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7
부흥을 기다리는 삶(창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방신상의 이야기를 하다가 끝이 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전에는 야곱이 자기네 집에 우상이 있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문제를 못 느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럼 하나님 앞에 우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한가. 그것은 말은 그렇게 하기 쉬운데 심각하게 그것이 이것이 잘못된 것이었구나.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좀 생각해봐야할 것은 그럼 어떻게 해서 야곱이 이방신상의 문제, 그 다음에 자신을 정결케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문제, 그 다음에 의복을 바꾸지 않고 살아가는 이런 모든 문제들이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아! 이것은 잘못된 것이구나. 하면서 천천히 깨달으면서 어느 날 그렇다면 이것을 잘못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각성의 특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 전체적으로 자기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잘못 흘러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단순히 죄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죄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내가 이런 죄, 저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그런 구체적인 죄 뿐만이 아니라 더 큰 죄는 제가 둘째시간부터 계속 말씀드렸는데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에 아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시대 속에 살면서 그 시대가 가르쳐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말미암아 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말씀을 볼 수 있는 그런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오류로부터 하나님께서 건져내시는 그런 각성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밤을 새워서 이야기를 해도 다 못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그 한 케이스만 예를 들어봅시다.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율법으로 따지자면 내가 난지 팔 일만에 할레를 받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자기가 지켰노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사이비 유대인도 많았는데 이 사람은 정통 히브리 랍비의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보수파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장래의 꿈은 물론 히브리 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으니 그 율법을 몰랐겠습니까. 그렇게 살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얼마나 열심히 있었는지 예수를 전파하는 도가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달려갈 정도에 열심히 특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리스도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벨로 포로 이후에 구약에 하나님을 믿어오던 참 종교가, 그러니까 유대교는 기독교의 전신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종교가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쭉 이어진 신앙이 물론 흔들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의 줄기로 계속 내려와 말라기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가 그치고 그 다음에 바벨론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면서 똑바로 내려온 이 신앙이 후일에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에 의해서 끊겼던 줄기가 다시 이어지면서 신약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간기라고 그러는데 바벨로 포로부터 시작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지자의 계시가 끊긴 때부터 시작해서 세례 요한 때까지를 중간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쭉 내려오던 구약신앙이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 시대가 400년이 넘도록 흘러오는 시대를 가르쳐준 그 눈가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준 유대교 사상에 눈이 가려지니까 수없이 율법을 보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욥이 어느 시대 사람입니까? 아브라함 시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 육체의 껍질을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서계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계시는 풍성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후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리워졌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는데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데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다메섹에서 이루어집니다.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그 눈을 치셨을까? 굉장히 심각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을 봤으니까 어두워졌다. 그 빛은 육체적인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입니다. 하나님의 거기에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에 이상이 오면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걸어온 영적인 삶을, 하나님께서 다시 아나니아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셔서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네게 나타날 일들에 대해서 사환과 증인을 삼기 위함이니 내가 너를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눈을 뜨게 하는 역사를 위해서 내가 너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생생한 것입니까.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대 그 뒤에는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단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눈에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치 복음을 보되 간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비슷하게 보기는 보는데 그 눈에 비늘이 벗겨져 밟게 보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한없는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이 높아지고 낮아지고 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 복음 자체에 대한 한없는 감격을 느끼는 것입니다. 요즘도 제가 세 번을 준비하는 가운데 두 번은 탈고가 끝났습니다. 그것을 손을 보면서도 한없이 감격을 느낍니다. 아! 내가 정말 복음을 아는가? 성경책 한권을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쓸 수 있을까? 한없는 감격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그 진리의 세계가 너무나 커서 믿음의 그 위대한 선배들은 거기에 압도당했던 것입니다. 왜 인간이 이렇게 교만하고 말이 많고 그렇습니다. 진리에 압도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런 일들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안 그러셨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미디안에서 짐승을 쳤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수많은 짐승을 치면서 와신상담하면서 그 애굽의 화려한 영화를 다 버리고 이곳에 왔는데 이곳에서 양이나 치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 그 거친 광야에서 신발, 얼마나 필수적인 것이었습니까. 그게 무슨 문제가 되었습니까? 아무 문제도 안 되었습니다.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 타지 않는 불꽃 가운데 있을 때 아무 문제도 안 되던 신발이었습니다.