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8
목 차
주의 손이 나를 누를 때(시 38:1-3) 1
범죄의 우매함(시 38:4-5) 5
감출 수 없는 탄식(시 38:6-9) 9
회복하기 전에(시 38:10-11) 14
죄인이 침묵할 때(시 38:12-14) 18
내가 넘어질 때(시 38:15-17) 24
나를 도우소서(시 38:19-22) 28
시편56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주의 손이 나를 누를 때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1-3)
본문해설
시인이 언제 이 시를 썼는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죄로 말미암아 겪는 깊은 고통을 내면세계 속에서 표현하고 있는 시입니다.
다윗의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강한 끌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모든 창조의 세계 속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구약의 인물 가운데 탁월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의 시편을 보면 하늘의 달과 별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의 권력의 붙임과 나라의 흥망,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탁월한 신앙과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바깥의 무한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시가 우리에게 강력한 끌림을 주는 이유 중 또 하나는 내면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상세한 묘사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탁월합니다. 자기 바깥에 있는 무한한 세계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발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자신 안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내면의 성찰, 이 두 가지를 끌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와 사물에 대한 지식이 탁월하고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탁월한 지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탁월한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리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현저하게 부족해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용납해주십니다.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
38편은 다윗의 신앙과 신학의 탁월성으로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깊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 다윗은 38편 전체의 표제가 될 중요한 진수를 말합니다. “주의 노로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발견하는 교리는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분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의 사랑이든 하나님의 사랑이든 그 사랑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사랑에 계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계획을 따라 살아가면 그것을 가리켜 순종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계획에 거슬리도록 살아가면 이것을 가리켜 불순종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이 기계적인 사랑이라면 불순종했을 때 햇빛이 쭉 비칩니다. 그런데 햇빛이 싫어서 기둥 뒤에 숨으면 햇빛이 휘어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햇빛을 피해서 숨을 수 있습니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춰서 눈부신 아침이 되어도 이불속에 들어가서 뒤집어쓰면 그 빛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기계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는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 계획대로 우리가 살지 않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인격적으로 설복하십니다. 그러나 설복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 징계는 항상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인간의 영혼에는 깊은 시름이 생깁니다. 근심과 걱정, 염려, 예전에 있었던 기쁨과 생생한 은혜, 이런 것들이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는 본문에서 ‘주의 노’, ‘분노’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은유적인 묘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죄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께 책망을 받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양심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양심이 하나님보다 먼저 나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이 잘못되면 하나님은 괜찮다고 오라고 하시는데 내 양심이 나를 그릇되게 책망해서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인은 그것을 ‘주의 노’, ‘주의 분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원수들, 멸망하기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폭발하는 분노를 가리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면 하나님 앞에서 느껴지던 친절, 호의, 부드러움, 은혜,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고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걱정이 휩싸이게 됩니다. 그것을 시인은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손이 심히 누르나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살’은 화살을 말합니다. 화살의 뾰족한 끝으로 나를 찌른다는 것입니다. 뾰족한 살로 우리의 무릎이나 어깨, 가슴을 수없이 찌르면 피가 날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나이다” 이것은 전쟁의 문맥입니다. 