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2009년 설교모음)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설교기간|2009년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1. 침체의 겨울은 가고(아2:10-13) 2009.4.15 수요예배 1
2. 내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시3:1-4) 2009.4.29 수요예배 7
3. 영혼의 봄날이 갈 때(아5:2) 2009.5.6 수요예배 16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4. 고통 가운데 배운 사랑(시31:19-21) 2009.5.20 수요예배 26
5. 거룩한 교제와 회복(아4:16) 2009.5.27 수요예배 35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6. 다시 살리시리니(시85:6) 2009.6.17 수요예배 44
7. 그리스도가 교회를 누리실 때(아5:1) 2009.7.1 수요예배 53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8. 말씀으로 세워질 때(시119:28) 2009.7.8 수요예배 64
9. 내 남자의 아름다움(아5:9-16) 2009.11.11 수요예배 72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2009.4.15
침체의 겨울은 가고
아 2:10-14
I. 본문해설
II. 신랑의 목소리
A. 침체의 겨울은 가고
B. 생명의 봄이 오고
III. 신부의 위험
A. 바위틈에 숨음
B. 낭떠러지에서 위험함
C. 신랑을 부르지 않음
D. 얼굴을 보이지 아니함
IV. 신랑의 그리움과 호소
A. 여전한 그리움
1. 부드러운 소리
2. 아름다운 얼굴
B. 일어나서 함께 가자
V. 결론 : 회복을 갈망하라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2 2009.4.29
내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
시 3:1-4
I. 본문해설
II. 고난을 사용하심
A. 많은 대적
B. 은총이 끊어진 듯함
III. 영혼을 회복시키심
A. 방패
B. 영광
C. 머리를 들게 하심
IV. 다시 배운 기도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3 2009.05.06
영혼의 봄날이 갈 때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아 5:2)
I. 본문해설
II. 영혼의 침체와 감각
A. 영적 침체: 영혼의 잠
B. 불멸의 감각
III.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감
A. 두 가지 연합
B. 문밖에 계신 그리스도
C. 변함없는 사랑
IV. 결론: 그리스도와 동행함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4 2009.05.20
고통 가운데 배운 사랑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시 31:19-21).
I. 본문해설
II. 고난 속의 외로움
III. 회복의 기회로 삼으심
A. 숨기심
1. 하나님의 장막에
2. 비밀히
B. 벗어나게 하심
1. 사람의 꾀에서
2. 구설의 다툼에서
IV.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심
V. 결론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5 2009.05.27
거룩한 교제와 회복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아 4:16).
I. 본문해설
II. 거룩한 교제의 비밀
A. 거룩한 교제의 효과
B. 은유의 의미
1. 남풍과 북풍
2. 동산과 향기
C. 결실이 있는 신앙
III. 영혼의 회복을 위하여
IV. 결론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6 2009.06.17
다시 살리시리니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
I. 본문해설
II. 언약 백성의 삶
A. 참된 기쁨의 생활
B. 기쁨의 근원
C. 소중히 여김과 기쁨
III. 영적 회복과 은혜 작용
IV. 결론 : 영적 회복을 구함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7 2009.07.01
그리스도가 교회를 누리실 때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 5:1).
I. 본문해설
II. 잠근 동산 같은 교회
A. 열매 가득한 동산
B. 샘에서 흐르는 물
III. 교회의 기쁨 : 누리심
1. 몰약․향재료 - 약품 : 치료
2. 꿀송이․꿀 - 기초품 : 기쁨
3. 포도주․젖 - 식품 : 영양
IV. 초청하시는 그리스도
친구․사랑하는 사람들
V. 결론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8 2009.07.08
말씀으로 세워질 때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
I. 본문해설
II. 영혼의 눌림
III. 마음의 녹음
IV. 말씀으로 세워짐
V. 결론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9 2009.11.11
내 남자의 아름다움
아 5:9-16
I. 본문해설
II. 미녀가 사랑한 남자(8,9)
- “극히 어여쁜 자야”
- “얼마나 어떻게 나은가”
III. 새롭게 발견한 아름다움(10-16)
IV. 끝없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V. 결론 :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함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1.침체의 겨울은 가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0-13).
I. 본문해설
이 아가서는 솔로몬 임금과 술람미 여인의 연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노래는 단순한 남녀 상렬지사를 담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교회와 신약에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에 아름다운 사랑과 연합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표적인 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아가서를 잘 연구하게 되면 거룩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지금 어떠한가를 반성하게 하고 보다 깊은 사랑을 찾게 하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이 아가서는 교창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즉 신랑이 노래하고 신부가 노래하고 또 신랑이 노래하고 신부가 노래하는 이런 교창형식으로 되어있고 히브리어로 보면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 된 시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10절부터 14절까지를 이 신랑의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직접 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신부가 회상하는 신랑의 목소리입니다. 이 10절부터 14절까지 나오는 이 신랑의 목소리는 신부가 기억 속에서 더듬어서 토해내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역사적인 내용인가, 아니면 꿈과 환상이 섞인 내용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갈리는데 아마도 제 생각에는 두 번째가 맞을 것 같습니다. 없었던 일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거기에 환상적인 어떤 내용들이 판타지처럼 덧붙여져서 이것이 이제 신부에 의해서 신랑의 목소리로 회고되고 있는 것입니다.
II. 신랑의 목소리
이 아가서 4장에 보면 이 솔로몬 임금의 애인이 되었던 이 신부로 나오는 술람미 여인의 고향이 레바논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기에는 추운 북쪽지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북쪽지방에서 이제 이 술람미 여인을 만났고 아마도 솔로몬 임금은 바쁜 공인이었기 때문에 자주 이 술람미 여인에게 들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격적인 만남의 때를 지금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가 회상하고 있는 신랑의 목소리 거기에서 나오는 이 첫 번째 테마에서는 두 가지 내용으로 이 신랑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침체의 겨울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A. 침체의 겨울은 가고
그래서 오늘 여기에 아가서에 보면 “겨울도 지나고 비는 그쳤고” 그랬습니다. 팔레스탄에서는 겨울에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겨울이 우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비가 오는데 이 이른 비가 그치면서 봄이 오는 것을 알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른 비를 맞으면서 식물들이 싹이 돋고 봄기운을 타게 되고 늦은 비가 오면서 이제 추수 때를 알리면서 이제 곡식이 영글고 추수기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 이렇게 신랑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또 하나 이 신랑이 노래하는 것은 겨울이 지나가는 것과 함께 생명의 봄이 왔다는 소식을 겨울이 지나간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묘사해나가고 있습니다. 겨울은 모든 생명이 움츠려 들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무들은 겨울이 오니까 자신의 양분을 저장하기 위해서 나뭇잎을 다 떨어트리고 풀들은 모두 시들어버리고 그리고 뿌리만 남아서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은 ‘죽음’ 혹은 ‘잠’으로 상징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이런 겨울의 때가 있습니다. 잠자는 것은 죽음과 아주 흡사합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는 영혼의 잠이고 이런 잠에 깊이 빠지게 되면 그것은 영혼의 죽음을 방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육체가 죽었다고 할 때는 기력이 끊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서 육체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혼은 죽어있을 때 가장 활발하게 삽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대상을 하나님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을 향해 죽어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수도 없고, 하나님께 열렬히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에 신령하게 반응하지도 못한다는 그런 측면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는 반대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은 자에게는 죽음으로 모든 활동이 끝나지만 영혼이 죽은 자들에게는 죽은 영혼에 합당한 열매를 많이 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에서 죽은 행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약에 영혼에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잠든 것이고 그것은 영혼의 죽음을 닮은 것인데 그때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거의 못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육체의 일들은 활발하게 많이 열매를 맺어서 그래서 육체의 열매를 많이 맺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신자의 처지는 주님께 욕을 돌리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강을 누려야 할 신자의 마음에는 불안과 고통, 그리고 번뇌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침체의 겨울에 대한 묘사는 아주 짤막한데 봄에 대한 묘사는 아주 깁니다.
B. 생명의 봄이 오고
그래서 오늘 말하기를 “꽃은 피어”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꽃들”이라고 나옵니다.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그리고 새들이 노래하고” 성경에는 원래 새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노래할 때” 이렇게 되어있는데 아마 이것이 새들이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해서 “새”라는 말을 우리말 번역에서 덧붙인 것입니다. 어째든 사람이 너무 기뻐해서 노래하든지 아니면 새들이 많이 날아와서 노래를 하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 번째는 “반구의 소리” 그랬는데 이 “반구”는 히브리말로 “토루”인데 산비둘기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이 산비둘기가 아주 정확하게 때를 따라서 날아오고 날아가는 철새였다고 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제비 날아들고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오고’ 정도의 뜻이 됩니다. 아주 현저하고 분명한 봄날이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푸른 열매가 있고” 그랬는데 사실 푸른 열매니까 아직 익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들에서는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달리고 무화과나무의 푸른 열매는 익어갈 것이고”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포도나무에는 꽃이 피어 이렇게 생명의 기운이 봄과 함께 온 천지에 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봄날이 오면 꽃이 활짝 피어날 때 예쁜 것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원에 한번 가보십시오. 군자란 같은 것이 있는데 꽃이 안 핀 군자란은 쌉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꽃이 핀다고 하는데 그런데 예쁘게 꽃이 활짝 핀 꽃은 비쌉니다. 활짝 핀 꽃은 이파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듭니다. 자,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외적으로 기독교인의 의무를 행하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 생활하고 기독교적인 생활의 형식을 따르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파리입니다.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을 사랑함과 기쁨으로 가득하게 피어날 때 그 내면적인 것은 파란 잎사귀와 줄거리위에 얹혀진 활짝 핀 꽃입니다. 왜 아멘을 하지 않으십니까? 활짝 핀 꽃입니다. 그래서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은혜가 충만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어쩜 사람이 그렇게 진실하고 신앙이 올곧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해박하고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이 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인격, 순전한 사랑, 이게 아름다운 꽃이지 그 꽃이 활짝 아름답게 우리에게 느껴지게 될 때 그 속에 이파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글쎄 그 사람이 한 교회에서 20년 동안이나 충성을 했다며, 그 사람이 매일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십일조를 하는데 그 사람은 십의 이조를 한데, 그 사람은 그렇게 교회에서도 무엇인가 하나를 맡으면 최선을 다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데, 가난한 사람도 그렇게 많이 구제한다며, 또 그렇게 검소하데, 그 집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를 그렇게 칭찬한데 이게 모두 이파리입니다.
꽃이 없으면 사람을 만났는데 향기가 없어.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이 느껴지지 않아. 주님을 향한 순전한 기쁨이 없어, 마음은 차디차고 얼굴은 싸늘하고 의무에 매어서 교회에 나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인격의 올바르지 않으니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구석구석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 말이 완전히 바뀝니다. 꼴에 한 교회를 20년이나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눌어붙어있다며, 참 어느 목회자인지 고달프겠네. 아이고, 그 꼴에 십일조를 한데, 새벽기도를 다닌다며 새벽기도를 안 나가도 그보다는 낫게 살겠네. 그렇게 교리를 꿰어서 알기만 하면 뭐해. 그래서 모든 무성한 이파리가 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아름다운 영혼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영혼에 봄날이 올 때,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피어나는 꽃은 일순간입니다. 불과 며칠,
주 예수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시는 변하여 새사람 되고
그러니 여러분의 생활은 얼마나 아름다우십니까? 누가 그러는데 주님이 언제 오시냐고 그러니까 비가 추적추적 오는 수요예배의 밤에 교회에 오신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여러분이 이렇게 나왔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져야 합니다. 활짝 핀 꽃 같은 영혼이 있어야 합니다. 봄날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노래할 마한 때가 됩니다. 영혼의 노래할만한 때가 됩니다. 교회 역사를 둘러보면 참 놀라운 게 평안하고 고요한 때가 찬송가가 많이 나온 게 아니라 극심한 고통, 종교 전쟁, 그 다음에 전쟁의 비참함, 가난, 기근, 이런 것들이 온 땅을 뒤덮을 때 그때 주옥같은 찬송가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노래는 육신의 잘되는 번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봄날을 맞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찼을 때 영혼에 울려 퍼지는 새 노래가 확! 나오는 것입니다. 묵은 마음으로는 옛날 노래밖에는 못 부릅니다. 새 노래는 새 마음으로 새로운 영혼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가 되고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 제일 충격을 받은 것이 어쩜 인간의 언어가 이렇게 불안전할까.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을 표현할 말이 우리말에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 반성문을 쓰라고 하면 용지 한 장에 5분도 안 걸리는데 애인에게 편지를 쓸 때는 5시간도 더 걸립니다. 왜,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은 그것을 표현할 말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노래는 새 마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영혼에 봄날이 와서 넘치게 되면 영혼 깊은 곳에서 맑은 샘이 터지듯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이게 영혼의 순발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곤고하고 힘들다가도 이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면서 그 이름을 찬송할 때 마음속에서 큰 기쁨이 확 솟아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영혼의 봄날이 와도 시련도 있고, 고통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건강할 때는 조금 다쳐도 금방 낫는 것처럼 영혼의 솟아나는 순발력 때문에 하나님 앞에 꽃같이 피어나는 영혼으로 노래를 부르고 나면 이 마음의 근심이 변하여 찬송으로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로 그렇게 바뀌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에 봄이 오면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들이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제비가 돌아오면 야, 봄이 왔구나. 그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비둘기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 이제 겨울이 끝났구나. 그리고 노래했습니다.
영혼이 깊은 침체에 빠져 있을 때는 하나님이 이제 나를 버리셨구나. 나는 하나님께 잊혀 졌는가. 아, 나는 아무 희망이 없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나는 고리무원의 존재이구나.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도 나를 잊으셨을 거야. 하는 자포자기하고 좌절하는 마음이 생겨서 절망을 향해 걸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이 봄날을 맞아서 은혜가 충만할 때는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수시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봄날을 맞았을 때 영혼이 움직이는 방향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련이 많이 와서 그것이 아프고 괴로워서 눈물을 흘려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런 근심과 걱정의 눈물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때도 가만히 돌아오면 어렵고 힘들 때 고통 속에서 기도를 많이 했지만 우리의 영혼이 봄날이었을 때는 항상 근심으로 시작했다가 감사로 마치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 아픔으로 기도를 시작했다가 찬송으로 끝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확인하게 되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노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봄날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는 절망이 없다는 증거를 매일 보여주셔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눈물과 탄식, 미움과 원망, 좌절과 분노 속에서 걸어갔을 그 길을 용서와 화해, 사랑과 그리고 이해 속에서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니 봄날이 와야 합니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매달렸습니다. 영혼의 봄날이 오면 금방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참 놀랍게 우리가 긴 침체 속에서 벗어나 그 터널에서 나와서 햇빛을 보고 우리의 영혼에 봄날이 오게 될 때는 우리의 마음에 많은 것을 품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되면 또 역시 많은 것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상처를 마음에 깊이 끌어안고 털어버리지 못합니다. 미움과 원망을 가슴에 품고 털어 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근심과 염려가 있으면 부둥켜안고 그 근심과 염려를 계속 키워가면서 자신이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하는 단계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영혼의 봄날이 올 때는 이런 것들을 마음에 품지 않습니다.
저는 농사를 지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작물마다 좋아하는 토양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그런 것은 제가 좀 압니다. 땅콩 같은 것은 모래밭에서 잘 자랍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나무는 물이 많은 것을 좋아하고, 어떤 나무는 물이 잘 빠지는 모래땅을 좋아하고, 어떤 나무는 습기를 잘 머금은 그런 흙이 있는 땅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양파를 심는 곳이 다르고, 감자를 심는 곳이 다르고, 또 무를 심은 곳도 다릅니다. 땅이 각각 어떠냐에 따라서 품는 나무, 품는 곡식이 각각 틀리듯이 마음에 상태, 영혼의 경향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품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그런대 오늘 여기에 보면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어가고” 하는 번역을 한다면 이렇게 영혼의 봄날이 와서 심령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는 다른 것들을 품게 됩니다. 미움과 원망대신 사랑을, 절망과 좌절대신 희망을, 자아의 상처대신 하나님을 위한 소명을 이렇게 나보다는 이웃을 품으면서 그것들을 끌어안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침체가 지나가고 회복이 찾아왔다고 해서 금방 침체가 사라지고 생명의 봄이 왔다고 해서 금방 주렁주렁 큰 열매가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품습니다. 아직은 푸른 열매에 불과하지만 곧 아주 아름다운 열매로 익어갈 것입니다. 그가 그런 영혼의 봄날을 깊이 사모하고 그리하여 침체의 계절이 지나가고 봄이 왔으니 그 은혜 안에서 계속 살기만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깊어가면서 이 열매들은 아주 아름답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는 은혜를 받고 회복이 되는 것 같아도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미끄러져 가면 푸른 열매들이 막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인데도 이제 막 품어서 파랗게 되었는데 유산하듯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못된 성질도 변해서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의 표가 조금 날만한데 미끄러져 내려가면 유산하듯이 그 옛날에 못된 성질, 그 못된 성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봄에 그렇게 푸른 열매가 맺히게 되면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올 때 그때 아름다운 열매들이 가득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보니까 포도나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포도나무에 꽃이 피어“ 그랬습니다. 꽃이 피고 이어서 열매가 맺습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보다는 늦게 결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꽃이 활짝 피었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활짝 핀 그 꽃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많이 맺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농사를 짓는 뿌리식물이 아닌 꽃에서 열매를 맺는 식물을 농사하는 사람의 관심은 꽃이 적당한 일기를 맞아서 활짝 피는 것입니다. 그때 활발한 수정이 이루어지고 그러고 나면 그 꽃이 맺힌 곳마다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활짝 핀 꽃의 만개는 열매를 보증해주는 것입니다. 배꽃이 오늘날 활짝 피었습니다. 그 활짝 핀 배꽃은 탐스럽게 익을 배라고 하는 열매의 훌륭한 전조입니다. 만약에 꽃이 막 피었는데 비가 쏟아져 천둥과 번개가 치고 폭풍 속에서 그 꽃이 다 떨어진다면 그 배 농사는 다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도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서 그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조짐을 보이는 것입니다.
