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극복하라
(2017년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7년 1월 9일 - 1월 1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2월 8일
목 차
1. 돌보시는 하나님(마 6:30) 2017.01.09.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3
2. 아시는 하나님(마 6:31-32) 2017.01.10.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8
3. 더하시는 하나님(마 6:33) 2017.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2
4. 염려하지 말라(마 6:33) 2017.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6
염려를 극복하라 (2017.01.09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염려를 극복하라 (2017.01.09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염려를 극복하라 (2017.01.10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2)
염려를 극복하라 (2017.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3)
염려를 극복하라 (2017.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4)
1. 돌보시는 하나님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녹취자 : 김세나
산상수훈 중에서 마태복음 6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외식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고, 이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속해 있는 19절 이하부터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을 욕심을 내지 말라, 이 땅에 재산을 모으지 말라, 해석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염려의 문제를 다루시려다가 그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판단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대적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염려’입니다. 내일에 대한 잘못된 염려가 우리로 하여금 물질에 집착하게 만들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랑하게 만들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 수 있는 마음의 여지를 모두 박탈해 버립니다. 그렇게 마음이 사랑이 결국 염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가르치시면서 그러면서 예수님이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아라 하시면서 두 비유를 드시는데, 공중의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다가 오늘 읽은 본문,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앞으로 4일에 걸쳐서 30-34절 말씀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 사경회의 주제는 “염려를 극복하라”입니다. 30절, 다시 한 번 제가 읽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기에서 우리에게 최소한 세 가지의 교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육신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먹고 마시는 것은 목숨을 위하는 것이라 말씀하셨고, 입는 것은 몸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먹고 마시는 것은 목숨과 관계된 것이지만, 입는 것은 몸에 관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몸을 부지하게 하는 생명입니다. 그러한 생명이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사용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음식을 공급해 주고, 적절히 음료를 공급해 줄 때 인간의 목숨이 지탱됩니다. 그리고 그 목숨은 몸을 사용해서 자기 할 일을 해 나갑니다. 그러나 그 몸을 몸답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은 목숨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몸의 주인이 목숨이라면 목숨과 몸을 사용해서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세상의 자원을 사용하고, 영혼은 천상의 자원을 사용합니다. 육신의 자원은 먹고 마시는 것이지만 영혼의 자원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먹음으로 영혼은 영혼다워지고 올바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그러한 조화를 이룰 때 그 인간이 참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의복은 바로 그 몸을 위하는 것입니다. 추울 때 그 추위를 피해주고, 또한 더울 때 그 더위를 피해주고, 외부에서부터 오는 충격과 많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인간이 옷을 입으면 사회적인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옷을 입으면 혼자만 그 옷의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 옷을 보면서 예쁘다, 어울린다, 참 따뜻하겠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그러면서 의복에 대한 생각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신경을 쓰는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이러한 의복에 대한 모든 생각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의복의 정교함과 어울림, 모든 재질들, 이것이 인간에게 주는 유익과 즐거움,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의복에 대해서 우리에게 값싼 의복을 입어라, 모양을 내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염려하는 것입니다. 희랍어에서 ‘염려 한다’는 단어는 마음이 나뉜다는 뜻을 가집니다. 마음이 나누어지게 되면 어느 한 곳에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집중할 수 없게 되면 적절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해 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육신은 소멸될 것인데, 마치 들풀이 잠시 피어났다가는 아궁 속에 던져지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잠시 이 세상에 있다가 소멸할 육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풀과 같이 무가치한 것이 하나님의 돌봄의 대상이듯이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돌봄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육신을 위한 많은 자원들을 인해서 많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라 명심하고 거기에 맞게끔 우리의 육체를 위한 모든 자원들을 배열해야 합니다.
