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대면하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녹취자 : 김세나
두 시간 이야기 한 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35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마지막 장면을 우리들이 좀 기억을 해야지만 35장이 생생하게 살아서 올 것이에요. 성경을 읽으실 때 성경을 깊이 읽는 방법을 내가 하나 가르쳐 드릴게요. 그것은 뭐냐 하면 성경을 읽되 읽기 전에 성경을 한 번 두 번 읽으면서 성경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도록 그렇게 먼저 마음을 준비해야 되요. 이렇게 보면 야곱이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뭐, 야곱이 벧엘로 올라갔네. 하나님 만났나봐. 몇 번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머리만 커지지 천천히 천천히 읽으면서 그러면서 34장을 쭉 읽으면서 야곱이 한번 되보는 거예요. 야곱이, 야곱이 그 심정이 어땠을까. 그것을 느끼기 전에는 35장이 다가오질 않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읽어도 마음에 남는 것도 없고, 삶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러는 거죠.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그렇게 느끼면서 성경을 읽으면 야곱이 통곡할 때, 자기도 통곡한다고요. 야곱이 기뻐 뛸 때, 그 때 비로소 자기도 기뻐 뛰게 된단 말이죠. 살아있는 성경을 읽어야 해요. 그것은 뭐 나중에 하기로 하고.
34장에서 말이에요. 야곱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 야곱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어요. 얼마나 놀라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말하자면 이제 그 닳고 닳은 고수 가나안에서 익혔고, 그 다음에는 밧단 아람에 가서 진짜 고수를 만나서 그 고수까지 누르고,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고 그래서 닳고 닳고 술 하면 무궁무진한 이 사람도 이제 34장에서는 술은 써볼 기력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코너에 탁 붙었어요.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 무엇이었다고요? 디나의 강간 사건을 통해서 그 야곱의 마음은 갈기 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죠. 그래도 이 사람은 술을 버리지 못해요. 아, 지금은 아들이 없다. 아무말 할 필요 없다. 아들이 오기만 해봐라. 아들이 왔어요. 아들이 자기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 줄까 했더니 아들이 이번에는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서 세겜 사람들을 다 도륙했으니 이제 그 동족들이 말을 몰고 자기에게 달려와서 만약에 헤친다 하면 이 집안에 졸지에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은 순간의 일이란 거죠. 이런 상황을 맞이하면서 야곱은 움치고 뛸 기회가 없게 된 거예요. 그것은 늘 기억해야 해요. 어린 아이처럼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극한 위기를 당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제도 제가 하루 종일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경에 나타난 가장 평범한 진리 하나를 깨닫기 위해서 엄청난 수강료를 내고야 비로소 깨달아요. 얘야,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불순종하면 안된다. 불순종하면 나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씀을 듣고 설교를 할 때는 실감나게 안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고 그래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고 인생의 절망의 벼랑 속에서 신음을 하고 몇 번 죽었다 살아난 다음에야 아 그 말이 그게 보통 말이 아니었구나. 그 평범한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의 기자가 말하기를 복이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그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상해요. 어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막 죽었다 살아났다 징계를 받고 차를 타고 몇 바퀴 굴렀다가 다시 살아나고 그런 상황들을 보면 존경심 어린 태도로 와 이렇게 쳐다보는데 그리고는 거기에서 신나서 자기는 뭐 하나님 이야기 하는데, 그게 복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렇게 이야기 할 때, 말로 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로 할 때 그 때 아 그렇습니다 하나님,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그 사람보다 백번 간증할게 많은 사람이고 천번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아담의 후손의 본성이 말이에요. 말로 하면 안 들어요. 말로 하면 실감을 못 느껴요. 야곱이 말이에요. 이렇게 될 줄을 몰랐겠어요? 이 정도는 야곱이 알았던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성품을 28장이라면 몰라도 28, 29. 30, 31, 32, 33, 34. 여기까지 와가지고 상당히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인데 주님이 주님을 마음이 주님을 떠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겠어요? 다 아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어요. 인생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늘 예민한 마음을 가지고 어린 아이와 같이 전폭적인 순종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이라 이거예요. 꼭 기억하셔야 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못 되면 못 될수록 수강료가 비싸요. 수강료가 비싸서 톡톡히 댓가를 치루고 완전히 죽음까지 와서야 비로소 딱 그것도 많이 아니에요. 딱 그것 하나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이렇게 되는 구나. 그것을 깨닫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너무 믿으면 안돼요. 인간 자신을 너무 믿지 마세요.
그것은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기에 보니까 이렇게 야곱이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속에 놓여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드디어 35장에서 나타나셔서 야곱이 하나님을 찾았어요, 아니면 하나님이 야곱을 찾았어요? 대답을 자연스럽게 해 보세요. 하나님이 야곱을 찾았어요, 야곱이 하나님을 찾았어요? 하나님이 야곱을 찾으셨어요. 저녁때는 질문도 안 하고 퍼부어대고 아침에는 이렇게 대화하면서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았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성경을 읽을 때 의문을 늘 제기해야 해요. 왜 이럴까. 여러분, 야곱이 어디에서 위기를 만나게 되었어요? 34장 1장에서 벌써 위기를 만나게 되었죠. 무슨 위기? 딱 디나가 강간당했다고 하는 그 순간에 벌써 위기를 만난 것 아니에요? 아니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다가 1절에도 안 나타나시고, 2절에도 안 나타나시고, 31절이 다 가도록 안 나타나시다가 35장에서 슈퍼맨처럼 탁 나타나시는 이유는 뭐예요? 왜 그래요? 왜 34장에서 디나가 강간을 즉시 당했을 때, 하나님이 탁 나타나셔서, 그것 봐라. 그러시지 않고 왜 세겜 사람들이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왔을 때 그때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왜 칼 들고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을 진멸할 때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35장 1절에서 나타나시는 이유는 뭐예요? 왜 그래요. 왜 그래요. 기억을 하셔야 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31절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리고 35장 1절에서 나타나신 거예요. 왜 31절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어려분, 하나님은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착각 하면 안 돼요. 대통령을 만나려면 석달 전에 허락이 떨어져야 해요. 10분, 10분 면회 하기 위해서 세 시간을 먼저 가야 해요. 교육을 받고 다 검사를 하고 만남을 갖는 시간은 10분. 하나님은 아무 때나 만나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언제든지 계시고 그리고 언제든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분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만나지지 않는다. 왜 그러느냐. 34장 1절에서 이미 위기는 시작이 되었고 위기는 점점점점 파국을 향해서 치달아서 31절까지 와가지고 완전히 파국에 치닫게 되었어요. 그런데 31절에 보세요. 34장 31절 보세요.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끝났죠. 그리고나서 35장 1절 사이에 뭐가 있어요? 34장 마지막과 35장 1절 사이에 뭐가 있어요? 빈칸이 조금 나오죠. 그 빈칸이 중요한 거예요. 그 빈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요.