Ⅲ. 결론
이처럼 겨울은 죽음과 방불하듯이 우리의 영혼의 침체도 사실은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봄이 오면 꽃피고 새들 노래하고 철새가 날아들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의 열매가 꽃이 맺고 피듯이 우리의 영혼에도 주님이 오셔서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봄을 주시면 우리의 영혼에도 죽음을 이길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신랑은 선언합니다. 침체의 겨울은 다 지나갔고 이제 생명의 봄이 왔구나, 노래합니다. 술람미 여인의 신랑은 솔로몬이었지만 우리 믿는 사람의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의 영혼의 침체의 겨울은 모두 지나가고 봄날이 오기를 간절히 오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봄에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새봄을 맞이하여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꽃피고 노래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는 그런 살아있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2.내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3:1∼4).
I. 본문해설
주님을 믿는 신자의 생활이 날마다 영적으로 봄날이었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런 따스한 봄날보다는 시련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러한 때에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윗이 경험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아마도 가슴 아픈 일을 당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좋아하던 이 시인이 토로한 그 기도를 아마 후일 기억하고 기록에 남겼겠지요.
이 본문의 배경은 압살롬이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너무나 황망한 가운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급히 도망을 가며 쓴 시처럼 보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흔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이 항상 봄날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정도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도 항상 그 영혼이 봄날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혼이 언제나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같이 하나님 앞에 간직되기를 원하셨습니다.
II. 고난을 사용하심
그래서 하나님이 비록 사랑하시는 다윗이었지만 그의 영혼에 봄날을 다시 오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고난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외적인 환란을 겪은 때가 많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대부분 많은 때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그리고 은혜로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은 참으로 안팎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시련이었습니다. 자식이 칼을 들고 일어난 것이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할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돌보던 수하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던 친구들조차도 등을 돌렸고 자기를 어버이로 알고 존경하던 백성들이 표독한 얼굴로 돌아서고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큰 환란과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가슴의 고통이 없으면 견딜 수 있을 텐데 그 모든 고통의 한 가운데는 자기의 아들이 자기를 향해 반기를 든 것이었습니다.
A. 많은 대적
상황은 많은 대적으로 들 끊고 있었습니다. 평안하고 그리고 왕국이 번성할 때에는 아무도 자신의 이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천지였는데 어느 한 순간 시련이 닥치자 잠재적으로 자기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섰고 그것은 다윗에게도 너무나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대적들이 단번에 고개를 들고 그리고 다윗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워주신 이래로 왕으로 등극한 이후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왕궁을 황망히 빠져나와야했고 왕권의 정통성의 상징이던 법궤마저도 버려두고 도망쳐야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뼈아픈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고통과 수치에 대한 눈물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자기의 자식이 자신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큰 고통이었습니다. 수많은 대적들에 에워싸인 가운데 다윗은 이 고난을 그대로 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때로는 이렇게 나를 도울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홀로 외톨이가 된 채로 수많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이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욱여쌈을 당하며 수많은 대적들이 일어나 손가락질하고 나를 비난하는 그러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가 가까울수록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봄날을 주시기 위해서 고난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주셔도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생각이 현저히 달라집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그리고 안온할 때에는 새들이 노래하는 것 같다가도 슬픔을 당하면 새들이 운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이 말씀을 주셔도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의 결함 때문에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볼 수 없었던 말씀을 보게, 들을 수 없었던 말씀이 들리게,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을 찾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B. 은총이 끊어진 듯함
시인은 이렇게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였을 그 때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상황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은총도 끊어진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이 끊어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나 왕궁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이 얻을 수 있었던 용기는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이나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이니 그러니 저를 죽인들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랴.’ 는 마음으로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쓰레기 같았던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다윗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네가 사울의 집안을 망치더니 이제 네가 사울의 집안에 행한 것처럼 하나님이 네 집안에 행하시느니라.’ 고 외쳤습니다. 사실 사울을 다윗만큼 사랑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미치광이가 되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자객을 풀었는데도 그는 다윗을 미워하였으나 다윗은 그 장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버렸어도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 끝까지 여기고 자기의 손으로 그의 잠자는 그의 옷 가장자리를 약간 베고 물병을 훔친 것을 인해 깊이 마음 아파하던 그런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지 다윗이 그를 망쳐놓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모욕을 다 받으면서 남들이 보기에 다윗은 어느 모로 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고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은총이 끊어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은총이 끊어진 것 같은 그러한 막막한 광야에 우리를 두실 때가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만났는데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가 없고 나의 다정하던 친구들도 나를 배신하고 나를 위해 많이 헌신하던 사람들도 고개를 돌리는 때가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까지 우리를 다루시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할 수 없을 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향한 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은총이 모두 끊어진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우리를 두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주님을 만났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항상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물론 사람들이 볼 때에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건강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가정의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때에, 그 때에도 여러분은 내면의 세계에서 큰 고통을 느끼며 아파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환란과 시련도 사용하시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움직이는 때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이 폭풍우처럼 밀어닥친다고 해서 그 때 마음이 모두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평안하다고 해서 그 마음도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은총이 끊어진 것 같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았던 그 고난의 시기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III. 영혼을 회복시키심
그렇게 마음이 많은 대적과 그리고 은총이 끊어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속에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이 그렇게 자식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황망히 도망을 쳐야할 인생에 가장 가슴 아픈 때에 이 시인은 하나님이 이제껏 자신의 인생에 베푸신 많은 은총을 생각했습니다. 영혼을 회복시키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세 가지로 노래하였습니다.
A. 방패
첫째는 하나님은 자신의 영혼에 방패가 되어주심으로 이 환란과 시련의 때에 오히려 자신의 영혼에 봄날을 가까이 오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방패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서 사용하는 방패에요. 이 방패는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수비용 무기에요. 적군들이 내려치는 칼로부터 자기의 몸을 보호하고 그리고 적으로부터 날아오는 창이나 화살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바로 이 방패에요. 그러니까 방패라고 하는 이 말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키는 말이죠. 다윗이 비록 환란을 만나고 큰 시련의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렸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 환란이 너무 치욕스러워서 하나님의 은총이 끊어진 것 같은 때였지만 하나님은 생명 싸게 속에 이 시인 다윗의 영혼을 감추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시련과 환란을 많이 당하는 그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큰 환란과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닥쳐서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데도 하나님이 내 영혼을 방패로 막아 보호해주셨습니다. 악인들이 나를 향해 악한 말의 화살을 쏘아도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 내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게 하시고 악인들이 나의 과실과 허물을 지적하고 칼로 찌를 때 다른 때 같으면 피가 콸콸 쏟아지는 상처를 마음에 받았을 텐데 하나님이 방패로 그것을 막아주심으로 나에게 칼을 휘두르는 그 사람이 더 가련해 보이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다윗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시련과 환란으로 치자면 겨울날이었는데 주님이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를 방패삼아 막아주시니까 그의 영혼은 오히려 극심한 환란의 때에 주님과 은밀한 장막에서 밀회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망명의 길을 떠나서 다른 사람 보기에는 나라를 잃고 기름 부은 자가 그 나라에서 쫓겨나 요단 건너편으로 도망 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 때 다윗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면서 정사와 그리고 왕국을 다스리는 일로 인해서 번잡한 마음을 다듬고 주님 한분만을 바라는 간절한 영적 교제 속에 들어감으로써 그래서 왕궁 속에서 누리지 못하는 은혜의 호황을 누렸던 증거들을 우리는 시편 구석구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방패를 통해서 자신의 생명이 보호받았던 경험을 회상하며 바로 그 큰 환란의 때에 그 큰 고난의 때에 주님이 방패가 되어주심으로 가장 아프고 쓰리던 가슴 아픈 때에 자신의 영혼에 봄날을 주셨던 것을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B. 영광
다윗은 두 번째로 하나님을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광이시오’ 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영광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무겁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영광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어떤 것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효과에요. 그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그가 소유한 물질이나 권력, 그 자체가 영광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를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효과, 그것이 바로 영광인 것입니다. 시인은 압살롬이 일으킨 이 반란을 통해서 가장 치욕스러운 인생의 수치를 경험했습니다. 백성들이 저주하고 욕하며 흙까지 끼얹으면서 퍼붓는 그 저주를 온 몸으로 받으며 도망을 가는 망명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큰 시련이 끝나고 나서 하나님이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며 그의 왕위를 넘보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을 압살롬의 비참한 죽음을 통해 보여주셨을 때에 그리고 그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결국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에 다윗은 자신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이 시련과 고난이 없었더라면 세상의 영광만 있었을 텐데 이 뼈저린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세상의 영광은 잠시 위협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사람이 됨으로써 다시 한 번 주님을 굳게 붙들고 자신에게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께 큰 기쁨과 영광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시련과 환란을 당했을 때에 방패처럼 막아주시고 가장 악인들의 비난과 배신이 창궐하던 때에 하나님과 은혜의 밀회를 나누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광은 단번에 회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그리고 반란이 토벌되는 시간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과정도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한분을 앙망하는 그런 시간으로 삼으시고 마지막에 결국은 다윗이 그 하나님의 큰 영광과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다윗을 회복시켜주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인정받게 하는 영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고 이러한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그는 시련이 아니었더라면 되찾을 수 없는 영혼의 순결한 상태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환란을 당하는 때가 있는가하면 우리는 영혼의 호황을 누리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싶어 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최고의 완전한 상태 속에서 주님께 꽃처럼 피어나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매일 그렇게 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불순종과 악으로 우리의 영혼이 현저한 위험에 처할 때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고 멸시를 당하게 하심으로 이 세상이 내 집이 아니요, 나의 기업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하심으로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가장 자랑하고 든든히 믿었던 것을 상실하게 하심으로 이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믿음을 회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먼저 고치시고 그리하여 우리의 영광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이렇게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마지막 세 번째로 노래하기를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십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왕이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혹은 자신의 과오 때문에 용서를 비는 사람들을 복권시켜주는 풍습과 관계있습니다. ‘그대는 머리를 들라.’ 이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네가 잘못하였으나 나는 벌하는 대신 너와의 관계를 계속하겠노라,’ 아니면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바로의 가까이에서 떡을 맡은 관원장과 그리고 술을 맡든 관원이 함께 왕을 섬기다가 요셉이 있는 감옥 속에 투옥된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복권시킬 때 그것이 바로 왕이 머리를 들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쓰라린 환란을 당해야했습니까? 다윗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천추에도 잊을 수 없도록 사랑하는 자식에게 반역을 당하여 그가 칼을 겨누고 자기를 죽이고자하는 쓰라린 시험을 당하여야했나요? 반란군이 모두 토벌되고 평화가 왔다는 소식은 압살롬이 전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왔습니다. 이 끔찍한 시련과 환란을 당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다윗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은 이때까지 그렇게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의식을 떨쳐버리고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큰 환란을 통해서 한나라의 제왕인 다윗, 무엇도 부러워할 것이 없는 이 위대한 임금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며 뼛속까지 죄로 물들었으며 어머니의 태속에서도 죄 중에 태어난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 환란과 시련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이 환란과 모든 시련, 왕국의 위기는 나의 죄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C. 머리를 들게 하심
그러나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이 모든 시련을 다윗을 순결하게 만드는데 사용하신 후 ‘네 머리를 들라’ 고 복권을 시켜주는 왕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머리를 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은밀한 죄와 그리고 씻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혼란 속에서 방해 받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리고 주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다시 받아주시는 것이 자기의 의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의 의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주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의로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발견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가장 극심한 고난을 통해 ‘내 머리를 드시는 여호와’ 라고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수많은 대적들, 은총이 끊어진 것 같은 그러한 환경의 깊음 속에서 영혼이 회복되어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막아주시는 방패와 같은 은혜 속에서 미래를 나누게 하시고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자기의 머리를 들어 다시 복권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이 대조적인 영혼의 회복시키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가 당한 많은 고난이 영혼의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시인은 이에 대한 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라고 말이죠. 그 큰 고난의 때에 오히려 영혼의 회복, 영혼의 봄날이 찾아온 것은 그의 부르짖는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큰 고통 속에서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에 그는 거룩한 산을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방의 땅으로 도망간 뒤에도 눈물로 음식을 삼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유사한 경험을 가졌던 42편 시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묻습니다. 종일토록 눈물로 나의 음식을 삼았나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타일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두려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 큰 시련을 당하고 망명의 길에 올라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 재위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였을 때 거기에는 위대한 왕의 모습은 없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군인의 용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 때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워주셔서 수많은 백성들에게 어버이처럼 공경을 받던 권위 있는 제왕의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재위에서 옷을 찢고 흐느껴 우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하나님의 어린양 한 마리였을 뿐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찬양)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제왕도 아니었고, 용감한 군인도 아니었고, 한 나라를 통치하고 뒤흔드는 주권자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많은 계시의 말씀을 받아 율법을 통달한 선지자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찢기고 원수들에게 상처를 받은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서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파고드는 한 마리의 상처 입은 어린양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오늘 성경은 ‘부르짖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말로 ‘가라’라는 단어인데 소리 내어서 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육신의 힘을 보이기 위해서 거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억누를 수 없는 탄식을 동반하고 하나님 한분에게 고정된 영혼에서 솟구치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시킴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IV. 다시 배운 기도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를 배웠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이 합하였다’고 할 때 그의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그 마음은 계시인 말씀의 마음이었고 기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아버지 집에서 짐승의 똥이나 치고 풀이나 먹이는 그러한 비천한 인간이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든 사람위에 뛰어나게 높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이 푼 자객들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을 다닐 때 그는 시편 여러 곳에서 악인들에게 쫒기면 우리 하나님께 피하는 자신의 쓰라린 마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 기도는 얼마나 향기로운 제사였습니까? 어디든지 나타나는 마음의 깨뜨려짐, 어느 곳에서든지 준비운동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 폭포수와 같은 기도, 주님을 향한 억제할 수 없는 사랑과 악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 이런 것들이 그의 풍부한 기도 속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 아름다운 기도소리는 다윗의 마음에서 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찬양하던 온 마음은 죄로 물들게 되었고 영혼의 어두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고 구원의 기쁨을 거두시고 성령을 가져가실 것 같은 깊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의 말년에 다시 한 번 처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닌 헛된 것들에 뿌리박혔던 욕망들을 끊어버리게 하시고 그의 영혼을 순결하게 세척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영혼은 물이나 비누로 씻기는 것이 아니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도망친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씻기는 것이 아니네요. 왜 사람들이 시험만 들면 교회를 떠나요? 교회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바보들입니다. 기왕 떠나려면 충만할 때 사명을 받아서 가야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내가 시험에 있고 곤고하니까 여기를 떠나면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다.’ 무슨 변화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어요. 은혜 안에 순종하면서 살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차이일 뿐이지 무엇이 있겠어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마음을 드리면 언제나 우리에게 얘기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삐딱선을 타면 입을 꽉 다물고 계신 하나님을 만날 뿐이지 어디에 하나님을 피할 수가 있느냐고요. 그런데 바보같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쓰러졌든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어요. 그렇게 값 주고 한사람, 한사람을 당신의 영혼으로 사셨어요. 그러면 우리가 시험에 들었을 때에 회복이 더디다 나는 너무 큰 잘못을 했기 때문에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그 큰 환란, 시련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기도를 배우게 하십니다. 다시 기도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러갔던 그 곳을 기도 속에서 알게 하시고 다시 성령에 이끌려 거기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우리의 모습을 기도 속에서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게 하심으로 누가 뭐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어도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겨울을 물러가게 하시고 봄날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나는 교회마당에만 들어오면 생명의 힘을 느껴요. 아침에 나뭇잎파리를 보고 집회를 갔다가 저녁때에 왔는데 틀려요. 그 다음날은 또 틀려요. 한 삼일을 밖에 나갔다가 오면 완전히 달라져요. 영국을 갔다 와서 깜짝 놀랐어요. ‘야, 이거 완전히 변했구나!’ 그게 뭐에요? 생명입니다. 생명……. 죽은 것은 삼일이 아니라 삼년이 지나도 그대로인데 산 것은 삼일만 살아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요. 영혼이 죽은 것 같은 깊은 심연에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아니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나요. 그런데 그 죽음과 방불한 계곡에서 벗어나는 것은 한순간으로도 가능해져요. 확 변화가 일어나요. 이렇게 고난 속에서 다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기도 해야 돼요. 다시…….
그러니까 마음에 뜻을 세우고 힘들지 않으면 그게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 아니지……. 누구든지 새벽에 힘들고 저녁에 퇴근하면 가서 목욕하고 파자마바람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싶지 그 어두운 예배당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가 쏟아지는 것도 아닌데 그 기도를 기름을 짜듯이 짜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봄날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행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을 바래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나가고 싶다. 내 영혼은 하나님을 그리워해. 내 영혼에도 봄날이 와 야해.’ 나가면서 나무를 한 번씩 만져 봐요. 불과 한 3, 4주 전에 마른 막대기와 같았고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봄날을 주시니까 확 피어나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새들이 날아와요. 그렇게 아름다워요. 그래서 교회를 떠나면서도 마음속으로 항상 마음을 다스리는 거예요. ‘아! 맞아, 맞아, 틀림없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아멘, 아멘, 아멘. 내 영혼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 하나님이야. 하나님! 사람들은 나를 버려도, 세상은 나를 버려도…….’
