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8
부흥 안에 있는 권세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35:5)
지난시간에는 야곱이 이방신상과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 이제 벧엘로 올라가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4절의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자기 손에 있는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아래 묻었더라.’ 그러고 나서 이제 야곱과 가족들이 전부다 대열을 지어서 가는 것이죠. 어디로 가겠어요? 벧엘로 가게 되는 것이죠. 그 때에 이제 사면에 있는 많은 고을들을 지나서 야곱의 집안이 가는 것이죠. 그런데 그 때에 성경이 말하기를 사면의 모든 고을들로 야곱의 집안의 이 행하는 걸음을 두렵게 만드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것이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내용이에요.
우선 말이에요. 제가 엊그제도 우리 교회의 청년 하나를 데리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만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보세요. 야곱이 이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참 간단한 이야기 아니에요? 어떻게 간단한 이야기에요? 벧엘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그것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상식적인 것 아니냐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에요. 그러나 보세요. 그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마음이 되어서 실제로 걸음을 벧엘로 향하여 떼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일어났는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에요. 하나님만큼 복잡한 존재에요. 나쁜 의미에서 복잡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도 인간 자신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러느냐하면 말이에요. 하나님은 언제든지 만나실수 있는 분이지만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까지 깊이 기울어져서 실제로 주님을 추구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자주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생각해보세요. 이런 마음을 먹느라고 지금 10년이 넘어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것이에요. 한번 이렇게……. 그러니까 한사람이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이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기적이에요. 어마어마한 기적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거든요. 그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구분되는 이유가운데 하나에요. 다른 종교는 사람들이 열심히 수도를 하고 찾아가면 그 절대자를 만날 수 있어요.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은 늘 우리를 찾으시지만 그러나 찾아오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향해 내 자신의 인생의 문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여야할 필요를 깊이 느끼는 이 마음의 궁핍함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이게 인간이 얼마나 패역하고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만을 향하여 가난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니까 주님이 뭐라고 그러셔요? 팔복을 이야기하시잖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게 첫 번째였어요. 그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을까요? 부자였을까요? 대답을 해보세요. 그렇죠. 가난한 사람들이죠. 어느 정도로 가난했어요? 벳새다에서 설교를 계속 듣다가 도시락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아, 이러다가는 애들이 가다가 기진해서 쓰러지겠다.’고 주님이 도시락 걱정을 해주어야할 정도로 끼니가 온데간데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이 지금 누구를 놀리시는 것이에요?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아 그러면 우리네…….’ 그게 아니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보세요. 우리 중에 누가 몸과 마음과 우리의 영혼을 모두 하나의 시선으로 그 거룩한 하나님 한분에게만 고정시키면서 살아갑니까? 그게 아무 때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하면 언제든지 내가 가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맞는데 자기에 대한 이해는 틀린 것이에요. 자기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되겠다고 하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은 맞아요. 내가 언제든지 가면 하나님은 나를 맞아주실 것이다. 그것은 맞아요. 그러나 ‘주여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 마음이 쉽게 안 생긴다는 것이에요. 그게 말로는 가능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영혼이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기울어지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부흥이 뭐냐 하면 부흥과 각성이 뭐냐 하면 그렇게 기울어지지 않고 버티던 사람이 한번 꺾어지는 것이에요. 그게 부흥이에요.
저는 이번에 책을 내면서도 매일같이 생각하면서 너무너무 하나님께 감사해요. 하나님 내가 정말 그 때 그 시절에 그 하나님, 그 크신 하나님을 내가 못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들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죽는 인생이었겠는가? 나는 일 년을 살다가 가도 정말 그렇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다가 갈 수 있는 그런 생의 길을 하나님이 한번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늘 기도해요. 문제는 뭐냐 하면 야곱 하나가 하나님은 그렇다고 해서 야곱의 인생가운데서 안 부르시다가 20년 후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부르시는 것은 아니거든요. 늘 야곱을 찾으시고 부르시는 것이죠. 그런데 못 듣는 것이에요. 그리고 마음이 이렇게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올바른 것인데 자기가 그럴 수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그 생각을 계산에 못 넣은 것이에요. 자기가 그렇게 되지를 않아요. 내가 늘 말씀드리죠. 인간은 믿는 것만큼 실패해요. 얼마나 부패하고 그리고 얼마나 완악하고 그리고 마치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여기서 깨달았지만 심판의 칼이 목에 들어와도 인간이 버티는 게 인간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야곱이 드디어 벧엘로 올라가기 직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세요? ‘야곱이 그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무엇을 묻었어요? 이방신상과 자기 귀의 고리를 야곱에게 주었을 때 야곱이 그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아래 다 묻었어요. 쉽게 얘기해서 귀에 거는 귀고리를 우상숭배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우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선적인 의미는 단장품이겠지요. 우상은 따로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다 필요 없어지는 것이에요. 왜 그런 것이에요? 지금 이제 시선이 하나님께만 고정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다 단장품이나 그런 것들이……. 그래서 청교도 시대에 살던 여성들이 검소했던 이유가 뭐 검소하기 위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전체적인 그 시대의 청교도들의 분위기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너무나 잘 먹고 잘 쓰고 그 다음에 아름다운 치장들을 하면서 산다고 하는 자체가 하나의 악으로 여겨졌던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지금 귀에 있는 고리와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상수리 나무아래 묻은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에요. 비로소 벧엘로 올라가는 일이 일어나요. 이것이 그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기도생활을 해봐서 알지만 계속해서 기도의 영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런 것이 가능하지만 그러나 기도의 영이 살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 오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내 마음을 다 쏟아서 기도해야지!’ 쏟아져요? 자기가 머리로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하면 이런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은 철저하게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만나는 것이에요. 머리로도 생각을 해도 그러나 영혼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주목하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런 절박한 소원……. 