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갈림길에서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죽음 같은 궁핍의 길에서(눅15:11-24) 2006.8.6 주일오전 1
2.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왕하6:14-17) 2006.8.13 주일오전 17
3. 네 자녀를 돌이키게 하라(삼상2:12-36) 2006.8.20 주일오전 31
4. 여호와께서 치실 때(룻1:16-18) 2006.8.27 주일오전 47
5. 침체와 회복의 갈림길에서(시107:10-14) 2006.9.3 주일오전 61
6. 두려움과 희망사이에서(창35:1-2) 2006.9.10 주일오전 78
7. 환란과 능욕의 날에는(삼상8:1-5) 2006.9.17 주일오전 97
8.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사38:1-6) 2006.9.24 주일오전 109
9.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때(시 42:1-2) 2006.10.8 주일오전 120
10. 핍박과 시련을 만날 때(단6:1-10) 2006.10.29 주일오전 131
1. 죽음 같은 궁핍의 길에서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15:11-24)
I. 본문해설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생의 갈림길에서” 라는 시리즈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첫 시간은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을 하는 사람들에게 죄인들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신 비유였습니다. 15장에는 그림과 같은 세 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첫째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두 번째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마지막 세 번째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세 비유는 잃어버려지게 된 그 이유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양은 의도는 없지만 연약했기 때문에 잃어버렸고 드라크마는 연약하지도 않고 의지도 없는 물질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잃어버린바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의지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잃어버린바 된 경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안타까워하시고 그들을 다시 찾으신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어서 돌이키게 하는데 이 비유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세 번째 비유로서 탕자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보면 한 부자인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을 합니다. 아버지는 상당한 재산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 집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요구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그 아들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들어주고 그리고 아들은 이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음과 같은 곤핍함의 길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주었다는 이야기로 이 탕자의 비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보석과 같은 교훈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 본문 자체가 한 시리즈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의 양입니다만 오늘 우리들이 간략하게 이 탕자의 비유에 나와 있는 그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돌아서는 과정을 살펴봄으로 우리 자신도 이렇게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II. 죽음 같은 궁핍의 길에서
우선 여기에 보면 아버지의 집을 떠난 이후에 죽음과 궁핍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사랑하는 아들의 이야기가 등장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서는 이 아들의 이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제일먼저 이 고통스러운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서는 과정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부족한 것이 없이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이 마음속에서 자기는 속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더 많은 자유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아닌 먼 나라, 아버지의 간섭이 없이 자유로운 곳, 그곳에서 내 마음속에 그리는 데로 내 삶을 한번 살아보는 곳, 이런 자유에 대한 갈망들이 커지면 커질수록 지금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아주 고통스러운 속박이었고 그래서 이 아들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입니다.
A. 자유를 갈망함
이 자유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 안에서 얻게 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갈망을 가리켜서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정욕은 성적인 부정한 욕망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정욕은 인간이 자기의 욕심대로 살고 싶어 하는 육체적인 욕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이면에는 하나님이 이 온 세상을 만드셨고 창조의 목적을 갖고 계시며 나도 하나님의 그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창조하셨고 내 인생도 하나님의 그 큰 계획안에 있다고 하는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라는 욕망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정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방탕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탕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이미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의 본성을 탕자의 본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탕자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주님 앞에 예배하고 성도로서 기본적인 의무는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망이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사실상 아버지의 집에 있는 잠재적인 탕자들입니다. 이 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고 하는 갈망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신자 안에 똑같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말하기를 “세상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 신앙에 있어서 총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그런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방향으로 무엇인가를 하면서 내가 즐거움을 어기려고 하는 것, 그럴 때 그 즐거움이 마지막에 가져다 줄 고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현해보지 않고도 미리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신앙의 지혜이고 총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면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명정한 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행복해보이고 즐거워 보이는 것인데도 이 사람은 그렇게 자유를 따라 살면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견디기 힘든 속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서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만족하고 그 안에서 거룩하게 사는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화되어가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아들의 마음속에서 견딜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아버지의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의 간섭 속에서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그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육욕적인 갈망에 사로잡혀서 신앙을 떠난 자유, 하나님을 떠난 자유를 구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탕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욕망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존 오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거룩한 사람에게는 신실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것이고 방종한 신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은 방종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신자의 정체성은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 이제 그는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즐거움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아갈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이 땅에서 나그네라고 자처하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는 동안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단정한 신자들이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이 탕자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먼저 읽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마음을 버리고 깨끗하게 하여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해하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뻐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언젠가 여러분이 탕자와 같이 집을 멀리 떠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나서 그래서 멀리 방탕한 길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떠나는 그에게는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결국은 자유를 누린 것만큼 영혼은 속박을 받아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탕자가 경험한 것이 궁핍이었습니다. 맨 처음 보무도 당당하게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모두 처분해서 돈 가방을 들고 떠날 때는 정말 씩씩해보였습니다. 이 탕자가 나쁜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창기들하고 먹고 마시면서 신나게 방탕하게 살다가 와야지 그리고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아마 이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는 먼 나라의 도회지로 가서 사업도 하고 해서 돈을 좀 더 쉽게 벌어서 그래서 이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여봐란듯이 성공해서 금의환향 하리라 하는 그런 종류의 꿈들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야말로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아버지의 간섭이 없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고 나면 자신이 항상 성공하고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대적을 몰랐습니다. 방탕하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방종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정욕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허랑방탕하며 많은 재물들을 낭비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있을 때는 친구도 있었고 즐거움도 있었기 때문에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가지고 간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되었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어디에 가서 밥벌어먹을 때도 없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고 마침내는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었지만 쥐엄열매 조차도 먹을 수가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탕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그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B. 궁핍을 경험함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자원들은 바닥이 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영원히 우리에게 무한히 있는 것은 없고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그것은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에 우리를 빈털터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이 탕자가 경험한 것은 육체적인 궁핍이었습니다. 죽음과 같은 그런 고통스런 물질적인 궁핍을 경험하였습니다. 부자인 아버지의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방종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좋은 옷과 그리고 좋은 신발을 신고 입고 그리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풍족하게 무엇 하나 부러운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물질적인 궁핍, 물질적인 가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으로 죽음을 방불한 가난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잃어버렸고 자기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외톨박이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붙여먹어서 종처럼 살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멀리 들판에 내어보내서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게 했습니다.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는데도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어서 쥐엄열매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이 쥐엄열매는 당시의 돼지의 사료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절대적인 궁핍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육체적인 말할 수 없는 궁핍한 상태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이 육체의 궁핍 속에서 사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들이고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더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고 계시는 연단 중에 계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궁핍을 누리면서 죽음과 같은 이 가난의 길에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길을 지나가는 것은 아버지의집을 떠났기 때문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궁핍 속에서 죽음과 같은 궁핍 속에서 그렇게 고통 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가슴에 손을 얹으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서서 육체적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고통스러운 물질적인 고통을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계십니까? 교회에 나오는가? 하고 제가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영혼과 마음과 온 삶이 예수 안에 있는가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음은 올바르며 영혼은 은혜 안에 있는가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예수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움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은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고 있습니까? 가난하고 궁핍하고 고통스러워도 여러분들의 영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소중합니까? 아멘! 할 수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곧 그 가난을 물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죽음과 같은 궁핍에 돌이켜서 하나님이 다시 여러분들을 복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멘 할 수 없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궁핍한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기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여러분들에게 아낌없이 주셨지만 물질은 너무나 아까워서 여러분들에게 주실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죽음과 같은 궁핍의 때를 지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생명을 누리는 관계 속에서 여러분들이 이탈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죽음과 같은 육체의 궁핍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을 지나는 사람들 중에 부지런하지만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성실하지만 자기를 인정해주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은 삶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궁핍해도 나하고 싶은 것은 해야지 된다고 하는 자기 편의주의, 그리고 내가 이렇게 궁핍하지만 내가 어떻게 천한 일에 봉사하랴. 내가 궁핍하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내가 그렇게 고달픈 삶을 살겠는가. 하는 이런 잘못된 인생에 태도가 많이 기도해도 여러분들을 그 궁핍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어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그 사람의 궁핍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해야지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와야지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물질을 주시면 하나님이 큰 실수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겨우 교회에 나와서 신앙의 명맥만을 유지하는데 물질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멀리 떠날 것입니다. 탕자와 같이 보따리를 싸서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으로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궁핍하게 사는 것이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삶의 태도를 고치십시오. 여러분들이 가난하고 궁핍하면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무십시오. 그렇게 여러분들이 자립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자력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수고한 데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예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아왔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물질의 축복을 주셨는데 그 물질 때문에 범죄 했기 때문에 지금은 다시 그 물질을 모두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육체의 자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아는 아무 아무개는 하나님과 화목하지도 못하고 범죄하며 사는데도 풍족한 물질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부럽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없이 물질이 많았더니 이 탕자가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이 탕자가 돈이 없는 아버지의 집에 품꾼이었다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두어가십니다. 제가 보증해주겠습니다. 반드시 거두어가십니다. 그래서 깡통 차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계속 번영하게 하신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 택한 백성은 그렇게 두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 돌아와서 그나마 밥이라도 먹고 살고 물질생활을 누리는데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주신 그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사는데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겠습니까? 반드시 깡통 차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면 반드시 동일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이 주셔도 우리의 자력의 자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워지면 그리고 신앙이 없으면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을 원망하게 됩니다. 자살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성부 성자 성령님께
그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행복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되는 그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행복과 자유를 꿈꾸는 것 자체가 범죄입니다. 그는 많은 행복과 번영이 기다려도 거기 하나님이 없으면 그것은 내 기업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복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물질적으로 죽음과 같은 궁핍의 때를 지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집을 떠난 탕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원이 모두 떨어진 것이 아닌지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집을 생각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궁핍보다 더 비참한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궁핍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먼 나라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돼지는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경멸하는 짐승이었습니다. 그것을 치는 목부가 되었다는 것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존감마저 모두 팽개치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정신적인 공항의 상태에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육체의 욕망을 버리고 나면 많은 물질이 필요 없습니다. 먹고 살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그러니까 돈 없는 것이 불편하지 그러나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사실은 충분한 것들이 많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인 외로움과 영적인 궁핍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정말 곤고한 인생길에서 인생의 비탈길에 서서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여러분들이 교회 문을 두드리고 열린 교회에서 말씀을 들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배가 고파서 그랬나요? 한모금의 물이 없고 한조각의 떡이 없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가슴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번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예수님의 이름을 찾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계기에 지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육체적인 궁핍보다 더 깊은 밑도 끝도 없는 영혼의 궁핍, 정신의 고통이 여러분들의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은혜생활을 하시는 것을 정말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여러분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결단하는 것, 하나님이 모두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것을 의지하지를 않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지체가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제 신앙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요? 목사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정색을 하고 그랬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우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네 신앙을 책임져주는가 그랬습니다. 신앙의 언저리에서 깡통 차고 영적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돌아다닙니다. 어떻게 책임져주는가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울려 퍼져서 어떤 사람은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시간에 보따리 싸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이 좋아서 교회에 왔다가도 그 다음에는 말씀이 진력나서 보따리 싸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될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이렇게 경건한 예배에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묵상, 진리에 대한 풍부한 빛,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의지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들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은혜가 충만하다고 합시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여러분들이 의지하며 살기를 원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은혜를 주시지만 여러분은 은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매일 왕년에 내가 받았던 은혜가 어쩌고저쩌고 하고 그렇게 자랑하는 사람들이 금년에 그렇게 허접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얼마나 은혜 받은 사람인데, 그게 무슨 상관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을 끊으시면 다 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빈털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무한하고 불변하고 끝이 없는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나온 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면 모두 동이 나고 바닥이 나고 궁핍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의무가 무엇인가 하면 매일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고 내게 필요한 육체적인 자원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하면서 살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 필요한 은혜를 매일매일 공급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웃리치 때 받은 충만한 은혜, 그것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회상하면서 오늘 다시 그 은혜를 사모하며 매일매일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래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계속 공급받으면서 살아야지 우리가 그 자원을 사용하면서 무한히 흘려보내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 견디기 힘들게 곤고하고 괴로운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모릅니다. 이게 표상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나니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철저한 고갈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비참한 궁핍의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너무나 궁핍해지면 생각나는 게 하나입니다. 죽음입니다. 이 궁핍 때문에 경험하는 고통을 받기 보다는 차라리 고통이 없는 죽음의 상태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이 끊어진 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통로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경쟁을 해서 자원을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이게 자꾸 소모되니까.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자원은 그렇게 채운다고 하는데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은 어떻게 채우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그 깊은 영혼의 궁핍은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C. 마음을 돌이킴
영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거기로부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을 받고 우리의 육체에 필요한 물질적인 자원도 끊임없이 공급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게 영생입니다. 이게 영생의 삶입니다. 탕자는 여기서 철저한 궁핍을 경험합니다. 예전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그 비참한 궁핍을 경험합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의 내면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는 쥐엄열매라도 먹고 싶었는데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위기를 느꼈는가 하면 ‘이렇게 굶어서 죽는 것이구나. 나는 이제 여기서 이렇게 굶어서 죽는구나,’ 하는 정말 뼈저린 인생의 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최초로 마음이 깊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그런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생각난 것이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이제 여기서 굶어죽는구나. 그러면서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들은 쉽게 얻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자신의 인생을 밝혀줄 진리의 말씀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오늘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정말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으면 안 될 그 삶의 비참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무너진 사업, 깨어진 가정, 회심하지 않은 자녀, 회심하지 않은 내 남편 뭐 그런 것들을 비롯해서 그다음에 많은 인간의 관계와 삶에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중의 소수의 사람들만 만납니다.
어제 저녁에 나온 열린 신문을 다 읽었습니다. 몇 달 가운데 나온 신문 가운데 저는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내용들이 그 신문 속에 많이 있었습니다. 간증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은 많은데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은 그 중에 소수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눈물로 기도해주고 교회가 사랑으로 돌보고 온 힘을 다해도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그게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낮아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제 회심의 문제를 이야기하니까 남편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고민한다는 것과 갈망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한번 어떤 자매가 교회를 떠나면서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목사님, 저는 열린 교회가 너무 좋은데 남편이 예배당에 와서 계속 잡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이 길다고 계속 불평하고 교회를 떠나자고 그래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봤나. 자녀가 회심하지 않았다고 고민 많이 하고 그리고 뭔가 교회의 교육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생명을 걸어보셨습니까? 내 남편을 회심해주시든지 나를 죽여 버리시든지 둘 중에 하나 해주십시오.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회심하지 않은 내 자녀들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 눈을 감겠습니다. 그렇게 결단을 해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그런 결단을 못하게 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게 하기 싫은 것입니다. 왜 그 희생, 그 목마름, 그 매달림, 그래서 자기를 모두 포기하고 그 하나의 목적에 자기를 다 바쳐야 하는 것, 이게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뭐 하나님의 큰 다른 뜻이 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어떤 이유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잘 믿는 것입니다. 목회의 축복이 있으려면 목회자가 잔인하게 부서져야 합니다. 거기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잔인하게 부서져야 합니다. 거기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남편, 그랬는데 목숨을 걸어보셨나요? 목숨을 거십시오. 정말 엊그제도 자매 하나가 교회 마당에서 제 손을 꼭 잡고 놓지를 못합니다. 자기 남편이 회심했다고, 아니 그 철벽이 어떻게 회심했는가,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하셨습니다. 그 이면에는 누군가가 그 주인이 흘리지 못한 눈물을 대신해서 흘려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고 인내하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방황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둡고 캄캄한 길에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나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래서 내 남편은 회심이 없고 우리 가정에는 풍파가 그치지 않고 먹고 살아보려고 몸부림치지만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서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강퍅하고 회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낮아질 때 그때 사람을 향한 원망과 사람으로부터 오는 도움 같은 것은 다 사라지고 오직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 한분께로 향합니다. 오늘 이 탕자와 같은 그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을 지날만합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은사로 주신 분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아들까지 주셨는데,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급합니까? 예배가 끝나고 설교자는 아직 나가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벌떼처럼 일어나서 뛰어나갑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위한 감격 때문에 못 일어나고 못 받았으면 자기가 밉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건성으로 예배생활을 하니까 마음이 겸비해지지 않고 겸비해지지 않으니까 수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입니다. 그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가 다 주셨는데도 그 집을 떠나서 죽음과 같은 궁핍 속에서 살아갑니다. 돌아서는 지혜로운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기다리시는 아버지
결국은 이 아들이 그렇게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보면서 용기를 내고 결단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다리시는 아버지,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A. 귀향의 결단
여기에서 귀향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에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방황하고 그렇게 괴롭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대게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내가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렇게 간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사실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있는 신비한 작용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올 때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거의 없었습니다.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고통을 눈물을 흘리고 나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에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버지의 집에 갈 면목이 없는 짓을 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자기가 이렇게 아버지를 배신하고 떠나온 것이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는 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살면서 여전히 사람을 원망하고 내 인생이 꼬였다고 불편하고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 원망의 이런 태도를 여러분들이 계속 가지고 살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계속 꼬입니다. 뭐가 생각이 나야지 되는가 하면 내가 하늘 아버지께 죄를 얻었나이다. 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 대한 회개가 없이 땅에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파렴치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 탕자가 그랬다면 그것은 파렴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은 그 가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과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신자가 마땅하여 할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주의해야 될 것은 이 은혜는 우리에게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의지를 압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는 무엇에 의해서도 강조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부서져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지를 하나님이 불러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갗 태어난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엄마입니다. 엄마가 그 젖을 먹여줍니다. 자기에게 엄마 젖이 필요하다고 입을 오므리면서 칭얼거리는 것은 아이입니다. 적합한 비유가 될는지 자신은 없지만 말하자면 그것입니다. 아이가 칭얼댄다고 해도 그것으로 자기가 저절로 양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의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실 때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사용하셔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무꾼이 장작을 쪼갤 때 장작을 결대로 세워놓고 도끼질을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 안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마음과 의지를 보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지를 보고 하나님이 그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돌아간 사람들은 우리의 의지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갔다고 고백을 하게 합니다. 돌아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한계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뭐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물이 이렇게 쏟아지면 그것을 보고 우리는 이 안에 물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압니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안에 이미 물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흘러나올 것을 압니다. 똑같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시간과 공간에 매이시지 않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밖으로 흘러나와야지만 비로소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그 자체를 보시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는지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나는 돌아갈 수 없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면 나는 돌아갈 수 없고 따라서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순종하려고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이 아들은 결단했습니다. 사실 그 귀향의 길을 가로막는 어려운 숙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이 아들은 생각하기에 그래도 아버지의 집에 돌아갈 때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유산을 훨씬 많이 불려서 꽃가마를 타고 그래서 성공해서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집에서 이렇게 별 볼일 없이 농사나 짓고 사는 것보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렇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산을 다 탕지하고 이제는 비렁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받아주실까? 또 시기심 많은 형이 내가 그렇게 돌아갔을 때 인간취급도 안 할 터인데 형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내가 늘 부리고 우습게 생각하던 그 품꾼들이 내가 자신들보다도 초라한 얼굴로 이렇게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는 나를 보고 얼마나 뒤에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할까? 아버지는 과연 나를 집에나 들여보내줄까? 라고 하는 이런 많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들은 결단을 했습니다. 무슨 결단을 했습니까? 그 모든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면 이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이렇게 핍절한 삶을 살며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낫다고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결단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아버지께 맡기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고 결단하게 되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그런데 이제 결단을 못할 사람들은 보면 머리가 복잡합니다. 그리고 잔머리를 많이 굴립니다. 결국은 수없이 잔머리를 굴리면서 괴로움의 날들을 보내는데 번민에 번민을 더할 뿐이지 해결은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는 내 아버지시고 나는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 나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단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순종의 삶입니다. 그게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렇게 좋은 머리로 여러분들이 육체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까? 머리를 굴리며 잔머리를 굴리다가 나중에 죄까지 지었습니다. 쉽게 돈을 벌려고 하니까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궁핍을 채우기 위해서 그냥 고민하는데 무슨 답을 얻었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방탕해서 그 돈을 모두 잃어버린 날부터 이 사람은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후회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후회에 가득 찬 마음으로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었고 그리고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먹이는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민하고 후회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지막에 뭐가 필요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남편이 회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한번 목숨을 걸어보십시오.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았습니까? 자녀들이 아무리 강퍅한들 하나님의 은혜를 능가할 수 있을까요? 사업의 위기가 옵니까? 목숨을 걸어보셨습니까?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결단을 위해서는 그 결단할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결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적거리면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늙어가고 금같이 소중한 여러분들의 세월은 계속 흘러갑니다. 정말 짧은 우리의 인생사는 동안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온전함을 쏟아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영혼을 위해서 살고 이렇게 복음의 빛이 들어가지 않은 많은 곳에 이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도 모자라는 시대인데 이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마치 똥통을 밟은 곳을 지나가는, 그 시궁창 냄새가 나는 곳을 걸어가는 것 같은 끝도 없고 목적지도 보이지 않는 그런 길을 허덕이면서 걸어가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에 발을 담구고 한편으로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도움이라도 받을까. 그러면서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매달리자니 하나님이 무섭고 하나님께 매달리자니 세상이 아까워. 그러면서 끝없는 세월을 낭비하면서 삽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실험해보십시오. 무엇인지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겠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리라. 그러기 위해서 이제 내가 이런 의무를 이행하리라. 하고 뜻을 딱 세워보십시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시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기뻐하시는구나.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결단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돌이켜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도 잃고 하나님도 잃고 아끼는 자 없이 그런 궁핍의 길에서 사는 것입니다. 떨쳐버리십시오. 집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는 결단을 해야지 됩니다.
B.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탕자는 그 결단 후에 스스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머리에 복잡한 모든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는 아버지 곁에 살아야 될 사람이다. 그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돌아갈 때 얼마나 많은 두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양심으로는 이제 도저히 살아계신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했으니 그것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으니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에서 이제 아들이 되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일이고 먼발치에서 품꾼 중에 하나가 되어서 지게라도 지면서 멀리서나마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도 나는 그렇게 살겠노라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니까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동구 밖에서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날 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동구 밖에 나왔을까요, 아니면 매일 그랬을까요? 매일 그랬습니다.
나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나의 첫 회심이 생각이 납니다. 21살 때 세상에서 찢기고 다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전도하는 사람 없어도 스스로 2층에 있는 작은 교회에 수요예배 시간에 찾아갔습니다. 삐거덕거리는 풍금소리가 들리고 찬송이 울려나왔습니다. 병들고 상심한 한때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에 철학과 사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숭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돌아갔을 때 어떤 철학도, 어떤 문학도, 어떤 사상가도 나에게 줄 수 없었던 근원을 알 수 없는 평안이 나에게 밀려왔습니다.
밤마다 문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생전 처음 평화가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변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단아한 모습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아들은 오랜 방탕한 생활에 수염은 길고 거칠고 그리고 돼지우리에서 지냈으니 그 옷은 형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한 거지 신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먼저 알아본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추루한 몰골로 돌아오는 그 순간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유산을 나누어가지고 가며 그 소중한 유산을 모두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일,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정말 비참하게 굶주린 자기 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더러운 얼굴에 입을 맞추면서 아들을 사랑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마음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뛰어나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출 때 틀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잘못되었거나 태도가 잘못된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이렇게 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에고, 인생아 왜 그렇게 사니?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참 반성을 많이 합니다. 옛날에 목회를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곤고하게 살면 당연하지, 그렇게 말씀 안 듣고 까부는데 정신 좀 차려야지 하는 마음이 내 안에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자기를 그렇게 아프게 했는데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랑, 아들이 남루하게 되었는데 왜 남루하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를 배반하느라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몰골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자기의 재산을 먹어버리느라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그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비참한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떠나서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서있는 여러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들이 제일 먼저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핑계를 댑니다. 애야, 너 왜 나를 떠나서 이렇게 곤고하게 사니? 하나님 그게 아니라 사연을 늘어놓으면 긴데요. 그 자식이 말이지요. 그러면서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울면서 아빠, 내가 하나님과 아빠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나를 이제 아들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아버지의 집에 있는 많은 품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주세요. 아버지의 옆에만 살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해야지만 정말 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무모할 정도로 많은 재산을 나누어주어서 아들에게 그 방탕한 길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인지 모릅니다. 그 고백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죽음과 같은 궁핍을 지나면서 사람 원망하고 자기 팔자를 비관하고 그리고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해서 이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궁핍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까? 더욱이 누군가를 치열하게 미워하고 그러면서 여러분들의 영혼의 궁핍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까? 공동체의 지체를 미워하고 아프게 하면서 그러면서 이런 궁핍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사람이 곤고하게 사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신기한 게 생전에 아들의 이 요청에 아버지의 답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는 오히려 못 들은 것처럼 종들에게 명합니다. 좋은 옷을 가져오너라. 예쁜 신발을 가지고 와서 신겨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락지를 끼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가락지는 도장입니다.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도장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의 기업을 창기와 함께 다 먹어버렸는데 다시 유업을 물려줄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반지를 끼어준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는 잔치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돌아온 아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한마디도 면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면서 아버지의 고백하는 말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죽은 것 같은 궁핍의 길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있어도 죽은 성도와 산성도가 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져서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육체적인 궁핍, 영적이고 정신적인 궁핍 속에서 방황하면서 사는 날들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날이 아닙니다. 그런 궁핍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것을 참회하고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는 살수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쥐엄열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야 합니다. 결단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유한합니다. 항상 바닥이 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끊임없는 육체적인 자원과 정신과 영혼의 자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맨 처음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불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곤고한 인생의 길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살수 없고 길을 알아도 그렇게 살 힘이 없을 그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어떻게 건져내어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거기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다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이 바로 가장 좋은 그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절하고 안타까운 음성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리지 않습니까?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떠나서 그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시달리는가. 너는 내게로 돌아와라. 나에게는 많은 양식이 있고 쉴 곳이 있는데 내게로 와서 너는 쉬어라 하고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갈림길에 놓여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가지 아니함으로 계속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결단하고 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이런 각오 속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다시 그 풍요와 행복의 삶을 살든지 이 갈림길에 여러분들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2.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4-17)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엘리사 선지자 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엘리사 선지자는 북 왕국 아합 왕 시대 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때 왕국 이스라엘 북쪽 지방에 아람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성경에 다메섹이라고도 나오고 혹은 갈대아라고도 나오는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는 신흥국가였는데 이제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를 자주 공격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계략을 세우고 침공하면 여지없이 그 들어오는 길목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복을 하고 있다가 방어를 하고 그들을 공격해서 자신들의 공격의 기도가 번번이 무리로 끝났습니다. 이런 실패가 거듭되자 아람왕은 틀림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일들은 아마 누군가 첩자가 자기들 내부에 있어서 그가 자신들의 공격에 관한 작전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겨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런 우려를 전달하자 신하 중 한사람이 사실을 고했습니다. 왕이여 그것은 우리 안에 첩자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나라에 엘리사라고 하는 아주 신통한 선지자가 있는데 왕이 당신의 방에서 한 이야기조차도 모두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왕은 그 선지자를 체포하거나 죽이지 않고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군대들을 급파하여서 엘리사를 생포하거나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엘리사는 이때 마침 도단이라고 하는 작은 성에 당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아람왕은 이 작은 성에 많은 군대를 보내어서 이 성을 에워싸게 되었습니다.
II. 밤에 일어난 일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인생의 밤을 맞이하고 또 그 밤에 우리들의 영혼과 육체는 어떻게 위험에 처하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두 시각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지만 인생의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게 되는지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되는데 그것들 중 일부를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앞 절에 보면 밤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람왕은 야음을 틈타서 자기에 군대를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도단에 보내었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많은 군대를 보내어서 100%성공을 확보하도록 이렇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밤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어두운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제일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자원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맞이하게 되는 위험한 시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한 것처럼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서게 된다든지, 사업의 위기를 만난다든지, 그리고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느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게 된다든지 하는 이런 육체의 어두운 밤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의 어두운 밤보다 더 가혹하고 무서운 것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니 이 영혼의 어두운 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영적인 위험들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아람 왕이 왜 야음을 틈타서 자기의 많은 군대를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도단성에 보내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서 그들을 에워싸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이런 어두운 밤이 옵니다. 우리의 영혼의 뛰어난 기능은 우리에게 생각을 사용해서 생각 자체와 영혼을 위협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모든 위험을 미리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온 몸과 마음에 전달해주어서 영혼을 보호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 중에서 특별히 생각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혼의 중요한 기능인 생각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게 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어쩌면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어느 한순간에 여러분들의 신앙의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면서 아!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온다고 했지만 신앙이 이것밖에 안되나. 내가 오랫동안 주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결국은 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정도 밖에 안 되는구나, 하면서 자신에게 실망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게 되면 자신이 이렇게 뒤로 미끄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 체 깊은 침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야음을 틈타서 악한 세력들은 여러분들을 공격하고 파괴시킬 많은 군대들을 보냅니다. 그래서 물밀 듯이 여러분들의 잠자는 어두운 영혼 속으로 야음을 틈타서 수많은 죄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까 뱀처럼 온갖 죄와 불순종이 여러분의 영혼을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깨어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깨어있고,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 깨어있고, 자신과 주변의 환경을 사용해서 여러분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죄의 움직임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야음을 틈타서 군대를 보내어 도단을 에워싸려고 하는 아람왕의 계획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파악되지 않은 채 눈길을 피해서 성을 겹겹이 에워 쌓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선지자는 그 성에서 도저히 도망갈 계략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영혼의 어두움의 때 이것이 우리에게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기도안하고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던 사람들이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싫증을 내고 그렇게 산다고 해서 갑자기 여러분들의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풍지박살이 되고 여러분들의 육체가 사형선고를 받아서 중환자실에 실려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의 어두운 밤은 여러분들이 눈을 뜨고 나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원수들이 야음을 틈타서 여러분의 삶 속에 물밀 듯이 밀려오게 만듭니다. 육체가 잠이 많으면 잠언에 말하기를 빈궁과 곤핍이 군사와 같이 밀려온다고 말했습니다. 영혼이 잠자기를 좋아하면 영적인 군사, 악한 세력들이 군대와 같이 밀려와서 여러분을 포위해도 스스로 자신이 그런 적군에게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매일매일 깨어있는 삶,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선지자를 수종들던 종이 아침에 눈을 떠서 성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면을 둘러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지난 저녁까지도 상상도 못하던 그 일이 아침에 발생했습니다. 성은 작은데 구름 때 같이 많은 아람 군대들이 병거와 군대들을 거느리고 온갖 무기로 무장한 채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그 군대에 대적한 병력도 없었고 그리고 전쟁을 피하여 도망갈 어떤 구멍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III. 생의 위기를 바라봄
우리는 여기에서 생의 위기를 바라보는 두 시각을 만나게 됩니다. 이 선지자의 종은 탄식하며 자기의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아! 내 주여 어찌하오리까? 이 탄식은 바로 아! 주인이시여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습니다. 꼼짝없이 저들의 손에 죽게 되었고 이제 우리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라는 절망의 고백이었습니다. 절망의 탄식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 가장 타락하고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대항하던 그 철저한 불신앙과 우상시대의 시대에 하나님은 구약 역사 속에서 가장 뛰어난 선지자 두 사람을 보내십니다.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였습니다. 특별히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할 때 갑절의 영광을 자신에게 더해달라고 매달리던 그런 능력을 사모하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엘리야 못지않은 놀라운 능력을 주셨고 그리고 그는 정말 혁혁하게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때 항상 옆에 따라다니던 사환이 있었습니다. 그가 선지자와 함께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사는 뛰어난 하늘의 능력을 소유한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을 것이고 또 하나님 때문에 발생하는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의 역사도 보았을 것입니다. 엘리사를 통해 흘러나오는 놀라운 진리의 말씀 앞에 사람들이 무릎을 꿇게 되는 일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엘리사 가까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그 크고 많고 놀라운 기적을 늘 경험하면서 이 종이 선지자를 수종들었습니다.