전쟁이나 격투를 할 때 상대방을 쓰러뜨려서 손으로 눌러서 제압한 후에 마지막으로 받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항복, 혹은 죽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 때 느꼈던 영혼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상세하게 죄에 대한 묘사와 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증상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불안해하고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것이 계속된다면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뼈와 살에 이상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염려와 고통에 시달릴 때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에까지 변화가 옵니다. 신경 쓸 일이 있어서 낮에 조금만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면 당장 점심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위가 아픕니다. 밥을 먹다가도 안 좋은 소식을 듣거나 일이 생기면 그대로 얹힙니다.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위와 장이 딱딱해지면서 소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을 떠나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우리에게 큰 고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매일매일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주님 안에 거하는 삶, 세상에 큰 욕망 없이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범죄의 우매함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시 38:4-5)
죄, 영혼의 무게
예전에 짐꾼들이 짐을 나를 때 짐을 한껏 지면 짐이 머리 위까지 올라옵니다. 허리가 휘도록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기억날 것입니다. 시인은 죄를 짓고 나서 자기 영혼이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 꼭대기까지 짐이 올라와서 넘치는 것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짐의 무게가 느껴졌던 것입니다. 짐꾼이 무거운 짐을 머리 위까지 올라오도록 지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내가 죄를 지었더니 그 죄악이 나에게 그 무거운 짐이 되어서 이렇게 나를 곤고하게 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에 큰 무게를 더합니다. 우리의 참된 자유는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 세상에 있는 모든 욕망을 털어버리고, 주님만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영혼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집니다. 아무 거리낌이나 얽매임 없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영혼이 가볍게 느껴질 때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더러 무엇을 하라고 하실 때 그 영혼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거기에서 순종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유혹이나 시험을 피할 때도 신속하게 피할 수 있는 비결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영혼의 무게가 넘쳐서 자기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그때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무거워지면 내려가는 방향이 있는데, 그 방향으로 향해 가는 마음이나 행동의 경우에는 자유로운 것입니다. 새가 날갯짓을 하며 올라가려고 하는데 밑에서 줄을 묶어놔서 날아갈 수가 없습니다. 점점 더 큰 추가 달려서 밑으로 계속 떨어지는 것입니다. 날아가려고 날갯짓을 해도 밑으로 계속 떨어지는 것입니다. 새가 위로 올라가려고 해도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날개를 접으면 밑으로 더 빨리 추락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머리에까지 넘쳐서 무거운 짐 같아질 때 그것이 잡아당기는 방향이 마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영혼의 무게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혼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무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무게는 밑에서 잡아당기는 죄의 무게입니다. 그럴 때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깃털처럼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선한 소원을 품고 말씀대로 살고 은혜를 따라 사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 때 마음속에서 기쁨도 솟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가득 찰 때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실제로 실행을 하려면 잘 안 됩니다. 그것이 영혼의 무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 때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깨닫는 것들은 훌륭한 것이지만 동시에 죄를 짓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을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감당해야 합니다. 비유를 하면, 수영을 할 때 두 사람이 경쟁을 하는데 한 사람은 말끔한 맨살에 가벼운 수영복을 걸치고 수영을 하고, 한 사람은 모피 코트를 걸치고 수영을 한다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모피코트를 걸치고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을 병들게 하는 죄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여기에서 ‘상처’는 자기가 지은 특정한 범죄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상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죄라는 상처는 덧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짝 긁혀도 몸 자체에 치유력이 있기 때문에 몇 분이면 피가 마르기 시작하고 덧나지만 않으면 며칠이 지나서 딱지가 떨어지고 새 살이 돋아납니다. 그런데 면역력이 깨지면 아주 작은 상처만 나도 피가 멎지 않고 감염이 됩니다.