그러니까 1절에서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이 안 나타나신 이유는 야곱은 하나님께로 이 마음이 돌아간 게 아니라 아들에게로 돌아가 있었어요. 그리고 강간당한 자기 딸, 아들, 이것 밖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모든 사건을 주관하신다는 것들이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기다리세요. 34장 마지막 절에서 이제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피하고 움치고 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해서 거기에서 우리는 성경에 안 쓰여졌을지라도 틀림없이 확신할 수 있어요. 이제 뭐겠어요.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이제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고 이제 조금 있으면 저쪽에서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들이 말하자면 무기를 가지고 자기를 쳐 죽이기 위해서 집단으로 쳐 들어올지도 모르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야곱의 마음은 뭐겠어요. 둘중에 하나에요. 신앙이 없으면 아 죽어 버려야지 그것이고, 신앙이 있으면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거예요. 그 마음이 여기에 와서야 생기는 거예요. 여기에 와서. 하나님은 그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먼저 어떤 일들이 있었어요?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셔서 높은 마음이 낮아지고 낮은 마음이 돋우어지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평지가 되게 만드는 거예요. 쭉. 그것에 비로소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사람들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시는 거죠. 기다리시는 거예요. 주님이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은 환란을 당하면 내가 가서 구해주리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네가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주님은 환란 속에서 그 분을 부를 수 있는 마음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어떻게 돼요? 환란 속에서도 주님께로 아직 관심이 안 가고 눈 앞에 벌어지는 환란과 그리고 눈 앞에 벌어지는 모든 역경 그리고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들을 바라보면서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불평하고 자기 자신에게 불만족해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아직 수강료를 덜 냈어요. 더 내야해요. 길어지는 거예요. 그것 가지고 안 되면 하나님은 강도를 높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이 철저하게 그 분의 다스림 아래 있고 그 분의 통치하시는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안전한 것인가를 깨달을 때까지 이 사악한 인간의 본성과 끊임없이 싸우시는 거예요. 끊임없이 싸우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을 겨루어서 이기려고 하는 게 이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소심줄 같이 질겨요. 질겨. 누군지는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이 질긴 거예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깊이 마지막에는 어느 순간에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돌이키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의 마음은 다 녹는 거예요.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확 녹으면서 야곱이 마지막에 깨닫는 게 뭐에요? 이제 자기가 배웠던 강호의 그 밧단 아람에서의 고수가 통하지 않는 거예요. 여태까지는 통했는데 이제는 통하지가 않는 거예요. 그것이 통했더라면 주님을 구했을 리가 없죠.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허랑 방탕하고 그 나라의 흉년이 들었어요. 그리고 가지고 갔던 것들도 다 썼어요.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포가 되어 버렸어요. 얼마나 비참해요. 거기에서도 하나님은 안 찾는 거예요. 쥐엄 열매에 들어 누워가지고 돼지 열매에 가가지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가 있나 없나. 있었으면 아마 아버지 집을 안 갔을 거예요. 그것 먹고 또 살았지. 그것마저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치워 버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 돼서야 비로소 아버지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인간의 이 사악한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작은 일 닥쳤을 때 그 때 즉시 뭔가를 깊이 깨달으면서 순간 순간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게 그리고 오늘 일어난 이 일들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내가 지금 살아가는 오늘 하루하루의 걸음 중에서 어떤 부분들을 주께서 마음 아파하시는가.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분별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 그러한 영적인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에요. 진짜 복된 사람이에요. 정말 복된 사람이에요. 그것은 기억해야 돼요. 인간들이 그러질 못해요.
야곱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철저하게 34장 마지막에서 완전히 손드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 속에 이미 야곱이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어때요. 철저하게 고독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거예요. 어떠한 느낌을 받게 돼요? 이제 자기가 그러한 위기 속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고, 환란을 앞에 두고 있고 또 하나는 자식들도 자기를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리는 거예요. 기억해야 해요. 이렇게 신앙이 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그러면 철저하게 권위가 떨어져요. 모든 권위가 사라지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해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는 교회가 권위가 있어요. 힘이 있어요. 그래서 그 교회가 세상을 변화 시키고 사람들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권세를 갖는 거예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지 못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그리고 끊어져 버렸을 그 때에 비로소 교회는 그러한 모든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개인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든든할 때는 그 때는 이런 권위를 갖게 되는 거예요. 이런 권위를 다 잃어버리고 이제 야곱은 자기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대로 34장의 위기에 닥쳤을 때 처신을 한 모든 결과가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가져다 준 것이 없고, 그리고 자신에게는 철저하게 지금 인생의 마지막 외딴 골목길에서 아무도 도울 자 없는 가운데 혼자 주저 앉아 있는 거예요. 그 속에서 환란이 겹쳤고 디나의 강간과 그리고 울고 있는 아이와 그리고 그 자기의 자식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과 그리고 닥쳐올 곧 임박한 환란, 모든 것 속에서 이 야곱의 마음이 비로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러한 마음이 되었을 그 때에 35장 1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이제 하나씩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래요. 우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심이에요. 하나님. 늘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해요.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내가 그 위기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몸부림 치지만 그러나 결코 성공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인생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를 위기에서 구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32장에서 브니엘의 사건에서 그렇게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하고 마지막에는 교만함 때문에 환도를 쳐서 주저앉아서 통곡하며 부르짖다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을 받아낸 다음에 야곱이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이에요? 주님은 참 회개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환란에서 구출되는 것만으로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없어요. 환란에서 구출되면서 환란에서 구출되면서 그 환란에서 구출되는 가운데 자기를 그 환란에서 구하시는 주님이 누구신지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아까 말씀 드렸죠. 비싼 수강료를 지불하고 말이에요. 온갖 고통을 다 치룬 후에 환란에서 건져 내면서 깨닫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아, 하나님이 불순종을 이렇게 미워히시는구나. 깊이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예요. 한번 그렇게 되면 영원히 쉽게 잊어지지 않아요. 어떻게 잊어먹어지지 않아요? 아이들이 마치 빨갛게 타오르는 불에 한번 손을 집어넣고 고통을 경험한 후에는 그 불 비슷한 것만 봐도 근처에 안 가듯이 말하자면 그 인간이 깨닫기가 미련해서 짐승과 같지 않는한 한번 깊은 그런 것을 경험한 후에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불순종을 싫어하신다는 성경의 이 진술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의 깊이에요. 신앙의 깊이는 다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한 정도, 그것을 깊이 많이 경험한 사람. 그러한 비싼 수강료를 내지 않고도 영혼 깊은 곳에서 그런 것들을 말씀으로 말미암아 경험한 그 부피가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의 삶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신앙의 수준의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신앙의 부흥은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하나님이 이러한 위대하심이 어떠하신지를 체험하게 되는 사건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다르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거죠. 기억해야 해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거예요.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러나 주님은 나타날 만한 때에 나타나셨어요. 나타날 만한 때에 나타나셨어요. 주님이 기다리시다가 나타나셨어요. 이것이 바로 신앙 부흥의 모든 줄기의 출발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어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야곱에게 이르시되 그러면서 단을 쌓아라 그러셨어요.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르셨다고 그랬어요? 누구?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큰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무슨 소망을 발견하게 되어요?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야곱과 함께 28장에서 언약을 맺으신 이후에 한 번도 약속을 어겨보신 적이 없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제껏까지 야곱의 모든 삶을 인도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죠. 32장에서 전폭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회개할 때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고 그리고 34장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을 당하고 슬피 고통하며 괴로워 할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어요.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라고 하는 약속은 28장에서 하신 약속은 어기신 적이 없이 늘 지키셨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약속을 맺은 이 야곱은 환경과 상황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주님께 매달렸다, 주님을 버렸다,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했다, 자기 수단을 의지했다, 이러면서 살아온 결과가 34장이에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오늘 나타나서 말하고 계신 그 대상이 누구냐 하면 야곱. 이 35장에서 쓰여진 야곱이라고 하는 단어는 32장에서 야곱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라요.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데도 여기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야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때문이에요? 늘 조심해야 해요. 성경을 읽다가 한 글자라도 주의해서 보아야 해요. 이런 의문이 떠올라야 해요. 금방. 왜 이스라엘이라고 안 그러고 야곱이라고 그랬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명 시켜준 이름이에요. 