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9
가난하게 하시는 하나님(창35:6-8)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지난 시간에 그 야곱에 마지막 언덕을 내려가서 마지막 절정에 만나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면 계획대로 끝날 것 같은데 주기도문이 요원하네. 종강할 때까지 마쳐야 하는데 지난 시간에 얘기한 것을 좀 간추리면서 오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뭐 좀 행군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복수하러 쳐들어올까봐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지 않으셨어도 어디로인가 도망쳐야 했을 사람들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계산이 빠른 사람인데 그 사람이 계산해보니까 어림도 없는 게 자기들 머리수를 가지고 그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 났으니 뇌물을 갖다 주면 그 화가 풀릴 것이며 또 뭘 갖다가 바치면 그들의 진노를 풀 수가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망갈 처지밖에 안되니까 벧엘이라고 하는 신앙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지 사실은 지금 이 행렬이 전진하는 용사의 행렬이 아니라 지금 도망가는 행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도망가는 행렬이 주위에 있는 사면, 그 고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권세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오히려 도망가는 그 사람들이 한없이 두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누구도 너희가 이렇게 동리를 쑥밭으로 만들어놓고 어디로 도망가느냐. 길을 막아서 도전하는 자도 없게 그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간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 뭔가 메시지를 받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은 이렇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번 말고 그 전주에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비겁한지, 그렇게 비굴하고 구차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걸어가는 이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이 확신가운데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좀 닥치면 어떻습니까? 고난이 닥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상급을 저축하는 것이고 환란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역경에 처하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거기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욥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따라서 내가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는 분명한 확신과 신념, 그리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늘 비굴하고 비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란이 닥치면 두렵습니다. 일이 비비꼬이면서 역경으로 들어가면 막 불안해합니다. 그게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환경 때뿐만이 아니라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야곱이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처참할 정도로 모든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일시에 회복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러니까 일시에, 그리고 벧엘로 올라간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자. 과연 아버지 말을 듣고 보니까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야밤에 도주한 것이 아니라 대낮에 떳떳하게, 모든 사람들이 쭉 걸어갑니다. 무기로 무장하고 걸어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거기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울까!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높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집이 구별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영광스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초라한 무리들이 지나가는데 영적인 권능이 충만한 가운데 사방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회는 그런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을 생각해보셨습니까? 500명이 모였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보고 도망가고 120명이 남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온 떨거지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로 교주인데 그분이 그래도 계실 때만 해도 그분이 가끔 능력도 행하시고 그러니까 보호받을 수 있었는데 그분도 올라가셨습니다. 이제는 의지할 게 없습니다. 사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도 순종한 것이지만 다락방에 모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슬쩍 가서 예수 믿는 신분을 감추든지,
모여서 기도할 때 역사가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세계를 바꾸어 놓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락방에서,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20명의 떨거지들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꼴값하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데 뭐가 임했습니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120명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성령의 충만함은 전부다 가짜입니다. 성령이 참으로 임하시면 그 영혼들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시에 예루살렘 거리를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120명의 떨거지들이 막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러니까 예루살렘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흔들흔들, 사람들이 모였는데 베드로가 설교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뒤흔들리고 나중에는 로마가 뒤흔들리고 기둥뿌리가 빠져버립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건물이 있었습니까? 외제 대리석을 갖고 집회장소를 지었습니까? 야외에서 모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없었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높이 서있었습니다. 능히 수많은 어두움의 세력을 굴복시킬 수 있는 이런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적용을 시켜도 이것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34살에 전도사님이 통합측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었다니까 승진을 해도 고속 승진을 했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승진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집사, 장로, 안수집사 해서 쌓아올려진 그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정말 자기가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뀔수록 보이지 않는 그 믿음의 사람, 속사람이 자기 안에 서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이전에는 그럴 수 없었는데 한해, 한해 가면서 어두운 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는 그리고 참으로 문제가 있는 곳에 다가가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영권을 소유하고 있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빼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건축사를 연구해보면 건축사가 최고꼭대기로 발전했던 전성기가 교회가 가장 영적으로 타락했던 시기와 반 비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속이 허하니까 자꾸 외모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진심으로 하나님께만 마음이 쏠려진 사람, 시편이 말한 대로 제물이 늘어도 너희는 거기에 치심치 말지니라. 마음을 두지 말지니라. 정말 하나님께로 마음이 향해있고 그리고 그분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돈이 많아도 티를 안 냅니다. 수수하게 합니다. 왜? 마음의 즐거움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이 심령이 허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막 뿌리면서 마음에 허함을 달래는 것입니다.
교회도 역사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지, 우리들이 이렇게 조금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고 기독교 복음을 보는 눈이 열리면서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것과 내가 옛날에 내가 하던 짓을 봐도 참 우습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데 하늘 높은 곳에서 하나님이 아래를 내려 보실 때 얼마나 졸렬하고 하나님이 애들을 데리고 내가 놓아야 되나. 그러실 것입니다. 이 치졸한 인생들을 데리고 내가 놀아야 하나. 금방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뭐 폼을 잡다가 금방 토라져서 하나님은 내 인생을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이런 소리나 하고 하나님이 위해서 보시면 얼마나 졸렬해 보이겠습니까? 나는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내가 제대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게 세상엔 참 많습니다.