A. 믿음 없는 시각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군대를 보면서 그는 신음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그리고 예전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되어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신기한 하나님의 사랑도 경험하고 수많은 것들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뒤로 미끄러지고 나니까 그런 많은 것들을 경험한 것과 상관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환경적인 어려움, 인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절망하고 탄식하는 것이 바로 신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 없는 시각으로 인생의 위기를 바라보는 오늘날 현재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이 종은 눈을 떠서 성을 에워싸고 있는 어마어마한 군대를 보았고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병력으로는 저 군대들을 이길 수 없었고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인간의 모든 능력에 뛰어난 하나님의 권능,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와 그리고 변함이 없는 인자하심,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오! 내 주여 어찌하오리까? 우리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대가 에워쌌고 우리는 힘이 없으니 이제는 우리는 죽었나이다. 절망입니다. 그 이상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응답을 받았으면 엘리야만큼 많이 받았습니까? 기적을 보았으면 엘리사의 종처럼 많이 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인생의 위기가 다가오자 믿음은 간곳이 없고 상황을 보고 절망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이 사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신앙은 떨어지는 벼랑에서 붙잡은 밧줄과 같습니다. 대충대충, 설렁설렁 신앙생활을 하고 설렁설렁 알고, 설렁설렁 믿고, 대충대충 하는 것은 마지막 벼랑에 떨어지는 위기의 날에 신앙을 붙들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 신앙의 썩은 밧줄입니다. 힘을 줄 수가 없습니다. 평안한 때에 무엇이든지 철저히 배우고, 무엇이든지 철저히 믿고, 무엇이든지 철저히 살고 그래서 그 진리와 자신의 삶을 합치시켜 하나 되게끔 온전한 신앙을 갖게 될 때 인생의 위기가 와서 그 사람을 벼랑 끝에 구를 때 여러분들의 손에 붙잡힌 그 밧줄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밧줄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인생의 위기를 맞으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캄캄한 위기의 순간을 맞으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망망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이 작은 쪽배가 어두운 밤바다를 헤쳐 가는 것처럼 풍랑 속에 시달려서 돛대도 부러지고 삿대도 잃어버리고 캄캄한 밤바다에 파도에 떠밀리며 자신의 가야할 위치를 생각해보고자 고개를 드니 하늘은 칠흑과 같은 먹구름에 가려서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인생의 어려운 날들이 여러분들에게 왜 없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정말 믿음이 없는지 있는지 여러분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무엇이 있는지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고, 알고 싶어 하시고, 또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시고 싶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날 때 절망적인 밤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본성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것이 흘러나와서 여러분들을 가득 여러분들의 삶 속에 흘러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대표적인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모리아산으로 가서 나를 위해 재물로 바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미 그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가혹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심으로 아브라함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하심이었고 또 하나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것을 순종으로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은혜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드러난 순종을 보고 기뻐하시기 위해서 이런 잔인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삭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내가 죽여도 이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니 죽여도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이삭의 목에 칼을 대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돈이 많고 부요한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그렇게 유유 자족한 교회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그 교회에게 실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실상은 너희가 가난한 자요, 헐벗은 자요, 눈먼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이 깨어나서 자신들이 부요하다고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얼마나 가난하고 자신들이 부자라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지만 그의 영혼은 얼마나 배고프고 헐벗었는지 그것을 보이고 싶어 하셨고 자신들의 마을은 안약을 만들어서 파는 그런 본산지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눈에 병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B. 절대 의존의 시각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로 하여금 인생의 위기를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교만해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볼 수 없었던 여러분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의 죄와 악함, 위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여러분 자신의 결함들을 보게 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을 수치스럽게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계기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시고 그 은혜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주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신앙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이런 인생의 밤과 같은 위기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밤과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맞이한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없는 것으로 없는 것으로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생의 이런 어두운 밤을 주십니다. 이 어두운 밤에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있고 없는지를 발견하여 인생의 이런 어두운 밤에서 지혜를 배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이런 인생의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으니 이것은 절대의존의 시각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엘리사의 선지자가 보여준 시각이었습니다. 그는 도단성이라고 하는 작은 성에 머물고 있었고 작은 성은 그만큼 군대의 공격을 받을 때 도망갈 어떤 여지도 없는 불리한 환경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선지자였고 주님이 소명을 주셔서 살려준 사람이며 아직까지는 그의 사명이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섬기기위해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의 무리 앞에 벌벌 떨고 있는 이 종과는 틀린 시각으로 인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시각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고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위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제 마지막 통보를 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천만 원의 빚을 졌는데 이번 주까지 갚지 않으면 당신들을 집달이를 시켜서 여러분들의 집을 차압하고 거리로 내어쫒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백만 원밖에 못 버는 사람이라면 이런 최후통첩을 받았을 때 여러분들의 인생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한 달에 일억을 버는 사람이라면 그런 통첩을 받았을 때 그게 인생의 위기일 수 있겠습니까? 삼일만 벌어도 갚을 수 있는 돈인데 그러면 충분히 그 주간 안에 갚고 그 통보서는 찢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위기는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경우에는 위기가 아닙니다. 모든 인생의 위기가 자원에 부족이 빚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돈이 없더라도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아버지에게 돈이 많다면 천만 원의 빚을 갚으라고 독촉장이 날아와도 여러분은 인생의 위기가 아닐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위기가 왔을 때 아! 내 주여 이제는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절망입니다. 하고 좌절하는 그것은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위기가 오고 고난의 어두운 밤이 올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께 대항하고 주님을 대적하는 그런 악한 인간성이 발생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 사람은 자신이 쓴 책 속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경계를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기는커녕 우리가 내일은 죽으리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 하고 말입니다. 주후 2000년이 되었을 때 혹시 이것이 이 세상의 종말이 아닌가 하고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은 모두 파멸된다고 흰옷입고 산으로 올라가던 무리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주후 1000년대에도 유럽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지구의 종말이 곧 올테니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러면 교회당에 모이든지 산에 올라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이 심판할 때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하고 수많은 사람이 회개할 것 같지요? 그러지 않고 약탈과 방화, 살인과 강간, 생존에 대한 약탈들이 온 도시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선지자가 말한바 내일은 죽으리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고 했던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과 유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또 예전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옛날이야기고 지금 여러분들이 은혜 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이런 시련과 위기를 만날 때 마음이 가난해져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퍅해지고 완강해져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무리들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제 것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날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신앙의 양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밤 같은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오,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천만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함이 낫도다. 주를 사랑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크신지요. 나는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절대의존의 믿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났을 때 이렇게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귀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사교, 혹은 교제라고 합니다. 저는 이 사교를, 교제를 양약과 같은 교제가 있는 교제가 있는가 하면 한약과 같은 교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약과 같은 교제라고 하는 마치 몸에 상처가 났을 때 급히 양약을 찾아서 상처에 바르는 것 같은 그런 방식의 교제입니다. 그 사람과는 아무 관심도 상관도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그 사람이 필요한 상황을 만나니까 갑자기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밥 먹고 숟가락을 놓기 전에 나를 도와줘,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이 인생이 가치 있고 보람 있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한약에 있어서 특별히 보약과 같은 사교생활을 해야 합니다. 보약은 가을에 먹고 내년 봄에 힘을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해관계가 아직 얽히지 않았을 때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으로 생각하며 그를 사랑하고 흉금을 터놓고 그와 함께 사귀고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하게 어려움이 찾아와서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 도움을 구하면 거절당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제 그자체가 처음에 뭐가 필요해서 시작된 교제가 아니라 서로 서로를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 있는 교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여러분들이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예전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다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와서 하나님, 나 좀 도와주십시오. 라고 해도 하나님이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 매달릴 힘이 없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불순종하고 강퍅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하나님께 그렇게 매달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생의 어두운 밤이 왔을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절대의존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원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자기 능력, 재능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느라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죄 가운데서 깨트려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순종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그 사람을 기뻐하시고 오히려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절대의존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결코 낙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어차피 나의 인생은 나의 능력의 장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위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하나님이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셔서 나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시면 그 고난 때문에 연단을 받고 예전에 불결하던 사람이 순결해져갑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기 때문에 예전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인생의 비바람이 부는 풍랑 이는 위기를 통해서 자신의 자원 없음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위기가 닥치고 시련이 오고 때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그는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경제적인 궁핍을 통해서 자신의 굶주린 영혼을 발견하게 되자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분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불신실한 많은 사람들의 배신보다는 언제나 변함없고 신실하신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입니다.
나의 믿음이 연약해져도 미리 예비한 힘을 주시고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능력 있는 그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고 정녕 나를 지키시니
어느 곳에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인생의 고난의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이 망가진 우리를 고치기 위해서는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지 않고는 고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망가진 마음이기 때문에 아프게 하시지 않고는 고칠 수 없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잖네
IV. 희망의 아침을 맞으라
주님을 깊이 하나님, 이 하늘아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내가 의지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반석이시고 나의 피할 바위시며 나의 산성이십니다. 나는 주님만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 종을 기억해보십시오. 그 많은 기적,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엘리사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계속 들었지만 절대의존의 신앙이 없었습니다. 절대의존의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에 그쳤습니다.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습니다. 내 인생이 주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죽음과 같은 위기 앞에서도 이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서 이 종은 절망의 아침이었는데 선지자에게는 이 아침이 희망의 아침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A. 하나님과의 평화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죄를 짓고 삶으로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신적인 자원들을 금방 거두어가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자원이 공급되는 통로를 닫히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깨트려지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던 사람들, 말씀을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던 수많은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이 깨트려지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많은 간증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어느 날 뒤로 미끄러져서 침륜에 빠지는 것을 우리들은 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평화는 원리적으로는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죄의 용서를 받는 순간 수립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이제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침체에 빠졌을 때도 사랑해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순종하고 주님을 위해 많이 헌신할 때만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만나고 위기를 만나서 심지어는 범죄 할 때조차도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우리 자식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식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운명처럼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우리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가보면 기쁨으로 충만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서 희락과 은혜가 충만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때로는 염려와 근심이 마음에 휩싸여서 내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해서 깊은 외로움과 그리고 고통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내가 혼자 마음속으로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늘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충만한 마음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은혜주실 때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침체에 빠졌을 때나 충만할 때나 위기 가운데 있을 때나 죄 가운데 있을 때나,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런 원리적인 평화만을 가지고 우리가 충분한가. 그게 아니라는데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내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실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내 마음에 인쳐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내가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좋은 비유가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딸이 어렸을 때 이렇게 자기가 이렇게 위험한데 올라있고 거기서 자기가 몸을 던지면 아빠가 이렇게 안아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런데 올려놓고 자 쓰러져봐 그러면 쓰러집니다. 그러면 항상 받아줍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빠가 잡아줄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빠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면 아이가 뛰어내리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여러분이 느낄 수 있고 여러분 자신만 알 수 있고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해야지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고난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절대 의존하는 신앙, 이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가에 의해서 증대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제든지 두렵지 않습니다. 환난과 시련이 막 다가오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고백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난을 당해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아래 있으면 이 고난을 인하여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도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 그러니 나도 주님을 섬기며 그 뒤를 따라가다가 보면 어찌 예수님과 같이 고난을 당하지 않겠는가. 그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를 짓습니다.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생각이 안 납니다. 그야말로 고생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난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짐승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고난을 당할 때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간만이 고통을 당할 때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어두운 밤과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다고 칩시다. 눈을 떠서 사방을 돌아보니 이제는 그야말로 철저한 위기고 어떤 도움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종이 탄식한 것처럼 아아! 내 주여 이제는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절망하게 되는데 도달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은 내게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일들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를 에워싼 원수의 숫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차피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고자 하시면 하나님을 꺾을 수 있는 이 세상의 대적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는데 내가 하나님 편이 아닙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는데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습니다. 끊어졌습니다. 그렇게 내 가슴을 녹이며 들려오던 하나님의 말씀,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고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던 그 아름다운 기도의 가락은 멎었습니다. 그 인생의 궁핍한 순간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경험하는 궁핍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지고 나니까 더 이상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일들이 차단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영혼과 육체의 자원을 힘입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들이 자신을 에워싼 절망 앞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일생을 주님의 말씀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온 나에게 어떻게 하다가 내 인생의 밤에 이르게 되었고 그 밤중에 수많은 군대들이 나를 에워쌌을까? 이제 나는 여기서 죽는 것인가? 하나님은 도대체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실까? 나는 정말 이런 인생의 위기 앞에서 “주 여호와는 나의 신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영광, 나의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자이십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도 여호와는 내 편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 그럴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목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위기 자체가 자원의 부족 때문인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고 그분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놀라운 자원으로 인생을 극복할 생각은 안 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자기 자원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구름같이 수많은 아람군대가 도단 성을 에워쌌습니다. 그때 이 종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규합해서 우리 한번 붙어보자 하고 병력을 이끌고 만약에 성 밖으로 나갔다면 용기는 가상하겠지만 그 싸움이 과연 이길 수 있는 싸움일까요? 성 밖에서 전멸을 당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인생의 위기를 만난 시점에서 사람을 원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곤고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당하신 도구가 된 순간들을 원망하고 계십니까? 그래서 마음속으로 미움의 칼을 갈고 죄 위에 또 다른 범죄를 더하고 있습니까? 모두 비이성적인 행동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여러분들의 인생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베푸신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과 같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를 버리지 않고 불러주셨던 그분은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밤새도록 실패했지만 나를 찾아와주셨던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 때문에 항상 위로해서 용기를 얻었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위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위기에서 붙잡을 수 있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나에게 많은 축복의 기회들을 방종하게 사용하고 은혜에 게으르고 하나님을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그 일을 위해서 내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깊이 고백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품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같이 악하고 더러운 인간들도 얼마만큼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지만 어느 시점에 가면 하나님과 평화를 잃어버리면 도저히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고백을 하게 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평화를 누리며 지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외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런 평화를 수립시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그 평화를 그 누리게 되었지 이제는 그 화목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평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진실해져야 합니다. 거짓과 허위,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 마음 바침이 없는 형식적인 봉사생활,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조용히 그 이상의 걱정과 근심에서 물러나서 나에게 닥친 이 밤과 같은 인생의 위기,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내 인생의 절대적인 시련기가 찾아왔고 그리고 지금 나는 왜 주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나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어디서 미끄러졌을까? 그리고 어디에서 떨어졌을까? 나의 죄가 무엇일까? 주님이 내게 베푸신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크신 은혜에 대해서 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았는가,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애달프게 당신과의 평화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그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평화를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B. 위기 중에 기도하라
두 번째는 기도가 그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능력의 선지자였고 하나님의 그 큰 신적인 능력은 하나님과의 열려져있는 그 평화와 교통의 관계를 통해서 계속 흘러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처한 그 상황이 정말 구름 때 같은 표적들에게 에워싸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모든 선지자들보다 뛰어난 이 엘리사에게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고 사명을 감당하면서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난관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려고 했더니 이런 난관이 나에게 찾아오는구나 하고 겨우 느꼈지만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을 그 사람에게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의 어떤 위기를 만나도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인생의 칠흑과 같은 어두운 밤을 만나게 되면 이상하게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의 모든 인생의 길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 그 기도의 향내보다는 이 속에서도 수많은 불평과 원망, 독한 마음 이런 것들이 이 속에서 뜯물처럼 솟구칩니다.
사실은 우리의 육체의 위기는 위기가 아닙니다. 정말 위기는 우리의 영혼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의 위기를 허락하시는 것은 이 육체의 어두운 밤을 통해서 잠들고 있는 우리의 영혼의 어두움을 보여주고 싶으셔서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엘리사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내 주여 어찌하오리까? 이제는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는 이 종을 위해서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제가 보고 있는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사환이 눈이 열렸습니다. 작은 성을 에워싸고 있는 구름과 같이 많은 아람의 군대들만 보였기 때문에 그는 탄식을 토하며 절망했는데 영안이 열리고 나니까 그 군대를 에워싸고 있는 끝도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하늘의 천군천사, 군대들 불말과 불병거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절망의 아침이 변하여 희망의 아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심한 위기를 만나도 그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이 위기에서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함께 절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게 평화의 도구가 아닙니까? 소망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낙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함께 낙심하는 것은 동정심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그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낙망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회복의 일, 이 종과 같이 절대적인 낙망 속에서 신음을 토하고 있는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 나타나서 그 눈을 뜨게 하여 그 절망의 아침이 변하여 희망의 아침이 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이런 모본을 이미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로 되어 있는 그날 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 곳은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멀찌감치 두고 당신 혼자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 드려서 자기에게 닥쳐오는 이 위기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 밤이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외로운 밤이었을까요? 생명이신 그분이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사랑을 받으시고 은총을 입으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그 순간이 위기였고 고통이었는지 예수님께서 감히 아버지께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제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아버지 앞에 비실 정도로 그렇게 외로운 위기를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심정도 모른 채 잠자고 있었고 그리고 이미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야 할 배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 드려 기도에 자기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늘 자신의 고열을 짜내는 순간이었지만 십자가를 앞둔 이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두고 가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우리를 위해 당신을 다 드려 고열을 바친 것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피에 펌프질을 하십니다. 자기를 다 드려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까지 그 위기 앞에서 당신을 위해,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매달리셔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에 이튿날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 빌라도의 뜰에, 그리고 헤롯의 법정에 서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멸시와 모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그 피어린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시면서도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사랑하던 그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보다도 더 악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흉악한 죄인들을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만나거들랑 하늘을 보십시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아귀다툼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인생의 곤고한 날을 지나고 있습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절대적인 외로움의 밤, 인생의 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주님,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왜 내가 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의 죄 때문입니까? 나를 연단하시기 위함입니까? 하나님, 나는 지금 주님과 충분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기도해야 됩니다. 매달려야 합니다.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 사람이 천사와 같은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슴을 에워는 기도제목이 없이 구도의 길을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일수록 많이 깨트리십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일수록 이 세상에 작은 티끌 하나에도 가슴아파하시며 그들을 깨트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마음을 더 순전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그 육체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온전히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분이시고 자신의 모든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고난도 주시고, 슬픔도 주시고,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도 하시고, 너무나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던 사람들을 죽음의 강 저편으로 떠나보내기도 하십니다. 충분히 외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백하게 하십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잖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가득한 나의 사랑을 보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시고 오늘 이 자리에서 거미줄 같은 신앙이나마 붙들고 섬기며 살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동일하게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신 자비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디에도 소망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을 인생의 위기에서 건져주지 못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과 같은 위기에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 모든 더러운 마음을 티끌을 털고 마음에 할례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주님만이 나의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난이 올 때나, 형통할 때나, 번영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오직 살아계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그런 인생의 갈림길에 세워주시려고 하십니다. 이제 두 갈림길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펼쳐지는 그 절망적인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다가 정말 절망의 길로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인생의 그 깊은 위기 앞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제껏 까지 막 아무렇게나 살아왔던 삶 때문에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영원하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다시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공급받아 축복된 삶을 살 것인가, 두 갈래의 길에 여러분들이 서있는데 이 선택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 두 갈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네 자녀를 돌이키게 하라
“엘리야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2:12-36)
I. 본문의 배경
우리는 물질적인 궁핍으로 큰 환난을 만나거나 혹은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역경을 만날 때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그런 상황 속에 우리들이 서게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이유를 인해서만 우리들이 인생의 갈림길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사랑하는 자녀로 말미암아 인생의 갈림길에 섰던 한 믿음의 가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갈림길에서 하나님 없이 인생을 마친 불행한 한 믿음의 가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나서 가나안 정복에 참여했던 믿음의 사람 일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번영 속에서도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름진 논밭에서 많은 곡물들을 거두고 원주민들이 지어놓은 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부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일세대가 살아있는 날 동안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였지만 여호수아를 비롯한 일 세대들이 죽고 장로들조차도 모두 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속하게 타락하게 되었고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라는 한 집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했지만 그때는 왕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왕을 두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하시는 신정통치의 이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없이 하나님이 직접 이들을 다스리신다고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사는 히브리말로 “쇼패트”라는 사람인데 정치적인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종교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사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엘리도 역시 그런 사사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고 이끌며 한편으로는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는 사람이었으니 원래 쇼패트라는 이 말은 재판관이라고 하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II. 믿음의 가문의 불량자들
하나님께서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주셔서 이스라엘을 왕처럼, 제사장처럼 다스리시고 이끌게 하셨으니 믿음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이런 중요한 직분을 맡기실 리가 없습니다. 엘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특별한 소명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을 위한 이런 지도자의 위치에 있게 되었으니 그의 가문은 신앙의 가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신앙의 가문에서 불량자들이 자라고 있었으니 엘리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엘리의 아들들의 불신앙의 특징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을 알지 아니 함
우선 첫째는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르시기를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그들을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버린 것을 의미했습니다. 엘리의 집안의 자식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애를 썼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회심한 자식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의 집안에는 좋은 신앙이 있었고 그 집안에서 아이들은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중차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섬기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율법과 제사와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힘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자신이 일세대의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정말 어려운 길을 헤치면서 살아왔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것을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했기에 당하게 되는 신앙적인 외로움은 무시하고라도 이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가족들이 끊임없이 방해하고 나를 소외시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들과 관계를 등져야 하고 때로는 부모가 의절하도록 자식인 우리에게 불신앙을 강요하기도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때로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단언하는 부모들까지도 생겨나고 형제들과의 의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부모에게서 양육을 받습니다. 그 부모에게서 격려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도를 받습니다. 빗나가지 않도록 그들이 울타리가 되어주고 그들 곁에는 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예배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부모들로부터 좋은 신앙을 갖도록 격려를 받고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환경일 뿐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닙니다. 부모의 훌륭한 신앙도, 좋은 은혜의 수단도 그리고 가정에 깊이 깃들어있는 믿음의 가풍도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끔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좋은 환경이고 준비일 뿐이지 그 자체를 아이들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자라는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얼마나 놀라운 사람들입니까.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품안에서 자라가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여러분들은 격려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환경일 뿐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게 할 수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이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의 자녀는 타락할 수 있습니다. 엘리 집안에서 자라는 이 불량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회심했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B. 제사를 멸시함
두 번째로 이 엘리의 집안의 자녀들은 제사를 멸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사장은 세습되는 직분이었으니 이 아들들도 당연히 성전에서 하나님의 제사를 수종드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제사의 제도는 얼마나 훌륭합니까? 하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서 주신 훌륭한 은혜의 방편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율법과 율법에 따르는 제사였습니다. 죄를 지은 죄인들은 제사를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이웃에 대해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그 제사 안에서 이웃과 화해하고 그들과 다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억누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낙헌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하게 헌신하는 약속을 드립니다. 이런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이 제사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넘어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일어선 사람들을 달려가게 만들고 불화한 사람을 다시 화목하게 하여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자녀들도 이 일을 위하여 수종을 들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이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런 제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는 드리지만 그 제사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주님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훌륭한 은혜의 방편의 수종을 들면서도 그들은 유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다가오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고 오는 제물에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께 드릴 예물들을 억지로 빼앗는 일들도 서슴지 않았으니 그들의 탐욕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부모로서 여러분들은 예배에 유익을 누리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공경하는 섬김이 없다면 예배 속에서 여러분들이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고 깨트려진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하는 이런 갱신이 여러분들에게 없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예배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간섭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그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 한번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청년들이, 그리고 청소년들이, 어린이들이, 아직 유아인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그 예배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그 예배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까? 신령한 영향을 받습니까? 그래서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변화를 받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과 깨트려진 관계들이 다시 복원되고 그리고 형제들과 지체들을 향한 망가진 관계들을 다시 자기 깨어짐 속에서 회복하는 갱신들이 여러분들의 자녀의 예배 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정직하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혹시 여러분들의 자녀는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그 예배 시간을 지루하게 여기고 그 속에서 졸고 장난치고 심지어는 여러분들의 자녀 때문에 다른 자녀들이 드리는 예배가 심각하게 방해받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교역자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집사, 장로, 권사의 자녀들이 예배 시간에 가장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엘리의 자식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C. 악행으로 타락함
세 번째로 이들은 악행으로 타락했습니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으니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제사를 수종드는 사람들이 된 이들이 회막에서 수종드는 아녀자와 간음을 하게 된 사건입니다. 구약에서 이 간음은 우상숭배와 함께 모든 죄의 맨 끝에 있는 죄악이었습니다. 바로 이 끔찍한 일들이 이 믿음의 가문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런 끔찍한 죄들이 엘리의 집안의 자녀들이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함께 엘리의 집안의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죄가 제사를 멸시하는 죄로 성장했고 성인이 되자 이들은 억누를 수 없는 정욕 속에서 하나님 없이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이런 끔찍한 죄를 행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마십시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완력과 그리고 다스림 아래서 복종할 수 있지만 여러분들이 이제 서서히 늙어가고 자녀들은 장성해갑니다. 이제 자녀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권한 밖의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실 때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여러분들에게서 두 가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맡겨주셨으니 곧 지혜와 사랑입니다. 먼저 이 지혜는 총명에 비추는 빛입니다. 인간이 영혼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합치시키는 삶을 살아갈 때 그때 그의 영혼은 총명에 찬란한 빛이 가득하게 되고 이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 인간의 마땅한 도리가 무엇이고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인간의 참된 행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별력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혜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미래에 자녀들만큼 학문을 공부하지 못했어도 그것과 지혜는 조금밖에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만큼 학문을 배우지 못했어도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 지식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이 구닥다리가 될지라도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면 그리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신실한 마음으로 구도의 길을 가면 여러분들의 총명 안에는 이 지혜가 넘치게 됩니다.
자녀들이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그릇되게 판단할 때마다 부모의 판단을 배우게 되는 것, 부모의 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린아이 적부터 바로 그 지혜를 부모로부터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처럼 흙으로 빚어 여러분들의 자녀로 만들지 않으시고 여러분들의 몸 안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그 지혜를 여러분들에게 물려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인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자식들에게 좋은 공부를 시킨다고 할지라도 훌륭한 것들로 자녀들에게 공급해주어서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지혜가 없으면 여러분들은 이미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 자녀들은 너무나 불행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영혼의 눈을 높이 드십시오. 정신을 똑바로 하고 진리를 사랑하십시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의 온 마음으로 터득하고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바로 지혜를 소유한 부모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자녀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자녀를 주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이 아니요, 없는 것이라고 해서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님을 자녀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단지 사용해야만 하는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돈이나 물질이나 좋은 환경이나 우리가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사랑해야 하는 참되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모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여러분들의 자녀가 무엇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아야 할지 그것을 투명하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엘리의 집안의 자녀들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이들은 큰 악행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욕에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그런 정욕을 하찮게 여기고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분별력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악행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혜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가슴 아픈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배워가고 있습니까? 날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 속에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모습, 세상의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려고 하며 살아가는 그 사랑의 모습을 여러분들에게서 배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III. 무기력한 부모의 신앙
그러면 이 엘리의 집안의 아이들이 한때의 믿음의 가문이었던 엘리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어떻게 이렇게 비참할 정도로 철저히 타락하는지, 그런 불량자들이 되는지 우리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A. 신령했던 사람
이 문제를 먼저 다루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엘리가 처음부터 자녀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보면 엘리의 무기력한 신앙이 바로 불량자들을 자라게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는 처음부터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때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우리가 읽은 본문 이전과 이후에 골고루 흩어져서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사건 속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엘리를 버리시고 나이는 어리지만 사무엘을 통해서 당신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전에 경험한 것이 없는 신령한 경험을 어느 날 밤 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친히 들린 것입니다. 사무엘은 엘리에게 나아가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두 번이나 물었습니다. 세 번째 사무엘이 와서 선생님, 또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때 엘리는 비로소 이 음성이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음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르기를 그런 소리가 또 들리기를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말씀드려라. 하고 일러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추측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예전에 자신도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 같은 방식으로 자기를 불러주신 적이 있다고 하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한때 하나님이 엘리야 엘리야 거기에 있는가 하고 신령한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해도 자신은 들을 수 있는 신령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고 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난 일이 되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음성을 주시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믿음의 가문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처럼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요즘 침체 가운데 빠져서 자녀들에게 전혀 본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사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성도가 되고 그리고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한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이 되었을 때 젊은 시절에 한때 은혜를 받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젊은 시절에 한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흠뻑 받아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땀을 흘리며 주님의 교회를 봉사하고 주님밖에는 없노라고 신앙을 고백하던 그런 시절이 한번쯤 없는 사람들이 도대체 여러분들 중에 누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젊은 시절에 그렇게 사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엘리가 늙었을 때 엘리의 자녀들에게 이런 불량한 일들이 노골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젊어서 한때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신령한 사람, 은혜에 잠긴 사람,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지혜와 사랑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젊었을 때는 펄펄 끓는 가슴으로 주님을 위해 눈물도 흘리고 기도도 많이 했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금도 많이 했지만 나이가 많이 든 뒤에는 높은 도수를 끼고 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꺼덕이다가 졸다가 돌아가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대신하는 늙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잘못하면 그것이 여러분들의 자화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는 그렇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큰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결국은 엘리는 자녀들을 이끌 수 있는 그런 신령한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B. 부모의 무력한 신앙과 자녀들
그 자녀에 대해 영향력을 잃어버린 이 무기력한 신앙은 오늘 우리가 읽은 앞뒤 본문에서 크게 세 가지로 나옵니다.
1. 영적인 분별력이 없음
첫째는 영적인 분별을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증거는 이미 사무엘의 어머니가 한나가 성전에 왔을 때부터 나타납니다. 이때도 이미 엘리는 노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찢어질 것 같은 가슴으로 원통함을 가슴에 가득 담고 하나님 한분밖에 소망이 없어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마음에 깊은 한을 품고 물 녹듯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엘리가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포도주를 끊어라.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있는 이 한나를 보면서 오히려 이 엘리는 그가 술에 취해서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도 한때는 마음이 녹아내리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자기를 진심을 토로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날의 일이었고 노년에 접어들게 되자 그는 이런 신령한 기도의 세계도 이해할 수 없는 마른 뼈 같은 은혜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영적인 분별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성령 충만하고 은혜로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기를 위해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분별력 속에서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이 그 부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분별력 있는 신앙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 아이들이 분별력을 갖게 된다면 마음속에서 부모인 여러분들은 이미 신앙의 아름다운 모범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지혜를 가지고 지혜 없는 여러분들을 판단하고 그 아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사랑이 없는 여러분들을 용서해주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부모로서의 아름다운 지위를 부끄럽게도 잃어버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인 여러분들을 보면서 ‘아! 나는 내 아빠처럼 하지 말아야지, 나는 우리 엄마처럼 살수는 없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부모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지위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 됩니다. 이런 영적인 분별력을 엘리는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분별력이 없는 불신앙 속에서 믿음의 가문의 자녀들이 불량자로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2. 신령한 영향력을 상실함
두 번째는 신령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악행을 계속 행하자 엘리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느냐. 너희의 행하는 나쁜 소문이 나에게 들리는데 제발 그러지 말라, 사람에게 잘못하면 하나님이 재판하시지만 하나님께 잘못하면 너희가 어찌되겠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한 글자도 뺄 것이 없는 진리의 입각하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런 영향력을 상실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권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참된 충고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신령한 영향력을 자녀들을 향해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향하여 여러분들은 신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 앞에서 신령한 영향력을 받으면서 그 영향력 때문에 가던 길을 바꾸고 생각을 고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통해 신령한 영향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첫째는 여러분들의 모범이 되는 일치한 삶입니다. 그것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 여러분들은 자녀를 향해 신령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알고 있는 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버지가 한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정말 기도생활을 하고 은혜를 받던 때도 있었지만 그만 신앙에서 미끄러져 교회도 제대로 안 나오고 방황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부사이도 좀 소원하고 그래서 멀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별거 있습니까? 끊었던 담배도 손에 가끔 대고 어떤 때는 퇴근하면서 한잔씩 먹고 집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아들놈이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어느 날 술을 먹고 들어와서 그날 밤을 내버려두고 그 다음날 아침에 무릎을 꿇어 앉혀놓고 따끔하게 얘기했습니다. 네가 지금 학생의 신분으로, 더욱이 크리스천 학생인데 네가 그렇게 올바르지 못한 행실을 해서 되겠는가 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는 이 아빠는 신앙의 침체에서 벗어나서 다시 교회에 돌아와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한참 야단을 맞더니 고개를 들고 아빠에게 그러면 나도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아빠는 한 교회의 집사인데 왜 담배도 피고 술도 먹었어. 하고 물으니 이 사람은 이미 벌써 한 2-3년 전에 일어났던 영적인 침체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니까 회개하고 지금은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지금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충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에 여러분들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새겨지기를 원하시지만 자녀들의 마음속에 항상 그렇게 선택해서 새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이 바닥으로 내려가서 어쩌다가 한번 잘못했는데 그것이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이 깊이 새겨져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의 자녀를 생각해보십시오. 신령한 영향력이 여러분들에게 미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본이 되는 삶을 살아도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는 한 그 본을 보는 것만으로 자녀들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깊이 회심하게 되면 부모인 여러분들이 잘못 살았던 날, 올바로 살았던 날 모두 섞여있는데 그것이 성도가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넘어지며 믿음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는 이 신앙역동성을 자녀들이 이해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 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던 부모를 용서하는 것처럼 믿음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쓰러지기도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 부모는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왜 자신들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회심하지 않으면 이런 신앙의 세계 속에 있는 역동성들을 이해를 못합니다. 그리고 믿기 싫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모본이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기 싫은 마음의 불신앙과 그 다음에 부모인 여러분들의 잘못된 모본이 딱 만나면서 이 아이들로 하여금 신앙을 거스르게 만듭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령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용돈 몇 푼으로도 자녀들에게 권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유산가지고 자녀들이 자라면서 영적인 권위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 주고 사는 권위는 하루밖에 가지 않습니다. 그런 권위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신령한 영향력을 아이들에 깊이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십계명 속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지만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삼사 대까지 하나님께서 그를 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믿음은 여러분 개인의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생명이 달린 믿음입니다. 그런 신령한 영향력을 엘리가 잃어버렸습니다. 한때는 잘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신령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3. 빗나간 자식 사랑
또 한 가지는 빗나간 자식 사랑이었습니다. 결국은 엘리가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판단하셨는지 한번 들어보십시오. 자식을 나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도 문제가 되지만 빛나간 방법으로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문제가 됩니다. 빛나간 사랑으로 하나님 없이 자녀들을 엘리는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없는 사랑은 칼이 되어서 돌아와서 자신의 자녀와 자기를 한날에 죽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육신의 부모일 뿐입니다. 그들의 영혼의 부모는 하나님이시니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그 자녀를 돌보는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아이들을 하여금 육신의 부모는 잊고 영혼의 부모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게 하기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잠시 맡겨주신 기업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들의 자녀를 길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동물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올바른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로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권위와 사랑을 가지고 이 아이들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여러분들의 도리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교사들의 삶은 매우 고달픕니다. 이 지역 저 지역으로 옮기고 때로는 아이들 도시에 내버려두고 오지에 가서 사역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어린나이에 유학을 보내기도 합니다. 남들 보기에는 화려한 외국생활이지만 실제는 비애가 많습니다. 이제 선교를 모두 마치고 은퇴하는 어느 목사님의 아이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어떻게 자녀들을 기르셨습니까? 사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어. 늘 이사 다니고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고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바빠서 가르칠 수가 없었어. 그런데 한 가지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라고, 너희들이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녀를 많은 돈을 쓰고 자녀를 위해 좋은 옷을 입히고 유별난 교육을 시키는 이것이 자녀를 올바르게 기르는 것의 모두가 아닙니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자식 사랑이 빛나간 사랑은 아닌지 진지하게 물어보기를 바랍니다.