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야곱이 하나님과 깊이 만나고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 대해서 깨닫게 되니까 자기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 이래로 우리가 윤리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하고 막 외쳤던 시기치고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살았던 시대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은 그런 원함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지 된다고 하는 머리에 생각이 있어도 문제는 그렇게 안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교회 화장실에 갔는데 벽에 이만한 스티커를 붙여났습니다. 뭐라고 그런가 하면 ‘평일은 경건하게 주일은 거룩하게’ 그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평일이 경건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일이 거룩해지지 않고 평일이 경건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일이 어떻게 하면 거룩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을 길게 늘리고 모든 사람이 조용하고 졸지 않으면 그 예배가 거룩해지겠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그 예배라는 모임을 다른 모임과 구별시켜주지 않으면 거룩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연로하신 장로님들이 늘 안타까워하는 게 무엇입니까? 요즘 애들은 예배 의식이 없어. 예배 의식은 누가 없어지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수없이 세미나를 하고 회의를 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이 시간이 보통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현장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이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해주실 때 정말, 내가 그래서 어렴풋이 그때 수준은 아니겠지만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대 때 주일이 이렇겠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 이외에 주일날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그것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말씀이라는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같이 이런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전에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 4시간씩 계속 되어도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도 갈 줄 모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게 더 기도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더 말씀을 배우고 싶어 하고, 그러니까 1611년에 작성된 웨스터민스터 장로교 요리문답에서 주일날은 어떻게 보내야 됩니까? 그러니까 예배에 전념하고 남는 시간이 있다면 주일날 배운 말씀을 집에 가서 식구들과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나누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조용히 육신을 쉬면서 위대했던 신앙인들의 경건서적을 읽는 것으로 주일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일날 교회에서 많은 행사들을 주일날 받아들이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사라져간 빈 공간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은 너무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쁩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이런 것은 참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각성을 시키시자 이제껏 살아오면서 문제가 안 되었던 그 이방신상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신상에는 아마 두 종류의 이방신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라헬이 라반의 집에서 가지고 왔던 그 드라빔, 훔쳐왔으니 버렸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 드라빔이 최근에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그쪽 지방에서는 그 드라빔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물론 신주였는데 우상단지였는데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법정에 그것을 내놓으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그 치사한 방법으로 그것을 감추고 했던 모든 것은 그 우상 자체에 대한 욕심보다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가서 유산을 좀 얻겠다는 탐욕입니다. 여자는 소용이 없습니다. 기껏 길러서 시집보내주니까 그것을 가지고 오라비들과 재산다툼을 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더군다나 남편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딸은 비밀계좌입니다. 말하자면, 그랬습니다. 그래서 들어와서 그 속에서 세겜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보십시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잠깐만 멈추어지면 즉시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교회로부터 좀처럼 영향을 안 받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살기 전에는 영향을 안 받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서 이렇게 보시면 알게 됩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이 영향을 미치기가 가장 어렵다.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도라고 된 것이 엄청나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른 것 없습니다. 바닷물이 소금물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염전을 하는 어느 장로님 이야기가 바다에서 소금을 채취하기 위해서 햇빛을 비추면 28일이면 그게 소금으로 굳어진다고 합니다. 그것을 스케이트 장 같은 곳에서 긁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마니에 담는데 김장할 때 보면 고욕이 소금이 물에 안 녹습니다. 설탕은 뜨거운 물에 넣으면 잘 풀어지는데 소금은 변화가 없는데 뜨거운 물이건 찬물이건 하여튼 안 녹습니다. 밑에 그냥 소금이 굴러다니면서 잘 안 녹습니다. 김장해보신 분은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물에 잘 안 녹는 소금인데 섬에서 배에 옮기다가 아차! 해서 소금가마를 바다에 빠트리면 이게 한 이 분만에 건졌는데 가마니밖에 안 남는다고 하면서 장로님 하는 말이 성도는 소금이라고 하지만 원래 취하기를 바다에서 취한 것이기 때문에 바닷물을 만나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녹는 게 이 소금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뭐 엄청나게 다르게 생각하는데 별다르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뭐가 변한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그 성품에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 싶은 소원이 있는 것인데 그것도 믿음이 있는 한계 내에서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렇게 신앙이 잠깐 식어지고 34장이 지나면서 걸어오는 10년 20년 동안 완전히 세겜 사람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똑같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눈을 벗기시니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신상이 자기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기를 그것은 세상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그랬는데 ‘타헤르’라고 하는 명사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깨끗케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물로 씻어내어서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물리적인 것으로 더러운 것을 물로 닦아내는 것도 의미했지만 종교적인 것입니다. 결례를 행하는 것, 세례를 받는 것, 이런 것 전부다 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령에 있는 죄악들이 깨끗이 씻김을 받는 것과 그 다음에 물리적으로 물로 씻어내는 것을 하나의 연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타헤르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뭘 보게 만드는가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은 벧엘로 올라가라. 그 말씀만 하셨는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니까 야곱은 깨닫게 되는 게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참 기이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마다 구원받은 경험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언젠가 깊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좀 다르겠지만 나중에 아무튼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가만히 보면 누가 우리에게 와서 너는 죄인이다. 