수치를 굴려버리고
온 백성이 할례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 중 각 처소에서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8-9)
녹취자: 양현정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제일 먼저 진 친 곳이 바로 길갈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끝내고 요단을 건너 길갈에 진치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요단강물을 말리시는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가고 거기에서 정말 하찮은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민족들로 인해서 이미 싸움도 시작하기 전에 가나안에 있는 많은 원주민들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해지고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원래 이 길갈이라고 하는 것은 ‘낄’이라고 하는 “갈”은 굴러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길’이라고 하는 것은 똥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더럽고 수치스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진 친 곳,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 진 친 곳을 길갈이라고 명했으니 이는 수치를 굴려 버렸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수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오늘 굴려버렸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첫 째 수치는 애굽에서의 수치였습니다. 애굽의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합비루’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 사람들은 노예였습니다. 아주 하층민의 노예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요셉이 그 대우를 받고 요셉이 애굽을 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보호를 받았던 때는 특별한 시대였고, 그 후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나온 때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 430년을 마치고 애굽에서 떠나는 그 날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애굽 땅에서 그냥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왕성한 번식력으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육을 계속해서 장대한 민족을 이루게 되자 핍박은 더욱 심해져서 남자아이는 태어나면 죽여버려야 하는 이런 수모를 당하기도 했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백성들은 많지만 애굽에서 가장 박해를 받고 고통을 받는 힘이 없는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약속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인데도 애굽에서는 그저 애굽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천한 노역에 종사하는 하찮은 노예일 뿐이었고 누구도 애굽에 있는 히브리 사람들을 그 이상의 사람들로 기억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애굽에서의 수치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아마도 주님 믿기 전의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영예로울 것이 없는 수치스러운 생애를 사는 우리의 지난날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종살이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에 매여 종살이했고 바로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였던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 신들 가운데 복종하며 진노의 자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난날의 수치였고 이스라엘 백성의 수치였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졌으니 그 모든 피조물 가운데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정해진 바 목적이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면 그 목적을 따라서 사는 인간과 목적을 거스르며 사는 인간이 하나님앞에 똑같이 여김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은 천지창조의 도덕적인 기반을 흔드는 발언과 같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반드시 나누어서 보십니다. 예전에 말하자면 우리는 그렇게 애굽에서의 살아가던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저희가 이 세상에 지어진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노예생활하며 그저 고된 노역 끝에 에굽의 노동의 현장에서 가끔 퍼주는 고깃국이나 혹은 마늘이나 참외나 이런 음식 부스러기들이나 먹으면서 그것이 애굽에서 사는 행복의 전부였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이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의미 없게 살던 사람들이었으니 이것이 우리들의 지난날의 수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그 큰 능력과 기적으로 인도하여내신 것처럼 숙명적으로 세상에 메여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그렇게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영예였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꿈꾸던 것과 같던 기적적인 일을 경험하고 애굽의 모든 헛된 신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내며 광야로 뛰쳐나왔던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가 계속되었으니 그 수치는 광야에서의 수치였습니다. 만약에 애굽에서의 수치가 노예살이의 수치였다면 광야로 나온 뒤에는 자유인의 수치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도 노예도 아닌데 그들은 불행하게도 불순종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았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약속에 참예할 수 없게 될 때까지 모두 죽도록 하나님께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 하면 항상 따라다니던 수치가 있으니 그것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이 행한 불순종과 죄악이었습니다. 그것이 수치였습니다.