(예화) 얼마 전 시안에 갔을 때 병마용을 보면서 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시황이 13살에 왕위에 올라 그때부터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아주 대단합니다. 마치 제국 전체가 한 사람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교하게 어마어마한 부장품들을 함께 집어넣고 만들었습니다. 그렇게만 만든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아예 살아있는 사람도 함께 매장하였습니다. 재미있게 발견한 사실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람들과 물자들을 집어넣은 이유는 그 왕이 다시 환생하면 그때 그 사람들이 왕을 시종 들기 위해서라고 하니까, 오늘날의 과학의 방식으로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잠시 있다 소멸할 존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그 육체의 삶을 영원으로 연장시켜 보기 위해서 몸부림쳤고 그러한 것들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그런 식으로 허비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물론 구속과 함께 우리의 몸은 변화되어 영원히 파멸되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신은 잠시 사라졌다가 하늘의 것으로 다시 덧입을 몸입니다. 몸과 영혼의 질서를 올바르게 세우고 제자리에 두는 것이 신앙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염려는 믿음이 작을 때 생겨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희랍어 성경은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올리고피스토이’(ὀλιγόπιστοι)라고 되어 있는데, 믿음은 믿음인데 모자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이 설교 하십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양상은 큰 믿음도 있고, 작은 믿음도 있고, 많은 믿음도 있고, 적은 믿음도 있습니다. 오늘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 이러한 경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끊임없이 염려하고 고통을 받는 이유는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걱정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크기의 문제입니다.
(예화) 어느 권사님이 꿈을 꾸었습니다. 새벽 기도 매일 와서 기도하고 예배 시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연세가 많이 들면 신앙 가진 사람들이 그것 이외에 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와 기도합니다. 그런데 늘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자식들 걱정, 남편 걱정, 교회를 봉사하면서도 늘 비관적이고 어둡습니다. 교회에 대한 염려와 걱정, 나라를 보면서도 나라에 대한 걱정과 염려, 가끔씩 자신의 몸에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덜컥 마음이 내려앉으면서 ‘내가 지금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아도 마음이 자유가 없습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어느 산길을 끊임없이 걸어갔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옛날 어렸을 때 망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울지 마라.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 망태는 남자의 머리끝부터 거의 장단지 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바구니입니다. 대나무 혹은 싸리나무로 짠 바구니입니다. 그 바구니를 어깨에 매고 아주 기다란 집게를 가지고 넝마를 줍는 것입니다. 그때는 자원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종이도 줍고, 못도 줍고, 개밥그릇도 슬쩍 집어넣고 하면서 망태에 오만가지 고물상에 팔아먹을 만한 것들을 잔뜩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망태 할아버지입니다. 그 권사님이 그런 망태를 짊어졌답니다. 집게를 들고 집어넣는데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새카만 천을 계속 뿌리더랍니다. 그 뒤를 따라가며 계속 담았습니다. 얼마나 많이 담았던지 그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망태에 짓눌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계속 시커먼 헝겊을 망태에 집어넣고 있다가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어 가위에 눌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사탄이 계속해서 염려와 근심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 망태에 집어넣는 것이 자기 사명인줄 알고 집어넣으면서 갑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불안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이상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불안하지 않으면 인간이 자기를 의식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는데 주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두려워하거라. 그것은 무엇입니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불안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좋은 불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다시 믿음으로 살게 만드는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이 불안은 그러한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작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큰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에게는 어떠한 자세가 필요한가 하면, 잠시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잠시 모두 스쳐가는 것들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과 본질적이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어떤 일이 너무너무 중요한줄 알고 매달려 그냥 열심을 내고 다른 것들을 희생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였는데, 나이가 들고서 ‘그때 왜 그랬을까? 그 까짓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그 까짓게 뭐가 그렇게 문제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해결책은 모든 것을 가짐으로써 염려를 극복한다? 그것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과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곡식을 많이 거두어 들였습니다. 대풍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염려가 생겼습니다. 내년에도 그렇게 곡식을 거둘 텐데 염려가 생겼습니다. ‘창고는 작은데 이렇게 많은 곡식이 생겼으니 어떻게 할까?’ 그 당시 곡식의 양이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염려 끝에 생각한 것이 창고를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창고에 가득 들이고 즐거워하며 먹고 놀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정 불안해 할 것은 불안해 할 줄 몰랐습니다. 그 불안이 무엇입니까? 오늘 저녁에 내 영혼을 취하시면 저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사탄은 염려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준비하러 기도원에 가 있어도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확 듭니다. 그리고 가정의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교회에 무슨 어려움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확 밀려옵니다. 어떤 때는 전화도 해 보고, 문자도 보내봅니다. 그때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우리의 인생이 어차피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내 인생은 날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눈물방울에 매달려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제 마음에 평정을 주십시오.’ 기도하면 쓰레기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이 일을 한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큰 믿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어 하셨던 바가 무엇입니까. 들에 핀 백합을 보라. 그 나라에는 백합이 아주 흔하고 무가치한 풀 중 하나였습니다. 들에 핀 백합을 봐라. 오늘 있다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도 못한 채 베어져 마른 후에는 아궁이 속에 들어가는 풀이 아니냐. 그런데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뛰어나게 예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창고가 없는데도 매 순간 먹이셔서 날아가다가 배고파서 추락하게 내버려 주시 않으시는 것을 보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백합화를 보라. 