그렇게 이야기해주어서 나는 죄인이다. 깨닫게 된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요즘같이 죄에 대한 심각한 설교를 잘 안 하는 그런 시대에 어느 교회 성장학에서 그러는데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신다면 죄에 대한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이야기보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시고 우울한 이야기보다는 소망이 있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다시는 교회 성장학에 안 나간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죄에 대한 명백한 선언이 없어도 더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의 마음에 확 부딪혀올 때 다 생각이 납니다. 성령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죄인이고 정말 하나님 없이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날이었는가 하는 것을 확 깨달음이 오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내 경험에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도 회심을 참되게 경험한 사람들은 대게 비슷한 과정을 겪습니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니까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야곱이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한 것도 무엇 때문입니까? 이전에는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한 번도 문제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런데 어디서 깨닫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나서 그 거룩한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 사람에게 깨끗함에 대한, 거룩함에 대한 그런 소원을 가져다주고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가 하는 사실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정결케 해야지 된다는 이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의복을 바꾸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우선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문자적으로 의복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왜 먼 길을 떠나니까 복장을 간편하게 차려입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옷은 성경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옷은 성도의 행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도 보면 세마포, 그것은 곧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예복을 입지 아니하는 자가 슬피 울며 내어 쫓기는 비유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 성도의 올바른 행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야곱 자신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쳐다보는 견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각성입니다. 자기 삶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견해가 바뀌는 것입니다. 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어느 순간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각성이 없이 너의 삶이 하자가 있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에게 반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살아야 됩니다. 하는데 아래 앉아서 ‘자기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참된 각성이 안 일어나게 되면 얼마나 사람의 삶이 바뀌는 것이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심과 사랑으로 하나님만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그런 뜨거운 열망 같은 것들이 이런 각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런 모든 문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면 문제는 인생이 하나님을 믿고 전심으로 하나님만 추구하지 않으면 모든 견해들이 이렇게 탈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로 불러주셨을 때는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가치와 목표가 당신 한분에게만 주목되도록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그 하나님을 찾을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이 삶의 구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구도로 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관되게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금주 한주 동안도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좌우로 쉽게 치우치며 한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막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는, 지난주에 집회 갔을 때 앉아서 상당히 많은 사람은 잘 안 듣고 몇 사람이 깊이 듣는데 아무런 기대도 없이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막 우는데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 다 내어줄 것 같이 그렇게 변합니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면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러므로 이방신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우리도 의복을 바꾸어야지 되겠다. 그렇게 생각해도 하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어떻게 했기에 이 사람은 이제 문제가 안 되는 그것을 문제로 여기고 그 문제도 아주 심각하게 느끼게 만들었는가?
지난주에 아주 깊은 소식이 들어왔는데 우리 청년 중에 한사람인데 예수 믿은지 이제 한 1년 6개월 밖에 안 되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서 예수를 믿었는데 정말 말씀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확확 큽니다. 제가 늘상 연조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예수를 계속 믿으면서 말씀 속에서 자라간 그 신앙의 연조를 누가 쫓아갈 수 있겠습니까. 3-40년 살았다면, 거의 성자에 가까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쫓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없이 지낸 3-40년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회개만 안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 전도사님 말대로 알도 못 낳는 닭이라고 그랬는데, 하여큰 1년 6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청년부에 제가 가서부터였는데 그런데 말씀에 한없이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단의 도전도 강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그래도 기도하면서 이기는데 군대도 보통 군대를 갔다 온 것이 아니라 수도경비 사령대를 갔다 왔습니다. 험악한 군대를 갔다 온 씩씩한 청년입니다. 처음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 집사람에게 나를 바꾸어달라고 그래서 집회에 갔다고 하니까 그 다음에 다시 전화해서 막 우는 것입니다. 사모님 나 어떻게 합니까. 무서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왜 그런가. 자기 앞에 그 주위에 있는 영혼들이 부르짖으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 장면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무섭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형제들이 모여서 사는데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서 있는데 너무 무섭고 영적인 실체를 보이시면서 주위에 있는 자기가 무관심하게 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막 비명을 지르면서 지옥의 불길에 떨어지는 그것이 생생하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너무 무섭고 괴로워서 사모에게 건장한 청년이 펑펑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쭉 이야기를 해주고 기도를 세게 해주고 그쳤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시간 후에 전화를 해서 성령께서 너에게 깊이 기도하게 하신다. 그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고 전심으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라. 짐을 하나님이 지어주신다.
