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7
목 차
악한 자의 허무함(시 37:1-2) 1
여호와를 의지하여 선을 해하라(시 37:3-4) 5
의지하면 이루시리라(시 37:5-6) 8
참으라(시 37:7-8) 11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시 37:9-10) 13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시 37:11-14) 16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자(시 37:11-12) 21
복수하시는 하나님(시 37:13-15) 25
의로운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시 37:16-17) 28
완전한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시 37:18-20) 32
의인과 악인의 대조(시 37:21-22) 35
정하신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시 37:23-24) 39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시 37:27-28) 42
땅을 차지하는 의인(시 37:29-31) 47
의인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시 37:32-34) 51
악인의 종말(시 37:35-37) 54
환란 때의 산성이신 하나님(시 37:38-40) 58
시편56편 강해 1
시편37편 강해 1
시편37편 강해 1
시편37편 강해 1
시편37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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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37편 강해 1
악한 자의 허무함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1-2)
불평하지 말라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악한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 불평하고 그로 인하여서 마음 상하면서도 그가 번영하면 부러워합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처럼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러워하지 않고는 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도 말고 또 투기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삶의 질서가 있고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이 있고 질서가 있는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로 데려가려고 하고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데려가려고 할 때, 그리고 고통이 있을 때, 불평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믿음이 상당히 뛰어나다 하더라도 사람이 참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거기에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불평은 가장 낮은 단계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이 주는 유익
다윗은 고통스런 인생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원하지 않았던 삶의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불평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미로 볼 때 깊은 고통과 악을 통해서 결국은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렸는데 의미심장했습니다. 벼랑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벼랑을 뒤로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절벽을 바라보고 밧줄을 붙들고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절벽을 등진 사람은 뒤에 절벽이 있는 것도 모르고 서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이 벼랑으로 달려가는 줄 모르는 사람은 그가 고통스럽게 여기는 반대자에 의해 밧줄이 잡아당겨져야 자신의 생명이 보장되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간혹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어릴 적 부모의 징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혼을 내서 못하게 합니다. 그 때는 너무 쓰리고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때 받은 쓰라린 고통이 나를 보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어도 판단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바르게 하십니다. 선하고 좋은 사람들만 사용하셔서 그렇게 일하시면 좋겠는데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길러 보면 아이는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징계가 필요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아이들보다 낫지 않습니다. 결국 신앙이 들어가야 주님에 의해 다뤄지는 것이지, 신앙이 들어가지 않으면 자기 완고함과 고집이 훨씬 강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악인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유익을 주십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습니다. 악한 데서 의롭게 산다는 것 자체가 악인들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삶입니다.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굉장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소처럼 은혜생활을 할 때는 고갈된 사람보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침체에 떨어지고 조금 더 진전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마음이 되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그들 딴에는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준다고 하는데 그것이 전부 마음에 가시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은혜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동안에는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목회자가 좋지만, 내 마음이 접히고 나면 그 모든 것이 힘이 듭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진리를 좋아하면서도 진리가 자신을 책망할 때는 그 진리를 싫어합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진리에 합치하는 솔직한 삶인데 그것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악인에게는 의로운 길이 악하게 보이고 의인에게는 악한 길이 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은 서로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의 사람들은 불평하면 안 됩니다. 불평한다는 이야기는 교만입니다. ‘이 길 말고 훨씬 좋은 길로 하나님은 인도하실 수도 있을 텐데, 왜 하나님은 이 길 밖에 인도하지 못하시나?’ 하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 받아들이지 않고 원망하는 마음이 깃들여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면서 잘 살려고 애를 쓰는데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번영할 때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깊이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불평한 것도 잘못이지만 투기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대부분 자기보다 잘난 사람들을 깎아 내리는 것은 투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것은 자기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의 허무함
왜 악한 자를 향해 불평하지도 말고 투기하지도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모두 잠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풀은 길같이 자라고 큰 나무와 같이 자라납니다. 낫으로 베어 놓으면 잠시 동안은 다른 풀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아침 햇살이 피어나고 낮이 되면 베인 풀은 금방 말라버립니다. 생명의 근원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채소는 밭에서 뽑아서 마당에 쌓아놓으면 속히 갖고 나가서 팔든지 먹지 않으면 말라버립니다. 풀이나 채소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의미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특징은 덧없습니다. 악인의 삶 자체가 영원을 향하는 삶이 아니라 현세에 묶여있는 삶이기 때문에 그 이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에워싸인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교통이 계속 되지 않고서는 이 모든 것들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생활이고 신앙생활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여 선을 행하라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3-4)
하나님을 의지하여 선을 행함
‘선을 행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것에 대한 판단은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란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그것과 최대한 합치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반대의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 눈에도 선한 것이 있고, 악한 사람 눈에도 선한 것이 있기 때문에 각자 선해 보이는 바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이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에 손을 댔을 때 성경에 보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였기 때문에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것이 선해 보이니까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 자기 보기에 선해 보이는 길을 따라서 삽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선을 행한 사람입니다. 자기 눈에 보기에 선해 보이는 것만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눈에 선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자기 안에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을 행하려고 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선을 행하려고 마음을 먹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힘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허랑방탕하게 사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와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선을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의 힘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사는 것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실로 양식을 삼음
본문은 또 한 가지를 말합니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여기에서 ‘성실하다’라는 것은 정해진 일을 위해서 변함없이 한 방향으로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정하신 뜻에 대해 성실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본받은 도전과 헌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선을 행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잠시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들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나님을 변함없이 섬기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히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성실하심이 우리의 양식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성실한 섬김이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4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행동입니다.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소중히 여기는 것과 기뻐하는 것, 두 가지 정신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소중히 여기는 것, 기뻐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그를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이 기쁨 속에는 이미 그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의 경향이 포함됩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지는 자식은 없어도 부모를 이기는 자식들은 많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내리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뜻이 꺾일 때 상처투성이가 되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꺾일 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사랑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소원 즉,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됩니다.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원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꺾어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신앙의 근본은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온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자신을 드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생활입니다.
