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평화를 회복하는 길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교회가 평화를 누릴 때(눅19:41-46) 2006.11.5 주일오전 1
2. 십자가로 평화를 이루심(롬5:10) 2006.11.12 주일오전 14
3. 화목과 거룩함(골1:12) 2006.11.26 주일오전 29
4. 행복의 비결(욥22:21) 2006.12.3 주일오전 46
5.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호2:5-7) 2006.12.10 주일오전 63
6. 교회 그 평화를 누리는 곳(사66:10-14) 2006.12.17 주일오전 77
7.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렘33:6) 2006.12.31 주일오전 91
1. 교회가 평화를 누릴 때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매어 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19:41-46)
I. 본문배경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환란을 만나거나 시련을 당한다 해도 한 가지만 우리에게 있으면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우리를 에우고 환란의 풍파가 우리를 엄몰해도 이 한 가지만 있으면 우리를 오히려 그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고통의 이유를 물질의 부족이나 우리의 삶의 상황의 탓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가오는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언약백성의 삶의 진수입니다.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없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야말로 언약백성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교만과 마음에 가득 찬 욕망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의 정욕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우리의 지성은 혼란스러운 사고로 엉키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세속적인 정욕으로 불붙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와 진리에 말씀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하게 되고 작은 죄도 이길 수 없는 그런 죄에 대한 친화력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동안에 우리의 삶은 악으로 넘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는 틈이 벌어진 그 불화를 점점 더 진전시켜 가는데 완전히 상실합니다. 이런 상황에 들어섰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물질이 많다면 그가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높은 지위를 누린다면 건강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모두 벌래먹은 과일같이 다 썩은 것입니다. 그의 가장 급선무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충만히 누리고 있을 때는 고난의 때에도 여러분들은 행복했고 시련의 날에도 하나님께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에 대해서 몇 주간 살펴보고자 합니다.
II. 심판의 운명을 모르는 도성
우선 우리들이 오늘 읽은 성경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 말기에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힐 때가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유명한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고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을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 다가오시자 갑자기 우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우셨다는 대목을 ‘에클라우센’이라고 희랍어로 적고 있는데 이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많은 인파에 에워싸여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오시던 예수님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복 바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계시는 것일까요? 동양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억제할 수 없이 눈물을 터트리시며 울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도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통곡하신 이유입니다. 오늘 성경은 성을 보셨기 때문에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을 본 사람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을 보았는데 왜 예수님 혼자 그렇게 가슴 아프게 그렇게 가슴 아프게 누구도 이해할 수없게끔 통곡하셨을까요?
이 “보셨다”는 부분을 희랍어 성경에서 ‘이돈’이라는 분사로 적고 있는데 이것은 두 눈으로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어떤 사물의 배후를 직관하여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과는 다른 식으로 성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변함없이 서있는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성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영적인 의미와 사건들을 인식하면서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통곡으로 이 성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통곡하고 우신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문자 그대로 평화의 도시였습니다. 이 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던 그때에 당시로부터 약 1500년 전에 이미 가나안에 가면 하나님께서 한 도성을 정하실 것이고 그 안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의 시대는 그 모든 일들의 그림자였고 그 성막의 시대를 거쳐서 성전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때 예루살렘을 이 성전을 품고 있는 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도시였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이 민족도 하나님이 친히 지키시는 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쳐들어오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벨론에게 패배하고 예루살렘 성이 그들의 수중으로 떨어졌습니다. 성전에 많은 존귀한 기물들이 모두 박탈당하고 성전은 겁탈당한 처녀처럼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형체만 남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그 사건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심판의 역사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어떤 성도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그리고 그 도성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에 의존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낙관주의는 그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품고 있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 할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고 로마에 대해서 끊임없이 저항했습니다. 주후 70년 결국 후에 로마의 황제가 된 디도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토성을 쌓고 그 성을 공력하기를 여러 날이었습니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6월 24일 안토니오 요새가 불이 타고 7월 6일에는 늘 드리던 그 거룩한 번제조차도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월에는 예루살렘 성의 위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이 불타게 되고 9월에는 전 도시가 로마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때가 예루살렘 최대의 날이었습니다. 당시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에 모여 저항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 피는 예루살렘 성에 강물처럼 흘렀다고 합니다.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어린아이는 죽임을 당하고 거리는 부녀자들이 겁탈을 당하는 비명소리로 가득 차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40년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보고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 통곡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혼자 독백하듯이 “너도 평화에 관해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도” 라고 하는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은 ‘카이시’라고 읽은데 이는 “너만이라도” 하는 뜻입니다. 다른 나라가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트리는 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런 평화에 관한 일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면 온 땅에 재앙의 나팔을 불어야 할 사명이 있는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말씀의 종들,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외쳤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는 여러분들을 종교생활을 하는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선지자들 중 자신들을 질타하고 비난하는 선지자들을 거침없이 죽였습니다. 심지어 제단 사이에서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시대에 살기로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혹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면 그들은 그 아들의 마음은 이해하고 공경할까! 생각하시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지독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셨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골고다에 내어주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에 철저하게 무지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심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네 눈에 숨기웠도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누군가가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일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이들은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명백한 사실들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바로 볼 수가 없었고 어떻게 해야지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그들은 장님처럼 무지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제 좋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백만 명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도 이렇게 로마에 항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며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켜주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태도는 어찌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자신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고 지켜주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런 사랑의 교리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것이지 성경이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교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교리에 쇠창살에 갇힌 죄수와 같은 몸이 되어서 자신들이 타락하고 범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을 살아도 하나님은 그 교리의 창살에 갇힌 채 눈물만 흘리며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는 힘없는 죄수의 처지와 같다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그런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속박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의 위엄은 하늘에 미치고 그의 영광은 궁창에 가득하여 그의 위엄과 존영은 이 세상에 있는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시고 당신의 지성과 의지를 행사함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 바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거스르는 사람들을 향해 오래 참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지만 때로는 징벌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40년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중차대한 심판을 알지 못한 채 잠들어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해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진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꾸역꾸역 저 좋은 대로 교회에 나가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마지막 날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교회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지옥에서 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진실한 참회와 뉘우침,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밖에는 자기를 형벌 받을 그 죄에서 구원할 리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사한 아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적대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 알량하고 간사한 아첨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무엇을 위함이었습니까? 여러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면서 죄악 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악하고 더러운 여러분들을 돌이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룬 구속의 공로로 여러분과 평화를 수립하시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이 교회로 부르셨고 그리고 저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타협함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그 복음의 교리들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도록 나를 여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13년 동안 여러분들의 구원을 위해서 설교했고 지금도 여러분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긴 세월동안 이곳에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고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뉘우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뼈 속 깊이 죄에 사무친 악한 인간이며 통렬하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가르쳐주어도 여러분들은 무엇을 믿는지 모르지만 마음에 부요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도 15-20분이 되어서 예배당에 들어오는 상습적인 예배의 지각은 이미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오면서도 정직하지 않은 헌금생활과 제 멋대로 하는 십일조 생활들은 이미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사람들 중에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직분자 들까지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고 그들을 향하여 다가올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를 여러분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십시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들의 목자로 세움을 받았고 내가 살아있는 날 동안 주님의 말씀이 이 예배당에 울려 퍼질 것이며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길은 오직 둘밖에 없으니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과의 평화를 무엇인지도 모르고 수립된 적도 없다면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십시오.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든지, 멸망해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언제까지 이 지리멸렬한 교회생활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 터를 더럽히고 예배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계속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시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판단에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면 지금 곧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예배당을 떠나십시오. 그리고 불신자로 살다가 이 세상에서 죽으십시오. 그리고 지옥에서 만나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티끌만큼이라도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하나님이 모든 영광 위에 뛰어나게 이 세상을 이룩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이 티끌만큼이라도 여러분들에게 있다면 이미 죽게 되어 꺼져가는 불씨와 같은 그 신앙을 다시 한번 불붙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의 합당한 그런 믿음의 태도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절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평화는 처음부터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면 나올수록 하나님의 진노는 싸여갈 것이고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교회생활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하나님을 믿는 많은 경건한 사람들의 심령에 고통이 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서 그런 거짓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분들의 교회출석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진실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이니 여러분들이 만약에 진실한 회심이 없고 뉘우침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는 꿈도 꾸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고 여러분들이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지 않는 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는 다시 여러분들이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찌꺼기 같은 신앙생활로 여러분들이 유세를 부린다면 여러분들은 지옥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나누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고 통곡하셨을 때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 운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3년을 따라다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왜 우시는지 몰랐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 모두 버리고 도망갈 인간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통곡하실 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태도로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고 365일 50주를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눈물 한번 흘려본 적이 없으면서도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데 나는 여러분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확신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인격적인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죄에 빠지지만 그들은 마음은 근본적으로 부드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선택하고 사랑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질 때 그들은 가출한 자녀의 귀에 들려오는 감미로운 어머니의 음성처럼 그들의 마음이 후벼 팝니다. 그리고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이 1년 50주를 예배를 드려도 눈물 한번 흘릴 줄 모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은 아픔 때문에 예배가 끝나도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낄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제가 돌맹이들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까? 말귀를 알아듣는 짐승에게 설교를 했어도 아마 여러분들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은 TV나 보는 것처럼 드라마의 단막극을 보는 것처럼 설교자의 얼굴을 지켜보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갈 바를 택하십시오, 정말 주님을 믿을 것이면 제대로 믿고 주님이 없다고 믿으면 벌떡 일어나서 외치십시오. 나는 자유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 욕망대로 살다가 지옥에서 동창회를 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됩니다.
III. 잠들어 있는 성전
이런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결국은 다가오고 있는 그 멸망의 순간에 눈치 채지 못한 채 거기서 먹고 마시며 예배하며 성경을 읽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도성이 이렇게 철저하게 잠들어 있었을까요?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들어가자마자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행동을 하십니다.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쫒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시면서 진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진노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묵상해보면 예수님이 이러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제사를 드릴 때 자기 집에서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와서 바쳤습니다. 그런데 거리가 멀고 이 제물들을 가지고 오니까 여행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제물을 사게 되었고 급기야 성전 안에 이런 매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통용되던 화폐가 셋이 있었는데 그리스 돈, 로마 돈, 히브리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돈과 로마돈은 명목가치보다 실질가치가 낮은 그런 화폐였습니다.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는 돈이 히브리 돈이었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바칠만한 가증하지 않은 돈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경제생활 속에서 획득한 그리스 돈, 로마 돈을 가지고 와서 예루살렘에 와서 히브리 돈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게 성전 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것이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은 나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됐지 뭐,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못하데. 그래도 나는 매주일 교회에 나가고 십일조야 자주 떼어먹지만 그래도 주일헌금이라도 하고 그리고 예배당에 늦게 가지만 그래도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고 가족들도 같이 가는데 내가 뭐가 잘못되었나. 다른 사람들도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많던데. 그게 뭔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인간이 너무 많으면 너무 많아서 지옥에 못 보내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상관없으십니다. 이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말씀 한마디로 다시 창조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저항하던 백만 명의 유대인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IV. 하나님의 시각
키에르 케고아의 말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그렇게 많이 살아도 그 길이 진리가 아니면 나는 갈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렇게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자식처럼 할 수없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여러분들 눈에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만 제 눈에는 너무 이상합니다. 제 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분들의 그런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통곡하시는데도 이들은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성을 드나들었고 그렇게 돈을 바꾸고 제물을 사서 그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두 못 박혀주셨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무지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잘못 아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험은 설익은 지식의 위험입니다. 무엇을 하나를 알아도 좀 똑바로 알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생각하십시오. 그 지식 하나가 잘못되면 여러분들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곁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 차려 들으십시오. 하나님과의 평화는 둘로 나뉩니다. 원리적인 평화와 실제적인 평화로 나뉩니다. 원리적인 평화는 사람이 회개하고 거듭나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수립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기초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의 믿음을 작용으로 해서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청산되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됩니다. 그런 점에서 거듭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된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인가요?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적대감으로 꽉 찬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교회에 나오는데요? 그 적대감을 품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노골적으로 하나님을 적대하지는 않는데요? 하나님이 은혜로 보호하시는 것은 신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당신들처럼 거듭나지 못한 악인들도 성령으로 감화하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항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수립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 없이 가족들의 손을 이끌고 꾸역꾸역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과의 원리적인 평화가 수립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수립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그리고 참회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뼈아프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내 고집대로 살던 모든 날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하고 자신의 그런 죄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 뉘우침이 없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는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가르치는 교사들은 정죄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는 눌림이고 고통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오늘 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절대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한 이 예배당에 드나들어도 어떤 은혜도 여러분들의 영혼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길들여진 그런 야수처럼 교회생활을 할 것이고 천국은 여러분들의 유업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복음의 은혜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작용, 성도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연합, 그에게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기업, 주님의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어서 이 땅을 섬기며 살아가는 거룩한 소명, 그리고 거기서 오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기쁨, 그의 상급 이런 것들은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것입니다. 여기는 여러분들의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인들의 유일한 소망은 마음을 다 열어 주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그 짧은 시간에 마음을 모으고 나를 거듭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더니 주님을 만났다고 오늘 신문에 간증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해보셨습니까? 예배 시간에 하나님, 내가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과의 원리적인 평화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나는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이 예배의 시간에 나를 보여주십시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께 받아질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부르짖으며 단 한번이라도 예배를 드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젠가 어느 순간에 이런 간절한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오라는 외침은 끝날 것입니다. 제가 죽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변해서 이런 외침이 울려 퍼지지 않는 교회로 떠나든지 어떤 이유로든지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속히 미끄럼을 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평화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평화가 있으니 실제적인 평화입니다. 원리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인 평화가 있을 때 그 평화 안에서 우리들이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활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평화의 조건은 둘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평화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이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고백하게 됩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여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끊임없이 세상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내 일평생 사랑할 신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실제적인 평화는 촉진됩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사랑으로 꽉 차면,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하늘을 열고 짝 그 평화의 빛이 내려옵니다. 고난과 결핍이 그 평화를 깨트릴 수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사망의 질병이 나를 엄습해도 이 평화를 나에게서 뺏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이나 환란이나 깊음이나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이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과 같은 이 세상에 대한 노골적인 사랑, 육신에 만족에 대한 은근한사랑, 이런 속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틀은 다 해체되고 주님을 향하여 유지되어야 할 이 마음과 정신의 올곧음이 흐트러지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는 현저히 방해받게 됩니다. 누구도 자기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 없이는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죄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런 죄를 따르고 하나님을 반역하라는 자기를 끌어안고 죄에 욕망을 함께 감싸 안으면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평화, 이런 것들은 모두 기독교적인 진지함으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한 것입니다. 이미 죄의 속이는 작용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교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아는 교리는 죄의 작용에 의해서 심각하게 오염된 채 그에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진노하신 후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안해낸 말씀이 아니라 이사야 5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문맥 속에서 53장이 나옵니다. 53장에서 고난 받는 메시야가 이 땅에 와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 구속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인 회복의 때가 도래하게 되는데 그 영광스러운 영적인 회복의 때에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왜냐하면 나의 집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불쌍한 수많은 인간들을 위해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붓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그 가운데 계셔서 그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 앞에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땅에 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서 그들을 하나님과의 평화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교회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 회심하지 않은 인간들이 교회에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데리고 왔는데 이 교회에서 죄인들의 심령을 찌르는 성령의 강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나타나도 죄인들이 더욱더 강퍅하게 마음을 먹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그랬더니 교회에 나와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회개의 의무를 때웁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늘어나는 것은 재앙입니다.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그 교회의 특징이 된 교회, 언제든지 가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한구석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섬김의 기도로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주일이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일주일 내내 교회는 텅 비고 누구도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멸망을 눈앞에 둔 예루살렘 성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제가 이 설교를 했을 때 이 설교를 들은 어느 학생이 저에게 눈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복 바치는 열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동네 가까운 교회에 막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상황이 벌어졌겠습니까? 그가 말합니다. 교회에 대문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써있었는데 그 넓은 교회당은 불이 꺼지고 그리고 입구는 미제 열쇠로 잠겨있고 경비병의 호루라기 소리만 들렸습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나누어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흘리셨을 그 눈물과 영혼을 향한 아픔, 그리고 민족을 향한 애통하는 마음을 정말 교회가 나누어가지고 있습니까?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모두 떠나고 났는데 이 예배당이 어떻게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이 성전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고 그렇게 해서 온전히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이 한사람 한사람의 성도가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기도의 삶,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아서 회심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울고 미끄러진 자들을 위해 흐느껴서 마치 기도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고 이웃의 행복과만 상관이 있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헌신이 없이 어떻게 텅 빈 교회당이 하나님 앞에 기도의 집으로 바쳐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주님이 내게 주신 이 크신 은혜가 감당할 수 없어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울고 이 사랑을 알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살아가는 교회 안에 회심하지 못한 많은 지체들과 이 세상에 있는 내 가족, 그리고 내 동포, 북녘에 있는 내 겨레를 위해서 흐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길을 걷다가 내 동포를 위해 울고 밥을 먹다가 내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세계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형벌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슬픔도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가볍고 또 가볍고 또 가벼운 이 시대의 모든 신앙의 풍조로부터 돌이켜 서십시오. 이런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고 이모든 것을 못 박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간절한 기도, 영혼을 울리며 하늘을 향해 뻗쳐오르는 그 토혈의 기도, 부흥을 구하는 자신의 심령을 녹이는 그 통곡의 기도는 순결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세상을 향한 정욕과 음욕을 간직한 이 더러운 마음에서는 울려 퍼질 수 없는 기도입니다.
V.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세운지 13년이 되었고 저는 속히 늙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밤에도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렇게 많은 세월이 속히 지나갔는데 그 많은 날들은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쓸모없이 흘러갔고 폐기처분되어버렸는가. 우리들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우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우리의 마음을 물같이 녹이며 이 땅에 있는 영혼들과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 동강난 내 조국, 그리고 불쌍한 내 북녘 동포를 위해 눈물을 흘렸더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주님은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찾으십니다. 내 마음에 찌르듯이 다가오는 고통,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 어두운 죄악 길에서 돌이키게 하신 그 찬란한 복음 계시의 빛, 이 모든 하나님의 도구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배나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이 땅에서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이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과 같은 것을 내어쫒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주저하였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양심을 달래며 한편으로는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욕망으로 그 말씀의 불을 껐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어진 채 하나님께 축복을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손 내미는 기도는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이 세상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싫은 신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자신의 기도로 교회의 역사를 움직이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이일에 쓰임받기 싫어하는 신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안타깝게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기도하라고 해도 기도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도 그것이 여러분들의 심령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의 심령이 죄로 가득 차도 말씀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거나 갈망하는 사람들이라는 증명은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놓는 그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기도하지 못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할 수 없을까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기도가 잘됩니다. 그것은 100%로 보장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때처럼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가 없습니다. 회개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마음의 샘이 터집니다.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기도하면 그렇게 기도하면서 살지 못했던 날들을 바꿀 수 있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1800년대의 중반에 미국에 폭풍 같은 대각성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쓰임 받았던 인물이 찰스 피니라는 전도자였습니다. 변호사였다가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확성기도 없던 시대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그때까지 그는 50만 명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많은 책을 남겼고 그의 관한 많은 논문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 기도하던 아벨 클러리라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찰스 피니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그는 하루에 14시간씩 찰스 피니의 복음사역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4시간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나머지 10시간 동안 발을 펴고 밥을 먹고 잠도 자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찰스 피니를 기억하고 있지만 어쩌면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벨 클러리가 더 큰 영광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1830년 찰스 피니는 로체스터 시에서 말씀을 전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세 개의교회가 있었는데 한 교회는 목사를 쫒아낸 교회였고 두 교회는 목사끼리 싸워서 법원에 고소를 하고 소송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상태는 심각하게 타락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벨 클러리가 그렇게 살인적인 기도에 자기를 바쳤을 때 6개월 동안 거기서 복음을 전했고 10만 명의 사람이 거기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용해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19살에 예일 대학의 교수가 된 천재 같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사용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초등학교를 중퇴한 무디 같은 무학자를 들어서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난 요한 웨슬리 같은 인물을 들어서 쓰시기도 하시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한편의 설교를 하면 한사발의 피를 토하던 그래서 29살에 요절한 연약한 젊은이를 들어서 사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은 동시에 기도의 사람들로부터 후원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임스 글렌드라는 사람은 아일랜드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기도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올드 스톤의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그 집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악당들이 그 집회에서 폭력을 행사하고자 무장하여 그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설교를 듣고 12명이나 회개하다가 졸도해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우리 장로교의 원조가 서게 하는 장본인은 존 낙스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의 장인 존 웰츠는 하루에 3천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고 기도할 때마다 그는 처절하게 스코틀랜드를 우리 사위에게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죽음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가톨릭의 타락한 땅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존 낙스에 의해서 영광스럽게 장로교회가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은 다양했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를 바쳐 심령을 드리고 기도하던 사람들이었고 또 그렇게 기도해주던 사람들이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슬이 시퍼런 가톨릭의 출교의 위협에서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위치며 종교개혁의 횃불을 쳐들어 유럽에 진리의 불을 밝힌 마틴 루터는 아내 폰 보라와 함께 하루에 3시간을 기도에 헌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개혁사상을 외쳤다는 이유 때문에 간악한 꼬임에 빠져 덫에 걸려 화형장으로 끌려가던 존 호스는 불타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불교의 땅 미얀마에 젊은이 한 사람이 가서 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하자 그 후 6만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그 사람이 유명한 아도니라는 (?)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이렇게 기도하는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정결케 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 앞에 바쳐지도록 자신의 진액을 짜 바쳤고 그리고 그런 기도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해서 공동체적 마음의 일체 속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꿈에나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 위대한 일들이 이 땅에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수없이 배를 쓰고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던 동토의 땅에 부흥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가자 수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고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이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바다를 생각합니다. 넓고 드넓은 바다, 오물이 쏟아지는 폭우에 모여 앉아서 그렇게 싸우고 지지고 볶고 미워하고 그러지 마십시오. 쓰레기 같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죄짓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자신 있습니까? 살아가다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겨나도 새가슴처럼 덜컥 내려앉는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며 온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 죽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희생과 사랑을 본받아서 온 마음을 다해 그 기도의 바다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기도하셨을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것 말고 또 다른 행복이 있다면 그리로 가십시오. 그러나 거기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하나님과의 무너진 평화를 재건합시다. 먹고 입는 것보다 이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시다. 주님이 허락하시면 간절히 매달립시다. 주님이 응답하시면 금식합시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셔서라도 나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돌려주십시오. 그 평화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2. 십자가로 평화를 이루심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생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번영과 행복도 항구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우리가 예전에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는 더더욱 이런 하나님과의 화목, 즉 평화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역설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하나님과이 평화를 기초로 영광의 소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5장에 와서 사도는 그런 신자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러면서 5장에서 와서 사도는 그런 신자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는 원리적으로는 단번에 심겨집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평화를 실제적으로 계속 누리는 일은 끊임없는 자기 복종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하기에 사도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러한 환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화평은 누리는 자로서 바라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평화를 누리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죄인었다는 것입니다(6-7절). 여기서 우리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자들인지 발견학게 됩니다.