예전에 제가 돌보던 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청년인데 몸에 저항력이 없어서 감기만 걸리면 무균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은 균이 거의 없는 병실입니다. 그 때가 20년 전인데 하루 사용하는데 30만원이라고 했습니다. 몸이 균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처에는 덧나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손을 찧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왔다고 합시다. 상처가 난 것은 손가락 한 개인데 고통은 온몸이 다 느낍니다. 욱신거리고 곪으면서 덧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전 영혼, 심지어는 육체에까지 고통을 줍니다. 거기에서 부작용이 일어나면서 덧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작은 죄를 지었던 사람이 그 다음에 더 큰 죄를 지으면서 끊임없이 죄의 지배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어리석음을 회개함
시인은 그것을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우매한 연고입니다. 내가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선택하기 전에 먼저 총명이 흐려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의해 온전하게 변화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는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입니다. 존 오웬은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어리석어지지 않고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항상 죄짓기 전에는 지성의 가림이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지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을 하나님 바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 그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누리도록 주신 많은 유업들을 즐거워하며 그분 앞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출 수 없는 탄식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6-9)
본문해설
시인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을 때 자신에게 일어나는 육체와 마음의 상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신자가 죄 가운데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이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하나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있으면 소화가 안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신경을 쓰는 것이 들어오면 곧바로 얹힙니다.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렇습니다. 위에서 위액이 나와서 소화를 시켜야 하는데 신경을 쓴다든지 마음이 상한다든지 하면 순간 그런 작용들이 지장을 받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계속 근심이 있으면 그것이 암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육체는 영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 신자가 괴로워할 때 그것이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는 고립
재미있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도 부부가 좋은 관계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새끼가 태어나서 어미 곁에서 자라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들의 수명이나 질병을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납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하나님과 가족들과 형제들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꽃 같은 경우, 암술과 수술이 꽃에 함께 있습니다. 바람이 암술과 수술에 붙어있는 꽃가루를 떨어트려 주어서 수정되는 것을 자가수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가수정을 계속 반복하면 상당한 결함이 있는 후손들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이 근친상간을 못하도록 어느 나라에서든 금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것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이 멘델입니다. 벌이나 나비가 멀리 다른 나무에서 꽃가루를 찍어서 옮겨줄 때 건강한 것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서로를 의존하면서 살게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죄라는 것은 결국은 고립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고립이고, 교회 공동체로부터의 고립이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고립입니다. 큰 죄가 아니더라도 잘못 살아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면, 통속적으로는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다 나를 버렸다.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줘도 해소가 잘 안됩니다. 이것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인간은 얼마든지 외로울 수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에 더 큰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죄의 고통을 경험함
시인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에 넘치는 고통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겼다고 고백을 하면서 하는 말은,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역설적으로 시인은 죄 가운데 있게 되었을 때 자신의 참 기쁨과 소망이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신자가 죄를 선택할 때 하나님이 왜 내버려 두실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가장 중요한 이유 하나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죄를 선택할 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고통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마치 불에 덴 어린 아이가 불을 멀리하는 것같이 죄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그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렇게 하면 매질을 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못했는데, 자란 후에는 그것이 처음에는 좋아보여도 마지막에는 얼마나 나쁜지를 깨닫고 스스로 그것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담배 피고 술 먹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때 착실하고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 착실하던 애들은 예비고사를 보고나서 세상을 처음 맛봅니다. 그리고는 담배도 피고 술도 먹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술도 먹던 애들은 스스로 그만둡니다. 스스로 이것은 굉장히 나쁜 것이라고 합니다. 담이 올라오고 뚜렷하게 나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친구들이 담배를 줘도 나는 끊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끊은 것에는 확신이 있습니다. “담배 피다 걸리면 우리 아버지한테 맞아 죽어.” 그러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 담배를 많이 폈는데 끊게 된 것에는 신앙적인 이유가 가장 컸고, 또 다른 이유는 폐의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금연 캠페인을 하면서 폐암으로 죽은 사람들의 폐 모형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짜장에 범벅을 한 것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보는데 역겨운 것이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생전 담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담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끊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너의 행복은 나다. 너희들은 나 없이 살 수 없다.”라는 것을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하나님보다 죄가 더 사랑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한 번 맛을 봐라.” 하고 허락을 하십니다. 