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
(2017년 새해말씀사경회 저녁설교)
설교기간|2017년 1월 9일 - 1월 1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2월 8일
목 차
1. 침묵으로 순종할 때(창 22:7-14) 2017.01.0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 약속을 붙들고 살 때(창 26:1-11) 2017.0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 온유함으로 화평할 때(창 26:12-22) 2017.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4. 대적에게 인정받을 때(창 26:26-31) 2017.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1 2017. 1. 9 (새해말씀사경회 첫째날)
< 침묵으로 순종할 때 >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7-14)
I. 본문해설
-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 “그 일 후에”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암시
- 침체, 이삭의 출생, 이스마엘과의 작별
- 아비멜렉의 종들과 우물로 인한 갈등
-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부름, 블레셋에 거함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심 nisa
-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II.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
- 이 사건을 다룰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함
- 그러나 이 때 이삭은 이미 성년이었음
- 이삭이 스스로 자원하지 안했다면 제사 불가함
-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제사에 인식
- 아버지가 자기를 제물로 삼음을 인식
A. 침묵한 사람
- 제단에 바쳐진 뒤 이삭의 대사 실종
- 성인인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를 받아들임
- 침묵은 냉소, 자포자기 아니 신앙임
- 육신의 아버지를 신뢰함, 자기를 맡김
-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과 자기 필요를 앎
- 주님께 명령받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함
- 이는 하나님을 신뢰했던 아빠를 신뢰함
- 일체의 침묵 속에 주님께 바쳐짐
B. 순종한 사람
- “나무…결박 …위에 놓고 칼"(8)
- 명백한 죽음의 위협에 반항치 않음
- 아버지에 대한 신뢰만으로 가능할까?
- 이삭 자신의 신앙이 강조되어야 함
- 아브라함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믿음
- 이삭의 믿음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믿음
-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을 드린 믿음
- 신약은 명백히 그리스도와 연관 않음
- but 모리아와 대하3:1 성전 건축지
- G. Wenham은 적극 예표론적으로 해석함
- 아브라함과 이삭: 성부와 예수님
- 롬8:31∽2절과 요3:16이 여기서 옴
롬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3:17)
마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agapetos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봄
- 사53:7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주 뜻 성취를 바라본 그리스도의 그림자
III. 예비하시는 하나님
-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발견”(13)
- “이제야∽경외하는 줄 아노라”(12)
-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보신다”
- 보심과 하심이 분리되지 않는 주님
-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심
- 아직 그 예비하신 것을 발견치 못함
- 숫양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IV. 적용과 결론
- 설명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두 태도
- 침묵함+순종함: 그리스도의 모형
- 자신을 통해 주 뜻 이루실 주님을 바라봄
- 이 순수한 믿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자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 2 2017. 1. 10 (새해말씀사경회 둘째날)
< 약속을 붙들고 살 때 >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창 26:1-11)
I. 본문해설
- 리브가와 결혼한 후 두 아들을 얻음
- 아브라함 때 흉년이 다시 찾아왔음
- 브엘라헤로이에서 그랄로 이주함
-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26:2)
창 26: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 온전한 이삭의 불완전을 보여준 사건
II. 약속하시는 하나님
A. 하나님과 언약
- 아브라함 이전 언약: 아담, 노아
- 아브라함 이후 언약: 이삭, 야곱
- 이삭에게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a. 조건: 약속의 땅에 거주함
b. 내용: 복+땅+아브라함 맹세+만민 복
- 이전의 언약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감
- 언약은 당사자와 시대 경륜의 핵심
B. 언약에 대한 반응
- 믿음과 순종을 요구함: 의무
- 주님의 선하심+믿음으로 자신을 바침
- 비교적 주 앞에서 순전하게 살았음
- 하나님의 현현과 언약에도 불구하고 실수함
- 온전함과 모자람이 섞인 인생길
- 하나님 약속보다 에서에게 인정이 끌림
- 그랄에 이르러 아비멜렉 왕에게 결혼을 숨김
- 힘 다해 온전하게 살도록 노력하자
- 약해진 신앙을 틈탄 두려움의 역사
III. 두려움과 불순종
- 그랄에 거주함으로 흉년을 피함
-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불신앙
- 거짓말 자체보다 불신앙이 문제임
-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 이전처럼 주님을 절대의존해야 했음
- 아비멜렉에게 부끄러움을 당함
- 그를 통해 이삭의 불신앙을 깨우침
- 아비멜렉의 마음을 붙든 하나님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라
- 그 약속을 붙들고 그분만 부종하라
- 말씀과 은혜 안에서 주님을 신뢰함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 3 2017. 1. 11 (새해말씀사경회 세째날)
< 온유함으로 화평할 때 >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창 26:12-22)
I. 본문해설
- 여호와께서 이삭의 농사에 복을 주심
- “창대하고 왕성하여 … 거부가 됨”
- 농사 백배 수확+창대+왕성+거부
- 우양의 떼+종 심히 많음⇒시기함
- 아브라함 때 판 우물들을 모두 메움
- 아비멜렉이 이삭에 이주를 명령함
- 그랄에 이주해 메운 우물을 다시 팜
- 큰 기적, 전쟁의 승리 없음, 약한 듯이 삶
- “온유함+화평” 보여줌>이삭의 인격
II. 온유함으로 화평함
- 이삭의 인격=“온유함+화평” 보여줌
- 이웃과 화평한 삶을 살게 한 인격의 특징
A. 온유한 사람, 이삭
- 강함에도 블레셋 인들과 다툼을 피함
- 스스로 나그네의 신분임을 인식함
- “이 사람들 … 나그네라”(히11:13)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이익을 위해 대립하며 다투지 아니함
- 에섹>싯나>르호봇 땅으로 물러남
- 세상 사람의 눈에는 패배자처럼 보임
- 근심, 염려는 대부분 평화를 상실함에서 옴
- “기뻐하라…관용을…”(빌4:4-5)
빌 4:4-5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일의 성과만이 아닌 과정을 통해 영광 돌림
- 이삭의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
B. 온유하다는 뜻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5)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함이 더하니라”(민12:3)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 praus 친절 관용+anaw<ana 굴욕
- 불의한 타협이나 변절적 화해가 아님
-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너그러움
III. 온유함으로 화평하라
- 이스라엘의 샬롬: 하나님+백성들
- 그리스도가 새 계명 주심(요13:14)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 이기적인 사랑을 버림으로 화평을 구현함
- 거듭된 침해에도 복수나 원망 없음
- 물리적 땅뿐 아니라 신앙적 땅 얻음
- 하나님을 기업으로 여기며 동행함
- 미워하는 것 평생, but 용서 한번에
- 이삭은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22)
- 시련들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생각함
- 믿음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능력임
-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6:22)
- 하나님 없는 번영 추구가 실패를 부름
- 사람도 잃고 세상의 복 하늘의 복도 잃음
-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으며 살라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 때문에 여유로운 자가 되자
- 악악대며 산 동안 파괴된 관계보라
-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주, 복 주신 자
- 하나님과의 평화로 이웃에 덕을 베풀자
- 하늘 생명과 사랑을 자원 삼아 살자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 4 2017. 1. 12 (새해말씀사경회 네째날)
< 대적에게 인정받을 때 >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창 26:23-31)
I. 본문해설
-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간 때의 일
- 온유함으로 화평을 이룬 이삭에게 현현하심
- 약한 자처럼 보였으나 주님께 인정받음
- 이삭에게 약속: 동행+복+자손 번성
-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 대적 아비멜렉이 일행과 함께 방문함
- “미워하여…떠나게 하였거늘…어찌하여 내게 왔느냐”(27)
II. 대적도 인정한 사실
- 그랄: 애굽과 팔레스타인의 경계 도시
- 주전 20C 이후 애굽의 곡물 수집지
- 그러나 여전히 약속의 땅은 아니었음
- 브엘세바: 이스라엘 최남단 도시임
- 시련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심
A. 하나님이 함께하심
-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 자기들의 번영과 이삭의 다름을 봄
- 불신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을 인정했음
- 번영뿐 아니라 이삭의 인격에 감화됨
- 하나님 없는 번영은 많이 보았었음
- 이삭의 번영 뒤의 실재에 눌린 대적
-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26:28)
- 스스로 이삭에게 악을 행치 않음을 자랑함
-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높이심
- 다툼대신 온유함과 평화를 추구한 자
- 우리 생애 최고의 보험은 하나님의 함께하심
- 온유함으로 화평을 추구하는 자 되라
B. 여호와께서 복주심
- asher와 beraka의 두 가지 복 주심
- 두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축복관
- 영적인 복이 탁월함, 영혼에 주시는 은혜
- 이삭은 우양과 식솔들로 거부가 됨
- 아비멜렉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음
- 자기 압력에 이주, but 아우라 있음
- 여호와의 복은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함
- 주님 없는 번영-인간의 영광-수치됨
- 대적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
- 하나님께서 동행하며 복 주신 사람
- 하나님의 복에 대적도 와서 굴복함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 밖에서 번영을 추구하지 말라
- 모든 것 가져도 주님 없이 행복 없다
- 샬롬 속에서 온유함으로 화평하자
-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자
-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한 사람이 되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 (2017.01.0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1. 침묵으로 순종할 때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7-14)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아브라함도 사경회 때 설교를 했고 야곱도 여러 번 설교를 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삭이 섭섭해 하기에 이번 사경회 때에는 이삭을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는 성경에 길게 실려 있으나 이삭의 이야기는 아주 짧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말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쓰신 훌륭한 인물이며 주님이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주신 은혜만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이삭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돼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삭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야곱과는 달리 이삭도 얼마나 소중하게 사용하셨는지, 그에게 베푸신 은혜가 어떠하기에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도 그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읽은 22장의 본문은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어온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도입부에는 ‘그 일후에’ 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전에 많은 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신앙으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였습니다. 그는 13년 동안 영혼의 깊은 어두움과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만난 기록이 13년 동안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이 드디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손이 번성할 약속을 주십니다. 또 일평생 아들처럼 데리고 살았던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는 이별의 아픔을 19장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100세에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었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기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땅의 권세를 가지고 있던 아비멜렉의 종들과 우물로 인한 갈등이 생기면서 결국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블레셋으로 이주하여 거하게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드디어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서 부르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보면서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 새끼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은 더욱이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주신 자식인데, 있는 자식도 내어 쫒으라고 해 놓고 마지막 하나 밖에 안 남은 이 자식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가? 아멘! 할렐루야!’ (우리는 줄곧)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여러 곳에서 백세에 낳은 그 소중한 자식을 제물로 바쳤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의 표상이 됩니다. 그렇지만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말 이 모든 영광을 아브라함 혼자만 받아야 하느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마트 폰에서 사용하는 성경 어플리케이션이 많이 있습니다. 툭 누르면 성경 말씀이 음성으로 나옵니다. 저도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에 깔려 있는 어플을 통해 말씀을 들으며 산책을 하곤 합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이삭의 말을 성우가 연기하는 것을 들을 때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아주 작은 유치부 아이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여기에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에 있나요?’라고 연기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창22:5)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아이’라는 말은 나아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어린 애’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때에 이삭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성우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느낌에는 아주 어린 일곱, 여덟 살, 아니면 기껏해야 열 몇 살쯤 되었을 것이라고 그립니다. 아주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에 아주 익숙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에 이삭의 나이가 37세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90세에 사라가 이삭을 낳았고 127세에 죽습니다. 명백하게 37세라는 것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산정해 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똑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암시 구절이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 25장 20절에 보면 이삭이 리브가에게 장가든 나이가 40세로 나옵니다. 장가를 들었을 때에 당시 이삭의 마음을 표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24:67). 한 20년 전에 어머니가 죽은 사건을 두고 이런 식으로 썼을 리는 없습니다. 어머니를 여윈 슬픔이 아직 남아 있을 때에 뜻밖에 경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이삭이 결혼한 때가 40세였고 야곱과 에서 두 쌍둥이를 낳은 때가 60세였습니다(창25:26). 그 사이에는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37세로 보는 해석이 그렇게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확실한 것은 40세에 결혼을 해서 어머니의 장례를 지낸 슬픔이 위로를 받은 정도니까 40세에서 아주 멀지 않는 어느 지점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 성경 해석가들은 사라가 127세에 죽은 원인이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까지 해석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 자식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지만 사라만 했겠습니까? 굵은 정은 아빠에게 있을지 모르지만 잔정은 엄마에게 있는데, 그래서 그런 해석을 내린 듯 합니다. 우리가 그것에 모두 동의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40세에 어머니를 여윈 슬픔이 결혼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고 기술되고 있으니 어머니를 여윈 슬픔이 진하게 남아 있는 어느 시점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이삭이 제물로 바쳐질 때의 나이를 25세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확한 이삭의 나이를 추산해 내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아주 어리게 보는 사람들은 25세 정도로, 많이 보는 사람들은 40세 정도로, 유대인들은 37세 전후로 봅니다. 그러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몇 세였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 이삭이 25세였다면 125세였을 것이고, 이삭이 37세였다면 137세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이삭을 바칠 때에 상당히 건강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135세나 137세가 된 할아버지입니다. 반면 이삭은 한참 나이인 35세에서 37세 정도 되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말하기를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갔다고 하니 사람 하나를 다 태워서 드리려면 그 나무가 어느 정도 양이 되어야겠습니까? 작은 단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양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나무를 짊어지고 가야 하니까 이삭은 아마도 상당히 건장한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35세 내지는 137세 된 아버지가 그렇게 건장한 아이를 벌려 놓은 나무 위에 묶습니다. 나무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칼로 죽이려고 할 때에 ‘이 할아버지가 노망이 났나?’라고 하며 한번만 손을 흔들면 아브라함은 아마도 나가 떨어졌을 것입니다. 이치적으로 분명하지 않습니까?