그런 이야기 우리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슴 깊이 실감나게 다가오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막 몸부림치면서 울게 하는 이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각성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때 교회가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의무적으로 가서 스티커 하나 달기 위해서 뒷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전도를 못 합니다. 주님이 누구에게 붙여주십니까? 영혼을 향해서 절박한 탄원을 가지고주 앞에 드리면서 그 영혼에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구원처럼 안타까워하는 사람에게 영혼을 붙이시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 일 년 동안 교회에 와서 설교한 보람이 있구나. 나는 너 같은 사람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눈을 열어주시니까 이전에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야곱이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계기가 없으면 못 깨닫는 것입니다.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벌써 이런 식으로 살아온 것이 10년 넘어 20년 가까운 세월을 이런 식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깨닫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면 안 됩니다. 상식으로 판단하면서 ‘나는 참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니까 야곱이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흥은 아니고 각성입니다. 각성이 일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부흥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방신상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버리는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신상을 버리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 식구들이야 야곱이 버리라고 그러니까 버렸겠지만 우리로 말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경배와 영광을 세상을 향해 돌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것이 아까 얘기한 것 같은 그런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상황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를 많이 하고,
늘 저는 아직까지 공생애가 시작이 안 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생회에 여기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것들을 깊이 느끼면서 내 자신은 그런 진리에 마음이 녹는데 사람들이 안 녹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며” 그것을 설교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하려고 머리를 숙였는데 금싸라기같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때는 기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펼치고 막 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설교를 하는데 내 마음이 막 물같이 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에서는 막 통곡을 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설교를 듣는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서 그래도 한국교회의 기본적인 수준은 훨씬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안타까운 게 이렇게 내 마음이 녹는 게 왜 사람들이 같이 녹지 않을까? 그래서 성령 안에서 다 녹아서 하나가 되지 않을까? 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능력이 아직도 많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반도 설교를 못하고 삼분의 일정도만 설교하고 다음 주에 더한다고 그리고 그쳤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깨닫게 된 것, 그것이 각성인데 각성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뭘 경험하는가 하면 아, 주님 자신이 오셔서 나와 동일한 이런 각성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시고 그래서 그 어두운 눈을 뜨게 하셔서 그래서 보게 해달라고 하는 탄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웃기는 게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불러놓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얘기를 하면 다 알아들을 것 같은데 그런데 역시 영적인 말을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못 알아듣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이 모든 이야기가 늘 같은 이야기로 반복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를 깨닫게 되면 점점 그 말씀에 깊은 속들을 더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자기는 얼핏 보며 다 안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부흥에 대한 간절한 갈망,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렇게 옮겨주시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고 영혼들을 구원함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과 힘이 얼마나 모자라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이런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주관해주셔야 된다고 하는 것들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는데 그 대안이 부흥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문맥에서 보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벌써 벧엘로 올라가셔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엘샤다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메시지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왜 야곱이 빨리 아버지께 약속대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성에서 그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 다 가지고 있고 자신을 더럽게 하면서 그렇게 세속적인 생활에 물들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고 내가 너를 지키겠노라고 약속하셨는데 왜 그런 식으로 세겜 성에서 사람들과 함께 화친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먹고 살수가 없을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핵심을 찔러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야곱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 사실을 전에는 그냥 조상으로부터 알고만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얘기만 들었는데 여기에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불도장이 찍힌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부터 야곱의 인생이 엄청나게 변화되는데 이후로부터 이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 신앙이 계속 이 사람을 붙들고 일생을 가는 것입니다. 그게 부흥의 특이성입니다. 그 예가 많이 나옵니다. 베냐민을 애굽에 올려 보낼 때 뭐라고 그렇습니까? “내가 그 아이를 잃으면 잃으리로다.” 이게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길에서 너희를 지키시리라.” 그런 고백을 계속 하게 됩니다. 축복할 때도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35장에서 아로새겨졌으면 그것이 그 사람을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알게 되면 정말 빛의 비춤을 받고 다시 타락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한순간의 각성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우리와 함께 사모해야할 바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어주십시오. 무엇을 소유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제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보게 하시고 그 주님 앞에서 내 자신의 존재가 새로운 존재로 변하게 해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서 참다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하나님이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모르셨습니까? 당연히 아십니다. 그러면 야곱에게 나타나서 야, 네 집에 이방신상 좀 치워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을 쓰레기통에 갖다놓고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신 분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인생을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주님은 그 이방신상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한없이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신상 자체는 히브리어에서 ‘펫셀’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런 뜻입니다. 무엇이든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기하신다, 질투하신다. 그러셨는데 무엇을 가지고 질투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할 그 마음의 경배가 그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질투한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뭐 할 일이 없어서 자기가 흙으로 만든 그 피조물을 질투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우상은 탐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 속에 있는 심령의문제로 귀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본질적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가 이것도 고치고 저것도 고치는 것이 하나님 앞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덕적인 사람이 되면 그 썩어빠진 인생들이 얼마나 거룩하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정결해지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인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그 속속들이 썩어서 타락하고 부패하여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떠난 그 인생이 자기 자신을 고치면 얼마나 고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화장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시체 얼굴에 화장을 하면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속속들이 썩은 인생인데, 하나님은 이와 같이 본질이 변화되고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룩한 삶은 변화된 영혼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포도나무 가지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서있는 것입니다. 본질이 회복되면 그냥 열매를 맺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서 각성을 일으키실 때 이런 본질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신상을 버리고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는 이야기까지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신상을 버리고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는 부흥이 온다. 그게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과 만나고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은 이미 벌써 자기의 삶이 바꾸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만나고 그 부흥을 사모하게 되면 그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의 가치는 자기가 이전에 부흥을 사모하지 않던 시대에 가치와 너무나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제목을 뭐라고 붙였는가 하면 벧엘로 올라 가자에서 진정으로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삶, 부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나타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창세기 35장에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의 산봉우리입니다. 우리가 부흥을 사모하는 것이 참말인가? 이것을 보면 압니다. 정말 우리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가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그것을 치우려고 하는가.
