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시 23:3)
녹취자: 김미영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했고, 2절에서 부터는 왜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자기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육신을 위한 공급과 그리고 영혼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게 된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인 이유를 이제는 육적인 환경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생하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하야’인데 이것은 ‘살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 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다고 했으니 다윗도 언젠가는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때가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시인 다윗은 아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고, 또한 하나님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11장까지 그는 순결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만날 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 믿음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그의 생애 중 지은 두 가지 커다란 죄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왕으로서 인구조사를 한 것은 행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구조사는 사람의 수만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나갈 군인과 말의 숫자까지 헤아려 자신의 왕국의 강함을 확인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한 나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군대나 말을 의지하고 병기를 의지하는 나라가 아니라 아무리 나라가 커져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인구조사를 한 다윗에게 임했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게 됩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죄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다윗은 상처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특히 아버지로부터는 끔찍한 편애를 경험하며 상처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신은 형들을 사랑했으나 형들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 결혼한 여자는 자기가 받은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수준이 맞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식들은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자기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그 강간범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난 그의 일생 속에 단 한 사람 사랑한 사람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여자는 이미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 충성스런 헷 사람 우리아를 살인해야 했고, 이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가 다윗의 심령에 임했습니다.
그는 일평생 성령의 사람이었고, 하나님 사랑의 사람 이었습니다마는 이 죄로 말미암아서 구원의 기쁨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커다란 위기를 느꼈습니다. 실로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을 어둠 속에서 보냈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매일 밤마다 침상을 띄우며 회개해야 했습니다. 이 때 그는 영혼의 암흑을 경험했고 자신의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 같은 비참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다시 자신의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째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움직여서 섭리의 질서를 따라서 우리에게 주는 복입니다. 사업을 했는데 돈을 많이 벌었다 혹은 능력을 인정받아서 회사에서 승진을 했다 아이가 결혼을 했는데 좋은 혼처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뭐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이것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복이 있는데 이것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은혜와 사랑을 경험함으로 영혼이 살아나는 축복입니다.
이 영적인 축복은 육적인 축복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고 섭리적인 축복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지 않지만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교만하고 하나님을 등지던 사람을 바꾸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이기적이고 그리고 파괴적이던 사람을 바꾸어 남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덕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영혼의 깊은 침체의 경험을 시인들은 노래합니다. 이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혼의 침체는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소외된 영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죄에 가까워지는 상태를 우리는 침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에는 구원 받았어도 성령의 열매가 충만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나의 제자가 될 것이요 또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침체 상태에 있을 때에는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지 못합니다. 그 대신 육체의 열매를 맺습니다. 시기와 분쟁, 살인, 음욕, 이런 많은 죄들의 열매를 맺게 되어서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생생한 은혜, 거룩한 사랑을 간직하던 시인들이 무엇 때문에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될까요? 성경은, 시편은 크게 세 가지로 그 원인을 이야기 하는데 첫 째는 하나님께 대한 무지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의 깊은 침체가 오고, 그 침체가 왔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마치 자기 질병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죽을병에 걸려도 병의 징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 째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입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은 영혼의 깊은 침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보다 더 훨씬 보편적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로 말미암는 침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와 사랑, 은혜의 경험들을 빼앗아 가 버리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느낄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돌처럼 굳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아! 죄라면 나는 자신 있습니다. 나는 신문에 날 만한, 경찰서에 잡혀갈 만한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성경에서 영혼의 침체를 불러오는 죄는 아닙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비이커에 차가운 물을 담고 실험을 했습니다. 불꽃을 조절해서 매 초마다 0.02도씩 상승하게 만들게 거기에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물론 그 개구리는 마음만 먹으면 풀쩍 뛰어서 도망칠 수 있는 접시처럼 납작한 비이커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시간 20분 만에 개구리가 삶아진 채로 발견 되었습니다. 아마 미지근한 물에다가 개구리를 넣었으면 개구리가 펄쩍 뛰어서 도망갔을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물이 데워지고 자신은 거기에서 삶아졌던 것입니다.