Ⅱ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
이삭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이 사건은 분명하게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믿음으로 그 제사 사건에 함께 참여한 이삭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성경에서 그렇게 영광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제시하는 해석입니다. 그런 생각 별로 안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 이삭은 결국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라고 이야기 한 것 보면 그는 제사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있었고, 아버지가 자기를 묶어 그 나무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주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신앙의 특징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의 경배를 드렸던 것이었고 그것이 그의 생애였습니다. 이처럼 불타는 수많은 짐승의 제사를 보고 자란 이삭은 ‘짐승은 없고 하나님의 어떤 분명한 지시를 받아서 아버지가 나를 제물로 바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명료하게 가진 채 이 제사에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A. 침묵한 사람
하나님 앞에 순종한 사람 이삭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두 가지 특징을 오늘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는 침묵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성경 구절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제단에 바쳐지기 전까지는 이삭의 대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나무 장작 위에 바쳐진 후에는 이삭의 대사가 실종됩니다.
125세에서 137세 혹은 140세쯤 된 노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피 끓는 젊음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 이삭이 보기에는 아주 어설픈 동작으로 칼을 가지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 못지않게 강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0세까지 장수합니다. 삼십 대의 젊은이의 눈에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다가오는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노쇠한 하얀 머리에 어설픈 동작으로 칼을 쥐고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닭 한 마리 잡을 힘이라도 있을까 하는 폼이 아니었겠습니까?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기는 잘하는 것 같지만 젊은이들이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 연로하신 목사님들을 만나서 밥을 같이 먹거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 좀 짜증이 났습니다. 그분들이 무엇이든 자꾸 쏟습니다. 왜 자꾸 쏟습니까? 제가 요즘 그러고 삽니다. 거리와 공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면서 그럴 의향이 없는데도 손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을 쏟고 숟가락을 떨어트리고 국그릇을 쏟곤 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삭이 ‘내 아버지 손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없었다면, 그 신앙이 없었다면 그 제사를 한 번쯤 엎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의심이 나면 시험 삼아 한번 해 보십시오. 137세까지 사신 분이 우리 교회에는 없으니까 87세쯤 사신 분이 27세 아들 아니 손자를 놓고 시험 삼아 한번 해보십시오. 그러나 이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인인 자신을 죽이려는 노인과 같은 아버지의 어설픈 시도를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의 이 침묵은 냉소나 ‘아, 이제 나는 아버지의 손에 죽는구나.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으니 죽어야지.’라는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과 이 제사의 의미와 자기가 이 제사에 바쳐져야 한다는 그 필요성을 깊이 인식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 우리가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무 위에 아들을 묶어 놓고 아버지인 내가 왜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지, 하나님을 만나고 이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진술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아버지가 이야기를 했던지 혹은 이삭이 믿음으로 그것을 수납했던지 간에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이삭은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했던 아버지를 믿었을 수도 있고, 주님께 받은 그 명령이 너무 지엄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일체의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삭의 신앙이었습니다.
성경은 이삭을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많이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히브리서 11장 20절이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증거하고 있듯이 그는 믿음의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내어 쫒았던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과 함께 와서 깊이 머리를 숙이는 마음으로 이삭에게 경의를 표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임을 보았노라고 고백을 합니다(창26:28). 그 이방인이 말입니다.
게다가 더 결정적인 말씀이 있으니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서 34절 말씀입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성경은 이삭을 하나님의 구원을 유업으로 받을 씨로서, 그리스도를 유업으로 받을 약속의 자손으로서 묘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산 사람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자기 자식 야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수 있었겠으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언급할 때 한 결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이 사람 이삭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쳐야 할 그 순간에 자기 사랑을 버리고 조용히 침묵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는 때에 시작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인데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스스로를 복되게 하려고 애쓴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예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미아리 고개에 가면 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그 점집들은 한결같이 태극기를 꽂아 놓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찾아오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갔습니다. 제가 지금 들려줄 이야기는 거기 점집에 갔다가 온 사람의 간증입니다. 불신자 친구들이 새해에 점을 보러 가자고 하기에 따라 갔다고 합니다. 점쟁이가 점괘를 막 흔들더니 ‘네년들 중에 예수 믿는 년 있냐?’고 하였고, 친구들은 일제히 자기를 쳐다보았습니다. ‘이런 염병할, 너 때문에 점괘가 안 나오잖아. 예수 믿는 년이 여기는 왜 와? 예수 믿는 년은 어차피 팔자대로 안 살아. 교회나 열심히 다녀.’ 그 사람이 거기서 큰 찔림을 받고 교회 와서 회개를 했답니다. 재미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운명대로 안 산다는 것을 점쟁이들도 인정합니다. 관상이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 없습니다. 어떤 운명도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때에 그런 것이 있다고 뻥치던 잡귀들도 물러갑니다. 악한 세력들은 ‘이것은 내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다’고 하며 포기합니다.
우리는 바보같이 자기가 자신에게 복 주려고 합니다. 거기서 인생이 꼬이면서 신앙의 반역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행복해지려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불행해지려다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자기 방법과 수단을 다하다가 결국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고통을 받고 불행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준 위대한 인물의 표상이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할 그 순간에 이제껏 나누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모두 끊었습니다. 그는 모든 소리대신 침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가도 한번 못가보고 아버지의 손에 끌려와서 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도 사람이니 그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정들이 소리를 치고 있었겠습니까? 정들은 마음으로 소리를 쳤으나 말로는 입속에서 조용히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는 예수 닮은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진영에 있는 주석가이든 개혁주의 진영에 있는 주석가이든 많은 사람들이 예외 없이 한 가지 사실은 인정합니다. 이삭의 나이에 대해서는 확증을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침묵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받친 이삭은 이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일체의 침묵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신 예수를 가리키는 그림자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보셔서 아실 겁니다. 말을 청산유수로 늘어놓으면 마음은 좀 시원하고 사람들의 동의는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내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도 돌아오는데 마음이 공허했던 적은 없습니까? 왠지 뻥 뚫린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이 든 적 없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하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해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 없이 번영하고 복 받은 사람이 되어 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주님과의 관계도 깨트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부서뜨리고, 자기 인격도 망가지고, 신앙도 부서지고, 기도의 세계는 허물어지지 않았습니까? 이제 새로운 한해에 또 그 삶을 다시 끌고 들어와서 우리 인생에 한번 밖에 없는 2017년, 새하얀 눈밭과 같은 이 한해를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주님의 뜻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며 자기를 드려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순종한 사람
마지막 두 번째는 이 사람은 침묵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무를 벌려 놓고 결박한 다음 칼을 겨누며 아버지가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명백한 죽음의 위협 앞에 그는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신뢰만으로 가능했겠습니까?
신약 성경은 이 아들을 받칠 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하나님은 이 아들을 약속의 자식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 앞에 바쳐 죽여도 주님이 그를 부활 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렇게 믿음이 훌륭해서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믿음만으로 이삭의 제사 행위가 가능했겠냐는 것입니다. 이삭이 아버지와 똑같이 ‘내가 아버지의 칼에 죽어도 나는 다시 부활할 것이야’라는 것을 믿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단지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정 때문에 자신을 죽이기 위해 접근하고 있는 칼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아니라 이삭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제사를 수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선하신 하나님이 지금 자기를 제물로 원하시고 주님이 자기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처분에 맡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순종입니까? 아니면 소극적인 순종입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 한사람의 믿음에 의한 제사가 아니라 믿음으로 백세에 낳은 자식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시에 아버지가 섬겼던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기까지 순종했던 이삭의 믿음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바친 아버지의 믿음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아들의 믿음과 입맞춤으로써 성경에서 잊혀 지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사건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은 명백하게 이삭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 짓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침묵 속에서 온전히 순종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드리는 이삭의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침으로 우리에게 구속을 주신 한 표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모리아’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을 받친 곳이 모리아 땅이었고, 역대하 3장 1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지역 이름도 ‘모리아 산’이라고 나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산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 동일한 명칭의 그 산 위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는지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좀 더 넓은 의미로 그 지역이 동일한 모리아 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주석가들이 동의를 합니다.
