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에 부르시는 하나님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녹취자 : 김세나
지난 시간에는 이제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어떻게 고생을 하게 됐고, 그래서 형편없었던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 얼마나 수준 높은 신앙으로 점차 점차 올라가서 그래서 여기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그러면서 이제 라반의 추격을 받고 구출을 받는 그 장면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제 35장 전까지 전부다 34장까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넘어온 모든 시련 말이에요. 이런 것들은 그래도 어떻게 피해볼 길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어떻게 그 시련이 늘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경험하면서 정말 놀라울 정도로 넘어왔어요. 인간이라는 게 원래 지나온 고통은 그렇게 크게 안 느껴지고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이 한 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인생이에요. 그런데 여태까지 어떻게, 어떻게 넘어왔는데 이 마지막 시점에 이제는 도저히 자기가 여태까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혹은 또 이렇게 라반의 추격을 받으면서 면해온 모든 과정들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옛날에 있었다가 사라졌던 그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말하자면 자기 인생의 근본적인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미 야곱이 예상했던 문제였어요. 뭐예요.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자기의 형이 있다 이야기에요. 자기의 형이, 자기의 형을 만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데 자기 형을 생각할 적마다 심히 눌려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예요.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자기가 가로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이미 자기가 입장을 바꿔 놓고 형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가만내버려 둘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결국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이 때에 야곱이 말하자면 인생의 깊은 한번의 결단을 요하는 시점에 서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의 훌륭한 점은 뭐냐 하면 이렇게 그 시간이 바로 자기의 깊은 결단을 요구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더 큰 말하자면 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소식을 들으니까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이 벌써 들려 온 거예요. 그 400인은 집에서 기른 무사들이에요. 무사들. 당시에는 지금처럼 강력한 정부가 있어서 고을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왕이라는게 많이 나오는데, 지금으로 치면 동장정도 될까 하는 정도예요. 조그만 무리들을 지어놓고 자기네들끼리 왕이라고 이름 지은 거죠. 그러니까 무슨 몇 십명의 왕들이 모이고 그러는 거죠. 그러한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재물이 있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군사를 길렀어요. 그리고 그것들로 호위병을 삼았죠. 그런데 그 사람이 400명이라고 그랬으니까 축복을 야곱이 다 빼앗아 갔어도 이삭에게 워낙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어요.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없어요. 종들이 좀 있고 그리고 또 아내들이 있고 애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전면적으로 훈련을 받은 무사들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할 승산이 없는 거죠. 그 때에 야곱이 무슨 생각을 안 했겠어요. 기껏 생각한 것이 떼를 두 떼로 나눠가지고 하나 보내고, 그 다음 하나 보내고, 그래서 치면 후퇴하리라. 심통치 않은 것들은 앞에 보내고, 자기 부인도 말이야. 사은품은 앞에 보내고, 진품은 뒤로 가고 그렇게 하고서 이제 그러면 이제 이것으로도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야곱은 다 말하자면 다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고 소요도 다 건너고 마지막에 오늘 읽은 성경 구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얼마나 멋있어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것 보세요. 야곱이 이 일생에 가장 결단을 요구하는 말하자면 인생의 자기 인생의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첫 번째 방법을 보였어요. 홀로 남았더니. 홀로 남았어요. 모든 사람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난관이나 혹은 이러한 깊은 말하자면 인생의 결정적인 어려움에 부딪힐 때 있죠. 그 때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야곱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홀로 남는 것이었어요. 홀로 남는다. 결코 누구, 자기의 모든 인생의 문제와 그리고 인생에 일어난 모든 곤고한 일들이 누구 때문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거기서 문제 해결을 찾기 시작하면 그러면 그것은 이미 방향을 잘못 집은 거예요. 모든 문제의 시발은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에 있는 거예요. 야곱이 여기에서 그것을 배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이 28장에서부터 그 많은 환란과 그 정말 그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 자라온 신앙의 결과에요. 이 인생의 근본적이고 그 다음에 언젠가 한번 넘고, 언젠가 한번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러한 문제 앞에서 문제의 해결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깨닫는 거예요. 그리고는 홀로 남는 거예요. 홀로 남아서 하나님하고 말하자면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그렇게 고대하면서 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왜 불행을 만나면서 그 불행에서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왜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뭐예요. 신앙적인 어려움에서 그것을 극복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어려움 속으로 마치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무슨 힘에 의해서인지 소용돌이처럼 끌려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러한 거예요. 진흙 속에서 해매는 것 같은 한발을 나오려고 내딛으면 더 깊이 들어가고 두 발을 빼려고 내딛으면 더 깊은 수렁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래서 마지막에는 포기하고야 마는 이러한 일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람을 원망하고 그 모든 것들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고 모든 것들을 탓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참된 해결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홀로 남을 때까지는 그 심정이 얼마나 찹찹했겠어요. 다 보내고 홀로 남았죠. 그 때까지만 해도 홀로 그렇게 남아있는 것은 뭔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이러한 모습이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누구겠느냐. 흔히들 천사라고들 말하죠.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죠. 이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니까 천사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여기에서 야곱과 씨름을 하다가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하고 환도뼈를 쳤다고 하죠. 찬송가에 보면
(찬양) 옛 야곱이 천사와 씨름 하던 그 믿음을 주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야곱이 씨름하던 이 장면이 야곱의 믿음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그렇게 봐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천사와 더불어 씨름한 것이 축복을 얻어내겠다라고 하는 고집이었는데, 그게 믿음이었다라고 한다면 호세아 12장에 보면 울면서 회개하는 장면이 나와요. 뭘 회개 했겠어요. 여기에서는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야곱이 홀로 남을 때까지는 뭔가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생각을 했는데 그 다음에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그 야곱이 이제껏 자기가 육신적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왔던 삶의 방식, 고집과 자기의 아집과 이런 것들로 자기의 환경을 열어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던 그러한 인생의 삶의 방식을 말하자면 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한번 끌어들여 보는 거예요. 그러나 천사는 그를 놔두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그의 환도 뼈를 쳤죠. 허리 아래쪽이라고 하죠. 환도를 쳤죠. 그때에 그 자기가 인간적인 고집으로 천사와 씨름하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꺾어서, 천사를 꺾어서 자기가 반드시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겠다 라는 사실을 환도 뼈가 부서지면서 그러면서 환도 뼈를 얻어맞았으니까 주저앉았을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 결국은 천사를 잡았던 손을 놓을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때에 야곱이 깊이 깨닫게 된 거죠. 그러면서 그 징계를 받으면서, 징계였어요. 징계. 징계를 받으면서 호세아 12장은 말하기를 울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다. 자기가 살았던 모든 방법들, 그래서 결국은 야곱이 축복을 얻어내는데, 이 축복을 얻어낸 것은 천사를 붙들고 씨름을 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천사와 더불어 씨름을 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이 야곱이 천사와 더불어 씨름하던 것들을 징계를 받고 회개하고 그리고 뉘우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통회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거예요.
