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인생
(2017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7년 1월 1일-2월 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12월 7일
목 차
1. 브니엘에서의 아침을(창 32:22-32) 2017.01.01 주일오전설교
2. 수치를 굴려버린 날(수 5:9) 2017.01.08 주일오전설교
3.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수 5:10-12) 2017.01.15 주일오전설교
4.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수 6:20-21) 2017.01.22 주일오전설교
5. 새 삶의 깨끗한 동기(수 7:11-13) 2017.01.29 주일오전설교
6. 다시 승리하게 하신다(수 8:18-19) 2017.02.05. 주일오전설교
다시 시작하는 인생1 2017. 1. 1 주일오전예배
< 브니엘에서 아침을 >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창 32:22-32)
I. 본문해설
- 에서가 자신을 죽이러 옴을 알았음
- 400인의 무사를 거느리고 다가옴
- 두 아내, 두 여종, 열한 아들을 먼저 보냄
II. 하나님 앞에 홀로 남은 밤에
A. 인생의 벼랑 끝에서
- 약속을 따랐으나 현실에 대한 대책이 없음
-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
- 천사를 만나 복을 구하며 씨름을 함
- 하나님께 매달리는 마음으로 씨름
-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약삭빠르게 살았으나 신앙은 확고함
- 벼랑 끝에서 자기 재주 아닌 믿음을
B. 하나님을 대면하다
-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여 주심
-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겨”
- 이것은 단순한 힘의 씨름이 아님
- 하나님이 사랑의 성품으로 져 주신 것임
- 그렇게 당신께 매달린 믿음을 원하신 것임
- 인생의 변화는 하나님을 만나는 데서
- 인생의 벼랑 끝에서 어떻게 만났을까
C. 울며 간구함으로써
- 천사와 겨루어 … 울며 간구했으며(호12:4)
- 힘을 겨룸>환도뼈 침>회개와 간구
- 징계를 통해 물 같이 쏟아진 마음을 경험
- 형, 아버지, 자신을 의지할 수 없는 때
-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몰아가심
- 추해지지 않게 신앙으로 나가야 함
III. 브니엘의 새 아침
-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다”
- 육신은 고통스러웠으나 영혼은 자유함
- 쓰레기같은 걱정으로 마음을 더럽히지 않게
-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을 우러러 봄
- 완전히 새로워진 인생이 기다릴 때
IV. 적용과 결론
-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희망은 있다
-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 홀로 남겨진 밤 같은 상황을 맞으라
-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함
- 실패로 얼룩진 인생을 뛰어 넘으라
다시 시작하는 인생 2 2017. 01. 08 (주일오전예배)
< 수치를 굴려버린 날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9)
I. 본문해설
- 40년 광야 방황 끝나고 가나안 정복 시작됨
- 요단을 믿음으로 건너는 기적을 보다
- 앞서 행하사 가나안 족속의 마음을 녹이심
- “마음 녹았고…정신 잃었다”(1)
- “부싯돌로…다시 할례를 행하라”
- 광야에서 태어난 자 2세들의 할례
- K&D: 72만: 60만+20세미만+출애굽 때 할례를 받은 20세 미만(30만)
- 언약의 표 새김을 가나안 입성 직전 행함
- 할례로 인해 상처받을 때 선포하심
II. 수치를 굴려버림
A. 애굽의 수치
-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
- 하층민으로서 쓰레기 같은 삶이었음
- 가나안 입성 못할 시 가능한 비난들
a. 백성 죽이려 이끄심 (출32:12)
출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b. 능력 없어 광야에서 죽이심
민14:16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 무능과 불능의 누적된 경험을 운명으로 여김
- 세상에서의 우리 수치가 분명해짐
B. 수치를 벗기심
-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게…"
- 운명처럼 굳어진 수치와 모욕을 벗음
- 군대의 칼과 활이 아닌 주의 능력으로 하심
- 모든 모욕이 백성의 기업 땅 없음이었음
- “그 땅” 가나안 정복을 통해 기업을 얻음
a. 평화와 안식 b. 하나님의 통치
- “그 땅”은 신약에서 누릴 그리스도임
- “길갈”(gilgal) a. 수레바퀴 b. 똥 굴림 ‘똥’(gel)+‘굴리다’(galal)
- 우리의 운명 같은 수치는 무엇인가?
- 당신의 영광을 위해 싸운 자들의 수치를 벗기심
C. 할례를 받을 때
- 이방 종교에도 유사한 의식 있었음
-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의 상징
a. 세상과 구별 b. 하나님께만 봉헌
- 열심히 살아도 거룩함 없으면 수치
- 노력과 지위와 재물의 부족이 수치 아님
- 거룩함 없기에 수치를 당하게 하심
- 신자의 삶의 목표는 행복이 아닌 거룩함
III. 적용과 결론
- 우리의 수치는 운명이 아님을 알라
-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극복했음
- 삶의 목표를 올바르게 하여 수치를 벗자
-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를 의지하자
다시 시작하는 인생3 2017. 1. 15 주일오전예배
<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 >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 5:10-12)
I. 본문해설
-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옴
- 앞서 행하사 가나안 주민의 마음을 녹이심
- 맞서지 못하고 성문을 닫고 방어함
- 똥 굴림 약속이 주어진 길갈에 진을 침
- “길갈” 수치 벗겨줌은 아직 약속임
- 정복을 통해 실현 예정>참여하게 하심
- 승리가 보장된 전쟁이나 헌신이 요구됨
II.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
A. 유월절을 지킴
- 가나안 입경 후 첫 번째 유월절임
-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10 재앙
-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성 보이심
- 독점적 사랑과 일방적 은총을 베풂
- 핵심: 어린 양 대속과 pass-over
- 가나안 정복으로 수치 벗기 직전
- 왜 유월절 예식을 먼저 지켰나?
- 이스라엘 구속의 은총을 생각하게 하심
- 구속의 감사 없이 사명 의식 없음
-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
- 예수 대신 죽음+우리가 맏아들임
- 십자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자!
B. 그 땅 소산물을 먹음
- 탁월한 지혜와 사랑으로 인도함
- 이제 기적의 만나 아닌 믿음을 요구
- 믿음으로 약속의 땅 정복하여 생활
- 유월절 음식: 무교병과 볶은 곡식
a. 무교병: 누룩 없는 떡+순전함
b. 볶은 곡식: 광야의 고난을 기억함
- 그 땅에서 거저 얻은 곡식을 볶았음
- 하나님 없이 살던 날의 고난을 기억함
III.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함
- 새로운 인생 새로운 관계에서 시작
-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
- 모든 관계 거기서 옴: 사람들+자신
a. 자신을 깊이 생각하라: 죽을 자
b.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구속주
c. 사명을 깊이 생각하라: 삶의 목표
- 운명을 거부하라! 똥 수치+실패
- 노예같은 삶을 온 몸으로 거부하라
IV. 적용과 결론
- 이제까지 따라왔던 수치를 잊으라!
- 주님 안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다!
- 새로운 인생 다시 살 은혜를 받자!
다시 시작하는 인생4 2017. 1. 22 주일오전예배
<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수 6:20-21)
I. 본문해설
-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전투지
- 이상한 명령: 6일 성 돌기, 7일 나팔과 큰 소리
- 여리고 성: 외벽14∼20 B.C , 내벽22∼30 B.C
- 진흙 성벽 무너짐에 내부 피해 더 큼
II. 여리고 성이 무너짐
- 말씀 제시 후 믿음 요구⇒기적 발생
- “제사장 나팔+백성 큰 외침”(20)
- 말씀의 선포와 성도의 반응: 믿음
- 돌격 부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임
- 구원의 은총적 성격⇒온전한 믿음
- 인간이 넘지 못할 한계를 이기는 힘
- 그런 절대적 의존의 훈련으로 예수를 대망함
- 인생: 문제의 크기 아닌 믿음의 크기
- 우리가 넘지 못하는 큰 문제는 무엇인가?
- 하나님과의 동행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함
a. 꿈꾸지 못했던 위대한 일 이루심
b.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 주심
- 여리고, 인류 역사 최초 최고의 성벽 중 하나
- 언제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나?
III. 믿음으로 순종할 때
- 이스라엘이 전쟁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음
- 전투할 무기보다 믿음을 요구하심
- 출애굽 직후 가나안 정탐 사건 교훈
- 절망+메뚜기 비유⇒믿음이 없음(민13:33)
민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 애굽-가나안 직선: 300∼400km임
- 애굽 10재앙 구름과 불기둥, 만나의 기적
- 광야 약 40년 방황은 불신앙 때문임
- 하나님의 경륜과 이스라엘의 성숙: 아브라함⇒모세
- 여호수아와 약속의 땅: 믿음을 요구함
- 기적 보여주는 대신 약속에 대한 믿음 요구
- 히11장: 구약의 역사적 사건 해석
- “믿음으로 7일∼여리고 성을 도니”(30)
-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줌
모든 믿음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수렴함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역사를 믿음으로 여심
IV. 적용과 결론
- 당신의 여리고 성은 무엇인가?