II. 비중생자의 영혼
A.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
그러면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전에 우리가 회심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었다면 지금 또한 교회 안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과 원수 된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중생,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할까요? 제일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도 한때 회심하지 않은 적이 있었고 그때 그 영혼의 상태는 하나님과 원수를 맺은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수 맺은 상태는 마음속에서 상대방의 존재를 전적으로 미워하고 그리고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뜻과 마음, 모든 행동에 반대하는 감정을 가진 것이 바로 원수의 감정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 맺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하는 일은 배워야 하고 변화를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는 것은 인간에게 교육시킬 필요가 없이 저절로 인간 속에서 그런 악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쥐와 고양이가 태어나자마자 같은 장소에 모아놓고 생활하게 했습니다. 쥐도 고양이를 처음 봤고 고양이도 쥐를 처음 봤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그렇게 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 고양이가 성장을 했을 때 결국은 그 쥐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관계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존재하는 그런 천적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원수 된 감정을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밖으로 뿜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의 하나님을 믿는 분위기 때문이라도 적극적으로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원수 된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질상 그는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취향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좋아하지 않는 감정이 모두 배어있게 됩니다. 그것이 그의 영혼과 정신과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하지 않는 사람의 영혼의 본질적 상태입니다.
B.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가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는 예전에 우리도 이 세상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본질상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녀였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예의를 갖추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겉모습뿐이고 그 속은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적인 생활 속에 있는 그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강한 반대하는 마음, 하나님 앞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끄시는 것과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충돌을 일으킬 때는 언제든지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하나님께 대한 미워하는 감정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III.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으로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이런 원수 맺은 상태를 감춥니다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회심하지 않은 교회의 출석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를 드러내어 보일까요?
A. 사물에 대한 판단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그의 모든 판단에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듭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의 뜻대로 판단하고 행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판단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져있을 때는 저 잘난 척 살지만 어느 한순간에 참다운 충고가 주어지거나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시면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도록 꺾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꺾어짐이 없이 그들은 꿋꿋하고 완고하여 모든 것을 판단함에 있어서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말은 이것이니 바로가 친히 말한 바와 같이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이것이 회심치 못한 사람의 마음에 있는 언어입니다. 회심치 못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언어는 발설되지 않은 채 감추어져있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수 맺은 감정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수를 맺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그에게 어떤 좋은 장점이 발견되어도 악하게 해석하고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을 드러내게 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맺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수시로 하나님을 깔보고 하나님의 판단을 보기 좋게 거절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는 그런 막대 먹은 행동들이 그들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모든 판단 속에서 하나님과 원수 맺은 것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나는 오늘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잘못 판단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뉘우쳐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다 틀렸고 하나님은 다 맞습니다. 이런 고백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고백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에게 언제나 하나님은 자기 똘마니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이 자기의 말을 들을 때는 공경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거나 자신의 판단과 다른 판단을 하나님이 제시하시면 하나님을 깔보고 무시하고 아주 우습게 여기는 그런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바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 삶 자체가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하나님께 계속 죄를 짓는 삶이 되고 그가 이 세상에 숨쉬고 살아가는 모든 날들은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는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저는 어제 여러분들에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진지하게 설교했고 그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나는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나는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권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설교를 들으며 마음이 배나 강퍅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며 그렇다. 목사가 가라고 그러니 나는 이제 일어나서 떠나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러분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을 똑같이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은밀한 곳에서 망신시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그를 벌하시지만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모욕한 사람들, 혼자서 하나님 앞에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는 것과 공개적인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은 정말 웃기는 분이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죄는 질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약 용기가 있다면 그렇게 행동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다가도 참된 진리가 울려 퍼질 때 어느 한순간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지난 죄를 회개합니다. 그런데 감히 하나님의 울려 퍼지는 말씀 앞에서 여러분들이 다시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깔보고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대적하고 항거한다면 나는 여러분들의 그 모든 피에 대해서 깨끗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어제 밤에도 밤 깊도록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눈물로 호소해도 듣지 않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전달해주어도 여러분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고 그리고 지성에 호소해도 여러분들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수시로 여러분들은 설교자를 깔보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었더라면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 부족하여 회개하여 할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깔보는 행동을 의지적으로 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더욱 강퍅한 마음으로 주님이 징벌을 내리실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잠시 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보지 않습니까? 이처럼 회심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제멋대로 판단하고 수시로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B. 본성의 취향
두 번째는, 회심하지 않는 사람은 그 취향에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 됨을 드러냅니다. 사람마다 마음과 정신이 취향에 있기 마련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거듭난 사람으로 좋아하는 취향이 있고 그리고 거듭나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들이 좋아하는 취향이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취향은 이 세상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고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죄짓는 것이고 형제들을 원망하는 것이고 이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취향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처럼 높이고 떠받드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렇게 육에 속한 사람들의 취향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이렇게 장시간 동안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좀이 쑤시는 지루한 일입니다. 회심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간이 자신의 온 마음과 영혼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시간이지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시간은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시간입니다. 예배가 일찍 끝나면 재수가 좋은 날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부어져서 설교가 길어지는 날에는 재수가 옴 붙은 날입니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그렇게 예배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그 지루함과 그 모든 것들은 영혼의 어두움과 그 싫증, 예배당에 나와 있으나 마음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취향입니다. 그들의 취향은 이 시간 이렇게 성도들과 함께 단정하게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루하게 청취하는 것이 아니라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며 TV를 보고 그리고 집에서 쉬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고 화투치고 먹고 마시고 좋은 곳에 다니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그들의 취향이지 이런 것이 취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거듭난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눈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지각이 중생과 함께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몰랐지만 회개하고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양 속에 눈물이 흐릅니다.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눈물이 쭉 흐릅니다. 그것을 좋아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자신의 거친 마음을 어루만지고 지나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그들의 가족들보다 더 기쁘게 뛰놉니다. 취향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취향이 없습니다.
C. 의지의 방향
세 번째로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지의 방향입니다. 거듭난 사람들도 때때로 시험에 들고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의 의지와 정반대로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회개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지를 꺾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신자들이 죄를 지을 때도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복합의지가 작용합니다. 복합의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가 좋아서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한쪽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하는 또 다른 의지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꺾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단일한 의지로 전 인격 속에서 찬동 속에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짓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죄송하다든지 마음이 아프든지 후회한다든지 이런 것이 없습니다.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결과로서 자기가 고통을 당하니까 자기가 아쉬워서 후회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죄송해서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의지의 박약입니다. 나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참고하고 싶은 것을 꺾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D. 정서의 움직임
네 번째는, 그들의 마음의 정서가 하나님과 원수 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정신적으로 위대하다. 이럴 때는 이 정신의 크기와 영혼의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둘로 나뉘는데 감성과 지성입니다. 감성은 사물을 이렇게 볼 때 쭉 보면 보는 것은 감성이 큰 사람도 보고 감성이 나쁜 사람도 봅니다. 그런데 감성이 큰 사람은 잠깐 봐도 이 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이것을 지각한다고 말합니다. 감각한 사물들이 육체의 눈을 통해서 들어갈 때 이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지각이라고 얘기합니다. 감성이 큰 사람들은 조금 봐도 큰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감성의 크기가 다른 사람은 멍하니 쳐다봐도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감성이 적은 사람은 낙엽이 떨어져도 ‘청소부가 힘들겠네.’ 그것밖에 생각 못합니다. 그런데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낙엽이 떨어지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 저 낙엽도 떨어지는데 나도 언젠가는 떨어지겠지. 낙엽이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나도 이 세계의 한 생명으로 이 자연 속에 붙어있으니 언젠가 이 육신의 생명은 낙엽처럼 떨어지겠지.’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감성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낀 것을 지성이 뛰어나지 않으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지성이 없이 감성만 뛰어나면 사람이 피곤합니다. 그리고 복잡합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한번 수련회를 가서 노래를 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나보고 노래를 부르라고 그래서 찬송가만 부르면 교회에서 많이 불렀는데 그래서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습니다. 그게 18번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다들 조용히 듣고 있는데 사모님 한분이 막 흑흑 흐느껴 웁니다. 다 끝났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옆에 있는 목사님이 물어봤습니다. 사모님. 김 목사님이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는데 왜 그렇게 우냐고, 그랬더니 사모님이 울먹울먹하면서 하는 말이 김 목사님 마음속에 있는 이 조국에 대한 사랑, 북녘에 대한 그리움, 통일에 대한 열망이 막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안 하고 불렀는데, 난 그냥 불렀는데, 왜 그렇습니까? 감성의 크기가 워낙 커서 남들이 멍하니 언제 끝나나 하고 있는데 이분은 막 북녘 동포, 남북통일, 세계 평화 김목사의 영성까지 막 한꺼번에 밀려오는데 지성이 부족하니까 정리는 안 됩니다.
우리 결혼은 했는데 아내를 이런 사람을 얻었다. 그러면 카드 빚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감성대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남자가 그런 남자가 잘못해서 남편이 되었다면 김삿갓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성입니다. 그런데 지성이 뛰어나게 되면 들어온 그 수많은 덩어리들을 지성 속에 찍어내어서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다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만 딱 보면 지식이 확 늘어납니다. 딱 보면 확! 늘어납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 봐야 느끼는 것도 없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밥이나 먹자. 그러는데 막 생겨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감성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하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이 감성 속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딱 보면 그러면 본 이것이 이 속에 들어올 때 그냥 객관적으로 들어오지만 이속에 해석될 때는 머리통속에 무엇이 들었는가에 의해서 해석이 됩니다.
바둑을 한참 두어본 사람은 사람만 모이면 아다리. 넌 죽었고 여기에서 대마가 잡혔고 저기 한자리만 앉으면 다 죽는데 하는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머리통 속에 마음속에 바둑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니까 사람의 머리를 볼 때 이게 바둑판으로 보이고 머리털이 있는 사람은 흑돌, 벗겨진 사람은 백돌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을 보면 반드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는 순간에 이것이 우리의 감정의 파동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보면 아! 그래, 감정의 파동이 확 옵니다. 편지를 받았는데 두통이 날라 왔습니다. 한통은 애인에게 온 편지야, 빨간 핑크빛 편지에 사랑하는 누구, 마음이 두근두근 뛰면서 기쁨이 옵니다. 또한 편지가 왔는데 이것은 나라에서 온 편지야. ‘안양시장’해서 과태료 통지서로 옵니다. 그럼 짜증이 확 납니다. 이렇게 뭔가 사물을 봤을 때 우리의 정서가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서 적당한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의 변화가 옵니다. 그러니까 탁! 보면 정서의 변화가 확!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보십시오.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뭘 볼 때 마음에 변정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보는 게 세상의 유혹, 그 음란하고 더러운 쓰레기 같은 것 이런 것을 봅니다. 그럼 계속해서 변정이 계속 일어나는데 무슨 변정이 일어나겠습니까? 욕망과 세속적인 충동의 변정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두 번이야 은혜로 뽑히지만 죽어라 일어나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게 죄 가운데로 빠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족해도 딱 보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그럼 변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저렇게 아름다우시구나. 야! 하나님 정말 놀랍다. 아! 하나님이 저런 분이시구나.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결국은 이것도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한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들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에서 시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언제 눈을 든 것입니까? 너무 어려운 인생의 시련기를 만났을 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러니까 눈에 뭐가 들어왔습니까? 산이 들어왔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어! 저기 산이 있네. 등산하는 사람들 좋겠네.’ 아니면 할머니들은 ‘고사리 많겠다.’ 이런 생각밖에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보는 순간에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게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소이다.” 내가 고통 받을 때 산을 보는 것입니다. 아! 저 산을 지으신 분이 누구일까? 하나님, 하나님이 저 큰 산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지.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실 수 있겠네, 그럼 내 인생에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의 도움이 되실 수 있겠구나. 아멘! 그리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늘 내가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인해 마음이 깨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벌래 같은 나를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있습니까?
E. 실제적인 행함
다섯 번째는 행동 그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 됨을 드러냅니다. 의지는 행동을 하게 하는 정신과 마음 안에 있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적극적으로 발휘될 때 그때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서 그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해도 항상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깔보는 행동을 수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없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아도 자기가 원하면 그것을 합니다. 그들은 이 속에 있는 것이 아주 쉽게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모두 알고 계신다든지, 자기의 행동을 판단하고 계신다든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합니다. 배속에 변의가 꽉 차면 대변을 보듯이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 욕망이 꽉 차면 그대로 배변하듯이 행동을 거침없이 쏟아냅니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늘나라가 바겐 세일할 때 열어놓은 백화점의 매장의 출입문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도록 활짝 열어놓으셨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그 구원에 이르는 문이 좁은 문이라고 우리에게 강조하십니다.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사망을 향해 가는 길은 넓은 길이고 친구들도 많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교회에 나오면서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반이나 천국에 가면 기적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알지니.” 그리고 그 열매는 무엇보다도 은혜의 열매이고 사랑의 열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덜덜 떨면서 하나님 앞에 뜨겁게 회개한 적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회심을 확신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회심의 한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다운 거듭남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참다운 회심의 열매는 인격적인 사랑입니다.이 세상에서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을 때 유혹에 늘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그들에게는 영혼의 쇄신과 회복의 과정이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가도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예배의 시간에 깊이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의 영혼에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주십니다. 다시 세상에 붙었던 자신의 욕심을 그 눈물로 씻어내고 다시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어린아이 같은 결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예배의 시간, 주님 앞에 드리는 기도의 시간,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찬송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자기의 마음을 바치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한 사람의 마음의 회개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회심한 자의 표인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 진실한 사랑, 그런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마지막 때에 부르신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뭐라고 말하시겠습니까? 내 종을 너희에게 보내어 너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고 복음의 말씀을 통해 너희를 내 품으로 수없이 불렀다. 그런데 너희가 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는가 물으실 때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변명하겠습니까? 시골구석에 있어서 누구도 복음 전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멸망의 길을 갔다면 하나님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고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너에게 이 영혼의 진실을 증거 해주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을 때 네가 왜 끝까지 그 설교자를 미워하고 그 설교에 대항했는가 하고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안 해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했다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교회로 불러주셨고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여기에서 참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라고 그렇게 인간의 본분을 다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남편이,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지체들이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아프게 하는 이 교회 속에 있는 수많은 지체들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 여러분이 편안히 잠자는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고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울어주지 않는 영혼을 위해 그들이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며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친절과 섬김으로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어떤 나쁜 일을 여러분들에게 행했습니까?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어떤 일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괴롭혔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설교하는 사람이나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여러분들 이제 그렇게 살지 말고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밉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까? 솔직해지십시오.
오늘날은 복음의 본질이 흐려진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배울 만큼 배웠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현대인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얘기해도 저 목사 또 공갈치는군, 하는 분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있는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백한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여러분들이 그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통째로 깔아뭉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막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든지 지가 뭘 알겠는가. 판단하는 내가 제일이지. 그게 바로 그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막 보는 경향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지옥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진실로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바로 그 지옥의 불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 불길 속에 던져지지 않는 그런 엉터리 같은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을 때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징벌 아래 있을 때 회심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있을 때 여러분들의 아내가 울었고 여러분들을 돌보는 목회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빌었습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지체들,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는 지체들이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면 하나님은 끝까지 여러분들을 그 심판의 불길에 던져버릴 것이며 그때 누구는 하나님의 그 정당한 심판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거나 용서해달라고 빌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끝까지 대항하고 무수한 회개의 기회를 하나님을 깔보는 마음으로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했던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불길에 던져버리시는 그 날에 천군천사들은 노래할 것이고 수많은 성도들이 함께 주님을 경배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며 그렇게 찬송 부르는 성도들 속에 여러분들의 가족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울려 퍼질 때 마음 한구석에 저 말은 공갈일 것이야. 저 말은 사기일 것이야. 아니면 지금 저렇게 지금 설교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다른 사람은 저만 못해서 말을 하지 않나. 저것은 모두 우리를 협박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야. 이렇게 희망을 가져보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아니라고 줄을 긋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의 본질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바와 같이 본질상 마귀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마귀는 억제함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원수 된 마음을 쏟아내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교회 안에서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나마 양심과 본성의 빛을 따라 정도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단정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모든 부조화와 부조리, 공평해보이지 않는 이 세상 사이에 모든 도덕적인 모순들을 최후의 심판과 상급을 통하여 모두 정리하고 당신 자신이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도덕적인 통치를 완수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도덕적인 통치를 완수하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조금 불공평한 일이 있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마지막 날에 갚아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소망 가운데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안에 있는 영혼을 향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영광을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평화의 소망 같은 것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IV. 화목의 길: 십자가
그러면 결국 본질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는 어떻게 다시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실까요? 이 화목의 길은 오늘 성경은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죽으심을 인하여 화목하게 되었은즉” 이란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관념이 두 가지입니다.
A.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의 희망
우선 첫째는 그런 죄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심치 못한 사람들이 죄가 지극히 큰 것은 사실이지만 절망적인 상태로 아무 대책 없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대책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회심치 못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종교, 그 영혼의 위험한 상태, 미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지금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과 버려진 느낌,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회심치 못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어린 초청의 또 다른 한 형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지 됩니다.
우리가 정말 하지 말아야 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식들을 향해서 너 이렇게 하면 죽어. 이런 말, 그 말을 좀 가려서 하셔야 합니다. 너 오늘학교 빨리 갔다가 안 오면 죽어, 그렇게 말할 때 부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목표가 그 새끼 죽이는 것이 여러분 마음의 목표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렇게 극단적인 말을 서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오히려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것입니다. 사랑이 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오거나 말거나 제 인생 제가 사는 것이지, 하고 버려둡니다. 사랑이 그렇게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준엄하게 경고하시고 그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1700년대에 노셈펨에서 목회하실 때 그 사람들이 오늘날 여러분들의 상태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회심하지 않은 인간들이 꽤 많습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때 기록을 보니까 저녁마다 젊은이들이 몰려다니면서 희희낙락하고 아주 불경건한 행동을 하면서 노름을 즐기면서 음주하고 그러면서 동리가 신대륙을 건너올 때 그 아름답고 단정한 신앙을 거의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지옥에 대해서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6년 동안을 지옥에 대해서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설교를 듣던 교인 하나가 나가서 목매어 죽어버렸습니다.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게 바로 회심치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미쳤습니까? 왜 자살을 합니까? 그렇게 무섭고 두려우면 회개를 해서 살아야지, 왜 가서 목매어 자살을 하는지, 이게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감정은 목숨을 건 감정입니다. 한번 해보는 게 아니라 갈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런 모진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철저하게 경고하시면서 그렇게 돌아오도록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러면 그 죄인을 향한 간절한 하나님의 탄핵은 결국은 그 죄인들을 너무나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의 또 다른 반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절망적인 죄인 안에 있는 하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 유일한 희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모든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 구속의 공로 안에서 죄인들은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죄로 말미암아 다 망가트리고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간들에게 죄가 출렁거리며 역사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인간입니다. 그 죄의 크기는 무한히 큽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받아야 할 형벌도 무한히 커야지만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부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죽는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마음인지를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화목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고통 받는 자들의 눈물을 씻겨주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죄 지은 자들을 찾아가서 친절히 용서해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사랑을 말로만 들어서는 깨달을 수 없는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고 그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을 입고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멸망당할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이신 그분은 사람의 모습을 입어서라도 죽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이 당신의 죽음을 안에서 우리 모든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33년 동안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이 당신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전해주시면 돌이킬 죄인들을 찾아서 온 동리와 그리고 방방곡곡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가득했고 그 눈물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회심하지 못한 영혼에 비참한 상태 때문에 가득 고인 눈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욕하십니까? 왜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미워하십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를 이유 없이 싫어합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한 관계는 병원의 여러분들의 육체에 대한 관계와 여러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건물이 예쁩니다. 그리고 인테리어도 깨끗합니다. 간호원들도 절세의 미녀들입니다. 모든 의료진들도 친절합니다. 그러나 병을 고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병원에 수술하러 갔더니 음식을 잔뜩 차려놓고 편히 드시고 가시라고 그렇게 친절을 베풉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죽을병에 걸렸다면 당장 그 밥상을 뒤집어엎고 분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을 다해주어도 죽을병을 고쳐주지 못하면 그것은 병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여기에서 원하십니까? 언제나 여러분들의 편의를 들어드릴까요? 죽을병에 걸려서 당장 수술대에 올라 배를 가르지 않으면 안 될 영혼의 상태인데 어깨를 두드리면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니 밥이나 먹고 가시라고 그렇게 여러분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교회를 원합니까? 찾아가십시오. 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그것은 영원히 후회할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회심하지 못했다고 여러분들 스스로 판단하면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교회로 찾아가십시오. 회심하지 못한 영혼은 회심할 때까지 괴롭힘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을 거스르는 삶 자체에 싫증이 나서 아! 그렇구나. 내가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더니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칼로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구나. 거기에서 그치지 말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그 행동을 복음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 저 목사님이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아는데 그렇게 싫어하는 이야기를 저렇게 애절 하는 게 하는 것을 통해서 그가 돈을 벌까? 명예가 올라갈까? 혹시 정말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쯤 생각을 바꾸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러보내셨다는데 나는 이 교회에 나와서 한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들으며 펑펑 울고 주님을 만날 때 나는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마음에 악한 마음을 품었었지.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지. 아직까지도 내 생명을 거두어가지 않으시고 여기서 그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이킬 기회를 나에게 허락하시는구나. 오! 하나님,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크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V. 십자가의 화목을 받아들이는 길
방탕한 길에서 돌아오는 탕자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그의 모든 명예를 회복시키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회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A. 회개함으로써
첫째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으로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나의 죄에 대해서 정당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하나님 편이 아닌 죄의 편이기 때문에 죄는 여러분들의 우군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공정하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래서 지난번에 그 신문에 간증을 쓴 여학생의 간증을 읽으면서 마음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뭐가 뭔지 몰랐지만 하여튼 회심집회에 참석하면서 마음속으로 예배시간 내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나로 하여금 회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비니까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까? 예배 시간 내내 손목시계만 보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예배입니까? 왜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까? 단 한번만이라도 하나님, 나는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천국에 갈 확신이 없습니다. 확신이 있어도 주님이 보장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주에 대해서 정당한 생각을 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예배시간 내내 말입니다. 게슴츠레 졸던 눈을 치켜뜨는 그 졸음과의 싸움 속에서는 회심할 수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습니다. 주위의 사람이 모두 주님을 만나도 여러분들은 회심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욕입니다. 예배를 안 나오면 되잖아요. 막 보는 것입니다. 나와서 하나님을 모욕하든지 막 보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는 죄에 대한 정당한 감정입니다. 이게 슬픔입니다. 하나님, 죄에 대해서 정당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죄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나에게 전해주십시오. 기도하면 슬픔이 밀려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나의 이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결한 몸으로 고난을 당하고 살을 찢고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그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다 찢고 쏟으신 그 죄를 지금 내가 붙들고 있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깊이 참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를 선택한 자기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를 불신하고 미워하는 것만큼 의지적으로 이제는 주님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 속에는 반드시 실제적인 삶에 대한 돌이킴이 있는 것입니다. 본성이 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에 대해서 심오하게 회개하게 될 때 예전에는 자기를 믿으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니까 마지막에 내 영혼이 이렇게 시궁창에 처박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나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율법도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나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은혜로운 초청을 십자가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그냥 예수님이 죽으셨다니까 죽었나보다. 하고 생각하던 사람이 회심의 역사가 그 마음속에 일어나게 될 때 가슴이 깊은 고통이 밀려옵니다.
