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영광과 회복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눅19:46) 2004. 2. 1 주일오전 1
2. 성령이 임하시면(행1:8) 2004. 2. 8 주일오전 15
3.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눅3:1-2) 2004. 2. 15 주일오전 25
4.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10:12上) 2004. 2. 22 주일오전 40
1.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19:46)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기사가 함께 묶여져 나옵니다.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의미적으로는 서로 치명적인 중요점들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두 사건을 하나로 엮어서 오늘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교훈들을 한번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때가 있었지만 이때에는 특별히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예수님께 종료나무가지를 펴서 꺾어 바닥에 깔고 옷을 벗어서 양탄자처럼 펼치면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기 때문에 마태복음에는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지도 모르는 채 따라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따라왔던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들을 배고픈 그 가난과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서 해방을 주실 수 있는 그런 지도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렇게 열렬하게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열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 왜 예수님 안에 하나님도 나타나셨고 그리고 예수님 안에 이 세상에 사는 우리도 어떤 존재인지가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어째든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갔다가 예수님께서 갑자기 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시고” 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베클라우스덴”이라고 하는 동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어에 “cry”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엉엉 우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엉엉 우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까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끊임없는 논쟁과 핍박, 도전, 심지어는 예수님의 생명을 노리는 악한 자들에 의하여 둘러싸이신 생애였습니다. 한 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런 대적들에게 에워싸이시면서 일생을 사신 생애였습니다. 사람들도 그랬고 원수 마귀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예수님께서는 약해지신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비록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갖지 않으셨고 특별히 재력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살아계셨지만 그러나 불구래 강렬한 의지와 그리고 지도력을 가지신 분이었고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철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에 보면 우셨다는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가장 연약한 자처럼 통곡하며 우시는 장면이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우신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더 이해가 안 갑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셨던 이유가 성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희랍어 성경에는 “에이도”이라고 하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것은 분사입니다. 그래서 보신 후에 우셨다기보다는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에이도이라고 하는 동사는 보기는 보는데 그것이 육신의 눈으로 보아서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분별하는 육체적인 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배후에 있는 사실이나 어떤 특징을 꿰뚫어보는 지적인, 정신적인 통찰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을 보셨지만 보신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거기 예수님을 따라오던 모든 사람들이 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성을 직관적인 통찰로 보시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그 성 이면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사실과 의미를 통찰하시고 거기서 얻어지는 결론 때문에 예수님이 통곡하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부분을 읽어도 예수님이 왜 우셨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이어지는 독백과 같은 예수님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암시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네 눈에는 숨기웠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타내는 평화에 관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평화는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샬롬, 혹은 셀렘 이라는 단어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희랍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평화가 무엇인가 물을 때 그들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불렀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로마의 평화라고 불리는 팍스로마나시대 약 300년 동안은 로마에 전쟁이 없는 그런 시대를 가리켜서 로마의 평화의 시대라고 불립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의 상태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이 예루살렘도 역시 평화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볼 때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람들 사이에 화목의 상태,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가 전쟁이 없던 시절에 나라가 평화로웠습니까? 물론 사람들의 외적인 삶은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신과 이 모든 것들도 평화로웠는가 하면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북이 분단된 이래로 전쟁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누구도 지금의 시대가 평화라고 말한다면 생각 있는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 못지않은 사회적인 부패와 그리고 전쟁 때 못지않은 인간성의 불안, 그리고 폭력, 그리고 타락한 문화와 그리고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우리는 이미 예전 시대의 평화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때문에 각 사람의 영혼이 평화롭고 그 평화로운 상태에서 사람들과 행복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평화롭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그런 내적이고 외적인,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평화를 알았으면 좋았을 뻔 하였는데 지금 네 눈에는 가리웠도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후로부터 약 40년 후에 다가오게 될 한 역사적인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런 사건이 40년 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고 예수님 홀로 그 평화롭게 서있는 예루살렘이 40년 후에 당하게 될 그 비참한 종말을 미리 보셨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끊임없이 로마에 대항하는 동기와 반란을 일으키니까 로마는 후에 황제가 된 ‘디도’ 라고 하는 장군을 보내서 예루살렘을 복종시키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에 모이게 되었고 그때도 유월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이제 로마에 결사항쟁을 하게 됩니다. 그때 로마는 디도 장군을 보내서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고 예루살렘을 공약을 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점점 포위망은 좁혀져왔고 그리고 보급로가 차단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에서 전대미문의 굶주림을 경험하게 되고 심지어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이까지도 삶아먹는 사태가 발생되었다고 하니까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그러다가 70년 6월 14일에 예루살렘에 있는 안토니오 요새가 로마에 의해서 점령이 되게 되고 7월 6일 날은 성전에서 늘 드리던 희생제사가 더 이상 제물이 없어서 그치게 됩니다. 그리고 8월 27일에는 예루살렘 성의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문이 불타게 되고 결국 그 후로부터 약 한달인 9월 24일 날 이날이 바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고 이때에 예루살렘의 전 도시가 함락되게 됩니다. 한낮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자행되었고 그리고 수많은 부녀자들이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때 광경을 역사가들이 아주 생생하게 적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은 아주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역사의 시대 1500년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섰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한 장소를 지정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경배를 받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약속이었고 그 약속과 함께 이제 약속의 도성이 이 예루살렘이 되게 됩니다. 이 예루살렘은 그런 의미에서 성전을 품고 있는 신적 통치의 상징이었으며 그 예루살렘 약속의 땅이 되었고 그 약속의 땅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스라엘 나라의 왕권이 행사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그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과 권위자들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가 바로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그리고 그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이 단어, 구약에서 이 예루살렘이 뭘 의미하는지는 하나의 미스터리인데 그런데 여태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게 이루살렘, ‘이루’는 성이고 ‘살렘’은 아까 이야기한 것대로 평화인데 평화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래도 많이 받아지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이름 자체도 평화의 성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과의 평화가 중요했는지 그 평화의 성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추측컨대, 그런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어떤 신념이 있었는가 하면 ‘모두 파괴되고 망해도 예루살렘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비록 로마에 의해서 국권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곳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거기를 자치구처럼 이렇게 어느 정도 자유권을 주면서 로마가 통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40년 후에 그렇게 비참하게 멸망당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보셨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통곡을 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가리웠도다.” 라고 되어 있는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에클리베”라고 하는 단어인데 누군가가 와서 볼 수 없도록 시야를 가리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명백하게 다가올 사실 조차도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많은 특권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특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큰 특권이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없는 권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은혜도 주시고 순종하며 살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이런 다양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수단들입니다.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이것들을 잘 활용할 때는 교회도, 그리스도인 개인도 영적인 눈이 뜨여져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부분적으로는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인도받을 것인지 하는 것도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서는 너라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다시 말씀드려서 이 세상에는 많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과 그리고 지적인 눈멂 속에서 존재하는 도시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시고 그리고 그들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고 앞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성은 그야말로 평화의 성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성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많이 계시해준 성이었고 그리고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은혜의 수단들을 하나님이 내려주신 도성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제사장들이 있었고 제사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의 뜻을 터득했습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나라의 법과 제도가 살아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예루살렘이 독점하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도시가 잠들어있어도 예루살렘은 그렇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의 수단과 특권들을 가지고 깨어있는 도시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혼의 현주소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또 앞으로 우리들이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 조차도 알고 있어서 오히려 예루살렘에 딸린 많은 도시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깨우는 그런 도시가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들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알 수가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가슴 저미는 사랑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구원받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그 성품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습니다. 불과 눈앞에 닥친 잠시 후의 일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면 마지막에 지옥 형벌에 떨어질 운명이라는 사실도 여러분들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가르쳐주었습니까? 누군가 그것을 생각나게 만들어주었습니까? 눈에 보이는 인생이 전부가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눈먼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그 모든 죄와 어두움에서 구원해주시려고 했던 그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전해주었고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고 우리 인생에 모든 불안과 고통,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이 모든 괴로움들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진 것이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세상에서 전쟁이 없는 상태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놓으신 목적은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과의 불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그리고 인간의 참된 본분이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그것이 평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고 그리고 이 평화를 전하고 외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느끼고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들,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 자유로운 예배, 누구의 억압도 받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따라서 주님의 진리를 지키며 살 수 있는 이 신앙의 자유, 그리고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온갖 신령한 지혜들과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게 하는 이 모든 목양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평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단들입니다.
저는 오늘도 자라나는 우리 교회 어린 세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그리고 그들을 잘 기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덜 먹고 덜 입어야지 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시대를 보십시오. 거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막대 먹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 같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여호와와 여호와의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알게 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라도 있었습니다. 땅도 있었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모든 것들을 소유했지만 그 자라나는 세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그분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참된 지식을 물려받지 못했더니 그들은 그 좋은 땅에서 패괴한 삶을 살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그런 불순종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지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것인지 그 모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들 위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추구 속에서 그 지식을 풍성하게 하고 더 많이 보태어서 그래서 아직까지 알지 못했던 복음의 비밀들을 더 많이 터득해서 그것으로 자녀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가르쳐야지 됩니다. 건물과 땅, 많은 재산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평화를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 가득 차고 그 사람들의 자녀들이 새싹처럼 자라는 곳,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서 너라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늘 눈에 가리웠도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눈에 이런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이런 영혼의 상태를 보지 못하도록 그렇게 가린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라는 것입니다.
70년에 망하기 될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자녀들을 땅에 매어 치게 되는 그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텐데 그들은 다가온 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전혀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이어서 나오는데 예루살렘이 있는 성전으로 가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 예루살렘의 심장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 하나님이 좌정하셔서 그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당신이 세워놓은 모든 제도들을 통해서 당신의 왕권을 펼치시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가자마자 예수님께서는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는 그런 일들을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비폭력 평화주의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수많은 반대자들과 생명을 노리는 대적 자들에게 에워싸인 채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허리춤에는 단 한 자루의 칼이나 창하나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잡히시던 날밤에 자기를 잡으러온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버리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검을 꽂아라.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하시면서 그 귀를 붙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체포되어 스스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러던 비폭력주의자인 예수님이 오늘 여기에서 일전의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그래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고 비둘기파는 자들의 자판을 뒤집어놓으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앞에 나왔던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펑펑 우셨던 예수님의 그 마음과 연결이 되는 장면들, 왜 평화를 잃어버리고 잠시 후 다가오게 될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한 채 거짓된 평화에 속은 채 살아가고 있는 그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그 예수님의 마음은 이 성전에 들어오게 되자 그들이 그렇게 잠들어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수님이 이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심판을 눈앞에 둔 예루살렘 그 한가운데는 잠들어있는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뒤엎으면서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배경은 이사야 56장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39장 까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외치고 그리고 40장서부터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씀하시는데 53장에서 메시야가 오셔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 백성들을 회복시키셔서 말씀하신 후에 56장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메시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게 바로 성전에 일어나는 변화인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될 때 그때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왜냐하면 나의 한 집은 그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셨던 이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 만민이 와서 기도한다기보다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민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 그것이 되기를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성전이 예수님의 이런 의도, 하나님의 이런 약속을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만민을 위해서 선택된 백성들이 기도하고 선택된 만민이 그 백성들을 위해서 간구하며 그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었더라면 그러면 40년 후에 이런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이 임할 리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복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심판을 통해서 자기의 백성들을 정화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모아서 거기서 그들을 그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 그 영혼에 부흥이 일어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그들로 다시 새로운 신앙의 씨를 퍼트리심으로 자기의 교회를 보존하시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보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화시키셔야 할 정도로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패하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정화의 작용을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비둘기파는 자들이나 이런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원래 제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제사를 드릴 때 자기가 드리던 양, 이런 것들을 가지고 갑니다. 이게 재물이 되면서 그 주인을 자꾸 쳐다봅니다. 한번 이것을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그 양이 자기의 죄를 대신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피투성이가 되고 그래서 배가 갈라지는데 거기서 창자와 이 장기들이 분해 됩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이 죄인은 자기가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순결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법도 복잡한 게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곳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까 그 짐승들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와서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하듯이 재물을 사기 시작했고 그게 결국은 성전 뜰까지 들어와서 결국 매점을 만들어서 팔게 되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는 세 나라 돈이 함께 통용되고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당시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돈과 그 전에 있었던 헬라의 돈, 그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유하게 사용하던 히브리 돈, 이 세 가지가 함께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랍 돈과 로마돈은 명목가치가 실질가치보다 높은 화폐였습니다. 그러니까 은돈 100원, 그러면 사실 녹이면 그 은이 100원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 돈 세 개는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는 돈은 진실한 돈이었다고 믿었고 두가치가 서로 차이가 나는 화폐는 이게 가증한 돈이라고 생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 돈, 로마 돈으로 돈을 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면서 성전에 바칠 때는 돈을 바꾸어서 연보를 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착복들이 있었는지는 사실 역사적으로 어떻게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면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뭔가 이들 속에 얼마나 많은 이문을 남기고 착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이런 제도 사이에 깃들어있는 인간의 탐욕을 알게 하는 대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교회 안에 깃들어있는 이런 사업적인 제도,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순수하지 못한 탐욕 하는 인간의 마음, 이런 것들이 교회의 영성에 어두움을 가져왔고 그래서 결국은 그 탐욕과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바로 임박하게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도 깨달을 수 없는 잠든 성전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제도 토요일이면 한 주간에 교회에 지출된 돈을 가지고 와서 저에게 결제를 받습니다. 결제를 하면서 한숨이 나왔습니다. 아니 이 작은 교회가 운영되는데 어쩜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나. 매주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에 들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있으면 내 생활비밖에 더 나가겠습니까. 그런데 열심히 일하니까 이렇게 많은 돈들이 지출이 되는가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감사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교회는 게으른 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똑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야지 됩니다.