여러분, 정말 인간적인 고집과 인간적인 자만과 인간적인 열심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유익이 되겠어요. 이 사람이 야곱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서 있는 한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죠. 그러나 그가 징계를 받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죄의 용서를 구하고 매달릴 때, 하나님을 이길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은 그의 매달리는 씨름이 이긴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통회와 회개였어요.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 앞에 살아왔던 것, 지금도 자기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이겨 보려고 하는 이 모든 자만과 육신에 속한 생각들을 버리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을 때, 그 때 이 야곱이 하나님 앞에 이긴바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 주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이기고 그리고 상황을 이기고 환경을 극복하고 싶으신 분들은 그것은 바로 환경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얍복 강가의 장면은 환경이 변한게 있어요? 야곱이 울며 매달릴 때 무슨 환경이 변한 것이 있어요? 나오던 에서가 400인의 군사를 돌려보냈습니까? 에서가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아니면 자기에게 없던 무사들이 생겨났습니까? 환경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요. 야곱 자신이 이 얍복 강가에서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맞이한 거예요. 놀라운 변화를 맞이 한 거예요. 그러면서 뭐냐 하면 깨닫게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참 신앙은 자기의 육신적인 고집으로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깊이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한번 찾아 볼까요? 호세아 12장을 찾아 보세요. 1267페이지, 3절이에요. 12장 3절. 1267페이지.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이기고, 천사와 힘을 겨루어서는 이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울며 그에게 간구했어요. 왜, 천사와 더불어 씨름하던 사람이 울며 간구하게 되었어요? 환도 뼈를 치는 징계를 맞으면서 이 야곱이 깊이 깨달아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매달리면서 그러면서 주 앞에 매달리면서 참된 회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이 야곱이 32장이 말이에요.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장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이 야곱이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자기의 변화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이 처해 있는 그 말할 수 없는 창세기 32장과 같은 위기 속에서 구출을 받고 새롭게 되는 소원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해요. 야곱이 깊은 회개를 통해서 야곱은 비로소 말하자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돼요. 그 때에 이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록 징계를 받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이런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상황이 변하고 환경이 변한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야곱이 왜 지금 이 깊은 밤에 아무도 없는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천사와 더불어 씨름하던 이유는 무엇이었어요? 그것은 자기의 인생에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해 보기 위한 몸부림이었어요. 여기 얍복 강가에만 섰을 때만 해도 야곱은 그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형, 저 형, 400명이 칼을 들고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 저 형을 어떻게 돌려 보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저 위기에서 내가 피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었어요. 하나님이 야곱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방법이 얼마나 놀라워요. 이 머리 잘 돌아가고 꾀 많은 야곱이 이와 같이 완전히 절벽과 같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렸을 리가 없죠. 자기의 상식과 계산과 여태까지 산전수전 겪으면서 그 훌륭한 고수와 겨루어서 이긴 그 술수를 가지고 이 문제를 대응하려고 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가 완고하면 완고할수록 우리를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완전한 벼랑에 우리를 세우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벼랑에 세우시는 것은 낭떠러지를 바라보면서 절망을 하라고 우리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라는 거죠. 자기를. 야곱이 이와 같은 환경,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칼을 들고 다가오고 있는 400인의 무사와 그 성난 형, 그 환경 때문에 홀로 야곱이 천사와 더불어 씨름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환도 뼈를 치는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문제는 형과 그리고 400인이 나아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깊이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생애적인 회개를 통곡과 눈물로 하게 되는 거예요. 놀랍게 회개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놀랍게 변화된 사람으로 우리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바꿔 놓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어떤 환경에 직면시키시는데 그 속에서 우리들이 자기 자신, 변화되어야 할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있는 환경을 바라보면서 염려하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계산하고 있다면 그 벼랑에서 한참 더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인생의 절망적인 계곡에서 한참 더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험을 당하거나 인생의 위기가 올 때에는 그 시험이나 위기를 보지 말고 왜 하나님이 나를 여기 세우셨는가.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내게 주시는 세미한 음성이 무엇인가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야곱은 여기에서 놀라운 사건을 만나게 돼요. 그랬더니 야곱이 그렇게 환도 뼈를 징계를 받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통곡하고 회개할 때에 그 때에 이미 야곱의 관심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 자기 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자기가 서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들을 다 회개하면서 전심으로 자기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죠. 그랬더니 눈을 뜨고 그 다음 아침에 보니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에서가 400명을 진짜 과연 거느리고 오는 거예요. 자식들을 나누어서 다 그렇게 하고 그리고 형이 나아오는데 야곱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어요. 엎드려서 일곱 번을 땅에 굽히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형을. 그게 얼마나 우스워요.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환도 뼈를 치신 것도, 놀라운 섭리였다. 왜 딴 곳이 아니라 머리통을 한방 치신다든가 말이에요. 그러니 환도 뼈를 치신 것도 놀라운 섭리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묵상을 해 보니까요. 강이 있는데 저 쪽에서 야곱이 올 것 아니에요. 에서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올 때, 아 야곱이 얼마나 고생하며 야 400명이 다 가서 야곱을 행가래 치자 그러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출발할 때는 분명히 야, 칼을 단단히 갈아라. 내가 이 천하에 몹쓸 녀석을, 아버지를 속이고 나를 속이고 도망간 이 녀석을 말이야, 가만 두지 아니하리라. 칼을 들고 나오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그 마음이 물같이 녹은 거예요. 물같이 녹은 거예요. 여러분 사람 때문에 고난을 겪으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사람의 마음을 누가 움직입니까. 하나님이 움직이셔요.