B. 믿음으로써
둘째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으며,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시고,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이유는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확신 때문에, 나의 이 형벌 받을 죄 때문에 2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의 찢으신 살은 내가 찢겨야 할 살이었고 그가 흘리신 보혈은 내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흘려야 할 피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대화하게 됩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이렇게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왜 내가 대적하고 그분을 현저하게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분을 또 다시 고통을 줌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내가 그렇게 살았을까? 깊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을까? 오랫동안 회심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면서 내가 눈물 흘릴 수없으니까 울 수 있는 목회자들과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지체들을 보내셔서 마음에 아픔처럼 끌어안고 나를 위해 빌게 하셨습니다. 나는 왜 그 많은 세월을 진리를 거슬려 그렇게 살았을까? 깊이,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이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수 있을까? 아무런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머리와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그러면서 만약에 이 세상에 죄인이 나 한 사람 뿐이어도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것이야.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것이야. 그러면서 회개가 확! 나오면서 이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살아야지. 그분만이 나의 신랑이시며, 나의 구주이시며, 영원히 내가 따라야 할 내 친구이시며, 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내 마음에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희망, 그것이 곧 구원의 희망이었습니다. 다 버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의 약속 이외에 어떤 것도 나를 이 근본적인 불행에서 건져낼 수 없다고 믿고 그리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꽉 붙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든다는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 의미를 붙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미와 일치합니다. 그 뜨거운 사랑을 깨닫습니다.
VI. 회심으로 나아오라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 중에 쓰레기 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나의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그리고 나의 모든 존재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주님의 것이고 내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고 내게 맡겨주신 이 모든 소유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주님이 그들을 불러주십니다. 그래서 주님만 꼭 붙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접붙여진 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면서 날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예수의 몸을 태우고 이 어두운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어서 옛날에 나같이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과 원수 맺은 채 그렇게 완고하게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보이는 나의 눈물이 흐르게 하고 그렇게 그 영혼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 나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과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의 그 구속의 은혜를 전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나 같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면 주님의 눈물은 우리의 눈에, 주님의 섬김은 우리의 손에,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진리는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가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주께서 우리를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 부르시는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가운데 펼쳐진 그 하늘나라의 위대한 전망을 인해 한없이 감격합니다. 수많은 승리한 믿음의 성도들의 찬송가 천군과 천사들의 영광스러운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나라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는, 예수 공로 의지하여 그 구원의 약속과 영광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이렇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회개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여러분들이 참 회심의 길로 예수의 복된 지체들이 되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화목과 거룩함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2)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삼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를 중심으로 사역하던 때에 그 부흥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여러 도시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세워진 한 교회라고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골로새 교회는 분명하게 사도 바울의영적인 지도력 아래 있었고 그래서 사도는 여러 차례 이 교회에 많은 권면과 위로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런 섬김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이 골로새서가 쓰여 졌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 처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와 그리고 당시의 유행하던 신사적인 영지주의, 그리고 천사숭배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금욕주의 등등 이단적인 요소를 가진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창조의 근본이시라는 것과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시며 그리고 모든 이 세상을 재창조하심에 있어서 그 처음이 되신다는 사실을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다시 가르쳐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 한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그들에게 강조하여야 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한 중보자가 된 방식과 의미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상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었습니다.
II. 화목을 위한 죽음
성경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원수 된 관계라고 가르친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원수 된 관계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적의로 가득 찬 가운데 태어나는 것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순종하고 사랑하는 마음 대신 주님을 생래적으로 미워하고 우리로 하여금 참 인간의 살길을 가르쳐주신 주님의 뜻에 대적하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 땅에 죄가 들어온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그 모든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며 그래서 결국 그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스스로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트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먼저 찾아오셔서 죄인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당신과 원수 된 인간들을 돌이켜 다시 화목하게 하시는 것은 그런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지 않고는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맨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존재하도록,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존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흙으로 만든 이 인간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 본래의 생명을 유지해나갈 수 없는 것처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그 존재의 자원이 없이는 인간의 영혼이 참 삶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이처럼 영혼에 공급되던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차단하였고 그래서 결국 인간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은 존재로 하나님과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를 가져왔고 자연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이웃 인간들로부터도 소외를 가져왔고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이런 일들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지성과 감정과 모든 의지와 마음의 작용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필요를 알고 화목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화목하게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으니”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여주신 최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바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당신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화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송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일 수 있는 방식으로 가장 현저하게 십자가에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창조주이시고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스스로 무한으로서 유한에 갇히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이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B. 두 종류의 화목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극진한 희생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화목을 우리가 복음 안에서 누리며 하나님과 평화 속에서 살고 이 평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채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참 사람의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화목은 두 종류의 화목으로 나누어집니다. 며칠 전에 저는 평화에 관해서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우리들이 누리는 평화에는 원리적인 평화와 실제적인 평화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변동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평화는 다시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으니 불변적 평화와 가변적 평화입니다. 이 불변적 평화는 곧 원리적인 평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지난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주님을 믿기 전까지는 악한 행실을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었으니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표현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믿게 되었을 때 그리고 예전에 따르던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 그 사이에 오랫동안 막혔던 불화의 담이 무너졌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화목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종류의 평화는 원리적인 평화입니다. 다시 우리의 영적인 상태나 삶의 상황에 따라서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감격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생명과 성령의 법이 저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으니” 라고 말입니다. 영원히 단번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원리적인 평화는 불변적 평화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을 때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자식으로 생각하시고 안 믿고 불순종할 때도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을 자식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러분들은 그분의 새끼입니다. 우리들이 시집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게 되면 자식들이 내 마음에 기쁨을 줄 때도 있고 근심시킬 때도 있고 괴로움을 줄 때도 있습니다. 괴로움을 줄 때 어느 날 집에 돌아가 보니까 이 엄마 아빠가 이제는 자식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그런 일들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옛말에 “고슴도치도 제 새끼 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그 속으로 낳았으니 잘하든 못하든 그 자식은 자기의 새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원리적인 화목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식이 항상 부모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부모와 연합된 감정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화목이 있는데 가변적인 화목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평화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인 평화, 그리고 불변적인 화목은 흔들리고 다시 나누지 않는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 가변적인 평화, 실제적인 평화는 우리가 실제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는가에 의해서 이 평화는 증진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지체가 저와 상담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와야 하는 주일인데 도저히 교회에 갈 힘이 없고 어떻게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집에서 울고 있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하나님이 이제 나를 버리셨다. 나는 이제 아무 희망도 없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라는 그런 반기감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과의 이 가변적인 화목이 거의 고갈된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 반대의 간증도 있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지체가 고백하기를 ‘예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요즘은 제 마음 안에 있습니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만큼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변적인 평화가 최상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경험입니다. 이처럼 이 가변적이 평화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붙어있는가에 따라서 실제적으로 변동되는 종류의 화목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고귀한 육체를 깨트리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주신 것은 죄 가운데 살다가 한번 하나님과 화목한 후에 다시 그 화목을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한번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화목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을 누리며 연합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구원에 관한 균형을 잃은 교리들이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정통주의 신학이라는 그릇된 미명하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모든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어떤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 아름다운 공로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참다운 구원이 아니고 정통에 속해있던 종교개혁자들이 우리에게 전수해준 그런 유산으로서의 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참다운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개뼈다귀 같은 교리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자기의 육체를 찢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들이 보탤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유일한 구원은 이것이니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단번에 영원히 죽어서 우리의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믿음은 믿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믿은 것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우리의 행실로 하신 것이 아니라 중생의 씻음과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단번에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구원의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모든 것에 우리의 일체의 공로를 보탤 수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이 구원은 우리가 이후에 얼마나 성화의 구원에 신실하게 참여하며 사는가에 의해서 그 구원의 위대한 축복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다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애쓰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값없이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이제는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살기를 원하셨던 그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과 끊임없이 분투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분투하고 애쓰지만 우리의 분투나 애씀으로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순종과 믿음 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놀라운 감격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감격의 눈물과 함께 이 성화의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드리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화목을 실제의 삶 속에서 증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복종시키며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뒤를 따라가려고 하는 실제적이고 참된 생활의 노력이 없는 그런 사람의 구원에 대한 찬미는 모두 가식이고 외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위대함을 찬송하지만 부패한 영혼의 상태 때문에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개념으로 들릴 뿐이지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 은혜의 체험을 동반하지 못합니다. 이런 개뼈다귀 같은 교리들이 오늘날 많은 거짓된 사람들에 의해서 정통주의 교리인 것처럼 호도되어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개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 의무도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특권인 것처럼 이런 삶을 주장하는 이 모든 값싼 기독교의 교훈들은 모두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준엄하게 불타버릴 그런 검불과 같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장 헌신적으로 가르쳤던 인물 중에 한사람은 요한 칼빈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서술 속에서 오직 이 사실 하나를 강조하는데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속죄의 공로는 그의 평생의 찬송의 제목이었고 신학의 소명이었습니다. 그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만 높였던 그가 인간의 의무를 강조하는 신명기에 대한 설교를 2.000번 이상이나 강론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는 이 교리를 외친 사람이었지만 이 교리를 참으로 감격으로 외칠 수 있는 사람은 매일매일 순종과 그리고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이 교리에 감격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정말 그들이 전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교리가 아니라 정말 그들에게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눈물이 있는가? 자기를 그 모든 죄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 대한 온전한 찬송과 감격이 있는지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면 죄인인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로 죽음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큰 희생을 치루면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원수 된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켜 놓으셨습니까?
오늘날은 구원에 대한 가벼운 교리들이 매우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모든 인간의 의무들은 자의적으로 내팽겨 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따라서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만 이 구원에 부합한 삶을 살수 있고 이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영혼의 온전한 덕을 소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보석과 같은 교훈들은 자신의 의무를 강요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쉬운 설교, 재미있고 웃기는 설교, 그리고 한판의 파티처럼 어울리다가 돌아가는 예배의 현장입니다.
한주 전에 고신대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이신 유형모 교수님이 저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함께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분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왜 설교가 재미있어야 합니까? 그리고 왜 설교가 쉬워야 합니까? 난 그것을 묻고 싶습니다. 계획은 없었던 것인데 여러분들 특별히 사랑해서 잠깐 시간을 할애할 것이니 정신 차리고 들으십시오. 이 설교는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강설은 여러분들의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독교의 강설은 어느 한 행동을 고쳐놓기 위한 따끔한 충고도 아닙니다. 이 강설은 내가 만난 하나님을 여러분들에게 자랑해서 간증하는 그런 시간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 강설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사상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 사상을 체험하게 하고 그래서 그 사상을 체험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알고 사랑함으로서 자신의 전 존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의 도움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사상과 교훈을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핵심은 쉬운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진지함입니다. 진지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지금은 작년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장난치는 것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예수 믿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가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농담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장난치다가 웃겨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진지해지지 않고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한 시간 내내 설교를 듣고 뱃살을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텅 빈 머리 속에 뭐가 남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삼가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에 와서 기대하는 사람들은 시장판에 나가서 엿장수의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차라리 집에서 폭소 클럽을 보십시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설교가 반드시 다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대부분은 알겠지만 그 한마디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성도들, 그들이 다음주에 와서 하나님의 진리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돌아가겠습니다.
III. 화목케 하신 목적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 고귀한 아들의 육체를 죽이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을까요? 이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합니다.
A. 거룩하게 하기 위함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첫째로 아들의 육체를 죽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거룩’이라는 말은 형용사이지 명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거룩이라는 말로 끝낼 때는 항상 뒤에 함을 붙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은 곧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그러면 이 거룩함이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서는 이것을 ‘코데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카다쉬’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무엇인가 하나로 되어있는 물체를 어떤 목적을 위해서 따로 떼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떼어낸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떼어내어졌을 때 이것은 함께 붙어있던 것들로부터는 분리되어 거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하기어스’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고전 그릭에서 원래 신들과 관련된 사물들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고전에서나 또 기독교의 문맥에서나 신들과 관계가 있는 것,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정의되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원래 이 거룩함은 하나님 한분만이 가지고 계신 것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 거룩함 덕분에 약간의 거룩함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오직 하나님 한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거룩함을 가지신 존재였으니 그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바로 그 거룩함의 본질이요, 영광의 본질이며 미학적으로는 아름다움의 본질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거룩함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나는 편의상 이 거룩함을 본체적 거룩함과 파생적 거룩함으로 나눕니다. 본체적 거룩함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더하여지거나 덜하여질 수 없는 부동의 거룩함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인간과 그리고 사물들도 그 거룩함을 나누어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나 사물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 자신의 본체적 거룩함에서 비롯되는 거룩함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여기에 이런 가구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데 사용된다면 이것을 주방기구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무로 만든 가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구별되어 바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구라고 부릅니다. 용도가 끝나서 만약에 이것이 폐기처분되어 쓰레기 처리장에 가면 그것을 폐품이라고 부르지 성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파생적인 거룩함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 이외에 인간과 모든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거룩함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덕을 입을 때 거룩함을 소유하게 되고 특별히 도덕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파생적 거룩함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어떻게 충실한가에 의해서 이 거룩함이 증진될 수도 있고 쇠퇴될 수도 있는 가변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적 거룩함이 부동의 거룩함이라면 성도가 가지고 있는 이 거룩함은 그 부동의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이행의 거룩함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1.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이 거룩함은 다음에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를 표함하고 있습니다.
a. 존재적 초월성
첫째는 존재적 초월성과 둘째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존재적 초월성이란 하나님 한분이 원래 존재하시는 분이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하나님 때문에 생겨나게 된 피조물임으로 원 존재인 하나님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나머지 모든 피조물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초월성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만든 이 세상에 피조물 속에 당신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어느 정도 보여주시고 창조주의 솜씨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어느 정도 나누어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 어떤 방식으로도 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격차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로 이 초월성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해가 덜 된 것 같아서 여러분들에게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몇 해 전에 제가 캐나다에 집회를 갔습니다. 끝나고 나서 그 교회의 목사님이 저에게 로키 산맥을 보여주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한번에 올라갔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긴 케이블카를 탄 것은 처음입니다. 한 20분 가까이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단번에 해발 3400미터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이제 9월 초였는데 거기에는 얼음이 버적버적하고 그리고 그 산꼭대기의 전망대에 올라갔을 때는 발아래는 3-5천 미터에 이르는 로키의 영봉들이 저 하늘 끝까지 맞닿아 있었는데 그것이 980킬로의 거리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가슴이 탁! 막혀왔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생전 처음 자연 앞에서 내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물이 복 바쳐 나왔습니다.
주 하나님 크시도다
끝없는 영봉들, 전임미답의 그 영봉들이 끝없이 펼쳐져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세월의 억겁(?) 속에 눈이 가득 쌓였습니다. 태고적 신비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 앞에서 80년을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하는 입니다. 그러나 그 끝없는 광대무변한 우주가, 자연이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일천 억 개 내지 이천 억 개의 별이 모인 곳이 은하계라고 합니다. 태양계가 자리하고 있는 우리 은하계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10년의 빛이 달려야 하는 거리라고 합니다. 이런 은혜계의 덩어리가 천억 개나 이천억 개가 모인 곳이 우주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지금도 밤하늘 우주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생겨나고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사라져갑니다. 사라져간 별들은 다시 별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하나의 별들이 태어났다 사라지는데 다 몇 억 년이나 몇 십억 년이 걸리는데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80년 정도를 살다가 죽는데 영혼의 관점에서 하루살이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뭔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 드넓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무한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존재의 격차, 이것이 바로 초월성입니다. 존재론적인 초월성입니다.
b. 도덕적 완전성
두 번째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인간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밖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정해놓으신 창조의 목적입니다. 이게 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이 정하신 창조 목적에 대해서 당신 자신이 모순이 되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정해놓으신 천지창조의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는 영혼의 무한한 힘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이 덕입니다. 그 도와 덕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완전한 합치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정하신 목적에 대해서 선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그런 도덕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존재론적인 초월성과 도덕적인 완전성,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들이 이 두 가지 필수적인 개념들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방식을 이해하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서 이중적 통치를 하십니다. 자연적 통치와 도덕적 통치가 그것입니다. 자연적 통치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그중에는 인간이 발견한 법칙도 있고 발견하지 않은 법칙도 있고 인간이 발견하는 것을 초월해서 역사하는 법칙도 있고 어째든 그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을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의 피조물들을 통치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자연적 통치라고 부르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자연 속에서의 정연한 질서는 하나님의 일관적 자연적 통치가 가져다준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고등의 통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덕적 통치입니다. 이 도덕적 통치는 도덕적 피조물들과 관련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 도덕적 통치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덕적인 통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을 닮은 인간의 형상 안에 주셨던 것입니다. 도덕적 감각과 도덕적 능력이 없이는 도덕적 통치를 도덕적 방식으로 구현해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영혼의 올바른 힘은 무한하고 완전합니다. 이 목적에 모순 되지 않게끔 행사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얘기합니다. 성실하심,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적인통치를 거절하고 어기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인간의 육체는 파멸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 자연적 통치의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건강의 원리와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고 살아가면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속에 들어가면 다 타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불속으로 들어가 죽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는 우리의 영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과 영혼, 이런 내면의 세계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그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울레 리우스 어거스틴의 작품 가운데 ‘솔리리꾸이야’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독백’이라는 작품인데 그 작품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이성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네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인가? 하고 영혼이 묻습니다. 이성이 대답하기를 하나님과 내 영혼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니까 더 알고 싶은 것은 없니? 하니까 나는 아무 것도 더 이상 알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 영혼만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어떤 구도에 대한 사색들이 오늘날 심각하게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싸구려 기독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자, 그럼 좀더 들어가 봅시다. 그럼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있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모순 되지 않고 일관되신 분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인간들이 그 목적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인간들이 있는데 그 인간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는 기계처럼 창조하시지 않고 당신과 흡사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어떤 의지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유의지도 불안전했지만 타락으로 인해서 이것은 완전히 다 선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죽으심으로 이것을 다시 살려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부패성 때문에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사랑하고 진리로 깨끗하게 될 때에 그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한 또렷한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꺾고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치시키는 방식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고 은혜에서 미끄러져 부패하게 됩니다. 누가 그 짓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데,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밤새워서 기도하라고 그러면 차라리 땅을 파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오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설교를 듣는 것은 고문입니다. 두주에 걸쳐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정말 대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출석인원이 50명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언저리에서 그렇게 돌고 있으면 뭐합니까? 그게 자기들 혼내는 설교였습니까? 하나님이 안타까우셔서 당신의 사랑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가 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지,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자기 사랑이 깨트려지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그리고 그쪽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려는 하나님의 통치, 그리고 거기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반응, 이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에 자연적 통치와 도덕적 통치의 목적들이 구현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통치는 도덕적 통치를 위해서 기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 없는데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강퍅한 마음을 갖고 그러면 자꾸 일이 꼬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막 생깁니다. 자연적인 통치들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러면 이상하게 이런 모든 질서들이 순조롭게 돌아가면서 길이 열립니다. 자기가 직접 한 것도 아닌데 그래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구나.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십니다.
