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Ⅱ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생의 벼랑끝에서 들린 음성①(창35:1) 1999.1.11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이방 신상을 버리라(창35:2上) 1999.1.12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6
3. 자신을 정결케 하라(창35:2下) 1999.1.13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3
4. 벧엘로 올라갈 때(창35:3) 1999.1.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0
5.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의 권세(창35:3下-6) 1999.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5
1. 생의 벼랑끝에서 들린 음성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35:1)
야곱의 신앙이 28장부터 물론 그전에도 있었지만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29, 30, 31장에서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면서 자라왔다가 32장에서 결정적으로 다시 한번 하나님을 만나고 33장에서 형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34장에서 다시 영적인 깊은 침체로 들어가는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35장이 나왔다.
그러면 여태까지 이야기 한 것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35장 이것을 강의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평소에 알았던 신앙의 상식 가운데 어떤 것들이 타파되었다고 할까? 어떤 것들이 평소에 알고 있었던 신앙의 상식과 합치 하지 않는다는 것들을 발견하였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실은 무지이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너무 확신이 강하다. 무엇이든지. 확신이 강하다는 이야기는 믿음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제가 말하는 면에서는 확신이 없을 수 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주님이 믿음을 지키면서 산다는 말씀을 하실 때 늘 근신하라 고 하였다. 근신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늘 자신을 살피면서 조심하는 것이다. 어떤 식의 조심인가? 내가 믿고 내가 신앙하는 바를 확신하지만 또 동시에 자신이 그 하나님을 믿는 참된 도에서 잘못 행하고 있거나 그릇되게 믿고 있는 것들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늘 생각하면서 언제든지 진리가 우리에게 말해 줄 때 자신을 교정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말씀으로 말미암는 교정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깊은 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굳어져 있는 것이므로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두 가지 사실만을 굳게 붙들면 절망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창35:13,14,15) 창 35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선하시고, 사랑이시며, 또 하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하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자신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러한 성향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을 생각해보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식으로 생각한다. 상식을 따라 행동하고 상식을 따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경에 이르기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가망이 없다. 그러면 남는 것은 인간의 이성의 판단과 자기 자신의 성향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굳게 붙드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하시게 보일 때 선하시다고 믿는 것은 쉽지만 전혀 선하시게 보이지 않을 때 선하시게 믿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이 그렇게 강철 같은 존재가 못된다.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잠시 잠깐 동안 선하시지 않은 것처럼 행하실 때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되고 길어지면 누구도 장사가 없다. 그러면서 믿음이 식어진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혼돈을 느끼게 된다. 결국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혼돈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 시험하는 자가 와서 말하기를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만약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런 관계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성품에 대한 의심은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나간다. 관계에 대한 의심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을 따라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붙드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 틀린 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세상의 어떤 도덕적인 민족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키며 살 수 있는 도리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궁금해 여기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흥에 대해서도 말씀을 증거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인상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견해를 설파하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판단이 어디서 나왔는가? 성경인가? 아니다.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상식에 일치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즉각적으로 판단이 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그런 태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설교가 나오면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권리들이 있다.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가 있다.
여러분, 만약에 강단에서 잘못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전하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여서 그릇된 길로 갔다면 전한 사람만 책임을 질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모든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이다. 책임을 함께 지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가 그것을 드러낸다(계2:2). 판단해야 한다. 판단하는 것이 만약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죄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늘 성경을 증거 할 때 그 말씀이 정말 성경인가? 끊임없이 거기에 관심이 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큰 문제이다. 신학의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하는 것이 안 되어 있으니까 성경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헛구호이다. 사랑할 수 없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게 강요를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경을 머리로 공부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머리만 키우는 것이다.
성경이 얼마나 신비한 책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성경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성경을 배우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서 실천하게 되고 행하게 될 때 깨달아진다. 성경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여서 호기심으로 성경에 접근하거나 이지적인 태도로 성경을 접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성경은 장막을 친다. 보이지 않는다.
시편을 읽어보고,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구약이 나온 후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나오면서 구약에 희미하게 비췄던 그 구원의 빛줄기가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장엄하게 빛나게 된다. 그것을 모든 사람이 보았다. 그것을 보고 성경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 사람들은 석사나 박사나 전문가가 아니었다. 평범한 어부들, 세관의 세리들, 아니면 유대교에 푹 빠져 있던 바울, 뱃사람 베드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다 성경을 썼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기독교의 참된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세계를 꿰뚫어서 우리에게 참된 기독교와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들인가요? 호기심으로 구약을 탐구했던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열심이 있었어도 유대 종교를 위하고 히브리 종파를 위하는 열심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신약이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가 참답게 예수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그 놀라운 과정 속에서 비로소 참다운 하나님의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진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전해주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주일학교 성경시험 보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뭐하나가 기본적인 원리를 벗어나면 그 다음에는 다음 원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적용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35장 마지막에서도 결국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3번 연속해서 나오면서 끝난다. 야곱이 이제껏 하나님을 믿어 왔던 신앙이라고 하는 것들이 여기 와서 하나의 커다란 변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35장 1절에서 약간의 각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1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서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1-3절) 3절에서 느끼는 것이 없는가?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 이 정도가 야곱이 생각하던 하나님이었다. 잘 보세요. 35장을 경험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났었을 것이다. ‘환난 날에 내게 나타나셔서 내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그 수준밖에는 가지 못하는 것이다. 어때요? 하나님은 자기가 고난 중에 있을 때 부르짖으면 달려오시는 분 정도로, 자기의 도움이 되시는 분 정도 이것이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견해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그거지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신앙의 단계마다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조사해 보면 아주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론은 처음에는 환난 가운데 도와주실 수도 있고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창28) 이렇게 하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했다.
35장에 와서 깨닫게 된 것은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응답했다는 것은 환난 날에 부르짖었더니 자기에게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다. 나의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시던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신앙이 좋고 믿음이 충만하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정도가 이 틀이다. 그렇지 않아요? 믿음이 적은 너희들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으나 나는 기도가 있고 살아있는 신앙이 있으므로 내가 부르짖을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생생하게 오셔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를 위해 역사하신다. 그러나 이제 이 35장을 경험하면서 야곱에게 일어났던 가장 놀라운 변화는 무엇이냐면 그 하나님이 자기를 환난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그런 것들보다도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새로운 성품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던 곳에서’ 라는 것을 3번씩이나 써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면서 그 말씀에 깊이 집중하고 거기에서 자기 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녹아들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경험한 사람이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서는 그럴 수 없다. 제가 여태까지 섬겨오던 교회에서도 늘 그러지를 못해서 안타까웠다. 조금의 변화는 있었지만 예배를 드리는 광경을 보면 저는 매주 절망한다. 소망이 있겠는가? 우선 말씀을 향하여 채워지지 않는 갈증, 양쪽이 다 문제이다. 설교자나 듣는 사람들의 태도도 문제이다. 정말 생명이 없다. 왜 그렇게 안 믿는지 모르겠다. 생명이 있는 예배의 광경을 경험 못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한번 깊이 경험해야 한다. 그럼 경험하지 못하면 영원히 알 수 없는가? 아니다. 그래서 말씀한다. 책을 읽어라. 과거의 역사를 읽어라. 성경을 깊이 읽어라. 그러면 우리들 눈에 ‘그것과 틀리다’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 자신도 그 속에서 그렇게 닮아가는 것을 느낀다. 개인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를 흐르고 있는 어떤 영적인 기류이다.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고요한 예배당이 부르짖는 기도소리와 영혼에 대한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지 않는다. 참다운 영혼의 변화와 함께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결과들이 생겨나는가? 자기 의가 되는 것이다. 어떤 자기 의? 새벽 기도를 사십 일을 했다든지 우리 교회에서 이만큼 했으니까,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 된다든지 이런 것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옳지 않은 것인지 아십니까?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 자체에 영혼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 정말 되지 않는다. 놀라운 영혼의 변화 없이도 그런 일들은 행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마음의 참다운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는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부흥의 문제이다. 대안이 있는가 보자. 그러나 대안이 없다. 영혼 속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일들이 부흥에 나오는 커다란 대단원의 결론이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도 제가 부족하게 설명을 해서 그런지 부흥이라는 말 정도가 그렇게 깊이 어필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충만하고 은혜가 많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흥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깊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14절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울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라고 했다. 우선 참다운 부흥에 있어서 말씀의 요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든 문제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설교자, 그 다음 그 말씀으로 만족할 수 없는 성도, 그 문제가 출발인데 그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을 안 하고 접어두고 나서 문제를 풀려고 하니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풀리지 않으니까 세속적인 것들이 교회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다 뒤틀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와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 부흥에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그런 진지한 탐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세상의 모든 사람은 훌륭한 철학자라고 했다. 다 자기 주견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하나님 말씀을 물리칠 정도로 완고하다. 그렇게 되면 그 완고함은 정말 불행한 완고함이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조금만 지각이 있으시다면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얼마나 간섭하고 더럽고 추잡한 것인가를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완전하고 순결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못 믿을 육신 속에 깃들여져 있는 생각과 상식이 판단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교회를 그런 상식을 가지고 이끌어간다.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무엇을 말하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말하지 말고 성경을 가지고 다가오라. 그러니까 어느 목사님이 그런 표현을 썼다.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시냐? 입헌 군주제의 국가의 왕이라고 했다. 영국 여왕이나 일본 천왕이라는 것이다. 실권이 없고 상징적인 존재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이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먼저 회의하기 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은 국회가 의회를 하기에 앞서서 국왕께 알현하는 정도로 끝난다. 인사를 받으시고 높은 자리에 앉으셔서 저 곁방에 가셔서 편안히 대접을 받고 계십시오. 모든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제직회 때 성경을 펴 놓고 하는 제직회가 있냐? 당회 때 성경을 펴 놓고 하는 당회가 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1960년 대 박윤선 박사님이 총신대학장을 할 때 교수회의 하면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셔서 학교 진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지 우리 서로 성경을 살펴봅시다. 그 속에서 진로를 찾았다.
이러한 신앙적인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걸음은 그것이다. 말씀을 듣고 이번 학기가 끝나지만 동의를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늘 성경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확인하라. 반론을 제기 하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서 이야기 하라.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전문가이고 우리들은 비전문가인데 라고 말하겠지만 동일하게 같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성경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준다. 그 성경 속에서 삶으로 돌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성경에 자기 신앙의 미래와 자기의 생활의 미래와 삶의 장래와 모든 것들이 달려있다고 그럴 때 그것을 매일 따라 살아갈 때 성경이 사랑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공부로 모일 때도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는가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말하고 싶어 안달들이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3시간씩 보내지만 입만 아프지 무엇이 남겠는가? 물론 자기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경 속으로 깊이 함께 들어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도 철저하게 무엇을 먼저 교육을 시켜야 하는가 하면 쉐마부터 교육시켜야 한다. 히브리말로 “들어라” 고요히 앉아서 부모가 읽어주는 성경 말씀을 듣는 연습부터 시켜야 한다.
