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009년 설교모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설교기간|2009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1.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요8:1-11) 2009.1.11 주일오전 1
2.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요4:1-26) 2009.1.25 주일오전 11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3. 전혀 다른 선택(행9:13-16) 2009.1.28 수요예배 19
4. 다시 믿게 하시는 하나님(창17:1-2) 2009.2.11 수요예배 26
5. 벧엘로 부르시는 하나님(창35:1) 2009.2.18 수요예배 37
6. 죽지도 못하는 사명자(욘2:1-3) 2009.3.4 수요예배 48
7. 다시 걷는 세상(눅5:17-26) 2009.3.11 수요예배 57
8. 과거와 다른 현재(몬1:10-12) 2009.3.18 수요예배 68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요 8:1-11
I. 본문해설
II. 종교지도자의 음모
A. 모세의 율법
B. 예수의 율법
1. 자기를 돌아보게 함
2. 양심의 힘과 한계
III. 독대하시는 그리스도
A. 용서하심
B. 다시 시작하게 하심
IV. 복음의 은혜는 기회입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
요 4:1-26
I. 본문의 배경
II. 목마르지 않는 물
III. 네 남편을 불러오라
IV. 결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전혀 다른 선택
행 9:13-16
I. 본문해설
II. 선택과는 다른 삶
A. 성도를 박해함
B. 그리스도를 대적함
III. 삶과는 다른 선택
A. 주 이름을 위한 그릇
B. 고난을 받을 생애
IV. 결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다시 믿게 하시는 하나님
창 17:1-2
I. 본문해설
II. 아브람의 불신앙
A. 하나님의 약속(15:4)
B. 아내에게 순종함(16:2)
III.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A. 전능하신 하나님
B. 완전함을 요구하심
1. 완전한 믿음
2. 완전한 순종
IV. 결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벧엘로 부르시는 하나님
창 35:1
I. 본문의 배경
II. 번영 속에 궁핍한 영혼
III.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A. 벧엘로 올라가서
B. 거기 거하며
C. 단을 쌓으라
IV. 결론 : 유일한 소망 - 하나님 앞에 섬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죽지도 못하는 사명자
욘 2:1-3
I. 본문의 배경
II. 요나의 소명과 불순종
A. 불순종의 원인 : 편견
B. 끝나지 않은 부르심
C. 사랑 없을 때에도
III.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다시 걷는 세상
눅 5:17-26
I. 본문해설
II. 질병의 절망 속에서
A. 침상에 실려 옴
B. 도움의 손길들
III. 고치시는 그리스도
A. 능력의 나타남
B. 죄 사하시는 그리스도
C. 믿음을 보심
IV. 결론 : 다시 걷는 세상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과거와 다른 현재
몬 1:10-12
I. 본문의 배경
II. 다시 시작하게 하심
A. 과거의 오네시모
B. 현재의 오네시모
III. 오네시모의 변화
A. 회심한 사람
B. 유익한 사람
C. 동역한 사람
D. 복음을 위해
IV. 맺는 말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1.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 1-11).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에게 끌고 와서 재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이지만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이 기사에 보면 복음의 은혜가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보석처럼 소중한 진리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소중한 교훈들을 살핌으로 힘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나옵니다.
Ⅱ. 종교지도자들의 음모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가 잡혀 왔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왔고 또 많은 백성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이 여자의 처벌에 관한 건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내세운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A. 모세의 율법
이들이 모세의 율법을 내세운 것은 모든 백성들이 일치하도록 존경하는 권위의 선지자였고 또 예수님도 당신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자기는 율법을 폐하러 온 사람이 아니요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온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모세의 율법을 걸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일이 났습니다. 자신들이 이제껏 이런 저런 가르침으로 율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종교 지도자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번 접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에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많이 알고 있고 모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한 사람들은 놀랍게 예수님에게 끌렸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말씀의 권세와 영혼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로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중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백성들로 하여금 신임할 수 없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갖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고 나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돌로 쳐서 죽여라.” 하면 평소에 예수님이 늘 부르짖던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이 모순된 가르침임이 드러날 것이고, 만약에 이 여자를 용서해 주라고 말하면 모세의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니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또한 신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고, 종교 지도자들의 회의에 회부하면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죄를 물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를 보십시오. 간음하다가 잡혀온 이 여자의 영혼에 대한 염려, 이러한 죄악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질지도 모른다는 회중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직 이 종교 지도자들이 노리는 것은 이 죄를 지은 이 여인의 비참한 처지를 재료 삼아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이들의 목적의 전부 다였습니다. 옳고 그름, 시비에 대한 도전은 있었으나 영혼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이러한 상황을 통해 아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님은 아무 대답 없이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글자를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구도 이때 쓴 글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할 말이 없다고 판단을 하고 강력하게 계속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을 몰아붙였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의 율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B. 예수님의 율법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자기를 돌아보게 함
돌로 친다는 의미는 때리기 좋은 돌을 손에 움켜쥐고 정죄 받은 사람의 생명을 끊을 의도를 가지고 그를 내리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될 때에 아마 가격하는 목표 지점은 머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돌멩이로 한번 쳐서 죽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계속 돌멩이로 쳐서 결국은 이 죄지은 여자를 죽이는 것이 이들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이 여자의 죄가 하찮다든지, 이런 정도쯤은 상관이 없다든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런 죄는 다 덮어야 된다든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돌로 치라는 모세의 율법은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도 그 모세의 율법을 따라서 간음하다 붙잡혀온 이 여인을 “돌로 치거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훼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그들에게 함께 전해주고 싶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누구도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혼에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죠. 그러면 그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죠. 여러분이 머리로는 어떤 진리를 알아도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을 여러분이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진정으로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말씀을 깨달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나에게 주실 때에 하나님이 품으셨던 마음까지도 함께 전달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은혜가 유지되는 사람에게는 이 마음을 지키고자 하는 내적인 의지가 있어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마음까지 함께 전수를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가시적인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삶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삶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이 기록된 대로 이 여자를 돌로 쳐라. 그렇지만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일을 하거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예수님을 통해 이 백성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세를 통해 왔지만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알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그 율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이러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음을 입증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율법은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을만하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거라. 이러한 예수님의 율법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행한 일로 인하여서 쳐 죽여야 되겠다고 분노가 마음에 가득했던 사람들, 그들은 손에 손에 돌멩이를 움켜쥐고 이 여자의 간음한 죄에 대해서 돌로 치려고 하는 솟아오르는 이 분노가 곧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신앙의 마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그들이 일생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었던, 모세의 율법의 내면의 세계 속으로 이들을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세의 율법의 찬란한 빛 앞에 드러난 이 여자를 정죄하고자 한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한 결 같이 자신들에게는 이 여자를 먼저 돌로 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힘입니다.
2. 양심의 힘과 한계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두 군데에 새겨 놓으세요. 하나는 돌 판에 새기시고 하나는 마음에 새기셨어요. 돌 판에 새겨진 것은 십계명이고, 율법은 이 십계명을 확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법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마음에 새기신 법인데, 이것이 바로 양심 입니다. 돌 판에 새겨진 율법과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차이는 이런 것입니다.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은 한 번에 열 개의 계명을 모두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음에 새겨진 계명은 그 구체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에 볼 수 없어요. 다만 그 법에 어긋나는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마음을 품을 때 양심은 움직이며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은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의 어떤 내용을 거역하고자 할 때 강력하게 소리를 지르고 두 가지를 우리 마음속에서 수행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죄라고 하는 송사하는 기능이고 이러한 죄를 범했을 때는 거기에 해당되는 벌이 이것이라고 판단을 내려주는 정죄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송사의 기능과 정죄의 기능이 양심이 하는 역할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서 이 양심의 기능도 많은 부분 훼손되었지만, 그러나 영혼의 기능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양심의 기능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어서 중생하지 못한 자의 양심의 기능이 중생한 자의 이성의 기능보다도 더 탁월하게 믿을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인간의 양심을 등불삼아서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야 된다는 복음에로까지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몽학선생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었지만,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이 양심 자체가 몽학선생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이렇게 놀라운 힘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송사하고 우리를 정죄함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지만, 그러나 이 양심 자체는 우리에게 믿음을 줄 수는 없어요. 그것이 바로 한계에요. 오늘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분노에 가득 찬 군중들이 손에 손에 돌멩이를 움켜쥐고 이 여자를 내려쳐서 죽일 각오를 하고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들의 양심은 이제껏 그래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속으로 탄식하였습니다. 이 여자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이 죄는 지금 우리가 짓지 않았지만,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는 이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만한 그러한 순결함이 있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양심의 힘이 느껴지자 수없는 양심의 송사와 정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이 여자를 돌로 치는 처음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돌을 내려놓고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힘인 동시에 한계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절망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이는 소망을 갖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에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의롭지 않다, 나 역시 죄인이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즉시 이 여자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처럼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죠. 그러면 자신들 안에 있는, 이 여자를 돌로 칠 수 없는 죄의 문제는 어디서 해결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그것이 죄이며 그 죄를 지은 자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양심의 송사는 율법의 정죄를 통해서 그 목적을 완수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 이 여자가 명백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를 도롤 칠 수 없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라고 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양심 자체에는 그러한 기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고 양심만 살아있으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절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렇습니다. 나는 비록 이 여자가 지은 끔찍한 죄를 지금 동일하게 짓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를 돌로 칠 수 없는 무서운 죄가 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깨달았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라고 빌게 만드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여자는 이미 현장에서 붙잡혀서 백성들의 거친 손에 의해 여기까지 끌려 나오면서 이미 충분히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수치, 하나님에게뿐 아니라 자신의 동족에게도 버림을 받았다는 비참한 절망감,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분노하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누구도 도울 길 없는 무서운 두려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공포 같은 것들이 이 여자의 마음 안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현장에서 죄를 짓다가 잡힌 사람이었고, 어떠한 변명도 이 기록 속에 나오지 않습니다. 양심은 충분히 이 여자를 매질하고 있었고, 거칠고 커다란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준엄한 정죄 앞에서 이 여자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죄에 대한 분노는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하겠다는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돌멩이를 내려놓고 그 현장을 떠나갔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 안에 있는 아주 큰 비밀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이러한 유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은 담대하게 오른손에 돌멩이를 들고 간음한 여자의 머리를 내어쳐서 손에 피를 묻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요, 믿음이라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의 정신은 이들로 하여금 이제까지 가보지 못했던 자신 속으로 자기들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비록 내가 이 여자의 지은 이 죄를 지금 짓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를 정죄할 수 없는 커다란 죄가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대신 돌멩이를 내려놓고 한사람씩 사라졌습니다.
자! 그 강력하게 비추었던 양심의 빛, 예수님의 새롭게 제시하는 율법 앞에서 드러난 그들의 마음 안에 있는 수많은 죄와 악들, 지금 예수님의 곁을 떠나면 어디서 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게 바로 믿음이 없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좌절하는 사람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송사해서 올바로 그 양심의 기능을 활용하여 신앙을 붙드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고마운 등불이지만,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양심이 데려가는 마지막은 절망입니다. 이 절망의 마지막 계획이 뭔지 아세요? 욥기에 잘 나옵니다. 욥이 큰 고난을 당했을 때, 이유도 없이 고난이 겹쳤을 때 믿음의 순전함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썼지만 믿음이 없는 그 여자는 깊이 절망하면서 남편에게 충고하고 떠났습니다. 그 충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십시오.” 그게 절망의 마지막입니다. 이 절망의 마지막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 없는 사람의 양심이 마지막에 끌고 가는 곳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가르침, “그래, 이 여자가 지은 죄는 돌에 쳐 죽임을 당할 만 하단다. 그러니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그랬을 때 확연하게 드러난 자신들의 양심의 빛 앞에 그들은 종류는 다르지만 또 다른 율법을 어긴 수많은 죄들이 있어서 양심은 그 죄에 대해서 그들을 심하게 매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만약에 그들이 그 땅에 한 결 같이 무릎을 꿇고 “우리가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이 여자가 지은 죄 보다도 더 커다란 죄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힘으로는 이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고 매달렸더라면 그들 중 누구도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양심은 정죄하고 율법은 송사해도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죄 때문에 양심이 우리를 매질해도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 예수의 품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이 믿음, 이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단순한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변화예요. 쇠가 뜨겁게 달아올라 녹아내리는 것처럼 이렇게 양심의 모진 채찍질을 맞으면서 마지막으로 그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전심으로 붙들고 그분께 피하려고 할 때, 우리의 영혼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에 좋아했던 죄를 미워하게 만들고, 이전에 사랑했던 악을 혐오하게 만드는 영혼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마음에 그 놀라운 변화가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주님께로 피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양심은 그들을 호되게 매질하여 손에 손에 이 여자의 머리통을 까부수려고 했던 돌멩이를 모두 내려놓게 만들었지만, 거기에서 더 이상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양심의 강한 빛 앞에 드러난 자신들의 죄를 보고 잠시 분노가 멎었지만 그 양심의 빛은 그들의 죄를 죽일 수도 없었고 덜어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는 그들은 떠나가고 이 여자는 자기를 독대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Ⅲ. 독대하시는 그리스도
인생은 우리에게 수많은 문제를 던져 주어도 문제의 해결은 주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얼 키고 설 킨 문제가 많아도 문제에 매달려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면 사람은 점점 구차해지고 아주 비굴해집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한분 그리스도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여자야,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자신 앞에 펼쳐진 것을 보면서 “주여,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이 여자의 마음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자기의 죄에 대한 깊은 부끄러움과 자신을 용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 가운데 이 여자를 돌로 칠 자격이 있는 단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가능성도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이죠.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히 있었다면 예수님보다 더 뛰어나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율법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다면 예수님보다 더 이 율법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셨던 분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디서도 이 여자의 죄가 하찮은 것이라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런 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든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죄의 준엄함을 이 여자를 돌로 치라는 말씀 속에서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여자를 용서하셨습니다.
A. 용서하심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 똑같은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것은 아니죠. 여러분이 이렇게 여기 가득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여러분이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많이 사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덜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는 주님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했지만 요즘은 그만 못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대한 감사가 뼈 속까지 사무쳤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죄를 용서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다윗은 이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눈을 뜬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더 심오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것은 용서를 통해서였습니다. 20세기의 세 명의 위대한 칼빈 주의자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벤자민 브리큰 리즈워필드라고 하는 신학자는 시편 51편을 해석하면서 다윗은 이 큰 죄로 말미암아서 영혼의 큰 상처를 받았지만, 이 죄를 통해서 이 죄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의 비밀스러운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셨다고 해설하셨습니다.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하여 죄를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끔찍한 죄를 지었고, 죄 때문에 그의 영혼은 양심의 심한 매질을 당하고, 구원의 기쁨을 박탈당할 것처럼 주께서 베푸신 그 기름부음 받은 자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영혼의 큰 위기를 경험하였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그는 누구도 가 본적이 없는 복음의 세계를 탁월한 선지자의 안목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심오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시 80여 편이 넘는 대부분의 시는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긍휼에 대한 찬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고 그의 진리는 온 궁창에 미친다고 고백했던 노래 속에서 그 진리와 궁창에까지 가득 찬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국 용서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성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제왕이었고 주변의 많은 나라를 복속시킨 임금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단지 끔찍한 죄에서 용서받은 한 죄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주님을 만나고 일생동안을 예수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골육지신을 자기의 뼈처럼 생각하며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이 그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업적을 이루어도 내가 한 일은 모두 잊어버린다. 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그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해주신 용서의 순간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녘에서도 그가 생각했던 것은 일생동안 자기가 이룬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용서의 은혜였죠. 그래서 그는 위대한 목회자요, 선교사요, 신학자의 삶을 산 이후에도 그는 아주 단순하게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살다가 보면 인생이 힘겹게 느껴지는 때가 있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밤에 조용히 눈을 감으며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때가 있어요.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마음을 다스리는 아주 훌륭한 비결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용서받은 순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용서받은 순간을 기억하면, 그 용서받을 때에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가면, 지금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면서 양심의 심한 매질을 당하며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는 인간이라는 죄의 확신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B. 다시 시작하게 하심
그때에 우리는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이 그 당시에는 그냥 나쁜 일들이었는데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그 나쁜 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데려와 질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 나쁜 일도 나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일어난 많은 나쁜 일은 원래 나쁜 일이었고 좋은 일은 나중엔 결국은 나쁜 일이 되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용서받고 나니까 그 나쁜 일도 나를 여기 데려오기 위한 좋은 일이었고 그때에 일어난 좋은 일들도 사실은 나를 여기에 데려오기 위해서 이바지했던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 같은 인간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대신 죄 값을 치르고 구원해주신 그리스도의 그 큰 의를 발견하면서 우리를 심하게 매질하던 양심의 그 매질은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용서의 경험 안에서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이렇게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은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되돌려 놓을 수 없는 일들이죠. 그러면 그 과거에 한 일이 잘한 것이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찬송하고, 그것이 잘못된 일이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죠.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실망하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질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죽었어야 할 이 여자에게 우리 주님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어요. 어디서도 예수님은 이 여자의 죄를 가볍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죄보다도 더 큰 예수 자신 안에 있는 용서를 보여 주심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Ⅳ. 복음의 은혜는 기회입니다
복음의 은혜는 기회에요. 사람들이 한번 주님을 믿은 그 후에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거침없는 마라톤처럼 일생을 살아온 것처럼 자랑하지만, 그것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간증일 뿐이고 세상에 누가 그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넘어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주님을 부끄럽게 하였던 날들보다 더 많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면에서 복음의 은혜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하면서 한 해가 바뀌었기 때문에 저절로 희망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한 일, 곧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그랬습니다. 한 해 동안 믿음으로 잘 살고 헌신하고 주님 예쁘게 섬기고 그랬죠.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오직 여러분을 그렇게 살게 하셨던 주님의 은혜만 기억하세요.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져도 절망의 순간에 당신과 독대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일어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2.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l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요 4:1-26).
