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6
목 차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시 36:1-4) 39
판단하시는 하나님(시 36:5-6) 42
복락의 강, 하나님(시 36:7-9) 47
주를 아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심(시 36:10) 51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함(시 36:11-12) 55
시편56편 강해 1
시편36편 강해 1
시편36편 강해 1
시편36편 강해 1
시편36편 강해 1
시편36편 강해 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시 36:1-4)
본문해설
본문은 악인의 특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악한 사람이 되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악인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악인이 어떤 존재인지 그 특성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악인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악인의 죄얼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죄얼’이라는 말은 오늘날 잘 안 쓰는 말인데 영어로 ‘trouble’ 정도의 뜻입니다. 괴롭힘, 혹은 악인의 분유함, 악인이 괴롭히는 것, 정도가 됩니다. 악인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뿌리가 결국은 악인 안에 있는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악인의 특징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악한 자에게 내가 고통을 받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악인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근본적으로 악인은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사람을 향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으니까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얼이 되어서 의롭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악인에게는 지혜와 선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일을 슬기롭게 잘한다는 좁은 의미에서의 일에 대한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에 대한 지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는 근본 자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깨닫는 것을 통해 다른 모든 하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침으로서 지혜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유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그런 유익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 영혼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녹아질 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은 복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친근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식고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만 사라질 뿐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생기지 않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굳어졌겠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굳어지면 그 다음에는 통제가 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뜻에 맞게 해석해서 색욕거리로 삼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매순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이 아닙니다. 마음이 그러한 상태가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의 마음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처럼 지혜와 두려움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지혜와 선도 없이 악을 향해 돌진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들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침상에서도 의로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를 가해서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올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이고, 악인은 마음 안에 이런 성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성향이 자신의 삶에 깊은 뿌리가 되어서 악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로 말미암아 시인이 고통을 당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이러한 악인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밖에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도와주시는 사랑, 이것 없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매순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죄얼을 받아서 고통을 받을 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은혜의 작용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판단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 36:5-6)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모든 사람이 이 자비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안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종종 다른 사람을 향해 자기의 뜻을 꺾기도 하고 자기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사랑이 이런 것을 시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내 고집을 버리고 내 뜻을 꺾습니다. 사랑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내 뜻을 꺾고 그 사랑의 성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을 때 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자식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모가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없어도 어떤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꺾일 때가 있는데, 큰 힘을 가진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꺾을 때 그것을 아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자신을 꺾는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꺾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사랑을 포기하면서 꺾여야 그것이 진정으로 꺾이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살면서 자기를 꺾지 않으면 결국은 갈라서야 합니다. 갈라서든지 남남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자기를 잘 꺾으면 사랑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왜 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 속에 들어올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세웠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그런 위치에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존재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흉내 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극도로 대적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주권, 그리고 그의 판단을 본뜨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이 인자하심을 모든 사람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지만 인자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목적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든지, 최소한 거꾸로 가던 길을 돌이켜 참회하여 그 길로 돌아서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 중의 하나가 있어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소망의 이유, 신실하신 하나님
신앙이 어려운 이유는 자기 갈 길은 계속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 길대로 가면서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것인데 결국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정신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중심축을 가지고 제멋대로 달려가는데 이 사람이 달려가는 길이 저 사람이 달려가는 길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 사람도 기뻐하고 저 사람도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성품에 대한 이해가 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일단 당신의 목적과 뜻에서 이탈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공을 들였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철저하게 성찰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이탈하고 나면 삶의 형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참회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노래한다 할지라도 삶의 중심축이 자신에게 그냥 있고 삶의 길을 자기 멋대로 가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아첨에 의해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러한 아첨에 속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아첨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고 결국은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그때 그 사람을 좋아했던 만큼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비행기를 타면 고도 10,000m 정도에서 비행을 하게 되는데 거기는 산소도 희박합니다. 비행기가 날아갈 때 공중에서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주 높은 새털구름도 고도 8km 높이 하늘에 떠있는데, 비행기는 10km 위를 날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감지가 잘 안 됩니다. 전투기는 한 시간에 3200km씩 날아가기 때문에 부산까지 4분정도 걸린다고 하니, 만약 거기에 목을 내놓는다면 목이 댕강 부러진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상 10km 상공에서 어떤 때는 초속 몇 십 미터의 엄청난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미국에서부터 오는 데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불면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다고 합니다. 기름도 엄청 절약이 됩니다. 