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2008/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2 (2008/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앉은뱅이를 고치신 하나님(행3:1-10) 2008.1.14 새해 말씀사경회(새벽) 1
2. 소경을 고치신 하나님(요9:1-2) 2008.1.15 새해 말씀사경회(새벽) 5
3. 문둥병을 고치심(마8:1-2) 2008.1.16 새해 말씀사경회(새벽) 13
4. 중풍병자를 고치심(막2:1-12) 2008.1.17 새해 말씀사경회(새벽) 17
5. 혈루증을 고치심(막5:25-29) 2008.1.18 새해 말씀사경회(새벽) 21
1.앉은뱅이를 고치신 하나님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 3:1-10).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3 (2008/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절망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올려다보고만 사니까 그렇지 한 번 인생의 밑바닥을 내려다보면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앉은뱅이 된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상태니까 이 사람이 그 당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빌어먹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자기 발로 걸어서 빌어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들어다가 성전 미문이라고 하는 곳에 거기에다가 데려다 놓으면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갈 때에 사람들이 양심이 가장 예민해지는 곳에 거기에 두었는데. 문의 이름이 ‘아름다운 문’ 이예요. 거기에 앉은뱅이 된 사람이 거기에 앉아서 돈을 구걸을 하는거죠 그 때도 기도시간이 되니까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인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뭘 좀 달라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 우리를 보라고까지 하니까 꽤 큰 돈을 주려나 보다 하고 쳐다봤더니 베드로가 아주절망적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은과 금은 내게 없다” 이건 거지에게는 정말 절망적인 선언이란 말이죠. 은과 금이 없으면 그냥 조용히 갈 일이지 왜 쳐다보라고 그러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더니 이 사람이 일어섰단 말이죠. 그리고는 믿어지지 않으니까 한 번 뛰어 본 거죠. 걸어도 보고 뛰어도 보고 그러면서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그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더라. 그 예기입니다. 내용이.
이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그 날 바라는 행운이라고 하는 것은 좀 인정이 많은 예배자를 만나서 그래서 그 날도 좀 넉넉한 적선을 받는 것이 이 사람의 하루에 기대하는 최고의 행복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 다른 날보다 수입이 넉넉해지면 우리 옛날에 살던 60~70년대 문맥으로 얘기하자면 그 당시에 보면 하루 시장 바닥에서 일을 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저녁때 이렇게 보면 한 손에는 쌀 봉지 하나 들고 그리고 한 손에는 연탄, 연탄을 새끼에 껴서 팔았습니다. 두 장도 못 들고 한 장 드는 거죠. 두 장 들려면 양손에 들어야 되니까. 그래서 봉지쌀 하나 사고 그 다음에 연탄 하나 사들고 이렇게 오는 것이 그 때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래도 한 말 씩 두 말씩 쌀을 사서 먹는 사람들은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가마씩 쌀을 부쳐서 먹는 사람은 항상 그 쌀을 안방 웃묵 에다가 보관을 해서 집에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시를 했죠. 그러던 시절 문맥을 보면 이 사람도 아마 그 날 수입이 좀 넉넉하면 그러면 봉지쌀이라도 하나 사고 연탄이나 하나 사고 거기에 고등어라도 한 마리 엮어서 들고 와서 배불리 따뜻한 집에서 먹고 하룻밤 자는 게 소원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스물 네시간이 안가는, 유효기간이 스물네시간도 안되는 행복이었습니다.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4 (2008/01.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그랬더니 이 베드로와 요한은 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이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본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적선을 좀 해준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랬는데 사실은 거짓말이거든요.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많은 은혜 받은 사람들이 그 집과 땅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두었다 그랬어요. 물론 베드로가 그 날 예배당에 갈 때에 현찰을 안 들고 갔을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자기가 맘만 먹으면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 이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스물 네 시간만 해결해 주고 싶은 게 아니라 아주 완전히 영원히 해결해 주고 싶었던 거죠. 그것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주고 싶어 했던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유효기간이 이십 사 시간 밖에 되지 않는 소원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하는 이 만족을 얻게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고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명령하고 이 사람을 번쩍 잡아서 일으키니까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절망적인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거죠. 그러면 이제 더 이상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건네주는 푼돈 정도는 이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죠.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걷고 뛰고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으니까 더 이상 그 미문에 앉아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떠 매어 와서 거기서 구걸하면서 살 필요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하나님 앞에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정말 매일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 적선을 받고 구걸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매일 주시는 일용할 양식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쓸 것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사는 것이죠. 그리고 또 그것이 바로 신앙인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거기에는 매우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름다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일용할 양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것, 예전에 우리들의 삶은 소박하고 그리고 우리들의 욕망이 제한적이었어요. 지금은 그렇지가 않고 사람들의 욕망이 한없이 커져서 그래서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정말 보다 더 많은 만족을 누리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과분한 삶을 위한 욕구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경쟁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사실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사실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를 이렇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서 성전 미문에 둔 이 사람처럼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으로 하나님 앞에 힘 있게 살아가지 못하는 그런 장애는 사실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문제는 그런 영혼의 장애를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놀라운 은혜로 치료 받아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혼돈스럽고 어지러워도 거기에 믿음이 있고 환란이 오고 시련이 닥쳐도 거기에 소망이 있고 많은 결핍이 있어도 거기에 만약에 사랑이 있다면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그 모든 것들을 얼마든지 극복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깊이 어루만져 고쳐진바 된 성도들은 지금도 그런 결핍과 어려움을 오히려 하나님 만나는 기회로 삼고 시련과 고난도 오히려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의 통로로 여기고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요. 그것이 신앙의 간증이고 믿음 이예요.