이렇게 너희들이 생각할 때, 아궁 속에 들어가 버릴 무가치한 풀인데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그런데 너희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 너희들을 돌보지 않고 내팽겨 치시겠는가,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한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느냐.”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들이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한해 여러분들이 먹고 살았지만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였습니까. 그리고 그림같이 응답을 받음으로 겨우겨우 먹고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음식과 물질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만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 뿐 아니라 기도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들판에 나가면 만나를 거두었고 그 음식을 먹고는 힘을 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그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우리 짧은 인생인데 허무하게 살았을 인생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시간들은 얼마나 짧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욕심, 우리의 염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다 소진하느라 주님을 위해 경건하게 근심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염려를 극복하라 (2017.01.10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2)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가끔 염려와 근심이 마음에 엄습할 때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껏 주님의 돌보심으로 살아온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입니다. 나의 인생의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보호에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의 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그러면서 잠시 기도하기만 해도 그 불안과 염려의 먹구름은 물러갑니다. 그리고 염려되고 또 내가 힘이 없어 연약하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의 품을 파고 들게 되니,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큰 믿음을 갖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근심과 염려가 밀려올 때마다 그것을 가슴에 품고 자라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을 떨쳐 버리십시오. 신앙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아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녹취자 : 김세나
어제는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지금 읽은 두 구절을 중심으로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앞에 나오는 긴 이야기를 받으면서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가까이는 들에 핀 백합도 하나님이 돌보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신다. 그러니 너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많은 물질을 사랑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과 돈을, 물질을 아울러 섬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라고 받습니다. 31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6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는 염려에서 비롯되는 탐욕을 물리는 마지막 결론적인 담화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사실입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의 가르침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여기에서 방점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아라,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거기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염려하여 이르기를”입니다. 이것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고 싶으셨던 가르침이었습니다.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마라. 이는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신을 섬기는데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신을 섬겼습니다.
(예화) 제가 아는 교수님 한분이 대만을 여행하고 왔는데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손 위에 작은 금색 우상을 놓고 막대기로 계속 때리면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금년이 다 가는데 이 우상이 나에게 복을 주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복을 안 줘서 우상을 맴매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계속 때리는 것입니다. 종교들 중 많은 것들은 사실 신을 찾았다기보다 자기 욕망을 가상적인 신에게 투사시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자신들의 욕망을 신에게 투사시켜서 간구행위를 하는 것처럼 너희들은 우리 하나님께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생존이 위협받을까봐 이러한 염려를 하는 것을 포함하여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그릇된 욕망을 갖는 것을 포함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끼니가 간 곳 없는 사람들만 이런 염려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큰 욕망을 가지고 있어서 한 끼에 아주 탁월한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고민을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이 속에서 마음은 염려에 잠기게 되는데 그렇게 염려에 잠긴 채 간구하는 행위가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그런 신이 아니고 나 하나님은 너희의 아버지, 너희의 여호와이시니라. 너희는 나의 자녀들이니라. 그러니 너희는 그 염려를 나에게 맡겨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염려와 결별하지 못합니다. 하루 동안이면 우리의 마음에 숫한 염려들이 파고듭니다. 실체도 없는 것들이 파고들어 마음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를 애태우게 만들고 우리의 온 영혼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 염려가 극에 달할 때 그때 모든 것을 그만두고 떨어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걸어온 길,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우리에게 주신 사명,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보람,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한 목표,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고 우리의 마음을 근심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때 우리는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안에 충만히 계셔야 할 성령님께서 거하시기에 기뻐하시지 않는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시덤불과 같은 염려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성령님은 죄를 죽이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의지하는 마음을 당신이 거할 좋은 장소로 여기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사명의 자리로 세우시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것들을 우리가 염려와 근심 때문에 활용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불충성한 사람들이 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마음속에 솟구치는 죄나 하나님을 반역하고자 하는 억한 마음이나, 그러한 것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회개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죄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안개 낀 마음,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마음에 가득차서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용기와 힘도 없고 마지못해서 자기의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해 가는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 앞에 불충성한 자들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려 주인 올 때 한 달란트만 내놓았다가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 주인은 엄격한 사람이라 이 한 달란트로 장사를 했다가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장사를 한다? 