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돌아오라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절망의 끝에서 돌아서라 1 (2008/06/15)
1. 절망의 끝은 배교이다(욥2:9) 2008.6.15 주일오후 1
2. 절망의 끝은 죽음이다(마27:3-5) 2008.7.13 주일오후 6
1.절망의 끝은 배교이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2:9)
오늘부터 오후시간에 몇차례에 걸쳐서 절망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데도 사실 낙심이 되고 절망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떤 환경이 매우 고통스러운데 이것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했는데도 도대체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도 절망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힘이 있어서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 보고자 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을때에도 우리 마음에 절망 같은 것이 될 때가 있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런 절망들이 밀려오게 되는데 사실 성경은 절망에 대해서 아주 분부하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절망에 대해서 절대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꼭 하나 절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철저히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 소망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는데 그것도 조건이 그러한 자기 절망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절망은 희망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절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끝이니까 절망이 또 다른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일 경우에는 사실은 그것이 희망의 징검다리이지 절망이 아닙니다.
여기에 보면 절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욥의 기사를 통해 나타납니다. 욥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브라함 시대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화폐단위 같은 것들이 바로 아브라함 시대임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욥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믿음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사단이 하나님께 욥의 의로움에 대해서 송사를 하고 그리고 사단이 욥의 믿음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번의 환란이 겹치면서 자녀들이 죽고, 재산이 다 없어지고, 집이 무너지고 하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다 일어났는데도 욥이 주신이가 하나님이시니 또한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다 아멘.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이중에 아마 한가지만 일어났더라도 하나님을 믿니 마니 하며 펄펄 뛰었을텐데 이렇게 여러번의 환란이 일어나서 거부였던 사람이 아무것도 없고 자식들 조차도 다 떠나 보내고 이제는 정말 비천한 인간이 되어서 주저 앉아 있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니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는 여기에 안 나타났는데 아내도 이때까지만해도 그래도 믿음을 지켰던것 같습니다. 그때 시련의 강도가 더 올라가게 되는데 바로 욥 자신의 몸을 쳐서 질병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생긴 이 악창은 사실 무엇인지 지금에 와서는 명칭만을 보고는 지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온 몸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오는 그런 흉악한 질병이었던것 같습니다. 이 악창이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모두 나왔다고 하니까 한번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 보십시요. 그러면 그 인간의 그 몰골이 어떻했는가 생각해 보십시요. 환란과 시련을 만나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몸까지 병들어서 악창이 나니까 온 몸에 가려움증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제위에 앉아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고 하니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그 비참의 끝까지 내려 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럴 때 조차도 이 욥은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이미 한계가 찿아 왔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내가 이 상황에 깊이 낙심하면서 마지막에 남편에게 쏘아 붙인 말이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이 말이 너무 험악해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욕하고를 축복하고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의 유페니즘이라고 해서 하나님께는 감히 욥의 아내가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대로 옮길수가 없어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이 올바로 된 것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의 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망은 문자 그대로 희망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희망이 모두 끊어질 때 그것이 절망인데 사실은 이 절망은 환경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망은 반드시 믿음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절망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요. 희망을 가질때는 희망의 이유가 있고 절망 할때는 절망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절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대부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앞에 펼쳐지는 삶의 질서와 환경들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것을 토대로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러한 삶을 돌아 보면서 나중에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희망을 갖게 되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망은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되고 더 큰 고통과 외로움이 밀려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때 인간은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절망을 선택하게 될 때 절망을 선택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응답이라기 보다는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절망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은 믿음을 통해 세상을 알기 보다는 사물의 이치를 통해서만 세상을 알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사물의 이치를 통해서만 세상을 알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 믿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절망하는 것은 배교에 가까운 삶입니다. 그래서 고전적으로 자살한 사람들은 구원이 없다고 해석을 해 왔습니다. 