한번 이것을 우리의 육적인 형편으로 보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이 앉은뱅이가 너무 불쌍해 보이고 비참해보일지 모르지만 한 번 이것을 영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바로 이 앉은뱅이와 같이 사람들이 매고 와서 성전에 갖다가 두어서 구걸을 하며 오늘 하루 먹고 사는 일에 급급했던 이 사람 같은 그러한 영적인 생활이 아닌가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렇게 매주 와서 예배를 드리고 이름만 걸어놓은 신앙생활, 마음에서 자의적으로 우러나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기뻐하며 이렇게 살아가기 보다는 무엇엔가 나도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의해 강요당하며 이렇게 억지로 신앙 생활하는 것과 같은 이런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했더니 이 사람이 누가 하나님 찬양하라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 만약에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두둑한 돈을 얻어서 그래서 며칠 편안하게 먹고 지낼 이런 물질을 갖게 됐다면 이 사람이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 께 경배하며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치유입니다. 이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성전 미문에 앉아 있을 때 자기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나면서부터 그는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걸어본 적도 없고 뛰어본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것이 운명인 것처럼 여기면서 그렇게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불행을 한탄했겠지만 그러나 이제는 행복의 기대치를 훨씬 낮추어서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이나 하면서 밥을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을 못 만났더라면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삶을 이에게 전개해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묘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앉은뱅이가 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손에 심심치 않게 떠 매어서 그래서 구걸하기 위해서 성전 미문에 갖다가 내려놓음을 당하는 일들을 매일 되풀이 하면서 그는 자기가 앉은뱅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자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영적으로 앉은뱅이인데도 사실은 우리가 그런 사람인 것을 모를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그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의 상태에서 어제와 다름이 없는 오늘 그리고 오늘과 다름이 없는 내일을 꿈꾸면서 사실은 이 신앙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실 위대한 일들에 대해 기대도 갖지 않고 믿음도 없이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살면서 실패에 익숙해져 있고 그리고 마치 실패를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모든 우리의 인생의 기대,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든 생각들을 오직 환경, 그리고 물질, 그리고 우리의 삶의 여건에만 두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치셔서 새롭게 하실 그런 꿈들을 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실패에 익숙하고 더 나은 삶에 대해서 도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그러한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한 번 우리가 눈을 떠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한 번 봐야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들이 앉은뱅이와 같이 살아가지 않았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타의에 의해서 이끌려 교회에 나오고 영적인 생활이라곤 없고 한 번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다시 그 은혜로 다시 돌아갈 어떤 여망도 보이지 않고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면서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이 타율적 신앙생활로서는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축복을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에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가 잘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사람의 인생이 놀랍게 바뀌게 되었을 거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가 앉은뱅이 되었던 자가 일어났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과 함께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제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기만 한것으로도 그의 삶의 질의 놀라운 변화가 찾아 왔는데. 제가 요새 그 간증이쟎아요. 정말 날로 새로워요. 날로 새로워요. 날로 새로워요. 어제도 밤거리에 이렇게 보니까. 이 시골의 밤거리가 이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어쩜 가로등이 그렇게 빛나고. 전 세계에서 이렇게 화려한 밤을 가진 도시가 몇 않되요. 아낌없이 전기를 쓰쟎아요. 교회에도 와서 보니까 나는 어두워서 계속 등을 달았는데 보니까 너무 환해. 눈부셔요. 삶의 이런 모든 것들이 그럴싸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두통이 훨씬 사라졌구요. 속도 훨씬 편해졌어요. 이렇게 눈 하나만 고쳐도 이렇게 삶의 질이 이렇게 달라지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엉덩이로 기어 다니다가 벌떡 일어나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얼마나 그 사람의 삶의 질이 달라졌겠어요. 거기에다가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진정한 인생에 있어서 축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영육간에 한꺼번에 보여 주신 거예요. 이 사람이 기뻐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앉은뱅이를 만약에 의사가 와서 고쳤다면 이 사람이 그렇게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겠어요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일어나게 되었을때 그의 온 관심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을 꺼예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이렇게 나를 고쳐주셔서 나에게 새 인생을 주셨구나’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게 되었던 것이예요. 우리에게도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번 사경회에서 앉은뱅이 되었던 여러분의 영적생활이 고침을 받고 기뻐 뛰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정말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절망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2008/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2 (2008/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3 (2008/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4 (2008/01.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5 (2008/01.18,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2.소경을 고치신 하나님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 :1-11).
어제 새벽에는 우리가 앉은뱅이가 되어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몸이 천 냥 이면 눈이 구 백냥 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눈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가를 지나가시는데 소경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소경이 아마 그 길 가에서 빌어먹고 있었던 모양 이예요. 그래서 한 푼 좀 보태달라고 구걸을 하고 있는 소경을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이 궁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 소경인데 이 사람에 대해서 아마 이 모든 제자들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겠죠,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인 것을 제자들도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됐는데 그래서 처음부터 빌어먹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됐는데 선생님, 이게 누구 죄입니까? 이 조상의 죄 입니까 ? 아니면 자기의 죄입니까? 어쨌든 앞을 못보고 그 비참하게 빌어먹으며 살아가는 것은 재앙임에 틀림없는데 이런 재앙이 이 사람에게 내렸으면 원인이 있을 텐데 그건 도대체 뭡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이 사람 부모의 죄 입니까? 이게 이 제자들의 마음에는 아마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그 자손의 대 삼 사대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미워하고 그리고 그에게 큰 재앙을 내린다고 하는 이러한 율법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던 거 같아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건 이 부모의 죄다 아니면 이 사람의 죄다 이렇게 단정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전혀 다른 말씀을 하세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 얘기는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 소경을 눈 먼 자로 태어나게 하셨다 이 말씀이에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모에게 좋은 형질을 물려받고 성경적으로 봤을 때 좋은 형질을 물려받는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개별적인 영혼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시지만 그러나 또한 부모로부터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특질들을 물려받는 것이거든요. 그런 좋은 형질들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 순진하던 어린 아이 시절에 좋은 부모를 만나서 그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면 다 받아들일 그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잘 배우고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리고 가정에 여유가 있어서 좋은 교육을 받고 또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부모에게서 배운 인생을 사는 이치나 사람의 도리가 부모의 품을 떠나서 학교에 와 봤더니 선생님도 똑같이 가르치더라.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아내를 만나고 혹은 남편을 만났는데 이 엉터리 같고 개념이 없는 인간을 안 만나고 그렇게 부모로부터 좋은 형질을 물려받고 좋은 가정에서 그렇게 인간의 삶의 도리와 인생의 이치에 대해서 바르게 배운 아내나 남편을 만나요.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여건이 열린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거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가 선택을 많이 했겠어요.