- 반복된 실패로 운명으로 받는가?
- 삶의 목적과 목표를 바르게 하라
- 믿음과 순종으로 도전하라
다시 시작하는 인생5 2017. 01. 26 주일낮예배
< 새 삶의 깨끗한 동기 >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수 7:11-13)
I. 본문해설
- 여리고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둠
- 작은 아이성 공격에 실패, 36명 전사
- 백성들 마음이 물같이 녹았음(7:5)
수7: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법궤 앞에 기도
- 옷찢음+엎드림+티끌을 뒤집어 씀
- 현실을 고함⇒여호와의 영광을 염려(7:9)
수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 여리고 1장, 아이성 2장에 걸쳐 서술됨
- 가나안땅을 주신 목적: 재이해의 계기
II. 하나님께만 바쳐짐
- 이스라엘, 소명을 따라 성별하셨음
- 세속 이익을 목표로 삼지 못하게 하심
- 여리고성의 모든 물건이 바쳐짐(6:17)
수6: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 첫 번째 정복한 성, 장자처럼 봉헌됨
- 이후 정복에선 요구치 않으심(8:2)
수8: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 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 여호와의 승리 보증+정결함+겸손 없음
- 성례처럼⇒가나안의 봉헌 상징함
- 모든 원주민을 명함(6:21)의 의미
수6: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 패역함 징벌+약속의 땅의 순수성 보존
- 하나님께만 바쳐짐으로 구별되게 하심
III. 이스라엘의 불순종
- 지파, 족속, 남자를 나아오게 하심
- 아간이 선택됨: 외투+은+금덩이 사취
- 자신과 온 식구와 가축들이 징벌됨
- 이스라엘의 작은 범죄를 크게 다름
- 하나님 나라의 성격: 가나안+N.T 천국
- 언약 파괴는 탐욕이 가져온 결과임
- 이스라엘의 작은 범죄를 크게 다룸
- 바쳐진 것을 멸함으로 순수성을 회복함
-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잠시 멈춤
Ⅳ. 적용과 결론
- 새해를 용기와 희망으로 맞이하라
- 이제까지의 수치를 굴려 버리자
-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한다
- 탐욕+불신앙으로 새 삶을 살 수 없다
- 삶의 목표와 동기를 올바르게 하라
- 정결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자
다시 시작하는 인생6 2017. 02. 05 주일낮예배
< 다시 승리하게 하신다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수 8:18-19)
I. 본문해설
- 큰 성읍 여리고를 점령한 이스라엘
- 그러나 작은 아이성 점령 실패하였음
- 범죄>기도>말씀>정결>관계 회복을 이룸
- 실패 없는 신앙도‥인생도 없다
-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
II. 다시 승리하게 하심
A. 지도력을 주심
- “여호수아에게∼단창을∼가리키라”(18)
- 좌절해 엎드린 동안 지도력의 공백
-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심으로 새로 시작함
- 그에게 단창으로 아이 가리키게 하심
- 지도력을 회복시켜 다시 이끌게 하심
- 사람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시는 주님
- “사자에 이끌린 사슴들의 비유”
- 공동체-지도력/국가, 교회, 가정
- 영혼-정신 육체/신앙-모든 삶을 이끎
B. 승리를 보증하심
-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18)
-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증하심
- 아이성 전투에서는 없었던 것이었음
- 꼭 이길 것 같은 싸움이었으나 실패함
- 문제는 하나님 없는 성공을 생각하는 것
- 신앙은 자기 부인, 그것 없이 승리할까?
- 이스라엘은 쓰라린 실패를 경험함
- 전쟁의 승리: 주님과 동행의 중요성을 보여줌
- 실패를 통해 낮아짐으로 이것을 깨달음
- 언제 그들에게 다시 승리를 보증하였나?
- 그들이 기도와 회개로써 다시 정결해질 때
-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실패했던 사람들
- 그러나 실패한 모든 사람이 위인은 아님
- 신앙으로 실패 속에서 주님을 배운 사람들임
- 다시 우리 주님의 승리 보증을 받자
C. 지혜를 주심
- 구체적으로 전투의 지혜를 이스라엘에게 주심
- 승리에 도취된 적들의 심리를 이용하심
- 거짓 패배로 성 안의 군사들을 유인함
- 빈 성을 공격할 매복 부대를 배치함
- 이스라엘은 자신의 데자뷰를 경험함
- 시험을 이기는 길: 먼저 지혜를 구함
- 시험에 든 신자는 마음이 어둡게 됨
- 지혜는 사라지며 감정은 혼란케 됨
- 주님이 기뻐하는 자에게 지혜 주심
-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약1:5)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주님은 당신의 지혜로 대적을 이기게 함
- 온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려 지혜를 구함
III. 적용과 결론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불순종과 죄로 잠시 멈춤
이스라엘을 각성, 회개, 정결케 하심
다시 새로 시작하게 하셔서 승리를 주심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는 인생 (2017. 1. 1 주일오전설교 1)
1. 브니엘에서 아침을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창 32:22-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삭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쌍둥이로 태어나기까지 태 안에서도 서로 다투었습니다. 에서가 먼저 태어났고, 동생인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들사람이라 사냥을 좋아했고,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야곱은 가정적이고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까지 속여서 이삭의 말년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는데 이것은 형이 받을 축복을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결국 야곱으로 하여금 메소포타미아로 떠나게 하였고, 그곳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거하며 파란만장한 20년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신앙이 자라갔고, 또 매우 큰 재산을 모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두 아내와 두 첩, 그리고 열한 아들과 종들, 많은 가산을 거느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장자로서의 축복을 훔쳐 빼앗긴 에서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복수심이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400인의 무사까지 거느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일생일대의 커다란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잔꾀와 잔머리로 인생의 많은 문제를 극복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자신의 잔꾀로 해결할 수 없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 열한 아들을 마음에서 멀리 떨어진 순서대로 앞서 보내고 그리고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자식까지 보낸 후에 그는 홀로 얍복강가에서 마지막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II. 하나님 앞에 홀로 남은 밤에
A.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남은 밤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벼랑 끝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위급한 이 현실에 대한 대책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자신의 잔 머리로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천사를 만나 씨름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야곱은 혈기로 천사를 붙들고 내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으니 날 좀 도와달라는 뜻으로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노동과 목축으로 다져온 몸이었기에 그는 대단히 강인한 체력을 소유했던 것 같습니다. 천사를 만나 복을 구하며 씨름을 하였고, 결국은 그 천사에게 간절히 매달리며 씨름을 하였습니다.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천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때렸고, 그래서 결국은 관절이 어긋나 버려 하체의 힘이 모두 빠지면서 결국은 그 사람을 붙들고 씨름하던 손을 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떠나려는 천사를 굳게 붙들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며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가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이름을 고쳐주었습니다.