2. 거룩하게 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가?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이 존재론적인 초월성과 관련해서는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비참하도록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겸손해지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같은 교부는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가 인간의 사고 속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높은 분이신데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신데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인식론적이 착오가 마음으로 하여금 그 죄를 깊이 붙들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도 자신의 글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는 비결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죄에 대한 공정한 생각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절실하게 계속되는 반복되는 충고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높고 자기는 아주 하찮아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교회의 목사님이 시골에 가서 집회를 하셨는데 교인이 8-9명 모이는 교회인데 거기에 있는 할머니가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기도를 하라고 그랬더니 할머니가 기도를 하는데 이렇게 하더랍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에 대해서 막 생각을 하니까 생각할 게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전봇대 같이 높으신 하나님 돼지 같은 나를 돌아 보사, 그 동리가 수십 년 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시골동리였는데 최근에 전봇대가 세워졌습니다. 동리에서 그것만큼 높은 곳은 없습니다. 할머니 생각하기에 어떻게 이렇게 막대기가 높을까? 야, 정말 높다. 신기하다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하고 나니까 그 하나님의 높으심을 얘기해야겠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생각이 났는데 야, 그 높은 전봇대, 전봇대 같이 높으신 하나님, 돼지 같은 나를 돌아 보사, 그게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초월성을 경험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죽는다는 것이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의 영광과 부귀, 그리고 영화, 명예, 그리고 돈 막 이랬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임금들이 꽃으로 꾸몄을
저 황금의 면류관은 광채를 잃겠네
그래서 몇 달 전인가 여기서 설교를 한 것 같은데 하도 많이 해서 했는가 안 했는가 모르는데 6-7살 된 유치부 아이가 회심을 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좋은 TV를 사다가 놓고 임마, 어때? 아빠가 능력이 있으니까 이렇게 좋은 것도 사다놓고 좋지. 그랬더니 이 6살짜리 꼬마가 그렇지만 아빠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라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끊임없는 성화의 생활은 인식론적인측면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빛을 얼마나 많이 받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그래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 완전성과 관련지어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만 사랑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나도 의롭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몰랐을 때는 나 자신을 굉장히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면서 그분께로부터 찬란한 그 도덕적 완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도덕적 완전하심이 존재적 초월성과 함께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성합니다. 미학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하심은 눈부신 찬란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 비추어오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가 이제껏 자랑하던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이,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의로운 삶,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신 이런 것들이 차마 자비와 사랑과 의로움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하찮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게 바로 거룩의 경험입니다. 그때 나타나는 반응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하게까지 미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요소가 죄와 인간으로서의 한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재론적 한계와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결함입니다. 이 두개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실패한 베드로에게 뭐라고 그랬습니까? 야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던졌더니 막 뜯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그러면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하면서 예수님 우리 반씩 나눕시다. 그래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자매가 아이를 무릎에 놓고 원제의(?) 교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그 선악과를 따먹고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멸망하게 되었단다. 그랬더니 한 3-4살 된 아이가 그러는데 엄마, 그것은 당연하잖아. 뭐가?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나누어먹어야지. 혼자 먹으니까 그렇게 되었지. 어른들은 그것을 아무리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애는 기발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예수님이 언제 너 죄짓지. 나쁜 놈, 너 고기 잡으러 오기 전에 뭔 짓을 했어, 예수님이 한번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 말씀이 한 말씀 다입니다. 그랬더니 고기를 잔뜩 잡은 다음에 이 사람은 고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언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까? 예수님의 당시의 옷차림새가 어땠을까요? 황금으로 수를 놓은 옷을 입고 폼 잡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냥 성인의 옷차림새였습니다. 그런데 그 초라한 옷차림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한번도 죄인이라고 말씀해주지 않으셨는데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고백을 하면 흐느끼는 심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함의 발견 때문입니다. 그 거룩함의 빛이 확! 비추게 되었을 때 베드로도 제법 자비를 베풀며 올바르게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모두 쓰레기와 같은 것이었고 오히려 그 찬란한 빛은 베드로 속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많은 허물과 도덕적인 불안전한 죄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경험하게 될 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는 항상 참회의 영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진지한 깨달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그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이 혼적인 탄원이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거룩함의 경험을 통해서 본성 깊이 배어있는 하나님을 거슬려 살려고 하는 이 부패한 옛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게 성화입니다. 우리는 단지 성령께 순종하는 도구로서 그 의무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서 우리를 거기에서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B. 온전하게 하심
그래서 우리가 가진 이 파생적인 거룩함이 하나님의 본체적 거룩함에 덕을 입어서 더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이행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그렇게 이행하게 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구나. 만물 위에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정말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어서 우리는 이 거룩하심과 함께 또 하나의 목적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1. 흠이 없음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이렇게 나누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두 번째 나오는 이것이 첫 번째 것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사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 첫째의 요소가 흠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흠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명백하게 구약의 제사의 문맥에서 불러들인 표현입니다. 즉 사도가 이 표현을 사용할 때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성전에서 이루어진 헌제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로 바칠 때 그 제물이 흠이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양 한 마리를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할 때도 아마 흠이 없는 것을 찾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보면 다리를 절거나 상처를 입어서 눈이 찢어진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혹은 또 그렇지 않지만 심하게 털이 오염 되어서 똥이 묻는다든지 뭔가 묻어서 그렇게 더러운 것도 제사에 바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온전한 것을 찾자 하는 이 노력은 평생의 많은 주의 깊음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당신이 직접 드실 것도 아니면서 인간에게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의 완전성에 관해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완전성과 지존하심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그래서 계속 제물을 고르는 과정을 통해서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흠이 없고 완전하신 분인지를 생각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종류의 제사를 받으셔야 하는 분이라고 하는 인식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인간에게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흠 없는 것을 찾는다, 찾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찾는 노력을 촉진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오늘 지나가다가 쇼핑 센타에서 이 옷을 하나 사 입었습니다. 얼마를 주고 사 입었는데 이게 굉장히 만족스러워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자기도 옷을 사 입었다고 그러는데 나하고 똑같은 돈을 주었는데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예쁜 옷을 사 입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이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흠이 없는 것을 찾았는데 저기 더 깨끗하고 좋은 것이 있어. 그러면 그것 앞에서 이것은 흠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헌제자로 하여금 보다 완전한 제물을 찾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경배를 받으실 최고의 위치에 계실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자신이 그런 제사를 받기에 합당한 완전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헌제자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옛날에 가르쳐준 내용이 인간 안에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결코 인간은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가르쳤는데 오늘 여기에 보면 흠이 없는 자로 세운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이런 부패성을 가지고 인간이 흠이 없는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게 가능하기나 합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은 실은 내용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논리에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주인님, 어디로 모실까요? 저 북두칠성을 계속 따라가면 된다. 북두칠성을 따라 가라. 주인은 배에서 한참 잤습니다. 한참 자는데 주인님, 하면서 깨웁니다. 북두칠성을 지났는가, 봅니다. 안 보입니다. 주인이 북두칠성을 향하여 가거라. 그 애기는 배를 몰다가 바다 위에 떠서 우주공간을 향해 북두칠성에다 이 배를 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배를 따라서 가면 그것을 표적으로 하고 갈 때 지나가게 되는 어느 지점이 목표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목표인 것처럼 지시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따지면 성경에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 받습니까? 우리 구역에서 예수를 잘 믿는 언니도 본받기 힘든데, 아니 예수님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어떻게 본받습니까?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열심히 하면 제 삼, 제 사의 예수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까? 그래서 20년 전에는 예수를 본받으라고 말했지만 요즘은 박아무개 자매를 본받으면 충분하다고 이렇게 말씀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문학을 그렇게 모릅니까? 그런 의도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흠 없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될 때 그런 중단 없는 노력이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되려는 우리들을 계속 제자리로 불러들여서 그 한 길을 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안에서 인간의 영혼은 안전하고 인생은 행복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본받는 흠 없이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흠 없이 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있는 흠 없이 라고 하는 이것이 제사의 문맥에 보면 외형적인 짐승의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에게는 마음이 없으니까 마음까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양을 내게 바치라고 그러면 무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흠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그것이 이 성화의 문맥에서는 나 자신의 존재와 성품에 관련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온전함을 목표로 놓고 우리들이 흠 없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면 이 일에 있어서 상당한 진전을 이룬 사람도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왜 아직까지도 완전인은 아니니까. 만약에 비슷한 것을 목표로 정해났으면 도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도달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미 이루었다. 온전히 붙들었다.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자랑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목표는 고정되고 인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는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주 쉽게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모든 공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까지 나오고 전도 백 명 하면 온전히 이룬 것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미친 듯이 그때까지만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달성하면 뭐 할 것입니까? 부패하는 것입니다. 뭐 할일이 있겠습니까? 없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목표를 정해놓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가깝게 다가간 사람들도 자신의 끊임없는 결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설교할 때 진짜 죄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온전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애를 쓰려고 할 때 그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자기 안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너무나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끊임없는 죄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하려는 자기 사랑과 그리고 교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영혼은 옛사람과 거듭난 새 본성 사이에서 거룩한 팬션을 경험합니다. 긴장감을 경험합니다. 두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때 자기의 심령을 찌르는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욕망을 따라 살려고 했던 자기에 대한 미움과 혐오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불신하는 것만큼 그리스도 예수를 꽉 붙들고 살려고 하는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의존의 마음이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이 하나님의 의지를 전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진리의 빛 아래서 자신의 삶의 뿌리를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고 어떤 실패를 계속해서 익숙해져갈 때 나로 하여금 이것들을 계속해서 양산해내는 그 뿌리는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파헤치려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자신의 인격과 본성 안에 있는 수많은 점들을, 죄의 그 더러운 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흠들이 어떻게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물로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다 비누를 발라서 씻는다고 그래서 미움이 사라지겠습니까? 무엇으로 고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진리와 성령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이 생겨납니다. 진리의 찬란한 빛, 그리고 자신의 심령을 깊이 들여다보는 통찰,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삶을 엉클어트리는 이 실패하는 행동들을 양산해내는 자기 속에 있는 기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발견이고 죄의 본성과의 싸움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것들이 쇄신되는 이 복음의 신기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깊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치는 헌신과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것들이 새롭게 되어져갑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흠이 없어져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하나님의 그 육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신 목적을 따라서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과의 화목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한번 구원을 받고 제 멋대로 사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과의 화목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책망할 것이 없음
두 번째는 책망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실제의 삶의 실천을 통해서 이번에는 거꾸로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지니” 가을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를 보면서 그 나무가 진짜 감나무인지 보자고 땅을 파고 감나무를 뒤집어서 뿌리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의심할 수 없는 필연적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양산해낸 모든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행동과 죄,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살고 행동하는 이 모든 하나님 없는 삶의 행동들을 단순히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교훈과 책망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보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자신 안에 있는 이 부패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온전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결점을 발견해내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고 격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고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모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그런 행실을 하게 되는 것, 그것과 내적인 본성과 아주 필연적이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아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이것은 존재와 성품입니다. “모든 선함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케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에는 실제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일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전체를 향한 목적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고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성경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계시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창조의 목적과 성경의 목적이 일치하고 성경의 목적과 구원의 목적은 일치합니다.
IV.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당연히 사람답게 살고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며 살아가기에 합당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성령님의 은혜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성품과 존재가 거룩해지고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모든 삶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이고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할 수없고, 말씀에 은혜가 없고,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대한 사랑도 없고, 그리고 지체들을 사랑할 수도 없는 망가진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존재 의미는 단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단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아있게 하신 목적을 가지고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성화의 길이 고달프기 때문에 집어치우고 그리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까? 광야에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할 때보다 더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모든 부패한 신자들의 삶의 처지는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상태로부터 부패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정확하게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천천히 흐르는 강 위를 거슬려 오르기 위해서 부단히 헤엄을 칩니다.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 앞으로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힘들어서 몸부림을 그쳤습니다. 그러면 떠밀려서 내려갑니다.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주님과 화목을 유지하며 순종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 거룩한 성화의 노력이 없이는 우리는 뒤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는 가장 최상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그리스도의 육체를 깨트려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평화의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를 죽여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가슴에 깊이 손을 얹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내가 오늘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가? 그리고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나를 고쳐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가 성령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정말 예수께서 육체로 죽으심으로서 이루신 그 실제적인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행복의 비결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I. 본문해설
욥은 의로우면서 고난을 당한 사람의 대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로움과 순전함을 사단에게까지 자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통해서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면서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존재의 질적인 차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보다 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에게 세 친구 중 한사람인 엘리바스가 욥에게 훈계하는 장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욥의 친구가 훈계한 이야기들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욥이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판단을 당한 것은 그릇된 판단이었지만 그들이 행한 많은 교훈과 충고는 욥에게는 적실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욥과 같은 성정을 지닌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는 적실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엘리바스가 말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는 이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충분히 우리에게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런 행복에 대한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간명하게 그 복의 비결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임하리라” 그런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나면 한참 있다가 평안하고 평안해지면 몇 년 있다가 복을 받게 되는 식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평면상의 함께 있는 행복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행복이라고 하는 많은 논의의 단면도를 보여주는 것과 말할 수 있습니다.
II. 복을 원하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하기 위한 욕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은 거의 본성적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그들이 행복과 관련은 그들의 행동이나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자신은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부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린 것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A. 육체의 상태
우리의 육체가 행복한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고통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그의 몸이 건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만약에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면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면 육체의 고통이 없을 것이지만 결국은 내버려두면 죽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육신의 심각한 질병이 있는 사람은 그 몸이 병든 상태로 평안한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배를 갈라내고 장기를 떼어내고 꿰매고 약을 바르고 주사를 놓고 하는 이 모든 치료의 과정이 그의 몸에 고통을 줄지라도 오히려 그렇게 처치 받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선행되어야지만 그 사람의 만족이 참된 행복을 위한 만족이 아닌지도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묻기 전에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물어야지만 이에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이 사람 저 사람 권위 없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맨 처음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보면 인간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각 구성요소가 좋음의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것으로서 인간은 피할 수 없이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처음 창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가 생명이 된지라 말입니다. 이 생령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네페쉬 하야’입니다. 그리고 이 네페쉬 하야는 직역을 하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라고 할 때 바로 그 인간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흙에서 빚어진 육체와 그리고 그 속에 불어넣어진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구나 하는 두 요소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영혼과 육체만 있겠습니까. 마음도 있고, 정신도 있고, 사상도 있고 많은 작용들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을 둘로만 나눌 수 있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상과 실제의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제가 쉬운 비유를 오늘 아침에 만들어냈습니다. 자, 여기에 전깃줄이 하나 있고 여기에 전깃줄이 하나 있습니다. 피복을 벗겨서 구리선이 나오게 했고 한쪽은 음극이고 양극입니다. 이것을 두개를 갖다가 붙이면 부시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불꽃이 튈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의 전선의 그 피복을 벗기고 칼로 전선을 아무리 잘라내 봐도 그 속에 불꽃이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불꽃이 없습니다. 두개는 진짜 전선이지만 이 전선이 맞닿을 때 합선이 되면서 그 속에서 불꽃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이렇게 함께 만나게 될 때 여기에서 인간의 마음, 정신, 사상 이런 모든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들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 감성적인 기능들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혼이 없이 육체만 있을 때도 이런 마음, 정신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육체가 사라졌을 때도 이 영혼만 남아있는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의 존재의 행복을 유추하게 만드는 모든 정신적인 기관들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들이 육체가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영혼이 좋음의 상태를 각각 유지해서 결합되어있을 때 그의 마음도 좋은 마음이 될 것이고 그의 정신도 좋은 정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정신과 마음에 대한 성경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인간이 진정을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그런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마음인데 그렇다면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이제 우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실제론적으로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혼과 육체가 각각 좋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존재는 완전한 존재가 될 것이고 인간이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만큼 그가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선 육체의 상태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육체가 좋음의 상태를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맨 처음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셨지만 그 흙인 육체가 영혼과 함께 만나면서 이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이런 물리적인 실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맨 처음 인간이 창조될 때 이 육체는 사멸한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멸할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멸은 죽음의 기운이 계속 침투하는 그러면서 생명이 끝없이 연장되는 그런 종류의 불안전함 속에서의 연속적인 그 불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육체가 가장 완전에 도달한 상태에서 창조되었고 그 상태를 영원히 연속할 수 있도록 그렇게 특별히 창조된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완전함으로부터 멀어져 그 선함으로부터 부패에 의해 잠식되어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으니 하나님의 덕을 입으면 그렇게 유한한 피조물도 부패되지 않고 선함을 유지할 수 있고 또 부패를 부패에 잠식되었더라도 다시 그 완전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육체가 어떻게 완전함을 유지하게 되는지를 생각해보십시다. 맨 처음 창조시에는 하나님이 익숙한 어린아이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지 아니하시고 이미 성숙한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는 더 자람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즉 창조되었다면 3-4살도 아니고 16-17세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완전히 다 자란 그런 상태로 완전한 것을 가진 채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성숙이 필요 없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 그런 지점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가 들어온 다음에 우리의 인간의 육체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 태어날 때는 갓난아이로 태어납니다. 아직 모자랍니다. 그래서 많은 외국어에서 이 어린이, 아이들이 여성 명사도 아니고 남성 명사도 아닌 중성명사로 쓰여 진다는 것을 여러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독일에서도 이 어린아이를 나타내는 말이 중성명사가 아닙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아직은 성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성장합니다. 이것은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서 완전에 달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게 18-19살이나 아니면 20살 좀 더디 늦으면 23살 이때쯤 될 것입니다. 어째든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정점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정점은 잠깐이고 정점에 도달하자마다 그 완전성을 상실하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한번 제가 읽은 잡지에서는 어느 의사가 말하기를 여성의 경우 23살부터 늙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쩜 더 빨리 늙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늙기 시작합니다. 늙는 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반대편에 있는 생과 반대되는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젊고 자원이 많고 건강할 때는 죽음의 기운이 약간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자원의 힘이 떨어질 때는 더 많은 죽음의 기운들이 휘몰아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생명이 죽음에게 삼킨바 되어서 우리의 육체는 사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이런 완전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늙고 병들고 아직 미숙하고 그런 상태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육체가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육체 자체가 땅에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더위와 추위를피할 수 있는 그리고 상처받는 것, 그리고 더움과 추위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는 의복, 그 다음에 거리를 둔 두 지점 사이를 오고가게 할 수 있는 교통수단,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활력을 위해 잘 준비된 음식, 이런 것들은 바로 지상의 자원들이고 어디서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돈만 있으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적기에 우리의 육체에 공급될 때 우리의 육체는 좋은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육체는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 있던 부목사님 한분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하도 꿰제제해 보여서 양복을 하나 사주러 갔습니다. 기왕 사주었다는 소리 듣는 것 강남에서 사주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영광을 받을 것 같아서 그래서 평생 안나가는 현대백화점까지 갔습니다. 가보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실 여기는 시골에 가깝습니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한 15킬로 와야지 되는 이런 시골입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사람들을 만나면 시골 목회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시골입니다. 우리 모두 시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보니까 정말 그야말로 서울 사람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이 왔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왔는데 얼굴의 빛깔이 시골에서 오는 그런 빛이 아닙니다. 왠지 시골은 그저 백화점도 후줄근하고 그저 사람들도 만나면 푸석푸석하고 그런데 거기는 정말 죽음의 기운이 상당히 스며들어올 만한 나이인데도 탱탱합니다. 그리고 기름이 줄줄 흐릅니다. 야, 정말 사람들이 틀립니다. 왜 그렇게 틀릴까요? 예. 적기에 좋은 자원을 육체를 위해서 넉넉히 공급해주었기 때문에 육체가 좀더 오래도록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인간의 존재가 행복해지는 하나의 비결입니다. 요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그 악한 본성 때문에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체의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가 기준인가 하면 영혼과 정신의 올바른 힘이 그들에게 무엇을 명령할 때 그것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되어있으면 육체는 충분히 좋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체의 좋음이라고 하는 기준은 영혼과 정신이 올바른 힘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지시할 때 그것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수행하는데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해낼 수 있으면 그 정도의 좋음이면 육체의 좋음은 충분한 좋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육체가 그런 정도로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기한 일을 도모하게 되는데 그것은 육체의 본분에 벗어나는 일을 육체로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욕망을 만들어내서 이번에는 자기를 다스리는 올바른 영혼의 힘과 정신과는 상관이 없이 육체 자신을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기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과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타락들입니다.