Ⅰ.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유대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던 도중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은 세 덩어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위쪽으로는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갈릴리 지방이었고, 아래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지방이었습니다. 중간에 사마리아 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마리아 땅이 있었는데 이 사마리아 지역은 원래 이스라엘 왕국이 둘로 나뉘어져 있던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가 망하기 약 130여 년 전에 앗수르, 여러분이 역사시간에 배운 앗시리아라는 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율법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동족들을 대적해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지역 사람인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을 안 하게 된 데는 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제일 먼저 실시한 정책이 사민정책이었습니다. 즉 외국인들을 그 땅에 거주시키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이사시켜서 인종을 서로 섞는 국제화 정책이었죠. 잡혼 정책은 이런 국제결혼을 강요함으로써 유대민족의 동질성을 파괴하고 단합을 저해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결국 많은 혼혈아들이 생겨나게 되고 사마리아 지방은 자기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살아가는 특이의 땅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지방에서 갈릴리로 가고자 할 때에는 이 지방을 거치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강을 건너 동편으로 돌아서 갈릴리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제자들과 함께 버림받은 땅으로 여겨지던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피곤하셔서 우물곁에 앉으셨을 때에, 그리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거리로 간 때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와 마주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영생과 성령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Ⅱ. 목마르지 않는 물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자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이 여인은 물을 긷기 위해서 우물까지 왔습니다. 하루도 거를 날이 없이 가족들이 먹어야 하는 물을 긷고 가야 하는 이 일은 이 여자에게 있어서도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어서 물을 길어서 집에 가려고 하는 생각으로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육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한 동이의 물을 길으러 온 이 여자의 모습 속에서 목마른 그녀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버린 땅에서, 나중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지만, 희망이 없는 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고 이것은 사랑이었습니다. “내게 마실 물을 줄 수 있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하는 예수님의 요청을 시작으로 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선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같은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들이라면 오해할 여지도 없고 이해 못할 것도 없는, 명백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은유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갈망을 이야기하곤 했죠. 그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오직 육체의 목마름이 생수로만 해갈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 성령의 은혜,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로만 해결되어질 수 있는 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생수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물입니다. 생명이 있는 물,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갈망을 해결시켜 그 영혼과 마음을 살아나게 해주는 그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가지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은혜의 샘물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는 오해할 소지가 없는 명백한 설명이었습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사도는 이러한 성경의 맥락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들은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에 대해서 성경은 같은 저자인 계시록의 기록자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목마릅니다.”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 여러 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물을 통해서 영원하도록 있는 생명, 하나님과의 교통함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은혜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보십시오. 자기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영생하도록 있는 샘물과 같은 성령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이 여자는 계속해서 마른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리적인 물만을 생각하면서 질문하고 대꾸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성경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인의 생각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친절히 설명해주면서 가르쳐 주시는데도 이 여자의 관점은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에게로 옮겨지지 않고 여전히 육신에 매달려 있습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설명하시는데도 그저 자연적인 한모금의 물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가 아주 많은 것 같아도 마지막에 돌아가면 그 문제는 매우 단순하고 하나뿐인 문제에요. 옛날에 저희 할머니 살아계실 때 그런 말씀을 잘하셨어요. 누가 “아유, 쌀도 없고 탄은 사야 되겠고, 애들 학비는 내야겠고······.” 그러면 그러셨어요. “뭐 거 말을 그렇게 많이 합니까? 돈이 없구만.” 돈이 없으니까 나머지 다 없는 게 많은 거지. 문제는 많은 것 같아도 하나에요.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그 문제의 끝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은혜, 하나님과의 관계, 거기에 문제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무지하고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이 여자의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답답하고 어리석은 여자 앞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깨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 곧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을 하고 얼마 안 되서는 금식을 참 자주 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공부에 전념하고 난 다음에는 대개 금식기도를 기도원에 가서 했습니다마는 직장에 다닐 때에는 그럴 수가 없었죠. 그래서 직장에 다니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하도 오래 되서 기억이 나지 않는데, 금식기도를 해야겠다고 중대결심을 했었어요. 여태까지 내가 금식기도를 한 게 7일이 기록이었으니까 이번에 기록도 깰 겸 10일 쯤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도 들어주시고 어쨌든 내 영혼도 새로워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대개 금식기도는 이게 할지 못할지 이틀째 되면 대개 알더라구요. 금식기간 하는 중 계속해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먹는 것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 먹을 게 떠오르는 게 아니라 딱 하나, 노릇노릇하게 튀긴 튀김 위에다가 설탕물을 뿌린 탕수육이었어요. 금식을 시작하고 이틀 반나절쯤 되었을 땐데 도저히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어나가서 중국집에 들어가서 탕수육을 시켜서 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있는지, 배가 부르고 난 다음에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비록 목표로 한 금식은 못했지만 굶주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그 굶주림이 깊을수록 음식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목마름도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목마름이 있는 한 그 사람은 다시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자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에 대한 말씀을 끊임없이 해 주시는데도 그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오히려 성령, 그게 무슨 소린지도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여인이 이토록 깨닫지 못하는 답답한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적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깨우심으로 영혼의 필요를 느끼도록 해주시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오직 자신의 육신의 문제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은 개별적인 것이고 사실 그 모든 문제의 원천이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핍절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영혼 앞에 세워주심으로써 주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찾아오셔서 고치시는 사랑의 목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은 회심하지 못해서, 혹은 영혼의 침체가 너무 오래 되어서 이러한 은혜와 사랑에 대한 목마름조차 잃어버린 성도들은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런 성령의 은혜가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하고 지금 느끼는 마음과 삶의 많은 곤고함 들의 뿌리가 사실은 그 영혼의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는 못했지만 드디어 이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에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해 주옵소서.” 이것은 놀라운 진전이었습니다.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하실 때에도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야곱보다 크십니까?” 라고 대꾸했던 것에 비하면 그런 물을 내게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며 예수님께 그 물을 구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Ⅲ. 네 남편을 불러오라
원래 이 우물에서 물을 긷는 시각은 아침과 저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난 것은 한낮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무엇인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사연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어요. 옛날 우리 사회에서도 시골에 가면 마을의 모든 소식의 근원지가 있는데, 우물가와 빨래터입니다. 거기서 대개 여성 통신원들이 부지런히 정보를 주고받아서 동네 방방곡곡에 퍼트림으로써 이제 의사소통에 기여하고 여론형성에 이바지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렇게 자기를 중심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여론이 형성되고 새로운 소식들이 알려지는 것들이 매우 싫을 수밖에 없는 사연을 가진 여자였기에 물을 다시 길러 오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며 그 물을 내게도 주옵소서 라고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시면서 그러면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생,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목마르지 않는 물 등으로 대화를 이어가실 때 까지는 여인과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을 향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이 한마디 던지신 말씀은 이제 이 관점을 갑자기 땅으로 끌어내려서 하나님으로부터 사연 많은 이 사마리아 여자에게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여자는 남편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말씀은 이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성령의 은혜를 받기에 앞서서 먼저 해결해야할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 여자의 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약속된 성령의 은혜를 받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은혜를 누리기에 앞서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다름 아닌 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 여인은 이 대답 속에서 단순히 남편이 없다는 것 이상의 어떤 진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 남편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으며, 더 이상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자의 짧은 대답 속에 담긴 하소연은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 좋은 선물, 목마르지 않는 물, 다시 여기 내가 물 길러 오지 않는 그런 물을 말씀하다가 기분 나쁘게 남편 이야기를 꺼냅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추지 마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사마리아 지역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지역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방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유대 여인들, ‘조나’라고 하는 여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주석가 매튜 헨리 목사는 이 여자가 창녀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며 살았던 편력을 지닌 부끄러운 과거가 있던 여성이었습니다. 지난 시절 자기 품을 떠난 다섯의 사내들 중에는 망부가 되어서 땅에 묻힌 남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중에 어떤 남자는 살다가 헤어져 다른 데로 장가간 남자도 있었을 겁니다. 이러한 편력의 과정 속에 새로 맞아들여야 했던 어떤 사내들 중에는 이 여인과의 하룻밤 향락을 위해 본 부인과 헤어져야 했던 인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은 이러한 남녀를 간음의 죄를 범한 자들로 규정합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살았던 여인, 그러나 지금도 몸을 섞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남자와의 생활도 혼인을 통하지 않은 불륜의 동거였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성령의 선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실 때 까지만 해도 이 여자는 호기심 많고 기대에 들뜬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던져진 예수님의 이 한마디의 말씀은 이 여자로 하여금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던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대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뿌리 깊은 죄악의 치부와 마주 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삶,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영적인 능력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슴에 새겨야할 진리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 받음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개인의 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기에 앞서 이러한 죄의 지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죄에 대한 지적, 지적된 죄에 대한 회개, 하나님의 죄 사함, 성령의 부어주심 이것이 바로 죄인들이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게 되는 방식에 대한 사도행전의 설명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가련한 사마리아 여인을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 여인에게 가장 뼈아픈 과거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의 수치스런 죄악과 대면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 이었겠습니까? 이 여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를 좌절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다섯 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워야 했지만 그래도 끝나지 않은 인생의 불연의 모진 끈, 지금도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지금도 남의 남자와 살아가고 있는 이 여자의 불행한 처지를 동정하는 대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진정한 회복을 주시기 위해서 죄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를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음이니,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뉘우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성령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성령의 은혜, 그분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영이시고 또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이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갈망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우리들이 능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전투적인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늘상 패배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이런 성령의 능력에 의해 다시 한 번 새롭게 충만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능력으로 무장되어서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이기는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비결이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정복해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런 성령의 은혜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복종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할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게 무장되어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위업을 이루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찾아오셔서 먼저 관심을 보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무지한 우리들을 깨우쳐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게 하시고 또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충만한 생활을 해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셔서 거기에서 우리가 죄의 문제를 진심으로 사함 받고 성령의 충만한 선물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에 예언은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흥하고 패배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패배하고 흥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불결을 알게 됨으로써 패배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승리하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시 한 번 정결하게 하셔서 이 충만한 성령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오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907년 1월 2일 오랫동안 기도하며 기다리던 한 부흥회가 평양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907년 장대흥 교회의 부흥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집회를 위하여 매일 두 시간씩 4개월이나 기도했고 시작하는 첫 날 북한 전역에서 700여명의 신자들이 은혜를 받고자 하는 일념으로 산을 넘고 먼 길을 걸어 삼삼오오 운집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열렬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교회 오면 밥도 먹고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각자 자기 양식을 싸가지고 짚신을 신고 몰려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여든 모든 교인들은 이 집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이미 존스턴 선교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조선 땅에도 희망이 있다면 단 하나, 인도 카시 지방에서 일어났던 그 불같은 성령의 역사, 웨일즈 지방에서 일어났던 1904년의 그 큰 성령의 부흥이 이 조선 땅에 임하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선포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모아졌습니다. 그 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2일, 3일, 4일, 5일, 6일, 7일 모든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아무 은혜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인 8일은 주일날이었습니다. 오전예배와 저녁예배로 이 모든 집회는 끝나게 되어있고 오전예배도 답답한 가운데 드렸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부흥회를 향해 얼굴을 숨기신 것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집회인 그날 밤 집회에는 자신의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고 온 나머지 많은 합류한 성도들을 포함해서 일천 오백 명의 성도들이 운집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은혜 없이 집회는 끝났고 예배가 마쳤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은 돌아가게 되었고 이제 내일 새벽에 먼 길을 떠날 성도들과 은혜에 사모함이 남은 성도들 육 칠백 명이 남아서 기도회를 계속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도회 시간이었는데 천정이 놋 뚜껑으로 덮인 것처럼 아무 기도도 상달되지 않고 어떠한 은혜도 쏟아지지 않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확연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긴장감이 예배당 안에 팽팽하게 깃들기 시작했고 이때에 이 교회의 유력한 장로인 길선주 씨가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개인적인 죄를 고백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집회에 은혜를 베푸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하며 내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길 장로,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내 집 살림을 돌아봐 주오. 내 아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니 당신만 믿겠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줄 테니 염려 말라고 약조를 하였죠. 그러나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면서 미화 백 불 상당의 돈을 사취하였습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을 전액 이 미망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길 장로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여러 날 동안 무섭게 짓누르던 장벽과 같았던 막힌 담, 그리고 솥뚜껑같이 닫혔던 하늘이 갑자기 무너지고 열리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집회 장소에 충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죄에 대한 애끓는 회개가 예배당 전체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이 기도회는 다음날 새벽 두 시가 되어도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울부짖는 통곡 소리와 함께 엄청난 회개의 물결이 교회에 모인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회개할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주님이 마음 아팠던 것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큰 회개의 역사가 불길처럼 일어나서 죄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인들은 한 사람씩 일어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의 죄를 고백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날이 바로 한국 교회사 속에서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그날, 성령의 불길이 평양을 휩쓸기 시작하던 1907년 대 부흥의 시작이 있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기도 속에 모인 집회였지만, 숨겨진 죄가 있는 동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당신의 은혜를 회수하시고, 부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의 죄가 자백될 때까지 유보하셨습니다. 충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자 주님은 그 죄를 용서해 주셨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Ⅳ. 결론
성령에 대한 갈망은 시대마다 달랐고, 성령 주심에 대한 평가도 역사마다 상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교회를 삼키려고 하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서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온갖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신 것이죠,. 이러한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결핍된 채 살아가는 사마리아 여인 같은 여러분을 보시며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삶의 목적도 없이, 방향감각도 상실한 채 하루하루 이어가는 삶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핍절한 삶을 종식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쳐나는 기쁨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삶을 영위해 나가길 원하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은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마음 안에, 영혼에 이 충만한 성령의 은혜, 결코 목마르지 않고 결코 갈급하지 않은 이 은혜의 샘을 터치고 부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간곡하게 이것들을 부어주셔서 여러분을 승리하는 사람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더 교회답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 앞에 직면함으로써 성령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 축복의 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부으심이 필요한 여러분에게도 주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이죠.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충만한 은혜, 하늘이 열리고 샘이 터져서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 능력이 쏟아지던 그 은혜와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이런 충만한 은혜 속에서 새 힘을 받아 이전에는 실패했을지라도 이제는 새롭게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큰 능력의 은혜를 받고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3.전혀 다른 선택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쳣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3-16).
I. 본문해설
오늘 이 본문은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는 장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사도 바울의 회심의 기록은 세 번 정도 나오게 되는데 그 만큼 복음 전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함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이제 이방의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되는 아주 소중한 그런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원리도 이해하기가 어렵죠. 하필이면 이렇게 사울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마음을 먹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무엘처럼 그렇게 구별된 사람이 아니라 정말 막되 먹은 사람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들 핍박하고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인 이 사울을 들어서 하필이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매우 귀하게 쓰임 받았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도록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이변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한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베드로란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그런 소문이 모든 사람에게 파다하게 났던 그 사람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위대한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똑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 그렇게 한번쯤은 넘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 한번쯤은 전혀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시는 놀라운 선택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던 사람을 불러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제껏 살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따라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도 가장 가슴에 와 닿으려면 12명 가운데 한명은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는데 그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가 됐다면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며 ‘과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달라.’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약한 자를 부르시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비천하고 무명한 자를 부르시어 유명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인간의 약함 속에서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 자체가 ‘큰 자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 이름을 사울에게 지어준 사람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지어줬을 가능성이 많은데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 앞에 있었던 사울이라는 임금이잖아요. 그 사람만 생각을 해도 이런 이름을 안 지어주었을 텐데 그 사람이 생각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어쨌든 사울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름을 지을 때에 좀 생각을 많이 하고 지어야 합니다. 그냥 장난하듯이 지어서는 안 됩니다. 성이 김씨인데 이름을 치국이라고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뜻이야 굉장히 좋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김씨가 문제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에게 이름을 말하게 될 때에 그 자체가 아주 영적인거거든요. 이 이름에 따라서 이 사람이 그렇게 교만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당신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당신의 종으로 이미 영원 전에 선택하셨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선택과는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II. 선택과는 다른 삶
선택과는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이 살던 삶이 어떠했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고 했습니다.