그것이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살의 원인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요즘 같이 우을증이 많고 우발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환경에서 모든 자살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 라고 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 남은 하나님을 향한 단 하나의 믿음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했기 때문에 그 죄가 너무나 커서 지옥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자살을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믿음도 그 안에 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절망은 항상 그 배후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절망 뒤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반드시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을 하게 되면 마음이 강팍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거룩함, 경건함, 진실함 이것은 다 희망을 갖는 한도내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지면서 살게 될 때 그 소망 때문에 경건해지고 그 소망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그 소망 때문에 신실해지고 그 소망 때문에 절제하고 이렇게 소망이 손짓을 할 때 그 소망의 손짓을 보면서 많은 경건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끊어지고 나면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극도의 원망이 그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은 인간의 심령을 점점 굳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로 인해서 깊이 절망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깊이 절망하면 먹고 싶은것도 없고, 가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하면서 자신에게만 깊이 몰두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끝이 뭐냐면 이 여자가 이야기 한것과 똑같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망의 끝입니다. 어떤식으로든 그것은 성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이런 절망이 확확 밀려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욥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안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 모든 것을 가져가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또한 주신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는 손해 볼 것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자기 아내에게 반복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또한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하고 이 모든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 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진짜 욥은 하나님이 복도 주시고 재앙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을 한 것일까요? 만약에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 하나님은 심술쟁이 같은 분이 아니겠습니까? 어떤때는 복을 주었다가 마음이 상하면 벌을 주고 그리고 또 복을 주고 벌을 주고 그것 이상이 없다면 하나님은 심술 부리시는 것 같은 방식으로 인간을 다루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욥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후에 뒤로 넘어가면 자기의 고백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연단해서 자기를 어디론가 데려 가시려고 하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보다 높은 계획이 있다 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도 주셨지만 재앙도 주시지 않겠느냐 재앙이 끝이 아니라 이 재앙을 통해서 나를 정금과 같이 나아 오게끔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시려고 하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재앙도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주님앞에 자기의 마음을 지킬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두가지 사실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선하실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악한 것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두쪽이 나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커다란 어려움은 하나님이 선하시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반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부모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남의 아이처럼 생각하고 거의 돌보지 않았다면, 공부하지 않는다고 때리고, 행실이 바르지 않다고 책망하고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자녀를 향한 엄격함과 징계는 바로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징계가 없다면 너희는 사생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연단하고자 하는 자를 징계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것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 살때는 나쁜짓을 하고 요령을 피워도 들통이 안나고 순풍에 돛단것 처럼 잘 가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면 이상하게 조금만 잘못해도 바로 하나님이 보시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어려움도 생기고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나만 미워해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당하게 되는 많은 시련과 환란도 사실은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환란을 만났기 때문에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리고 시련을 당하면 항상 자신은 욥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욥과 같은 고난을 받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욥도 행위로 드러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이 욥이 순수하게 고난을 받았지만 고난을 받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자기 안에 그런것이 있는지도 모를 불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 같은 것들을 욥의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욥은 순전한 사람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이 환란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결코 환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자신안에 있는 깊은 본성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뿌리 같은 것을 우리안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일어날때라도 티끌 만큼도 입으로는 범죄하지 말고 그리고 빈말로라도 항상 하나님은 다 맞고 틀린것은 나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라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기준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설령 지금은 내가 잘 몰라도 나중에는 깨닫게 될 지 모르는 어떤 잘못과 허물 그리고 합당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내가 지금 환란과 시련을 당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선하시기 않기 때문에 혹은 나를 무시하시기 때문에 하챦게 여기시기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찬양은 이럴 때 찬양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저는 인생을 살면서 그럴때가 있습니다. 