그러니까 주님은 여기서도 주기도문하고 전혀 다른 것을 얘기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 그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우리의 마음에 느껴져서 그래서 세상과 나는 간곳이 없고 그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모든 영혼을 너무나 압도한 나머지 우리가 그분만을 주목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것이 말하자면 신앙의 출발이에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정도가 심하면 덜 뒤틀리고 아주 박약하면 크게 뒤틀리고 그래서 완전히 처음에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그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 눈을 가지고 우리는 또 세상을 보고 사람의 살아가는 인생을 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두 번 굴절이 되면서 전혀 다른 내용의 삶을 살아가고 전혀 다른 내용의 말하자면 인생을 살아가야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씀드려서 부흥은 일어나면 참 좋은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참다운 부흥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이 뒤틀린 것들이 근본적으로 돌아서는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기억해야 되요. 왜 그러느냐하면 여기서도 보세요. 결국은 하나님과의 그런 깊은 만남으로 지금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우선 우리가 여기서 벧엘로 올라가기에 앞서서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리고 이제까지 자기의 사랑의 대상이었고 자기를 보호해준다고 믿었던 그 우상들을 다 버리고 그리고 단장품들을 다 제해버릴 정도로 이제는 유일신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기대가 회복되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비로소 벧엘로 올라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기도를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주기도문에서 얘기하다시피 삶의 변화가 없는 기도, 기도의 변화가 없는 삶, 둘 다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삶이 기도하는 내용과 최대한 근사치로 가야해요. 그래야 기도가 힘이 있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서 백성들을 이끌고 아이 성을 공격했잖아요. 다 공격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데 아니 여리고도 무너뜨린 사람들이 아주 우습게 생각하고 갔는데 아주 비참하게 참패당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지도자의 심정이 어땠겠어요?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 안했겠어요? 건성으로 기도했겠어요? 간절히 뼈가 녹는 것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하나님 어찌하시렵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셔요? ‘너는 왜 그렇게 엎드려 있느냐?’ 하셔요. 그 기도에 하나님이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이에요? 없으시다는 것이에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요. ‘왜 그렇게 엎드려 있느냐?’ 그러시더니 ‘너희 중에 죄가 있다.’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그렇게 뼈가 녹듯이 간절하게 부르짖는 지도자의 기도도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얼마나 효과적이에요. 딱 엎드려서 심각하게 부르짖는데 너는 왜 엎으려 있느냐? 주님이 물으셔요. 너희 중에 죄가 있다. 아간을 돌로 쳐서 죽이고 나니까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 앞에 고정시키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진실한 소원을 가진 사람들의 기도는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것이에요. 이것이 결국은 그 모든 것들에 선행되어져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힘이 있고 절박한 기도가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리새인들의 기도였거든요. ‘오! 거룩하신 하나님…….’ 괜히 옷을 찢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위에 계시고 내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 그러면 가슴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면서 괜히 옷을 찢는 것이에요. 전부다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에요. ‘참람하도다!’ 그러면서 찢는 것이에요. 얼마나 우스운 것이에요. 그러니까 영혼을 하나님 앞에 깊이 고정시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때로 어떻게 해요? 인생의 절박한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해요? 금식을 하는 것이죠. 금식의 의미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영혼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 한분에게 두는 것이에요.
어제 집사님이 물어봐요. 아니 왜 그렇게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고 들어가면 한참이 되어도 기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도 늘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나는 해답은 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기도의 영으로 밥을 먹고, 기도의 영으로 설교를 하고, 기도의 영으로 출근을 하고, 기도의 영으로 성경을 읽고, 그러다가 기도로 들어가면 간단한데 우리가 늘 그런 속에서 살지를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늘 이 세상에 있는 죄와 그리고 쓸데없는 이 세상의 부패한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다 무너지면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그 보좌 앞에서 우리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런 것들이 힘들어지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이 먼저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삶이 아침에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잊어먹고 자기 마음대로 막 살다가 들어와서 다시 보고하는 그런 삶은 안 돼요. 주님이 마치 기도실에 계신 것 같은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렇게 될 때에 그 삶은 결국은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17절은 우리에게 주는 훌륭한 답이에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사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응답은 어떻게?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경외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에요. 여러분 기억하세요. ‘믿습니다.’를 연발한다고 해서 기도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의 최면을 거는 것을 하나님이 믿음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니에요. 간절히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살아가는 삶도 그렇게 간절해야 해요. ‘믿습니다.’를 말하지만 살아가는 삶도 그렇게 굳건한 믿음 가운데 주님을 경외하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 때 바로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이에요.
영혼이 이렇게 깊이 하나님 앞에 고정되니까 어떤 역사를 하나님이 주셨느냐하면 큰 권세를 느끼게 만들어주신 것이에요. 지금 야곱의 집안이 벧엘로 개선행진을 하는 것입니까? 군대를 이끌고 깃발을 세우고 개선행진을 하는 것이에요? 지금 도망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벧엘로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가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올라오라고 안 그러셔도 이제 벧엘로 도망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어요. 왜 그래요? 세겜 족속을 쳐 죽였으니 동족들인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들이 와서 이제 자기들을 해코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쭉 지나가는 것이에요. 고을들을 지나는 것이에요. 보복을 받을 만한데 아무도 보복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히브리 원문에는 ‘하나님의 두려움이 온 사면의 도시위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온 사면위에 두신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야곱이 걸어가는 그 행로를 보면서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던 것이에요. 이게 나쁘게 생각하면 떨거지들이거든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제는 거기서 살았던 좋은 집들도 다 내팽개치고 그리고 부랴부랴 보따리를 싸서 (보따리를 얼마나 쌌겠어요.) 짐승들 떼를 거느리고 그 다음에는 벧엘에는 저택이 있습니까? 맨션이 있습니까? 돌멩이 하나 놓여있는 그 벧엘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도망가는 피난의 행렬로 안보이고 장엄한 말하자면 권세를 가진 어떤 군대의 행렬같이 느껴지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생겨요. 