IV. 네 자녀를 돌이키게 하라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이제 우리의 자녀들을 돌이키게 하여야 할 텐데 이제 어떻게 해야지 될까? 기억하십시오. 어린아이일수록 돌이킬 가능성이 많고 나이가 들수록 돌이킬 가능성이 없고 결국은 회심하지 않고 시집장가를 보낸 여러분들의 자녀가 회심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오늘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A. 모본을 보이라
우선 첫째는 모본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제 짧은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왜 어린아이들에게 회심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자녀를 태어나서 그 부모에게서 참으로 이 창조된 세계와 하나님과 인간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기위해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자, 아이들이 자라면서 읽은 것을 통해서 먼저 배웁니까? 듣는 것을 통해서 먼저 배웁니까? 보는 것을 통해서 먼저 배우게 됩니다. 태어나서 눈을 떠서는 앞이 희미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며칠, 일주일씩 지나면서 눈을 뜨게 되면서 제일 먼저 들어오는 엄마의 얼굴이 있는데 이게 세계에 전부 다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 품에서 배웁니다. 조금 자라면서 옆에 아빠도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조금 자라고 기어 다니면서 형아 동생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배우는 세계가 좁은데서 점점 넓은 세계로 펼쳐나갑니다.
그런데 그 좁은 세계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인간이 누구인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똑바로 봅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회심합니다. 이것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자라면서 그런 것이 전혀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악이 통용되고 공식대로 통하지 않는 세상을 봅니다. 더 넓어지고 넓어지면서 자기 나름대로 철학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안 믿어져서 못 믿었는데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안 믿어져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돌이켜서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러분들의 회심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기적 같다고 말하는 간증 속에서도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캄보디아에 일주일 다녀왔습니다. 제가 가는 목적이 크게 두 가지였는데 황선교사를 파송했기 때문에 그 캄보디아 선교가 어떤 것이고 지금은 거기서 무슨 일을 잘하고 있는지 제가 직접 보고 오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캄보디아가 어떤 나라인지 그가 무엇을 하겠다고 제안을 할 때 결정을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제가 간다고 하니까 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해서 집회를 해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한인교회에서 우리를 위해 집회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집회 일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있다가 연락이 왔습니다. 선교사들이 지금 너무 바쁜 철이기 때문에 모이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경 쓰지 말라. 난 당신의 일을 보러 가는 것이지 선교사들 집회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모아보겠습니다. 20명쯤 모여도 낙심하지 마시고 많이 모이면 50명쯤 모일 것 같습니다. 상관없다. 그리고 덧붙여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렇게 집회를 할 때는 한국에서 온 목사님들이 항상 저녁을 사주는 관습이 있는데 따르시겠습니까, 안 따르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녁이 얼마인가 했더니 호텔에서 모여야 하는데 10불이면 됩니다. 10불이면 20명이 모이면 200불인데 그거야 못 사겠는가. 사지, 그렇게 하도록 하자고 갔는데 웬걸 첫날에 120명이 오고 둘째 날 150명이 왔습니다. 그렇게 바쁠 때인데 거기 등록된 선교사가 160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첫날은 120명, 둘째 날 150명이 넘어서 호텔방 하나가 모자라서 강단 두개를 터서 가득 모여서 그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오는데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이런 집회를 매년 해주시면 안 됩니까? 글쎄. 그랬더니 이것 말고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가는데 여기서 한 두 시간 더 올라가면 거기에 아주 편안한 숲 속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이 선교사들 한 2박 3일정도 수련회를 해주시고 교리적인 기반이 매우 취약한데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한 20시간 집회를 해주시면 우리 선교사 부부들이 많이 은혜를 받을 텐데 열린 교회에서 좀 해주시면 안 됩니까? 궁금한 것은 나야 백번이라도 갈 수 있지, 돈이 얼마나 드는가가 문제지, 한 사람 앞에 100불이면 된다고 합니다. 200명쯤 모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가능성은 별로 없는데 교회에 가서 설교 시간에 한번 예화를 들어보지. 그러면 누가 요즘은 제가 한번 섬기겠습니다. 하면 올 겨울이라도 오지.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하고 왔습니다.
거기에 가서 보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이 지구상에서 제가 방문한 나라 중에 가장 절망적인 나라가 캄보디아였습니다. 캄보디아에 75년도에 여러분 알다시피 킬링필드라고 하는 대학살이 일어납니다. 왕국이었다가 왕국이 제대로 안되니까 미국에서 지원을 해서 논놀이라는 민주정부를 세웠습니다. 잘 했더라면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되었겠습니까. 굉장히 잘 사는 나라였고 동남아에서 제일 부자인 나라였고 1950년대에 이미 우리에게 10만 달러를 원조했고 그리고 6.25때 참전까지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나라가 결국은 제대로 못해서 나라가 민주정부가 부패했습니다. 그때에 폴포트라는 그 왕가에 자손 하나가 프랑스에서 유학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왔으면 좋았는데 방탕하고 그런데다가 진짜배기인 공산주의에 심취해서 새빨간 공산주의자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부패한 민주정부의 등 돌린 세력들과 함께 왕권을 복구한다고 하는 미명하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왕을 옹립했더니 부패한 민주정부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마각을 드러냈는데 무자비하게 자본과 계층유식한 사람들을 죽어버렸습니다. 대학생 90%가 학살을 당했고 모든 지식인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노동자와 농민이 아닌 모두 살육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손이 부드럽다는 이유 때문에 총살을 당했다고 하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때에 모든 책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가서 기가 막힌 게 황선교사가 거기에 기능대학 교수로 갔는데 가보니까 대학공대 교수의 수준이 고등학교 1-2학년 수준입니다. 미적분을 풀지 못하는 대학교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을 못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두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학살 현장에 가보니까 정말 토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비참할 수 있는지, 30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옷가지들이 아직까지도 길바닥에 그냥 묻혀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사람들을 죽이는데 웅덩이를 파서 쭉 세워놓고 그 어린아이들에게 철저하게 공산주의를 가르쳐서 이놈들을 죽이라고 그래서 총잡이들이 나와서 죽이는데 이들이 초등학교 5-6학년들입니다. 나중에는 대나무로 찔러죽이고 심지어는 거기에 킬링 틀이라고 하는 나무가 나왔는데 그런 집안의 자식들을 다리를 손으로 붙들고 어린아이들을 그 나무에다 으깨어서 두개골이 터지도록 죽이고 그 아이들을 공중으로 던지면 밑에 있던 병사들이 클레이 사격하듯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아이들을 총으로 싸서 죽이는데 800만 인구에서 200만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나는 그 나라가 100년 안에 일어난 가능성이 별로 없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했습니다. 탑처럼 높이 쌓아올린 그 두개골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폴포트가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누군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다면 그가 창 칼 대신에, 공산주의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조국으로 돌아왔을 것인데 캄보디아의 역사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모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B. 오래 참으라
두 번째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연적인 성품에 있어서는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말에 고분고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신령한 일에 있어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자연적인 성품이 고분고분하면 교회는 출석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회심하지 않고는 부모의 명령을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자녀들은 부모가 조금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도 응답이 되어서 회심하는 아이도 있지만 어떤 때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부모가 피눈물을 흘리는데도 아이들이 회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부모인 여러분들은 참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이 속히 회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심하면 여러분들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낙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 믿고 또 믿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견디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사랑하실 것입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변화되지 않더라도 사랑하면서 오래도록 참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자녀를 위해서 나는 그렇게 목 놓아 가슴 아프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들으며 내가 부끄럽습니다. 고백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괜찮습니다. 오늘부터 이제 안 그러면 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안일하게 생활하는 동안에 우리의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신앙의 고목이 자라고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습니까? 미래에 내 자식이 가장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거스르며 사는 자식이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그 아이에게서 낳은 자기의 자식들, 믿음의 자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그렇게 불신앙으로 양육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녀들을 위해 깊이 기도하고 매달리는데도 변화되지 않아서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찔리고 눌리고 고통스러운 그런 마음이 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회심하지 못한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눈물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도하면 시기야 하나님의 수중에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가슴이 눌리도록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도 응답이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먼저 온전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기 때문에 그리 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가슴 저미도록 여러분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새사람 만드시려고 하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위한 우리의 기도는 나의 마음에 떨어지든지 자녀의 마음에 떨어지든지 반드시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책망하고 불신앙을 책망하기보다는 자녀들을 꼭 끌어안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깊이 참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녀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의 행복, 그 신앙의 부모 아래서 자라나는 이 자녀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아이들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바꾸어 새사람이 되어가게 하십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치부인지 유년부에서인지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아빠에게 기도를 매일 받고 오기, 아이들은 순진하니까 아빠 교회에서 숙제 내주었는데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래. 뭐 기도냐. 바쁜데. 엄마에게 해달라고 그래. 아빠 지금 바쁘거든, 그 애가 매일 조르니까 아내도 여보, 그렇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는데 좀 해줘. 하니까 이 아빠는 회심을 안 한 아버지든지 아니면 은혜가 떨어진 아버지인지 모르지만 어째든 본인의 고백에 의하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무릎 사이에 와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니까 할 수 없이 이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면서 자기가 사실은 아이를 낳기만 했지 한 번도 아이를 축복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아이를 끌어안고 기도하다가 그만 그 아빠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자녀를 위해 여러분들이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은혜가 사라진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나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기까지 헌신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서 오래 참으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녀들의 이 회심이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위해 병을 준비하셨습니다. 네 자녀를 위해 울라. 예루살렘을 위해 울지 말고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의 자녀와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자녀를 위해서 깊이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이 그 병에 가득 찰 때 그때에 회심의 깊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C. 복음을 듣게 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복음을 듣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여러분들이 잘 살아서 모본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듣게 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자라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그 정도면 아이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 집사님 한분이 전도 훈련을 받으면서 하루 몇 사람씩 사영리를 전하고 오십시오. 다 못 채워서 그래서 가까이 보니까 자기 딸이 있어서 사영리를 전했습니다. 찬찬히 전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엄마, 나, 주님을 영접할거야.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서 부모를 통해서 신앙의 본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명하게 이 세상을 누가 만드셨고 우리가 왜 죄인이며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를 아이들이 선명하게 아는 것, 이것을 통해서 아이들이 회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회심하지 않은 여러분의 자녀가 있다면 한번 여러분들이 이일을 했는지 물어보십시오. 어느 날 이 아이를 앉혀놓고 엄마가 하는 말, 아빠가 너에게 하는 이야기 10분만 들어볼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거든, 그런데 우리는 범죄 했거든,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셨는데 이제 누구든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얻게 해준단다. 네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저절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회심해야지 된단다. 넌 정말 예수님 영접했니? 한번만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 번 기도하면서 이 일을 했는데도 여러분의 자녀가 영접하지 않았으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다소간의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한 번도 그것을 해보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 기도는 어떻게 보면 공중에 뜬 기도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그 아이를 앉혀놓고 진지하게 말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복음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가르치십시오. 무엇보다도 이 복음이 울려 퍼지는 예배의 현장에 여러분의 자녀를 있게 해야 합니다.
조셉 얼라인이라는 청교도는 자기를 죄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복음이 울려 퍼지는 곳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녀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여전히 영혼은 어두움 속에서 태어나고 지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눈멂 속에서 태어나며 사랑은 헛된 것들에 굴복하고 의지는 가치 없는 것에 복종하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들이 회심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 얻은 자녀들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정말 회심에 이르기를 위하여 깊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캄보디아에 있는 동안 일주일 동안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면서 마음에 많은 가책과 찔림을 얻었습니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말로는 안 했지만 어린아이의 회심이야 맡겨준 전도사들이 해야지 라고 하는 생각이 많이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있었기 때문에 장년부인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는 것만큼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근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들인데 하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제가 39살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얼굴도 팽팽하고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이제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늙어갑니다. 여러분, 결국은 우리도 그렇게 늙어가고 우리가 영원히 있고 싶어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도 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는 영원히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망하지 아니할 터이니 고난 속에서도 그 바닥 길을 헤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다른 목회자가 오고 여러분들이 앉은 그 자리에 여러분들의 자녀가 앉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저는 되물었습니다. 정말 지금 교육관에서 자라나는 천명 가까운 아이들의 신앙이 우리만 못하다면 미래의 우리의 교회의 희망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온 백성 듣게 하소서
정말 그렇게 될까요? 우리들의 자녀들이 이렇게 회심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모두 사라진 30년 후에 우리의 자녀들이 여기에서 모일 때마다 주님을 높이고 그리고 성전 기둥과 같이 요긴한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들이 밟지 못했던 땅에 가서 선교하고 우리처럼 우리보다 더 거룩한 열심히 신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까요? 우리보다 더 많이 자기의 자녀들을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까요? 그리고 이 강단에서는 정말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인간의 사상 속에서 불변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울려 퍼지고 우리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사주와는 상관없이 그 복음을 기뻐하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이 교회당을 매울까요?
얼마 전에 초등부 전도사님이 자기네 부서의 아이들 중 20%가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대부분이 믿는 집안의 아이들인데, 안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엘리의 집안을 보십시오. 자녀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건강하여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집안에서 뒤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녀들을 붙들고 있자니 땅에 자원이 모자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자니 하늘의 자원이 모자라서 간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회심했는지 한번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갔을 때 애야. 내가 네게 맡겨준 내 자식은 어찌되었느냐?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까지는 우리들이 부모의 그런 부르심을 다 감당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모두 지워버리고 이제는 자녀를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한주간이 남은 기간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이 자녀들이 은혜 가운데 살도록 기도해야 하고 이것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학교 교역자들이 얼마나 회심했는가 하고 물었을 때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이 없지는 않은데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교회마당을 뛰어다니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정말 이 아이들에게 좋은 건물, 그리고 훌륭한 식사, 잘 짜인 교육의 체계를 제공하는 것도 좋지만 그 아이를 꼭 붙들고 정말 하나님, 이 아이가 이 교회에서 회심하게 해주십시오. 주 하나님 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아름답게 자라서 부모인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신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깊이 쌓인 패역으로 인해서 그 아이가 온전히 순종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고 이곳에서 날마다 주님을 알아가고 그 사랑과 지혜안에서 자라가고 어디서든지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주님의 도구로 자라갈 수 있도록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들의 자녀를 회심하게 하실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예배에 냉담하던 내 아이를 주일이면 한번 교회에 보내는 것이 싸우듯 보내야 하는 내 아이들, 주일이 지나면 무엇 때문에 심술이 났는지 잔뜩 부어서 투덜대는 아이들, 그리고 입에 불평을 달고 살고 교회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그 은혜의 시간들을 활용할 줄 모르는 자녀들이 변화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아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아이가 온 마음을 다해서 엄마, 나 엄마처럼 살고 싶어, 아빠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큰 기쁨이야.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싶어. 이런 고백을 듣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큰 기쁨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밀려오겠습니까? 그 아침이 올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엘리는 갈림길에 놓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가문이었고 사명을 받은 집안이었지만 자식들은 불량자로 타락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에 따라 떠밀렸을 때 그가 고통을 느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아이들의 불신앙을 부모의 힘으로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림길에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에게서 회심의 영광을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떠밀리듯이 그냥 살아서 여러분들의 자녀가 점점 회심할 수 없는 강퍅한 가슴을 가진 자녀들로 밀려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마음을 모으십시오. 그리고 자녀를 위해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위해 아파하십시오. 아파하지 않는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본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복음이 울려 퍼지는 곳에 그 아이를 세우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여호와께서 치실 때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려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룻1:16-18)
I. 본문의 배경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사시대의 후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남편으로 했던 나오미는 두 아들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살던 이스라엘 자손이었습니다. 마침 큰 기근이 찾아오자 그들은 양식이 있는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실려 있는 1장에는 그 모압 땅에서 당한 혹독한 시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련 가운데서 믿음의 선택을 했던 한 여인 룻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을 때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야 되는지 그 본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자손이었던 이 엘리멜렉의 집안의 나오미가 왜 이렇게 커다란 시련을 당하게 되었는지 먼저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모든 집안의 당하는 불행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실려 있는 룻기 1장 이곳저곳에서 나오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치셨음으로, 여호와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으로 나는 곤고한 자라.” 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서 그의 집안에 일어났던 큰 풍랑, 그리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 환난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II. 여호와께서 치실 때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한때 믿음을 가졌던 이 집안이 이렇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을까요?
A. 베들레헴을 떠남
우선 제일먼저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베들레헴을 떠나는 것입니다. 기근이 들어서 온 땅에 굶주림이 있을 때 그들이 양식이 있는 이방 땅 모압을 향해 찾아가는 것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백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살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형통함을 입은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근을 면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아내를 빼앗길 뻔 하는 끔찍한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약속의 땅에 어떻게 기근이 올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찾아오는가?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도 그런 기근이 들 수 있고 환난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그 땅을 지키시지 못하는 무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도 기근이 찾아오게 하시는 것은 그 땅에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헌신을 매우 기쁘게 받으시고 그리고 당신이 이 성전에 영원히 임재하실 것이며 그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통치하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약속하신 언약의 땅이고 하나님이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그 임재의 약속을 내리시는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혹시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은 재앙이 있어 기근이 그 땅에 찾아오게 될 때 그때 너희는 나에게 간구하라.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너희의 죄를 사하고 이 땅을 고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 번영과 쇠퇴는 그 땅에 사는 언약백성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땅에 왜 이런 기근이 찾아오게 되었을까?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입는 우리에게 왜 이런 재난이 찾아오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고 마음이 겸비해져서 악한 길을 떠나고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설하여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이 거기서 그 땅을 고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근이 들자 약속의 땅을 훌훌 떠나버렸습니다. 한줌의 양식을 위해 언약의 땅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들을 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가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가정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영적인 의미에서의 약속의 땅입니다. 가정이 상처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가정에서 나와 버리거나 아니면 가정 자체를 포기하는 성도들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심하면 그 가정을 완전히 포기해버립니다. 이유는 자기가 상처가 너무나 많고 그 가정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혼이나 부부관계를 끊는 것 말고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사실상 가족의 기대를 모두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 이것도 영적으로 보면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어린자매에게 상담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 희망은 시집가는 것입니다. 왜 이제 정말 상처뿐인 가정이고 그리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가정에서 받았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바는 빨리 이제 이 가정과 이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지금 듣고 계시다. 너는 이미 벌써 정신적으로 너의 상처 많은 집안에 오염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네가 가서 신랑을 만나서 새 가정을 이루어도 벌써 거기에 오염인자가 퍼져서 너도 비슷한 가정을 만들어, 그러니 고쳐지기 전에는 시집가지마. 가슴 아팠겠지만 때로는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이라는 기업을 주셨고 또 그 유업을 우리들이 가지면서 살아가게 하신 것은 우리들이 무슨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하심으로 그 땅을 고치게 하시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지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리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뭔가 유익이 될 때는 그저 웃으면서 교회를 왔다 갔다 해도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서 기근이 찾아온다든지 아니면 어려운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려면 훌훌 털고 보따리는 싸는 것입니다. 그리고 떠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쓰레기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어려움이 생긴 가정을 쉽게 포기하고 난관이 생기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이 생기거나 십자가를 져야 할 일이 생겼을 때 교회를 쉽게 포기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결국 기근이 왔을 때 약속의 땅을 쉽게 떠나는 나오미의 집안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절대로 안정할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 자기는 옳은 길을 택하고 가는 것 같은데 그의 영혼은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신다는 증거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곤고한 인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오미의 집안이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늘이 닫히고 기근이 왔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 땅에 기근이 찾아오시게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도 기근을 내리십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말씀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있는 교회를 찾아서 이리저리 떠돕니다. 자신의 영혼에 만족을 줄 수 있는 좋은 교회를 찾아서 유리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많은 지체들이 자기가 있는 교회에서 왜 우리의 교회는 약속의 땅인데 하늘의 문이 닫혔을까? 왜 하늘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내리지 않을까를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그 악한 길을 떠나고 겸비한 마음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면 아마 교회마다 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B. 모압에서 당한 환란
하나님께서는 종종 약속의 땅에 비를 그치게 하시고 기근이 오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 땅에 살고 있는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돌아보게 만들어주십니다. 이 사람들이 모압으로 이주를 했지만 거기에서는 더 커다란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모압 땅에 들어가자마자 얼마 안 되어서 하늘과 같이 믿었던 남편 엘리멜렉이 이유도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늘과 같은 남편을 잃어버린 고통은 이후에 닥칠 더 큰 불행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거기에 말론과 기룐이라고 하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함께 죽게 됩니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 불행한 사건이 10년 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편을 잃은 세 사람의 여인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왜 이방여자에게 장가를 듭니까? 기근이 들어서 약속의 땅을 떠나는 그런 선택을 했더니 그 선택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언약의 백성인 자기의 아들들을 할례 받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여자에게 장가를 보내는 데로까지 죄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남편을 잃은 세 여인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을 때 그들이 당하게 되었던 그 큰마음의 고통을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C. 쓸쓸한 귀향
그래서 결국은 이 나오미는 이제 이 10년 동안의 모압에서의 이주생활을 접고 하나님이 다시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자 귀향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귀향도 무엇인가 신앙의 결단과 깊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우러나온 선택이 아니라 기근이 들어서 모압 땅으로 양식을 찾아왔던 것처럼 이제 고국에 다시 양식이 있다고 하니까 미련 없이 10년 동안의 타향살이를 접고 돌아가는 자연적인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나오미는 이 고통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전에는 갖지 못한 고통에 대한 깊은 인식을 새롭게 합니다. 그 기근 속에서 정든 고향을 등졌던 슬픔, 물설고 물 설은 모압 땅에서의 생활의 시작, 하늘과 같은 남편의 죽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아들의 죽음, 그리고 그렇게 몸부림을 쳐서 인생의 살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직면하게 되는 이 가난의 고통, 이 모든 것으로 나오미는 괴로운 여자였고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음으로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내 마음은 더욱 아프도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가 그 큰 환난을 통해 자기의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의 의미였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아파하는 것은 개나 돼지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고통 속에서 아파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더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을 가진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나오미가 많은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 신앙의 눈을 뜨게 되었고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지금 징계를 받고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고백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시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시는 징계가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등진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의 고난의 문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을 아는 눈으로 우리의 인생의 고난을 해석하면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이 징계를 통해서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우 다급하게 당신과의 성스러운 화목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간절한 초청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요즘은 시집장가를 가도 아이를 잘 낳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시집장가를 가면 아이를 많이 낳으십시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한사람 앞에 최소한 4명 정도씩은 낳아야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참 많습니다. 한 3명 정도 더 있었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옛날에 제가 아주 어렸을 때만 해도 이상적인 가정에 아이가 얼마인가 하면 3남 2녀 이렇게 말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실제로 3남 2녀만 되도 준수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7-8씩 낳고 많이 낳는 사람들은 한 타스씩까지 낳습니다. 그러니 그 집안에 애들 자라는 그 모습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그렇게 많으면 육아의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큰 애들이 작은 애들을 보니까 많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아놓고 1, 2, 3째 차례대로 낳으면 한 5째 쯤 낳으면 3째가 봐줍니다. 그 3째가 8살쯤 되면 그 다음에 6째쯤 낳으면 3째에게 기저귀 끈으로 허리에 묶어주면 애가 1-2살 박이를 매달고 그리고 매일 소꿉장난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등에 업혀있던 아이도 얼굴이 새까맣게 탑니다. 선탠이 저절로 됩니다. 그 누나의 등에 매달려서 자기도 하고 오줌도 싸고 또 어깨 너머로 공기 돌 하는 누나를 보면서 사회와 세상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애가 커서 초등학교에 갈 때쯤 되면 그 다음에 언니가 6학년쯤 되니까 과외선생까지 해줍니다. 조금 더 크면 큰 언니가 중학교쯤 마치면 방직공장에 가니까 생활비까지 보탭니다. 그러니까 애가 많은 집은 걱정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애가 애를 키우면서 계속해서 교육과 육아, 그리고 생활의 문제까지 스스로 자급자족하면서 크는 것입니다.
그렇게 쥐뿔도 해주는 것이 없이 부모들은 이른 새벽에 일하러나가서 밤 어두우면 돌아옵니다. 그러니 쥐뿔도 해주는 것이 없는데 애들은 왜 그렇게 야단을 쳤는지 모릅니다. 우리초등학교 때도 보면 항상 저녁때쯤 보면 길거리에 나와서 자기 문 앞에 나와서 손들고 있는 애들을 많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하도 화가 나니까 너 대문 앞에 나가서 손들고 서있어. 그러면 거기서 6-7명 일개군대가 차례대로 손을 다 들고 거기서 그렇게 심지어는 비 오는 날에도 벌을 세웠습니다. 요즘 아마 그렇게 한다고 하면 다 가출한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뭘 잘못했는지 아버지가 그냥 회초리로 내리치면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발발 깁니다. 그랬는데도 애들이 상처를 받지 않고 거기에서 효자들이 나왔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껏해야 하나 아니면 기껏해야 둘 정도 낳고 셋째만 낳으면 사람들이 원시인 보듯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애들을 그렇게 그냥 애지중지 키워서 애들이 원하는 대로 다해줍니다. 애들이 제약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 원하는 대로 다 해줍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불량자들이 나옵니다.
어제 우리는 어린이 회심 집회를 했습니다. 제가 오전에 한번 설교하고 오후에는 7시 10분에 집회를 시작해서 10시 30분이 넘어서 집회를 마쳤습니다. 그 아이들을 이렇게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이 아이들의 영혼이 어떤지 자기의 엄마 아빠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애를 붙들고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데 애는 장난만 칩니다. 이렇게 돌같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이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아이들이 회심하도록 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애들이 여러분들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게끔 만들어줍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줍니다.
제가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사형수였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2003년도에 카드 빚 때문에 돈을 달라고 부모님께 그랬더니 야단을 치고 돈을 안 주니까 석유를 끼얹어서 부모를 다 태워버린 그 카드 패륜아로부터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 속에서 패륜아의 모습은 간곳이 없고 하나님을 잘 믿고 살고 싶다는 참회의 내용들이 가득했습니다. 자기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전 그때 마음한구석에서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누군가가 이 아이에게 삼년만 먼저 예수의 복음을 전해주었다면, 누군가에게 이 아이에게 몇 년이나 먼저 예수의 복음을 전해주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했다면 자기의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렇게 깊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서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식으로도 이런 뼈저린 고통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런 끔찍한 고통을 당했을 때 그때 그 고통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저 인간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면서 손가락질하며 누군가의 핑계를 대는 유치한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도움이 된다면 한번 해보십시오. 그러나 그게 여러분들의 영혼에 무슨 도움을 가져다주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믿음이 별로 없었던 여자, 나오미 조차도 약속의 땅을 떠나고 하늘같은 남편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가난을 극복해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고통 하는 처지를 모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동안에 무슨 유익을 우리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믿음이 없었던 사람도 그 고통이 가중되는 가운데 한 인간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음으로 내 마음이 괴롭도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 큰 고통을 하나님이 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치셨을까요?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 그리고 이방여인에게 자식을 장가보내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자식을 잃어버리고 남편마저 죽고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은 사람의 많은 기도는 거짓입니다. 순종하는 고통을 싫어하고 하나님 만나는 감격을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아주 싸구려 연애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사람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삶,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규칙과 삶의 도리들을 배우고 그 진리를 따라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법도에 합치시키려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고 그 안에서 인생의 참된 기쁨을 맛보는 이런 진실한 삶, 이것 이외에 다른 곳에서 행복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은 재앙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고난은 행복의 극치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가치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가, 쇠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III. 환란의 갈림길에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제 이 큰 환난을 만나면서 이 세 여자가 함께 모였습니다. 나오미는 이런 고백,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음으로 내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고 하는 이 깨달음의 고백이 있었지만 깊은 신앙 속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며느리인 오르바를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오르바와 그리고 룻은 동서지간이었습니다. 아마도 말론의 아내는 오르바였을 것이고 기룐의 아내는 룻이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모두 여위고 그리고 홀로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나오미는 귀향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며느리는 끝까지 어머니를 따라가겠노라고 매달렸습니다. 아마 타향에서의 10년 생활 동안에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어버리고 늙은 몸으로 쓸쓸히 귀향의 길에 오르는 시어머님을 홀몸으로 보낼 수 없는 동정심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오미는 어떤 점에서는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이 며느리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나를 따를 생각하지 말고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라고 권했습니다.
A. 두 사람의 선택
당시에는 형수취수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결혼의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아서 자기 아들이 아니라 형의 아들로 삼아 가문을 잇게 하는 습속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나오미는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아들이 없다. 만약에 아들이 있다면 그 아이가 너희에게로 들어가서 대를 잇게 할 텐데 없다. 또 내가 시집을 간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남편을 통해서 아이를 얻게 된다고 치자. 그 아이들이 자라서 너희에게로 들어가기까지 어떻게 기다리겠는가.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쓸데없는 일이고 너희는 각각 속히 너희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자기의 며느리들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 설득을 듣고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서 영원히 잊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빨리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이 설득에 어머니보다 배나 더 단호한 어조로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갈 것이며, 어머니가 유숙하신 곳에 나도 유숙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죽는 이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이 나를 벌을 내리시고다시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장사하는 그곳에서 나도 장사될 것입니다. 워낙 확고한 결단이었기 때문에 나오미는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이제 이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B. 믿음으로 택한 길
여기에서 이 믿음의 사람 룻은 바로 두 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는 어머니를 따라가는 곳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선택하는 곳이었습니다.
1. 어머니와 함께 있기를
제일먼저 이 여자는 어머니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갈 것이요,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할 것이며 어머니가 죽어 장사되는 그곳에서 나도 죽어서 장사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제 이 시어머님 나오미를 향한 사랑을 룻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환난에 날에 가족들과의 연합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편도 그리고 두 아들도 죽고 며느리 둘 중에서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룻 혼자 남았는데 그래서 두 여자를 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단촐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룻의 마음속에는 나오미를 향한 살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제 이 어머니를 붙잡고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인 선의에서 나온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와 엘리멜렉이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이 모압 땅에 왔을 때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하나님의 계시가 묻어있었습니다. 이방여인으로서 이 집에 시집와서 이 부모님과 남편을 접하면서 그 여자 룻은 어떻게 하든지 계시의 형태로 자신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참된 인생의 기업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자신이 고향에서 섬겼던 그 신과는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아는 지식, 그 속에서 그는 점점 신앙이 자라갔던 것입니다. 이 나오미에게 보여 지는 이 룻의 아름다운 사랑은 바로 이런 언약의 하나님의 여호와의 헷세드, 곧 그의 자비를 경험한데서 비롯한 까리따스의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 어머니를 끝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환난을 만난 이 가족적인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 룻이 선택한 그 선택이었습니다. 이 사람 룻은 바로 그렇게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어머니 못지않게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고향에서는 이방인에게 시집간 여자로 낙인이 찍혔고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이방인의 집에 시집을 왔지만 남편도 죽고 남편의 형제도 죽고 시아버지마저 죽고 동서는 떠나고 그리고 외로운 여자어머니와 함께 있는 상처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 때문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여자는 자신의 마음에서 넘치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자기와 함께 이 불행한 처지에 있게 된 나오미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소위 이야기하는 상처, 시련을 통해 얻게 되는 상처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상처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입는 피해라고 어느 정도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자기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끝없는 자기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우리의 내면이 응축되고 또 응축되도록 만들어서 결국은 안에 오므라들고 오므라들어서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여러분 뒤에서 상처 타령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연민에 빠져있습니다. 그런 연민에 빠져서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그 사람이 무기력한 인생에 새 힘을 주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10년 전에 상처를 타령하고 있던 사람은 아직도 계속 상처 타령입니다. 자기는 자기를 굉장히 불쌍하게 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패역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상처 안 받았으면 참 좋겠는데 이미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는데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빨리 정신 차리고 상처는 받았지만 이 상처가 자신을 더 이상 그 인생의 불행으로 번지지 않도록 상처를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지 않도록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 지켜야지 그 상처에 자기의 몸을 내어버리고 나면 삼류 싸구려 소설 같은 간증 이외에 무슨 찌꺼기가 마음에 남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들에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세상은 항상 그런 곳이야. 상처가 없는 그런 곳은 이 세상이 아니야. 살아있고 숨 쉬는 동안에는 상처도 있고 상처를 받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의도했기 때문에 상처를 주지만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를 통해서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의도적으로 상처를 나에게 주기 위해서 다가오는 그런 배신자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세상은 또 그런 배신도 있고 상처도 있기 때문에 소설도 쓸 수 있고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나오는 것이지 그게 인생의 한 맛이라고 생각해야지 그것을 끌어안고 사랑하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면 앞으로 전진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인생의 좋은 일이 아무리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그 자매 이 설교를 듣는 이 순간에는 없으니까 내가 안심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 소망은 시집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이미 벌써 병원균이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는 순간 자기 가정에 비슷한 모형을 가진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자기가 상처를 엄마로부터 상처를 받았는데 이제는 자기도 엄마가 됩니다. 그래서 상처를 주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콩 심은데 콩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을 하고 자기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깁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하던 자식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확 밀려드니까 어느 날 회심하지 못한 아버지가 불쌍한 어린아이처럼 보였습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서 정말 그랬구나. 나와 우리 아버지와의 차이는 우리 아버지는 일찍이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과 나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일찍이 하나님을 알게 된 차이인데 아버지도 만약에 나처럼 일찍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야. 내가 만약 아버지처럼 저렇게 늦도록 하나님을 몰랐다면 나는 내 아이에게 우리 아버지가 그랬던 것보다 배는 더 나쁜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미움의 것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살아 주의 사랑 안에 하나 되어
주님이 내 마음에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요즘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엇 그제 신문에 돈 많은 집안의 아들들이 어머니 아버지를 보일러 안 한 방에 집어넣어서 동상에 걸려서 죽게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나는 그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원한이 맺히게 되면 그보다도 더한 일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있는 자기의 부모를 죽이고 거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지를 생각을 하는지 그런데 그게 여러분들과 나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상처 타령하면 안 됩니다. 상처가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무슨 삼류영화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다 쓸데없는 개 폼 입니다. 그것도 얼굴이 그렇게 예쁘니까 상처받은 것도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지 못생긴 사람들끼리 그렇게 합니까? 우리 같은 얼굴에 상처까지 가슴에 품어봐. 못 봐줄 영화지.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엇 그제도 누구를 만났습니다. 목사님, 많이 아프게 해드리고 상처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다 잊어버렸어.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시간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향하여 살 시간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로 나가기도 모자라는 시간입니다.