의지하면 이루시리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어떻게 보면 형통하는 길이 참 간단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엄청난 의미들이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냥 맡기기만 하는 것은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것은 “나 말고 누군가가 다 할 것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사람은 마치 그 일을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너무 어려운 일이었는데 기도도 많이 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놀랍게 승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도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때 그 일이 해결된 적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주시는데 맡긴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모함을 당하고 악의의 비난을 받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대적을 당한다고 합시다. 그 때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아무나 이렇게 담대하게 노래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원수들이 나를 에워싸도 나는 안연하리로다” 이렇게 노래하려면, 내가 그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든지, 혹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지만 진심으로 참회하고 하나님께 돌아갔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너 도둑놈이지? 너 요즘도 돈 훔치지?”라고 물을 때 한 쪽으로는 계속 돈을 훔치면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라고 노래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도둑질 하면서 “하나님은 내편이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 수 있겠느냐?”라고 노래 할 수 없고, “여호와는 내 방패 내 영광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합치된 삶
그러면 맡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만 온전케 되기만을 원하는 사람들만이 충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
다 맡길 수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결국 하나님의 뜻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품은 뜻이 좋은 뜻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비는 기도제목부터 다릅니다. 가만히 보면 자식들이 모두 부모의 마음에 착착 붙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마음에 착착 붙는 자식은 말을 하는 것도 틀립니다. 그를 위해 무엇을 주든지 결국 그것은 부모에게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늘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는 것을 구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맞춰주신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나를 포기하고 주님 속으로 들어가니까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결하게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웃을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 내게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깨뜨릴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기도 중에서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여호와를 의지하면”, “저를 의지하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의 목표와 하나님의 목표가 따로 없는 합치된 마음과 의지, 그러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결국은 그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곤고하게 살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에서든지 삶의 태도에서든지 깊이 고쳐지고 바뀌고 변화되어야 할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바깥에서 복을 얻어 보려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런 것을 꿈꾸거나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7-8)
악인의 형통을 볼 때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무한정으로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은 커다란 고통을 주지 않지만 나를 괴롭히고 해치고 명백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고통입니다.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형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질서가 우리 눈에는 안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순처럼 보이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살지 않고 다른 요소에 눈을 돌리면서 믿음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시련이 옵니다. 형통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르며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
본문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쉽지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비교의식과 시샘, 이런 것들이 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특히 자신을 괴롭히면서 형통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나는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데 고난이 겹칠 때 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보면서 자기를 꺾고 참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될 때 우리들이 하기 쉬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으면 그런 상황을 타계해 버리겠지만 힘이 없으면 그 속에서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 불평 속에는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원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사람에 대한 미움이 함께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불평하게 되면 악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불평하는 자신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불평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허물고 자기와의 관계를 허물어서 마음과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의 마음에 큰 슬픔을 드리고 자신의 영혼에 파괴를 가져옵니다.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며 눈에 보이는 어려움과 질서의 혼돈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 모든 것들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매순간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 37:9-10)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본문은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를 비교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와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를 비교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의 반대말은 ‘선을 행하는 자’일 텐데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평행법을 통해서 우리는 악인의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악인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악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들과 똑같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참으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시비와 선악을 가려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없으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대를 내포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이는 믿을 수 없습니다.
“악인을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 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끊어질 때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과 하나님을 향한 불평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절망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기대가 끊어졌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기대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오늘은 주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하시지만 이 어려운 일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까?’ 항상 가슴 설레는 기대감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삶
인생은 끌려 다니면서 사는 길이 있고, 인생을 스스로 이끌면서 사는 길이 있습니다. 원래 ‘삶’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살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삶, 이런 것들은 모두가 ‘살다’라는 동사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결국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직접 이끌 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고 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우리가 직접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거기로부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매일매일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는 자기가 주인이 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으로 하나님을 따라오고 공경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듯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인생이 끝나는 것이며,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은 영혼의 생명이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은혜의 힘이 없이는 우리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이끄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일이 자기를 질질 끌고 다니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질질 끌고 다니는 인생이 되는 것이며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들의 결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대하며 사는 선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지금은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지만 잠시 잠깐 후면 그들 중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인데, 하나님이 그들을 깨끗이 쓸어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 선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반드시 선한 결말을 보게 될 것이지만 악한 사람들은 그 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끗이 쓸어버리시는 것이 악한 사람들의 끝입니다. 성경도 모르던 시절 우리 조상들의 속담이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선한 자의 끝은 있어도 악한 자의 끝은 없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대하는 삶입니다. ‘이런 곤경에서 결국은 나를 이끌어 건져내 주실 것이다.’ 그래서 결국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믿음생활이고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시 37:11-14)
수치와 멸시를 당함
시인은 욕을 당하는 이야기를 경험으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때로는 자신이 범죄하고 잘못했기 때문에 욕을 당하기도 하고, 믿음을 따라 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올바르게 살고 자기의 사명을 따라 살 때 존귀하게 하시지만 그렇지 못할 때 수치스럽게 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한 나라를 다스릴 때는 거기에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수치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처럼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온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노예처럼 거기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교만하여 죄를 짓지만, 그 후에는 노예처럼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광도 함께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뜻,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첫 번째 경우라기보다는 두 번째 경우로 생각됩니다.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워낙 악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그들에게 멸시와 욕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 모습이 마치 깨어진 그릇과 같습니다. 하다못해 양은그릇은 깨어지지 않아서 찌그러져도 아쉬운 대로 쓰거나 개밥그릇으로라도 쓰든지 뜬 물이라도 푸는데, 질그릇은 깨어지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그것이 파기(破器)입니다. 뚝배기가 깨어졌다면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그것이 만약 쇠붙이라면 팔수도 있고 구멍이 뚫어지면 때워서라도 쓸 수 있디 않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솥 때우세요. 냄비 때우세요.” 그러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때워줍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당시에 많이 쓰던 토기나 그런 그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사기그릇이 깨어지면 더 멀리합니다.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그대로 있을 때와 깨어졌을 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알고 이해해주고 존귀하게 여겼는데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자신은 한없이 멸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경험을 직접 했습니다. 한 나라를 영광스럽게 다스릴 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그를 높이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의 통치에 복종했습니다. 그가 범죄하자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멸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은 “저 사람의 생명을 빼앗자. 죽여 버리자.” 이렇게 함께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할 때