수십 년 동안을 말이에요. 돌맹이같이 굳어져서 철천지한을 품었던 이 사람의 마음을 하루 아침에 순식간에 물같이 녹여 버리는 거예요. 누가 하셨어요? 누가?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사람 때문에 곤고해진 심령들이 있습니까.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에 늘 고통을 받고 그것으로 여러분들이 찔림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한번 마음을 움직이시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십 년 동안 철천지 원수가 져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그 사람의 돌같은 마음이 어느 순간에 순식간에 녹아진 거예요.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게 녹은 시점이 야곱을 딱 쳐다 보았을 때, 녹지 않았을까. 복음서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있을 때, 부인한 그 후에 예수님과 눈빛이 딱 마주치죠? 그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아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봐야지 생각이 나는 거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재산이 그 정도 되었으니까 제법 행세가 의젓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 이게 왠일이에요. 그 전날밤에 환도를 얻어 맞은 거예요. 그러니까 에서가 생각하기에 아, 야, 이제 이 야곱이 나를 속이고 그리고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으니 엄청나게 놀라운 축복을 받고 돌아올꺼다. 그것을 생각할적마다 이가 갈리는 거죠. 이놈의 인간 두고보다 그랬는데, 저기서 걸어오는데 후질근한게 다리는 절뚝절뚝 거려요. 환도를 안 쳤으면 다리가 절뚝 거렸을까요? 뒤통수 한방 치신다든지 엉덩이를 때리신다든지 끄떡 없으셨겠죠. 환도를 치신 거예요. 다리를 절뚝 절뚝 하면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가정에 큰 풍지풍파를 일으키고 복을 받겠다고 도망가더니 꼴이 겨우 그거냐. 그게 또 저 멀리서 일곱 번을 엎드려서 신하가 왕한테도 그렇게 절 안 했을 거예요. 일곱 번을 엎드려서 주님이시여 하는 것을 보니까 이 에서의 마음이 갑자기 녹는 거예요. 야, 인생이 그런 건데 네가 그렇게 살았구나. 가련하다. 참 불쌍하다. 이런 생각이 확 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확 녹이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녹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가면서 목회를 하거나 가정생활을 하거나 사람이 안 변하기 때문에 받는 고통이 너무 커요. 너무 커. 그 때 그것을 인간적으로 덤벼들어서 그 사람을 바꿔 놓으려고 하면 어림도 없어요. 고통만 크고 시험이 가중되어요. 하나님 앞에 정말 맡겨야 해요. 사람이 변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맡겨야 해요.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시면 그 하나의 믿음은 꼭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일초만에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물같이 녹여서 바꿔 놓으실 수 있다. 그거예요. 그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야곱이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주님이 징계를 받을 때, 얼마나 쓰라리고 아팠겠어요. 그러나 이것이 에서의 마음을 녹이는 도구가 되리라고는 누가 생각했겠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한토막을 잘라서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게 많아요. 그러나 그 토막을 다 연결해놓고 보면 하나님이 참 놀라우시고 세밀하신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이렇게 돌아보면 과거에 일어났던 가장 불행한 일이 오늘날 나의 인생이라고 하는 이 비단을 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날실이 되고 그 다음에 시실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죠. 그러면서 야곱이 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인생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완벽하게 하루 아침에 해결되는 거예요. 싹 해결이 되어요. 그 때 야곱의 감격이 어땠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야곱이 여기에서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신앙이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올라오게 되는 거예요. 그랬으니 큰 시험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확 올라가게 되는 거죠. 그 기쁨과 그 놀라운 신앙의 힘,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것, 그러면서 야곱의 믿음은 28장과는 비교가 안 되는 믿음으로 서서히 진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이에요. 이 야곱이 신앙적인 모습을 33장에서 보여줘요. 첫째는 뭐냐 하면 17절이에요.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형이 에서는 가만히 보면 좀 일관성이 없는 감정적인 인물 같아.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장자의 명분이 뭔지도 모르고 팥죽 한그릇에 덜렁 팔고 그 다음에는 또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울면서 그것을 되찾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그 다음에는 또 이놈의 자식 죽여버린다고 칼을 들고 나오다가는 또 단번에 용서해줘버리고, 그리고 또 같이 가서 살자. 세일 쪽으로 가서 에덴있는 족이에요. 세일산으로 이렇게 가서 에덴강을 높고 가나안은 이쪽이고 세일은 이쪽이에요. 이쪽에 가서 살자. 야곱이 간다 그러죠. 그 이유는 뭐냐 하면 형은 단번에 야곱을 용서했는데 이 머리 잘 굴리는 야곱은 그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이 에서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요. 그렇죠. 아니, 장자의 명분을 누가 팔았어요. 자기가 팔아놓고 나중에는 왜 훔쳐갔냐고 따지고 하니까 분명히 나를 용서해 준다고 그랬지만, 이 사람과 같이 가서 살면 자기가 하나님의 축복을 점점 받으면 언젠가는 그 옛날을 기억하고 무슨 일을 행할지 모른다는 계산이 깔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쫓아간 거죠. 