배를 타보면 돛단배가 아니고 발동을 걸어서 가는 배인데도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불어주면 덕적도에서 인천까지 오는데 30분 정도가 절약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 돛을 달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큰 돛을 달고 바람을 맞으면서 어느 한 쪽으로 항해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거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과 똑같은 방향으로 배의 위치를 잡으면 굉장히 빠르게 달려갈 것이고, 뱃머리를 돌려서 바람을 거스른다고 할 것 같으면 배는 끊임없이 바람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성실하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 일관되게 열과 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미리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신실한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항상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실하다는 것은 변덕스럽지 않고 일관되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 사람이 화를 낼 것이고, 이렇게 하면 이 사람이 기뻐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이유는 같은 방향으로 당신의 성품을 계속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또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리는 판단은 바다와 같다고 하였는데 바다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것으로 비쳤습니다. 신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함께 바다는 고대 사람들에게 끝없이 신비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신비하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은 바다와 같다. 무한하다. 하나님의 많은 지혜가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뜻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 판단을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부인과 참회의 삶
결국 인생을 사는 지혜는 하나님을 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중심축을 끊임없이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 전체가 참회의 과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 속에서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힘입으면서 사는 길입니다. 고대의 교부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라는 사람은 “나는 이 땅에 참회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입니까? 끊임없이 참회함, 오늘날은 기독교의 참된 정수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나 중심의 신앙을 가지려고 하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후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절대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연한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 참된 신앙의 근거를 그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불가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 인자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무리 죄인이 자주 죄를 짓고 멀리 떠나도 다시 참회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복락의 강, 하나님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7-9)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함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들을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시인은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오히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날개 그늘아래에 인간들이 피하게 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것,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을 아는 지식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 이것이 삶의 모든 상황들을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틀 동안 노회를 했습니다. 그 중 제가 잘 아는 후배 목사 한 사람이 말합니다. “목사님,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개척을 해서 목회를 하니까 목사님 마음대로 할 것 아닙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해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저는 하나도 좋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하는 것을 보면 근심이 없고 매우 즐거워보이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땅에서 평안하게 놔두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렇게 대해주시면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청교도를 연구하고 설교를 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냐?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설교자를 편안한 가운데 두시지 않는다. 당신의 말씀을 살아있게 하시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가슴에 계속 피가 흘러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시인도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쓰라린 사건이 없었다면 주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그의 날개 그늘 아래 피했을 리가 없습니다. 날개 그늘 아래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리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환란과 풍파와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내면의 세계는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먹을 것이 끊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직업을 잃고 재산이 사라지고 몸에 병이 들어서 죽을 날이 다가와야 하나님 앞에 마음이 움직이지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더 아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고 편안하게 하시는 것 같아도 삶 속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복락의 강이신 하나님
시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피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복락의 강같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꼭 강가에서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십 킬로미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물을 옮길 수 있고, 그 물을 먹으면서 연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촌락들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발상지들은 모두 강을 끼고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 물을 먹고 살아야 하고, 땅이 물을 머금어야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생태계가 형성되어서 짐승도 모이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물고기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은 그야말로 생명이었습니다.
물줄기 하나가 흐르면 그 효과가 강 주변에 모두 생겨나서 사람도 살고 여러 가지 많은 생명체들이 번식을 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이 중심에 흐르시면, 하나님으로 인해 덕을 보면서 사람들이 창조의 목적을 향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강물이 흘러가고 생태계가 형성되고 촌락이 형성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흐르심으로 인해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형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복락의 강수이시니 만약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없이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마치 강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 촌락을 형성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온전히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태양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태양은 직접 바라볼 수 없고 가까이 가서 직접 만져 볼 수도 없지만, 태양 볕을 받으면서 수많은 생명의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고목나무에 싹이 나고,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풀들이 땅에 다시 돋아나고, ‘추운 겨울에 무엇이 살아남았을까?’ 생각했는데 봄이 되니까 나무, 풀포기 사이에서 벌레들이 다시 깨어납니다. 놀라운 생명의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물질적으로 보이는 것들 속에 생명이 현저하게 나타난다면, 보이지 않는 영혼 속에는 생명이 얼마나 놀랍게 역사하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생명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이미 있는 것들을 사라지게 합니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 것처럼 태어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다시 태어나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돋아납니다. 양쪽에 심은 나무가 만날 정도로 엄청나게 나뭇잎을 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볼 때마다 나무가 자라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발을 해줍니다. 그렇게 막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나무가 잎사귀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죽어라. 이제 우리가 이 나무를 보호해야겠다.” 겨울이 되어서 추위가 오면 여름과 같이 물기를 빨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나뭇잎이 다 매달려 있으면 거기에 양분을 공급하느라 나무가 살 수가 없습니다. 겨울이 오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도 육십조 개 정도의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세포가 생겨났다가 죽고, 죽었다가는 생겨나면서 육십조 개의 세포가 살고 죽는 일들이 초 단위로 일어납니다. 하나가 죽고 나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화학물질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세포에 영향을 주어서 그 세포가 살아있게 하고, 살아있는 세포가 죽으면 죽은 것이 다른 세포를 살아나게 합니다. 우리의 몸에 육십조 개의 등불들이 있는데 그 등불들이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반짝이면서 우리의 몸을 지탱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있는 것을 죽게 하고, 없는 것을 생겨나게 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구별이 없이 사라졌다가 생겨나고 생겨났다가는 사라지게 하는 놀라운 비밀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입니다. 만약에 육체의 생명이 진정한 생명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 중 하등하신 분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육체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혼의 생명이 참된 생명이고 물체를 가진 생명은 영원한 생명의 모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본뜬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그분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과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하나님과 끊어지고 나면,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쓰레기 같았던 영혼도 하나님께 붙어서 다시 살면 그토록 아름답게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께 잇대어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를 아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심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시 36:10)