엊그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장실에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들어가서 우리 아들에게 애야 네 아빠가 오늘은 게으른 사람의 삼일 치 삶을 살았다. 너무 뿌뜻했습니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서 힘을 주었더니 허리가 아팠습니다. 그렇게 살아야지 됩니다. 뭘 하는 게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고 계속 인생만 허무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아니 열심히 살면서 허무하다고 그래야지 내가 보기에는 진짜 허무합니다. 밥 먹고 그냥 소화시키고 그냥 살고 그것도 소화도 못해서 소화제의 도움을 받으면서 삽니다. 그게 인생사는 것인지, 목표가 정해지지 않는 사람은 뭘 해야지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삽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누구를 위해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지 됩니까? 치열하게 살아야지 됩니다. 왜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들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까지 살려두실 것인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태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분, 삼 인분을 살아야지 됩니다. 밥만 이 인분, 삼 인분을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 인분, 삼인분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신발도 더 빨리 닳고 종류도(?) 훨씬 더 많이 쓰고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달에 주유소에 기름값을 결제할 때 기름값이 많이 나올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아, 이 전도사님들이나 목사님들이 얼마나 심방을 많이 다녔으면 이렇게 기름값이 많이 나왔을까. 성도들이 참 유익을 얻었겠구나. 기름값이 조금 나오면 우울합니다. 얼마나 놀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결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능력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면 순결입니다.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시골처녀가 아무도 없는 산속에 화전민처럼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 남자를 못 만나서 순결한 게 아닙니다. 순결은 이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나를 유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문과 명예로 유혹을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아내가 될 날을 기다리면서 순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순결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답답한 게 우리는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안한다. 우리는 순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이기 때문에 그것도 안 한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럼 다른 것을 얘기하십시오. 우리가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안하지만 이것은 한다.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세속적이기 때문에 안 하지만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서 한다. 하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바쁘게 교회가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교회의 도움을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이 일해야지 되고 그리고 불철주야 우리는 애쓰고 수고하고 고생해야지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이고 그것이 바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휴식이라고는 없는 생애, 그리고 어느 곳이든지 그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어느 곳이든지 그분의 눈길이 닳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닳지 않고 섬기는 그분의 손길이 닳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섬기며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순결입니다. 이들이 그 비둘기를 파고 돈을 바꾸면서 거기에서 얻게 되는 이익에 눈이 멀어서 정말 마음으로 순전하게 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고 그리고 이 성전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고 이들에게 이 평화를 외쳐야 되는지를 점점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환경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으로도 그렇고 제 경험으로도 그렇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살고 기도의 영에 붙잡힐 때 환경은 그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한가하게 예배당에 나와서 7-8시간씩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시간은 환경이 허락을 안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그 기도의 용솟음은 환경이 막을 수 없습니다. 걸어가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신호대기 중에도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귀저기를 갈아 채우면서도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환경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과 같은 그런 불결한 어떤 것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을 더럽히고 순결을 빼앗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사람이 주님의 일을 많이 하고 능력이 충만하다고 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것입니다. 왜 더 없이 무능한 것은 대부분 나쁜 것입니다. 왜? 무능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호미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많이 일하겠습니까, 아니면 굴착기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많이 일하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결할 때에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이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가슴아파하시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가?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이 도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도시인가? 정말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그의 율법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거룩한 도성이 되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깨닫고 이 성전이 예루살렘에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백성들을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사모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주는 것이 이 성전의 사명이었습니다.
똑같이 원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이익 집단이나 사교단체가 아닙니다. 와서 문화시설이나 엔조이하고 사람들과 함께 여기서 사교적인 기쁨이나 나누는 그런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곳, 실제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지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병든 자를 싸매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저는 자를 일으켜 세워서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고쳐서 이 세상에 내어보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임종을 앞둔 노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 심지어 배속에 들어있는 태아까지 우리가 그렇게 그 자녀들에게 인간의 참된 본분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은 그 평화가 우리 안에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 속에 가득 배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것을 소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것을 보면 교회는 결코 자기만족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평화를 누렸지만 이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 평화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기도하면 돌아올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직접 흐느끼는 마음으로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떻게 섬기셨는지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과의 평화가 인생의 근본이고 이것 없이는 불행하다. 내가 이 평화에 대해서 너희에게 한수 가르쳐줄 테니 마음이 있는 사람은 우리 집으로 오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황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으셔서 엎드려 자기 발에 입 맞추는 사람들에게 평화에 관해서 훈수를 드셨습니까? 아닙니다. 대적들로 에워싸인 도시에도 가난한 농촌에도 예수님은 각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과의 이 평화를 눈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는 뜨게 하시고 그 더러운 문둥병자들을 손을 얹어서 모두 고치셨습니다. 주린 자들은 먹이시고 아픈 자들은 싸매시고 그렇게 예수님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을 하나님과의 평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일평생을 가시고기처럼 사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눈물로 전하시던 그 평화,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의 옥체를 주신 그 이유도 바로 이 평화를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이 하신 그 일을 우리 교회에 남겨두시고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위해서죽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정말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안다면 교회가 이렇게 냉랭하고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을 책으로 쓴 제 책을 읽고 한 14년 전에 한 학생이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런 내용을 책으로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그래서 근처에 있는 큰 교회당으로 갔더니 교회가 미제 열쇠로 잠겨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를 보십시오. 어쩜 교회가 이렇게 냉랭할 수가 있습니까? 주일날 이 시간이면 교회당이 매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지만 그러나 주일날 11시 예배드리고 사라지면 교회는 그야말로 죽은 송장들이 모인 곳처럼 조용합니다. 새벽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울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울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 이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한다면 아마 부흥은 멀지 않을 것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해갈함이 없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름이 없는 이 세상에 자원을 가지고 행복해보려고 애쓰는 이 세상을 정말 어떻게 도와야지 되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순결해져야지 되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이 헌신하여 하고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이 죽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교회가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새벽마다 이런 복음의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평화를 잃어버린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통곡하셨던 예수님처럼 나라와 도시와 그리고 이 타락한 땅과 그리고 무력해진 교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고 그 기도소리가 새벽 밤하늘에 메아리 쳐진다면 아마 이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셨습니까? 결국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없는 자력으로는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백성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거기서 자신의 몸을 깨어 그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의 길을 여셨습니다. 아들은 피를 흘렸고 아버지는 그 피를 받으시고 성령님은 그 피를 우리의 가슴에 바르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에서 자기를 쪼개어 흘린 그 성자 예수의 피를 아버지가 받으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는 그 눈물의 기도를 받으신 후에야 그 피의 보혈을 받으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지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수많은 섬김, 기도하지 않는 수많은 하나님을 향한 야심 찬 계획들, 기도하지 않는 그 수많은 지식들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를 얼마나 교만하게 하고 결국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5년 전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저녁 10시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잠자리에 들었고 그때 우리 세 식구가 단칸방에 살 때였습니다. 10시 반에 깼습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서 나머지 우리 두 식구는 자고 혼자 성경을 폈는데 바로 여기였습니다. 오늘 설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성경을 찬찬히 이 부분을 읽기 시작하는데 겉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설교가 열렸습니다. 오늘 설교는 그 중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책상에 엎드려서 얼마를 가족들이 있으니까 울음을 억제하면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기도하는 시간으로 잘 모르는데 어째든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 이것을 써서 정리를 해야지 되겠다. 그리고 깨알 같은 정리를 했습니다. 정리를 모두 마치고 났을 때 아침 8시 반이었습니다. 제 생애를 움직인 성경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 땅에 있는 우리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가. 주님은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서 이 세상을 섬기게 하시려고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여기에 남겨두셨는데 주님의 그 마음을 품어야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지 세상의 마음을 품었는데 어떻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거기서 몇 푼 얻으려고 하는 장사치들이 교회에 돌아다니는 이것이 바로 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많은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까? 시시때때로 은혜를 주시고 시시때때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원기를 공급해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쉽게 뒤로 물러가고 그리고 은혜의 흔적만 남고 타다만 나무토막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그 은혜의 불에서 멀어지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이 모든 원인이 여러분들 안에 있는 죄와 그리고 순전하지 못한 마음 때문입니다.
인천 앞바다에 가면 부두가 있고 거기 크고 작은 배들이 묶여 있습니다. 배가 먼 바다를 항해하려고 할 때는 큰 배든지 작은 배든지 먼저 부두에 묶인 밧줄을 풀고 닻을 올린 다음에 출발을 합니다. 만약에 부두에 묶인 줄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발동을 걸어서 엔진을 풀로 가동한다고 하더라도 배는 아마 일 미터도 앞으로 진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받아야 할 능력도 많고 그리고 주셔야 할 은혜도 많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먼저 끊고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이 은혜의 바다에 기도의 항해가 가능해집니다. 주님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에서 위대한 부흥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의 피어린 기도의 헌신을 통해서 부흥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찰스 피니라고 하는 19세기의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로체스타라고 하는 시에서 1830년에 복음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는 집회를 하면 한 도시에서 6개월씩 그렇게 매일 집회를 했습니다. 세 교회가 있었는데 두 교회는 목사는 둘이 서로 고소를 해서 법정에서 싸우고 있었고 한 교회는 교인들이 목사님을 내어쫒으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서 피니가 복음을 외치고 설교할 때 6개월 동안 10만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했습니다. 그 등 뒤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피니를 위한 처절한 기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벨크로리 라고 알려진 사람인데 이 사람은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사명을 주셨는데 너는 일생 찰스 피니를 위해서 기도하라. 그때부터 이 아벨크로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 찰스 피니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습니다. 로체스타에서 집회가 벌어지고 있을 때 아벨크로리는 하루에 14시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14시간을 무릎을 꿇고 로체스타 시에 부흥을 주시고 외치는 피니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 잠들어 있는 그 영혼들을 깨우도록 기도했을 때 그때 하나님이 10만 명의 사람들을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로체스타 시 한복판에 십자가의 깃발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1613년에 아일렌드에 얼스타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큰 부흥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건은 부흥이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니까 장사가 안 되니까 장사하는 무례한 7명이 와서 이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서 망치와 각목을 들고 왔는데 그 사람들이 제임스 글렌딩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 일을 위해서 많이 기도했는데 그 사람들이 그 집회에 왔다가 성령이 임하시니까 졸도해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이 부패하고 쓰레기 같은 이 세상에 인간들이 수없이 분을 바르고 사회를 고치려고 노력을 해도 궁극적인 대안은 되지 못합니다. 이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와 잠들어있는 교회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은 하나님 자신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책망하고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회심과 중생의 강력한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 그것 이외에 또 다른 대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과 교회를 보십시오. 너무나 안일하고 잠들어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세상을 향한 주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하나님 앞에 살수 없어 그렇게 아파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회복시키셨을 때 그들이 다시 받은 은혜로 만족하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치는 순결한 삶을 포기하고 그리고 뒤로 물러가는 반복되는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항상 죄인들을 위한 눈물이 있었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손과 발이 되어서 섬기시던 땀이 있었습니다. 섬기시던 예수님의 등줄기는 언제나 땀이 흘러내렸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습니다. 왜 어두운 세상에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할일 없이 그렇게 허송세월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저 같은 죄인이 보기에도 그렇게 가슴 아픈데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심판 날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의 그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또한 피의 생애가 아니었습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이제 누구의 삶입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화를 누리게 된 여러분들의 인생이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소유도, 우리의 젊음도, 우리의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재능까지 예수님의 것이 아닙니까?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하나님이 우리 어두운 세상에 묻혀서 똑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별들처럼 그렇게 빛나는 존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 나아왔던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의 은혜를 받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을 찬송하고 예수 없이 살았던 자신의 지난날들에 대해서 회개하고 그리고 새사람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탄원과 함께 울부짖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면서 부르짖는 그 회심의 울부짖음이 정오의 하늘아래 메아리칠 때 하늘의 천사들은 기뻐서 일어날 것입니다. 어리석고 형식적인 수많은 신자들과 아직까지는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영광스러운 회심의 역사에 도달하기위해서 그렇게 정오의 하늘아래 회심하는 영혼들의 울부짖는 회개 소리가 메아리쳐 지기 위해서는 이른 새벽 깊은 밤에 이 교회당 속에서 그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울부짖어 기도하는 소리가 메아리쳐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집이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이 모르는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까? 왜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닌 이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의 가슴에 심으시고 미끄러진 우리를 그 수렁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영혼의 깊은 가운데서 건져내셔서 빛의 나라 안에서 살게 하시고 계시와 지식의 빛을 주셔서 짐승과 같은 삶 속에 버려두지 아니하고 성도답게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모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만민을 위해서 살게 하시고 그 평화를 지키고 그래서 교회를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정말 이번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 은혜를 굳게 붙들고 그리고 이 평화를 위해서 섬기고 그러기 위해서 마음을 찢고 하나님 앞에 교회의 부흥과 잃어버린 영혼들의 참된 구원과 우리 어린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성령이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또 그분을 죽음에서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껏 들은 것도 없고 본적이 없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뵈면서 제자들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리고 그분이 자신들에게 가르쳐준 모든 진리의 말씀들이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잘못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뭘 해야지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기한이 차시자 하늘로 오르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왔던 한 가지를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심이 이때이니까?” 