고든 웬함(Gordon J. Wenham)이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학자는 아주 적극적으로 예표론을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은 성부 하나님과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과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 마태복음 3장 17절이 바로 이 사건을 염두에 두며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1-32). 또 하나님은 세례를 받는 당신의 아들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사랑하는’이라는 뜻을 지닌 희랍어 아가페토스(ἀγαπητός)는 70인역에서 사랑하는 독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똑같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고든 웬함은 이사야 53장 7절을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건에서 모티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이삭은 마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침묵 속에서 조용히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고 그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자신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며 숨을 거두실 때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씀하셨지만 마지막에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이삭은 바로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자기 자신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 이삭을 이스라엘 역사에 토대를 놓는 세 족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시 말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중요한 표증을 지닌 세 사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중 한 사람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의 아들 야곱이 아직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고 믿음이 연약하였을 때였습니다. 형이 받을 축복을 도둑질하고 외삼촌이 있는 메소포타미아로 도망을 갈 때였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주신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28:13).-정확하게 야곱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심, 편집자 첨가] 그때 야곱이 기도할 때 뭐라고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곧 ‘나는 아직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할아버지를 통해, 또 우리 아버지를 통해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 그분들이 당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하나님이 그분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느 때든지 꼭 붙들고 지켜 주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고, 그 후손들 역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입니까? 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고집을 쓰고 하나님을 꺾어보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예전에는 미운 일곱 살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손녀가 올해 네 살이 됩니다. 유아부로 올라갔는데 두 살 때는 전혀 못 보던 모습을 요즘 봅니다. 무엇을 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소리를 꽥 지릅니다. 누가 전적 타락이 아니랄까봐 그런 성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누구에게 학습이 되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도 바르르 떨면서 “에이 씨, 내 인생의 계획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라고 했던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제가 주님을 믿었으나 아주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을 때 자주 했던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었으면 나를 도와주셔야지, 도와주시지는 않고 내 인생에 가끔씩 나타나서 딴지나 걸고, 내가 하려는 일이나 안 되게 만드시고…’ 그러면서 포달을 떨면서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찬양)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올 한해 주님께 깊이 순종해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예비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여기에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칼로 내리치려 할 그때에 여호와의 사자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1-12). 하나님이 정말 모르셨겠습니까? 모르신다면 하나님일 리가 없습니다.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이것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인생을 살다보니 가족들한테 미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많이 표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부들 중에서도 어려서부터 사랑하다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아서 마음으로는 자기 남편을 혹은 자기 아내를 끔찍하게 좋아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물 하나를 사가지고 와서 ‘여보 한 해 동안 정말 고생했어. 생일 축하해. 너무 사랑해.’ 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말 한마디 없이 ‘자. 여기’하고 선물 하나 휙 던져 주고 갑니다. 새해부터는 고치십시오. 아직 인생 더 살아야 합니다. 여태까지도 이렇게 살았는데 지금 와서 꼭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100세 세상입니다. 언제까지 살지 모릅니다. 147세까지 사는 사람이 동남아에 있답니다. 그러나 연습합시다. 고치십시다.
중국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중국을 자주 드나들며 집회를 했습니다. 그분이 65세쯤 되었을 때 중국 관계자들이 중국어를 좀 배워보시면 어떠시냐고 권했는데 이 나이에 무슨 새로운 언어를 배우겠느냐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올해 95세이신데 아직 정정하게 살아계십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중국어를 배울 걸 잘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살 날이 많습니다. 처음 한 번을 할 때에는 두드러기가 강력하게 나겠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안 납니다. 오늘 집에 가서 얼굴에 철판을 쓰고 ‘사랑해, 우리 아들’ ‘사랑해, 여보. 오늘 당신 생각하며 눈물이 났어. 당신이 내 신랑이어서 혹은 내 아내여서 너무 고마워.’라고 해 보십시오. 숙제입니다. 이렇게 남편을 향한 사랑과 자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티끌만큼도 애미, 애비를 생각하지 않는 못된 자식놈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조금씩은 부모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 마음을 꺼내서 표현하기 창피해 합니다. 그러지 말고 내일은 속 썩일지언정 오늘 사랑하는 그 마음을 부모님께 표현하십시오. 잘못한 일이 있으면 글피에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 무릎 꿇으면 됩니다. 있을 때 사랑하고 많이 표현하십시오. 저는 요즘 많이 표현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노망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지나 간 긴 세월들이 아깝습니다. 표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가질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행사하여 보일 때에 또 다른 기쁨을 느끼십니다. 이렇게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그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좋습니다. 게다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아 하나님이 드디어 나를 시집보내시구나.’ 아니면 ‘안 팔리던 집을 팔리게 해 주셨구나.’ ‘나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셨구나’ 등등의 응답을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시련과 역경을 당하는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에 마치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의 표들을 드러내지 않는 우리처럼)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뭐 그런 것을 가지고 도와주고 말고 하는 사이인가?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냥 당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것을 표현하면서 그의 나이 137세 혹은 140세가 다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생명보다 백배나 귀한 백세에 낳은 그 자식을 죽이려고 바치기까지 했는데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절대로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제가 5일을 금식 기도하고 제 자신을 주님께 바치던 밤이 생각납니다. ‘하나님, 이제 제 인생은 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마음대로 저를 사용하십시오.’ 울면서 기도를 할 때에 제일 먼저 제 마음에 들어왔던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그 고백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집에 가서 무릎을 딱 꿇고 ‘여보 사랑해.’라고 하고, 손을 얹고 기도를 해줍시다. 남편이 너무 숫기가 없으면 아내가 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딱 꿇고 ‘여보 사랑해. 당신 같은 사람을 내게 줘서 너무 감사해. 이렇게 하는 거야. 한번 해봐.’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렇게 이삭을 드렸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바로 그때 무엇이 필요한지 아셨습니다.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여호와 이레’가 되었습니다. ‘이레’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가 비참한 일을 당할 때 일의 전말을 다 보고 마음 아파하지만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어서 그를 구해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그러십니다. 하나님은 보시고 마음이 움직이시면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한해, 불통하고 힘겹고 어렵게 살았을 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없으시구나.’ 혹은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은 어디 신경이나 쓰실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숫양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놓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며 독자 이삭을 바쳤고 이삭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자기를 헌신했습니다. 침묵 속에 순종함으로 자기를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놀랍게 상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제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힘센 아들과 함께 숫양을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아들과 함께 손잡고 그 언덕을 걸어 내려오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좋으신 하나님, 한번 약속한 것을 결국은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셔서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하나님만 바라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부자가 손을 잡고 하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 돌아와서 그 감격스런 소식을 전하였을 때 아내 사라는 또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의 마음속에도 놀라운 신앙의 갱신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 이삭이 침묵 속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될 수 있는 지점이 변하여 환희의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의 감화와 놀라운 신앙의 갱신을 불러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금년 한해를 이렇게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 약속을 붙들고 살 때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창26:1-11)
녹취자: 허혜숙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 (2017. 01. 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
I. 본문해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을 한 후에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찾아왔던 흉년이 이삭의 때에 다시 한 번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브엘라해로이라는 곳에서 그랄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26장 2절에서 이삭에게 ‘너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삭에 대한 기사가 아브라함이나 야곱에 비해서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두 족장에 비해 과실이 적은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의 여러 지문들을 미루어볼 때 이삭은 온전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람일 수는 없었으나 비교적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대대로 하나님의 사람을 말할 때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은 비교적 온전한 삶을 살았던 이삭이 얼마나 불안전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생애 전체를 거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믿음으로 살지 못했던 때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지 못했던 한 실패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오늘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약속하시는 하나님
우선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속에서 우리는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에게도 나타나셔서도 말씀하셨습니다.
A. 하나님과 언약
그 약속은 언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언약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언약은 이미 이삭 이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서부터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핏줄로서의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지만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첫 조상은 아브라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그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선택하심으로 이제 그 아브라함을 씨앗으로 삼아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고, 그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뿌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신약의 교회라는 나무가 자라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스라엘의 첫 조상으로 택한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며 지극히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공로나 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인 믿음에 달린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도 언약이 있었습니다. 이 언약은 정확하게 말하면 계약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약속을 맺고, 하나님은 선택된 그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고, 그 은총을 입은 언약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노아와 맺은 언약이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과 맺은 언약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족장들로 보자면 아브라함 이후에는 이삭과 언약을 맺으셨고 또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들은 많이 있지만 하나하나가 동떨어진 것들이 아니라 앞에 있는 언약을 기초로 그 언약의 실현해 가는 한 과정으로서의 또 다른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그 언약을 받은 당사자와 그 시대를 향해 하나님이 당신의 경륜을 펼치시는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실패에 실이 감겨져있습니다. 그 실을 잡아당기며 계속 풉니다. 연의 비유가 더 적합합니다. 연을 하늘 높이 띄웁니다. 그리고 바람이 잘 불면 끊임없이 얼레를 풀어서 실을 계속 놓아줍니다. 그러면 연이 하늘 높이 더 높이 올라갑니다. 모두 올라가고 나면 이 실패에 실이 모두 떨어 질 때가 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이 얼레입니다. 그 얼레를 언약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셨는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입니다. 이삭의 때에는 하나님이 완전히 다른 하늘 문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역사하셨던 하나님과 또 다른 측면들을 이삭과 함께 하시면서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또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으로 떠난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이삭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야곱은 사기꾼 같고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으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이삭과는 이삭과 맺은 언약을 핵심으로 당신의 경륜을 펼치시고, 야곱과는 야곱과 맺은 언약을 중심으로 당신의 경륜을 펼치시면서, 이 세 개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을 그 이후에 맺은 언약을 통해서 더 구체화 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도 보지 못했던 아주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면서 이스라엘의 미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오늘 이삭에게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할까요? 우선 언약의 조건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왜 그렇습니까? 팔레스타인이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즐겨 피하는 곳이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은 기름 진 땅이 많고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곡식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빌어먹어도 애굽에 가면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요셉이 애굽 총리로 있던 시절) 온 세상에 7년의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물론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지만- 애굽에 가면 먹을 것이 넘쳤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너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주일날 설교에서 이 땅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너의 기업은 예수 그리스도인 줄을 알고 그 분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 분을 떠날 수 있을까요?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이 그 구원을 취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떠난다’라고 하는 이 말은 거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주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도 그렇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거주하는데도 이렇게 흉년이 들게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약속의 땅에도 흉년이 온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기업을 약속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누렸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안에서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그분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 언약의 조건에 대한 내용은 네 가지인데, 첫째는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둘째,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며’, 셋째,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고’, 넷째,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십니다. 언제 주께서 나타나셨습니까? 풍년이 들고 모든 것이 풍족할 때가 아니라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의 말씀을 반복하시며 그 언약을 이삭과 갱신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약속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살라고 주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B. 언약에 대한 반응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언약을 하실 때에는 이 언약에 대한 반응을 요구합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언약은 언제나 은총이 약속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은총만 약속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은총에 대한 반응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이것이 의무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모세의 언약을 비교할 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의 언약은 ‘내가 너로 만민의 아비가 되게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땅을 주고 또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할 것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된다’ 그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봐도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에는 언제나 은총으로만 다가오시지 ‘네가 이것을 안 지키면 죽여 버리겠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실 때에는 아브라함이 언제나 수혜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모세와의 언약이 등장합니다. 약 700년 정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와의 언약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입니다. 그 계명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은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너희는 벌을 받으리라 그러면서 은총의 상급과 심판의 칼이 함께 들어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떤 점에서 그 두 언약이 일관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언약해석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시간에 그 모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훌륭한 해석은 이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어린 아이로 보고 그 아이의 성장 시기에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었고 역시 그도 여호와라는 신을 잘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자라면서 경험한 허접한 중동의 그 걸레 같은 신들과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지극히 큰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후에 오직 은총만을 제시하십니다.