반드시 잃어 버릴거야.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이 밎지면 어떻게 하지? 반드시 그렇게 될거야.’ 이러한 염려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떨쳐 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을 살면서 왜 이런저런 염려가 없겠습니까. 눈을 뜨면 매일 매일 전개되는 슬픈 소식들,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의 질서,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난과 근거 없는 모욕이나 때로는 내가 도저히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여야 할 때 내가 전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도록 하나님이 나를 밀어붙이실 때 그때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겠으며 왜 염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렸을 때 개울을 뛰어다니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강아지를 데리고 갑니다. 빨리 오라고 합니다. 강아지는 우리보다 헤엄도 잘 치고 하는데 그것을 끙끙대고 못 건넙니다. 개 한 마리도 자기 힘으로 안 될 것 같은 일에 도전할 때에 그렇게 꼬리를 감추고 끙끙거리고 두려워하는데 그 개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정신을 가진 인간은 얼마나 많이 불안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는 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인간이 아는 것은 아는 것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알지만 도와줄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알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시고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필요한 것들을 다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오늘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너희 하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각양 좋은 모든 것들이 하늘의 아버지,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펴시고 먹을 것을 내리심으로 땅의 모든 생물이 존재하고 기동하고 힘을 얻어서 주님 앞에서 삽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이 하늘 아버지로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돌보시고 구속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염려를 극복하라 (2017.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3)
염려가 마음을 크게 휩싸일 때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잠시 있다가 쓰러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지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인데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염려하는 일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염려가 우리를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고 결국 우리 마음만 망가뜨려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면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서 ‘그것 어떻게 하지?’ ‘그것 참 걱정되네.’ 이런 것들은 우리 생각 속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굉장히 큰 어떤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힘을 쫙 빼놓고 주저앉게 만드는 그러한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꼭 잘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도 있고 근거 없이 어느 한순간에 그런 두려움이 확 밀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어디 멀리 갔는데 ‘지금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 직감적으로 들어, 근심이 확 밀려옵니다. ‘교회에 무슨 일 있는 것 아니야?’ ‘내 건강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 아니야?’ 아주 특이한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마음이 평정을 잃어버리고 흔들립니다. 그것은 영적인,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때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주 짤막하게 간절하게 마음을 먹고 “하나님, 이런 근심과 염려가 내 마음을 파고 들어옵니다. 스쳐 지나가지만 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해 주시옵소서. 사탄아 물러가라.” 책망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아버지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능력을 따라서 우리에게 각양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나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평안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주님의 은총으로 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안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빌지 않았어도 우리는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이 매일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마음이 근심과 염려 속에 있어서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는데도 주님이 먹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그렇게 돌보신다면 공중 나는 새 한 마리를 그렇게 아끼신다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 피로 구속하시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살려내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아들을 버려 우리를 사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도록, 그렇게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3. 더하시는 하나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녹취자 : 김세나
첫째 날은 돌보시는 하나님, 둘째 날은 아시는 하나님, 오늘 셋째 날은 더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결국 염려는 우리의 모든 마음을 태우고, 우리의 심령을 부패하게끔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염려와 근심으로 사실상 영적 군사로서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염려를 전혀 안할 수 없지만 성경은 두 종류의 염려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 혹은 염려입니다. 경건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염려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빌자면, “내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지 않을까.” 사도바울이 칭의에 대해 부적절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까? 또한 구원론에 있어서 성도의 견인이라는 주제를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경건한 근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촉진하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에 이르는 염려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다루는 염려입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신앙으로 보셔서 죽여 버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솟아나는 생명의 은혜를 상실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면 한순간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더 큰 걱정을 불러들여 결국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결국 믿음을 배반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하는 정체모를 근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우리를 지켜 주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차에 치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신호등을 정확히 지키라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안전에 대한 근심 때문에 우리는 과속을 하거나 매우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두려움과 염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육체의 보호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입니다. 