말하자면 우리로 말하자면 성도라 그런 이름이죠. 그렇게 바꿔 주신 이름인데 그 이름은 전혀 여기에 합당치 않아요. 왜 그래요. 34장에서 살아온 디나의 강간 사건, 그것을 당한 당하고 나서 처신하는 모든 불신앙 이런 모든 것들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그러한 성도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그것이야말로 정말 사기꾼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야곱의 모습대로 살아간 그에게 찾아오신 거죠. 우리는 여기에서 죄인을 찾아오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는 거예요. 죄인을 찾아오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거룩했고 이 야곱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불신앙 가운데 조금 있다가 보면 알지만 집안의 우상단지가 들끓고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가고 위기 속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지를 모르는 이러한 완전한 불신앙 속에서 실패한 그 인간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소망이 되는 거죠. 우리들에게. 그러니까 어떠한 죄인이라도 주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여 주실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죠.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떻게 인생의 절망 가운데서 불순종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반항하면서 죄 가운데 허물 가운데 34장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빨리 31절 이후에 야곱이 가졌던 그러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는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보여주시는 거죠. 35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결국 야곱의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34장으로 끝난다면 결국 야곱에게 있어서 34장은 야곱을 파멸케 하는 마지막 원인이 되는 것으로 성경이 마쳤을 거예요. 그러나 문제는 뭐에요? 야곱이 35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후로 얼마나 거룩해 지는지 몰라요. 정말 거룩해지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모든 술수를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죽은 후에 자기를 또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그 묻어주기를 애굽으로 내려간 뒤에도 그렇게 고백을 하고 죽는 그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결국은 하나님이 놀랍도록 거룩하게 만드신 야곱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런 눈으로 보게 된다면 35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신앙의 부흥의 기사가 있었으니까 34장은 어떻게 말하자면 34장이 없었으면 35장이 없었으리만큼 그렇게 중요한 장이 되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돼요? 인생의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위기는 기회가 될수도 있는 거예요. 인생의 위기가 기회도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절망 가운데 신음하는 이 고통이 새롭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왜, 주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야곱에게 있어서 바로 하나님이 이러한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이르시되.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뜻이거든요. 말씀하셨다. 35장에서 말이에요. 35장에서 뿐만 아니라 34장 이 절망적으로 떨어져있는 인생 가운데서 야곱이 만약에 여기에 있어서 성경을 읽으면서 당신이 당신이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가 기록된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이 부분에다가 동그라미를 칠 것이라 생각을 해요. 이르시되. 이르시되. 왜요. 34장에서 하나님이 계셨어요, 안 계셨어요? 대답해 보세요. 34장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안 계셨어요? 34장의 시간이 흐를 때, 하나님이 계셨어요? 안 계셨어요? 32장에는, 31장에는? 언제나 계셨어요. 언제나 계셨는데 그 계신 것이 야곱의 인생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되는 거예요. 34장에 그와 같이 비참한 위기를 당해서 고통하고 신음하면서 말하자면 절망하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셨는데 야곱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신, 야곱이 그 인생의 비참한 위기 가운데서 벗어나는데 아무런 역사하시지 않으신 거예요. 그러면 35장에 비로소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이제는 하늘의 고요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떻게요? 이르시되, 그러면서 야곱의 심령 속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이 평범한 사실을 기억하면 인생들이 훨씬 더 안전한 길을 걸어가면서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위기 가운데 있어도 두 가지만을 명심하면 소망이 있어요. 그 중에 첫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다. 비록 나를 시궁창에 굴리고 절벽 아래로 밀어 넣으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다.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믿어지면 그러면 그 인생은 어떠한 시련 가운데서도 소망이 있어요. 그런데 늘, 오늘 저녁에 그 이야기를 다루려고 하는데 마귀는 늘 이것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뢰하고 싶어도 의뢰할 수 없게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는 거예요. 두 번째가 바로 뭐냐 하면 하나를 이것을 기억하면, 꼭 이 신앙의 신실함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르시되. 하나님이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에게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믿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그 모든 위기 가운데에서 건져 낼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리고 나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켜서 자유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 이 두 가지가 믿어지면 든든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시면서 들으셔야 해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보고 집회를 다녀보고 서로 같이 신앙생활을 해 보고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한번 하나님의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말씀으로 그냥 이렇게 한번 분위기에 녹아서 눈물을 흘리고 닦고 하는 것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가슴을 저미도록 밀려와가지고 그 진리 앞에 인생이 확 뒤집어지는 사람 이외에는 전심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요. 기억해야 해요. 그리고 그렇게 한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생 자체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과 같이 완전히 변화된다. 놀라운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인생 그 자체가 뒤 바뀌는 놀라운 진리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태도가 달라요. 그리고 늘 인생의 모든 문제를 성경 속에서 풀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성경을 사랑할 수 없어요. 저도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 부흥을 만나기 전에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이 성경책이 콘크리트 덩어리였어요. 늘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읽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말씀이 어떤 깊은 부분들이 숲속으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수많은 갈래길이 보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죠. 그런 적이 없었어요. 늘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과 짐으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것은 벌써 우리의 영혼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징조에요. 그러면 그런 역사가 한번 사람들에게 주어지면 말이에요. 집에 이렇게 가서도 사람들이 무거운 죄짐을 지고 왔건 아니면 개판을 치면서 살다 왔건 간절히 기도하면서 왔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일단 올라가서 한번 며칠이 지나서 분위기가 확 하나님 앞에 한번 청소가 된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예전에 10년전이라 할지라도 말씀 그 자체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커다랗게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의 말씀이 가슴 깊이 지워질 수 없는 화인으로 각인되어 새겨진 사람들은 거기에서 말씀을 듣는 태도가 엄청나게 변화되어요. 그러니까 똑같이 자기를 변화시켰던 그러한 말씀이 말하자면 성령에 의해서 선포되어질 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놀랍게 믿는 거예요. 그리고 마치 설교자를 잡아 먹을 것처럼 그리고 전심을 기울여서 그 말씀을 받아 들여요. 그것은 신앙의 연도와는 상관이 없어요. 나는 신앙의 연도에 대해서 제일 회의하는 사람 중의 하나거든요. 나는 목회 현장속에서도 놀랍게 많이 봤어요. 신앙의 연도가 많은 사람들이 절대 견고하지 않아요. 그렇죠. 교회를 가지고 안 빠지고 나오는 그것만을 가지고 견고하다고 그러면 견고할 수 있죠. 그러나 그러한 것이 견고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폭적으로 이 나그네와 같은 세상에서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으로 인하여 살고 그 분을 붙들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전폭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교회에 오래 나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거예요. 저는 요즘도 우리 교회에서 봐요. 나온지 불과 2-3주 밖에 안 된 그러한 형제 자매들이 생전 예수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주기도문 강해 하는데 빨려 들어와요. 산전수전 다 겪은 청년들은 눈에는 눈꺼풀이 낀 것처럼 시꺼무래 해서 영혼의 호수에 안개가 낀 것 같아요. 외쳐도 안 들어가고 다독여도 안 들어가고 눈물로 이야기해도 안 돼요. 이게 보통 큰 병이 아니에요. 이 정도 되면 정말 가망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르시되 이 이르시되 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면 야곱은 계속해서 시달림 속에서 헤매는 거예요. 절망하고 죽어버리는 거죠. 아니면 가나안과 브리스 족속이 쳐들어 왔을 때 힘을 다해서 싸우다가 장렬하고 죽어버리든지요. 둘 중 하나에요. 도망가다가 잡혀 죽어 버리든지. 둘 중 하나에요. 이르시되, 얼마나 중요해요? 주님이 말하자면 가나안에서 33장까지, 32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33장에서 단을 쌓을 때까지 기도하면 늘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 같아요. 틀림없어요. 그런데 그게 20년 가까이 끊긴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데도 불편 없이 살아요. 그러면서 35장에 이르러 인간이 완전히 위기에, 상식 가지고 해결이 안 되요. 어떻게 몸부림쳐도 눈물을 흘리나 눈물많이 흘려도 죄를 벗게 못하네. 눈물을 흘려도 어찌 할 수가 없어요. 가슴을 찢으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말하자면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게 꼭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야곱처럼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해주실수도 있어요. 나도 그러한 것을 부인했던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을 붙잡으면 안돼요. 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여기 있는데, 네, 여기. 하나님은 제가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에 와서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이 웃긴다. 가고 안 오셔요. 이건 어때요. 언젠가 기다리셔요. 주님, 조금 있다가 듣겠습니다. 그래라. 저녁 먹고 들어라. 그리고 여전히 주님은 말씀하셔요. 새벽에 정신이 멀쩡할 때 듣겠습니다. 그래라. 새벽에 펼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펴자마자 주님 말씀하십니다. 왜 안 일어나. 그리고 뭔가 뭔가 자기 인생에서 뻥 하고 터지기를 바라면서 불 떼러 다니고 그러면서 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 헤맵니까. 말씀으로 돌아와야 해요. 이르시되. 이 한 마디에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 해결되는 놀라운 전개를 맞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이 주야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거예요. 시인이 말하죠. 주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이니이다.