또 하나는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 기름을 부었다고 하였다. 돌기둥을 세운 이야기는 무엇인가? 돌은 언제 세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사건들이 일어날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을 때 돌기둥을 세웠다. 라반이 야곱을 쫓아오다가 다시는 너를 이 국경을 넘어서 너를 추격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할 때 여랄사할두다라고 증거의 돌무더기라고 하는 돌무더기를 세웠다. 바로 그것이다. 왜? 돌아가면서 그것을 보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국경일이 있는 이유는 그날을 평상시의 날과 구별을 시켜서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저는 생일에 대해서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다. 태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고 마지막에 주를 위해 살다가 주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한다. 출생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일단 조금만 더 저의 주변이 정리가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하실 때 대대적인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날보다는 우리 가족이 커다란 시험으로부터 응답을 받고 구출을 받았던 날을 대대로 기념하는 것이다. 자녀들을 모아놓고 그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새롭게 회복을 받았던 그런 날이었음을 알려주고 그날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란다. 하고 성경을 펴 놓고 “너희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돌기둥을 세운 것이다. 교회가 세워진 날을 기념하며 깊이 교회를 세우시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그 구속사역에 합당한 삶을 교회가 이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돌기둥을 세우는 이유이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기념일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들이 그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다. 후손들로 하여금 그 날에 동참하도록 가르쳐주는 것이다. 옛날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인간은 그러한 주를 의지해야만 한다. 그래도 순수성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우린 너무나 빨리 단절해 버린다. 과거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끊임없이 그런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다. 수4:19-24
여러분은 돌기둥이 있습니까? 돌기둥을 세워 놓을 만한 그런 기념비적인 사건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좋은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도 저는 그런 기념비적인 돌기둥이 세워질 수 있는 일을 여러분들이 찾아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적으로 정말 그렇다. 저는 늘 교회를 섬겨오면서 교회는 무엇인가를 많이 하는 곳이 아니다.
백성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면 거의 일을 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이 구제하고 전도하며 의로운 삶을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고 영혼들이 놀랍게 변화되고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교회의 주된 것이고 교회의 행사는 부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 개개인의 영혼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교회에서 체험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돌기둥을 세우는 이야기가 나오고 전제물을 붓는 이야기가 나온다. 전제물은 제물을 태워 드린 다음에 그 위에다가 추가로 제물을 붓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액체로 되어 있다. 시편에 보면 피도 나오고 포도주도 나오고 기름도 나온다. 여기에 보면 기름을 붓는다고 했다. 하나님을 참답게 만난 사람은 아낌없이 붓는다. 은혜를 받으면 바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진다. 무엇이든지 바치고 싶어진다. 하나님 앞에 쏟아놓게 한다. 사랑을 하면 주면 줄수록 만족해진다. 나로 인하여 부요해지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참다운 헌신은 부흥이 일어날 때 참답게 한다. 헌신되지 않은 십만 명보다 헌신 된 10명이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 교회는 다수결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수만 사람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사람이 다수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참답게 만나고 올라가자 돌기둥을 세우고 아낌없이 자기의 전제물을 부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부었을 것이다.
제물에 있어서 제물을 드리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이미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자기 자신이 제물위에 드려지는 관제와 같이 액체가 되어서 순결을 위해 그렇게 부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의 참된 의미이다.
하나님 앞에 이런 헌신은 참답게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당연히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부을 수 있는 상태가 언제든지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참답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통하지 않고 무엇으로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회개도 참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회개하는 순간에도 머리를 굴린다. 인간이 정말 야곱의 후손이다. 회개도 헌신도 자신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붓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일들이 부흥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다. 정말 참다운 부흥을 경험하기 전에는 참다운 헌신은 일어날 수 있지 않다. 참다운 부흥을 만나지 않고도 물질적인 헌신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참다운 부흥을 만나면 이런 물질적인 헌신이 있다는 것이다. 헌신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다운 하나님을 만난 깊은 신앙의 경험이 있으면 아낌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쏟아 붓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도 주님이 자기의 생명을 받으시지 않으면 주님에 대한 소속감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헌신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참다운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선교는 지체된다. 구원의 역사와 신앙의 놀라운 역사는 그렇게 생생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생각으로 변화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올라가셨고 돌기둥을 세웠고 전제물을 부었다. 또 벧엘이라고 불려진다. 벧엘은 새까맣게 잊어진 이름이었다. 벧엘이 이제는 정겨운 이름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신앙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놀랍게 변화하게 되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중심하여 살아간다.
벧엘이 새로워지게 된 것이다. 신앙의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되면 교회가 다시 보이는 것이다. 교회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신앙의 경험은 사람이 틀려도 똑같이 일치되는 것이 많다.
루스가 변해서 벧엘이 되는 것이다. 견해가 바뀌는 것이다. 삶의 중심과 사람의 자리가 바뀌는 것이다. 루스에 올라와서 이곳을 벧엘이라고 부르면서 야곱의 마음에 세겜은 완전히 사라졌다.
벧엘이라고 불렀을 때 야곱이 깊이 깨닫는 것이 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벧엘이라는 이름이 새로워지면서 깨닫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기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벧엘을 깨달으면서 자기 인생이 하나님의 언약의 구비치는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에 그 속에 구원의 역사에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인생이여 풀꽃과 같이 사라지는 인생이지만 영원을 향하여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야곱의 생애에 깊은 신앙 부흥을 여기서 경험하게 되면서 계속 일평생동안 이 35장의 영향이 그를 주장하는 것이다. 주님은 잠시 만나고 떠나가셨지만 야곱의 인생은 영원히 변화되었다. 놀랍게 변화되었다.
그가 믿음으로 그 험난한 세상을 헤치면서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기꾼 같고 권모술수를 의지하면서 살았던 하찮은 인간 야곱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의 한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역사로 넘어올 수 없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계시의 역사가 이어질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매일같이 짐승에 둘러싸이고 짐승의 먹이를 해주고 세겜 사람들과 물건이나 몇 푼 나누어서 팔았던 야곱 그 사람도 죽었고 야곱이 주고받던 그 우상도 없어졌고 물건을 팔아서 얻어 들였던 그 수입도 다 사라졌다. 그를 그토록 기쁘게 했던 가축도 다 죽고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사용하셨던 그 놀라운 역사와 그리고 그의 인생을 통하여 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시가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징검다리가 되어서 우리에게 건너오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이것이 바로 창세기 35장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를 깊이 깨닫고 충만하고 크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해야 한다. 그 빛에서 이 시대와 교회와 자기의 신앙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한없이 말씀을 깊이 의지하고 그 말씀 가운데서 살아서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커다란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야곱처럼 재밌는 사람도 몇 되지 않는다. 배속에서부터 문제를 앉고 태어난 자였다. 에서와 함께 다투면서…. “이미 하나님은 나중 된 자를 먼저 되게 하시려고 선택 하셨다” 그럼에도 어머니 뱃속에서 먼저 나오겠다고 형의 발꿈치를 잡았었고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도적질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까지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대신 받은 자였다.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두 사람 가운데 야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사모 할 것이란 것을 아셨기에 그러한 신앙을 사용 하셔서 나중 된 동생을 먼저된 형보다 앞세워서 당신의 거룩한 언약의 대를 잇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형의 축복을 도적질 한 다음에 형의 보복이 두려워서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 하고 밧단아람이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도망 하게 된다. 때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말로만 들었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과 독대를 하신 것이다. 심정적으로 외롭고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그 처지에 있을 때 야곱의 아버지께서 늘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 나 주셨을 때 많은 것을 부탁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기도 하는데 하나님께 요구 조건이 세가지였다. 첫째는 나그네 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시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먹을것을 충분히 공급 해 달라는 것이었고 셋째는 아비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 갈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도 세 가지 일을 하나님 앞에 해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첫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 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 되게 하겠다고 한다.(하나님과의 만난 장소를 세우겠다고함) 셋째는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라반의 집에 무사히 도착 하도록 해 주셨고 잘 먹고 살수 있도록 해 주시고 지금 가나안 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다 지켜 주셨지만 그는 약속한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야곱은 머리 굴리는데는 명수였다. 그러나 더 도사를 만난 것이다. 라반 외삼촌이 그랬다.
삼촌 라반은 자신의 집에서 일할 것을 제의 하면서 가정을 꾸밀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한다.야곱이 라헬을 끔찍이 사랑하는 것을 알고 라반은 7년동안 머슴 살이를 하게 한다. 야곱은 성향이 여성 같은 사람이었다. 타향에서 마음 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랑하는 라헬을 만났을 때 7년을 일하면서 그 날수들을 수일 처럼 생각 하면서 일을 한 것이다. 그러고는 꿈 같은 첫날밤을 보냈지만 자신이 사랑한 라헬이 아니고 언니 레아였다. 외삼촌에게 따져봤지만 “우리 지방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외삼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다시 7년을 머슴살이를 해 주면 라헬을 주겠다고 한다. 야곱은 젊음을 장가 가기 위해서 아 털려 버렸다. (14년) 14년을 다 보냈지만 4명의 아내가 생겨서 짐작컨데 정신 없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이때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 갈려고 한다. 이때 또 라반이 제의 한다. 하얀 양들만 모아놓고 거기서 알록 달록한 양들이 나오면 야곱의 재산으로 다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신기한 방법으로 많은 짐승들을 소유하게 된다. 미미한 확률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 하신 것이다. 속임수의 제왕격인 삼촌 밑에 더 있어봐야 더 이상은 얻을게 없겠다 싶어 야곱은 삼촌으로부터 도망을 나온다. 라반이 도망간 야곱을 죽이려고 잡으로 가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게 라반에게 경고 하신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형이 여전히 두려운 대상이었다.