A. 성도를 박해함
그래서 여기서도 믿는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하는 것은 대제사장은 하나 밖에 없는데 전직 대제사장들도 다 대제사장이라고 불러서 그래서 이렇게 복수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말하자면 종교회의를 통해서 중요한 것을 결정을 하는데 이 젊고 똑똑한 청년에게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메섹에 많이 있다고 하니까 가서 단도리를 하고 오너라. 그리고 권한 줬다 이것입니다. 성도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편견에 가득차고 오만에 가득차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도록 방해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심하게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는지를 생생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암시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세 가지 정도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의로운 사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증인이 되어서 가편 투표를 하고 옷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스데반의 거룩한 성도의 전도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틀림없이 육성으로 외치는 그 7장에 나오는 구속사적인 설교를 청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회개하지 않고 그리고 표독스럽게 대적하며 결국은 의로운 사람의 피를 간접적으로나마 자기 손에 무치는 행동을 했던 사람이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 사람이 회심하였을 때에 아무도 이 사람의 회심의 진실성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이 사울의 회심의 진정성에 대해서 변호를 해줌으로서 비로소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사람에 회심이 인정받을 정도였으니까 그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로 소문이 나서 두려운 상대가 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 근거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자전적인 고백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이야기 할 때에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 단순히 사람들을 말이나 생각으로 박해한 것이 아니라 폭력을 가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자신이었다고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한 이 세 가지 사실을 보더라도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박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표독스럽게 성도들을 박해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이름만 들으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악랄하게 핍박하였을 때에 그 사람에게 예수를 위한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선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B. 그리스도를 대적함
성도를 박해한 것은 성도가 미워서 박해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에서 자라난 그 젊은이 예수, 나이로 따지자면 자신하고 비슷한 또래였을 그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 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당대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를 배경으로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를 배경으로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세계에서 많은 학문들을 터득하며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틀로 볼 때에 나사렛의 이 젊은이는 절대로 메시야일 수 없고 그리고 구약이 자신들에게 약속하고 있는 메시야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사도바울에게 가르쳐주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야에 대한 공정한 이해에 도달했더라면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중에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묘사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고 징계를 받음으로 평화를 누리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러한 대속의 사상이 유대교 속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교라고 하는 그 자체가 구약대로 믿는 종교라기보다는 구약의 신앙을 올바로 믿고 바르게 해석하면 신약으로 들어오는데 이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철학에 의해서 사상에 의해서 굽어서 그래서 결국은 구약에서 시작은 했지만 잘못된 해석을 통해서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아주 심하게 대적했고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그 미움이 바로 스데반을 잡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하고 증인이 되는 역할을 하게 했고 예루살렘 모든 성도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였고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들의 공문을 청하여 달려가게 만들었던 그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표독스럽게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 전체는 이렇게 예수를 대적하는 것으로 얼룩진 삶이었어요. 이 삶은 예수님이 앞으로 이 사람을 선택해서 살게 하실 그 사명과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III. 삶과는 다른 선택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이 사는 삶과는 다른 선택으로 하나님이 그를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 이름을 위한 그릇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A. 주 이름을 위한 그릇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에는 그릇 사상이 잘 나옵니다. 이 그릇은 무엇을 담고 보관하는데 쓰이는 용기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이 그릇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거기에 담으셔서 그래서 당신의 의지와 생각을 그에게 주셔서 그의 마음속에 당신이 하고 싶은 것과 똑같은 소원을 주셔서 당신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뜻을 담는 그 사람을 그릇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릇에는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고 그리고 또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이렇게 크기와 종류가 다양한 그릇들이 있지만 그 그릇은 모두 집안의 살림살이를 꾸려감에 있어서 그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한 도구인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많은 그릇이 있지만 크기도 다르고 질도 다르지만 그렇지만 그 그릇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이전에 살았던 삶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 쓰임 받을 그릇에 어울리는 삶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주님의 이름을 위한 그릇으로 선택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성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성도를 위해서 살아갈 그러한 목자요, 전도자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하나님께 선택받기 전에 그 이전에 삶과 선택받은 이후에 그 선택이 실현됐을 때에 살아갈 삶과는 전혀 다른 대조를 이루게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받을 생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B. 고난을 받을 생애
그래서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했습니다. 이 고난이 누구를 위한 고난이었을까요? 교회를 고난 아닙니다. 성도를 위한 고난 아닙니다. 세상을 위한 고난 아닙니다. 동료들을 위한 고난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표면에 나타난 모습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이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표독스럽게 그리스도 예수께 대들고 그리고 그분을 모욕하고, 무시하고 그리고 그분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던 그 사람, 자신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고 혐오하던 하나님의 원수로 여기던 그 사람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의무감에서 고난을 당하고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어떤 상급에 대한 욕망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기 같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것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요,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당하던 고난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한 몸에 당하면서 살아 갈터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울이 이후에 당신 자신을 위하여 당하게 될 그 고난을 그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된 이후에 살았던 그의 모든 삶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삶은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성도들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생애를 가장 훌륭하게 보냈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감당할 수 없다면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 어떠한 삶이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기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또한 나를 본받는 자가 되거라.”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박해하고 그렇게 잔인하게 핍박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이 사람의 이름 두 글자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진심을 회개했는데도 그 회심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그때만 하더라도 누가 이 사람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넘치는 고난을 받고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성도들 가운데 가장 성도다운 삶을 삶으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남겨주는 책을 13권이상이나 써서 기독교를 우리에게 전해준 인물이 될 것이라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불러일으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할 사람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처절한 고난의 생애를 기억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어떤 보장된 장래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 고난을 견딘 것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고난을 견딘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어둠 속에 갇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전파하고 그렇게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에 던져질 비참한 인간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구원해주신 그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자기가 그렇게 무시했던 나사렛의 젊은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지혜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도 바울도 사람이었으니 믿음이 식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로마서 7장에서 고백대로 정욕과 죄가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깨달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누구였을까?” 예전에 나는 그리스도를 표독스럽게 대적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성도들을 그렇게 박해했던 나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사명으로 선택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찬송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주님에게 빚진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런 고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큰 은혜이고, 살아서 주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가치도 없는 우리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선택해주셔서 우리의 살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해주심으로서 주님의 은혜로 이전에 하나님 앞에 표독스럽게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자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시고 주님을 가슴 아프게 하고 핍박하던 사람을 변하여 성도를 위로하고 돌보고 무릎을 꿇어 성도들의 발을 씻길 수 있는 사람으로 불러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는 비록 회심이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도를 박해하고 예수 대적하던 사람을 예수 만나니까 하나님이 새 삶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을 삶과는 전혀 다른 선택으로 불러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도 걸어갈 수 없는 이 사명의 길을 걷게 하신 이 변화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 만난 것이었습니다.
이 원리는 회심 이전과 이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끄러졌을 때에 다시 일어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우리의 결심과 힘으로 일어섯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쓰러지고 넘어졌을 때에 우리가 일으켜 세운 것이 우리 자신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미끄러졌을 때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그 모든 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그래서 매일 매일 부르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불러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또 다시 시작하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도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고 그리고 이전에 선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나를 부르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때만 예수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원받은 이후에 미끄러진 사람들을 다시 부르실 때에도 언제나 예수 다시 만나게 하셔서 그래서 예수 성품 깨닫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새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오순절의 사건을 통해 만나고 비로소 갈릴리 바닷가에 오셔서 자기를 만나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의 대화 속에서 나누었던 그 진정한 소명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미끄러진 사람들을 당신 만나게 하셔서 새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아무 희망이 없다고 낙심한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기회는 없을 거라고 주저앉은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자신도 자기를 포기해버리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게 하셔서 그래서 거기에서 일어서게 하시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정말 힘에 넘치는 고난을 감당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아내도 가족도 없이 오직 예수를 신랑처럼 그리고 교회를 아내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성도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였지만 주님을 섬긴 기억이 또렷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자기를 불러주시기 전에 살았던 자신의 삶, 불러주신 후에도 미끄러졌던 그 모든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 그것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함으로 예수의 강한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 속에서 그는 사울이라는 사람의 이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바울이라는 사람의 이름과는 아주 밀접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평생 작은 자요, 약한 자로 살면서 자기를 고치고 바꾸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여러 번 이 회심의 사건을 증거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부르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갖도록 하는 표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감히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소개하며 자신도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다고 고백하며 엎드려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다시 불러 새 삶을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렇게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으로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고 이제는 나에게 아무 미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보여주심으로 그 사람들이 이후에 주님을 위해 훌륭하게 산 다음에 훌륭하게 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그렇게 살게 하셨던 그리스도 예수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기 바랍니다. 지난 해 실패했기 때문에 올해도 그 실패는 계속될 것이다. 운명처럼 이어져온 실패였기 때문에 올해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실패와 좌절의 적응하는 연습을 하지 말고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4.다시 믿게 하시는 하나님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창17:1-2).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아브람’이 어떻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만남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의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이 아브라함의 기사의 내용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어느 삶의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주셨을 때에 당신 자신에 대한 자기계시가 있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자기계시를 주실 때에는 그 자기계시의 내용이 아브라함이 처했던 상황과 그가 지니고 있었던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여기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고 깨달음을 줍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구십 구세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이때에 자식을 주실 약속이 다시 한번 확증되고, 백세에 그 유명한 이삭의 출생사건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17장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담고 있는 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굳이 이스마엘을 나을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고, 바로 한 절 뒤에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이 임하셨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13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이 공백이 있게 되었는데 굳이 이렇게 86세, 99세라는 나이를 한 절 사이에다가 하나님이 기록해 놓으신 이유는 이 13년의 공백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나을 때 86세 이었는데 그 후 1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게 되었을까.. 많은 주석학자들은 이 16장과 17장 사이에 흘렀던 13년 어간의 이 긴 세월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깊은 암흑기였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몇 차례 오셨고 저에게 구약을 가르쳐 주셨던 故 김희보 박사님도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16장 마지막 절과 17장 첫 절 사이에 있는 이 13년의 공백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만나주시지 않았던 긴 영혼의 침체기였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Ⅱ.아브라함의 불신앙
A. 하나님의 약속(15;4)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당신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고 불러주신 이후로 늘 함께 하시며 교통하시던 하나님이 여기에서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혼의 침체에서 헤매도록 아브라함을 놔두신 데에는 무슨 하나님의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할 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선 첫째는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가 아브라함의 불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불신앙 때문에 이렇게 긴 13년의 세월의 영혼의 침체가 있게 되었고, 이 불신앙은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생각해야 할 대목이 뭐냐하면 이 아브라함이 12장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이제 처음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제 이 16장까지 왔을 때에는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적어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방법이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 다루시던 방법과는 달랐다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맨 처음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때가 있죠.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과 오래 예수를 믿고 말씀도 많이 깨닫고 알게 된 그 때에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뭇 다릅니다. 그 때 처음 만날 때에 그 하나님과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나를 상대해주시는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나의 신앙의 연륜이 많이 쌓였고 이미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말씀의 깨달음과 은혜의 세계에 대한 앎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다르게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어린아이때는 어린아이대로 아이들을 상대해 주지만 크고 성숙한 다음에는 그 아이들을 크고 성숙한 대로 다루지 않겠습니까? 이제 대학교 다니는 아들을 앞에 놓고 엄마가 밥을 한술 퍼서 그래서 반찬을 발라놓고 입으로 한 번 빨아먹고 그리고 아들 턱을 붙들고 아, 맘마 먹어야지 그러면 아마 제 7병동에 가야 될 것입니다. 그거는 아주 어렸을 때 그저 막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는 나이 정도에 쓰는 태도죠. 그 때 보이는 태도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기도도 잘 들어주세요. 엉뚱한 것을 기도해도 수준에 맞게 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못 기도해도 때로는 하나님이 잘 못 기도한 것을 우리 자존심 상하지 않게 아주 잘 바꾸어서 그래서 들어주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죠. 성숙한 다음에는 하나님이 보다 더 엄격하게 다루십니다. 부드럽게 다루시다가 이제는 과격하게 다루시고 또 우리에게 항상 격려만 하시는 것 같다가 나이가 들고 신앙이 깊어지면 준엄하게 책망을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B. 아내에게 순종함(16:2)
그러면 이 16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었는가, 먼저 생각해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사람이 한 일은 지금 하갈, 하갈은 여종이었거든요, 여종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에게서 아들을 낳은 이유는 본 부인인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한 일이었죠.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는 아주 커다란 불순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16장에 오기 전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12장에 이어서 아주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에게 큰 상을 주고 싶다는 뜻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어요.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주님 내게 무얼 주시렵니까? 나는 자식이 없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이 나의 종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이 상속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당시의 법을 따라서 우리 집에서 자란 종 중의 한사람이 나의 후사가 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너의 유업을 이을 후사가 아니다. 나는 네 몸에서 씨를 내어 그 씨로 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고, 그렇게 하나님이 주셔서 사래에게서 태어나는 아들만이 너의 유업을 이을 적합한 유업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세월이 15장과 16장까지 흘렀는지는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이 약속은 분명히 살아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이 하신 말씀을 후회하시거나 혹은 그것을 식언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대아우르를 떠났던 것처럼 또한 비록 자신의 아내가 늙고 자기도 늙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약속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아내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6장에 보니까 이제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었더라하였습니다.
부부과 함께 살다보면 사람이라는 게 믿음이 약해질 때도 있고 강해질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남편의 신앙이 식으면 아내의 신앙이 뛰어나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저렇게 저렇게 믿어야 합니다. 라고 사랑과 우정이 어린 진실한 충고를 상대방에게 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가 똑같이 믿음이 없어져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약속 대신에 현실을 바라보며 이 믿음을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사래는 이미 나이 많아 늙었고 그리고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의 증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계속 붙들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가슴에 확고하게 믿어지고 이 속에 신앙이 역사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 자신의 형편을 봐도 믿음으로써 그것을 이길 수 있지 않아요?
테르툴리아누스라고 하는 2세기의 유명한 교부가 남긴 역사에 남는 명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 이치에 맞고 합당하다면 우리가 믿어야 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냥 알면 되지.. 그러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믿게 하실 때에는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생각을 해서는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를 데려가셔서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지를 보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치에 닿지 않는데 그것이 성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더라고 할 때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것은 아무리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동원해서 그것들을 맞추어 보려고 해도 맞추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짝을 맞출 수 없으니 그것이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면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믿음이 바로 이런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앙하고 아내에게 순종함으로써 아브라함 안에 있는 불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이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은 안 믿으려는 고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굉장히 슬퍼하시는 죄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 대신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하면서 좌절하고 그리하여 결국은 아내에게 순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불신앙을 보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셨던 그 깊고 아주 친밀하던 교제의 은혜를 거두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과거를 돌아보면 주님과 함께 늘 동행하면서 말할 수 없이 선명한 하나님의 은혜와 간증 속에 살았던 때에는 우리에게 믿음이 충만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꼭 믿던 때, 그 때에 이 믿음과 함께 수많은 신앙의 간증들을 우리가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냈다기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전폭적으로 믿고, 어린아이처럼 그분을 온전히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시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하게 하시고, 우리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곳에서 도움을 받게 하시고, 우리가 도대체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깨닫게 하셔서, 그래서 믿음이 없었더라면 살 수 없었을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에도 보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주 놀랍게 신앙의 간증거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기뻐하시는데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이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셨던 많은 은혜를 거두 시셨어요.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영혼은 깊고 어두운 침체의 터널을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을 돌아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팔고 생활하던 사람이었고 아브라함도 그렇게 보면 그 많은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태어난 한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이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보여주는 것은 없죠. 그러니까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왜 아브라함이었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어요. 다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것을 기뻐하셨고, 그래서 우상이나 만들어 팔아먹고 살던 집안의 그 자식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그렇게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고, 그렇게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자격이 없는 이 사람을 이후에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머리로 삼고자 하셨을 때에, 이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큰돈을 벌어서 하나님을 위해 큰집을 짓는 것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높은 지위에 올라서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유리하는 사람으로서 짐승들을 치고 그렇게 살던 한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 도처에 신이 있다하고 그 신들에게 아부하며 자기의 인생에 행복을 꾀해보려고 했던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사람들, 그 수많은 신을 섬기던 그 족속들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것 하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생각하시고 만족하실 수가 있었고, 만약에 그 이외에 아브라함에게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것도 주셨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를 한번 돌아보십시다.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있죠? 그렇죠?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그리고 이 교회 안에서의 삶에 많은 괴로움을 느끼고 남이 알 수 없는 고달픈 사연을 갖고있고,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고민합니다. 또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우리들이 되기를 원하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낙심하고 이렇게 주저앉은 마음이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마음을 온전히 쏟지 못하게 하는 근심과 수고, 주안에서의 은혜로운 근심과 염려가 아니라 가치도 없는 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 그리고 요동치는 마음, 솟아오르는 정욕과 그리고 세상의 헛된 욕망,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피곤해지고 우리가 도무지 마음을 묶어 하나님 앞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에 모두 집약이 됩니다.. 믿음의 부족입니다.. 믿음의 부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을 깊이, 순수하게 사랑하던 때를 돌아보면 많이 사랑하던 때도 있었고 아주 희미하게 사랑하던 때도 있었잖아요? 근데 그렇게 많이 사랑해서 그래서 주안에 있는 나에게 아무 근심이 없고 그리고 주님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죽어도 나는 참 행복하겠다하던 때가 있죠? 그때 공통점은 뭐냐 하면 그 사랑이 자의적으로 불러일으켜진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사랑이었어요. 그래서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진실한 사랑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참된 믿음이 없이는 진실한 사랑,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열정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노라고 하고 그 분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가져야 했던 그 신적인 사랑이 아닌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연애감정 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께로부터 먼저 받은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셨음이라고 한 그 사랑이 아니다 이 얘기 에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근심과 염려, 신앙의 발목을 잡는 많은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은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마지막 한 가지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현상들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 나는 약하고 부족하나 나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주님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의 결핍이죠.