또 한면으로는 어떠한 것이냐 하면, 그곳으로 쫓아 가면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으로부터 멀어지는 거예요. 길이 다르니까, 이리로 가야 되는데, 이리로 가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어떻게 보면 그러한 계산도 깔렸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신앙이에요. 내가 결국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것이었어요. 그랬더니 두 번째로는 야곱이 18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우선 이 사람이 그 세겜 성에 이르러서 자기가 거할 장소를 돈을 주고 샀어요. 그러면서 이제 비극의 씨앗이 이 19절에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세겜 자손인 하몰의 아들들, 하몰의 백성들이죠.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거예요. 그게 말하자면 야곱으로 하여금 불행의 씨앗이 되는 거예요. 어쨌든 그때는 그러지 않았고, 거기에서 그 성에 도착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단을 쌓는 일이었어요. 단을 쌓는 일이었어요. 그리고는 그 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그 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이 자기 이름이니까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런데 그 나는 옛날의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변화된 자신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분명했어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지금 용어로 이야기 하면, 야곱이 엘엘로헤이스라엘 이렇게 불렀을 때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런데 그 나는 누구냐 하면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게 된 그 나에요. 하나님을 신앙하게 된 그 나, 거듭난 나의 하나님,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된 거죠. 이제껏까지 살아온 것은 늘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그랬어요. 아버지로부터 들은 하나님, 할아버지를 도우셨다라고 전해 내려오는 그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었는데 오늘 이 32장에 생애적인 32장, 33장의 생애적인 사건을 통해서 야곱이 드디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을 수 있게 된 거예요.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그가 한 것이 비로소 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경배단을 쌓은 거예요. 28장의 수준에서는 어때요? 하나님이 탁 나타나니까, 기껏 한다는 소리가 먹을 것을 주시고 옷을 주시고 뭐 아비의 집으로 가게 하시면 하나님이 될 것이며 그러면서 주저리 대다가 이제는 아무런 그런 조건 없이 조건 없이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옵나이다 그러면서 주님을 경배하게 되는 거죠. 그게 신앙이에요.
처음 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기복적인 신앙을 갖는 것을 나무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처음엔 그렇게 믿는 거예요. 처음서부터 그렇게 안 믿으면 좋은데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변화되지 않으면 그 믿음 가지고는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죠. 정말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백성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차원적인 축복의 신앙가지고 그 공식가지고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하나님을 위해서 구약의 어두운 시대에 피 뿌리며 죽어갔던 많은 선지자들, 그들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그들이 받은 분깃이 무엇이었어요? 땅을 얻었습니까. 자녀를 얻었습니까. 아름다운 부인을 얻었습니까. 그들의 기업은 순교였어요. 죽음이었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셨는데 그 분이 친히 말씀하셨듯이 그 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사셨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어요. 사도들의 생애가 그러했어요. 그러니까 그 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실 것이다. 그러한 일차원적인 생각이 아니에요. 야곱이 말하자면 28장에서는 그런 식의 기복신앙이었는데, 32장, 33장까지 와가지고는 이제는 조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드디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나를 형통함 가운데 인도하실 때나, 사망의 골짜기로 나를 인도하실 때나 풍랑을 지나게 하실 때나 아름다운 숲속의 길을 거닐게 하실 때나 인생의 어느 때를 걷게 하든지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고백을 33장에 와서야 하는 거예요. 수 십년이 지나고 나서. 얼마나 어려워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한명의 성도는 수 십년 동안 하나님께서 만드신 조각작품과 비슷한 거예요. 그게 그렇게 순식간에 안 된단 말이에요. 안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에 깨달아야 하는데 이 단단하고 무딘 인생의 심령이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 자신을 보라고 계속 우리를 벼랑에 세우시는데 벼랑을 내려다 보면서 죽어야지, 죽어야지 절망하고 있거나 아니면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온 그 놈이 도대체 누구인가. 사람을 원망하고 이를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기에서 세우신 목적이 이루어지질 않는 거예요. 그러면 어느 한순간에 아, 여태까지 자기를 등을 밀어서 벼랑에 세운 그 사람을 향해 원망의 칼을 갈고 그럴 수 밖에된 자기의 인생을 비관하면서 살아오고 그리고 벼랑을 내려다보면서 그 죽음의 절벽에서 절망하고 슬피 울었는데 그렇게 울면서 내가 이렇게 고통 할 때 하나님은 왜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가. 심지어 원망의 마음까지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느 한순간에 막 깨닫게 되어요. 그러면서 자신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각성이에요. 각성. 깨닫게 해 주시는 거예요. 아, 내가 이 벼랑에 선 것은 나로 하여금 이 벼랑을 쳐다보며 비관을 하게 함도 아니요. 사람의 원망을 하게 함도 아니다. 그러면서 벼랑 끝에 서 있는 자기의 태도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회개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람을 보고 벼랑을 본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리고