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망가진 가정에서 태어나요. 부모가 머리도 나쁘고 인간성도 거지같아요. 그런 나쁜 형질을 물려받은 거예요. 태어났는데 아예 처음서부터 이 부모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을 하지 않는 거의 짐승이야. 그러면서 자기 욕망을 따라서 자기 좋은 대로 그 어미 애비가 막 사는 거예요. 그럼 그것들이 어린 아이의 가슴에 콱 콱 찍히면서. 어린아이는 판단이 없으니까 그렇게 찍히면서 그것들이 그 아이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는 거예요. 실제로 심리학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80%가 부모에 의해서 그것도 6세 이전에 형성이 된다고 보는 거죠. 부모의 품에 있을 때. 그런 소중한 시기에. 그렇게 무엇이든지 가르치고 영향을 주면 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그런 소중한 시기에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거예요. 가정이 깨뜨려지고 악한 부모,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그런 속에서 자라요. 돈이 없어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 그렇게 하면서 이 거친 세상에서 돈도 없고 환경도 안 좋아 그러니까 어울리는 인간들도 자기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면서 부딪히면서 인격을 형성해 가요.
사실 이것은 그 어린 아이가 매 순간 악을 선택한다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그 아이와 이 아이는 인생을 100미터 달리기로 보자면 한 아이는 한 70미터 앞에서부터 시작하는 거고 얘는 0점이 아니라 저 뒤로 한 이십 미터 쯤 가서 시작하는 거죠. 처음서부터 달리기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물러나는 대통령이시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강남에 대해서 그렇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그랬던 것이 그것도 사실 어떻게 보면 눌리고 약자로 살아온 사람들 편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거죠. 우리는 뭐 약자 편도 아니고 강자 편도 아니고 우리는 시골 사는 사람들이니까. 한 사람은 서울 사는 사람들이고 한편은 강남 사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제 삼자 들이니까. 서울대 들어간 애들 50%가 강남 애들 이예요, 그리고 강남 애들 아니면 서울대 들어가도 그 아이들 속에 어울리지를 못한대요. 그러니까 아예 처음서부터 태어나서 네 살, 다섯 살 밖에 안 되는데 벌써 백만 원씩 주고 과외를 시키면서 그때부터 대학을 준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할 수 있겠어요. 처음서부터 되지를 안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학원을 일곱 개 여덟 개 씩 다니면서 고등학교 때는 사백 만원, 오백 만원 과외를 들여서 그렇게 해서 정확하게 길을 따라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서부터 게임이 안 되는 거죠.
저는 좋은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고 자란 사람들이 제가 이 나이가 됐는데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 자신을 이렇게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역시 그렇게 모자란 부분들은 아직까지도 모자란 흔적들이 남아요. 그게 그렇게 그대로 남아 있어요. 아마 나, 우리 자녀들 그리고 그 자녀가 다시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자녀를 낳고 아마 그저 이삼 대 지나가야 믿음의 가문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고 그 전에 결핍되었던 것들이 채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들어요. 그래서 믿음의 뿌리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들을 저 자신을 보면서 언뜻 언뜻 해요.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많은 것들은 자기도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순전한 피해자요 아무 책임도 없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날 사형제를 폐지하자 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는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결정론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아예 처음서부터 그런 인생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도록 인간의 이 속에 이미 프로그램이 돼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는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어떤 인간은 선하게 살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딱 돼있고 어떤 인간은 아예 처음서부터 망가져 가지고 개판 치면서 살 수 밖에 없도록 돼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프로그램 돼 있는 인간들이 펼치면서 살아가는 데 자기가 가끔 뭘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결국 그렇게 선택 할 수 밖에 없도록 이 속에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사회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봐 주고 그렇게 같이 살자 그거죠. 그러게 프로그램 되어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채임 지우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부모도 책임지고 그 부모의 부모도 책임져야 하고 세상도 책임 져야 하고 교육도 책임 져야 하고 우리 모두 나누어 져야 한다는 그런 거거든요.
모두 동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확실 한 건 하나 있죠. 우리도 살다 보면 우리가 우리 인 것이 싫어 질 때가 있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이제 나도 내 자신이 싫어진 지금에야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그래서 주님을 기쁘게 하고 싶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죠. 그런 것을 우리들 모두 가지고 있는 거죠. 모든 부분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렇게 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그런 속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입력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런 굽은 잘못들 결국은 거기에 나도 의지적으로 동조를 하고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런 인격과 나의 습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 나의 의지적인 선택이 가미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거든요
그게 결국은 이 소경과 같은 신세가 아닌가 생각을 해요. 사람들은 생각하는 거죠. ‘야, 저 인간이 저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누구의 죄냐? 개념이 없고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고 신앙의 도리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치를 모르는 그 막된 부모 때문이냐 아니면 자기 자신의 끊임없는 죄와 끊임없는 악 때문이냐 무엇 때문이냐?’ 묻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이 부모가 되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또 백 번 양보해서 우리가 죄를 짓고 우리가 끊임없이 나쁜 것을 선택해서 우리 안에 패역해서 그런 악한 것들이 생겨났다고 칩시다. 자, 우리가 알코올 중독에 걸리게 되죠. 그러면 거기에는 술을 좋아하는 형질을 타고난 것도 있겠죠. 왜, 어떤 사람은 한 모금만 마시면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어요. 저희 아버지 같은 분. 할아버지는 두주불사했어요. 들고는 못 가도 그걸 다 잡숫고 가셨어요. 아버지는 전혀 술을 못 드셔요. 맥주 한 반 컵만 마시면 택시에 실려 올 정도니까. 본인은 날 보고 그러셔요. 너희 할아버지가 술 먹고 주사를 부리고 그러시는 것이 너무 싫어서 결심을 하고 술을 안 먹었다고 그러는데 내가 보기엔 사실이 아니고, 체질 자체가 술을 받아들이질 않아요 이런 체질을 가지면 사실은 그렇게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괴롭고 못 견디니까 그걸 선택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체질적으로 이 알코올을 잘 받는 사람이 있어요. 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든지 특수 조제됐든지 어쨌든지 간에 잘 받아들여요. 그래서 냄새만 맡으면 ‘흠, 하~ ’ 이러는 사람이 있단 말의예요. 이런 사람들은 먹고 중독이 될 가능성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선택을 하는 거죠. 그러면 그 무수한 선택 가운데서 자기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거쟎아요. 선택은 자기가 했는데 그 다음은 자신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옛말에 그런 말도 있쟎아요.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데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셔버린다.’ 자기도 어찌 할 수 없는 형질이 되어 버리는 거죠. 자, 이제는 자기도 어찌 할 수 없어서 그런 중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그 때 그가 자율적으로 무얼 할 수 있는 여지는 아주 협소한 거예요.