처음에는 꿀과 같이 단 것 같지만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쓰디쓴 고통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간 사람 중에는 죄의 맛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마지막 결과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경험하고, 그 앞에 있는 비참한 결과를 알기 때문에 죄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 그 맛을 보았기 때문에 다시 죄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 맛을 보았느냐 안 보았느냐 하나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은혜 가운데 있느냐는 것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타락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지금 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전에 그랬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미끄러져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 불리하다.” 이렇게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경우,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교회를 핍박하면서 악하게 살았지만 은혜 가운데 있으니까 이것이 계속해서 자기를 겸손케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우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포악스럽고 악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러한 행동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은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일어났던 가슴 아프고 괴로웠던 일들도 지금 우리가 은혜 가운데 온전하게 살 때 기쁨과 은혜의 샘이 솟아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인은 “나의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탄식은 주 앞에 감추이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제야 고통 속에서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주님 없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깊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고, 주님이 주시지 않는 모든 것들은 나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자는 참된 행복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을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자의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회복하기 전에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시 38:10-11)
기력이 쇠함
여기에서 시인은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며 내 눈의 빛도 떠났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심장이 뛴다”라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분노하는 일이 생기면 심장의 박동이 급해지게 됩니다. 경험적으로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기력이 쇠하여” 여기서는 죄에 빠져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인 이미 지났고 양심의 가책이 밀려오는 가운데 고통 받고 있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깊은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무기력해 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경우에는 모든 행복한 일, 좋은 일들은 하나님과 연관이 될 때에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양심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흥미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력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신적인 것과 더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육체에 상당한 힘이 남아 있어도 기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녀들은 도시에 나와서 잘 살고 부모님들은 농촌에 사는 게 자식의 마음에는 늘 안쓰럽고 걸립니다. 그래서 무조건 올라오시라고 합니다. 시골에 불편한 집에서 사는 것 보다는 큼지막한 아파트에서 곁방이라도 하나 두고 사는 것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눈에는 육신도 고달프지 않고 편해 보입니다. 그런데 도시에 오면 시골 노인들은 죽습니다. 얼마 못살고 대부분이 죽습니다. 이유는 마음의 활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파트에 갇혀서 집지키는 강아지처럼, 애들이 다 나가고 나면 두 노인들만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은 인생의 참된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더 많은 부분, 정신적 요소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골에는 함께 살아온 이웃들도 있으니까 교제도 있고, 거기에는 분명한 자기 일이 있습니다. 밭에 있는 채소들이나 뒤뜰에 있는 강이지, 돼지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끊임없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을 하고 마음에 활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활기입니다.
시인은 이런 활기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것을 이야기한 것이고, 믿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활기를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세상에 좋은 일들이 있고, 거기에서 잠시 즐거움을 누리고 행복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그것이 신자에게 영원한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력이 쇠하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고 봉사하고 섬기는 많은 섬김과 헌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늘 있어도 그것의 초점이 하나님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오는 기쁨과 은혜, 도움, 이런 것들이 내 마음 속에 늘 살아서 역사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활기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 기력들이 다 쇠해 버린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돌아오게 하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근심이 많고 괴로움이 심하고 가책을 느끼니까 눈이 침침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을 볼 수 없게끔 영안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 가책을 받는 시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서서히 그의 삶의 질서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내면의 고통만 생겨났는데, 그 다음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그렇게 가깝고 자기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고, 친척들조차도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신 앞에 세워 고치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외로운 순간을 주십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주십니다. 많은 고통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죄를 선택하고 기쁨을 좇은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죄를 지은 시인에게 죄에 대한 분노 때문에 보복을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못했을 때 바르게 하려고 야단을 치는 것을 부모의 복수라고 볼 수 없듯이, 궁극적으로 그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할 목적으로 그를 이끄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그의 마음을 고통 가운데서 자기가 선택한 죄의 대한 사랑으로부터 끊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이들은 불을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불, 칼, 위험한 것을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불을 가지고 장난하고 싶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겨울에 임시로 광을 만듭니다. 강원도니까 워낙 추웠습니다. 안방에 들어가서 앉아있었는데 뭐가 타는 소리가 납니다. “아무래도 장작불이 타다가 바깥으로 나온 거 같은데 네가 가서 안으로 밀어 집어넣고 오너라.” “네.” 그리고 내려왔는데 장작이 타는 게 아니라 광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옆에 있는 처마에 옮겨 붙으면서 온 집안을 태울 기세입니다. 펌프에 달려가 보니까 펌프는 꽁꽁 얼어있습니다. 큰일 났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방에는 안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시골에 무슨 소방차가 있겠습니까? 구루마에 양쪽에 장정이 올라가서 펌프를 틀면 물이 나오는 조그만 것을 끌고 옵니다. 불을 간신히 껐습니다. “이게 웬 불인가?” 했더니 동생이 애들이랑 광에 들어가서 부모들이 하도 못하게 하니까 성냥을 몰래 갖고 와서 그어본 것입니다. 불씨가 지푸라기에 달라붙어서 타기 시작하니까 둘이 무서워서 도망친 것입니다.