(찬양) 예수 내 친구 나를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맞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을 거야. 주님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봄날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3.영혼의 봄날이 갈 때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아 5:2).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신부의 노래입니다. 1절에 신랑의 감격적인 노래가 있고 교창으로 이어받아 이제 신부의 노래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신부의 고백 속에는 교회의 영적인 침체와 그리고 불멸하는 감각들에 대한 아주 주옥같은 교훈들이 흘러나옵니다. 높은 산 아래 깊은 계곡이 있고 깊은 계곡이 있으면 반드시 높은 산이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본 깊이는 침체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만이 주님을 향하여 깊은 침체에 빠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II. 영혼의 침체와 감각
오늘 성경에 보니까 여기에 그러한 영혼의 침체와 감각에 대한 교훈을 주는 내용이 2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여기의 이 무대는 신랑과 신부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랑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신부는 홀로 문을 걸고 잠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신부가 신랑을 뜨겁게 사랑하지만 이렇게 떨어져있는 때가 있고 그리고 떨어져있는 그 속에서 이제 이 신부가 잠들었으나 신랑을 잊지 못하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들을 봅니다.
A. 영적 침체 : 영혼의 잠
제일 먼저 우리들이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이 이 신부가 잠들어있는 장면입니다. 이 영적인 침체는 성경에서 여러 번 ‘영혼의 잠’으로 비유가 됩니다. 신부가 이렇게 신랑이 멀리 떠나 있는데도 잠들어있는 것은 이것은 교회가 공동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을 받은 교회들이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이것이 개별적인 성도들에게 적용이 되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때는 예수와 만나 뜨거운 감격을 누리던 사람들이 얼마만큼 지나고 나서 이렇게 영혼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다가 살아나도록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나도록 생명을 부여받은 그 사람, 그렇게 생명을 부여받은 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 생명이 완전히 빼앗기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빼앗기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죽음이겠지요.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단번에 죽은 영혼의 상태에서 살려낸 사람이고 그 살아난 영혼의 생명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도록 신자의 영혼 안에 감추어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그 생명이 신자의 마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똑같은 정도로 생명력 있게 살아서 역사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죽음을 제외한 생명의 현상가운데 죽음과 가장 닮은 형태를 말하라면 그것이 바로 잠입니다. 잠잘 때는 숨을 쉬고 생명과 호흡이 끊어지지 아니하지만 의식도 없고, 반성할 수도 없고, 오관의 모든 것들이 함께 잠듭니다.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고, 만져지고 하는 이 다섯 개의 감각기관이 문을 닫고 쉬는 것이 이게 바로 잠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는 그것들이 날라다주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머리도 휴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잠은 죽음과 가장 방불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영혼의 생명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감각이 사라진 상태를 잠, 혹은 수면상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잠든 상태,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워올수록 우리에게 잠들지 말고 깨어있도록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신부가 신랑과 떨어져있는데도 홀로 잠을 청하고 방에 옷을 벗고 발을 씻고 누웠습니다. 신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잠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잠이 어떻게 달콤하고 편안한 잠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의 품에 안겨서 그래서 그 팔로 베게하고 그 품에서 잠듦으로써 육체로는 수면 속에서 안식을 취하고 영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음으로 휴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 사랑하는 부부의 진정한 휴식의 형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의 많은 타락은 하나님 밖에서 쉼을 찾아보려고 할 때 거기에서 모든 부패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에 에워싸여서 피 흘리면서 분투해야하는 상황에서는 믿음을 훌륭하게 지키던 사람들이 모든 것이 평화롭고 쉼이 있는 상태에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거나 넘어지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에게서도 그러한 상황을 보았겠지요? 나이가 어렸을 때이지만 그 가정의 역사를 알고 있었을 이 솔로몬은 바로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전설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던 다윗이 모든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을 그 때에 깊은 타락의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런 타락은 어느 한 순간에 왔지만 영혼의 침체는 땅거미가 지듯이 오래전부터 어둑어둑하게 그의 영혼을 덮고 있었던 것입니다.
B. 불멸의 감각
그러나 오늘 성경을 자세 보면 이 신부는 신랑이 없는 가운데 완전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그랬습니다. 이게 바로 불멸의 감각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심하고 나면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의 감각이 강력하게 생겨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죄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감각은 용서에 대한 감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감각이 확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의 없던 것에서 용서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런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각은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한다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죠. 우리 사람도 보면 자기에게 끊임없이 섭섭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결심을 하는 것이 ‘사랑해야 될 사람이야! 사랑해야지! 사랑해야 돼!’ 이렇게 마음을 먹는 것이 그를 사랑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어떤 때는 사랑하려고 결심을 안했는데도 미끄러지듯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아름다운에 대한 감각이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것이 착각을 일으킨 아름다움이라면 잘못된 사랑으로 가는 것이고 그 아름다움이 올바르게 발견된 아름다움이라면 올바른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런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꽃을 보아도 꽃이 완전 속으로 가득차서 활짝 피었을 때에 이 꽃은 꽃다운 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꽃이 있음으로 가득한, 선함으로 가득 찬 상태에요. 꽃을 꽃답게 만드는 것으로 가득 차있을 때 그 때 그것이 바깥으로 표출되는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선함의 빛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아름다움은 내면의 세계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인식이 되는데 그렇게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선함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날마다 점점 더 사랑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꿈이고 바람이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날마다 더 가까이 사랑하게 되려면 ‘나는 날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거야’ 라는 개인적인 결심만을 가지고는 그것이 되지를 않아요. 오히려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런 결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엑기스가 성경입니다. 성경……. 성경이 그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별들이 가득 모여 있는 그러한 아주 빛나는 성단이라면 이 모든 자연의 세계는 띄엄띄엄 별들이 빛나는 흩어진 별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를 만날 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성경을 읽을 때도 은혜를 받지만 이렇게 설교를 들을 때 성경말씀을 누군가가 잘 풀어줄 때에 은혜를 받잖아요? 그러니까 엠마오로 올라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성경을 풀어주시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이 설교와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이 성경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드러내는 역할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렇게 아름다우신분이었구나!’ 그럴 때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라는 말이죠.
이런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감각이 아주 예민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에는 눈물이 많아요. 은혜가 떨어지면 울려고 해도 안 나와요. 목사 안수 받을 때의 일이었는데 이제 한 20명이 안수를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강대로 다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면 선배목사님들이 쭉 서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는데 옆의 목사님이(강대 뒤에서 뭐라고 꿍얼거려도 저 밖에까지는 안 들리잖아요.) 이제 기도를 해주는데 어떤 강도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안수를 받는데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너무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등을 퍽퍽 때리면서 ‘아 이 사람아 울어라 울어 오늘이 무슨 날이냐?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고 이 고난의 길을 들어섰는데 넌 눈물도 안 나오니?’ 그러면서 등을 안수해주는 것이 아니라 패는 것입니다. 그래도 눈물이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죠. 그래서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조금만 봐도 이 속에서 기쁨이 확 솟아오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조금만 추한 것을 봐도 마음이 너무 상하고 아픈 것을 교회에서 조금만 발견해도 마음의 근심이 확 쌓이는 아주 다이내믹한 정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신앙과 정서에서 논한 것들이 바로 그런 내용들입니다. 강력하게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이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무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을 정말 더 사랑하고 싶은데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뭐냐 하면 잘 들으세요. 정말 중요해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주님께 은혜를 받은 것 같지만 일단 사랑의 불이 우리 속에 붙고 나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기가 너무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치 큰 횃불이 있고 거기에 가스가 연결되어서 막 불꽃이 오르잖아요. 그런데 저기서 스위치를 딱 끄면 불꽃도 없고 아름다운 불길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아무리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자동으로 태우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거기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이 공급됨으로써 우리의 우리 안에 있는 이 사랑의 불길들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영혼의 감각, 이러한 영적인 감각은 풍부해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하고 다시 말하면 예민해지기도 하고 둔감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이 뒤에 보면 이 신부가 말하기를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다오.’ 그렇게 나오지요. 그거에요. 그러나 이 신부역시 신랑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나타나지마는 항상 똑같은 정도로 이 신랑에 대한 사랑의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죠. 이렇게 병이 날 정도가 되는 사람이 왜 신랑을 찾지 않고 신랑 없이 혼자 잠들게 되었을까요? 이 마음속에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감각,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각, 이런 것들은 이렇게 예민해지기도 하고 둔감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은 이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 중생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집에서 야단을 맞고 가출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출은 지금처럼 이렇게 며칠씩, 몇 달씩 꼴도 없이 어디로 도망가서 부모가 경찰서까지 찾아가게 만드는 그런 가출이 아니라 아침에 도망쳤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정도의 귀여운 가출이죠. 그래서 이제 ‘내가 우리 집에 들어가나 봐라. 만날 나만 구박하고…….’ 막이래요. 그런데 저녁때가 다가오죠.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이상하게 그때는 되게 처량한 노래들을 잘 불렀어요. 그런데 그런 노래를 한번 불러주면 갑자기 눈물이 쫙 흘러요. 다시 엄마생각, 따뜻한 집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밤중에 슬금슬금 기어들어가지요. 그리고 실컷 혼나고 다시 또 가정에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지 자연적인 인간이 자신의 가정과 부모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할 수 없듯이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영광의 이러한 감각들은 사라지고 잊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깊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감각이 신부에게 여전히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잠이 들었지만 그러나 마음은 깨었는데 우리가 영혼의 침체에 빠져서 주님을 멀리 떠나있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침체 속에서 이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가 겉보기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잠들었지만 그러한 깊은 침체에 빠진 때일수록 사실 우리의 영혼은 더 많이 외치는 것입니다. ‘나로 우리 주님을 만나게 해다오. 내가 우리 하나님을 뵙고 싶다. 내가 그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러한 허기진 갈망이 이 속에서 강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우리의 영혼의 봄날이 다 지나가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영혼의 목마름과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르몬 바빙크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다. 한편은 하나님을 치열하게 찾으면서, 그렇게 목말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역설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가 아닌 하나님 밖에서 우리가 행복해보고자 할 때 우리의 영혼에는 진정한 안식과 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육신의 오관을 통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행복을 주어도 우리의 영혼 안에 중생한 신자의 영혼 안에는 그것으로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만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그러한 무엇이 신자의 마음 안에는 남아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가만히 보면 우리들이 신앙이 없는 이성을 가지고 생각해보더라도 행복은 상당히 주관적인 요소가 많은 것입니다. 낮에도 신문을 보니까 200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는데 지하주차장에서 비참하게 칼에 찔려 살해를 당했어요. 그런데 순식간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타나서 찔러죽이고 갔는데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어요. 그러니까 아주 숙련된 킬러들에 의해서 청부살인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200억의 재산을 모으는 형성의 과정에서 혹은 그것을 유지해가는 과정에서 누가 잘못했는지를 떠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을 사고 원한을 샀을까? 과연 그 사람의 삶이 그 동안도 행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의 참된 행복이 우리의 외적인 조건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에 들어서서 우리가 행복했던 때는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받거나 내 사업이 잘되거나 큰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에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했던 때에는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있어서 흔들리지 아니할 그 때에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III.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감
그래서 우리가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모든 것이 그 사랑을 알게 하는 도구에요. 돈이 없다가 돈이 만원만 생겨도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또 가난하고 배고파도 그것을 통해서 고난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이렇게 행복은 외적인 여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신부와 신랑이 지녀야할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은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이루어질 연합이고 또 신약의 성도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맺어질 그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A. 두 가지 연합
여기에서 우리들이 두 가지 연합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본질상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 교회의 일부를 구성해요. 누구든지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일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날 때 그 때에 그는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맺어진 연합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원리적인 연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어떤 식으로도 깨뜨려지지 않고 그리고 영원히 계속됩니다. 더 넓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중생하기 전에도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봐야하거든요. 그러나 신자의 삶에 있어서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연합은 이런 원리적인 연합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입니다. 이 실제적인 연합은 원리적인 연합과는 달리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은 견고해서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정사나 권세나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다고 할 때에 이것은 바로 이런 의미의 원리적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연합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심령 속에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의식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살아있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부부가 있었는데 그 남자 집사님은 무뚝뚝하고 여자 집사님은 아사아사 하는 형입니다. 만날 기회만 있으면 남편한테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누구 집 좀 보라고 하면서……. ‘남편이 뭐 시계를 사주었대, 옷을 사주었대, 아니면 어디로 여행을 갔대, 그런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거야? 안 사랑하는 거야?’ 기회만 있으면 특히 누가 옆에 있을 때 잘 그래요. 그런데 항상 이 양반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는 니 안버린다카이.’ 그게 답입니다. 참 썰렁하지요. 안 버리기만 하면 충분합니까? 하긴 뭐 발로차고 나가라고 골프채로, 야구방망이로 패는 사람도 있다는데 거기보다는 낫겠지. 그러나 충분하지 않잖아요. 안 버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치 헤어지고 싶은데 죽지 못해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그게 어떻게 신랑과 신부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무엇에 마음이 상했는지 골난 것처럼 예배당에 왔다가 예배시간 내내……. 예배당에 올 때는 골난 것처럼 오고 그리고 앉아있을 때에는 화난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마지막에 갈 때는 성질난 사람처럼 간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깨뜨려진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두 가지 연합 중에서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갈 때 ‘주님의 마음이 내 안에, 내 마음이 주님 안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내 모든 마음을 아시는 주님, 주께서 아십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B. 문밖에 계신 그리스도
이 신부도 그렇게 신랑과 함께 동거하며 그 완전한 연합 속에서 살아야했던 관계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신랑이 문 밖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신부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신랑의 태도와 신부의 태도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부는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신랑은 밖에서 깨어있는 상태에서 신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는 호칭이 너무 너무 사랑으로 꽉 찬 음성으로 그 마음으로 신부를 부르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자야…….’ 여기에서 완전한자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쁜 자야’ 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마음이든지 외모든지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아주 아름다운상태 그것입니다. 그래서 부르는 것입니다. ‘나의누이, 나의사랑, 나의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신랑 속에는 이 신부를 향한 그리움이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는 그렇게 그리움으로 꽉 찬 신랑을 밖에 두고 그는 잠이 들었어요. 그러나 마음까지 아주 잠들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신랑이 고백하기를 ‘문을 열어다오.’ 문을 안에서 잠가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오랜 시간동안 거기 같은 자리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면 신부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끊임없이 서서 두드리는 그 신랑의 간절한 사랑의 마음과 그를 문밖에 세워두고 자신은 잠 속에 빠져있는 이 신부의 모습이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마지막에 가니까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나오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나와요. 그런데 그 성경구절을 우리들이 전도용 성경구절로 많이 쓰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신 예수님은 문 밖에서 두드리면서 우리를, 교회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충격적이죠. 그러면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교회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 문을 잠가 놓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회의하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교사도 파송하고 다 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문밖에 계신 것처럼 이 신부는 깊이 잠들고 신랑은 온 머리에 이슬이 가득 젖도록 그 자리에서 신부의 잠자는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혼인한 사이이면서도 주님이 우리의 마음의 문 밖에서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고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신자는 공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내적인 충만한 기쁨, 그 영광과 사랑의 행복, 이런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찬양)문밖에 세워두니 한없는 내 죄라
아니 그러면 아니 이 신랑도 이상하지 한 나라의 임금인데 이까짓 거 발길로 차서 부수고 들어가던지 아니면 부하들을 시켜서 도끼로 빠개고 들어가면 되지 그것을 빙충맞게 두드리고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머리에는 이슬이 흠뻑 젖을 정도로 두드리는데……. 이게 밤이슬이라는 게요. 막 돌아다니면 덜 맺혀요.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때에 이슬이 많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두드리는 것입니다.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자기 말로는 마음은 깨었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자기 얘기이고 어쨌든 퍼질러 자는 이 신부를 깨우려고 밤새도록 두드려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다루시는, 교회를 다루시는 인격적인 특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면 문 밖에서 예수님이 두드리시는 그림 있잖아요? 그것을 보면 밖에는 문고리가 없어요. 그것은 안에서 잠그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안 오셔서 주님을 못 만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 속에 있는 각양 욕망과 탐심, 죄악과 편견 이런 것들로 문고리를 잠그고 열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가올 때는 항상 부수는 것과 같이 도끼로 내리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항상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진리를 가지고 우리를 설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고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 그 마음을 걸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그것을 끌러서
(찬양)곧 오셔서 좌정하서 떠나지 마소서
C. 변함없는 사랑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발견하게 되요. 여러분들은 이번에 고난주간 사경회를 하면서 화목의 교리를 배웠지요. 이 화목은 우리가 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렸기 때문에 이루어진 화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유화시키시고 희생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는 미워하셨지만 우리는 오래전부터 찾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셨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가 회심할 때 깨닫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 화목은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의 선택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처음에는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시고 우리를 죽여 버릴 것처럼 하시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풀어지시다가 몇 년이 지나가니까 그저 조금 봐주시고 더 지나가서 착한 일을 많이 하니까 그래도 쓸 만하구나 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죄에 대해서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경험되지만 하나님께서 나는 그 모든 죄에서 구속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돌아오기를 기뻐하시고 기다리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게 영원 전에 이루어진 그 화목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경험되는 것이거든요.