안전에 대한 희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의 매우 위험한 현상으로서 다루고 있는 염려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근심과 염려입니다. 단순한 자신의 보호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인데 하나님을 불신하는 데서 오는 근심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보이는 대로만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때때로 그 이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는데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은 알겠는데 지시하신 땅은 어디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깊이 신뢰함으로 ‘아멘’하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것이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의 위대함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우리에게 증거가 됩니다. 즉,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는 이성의 눈으로 설득되었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인격에 대한 깊은 개인적인 신뢰,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약속, 그것을 바라보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자, 우리가 종종 높은 산에 오릅니다. 산은 너무 오르기 힘들 때에는 산에 사다리를 설치합니다. 안개가 가득 끼었습니다. 그래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일부는 보이고 그 윗부분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보이는 부분까지만 계단이 되어 있고, 그 이후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계단을 걸어서 올라갑니다. 이것은 확률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확률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격에 대한 경험으로써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붙들고 살면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선하게 대우해 주실 것이라,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욕망을 신에게 투사했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자신의 인생에 시중을 들어주기를 원했습니다. 일종의 거래였습니다. 자신들을 신을 경배하는 척하고, 그러면 신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대가로 주는 거래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모두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위대하셔서 당신이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인류를 그 선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 거래하기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선을 베풀기를 원하시고 그 선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자칭 의인 보다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더욱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극복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누구도 아무리 뛰어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그릇된 염려를 불식시키지 아니하고는 결코 믿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위대한 사도바울도 아마 이러한 염려의 공격을 수시로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생명에 이르는 염려’와 ‘침체에 이르게 되는 염려’를 구분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염려를 극복하고 평강을 누리게 될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에서 그러한 염려를 극복하는 실제적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그는 ‘염려하지 말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것은 타협의 조건이 아닙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주어지는 명제입니다. 마치 ‘살인하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처럼 명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안 됩니다. 염려하는 그 자체가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제적으로 그것을 이기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염려하지 말고, 오직.” 무슨 뜻입니까? 염려가 아니라 다른 것을 해라는 것인데, 그것이 기도와 간구였습니다.
기도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올리는 모든 바람의 표명입니다. 그러나 간구는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서 아주 간곡히 ‘그 일이 이렇게 되도록 도와 달라.’고 비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나라가 임하옵소서.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기도라면, 그 중에서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이러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저렇게 마무리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 간구입니다. 마치 전방에서 적국의 침입이 없을까 하고 감시하다가 적군이 도발하는 신호가 발견되면 거기에 집중적으로 화력을 쏟아 부어 그것을 괴멸시키는 것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다가 어떤 특별한 일이 발생하여 그것이 꼭 이렇게 (해결되도록) 거기에 집중적인 기도를 구체적으로 퍼붓는 것을 간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간구를 어떤 태도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가르칩니다. 원망하고 ‘하나님,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나님 섭섭합니다. 이렇게 돼서 뭐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이런 원망과 불평 속에서는 그런 집중적인 화력을 퍼붓는 것 같은 간구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지라도 기도하면 결국 그 나빠 보이는 일 때문에 좋게 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잘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약을 먹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쟁터입니다. 엄마가 약을 줄 때, ‘아, 엄마가 너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쓴 약을 먹이는 것이 마음 아프면서도 나를 나으라고 이 약을 먹이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한 살, 두 살, 세 살 된 아이들이 그것을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왜 엄마는 나를 데리고 이상한 아저씨에게 가서 엉덩이를 벗기고 큰 주사를 놓을까? 그리고 뭘 잘했다고 그 아저씨에게 돈을 줄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화) 전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6살 때의 경험입니다. 시골에서 부모님과 살았는데 이를 다쳤습니다. 그 당시 치과도 없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의원에 갔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고치는 병원이었습니다. 딱 한집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엄마가 왼쪽 팔을 붙들고 간호사가 다리를 붙들고 의사가 오른쪽 팔을 누르고 입을 벌리게 한 다음에 썩은 이를 펜치로 빼는 것입니다. 그 광경이 아주 생생합니다. 그 이를 빼다가 결국 부러뜨렸습니다. 서울에 와서 치과를 가니까, “어느 무식한 놈이 애를 이렇게 잡아?” 하며 주사를 한번 놓고 툭 치니까 이가 하나도 안 아프게 쏙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나이 6살인데도 그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성숙한 정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신뢰를 쌓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내 뜻대로 안 되어도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모든 게 다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게 바로 희랍어 성경에 ‘에이레네(εἰρήνη)’, 히브리말로 ‘샬롬(םולש)’입니다.