이 사람 룻의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헷세드를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기게 되니까 자신의 상처에 대한 모든 인식이 사라집니다. 아멘! 우리 집안에 모두 부서졌어도 나 하나님의 딸 룻은 이 불행 중에서 기업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나이다.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를 긍휼히 여기게 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였습니다. 결혼해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한번 아멘 해보십시오. 전혀 의지가 없네. 특히 자매들 결혼해서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형제들 생각을 다시 해야겠다. 믿음이 없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목소리가 작으면 시집갈 자신이 아직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비결을 하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시집가기 전에 요리학원을 다닙니다. 가계부를 쓰는 연습을 한다. 다 헛소리입니다. 나처럼 아무 것이나 잘 먹는 남자 만나면 학원비 없애는 것입니다. 양만 많으면 뭐든지 먹어, 다 쓸데없는 이야기고 진짜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을 만나면 한국 요리학원 가지고 안 됩니다. 또 그렇게 까다로운 남자를 만나도 자기가 못 벌면 소용없지, 칼 살돈도 없는데 다 쓸데없습니다. 한 가지만 잘 연습하면 됩니다. 자기 깨어짐,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것,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 사랑으로 깨트려지는 것,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의 상처에 매이지 아니하고 상처받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법, 그래서 예수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법, 그것을 배우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룻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은 영적침체에 빠진 것을 무슨 큰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영적침체에 빠지면 다 배 째라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봉사 좀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요즘 은혜가 떨어졌습니다. 주님을 믿는 신자가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 나 은혜 떨어졌다. 어쩔래. 기도하셔야지요. 제가 기도가 되면 안 하겠습니까? 이게 무슨 완전히 배 째라 신앙입니다. 그렇게 배 째라 식이 되면 하나님이 언젠가 한번 찢으십니다. 그럼 그 찢어진 배속에서 온갖 시커먼 먹물이 쏟아집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의무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힘이 없는데요. 그래서 악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악한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핑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그에게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의무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의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 의무를 가지고 금요기도회에 나오면 기도가 안 되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막 깨트려져서 눈물을 흘리는데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기도가 안 되니까 나는 못해. 못하니까 안 해. 그리고 파자마 바람으로 벌렁 누워서 금요기도회 성도들이 기도하는 시간에 TV나 보고 앉았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 나와서 매달리다가보면 자신의 힘으로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가 있어서 기도할 수 없다면 용서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마음을 지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회복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늘 이 여자 룻을 보십시오. 도대체 자신의 처지도 가장 비참한 여인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불행한 어머니를 위해서 이렇게 공경을 하는 이 사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하나님의 헷세드를 아는 까리따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무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의무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회복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두 번째로 보면 이 여자가 하나님을 자신을 기업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 여자 룻은 이제 이 집안에 시집와서 거기에서 묻어나온 아주 적은 계시에 빛을 통해서나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은 헛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잠시 지나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영원한 분이시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마지막에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리라. 이 고백을 주목해보십시오. 이 고백이 그 긴 고백의 결론이요,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나오미를 따라 나서서 그 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이제 자신의 고향을 등지려고 합니다. 가보지 못한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불행해진 이 여자 막말로 과부 둘이서 요단강을 건너서 베들레헴으로 간들 어느 누가 그들을 환대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고달픈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 길에 무엇이 약속되어있습니까? 베들레헴에 오면 큰 집을 준다고 합니까? 아니면 엄청난 농토가 있습니까? 이 여자가 베들레헴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와서 하는 일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떨어진 낟알을 줍는 이삭줍기입니다. 그런데도 베들레헴을 택한 것은 세상이 주는 번영이 주는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약속의 땅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변천하는 일들, 사물들, 결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부하고 가난해지고, 늙고 젊고, 병들고 건강하고 하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굉장히 분주한 사물의 표상들,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듭나기 전까지는 눈으로 보는 것밖에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듭남과 함께 우리의 영혼의 눈이 뜨여지고 영혼에 아름다움에 대해서 관상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영혼에 대한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의 빛으로 현세를 비추어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끌던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표양들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것입니다. 굉장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혼의 빛을 받으니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혼의 빛을 받으니까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혼이 빛을 받으니까 이것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실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보였는데 영혼이 빛을 받으니까 정말 추루한 것이고 추루한지 알았는데 영혼이 빛을 받으니까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어떤 사물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눈으로 보이는 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영혼에 빛을 받아서 떠오르는 사물들의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그런 감각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중생의 인식론적인 의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직접 영원에 심연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은 영원한 사물들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되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적으로 보면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또 보면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불멸합니다. 천국과 지옥도 불멸하니까 영원한 것입니다. 천국에는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원한 사물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을 비롯한 영원한 피조물들뿐만 아니라 거기에서도 뭔가 사물들이 있습니다. 생명은 없지만 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영원한 것들입니다. 그 영원하지 않았는데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덕을 입는 한도 안에서 영원한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본래적인 영원이 아닙니다. 그런 본래적으로는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덕을 입어서 영원하게 된 사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끝없는 우주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실제로서의 영원 안에는 세 가지의 속성이 들어있는데 완전함과 불변함과 무한함입니다. 우주를 보면서 끝없는 무한을 느낍니다. 우주 자체가 궁극적으로 무한하지 않겠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들은 무한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이 너무나 멀리 있고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우주를 보면서 영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영원에 실제에 대한 지식들을 전달해줍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거듭나는 그 순간에 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 영원은 곧 궁극적인 영원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이 영원은 곧 하나님이시며 이 영원은 곧 진리입니다. 진리는 영원이고 영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영원으로부터 빛을 받는다는 것은 곧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빛을 받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성경에 그려내고 있는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설음을 이기고 고난을 견디는지 그 비결을 베드로전서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거듭나는 그 순간 거듭남과 함께 생겨나게 된 영원에 인식기관을 가지고 영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그 빛으로 지혜를 얻고 그 영원의 빛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사랑으로 채워서 그래서 나그네 인생길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영원에 잇대어서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 모든 신령한 힘이 거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에 아무리 나오고 저녁 늦게까지 성경공부를 하고 별 야단을 다하면서 교회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영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도구를 통해서 진짜 영원을 여러분이 접촉하고 그 영원한 실제를 영원한 사물들을 통해서 전달받는 이런 영혼의 인식이 여러분들에게 계속 있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남다른 삶을 살수 없습니다. 불행한 일을 만나면 똑같이 슬퍼하고 괴로운 일을 만나면 상처받고 행복한 일을 만나면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은 영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영원한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 기자는 말하기를 “하늘에서는 주 외에 사모할 자 내게 누가 있으리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렇게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전망 속에서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정에 굴복하는 삶이야말로 영원으로부터 밀려오는 이 놀라운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해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구경하고 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너무 큰 즐거움을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어린이 회심집회를 하면서 내가 말씀을 잘 안 들으려고 하는 애들에게 혼을 내면서 가르쳤습니다. 너희들이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고 동생을 때리고 친구에게 칼을 대는 일보다 더 악한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에 잇대어 살지 않고는 진리 자체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들이 실제로서 영원에 대해서 눈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치신 징계의 고난이 아니라면 그 고난 속에서 넘치는 기쁨으로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시고 넘치는 사랑과 용서로 여러분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치셨기 때문에 다가온 곤고함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십시오. 오히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 고난이 하나님께 여러분들을 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넘치는 고난 속에서 열렬한 기도로 그 고난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치신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직하게 고백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곤고하게 인생의 고난과 환난의 길에서 신음하면서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고 연민에 빠지는 그런 바보 같은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돌이키겠습니다. 내가 비록 잠시 주님께 불순종했지만 나의 기업은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나를 주님께로 돌이켜 주십시오. 내가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IV. 결론과 적용
인간은 영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탁월한 존재이지만 영원의 뛰어남은 영혼이라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으로 아무 피조물도 할 수 없는 일, 곧 진리를 직관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바라봄으로 그 진리를 통해 영원에 관한 빛을 받고 그 영원의 빛을 받음으로 끝없이 출렁거리는 이 사물에 표양 속에서 그것이 갖는 영원의 잇댄 가치가 무엇인지 터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난과 시련을 당해도 주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번영 속에서 유혹이 가득한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도 오히려 그 길을 걸으면서 비웃듯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붙들게 되는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아래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기쁨으로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룻은 어느 정도 이런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에 그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 어머니와 함께 귀향함으로 얻을 수 있는 기업이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환난의 길에서 그 인생의 고난으로 가득 찬 환난의 갈림길에서 오르바처럼 세상을 택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계시의 빛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던 이방 여자 룻이 그럴 수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더 많이 감지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인생의 환난의 갈림길에서 여호와만 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깊이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내 인생이 어떤 환난에 흔들려도 나는 여호와는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만이 나의 기업이 되신다면 나머지는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불퇴전의 신앙의 결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이 룻처럼 주님 자신을 기업으로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침체와 회복의 갈림길에서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려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시107:10-14)
I. 본문해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죽음과 같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바로 이런 인생의 죽음과 같은 벼랑에 길에서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그림처럼 묘사할 수 있고 그 묘사 속에서 보석과 같은 많은 영혼의 회복을 위한 교훈들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편 107편을 통해서 그렇게 영혼의 침체와 회복의 갈림길에 서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고 거기서 주님의 도움으로 은혜를 입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는 이 고백은 시인 자신의 고백일 수도 있고 혹은 시인 자신의 고백을 토대로 삼아서 모든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후자일 것입니다. 이 속에서 시인은 그 하나님 앞에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영혼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이라고 말입니다.
II. 생의 벼랑 끝에서
이 속에서 한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 있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서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A. 육체: 죽음과 같은 절망
우선 첫째는 육체의 상태입니다. 죽음과 같은 절망에 매여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10절의 문맥은 철저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모습에 이 내용들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혹은 동굴로 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언약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흑암과 사망에 육체가 처한 형편을 겪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형통과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절대로 무조건적인 축복과 그리고 형통함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처럼 인생의 절망의 벼랑에 설 때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절망의 벼랑에 서게 되는지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물질의 궁핍으로 인해서 절망의 벼랑 끝에 서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림으로 삶과 죽음사이를 오가며 절망의 벼랑 끝에 서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해야 할 사람과의 관계의 깨트려짐으로 인해서 믿었던 사람들로부터의 그 살을 에는 것 같은 배신으로 절망에 벼랑 끝에 서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밀접한 삶의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에 휩싸이게 됨으로서 자신도 또한 이런 절망의 벼랑 끝에 서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이렇게 인생의 절망의 벼랑 끝에 서있을 때 거기에서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런 고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이고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고 이렇게 물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서 우리를 그 벼랑 끝에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B. 영혼: 죄수와 같은 속박
이 사람 또한 영혼의 상태를 오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상태입니다. 지하 캄캄한 감옥에, 혹은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히고 큰 철창으로 입구를 가로막았습니다. 어디 한군데 도망갈 여유가 보이지 않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죄수를 다시 바닥에 말뚝을 박고 쇠사슬로 다리를 묶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밧줄을 묶어서 설령 그 철창이 벗겨진다고 하더라도 도망갈 수 없는 그런 속박 받은 상황에 남겨두었습니다. 육체의 속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혼의 속박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육체로는 많은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영혼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 육체의 고난을 파도 삼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의 인생은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이중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신분의 자유고 또 하나는 내적 자유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죄의 자식이요, 멸망의 아들들이요, 사단의 자식들이었지만 그러나 우리를 용서해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죄와 사망에 법에 매어 마음과 영혼이 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원하는 바 선이 우리의 마음 안에 있었지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놓으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함 가운데 주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이 내적 자유 역시 조건적인 자유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분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 내적인 자유는 우리의 순종을 담보로 한 조건적인 자유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자유를 원리적으로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다시 협박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사는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는 내적인 속박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항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없고 이렇게 잃어버린 자유는 스스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 자유를 다시 되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래 전에 저는 TV에서 하는 다큐멘터리를 잠깐 본적이 있습니다. 야생동물들을 불법으로 포획하는 사람들의 잔인함을 고발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깊은 산을 등산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특히 가까운 곳에 민가가 있는 깊은 산을 방문할 때는 여러분들이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수많은 덫들이 놓여있습니다. 낙엽 같은 것으로 덮어놓고 덫을 놓습니다. 저쪽에다 먹을 것을 갖다 놓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갖다놓지 않아도 짐승들이 야생동물들이 지나는 그 통로에다가 덫을 설치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그것을 밟으면 덫이 튀어 오르면서 이 동물의 발을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저도 직접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쥐덫처럼 탁 채이게 되어있는데 이게 톱니처럼 날카롭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탁! 하고 발을 채우는 것입니다. 어린 멧돼지 한 마리가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도망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살갗이 다 찢어지고 힘줄이 끊어지고 나중에는 뼈가 하얗게 탑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톱니바퀴 같은 이 덫이 점점 살과 뼈를 파고 들어갑니다. 결국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갔을 때는 며칠쯤 지났는지 그 어린 멧돼지가 거기서 죽어있었습니다. 그 살은 다 파이고 뼈가지 다 드러나도록 피가 흥건하게 고이고 더 불쌍한 것은 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마른 자국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눈길을 끈 것은 사슬이 묶여져있는 나무였습니다. 그 주위를 얼마나 돌았는지 그 나무가 하얗게 파져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속박 받는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아! 인간이 이 죄라는 것에 묶인 영혼의 속박의 상태가 저렇구나. 그것을 극복해보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보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의 속박 받는 상태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영혼이 자유하십니까? 구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찬양합니까?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이 없이 우리 하나님을 앙망합니까? 이 마음과 영혼의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사람은 그런 자유를 잃어버리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어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지 오늘 한번 가슴에 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III. 절망과 곤고함의 원인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절망과 곤고함의 벼랑에 서게 될까요? 그 원인이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A. 말씀을 거역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절망과 곤고의 벼랑 끝에 서게 될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바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는 속히 이 절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다시 행복하고 평안해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시기 시작하십니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고치기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싶어 하시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고치시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가 왜 이런 절망에 벼랑 끝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참으로 알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런 어려움에 빠지게 된 그런 모든 원인들을 우리에게 항상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하고 그리고 환경 속에서 그 답을 내려고 합니다. 오늘도 내려오기 전에 열린 신문에 실린 그 간증을 읽고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지체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어려움이 일어났을 때 제일먼저 생각되는 것은 그 사람이 밉다. 왜 인간이 그럴 수가 있을까? 어려움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항상 그 모든 원인들을 자신에게 찾으려고 하지 않고 환경과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모든 인생의 환난을 몰고 온 그 장본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서 된 일입니다. 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게 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어리석음들이 깨트려지고 우리의 아집들이 하나님 앞에 쪼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경험에 이르기 전까지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단어를 복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 때문에 흑암과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불순종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기억이 안 나지만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시고 그 수많은 불순종 때문에 육체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되었고 영혼은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된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들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은 우리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배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믿음의 규칙과 또 하나는 삶의 교훈입니다.
첫째는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규칙들입니다. 믿음의 규칙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많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나는 신실한 여호와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나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는 다른 뛰어난 영광을 가지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되는구나.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규칙들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우리의 믿음을 위한 교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삶의 교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삶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규칙인 동시에 거기로부터 삶의 교훈이 흘러나오는 것인데 그 교훈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야한다는 교훈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거역하는 말씀은 바로 그 삶을 위한 교훈, 즉 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세 가지 등급이 있습니다. 제일 훌륭한 것은 잘 믿고 잘 배우는 것입니다. 잘 믿고 이성적으로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라. 계명을 주시면 아멘, 하나님이 그런 계명을 주시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참 감사한 것입니다. 나는 이 계명이 잘 이해가 안 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틀림없이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믿고 그렇게 살 때 행복이 올 줄 믿습니다. 아멘 하고 받아들인 후에 그 다음에는 또 아멘이라고 했지만 내가 왜 그런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삶의 교훈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을까? 믿음의 규칙을 주셨을까? 하고 부지런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탐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사색하고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고 실제로 실천해보면서 진리를 찾아서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도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고 또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순종하면 일등입니다. 최고의 믿음입니다. 그것보다 조금 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이 부지런히 탐구는 하려고 하지만 지성적인 능력이 훨씬 못 미칩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처럼 단순합니다. 난 잘 모르지만 좋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멘이야. 나는 그분의 뜻만 따를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나를 꼬여도 나는 예수님말만 따를 거야. 이런 것이 믿음만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있어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마음이 오래가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식의 끊임없는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 마음이 계속 불일 듯 일어나지 않으니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제일 나쁜 게 믿음도 없고 쥐뿔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슴도 텅 비고 머리도 텅 빈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혹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그래도 잘 길들여진 짐승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성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인간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인간들 속에 내가 있습니다. 예전의 세대도 아니고 앞으로 올 세대도 아니고 지금 이 시대에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미국사람도 아니고 소련 사람도 아니고 아프리카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며 이 내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역사 속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조시대도 아니고 22세기도 아니고 지금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 가족들을 만나게 하시고 수많은 교회 가운데 이 교회에 우리를 심으셨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는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계명의 형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모든 계명을 순종하면서 살아가야지만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육체는 죽음과 같은 절망에 휩싸이고 영혼은 그 절망적인 곤고함에 매어서 지하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는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큰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속에서 그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담배 피는 것이 죄인가요? 술을 얼마큼 먹어야 죄인가요? 돈놀이하는 것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주일날 뭐 사먹으면 안 되나요? 이런 질문이나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할 때는 하나님이 모든 선에 근원이시고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지혜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사사로운 생각을 하고 그분께 일단 순종하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선의 의지에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아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영혼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그것들은 사람을 사용해서 어떤 환경을 매개로 해서 그런 불행한 일들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원망하고 있는 것은 가장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 모든 환경들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데 왜 그렇게 곤고한 인생의 길에 서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사람을 원망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은 흘러가고 여러분의 인생은 달음박질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도 시원치 않는 수많은 날 동안에 여러분들은 쓸모없이 환경이나 원망하고 팔자나 한탄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불순종해서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침체 속에 낭비함으로서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회고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닥치고 있는 그 모든 불행과 고통, 그 이면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여러분들의 말씀을 어긴 수많은 삶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여러분들을 거기에서 건져내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의지를 읽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뜻을 멸시함
또 하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 곧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는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으며 영혼으로는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실천적인 죄를 의미한다면 뒤에 나오는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것은 그런 실천적인 죄를 짓게 만든 마음의 원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존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모든 질서에 있어서 맨 위에 계신 하나님은 가치에 있어서도 모든 사물들 맨 꼭대기에 계신 최고의 가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가치는 위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복종하고 항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집에 강아지를 기르고 있는데 그 강아지가 여러분들이 먹여주고 계속해서 길러주었는데도 여러분들의 사랑스러운 자녀를 계속 물어서 피가 나게 한다면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죽여 버리겠습니다. 정리해버립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계속 물어서 생명을 위협하는데 그 개를 거기에 놔둘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자신의 개를 잘못 관리해서 이웃을 물어죽이거나 하면 일급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질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주님이 보내신 아들로 구원을 받아서 오늘도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의존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글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모든 만물들이 먹고 입습니다. 그 코에 모든 호흡도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주께서 그 모든 것을 거두실 때 그것들은 모든 생기를 잃어버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는 모든 만물들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모든 만물 가운데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 뛰어남은 하나님을 덜 의존하는데서 뛰어남이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피조물이 어떻게 의존해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의존의 뛰어남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탁월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교만해지기 때문에 이런 가치에 질서를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우리에게 행복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믿어라. 하고 믿음의 규칙과 삶의 교훈을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셔서 그렇지 이것보다는 이렇게 믿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보다 이렇게 사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더 신뢰함으로서 우리는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면적으로 거슬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인간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는 그렇게 ‘하나님보다는 내가 낫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걸합니다.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보다는 내가 낫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율배반적인 것이 바로 영혼의 침체에 빠져서 절망 가운데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신자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행복을 찾는 그것 자체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고 인간의 모든 욕망이 바로 이런 일들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침체에 빠져있는 여러분들,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여러분들이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교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은 다만 힘없고 가련한 피조물에 불과하고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의 은총 없이는 살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죽음과 같은 절망의 길에서 돌이키고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는 다만 이 세상에서 나그네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 인생의 길이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지 않을 때의 일이고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영원한 본향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이 바로 그 나그네의 길이고 그 나그네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이 신자의 유일한 위로는 잠재적인 세상 속에 살면서 영원을 관상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그 자신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생각날 수 있도록 많은 영원한 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세상에서의 섭리적인 축복, 그 안에 깃들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들, 주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사는 날 동안 맺게 해주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그 다음에 목양의 관계들, 그 다음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서 행하고 있는 영원에 속한 많은 일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영원한 것들입니다. 그 자체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가변적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것들은 영원을 지향하고 있고 그 은혜의 수단들은 영원한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영원은 영원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 땅을 나그네로 살면서 그 즐거움을 변전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감각적인 사물들을 표양 속에 두지 않고 오히려 그 표양 너머에 있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완성의 세계, 영원하고 불변하며 무한하고 완전한 그 세계에 두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면서 사는 동안에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IV. 하나님의 구원방법
고난과 시련이 올 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하여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에 떨어지도록 만들어도 우리는 그 속에서 흔들리는 이 감각적인 이 세상에 의해서 함몰당하지 아니하고 그 모든 것들의 너머에 계신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 그리고 무한한 자체이신 하나님,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영원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의 길이 나그네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영원으로부터 오는 모든 힘 때문에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거역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같은 육체의 절망의 길, 죄수와 같은 희망이 없는 영혼의 침체 속에서 있을 때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언약백성들을 건져주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어떤 위기 상황 속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만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반드시 그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언약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백성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그 무한한 특권 두 가지만 묵상한다면 여러분들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약속되어있지 않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맺어진 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그 언약 안에서는 무한한 죄의 용서가 약속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회개는 백번을 해도 기억하는 법이 없고 한 번의 실패는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각인되어서 우리를 낙인찍습니다. 그러나 언약백성들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 백성들에게 무한한 죄의 용서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돌이키면 다시 은총을 베풀겠다는 구약의 수많은 약속, 몇 번이나 우리의 원수를 용서해야지 되는지의 질문에 일흔 번의 일곱 번도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약속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짓지 않고 영혼의 곤고함에 이르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죄가 그렇게 큰 것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잘못하지 않고도 우리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욥조차도 의로운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한 자의 표상인 욥조차도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깨끗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수많은 무지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심에 통회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용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무한한 은혜의 공급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일지 모르지만 선택한 것을 끝까지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어두움 속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통을 받을 때는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인생의 벼랑 끝에서 탈출하여 정말 평야를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큰 환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의 모든 내면까지 새롭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제 그 계획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세 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A. 마음을 낮추심
첫째는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저희의 수고로 저희의 마음을 낮추사,”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범죄와 불순종은 말씀드린바와 같이 판단의 교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교만이 걸어가는 자리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교만이 우리의 마음에서 작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게 되고 자신을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라는 것을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마치 커다란 배의 방향타와 같습니다. 인간 존재의 참다운 가치는 이 방향타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가 참으로 그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동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부흥사를 지냈던 이성봉 목사님은 항상 교역자를 고를 때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밥을 반 그릇쯤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실격인데 왜냐하면 그에게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이야기할 때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가 지혜, 두 번째는 욕망, 세 번째는 기개, 희랍어로 튜모스라고 하는 기개, 혹은 용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 개가 골고루 갖추어져있는 영혼일 때 그것이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생각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면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런 튜모스 기개가 있어야 됩니다. 어려움이 오면 굼뻑 죽고 그냥 한숨이나 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기개가 있어서 어려움이 오면 그 난관을 대응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기개, 그런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용기는 바로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에너지가 있어서 이것들이 계속 이렇게 넘치게 될 때 그때에 인간은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뭘 하나를 봐도 허튼 것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 저것을 활용해서 내 삶을 비옥하게 할까? 내 일을 어떻게 하면 저것을 보고 잘할 수 있을까? 이런 역동적인 사람들이 일을 해야지만 사회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회사를 가지고 있거나 경영을 할 때 이런 기개가 없는 사람들을 쓰면 그럼 반드시 그 회사는 쇠퇴합니다. 조금 문제를 일으켜도 이런 기개가 있는 사람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에너지가 여러분 안에 넘쳐서 의욕과 욕구, 욕망 같은 것이 많아서 무엇이든지 한번 인생에서 해보면서 살고 싶다고 그런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방향타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에 지혜로운 항해사라면 배가 엔진을 훌륭한 출력을 낼 수는 있지만 무엇인가 이유 때문에 방향타가 망가졌다면 절대로 엔진에 시동을 걸고 출력을 이용해서 바다를 항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오래간만에 부두에 매어놓은 자기의 배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시동을 걸어보니까 잘 걸립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습니다. 밟으면 밟을수록 엄청난 속도로 뱃머리를 쳐들면서 배가 파도를 가르며 배가 달립니다. 얼마를 항해한 다음에 이제 방향을 틀어보려고 핸들을 움직였는데 오랫동안 운행을 안 해서 그런지 엔진은 성한데 이 뒤에 있는 방향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점점 속력을 냅니다. 그럼 막 달려가는데 한참 뒤에 절벽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배는 멈출 수가 없이 계속 달립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배를 버리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도로 달려가면 에너지가 있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시동이 꺼지면 오히려 살수가 있는데 에너지가 있어서 죽습니다. 절벽을 향해 부딪치고 폭발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불행, 우리가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되는 이런 모든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이 굽어서 하나님을 향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마음이 망가진 상태를 고치고 싶어 하시는데 그 마음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 것입니까? 그 마음이 망가지는 것은 높아지는 것 이외에는 망가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한 인간의 자신의 철저한 절망도 사실은 교만입니다. 왜 넌 희망이 있다. 괜찮다. 내가 너를 돌봐줄게. 하나님이 수없이 말씀하시는데 안 될걸요. 내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지나친 절망도 분에 넘치는 허영도 모두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치시는 하나님, 무슨 상처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치료될 수 있다고 하는데 자기는 아니라고 그렇게 합니다. 자기는 이게 워낙 크기 때문에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못하실 걸.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보들입니다. 자기 연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이 하나님께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가봅니다. 왜냐하면 쉽게 흔들릴 수 있으면 좀 빗나갈 때 툭 하고 건드리면 움직이면 되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움직여집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많이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리고 욕정에 굴복하는 삶을 실제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돌이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바꾸어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잘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이 이렇게 사물들에 이런 표상에 매이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 마음 잘못되었는데 고쳐야겠다. 그러면 울면서 고칩니다. 그런데 이런 눈이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영원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눈이 없는 사람은 거꾸로 뭘 보고 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표양들, 감각적인 사물들밖에는 못 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리 깊이 그의 영혼에 애야, 너 나와의 관계가 잘못되었거든.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할 때도 못 알아듣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설교를 진지하게 하고 지금 제 마음속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얘기를 해도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리는 사람들이 여기에 여럿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방법으로는 안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들이 제일 잘 보는 것을 하나님이 막 흔들어버리십니다. 돈이 이렇게 쌓였는데 와르르 무너지고 불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있어서 막 좋아했는데 막 죽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했는데 다 버리고 도망가고 배신합니다. 건강을 믿고 껍죽댔는데 갑자기 막 걸을 수도 없게 되고 피가 나오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다루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마음이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마치 설악산의 흔들바위 비슷하지 않습니까? 약간씩 흔들리기는 하는데 절대로 수백 년 동안 굴러가지는 않습니다. 그게 흔들바위입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눈물이 조금 나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가? 끝나고 나서 눈물을 닦으면 원위치입니다. 그런 정도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배에다 무슨 물건을 싣는다고 해서 배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였다가 가난해질 수도 있고 가난했는데 돈을 많이 벌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작았는데 엄청나게 큰 회사가 될 수도 있고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사업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이 못 생겼는데 돈 좀 벌어서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비를 했더니 새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출입국 사무소에서 싸운다고 합니다. 여권이 어떻게 당신 사진이냐. 여권의 사진은 50대 여성이고 얼굴은 20대니 이것이 성형 전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겠는가, 이 얼굴인데. 그렇게 변한다고 칩시다. 혼자 살던 사람이 시집장가를 갔습니다. 애들을 줄줄이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삶에 표양일 뿐이지 그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배에다 예쁘게 색칠한다고 해서 서쪽으로 가던 배가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져야 할 필요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환난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하지만 고통 하는 그 속에서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는 우리가 좋아해서 선택한 것, 한때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 한때는 우리의 판단이 하나님 판단보다 훨씬 낫다고 믿었던 것, 그것이 우리에게 수많은 칼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사랑하던 것, 내가 믿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를 버리는 것이었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만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것을 버렸구나. 그리고 깊이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미워하는 감정이 생겨납니다. 부패한 자신에 대한 배신, 그리고 나는 다시는 너를 믿지 않을 것이야. 나는 네가 정말 싫어. 그런 마음이 생기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멸시하게 만들었던 자기의 옛 자아와의 끊임없이 결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마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지지난 주에 우리가 어린이 회심집회를 했는데 오늘 상세하게 특집으로 나왔습니다.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러분 깊이 자신이 회심하십시오. 1-6학년까지를 제가 직접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오전에는 조금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제가 어린이들에게 설교를 해도 원하는 수준이 이정도입니다. 이렇게 조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녁 예배 때 거의 이 수준에까지 갔습니다. 조용하게, 수백 명의 아이들이, 기도에 위력이라는 것이 대단합니다. 말씀을 쭉 전하는데 그렇게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도를 해주었는데 아이들이 수백 명이 모였는데 제가 기도를 해주어봐야 몇 명이나 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하나씩 하나씩 해주는데 이상하게 그만 끝나려고 하는데 애들이 계속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보니까 저 뒤에 있는 애들이 친구들 틈을 비집고 무릎으로 나와서 올망졸망 계속 모여서 머리를 뒤 밀면서 기도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게 1,2, 3학년 이런 애들입니다. 그 중에 어떤 애들은 금식하며 은혜를 받겠다고 기도를 한 애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어떤 애는 얘기를 들으니까 목사님께 기도를 세 번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은혜를 받고 싶으면, 그게 낮아진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도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애들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변화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근심하며 부르짖게 해야지 됩니다.
오늘 성경에 그랬습니다. 근심 중에 저희의 마음을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제일먼저 우리의 자원을 동원해서 문제를 막아보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의 자원을 이용해서라도 막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지혜를 발휘하면 피할 길이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주신 고난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고난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돕는 자가 없도다.” 그랬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를 믿으면서 살아왔던 모든 날들이 교만이었으며 그 날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한 날들이었습니다. 고백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절대로 영혼의 회복이 없습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마시고 먹고 수없이 어울려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좀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청교도들이 그 성도들이 복음에서 타락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로 무엇을 꼽았는가 하면 목회자와의 지나친 인간적인 친분이라고 꼽았습니다. 왜 서양속담에 친근한 것은 불 경건을 조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항상 여러분들이 지체들 간에도 보면 친근하게 사랑하며 지내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막히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 친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친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판단하지만 이 사람은 친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유아무아 덮어주는 것, 이런 것들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살아있을 때 쓴 소리를 하는 목회자가 있다는 것을 좋게 생각하십시오. 죽을 때까지 쓴 소리를 하다가 죽을 것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낮추고 싶어 하십니다. 낮아진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신뢰하던 모든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나의 힘으로 살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밖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때 그 사람의 마음 가득히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머리와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감각적인 삶들에 매어 세상에 눈이 어두웠을 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나를 의지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의 모든 도움은 이제 하나님 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될 때 십자가가 놀랍게 다가옵니다. 왜 우리가 그 십자가의 중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패한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나를 낙인찍었어도 나를 용납해주시려고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마음을 낮추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빈말이라도 좋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저는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이고 한순간도 주님이 붙들지 않으시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그런 티끌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말입니다.