또 하나는 이런 고백이 만약에 참된 것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흥을 사모하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마치 하나님께 돌아가야지 하면서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말은 맞습니다. 그러면 일어나야지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일어나야지. 그것입니다. 참된 우리의 모든 사랑이 하나님 한분에게만 꽂혀 있는가.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끊임없이 자신의 불결을 인하여 괴로워하는가.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기를 원하는 마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속된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는 도덕적이 되어라. 그게 아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모든 것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별됩니까? 그러니까 동일한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까? 구별된 사람이라면 세상과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그게 가슴에 도저히 어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이 나에게는 즐거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한없이 흥분할 수 있는 그 놀라운 토픽이 나에게는 화젯거리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별되었다고 하는 하나의 표입니다. 그런 불일치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심령의 변화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짓고 싶은데 억제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그 죄 자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멀리하고 싶어서 멀리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부흥을 참되게 만난 사람들은 이것을 멀리 하고 싶어서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갖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대안을 얘기해보십시오. 부흥이 아니면 그렇게 예수를 믿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인 신자로 남아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은밀한 죄를 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이름만 걸어놓고 살아가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다수입니다. 저는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시대에 어떻게 갑자기 그 사람이 변해서 그렇게 은밀하게 즐기던 죄악의 낙을 마치 벌레나 짐승처럼 징그럽게 여기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서서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고 영광스럽게 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을 막 불태우는 것처럼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삼의 방법이 있다고 하면 나는 다 포기하고 거기로 가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대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뭘 찾으려고 하는지 어디서 대안을 찾으려고 하는지 하나님이 깊이 만나주셔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망에 불타오르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 전에는 사람은 변화되기가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훌륭한 모든 사람들이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렇게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서 그분께로부터 이렇게 자신의 그 이방신상과 정결케 하는 것과 그리고 의복을 바꾸는 것과 이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깊이 애통하고 회개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깊은 한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닫고 그리고 그 위에 거기서 그치면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그런 세상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죽는데 그러나 그 위에 부흥이 부어지면 실제로 자기가 각성했던 그 삶을 구현해가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 하도 책을 안 갖다놓아서 제 서재에 있는 책을 5권 갖다 놓았는데 사보나롤라라고 하는 사람이 대표적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분명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시 전체 하나가 완전히 거룩한 도시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확장해서 세상을 향해서도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이 무엇인가?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그 다음에 이웃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자기 가족만 있고 그것도 더 못된 사람은 가족도 없고 자기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졸지에 변화되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의 신앙적인, 종교적인 불결을 깊이 애통해하고 그리고 삶을 바꾸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만나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런 변화를 가져다주는데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깊은 깨달음을 갖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만들어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랬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야곱이 만나니까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응답하리라. 뭐 하리라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혀졌던 하나님의 성품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성품은 어떤 하나님? 환란 날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옛날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무엇으로 떠오르는가 하면 추억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린 것이 그것입니다. 집회를 하던 무엇을 하던 이전에 한번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했던 사람들이 회개를 또 하지 생짜배기들이 회개하는 일은 예가 있기는 있지만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정신을 차리자 즉각 생각난 것이 무엇인가 하면 28장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만나주셨던 그 만남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던 언약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때 언약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리라,” 하는 약속입니다. 그게 일시에 다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말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그것은 된 이야기고 나의 환란 날에 나에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그랬는데 이제야 자기가 닥치고 있는 이 상황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할 환란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제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인물이 나오면 그 인물을 긍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보면 깨닫지 못한 것이 짐승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되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좀 있습니다. 하나님, 이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은 확실한데 그런데 가끔 나는 이 정도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주님은 어떠십니까? 무지 무각한 것이 짐승과 같습니다. 이제야 하는 말이 환란이라고 합니다. 왜 모르는지, 디나가 벌써 울고 들어올 때 그때 즉시 환란이라고 생각했어야지, 강도를 계속 높여서 이제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의 말발굽 소리가 들릴 시간이 되니까 그때서야, 칼이 목 앞에 들어오니까 아, 환란이로구나. 그러면서 옛날에 그런 환란 때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믿지 마십시오. 그게 신앙생활에서 실패를 덜 하는 비결입니다. 자신도 믿지 마십시오. 얼마나 사악하고 무지막지한 인생인지 하나님이 걸어가는 인생을 발을 걸어서 넘어트려도 하나님의 발길이 자기를 넘어트린 것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정말 저는 신앙도 별로 깊지 않고 오래 예수를 안 믿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확실한 것은 내 자신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인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지, 그러면서 저는 꼭 생각하기를 그 시인들이 왜 그렇게 하나님만 높였는지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나하고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지막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주 앞에서 깨닫기가 짐승과 같사오니 짐승과 같습니다.