낙심될 때가 왜 없겠습니까? 정말 낙심이 될 때가 있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연약한 풀잎 같은 존재입니다.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낙심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마다 무엇을 생각하냐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 하셨을까? 이런 성경구절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아니 하시겠뇨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해야합니다. 흉악한 죄인 이었을 때 모든 생각과 사상의 하나님이 없을 때 하는 일 하나하나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주님을 원수 삼는 그런 때 일때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녹으면서 주님은 잘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고 내가 고난 받는 것은 내가 선하신 하나님께 부딪혔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렸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복됩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항상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환란이 일어나서 죽을 고비를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마지막에 우리에게 오는 것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인생의 난관에 부딪혀도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양한 환경속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물질이 없어서 곤고한 가운데 절망하기도 하고 건강으로 낙심해서 하나님 앞에 희망을 잃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돈이 없다고 해서 돈을 막 쏟아 부어주시고 건강이 나쁘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느 한순간에 우리에게 건강을 새롭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선을 보이시는 적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다루시기 전에 영혼을 먼저 다루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찔림을 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 후에 우리를 고치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돈 밖에 보이지 않았을때에는 돈이 없어서 낙심하고 절망 했는데 하나님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까 자기가 왜 사업에 이런 위기를 만나게 되고 시련을 겪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고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없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시련 가운데 두셔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으로 우리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도 우리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말씀을 통해 보내시고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에게 말씀의 밧줄을 던져 말씀의 줄로 우리를 고난과 시련에서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말 합니다. 이렇게 소낙비처럼 시련이 쏟아지고 환란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그때가 가장 그렇게 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허우적거리고 돌아 다니면 인생은 점점 꼬이게 되고 절망은 점점 깊어져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마음이 더욱 무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시련에 접할수록, 낙심 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와서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되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당신의 시련 가운데 있는 자녀들의 손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욥의 아내가 이야기 한 것 같은 죄에 빠지지 않고 절망의 마지막 끝이 결국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 버리는 배교다 라고 생각하고 두려워 하면서 주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고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절망의 끝에서 돌아서라 1
절망의 끝에서 돌아서라 1 (2008/06/15)
절망의 끝에서 돌아서라 2 (2008/07/13)
2.절망의 끝은 죽음이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27:3-5)
지난번부터 절망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시간에는 욥기를 보면서 절망의 끝은 배교다 라는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절망의 끝은 죽음이다 라는 부분을 우리들이 보게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사람 볼 줄 모르시지 왜 그런 사람을 제자 삼으셔서 배신을 당하셨을까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제자가 자기를 배반하고 자기가 이 제자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사단의 도구로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 되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사단의 계교를 능가해서 이 사람의 범죄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하게 하셨으니까 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악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러한 악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가롯유다가 그렇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도구로 선택되었다면 두가지 문제가 남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러면 가롯유다도 좋은일에 쓰임 받았던것 아니냐? 뒤집어 말하면 예수님이 가롯유다가 아니었더라면 죽지 않으셨을 것이고 죽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의 구속을 이룰수 없었으니까 이 가롯유다는 나름대로 큰 일을 위해 봉사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금 틀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가롯유다는 악을 행할 때 이렇게 예수를 죽여서 예수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여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팔아 넘긴 것이 아닙니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는 이 악의 근본적인 원인은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런점에서 이런 논리는 해결이 안 됩니다. 25년전에 한국 신학계에서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신없는 교수 한분이 유다 예찬론을 썼습니다. 그래서 가롯유다를 본받아라 이렇게 쓴 것입니다. 신학계가 발칵 뒤집혀서 논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는 그것입니다. 가롯유다는 나쁜짓하고 뉘우치기라도 했지 너희들은 나쁜짓하고 뉘우치기라도 하냐 그러니까 가롯유다만 본받아도 나라가 이 꼴이 안될 것이다 라는 것이 요지 였습니다.