다시 머리를 굴리는데 먼저는 종들을 보내고 사은품으로 온 가족들을 세우고 사랑하는 여자라헬과 자녀들을 맨 뒤에 세우고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지점은 머리 굴려서 될 지점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얍복 강가에서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나타난다. 내일이면 형을 만나야 하는데…… 그곳에 천사가 나타나는데 그를 붙들고 나에게 축복 하지 않으면 형이 있는 곳으로 갈수 없다고 씨름 한다. 천사를 붙들고 씨름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보기보다는 언제나처럼 잔머리 굴려서 해결 보려던 그 기질의 한 모양일 뿐이었다. 야곱에게서 천사가 정말 감동을 받았다면 야곱을 때려 환도뼈를 치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의 행위는 믿음이 아니라 옛 기질이 나와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또 한 번 인간적인 몸부림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어떤 후배가 설교를 하면서 신중한 얼굴과 음성으로 “당신들이 예수 똑 바로 믿지 않으면 내가 활복 할 것이다” 고 심각하게 몇 번씩 얘기 한 것을 본적이 있다. 이것은 객기다. 믿음이 아니고….천사가 야곱을 보다 못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환도뼈를 친 것이다. 환도뼈를 맞은 야곱은 오기를 부리면서 안간힘을 쓰던 육체의 힘까지도 다 잃게 된다. 그 다음에 통곡 하면 눈물 흘리고 회개 한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감동을 받은 것이다. 우리를 향해 굳어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활복할 자신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럴 때는 하나님이 맘대로 하라고 가만히 내버려 둔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객기를 부리는 것과 거룩한 용기는 같은 것이 아니다. 힘을 다 잃은 야곱은 이제는 잔머리 굴리는 것도 끝났고 맹수들과 싸우던 완력도 다 무너지고…. 형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리는 들리고 아무것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통곡하면서 회개하고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울부짖는 것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굳어진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우리의 잔머리나 오기 혈기 그런 것들이 아니다.“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로서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자기 깨어짐, 자기 승복, 무너짐…. 그런데서 흘러나오는 회개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셨던 굳어진 마음이 우리를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에서가 동생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칼잡이들을 동원해서 야곱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성경에는 어떤 동기에서 에서의 마음이 녹아졌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만나는 장면에서 암시는 나온다. 환도를 맞은 야곱이 강가 저 편에서 어기적 거리면서 가련한 모습으로 자기를 향해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분노에 가득차서 야곱을 맞으러 나갔던 에서의 마음이 순간 사랑하는 부모를 내버리고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더니 자신보다 더한 고수를 만나서 죽도록 고생하고 재산을 가지고 오기는 하지만 반신불수(半身不隨) 되서 오는 동생을 가련하게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에서는 신앙의 세계가 별로 없는 사람이기에 야곱이 어떤 상황을 맞고 자기에게로 오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순간 마음이 녹아지면서 그를 불쌍한 마음이 들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다.
둘이 만나서 팔을 어긋맞게 하고 부둥켜 앉고 우는 것이다. 야곱이 깊이 회개 하고 주님의 굳었던 마음을 녹여드렸더니 도저히 화해 할 수 없었던 형제가 완전히 화해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변화는 반드시 묶여 있는 인간과의 관계를 푸는 역사를 가져오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발목 잡혀 있는 것들은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이다.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과의 관계… 사랑해야 하는 사람과의 관계임에도 그렇게 못하는 …. 신앙이 회복되고 놀라운 변화가 회복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치료되어야 하고 자신과의 관계도 치료 되어야 한다. 잘난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도 자신과의 관계가 망가진 이유이다. 그것을 고쳐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인생의 참다운 회복이 주어진다.
야곱이 그런 것을 경험 한 것이다. 이것이 32장이다. 야곱이 32장에서는 상당히 영적인 사람이 어느정도 되어 있었다. 생사를 거는 기도가 무엇인지…. 가난해 지는 마음이 무엇인지…주님의 도우심이 무엇인지…. 홍해와 같이 자신의 인생길을 막고 있는 것을 권능으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경험 하게 된 것이다. 야곱의 신앙이 최고봉에 도달 했지만 또 머리를 굴린다. 단순한 에서는 한번 끌어안고 울고 나서 같이 살기를 제의 했지만 동생 야곱은 형을 끌어 앉고 울면서도 “안돼… 언제 형의 마음이 변할지 몰라…. 형 따라 가면 안돼….” 이렇게 머리를 굴리면 자기의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야곱이었다. 눈물을 닦고 형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 나는 그 제의를 감당 하지 못하겠습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곧 따라 올라가겠습니다” 자신에게는 딴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행동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에서를 따라 가지 않는 것은 잘한 것인 동시에 동기 자체가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세일 산이니까 그 후에 에돔 족속들이 살던 지역이 된다. 에서의 후손들이 에돔이다. 야곱이 가야 할 최종적인 목적지가 그곳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아비집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한 의중은 야곱을 하나님이 실질적인 장자로 삼아서 이삭으로 하여금 그를 축복하셔서 족장으로서 복락을 누리도록 약속을 주신 것이다. 그러려면 주님이 약속해 주신 땅으로 돌아가서 부모의 땅을 물려받아야지만 축복이 전수 되는 것이다. 신앙이 아니라도 형을 쫓아 가서는 좋을 일은 없다.
야곱의 생애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데 그것은 단을 쌓는 것이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 해 보면 참으로 감격적이다. 인생이 끝난 상태였지만… 지금은 헤아릴수 없는 거부가 되었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상태에서 복된 가족들을 이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앞에 신고식을 하는 것이었다. 쌓은 단의 이름을 “엘엘로헬이스라엘” 이라고 지었다. 히브리말로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단을 쌓으면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던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야곱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영적인 가장으로 분명히 선 것이다. 이것이 33장까지의 일이다.
34장에서 충격 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야곱에게 외동딸 디나의 사건이다. 디나가 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구경 하러 나갔던 것이다. 그 땅의 추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이다.(히브리 성경에는 강간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딸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야곱을 각성 시키는 것이다. 야곱은 또 잔머리를 굴린다. 딸의 소식을 접하고 아들들이 돌아 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아들들과 의논 한다. 이것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드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먼저 “하나님! 제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잃어버리고 이 세겜땅에서 세상이 좋은 줄 알고 살았기에 이런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신실했지만 저는 주님을 배반 했기에 이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버린 죄를 용서 해 주십시오……”에스라가 성전 문 앞에서 회개 했던 것처럼 회개 하는 것이 정상인데 나이 먹어도 또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었다. “아들들만 돌아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아들들이 소식을 접하고는 그 땅의 사람들과 거례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동의도 얻지 않고….할례만 받으면 자신들의 동생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대로 할례를 받았고….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을 다 죽여 버린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은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한 씨족을 몰살 시킨 것이었다. 야곱의 집안은 그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 일 뿐이다. 나그네들이 본바닥에 와서 원주민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들려지면 엄청난 세력들이 와서 자신들을 다 죽일 것이란 생각에… 큰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다. 절망 적인 그 순간에서 오늘 읽은 35장1절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에 나타나 이르시기를 내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라는 것이 나온다.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 해 보자.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오셨다는 것이다. 인생의 벼랑끝에 서 있을 때 우리의 문제가 우리의 잔머리로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 하는 동안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야곱은 지금 디나의 강간 사건과 아들들의 경거망동한 행동들로 인해 일가족이 멸망 당할 위기에 서게 된것이다. 이제는 돈으로도 해결 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붙들고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빈다고 해결될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것은 야곱이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종류는 다르지만 34장과 같은 사건을 만나서….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이어 질것인가? 그 때 그 때 마다 수십년 동안 임기응변으로 머리 굴리면서 바보 같이는 살지 않고 남들이 볼 때 현명하다 생각 할 정도로 살았는데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물질이나, 주변의 사람들로의 어떤 도움조차도….우리의 인생을 해결 할 수 없는 그런 분들이 여기에 있을 줄 안다. 희망은 하나님이 그런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품상 그런 일 하시기를 즐겨 하신다.
하나님은 잘 나가는 사람을 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지 못하는 위기와 좌절 속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것을 즐겨 하신다. 이유는 그런 사람을 찾아나서는 것은 그들이 그런 험한 골짜기를 헤치고 걸어나올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사람에게 조금 도움을 준다고 크게 감동하거나 하지 않는다. 절망가운데서 친구도 없고 아무 의지도 없고…….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평생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벗어 날수 없을 때 하나님이 나타 나주시면 어둠을 뚫고 나와서는 무겁고 무서운 쇠사슬 속에서 건져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임이 가슴 깊이 새겨 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함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불행해 지는 원인도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아주 단순 한 것이다. 하나님 만나면 해결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독대를 하라.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주님이 내 인생에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는 것 말고는 소망이 없다는 고백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지금 야곱의 상태는 세겜 땅에서 20여 년을 살아오면서 무역을 하면서 돈도 벌었을 것이다. 번성해 가는 동안, 세상 재미에 취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 이 나타나지 않았다. 위기 가운데서… 누구도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상황에서 주님이 나타 나 주신 것이다. 누구에게나 나타 나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아무에게나 나타나 주시지 않는다.
만군의 하나님이 문제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실 때 그때가 언제인지 잘 생각해보라. 하나님밖에는 누구도 도울 자가 없고 희망이 없다는 간절한 마음…. 주님이 오시지 않을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만이 자기에게 나타나야지만 생사를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생각 할 때…. 그때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영적인 침체는 맘만 먹는 다고 회복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인생에 역사하심으로 속박과 억압 가운데서 건져 내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고통 받는 다고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찾아 오신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집중된 마음에, 간절한 마음에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도저히 마음으로 감당 할 수 없는 마음을 넣어 주는 것은 거기서 무너지라고 그러시는 것이다.
고통을 받으면서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자꾸 무너진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은혜를 못 받으면….”죽기밖에 더 하겠냐” 는 식으로 시간 을 보낼 뿐이다.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기를 원하시는지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보면서 길을 찾아 가야 한다. 하나님 과의 관계라는 것은 풀다 만 시험지와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안된 상태 그대로 가만히 두고 시간을 보낸다면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그 자리가 그대로다.(5번까지 풀다가 그만 풀고 잠들어 버린 다면 그 다음 아침에 일어나면 그 자리 그대로다. 자고 나면 자동으로 풀려 있는 그런 경우는 없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오신 것은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야곱의 마음이 한없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계속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못 만나는 특징은 어떻게 고통 받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그 고통을 종식 시키는가? 하는데 관심이 있어야 한다. 야곱과 같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다면…. 내 마음이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 도움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교만 가운데만 있을까? 생각해보라.
은혜를 받으면 영혼의 문제가 보이는데 은혜를 못 받으면 그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신앙이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왜 안 되는지 잘 살펴보면 자신의 병든 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얍복 강가의 사건을 경험하고 디나의 사건을 경험한 야곱은 ….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도와 달라고 절규한다. 그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세 번째는 벧엘로 올라가라고 했다. 거기서 단을 쌓으라 했다. 왜 하필 거기에 가라고 했을까? 안 계신 곳 없이 다 계신 하나님이 왜 꼭 벧엘로 올라가라 하셨냐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세겜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이다. 고객들과 친선 관계를 맺어가면서 야곱가족들은 세겜에서 살았다. 무역을 하면서…. 그러면서 세겜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들어 오게 된 것이다. 떠나야지만 그곳에서 묻은 더러운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옛 습관과 깨끗하게 결별해야 한다.