(찬양)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그러면서 하나님 바라보게 만드는 거예요. 정말 인생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삽니까. 정말 그래요? 어림없어요. 어림없어요. 세상이 크게 보이니까 하나님은 거의 보이지 않는 거죠. 그러면서 상식으로 걸어왔던 길을 깊이 뉘우치는 기회로 하나님께서 삼으시는 거죠. 그것을 통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거예요. 깊이 한 거예요. 놀라워요. 도무치 어떻게 뛸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하나님의 손에 타나났다. 건져 준 거예요.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가있을 때 말이에요. 어디 길이 있어요? 600의 병거가 벌 떼와 같이 창과 칼을 가지고 덤벼들죠. 비무장이죠. 뒤를 돌아다보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누가 그것을 계산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겠어요.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그렇게 야곱에게 보이신 거예요. 상상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다면 야곱은 또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이 그 일을 행하였다고 시인 안할 거예요. 홍해가 갈라지고 물이 절벽 뒤에서 서는 것을 바라보고 거기를 지나가면서 건너서 그 다음에 병거가 들어올 때 물을 합치고 그 위에 떠다니는 시체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것이 뭐예요? 신 중의 여호와가 같은 이가 누구뇨 그러면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수백 만명의 성가대가 울려 퍼진 거예요. 야곱이 여기에서 깊이 깨닫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화) 제가 내수동 교회에 있을 때 어떤 지체 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해요. 저는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 3년이 걸렸대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3년의 세월이 흘렀대요. 야곱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역사가 거기에서 일어난 거죠. 그러니까 야곱이 말했던 것은 환경이 바뀌는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야곱 자신을 바꿔 놓으시고 야곱 자신이 바뀌니까 환경도 확 여시는 거예요. 목을 어긋 맞기며 두 형제가 얍복 강에서 얼싸 안고 슬피 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모든 사람은 야곱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본 거죠. 믿음이 생겨난 거죠. 그러니까 내가 변하면 다른 사람이 믿음이 생긴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이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여기까지는 서론이고 34장을 들어서게 되는데, 34장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의 스토리를 계속 쓰고 있는 거예요. 그 하나의 스토리가 뭐냐 하면 그 딸내미가 딱 하나가 있었어요. 디나라고 부르는 딸내미가 하나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딸내미가 딱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 놈들이 장성한 놈들이 말이에요. 그 그렇게 많이 있었는데, 거기에 딸내미가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이 저희 집 안에 아들이 넷이거든요. 어렸을 때 한없이 부러운 것이 뭐냐 하면 여동생을 가지고 있거나 누나가 있는 집안. 하여튼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오빠 소리를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일찍 교회 들어갔으면 들어 봤을텐데 그 못 들어보고 결국은 어른이 되고 말았어요. 그게 늘 섭섭하고 안타까워요. 이제 누가 저를 오빠라고 불러 주겠어요. 이런 사람인데. 그런데 하여튼 그 말이에요. 이 4명이 있었는데 남자 애들이 양만 던져서 휙 집어 던지고 옷 벗어서 휙 집어 던지고 발가락 내 나는데 들어와서 퍼 자고 그게 뭐 집에 들어와야 재미가 없어요. 다 사내놈들이면 냄새나 나지 재미없어요. 야곱의 집안에 그런 놈의 아들이 넷 하고 비교가 안 되요. 세 배 정도 많았어요. 그러니 그 많은 남자들이, 이 집은 뭐 하는 집이었어요? 목축을 하는 집이었거든요. 목양을 하는 집, 목축을 하는 집이었으니 한번 장막에 들어오면 그 냄새가 보통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 놈들이 모여서 남자애들 하는 짓은 맨날 똑같은 짓이죠. 작대기로 칼 만들어 가지고 죽여라 그러면서 싸우고, 이러고 있었는데 그런 삭막한 집안에 꽃이 한 송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디나에요. 디나. 그 야곱이 눈에 넣어도 안 아팠겠죠.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그러니까 그 삭막한 하루 일과를 보내고도 이 딸내미를 쳐다보면 피로가 싹 풀리는 거죠. 아주 뭐 살살 녹는 거죠. 제 동생이 먼저 딸을 낳았는데 저는 늦게 낳았어요. 자기는 죽겠대요. 2살, 3살도 채 안 됐는데 아빠가 안경을 쓰고 밖에 갔다가 탁 들어오면 서리가 끼잖아요. 사내 놈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데 아장아장 걸어와서 크리넥스 티슈 하나 딱 뽑아가지고, 아빠 안경 닦으라고 그러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살살 녹겠죠. 애교가 보통이겠어요. 이게 세월이 상당히 많이 흘렀어요. 그렇게 하면서 자라온 거죠. 그러니 딸이 하나 밖에 없으니 아들 중 하나를 특별히 사랑해서 편애를 하면 요셉의 경우에서처럼 문제가 되겠지만 딸내미이니까 그 다큰 말하자면 장정이 된 남자들이 말이에요. 그 시기하거나 않잖아요. 더군다나 동생이잖아요. 귀엽다. 어리다 이 생각을 하죠. 그런데다가 한 없이 이쁜 옷을 입히면서 말이에요. 그러면서 길렀겠어요. 늘 무릎에 두고 길렀겠지요.