요즘 선지서를 읽으면서 그런 것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여로보암 시대에 좀 잘 삽니까. 떵떵거리고 삽니다. 여름에는 여름 별장, 겨울에는 겨울 콘도, 아침에 기지개를 키고 일어나는데 침대는 상아로 깎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폼을 잡으면서 사람들이 사는데 그 속에서 제법 잘난 척 하고 살았습니다. 위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내려다보시면 참 가소로운 인생들이지,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보면 그냥 기를 쓰면서 인상 쓰면서 사는데 그냥 큭큭 거리며 웃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 보시면 그렇게 웃으실 것입니다. 야, 웃긴다. 그럴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머리를 굴리면서, 자기 딴에는 잘났다고 사는 것을 보고 얼마나 치졸하고 졸렬하겠는지.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시면서 여럿 팔자를 그리면서 몸부림치면서 심각하게 살아가는 그 꼴이 얼마나 인생이 웃기고 가련하겠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부어주시니까 아무 것도 아닌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들이 지나가면서 한 시대를 뒤흔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뒤집힐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정확하게 280년 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됩니다. 그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겨우 학자에 따라 틀리지만 4-8%였다고 합니다. 그 인구가 로마를 걸어서 넘어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25%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그러는데 한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처럼 돌려보내야 합니다. 의미 없습니다. 제 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폴란드가 공산화될 때 95%가 예수 믿는 사람이었는데 아무 저항 없이 손들고 공산화가 되었습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소용없습니다. 생생하게 살아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영적인 그런 권세를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 명의 한명만 되어도 감히 세상이 교회를 이렇게 넘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놀라운 권능을 가지고 가나안 족속들이 있는 그곳을 지나서 세겜을 지나서 벧엘로 향한 것입니다. 입을 딱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 원리를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만큼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흥은 가장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냅니다. 가장이 아니라 그곳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한 사람을 들어서, 이런 떨거지들을 들어서 한 시대를 쪼개면서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부흥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정말 여러분, 제가 주기도문 강해하면서 부흥에 대해서 많이 말했습니다. 지난 학기에 우리가 출애굽기 부흥을 연구하면서 부흥을 많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부흥을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참된 부흥의 시각에서 주기도문을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시각에서 부흥을 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참된 부흥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계시된 참된 교회로 돌아가게 하는 그 참된 원동력입니다. 그런 놀라운 권능 속에서 이 야곱이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벧엘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거기 6절에 보면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그리고 8절에 가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돌아온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드디어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분이 말하자면 참된 부흥의 진수입니다. 그런데 이제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고 그 단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참된 부흥을 주시기 전에 그때 무슨 사건이 하나 삽입으로 들어가 있는가 하면 드보라가 죽는 사건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 어느 목사님에게 그래, 어때 부흥이 보입니까? 그래서 제가 드보라가 죽어야지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사사시대 드보라가 왜 나와. 이 사람은 사사시대 드보라가 아닙니다. 드보라가 죽어야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하는 나는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드보라가 죽어야지. 이 드보라는 리브가의 유모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을 낳아준 어머니의 유모입니다. 그 당시에는 시집을 보낼 때 유모를 딸려서 보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동향문화권입니다. 기가 막히게 문화적인 일치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딸려 보내니까 밧단아람에서 리브가가 시집올 때 유모를 딸려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유모가 여기서 왜 갑자기 나오는가에 대해서는 이제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게 두 가지로 말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야곱이 떠날 때 혼자 떠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염려해서 자기 유모를 딸려서 보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들이 미리 마중을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성경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여기 지금 리브가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리브가는 지금 여기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아니고 한동안 같이 있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같이 밧단아람으로 갔든지 아니든지 나이가 굉장히 고령입니다. 최소한 170세가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그러면 이제 가만히 생각하면 그럼 신분은 종의 신분이나 되었지만 그러나 유모니까 자기 몸에서 나온 딸처럼 정말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사랑하는 가운데 자기가 낳은 자처럼 길렀던 그 딸이 아이를 둘 낳았는데 누구를 더 좋아합니까? 야곱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그 할머니의 마음이 야곱에게 쏠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뭐 불 보듯 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드보라가 이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사람이 분명히 아주 경건한 신앙을 가진 부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칼빈이나 리비타스나 이런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을 떠나서 이 분이 어디서부터 합류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멀리 잡아서 같이 동행했더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고 가나안에 와서 합류해서 왔더라도 또 그랬을 것인데, 무엇이 그 살아가면서 집안 식구들 중에서 누구를 의지할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야곱에게 있어서 가정이 그렇게 행복했습니까? 정품도 하나 왔지만 사은품까지 하나 쫓아와서 그래서 끼어 팔기로 해서 들어온 레아, 거기서 딸려온 종, 원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딸려 와서 그렇게 살아가는 가정생활에서 참된 위안이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 경건한 할머니와 같은 이 드보라가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늘 염려의 눈빛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때로는 조언을 해주었던 경건한 할머니 드보라가 이 광야와 같은 야곱의 인생길에서 마지막 생수와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여기서 하나님이 그 드보라를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게 왜 벧엘로 올라가고 부흥을 만나기 그 사이에 나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메시지는 간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있는 야곱이 마음을 둘 수 있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강해를 듣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아, 정말 우리에게 참된 부흥이 필요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참된 부흥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마음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일관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고 예수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외에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은 낫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올씽이든지 낫씽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 중간에서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가, 부끄러워 하는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 드보라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번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생각하면서 그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인물이 느끼고 있는 것을 같이 느끼려고 해야지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밖에서 보면 잘 안 보입니다. 한번 야곱의 입장이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벧엘로 올라가기는 했지만 벧엘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뭐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너는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라.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는 이야기만 하셨지 그 다음에 뭐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 벧엘로 올라갔는데 자기의 딸린 식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딸린 식구들일 뿐입니다. 지도자는 늘 고독한 것입니다. 아무도 의논할 상대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있는 사람일수록 늘 그런 고독 속에 삽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런 높은 신앙의 지도자가 되어서 백성들을 자기 가족들을 이끌고 그렇게 나아갈 때 그때 수많은 자기 가족들이 있지만 누가 자기의 위로가 되어주며 누가 자기의 문제에 조언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식구들이 자기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로서 한없이 외로운 것입니다. 속에 숨으면 거기에 묻어서 흘러가면 되는데 정말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단 한사람의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단 한분이 바로 드보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껏 의지하였던 그 마지막 의지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야곱이 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4장에서 그 환란을 만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34장은 유가 아닙니다. 이제는 34장의 그 환란을 벗어나고 벧엘에 올라가서 단을 쌓고 이제 드디어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켰다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쉴 때 마지막 의지가 되던 드보라를 데려가심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마음은 철저하게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거기에 드보라를 묻은 다음에 알론바굿이라 바굿은 바카에서 온 명사인데 울음, 곡함, 엉엉 우는 것 오죽했으면 얼마나 많이 울었으면 그 상수리나무를 알론바굿으로 부를 정도로 그렇게 깊이 애곡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그렇게 수없이 압박을 받고 지독한 강호의 고수를 만나서, 짐승이 와서 물어갈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까지 다 물어내라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것까지 다 자기 품삯에서 변상해주는 그런 상황까지 도달했는데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 여기에서 완전히 마음이 무너지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마지막으로 자기의 자아가 완벽하게 꺾이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면서 그렇게 깊이 부르짖고 기도하면서 이 야곱은 드디어 부흥을 만나는 그런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애기해도 소용없습니다. 마음에 아, 그런 부흥은 참 좋다. 아, 그런 각성 너무 좋다. 그런 것 가지고 안 됩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사랑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그분 한분뿐이라는 고백을 받아낼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예를 차근차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에 별들을 보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과 같이 될 것이다.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될 것이다. 네가 둘러서서 동서사방을 돌아보라. 이 모든 땅이 너의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약속을 주시는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의 의지가 누구였습니까? 데리고 온 그 조카, 그 조카와 함께 살아가더니 결국 목자들이 대판거리싸움하면서 롯이 탐욕 때문에 그 삼촌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너는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사방을 둘러보고 제일 기름진 들판으로 나아갑니다. 저기 내가 살겠습니다. 떠나갔을 때 이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고 그랬겠습니까, 의지하면서 그 외로운 땅에서 함께 살던 롯도 자기의 물질적인 욕심 때문에 아브라함을 떠나고 그리고 자기 혼자 고요히 남은 그때 그 외로운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뿐인가요? 롯도 소돔과 고모라 그 앞에 소알에 있다가 소돔과 고모라가 대판 싸움하면서 많은 왕들에게 잡혀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거기에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쳐부수고 다시 롯을 구출해옵니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는 조바심 속에서 걱정합니다. 왜? 보복이 두려워서. 그러고 있을 그때 완전히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데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나는 네가 지극히 큰 상급이요, 너의 방패니라.” 그러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를 탁탁 짚어가면서 그 만나는 직전의 상황이 어땠는가를 연구해보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성경이 일치합니다. 아주 오늘 내내 해도 끝이 없습니다.