두 번째는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롯유다 때문에 배신을 당하고 죽으셨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가롯유다 때문에 만약에 죽으셨다면 가롯유다도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의 답변은 여러분들에게 지금 드렸고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가롯유다가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그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도구가 되었다면 그것을 선택한 하나님이 더 큰 힘을 가지고 계신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가롯유다는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선택되었으니까 일종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그렇지가 않은 것이 하나님께서는 각각 자기가 선하고 악한 일을 위하여 쓰임 받을 때 그 사람의 준비된 마음과 하나님의 선택의 작용이 함께 합하여 이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악한 일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은 악을 위해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선한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은 또한 선한 일을 위해서 준비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없이 생긴 마음일수는 없지만 어쨎든간에 하나님은 그 각각의 마음을 보고 그 마음의 본성과 어울리게 당신의 도구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올때도 은혜를 향해 준비된 마음에 은혜가 흘러 들어오고 귀신이 흘러 들어갈 때에도 그렇게 준비된 마음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단이 예수를 팔 마음을 가롯유다에게 넣어 준지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만 보면 만약에 사단이 그 마음을 요한에게 넣어 주었더라면 요한이 죽일 놈이 되었을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에 그냥 꼬챙이로 쑤시고 들어가 그 마음을 넣어 준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상합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넣어 준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이 두가지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어쨎든 이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돈 궤짝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창기에는 돈이 조금 있었을지 모르지만 갈수록 예수님의 인기가 조금 떨어졌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때쯤 되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돈 궤짝이 비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관리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이점에 있어서 누구도 믿으면 안됩니다. 저는 학교에 있으면서 이런 돈 사고가 나는 것을 여러번 보았는데 대부분 믿음 좋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사람을 믿기 때문에 돈 문제에 대해서 허술합니다. 허술한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개중에는 아주 나쁜 인간들이 있습니다. 제가 강사로 신학교 다닐 때 일인데 학교의 책임을 맡은 목사님 한분이 저한테 한숨을 쉬면서, 후에 그 학교의 학장이 되신 분인데 이 세상이 어떻게 될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래도 명색이 신학교에 세례증명서 띠어 와서 오래도록 근무를 했는데 구조조정을 해야 할 상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만 두게 되었고 돈을 계산을 하니까 그때 돈으로 퇴직금이 몇백만원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올 시간이 없으니까 퇴직금을 달라고 하니까 그 퇴직금을 경리를 시켜 주었는데 그것도 저는 이해가 안가는데 돈을 주면 반드시 영수증을 받아야지 그것이 몸에 습관처럼 배어야 하는데 그냥 돈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있다가 학교로 연락이 왔는데 왜 내 퇴직금 안 보내냐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받아 가지 않았냐 하니까 자기는 전혀 그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옆에 증인도 있는데 자기는 받은 적이 없다 영수증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두 번 물어 준 것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신학교에서...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학교와 교회는 은혜로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은혜로 하면 안되고 모든 사람이 은혜받는 하나님 사람들이라고 보지 말고 도둑놈도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공인회계사 감사 받는 이유가 그런것도 있습니다. 우리끼리 한들 뭐 어떻겠습니까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은헤로운 사람은 제도가 아무리 까다로워도 문제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법대로 할 것이니까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법에서 이탈하려는 사람들이 법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법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 만지는 사람들이 시험에 많이 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 많이 일어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수시로 일어 나는데 어쨎든 유다도 걸릴때에 가서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따라 다녀 봐야 별 볼일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제는 드디어 조직적인 핍박이 시작되어서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공동체가 큰 위기를 만나겠구나 하는 정치적인 생각을 똑똑한 사람이 못했을리라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판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찿아가서 흥정을 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흥정이 두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돈을 받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렇게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 할 때에 자기가 이 사람들에게 협력하여 자기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기대가 오히려 더 컷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증거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는데 이 은 삼십이 무슨 돈 인가하면 당시 노예의 몸값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말도 되지 않는 비용에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중요성으로 미루어 볼 때 내가 보기에는 은 삼십이 아니라 은 삼백을 주고 흥정을 해도 전혀 비싼 가격이 아니었을텐데 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렸을까?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전까지도 담보로 한 거래 였다는 것입니다. 20여년전에 이 대목을 보면서 정말 기가막혔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낮아 지시데 낮아 지시데 마지막에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팔리실 때 그때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려 많은 사람들 원수에게까지 종 놈 한명의 몸값에 팔리셨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잡지에 보니까 말이 있는데 경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엄청나게 중요한 재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 한 마리에 80억이라고 합니다. 