네덜란드라는 나가가 있어요. 화란이죠. 거기에는 전 세계에서 마약 복용률이 가장 낮은 나라야.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마약을 팔다가 걸리면 어마어마한 벌을 내려요 그 대신 마약을 하고 싶은 사람은 병원에서 줘요. 그러니까 그 마약이 굉장히 비싸거든요. 그 비싼 돈을 주고 길거리에서 살 이유가 없어요. 내가 꼭 마약을 하고 싶으면 병원을 찾아가면 돼. 그리고 검사를 하면 돼. 내가 중독이 됐는데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고 그러면 병원에서 의사가 처방을 해서 마약을 주는 거예요. 처음에 기독교 국가들이 무지하게 욕을 했어요. 그런데 결국 그것을 통해서 마약을 잡았어요. 병원이 너무 싸니까. 그거 중독된 사람들 아니면 길거리에서 사서 맞지를 않잖아요. 그런데 길거리에서 사면 엄청난 벌을 내리는 거예요. 거의 죽여 버리다시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병원에 가면 너무 너무 싸. 막 헐값이야. 그러니까 내가 어쩔 수 없으면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보이면 의사가 기록을 남겨요. 언제 몇 그램씩 마약을 가져 간 것을 다 적어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상담하면서 결국은 고쳐주는 거예요.
말하자면 우리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 거거든요. 우리가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됐다 해도 우리 자신들이 어찌 할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게 누구 죄 때문이냐에 관심이 많으신 게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절망과 같은 순간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셔요.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봐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인생을 넉넉히 살아갈 수 있었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주님께 은혜를 구했어요. 내가 묻고 싶어요. 왜 그렇게 여러분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어요? 여러분들은. 딴 사람들은 모두 짐승처럼 살고 여러분들은 아주 놀라운 현자의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의 무게를 혼자 발견한 거예요? 아니에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를 지으면서 살았고 그러다가 남들이 못 깨닫는 것을 어느 한 순간에 ‘나는 정말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 인생의 무게를 혼자 감당 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모든 죄를 용서받고 다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마음 안에 오셔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하는 거기에 무엇을 이바지했어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는 사람이고 무엇으로도 그 인생의 올무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입증하셨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그 큰 사랑을 부어 주셨어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아무것도 날 위해서 한 것이 없고 다만 주님 앞에 나아가 내 자신의 힘으로는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노라고 고백을 했더니 주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또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는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을 두 눈을 밝히 떠서 보게 해 주셨어요. 그리고는 주님이 우리도 어찌 할 수 없는 그 인생의 무게를 덜어 주시고 나 자신이 나 자신의 본성에 묶여 있었었는데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계시게 해 주셔서 나도 극복할 수 없는 옛 본성을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본성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리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하늘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부어 주셔서 그래서 그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나를 극복하고 내가 이길 수 없는 환경을 이기게 하셨어요.
좋은 부모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못 물려받았어도 주님이 친히 부모가 되어 주시고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주님이 내 형제가 되어 주시고 그러면서 큰 사랑을 부어 주셔서 오히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주님을 못 만난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도록 그렇게 많은 은혜를 주셨어요. 잘 배우고 좋은 교육을 받아서 훌륭한 그렇게 지위 갖지 못했지만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지식을 갖은 사람들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이치와 창조의 목적을 알게 하셔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며 살게 하셨어요.
그 때에 우리는 우리가 한 때 소경처럼 절망적인 인생을 산 것이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왜, 그것 때문에 우리의 간증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 없이 살던 때에 이 소경과 같이 절망적이었고 또 좋은 부모 못 만나고 자신도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 것이 더욱 감격이 되었고 그리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 없이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죠.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주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하니까 예전에 내게 불행했던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고 내가 그렇게 칠흑 같은 인생의 어두움,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인생의 길을 알 지 못하는 그 혼돈과 무지와 어두움이 없었다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간절히 찾을 수 있었을까. 결국은 하나님이 나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라고하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지금도 어찌 저 뿐만 이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우리도 어찌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도 어찌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를 원하지 않는 데로 데려 가고 폭력과 같이 나 자신을 억압하는 어떤 것들을 발견하게 되요.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주님은 이 절망적인 소경의 상태에서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이 인간에게 다가 가셔서 제자들은 누구 죄 때문에 이 삶이 이렇게 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준비된 상황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를 고쳐 주셨어요. 그런데 고쳐 주신 방법이 어제 본 방법과는 틀려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그렇게 명령을 해서 걸은 게 아니라 사도들보다 훨씬 큰 예수님이신데도 침을 뱉어서 흙을 땅에 짓이겨서 오라 그래서 그 사람 눈에다가 발라주셨어요. 광경만 생각해도 그게 얼마나 지저분합니까. 침을 뱉어서 그걸 발라서 그걸 눈에다가 바른 다음에 소경을 보고 실로암이 얼마나 거기서 떨어져 있는 지는 모르지만 거기까지 가서 다른 물도 안되고 꼭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그랬을 때 그 얼마나 불편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 소경은 믿음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그분이 긍휼에 넘치는 자비를 가지고 인생의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기처럼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비천한 죄인들에게 베푸신 그 긍휼과 크신 사랑의 소식을 들었어요. 이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의학적으로는 설명 할 수 없는 거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침을 발라 짓이겨 주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실로암 못에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 가서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대로 씻었습니다. 그리하여 눈이 떠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이 그렇게 길거리에서 구걸이나 하면서 있던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서 푼돈 하나 건네주시고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셨더라면 이 소경은 하루만 구원받을 수 있었을꺼애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쳐 주고 싶으셨어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고쳐 주시고 나니까 오히려 이 사람이 소경이었고 그 소경된 상태에서 길 가에서 빌어먹고 살았다고 하는 이 부끄러운 과거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데 아주 요긴하게 쓰여졌어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소경에게 찾아 와서 “누가 고쳐주었느냐. 너를 고쳐 준 그 분은 어디로 가셨느냐”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사람이 끊임없이 의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당신들이 왜 의심하느냐 나는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그 분이 나에게 이렇게 진흙을 발라 나에게 실로암으로 가라고 명하셨고 내가 그 명령에 순종해 씻었더니 내가 눈을 떠서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보지 않았습니까. 예전에 나는 길가에서 빌어먹으면서 살던 비참한 소경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눈을 뜨고 보게 되었고 나는 더 이상 빌어먹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백했어요.