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삶에 평정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그 분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그 근심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져서 인생의 목적에 빗나간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분이시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간구하지 않는 것을 안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셔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위해서 간구하게 하셔서 모든 것이 내가 얻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히 젖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씀이 이런 것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생각 없이 받은 밥상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저희는 너무 곤궁합니다.” 이렇게 하며 받은 밥상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이 말씀은 염려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자라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생명과 모든 조건들이 우리의 염려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심으로써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너희들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 때문에 많이 염려하며 인생을 살지만 그러나 그것이 너희의 인생에 필요한 것일 뿐이지 그것이 너희의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그러면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에서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고, ‘의’는 그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들은 신앙으로 우리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내 삶 구석구석에 주님의 통치를 구현하시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세상 나라들까지 그들을 다스려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요,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도록 주시는 모든 자원들은 우리를 그렇게 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올 한해 한번 생각을 바꿔 보십시오. 지난 해 염려하고 근심하다 보니까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얻은 게 별로 없고 신앙적으로도 염려와 근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사명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올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일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까?’ 그것에 마음을 집중시키며 어떻게 충성스럽게 그 일을 완수할지에 대해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살 때에 나를 핍절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마음을 근심과 염려에 내어주어 삶이 무모하고 쓸모없어지게 되도록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순간순간 마음에 먹구름처럼 피어나는 염려와 근심을 명하여 다스리십시오. 그래서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어 평강을 누리며 올 한해 믿음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필요한 것을 더하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3)
녹취자 : 김세나
6장 19절부터 계속되었던 재물 사랑에 관한 것과 염려와 근심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의 총결론 부분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앞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에 대한 결론으로서,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하고 사태는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정리를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인간의 마음으로 데려 가십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섬김 이야기를 하십니다. 한 사람은 한 주인을 섬기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경쟁하며 우리 마음의 경배를 받기 원하는 또 다른 상대가 있으니 그게 바로 물질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맘몬을 섬길 것이냐,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합니다. 예수님은 탁월한 심리적 분석가처럼 물질에 대해서 탐심을 갖는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 대신 물질을 의지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외국 어느 도시에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개혁신앙의 유산이 잘 간직되어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당연히 주일에는 영업을 하는 사람이 없고 몇 년을 그 동네에 살았어도 술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거나 큰 소리로 싸우는 일을 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거기에 사는 동네 모든 주민들은 일체의 보험을 들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개혁신앙을 좋아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 시대에는 보험이라는 제도가 안 나왔을 때입니다. 그 후에 상업과 교통이 발달되면서 보험이 나왔을 텐데, 그것을 두고 왜 그렇게 해석했을까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었지만 썩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라가 이미 보험처럼 보장해주고 있는 것은 모두 거부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비하고 규모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보험을 들면서 미래의 삶을 대비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정죄 받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덜 신뢰하거나 못 믿어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예화) 저는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주기도문을 문자 그대로 믿는 자매를 만났었습니다. 자신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었지만 월급을 받아 다른 교사들을 섬기는데 사용하거나 선교비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빌리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빌리면 갚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뜻하지 않는 일이 계속 생기니까 갚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경제를 적절하게 관리해서 세월이 흘러 어떤 변화된 환경이 자신에게 찾아와도 이웃에게 누를 끼치거나 혈육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관계들이 깨뜨려지거나 어려워지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공부할 때 이미 가르쳐 드렸지만 일용한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목숨을 부재하기 위한 먹을 것과 마실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복과 안전한 집, 교육,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모든 환경, 심지어 적절한 문화, 예술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러한 각도에서 보면 사실 그 자매의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염려하는 것’은 다릅니다. 들의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를 예로 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미래를 대비하면서 사는 모든 삶을 두고 이야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예수님은 왜 돈 맡은 사람을 두시고 선교활동을 하셨겠습니까? 물론 돈은 별로 없었겠지만 왜 그렇게 관리하시며 일하셨겠습니까? (그러니 이 말씀을 우리는 아무 대비도 없이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다’는 뜻의 희랍어 단어 메림나오(μεριμνάω)는 메림나(μέριμνα)라는 명사에서 옵니다. 사람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쓰여 진 ‘염려’라는 단어가 ‘어떤 물건들을 나누다’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나누어지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아서 무엇인가 하나에 집중하며 헌신하지 못하게 합니다.