우리중에 누가 비행기 타고 떨어 졌을 때 80억을 줄까 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 절대 안 줄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80억인데 그 말의 씨가 접을 붙이는데, 그 말에서 나온 정액이 다이아몬드 그 만한 양보다 훨씬 비싸다고 합니다. 대단하죠? 말 한 마리에 80억이면 상상이 됩니까? 우리 교육관 빌딩을 80억에 샀는데... 그 말 한 마리가 뛰어 다니는데 떨려서 어떻게 타고 다닐까? 말 한 마리도 80억짜리가 있는데 예수님의 몸값이 은 삼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팔리시는 그날까지도 비천하게 낮아 지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 아니겠습니까?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그 후의 상황을 보니까 유다는 불안에 떤 나머지 자기가 판 예수의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먼 발치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혹은 다른 제자들과는 동떨어져서 그렇게 지켜 보았던것 같습니다. 살인범의 공통된 심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가 살해한 그 장소에 꼭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심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사람을 죽인 장소를 알면 인내심을 가지고 거기에 숨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범죄자의 심리가 유다에게 작용을 했는지 예수님의 체포 당하신 이후의 그 과정을 다 지켜 보았는데 이것은 양심의 견딜 수 없는 가책을 불러 일으킬 만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붙잡히신 다음에 그 체포와 심문 그리고 그 모든 고문의 과정이 거듭나지 못한 유다의 눈에 볼때에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일생 오셔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예수님이 받으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대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에 결국은 정죄되고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오늘 성경에 보면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뉘우친 것입니다.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 넘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아주 뼈져리게 후회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그 은 삼십을 쓰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면서 고백하기를 두 번째 고백은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었다 세 번째는 그를 판 것은 나의 죄였다 이러니 사실은 회개가 제대로 된 것 아닙니까? 예수의 정죄됨을 보고 깊이 뉘우치고 그 다음에는 내가 판 그 예수가 사실은 죄 없으셨던 분이셨다. 정작 죄인은 나다. 훌륭하게 회개를 한 것 아닙니까? 오늘날 많은 신자들 가운데 이 정도 회개하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말 스스로 깊이 뉘우칩니까? 그렇게해서 얻은 이익을 자기가 쓸 것도 포기하고 원래의 자리에 갖다 놓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하고 바로 자기가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하는 자복의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것 보면 유다의 회개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과는 스스로 나아가 목매어 죽어버립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람이 유다가 목매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배가 터져서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생각하기를 목매어 죽었고 죽을 그를 어떤 이유에서인지 떨어뜨렸더니 높은곳에서 떨어뜨려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온 것인데 마태복음에서는 앞 부분을 보고 적은 것이고 사도행전과 다른 부분에서는 뒷부분을 보고 적은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쨎든 비참한 자살로 인생이 끝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드는 질문은 그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뉘우치고 그리고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오히려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깊이 자각을 했는데 왜 마지막 결론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왜 이 사람은 결국은 목매어 배가 터져서 죽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는가?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을 때 예수님은 죽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을 설마 죽이기까지야 할까 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습니다. 은 삼십이 좋아서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나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치고 다시 예수님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나 오십보, 백보 아닙니까? 전쟁이 났을 때 오십 발자국 도망간 사람과 백 발자국 도망간 사람 누가 더 충신입니까? 그것을 이야기 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아니 관절염 때문에 조금밖에 못 도망갔지 관절만 튼튼 했더라면 백오십 발자국 도망갈 수 있었을텐데 그것은 오십보, 백보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이 아까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자기 목숨을 예수님보다 사랑해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인간이나 은 삼십이 좋아서 예수님을 판 유다나 사실 그 죄 질의 차이로 보면 오십보, 백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 범죄를 딪고 예수님에게서 내 양을 먹이라는 소명을 받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지도자가 되고 이 인간은 빌라도와 함께 영원히 저주 받은 그런 인물이 됩니다. 이렇게 뉘우치고 예수는 무죄하다고 확신하고 자기가 죄를 범했다고 믿게 되었는데도 왜 베드로는 용서 받아서 참 회복으로 나아가고 이 인간은 이렇게 저주를 받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와 절망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라 죄에 대하여 깊이 후회는 하였지만 그것이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깊이 후회를 하고 났더니 자신이 그릇 행한 것 그리고 그분이 무죄한 것 자기가 죄를 범한 것 까지도 확신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 가려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그래서 절망의 마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스스로 좌절하고 무너지는 마음입니다. 그 모양은 참된 회개의 모습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용서 받게 만들지만 절망은 그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회개하게 하시지만 마귀는 우리 인간을 끊임없이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이 불신자의 특징이라고만 하면 안됩니다. 신자의 마음에도 순간순간 이런 절망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그런 기운이 역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과 은혜가 없으면 잘못하면 거기에 주저앉고 순간적으로 절망의 어두움이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자살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조금 생각이 틀립니다.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자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특히 요즘 같이 인간의 정신세계가 아주 혼미하고 어지러워지는 때에는 정상적인 건강한 마음의 상태에서 단번에 자살의 문턱에 들어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주위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거의 정신병적인 증상들이 누적된 가운데 그런 결단이 어느 순간에 나오는 것이지 절대로 건강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자살로 뛰어 드는것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은 인기있는 연예인들이 줄줄이 자살을 하면서 사회 문제화 된 적이 있었습니다. 