소경이 아니었던 사람이었더라면 이렇게 감격에 차서 예수님을 간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도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과거의 측면에서만 자꾸 보지 말고 미래의 측면에서 봐.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상황이에요
절망적인 인간 아무 희망이 없는 비천한 인생. 결국은 그 속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여 주시고자 주님이 준비하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소경과 같이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있어서 빌어먹어야 하는 이 소경의 신세처럼 여러분들이 가엾은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에요 간절히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어찌 할 수 없는 이 한계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빌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부끄럽게 여기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오히려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으실 겁니다.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기길 바랍니다.
절망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2008/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2 (2008/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3 (2008/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4 (2008/01.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5 (2008/01.18,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3.문둥병을 고치심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쫓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1-3).
사실은 지금은 문둥병이 많이 사라졌지만, 사실 지금도 정복할 수 없는 질병가운데 하나죠. 이 당시에는 문둥병은 아마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질병중에 가장 절망적인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질병은 그래도 사람 속에 어울려 살면서 고쳤는데, 이 문둥병은 강한 전염력 때문에 일단 이 병이 걸리면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서 따로 떨어져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가족들로부터도 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로부터도 분리되어서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이 문둥병은 천주의 질병이라고 여겨졌어요. 즉,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생긴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였죠. 이 문둥병은 온 몸에 지체들이 떨어져 나가죠. 그래서 얼굴 모양 자체가 다 일그러지고 발가락도 떨어지고, 손가락도 떨어지고 그리고 피부 자체가 무너져서 그래서 몸의 지체가 하나씩 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혹시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한아운이라고 하는 시인이 있어서 문둥병자였죠. 자기의 ‘보리피리’라는 시에서 그렇게 표현했어요. “오늘도 고개를 넘는다. 발가락이 하나 또 떨어진다.” 그렇게 온 몸에 지체가 떨어져 나가는 절망적인 질병이었어요. 가까이 오는 것을 모두 싫어해서 사람들이 그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죠. 어려서 꼭 한번 그 문둥병자를 본 적이 있는데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흉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둥병이예요. 여기에 나오는 이 문둥병자가 그 몇 살된 사람인지는 성경에 안 나오지만, 어쨌든 이렇게 자기발로 나와서 예수님을 찾을 정도가 됐으니까 어린애가 아니라 성인이었을 것이 분명하죠.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문둥병에 걸려서 그 긴 세월동안 살아오는 가운데 무슨 일은 안 해봤습니까? 나름대로 그 사람들도 문둥병자를 고치고자 하는 처방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맨 처음에는 용한 의원도 찾았을 것이고, 민간에서 자기 질병에서 스스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는 비방이라는 비방은 다 해 봤을 거라는 거죠.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자기의 문둥병이 얼마나 중한지도 알고, 주위를 둘러봐도 문둥병에서 나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문둥병자는 자기의 모든 희망을 접고,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질병에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기가 포기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는데, 이 산이 팔복산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다 가르치시고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른 이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때에 산에 있었는지, 아니면 산 아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이 문둥병자가 나아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수 있나이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사실 절망적인 환경이 아니라 그 절망적인 환경에 낙심하고 더 이상 어떤 희망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패역한 마음이에요. 그것이 가장 커다란 인생의 고통이 되는 것이죠. 보십시오. 이 사람은 절망적인 질병에 걸려서 자기를 치료할 어떠한 수단도 일생동안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팔복산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천국의 비밀들을 전파하시고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전에 뵈었는지 소문만 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에서 살던 이 문둥병자가 자기의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와 그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과 무슨 관계를 발견하게 되었다는데 중요 점이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없이 살아가던 때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는데 예수님의 관한 소문을 듣고 또 막상 눈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잠자고 있었던 이 문둥병자의 마음에 한 소원이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자기가 깨끗하게 되고 싶다고 하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처한 어떠한 환경이나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어떠한 특질들이 이제는 도저히 내 자신의 힘으로 고쳐질 수 없고 내가 살아왔던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예수님과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관련짓는 것. 그것이 믿음이예요. 다른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자신의 인생을 관련짓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예요. 무슨 뜻입니까? 절망적인 문둥병에 걸려서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되고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도 소외되어서 이제는 사람이면서도 도움을 받기는 커녕 사람의 눈을 피하여 살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문둥병자가 이제 이정도면 절망에 익숙해질 때인데, 실제로 이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 속에서 살았을 텐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예수님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비참한 인간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건져주셨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주님을 자신의 인생과 연관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인생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나의 이 문둥병의 상태가 아무리 중하든지, 내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나의 인생을 고쳐볼 어떠한 희망을 찾다가 아무런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할지라도 이 예수님이 원하시면 고칠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주님께 나아와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과 관계를 멪으실 수 있는 주님. 그리고 원하시면 하늘이 내린 질병이라고 여겨지던 이 절망적인 문둥병도 고칠수 있는 예수님. 그분이었기 때문에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합당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만물 위에 탁월하시고 모든 인간위에 뛰어나셔서 그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어요. 그 사실을 아는 자마다 즉각적으로 보여야 할 반응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무슨 도움을 주실까 그 이전에 그리스도의 그 탁월하심 앞에서 인간이 돌아가야 할 의무는 그분을 경배하는 것예요. 경배가 없이 나의 인생의 난관을 그분과 연결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이지, 그분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분이 모든 만물위에 탁월하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분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껏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살았던 삶을 돌이키는 거예요. 이전에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르면서도 마음속에 그분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그분께 경배하지도 않았던 이 태만하기 그지없는 삶. 그러면서도 그분이 내 인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모든 자기 중심적인 기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해요. 그리고 제일 먼저 그분의 탁월하심을 발견했으면 그분을 경배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예요. 그 믿음 없이 자신의 인생의 필요를 따라서 그분과 연관시키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모든 신앙의 출발은 무릎을 꿇고 그분의 위대하심 앞에 엎드려지는 승복을 통해서 시작되는 거예요. 이 문둥병자가 먼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여기에서 이 문둥병자가 절한 것은 병을 낫기 위한 아부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한없는 사랑과 그휼로 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풀고 구원하실 수 있는 그 큰 능력을 가지신 주님, 그 주님을 뵈오며 그분의 탁월성을 발견하고 제일먼저 그는 그 예수그리스도를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깨끗케 하실수 있나이다.’ 하고 주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보시고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문제는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을 발견하고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제일 큰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그분이 관련하실 수 있다고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염려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한다면 우리는 그 환난과 시련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될 것이고 형통한 환경이 열리게 되면 그것 때문에 예전의 한숨이 변하여 주님께 드리는 노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변하여 주님을 향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이 맡겨 주시면 그러면서 주님의 더 많은 탁월성을 발견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가 어떻게 주님이 주신 축복을 기화로 다시 타락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원수로 갚겠습니까? 