희랍어 성경에는 “그 나라로 이스라엘에게로 회복시키실 때가 이때이니까” 되어 있으니 거기서 말하는 그 나라라고 하는 것은 다윗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왕국은 지금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지금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식민지 국가였지만 그때는 주위에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때가 되면 철철이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신들과 예를 표하는 각 나라의 군신들로 왕궁에 줄을 이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강력한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갈갈히 찢겨버린 꿈이 되었고 그리고 그들은 이제 로마 나라에 의해서 억압받고 박해받는 소수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꿈은 메시아가 나타날 것인데 그 메시아가 그 다윗 왕궁의 화려한 영광을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주는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을 뵈면서 제자들은 여전히 그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인가 라고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하지 아니하시고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두신 것이오,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 너희들이 지금 관심을 갖고 나에게 물어보는 것과는 다른 대답을 내가 너희에게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견해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견해의 차이는 제자들의 생각은 이스라엘 육적 나라를 부강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 되게 하신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강하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구약시대 때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예표로서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신 것일 뿐이고 오히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다음 부활한 다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이루어질 나라는 그 성령이 오셔서 너희들을 나에 대한 증인으로 삼아서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영혼을 살리고 새사람이 되게 하셔서 그래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새 왕국, 즉 영적인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지면에 가득 채우는 이야기들은 교회에 관한 칭찬과 그리고 교회에 관한 욕입니다. 저는 이것을 언론적 당금과 채찍이라고 생각하는데 신문을 펼쳐보면 곳곳에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와 함께 또 교회가 양로원도 짓고 뭐도 하고 하면서 착한 일을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권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신문에 따르는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착한 삶을 참 강조합니다. 그래서 정말 착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었으면 이제 욕도 좀 하지 말고 그리고 예수 믿었으면 사람들과 살면서 좀 사람들과 살면서 손해도 보고 예수 믿었으면 좀 사람들에게 온유하게 대하십시오. 탐욕으로 가득 찬 삶이 예수 믿기 전의 삶이었다면 이제는 좀 그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지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좀 돕고 불쌍한 이웃도 좀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직하게 기업 활동을 하고 또 탐욕 속에서 근로자 생활을 하고 이러던 사람들은 좀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추구해야지 될 때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우리에게 많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그렇게 착한 사람 그리고 평화로운 삶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정말 평화가 올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그런 착하고 평화로운 삶을 통해서 감동을 받겠지만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평화주의자적인 삶은 짐승의 먹이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인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짐승들의 세계를 한번 보십시오. 누구든지 만나면 물어뜯고 죽여 버리는 맹수들이 사는가 하면 일평생 살면서 풀밖에 뜯지 못하는 초식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런 평화로운 초식동물 때문에 동물의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풀을 뜯는 양을 보면서 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토끼 잡아먹은 것을 뉘우치는 광경을 본적이 있습니까? 너무 심한 비약일지 모르지만 죄는 어느 정도 사람을 짐승처럼 만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맹렬함이 있습니다. 결코 이 세상은 그런 비폭력 평화주의자의 삶, 그리고 정말 착하게 살아가는 삶, 이것 하나의 인해서 세상은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인간이 누구인지를 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이상이 얼마나 착합니까? 열심히 벌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많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조금 이렇게 골고루 나누어먹고 평화롭게 사는 그런 시대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은 어떻게 하든지 이 복을 좀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깊이 결심하면서 어떻게 국수공장이라도 차려서 이 다음에 통일이 되고 나면 우리가 배곯던 민족들에게 무슨 할 이야기가 있는가. 별 생각을 다하면서 연구를 했고 실제로 북한을 넘나드는 그 사역자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결론은 세워놓아도 누가 먹는지 그 사람들만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서 어마어마한 양의 밀가루를 내놓았더니 나중에 북한 당국에서 표창장이 날아왔는데 김일성 수령 별장을 수리하는 사람들에게 애국 충정의 마음으로 국수를 만들어주어서 고맙다고 훈장이 날라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 먹이라고 주었더니 김일성 별장 고치는 사람들 간식 만들어준 것입니다. 유치원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유치원을 만들어주었더니 당 간부 자제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참 너무 안타깝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번 2월 달에 제가 중국을 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돕는 길이 없을까 생각을 하면서 현장을 가서 보려고 제가 떠납니다. 어째든 간에 정말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늘진 곳에서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나누면서 사는 그 삶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잘 차려놓은 교회당, 황금으로 만든 강단에 앉아서 높은 의자에 비단옷 입고 앉아서 진리는 그런 게 아니지 하고 변론만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눈먼 자 뜨게 하고, 병든 자 고치고, 눈물을 흘리는 자 그 눈물을 씻기시며 일생을 섬기는 자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노예였습니다. 가난한사람들의 노예였습니다. 병든 자들의 종이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의 머슴이 되어서 일평생을 그렇게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착한 삶을 우리고 본받아야지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법을 말씀하시는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그러나 성령이 너희 위에 오실 것이오,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너희가 예루살렘에서도 온 유다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과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의 삶은 영적 전투의 삶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슬픕니다. 그들이 눈을 떠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삶의 한복판이 피 튀는 영적인 전쟁터라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그들이 그렇게 안일하게는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일날 예배에 참석했다는 이유 하나로 양심의 가책을 달래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혼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또 일주일동안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예배 속에서 전혀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는 비인격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일관하는 이런 삶으로는 도저히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기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씨름은 희랍어로 ‘팔레’인데 이 팔레는 고대 희랍과 로마의 특히 로마의 격투기였습니다. 그래서 맨주먹으로 사람들이 콜로세움에 모여서 싸우고 그래서 한사람이 한사람을 피 터져 죽이기까지 싸우는 그런 격투기의 곳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그런 생사를 건 격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 그 씨름이 피가 흐르고 육체가 찢어지는 그런 종류의 격투가 아니라 영적 전투라는 것입니다. 오직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모두 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삶을 파괴시키고자 하는 도전하는 세력들이고 또 거듭난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는 이 악의 세력과 내통하는 죄와 부패라고 하는 첩자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부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없으면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들의 일은 어쩌다 받은 성령의 은혜를 쏟아버리고 죄와 그리고 은밀한 부패 속에서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기가 일쑤이고 주님이 주신 은혜를 썩어질 것과 바꾸고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돌작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은혜를 받을 때는 잠시 살아나는 것 같아도 조금만 어려움이 오거나 유혹이 오면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버려서 불신자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기가 일쑤이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참회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던 삶에서 돌이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겸비함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신다고 하는 그 용서의 교리를 오용하면서 뒤로 미끄러질 기회로 삼는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포함해서 이 땅에 예배드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주일날 예배당에 벌 떼처럼 모이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예배당에 오늘 모이셨습니까? 그리고 들어올 때 여러분과 이 예배를 마치고 끝나고 나아갈 때 여러분이 정말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갈망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돈이 좀 없는 것, 사회적 지위가 좀 낮은 것, 이런 저런 근심과 염려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서 싸우고자 하는 전투적인 열의로 가득 찬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는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착한 삶이 많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것은 결코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삶, 단지 평화만을 외치고 그 다음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사람들의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겸비한 마음으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단강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에 합당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면서 너무나 감동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해주신 적이 없었는데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아버지의 마음에 세례를 받으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기쁘셨으면 참을 수 없어서 하늘을 여시고 성령을 부으시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바로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그 사랑스러운 예수님을 왕위에 앉히시고 금가마를 태워 한 나라의 제왕이 되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광야로 나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40일 밤낮을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한 채 마귀에게 강력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쇠잔한 육체로 예수님은 그 치열한 영적 전쟁에 자기를 바치시고 그래서 자기를 모두 드린 치열한 희생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유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치열한 영적인 전쟁을 치루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렇게 하나님 마음에 사랑스럽고 기쁘신 그 아들을 왜 홀로 광야에 내팽겨 치신 것처럼 있게 하시고 마귀에게 혹독한 시험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본격적으로 섬기러 내보내시기 전에 훈련시키신 방법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온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순결한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강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시험을 모두 이기신 후에 돌아가신 첫 번째 장소가 고향인 갈릴리셨고 거기서 예수님은 첫 번째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를 펼치고 설교할 때에 예수님이 왜 광야에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는지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은 예전에 누구도 볼 수 없는 다른 분이 되어서 설교하기 시작했고 저항할 수 없는 큰 권위와 권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헤치셨고 그것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은 오금을 저리면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증거 하시는 말씀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그것과 같지 않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바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준비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설교의 제목들이 있다면 죄, 그리고 마귀, 지옥, 심판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설교의 제목들이 이제 새로운 시대를 사는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원색적이고 또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진리인 것처럼 생각되어서 현대화 작업 속에서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이 세상을 편안하고 잘 살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를 진정으로 기독교 되게 만드는 그 권위 있고 원천이 있는 기독교에 대한 참된 메시지들을 수없이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아마 마귀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는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은 그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죄악 된 세력과 싸우고 피 흘리기까지 전투하고 그리고 교회와 이 세상에 수많은 영혼들을 노략하고 노리고 있는 악한 영들의 세력과 전투를 하고자 하는 그런 전사적인 의지는 엿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오로지 자기만족적인 은혜로 전락하게 되어버렸고 성령을 받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이 땅을 정복하고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죄를 책망하고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중생의 역사가 펼쳐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현저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잠들어있는 교회, 죽어가는 영혼들, 변화하는 세상 속에 무기력한 교회를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 일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마치 예레미야에 예언과 같이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유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장롱에 감추었던 보화를 꺼내어 양식을 사기 위해서 분주히 돌아다녔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자기만족적입니다. 누가 이 땅에 황무함을 보고 눈물을 흘릴 것이며 그 땅을 고치도록 부름 받은 교회의 짧은 팔과 저는 다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까?
저는 세례 요한을 기억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7년 전에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고 그래서 세례 요한의 별명은 회개 요한입니다. 400년 동안 캄캄하던 어두운 땅에 말씀을 가진 주의 종이 등장했고 그가 입을 열어서 외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인류 대를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사장이었지만 어린시절에 광야로 보내어졌고 광야에서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냈습니다. 예루살렘의 따뜻한 공부방, 그리고 안락한 환경에서부터 떼어져서 광야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모래바람이 그의 친구였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그의 벗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3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돌봐주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는 거기서 다른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황무한 약속의 백성의 무너지는 신앙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서실 날들을 위해 자기를 예비했을 것입니다.
광야에 나타나서 외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입은 옷은 약대 털옷이었고 그가 먹는 음식은 메뚜기와 야생 꿀이었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으로 내놓을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정말 오랜만에 그 400년 만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일 먼저 외친 그 고고한 외침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이스라엘은 그렇게 성전에 모여서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회당에 모여서 그렇게 학원공부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해주셨던 때에 누렸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온 백성이 자기를 선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이름에 목매인 그런 살아있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찾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신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쌀도 주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의 물질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도 주고 모든 것을 이 세상과 나누면서 살아야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그것 이상의 것이 아닐까요? 죄를 책망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우물가의 여인 같이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서 예수가 아니면 살수 없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참다운 영혼의 변화, 이 세상 신이 영혼을 어둡게 해서 하나님 앞에 갈 바를 몰라 하는 사람 하나 하나를 일깨워 주의 참 진리의 길로 돌이키게 하는 이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교회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교회가 자신이 기뻐하지 않는 복음을 어떻게 눈물로 전할 수 있겠으며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 세상을 향하여 사랑하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살아가지 않는 성결하고 진실한 삶이 어떻게 이 백성들에게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잠들어있는 교회,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잃어버린 예배나 습관을 따라서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신앙생활 하는 오합지졸과 같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이 땅에 교회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밖에는 할일이 없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여러분들이 찾아와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참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거짓된 삶을 버리고 그 회개에 합당한 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루려고 했던 참 세상이 무엇이고 왜 죄 없으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고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버리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가 진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수 있을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강력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결심이 그리고 사람의 지혜만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이기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끊임없이 먹구름처럼 솟아나는 우리의 타락한 욕망을 노리기에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우리를 에워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전쟁해서 승리하기에는 우리의 자연적인 지혜나 육적인 힘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구하면서 성령받기를 사모했습니다. 성령이 이렇게 예배드리는 현장에 강력하게 임할 때 졸고 건조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느 한순간에 자신이 정말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사람들에게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죄와 그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항상 진실한 참회가 있습니다.
참회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가슴에 맺힌 한 때문이 아니라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보다 죄를 더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깊은 회개, 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보셨습니까?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모였을 때마다 냉랭하게 예배드리던 사람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는 그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 있고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배불러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형식적인 생활에 더러움을 깨닫고 마음을 드리지 않는 모든 신앙생활을 미워하며 뉘우친다면 우리의 모임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임이 될까요.