아직 아이로 치면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너 빳다 맞을 줄 알아, 물구나무 세울거야, 너 물고문할거야, 아니면 너 호적에서 파 버릴거야,’이러면 못 알아듣습니다. 아마 ‘응’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꾸 상을 약속하십니다. 좋은 교육입니다. ‘자, 어지럽힌 것 모두 치우자, 그것이 인간의 도리야’ 못 알아듣습니다. ‘이것 다 치워 그럼 과자 줄게’ 그러면 잘 알아듣습니다. 아이가 큽니다. 그래서 스무 살쯤 되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갑니다. 그런데 ‘너 학점 꼭 받아, 낙제하지 말고, 스케이트 사 줄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대학 다니는 애를 그렇게 하면 됩니까? 부모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면서 ‘제발 졸업만 해줘 세계 배낭여행 시켜줄게, 부탁이야, 엄마 마음을 봐라’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 다음에 책임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너의 나이 열여덟이야, 이제 법이 바뀌어서 네가 투표 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면 이제 네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지 그 결과가 어떤 지를 네가 감당해라.’ 자라면서 아이에게 자기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그 인간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하나하나 책임지게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인데 돌을 던져서 학교 유리창을 깼습니다.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그 유리창이 80만 원짜리 유리창입니다. 그것을 깼습니다. 그것은 엄마가 해결을 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대학교 졸업반일 때 야구를 하다가 학교 유리창을 깼습니다. 그러면 그 때는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합니다. 엄마가 통장 들고 뛰어가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과정동안, 약 7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이 엄청난 책임을 이스라엘에게 물으시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7백 년 동안을 하나님이 양육하십니다. 기르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믿음이 자라게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수없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모두 7백세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조상들이 경험한 그것이 자손들에게 전해지고 자손들이 그것에 의해서 다시 신앙을 계승하고 혹은 후퇴시키고 혹은 발전시키고 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이 마지막 특수 종합 반에 집어넣고 고농도의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마치 ‘학력고사 40일 반’ 하듯이, 그것이 광야 40년 세월의 고생입니다. 이것을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행해지기 직전에 하나님이 신약의 율법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책임지는 훈련을 39년 동안 수많은 조상들이 불신앙으로 죽어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교육을 시킵니다. 왜 입니까? 요만큼만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단칼에 날려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로 오게 하는 유일한 도구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자, 치우자. 과자 줄게’만이 은혜가 아니라 ‘네 행동에 책임을 지거라’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모세 언약의 차이로 가장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이삭은 비교적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아주 명백한 언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생애에서 잊혀 지지 않은 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삭이 비교적 순전한 삶을 살았던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모든 뛰어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온전함과 모자람이 함께 섞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류역사에 실제로 존재하는 위인은 없고 위인 같이 기록이 남겨진 사람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록이 모두 허위라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한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정보는 한 쪽으로 쏠리면서 그의 어두운 면들을 사람들이 덮어 주게 되고 반대가 되면 그가 참 훌륭한 점들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려주지 않으므로 그 사람이 완전히 어두운 역사를 써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그런 것을 읽으면서 확 빠져들어 가면서 사로잡히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 거기에 대한 균형 감각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뉴스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아멘을 못하다가 텔레비전 앞에서는 늘 아멘을 합니다. 어느 채널에 고정을 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텔레비전이 여러분들의 머리를 주무르면서 자기네에게 적합한 사람으로 빚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뉴스가 나오면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되 마지막에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을 함께 놓고 봅니다. 그러면서 YTN 뉴스채널을 같이 들으면서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균형 감각을 잡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내 생각이 뭐냐고 묻고 싶겠지요. 지금 이 시간은 그런 것을 답하는 시간이 아니기에 지나가겠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은총으로 언약을 주시지만 그 언약에 반응해야 할 의무를 인간은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III. 두려움과 불순종
자, 그러면 그 순전한 사람 이삭이 약해진 신앙을 틈타서 파고 들어온 그 어떤 죄의 힘에 의해서 넘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두려움으로 말미암은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랄에 거주하므로 흉년을 피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상당히 노년이었는데도 그이 아내 리브가가 아리따운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도 이 부분에서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그때는 기후나 모든 것이 지금과 달랐으니까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날의 화장품이 그 때보다 훨씬 더 발달 했을 텐데, 어쨌든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리브가를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을 그가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납치된다든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리브가를 취하기 위해서 남편인 자기를 죽일 것 같은 두려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윤리 기준으로 보면 이까짓 것이 무슨 거짓말에 속할까 싶기도 합니다. 오늘 9시 뉴스만 보아도 청문회에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까짓 것이 무슨 위증죄나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거짓말이 신앙적으로 보다 심각한 동기와 관련을 맺고 있을 때에는 외형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커 보이는 거짓말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됩니다. 이삭에게 있어서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객관적으로 말하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녀는 외삼촌의 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거짓말 이었습니다. 이 이삭의 거짓말이 그의 생애에 관한 짧은 기록들 중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 이유는 거짓말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거짓말 속에 깃들여있는 하나님에 대한 매우 큰 불신앙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0장 1절에서 7절 사이에 보면 거의 똑같아 보이는 기사가 반복됩니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흉년이 들어 그랄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사라는 아비멜렉이라는 그 나라 왕에게 요즘말로 하면 수청을 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혼을 내십니다.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나는 그 여자가 아브라함이 자기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정당하게 취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더니 하나님은 ‘그러니까 내가 이 정도에 끝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 돌려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아내를 돌려받게 됩니다. 이 대목은 아브라함이 그때에 아비멜렉을 비롯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받은 위협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자식을 산 채로 죽여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 믿음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왕년에 믿음은 왕년에 우리를 살게 했고,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왕년에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서 오늘도 그렇게 산다는 보장이 없고, 오늘 그렇게 산다고 해도 내일도 그렇게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오늘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살 힘은 어제 주셨고, 내일 살 힘은 내일 주시고, 오늘 살 힘은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지 살 수가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삭에게로 돌아와서 이런 위협이 있었기에 그는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서도 등장한 아비멜렉이 여기서도 등장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수명이 길 길래, 또 무슨 정력에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여자를 취하고 또 오늘 여기에도 등장하는 것일까요? ‘아비멜렉’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두 단어가 붙어 있는데 ‘아비’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멜렉’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왕의 아비’라는 뜻으로서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왕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가 진짜 ‘바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왕을 했던 것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왕을 지칭하는 말이듯, 또 중국의 왕들을 ‘황제’라고 불렀듯이 아비멜렉도 그와 같은 말입니다. 그저 하나의 보통명사의 칭호였습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우두머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아비멜렉과 여기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은 동일인물이 아닙니다. 어쨌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뼈아프게 실수한 바로 그 지점에서 똑같은 흉년이 든 상황에서 똑같은 실패를 이삭이 하게 됩니다. 결국은 인간의 나약함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특이하게 다른 것이 아니라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직장에 다녔을 때의 일인데, 3년마다 감사를 받습니다. 감사가 나오면 재미있는 것은 3년 전에 감사받은 지적 사항을 모두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으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감사를 합니다. 그러면 항상 옛날에 걸렸던 것이 또 걸려듭니다. 사람이 항상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약한 모습을 봤는데 엄청난 경계심을 가지고 그것을 이겼을 것 같은데 똑같이 걸려듭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짝으로 존재하는 감정이 ‘염려’입니다. 두려움은 염려를 낳습니다. 둘이 따로 다니는 적이 없습니다. 항상 두려움과 염려가 한 짝을 이루어서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이 있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싶고 기왕이면 편안한 환경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며, 편안히 자고 싶어 하는데 그런 것들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본성 아닙니까?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면 자기가 어디에 여행을 가서 아주 럭셔리한 호텔에서 자고 맛있는 것을 먹었다고 하는 속없는 사람들의 자랑이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보다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보다 조금 더 못한 사람들은 자기도 그것을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정욕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다른 미디어에서 마음을 흥분시키는 장면이 나오면 그런 감정이 야릇하게 생겨납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마음의 구조에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저항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게 우리들을 엄습하는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 증거는 그렇게 강력하게 엄습을 해서 3일씩 4일씩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정욕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아, 저 코트 하나 입으면 참 좋겠다.” 혹은 “저 밍크 달린 목도리 한 번 둘렀으면 좋겠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얘기가 나왔으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시중에 밍크로 된 목도리를 많이 팝니다. 최근에 중국에 가서 그 원가를 알았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시안(西安)에 갔는데 그곳이 밍크의 고장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밍크를 기르는 농장이 있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밍크를 사라고 하는데 저는 안 산다고 하고 갔습니다. 상인들이 따라붙으며 흥정을 하는데 멀리 떠나갈수록 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200위안 하던 밍크가 70위안까지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만원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밍크가 35000원에서 시작해서 좋은 것은 15만원까지 받습니다. 그것을 며느리한테 선물을 했는데 선물 가격이 드러났으니 창피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뭔가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을 꼭 소유하면 안 되겠다는 감정이 확 밀려와서 죄라도 지을 마음을 줍니다. 그런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짓밟히고 하찮게 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더 인정받고 싶고 더 좋아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너무나 강하게 밀려와서 누군가를 험담하고 짓누르고도 자기가 등극해 보려는 마음이 한 순간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저항하기 힘든 강한 힘을 어떤 순간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한 번 보십시오. 그렇게 자식까지 죽일 수 있었던 그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그까짓 두려움을 못 이겼을까? 그렇게 순전하게 살던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무서워해서 거짓말을 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한 순간에 남들이 보기에는 근거가 없지만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두려움으로 확 밀려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적이 없습니까? 요즘은 그런 것이 덜 하지만 살면서 그런 것을 참 많이 경험했습니다. 멀리 여행을 갔는데 꼭 집에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또 외국에 집회를 갔는데 교회에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확 들면서 숨을 쉬기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내 건강이 매우 나빠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두려움의 종류는 아주 다양합니다. 그런 것들이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굉장히 강한 힘으로 밀려들어옵니다. 그 때는 매우 위험한 때입니다. 방치하면 확 들어오면서 순간의 두려움이 먹구름 같은 것들을 마음에 확 뿌립니다. 그래서 어두워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뭉게구름처럼 염려가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뭐하고 똑같은 줄 압니까? 은혜를 받을 때하고 똑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으면 그 다음에 상상의 날개를 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아, 옛날에 일어난 일들이 이러 이러해서 하나님이 일어나게 하셔서 결국은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구나. 작년에 그 큰 사고를 당하고 내가 입원을 했었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좋게 해 주시기 위해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거야.’ 그러면서 이제까지 의문으로 남았던 자신의 삶에 설명 안 되던 끊어진 고리들이 모두 줄처럼 이어지면서 마음속에서 기쁨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이 확 밀려오게 되면 먹구름처럼 피어나면서 모든 것들에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연결되었던 모든 것들이 끊어지면서 하나하나가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가장 나쁜 쪽으로 해석해서 연결을 지으며 최악의 상황이 올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그 두려움을 대항하여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 아닙니까? ‘아비멜렉, 그 인간이 나를 대적해? 한 번 붙어보지 뭐.’ 그러면 될 텐데 그걸 못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싸워도 안 되겠다면 그것은 주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 주님이 죽으라 하시면 죽지 뭐!’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연상이 안 되고 자기 자신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어려움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손을 뻗어서 도와줄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하거나 그것이 성공했을 때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을 오염된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오히려 문제를 더 확대시키고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나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는 나는 비교적 평안하게 살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미래는 더 두렵습니다. 