주일날 아침에는 그런 생각을 교회마당에 혼자 서서 했습니다. 태어나서 철들기 시작하면서 인생은 왜 살아야 하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리고 이것은 정말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정말 어린 나이에 내 딴에는 치열하고 고민을 했는데 이제 회심한지 3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돌아보니까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때에는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못 살았고 진리를 알고 난 뒤에는 그렇게 살기 싫어서 안 살고 그러면서 회심한 30년이 흘러갔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까 살아온 세월이 너무 속절이 없고 슬펐습니다. 이게 어찌 나만의 회상이겠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 전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고통가운데 사람답게 살고 싶었지만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못 살았던 때였고 회심한 삶의 이후를 돌아보면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원하였고 또 진리도 자신의 손 안에 있었지만 얼마나 순종하기 싫어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삶의 이후에 여전히 불순종의 길이 되었고 또 그 불순종의 길이 되어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빛을 발하는 대신 부끄러움의 생애였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치가 바로 그런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광야의 옛 세대들을 모두 정리하신 후에 광야에 태어난 세대들을 이제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이르게 하셨고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수치를 모두 굴려버리셨습니다. 그 길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던 그날의 그들은 분명히 이제껏 숙명적으로 자신들을 따라오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를 굴려버린 날이라고 천명했으니 이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에서 수치를 굴려버린 날이였습니다. 우선 첫째는 이 수치를 굴려버린 그 날은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하시던 날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올 때와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모두 물을 건너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물을 건너는 이 두 사건은 본질에 있어서는 같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에 있어서는 각각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에게 쫓겨 홍해 앞에서 고통하다가 홍해를 건넌 사건은 이 요단을 건넌 사건보다 물리적으로는 엄청나게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년 시기에 인도하는방법이었으니 기적이 먼저 나타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습니다. 모세가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빌고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손을 내어 미니 홍해가 그를 의심하는 모든 백성들 앞에 갈라졌고 마른 땅이 드러났으면 좌우에는 물이 벽과 같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그 물 사이를 건너며 그리고 건너편 그 언덕에서 그 물이 합쳐져서 애굽의 600승의 병거를 수장시키는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아버지의 크신 이름을 찬송했으니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는 물이 갈라지니까 그 기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요단에 발을 들여놓았더니 물이 마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기적이 믿음을 둘렀는데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는 믿음이 기적을 가져왔으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기적을 행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보심으로 기적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 많이 성숙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시던 그 날에 믿음이 기적을 불러오던 그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려고 하는 가나안 땅에 있었던 원주민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내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큰 충격과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문명적으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문명을 가진 나라였고 강력한 요새와 그리고 큰 키를 가진 장대한 민족들이였습니다. 그 번화한 번성한 이 팔레스타인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이 노예에 지나지 않는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두려워 떤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를 모두 굴려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음이 있는 그 곳에서 수치를 굴려버리십니다. 지난해에 실패했으니 올해도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 오늘날 일어나는 모든 일이 과거의 일어난 모든 일에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를 포기한 사람, 사역에 있어서나 개인의 삶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이루어질 꿈꾸는 것과 같은 위대한 날의 출현을 기대하지 않고 묶여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수치를 굴려버릴 날들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온전히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자기를 주님께 다 드려서 그래서 자신이 능력이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지난 수십 년 간 지배해 온 운명이라 할지라도 오늘 주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면 과거의 모든 무기력한 지난날들이 청산되고 하나님 앞에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 하는 신념, 이 놀라운 믿음, 그 믿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이 수치를 굴려버릴 수 있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이 끝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문제는 우리가 그 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 수치를 굴려버리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 째는 할례를 받던 때 하나님께서 수치를 굴려버리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치를 굴려버리시는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하기를 명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온 뒤로 들어온 세대들은 왜 그런지 할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기적으로 요단을 건너 길갈에 진 친 후에 주님께서 이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거기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어쩌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많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이 할례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들이 믿음의 백성들로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선 그 첫 번 정착지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역사를 앞두고 할례를 받게 하신 이 사건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알다시피 이 할례는 하나님께 구별된 것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그 구별을 통해서 전적으로 자신이 바쳐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해 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시켜 주시고 싶으셨습니다. 할례를 받으면서 그렇다, 우리는 이방인 땅에 들어와 전쟁을 수행하려 하는데 우리의 정체는 주님을 위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 속에서 할례가 행해졌고 이제 하나님께서 수치를 굴려버리신 날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새해라고 해서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만 새해라고 해서 지나온 날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문제는 저절로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눈밭처럼 펼쳐진 새해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눈밭처럼 펼쳐진 일 년 365일을 죽지 않고 살려고 합니까. 