비록 야곱은 일생을 약삭빠른 자신의 꾀를 가지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또 외삼촌을 속이면서 살아왔으나 그 모든 험한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신앙은 점점 확고해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잔재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이제 자신의 모든 재주를 포기하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종종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십니다. 그때 우리는 회심하지 못했던 야곱과 같이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경험과 잔재주를 의지하여 그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지나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렸나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종종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서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교만한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살아왔던 불신앙을 깨뜨리고 주님을 만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B. 하나님을 대면하다
오늘 이 야곱을 보십시오. 바로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대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야곱이라는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히브리어로 ‘발뒤꿈치를 잡았다’라고 하는 뜻이고, 그 사람들에게 이 야곱이라는 이름은 속임수와 잔재주로 살아가는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는 뜻입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육체의 힘으로 천사를 씨름에서 꺾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졌다라고 고백하신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리브가의 태에 있던 야곱과 에서 중 야곱을 더 사랑하셨고,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만약에 야곱이 그런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야곱을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온 가족이 순종했다면 이런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도 결국은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언약의 계승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단순히 힘이 천사보다 세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뜻으로 개명을 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워낙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인생의 벼랑 끝에서 당신에게 축복을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져주신 것처럼 하며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잔꾀와 자기 머리로 살아오던 이 야곱이 그 모든 것을 어느 순간 내려놓고 ‘하나님 밖에는 나를 도우실 분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유일신 신앙의 믿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참된 변화는 세상의 물질적인 번영이나 우리의 높고 낮은 지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생의 변화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데서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사랑하시면서도 오늘 이 야곱과 같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십니다. 이제껏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게 하시고, 결국은 우리 하나님밖에 자기를 지킬 분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고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 주시도록 대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는 기쁘고 감사한 일도 있었고 힘겹고 눈물겨운 일도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그 모든 시련들을 이기며 여기에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감언이설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새롭게 밝아온 이 한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제껏 누리지 못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물질적인 곤궁함과 빈곤 속에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은 물질적인 형편이 많이 좋아져서 그 근심과 염려를 떨쳐 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에 어려움이 있어서 늘 고통을 받고 시름에 잠겨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건강의 축복을 받고 의사도 놀라는 놀라운 건강의 회복을 되찾기 바랍니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어려웠던 사람들도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놀라운 은혜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신앙적으로 방황하던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정착을 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신앙 생활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 1년 사는 동안에서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2017년 달력을 한 장 넘겼다고 해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이 갑자기 카페트를 깐 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모든 우리의 인생의 다양한 시련과 어려움 속에도 그 어려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C. 울며 간구함으로써
오늘 이 야곱을 보십시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랬더니 인생의 가장 어려운 벼랑 끝이 변하여 하나님께 커다란 복을 받는 자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오늘 이 야곱은 어떻게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축복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울며 하나님께 간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를 보면 단순히 하나님 앞에 천사와 씨름했고, 천사가 허벅지 관절을 때려 뼈가 어긋났고, 그래서 야곱이 그래도 매달렸더니 천사가 네가 이겼다고 하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축복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이 사건을 호세아서 12장 4절에서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3절부터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요약을 하면 맨 처음에는 천사를 만나 육체의 힘으로 그를 꺾어보고자 힘을 겨루었지만 환도뼈를 내려쳐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이후에는 온 몸에 힘이 빠지며 자신의 힘으로 천사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그의 마음은 깨뜨려졌고 이제껏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잔재주와 자기의 힘을 믿고 살아왔던 불신앙을 울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건져달라고, 주님이 아니면 자기를 이 인생의 위기 속에서 건질 분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이제껏 이룬 많은 재산과 사랑하는 식솔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첩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열 한 아이들을 모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노라고 아버지 앞에 생사를 걸고 눈물로 지난날을 회개하며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천사가 그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 뼈가 어긋나게 한 것은 자기의 방법대로 살아온 야곱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그 징계를 통해 자신의 힘으로 천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일생일대의 잊혀 지지 않는 믿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지푸라기와 같은 자신은 정말 야곱과 같이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는 자신의 잔재주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깊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이제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까지는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었는데 바로 이 순간 그 자신, 야곱의 하나님이 되고 계셨습니다. 거기서 야곱의 마음이 깨뜨려져 물같이 쏟아질 때에 그의 흐르는 눈물과 회개의 간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였습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보다도 더 아름다운 헌신된 제사였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때에 이 이삭의 아들인 이 야곱을 한없이 축복하셔서 사랑의 성품으로 당신이 야곱의 이 간구하는 믿음에 졌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셨고, 그 이름을 따라 이스라엘이 진실로 이스라엘이 되었고, 우리도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가 선택하신 백성들을 고쳐 온전한 자기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우리 인생의 부끄러움도 아니고 추함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을 신앙으로 이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니 신앙으로 이기지 못할 때 우리는 간사한 세상의 꾀와 믿음으로 거듭나기 전 세상적인 방법으로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추함을 보이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간곳이 없고 썩는 인간의 냄새가 우리의 삶 전체를 뒤덮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올 한 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육체의 방탕한 욕심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실 것이기 때문에 종종 시련을 만날 것이고 우리가 높은 뜻을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분의 나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면 우리의 목표가 너무나 거룩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과 마귀의 세력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어려운 때가 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 이르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대면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 우리가 울며 간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승리를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는 가장 확실한 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눈물의 기도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복을 받을 사람들은 복보다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울며 하나님 앞에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가득 찬 사랑을 이 불쌍한 야곱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영원히 빛나는 새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칭하여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이제는 형의 발꿈치를 붙들며 간사하게 꾀로 사는 사람 야곱이 아니라 이제는 회개와 눈물의 간구로 우리 주님의 마음을 녹인 은혜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이름을 계승한 성도들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브니엘의 새 아침
이 모든 큰 씨름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밝은 햇살을 맞으며 그는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히브리말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오랜 세월 그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브니엘에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것과 같은 대면을 경험하였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때 주님은 그를 만나주셨고, 그래서 절망의 그 땅이 변하여 브니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간밤에 받은 징계로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뚝절뚝 절면서 그는 얍복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채간 이 동생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20여 년 동안 칼을 갈았겠지만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녹아지자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그는 신앙이 없었지만 야곱을 단칼에 죽여 버리기 위해 달려오다가 저기서 초라하고 남루한 차림새로 절뚝거리며 장애가 있는 것처럼 강을 건너 걸어오고 있는 야곱을 보았습니다. 한순간 20여 년 동안 쌓여왔던 원한이 물 녹듯 녹으며 혈육에 대한 그리움과 정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얍복강에서 그 긴 세월 동안의 원한을 풀고,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울며 은혜의 화해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육신은 고통스러웠으나 영혼은 자유하였고, 그날 브니엘에서 떴던 아침 햇살은 인생의 다른 어느 날 떴던 아침 햇살 보다도 찬란한 햇살이었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며 아버지 앞에 마음을 쏟으며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완전히 다른 한 아침을 선사하셨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쓰레기 같은 염려와 걱정으로 마음을 더럽히지 않도록 굳게 다짐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벼랑 끝에 있다 할지라도 희망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버리지 않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하여 이제는 나에게 살 소망이 없고, 이제 나의 모든 인생의 꿈은 여기까지다 말하는 그 순간 거기부터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바로 거기서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눈물로 회개하며 간구했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홀로 남겨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때로 모든 일들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되고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위기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홀로 남겨두시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깊이 만나 야곱처럼 살아왔던 우리 인생을 이스라엘처럼 사는 인생으로 바꾸시기 위함입니다. 실패로 얼룩졌던 인생을 다시 성취와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던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2017년이라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분께 눈물로 간구하며 말씀으로 한 해를 시작해 올 한 해가 브니엘에서 새 아침을 맞은 이스라엘처럼 자유와 기쁨과 소망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2017. 1. 8 주일오전설교 2)
2. 수치를 굴려버린 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약 40년간의 광야 방황이 끝날 때 일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먼저 홍해를 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니 물이 마르게 하심으로써 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 하나님은 앞서 행하셔서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공포로 녹이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5장 1절에서는 말하기를 “그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더니” 하였습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바로 부싯돌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태어나면 할례를 받게 되어 있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별도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태어난 제 2세들의 할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카일(C. F. Keil)과 델리치(F. Delitsch)라는 19세기의 유명한 주석가들은 이때에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요가 약 72만 명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몸에 새기는 언약의 표입니다. 하나님은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입성을 바로 앞두고 할례를 받도록 명령하셨습니다.
II. 수치를 굴려버림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몸에 신열이 나서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잊히지 않는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읽은 5장 9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었으니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수치를 굴려 버리셨습니다. 그 수치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성경은 애굽의 수치였다고 말합니다.
A. 애굽의 수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짊어지워진 애굽의 수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요셉이 국무총리일 때에는 그래도 대접을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바로가 되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층민으로 노예로서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붙어 다니던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탈출하였지만 그들은 아직 땅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유리하고 방황하는 동안 열방의 많은 나라들은 광야를 오합지졸처럼 떠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애굽에서 주인의 품을 떠나 도망친 쓰레기 같은 노예 후손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하나님이 권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질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몇 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하면 하나님이 받게 될 불명예를 염려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2장 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 백성들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하고 빌었습니다. 민수기 14장 16절에서는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으므로 광야에서 죽여 버렸다 하리이다”하고 하나님의 불명예를 염려하였습니다. 40년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애굽의 수치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출애굽을 한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이 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이들을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수치가 없을까요?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거역하는 삶을 삶으로써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이 이미 무능과 수치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나에게는 더 새로운 삶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는 것입니다.