세상이 변하면 교회도 조금씩 변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을 끌어안고 가기 위해서 비본질적인 것들은 조금씩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불변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죄를 책망하고 죄인들을 거듭나게 만드는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와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마음에 아픔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모르지만 내가 부름을 받아서 목회하는 교회에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어눌하지만 죄인인 여러분을 향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소중한 사람들인지 얼마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예수의 참된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계시는지를 힘닿는 대로 보여주기를 애쓰지만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오랫동안 돌처럼 굳어져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그렇게 굳어진 마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예배를 끝마치고 지나가는 길에 부딪치며 아무 일도 없이 예배를 드리고 다소 피곤함이 깃든 여러분들의 얼굴을 볼 적마다 제 가슴은 미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루어지리라
처음 은혜를 받고 정말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그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설교를 했을 때 하나님이 이런 강력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선생님이 안 오시는 것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공과공부를 안 하고 집에 가니까. 있어도 도망을 가는데 선생이 안 왔으니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애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으니까 선생님은 바쁘다고, 아프다고, 심지어는 어제 저녁에 술 먹었다고 안 나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모여서 그 공과공부 하는 자리에서 기도합니다. 실화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합니다. 뒤에 지나가다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황당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선생님을 변화시켜주세요. 참, 그러니 뭘 알겠습니까. 이제 16-7된 아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런데 예배 끝나고 나서 보면 화장실을 부셔서 만든 작은 창고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방석이 흠뻑 젖도록 눈물로 기도합니다. 울며 지체들을 순결하게 해주십시오. 조국교회에 부흥을 주십시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에 무너진 기초를 다시 세울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시고 성령의 불이 임하시옵소서.
아, 정말 주님이 일신의 모든 행복과 즐거움을 내어던지고 이 땅에 가득한 주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부르짖는 성도들의 뼈아픈 기도소리를 주님이 들으실 수 있다면 어찌 그들에게 수년 내 부흥을 보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정말 이런 갈망이 너무나 사라져갑니다. 이곳에 와서 예배당을 깨끗이 고치고 살아가면서 저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위험을 봅니다. 어느덧 편한 교회생활에 익숙해져가고 그리고 이 땅에 교회와 영광 받으실 그 주님의 은혜를 위해서 갈망하지 않는 우리의 나태하게 흐르는 모습들을 봅니다.
캄캄한 바다에 표류하던 배가 암초를 만나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널빤지를 타고 선원 두 사람이 간신히 그 폭풍 속에서 육지로 기어 올라왔고 해변에 엎드려져서 밤새 떨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에 찬란한 햇살이 떴을 때 그들은 자기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둘이 서로 말하기를 야, 정말 우리 동료들은 다 죽었는데 이 해변이 위험한데 어쩌면 등대 하나도 없는가. 그래. 우리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살았으니까 우리 남은 인생을 뜻있데 쓰자. 어떻게? 우리가 여기 해변에서 저기다가 모닥불을 피우고 등대 역할을 대신하면서 혹시 누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우리가 구해주도록 하자. 그때 우리는 죽어도 어차피 그때까지 산 것만큼 덤으로 산 인생이 아닌가. 그리고 시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몇 주일에 한번씩 배가 난파되어서 물속에서 사람을 살려달라고 하는 애원하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고 그 함성이 들리면 그들은 뛰어나가서 목숨을 걸고 그 어두운 밤바다에서 한사람, 두 사람씩 건져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조직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까 둘이 있을 때는 텐트를 치고 아무렇게나 굴러 자면서 그 일을 했는데 이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집을 짓고 나니까 사람들이 밖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돌아오면 샤워도 할 수 있는 방을 만들어달라고 그래서 그것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반장 부반장도 필요하다고 그래서 조직도 짰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우리가 효과적으로 잘 가서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밤을 새울게 아니라 돌아가면서 조를 짜서 이렇게 조별로 근무를 하자. 우리가 이렇게 어두운 밤바다에 나가서 사람을 건지는 일은 위험한 일인데 팀워크가 잘 이루어져야지 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은 파티를 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래서 파티 장을 만들고 술도 마셨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조난자를 위해서 하루 종일 밤새도록 보초를 서는 일은 너무 고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근로기준법까지 들먹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어두운 밤바다에 나아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 밤도 먹고 마시며 흥겨운 잔치를 벌였고 그때에 저 멀리 창밖에서는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사람 살리라고 하는 울부짖음 소리가 가득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위험에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위험에 빠지게 하는 대적은 사실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성도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혜를 동원해서 교회를 올바로 이끌어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지 하고 그리고 우리가 정성껏 돌맹 이를 고르고 물매를 준비하지만 골리앗 같은 그 대적들을 쓰러트리는 그 일은 우리의 물매 던지는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음날도 예배 시간에 만나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지 않고 나온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잔재주를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크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한번밖에 없는 이 구원의 은혜를 붙들고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교회를 기도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거룩한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주님이 물 붓듯이 부어주시도록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을 구원해내기에 적합한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1907년 1월 7일은 제 기억으로는 주일이라고 기억이 됩니다. 그때에 선교 초기였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수가 불과 몇 만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선교사들이 넉 달 전부터 기도하고 팔도에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던 전국 연합사경회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먹을 쌀을 괴나리봇짐에 싸고 짚신을 삼고 버선을 가지고 그리고 팔도에서 1500명이라는 사람이 모였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데 생명을 건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때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인가 화요일부터 시작되는 부흥회는 그 다음주 월요일까지 계속되어서 꼬박 일주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날들이 다 지나가고 마지막 저녁 집회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일체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답답하기가 예배당 위를 솥뚜껑을 덮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설교도 모두 끝나고 이제 내일 새벽예배만 드리면 다 돌아가야 할 시점에 한 사람이 나와서 울먹이면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바로 여호수아 시대대 아이성을 공격할 때 있었던 그 간사한 아간이었습니다. 내가 도둑질을 했습니다.
교회의 장로였던 그 사람에게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많은 유산을 남기고 죽으면서 말하기를 내 아내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서 이 재산을 관리할 수가 없으니 친구인 자네가 잘 맡아서 관리해주게. 그렇게 신신당부하고 죽었는데 그 재산 중에서 당시 미화 100불, 지금으로 치면 아마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돈을 유산에서 빼돌리고 착복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자 그는 거기서 모두 토설하며 자기의 죄 때문에 우리교회 전체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면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었습니다. 그러자 한순간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강력한 성령의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하면서 새벽 2시까지 회개가 이어졌고 줄지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렇게나 이런 성령의 은혜, 거룩한 성령의 부흥을 사람들에게 보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사람들에게 정결함이 있는 그곳에 성령의 이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사람, 진정한 용서를 하나님 앞에 비는 사람들에게 이런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강력한 성령으로 무장을 시키셔서 이제껏 이길 수 없는 죄를 이기게 하시고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고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 능력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이 땅을 고치는 사명들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도 진실한 참회와 순결을 향한 갈망 속에서 이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인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1-2)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칭찬이나 받고 미담이나 만들어내는 사회봉사를 위한 매개체로 세우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는 타락한 온 우주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 창조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어졌고 그래서 그 온 창조세계는 성자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온 세계를 모두 하나로 이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지의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루어진 창조의 세계는 각각 개별적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기 전 그 모든 피조물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영적 연결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그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온 피조세계에 가득하게 되었고 거기서 모든 피조물들은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 보기에 선하였으며 그것이 곧 만물의 탁월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만물의 한복판에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모든 창조세계의 화목한 관계는 깨어졌고 그 영적 연결들이 죄로 말미암아 일시에 더렵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와 존재하는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원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세상은 더러워졌고 하나님의 손길이 깃든 그 본래의 탁월함에 대부분을 상실했습니다. 그중에 으뜸이 인간이었으니 그 인간은 그 모든 죄가 들어오게 된 원흉이었고 그리고 인간 자신들도 그 죄 아래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원래의 작품으로서의 영광스러움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그렇게 인간들의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내버려두려고 마음을 가지셨다면 그냥 죄 가운데서 모든 만물들을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한 채 서서히 멸망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망가진 세상이기는 하였지만 그 망가진 것을 통해서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더 찬란하게 드러낼 방법을 택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구속이었습니다. 결국 죄가 들어온 순서와 구속을 통해서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순서적으로 동일했습니다. 인간을 통해 죄가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해 만물이 모두 창조의 영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은 죄의 원조인 사단의 머리를 깨트리시는 것이었고 그 후에 인간들을 변화시키시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만물 안에 하나님의 구속의 회복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계획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 인간에게 주어지기 시작했고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한 원흉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자기들을 구속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봄으로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래서 다시 부활하신 것은 바로 죄의 원흉인 사단의 머리를 부순 것이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으로 구원받을 사람 각자 각자를 불러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하심으로서 위대한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신 것입니다. 그 적용을 통해서 각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그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나 되는 비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곧 연합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을 기초로 해서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못 박히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하나가 되어서 못 박혔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또한 함께 살아난 자가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창조의 원리를 원형 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인간들을 다시 하나로 묶으시는데 이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모든 지체의 연합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연합들을 통해서 모든 지체들이 영적 연결을 이루게 되고 그 이루어진 영적 연결을 통해서 창조 시에 있었던 그 만물의 연결 속에 깃들었던 창조주의 영광의 신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결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온 창조된 세계가 가졌던 영적 연결과는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영적인 연결을 이루게 되었지만 그래서 한 몸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연결은 창조주시에 가진 것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연결이 자연계까지는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어도 아직 우리밖에 있는 이 자연과 우주의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그의 부르심을 따라서 모두 부활할 때 그래서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궁극적으로 성취될 일들입니다.
또 한 가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이 영적인 연합을 통한 연결이 창조 시에 그것과 다른 또 한 가지는 그때는 전혀 죄가 없었는데 지금은 죄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죄는 용서받았고 죄의 원흉인 사단은 등뼈가 부러져서 기어 다닐 신세가 되었지만 거듭난 신자 안에도 여전히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신비로운 방법으로 이 죄들을 사용해서 오히려 당신의 교회를 순결하게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가 궁금하신 분은 “죄와 은혜의 지배” 중에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라는 그 부분을 다시 청취하기를 바라면서 계속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각 연결을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그 영적인 연결이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안에 죄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신자 각자 각자 안에 있는 죄, 진공상태는 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죄가 있습니다. Where there is man, there is a sin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사람들이 있는 곳에 곧 죄는 있다. 그렇게 사람 있는 곳에 죄가 있는데 그러니까 그 잔존하는, 죄는 용서받았지만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부패성의 죄들과 싸우면서 그렇게 하면서 이기며 살아가는 이 성화의 삶, 이 성화의 삶은 우리에게 매우 고귀한 소명입니다.
우리들이 이 성화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가 있습니다. 요즘 제 설교를 들으면서 신학적으로 혼동을 느낀다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혼동을 왜 느끼는가, 그랬더니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렇게 지성이 강조되고 인간의 결단이 강조되면 성령이 서실 곳이 어딘가. 그러면 사실 이미 들을 귀가 있는 지체들은 모두 다 알아들었는데 오히려 공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생각하다가 자꾸 이해가 안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1,2부 시간에 안 했습니다. 3부 시간인 여러분들에게만 명쾌하게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그러니까 죄를 이기는 행동의 내적인 원동력이 있고 그 원동력을 가중시키는 원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 내적인 원동력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셨는데 그것은 지성과 의지입니다. 감정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 감정은 의지 편에 많이 속해있습니다. 그래서 이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성과 그리고 의지, 이 두 가 지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주신 행동의 내적 원동력입니다. 죄를 이기는 것도 싸우는 것도 하나의 행동이기 때문에 그런 원동력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철학자들 사이에 이성, 혹은 지성, 혹은 오성이라고 불리는 이 이성과 의지가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감정과 의지가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이성과 의지도 그렇게 쉽게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모두 통합해서 움직입니다. 이런 것들이 두 개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있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내적인 원동력입니다.
처음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 지성과 의지 두개가 있는데 누가 우월한 위치에 차지했는가 하면 항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이 항상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의지도 있고 감정도 있지만 항상 지성이 있어서 지성이 이것은 옳은 것이야 그러면 그 밑에서 똘마니 둘이 그래, 그러면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이것은 옳아 그러면 다 그렇게 하고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면 감정이 기뻐하고 이렇게 해야지 되, 그러면 의지나 순종하면 그런 아주 조화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서 이 위계질서가 다 깨트려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이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데 감정이 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면서 의지 편에 딱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일단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용불량자들이 그렇게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쓰면 안 되는데 이성은 그렇게 얘기하는데 감정이 의지의 편이 되어서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데 나중에 산수 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먹고 보자, 쓰고 보자. 그렇게 해서 300만 명이 넘는 그런 신용불량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날 교육을 잘 시킨 나라들이 사회가 안정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근본적으로 이렇게 변화시킬 수 없지만 사회가 이성을 강조하고 교육을 잘 시켜서 이성을 고도로 발달시키고 도덕성을 강조해서 감정이나 의지를 억누르는 훈련을 잘 시키면 충동적인 사람이 그만큼 줄어드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일반 하나님의 일반 은총 속에서 다시 또 보아할 맥락입니다. 더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 오늘이 예배 시간이 아니라 강의 시간이 되기가 쉽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앞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과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게 타락했지만 아직까지도 인간 속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적인 원동력일 뿐입니다. 그것들을 움직이고 역사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인가 하면 성령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내적으로 주신 기능들이 작동을 하고 움직여서 역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내어쫒고 혼자 독립해서 존재합니다. 성령을 내어쫒고 지성과 의지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이게 불신자로서 도덕적인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것을 다 없애버리고 성령만으로 산다는 사람은 광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서 안에서 성령께서 움직이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들에 임하시면 여러분들이 새사람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새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정신이 해까닥 하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신다고 해서 ABC를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영어, 불어, 독일어를 줄줄 꿸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급하던 사람이 성령이 임한다고 해서 어느 날 몇 시 몇 분을 기초로 해서 갑자기 놀랍게 신중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악령은 임할 때 우리의 기질들을 막 때려 부습니다. 그리고 파괴적으로 일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귀신이 들리면 다중인격손상이 일어납니다. 자기 안에서 막 싸웁니다.