그런데 33장과 34장 사이에는 짧으면 10년, 짧으면 10년, 길면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거예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추측할 수 있냐 하면 그 밧단 아람에서 낳은 애들이 34장에서는 전부다 싸움을 할 수 있는 장정의 모습으로 나타나요. 최소한 10년은 흘렀어야 해요. 많으면 20년의 세월이 흐른 거예요. 그러면서 이 세월이 흐르면서 디나는 점점점점 더 성숙한 말하자면 처녀가 되어가고 있을 것 아니에요. 야곱이 점점점점 늙으면서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한 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이쁘죠. 그런데 그 아이가 강간을 당하는 거예요. 차라리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통사고를 당해서 불시에 죽었다고 하면 그게 속이 편한 거지, 그것을 강간을 당해가지고 와가지고 질질 짜고 눈물을 짜고 있는 그 꼴을 보는 그 애비의 마음이 정말 찢어지는 것 같았겠죠. 더군다나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디나여서. 그 아이가 어떻게 순결하게 자라서 좋은 남편 얻어서 시집을 가기를 바랬는데 이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을, 더군다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의 민족에게 당한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제 34장에서 야곱이 이 10년, 혹은 20년 간 얼마나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철저하게 보여주는데 34장이 마치 뭐와 똑같으냐 하면 시골에 가잖아요. 시골에 가면 헛간에 들어가면 대게 뭘 깔아 놨느냐 하면 가마니를 깔아 놨잖아요. 가끔 햇빛이 문살로 들어와서 가마니 위는 보송보송하게 말랐죠. 그런데 청소하기 위해서 가마니를 거적을 들치면 그 속에서 온갖 벌레 그런 것들 다 나오잖아요. 상상할 수 있죠. 이것이 34장이고, 들쳐내는 도구가 무엇이었냐 하면 디나의 강간 사건이었어요. 33장에서 그렇게 훌륭하던 야곱의 감격적인 신앙이 34장에 와서는 완전히 황폐화 된 것이 나타나요. 그 증거들이 이제 하나씩 하나씩 대 볼께요.
우선 뭐냐 하면 야곱이 이 디나의 강간 사건을 당한 것을 보고 난 야곱의 태도에요. 그게 뭐에요.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렵혔다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을 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그랬거든요. 무슨 뜻이에요. 이런 불행한 사건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내어 매달리면서 하나님 어찌하여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옛날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브니엘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지 33장과 연장선상에 서 있는 야곱의 모습 아니에요. 강간 당했다는 소식을 딱 들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떠오르는 게 우리 집안에 그래도 아들이 열명이 넘는데 오면 해결해 줄꺼야. 아들을 기다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아들의 숫자를 의지하고 그들의 힘을 의지하는 거예요. 야곱이 이정도로 딴 사람으로 변한 거예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그리고 깊이 회개하면서 그 깊은 회개가 하나님을 이겼다라고 하는 그 신앙의 놀라운 원칙을 잊어 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옛날 본성이 다시 꿈틀 거리는 거예요. 이 머리 굴리고 계산하고 잔 재주 피우면서 술수 쓰던. 그것 때문에 자기 인생이 그렇게 고달프게 와서 33장에서 겨우 하나님께서 변화 시켜 놓으셨는데 신앙이 떨어지니까 옛 본성이 나오는 거예요. 천하에 도리가 없어요. 신앙이 떨어져봐요. 옛 본성이 나오죠. 옛날에 방탕하게 지내던 그 본성, 신앙이 누르고 있지만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그 본성이 떠오르는 거예요. 이 야곱의 이 모습이 지금 이렇게 된 거예요. 뿐만 아니죠. 이 사람은 이제 기본적인 신앙 조차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어요. 어떤 면에서 그래요. 할례를 누구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셨을 때는 이 할례가 언약의 표다. 너와 나와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표가 바로 이 할례다. 그런데 뭐냐 하면 자기 아들들이 부전자전이야. 와 가지고 하는 말이 뻔뻔 스럽게 와서 강간을 해놓고 이왕 버린 몸 우리에게 마누라로 달라 그러는 거예요. 이게 지금 눈에 불이 나는데 와가지고 그러니까 거기에서 머리를 굴리는데 할례를 받아라. 그러면 같은 민족이 되겠다. 할례만 받는다고 같은 민족이 됩니까. 할례만 받는다고 같은 민족이 되겠어요? 이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민족이 될 수 있겠어요? 약속의 백성이 아닌데, 그 약속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안 믿는 사람에게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기본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언약된 백성으로서의 표인 이 할례의 기본적인 의미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신앙이 바닥까지 내려간 거예요. 아버지 뺨치는 모사꾼들이었어요. 그렇게 놓고 머리를 굴리는 거죠, 이 사람들도. 할례를 받자. 그러면 저 사람들이 우리와 하나가 되는데 그러면 그들의 소유를 전부다 우리가 소유하게 된다. 빼앗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머리를 굴리는데 과연 고수의 아들답게 이 세겜의 사람들이 머리 굴리는 것을 한 차원 능가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3일만에 할례를 받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몸에 열이 나 있으니까 그 다음에 가서 장정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에 전부다 가서 칼로 도육하여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런 사건을 야곱이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디나가 강간당한 이 사건이 이렇게 그 사람들을 갔다가 도륙한 사건, 도육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물건들까지도 강탈해 가지고 왔어요. 이것은 나쁜 놈들이죠. 그렇게 해서 와가지고 되게 되니까 야곱의 눈에는 아들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가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니까 그 근처의 족속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같은 족속들이 같은 가나안 족속들과 브리스 족속과 같은 혈통인데, 이 사람들이 자기의 동족들이 끔찍한 일들을 당했다는 것을 알면 당장 쳐들어 올 거라는 거죠. 그 쳐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당할 위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너희들이 왜 그랬느냐 따지는 거예요. 야곱이 디나가 강간당하는 사건을 통하여 깊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될텐데, 그것을 못하는 거예요. 왜, 왜 그래요. 33장에서 34장 동안에 10년 어간의 세월이 흐르면서 야곱에게 천천히 그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면서 마치 갑옷과 같이 딱딱한 말하자면 불신앙의 껍질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무감각해 지는 거예요. 