두 번째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이렇게 표현 한 것이다. 벧엘에 가서 생각해야 할 것은 세겜에서 세를 과시 하고 살아가지만 세겜에서 보지 못했던 그 옛날의 삶을 다시 돌아보면 옛날의 그 약속을 생각 할 것이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생각 하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 지를 벧엘로 올라가서 생각 해 보라는 것이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도움과 구원의 약속을 경험 한 곳 그 지점이 벧엘이다.우리의 벧엘은 어디인가….? 더 분명한 벧엘….구원의 주님을 만난 그 순간…. 아무 소망 없이 짐승처럼 세상의 헛된 것을 쫓던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 주님의 십자가를 알게 하시고 … 우리를 위한 속죄 재물로 대신 하신 주님의 놀라운 그 사랑을 왜 내게 베풀어 주시는가 생각 했던 그 벧엘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 했는가.?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은 사람 됨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주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 할 그 때는 그것 밖에는 보이지 않았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드렸던 수많은 고백들…. 다 어디로 갔는지? 단을 쌓으라는 것은 “넌 나랑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그런 얘기다. 하나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로 들리지 않고 마음의 귀로 들린다. 마음이 떠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계속 말씀하셨지만 들을 귀가 없어 듣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 많은 눈물을 흘린다. 마음 고생과 함께…. 머리 터지게 고민 하고 가슴을 쥐어뜯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면 해결 받을 수 없다. 어차피 고생 하는 것인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만나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 하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응답 하는 하나님…제가 주님을 찾습니다. 저를 만나 주십시오 그러면서 믿음으로 단을 쌓아가길 바란다.
2. 이방 신상을 버리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창35:2上)
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모든 면에서 놀라운 변화가 찾아온다. 1절에서는 야곱 개인에게 대한 얘기고 2절은 야곱이 약간 높은 곳에 서 있고 많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머슴 살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그곳은 야곱의 얘기에 이의를 제의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불안하고 위기 가운데서도 34장에서 자식들을 의지하고 원망하던…. 갈팡질팡하던 야곱이었지만 35장의 야곱은 다르다. 족장시대의 족장들은 선지자와 왕과 같은 절대 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들의 생명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였다. 아버지가 그냥 아버지가 아니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때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찌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삶이 흐트러지고 나면 아무나 와서 짓밟고 다니게 된다. 영적인 지도력이 무너진 가정의 상태가 34장의 야곱의 가정이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무시하고….
그 아들 요셉에게서도 그런 일이 발견 된다. 감옥 속에 있다가 바로앞에서 꿈을 해석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였지만 이 세상에 이 사람처럼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바로 국무총리로 앉힌다. 자기 민족의 목숨을 바로는 보존코자 했다. 옥에서 끌려 나왔을 때 요셉의 몰골은 초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교통속에서 살아가니 놀라운 권위가 그들에게 보여 진 것이다.
34장에서 정신 차리지 못하는 야곱이 35장2절에 와서는 모든 식구들 앞에서 무엇인가 말할 때 모든 가족과 일꾼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청종했다. 34장의 허둥지둥 거리던 가장과 35장에서는 생의 벼랑 끝에서 제시하면서 인도 하는 권위 있는 야곱 사이에는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 주시는 일이 있었다.
오직 변한 것은 하나님이 그를 만나 주셨다는 것이다. 생의 벼랑 끝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 사건은 사건 대로 그대로 있었고 무엇인가 위기는 그대로 있었지만 그런데도 야곱이 바뀐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해결 되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장악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진리의 말씀에 감화가 없고 심령이 메말라서 따뜻한 사랑과 눈물을 잃어 버렸다면 이것은 영적인 벼랑 끝에 내몰린 것이다. 이런 속에서 허둥대고 있는? 아니면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라. 불만족과 고통으로 가득한 모든 것들이 아직도 인간의 지혜를 다 동원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 하면서 자기 힘으로 정면 돌파 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야곱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잔머리를 굴려서 벼랑 끝에 몰린 인생을 어찌 해보려 했지만 일은 점점 꼬여만 갔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무시했고…. 아내들도 사랑하는 딸도….도무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나올수 없는 벼랑 끝으로 내몰아 버렸다.
한 걸음 뒤에는 끝도 없는 벼랑이 있었고 앞으로 가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고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떤 인생의 위기 가운데 빠져 있을 때라도 상황 속에서 허둥대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되고 상처와 고통만 남는다. 상황을 장악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보인다.
비유: 소가 작물을 심어 놓은 밭에 들어가서 뛰어 다닐 때 소리를 질러도 안된다. 꼬리나 발을 잡아서도 안되고 오직 고삐를 잡아 당겨야만 한다. 아무리 큰 황소라 할지라도 어린 아이 손에서도 순한 소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소의 고삐를 잡아서 밖으로 끌어내듯….그래야 작물도 많이 상하지 않고 소도 끌어 낼 수 있다. 그렇게 되려면 계속 밤에 잠자리를 뒤척이면서 고민 하는 것으로는 안된다. 이사람 저사람 만나서 많은 얘기를 듣고 자기의 생각을 비빔밥으로 만든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시고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계시는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중요하다.
1절에서 하나님과 마주 대하고 보니 2절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해답을 발견 한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다. 여기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 하는 것이다. 가나안 사람과 사이가 좀 나쁘면 어때….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생각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세겜에서 이미20여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업의 많은 거래처가 생겼고 …. 성공이 보장 되었고 탄탄한 장래가 약속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이 야곱의 집처럼 생각 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그동안 고달픈 나그네의 길을 걸어오다가 세겜에서 발 뻗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상태였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왜 이런 환란을 당하게 되었는지? 그는 깨닫게 된 것이다.
디나의 옷차림이 야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추장의 아들이 나빠서도 아니고 자식들이 자신을 무시해서도 아니고…. 다른 누구에게도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나면 인생의 위기에 몰렸을 때 “나 때문입니다” 하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남편 때문에도 아니고 자녀 때문에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위기는 바로 나 때문이다.
벧엘은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 잠시 들렀던 곳이 벧엘이다. 야곱만 알뿐 그곳은 다른 가족들은 모르는 낯선 곳이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을 때 모든 가족들은 어쩌면 지명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 사실 자체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34장의 이런 위기들은 가족들의 과실들이 사용되고 주위에 있는 나쁜 사람들의 사악한 행동들이 연루되고 했지만…….가정의 비참한 일의 일어남은 결국 야곱 자신이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가족들이 그동안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고 생각 했는데 한순간에 모든 주변의 가족을 비롯한 모든 것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니 깨달은 것은 그 모든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였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가르쳐서 영적인 각성이라 한다. 영적인 각성이라 함은 자기도 알지 못하던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고 새롭게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주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엇인지 깊이 헤아려 순종하려고 하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각성 없이는 회개도 기도도 열심도….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방향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문제는 벧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벧엘로 올라 가서 단을 쌓으라”
이 약속은 야곱에게 잊혀졌던 약속이었다. 오랜 시간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 순간 순간 감사했을 것이고 가정 예배도 가끔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벧엘에 대해서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다. 지나온 인생의 시야가 열리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 하시는 것을…. 나 같은 인생이 한 약속을 기억 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뼈 져리게 느끼는 것이다. 20여 년만의 하나님과의 만남 이었다. 내가 네게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 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너는 왜 잊었냐? 주님의 마음이 그랬다. 야곱이 회개 하고 나니 권위가 생긴 것이다.
식구들 앞에 섰을 때 권위를 회복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바뀌어야 환경이 바뀐다. 지속적으로 위기와 벼랑 끝에 내 몰리고 신앙생활에서도 침체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상황만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면 여러분은 문제 해결에 접근 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고통스러운 상황과 위기 속에서 여러분이 바뀌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길이 길이 미쳐 날뛰던 문제가 고삐가 잡히는 것이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40일 금식 기도 하는 것 보다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고 하는 4시간의 기도가 더 큰 위력이 있다. 우리가 기도를 배우면서 강조 받은 것은 기도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거룩한 감화가 있어야지만 정확하게 하나님이 기도 하라는 방향으로 기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야곱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고 통해 하고 나니 가족들을 어거 할 수 있게 되었고 미친 듯이 날뛰던 인생의 문제의 고삐를 잡을 수 있었다. 인생의 위기에 대한 해답의 열쇠는 항상 문제 바로 옆에 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경험이 부족해서 열쇠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문제를 보려고 하는 신앙의 눈이 없기에 안 보인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원리는 항상 동일하다. 누구 원망하고 하는 것 그만 두라. 죄만 더 지을 뿐이고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벼랑 끝까지 내 몰린 인생 일지라도 그 상황을 나의 상황이라 받아들이라.
돌일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한탄을 하고 눈물을 머금고 마음에 분노를 품어봐야 하나님 앞에 죄만 더 지을 뿐이다. 다 받아들이라. “하나님! 나는 그렇게 밖에 못 살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삶을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의 인생이 바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라. 의심이 되면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믿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으라”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라. 하나님은 항복 하는 기도를 원하신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염치 불구하고 주님 앞에 갑니다. 주님, 저를 버리지 마시고 용납해 주세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만나 주신다. 사랑하는 딸이 간음을 당하고 그곳 백성들에게 죽을 위기 가운데 있든… 무엇인가 깊은 상실감에 몸부림치든…. 모든 원망의 대상을 다 지우고 오직 내가 주님을 만나야 겠다는 생각을 가져라. 하나님을 만날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겸비한 마음을 가져라.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혜결의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관심은 34장과 같은 위기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회복 시켜 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다시 한번 하나님이 만져 주셔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복한 신자로서의 삶을 걸어가야겠다는 마음이 진정한 치료이다.
주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어린아이가 어미의 젖을 사모함 같이 목마른 자가 한 모금의 물을 찾듯… 그런 간절한 사모함을 가져라. 그것이 무엇보다 급한 것이다. 제일 먼저 눈을 열어 자신의 영혼의 병든 모습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칠 수 있도록 ….또 보여 달라고 기도 하라.
야곱이 결단을 내리고 세 가지 명령을 가족들에게 내린다. 족장의 권위를 회복하고…. 너희 가운데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탈굼에 보면 이방 신상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세겜의 아비의 집에서 취하여 낸 그 이방 신상을 제해 버리고 나온다. 탈굼을 성경과 같은 것으로는 볼수 없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믿음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이방 신상이라는 것이 세겜 사람들과 교제 하면서 그기로부터 흘러 들어온 신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고학에는 그 쪽 지방에서 출토 되는 신상이 있는데 큰 것은 2-3미터 정도로 크고 작은 것은 연필 깎지 정도 되는 호신용 우상이 있었다.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란 부적 같은 것이다.
우상들을 제해 버리라는 것은 한 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우상이 야곱의 집안에 식구들과 자녀들…. 모두에게 함께 애용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 했다면 뭔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은 순식간에 몰려와서 한 인간을 파멸 시키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 천천히 흘러 들어와서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몹쓸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성을 다 잃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것 간절히 탐하는 것이 우상이다. 야곱이 왜 이렇게 좋은 신앙을 20녀년 사이에 다 털어먹고 죄악 덩어리가 되었냐면 하나님 외에 세상 것들에 대해서 취해 그 사랑이 사람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왜 인생의 위기가 찾아 왔을까?
사람들은 고난당할 때 다 욥과 같다고 생각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큰 오해다. 그런 일은 만분의 일도 없다고 생각 하면 맞다. 관계가 파괴 되어 버린 사람은 너 잘못 되었다고 하면…. 자기는 문제가 없고 상황이 문제라고 탓만 한다. 야곱에게20년의 기간 동안 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나? 야곱이 살인죄를 지은것도 간음죄를 지은 것도 결별 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살았다.