B. 수치를 벗기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애굽에서의 생활까지 계산한다면 수백 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수치를 벗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라고 말입니다. 완료형 시제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 눈에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운명처럼 굳어진 수치와 모욕을 지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이 벗겨지는 날이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대의 칼이 이 일을 하였습니까? 병사들의 수많은 화살이 많은 숫자가 이 일을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오늘 떠나가게 하였다” 하나님이 당신의 큰 능력으로 한 번에 이스라엘의 수치를 벗겨 주실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애굽에서 노예살이나 하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백성, 저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진멸해 버리시려던 쓰레기 같은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상들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젖과 꿀이 흐르는 기업의 땅을 받으려고 구별된 마음을 가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모욕을 받으며 광야에서 방황하고, 애굽에서 애굽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며 쓰레기 같이 취급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하나,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였으나 그들이 여행하던 땅은 정착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탈출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나그네였습니다.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나안 정복을 통해 그 땅, 곧 저들의 기업을 주실 작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신 것은 신약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평화와 안식입니다. 방랑과 고생이 끝나고 이제는 주님이 주신 땅 안에 평안히 거하며 짓지 않은 집에 거하면서 심지 않은 포도원의 열매를 취하는 안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은 거기서 잘 먹고 잘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텅 빈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가장 발달한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눈부신 문명을 구가하고 있는 선진국들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악함이 하늘에 미치자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쓸어버리시고 거기 이스라엘 백성을 감람나무처럼 심으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참 인간으로서 어떻게 아름다운 삶을 사는지를 (모든 열방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열방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그 땅,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은 바로 신약 시대에 우리들이 누리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음으로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이스라엘을 선택한 사명대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됨으로 그 예수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신자의 소명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버림받고 죄의 노예 생활을 하고 세상의 쓰레기처럼 여김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인줄 알고 살았던 인생의 많은 목표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거나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늘 해도 무엇을 행해도 실패만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늘 망가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냥 그 실패와 절망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 이스라엘의 운명적인 수치를 벗겨주십니다. 가나안 땅을 주심으로 부끄러웠던 민족을 자랑스러운 백성 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우리는 그렇게 부끄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의 구역질나는 짓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허탄한 일에 굴복하며 아무것도 아닌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우상처럼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의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이끌어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어떤 의로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 우리를 구원하셔서 예수의 품 안에 유업을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역사 속에서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수치스러웠지만 예수를 알고 난 후에는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된 이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울은 핍박자요, 포행자요, 자기를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는 죄인 중의 괴수였던 사람이 주님께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형제는 예수 만나기 전 불같은 성격으로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예수 만나기 전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도망쳐 나온 노예였습니다. 범죄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 사도바울의 심복이 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어거스틴은 천재였으나 마니교에 빠졌을 때에는 방탕한 부랑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그는 2,000년 기독교 역사에 교회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인류가 살 길을 제시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한 사람도 애굽의 수치를 짊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벗겨주셨습니다. 믿어지시지 않거든 저를 보십시오. 저는 예수 믿기 전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로 극한 방탕의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뼛속 깊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신론자로 살기로 다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욕보이고 예수 믿는 사람의 믿음의 근본을 흔들어 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수치스러운 인간도 바꾸셔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으로 삼으셨고, 무신론자일 때에 내가 실족시켰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막대기로 삼으셨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옛날에 수치를 벗어버리게 하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선함과 의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주님이 십자가 사랑으로 하신 일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십자가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주님이 우리가 그렇게 부끄러운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이 그 수치를 벗겨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영광스러워진 것은 주님 때문이었고, 부끄러워진 것은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한 해에도 영광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수치스러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그 수치를 계속 지니고 새해를 맞이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수치를 모두 벗어버리고 눈처럼 하얀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시겠습니까?
주님은 그 수치를 굴려버렸다고 선언한 그 장소를 길갈()이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 길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단어가 하나의 보통 명사로서 수레바퀴라는 뜻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레바퀴가 언덕에서 저절로 굴러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애굽의 수치를 거기서 굴러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 번째 해석을 좋아합니다. 길갈이라는 단어는 원래 ‘겔갈’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겔’은 똥입니다. 그리고 ‘갈’은 ‘갈날’에서 왔는데 즉, ‘굴려 버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길갈’이라는 단어는 ‘똥굴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애굽의 수치는 똥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관계를 맺기를 싫어하는 똥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욕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여기서 그 똥을 모두 굴려 버리고, 이제는 수치스러운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백성, 모두들 멸시하는 족속이 아니라 모두들 부러워하는 족속들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올 한 해 이렇게 모든 수치를 벗고 영광스러운 한 해를 살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할례를 받을 때
그럼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 이 애굽의 수치를 굴려 버리셨을까요? 오늘 성경은 할례를 받을 때였다고 말합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남자의 몸에 새기는 언약의 표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몸에 새김으로써 잊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할례를 받음으로써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으므로 ‘너는 하나님 앞에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두 번째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는 뜻입니다. ‘너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만 바쳐진 백성들이니라 그래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었느니라’ 하는 표였습니다.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했고, 인간들과 함께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도리를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수치는 그냥 세상에서 지위가 낮은 것 아닙니다. 우리의 수치는 부자가 되지 못한 것 아닙니다. 우리의 수치는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품 안에 두셨을 때, 또한 여러분들을 이 세상 가운데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며 ‘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저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저 사람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족속들인가, 얼마나 선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인가’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없는 것이 수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긴 광야의 방황을 끝내고 유업의 땅을 얻기 전 할례를 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40년 동안이나 할례 없이 살았던 백성들이 모두 할례를 행하였고, 그때 그들은 가슴에 새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 40년 동안을 떠돌았고 우리 조상은 애굽에서 쓰레기처럼 취급을 받으며 노예로 살았으나 우리는 이 세상의 백성들과 구별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언약의 자식들이다 라고 깊이 가슴에 새기며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4장 4절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어버리고 하나님께만 속한 사람으로 살려고 할 때 할례를 받을 때에 그들을 모든 애굽의 수치에서 벗겨주신 것처럼 우리의 수치도 벗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한 해를 어떻게 사시렵니까? 우리의 수치는 운명이 아닙니다. 이제껏 수치스럽게 살았다고 해서 올 한해도 그렇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자기의 운명과 같은 실패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예수를 바라봄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작년에 우리를 따라다녔던 부끄러운 수치를 그대로 짊어지고 다시 2017년을 그냥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이전의 그 모든 똥과 같은 수치를 굴려버리고 그리고 눈 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한 해를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인생의 한 페이지를 쓰시겠습니까? 이전에 모든 수치를 이번에 모두 똥처럼 굴려버리고 예전에 부끄러웠던 우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찬란한 빛처럼 한해를 살아 여러분 생에 잊히지 않는 행복과 은혜를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2017. 1. 15 주일오전설교 3)
3.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 5:10-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앞서 행하셔서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녹여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것을 알고도 맞서지도 못한 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6장 1절에서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는 없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의 수치를 굴려 버리겠다고 약속이 주어진 바로 길갈에 진을 쳤고, 그리고 거기서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을 행하시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길갈에 수치를 모두 굴려버리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지만 성취되기로 예정되었고, 그것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치를 굴려버렸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짐으로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존귀하게 생각할 것이었습니다.
II.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
A. 유월절을 지킴
그러면서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에 앞서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여리고성이 보이는 평지에서 그들은 두 가지 중요한 실천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유월절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에 들어온 후 첫 번째 지키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이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애굽에 행하신 열 번의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백만 명에서 삼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숫자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매우 중요한 노동력이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삶을 위해 봉사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규모 토목 사업에도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니 애굽왕 바로가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떠나가게끔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지도자 모세는 바로에게 맞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떠나가게 하라고 요청했지만 강퍅해진 마음으로 바로는 맞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시고 전대미문의 대재앙을 10차에 걸쳐 애굽에 내리시기로 작정하십니다. 나일강으로부터 애굽에 있는 모든 물을 피로 만드는 첫 번째 재앙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땅에 개구리들이 가득한 두 번째 재앙, 이, 파리, 악질, 독종 등등의 재앙을 내림으로 차례대로 하나님은 당신이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여호와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하나님을 믿을 마음을 심으시고, 애굽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마음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재앙의 절정은 아홉 번째 재앙에 나타납니다. 갑자기 태양이 모든 빛을 잃고 어두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가득하게 되었을 때에 그것은 곧 애굽 사람들이 믿고 섬기던 태양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양신이 한 번에 빛을 잃어버리고, 온 땅이 흑암에 쌓이게 됨으로 여호와께서 그것들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애굽의 모든 백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셨습니다.
마음이 두려움으로 녹을 때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는 결정적인 재앙을 준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짐승의 새끼까지 처음난 모든 것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었습니다. 아홉 번째 재앙과 열 번째 재앙 사이에서 하나님께서는 무교절과 유월절을 지키는 규례를 주십니다. ‘유월’이라고 하는 것은 ‘건너뛴다’는 뜻입니다. 모두 다 해야 하는데 어느 지점에서 ‘건너뛰고 넘어간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건너뛴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온 땅에 열 번째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처음 난 것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빛을 주시고 또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계시하십니다. 그 핵심은 바로 문지방에서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인방과 설주에 바르면 그 집은 처음 난 초태생이 죽지 않고 그 죽음이 건너뛴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탈출하기 전 바로 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의 첫 아들부터 시작해서 종들의 첫 자식, 짐승들의 처음 난 새끼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므로 온 애굽이 통곡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때에 일체의 통곡과 눈물이 없이 벅찬 감격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릴 위대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유월절을 지키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양이 대신 죽임을 당하고 그 피를 바름으로 속죄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애굽에서 그런 죽임을 당하고 대가 끊어졌어야 될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살림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한 해가 여러분 앞에 펼쳐졌습니다. 지난 해 실패를 지루하게 되풀이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했던 사람들은 여유 있어지기를 원할 것이고, 억눌렸던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원할 것이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은 존귀하게 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묻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거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되면 우리가 좋으니까요. 그것은 답이 아닙니다.