힘이 있는 사람에게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어려움은 환란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작은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는 것은 환란이 아닙니다. 육체의 힘이 많은 사람에게 작은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환란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환란과 시련은 항상 자기가 있는 자원을 능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힘이 남아있어서 움직일 수 있으면 자기를 모욕하는 자들은 불러다 목을 치면 되고, 자기를 깨진 그릇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면 됩니다.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해치려는 자들은 모두 쓸어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이 환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 환란, 어려움 속에 우리를 두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시련이고 연단이고 고난입니다. 그러면 이런 성경구절 하나가 떠오르면서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감당할 시험 이외에는 우리가 당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것을 고려할 때 감당할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돈을 써도 능력껏 써야지 자기는 감당할 능력도 안 되면서 돈을 쓰면 파산 하는 것입니다. 파산하면 어떻게 됩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존귀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파산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능력이 없지만 성경에서는 “시험을 당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거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감당할 힘을 주시는 것을 고려하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우리에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을 처리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이 자신에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신 사람일수록 이런 상황에 자주 처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고난 가운데 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삶의 방향이 올바로 정해지지 않으면 많은 능력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신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할 일이 많도록 만드시니까 고난을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 그런 길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능력이 많으면 힘들게 하는 일도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시면 다른 사람이 몇 달을 걸려도 못 할 일을 단 몇 일만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감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많으면 하나님이 고난을 더 많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 때문에 편안하게 살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안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지면서 순전하게 살았던 다윗도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에 나가면 늘 이기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깊은 비밀을 알고 있는 영성가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경험해도 말로 풀어내는 것은 별개인데 이렇게 많은 시를 썼으니 뛰어난 저술가였습니다. 거기에다가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탁월하게 다스릴 수 있는 행정가였습니다. ‘어떻게 모든 재능을 한 인간에게 몰아주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그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하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참회 속에서 인생을 살아왔는데도 교만해져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해서 영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그 마음이 하나님을 더 많이 붙드는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되면 이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는 일이 자기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일 때 기도도 잘 되고, 하나님의 말씀도 가슴에 다가오고, 하나님이 한없이 소중해 보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꼭 붙들고 의지하고 싶은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자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시 37:11-12)
온유한 자의 영향력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온유하지 않아서 땅이 없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땅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땅 중에서는 쓸모없는 땅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갖고 사용할 수 있는 땅은 지극히 일부입니다. 여러분에게 시베리아의 땅을 잘라 준다든지 사막 한복판의 땅을 몇 만평을 잘라준들 그것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것이요”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앙의 사람이 박해를 당하거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인생을 살아갈 때 그 고통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서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일의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가 올바르지 못할 때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땅’은 재산으로서의 땅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사는 거처로서의 땅을 말합니다. 사람이 사는 거처로서의 땅입니다. 이것은 돈이나 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으로 차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대목을 해설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화력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이것이 바로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영향력이 바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는 영향력은 자기가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분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때 사람들에게 인격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 영향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파문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영향력입니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한 가운데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파문을 그리면서 사랑이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가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이야기를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하지 않다면 그 반대가 될 것 아닙니까? “온유하지 않은 자는 결코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요.” 온유하지 않다면 그가 구원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사명은 상호교통의 회복을 통해 생명과 사랑이 사람들 속에 흘러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인간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참 인간으로 살아야 할 신자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신자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생각나는 순서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을 처음 믿을 때 마음이 정말 가난합니다. 주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끼게 됩니다. 주님밖에는 없는 처절함을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죄를 향해 애통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향해 애통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온유함은 특별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부드러움과 친절함,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을 온유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안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질서를 따르고 잘 해주는 사람에게는 잘 대해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대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이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통하고 나면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죄를 고백할 때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통회하던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그런 것을 안 써 붙이고 다니는데, 우리 때는 ‘초보운전’이라는 문구를 많이 써 붙이고 다녔습니다. 저도 15년 전에 잠깐 써 붙이고 다녔는데 대접을 안 해줍니다. ‘초보운전’이라고 써 붙이면 길도 좀 비켜주고 잘못해도 좀 봐주고 그럴 줄 알았더니, ‘초보 운전’이라고 붙여 놓으면 짜증스럽게 ‘빵빵’ 대면서 지나갑니다. 제가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 2-3년 뒤에 이런 문구가 유행을 했는데 “당신도 한때는 초보였다.” 이렇게 써 붙이고 다닙니다. 굉장히 도전적입니다. 맨 처음에 버벅 거리면서 운전하던 때를 기억해라는 것입니다. “당신도 한 때 초보였다. 기억하라.”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로서 그것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이상적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악인은 이런 사람을 죽이기 위해 칼을 갈며 준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노리지만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거두시기도 하시고 보호하시기도 하시는 주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면 죽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훌륭한 도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시 37:13-15)
˚주께서 웃으시리니˛
하나님의 자녀들보다는 세상의 자녀들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는 훨씬 지혜로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악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녀보다 세상의 자녀들이 훨씬 슬기로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희망이 없는 것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악인이 의인을 해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이 상당히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의인의 고난, 믿는 자의 환란, 시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하나님이 웃으시는 이유는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 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그 날’, 즉 여호와의 날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오시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 감격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칼과 활로 공격하는 악인들
그래서 악한 사람들이 칼과 활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을 죽이고자 목숨을 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삶의 질서가 다릅니다. 그 질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이루어 놓은 질서에 순순히 복종하면서 자기 질서를 포기하고 들어가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모두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각자 자기 사랑의 질서를 펼칩니다. 그래서 순순히 굴복할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총체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고난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과 총체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감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향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에게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과 활을 준비합니다. 알다시피 칼은 접근해서 사람을 살해하는 무기입니다. 찌르거나 베지 않으면 칼은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활은 아주 먼 곳에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약 350m까지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화살을 쏘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화살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근접해서는 칼에 맞고 멀리 떨어져서는 화살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숨어서 화살을 쏘는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숨어서 쏘는 것입니다. 그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서 사람의 가슴 혹은 등에 꽂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해할 목적으로 철저하게 준비한 것입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방패를 주셔서 그것을 막게 하시는 대신에 상황을 바꾸십니다. 그들이 준비한 칼에 그들이 찔리게 하시고, 그들이 예비한 활에 그들이 맞게 하셔서 생명을 빼앗으려고 했던 자들의 생명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행동을 보면서 그분의 자녀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적들의 수,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의 어려움,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보호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의 편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 속에서도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나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당신 의지하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당신을 의지하면서 연약하게 사는 사람들을 훨씬 기뻐하십니다. 신앙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환경에 요동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광경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 환경에 의해 충동당하지 않는 온유함, 자기의 작은 이익을 초월하는 영혼의 안정감에서 오는 평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항상 하나님을 향하기가 쉽지 않고, 새벽기도에 나와도 그것으로 하루 종일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가슴에 손을 얹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 때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 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의로운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시 37:16-17)
통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늘 번영하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늘 쇠퇴하게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러면 교회 안에는 거짓된 사람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모양만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삶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마음과 본성,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영혼이 총체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심이라는 것은 창조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목적을 향하여 돌이키게 만드는 일을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의 밑바닥부터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신자일 수 없습니다.