교회 결별 선언 한다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면 멀어진다. 야곱이 가는 자리가 연구 대상끼리만 모인 자리가 아니다. 여러분도 그냥 정신없이 살면 어느 순간에 그런 사람이 된다.
어떻게 하다가 야곱 자신이 우상으로 가득찬 집안에 족장이 되어버렸나. 세겜에 살았어도 늘 주님이 주신 소명을 생각 하고 살았어야 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정이 들기 전에 떠났어야 했다.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은 남다른 무엇이 있어서 은혜를 베풀어 준것이아니라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복주셔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알게 하려고 나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생각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이 없는 구원이 없고 뜻이 없는 구원이 없고 사명을 염두에 두지않고 주는 은혜가 없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며 사는 길은 매일 기도 하고 성경만 읽는다고 해서 그 은혜가 유지 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 하지 말고 하나님이 서 있으라는 그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여러분 같은 사람을 사용 하셔서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 깊은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내가 살고 죽는 것은 사명에 죽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만큼 깨웠으면 이제 세겜 땅을 떠나야 한다. 예전에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배웠는데 현제는 세겜에서 돈 벌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 인생의 위로를 삼고 그러는 동안에 영혼은 황폐하고 거룩한 족장으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없는 돌 같은 가슴을 가진 사람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려면 집착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시고 축복 해주셔야지만 내 인생이 진정으로 복 될수 있다는 전환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돈만 있으면… 누구누구만 없으면 내 인생은 괜찮을텐데…. 그러는 동안에는 돈도 못 벌고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게 해 주는 게 하나님의 은혜다. 세상에서 경험한 끔찍한 실패들 이것이 결국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삶을 살아온 … 영적인 실패 까지 포함해서 그 근원 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서 식어지고 세상에 있는 사랑이 나를 차지했다고 고백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되 우리가 아르바이트 하듯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그런 방식으로 사랑 해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 까지 우리를 사랑한 것은 장난도 농담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 잘 생각해보라.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리고…. 밧단 아람에서의 삶의 위기를 축복으로 바꿔 주신…. 그분이 하나님 이시다.
그 아들을 죽이시므로 우리를 향해 화해의 손을 내 밀으신 것은 더 이상의 사랑을 표현 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 이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진실…. 하나님 자신을 다 건 그런 사랑임을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목숨을 버리는 그런 사랑이었다.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장 기뻐 하신다. 주님이 사랑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관계 자체이다.
동물과 같은 그런 인생들과 그런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깊이 신뢰 할 때 느끼는 그런 것을 우리가 느낄 때 하나님도 느끼신다. 세상의 것들을 많이 사랑하면서 …쓸모없는 죄인이 세상의 사랑을 다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 돌아서는 그 사건을 엄청 나게 귀하게 보신다. 세상에서 한 나라가 서고 사라지는 것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우상 까지 섬기면서 산 야곱…20년 가까이 살면서도 주님은 기다리셨다. 그의 마음이 가난 해 지도록……. 지금까지 사랑하고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란 것을 보여 주고 싶으셨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아버지의 고향이며 지켜야 할 것이 주님과의 약속이며 자기의 진정한 분깃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까지 주님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야곱으로 하여금 그렇게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이방 신상을 다 버리게 하고 이제는 벧엘로 올라가자 결단 하게 만들었는가?
34장에 인생의 폭풍과 같은 위기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사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신앙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면서 말해주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마치 신앙을 억지로 집어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은 공부 못하는 아이 머리를 뚫으면 지식을 집어 넣을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 하는 것과 꼭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도리를 다 가르쳐 주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목회자는 가슴 아파 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거기 까지다.신앙은 인격 적이다. 인격 적이라는 것은 서로 말로 하는 것이다. 주먹이 나가는 것은 인격 적인 것이 아니다. 야곱이 인생의 폭풍과 위기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야곱을 무릎 꿇게 만든 것이 아니라 폭풍과 위기 속에서 비로소 귀가 열리면서 하나님이 그 일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다시 살아 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에게 전 존재적이고 전 방위 적인 사랑을 원하신다. 모든 삶의 방향 에서…. 사랑이길 원하신다. 그 사랑에 미친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그때 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신 줄을 깨닫게 된다. 나도 포기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죄를 회개 하고 살아가게 하신 것은 얼마나 나를 향한 사랑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신앙의 위기는 교회 나오지 않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이 사라질 때 인생의 위기이고 신앙의 위기이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온전히 알고 자기가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고 싶다가도 주님의 사랑에 빗진 자 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기로 결심 했는데…. 세상 사랑에 미쳐서 주님을 떠날 수 없다는 각오와 다짐이 있어야 한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지 전에 준비가 있었다. 하나님 만나러 가자. 그러나 사랑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결단을 촉구 하고 있다.
여러분들의 사랑은 어떤 것인지? 잠시 머무는 나그네 길에서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다 마음이 바쳐진 나머지 주님께는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텅빈 마음으로 서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나의 2병든 심령을 치료 하셔서 우리 몸 어디를 찌르든지 사랑이 흘러 나와서 그 흘러나오는 사랑이 우리 삶에 고백이 되게 해 달라고 하자….
3. 자신을 정결케 하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35:2下)
실화 인지는 잘 모르지만 6,25때 부녀자들이 신변의 위협을 많이 느껴 먼 길을 떠날 때면 옷을 남루하게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에다는 똥을 발랐다고 한다. 젊은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런 모습이라면 누구라도 안아주고 싶다던지 사랑을 나누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신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불길하고 벌 받을 것 같고… 그러니 교회도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맛을 보았던 사람이라든지, 하나님을 즐거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되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복을 주고 은혜를 주기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우리 자신이 준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지만 한다. 그것은 정결케 되는 것이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려고 결심하면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이방 신상을 버리는 것이었다(세겜 사람들과 오랫동안 살면서 들어온 이방 신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 사랑을 가지고는 벧엘로 올라가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이 결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하지만 생각 자체는 쉽지만 진짜 결단 한다는 것은 뭔가를 잘라내야 한다. 세상사랑은 정말 질긴 것이다.
내가 세례를 받고도 4년 동안 담배를 피웠다. 그 좋은 것을 왜 끊으라고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끊으려고 결단을 했지만 정말 어려웠다. 하나님이 결단 하게 하셔서 끊은 지 3년쯤 지났을 무렵 버스를 타고 가는 데 앞자리 사람이 담배를 피는데 그 연기의 맛에 잠시 취한 적이 있다. 그때가 내가 정말 은혜 생활을 잘 하고 있을 때였는데 …. 완전 무의식중에…. 깨달은 것이 담배와 술을 끊었지만 나도 모르는 저 육신의 밑바닥에 좋아 하는 습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뭔가를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안하는 게 아니다. 안했다고 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런 세상 사랑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마음에 종교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성경이 지시하는 방법을 따라서 정복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정리하고 버려야 한다. 야곱에게 있어서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20여년을 세겜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죄가 들어 온 것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 하지만 세상을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었고 하나님과의 평화 보다는 세겜 사람과의 관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들도 그렇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직장의 상사는 사업의 거래처나…. 이런 사람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관리를 한다면 거룩한 신자가 될 것이다.
막다른 사건이 34장에서 일어나고 나니 그때야 야곱은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안다. 세겜 사람과의 평화도 깨어졌고… 자신의 인생은 막장까지 가고…. 20여 동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그 모습을 그때야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보기만을 원하지 자신의 참모습을 볼 줄 모른다. “R. A. 토레이 목사님이 점심을 드시러 식당에 들어가서 서빙하는 종업원에게 전도를 했다. 당신이 예수 믿어야 산다고 하니 그분이 계시다는 것이 확실하면 믿겠다고 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 방법은 기도를 통해서라고 일러 주셨다.
2주후에 목사님이 다시 그 식당을 방문했을 때 그 자매는 2주를 열심히 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도 했다. 그 자매는 기도 할 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했다. 목사님은 순서가 잘못 되었음을 일러 주고 다시 기도 하라고 했다.
오늘부터 다시2주를 기도 하되 자신을 보여 달라고 기도 하라고 일러 주셨다. 2주후에 자매는 하나님을 만났다. 자신을 보여 달라고 기도 했더니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자신은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안되는 그런 사람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지만 많은 기도가 참으로 공허 하다. 머리 속에서 돌던 이야기, 넉두리 같은 기도 기대도 별로 없는 그런기도…. 이런 모든 것들은 세상 사랑과 관계가 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은혜의 빛이 비치고 나니 인정 하고 싶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정체성을 잃어 버렸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그 가운데는 끔찍이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우상을 버린다는 것은 이제는 세겜 사람과는 끝났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너희들과 화친하게 지내고 우호친선 관계를 지내는 동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괴 되었고 비참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상을 버리는 것이 세상사랑을 버리는 것이라면 정결케 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씻어내는 것이다. 정결케 하고의 말은 히브리의 성경에 보면 “히타할로” 뭔가 불결해진 것을 깨끗이 씻어 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의식적인 더러움이 있다. 예를 들면 제사의 규례를 지키지 않아서 시체 가까이 가서, 병이 있는 사람과 가까이 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로부터 깨끗해진다는 규례가 있다. 물로 씻는다던지 하는 의식적인 불결로부터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도덕적인 불결로 부터 정결케 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과 꼭 같은 내용이 신약의 팔복 속에 나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며…… 팔복 가운데 최고의 축복은 청결한자의 복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맛 볼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생명수 물 가운데서 과일 따먹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지존이시고 영광이신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그런 축복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청결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청결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할 것이다. 야곱이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 지시 하면서 정결케 하라고 했다. 정결케 한다는 것은 마음을 씻어 내는 것이었다. 이때는 제사의 규례들이 구체적으로 제시 되지 않았기에 레위기에 나오는 방식으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그런 예식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모정의 의식도 행했을 것이라 생각 한다.
35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인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고 나서는 야훼 하나님의 종교가 얼마나 영적인 종교인줄 깨달았을 것이다. 정결케 한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와 떼어 놓을 수 없다.
레위기나 출애굽에서 수많은 정결 규례들이 나온다.(어떻게 해서 더러운 인간이 거룩하고 순결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 길을 보여 주는 책이다) 정결하게 한다는 이면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백성들…. 수시로 하나님과 만나지 않고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 하고 살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 하고는 살수 없다.