B. 기도하게 하심
그렇게 마음을 낮추신 하나님은 두 번째로 그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십니다. 즉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그렇게 부르짖게 하신다고 되어있습니다. 흔히 우리 중보기도를 이야기합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중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공로를 가지고 매개하는 것을 가리켜서 중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지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매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부분적으로 이런 매개사상을 인정하지만 개혁주의에서는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매개역할을 하실 수 있는 그런 능력과 근거를 가지고 계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는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것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뛰어난 입법자였던 모세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중보자라고 하는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중보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위해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우리가 그 사람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 때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신 것처럼 어느 정도는 우리가 그런 기능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인간의 표준에 서서 같은 위치에서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비는 것이기 때문에 중보의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치할 수 있는 적당한 용어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지만 섬김 기도라든지 혹은 도고의 기도라고 하든지 우리들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런 용어를 정의하고 나면 우리는 많은 섬김 기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서 섬기는 마음으로 대신 기도해주는 기도를 많이 받을수록 그 사람은 든든한 후원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누군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주면 그 사람이 그 기도의 후원을 강력하게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어린이 집회를 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저녁때 예배의 분위기가 차분하고 아이들이 말씀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른들 못지않은 집중력으로 한 30분의 설교를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그때에 본당에서 많은 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이런 섬김의 기도를 우리가 많이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많은 기도를 받는 사람이 그 기도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거나 불순종하는 삶을 살 때는 그 많은 섬김의 기도의 효력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많은 섬김 기도의 흐름을 따라 자신도 그 기도가 하나를 이룰 때 삶으로 그런 기도의 응답을 따라서 살아갈 때 폭발적인 응답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 곤고한 사람을 아무리 많이 섬긴 기도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그 섬긴 기도가 위대한 폭발력을 입증하는 것은 기도를 받는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곤고한 벼랑 끝에 서있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한 섬김 기도를 올려드린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섬긴 기도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곤고함에 처한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백성들의 삶에 있어서 아름다운 순간들이 무엇일까요? 어느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까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순간도 아름다운 순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중할 것이기 때문에, 가족들을 모두 버리고 선교의 길을 떠나는 사람의 그 사명자의 뒷모습도 아름다운 순간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물질들을 자신이 가난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지난주에도 어느 아름다운 성도가 간절히 기도하다가 마음에 생각이 났다고 하면서 총신에 가는 길이 있으면 신학교에 국문학생들에게 전달해달라고 그리고 상당히 큰돈을 저이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내년이라든지 가을에 갈 때 보태려고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섬김입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섬김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섬김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깨를 들먹이며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하나님 앞에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기도하는 그 통곡의 기도는 이 모든 섬김보다도 더 아름다운 놀라운 모습입니다. 이런 통곡하며 어린아이처럼 우는 이 기도 그 위에서 그 모든 섬김은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 속에서 통곡하면서 울고 가슴아파할 때 그의 영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전에 자신을 하나님의뜻보다 높이던 교만한 날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만의죄를 저질렀던 자기를 미워하고 그리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자기혐오와 미움의 감정이 그 속에서 생겨납니다. 예전에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스스로 내려놓게 되는 마음의 변화,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자기 깨어짐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께 많은 돈을 주셔도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위를 높여주시고 여러분들을 10년 젊게 만드셔도 이런 일들은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진리와 성령으로서 여러분의 마음이 깨트려질 때, 깨트려진 그 마음이 구체적으로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역사할 때 이런 깨트려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낮아진 마음을 하나님 앞에 깊이 통회하게 만드십니다. 이때에 그 사람이 예전에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문제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불순종하고 거슬렸던 죄인이 돌아올 때 그의 눈에 눈물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이전에 그 모든 계명을 멸시했던 삶을 용서해주시고 마음에 교만으로 하나님 자신을 업신여겼던 그 모든 더러운 죄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그 무한한 사죄의 은총과 그 무한한 능력을 힘입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C. 영혼을 자유케 하심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얽매인 줄을 끊으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자유함이 영혼을 갖게 해주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참회하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우리를 그 곤고한 중에서 갑자기 건져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때도 있지만 안 하실 때가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축복을 주셔도 영혼이 곤고한 가운데 있을 때는 그 축복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면 그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신학교 다닐 때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방학 때가 끝나 가면 학생들이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등록을 해야 합니다. 일반학교 같으면 벌써 제적되었을 것인데 신학교니까 차마 자르지 못하고 9월까지 등록기간이 연장이 되는데 1차 연장, 2차 연장 분납, 반만 내도 일단 다닐 수 있다는 등등의 해택들이 주어집니다.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서서히 하나 둘씩 보따리를 싸고 그리고 이제 기도원에 금식하러 올라갑니다. 까마귀를 보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고 오면 뜻밖에 누가 도와주겠다는 기적적인 일들이 나타납니다. 난 그런 방식으로 신학교 다닌 것에 대해서 썩 동의를 안 하는 면이 있습니다만 어째든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던 사람들이 누가 도와주면 도와준 사람은 이 신학생이 안중에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중에 있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그래도 휴학하지 말고 그래도 다니라고 그러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들은 기도도 안 합니다. 탱탱히 놀고 돈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휴학하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소문을 듣고 저 사람을 도와주던 분이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불쌍하니까 도와줍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등록했습니까? 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어. 그리고 도와준 사람의 이름도 거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 어떻게 그렇게 등록했어. 운이 좋았지. 그 사람이 누구를 도와주러왔다가 내가 그 옆에 있었는데 그래서 등록했는가, 해서 못 했다고 하니까 도와준 것인데 이게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이야. 내가 매점에만 가도 아마 그 사람을 못 만날 것인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만큼 틀립니다. 얽매인 영혼으로는 하나님 앞에 배우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어도 그게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침체된 영혼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감사도 못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모든 형편을 구원해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영혼에 자유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어머니와 같이 섬세한 손길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시험에 빠져서 침체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만 원망스럽고 뭐가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침체에 빠진 영혼들에 찾아오는 영적인 현상은 혼란입니다. 그래서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뭘 물어봐도 모른다고 합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혼란 속에 있으니까. 그러다가 이제 그렇게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기도해서 하나님이 그 영혼에 자유를 주시면 모든 것이 질서정연해집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나에게 이 큰 시험이 찾아왔구나. 아!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것을 주셔서 형통하게 하실 때는 사명이 있어서 그런 것을 주시는데 내가 모르고 나만을 위해서 사니까 하나님이 역경을 만나게 하시는구나. 아! 이런 시련도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구나. 아! 정말 그렇게 되는구나,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가야할 바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한때 아버님이 춘천에 사신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방직공장이 많았습니다. 옛날에는 누에를 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번데기 같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볶아서 파는데 지금은 먹지 마십시오. 약품 들이 들어가 있기가 십상이니까 먹지 마십시오. 그런데 옛날에는 먹어도 되나 안 되나 먹을 게 하도 없으니까 그것이고 저는 좀 낫습니다만 저의 동생들은 공장에서 나오는 나방을 갖다가 기름을 쳐서 볶습니다. 나는 안 먹어봤는데 그렇게 맛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번데기가 맛있으면 나방도 번데기에서 나왔으니까 송아지가 맛있으면 소가 맛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듯 맛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메뚜기를 먹나 그것을 먹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누에고치에서 나방이 되어서 날아오는데 이게 이제 몸통이 쑥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날개가 빠져나오면 뒤에 자루같이 꼬치가 달려있습니다. 거기에서 벗고 나와야 하는데 날개는 다 나왔는데 막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뒤에 커다란 껍질이 씌어서 못 나옵니다. 그러면 이 나방이 날개 짓을 하면서 오랜 시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보면서 날개 짓 하는 것이 힘들겠다. 그리고 만약에 그것을 확 벗겨내면 그다음에 꽁무니를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나방이 못 납니다. 그런데 내버려두면 죽겠다고 막 날개 짓을 하는 가운데 하체가 튼튼해져 결국 자력으로 빠져나올 때 하늘을 향해 날수 있는 나방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 눈물을 흘리고 회개할 때 갑자기 하늘을 열고 돈도 주시고 지위도 주시고 형통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고쳐질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영혼에 자유는 주십니다. 그러고도 한동안 시간동안 그 고통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때 그 대신 하나님이 끊임없는 은혜를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막혔을 때는 이 은혜의 공급이 별로 없었는데 끊임없는 은혜의 공급을 통해서 이 속에서 계속해서 생명이 내 속에 움트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의 속사람의 모든 마음 이런 영혼들이 이제 그 고통 속에서 계속해서 단련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욥이 얘기했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단련하십니다.
V. 구원하시는 우리 아버지
그래서 우리를 깨끗하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신 다음에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놓으십니다. 그 구원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가지신 그 아버지 하나님, 그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 모든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건져내십니다. 그 모든 시련과 그 모든 사망의 음침한 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이 일을 행하십니다. 첫째는 지혜로 이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회복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많은 진리들을 발견하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혜가 끊임없는 하나님의 지혜로 연단되어서 어리석음을 십자가에 못 박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빛을 이 극복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성령 충만할 때만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고뇌하고 괴로워할 때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건져주실 때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으로서 여러분들을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자기는 막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었고 시커먼 옷을 입은 군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새카맣게 따라오고 있습니다. 칼을 휘두르고 창을 던지면서 따라오는데 창을 휙 던지면 자기 발 뒤에 쿵! 하고 떨어지기에 달음박질을 했는데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구름이 발아래 걸릴 정도에 높은 벼랑 끝에 서있는데 저 언덕 아래로 새카만 군인들이 몰려오기에 거기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합니까? 이제 나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날개가 하나 내려오기에 날개를 입었더니 주님이 그러시는데 날아라. 이제는 절벽으로 뛰어내리라. 하나님 내가 어떻게 뛰어내릴 수 있습니까? 그래도 뛰어내리라. 그래서 눈을 감고 주여, 하고 뛰어내렸더니 잠시 후에 자신이 그 높은 계곡 위를 활공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력이 풍부한 여러분들이니까 상상해보십시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칼을 주셔서 그들과 싸우게 하신다면 인생이 얼마나 곤고하겠습니까? 어째든 거기서 또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 땅이라는 바닥에서 보면 그 벼랑 끝은 죽음 직전이지만 만약에 날개를 달고 뛰어내린다면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출발점입니다. 그 갈림길에 우리들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선택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VI. 결론과 적용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여러분, 육체로서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영혼으로서는 곤고와 쇠사슬에 매어있는 여러분들 하나님 앞에 포기하고 낙심함으로서 그 벼랑 끝을 생애 절망의 지점으로 삼으시렵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회복함으로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그 활공의 출발점으로 삼으시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두려움과 희망사이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창35:1-2)
I. 본문의 배경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언제나 지극한 평안 가운데 단정하고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고치고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의 순간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족장 가운데 특별히 야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 중 야곱만큼 흥미로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의 족장 가운데 특별히 이삭의 아들이었습니다. 뱃속에서부터 형 에서와 더불어 먼저 나오겠다고 다투었던 사람입니다. 형을 속여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사람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형 몰래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던 교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일을 기회로 하여 형의 보복을 두려움으로 느꼈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밧단 아람으로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거기서 또 외삼촌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야곱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모사꾼이었고 그리고 잔재주로 이 조카를 괴롭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자기에게는 아무 소득도 없이 장가든 것 이외에는 아무 물질적인 소득 없이 종처럼, 머슴처럼 그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아니었더라면 거기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을 것인데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 야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많은 역경 끝에 거부가 되어서 이제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들어오는 길에 이 사람은 왜 그런데 곧바로 부모님이 있는 그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고 들어오는 길목인 이 세겜에 머무르게 됩니다. 아마 잠시 머무르려고 했을 것인데 상당히 긴 세월동안 이 세겜에 정착하게 됩니다. 형, 에서를 만나게 되는 일은 야곱에게 있어서 정말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그 형을 만나는 그 일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고 그러나 그 형을 만나지 않고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였지만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자기 깨어짐의 참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에서의 마음을 물같이 녹이셔서 형제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는 함께 세일산으로 나아가 같이 살자는 제의를 하였지만 야곱은 그 제의를 뿌리치고 세겜쪽으로 오게 됩니다. 아마 이 세겜을 택한 것은 이쪽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야곱에게 너는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고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에 이 세겜 땅 쪽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에서를 만날 때만해도 아이들이 아직 어린 애들이었는데 이 34-5장의 문맥에서는 아이들이 이미 성인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10년 이상의 세월을 이 세겜에서 정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이 야곱을 절망과 두려움의 길에 서게 하심으로서 그를 다시 한 번 만나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베푸십니다. 만약에 이 사람 야곱이 이런 절망과 두려움의 길에 서지 않았더라면 이 세겜의 땅에서 그 이방사람들과 섞여서 속절없는 인생을 허비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인생을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야곱이 당하게 되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의 초청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II. 절망과 두려움의 길에서
그러면 이 사람이 세겜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을까요?
A. 디나의 강간 사건
그게 바로 디나의 강간사건이었습니다. 이 디나의 강간사건은 야곱에게 있어서 가슴을 찢는 통절한 아픔을 가져다준 사건이었습니다. 레아에게서 난 딸이 바로 이 디나였습니다. 시커먼 털투성이 아들놈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이 디나가 꽃다운 모습으로 항상 이 야곱 곁에 있었을 것이니 야곱은 비록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이 디나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늘 마음에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엊그제도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우리 결혼식 하는 것을 보고 그랬습니다. 마음이 짠하다고 그래서 뭐가 짠 한가 그랬더니 자기 딸이 지금 고 3인데 이 결혼식 하는 광경을 보니까 마음이 짠하다고 합니다. 왜 몇 년 있으면 떠나보내야 하는데 벌써 마음이 아픈 모양입니다. 그게 애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야곱에게 있어서 이 디나가 얼마나 달콤하고 아름다운 선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가 그 집안의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외출을 했다가 그만 강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통절한 마음이야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언약백성의 딸이 그 지방에 있는 이방사람에게 그것도 강간을 당했으니 그 통절한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정에 이런 고통스러운 일을 주실까? 그러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성도의 마땅한 바인데 이 야곱의 영적인 침체는 그런 정도로까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침체에 아닌 더 깊은 침체였습니다.
이 불행한 일을 당하고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보다는 아들들이 목축을 하러 멀리 떠났기 때문에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스스로 절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더 큰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 아이를 강간한 그 추장 세겜과 그 아비 하몰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 일찍이 제안하기를 이와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 딸을 우리에게 달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 한 가족처럼 이 땅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때에 이 디나의 오라비인 시몬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서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생을 주겠으니 할례를 받아라.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니 할례 받지 않은 족속과는 청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신앙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언약의 표인데 아무 신앙도 없고 그 딸아이에게 장가가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해서 거룩한 할례를 그들에게 받게 한 것은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땅에 있는 백성들이 추장과 함께 모두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몸에 신열이 나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그 때에 이 시몬과 레위가 달려가서 그 남자들을 모두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녀자들과 아이들까지 심지어 제물까지 노략질하고 그들을 노예로 끌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사려깊이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야곱은 대대로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B. 약속의 땅을 생각함
그러니까 지금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이 주시기는 했지만 아직은 이 땅이 그들이 차지하고 살 땅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에 비해서 세겜 사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힘이 없지만 이 야곱의 아들들의 꾐에 넘어가 살육을 당했지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같은 동족인 가나안 족속들에게 알려지면 이들이 질풍과 같이 달려와서 보복을 당할 것인데 그때 공격은 이 야곱의 집안에 모든 식구들이 힘을 합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야곱의 마음속에는 디나가 강간당했어도 느끼지 못한 큰 공포와 절망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야곱이 자기 아들들을 책망하며 너희가 어찌 이런 일을 하였는가. 이제 우리의 이 일을 통해서 우리의 냄새가 그 가나안 원주민에게까지 모두 나게 되었고 이제 그들이 나를 공격할 것인데 나와 내 집이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왜 이런 일을 하였는가? 하고 통탄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하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야단치십니다. 이때 야단을 쳐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하나님이 강도를 높이시게 되는데 오늘 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만행이 바로 이렇게 강도를 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도울 수가 없는 자신의 자원으로도 자신밖에 있는 자원으로도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이 절망과 두려움의 끝에 야곱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큰 절망적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야곱의 마음에 큰 고통과 환난을 경험하게 하시는데 그 이유는 바로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함께 그렇게 사랑하셨던 이 야곱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시고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아직 돌아가지 않고 불순종하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겜의 땅에서 이렇게 살을 에는 것같이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은 세겜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빨리 돌아가야지 되었습니다만 이 사람은 왜 그런지 이 세겜의 땅에서 오랜 세월을 지냈습니다. 좋지 않으면 세겜 땅에서 오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34장의 문맥으로 볼 때 목축을 할 뿐만 아니라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34장에 보면 우리와 함께 살면서 너희는 장사를 하라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그 배경이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 이들은 다른 지방에서 물건을 받아다가 이 세겜 땅에 파는 그런 종류의 교역을 겸하여 하는 목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아마 이들은 대단한 번영과 성공을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반의 집에서는 목축을 통해서 큰 부를 누리고 여기에 와서는 이제 장사를 통해서 큰 이문을 남기면서 이 사람들과 함께 편리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동안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 할 사명과 본분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잠시 번영에 취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런 불신앙의 삶이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번영에 그 마음이 취하여 자신의 언약백성으로서의 본분,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고 사명의 기업이 있는 그 부르심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이것이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서 자신이 왜 이런 처지를 당하게 되었는지를 그렇게 고민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에 잠시 취하여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에게 주셨던 그 사명, 여러분들에게 주셨던 그 기업의 자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아름다운 삶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여러분들을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서게도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III.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두려움과 어지러움이 가득한 이 공포의 상황에서 드디어 한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35장 첫머리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시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꼭 우리가 인생에 벼랑 끝에서만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인생의 위기 속에서만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간증을 인생의 위기와 벼랑 끝에서만 경험을 할까요? 그들이 평탄할 때는 마음이 잠들어있기 때문에 주님이 외치셔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면 인생의 벼랑 끝에서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가 하고 제가 물어볼 때 고개를 가로지었습니다. 왜 오늘도 내 마음이 평안하고 인생의 아무 위기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이 말씀이 내 가슴속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주님이 참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집안이 평안하고 사업이 잘되고 아이들도 속 썩이지 않고 건강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나를 낮추십니다. 그래서 나를 변화시키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가고 의지하게 만드시고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의 세계에 대한 빛과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통해서 보더라도 하나님이 인생의 위기 중에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말귀를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가끔만 알아듣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혼을 주시고 영혼 안에는 지성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지성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그 지성에 하나님께서는 뭔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거나 혹은 우리에게 어떤 다른 신비한 경험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하시는 것은 자기가 엄청나게 신령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하는데 반대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다 자라서 대학교 다니는 아들딸이 있는데 그들에게 행단보도를 똑바로 건너고 그래서 사고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주면 되는데 그것을 자기가 그 대학 다니는 애에게 설명해준답시고 자기가 그 아이 앞에서 건널목을 건너고 차에 치고 넘어지고 하는 흉내를 내면서 설명해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원맨쇼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유치원생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야, 네가 길을 건널 때 정신 안 차리고 길을 건너면 차가 와서 꽈당! 하고 넘어지면 앵앵! 하면서 병원에 실려 간다는 그런 이야기는 유치원 다니는 유치원 이하의 어린애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대학생에게 그렇게 설명하면 그 애는 정신적으로 뭐가 문제가 있는 애입니다. 절대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영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거나 감격 있는 눈초리로 그 사람을 은밀하게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바보입니다. 바보들의 합창입니다. 얼마나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이상이나 꿈으로 놀랍게 말씀하셔도 벌써 지성의 깊이가 있어서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그런 일이 있어도 말을 안 합니다. 거기다 깊이 묻어둡니다. 그것은 보조적인 것입니다. 지성을 깨닫기 위한 보조적인 것입니다. 오늘도 생각합니다. 꿈을 자주 꾸거나 이상한 것을 번뜩이면서 보거나 뭔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수준이 미달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대학에 다니는 아들놈에게 그렇게 원맨쇼를 하면서 설명해야 겨우 건널목 건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을 깨닫는다면 정신지진아지, 그것을 심지어 목회자들도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면서 영적으로 폼을 잡으려고 그러는데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외치도록 12년을 설교해도 그것을 못 알아듣겠습니까? 그것도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에고,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어찌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인간 지성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의 지성을 향하여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에 지성으로 전달되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외치고 수많은 말씀을 주셔도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이르는가에 따라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안 들리고 심지어는 뻔히 봐도 우리의 마음이 다른데 있으면 그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장로님이 해병대 중장으로 사령관을 지내셨는데 출근하시기 위해 차를 기다리시는데 오지 않자 화가 나있는데 앞에 어느 일개 병사가 왔다 갔다 하면서도 자신을 보고 아는 척을 하지 않아 먼저 아는 척을 하자 그 다음에 알아보고 당황하면서 하는 변명이 자기 애인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 조금 늦게 왔는데 애인이 기다리다 갔는지 안 왔는지 그것에 정신이 팔려 못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심지어는 이 꽃도 떡으로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계속 마음으로 생각을 하면 그것들에 의해서 예민해지게 되지만 생각이 거기에 욕망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예민함을 잃어버려서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을 관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대한 그 신령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늘 자신의 귀에 들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주 작은 부분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외치고 고함쳐도 바보같이 그 길로 계속 걸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그 귀에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어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기 때문에 종종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데 여기에서 이제 우리의 환난이라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음을 바꾸어놓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많이 차지하는 것들을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신령한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식과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법이 틀립니다. 신령해서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뭔가 이 사람을 고치고 싶어 하시면 말씀에 은혜를 안 주십니다. 그럼 괴로워합니다. 왜 오늘은 예배에 감격이 없을까? 내가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건조할까? 왜 아무 것도 깨달아지는 마음이 없을까? 심지어는 내가 기도할 때 왜 이렇게 갑갑할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뭘 잘못했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금식하면서 내 모습을 좀 보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막히게 하셔도 그게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왜 원래 안 하니까. 뭐 뚫려봤어야 막히는 것도 알지, 그러고 삽니다. 말씀에 은혜를 안 주십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습니다. 왜 원래 은혜를 받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끄덕이며 졸다가, 온갖 공상을 다하다가 멍하니 돌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을 안 내려주셔도 원래 받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인가 보다. 그러고 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가득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돈을 뺏어가고 세상에서 실패하게 하지 않으면 그 마음의 변화가 안 옵니다. 더 웃기는 이야기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고 매일 결석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가출이나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애를 앉혀놓고 너 그런 식으로 하면 학교 못 다니게 한다. 그러면 이 애는 속으로 아이 좋아라. 그러지, 어차피 이 애는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교를 잘 다닙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행동하면 어느 날 불러서 야, 가정형편도 안 좋아서 너 학비를 대는 것이 너무 힘들다. 너 그렇게 열심히 안 하는데 학교 그만두어라. 그러면 애가 엄마 아빠를 붙들고 매달립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학교는 계속 다니게 해달라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씀을 앗아가면 이 사람이 두려워합니까? 뭘 두려워합니까? 오죽했으면 예배당에 와서 꺼떡꺼떡 거리며 졸고 그렇게 교회에 다니려면 그만두라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내가 열린 교회에 가니까 그만두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자기는 그만두었다고, 신앙이 나쁘면 말귀라도 알아들어야지. 어찌 국어도 못하는지, 그런 것입니다. 겁 안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환난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디나가 강간을 당했어도 조금만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멸망당할 위기에 오니까 세겜에서 이 삶이라는 것이 다 쓸데없는 것이구나. 잠시 번영과 성공이 이렇게 칼이 되어서 나를 찌르는구나. 고통을 느낄 때 이 마음이 변화가 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A. 벧엘로 올라가라
그 들려오는 음성이 첫 번째가 벧엘로 올라가거라. 참고로 이 벧엘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야곱이 부모의 집을 떠나서 이제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때 어딘가에서 아직 가나안을 못 떠났을 때 거기에서 잠이 들게 되는데 그 상황은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고 야곱은 이 에서와 같이 활달한 사람이 아니고 엄마 치마폭에서만 놀던 애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홀로 가게 되니까 그 두려움이라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굶어죽지는 않을까? 내가 맹수를 만나 죽지는 않을까? 라반의 집에서는 나를 반겨줄까? 이런 등등의 말할 수 없는 두려움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두려움 속에서 어느 한 지점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그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왔다고 그랬는데 이것은 사실이 사닥다리가 아니라 ‘쓸라미’라는 단어인데 고속도로와 같은 큰 길입니다. 큰 길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천사가 이렇게 오르내리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생각하면서 일어나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거기에다 기름을 붓고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게 야곱이 일생에서 제일처음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엉겁결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도움을 청합니다.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이 길을 평안히 가게하고 먹을 양식을 주시고 아비의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세 개를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자기도 세 개를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렇게 해주시기만 하면 나는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이 벧엘에다 내가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거기에서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생의 위기 중에 나타났던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했던 그 벧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였던 나타났던 그 하나님, 그것이 바로 벧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벧엘은 이미 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다 잊혔는데 벧엘을 생각해보라. 네가 그때에 나 하나님을 만났지. 네가 얼마나 희망이 없는 절망의 길에 네가 있었는가. 그때 내가 네게 나타나서 약속해주었지. 그리고 너와 동행하겠다고 내가 약속했지. 그리고 너는 나에게 약속했지. 내가 그렇게 너를 약속에 신실하도록 30년이 넘는 가까운 세월동안 너를 지켜왔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에 그 벧엘에서 베풀어주셨던 은총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바로 이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섰을 때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어려움을 만나고 인생의 곤고함 가운데서 어떻게 하든지 삶이 너무나 불편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왜 여러분의 영혼을 그렇게 곤고하게 하시는지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주셨던 이 벧엘의 만남이 있었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인생의 길에 너무나 고달프고 곤고해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감격에 겨워서 하나님께 이런저런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여러분들을 지켜주셔서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베풀어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때 하나님께 한 약속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그 모든 세상을 접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함으로 내가 이 고난을 당하게 되고 환난 가운데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내 마음을 주님께 바치며 주님을 섬기는 그런 보람으로 나의 남은 인생을 살겠습니다. 하나님 찬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을 했던 그 벧엘의 때를 지금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은총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벧엘로 가라고 하신 이유는 세겜 사람과 헤어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파송되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보내신 것도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우리가 언약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해야지만 진정으로 파송 받은 자의 삶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삶은 하나님께 파송 받은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 오늘 야곱처럼 그냥 세겜 지방에서 섞여서 그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야곱이 바로 이렇게 이 세겜에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안 기뻐하셨습니다. 거기는 잠시 머무는 땅이었지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준 그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잘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아첨입니다. 하나님이 순종을 먼저 원하시겠습니까, 제사를 먼저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일하는 것을 먼저 원하시겠습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겜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번영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약속의 땅 사명의 자리를 떠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의 짧은 시간에 번영과 그리고 행복이 결국은 찌르는 칼이 되어서 자신의 심장으로 되돌아옵니다. 웃고 노래하던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던 때가옵니다.
B. 단을 쌓으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 야곱에게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세겜에도 하나님께 예배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이제 에서와의 그 어려운 대면을 성공리에 마치고 하나님의 큰 축복 속에서 가나안 이 세겜에 들어오게 될 때는 마음이 하나님을 만난 은혜의 감격으로 꽉 차있었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 마음의 갈망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일먼저 그 땅에 들어와서 한 일이 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경배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는 이 일이 매우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의 이름은 더더욱 특이하였습니다.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지어있는데 그 단의 이름은 곧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었고 이스라엘은 바로 벧엘에서 하나님이 이 야곱이 이름을 개명해주신 그 이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야곱의 문맥에서 다시 해석하자면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야곱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 들어있는 그 제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사하면 되지 왜 하나님께서 자꾸 벧엘을 향하여 올라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만들어놓은 단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겜에서 예배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벧엘에서 예배하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겜 땅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감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인생이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지난주에도 너무나 몸이 고단하기는 했지만 신학교에서 집회를 하면서 제가 마음에 깊이 회개를 했습니다. 제가 교회 일을 핑계대고 내 연구를 핑계대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집회를 많이 안 나갔고 오는 것마다 제가 거절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너무 많이 거절했더니 요즘은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쪽입니다. 한참 때는 한 30군데 들어오면 한군데 밖에 못 갔습니다. 제가 이번에 마음속에 좀 찔림이 있었습니다. 와서 이렇게 나야 뭐 토할 것 같이 힘듭니다. 나중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립니다. 하루에 세 번씩 설교를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밥 먹고 설교하고 그러니까. 그런데도 아! 이렇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회복이 되는데 오라고 그러는 곳이 그렇게 많은데 내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댔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도 다 하나님을 위해서 댄 핑계였지만 제가 좀 한번 마음을 열고 봉사를 해야지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잘 되려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습니다.
그러면 보면 그렇게 어떤 사람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 뭐 특별설교를 했는가 하면 매일 하는 것 거기에 가서 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그렇게 못 만납니까? 그것도 잘살면서 못 만나면 제가 이해를 합니다. 사는 것은 개떡처럼 살고 진짜 가슴앓이를 하면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살면서도 왜 그렇게 매주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내리는데도 그렇게 못 만납니까? 왜 그런 것 같습니까?그럴 때 설교자가 후져서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안 좋아하십니다. 좀 가슴에 손을 얹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상하다고 좀 생각해보면 안 됩니까? 옛날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참 동의해주기가 어려운 자매였습니다. 예배 시간에 집중도 안 하고 어째든 영적인 상태에서 평가가 별로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 지방에 집회를 갔는데 거기에 와서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교회에서 한 것과 똑같은 것을 했는데 생애적으로 자기가 주님을 만났다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왜 매일 하는 이야기인데 거기서는 안 되고 여기서는 되냐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세겜에서 단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벧엘에서의 단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한번 이것을 여러분들의 영적인 면에서 한번 적용을 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매일 드리는 여러분의 이 예배가 세겜에서의 단입니까? 벧엘에서의 단입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 야곱처럼 이 세겜에서 은근한 세상 사랑과 세겜 지방에서의 성공과 번영에 취한 상태로 의식 없이 나와서 드리는 이 예배라면 여러분들은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벧엘로 올라와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은총의 때를 생각하고 아무 것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나타나신 하나님 한분을 붙들고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거기가 바로 벧엘의 단입니다. 거기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단을 쌓으라는 이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과 대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너는 하나님과 만나라. 하나님과 대면하라.