의인이 번성하고 악인이 쇠퇴하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면, 하나님을 위해 변화된 삶을 살기보다는 변화된 사람처럼 살면 하나님이 나에게 번영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삶의 태도만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있고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순종하며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의 번영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추한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여러분을 열렬하게 따르고 존경하는데 알고 보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돈 때문이었다면 모욕과 수치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람이 돈이 많고 유명해지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늘어나고 출세할수록 사람들은 착각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자기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사람 때문에 번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꼬이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그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지는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번성하고 당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쇠퇴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지 않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악인이 잠시 번영하는 것 같고 자신들은 고난을 받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반드시 은총을 베푸십니다. 아주 질서롭게 그 일들이 일어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고 무질서하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주시기를 기대하기 전에 자기가 그릇된 방법으로 복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세상에 악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앙은 참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때가 와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 사람들은 잠시 고난을 받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그들을 세워 주시고, 악인은 선 것 같아도 반드시 그들을 넘어뜨리셔서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잠시 그렇지 않는 것 같은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모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당신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려내십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가 매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진실함을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아첨입니다. 의인은 진실한 자를 원하나, 악인은 아부하는 자에 에워싸여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결정을 할까? 모든 백성들이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 왜 저렇게 결정을 할까?’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부하는 자들에게 에워 싸여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확인까지 해볼 의지는 없지만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청와대에 들어가는 신문을 따로 찍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신문이 나오면 시내에 파는 신문과 대통령 책상에 올라가는 신문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전부다 그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삼선개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백성들이 다 알고 있는데 주위에서 된다고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헌법 바꾸는 것을 백성들이 그렇게 원했는데 대통령을 뽑겠다고 체육관에서 했습니다. 선언을 합니다. 결국은 그것 때문에 결국 망했지만 그것을 주위에서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 때 구미 사태가 일어나서 수십 만 명이 데모를 하는데 측근에 있는 사람이 “각하, 20만 명만 죽이면 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부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눈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번영을 위해 아부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길 전체를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을 향해 전적으로 돌이키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는 것 같고, 아무도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는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표에 의해 계속 일을 하고 계십니다. 어느 한 순간, 미련한 우리의 눈을 떠서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라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4시 40분에 깼습니다. 미리 와서 1시간 기도를 하고 일과를 하려고 내려왔는데, 오면서 걱정을 했습니다. ‘교회도 캄캄하고 문이 전부다 잠겨있을 텐데, 관리실에서 자는 형제들을 어떻게 깨워서 문을 열어 달라고 그러나?’ 했는데, 와보니까 불도 켜져 있고 히터도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인생을 사는 것도 이렇겠구나. 이제 혼자 다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계속 일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당신의 할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더 이상 돕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는구나.’
의로운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그 팔은 의인을 해하기 위해 칼을 들었던 팔입니다.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그를 죽이기 위해 화살을 겨누었던 팔입니다. 그 팔을 하나님이 부러지게 하시고 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편에 선 사람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승하다’라는 말은 ‘낫다’라는 뜻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모여 있는 것은 ‘훅’ 하고 한번 불면 모두 날아가는 것들입니다. 그 날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지, 어느 순간 그 날이 도래하여 하나님이 ‘훅’ 하고 부시면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지 않는 모든 것들은 단숨에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도 영화도 기쁨도,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날아가서 사라지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은 “나의 기업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굳게 붙들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업이 되십니다. 비록 믿음의 길을 따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삶이 힘들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삶으로 우리들이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택하는 것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도 믿음을 택한 사람의 끝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이 끝에 그들을 복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완전한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시 37:18-20)
본문해설
이 시대에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는 목적과 형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눠지는데 그 중에 번제가 있습니다. 제물을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20절을 쓸 때에 시인은 번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남김없이 태워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불 위에 올려놓으면 가장 잘 타는 부분이 어느 부분이겠습니까? 짐승의 내장 같은 것들을 태우면 거기에서 많은 기름이 나오면서 불 위에 떨어져서 불길이 치솟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타서 재만 남습니다.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아도 그 마지막 말로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면서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단숨에 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집니다. 악인의 말로는 허무한 것입니다. 번성한 것 같아도 그것은 마치 벤 풀과 같습니다. 풀을 베어놓으면 처음에는 심겨져 있는 풀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만 햇살이 내리쬐고 시간이 지나면 검불처럼 말라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의 말로입니다.
완전한 자,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
18에서 19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완전한 자로 불립니다. 여기에서 ‘완전하다’라는 말은 절대적인 완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완전’은 상대적인 완전이고 점진적인 완전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비록 기술이나 능력은 모자라지만 그것을 제대로 해서 원래의 목표대로 해보려고 몸부림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하지를 않고 조금 잘못된다 하더라도 자기가 할 만큼만 하고 그만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는 절대로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완전하게 하려고 몸부림치게 될 때 점점 더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일을 완전히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배를 잘 만드는 나라입니다. 전 세계 중요한 배들의 수주를 거의 휩쓸고 있습니다. 맨 처음 현대조선소가 생기고 첫 번째 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커다란 화물선이었을 것입니다. 그 배를 인도해가려고 왔는데 길이를 재보니까 설계도에 나온 것과 6m의 차이가 나더랍니다. 더 크게 만든 것입니다. 배가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6m나 크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설계도를 그리면서 연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 굵기가 반영되어서 시간이 지나면서 배가 6m가 커진 것입니다.