옛날부터 전쟁의 역사를 보면 자기보다 강한 군대를 만났을 때에 취하는 전법 중 하나가 아주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돌격 부대를 만들어서 그 부대로 하여금 한 덩어리가 되어서 몰려오는 군대를 절반으로 찢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둘로 나누어 놓은 다음에 자기들도 군대를 나누어서 사람들을 공격하는데, 두 번째 공격할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반 나누어진 군대를 또 나누고, 나누어진 군대를 또다시 나눕니다. 그리고 숨겨놓은 병력들이 협공을 해서 작게 나누어진 그룹들을 하나씩 섭렵하는 것입니다. 그런 전법을 제일 많이 사용하였던 사람이 역사적으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4만 밖에 안 되는 병사로 26만이 몰려오는 페르시아 군대를 대파시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마음을 향한 사탄의 전략도 똑같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면 엄청난 힘이 생겨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에게 염려라는 것을 던져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찢고 분산시키고 흩어지게 만들어서 하나하나 괴멸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온 성도가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 온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었고, 성령의 시대,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깊이 경험하면서 이전의 있었던 무지의 미몽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이러할진대 개인도 그렇게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엄청난 힘이 나옵니다.
남성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이를 셋씩, 혹은 넷씩 낳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여자 홀로 그 양육을 완성해 낸다고 하는 것은 그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건 일입니다. 자기 자식이 아니기에 가끔씩 들여다보거나 길거리 가다가 마주치게 되면 애들이 저절로 자라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셋씩, 넷씩 키워 놓은 사람들에게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면 할 이야기도 많고, 서러운 일도 많고, 하나님의 은혜의 간증도 많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애를 안 낳으려 하겠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애를 안 낳는다고는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누구에게 희생하거나 헌신하며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놀라운 비결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 것입니다. 자녀들을 어떻게든지 잘 길러내야겠다고 하는 그 한 생각뿐인 것입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도 오직 그 생각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하나된 것이 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을 해내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어려움이 몰려오고 때로는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온 교인이 한 마음이 되면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나옵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난관들을 극복하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면 비상하리만치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서 그것을 피하거나 극복하거나 이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그런 수많은 간증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에 가서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을 만나면 이런 일들을 많이 봅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허술해 보이지만 말입니다. 중국의 교회는 질서도 좀 없고, 목회자 자신도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고, 말씀의 깊이나 교인들을 교육하는 시스템도 약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고 쫓겨나면 온 성도의 마음이 하나가 되니까 합심하여 기도하게 되고, 그렇게 기도하면 언제나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끔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간증들을 남깁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씩 극복하고 나면 모든 면에 있어서 점차 어른스러워 지고 힘이 생깁니다. ‘아, 이렇게 되는 거였구나.’ 깨닫게 되면서 변화되어 나갑니다. 마음이 찢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이끄시는 원리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어설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이 하나된 교회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경륜들을 생각할 때면 눈물이 납니다. 마치 새벽에 풀잎 끝에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교회라고 하는 곳도, 한 목회자도, 한 성도도 하나님의 은총의 물방울처럼 그렇게 풀잎 되시는 주님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비하고 지혜롭게 잘 생각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을 것임을 알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기대면서 사는 구차한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우리의 소명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 적절히 준비하며 사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미래에 대한 깊은 염려, 매일 매일 갈라지는 마음, 그리고 찢어지는 정신, 무엇인가 하나님 한분을 향해 마음을 모을 수 없는 심령의 분산,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한 사탄의 계략에 자기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면서 대치해야 합니다.
지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려도 일반적인 염려가 있고 매우 특별한 염려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염려는 우리의 정신 구조에 관한 염려입니다. 그러한 염려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안전하게 합니다. 어제 밤에 11시 10분까지 산책을 했는데 그 때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눈이 하얗게 내렸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넘어지지 않을까?’ 마음을 쓰게 됩니다. 그런 염려는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갑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확 하고 밀려오는 염려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자신이 공중에 던져진 것 같은 소외감이 밀려오고 불안이 엄습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일반적인 우리의 정신적인 구조와 관련된 염려가 아니라 사탄의 역사입니다. 확 밀려와 우리의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염려입니다.
