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백지영
시편 23편 1절이 총론적인고백이라면 2절부터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을 한 다음에 왜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를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2절을 못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다 이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푸른 풀밭이라는 것이 우리들한테는 플레이그라운드이지만 양떼들에게는 도시락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일생을 살았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육체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을 베풀어 주시고 자기를 평안으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과연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라고 고백했다 이 뜻입니다. 하나의 신앙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맨 처음에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각각 우리의 수준에 맞게끔 대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처음 믿고 나서 무엇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이 참 잘 된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 수준에 맞춰서 응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와서는 훨씬 그 신앙의 단계가 상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즉,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를 의의 길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방대한 분량의 메시지들이 들어 있습니다. 우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데패시’라고 나오는데 ‘영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야지만 소생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나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도 보고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하나의 사람으로 보지만 그러나 성경으로 들어가서 인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를 잘 살펴보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순복음교회 같은 곳에서는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보면 혼이라는 말과 영이라는 말이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과 육체 둘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서 이 물건의 구성요소가 무엇일까를 알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공장에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맨 처음 창조될 때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보면 거기가 공장입니다. 하나님이 흙을 모으셨습니다. 그런데 흙이라는 것이 히브리말로 ‘압바르’라는 단어인데 원래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먼지들을 티끌을 모아서 하나님이 빚으셨습니다. 이것이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잠시 육체로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꾸 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딸도 지금 23살이지만 그때 나이쯤 되면 집에서 세수만 하고 와도 예쁩니다. 그리고 화장을 안 해도 뽀송뽀송하고 눈곱이 끼어도 예쁩니다. 아무 티셔츠나 하나 걸쳐도 예쁩니다. 그런데 23살을 기점으로 서서히 정점에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떨어지는 것만큼 생명이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죽음은 무(無)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일정기간 동안은 그것이 육체로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티끌처럼 흩어져서 무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을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화장품을 영어로 'cosmetics'라고 합니다. 희랍어 ‘코스모스’에서 왔습니다. 코스모스는 우주, 질서 이런 뜻입니다. 열아홉 스물 이런 때도 빨갛게 칠하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데 안 해도 예쁩니다. 그런데 죽음의 기운이 서서히 들어옵니다. 30대 후반을 지나 40대 이렇게 지나가면 그 죽음의 기운이 현저하게 얼굴에 나타납니다. 볼 살이 튀어나오고 심술 볼이 생기고 팽팽하던 것은 다 쭈굴쭈굴해 집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얼굴에 질서가 없으니까 화장품으로 질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서 화장을 하는 것은 겸손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서 화장을 안 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화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서를 잡아주는 게 화장품의 역할이기 때문에 커즈메틱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학술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10대에 화장을 하는 것을 치장, 20대 때는 단장, 30대 때는 화장, 40대 때에는 변장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이 완전성으로 멀어져서 무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육체와 함께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후에 ‘후’ 하고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이 생기가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부를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후’하는 것은 말하자면 창조행위입니다. ‘탁탁’ 두드리면 식당에서 종업원이 오듯이 ‘후’ 하고 하나님이 불어넣으시자 영혼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과 육체의 결합에 의해서 인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과 육체는 결코 떨어지지 않고 딱 붙어서 육체와 영혼이 긴밀하게 작용을 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일생을.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는 기능이 있는데 고등한 기능이 있고 하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하등한 기능은 먹고 싸고 마시고 배고프면 추위를 느끼고 이런 것들은 하등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쾌락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고 이런 것들은 하등한 기능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진리를 탐구하고 올바른 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 이해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영혼의 고등한 기능입니다.