‘완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완전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완전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면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핍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 내가 못나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계획대로 그것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렵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때 고난을 받는 것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참 설교자와 거짓 설교자의 구분이 되는 점을 말할 때 고난을 들었습니다. 고난이 있다면 참된 설교자이고 고난이 없다면 거짓된 설교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그 시대가 진리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외치면 그것이 보편적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미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환란과 시련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들은 완전해지려는 사람들이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가 그 마음에 가득 차게 될 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날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정하십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시는 날입니다. 성경에서는 ‘권고하시는 날’이라고 자주 표현됩니다. ‘권고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dq'P)인데 ‘방문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방문하시는 그날에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치리하시고 역사하셔서 올바른 질서들을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질서가 자기가 걸어가고 있던 질서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자비 같은 것들이 그날에 풍부히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것을 거슬러 살던 사람들은 바로 그 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것을 치리하시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하나님을 늘 가까이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조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시 37:21-22)
의인과 악인의 특징
자기를 위해 스스로 자원을 조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쉽게 자원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은 남의 돈을 꾸고 갚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떼어먹는 일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나라라고 하는데 고조선에서 통용되던 8조 법금이라는 8개의 조항으로 된 법문서를 보면 “재물을 꾸고 갚지 않는 자는 몸을 상하게 하라.”고 합니다.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돈을 떼어먹는 역사는 오래된 것입니다. 자원을 필요로 하지만 스스로 조달할 능력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을 통해 조달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것이 악한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외로 자기 능력 밖의 자원을 얻게 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돈을 떼어먹은 사람은 이익이지만 그 돈을 떼인 사람은 자기 생명이 쏟아지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얼마 안 되는 돈이라면 문제가 안 되지만 큰돈이어서 자신의 생활에 위협을 받고, 심지어는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떼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악인의 특징은 돈을 꾸고 갚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쁜 경우, 갚을 능력이 충분히 되는데도 그것을 갚지 않는 것이 악인의 특징입니다.
반면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굴지의 기업 중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유리를 만드는 회사인데 그 창업자의 전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은행에서 꽤 많은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하는데 6.25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도망을 가고 여기저기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 사람은 피난가기 전에 먼저 은행에 갔습니다. “내가 이만큼의 돈을 빌렸는데 갚으러 왔다.” 그랬더니 은행에서 짐승 보듯 하더랍니다. ‘저 사람이 정신이 나갔나.’ 그분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전쟁이 나서 폭탄이 떨어지면 다 흩어질 텐데 누구한테 이 돈을 갚느냐?” 그러니까 “전쟁은 났지만 아직까지 부서지지 않았으니 빨리 갚아야 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양심적으로 기업을 하니까 그 기업이 그 정신을 오래도록 물려받아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요새 삼성특검을 보면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수출량의 4분의 1을 그 회사에서 수출하는데, 1년이면 몇 백억, 몇 천억씩 모아서 여기저기 뿌리면서 굴지의 기업을 유지했다는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굴지의 기업이 그렇게 기업을 굴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뿌려가며 기업을 지탱했다면 힘이 없는 회사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정직한 기업이 그리워집니다. 그런 정신이 있는 기업 말입니다. 정신이 없는 기업은 절대로 튼튼하게 오래서지 못 합니다. 혹시 사회가 부패해서 그런 기업이 세워진다면 돈은 벌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존경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삶의 원리입니다.
본문은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대조합니다. 악한 자는 돈을 꾸고도 갚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능력이 있어도 갚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자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인의 특징입니다. 의인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의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이 의인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고 잘되기를 바랍니다. 요즘에 보면 형제들이 거의 남남처럼 살고 형제들끼리 갈등도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효도를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효도를 가르치면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참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꺾고 자기 생각을 접습니다. 그것을 안 가르치니까 제멋대로 살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토록 인심 사나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안에 이웃도 있고 이 세상의 모든 자연도 있습니다. 사람을 해치려다가도 ‘저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하면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풉니다. 의롭게 살면서 선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농사지을 땅을 주시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을 향한 감화력입니다.
인간이 땅에 미치는 영향력
옛날에 농사를 지을 때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이 더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씨를 뿌리러 나갈 때는 목욕재계하고 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농사가 잘 안되면 일 년 동안 굶기 때문에 심지어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땅을 직접 만지면서 농사를 지으니까 자기가 올바른 마음으로 농사를 지어야한다라는 것이 정신 속에 들어옵니다. 땅은 하나의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땅을 만지면 그 땅도 함께 악해지는 것입니다. 악인이 농사를 짓는 것과 선인이 짓는 것에는 차이가 납니다. 악인이 악이 가득 찬 손으로 농사를 지을 때 땅과 접촉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땅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운명은 인간과 함께 하는 운명입니다. 인간은 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땅은 인간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운명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악한 일을 행하면 땅에 기근이 들고 곡식을 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이 가장 먼저 내리신 저주는 “너희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것이다. 너희들이 땅을 갈고 애를 써도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다.”라고 하시며 땅에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악하게 살면서 이 땅에서 번영하려고 하는 꿈 자체가 악한 자의 희망이지 선한 자의 진정한 소원은 아닙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한 자는 땅을 얻지만 악한 자는 끊어지리로다.” 끊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 올바로 살지 못하니까 자신의 이기심으로서 모든 것들을 움켜쥐고 남에게 베풀지 않고 나누어주지도 않으면서 악하게 살아가는데 결국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얼마나 악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살아가니까 땅도 그를 배척합니다. 복된 삶은 위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주님께 사랑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고 믿음입니다.
정하신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3-24)
정하신 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 들에 핀 백합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것을 또한 친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늘에 있는 별을 보더라도 각자 자신의 정확한 위치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도는 별들이 있고 각기 제 길이 있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을 따라서 돕니다.