장래가 꽤 촉망되고 상을 많이 받은 배우들인데도 어느 한 순간 동맥을 끊고 약을 먹고 투신하고 하는 자살한 기록들이 나옵니다. 대부분 그런 일을 결정하기 전에 정신세계가 무너지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절망으로 확 다가오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정신세계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런 상황들을 스스로 이것들을 극복해 갈 수 있는 해석의 능력들이 있는데 정신에 이상이 오게 되고 병적인 상황에 접어 들면 상황을 보고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들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마치 카메라를 비칠때에는 넓은 세계가 보이다가 카메라를 확 땅기니까 어느 한 점이 카메라를 꽉 채우는 것처럼 절망 스러운 어느 한가지만을 주목하면서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회개할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의존할 마음을 버리고 예수께 더욱 의지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절망에 사로 잡히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자기 안에 있는 모든 해석의 능력을 뺴앗겨 버리고 거기에서 깊이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두가지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절망에 대한 작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절망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난과 시련이 많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망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소망의 어머니입니다. 그 사랑의 품안에서 수 많은 젖 먹이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가지면 항상 희망을 갖고 꿈을 갖는 것입니다. 현실과는 다른 꿈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은 기대를 끊임없이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여러분 자녀를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진 부모는 자녀를 향해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별로 신통치 않아도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저게 인간이 될까 라고 말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봐 많이 변했쟎아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향해 그런 기대를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절망에 자신의 마음을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은 이런 절망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조정되고 함부로 움직여 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필요하고 요긴합니다. 그런 건강한 은혜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가끔 낙심하고 절망하지만 오히려 그 낙심과 절망 때문에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더 많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를 향해 실망하면 실망할수록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나에게 낙심하면 낙심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지점에 가서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그때에 그 인간의 절대적인 외로움 때문에 절망하게 되는 것인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분이 내안에 내가 그분안에 있어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산다고 하는 것 이것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그렇다해서 심오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이 먹고 늙은 성도들인데도 그렇게 말하자면 주님이 죽음을 넘어서 주님이 나와 동행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죽음의 공포도 이기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평온함을 잃지 않는 성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없으면 그럴수 없는데 믿음 때문에 오히려 절망을 극복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절망의 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는 것이고 절망의 끝은 배교하고 결국은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자살이 아주 유행하였고 그것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특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지성인들이 결국은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문맥을 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제 이 자살을 해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인간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인데 존재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너무나 너무나 간절하게 존재 하기를 원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존재하기를 포기 하는 것이 자살인데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이냐면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견딜수 없을 때에는 다르게 존재하고 싶은 간절한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다르게 존재하고 싶은 간절한 희망이 있는데 그 기대가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사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기 때문에 너무나 너무나 죽기를 원하는 것이 자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순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낙심, 절망입니다. 낙심은 절망의 사촌쯤 되고 그리고 절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부부입니다. 그래서 이 세단어 하나님을 향한 원망, 절망, 낙심 이 어두운 단어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낙심될 때 마다 자기를 추수르면서 이것이 마지막에 나를 데려가는 것은 배교이고 그리고 죽음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을 밝은 면을 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결국은 하나님 사랑이 이 마음안에 충만하게 있을 때에는 고난과 시련이 닥치면 기대가 생겨 납니다. 이 고난과 시련 아니면 이 새롭고 두려운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제껏 내가 보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 보여 주실까 이런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소망의 어머니입니다. 소망은 사랑이라는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물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절망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고 매일매일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사랑은 한번에 우리에게 입금시켜 주는 계좌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끊임없이 당신의 살아 계심을 우리의 영혼안에 그 영향을 미치심으로서 우리 안의 마음의 사랑이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이런 모든 정신병적인 불안을 이기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서 돌아서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