하등한 영혼의 기능은 영적인 생활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등한 영혼의 기능은 계속 작동을 합니다. 그런데 고등한 기능은 거의 죽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멸절된 것이지만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고 흙이 되어서 없어지고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죽음이라는 의미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주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게 “저 사람 변질했구먼.” 이 이야기하고 아침에 콩나물 국 뚜껑을 열어보면서 “변질됐네.”하고 그 의미가 다르듯이,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와 영혼이 죽었다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는 의미는 진짜 눈을 감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불신자의 영혼이든 신자의 영혼이든지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고등한 기능이 거의 작동을 안 할 때 그리고 하등한 기능만 살아서 활발하게 움직일 때 그것을 죽은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영혼의 죽은 행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살인과 미움과 간음과 거짓말함과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무엇이냐? 영혼은 결국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의 경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경향성이 인간 안에서 크게 세 가지 중요한 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생각하는 지성, 느끼고 감동을 받는 감정, 무엇을 결정하는 의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작용이 모두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은 수많은 인간의 행동을 생산해 내고 창조적인 사색들을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공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나고 온 발자국을 보면 현재 이 사람의 마음이 어떤 성향인지 알 수 있고 성향을 보면 이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가 될지 눈에 이미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이런 영혼이 있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아주 건강하게 움직여서 하등한 기능을 적절하게 통제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나가다가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보니까 통닭집에 통닭이 있습니다. “저것 하나 시켜 먹고 얼른 도망쳐?” 배는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 그런 도둑질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통제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 여자 참 예쁘다. 쾌락을 즐기고 싶다.”, “안되지. 내가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기능이 적절히 통제가 안 되기 때문에 살인, 성폭행, 모든 죄, 가정 폭력 이런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오늘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것이 주어가 빠졌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주어가 나옵니다. “당신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 당신은 앞에 나오는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기서 ‘소생 시킨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야’라는 동사인데 ‘살아 있게 하다.’ 그런 뜻입니다. 즉 “당신이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고” 그런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시인같이 훌륭한 사람도 언젠가는 영혼이 죽은 것 같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있는 것 같은 영혼을 하나님이 확 살아나게 하셨는데 그때 감동과 은혜가 얼마나 켰는지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어린 한 마리의 양이고 하나님은 사랑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는 목자이시다.”라는 것을 깊이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푸른 초장에서 꼴을 먹여주시는 그것보다도 훨씬 자신에게 위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소생이 안 되면 반대로 낙담해서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침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침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요즘 우울하게 지내고 힘들어 하십니까? 집안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시어머니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침체가 시어머니 때문에 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면 그제야 한 맺힌 것처럼 시어머니 이야기를 막 합니다. 한편 다른 교역자가 시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시어머니도 침체 되어 있습니다. “권사님, 왜 그렇게 침체되어 있으세요. 새벽기도도 안 나오시고.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요. 저는 변함없이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하는데 우리 며느리 때문에 이렇게 침체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 하와의 후손입니다. “네가 선악과의 실과를 따먹었느냐?” 그러면 “예.” 그러면 될 터인데 “저 뱀이”, 아담도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그런 말을 왜 붙입니까? 평생 실수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을 만난 잘못, 저 여자가 줘서 내가 먹었습니다. 핑계를 많이 대는데 사실 그것은 모두 핑계일 뿐이고 마지막에 다 종합을 해 보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침체되어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는 영혼이 깊은 침체에 들어가는 원인을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제가 이것을 다 설명을 못합니다. 이해를 하십시오. 첫째가 무지, 두 번째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 세 번째가 죄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공통된 토대를 이루고 있는 영혼의 침체의 주범이 바로 “죄” 입니다.
시인 다윗은 사무엘하 11장까지만 보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말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마 대표적인 순결의 사람 두 사람을 꼽으라면 요셉과 이 사람 다윗을 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12장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침체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늘 죄와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두 개의 커다란 범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구조사는 그냥 인구조사가 아니라 나라에 있는 마병, 군대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과 마필의 수가 얼마인지를 헤아리는 센서스입니다. 행정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너무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조사를 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 보다는 자기네 나라의 강성함을 의지하는 이방나라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까봐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명령을 어기고 기어이 인구조사를 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십만 오천 명이 죽는 온역을 내리십니다. 그 끔찍한 환난을 당하면서 회개하고 벗어나게 됩니다.
그보다도 더 오랫동안 더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은 너무 너무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다윗을 비난할 만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는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영혼의 침체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때 뭐라고 토로를 합니까?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주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그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실 때의 느끼는 그 공포는 오늘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공포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님 앞에 고백하기를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전임자 사울이 성령의 거둠을 당하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악신이 임하여 그가 미치광이가 되어버려서 저주받은 가운데 죽습니다. 자신이 그런 말로를 맞이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다윗으로서는 내려가 볼 수 없었던 저 영혼의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것입니다.
영국의 17세기의 청교도 존 오웬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 중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었다.” 프리스턴의 신학자였던 벤자민 워필드라고 하는 사람은 이 부분을 51편에서 해석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윗은 일찍이 가 본 적이 없었던 인간의 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 주님이 아니면 자기를 고칠 수 없는 그런 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만약에 영혼의 침체의 원인이라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기도도 안 되고 마음의 뜨거운 감동도 없을까? 나는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그런 죄를 지은 적도 없는데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죄의 크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죄의 질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이나 도둑질은 양적으로 큰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냥 부패하고 안일하게 산다거나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크기로서는 작은 죄입니다. 그러나 그 질은 동질입니다.