IV. 결론 : 그리스도와 동행함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가면 때로는 주님의 진노가 그리고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우리 같은 인간은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상대도 안 해주시는 분이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만 이것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하나님과의 단절의 결과에요.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죠. 마치 탕자가 집을 멀리 떠났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고백을 하려고 자기의 집에 돌아왔을 때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 아버지는 아들이 그 사랑을 알기 오래전부터 언제나 거기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또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침체 속에 있고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감각이 심하게 무디어졌을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감각에는 변화가 없어요. 그래서 변함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이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봄날과 같은 호황 속에서 살아있을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까지는 느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셔서 그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그리고 열어주지도 않는 그 문을 오래전부터 그렇게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우리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주님을 향하여 문을 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영혼의 어느 시점에 와있습니까? 끊임없이 신랑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데도 여전히 잠들어있는 신부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게 잠들어있는 그 모습은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 아니죠. 침은 줄줄 흐르고 눈은 게슴츠레하고 잠꼬대도하고 가끔 이도 갈고 추한 모습이죠.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이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모두 생명 충만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삶으로 그 충만한 생명을 흘려보내어서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4.고통 가운데 배운 사랑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시 31:19-21).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니 하여튼 많은 고난이 그의 생애에 넘칠 때 일어난 일들을 회고하며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춥고 배고픈 경험도 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고난을 받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 다양한 경험 속에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사람을 통해서 오는 고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반드시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 자기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의 복수, 이런 것들이 항상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환경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내적으로는 이런 마음의 상처로 고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치열한 고난의 길을 가야 했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이 깊은 고통을 동반한 시련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 가운데 한 토막을 다윗이 소개하면서 그 당시 느꼈던 자신의 마음을 술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고난은 자신에게 필요 없고 괴로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고난과 괴로움은 다윗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II. 고난 속의 외로움
다윗이 이렇게 큰 시련을 당할 때마다 환경의 깊음과 함께 내적인 깊은 속에서 많이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은 바로 심적인 외로움이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외톨이가 되어버린 그 고독감이야말로 이 다윗이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은 고난 속에서 겪었던 가장 끔찍하고 기억하기 싫은 형벌과 같은 고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런 고통 속에서 외로움을 겪게 하심으로서 이런 고통이 없을 때는 간과하였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게 만드시고 또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눈뜨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는 아무 것도 세상적인 것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왕이 된 후에 그가 왕이 되기 전보다 행복하였는가 하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결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깊이 교제하며 평범한 목자로 지내던 그때에 그가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만약에 그가 이름 없이 짐승이나 치는 인생의 시간에 아버지도 별로 기억해주지 않는 이름 없는 한 아들로 살았더라면 왕이 되어서 맞닥뜨려야 했던 수많은 대적들은 그의 원수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 다윗을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이 사람에게 큰 고난을 주셔서 불로 연단하시는 것처럼 그의 마음을 단련하셨으니 외로움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III. 회복의 기회로 삼으심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에서 빼버리고 싶은 고난이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련과 모든 고통을 다윗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회복의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을 큰 고난 속에서 침체될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이 세상에 풍족한 것 때문에 멀어질 수 있는 다윗의 영혼을 쇄신시키기 위하여 이 고난 속에 있는 외로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영혼을 쇄신시키시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다윗이든 우리든 누구든지 죄성이 남아있는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 의존하지 않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마음이 당신으로부터 멀어져 독립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손해가 있는 것이 아닐 텐데 하나님이 우리처럼 외로움이 있으셔서 우리가 함께 해주시면 하나님이 위로를 받으시는 것도 아닐 것인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때로는 이런 깊은 고난 속에서도 당신 앞에 돌아오게 하셔서 결국은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영혼이 가장 맑고 순수해질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맑고 순수해질 때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순전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떠나가면 부족해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 곁에 두시려는 것입니다.
이 시인도 한 나라의 임금이었지만 우리와 꼭 같이 죄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때로는 명예욕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때로는 육신의 정욕이 불붙는 것 같아서 범죄하기도 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 묻은 그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고통 가운데 당신의 사랑의 성품을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주를 두려워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즉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는 도망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고난을 당하고 환경적으로 심적으로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피할 수밖에 없는 이 한계를 가진 이 시인을 하나님께 도망칠 때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필요치 않은 고난을 당하고 원하지 않은 환난을 만나 자기가 비참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 시인을 그 큰 고난 속에서 당신의 품으로 도망치게 하심으로서 고난과 시련이 없었더라면 결코 겪지 않았을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고통 속에 배우게 하심으로 주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중에서 특별히 18절에서부터 20절까지는 문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병행법의 기교를 사용해서 두 번 반복하고 있지만 이 두 가지가 한 가지 사실의 반복을 강조하는 것이 되도록 그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주께서 저희를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다시 말해서 은밀한 곳에 숨기시는 것과 비밀히 장막에 감추시는 것이 한 짝을 이루고,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는 것이 한 짝을 이루어 병행법의 기교로 자기가 이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보호와 은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A. 숨기심
제일 먼저 그는 이 환란과 고난의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셨다고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대적들은 시인의 생명을 노리기 위해서 혈안이 되고 이 시인을 찾기 위해서 온 뜻을 다해서 이 시인을 죽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자객을 풀고 전국을 수배하고 그를 추격하던 일을 기억해보십시오. 그의 행적은 손안에 드러나 있고 그리고 대적들은 그를 어디서든지 살필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도망치는 다윗에게는 우군이 없었고 그리고 자기는 오직 두 눈으로 피할 곳을 찾아 도망을 다니지만 그를 감시하고 그를 죽음에 넘겨주고자 하는 악한 대적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편을 이루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으로 이 시인의 가는 길을 감찰하고 있었으니 누가 그 사람의 감시의 눈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장막에 숨겨주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1. 하나님의 장막에
이 하나님의 장막은 그 당시로 말하자면 교회의 성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은어로서 하나님이 당신과의 교제 속에서 그를 다른 사람의 추격하는 눈길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이 그를 숨기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깊은 은혜의 교제를 나누고 비록 동기는 환란과 시련 때문이지만 주님의 품으로 도망쳐 주님의 품안에서 할딱거리던 그때에 하나님은 이 시인을 당신의 품에 감추심으로 모든 대적들이 찾아도 다윗을 만날 수 없도록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은 좀 더 밝히 말하기를 주님이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기셨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 비밀히
이 은밀한 곳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겉으로 보아서는 찾을 수 없는 그런 장소입니다. 다윗은 또 같은 시편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신 은밀한 곳을 ‘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원수로부터 살짝 보이지 않도록 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설령 원수들이 그를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그를 칠 수 없는 높은 요새와 같은 산성에 이 다윗을 보호하고 계셨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무도 환란과 시련이 내 인생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또 백번 양보해서 그런 시련과 고난이 필요하다고 고백을 할지라도 지금이 바로 그런 시련을 내가 당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본래 행복한 상태를 바라는 존재이니 행복을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것이 인간의 처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는 고난과 큰 슬픔 속에 직면하게 하시고 환란의 비바람을 맞게 하심으로서 우리들이 그렇게 자주 마음을 주고 사랑하는 이 세상을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일 수 없고 우리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가치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알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 너머에 계신 보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앙망하고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선하고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고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좋은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본뜬 것이 아니면 어디에서 본을 떠 아름답게 되었겠습니까. 달콤하고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행복을 흉내 낸 것이니 그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뿐이요, 그 너머에 있는 그 진정한 그 모든 아름답고 선하고 달콤한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눈은 밝아질 때도 있고 흐려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은 한동안 좋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좋고 나쁜 사람은 언제나 시력이 나쁘지만 우리의 영혼의 눈은 오늘 밝아졌다가 내일 흐려지기도 하고 오늘은 흐리고 어둡지만 내일은 눈부신 찬란한 빛으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눈의 질병이 생긴다면 건강한 눈에는 그렇게 눈부시고 아름다운 햇살이 괴롭기 짝이 없는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의 눈이 병들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괴롭게 느껴지고 주님의 선하심은 우리에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혀 위에 올라가있는 신 김치처럼 그렇게 지독하게 쓰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떠나게 하시고 버림을 받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할 것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 시인은 바로 고통 속에서 그런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이 배신할 때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누는 언약백성으로서의 교제, 사랑하는 가족으로서의 연합과 교제, 천국을 본뜬 것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자기는 사랑했지만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고 돌이켜 서는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사랑의 교제도 결국은 완전히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시인은 마지막 남은 이 세상의 미련까지도 떨쳐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만이 자신의 참된 행복이요 그리고 주님만이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도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 라고 노래하며 주님의 품으로 도망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도망친 시인을 하나님께서는 그 품에 안으시고 산성과 같은 안전한 곳에 그를 보호하여 지키셔서 누구도 그를 헤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붙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걸어온 신앙의 길을 돌아보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한번 우리를 구원해놓으시고 내버려두셨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유혹 속에서도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쓰라리고 아픈 많은 일들을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겪게 하셨지만 그 일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진정한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세상을 사랑하던 그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우리의 영혼의 회복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악한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두려움에 떨고 환란과 시련에 모두 몸이 드러나 집중사격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님께로 피하십시오. 주님은 시련과 환란, 이 세상의 실망 속에서 당신 자신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들의 산성이 되시며 바위가 되시며 당신을 향하여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품이 되십니다.
B. 벗어나게 하심
하나님이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이 시인에게 행하시는 또 하나의 일은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저주하고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고자 하는 대적들이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기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악한 일들을 의논함으로서 우리를 그 악에 빠트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꾀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1. 사람의 꾀에서
우리는 도저히 우리를 헤치고자 하는 악한 사람들의 꾀를 능가할 지혜가 없지만 우리가 주님께 믿음으로 피하면 하나님은 우리 대신 대책을 세우셔서 사람의 꾀가 아닌 당신의 지혜로 사람의 꾀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일들을 하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직접 주셔서 시인을 넘어트리고 빠트린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이 그 꾀를 내고 그 꾀로 시인의 목숨을 노리기 위해서 베푼 것 때문에 당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악한 꾀로 우리들을 유혹하거나 혹은 우리를 믿음의 한길로 달음질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우리를 시험 속에 넘어트리려고 합니다. 그들 뒤에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사단이 있으나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당신을 의지하는 우리들 뒤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친히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빌 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탄에 빠진 우리가 손을 내밀어 주님의 사랑을 정한 것이 아니라 아직 주님이 계신지도 모르고 인생의 갈림 길에서 벼랑 끝에서 고통하고 가시밭길을 걸으며 괴로워하던 인간에게 주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당신의 손을 내미시고 우리를 그 큰 환란과 시련에서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영구히 자기의 종으로 묶어두기 위해서 자기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에게 때로는 끊임없이 달콤한 유혹으로 덧을 놓고 때로는 협박과 위협, 핍박과 고난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으나 하나님의 지혜는 그 모든 사단의 지혜와 사람들의 꾀를 능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도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탁월한 방법으로 어둠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시련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꾀를 능가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후로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난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사람의 꾀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고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지혜에 호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우리같이 교만한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꺾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2. 구설의 다툼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헤치기 위해서 꾀를 놓을 때 이 모든 일과 함께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구설의 다툼입니다. 있지도 않은 일, 혹은 동기는 그렇지 않았는데 매도하는 일, 참으로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어쩜 그렇게 잔인하게 왜곡하고 곡해하여 수많은 말들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그 말들은 또 말을 타고 끊임없이 전파되고 그리하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인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급기야는 용감하게 저주하는 사람이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많이 주신 것이 있다면 물질보다 더 많이 주신 것이 있다면 다윗의 명예였습니다. 비록 고난은 많이 당했지만 부요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에 부름 받은 자로서 가난하고 병들고 억울하고 빚지고 원한 맺힌 그 시대에 낙오자들을 하나님이 그의 품으로 보내주셨으니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이 목자 되신 우리 예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로 가는 곳마다 혁혁히 이기게 해주시고 승리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넘겨받게 하셨으니 백성들의 칭송과 그 칭찬과 사랑, 존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도 존경했지만 사람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하며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하나님이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를 떨쳐버리게 하시고자 마음을 가지셨으니 그렇게 자기를 존경하던 수많은 백성들이 고개를 흔들며 다윗을 멸시하기 시작했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던 많은 백성들도 부하내동하게 되었고 결국 아들에게 환란을 만나 도망을 치는 이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의 집안을 망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는 것이라고 하나님이 도저히 동의하실 수 없는 악한 논리로 사람들을 꼬이고 그래서 수많은 백성들이 마음을 다윗에게로부터 돌이켜 섰습니다. 이때에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이 다윗의 마음에 미치는 그 큰 고통이 얼마나 많은 것이었겠습니까? 돈을 잃어버리면 적게 잃어버리는 것이고 명예를 잃어버리면 아주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으니 일평생을 백성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받아오던 다윗을 하나님이 발가벗겨 모든 사람들에게 수치를 보이게 하시고 그리하여 결국은 자기의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구설의 다툼에 갇혀서 그래서 아무 것도 변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배운 신앙의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또한 욥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마음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무엇에 의해서도 깎여질 수 없는 다윗의 악하고 모난 본성을 하나님이 다듬으시기 위해서 전대미문의 살을 에이는 아픔을 겪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 의해 반역을 당하게 하시고 자기가 양떼처럼 끌어안고 함께 고생을 하던 사랑하는 자기의 친자녀 같은 백성들에게 모욕을 받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날들이 다윗을 휘감으며 그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렸고 그리고 그는 마치 머리를 모두 풀어헤치고 옷을 찢고 음부로 내려가는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모욕을 가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꿈꾸는 대신에 자신의 인생의 모든 주권을 홀로 가지고 계신 주님 한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품으로 어린아이처럼 피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귀머거리가 되는 대신 주님을 향해서는 마음의 귀를 열고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세상이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서는 벙어리가 된 그 입으로 하나님께는 통곡 하며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돌아보아 달라고 밤낮을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어제까지 자신의 동료요, 자기를 존경하던 백성들이었으나 지금은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고 모욕하는 흙을 던지며 욕을 퍼붓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눈을 감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 눈을 뜨고 누구도 볼 수 없는 절박하고 간절한 시선으로 위에 계신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그분께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이 환란 속에 버리지 말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에 넘칠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자기를 향해 환호하고 그리고 박수치는 사람들로 에워싸여 영광을 받을 때는 전부 볼 수 없었던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고 그렇게 순탄한 환경 속에서는 버릴 수 없었던 것들을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환란의 칼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겨울과 같은 다윗의 인생 속에서 그의 영혼의 봄날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 폭풍과 같은 시련, 살을 에이는 것 같은 환란, 저녁에 눈을 감으며 아침에는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것 같은 큰 고난 속에서 다윗 자신이 예견할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셨으니 이 지혜는 바로 사람의 꾀를 능가하는 지혜였고 사람들의 구설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IV.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심
그것은 바로 평안한 가운데 알지 못한 하나님의 성품을 고통 가운데 배우게 하시니 이것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사람들이 보기에 원수의 눈빛 앞에서는 이 힘없는 시인이 한주먹거리밖에 되지 않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외톨박이였지만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본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보이는 이 다윗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성에 숨기시고 거기에서 인생의 시련과 고난이 가장 넘칠 때 이제껏 만나본 적이 없는 그 기인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다윗에게 보이셔서 아직도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불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잠시 사랑하고 마지막에 욕망에 굴복하여 죄를 짓기까지 한 다윗이었고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할 때 이 끊임없는 과거의 기억들이 그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괴롭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끔찍한 환란 속에서 단순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피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머니처럼 그 품에 안으시고 시련과 고난이 없었더라면 결코 할 수 없었을 그 기이한 사랑을 이 시인에게 가르쳐주신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평생에 주님 한분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그의 인생의 노년에 영혼에 새로운 봄날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V. 결론
그리하여 이 시인은 환란과 큰 시련 속에서 악인의 꾀에서 벗어나고 구설의 다툼에서 벗어나 오히려 잠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 같은 끔찍한 고난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환란과 시련, 고난과 어려움, 결핍과 그리고 넘치는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도망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빚나간 독립정신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시련과 환란의 큰 고통을 인생의 파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이 환란과 인생의 고통의 파도를 태워 그 풍랑을 인하여 더 빨리 가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을 우리의 삶에 선장으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분만을 전심으로 앙망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산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통은 잠시 후에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우리의 피할 바위요, 산성이었다고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5.거룩한 교제와 회복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아 4:16).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바로 앞에 보면 아가서에서 아마도 가장 귀에 익은 구절가운데 하나인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등등…….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라는 노래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16절에 우리가 읽은 노래가 나옵니다. 앞에 나오는 15절까지의 노래는 신랑의 노래이고 16절은 신랑의 그 송가에 답하는 신부의 노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나의 동산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동산의 주인이면 왕인 신랑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해서 이 16절을 신랑의 노래에 모두 포함을 시켜서 5장까지 함께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신부는 동산 자체라고 불리기도 하고 또 8장 13절을 보면 신랑이 이 신부를 향해서 ‘너는 동산에 거하는 자로다.’ 해서 이 동산이 신랑의 것이지만 또한 신부도 그 동산에 거하며 그 동산을 누리는 사람으로 즉 이 동산은 신랑과 신부가 함께 미래를 나누는 장소로 부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16절을 굳이 신랑의 노래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이것을 신랑의 노래로 본다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신부가 될 텐데 그 신부가 동산에 가서 아름다운 실과를 먹는다고 해석을 해야 되는데 뭔가 그렇게 썩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16절은 신부의 노래라고 보는 것입니다.
II. 거룩한 교제의 비밀
그런데 이 신부의 노래 속에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아주 놀라운 비밀들이 이 속에 담겨있습니다. 우선 그 앞의 12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흥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그래서 이 동산은 왕의 비원인데 이 비원이 굳게 잠겨있고 그리고 또 그 동산의 중앙에는 우물이 있는데 그것은 덮여있고 샘이 있는데 그 샘은 봉해져있습니다. 이렇게 삼중으로 엄폐, 혹은 은폐된 가운데 이 샘에서 나오는 물이 두루 흘러 이 동산을 적시니까 이제 그 동산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기화요초들과 그리고 아주 귀한 약재와 향품으로 사용되는 중요한 식물들이 여기에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식물과 아름다운 향품과 약초가 자라게 된 데에는 동산 한가운데서 흘러나오는 그 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물이 두루두루 동산을 적시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과실을, 아름다운 잎사귀와 그리고 소중한 약효를 가진 뿌리들을 맺는 그런 식물들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겨서 주님의 그 사랑이 진리와 함께 우리의 인격을 온전히 적실 때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변화가 우리의 본성과 마음 그리고 그 본성과 마음의 변화는 우리의 삶을 열매로 가져다주어요. 그래서 아주 아름다운 결실들을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주 아름다운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소중하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을 바꿔놓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이제 이 모든 것이 퍽퍽해지면서 그러면서 건조함과 메마름이 시작됩니다. 아름답던 꽃잎은 떨어지고 그리고 싱싱한 생명을 자랑하던 푸른 잎사귀들은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귀한 향기를 발하던 많은 열매와 뿌리들은 서서히 고사되기 시작하지요.