여러분 병중에도 심각해 보여도 별거 아닌 병이 있고, 표시가 안 나도 무서운 병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어디 부딪히거나 해 가지고 죽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은 끔찍해 보이잖아요? 그죠? 어쨌든 우리는 몸에서 피가 나면 공포와 그 다음에 하여튼 비장한 느낌이 들잖아요? 물론 중국 갔을 때에도 중국에서 그렇게 고단하게 일한 것도 아닌데 이틀째 됐는데 막 세면대 앞에서 쉴 새 없이 코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분이 아주 이상하더라고요. 중국에서 내가 순교하는 거 아닌가.. 어째든 한참만에 고개를 들고 그러면서 겨우 코피가 멈췄는데 혼자서 그러고 있으니까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근데 어디 부딪히든지 해 가지고 쭉 찢어져서 피가 막 주르륵 흐른다 이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해 보여요. 그죠? 피가 막 난자한데.. 별거 아닙니다. 그냥 싸매면 됩니다.
여러분이 정말 지혜롭게 처신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그러나요 아주 단정하고 착실한 학생이었는데 학교 갔다 오다가 건널목에서 길을 건너는데 차하고 ‘쿵’하고 부딪친 것입니다. 그래서 ‘툭’ 쓰러졌죠. 근데 얘가 깜짝 놀래서 벌떡 일어났는데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운전사가 병원에 가자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엑스레이라도 찍어보자 그러니까 ‘아, 아저씨 괜찮아요’. 그 다음 다음날 죽었어요. 그래서 참 지혜롭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여러분이..설교 내용하곤 별로 관계가 없지만..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른 거 다 필요 없어요. 정확하게 그 사람에게, 뭐 그 사람에게 막 자동차 등록증을 뺏고 주민등록증을 뺏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그냥 쪽지 하나에다가 몇 년 몇 월 몇 시에 그 차가 나를 받았다 간단하게 자필로 쓰게 하면 되요.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되요. 그러면 차번호 있고 주민등록증 보면 주민등록증 번호 있으니까 이거만 가지고 있으면 되요. 그러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 가지고 죽잖아요, 몸으로 드러나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은 그건 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기에 감전되잖아요. 그러면 전기가 몸을 통해 지하로 땅으로 어스가 되요. 그때 발바닥에 구멍이 뚫어지고 신발에 구멍이 나면서 전기가 빠져나가요. 그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 없다하면 뭐하지만 조금 치료받으면 되요. 근데 전기가 몸 안에 갇혀서 안 나가면 죽는 것입니다. 근데 아무 몸에 피도 안 흘러요. 그런데 어떤 병이 무서워요? 면역력이 현저히 감퇴했을 때 그게 ‘에이즈’ 아니에요? 그래서 감기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정도 에이즈는 아니더라도 현저하게 면역력이 감퇴되면 감기 한번 걸리면 나아지질 않고 무슨 병이 생기면 꼭 합병증이 생겨서 온몸을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거 보세요.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돈 없는 게 문제이고 몸이 좀 아파서 병원 다니는 것이 문제이고 애들이 공부 안 해서 속 썩이는 게 좀 문제이고 등등, 겨울이 오는데 연탄은 어떻게 하고 먹을 것은 어떻게 하고 이런 게 근심이지만 그러나 진짜 근심거리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광야에 갖다가 혼자 집어던져 놔도 거기서 살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도와 주시니까. 이게 믿음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잃어버렸을 때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이고, 당신을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은 추해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은 거룩에 가까이 있고, 당신으로부터 독립하는 사람들은 죄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상식을 따라서 자기의 고집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입니다. 꺾어져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으냐하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꺾어져 본 사람들이 믿음이 좋아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날마다 깨달으니까.. 자 그러면 이렇게 아무 공로 없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우상이나 만들어서 팔아먹고 살던 비천한 집안의 자식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하나님이 스스로 맹세까지 하시면서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이 번성하게 해주겠노라고 땅을 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해주셨는데도 아브라함이 그 믿음을 팽개쳤으니 사실은 믿음을 버릴 때 하나님도 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면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이 이제 믿음을 버렸으니 아브라함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랬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신앙까지 저버리고 깊은 침륜에 빠졌던 이 아브라함에게 17장은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Ⅲ. 다시 나타시신 하나님
놀라운 것은 이 16장 마지막 절에 한 구절쯤 덧붙여 있을 것 같잖아요. 아브라함이 너무 곤고해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였더라. 금식이 끝난 날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기록할 만 하잖아요? 근데 놀랍게 아브라함이 불신앙 속에서 헤매는 이야기로 16장을 끝내고 17장은 누구의 간청이나 도움도 심지어는 아브라함의 기도도 있었다고 기록되있지 않는데 하나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다시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예전에도 한 번 설교한 적이 있지만 이 주제에 맞추어서 다시 한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지점이 깊이 은혜가 되요. 아, 그렇구나! 이 끝에 아브라함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결단을 했더라,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40일을 기도를 했더니 40일이 마치는 그날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되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이하 동문 했다면 우리는 아마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보다는 결단하고 40일 금식했던 아브라함을 더 만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 결단할 때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때도 있고 때로는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목숨을 버려 눈물을 뿌려 주님 앞에 자기를 희생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한 선행과 바꾸어 그것을 값주고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들이 아무리 선하게 하나님 앞에 산다 할지라도 주님이 당신의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기로 마음을 먹으시면 은혜에서 소외된 사람일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주시지 않은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로 얻은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버린 아브라함, 침체 속에서 침륜 가운데 헤매는 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정하신 때에 주권적으로 나타나셨어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틀림없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차질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고, 아브라함을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은혜로운 당신의 경륜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당신 자신에 관한 자기계시의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란다.” 쉽게 얘기하면 “아브라함아, 나는 모든지 내가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단다.”.. 사실 그게 얼마나 우스워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하나님이 무엇인가 능력이 모자라서 못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무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무능하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있겠어요?.. 불가능하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당신 자신에 관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깊고 심오하고 아브라함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도 깨달을 수 없었던 심오한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하고 그리고 평범한 사실 “나 하나님은 전능한 여호와니라”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어요. 우리들이 환란과 시련을 많이 당하고 가까스로 깨닫게 된 놀라운 진리는 주일학교 때부터 늘 배워온 진리이지, 우리가 머리를 싸매도 깨달을 수 없었던 심오한 진리를 환란과 시련가운데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이 신앙생활의 근본은 상식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16년 동안 미끄러져 있을 때에도 누군가가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도 많다. 그게 하나님이시지’ 라고 말했다면 아브라함은 펄펄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 미끄러짐, 하나님이 분명히 주시기로 한 약속인 그의 몸에서 태어날 어린 아이의 출생을 믿지 못하고 대신 하갈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아이를 나아 자신의 대를 이으려고 했던 것은 불신앙이었는데 이 불신앙은 왜 생겨난 것이었어요?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 그 불신앙의 정체였단 말이죠.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무능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초월해서 역사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일, 참 놀랍고 위대한 역사..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믿음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는 믿음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느날 어느 대학의 총장이 나와서 강연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네 학교에 디자인과가 없었는데 하도 주위에서 디자인과를 하라고 그래서 디자인과를 만들고 그리고 좋은 교수님을 초청해서 그걸 맡겼데요.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 보니까 자기 학교에서 졸업한 학생들이 서울에 있는 훌륭한 학교를 물리치고 아시아 디자인 대회에서 상을 많이 따내고 국내에서도 유수한 대회에서 석권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책임진 교수를 불러다가 우리 학생들이 그렇게 디자인 대회에서 상을 많이 타고 그런 다는 보고를 듣는데 어떻게 우리학교의 학생들이 이렇게 우수하게 됐습니까? 그랬더니 그 교수님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디자인 학과에서는 실기시험을 안 보기 때문입니다’ 대개 여러분 디자인과 같은데 들어가려면 1년, 길게는 2년, 3년씩 50만원에서 80만원씩 주고 과외공부를 계속하면서 학원을 다녀야 됩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아예 처음부터 입학생에게 실기시험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실기시험을 본다 그러면, 내가 예를 들어서 모 대학에 가고 싶다 그러면 그 대학에 교수와 연결되어 있는 학원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가서 그 교수가 어떤 디자인을 좋아하는 지를 열심히 1년, 2년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장 그려내면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 교수의 원하는 바를 따라서 1년 동안 혹은 2년 동안 이 머릿속에 새겨진 것이 이게 틀이 되어서 더 이상 창조적인 생각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몸이 늘 교회에 있는 것 같고 그리고 늘 찬송 부르고 예배드리고 그리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남의 신앙도 자기 신앙같고 예수님 신앙도 자기 믿음 같아서 결국은 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은 실제로 믿음은 없고 그저 매일 매일 이어지는 습관적인 종교생활에 익숙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기 자신이 확고하게 믿지 못하는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약속하시고 그 일을 꼭 이루시겠다는 징표까지 보여주셨어요. 그러면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전심으로 자기는 미약하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붙들고 그 분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 믿음이 사라지자 그는 미끄러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절망적인 상황,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같은 어렵고 낙심스러운 상황,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오히려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라는 믿음을 갖도록 요구하시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낙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낙심시키시는 환경을 허락하실 때에는 우리의 믿음이 더욱 날개 치며 하늘을 날으라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이죠.
많은 동물학자들 가운데 독수리가 자기새끼를 날수 있도록 훈련을 시킬 때에는 이 새끼를 절벽에 데리고 올라가서 자기새끼를 떨어뜨린다는 속설이 있었어요. 그런데 동물학자들 이야기는 그것이 진짜 사실인지는 확인을 할 수 없다 그러더군요. 그런데 며칠 전 다큐멘터리에서 절벽에 데리고 올라가서 새끼를 떨어뜨리고 이러는 것은 안 나오지만 높은 바위나 나무 위에서 새끼를 낳고 자기가 먼저 뛰어내려가서 새끼들을 부르더라구요. 새끼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됐는데 몇 미터나 되는지 필름이라서 잘 모르겠는데 거기서 뛰어내려요 그 대신 그 자리를 어떻게 하냐하면 푹신한 낙엽이 있는 곳을 택합니다. 푹신한 나뭇잎이 있는 곳을 택합니다.. 그 새끼들이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그러면서 사력을 다해서 나는 것들을 연습을 하는것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생을 마지막으로 몰으시는 것 같은 때가 나와요. 그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냐하면 ‘결국은 내가 잘못 살았더니 하나님 앞에 밑보여서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막판으로 밀어버리시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낙심과 형언할 수 없는 좌절을 경험들이 우리에게 있기 마련입니다. 근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나에게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을 부숴 버리기 위해서, 그래야 지만 당신을 온전히 붙들 것이지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니다.(50;45)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할 수 없고, 그래서 순종할 수 없죠. 큰 믿음으로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완전함을 요구하심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전능하다는 자기계시에 기초하여 아브라함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셨어요. 그게 뭐냐하면 완전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함이 없는 완벽함, 신적인 완전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있지 피조물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상대적인 완전이고, 그래서 이 완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롯이 있었던 시대처럼 타락하고 아주 부패했던 시대에는 한때 롯의 믿음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성경은 ‘의로운 사람 롯’, ‘불법한 자들의 무법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던 의로운 사람 롯’ 이라고 불러요. 노아도 훌륭한 사람이긴 했지만 완전한 사람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안다면 그 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렇게 술에 취해서 그렇게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은 당대에 의인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시대가 악하고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우리들이 조금만이라도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어둡기 때문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별들은 낮에도 빛나고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저녁에 보이는 별은 샛별 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밤이 깊어지면 수많은 별들이 뜨게 되는데 뜬 것이 아니라 원래에도 비쳤지만 날이 완전히 어둡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날이 조금 어두울 때에는 샛별 밖에 보이는 것이 없지만 완전히 어두우면 희미한 별들도 밝게 빛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완전함을 요구하시는데 결국은 두 가지예요. 완전한 믿음과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게 아니라, 더욱 온전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지 않았을 때에는 자신을 완전한 자라고 생각을 하던 사람도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으면 자기의 삶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세요.(54;30)
IV.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큰 불신앙 속에서 13년 동안이나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냈습니다. 40일 금식기도, 목숨을 건 철야기도 없었는데도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브라함에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전능하니 너는 나만 믿고 나만 의지하고 나의 약속만을 붙들어라’ 이것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원하시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마!’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많은 문제가 우리의 밖에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 훨씬 어려운 때에도 살 수 있었고 소망을 가졌고 오히려 어렵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동거하며 승리의 노래를 불렀어요. 소망의 노래를 불렀어요. 왜 우리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가장 절실한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견디기 어려운 시련,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할지라도 바로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다른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이 내가 의지할 유일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환경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래서 주님을 더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5.벧엘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I. 본문의 배경
수요일마다 실패 속에 있었던 사람들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성경본문을 보면 야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34장 그리고 35장 1절의 장소가 바로 야곱의 가족이 세겜에 있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원래 이 세겜은 이 사람 야곱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잠깐 들른 곳이 바로 이 세겜이었습니다. 원래 이 야곱은 이제 가나안을 떠나서 우여곡절 끝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게 되고 거기에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많은 재물을 얻은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과 약속한대로 이제 가나안으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잠시 쉬어갈 겸 자리를 잡은 곳이 세겜땅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이 읽은 34장 그 앞에는 33장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다름이 아닌 자기를 죽이려고 기다리던 형 에서와 만나서 얍복 강에서 화해하는 감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야곱은 얍복 강을 건너기 전에 인생의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형이 자신의 축복을 가로챈 이 동생을 원한에 사무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맞으러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이 야곱은 하나님 앞에 처절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인간적인 야곱의 마음이 꺾이지 않고 천사와 맞붙어서 씨름을 하는 혈기까지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에 그가 통절하게 회개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천사와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형의 마음이 물같이 녹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있어야 되는 그 순간에 형제가 서로 끌어안고 뜨겁게 해후하는 기적과 같은 인생의 축복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형이 지금은 화해를 하며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맞아주었지만 그러나 이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어떠한 보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바로 형을 따라가지 않고 이제 이 사람은 세겜이라는 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짐승 떼를 거느리고 여기까지 왔지만 동시에 무역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목축과 함께 이 사람들, 세겜의 사람들과 무역을 하면서 이러면서 나름대로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아이들이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 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자랐으니까 아마 어림잡아도 십년, 혹은 십오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때에 이 사람은 아주 번영한 시절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II. 번영 속에 궁핍한 영혼
아마 거기서 재산도 꽤 모으고 그리고 큰 어려움 없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34장을 통해서 결국은 번영 속에 야곱의 영혼, 그 가족들의 영혼은 매우 군핍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그 시련과 어려움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하지만 사실 정신만 차리면 어려움이 있을 때 신앙생활을 하기가 더 좋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형통하고 걱정이 없는 번영의 시기 속에는 우리의 마음과 모든 생각들이 해이해져서 그래서 안으로부터 우리 자신이 썩게 되는 것입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많은 공격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그래서 우리들이 그것과 더불어 맞서서 싸우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 안에 있는 적은 우리 자신의 일부인 우리 스스로의 부패성이기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 하기 쉽고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4000킬로미터가 조금 넘는다고 하니 진짜 만 리를 성을 쌓은 것입니다. 북방에 있는 민족들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았는데 성을 쌓고 중국이 다섯 번을 멸망했는데 모두 성벽을 넘어 들어온 왜적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망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영 속에서 이 야곱의 영혼이 매우 군핍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설명을 해도 다 설명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가 몇 가지 살펴보자면 이 야곱이 34장에서 큰 환란을 만나게 됩니다. 이 33장과 34장 사이에 거의 십년 내지 십오 년, 최소한 십년, 길면 십오 년 정도 되는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장 사이에서 그 긴 세월이 흘렀고 33장의 마지막은 은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주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한 장이 끝나는데 그 장에서 그 다음 장까지 한줄 사이에 십년에서 십오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발견되는 이 야곱과 야곱의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신앙은 그야말로 번영 속에 군핍한 영혼임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두 냄새나는 사내 녀석들 속에 그 예쁜 딸이 하나 있었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귀여운 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이 아이가 이 세겜의 땅의 여자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아마 커서 이제 처녀가 된 다음에 구경을 나갔다가 강간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 땅 추장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이 야곱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지는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 자녀를 길러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처절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형이 군대들을 이끌고 나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이렇게 마음이 찢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 목숨 하나 죽으면 그만일 테니까 말이죠. 그러나 이 딸이 만약에 사고가 나서 죽었다면 마음이 덜 아팠겠지요. 할례도 받지 못한 더러운 족속에게 강간을 당하고 딸이 거기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아비인 이 야곱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미끄러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순순히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더러운 죄의 종자들이 마음속에 있어서 남의 허물과 죄는 잘 보면서 자신의 죄와 허물은 스스로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해서 미끄러질 때는 우리의 마음대로 미끄러지지만 그 미끄러진 곳에서 다시 시작할 때는 항상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우리가 신앙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가장 뼈아픈 야곱의 일생에서 거의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뼈아픈 슬픔을 당하게 하셨을 때에는 그러면 즉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내게 일어난 이 고통스러운 일의 의미가 무엇이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 것일까? 생각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큰 위기를 당하고도 야곱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는 이야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한 번 더 이제 이 환란과 어려움에 등급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언덕을 올라갈 때에 도저히 힘이 부치면 기어를 변속하듯이 한 번 더 힘을 넣으시는데 그 사건이 바로 자기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기 동생이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있는 것을 보자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찾아온 그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 제안하기를 ‘너희가 모두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그래서 우리와 똑같이 할례 받은 백성이 되면 우리 동생을 주마 그리고 우리도 너희의 딸들에게 장가를 가서 한 민족을 이룰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얼마나 컸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서 아버지까지도 속이고 이 악을 행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모두 할례를 받고, 할례를 받았으니 이제 남자들이 움직일 수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쭉 누워 있을 때에 움직이지 못할 때에 이 사람들이 가서 이 시므온과 레위가 가서 신열을 앓고 있는 이 남자들을 다 찔러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고 거기의 자녀와 심지어 거기에 있는 여자들까지 납치하는 사건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혈기에 의해서 생각 없이 이 일을 저질렀지만 공포의 입술이 파랗게 질린 사람은 이 가나안 땅의 백성들의 이 속성을 잘 아는 야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겜에는 지금 이 히위족속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지만 인근에는 가나안 족속 등 여러 족속이 살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 슬픈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도망을 쳤을 텐데 만약에 그들이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자신들의 동족을 이렇게 무참하게 도륙한 이방에서 온 타지의 사람들이니 그들이 연합해서 이 야곱의 집안에 복수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숫자가 적은 이 야곱의 집안은 모두 몰살을 당할 위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III.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우리의 양심과 그리고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돼 이렇게 주님을 멀리 떠나 살면 안 돼’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 스스로 자각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고 있다는 것,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우리들은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께 돌아올 때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끊임없이 들려주십니다. 설교를 들어도, 사경회를 해도, 어쩌다 차에서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를 틀어도, 책을 집어도, 지체들과 만나서 대화를 해도 똑같은 이야기가 계속해서 들려올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요. 어느 자매가 그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다는 소식을 듣고 하도 곤고하니까 그 예배당에 막 왔더니 ‘네 부모께 순종하라’는 설교를 하더래요. 그래서 안 듣고 갔는데 하도 곤고해서 그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왔다고 해서 또 따라갔대요. 가봤더니 하필이면 그 때도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였대요. 그 다음에는 그 목사님이 무슨 세미나를 한다고 그래서 이번에는……. 하고 따라 갔더니 그곳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더래요. 거기에서 깊이 꺾어지고 그리고 집을 나왔다가 회개하고 부모님께 돌아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기하게 지난주에 나의 삶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데 주일날 딱 들어오면 마치 하나님이 나의 산 것을 일주일 동안 딱 보고 있다가 나 하나 불러다놓고 설교해주시는 것과 같은 때가 있어요. 성경을 우연히 폈는데 하필이면 그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들려올 때에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깊이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의 빛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에요.