신앙은 일수불퇴다. 한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순종 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든지…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려서 하나님께 혼나든지 둘 중에 하나다. 신앙의 중간 지대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 할 수 없는데 불결하다면….( 나에게 사랑을 주십시오…하는 것은 어거지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칙을 정해 놓으면 그 원칙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더러운 사람이 더러움을 해결 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은 어거지다 응답이 절대 되지 않는다. 금식하다 죽어도 ……….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기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그 마음을 바르게 표출 하지 못한다. 이 방법 저 방법을 다 써보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간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냐면 하나님한테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성경에는 죄인들을 부르시는 음성이 많은데…. 예전에 잘못한 일 하나를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날 상대도 하지 않구나. 그러면서 결론 내기는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생각 한다. 더 이상 뭐가 나빠지겠는가? 하면서 막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한다 .자신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갖고 계시는 분이신지 이해하는 폭이 넓어 져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 더러운 죄인들을 받지 않으신다. 성경에 죄인들을 그저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 하는 죄인들을 부르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결을 씻어 내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깨끗함을 얻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물과 불로…. 회개하는 눈물로 깨끗해지고 성령의 불로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깨끗해지고 나면 우리를 예전에 지은 죄들을 기억 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도말 하신다는 말의 의미다. 우리가 죄를 짓고 진실로 회개 하고 참회해서 성령의 불로 씻고 나면 …. 예전에 지은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지우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수뿐
예수 내 친구 날 버리 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 잖네
하나님이 한번 괜찮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시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야곱이 정결케 하고란 말은 그 당시 맥락으로 볼 때 두 가지를 내포 한다. 의식적으로 깨끗하게 하자는 것(세겜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함을 잃어버린 것들………….) 이다.
자기의 고집으로 몸부림 쳐도 안되었지만 얻어맞고 환도가 부러졌을 때 통회하는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감동 시켜서 그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축복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 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통곡 하던 그 때 정결해 지고 그 속에서 그때 주님이 오셔서 혈기로도 안되던 것들을 회개 하던 그때 하나님이 복 주시던 것들을 경험 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해야 할 때라고 야곱은 생각 하는 것이다. 자기가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모든 가족들이 변해야 한다는 절박한 책임 의식이 생겨 난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정결케 되라고 촉구 한 것이다. 교회를 잘 나오고 시키는 데로 해도 하나님을 못 만나는 이유는 마음에 문제다. 정결해 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못 만난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신자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주님 안에서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도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의무감에서 꾸준히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는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없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어떻게 축복 해 주시는지…. 그런 경험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판 보다는 사람의 판에 더 관심이 더 많다. 이것은 오래 믿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잘못 믿은 시간들이 고쳐 지지 않고 오랜 시간들 속에서 마음이 더러워 진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것들이 마음을 더럽힌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리 속에는 하루에 10만 번의 생각 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대부분 속된 생각 들이라고 한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도 많이 있지만 어떤 생각들은 마음에 열매를 맺어 행동을 낳는 것이다. 매일 털어 내야 하는데 내버려 두게 되면 계속 쌓이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불결은 외상값과 같다. 외상이 많다고 탕감 되지 않는다. 때가 묻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것은 잘 지워 진다. 그러나 묵은 때는 잘 지워 지지 않는다.
어제의 죄가 우리를 주장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회개 하지 않는 죄가 우리의 영혼을 질식 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아야지 회개가 가능하다.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깨끗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양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두운 마음이 깨달음을 얻는 신앙의 교제가 살아 있어야한다.
신앙은 우리의 몸과 같이 유기적으로 다 연결 되어 있다. 기도를 계속 잘하려고 끌어내다 보면 거기에는 삶이 따라 온다. 삶을 변화시키려고 계속 따라 오다 보면 말씀에 대한 부정직한 태도가 따라오고 나태한 삶이 따라오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따라오고 불결이 따라오고……….이렇게 줄줄이 따라 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얘기 하면 기도만 잘 하고 싶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만은 안된다고 하신다. “네가 통째로 바뀌기 전에는 안된다” 이 말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 나셔서 무엇을 바꾸라고 했는가? “너, 나 만나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때 야곱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결케 되기를 …… 하나님 앞에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두 가지를 기도해야 한다. 자신을 정확하게 볼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나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시라도 그런 원리를 넘어 갈수 없는 것이다.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 간 사람들이 깨끗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정결케 됨을 경험 한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린 여러분들에게도 정결케 되기를 원하신다. 깨끗해지려고 노력 해보면 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깨끗케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흠 없고 정결하게…. 주님의 품에 안길수 있는 사람으로 정결케 해주시고 고쳐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은혜 받던 때를 회상을 한번 해보라. 깊이 자기의 죄를 회개 한 사람들의 고백은 주님이 오셔서 마음을 녹여서 회개케 하고 깨끗케하심을 알게 된다.
내 마음을 녹이신 예수님
그렇게 고백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니 용서해 주더라는 사람은 없고 세상도 없고 자신도 없고… 오직 자신을 정결케 하신 주님만 보이는 것이다.
조셉 얼라인의 회개의 경전이란 책을 한번 보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기도의 생애를 학생들에게 읽힌 적이 있다. 이 책을 보고 난후 학생들 간에 엄청난 회개가 일어났다. 각성이 일어 난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자기를 정결케 해보려던 공통된 경험들은 자기가 어떻게 했기에…. 하는 말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 하나님의 이름만을 더 높이려는 것이다. 주님이 강력히 회개 시키는 것은 아무에게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마음은 타는 것 같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구원 받아야 할 자들을 향해서 절박하고 타는 듯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야곱을 그렇게 까지 내 버려두셨을까? 인생의 벼랑 끝까지 가도록 내 벼려 두셨을까? 2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이 회개 시킬 수 있도록 마음이 준비 된 때가 이때였다. 준비된 마음에 하나님은 역사 하시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정결케 되는 것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울부짖어도 그것은 헛된 구호일 뿐이다. 꼭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마음이 준비된 자에게 오신다는 것이다. 야곱이 마음이 준비 되지 않았더라면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났을 수도 있었다.
위기를 만났다고 하나님이 건져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멸망해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 없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므로 당한 인생의 괴로움, 영혼의 병든 상태….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위기…. 뼈 져린 고통을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누렸을 수많은 성도들의 축복과 비교를 해야 한다. 세상 사랑이 가져온 결과가 헛된 것이었음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누가복음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라.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두 가지를 생각 했다. 내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는 것과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삶을 사는 일꾼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 했다. 이것을 인식 하고 나니 그에게 어떻게 해야겠다는 결단이 생긴 것이다.(아버지의 집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이 생겨 난 것이다.) 겁주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안된다. 청교도들은 회개도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로 나누었다. 이들은 율법적인 회개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정했다. 율법적인 회개는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줄 것이란 생각으로 무서워 잘못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두려움은 대단한데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정죄하는 칼날로는 신자들의 가슴에 주님 뜻대로 살고 싶다는 결심을 세길수 없다.
그러나 예수의 피로 세긴 마음에는 새긴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 “내가 결국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산다면 “나는 얼마나 풍족한 사람인가” 하는 비교를 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사랑이 물밀 듯 밀려 올 것이다. 인간은 죄지을 능력은 있으나 죄를 해결은 못한다. 자기의 힘으로는 허물 수 없는 담장 안에서 담장 너머에 있는 하나님과의 풍성했던 진실한 사랑의 교제를 그리워하면서 그 담을 통곡의 벽으로 만들며 자신의 힘으로는 그 담장을 허물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메달리는 것…. 그것이 회개다.(자기의 힘으로 죄의 담장을 쌓아 올렸지만 그 담장을 허물 수는 없는 것이다.)
회개를 경험 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경험 하는 것이다. 회개의 영속에서 … 참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의 의에 빠질 수가 없다. 오직 내 눈을 채우는 것은 내가 죄의 담장을 쌓아 올렸지만 도저히 내 힘으로 허물 수 없는 그 담장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어 주신…. 고난의 십자가만이 그 눈에 눈물로 보이는 것이다. 자기를 정결케 해서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합당하게 되는 것과 십자가의 사건을 체험 하는 것은 절대 나눌 수 없다. 죄의 짐을 지고 무겁게 느껴 질 때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은 십자가를 깊이 경험해야 한다. (문둥병자와 같이 더러운 자신을 치료되도록 그 찬란한 십자가 앞에 자신을 노출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은 성도답지 못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창조다. 바울이 고백했다.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수많은 죄와 불순종이 그렇게 멀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로 오늘 주님을 만나야 할 날이다.(오늘은 듣기만 하고 내일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겠다…이렇게 생각 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그 백성들의 태도에 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ao달려 있다. 오늘이 바로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야 할 때이다.