또 하나 대볼까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삭을 내가 주겠다. 그러실 때가 언제입니까?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 하나님과 못 만나는 그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씨름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면서 이제 100세에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는 예언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흥을 만나주시기 전에 하나님 충분히 만날만한 때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러면서 그때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란을 통해서, 어려움을 통해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이 자기의 참된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리브가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을 때 그때 야곱은 상수리 나무아래 묻는 것도 의미가 특이하지 않습니까? 상수리나무 아래가 어디에 나옵니까? 그 앞에 보면 귀걸이와 그 우상들을 상수리나무아래 묻는장면이 나옵니다. 이 상수리나무 아래 그 드보라를 묻으면서 사실은 드보라만을 묻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소망과 기대를 함께 묻은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되었다고 합시다. 내가 묻겠습니다. 이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면서 알론바굿이라는 상수리나무아래에 마지막 자기 마음에 의지가 되었던 드보라를 묻을 때 그때 여러분이 야곱이라면 인생 더 살고 싶겠습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주여, 내가 이제도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사오니 이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만족해서 바랄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이제는 싫어.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시네, 어떻게 그런데 이제는 옛날에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신풍나무 껍데기를 물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양떼와 짐승의 떼가 늘어나는 것을 계산하면서 눈을 요리 굴리고 저리 굴리던 자기 자신이 얼마나 우습고 치졸해보였겠습니까? 야곱이 드디어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참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보입니다. 사랑하는 것들을 다 버리기 전에는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탐욕과 신기한 게 사랑하면 눈이 멉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세상에 눈이 멀어서 참답게 보아야 할 그 세상이 안 보이고 보지 말아야 할 세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뭐가 엄청나게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 더 인생 살고 싶으십니까? 야곱은 틀림없이 아니다. 그래도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무엇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까? 이제는 이 세상에서 무슨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를 살아있게 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러면서 또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야 할 그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광대한 하나님이 눈앞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어림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가 하나님을 위해서도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은 그 정도 가지고는 부흥을 안 보내십니다. 살아있는 것이 마치 하나님 때문에 살아있는 것같이, 정직한 고백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래도 리브가가 있을 때는 세상이 살맛이 안 났지만 그러나 리브가가 있을 때만해도 마음에 갑갑함이 있으면 할머니하고 찾아가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유일한 낙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자, 사은품보다 좋고 정품보다 좋은 여자를 주랴. 그러면 우우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야곱에게 그런 것은 즐거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미 다해봤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마지막 가져다준 것은 모든 영적인 좋은 것들이 무너져버린 황폐하게 되어버린 자기의 신앙과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이 황폐화되어지면 자기의 인생을 지탱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자살을 많이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탱할 힘을 잃은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를 안 믿었을 때는 죄의식이 없으니까 오히려 인생이 죄 한번 짓고 찝찝하면 사우나 한번 한 기분으로 툭툭 털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까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돈을 쓰고 방탕하게 쓸 때는 잊어버리는데 고요히 집에 들어와 누우면 모락모락 다 생각이 나서 괴롭힙니다. 그러니까 더 몸부림치면서 세상 속에 탐닉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신세입니다.
결국은 이 리브가를 하나님이 데리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놈의 세상 이제 살기 싫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이미 35장 1절에서 각성을 시키셨습니다. 이 절망이 절망으로 이어지지 아니하고 복된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절망이 두 가지 절망입니다. 하나는 파괴적인 절망, 또 하나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절망, 아, 못살겠어, 그러면서 파괴적인 절망, 가룟 유다와 같은 절망 같은 것입니다.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목매어 죽으니라. 목매다가 떨어지니까 땅에 굴리면서 배가 터져서 창자가 흘러나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절망이 아닙니다. 절망 가운데 유다의 경우에는 캄캄하게 하늘이 가리면서 하나님도 안 보인 절망입니다. 그런 절망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절망입니다. 절망에 깊이 부딪혀서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하나님만 보이게 하는 그런 절망, 그게 누구입니까? 요단강변에서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그렇습니다. 그게 말하자면 깊이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는 그런 것이 말하자면 이런 하나님 만나는 절망입니다.
야곱의 경우에 하나님이 드보라를 데리고 가실 때 한이 맺히고 세상에 하나님이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면서 마지막에 드보라밖에 안 남았는데 하나님이 해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분이 정말 이러실 수 있어. 인생 안 살고 말아. 이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막아주었습니까? 35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깨달으면서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주여, 이제는 나의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사랑을 다, 부흥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죄입니다. 그런데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부요함입니다. 말씀 전하면서 막 이렇게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런지 마음이 한없이 부요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비참한데도 부요합니다. 주일날 뭐 하러 나오는지 나와서 주보도 집에 갈 때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무슨 아무개 집사 십일조 헌금한 것까지 예배 시간에 다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주보에 낙서하지 않으면 그것가지고 옆 사람 쿡쿡 찌르고 그러거나 그것도 하다가 질리면 아멘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럼 뭐 하러 교회에 나옵니까? 안 나오면 일주일 내내 찝찝하다고 합니다. 여기가 무슨 사우나입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근본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무슨 영혼이 살아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쉽게 얘기해서 자기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데도 말씀을 안 듣습니다. 그래도 부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도 이제 그 곤고함에 단련이 되어서 무감각해져서 그냥 견딜만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무감각해져서 견딜 만 한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 있고 자기가 신앙이 있어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워낙 돼지 우리 같은 곳에서 쥐엄열매를 주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문화주택에 대한 기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냅둬,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그렇게 부요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벌거벗었는데도 부요한 것입니다. 가난한데도 자기는 부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눈이 멀었는데도 자기는 모든 것을 다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교회밖에 추방 되어 계신데도 자기들이 모여서 매일 예배드리면서 자기들은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 주님이 내가 문밖에서 두드린다. 문 좀 열어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면서 사는 것인지, 그 부요함이 모든 재앙의 출발입니다.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요하고 조금도 내게 모자라는 것이 없다.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도 그런 부요함이,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실 때 뭐라고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것이 물질이 가난한 것과 비례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물질이 많으면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정말 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팔복을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러면서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게 원래 투토코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파산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파산해봤습니까? 집안에 딱지붙이면서 냄비가지고 길거리로 쫓겨나는 것, 한번 해봤습니까? 그때 누가 우리 집에 오셔서 오늘밤을 지내십시오. 그러면 뭐라고 그러시겠습니까? 거기 몇 평 아파트입니까? 그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까? 지금 추운 겨울에 길거리에 쫓겨났는데 몇 평 아파트입니까? 23평인데요. 하루 밤을 자더라도 그래도 60평은 되어야지, 그럴 수 있는지, 그것은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을 쫓아갔던 사람이 무엇입니까? 멀리서 보면 그야말로 진짜 떨거지들입니다. 먹을 것도 없어 주님이 먹여주셔야 했던 그 떨거지들이었는데 뭐라고 그랬습니까? 너희는 가난한 사람들이지. 너희는 다 복이 있다. 그렇게 말씀안하셨습니다. 너희들 중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그것이 모든 복의 첫 번째 복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우리의 커다란 적은 이유도 없는 이 부요함,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올라오면 거만합니다. 뭐라고 하나 한번 들어볼까? 집회 나가면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왜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집회를 가면 며칠 동안 죽다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배가 고픈 것을 느끼게 만들어서 말씀을 주어서 그것을 받아먹게 해야 하나 얼마나 고달픈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처량하게 죽어가는 그 말라비틀어진 영혼을 가지고도 뭐라고 하나 한번 볼까? 부요한 사람들은 이제 가난하게 되어질지라. 그 부요한 마음은 우리의 가장 커다란 적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기도생활이 절박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그 간절함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뭘 믿는 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을 주님이 제일 싫어하신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누차 얘기합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커다란 죄를 짓고 슬퍼 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나 혼자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주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최대의 적입니다. 