무감각해 지는 거예요.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이 야곱의 인생에서 야곱의 마음을 아픈 것으로 본다든지, 야곱의 위기 의식으로 보게 된다면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이 브니엘에서 400명을 이끌고 나아오는 형을 맞이하는 그 위기의 조금도 못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 자기 딸이 이렇게 강간당하는 이런 상황에서 지금 재물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뭐가 들어오겠어요. 그런 위기인데도 그때는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을 찾는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믿음의 수준에 올랐다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때만 하나님의 사람이지, 하나님이 손 놓으시고 내가 하나님의 손을 놓으면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과 무엇이 다를바가 있느냐는 거예요. 똑같아요. 세례도 아무 소용이 없고, 신자라고 하는 이름도 아무 구실을 못해요. 야곱이 이렇게 되어 가는 환경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마지막에는 어때요. 지금 하나님께서 강도를 높이시는데, 강간을 당해가지고 아, 그러면서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으니까 강도를 한번더 높이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세겜 족속들의 살육 사건이었에요. 이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쳐들어오면 자기는 다 망하는 거예요. 지금 도망가든지 어떻게 할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러면서 자식들을 원망하는 거예요. 자식들을 원망하니까, 33장에서는 아버지가 제사를 드리고 엘엘로엘이스라엘 고백할 때는 모든 가족들이 그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랐는데 이제는 너희들이 어떻게 이렇게 했느냐. 자식들이 막 대드는 거예요. 뭐라고 대들어요. 34장 마지막에서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와 같이 대우함이 가함이니이까. 어느 안전이라고 이렇게 대들어요? 그러니까 신앙적인 것들을 잃어버리니까, 아버지로서의 권위 조차도 잃어버리는 거예요. 어머니로서의 권위 조차도 잃어버리는 거예요. 부모들이 신앙이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의 풍속을 쫓아서 살아보십시오. 자녀들에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뭐를 사주고 많은 물질로 자녀들에게 공급해 주면 한 시간은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권위가 그 자녀의 앞날을 지켜주지 못해요. 부모의 권위는 재물에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권력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부모의 권위는 그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시는 분이다라는 것, 그것이 권위에요. 그것이 권위에요. 자녀가 특별히 신앙이 있을 경우에나 없을 경우에나 그것이 부모의 권위란 말이에요. 그것을 잃어버리니까 권위까지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바닥에서 헤매는 상태가 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리고나서 35장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35장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까지 한 거예요. 35장에서 하나님이 야곱에서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어떻게 할지를 알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죠. 그것은 다음 시간에 하고, 오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하면, 그러면 왜 33장에서 이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34장에서 이렇게 비참할 정도로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이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28장의 신앙만도 못한 28장만도 못하죠, 지금은. 28장은 그래도 수준은 낮았지만, 마음은 순수했잖아요. 그러니까 다 뭐 자기 수준에 맞게 기도하고 매달리는 거지, 흉볼 게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한 게 뭐예요. 뭘 해달라는게 아니라 나타나셔서 기름을 붓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드리는 일이 여기에서 일어났죠. 기도의 내용은 수준 이하였죠. 그렇지만 마음은 순수하고 진실했어요. 그렇잖아요. 순수하고 진실했어요. 그런데 이제 이런 순수함도 다 잃어버렸다는 의미에서 이 28장만도 못하고 곤두박질 하는 거예요. 완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황폐하게 되어 버린 상황을 무엇을 통해서 드러내시냐 하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거예요.
불행한 사건을 만납니까. 도무지 자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납니까. 하나님의 손으로 오세요. 하나님의 손으로 오세요. 어기에는 여러분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거예요. 오늘 마지막으로 제가 질문을 제기하고 싶은 것은 그러면 33장에서 그 좋던 신앙이 왜 34장에서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되게 되었는가. 그 10년, 혹은 20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야곱의 신앙이 곤두박칠 쳐서 형편없는 신앙이 되어 버리고 28장 이전으로 후퇴해 버린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무엇 때문이었어요? 아무리 들여다 봐야 백지 밖에 나오는 게 없어요. 뭐가 있어요, 33장 마지막에 한 5센티 하얀거 나오고, 34장이 나오는데요. 그거예요. 그 백지가 의미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33장에 좋던 믿음을 가지고 34장에는 믿음이 하나도 없는 형편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는데 그러면 33장과 34장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요. 33장과 34장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백지가 5센티 있습니다. 맞아요. 백지가 5센티 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그렇게 거기에서 살아간 거예요. 그렇게 그렇게 살아간 거예요. 여러분, 어저께 무슨 큰 일이 있었어요? 신앙이 공중으로 솟아나거나 땅바닥으로 일어나는 일 무슨일이 일어났어요, 어저께? 없었죠? 없었죠? 오늘은? 천장으로 솟아날 만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없죠? 야곱이 그렇게 우리처럼 살아간 거예요. 매일 매일 천천히. 천천히. 1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아간 거예요. 오히려 곤두박질 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소망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가 잘못된 지점을 딱 알아. 그래서 내가 이 비유를 늘 두는 데요.