어느 날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래요. 저도 건너들은 이야기인데 아들이 겨울인데 부모님 집에 왔다가 이제 방학 때인데 좀 더 놀고 가지 그러느냐 했더니 ‘아니에요 아버지! 빨리 가서 공부도 하고 할 일이 많아요.’ 그래서 ‘너무 춥고 길이 미끄러운데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그리고 가더니 한 서너 시간이 지났는데 아들이 돌아왔어요. 돌아왔는데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어요. 그래서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아빠, 아빠 큰일 날 뻔했어요.’ ‘왜?’ ‘나간 지 얼마 안돼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미끄러지면서 차가 가드레일을 받고 전복을 했는데 나는 이렇게 말짱하게 살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래 내가 늘 너한테 해주던 이야기가 아니냐? 결국은 그렇게 차가 뒤집히고 큰 사고가 나서야 깨닫느냐? 내가 너에게 늘 해주던 이야기가 아니냐?’ 그러니까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나는 그런 것을 과외공부라고 그러는데 지금 야곱이 과외공부를 실컷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실컷 하고 마지막에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너는 다시 하나님 앞에 서거라’ 그것 하나 깨달은 것입니다. 그거 옛날부터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에요? 조상 적부터…….
그러니까 우리가 환란과 시련을 많이 당하고 깨달았다는 게 그게 뭐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늘 듣던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실 때는 못 알아듣고 큰 환란과 시련에서 인생 전체가 뒤집히는 폭풍과 어려움을 만나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야곱이 한 단계 더 시련이 올라가서 이제는 깊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을 포함해서 온가족이 도륙을 당할 위기에 놓여있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4장 1절이 아니라 35장 1절에 찾아오십니다. 이것도 이 큰 환란을 당했는데도 이 강심장 야곱은 한 번도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리고 이 시므온과 레위가 잘못 행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그러면 되겠느냐?’ 라든지 ‘믿음으로 살아야지 그렇게 살면 되겠느냐?’ 는 등 이런 등등의 신앙적인 충고나 권면이 전혀 없이 아주 세속적인 아버지로서 그래서 자식들에게 그 모든 권위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우리가 남의 자식들의 부모보다 공부도 더 많이 하고, 기왕이면 돈도 더 많고, 권력도 있고, 그리고 사회에서 존경도 받고, 지위도 있으면 내 자식들이 지금처럼 나를 대하지는 않을 텐데……. 라는 아쉬운 마음이 부모로서 한 두 번씩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권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자식들이 신앙적인 영향을 부모가 끼쳤던 것을 기억하면서, 거기에 하나님 앞에 그것을 깊이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서 인식할 때 그게 진짜 부모의 권위인 것입니다. 돈 많이 벌었습니다. 그럼 뭐합니까? 자식들에 의해서 무시당합니다. 거기에서 무역을 해서 장사도 잘 했습니다. 세겜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누리면서 사업상의 이익도 얻고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에 아버지의 권위는 간데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야곱은 절대 절명의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큰 위기 앞에서 그는 비록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매달려 기도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에는 예전에 번영할 때의 그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이 세겜에서의 자신의 삶의 뿌리 전체가 흔들리는 인생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할 말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기 전에 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 가지 서원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며,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그리고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너 왜 그렇게 살았니? 세겜에 있는 동안에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나와의 약속을 어떻게 하였느냐?’ 구차하게 야곱이 저지른 모든 죄 하나, 하나를 캐물으면서 이 야곱을 한쪽구석으로 몰아세우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인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하나님이 다시 그를 부르시는 음성 속에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A. 벧엘로 올라가서
첫째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이 야곱이 이제 가나안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가게 되었을 때에 홀로 부모의 집을 떠나서 가본 적도 없는 메소포타미아에 본적도 없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형의 복수가 두려워 도망을 쳤지만 그러나 무사히 이 긴 여행길을 걸어 밧단아람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거기에 가면 과연 외삼촌이 자기를 환영해줄지……. 또 거기에 가서 생활을 한다고 할 때에 후에 과연 자기가 온전한 몸으로 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안만이 앞에 가득하였고 그렇게 아비의 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홀로 길을 떠날 때에 그는 외로운 나그네였고 그리고 주님만을 꽉 붙들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신앙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거기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수준에 맞게 영악하게도 하나님과 거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나를 평안하게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나를 보호해주신다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아버지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섬겼습니다만 이제는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주님 앞에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다가 하나님의 집을 짓겠습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 즉 ‘벧’은 히브리말로 집이라는 뜻이고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는데 하나님은 야곱과 맺은 약속을 따라서 성실하게 그를 보호해주셨습니다. 그 간악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그 끝임 없는 속임수를 당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이 야곱을 편들어 주셔서 야곱을 부자로 만들어 주셨고 죽을 수많은 고비들 속에서 보호를 받고 이기며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원한으로 가득차서 기다리고 있었던 에서의 마음을 하나님이 친히 녹이심으로써 그래서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이 에서의 보복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녹이심으로 오히려 피의 살육이 있을 그 자리에서 형제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로 화해하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다가 느낀 것인데 가만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가 어떤 시야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많이 달라져요. 우리의 인생의 과거를 믿음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해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맨 처음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을 때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가 회심하고 십자가의 사랑에 굳게 붙잡혀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때에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에서 권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것이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신 적이 있습니까?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최고의 신앙의 자유를 이 나라에서 우리들이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감히 확신합니다. 기독교의 종주국이라고 하는 미국도 이런 정도의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우리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앙의 자유를 이 시대에 우리들이 누리고 있어요. 언제 한번이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빼앗아 본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어떻다고 하면서 가끔 불평을 하고 어려워하지만 예수 믿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입니까? 정말 우리가 가난해서 예수를 못 믿을 정도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어디서든지 부를 수 있는데 방해를 받는 어떤 어려움이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결국 돌아보면 그 어려운 모든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로 하나님이 아주 소중하게 사용하셨어요.
(찬양)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무것도 안 들어 주신기도가 없고 베풀어주시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를 향해서 아끼시는 것이 없었어요. 야곱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번영과 큰 사랑과 인도하심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시련 속에 인생의 다급함이 있는 위기 속에 있을 때에는 통절하게 회개하며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이 야곱이 번영가운데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오늘 우리들이 처한 형편이 곤고하고 힘들고 어려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미끄러져 있다면 우리는 그럼 예수님 만났을 때부터 이제까지 어려울 때마다 늘 미끄러졌습니까? 아닙니다. 시련이 많을 때에 오히려 그 시련 때문에 주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환란의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칠 때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 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확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그 시련과 그리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더 단련되어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너와 약속을 맺던 나를 기억하여라. 그리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킨 나를 기억하고 그 언약 중 아무것도 지키지 않은 너를 돌아 보거라.’ 이것이 하나님이 이 사람을 벧엘로 올려 보내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될 때에 가장 어려웠던 인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시련의 때,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붙드셨고 우리는 그분께 어떻게 붙들린바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히 우리의 신앙이 미끄러진 것을 환경에 핑계를 댈 수가 없어요.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때에 주님을 꼭 붙들고 살았습니다. 지금보다 가난하던 때에 주님을 꼭 붙들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제 위기, 위기 그러지만 60년대쯤으로 가면 위기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밥은 안 굶잖아요? 60년대 초에는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오늘의 위기는 위기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벧엘로 야곱을 올려 보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장 어려울 때에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주님이 거기서 우리를 어떻게 붙들어주셨는지 그래서 모두 고통스러워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어떻게 찬양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B. 거기 거하며
두 번째는 ‘너는 거기 거하며’ 그랬습니다. 히브리말로 ‘야사브라’라는 단어인데 이는 잠시 들릴 요량으로 거쳐 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거기에 살 마음으로 자리를 잡는 것을 ‘거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난번에는 이 벧엘에서 하룻밤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잔 후에 떠났지만 하나님은 이 세겜이 아니라 벧엘에서 잠시 머물도록 그러나 오래 살 사람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고 머물도록 야곱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들이 신앙에서 미끄러졌을 때 곤고하지요! 그래서 기도하지요! 곤고한데 기도를 안 하겠습니까? 곤고하고 힘드니까 책도 읽어보고 또 곤고하고 힘드니까 예배도 드려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지속성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미끄러져서 많이 넘어졌으면 그러면 자기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다시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하고 한동안 하나님을 찾아야지요. 그래야지만 어떤 변화가 오지 않겠습니까? 신앙은 마음으로 믿는 종교에요. 그 마음 안에서 머리의 지식과 그리고 이 내면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정이 함께 만나면서 그러면서 그 마음이 우리의 삶 전체를 움직임으로써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과 인격을 만들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주님의 뜨거운 은혜 속에서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미끄러졌을 때에는 한 순간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죠. 어느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것 같아도 오랜 세월동안 심령의 피로감이 쌓이고 마음속에 은혜가 약화되었을 그 때에 무너지는 것이거든요.
요번에도 무슨 공사하다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안타까워요. 왜 좀 철저하게 자기들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렇게 매번 후진국형의 사고들이 계속 나게 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보니까 거기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며칠 전부터 그 흙속에서 계속 소리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예전에 산에 나무가 별로 없을 때에는 산사태가 많이 났습니다. 이 산사태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산을 아는 사람들은 산사태가 날 것을 미리 안대요. 며칠 전부터 산이 울면서 소리를 낸대요.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수분을 너무 많이 머금으면서 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시간이 걸리면서 결국은 물러나고 무너지잖아요. 신앙이 한번 무너지는 것은 쉽지만 세워지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려요.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보다는 죄에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는 한번 무너지면 여지없이 쉽게 사람을 파고들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무너진다고 해서 그것이 일시에 우리의 자신을 바꾸어 놓지는 않는 것이 신자의 성화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을 지켜야하는 이유도 바로 그렇게 미끄러져도 깊이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기 위해서 마음을 늘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세겜에서 10년 혹은 15년 동안 살면서 신앙적으로 타협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없는 번영 속에서 군핍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야곱의 영혼, 이 집안 가족들의 영혼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 벧엘에서 상당한 시간동안 거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곤고하고 신앙에서 미끄러졌을 때 새벽기도 한번 나와서 해결을 보려고 하고 그리고 주일 예배 한번 드리면서 무엇인가 해결을 해보려고 시도를 하는 것은 책망할게 없지만 그러나 꾸준히 해야 되요.