많은 욕망들은 품고 있으면 그 자체가 그에게 불편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 욕망에 순종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다시 그의 마음과 정신은 불편함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자유를 위해서 더더욱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거기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더 큰 욕망들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어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속박으로 데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이 육체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육체가 육체의 정신과 영혼과는 상관없이 육체 자체로 만족을 이루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경향성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육체이든지 영혼이든지 각각 자기가 정해준 자리에서 그 질서를 지키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거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이 완전성을 갖게 될 때 그때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B. 영혼의 상태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이제 이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육체는 올바른 영혼의 힘과 정신에 의해서 명령받은 바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좋음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것이 행복을 위해 충분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합니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눈이 빨개서 돈을 벌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승부가 어려울 때는 비겁한 방법을 써서라도 남의 물질을 탈취하고 그리고 강탈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두 이 육체는 좋음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지도할 수 있는 영혼의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혼은 그러면 어떻게 해서 좋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이 영혼을 창조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이것은 창조의 화려점정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 창조를 가장 완전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자신에게 있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존재의 정도는 이 영혼을 얼마나 온전히 가지고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바로 이 영혼이 얼마나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인간 존재의 가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모두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볼 때는 영혼의 좋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가치는 이 세상에 있는 제물의 소유나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재능의 유무나 젊고늙음의 여부가 아닌 영혼의 아름다운 정도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창조하신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으니 첫째는 하나님과 관련해서입니다. 하나님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고 그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 필요했고 그런 영을 주심으로서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통하면서 인간에게 있는 어떤 생각과 그 무엇이 하나님께로 들어가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있는 그 어떤 생각과 그 무엇이, 특별히 생명이 인간에게 흘러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인간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 마음에 있는 창조의 디자인을 인간도 갖게 하시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물들이 정의될 때 당신이 느낄 행복감들을 인간도 느끼게 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야 했습니다. 당신이 볼 때 아름다운 것들을 인간도 보고 아름답게 느끼게 하셔야지 만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봉행하며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서 당신과 교통하고 당신을 닮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밖의 사물과 관련해서입니다. 인간 존재 밖의 사물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밖의 존재하는 사물들을 보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꽃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에 따라서 천연색으로 볼 수 있는 동물들도 있고 인간과는 달리 흑백으로밖에 볼 수 없는 동물도 있지만 모든 동물들이 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보는 그것과 감각적으로는 거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이 감각된 사물들을 지각하고 또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고 사물 배후에 있는 사물의 의미를 깨닫는 그런 기능을 주시기 위해서 영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주셔야지 만 육체와 만남으로서 정신과 그리고 마음을 만들어내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사물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 사물의 의미까지 깨닫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인간이 비로소 사물 배후에 있는 사물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눈에 보이는 많은 사물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의미를 위해서 연결되고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간파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능력을 인간이 소유해야지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사물에 탐닉해서 본래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주셔서 자기 존재 밖에 있는 사물들을 온전하게 인식하고 그것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용하여서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존재와 관련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혼을 주신 것은 이 영혼을 주심으로서 이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보이는 사물 속에서 성취해나가는 사상과 생각, 사고, 그리고 감정, 의지 이런 등등의 많은 작용들을 정신세계 속에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자신 밖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사용하여 보이지 않는 자기를 초월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에 부합하도록 그렇게 작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신작용이 필요했고 이것은 영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이런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혼이 건강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육체가 건강한 상태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위한 이 세상의 자원이 어떻게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삼겹살을 먹으면 삼겹살이 우리의 혈관을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겹살이든지 오겹살이든지 먹고 나면 이것들이 이 속에서 잘잘하게 부서지고 소화가 됩니다. 찌꺼기는 변으로 나오지만 나머지 양분들은 소화가 되어서 온 몸속에 퍼집니다. 그리고 피가 되고 그리고 어떤 것들은 그것들을 통해서 세포를 더 증식시켜서 우리의 몸을 키웁니다. 이제 노동과 늙음을 통해서 계속 소멸되고 있는 세포의 수를 충족시키는 작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로 들어간 것은 우리의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노폐물을 끌어내고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노폐물까지 끌고 들어가서 우리의 장기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모든 찌꺼기들을 쏟아내고 그것들이 소변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걸러진 그 피는 다시 우리의 장기 속에서 산소를 공급받아 우리의 온 몸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결국 평생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휘도는 피와 그 다음에 증식되는 세포의 수와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돌게 됨으로서 육체에 가져다주는 효과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육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적당하게 먹지 않고 우리의 육체의 자원을 낭비하게 되면 이 생명이 결핍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과 정신의 온전한 지시를 올바르게 이 육체가 봉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육체에 이처럼 생명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도 온전한 상태를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육체의 생명은 얼마든지 우리들이 재활을 주고 구입하여 우리의 몸속에 넣거나 우리의 몸을 보호하는 생겨나거나 유지되지만 영적인 생명은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재활을 구입할 수 있는 모든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육적인 것들이지 영적인 것들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고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서점에 가면 돈 주고 성경을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기를 이것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생명의 양식이 아닙니다. 베고 자면 베게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먹고 우리의 정신이 소화했을 때 생명이 되는 것이지 성경책 위에 누워서 잠을 자본들 허리가 배이는 일 말고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이처럼 이 세상에서 돈 주고 살수 있는 자원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지혜로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꼭 그렇게 영적으로 생명을 받지 않아도 음악을 듣거나, 혹은 아름다운 게임에 빠지거나, 친한 친구를 만나거나, 가고 싶은 장소에 이동해도 우리의 이 내면의 세계와 정신세계는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오래간만에 만나거나, 꿈에도 가보고 싶은 장소에 여러분들이 가게 될 때 잠시 여러분의 정신이 새로워지고 기쁨을 가득차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이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을 바라보는데서 일어나는 변정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마음은 비록 심각하게 이 영혼이 생명을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어떤 종류의 살아있는 작용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변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존재에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영혼에 이제 생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아름다운 산이나 좋은 풍경을 바라볼 때 변정을 느끼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생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에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생명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한 자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에서도 구할 수 있는데 영혼을 위한 자원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 안에도 생명이 있다고 그러셨는데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생명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진리를 통해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영혼이 그런 생명을 계속 누리고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될까요? 육체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육체가 뭐 좋은 것을 잘 먹고 따뜻한 곳에 잤다고 할지라도 그 힘은 불과 하루나 이틀밖에 축적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이 건강이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육체도 지속적인 공급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지속적인 공급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공급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 생명이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되는 것, 그래서 그 연결된 통로를 통해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부여받으면서 영혼이 좋음을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이런 영생을 박탈당할 때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 생명이신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그 생명으로 완전하고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때 두 요소가 모두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그때에 인간 존재는 완전성을 소유하게 되고 이 안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혼과 육체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조화와 그리고 이상적인 결합의 관계가 생겨나게 되고 그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단순한 인간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합니다. 심각한 무지와 그리고 어리석음 속에서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행하는데 잠시는 그것이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의 영혼을 노예처럼 속박하는 죄의 속박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죄는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를 고립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기를 고립시키고,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고립시키고, 마지막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을 고립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고리 무원한 처지가 되게 합니다. 인간이 그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면 자기 안에는 스스로 자원을 생산해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포위된 성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아사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기진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이런 육체의 이치를 알게 된다면 우리들이 올바른 행복을 찾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들은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영혼과 육체의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III. 행복의 비결
그러면 오늘 성경에서는 그런 행복의 비결이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니라”고 말입니다.
A. 행복의 상태: 평안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요소를 만나게 되는데 인간의 평안과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평안입니다. 이 참으로 행복한 상태는 평안의 상태입니다. 이 평안의 히브리말은 ‘샬롬’입니다. 이 샬롬은 바로 구약에서 셀렘이라고 하는 화목제와 동일한 어근입니다. 이 샬롬은 평화는 평화인데 하나님 없이 인간들의 노력과 타협에서 성취되는 그런 평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샬롬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사이에서 이룩되는 총체적인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기초로 이루어진 정의의 질서 안에서 인간 각각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툼이 없고 사랑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 것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샬롬이 회복된 상태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그 사람들의 주식이 빵입니다. 빵 가게에서 통으로 동그랗게 구은 빵을 사고 싶으면 텐리 샬롬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나에게 주십시오. 샬롬을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통짜로 된 빵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너무 많으면 텐리 하찌 라고 말하면 나에게 반쪽을 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샬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흠집이 나지 않는 온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wholeness 온전하다는 wholeness는 곧 그것이 holiness 즉 거룩함과 동일한 뜻입니다. 그래서 참된 거룩함은 이 샬롬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다운 평화에서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거룩함도 거기에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참된 행복을 그 본질이 하나님과의 평화, 그 평화에서 오는 사람들과의 완전한 평화가 바로 행복의 본질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이 온전한 평안의 상태, 이 상태는 바로 영혼과육체가 각각 가장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 둘 사이에 완전한 조화와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서 조화와 그리고 절제, 균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조화로운 상태 안에서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와 거기에 합당한 작용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 절제를 가지고 그리고 둘의 힘의 균형이 온전히 이루어진 균정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의 작은 우주로서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동시에 내포하게 되고 그 아름다움과 완전함 속에서 인간은 가장 탁월하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밖에서 어떤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욕망에 노예가 되고 자신의 참된 존재의 자리에서 이탈하게 되고 그리고 혼돈된 사랑의 질서는 바뀐 사물의 질서를 불러들여서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이런 조화와 그리고 절제와 균정을 유지한 상태에서 참 사람다운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무한한 지혜와 그리고 사랑으로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 안에는 수많은 삶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이 들어있는데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들은 영혼과 육체가 끊임없이 이탈하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며 인간 존재 전체가 좋음을 유지하여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늘 말씀드리지만 이 기독교 신앙은 인류 최고의 철학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방 사람들, 그리고 이교의 종교가들이 도달하려고 했던 그 최고의 행복의 상태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적실하고 권위 있는 답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바로 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이방의 그 헛된 종교와 그리고 대책이 없는 쓸모없는 철학들을 버리고 바로 이 복음의 빛 아래로 들어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과 말씀의 빛 아래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에서 영혼은(?)볼 때는 평안이 아닌데 그게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번 시내에 나갔다가 여름이기는 하지만 길바닥에 누워서 대자로 편안하게 잠을 자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는데 한쪽에는 신문인가 이런 것을 들고 있고 그리고 배는 반쯤은 내놓고 그리고 혁대는 풀어놓은 채 길거리에서 런닝 차림으로 실컷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깃들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은 편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객관적인 기준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거기 그렇게 누워있는 것을 편안을 느낄 수없습니다. 무엇인가 이 몸과 정신의 구조가 망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 따라서 생각을 해야지만 우리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상태에서도 평안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거짓된 평화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지성의 명정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의 존재 중에서 영혼의 기능인 이 지성은 바로 우리 모든 인생을 배라고 표현한다면 우리의 배를 인도하는 뱃머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이 이 쓸데없는 것에 탐닉하고 빠지는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하겠는데 여러분들 중에 게임 같은 것에 빠져서 심각하게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여러분들만 경험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벌써 한 15년 전에 제가 외국에 나갔을 때 우리 후배 형제 하나가 나를 작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관에서 자고 나는 내일을 보고 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서 저를 자기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까 그 사람이 기도하는 공부방에서 나를 재웠습니다. 일어나보니까 컴퓨터 앞에 노란메모지 하나가 붙어있는데 거기에 나의 결심, 게임은 절대 하지 말자. 그 사람이 나이 많이 든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그게 극복하게 힘들었으면 거기에다 쪽지를 써 붙여서 올해 나의 결심, 게임은 하지 말자. 그 이야기는 가끔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박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여러분들이 그렇게 게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은 뭐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매우 안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데 빠지고 나면 이 지성이 에너지가 떨어져서 올바른 일을 위해서 헌신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게임할 때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정성을 다하여 승리를 쟁취하고 인간 존재를 행복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는 무엇을 판단할 때는 기력이 떨어져서 아무렇게나 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일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이렇게 아무리 사람이 보기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뭔가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에 지성이 종사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직 지성은 진리를 찾는 일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에도 정신이 벅찹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그저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그렇게 지성을 쓸데없는 진창에 굴리고 사는 것은 매우 불행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간스포츠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암기하듯이 읽는 것, 이런 것도 전부다 지성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에 깊이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시간이 되면 그의 영혼에 침이 흐르는 것, 이 모두 지성을 다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성은 하나님이 그런 것을 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분별해서 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성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마땅히 헌신하게 해야지 됩니다.
이번에 열린신문에 실린 간증을 어제 밤에 읽으면서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자매의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성경공부 시간 때마다 자기가 정말 제대로 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떠들며 얘기하는데 전도사님이 그러시는데 한참 듣더니 ‘자매님은 참 생각이 많으시군요.’ 한마디 딱 하는데 그 순간에 자기의 영혼 속에서 거울이 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러면서 나의 이 많은 생각은 진리와는 생각이 없는 생각들이다. 그리고는 이제 지성적으로 깨어져서 어떻게 자신이 진리를 발견하고 구도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묘사한 간증이었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십시오.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일을 위해서 지성이 헌신해야지 됩니다.
이 영혼의 작용인 지성이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혼 그 자체가 진리에 영향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진리를 우리에게 지성에 전달해주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역사를 전달해주시는 또한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이 진리를 소유하게 될 때 그때 이제 이 속에서 그 진리로 말미암아서 이 지성은 명정한 기능을 갖게 되고 그때 사물의 배후에 있는 모든 의미들을 올바로 꿰뚫어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으로 보면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은 가히 미친 세상입니다. 그리고 미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정신 빠진 삶입니다. 어쩜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를 불행하게 할일들만 골라서 하면서 그것이 인생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주장하는지 참 우스운 일입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발전된 새로운 생각의 세계 속으로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통해 들어가는 것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혹은 도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을 더욱더 소유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평화가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평화를 다 박살내고 낭비하면서 무엇인가 이 세상에 있는 정신적인 쾌락과 그리고 육체적인 만족을 위해서 많은 물질과 재화들을 소유함으로서 그것들을 허비함으로서 행복에 도달해보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어리석기 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비늘을 벗겨주기 위해서 복음을 들고 이 세상에 파송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그런 하나님과의 평안을 상실한 채로 그 욕망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만약에 우리들이 그 악순환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의 육체의 고단함과 영혼의 고통을 이루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세상의 마지막 현자들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평안을 위해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목을 통해 이룩된 평안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이것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부활하고 나신 다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제일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인간의 존재를 행복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평안을 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고 싶어 하는 평안은 이것이니 곧 당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화목에서 생겨나는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B. 하나님과의 화목
그래서 오늘 성경은 두 번째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고 말합니다. 이 평안이 인간존재의 행복을 위한 필수적인 본질이라면 아마 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 본질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지혜 있는 어떤 분은 저의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렇지만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충만한 사람들도 육체의 심각한 자원의 결핍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육체는 나쁜 상태가 아닙니까? 그의 영혼은 좋은 상태라도 육체가 여전히 나쁜 상태에 있는데 어떻게 그가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결론은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 가운데 있는 신자라도 육체를 위한 자원이 결핍하면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라고 개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반론함으로서 성경의 진리를 옹호할 수 있습니다. 이론은 이것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그런 육체의 자원이 잘 공급되어서 육체가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그리고 영혼도 좋음의 상태를 유지할 때 인간존재는 가장 잘 발휘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이것들이 좀 다르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제 이 적용되는 방식은 육체의 어떤 결핍들이 있을 때 영혼의 완전함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를 완전하게 함으로서 행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즉 육체가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영혼이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각각 인간존재가 행복해지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육체가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영혼이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논증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전에는 하나님도 몰랐고 하나님과의 평화도 몰랐기 때문에 육체만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좋음에 머물지 않고 육체는 향락에 빠져서 인간의 영혼과 마음도 더럽히게 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좋음의 상태를 공급되는 영생을 통해서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시시때때로 육체가 자원의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취업이 되지 않거나 사업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거나 육체의 질병이 있어서 이 자원이 모자라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결함의 상태에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이런 불안전을 통해서 영혼이 오히려 그 불안전함 때문에 하나님께 그 온전함을 더 많이 호소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된다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호소하는 과정을 통해서 불안전한 영혼은 보다 더 완전해지도록 변화될 것이며 그런 상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육체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주는 그 과정 자체를 영혼이 더 온전해지는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육체에 무엇인가 결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 사람 존재 전체가 불행해지도록 뒤흔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스며들어오고 있는 육체의 죽음의 기운 때문에 생명이신 하나님을 더 많이 붙들고 더 많이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면 사멸할 육체가 잠시 결함이 있는 것과 사멸하지 않을 영혼이 온전한 아름다움과 풍만한 생명을 누리는 것 사이를 두개의 질적인 차이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후자에 의해서 전자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생명의 분열 속에서 충만하게 살아가던 많은 신자들은 육신의 심각한 결핍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가난 속에서도 인간의 존재가 가장 행복하지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화목은 인간에게 육체의 결핍에 의해서 인간 존재의 전체가 불행하게 되는 일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환경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고 존재 자체가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행복하도록 유지시켜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비결에 관해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비결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 화목의 수립
이 화목과 관련해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첫째는 이 화목의 수립입니다. 이 화목의 최초의 수립은 인간의 창조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 존재를 창조하실 때 이미 하나님과 완전한 화목을 누리고 있는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육체도 완전했고 그리고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혼도 완전한 상태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타락할 수 있는 개념성은 남아있었지만 그런 점에서는 불안전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시고자 했던 인간 영혼의 상태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완전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인간영혼으로서 인간 영혼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영이신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혼을 비교해보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존재의 정도가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인간에게 깃들게 하시고 싶으신 영혼으로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좋음의 상태 속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그 속에서 완전함을 누리고 육체도 완전함을 누림으로서 인간은 창조된 그 즉시부터 행복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하나님과 가족관계 속에서 그렇게 친밀하게 교통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모든 세계는 그에게 하나님의 통치권에 복종하듯이 복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는 거기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수립하신 평화입니다.
2. 화목의 파괴
그러나 이제 이 화목은 파괴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는 다시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최초의 파괴이고 두 번째는 그 이후의 파괴입니다. 최초의 파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으로서 죄와 불순종에 떨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모든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그 화목을 깨트렸기 때문에 그 결과는 후세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유전으로 물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 맺은 상태에서 화목이 파괴된 상태에서 태어나고 태어나면서 인간은 불행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으니 인간의 불행을 어찌 이루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후의 파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 태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영적이 자원이 끊어져서 고갈된 상태의 영혼으로 남고 그리고 육체의 자원도 땀을 흘려야지만 겨우 얻을 수 있어서 육체는 사멸할 그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가는 사멸할 육체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영혼의 자원은 끊어지고 그리고 육체의 자원은 계속해서 이 자기 밖의 죽음의 세계 속에 빼앗겨서 결국은 결핍으로 가득한 존재로 살아가게끔 만드셨습니다. 어디에서도 인간은 행복을 위한 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한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분여해주셨습니다. 육체는 결국 사멸하지만 대신 부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사멸하지 않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열린 그 통로를 통해 하늘의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받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화목의 재건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그렇게 화목을 누리게 되었지만 인간의 이후의 삶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구원과 함께 우리 안에 수립된 평화를 이런 화목을 원리적인 화목이라고 부른다면 실제적인 화목 속에서도 우리들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도 그 화목을 누리고 살아야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하나님 앞에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육체가 때로는 결핍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무엇인가 공급에 부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 존재가 뿌리 채 뒤흔들어 불행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일들을 위해서는 영혼이 그런 힘들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리적인 화목을 통해서 교제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원리적인 화목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원리적인 평화가 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으로 낳은 자식들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속을 썩여도 영원히 우리 새끼이듯이 우리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화목은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과 사랑이 사라지고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역사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는 파괴됩니다. 신자 안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자원이 심각하게 결핍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할 수 없고 말씀을 들어도 예전과 같은 깨달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그 안에서 생명의 자원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영혼은 점점 고갈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우리의 존재는 점점 불안전해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본래의 가지고 있었던 그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타결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화목의 재수립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화목은 실제적인 화목은 신자 안에서 불순종과 죄로 인해 깨지지만 두 가지에 의해서 이 화목은 다시 재수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된 용서를 믿는 믿음과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두 가지 놀라운 특권이 있으니 순종하기 위해서 필요한 은혜를 한없이 공급해주시겠다고 하는 것과 범죄 하였을 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그 죄를 무한히 용서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한번 이룩된 하나님과의 평화를 끝까지 지키고 온전한 실제적인 평화 속에서 일생을 죽는다면 더 좋을 수가 없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는 수시로 이 실제적인 평화가 위협받습니다. 실제적인 화목이 끊임없이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이제 자신이 그런 실제적인 화목을 잃어버리고 죄에 빠져서 영적인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고갈의 상태에 있을 때 이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이것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약속된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단 모든 죄지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용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자신의 죄를 미워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의 죄에 영향력에서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로의 회기를 약속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안에 있는 위대한 약속이고 보증이며 특권입니다. 그리고 이 일의 확증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용서의 영이시며 그 용서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위로의 영이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렇게 죄에 대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용서를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너는 끝났다. 너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제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들려오는 수많은 율법과 양심의 송사, 그리고 그 정죄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구약에서는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해서 사람을 실수로 죽이고 나면 사람들은 그를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피성으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제사장이 그를 기쁘게 맞아주고 성문은 닫히고 거기에서 보호받게 됩니다. 정당한 판결이 날 때까지 누구도 해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그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환란 날에 피난처이시며 이렇게 죄 가운데 빠져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상실했을 때 도피성입니다. 오늘도 이런 처지에 있는 여러분들이 도피성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과의 화목을 재수립하는 길은 바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올바른 회개는 자신이 사랑하던 죄에 대한 미움과 그 죄를 사랑하던 자신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킴이고 불신을 가져옵니다. 자기 자신을 불신하는 것만큼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이 불순종할 리가 없고 세상을 사랑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범죄한 것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갱신시켜서 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과의 화목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이제 무너졌던 하나님과의 화목은 다시 회복되고 그 회복된 화목 속에서 우리가 평안을 누리게 되고 그 안에서 육체와 영혼이 좋음의 상태를 유지하여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행복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주시는데 바로 그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지정하신 그 자리에서 인간의 위치와 처지에 만족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서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놀라운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오늘도 눈을 감고 골고다 언덕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떨군 그의 머리에는 바로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수많은 악한 생각과 그것을 붙들고 살던 우리의 지성의 범죄로 인하여 주님이 지신 고난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지은 그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손에 피 흘리시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상처를 지니셨습니다. 거기에 흐른 모든 피는 우리들이 이 손으로 범죄한 죄를 위해서 대신 고난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그분이 대신 못 박히심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발에 박힌 그 못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은 길을 다녔던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우리의 행로를 통해 지은 모든 죄와 불순종을 가지고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의 고립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 자신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그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실 때 악한 병정들이 찔렀던 그 창은 그리스도 예수의 옆구리를 지나 허파를 꿰뚫고 심장을 터트렸습니다. 요한이 물과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대목은 바로 이렇게 쏟아진 물과 그 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속에 있는 끊임없는 욕망과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이치를 떠나려고 하는 자기 사랑에 모든 그 정욕과 그리고 죄 된 육체의 소원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창에 허리를 상하셨습니다. 사실은 그 창은 그분의 옆구리에 들어갈 창이 아니라 타락하고 범죄한 우리 인간들 속으로 들어와야 할 그 창이었습니다. 그분의 순결한 육체와 그 모든 지체를 꿰뚫고 그 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 물과 피를 모두 쏟아내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애매히 쏟으신 물이요, 애매히 쏟으셨던 피였던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불행의 길을 재촉하는 인간의 이 모순들은 끊임없이 인간을 고립시키고 죄 가운데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을 원하나 행복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져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지신 그 십자가를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악한 생각이 들 때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쓰신 가시면류관을 기억하고 우리의 손이 악을 행할 때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박히신 그 못 자국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악을 품을 때마다 바로 그분의 옆구리를 우리의 이 악 때문에 찔렀던 창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악함을 통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 결핍과 그리고 이 모든 악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스스로 불행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정말 맨 처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났던 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어떠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지나간 하나님을 배향하던 모든 삶을 회개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지은 자신의 모든 죄를 위해 두려움 속에 떨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와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더러운 죄인들이라도 주님이 그 십자가의 피로 화목하게 하신 그 피 길을 걸어 당신의 거룩한 보좌 앞으로 나아오도록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거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주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했던 우리 모든 영혼과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회개하던 때를 깊이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이 화목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존재의 참된 행복은 우리의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세 반석으로 열어놓으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을 누리며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그것, 거기에 인간으로서의 참된 행복과 신자로서의 행복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팔아서 산 모든 인생의 기쁨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팔아서 산 모든 더러운 것들이 우리와 우리의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할 수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하다면 그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며 처음 그 복음을 만나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꼭 붙들고 주님 앞에서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베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2:5-7)
I. 본문의 배경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호세아 선지자의 기록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명 받은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의 직업이 농사꾼이 아니면 빵을 굽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사랑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절절한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였던 이 선지자는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예언하도록 부른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외침으로 예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란한 여자로 소문난 고멜에게로 장가들도록 계시되어서 음란한 여인과 함께 한 가정을 이룸으로서 가시밭길과 같은 선지자의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외간 남자를 향해 방탕한 길로 떠나는 이 여자와 그를 끊임없는 사랑으로 다시 찾아오는 호세아의 눈물겨운 사랑은 호세아 자신에게는 형벌과 같은 가정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호세아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을 좇아 음란한 길로 가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예언은 혼인언약에 대한 눈부신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당신과의 관계를 혼인을 맺은 언약관계로 즐겨 묘사하셨습니다.