사람들을 모아놓고 돌맹이를 주워 오십시오. 50킬로그램씩 주워 오십시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가가지고 무식하게 50킬로그램 짜리 돌맹이 하나를 집어가지고 왔어요. 어떤 사람은 30킬로그램 하나 20킬로그램 하나. 두 개를 집어 오고, 어떤 사람은 공기돌을 잔뜩 주워와서 50킬로그램을 만들어 왔어요. 다시 이야기 했어요. 있던 자리에 가져다 두십시오. 50킬로그램 그것 지고 온 사람은 확실해요. 정확하게 제자리에 가져다 둘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정확하게 가져다 둘 수 있어요. 두 개 갖고 온 사람도 갖다 놓을 수 있어요. 헷갈리긴 하겠죠. 큰 이쪽이든가 이쪽이든가, 그러나 결국은 가져다 놔요. 그러나 공기돌을 주워와서 50킬로그램을 만들어 온 사람은 그 수천 개의 공기돌 가운데 단 한 개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없어요. 50킬로는 똑같은 50킬로에요. 그렇잖아요. 죄 짐이라고 생각을 해봐요, 그것을. 야곱의 경우에 말하자면 공기돌이야. 무슨 특별한 일이 생겨가지고 믿음이 곤두박질 쳤다면 성경은 기록을 했을 거예요. 그렇죠. 그냥 살아가는 거죠. 사람들이 이야기 하죠. 회개하십시오. 내가 뭐 그렇게 회개할 것이 있습니까. 그래요. 야곱이 그렇게 살아간 거예요.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살아간 거예요.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자기도 모르는 거예요. 가슴이 팍 터지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온 영혼을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신령한 하늘나라의 이슬을 맞고 싶은데 안 움직이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요. 신앙생활은 뙤약볕을 거니는 것처럼 피곤하고 인생은 마치 안개가 가득낀 오솔길을 해매는 것과 같이 그런 상태가 1년, 2년, 3년, 4년,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러는 사이에
(찬양)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분명히 이것은 아니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데 왜 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 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를 아무리 들여다 봐도 큰 문제가 없어요.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나 결국은 한번에 50킬로의 죄짐을 지었든, 공기돌을 모아서 50킬로를 졌든 후자가 개인의 양심에는 가책은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동일한 것이에요. 아무 일도 없이 그 속에서 살아간 거예요. 왜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갔겠는가. 비극의 씨앗이 어디에서 뱉어졌다고 했어요.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그 땅을 은 일백개를 주고 샀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정착. 거기에서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감격적으로 예배를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에서 오래 살면 안되는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은 빨리 가나안으로 가야 할 사람이었어요. 거기 왜 그렇게 오래 머무냐 이거죠. 뭐 때문에 그랬어요? 세상 사랑 때문에 그랬어요. 무슨 사랑, 거기에 있으면서 이 사람들이 하던 주업이 짐승을 치는 것과 함께 매매하는 업이었어요. 매매하는 업. 무엇을 매매했는지는 몰라요. 그러나 분명히 무슨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이라고 나와요.무역하는 사람들, 매매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그 세겜에서 나지 않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아마 매매를 했던 모양이에요. 무역을 하면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면서 말하자면 부에 부를 더 불려 갔던 거죠. 여러분,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어요. 야곱이 형을 만날 때 뭐라 그랬어요. 얘야, 이 떼가 무슨 떼냐 그럴 때, 내가 이 요단을 건널 때에는 지팡이 하나 가지고 건넜는데 이 때는 이렇게 많은 떼를 이루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나에게 주신 것이나이다. 자기가 그 축복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했어요. 그런데도 무슨 돈을 또 벌 욕심이 생기냔 말이에요.
(예화) 록펠러가 미국의 재벌 아닙니까. 올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부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조금만 더. 그 다음에 인터뷰할 때 다음에 인터뷰 할 때도 또 그러더래요. 당신의 부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인생이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하나님 자신을 인하여 만족하기 보다 이 세겜의 땅에 살면서 재물을 모으고 재산을 모으는데 몰두했었던 거예요. 그러는 사이에 그렇게 살아가면서 세겜 사람들과 사니까 교류가 있잖아요. 세상에 세겜 사람들의,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의 그 생활의 모습과 부패한 것이 천천히 천천히 10년 동안을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고 10년 동안에, 20년 동안에 서서히 물들면서 이전에 그 하나님 앞에 순수했던 야곱은 사라지고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인간, 세상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인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대신 자기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술수에 또다시 깨어난 인간, 이런 모습으로 변한 거예요. 왜 신앙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자기의 방법대로 살아갑니까.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왜 그래요, 당연한 거예요. 야곱이 깨어있고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거예요. 인도하심.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기록이 없어요. 영적인 캄캄한 암흑기를 지나는 거예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겠어요. 할 수 없이 자기 방법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방법대로 저 잘났다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도 기가 막힌 사정이 있는 거예요.,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들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면, 기도할 때 자기들에게 찾아오셔서 얘야, 이 길은 내가 너를 인도하는 길이다라고 말씀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들이 드리워졌어요. 점점 포기하는 거죠. 그리고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는 거죠. 그 열매는 죄와 고통 밖에 없는 거죠. 이 33장과 34장의 이런 세월을 보내면서 마지막에 34장에서 브니엘하고는 비교가 안되고 밧단아람과는 상대도 안되는 인생의 이제는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는 야곱의 모습을 발견하는 거예요. 이 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괴로워 하던 야곱이 문제를 해결받는 놀라운 역사가 35장 1절에 나오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시는 거예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