(예화) 빛 없는 시골길을 걸어본 적 있으세요? 등 없이 산길을 헤매 본 적 있으세요? 전 헤매봤어요. 기도원에 삼각산 기도원 꼭대기를 올라가는데 가다가 중간 딱 올라가는데 후레쉬가 망가졌네. 그것도 캄캄한 그믐 밤에 그것도 1월달에 아주 추울 때, 길이 보여요, 그 캄캄한 밤에? 한참 걸어갔는데 휙 하고 하얀게 나타나서 이렇게 하고 보니까 폭포가 얼어 붙은 거예요. 이렇게 하고 보니까 이쪽에 암좌가 보이고, 막 걸어가고 나면 낭떠러지고 불빛이 멀리 보이는데 세 시간을 산속에서 헤맸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길의 빛이요. 빛 그 말씀의 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 저리로 가면 안 되는구나 아는 거예요. 그 꼭 그것을 꼭 찍어서 먹어봐야지만 그 맛을 알아요? 걸어보면 알죠. 그 발에 등이 비취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구나를 알게 되어서 그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야곱이 이랬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소망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돼요. 그리고 사모하세요. 정말로 전 있죠. 여러분들은 아니고 설교 듣는 사람들이 불쌍해 죽겠어요. 너무 불쌍해요. 그 평범하고 그 생명적인 진리를 왜 그렇게 말을 하면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정말이에요.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와 같이 밀려와서 한번 우리의 모래성과 같은 교만한 모든 것들을 한번 확 쓸어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야 해요. 제가 단순히 성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광대하게 펼쳐지면서 인생 자체를 쓰러넘어뜨리는 일들이 일어나야 해요.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있다라고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구나. 저는 농담처럼 받아들였어요. 그러니까 교회 오면 생각은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 그러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회가 정말 재미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즐겁게 지낼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큰 일을 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보람있는 계획을 세울까. 이러한 생각들로 가득채우는 거예요. 야곱의 일생이 건져낸 단 한 마디의 말씀, 이르시되. 이것으로서 결정이 나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하나님이 뭘 이르셨어요? 어떻게 하라고 하셨어요? 뭘 쌓으라? 단을 쌓아라. 단을 쌓아라. 단을 쌓으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었어요? 제사를 드리는 거죠. 제사는 무슨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예배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가장 중심자리가 예배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진군을 할 때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났는데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가운데 치는 것이 뭐냐 하면 성막. 성막을 치는 거예요. 성막 가운데 뭐가 이루어져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게 모든 진의 정 중앙에 있었어요. 상징하는 바가 뭐예요?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지만 그렇지만 그 모든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 가운데 정중앙에는 그 모든 힘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공급을 받는 거예요. 단을 쌓으라고 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 앞에 서라는 거죠. 그러면 내가 만나 주겠다라는 거죠.
지금 여러분들은 우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가장 큰 문제는 딴 게 아니에요. 그것 하나가 변화되지 않고는 다른 것들은 아무리 변화가 되어도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예배에요. 예배. 예배에 대한 것이 뭐냐 하면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예배를 조금 더 절도있게 조금 더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교회에서도 보면 옛날에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예배를 막 강조해요. 막 예배 드리러 오는데 말이에요. 옷 차림이 그게 뭐냐. 예배 드리러 오는데 뭐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예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왜 그래요. 문제를 어디에서 풀어야 되겠어요?문제는 뭐냐 하면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사람들에게 예배 시간을 지켜라. 예배할 때 거룩하게 예배 드려라. 뭘 어떻게 하지 마라. 아무리 이야기 하여도 소용이 없고 해결은 하나가 있어요. 예배 시간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확실하게 이루어지면 변해요. 완전히 변화해요. 저는 그것을 생생하게 경험했어요. 예배 시간 전 한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와서 기다려요. 흐느끼면서 기다리는 거죠. 뭐라고. 모든 관심은 예배에요.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예배 속에, 말씀 속에서 우리와 만나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는 거죠. 예배가 거룩해져요. 그 예배가 예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가 끝났다 그것이 아니라 예배를 끝나고 탁 나올 때 우리가 하나님 만났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연약한 무릎을 꿇게 만드시고 우리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의 죄악을 들쳐내셔서 징계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예배가 침묵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는 문제인 거예요. 이것 가지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말 이 악한 세상에서 허막한 세상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게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예배 시간에 북을 치자, 그 이야기도 아니에요. 예배 시간에 울자, 그 이야기도 아니에요. 뭐에요.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이 있으면 어떻게 예배가 11시에 시작을 해서 똑같이 끝나겠느냐는 거예요. 전국의 예배가 12시 10분에. 그리고는 12시 30분부터는 점심 먹어야 할 것 아니에요. 이런 것은 뭔가가 상당히 결핍되고 있는 것이에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 이 말씀은 아주 간단한 거예요. 이것은 복잡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너와 만나 주시겠다, 그 이야기에요. 헌신 그러한 의미도 있지만 그것은 2차적인 이야기이고, 첫째되는 의미는 단을 쌓으라. 내가 너와 만나 주겠다. 33장에서 그렇게 이야기 한 후에 34장에서 살면서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봐요. 지금 전혀 야곱이 고민하는 것과는 방향이 같아요, 달라요? 방향이 전혀 다르잖아요. 자, 야곱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뭐에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쳐들어와서 나는 이제 죽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인간의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타내셔서 야곱아 걱정 마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너 쫓아오다가 구덩이에 다 빠져서 지금 헤맨다. 그런 대답을 원할 거예요. 그러나 순서가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원하시던 바는 이 세상에서 그 가나안 세겜의 땅에서 야곱이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주님의 소원이 아니었어요.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너무 행복해봐요. 그 어떤 일이 있어요? 그러면 하늘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너무 행복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야곱을 하나님 앞에 세우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뭘 보내시기로 하셨어요? 야곱이 이 핏줄을 통해서 뭘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메시야를 보내고 싶어하시는 거예요. 야곱 이 한 사람 속에 인류의 모든 구속의 계시가 담겨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 야곱, 하나님은 야곱이 야곱이었지만 하나님은 야곱 속에서 온 세계를 구원할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때는 이렇게 기도해요. 하나님, 나같은 것을 보시면 어떻게 처치를 하셔야 마땅하시겠지만, 그러나 주께서 저를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신 계획하신 사람들을 기억하셔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야곱이 야곱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죠. 그러면 뭐에요. 야곱 이 한 사람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고, 메시야를 통해서 저 멀리에서 수많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그러한 모습들이 이 야곱 한 사람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단을 쌓으라. 내가 너와 만나주겠다. 브리스 족속과 무슨 그 가나안 족속,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돼요.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돼요. 왜 문제가 안 돼요? 야곱 코 앞에 와서 칼을 대밀어도 주께서 한번 건지시면 야곱을 헤할 자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가장 급한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성급한 문제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세우시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서고 있습니까?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서 서있다는 것을 느낍니까. 예배 시간 끝나자마자 나오면 대부분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오늘도 예배가 끝났다. 땀이 흐르는 성가대 옷을 벗으면서 아, 오늘 예배가 끝났다. 그것 가지고는 허막한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정말 이길 수 없어요.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가 예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저는 인생의 최대 고민은 그거예요.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수 없이 움직이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천사의 목소리로 가지고 수십만명 앞에 설교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것 끝나고 나서 아 감명 깊었다 돌아간다고?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정신 못 차리게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을 그 브니엘에 세워줘야 하죠.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붙잡던 교만이 환도 뼈를 치심으로 말미암아 주저 앉아서 통곡하며 매달리며 애원하며 이런 놀라운 모습으로 바뀌었어야죠. 제일 듣기 싫은게 아, 감동받았습니다. 제일 듣기 싫은 소리에요. 제가 경험해 보니까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정말 놀랍게 전광석화와 같이 밀려와서 마음 속에서 핵폭발을 일으킨 사람들은 설교자도 눈에 안 들어오고 옆의 친구들도 눈에 안 보이고 자기가 어느 교회에 있는지도 몰라요. 한참 막 통곡하며 기도하다가 황망의 눈물을 닦으며 가버리지. 에이 뭐 그런 것 없어요. 이 부흥의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때에 부흥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갖게 되는 거예요. 생생한 만남.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란 것이 뭐냐 하면 아 은혜로웠다 그 정도 가지고 안 돼요.