A., 거룩한 교제의 효과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에게 그 거룩한 교제의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그 효과가 바로 거룩한 인격이요, 그리고 신실한 생활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렇게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바꾸어놓고 거기에서 그 사람 자신을 먼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는 비결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속에서 깨닫게 합니다. 이 일이 있기까지 황무지와 같았던 그의 마음과 심령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지도록 깊은 회개와 변화가 일어나고 이윽고 부어지는 하나님의 성화의 은혜는 그를 끊임없이 변화시켜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은 어느 정도 하고나면 그게 그거고 다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한계에 오고 또 신앙생활의 어느 시점쯤 되어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이 건조해질 때 이것은 오래 믿으면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실이 아닌데 우리의 악한 본성 때문에 또 하나는 그 악한 본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의 악한 본성도 끝이 없고 우리의 악한 본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도 끝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 살았다고 하는 날 동안에는 이 악한본성이 거룩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은혜로 변화되어갈 때 그 때에 일어나는 아픔도 있지만 그 아픔과 함께 생겨나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기쁨은 마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신앙의 세계에 신비함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변화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초창기 때에는 말씀의 은혜도 받고 성령의 은혜도 사모하면서 깨뜨려지고 새로 깨닫고 변화되고 그러며 기뻐하고 전도하고 그래서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하지만 얼마만큼 시간이 지나가면 더 이상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감격 신앙의 은혜, 기쁨, 환희, 이런 것들은 초기증상이고 이후에는 그냥 일이나 열심히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뿌리가 잘린 섬김으로 경건을 대신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런 사람들이 목회자요, 교회의 일군들이 될 때에는 이제 교회는 너무 많은 아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 주님과의 거룩한 교제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믿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교만해질 리가 없어요. 대개 교만한 사람들은 오래 믿고 산전수전을 겪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의 세계에는 끝이 없어요. 주님과 거룩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효과는 따라서 끝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날마다 그 거룩한 교제 안에서 살아갈 때에 황무지 같았던 자신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그런 동산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B. 은유의 의미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신부가 갑자기 바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와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려다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 말이 은유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은유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선 여기에 남풍과 북풍이 나오는데 오늘 성경적인 바람 공부를 좀 해보겠습니다.
1. 남풍과 북풍
성경에는 동풍, 서풍, 남풍, 북풍 다 나옵니다. 우선 성경에서 나오는 이 북풍은 북쪽에서 부는 바람인데 찬바람입니다. 그리고 이 바람이 불면 물이 얼고 또 이 바람이 불 때가 되면 넉넉했던 물들이 추위 속에서 가물며 물이 줄어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실은 욥기 37장 9절과 10절 사이에도 나옵니다. 남풍은 이와 반대로 더운 기운을 싣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이 바람은 항상 회리바람으로 나타나고 그래서 이 남풍은 꼭 좋은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광풍으로 묘사되기도 해요. 욥기 37장에 이러한 남풍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 동풍이 있는데 이 동풍이 사실은 네 개의 바람 중 가장 무서운 바람입니다. 그래서 이 동풍은 아주 커다란 파괴를 동반하는 바람이고 또 식물을 말라죽게 하는 그러한 바람입니다. 이러한 바람에 대한 이야기가 욥기 27장이나 이사야 27장에 기록되어 있고 애굽이 7년 흉년을 만날 때에 그것을 예고하는 꿈을 꾸었을 때에 요셉이 보았던 그 재앙의 바람이 바로 이런 바람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서풍에 대한 이야기가 열왕기상 18장이나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데 이 서풍은 비를 동반하며 부는 바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는 이제 이 남풍과 북풍만이 등장해요. 델 리치 같은 구약학자는 여기에서 굳이 동풍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의미심장하게 보면서 이런 해석을 첨가합니다. 이 무서운 파괴를 동반하는 커다란 재앙의 바람, 이것들은 하나님이 직접 막아주신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이런 바람이 불어서 완전히 파괴되고 멸망되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고 노래할 때 이것은 결코 좋은 의미에서 나를 위해서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불어달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풍의 한설을 동반한 찬바람, 남쪽의 회리바람처럼 불어 큰 바람을 일으키는 광풍, 이러한 것들이 분다고 할지라도 나의 동산을 파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신부가 신랑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영혼과 마음의 덕들이 이 세상에 있는 환란이나 유혹, 시련이나 큰 고난을 통해서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2. 동산과 향기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우리말 성경에는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 때문에 향기가 날린다.’ 라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어성경에는 이렇게 사역형으로 나옵니다. ‘바람아 나의 동산으로 하여금 향기를 내뿜게 해다오.’ 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시련과 환란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면 그것 때문에 나는 나의 신랑을 더 많이 사랑하리라’ 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분다면 동산에 있는 많은 각양 향을 가진 식물과 그 많은 꽃들은 그 바람이 불 때에 머금었던 향기를 밖으로 확 토해내게 될 것인데 이것을 통하여 이 동산의 주인인 내 신랑은 이 동산을 더 기뻐할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여러분 꽃이나 혹은 나무 풀 같은 것들이 어떤 것들은 아주 좋은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안 좋은 향기를 가진 것들도 있습니다. 똥풀이라는 풀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가만히 내버려둘 때에는 별로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뻥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특히 더덕에서 향이 많이 나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접근하지 않으면 향이 조금밖에 안 납니다. 사람이 산에 접근하면 그 인기척을 이 더덕이나 이런 것들이 알면서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 더덕을 캐는 사람들한테는 아주 신나는 일이죠. 그 냄새를 맡으면서 그 더덕을 찾아가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식물이 향기를 내는 것을 우리들은 아주 긍정적으로 보잖아요? 마치 여자가 화장을 예쁘게 하고 온몸에 향품을 뿌리면 지나가는 사람 곁에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듯이 아마 꽃이나 풀들도 자기를 뽐내기 위해서 그렇게 향을 내뿜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 향은 벌레나 혹은 자기를 해치는 다른 해충의 접근으로부터 다른 물체의 접근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방어물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허브나무 같은 것을 냄새 맡아보아서 잘 안 나면 괴롭히면 냄새가 잘 나요. 막 흔들어 봐요. 오늘 가다가 실험 해봐요. 막 이렇게 대여섯 번 흔든 다음에 맡으면 향기가 확 나요. 그게 뭐냐 하면 위협을 느끼니까 이 식물들이 향기를 확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꽃이 벌을 유혹하기 위해서 향기를 낸다고 노래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벌이 접근하니까 벌레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괴롭다고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합화 아니에요? 그래서 백합화하면 나오는 게 뭐죠? 가시밭에 백합화에요. 그것도 여러 송이가 아니라 한 송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백합화는 힘이 없어서 이렇게 흔들려요. 가시에 툭툭 찔려요. 그러면서 아프다고 쏟아내는데 그게 순결하게 하얗게 핀 백합의 향기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주 작은 방에 백합꽃을 꽂아놓고 그리고 그 문을 닫고 지내면 사람이 기절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런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영위해나가면서 이 세상에 누가 자신의 인생이 괴로움과 시련으로 가득차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자신의 인생은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바라고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안전하고 그리고 여유가 있고 그리고 편안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것을 편안하게 허락해주시지를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우리의 잘못된 신앙생활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나의 인생에 너무나 많은 무거운 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고난과 핍박과 시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유혹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신부가 신랑을 진심을 사랑하고 그의 동산이 아름다운 나무와 그리고 수많은 약재들과 향기 나는 식물로 가득 차있을 때 그것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샘에서 나오는 그 많은 물들이 동산을 두루 적시며 시내가 되어 흐르고 그리하여 이 동산을 기름진 동산으로 만들었을 때에 이렇게 풍성한 식물들이 자라지 않았습니까? 이때에 오히려 그는 평안한 동산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북풍이 일어나고 남풍이 불어서 동산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게 해달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가운데 있는 성도는 고난이 오면 고난이 오는 대로 아름다운 가락으로 주님의 성품을 배우며 노래하게 되고 또 평안하고 기쁜 일이 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아름다운 연주를 하게 됩니다.
예술가들 중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종류의 사람은 기술만 가진 사람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진리의 심오한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의 세계에서도 깊고 심오한 예술의 뜻을 발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편안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없어요. 예술의 세계에서도 간접적으로 진리의 질서를 깨닫는 것도 그러하니 하물며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풍성하게 알고 고난이 올 때에는 고난 때문에 주님을 노래하고 시련이 올 때에는 시련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던 사람들, 모든 것이 평안하고 행복할 때에는 그 평안함과 행복 속에서 주님을 노래했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 같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깊이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C. 결실이 있는 신앙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이 모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결실이 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믿음에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에 달린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즘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이 지금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이런 어려움과 고난을 당한 적이 있지요? 예전에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예전에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지금처럼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리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면서 끊임없이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더욱 간절히 주님을 찾고 그래서 그 고난과 시련 때문에 하나님의 은밀한 장막에서 주님을 만나고 시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발견할 수 없었을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에 시련과 고난이 지금이 처음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의 기쁨과 평안함도 지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 평화롭고 기뻤던 그 때에는 주님을 노래하고 주님이 주신 평안한 환경에서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잘 섬겼지만 오늘날은 오히려 평안하고 안락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로부터 미끄러져있지는 않습니까? 이래서 우리는 열매 맺지 못할 때에는, 자신이 미끄러져있을 때에는 환경과 여건이 나빠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하고 모든 것을 좋게 해주셔서 평안할 때에는 너무나 평안하고 여유가 있기 때문에 부패해서 결실하지 못하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되풀이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결국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신부를 보십시오. 자신의 동산이 은혜의 물로 말미암아, 우물과 샘의 물로 말미암아 동산의 아름다운 향품과 약초와 꽃들이 가득하게 되니까 그는 오히려 북풍을 일어나라고 부르고 남풍을 불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바람이 불 때에 그 바람을 머금고 자기의 동산은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신랑을 향해 뿜어낼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북풍을 부르고 남풍을 불렀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오면 그것 때문에 그 풍랑을 인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간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고난이 오면 고난 때문에 열매를 맺게 되고 평안한 환경이 주어지면 고난 속에서 열매를 맺지 못했던 그런 신앙의 열매들을 더 풍성히 맺게 되는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환경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오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깨달음과 열렬한 기도의 간구와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과 섬김 속에서 주님의 성품을 배워가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삶속에서 복음의 가치를 전격적으로 체득하는 이러한 은혜가 있는 삶을 살아갈 때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 어느 한구석에 멎어서 부패하고 썩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영혼과 인격과 마음 안에 흐르고 또 흘러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향기 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놓아서 아름다운 삶으로 결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요, 우리의 마음속에서 흘러넘치는 은혜의 우물입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전 영혼과 인격을 휘돌고 우리의 삶을 휘감으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급기야 이것이 우리의 가정에 흐르고 교회에 흐르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흘러서 나를 만나지 아니했더라면 좌절과 고통과 원망 속에서 살았을 그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과 소망을 주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위대한 역사를 보게 해줍니다. 사람의 역사는 파괴하는 역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고치는 역사입니다.
III. 영혼의 회복을 위하여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해야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겨울같이 얼어붙었던 우리의 영혼의 동토의 계절이 변하여 영혼의 봄날이 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찬양)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것, 그것이 침체된 영혼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훌륭한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의 소리는 울리면 귀로 듣습니다. 이 울리는 소리는 내가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이 소리는 이 소리입니다.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땡’하는 종소리가 ‘딩동댕’으로 들리거나 딩동댕하는 종소리가 기분이 나쁘다고 불합격을 알리는 것처럼 땡처럼 들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물리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내용을 담고 하나님의 숨기운이 담겨진 주님의 인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그 음성은 우리에게 아프게 들리기도 하고 친절하게 들리기도 하고 소망을 주기도 하고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다. 간밤에 무리하고 영양을 잘 보충하지 못하고 몸이 허한 상태에서 이렇게 나오면 들리는 모든 소리들이 작은 소리인데도 굉장히 큰 소리처럼 들려서 윙윙거리기 시작해요. 몸의 상태에 따라서 청력도 이렇게 변화가 온다면 시력은 변화가 오지 않겠어요? 당연하지요. 근심이 많고 신경 쓰는 것이 많으면 눈이 침침해서 무엇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깊은 고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에는 얼마다 더 많은 변화가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아버지를 원수처럼 여기는 적대감을 가지고 무릎을 꿇고 아버지로부터 인생을 살아가는 교훈을 듣는다고 해봅시다. 그게 잔소리로 들리지 그게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뼈 저리는 음성으로 들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있어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올바로 들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어루만지고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뀌려고 하는 그 마음에 변화를 주시고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의 마음이 은혜받기에 합당한 마음이 되도록 주님이 어루만지시고 그리고 고쳐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의지하면서도 또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이 은혜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기도 속에서, 예배 속에서 그리고 섬김 속에서 이웃을 향한 복음의 전파 속에서 그 은혜를 우리들이 힘입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마음을 사용해서 베푸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진실한 회복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기를 앙망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보십시오.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예배하고 마음을 드려 기도하고 주님이 자기를 세워주시는 자리에서 마음을 다해 충성하고 주님을 섬기며 이렇게 살아가는 삶에서 미끄러지는 편리함은 잠깐이지만 그렇게 미끄러져서 게으르고 편안한 삶을 사는 그 대가는 너무 가혹할 정도로 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을 떠날 때는 주님이 밀쳐서 떠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결단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처럼 미끄러져 나아가지만 스스로 하나님 앞에 깨닫고 은혜를 받으며 돌아올 때에 돌아오고 나면 언제나 거기는 예전에 떠나갔던 바로 그 자리 아닙니까? 주님을 떠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빛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과소평가하고 내 생각과 주장대로 살고난 후에 마지막 도달한 그 지점이 과연 갈만한 곳이었습니까? 돌아옵니다. 그리고 거기는 항상 떠나간 바로 그 지점 아닙니까? 그런데도 끊임없이 같은 일들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이니 이 어리석음과 무지함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자신의 영혼이 어디에서 미끄러지고 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주님의 은혜 이외에는 나를 살릴 것이 없다고 믿고 그래서 주님을 꼭 붙듭니다. 안 그랬으면 좋은데 멀리 떠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불순종했습니다. 안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미끄러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과 후회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삼일 전에 건너편에 아파트에서 사람이 하나 떨어져 자살을 했어요. 알고 보니까 중학교 학생이래요. 사는 게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자살을 했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자살을 잘 생각해보면 그게 절망의 소산이거든요. 절망의 소산인데 절망해서 마지막에 아무런 희망의 빛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믿을 때 그 기간이 상당히 계속될 때에야 자살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발적인 자살이라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 노무현대통령도 마지막에 오래된 생각이다. 제가 그분이 대화하는 내용을 신문기사에서 읽으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참 이상하게 섬뜩한 이야기가 한줄 스쳐갔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비껴가면서 검찰에서 박연차씨와 만나는 장면이 보도되었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누가 아무도 자기를 어떻게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 스스로 이야기해요. ‘나도 결국은 당신처럼 파란 옷을 입지 않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할 때 아 무엇인가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람이 자살하기 직전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온 세계는 아무것도 없고 우물 같이 끝없이 깊은 자기밖에는 안 보이는 시간이 상당기간 계속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여러분 그런 경험이 있지요? 위험하기는 하지만 우물이 하도 궁금해서 매달려서, 시골에 가면 아주 깊은 우물이 있잖아요? 이렇게 내려다본 적이 있지요? 고개를 쑥 박고 내려다보면 밖의 사물은 아무것도 안보이고 캄캄한 굴이 직선으로 아래를 향해 나있고 그리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물빛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잖아요. 그러한 상태가 상당기간 계속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무것도 건 질수 있는 것은 없어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야 똥 같은 죄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요. 그 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바깥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 안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양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은혜에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기도의 은혜로, 섬김의 은혜로,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으로 이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이러저러한 불순종과 미끄러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것은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우물처럼 들여다보게 만들고 마지막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절망감이 우리에게 시키는 일은 단하나,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그것이 바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지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미끄러지고 불순종했던 일들을 새 까먹은 정신처럼 잊어버려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과 거기에 몰입해서 절망하게 되어서 너무나 몰입하고 절망한 나머지 하나님께로부터 올 영혼의 회복을 위한 어떠한 전망도 갖지 못하게 된다는 말은 다른 말이죠.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소생의 은혜는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봄날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았든, 주님의 은혜를 깊이 터득했든, 하나님의 영광의 깊은 경지를 깨달았든, 모든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었어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깨달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터득하고 주 앞에서 사는 신앙생활을 해갈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놀라운 은혜 속에서 주님 앞에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6.다시 살리시리니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
I. 본문해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시편 85편입니다. 이 시는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있고 아마도 이 시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관습적으로 성가대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서 노래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주석학자는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 쓴 시라고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윗이 쓴 시를 고라의 자손이 보관만 했기 때문에 고라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양단간에 어느 것이 맞는지는 우리들이 판단을 내릴 자료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썼느냐 보다도 그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1절부터 4절까지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중대한 사건 하나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다름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있는 이 표제는 85편만이 아니라 몇 개의 시편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85편은 바벨론 포로의 귀환을 노래하고 있으니까 사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라고는 볼 수가 없겠지요. 누군가가 썼는데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보관했다는 이야기지요. 고라의 자손은 이제 그들에 따르면 다윗이 쓴 시만이 아니라 여러 편의 시대의 시들을 후대에 가지고 있다가 이것이 모두 편집된 것이 주전 3, 4세기경인데 이때에 이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시인은 지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건 하나를 이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건을 노래하면서 이제 그 공동체적, 국가적, 교회적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비탄한 감정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주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던 그 자비와 사랑으로 이번에는 죄와 무기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셔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II. 언약 백성의 삶