그러면서 어떻습니까? 종교적인 행동을 하고 교회 출석하고 십일조도 하고 뭐도 하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 속에 빠져들어서 기본이 되어있는 교인들은 영적으로 허하면 허할수록 그 허한 것을 무엇으로 가리려고 하는가 하면 바치려는 것도 좀 확 바치고 그리고 팔 걷어 부치고 교회 일이라면 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곤고한 영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줍니까?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참 해본 사람들은 지금 제 얘기가 피부에 와 닿을 것입니다. 열심히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행동주의자가 되어서 내마음속에 있는 이 공허함을 가리고 싶은 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할 때는 모든지 다 잘되는 것 같은데 봉사의 손길을 놓고 고요히 혼자 있으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무런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결코 주님은 여러분들이 행하는 무슨 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님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은 마음으로 주님 없이 살아갈 수 없나이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는 것처럼 주님, 오늘도 주님이 주시는 이 은총의 양식이 없이 나는 한순간도 살수 없습니다. 우리 아빠가 벌어오는 월급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려주시는 그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간사하고 더러운지, 하나님이 그 은총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간다고 하는 이런 필요를 세심하게 느끼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 그러니까 강물과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드는 그분 자신의 놀라운 평강과 그분 자신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참된 만족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이제는 한없이 가난해졌습니다. 34장을 겪으면서 쉽게 말해서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었습니다. 산전수전은 옛날 얘기고 이제는 중요한 게 화생방전입니다.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하지 않습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보니까 그래도 네가 의지하는 구석이 그래도 한군데 있다. 그게 뭔지 아니? 드보라를 네가 의지하는구나. 미안하다. 데려간다. 그리고 데려가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기 전까지는 잔인하리만치 완전한 가운데 우리를 몰아붙이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거부하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교만과 완고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완고함을 꺾으시는데 무릎을 안 꿇는 사람에게 작대기를 가져와서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게끔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높은 권세자들은 우리를 마구몰아가고 휘몰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휘모시는 분이 아니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가 하면 다리가 부러져서 할 수 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마음이 안 녹고 필요하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34장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것 앞에서도 마음이 녹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늘 얘기합니다. 찝찝해할 필요 없습니다. 주일 한번 안 나온다고 찝찝하지 마십시오. 주일 안 나오고 싶지 않으면 놀러 가십시오. 들로 가고 산으로 놀러 가십시오. 주일날 와서 조느니 들에 가고 산에 가십시오. 그런다고 해서 오늘 예배 빠지고 도봉산에 올라간다고 해서 발목이 부러지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올라가십시오. 주일날 안 나오고 친구들하고 낚시를 갔다고 해서 물에 빠져서 죽어서 시체가 되어 떠오르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인간들을 향해서 치사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발목을 부르트려 주저앉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은 다른데 가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달라, 결국은 마음을 다 쏟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밖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모퉁이에서 항복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때 겁나서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의 인생이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정말 인생이 소망이 없구나.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가슴속에서 우러나와서 영혼 깊은 곳에서 고백을 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게 부흥이 가까운 때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그리고 매일매일 하루, 하루를 하나님께서 내게 여기 살려두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친밀함이 누구에게 있느뇨. 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주께서 친밀히 대하심이라. 여호와의 친밀한 사람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한 분 뿐이고 그분 앞에 우리의 마음을 다 쏟으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참된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니까 기도가 틀린 것이고 성경을 읽어도 틀린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같은 성경이라도 누가 읽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똑같은 제목의 기도라도 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비는 안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 좀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아무가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엘리야가 고요히 무릎을 꿇고 주여, 비를 내리시옵소서, 일곱 번 기도하니까 삼년 육 개월 동안 그쳤던 하늘이 열리면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가슴을 찢고 금식기도를 하고 난리를 쳐도 소용없고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금식하려고할 때 하나님께서 금식하지 말라고 하실 적이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주님은 금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필요로 합니다. 하는 기울어지는 것을 먼저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금식기도도 의미가 있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창세기 34장에서 그 환란과 고난의 통로를 통과하면서도 쓰디쓴 물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세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대접받으면서 유지노릇하면서 살던 때가 그리워진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82년도에 전도사가 되었으니까 11년 째 참 길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무슨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별짓을 안 해봤겠습니까? 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 앞에 마음이 기울어지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도움이 안 됩니다. 그것을 머리를 맞대고 수없이 이야기를 해도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하나도 안 된다고 내가 말할 수 없습니다.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요즘도 가끔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을 불러서 얘기할 때 사람을 골라가면서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입만 아프고 소용없습니다. 교역자 체통만 떨어집니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습니다. 그것을 가난함이 어쩌고, 저쩌고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익어갈 때가 있습니다. 아, 이제 뭐가 좀 진리에 기우는구나. 할 때 이리와 여기 앉아봐.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제도 한 10분인가 말하니까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예수를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다. 내가 날이면 날마다 너에게 경고하는 게 아니다. 그게 뭐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네가 정말 하나님을 만날 것 같은가. 이제 네 믿음이 요만한데 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나. 마음에 뭐 믿는 게 있느냐. 왜 그렇게 마음이 부요해. 그러니까 마음이 물같이 녹는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자기 속에서 깊은 갈등을 느끼면서 마음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이것이 내 인생에 만족을 못주는 것이구나. 하는 그 느낌이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소용없습니다. 불러놓고 이게 뭐냐? 한마디만 하면 확! 쏟아집니다. 생짜백이 데려놓고 창세기부터 뒤지면서 계시록까지 애기해도 마음은 지금 콩밭에 가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 듣고 나서 토를 답니다. 글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요. 애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그렇게 돌이키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창세기 34장에서 이 장구한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게십니다. 왜 신실하시니까.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34장까지 그렇게 깨어있고 좋았던 믿음이 아, 맞아. 그 하나님만이 내 유일한 소망이야. 이게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오늘 기회를 놓치고 평생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결국은 죽는다고 누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리입니다. 오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나중에는 은혜가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늘 하나님은 거기에 계셔서 은혜롭게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 필요로 하게 되는 그런 때가 자기 마음먹은 때에 늘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보통 착각이 아닙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못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그때 전심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최종적인 찬스다. 그렇게 생각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나는 수없는 인생의 파노라마 속에서 정말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마지막에 정말 비참하게 하나님을 떠나서 죽는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누가 그를 그렇게 죽을지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한때는 장로고, 한때는 집사고, 한때는 신학을 하겠노라 하고, 한때는 선교사가 되겠노라고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 없이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장담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언제나 거기 계시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바뀌어서 하나님밖에 없다고 그러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붙잡기를 원하는 이 힘없는 손이라도 내밀며 그분을 붙잡기를 원하는 이 마음이 되는 것, 그게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잘 아는데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을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정확한 말인지,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데리고 가심으로 말미암아서 이 야곱은 완전히 이제는 이 세상에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에 살아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할 수없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그런 것들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하심으로 내가 살아있는 것이라고, 성도라고 나에게 일컬어주신 이 약속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게 참된 하나님의 자녀 됨입니다.