야곱이 이제야 자기가 환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전심으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던 그 하나님, 그러니까 자기에게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께 단을 쌓는다고 했으니까 단을 쌓으면서 또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또 내게, 그때처럼 내게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앞에 벌어진 그 모든 소용돌이치는 위기상황을 누구 앞에 맡긴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다 맡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즉각 야곱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28절 이후로 여기까지 한 번도 식언치 않으시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켜오셨는데 자기는 한 번도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뭐가 하나님이 되셨습니까? 세겜의 우상이 자기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또 뭐를 드리겠다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어디 드렸습니까? 벧엘로 여호와를 섬기는 전이 되겠다고 했는데 뭐가 되었습니까? 하나도 안 지켰습니다. 하나님 앞에 공수표를 남발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말씀드리는데 아무리 말씀드려도 지나치지 않은 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34장에 있든지 35장에 있든지 28장에 있든지 33장에 있든지 하나만 붙들면 살 수 있습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들여다보는 인생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양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도 매일 올라갔다 떨어졌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뭔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것 같으면 이 정도로 신실하니 뭔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 같고 이렇게 보니까 인간의 본성이 믿을 수 없는 게 인생인 것입니다. 하루에도 조속변입니다. 그런데 뒤를 보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다 어디에 기준이 있기 때문인가 하면 자기의 신실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야곱이 당신을 대했던 태도가 어떠하든지 물론 하나님이 때로는 징계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을 야단칠 때 화가 나서 이 아이가 이것으로 얻어맞으면 어떻게 고쳐질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 없이 성질이 나서 일단 때리고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너무 많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회초리 한 대를 대도 동기는 하나님의 선하심이고 이 회초리를 통해서 반드시 가게 하시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감정적이신 분만은 아닙니다. 때리십니다. 그것도 야곱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었습니다. 디나가 그날 야한 옷을 입고 나가서 강간을 당한 것도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조금도 우리 자신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우리의 신앙의 여정,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린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은 태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셨다. 여기서 말씀을 전할 자도 없고 들을 자도 없고 우리는 전부다 지옥의 아랫목에 뜨끈뜨끈한 데 앉아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변합니까. 말씀을 전한다는 제가 그럴 때야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마음에 중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없이 부족한 인생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루십니다. 야곱을 향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참으십니까? 한없이 참으십니다. 결국은 야곱이 사람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거룩한 인생이 되어서 세상의 모든 욕망으로부터 초월한 그 몸과 마음이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네 나이가 몇이뇨, 내 나이가 130세요. 조상의 연수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라반의 집에서 양 한 마리라도 더 뺏으려고 몸부림칠 때 그 사람의 입에서 심히 험악한 세월입니다. 아닙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직도 인생은 살만합니다. 세겜에서 한참 돈 벌고 희희낙락하게 살아갈 때 심히 험악한 세월.... 그 수준이 아직 안 된 것입니다. 아직 어린 것입니다. 철이 덜 든 것입니다. 그러다 이렇게 부흥을 만나게 되니 참 사람이 인생의 모든 길을 돌이켜볼 때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마음 아파하고 막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울며 대굴대굴 구르며 그리고 자식들에게 핍박을 받던 그런 시절, 아스라이 기억의 뒷전으로 사라집니다. 라반에게 속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신풍나무 껍데기를 물에 넣었다가 뺐다가 하면서 속임수를 부리던 그 모든 것이 다 덧없어 보이니 이제 뭐만 남는 것입니까? 변함없으신 하나님 한분이 크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까,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다시 한 번 그 험악한 세월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다시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누구에게만 있음을, 하나님에게, 그러면서 마지막에 내 연수가 조상의 세월에 심히 미치지 못하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마지막 하는 장면이 손을 들고 바로에게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네게 있으라. 그것이 바로 마지막에 정말 부흥을 만나고 거룩하게 된 인생의 그 마지막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이제 인생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저같이 이렇게 젊은 사람도 남아있는 날들이 결단코 지내온 날보다 많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휙 지나가버리고 말 인생인데 마지막에 단 한번이라도 내 나이 130이나 조상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깨닫는 것이 이제야 주님은 신실하시고 이제는 하나님밖에 소원이 없노라. 내가 너희를 축복하노라. 마지막에는 그래도 그렇게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가 되어서도 양 한 마리 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신풍나무 껍데기를 집어넣었다 뺐다하고 그 이방의 우상단지를 모아서 거기에서 뭔가를 친선을 도모해보려 하는 세상과 어떻게 짝하고 살까. 인생이 결국에 너무 추한 것입니다. 너무나 추하고 나이가 들어서 우리가 그렇게 살면 정말 너무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엊그제 주일날 교회에 오기 위해서 잠깐 서재에서 책을 꺼냈는데 찰스 스펄젼의 전기를 전에도 읽었지만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 다른 이야기 많이 나왔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마지막 죽을 때 자기 묘비에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느니라.’ 그것을 새기고 죽었는데 찬스 스펄젼은 자기의 관 뚜껑에다 글씨를 새겼는데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리고 내가 내 믿음을 지켰노라,’ 그것을 어떻게 감히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하여튼 가슴에 벅찬 언어로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달렸노라. 나는 나의 믿음을 지켰노라.’ 관 뚜껑에다 그렇게 쓰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장엄한 죽음입니까.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이 야곱이 말하자면 이런 각성과 이런 부흥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쉼 없이 마지막까지도 찰스 스펄젼이 정말 모든 교회가 그리워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장례식 때 그 사람에게 은혜 받은 사람이 줄을 늘어섰는데 이마일, 3.5킬로. 그런데 자기 후배 목사님들을 모아놓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저는 거기서 일평생 계속해야 할 기도제목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 우리는 한때 영국 전체를 뒤흔들었던 그런 능력을 소유한 설교자였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연로해지자 교회가 할 수 없이 데리고 있어 주어야 하는 목회자로 전락되는 사람을 봅니다. 