(예화) 무디가 그랬다고 그러죠. 설교를 했는데 아 그래도 이름이 그래도 났을 때에요. 상당히 잘 했단 말이에요. 자기도 만족스러워서 집회 끝나고 와서 강사방에 있는데 자매 둘이 찾아왔어요. 성령에 깊은 감화를 받은 자매에요. 와 가지고 뭐라 그러냐 하면 무디 목사님, 정말 그 설교를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무디가 생각해요. 그러면 그렇지. 자기들이 누가 설교를 했는데, 그러더니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고 헤어졌는데, 그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존심이 보통 상한 게 아니에요. 이게 지금 모자란다는 거거든. 그래서 무디가 쭉 깨달았던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을 깊이 마음을 움직여서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가져다 주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가 전폭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주여, 하늘을 가르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기도하는대도 성령이 안 오셔. 성령이 안 오셔. 성령이 안 오시니까 나중에 이제 무디가 깊이 깨닫는게 뭐냐 하면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뭐라고 기도했냐 하면 주님 그 성령이 오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나를 바꿔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거예요. 6개월을 기도했어요. 월 스트리트를 걸을 때, 그 증권으로 유명한 월 스트리트를 걸을 때, 기도할 때가 걸을 때였어요. 그 때 하늘에서 성령님이 그리고 우리가 아는 무디로 완전히 변화가 된 거예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통해서 그는 변화된 역사가 일어나요. 아니에요. 정말 이게 아니에요. 본거로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흥을 경험한 이후로부터 말이에요. 늘 설교를 해도 만족이 없어요. 저는 여태까지 수없이 설교를 많이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설교는 딱 한 번 했어요. 그 설교가 내 인생에서 열 번 정도만 반복해도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부흥을 일으킬 것 같은 그러한 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는 설교자가 설교하러 올라가서 성경본문을 피기도 전에 그것이 내려와요. 오늘은 정말 크고 놀라운 일을 볼 것이다. 그게 얼마나 생생하게 다가오는지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집회 장소로 들어오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절대 그것은 내가 스스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테니까 너희는 기다리라 그리고 성경본문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말하자면 그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냐 하면 사람들이 깊이 자기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거예요. 벽을 붙들고 2시간 반 동안 서서 회개를 하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한 모든 감격 그 다음에 너무너무 기뻐하는 거죠. 은사, 그런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하나의 부순물들이에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 그 죄인이 이제껏 본적이 없었던 거룩한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남으로 말미암아서 말하자면 사람 속에 있는 모든 생각과 이 마음의 경향과 모든 것들이 바뀌어지는 거예요. 본질적인 변화가 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그러한 사람들은 연도가 긴 사람들이 견고한 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이 견고해요. 물론 100%는 아니에요. 그렇게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 경험이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은 실족을 하고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에드워즈와 같은 천재가 말이에요. 부흥을 이야기 할 때, %를 냈어요. 그것 지금 다 기억을 못하는데 놀라운 사실이 뭐냐 하면 아주 그냥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고 어마어마한 회개를 하였는데도 1년 동안 세례를 안 줘요. 두고 보겠다. 놀라운 이야기는 뭐냐 하면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회심을 한 사람들이 1년 후까지 교회에 남아있는 숫자가 50%밖에 안 된다면 부흥의 시대에는 90%가 넘는 사람들이 남는 거예요. 신앙은 연도 아니에요. 그러한 것으로 교만하신다면 지금 다 훌훌 털어 버리세요. 다 털어버리세요. 그런 사람들이 집회 가면 꼭 저쪽에서 모범 답안 꺼내들고 설교자가 설교하면 그것이 정답에 맞나 안 맞나 맞춰보고 있다고. 그러다가 한 두 개 틀리면 봐주는데 계속해서 틀리면 대드는 거죠. 아니면 앞 문 꽉 닫아 버리고 집에 가던가. 둘 중의 하나에요. 안 돼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통해서 신앙은 놀랍게 성장하고 견고함이 있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이 이런 모든 문제 가운데서 방황하고 고통하고 있을 때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너는 내 앞에 서라는 것이었어요. 너는 왜 내 앞에 서지 않느냐. 그 하나님 앞에 너는 서라. 이것이 이 모든 야곱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첫 번째 방식이었다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그것을 기억해야 해요. 모든 문제를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마음 속에서 그렇게 봐서는 문제 해결이 없어요. 생생한 하나님과의 관계, 그 속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거예요. 정말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없이 자기가 머리 궁리를 하고 이렇게 하면 되겠다. 그러면 될 것 같죠. 해 보면 그게 아니에요. 만족이 없어요. 야곱이 단을 쌓으라 할 때 정말 얼마나 오래동안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 모르겠어요. 제사는 드렸을지도 몰라요. 거기에 단이 있었으니까 드렸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드렸건 안 드렸건 문제가 안 돼요. 왜 문제가 안 돼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났겠느냐에요.