II. 하나님과 혼인한 백성들
그러면 이 혼인언약 관계는 성경적으로 볼 때 어떤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을까요? 어느 학자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대진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성경에 흐르고 있는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들을 구속사적으로 연결해볼 때 이 혼인언약의 신학은 대게 이런 물줄기로 흐른다고 여겨집니다. 만세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지만 그러나 한 민족으로서 그들을 택하시는 장면은 사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고 한 가족인 아브라함 가족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하나님이 쓰시는 민족이 되었을 때는 애굽에서의 종살이가 거의 끝나던 기간이었습니다. 이때를 아직 결혼하기 전 연애의 기간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셔서 이제 시내반도로 올라오게 하신 이 사건은 잠시 후 신종국가를 수립하는 율법 수여식으로 이어집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부여받은 이 율법 수여 사건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수여식에서 피를 뿌리며 아멘, 아멘 하고 헌약하게 되는데 이것은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과의 결혼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신혼생활이 시작되는데 이게 광야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생활서부터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음탕한 기질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끊임없는 불순종과 반역, 그리고 이방신들을 좇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서 많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신실하게도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정착시키시는데 여기에서 이제 정착된 신정국가의 이상이 실현되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왕정이 성립하게 됩니다. 이때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의 정착기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가다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배역함으로서 이제 그 혼인관계가 파기가 됩니다. 그 파기된 혼약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남편인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이시고 이제는 혈통과 육신을 따르지 아니하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서 그들을 정결한 한 신부로서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되는데 공동체적으로는 이것이 교회가 바로 그 신부이고 각 신자가 바로 그 신부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개인적인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이제 다시금 성대하게 하나님과의 혼인관계의 완성 속으로 우주적인 완성 속에서 그 혼인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것이 바로 그 속의 대 드라마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당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 비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스라엘과 당신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들을 여러 가지 유비를 통해서 그 빛깔들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문학적인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우리와 결혼한 혼인관계 속에 있는 남편으로 묘사하게 되는 것은 결혼에 있어서 최소한 다음 네 가지의 개념들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혼인언약은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정의를 내리자면 어떤 한 대상을 궁극적인 목표로 정하고 그를 끊임없이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과 정신의 움직임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혼인관계는 바로 이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어느 한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둘 사이에 합치가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자신은 망아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망아의 사랑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도 여기에서 여러분들의 지체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할 때마다 제가 늘 잊지 않고 주는 당부가 있습니다. 이 결혼과 함께 이제 남편이 나를 섬겨서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그런 생각하지 말라. 아내가 나를 많이 섬겨서 내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반대로 내가 내 남편을 잘 섬기고 그를 위해서 그의 인생의 목표를 나의 목표로 여기며 섬겨서 그래서 이 남편으로 하여금 내가 없었더라면, 혼자 살았더라면 도달할 수 없었던 보다 완전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내가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당부를 합니다.
사랑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목적적인 사랑과 또 하나는 박애적인 사랑입니다. 첫째로 목적적인 사랑은 여러분은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제가 가르쳐주었을 때 사랑의 원인에 대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사랑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한 대상을 마음과 정신을 고정시키고 그것을 즐기려고 하는 경향을 갖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름다움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지각할 수 있는 바른 심미안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 심미안이 올바르지 못할 때는 사랑하면 불행해지는 대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 목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이런 목적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해서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을 지피는 것은 지성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박애적 사랑입니다. 이 박애적인 사랑은 사랑을 하게 하는 원인이 아름다움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음에도 불구하고 있어도 아주 적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주체 자신이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사람을 가리켜서 박애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불멸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아름다움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추함을 능가하는 종류의 아름다움입니까? 추함은 굉장히 크고 아름다움은 아주 희소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는 이것보다 더 심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조금 있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커다란 추함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시고 그것을 끝까지 사랑하시려고 하는 그것은 저항할 수 없이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낸 것이라기보다는 삼위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렇게 발현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리켜서 박애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좀더 들어가고 싶은데 못 들어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베풀어야 할 사랑은 바로 이런 박애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목적적인 사랑을 계속 부여받고 그리고 그 사랑의 영향으로 아가폐의 사랑의 감화를 받아서 박애적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폐의 사랑의 지평의 융합이라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박애적인 사랑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향해 가져야 할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바로 이런 박애적인 사랑과 목적적 사랑의 지평의 융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가지고 이제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려고 해도 그 사랑이 목적적 사랑 이상으로 넘어서지 못했을 때는 행복에 이르기가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내 남편이 항상 영혼에 아름다운 모습을 내게 보여줄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아름다움이 전혀 없는가 하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참아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 목적적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되고 아내인 여성의 마음에 박애적 사랑이 이게 계속해서 역사해야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이 박애적인 사랑은 우리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사랑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가 이 아내인 고멜이 음탕하게도 자기를 버리고 외간남자의 품에서 놀아나는데 가서 그것을 다시 찾아오는 그것은 선지자가 혼인언약관계에 충실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관가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냥 의무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호세아 선지자의 뼈 속까지 파고들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하는 어떤 신적인 강제력 속에서 이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완성된 사랑입니다. 결혼생활 속의 사랑이 이렇게 승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인가 하면 나 여호와가 끊임없이 나를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들 다시 구속하여 용서하여 다시 내 품으로 불러들이는 이것이 차가운 의무를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이 가슴속까지 깊이 배어있는 하나님의 이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하나님과의 혼인언약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동행을 요구합니다. 이 동행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삶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끊임없이 집을 떠나고 외간남자의 품에서 놀아나고 있는 이 아내를 다시 불러서 가정으로 데려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돈을 벌어오라고, 아닙니다. 밥을 하라고, 빨래를 하라고, 그것이 아닙니다. 어떤 가사노동을 하라고 이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같이 살아가자고, 왜냐하면 혼인언약관계 그 자체가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함께 삶,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최고의 약속이 무엇인가 하면 레위기의 말씀처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셨던 그 절절한 소원이 무엇이었을까요?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자. 이게 연합의 교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함께 있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면화되고 영화된 것을 보여줍니다. 첫 혼인이 성립될 때 먼저 고백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게 무엇인가하면 이 아내와 나는 불가불리의 관계가 있다. 한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동행의 극치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혼인언약을 하나님과 맺고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닌 것은 그것은 혼인언약관계의 삶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정절입니다. 배타적이지 않은 남녀간의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자매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위해서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굉장히 멋진 형제가 나타났습니다. 얼굴이 멋있게 생겼으면 대부분 교만한데 이 형제는 겸손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늘 섬깁니다. 그리고 대게 얼굴이 기생오라비 같이 말끔하면 머리 속에는 든 게 별로 없는데 공부를 잘해서 아주 훌륭한 학교를 졸업하고 20대 박사까지 받았습니다. 대게 이렇게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면 신앙이 없는데 이 사람은 신앙도 좋습니다. 개인이 그렇게 신앙이 좋고 똑똑하면 집안이라도 허술해야지 되는데 돈도 많고 그리고 대게 돈이 많으면 그 부모는 고상한 인격이나 그런 사람은 아닌데 돈도 많을 뿐 아니라 그 부모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대게 다른 사람을 향해서 친절하게 잘해주지를 않고 받으려고 하는 기질이 있는데 이 형제는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렇게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와 똑같이 대우해주면 그것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인데 자기에게 너무나 특별하게 대우를 해줍니다. 이 정도의 사람이면 독신서약을 꺾고도 시집을 갈 용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청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둘이 결국 그 사랑을 받아들여서 결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꿈꾸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혼식이 있기 며칠 전 이 형제가 만나자고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한다. 네 모든 것을 너를 위해 주고 싶다. 이 자매는 마음속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다음 말이 내가 이렇게 너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딱 한사람 더 있거든, 그리고 그 사람은 너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그 관계는 끊을 수가 없어. 그러면 여태껏 그 남자에 대해서 내렸던 모든 좋은 감정과 생각은 다 사라지는 것이지 뭐 한명밖에 아닌데.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객관적으로 그 형제와 비교될 수 없는 낮은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의 결혼은 안 할 것입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앙케트를 했는데 연애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잘 쓰는 말이 너한테만, 그리고 우리 둘이만 이게 1위와 2위를 차지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그처럼 배타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둘이만 있어야지 같이 있는 것이지 여러 사람이 섞여있는 가운데 둘이 있으면 둘이 붙어있어서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갖는 배타적인 감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런 배타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이방의 신들은 나도 섬겨라 하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만 섬기라고 하십니다. 어떤 때는 이 요구가 너무 강력해서 우리들이 속박을 느끼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도 사랑하지 말고 사람도 사랑하지 말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하라고 그러시는가. 나만 섬기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고 마지막에는 나를 위해 생명까지 달라고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배타적인 요구를 하실 때 이게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게 요구가 무거워서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변심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연애를 못해본 사람은 오늘 설교가 매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너무너무 사랑하고 언제나 부드럽던 형제가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면서 주먹을 꼭 쥐고 하는 말이 너 나만 사랑하지. 그럼, 만약에 나 말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너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주먹으로 산에 올라가서 바위에 앉아서 대화를 하는데 바위를 쳤습니다. 바위는 끄덕도 없고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주먹을 쥐면서 나만 사랑해야지, 알았어. 나만 사랑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 것이야. 알았어, 내 생각만 해야지 돼. 알았어. 정말로 아침에 일어나서 내 생각, 밤에 잘 때도 내 생각, 나만 생각해야지 돼. 이 여자가 그 남자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무시무시한 분위기속에서 협박처럼 주어지는 그 모든 말이 달콤하게 들립니다. 왜 달콤하게 들리는지 심리적으로 설명해볼까요?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남자는 반의어적으로 자기에게 그렇게 죽음을 맹세한 배타적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은 남성 쪽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났는데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 나에게 너무 속박하지 마. 좋은 남자친구가 있으면 사귀고, 옛 애인도 좀 만나고 그러면서 데이트도 하고 선물도 하고 우리가 사실 뜨겁게 사랑하지만 꼭 결혼해야지 맛이냐, 이러면 그 여자가 자유롭다. 아! 나의 형제는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어,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금방 떠오르는 생각은 ‘이 자식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고개를갸우뚱거리는 자매들이 많은 것을 보면 결혼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지 되겠습니다.
네 번째는, 헌신입니다. 이 헌신은 바로 혼인언약이 가져다준 의무입니다. 그래서 이 헌신을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남편 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혼약한 사이, 그리고 이 혼인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요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삶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파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고 영혼까지 우리들이 파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름다운 혼인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여 자기의 아내를 삼으신 목적을 자신의 존재의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은 우리가 이스라엘이 섰던 그 자리에 서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바로 이런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혼인의 관계 속에서 한분 남편이신 하나님께 혼약한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III. 혼인 언약의 파괴
그러면 그런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게 바로 혼인언약의 파기로 나타납니다. 오늘 이 타락한 고멜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혼인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의 음란한 모습으로 대변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 혼인의 관계가 파기될까요?
A. 육욕을 따라 살아감
그것이 바로 육욕을 좇는 삶으로 요약이 됩니다. 오늘 이 고멜을 보십시오. 왜 이 선지자와의 혼인관계를 파기하고 이 세상에 있는 남자들을 따라가고 그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육욕을 좇는 삶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이 여자가 호세아를 버리고 방탕한 길로 들어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이것도 복수입니다. 한두 남자가 아니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이는 저가 이르기를 내 물과 내 술과 내 양털과 내 기름과 내 삼을 준다고 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호세아를 버리고 그 방탕한 남자들을 따라간 이유는 세상의 물질의 번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과 혼인관계를 파기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혼인관계를 파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강수량이 많지 않은 곳입니다.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기까지는 유목생활이 주였으나 정착하고 난 다음에는 농경사회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농경사회에 있어서의 성패는 풍년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곡식이 잘 되면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고 그 곡식으로 무역을 하게 됩니다. 화폐처럼, 그래서 물질문명을 구가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삶의 질 자체가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가 제때에 내려주는가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농사의 풍년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축복해주는 것을 가리켜서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때에 주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습니다. 이른 비가 적당한 때에 내리게 되면 그 비 덕분이 파종을 하게 되고 늦은 비가 내리면 곡식들이 그 비를 맞고 다시 한번 햇빛을 받으며 결실해서 풍년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시기가 빗나가거나 비가 오지 않을 때 파종이 힘들거나 수학이 힘들거나 혹은 둘 다 했어도 결실이 부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착이 바알종교로 연결이 됩니다. 산위에 바알의 신당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주기를 따라서 이 바알이 비를 내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에 비가 꼭 와야 할 시기에 내리기 위해서는 바알이 좋아하는 제사를 제의 속에 채택하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바알 신을 예배하는 제사 행위 속에 성적인 교접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알신당 옆에는 이 신전 창녀들의 공동생활 터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러 온 헌 제자들이 제사를 드리고 그 의식 속에 돈을 주고 신전창녀를 사서 아주 쪽방으로 여러 개 나누어진 방속으로 들어가서 동시다발적으로 성적인 교제를 갖습니다. 이것이 바알을 자극해서 이 비 내리는 주기를 잊고 있는 바알을 일깨워서 비를 내린다고 하는 해궤망측한 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중으로 올무가 되는데 하나는 발달한 농경사회에 들어와서 과연 하나님만으로 우리의 생존이 충분한가 하는 불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에서 계속 비를 내려주고 풍요를 주는 신이 바알인데 바알에게 밉게 보일 리가 무엇이 있는가. 그래서 혼합종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기는 이래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혼합관계에서 성립될 수 없는 그 길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왜 아까 이야기한 정절이 무시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의 배타적 성격이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의 신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아주 불결하게 생각하고 혼인언약을 파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올무는 그렇게 풍년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러 가면 육체적인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성전의 제사는 그런 즐거움이 없습니다. 제물을 드리고 오니까 너 이 제물에 정말 합당한지 생각해보아라. 제물을 가져오니까 이게 정말 너의 초태생인가. 정말 흠이 없는 것인가. 끊임없이 헌신과 희생만을 강요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 제사는 그에 비해서 자기를 절제할 필요가 없는 육욕의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 것이 동기였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육체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 이 종교를 따르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그렇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잡아끄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었던 혼합종교의 기원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습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을 버리고 어느 날 절교 선언하고 세상사랑을 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혼인언약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B. 그 길을 막으심
그러면 두 번째는 이런 혼인언약의 관계가 깨어진 결과가 무엇일까요? 그게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신다고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막으시는 것이 두 가지로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고 있는데 하나는 가시로 그 길을 막으신다는 그 표현과 또 하나는 담을 쌓으신다는 표현입니다. 이 두 가지의 표현은 하나님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세상을 사랑하러가는 신자들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양상들을 설명해주는 있는 최적의 표현입니다.
1. 가시를 두심
첫째로 그들의 길에 가시를 두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가시는 내적으로 외적으로나 커다란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방의 백성들을 드셔서 그들을 가시 삼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사울이 회심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하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메섹 가는 길에 나타나셔서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시며 너의 그 행동이 가시나무 채 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을 발길로 계속 차는 것과 같다. 가시가 망가지겠는가, 네 발이 망가지겠는가? 결국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고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시는 매우 특별하게 내면에 있는 끊이지 않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혼인언약관계를 파기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끊임없는 내적인 고통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동기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따르는 것으로는 이 세상에서 번영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끊임없이 나를 향해 부르는 거기로 가자. 그러면 거기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세상을 따라갑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의 제사의 유비에서 본 것처럼 항상 인생의 궁극적인 성공만을 위해서 신앙을 버리고 세상을 따르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신앙을 따르는 것은 오늘 당장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르는 것은 들어가자마자 당장 기쁨을 줍니다. 제사를 드리러 신당에 들어갔을 때 아직 비는 오지 않았지만 거기에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기쁨이 있었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육욕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의 올바른 힘을 끊임없이 앗아가는 사악한 기쁨입니다.
저는 최근에 이 정욕에 대해서 사색을 하면서 정의를 내려봤습니다. 이 정욕의 정의가 무엇일까? 사전에 나와 있는 정의들은 우리의 신학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정욕이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게 정욕입니다. 이게 넓은 의미의 정욕입니다. 그 넓은 의미의 일반적인 정욕 중에서 특수한 정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적인 욕망, 바르지 않은 정적인 욕망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유비의 발견인지 한번 묵상해보십시오. 바알 때문에 번영해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총체적인 욕망이었다면 그 속에 제사를 드리면서 탐닉하게 되는 성적인 기쁨은 좁은 의미의 정욕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신자들에게 이중적인 정욕으로 그들을 불러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이방의 신에게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음란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런 것들이 그 속에 표현되어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번영하기 위해서 신앙을 팔아먹는 신자들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빚의 나라를 버리고 어두움 속을 걷고 있는 사람인데 언제 그 어두움이 끝날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대한 공정하고 올바른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거룩한 삶의 관건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어떤 행복한 상태도 꿈꾸지 않는 것,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어떤 상상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거기에 기대를 걸지 않는 것, 그것입니다.
호세아는 틀림없이 가난한 선지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이미 호세아에게 시집오기 전에 이름난 창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름난 창녀였으니까 어느 정도 미모도 갖추었을 것이고 상당한 재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호사스러운 삶을 살던 사람이 무엇인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호세아와 혼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궁핍하기 짝이 없는 생활 속에서 살다가 결국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전보다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내게는 풍부한 기름과 삼, 그리고 많은 술들이 내게는 없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실한 남편인 호세아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호세아가 이름처럼 끊임없이 구원하고 이끌어 하나님 앞에 데려가는 영적인 인도자가 아닌가. 생각하면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가난하게 사는 것이 뭇 남자들의 품에서 더럽게 살며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육욕이 그를 호세아와의 언약관계를 파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끊임없이 하나님 밖에서 도달해보려고 하는 그런 육욕적인 희망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들고 세상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2. 담을 쌓으심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담을 쌓으시는 것입니다. 이 담을 쌓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과 환경의 막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에 담이 놓이게 되면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알 수 없는 이 영적인 어두움 속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밭길이라도 힘으로 돌파하는 것이면 잠시 아픔을 참고 하나님이 당신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계속 형통하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잠시는 하나님이 두고 보실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형통함은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끝까지 형통하게 하면 그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혼인언약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세상에 방탕하게 살아갈 때 잠시는 형통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의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길을 막으실까? 이 막으신다는 것은 환경을 막아서 그들로 하여금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더 앞으로 전진 하려고 하는 그 상황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실까요? 여기에는 매우 깊은 뜻이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원리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셔서 혼인언약을 파기하는 사람들의 길을 막으셔서 역경을 주시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는 삶이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아가지만 마음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아내에게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요구를 남편에게 할 수 있습니까? 남편과 아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놓고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모는 부모이지만 부모 마음에 있는 말을 새끼들에게 다할 수 있습니까? 자식들은 부모이지만 부모에게 자기에게 있는 요구상황을 다 말할 수 있습니까?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하지 않는 것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 간격들을 매어주기 때문입니다. 좋은 남편은 아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좋은 아내는 돈 많이 벌어오고 그리고 힘세고 살림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남편의 마음을 들리는 언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고 보여주는 것이 없어도 볼 수 있는 그 감각을 가진 아내가 진짜 아내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오감의 감각을 깨어나게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면 내적인 모든 감각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확! 깨어납니다. 설명을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갔습니다.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이 꽃이 피었는지 시들었는지 하나도 못 느낍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면 아! 꽃망울이 졌네. 감각이 깨어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혼인언약의 관계의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계속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신앙생활입니다. 머저리 같은 교인들은 항상 물어봅니다. 목사님, 술을 먹어도 취하지만 않으면 죄가 아니지요? 담배는 피어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지요? 왜 그렇게 불순종의 벼랑 끝에서 재주를 부립니까? 좀 이렇게 벌판으로 나와서 순종의 벌판에서 그런 것을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집니까? 진리의 말씀이 들려올 때 그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우리의 심령 속에 변정이 일어납니다. 어펙션이 생깁니다. 사랑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수가 되어서 몽둥이를 들고 공갈치지 않아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심령으로 돌아갑니다. 기도할 때도 생겨납니다. 기도를 간절히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처음에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은 하나님이 섭섭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의 마음을 모른 채 살아가던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에 서 봐도 하나님의 마음이 잘 전달됩니다.
선교지에 한번 나아가보십시오. 이 안에서 우리들이 편안하게 살면서 느꼈던 그 모든 고민들이 하찮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 은혜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들이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명의 자리에 서보면 주님의 마음이 확!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이미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들리지 않고 기도해도 안 되고 사명이 자리에 돌아가야지만 느낄 수 있는데 그리로 안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곤고한 영혼들을 섬겨야한다고 아울리치를 외쳐도 이게 움직이지도 않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모든 인간들을 깨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지 됩니다. 하나님이 아울리치를 가기 전에 나를 천국으로 부르시지 않는 한 내가 꼭 갈 것이다. 그래서 모두 가야지 됩니다. 그 자리에 서보면 거기에서 느낍니다. 아!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구나.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혼인관계에 있는 언약백성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그 마음이 떠났습니다. 이미 마음이 가정이 아닙니다. 외간남자의 품입니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사실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나게 하여야 할 터인데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영적인 귀와 영적인 눈이 멀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밝게 비추어주어도 시력이 없어서 볼 수가 없고, 큰 소리로 외쳐도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 환경과 여건은 닫히고 그 다음에 환경과 여건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힙니다. 이게 막히고 위기가 오게 되면 이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영적인 눈과 귀가 없어도 볼 수 있습니다. 사업에 위기가 오는데 깨어있어야 봅니까? 눈으로 보면 모릅니까? 회사가 망하는지. 가정에 위기가 오는데 깊이 기도해봐야 아는 게 아니라 위기가 막 옵니다. 자신의 삶의 질서가 막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역경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당신과의 언약관계를 깨트린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도저히 감긴 눈, 닫힌 영적인 귀로서는 볼 수 없는 그것을 보도록 하나님이 열어주시기 위해서 담을 쌓으시는 것입니다.