어떤 군인들이 개울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세 명의 부하를 놓고 커다란 자루 하나씩을 주면서 명령했습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가서 이 자루에다 각각 50킬로씩 돌멩이를 담아온다 실시’ 그랬습니다. 한사람은 가서 50킬로그램짜리 돌멩이 하나를 자루에 담아가지고 메고 왔습니다. 두 번 째 사람은 20킬로와 30킬로 그람짜리 두 개를 담아왔습니다. 세 번 째 사람은 ‘이 돌을 가지고 어디까지 지고 갈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할까’ 하고 자잘한 돌멩이를 천 개를 모아서 50킬로 그람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명령이 이 사람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지금부터 그 돌멩이를 있던 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한 개를 가져 온 사람은 정확하게 그 자리를 기억하고 갖다가 두었지만, 두 개를 가져온 사람은 잠시 멈칫거리며 확인하다가 제자리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개의 돌만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자잘한 돌멩이를 천개나 모아 가지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죄는 크기는 다르지만 질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 품질은 큰 죄나 작은 죄나 동일합니다. 죄의 크기는 다르지만 그 죄의 질은 똑같은데 그 죄의 질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그것이 죄의 본질이고, 하나님께 대적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께 순종하고 어린아이처럼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고 그 영혼을 끊임없이 소생하게 하셔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사랑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수많은 생각들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를 예측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점검하는 노력이 필요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내 마음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서 이 일이 마지막에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탁월하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아주 분명한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크든 적든 죄를 짓게 마련이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발견한 후에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는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뉘우치는 것,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죄 때문에 죽어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영혼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의 사건은 그의 아름다운 신앙의 세계를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가슴 깊이 울려 퍼지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그 아름다운 현들이 끊어져 버렸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고백이 담겨 있던 그의 마음은 검게 물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율동으로 우리 하나님을 아이처럼 찬송하던 그의 육신이 정욕에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일평생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혼의 캄캄한 어둠 속으로 그는 내 동댕이쳐 졌고, 거기서 그는 일생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신 기쁨을 송두리째 잃어 버렸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자기에게 내려 주셨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다윗의 전임자는 사울 왕 이었습니다. 그가 겸손하여 하나님께 선택을 입었고, 성령의 충만한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실 때에 그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다윗은 모두 보았습니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우리아를 살인한 것과 그의 아내를 간음한 모든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많이 울며 기도했는지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자신의 요를 적셨습니다. 얼마나 긴 세월 동안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간절히 부르짖었고, 그 애절한 회개의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하셨을 때에 그는 담대히 외치기를 ‘악을 행하는 자들이여 다 내 곁을 떠나라 여호와께서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캄캄한 마음에는 다시금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오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소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불경건한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마귀로부터 끝없이 도전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 일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든지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신 은혜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언제나 회개할 때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맨 처음 시작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 하나님이 내 생각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이런데서 신앙이 시작 되는 게 아닙니다. ‘아 그 기독교의 가르침이 상당히 괜찮네요.’ 이런데서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바람직하네요.’ ‘나는 교회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자기를 자기 인생의 주인인 줄로 생각하고 살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그 때에 커다란 빛이 밀려들어 오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던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나를 믿었던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지어 하나님을 멀리 떠난 나 같은 죄인을 다시 당신 곁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처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 이제까지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믿고, 나를 의지하며 살았는데, 그 최종적인 결과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것 밖에 없습니다. 그가 나를 불신하는 대신 나 같은 인간을 살리려고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내 인생의 보좌의 주인이 나였던 삶을 철저히 후회하게 되고, ‘이제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예수가 나의 삶의 보좌에 앉으셔서 성경을 통해 나를 다스리는 그 말씀에 복종하고 살 때에 참으로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심오한 회개, 진실한 통회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게 된 과정과 동기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난 후에는 한 결 같이 똑같은 고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러니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매우 나쁜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대신 나를 의지하며 사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를 깨닫고 진실하게 회개할 때에 그것은 이제까지 알지 못 했던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였던 ‘벤자민 워필드’라는 사람은 이 시편 51편을 해석하면서 ‘다윗은 오히려 이 범죄를 통하여 예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체험하고 깊이 있는 진리를 즐겨하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진실한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리 도덕적인 삶을 살아도 그는 반드시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고야 맙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해 순수해 지는 시간이 두 시간 있습니다. 