그러나 성령은 안 그렇습니다. 같은 영인데, 이게 하나의 성령이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신비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이해와 의지를 가지고 이것은 원동력일 뿐이지 실지로 원동력을 역사하시게 하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으로서 진리를 깨닫고 자기의 죄를 깨닫고 혹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신자의 삶을 살려고 하고 죄 죽임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것만큼 성령을 내어쫒는 삶이 아니라 그게 바로 성령을 구하는 삶입니다. 성령으로 하여금 역사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지성으로서 죄가 무엇인지도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 지성으로 감정과 의지를 설득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분발하지도 않는 사람이 욕심을 따라서 방종하게 살던 가운데 죄가 죽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태초 이례로 그런 일들은 한번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째든 이것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신학적인 토론의 장을 여러분들에게 제공해주겠습니다. 어째든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결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분히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성령이 하시려고 하는 그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이 성화의 역사를 우리 밖에서 우리를 거슬려서 우리 없이 일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와 더불어 일하시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한사람 한사람의 신자가 철저한 죄 죽임의 삶을 살아갈 때에 그때에 그 신자의 연결은 순결해지게 되고 그 안에 창조주의 그 신성에 영광의 충만한 것이 드러나서 그래서 그 성도들의 연합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시의 그 영광의 빛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의 신자가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이런 삶이 개인의 문제이겠습니까, 교회의 문제겠습니까?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모든 연합된 교회의 문제이고 이것은 또한 앞으로 우주와 관계된 문제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다양하게 주시고 또한 자연적인 은사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것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이 연합을 통해서 그것들을 흘려보내고 받으면서 흘려보내어서 해택을 받아서 그렇게 해서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각자의 피조물로서의 아름다운 신성의 영광을 나타내보여주도록 부름 받은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상관없이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것들을 유무상통할 수 있던 것들이 바로 그냥 어느 순간에 그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힌 예외적인 헌신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그들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결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저 지체의 곤궁한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곤궁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사이에 있는 이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내 물질이 흘러들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의 말씀의 은사 때문에 그 섬김이 흘러 들어와서 내가 유익을 얻고 저 사람의 그 놀라운 은사의 능력을 힘입어서 다른 지체들이 힘을 얻고 은혜를 얻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서고 창조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드러내서 많은 사람들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고 또 부분적으로 창조의 세계가 구속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해가는 영광스러운 회복의 과정을 하나님께 보여드림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이 교회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런 우주적인 정신을 지금 철학적으로 여러분들 속에 세우고 여러분들의 인생관을 지배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재능과 물질, 그리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놀라운 교회의 연결, 이 지체들의 연결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연결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결국은 우주 자체가 창조의 원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인가? 그 교회의 영광은 단지 이 세상에서 사회 개혁을 위한 매체가 되고 도덕적 개선을 위해서 기여하는 봉사단체가 됨으로서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는 칭찬거리가 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존재의 목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워서 세상이 칭찬하면 그것은 자기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한번도 주님 앞에서 목표로 삼은 법은 없습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인가? 회심하지도 않은 짐승 같은 교인들이 예배당 앞마당을 가득 매우는 것, 그 수의 과시가 결코 교회의 영광의 수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지도 못하고 인생관도 변해본 적이 없는 속된 그리스도인들이 헌금해서 지은 교회의 빌딩의 규모가 교회의 영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 방종한 삶을 살다가 이따금 헌금 통에 던져놓는 몇 푼의 푼돈으로 여기저기 찢어서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는 그것으로서 양심을 달래는 그런 선교활동들이 교회의 영광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바로 사람들을 회개하게 만들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러운 빛에 접촉되게 하는 것, 그리고 그런 놀라운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죄에 빨려 뒤로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구속받은 사람들로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들은 고난 받은 작은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세상은 어디 그 무리를 주목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 무리가 결국은 거대한 로마제국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믿기나 하였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좋은 교회시설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말씀을 듣고 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세례 받는 것 때문에 내일은 목숨을 잃어야 했고 한번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들은 투옥되는 각오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는 아무 영광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한번 복음이 선포되면 3-5000명이 회심하고 예전에 삶을 버리고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노동자와 그리고 천한 백성들뿐만 아니라 관리와 귀족들,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회개하고 복음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세상을 보면 너무 이 백성들이 불쌍합니다. TV의 뉴스를 봐도, 라디오에 방송을 들어도, 신문을 봐도 불쌍한 것은 이 땅의 백성들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지 되나. 지금으로 한 13년 전인가 타임지에서 현대물질 사회의 어두운 면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21세기의 기독교에 대한 전망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타임지에서 그 모든 물질문명의 어두운 면들을 말한 후에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20세기에도 이러니 21세기에는 인류는 기독교를 더 많이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 아마 세상이 기독교를 필요로 하는 것만큼 교회의 필요성은 점점 21세기에는 감소할 것이다.
작년에 뉴스위크지에서 가톨릭의 사제들이 성추행한 사건들을 특집으로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찌 가톨릭 안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다만 하여튼 이름을 내로라하는 탁월한 사제들이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거액의 위자료를 물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때에 그 뉴스위크지 타이틀에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가톨릭교회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런 타락한 현상이 어떻게 한 종파의 것이겠습니까?
기독교라고 예외일까요? 어디를 봐도 이 백성들은 너무 불쌍합니다. 신문만 열면 돈 먹은 사람들의 이야기, 서로 삿대질을 하고 네가 많이 먹었다. 그래도 나는 좀 돌려주었다. 감옥에 간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로 온 지면을 쳐 바를 때 저는 눈물이 납니다. 정말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있습니까? 왜 지금보다도 훨씬 국민소득이 낮고 어려웠을 때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어른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다 분재 같은 지도자들과 도토리 같은 백성들이 키 재기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을까?
이 민족은 누구의 지도를 받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과 그 연민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시대에는 제발 이런 불행한 시대가 반복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역사에 구김살을 펴주고 그래서 사람들이 좀 빛 가운데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대한민국 지도를 부여안고 매일 밤 울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지구본을 껴안고 옛날에 윌리암 케리같은 선교사처럼 밤에 잘 때마다 지구본을 끌어안고 온 세상에 갈 길을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잠들었던 근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켈리같이 그렇게 기도하든지.
정말 이 세대의 젊은이들 중에 소수가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단보다도 더 심한 향락에 피해에 절어 있고 쓰레기 같은 가치관에 자기를 매몰시키면서 살아갑니다. 불행한 우리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다음 시대에는 희망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서막이 보여야 합니다. 그 서막은 여러분들의 눈동자 속에 달려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 얼마나 더 간절함 사모함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준비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아무데나 가서 몇 푼 받아서 살다가 장가가서 자식이나 몇 낳고 살 그런 꿈을 꾸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영광은 바로 이렇게 잠자던 사람들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우주적인 전망을 열어주는 것, 그래서 그 우주의 아름다운 구속의 전망을 가지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그들을 회심시키고 또 그 회심을 보존하며 살아가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그곳이 주 예수 모신 하늘나라입니다. 그 교회는 그 비전을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로 우리와 같은 이런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 시대를 일깨웠는지 한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로 하여금 영광스러움을 회복하는 방편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성령과 그리고 기도입니다. 거꾸로 첫날 기도에 대해서, 둘째 날 성령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 셋째 날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이 말씀과 기도와 성령, 이 세 가지는 교회로 하여금 영광을 회복하게 만들고 또 잠자던 그리스도인들을 깨워서 주님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들판에서 자란 이름도 없는 무명의 한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거창하게 다섯 명의 정치지도자와 두 명의 종교지도자를 끌어들이면서 그런 일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노무현씨가 대통령을 지내고 부시가 미국을 지배하고 그리고 또 푸틴이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에 김남준 목사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뱃살을 잡고 웃어도 시원치 않은 모순적인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것이 그 시대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때 꿈꾸셨던 구속은 단지 형벌 받을 죄로부터의 구원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비참함으로부터의 구원도 의도하신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기대하셨던 것은 창조의 모든 세계의 구속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구원과는 우주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의 사상이기도 하고 종교개혁가의 사상이고 청교도의 사상입니다. 어제 읽은 책에서 이런 내용을 하나 봤습니다. 어떤 이발사가 은혜를 받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수학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수학공부를 했답니다. 그때에 어떤 한 신자가 다가가서 그렇게 흥분에 차서 자기가 수학을 공부하면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구원을 너무 좁게만 생각하는 비성경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수학은 모두 세상의 학문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수학은 그런 것에 비하면 모두 쓰레기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아주 좁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청교도가 찾아가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잘하셨습니다. 당신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알아가면서 참 신자가 되십시오. 그런데 수학에 재미를 붙이셨다니까 제가 말씀드리겠는데 세계 최고의 수학자는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게 청교도들과 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서 새사람이 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그 배경에는 7명의 그 시대에 혁혁한 지도자들의 명단에 오릅니다. 디베랴 기아사가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구간에 태어나실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모든 사람들을 세금 잘 거두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바로 그 황제였습니다. 뒤에 나오는 갈릴리 분봉 왕 헤롯은 누군지 아십니까? 역사적으로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끌려온 그리스도를 신문하고 조롱할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은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정부로 취하여 선지자 세례 요한에게 호된 책망을 받고 고민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동생 빌립은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형 안티파스의 정부의 딸인 살로매 춤을 추는 것에 감격해서 헤롯이 모든지 구하는 대로 주겠다고 그랬을 잔인한 어미의 간교를 따라서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부탁함으로서 그 쟁반에 세례 요한의 목을 담아서 연회장에 들고 오게 만들었던 그 악랄한 여자와 결혼할 바로 그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룻사니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가야바와 그리고 안나스 이 두 사람은 당시 종교지도자였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두 사람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안나스는 전임자였기 때문에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고 그리고 가야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다가 체포하고 신문하고 처형하기로 처결했던 그 사악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유다를 매수하고 그리고 군사들을 매수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그 간교한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이 7명의 명단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그 시대를 향해서 소망을 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우리 시대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모두 탐욕스럽고 정욕에 사로잡힌 인간들이었고 그리고 세속적인 욕망에 이글거리는 탐심을 가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고 주님의 정직한 공의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숨도 쉴 수 없을 것 같은 이 캄캄하고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뭘 하고 계셨을까요? 대책도 없이 그 악한 시대를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많이 역사하시던 시대도 있었고 적게 역사하시던 시대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도 깨어있는 사람이 없이 완전히 잠들어있도록 이 세상의 교회를 내버려두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사람 세례 요한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세례 요한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의 의해서 예언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모든 육체가 그 영광을 볼 터인데 그 영광이 나타나기 전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예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외쳐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오, 육체의 아름다움은 꽃과 같도다.” 이 외침과 함께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이 중동지방의 관습에 의하면 요즘은 왕이 없는 시대니까 그렇지만 옛날에는 왕이 지나가기 몇 달 전에 외치는 자가 먼저 지나갑니다. 모년, 모월, 모시에 지존하신 왕이 이 길을 지나가실 것이니 너희는 준비하고 마음을 갖추라. 외치는 자의 소리가 지나가면 뒤이어서 곡괭이 부대가 동원됩니다. 그리고 길을 닦는 것입니다. 높은 곳은 깎아서 낮추고 낮춘 곳은 흙을 집어넣어서 편편하게 길이 고쳐지면 노면이 최상의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모년, 모월, 모시가 당도하고 그때에 왕은 황금마차를 타고 그 대로를 지나가는데 그 길을 Kings highway라고 불렀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런 Kings highway를 만들기 위해서 외치는 자로 그리고 그 길을 보수하는 자로 예수님 앞서 보냄을 받은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의 왕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리석은 헤롯은 그 동리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를 모두 학살하는 천인 공로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한 두 평의 땅을 얻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예수님이 내려오신 것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고 당신이 세우실 나라는 영적인 왕국이었습니다. 그럼으로 그분은 금마차를 타고 오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비해야 할 Kings highway도 따라서 물리적인 도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으로 영적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많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회개하여야 했고 회개를 통해서 교만하던 마음은 낮추고 우 그러지 마음은 다시 돋아져서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알아보고 그 음성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 마음의 길로 왕이신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만들어드려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준비하였으니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세례 요한은 너무 하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제사장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주석에 보니까 당시 세례 요한 시대에 예루살렘 시대에만 일만 팔천 명의 제사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 제사장들은 한꺼번에 섬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번을 정해서 섬긴 것입니다. 그 섬기는 봉사기간이 지나면 집에 돌아가서 다시 농사짓고 지내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한미한 집안에 태어나서 무엇 때문인지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는 훌륭한 대학을 다닌 것도 아니고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요즘 흔한 석사 학위 하나 그의 머리에는 없었습니다. 왜 제사장의 아들이 광야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두 가지로 추측하기는 일찍이 요한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가 모두 죽어서 광야로 보내졌을 가능성과, 혹은 부모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워낙 경건했기 때문에 썩어가는 이 종교계에서는 자식을 제대로 신앙 교육시킬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경건한 무리들이 있는 그 광야로 요한을 보냈든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느 쪽을 취하든지 우리들은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요한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사회적인 교육으로부터 격리된 채 오히려 광야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생각할 때 따라다니는 한 단어가 있으니 그것은 고독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의 사람이었고 들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은 그 사람이 광야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뭘 하고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광야에서 메뚜기나 잡아먹고 꿀이나 따러 다니고 그렇게 놀다가 그렇게 벼락 맞듯이 말씀이 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이 장면은 기사의 내용자체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소명 받는 장면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히브리말로 ‘와이 에히 핫 따브르 알로힘’ 혹은 ‘아도나이 엘’ 누구 누구 하는 것과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순간에 말씀을 불 붓도록 주셔서 그 말씀에 사무친 사람이 되게 하셔서 그를 이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사람이나 불러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되고 준비된 사람, 하늘을 가르시고 임하시는 특이한 말씀의 체험이 없어도 심령이 정결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는 그 사람을 예비하셨다가 그에게 다가가셔서 말씀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움직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애국심은 불길같이 타올랐지만 인간의 정욕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왕궁에서 자란 모세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 거룩한 소명에 부응할 수 없을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모세를 이스라엘 해방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추격을 피해 아합의 핍박을 받으며 까마귀가 날라다주는 음식물과 물을 먹으며 연명을 했던 엘리야를 만나주시고 회복시키신 것도 광야였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에 가득 찬 첫 번째 설교를 갈릴리에서 행하시기 전에 그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했던 것도 바로 광야였습니다.