여러분, 인생의 절망과 난관의 벼랑 끝에 있을 때 한번 여러분들이 즉각적으로 오! 하나님 내가옵니다. 그리고 나오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머리를 굴립니다. 스스로는 머리가 대단하다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불신앙과 불순종속에 살았기 때문에 인생의 위기가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도 하늘 문이 안 열립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있는 자원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그것은 마치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아들을 기다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돌아가서 그 아들이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사태를 더 망가트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이 여러분들을 속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하시면 요단강 건너가리
풍파가 일어나는 것, 세상 줄을 끊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명료한 음성이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서있는 이 야곱에게 큰 우렛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언제나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러나 마음 세상 사랑에 취해있을 때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아라. 이것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주 놀라운 적용의 능력이 이 야곱의 마음 가운데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들을 모았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리더십도 별로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막 대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모든 가족들이 야곱이 굴복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치고받습니다. 아버지인 여러분을 알기를 우습게 알고 어머니인 여러분들을 아주 갖지 않게 생각하는 자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들의 불신앙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러분들의 권위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왜 그런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권위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데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IV. 자신을 준비함
그래서 이 야곱이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명령했습니다. 그 명령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A. 이방 신상을 버림
첫 번째 명령이 너희 중에 이방신상을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방신상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방신상이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그 이방의 신상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한두 개가 아니라 복수로 나옵니다.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원래 이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되어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해설적인 성격을 집어넣은 그런 종류의 자유로운 성경이 있습니다. 아람어로 되어 있는 ‘탈굼’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탈굼 중에 한 번역인 요나단 탈굼(Jonathan Targum)에 의하면 이 부분을 뭐라고 번역했는가 하면 “너희가 세겜 사람들의 신당에서 가져온 그 우상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해설을 우리들이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야곱의 집안 식구들이 자유롭게 이 세겜 사람의 신당에 드나들면서 거기서 팔았는지 선물로 주었는지 모르지만 그 신상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큰 신상부터 시작해서 작은 신상들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었고 심지어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런 우상까지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몸에 지니는 부적처럼 그것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그 이방의 신이 보호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신상이 오늘 야곱의 집안 식구들 속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버리라고 그랬으니까 하나씩 꺼내서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았으면 그랬겠습니까? 그 이방신상을 그런 이유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방신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왜 이 사람들이 이방신상을 지녔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게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문화적인 교류입니다. 이 사람들은 언약의 백성들이지만 장사를 하는 측면에서 보면 이 세겜 사람들은 고객이었고 더욱이 그 땅의 주인이었고 자신들은 나그네였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친선해서 살아야지 이들을 대적하면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문화와 접촉해서 친근하게 지내다보니까 그들의 모든 문화적인 삶 한복판에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 종교가 바로 그 땅에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언약백성에게 주어진 의무를 대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워지게 되었고, 또 하나는 농경사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껏 이들은 유리하면서 저 메소포티미아에서부터 유리하면서 목초지를 따라서 양떼를 치면서 그러면서 가나안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짐승도 치는지는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정착된 농경생활이었습니다. 정착된 농경생활을 한다는 것은 땅이 비옥하다는 것이고 땅이 비옥해서 농경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고대로 보면 번영을 누리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었습니다. 무역이나 산업, 공업이나 이런 것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넓은 땅에서 기름진 곡식을 생산해내는 것, 그것을 팔아서 다른 물건을 사고 건물을 짓고 하는 문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에 보면 모든 문명이 일어났던 곳은 다 강가입니다. 사막에서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왜 기본이 농사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그들이 보기에는 뛰어난 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경사회에 그 번영의 한복판에 그 농경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과연 하나님이 여기서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인가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이 신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지만 이 지방에 있는 신에게도 밉게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런 느슨한 혼합주의적인 신앙이 이런 불신앙요소를 가지고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분명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지 않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는 이 세상에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세속주의라는 우상을 함께 가지고 들어오면 세상을 사는 데는 편리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방신상이라는 것이 성공과 번영을 위한 기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방 신상을 함께 가지고 생활함으로서 그 사람들과의 일체를 이룰 수 있었고 농사와 목축과 무역으로 그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친선관계를 지니고, 그런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구약의 언약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인가 하면 계시의 담지자입니다. 담지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자신이 담아서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담지자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에서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고 어떻게 해야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구속행동을 통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계시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택한 백성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신앙을 이렇게 성장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를 잘 가지고 계속 그 계시를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추가적인 계시를 담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고 말로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어서 구원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언약백성의 사명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깡통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하고 늘 꿈꾼 이야기나 하고 그렇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이상하게 알아듣지도 못하게 이상한 소리나 새벽에 와서 하고 왜 사람들이 그렇습니까? 신앙도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과 자신의 온 지성을 사용해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하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2-3년 다녀도 도대체 교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깡통처럼 다니다가 이 세상에 불행을 만나면 뭘 붙들고 일어서야 하는데 지팡이가 있어야 일어서지 말이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계시의 담지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진리의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꽉 채워서 그 지식이 가르쳐준 지혜대로 살고 사랑을 따라서 이 세상을 섬기는 것, 그 섬김의 과정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의 섬김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 너나 잘하세요. 이런 마음이 든다면 그 복음이 전해지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오늘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통절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얍복 강가에서 통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이 야곱의 마음,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단을 쌓으며 그렇게 온 가족이 감격하며 단을 쌓은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철저하게 타락하고 이방의 신상들까지 끌어들이는 이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결정적인 그런 계기가 있었다면 성경이 빼놓지 않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일어나기는 뭐가 일어났습니까. 그냥 거기서 산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세상을 사랑해야지, 신앙은 버릴 것이야. 그렇게 결단하고 타락하는 신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돌아올 때는 그렇게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갈 때는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입니다. 그냥 은근히 미끄러지듯이 스며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껍데기는 교회에 계속 왔다 갔다 하니까 그 안에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 오면 참으로 그 영혼을 확 찢어서 누가 어디에 병이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고 다 약한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고무신 거꾸로 신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뭐 도움이 되겠습니까? 암 덩어리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을 머리 쓰다듬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예쁜가 하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실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싫어하시고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최소한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그것이 인간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이유는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교제할 수 있는 영혼을 주시고 인격을 주시고 지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사랑하는 우리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사랑함으로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려고 애쓸 때 자기의 모든 꿈들을 포기하고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합치시킵니다. 그러니까 사랑 없이는 순종이 안 됩니다. 순종을 안 하고는 그 사람 속에 일어나는 그 사랑이 참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입증이 안 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리면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가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그렇게 끝없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누구도 이 점에 있어서는 자유롭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늘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세상사랑,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며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세상의 제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없고, 또 아버지를 향한 사랑도 내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뿐만 아니라 내가 많은 행동을 하고 일을 해도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사랑도 못 받고 일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를 쓰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밖에서의 번영과 행복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복은 하나님 자신이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성공과 번영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번영과 행복일 수 없고 그것은 우리의 유업의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행복이 아닙니다. 결국은 그런 번영과 행복은 당장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우리의 영혼을 찌르는 칼이 되어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마음을 충만하게 하소서
내 생명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러면 오늘 왜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없는지 잠깐 말씀을 드리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거기가 마치 인생의 종착역인 것처럼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거기가 종착역이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물질을 주셨으면 그 물질을 쓰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종착역입니까? 아닙니다. 그 물질을 주신 것은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분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기서 머무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번영과 성공이 있을 때만 세상을 사랑하는가 하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있어도 사랑하고 없어도 사랑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없는 것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큰 집을 사랑한다면 여러분 작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항상 욕망이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안 가졌을 때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잃어버릴까봐 돈을 사랑하고 없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사랑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비참하게 산다고 그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가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감화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거기에 꽂혔는데 그 영원과 진리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려면 그 세상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하나님이 뺏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의지로 이 사랑의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습니다. 왜 애들이 위험한 물건을 들고 있을 때 손을 벌리고 뺏으면 애들이 우니까 다른 것을 주면서 호감을 갖게 하면 애가 고민을 합니다. 나쁜 물건을 두개를 들었는데 더 좋은 것을 줍니다. 고민을 하다가 할 수없이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세상 사랑을 버려야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자의 본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 중에 십자가의 감격이 밀려오던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용솟음치던 은혜의 경험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가치 없는 이 몸을 가치 있게 하셨네
그렇게 다 버리고 그리고 이제는 주님밖에는 사랑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옵니다. 이 사랑은 의지의 성격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순종하고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의지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의지적으로 우리들이 사랑을 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따라가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그 사랑을 버릴 때는 동일하게 의지의 결단과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둘 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좋아하는 게 마늘입니다. 저는 하여튼 마늘을 한 두 숟가락씩 먹어야 기분이 좋습니다. 생것은 싫어하고, 그런데 처음에는 근처도 가기 싫은 게 마늘이었습니다. 언제 한번 보도를 보면서 이 마늘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병에 너무 좋습니다. 그때부터 마늘을 억지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역겹고 싫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먹다보니까 마늘을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서 말랑말랑해진 것이 참 좋습니다. 먹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마늘이 막 끌립니다. 그래서 뭘 하든지 나는 마늘을 많이 넣어달라고 늘 주문을 합니다. 냉장고에 마늘 찧어놓은 게 없으면 짜증이 납니다. 왜 마늘도 안 찧어놓는가. 그래서 라면을 끓일 때, 국 끓일 때 김치찌개나 모든 것에 넣어서 마늘을 먹습니다.
보십시오.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그 의지가 사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선한 의지를 발동하려고 애를 쓰면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사랑을 버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먼저 자신이 사랑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방의 신상을 버리는 그런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B. 자신을 정결케 함
두 번째로는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의식적인 불결이나 도덕적 불결, 죄악적인 불결, 이런 것들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제사에 많이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깨끗케 되는 것, 무엇인가 외부의 힘을 신의 도움을 받아서 더럽게 된 것이 정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타헤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동치어 똑같은 의미를 가진 맞먹는 단어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등장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할 때 카탈로이라고 나오는데 그 카탈로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물로 씻어서 깨끗하게 된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영어 단어 가타로시스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씻어 내버리는 것, 카타르라고 하는 단어가 바로 그런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정결케 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 안에 있는 깨끗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으로서 깨끗이 씻겨내어져서 정결하게 된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씻겨내어져 깨끗케 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팔복 중의 최고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그 좋은 산에서 길러온 이름난 생수라고 할지라도 여러분 뜯물을 푼 바가지에다 먹으면서 즐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차라리 그 정도의 물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깨끗한 유리컵에 넣어서 먹지, 그 세계에서 이름난 생수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뜯물을 푼 바가지에다 담아 먹으면서 만족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의 원리상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정에 굴복하고 세상에 헛된 것들에 매달리다보면 그 자체가 우리의 지성을 속박합니다. 그래서 옳게 볼 수 없도록 우리의 눈에 무수한 색안경을 끼게 만들거나 우리의 눈을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두워져서 죄와 반대되는 신령한 것들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신론적인 착시 내지는 말하자면 맹인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지만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우러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청결함이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아무 욕망이 없는 무욕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별 욕심이 없는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큰 부자가 되려는 욕망도 없고 따라서 무슨 다른 사람들의 돈을 사기 치려는 그런 사기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도 없고 그냥 이대로 편안하게 살다가 그냥 일생을 마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청결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이 청결함은 그런 종류의 청결함이 아닙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정결케 된 그런 종류의 청결함입니다. 바로 그런 청결함을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요구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네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결케 되기 위해서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전에는 자신의 불결을 느낀 모든 구약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흘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서 피 없는 제사를 우리가 드릴 수 있도록 구속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믿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찌르고, 예전에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거기서 짐승의 목을 꺾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완고한 마음의 고집을 꺾고 진실하게 통회하고 참회하는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정결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한번 잘못한 것을 일생동안 기억하고 우리를 그 마음속에서 더러운 인간으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참회하고 주님 앞에 자기 깨어짐 속에서 진실한 뉘우침의 회개가 있을 때,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다고 할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도 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언약의 백성들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여러분들을 뭐라고 정죄하고 뭐라고 여러분들을 욕하든지 개의치 마십시오. 모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생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 살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존하시는 하나님, 거룩하고 존귀하신 우리 아버지 앞에서 살기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니 그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이 씻어낸 사람들을 누가 불결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만약 그렇게 불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커다란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오늘도 자신의 모든 불결과 죄를 짊어지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어린양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담그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이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당신의 품에 안아주시고 절망과 두려움에 가득 찬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아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C. 의복을 바꿈
마지막 세 번째는 의복을 갈아입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물론 신학자 크나벨의 지적과 같이 이들이 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 불편한 평상복을 벗어버리고 여행을 위한 간편한 복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옷을 갈아입는 그 의상이 의미가 있습니다. 신상을 버리는 것이 세상 사랑과 단절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이 이 불경건하고 더러운 이 마음에 죄로부터 깨끗케 된 것을 의미했다면 이 의복을 바꾸어 입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불경건한 이방의 습속으로부터 생활 자체를 돌이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경은 이 의복을 입은 사람과 연장선상에서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가 남자 옷을 입거나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아주 가증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옷을 입고 그래서 뭔가 통절하게 비통한 일이 있으면 그들은 그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곧 자기 안에 살을 찢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곧 자신이 그 옷을 찢는 것과 같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통분함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한 참회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계시록에서 말씀하시기를 세마포 옷을 가리켜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오늘 이 야곱에 오랫동안 이방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그 습속 속에서 섞여서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러가려고 결단하고 나니까 자신의 그 일상적이 그 모든 삶이 정말 불결하기 짝이 없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 벗어버린 옷과 함께 그 불경건한 옛 습속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과 함께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가는 그런 실질적인 삶의 결단을 스스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이스 벨리라고 하는 그런 유명한 청교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가운데서 그는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을 묵상하며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하면서 실질적으로 매일매일 삶 속에서 어떻게 경건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살아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인 지침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문장을 그대로 외우지는 못해서 똑같이 인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번 비슷하게 해보면 대강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그대들은 천국을 생각하십시오. 언젠가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마지막 눈을 감고 저 하늘나라에서 눈 뜰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인생에 막을 내리고 하늘나라에서 눈뜰 때가 있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고 하루하루가 새롭게 주어진 날인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눈을 뜬 후에는 기도를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옷을 입을 때는 항상 나의 벌거벗은 이 몸을 성도의 거룩한 행실로 이렇게 옷 입는 하루가 되어야지 하고 묵상하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그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보니까 그 사람이 해질 때까지의 생활하는 모든 것들에 비하면 나는 그냥 매일 먹고 돌아다니는 강아지 같은 삶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일어나면 눈뜨고 또 생각 없이 옷 입고 밥 퍼먹고 세수하고 뛰어나가고 그럴 때가 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만나러가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우리 스스로 만족할 것입니다. 뭐 이만큼 사는데 주일을 지키는데 그래도 내가 집사인데, 헌금도 하는데, 내가 구역장도 하는데, 한 번도 성가대를 빠지지 않았는데, 별의별 이야기를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 앞에 우스운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마음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상들이 우리 온 몸에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의 죄의 경향성이 차있으면 그럼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의 생각, 행동 모든 것에 구체적으로 그 범죄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점점 우리를 벌거벗은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너희 스스로 자랑하는데 그러지 마라, 너희가 옷을 사 입으라. 너희의 부끄러운 수치를 면하라. 그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의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데 교수님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신학교 교수가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깊이 찔렸는데 이제 결심을 했습니다. 한참동안 새벽기도를 못 나갔는데 내일부터는 다시 새벽기도를 다녀야겠습니다. 그래서 12시에 헤어져서 부지런히 차를 몰고 가는 뒷모습을 봤습니다. 그런 삶의 개혁, 뭔가 깨달은 것이 있으면 용단을 내리고 그리고 바꾸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를 구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 물에 물탄 듯 그렇습니까? 뭔가 어느 한순간에 한번 도끼를 번쩍 집어 들고 발등을 찍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매일 그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한 번씩 그래야지만 지리멸렬하게 꼬이는 인생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났던 그 감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서 여러분들이 모두 결단이라는 요소를 뺄 수 없습니다. 물론 결단을 남발하면서 하나님을 못 만날 때 많습니다. 그것은 육욕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혀서 결단을 내리고 그 결단을 꺾지 않으려는 열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순종하려고 하면서 나는 순종할 힘이 없으니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매달리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의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은 그 지옥과 같은 생활에서 여러분이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결단 없이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의 결단만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결단을 축복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 순간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제 이 시리즈가 거의 끝나갑니다. 그런데 뭐 한번 찌르면 눈을 게슴츠레 떴다가 다시 또 월요일이 되면 다시 잠들고 이런 시절을 계속해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번쯤 용기를 내야지, 결단을 해야지 됩니다. 내가 정말 이렇게 살면서 일생을 허비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해야 합니다. 거기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야곱은 자기의 기지와 자기의 재능만을 의지해서 인생의 이 벼랑 끝에서 모면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은 가중되었고 이제는 스스로 포기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낮아졌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야지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세상 사랑에 의해서 이미 버린 땅 가나안 약속의 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용단을 내려서 주님을 만나러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큰 부흥을 경험하고 거기서 정말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그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가 인생의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주심으로 희망과 그리고 기쁨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갈림길에서 그는 벼랑 끝에 서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그 고난 때문에 생애적인 부흥을 맛보는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계획을 가지고 오늘도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 앞에 이 갈림길에서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환란과 능욕의 날에는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야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을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8:1-5)
I. 본문의 배경
몇 해 전 어떤 사람이 카드빚에 몰려서 자살한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 사람이 진 카드빚이 60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돈이 많고 여유가 있을 때는 큰 빚도 걱정이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을 때는 적은 빚도 인생의 절망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젊고 자원이 많을 때는 큰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이 우리를 절망으로 데려가지 못하지만 나이가 많고 자원들이 거의 사라졌을 때는 인생의 작은 시련도 견디기가 힘든 법입니다.
II.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무엘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한 지도자의 가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의 좋은 신앙이 자녀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무엘은 정말 구약에서 반드시 연구하고 지나가야 할 중요한 인물입니다. 저는 이 사무엘이 구약의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두개의 큰 산으로서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은 여러 각도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자녀의 회심에 문제, 가정의 문제와 관련지어볼 때 오늘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인물입니다. 사무엘은 정말 불세출의 뛰어난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남다른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로, 이 사무엘은 모든 직임(職任)으로서의 선지자의 시작이 되는 사람입니다. 모든 선지자의 비조는 모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선지자인 동시에 모세 시대 때부터 선지자 직이 본격적으로 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제 이 선지자들이 각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세워지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이 사무엘 시대에 와서 이제 직인 선지자로서 자리를 매김 하게 됩니다 선지학교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수종들 사람들을 길러내는데 그 일에 있어서 제일 처음 그 일에 선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세 솥발과 같은 기구들이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의 신정통치의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의 시대부터 시작해서 왕정시대로 들어가는 역사의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을 왕으로 세웠고 그리고 그 모든 변화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은 역사 속에 매우 큰 인물이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한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었습니다.
둘째로, 이 선지자는 탁월하게 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아주 뛰어난 영적인 인물이었으니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이었고 뛰어나지 못한 스승 엘리보다는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어머니 한나로부터 신령한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승 엘리처럼 나이가 들면서 그 신령했던 영성이 쇠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명료하게 빛난 사람이었으며 이런 그의 신령한 신앙의 특징은 미스바의 집회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그때를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갈 때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국가적인 위기를 민족적 회개의 기회로 삼음으로 영적인 쇄신을 가져온 지도자였습니다. 결국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신들과 아스다롯 신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 국가적인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선포함으로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민족적인 회개의 운동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 유명한 에벤에셀의 축복을 불러왔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셋째로, 이 사람은 탁월한 권위를 가지고 사역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사시대를 끝내고 왕정을 도입하였지만 그러나 이 사람의 이상은 모세가 세운 신정통치를 왕정의 구도 속에서 실현하는 신정 왕정통치를 꿈꾼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이상을 왕이 거스르려고 할 때는 거침없이 직언과 충언을 서슴지 아니함으로 권력에 굽히지 않는 그런 분명함을 가지고 자기의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모쪼록 이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날에만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도 그는 온 백성에게 흔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하리라” 살아있는 동안에 온 마음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고 기도하였던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이만한 뛰어난 인물이 흔치 않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둔 자식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III. 아비를 따르지 않은 아들들
그런데도 오늘 성경은 그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인 보도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한 아들들이라고 우리에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에게는 두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에 대해서 성경은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일을 위하여 제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 두 사람의 이름은 요엘과 아비야였습니다. 요엘은 문자 그대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고 아비야는 “나의 아버지는 여호와시다. 혹은 여호와가 나의 아버지시라.” 라는 그런 의미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두 아들을 낳기 전에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이름일 수도 있고 아이를 낳고 나서 혹은 낳기 전에 아버지인 사무엘이 지은 이름일수도 있습니다. 아마 후자일 것입니다.
A. 요엘과 아비야
그러면 첫아들을 낳아서 요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때 이 요엘이라는 이름은 당시 유일신 신앙이 쇠태하고 있었을 때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유일신 신앙의 표명이고 차자인 아비야의 이름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자원에 근거이시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가족관계를 표명하는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사무엘의 소원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런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의 두 아들이 그렇게 귀하게 쓰임을 받기를 원하는 신앙의 고백이 그 속에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산 아들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성경의 인물을 따다가 붙여주는 부모들을 가끔 만나고 또 여러분들 중에도 아마 그런 성경의 인물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있는 지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주 귀하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또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기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길러야겠다는 결심을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한번 교도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깜짝 놀란 것이 그 교도소의 죄수들 가운데 성경의 인물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도 있고, 마리아도 있고, 요한도 있고 무슨 사연들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아비를 따르지 않음
성경에 오늘 아비를 따르지 아니한 이 사무엘의 아들들이 신앙과 행실에 대해서 세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비의 본을 따르지 아니한 자식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모로서 경건한 신앙의 모본을 보이면 자식들이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부모의 경건한 신앙의 행실의 모본은 자녀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서 누누이 여러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의 경건한 신앙의 본을 통해 참 신자가 되는 길이 무엇이고 또 참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 사실 이것이 없이는 자식들이 참으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들이 일단 회심했을 때 그런 것입니다. 물론 회심하지 않은 자녀라도 부모의 아름다운 신앙의 행실을 보고 모본을 접하며 자기가 회심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될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자신의 신앙 없음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단지 우리가 경건하게 모본을 보이는 삶을 살면 이 아이들이 저절로 회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기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무엘의 자식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만큼 존경스러운 아버지, 언행이 일치된 아버지,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한꺼번에 받는 무엇에도 굽히지 않는 지조 있는 아버지를 둔 자식들이 몇이나 있었겠습니까? 사무엘의 일생 전체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본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식들은 그 아름다운 아버지의 신앙의 모본을 통해서 단 하나도 아버지를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신앙을 이 아름다운 본이 수없이 그들에게 보였지만 그들은 이 신앙의 본을 보면서 거룩한 감화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운 신앙의 본에 관해서는 돌멩이와 같고 죄와 이 세상에서의 유혹에 관해서는 마치 무른 땅과 같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자식들은 그 정반대입니다. 사무엘의 자식들이 회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아버지의 신앙의 본을 날마다 접하면서도 아무 것도 닮지 못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잠재되어있는 그 반감과 그리고 적대감은 반드시 삶과 행동으로 표출되게끔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단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도 자식들이 회심하지 아니하면 그 본이 자식들이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진실로 회심했다면 여러분들이 많은 잘못을 했다가도 하나님 앞에 돌이킨다면 잘못했던 많은 날들은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앙으로 돌이켰던 날들을 더 많이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자녀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신앙의 모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잠시 미끄러진 날들이 가슴속에 칼로 새긴 것처럼 아로새겨져서 그들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본, 그 이상의 무엇이 그들 자신 속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이성을 초월하고 인간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어떤 초자연적인 역사가 그들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을 대항하며 살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반감을 갖던 것들을 꺾고 회심하는 역사가 필요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어떤 변화가 그들의 영혼 속에 먼저 일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항상 아름다운 신앙의 모본을 보이며 예쁜 신앙생활을 해서 영향을 끼쳐야겠지만 여러분들이 조금 신앙적인 삶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그 아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자식들은 최고의 존경할만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회심하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그런 신앙의 아름다운 본은 회심한 다른 집안의 자식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정작 그 아버지의 아들들에게는 낯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뜨겁게 사랑한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는데 자식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신앙의 아름다운 모본도 자녀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할 때 가슴에 새겨야 할 사실입니다.
2. 재물을 사랑함
둘째로는 그들이 제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 이익을 위하여 제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하고 말입니다. 아버지 사무엘은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도 나무랄게 없는 사람이었지만 특별히 이 제물의 이익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실패한 스승 엘리처럼 나이가든 후에 영안이 흐려져 부패한 일도 없었고, 전쟁터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평안할 때 육욕에 흘러 범죄 하게 된 다윗의 실패도 이 사람은 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와 아사처럼 두려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평안할 때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어리석은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겸손했지만 기름 부은 받은 후에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울과 실패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도 청청한 유일신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비탈길에서유일신 신앙을 고고하게 외치던 여호수아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늙었을 때도 그는 노역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깨끗한 신앙을 지닌 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너희에게 출입하였거니와 너희는 오늘날 살아계신 여호와 기름 부은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답하라. 내가 너희에게서 네 소를 취하였느냐. 너희에게서 나귀를 취하였느냐. 내가 너희 중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가 너희 중 누구에게 눈을 어둡게 하는 뇌물을 받았더냐.” 그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서 소도 취하지 아니하였고 나귀도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압제하지 아니하였으며 우리 중 뇌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 악한 백성들조차도 이 점에 있어서 이 사무엘에 깨끗함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에게만 영향을 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우리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접하는 세계는 넓어지고 그 세계가 넓어질수록 우리와 접촉하는 시간과 공간들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오히려 경건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일수록 이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으로부터 차단되어있기 때문에 일단 그 봇물이 터지고 그 유혹들이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건으로 발생하기 시작하면 억제되었던 모든 욕망, 자극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던 욕망들은 급속히 팽창하게 되고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불경건한 집안의 아들들이 받는 영향보다 더 빠르게 큰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사무엘의 아들들에게 제물을 사랑하라고 사무엘이 가르쳐준 적이 없습니다. 진실무망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섬기는 그런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누구에게 배웠는지 백성들로부터 이익을 챙기고 제물을 받는 그런 타락한 길을 걸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욕망이 스스로 선생이 되어서 이 악한 길을 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그 믿음을 가리킵니다. 회심은 따라서 모든 회심하는 사람들에게 이 변천하는 세상의 많은 사물의 표상 너머에 있는 불변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관상하게 만들고 거기로부터 온 영원에 빛을 통해서 이 세상의 사물들의 의미를 가늠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영혼이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회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보이는 사물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눈뜨도록 만들어줍니다. 영원은 곧 사랑이고 사랑은 곧 진리이며 그 진리는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바로 궁극적인 선이시며 진리이시며 아름다움의 본체이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영원으로부터 오는 그 빛을 우리들이 받을 때 그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이 사물들의 존재의 질서가 어떠하며 우리가 이것을 어떤 것을 사랑하고 어떤 것을 미워해야 될지 판단하게 만들고 어떤 아름다운 것이 일시적인 것이고 어떤 아름다운 것이 영원한 것이며 어떤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주는 욕구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헤아리게 만들어줍니다. 회심하지 못하면 이런 영원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 영혼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성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고등한 욕망보다는 우리의 육체와 육욕이 원하는 열등한 욕망을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함으로 우리들이 그릇된 길을 선택하고 욕정에 굴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제물 사랑도 바로 그런 욕정의 결과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직하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그러하듯 여러분들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심했습니까? 아직 나이가 어려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경건은 부족하고 또 회심해서 은혜의 상태에 있지 않고 유혹에 져서 잠시 미끄러졌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다루어진 사람입니까? 날마다 연약함 때문에, 악한 욕망 때문에 불순종의 길을 택하지만 또한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가 우리에게 전달될 때 그 영원한 사물들을 통해 그 영원 자체를 지각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다시 자기의 육욕적인 자기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합치시키는 일들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안에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잠시는 세상을 사랑하고 육욕에 빠졌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육욕의 즐거움보다도 더 안타깝고 가슴 아픈 그런 영혼의 고통에 대해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에 대한 사모함이 그의 마음이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로 채워질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영적기갈을 느끼게 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이런 영혼에 대한 감각을 못 가진 회심하지 않은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제물을 사랑하고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대신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그 자리에서 육욕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3. 판결을 굽게 함
셋째로는 이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이런 범죄의 원인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이웃의 소유를 탐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 진리를 경험하지 않고는 그 진리를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이 아들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가공할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사사의 중요한 임무는 재판을 하는 것이고 이들에게 있어서 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지를 담은 그분의 율법이 바로 그 모든 판결의 기준이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인 이 사사들이 백성들과의 다툼이 있을 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고 판결하여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신앙의 도를 심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오히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므로 무신론의 신앙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누룩처럼 번지게 하였으니 이 가공할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연약함과 실수로 한번 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런 범죄 속에 살았으니 그들이 회심하지 않은 증거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십 부장과 백부장 등등을 뽑을 때 진실무망하고 불의한 일을 탐하지 아니한 자들이어야만 자격이 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일군으로서 가장 관건이 되는 자격, 이 세상의 불의한 일을 탐하지 않는 순결한 마음을 가져야하는 마음이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니 회심하지 않은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세상 사랑이 그 기준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회심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있는 중요한 작용은 두려움과 이끌림(timor et fascinatio)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옷깃을 여미는 두려움,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이 싫지 않고 좋은 사랑의 이끌림, 이 두 가지가 회심한 자녀의 아주 중요한 정신적인 특성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앞을 떠나기는 싫은 무엇인가 더 깊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싶은 그 사랑의 이끌림, 이것이 회심한 자녀들의 정신적인 특성중의 하나입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두려움과 이끌림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오직 세상에만 이끌렸고 육신의 정욕에 눈이 멀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모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타락의 길로 이들은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B. 늙었을 때에
이런 일들이 노년의 사무엘의 생애에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모든 백성들에게 신망과 존경을 받으며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았던 탁월한 하나님의 순결한 사람, 이 사람의 인생의 황혼에 깃드는 위기는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식들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아직 자녀를 두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합니다만 자식을 둔 부모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가진 우리에게 누가 와서 당신 어떻게 사람이 그 모양이야. 이렇게 욕하는 것이 더 상처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새끼들은 어떻게 그 모양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상처가 되겠습니까? 당신 자식들 왜 애들이 그 모양이야. 이는 자식을 가진 부모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답입니다.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과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바로 그런 수치를 당하며 장로들에게 둘러싸여서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과 같지 아니하여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우리가 이들의 통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왕을 세우게 해주십시오. 라고 항의하는 그 장로들의 항의를 들으며 아마 이 아버지 사무엘은 똥바가지를 얼굴에 뒤집어쓴 것 같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오늘 성경에 보니까 사무엘이 늙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늙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아직 어리고 우리가 젊고 권력이 있고 자원이 있을 때는 자식들이 회심하지 못했어도 회심하지 못한 그 증거를 심각하게 밖으로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우선 나이가 어리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젊었을 때는 요엘과 아비야도 어렸습니다. 그 어린애들이 무슨 그런 큰 타락을 하겠습니까? 초등학교 아이가 회심하지 않고 타락했다고 칩시다. 뭐 하겠습니까? 어른들은 나쁜 짓 많이 하다가 회개하고 회심해서 신자가 됩니다. 이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면 옛날에 그 나쁜 짓 다 합니다. 다시 술 퍼먹고, 바람피우고, 사기치고, 가정폭력하고 할 짓 다 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애가 회심을 안 해서 타락했다. 그런다고 얼마나 타락하겠습니까? 기껏 타락해봐야 공부하지 않고 게임이나 하는 것, 동네 애와 싸우는 것, 엄마 말 안 듣는 것, 그 정도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면서 이런 것들이 조금씩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도 부모가 젊고 자원이 있을 때는 자녀들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회초리로 몇 번 심각하게 때리면 말 듣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용돈을 안 준다고 협박하면 굴복합니다. 또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닌다고 할지라도 부모가 돈이 많고 유산이 있는데 교회 안 나온다고 그러면 너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너 장가갈 때 집 하나도 없다.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면 다시 교회에 나옵니다. 또 신앙이 없는 자매를 만나서 둘이 어떻게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몇 백억이 가는 재산가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뭐 어쩌고 그러면 잔소리하지 마라. 나는 죽기 전에 유산을 분배하지 유산분배 없다. 잘해. 그러면 추석이고 명절 때 자식들이 서로 고기라도 사서 옵니다. 왜 아버지가 늙었어도 몇 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에게 돌아갈지 모르니까 아버지에게 가서 김밥을 쌉니다. 아부합니다. 어느 정도 통제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 늙어 부모가 늙고 병들어 결국은 자녀들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고 재산도 상실하거나 자식들의 손으로 넘어가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은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부모의 권력과 자원에 힘에 못 이겨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강제로 길들여지는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부모의 힘과 권력, 그리고 자원에 눌려서 자기를 맘대로 표출할 수 없을 때는 회심하지 못한 자의 발톱은 마음에 감춥니다. 그러나 이제 부모의 통제가 사라지고 권력도 없어졌을 때 오히려 자신에게 자원이 더 많을 때 담대하게 자신이 회심하지 아니한 증거를 담대하게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아들들처럼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잘 살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겼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선한 싸움을 싸웠으니 이제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리라. 그렇게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는 나루터에 서서 흰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하늘나라에 대한 전망으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도 자식들은 그런 영원에 대한 사모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라고 아름다운 유언을 남겨도 회심하지 않은 여러분들의 자녀에게는 그것은 이행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회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IV. 은혜로 다스려지게 하라
결국 우리들이 여기에서 도달하는 결론은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나니까 갑자기 금시발복하고 그리고 환상적인 행복의 길이 열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고난도 왔습니다. 쓰라리고 아픈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똑같이 그런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그 세상이 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루어질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도 고난이 있을 터인데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고난은 상처를 주겠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으면 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을 많이 당해도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그 풍랑을 인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괴로움과 많은 시련, 살을 에는 것 같은 쓰라린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죽음의 이별, 신뢰했던 사람들의 배신, 그리고 경제적인 고통에서 오는 그 말할 수 없는 괴로움, 이 모든 것들이 고난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부당한 세상 사랑을 끊고 질기고 질긴 내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욕망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우리의 기도가 되었고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우리의 노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은혜 안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이 물질에 큰 복을 주실 때 타락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있다면 그 많은 축복을 통해서 사명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좀 상처 있는 가정에 태어났어도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자식들이라면 우리는 믿습니다.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상처의 경험 속에서 만나고 오히려 상처받지 않았더라면 용서할 수 없었을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길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치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박애의 사랑을 보이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고난이 와도 그 고난 속에서 자기를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성령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죽음이 오늘 예수를 위해 자기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심령 속에 재현되어서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는 죽고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주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그분을 사랑하며 그리고 그분을 위하며 그분과 동행하며 삶의 모든 희망을 잠시 머물 세상에 두지 않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그 나라에 두게끔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간간히 주님을 향한 우리의 노래가 끊어져도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 속에 살 그날을 꿈꾸며 하나님 앞에 올곧은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A. 은혜로 다스려질 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스려질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진리에 산 증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는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살기 싫었습니다. 주님을 안 다음에도 역시 그런 일을 겪는다는 것은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전에는 그런 일들이 그냥 나쁘고 아픈 일로만 끝났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본래적으로 나의 선한 것은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의 약한 것, 그래서 내 인생에서 나도 떼어버리고 싶었던 그 고통스러운 순간들,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부득불 내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약한데서 주님의 강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상처 많은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그것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아직 충분히 주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아픈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B. 은혜로 다스리는 길
우리의 자녀들의 일생을 우리들이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품안에 있고, 좀 크면 안방에서 놀고, 좀 크면 마당에서 놀고, 좀 크면 멀리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항해합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지만 우리가 직접 그들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자식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그 은혜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식들이 될까요? 첫째는 회심해야 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또 회심했다면 그들이 은혜 안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이 은혜로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의 회심에 대해서 외치면 어떤 부모들은 마음에 부채의식이 좀 적습니다. 우리의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지난 수련회 때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우리 애는 금요기도회 때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회심한 사람이 은혜 안에 살지 못하면 회심하지 않아서 은혜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은혜에서 소외되면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떻게 해서 얻은 구원입니까? 주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더러운 세상에 내려오시는 희생을 감내하셨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지만 교만과 우리의 많은 죄악들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서 수없이 주님이 목 놓아 불러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우리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살 수 없어서 그렇게 아파하던 날에 주님의 음성이 우리 귀에 기적처럼 들렸고 그래서 우리는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값도 공로도 없이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욕망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던 날들이 지난날들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전에는 몰라서 그렇게 살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살도록 전에는 알았어도 그렇게 행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살수 없었지만 이제는 성령 안에서 그런 능력을 공급해주심으로서 살게 하셨으니 이것이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사실 회심하기 전까지 우리는 살았으나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모르고 그 아버지를 미워하며 산 인생이 어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더 잘 주님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회심한 그날부터 구도의 길을 걸어온 이 길에 이르기까지 흘렸던 그 수많은 회개의 눈물, 우리의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던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 때로는 우리의 여린 속살을 날카롭게 도려내던 그 진리의 힘들, 남아있는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못했던 영광 때문에 통곡하던 그 많은 날들에 울음소리와 흐느낌, 그 신음소리가 결국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도 회심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회심한 그 후에는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지식과 총명과 사랑 안에서 자라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면 인생의 모든 기대는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게 고백하며 성화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녀들에게 회심에 강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회심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성화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성화의 길을 걷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참 부모가 되는 비결, 참 아내, 참 남편이 되는 비결, 자식이 되는 비결, 이 모든 것들이 참 신자가 되는 비결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아까 예배드리려고 들어오는데도 어느 자매가 자기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회심을 했는데 그 회심이 너무나 총체적인 회심이라고 그래서 내가 새벽기도도 나오고 담임목사님 설교를 들어야겠다고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그러면서 요즘에 언니 오빠들이 이번 주일날 집회하는데 자기 가면 안 되겠는가 하고, 그게 회심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가 계속 생겨나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러면 그 아이들도 영혼이기 때문에 온전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더 많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싶고,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여러분들과 똑같은 일들이 그자녀의 영혼 안에서,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아! 목사님, 한 자식의 부모가 된다는 것이 장난 아니네요. 부담스럽네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기 때문에 아직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너무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길을 걸어왔는데 그러면서 완전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도 않지만 끊임없이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매순간 자기 깨어짐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의 손을 붙들며,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은 하지만 한 번도 그 길을 나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래서 더 온전해지기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붙들고, 그러면서 걸어갑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V. 결론과 적용: 네 자녀를 버리지 말라
우리의 자녀들이 회심하였다면 회심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끊임없이 돌보고 기도하고 마치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나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그런 섬김을 받지 못했지만 우리의 자식들은 나 같은 처지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난 특권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그래서 그 아이의 일생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이 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 가정을 이루어가면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 씨들이 퍼지고 퍼져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 회심하지 않았다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심하지 않았어도 낙심하지 말고 반드시 이렇게 기도하면 그 회심의 때가 앞당겨질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하나님을 가르쳐주기 싫어서 아이가 주님을 못 만나지만 나이가 들면 아이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사랑해야 합니다. 오래 참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처럼 돌이키지 않은 죄인을 위해서 무제한으로 인내하시며 못 박히신 것처럼 오래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급함을 늦추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 알의 밀알처럼 그 아이의 참된 행복을 위해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가야지, 늦게 일어날 때마다 속으로 너 가서 한번 고생 좀 해봐라. 임마. 훈련소에 집어넣고 돌아왔는데 마음이 참 아렸습니다. 부모의 마음입니다. 헤어지면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그랬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힘들 때마다 주님을 이름을 부르거라. 우리의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 그리고 우리가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것은 세상의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의 자녀의 회심은 건너지 않으면 안 되는 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서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38:1-6)
I. 본문의 배경
히스기야 임금은 구약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임금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에서 길이 빛나는 아주 아름다운 신앙의 본을 보였던 몇 안 되는 임금 중에 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29년간 나라를 다스린 이 사람은 아버지 아하스 왕으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았을 때는 남 왕국 유다가 매우 연약한 상태에 있었고 아버지 아하스는 아주 하나님 앞에 패역한 왕이었습니다. 그 패역한 아버지에게서 이렇게 별빛과 같은 신앙을 가진 아름다운 임금이 나온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왕국을 통치하는 뛰어난 통치력과 함께 아주 아름다운 신앙을 겸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평생 다윗의 길로 행하였으며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했던 자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구약성경 특별히 사울 왕 이래로 왕들의 역사에 있어서 이 사람은 다윗 왕 다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고 또 하나님께 그렇게 사랑을 받았던 아주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믿음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아버지가 문을 닫았던 예루살렘의 성전의 문을 다시 열었고 화목제를 드리며 이제 온 유다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국제적인 감각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월절 잔치를 성대하게 열어놓고 이제 북쪽에 있는 동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어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이 약속의 성 예루살렘에서 함께 유월절을 지키자고 제안했습니다. 많은 동포들이 내려오게 되었고 함께 유월절을 지키며 먹고 마셨으니 그 시간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남쪽에서 일어난 신앙의 부흥의 영향을 북녘 땅에까지 실어 나른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부왕이 제거하지 않은 산당들을 철저히 제거해버렸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에까지 모세 시대 때 있었던 그 놋 뱀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불 뱀에 물렸을 때 모세가 장대 끝에 매달아 높이 들었던 그 구리 뱀은 치료의 상징이었고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히스기야 왕은 그것을 다 때려 부수면서 이 따위 것은 놋 조각에 불과하니 이런 것을 섬기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서 깊은 놋 뱀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유일신 신앙에 그 마음을 더럽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일들이 구약성경에 몇 명이나 나오겠습니까?