언젠가 한번 어느 지체가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아무리 돌아보아도 큰 죄도 없고 그리고 그럴 이유가 없는데 이렇게 기도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글쎄 뭐 본인이 아무리 살피고 잘못한 게 없다고 말을 하니까 뭐라고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데 알겠느냐? 그렇지만 나도 가끔 그런 때가 있는데 이렇게 해 보거라. 날을 잡아서 기도가 될 때까지 교회당에서 안 나오겠다는 마음을 가져봐라. 그러면 참 신기한 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엎드리면 그 마음에 온갖 잡념이 스쳐가고 기도가 안 돼요. 그러면 차라리 싸우다, 싸우다 지치지 말고 차라리 잡념을 따라가면서 기도를 해라. 잡념이 한국으로 있으면 한국을 위해서 기도를 하다가 그 잡념이 다시 친척집에 가면 그 친척을 위해서 기도하고, 잡념이 열린 공간으로 가면 열린 공간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잡념을 따라 다녀봐라. 그러면 그 잡념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순간에 멈출 때가 있다. 때로는 한참 기도하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한숨자고 났는데 그 때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기도가 되는 때도 있다. 문제는 영적인 상태는 영적인 순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상태가 좋을 때는 순발력이 빠르지만 상태가 나빠지면 순발력도 느려진다. 그런데 그 때에도 계속해서 10분의 기도로 해결을 해보려고 하면 하나님을 못 만난다.’ 그랬더니 ‘알았습니다.’ 그리고 날을 잡아서 아침서부터 기도 안하면 내가 점심도 안 먹고 안 나오리라고 마음을 먹으니 하나님이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찾는 당신 자신의 자녀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어요.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기도가 안 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당신 앞으로 부르시고 이끄시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이 야곱도 거기에 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C. 단을 쌓으라
마지막은 하나님이 ‘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죠? ‘이즈베아흐’라는 단어인데 제단입니다. 다른 단이 아니라 제물을 올려서 제사를 드리는 단이었어요. 더 설명할 필요 없이 이것은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마주하였던 이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번영 속에 군핍한 영혼인 이 사람을 예배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곤고하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심방 오시듯이 찾아와서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들은 그냥 내버려두고 위로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일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바뀌기를 기다리시고 거기에 합당하게끔 행복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셔요. 명백하게 뉘우칠 죄가 있고 돌이킬 불결이 있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무조건 두둔하고 위로하시는 것만 느끼게 해주신다면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공정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통절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변화가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실 때에 항상 예배 속에서, 제사 속에서 당신의 거룩함을 다시 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결국 벧엘로 올라가서 인생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며 주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너는 다시 그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다시 서라고 부르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위기에서, 그리고 시련가운데서, 그리고 그 모든 고난 가운데서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 앞에 마주서는 사람들을 오늘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야곱을 당신을 향한 경배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뒤집어서보면 이렇게 번영 속에서 궁핍한 영혼으로 살아가고 있고 신앙을 모두 팽개친 이 야곱에게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에게 합당하기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시고 거기에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로써 하나님 앞에 서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은 죽어가는 짐승의 피로 하나님 앞에 잠시 교제할 길을 열었으나 우리에게는 우리가 미끄러지고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니 보혈을 지나, 그 휘장을 지나, 우리는 그 보혈의 길을 걸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당당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 전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버리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을 우리 자신이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그 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에 호소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야곱에게 ‘단을 쌓으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당신 앞에 마주 서라고, 당신을 대면하라고, 당신과 마주하여 모든 사연을 아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유 받도록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IV.. 결론 : 유일한 소망 - 하나님 앞에 섬
자!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신자의 유일한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들, 결국은 우리가 주님을 만난 우리의 신앙의 이력을 돌아볼 때에 어디서 그 문제들이 해결되었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려움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냥 일반적인 어려움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특별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어려움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이나 우리의 지혜로도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과 마주서게 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어려움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지혜와 생각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때로는 고통 가운데 징계하시고, 시련 가운데 그들에게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선택한 자신을 불신하고, 미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이 길이 가장 복된 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미끄러졌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습니까? 번영 속에 군핍한 영혼입니까? 그래서 그 번영조차도 이제 빼앗기고 군핍한 가운데 핍절한 영혼으로 있습니까?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시 부르는 시기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거기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단을 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니 다시 시작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6.죽지도 못하는 사명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1-3)
I. 본문의 배경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요나 선지자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요나 선지자에게 주셨지만, 이 요나가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난 이야기가 1장에 나옵니다. 큰 풍랑을 만나서 결국 제비를 뽑은 결과 이 큰 풍랑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졌습니다. 그리하여 뱃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삼일동안 요나는 물고기 속에 있으면서 오늘 2장에 나오는 이 장문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 물고기에 삼킨 요나의 이야기를 믿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성경의 부분을 믿는 많은 사람들도 이것이 하나의 고대 근동의 설화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통재로 삼킬만한 큰 물고기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1912년 플로리다의 나이트키에서 잡혔고 지금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래가 있습니다. 길이가 135미터라고 하니까 그리고 입 넓이가 9.5미터 다음에 무게가 13.5톤인데 잡힐 당시에 그 고래의 위속에는 무게가 약680킬로그램 정도 되는 검은 물고기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물고기가 사람을 삼켰다면 어떻게 이 사람이 삼일이나 물고기 배속에 살아 있을 수 있을까 1758년 지중해에서 한 선원이 배 밖으로 떨어져 상어에게 삼켰는데 상어 중에 아주 커다란 상어들이 있답니다. 상어가 대포를 맞고 그를 다시 토해낸 사건이 있었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종합을 해본 결과 현대의 과학자들은 이런 설명을 합니다. 프린스톤 대학에 있는 메클로스키라는 교수는 이 요나의 기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만약에 위속에 들어갔다면 위액에 의해서 질식사 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 후두부 여러분이 밥을 먹다가 밥알이 걸리는 그런 후두부에 있는 소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만약에 이 고래가 엄청난 크기의 고래였다면 사람 한사람 정도가 거기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난다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가 아닙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요나 선지자가 삼일동안을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고, 또 2장의 기도에서 보면 물풀이 들어와 내 머리를 쌌나이다 했으니 그 후실은 고래가 헤엄을 치면서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러한 신체의 부분이었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선지자 요나는 그렇게 삼일동안이나 물고기 배속에 있으면서 큰 고통을 격었고, 그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토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소명의 길을 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II. 요나의 소명과 불순종
그러면 도대체 요나의 소명은 불순종에 관해서 생각해 볼 때 그의 불순종의 원인이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편견과 미움이었습니다. 앗수르는 북방에 있는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수시로 침공하고 괴롭히던 신흥국가였습니다. 이 나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다하고 고통을 받은 이선지자가 바로 그 니느웨라고 하는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그는 그 소명에 동의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은 선지자였지만, 그 말씀을 선포할 곳이 니느웨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민족에 대한 편견 이었고 그리고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A. 불순종의 원인 : 편견
목사들끼리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도 일본에 대해서 독한 말을 퍼붓는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목사님을 뵙는데 일본은 자기의 믿음으로는 분명히 망할 거라고 점점 바닷물이 높아져서 가라앉아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라고 자기는 그렇게 믿는다고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라 그랬어요. 그러면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이 들으면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남아 있어야지만 선교도 하고 복음도 전해서 구원을 하지 그 어느 날 물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제일동포도 많은데 그러시지 마시라고 제가 그랬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분은 중국 선교만 하세요, 일본 선교는 안하고,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우리 인간은 정말 연약한 존재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을 판단할 때 항상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오늘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물어보겠어요. 일본사람들을 마음 깊이 사랑합니까? 아니라고 아주 확신 있게 말씀하시는데 어렵지요.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모두 잊어 버리 자든지 묻어버려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들이 잘못하면 타이르고 그리고 항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그 나라가 점점 바닷물에 잠겨서 물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고 잠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건 참된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36년 동안 괴롭힘을 받은 더욱이 여러분 중엔 누구도 일본 사람한테 직접 괴롭힘을 당한적은 없잖아요 들었을 뿐이지 그러나 일 세대 처음세대들이 그렇게 고통을 받고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편견이 아주 뚜렷하게 있었지 않겠어요? 그거를 가지고 한번 이 요나의 심성을 생각해 보 면은 그렇게 우리가 요나를 나쁜 사람이라고만 몰아 부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그렇게 살 면은 안돼요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그 말씀을 좇아서 끝임 없이 주님이 주시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는 편견을 버리고 그렇게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핵심을 찌르는 한 질문을 했죠.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큰 것을 이웃이 어겼을 때에 분노 합니까? 내 인생관과 다른 삶을 사는 이웃을 볼 때에 더 분노 합니까? 어떤 것이겠어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후자지요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의 삶의 주인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요. 만약에 우리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인생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애들 교육시키면서 아빠 우리 가운 써오래 그런 거 없다 그래라 얘기 했잖아요 그죠 없어요. 가끔 신문사 같은데서 목회철학이 뭐냐 그래서 그런 거 없습니다.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런 것 들을 건축하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중심에 두고 살아서 그 말씀에 끊임없이 비춰 나에게 편견이 있다는 사실에 확인 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되요. 그래서 인생관이 너무 뚜렷한 사람들은 예수 믿기 굉장히 힘들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대부분이 자기 의를 신뢰하기 아주 쉬운 사림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재발견함으로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함으로서 시작이 되는 것이고, 자기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자기를 세움으로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고 그리스도를 발견함으로서 기독교 신앙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의 길에서 끊임없이 찬란한 진리의 빛이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편견과 아집이 우리의 생각과 정신 구석구석에 있어서 그래서 언제든지 그렇게 우리의 편견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생을 살수 있기 때문이죠.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교제하다가 그 사람이 십계명중 하나를 어겼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중요한 계명을 범한 너 같은 사람하고는 친구를 할 수 없어 하고 단절한 적은 없죠, 그러나 시간을 매우 중시하게 여기는 사람이 시간을 자주 어기는 사람과 단절하는 적은 여러 번 있고, 남에게 꾼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활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이라도 빌리고 제때에 갚지 않는 사람들은 아주 너절한 인간으로 보여서 상종하기도 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누가 하나님입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까? 그리고 기준입니까? 자기의 생각과 인생관이 기준이고 진리입니까? 그래서 성화의 길에서는 찬란하고 눈부신 빛이 필요해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리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만큼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절대고 없어야 되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 진리의 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라고 하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복잡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요. 나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알았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암과 비례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우구수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고백을 했어요. 사람들은 별자리를 찾아 혹은 다른 나라를 여행 합니다 만은 우리가 가장 많이 찾고 여행하여야 할 땅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아니겠 사옵나이까? 그래서 가장 모를 것이 나 자신의 마음이라고 그렇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끝임 없는 빛이 필요한 거예요 결국 이러한 무지 그리고 이러한 오류 그리고 이러한 죄 이러한 악한 성향 이런 것들은 오히려 거룩한 성도 속에 남아 있는 것일수록 진국이야 나쁜 의미에서 진국이라는 아주 말하자면은 아주 엑기스가 남아 있다 이거지요. 왜 전혀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그 속에 비슷하기만 한 모든 죄와 무지 오류 그 인간존재 자체가 그렇게 시커먼 어둠 속 이고, 오류덩어리고, 비 진리 투 성이 이고, 죄 투 성이 인데 근데 성도는 비교적 깨끗한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안에 남아 있는 그 무지는 그 수많은 설교시간에 빛을 받고도 피해 남은 어두움입니다. 수없이 설교를 읽었는데에도 그 번쩍이는 수많은 성경진리의 깨달음의 빛을 빗겨서 아직까지도 파괴되지 않은 어두움입니다. 남아 있는 죄성은 그 수많은 철야기도, 수많은 금식기도, 수많은 기도에 수많은 찬양, 수많은 예배에 수많은 묵상 이 사간에서도 죽지 않고 끝가지 살아남고 버티는 놈입니다. 그러니 그게 나쁜 의미에서 진짜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점점도 치밀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그리고 점점 더 아주 세밀한 이 진리의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 인제 여러분이야 인제 저한테 설교를 들으면 되지만 난 뭐 누구 설교를 나한테 해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성경을 탐구하는데 그러다 어쩌다가 인제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커다란 교리들을 발견하게 되요. 그리고 쑥~ 들어가서 그것들을 탐구하면서 아 그랬구나! 라고 알게 되는 경우가 있죠. 그러면 몇 달 뒤에 여러분이 사경회든지 씨리즈든지 해서 몇 달 동안 또 인제 설교를 듣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쭉 들어가게 되면 무슨 생각이드냐 하면은 내가 예전에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는데 요번에 배우는 게 거기에 좀 보탬이 되겠구나, 이게 아니라 이점에 대해선 내가 예전에 거의 몰랐구나? 어둠 속에 있었구나? 무지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진리의 빛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중심이 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순종을 운명처럼 달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째든 이 요나는 소명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찬란한 빛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편견과 그리고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불순종을 했고 결국은 사람들이 그를 바다로 집어 던졌습니다.
B. 끝나지 않는 부르심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을 해보세요. 배에 이미 짐을 다 버리고 배가 뒤집힐 것 같이 요동을 쳤으니 바다의 그 파도는 얼마나 큰 크기의 풍랑이었겠어요. 그리고 이미 배는 항구에서 그 일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러한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틀림없이 아마 먹구름이 가득 낀 어두운 하늘아래서 그가 출렁거리는 바닷물 속에 제비가 뽑혀서 사람들에게 던져 질 때 사람들이 휙~ 던져서 배를 떠나서 그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에 틀림없이 그 사람은 눈을 감았겠죠. 그게 뭐죠 무슨 뜻이겠어요? 그래 이렇게 해서 결국 나는 죽는구나하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면서 그러면서 이제 어것 으로서 내 인생은 끝이구나, 이때에는 지옥에 관한 천국에 관한 계시도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나면 그저 영혼이 음산하고 어두운 생명이 없는 사후의 세계로 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밖에 없었어요. 그때 휙~ 던져지면서 아~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고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만의 착각이죠. 왜냐하면 끝나지 않은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죽지도 못하는 사명자 에요. 사명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안 죽어요. 절대 안 죽어요. 어떤 사람이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한강다리에 뛰어 내렸어요.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그 밤중에 거기에서 뛰어 내렸겠어요. 글쎄 교각에 걸려서 떠내려가다가 붕 떨어졌는데 흘러갔는데 하필이면 교각에 쓰레기처럼 탁 걸려 버린것입니다. 그러면은 그때에 어차피 죽으려고 했으니까 그냥 물속으로 들어 갈 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기어 올라오더라 이거에요 그리고 거기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경찰이 왜 거기 있어요 이렇게 물어 볼 거 아닙니다. 뭐라고 대답 하겠어요 자살하려다 실패 했어요 그래요, 못 죽어요.
제가 대전에 어느 곳에 집회를 가서 거기에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얘길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맨 처음에 목회하도록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게 30세 일이었데요. 그런데 세상에서 돈버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목회자로 부르시는데 돈 많은 장로 하겠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했데요. 그러니까 이제 이 사람이 그러면서 돈을 벌고 잘 나가면서 사업가로 변신을 했어요. 근데 뭐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잘 될 리가 있겠어요. 결국은 다 말아먹고 오십이 넘어가지고 신학교에 들어 왔어요. 그 다음에 하는 애기가 재미있어요. 오십이 넘어서 신학교에 들어와서 오십대 중반에 교회를 개척을 했으니까 자기는 그렇게 생각 했다는 것입니다. 삼십대 때에 주님 부르셨을 때, 그때에 응답했더라면 맡기실 일들이 죽~ 있는데 어차피 늦게 응답했으니까 오십대 중반까지의 일은 접으시고 하나님이 손해를 보시고 이제 일직이 응답했더라면 오십대 중반서부터 할 하나님의 일만 자기에게 맡겨줄 것이다 생각했더니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풀지 않은 숙제처럼 그대로 남아 있어서 결국은 자기는 휴가도 없이 휴일도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더라,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 있는 젊은 후배들에게 나는 당신들이 너무나 부럽다 이렇게 지금서부터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다가 평생을 살다가 죽는 것이지 나처럼 소명에 응답하지 않고 이십년이 넘는 세월을 방황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이 나이도 많고 세월도 까먹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좀 덜어주시리라, 했더니 끝나지 않은 부르심이 있어서 결국은 그대로 그 해야 할일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남들이 사십년 동안에 골고루 펼치면서 할일을 이십년 동안에 농축해서 짊어지고 결국은 죽는 것이 인생 인가 보다 라구 말이죠. 참 은혜로운 간증이었습니다.
모세는 모세가 아니라 이 요나는 자신의 이 사명을 결국은 끝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생각했겠죠. 사명도 산사람을 위한 사명이지 죽겠다는 사람한테 사명은 무슨 놈의 사명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직 이루어야 할 사명이 남을 사람은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지도 못하고 이렇게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는 전대미문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물고기 배속에 요나가 들어간 것을 우리들이 화제로 삼고 이야기 하지만 거룩하고 아주 장중하게 요나를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어린이 성경 동화책에도 요나가 못된 짓 하다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데요.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이들에게 결국은 아주 희화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소명을 받았던 이사야 전승에 의하면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는 그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증거 하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고 그러면서도 진리의 외침을 그치지 않았던 예레미아 선지자 같은 생애와는 얼마나 대조되는 생애를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에게 사명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소명이 이렇게 큰 사람 선지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죠. 우리 모든 사람에게 각기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실 때에 소명이 있습니다. 각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이 부르심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이 부르심을 감당해 나가게 하는 것은 처음 불러주실 때 소명만이 아니라 이후에 끊임없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힘으로써 이 소명을 감당해 나갑니다. 만약에 이 사명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지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은혜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산다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은 틀리죠. 살아 있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목적 없이 아무러케나 아무 방향으로나 달려간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어서 그것을 따라서 가는 것이고, 그것을 따라서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니 은혜가 없다면 신자는 살 수도 없는 것이죠, 더욱이 죽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끝나지 않는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호락호락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선택 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는 것 같애도 결국은 마지막 하나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가 요나 선지자를 육지에 토해 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토했다기 보다는 재채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요. 어째든 밥알이 튀어 나오듯이 튀어 나왔고 성경에 기록은 정확히 안 나오지만 아마 물고기가 이 사람을 토해 놨을 때 깊은 바다에서 토해 놨다면 익사 했을 것이고, 돌맹이가 많은 곳에서 재채기를 해서 토했더라면 뇌진탕으로 죽었을 텐데 아마 고운 모래가 있는 그러한 해변에 토해놨을 것이고 그리고 거기서 요나는 얼마 만에 눈을 뜨고 자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제 물을 마실 수 있었겠습니까? 음식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최소한 삼일을 굶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거의 실신 상태에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임했습니다. 참 집요하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 물도 못 마시고 밥도 못 먹었을 텐데 하나님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명이 중요하셨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주어집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이번에는 니느웨로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외치라는 대로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C. 사랑이 없을 때에도
3장 이하 4장까지를 읽어 보면 우리는 비로써 요나의 이 순종이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에게는 니느웨 백성들에 향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그래서 니느웨로 갔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이 낯선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보좌에 있는 임금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 까지 짐승이 뭐 알고 금식을 했겠어요. 주인이 밥을 안 주니까 굶었겠지 그렇게 하여튼 온 나라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런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앗수르 같은 큰 나라의 수도에서 사전적으로 율법에 대한 지식도 없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겠느냐?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 보면 은 바로 이 선지자가 활동하던 기간으로 여겨지던 때인 주전 765년에서 59년 사이의 큰 전염병이 이 앗수르 특별히 니느웨에 번졌고 천문학적으로는 763년6월15일에 달이 완전히 없어지는 큰 일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달에 의해서 해가 가려지는 그런 일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하늘의 징조였다는 것입니다. 어째든 그래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이 그 심판을 거두시고 이것이 선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예표가 하나의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린 하나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온전히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당신께 온전히 충성하고 마음이 온전하여져서 주님께만 붙들린 사람에 의해서 사명이 수행될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당신의 역사적인 계획들을 이루시고 또 한편으로는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그 사람의 영혼에 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이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복종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두 가지 사실을 아주 심각하게 배우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사명에 충실 하는 삶을 사용하시되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충성하는 섬김도 당신이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시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섬김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 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섬김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충심으로 복종하지 않은 사람의 봉사를 통해서라도 결국은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계획을 이루시는 주님의 주권과 위대한 자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영혼을 돌보는데 그들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들을 사랑하기를 주님 사랑하듯이 그렇게 섬기지 않는데도 영혼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그 영혼들이 은혜롭게 교회에 붙어 있어서 신앙에서 성장하고 있다면 우리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그 영혼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깊이 니느웨 백성들을 결코 사랑하지 않으려는 민족주의에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이 사람을 통해서 오히려 니느웨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소명을 뛰어 넘어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보여주는 사실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식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은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부르셔서 우리가 사명을 주시죠. 가장 좋은 것은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많이 기도하며 추호의 사심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봉사하고 그 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사명의 생활이죠. 그것이죠, 그러나 그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힘과 결심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아니겠어요. 혈기로 시작했는데도 은혜가 역사하면 마음이 순수해지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는 사모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항상 그렇게 충만한 은혜 속에 있습니까? 그럴 때도 많이 있지만 안 그럴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섬기면서 살면 되죠. 은혜가 떨어 졌을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정답은 그래도 거기 있어야 된다하는 것입니다. 거기 있어야 된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여러분이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만 그 사명에 자리에 서 있을 텐데 여러분이 얼마나 은혜 생활에서 쉽게 요동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사명의 자리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은혜가 떨어진 것도 발견하게 되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나에게 큰 한 은혜를 부어 주셔야 지만 되겠다는 필요성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은혜에서 멀어질 때에라도 우리는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처음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주셔서 그 자리에서 살아가게 하실 때에 그 소명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회복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III.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결국 하나님은 이 사람을 다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불러 는 주셨지만 그래서 소명은 받았지만 소명감도 없는 사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 민족주의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f있는 사람, 그래서 불순종하기에 완고한 이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친절히 그의 편견의 비늘을 벗겨주셔서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하나님이 요나 선지자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소명은 받았지만 아직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 무한한 자비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요나도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이 있는데 여러분이 거기를 떠났다면 여러분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어떤 분 들은 아직도 온 바다가 고요하고 순조로이 항해를 하고 있는 그런 중에 계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물결이 일어나는 파도의 상황 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시간 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제 제비가 뽑혀서 뱃사람들에 의해서 바다로 던져지는 상황일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물속에 빠져서 물고기에 삼킨 상황 일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면 기도하는 시간 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소명을 주셔서 부르신 사람들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그러니 자신의 오류와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해달라고 비는 성도의 간구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7.다시 걷는 세상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자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17∼26).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절망적으로 중풍 병에 걸려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찾게 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면, 비록 이전에는 절망 속에 있는 인생이었지만 다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런 귀한 진리를 여기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등장한 사람은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한 중풍 병자라고 나옵니다. 이 사람이 질병의 절망 속에 있었던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II. 질병의 절망 속에서
우리들이 병이 들었어도 곧 나을 병인 경우에는 무슨 병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기병자라고 부르는 적이 있습니까. 아니 감기는 길어봐야 한주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독감이라도 한 달 정도 가면 떨어지기 때문에 누구도 독감병자 혹은 감기병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암환자라고는 그러지요. 암이 한번 걸리면 그것은 오늘, 내일 낫는 병이 아니니까요. 더욱이 이 사람은 중풍 병에 걸렸습니다. 중풍 병이 오래되어서 그 사람의 존재의 특징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질병이 그랬겠지만 이 사람의 질병도 아주 절망적이었습니다.