불쾌하시겠지만 들어보십시오. 아침이면 동네에 가끔 청소차가 옵니다. 그러면서 음악이 나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음악이 나오는데 똥 푸는 차입니다. 베토벤이 참 힘들어할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자기 음악을 똥 푸는 차에다 틀어놓고 다니니 말입니다. 아침에 엘리제를 위하여가 나오면서 똥 푸는 차가 와서는 파이프를 갖다가 대고 빨아댑니다. 어마어마한 양이 빨려 나갑니다. 그리고 나중에 몇 리터라고 고지서를 끊어주고는 출렁 출렁 거리면서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똥을 갖다가 잘 비벼서 채로 몇 번을 쳐서 노란 국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스프레이다 넣었습니다. 공중에다 확 뿌렸습니다. 그러면 먼지 같은 노란 알갱이들이 아름답게 확 퍼집니다. 이 광경과 저 출렁거리는 것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두 개는 성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은혜를 받는 것 못지않게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 회개의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기를 호흡하면서 유해의 물질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 세상에 생존하면서 마음으로나 행동으로나 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크고 작은 죄들을 짓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정리하고 깨끗케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죄를 짓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회개를 안 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자꾸 행복하자라는 구호가 넘치는데 사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의 관심은 인간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이용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를 꿈꾸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어떻게 하면 거룩해 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돈이나 명예나 성이나 쾌락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도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룩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거룩함의 끝에서 항상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사한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인간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면, 거룩함이 접혀 있는 것을 쭉쭉 펼치면 그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결국은 그 행복을 계속 접어서 시간 속으로 밀어 집어넣게 되면 이것이 홀리니스(holiness,) 거룩함입니다.
그러면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을 것입니다. “왜 나는 왜 성령 충만하지 못할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왜 나에게는 이렇게 예수를 믿는 기쁨이 없을까?”, “왜 나는 내가 믿는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네가 예수를 안 믿고 좋은 차타고 다니고 큰 집에서 살지만 나는 비록 셋집에 살아도 예수 때문에 너보다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을까 ?”그런 의문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들어가 보면 뭐냐 하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여기서 한 200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칩시다. 예배가 매주일 그럴 수는 없겠지만 모든 교인들이 자리를 뜰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신데 나는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기에는 너무 비천한 죄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2세기의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 테루툴리아누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평생을 순교하기 위해서 안달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꽤 오래되신 분들은 내 생애에 정말 잊히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신앙의 감격을 경험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춤추고 노래하고 돈 많이 벌었을 때가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인간인가를 깨닫고 교회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 그런 특별한 은혜의 감격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강물처럼 밀려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예배가 끝난 뒤에 자리를 뜰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여러분의 죄가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적시며 참회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교회에서든 집에서든 가정 예배에서든 주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하면 자기가 지은 많은 죄가 생각이 나서 성경 찬송에 얼굴을 묻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의 많은 사랑에 비해서 내가 살아온 삶이 너무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이었다고 진실하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 적이 언제였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진지함을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이 믿으니까 엄벙덤벙 따라다니면서 흉내나 내는 생활로서는 절대 예수 안 믿은 것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정말 언제 회개했습니까? 그것을 묻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는 주된 원인이 죄에 있다면,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성경이 둘도 아니고 오직 하나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입니다. 회개란 자신이 지은 죄를 깊이 슬퍼하고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원래의 순결함 때문이 아니라 위대한 회개 때문이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일생을 살면서 눈물로 여러분의 요가 젖을 정도로 회개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어린이 회심집회’를 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는데 회개해 본 적이 없습니다. 회심을 안 한 것입니다. 