왜 그래요? 누가 그렇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그런 권세를 주셨어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때 그런 일이 생겼나? 그것을 보고 그 다음에는 그러한 권세가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이 문제를 보겠어요. 문제는 뭐에요? 이렇게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셨어요. 그런데 어떨 때에 이렇게 그 사면 고을들이 깊이 두려워하고 권세를 갖게 하셨느냐하면 야곱을 비롯한 그의 집안이 깊이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그리고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위에 계신 하나님 한분을 향해서 신앙을 회복하고 그분 한분만을 주목하는 그러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에 사람들이 그 고을들을 두려워할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에요. 우리가 권세를 가진 것처럼 흉내를 낼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그릇 행하는 부흥집회 같은 데서 일어나는 그런 이상한 일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그러한 흉내는 우리들이 낼 수 있어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적인 권세는 주신 자가 참으로 주시지 않았으면 언젠가 모든 거짓된 것들이 드러난다는 것이에요. 그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는 것을 봤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중에도 그렇게 귀신을 쫒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꽤 여럿 나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다니면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이 귀신들린 자가 뛰어 올라와서 붙잡으면서 하는 말이 ‘바울도 내가 알고 예수도 내가 아는데 너는 도대체 뉘 집 아들이냐?’ 그러면서 대들었어요.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칠 정도가 되어버렸어요. 여러분 귀신들린 사람이 얼마나 힘이 센지 정말 초인적인 힘이 나와요. 세 사람이 붙잡아도 꼼짝도 안 해요. 한번 팔을 휘두르면 붙들고 있던 두 사람이 저기 가서 떨어진다고요. 아무튼 초인적인 힘이 나와요. 그런데 그것을 당한 것이에요. 그렇잖아요.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흉내가 아니라 실제에요. 실제……. 그런데 그런 실제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서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이 고정되기 전에는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다가 불 뱀에게 물리는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 불 뱀은 뱀인데 한번 물리면 불이 붙는 것처럼 독이 퍼져서 고통가운데 24시간 안에 죽는 광야의 뱀이었는데 뭐라고 그래요? 구리 뱀을 만들어서 높이 들면서 누구든지 이 뱀을 어떻게 하는 자? 쳐다보는 자가 살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야기하다가 뭐라고 해요? ‘광야에서 모세의 지팡이에 구리 뱀이 들린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하면서 ‘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그러니까 그 광야의 뱀이 들린 그 사건과 십자가에 달린 사건을 같이 비교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그 모세의 막대기를 주목했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믿음의 본질이에요. 안 믿어지는 것을 막 믿는다고 그러면 세게 할수록 그 사람은 심리적으로 안 믿어지는 사람이에요. 안 믿어지니까 자꾸 세게 ‘믿습니다.’ 그러는 것이에요. 자기 마음을 쫒아보려고……. 그렇게 해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주목하세요. 바라보세요. 그렇게 고정될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큰 권세를 주신 것이에요.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에요.
역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한분만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마음이 굳게 정해지고 좌우를 들여다보지 않고 그 한길을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는 확신과 권위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성령의 큰 능력도 그들에게 부어주시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확신과 권위가 있어요. 흔들리지 않아요. ‘아니다, 이것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니까 권위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이 사람들이 큰 두려움들을 사면으로 느끼게 하면서 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주위에게 해를 받지 아니하시고 무사히 벧엘로 올라가게 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부흥이 일어났을 때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했어요? 칭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어떻게 했어요? 두려워했어요. 사면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두려워했어요. 교회는 세상에 친근감을 주기 전에 이러한 두려움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해요. 그것이 커다란 영적인 권세를 가진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결국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연결 지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교회가 하나님의 큰 능력을 소유했을 그 때에는 교회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교회에 들어가면 그 교회는 뭔가 이 세상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러한 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교회에요. 그러니까 예배가 예배다워지기 위해서는 성령이 장악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해요. 성령님이 오셔서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장악하시는 이러한 예배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에 깊이 넘치면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삶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 변화의 능력을 교회가 소유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변화 되요. 이런 얘기는 너무 추상적인 것 같지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면 이런 이야기에요. 뭐냐 하면 교회에 나와서 놀러 다니는 것처럼 다니는 사람이 많잖아요? 특히 젊은 사람가운데는 많아요. 그래서 가면 무슨 좋은 일이 없을까? 하고 혹시나 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데 그것이 변화를 받으면 좋은데 변화를 못 받고 계속 그런 식으로 다녀요.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교회가 무슨 권세가 있다든지 아니면 그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두려움을 느끼고 그 은혜 안에 잠긴다든지 그런 개념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깊이 은혜 속에 잠기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육신적인 생각들이 살아있어요. 혈기가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지요.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한번 깊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도전을 받고 많이도 필요 없어요. 어느 정도냐가 문제에요. 한번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고 나면 그러면 사람이 말하자면 교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이고 하는 것을 깊이 알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겸비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영적인 권위를 느끼게 될 때 사람들이 겸비해지고 깊이 낮아지게 되는 것이에요.
초대교회 때에 김익두 목사님이라고 있었죠. 아주 평양의 제일가는 깡패였지요. 그런데 걸어가는데 여자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우습게 알겠어요. 자기 눈에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어요. ‘야, 예수를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 성경을 주니까 그 자리에서 그것을 찢어서 코를 풀어 버리면서 ‘예수를 믿으려면 나를 믿어라.’ 그러는데 이 선교사가 딱 쳐다보면서 하나님이 당신의 코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랬는데 ‘웃기네.’ 그러면서 돌아왔거든요. 누워서 자는데 선교사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이에요. 여자가 뭘 알아. 그러는데 자꾸 코에 손이 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밤에 자는데 깊은 두려움이 와요. 내가 이러다가 죽지…….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코를 풀다니……. 혼자 일어나서 회개하는 것이에요. 그게 김익두 목사님의 회심이에요. 평범한 말이었지요. 하나님의 권세는 이렇게 평범한 말을 사람들의 깊은 곳에 파고들어가게 만들어요.