IV.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가시를 두시는 것도 이렇게 높은 담을 쌓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파기하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하고 살 깊은 사랑의 초청입니다. 왜냐하면 내버려두어서 형통한 길로 계속 가게 버려두시면 결국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죽을 것이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담을 쌓으시는 역경을 통해서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아!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던 모든 나의 희망과 기대가 더러운 정욕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지금도 여러분들의 삶의 상황에 담을 쌓으신 것처럼 가는 길을 가로막아 어떻게 할 수 없이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 속에 있는 사람들 중에 대다수는 하나님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지금 고멜처럼 당하고 있는 고통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순종하고 혼인언약을 파기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을 수 있는 진리를 아는 귀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그분의 채취를 냄새 맡을 수 있는 여러분들의 영적인 코가 열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서 그의 사랑과 영광과 그리고 그의 사죄에 대한 그 신령한 감각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혼인언약의 관계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언제나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과의 혼인언약 관계 속으로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A. 평화를 잃은 비참함
이런 하나님과의 혼인언약관계를 파기하고 세상으로 나간 비참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 고멜은 말합니다. “나의 처음 형편이 지금보다 더 낫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본 남편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떠나 세상 속으로 달려갈 때는 그렇게 하면 놀라운 번영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이미 예전에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이루면서 살았기 때문에 달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편법으로 살고 사기도 치고 나쁜 짓도 해도 잘 넘어갔는데 예수 믿고 나면 항상 재수 없이 자신만 걸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재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당신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당신의 아내들의 삶에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당신의 품을 떠나는 아내를 찾지도 않고 내버려둔다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남편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에게로 오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예전과 같이 자신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또 이 세상에서의 번영도 약속되어있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목표는 우리를 다시 성공하고 번영을 누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잊지 마십시오.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의 편에서 보면 자기의 가슴에 못을 박고 변절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께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세상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은혜가 떨어지고 죄가 융성하니까 우리는 다시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세상은 우리 신자들로부터 받았던 그 씻을 수 없는 배신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감언이설로 하나님 밖에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면 세상이 그를 뜨겁게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이치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밖에 버리어져 사람들에게 밟히느니라.” 그때 이 소금은 암염이었습니다. 약간의 흙성분이 있는 암염이었습니다. 습기에 의해서 녹아서 짠맛을 다 상실하게 되면 흙 찌꺼기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혀지게 됩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바로 그렇게 말합니다. 이전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으니 예전에 가난했으나 그때 그 형편이 이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뭇 남자의 품으로 달려들어 남편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한 이것이 정말 어리석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에도 이 여인은 방탕하지만 이런 생각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받는 유혹이 강렬했던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B. 하나님께로 돌아감
지금도 똑같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한 상태를 우리에게 제시하지만 어디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함께 못 박힌 것입니다. 그것은 환상입니다. 거기에서 그 행복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고멜은 말합니다. “내가 나의 본 남편에게 돌아가리니”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세상으로 달려간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끊임없이 당신과의 언약의 관계로 부르시기 위해서 그들을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고 그리고 다시 용서하십니다. 아마 이 세상이라면 그렇게 타락한 아내를 다시 데리고 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의 순결은 외간남자와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은 육체에 매인 순결이지만 주님이 생각하시는 순결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순결이기 때문입니다.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그래서 하나님은 음란하게 당신을 버리고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세상으로 달려 나갔던 이미 더럽혀질 때로 걸레처럼 더럽혀진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당신 앞으로 나아와 그 언약을 파기했던 죄를 진실하게 뉘우치고 다시 그 남편의 그늘 아래 살고 싶어 할 때 끝없는 자비와 용서로 당신의 언약관계 속으로 다시 불러들이십니다. 그래서 다시 그가 당신을 향해 바치는 사랑을 받으시고 그와 함께 동행 하시기를 좋아하시고 그가 정절을 지키면서 다시 사는 것을 어여삐 보시고 당신을 위해 바친 헌신을 한때 자기를 배반하였던 여인의 헌신이라고 매도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섬김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타락하여서 더러운 남자의 품으로 달아났던 아무 개념이 없는 더러운 여자 고멜을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절절한 사랑으로 찾아나서는 호세아의 형벌과 같은 사랑, 끊임없이 당신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세상으로 달려간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 나서시는 신랑 되신 하나님의 목 매이는 사랑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찾아왔을 때 고멜에게 뭘 원했습니까? 그에게 은과 금을 요구했습니까? 아니면 술과 삼을 요구했습니까? 그렇게 그 혼인언약의 관계를 파기하고 세상의 품에 달려 들어가는 우리를 구속하셔서 다시 당신과의 혼인언약관계로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요구하시기에 그런 집요한 사랑으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 섬김을 기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죄 가운데서 불러내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바치는 그 얼마 안 되는 섬김이나 물질을 바라셔서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냥 함께 사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의 혼인언약으로 운명지어진 사이기 때문에 당신을 떠나서 어디에서도 행복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늘도 당신과의 언약관계를 파기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예수님의 생애 모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혼인언약관계를 파기하고 화목이 깨트려진 우리를 다시 우리 주님과 하나 되게 하시려는 그 회복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종처럼 일생을 사시고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상처받은 자에게 위로를,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곤고한 자에게 소망을 주신 것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다시 이 고백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이전에 나의 형편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음이라.” 그 고백을 받고 싶으셔서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의 어두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행복합니까? 하나님 밖에서 얻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셨습니까? 희망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속임이었습니다. 여러분을 남편이신 하나님과 떼어놓기 위한 속임수였습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야지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과의 혼인언약의 관계를 파기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과 다시 화목을 회복하도록 부르십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회사역을 중매장이에 비유했습니다. 어찌하든지 너희를 우리 신랑 예수께 좋은 신부가 되도록 맺어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의 영혼에서 들려오는 그 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영혼은 여러분들에게 평화를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남편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모든 허물을 용서하고 다시 사랑 속으로 불러들이는 그 신랑 되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거기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많은 행복이 여러분들을 위해 약속되어있는지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교회 그 평화를 누리는 곳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들에게 더하리라” (사66:10-14)
I. 본문해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사실을 이미 여러 주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 없이 인간이 독립하여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누누이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본문은 선지자이사야의 기록입니다. 그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의 예언활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사야서는 공교롭게 66장으로 되어있는데 성경의 66권과 일치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66장은 2부로 나뉘는데 1부가 1-39장까지고 구약의 권수와 공교롭게 일치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심판, 그의 엄위하심과 그의 위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40장부터 66장까지인데 공교롭게 27장으로 신약의 27권과 짝을 이룹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40장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후반부는 전반부와는 전혀 색깔이 다른 하나님의 위로와 자비, 그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 그리고 왕국에 대한 전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40장에서 시작된 위로의 선포는 41장을 지나 53장에서는 고난 받는 메시아의 등장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그 후 56장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메시야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인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이제 이 66장에 와서는 그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회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II. 예루살렘을 위로하실 때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과 교회가 평화를 누리게 될 때 교회가 어떠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지에 대한 우주적인 전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읽은 본문 전반부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그 백성들이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그 백성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는 진노와 징계의 심판을 거두시고 다시 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는 장면이여기에 전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하나님의 자비가 부어져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로하게 될 때 그 교회와 그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도달하게 될 상태를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A. 함께 기뻐함
첫째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기쁨을 찾지만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찾는 기쁨이 진정으로 그를 행복하게 할 수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관심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물질적인 성장과 육체적인 번영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모든 사람들의 잘남과 못남을 평가하고 그리고 그들의 모든 인생의 목표를 그런 외적인 번영과 성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그들이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문명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들의 삶이 정말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삶의 외적인 성장과 번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내적인 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누리게 될 그 놀라운 기쁨은 바로 이런 내적인 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성공과 성장과 번영을 인하여 당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는 위로의 하나님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그 기쁨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런 기쁨이 또한 함께 누려진다고 하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절에서 “함께”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각각 배타적인 이기심과 자기만을 위한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행복하게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물질적인 발전과 함께 육체적인 기쁨을 얻고자 애를 쓰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가 진정으로 기쁨을 얻기 전에는 그들의 삶의 질이 고양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교회와는 상관이 없이 자신의 인생에 참된 기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로 위로를 받을 때 성도들은 기쁨을 누리는 상태가 되며 이것들은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기쁨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B. 함께 만족함
나아가서 오늘 이런 기쁨 외에 또한 만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젖을 빠는 어린아이가 그 부모의 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처럼 그런 만족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는 아이는 아직까지 이 세상을 알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나 성공, 물질에 대한 욕망, 심지어는 장난감이나 자신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 같은 것에 대해서 아주 눈뜨지 못한 그런 어린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어떻게 만족을 누리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배가 고파서 칭얼대던 어린아이가 이제 엄마에게 다가오고 엄마가 그 아이를 끌어안고 젖을 먹이기 시작합니다. 앞섶을 깊이 풀어헤쳐 자신의 젖을 아이의 입에 물리고 왼손으로 그 아이를 보듬고 오른손으로 그 아이를 다독이며 이제 편안하게 젖을 물립니다. 허기졌던 이 아이는 열심히 젖을 빨기 시작하고 그리고 목구멍을 넘어 엄마의 유선을 타고 흐르는 그 젖이 자신의 신체 부위를 타고 그리고 배속으로 들어갑니다. 한참 젖을 빤 후에 이제 허기짐을 면하고 나면 위가 불러오기 시작하고 피가 아래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노곤한 그런 식곤증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 속에서 아이는 만족감을 느끼고 드디어 잠들기 시작합니다. 온 눈에 가득하던 졸음이 그 아이의 눈껍풀을 무겁게 하여 잠들게 하고 그리고 열심히 빨던 그 젖꼭지를 놓기 시작합니다. 조금 벌어진 입술 끝에 엄마의 젖에서 아직 떨어지는 그 젖 물이 묻어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온 얼굴 가득히 평화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기운을 놓고 충분히 안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쌔근쌔근 거리는 아이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그 아이의 내쉬는 그 숨이 아이의 옷깃을 스치며 젖비린내가 엄마의 코끝으로 향기롭게 전해집니다. 엄마의 다독임을 받으며 아이는 좀더 깊이 잠들기 시작하고 자면서 무슨 꿈을 꾸는지 입을 오므리고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아이는 그 속에서 편안을 누립니다. 그 완전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그 아이의 온전한 평안의 상태, 그것은 바로 만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과도한 욕망을 품고도 이런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무저갱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것들을 쓸어 넣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그 욕망으로 인하여 이미 채워진 것은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채워지지 못한 것들은 채워지기 위해서 조바심하는 가운데 마음에 평안은 사라지게 되고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이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로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런 헛된 욕망을 좇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성취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건전한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들을 죽임으로서 그 욕망을 향해서 치달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을 절제하는 일이 행복에 요소가 된다고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과 환경이 주는 만족은 우리를 완전히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이 만족은 무엇에 의해서도 빼앗길 수 없는 그런 만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때 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이런 만족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배워야 할 만족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것 때문에 누리게 되는 완전한 만족을 경험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만족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모두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III.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을 때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교회가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그 언약백성들이 예루살렘 안에서 받게 되는 그 축복을 네 가지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맥락에서 보면 이 평화,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북쪽으로는 끊임없이 남하하려는 북방세력에 압박을 받았습니다. 남쪽으로는 어찌하든지 북상하려고 하는 남쪽 세력들, 블레셋이나 혹은 그 아래 있는 애굽과 같은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작기는 하지만 또 작은 나라들이 있어서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왼쪽은 바다였습니다. 이처럼 독특한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라고 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없이 나라가 편안하게 될 때 그 편안 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상태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전쟁에 끊임없이 휘말리고 나라가 그 전쟁의 패배에서 고통 받는 것은 이미 하나님과의 공급이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징책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 속에서 이 평화는 전쟁이 없는 그 상태, 그 이상의 무엇을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그것은 단지 전쟁이 없는 물리적인 평화의 상태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그 놀라운 평화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통해서 영생하는 자원으로서 흘러들어오게 된 그런 종류의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상태에서 그들 안에 가득한 자비심과 공의가 모든 백성들을 향해 펼쳐짐으로 모든 공동체가 하나로 아우러져서 그래서 그들이 공동체의 정신을 가지고 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해가고 있는 그런 상태가 바로 이스라엘이 전망하고 있는 미래의 평화의 상태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구축될 때 그때 그 예루살렘 안에서 언약백성들은 네 가지 축복을 누리게 된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A. 평강을 누림
그 첫째가 바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평화의 또 다른 국면입니다. 즉 이 평강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로 인하여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실제의 삶 속에서 누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바로 이런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평강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평강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사람과 사물들의 질서를 바르게 하심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모두 물질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그것들에 대한 질서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돈이 어느 때가 되면 어떤 경로로 흐르게 되고 그리고 어떤 시점이 되면 자신에게 들어오고 들어온 그 물질은 다시 어떤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흘러가고 어떤 것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거기서 최종적으로 소비된다고 하는 이런 물질의 흐름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막혀버립니다. 그래서 물질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은 고통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흘러가야 할 많은 사람에게 흘러가지 못함으로 신용을 잃게 되고 급기야 인간관계까지 깨트려지게 되고 고통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되고 고통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물질의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물들의 질서가 자신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그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가족 중에 한 일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각자 그리고 있는 가정의 질서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이런 분이 되어주시고 가족을 위해 이렇게, 이렇게 활동해주시면 참 좋겠다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는 이런 분이 되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각각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런 것들이 모두 질서 있는 균형을 이루게 될 때 우리는 가정으로 인하여 만족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있기를 원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방탕하거나 도벽이나 혹은 주벽으로 그리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자기의 위치를 이탈합니다.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아이들도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들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서 가정적으로 불후한 환경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가정적인 환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주에도 제가 가서 복음을 전한 그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나라에서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누구나 다니는 쉬운 일이 아닌데 3학년 학생인데 주님을 믿는데도 이상한 침체에 빠져서 방황하고 부모의 마음에 많은 눈물을 흐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첫날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제껏 교회에 다녔지만 내가 왜 사는지 잘 몰랐는데 오늘 말씀을 듣고 나서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고 그리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야 할지 분명해졌다고 하며 자신의 삶을 돌이켰다는 부모의 기쁜 소식을 목사님이 전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변화되게 될 때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때 이렇게 가정의 평화가 오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될 때 하나님은 이런 물질의 흐름을 원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때 또한 이런 가족들과의 관계나 사람들의 질서 또한 제대로 구축되게 만들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안정된 삶을 유지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평강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외적인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심으로서 우리들이 그 모든 바뀌진 질서를 보며 안정을 누릴 수 있도록 안녕과 그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성도들이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이렇게 외적인 인간과 사물들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것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를 올바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바이올린이라고 할지라도 그 줄을 정확하게 조율한 후에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바이올린이라고 할지라도 조율이 안 되었다면 아마도 그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 모든 환경이 질서 있고 편하다고 할지라도 우리 내면이 조율이 되지 아니하면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큰 축복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축복들은 그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때는 우리의 내면의 질서도 다스려주십니다. 죄 가운데 살 때는 우리의 지성의 작용과 그리고 감성의 작용, 그리고 우리의 의지의 작용들이 모두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우리 자신을 추스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저희가 변화가 되고 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의 마음에 올바른 질서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은 명정하게 하나님의 진리에 영향을 받고, 우리의 감정은 그 지성에 복종하며, 그리고 우리의 의지는 또한 우리의 올바른 감정을 따라서 순종하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존재 자체의 내부의 균열이 없는 통일된 완성의 상태가 되고 그 작용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의 이득이 되는 행동들을 하고 또 생각하고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삶은 좀더 완덕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거나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다고 해서 주변에 흩어져있던 사물들의 질서가 기적적으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초월적인 방법으로 평강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각은 바로 우리의 이해나 혹은 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 작용과 추론의 작용을 능가하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평강이 내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 속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내면의 질서들을 바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런 평강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들이 항상 승승장구하거나 마치 기차를 타고 조용히 운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평안한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많은 꿈들을 갖게 되고 그 많은 비전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도전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예전보다 더 야심 차고 그리고 예전보다 더 활기에 찬 인생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것들 때문에 우리들의 인생에 많은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 꿈을 꾸고 산 사람들 중에 잔디밭을 걷고 있는 것과 같은 평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들이 가진 꿈이 원대하고 위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꿈의 대가를 지불하여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는 고난과 평안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위기에 봉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바로 이런 놀라운 평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강을 기초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관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B. 영광을 얻음
두 번째는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원래 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나 어떤 물질, 보이지 않는 어떤 정신적인 것들을 많이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그 소유한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효과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영광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얻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가치 있게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는 이 영광 얻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누리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렇게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때 그런 영광의 본연적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을 눈뜨게 할 수 있습니다. 저를 그렇게 높이시는 분이 누구인가? 그리고 저가 그렇게 높아진 사람이 되었다면 그 배후에서 저를 그렇게 높이고 계신 분이 누군가 하는 것을 생각나게 만들어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이런 영광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전에 쓸모없고 그리고 가치 없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 상상하지 못할 새로운 인생을 그들에게 펼쳐 보이고 그들의 이름을 높이는 일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성경에서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 영광을 얻게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을 얻는 방식에 대해서 세 가지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행복입니다. 아이가 그 젖을 빨므로 그 안에서 엄마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영광을 얻게 되는 방식으로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많은 돈이나 물질을 소유함으로서 얻게 되는 그런 열방의 영광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열방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것은 열방들이 자랑하는 군대의 수나 말의 숫자, 그리고 나라의 넓이를 가리키는 그런 영광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상의 영광이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전망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놀라운 영광,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해진 상태 안에서 그들은 가장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 안에서 여러분들이 지극히 행복하고 그리고 기쁨을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때 그때 바로 여러분들이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때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들어가게 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밀함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옆에 두며"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갑자기 연인들 사이에 그림, 혹은 부부들 사이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사랑함으로 자신의 아내나 연인을 꼭 끌어안고 있는 그런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정신적인 친밀함이 함께 끌어안고 있는 장면 속에서 그 옆에 안고 있는 장면 속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십니다. 그 백성들은 바로 이런 영광과 그리고 친밀함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 속에 있는 내적인 삶의 질을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불신자가 눈이 아무리 어두워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한 성도를 옆에 안으시고 그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것은 누구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바로가 요셉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감탄하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던 그를 애굽에 많은 사람이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방식을 통하여 그 백성들에게 영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는 희락입니다. 이제 다시 그림은 아이를 안고 무릎에서 아이를 뛰놀게 하는 엄마의 아빠와의 관계로 그림이 옮겨갑니다. 이제 젖을 먹고 잔뜩 배가 부른 아이가 평화 속에서 눈을 뜨게 되자 이제 아빠는 이 아이의 양옆구리에 손을 넣고 그 아이를 무릎에서 뛰게 합니다. 아이는 깔깔대면서 웃고 그 얼굴과 기쁨 속에는 아무 근심이 없습니다. 그 부모의 무릎에서 위로 아래로 뛰노는 그 아이의 희락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빠가 신이 나면 또 이 아이를 공중으로 높이 던집니다. 그래놓고 팔짱을 끼고 돌아앉으면 아이는 땅바닥에 떨어져 묵사발이 될 터인데 그래도 이 아이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모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까르르거리는 웃음소리에 온 가족이 행복을 누리는 이 그림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 얻게 될 그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돈을 얻게 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희락의 삶이 바로 우리들이 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 희락의 삶이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하기에 오늘도 우리들이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C. 위로를 받음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위로입니다. 이 위로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릴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실제적인 그 축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위로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집안에 TV도 없고 오락기는 물론 없고 또 놀 수 있는 넓은 마루나 방을 가진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즐거움은 항상 골목이었습니다. 그때 골목은 포장도 안 되고 그냥 흙으로 뒤덮인 골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그 흙과 함께 놀고 그 흙과 함께 살았습니다. 구멍을 파고 구슬치기를 하고 삼각형을 만들어 놓고 딱지치기를 하고 그리고 돌맹이를 던지며 망까기를 하고 전봇대 옆에서 가랑이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말 타기를 하고 그리고 전봇대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고, 하나 둘 셋 넷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세면서 술래잡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놀던 골목의 그림이 아닙니까?
그러니 거기에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모여서 늘 놀고 있었고 그래서 그 아이들 속에 항상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우리보다 덩치가 큰 형들에게 얻어맞고 구박을 받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지르고 골목에서 울면 우리 어머니가 드디어 등장하십니다. 그래서 바쁘게 걸어 나와서 물 묻은 손으로 주먹을 쥐면서 그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게 되면 엄마는 그 골목에 그 순간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왕의 통치 아래서 잠시 기를 핍니다. 울다가 엄마의 품에 달려가면 엄마는 우리를 치마폭에 감싸시고 그리고 물젖은 행주치마로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서 간식을 주고 우리를 위로하고는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그림을 여기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때 그 속에 사는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 상처받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쉽게 나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그런 종류의 상처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가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겠습니까? 하고 생각하며 슬픔에 당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길 떠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한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그는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다하여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을 하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들이 위로하기보다는 위로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둘러싸여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받은 상처만이 가장 크고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자기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말 행복한 사람은 많이 위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바쳐 섬기며 위로해주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슬픔에 싸여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는 삶을 살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빰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그런 위로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로 자들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하나님과의 영생의 관계 속에서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는 끊임없는 사랑의 경험, 까리따스의 부으심을 경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자기를 잊고 슬픔에 처한 이웃들을 보며 그들을 위로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자신들의 행복과 직결된다는 판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드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있는 상황이고 삶의 형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는 정말 자신의 진액을 바친 헌신의 삶을 사셨고 그분의 인생 전체는 고단한 삶의 연대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생애는 항상 많은 위로를 받는 영혼들이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병든 자와 그리고 죄지은 자와 곤고하게 된 자의 영혼에 늘 위로의 말씀으로 저희들을 어루만지시고 그리고 위로와 사랑으로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해주셨습니다. 고난과 핍박, 그리고 원수들로 인한 그 시련에 직면하는 삶을 사시고 육신적으로도 고달프기 짝이 없는 과로의 삶을 사셨습니다. 양식도 없어 때로는 주리시기도 한 그런 핍절한 생애를 사시면서도 스스로 사람들에게 인간적이 위로를 받기를 구하신적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로가 언제나 그분에게 넘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영혼들을 위해 사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에는 넘치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서 연약한 한 아들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러나 기도가 끝난 후에는 그 눈물을 씻고 마치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 오신 거룩한 대장으로서 분투하고 그리고 힘에 넘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신령한 위로로 가득 찬 그분의 영혼의 만족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런 그리스도의 예수의 섬기심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 얻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위로의 사역을 뒤잇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여기에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많은 하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시고 우리의 순간순간마다 간증을 남겨야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효막심한 인간들이고 불법 무도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그 놀라운 그 자비는 우리에게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을 뒤잇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셨더라면 하셨을 그 사역의 뒤를 잇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처한 백성들에게 위로를 베풀고 굶주린 백성들의 손에 떡을 쥐어주며 그리고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그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진리의 빛을 나누어주는 현자의 삶을 다하여야 합니다. 상처받은 그들을 위로해주고 그리고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그들에게 포도주를 부을 수 있는 자비심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으로 인하여 가슴에 칼을 품고 서로 자신을 해치며 살아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의미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어 저들로 하여금 피 묻은 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섬기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아무 교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한 은혜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게 할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가슴에 품고 그리고 남이 가지 않은 그 많은 곳에 다가가 그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사역을 위해 자신의 신명을 바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해양선교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점점이 떠있는 많은 섬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섬들은 아직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 그 조인식을 하면서도 저는 가서 그 관내에 있는 많은 섬들에 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중에는 다섯 가구밖에 살지 않는 섬도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식수와 의료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육지에서 아마 백성들이 모여 살면서 그렇게 식수의 문제나 질병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데모를 하고 아마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는 결집될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묵묵히 그 불편을 감수하고 그 섬에서 살아갑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복음이라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동포들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번도 듣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 이런 것에 집중해서 우리들이 사역을 했습니다. 거기도 우리는 흘러가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갈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의미를 더 깊이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들이 자기를 버리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들은 누구를 통해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십수 년 동안 이 일을 위하여 헌신하여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예수 믿는 놈들 재수 없으니 물러가라고 소리치던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그 핍박을 기억합니다. 바가지를 집어던지며 욕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람들 가운데는 당신도 있었습니다. 전해줄 때 그들은(?) 더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식수가 없어서 목이마른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는 이 하나님의 복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고 있고 어두움 속에서 그들의 인생을 연명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은 그 파도치는 섬 소리에 들려오는 그들의 영혼의 비참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아름다운 바다와 아름다운 뱃사장, 갈매기 떼의 노니는 그 아름다운 풍경, 그 푸른 바다와 맑은 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핍절한 영혼들과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십시오. 만약에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그들에게도 찾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을 것입니다. 거기 있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지혜의 복음을 들려주셨을 것입니다. 도예의 사역이 바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섬에 있는 많은 영혼들을 버려두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꿈꿉니다. 멀지 않은 가까운 시일 내에 열린 호의 깃발을 달고 망망대해를 항해하여 흩어진 먼 섬에 이 복음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선교선 열린 호의 출항을 꿈꿉니다. 거기에 많은 의료진과 식수와 그리고 곤고한 영혼들을 위한 말씀에 지혜, 어린영혼들을 위한 복음과 그리고 기쁜 소식들을 담고 갈 무엇보다 그 마음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가득안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들의 발을 씻기고 그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줄 수 있는 여러분들의 승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365일 그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며 사람들이 와주지 않는 그 외딴섬에 이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소외시켰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소외된 그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전할 것입니다.