순수해 지는 때가 두 번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미워하며 철저히 회개하는 때, 두 번째는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며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 이 두 번의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장 순수한 신령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는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쏟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기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가족을 위해서도 그렇게 안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마음으로는 사랑인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인해서 진실하게 통회하는 그 마음과 남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죄에 대해서 민감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입니다. 교회가 얼마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지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런 깊은 기도와 간절한 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만들고, 이런 놀라운 하늘의 능력과 커다란 영적인 은혜는 언제나 소생한 영혼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의 영혼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아니면 거의 가사상태 입니까? 아니면 강건합니까? 사람들의 눈은 우리의 겉 사람 밖에 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진실하게 회개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영혼이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들이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중간은 빼 버리고 결론을 이어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죽은 것 같은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은 우리의 돈이나 물질, 어떤 우리의 외모를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살려 주시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보다 원대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의’, ‘의의 길’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아주 쉽게 얘기하면 불의하다는 말의 반대가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불의하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의롭다 불의하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 합치하면 법적으로 의로운 상태이고 합치하지 않고 위반이 되면 불의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범법자들이 있습니다. 나라의 법을 어겼습니다. 상황은 끝났습니다. 예를 들어서 세금을 떼먹는다든지 혹은 사람을 죽인다든지 하는 것은 나라가 그렇게 하라고 하는 기준을 어긴 것입니다. 상황은 끝났습니다. 사람은 죽었고 이미 세금도 다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죄는 항상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을 불의한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지명수배를 당해서 살인자를 처벌하고 세금을 포탈한 사람들을 정당하게 다시 법을 집행해서 세금을 추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의의 개념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의 의’, ‘주님은 의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 하시는 도다’라고 할 때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의의 개념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어떻게 이웃을 향해서 살아라.’고 하는 규칙을 주셨는데 이 규칙을 어겼을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불의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자, 이상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요? 하나님이 죽어 있는 것 같은 시인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놀라운 영적인 소생함을 주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이루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하나님을 향해 살아야 할 책임이 뒤 따르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왜? 만약에 이 세상이 일체 정의롭고 또 그 정의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정의를 따라 가는 세상이라면 나 한사람만 올바로 살아야지 그리고 결심하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뜻대로 사는 것을 미워하고 그런 속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 언젠가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이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손해를 가져 오기도 하고 핍박을 가져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는 받아도 정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삶의 순종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는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소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영적인 부흥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력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 이 성령의 은혜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과 삶의 환경이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우리 안에 주신 이 성령의 은혜가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의 풍취가 있습니다. 그 풍취가 뭐냐 하면 끊임없이 순종의 삶을 살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해서 무성해지는 나무처럼 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의 삶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며 살아도 나는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십자가 사랑의 은혜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 커다란 손해나 박해, 심지어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라는 결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은혜는 가장 잘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어떤 사람은 은혜를 잘 받아. 그런데 너무 빨리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옛 삶으로 돌아가. 어떤 사람은 생각이 많고 좀처럼 은혜를 못 받아. 그런데 은혜를 받았는데 아주 오래도록 이 은혜를 간직하며 사는 겁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삶을 사는 것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간직하면서 경건하게 참회의 기도와 일체의 순종함으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사는가 이것에 의해서 은혜가 사라지기도 하고 더 융성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져서 의로운 세상이라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못한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 이 세상에 나아가서 사회생활 할 때에 무엇인가 우리가 믿은 대로 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날 적마다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냐 하면 ‘아 세상이 이렇게 고장 나고 망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의 사랑을 많이 주셨구나. 그래서 일체의 사랑과 정의로써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구원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면서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영혼이 소생되는 은혜를 충만하게 부어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이 은혜를 받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망가진 자신을 고치고 가정을 고치고 교회와 이 세상을 고치면서 사는 치료자들이 되시게 하시려고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