또 나는 지금도 심히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험악한 것에 연단되기는커녕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미래에는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비관적으로 생각하면서 낙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위에 누군가 낙심에 빠지면 같이 한숨을 쉬어 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부정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설득해서 그의 생각을 돌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그 사람은 절망의 늪으로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수없이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만납니다. 한두 번 설교를 듣거나 몇 번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고 기도하면 어느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회복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네 문제는 문제도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의 문제는 더 크다고 함께 탄식을 하는 것은 수렁에 빠진 사람을 구덩이에 더 집어넣는 행동입니다. 그런 것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그래서 종종 정말 강해보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데도 그런 것들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은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지금 은퇴하셨는데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으로 집회를 갔는데 집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집과 교회에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무서운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밤중에 전화를 돌려보니까 아무 일도 없다고 오히려 그 쪽에서 놀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에게 순간순간 온다고 해서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야, 나는 믿음이 바닥이구나. 신앙이 이렇게 저질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믿음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종종 그런 공격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사로잡히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에 사로잡히면 마귀에게 굴복하지 않고 싸우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을 등지고 마귀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치유법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불행한 일이 내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두려운 마음이 내게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가 믿음으로 이것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데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꼭 그렇게 하기로 작정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일어날 일입니다. 피할 수 있습니까?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험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이 꼭 그 시험을 없어지게 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시험을 사라지게 하시기도 하지만 온다하더라도 피할 길을 주시기도 하시며, 피할 길도 안 주시고 사라져버리게도 안 하셔서 그냥 당하게 하신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셋 밖에 없습니다. 막말로 이야기해서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처지에 놓여있다 칩시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우리를 향해 네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너를 심판해 버리겠다 혹은 지옥에 처넣어버리겠다고 하셨다고 칩시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셋 중에 하나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삶에 엄습하는 두려움을 경험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거기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보면 죄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염려 근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총은 쥐었지만 한 번 쏘아보지도 못하고 탈영을 한 군인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분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못 박으시면서 그 삶을 못살게 하는 가장 큰 대적을 마귀나 사탄을 꼽은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에서 찾으셨습니다. 그 두려움이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순전한 자신의 인생에 한 페이지를 흠집을 낸 것입니다. 이삭이 언급한 거짓말 자체보다 더 큰 것은 그 이삭이 평상시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인생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바에 따르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고 불순종한 사람이 진노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한 사람은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지 누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된 사람입니다.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그 길이 옳은 길이면 ‘하나님 제가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이 길을 갑니다. 내가 연약하니 보호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신앙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삭이 경험한 이 큰 두려움으로 말미암는 거짓말은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의존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거짓말이 자기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에게 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이삭이 창피를 당하며 그의 불신앙을 깨우치게 해 주셨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삭을 선택하실 때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며 살도록 부르신 그의 소명과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붙드십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마음을 사로잡으셔서 그렇게 악을 행치 못하게끔 하나님이 막아주셔서 믿음이 충만할 때뿐만 아니라 연약할 때조차도 이삭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이제 새로운 한 해 2017년이 펼쳐졌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두려움과 염려를 운명처럼 끓어않고 결국 불신앙으로 살아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수치스러운 사람들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매 순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서 그분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와 같은 때 이처럼 주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어라 주가 인도하신다,’ 주님을 굳게 믿고 이 두려움과 염려를 떨치고 순종하며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 (2017.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
3. 온유함으로 화평할 때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창 26:12-22)
녹취자: 최원정
Ⅰ. 본문해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농사를 지었는데 백배의 수확을 하게 되었고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 식솔들이 많아져 왕성하게 되었고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던지 성경은 거부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양의 떼가 점점 늘어나서 가축이 떼를 이루었고, 종들이 점점 많아져서 큰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그 땅의 본토 사람들인 블레셋인들이 이삭을 시기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시기는 이삭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도 있었던 일입니다. 이삭은 이들에게 무슨 손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그냥 그들은 시기심 때문에 배가 아팠고 그들의 눈에 이삭은 미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박복하게 살아도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주님의 복을 많이 받아도 이렇게 부당한 시기심에 미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기심 때문에 아주 고약한 짓을 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물은 생명과 같았고 아시다시피 빗물을 받아서 쓸 정도로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 그곳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동네 우물에 가보면 우리들이 흔히 시골에서 보는 우물이 아닙니다. 그들의 우물은 매우 깊습니다. 기계도 없던 그 시절에 우물 하나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판다고 해도 모든 우물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단물이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쓴물이 나오는 지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물은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고 그 우물을 놓고 전쟁도 벌어지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렸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메워버렸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 정도로 그친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은 아예 이삭에게 공식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자기네 땅을 떠나달라고 이주를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거기서 그랄로 이주해 왔고 메운 우물을 다시 파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의 이 이야기는 꽤 긴 기록이긴 하지만 (다른 족장들처럼) 큰 기적은 없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승리도 없습니다. 두고두고 일생동안 간증이 될 만한 엄청나고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도 없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이 본문을 본다면 못난이 이삭, 여기서 발로 차니까 저기로 굴러가고, 저기서 발로 차니까 또 저리로 굴러가면서 약한 듯이 살아온 그의 삶의 발자취밖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온유함으로 화평한 이삭의 인격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결국 감화를 끼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삭에게는 매우 까다롭고 고약한 심보를 가진 블레셋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이웃과 화평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다져진 이삭의 평화로운 인격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온유한 사람, 이삭을 만나게 됩니다.
Ⅱ. 온유함으로 화평함
A. 온유한 사람, 이삭
성경 본문을 보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어 종이 심히 많았다고 했고, 심지어 아비멜렉도 이삭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하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삭의 집안에도 그 모든 재산을 지키는 군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번 어마어마한 재산으로 더 많은 군사들을 모으고 아비멜렉과 전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강함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핏 보면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아비멜렉을 비롯하여 블레셋사람들이 이리로 차면 저리로 굴러가고 저기서 차면 또 다른 곳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다툼을 피하며 살았고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기 전까지는 나그네의 신분임을 인식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위대한 신앙의 족장들을 거론한 후에 히브리서 11: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는 힘이 있었으나 그것을 가지고 아비멜렉과 다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였지만 그 이익 때문에 아비멜렉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대립하여 다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용렬한 지도자이고 못난이이고 이리저리 타박 받는 신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이 땅을 떠나라는 명령에 그 어마어마한 세력을 가진 이삭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그 땅을 떠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그 식솔 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삭의 이 지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주하라고 해서 이주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거기까지 따라와서 여기도 우리 땅이니까 다른 데로 가라고 했습니다. 우물을 파기 전에 진작 와서 가라고 하지 다 팔 때를 기다려 놓고 우물을 빼앗고 또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더 먼 곳으로 가서 다시 정착하고 땅을 팠더니 그 우물을 달라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나라 이름하고 그 샘을 내어 준 후 더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그 길이 너무 멀기보다 그들에게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쫓아와서 세 번째로 그 우물을 내 놓으라고 행패를 부릴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두 번째 직장에서 쫓겨나고 세 번째 직장에서 또 쫓겨났다면, 사업을 하다가 한 번 말아먹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망하게 되었다면 한 집에서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세 들어 사는 서러움에 쫓겨났는데 이번에는 애들이 너무 시끄럽다고 건물이 망가진다고 또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사 간 집에서 첫날밤을 자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굉장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세 번째나 행패를 당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판 우물을 메워버리고 메워 버린 그것을 다시 파고 에섹으로 신나로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남의 나라 땅에 들어와서 이렇게 서러움을 당하는가. 아 정말 눈물 난다. 서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 이상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는다. 르호봇이다.’ 그랬습니다. ‘넓은 곳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를 왕성하게 하시리라. 번성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이삭이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에게 쫓겨 다닌 것이 아니라 힘이 있었으나 또 다른 의도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과 다투거나 전쟁하지 않기 위해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양보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대로 자기를 복 주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
세상사람 눈에는 정말 힘없이 패배한 낙오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제 그 다음에 내일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정신과 힘은 아비멜렉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에는 오히려 이삭에게 명령하여 ‘내 땅을 떠나라.’ 하고 외칠 수 있었지만 이삭이 그들의 요구대로 두 번, 세 번 물러난 후에는 거기서 뻗쳐 오는 그 이삭을 영향력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는 대부분 평화를 상실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을 때.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 될 사람과의 평화가 깨뜨려졌을 때 그 때 우리는 외로운 자가 되고 관계의 파괴와 결핍에서 오는 수많은 근심과 염려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보면 인생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똑같은 정신조건을 가진 사람이 끼니가 간 데 없이 생계의 위협을 받아서 실제로 자신의 육신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없게 될 때에 그들이 덜 행복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세상의 자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예화) 전도사 때 담임목사님을 따라 장례를 갔습니다. 참 풍경이 이상했던 것이 목사가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머리에다가 베로 된 그것을 쓰고 막 큰 소리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하게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저게 무슨 풍경일까 (생각했는데)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장례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가족들은 다른 차로 가고, 뒤에 있는 저와 담임 목사님께 얘기해주었습니다. “제가 장례차를 평생 몰았는데요. 가난한 집안에서는 형제들이 저렇게 싸우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도 시신이 따뜻한데 유산문제를 가지고 얼굴을 붉히면서 때로는 멱살까지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물질의 많고 적음이 우리 행복의 추호도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게 많으면 우리가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짜 행복하게 살았노라.’ 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변에는 항상 평화를 누리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 어떤 처지에도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아내, 동일한 사랑으로 붙들어 주는 남편, 사랑하는 자녀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녀들, 보고 싶은 형, 누나, 언니,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집. 어려움을 당하면 자기 일처럼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은 물질의 다과에 의해서 행복 그 자체가 뿌리채 흔들리지 않습니다. 돈으로 어느 정도 관계를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삶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관계는 살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해서 타국으로 갑니다. 허랑방탕하게 보냅니다. 그 때까지 친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돼지우리를 찾아서 목부의 신세가 되고 쥐엄열매라도 먹어서 배를 채우려고 하는데 주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 함께 어울려서 어깨동무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까? (관계는) 살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노예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가 아닙니다. 돈을 가지고 사람을 부리고 원하는 대로 무엇을 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관계)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행복입니다.