인생의 문제는 속도나 소유가 아닙니다. 방향입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능력이 비행기를 타려고 나르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갈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처럼 높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그냥 버스 타는 것처럼 천천히 갈 수밖에 없는 능력의 사람도 있고, 많이 가진 사람도 있고, 또 조금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높이 나르느냐, 땅으로 걸어가느냐, 빨리 가느냐, 천천히 가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또 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교통수단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짚신을 신고 걸어가느냐에 인생의 행복이 달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만약에 그 인생의 방향이 올바르다면 비록 비행기로 날아가는 사람만큼은 가지 못해도 얼마를 가든지 가고 있는 동안 역경과 어려움도 있지만 보람이 있고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정해진 인생을 살만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도, 빨리 달려갔던 사람도 그렇게 오래도록 이름이 기억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인생의 방향이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함으로써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결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빌자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다시 어린양을 죽이는 유월절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이 모두 멸망하여야 할 하나님의 죽음 아래 있는 인간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속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 없이 사명을 발견할 수 없고, 속죄에 대한 감사 없이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우 어린양을 죽이고 그 피를 바르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문지방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어린 양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 받을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유월절 어린양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죽음 아래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요, 삶의 방향도 모르고 목표도 없이 살던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하셔서 주님을 위해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십자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어린 양으로 죽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으니 이제 내 앞에 펼쳐진 올 한 해의 인생을 어떻게 살까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올바르게 정해지지 않았을 때 계속 발생하는 성공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 것입니다. 방향이 올바로 잡히지 않았을 때에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를 못 가게 하셔야지만 우리에게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애굽의 수치를 짊어지고 살았던 이유가 바로 이 세상의 복만을 원하고 내 삶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흰 눈 밖처럼 펼쳐진 올 한 해 다시 실패의 수치를 짊어지지 말고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그 땅 소산물을 먹음
두 번째는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지혜와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위대하신 여호와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에 열 개 재앙에 놀랐고 홍해가 갈라질 때에는 이들이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것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충분히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야 40년 가까운 세월을 하나님이 기적으로 점철시키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키우셨습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곡식이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새벽마다 나아가면 하얀 들판이 되었고, 거기서 그들은 만나를 거두어 그것으로 양식을 삼았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을 보면서 행진했고, 밤에는 불기둥을 보면서 그들은 밤을 보냈습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면 기적으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들의 믿음을 키우신 후에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는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시기보다는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고 이방 민족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고 홍해를 건넜지만 믿음으로 발을 들여놓으니까 요단강 물이 마르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을 보고 겨우 믿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믿는 자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도록 하나님이 경륜을 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땅의 소산으로 유월절 음식을 먹게 하셨습니다. 두 가지였는데 무교병과 볶은 곡식이었습니다. 무교병은 발효제가 들어가지 않고 만든 빵입니다. 원래 빵은 발효제인 이스트가 들어가서 그 효모가 빵을 부풀게 하고 그럴 때에 빵은 아주 부드럽고 풍미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소금만 넣어도 참 맛있습니다. 그리고 효모가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 소화를 촉진해서 그래서 위장 활동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음식물의 섭취도 돕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주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에는 누룩이 없는 빵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 누룩은 부정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인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예수님은 그 나라가 마치 서 말의 가루에 넣은 한 줌의 누룩과 같다고 표현하셨습니다. 가루가 서 말이면 꽤 많은 것인데 거기에 누룩 한줌만 집어넣으면 하룻밤 사이에 발효되어서 커다란 반죽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순수한 복음을 가진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그 복음을 사용하여 큰 나라를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때 누룩은 긍정적인 뜻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는 이 누룩을 부정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바리새인들의 거짓 신앙, 거짓 실천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오염시키고 영향을 주어 순식간에 잘못된 신앙과 삶으로 이끄는지를 그 영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누룩이 없는 빵을 유월절에 먹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순수한 신앙을 가져라 그리고 순전한 삶을 살아라’고 하는 교훈으로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누룩이 없이 빵을 생각해 보십시오. 빵이 거칩니다. 그리고 딱딱합니다. 그리고 맛이 없습니다. 매일 먹는 빵이 아니라 그날만 누룩 없는 그 빵을 씹어 먹으며 그들은 교훈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순결한 신앙을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을 가슴에 새겼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십시오. 연약했던 사람은 건강해 지십시오. 무명하셨던 분들은 이번에 한 해 동안에 유명해지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무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주셨을 때 여러분들이 변질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리고 더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세상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주신 탁월한 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주신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은 사람이 잘못 사용하니까 오히려 그 지혜 때문에 하나님께 누를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올 한 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더 많은 복을, 더 많은 물질을, 더 많은 건강을, 더 많은 젊음을, 더 많은 지혜를, 더 높은 직분을 구하기 전 그것으로 무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순수한 신앙으로, 그리고 순전한 삶으로 어디에 있든지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 주자라는 결심이 서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유월절의 무교병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고 한 해를 설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볶은 곡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곡식을 낱알로 먹는데 끓이거나 갈아서 떡을 만들거나 한 것이 아니라 볶은 곡식을 먹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볶은 곡식을 먹게 하셨을까요? 거긴 깊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곡식 낱알을 불에다가 굽는 것입니다. 볶습니다. 그러면 그 불에 가열이 되면서 타고 혹은 구워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꼭 유월절에 그렇게 불에 볶아진 그 곡식을 먹으면서 고난 받았던 지난 세월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 경제력이 별로 없으니까 맛있는 과자라는 게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캐러멜이라는 것을 먹어봤습니다. 신앙촌에서 나온 실로 묶은 5원짜리 열 개 들어있는 캐러멜이었습니다. 그것도 옆집 아저씨가 사줘서 하나를 먹고는 그 감미로움이 마치 회심할 때에 복음을 듣고 느낀 감미로움 같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존재할 수 있구나’ 그때에 그래도 최고의 간식중 하나가 할머니가 볶아주시는 콩이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에는 콩만 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가 엿을 녹여서 콩엿으로 만들어서 어디엔가 감춰놓으시는데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어디선가 그것을 가져오셔서 네 개씩, 혹은 세 개씩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콩엿을 만들었는데 그 콩을 볶지 않고 엿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려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광야에서 그렇게 고난을 겪으면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그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는 그 위대한 역사가 전개될 바로 그 시작점에서 그 볶은 곡식을 먹으면서 그들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지내온 연단의 세월들, 그리고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그 고통스런 삶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들이 겪었던 그 인생의 허무함과 슬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여기까지 읽습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 진정한 쉼은 모든 것을 벗어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나면 예수 믿으며 우리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섬기며 사는 것이 너무 무거운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볶은 곡식을 먹으며 광야에서 겪었던 나라 없는 그 지난 설움, 슬픔을, 고난의 세월을 곱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없이 혹은 주님을 등지고 살던 날의 고난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올 한 해도 그렇게 실패를 짊어지고 수치스러운 한 해를 살 것인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이전에 있었던 나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고 새로운 인생의 역사를 써갈 것인지를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볶은 곡식을 먹으며 고난으로 가득 찼던 광야의 시절을 회고한 것같이 여러분도 그렇게 한 해를 시작하면서 주님 없이 방황하던 때의 고통과 연단을 받았던 때의 아픔을 생각하며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함
그들은 구체적으로 수치를 굴려버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새로운 인생은 새로운 물질이나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은 새로운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 없이는 사람과의 관계도 자신과의 관계도 새롭게 할 수 없고, 그렇게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없는 한 새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옴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먼저 자신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원래 유리하던 족속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믿음의 종족으로 삼으시고 그 광야의 모든 세월들을 이기게 하셨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상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소망이 없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어린양으로 죽으신 이 속죄가 얼마나 위대한 은총의 사건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 죽음으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명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삶의 목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했지만 광야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똥 같은 수치를 짊어지고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땅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슬렀으나 신실하신 주님은 변함없이 그들에게 한 결 같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실패를 온 몸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노예와 같은 삶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그리고 바로 2017년 새해에 이 펼쳐진 한 해를 우리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전에 살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이제까지 따라왔던 수치를 잊어버리십시오. 주님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전에 모든 수치를 똥처럼 굴려버리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2017년을 살아서 여러분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인생의 한 해 중 가장 빛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도 감격스러운 인생의 한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2017. 1. 22 주일오전설교 4)
4.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수 6:20-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첫 번째 전투였습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이스라엘의 공세로 보입니다. 6장 1절에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으니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요단의 강을 말리시고, 질풍과 같은 대세로 밀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 마음이 녹아 내렸던 것입니다.