회심안 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엄마 아빠들이 자기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엄마하고 일생을 같이 살면서 엄마가 회개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래야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혼이 살아나서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의 영혼의 하등한 기능을 다스리고 우리의 육체를 강하게 꽉 붙들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오늘 영혼이 깊은 침체에 빠져 있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신문에 나지 않은 것만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영혼의 깊은 소생함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는 먹을 것을 주시는 은혜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하나님,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 하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제 신앙이 원숙해 지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원래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라티아’ ‘그레이스’, 이것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은 거저가 아닙니다. 그래서 스페인어권이나 이탈리아어권 같은 데 가면 원 플러스 원 할 때 ‘그라시아’ 혹은 ‘그라티아’라고 합니다. 하나 값을 내면 하나만 줘야 하는데 하나를 더 주는 것입니다. 뭐로? 공짜로. 그래서 ‘그라시아스’ 혹은 ‘그라티아’라고 합니다. 공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공짜이지만 그래서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에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는 그라티아, 공짜이지만 은혜 안에는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신 의도와 목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공짜로 그것을 받으면서 그 의도대로 공짜로 받은 것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주시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그 사람의 영혼도 건강해 지게 되지만, 그것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 자신이 계속 망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군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말도 되지 않는 일을 보면서 매우 염려합니다. 오늘도 신문에 보니까 특전사 군인들이 부하가 말을 안 들으면 데려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놓으라고 거기다 전기를 플러스마이너스를 갖다 댔답니다. 그래서 구속됐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그래서 엊그제 설교할 때 이런 군대에 있느니 차라리 탈영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지키고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군대가 자신들 군인의 생명을 개 목숨만도 못하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진정한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군인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여기도 군인 있으면 각성하십시오. 절대 그런 정신을 가지고는 나라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절대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군대로 어떻게 전쟁에서 이기겠습니까? 사랑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대오 각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보고 혓바닥을 내밀라고 하고 백 볼트까지는 아니지만 자전거 돌리는 배터리를 갖다가 대면 물고기들도 이만한 게 벌떡벌떡 죽어서 뜨는데 그것을 혓바닥에다가 댄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합니다. 그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이 벌써 얼마나 망가진 인간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 폭력을 행했을 때 그 폭력을 당하여 상처를 입은 사람보다 더 나쁜 것이 폭력을 행한 그 사람의 마음에 이미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때렸습니다. 찢어지면서 피가 철철 흐릅니다. 그럼 우리가 볼 때는 때린 사람은 가해자이고 맞은 사람은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맞은 사람은 갑자기 습격을 당해서 피가 흐르지만, 때린 사람은 사람을 그렇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습성이 그 사람 안에 생겨난 것입니다. 반대 이야기도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어느 집사님을 내가 어느 날 만나서 얼마나 어려우시겠느냐고 백만 원쯤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받은 사람이 혜택을 받은 것이고 나는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은 엉겁결에 돈을 받았지만 이 사람 마음속에는 그 행동을 함으로써 불쌍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성품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군인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들고 누군가를 고문할 수 있는 힘도 국민이 준 세금으로 그 힘이 생긴 것입니다. 아침에 밥 끓여 먹었으니까 그 힘이 생겼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전기 줄도 국민의 세금으로 산 것입니다. 그 고문하는 장소도 세금으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준 세금으로 그런 건물을 만들어서 남의 집 자식을 혓바닥을 벌리고 전기로 고문하라는 의도를 가지고 세금을 낸 적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의도로 우리 세금을 쓴다면 우리는 세금을 돌려받을 용의도 있습니다.
그러면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거저 주시지만 그냥 주기만 했을 뿐 너희 맘대로 해라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자녀들이 있습니다. 고민 많이 하실 것입니다. 분당에 사시면서. 외고를 보내야 하나 과외를 시켜야 하나, 오늘도 오면서 신문 보니까 서울대생 88.7%가 사교육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사교육 안 시키면 좋은 대학교도 못 들어갑니다. 물론 사교육 열심히 시켜도 아예 아무데도 못 들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계부를 쓰지만 아들 보여주려고 가계부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대학 졸업했을 때 이게 여태까지 유치원 때부터 들어간 돈이니 이제 할부로 갚으라고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자녀를 위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용돈주고 필요하다면 병원에 데리고 가고 심지어는 마지막에 자기 장기라도 팔아서 자식을 살릴 용의가 부모들에게는 있습니다. 안 그러면 부모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 자식이 대학을 보냈는데 대학에 가서 공부는 안 하고 동거생활이나 하고 나쁜 짓이나 하고 다니면 가만 내버려 두겠습니까? 쫓아가서 몽둥이를 휘둘러서라도 야단을 칠 것입니다. 