야곱은 인생의 위기를 많이 만납니다. 물론 그의 관한 기록도 양이 훨씬 더 방대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눈에 띌만한 생애적인 위기 같은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자주 나타나지 않습니다. 항상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이삭이 사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아름다운 희망을 남겨두고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평화를 이루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온유한 사람 이삭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방법입니다.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과 평화롭고 인생 말년에 사람을 얻은 사람이 되었을 때 그리고 신앙의 본을 따라서 인생을 산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해 자신이 있는 사람이 인생에 대해 자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저 남태평양 무인도에서 수영복을 입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산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못된 놈, 성질 급한 인간, 야비한 사람(과 같이) 온갖 사람들과 부딪히며 스치고 살면서 거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 저 인간 내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우리의) 성품을 바꾸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우리 곁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예화) 못된 성질을 가지고 장가를 갑니다. 그래서 장가를 가서 마누라를 한 손에 휘어잡으려고 합니다. 근데 더 못되게 자란 마누라를 만난 것입니다. 최근에 차인표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이기지 못한다.” 마지막이 제일 은혜롭다고 여성도들이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풍상을 다 겪고 그렇게 보면서 결국을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이 인간하고 정말 못살겠다. 그리고 이제 헤어져야겠다.’ 라든지 ‘너 죽고 나죽자.’ 아내는 ‘너 죽이고 나 살아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아내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반구불면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살아보니까 이제 깨닫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결혼을 하게 해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떤 센 사람이 누구를 눌러 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남편은 생각합니다. 내가 좀 성질이 못돼서 한 번에 한손에 휘어잡고 살려고 했는데 수십년동안 휘어잡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그 아내가 남편을 그 밑에 밟고 군림하며 산 것 같습니까? 그 아내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는 아내가 아무도 없습니다. 저 인간 때문에 일생을 죽어서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못된 사람은 더 못된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좋은 사람으로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같이 좀 괜찮은 사람은 덜 나쁜 아내를 만났습니다. 농담이었습니다.
정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게 젊고 어린 시절에는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제가 요새 예전에는 많이 썼지만 요새 안 쓰는 말이 있습니다 “이해 할 수가 없다.” 이제 다 이해가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 젊은 시절, 왜 그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핏대를 세우며 그랬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말입니다. 젊었을 때는 절대 모릅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조정기에 접어들면 자식이 태어납니다. 이 놈 공부 못 시키면 인생 캄캄한 밤중으로 느껴집니다. 죽어라고 공부를 시킵니다. 그 방식이 인격적이지가 않아서 공부를 그런다고 그렇게 아주 막 족치면 내버려두면 방목한 애들 보다 나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부모와 관계가 파괴가 됩니다. 아내에게 어떤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내가 저것을 고쳐놓고 말리라.’ 고쳐질 것입니다. 매일 행패 부리고 그렇게 하면 죽여 버린다고 하면 무서워서라도 고칠 수 있습니다. 근데 그것은 고쳐졌는데 관계는 파괴됩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사람 사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이삭은 아비멜렉이 두렵거나 무섭거나 아니면 크게 어떤 시련을 당할까봐 공포심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우리의 근심과 염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자신이 없고 사람들과의 평화를 잃어버려서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모두 눈을 뜨고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살아갈 때 염려와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4-5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일의 성과, 결과서로서의 이익만이 아니라 그 일을 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렇게 가는 곳마다 물러서면서 겉으로 보기에 패배한 자 같았으나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그렇게 하면서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가 이루어졌고 결국은 커다란 복을 받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B. 온유하다는 뜻
그러면 온유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은 5:5에서 예수님은 천국 시민의 성품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을 물리적인 땅으로 해석을 해서 온유한 마음을 갖게 되면 많은 토지를 갖게 된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인 성격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셨을 때 그 천국은 이 세상의 땅 덩어리의 확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그것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신령한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민수기 12장에는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가 대적자들에게 시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의 핏줄을 나눈 형제들에게 비난을 받고 그리고 욕을 먹습니다. 모세는 원래 그 사람의 자연적 성격으로 보면 불 같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성질이 안 맞으면 하나님한테도 수시로 대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2장쯤 와서는 모세가 많이 거룩해졌습니다. 그렇게 비난을 받을 때 모세가 어떠했는지 12장 3절은 이렇게 적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아부하고 당신이 최고라고 말할 때 온유하고 너그러워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는데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받으며 지도력이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에 온유함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더라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온유함입니다.
희랍어로 온유함은 '온유하는' 프라우스(πραΰς)라고 하는 단어이고 ‘친절하다. 관용이 있다.’라는 이런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나브()이라는 단어인데 온유함, 이것을 'anaw'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동사 아니()에서 오는 ‘굴욕을 당하다. 수치를 당하다. 고생하다.’ 이런 동사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것이 고통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칭찬하고 있는 온유함은 그냥 자연적으로 타고난 성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나쁜 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어서 성격이 원래 흐리멍텅해서 사람들하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그러한 천성적 성품을 가리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불같은 사람이었으나 주님과 동행하며 온갖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고 주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지체들과 이웃들과 그렇게 평화를 구현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뭘 잘했고 내세울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자신의 언약백성이 처지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온유함은 불의한 타협이나 변절에서 온 화해가 아닙니다. 샬롬이라는 이 단어 자체가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와도 평화를 누리며 사는 그 너그러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민이 있으십니까? 작년에도 많이 고통 받으셨습니까? 그 고통 중에 대부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한번 추적해보십시오. 그 끝자락에는 항상 관계의 깨어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화되었거나 깨졌기 때문에 나와 다르거나 모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습니다.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사람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능력은 항상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그 사람은 그렇게 밖에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깨뜨려지고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확신하고 주님의 품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본성이 좀 힘들긴 해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 평화를 토대로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어갑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구역장을 세웠는데 구역장이 구역원과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참 곤란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의 답은 그럴 위험성이 있는 사람은 다른 어떤 탁월한 점에도 불구하고 구역장이 되면 안 됩니다. 교역자가 혹은 순장, 구역장이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격은 진리의 빛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에게 있느냐,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그렇게 최소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신자의 성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깊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의 깊이는 숨길 수 없이 사람들에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종종 숨길 수 있고 우리 자신도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모를 때도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멀어질수록 자신에 대해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신앙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관계가 깨집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툽니다. 그리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도 괴롭지만 나 때문에 그 사람도 괴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서로를 만난 것을 후회하게 만듭니다. '어디를 가도 너를 만났기 때문에 내 인생이 참 복되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너는 내 인생에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때 아주 많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근데 확인해 보면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그렇게 자기가 지나가는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섬기고 살았지만 그러나 자기만 못해 보이는 사람들과 관계가 깨지는 현실을 통해서 너의 믿음이 어디에 와 있다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불완전하거나 혹은 깨졌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온유한 사람이었으나 곧 불의와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온유했기 때문에 그는 정당하게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수 있었고 징계할 사람을 징계하고 벌줄 사람을 벌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눈물로 그들을 대신하여 용서를 빌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게 바로 온유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온유한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항상 한해를 지나며 1월부터 12월까지 상처받고 아팠던 일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기억에 나지 않는 2016년 1월까지 올라 가지말고 바로 한 달 뒤를 달력을 넘기면 12월이 나오고 한 장 더 넘기면 11월이 나옵니다. 반드시 그렇지 않지만 시간의 순서대로 기억이 쌓여있습니다. 나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누구일까. 나 때문에 아팠던 사람이 누구일까. 나 때문에 행복하지 않게 되었던 사람, 마음에 평화가 흔들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피해자의 마음이 되지 말고 가해자의 마음이 되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 때문에 그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것 같아. 나의 부족함을 용서해다오.' 빌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과 갈등하고 미워하는 때에 불안과 염려는 사라지고 '샬롬'이 옵니다.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로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는 것도 말씀의 복을 주시는 것도 결국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바로 그렇게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으로 화평하라.' 는 것입니다.
Ⅲ. 온유함으로 화평하라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3:14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또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었던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온 이유가 바로 그렇게 오셔서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고 찢음으로써 그 평화를 이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사시는 동안 참 사람이 가족과 이웃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는데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슬픔의 삶을 사셨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 자신에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셔야 했을까요? 그게 바로 우리들에게 어떻게 평화를 이루며 온유함으로 살아야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라는 말씀은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온유함으로 말미암는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거듭된 블레셋의 침해에도 불구하고 복수나 일체의 원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평화였습니다. 악과 타협하고 불의와 굴복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고 하나님 앞에 단련된 온유한 마음은 그로 하여금 이기심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리적인 땅뿐이 아니라 신앙적인 땅을 얻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이웃과 함께 온유함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 누구도 그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복 주실 사람은 복을 받고야 맙니다. 이삭은 자신의 가장 큰 기업이 결코 우물 몇 개나 몇 마지기의 땅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사소한 유업을 얻기 위해 더 큰 유업인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저 사람이 미운데 사랑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그 극중에 나온 사람이 그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이 너무 미우면 그 사람을 위해 용서하지 말고 너를 위해 용서해. 왜냐하면 미워하는 것은 평생 해야 하는 일이지만 용서는 한번만 하면 되잖아.” 이삭은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모든 복의 근원이심을 믿었습니다. 땅 몇 마지기. 우물 몇 개는 그 복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복의 원천은 아니었습니다. 복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셨습니다.
(예화) 자, 아이가 너무 사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누가 그랬다고 합니다. 사우나를 갔는데 락커에서 울렸는데 벨이 울리더랍니다. “따르릉” “누구 전화에요? 전화 왔어요.” 받는 사람이 없어서 ‘띡’ 눌렀더니 “여보세요.” 그랬더니 “아빠 난데,” 그러더니 “나 인라인 스케이트 하나 아빠 카드로 사도 돼? 노트북도 하나 사면 안 돼?” “어.” “어.” 하더래요. “이거 누구 핸드폰이에요?” 하고 툭 던져 놨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진짜 자기가 필요한 것이 있잖습니까? 좀 지혜롭지 못한 애는 엄마하고 돈 달라고 싸웁니다. 아빠도 못 이긴 엄마를 자기가 이기겠어요? 진짜 지혜로운 딸은 아빠한테 살짝 옵니다. “아빠,” 그리고 뒤에 끌고 가서 속닥속닥하며 이야기합니다. “걱정 마. 내가 해줄게.” 그리고 카드를 빌려줍니다. “무엇을 원해?”