끊임없이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부요함을 갖게 만들고 애야, 네가 그렇게 부엉이와 같이 슬피 울고 당아새와 같이 서글퍼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너에게는 몇 년을 먹고 쓸 수 있는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지 않는가. 너희 남편의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 네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인데, 야, 조금만 기다려. 내년에 적금타면 60평 아파트 옮겨갈 텐데.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그러면서 점점 나이가 들면 자기의 꿈이 시들어가고 자기 육체가 시들어 가면 자식들을 봐라. 얼마나 대견스럽나. 그리고 자꾸 희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 걱정마라. 조금 있으면 네 아들이 의사가 되고 조금 있으면 병원을 차리지 않니. 뭐가 되지 않나. 그러면서 인생에 대한 헛된 기대를 그러면서 영원을 향하여 참된 가치가 있는 영원을 향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자꾸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는 마지막 인생을 마칠 때 자기의 살아온 모든 길을 돌아볼 때 보일 듯 말 듯 희미해,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만을 위해서 전심으로 살아온 그런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그렇게 안개 속에 묻혀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흉악한 마귀들과 싸워서 너희들이 이겼으니라. 흉악한 마귀의 권세와 싸워서 너희들이 이미 이긴 증거를 내가 이 교회 현장에서 많이 본다. 그렇게 세상과 싸워서 마귀와 싸워서 이겨서 그 영적인 훌륭한 군사들,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상에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그렇게 마귀와 싸워서 영적으로 승리한 사람들도 뭐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않으면 끝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없이 섬길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이 무슨 말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놀라운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사람이 말씀을 읽으면 그 말씀이 놀랍게 말씀의 원실인이 우리 앞에 펼쳐보였던 사람, 그 말씀이 증거 할 때 불꽃이 튈 것 같은 놀라운 역사로 수많은 어두움의 세력들을 쓰러트리는 그런 권능의 사람들, 어두운 땅,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는 곳에 복음의 신발을 신고 가서 그 어두움의 땅에 찬란한 복음의 권세를 비추어주던 사람들, 누구였습니까? 마음이 하나님만 위해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윗 필드목사가 훌륭한 일을 참 많이 했는데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 졌습니다. 그 사람이 설교를 잘하고 그러면 얼마나 추종하는 무리가 많았겠습니까. 한마을에서 집회를 하고 떠나면 사람들이 3킬로씩 줄을 서서 흔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상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윗필드를 잊어라. 사람들이여, 형제들이여, 세상으로 하여금 윗 필드를 잊어버리게 하라. 오직 그리스만 생각나게 하라. 인생의 삶의 모토였습니다.
매일매일 저는 아침에 죽음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왜 하루를 종말적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주님, 나에게는 오늘 아침에 너는 이제 이 슬픈 많은 세상에 노고를 끝내고 내게로 오라. 우리는 매일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주님, 진작 좀 그러시지. 왜 이제야 그러십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만약에 저를 이 땅에 살게 하시면 제가 오늘도 마음껏 주를 위해서 하루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입니다. 얘기할 때마다 우리 집 사람 섭섭하다고 그러는데 정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뭐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게 이 세상에 많겠습니까. 이 세상에 부귀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살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큰 아파트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매일같이 로데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하면 정말 여러분이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외에 채워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이 정말 만족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신 그 마음속에 그 가난함과 궁핍함, 영원한 것 이외에는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갔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전혀 안 믿었던 사람들도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내 마음이 족할까. 푸른 하늘에 밝은 달 아래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도 인생의 본질을 깊이 생각할 때 무언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 세상에 있는 부귀와 영화와 그리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으로 채워질 수 없는 인생의 본질적인 허전함이 있다는 것을 그들도 눈치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빈 공간은 오직 나만이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 애야, 그곳은 나 자신이 들어가기 전에는 채워질 수 없는 곳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순간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떠나서 주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이게 우리의 고백입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원하고 바라옵건데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지 말게 하시고 주님의 손에 들려서 한번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써주십시오. 그 대신 사용기간이 다 끝나면 망설이지 말고 즉시 폐기처분해주십시오. 남으면 뭐하겠습니까? 망가진 채로 이 세상에 남아서 하나님의 잘살아온 인생의 마지막을 하나님 앞에 욕 드리고 그렇게 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확 쓰시고 사용이 끝나고 이제는 내가 너를 쓰고자 하는 목적이 이루어졌다. 그러면 주님 주저하지 마시고 속히 폐기처분해주시고 그리고 나를 불러주십시오.