본문해설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사상가운데 가장 심오한 사상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원래 ‘안다’라는 말은 아주 포괄적이고, 경험적인 말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포괄적인 말인데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될 경우에는 ‘안다’라는 말이 신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많은 사물들은 눈으로 보고 만져지는 감각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감각에 의존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다’라는 것은 매우 독특한 개념을 갖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말이 성경에서 제일 먼저 쓰인 것은 창세기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함께 동침하매”라고 할 때 ‘안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경험적인 말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고 하는 천사의 수태 고지 사건이 나옵니다. 그 때 마리아가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것도 역시 ‘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은 지식으로 정확하게 알 뿐 아니라 사랑하고 영향을 받음으로 그 대상을 경험하는 것과 아는 것이 분리가 되지 않는 총포괄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인자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 때에만 그 인자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떤 것을 경험하고 감동을 받을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데 자신이 자의로 해석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두 가지가 똑같은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는 없지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사랑과 그 사람이 나를 실제로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여러 가지 일들을 상상하고 해석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효과는 비슷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두 가지가 절대로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짝사랑하는 것이 대개 그런 경우입니다. 저 사람은 그냥 생각 없이 웃었는데 자기를 보고 웃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너무 갖고 싶어 하면 상상임신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임신한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입덧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런 효과가 몸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의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우러나와야 그것이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를 아는 자에게 인자를 베푸소서˛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사실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또 알겠사오니 나에게 인자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이 정직하고 정직하겠사오니 나에게 주의 의를 베풀어 주옵소서.”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의 크신 사랑, 자비, 인격, 이런 것들을 알아가면서 주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주의 의를 베푸소서˛
두 번째로는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의’는 하나님 앞에 받는 사법적인 판단의 결과로서의 ‘의’입니다. 그러한 의는 내가 하나님 앞에 율법대로 살아서 얻게 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올곧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 올곧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거치는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잘 지낼 수 있는 사람과도 부딪히고 어려운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정직한 사람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처결하시면 고통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즉각 즉각 당신의 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도 특별한 이유 때문에 상당기간 동안 지나가게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번성하는 악인을 보면서 괴로워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구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즉각 처결하셔서 당신의 의를 베푸시옵소서.”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합치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처결되고 그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처결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주의 의를 베푸소서”라는 사상이 31편에도 나오는데 이것이 마틴 루터의 칭의 사상입니다. 시편 31편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성경구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정직한 자로서 살지만 때로 그렇게 살지 못하여 잘못 했을 때는 나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므로 주님의 의를 덧입혀 주셔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붙들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악과 불의로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으로 적용되고,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때 그분의 의를 덧입혀 주시는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결국은 두 이야기가 같은 말입니다. 인자를 베푸는 것과 주의 의를 베푸는 것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실 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심판을 자비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가리켜 인자와 긍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더 하나님에 관한 탁월한 지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비밀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 생활입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함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시 36:11-12)
본문해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참 좋습니다. 마음에 가득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들이 은혜 받은 사람들 안에도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많은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할 사람들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랑이 그 사람에게 있는지는 공동체 안에서 그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인격이 어느 정도인가는 기분이 좋을 때 베푸는 자선이나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교회생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그 사람의 성화의 정도와 인격의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함
본문에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교만하다’라는 것은 사람에게 마음을 높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하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끔,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자기 마음대로 있고 없는 것이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판단이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시인을 쫓아와서 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구하는 애절하고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기대는 사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보호해주시도록 은혜와 인자를 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의지의 마음이 잘 이루어진 사람들에 의해 쏟아져 나옵니다. 죄인이든 훌륭하게 살았든,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본문에서 시인은 어떤 확신을 갖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잠시 동안은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살려고 하는 사람이 넘어지는 것 같고 미끄러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큰 능력의 손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믿는 사람들을 붙들어주시고 악인들을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매일매일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은 우리의 재물, 지위,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런 것들이 견고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만드는 평화, 은혜, 확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의지와 의존의 마음에서 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가 잠시 환란과 어려움을 당해도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시편56편 강해 1
시편36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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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36편 강해 1
시편36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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