II. 중년에 찾아온 위기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 히스기야에게도 예기치 않은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고 이것은 바로 중년에 찾아온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왔는데 끔찍한 선고를 내리고 돌아갔습니다. 너는 이제 반드시 죽을 것이니 너의 집에 유언을 남기라. 너는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선고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람은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앗수르라고 하는 북방에 있는 나라가 이 유다 나라를 계속 침공해서 괴롭혔지만 하나님이 막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보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것을 막아주셔서 그래서 북방에서 내려온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손도 대지 않았는데 모두 시체로 변하고 예루살렘과 유다 나라를 건져주셨습니다. 선정을 베풀며 백성들에게는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고 하나님과도 화목한 관계를 누렸기 때문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던 평화로운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이렇게 커다란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는 선고였습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 이 히스기야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죽음이 이제 히스기야에게 선고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는 말하기를 중년에 나의 남은 날들을 빼앗기고 내가 음부에 내려간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인생에 시기에 있어서 죽음의 깊은 두려움을 느끼는 때가 두 번 찾아오는데 한번은 청소년의 때고, 한번은 중년의 때입니다. 저는 14-5세가 되던 해에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느끼고 두려워 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계기로 주님을 믿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 공포의 순간들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년의 때에 죽음에 대해서 느끼는 위협이 청소년 때 그것보다 훨씬 큽니다. 청소년 때는 우주에 대해서 눈뜨고 인간의 미천함에 대해서 눈뜨면서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되지만 중년의 때에는 실제로 자기의 육체 속에 우주적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됩니다.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서 육체가 점점 더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육체에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 때에 실제로 죽음을 느끼게 되는 그 공포는 훨씬 더 강하게 됩니다.
중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정신병적 현상과 우울증 같은 공포와 맞물려서 중년을 매우 공교하게하고 영혼을 위험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시기 중에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이 타락하지 않을 때가 없지만 한순간에 마음에 모두 흔들려서 타락의 길을 가기 쉬운 때도 바로 중년입니다. 도덕적인 감각이 희미해지기 쉬운 때도 바로 중년인데 심리적으로 보면 이런 죽음의 공포를 쾌락이나 정욕으로 잊어버리려고 하는 또 다른 심리에서 이런 정신작용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째든 이 히스기야는 그런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보면서 의아해합니다. 어떻게 신실하신 하나님이 죽는다고 말씀하셨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너는 안 죽고 다시 산다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넓은 하나님의 계획과 오묘한 섭리를 다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뜻은 이 히스기야를 일찍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통해서 히스기야의 마음을 중년에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를 벼랑에 세우심으로 새롭게 쇄신시키시는 기회로 삼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벼랑 끝에 이 사람을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그의 영혼과 마음을 쇄신시키는 기회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런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하십시오. 인생의 이런 위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연단하는 기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히스기야가 이런 인생의 벼랑 끝에 서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아름다운 영혼, 아름다운 마음으로 반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세우도록 주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그 인생의 위기가 그 사람을 부패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해 강퍅하게 만드는 그런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이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런 인생의 깊은 위기, 가슴 아픈 고난이 오히려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더 덕성스러운 사람으로 몸과 영혼을 마음을 쇄신시키는 기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선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는 그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A. 하나님만 바람
제일먼저 이런 인생의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라고 말입니다. 그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질병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이 질병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뒤에 문맥으로 미루어볼 때 무슨 치명적인 생명의 위협이 되는 불치의 종양 같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위기를 만났을 때 아마 이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자기를 징계하시고 죽이시려고 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병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의원의 도움도 받았을 것이고 약도 먹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그 병이 하나님이 자기의 생명을 거두시기 위해서 주신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의원과 치료의 방법을 물리치고 면벽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벽을 향하여 마주앉았다는 이야기는 이제 이 인생의 위기 앞에서 사람의 위로나 도움, 인간적인 방법이나 해결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죽음이 선고된 그 삶에 상황은 그야말로 절벽과 같은 상황이었으니 넘어갈 수도 없고, 땅을 파고 지나갈 수도 없고, 스스로 몸을 던져 뚫을 수도 없는 엄청난 절벽이 그의 인생 앞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 절벽과 같은 인생의 상황을 직면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마음을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 히스기야에게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늘 일어나는 근심과 염려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이었으니 어딘들 근심이 없겠으며 어딘들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었겠습니까? 아마 북쪽에서 내려오는 앗수르 군대의 소식들도 그의 마음을 졸이게 했을 것이고 백성들이 편안히 먹고 입고 살게 하기 위해서 정치를 베풀 때도 늘 마음에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괴로움으로서는 일상적인 번민으로서는 이 히스기야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도 한번 그 마음을 쇄신시켜 하나님 이외에는 인생에 많은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한번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에 이 인생의 벼랑 끝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사람을 세우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서 가슴을 졸이고 아파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그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에 소망을 갖던 마음을 씻어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앙망하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물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을 잘 안할 때는 있을지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때는 없습니다. 항상 눈에 비춥니다. 좋은 일, 나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그리고 달콤하게 우리를 이끄는 유혹과 시련까지 삶의 상황이 다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엇 그제도 뉴스를 들으니까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전세금을 돌려 달라 말라 다투다가 두 사람 다 죽어버린 일입니다. 한 사람이 그를 죽이고 자기는 집에 가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 전세금 몇 푼이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이렇게 우리의 눈에 수많은 표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서 마음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막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20년 만에 다시 뵈었습니다. 할머니 묻혀계시던 그 산소가 도시계획에 들면서 이장을 하라고 도에서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가서 다 파헤쳐진 무덤 속에서 그 할머니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20년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성경책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할머니의 유골, 양푼 하나 나왔습니다. 할머니의 유골을 만지면서 그렇게 어렸을 때 저를 보고 환히 웃으시던 그 옛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을 다시 샘플로 짓고 그리고 절구로 빻으니까 큰 사발 하나가 나왔습니다. 아마 더 열을 가하면 그것도 허공중에 기체로 다 사라질 것인데 인생이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영혼의 빛으로 우리의 인생에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바라보게 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들렸을 때 그래서 우리의 온 영혼과 마음이 그분께 바쳐졌을 때는 언전에 그 영혼의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추어 그래서 잠시 있는 이 세상에 속한 것과 그 속에서 가려내어서 찾아야할 영원에 속한 것들 사이에 차이를 발견합니다. 잠세적인 것들 가운데서도 그 잠세적인 것들을 사용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시시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런 모든 일들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라는 가운데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수시로 우리의 마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것에서 우리의 마음이 떠나 잠시 있을 이 세상의 물질과 이 세상에 번영과 세상살이에 매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상태가 우리의 마음에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세우십니다.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하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연연하였던 인연에 속한 사람들을 먼저 죽음의 강 건너편으로 데려가심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하나님을 향한 인연보다 더 질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물질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 물질에 배신을 당하게 하시고, 명예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게 하심으로 그 명예가 얼마나 하잘 것이 없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고 우리의 참 소망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쉼 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때때로 이런 인생의 위기 가운데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인생의 이런 벼랑 끝에 선 위기 가운데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주님의 그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만 바라라고 하는 그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황을 보면 해결되지 않던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상황을 훌훌 떨쳐버리고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의 인생의 문제들을 풀어주십니다.
B. 마음을 쏟은 기도
두 번째, 이 위기를 만났을 때 이 사람은 마음을 쏟아 부은 그런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위기 앞에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죽는 것이 무서워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더 많이 남아있는 것은 자기에게 남겨진 이 사명을 이렇게 두고 갈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이 고국과 그리고 위기에 처한 자신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을 생각하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 속에서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쏟으며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우리가 신자인데 기도하려는 마음을 안 가질 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인생의 이런 위기의 벼랑에 설 때는 마음을 온전히 쏟아 붓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골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상황으로부터 마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영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으로 쏟아 붓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렇게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를 좋아하실까요? 이것이 바로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 안에 있는 마음과 영혼을 쇄신시키는 작용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 앞에 불순종할 때도 마음을 사용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갈 때도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그리고 난 후에는 마음에는 그 더러움이 남고, 마음에는 그 경향이 남고 영혼에 그 경향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끔 인생의 위기 가운데 세우셔서 일상적인 기도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위기 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가셔서 절대 절명에 위기에 처한 것처럼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십니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게 된 모든 더러운 생각과 불결들을 떨쳐내고 이런 기도의 반복 속에서 하나님을 거슬려 살고자 하는 우리의 영혼의 경향성은 죽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죄의 죽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기도를 가장 좋아하시고 이런 기도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찾아오셔서 그 기도에 교통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얼마나 거창한 기도제목입니까? 그 기도제목을 위해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지만 아들 하나만 낳게 해주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세속적인 기도입니까? 그러나 그 기도를 마음을 쏟아 붓고 기도하는 한나에게 찾아오셔서 교통해주시고 응답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의 마음과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달려있습니다. 그의 마음과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존재가 덕성스러울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향하고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이 이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이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덕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놀라운 기도입니까? 우리의 지성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생각 속에 흩어져 나와서 우리의 귀속으로 사라져가지만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기도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쏟아져 나와서 삼층천을 뚫고 하늘의 보좌로 들어가고 주님의 보좌에서는 그 향기로운 기도의 향연이 주님 앞에 바쳐지고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공급하셔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이 모든 기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쏟아 부어진 그리고 기이한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혜의 빛, 우리의 상식을 깨트리고 우리의 지성을 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세계의 감화,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감동과 그리고 희열, 그리고 독점적인 하나님의 사랑, 배타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이 모든 경험들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의 진수이고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모든 기도는 예외 없이 마음을 쏟는 기도입니다. 건성으로 하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주님의 보좌를 움직인 적이 없고 건성으로 드리는 기도가 자신을 바꾸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잡히시던 날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일생동안을 고난과 시련 속에서 사셨고 잡히시던 날 한주간도 주님은 고된 사역 속에서 당신을 다 바치신 인생을 사셨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들어있는 제자들을 뒤로한 채 아버지 앞에 혼신의 힘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핏방울같이 떨어지며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의 사투에 자신의 육체의 힘을 모두 쏟으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께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예수의 기도를 돕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 드리는 기도는 모두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마음을 쏟아 붓지 않는 기도의 그 순간이 닥칠 때마다 기도하기 전에 살아왔던 나의 삶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셨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삶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삶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면 기도는 마음을 쏟아 주님 앞에 풀어지는 물같이 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권면하셨습니까?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의 백성들아 시시때때로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라,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아라. 라고 초청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구약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제가 일생을 살면서 본받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이 히스기야였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에는 히스기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유독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쓴 이 히스기야에게 가혹할 정도의 시련을 주셔서 벼랑 끝에 세워주셨습니다. 왜요? 히스기야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히스기야를 다시 인생의 벼랑에 세우셔서 가혹할 정도로 그 마음을 몰아붙이셨습니다. 애야, 아프지? 아프지만 더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이 시련의 불이 필요하단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사랑했고 순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히스기야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을 히스기야의 마음속에서 보셨습니다. 히스기야도 자신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하나님은 보셨기 때문에 이 가혹한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마음에 자라는 부패성, 그리고 교만, 그를 미끄러지게 하는 암적인 요소들이 아직 작기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이 히스기야를 다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이 사용하셔서 그래서 이 히스기야를 저물어가는 유대역사 마지막 비탈길에서 여호와 유일신 신앙을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불붙여서 포로로 끌려간 후에도 그들의 마음속에 유일신 신앙이 활활 타오르게 해서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쓰시려고 하는 우주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구속사적인 인물이 바로 히스기야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뼈아픈 시련을 당하고 불같은 고난을 당하고 연단을 당할 때마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쓰시려고 하시는구나. 그때에 여러분들이 나보다 쓰레기같이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데 그래도 나는 시시때때로 주님을 앙망하며 살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오늘도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으로 아파하는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주시고 상처를 주시고 고난의 벼랑에 세우셔서 아파하게 하실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생각을 바꾸십시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애야, 내가 너를 아직도 사용하고 싶어서, 그래서 너를 깨끗케 하고 싶어서 그래서 네가 아픈 줄 알면서도 이 세상에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너를 더 깨끗케 하고 싶단다. 하고 말입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있는 금이 14금, 18금입니다. 쌉니다. 그러나 여러 번 연단하여 순결하게 된 금을 우리들이 정금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값이 매우 비쌉니다. 그렇게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수없이 뜨거운 불에 녹아내리고 녹아내리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14금도 녹이 슬고, 18금도 가끔 얼룩이 지지만 순금은 녹슬지 않습니다. 깨끗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히스기야에게 가혹할 정도의 시련을 주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청사에 길이 빛날 하나님의 구원사의 도구로 쓰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괴로운 날들을 만날 때 하나님이 나만 가혹하게 다루신다고 불평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일부 설교를 마치고 강단을 내려가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더 아프게 하시옵소서, 깨끗케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더 아프게 하시옵소서. 만물 가운데 찌꺼기와 같게 하시옵소서, 시편 22편은 다윗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지은 참회 시였습니다. 그는 그 시속에서 말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오, 벌레라. 사람들은 나를 향해 입을 비쭉거리고 나를 모욕하며 저주하느니라” 그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인을 향해서 너는 더 이상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이 버리신 자라고 외쳤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시인을 더 정결케 하시는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젊은 시절에 볼 수 없었던 하늘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궁창에까지 이르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발견하여 우주 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기이한 영원과 사랑과 진리를 보게 하셨습니다.
C. 눈물을 보신 하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할 때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심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보십시오. 너는 죽으리라. 이 선고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쏟는 이 통곡하는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그 속에서 한 나라의 왕의 위엄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권위를 읽을 수 있습니까? 그는 오히려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서 왕도 아니고 한때 하나님과 동행했던 능력을 가진 믿음의 사람,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 모습을 오늘 이 히스기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히스기야가 뭐 그렇게 악한 죄가 많았습니까? 그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일평생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선을 행하였던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교만이 아니라 실제로 히스기야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책망할 양심의 죄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피눈물을 쏟게 만드셨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청소년 회심 집회를 했습니다. 정말 많이 왔습니다. 전라도에서도 올라왔습니다. 경기도, 강원도 할 것 없이 전부 400명의 중고등부 학생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운지 제가 기도하면서 6학년 아이들이 그렇게 단단하고 회심하지 않아서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서 어차피 청소년이 다 된 애들이니까 중등부에 붙여서 그들을 한 번 더 녹여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자. 그랬더니 하나님이 6학년, 중등부 학생 1-3학년 중에서 6학년 남자애들을 제일 많이 추수하셨습니다. 나는 제 방에 모여서 그룹 기도를 시켰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이 통곡하면서 기도합니다. 마음이 그러니 하나님이 안 휩쓸고 지나가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날 밤 회심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중학교 아이들도 하나님이 회심시킬 아이들은 다 회심시켰지만 특별히 토요일 날 고등부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많이 추수하셨습니다.
그 아이들이 고등부 아이들 쯤 되면 선생하고 섞이면 누가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 애야, 너 그리로 가지 말고 이쪽에 앉아라. 그러니까 목사님, 저 선생인데요. 미안하다. 애들 좀 오라고 그러라. 목사님 저 학생인데요. 이런 애들을, 여자애들은 아줌마 같고 애들은 아저씨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애들의 가는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애들을 아빠가 때린다고 되겠습니까, 엄마가 돈을 준다고 되겠습니까? 아무도 못 바꿉니다. 하나님도 안 바꾸십니다. 못 바꿉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누가 시킨다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큰 어깨를 들먹이면서 애처로울 정도로 통곡합니다. 기도의 시간이 끝났는데도 울면서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며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오는 99명보다도 그 길을 벗어났다가 다시 회심함으로 그 길을 돌아오는 사람들을 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명을 인함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로 인하여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한없이 쏟으며 비통한 가운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는데도 이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빨래 짜듯이 짜셨고 히스기야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안일하게 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지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려는 마음들이 빨래처럼 짜시는 그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인데 다 기도를 하고 이제 11시가 넘어서 거의 지쳐있는데 어떤 중학교 3학년 아이들 다섯이서 자기는 열린교회 애들만 목사님이 기도해주는 줄 알았기 때문에 못 받았는데 우리도 기도를 해줄 수 있는가 하고 찾아와서 물론 해줄 수 있지. 그리고 그 아이들에 하나씩, 하나씩 이제 사연을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 한 아이가 얘기를 하는데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막 쏟아집니다. 기도를 다 해주고 났는데 그 중에 마지막 기도 받은 애가 그러는데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꼭 기도해주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래서 뭔데?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개척교회를 하시는데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그 3학년 밖에 안 된 아이가 막 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한참 구김 없이 뛰어놀고 엄마 아빠 속이나 썩히면서 그렇게 잔소리나 들어야 할 그 나이에 교회 아픔을 끌어안고 그렇게 가슴 아파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했습니다. 너희 아버지 마음도 네 마음도 많이 아프겠지만 그러나 너희 마음을 아프게 한 그리고 교회를 떠난 교인들을 미워하지 말고 그리고 많이 사랑하여라.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어라. 그래야지만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울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가 만약에 회심하지 않은 아이라면 아마 교회를 혐오하고 자기 아버지의 사역을 하찮게 여기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등 돌리고 떠난 교인들을 향해 미움의 칼을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회심했으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아파도 그렇게 울면서 기도합니다. 아침에도 일어나서 그 애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미어지는지 모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그 아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뭐가 그 속에 있겠습니까? 히스기야의 눈에서 그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릴 때 마음이 빨래처럼 짜지고 그 속에서 자기 사랑이 쏟아져 액체처럼 흘러나올 때 왕으로서 위엄도 팽개치고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흐느끼며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통곡과 눈물로 매어달릴 때 그때 그 마음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의 뜻대로만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 그게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인생의 벼랑에 세우셔서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을 쏟아놓게 하시고 눈물이 흐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왜 그렇게 아프게 해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고 우리의 영혼을 고쳐서 그래서 남은 날 동안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나가게 하시려고 남은 날 동안에 아름다운 영혼으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깨끗한 사람이었고 그렇게 진실한 사람이 구약성경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III. 쇄신된 영혼을 기뻐하심
그런데도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가혹할 정도로 깨끗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사회생활입니다. 뭐 저 사람들은 저런데, 그것은 사회생활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신앙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나는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깨끗한지 안 깨끗한지 난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 난 모릅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나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도 하나님이 아직 내 마음이 더럽다고 그러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많이 우리를 벼랑에 세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주님의 사명 앞에 서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기도해서 자신의 마음과 영혼에 더러운 찌끼를 다 쏟아내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심한 통곡과 눈물 속에 그의 마음에 찌꺼기들이 쏟아져 나올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가서 전하라. 다시 살 것이다. 그러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까? 네 수한의 15년을 내가 더하여주마.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추가적인 응답도 주셨습니다. 히스기야가 가슴을 졸이며 하나님 앞에 통곡으로 매달렸을 때 기도제목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일을 연장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그가 불사를 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마음이 깨끗케 되고 영혼이 올바르게 되니까 연단을 끊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도하지 않던 기도제목까지 들어주셨으니 평생에 고통거리였던 앗수르에서 저희를 구원하고 그리고 앗수르로부터 저를 보호해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민하고 안고 씨름하는 문제들은 사실 대부분 목숨을 걷어가겠다는 그것이 아니라 앗수르로부터 고통 받는 그 상황들입니다. 이 과외적인 기도의 제목들은 오히려 진정하고 고유한 제목들이 응답될 때 알아서 응답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과외적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매달리는 대신 고유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매달려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벼랑 끝에 세우시는 것도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언약백성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보복이 없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어도 주님은 결코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보복하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시는 것은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하심이며 어그러진 그의 길을 고쳐 다시 하나님 앞에 사랑받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를 고치실 것이요. 그가 우리를 때리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아직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에 너무나 사랑하셔서 여러분들이 더 깨끗케 되기를 워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여러분들을 벼랑 끝에 세우셨습니다. 여러분들을 절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벼랑 끝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모든 것을 쏟아놓고 눈물 흘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벼랑 끝 거기에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이 우십시오.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많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내 소망이 주님밖에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내 마음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십시오.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인생의 가치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고백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인생을 끝내려고 할 때는 그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
I. 본문의 배경
우리가 읽은 시편 42편 표제에는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라자손의 시라고 하는 이 말 자체가 고라 자손의 저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관한 사람으로서의 고라 자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게 42편 시편을 다윗의 저작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판단으로는 문체는 다윗의 그것과 유사한 면은 많이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감정의 소산이라고 보고 오히려 이 42편 3-4절에 가면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문맥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왕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고라자손들이 하던 일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라 자손이 바로 하던 일이 성전에서 성도들을 예배하게끔 그렇게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고라라고 하는 사람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을 때 레위지파에 속한 한 족속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를 수장으로 하여 하나님이 세운 종 모세의 명을 거스르는 반역을 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셔서 땅이 갈라지고 고라 자손들이 그 땅속으로 모두 묻혀버리는 전대미문의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도 그때 모든 고라의 자손들이 죽지 않고 후손들 일부 중 살아남아서 반역의 무리라고 하는 슬픈 가족사의 아픔을 안고 역사를 이어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윗 때 이 집안이 명예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의 건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이들을 다시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사람들로 임명하는 장면이 역대기에 등장합니다. 오늘 이 시를 쓴 사람은 따라서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 왕을 함께 따라나섰던 고라 자손의 한 사람이 두고 온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목말라하며 지은 눈물어린 시라고 우리들이 이렇게 정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라고 자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욕망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습니다.
II. 욕망과 영혼의 힘
우리는 여기에서 욕망과 영혼의 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A. 영혼의 힘과 욕망
영혼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야구를 하는 사람이 있고,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구를 하는 사람의 덕은 경기를 훌륭하게 해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팀에 기여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야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뛰어난 덕을 소유하게 되고 이 세상에서 매우 유용한 사람이 되어서 부와 명예를 얻게 됩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은 야구를 잘해서는 안 되고 도자기를 잘 구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도자기 굽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군인, 이런 경우에 전쟁이 났을 때 도망을 가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덕이 없는 사람이고 목숨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워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일 때 그는 덕이 있는 군인이 되어서 모든 군인들 위에 뛰어난 명예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구를 하는 사람, 도자기를 굽는 사람, 나라를 지키는 사람 그런 사람들 중에 누가 덕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즉 사람이 태어나서 도자기를 구면서 살수도 있고, 나라를 지키며 살수도 있고, 야구를 하면서 살수도 있으니까 이것은 사실은 본질이 아니라 삶의 양태입니다. 그 양태를 떼어버리고 나면 모두 공통되는 것이 나오는데 사람이라는 두 글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야구를 하는 사람의 덕은 야구를 잘하는 것이라면 그 야구라는 것은 하나의 패러다임이니까 야구를 하다가 내일이면 내가 도자기를 구을 수도 있는데 무엇을 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사람으로서 공통되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인류역사의 철학사에서 지속적인 논구의 대상입니다. 짧은 시간에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에 선과 악의 문제, 덕의 문제, 그 덕의 표준의 문제 이런 많은 것들을 끌고 들어오면 엄청난 담론사적인 층차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성경적으로 볼 때, 신학적으로 볼 때 그러면 그 영혼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도자기 굽는 사람의 덕은 도자기를 잘 굽는 것입니다. 도자기를 구을 마음이 별로 없고 당장 일을 때려 치고 싶은 데도 도자기를 잘 굽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적인 경우에 도자기를 잘 굽는 사람은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삶의 양태를 사상하고 만약에 사람이라는 것에만 맞추어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영혼의 힘, 올바른 힘, 영혼의 올바른 힘을 소유하고 있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이것은 방향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내 안에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일차적인 의미는 인간 존재 밖에 있는 어떤 객관적 표준입니다. 그에 비해서 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인식 안에 있는 개념입니다. 그 선을 향해서 가고자 하는 지향성을 영혼의 힘이라고 묘사한다면 그 선을 향해서 가고자 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을수록 그 사람은 덕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물질이 아닙니다. 철학에서는 인간의 이 영혼을 유물론적으로 보는 입장과 그리고 유물론으로 안 보고 현상학적으로 보는 입장으로 나누고 오늘날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융합해서 새로운 영혼에 대한 생각을 역어가야지 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간에 유물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인 실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물리적인 실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본질적으로 힘들과 경향성입니다. 어떤 작용하는 힘과 경향성입니다. 그런 힘과 경향성이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올바른 정의된 가운데 그쪽으로 가려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이게 덕을 소유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성화의 노력은 바로 이 덕을 증진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화의 삶은 창조의 목적을 향해서 영혼이 힘이 배양이 됩니다. 그쪽으로 굴러가고자 하는 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야구를 하든, 나라를 지키든, 도자기를 굽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그런 덕을 가지고 있게 되면 그 덕을 소유한 사람의 마음 안에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다른 욕망을 갖게 됩니다. 즉 영혼의 힘은 영혼 자체의 힘일 뿐 아니라 그 영혼이 영혼과 관계된 인간의 모든 마음과 지성, 그리고 그의 모든 사고활동, 심지어는 신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 전체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인 선을 향하여 강하게 흘러가려고 하는 경향성을 갖게 됩니다. 그게 많은 사람들이 바로 덕이 많은 사람이고 영혼에 강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혼의 힘, 곧 덕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얼마나 기도의 제목이 많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존경하는 다윗 왕의 목에 칼을 겨눈 원수들을 죽여주시옵소서. 잃어버린 왕국을 되찾게 해주십시오. 얼마나 기도의 제목들이 많겠습니까? 그 모든 것들을 다 밀쳐버리고 한 가지 자신 속에 일어나고 있는 영혼의 어떤 상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목마름,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욕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목사님, 사람의 마음속에 한 가지만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욕망이 있는데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물론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더러운 욕망이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더럽고 추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주도적인 욕망입니다. 주도적으로 자신의 마음 안에 흐르고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는 욕망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두개가 아닙니다.
B. 영혼의 갈급함
이 시인은 그런 점에서 영혼의 위대한 힘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1. 이 고백의 배경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차단되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견딜 수 없는 간절한 갈망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이렇게 말하기에 앞서서 그 앞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고백을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사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슴들이 가을철이 되면 교미기가 됩니다. 그러면 수컷들이 발정을 하게 되고 이때 짝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때로는 하나의 암컷을 놓고 수사슴들이 날카로운 뿔을 가지고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발정을 할 때 수사슴의 신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타는 듯 한 목마름입니다. 그래서 짝을 찾아 나섰다가 짝을 찾고자 하는 욕구보다 더 강한 목마름을 느끼게 될 때 이제 물을 찾게 되는데 사실은 팔레스타인에는 여기저기 우물이나 샘물, 시냇물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들판을 가로지르며 물을 찾습니다. 때로는 신기루가 보입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가면 신기루는 저만치 더 멀리 있습니다. 결국은 그러다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다고 합니다. 죽을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시인은 가을철에 이렇게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죽어가는 많은 사슴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이런 열망이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자신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이 욕망이 하나님 자신을 향한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혼의 목마름
이 세상에는 축복에 목마른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 자신에 목마른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냉담함으로 가득 찬 예배의 현장이 이런 것들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형식과 거짓, 위선에 쌓인 신앙생활로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일에 이 종교생활을 이용합니다. 그런 속에서 과연 이 신앙이 참다운 평안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 우리는 회의적입니다. 정말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방법과 원리는 항상 같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 자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감격적인 만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당신 자신을 마음에 합한 사람들을 찾아가십니다.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던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못 만난 하나님을 세리와 창기들은 만났습니다. 더러운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록 낙인찍힌 더러운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갈망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 예수님 안에서 영생이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배를 드리러오기 전에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돌아가실 때는 그 기대와 실제로 얻은 그 사이에 비교가 존재합니까? 정말 우리에게 갈망이 있습니까?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예배의 출석,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주의 깊음이 상실된 실천이 없는 종교생활,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마음아파하시겠지만 하나 더 도전합시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주님을 만난 감격 때문에 울든지, 주님을 못 만나서 원통해서 울든지 둘 중의 하나는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삶 속에서 정말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의 진액을 짠지가 언제입니까? 그렇게 하면서 적당히 이 세상 속에서 섞여 살아가는 동안에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안에 있는 은혜는 고갈되고 죄는 번성하게 됩니다. 자기 부인과 깨어짐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흔적을 지닌 삶이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아집으로 뭉쳐지고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이기심과 정욕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까?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용서하고 화해하기보다는 분쟁과 싸움을 일으키고 그리도 다툼보다 무서운 무관심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니까 무슨 기도제목이 있는지 금식하며 눈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래서 이상 중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가 왜 나에게 금식하며 부르짖는가?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주랴.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저에게 무엇인가를 주시려면 주님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은 저의 것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생활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 하나님은 의존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가장 먼저 영광을 받으십니다. 원래 사랑의 감정 자체가 의존의 감정입니다. 의존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모든 사랑은 의존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기대고 의지할 때 사랑은 증진됩니다. 또 내가 그 사람에게 기대고 의지할 때 사랑은 증진됩니다. 그래서 동정이 사랑에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환자와 간호사와의 사랑, 그런 것, 의존의 감정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때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감정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 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잖네
저는 이 세상을 살다가 사람에게서 실망할 때 꼭 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실망을 통해서 주님을 가장 의지하게 됩니다. 이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수,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예수 날 버리잖네. 이게 의존의 감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기 때문에 자기는 별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선하게 살아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그 영혼의 참된 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게 그런 사람들은 도덕주의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은혜의 깊은 세계에 대한 비밀을 모릅니다. 그런 것들을 알았더라면 자신이 도덕적으로 살면 살수록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는 가끔 묻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아마 그들 중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의에 가득 차있기 때문에 그럼요.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럼 한 번 더 묻고 싶습니다. 당신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행복하실까요? 라고 말입니다.