집회를 해보면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인데 어떤 케이스가 있느냐하면 설교를 할 때는 계속 딴 짓을 해요. 그런데 가서 한 일주일쯤 있다가 그게 다 말씀 생각이 나서 회개하랄 때는 안하고 자기 혼자 회개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어요. 아주 주목을 안 하는 것이에요. 한 일주일쯤 지났는데 가만히 기도할 때마다 설교가 떠오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듣긴 들은 것이죠. 듣긴 들었어도 저 이야기는 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들은 것이죠. 자기 혼자 회개하고……. 하나님의 권세가 깊이 있어야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호소력 있게 들어간다고요. 그게 가장 커다란 문제에요. 우선 물론 권세가 있어도 말씀이 분명치 않으면 그것은 분명치가 않은 것이죠. 찔러야 될 곳에 망치를 들이대고 미니까 구명이 뚫어지겠어요? 안되겠지요. 그러나 무엇과 똑같으냐하면 면도칼을 가지고는 정확하게 잘라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쪼갤 수는 없어요. 비록 그것이 면도날처럼 예리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말하자면 내려쳐서 부술 수 있는 도끼와 같은 힘 이런 것들이 하나의 파워에요. 영적인 권세에요. 교회가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때에 비로소 초대교회적인 전도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놓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커다란 영적인 권세를 교회가 소유하게 될 때에 그 때에 비로소 교회가 증거 하는 말씀이 사람들에게 깊이 파고들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고뇌하게 만들고 고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영혼을 구해달라고 탄원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것들이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오늘날 구라파에서나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에서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혀 다른 칼라로 제시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이 신앙이다.’ 이렇게 제시하면서 수많은 성공 학에 나오는 수많은 방법론중의 하나로 일단 초청하는 것이에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라고 하는 상품을 제시하는 것이죠. 그런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 혹해서 모이는 사람들도 있죠. 그러나 결국은 뭐냐 하면 그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일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제자입니까’를 쓰신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도 그런 고백을 하잖아요.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일을 했대요. 이백 명이 모이는 교회에 가서 육백 명을 만들었어요. 그것은 진짜 만든 것이죠. 그래서 정말 자기 나름대로 탁월한 목회 행정력을 과시하고 강사로서 많이 불려 다녔는데 이상하게 예배가 끝나고 나면 집에 가서 혼자 앉아있으면 다 무너지는 것과 같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원에 이 주간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얘야 네가 교회를 하는 것이 코카콜라 회사에서 콜라는 파는 것과 무엇이 틀리느냐? 보험회사에서 보험 모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 있느냐? 너희 교인들을 봐라 너희는 육백 명으로 늘어나고 나니까 일이 열여덟 시간으로 늘어났는데 점점 힘들어진다. 만날 젖병 갈아 먹이고 만날 기저귀 갈아달라고 우는 애들뿐이지 거기에 제대로 된 사람이 누구냐?’ 그게 복음을 깨닫게 되는 하나의 모멘트였어요. 계기였어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심으로 그 말씀이 사람을 움직여서 사람들 속에 근본적인 변화를 심어주는 가운데 태어난 신자들은 힘이 있어요. 자생력이 있어요.
오늘날은 신앙생활을 누가 옆에서 만날 만나서 얘기해주고 만날 무엇을 해주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설교를 하는 사람이 굳이 누군가도 깊이 알 필요도 없어요. 진리의 말씀이 중요하잖아요.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깨닫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내가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면서 신앙이 날마다 깊어져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신앙이 서 가는 것이에요. 누가 세우시는 것이에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든든히 세워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되는 것이지 뭐 별다른 일이 있어요. 그러면서 그렇게 깊은 신앙 속에서 지난번에 얘기한 것과 같이 모두 십자가 앞에서 한 형제, 자매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뭐 머리띠를 둘러매고 축구를 한다고 해서 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 속에 이러한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세상을 변호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두려움을 소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해요.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다분히 교회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너무 세상적이라는 것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워지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교회가 이 세상을 참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평화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목적이에요. 우리는 늘 산상수훈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렇지요? 그래서 거기에 보면 얼마나 고상해요? 그러니까 인류 평화의 대헌장이라고 불리잖아요. 그 산상수훈에 보면 5장, 6장, 7장을 봐요.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산상수훈은 늘 좋아하고 신문에서도 늘 인용을 해요. 원수가 이 뺨을 때리면 저 뺨을 대라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뭐 수없이 많지요.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속옷과 겉옷을 벗어주고 하는 이야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그냥 주고……. 그러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신을 믿고 깊이 따라온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해요. 그러고 나서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견고히 서지만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위의 성과 같이 무너지리라 말씀하시므로 말미암아서 그 복음 신앙의 기초를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5장을 읽기 전에 4장을 잘 읽어야 해요.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순서가 매우 중요한 것이에요. 그게 이유가 있어서 앞뒤로 있는 것이란 말이에요. 4장에 무슨 이야기가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신앙의 핵심을 5장, 6장, 7장을 이야기하면서 산상수훈처럼 그렇게 칭찬을 받으며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야한다고 하는 생각들을 우리들이 강조하기에 앞서서 4장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다음에 5장을 보여주었음을 기억해야 해요. 4장에 뭐가 나와요? 뭐가 나오나 펴 봐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오죠. 언제 시험을 받았느냐하면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랬는데 그리고 나서 바로 그 때에 광야로 성령에 이끌려 가셔서 혹독한 시험을 받으시는 거예요. 왜 그래요? 시험을 받으신 다음에 무슨 일이 생겨요?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여 갈릴리로 돌아가시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하늘을 열고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광야로 나가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놀라운 권능으로 채우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드디어 사역을 시작하게 만드시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 얘기가 나오고 5장의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그 4장을 읽고 5장을 읽어야지요. 이러한 영적인 전쟁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후에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에요. 그렇지요? 이 세상이 끊임없이 지금 우리들도 전쟁 중 아니에요. 휴전 중……. 전쟁의 공포, 핵폭탄의 위험, 핵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여러분 아세요? 하나가 떨어지면 서울시가 기화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기체가 되어서 싹 날아가는 것이에요. 중성자탄은 얼마나 무서워요? 터지면 건물이고 뭐고 다 있고 생명을 가진 것만 골라서 다 죽는 것이에요. 지금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해체중이라고 말하지만 이 핵무기를 가지면 이 지구를 스물세 번을 멸망시키고도 남아요. 