요한이 바로 똑같은 그런 광야에 서있습니다. 다메섹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졸도해버릴 듯이 강력한 영적 경험에 사로잡혔던 사도 바울이 그 어마어마한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충격적인 만남을 경험한 뒤에 총총히 발길을 옮겼던 곳이 어디였는지 아십니까? 아라비아의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아니었지만 마지막 날에 되어질 위대한 날에 계시의 보고를 열었던 사도 요한 역시 광야와 다름없는 절해의 고도의 밧모 섬에서 그리스도 예수만을 갈망하는 가운데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계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맥락에서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만나고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희랍어로는 이 광야가 ‘에레모스’이고 이것은 황야, 광야, 벌판, 들판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의 히브리말이 ‘미드바르’인데 ‘미’ 할 때 그 앞에 ‘스펠 엠’은 히브리어에서 분사나 명사를 의미하는 접두어입니다. 뒤에 붙어 있는 ‘다바르’는 알다시피 말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바라’는 말씀이고 ‘미드바르’는 광야입니다. 놀라운 우연이라고 치기에는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광야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계속 따라다닌 이미지는 고독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누가 옆에 함께 있었습니까? 엘리야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복되었을 때 누가 옆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와 동행하면서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아라비아 광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연회를 펼치고 위로연을 열다가 마지막 날에 계시를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피상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거룩한 고독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광야에 선 사람처럼 홀로 대면하는 그런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너무너무 무서워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사람 의존적이 되어서 누군가와의 연결을 끊고는 혼자서는 도저히 두려워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독 속에 둘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따뜻한 예루살렘의 독서실도 아니었고 친구들과 뛰어놀던 운동장도 아니었습니다. 회당도 아니었습니다. 광야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광야는 시냇물이 흐르고 꽃들이 피어나고 풀들이 돋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걸어 다니면 풀벌레 소리가 노래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그런 정겨운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모래 바람이 일고 뜨거운 햇빛이 내려쬐는가 하면 밤이면 모닥불을 피어야만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고 어두워지면 군데군데에서 맹수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이 에레모스 광야입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세례 요한은 심령과 능력이 자라갔고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성숙해갔습니다. 충분히 하나님을 만날 만큼 그는 자신을 그 광야에서 연단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아마 거기서도 먹고 마시고 노는 대신에 그는 많은 시간들을 자기 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보낸 이스라엘의 종교의 역사를 직시하면서 가슴아파하고 가까운 곳이었으니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 경건한 슬픔을 간직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광야가 있습니까? 주일이면 무엇엔가 쫓기듯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데 정말 갈망이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오늘도 주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절대 절명의 욕구, 그런 것이 우리 속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그 만남을 사모하고 너무나 그런 영적인 만남을 그리워하고 그런 내 자신의 영적인 쇄신을 사모한 나머지 고독해질 정도로 그렇게 그리워하고 주님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정말 우리에게 있습니까? 부요한 마음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무런 참회의 마음도 느끼지 못하는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드나드는 이 교회의 생활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음을 쓰레기로 바꾸고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이 방만한 시대에 여러분들도 시료를 따라가는 그런 파도 위에 거품과 같은 존재들이 될 것입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이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퀴나스야 내 사랑하는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무엇을 구하기에 그렇게 밤이 늦도록 기도하고 금식하며 갈망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수도사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제게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타깝게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구하는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오, 주님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다면 주님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고 주님은 저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생활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간만 되면 우르르 몰려와서 아무런 마음의 부딪힘도 없이 마치 오늘날 TV상자 앞에 앉아서 개그맨들을 보고 너 한번 나 웃겨봐라. 하는 것처럼 예배에 와서 나 좀 은혜 받고 해보라는 식으로 그렇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품고 하나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망하며 주님을 찾고 그리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주님을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바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찾지만 오늘도 아무 일도 없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만났으면 만났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그 자리를 뜰 수 없어서 그 신령한 감격의 여운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나의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까 생각하며 자신을 분노하는 마음 때문에 자리를 뜰 수 없는 그런 예배당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축도도 끝나기 전에 벌 떼처럼 일어나서 대문을 빠져나가는 그 수많은 군상들을 보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우리가 정말 주님을 갈망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너무나 찾았기 때문에 우리가 외로워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과의 연합,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그 간절함 때문에 우리들이 고독해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 그분과 하나 되기를 사모하는 진실한 갈망 때문에 우리들이 무서울 정도로 외로워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각양 탐심과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처리하지 못하는 육체의 정욕과 그리고 밀려오는 영적인 피곤함과 싫증, 이런 것들을 연약함이라고 하는 허울 좋은 미명하에 스스로 모두 자신을 용서해버리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는 감격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영혼의 축복입니다. 다른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축복은 주님이 직접 우리의 영혼 속에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여운을 남깁니다. 세상에서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예수 위해 산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손으로 영혼을 어루만져진 사람들이 죽기까지 예수 위해 살았습니다.
이 땅에 주님을 거스르며 살다가 죽어간 배역하는 그리스도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능욕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고난을 받으며 죽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던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돈 많이 주신 사람들, 명예를 높여주신 사람들이 아니라 영혼 안에 지어질 수 없는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못 박힌 그 손으로 영혼이 어루만진바 된 사람들, 가시관 쓰신 그 얼굴로 주님이 친히 볼을 비벼주신 사람들, 찔린 옆구리에 흐르는 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품에 안겨서 주님의 가슴팍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피 냄새를 맡아본 사람들이 가난해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위와 문벌이 귀하고 높지 않아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유리하는 양과 같았으나 그들은 사자처럼 담대하게 살았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7명의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 같은 사람들의 기록만을 남겨두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이들의 명단은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명단입니다.
나는 오늘날 여러분들을 보면서 안타깝습니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참 신자가 되는 것이 소명인 줄도 몰랐고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이것이 죄의 결과이고 그리고 이 인생의 고통이 결국은 죽음이라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 있는데 우리는 빛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선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인지 하여튼 주님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셔서 복음의 빛을 비쳐주시고 영혼의 암흑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이 시대의 어두움에서도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음 진리의 길에서 미끄러져서 예전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는 복음을 듣고 싶고 복음이 울려 퍼지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죄는 복음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죄를 멸하려 오신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배운 하나님의 말씀은 정리는 되어 있지만 지성의 창고에 차곡차곡 들어 누워있고 그리고 영혼은 싫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번성하는 육체의 정욕을 지성의 창고에 들어 누운 말씀들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의지가 깨어난 지성보다는 타락한 감정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더욱더 위선적이고 이중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까?
복음의 빛을 받은 후 그 빛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의 그 죄악에 대해서 성경이 얼마나 무섭게 경고하고 있는지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문제는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이 좋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없지만 그러나 지금도 내 안에 있는 이 모든 죄에 대한 욕망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붙들고 싶고 그리고 이 세상의 정욕도 따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는 광야와 같은 이 고독의 시간이 싫습니다. 두렵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의 교리를 방종을 위한 수단으로 제공되고 각양 많은 은혜의 수단들은 양심을 달래는데 사용되어질 때 그 신자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어서 빛의 나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까? 참으로 진리를 따라 살고 싶어 할 때 그 진리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 우리의 고통을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길을 알아도 살고 싶어도 살수 있는 그 어떤 힘도 내 안에 없을 때 그때 영혼의 고통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그의 시선은 하나님께 고정되었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그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을 향해서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순결을 사모했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에게 화룡정점과(?) 같은 사건을 허락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속된 모든 더러움들을 내어버리고 그 진리의 불붙는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은 신도시도 아니었고 아파트도 아니었습니다. 모래바람만이 있는 외로운 광야였습니다. 외치는 광야에서의 첫 설교는 바람 홀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곳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지자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어주셨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갈망했던 사람들,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례 요한의 외침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빛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깨어났고 가슴을 치며 회개했으니 그들 가운데는 종교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날의 시대가 이런 일들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얼굴들을 보십시오. 핏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그 젊은이들, 탐욕에 가득 찬 그 쾌락의 눈동자 속에서 우리가 이 민족의 내일을 읽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 많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고 그 마음의 거룩한 불을 질러서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 누군가는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고 온 사람으로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사람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아가서 외쳤을 때 첫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외치신 그 외침과 일치하였습니다. 두 분이 서로 합의를 본 것도 아닌데 똑같이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다급한 음성을 모두 공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외침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정말 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집착,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는 방종한 신앙생활에 심령의 추구를 통해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지만 어느 한순간에 내 손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이 없이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주님 없이 어찌 내가 인생을 살수 있을까? 빈들에 선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는 그런 몸부림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의 젊은이들과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까?
아직 회심하지도 않았던 사실상 불신자였던 자매가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에 제 설교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7월에 회심했는데 9월에 학교를 휴학했습니다. 왜 좋은 학교를 다니다 휴학을 했는가, 했더니 이제 회심한지 두 달도 안 된 자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절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빌립보서를 읽다가 휴학을 결심했습니다. 뭔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왜 나도 그리스도인인데 내게는 이 고백이 없을까? 이 대답을 듣기 전에는 학교도 다닐 수 없고 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뜻 없이 예배에 나와서 참여하는 이 거짓된 종교생활을 청산하고 정말 하나님의 얼굴과 빈들에 선 세례 요한과 같이 사가랴의 한 아들처럼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한다면 몇날 며칠이 되지 못해서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은 새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는 진실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여기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서 그분만을 갈망하고 있는지 반성하십시오. 지금이라도 빈들에 선 절대 고독자의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리고 그 주님의 얼굴을 뵈옵기까지는 어떤 안식도 여러분들에게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전심으로 찾으십시오. 기도하고 금식하며 젊음의 정욕을 죽이며 그렇게 어두운 역사에 한 장을 새로 기록하십시오, 주의 사람들을 찾으시는 안타까운 주님의 음성에 여러분이 아니면 누가 응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만나고 정말 새로운 삶을 살면서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가지고 고통 하는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고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몸에 짊어지고 주님의 교회의 찬란한 영광의 회복을 위해서 사는 그런 보람된 젊은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 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을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상)
시골서 자란 분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도시 생활을 꿈꾸며 시골을 많은 사람들이 떠납니다. 그러면 살던 집도 버려두고 그 집에 딸린 밭들도 내팽개치고 떠납니다. 사람 없이 버려진 지붕에는 잡초들이 돋아나게 되고 곡식이라도 일구어먹던 그 밭에는 사람의 손길이 그치자 기일같이 잡초가 자라고 가시덤불로 뒤 덥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원래 가시덤불은 풀 섶 같은 산자락 아래서 자라는데 누가 거기에다가 가시덤불이나 잡초를 심지도 않았는데 한 두 해 지나고 나면 기일 같이 잡초가 자라고 가시덤불로 가득 차게 되는데 원래 가시덤불이 있던 곳보다도 더 무성하게 자랍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문전옥답”이라고 말합니다. 문전옥답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묵은 땅은 한번도 곡식을 심어본 적이 없는 처녀 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농부가 정성스럽게 돌보아 거름을 주어 곡식을 가꾸어서 소출을 내어 먹던 그런 기름진 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고 버려져서 잡초가 우거지고 가시로 덤불을 이루고 있는 그런 땅을 가리켜서 묵은 땅이라고 합니다.