그러니까 교회를 정하실 때는 말이에요. 딴 것 볼 것 없어요. 목회자가 어느 학교 졸업했나. 뭐 얼마나 무슨 뭐 공부를 많이 했나. 뭐 얼마나 배가 많이 나왔나. 그런 것 볼 필요 없어요. 우리 조 전도사님과 같이 풍성한가. 아니면 저처럼 이렇게 홀쭉한가 그런 것을 보실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뭐예요. 그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뭐예요. 예배에 참석해 보면 알아요. 진리가 있는가. 성령이 역사하시는가.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가. 그것을 보면 돼요. 그 다음에 그것만 완전하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용납해 줘야 해요.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어떻게 목회자가 독재를 하든지 다 용납해 줘야 해요.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말씀하셨어요. 설교자가 설교 시간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설교자라면 그 나머지 부분은 모두 용납해야 된다. 괜찮다. 용납받을 수, 용서받을 수 있다. 늘 그게 내 마음의 부담이에요. 정말, 저는 회심하고 나서 말이에요. 지금 19년인가 그랬는데요. 회심하고 나서, 어렸을 때 믿었습니다만 회심하고 나는데 늘 그것이 말하면 의문이었어요.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깨닫게 된 거죠. 예배의 문제에요. 정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 생생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예배, 없어요. 그 이외의 다른 활동이 아무리 풍성해도 늘 성도들은 외부적으로는 교회에서 자꾸 이런 저런 일들을 하니까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순서가 돌아오면 성가대 밥도 해야 되고 다 해야 하잖아요. 그래야지만 교회가 운영이 되죠. 다 하는데 늘 문제는 뭐예요. 겉으로 막 봉사하는 사람들은 중심에 팍 찌르고 돌아가면 한없이 곤고하고 공허한 거예요. 왜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상이 너무 희미한 가운데 짊어지고 있는 일들은 너무 큰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참 영생의 종교는 사실 그러한 의미의 신앙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만남, 야곱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것이에요
생생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세워 주심으로 말미암아 야곱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는 너는 내 앞에 서라. 너는 나를 만나라. 그리고 모든 문제를 내 안에서 해라. 왜, 하나님 안에서 모든 해결이 있는데, 그렇잖아요. 하나님 안에 모든 해결이 있는데 하나님과의 만남 이루어지면 다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늘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해요.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어서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뭐냐 하면 어디로 올라가라고 했어요? 벧엘로 올라가라. 어떻게 올라가라? 어떻게 올라가라? 야곱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죠. 주님을 만났을 때 야곱이 졸지에 엎드려 졌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야곱은 엎드려 진 자예요. 자기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엎어진 자. 우리말로 이야기 하면 엎어져서 코가 깨진 상태. 그래서 온통 얼굴이 코가 깨져서 말이에요. 묵사발이 된 상태에요.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야곱에게 일어나라. 일어나라. 여러분 이 일어나라는 구절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성경에서 이따가 일어나라를 찾아 보세요. 대게 많이 나와요. 일어나라. 일어나라가 신약에서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엎드려진 바울을 향해서 일어나 네 발로 서라. 일어나라. 일어나라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발하자면 하나의 회복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34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야곱이 자기의 죄의 돌부리에 걸려서 완전히 넘어져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라, 그 다음에 어디로 올라가라? 벧엘로 올라가라. 단을 어디서 쌓으라는 것입니까? 벧엘에서 쌓으라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요. 무슨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요? 왜 단을 쌓는데 단을 쌓으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단을 쌓으라 그러시면서 왜 벧엘에서 쌓으라고 그러셨을까. 왜 벧엘에서 쌓으라고 그러셨을까. 단이 어디에도 있어요? 최근에 만든 단 있잖아요. 세겜에 만들어서 자기가 신앙 고백까지 했잖아요. 엘엘로헤이스라엘. 33장 마지막에서 세웠죠. 그것 보면 세겜에서 세워진 단이 신앙적인 단이었을까요, 불신앙적인 단이었을까. 신앙적인 단이었어요. 왜 그래요. 우선 그 단이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지를 우리들이 주목해야 해요. 뭘 알 수 있어요? 무슨 사건 이후에 세워졌어요? 브니엘에서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그리고 그 브니엘에서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그 형을 만나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기를 건져 내신 것으로 인하여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쌓았던 단이에요. 신앙적인 단이죠. 그리고 이제껏 까지는 늘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러고 살았지만, 여기서는 드디어 엘엘로헤하나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이 자기의 이름이니까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렇게 개인적인 신앙을 깊이 고백한 유서깊은 단이었죠. 이러한 단에서 얼마든지 단을, 그 단이 쌓여져 있으니까 거기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싹 치워버리고 하나님을 세롭게 경배하면 얼마든지 되는데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세요? 벧엘로 올라가라. 그러면서 거기에서 거하며. 한번만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서 상당기간 동안 거기 있으면서 단을 쌓으라. 왜 세겜이 아니라 벧엘일까요. 왜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겠느냐.
우선 말이에요.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벧엘로 데려가셔서 이 야곱으로 하여금 벧엘에서 뭔가를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뭔가를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뭘 느끼겠어요. 벧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거예요. 벧엘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난게 28장이었죠. 지난번에 다 설명했죠. 28장에서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밧단아람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면서, 왜 돌아봤어요? 형이 쫓아올지도 모른다. 돌아보면서 사랑하는 엄마, 아빠 곁을 떠나서 걸어가고 있는데 그리고 거기에서 잠깐 자는데 하나님이 거기에서 나타나셨던 거죠. 그러면서 거기가 벧엘이 되었어요. 그 야곱을 벧엘에 가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벧엘을 말씀하신 것인데, 왜 벧엘이었냐 하면 벧엘에 서면 하나님이 그러니까 말씀을 직선적으로 안 하시고 벧엘에 가 봐라. 뭔가 느끼는게 있을 거다. 벧엘에 딱 섰을 때, 여러분들이 야곱이라면 뭘 느꼈겠어요? 뭘 느꼈겠어요?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밧단아람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고 거기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수가 없고 가다가 가다가 짐승을 만나도 죽고 강도를 만나도 죽고 가다가 옷은 떨어지지 않을까, 신발은 해어지지 않을까. 음식을 다 먹고는 그 다음에 음식을 구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고 수많은 위험이 있고 뒤에는 형이 자객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한 위기 속에서 새우잠을 자던 때가 그게 벧엘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불안을 일시에 씻어 주셨어요. 어떻게 함으로 말미암아? 만나주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야곱을 벧엘에 가서 하필이면 단을 쌓으라고 하신 이유는 그 벧엘에서 내가 너를 어떻게 인도하였는지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보라 내가 어떠한 사랑을 네게 주어 하나님의 자녀 삼아서 여기에까지 내가 인도해 왔는지 벧엘에서서 똑바로 기억해 보라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이런 것을 한번 해 보세요. 큰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날을 그것을 기념일로 지키란 말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일잔치만 해먹지 말고 그런 날 딱 기억하면서 그 날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가 이러한 큰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정말 죽음의 길목에서 있었는데 주님이 나를 건져 주신 날이다. 아니면 내가 이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 날이다.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상기시켜 주고 그러면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거죠. 우리의 벧엘은 어디에요? 여러분들의 벧엘은 어디에요? 여러분들의 벧엘은 최근일수도 있고 지금은 기억조차 안 날수도 있어요.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늘 우리의 가장 확실한 벧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와의 만남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참 감사하게 예수를 믿은 것 같아요. 누가 이렇게 잘 전도해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하여튼 갔는데 예수를 믿게 되니까, 어떻게 그 십자가의 사랑이 말이에요. 그 내마음을 그렇게 녹이는지 몰라요. 성경을 잘 모를때도 십자가 설교는 확실하게 했어요. 십자가는 뭐 조리있게 설교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하면 마음에 치밀어 오르는 게 있으니까 막 퍼붓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사랑, 그 우리의 벧엘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로부터 죄의 용서함을 받은 기억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거예요. 처음 사랑으로 우리들이 돌아가야 해요. 지금 어때요.