자식에게 해 준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해 준 것이지만 그렇게 살라고 그런 의도로 베풀어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실망이 너무나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부모들이 자식을 보면서 모든 것을 거저 주면서도 자식의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은혜”, ‘그라티아’라고 하는 이 말 속에는 이미 소명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잘못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을 너무 흐리멍덩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배웁니다. “우리 모두 지옥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 몇 사람만 살려주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런 극단적인 예를 구원파에서 봅니다. 성화를 안 가르칩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모든 은혜의 은혜 됨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관점에서 우리의 구원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관점,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그냥 예수 믿고 천국가기 위해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날 동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분투하고 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라는 소명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소명을 따라서 그 방향으로 살아가면 주신 은혜도 계속 증폭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건조하고 그럴 때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지만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안 됩니다. 결국은 삶과 기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사는 것만큼만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것만큼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는 방향과 기도하는 방향이 일치할 때 그 기도가 힘이 있는 것이지 사는 방향과 기도하는 방향이 반대일 경우에 삶도 기도도 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3절을 거두절미하고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다 이 뜻입니다. 누구를? 이 시인을. 하나님이 이 시인 다윗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명료해 졌습니다. “의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어 성경에 ‘데레크 체다카타’라고 나옵니다. ‘체다카’ 혹은 ‘체데크’라는 단어입니다. 그 “의”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의”라고 하는 것은 불의의 반대말입니다. 불의의 반대가 의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서 의가 도대체 무엇인가? 의, 불의 이렇게 따지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었습니다. 그 율법을 따라서 거기에 부합하는 삶은 의로운 삶이고 그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지 않는 삶은 불의한 삶입니다. 오늘 신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생활, 이것은 의로운 삶이고,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삶은 불의한 삶입니다.
어느 날 교사인 어느 교인이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뇌물이 아니라 학부모가 선의라고 하면서 봉투를 갖다 주는데 이것을 받아서 쓰는 것이 죄입니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과연 학부모가 담임선생님에게 돈을 갖다 줄 때 아무 조건 없는 선의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올해만 주는 게 아니라 그 아이가 2학년 된 다음에도 1학년 선생님에게 돈 가져오고, 2학년 된 다음에도 가져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1학년 때만 줍니다. 그리고 2학년 때는 2학년 선생님에게 줍니다. 예를 들어서 이러면 좋습니다. 2학년이 됐는데 1학년 선생님을 찾아가서, “우리 애가 학교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1학년 때 선생님이 너무 잘 가르쳐 주셔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봉투를 갖다 주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것은 선의입니다. 그것도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년에 갖다 드릴 테니까 올해 좀 잘 해 주십시오.”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학부모가 있습니까? 여러분도 많이 갖다 줘 보았을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우리 아들도 그것 때문에 미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나도 돈 있었습니다. 심지어 학교 선생님을 하는 우리 친척이 먹으려고 하는 선생님은 어쩔 수가 없으니 갖다 주라고 저한테 충고했습니다. 내가 절대 갖다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짜 나쁜 선생님들 많았습니다. 여기 선생님 있으면 죄송합니다만 우리 아들을 짝을 다 지워놓고 혼자 남겨서 저 뒤에 앉히고 그랬습니다. 왕따 시키고. 그래서 내가 절대로 갖다 주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가끔 내 책 한권씩 갖다 주었습니다.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쉽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까지 그렇게 살면 희망이 없습니다. 당연히 성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이 돈 받으면 안 된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 전체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 앉혀놓고 내가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적당한 직업 못 구했으면 열심히 노력해서 학교 선생님이 되라. 그리고 선생님으로 부임하는 순간 유서를 써라. 나는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을 위해서 순교하겠노라. 일체의 봉투를 거절하고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그리고 살아가라.” 아이들이 선생님을 너무너무 존경합니다. 무시하고 학교 권위를 짓밟는다고 하는데 선생님이 눈에 안 차서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눈에 꽉 차면 ‘죽어!’ 그러면 죽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스승을 갈망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율법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공무원도 나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무슨 질문의 가치나 있는 이야기입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어느 장로님인가 집사님이 투신자살해서 죽었습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정직하게.