아주 수많은 무기가 있는 것이에요. 우리나라 같은 것은 그저 다섯 개정도면 족해요. 다섯 개정도면 영원히 살 수 없는 땅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한 공포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요. 그 뿐만 아니라 환경의 위험도 너무 심각하지요? 그러니까 이 인간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평안함이 없으니까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우리 교회가 세상의 이런 평화를 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그것은 좋지요. 발상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생각들이 정말 순서가 뒤바뀌기만 하면 성경하고는 거리가 완전히 먼 것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해요. 2차 대전이 얼마나 지겨운 전쟁이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이천만 명이 죽었어요. 이천만 명……. 그게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어요? 이천만 명이 죽은 것이에요. 그렇게 죽었을 때에 결국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 하나가 세상을 끝장낸 것이거든요. 그 때에 처칠같이 훌륭한 사람이 뭐하고 했느냐하면 핵폭탄이야말로 영원히 지구의 평화를 지킨다고 했어요. 그 누구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어요. 그러니까 뭐에요? 전쟁만 일으키면 일본이 그렇게 항거하다가 그것 두 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완전히 항복한 것이에요. 일주일 만에 항복한 것이잖아요. 일주일은 회의하는 시간이었지요. 손들고 항복하며……. 천황 히로히또가 뭐라고 했어요? ‘무조건 항복한다.’ 그러나 미국만 만들었습니까? 조금 있더니 모든 웬만한 나라들이 전부 원자탄을 갖게 되었어요. 나중에 원자탄을 가지고 그 정도가지고 게임이 안 되니까 수소폭탄을 만들었는데 수소폭탄은 얼마나 그 규모가 크냐하면 원자폭탄이 터져야지만 속엣 수소폭탄이 터져요. 그러다가 중성자탄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건물은 하나도 파괴하지 않고 건물 속에 살고 있는 사람만 깡그리 죽이는 것이에요. 다탄두미사일이 발견되었는데 뻥 터지는 것 가지고 만족을 못하니까 뻥 터지면서 그 속에서 핵폭탄 10여개이상이 새끼가 터지는 동시에 공중으로 다시 올라와서 사방으로 떨어지면서 다시 폭발하는 거예요. 이게 다탄두 미사일이에요.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서 이렇게 살아요. 지금 누구도 이제 이 핵무기가 인류의 적이지 평화를 지키는 것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것이에요. 사람들은 노력을 해요. 군비를 축소하자. 그래서 이상이 뭐냐 하면 이상이 얼마나 좋아요? 미국과 소련이 제일 먼저 전략핵무기를 없애자. 전략 핵무기는 진짜로 쓸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쓰면 큰일이 나지요. 여기서 쏘면 저기서도 쏘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타협을 하기 위해서 붙들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폐기하자. 그 다음에 전술 핵무기를 폐기하고 그 다음에 재래식 무기를 폐기해서 나중에는 누가 전쟁을 하고 싶어도 들고 싸울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 이게 얼마나 이상적이에요. 그러나 사실은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그런 세상이 올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면 역사가 이렇게 비참하게 전개되어오지 않았어요. 그것은 인간을 향한 지나친 과신이에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를 물어봅시다. 과연 이런 전쟁과 이런 고통의 모든 원인이 사람들 때문이에요? 정말 히틀러 그 한사람 때문에 그런 이차대전이 일어났습니까? 군주 한 사람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을 들고 역사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이에요.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나요. 양쪽이 모두 전쟁에 대한 의사를 갖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어요. 여러분은 못 읽으셨을 거예요. 저는 신문에서 그것을 자세히 한번 보았어요. 한 십여 년 전이에요.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소련과 인접한 나토에 가입된 어느 나라가(독일인지 어느 나라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미사일이 오발된 것이에요. 그런데 미사일이 오발되었는데 그 미사일이 오발된 것을 요격미사일이 가서 격추를 했는데 그게 소련 속으로 들어가서 격추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잘못해서 쏜 거지요. 그러니까 서로 전쟁의 의사가 없어도 즉시 그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이러한 일들이 이러한 모든 전쟁 속에서 결국은 인간이 추구하는 평화에 대한 노력은 결국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하나의 인도주의죠.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것보다도 훨씬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우리는 정말 살기 좋은 세상, 공기가 좋은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만 되면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에 만족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편하게 하나님 없이 살다가 죽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고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 오렌지카운티에서 존 맥아더 목사님이 목회를 하는데 거기를 갔다 온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에요. 도시가 너무 경치가 좋고 평화로워요. 그 한 부락이 있는데 그런데 너무 너무 좋고 평화로워요. 수입도 많고요. 공기도 좋고요. 나중에는 사람들이 너무 무료해서 사람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이에요. 그랬더니 거기에 모여 있는 동네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부인을 바꿔서 살기로 했어요. 그것이 하나님 없이 평화로운 인생들이 가는 길이에요. 정말 그런 사회를 원해요? 우리는 그런 사회를 원할 수 없어요.
여러분 인간이 환경이 좋아지고,(미국에는 수돗물을 그냥 먹는 데가 많다고 해요.) 많이 노력을 해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게 해주고, 전쟁이 없고, 기근이 그치고, 모든 것들이 풍족하고, 그런 세상이 평화죠. 그러나 그 평화 속에서 사람들이 그 평화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 것이냐? 전혀 그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여러분 지금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더 고통스럽고 그리고 어려웠던 때 5, 60년대, 3,40년대는 정말 예수를 믿는 것처럼 믿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가 전부인 것처럼 살았어요. 우리가 원하는 교회가 있는 목적, 우리가 원하는 참된 평화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정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참된 회심이 일어나서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해요. 그 때에 비로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로운 세상이에요. 하나님 없는 평화는 결코 평화가 아니에요. 그래서 누군가 그렇게 얘기를 했죠. ‘예수 없는 천당보다는 예수 있는 지옥을 나는 원하네.’ 그게 말이 안 되는 얘기지만 우리가 원하는 바는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이죠. 인간들 속에서 우리에게 인간 세상 속에서의 완전한 평화를 위해 우리는 노력을 해야 해요. 그러나 교회는 바로 이 세상에 그러한 것들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를 주어서 그리고 이 모순되고 평화가 없는 시대 속에서도 그 모순과 불안이 넘볼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하고 그 평화를 이 땅에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해서 이쪽 뺨을 치는데 ‘얼마나 손이 아프셨습니까? 이 장갑을 끼고 이쪽을 때려 주십시오.’ 이렇게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에요? 우리의 인격이 그렇게 고매해져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사셨어요. 그런 삶을 사시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에요. 어떻게 그분이 그런 삶을 사실 수 있었어요? 말하자면 그렇게 마귀의 모든 궤계를 이기시고 성령으로 승리하시고 권능으로 충만하니까 되는 것이에요. 사랑이 어디서 나와요? 인격에서 나와요. 인격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인격이 명경지수와 같이 맑지요. 그러나 속에는 뜨물이 잔뜩 들어 있잖아요. 막대기로 한번 쑤시면 다 올라와요. 사도행전을 보세요. 스데반은 자기를 향해 돌로 쳐 죽이는 그 동족들을 향해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님과 기도를 똑같이 하고 죽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노라.’ 할 때에 그는 그 속에서 진정으로 죄인을 용서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우리 자신 속에 끊임없이 뚜껑을 열고 꺼내려고 해보세요. 이쪽 뺨을 때리는데 이쪽 뺨을 들이댈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어느 구석에 있어서 못 찾는 줄 아세요? 없어요. 없다고요. 기껏 해봐야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정도에요.