우리가 새해에 가지고 있는 많은 섬김의 계획들과 봉사의 많은 계획들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이 후 가나안 정복 있고난 후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자기 아이덴티티가 흐려졌을 때 하나님은 떠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가련한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능력과 엄위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깊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고단하게 이 삶을 헤쳐나가야 될 사람들, 대한민국의 백성, 한 회사의 직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입니다. 할례를 통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고 죄의 용서를 받은 백성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 할례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정복에 앞서 할례 시킨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런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너희가 나아가서 싸울 때에 ‘나는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그래서 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해서 너희들이 짓지 않은 집에서 살며 심지 않는 포도나무에서 과실을 먹어 배부르게 할텐데 내가 너희를 위해 이 모든 은혜를 베푼 것은 이제는 너희가 나만 섬기게 하기 위해서 베푸는 은혜이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잘 살고 있는 백성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멸하신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팔레스타인 땅에 심으신 것은 이방의 등불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가나안 땅을 선교적인 목적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할례를 받는 그 날에 그들이 수치를 굴려버린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금년에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금년에 함께하신 것처럼 내년에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많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언젠가 새벽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어는 자매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슴이 뛰고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 이 어려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제껏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놀라운 일을 내게 보여 주실까. 하고 말입니다. 올해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처럼 내년에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인데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축복들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헌신된 백성들로서 그분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기회일 뿐입니다. 금년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셨지만 그 주신 복들을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한 도구와 기회로 삼지 않고 마치 그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인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더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수치를 굴려버린 그 날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할례 받은 날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주님의 선택된 백성들이며 주님이 자신들에게 베푼 이 놀라운 인도와 보호, 앞으로 자신들에게 주실 승리와 영광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기회일 뿐이라는 사실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이 길갈의 영광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할례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받은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이니 예레미야 선지자가 친히 말한 바 너희는 의복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 마음의 할례를 받아 여호와께 속하라고 분부한 것과 같습니다. 깊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년도가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지 아니하면 그 해가 다른 해와 다를 리 없습니다. 한해를 넘기면서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한해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내가 나 자신을 깨뜨려 주님과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그런 할례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길갈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지난해 실패를 끌고 들어오는 자리가 되지 아니하고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전에 모든 수치스러운 일들을 모두 2005년도와 함께 묻어버리고 새 출발 해야 합니다. 이곳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갈이 되었으니 후손들이 이 땅을 지날 때 마다 길갈,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내려오던 두 가지 수치, 애굽에서의 종살이하던 수치, 광야에서 불순종하는 민족이었다는 수치를 여기에서 모두 굴려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되찾게 하신 이곳, 여기가 바로 길갈이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잘 섬기다 가면 이곳에 어떤 별명이 붙을까요? 주님을 너무도 사랑하던 목사 아무개가 자신의 신념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주님을 깊이 만난 곳, 열린 교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스승이 알아주는 훌륭한 직업은 아니었지만 형제 아무개 자매 아무개가 이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겼기 때문에 성도들이 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곳, 그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섬김 속에서 세상이 알아주는 좋은 지위와 장래는 없었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는 곳,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긴 인생을 살았지만 생각할 때 마다 감사한 시기가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특별히 학교 다니던 신학대학원 다니던 3년 간 이었습니다. 그 3년 그 다음에 대학원에 오기 전에 학부에 4년 이 7년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신대원 3년은 하나님이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그 대학원에 보내주셔도 저는 그 이상은 살 자신이 없을 정도로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 참 많지만 내 자신을 향해서는 크게 부끄러운 것이 없을 정도로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가끔 설교나 강의하러 양지에 가서 내가 예배드리는 채플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경의 고통과 영혼의 고뇌 속에서 매일아침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기도하던 채플실, 엎드려 울던 채플실, 가보면 그 때처럼 똑같은 마음이 되더군요. 그 때에는 그 순간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팠었는데 알고 보면 거기가 저의 길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우리에게 길갈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비록 작년에도 서있었고 올해도 서있었고 내년에도 서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제 끝까지 수치를 모두 굴려버리고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 장소로 우리에게 떠오른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만나 복된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2006년도가 그런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