A. 침상에 실려옴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사람이 침상에 실려 왔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사람의 중풍 병 증세가 가벼운 중풍 병 증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도 가볍게 풍이 왔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볍게 오니까 처음에 좀 팔을 쓰시는 것을 불편해하시고 안면이 조금 불편해하시다가는 많이 회복이 되시더라고요. 그런데 심하게 오게 되면 그러면 반신불수가 되거나 한 번 더 와서 양쪽에 다 얻어맞아서 풍이 들면 그 다음에는 대소변도 가누지 못하는 그런 신세가 됩니다. 이 사람은 발신불수정도도 아니었습니다. 아마 반신불수라면 사람들이 부축을 해서 왔겠지요. 침상에 떠메어서 왔겠습니까? 그러니까 중풍 병에서도 아주 중한 중풍 병에 걸려서 자력으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상태가 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요즘같이 약이 발달하고 가구가 발달한 시대에도 노인네들이 허리가 부러지든지 문제가 생기면 왜 죽어요? 허리나, 쓰러지게 만들었던 골절로 죽는 것이 아니라 욕창이 나서 죽잖아요? 그래서 몸이 침상에 붙어서 그 부분이 썩고 뭉그러져가는 것입니다. 지금같이 이렇게 의학이 발달하고 가구가 좋아진 때에도 나이가 들어서 움직이지 못하면 욕창이 나서 죽는데 더군다나 이 옛날에 더군다나 늘 침상에 붙어서 생활하는 이 사람의 삶속에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소변하나도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도움을 받아야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B. 도움의 손길들
그런데 놀랍게 이 사람은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질병에 걸려서 도저히 움직이지도 못하는, 기동도 못하는 이 사람에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러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만 보고는 이 중풍병자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이 중풍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잘 알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렇지만 두 가지 단서를 보면 우선 하나는 이 사람이 이렇게 침상에 메어가지고 와서 병을 고치려고도 했으니까 이게 금방 쓰러진 중풍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오래되어서 그래서 의원이나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빌어서는 고칠 수 없다고 하는 판단이 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중풍 병에 걸린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놀랐는데 아마도 이 사람은 동네에서 이 사람의 병세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더욱 놀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이 이렇게 판단을 해봅니다. 어쨌든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이 도움의 손길을 가진 사람들이 이 사람을 고치고자하는 전심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이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사람을 몹시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긴 증거가 나타나죠.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큰 능력을 가지고 각색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발디뎌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모였고 그래서 예수님 가까이에 가서 치료를 받을 엄두도 못 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가보니까 도저히 들어갈 수 없더라. 사람이 자기가 뚫고 비집고 들어가도 못 들어갈 텐데 더욱이 이 큰 침상에다 사람을 눕혀가지고 접근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섰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습니까? 놀랍게 이 사람들은 새치기를 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 때 도대체 무슨 기구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는 기와라고 번역을 했는데 어쨌든 지붕을 벗기고 그리고 순서를 무시하고 줄로 달아서 그 침상을 지붕에서 내린 것입니다. 그 집주인의 심정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달아 내릴 정도였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최소한 네 명입니다. 아무리 양보해도 최소한 네 명입니다. 줄을 달아서 만약에 둘이 들다가 한쪽으로 쓰러지면 사람이 쏟아져 내릴 텐데 단단히 사람들 묶고 최소한 네 귀퉁이에서 줄을 달아서 천천히 순서를 무시하고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예수님의 면전에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역자나 직원들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꽤 여러 번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은 모든 창의력의 근본이다. 사랑하면 독창성이 생긴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는데 죽어도 독창성이 없는 것은 사람들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애정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놀라운 새로운 방법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일에 사랑과 애착을 갖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방법들은 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지붕에 달아서 내려주는데 자력으로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가는데 있어서 스스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고치시는 치료자인 이 예수 그리스도의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III. 고치시는 그리스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전심으로 이 중풍병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중풍병자가 ‘나를 예수님께만 데려다다오. 마지막 소원이다.’ 라고 매달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로 달아 내리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이 질병의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자! 이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뜨고 나면 똥, 오줌을 받아내야 하고 침상에서 스스로 자력으로 일어날 수도 없는 처지에 있는 이 사람에게 아마 멀쩡하던 사람이 중풍에 걸려 덜컥 쓰러져 누웠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러진 처음은 지옥과 같은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예 불구였던 사람들은 처음서부터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내 몸은 이러려니 하겠지만 중풍 병은 일반적으로 타고나는 선천적인 병이 아니잖아요. 태어나면서 아이가 중풍 병에 걸려서 나오는 아이는 없잖아요. 살다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중풍에 걸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 이전에 자기가 가고 싶은데 다니고, 직업 활동을 하고, 돈을 벌고,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여행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활발하게 움직이던 그 삶에서 어느 날 중풍에 걸려서 침상에 구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면 오줌도 못 눌 신세가 되었을 때에 이 사람의 매일의 날은 얼마나 절망의 날의 연속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을 여기에 대입시켜 보는 것입니다.
종종 성도들을 문병하기 위해서 병원에 가면 특히 원자력병원이나 암 병동에 가면 이제 입원실 밖의 유리창에 밖을 내다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 창틀아래에서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도 이쪽저쪽에서 옆에 있는 가족의 어깨에 기대어서 말없이 흐느끼면서 오열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환자의 질병의 상태가 절망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더 이상의 색다른 희망, 어제와는 다른 내일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고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희한하게 지붕의 뚜껑이 뜯겨지고 무엇인가 소리가 나는가싶더니 순서를 무시하고 위에서 커다란 침상 하나가 밧줄에 매달려 서서히 내려오는 광경을 보면서 ‘감히 새치기를 하다니’ 하고 분노를 느끼시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여러분은 순서를 지켜야 됩니다. 절대 식당에서 줄을 설 때에 중간에 끼어들어온다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아무도 생각을 안 합니다. 거기에 줄 서있는 많은 사람들, 거기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침상에 달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침상이 내려왔을 때 아마 이 사람이 예수님을 본 것 같아요. ‘이 사람아’ 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니까’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보니까 이 침상은 혼자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간이침대였던 것 같아요. 어쨌든 이 사람이 그것을 들고 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A. 능력의 나타남
예수님께서 어떠한 시험의 절차나 이런 것을 거치지 아니하시고 이 사람을 보시면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을 하시자 이 사람은 벌떡 일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의 논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중풍에 쓰러진 이후 매일 매일 계속 되어오는 투병 생활 속에서도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이 사람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는데도 하나님이 도저히 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역경을 만나게 하실 때에 그 역경을 극복해보고자 노력을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지혜,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수단, 방법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대로 한번 해보려고 몸부림을 치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려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러한 모든 노력이 아무 의미 없이 헛되이 끝날 때 마치 이 나의 인생의 문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그러한 불가항력의 상황임을 느끼게 될 때에 그 문제를 이제껏 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침상에 누워있었지만 약을 먹고 그리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누웠다가 일어나 앉고, 일어나 앉았다가는 설 수 있고, 섰다가는 한두 발씩 걸어서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고, 화장실 출입을 하다가는 걸어 다닐 수 있고, 걸어가다가는 뛸 수 있는 상황으로 점점 나아졌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사람들이 이 사람을 그렇게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사람을 지붕까지 메고 올라가서 남의 집 지붕을 뜯어 이 침상을 달아 내려서라도 예수를 만나게 해주어야 되겠다고 하는 믿음 위주의 생각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힘으로 해보려고 몇 번을 매달리지만 그러다 그것이 힘으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아주 간단하게 기술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야지요.
유리문을 이렇게 여는데 어제가지 열리던 문이 안 열려요. 순간 생각을 했어요. 세게 밀어볼까? 하고 생각했어요. 세게 밀면 밀 수 있겠지요. 저도 힘이 있는데 못하겠어요. 그런데 힘을 조금 주어보니까 안 열려요. 세게 밀어볼까 하다가 멈추었어요. 이게 힘으로 세게 밀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유리가 깨져버리든지 아니면 열리긴 열리는데 무엇인가 하나 망가져야지 열릴 것이다. 그러면 수리비가 더 들겠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그러면 전문가보고 한번 와서 봐달라고 해야지……. 생각을 바꿔야지요. 그것이 안 된다고 밀어붙여서 확 하다가 왕창 부러져버리면 수리비가 더 많이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래서 무엇인가 일상에 살아오던 우리의 인간의 경험과 내가 해오던 모든 방법대로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그것은 분명히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있을 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거기가 절망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하나님의 도움은 나에게서 끊어졌다고 말하고, 이제는 내가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를 써 봐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이 어려움을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이 중풍병자가 의원에게 호소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다못해 누가 와서 다리를 주무르고 팔을 주물러서라도 한번 고쳐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백방으로 모든 노력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도저히 나의 힘으로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의 귀에 소문이 들렸습니다. 나사렛에서 온 예수는 많은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고치고 치료한다고 하더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을 나와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편 121편에서 어려움을 당한 시인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왜?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눈을 들어서 산을 봅니까? 산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큰 산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니 내가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도 산을 창조하신 그 큰 능력으로 나를 위해서도 창조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 아닌 다른 속에서 일어난 그 일을 나의 인생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요.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고 칩시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게 기적을 본 사람도 이미 다 죽었고 그리고 그 땅은 우리가 가보지도 못한 땅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도 여러 사람은 성지순례를 다녀오셨겠지만 나는 안다녀왔어요. 그러니 가보지도 못한 땅입니다. 그런데 나와 관계가 있어요. 왜? 그 땅은 가본 적도 없고 그 사람들은 만나본적 없지만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셨던 그 하나님을 지금도 내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죠. 그게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고 해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이제 나는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 때에 박수치고 좋아할 자가 누구겠어요? 천사들이겠어요? 성도들이겠어요? 아님 주님 자신이겠어요? 자기의 영혼이 그러겠어요? 누가 그렇겠어요?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과 이간질시켜서 그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만들고, 우리들이 이제껏 경험하면서 살아온 우리가 이제껏 믿으면서 행해온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관한 증거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래서 불신하게 만들고, 그래서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상태가 절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이 정신적으로 질병이 있어서 이렇게 우울증이나 편집증이나 이런 데에 빠지게 되잖아요. 그러면 믿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를 많이 사랑해주는 가족인데도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합니다.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사이에 언제나 있었던 그 믿음의 상태조차도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제껏 살아왔던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몸부림쳐도 도저히 되지 않는 한계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이 사람도 치료가 잘되었더라면 예수님을 만나볼 마음을 갖겠어요? 그런데 아무 희망이 없었어요. 그때 그는 나사렛 예수가 수많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것을 자기의 인생의 처지와 연관시켰어요. 그러면서 ‘아멘’ 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가 침대에 매달려서 공중으로부터 달아 내리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병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육체의 질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그의 영혼의 질병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B. 죄 사하시는 그리스도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이 사람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중풍 병이 걸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에 성한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다니던 사람들은 영혼이 순결한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니죠. 죄가 많이 있어서 질병에 걸렸다기보다는 이 사람이 놓여있는 이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는 예수님께서 죄의 상태에 있는 그의 영혼을 고쳐서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제를 누리게 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아주 소중한 선물이었죠. 그래서 환란을 당한 많은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고 나서 그 육체의 환란 때문에 영혼에 큰 유익을 얻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육체에 그 환란을 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도 어려서 들은 이야기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번 해보겠습니다. 어느 시골교회에 장로님이 계셨대요. 그 장로님의 별명이 뻗정다리래요.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아서 한쪽을 이렇게 쭉 피고 뒤뚱뒤뚱하면서 걸어 다녀서 별명이 뻗정다리가 되었대요. 그 사연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옛날에 보면 시골에서 ‘유지’ 그러면 누구냐 하면 우선 관에 있는 사람 아닙니다. 면장, 파출소장, 소방지서장, 농협조합장, 그리고 또 하나 끼어주면 우체국장도 끼어줘요. 그래서 저도 항상 한 달에 한 번씩 기관장 월례회에 가서 같이 모여서 밥도 먹고 회의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이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관직을 안 가진 사람 중에서 유지가 누구냐 하면 정미소집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부자거든요. 그래서 공장을 가지고 정미소를 돌리는 사람은 대개 농토도 가지고 있어서 쌀농사도 짓고 그것을 찧어주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정미소집 주인하면 그 지방에서는 그래도 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이 그것을 한 것입니다. 정미소가 그렇게 잘되는 것입니다. 그 넓은 동네 몇 개의 마을에 정미소가 그곳뿐이 없으니까 그 옛날에 그 정미소기계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막 사람이 추수철이 되면 사람이 쌀을 찧으러 수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뭐 일요일에는 사람이 더 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일요일에는 당신은 교회에 가지만 정미소는 계속 돌렸대요. 그날도 이제 성경, 찬송을 끼고 그리고 정미소에 와서 일을 정신없이 하다가 작업복차림으로 그냥 성경, 찬송하나 들고 11시 5분전 되면 교회로 막 냅다 뛰는 것입니다. 그날도 이제 아침부터 나와 가지고 정신없이 쌀을 찧는데 아! 이제 예배시간이 되어서 가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막 소리를 지르면서 ‘사장님 이거 큰일 났어요. 피대하나가 멎었어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진짜 피대하나가 멎었대요. 기계가 가다가 피대하나가 빠지면서 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돈을 벌 욕심에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빨리 고치고 가면 설교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냥 기계를 세우지도 않고 그것을 고친답시고 매달리다가 다리가 딸려 들어간 것입니다. 확 딸려 들어가면서 다리가 부러져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피대에 말려가지고 나서 사람이 피대를 따라서 돌다가 그냥 내동댕이쳐져 버리고 다리는 부러지니까 비명을 지르면서 난리가 난 것입니다. 다리가 잘못 부러지면 이 살과 근육이 찢어지면서 다리뼈가 밖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합니다. 이 양반이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을 고생하고 났는데 이게 후유증이 되어가지고 다리를 꺾지를 못하는 뻗정다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침상에서 회개를 했겠지요. 회개를 했겠지요? 장로쯤 되었으니까 전혀 믿음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주일도 지키지 않고 까불고 돈 버는 것을 좋아하더니 다리가 부러져서 결국은 발을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는 아주 믿음생활을 잘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이 장로님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내 다리 부러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매일 자기의 뻗정다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할 것 아닙니다. 아! 내가 주일도 안 지키고 까불고 돈 번다고 교만했을 때 하나님이 다리를 부러뜨리셔서 그런 사랑이 아니면 내가 부러지지 않았으면 지금도 그렇게 까불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것입니다. 보세요. 그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해석입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안 되고 극복할 수 없는 환란과 어려움을 만난 것은 우리보고 믿음을 가지라는 얘기에요. 하나님을 바라라는 얘기에요. 아무리 산전수전을 겪으며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음에 있어서 이미 완전히 어른이 되고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앙이 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믿었었는데 후에 신앙의 연조가 더 깊어지고 나서 오히려 안 믿어지는 것도 많아요. 성경지식은 예수를 믿을수록 더 늘어나지만 사실은 믿음은 처음 믿을 때가 제일 좋지 않았습니까? 무엇이든지 될 것이라는 주님이 붙들어주실 것이라는 그런 신앙이 있었잖아요? 이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질병 걸린 육체를 먼저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영혼을 치료해주신 것입니다. 죄가 있었기 때문에 중풍 병에 걸리게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중풍 병을 도구로 삼아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진정한 질병, 이런 불행한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고쳐질 수 없는 영혼의 깊은 질병을 주님이 다루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복한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오늘 누가 특강 하는 내용을 잠깐 들어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대요. 행복한 어린이를 만들지 마라. 행복한 어린이를 만들어주려고 하면 반드시 그 아이는 불행해진다. 행복한 어린이가 아니라 행복한 어른을 만들 목표로 어린 시절을 가르치고 생활하도록 그렇게 훈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어린이가 되게 하지 말고 성공한 어른이 되게 하라. 애들 때부터 이미 다 성공해서 뭐든지 손에 넣은 아이가 될 때에 그 아이의 미래의 인생은 어른이 되어서 결코 성공할 수 없고 불행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들어보니까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평탄한 길만 걸어가도록 절대로 그렇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는 부패함의 종자가 있어서 내버려두면 썩습니다. 여러분 음식을 맛있게 만들었어도 여름철에 퀴퀴하게 습기가 찬 그날에 뭐 그것을 썩게 하기 위해서 약을 치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에 안 놔두고 잠깐 잊어버리고 그냥 부엌에 내버려두면 그냥 그 다음날 아침이면 반드시 상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덮고 있을 때 그 때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게 되지 주님이 그것을 걷어버리시면 우리 자신 속에서 저절로 부패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결코 이 세상을 꿀맛처럼 느끼면서 행복하게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반드시 당신을 배반할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고난과 시련도 주시고 어떤 때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절망에 직면하게 하심으로써 그 때에 그런 절망의 상태에 직면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시련의 상태에 접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을 그런 진리들을 깨닫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결코 자기도 발견할 수 없었던 자기 안에 있는 새로운 모습들을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이 하나님 앞에 고쳐져야 할지를 알게 하시죠. 그 문제가 중풍의 문제입니까? 그 문제가 키가 몇 센티 작은 문제입니까? 코가 비뚤게 생긴 문제입니까? 피부가 거칠어서 문제입니까? 아니면 무슨 외국어를 몰라서 문제입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죠. 영혼의 문제지요. 영혼의 문제……. 어떻게 영혼의 문제가 고쳐지겠어요? 하나님을 앎으로써 고쳐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절망적인 위기는 그 속에서 발견하는 나의 비참한 모습은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고치시기 위한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육신의 질병상태에 있는 문제는 단지 몇 십 년 살다가 지나가는 이 인생의 길이 불편한 일이겠지만 영혼이 망가진 이것은 이 사람의 영혼이 문제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의 죄를 사하심으로써 죄 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그리하여 이 사람을 용서해주셔서 주님의 생명을 누리며 다시 살게끔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C. 믿음을 보심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런 의문이 들지요. 도대체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무엇을 보고 대화도 한마디 없었는데 무엇을 보고 예수님은 보자마자 이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다루시면서 영혼의 병도 고쳐주시고 그리고 친히 명령하심으로써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나갈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큰 능력도 주셨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은혜를 베푸셨을까? 물론 이것은 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거기에 모여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도 이 사람을 더 많이 긍휼히 여기셨는지 혹은 순서를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먼저 고쳐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치료함을 받고 영육간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매우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 저희는 단지 이 환자를 달아 내리는 섬기는 사람들의 믿음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에 의해서 매어 달려서 내려오는 이 사람 자신의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불행의 상황에서 주님 한분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이 환자의 믿음도 함께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이 믿음을 매우 기뻐하시면서 그에게 큰 능력을 베푸신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죄와 더불어 싸우는 많은 그리스도인, 핍박과 환란을 당하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고통을 받는 많은 성도들에게 가장 자주 사용한 단어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 인간의 계산, 사람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때가 진정으로 믿어야할 이유가 있는 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이 계속 그대를 주장하게 하라. 끊임없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중풍 병 나날이 병세는 더하여져가고 눈을 떠보아도 다음날이 어제와 다를 수 없는 절망적인 질병 속에서도 상황은 아무 희망을 주지 않았지만 만약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믿음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캄캄한 칠흑과 같은 인생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에 자신의 인생의 모든 희망을 걸어왔던 이 중풍병자 그리고 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면서 아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있을 때에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어디에 가도 주님은 계시고 오늘 여기서 풀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숙제는 내일 저기서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IV. 결론 : 다시 걷는 세상
어떤 사람이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고 미국으로 도망가서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해요 한국에서 미국으로 갔는데 하나님은 내가 풀다만 그 숙제를 다시 내미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다시 여기서부터 네가 안 풀었는데 다시 시작하라 하십니다. 숙제하다가 놀러갔다 오면 숙제가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신앙도 똑같아요. 그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믿음입니다. 절망적이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을 때 그러므로
(찬양)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분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자! 결론적으로 이 사람은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들어 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걸어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이었을 텐데 침상을 떠메고 그리고 자기의 갈 길을 걸어갈 때 이 사람의 인생은 새로 시작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다시 걷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 환경도 이렇게 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조짐을 보여주는 환경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캄캄했기 때문에 등대의 불빛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분께로만 향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건져주셨습니다. 치료해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시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1 (2009/1/11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2 (2009/1/25 주일오전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3 (2009/1/2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4 (2009/2/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5 (2009/2/18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6 (2009/3/04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7 (2009/3/11 수요예배)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8 (2009/3/18 수요예배)
8.과거와 다른 현재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몬 1:10∼12).