C. 하나님 자신께 대한 목마름
그러면 시인이 이렇게 간절히 갈망했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히브리 성경에 보면 그냥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가까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이런 정도의 깊은 내면세계를 가지고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의 덕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그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가 요단강 건너편으로 왔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기에는 안 계시다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교리에 무지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지와 교리, 지식 속에 묻힌 무기력한 하나님이 아니라 전투적인 삶의 현장에 용사처럼 나타나셔서 자신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간섭해주시는 그 위대한 하나님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갈망을 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실패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 급기야는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거기에 순응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더 커다란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혼자 예수를 믿고 온 가족이 불신상태입니다. 이 사람이 마음에 은혜가 없을 때는 가족들의 구원에 대해서 계속 부담을 느끼지만 그 부담은 사실은 양심의 부담이지 가족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가져다준 부담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항상 현실과 타협합니다. 언젠가 그래도 우리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겠지. 그게 어떻게 금방 해결이 되겠어. 세월이 흐르다보면 또 때가 오겠지. 그리고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에 굴복하는 법들을 배워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 가지 느낌이 밀려옵니다.
첫째는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자유함, 두 번째는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내 가까이 계시다는 친근감, 세 번째는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큰 죄라고 하는 죄에 대한 명민한 느낌이 옵니다. 이 세 개가 각각 하나님의 사죄에 대한 감각, 사랑에 대한 감각, 영광에 대한 감각의 회심으로 회복되는 세 감각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감각이 확 밀려오게 될 때 이때 오래도록 당연하게 받아들여오던 자신의 삶의 현실을 도저히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 가족은 왜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일까? 더 이상 우리 가족들을 이런 상태로 방치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서 창조의 목적도 모른 채 살아온 것은 지난날로 충분하다.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빨리 주님을 믿어야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적인 교통을 통해서 누를 수 있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그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하나도 없다가 자기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으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연발하는 사람들은 도박을 하는 것이지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이 곤궁에 처한 그 위기의 순간을 사용해서 우리를 하나님께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만큼 그 교제의 친밀함 속에서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교통하게 해서 넘볼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한 도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믿음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그 믿음을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외적특성과 내적특성입니다. 외적특성은 커다란 일에 대한 담대한 도전입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믿음 때문에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거기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늙어서 아무 희망이 없는데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합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내가 잠잠하면 백성들이 진리를 들을 수 없다는 이 믿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에 도전해서 한편의 설교와 자기의 목숨을 바꾸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이런 끊임없는 도전,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 믿음은 외적특성입니다.
이런 외적인 특성은 내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내적특성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해서 그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도전하며 온 마음을 다해서 살 수 있는 그런 강력한 용기와 믿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특성이 없는 외적인 도전은 무모함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 속에서 이 내적인 특성을 기초로 외적인 특성들이 나오게 됩니다. 만약에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면서 살고 굴복하면서 살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이나 흘리는 것 정도가 우리 신앙의 유형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치는 끊임없는 변혁입니다. 나 자신도 끊임없는 변혁을 필요로 하고 내 밖에 있는 이 세상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도전과 변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과의 풍부한 교통 속에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충만한 생명의 교제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용기, 힘, 그리고 능력들이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죄는 씻어 깨끗하게 하시고, 능력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능력을 채워주시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의 얼굴로부터 오는 영광의 힘을 덧입도록 만들어주십니다.
III. 갈망을 상실한 이유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으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내 안에 생겨나야지 되는데 이 갈망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엘비스 프레스는 원래 가수를 하기 전에 택시운전수였습니다. 어느 날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 가락을 부르며 운전을 신나게 하고 있는데 뒤에 유명한 작곡가가 타고 있었습니다. 범상치 않은 이 사람을 보고 발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아는 엘비스 프레스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두 번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기자들이 집에 찾아왔는데 어디선가 달걀껍질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깜짝 놀랐습니다. 엘비스 프레스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어서 손가락이 타는 냄새였습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어서 손끝에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명민함을 잃어버리는 영적무감각 때문에 이것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무감각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사람들 중에 물론 큰 죄를 짓고 나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뭔 큰 죄를 그렇게 지었겠습니까? 지명수배를 당했겠어요. 아니면 신문에 났겠습니까? 그냥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이 죄는 죄의 크기도 문제도 되지만 사실은 죄라는 그 질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은근한 죄, 그 다음에 아주 분명한 판단이 결여된 습관적인 불순종, 태만과 나태, 이런 것은 영혼에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앗아갑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잠깐 설명을 드리겠으니 이해를 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기에 사물이 있습니다. 제일먼저 사물은 우리의 눈이나 촉각, 오감을 통해서 신체에 속한 것입니다. 신체에 있는 오감을 통해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이것들을 이렇게 보게 됩니다. 눈을 시각이니 시각으로 보고 냄새도 맡고 하는 것입니다. 어째든 감각기관으로 이것을 이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을 센세이션 감각이라고 합니다. 감각을 하는 것은 우리가 안 하고 있는 순간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감각을 합니다. 눈뜨고 있는데 눈에 안 비칠 때가 있겠습니까? 모든지 아무튼 들어옵니다. 감각을 합니다. 죽기 전에는 이 감각작용이 끝나지 않습니다. 감각을 합니다. 감각된 것들이 이 육체를 통해서 감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이제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가 나옵니다. 이것을 지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좀 어렵게 표현하자면 감각자료가 인식을 위해서 진료화 되는 단계가 지각입니다. 펄 섹숀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들어온 것이 감각을 통해서 지각이 됩니다. 그러나 지각은 아직까지도 밀가루반죽 덩어리 같아서 뭐가 이렇게 완전히 형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제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틀들로 그것을 인식해서 집어냅니다. 그렇게 해서 찍혀서 그것이 완전히 지성의 작용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 카그니션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지각을 통해서 인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감각은 지각을 지각은 인식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정신 속에서만 그냥 마치 로봇에게 자료를 입력하듯이 평쪽으로 흘러가는가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감각되고 지각되고 인식되는 단계들이 이게 스며들어오면서 우리의 마음 안에 감성에 영향을 줍니다.
인간은 영혼의 기능이라는 것을 크게 나누면 이성과 감성입니다.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를 따라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얘기합니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이치를 따라갈 수 있는 능력, 그 다음에 인간의 한계 밖에 지성이 한갓 밖에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신비한 힘, 이런 것을 가리켜서 이성이라고 이야기하고 감성은 감각되어 들어오는 사물에 대해서 감정이 움직일 수 있는 진폭을 가리켜서 감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이렇게 들어오면 인식이 되어서 이성의 작용에 영향을 주는 것과 함께 인간의 감정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니까 정이 있는데 그 정이 인식의 작용을 통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신체와 대비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계속 꾸부려 일생을 밭일을 하면서 일생을 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등이 이렇게 굽습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동작이 외부의 환경이 신체적인 변형을 가져온 것입니다. 양태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 사람 안에서 감정의 변화, 변정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찍히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찍힙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지각이 될 때 이 사람 안에 있는 마음의 모든 틀과 영혼의 상태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딱 찍힐 때 그대로 들어와서 이 사람의 틀이 세속적이면 세속적으로 작동을 합니다. 그래서 인식이 될 때도 세속적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 안에서 변정이 일어납니다. 정서를 끊임없이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어팩션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번역하기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변정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변정이 어떤 변정일까요? 세상에 대한 사랑, 이 세상에 있는 제물에 대한 애착, 명예에 대한 사모함 이런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모두 다 하나의 변향일 뿐 마지막에 그 사랑은 무엇에 대한 사랑을 포장한 것입니까? 자기 사랑을 포장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순간적으로 계속해서 세속적으로 굴러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지금부터 얘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IV. 마음을 추스릅시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정말 나는 하나님,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이번에 나를 만나주셔야 되겠습니다. 난 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서 매달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렇게 매달리고 싶은데 안 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백날 있어도 안 됩니다. 가만 내버려두면 백날을 내버려두어도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왜 아까 이런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계속해서 변정이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그 변정의 방식이 그게 자기 사랑의 방식으로 변정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물은 항상 한쪽으로 흐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반대쪽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 이런 것들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러면 또 다른 감각적인 것들이 그에게 맞딱드려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맞딱드려질 수 있는가?
영원한 것들이 영원을 생각나게 만들고 영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것들은 대부분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비실제적인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애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이지만 우리사이에 있는 그 영원한 사랑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만져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만져질 수 있는 건물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것들을 생각나게 해주는 그 어떤 영적인 감각자료들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가는 눈빛인데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나 영원한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감각자료로 다가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해석이 다가올 때 우리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 수준에서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왔는데 우리는 주보가 없지만 늘 주보를 챙겨주는 자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체적인 양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얘기해주는데 매일 그렇게 너에게 주보를 챙겨주는 이유는 너를 마음속으로 무지하게 짝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가 귀띔을 해줍니다. 그 다음에는 주보를 받을 때 손이 떨립니다. 물론 서로 좋아할 때 이야기입니다. 의미를 알 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고 어! 꽃이네, 빨간 것도 있고 파란 것도 있고 참 좋다! 그리고 쭉 들어옵니다. 아! 좋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다 어떤 마음이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이 가을에 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들길을 산책하고 싶어. 이런 마음까지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입니다. 새롭게 해석을 합니다.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확 밀려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합니다. 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생명의 유한함을 생각하고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을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게 그게 바로 은혜의 수단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듣는 가운데 사물을 보고 감각을 통해서 지각을, 지각을 통해서 인식으로 그것으로 일어난 세속적인 변정들을 가져오는 그 과정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들이 개입을 합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눈으로 지각되어지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감각 자료들이 지각을 통해서 이 뇌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그분의 사랑에 불변하심, 그 은혜의 무한하심 이런 것들이 막 밀려오게 됩니다. 그때 변정이 일어납니다. 그런 변정이 바로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정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수단들을 자꾸 피합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다다음주에 사경회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참석하는 사람이 교만해질지 모르지만 안와도 되는 사람이 많이 옵니다. 왜 요즘 은혜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날 모여서 늘 설교를 들으면 괜찮은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여서 앞자리에 다 포진합니다. 진짜 변화를 받아야 할 인간들은 기가 막히게 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안 옵니다. 그러니까 몇 년을 교회에 다녀도 회심이라는 것을 안 합니다. 미끄러진 지가 몇 년이 되었는데도 그 속에서 관록과 역사를 쌓아 가는지 돌아올 기미를 안 보입니다. 그리고 늘 곤고하게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길르앗의 좋은 향유가 있지 않은가.”
치료하시는 주의 은혜 베푸네
주님이 그 길르앗에 나오는 유명한 향유입니다. 그것으로 바르면 낫지 않는 질병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는 길르앗의 향유입니다. 그래서 치료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삽니까? 행복합니까? 기쁩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계속됩니까? 안 그렇습니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마음을 추스릅시다. 그래서 자신을 정직하게 살피고 어두움을 뿌리치고 제가 빛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내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시옵소서, 새롭게 일어나도록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길르앗의 향료를 바르고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여러분들의 고통과 힘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아마 다양할 것입니다. 대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이 가을에 진지해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성찰하고 주님 앞에 가까이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그래서 이 가을에 주님을 다시 만나고 행복해지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핍박과 시련을 만날 때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매대와 바사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10)
I. 본문 배경
오늘로서 10주 동안 계속되어왔던 이 ‘생의 갈림길’에서 라는 시리즈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다니엘 시대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이제 왕들을 섬기던 이 나라에 다시 매대라는 나라로 나라가 넘어가게 되었고 그때 다리오 왕이 있었는데 그 치하에서도 다니엘은 나라를 섬겼습니다. 그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9번에 걸쳐서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생의 갈림길에서는 대부분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부딪히는 일반섭리 속에서의 문제였습니다. 죽음같이 궁핍으로 가득 찬 가난의 길을 걸을 때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가? 또 목숨이 죽고 다시 살지 못할 날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되는가? 혹은 자식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고 인생의 절망 끝에 서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실 때 내가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등등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신앙을 선택해야지 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문맥이 좀 다릅니다. 이런 인생의 위기가 아니라 신앙의 직접적인 핍박과 시련이라는 점에서 구별이 됩니다.
다니엘은 주전 605년경에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에 끌려옵니다. 아마 귀족의 집안의 자제였던 것 같습니다. 아주 뛰어나고 왕을 가까이 모실만한 지식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여러 왕이 바뀌어도 그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부귀와 그리고 명예가 있었고 지금 오늘 여기에서도 매대의 120도를 다스리는 그 두령들 가운데 세 명의 총리가 있었는데 그 세 명의 총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총리가 바로 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인생의 갈림길은 배가 고파서 오는 갈림길이라든지, 자식이 속을 썩여서 오는 갈림길이라든지, 몸에 죽을병에 걸려서 오는 갈림길이라든지, 하나님께서 그의 육신을 쳐서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찾아오게 된 그런 갈림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에게 평안했지만 신앙의 핍박과 시련이라는 위기가 그를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혹은 가정에서 믿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때 자기에게 어려움이 찾아오기만 하면 모두 그것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민첩하고 충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서 한 사람의 사업하는 사람으로, 또 한사람의 직장인으로서, 한 가정에 시집온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혹은 반대로 남편으로서, 사위로서 그 가치가 별로 없을 때도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오늘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이 여러분 갈렸어도 모두 탐내는 제목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을 섬겼지만 대적자들의 눈에 이 다니엘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이방에서 포로로 끌려온 비참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을 모함하려고 했지만 워낙 충성되고 순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흠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걸고넘어지지 않는 한 이 사람을 고소할 틈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게서 발견되는 습관이 있었는데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리석은 다리오 왕에게 가서 왕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일을 꾸며 30일 기간을 정하고 위대한 왕 이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신앙적인 의미에서 기도를 하면 그를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해달라고 법을 만들어달라고 재촉했습니다. 어리석은 왕은 도장을 찍었고 이로서 그 법은 왕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그 나라의 금령이 되었습니다. 이 덫에 다니엘을 걸려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온 후로 긴 세월을 남의 나라의 왕조를 섬겼지만 다리오 왕이 그 뒤편에서 고백하였듯이 이 다니엘은 다리오 왕을 섬기거나 벨사살 왕, 혹은 느부가네살 왕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을 향해 그 이튿날 이 다리오 왕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사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는가?” 이 다리오 왕도 이 사람이 자기의 부하였지만 자기를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니엘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의 위기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만난 위기와는 비교되지 않는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위기를 만난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그 위기가 죽는가, 사는가의 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죽는가, 사는가, 하는 이 생사의 갈림길에 신앙을 놓고 결정해야 하는 이 위기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때
오늘날 우리는 자유로운 시대에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주신 축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전 세계에서 이렇게 완벽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나라는 전 세계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신앙의 종주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과 영국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목에 칼을 들이대고 예수를 믿을지 아니면 죽임을 당할지 양자택일하라,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신앙을 고백하고 죽든지 아니면 배반하고 살아라. 하는 식의 이런 식의 핍박은 우리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많은 문제는 어떻게 신앙을 지킬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잘 살 것인가에 마음이 집중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오히려 이런 신앙에 자유를 누릴수록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신앙이 위태로운 것을 알아서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을 지키도록 우리가 온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 신앙이 전파되어오기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런 갈림길에 섰습니다. 성경의 모서리가 왜 붉은빛으로 되어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서리가 이렇게 붉게 칠하여진 것은 이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 때문에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모퉁이에다 금박을 칠하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왜 금박을 칠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피 흘리며 예수를 믿는 신앙보다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금과 같은 물질로 번영하기를 꿈꾸는 이시대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신앙의 정신, 그것은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할 정신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다니엘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지는 않지만 순간순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믿음과 배교를 선택하도록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를 것을 은근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그런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다니엘이 바로 그런 갈림길에 섰습니다. 무엇인가 타협을 하고 협의를 할 어떤 여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의지하던 신앙을 버리고 살든지 아니면 전에 행하던 대로 그렇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함으로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 이외에 어떤 것도 그 사이에 타협이나 아니면 협의할 여지가 없는 상황에 이 다니엘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III. 핍박과 시련 앞에서
우리가 자유로운 신앙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깨어있는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삶의 상황을 볼 때 우리도 순간순간 영적으로 이런 갈림길에 섭니다.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이 어느 순간에 그 믿음에서 파선한 자로 나타날 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이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급격히 변하여갈 때 그것은 바로 이렇게 순간순간 우리도 알지 못하던 때에 다가오는 신앙과 세상 사이의 기로에서 은근히 주님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하는 반복되는 행동들 때문에 이것들이 모두 쌓여서 결국은 그런 부끄러운 신앙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런 인생의 갈림길에서 신앙의 핍박과 시련을 맞이할 때 이 다니엘이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면 우리들이 또한 어떻게 슬기롭게 이런 인생의 갈림길에서 신앙을 붙들고 살아야 될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A. 뜻을 정함
우선 첫째는 뜻을 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의 국무총리였으니 그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 왕이 법률에 서명을 할 까닭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 법률을 알고 있었고 왕이 여기에 서명하면 왕 자신도 이 법률을 다시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에게도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정하였습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이제 또 다시 죄를 짓고 불순종함으로 그 슬픈 멸망의 역사를 다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뜻을 정하는 일은 이미 맨 처음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올 때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왕 앞에 모셔서 섬길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뽑을 때 다니엘은 거기에 뽑혔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특별히 왕에 상에서 나오는 진미를 먹도록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왕의 상에서 나오는 그 값진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는 기대가 주어졌으니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명예였을 것이고 부귀와 영화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는 지켜야 할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부귀요, 영화의 기회가 그들에게는 신앙적인 위기와 핍박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 음식은 왕에게 바쳐지기 전에 왕이 섬기던 신에게 제사된 음식일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음식은 율법에서 금하는 식품일수도 있기 때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 모든 음식을 지혜롭게 거절했습니다. 거절하는 방법은 매우 부드럽고 지혜로운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지혜롭게 부드럽게 거절하기 전에 세운 그 뜻은 완고하고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 다시는 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다니엘과 친구들은 뜻을 정했고 그리고 그 뜻을 지혜 속에서 부드럽게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도와주셨습니다. 또 한번 이렇게 큰 인생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생명까지 담보해야지 되는 위기는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죽음에 이르러야 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을 정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살다가 보면 수많은 핍박과 시련의 계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은 두려워하고 당황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 핍박은 매우 큰 두려움과 그리고 공포를 동반합니다. 우리는 어린양같이 힘이 없고 약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이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이 강하고 큰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련과 그리고 신앙의 위기에서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혹은 그 위협에 눌려서 스스로 신앙을 반납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때로는 우리를 위협하며 다가오는 신앙의 핍박이 아무리 커도 우리가 거기에서 담대하게 맞서면 오히려 그 큰 신앙의 핍박이 힘없이 우리 앞에 극복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80년대에 중국에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민주화를 갈망하던 수많은 중국 사람들이 중국의 공안들에 의해서 총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기가 막힌 와중에 사진 한 장이 서방에 보도되었을 때 수많은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에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 하나가 밀려오고 있는 탱크 앞에 가방 하나들고 서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몸에 지니지 않고 맨 몸으로 그 탱크 앞에 서있는 그 모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심령은 이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한 사람에게 주는데 신앙의 힘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오늘도 창칼을 목에 겨누고 신앙을 버릴 것인가,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를 강요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런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때에 뜻을 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업을 하든지, 직장생활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신앙을 팔아먹으면서까지 밥을 먹을 정도로 비참한 인간은 아니라고 하는 하나님 중심의 뜻,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무엇이 닥치고, 내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내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신앙을 따라 살고 죽겠노라고 하는 뜻을 정하는 것,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이익이나 번영, 행복과 이 신앙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신앙제일주의의 정신, 그것을 향하여 뜻을 세우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축을 중심으로 환경에 떠밀리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호와께서 치실 때”라는 시리즈 중의 한 설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모압으로 도망갔던 나오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그 불행한 일들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오미가 뭘 잘못했습니까? 살던 고향에 흉년이 들어서 입에 풀칠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먼 곳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떠났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한 것입니까? 그러나 뭐 좋은 일이 거기에서 일어났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잘못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귀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생각할 때는 항상 자기의 형편과 처지가 중심점이 되지 신앙이 중심점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다니엘이 인생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자니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다니엘을 따르는 모든 포로로 끌려온 유대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총리였던 다니엘이 죽임을 당한다면 그와 한 핏줄인 유대백성들을 내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그런 신앙의 깊은 위기 속에서 그는 뜻을 정하였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굳센 신앙. 유혹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한 확신,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뜻을 정하고 신앙 중심주의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자신의 신앙을 파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붙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이 다니엘이 이런 신앙의 핍박의 갈림길에서 뜻을 정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리라. 죄와 불순종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이 민족이 이렇게 뿔뿔이 흩어졌으니 이제 나는 더 이상 하나님 중심주의의 신앙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하는 뜻을 세운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타협하고, 고난이 두려워 타협하고,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타협하고 그렇게 사는 동안에 결국은 우리의 신앙이 모두 잠식당하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을 본받아 뜻을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똑같은 설교인데 왜 어떤 때는 그렇게 은혜가 되고 어떤 때는 그렇게 시들먹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뜻을 정하고 듣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틀립니다. 이번에도 미국에 집회를 갔는데 6개월 전에 갔을 때보다 비슷할까 약간 사람들이 덜 모였습니다. 6개월 전에 갔을 때는 한번 들어보자 하고 온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사모하는 사람들만 모였습니다. 심지어는 차로 2-3시간을 달려와서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떨면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뭐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하던 것 중에 많은 것 중에 서너 개 뽑아서 거기서 합니다. 여기서 2시간 하는 것 거기서 1시간 반쯤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려고 뜻을 세우니까 그들에게는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좋은 말씀을 들었으면 참 좋겠다. 은혜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하나님이 나에게도 오늘 은혜를 주시면 뭐 하려고 합니까? 뜻이 정해진 곳이 있어야 그 은혜가 흘러갈 것이 아닙니까? 어디로 갈 것인데. 그 은혜가 주어지면 어디로 갈 것인데. 그래서 뜻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도 그것이 언제나 일순간에 종교적인 감정의 경험에 그치고 삶으로까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기를 원합니까? 전혀 원하는 바가 없네요. 축도하고 마칩시다. 정말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뭐 하려고요? 어디다 쓰려고요? 꼭 써야지 될 곳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청량음료가 아닙니다. 여러분, 컬컬하니까 한잔 마시는 막걸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뜻을 정한 사람들 속에 그 인격 속에 스며들어갑니다. 하나님, 내가 인생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서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게 된 원인과 동기는 각각 다르지만 나는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직 살아가야 할 내 생애가 아직 많이 남아있고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이 벼랑이 내 인생에 마름하는 마지막 장소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그래서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전한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모든 신앙생활이 뜻을 정한 것과 안 정한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와 그냥 하는 기도, 뜻을 정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예배와 그냥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참석하는 예배,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해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은 것과 그냥 습관을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은 전혀 틀립니다. 상담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내가 목사님과 상담해서 내 인생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 하고 오는 사람과 내 가고 싶은 곳은 있지만 내가 그래도 목사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나오는 것은 틀립니다. 벌써 틀립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무슨 이제껏 여러분들이 수많은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를 했습니다. 혹시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은 뜻을 정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오늘 이 질문에 한번 답해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 모두 입술로 은혜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충만한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시면 어디로 흘러가시겠습니까? 그 뜻이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그 뜻이 있었습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 이제는 주님 중심주의로 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나는 신앙을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 이 신앙중심주의 거기에 뜻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은혜는 그 뜻을 성취하는데 쓰여질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혼자 버려두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뜻을 세우십시오.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매일 습관적으로 입에 붙어서 우리 엄마 천국가게 하시고, 우리 아버지 예수 믿게 하시고, 우리 동생들 나오게 하시고 응답이 안 된 것이 몇 년째입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뜻을 정해서, 염불하듯이 습관적으로 중얼거려서 몇 년이 지나도 응답이 안 되면 하나님이 무엇인가 뜻을 정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남편들이 회심한 기이한 축복의 간증을 가지고 있는 자매들을 만나보십시오. 목숨과 바꾼 자매들이 많습니다. 남편의 생명을, 예수 안 믿는 부모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친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세월이 가면 가는데도 그렇게 떠밀려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결단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뜻을 세웠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뜻을 세우십시오.
B. 하나님을 선택함
두 번째는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매대라는 한 나라, 역사적으로는 매디아라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의 최고의 총리였습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영화와 부를 누렸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정직하고 빈틈없이 살았지만 나라는 그에게 총리에 합당한 큰 대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좋은 음식과 화려한 의복, 그리고 좋은 집에서 수많은 하인과 부하들을 거느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자기를 그처럼 신임하는 왕의 조서에 서명이 된 그 법률을 어기면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마지막에 자기의 생명도 잃어버릴 정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 보다는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앙 중심적으로 살아야지, 이 뜻 하나만을 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한 사도의 제자 가운데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교하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에 직면했습니다. 신앙을 포기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86세 때 그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86년의 생애를 살아오는 동안 한번도 나를 부인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신 예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그분의 사랑에 관하여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신앙의 위대한 용기를 발휘해서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도 그런 상황이 되면 한번 해봐야지 하고 고사리 같은 손을 집니다만 결심일적이 많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신앙의 놀라운 결단은 한순간에 용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투옥하여 잡아가두는 상황 속에 어느 목사님이 말씀을 전했는데 자신은 이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면서 자기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어찌 이방의 신에게 절할 수 있겠는가 하며 전하는 연설에 감동을 받고 많은 성도들이 울며 열렬하게 기도하고 있을 때 저 뒤에 그 동리에서 이름도 없는 한 평신도가 있었는데 얼마 후 연설하던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고 성도는 투옥되었는데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는 내용)
그러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물론 한순간에 뜻을 정하고 결단을 내리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어느 결정적인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이 결단을 위해서는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오는 이 삶의 궤적이 있을 때 이것이 가능해집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깊이 우리의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모든 힘은 혈기와 결단에서 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낯선 손길은 더러운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은 매일매일 삶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하나님의 달콤한 음성 속에서 감미로운 목소리에 취하고 우리가 부르짖는 그 기도가 주님의 마음에 들리는 행복을 우리들이 경험하고 이 인격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깊어져가는 것이고 그런 속에서 어느 순간 결단을 내려도 그 결단을 실천에 옮길 모든 에너지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올곧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도 매일매일 은혜를 받으면서 살지 않으면 결단을 내려도 공허한 결단의 남발이 됩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결단을 내리면 내 삶의 방향이 바뀔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무수히 결단을 내리는데도 이상하게 공수표가 남발될 때도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전자의 경우는 은혜의 힘이 남아있을 때고 결단을 내리지만 은혜의 힘이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는 일과 매일매일 하나님을 선택하며 그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이 지속적인 은혜의 삶이 똑같이 필요합니다. 주를 위해 죽을래, 아니면 배반하고 살래 하는 위기가 찾아오기 전에 매일매일 주님을 붙들 수 있는 수많은 우리의 은혜의 때들이 우리의 게으름에 의해서 부패하고 우리의싫증에 의해서 소멸되는 많은 일들이 있고 난 후에 우리의 은혜가 소진된 후에 우리들이 그런 시련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들은 주님을 붙들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붙잡혀 그렇게 사는 것 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들려고 하는 사람을 주님도 붙드셔서 은혜도 주시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매일매일 매순간 주님을 선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변함없이 기도함
마지막 세 번째, 이 사람은 변함없이 기도함으로서 이 시련의 때를 이겼습니다. 아마 낮에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섬겼을 것이고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유대인 속에 내려오는 그 기도의 관습을 따르는 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동쪽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해서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비록 이 나라의 총리가 되었지만 남의 나라에서 봉사하는 총리였습니다. 그가 꿈꾸는 나라는 바벨론이나 매대 나라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의 왕국의 번성함이었으나 그 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 긴 포로시기를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울며 기도하면서 그 역사의 어두운 밤중을 지났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지나는 그 어두운 밤길과 같은 생애에 그에게 위로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했고 9장에서 드디어 예레미야의 예언을 탐구하다가 바벨론의 포로의 때가 거의 끝났고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를 받았던 것도 바로 그런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창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마음을 다 쏟으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하는 시간은 매대 나라의 정사도 잊어버렸고 복잡한 나라의 정치일도 그의 마음을 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께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으니 이것은 곧 영적인 이스라엘 교회를 위한 기도였으며 그 교회 안에 소속된 지체된 백성을 위해 부르짖는 그 섬김의 기도였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그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고 목사님이 모르셔서 그러시지 한번 사업한번 해보시라고 기도할 시간이 있는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생각이 틀립니다. 말단에 있던 사람이 조금 승진하고 나면 바쁜 척은 혼자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염려는 혼자 짊어진 것처럼 폼 잡지만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기도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닙니다. 물론 애들이 많고 모시는 부모님도 있어 가정생활에 매일 때 기도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도 근본적인 이유일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시간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시간이 없어도 마음이 하나님께 쏟아지면 기도할 수 있고 시간이 허락되어도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하게 넘쳤을 때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우리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기울어져 있을 때는 우리들이 무시로 기도할 수 있어서 복잡한 전철에서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운전하면서도 음악을 틀어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고 기도가 복받치면 길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고 운전대를 붙들고 울면서 기도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부어지는 마음이 있고 사실은 그 마음이야말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핑계일 뿐입니다.
IV. 담대하라
여러분들이 일이 많고 복잡하면 일이 큰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다니엘만큼 머리가 아픈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지위가 있으면 이 사람만한 고급의 지위에 올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갈림길에 있었는데도 왕의 조서를 비웃듯이 그는 전에 행하던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하는 일도 감추려고 하지 않은 채 전에 행하던 그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을 열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부으며 기도했습니다. 고달픈 포로생활 속에서 그 기도의 시간은 그에게 유일한 위로였을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교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달픈 인생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 모두 육체의 힘에 한계가 있고 마음이 견딜 수 있는 그 한계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환경에 이 얼마나 많이 영향을 받는 그런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간인지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에 행하던 대로 하십시오. 소유가 늘어나고 잘 되어도 전에 행하던 대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어린아이처럼 한번만 살려달라고 부르짖던 그때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전에 행하던 그대로 처녀 적에, 총각 적에 주님을 만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애쓰며 주님을 섬기던 사람은 아이를 낳고 부모님 모시는 때가 되었어도 전에 행하던 그대로 그때 그 처음의 마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가 고마워서 어떻게 하든지 이슬과 같은 인생이나마 주님께 드려서 섬기고자 했던 그 눈물이 있던 그 섬김의 결단, 그대로 전에 행하던 그대로 행하십시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지위를 높여주셨지만 가난하고 낮을 때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던 그때처럼 변함없이 전에 행하던 그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곤궁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기 스스로 헤쳐나 갈 지혜와 힘이 있었더라면 우리가 주님을 찾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지혜로 그 시련과 고난의 벼랑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목말라했겠습니까? 모두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갈망했고 그리고 우리의 온 마음을 드려서 뜻을 정하고 매순간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손에 붙들려 사는 것은 이 세상에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전의 신앙이었습니다. 전에 행하던 그대로 이 사람은 그렇게 행했습니다. 악한 자들은 다수였고 핍박의 시련은 폭풍과 같은 것이었고 그 앞에 서있는 사람은 한사람뿐이었고 그리고 그는 아무 힘이 없는 다니엘, 포로로 끌려온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능력은 사람들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은 악인들이었으니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없는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을 붙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전에 행하던 그대로 이 세상이 자신에게 빼앗아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빼앗아갈 수 없는 한분,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의해서 빼앗긴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간사한 존재입니까? 그렇게 벼랑 끝에서 하나님 앞에 살려만 달라고 몸부림치다가 주님의 은혜로 살려주시면 주님께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그 출렁거리는 홍해 앞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다를 갈라 안전하게 건너게 했을 때 그들은 건너편에서 뒤웅치는 파도 속에 떠밀리는 애굽의 병거와 군사들의 시체를 보며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삼일 후에 목이 마르자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주시고 굶주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를 보면서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맛대가리 없는 만나만 먹게 한다고 불평하며 주님 앞에 울부짖으니까 주님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 고기를 이사이에 물고 불평하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탐욕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을 이렇게 의지하며 다니엘이 걸어갔을 때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다니엘을 괴롭혔던 수많은 정치적인 대적들 중에 주모자들을 한꺼번에 청산해버리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변함없이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붙잡았던 그때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던 펑펑 울며 회심하던 그때처럼 변함없이 전에 행하던 그대로 주님께 기도하며 이런 인생의 핍박의 위기를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바꾸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능력과 자원이 그들의 것입니다. 오늘도 사면을 두루 살피시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찌하면 이 핍박과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음을 따라 살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지만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님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 오늘도 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담대하게 이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대적들의 숫자나 우리의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그분의 편에 서서 어린아이처럼 그분 앞에 뜻을 세우며 어린아이처럼 그분을 선택하며 어린아이처럼 변함없이 그분께 기도해서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생의 갈림길에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