II. 여리고 성이 무너짐
하나님께서는 이 여리고성의 전투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상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전투 명령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 그 소리에 맞춰서 큰 함성을 지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말씀이 제시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돌격 부대나 특공대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누리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그림자입니다. 구원의 은총이 바로 이렇게 우리의 공로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여리고성은 정말 큰 성이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여리고성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큰 성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성은 내벽과 외벽, 둘로 이루어진 겹성이었습니다. 원래 있던 여리고 안쪽의 성은 아브라함 시대인 22세기 그리고 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 3,000년경부터 축조되어 약 800년간에 내벽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그 성만을 가지고는 외부의 공격을 막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벽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멀리 주전 20세기, 약 2,000년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직전인 14세기 사이에 축조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성 하나는 성벽이 약, 두께가 15m 정도 되는 성벽이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당시 이 성은 진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로 축조된 성이었습니다. 그 당시 쉽게 구할 수 있는 그 물질이 진흙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서 단단하게 벽돌로 만들어 그걸로 높은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돌고 있었고 성이 무너져 내렸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에 깔리지 않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아마도 역사적인 기록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을 합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이루어진 고고학적인 발굴들은 이런 의문점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답을 주었습니다. 그 성이 이렇게 일직선으로 서 있는 성이 아니라 앞쪽이 약간 비스듬하게 경사가 진 성벽이었고, 뒷면은 똑바로 된 수직 성벽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당한 거리를 떼고 그 다음에 내성이 다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이 무너질 때 바깥쪽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그런 폭약이나 이런 것이 없던 시대에 그런 식으로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을 지지하기 위해서 아마 약간 경사지게 이렇게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을 넘어도 적군들은 내벽과 외벽 사이에 갇히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많은 공격을 받게 되고 그래서 내벽을 넘을 수 있는 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여리고성은 굉장한 성이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제일 받았던 큰 충격은 자금성 성문 앞에 서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복궁을 쳐다보고도 어마어마하다라고 생각했던 우리들이 자금성 앞에 딱 섰을 때 그 독특한 느낌, 우리가 이렇게 매우 외소하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애굽의 큰 성을 본 세대는 거의 다 죽었고, 광야를 헤매는 동안에 아마 그들은 이렇게 큰 성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고, 그들 앞에 있는 큰 성, 여리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시골의 토담집에서 살던 사람을 아마 강남 빌딩 앞에 세워놓은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 성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호미나 도끼나 칼이나, 창이나 망치로 부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정복할 수 있는 성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넘지 못할 것 같은 그 큰 난제를 이기는 방법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찾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차피 우리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문제는 문제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크기입니다. 우리가 넘지 못하는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여리고 성처럼 여러분들의 인생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이 어마무지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여리고성 앞에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손으로 밀어서 무너뜨릴 수 있는 성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희망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믿음을 더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이래로 가장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을 가졌던 때라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연애하던 때가 바로 이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앞에 있는 이 여리고성같이 버티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제껏 여러분들이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무너뜨리고 이것을 넘어보고 혹은 이것을 피해 가려고 애썼습니다마는 어느 길도 우리에게 완전한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이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꿈꾸지 못했던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주십니다.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의 놀라운 힘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III.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 본문을 다 살펴보면 성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성을 넘고 그리고 공격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점령하는 사건들은 기록이 되어 있지만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일을 거기에 보탠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높은 성벽이 안쪽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무너진 벽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밟고 내벽을 넘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투할 무기보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순수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 믿음과 의심은 공존합니다. 문제는 인생의 닻을 어디에다 내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닻을 내려도 파도가 높으면 물결이 치고 배는 흔들립니다. 배를 항구에 이끌어 단단히 묶어 두어도 풍랑이 일면 그 물결이 항구까지 밀려들어와서 묶인 그 배들을 서로 흔들며, 흔들리며 삐거덕거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이탈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닻을 어디에다 내렸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께 그 믿음의 닻을 내리도록,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에 그 닻을 내리도록 우리를 가르칩니다.
오늘 보십시오. ‘내가 이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었고 이 여리고성을 너희의 손에 붙였노라’ 라는 그 약속의 말씀, 너희들이 이 성을 돌고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와 함께 크게 외치라고 하는 그리하면 이 성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바란 지점이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그 큰 여리고성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분이 우리의 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 큰 성을 무너뜨리고 우리는 이 성을 취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름다운 광경은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사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모세는 정탐대를 파송했습니다. 지파의 대표들을 뽑아 그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풍부한 소산이 있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 나머지 모두는 비관적인 보고를 하였고, 마지막에는 명백한 사실조차 왜곡하여 그 땅은 차지할 가치가 없는 나쁜 땅이라고 악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믿음으로 그 땅을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보고하는 진실한 두 사람의 보고는 거절하고, 거짓으로 보고하는 불신앙의 보고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발달한 가나안의 문명에 절망했습니다. 아마 그들도 그 큰 성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메뚜기에 비유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중 이때만큼 진노하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서 그 불신앙의 보고는 이렇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진노를 봤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자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을 제외하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애굽 경계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가면 약 300km정도 되는 길이고, 또 거기서 블레셋 땅을 거치지 않고 다른 데로 돌아가려고 고려해도 400km, 500km 미만의 거리입니다. 아무리 200만, 300만 명 되는 사람이 천천히 걷는다고 하더라도 두세 달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광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방황하며 고통을 받게 됩니다. 넓은 뜻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40년 가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앙으로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심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과정이었지만 가깝게 보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다스려지지 못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게 된 고난이었습니다.
애굽에서 10번의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보여주셨고, 매일매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만나의 기적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더 큰 기적을 보면서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줄 것이라고 하는 더 작은 기적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불신앙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기적을 보여주셔서 믿게 하시는 대신에 먼저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믿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바로 이 여리고성의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신학적인 해석을 내립니다. 30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 성읍을 돌았고”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큰 여리고성 앞에서 주눅이 들고 절망하는 대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그 옛날 조상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하면서 겪었던 그 불행한 불신앙과는 대조가 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본 것입니다. 눈앞에는 어떻게 이 여리고성이 멸망하고 땅이 이스라엘의 땅이 될지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바로 이 큰 성이 우리의 성이 되리라, 이 성이 무너지리라 하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들의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직면했지만 도저히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인생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여러분들은 메뚜기 같이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고 그 현실을 피해갈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꿈을 꾸지는 않았습니까? 그 옛날 가나안을 정탐했던 불신앙의 이스라엘 정탐꾼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올해 한 해가 새로 시작되었지만 도저히 무너질 가능성이 없는 성, 이제까지 그렇게 살았고 오래된 반복된 실패로 운명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현실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여기 무릎을 꿇고 우리가 승복한다면, 굴복한다면 도대체 올 한 해 우리에게 새롭게 펼쳐질 위대한 일들이 무엇입니까? 기껏해야 그것은 애굽에 종노릇하면서 주어지는 한 그릇의 고깃국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눈앞에 있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꿈꾸지도 못했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중하고 어려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뚜기와 같은 모습으로 여리고성 앞에 섰을 때에 그것보다 더 컸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문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꿈꾸지 못했던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고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이 성취하십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삶의 목적과 생활의 목표를 올바르게 하십시오. 문제는 무엇입니까? 약속의 말씀에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생활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론 성도가 성경을 바라보며 고백해야 할 신앙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음성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실제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가운데 제일 그래도 많이 읽은 성경이 마태복음하고 창세기 아닙니까? 년 초에 항상 마태복음하고 창세부터 시작을 합니다. 레위기의 복잡한 내용에서 길을 잃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에서 마가복음으로 넘어오면서 점점 결심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하루에 몇 장으로 정하든지 그것은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시간을 내고 얼만한 깊이로 성경을 읽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읽습니다. 그래도 1년에 최소한 한번은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읽으면서 정말 은혜를 많이 받으면 좋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몸이 건강할 때에는 활동을 하면 음식 생각이 나고 음식을 막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건강과 기력이 쇠하게 되면 제일 먼저 음식의 욕구부터 사라집니다. 그럴 때에는 좋은 반찬과 함께 밥을 먹으면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반찬이 맛있을 때면 저희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반찬이 밥을 채찍질하는구나.’ 그래서 들어가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밥이라면 좋은 경건 서적은 반찬입니다. 그래서 밥을 놓고 그에 맛있는 반찬을 좀 얹어서 먹으면 그래도 밥이 먹을 만한 것입니다. 그것도 몇 숟가락 먹고 나면 이상하게 다시 위장이 동하면서 더 먹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성경을 더 보고 싶게 만들고, 또 읽고 나면 기도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 항상 우리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갈 때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붙듭니다. 그러면서 내가 처한 현실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말씀으로 내게 다가오고 그렇게 살고 싶은 결심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굳게 붙들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꼭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향이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지를 생각하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연약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때마다 주님께 호소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말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은혜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면서 산다면 한 해가 희망찬 한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수치스럽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늘 따라다녔던 그 똥 같은 수치스러운 이름들이 모두 굴러가 버리고 다시 삶의 목표와 목적을 올바르게 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올 한 해 여러분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금년에 여러분들의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무너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2017. 1. 29 주일오전설교 5)
5. 새 삶의 깨끗한 동기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수 7:11-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리고성을 공격했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충천했고, 이어서 아이라고 하는 성을 공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척후병을 먼저 보내었고 그들은 돌아와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군사를 이끌고 그 성을 점령하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성이니 군사 이삼천만 보낸다면 능히 정복할 것입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3,000명의 군대를 내어주었습니다. 그 큰 어마어마한 성 여리고도 정복했으니 아이성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작은 아이성 공격에 철저히 패배하고 36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전사를 하고 패배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6장 5절에 보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정벌하러 나아갈 때에 가나안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과 꼭 같은 공포와 두려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던 것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법궤 앞에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옷을 찢음으로 자신의 마음의 비탄함을 보이고 엎드려 티끌을 뒤집어씀으로써 오늘 전개되는 이 상황이 이스라엘과 자신들에게 말할 수 없는 치욕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전개된 이 현실을 그대로 고하며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받으실 그 모욕과 불명예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6장 9절에서 염려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큰 성 여리고를 무너뜨린 사건은 단 한 장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조그만 성 아이를 공략하는 이야기는 길게 약 두 장에 걸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말하자면 여리고 성을 정복한 것이 큰 사건이었지만, 작은 아이성 전투를 수행하면서 실패한 그 뼈저린 경험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하나님께만 바쳐짐
하나님은 바로 이 작은 성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패하게 하심으로써 나머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 하나님이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에게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함께 그 땅이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른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온 땅에 알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류를 창조한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맨 처음 왕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나라를 지배하고 영광을 받고 모든 것을 누리는 세속적인 목표를 가지고 왕국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지만 그 성의 모든 물건들은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6장 17절에 명령되었습니다. 마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처럼 장자가 모든 가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처럼 첫 번째 정복한 성 여리고가 이렇게 오직 장자처럼 하나님께만 봉헌되었던 것입니다.