그런 일을 경험하거나 불에 데고 나면 그 다음에는 호기심이 변하여 경계심이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나서 세상을 선택하고 죄에 빠져 그 즐거움을 잠시 느낀 후에 무엇을 느끼게 되는지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때 인간은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고통을, 또 한편으로는 다시 만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복과 기쁨을 통해 세상 사랑과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삶이 그릇된 것이며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삶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침묵할 때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시 38:12-14)
대적자들에게 고난당할 때
시인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살만한 죄를 짓고 경험했던 심적 상태를 계속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올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짐승을 잡는 데 쓰는 것입니다. 올무는 정교한 계획 아래 반드시 그 짐승을 잡을 수 있도록 놓은 덫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올무가 자기 앞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고 대적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기름부음을 받고 한 나라의 왕이요 싸움터에서는 용맹스런 장수요 정치가였기 때문에 그가 올바른 길을 걸어갔다 하더라도 많은 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이익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리는 것 자체가 싫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지위나 명예가 높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을 때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가 있고 물질과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대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상식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보람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필요합니다. 예로부터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와 용기, 사랑이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많은 제물도 모으지 말고 사람들 위에서 일할 기회도 얻지 말고 그저 낮은 자리에서 이름도 없이 지내는 것이 대적자들을 만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잘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수많은 대적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올무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고난이라는 것은 꼭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런 사람의 존재는 그릇된 질서의 원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부딪힘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그것은 그릇된 삶의 질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으로든 무력으로든 굴복시켜서 올바른 삶의 질서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이라는 삶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신학자는 일평생동안 결심문을 썼습니다. 백 몇 가지의 결심문 가운데 첫 번째 항목이 “나와 내 이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나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자기만 올바르게 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올바른 삶의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질서를 좋아 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싫어하고 굴복하지 않으려고 할 때 투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투쟁을 어떤 방식으로 취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거기에는 투쟁과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말씀으로 그것을 이기면서 본질적으로 그 사람이 새로운 삶의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독교적인 정신입니다.
당연히 많은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붓고 세우셨습니다. 그는 결국 한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전에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최대의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이 상당기간 왕으로 지내다가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도망을 갈 때도 백성들 중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의 집안을 무너뜨린 원수가 다윗이라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왕이 된 것이라면, “나는 이런 거 필요 없다. 나는 주님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다면 행복하지 권력은 나에게 상관이 없다.” 그럴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이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자, 잠재되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일꾼으로 시대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넘어져서 하나님의 능력에서 버림받게 되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에서 미끄러지면 원수들이 제일 먼저 박수를 칩니다. 하나님을 찾는 삶의 질서를 싫어하고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잠잠함
시인은 그러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보인 자신의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고 벙어리가 되었고 변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변박한다’는 것은 논쟁하는 것입니다. “너는 욕을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다.” 이런 식으로 논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귀머거리와 벙어리 같이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런 상태가 되었다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이 악한 의도로 나에게 올무를 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미끄러졌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치고 책망하시기 위해서 원수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아니면 잠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사람의 인격이 가장 잘 나타납니다. 평소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 자기가 원래 기뻐하는 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나의 순수성이 의심받을 때, 수많은 오해 속에서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발뒤꿈치를 들 때, 나와 관계를 맺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는 대적자로 바뀔 때, 참을 수 있으면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참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참는 것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적으로 참을 수밖에 없게끔 강요당해서 참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음이라기보다는 용기의 부족이거나 자신의 한계를 아는 체념입니다. 진정한 참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공격하는 대적자들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결말을 아름답게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견디는 것, 그것이 진정한 참음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 안에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고 사랑이 없는지, 마음속에 분노와 혈기들이 존재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쓴 게 언제인지 모르지만 왕이 된 후에도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능히 복수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물리적인 권력이 있을 때조차도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권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맏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밑에서 녹을 먹고 함께 나라를 이끌어 가던 부하들이 변절해서 반역하는 아들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역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그는 공격을 받게 되자 황급히 도망하였습니다. 