우리는 여기에서 언약백성의 삶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할지를 보여준다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였기 때문인데 하나님이 그들을 포로시대로부터 돌이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 이 영광스러운 포로 귀환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진노와 그리고 큰 분노를 거두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이러한 구원의 은총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자신들이 많이 회개하고 통회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셔서 회개하는 것을 보고 다시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의 결과요 또 그렇게 바벨론의 포로상태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한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곧 당신과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성품 때문이었던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니 그렇게 포로로 돌아와 이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시인은 이제 이들이 다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사랑과 그리고 뜨거운 신앙의 감정들이 싸늘하게 식은 가운데 형식화 되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고치거나 뒤집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사랑의 성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하신 것처럼 또한 지금 이들이 이러한 영혼의 깊은 침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이들을 찾아오셔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에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유럽을 갈 때마다 하나님이 한때는 그렇게 큰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셨던 그 나라들이 어쩌면 몇 백 년도 되지 않아서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을 버리고 그리고 배교에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랍니다. 자신들은 조상들이 얼마나 뜨겁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작년에 영국을 갔을 때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했던 예배당을 방문했습니다. 집회 장소에서 불과 한 3,4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어요. 거기에 우리가 가겠노라고 전화를 했더니 친절하게 그 교회의 여자 장로님하고 남편이 마중을 나왔어요. 그래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줘요. 그런데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가 그 교회를 목회했었는데 스물 몇 살 된 아들이 선교를 가겠다고 해서 그래서 파송을 했답니다. 파송을 해서 먼저 중국을 들어갔고 그런데 거기서 그 당시에 중국으로 가는 게 배를 타고 가는데 장난이 아니잖아요? 결국 며느리가 아이를 임신한 채로 거기를 갔는데 중국에서 죽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돼서 자기 아들이 이제 조선에 가서 도착하자마자 순교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버지의 그 비통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당시의 영국의 교회는 몇 교회 건너 하나씩 그렇게 젊은이들이 수시로 순교를 했어요. 그게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의 무덤이 교회 앞에 쭉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뜨거운 열정으로 선교하고 한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 친구가, 동생이, 형이 뒤를 이어서 계속 그 순교의 길을 갔어요. 그러던 교회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담임목사님이 없어요. 왜 없느냐고 했더니 교인이 20명쯤 모이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모여요. 그래서 담임목사님을 청빙할 돈이 없어서 그래서 동냥해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 교단의 목사는 교단에서 생활비를 주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여덟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야한대요. 그러니 담임목사가 주일날 어떻게 여덟 교회를 설교할 수 있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열심히 돌아다녀봐야 아마 네 개의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 네 개도 못 할 거예요. 그러니까 나머지는 그냥 책임만 맡고 8교회 내지 10개의 교회를 맡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참 그 영광의 시절은 다 지나고 이제는 이렇게 하고 한국 사람들이 와서 가끔 보태주면 그것으로 교회도 수리하고 그렇게 하면서 지내는 상황이더라고요. 그러니까 교회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뜨겁고 열렬한 신앙을 가졌는데 지금은 그렇게 철저하게 싸늘하게 식어가잖아요.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이 있을 때 가톨릭에 박해를 받으며 개신교도 이만명이 순교를 합니다. 그 후예들이 살고 있는 동네 에든버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전설적인 설교자 존 낙스가 설교하던 자일스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 도시 한복판에 종교개혁자 존 낙스가 이렇게 손을 들고 설교하고 있었는데 그 동상을 뜯어다가 교회당 안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흄이라고 하는 경험주의 철학자의 동상을 그 자리에 갖다놓았어요. 이것이 바로 영국 사람들의 오늘날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참된 기쁨의 생활
그러니까 이 시인이 과거를 생각할 때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고 구원해주신 것은 참 놀라운 감격이지만 이제 그 지긋지긋한 포로 생활이 끝나고 나니까 이번에는 밖에 있는 악한 나라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세력에 의해서 사로잡혀서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언약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도 한 때는 그렇게 죄 가운데 깊이 사로잡혀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서 큰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들을 건져주셨어요. 예전에는 죄의 절대적인 지배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죄를 이기고 살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은혜를 구하면 죄를 이길 수 있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기도를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사로잡히고 그리고 게으름과 나태로 침륜에 빠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생활은 언약백성에게 어울리는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굳게 명심하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언약백성의 참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언약백성으로서의 참된 삶으로 돌아갈 때 그 언약백성의 삶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깃발이 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는 나팔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떤 삶입니까? 그게 바로 기쁨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하시지 아니하겠나이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인하여 기쁨의 생활을 해나가지 아니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세상에 알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탄식입니다. 참된 기쁨의 생활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의 생활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러한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의 본질적인 기쁨을 회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밀려오는 감정이 뭐냐 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찬양)평화,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확 밀려오는 참된 기쁨,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심을 하고 나면 자기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생사 간에 그분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굳게 붙들면 그 순간 우리의 많은 죄들은 용서받고 하나님이 이전에 경험해 본적이 없는 놀라운 기쁨을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일평생을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불평과 불만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던 자학의 삶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내적 생명을 통해서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기쁠 때에 기쁜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대부분 감각적인 사물과 세상살이에서 오는 기쁨이었어요. 그 근원은 그리 크고 놀라운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짜릿한 것 같은 큰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 맛있는 음식을 반복적으로 먹을 때에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쁨도 차츰차츰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기쁨은 그 안에 샘솟듯 솟아나는 특성을 갖지 못해요.
B. 기쁨의 근원
그러나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진정한 기쁨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솟아나는 그 기쁨도 아주 놀라운 영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 기쁨의 근원이 세속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나의 육신적인 감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과의 평화에 있고 나의 영혼과 교제하고 계시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에게서 이런 놀라운 기쁨의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기쁨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면서 이 기쁨이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움직이는 하나의 힘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그 사람 마음속에 가득하게 될 때에 모든 사물들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기쁨이 가득 찰 때에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모든 환경을 해석하는 것도 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없을 때에는 우울하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주던 많은 사실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큰 감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마음의 경향을 고치는 힘이 이 기쁨 속에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러한 기쁨과 너무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슬픔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신령한 기쁨이 가득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보더라도 가슴을 치며 마음 아파하는 자기 깨어짐의 기도생활이 많았을 그 때가 사실은 가장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했던 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된 삶과 자아를 성찰할 때에는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와 실제 내가 있는 이 상태가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죄의 용서를 빌 때에 그 때에 우리 자신은 가책을 받습니다. 말씀의 빛에 의하여 가책을 받고 그리고 급기야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았던 우리 자신을 책망하고 원수처럼 여기게 됩니다. 자기 깨어짐 속에서 흘리는 많은 고통의 눈물은 바로 이러한 괴로운 고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깊은 고통과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아파하는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는 증진됩니다. 그 생명의 평화는 오히려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 충만하게 교제하게 되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참된 사랑과 은혜를 더욱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게 되는데 이때에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교제의 크기에 비례하는 신령한 기쁨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커다란 문제가 있어서 고통을 받는데 기도할 때는 그렇게 괴롭고 하나님 앞에 눈물이 나는데 분명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크게 근심을 하고 괴로워하고 고민을 해야지 마땅한 시기인데 이상하게 나 자신도 이해가 안갈 정도로 마음이 평화롭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쁨이 솟아나는 경험을 여러분들은 해본 적이 없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신령한 기쁨의 생활입니다. 이 기쁨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관용을 알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너희는 기뻐하라.’ 그리고 그는 충고했지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우리의 옛날 말에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는 말이 있지요. 넉넉하게 곳간에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이 있어야지 어디 가서 큰소리도 치고 자비도 베풀지 자기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지경인데 어떻게 너그러운 마음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은혜생활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하늘의 신령한 자원이 가득 찰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금 빼앗기는 것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손해 보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마음 상해하지 않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생기게 되고 이 관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때에 그 관용을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기쁨의 근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이 세상의 물질을 따라서 울고 웃는 사람의 비참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재물은 구름과 같아서 끊임없이 떠돌고 그리고 그것을 보고 웃고 우는 사람의 삶은 재물이 끊임없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돌아다니는 것처럼 그의 기쁨도 끊임없는 변덕에 종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시게 하는 방법은 우리를 성공시키고 돈 많이 벌게 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얘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또 김 목사의 독특한 무슨 기질이 나왔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기질만은 아닙니다. 우리 요즘 흔히 교회에서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래도 간증집회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역사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최근에 와서는 이 간증집회가 어떤 식으로 바뀌느냐하면 성공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자기 얘들이 공부를 못했었는데 은혜를 받고 기도를 세게 했더니 공부를 너무나 잘해서 미국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오라고해서 갔다더라. 그렇지 않으면 또 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높은 관직에 올려 보내서 한국에서 성공하고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 또 뭐 사업을 시작해서 고생, 고생을 했는데 그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큰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하더라. 이런 얘기들을 간증해요. 그런데 사실 이것도 가만히 보면 후기 근대주의의 인간중심적인 삶의 소원을 신앙심을 빌어서 이루고자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 사람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많은 사람위에 높이 뛰어난 자가 되고 돈을 많이 벌고 공부를 잘하게 된 거기에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써 아름다운 영혼과 선한 의지를 갖게 되었는가 하는 거기에 오히려 성경은 관심이 많은 것이거든요. 그러면 진정한 성공사례를 이야기하려면 그런 성공사례를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면 은혜는 받을 수 있지만 은혜 받은 여러분들의 자녀 모두가 그렇게 가끔 교회에 간증하러 다니는 아이들처럼 갑자기 공부를 잘해가지고 미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우리들 중에 한둘이나 있을까 말까 해요. 신앙생활을 잘하고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되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다윗 그리고 요셉을 뛰어난 사람으로 칭찬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다윗이 왕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다윗을 칭찬하거나 요셉이 국무총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죽었으나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잠시 이 세상에서 누렸던 영광이나 영화가 아니라 죽었으나 지금도 살아서 말하고 있는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시인이 이렇게 언약백성으로서의 본분이 기쁨의 생활이고 그 기쁨의 근원은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인데 그 평화를 회복하는 생활의 핵심은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보면 이제 시집, 장가갈 때가 되잖아요. 얼굴이 활짝 피잖아요. 물론 이제 시집, 장가가서 처음에 좀 다투고 하면 다시 찌그러지지만 그래도 어쨌든 뭣도 모르고 시집, 장가갈 때에는 무조건 다 좋은 것 인줄 알고 얼굴이 활짝 피잖아요. 그런 것입니다. 마음의 참된 기쁨은 이렇게 사랑하는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C. 소중히 여김과 기쁨
이 사랑의 특성 두 가지가 있는 것인데 소중히 여기는 것과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기쁨의 삶을 살도록 원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삶이 아니면 그런 기쁨의 삶이 가능하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삶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제일 먼저 성도들은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명분을 아주 값지게 생각해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얼마나 소중하신 분이십니까? 과연 하나님은 이 세상에의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에게 소중한 존재입니까? 정말 소중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중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소중한 것은 사람들이 아낍니다. 함부로 쓰지 않고 아낍니다. 보호하려고 합니다. 간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그래서 오늘도 땅에 떨어진 그분의 이름을 인해서 그들은 눈물짓고 주님의 이름이 자신의 삶을 통해 존귀하게 여김을 받도록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특성입니다.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위하여 부르신 부르심,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을 알려주는 지식,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 주님이 사랑하도록 세우신 교회, 그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이룩해놓으신 질서, 이 모든 것들 속에는 하나님의 특성이 배여 있고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사랑은 그 소중히 여기는 사랑 안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한히 소중하고 자기는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기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고백은 나를 향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만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게 대한 사랑을 내가 깊이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나는 나니까 이렇게 사랑을 알지만 한 사람 한사람 모두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특성입니다.
III. 영적 회복과 은혜 작용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회복과 은혜의 작용이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여기서 살린다고 하는 이 표현은 시편에서 여러 차례 나옵니다. 이것은 죽었던 것 혹은 생명의 특성이 현저하게 상실된 것을 다시 생명을 부여해서 살아있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화초가 물도 주지 않고 여름에 뜨거운 햇볕이 하루 종일 내리쬐게 되면 이것들이 다 시들고 이파리가 이제 병들기 시작합니다. 병들기까지는 않겠지만 말라서 다 이파리가 늘어지죠. 이제 저녁때 물을 흠뻑 주고나면 아침이면 다시 이파리가 팽팽하게 뻗치며 생명의 기운을 뿜어냅니다. 이게 바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가 스스로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심령 속에 충만하면 그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아도 그는 어디에 있든지 불꽃처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두신 생명에 충만한 역사가 그를 살아가게 할 때에 그런 생명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가 도드라지게 보이는 법입니다.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별 자체의 밝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두운 밤하늘 때문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영적으로 회복시켜주시는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이 안에서 그들은 이전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한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때에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는 신령한 기쁨이 충만하게 중심 속에서 차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 영적 회복을 구함
그래서 시인은 우리를 다시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번영, 이스라엘의 위대한 군대의 번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이스라엘의 심령의 부흥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렇게 다시 살려내셔서 마치 죽었던 자와 방불했던 그들의 영혼을 다시 소생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충심으로 그분에게 헌신하도록 살 수 있는 심령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금 불일 듯 그 심령이 일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시급하게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엇을 절실하게 구해야할지 생각해보십시오. 나 자신의 영혼, 우리 가족들의 영혼, 그리고 교회에 있는 지체들과 이 많은 영혼들을 위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교회를 위하여 우리가 가장 많이 헌신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중요하지도 않고 본질적이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피터지게 싸우는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본질적인 일을 위해서는 한 번도 무릎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한번 같이 흘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본질적이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는 박 터지게 싸우면서 주님의 교회에 상처를 내는 그 무질서한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드리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현저히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해야합니다.
(찬양)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사람이 보는 것이 마음을 많이 움직인다고……. 영국의 피폐해져가는 교회를 이렇게 들여다보면서 너무 너무 슬퍼요. 저기에 누구 한사람만 나타나서 피를 토하듯이 외치면 안 깨어날까? 거기도 영혼인데……. 나는 지난번에 영국에 갔을 때 존 오웬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라는 교회를 보여주는데 나는 거기가 유적지인줄 알았어요.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교회당에다가 자기무덤을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밤 예배 갈 때에 얼마나 썰렁하겠어요? 아휴!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돈 많이 낸 사람은 좋은 자리에 묻어준다고 하더라고요. 심지어 밖에도 아니고 요기에다가 묻어요. 요기 안에다가. 그리고 그 위에서 예배를 드린다니까요. 그것도 돈을 많이 내야 본당에 들어온대요. 그런데 그 비석들이 다 쓰러져가고 풀이 길같이 자랐어요. 목회할 것도 없는데 와서 풀이나 뽑지……. 나는 유적지인줄 알았어요. 그러더니 담임목사님이 자전거를 타고 와요. 옆에 있는 우리 후배목사가 나를 소개했어요. 나를 소개하는데 우리 목사님은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목사님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니까 아주 조롱하는 비슷한 태도로 How many thousand members? (야, 저 사람의 교회는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냐?) 그것을 물어보는 거예요. 너무너무 슬펐어요. 그리고는 한때 존 오웬 목사님이 이천 명을 모아놓고 설교하던 교회에 이제 백여 명이 모여요. 그것도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모여요. 누군가 거기에 서서 그 죽어가는 영혼, 그리고 이전에 그 찬란한 영광을 뒤로하고 스러져가는 교회를 위해서 누군가 한사람이 거기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지 않을까? 그 하나님이 예전에도 살아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살아계신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그들의 교회를 위해서는 우리가 보탤 일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시대에 이 나라, 우리의 교회시대를 유업으로 주셨으니까 우리는 정말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영혼의 부흥과 교회의 부흥과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여호와와, 여호와의 행하신 위대한 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후손들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야 해요. 아멘. 기도합시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7.그리스도가 교회를 누리실 때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 5:1).