그런 묵은 땅이 만약에 새롭게 기경이 되고 그래서 많은 곡식을 거두는 아름다운 소출을 안겨주는 밭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될까요? 먼저 기경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기경하기 전에 먼저 불을 지릅니다. 그래서 가시덤불을 다 태워버리고 잡초들도 다 태워버립니다. 그리고는 이른 봄에 그렇게 누렇게 된 잡초와 가시덤불을 다 태워버리고 그리고는 쟁기를 하나 대장간에 가서 삽니다. 크고 탄탄한 것으로 하나 사고 여유가 없으면 동리에 가서 황소 한 마리를 빌립니다. 그것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소가 아니라 튼튼하고 힘 좀 쓰는 황소 한 마리를 빌려서 멍에를 걸고 거기에 이제 쟁기를 매답니다. 그리고는 그 쟁기를 땅에 깊이 꽂고 그리고 사정없이 소를 후려치면서 힘 있게 다름질 하게 합니다. 그럴라치면 잡초와 가시로 덤불을 이루던 그 땅에 쟁기가 꽂히면서 파도가 치듯이 땅이 파헤쳐지기 시작하고 새카만 기름진 흙이 땅위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잘게 두들겨서 부드러운 밭을 만들고 그리고 거기에다가 씨를 뿌리고 몇 달 지나고 나면 예전에 묵은 땅이었던 그곳이 다시 농부가 기뻐할만한 소출을 많이 내어서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아마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농부는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풍성하게 매달려있는 곡식들을 보며 흐뭇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한때 제가 눈물나도록 짝사랑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는 어머니적인, 모성적인 감성과 부성적인 아버지의 사랑을 함께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예레미야의 눈물과 그리고 이사야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한 인격 안에 아울러 가진 탁월한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한때는 제 꿈이 죽기 전에 한번 1장서부터 14장 마지막까지 한번 설교하고 죽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꿈은 가슴에 묻어두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주후 930년경에 다윗이 죽고 솔로몬 때에 그 이후에 와서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에 의해서 왕국이 남북으로 양분되게 됩니다. 북 왕국은 에브라임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진 이스라엘이었고 남 왕국은 유다였습니다. 정치적세에 있어서는 유다나라가 약했지만 신앙적 정통성은 남 왕국 유다를 향해 계승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떨어져나간 하나님의 백성들로 보고 내팽개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걸출한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셔서 패역한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음성이 항상 들리게 하셨습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때에 예언했던 사람으로서 북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라고 하는 사람은 대게 주전 782년에서 752년 정도에 재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로보암 2세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아주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힘 있는 외교를 펼쳤고 주위에 많은 나라를 복종시켰습니다. 그리고 무역을 활발하게 해서 많은 외화를 벌여드렸고 그래서 결국은 나라는 강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많은 부가 축적되어서 상류사회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름에는 여름 별장으로 겨울에는 겨울 별장으로 아침에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면 상아로 깎아 만든 침상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부자들이 외국에서 들여온 호화스러운 물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을 세상적으로 볼 때 번영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번영한 나라가 되면 될 수록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정체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여호보암 2세가 세상적으로는 영명한 군주였으나 그 사람 안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물질적으로는 부강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이처럼 피폐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북 왕국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면서 이것을 묵은 땅으로 표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이고 부국강경을 이룬 그 나라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묵은 땅”이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기경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나는 이 속에서 오늘 우리 조국 교회를 향한 그림자를 봅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40년 전에 우리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 위로 올라가면 더 가난했습니다. 사실 제 기억에도 얼마나 가난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1원짜리 하나 주면 10명이 같이 사먹겠다고 따라갔습니다. 그럴 정도로 가난했고 사탕을 하나 사서 여러 명이 함께 빨아먹었습니다. 더러운 이야기지만 사실입니다.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세계에 11위 16위되는 교역의 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나라는 부강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졌습니다. 그렇지만 국제적으로 나라의 지위가 높아지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신앙은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교회의 순수한 열기, 그리고 신앙에 대한 열렬함, 기도에 대한 간절함 같은 것들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40년 전에 조국 교회를 기억합니다. 그때 교회가 모두 좋은 교회는 아니었지만 교회가면 온전한 건물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셀 정도였습니다. 대부분 교회 개척을 시작하면 믿음으로 시유지에 미군부대 텐트를 가져다가 동리에서 막대기를 빌려서 시작했습니다. 고물상에서 가마니를 걷어다가, 그러니까 아무 것도 자기 것은 없었습니다. 땅은 나라 땅, 텐트는 미군부대 것, 막대기는 동리에서 주어오고 가마니때기는 고물상에서 얻어 왔으니까, 사실은 말을 복잡하게 했지만 다 남의 것 가지고 텐트치고 그러고 한 것입니다. 철거반이 와서 허물면 믿음으로 다시 세우고 다시 세웠습니다. 나중에 하다가하다가-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정부에서 관청에서 짓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고 싶으냐? 그럼 불화 받아라. 그리고 통보를 내보내면 온 교인이 눈물로 헌금을 해서 그것을 정부로부터 삽니다. 8번 허물면 9번 텐트를 치니까 하다가하다가 지쳐서 그런 방법을 씁니다. 그러니 당연히 비가 오면 새고 호롱불 켜놓고 난로도 없이 겨울이 와도 그냥 가마니 때 위에서 박수를 치면서 교회를 짓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시작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우리가 편안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까? 물질적으로 그만큼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섬김이 필요한 절대 빈곤층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때 나라가 부강했고 살기 좋아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그 고난 받고 어려울 때 유지했던 열렬한 개척신앙,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어디에서나 예수 사랑 깨달은 자들이 들려주던 그 전도자의 음성들은 이미 먼 추억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열렬한 눈물과 그들에게 대한 그 예수 사랑의 간증보다는 교회의 세를 불리거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들이 마음의 진실한 갈망을 대치하고 있습니다. 잘 갖추어진 예배당과 좋은 환경 속에서 사교모임을 즐기듯이 교회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여로보암 2세 때에 묵은 땅으로 지칭되던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황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늘날 한번 보십시오. 세상은 교회에 의해서 세상이 변화될 것이라고 세상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교회도 자신들에 의해서 자신들이 변화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제일 꼴 보기 싫었던 포스터가 새로운 밀레니엄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제일 싫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갔는데 지하실이었는데 작은 교회였는데 다가오는 밀레니엄을 준비하자. 뭘 준비한다는 것인지, 새로운 밀레니엄이 와서 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항상 세상은 해아래 새것이 없고 똑같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묵은 땅과 같은 상태에서는 결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무기력한 교회생활, 이것은 바로 모든 무기력한 성도들의 생활의 총계입니다. 교회가 묵은 땅이 되어가고 있다면, 교회를 그렇게 묵은 땅으로 만드는 것은 굳어진 성도들의 심령으로 굳어진 산 신자들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굳어진 심령으로 살아가는 한 교회 역시 굳은 교회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몇 마디의 구호나 머리에 띠를 동여매는 궐기대회의 분위기로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도 없이 교회를 드나드는 많은 인파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으로 오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을 때 실제로 유대인에게 왕 노릇 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헤롯이나 빌라도나 그리고 가이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실권을 가진 세상 나라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국은 오늘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망했습니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은 지금도 번성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 백성들을 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 심어놓으시고 도저히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을 보고는 영생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 수 없고 죄인인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창조의 모든 세계가 죄로 인해서 본래의 영광을 상실했고 그 피조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죄로 인해서 영적인 총명을 상실했습니다. 그 어두운 속에서 인간은 도무지 하나님과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자기의 백성들을 심으셨습니다. 그 백성들을 통해 당신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인해서 피조세계는 영광을 잃어버리고 신적인 모든 연결을 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거기에 붙어 있는 접붙여진 연합체들입니다. 온 피조세계가 영적인 연결을 끊어버리고 창조주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들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접붙여진 모든 지체들의 연합을 통해서 영적인 연결들이 다시 생겨나고 그 영적인 연결들을 통해서 창조의 영광의 신성에 충만한 것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직까지도 죄가 잔존하고 있지만 끊임없는 성화로 말미암아 각 개개인이 성화되고 그들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거룩해하심으로 이 땅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창조의 영광의 회복을 교회를 통해서 성취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만물을 모두 그 발아래 굴복하게 하시는 위대한 이의 역사, 그 능력을 교회에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타락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비굴하게 세상과 야합함으로 그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나 주어먹으면서 연명을 하는 것이 거룩한 교회의 본질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본래 이런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세상에 충만하게 나타나기 위해서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성취적 성과입니다. 첫 열매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십시오. 역사 속에서 교회는 이런 신성의 영광의 충만을 잘 드러내면서 이 땅에 있는 많은 무지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위대한 중보의 기능을 수행하던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세상과 다름없이 똑같이 타락하고 무기력해져서 묵은땅과 같이 되어버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심어놓으신 사람들 속에 신령한 열매는 고사하고 육체의 더러운 정욕과 그리고 부패한 열매들만이 가득 돋아나서 주님이 기경하신 그 아름다운 땅들을 묵은 땅으로 몹쓸 게 만드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당신의 교회들이 이런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덜 소유하게 하는 때는 있었지만 그러나 영영 그 생명을 모두 잃어버리고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멸절되던 때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의 위가 영영하리라”고 하는 성경의 예언과 같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분이시고 누구에 의해서도 파멸될 수 없는 지존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왕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나라인 그리스도 왕국도 역사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임무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시대에 전수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비밀들을 기경하고 그 비밀들을 터득해나가고 물려받은 진리를 가지고 분투하며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 시대에 새롭게 깨닫게 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들을 추가해서 가고 오는 세대에 그것들을 전수하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들이 다 못 이루고 죽을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매진하게 하는 그 일이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세어놓으신 이유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관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통하지 않고는 이 세상이 자신들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엇으로 말미암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구속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창조의 목적은 물론이거니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능력의 비밀에 대해서도 그들은 소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이 세상에 미담이나 베풀고 도덕적인 감동이나 주는 사회변혁의 매체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고 말했을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 일세기에 교회가 순전한 교회는 아니지만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을 봅니다. 그들은 은과 금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무엇이 교회에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금과 은보다 더 귀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자들의 연합이었으나 모든 것을 가졌고 핍박받고 있었으나 교회는 사실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사교장소로나 생각하고 마음의 위로나 얻고 사악한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무리들이 교회의 영광입니까? 높은 빌딩이나 좋은 건물, 그리고 붐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자 같은 것이 그것이 교회의 영광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교회 건물도 제대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한 교회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들이 이루었다기보다는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말씀과 기도와 성령이라고 하는 이 방편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무엇을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교회에 와서 깨닫게 되었고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 앞에서 가장 강했던 세상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 진리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이 되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그리고 무쇠보다도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예배당을 짓누른 후에 예배가 끝나자마자 예배를 드리던 기간 중에 우울한 표정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예배당을 빠져나갑니다. 그들 중에 태반이 형식적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난 은혜의 감격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세상을 향해 순교의 결단을 가지고 한걸음을 내어딛어도 세상이 변할지 말지 하는데 그렇게 세상과 야합하는 마음으로 이미 벌써 세상에서 설탕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발길을 돌리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복음주의는 프란시스 쉐퍼의 지적과 같이 빛 잃은 등불이오, 맛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정황 하라는 미명하에 현실타협에 능숙한 패배적인 모습들이 되어버렸고 그리고 위선적인 삶에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그것이 위선이라고 하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현실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의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나누어줄 때 먹고 배불렀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 지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입성하실 때 종료나무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펴서 길거리에 깔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실 때 구경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진실 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정한 신자가 되지 아니하면 이 모든 교회 생활과 형식적인 종교생활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뭐 할일이 없어서 여러분들이 그런 헛된 일들에 여러분 자신의 정욕을 소진하며 의미도 없는 종교생활을 이어가려고 하십니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 대해서 화가 나든지 그 말씀대로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 분노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지 됩니다. 바람에 떠밀리는 갈대와 같이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에 굴러다니다가 사라지는 물방울과 같이 거품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묵은 땅에 불을 질러 모든 잡초들을 태워버리고 그리고 농부는 뜻을 세우고 그 땅에 쟁기를 깊이 꽂고 기경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강력한 영적인 기경이 필요하고 우리의 태만해지고 부패한 심령들도 무디어진 마음들도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의 심령에도 이런 강력한 기경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을 때는 무지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뭐라고 변명하시겠습니까?