한때는 그의 설교가 유창하고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지만 말년에는 겨우 설교 원고나 읽어 내려가는 이런 처지로 하락된 사람을 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되겠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영력이 넘치고 더 정결해지고 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넘쳐서 원숙함으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서 젊은 세대를 깨울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결국 무엇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입니까?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속에서 연로하면 연로할수록 그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교회에 있는 목사님들이 저를 포함해서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늘 사람들은 연세 드신 목회자를 점점 싫어합니다. 그것도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생생한 하나님을 향한 체험을 공급해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설교자들은 결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결국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느 한순간에 이렇게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서 자신이 환란 속에 처해있는 것을 깨달으면서 벧엘로 올라갈 때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었는데 무슨 믿음, 내가 이렇게 34장을 살아왔는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 갈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의 이상한 겸손은 갖지 않았습니다. 나는 비록 제 구실을 못하고 살았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셨는데 그때는 내가 신실했는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그리고 축복을 도둑질해서 도망치던 그 시대에 가장 불신실한 나에게 신실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깊이 생각합니다.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을,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그것 하나만 붙들고 있어도 우리가 어디로 떨어지든지 간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디나의 강간 사건을 통해 처참한 상황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께 이제 긍휼을 입을 수 없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없어, 그러면서 나가 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 사탄이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자기가 가장 신앙심이 좋은 사람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그런 식으로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야곱과 같이 이런 신실함을 가지고 나는 비록 한없이 더러우나 그러나 주님은 신실하시고 그러나 내가 그 주님을 의지한다. 이렇게 나가는 사람들을 뻔뻔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얼마나 사단의 궤계가 간교합니까.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나아갈 수 있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라고 그랬는데 그 하나님, 한없이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는 한없이 타락한 존재인데 그 격차를 무엇으로 매울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사람의 행실로나 의로운 그 무엇으로 하지 않으시고 중생의 씻음과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사도가 우리에게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신의 한없이 불신실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용납해주실 수 있었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전부 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원리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늘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그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4절만 같이 읽읍시다. 시작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랬습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그랬는데 우선 이 사람들이 손에 이방신상이 있었다고 그랬는데 그 신상이 큰 것도 있었지만 작은 것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필깎이만한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막 갖고 다니는 것이 부적을 차고 다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는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다 자기 손에 있는 것을 스스로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거는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강의를 듣고 가서 집안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 다시 특강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중학교 2학년짜리가 와서 이 설교를 대전까지 좇아와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눈동자 하나 안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전하는데 애들이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데 중학교 1-2학년짜리가 뭘 알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깊이 자기가 확실하고 경험하고 확신을 갖게 된 말씀은 사람들에게 전할 때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도 안 기뻐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으면 기쁘다고 하는데 얼굴이 죽상이어서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주는데 상품이 팔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살찌는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파는데 완전히 피골이 상접한 갈비씨입니다. 그러면 그 제품이 팔리겠습니까?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우리는 그렇게 본바, 들은바, 체험한 바를 얘기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의 마음이 막 움직이는 것입니다.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야곱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니까 이방신상을 버리자. 그러니까 다 내어놓습니다. 왜? 조금아까까지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어찌 이렇게 행했는가? 그랬더니 아버지는 뭐 잘한 것이 있습니까? 하면서 막 대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아무런 사람도 대꾸도 없이 그렇게 오랜 세월 가지고 있었던 이방신상을 다 내려놓습니다. 뭐가 생긴 것입니까? 권위가 생긴 것입니다. 못 느꼈습니까? 권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도 여태껏 가지고 다녔는데 왜 우리만 버리래.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권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이방신상을 다 내려놓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고,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지 위해서는 이런 권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왠지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거의 머리를 숙여서 들을 수 밖에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그런 권위를 주시는데 누가 야곱이 그렇게 권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디나의 사건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족장으로서의 그 장엄한 권위를 여기에서 회복을 하게 되는데 무엇을 그것을 회복시켜주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깊은 각성을 통해서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에 대한 회복이 없이 살아갈 때 그때 불신앙 속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기도원에 가서 마가복음 9장에 보니까 예수께서 오심에 저희가 서로 변론할새 능력이 사라지고 권위가 없으니까 너 잘났네, 내 잘났네 하면서 얘기하니까 그때는 항상 복음이 꿀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초 논리적입니다. 