I. 본문의 배경
이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에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부자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는 아마도 로마의 옥에 갇혀있을 때였을 것이고 60년이 좀 넘는 연도에 이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기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오네시모라고 하는 사람의 소식을 알리면서 이 사람을 빌레몬이 용서하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빌레몬은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의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또 골로새교회도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사도의 가르침아래 있었던 교회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영적인 스승이요 목회자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 빌레몬의 노예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대조해 보면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다시 시작하게 하심
하나님은 이 오네시모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무리 망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인생을 새롭게 고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네시모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오네시모의 인생을 통해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A. 과거의 오네시모
과거의 오네시모를 생각해봅시다. 과거의 이 오네시모는 이름이 오네시모인데 이것은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부모가 지어주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노예의 주인이 지어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노예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노예의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해방될 기회가 주어져도 자기는 해방되어도 자식은 놓고 가야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예가 낳은 자식은 주인의 우리에서 짐승이 낳은 새끼처럼 주인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특별한 인간이 되어서 인류를 두루 밝히는 유익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노예로서 어디에 가든지 유익한 사람이 되라’는 정도의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을까요?
그는 노예였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가 이름과는 달리 주인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하였던 노예였습니다. 도망을 쳐나온 노예였기 때문이죠. 주석가들은 이 문제를 두고 이 노예가 빌레몬의 집으로부터 상당한 돈을 훔쳐가지고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빌레몬서에 보면 ‘혹시 이 사람이 빌레몬 너에게 무슨 불의를 행했거나 혹은 너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나한테 계산해라.’ 고 이야기하는 구절을 토대로 이것은 단순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이것은 상당한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 나온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노예가 도망친 것 자체가 노동력을 상실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아마 이 바울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거든, 불의를 행하였거든 내가 회계해주겠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뭐 그렇게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인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노예가 도망을 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심부름을 시켰을 때에 심부름을 가는 척 하다가 도망을 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그렇게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나온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가 도망을 치면 상당한 중한 벌을 받게끔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유익을 끼치는 자’라는 뜻이었지만 그의 주인에게도, 이웃에게도, 그리고 혹시 있었을지 모르는 가족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한 전혀 쓸모없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말썽만 일으키고, 문제만 일으키고, 사고만 치던, 모든 사람에게 근심거리였던 오네시모였으니 이것이 과거의 오네시모의 모습입니다.
A. 현재의 오네시모
그런데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사도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상 깊은 고백을 남기는데 ‘사랑을 인하여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좀 측은한 이야기죠. 그렇죠.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이것만 해도 편지받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할 터인데 그 다음에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지금 갇힌 자가 된 나 바울이…….’ 이렇게 두 번이나 토를 단 후에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핵심은 뭐냐 하면 ‘그를 용서해주어라 그를 노예처럼 여기지 말고 형제처럼 받아다오. 그가 너에게 돈을 훔쳤든지 도망을 나왔든지 너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꼭 필요하면 내가 물어줄 테니 그러니 그를 모두 용서하고 사랑해다오.’ 이렇게 빌레몬에게 간청을 할 정도로 오네시모는 바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넘쳐나고 있는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네시모 그 자신이 바울에게 아주 유익하고, 필요하고, 사랑스럽고,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현재의 오네시모의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쓸모없고, 근심거리였고, 사고만치는 사람이었지만 현재는 유익하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너무나 귀한, 아들과 같은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오네시모와 현재의 오네시모사이에 비교할 수 없는 간격과 대조를 동시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숙명처럼 실패를 받아들이면서 희망도 없는 인생을 살던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으시는 하나님, 이전에 삶과 이후의 삶을 비교할 때 도저히 그 삶을 살던 사람이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현저한 차이를 불러일으켜 새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만약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고자하는 소원이 있다면 먼저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실패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어도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은 운명일수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III. 오네시모의 변화
그러면 오네시모는 도대체 어떻게 변화되었기에 이 사람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현재를 갖게 되었을까요. 오늘 이 짧은 본문은 최소한 네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A. 회심한 사람
첫째는 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소개하기를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와 함께 감옥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감옥에서 사도 바울이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영적인 출생을 가리키는 것인데 목회자인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그가 거듭나고 회심을 하게 된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과거에 모든 사람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준 무익한 사람이었지만 회심함으로써 그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현재의 오네시모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참된 변화는 우리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한 사람의 운명처럼 보이는 인생의 필연은 밖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길이가 수백 미터가 되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몇 십만 톤의 배도 사실은 수십 미터 풍랑이 일고 요동이 치는 파도에 의해서 배가 갈 길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초속 삼십 미터, 사십 미터로 부는 바람의 힘은 배를 쓰러뜨릴 듯이 불지만, 수만 톤의 배를 가랑잎처럼 만들지만, 그 바람에 의해서 배에 가는 길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밖에 있는 요인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조종석에서 작은 핸들 하나를 움직이는 그 항해사에 의해서 그 어마어마한 배는 갈 길을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밖에서 수많은 환경이 있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온갖 많은 일을 겪으며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운명까지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안에 있습니다.
회심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하나님을 향하여 선을 바라보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인간의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으로 바꾸어놓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입니다. 오네시모의 인생을 실패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노예였다는 신분?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네시모를 실패하게 만들었던 것은 너무 엄격한 주인을 만났다거나, 혹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 회심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의 영혼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오네시모는 방황하고 혼란스러웠던 인생을 끝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온 우리의 과거와 다른 현재를 사는 길은 우리가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다른 현재를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옆으로 기어가는 게를 동해바다에서 잡아다가 서해바닷가에 놓은들 앞으로 갈 리가 있겠으며 서해바다에서 잡은 게를 남해바다까지 운반한다고 해서 그 게가 뒤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옆으로 가는 게를 보고 하도 답답해서 그 어미가 ‘이렇게 걷는 거야.’ 라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 자신도 자기이고, 하나님도 그 하나님입니다. 필요한 것은 영혼의 참다운 변화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오네시모처럼 회심한 적이 없는 사람은 돌이켜 회심하여야할 것이고, 회심하고도 그 회심한 길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B. 유익한 사람
두 번째는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무익한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많은 고통을 준 노예였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회심하고 났더니 그는 사도 바울에게 그리고 또한 빌레몬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옥 속에서 아직 갇혀있는 때에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이제는 예전에는 죄수의 몸으로 옥에 갇혔지만 이제는 사도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게 없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도 그런 불평을 하니 사람에게 이런 불평을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면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나 때문에 이 세상을 살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또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존재인가? 이것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고, 그의 이웃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시지는 않았어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 안에서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려고 할 때에 자신은 이미 자기에게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오네시모는 예전에는 아주 무익한 사람이었지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도 바울을 위해서 아주 쓸모 있는 사람이었고 이 사람을 빌레몬에게 잠시나마 보내는 것이 매우 아쉬운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새로 시작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왕들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가장 허무한 묘사는 ‘그가 아끼는 자 없이 죽었더라.’ 왕이 죽었는데 아무도 그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나에게 건강이 있는 동안에, 그리고 나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물질과 시간이 있는 동안에,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고자 하실 때에 언제나 봄날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주님이 쓰시려고 해도 응답할 수가 없는 때가 오지요. 그런데 그렇게 유익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인생의 날들 동안에 허무하고 쓸모없는 것에 몰두하면서 주님을 섬길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한 번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은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을 변화시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아주 유익한 사람으로 바꾸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C. 동역한 사람
세 번째로는 동역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을 합니다만 그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똑같은 무게로 다가오지는 않았겠지요.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열두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제자들 중에서도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특별히 아끼셔서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은밀하고 신비한 광경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또 가르쳐주셨지요. 사도 바울의 주위에도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돕겠다고 자청한 사람들도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가르쳐서 나의 심복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서 오네시모는 이 갇힌바 된 감옥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수고하는 바울에게 복심이었습니다. 즉 사도바울과 똑같은 마음을 품고 사도 바울의 분신처럼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섬길 수 있는 일군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이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의 큰 능력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못 다한 일을 예수님보다 능력 있게 하게하기 위해서 보내주시기만 한 성령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실 위대하고 놀라운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실 것이요, 그가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들을 생각나게 해주실 것이다.’ 삼년동안이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쳤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먹고 마시며 피부로 접촉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복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삶은 모두 보았지만 그분의 부활도 목격했고 승천도 지켜보았지만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그 속에 품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말씀의 속 깊은 의미가 진정으로 무엇이고 그러한 가르침을 자신들에게 주실 때에 가르침 사이사이에 묻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빛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눈치도 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강한 임재 속에 성령님은 오셨고, 오시자 그들은 그 성령의 온전히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들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에 제일 먼저 깨닫게 된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요, 부활의 뜻이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의미가 진정으로 깨달아졌고 그리하여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모든 기억들은 마치 마른 뼈와 같이 죽어서 언덕 사이사이에 뒹굴던 뼈다귀와 같은 것들이 같이 함께 합체되어 힘줄이, 살이 입혀지고 군대처럼 살아나듯이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조각난 파편과 같은 기억들이 일시에 아주 웅장한 통합을 이루면서 그들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게 초대교회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 살아계실 때에도 예수의 심복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찬양)멸시와 욕 다 당하시고 가시관 쓰셨네.
죽으셨어요. 그것이 가슴에 확 밀려오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보이는 예수 앞에서 심복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예수 앞에서 심복이 되었고,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는 죽을 수 없었던 그들이 예수님이 가신 후에는 죽기까지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똑같은 것을 사도 바울도 물려받았기 때문에 ‘내가 너희 무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빌립보교회에 쓴 편지 속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가슴에 사도바울이 품었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품어 사도 바울이 예수의 심복이 된 것처럼 이 사람도 또한 사도 바울의 심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는 이 미천한 사람 오네시모에게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는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서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러한 교회의 목양의 원리를 제시했죠.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도 말고 나만 보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사도 바울이 교주였지 사도였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본받은 것처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복이 된 것처럼, 너희는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심복이 되어라.’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떠난 후에도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그 교회의 목회자로 머물러있는 것처럼 똑같은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교회의 질서를 지키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도덕적인 정절을 유지하고,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돈 많고 자유인이었던 고린도교회 교인이 못한 그 일을 옥 속에 갇힌 천한 노예 오네시모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서슴지 않고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 속에서 이렇게 절친하게 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이 디모데 이후에 거의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고 복음사역의 꿈을 안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마음깊이 다가오는 심복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에게도 이 오네시모는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네시모는 과거에는 쓸모없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훌륭하게 사도 바울의 아들이요, 심복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간증을 하는데……. 설교를 하는데 좀 소란스럽게 집회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젊은 주민 하나가 혈기방자해서 교회 문을 발로차고 들어왔어요. ‘도대체 너희들만 사는 동네냐? 어찌하여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고 미친 듯이 주민들을 괴롭히느냐고 목사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국은 회심을 했어요. 그리고는 이후에 그 목사님의 차를 몰고 다니는 기사가 되었어요. 그래서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그 사람의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원래 횟집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집회를 할 때에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방자히 행하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이제는 나의 당나귀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익했지만 주님이 변화시키셨더니 이렇게 유익하고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 저는 수시로 생각해봅니다. 자! 내가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되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우리 각자를 있던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어쨌든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회고할 것이 아니에요? 그때 우리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요? ‘아! 겨우 이제야 죽었네. 이제 그분이 돌아가셨으니까 교회도 이제는 좀 잘 되겠다. 그렇게 직분만 맡고 문제만 일으키더니 이제 그 사람이 죽었으니 교회는 좀 평안해지겠네.’ 만약에 이런 소리가 들린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이렇게 유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복음을 위해
마지막으로 이러한 변화, 유익한 사람이 되고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던 이 오네시모는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남에게 없는 좋은 것을 주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최고의 대의는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따라 살고, 그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붙들어주고, 미끄러진 사람들을 이끌고, 그렇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격려하고, 이렇게 해서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끼쳐 그들로 이 복음의 유익아래에서 살게 하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정신이었습니다. 과거에 오네시모는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한 능력으로 이 사람을 변화시켜 주었더니 과거에는 복음과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이 복음을 위해 수고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IV.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참된 가치는 세상에서의 영광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거기에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지난날들이 아무리 좋지 않았던 날들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렇게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오네시모를 바꾸어 자랑스러운 현재의 오네시모의 삶을 살게 하신 것처럼,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믿고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 예전에는 주님께 근심이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드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