4. 벧엘로 올라갈 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3)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 주시는 것은 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 나 주시기도 하지만 기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의무감을 느끼셔야 할 책임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자유로운 주권적인 의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가 가까워온 사람들에게 즉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인생에 관한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짐이 보인다. 그 조짐은 하나님의 사랑에 절대적인 성격을 느끼기 시작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랑 중에서 한두 가지를 하나님께 적선하듯 바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였던 방식으로 우리가 당신을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고 주님을 등지고 살았을 때 대단하게 생각 했던 것들(자존심일수도 있고 체면일수도 있고 물질일수도 있고 세상 일수도 명예 일수도……….) 이런 것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신앙은 곧 사랑싸움이다.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과 그 사랑을 나누어 가지려고 애를 쓰고 급기야 하나님께 바칠 사랑이 없도록 만들려고 몸부림치는 이 세상과의 사랑싸움인 것이다. “나 여호와는 질투 하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셨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이방 신상을 버려야겠다고 생각 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살아 갈 때는…. “뭐 어때 , 나도 할 만큼 하는데…. 내가 남편한테 못한다 하지만 내가 못해 주는 게 뭐가 있어……” 이러면서 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상황이 이러고 나니 인간들 앞에서 “이정도면 어때, 저 정도면 어때…” 하던 모든 핑계와 이유를 다는 것이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눈물 나는 사연이 있고 뼈 져린 사연이 있어서 그렇게 밖에 안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너 나 만나기에는 너무 더럽다” 그러면 끝인 것이다.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꺾지 못한다.(어떤 이유라도……) 그러니 하나님 앞에 서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야곱은 야곱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이유를 대라고 하면 20년 가까이 세겜 땅에 살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아무 이유도 핑계도 잔머리 굴리던 것들도 다 사라진 것이다. 창세기34장까지 오면서(벼랑 끝까지 몰리면서….) 그렇게 해 바야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바뀌는 것만큼 상황은 변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가 되면 (하나님을 만날 때가 되면)조짐이 생기는데 그것은 정결케 되어야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의복을 바꾸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평상복이 아닌 여행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이다(길이 멀어서 간단한 옷으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 만나러 가는 사람들은 삶이 단순하게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 하나님 알기 전에 좋아하던 취미, 못된 습관 이런 것 다 가지고 하나님 만나러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온갖 것들을 가지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웃기는 것이다. 무거운 세상 사랑을 지고는 벧엘로 올라 갈수 없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상은 이 시대의 아픔을 가지고 고통하고 고민하면서 의로운 성도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다(술먹지 않고 담배 피지 않는 자들이 아니다. 그렇게 해도 탈세하고 …. 나쁜 것은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
(제가 다니던 교회 어떤 신학생이 있었는데 자기는 모든 것을 다 끊었다고 했다. 술도 담배도 여자 친구도…. 그러나 딱 한 가지 스포츠를 끊지 못했다고 했다. 복싱부터 시작해서 골프까지….다 좋아 했다. 어느날 오전 예배만 드리고 오후 예배 때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야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신학생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그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것도 의복을 갈아입지 않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크드레스 입고 총 들고 전쟁 하는 것과 꼭 같다. 깊은 영성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재미없어 한다. 전 생활이 주님으로 가득차서 사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삶이 단순 한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세상 친구들과 멀어져야 하겠다고 다짐을 해서 멀어 진 것이 아니라 그런 친구를 만날 시간이 없어 자연스레 멀어 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을 하나 키울 때도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키울 수 없다. 뭐든 세상에서 한 가지라도 하려면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전 포괄적인 삶을 다 잘할 수 없다. 이것 하면 저것 생각 하고 저것 하면 이것 생각나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벧엘은 먼 길이므로 떠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세겜 땅에서 입던 옷차림으로는 안된다고 야곱은 그 가족들에게 말하고 있다. 주님은 만나고 싶은데 지금 내가 가지고 있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도 희생 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도둑의 베짱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삶에 초점이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이 삶을 정돈하지 않고는 안된다. 이 세상에 가장 끔찍한 죄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인생은 자기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최소의 시간으로 최소의 생명을 태우면서 최대의 불꽃을 발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골초였다. 결론은 끊었는데 계기가 있었다. 그의 고백은 “어느 순간 늘 자기 곁에 담배가 있었는데 담배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기도도 안되고, 생각도 뒤죽박죽이고…. 그 순간 이분이 깊이 깨달은 것은 담배가 없을 때 자신의 마음상태가 그렇게 요동 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그것에 많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그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집착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벧엘로 올라 가고자 하는 사람의 몸가짐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주님 때문에 꼭 하고 싶은데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라.(절대로 하고 싶지 않는데 주님 때문에 했던 일이 무엇인지…… 주님 때문에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 했다던지….) 주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칼을 빼어들고 여러분의 삶을 정리 해 본적이 있는가? 야곱은 주님을 만날 상황이 될 때 모든 단장품들을 다 모아 제해 버리고 벧엘로 올라간다. 생활을 정리하고 나면 영적인 순발력이 생긴다. 간편한 의복을 갈아입은 것처럼…. 정리가 안되는 이유는 집착과 사랑 때문이다. 미치는 것 없이 사랑하는 것만 버리면 공허함에 빠지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별로 쓸데 없는 일에 집착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적인 각성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의 삶을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겠다”는 생각으로 버리고 집중하면 할수록 더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신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한없이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준 본분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면서 인생을 살다가 죽든지….이 세상으로는 어떤 것도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면서 세상의 안락한 모든 삶을 버리고 올라갔다. 삶의 모든 좌표가 주님을 추구하는 것에 맞물리도록 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이 야곱 더러 벧엘로 올라가라 했는데 야곱은 우리가 벧엘로 올라 가자고 했다.(각자가 여러분 집안의 야곱 일수 있다)-한 사람이 변하면 가족전체가 복을 누릴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이 야곱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인공 의식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여기서 받는 교훈은 주님이 우리를 각성하게 하기 위해 부르실 때 삶에 연결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응답이 있어야 한다.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응답이 없을때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 최악의 답변을 주셔도 최선으로 순종할 각오를 하고 주님께 묻고 있는 것인지….” 주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견해들과 어깨를 겨누면서 사람들에게 취급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던 때에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앞에서 어떻게 엎드려 졌는지 생각해보라(그리스도가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을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 그런 복종하는 반응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어우러져 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늘 말씀 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참고 사항으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이런 삶은 벧엘로 올라가는 삶이라 할 수 없다. 순종하는 사람들의 생애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 것과 노아처럼 순종 할 수 없는 패역한 시대에서 피 어린 삶을 통해서 완전한 자요 의인이라 인정 받는 것은 절대 같은 것일수 없다. 가장 사악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엔조이 하면서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는 의에 빠지는 것이다.
설교를 들을때나 성경 공부를 할 때 누구에게 들려 주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벧엘로 라는 말 앞에 “모두 일어나”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음이 갈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뭔가를 받을 생각을 하면 안된다. 몸부림 쳐도 아무런 응답이 없고 좌절만 있다면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를 점검 해보라. 하나님께서 기뻐 할만한 자리인지?…… 돌아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인생을 유턴 하려면 생명을 거는 결단이 필요하다. 야곱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것은 여기 오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아낌 없이 다 버리자… 이런 말이다. 청교도 들은 설교를 들을 때 “ 말씀 하시면 우리는 행하겠나이다”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었고 성경 읽을 때도 그랬다고 한다. 위기가운데 몰리고 벼랑 끝으로 몰린 여러분들을 향해 주님은 충분히 말씀 하셨다. 이제는 거기서 돌이켜 서야 한다.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가는 길에 종지부를 찍는 결단이 필요 한 것이다.
세 번째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께 단을 쌓으려 하노라 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가 되니 내면의 세계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니 야곱이 눈을 뜬 것이 과거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생각났던 것이다. 찾는 것은 그리움이 없이는 사모함이 없이는 찾을 수가 없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간절하게 열렬하게 찾을수 없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날때가 되니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 난 것이다. 자신이 걸어간 그 모든 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던 ….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형을 피해 도망할 때 그 암담했던 그 길…. 아무도 없던 그때…. 인생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나면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폭풍가운데서는 시련 가운데서는 항상 혼자라는…. 외로움) 청교도 들은 인간의 외로움의 감정을 경계했다. 감상적인 인간의 외로움과 거룩한 외로움을 철저히 구별 할려고 애를 썻다고 한다. 옛날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때 나그네로서 잠시 잠들었을 때 자신에게 찾아와 주신 주님과의 만남은 생수와 같은 만남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야곱에게 있어서 일생을 뒤 바꿔 놓을 중대한 만남이었다. 인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그 날이 야곱에게 환란날 이었던 것 처럼 여러분에게도 환난 날이 있을 것이다. 환난 날에 필요한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나 명예나 돈이 필요 한 것이 아니라 거기 서있는 여러분들의 존재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인생이 벼랑 끝으로 내 몰렸을 때 …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겁날 것이 없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은 과거에 곤고 하던때에 어떻게 하나님이 응답 하시고 붙들어 주셨는지를 생각 하면서 소망 가운데서 함께 해 주셨던 그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게 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와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쓸모없는 죄인들을 향해 베푸시는 아침마다 새로우신 긍휼과 자비하심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치열한 광야의 길에서 엎드려져 죽었을 것이다. 사나운 짐승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는 상관없이 이제껏 우리의 많은 죄악과 불순종에서도 우리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인도하시면서 살려 두신 것은 “혹시 내 자녀가 다시 한 번 살려 주면 살아있는 그날 동안에 그에게 준 기회를 이용하여 벧엘로 올라가리라는 …” 실낱같은 기대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실한 자비로 여기까지 데리고 오시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빌미 삼아서 더 고집을 부리고 갈대까지 가보자는 포악한 마음을 드러낼 때가 참 많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다 주셨다.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고통과 아픔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의 마음과 내면에 가시와 엉컹퀴를 내었고 많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좋은 열매가 없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다.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셨다. 당신이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는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벼랑 끝에 내 몰린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에는 감사를 잃어 버렸고 이전에 베풀어 주었던 은혜에 대한 감사는 모두 잊어버리고 현재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불만족과 하나님을 향한 반항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것이 과연 하나님과 끝을 볼 수 있는 것인지….?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고는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지는 것 외에는 인생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야곱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오늘도 인격적으로 다가 오신다. 주님은 오늘도 신자의 참 행복을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시고 그 행복 속에 살게 하고 싶어 하신다. 하는 일 마다 되는 것이 없고 부르짖어도 응답 되지 않으면서 실패의 연속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미래에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나는 오늘 그 모든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를 여러분께 말하고 싶다. 지금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고 인생을 맡길 수 없다면….
지난날을 생각해보라 지극히 곤고했던 그 날들을…. 당신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모두 주셨고…. 정해진 때에 정확하게 십자가의 사랑을 새기셔서 십자가의 피 묻은 사랑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고 변화 되게 하시고……. 주님과 화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지금은 믿을 수 없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지난 인생의 발자취를 생각 하면서 좋으신 하나님을 배반 할 수 없다는 깊은 소망을 가져야 한다. 손들고 주께로 그저 가오니 우리를 용남 해 주시길……주님이 박대 하시면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갈 때 비로소 여러분들은 벧엘에 오를 수 있을 것이면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와 성대한 만남을 준비 하고 계실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의 권세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창35:3下-6)
본문은 우리에게 세가지를 보여 준다. 첫째:신앙의 회복 둘째:사랑의 회복 셋째:영적 권세의 회복 야곱에게 있어서 꼭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아야 할 인간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세겜 땅에도 하나님께 제사 드릴 수 있는 단이 있었다. 이전에 거기서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건져 주셨으며 (형으로부터 위기) 평안히 그 땅에 안착하게 된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른 신앙의 깊은 추억이 있는 의미 깊은 단이 그곳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벧엘로 올라가게 하셨다. 야곱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며 순종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곳으로 올라가서 단을 쌓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은게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의 모든 신들 가운데 한 분으로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야곱의 집안 식구들은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방 풍속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신상들과 종교적인 연관을 가지게 되었고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곳이 아니었다.
세겜땅에 있는 수많은 우상의 종류들 가운데 한 사람 인 것 처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을 즉 상대적인 신앙을 갖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벧엘에는 야곱에게 있어서 다른 신은 마음에 없었다. 하나님을 잘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 그에게 신은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 밖에 없었다. 다만 그는 초기에 신앙이 너무 없었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그 축복을 받아야지만 산다는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과 그러면서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세속적인 처신을 가졌을 뿐이지 다른 종교와 관련을 가진 것은 없었다. 세겜에서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종교적인 오염이 그 마음에 생긴 것이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경배 받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방문해도 따로 방문해야 할 분이 있고 다 같이 만나서 얘기해야 할 사람이 있다.
야곱이 결단을 내리고 세겜을 떠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무서워서 떠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동기는 그렇게 해서 발단이 시작 되었지만 보복의 두려움 가운데서 무너진 자신의 신앙을 보게 된것이다. 벧엘로 올라간다는 것은 모든 신들을 치워버리고 …. 유일신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모든 신들 가운데서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유일신의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신앙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이 유일신 신앙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히브리말로 “펫셀” 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헛된 것이다. 라는 말이다. 그들이 우상은 인정했지만 그에 대한 의미는 인정하지 않았다. 미스터리 극장 같은 것을 보면서 때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무서워한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고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 하고 나면 그때 느꼈던 그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 이외에는 참신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때…. 우리는 유일신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세겜에서 오래 살다 보니 신앙은 남았지만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 변질된 신앙이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그 분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안전하게 거하게 하실수 있다고 하는 것이 유일신 신앙이다. 이런 신앙이 세겜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동안 희석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분이다고 생각 하는 것이 무공해 신앙이다.