한 마지기의 땅, 우물 한 가지를 가지고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이삭이 블레셋 사람과 전쟁을 했으면 우물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약해서가 아니라 비굴해서가 아니라 그는 복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악악댄다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세상에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굳게 붙들고 주님이 나를 복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반드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세 번째 쫓겨 가서 하는 말이 얼마나 넉살이 좋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넓게 하셨다.”
근데 그것이 넉살이 아니라 사실은 이삭의 신앙이었습니다. 시련이 많아도 의미 없는 시련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악이 그를 해하게 하거나 사단이 그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능력 위에 뛰어난 능력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거듭되는 시련들 속에서 남들은 비굴한 패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이 믿음의 사람 이삭은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생각했습니다. 믿음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능력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믿음은 현실에 대한 해석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을 향해 결국은 찬송의 제목이 되게 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이리 치고 저리 치여서 온 르호봇인데 그는 창 26:22에서 새로운 현실에 대한 해석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가 번성하리라.”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를 번성하게 하리라.”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성공해보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염려와 두려움을 가져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하나님 앞에서 사는 또 다른 삶은 없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모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눈앞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고 어떤 사람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 하나님 없는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모든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 할 때 불행을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도 잃어버리고 사람과의 평화도 잃어버립니다. 사람도 잃고 하나님도 잃고, 결국은 홀로 외톨이가 되어 소외를 겪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 우리에게 살기를 기대하셨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업은 영원하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기업이신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Ⅳ.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십시오. 은혜를 받으십시오. 눈에 보이는 사람, 현실을 의지하며 하나에 웃고 하나에 울고 요동치는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그게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기를 힘쓰십시오. 어차피 내 인생 하나님의 눈빛 앞에 있고 사랑을 받아도 책망을 받아도 내가 어떻게 주님 뒤에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면 여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어려움이 생겨서 저리로 밀려가는 것 같았지만 이삭은 그 모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막막대며 살았던 동안 파괴된 관계를 보십시오. 한번 파괴된 관계는 칼 같이 남아서 우리의 삶의 평화를 위협해 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살아 있는 동안은 선을 행하기 위한 기회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많이 받았습니다. 물질은 적게 받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여러분들은 돈 많고 하나님 없는 사람보다 부자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진채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보다 우리가 가진 자 아닙니까? 그러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향해 베푸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시련과 역경을 당하고 정말 인생을 살 기운이 없는데 나 같은 인간도 쓸데가 있다고 상담해달라고 전화가 옵니다. 그래서 구역식구를 만났습니다. 근데 이 사람은 정말 더 한심한 상황을 맞이해서 자기하고 비슷한 상황으로 한심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충고하는데 울림이 되어서 ‘너도 그렇게 하거라.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이 얘기다.’ 라고 양심이 울립니다. 쿵, 쿵, 쿵. 그리고 힘을 주고 기도해서 깊은 밤, 차를 태워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정말 이 세상에는 나보다 힘겨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 그리고 저 사람, 내 자리에 세워놨다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했을까.’ 라고 말입니다.
(예화) 잠깐 TV를 보는데 드라마에 명대사가 하나 나옵니다. 남편하고 살다가 이혼을 했습니다. 애 하나 데리고 시집을 갔는데 그 집에 애가 둘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애를 써도 남편도 만족을 못하고 애 둘도 만족을 못합니다. 자기가 데려간 아이는 한구석에 놓고 희생을 해도 만족을 못 시킵니다. 어느 날 슬픔이 가득 차서 자기 여동생을 만나서 자매가 대화를 나눕니다. 옛날에 헤어진 네 형부한테 지금 하는 것에 1/2만 했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보십시오. 그런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깨어지기 전까지 그것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마지막에 무엇이 남을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움켜지고 있는 것은 두고 갑니다. 마지막에 생명도 여러분들은 잃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갑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관계입니다. 숙제했습니까? 어제 숙제 내주었잖아요. “여보, 나같은 인간 버리지 않고 살아줘서 미안해.” 라고 남성에게 일러줬고 남성이 안하면 여성들이 이렇게 해보라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겪었던 슬픔과 고통 중에서 어떤 것을 제가 안 겪었겠습니까. 질병부터 시작해서 깨어진 가족과의 관계까지 무엇을 경험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어느 자매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도대체 목사님은 여자가 애 낳는 순간까지 그렇게 아주 강렬하게 묘사를 합니까? 목사님이 경험하지 않은 게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이 경험한 것 중에 애 낳는 것 빼고 다 해봤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안 겪었겠습니까. 그런 무거운 마음에 짓눌려 눈물이 흐르고 한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삶을 마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때도 인생 살다 보면 들기 마련입니다. 근데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분이 어린 시절부터 이때까지 어떤 사람으로 나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여기까지 데려오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분은 나를 버리실 리가 없다.’ 그리고 ‘주님은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에게 상사병을 가진 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뒤덮었던 염려와 근심이 확 쓸려내려 갑니다. 내 아내가 이렇게 살아서 내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져도 함께 살아온 길인데, 그리고 내 아이가, 내 사랑하는 가족이, 친구가, 지체들이 이렇게 있어서 밤늦게 나에게 전화해서 나 같은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인생의 무게도 버겁고 힘든데 가르침이라고 어설프게라도 주면 큰 빛을 얻은 것처럼 시름을 털고 새 출발을 해보려는 마음을 갖는 지체들이 나와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위로받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차가웠던 마음이 따뜻해지게 해주고 인생을 접고 싶었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살아볼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밤늦게까지 모여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늘 생명과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 그래서 강물처럼 하나님과의 평화를 사람들 속에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 대적에게 인정받을 때
“아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창 26:26-31)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전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온유함으로 화평을 이룬 이삭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연약하고 비굴한 자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번에는 이삭에게 똑같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 가지를 그에게 맹세하시는데 첫째는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이삭과 동행해 주시겠다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의 씨를 이 지면에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 은혜의 말씀에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고 거기서 감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예배하였다”, 혹은 “제사를 통해 그를 경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약속한 그 모든 언약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고 자신은 듣기만 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언약을 이삭에게 말씀하심으로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뿐 아니라 이제 이삭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족장들의 역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홀로 주역이 되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 이삭 너도 이 역사의 현장에서 나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 가는 주역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II. 대적도 인정한 사실
브엘세바에 오기 전, 이삭이 거주하던 곳은 블레셋 땅 그랄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남쪽에 있는 이집트, 곧 애굽과 팔레스타인 경계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 시대가 주전 22세기경인데 주전 약 20세기경에는 여기가 애굽의 곡물을 수집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이 약속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 브엘세바로 이주하게 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의 최남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단은 북왕국 이스라엘 맨 위의 경계에 있는 도시이고 브엘세바는 남유다 맨 아래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이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이 이삭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삭의 생애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사건도 큰 기적이나 전쟁에서의 승리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선교적으로 매우 주요한 사건이었고 이것은 다가올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해 그 이스라엘이 성취된 후 신약 교회의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아주 중요한 경륜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이었고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은 뜨겁게 사랑한 이웃도 아니었고 전쟁을 벌인 적대국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삭과 좋지 못하게 헤어지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도 아비멜렉은 자기를 향한 대적으로 정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 대적이 이삭을 인정한 사실입니다. 대적도 인정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A. 하나님이 함께하심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 사이 곧 우리와 너희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대적도 인정한 사실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신자가 되었는데도 다른 신자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 사람은 불신자인데도 여호와라는 분이 저 사람과, 저 가정과 저 무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또렷이, 부인할 수 없게끔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이었고 아주 기름진 곡창지대의 땅을 통치하고 있었으니 번영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들의 번영과 이삭의 번영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신자였지만 우리들이 보는 눈과는 다른 눈으로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삭이 아비멜렉에게 얼마나 깊이 있는 전도를 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여기서 아비멜렉의 “보았노라”라는 이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들었노라” 가 아니라 “보았노라” 입니다. 애써서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말로 증거하고 논쟁으로 설득한 것이 아니라 이삭의 인격자체가, 그리고 이삭의 삶 자체가 아비멜렉에게는 기이한 것이었고 그가 하는 일마다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사람의 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시로 제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들은 것입니다. 이삭의 번영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번영 뒤에 있는 그들을 복 주시는 하나님의 실제를 그들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노라”라고 말합니다. 한 번이었겠습니까? 두 번이었겠습니까? 이삭의 이야기에 보면 어마어마한 기적이나 전쟁에서의 획기적인 승리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분명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먼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와 같은 찬란한 광채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우리 인간을 통해서, 특히 신자를 통해서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본질적 영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장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이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임재 하셔서 그 장소에서 찬란한 빛이 나오게 하시고 혹은 불이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시나무떨기 사이에서 소명을 받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특별히 나타난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특별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 곳에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좋은 예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현현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서 살았습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낙성식을 할 때 온 백성이 돌을 깐 그 바닥에 엎드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일이 매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장소에 한정되어 나타난 찬란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약시대에 접어들어 오면서 그리스도 예수께로 수렴이 되고 점차점차 그런 모습들은 사라집니다. 세 번째 영광은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것을 효과적 영광이라고 하는 이유는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달이 빛나듯이 그렇게 스스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음으로 그 하나님이 자기에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반응으로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시구나!”, “저 사람들이 저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따라 사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계시는구나!”, “저들이 저렇게 신실하게 섬기는 하나님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시는구나!” 하고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과 존경의 마음 혹은 사랑의 마음까지 갖게 될 때 그것을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용된 용례들을 살펴보면 “너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사람들이다” 라고 할 때, 그 영광은 대부분 세 번째 용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그렇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충분히 주시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게 하심으로써, 그들과 함께 화평하심으로써, 그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냄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범사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던 적이 중학교 1학년 때쯤인 듯합니다. 그때 돌아가신 저희 고모님이 함께 계셨는데 할머님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졸도하셨습니다. 그때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는 사람들이 많은 때였습니다. 너무 놀라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옆집에 사는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할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습니다. 그때 그 고모님이 기도생활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놀라서 할머님 뒤를 따라가면서 “어떡해, 어떡해…”하는데 고모님을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길거리를 막 뛰면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확 들어오는 생각이,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나보다.”였습니다. 그렇게 위급할 때 저분이 저렇게 눈물로 간절히 찾는 것을 보니,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보다 했습니다. 나는 그 중학교 1학년 나이에 받은 하나님이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인상은, 예수 믿고 성공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교묘하게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을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성취와 연관을 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욕망을 거기에 투사해서 다른 것들을 희생하는 정당한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어느 제자 전도사가 저를 만나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중고등부 사역을 하는데 애들이 시험 때, 특히 고3이 되면 아예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전통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가장 모본을 보이는 사람들이 권사님, 장로님 아이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잘못 된 것이라고 가르쳤더니 이제는 담임목사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시더랍니다. 심방을 가서 “잘 나오던 아이가 왜 고3이 되어서는 교회에 잘 안 나옵니까?” 했더니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이가 대학에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겠습니까? 1년을 교회 다니지 않고서라도 이 아이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이 보면서 예수 믿는 집안의 아이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가 1년 동안 열심히 학원 다녀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 영광을 학원이 받지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십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1년 동안 교회를 안 나오면 눈물을 흘리면 교회가고 싶은 어쩔 수 없이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인이 주일에 교회 가지 못하는 것처럼 공부를 하겠습니까? 대학에 가고 나서 “이제는 속박이 다 풀렸으니 예수 믿어도 좋다.”고 하면 아이들이, “엄마, 나는 이런 날이 오기를 눈물로 기다렸어!”하며 교회로 달려갈 것 같습니까?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언행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네가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을 내가 두 배로 드리고 올 테니 너는 공부만 해라.”,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게 해서 좋은 대학을 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나중에 그게 부모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아주 강한 웅변을 한 것입니다. “예수는 진실하게 목숨을 걸고 어느 때에든지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너 편한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삭은 정말 탁월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계약을 맺자. 나는 너와 계약을 맺으려고 한다.” 이 계약은 그냥 보면 상호불가침협정 정도로 보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대근동의 언약체결의식이었습니다. 양자가 약조를 합니다. 그 약조 속에는 맨 먼저 역사적 서언이 나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만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러이러한 연대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다음 사항을 약조한다.” 그 다음에 1, 2, 3,4, 하면서 조항이 나옵니다. 그 형태는 신명기에 나오는 형태와 아주 흡사합니다. 그렇게 약조를 하고 씁니다. 세 부를 작성해서 언약체결의식을 합니다. 큰 소를 잡아서 위의 머리에서부터 아래까지 각을 뜹니다. 잘라서 둘로 벌려놓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피가 흐르겠습니까?