그러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성도가 와서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제 전 재산이 몇 십억 되는데 목사님을 위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써주십시오.” 그러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여러 가지 생각이 막 오고 갈 것입니다. “아, 드디어 교회를 새로 지으라고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는가보다.” 어느 교인이 새벽기도를 하는데 살금살금 다가 왔습니다.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우리 집에 아파트가 있습니다. 제가 이 나이에 그것으로 뭐 하겠습니까? 목사님 드릴 테니 선한 일에 써주십시오.” 몇 번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시지요.”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의와 불의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또렷하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 불의 이런 것들을 장엄하게만 생각을 합니다. “너 예수 믿을래? 죽을래?”, “주여 죽겠나이다.” 우리같이 자유스러운 국가에서는 그런 일 안 생깁니다. 어느 날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자매 목에다 칼을 대고 “예수님 사진에 침 뱉을래? 죽을래?”, “아, 그때 되면 나는 말할 거야 나는 죽어도 예수님을 사랑해요. 으악.” 그것은 옛날 625때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지.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꽤 유명한 강사였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오죽했으면 카센터에서 제 차를 보더니 아저씨 영업하시느냐고 그랬습니다. 1년에 5만 킬로씩 타고 다니니까. 그런 때였는데 그날도 충청도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집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일찌감치 출발을 했는데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한참을 정체했습니다. 간신히 지방도로 빠져나오니까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막 달렸습니다. 차도 없으니까 100킬로 정도로 갔는데 저 멀리 경찰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여서 60으로 갔습니다. 그랬는데 경찰이 탁 세우는 것입니다. “면허증 좀 보여주십시오.”, “왜요?”, “속도 위반하셨습니다.”, “아니 60킬로로 가는데 무슨 위반입니까?”, “여기서는 위반안하셨는데 산 뒤편에서 위반하셨습니다.”, “산 뒤편에서 위반한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십니까?” 거기 자기 동료가 있는데 속도를 스피드 번으로 쏴서 자기에게 무전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내가 대학교수인데 강연요청이 있어서 가는 중에 시간이 급해서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얼른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관이 이야기했습니다. “아, 교수님이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교수님 너무 걱정 마세요.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 드릴게요.” 무슨 소리인지도 몰랐습니다. 어쨌든 받아서 햇빛가리개에 끼우고 갔습니다. 간신히 도착해서 집회를 끝내고 밤중에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햇빛가리개에 끼워놓은 고지서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낼 것은 빨리 빨리 내자는 주의였기 때문에 직원을 시킬까 하다가 은행가는 길에 내가 내자 생각하고 들고 갔습니다. 은행에 가서 금액을 확인하는데 속도위반이 그때 한 2만 원쯤 되던 시절인데 6천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 이렇게 싼 딱지가 어디 있나 6만원인가 하고 다시 보았습니다. 6천원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상하다.” 그때 경찰관이 했던 말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교수님, 너무 걱정 마세요. 싼 걸로 끊어 드릴게요.”, “아!” 그리고 다시 보았습니다. “범칙금 6000원, 과태료 7200원” 그리고 범칙금 사유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금연 장소에서 담배 피다 걸렸음.” 그것을 만약 교회 직원을 주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게 한 20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깊이 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교통법규를 지키자. 그리고 두 번째는 위반을 했을 경우는 달게 벌을 받고 반성하자.”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는 적발된 적도 별로 없지만 적발돼도 한 번도 한번만 봐 달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인들까지 그렇게 살아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장관들 청문회 나와서 다운계약서 때문에 욕을 많이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동정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그랬다면 나쁜 놈인데 한 20년 전에는 사실 일반화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가난한 동네 다니면서 겨우 전세 살다가 학교에 교수로 들어가니까 학교에서 5천만 원을 무이자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빌라에 전세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집 주인이 집사님인데 어느 날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자꾸 이 집을 김 목사님 댁에 팔라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꾸 집을 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기도하더니 드디어 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가격에 샀습니다. 나중에 다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드렸지만 어쨌든 샀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집을 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세금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법무사에 가서 세금이 얼마냐고 하니까 이만큼이라고 그래서 놀라서 그 조그만 집이 무슨 세금이 그렇게 많으냐고 했더니 법무사 직원이, “너무 많아요? 아줌마, 그럼 반만 내세요.” 무슨 세금이 그런 세금이 있습니까? 그러더니 하는 말이 주인하고 서로 양해하셔서 실제 거래된 가격보다 한 30프로 정도 낮게 써서 가짜 계약서를 만들어 오면 세금을 절반 정도만 내시면 된다고 아주 친절하게 지도를 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나한테 물어봅니다. “여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하지?”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 생각해 봐라. 집을 파는 사람은 집사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앉아서 그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성령님이 기뻐하시겠느냐? 그리고 로마서 13장에 보면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바치라고 그랬는데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 다 내라.” 그런데 정말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벙어리저금통가지 다 털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딱 맞춰서 법무사 사무실에 갔습니다. “세금 내러 왔습니다.”, “다운 계약서 써오셨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세금 다 내려고요.” 