그러니까 모세시대에는 인간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되었으니까 ‘원수들을 미워하고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그러니까 사랑하는 자도 미워하니까 고만큼이라도 살라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가운데 사셔서 이런 새로운 가르침으로 전대미문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에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 늘 사람들이 불평을 하지요. 무엇을 얘기해요? 교회는 헌금만 잔뜩 거두어서 구제도 안하고 자기네들끼리 다 먹고 쓴다고 그래요. 그러나 신경 쓸 것 없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살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음이 약해져서 신문에 착한일 하나 나오면 그것을 오려가지고 우리교회가 여기에 나왔다고 (동네에 구제하고, 수재의연금 몇 천만 원을 내고…….)자랑합니다. 교회는 그런 미담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악한 세상에 하나님 앞에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놀라운 권능 안에서 묶인 자가 놓임을 받고 억눌린 자가 해방함을 받아서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 근본과 본질을 바꾸어 놓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할 일이에요.
세상이 원하는 평화와 우리가 원하는 평화가 얼마나 틀린지 보세요. 많은 식구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서로 뭐라고 갈구지 않으면 그 집안이 평화로운 것이에요. 며느리는 며느리할일을 하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할 일을 하고, 아들은 아들 할 일을 하고, 자식은 자식 할 일을 해서 문제없이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평화로운 가정이에요. 그러나 성경에서 원하는 것은 가슴 깊이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마음속에 ‘흥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것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불화로 보시는 것이에요. 주님은 평화가 좀 더 있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없다, 샬롬이 없다고 말씀하셔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마음속에 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만두고 무관심한 것 자체도 성경은 걸고넘어지는 것이에요. 화목이 없다, 참된 샬롬이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깊은 관심과 뜨거운 사랑으로 늘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속에서 깊은 사랑이 솟아나는 것이에요. 그럴 때까지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세상을 향해서도 그것을 원하는 것이에요. 뭐 돈을 많이 달라고 그러고 못주겠다고 그러고 만날 봄철만 되면 데모를 하는데 타결이 되면 사람들이 막걸리를 놓고 띠를 풀고 한데 얼싸안고 춤을 추고 그런다고요. 그 다음에 또 돌을 던지고 그래요. 그렇게 막걸리를 풀고 그럴 때는 타결되었다고 하고 잘해보자고 하고 악수를 하고 밤에 철야작업을 한다고 그러는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평화라고 얘기해요. 산업의 평화라고 그러나 여러분 돌아서면서도 주인의 마음이 쓰린 것이에요. ‘아, 5%만 깎았으면 되는 것인데…….’ 여러분들은 돌아서서 일하면서도 근로자들은 ‘아, 열흘만 더 파업했으면 10%는 더 타낼 수 있는데…….’ 이것이 있는 한은 아무리 막걸리를 먹고 함께 춤을 춰도 하나님이 그것을 평화라고 안 그래요. 피스에요. 피스……. 샬롬은 우리의 원하는 바에요. 이게 지금 남북이 평화상태가 아니잖아요. 정말 평화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에요.
보세요. 빌레몬서를 보세요. 빌레몬에서 도망친 오네시모가 나오지요. 뭐라고 얘기해요? ‘형제로 받아들여라.’ 또 종들에게 뭐라고 해요? 주인이 형제로 받아들여주는데도 종처럼 일하는 거예요. 그러한 관계를 말해요. 그래서 바울이 보았던 것은 뭐냐 하면 노예제도가 타파되어야한다고 바울이 왜 부르짖지 않았느냐? 그런 면에서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바울이 꿈꾸었던 사회는 노예제도가 없어지는 사회가 아니에요. 지금은 노예제도가 있어요? 없어요? 그러나 실제로 노예가 있어요? 없어요? 많아요. 많아……. 비참할 정도로 부리는 사람이 많아요. 자본이라는 것을 가지고 정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요. 차라리 노예시대가 더 나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런데 제도만 없으면 뭐해요 사람들이 당연히 그것을 만들어내요. 무엇이 없기 때문에? 심령 속에 참된 샬롬이 없으니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러나 어때요?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만 그러나 어때요? 형제로서 무엇이 허물었어요? 하나님과의 화목이 모든 것들을 허물었어요. 교회는 이러한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할 수 없어요.
마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이 아무것도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동해안에다가 소련 애들이 자꾸 핵을 갖다가 버리잖아요? 그것을 끝까지 쫒아 다니는 것이 그린피스라고 그러대요. 엄청난데 회원이 430만 명이래요. 나한테도 지로용지를 보내주면 한 달에 돈 만원을 보낼 용의가 있는데 안와요. 일 년에 구백억 이 걷힌대요. 그것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쫒아 다니니까 그렇게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에요. 막강해요. 인공위성 사진까지 찍어서 회원 중에 과학자들이 있어서 그것을 회원들이 분석하는데 그래가지고 북한 핵이나 전부 다 조사해서 공격을 하는데 아주 엄청나요. 현대에서 나가서 시베리아에 가서 벌목하는 것까지 사진을 찍어서 막 공격하잖아요. 생태계가 파괴된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도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여하는 거예요.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바로 앞으로 갔을 때에 기적을 행하니까 걔네들도 하잖아요. 애굽의 술사들도 하잖아요. 지팡이가 뱀이 되게 만드니까 자기들도 뱀을 만들고, 피를 만드니까 피도 만들고, 개구리를 만드니까 개구리도 만들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에요. 몇 개를 쫒아서 하다가 도저히 못 쫓아하죠. 그렇다고 해서 그 몇 개 쫓아하는 것을 보고 결국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똑같다, 딱 들어맞는다고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열심히 전해야 해요. 결국은 어때요? 이 열 번의 놀라운 출애굽의 재앙으로 말미암아서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도다. 이런 고백을 받아낸 것이에요. 그리고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백성들 속에 ‘오, 여호와여 우리가 당신의 백성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가라고 하는 그 길을 따르겠나이다.’ 그리고 애굽에 있는 모든 생활의 근거를 버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모래바람만 불고 있는 광야로 들어선 것이에요. 그런 믿음을 주는 그러한 권세를 교회가 소유해야지만 이 어두운 세상에 소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가 무엇으로 그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 목표를 지니겠습니까? 누구 말 맞다나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잘 지키면 끝난 것입니까? 정말 그래요? 십일조 내고 교회를 지키는 것은 그것도 어렵다고 어느 목사님이 그래요. ‘그것만 하면 최정상이지요.’ 물론 그 목사님 말씀은 그것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목적만 일수는 없어요. 교회에 와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어서 세상에 있던 모든 가치관들을 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하면서 이제는 예전에 있던 것들을 싫어하고 싶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생각되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어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인생의 좌표와 목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로 살아가서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 그것이 교회를 찾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거는 교회의 기대여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그 한 사람이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참된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샬롬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있는데 그 교회가 수준이 어느 정도냐는 것은 다른 것을 보고는 알 수 없어요.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한번만 보면 훤해요. 평소에 그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왜 그래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운데 깊이 감동받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그 교회는 뭔가 권세가 장악합니다. 깊은 권세가 장악하고 그 권세 속에서 두려움을 느껴요.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부흥을 맞을 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하면 이런 권세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주셔서 교회가 큰 권세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부흥이 일어나는 때에는 물론 사람들이 나가서 열심히 전도했지만 그러나 가서 한사람, 한사람 데려오는 것보다는 부흥이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이에요. ‘여기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네!…….’ 그러면서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를 받게 되요. 인생 자체가 변화 받을 그 때에 결국은 인생의 모든 가치관과 생각이 바뀌고 이제는 자기 개인의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에 대한 견해가 바뀌는 것이에요.