지금도 또렷한데 초등학교 3, 4학년 때의 일인데 서울 시내 외곽에는 도로 포장이 거의 안 되었습니다. 아주 일어나기 힘든 일인데 지프차가 세게 달리다가 소를 받았습니다. 소의 어깻죽지가 너덜너덜 떨어져서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그걸 보고 놀란 것이, 저 소 한 마리에서 어마어마한 피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몇 양동이의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잊히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바가지를 들고 모였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거기서 나온 선지를 가져가려고 말입니다. 도로 가에 피가 굳어있는데 그것을 퍼가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황소 한 마리를 쪼개 놓으면 가운데 피가 낭자하고 그 피가 곧 굳어져서 질척질척하게 발목까지 선지를 밟으며 갔을 것입니다. 언약의 두 당사자가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고 거기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둘이 그런 약조를 하는데 만약 둘 중 하나가 그 약속을 위반하면 소가 각을 떠서 쪼개진 것 같이 신들에게로부터 임해도 좋다는 서약을 하고 가는 것입니다. 증인을 부르는데 증인이 천지신명이고 사람들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세 부의 계약서를 이 사람이 하나, 저 사람이 하나, 마지막 하나는 신당에 넣어둡니다. 그러면 당연히 아비멜렉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서 여호와 앞에 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사회를 규율하는 아주 엄숙한 언약체결의식이었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잘 안 지킬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누가 어기고 나면 그 후에 일어날 상황이 심각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공증”을 합니다. 법무사에 가서 양쪽이 합의를 해서 공증을 하고 도장을 찍으면 그것은 법원에서의 1심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을 우리가 공증 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문맥에 굉장히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공증에는 죽고 사는 문제는 들어가지 않지만 이 언약에는 그렇게 저주를 받아서 온 몸이 갈라져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어버린다는 엄숙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숙계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비멜렉이 이삭을 보면서 느꼈던 심각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비멜렉이 여태 경험한 것으로 보면 무골호인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면 양보해주고, 그것도 내 것이라고 하면 양보해주고,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그를 인도하는 모든 것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부러운 마음도 생기고 한 편으로는 크게 두려운 마음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런 방식으로 이 사람과 계속 동행한다면 나는 저 사람을 이기지 못하리라.’하는 깊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체결을 한 관련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베리트(ברית)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쓰일 때에는 항상 카라트(כרת)라고 “자르다”라는 동사와 같이 사용됩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에서 아주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말은 “계약”, 우리말에서는 “언약”으로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베리트라는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가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심치 않은 논쟁거리입니다. 그 가운데 아주 유력한 학설 중 하나는 아카드어,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이 기록된 바벨론어 인데, 거기의 “바리투”라는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바리투”는 “족쇄”입니다. 죄수가 둘, 셋, 넷, 다섯이 있는데 도망갈 것 같으면 모두 족쇄로 발목을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혼자는 도망갈 수 있지만 다섯 명이 발을 맞추며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군대 갔을 때도 맨 처음에 훈련 받을 때는 화장실 간다고 하면 도망 갈까봐 다섯 명을 불러서 스크럼을 짜라고 합니다. “너희 다섯 중에 누구 하나가 도망을 가면 남은 네 사람이 책임져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때는 그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투”입니다. 아비멜렉이 두려움을 느꼈든 부러움을 느꼈든지 간에 이 언약을 맺기 전까지는 아비멜렉은 아비멜렉이고 이삭은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을 맺음으로 당시의 중근동사회에서는 그 두 사람이 운명공동체처럼 그 언약을 중심으로 딱 묶이는 것입니다. 그런 그림을 그 당시 사람들이 주전 15세기 사람들이 아주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을 맺는 그 언약체결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여호와라는 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것이구나! 자신을 죽기까지 지사맹약을 함으로 그 죽고 사는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구나! 하는 인식을 시키는 데 있어서 최고의 설득력이 있는 학습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영원히 이삭을 대적해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에게 은총을 입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와 함께 관계를 갖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체결을 합니다. 뒤에 보면 잔치를 하고 밥을 먹고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언약체결의식의 끝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가족의 개념입니다. 형제가 되었다는 의미로 그렇게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어집니다.
자, 한 번 보십시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없으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주 가까운 예로 물질과 돈부터 시작해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주위의 수많은 조건들을 우리는 이야기 합니다. 오늘 저녁에 가셔서 뭐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무엇을 가지면 여러분이 행복하게 될지를 적어보십시오. 돈 때문에 지금 고통을 받는 사람은 돈이 몇 억이 생긴다면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인데 그 사람과 너무 맞지 않아서 고통스럽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쭉 적어보십시오. 그런데 그 옆에 한 단어를 적어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리고 어느 쪽이 큰지 부등호를 표시해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여호와께서 복 주심
대적인 아비멜렉도 인정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지금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언약을 체결해주면 정말 너는 복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정말 두려웠던 사실을 자신에 그렇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리 밀려나고 저리 밀려나는데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그를 복 주셨다는 사실, 그것을 직접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이 사람을 복 주시기로 다짐하셨기 때문에 이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받을 수 있는 영적인 복, 신령한 복입니다. 이것은 에쉐르()라고 부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할 때의 복이 이 복입니다.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의 복이 있습니다. 베라카()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복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가 중첩되는 축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쉐르의 복이 있고 이 복을 기초로 베라카의 복을 받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에쉐르의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좌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죄로 말미암아 곤고해진 사람을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고 말씀을 깨달아 큰 은혜를 받아 예전에는 결심할 수 없었던 일들을 결심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를 바꾸십니다. 이것이 에쉐르의 복입니다. 신령한 복,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던 신령한 복,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셨던 그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복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이 이삭에게 그런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아비멜렉에게 멸시를 받는 상황에서도 온유함을 유지하고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우양이 많아지고 식솔들이 많아지면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 백배의 수확을 거두게 하셔서 더더욱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그것 때문에 이삭을 무서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압력을 가하여 이삭을 이주시킬 수도 있었지만, 강력하게 요구해서 그 요구대로 힘없이 등을 돌리며 블레셋 땅을 떠나는 이삭보다는 그 뒤를 지켜보고 있던 아비멜렉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주님이 없이 스스로 번영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수치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경계하시는 악은 사람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한참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나게 사람들에게 간증하다보면 하나님은 간 곳이 없고 씩씩하고 헌신적으로 살았던 자기가 떠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동과 삶을 보면서 결국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여기에 아직 살아있게 만들어 두신 이유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기독교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그런 손가락질과 모욕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에는 언제나 진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떤 것도 감춰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과장과 허위, 거짓도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기독교의 평판이 이렇게 나빠지는데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이런 염려를 먼저 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깊이 반성하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욕을 먹는 소수의 사람들 말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말입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유학을 와서 한국에서 신학하고 있는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과 기도에 대해서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이야기하기를 자기 어머니는 저 중국 북동부 지방에서 예수를 믿고 있는, 별로 교육도 받지 못한 분인데 엄청난 열심으로 아들인 자기와 교회와 목회자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생겨서 걷기가 힘들 정도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다가 일어나 보면 저 윗목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계시고 한잠자다 일어나보면 기도하러 교회 가셨답니다.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정확한 해석은 아마 여러분이 확인해 보면 실망스러울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비록 앎은 적지만 그 적은 것을 꽉 붙들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물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자신은 이슬처럼 스러져도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 자신의 생명이라도 드려서 그분의 이름이 영광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은 그렇게 어디서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분이구나! 거기서 그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화를 받으며 마음이 빗나갈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찬양) 예수의 넓을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상이 다 무너지고 사람들이 모두 난잡하게 삽니다. 자유롭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그들에게 진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전혀 예수를 믿지 않다가 유학을 가서 예수를 믿고 돌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자기를 전도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너무 혼란스러워서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세속적인 캠퍼스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청년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그 사람들만 보면서 예수 믿을 마음이 들었습니까?”, “네”, “뭐가 달랐습니까?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목사님, 그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달랐습니다. 착하고 평안하고 불안한 마음이 없고,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지 뚜벅뚜벅 자기의 길을 걸어가며 항상 기쁨에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미친듯이 사업을 해서 거액을 사회사업에 내놓는 것,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 것입니다.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 큰 영광은 일상에서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자체가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의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쫓겨나면서 공격해서 쳐부술 무기를 만들거나 군인들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요즘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지내겠다는 약조를 하자고 제의해왔습니다. 대적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창이나 칼이나 군사나 무력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 족속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동행한 사람, 하나님이 복을 주신 사람, 그리고 하나님과 평화롭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평화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온 인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땅에 세워놓으신 것은 말로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언제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또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경회를 마치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밖에서 번영을 꿈꾸지 마십시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행복해지려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신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복을 얻어 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이 없이는 우리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샬롬 속에서 온유한 삶을 삽시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하고 자비롭게 대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복 주시는 것을 보여줍시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올 한 해 2017년 이라는 인생의 한 복판을 지나면서 예전에 돌려드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큰 영광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존재를 통해 나타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닮아 주님 사랑하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