우리가 복음을 정직하게 말하고 참된 신앙을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이 걸려서 신앙생활을 못한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니다. 교회는 순수한 진리만이 들려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순수한 진리만이 선포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을 가져 온다고 하더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유일신 신앙이 아니다. 아무런 자극 없이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세겜화 현상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야곱이 처음 세겜땅에 도착했을 때는 순수한 신앙이었을 것이다.(죽을고비를 넘기면서 하나님을 알아갔기에…) 그곳에 오래 살면서 신앙이 희석되고 신앙인의 도리를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청정 신앙, 그린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어느 교회 교사학교에서 무공해 신앙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어떤 자매가 그런 신앙인이 되고 싶다고 하길래. “무공해 콩나물을 키우는 것처럼 키워야 한다. 물을 주되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주어야한다” 고 했다. 벼랑 끝에 위기가 몰려오기 전에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야곱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각성 하지 못한 채 죽어갔다. 신앙의 이름만 있는 신앙인인지? 벧엘화 된 신앙인인지? 자신을 돌아보라. “엘사다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역사를 주관 하시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야곱의 생애에서 충격적으로 깨달았던 것이었다. 머리 굴리고 살아온 인생을 여기서 다 야곱은 정리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것은 깨끗한 유일신 신앙이 아니기에 그렇다.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는 깨끗한 신앙에서 가능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깨끗한 진리 안에서 신앙생활 할 때와 혼탁한 진리 안에서 생활할 때 영적인 상태가 다르다.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상태도 중요하지만) 내가 믿는 신앙의 도리가 참된 것인지…. 이것이 인간의 영성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이 된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성경 공부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 한 것이다. 물론 신뢰 할 만한 곳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곳은 참 진리가 없다고 생각 하면 된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다. 신앙의 길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 마시는 칵테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거짓된 신앙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못했지만 야곱은 유일신 신앙을 회복 하게 된 것이다.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거스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교회의 풍조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교회 속에 흐르는 더러운 물에 자신이 떠내려가게 될 것이다. 참된 신앙의 물이 흐르는 교회가 점점 줄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적당히 믿는 신앙의 세속가운데서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가질수 없다. 영혼 깊은 밑마닥 에서는 자신의 참된 신앙의 길을 알고 싶어 하는…무공해 신앙에 대한 열망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살려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신앙이 있냐고 묻지 않으신다. 유일신 여호와 신앙인지 물으시는 것이다. 더럽고 부패한 마음은 세겜화 된 신앙을 좋아한다. 순결한 영을 가진 자는 그런 사람들과의 생활을 하는 것을 불결하게 생각 하는 것이다. 야곱이 자기가 있었던 그 자리가 유일신 신앙을 회복하고 나니 그 자리가 싫어 졌던 것이다. 애착을 가지고 살았던 세겜을 미련 없이 떠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회복이다.
다음은 사랑의 회복이다. 이방 신상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니 모든 귀고리와 모든 금부치 들을 다 내어 놓은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귀고리에도 우상을 달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낌없이 땅에다 묻었다. 이것은 다시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 되니 모든 것들을 다 묻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순수, 순결은 세상 욕심을 비운 것을 그렇게 말한다. 순수 순결은 신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한다. 세상사랑은 우리 마음을 불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을 순결하게 한다. 어느 순간에 십자가를 깊이 경험 하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인생인지…. 주님의 사랑이 놀랍다는 십자가의 희생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때 우리영혼이 순수하게 느껴진다. 주님이 씻겨주셨기에 그렇게 느끼기도 하겠지만 … 다양한 목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의식의 세계를 모두 압도하게끔 다가오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사랑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으며 내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 외에 우리의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 전체를 가득 채우게 되는데 그때 자신이 순결 하게 된것을 느끼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은 비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다. 유일신 신앙을 회복하고 주님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고 나니… 이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초가 되었던 것들의 세겜화 되었던 모든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다. 우리도 기념비를 세우자. 세겜화 된 신앙과 결별한 날을 위해…….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유일신 신앙인으로 다시 세움을 받은 날……. 가던 길을 돌이키고 결단을 하자. 다시는 그 길을 걸어가지 않겠다고 가슴에 새기자. 그렇게 하기 전에는 야곱이 회복한 사랑을 회복 할 수 없다. 야곱은 세겜이 눈에 들어 온것이 아니라 회복되고 나니 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가 눈에 들어온 것 이다.
여러분들에게 말씀 들인 바와 같이 오늘도 말씀을 듣고 참고만 한다면 …. 백날을 말씀을 듣고 유명한 집회 참석 해바야 마음만 더 완악해 지고 그 어느 것도 내려놓을 수 없다. 땅을 파고 애지중지 한것들을 묻어버려야 한다. 더 이상 참고만 하고 미루기만 하면서 하나님을 희롱하는 삶을 살기만 해서는 안된다. 몰랐기에 못살았다면 이제는 진실을 알았고 지식을 갖게 되었으니 용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없고 세겜에서 보복 당하게 될것이다. 잠들어 있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커트라인을 낮추기 위해서 노력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린 천국에 대해서만 얘기를 했고 좁은길에 대해서는 얘기 하지않았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에 대해서 얘기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비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야곱은 결별했다. 오직 세겜에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해 살아온 그가 모든 것들을 땅에 묻어버렸다. 다시 보지 않기를 원했다.(이곳에 묻는 금붙이의 원가가 얼마인데…. 얼마에 샀는데…. 이런 계산이 다 필요 없었다)
그런 물건 하나 하나에 피눈물 흘려야 하는 쓰라린 실패와 하나님을 버린 죄악이 묻어 있었기에 다 땅에 묻고 다시 보지 않기를 원했다. 이것을 묻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찾았기에 잃은 것이 아니었다. 뼈아픈 배신을 당해서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사람이 있습니까? 벼랑 끝에 내몰려서 이제는 어떡해야 하나 생각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 되어 버린 사람도 있을 테고… 여기까지 오면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것을 자꾸 뒤돌아 보고 생각 한다는 것은 죽은 자식 얼굴 만지는 격이다.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뼈아픈 마음을 갖지 말고 잃어 버린 것을 비용으로 지불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을 통해서 배워야 할 바다.
세 번째는 영적 권세의 회복이다. 야곱의 집안 식구들이 벧엘로 올라가는데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 난 것이다. 우리가 보니 벧엘로 올라간다고 말하지 그들로 보면 도망가는 것이다.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들어 놓고 보복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나? 야곱의 가족들은 야밤도주 해야 할 실정이다. 만약에 모든 원주민 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결탁을 하면 남의 나라 땅에서 죽고 말 것이다.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야곱의 집안 식구들은 길을 떠났다. 이것은 분명히 그들로 보면 도망치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그들은 길 떠나는 그들을 보면서 큰 권세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향해서 뭔가를 얘기하거나 대꾸하거나 덤비거나…하면 큰 일이 일어 날 것같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영적 권세라고 한다. 야곱이 여태껏 살아온 것이 세겜화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다 잃어 버리고 엉망칭찬의 삶을 살다가 벼랑 끝까지 내몰렸는데 주님 만나고 자신을 보면서 새롭게 정리하면서 버릴것을 버리고 유일신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께 순종 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세를 입혀 주신 것이다. 보따리 싸서 도망 가는 사람들을 무서운 마음이 들도록 해서 그냥 가도록 내 버려 둔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기초의 질서이다.
교회에서 참된 권위가 사라질 때 권위주의가 팽배해진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고 있을때에는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남편으로서 삶이 깨끗하니 아내로서 그 남편이 존경스러운 것이다.
결국은 뭔가를 강요한다고 권위가 서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길을 걸어가는 사람… 삶에 모든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권위가 있다. 참다운 권위는 신앙을 회복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뭔가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순결한 신앙을 가진 신앙인의 모임 ….주의 뜻을 행하기를 사모하는….순종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없는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찮은 존재로 밖에는 기억 되지 않을 것이다. 순수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고 고난이 오나 시련이 오나 거짓된 신앙 안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참된 신앙 안에서 고난을 받겠다는 …. 유일신 의 참된 신앙!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 하신 것을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복되고 행복이라고 생각 하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와 진리의 사람들에게는 권위가 있다. 하나님이 판단하는 신앙을 정직하게 받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나를 두들겨 패서라도 고쳐 주십시오” 할 줄 알아야 한다.
추격당할 위험을 34장에서 야곱은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겁탈 당한 딸의 생각보다도 원주민들의 보복이 야곱에게는 더 무서운 사건으로 마음에 새겨 졌을 것이다. 그런 야곱이 대낮에 모든 가족들을 거느리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과 사랑이 회복 되고 나니 담대함이 생겨 난 것이다. 신앙이 혼탁한 사람들은 항상 불분명하고 지리 멸렬한 생활을 반복 하면서 살아간다.( 당신 구원 받았어? 십자가를 경험 했어…? 이런것에 대해서 분명 하지 않다. 정함이 없고 늘 불안 하다. 깨어져야 함에도 깨어져야 할 자리를 피하고 결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평화는 골 깊게 벌어지기 시작 하는 것이다)
야곱이 야곱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잔머리 굴리는데 명수였다, 도망갈 상황이면 자기 종 에게 자기 옷을 입히고 자기는 종처럼 변장하고 간다든지….,.잔재주 많은 사람이 어떤 꾀라도 내었을 텐데 …. 담대하게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다 맡기는 것이었다. 살든지 죽든지…뜻대로 하소서….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담대함이 있다.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벧엘로 부르실 수 있다. 잃어버린 신앙을 찾으라고…. 사명을 위해서, 소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각들을 다 내려놓아라. 여러분들이 아무리 수가 높아도 잔머리 굴리는 고수 야곱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주님이 오라고 하니 가는 길에 무슨 일을 만날런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살고 죽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이 불순종의 자리를 떠나서 주님이 부르시는 그 자리로 간다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세겜 사람들을 따돌릴까? 전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살든지 죽든지 주 뜻대로 하소서……. 오라고 하신 그분이 자기의 가는 그 길을 책임 져 주실 것이다… 오직 그것만 생각 하고 떠난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 알면서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과 결별하고 우상과의 잘못된 사랑에다가 칼을 꽂고도 무사히 하나님을 만나러 갈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눈물로 매달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죽으라 하지 않으신다. 믿음을 가지려면 끝까지 가져야 한다. 주님을 만나서 옛 삶을 모두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받기까지 끝까지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벧엘로 가는 길은 먼 길이 아니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불가능 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38년된 병자도 주님이 고치고자 하니 일어났다….) 순종하면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들어오면서도 일어나려고 하다가도 주저앉고 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살아왔기에 어떤 의미에서 신앙적으로 세상적으로 벼랑으로 내 몰렸을 수도 있다. 무의미 하게 반복된 실패 속에서 늙어가는 인생이 얼마나 아까운지…. 언제 까지 환경의 노예처럼 살 것인가?
주님이 일어나 벧엘로 올라오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너를 만나 주겠노라” 오늘도 주님이 부르고 계신다. 여기에 응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벧엘로 올라가자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