잊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전에 어는 목사님이 해주셨어요. 지하실에 모여서 사람들이 기도모임을 갖는 것이에요. 교회는 아니고 기도처 같이 만들어서 많이 기도를 하는데 낮에 모여서 기도를 하면 좀 어때요? 시끄럽다는 것이죠. 투서가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형사가 두 사람이 나왔어요. 형사가 나와서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데 이 난리냐?’ 가보니까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어서 자기네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 하지 마시오. 그럴 수는 없었어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지하실로 비집고 들어가서 뒷자리에 앉아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취조하려고) 그날이 장날이라……. 말씀을 듣다가 기도합시다. 그 말에 아멘, 방언을 받고 진동을 하고 난리가 난 것이에요. 그리고 인생 자체를 깊이 회개하고 그 자리에 처음 나왔대요.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완전히 인생 자체를 회개하고 주님을 만난 것이에요. 둘 다……. 그 중에 하나만 그랬어도 문제가 되었을 텐데 둘 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발로 밟으신 것이죠. 그리고 취조하기 위해서 서슬이 시퍼렇게 권총을 차고 왔던 사람들이 눈물을 닦으면서 나가니 동네 사람들의 일이 될 까닭이 없지요.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라.’ 그리고 새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렇게 하나님의 권세가 그의 심령을 주관하고 변화시키지 못했으면 그것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꼴값하네.’ 그랬을 거예요. 집에 가서 밥이나 하지 말이야 젊은 여자들이 모여서 박수치고 울고 말이야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들이야……. 그러면서 들어온 것이에요. 우리 마누라도 이런데 가면 가만 안 놔둘 거야. 그러면서 들어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때요? 그런 육신의 눈을 완전히 떠서 그것이 그렇게 눈에 비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줘요?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가 그를 주관할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뭐 헤아릴 수 없이 많지요. 어느 집안에서는 시아버지가 있었는데 자기 부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더니 만날 우는 거라. 예수를 믿으면 남들에게 없는 기쁨이 있어야지 만날 가서 울고 그러느냐고 그러면서 며느리와 함께 흉을 봤는데 며느리가 전도를 받아서 갔는데 이게 또 우는 거라. 그래가지고 도대체 무슨 귀신이 거기에 붙었기에 사람이 그렇게 통곡하게 만드느냐 하면서 자기도 갔는데 변화를 받았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상하다 기도할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냐?’ 그러니까 기독교에 대한 견해들이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것은 결국은 교회의 권세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무엇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요.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이 확 녹는 것과 그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요. 아무리 얘기를 해도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 권능이 밀려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때리고 그래서 그 교만한 자아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그런 권세를 교회가 소유할 그 때에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기관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시는지 모르시죠? 해외에서는 그게 유일한 낙이래요. 그게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안 나가면 소외되어 버리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민목회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어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기 가야지만 한국 사람들을 보니까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일하다가 거기 와서 친교를 하는 것이죠. 그러나 교회는 반드시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정말 그 이상이 되어야 해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교회가 성령의 깊은 권세를 소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것을 느끼지 않아요? 우선 뭐냐 하면 교회에 나오고 있는 한 사람, 한사람들이 이런 깊은 권능 속에서 살아야 해요. 그 때에 비로소 전도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힘이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부흥의 시대에는 이런 큰 권능을 교회에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재미있는 말이 있잖아요. 스펄전 목사님이 메트로폴리탄에다가 테보나크church(?)를 만들었어요. 아마 잘 모르겠지만 저도 꼭 교회가 그 모습이어야 하는 것에 대한 것은 회의적이에요. 고딕식 건물은 너무나 낭비가 심한 것 같아요. 앞에 짓는데 돈이 거의 다 들어가요. 그리고 뒤에는 평평하고 그런데 그 뾰족한 것에 뭐가 있느냐하면 별거 없거든요. 아주 커야지만 거기에 방이 나오니까 목사님 기도실이라든지, 서재라든지 그 정도로 나오고 나머지는 전부 없어요. 그러니까 스펄전 목사님이 그게 너무 위선적이라고 생각한 것이에요. 성당에서 온 양식이고 겉은 그러면서 뒤에는 평평한 게 앞, 뒤가 안 맞는다고 본 것이에요. 그래서 운동장과 같은 체육관과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렇게 지었는데 그러니까 교회가 모양이 독특하니까 사람들이 저게 뭐냐고 물어보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저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저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왜?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그곳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진지하고 자기는 동의할 수 없는데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는데 부인할 수도 없는 그런 뭔가 힘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매일 모여요. 하나의 그런 견해를 갖게 하는 것이죠.