그때 그 자매 눈빛이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아, 정말 부끄럽다 이렇게 의로운 시민이 있는데 내가 왜 탈세를 지도했을까? 정말 고개를 들 수 없다.” 이런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겠습니까? 아니면 “어이, 병신.” 전자였을까요? 후자였을까요? 그래서 그것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 큰 시험이 왔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당은 5년 되었다고 하는데 너무너무 하려한 천국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4번씩 물을 퍼내는 지하 예배당에서 곰팡이 피는 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지하실에 4년 정도 있다가 7명이 개척을 해서 250명쯤 됐는데 도저히 거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못 들어와서. 그래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한 3년 만에 천명이 됐습니다. 다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평촌에 공장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36억 원에 그것을 사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도 너무 마음이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계약을 했는데 건축위원들이 다녀와서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36억 원인데 30억짜리 계약서를 쓰잡니다.” 다운계약서를 쓰자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6억은 비자금으로 달란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자금이 한창 얘기 돌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사업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았습니다. 85프로가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문제도 안 되고 세무서에서 신경도 안 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회계사인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하기도 하는데 그런데 장부를 두 개 쓰셔야 합니다. 가짜 장부, 진짜 장부.” 그때 딱 왔습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금이 얼마냐고 그러더냐고 그랬더니 3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가서 전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자금으로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당신은 36억을 달라고 했지만 우리가 39억을 드리겠다고 하십시오.” 그래가지고 36억짜리를 39억에 샀습니다. 말이 됩니까? 36억을 33억에 사야지. 지금은 우리 교회 정도 돼서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닌데, 그 당시에는 교회 돈 통에 1500만원밖에 없는 상태에서 36억짜리를 39억에 계약을 했으니까 3억은 올려다 볼 수도 없는 돈이었습니다. 다 빚 얻어서 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의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 시간에 그 고민을 다 이야기를 하면서 결정을 했을 때 성도들의 마음속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 길은 의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 충만하게 해 달라고, 세상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면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를 가지고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하고 우리 교회하고 비교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의 주관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목사집 아이들이 유치원, 어린이집 이런 데를 다 무료로 다니는 것입니다. 수입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구청에서 동사무소에서 영세민 혜택을 준다는 것입니다. 밝힐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에서 저 바닥으로 내려갈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 교회들의 어깨를 견줄 수 있을 정도로까지는 부목사님들을 대우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당신들 잘 생각해 봐라. 당신들 연봉이 이만큼이다. 당신들이 어떻게 영세민이냐? 당신네 집 아이들이 한 명 혹은 두 명이 어린이집을 공짜로 다니니까 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밀려나는 것이다. 당신들 수입의 절반도 안 되는 아이들이 밀려난다.” 실지로 무직자로 등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카드를 안 만들어줍니다. 전 몰랐습니다. 알게 되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한 것이 이것입니다. “자, 우리가 여태까지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삶이 의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러지 말자. 우리 모두 세금 낸다고 해라.” 그리고 세무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무서에서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겠다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그때 교역자가 25명밖에 안 되었는데 일 년 세금이 6800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순복음교회에서 세금 냈느니 안냈느니 이야기가 나왔을 때, 냈다 세금 4400만원 냈다고 그랬을 때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4400만원 그것은 한 사람 세금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 세금도 안 됩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공평한 것이 아니다. 우리 세금내고 싶습니다.”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상으로 성직자들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금 안 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 내는 게 기독교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되어서 내고 싶다고 하니까 아주 귀찮아하는 것입니다. 귀찮아하든지 말든지 우리는 내겠다고 그 다음서부터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세금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직원들은 벌써 진작 했고, 강사 목사님이 와서 설교하고 가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씁니다. “아무개 목사님이 설교하고 50만원 받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한테 27800원 세금 뗐습니다. 세무서에 통보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사람이 세금을 안내면 세무서에서 연락이 옵니다. “당신 열린 교회에서 50만원 받아 갔다고 하는데 왜 신고 안 하느냐?” 전부다 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애들이 전부 다 돈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혜택이 다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보금자리 주택 들어가는 것이 일 순위가 삼 순위, 사 순위로 계속 밀려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 지불해야 할 대가다.” “아멘.”하면서도 얼마나 속이 쓰렸겠습니까? 그렇게 해야 됩니다. 물론 저도 세금 냈습니다. 그랬더니 좋은 것도 있습니다. 매일 은행에서 연락이 옵니다. 교역자들 집으로. 신용대출해 주겠다고, 직장이 너무 탄탄하고 세금을 많이 내니까 1억까지 대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담보 없이.