어떤 지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처음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가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모두 다 벗기는 것 같았고 영혼에는 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 어두움 속에서 무지 가운데 살았던 실패했던 날들이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날아갈 듯이 행복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 얘기인데 그 다음 얘기가 좀 우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예수 믿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보니까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었는데 은혜와 각성 속에서 살아남은 죄가 다시 동료들을 규합해서 내 안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그래서 곤고해져서 하나님 어떻게 하냐고 매달리고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또 말씀을 주셔서 한번에 쓸어 내버리십니다. 그러면 또 그 폭풍을 이긴 부패한 죄의 뿌리가 자신 속에서 다시 돋아납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마음을 다해 기도하지 않고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매일 매일 새롭게 변화 받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어두움 속에서 자기를 주장했던 죄악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어느 날 진리를 많이 받고 깨달았다고 그랬는데도 옛날에 어두움 속에서 살던 때와 다름없는 신앙생활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죄와 싸워야 하고 언제까지 우리들이 영혼의 싫증, 육체의 게으름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진리를 따라서 순종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몰라서 물어봅니까? 죽을 때까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렇지만 나는 참 신자 되기 위해서 분투하며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삶이 너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의 어두움에 사로잡혀서 죄악 가운데 살 때 받았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무슨 뜻인가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 퍼질러서 쉬게 되는 일만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 뒤를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는가하면 쉬게 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이 나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내 멍에를 쉽고 가벼우니 내게서 배우라” 이 멍에를 맨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 당시대의 문맥에서 보면 장인과 그 제자로 들어오는 사람의 도제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장인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유명한 장인을 찾아가서 맨 처음에는 그냥 수발만 듭니다. 물 떠오고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거들면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런 도제의 관계가 함께 멍에를 맨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영적 성장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단지 설교나 듣기나 하고 책이나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공부 잘하는 사람의 나라 게. 그렇게 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그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향하여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서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런 도계로 불러주시고 그분의 멍에를 함께 매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몸에 나타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삶을 통해서 지자의 삶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들이 영혼의 진정한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80년대에는 이단이 활개를 치던 시대였다면 오늘날은 향락 때문에 젊은이들이 이단보다도 더 많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는 여러분들이 진정한 신자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진실한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고집대로 영 죽을 세상이 더러운 줄 몰라서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회심에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분의 구속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것들을 터득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여러분 회심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정말 이미 장성해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의 죄에 대해서 번민하고 그리고 자기를 지적하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괴로워하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진실로 회개하는 정직한 반응이 없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별로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새로워져야 하는데 그럼 무엇으로 하나님이 묵을 땅과 같이 되어버린 우리의 심령을 기경하실까요? 이에 대해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의 쟁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의 쟁기입니다. 모두 불태워진 잡초의 잿더미위에 버려진 그 묵을 땅에 쟁기를 깊이 박고 소가 다름질하기 시작할 때 땅이 뒤엎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대로는 무엇을 고쳐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무엇인가를 심기 위해서는 갈아엎어야 합니다. 굳어진 교회의 땅이 무엇으로 뒤집어 갈아엎어집니까? 딱딱하게 굳은 여러분의 마음의 그 땅이 무엇을 위해 갈아엎어질까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33살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교수로 부임을 해서 학교에 갔더니 처음 간 학교에서 교수실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 생애에 있어서 그 교수실을 받을 때가 집샀을 때보다 더 좋았습니다. 방이 아주 작았습니다. 한 10명 들어가서 앉으면 무릎이 맞닿은 정도의 작은 방이었지만 그래도 그 방이 너무 좋았습니다. 혼자서 조용히 책을 볼 수 있었고 창문을 열면 산자락이 창 아래 끝까지 내려와서 다람쥐들이 창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아주 좋은 교수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더욱 게으를 수 없을 정도로 환경적으로 압박을 받으면서 분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급기야는 건강도 안 좋아서 화장실에 앉으면 한 컵씩 피를 쏟아내는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제 마음을 가난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성경을 펼쳐서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늘 읽는 성경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놀랍게 성경을 열면 금싸라기를 부어내리시는 것처럼 그렇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읽었는데 많이 읽을 때는 한 5-10장을 읽었고 못 읽을 때는 한 반장을 읽으면서 묵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에 제 스스로에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태까지 내가 가르친 기록대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 기독교는 아니었던 것 같고 내가 배운 기독교도 사실은 예수님이 나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그 기독교는 아니다. 유사했지만 아니다. 이것이 저의 영적인 순례를 위해 항구를 떠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한 진리의 말씀이었다면 서신서는 교회가 세워진 곳에 그것이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없으면 기독교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치명적인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진리들을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죄, 구원, 그 다음에 성령의 능력, 심판, 종말, 지옥, 마귀, 십자가, 죄와 분투하는 삶, 마지막 상급, 영광스러운 하늘나라, 부활의 능력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 모든 뽑아놓은 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오늘날 잃어버린 설교의 제목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기독교의 중심적인 기둥들인데 어떻게 기가 막히게 이것들만 빼놓고 사람들이 설교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심지어는 제가 만난 어느 교수님은 자기는 장로지만 교회의 강단에서 선명하게 자기를 향해 자기를 죄인처럼 생각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설교를 들은 지가 30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본래의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존재 그 자체가 예수님이 의도하셨던 그 존재로 회복되어야 하고 그 회복된 존재 위에 그 교회로 하여금 교회로 역사하게 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또한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믿어야 할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있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좋은 곳이 생겨서 다 이사를 가버리고 이것을 허물고 빵 공장 차리면 이곳은 공장입니다. 다 허물고 사이다나 콜라를 만드는 공장이 되면 그야말로 음료수 공장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신성성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연합에 있는 것입니다. 그 연합이 원래의 존재대로 의도했던 존재로 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참된 진리의 말씀이 필요하고 그 복음 진리의 터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그 진리의 요소들을 경험하고 그 진리의 요소를 통해 경험한 그 체험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이 진리를 확신하며 그 진리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교회가 그렇게 능력 있었던 이유는 바로 교회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가르쳐준 그 진리를 매일매일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 많은 이 세상 보다는 영적인 왕국을 더 사랑했고 로마의 시민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되기를 더 그리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표현할 때 한결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에게게르 타이’라고 하는 현재 완료형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고 말할 때에도 그들이 고백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다르’는 ‘에스타오르 타이’라고 하는 희랍어의 현재 완료형 동사였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현재 완료동사는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력이 오늘까지 미치고 있는 것을 표현한 화법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지만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향이 지금도 내 안에 있어서 그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핍박을 받습니다. 투옥되어도 평안이 잠들 수 있고 예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돌팔매를 던지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 수 있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런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채 앙상한 윤리적인 교훈 몇 가지를 가지고 구태의연하게 살아가는 그런 핍절한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구원을 얻는 일들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가 우리를 살리시고 그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들이 아니요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을 얻은 것입니다. 영원히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가 우리를 살린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어두운 세상을 자기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무엇으로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이르는 참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어두운 세상에 택해서 자기를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구원받았는데 어떤 빛도 없이 살다가 죽었다면 그것은 축복받은 인생이 아니라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무엇으로서 우리의 묵은 심령에 깊이 쟁기가 되어주고 갈아엎어주셔서 다시 찬란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 된 삶을 살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이 빛은 일차적으로 영광의 빛, 진리의 빛을 의미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리멸렬하게 이어가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거지로 이어가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성공하면 외식이고 실패하면 배교입니다. 무엇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강요합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새가족반 공부를 안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그래서 서로 서로 어깨동무하고 교양 있는 사교클럽처럼 교회를 만들어감으로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 살아계셔서 형제의 모습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자매의 모습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그래서 어두운 이 세상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해놓으신 구속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그 모든 학습들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구속받은 목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싫증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부패한 영혼에 깊이 쟁기 박혀 갈아엎어진 영혼의 각성과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치스러운 종교적인 생각들이 여러분들을 정말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젊음의 정욕에 쉽게 굴복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잘 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기도 훌륭하게 저항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런 삶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한때 주님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견고한 성도의 영적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까. 묵은 땅이 기경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찾을 때라. 모든 것을 접어두고 그리고 도대체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아서 이 젊음의 날을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집중입니다.
고등학교 때 제게 독일어를 잠깐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있었는데 이 양반이 취미가 독특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옥상에 올라가서 추운 겨울에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그런데 과외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옥상에 올라가서 라면을 끓여 먹는데 곤로에다 끓이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었습니다. 태양열 기구를, 그래서 거울을 작은 것을 다 이렇게 비쳐서 오목거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냄비를 놓고 빛을 다 모읍니다. 신기한 게 그 양은 냄비에서 물이 끓습니다. 거기다 라면을 끓여서 먹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웃었더니 그 선생님이 잡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과학 잡지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린나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7층 정도의 높이에 큰 빌딩을 지었는데 그 빌딩을 오목거울로 팠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정교하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초점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워놓은 쇠가 구멍을 뚫으며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게 집중의 무서움입니다.
여러분, 진짜 하나님 앞에 변화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이 생각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아마 그것보다도 백배나 더 큰 거울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초점이 산발적으로 흩어있다면 결코 그 물을 끓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오목거울이지만 초점이 하나에 맞을 때 물을 끓이고 급기야 쇠도 녹일 수 있었던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동사 가운데 하나가 찾는다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단지 루킨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 존재적인 갈망을 가지고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마음고생을 실컷 한 일이 있었습니다. 외국에 가야지 되는데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미국 여권 비자까지 붙어있던 여권이 어디로 가버렸습니다. 잘 둔다고 어느 파란 책갈피에다가 끼어났는데 그 책이 어느 책인지 너무 잘 두었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야지 되는데 우리 집사람은 포기하고 구청에서 가서 신고하고 빨리 만들라고 하는데 너무 억울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비자를 내는 수속이 너무 복잡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찾겠다고 한 3-4일을 찾았는데 온 책을 다 끄집어내서 뒤집어내고 난리를 쳤습니다. 못 찾았습니다. 밥을 먹어도 그 생각, 잠을 자도 떠오르는 게 그 생각, 화장실에 가서도 그 생각, 초록색 헝겊만 봐도 그 생각, 그때 제가 깨달은 게 아, 이게 찾는다는 것이구나. 정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나를 또한 찾으시고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묵은땅과 같은 내 심령을 기경시키시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도 어쩔 수 없던 내 자신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신앙,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갈망이 필요합니다. 뜻 없이 시간이 되면 교회에 와서 시계나 만지작거리며 예배나 드리고 지체들과 어울려서 기타나 치고 먹고 마시고 그리고 돌아갈 때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서 집에 갈 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공허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두움에 선명한 빛을 비추시고 그래서 희석해진 우리의 마음, 스스로 돌아갈 래야 돌아갈 힘이 없는 묵은 땅이 되어버린 우리의 가슴, 그 진리의 말씀을 깊게 심으셔서 힘 있게 우리를 기경해주시기를 목말라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의 가슴에 의를 빛처럼 내리실 것입니다. 듣기만 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경험하게 될 것이고 보기만 하였던 주님의 은혜의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조국의 교회가 이렇게 말씀으로 기경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예수 크신 복음을 주 예수 크신 복음을 늘 듣게 하소서’ 우리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서 그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말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이 장엄한 은혜의 세계, 말씀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치열한 삶에 대해서 증거 해 줄 때 그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우리의 다음 세대가 기대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말씀의 은혜를 깊이 사모하며 이 말씀에 의해서 기경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입니다. 한 사람이, 혹은 한 시대의 교회가 정확하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능력을 경험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죽은 전통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그 성경을 진리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주는 성령님의 강하고 힘 있는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묵을 땅과 같은 한 시대의 교회는 성령의 강력한 쟁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기경되어질 때 관념에 그쳤던 수많은 기독교 진리들은 그들의 가슴속에 살아 역사하는 체험된 말씀이 되고 이지 속에 머물러있던 수많은 신앙의 지식들은 가슴속에서 역사하고 요동쳐 그들의 온 삶을 뒤흔들어놓는 기폭제가 됩니다.
복음의 능력이라고 할 때 그 능력이 듀나미스이고 그 듀나미스에서 다이너마이트라고 하는 영어가 왔습니다. 폭발하는 위대한 힘과 놀라운 능력이 성령 안에서 그 진리와 함께 나타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듀나미스 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교회의 지체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에 모든 총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잠들어 있는 삶을 사는 교회 안에서 능력이 있는 교회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두 부패한 욕망을 가슴에 품고 묵은땅과 같은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인들이 모인 그 속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무장된 교회의 모습을 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개인인 동시에 또한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개개인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연합된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진지하게 기도해야 됩니다.
정욕에 흐르기 쉬운 젊음의 날들을 순결하게 보내는 비결을 하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를 위해서 많이 우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부패하고 망가진 교회를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 안에 깊이 끌어안고.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을 고쳐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살 때 우리는 젊음의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의 나라의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오, 묵은 땅과 같은 이 시대의 잡초가 우거진 교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의 핍절한 삶을 보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이 오시면 뭐라고 말하실까요? 오늘 이 냉담하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교회가 그렇게 냉담할 수 있습니까? 그 피로 속죄함을 얻고 그 피로 구속의 은혜를 입은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 앞에 냉담할 수 있습니까? 그 크신 능력에 복음이 성령의 권능과 함께 우리 묵은 땅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기경하게 허락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힘과 능으로 도저히 뒤엎을 수 없는 이 시대의 교회를 주님이 엎으시도록 현실을 인내하는 영성이 아니라 뒤엎는 그런 영성을 소유하는 교회가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이 젊은 날에 기도해야 합니다.
바알 선지자와 대적하던 엘리야를 기억해보십시오. 그가 메마른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바알 선지자들과 대적할 때 하늘은 불을 내려 수많은 장작들을 태웠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그친 그 하늘을 위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기도했을 때 그 한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며 하나님이 비를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끝없이 철없이 교회에 드나드는 어리석은 수많은 신자들이 아니라 빈들과 같은 벌판에서 주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어두운 역사에 그 그늘 아래서 다가올 부흥의 여명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최후 승리하기까지 주님이 교회를 붙들고 놓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 때문에 세상 나라는 영원히 망하고 멸하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왕권은 영원무궁할 것이라고 하는 진리를 굳게 믿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해주실 그 능력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의 교회를 일깨우십니다.
춤추고 노래하던 시대에 그들은 눈물 흘리며 기도했고 먹고 마시던 시대에 금식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말라했습니다. 그들의 흐느낌은 역사의 새벽을 밝히는 여명이 되었고 그들이 뺨에 흐르는 눈물의 기도는 다음 세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찬란한 새벽별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한번 밖에 없는 인생,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젊음을 여러분 무엇을 위해서 쓰고 싶으십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고 얻으신 교회,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성취하고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낼 이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위해서 누가 바울처럼 죽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생명을 버리겠습니까?
교회 아픔을 내 아픔처럼 간직하고 묵은 땅처럼 굳어진 교회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한 심령을 읽고 돌처럼 완고해진 형제의 모습 속에서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흐느낌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 인생이 마름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면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씻기시려니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예수님의 눈물을 씻겨드리고 교회의 눈물을 씻어주고 싶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 젊음을 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향해 목말라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들을 통해 새로운 한 역사를 펼쳐가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타날 찬란한 복음의 승리와 여호와의 영광의 기쁨, 그리스도의 거룩의 나타남은 오늘 우리들이 어두움 속에서 아픈 교회를 부여잡고 흘리는 이 눈물이 가져다주는 고통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위한 한 부싯돌로서 한 알의 밀알로서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영광과 회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