교회에 대한 인식을 세상에 구걸하려고 애쓰지 말아요. 세상에 칭찬받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주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에요. 어떤 때는 세상이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그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기도 해요. 개의하지 마세요. 흔들릴 것 없어요. 늘 다른 사람의 평판에 마음 쓰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속이 허한 사람들이에요. 속이 허해요. 스스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못생겼다고 그래도 마음 상해하지 않아요. 진짜 못생긴 사람들이 잘생겼다고 하면 괜히 들떠요. 못생겼다고 하면 괜히 마음 상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묵묵히 가는 것이에요. 그래 잘 생긴 사람이고 그래 나는 못생겼다. 니는 낫나? 그러면서 자신 있게 살아요. 내가 못생겼는데 네가 보태준 것이 있느냐? 그러면서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못생긴 사람들이 괜히 들떠가지고 잘생겼다고 하면 막 들떠가지고 뭐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그러지만 그래봐야 먼지투성이라고요. 신데렐라의 뜻은 먼지투성이에요. 뭐에요? 교회는 세상의 평가에 대해서 막 그럴 필요가 없어요.
물론 역사의식을 가져야지요. 우리가 있는 이 시대의 교회는 에베소 교회의 형편하고 또 틀려요. 그렇죠? 우리가 있는 이 교회는 미국에 있는 교회와 또 틀려요. 남북이 분단되고 이런 상황 속에 우리들이 있어요. 틀려요. 그러나 틀린 것은 요만큼이고 같은 것은 엄청나게 많아요. 여전히 이 도시에는 에베소처럼 타락한 죄인들이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 앞에 복음을 들어야할 죄인들이 살아가는 곳이에요. 변화 받아야 해요 새로워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늘 마음을 쓰면 스스로 화가XX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교회라면 마음 쓸 것 없는 것이에요. 우리교회가 세계 최고의 교회가 되었다. 뭐 교인이 제일 많이 모인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봐요. 하나님과의 그런 열린 관계 속에서 충만한 그런 은혜를 소유하면서 그리고 주님과 늘 동행하면서 살아갈 그 때에 정말 혼자가 아니에요. ‘너는 만날 그렇게 돈도 제대로 없이 차가 그게 뭐냐 구닥다리 같은 것을 타고 다녀?’ 그러나 마음 안 상해요. 왜 안상해요? 더 큰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권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돈 좀 가졌다고 그렇게 뻐기고 그러지만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를 만나서 코너에 몰려서 하나님께서 몰아붙일 때에는 결국은 누구를 찾아요? 누가 생각나요? ‘아, 그 하나님 앞에 열린 문을 가지고 깊은 교제 속에서 살던 그 성령의 사람’ 그 사람이 생각이 나는 것이에요. 자존심이 상해도 도와달라는 말을 못할지 몰라도 생각은 날것이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에요.
이렇게 끊임없이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만든 단체와 구별된다고 하는 증거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표징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권세에요. 여러분 그래서 설교시간 이것이 하나님이 언제 은혜를 주실지 모르지요. 그러나 분명히 틀린 것은 뭐냐 하면 이와 비슷한 시간이 세상에는 없어요. 예배를 드리는 시간과 같이 비슷한 시간은 없다고요. 어디서 그런 권세를 느낄 수가 있겠어요. 어디서 그렇게 완전히 복종해야하는 마음이 될 수 있는 그런 곳을 우리가 찾을 수 있겠느냐고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대면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그 앞에 하나님을 세워주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시간이 예배시간 말고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그 능력에 대한 깊은 그리움에 사무쳐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늘 말씀드립니다만 교회가 이러한 것들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소유해야 해요. 그런 그리움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또한 옛날에 교회가 그런 것들을 소유했던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그것을 봐야 해요. 그래야 그리움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늘 역사를 읽으라고 하는 것이에요.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갖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들이 얼마나 이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각성은 결국은 그런 것들 없이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없구나 하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잃어버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탄원하게 될 마음이 생기게 되는 그것이 하나의 각성이에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 충만한 영력을 교회에 부어주셔서 이 교회가 이런 행진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사모하게 되는 것이죠.
‘오치만 리’ 라는 중국의 지도자는 아주 어렸을 때에 주님을 영접했어요. 19살에 주님을 영접하고 영어를 워낙 잘했어요. 그런데 중국에 무슨 책이 있었겠어요. 그러니까 원서들을 구해다가 그 책들은 선교사들이 주는 책들인데 청교도 서적들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많이 읽었어요. 36살에 체포되어서 결국은 옥에서 죽어요. 한참 활동할 나이에 죽는데 그 사람이 옥중에서 써낸 수많은 책들, 아니 체포되기 전에 썼을 가능성이 많네요. 책들을 수없이 많이 썼는데 그것들이 계속 번역되어서 나오고 있죠. 대단한 사람이에요. 물론 신학사상에 있어서는 우리와 조금 다른 점이 있지만 그러나 확실히 크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 사람이 한창 때에 무엇을 했느냐하면 십자가의 군대를 조직해서 대륙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한번을 지나가는 것이에요. 쫙 지나가다가 세우고 설교하고, 그 다음에 지나가다가 세우고 설교하고, 하면서 말하자면 한번 대륙을 누비는 것이에요. 수많은 회심 자들이 생겨났어요.
이 타락한 강남이 소망이 있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야곱의 행렬에 대해서 이 압구정동과 신사동과 이 로데오거리를 한번 스치고 지나가야해요. 교회가 이 타락한 도시의 한복판을 가르면서 지나갈 수 있어야 해요. 주님의 두려움이 모든 사면에 떨어지게 하시지 않으면 괜히 폼 잡고 한번 지나가는 것이죠. 아무것도 아니죠. 주님의 권능이 사면에 내리면 그들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그들에 대해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단장품을 버리고 그리고 우상을 버리고 그리고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단 한분이신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이렇게 놀랍게 권세 있게 해주셔서 우리가 주님의 백성인 것들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알리게 해달라고 탄원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주님은 언제든지 하늘을 열고 이런 권세를 부어주실 수가 있다고 믿으면 아멘 해보세요. 믿습니까? 확신이 없어요. 주님이 언제든지 하늘을 열고 이런 권세를 부어주실 수가 있습니까? 주님이 무엇을 기다리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렇게 그것을 그리워하며 갈망하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에요. 거짓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