야곱이 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랍게 감동적이었겠어요? 그 새우잠을 자면서 불안에 떨고 있을 그 때 나타나셔서 염려하지 마라. 내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겠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때에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 늘 동행하겠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실 때에 이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거예요. 밧단아람에서 고생을 하고 그 외삼촌의 수에 놀아나면서도 늘 벧엘을 생각할 수 있었어요. 지금 어떻게 됐어요? 이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경배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으니까 하나님께 서원한 모든 것들을 지킬 때가 되었는데 벧엘은 어때요? 불신앙의 잡초가 길같이 자라서 기름을 붓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던 그 돌담 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신앙의 숲과 묵은 땅이 되어서 잡초가 우거진 그러한 늪이 보여요. 벧엘이 그렇게 되고는 벧엘이 그렇게 되고는 자기가 성할 날이 없요. 자기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늘 의심이 될 때마다 기억해야해요.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건져 내셔서 여기에까지 오게 하셨는가. 기억해야 해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나 에스라와 같은 사람들, 모세와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이끌고자 하는데 백성들이 타락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거예요. 주님이 징벌하실 것 같은 위기를 느끼는 거예요. 그 때 했던 일이 뭐냐 하면 고요히 지난날을 회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주셔서 그 어떤 놀라운 사랑으로 인도하셨는가. 계속 상기시키는 거예요. 상기해야 해요. 신명기의 주제가 잊지 말라는 거예요. 잊지 말라. 뭘 상기 시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에 자꾸 떨어지니까 하나님이 능한 팔로 너희를 어떻게 애굽에서 인도해내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독수리가 새끼를 날개에 업어 나름과 같이 너희를 인도하셨다. 독수리를 새끼를 나를 때 모든 짐승들은 이렇게 발톱으로 해서 날라간단 말이에요. 밑에서 사냥꾼이 슉하고 화살을 쏘면 어미새를 안 맞히고도 새를 맞혀서 떨어뜨릴 수가 있는데 독수리는 진짜 그러는지 모르는데 독수리는 엎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업어요. 이 날개 위에다가 흔들거리지 않는 이쪽 부분에다가 새끼를 엎어서 나른다는 거예요. 밑에서 보면 새끼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새끼를 쏘겠다고 마음 먹으면 어미새부터 떨어뜨려야 해요. 그 어미새가 하나님 자신을 비유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하나님을 멸하지 않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할 수 없게끔 그렇게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부터 건져내었다. 그것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계속 회상 시키는 거예요. 야곱에게 있어서 이 벧엘이 얼마나 놀라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가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벧엘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데 문제는 어때요? 불신앙의 잡초가 자라고 죄악이 깊어지면 인간의 심령이 부감각해져서 모르는 거예요.
(예화) 예를 들어볼까요. 어저께 이제 얼마 있다가 십자가를 출판을 하려고 원고를 만지고 있는데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한 1년 전에, 1년도 넘었나요. 원고를 만지면서 한없이 울었어요. 그렇다. 이 십자가다. 십자가. 이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의 마음이 분명히 우리의 입술로는 하나님의 가장 크신 사랑이 어디에 나타났다고요? 십자가. 성경에서 말하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오병이어로 보리떡을 먹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하지 않아요. 나사로가 살아서 일어날 때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 되었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어떨 때? 죄인 되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셔요. 하나님이 못하시는 게 많아요. 그 못하시는 것 중 하나가 십자가 말고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을 못 하셔요. 하나님으로서도 최상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에요. 사랑의 고백.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여기에 있는 사람 가운데 마찬가지에요. 누구든지 그것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 없어요. 십자가가 정말 나를 구했고 내가 그 십자가가 없으면 정말 죄 가운데 살아가다가 불구덩이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그렇게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죠. 다 그렇게 고백을 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무엇 때문에, 입술로 고백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에요?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이 나를 건져내신 것, 그 위대함 때문에. 야곱이 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전체의 새로운 장정으로 들어선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후에 야곱의 인생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행복에 가득 찬 인생이 되었어요? 아니에요. 지금도 말씀 드리잖아요. 그 구도를 가지고 신앙생활로 들어서면 걸림돌이 너무 많은 거예요. 빨리 그것을 버려야 해요. 빨리.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으십시오. 고난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그렇게 하면 누가 예수를 믿게 되겠어요? 예수 믿으면 생명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죠. 그러면 그 생명과 기쁨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은 이 세상에서 이방의 신들이 줄 수 있는 좋은 음식과 좋은 의복을 입으며 호의호식 하고 행복하고 가정과 함께 단란한 인생을 살며 죽기에는 야곱,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너무나도 컸던 거예요. 야곱은 그렇게 생각을 못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핏줄을 통해서 메시야를, 메시야를 통해서 온 인류를 구하고 싶어 했던 계시를 흘려보내는 통로였던 거예요. 우리의 구원이 야곱, 야곱 그 사람안에 담겨 있는 계시란 거예요. 그 벧엘을 통해가지고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놀라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말하자면 이러한 원대한 계획의 삶이 되는 거예요. 야곱은 그 때까지 몰랐을 거예요. 내가 왜 밧단아람에 와서 이 고생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고수에게 놀아나고 있는가 몰랐을 거예요. 그리고 브니엘의 사건 속에서 막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메달릴 때에도 내가 왜 이렇게 고통의 순간을 겪어야 되는가. 두려운 형과의 이런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 뭐예요. 지금 하늘에서는 다 이해할 거예요. 아, 땅에서 살아가는 이 팔레스타인과 밧단아람을 오갔던 이 방랑하는 방랑객과 같은 인생 하나에 이러한 놀라운 인류의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담으셨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어때요. 겉사람이 후패해도 답답할 이유가 없어요. 죽음에 가까워도 할렐루야. 유혹의 물결이 넘실거려도 아무런 걱정이 없어요. 우리가 조금 가난해지고 불행해지고 우리가 조금 더 고통을 많이 받아도 문제 없어요. 문제는 무엇이에요?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 사람들이 합해도 이룰 수 없는 그러한 계획들을 나의 인생을 통해 이뤄가려고 하는 원대한 계획으로 나를 초청하셨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바로 벧엘이 었거든요. 문제는 뭐에요? 야곱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의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의 벧엘은 가깝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사업의 위기를 만나고 커다란 인생의 말하자면 시련기를 만나서 그 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했더니 그 속에서 여러분들을 건져 주신 것, 얼마든지 벧엘이 될 수 있어요. 얼마든지 벧엘이 될 수 있어요. 늘 감사하세요. 늘 기억하세요. 그 때 환란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주님 앞에 이렇게 살겠노라고 작심했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나 그 고개를 넘어가보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여러번 일어났죠? 그러면 우뚝 서있는 벧엘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이후에 나타났던 벧엘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눈 앞에 보이는 인생만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정욕과 욕심을 따라서 쓰러져가는 풍습을 쫓아서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구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인생과 이 값진 생명들을 그렇게 세상 속에서 희희락락 하면 죄 가운데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것으로 즐거워하던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마지막에는 지옥의 뗄감으로 밖에 던져질 수 없는 인생들을 놀라운 하늘나라의 생명으로 주신 결정적인 터닝포인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만남 만이에요. 그런데 뭐냐 하면 이 십자가와의 만남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쉽게 이야기 해서 정말 그 벧엘에 끊임없이 서서 그렇게 감격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소수에요. 소수.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저 같은 사람도 필요 없을 거예요. 그런데 늘 이야기해요. 여기 성경공부 모임에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데리고 오지 마세요. 뭐하러 데려 오세요? 거기서 잘 살라고 데리고 오지 마세요. 못 사는 사람들 오라고 하세요. 그 하나님, 왜 그러면 자기를 그러한 비참한 우리의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과 태어나기 후와 여러날까지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는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의 운명이 영원히 바뀌게 된 갈림길보다도 더 큰 갈림길은 없어요. 그 갈림길에서 우리를 변화시켜도 우리 영혼의 벧엘,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감격으로 와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이유는 심령이 강팍해지고 죄가 가득해져서 그래요. 기억하세요. 참 제 말이 무리가 아니에요.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예민한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린 신앙의 눈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설교하면 마음이 녹아요.