문제는 그 예수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그분을 경배하는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모든 중요한 관건은 주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원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실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절망 속에서 살았어도 주님이 원하시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을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주님께 기쁨을 드렸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경배는 아부에 불과합니다. 모든 경배는 참스러운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죠. 그분의 인격을 믿고 그리고 그분의 탁월성을 믿고 그래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언약과 보증들을 믿는 이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경배이고 이 경배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경배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에요.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죠. 이것이 하니님이 받으실 만한 기쁜 제사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말없이 이 절망적인 문둥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주님께서는 이 문둥병자의 경배와 믿음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셔서 손을 내밀어 고름이 흘러 줄줄 흐르는 그 더러운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얼마든지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나아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충분이 낫게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손을 내밀어 고름이 줄줄 흐르는 그 더러운 이 문둥이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믿음이 있는 문둥병자를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시간 세계 속에 나타났던 거죠. 사람들은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분이 행하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없었을 것이고, 사람이 아니었다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볼 수 있도록 깊이 손 내밀어 고름이 줄줄 흘러 더러운 병자의 몸에 손을 대어 그를 어루만져 주실 수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긍휼에 넘치는 사랑으로 이 절망적인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고, 그리고 이 사람에게 치료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하는 이 고백에 답을 하듯이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으라.” 이렇게 명령하시자, 즉시 이 문둥병이 정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처한 모든 한계를 극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이처럼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의 상황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서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 신앙과 경배의 정신을 갖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죠. 어찌 이 당시에 문둥병자가 이 한 사람 뿐 이었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을 것이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소문이 이 한사람에게만 들렸을 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해 주실수 있는 분으로 연관을 지었고, 제일 먼저 그분을 경배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처해있는 문제의 상황이 이 문둥병자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과 관련이 있으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기쁘게 여기시고 그분을 경배하기만하면 주님을 찾는 여러분의 신앙을 보며 즐거워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문둥병자는 이 절망적인 질병 때문에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듯이,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 당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시고, 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경험할수 없는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신앙의 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문제는 문둥병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못 만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 사람은 지나는 풍설에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으나 여러분은 매주일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충분히 듣고 있고 그리고 얼마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올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된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원하시면 나를 이 고질적인 질병에서 고칠 수 있나이다. 이제껏 까지 한 번도 질병이 없이 살아본 적이 없는 비참한 인간이지만 주께서 원하시면 충분히 이 일을 하실 수 있나이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절망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2008/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2 (2008/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3 (2008/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4 (2008/01.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5 (2008/01.18,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4.중풍병자를 고치심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 2:1-12).
이 세상에 모든 질병이 좋은 질병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만 그 중에 이 중풍 병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질병중의 하나입니다. 어제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문둥병 같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가족들과 결별해서 별도의 장소에 수용되거나 아니면 가족으로부터도 축출당합니다. 이 중풍 병은 사지를 바로 쓰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수족을 의지해야 되는 그러한 질병입니다. 심하면은 대소변도 가려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질병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중풍병자가 바로 그런 사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그곳에 모이게 되었고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서 어느 집에 계신 것이 소문이 나니까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이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으려고 문 앞에도 들어 갈 수 없을 정도로 인산인애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육체의 질병을 고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당신 계신 곳에 가득 모인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저희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무슨 도를 가르쳤을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인간이 악하고 타락한 것과 그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오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 하시고 인간들을 참 사람으로 만드실 도에 대해서 가르치셨겠죠. 생명과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 때에 이 중풍병자가 이 현장에 오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이 중풍병자가 문맥으로 볼 때 기동도 못하는 사람인데 아마 틀림없이 이 사람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신도 한번 이 예수께 가서 고침을 받아 보겠다고 하는 소원을 자기를 돌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피력을 했겠죠 . 그래서 이 사람을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이제 침상에다가 눕힌 채로 침대 째 들고 예수님께로 갔으나 사람의 홀몸으로도 문을 빠져나가서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 큰 침상을 가지고 인파를 헤치고 예수님 앞에 접근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은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으니까 데려갈 수 없었다고 끝나지 않고 그리고 집으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예수님이 계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바로 그 앞에서 구명을 내고 상을 달아 내렸던 거죠 . 우리 생각에 지붕이 종이 짝도 아닌데 간단하게 뜯나? 하는데 그 당시에 집들은 지붕이 아주 허술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큰 비나 이런 것들이 오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지붕을 간단하게 하고 살아요. 그것을 위를 몇 개를 뜯으니까 곧바로 구멍이 나는데 예수님 바로 앞자리예요. 그래서 질서를 무시하고 네 명이서 줄로 침상을 달아매서 상이 위에서부터 내려 왔어요 . 예수님 앞에 어떻게 보면 새치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굉장히 가상하게 생각하셨죠.
저는 가끔 교회 직원들에게 이 설교를 합니다. ‘무리를 인하여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음으로 ..도로 집에 갔더라’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무리를 인하여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음으로 그 계신 곳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달아 내렸더라’ 엊그제 신문 보니까 이 명박 당선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사람보다는 차라리 오버하는 사람이 낫다. 참 저는 교회를 이끌어가면서 그 말에 깊이 공감했어요 . 제일 좋은 것은 냉소적이지도 않고 오버도 않고 충성스러운 것이 제일 좋죠. 그런데 가끔 오버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콧방귀나 뀌면서 냉소적인 사람보다는 훨씬 낫다. 그 이야기죠.
모든 열정은 창조적인 생각의 기반 이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중풍병자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다 놔야겠다는 일념이 강하지 않았더라면 데리고 갔다가 사람들이 많아서 도저히 들어 갈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들어 갈 수가 없었더라’ 그러면 충분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워낙 그 일념이 강하니까 거기에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생각 할 수 없는 것을 이 사람들은 해냈어요.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는 거죠. 그 때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새치기를 하느냐? 그러지 않으시고 상을 달아 내리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믿음으로 보셨어요. 그러면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셨어요.