하나님이 오늘 이 드보라를 데리고 가신 이 야곱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시는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질 수 없는 이 허기진 영혼의 굶주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것으로도 안 채워집니다. 교회에서 집사가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뭐가 되면 채워지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뭔가 큰일을 이루면 되겠습니까? 그 일이 지나면 또 일이 기다립니다. 결코 그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무엇으로서? 하나님으로서만 채워집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매일 저녁 때 설교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잠들게 하고 자기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어버린 그 설교자, 이것이 바로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꼭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 자신을 정말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자기의 영혼에 그 부르짖는 나는 주님의 손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 자신을 원합니다. 부르짖는 영혼의 외침,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가난한 자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겠습니까? 설마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내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 텐데 그러면 그 가난함이 메꾸어지리라.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어디가 천국입니까? 하늘나라. 이 땅, 지옥, 아닙니다. 어디든지, 어떤 곳이 천국입니까? 하나님이 다스려주시는 그곳, 그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만족함을 주고 주님이 다스려주셔서 그 속에서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기 전에는 마음속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탐욕과 세상에 대한 욕망과 그리고 죄에 대한 욕심과 이런 탐욕, 이 모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추구, 이런 것들이 있는 한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증거를 대볼까요?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 요즘은 안합니다. 옛날에는 가끔 그런 장난을 했습니다. 수련회를 가서 검정 봉투를 다 나누어주고 열어보라고 하면 편지지가 하나 나오면 오늘 쓰고 죽는다고 생각하고 유서를 쓰라고 하면 거의 의외로 자기의 마음이 놀랍게 담담해진다고 합니다. 예전에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직면했을 때, 그때도 의미가 있는 것, 주께서 내 영혼을 지금 취하셔도 이 일은 의미가 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의 심령,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심령으로 섬기는 내 하나님, 심령 전체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팔과 손으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더군다나 입으로 섬기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영혼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입으로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얼마나 가련하게 보시겠습니까. 그것도 듣고 있는 여러분은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심령으로 우리가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도 귀로 듣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심령 깊은 곳에서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섬김이 심령 속에서 드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령 속에서 들려지고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고 이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령이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때 우리는 결국은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바리새인과 위선적인 인생이 되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가혹하리만치 야곱에게 마지막으로 드보라까지 데려가십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날만한 사람이 되니까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한을 품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정말 보통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야곱이 더 깊이 낮아지면서 이제는 드디어 뭐밖에 없습니까? 드보르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드보라조차 없으니까 이제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 한분, 그래서 영원과 온 마음의 시선을 오직 여호와 한분께 고정시키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을 때 그것이 비로소 참된 경배가 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야곱아 네 이름이 야곱이다만 그러나 이제는 네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네 허리에서 많은 국민과 열왕이 나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네 씨를 통해서 메시야를 주어 죄 가운데 고통 하는 온 세상을 내가 구원하리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세겜의 집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만 그것을 버리고 떠났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 집을 버렸을 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런 천국의 기둥이 되게끔 이 야곱을 만드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육적인 생각과 육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쓰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인 것이 귀한 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애야, 이 세겜 땅을 네가 다 버렸지만 내가 너로 큰 영적인 왕국을 이루고 그 나라의 주춧돌이 되게 하리라. 그런데 기껏 하는 말이 하나님 나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주춧돌보다는 보이는 나라의 돌이 좋습니다. 애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까지 그런 상태에 머물러있는 사람과는 부흥을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만나서 무슨 소통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다려라. 아직 멀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때를 기다리시면서 그 사람이 온전한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는 사람, 변화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야곱이 그 후에도 야곱의 인생이 결코 평탄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밑에 보면 자기 큰아들이 간음하는 장면이 나오고 뭐 험상궂은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그때 나타나셔서 자기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계시해주시는데 그게 인생을 계속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부흥은 한번 만나면 그 효과가 잠시 가는 것, 그것은 은혜 받은 것이고 참된 부흥을 만나면 결코 그 수준 이하로 추락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상태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준과 상태는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면서 이 야곱은 이 땅에서 맴돌던 신앙에서 깊이 솟아오르면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엘사바이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식의 상태는 충만했다, 안 충만했다 할 적이 있지만 그 높은 신앙의 수준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베냐민을 애굽에 올려 보내면서- 그가 죽을 것은 뻔 한데 자기 아들도 지금 갇혀서 못 오니까 -하는 말이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면 잃으리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하리라. 전능하신 하나님, 마지막에는 결국은 자식들을 축복하며 죽을 때도 전능하신 하나님, 마지막에 바로에게 가서 인생의 본질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게 네 나이가 몇이요. 내 나이가 일백 삼십년이라. 조상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하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인생의 참모습을 높은 자리에서 관주할 수 있는 이런 수준으로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디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생의 생활에 얼마나 졸렬하고 우스운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언을 하기에 무슨 유언을 합니까? 네가 이 애굽을 나갈 때 나의 유골을 가지고 떠나라, 그 가나안에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벌써 이 세상에 나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으며 돌아가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5장은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을 뒤바꾸어놓는 장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드보라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묻습니다. 성경은 지금 소리치면서 지금 묻고 있습니다. 야곱과 만나주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야곱으로 하여금 인생을 정말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서 그렇게 우습게 여기며 당당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을 제압하며 타이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보다 커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세상 속에서 세상과 똑같이 울고 웃고 그러면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치 세상 속에서 울고 웃을 때 그 눈물이나 닦아주고 거기에 잘해라, 잘해라. 그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위에 높이 올라서 그것들을 비웃으며 때로는 코웃음 치며 그러면서 인생의 참된 것이 그것이 아님을 도도하게 보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은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참새 떼들이 바닥에 내려앉아서 지푸라기에 떨어진 그 낟알을 쪼아 먹기 위해서 머리를 쪼고 막 날개를 벼리고 있을 때 높은 하늘에서 유유히 날개를 짝 펼치면서 날아가는 그 기이한 학처럼 쭉 날아가면 인생의 참모습이 무엇인가를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때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결국은 1,2,30년 믿으면 성자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왜 어떻게 안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그런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 놀라운 제 삼의 세계, 또 다른 세계,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만족, 세상이 파악할 수 없는 또 다른 은혜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의 원천을 소유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애쓰지 않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 애쓰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즐겁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 어때요. 죽음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우르렁 거려?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죽음아 네가 나를 삼키려느냐. 주께서 나를 지키시거니와 설령 네가 나를 삼키려고 할지라도 그때가 내가 다시 사는 때다. 엊그제도 병원에 가면서 친구가 암으로 입원했는데 문병해주고 복도에 어떤 여인이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닦다가 엎드려서 흐느끼고 흐느끼다가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봤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인생이 그렇게 인간의 한계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정말 얼마나 매순간순간마다 심각한지 그 심각한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슬피 울며 고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인생 속에 일어나는 그 즐거움과 슬픔을 가지고 사람을 사로잡고 그것에 의해서 인생을 마구 몰고 가는 것입니다. 어떨 때 왜 못 쫓아갑니까? 두려움 때문에 할 수 없이 끌려 다닙니다. 어떨 때는 그것이 주는 달콤한 유혹 때문에 끌려 다닙니다. 그래서 코가 꿰어서 이리 몰면 이리로, 저리 몰면 저리로 가는 것입니다. 송아지가 시골에서 코 안 뚫은 송아지는 삼부자가 못 잡는다. 한번 경험했는데 와! 크지도 않은 놈인데 코를 뚫기 직전인데 목에다 밧줄을 맸는데 둘이 붙잡아도 소용없어 탁! 하면 저리 떨어지고 저쪽 산으로 달아납니다. 코만 뚫리면 황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작은 아이가 탁! 잡아당기면 이리로, 원하는 대로 옵니다. 그래서 끌고 다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몰아갑니다.
사슬로부터 끊어져서 그래서 이제는 이 세상의 죄와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 한분에게 붙잡혀서 그분에게 매어서 그분은 결코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애야, 이곳으로 가자, 아멘, 하면서 쫓아갑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 어린양의 뒤를 따라가는 자라, 계시록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수 시냇물가로 인도할 때, 이 땅에 살아있는 날 동안에 내가 너를 이번에 이 교회로 보낼 텐데, 거기서 네가 고난을 받아야 되겠다. 아멘,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내 마음이 늘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니까. 그리고 지금도 전심으로 내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만족하게 해주십니다. 그것을 경험 못합니까? 가끔 경험하지 않습니까?