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설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하나님 사랑 많이 받고 성도들에게 사랑받고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세상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지 은혜를 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은혜들이 올바른 데로 쓰이지 않으면서 자원이 낭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그러면 그 은혜 때문에 헌금도 하고 교회에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상에서 사는 삶을 보면 사업하는 사람은 탈세하고 사기치고 다 합니다. 뇌물주고 지저분한 권력 커넥션들에 얽혀가지고 살면서 자기는 신앙 생활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사용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삶을 살다 보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세속적인 사람과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 때문에는 충돌하지 말고 내 모든 것을 양보하고 용서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한다고 생각될 때는 원수져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를 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람들과 화합을 한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고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결국 오버해서 죽은 것 아닙니까? 얼마든지 안 그럴 수도 있는데, 제 3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만드시고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 정말 우리는 부끄럽다. 정말 저렇게 사는 것이 참다운 인생이구나. 그리고 저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저들보다 부자이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불안하고 우리의 삶은 허무하구나.” 그것을 깨달으라고 하나님께서 그런 삶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한때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영토를 넓히기 위함이었습니다. 공격만 하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온 교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영토를 넓히기 위한 침략전쟁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때 나온 찬송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 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반대하는 권력이 너무 강합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거나 혹은 불의의 억압이 됩니다. 그럴 때 도저히 그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는 정의감을 가졌다면,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속에서 장렬하게 죽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 회퍼’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다 내게로 오너라. 나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것이 신약성경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때로는 어마어마한 출혈을 요구합니다. 외톨이가 되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위협을 당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영혼을 소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따라서 그 진리를 따라서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섬에서 겨울에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풍랑이 너무 심하게 일어서 배가 안 올 줄 알았는데 여객선이 왔습니다. 주의보만 안 떨어지면 배는 무조건 출항합니다. 이렇게 풍랑이 이는데 갈 수 있느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발을 했습니다. 웬걸, 항구를 떠나서 인천에 도달해야 될 시간이 됐는데 반밖에 못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인천에서 무전이 떨어졌습니다. 큰 풍랑이 오고 있으니까 빨리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똑바로 가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를 것 같은데 배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캄캄해 졌습니다. 구명동의를 입고 배 밑창에 누워 있는데 ‘쾅’하고 때리니까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반대편으로 떨어지면서 생선이 후두두둑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때 예수도 안 믿었을 때이니까 ‘아, 여기서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너무 감동적이었던 장면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미국사람들이 선교헌금을 해 가지고 발전기를 돌려서 그 섬에다가 민가에 보급을 했습니다. 열시면 전기가 끊어지는 데, 딱 전기가 끊어지니까 사방이 완전히 깜깜하고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겠는데 딱 하나의 불빛이 깜빡 깜빡하는데 등대였습니다. 그것은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 등대의 불빛 하나가 저렇게 소중하구나.” 동서남북 어디인지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그게 딱 하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로 대피하는 것입니다.
“에이, 뭐 저 사람도 그렇게 사는데 나 하나가지고 무슨 힘이 있겠어요? 저 사람도 그런데, 저 사람도 그런데,” 그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맺는 관계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저 사람들이 나를 보고 감동을 받겠지?’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제껏 내게 베푸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 기도 응답의 은혜, 찬송의 은혜, 말씀을 깨달은 은혜, 좋은 교회로 인도하신 은혜,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의 자녀들을 입히시고, 시시때때로 지식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가르쳐 주신 모든 은혜가 나로 하여금 이때에 이렇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되, 그것이 도저히 나의 생명과 양립할 수 없을 때는 장렬하게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장중한 소명을 내포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주시기를,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는 필요하면 내가 의의 길을 걸어가다가 시련이 오면 당할 것이고, 고난이 오면 견딜 것이며, 마지막에 주님이 내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장엄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죽겠다는 그 기도까지 은혜 주시기를 구하는 그 기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은혜 받고 싶지요? 그 은혜 받아서 뭐하시렵니까? 그냥 좋자고?” 은혜는 애들 장남감이나 위로용품이 아닙니다. 애완견이 아닙니다. “살라”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어두운 이 세상의 빛으로 맛 잃은 이 세상에 소금으로 “살라”고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많이 받고 어두운 세상에서 이렇게 빛처럼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