(예화) 나는 90년도의 그 집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설교를 하는데 대학생들이 가득 있었는데 아 그렇게 강팍해요. 그래서 십자가를 설교를 탁 하는데 너무 눈물을 주시는지 몰라요. 그런데 무슨 뭐 먼산 쳐다 보듯이 맨 뒤에서 60이 넘으신 장로님이 어린 아이처럼 한 없이 우는 거예요. 한 없이 울어요. 무릎을 꿇고 한 시간 가까이 설교를 들으면서 한 없이 우는 거예요. 한 없이 우는 거예요. 살아있는 거예요.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가 살아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눈물을 흘릴 수 있겠어요. 그것이 작게 보이는 거예요. 그 벧엘이 하찮게 보이는 거예요. 그 벧엘이 하찮게 보이면 하나님 앞에 그 벧엘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이 하찮게 보일 거예요. 야, 그런 것 다 버리고 뭐 공부를 좀 하네, 돈이 좀 있네. 무슨 뭐 출세를 좀 했네. 교회에서 뭐 중직을 맡았네.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꼴이 얼마나 가서러우시겠어요. 벧엘은 지금 길가에 잡초가 자랐고 말하자면 감격과 눈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전재물을 붓던 그 돌들에 말이에요. 잡초가 무성해서 먼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묵은 땅이 되어 버렸는데 무슨 그 안에 생명이 있겠냐 이야기에요. 눈물이, 눈물이 없어요. 눈물이. 감격이 없어요. 피리를 불어도 춤 출줄 모르고 애곡하여도 함께 울 줄을 몰라요. 십자가를 묵상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광채가 나오는 감사가, 그리고 그 눈물이 여러분들을 확 여러분들은 이미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괜찮아요. 주를 위해서 열심히 아무 감각이 없고 무뎌 지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에 무뎌지는 거예요. 갈아버려야 해요. 바꿔야 해요. 묵은 땅을 기경하는 역사가 일어나면서 이러면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그래서 신앙부흥이 일어났던 때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벧엘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총을 베푸셨는가. 다 생각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에는 모든 이 거룩한 십자가의 복음에 말하자면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되는 역사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때 탁월한 설교의 주제는 늘 십자가입니다. 늘 십자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알지 않도록 작정한 거예요. 그러한 말씀이 이 부흥의 때처럼 생생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마지막 두 번째 왜 하나님께서 세겜이 아니라 벧엘에다가 단을 쌓으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간단해요. 세겜 사람과 헤어지게 하기 위해서. 세겜의 그 땅을 떠나게 하기 위해서. 그래요. 그 세겜의 땅에서 살아오면서 이 야곱은 세겜의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진리와 그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영향력을 세겜 사람들에게 미쳤어야 하는데 미치는 대신에 오히려 영향을 받았죠. 그들의 이방신의 영향을 받고 그들의 모든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야곱이 신앙적인 삶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하루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라 어떻게 일어났다고요? 서서히.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죠.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고 33장과 34장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살아온 거예요. 그냥 살아오면서 서서히 서서히.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세겜에서 떠나가야 하는 거예요. 세겜에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세겜에 계속 있으면 안 돼요. 그래서 세겜에서 자꾸 영향을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을 찾을 조차도 잃어버려요. 세겜에서 떠나라. 그러니까 문제는 어때요?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 그러니까 저도 뭐 느끼는 것이지만, 신앙이 식어지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더 절실해져요. 세상에 대한 사랑.
여러분들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말이에요. 성경을 읽으면 그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선지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계속 읽으면서 호세아의 마음이 되어 보는 거예요. 호세아의 마음이 되어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말하자면 방탕한 강남, 강남은 회개 많이 해야 해요. 강남 정말 회개 많이 해야 해요. 특히 강남에 있는 교회들은 정말 그날을 기억해야 해요. 하루에 술 값이 30억이 뭐야. 1년이면 1조 천억이나 되는 돈을 술 값으로 탕진해야 되겠으니. 술집, 그리고 스탠드바, 여관, 호텔, 어디에다 몰려 있어요? 강남에 강남. 뭐 하는 데에요, 다? 죄짓는 소굴이야. 그런데 그 큰 교회들은 다 몰려 있어요. 회개해야 해요. 나도 강남에 사니까 회개를 해야 하죠. 그런데 샛방에 사는 사람들은 조금만 회개를 해도 돼요. 그런데 이 말이에요. 이런 강남 도시를 보면서 호세아 선지자의 심정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면 걸어갈 때 호세아가 외쳤던 그 메시지가 솟아오르지 않겠어요? 눈물 없이 어떻게 세상을 보겠어요? 불쌍한 거죠. 음난한 여자를 취해서, 누구도 데려가지 않는 그 여인을 취해 가지고 예쁜 옷을 입혀서 장가를 들여서 시집오게 했더니 가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그 아이를 낳아가지고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여기 있다 주고 다른 남자한테 가는데 그 아이를 안고 눈물로 그 여자를 찾아다니는게 이 호세아에요. 하나님의 심정이 그런 것 아니에요? 진심으로 세상을 사랑해야 해요. 그러니까 오늘날 왜 복음 전도가 잘 안 되나요? 왜 복음전파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세상의 구원을 향한 교회의 눈물이 메말라버렸어요. 그것 문제에요. 오직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 그 자기 자신을 놓고도 별로 기도하지 않지만, 그 만민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간판이 무색할 뿐이에요. 문제는 뭐에요. 세상에 대한 사랑이 교회에 메마른 거예요.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나던 때에는 교회가 자동적으로 기도하던 시대였어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사랑의 복음이 사람들의 가슴에 넘치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기도하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그렇게 뒤 흔들고 지나갈 때 그들이 가장 사모하는 시간이 뭐냐, 기도에요. 기도.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거나 왜 그러냐 하면, 내 기도하는 시간, 그 때가 가장 귀하다. 달콤한 기도의 시간이에요. 그러면서 그런 속에서 말하자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이 뭐냐 하면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부흥을 즉시 경험한 다음에 깨달은 것은 자기 자신이 엄청난 죄인이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난 다음에 그 다음에 깨달은 것은 뭐냐 하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들면서 너무나 슬픈 울음이 터져 나와요. 막 눈물이 나요. 눈물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거예요. 이러한 세상을 향한 눈물들이 교회에 가득할 때는 복음이 전도계획 세우고, 오늘은 1구역이 동신아파트 돌고, 2구역이 무슨 뒤 파트를 돌아라 그러한 것을 안 해도 다 끊임없이 복음이 전해져요. 교회에서도 보면 계속해서 복음전도를 해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동일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어떠한 때에 일어나느냐 하면, 벧엘로 올라갈 때. 쉽게 이야기해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을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한번 버리는 것이 있어야 해요. 세상을 버리는 거죠. 헤어지는 거죠. 이 사람들이 있고, 문화가 있고, 돈이 있고, 상품이 있고, 물건이 있고, 그리고 자유로움이 있는 이 거리를 떠나서 아무것도 없는 벧엘로, 그리고 그속에서 이 세겜의 세속으로부터 분리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이에요.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