인생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너무나 비참하고 어떻게 해야 할 수 없을 때 고요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내 영혼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주님,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환란가운데 건지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와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 나와 함께 하면 전쟁도 겁 없고 주 나와 함께 하면 어디든지 갈수 있습니다. 불속에라도 물속에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눈을 떠 세상을 보면 기도하기 전까지 문제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 위에 초월해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그 인생을 그렇게 어거하면서 승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거기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지날 때 굴러다니는 해골바가지를 보면서도 의연하게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올릴 수 있고 그리고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그 고통과 시련의 때에도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감사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어주면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이 세상의 모든 권력들과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것들을 한손에 쥐고 있으면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리고 다스리고 어거하면서 하나님의 권세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보여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무엇을 견디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만이 그에게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만족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면서 걸어갈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피리를 불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해골바가지가 굴러다니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무릎을 꿇고 혼자서 생기를 부어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마라의 광야를 지날 때도 그는 하나님을 인하여 노래하고 찬양하고 노래하고 기뻐하고 그러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는 얼마나 놀라운지 하루에 일어나서 일곱 번씩 하나님 앞에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런데 오늘날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1장에서 말한바와 같이 너희가 두 가지 죄를 지었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된 나를 버린 것과 그리고 너희가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물을 저축하려고 한 것인데 그것은 너희가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힘,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참된 능력의 원천을 하나님께 두지 아니하고 세상에 있는 들에 두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수의 근원이 있습니까? 결코 거기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잔뜩 가지고 하나님을 버리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자기의 믿음을 근원으로 삼고, 생수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교만해하고 우쭐해합니다. 벌거벗었으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가난하면서도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착각합니다. 정말 고통 하는 영혼이 영혼 깊은 곳에서 씨름하고 부르짖고 고통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신앙의 정상에서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냄새도 못 맡고 참된 믿음의 도에 맛도 못 봤으면서 마치 기독교에 관한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이에 주님 앞에 갈 날은 가까워오고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영혼 속에는 곤고하고 가난함이 깃든 것입니다. 사람은 인정해주고 이 세상은 그들의 업적을 높이 살지라도 자기의 영혼은 자기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허전하고 허무합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마지막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려놓고 그리고 주님 정말 주님만을 사모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벧엘로 올라 가자를 산 속에 들어가서 쓸 때 내가 그랬습니다. 가슴속에서 복받치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그런 극단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차라리 다 부셔버리고 가져가십시오. 그리고라도 이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야곱에게서 드보라를 가져가신 하나님 내게 주님 말고 사랑하는 것이 남은 것은 데려가십시오. 그것을 가져갈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파할까 주님 그런 것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를 향해 잔인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데려가십시오. 그리고 내가 놓을 수 없거들랑 차라리 그것을 붙들고 있는 내 손목을 끊어서라도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을 이 드보라를 가져갔던 한없이 가난해졌던 야곱처럼 만들어주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야곱과 같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참된 하나님의 부흥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흥 없이 살아가는 그 인생보다는 붙잡을 수 없는 그것을 놓을 수 없을 때 그 손목이 끊어지고 그것들이 없어져버리고 그런 현실감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께 복된 것이 아닙니까. 내 스스로 가난해질 수 없을 때는 주님, 3장을 야곱에게 주셔서 가난하게 만드셨던 하나님, 우리 가운데 불행을 내리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취하게 하는 행복보다는 깨어나는 불행을 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을 잃어버리게 하는 편안함보다는 차라리 눈을 뜨게 하는 고통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런 극단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느냐. 그런 것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충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주님, 바라고 원하옵건대 우리들이 언제나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썩어지면 없어져버릴 그 물질 몇 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주님이 그것을 가져가버리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별로 잘나지도 않은 우리의 건강, 그것 하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차라리 우리를 치셔서 병상에 눕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뭔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부요해져서 그래도 내가 이정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지 못하고 있습니까? 차라리 아무 것도 섬기지 못하게 주께서 길을 막으시기를 바랍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올리고 있는 우리의 기도생활과 알량한 말씀 생활을 인하여서 이정도면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까? 차라리 기도하면서 마음이 부요해질 바에야 차라리 기도하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세리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선과 거짓과 더러움의 껍질을 모두 벗어버리고 그리고 온전히 벌거벗어 빈들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의 만족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참된 만족이시고 그리고 내 인생은 주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더 깊이 기도하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우리가 주님을 이미 믿으면서도 주님 아닌 세상의 어떤 것을 구했습니까. 우물가의 여인과 같이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걸어온 우리의 인생의 시간들을 한없이 꼬치에서 곶감을 빼먹듯이 그렇게 끝없이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고 이제는 우리는 이 지점에 서있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인생은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번만 더 인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수없이 돼내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월은 길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몸 바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만을 깊이 만족하고 주님만을 전심으로 필요로 하는 이런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우리는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게 이 말씀을 듣고 집에 가셔서 오늘 저녁에 꼭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서 정말 이 드보라 마저 잃어버린 야곱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기 위한 그 깊은 슬픔에 가득차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누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상수리나무 아래서 통곡하던 야곱과 같이 그렇게 간구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보기에 정말 저 사람,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의 위로도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 마음의 가난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 자신을 구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보십시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보라, 좌우를 행하고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그 도시에 누구 한사람도 여호와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보라. 그리하면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한가지로 모두 치우치고 그리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우준한 것들을 좇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어두운 이 세상 속에서 빛으로 불러내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빛으로 들어가게 한 그 기이한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 제사장으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 속에 그 빛이 사라짐으로 참된 그 빛을 증거 할 수 있는 광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했던 성도의 그 참된 모습과 얼마나 멀리 떨어진 가운데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질문을 여러분들이 깊이 던지면서 여러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전심으로,
여러분, 제 설교와 말씀을 들으면서 버겁게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갔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이 있을까?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좋다. 일리가 있다. 그것 가지고는 계속 나올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슨 좋은 소리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어르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당장에는 여러분의 입술에 달고 귀에 달지만 그러나 결코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이것이 성경이고 이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여러분, 위로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눈빛 앞에 차라리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을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는 이런 가난함이 없으며 그러면서 부흥을 바라니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차라리 그렇게 정직해지는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훨씬 바람직합니다. 끝까지 이 하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집요하게 훈련의 마당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요. 나의 참 소망’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만족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그 많은 과외비를 내고도 결국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다 버렸습니다. 우상을 버렸습니다. 더러운 자신을 다 정결케 했습니다. 의복을 바꾸었습니다. 그 세겜에서 평화롭고 안락한 모든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모두 다 버리고 그리고 맨 몸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그래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날들을 허허로움 속에 다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무엇을 더 바칠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 바쳤습니다. 