인간이 어느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랐던 자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시고 끊임없이 당신이 정하신 길로 걸어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악과 고통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어도 맨 처음 그때의 그 열정으로 매일매일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길을 잘못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어서 잘못 가는 것과 아예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가려고 했는데 힘이 없고 어려운 일이 많아서 뛰어가다 걸어가거나 그 자리에서 잠시 주저앉는 것은 그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져도 그 길에 있으면 하나님이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주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 길에서 이탈해버리면 질서자체가 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힘이 없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가던 길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앉아 있는 것과, 보따리를 싸서 사명의 자리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가다가 넘어진다 할지라도 주께서 다시 이끄셔서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다르게 취급하시는 것일까요?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길로 가버려서 불순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의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 길을 가려고 하는데 힘이 없는 것과 힘이 있지만 이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일단 순종을 하면 하나님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불순종하면서는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다려도 응답이 없지만 일단 순종을 하면 하나님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아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무엇인가 선한 일을 결심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느냐를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면, 어려움이 생길 때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깨뜨려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간절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만들고 어려움이 왔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길이 무엇인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로부터 교회에서 섬기는 작은 직분, 가정, 직장, 각각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에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힘이 없어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그 길을 걸어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손을 뻗어 일으켜주시고 그에게 힘을 주십니다. 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길을 함부로 막 버리고 아무렇게나 팽개칩니다. 그것은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그 길을 팽개치고 자기 멋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시련과 고통이 자신의 삶속에서 그칠 날이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한 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내게 정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그것을 이루어 드리려고 하는 헌신된 마음, 이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시 37:27-28)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본문의 결론은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는 것의 기준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당신이 뜻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당신의 의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성경의 계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철학을 모르고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선하게 삽니다. 성경에 나오는 계명들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둑질 하지 말라. 남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말라. 네 자신의 죄를 보라. 회개하라.”라는 계명들은 모호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너무나 분명해서 핑계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지 않으면, 스스로 깊은 사색을 통해 선한 길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명료한 계명과 계명의 지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계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 악한 사람들은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아주 깊은 사색을 하고 철학하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분명하게 우리의 갈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양육할 때 부모는 그 이유를 다 설명해주지 않고 지시를 내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도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선생님께서 구체적인 설명 없이 학교 앞 길가에서 파는 것은 나쁜 것이니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 초등학교는 7천 명이 모이는 학교여서 장사꾼들도 많았습니다. 조그마한 좌판에 번데기부터 시작해서 풍선까지 별것을 다 가지고와서 팔곤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처음에는 사먹지 말라는 선생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가게에서는 사먹어도 되는데 이상하게도 좌판에 있는 것이 가게에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생 상태나 모든 것을 볼 때 똑같아서 ‘왜 그럴까?’ 하고 혼란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할 때에도 하나하나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아이에게 설명해 주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이상한 것은 ‘어른들은 자기들만 영화를 보고 애들은 들어오지 말라고 할까?’ 어렸을 때 이것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일까? 만약에 우리가 봐서 나쁜 것이라면 어른들도 보지 말아야지 자기들은 보면서 왜 우리들은 들어오지 말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담배피우는 행위가 악한 행위라면 왜 어른들은 나쁜 것을 하면서 우리에게는 못하게 하는 것일까? 만약에 우리에게 못하게 할 정도로 나쁜 행동이라면 아예 세상에서 담배를 없애야하지 않을까?’ 하고 어려서 그런 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것을 설명해주지 않고 그냥 하는 말이 “애들은 그런 거 하면 못쓴다.”라며 야단을 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어른들도 잘 설명할 수 없었기에 아이들에게 설명을 친절이 안 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애들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것이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는 여섯, 일곱 살이 되면 아이들이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스무 살이 넘으면 그것은 애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 어른이 되면 담배를 끊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하겠습니까?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하면 몸에 해롭지 않은 담배가 나오면 피워도 괜찮은 것입니까? 쉽지 않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어른들은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명할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이고 아이들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권위로 누르며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 그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권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어른이 말하는데 말대답하지 마라.”
우리들이 아이들을 양육할 때도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라고 분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지를 아주 선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계명들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선한 삶이라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삶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생명을 누리도록 보호하십니다. 계명을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파멸하십니다. 이것은 당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자손들에게까지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의 자손은 하나님에 의해 보호를 받으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자손은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모가 악을 행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선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자식을 파멸시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창조의 목적을 떠나 교만하게 사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사는 것을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 계명을 따라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오래전 일입니다. 교통사고가 많이 나니까 학교 앞에 육교를 놨습니다. 선생님은 입이 닳도록 “길을 건널 때는 반드시 육교로 건너라.”라고 가르치셨는데 육교를 건너는 것은 사실 귀찮은 일입니다. 어렸을 때는 “구름다리 놨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좋아서 육교에서 밑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보면서 항상 육교로 다녔습니다. 그때는 엄마들이 학교로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등, 부모들이 학교에 자주 왔습니다. 가방을 맨 1, 2학년쯤 된 아이와 엄마가 육교 밑에서 한참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리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육교 밑으로 뛰어가려고 폼을 잡으니까 아이는 그러면 안 된다고 위로 올라가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잔소리 말고 따라와.” 하면서 오른손을 붙들고 뛰어 건너려고 하니까 애는 싫다고 선생님이 위로 건너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붙들고 “시끄러워 따라와.” 하고는 달음질을 치면서 중앙선을 건너 무단횡단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하늘같은 선생님이 “그리로 건너지 마라. 위험하다. 나쁜 거다. 항상 육교로 건너라. 건널목에서는 항상 손을 들고 건너라.” 하고 가르쳐줬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나쁜 짓이라고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한 일을 엄마 손에 이끌려서 하게 될 때 아이가 느꼈을 도덕적인 혼란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에게는 올바르고 인간답게 사는 부모를 만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첫째는 법이 법대로 통용되는 나라, 둘째는 인간다운 행동을 하는 부모, 셋째는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친구들, 이 셋에 의해 어린아이들의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입니다. 아이들이 바깥세상을 알게 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립니다. 적어도 유치원을 가야 바깥세상을 알게 되는데 그전까지는 엄마, 아빠가 전부입니다. 엄마, 아빠가 올바르고 사람답게 살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유치원에 가서 눈을 뜨고 친구들을 봤을 때 친구들이 다르면 그때부터 엄마, 아빠가 가르쳐준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 눈을 뜨고 세상으로 나가보면 엄마, 아빠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말이 더 맞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망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집안에서 잘 길러도 법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이면 교육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좋은 교수를 데려와야 한다. 선생들이 실력이 없어서 그렇다. 시험을 쳐서 떨어뜨려야한다.”라고 하는데 선생이 실력이 없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것보다 아이들이 사람다운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교재는 없습니다. 세상을 고치려고 생각은 안하고 학교 안에서 아이의 실력만을 키운다고 하는데 그래봐야 그것은 돈 잘 버는 사람으로 만들 뿐입니다. 삶의 질 자체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악한 사람들의 자손으로 태어난 인간들의 불행입니다. 악한 부모 밑에서 그들의 삐뚤어진 삶을 보며 악하고 고통스럽게 살 때 자신도 모르게 부모로부터 습성이 배서 하나님의 개명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착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께 간구하지 않아도 복을 주시지만 거슬러 사는 사람들은 간구해도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이치입니다.