Ⅰ. 본문해설
이 5장 1절은 4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고 노래하였던 신부의 노래에 대한 답변으로써의 노래입니다. 그러니 5장 1절은 신랑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신랑은 말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나의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고 노래하였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아름다운 연애관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시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신부를 나의 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가 원하는 바대로 그는 동산에 들어가서 많은 재료들을 거두고 먹고 마실 뿐 아니라 자기의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Ⅱ. 잠근 동산 같은 교회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풍성한 열매와 그리고 많은 아름다운 실과들이 있는 아름다운 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오직 신랑을 향해서만 개방될 수 있는 잠근 동산이었습니다. 그 잠근 동산이 바로 교회를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근 동산 같은 교회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열매 가득한 동산
여기에는 수많은 열매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신랑을 부르는 노래 속에서 이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얼마나 귀한 식물과 그리고 각종 귀한 약재들이 자라고 있는지를 그 앞에서 꽤 길게 노래했습니다. ‘내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재료들이 어디에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많은 향 재료와 그리고 꿀과 그리고 포도와 이 모든 것이 아주 풍부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산이라고 해서 모두 산이 아니라 이름은 산이지만 그러나 아무 식물도 거의 자라지 않고 바람이 불면 모래바람만이 날리는 그런 황야에 서있는 모래덩어리 같은 그런 산도 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는 산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많은 과수들이 가득한 수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산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세우신한 모두 교회입니다. 잘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고 생기 있어 보이는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앙의 구주로 고백을 하고 그 신앙의 고백의 터 위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 보면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마차를 타고 동역자들과 함께 지나가다가 교회를 발견하면 항상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작고 사람이 모이지 않는 볼품없어 보이는 교회도, 크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도, 신령한 말씀이 울려 퍼지는 교회도, 세속적인 교회도 그래도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사람과 모양을 보며 교회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교회와 관계를 맺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을 사랑하고 그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현실은 이렇게 민둥산과 같은 교회가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식물이 가득하고 그리고 열매와 실과가 많이 매달린 과목들로 우거진 그런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교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중 어느 교회가 민둥산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는 홍수가 나는 것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땔감이 없으니까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맨 처음에는 도끼로 잘라서 불을 땠어요. 그래도 우리가 서울에 살았는데 서울에서도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아궁이에다가 불을 때서 물을 끊이고 밥을 해먹었어요. 도끼를 가지고가서 자르더니 이제는 나무를 툭툭 잘라가서 없으니까 그 다음에는 나무를 해오는 장비가 바뀌었어요. 톱을 가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밑동까지 잘라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라가지고 온 요만한 나무들을 놓고 이제 도끼로 쪼개서 말려서 불을 때더니 이제 그것도 다했잖아요. 그 다음에는 나무를 하러가는 연장이 바뀌었는데 곡괭이하고 삽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실제 증언입니다. 사람들이 일할게 없으니까 시간들은 많거든요. 그러니까 가서 곡괭이로 찍어서 땅을 파고 그 속의 남은 것을 뿌리째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하면 그렇게 해서 곡괭이로 해서 안 되는 것은 삽으로 파서 끌고 와서 흙을 다 털어서 그것을 양지바른 곳에서 한 며칠 말리면 그것도 불이 잘 탑니다. 그것도 나무뿌리이긴 하지만 나무와 동질의 것이니까 잘 타잖아요? 그렇게 하니 우리 동네 뒤의 산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는 거기에 강아지 데리고 가서 아침이면 가서 옹달샘에서 물도 길어먹고 세수도 하고……. 밤나무가 그렇게 우거졌던 곳이었거든요. 어느 날 다 잘라버렸어요. 사람들이 밤이면 올라가서 다 잘라버렸어요.
그러다가 이제 어느 때쯤 되어서 나무를 절대 못 자르게 굉장히 강한 법이 생기고 나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철저히 시켰어요. 그래도 나뭇가지 하나만 부러뜨리면 애들이 뺑 둘러싸서 ‘이제 큰일 났다! 큰일 났다.’하면서 놀려요. 교장선생님이 조회시간에 나와서 작은 나뭇가지는 손가락이고 큰가지는 팔뚝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만약에 네가 팔뚝을 뚝 꺾어서 누가 가지고 간다고 치면 너는 마음이 어떻겠느냐? 그러니까 어린마음에 그 비유가 너무 생생했어요. 그래서 저도 어렸을 때에 절대 나무를 꺾지 않았어요. 그렇게 보호를 하니까 지금은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도 일본 다음으로 나무가 우거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숲속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꽉 찼습니다. 완전히 민둥산입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국토가 다 그랬어요. 비가 쏟아지면 그 흙탕물이 한 번에 다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시골에서는 왜 그랬느냐하면 계속 불태우면서 나무를 깎아내고 거기에다가 감자라도 심어 먹기 위해서 땅을 넓히는 수단으로 언덕이 경사가 완만한 산이라는 산은 하나도 안 남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가 쏟아지면 어마어마한 흙탕물이 쏟아져 내리면서 산사태가 나고 많은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 죽고 그랬어요. 그런 산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산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모두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지만 불행하게 그런 민둥산과 같은 교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마음은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함께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바로 그 산에다가 주님의 지시에 따라 나무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일학교 선생의 직분이 그렇게 귀하고, 새 신자 교사의 직분이 그렇게 귀하고, 구역에 있는 영혼들을 돌보는 구역장의 사명이 그렇게 중요하고, 순장의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다. 그 나무를 잘 돌봐서 하나씩 하나씩 뿌리를 내려 뻗어나가게끔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나무가 작았을 때는 산의 신세를 지지만 큰 나무가 되면 산이 나무의 신세를 지는 것처럼 처음에 심겨질 때는 아주 어린 신자였는데 믿음이 많이 자라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가 교회를 위해서 많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가 가득하고 아름다운 귀한 향 재료와 포도가 자라는 그런 열매가 가득한 동산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내 마음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내 마음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민둥산과 같이 아무리 좋은 것을 주님이 찾아보시려고 해도 먼지만 나는 그런 동산, 이름만 산인 그러한 황폐한 동산입니까? 아니면 정말 이런 아름다운 열매들이 많이 맺혀있는 그러한 동산입니까?
B. 샘에서 흐르는 물
그러면 오늘 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이 동산이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한 동산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샘에서 흐르는 물 때문이었습니다. 샘이 있고 샘 한가운데는 덮은 우물이 있고 우물 한 가운데는 봉한 샘이 있어서 그 생수의 우물이 시내가 되어서 산골짜기를 휘돌면서 흘렀습니다. 그 물이 넉넉하게 이 산을 휘감으며 동산을 싸고돌며 흐를 때 그 때에 그 물기를 흠뻑 머금고 쏟아지는 햇살을 향해 두 팔을 벌린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땅, 모든 산은 물이 없으면 생명이 서서히 사위어 가다가 마지막에는 사막과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미국에 집회를 가게 되었을 때에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이었는데 30분만 나가면 사막이 있는데 보여준다고 해서 태어나서 처음 사막을 보았습니다. 가보니까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모래만 가득한 그런 사막은 아니고 어쨌든 사는 것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는 끝없는 자갈밭, 끝없는 모래,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흙더미가 저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봇대 솟은 것, 기차 지나가는 철로, 자동차길 이외에는 집 하나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 끝없이 이어졌어요. 왜 여기가 이렇게 사막입니까? 그랬더니 ‘물이 없습니다.’ ‘얼마나 물이 없습니까?’ 펌프를 박아도 물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막도 언젠가는 사막이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거기가 사막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다시 물이 흐르면 사막이 그런 사막이 될 리가 없겠지요.
어느 선교사님이 그야말로 사막에 집을 짓고 살았답니다. 그래서 선교를 했는데 그래도 물이 조금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살지 않았겠습니까? 사모님이 거기서도 한국식으로 음식을 해먹으면서 설거지를 하고는 물을 뒷마당에다가 휙휙 버렸는데 버릇이 들어서 항상 같은 방향으로 같은 쪽으로 물을 버렸답니다. 그랬더니 몇 달이 지나고 나니까 거기서 풀이 돋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리비아에 그 유명한 대 수로공사는 한국이 맡아서 공사를 여러 해 동안 했고 이게 20세기의 인류의 8대 불가사의한 공사 중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그 공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내가 상세하게 다큐멘터리로 볼일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철판하나의 크기가 32평이 좀 넘는데 (아파트 크기정도겠지요) 그것을 둘둘 말아서 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큰 관이 나오는 기계가 없답니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그 기계를 만들어서 그 큰 크기의 철판을 특수제작해서 감아서 하나의 파이프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두 사람이 어깨를 딛고 올라가도 천장에 못 닿을 정도 굵기의 큰 관입니다. 그것을 만들어서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을 모두 연결해서 5,600㎞를 깐 것입니다. 5,600㎞이니까 여기에서 부산을 왔다 갔다 하기를 여섯 번 하는 길이를 깐 것이지요. 더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면 중강진까지 가는 것을 두 번 반 내지 세 번 정도를 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공사였고 사실 그 공사에 리비아는 국운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게 해서 담수설비를 이용해서 바다에 있는 물을 끊여요. 기름을 때는데 거기는 쌓인 것이 기름이잖아요. (하이힐로 찍어도 기름이 나온다는 나라인데…….) 어쨌든 그렇게 해서 기름을 때잖아요. 그러면 그 기름은 소모되지만 기름은 워낙 싸니까 물을 끊이면 수증기가 나오고 한편으로 소금이 나오잖아요. 물을 팔고 물을 이용하고 소금을 팔면 기름 값과 비슷하게 된답니다. 그러니까 무한정으로 끊여서 수증기를 모아서 그 어마어마한 관으로 물을 흘려보내서 사막을 옥토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였어요.
물이 있으면 사막이 동산으로 변해요. 변합니다. 참 놀랍지요. 그 물이 뭐냐 하면 교회 속을 휘돌아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의 은혜……. 진리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은혜의 물이 한 사람의 인격 속을 흐를 때 황폐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 변하여서 성도가 되지 않습니까? 무지와 죄악가운데 아무렇게나 살던 짐승 같은 신자가 변하여서 진리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가 함께 시냇물처럼 교회를 휘돌아 흐르게 될 때에 황폐하던 많은 사람은 변하여 성도가 되고 은혜가 식어져서 분쟁하고 고통하고 물고 뜯으며 황폐하기 짝이 없던 교회는 영적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교회 속에 흐르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의 이 물이 우리의 영적 생명과 직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고 우리는 이 교회가 이러한 생명과 은혜의 원천이 되어서 흐르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디가든지 교회의 중직들을 만날 때마다 타이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 사람이 담임목사이든지 아니면 이제 막 신학교를 들어가서 교역을 시작하는 아주 나이어린 전도사이든지 간에 목회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목회는 영혼을 돌보는 일로써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마음에 괴로움과 번민이 가득하게 되면 이 말씀의 원천이 말라요. 그것은 성도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제일 어려운 일은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일들이 교회와 개인의 삶속에서 일어나는데 이런 것에서 요동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질 수 있는 마음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물은 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 은혜의 물은 성령의 은혜이니 이 성령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흐르는 것이니 이 은혜의 충만한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마치 문을 여닫는 경첩과 같아서 함께 따로 떨어져서 역사하지 아니하고 말씀이 있는 곳에만 성령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그곳에 반드시 말씀을 붙들고 도구로 사용하시는 은혜의 역사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거기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 속에서 그 물이 항상 성도들의 배에서 솟아나 샘물이 되게 하고 그 물들이 모여 교회를 두루두루 휘감고 흐를 때에 변화되지 않던 영혼들이 변화되고 믿기는 해도 삶의 실천이 없던 사람들에게 많은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잠근 동산과 같은 교회가 될 때 성도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영혼에 생명의 샘물을 마십니다. 혹시 내가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고갈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곧 그 샘에서 먹고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며 영적인 놀라운 소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게 성도의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Ⅲ. 교회의 기쁨 : 누리심
이렇게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은 샘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은혜의 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샘에서 흐르는 은혜의 물을 대어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이렇게 샘의 물이 되어 흐르도록 만들어주신 그래서 열매를 가득 맺게 하신 이 동산과 같은 교회의 기쁨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교회를 충만하게 누리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당신이 충분히 그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의 거룩함의 열매를 누리고 사용하실 때에 거기에 바로 교회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신앙의 대의가 아주 많이 곡해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목표와 계획이 우리 중심이고 주님은 우리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시듯이 그렇게 우리의 계획을 따라서 역사하셔야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대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우리에게 내주시고 협조하시는데 교회의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버리신 그 희생과 사랑을 알고 그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성화의 열매를, 섬김의 열매를 교회 안에 가득 맺어서 누구든지 그 교회에서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드려서 하나님이 그 교회 안에서 맺혀지는 수많은 영혼들의 열매를 보시며 기뻐하시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누리실만한 아름다운것들이 교회에 많이 있어서 주님께 기쁨이 될 때에 교회는 그 주님의 기쁨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A. 몰약과 향 재료-약품 : 치료
오늘 여기에 보면 먼저 신랑이 들어가서 그 잠근 동산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 가지가 나오는데 몰약과 향 재료가 첫 번째 것이고 두 번째는 꿀 송이와 꿀이고 세 번째는 포도주와 젖이었습니다. 몰약과 향 재료는 약품으로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몰약은 향료로 많이 쓰였습니다. 지금도 조금만 것을 선물을 받아 가지고 있는데 아주 비싸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송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몰약과 향 재료는 약품으로 많이 쓰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하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치료의 기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망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망가진 영혼, 중상을 입고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영혼을 고치십니까? 그래서 어떻게 새사람을 만드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왔다고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축복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병자를 고치는 사역이 교회의 중심사역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도입된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이 이렇게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주님이 육체를 고쳐주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에 영혼이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의 복음의 전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전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물이 흐르는 교회에는 이렇게 사람을 치료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단지 사람의 심리나 그 사람의 정서나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져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할 수 없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려고 해도 살아갈 힘이 없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강력한 은혜의 힘으로 고치는 치료의 역사를 하나님이 열매가 가득한 동산에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치료는 반드시 커다란 기적의 역사를 통해 신비의 작용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꽤 긴 목회사역의 기간 동안에 수많은 회심의 경험을 보았습니다. 강력하고도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고서도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외적인 강력한 신비의 경험이 없고 그저 끝없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눈물만 흘리는 그러한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병든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몰약과 향 재료 같은 것이 교회 안에서 많아질 때 이것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놀라운 치료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중국을 갈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14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아직도 자기네 나라의 인구를 잘 모른다고 하잖아요. 등록 안 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사람의 의료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조금만 도회지를 벗어나면 병원이 거의 안보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우리는 이렇게 의대를 나오고 본과를 나오고 의사면허, 전문의 면허 등등 시험을 붙고 하여튼 절차가 복잡하고 입학할 때부터 전국에서 1%안에 들어야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거기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렇게 해서 의사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에 누가 병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동네주민의 확인서를 받아와요. 그리고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입증이 되면 그냥 의술을 베풀 수 있도록 허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골에 가면 평생 산의 약초만 캐러 다니던 할머니들이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정식으로 의학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 나름대로의 전승되어 내려오는 약초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병을 고치는데 낫기도 하고 안 낫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의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낫기도 하고 안 낫기도 하고 그러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료의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황무지와 같은 동산이라면 황무지 한가운데 서있는 그런 민둥산과 같다면 혹시 거기에 진리의 사람인 목회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한사람을 통해서만 이렇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물이 흘러가서 온 동산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그래서 몰약과 향 재료가 동산 이쪽, 저쪽 모든 곳에서 확 펴져서 자라게 된다면 사람이 어느 곳에 들어가든지 그 약품을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담임목사가 출타해서 못 만났어도 좋은 구역장, 말씀의 은혜를 받고 교리적으로 잘 정리가 된 구역장을 만나기만해도 구역예배를 통해 회심을 할 수도 있고 영혼이 변화될 수 있지 않겠어요? 또 구역까지 굳이 안가더라도 옆에 집에 사는데 방황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잠시 마실 와서 차를 마시고 놀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상담을 받는다면 그 사람이 치료되는 역사가 왜 없겠습니까?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동산 어느 한 구석에 가야지만 한포기의 향 재료가 있고 나무 한그루 거기서 특별한 약이 나오더라는 것이 아니라 동산 어디를 가든지 거기에 약재가 될 수 있는 많은 약초와 재료들이 있어서 그래서 그 약초들을 바르고 그리고 그 향 재료를 취하고 하여서 병 나음을 받을 수 있는 이런 치료의 기능이 교회에 가득할 때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멘을 해야 되지 않겠어요? 아멘.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과 함께 열린 교회에 있은 지 15년이 지나가잖아요. 마음에는 더 뜨거운 열망이 타올라요. 외국에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능하고 진리에 깊이가 있는 분들을 만나면 ‘아휴, 저 양반들을 데려다가 이번에는 별식을 먹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국내에 있는 목회자들은 한식이고 외국에 있는 목회자들이 오면 양식이잖아요. ‘야, 저 분이 오셔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해주시면 그게 꼭 내가 전하는 것과 같지는 않아도 지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얼마나 큰 은혜가 될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내년부터는 양식도 가끔 먹여주기로 그렇게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15년이 지났어도 마음에 더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더 많은 말씀을……. 그래서 어떻게 해요?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그것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뜨겁게 화차에서 불을 때는 증기기관의 열처럼 그렇게 가슴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더욱 간절해요. 그래서 언젠가 한번 그랬어요. 우리가 교리반을 가르치는데 교리반을 가르쳐놔도 정리가 안 되서 오락가락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삶의 규모가 없고 정리가 안 된 사람들도 있더라!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내가 목회의 사역이 끝나기 전에 이 어른 교리반에서 가르치는 것은 초등부 3학년쯤에서 가르치고 우리 어른들은 좀 더 깊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속에서 성령의 큰 능력을 힘입어서 세상의 사상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꿈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기독교 사상가가 되도록 완전히 이 아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진리로 꽉 채우자! 그가 어디에 가든지 그는 이 몰약과 향 재료를 나누어주어 병들고 망가진 사람들을 고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상입니다. 더하고 싶은데 그 다음을 가겠습니다.