어떻게 부부관계도 안 하는데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권위를 느끼게 만들어서 사람들 속에 믿어지도록 만들어서 들이미시는 것 이외에는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리고 불신자와 다투면 예수 믿는 자가 확실히 집니다. 말 수단이 아무리 좋아도, 그런데 여기에서 야곱에게 회복된 것은 영적인 권위입니다. 누구도 이유를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하자 사람들이 다 버렸습니다. 각성은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보면 주일학교를 해보면 이 사실을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벌써 하나님과 참된 만남을 경험하고 영적인 권위가 있는 선생들은 벌써 학생들이 선생님을 따르는 태도가 벌써 다릅니다. 그리고 말씀을 증거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깊이 움직이고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위를 잃어버린 롯이 자기 사위들에게 애들아 조금 있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는데 도망가자. 그랬더니 농담하지 마십시오. “농담처럼 여겼더라.” 요나 선지자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니느웨이를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리라. 짐승들까지 금식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누구도 농담으로 안 받아들였습니다. 아까 그 청년도 보십시오. 한때는 농담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지옥이 있어서 안 믿으면 불속으로 떨어진다. 농담처럼 여기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 있게 다가오는 게 느껴집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는 결코 능력 있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정말 저는 그래서 우리 기본적인 소망은 우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소망이 생깁니다. 아, 34장이 있으면서도 디나가 강간당하고 자식들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엘로히 이스라엘, 왕년에 쌓은 단을 보면서 왕년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겼어, 그 왕년에가 사람을 잡는 것입니다. 목회를 제대로 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치고 왕년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년을 가지고 먹고 살면 안 되고 금년가지고 먹고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올해 냉해가 들어서 벼가 수확이 안 되었는데 왕년에 풍년든 것을 이야기하면 뭐 합니까. 왕년에 풍년 안 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거지 보고 물어봐도 삼대 전에 거지 없고, 부자에게 물어봐도 삼대 전에 부자 없습니다. 다 왕년에는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야곱이 여기에서 그런 권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올까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 할 때 사람들이 꼼짝 못하고 이방신상을 내려놓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복음전파가 얼마나 놀랍게 전파되겠습니까? 얼마나 놀랍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다음에 자기 귀에 있는 고리까지 야곱에게 주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귀에다가도 우상을 달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인을 할 수 없는데 그러나 단장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 출애굽기를 우리가 공부하면서 단장품을 다 제해버리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단장품을 제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단장품을 제하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세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 자기의 영적인 깊은 위기를 느끼게 되니까 자기의 단장하는 것, 그렇다고 해서 다음주일부터 전혀 화장을 하지 않고 다니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사랑하는 것으로의 단장입니다. 그게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것을 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값진 것이었습니다.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낌없이,
그것을 어디다 묻습니까? 상수리나무 아래 묻게 됩니다. 이 상수리나무 아래라는 것도 장소가 독특합니다. 학자들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 상수리나무가 히브리말로 ‘울’입니다. ‘울’하고 ‘신’이라고 하는 ‘엘’하고 어근이 같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상수리나무가 바로 담들을 쌓는 하나의 대표적인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도 상수리나무 아래서 단을 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단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모든 것을 모아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상징하는 그래서 엘로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 울에서 왔다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무엇인가 하면 상수리나무가 있는데 바람이 막 불어서 다른 나무들은 다 쓰러지는데 상수리나무는 튼튼합니다. 그래서 상수리나무는 곧 튼튼함과 용맹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고 하는 의미도 결국은 그런 결단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땅을 파고 아낌없이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묻는다고 하는 말은 다시 기억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묻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이제 드디어 떠나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모두 다 해결하고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깊이 기도하고 싶다. 그러면 기도하기 전에 우선 다 정리를 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정리를 못하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힘이 없습니다. 정리할 것은 정리를 하십시오. 주님이 원하시지 않은 게 무엇인가 잘 보면서 거두어서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는 가운데 깊이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생생하게 보여줍니까?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해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야곱이 넘어졌던 똑같은 지점에서 우리는 넘어져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걸려 치어 넘어졌던 그 덫에 우리의 발도 치여서 상처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립니다. 야곱이 이것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이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 앞에 눈을 뜨게 되자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살아왔던 모든 삶을 돌이키게 하는 원동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무엇을? 하나님 정말 나 자신을 바꾸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바꾸어주셔서 내가 내 인생을 정말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부흥의 능력으로 나에게 임한 것과 같은 이런 변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지 않고서는 올수 없는 그 하나님의 나라, 그렇지 않습니까? 변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올수 있겠습니까? 그 나라가 우리에게 오게 되도록 하나님 나에게 변화를 주시옵소서. 깨닫게 하시옵소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이 뻗땡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34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