땅을 차지하는 의인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7:29-31)
땅을 차지하는 의인
‘땅을 차지한다’라는 말은 재산으로서 땅을 넓게 가지고 부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쳐서 그들에게 영향을 행사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땅’이라는 말은 ‘에레츠’($r,a,)라는 단어인데, 여기에는 ‘거민, 주민’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사람과 나누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차지하는 사람은 바로 의인이다.” 이런 뜻입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향력은 하나님 자신의 영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을 통치하시는데 그것이 의로운 사람의 통치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모든 땅에 영향을 미칠 때 자신이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땅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확실한 길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미치는 영향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영향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향력입니다. 그가 영영히 거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강하고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 걸어가는 길, 그의 생각, 그가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힘 있고 강한 나라는 자기 백성을 지켜줍니다. 힘 있고 강한 나라는 자기 백성이 다른 사람에 의해 납치되거나 자기 영토가 다른 나라에 의해 빼앗기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힘없고 연약해보이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해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인의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영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은 망하지만 의로운 사람은 영영히 번성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인의 번성함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힘 있고 영향력 있고 능력 있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곧 시들고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때로는 약해보이고 힘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이 땅에서 영원히 번성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의인의 특징
그러면서 시인은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혜를 말하고”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관심사 자체가 이 땅에서 돈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인의 관심사는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가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무엇을 분별해야하는가?’입니다. 의인은 이런 것들을 하나씩 구별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를 가짐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인가? 인간을 향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는 것이 큰 기쁨이지만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는 것이 기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기 싫어하고 기회만 있으면 나가서 놀려고 하고 ‘어떻게 하면 학교를 그만두고 자유롭게 놀아볼까?’ 생각하는 아이에게 공책, 연필, 참고서, 가방, 이런 것을 사다준다 한들, 그 아이에게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지혜를 구한다.”라는 것, 지혜를 구하고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만이 진리를 따라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진리를 따라 살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이 사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의를 이르며”라고 했는데, 공의를 이룬다는 것은 지혜를 통해 올바르게 판단한 것을 실천해서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전파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적용의 문제는 저절로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대부분 삶에서 느끼는 혼란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몰라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세 번째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입니다. 여기에서 ‘법’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법이라는 것은 기준과 규칙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성경은 이 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객관적인 규칙으로서의 법입니다. 십계명,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삶의 규칙들과 교훈들, 믿음의 규칙들, 이런 것이 다 객관적인 법입니다. 나라에서 공표하는 법들도 대부분 여기에 해당됩니다. 객관적인 규칙으로서의 법입니다. 두 번째는 전혀 다른 용도인데, 실효적인 힘으로서의 법입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법입니다. 버릇, 혹은 힘이 형성되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법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밥을 먹고 나서 늘 커피를 마셔버릇하면 커피가 당깁니다. 당긴다는 것 자체가 법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더 심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반드시 담배를 피워야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답답하고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몸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니까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러한 어기기 힘든 어떤 법이 마음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땅을 차지하는 의인의 내면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법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는 어떤 힘이 그 안에 성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는 성향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받을 때 한편으로는 그것을 원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것을 뿌리치려는 성향이 더 강하게 존재합니다. 환란과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과 가능성이 우리에게 남아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성향이 더 강합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의 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 밖에 있는 법도 있어야하고 우리 안에 있는 법도 있어야합니다. 우리 밖에 있는 법을 바로 알고, 우리 안에 있는 법이 마음껏 행사되어서 계명을 붙들게 될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의로운 자의 생활이고 생명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의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땅을 차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인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그를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시 37:32-34)
진리를 박해하는 세상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있어서 그분께 순종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계명을 준수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고, 그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본받을 만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눈에 거슬리고 그들의 삶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악인은 의인을 미워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악한 사람들이 진리를 미워하는 것이 의로운 사람들을 향한 박해로 나타납니다.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따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붙드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들의 경건한 삶,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 이 모든 것 뒤에는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새롭고 기쁨을 주고 행복한 것이지만, 그대로 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자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인입니다. 삶으로 진리를 찾지 않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로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그분을 미워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돕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는데 무엇이 그렇게 싫었을까요?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 생활 자체가 진리를 품고 있는 삶이었기 때문에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반박과 미움, 하나님을 향한 원망, 이런 것들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싫어하는 세상은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는 의로운 사람들을 향한 반대와 박해를 통해 진리이신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이 의인을 괴롭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 안에 진리가 없고 진리를 향한 미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이 진리를 거슬러 사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두실 리 없는 것입니다.