모든 것을 다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벌거숭입니다. 이제는 세겜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고 세겜에서 누렸던 그 아름다운 안락한 생활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우상과 드라빔도 이제 모두 버렸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주어지는 상속도 이제는 관심이 없고 그리고 이제는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도 다 소용없습니다. 자식들이 자기를 공경해주는 것도 이제는 자기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뭐가 남은 것이 있습니까? 다 버렸습니다. 기껏 남은 것이라고는 고통 가운데 한없이 시름에 잠겼을 때 할머니 하고 다가가서 말을 건넬 수 있는 그 드보라였습니다. 그것이 뭐가 사랑이었습니까? 그것이 뭐가 잘못된 것이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애야, 드보라도 네가 쳐다볼 사람이 아니다. 온전히 너는 나를 보라. 그래서 야곱으로 하여금 영혼과 인생과 그 모든 시선을 주님, 나는 이 세상에 살아있고 싶은 욕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흥의 미묘함에 저는 깊도다. 진리의 부요함이여 누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측량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그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가는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 깊이 깨달으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약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서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밖에는 없다. 어떻게 해서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이외에는 소망이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집요하게 우리를 쫓아와서 우리의 인생을 사로잡는 이 세상에 대한 욕망,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끊을 수 없습니다. 순간순간 솟아 나오는 이 세상의 욕망과 육체에 대한 이 욕망과 그리고 더러운 정욕과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우리를 사로잡아오는 이 모든 죄에 근본적인 추격으로부터 어떻게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정도가 되면 이미 그 사람 속에 부흥이 온 것입니다. 주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생 마지막 죽기 직전에만 이렇게 할 수 있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바는 부흥을 경험하고 살아있을 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이런 삶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추격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추격을 받을 때는 인생이 부담감을 느낍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추격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쫓아오시나. 내버려두지, 하나님 축복주시는 것 원하지도 않습니다. 참견만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살아가는데 죄의 추격을 받을 때는 스릴이 있습니다. 오늘 죄가 나를 사로잡고 어디로 갈까. 오늘은 안 쫓아오네. 천천히 갈까. 그러면서 말로는 죄로부터 우리가 자유롭고 육체의 정욕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주님의 추격을 받을 때는 불안해하면서도 죄의 추격을 받을 때는 스릴을 느끼면서 금방 쫓아오면 잡을 것을 알면서도 나 잡아봐라. 그러면서 돌아다닙니다. 그게 부패한 인생의 (?)입니다. 죄인의 마음을 잘 압니다. 얼마나 죄가 많으면 죄인의 마음을 잘 알겠습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거치시면서 이제는 죄인의 마음이 손바닥에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자기 딴에는 지혜롭다 그러는데 치졸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안 됩니다. 이 죄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왜 빨리 안 도망가고 천천히 가는지. 죄가 쫓아와서 자기를 포옹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끊고 주님, 이제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중요한 이야기는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러면 그런 죄의 추격으로부터 영원히 끝장을 내겠습니까? 다 끊고 주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우선 안 되는 방법부터 얘기하겠습니다. 자기를 들여다보면 안 됩니다. 들여다보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자기 속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 그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눈앞에 나가서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항복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온 세상을 꺾어놓을 것처럼 법석을 떨다가도 하나님께서 한순간에 손을 놓으시면 죄악의 사슬에 걸려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들여다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환경을 바라보아도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뭔가 하면 원망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도 가득 차 있거니와 감히 발설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에 대한 원망, 환경에 대한 원망, 세상에 대한 원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뭘 어쩠게. 믿음의 싸움을 싸우면서 세상을 누구 편으로 분류를 하는지 자기편으로 분류를 한 것입니다. 중립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 믿음의 싸움은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남의 나라 땅에 원정 와서 싸우는 싸움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세상, 어디로 분류해야 합니까? 우리의 적으로 분류해야 합니다. 우군이 아닙니다. 도와주는 세상이 아닙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난 그 찬송 부를 때마다 주님을 도와주지 않았던 세상을 읽습니다. 왜 우셨겠습니까? 세상이 도와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보들입니다. 원수들을 향해서 싸워야 되는데 네가 그럴 수가 있는가. 나를 위해 왜 안 도와주는가 하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보지, 그것을 계산하면 안 됩니다.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면 끝이 없습니다. 변해주기를 바라시지만 당신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세상이 변해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림없는 것입니다. 뭘 보는가하면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나 위해 고난당신 주 얼굴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린다.’ 세상을 볼 때 버림받을 것 같습니다. 환경을 볼 때 나는 완전히 폐기처분된 사람 같습니다. 쓰레기 같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그 고난 받으신 형상을 바라볼 때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는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눈을 들어 똑바로 보십시오. 나를 위해 못 박힌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림이로다. 그가 찔리신 그 가시면류관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투구를 쓰여 주셨고 그가 옆구리에 창에 찔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배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창끝이 그분의 심장을 터트림으로 말미암아 그 피로 우리의 온 몸을 적셔 구속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라.”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우리를 위해 주셨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하는 자를 사랑해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로서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지금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 줄을 그것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회개를 하고 돌아와서 주님밖에 없나이다. 그런 때만 하나님이 그래. 이제는 내가 사랑해주지.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34장에서 그 많은 방탕한 세월을 보내며 하나님 없이 살 때도 주님은 야곱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없이도 나는 이렇게 씩씩하게 잘 살아갑니다. 할 때도 하나님은 야곱 없이 사실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야곱 없이 살수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었는데 하나님은 우리 없이 살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야곱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되는 것이 관념론적으로가 아니라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실하게 증명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깊이 바라볼 때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회개하지도 않고 있는 나도 이미 사랑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 고통하고 있는 나와 함께 고통 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 비로소 어떻게 합니까?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그 은혜 다 못 갚겠네. 내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려야겠다고 하는 그 마음, 주님의 그 놀라운 십자가를 보면서,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34장을 헤매는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반짝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그 흉측한 십자가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십자가를 묵상하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부흥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34장 우상을 들고 다니면서 살아가는 그 야곱의 신앙을 여전히 사랑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언제까지? 여러분의 눈을 들어서 세상의 헛된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마음깊이 녹아서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시며 세상은 나의 기쁨이 아닙니다. 고백하고 주님, 아직도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가져가십시오.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셨던 것처럼 나는 내 인생이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촉구하고 타이르시고 깨우치시고 34장으로 몰아넣으시고 그리고 34장 마지막에서 고통을 받게 만드시고 신음하게 하십니다. 고통하게 하시고 마지막에 우리에게 그 고백을 받아내십니다. 하나님께서 간절히 사모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화: 인디언 마을의 추장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 회심을 했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바치고 싶어 생각하던 끝에 선교사님이 선교하러 다니실 때 편하게 다니시라고 좋은 말을 한필 갖다 바치지만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하자 또 생각 끝에 자기 왕국의 보물들을 갖다 바치지만 역 시 그것도 하나님이 안 받으시자 이번에는 자기의 왕관을 벗어 선교사님 께 가서 왕국을 바치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라도 안 받으신다고 하니 엉엉 울면서 이것은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밖에 없다고 하자 선교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목숨을 원하신다고 하면서 성경구절을 읽어주면서 네 마음을 나에게 달 라고 했다는 내용)
미가 선지자가 깊이 깨닫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그 깨달음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천 천의 수양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그것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너희들아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느냐 전심으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주님, 마음을 모두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섬김과 헌신이 결코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야곱의 이것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다 드렸는데 하나님이 안 된다. 그것 마지막으로 있는 것, 그것 나에게 내놓아라. 그러면서 드보라를 데리고 가시면서 나중에 가장 깊은 속에 있는 그 하나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야곱아, 이것을 잘 기억해라. 이것을 소유하는 분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누구에게서도 이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너에게 축복으로 준 모든 동물과(?) 그리고 모든 가축과 우양과 집과 아름다운 땅과 수많은 금과 은을 모든 사람에게 다 내어줄지라도 심지어는 네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했던 드보라까지 내어줄지라도 아무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네 마음이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