성을 점령하고 그 안에서 획득되는 모든 물건은 하나님께 바치고 거기에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 가나안 원주민을 진멸하라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그들의 죄가 하늘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그들의 죄악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유입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건이 하나님 앞에 모두 바쳐져야 했는데 이것은 바로 여리고성 그 큰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정복에 따르는 모든 물질적인 이익을 개인이 누리지 못하게 하심으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이성부터는 하나님이 이렇게 점령한 성에 모든 물건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8장 2절에서는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거라’고 너그럽게 명령하셨습니다. 아이성 전투가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과 언약을 파괴하는 죄가 들어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에 의한 승리의 보증도 없었고, 이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처럼 몸과 마음이 정결하지도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겸손도 없었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을 공격했고,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충천하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이제는 무서운 두려움과 공포로 그들의 마음이 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III. 이스라엘의 불순종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영문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그에게 명백하게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너희 중 어떤 사람이 여리고성에서 획득한 물건을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사취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망령된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아이성 그 작은 전투에서 철저히 패배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나안 정복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는데 이후에 전개될 상황을 보며 여호수아는 얼마나 두려움으로 떨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구다.”라고 지목을 하지 않으시고 지파를 나오게 하시고 그 지파 중에 유다 지파를 뽑았고, 또 그 유다 족속을 가깝게 나오게 해서 세라 족속을 뽑았고, 세라 족속의 남자들을 하나씩 나아오게 하면서 결국은 아간이라는 인물이 선택된 것입니다. 모든 지파 중에서 가장 탁월한 영예를 가지고 있었던 유다 지파에서 바로 이런 악이 행해졌던 것입니다. 그는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그는 시날 산 좋은 외투 한 벌과 은과 금 덩어리를 개인적으로 몰래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 아간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중대한 공동체적 범죄로 다스려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어떻게 보면 작은 죄, 외투 한 벌과 금 한 덩어리, 은 한 덩어리 정도는 여리고성이 가지고 있었던 그 하고 많은 보물들 가운데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이 죄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제 막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신정 국가를 건설하는 이스라엘의 순수성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지파별로 나오게 하시고 그 중의 한 지파를 택하고 지파 중 족속들을 나오게 하셔서 택하시고 족속들 중 가족의 남자들을 나오게 하셔서 선택하심으로 범인을 색출한 이 과정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높은 수준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요구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아주 엄벌에 처하셔서 그래서 그들을 모두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아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고 하였으니 아골이라는 이름의 뜻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마치 실제로 연기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그들에게 탐욕과 죄악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명백하게 교훈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과 온 식구와 가축들이 크게 징벌되었고, 유다 지파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작아 보이는 이 범죄를 크게 다루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애굽의 수치를 짊어지고 노예 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광야에서 40년 가까이 훈련시키신 이후 가나안에 들여보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모든 땅을 누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서 잘 살게 하시기 위함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는 첫 번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풍족히 가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한없이 인간들이 탐욕을 부리며 더 많은 부를 누리고 이 세상에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짓밟고 하나님의 법을 깨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사람으로 지음 받은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참된 가치는 바로 그 보람 안에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소명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들이 자신이 믿는 신앙을 전파하고 사상을 선포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의 울림을 통해 보여주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선교입니다. 최고의 선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충분히 선교된 사람으로 거기 있고, 거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의 삶의 가장 큰 보람이요, 가치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렇게 신약의 시대의 교회가 온 인류에게 보여줄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는 왕국을 통하여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광야 외로운 땅 혹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기는 하지만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외딴 곳에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의해서 최고로 문화가 발달된 인류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열국에 에워싸여 이스라엘을 거기에 심어놓고자 하셨습니다. 결국 그렇게 많은 열방들이 있는 곳에서 이스라엘은 가장 주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의 파괴는 탐욕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작은 범죄는 결국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지게 될 커다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위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바쳐졌는데도 아간에 의해서 사적으로 점유되고 있던 모든 물건들을 불태우시고 그들을 진멸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가나안 정복을 향해 기관차처럼 달음질 쳤습니다. 군사들을 파하고, 성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강을 말려버리고, 죽은 자와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자와 같이 만드셨습니다. 온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게 만드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무서운 힘의 역사가 이 작은 죄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탐욕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이 먹고 즐기기 위해서 돈을 벌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을 돕기 위해 돈을 법니다. 세상 사람들은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자녀들을 교육시키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을 이루게 하기 위해 자신도 공부하고 또 자녀들도 그 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을 공부시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위대한 정복의 역사를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이제 이 모든 불순종에서 돌이키고 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다시 정복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Ⅳ. 적용과 결론
새해를 용기와 희망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실패와 좌절, 무기력, 이 모든 이제까지 우리의 삶을 따라다녔던 수치를 굴려버려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평생 운명처럼 우리를 따라다녔던 수치를 똥처럼 굴려버릴 수 있겠습니까? 탐욕과 불신앙으로 새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옛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가 우리 앞에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올 한해는 용기와 희망으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해까지 우리를 따라다녔던 그 모든 절망적인 수치를 굴려버리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우리가 왜 실패하였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꿈도 있고 희망도 있고 용기도 있었지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이성에서 대피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올바르지 않은 탐욕과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이었습니다.
먼저 삶의 목표와 동기를 올바르게 하여야 합니다. 한 해의 우리의 모든 인생에 성공 여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화된 삶의 목표와 인생의 동기를 가진 사람, 그 분명한 목표와 동기 속에서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굳게 믿고, 삶의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공부든지 가사든지 사업이든지 목양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삶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에서 대패한 것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더라면 그들은 아마 다음 성에서 더 많은 탈취물을 숨기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성에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자신들이 파죽지세로 이 모든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 위대한 역사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 그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신앙을 굳게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진실하십시오. 삶의 목표와 동기를 올바르게 하고 지금 내가 여기서 이렇게 한 해를 살아가는 이 인생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삶의 동기를 깨끗케 하여 올 한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다시 승리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수 8:18-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상상할 수 없이 큰 성 여리고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아마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감과 용기가 솟구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는 비참하게 패하고 많은 군사들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 8장은 그렇게 실패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시 승리하게 하시는지에 대한 훌륭한 신앙의 교훈들을 담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성을 정복했을 때에 사적인 탐욕으로 그 재물을 사취하여 감췄고 이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에게 전가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렇지만 좀 더 훨씬 확장된 시각에서 보면 여호수아서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이성을 공격하러 갈 때에는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을 기적적으로 무너뜨린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했고, 아이성을 정탐하고 온 장군들은 수고스럽게 모두 출정하지 말고 군사 2-3천만 넘겨주면 단번에 아이성을 점령하겠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허락을 했습니다. 아마도 여호수아의 마음도 많이 풀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패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큰 혼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패배시키려고 하십니까?’ 하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에 별로 큰 관심을 가지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렇게 반문을 하십니다. “네가 왜 엎드려 있느냐?” 다시 말해서 지금은 기도할 시간이 아니라 도대체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와 삶은 그렇게 하나 되어서 가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잘못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열렬히 기도를 해도 삶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을 주셨고 그들을 다시 정결케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다시 정복을 하게 됩니다. 파송된 군사가 3만 명이었고 여호수아가 그 3만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으로 지도를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정신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가야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II. 다시 승리하게 하심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시면, 혹은 권능을 주시면 매우 어렵게 하는 일도 아주 쉽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말인가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실패했지만 다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 없고, 실패 없는 신앙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렇게 실패했을 때에 좌절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팡이 삼아 딛고 일어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승리하게 하셨을까요?