『혼불』이라는 책을 쓴 여성 작가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엄청 감동을 받았습니다. 작가가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데 이 책을 마무리하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온 몸에 이불을 두르고 간신히 앉아 책을 써내려갔다고 합니다. 결국 책을 완성하고 며칠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도 자기 작품을 완성해야겠다고 하는 하나의 사실에 꽂히게 되니까 산산이 찢어지던 온 마음과 정신을 하나로 모아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면서 자기의 일을 완수해 갑니다. 주님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나누어지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는 마음으로 자기를 구원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함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실까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주님이 구원해 주시기 전까지 방황하던 인생들이었는데 이제 구원해 주신 십자가 사랑 안에서 삶의 고상한 목표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찢어지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산다면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기쁘게 보실까, 얼마나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이렇게 마지막 생명을 불꽃처럼 다 태우며 죽어 가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 받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라는 목표를 지닌 우리의 삶이 그 사람의 소설만 못해서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이었습니다. 염려는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데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마치 망가진 차에서 기름이 새듯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뜨려진 데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파고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자신을 내어 맡겨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 새가 날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새가 우리의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염려, 근심이 우리를 스쳐지나갑니다. 그 점에 있어서 사도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로잡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생각을 바꿔 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에는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지, 그분 뒤에서 사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잠시 주님이 안 보셨으면 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하기에 만약 우리가 잘못해서 야단맞을 일이 있다면 야단맞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칭찬받을 일이 있다면 또한 주님께 칭찬받아야 할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힘이 없으면 하나님께 감당할 힘을 구하고, 잘하고 있으면 이렇게 잘 하는 것이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예배가 끝나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신다 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오고, 주로 말미암아 있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니, 주님 안에서 일어나는 그 큰 섭리를 거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주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고, 사랑할 것이고, 나를 돌보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주님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염려하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 다음 말씀이 너무 재밌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염려하다는 주체가 내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표현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일 일에 대해서 너희들이 염려하지 말아라. 내일은 그냥 내일에게 맡겨라. 내일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지 않는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어날 일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며 속을 끓이고 염려해서 오늘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에 가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내일에 염려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희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러면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지금 이 하루의 괴로움도 너희에게 충분한데 왜 내일에 일어날 일까지 마음이 갈라지고 염려하며 오늘 주님을 위해 감사할 수 있는 에너지를 모두 낭비하느냐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에 대해 착실히 대비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염려하지 맙시다. 오늘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모든 염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확고하고 뜨거운 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철같이 강해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한 길을 갑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린 궤적인데,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인생의 궤적을 그리고 싶으십니까? 찢어지고 갈라지고 나누어진 마음으로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인생을 그려서 주님을 위해서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 놓고 세상 욕심위해 산 것도 아닌 그런 삶을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시련과 역경, 고난과 많은 어려움들을 만났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온 올곧은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한번 선택해 보십시오. 마음을 썩이며 끓이며 애간장이 끊어질 듯 염려해도 사탄의 목표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만들고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빼앗은 다음 무기력한 우리를 한 발로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아주 오래된 상투적인 계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뿌리치고 이겨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주님의 뜻 아래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때에도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일어나는 나빠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도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임을 믿어야 하며, 그렇게 인도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 줄을 믿으면 아멘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쟁과 고난으로 얼룩졌던 시대에 찬송가가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마치 백합화가 바람에 흔들릴수록, 가시에 찔릴수록 더 진한 향기를 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과거를 돌아봅시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 있을 때에 주님을 붙들며 살지 않고 근심과 염려로 보내는 동안에는 어둡고 칙칙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 때로는 멸시와 핍박, 모욕이 있어도 주님을 향하여 사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 큰 시련을 통해서 그 시련이 없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어려움이 당하였던 것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를 만나주셨던 신실하신 하나님, 그 인생의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에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끊임없이 눈물 골짜기를 걸어갔으면서도 이런 찬양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간신과 같습니다. 잘 될 때에는 ‘헤헤’ 거리고 하나님께 아부하지만 시련과 어려움이 계속되면 마치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욥처럼 말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어린 아이처럼 그분을 깊이 신뢰하고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주신 삶입니다. 날마다 빛 가운데서, 사랑 가운데서 살면서 매일 아침만나는 이 세상이 눈부셔야 하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감추어주신 그 큰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면서 가슴 벅찬 감격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배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조용히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 벌레 같은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빛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이셔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게 하신 하나님, 그분을 찬송해 보십시오. 아마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좀 더 나은 음식을 먹고 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우리의 코에 호흡이 남아있고 우리의 혈관에 피가 흐르는 동안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에게 주신 그 소명을 따라 우리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기쁨의 삶을 사는 한해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룁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