그것이 무슨 뜻이냐 면은 우리의 육신의 모든 질병이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예요.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면서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도 쉬지 않고 설교하면은 몸살도 나고 감기도 나고 또 더 심하면은 더 큰 병도 걸려요.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의 몸이 자연적인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 질서를 어기면서 살면 그게 병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렇지만 자연적인 질서를 따라서 잘살았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 질병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죄에 대한 응분의 결과로 병을 허락하셔서 우리를 징계하신다기보다는 ...봤잖아요? 소경, 문둥병자, 앉은뱅이 이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거나 혹은 그를 고쳐주시는 일들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거나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잖아요. 누가 질병이 걸렸을 때 사람이 간단하게 ‘ 네 질병은 죄 때문에 걸린 질병이다.’ 혹은 ‘네 질병은 전혀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거다.’ 아니 면은 ‘네 질병은 영광을 드러냄도 아니요 죄 때문도 아니요 제가 자연적인 질서를 어겼기 때문이다 ’ 라고 모든 질병을 쾌하게 해석 할 수 는 사람은 없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 사람의 경우에는 죄가 문제가 되었던 것 이예요. 그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하셨는데 저희의 믿음은 이 사람을 달아 내린 사람들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라도 예수께 나아오고 싶어 했던 중풍병자 자신도 포함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이르되 “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면서 죄를 용서해주셔서 ”그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 고 명령하시자 자기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니까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는 것 이예요. 이렇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중풍병자가 일평생 누워서 친구처럼 지냈던 그 상을 자신의 힘으로 떠 매고 나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선언하신 한마디의 말씀으로 이 중풍병자가 낫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가 영적으로도 보면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혹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중풍 병에 걸린 것 같은 상황에 도달할 때가 있어요. 도저히 자신의 힘이 아니면은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할 수 없는 그런 신세가 될 적이 있죠. 그래서 또 교회는 필요해요. 그래서 혼자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붙들어주고 너무 심하면 자기의 힘으로 교회에 출석할 수 없어서 가서 사람이 데려오고 전화를 하고 불러 오고 또 성도로써 살아가야할 삶이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권고하고 위로하고 또 사람들이 격려하고 돌보고 또 때로는 육신의 필요까지 채워주고 이러는 일들이 필요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이 어리고 연약해서가 아니라 오래 믿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데도 미끌어지고 죄 가운데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챙겨서 신앙생활 할 수 없다면 이것은 이 사람의 영적인 중풍병자 상태예요. 그렇게 중풍 걸린 상태에서도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겠죠.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간호원이었는데 비오는 날 옥상에 올라갔다가 감전이 되어가지고 두 팔과 한 다리를 끊었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살다가보면 처음에 남의 손에 신세를 다 졌는데 이제는 혼자서 팬티도 입고 일 본 다음에 뒤 처리도 한대요. 간증하는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은 적응을 한 거죠. 자기의 불구의 상태에 대해서 발하나를 가지고 사는데 여기다가 목발을 끼고 발 하나의 놀림이 예사롭지 않아요. 그 발 하나를 가지고 다 하는 거예요. 우리보다 훨씬 더 발이 많이 올라가고 발가락 다섯 개를 움직이면서 손가락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거예요. 이것도 자기의 불구 된 상태에서 적응을 하는 거 아니예요.
중풍 병의 상태가 심한 데 어느 손가락이나 발가락 전혀 못 움직였을 리는 없겠죠. 침상에 누워있었어도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 사람들에게 신세를 덜 지면서 스스로 자기 몸을 챙길 수 있는 그러한 적응력을 갖게 되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은 아니잖아요. 궁극적인 해결은 건강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거죠.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은혜가 떨어지고 영혼이 불구상태에 있어도 나름대로 거기에 적응하는 법을 터득해요. 그렇게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예요. 자신이 미끌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간 영혼의 상태 때문에 불편해하고 고통스러워 해야지만 거기에 무엇인가 변화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중풍병자와 같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도 없고 걸어 갈 수도 없고 아무리 힘을 내어도 사람답게 살 수 없는 불구와 같은 영혼의 상태에 놓여있을 수 있어요.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가도 고칠 수 없었고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그를 돌봐주었어도 그 질병을 근원부터 해결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니까 어쨌든 이 사람의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절망적인 중풍 병을 고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더니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또 그의 육신도 고쳐주셔서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 감사하며 나아갈 그 때에는 그의 영혼도 고쳐져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며 영육 간에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중풍병자와 같은 이 절망적인 상태 우리의 육신 혹은 영혼의 상태가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만 만나기만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배경이 되는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그 분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그 분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는 믿음이 없다면 계속해서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사람들의 신세를 지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 하고 불구된 상태에 있는 불행 그 자체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행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되느냐 아니면 불행 그 자체로 끝나느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시점에서 그 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람처럼 예수그리스도의 능력과 자신 의 죄 된 상태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긍휼을 얻음으로 이렇게 예수님 앞에 영육 간에 고침을 받았던 이 중풍병자처럼 새 인생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망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 (2008/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2 (2008/0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3 (2008/01.16,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4 (2008/01.17,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5 (2008/01.18,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5.혈루증을 고치심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5-29).