A. 지도력을 주심
첫째는 지도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고 말입니다. 이미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쳐들어갔고 아이성 사람들은 반격을 했습니다. 패배하는 것처럼 도망가는 이스라엘 병사들을 아이성 군사들이 겁 없이 추격을 했습니다. 성이 텅 비게 되었고, 이때 여호수아는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며 복병으로 숨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점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단창으로 아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모든 이스라엘의 군사가 지도자의 손끝에 있는 창을 보았고, 그 창이 가리키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전에는 우리가 실패했지만 이것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다시 극복하여 승리로 바꿀 수 있다고 그들이 굳게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지도력을 회복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계획은 당신이 세우지만 그 계획을 사람의 마음의 감동으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안 그 사람이 그 감동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 나가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많은 돕는 자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혼자 창 한 자루 들고 나가서 아이를 정복하게끔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이 작은 아이성이라도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 그리고 뼈에 새기게 하신 후 공격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 마리 사자에게 영도되는 일천 마리의 사슴이 더 강하겠습니까? 한 마리의 사슴에 의해서 지도받는 일천 마리의 사자 떼가 더 강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국가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준비된 지도자요,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잘 준비된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래서 집안에 모든 가족들을 신앙을 따라 살게 이끌 수 있는 부모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은 인간의 도리를 배우게 되고, 성도들은 인생의 경륜을 배우게 되고, 백성들은 정의와 공평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만나 산 사람이 되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은 우리의 육신의 모든 기관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이 육체를 가지고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탐욕에 의해서 이끌려져서는 안 되고 신앙에 의해서 이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패배하여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잠겨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실패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지도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국가가 혼돈스러울 때에는 더더욱 많은 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들을 주시면 해결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재벌의 편에 서서 뒷돈이나 받으면서 그렇게 정치하는 것을 아주 수치스럽게 아는 지도자를 주시면 해결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끌어안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할 의무가 국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백성들의 배고픔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고 백성들을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국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지도자들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더 큰 기도의 제목이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좋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비록 그들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렇게 권위 있게 당신의 교회를 사랑과 진리로 이끌어갈 수 있는 탁월한 지도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1년 동안 여러분들의 삶을 살아가는데 영혼이 여러분들의 육체의 삶을 지도하고 있습니까? 신앙이 여러분들의 인생살이를 이끌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한 해를 위해서는, 다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지도력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승리를 보증하심
둘째는 승리를 보증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을 네게 넘겨주리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증하시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아이성의 전투에서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는 하나님이 보증을 하셨는데 그때에는 보증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을 점령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헌신하는 대신 그 일을 만만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싸움이었으나 승리했습니다. 아이성은 결코 질 수 없을 것 같은 싸움이었는데 결국은 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이 세상의 자원, 인맥, 이 모든 것들은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승리를 저절로 가져다주는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어야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이 두 번째 아이성 전투의 승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아지게 하심으로써 이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큰 성 여리고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한 장밖에 나오지 않지만 여리고성보다 훨씬 작은 아이성 전투 이야기는 두 장 이상에 걸쳐서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으니 여호수아가 이 아이성의 전투를 통해 얻은 교훈이 여리고성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승리를 보증하셨습니까? 여호수아에게 “단창을 들어라 그리고 그 아이성을 가리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매복한 군사들을 위한 한 신호였고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 승리를 언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보증해 주셨습니까? 그들이 다시 기도와 회개로 정결해질 그때에 하나님은 그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성의 패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해서 애굽을 탈출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최고도에 달한 순수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 전투에 패배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녹아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죄 없는 군사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희생시키시면서 까지 이스라엘에게 가슴에 칼로 새기듯이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소중해 보이는 것들을 가져가시거나 혹은 손해를 입히시면서 까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사 우리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어제 우리교회 박수자 권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으셨는데 1년 전부터 매우 좋지 않아서 심방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간 이식을 안 하면 돌아가실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병상 곁에서 예배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목사님, 전 간 이식 안 해요. 그냥 죽을 거예요. 그래야지 저 사람이 장가 한 번 더 가고 좋아할 거 아니에요?” 남편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권사님이 완고하게 고집을 세우고 말을 안 들으시길래 제가 따끔하게 얘기했습니다. “권사님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간 이식하는 것이 믿음의 배반이나 혹은 신앙의 배신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면, 혹은 의학적으로 도저히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면 살 수 있으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간을 이식해 주겠다는 가족들도 있는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말이 안 됩니다. 권사님이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이 꺾어져서 그런 것 같으니 정신을 차리십시오.” 병원 심방을 가서 야단을 치고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권사님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수술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식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1년이 넘게끔 사셨고, 열린공간 앞에 제가 혼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으면 차를 한 잔 사오셔서 언제나 제 테이블에 놓으시면서 권하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건강을 잘 회복하셨던 분이 갑자기 안 좋게 되신 것은 장기 이식을 하게 되면 순응도를 높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신체 면역을 모두 낮춰야 됩니다. 그런데 그 면역을 최하로 낮추니까 그 시간 동안에 암이 번진 것입니다. 그래서 전주 주일에 심방을 가서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 염려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열린교회 다닌 거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손을 잡고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십시오.”라고 위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을까?’하며 생각하니 그 슬픔이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식 후 1년 동안 권사님의 가족들이 얼마나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박수자 권사님의 평생 기도 제목이었고 가족들의 신앙이 더 뜨거워지고 돈독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온 가족이 그렇게 한 마음이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마지막 가실 때까지 저는 권사님이 화를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고난 속에서도 웃으면서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기신 말이 ‘아, 우리 목사님이 안식 휴가 가기 전에 내가 하늘나라를 가야지만 목사님의 집례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어제 4시에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사람들을 어떻게 승리하게 하시는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다 모릅니다. 우리 인생에 왜 그렇게 쓰라린 실패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도 결국은 모르고 갑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만 너무 많이 생각하면서 이 사람을 원망하고 저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정말 비단 실처럼 함께 어우러져서 그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도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기도와 회개로 정결해졌을 때 승리의 보증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실패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실패한 사람이 위인들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으로서 그 실패의 의미를 깨닫고 그 실패 속에서 주님을 배운 사람들이 위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해에 우리들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혹은 여러분 스스로 말하기를 최선을 다했는데 안됐다고 하더라도 다시 우리 주님의 승리의 보증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이기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지혜를 주심
마지막 세 번째는 지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구체적으로 전투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을 공격할 때에 실패한 원인을 2차 공격 때에 아이성 사람들에게 그대로 심리전으로 이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아이성을 공격하여 아이성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패하는 척하고 도망을 치니 아이성의 군사들은 성문을 열고 이참에 이스라엘 백성의 씨를 말리겠다고 1차전 때처럼 추격전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여호수아에게 전략을 가르쳐 주셨는데 또 다른 한 부대를 성 가까운 곳에 보이지 않게 매복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위해 아이성 군사들이 빠져나간 텅 빈 성을 점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거짓 패배로 성 안의 군사를 모두 유인하니 남김없이 모든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했고, 텅 빈 성은 이스라엘의 복병들에 의해서 점령이 되고 불타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얼마 전 자신들의 데쟈뷰, 즉 자신들이 행했던 과거의 기시감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의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하고 어리석게 아이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던 것처럼 이 아이성 사람들도 그 첫 번째 승리에 도취하여 겁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성을 텅 비워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을 이기게 하는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그 첫 걸음은 하나님이 불같은 권능을 먼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주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시험에 대하여 교훈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1장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들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살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더 많은 지혜를, 더 많은 총명을 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이 탐욕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구하는 것처럼 탐욕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시험에 든 신자는 이미 그 마음이 어둡게 되고, 신령한 지혜는 사라지며, 감정은 혼란하게 되고, 의지는 완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벌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기뻐하는 자들에게는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지혜로 대적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만약에 지난 해에 만족스럽지 않은 실패를 경험했다면 그것이 여러분들의 새해의 삶을 발목 잡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전투의 결과로 온 백성들의 마음이 두려움과 공포로 녹아버렸습니다. 모든 가나안 사람들이 볼 때에 그 전투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형편없는 군대인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승리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온 마음으로 매달려 시험을 이기도록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자가 아니라, 애굽의 모든 수치를 짊어진 자가 아니라 주님께 매달려 이 모든 시련과 난관을 이기고 다시 승리한 사람으로 기억되도록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인간의 불순종과 죄로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멈추게끔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두렵고 무서운 아이성 전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셨습니다. 실패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각성시키시고, 회개시키고 다시 깨끗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셔서 새로운 승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멋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넘어진 자들을 밟아버리고 밟힌 자들을 눌러버리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실패 속에서 성공했을 때보다 더 고귀한 교훈을 주님 앞에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쓰러진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승리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일생 사는 동안 그들은 실패한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를 통해 오히려 그들이 온전하게 되었고, 실패를 통해 오히려 그들이 위대한 승리를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마음을 다해 우리 주님을 붙드십시오. 그래서 운명처럼 따라 다녔던 애굽의 똥덩어리와 같은 수치를 굴려버리고, 나 혼자 살아 실패했던 불순종을 버리고 이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일어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