그 때 법궤는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법궤를 빼앗기면 하나님이 다윗을 폐하고 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다고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도구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지고 도망을 가자고 건의합니다. 그러면 왕권이 새로 세워져도 정통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놔두어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가 돌아와서 다시 법궤를 볼 것이다.” 법궤를 끌고 가면서 “보아라. 내가 법궤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직까지 내가 왕이다.” 이렇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셔서 나를 다시 여기 돌아오게 하신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법궤를 들고 야밤에 도주해서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길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모래를 뿌리면서 다윗에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요압이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칼을 빼자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지 마라. 혹시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하여 나를 욕하시는지 누가 알겠느냐? 문제가 되는 것은 나를 욕하는 저 사람이 아니라 나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고난을 만나면서 고난이 심해지고 징계가 더할수록 사람과 환경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의 공격과 올무를 놓고 비웃는 모습에 마음을 쓰고 귀 기울이고 그들과 다투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저 원수들이 얼마나 악한지, 원수들에게 나름대로 정당한 것이 하나님 앞에 있다면 그 분량은 얼마나 될 것인지,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시는데 내가 그들과 논쟁을 해서 이긴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 성도가 와서 막 따지더랍니다. 알고 보니까 교회와 자신에게 많은 오해를 하고 있더랍니다. 한 시간에 걸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돌아가는데 이상하게 자기 마음은 너무 슬프더랍니다.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 성도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사가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요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입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들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향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론과 적용
아무리 뛰어난 성도라고 하더라도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수시로 영혼이 찢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영혼의 찢어짐이라는 것은 세상의 육체적인 욕망, 물질이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관심이 분산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질서가 도입될 때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에서 잠시 동안 누리는 평안과 물질적인 복락, 명예, 이런 것들이 소중해 보이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경배 대상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임에도 때로는 깊은 시련을 주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죄이고 세상에는 그보다 더 흉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는 평안을 주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작은 죄에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이 깊은 상처를 주셔서 온전히 당신을 바라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고통을 통해서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장님이 되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옳다 하여도 주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소용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해도 주님이 옳다고 하시면 충분합니다.” 이런 신앙을 갖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넘어질 때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시 38:15-17)
본문해설
시인은 원수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친구들이 자신을 떠나는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귀머거리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 이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든지, 혹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깊은 시련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든지, 거기에서 많이 듣고 말을 많이 하고, 사람들의 비난에 일일이 대꾸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추한 것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끌어내려서 잘못이 있음을 증명하고, 많은 사람들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면서 흔들리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시인은 친구들이 배신하고 친척들은 자기를 멀리 두고 원수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을 해치려 앞에 자기 앞에 올무를 놓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만 보면 마음이 상하여 괴롭고 분노가 치솟을 수 있었지만 넓은 우주적인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참 소망이신 하나님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하나님의 계심을 알고, 그분의 견지에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늘 변하고 오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내일 배신하고 오늘 내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언젠가 내가 싫어서 떠납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활짝 피는 꽃이기도 했고 지는 꽃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불완전성입니다. 만약 세상이 완전하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 소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지나가고 흘러갑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소멸되고, 죽는 것들이 있기에 또 다시 생겨납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고통이요 괴로움일 수 있지만 우주 전체를 보시는 하나님께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은 세상에 보이는 물질이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의 이치를 터득하고 나면 우리가 쓰는 말 중에서 “실망했다.”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실망합니다. 변하는 사물, 꽃처럼 피었다가 지고, 졌다가는 다시 피는 삶, 사람의 사랑에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삶은 불안하기 짝이 없고 슬픈 삶입니다. 이 때 흔들리지 않는 비결은 이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많은 사람들, 우리 앞에 일어나는 고난과 역경, 기쁨과 순경, 이러한 상황들과 우리가 일대일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주신 하나님, 고난을 맞이하게 하시는 하나님,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순경을 주시는 하나님, 모든 사물과 환경 너머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붙들게 될 때 그 안에 있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고 행복이어야 합니다.