복음에 불타는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몇 가구 살지 않은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그날을 꿈꿉니다. 비록 5가구 10가구 밖에 살지 않아도 거기서 그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며 일생동안 그들의 어미와 아비로서 살아가게 될 복음 헌신자들이 구름 떼같이 일어나 그 먼 섬에 파송될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많은 섬의 주민들이 이제는 멀리 깃발을 달고 다가오고 있는 열린 호를 향해 박수를 치고 그들이 전해주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인하여 해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지는 영광스러운 그런 날을 꿈꿉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이 요구될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한국교회를 앞서가는 선각자로서 우리 교회 속에 주신 꿈이라고 하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들이 그 가시밭길을 헤치고 이 고난의 길을 지나가면 더 많은 교회들이 우리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리하면 머지않아 사람들이 사는 모든 유인도에 이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복된 날이 있을 것입니다. 번영된 도시에서 그친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가 망망한 대해에 흩어진 섬들에서 울려 퍼질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전망하면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때가 되면 먼 섬에 전파하여 나 여호와가 그들을 내게로 인도하여 내 곁에 있게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그 시대가 도래 하였고 우리가 바로 그런 소망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이런 꿈들을 나와 함께 꾸기를 바랍니다. 젊은 시절에 1년 정도 휴학을 하고 1년 정도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을 연기하고 그 섬 주민과 함께 굴을 따며 그리고 고기를 낚으며 그리고 채마밭을 일구며 그곳에 사는 섬 주민들을 도우며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이 필요할 때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는 도우미들이 되어서 한 1년 정도 그 섬에 살면서 그 영혼들을 지순한 사랑으로 섬기는 그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복음에 불타는 많은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서 노년을 아름답게 보내고 싶어 하는 눈물에 깊이 젖은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섬들이 성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적인 요청, 그리고 우리의 교회적인 이 소명을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사역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자원, 은혜의 자원과 이 세상의 물질의 자원을 가지고 그렇게 핍절하고 슬픔에 빠진 영혼들, 결핍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영혼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눈에 떨어진 그 눈물을 씻기고 그 영혼을 보듬어 안아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쓰임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의 날들에 무슨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대답할 이 어디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이 영광스러운 역사를 일으켜서 서로 그 열린 호에 승선하겠다는 젊은이도 가득한 날을 꿈꿉니다. 추운 겨울에도, 그리고 무더운 여름에도 그 영혼들을 섬기러 서해와 남해를 누비는 그런 날을 꿈꿉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다가 열리 호 나오십시오. 하고 무전을 치면 그 열린 호에서 그 눈앞에 펼쳐진 그 전경을 다 보여줍니다. 그리고 열린 교회의 깃발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는 배를 환영하는 그 복음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섬 주민들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쁜 소식을 위성을 통해서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은 매주일 영상을 보면서 우리 대신 먼 곳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섬김으로서 그 영혼의 눈물을 씻기는 위로의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들은 기도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꿈을 꾸면서 우리는 헌신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일생을 남을 위로하는 일에 바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넘치는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D. 승리를 거둠
네 번째는, 하나님이 승리를 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그들과 같이 있겠고 여호와의 진노가 대적들 손에 있으리니”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얻게 되는 위대한 승리를 전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실패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우리의 비참한 삶에 이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실패에 노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인은 말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평안,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확신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승리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도 계속 극복하지 못했던 환경적인 어려움, 혹은 내적인 어려움, 그것이 내년에도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상황의 무게나 우리를 괴롭히는 대적들의 숫자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면 우리의 대적이 하나인 것이나 일 만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싸움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승리의 확신이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진취적인 기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진취적이지 않고 개척적인 정신이 없습니다. 운명에 매어 사는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기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면 점집들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지금도 아마 많을 것입니다. 가본지 오래되었지만, 그 점집이 엄청나게 많아서 이 사회에서 한다, 하는 사람도 그 점집에 가서 점을 칩니다.
(예화: 친구를 따라 점집에 가서 친구와 함께 점을 보니 그 점을 보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재수 없으니 빨리 가라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운명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가서 예수나 잘 믿으라고 했다는 내용)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어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독수리 날개침 같이 하늘높이 솟아
그뜻이 이루어지도록 외치며 살라
우리는 운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 자신을 개척해가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담대함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원입니다. 지난날에 우리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고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며 살았으나 이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우리의 대적을 향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길 것이라는 확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신념이요, 확신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다시 회복하면 이런 담대한 확신이 생겨납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하랴, “여호와 하나님은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하는 담대한 확신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제껏 까지 숙명처럼 계속되어왔던 그 실패를 딛고 그리고 그 환경을 깨치고 그리고 자유를 선포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개척적인 삶이 될 때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삶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하나님과의 화목을 재건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온 마음과 뜻을 기울이십시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사고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결론: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하심
결론적으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은 축복이 교회에서 누려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로 그 백성들이 이런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을 성경이 오늘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배타적인 이기심과 자기만을 위한 욕망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구하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의 행복은 이 교회의 평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 교회는 커다란 저수지와 같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은 물이 가득하게 될 때 그 속에서 종류는 다르지만 수많은 물고기들이 그 속을 헤엄치면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거기에서 평강과 그리고 평강과 위로와 그리고 승리를 얻고 그것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럼으로 여러분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품고 있는 어떤 생각이나 말,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나 어떤 삶의 태도들이 이것이 하나님과 이 교회가평화를 누리게 하도록 이바지 하는 것인가 아니면 헤치는 것인가를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 그 일에 어떤 식으로든지 이바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체들끼리 서로 사랑으로 화합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그를 향하여 예수의 마음을 품는 그런 일이 필요합니다. 자신은 너무나 하기를 원하지만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포기하는 지체들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은 너무나, 너무나 싫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며 공동체의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이 열심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면 누구도 그를 소외시키지 않지만 스스로 소외되기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고자 하는 그는 스스로 소외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많은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는 그 지체들로부터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소외는 바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목함이 없기 때문에 찾아오게 되는 그런 잘못들입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지혜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마음을 갖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 되도록 힘을 기울이십시오. 마음을 다해 여러분들이 진실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 심령으로 많은 사람들을 아우르고 그 속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힘쓰십시오. 교회가 하나의 온전한 평화를 누리도록 진리 안에 사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하십시오. 그 일을 위하여 마음을 다해 섬기십시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속에서 그런 평강과 그리고 영광과 위로와 승리를 누리며 살아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높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렘33:6)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서 슬픔의 선지자, 혹은 눈물의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의 메시지는 눈물에 배어있는 슬픈 기록들입니다. 이런 그의 예언활동의 특징은 그가 부름 받았던 시대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미 140년 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망하고 남왕국 유다만이 남아있었던 때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심으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어있었습니다. 떠오르고 있는 강대국인 바벨론과 지고 있는 강대국인 애굽 사이에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하며 민족의 목숨을 연명하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가련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가장 캄캄한 어두운 밤중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가진 예레미야라는 선지자를 보내어서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에도 항상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들이 마음을 닫고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적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거시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들을 이해함으로서 주님의 뜻과 그리고 계획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할 실제적인 힘을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에 어떤 위기나 어두움 가운데 있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만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영혼의 그 어두운 그 밤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언제나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혹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갈등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에게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시고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든지 말씀으로 우리를 건져주신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으로 망가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고치고 부패한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원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곤고와 사망의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은 영혼의 부자유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며 당신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선포하게 하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끊어졌고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자비가 떠난 것처럼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포로로 끌려갈 그 위기의 상황에서도 당신의 마음을 가진 뛰어나게 신령한 선지자를 보내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그 백성을 잊지 않으신 것을 하나님이 입증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게 된 가운데 그 고난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두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도록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칠흑과 같은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범죄하고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하셨고 그 심판은 역사 속에서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그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당신이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그 땅을 주신 민족을 이렇게 슬픈 방법으로 다루시는지에 대한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당신의 더 큰 경륜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악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는 이것이 징계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녀이지만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될 때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그 징계 속에서 일정한 뜻들을 깨닫고 또 고쳐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II. 이스라엘을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A. 심판하시는 하나님
우선 첫째는 바로 이런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과 그리고 우리와 맺고 있는 특별한 언약관계를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번영하고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되어갈 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매우 특별한 관계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련이 일어나고 고난이 찾아옵니다. 무엇인가 나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손길로 개입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어 가실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갖고 계시며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각각 그 맺은 언약관계에 충실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런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 때도 그들을 내버려두신다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또 그렇게 징계 중에 고통을 당하고 참회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셔서 용납해주셔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또한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환난이 뒤따르는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성품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고 이 성품에 대한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함으로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되어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런 징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롭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고난 속에서 심판하시고 그 시련 속에서 그들을 아프게 하시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더하면 더할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처음 그들을 구원해주셨을 때 되기를 원했던 그 백성의 정체성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심으로서 이루고자 하시는 세 번째 목적은 그들의 영적인 쇄신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한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징계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그들의 영적인 모든 상태, 그리고 내면의 세계를 정화하고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대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하나는 조명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부패한지를 보게 하시고, 하나는 새로운 경향들을 그들 속에 주입해서 그들로 하여금 쇄신된 영혼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B. 치료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방법은 바로 그들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에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망가졌을 때 그것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것들을 고치심으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심판과 징계를 통해 오히려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나라와 백성으로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료하시는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료하시는 방법과 그리고 이스라엘 자신을 치료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실 때는 말씀으로 우리의 건강한 상태로 고치시지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고칠 때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건강하게 되는 그 상태에 대한 사모함보다는 치료하시는 과정에서 느끼게 될 고통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치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고쳐지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항상 무슨 올리브유로 살살 바르는 것 같은 그런 고통 없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이 고쳐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방법은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게 우리를 고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없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운 의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건강한 상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경도 위생적이지 않은 시대라서 그런지 우리 어렸을 때 살 때는 그렇게 병들도 많았고 그랬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한동안 온 몸에 종기가 잘 생기는 체질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허벅지에 종기가 났는데 얼마나 크게 부풀어 오르는지 꼭 밤톨만 하게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데 이게 걸을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아주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연고도 사다 바르고 고약도 붙이고 했지만 도무지 낫지 않아서 어려운 형편에 할 수없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손을 좀 봐야지 되겠구먼, 하더니 침대에 눕혀놓더니 치료를 시작했는데 가위를 가지고 부풀어 오른 곳을 잘라내더니 그 다음에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아무런 인정과 사정없이 그냥 눌러댔습니다. 그게 터지면서 노란 고름, 하얀 고름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고 하늘이 노랄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아직까지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게 이렇게 아프게 할 바에야 내가 뭐 하러 병원에 왔을까? 병원에 오는 것은 좀 덜 아프고 잘 고칠까 해서 왔는데 사정없이 쥐어짜는데 맑은 피가 나올 때까지 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끝났나 했더니 아주 머리가 아플 정도로 통증이 심한데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더니 젊은 학생이 뭘 그렇게 참지 못하고 아프다고 하냐고 오히려 야단치고 구박을 합니다. 그러더니 똑바로 된 핀셋으로 솜을 여러 번 감고 가재를 감더니 거기에 독한 과산화수소를 발라서 그것으로 그 구멍 사이에 집어넣고 한없이 후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을 청소하더니 그 다음에 다시 피가 쏟아지기 시작하니까 가재를 집어넣어서 다 닦아내더니 그 다음에 약을 잔뜩 집어넣는데 무슨 약인지 그렇게 쓰라린 약을 잔뜩 칠해서 그 속에 집어놓고 막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거기에 가재를 되고 반창고를 붙여서 집으로 보냈는데 하여튼 그날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쑤셨습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나니까 통증이 멎으면서 신기하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까 그렇게 고질적으로 아물지 않던 종기가 새살이 돋으면서 아물고 이제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은 바로 그런 방법으로 그렇게 고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실 때 그 방법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통스럽고 때로는 잔인하게 느껴지기까지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고치시려고 하는 열심과 그리고 그 의도를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끝까지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런 고치시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친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주시는 것은 아직까지도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식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만약에 우리에게 그런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르게 살 때는 우리를 격려하고 이끄시지만 올바로 살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살 힘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가르치시지만 우리가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스를 때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셔서 그래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그 손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한해를 지났습니다. 때로는 시련과 그리고 고난 속에서 마음 아파하는 때도 있고 끝없는 영적인 침체 속에서 하나님과의 단절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찌르시고 우리를 징계하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가련한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그 모든 것은 아직까지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지 않은 증거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기회를 다시 저버리지 않은 연고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들이 걸어가는 이 성화의 과정이 너무나 느리게 보이고 때로는 우리들이 미끄러진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도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값진 보혈을 기억하며 우리를 어떻게 하든지 다루고 고치고 새롭게 하셔서 제일 처음 십자가의 사랑 앞에 감격하며 주님을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때로 우리를 돌아가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심을 깊이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슴에 새기며 주님의 뜻을 좇으며 살도록 애쓰고 힘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I. 고난 가운데 보이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고난 중에도 우리를 하나님께서 다루셔서 맨 처음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에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런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는 평강과 성실에 풍부함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A. 평강의 하나님
첫째로는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인간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누리게 되는 마음의 평정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의 마음의 특징이 평강이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나니” 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평강을 얻지 못하는 상태가 물질의 부족이나 혹은 사물들의 질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에 작용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을 통해서 영향을 받음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작용을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공급되는 물질이 끊어지거나 혹은 정돈된 환경이 출렁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에 요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요동들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의 평정이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우리의 마음의 평강이 보이는 사물들의 질서에 의존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사물들의 질서만이 그런 사물들의 질서에 의해 평정이 유지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사물들의 모든 질서가 가지런하게 놓여있어도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으면 이 속에 평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강은 사물들의 질서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때로는 사물들의 질서가 결핍과 시련 중에 있어서 그래서 자신에게 현저한 고통과 아픔을 주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을 때 그 평강은 바로 이런 모든 환경이 주는 상태를 능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여기에서 지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 성경에 understanding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인간의 총명의 추론을 능가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평강이 신자들의 마음을 지켜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얻게 되는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평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하는 이런 담대한 외침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천만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라는 고백도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할 수가 없는 고백입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내가 신뢰하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고, 내가 의지하던 사람들이 나를 떠날 때 그때 담대히 하나님만이 나의 방패요, 요새요, 바위이며 피할 산성이라고 노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 그런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술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러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물질을 많이 주시고 그리고 형통하게 하신다면 그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선물하고 망가진 이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심령에 그 고통의 사슬들을 풀어주는 복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그 평화를 누리고 있는 그 사람에게 고난과 시련이 오면 그 고난과 시련 때문에 마음에 있는 세상사랑에 찌꺼기들을 덜어낼 것이고 배신을 당하고 위기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런 외로운 때를 통해 이 세상의 진면목을 아주 확실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잠깐 지나는 것이며 신자의 영원한 위로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신분은 나그네요, 그리고 지나가는 과객일 뿐이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련과 그 고통 속에서 하늘을 향한 소망으로 눈을 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주님을 찾는 마음이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만약에 물질과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된다면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이고 궁핍하고 시련을 만나게 된다면 근심과 걱정으로 여유가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에게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런 평강 속에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그 이후로부터 이제껏 그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과 화목을 깨트리고 떠난 그래서 고립된 인간들과 화해하기 위해서 인간을 찾으신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해치게 만들었던 우리의 많은 과오, 참된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에 대한 많은 야망과 그리고 교만,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헛된 호기심들을 버리고 주님을 굳게 붙잡는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유혹에 따르고 육욕을 좇아 살면서도 영혼의 평강을 누리면서 사는 제 삼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이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놀라운 평화, 어떠한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도 빼앗기지 않는 그 놀라운 평강은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평화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될지라도 기꺼이 그 길을 가고싶어 하는 사람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에 자기의 깨트려짐의 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누리기 위해서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면서 까지 이 세상에서 잘 되어보려고 하고, 번영을 누려보려고 하고, 그리고 예수 밖에 있는 어떤 복된 상태를 찾으려고 했던 우리의 모든 어리석은 기대를 오늘 이 12월 31일에 십자가에 못 박고 그런 어두움의 생각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한 해에는 넘어오지 못하도록 우리가 결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B. 성실하신 하나님
마지막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이 성실하심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본을 보여주시는 불변하시는 성실에 기초한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관계에 대해서 당신이 언제나 최선의 것을 우리를 위해 다 하여야 할 당신의 의무를 다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관계에 충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편의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또 하나님을 택하여 우리들이 그렇게 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애절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맺은 그 언약의 관계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과 근거가 되어서 끊임없는 변절과 그리고 자기 아집 속에서 주님을 떠났음에도 언제나 우리들이 주님의 손에 이끌려 찬양하고 돌아오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지체들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의 영혼에 밝은 등불이 되었던 주님의 말씀들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그리고 언제나 거기 계셨고, 불변하신 성품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들도 예측할 수 없는 변덕 속에서 주님을 대하지만,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에 기록된 그 양식에 따라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당신의 얼굴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집을 나갔던 많은 성도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회개하고 돌아가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버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그 훌륭한 자극제가 됩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만나를 내리신 것이 아니라 바가지를 발로 차며 불평하며 새벽에 걸어 나갈 때도 밖에 나가면 하얗게 생명의 양식이 땅에 내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힘을 얻어서 하나님께 대적하고 원망할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만나를 주신 것이 아니고 거역하고 거슬리는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만 하늘의 구름이 낮에 해가 그들을 상치 않도록 보호해 주었던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께 막말하는 인간들 위에도 시원한 구름으로 덮으셔서 낮에 해가 그들을 상하지 않게 도우셨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주께 불순종하고, 심지어는 우상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그들을 비춰주셔서 그들의 인도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해 할 수가 없는 그 하나님의 그 큰 사랑, 기분 내키실 때 베푸시고, 원하실 때 거두어 버리는 예측 할 수가 없는 변덕스러운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당신을 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베푸시는 그 큰 은혜와 그리고 가없는 용서. 그것이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양식이 되었습니다. 밥을 먹고 물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하나님의 가없는 용서와 한없는 자비. 짐승 같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빛과 사랑의 열로 인해서 살았습니다. 나도 내가 싫은데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싫겠으며, 불완전한 사람들에게도 만족을 줄 수 없는 나를 향해 하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맺으신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셔서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 흘리신 보혈을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셨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IV. 결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라
이 시간에도 한 해를 넘기며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소원이 무엇일까요? 천 천의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여러분들에게 원하실까요. 여러분들의 몸의 열매로 주님께 드리는 것을 원하실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시며, 주님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는 것. 그래서 한 가족으로 평화로운 상태에서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능력이 모자란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타박하신 적이 있습니까? 언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리가 적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이름이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처럼 당신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를 바라시는 그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그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 그리고 우리를 향한 용서와 그 큰 사랑, 은총 같은 것들이 우리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늘 의지하며 그렇게 살 때에 주님의 그 이름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리고 우리가 슬퍼할 때나 실패했을 때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나 언제나 우리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분의 품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돌려 감사해야합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 아직까지도 나 같은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관계를 지속하신 것.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면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저절로 좋은 것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대신해 해가 바뀌고 달이 갈리어도 그래도 신실하신 사랑으로, 변한 없는 성실하심으로 우리와 평화를 누리시고 싶어 하셨던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년 한 해도 굴곡이 많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 풍랑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을 굳게 믿고 쇄신된 영혼으로 하나님을 향해 살아야 합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오고, 때로는 행복한 날들이 오지만 그것들은 모두 삶의 양산일 뿐입니다. 본질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주님의 인자하심이며 그리고 한번 우리와 맺으신 언약에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자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어린 아이처럼 온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손을 꼭 잡고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도 없는 그 하나님을 깊이 의지해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래서 지금은 부족하지만 다시 한번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그리고 우리를 고치고 마지막까지도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결국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가고 우리의 일생이 강물처럼 자기를 깨뜨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런 삶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며 기도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