모든 질병이 다 고통스럽고 지난 사일 동안 언급했던 모든 병들이 절망적인 병이었지만 오늘 여기 혈루증을 앓는 여인도 그만 못지 않은 큰 고통스러운 육체의 질병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혈루증은 육체적으로 무슨 질병을 의미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많은 주석가들은 부인병의 일종이었을 거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혈을 하는 그런 종류의 질병이었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에 이런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소개한 문헌을 보면 이 질병이 불치의 병이 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소개하는 치료법이라는 것이 사실 질병과는 아무 상관도없는 미신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이죠. 만약에 고칠 수 있는 질병이었다면 무엇인가 의학적으로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비슷한 치료법을 제시 했을 텐데 그렇게 미신적인 방법들을 소개한 것을 보면 이 혈루증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로써는 불치의 병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병이 때로는 저절로 낫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경우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이 혈루증을 앓았으니 사실 인간적인 기대로는 저절로 낫는 상태가 될 수 없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마도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 이 혈루증을 앓기 전에는 꽤 재산도 있었던 여자 같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의원을 찾아 다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죠. 만약에 워낙 생계가 망막한 극빈자였다면 아마 의원에게 가는 대신 민간요법으로 낫는다고 하며 그런 미신 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의원을 만났다고 하니까 이 사람이 꽤 많은 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여기에 이 사람이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이 질병으로 미루어 볼 때에 아마도 결혼한 여자 일 가능성이 많겠죠. 이렇게 열 두 해를 피를 쏟으며 계속 질병 상태에 있으니까 남편과의 관계도 아마 깨뜨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복병처럼 만난 이 혈루병은 자기의 인생의 계획 속에 없었던 상황이죠. 그러니까 이 여자의 모든 소망은 이 혈루증을 빨리 고치고 남편에게로 돌아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최대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의원들을 찾아가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명성이 있는 의사들을 다 방문하여 치료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원들을 찾아 갈 때에 소망은 자기의 혈루증을 고치는 것이었지마는 돌아온 것은 많은 괴로움과 있었던 모든 돈을 전부 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많은 의원들에게 많이 고쳤다라고 말하지 않고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있었던 것도 다 허비하였지만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두려운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어려운 것이 있고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준비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어려움은 인간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의 자원을 가지고 고쳐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더 많은 괴로움과 더 많은 손해 더 많은 고통이 돌아오게 됩니다. 마치 한없이 삼켜도 삼켜도 끊임없이 삼키는 어떤 웅덩이와 같이 내가 내 인생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 많은 노력 물질 시간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자원까지 동원해서 고쳐 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괴로움을 당하고 더 중하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기로 하나님이 계획하고 준비한 어려움은 결코 그 어려움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만나기 전까지는 죽을 자유도 없어요 . 반드시 당신 앞에 세워서 걱정 마세요 .절대 죽지 않아요. 또한 막다른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은 사실은 죽는 것이 훨씬 더 좋아요. 그런데 죽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큰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여자는 많은 괴로움을 당하면서 있던 것을 다 허비했어요. 이제는 자원도 없고 희망도 없는 그 때에 그래서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도리어 더 중하였던 차에 예수의 소문이 들려왔어요. 예수님이 계신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이렇게 불치의 병에 걸린 앉은뱅이와 귀머거리와 소경과 문둥병자까지도 고침을 받아서 그들의 인생이 바뀌었다 하더라는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어요. 그 때에 그의 마음 속에 어떤 굳센 믿음이 생겼어요. 그 믿음이 뭐냐하면은 이 혈루의 근원을 마르게 한 믿음이었어요.
그러면 어제 배우기는 아무거나 믿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이성의 추론으로 믿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했는데 오늘 자기의 질병이 고쳐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는데 그게 아니고 질병이 고쳐질 수 있다라고 믿었는데 그 믿음의 기초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능력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발휘할 수 있는 신적인 능력 여기에 이 여자의 믿음의 근거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가 어떤 확신까지 갖게 되었냐면은 내가 그 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얻으리라 이러한 확신을 이 마음에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 흐르는 혈루병을 그대로 가진 채 예수님께 나아가서 정면으로는 도저히 예수님을 면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을 만나도록 주변의 사람들이 허락할 리도 없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거기에 섞여서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 중에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며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을 표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혈루의 근원이 즉시 마르고 그 순간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가만히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었지마는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이 그에게 행사된 것을 스스로 느끼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고 이 여자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나아오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너는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주님께서 그를 영혼을 구원 하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육신의 질병도 치료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자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에 걸려서 가족들과의 관계도 끊어진 채 있던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병이 더 깊어져 괴로움 속에 살았던 그것을 보면 인생이 벼랑 끝에가는 정말 고통스럽고 암울한 인생의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절망적인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아갈 사람인데 예수님 만나게 하시려고 이 큰 질명의 상태를 허락하셨더니 이 질병이라는 어두움을 배경으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사람의 몸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통하여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불행에 벼랑 끝에 선 인생을 그것을 오히려 계기로 삼아 이렇게 큰 구원의 은총까지 입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이렇게 희망이 없는 불치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그들은 환경에 절망하고 자신에게 여전히 희망을 걸면서 다람쥐 채 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여자는 예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 분을 의존하기만하면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하면 그분께 젊잖게 무릎을 꿇고 그분이 온 마음을 다해 자기의 몸에 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의 구원을 성취할 것이라고 하는 예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이 예수님이 고쳐주시지 않으면 찾아갈 의원도 없고 찾아갈 재물도 없어서 이제는 오직 그 분과의 만남에만 희망을 걸고 그리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뵈오면 뵈올수록 전심으로 그 분만을 의지해서 자기의 이 불행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믿음이 이 사람에게서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이 것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고 예수님과 화평이 이루어 진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하리라”고 예수님이 명령하셨으니 수 많은 의원들에게 호소했으나 괴로움만 당한 자신의 질병의 상태를 주님이 친히 떨쳐 버려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 만나기 위해서 주님이 준비하신 어려움이었기 때문에 이 여자는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하여 몸부림칠 때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자 이 인생의 문제를 기필코 해결을 하고 이 질병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평화도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 어려움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에 쓰디쓴 괴로움에 지나지 않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반대편에서 보면 이 어려움이 아니었다면 결코 모를 하나님의 사랑, 이 어려움이 아니었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그 자비와 그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준비하신 한 통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이 어려움이 처음 생겨날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돈, 내가 찾아갈 수 있는 의사에 의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움을 주신 것은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고쳐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큰 어려움 속에서 주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심으로 이제껏 주님을 믿는다고하면서도 같이 남아있던 사람과 물질과 나의 힘과 이 모든 주님이 아닌 것들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는데 이 어려움을 통해서 그것들을 내려놓고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껏 까지 여러분들이 지고 있던 어려움에 대해서 불평하고 괴로워했지만 오늘 한번 그 어려움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이 어려움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 새벽에 주님을 찾았을 리가 없는데 주님이 이 어려움을 통해서 게으른 나로 하여금 당신을 찾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희망을 많이 두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 인간을 고치시기위해서 주님이 이 어려움을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의존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무엇도 내 인생을 바꿀 수 없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내 인생이 주님 앞에 있사오니 주님의 뜻대로 해주시옵소서. 이러면서 주님을 꼭 붙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절망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