시인도 인생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이야기라면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깊은 시련과 배반, 고난과 역경에 속에 빠지면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기가 쉽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근심이 많습니다. ‘저 원수들이 나를 쓰러트리고 교만해져서 나를 멸시한다면 어떻게 할까?’ 근심이 마음 안에 가득하고 앞으로 가려고해도 걱정이 가득합니다. 아직 자신을 정리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서 칭찬할 만한 것은 믿음의 연약함과 눈에 보이는 환경을 뛰어넘지 못하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로다” 주를 온전히 바라는 모습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한결 같다고 생각한다면 교만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도 활짝 피었다가 시들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활짝 필 때가 있으면 시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활짝 피었던 처음 사랑일수도 있고, 처음 사랑이 아니면 은혜의 때의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항상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는 참 아름다웠어도 오늘은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꽃처럼 피어있어도 지금은 시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분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과 매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없이는 결코 그분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꽃처럼 피어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했던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자기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 어떻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는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꽃은 죽지 않는 한, 올 여름에 진 꽃은 내년 봄에 다시 핍니다. 그러나 신앙은 계절에 따라서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에 따라 물을 주시고 햇빛도 주십니다. 세상의 꽃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여름에 시들어서 가을에 씨를 맺고 겨울 지나고 봄이 되면 꽃이 핍니다. 1년을 기다리면 됩니다. 우리 신앙도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사경회 때 열매를 맺고, 신년사경회 때 물주면 다시 활짝 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너무 많이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여기며 깊이 의지하면서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물결에 적당히 눈을 감아야 합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합니다.
나를 도우소서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시 38:19-22)
본문해설
본문은 이 시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여전히 원수는 강성하고 시인은 원수로부터 당하는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이것을 보면 지금 시인이 받는 고난이 자신의 죄와 악 때문에 받게 되었다 할지라도 징계로 인한 고난의 길을 걸어오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가 많이 쇄신된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시가 시작되면서 죄 때문에 영혼은 물론이고 육체까지도 고통가운데 있는 것을 호소했지만 이 시가 끝날 때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을 주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느꼈던 자신 안의 많은 죄와 고통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느낀 임재의식에서 오는 자기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을 때는 자기가 악하고 죄 많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불결함과 악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러한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받는 고통
그러면서 악인의 특성을 이야기 하는데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하는 행동입니다. 선은 선한 것으로 갚아야 하는데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군가에게 은혜와 은덕을 입은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손해 때문에 생긴 원한은 잊혀질 수 없도록 깊이 새겨진다는 뜻입니다. 물에 새기는 것은 흘러가버리면 사라지지만 돌에 새기면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자신으로 하여금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할 의무를 기억나게 만듭니다. 인간은 그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되는 일을 겪었을 때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을 빼앗기거나 누리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질서를 해친 것은 커다란 고통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것은 전혀 기억이 안 나고, 자신이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깊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악한지를 보여줍니다.
앞 절에서 “친구도 멀리 떠나고 친척들도 멀리 서있나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시인에게 지금 고통과 괴로움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 한 때는 그의 덕을 많이 입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덕을 악으로 갚는 것을 보면서 깊은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좇아 살려고 했더니 그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행실의 상을 이 세상에서 모두 받으리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선을 좇아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들이 어둠속에 있기 때문에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마지막으로 의지할 데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육체는 물론이고 특별히 영혼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없이 많은 복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다.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실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함을 보이시기 위해서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지라도 세상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들을 도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고난 속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는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악이 잠시 승리하는 것 같은 때를 하나님은 훌륭하게 사용하셔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케 하시고 의지해야할 분이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만약에 모든 것이 형통하고 부족함이 없다면 우리는 속히 부패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쓰라린 고난, 어려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신, 이런 것들을 허락하셔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시편56편 강해 1
시편38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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