의인을 지키시는 하나님
의인이 악인에 의해 잠시 박해를 받는 것 같을 때 그들 홀로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재판하실 때 각자의 의로움과 불의함을 모두 기억하셔서 각자를 심판하시고 다루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결국은 그들이 땅을 차지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땅을 차지하게 한다는 말은 물리적인 땅을 소유해서 부자가 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력을 끼쳐서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감화를 끼치고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높여서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지배하게 하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들을 지배한다면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자리로 나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큰 행복이며 기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인의 종말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시 37:35-37)
본문해설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선한 사람들의 번성함이 아니라 악인의 융성함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악인의 번영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려서부터 ‘선상필벌’(善賞必罰), ‘선상악벌’(善償惡罰)이라고 해서 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이 주어지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벌이 주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배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라서 세상 밖으로 나와 보면, 세상이 그런 원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때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올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할 동기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사회일수록 선악의 가치가 분명하고 그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여야만 가치가 확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규칙을 어긴 사람들이 부를 갖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도모한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잠시뿐인 악인의 번성함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그 땅에 서있던 푸른 나무가 아주 무성하게 자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그러나 무성한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에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져버렸다는 것이 악인의 종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 땅에 서있는 큰 나무와 같이 무성한 악인들이 어느 순간에 보니 하나도 없을까요? 사람들은 악인이 번성할 때를 보고 ‘과연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가?’ 하고 의문을 느끼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인이 잠깐 동안 번성하였다 하다라도 만물과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무를 잘라서 쓰러트려 놓아도 나무에 물기가 남아있는 동안에는 마치 땅에 꽂혀 있는 것처럼 번성해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악인의 번영함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것들이 너희가 보기에 번성하는 것 같고 이기는 것 같지만, 그것은 뿌리가 잘린 채로 번성하는 것과 같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나무를 잘라 놓아도 잘려진 순간에는 산에 심겨진 나무의 무성함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근원이 없어 곧 마르게 됩니다. 이것처럼 악인의 번성함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누리는 평안
시인은 갑자기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악인은 번영하는 동안에도 계속 불안합니다. 외적인 삶의 번영만을 보고 그들의 기쁨과 행복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인의 번영함은 번영함 속에서도 내면의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완전’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완전함’이라는 것은 그 시대와도 큰 관련이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가 끝난 다음에 행동했던 것을 볼 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경건이 풀어진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을 향해 성경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완전하다’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결점이 없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분 앞에 순전하게 살려고 하는 경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볼 때 커다란 흠을 찾기가 어려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봐라. 그리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이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앞 구절은 바깥으로 나온 행위를 율법으로 조사한 결과, 비교적 완전한 것을 가리킨다면, ‘정직’은 완전한 삶이 흘러나오게 만든 그의 내면적인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외면의 삶을 추적해서 마지막에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규명합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행실이, 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악한 행실이 흘러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라” 완전한 것이 그의 행위이고 정직한 것이 그의 성품이라면 화평한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이고, 그 사람의 삶의 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과 평화를 도모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뚜렷한 특징은 평안입니다. 편안한 것입니다. 그 편안함 속에서 우리의 지성은 가장 잘 활동하고,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통제를 받고, 우리의 정서는 하나님 앞에 가장 훌륭하게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구조 속에 기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결론과 적용
완벽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선물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만약에 많이 먹고 큰 부를 누리고 자원을 많이 소유해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그러한 것들을 얻는 대가로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넘나드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진정한 복이 하나님과의 평화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삶의 원리는 물과 같습니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 은혜가 샘솟듯 솟아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흘려보내지 않아도 이것들이 넘쳐나면 그의 성품과 인격을 적시고 그것들이 끊임없이 흘러가서 주위의 땅들을 두루 적시면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붙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란 때의 산성이신 하나님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란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시 37:38-40)
악인의 결국
악인이 번성할 때가 있지만 왜 결국 악인은 끊어지고 의인만 남는가? 시인은 그 이유를 37편의 마지막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만사가 그렇듯이 항상 번영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꽃처럼 봉오리가 맺혀서 활짝 피었다가 지는 것처럼, 지고 나면 또 다른 꽃이 피고 한 나무가 시들어 죽고 나면 또 다른 나무가 자라나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이치입니다. 인간 만사도 이와 같습니다. 자연적인 질서 속에 놓고 봐도 인간은 번영하다가도 소멸하고 소멸하다가 또 다시 번영합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지라도 3대를 찾아보면 잘 살던 조상이 있고, 아무리 부자여도 3대를 캐보면 가난할 적이 있다.”
악인이 번영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멸망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을 파멸시키시고 큰 고통을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망한다고 말하지 않고 악인에게는 보호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 번영하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보호자가 없습니다. 그들이 번영하는 것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악을 도모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번영하는 것입니다. 건강에 나쁜 음식을 먹고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악을 행하면서 잠시 번영하는 사람의 번성함은 계속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징벌하고 심판하지 않으셔도 악인은 자기가 세운 원리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은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피난처가 없습니다.
환란 때에 산성이신 하나님
세상의 악한 질서들이 큰 강 여기저기에 있는 소용돌이처럼 늘 있기 때문에 의인이 올바로 길을 걸어가도 세상의 악함 때문에 휘말려서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는 환란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라고 말합니다. 고대에 전쟁을 할 때 백성들이 달려가서 산성에 숨었습니다. 문을 굳게 잠그고 적군들이 물러갈 때까지 거기에서 항전을 하는 것입니다. 남한산성을 가보면, 100명이 올라가도 그 위에 있는 한 사람을 당하기 쉽지 않게끔 지리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환란 때 저희의 산성이 되셔서 보호해주십니다. 산성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백성과 동행하십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내 인생의 계획에 없던 어려움을 만납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서 깊은 고통을 당했는데,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행복이고 기쁨이지 않습니까? 신기하게 하나님께서는 환란과 시련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맛볼 수 없는 당신의 큰 사랑,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악인들은 환란과 시련을 만나면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파멸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란과 시련을 만나면 그것을 산성으로 삼아서 주님과 동행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그분의 방법입니다. 의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악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위해 피난처를 제공하시고 보호하시는 행동이 악인에 대한 징벌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경험한 선과 악의 비밀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붙들리지 말고 하나님께 붙잡히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즉각적으로 보상이 주어지고 악을 선택할 때 즉각적으로 벌이 주어진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순종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순종은 손마디나 발, 입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받으시고자 하는 진정한 순종은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기까지 우리를 다루십니다. 인간은 결국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니까 그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매우 뚜렷한 일치와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서 환란 가운데서 당신을 피난처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신자의 일생은 자기를 의지하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의지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바를 따라 우리의 인생이 전개가 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진실한 삶, 시련과 고난을 견디는 인내, 자기 속에서 솟아오르는 혈기를 죽이는 마음, 모든 욕망을 이기는 절제,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강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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