B. 꿀송이와 꿀-기초품 : 기쁨
그리고는 또 하나가 나오는데 꿀송이와 꿀이라고 나와요. 성경에 히브리어 성경에도 똑같이 꿀송이와 꿀이라고 나와요. 이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했던 옛날 유대인들은 꿀송이도 먹고 꿀도 먹는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꿀송이를 떡으로 바꿔버렸어요. 그래서 꿀에다가 떡을 찍어먹는 것처럼 해서……. 근거는 없어요. 많은 사본 속에서 번역 속에서 꿀송이이고 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말하자면 두 개의 단어가 같이 나오지만 이 한 단어는 한 단어에 속해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었어요. 예를 들자면 영어에서 Bread and Butter 그러면 빵 따로 버터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빵에다가 버터를 슬쩍 바른 것을 Bread and Butter 라고 말하듯이 그래서 이 부분이 ‘꿀송이 속에 들어있는 꿀을 먹고’ 이렇게 번역하고 싶었단 말이죠. 어쨌든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이해에 도움이 되지요. 꿀송이는 꿀이 들어있는 벌집의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고 꿀은 그것을 덥히거나 회전시켜서 꿀을 뽑아낸 것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어쨌든 꿀송이 속에 들어있는 꿀이든 꿀송이 따로 꿀이든 어쨌든 꿀송이를 따서 그 송이 속에 들어있는 꿀을 빨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가르치면서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런 설명을 해요. 히브리 사람들은 옛날 아주 어렸을 때에 성경에 히브리어 글자를 쓰고 그 위에 꿀을 발랐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들이 찍어서 먹으면서 그러면서 성경말씀이 이렇게 달콤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교육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어떻게 보면 참 재미있는 교육법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꿀이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대개 기쁨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은혜의 물이 가득 흐르고 열매가 가득하게 될 때 교회 안에는 신령한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에 많은 고통을 받고 낙심하고 살았는데 교회에 와서 송이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킬 때 슬픈 세상에서 고통을 받던 심령에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는 기쁨이 확 솟아나게 되요. 아마 여러분도 그럴 때가 있지요. 예배드리러 오기 전까지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고 가슴에 눈물이 가득 찼었는데 하나님을 찬송하고 나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지금까지도 나의 인생을 고난의 길에서 건져주시고 이끌어주시니 임마누엘의 사랑을 증거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것과 그리고 내가 그분의 손에 길러지는 한 마리의 양이라는 기쁨이 가슴속에서 충만하게 솟아나는 그런 은혜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보고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 좋으냐고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그를 향해 대답한 노래가 있습니다.
(찬양)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아멘-
우리는 자꾸 교회생활 속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사실은 이 기쁨은 두 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마음에서 불러일으키는 기쁨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첫 번째 것은 아래로부터 솟아오르는 기쁨이고 두 번째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입니다. 아래부터 올라오는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예배 끝나고 3층에 올라가서 둘러앉아 새우깡 몇 봉지 놓고 오락회를 해도 마음속의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들 청년 때는 교회에 가기만하면 새우깡을 놓고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오락회를 했잖아요? 그렇게 해도 기쁨이 솟아요. 그러나 그것은 끝나는 것과 함께 사라지는 기쁨입니다. 그런 종류의 기쁨은 사리지고나면 더 큰 외로움과 고독이 밀려들어요. 그러나 송이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누리는 이 기쁨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성품을 바꾸어 놓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그 기쁨을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리며 살기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교회는 이런 기쁨을 나누어주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C. 포도주와 젖-식품 : 영양
세 번째는 포도주와 젖을 먹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식품과 같은 영양입니다. 포도주는 그 사람들이 물을 대신하던 음료였고 젖은 그것에서 수많은 유제품을 만들어서 먹어야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양식이었으니 아마도 그 동산 안에서는 이렇게 젖을 내는 양떼들도 함께 자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곤고해서 주님의 교회에 나왔을 때 그 곤고하고 목마른 그들에게 만약에 생수와 같은 영혼의 물이 아닌 흙탕물을 준다면 어찌 그들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으며, 그들에게 주리고 배고플 때에 떡이 아니라 돌을 준다면 어찌 그들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하나님이 은혜의 물을 공급하시고 열매가 가득한 동산이 되게 하신 것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값없이 교회에서 그 젖을 먹고 값없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들이 다시 영양을 섭취하고 살아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섬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한 최상의 섬김은 교회가 교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포도주와 하나님의 진리의 젖이 가득 흘러 젖과 꿀이 흐르던 땅처럼 영혼들이 이곳에 와서 이 세상 번영한 어느 곳에서도 먹을 수 없었던 영혼의 기쁨의 양식을 먹고 영양이 있는 음료를 마시면서 배고픔과 굶주림을 해갈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이렇게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서 우리가 이 교회가 열매가 가득한 동산이 되고 포도주와 젖이 가득하여 굶주린 자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절실히 바라며 살도록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의 교회가 이런 포도주로 목마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상처를 치료하고 젖을 먹여 많은 사람들의 기력을 회복하게 한다면 그들도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의 자리에서 돌이켜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Ⅳ. 초청하시는 그리스도-친구, 사랑하는 사람들
주님은 이제 이 솔로몬이 자신의 동산에서 이 모든 것을 충만히 누리는데 이것을 함께 먹도록 마시도록 많은 사랑하는 친구들과 많은 사랑하는 이웃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청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얘들아 이리 오너라 인생이 곤고하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친구들아, 병든 사랑하는 사람들아, 우리밖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나의 양떼들아,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서 방황하기에 얼마나 피곤하고 지쳤느냐 너희는 이 동산으로 들어오너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직접 부르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그 마음에 모신 성도들을 통해 이렇게 목마르고 배고프고 치료받아야 하고 기쁨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초청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반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당위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교회에서 흐르는 샘물로 말미암아 열매가 가득한 동산으로 가꾸어가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것을 자신들만 먹고 즐기고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굶주리고 상하고 치료받아야 하고 기쁨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기에 와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이 몰약과 향 재료, 꿀송이와 꿀, 포도주와 젖을 먹고 치료되고 기뻐하고 그리고 생명을 얻으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누리고 변화된 영혼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될 때에 교회 밖에 있었더라면 황무지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의 덕을 입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전인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인 것입니다.
V.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으로는 이 생명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고 외적으로는 이러한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절실하게 부르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외치고 온 뜻을 다하여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의 그 큰 사랑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 영혼의 봄날은 교회와 동떨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 없이 우리의 영혼의 봄날은 없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다시 살리실 때 우리의 영혼은 교회와 함께 다시 살고 주님이 교회를 슬퍼하셔서 얼굴을 돌리실 때 우리의 인생은 함께 지나가는 봄날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속에 늘 흐르는 물 댄 동산과 같은 심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의 교회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가 가득한 동산이 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8.말씀으로 세워질 때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
Ⅰ. 본문해설
우리의 인생에 시편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의 신앙생활은 훨씬 건조했을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다른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주지만 시편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함께 보여주며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또 다른 성도들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고통이 우리에게 독특한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시편을 읽으면 나와 똑같은 고난과 슬픔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편 119편은 특별히 이렇게 고난과 많은 시험가운데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시인의 자전적인 고백들을 많이 담고 있는 시편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이 28절 본문은 앞뒤에서 고난과 핍박과 시련으로 인해서 영혼이 죽은 자처럼 침체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러한 은혜의 경험을 많이 한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살리시는지를 회상하며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 부분이 히브리 성경에는 매우 어렵게 나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을 그래도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나의 영혼이 슬픔, 혹은 근심 혹은 괴로움 때문에 나래파(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뭐라고 번역할 수 없겠지만 나의 영혼이 근심 혹은 눌림 때문에 물처럼 그렇게 떨어지오니 하나님의 한 말씀을 좇아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옵소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말 성경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정확한 뜻을 한국사람 정서에 맞게끔 소화시켜서 의미가 좀 바뀌긴 했지만 해석적인 번역을 내놓은 것입니다.
Ⅱ. 영혼의 눌림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영혼의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했는데 그 영혼의 눌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눌림이라고 되어있는 단어 히브리말 ‘투가’라는 단어는 원래 ‘야가’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그리 자주 나오지는 않는 단어인데 그래도 대개 슬픔, 비탄, 괴로움, 특별히 근심이라는 말로 몇 번 나오고 그리고 여기서 눌림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여러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눌림이라는 이것은 결국 슬픔, 괴로움, 혹은 견디기 힘든 큰 걱정,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근심을 인하여, 혹은 슬픔을 인하여, 혹은 눌림을 인하여 이렇게 되는데 그러면 그 영혼이 느끼는 눌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영혼 자체가 물질이 아니니까 눌린다든지 찌그러진다든지 우리가 그렇게 물리적인 생각을 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여기에 나오는 이 슬픔, 혹은 비탄, 혹은 근심 이런 것들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영혼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무엇을 성경은 오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영혼과 그리고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물질인 육체는 영혼이라는 형상의 지배를 받으며 도구처럼 쓰이는 것입니다. 육체는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 잠시 사라지기도 하지만 영혼은 그런 것 없이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혼이 눌린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일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이 눌린다는 것이 아니라 ‘눌림 때문에 내 영혼이 녹습니다.’ 라는 것이거든요. 사실은 여기에 영혼이라고 번역되어있는 ‘나쁘시’라는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영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장 많은 뜻은 영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목숨이라는 뜻도 있고,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목구멍이라는 뜻도 있고, ‘후’하고 내쉬는 호흡이라는 뜻도 있고, 심지어는 마음과 정서라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이 ‘눌림’ 이것은 영혼을 짓누른다기 보다는 마음속에서 평소에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넘어서는 어떤 격한 무질서가 이 시인의 마음을 깊은 슬픔으로 몰아넣고 고통을 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호두를 많이 좋아하니까 호두를 까는 기계가 있습니다. 호두를 넣고 핸들을 돌리면 우두둑하고 깨지고 그 속에서 알갱이를 꺼내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워낙 이가 튼튼하니까 그저 입속에 넣고 우지직해서 나누어먹지요. 이게 처음에 호두를 넣고 핸들을 돌리면 호두가 찌그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안 깨집니다. 그러다가 견딜 수 있는 힘의 분량을 넘어서게 되면 우지직하고 소리를 내고 깨뜨려져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만나요. 그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 때에 그 속에서 격한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좋아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격한 고통이 시작될 때, 우리의 마음은 압박을 받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견딜 수 있는 강도가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두 가지 점에서 다른데 우선 첫째는 본성적으로 달라요. 사람이 그런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은 선천적으로 부모에게서 타고나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많은 겪음과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그런 도전과 응징 속에서, 겪음과 반응 속에서 그 속에서 자신의 본성이 자연적인 본성이 계속 강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오는 것입니다. 원래 모진 사람도 있지만 살아온 삶의 환경이 아주 모질게 되면 그 사람의 본성이 웬만한 고통스런 질서 속에서는 꺾어지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적인 성품에 있어서 강인함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그 반대쪽이 찌그러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결단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항상 한쪽에서는 자기가 사랑해야 될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어요. 그래서 상처를 주게 마련이죠. 그렇지요? 또 그런 사람들을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정이 있게 다루는 사람들은 과단성과 용기기 부족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적인 성품은 어느 한쪽이 아주 발달하면 그것 때문에 다른 쪽이 찌그러지고 부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강함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강함은 자연적인 성품을 찌그러트리지 않으면서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주는 시련과 고통의 무질서를 이기는 이 강한 힘은 사랑에서 오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에서 오는 강한 힘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이 어떤 도덕적인 잘못을 했을 때 강력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보면 자기가 아주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비난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는 자신도 그만 못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아요. 요번에 미국에서 아주 재미있는 조사가 나왔는데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포르노를 좋아하는 것을 앙케트 했어요. 그런데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교인일수록 비율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 것쯤은 허락하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프로테이지가 낮고 그런 것을 교회 안에서 얘기만 꺼내도 정죄하고(정죄하는 것은 당연히 맞지만…….) 잘못되었다고 강력하게 규칙을 가지고 있는 교단에 속한 교인이 그렇지 않은 교인들에 비해서 훨씬 더 높은 프로테이지로 그런 일들을 음성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시간이 없어서 전개하지 않겠지만 종교심리학적으로 그런 것들이 규명 되요. 참 놀랍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적인 것은 항상 한계를 가져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도덕적으로 자연적인 성품에 있어서 양심의 빛이 강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사람들은 그 죄를 미워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람도 함께 미워해요. 그런데 존 오웬 목사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처럼 올바른 것은 뭐냐 하면 이 죄가 발견될 때 그 죄는 아주 미워하면서도 그 죄인은 사랑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런 이분법적인 것은 사실 굉장히 힘든 것이거든요.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데 바가지는 미워하고 아내는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사실은 말은 아름답지만, 아내가 들을 때에 은혜로운 말이겠지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남편이 만날 술을 퍼먹고 밤늦게 와서 월급도 안 갖다 주고 그러는데 그런 것은 미워하고 남편은 더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어요.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주님이 죄인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한번 찾아가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죄인을 사로잡고 있고 그 죄인과 연루되어 있는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노하시는 예수님, 그런 죄에 붙잡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그러면서 당신의 품으로 부르심으로써 죄인들의 희망이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고통을 이기면서도 고통을 이기면서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주어지면 그 고통을 이기는 가운데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가 촉진 되요. 그런데 그 일이 비록 하나님의 일이었다 할지라도 은혜가 없이 그 고통스러운 무질서를 이기려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에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와서 심지어는 그것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도저히 정신이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경지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팍하고 찌그러지면서 회복할 수 없도록 정신이 부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울증, 정신착란, 피해망상, 조울증, 그런 많은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질병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Ⅲ. 마음의 녹음
이 시인이 그렇게 자기가 부스러질 것 같은 그런 마음의 격한 슬픔과 고통,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짓누르는 눌림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이 시인은 마음이 녹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녹사오니’라고 번역된 ‘다렛바’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특별히 초가 불붙으면서 녹아내리는 것을 묘사하는데 여러 번 사용되었어요. 그러니까 초는 식어서 굳은 상태에 있을 때에는 딱딱한 고체잖아요. 그런데 녹아내리면 물이 되잖아요. 그것을 굳혀서 약간 주물러서 다른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어렸을 때에 전기불이 나가면 장난을 많이 했잖아요?) 녹여서 어디에다 부어버리면 그렇게 되지요. 여러분 눈을 컵에 가득 채우고 파라핀을 녹여서 촛물을 만들어서 확 부어버리면 구멍이 뽕뽕 뚫어진 아주 멋있는 초가 나와요. 그렇게 자유자재로 형태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은 표면에서는 희로애락애오욕 하면서 막 칠정을 느끼면서 쉼 없이 팔딱거리면서 변하고 두 시간 전에 웃었다가 세 시간 후에 울고, 울었다가는 분노하고, 분노했다가는 또 잘못했다고도 하고, 이렇게 요변덕을 치지만 이 깊은 밑바닥은 안변하는 것입니다. 안변합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한번 눈물을 뚝뚝 흘리고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 안 돼요. 물론 이제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될 수는 있겠지만 오랫동안 자기 마음대로 살아놓고 눈물 한 방울 뚝 흘리고 지금 그것이 말하자면 자신의 인생이 전체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킨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영적인 이치를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마음의 큰 눌림과 슬픔을 종종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그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때에 그 마음이 녹아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형체가 녹기 전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초처럼, 쇠를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그 형태를 바꿔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뜨거운 고열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내리고 나면 그 철이 쇳덩어리가 자유자재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슬픔과 고통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녹지 않습니다. 녹는 것은, 녹는 마음은 하나님이 자기를 빚으시도록 충분히 허락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으로는 ‘내 마음아 하나님이 너를 빚으시도록 허락해 주거라. 하나님이 빚으시는 마음은 예쁜 마음이고 내 스스로 빚는 마음은 악한 마음이니…….’ 라고 아무리 우리 마음이 우리 마음에게 명령해도 마음은 그것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손보고 명령하면 이렇게 잘 순종하는 손이 마음이 손보다 더 가까이 있는데도 마음이 자신에게 명령하면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은 우리 스스로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러 곳에서
(찬양)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녹여요. 고통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며 우리의 삶을 생산해냈던 본거지인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뜻을 따라 잘 빚으시도록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허락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빚어지면 우리는 놀랍게도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제가 요즘에 목소리가 맛이 갔잖아요? 지난주에 집회를 여러 군데 갔는데 네덜란드에 가서도 집회를 했는데 아니 목사가 설교를 끝내고 나왔으면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든지……. 나는 그런 소리 듣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와서 감히 그런 얘기도 못하거든요. 하나님이 너무 크게 보여서 설교를 누가했는지도 잊어버린다고요. 그래도 와서 ‘말씀의 은혜를 조금 받았습니다.’ 라든지 ‘정말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라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목사님!’ ‘왜요?’ ‘혹시 CD있으세요?’ ‘무슨 CD요?’ 거기는 예배당이 아주 커서 우리는 여기서 찬송을 불러도 예쁘지를 않아요. 그런데 거기는 음악은 쫙 하고 울려 퍼져요. 굉장합니다. 그런데 설교는 잘 안 들려요. 로마 같은데 가면 돌멩이로 지어서 설교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도 합창소리는 너무 멋있게 들려요. 그날 그랬어요. 그러니 그 큰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니까……. ‘설교시간에 짤막하게 찬송하시는데 너무 은혜가 되는데 취입하신 것이 없느냐?’고 없다고 그랬지요. ‘혹시 모아놓으신 것 없어요?’ 없다고 그랬어요. ‘앞으로 그런 것을 취입하실 계획이 있으시냐?’ ‘아니 없다니까요.’ (짜증나게…….)
그래서 마음이 녹아내려요. 마음이 녹아내릴 때는 고통 그 자체가 마음을 녹이는 법은 없어요. 녹는다는 이야기가 두려움 속에서 녹는다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이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이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몰려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 속에서 마음이 막 녹아내리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것은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빚으시도록 그렇게 녹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의지하고 싶은 그런 종류의 녹음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제껏 내 마음의 주인이 나였고 생긴 마음 그대로 살다보니까 여기밖에는 못 왔습니다. 주님이 새롭게 내 마음을 빚어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빚어지겠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놀라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던 웨스트민스턴 채플에 전임목사님이 계셔요. 그분이 캔번모간이라는 목사님인데 저도 그분의 책을 한 두 권 번역했는데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하고는 색깔이 다른 목사님이시지만 정말 성경을 사랑하시고, 아주 경건하고, 성경에 익숙하신 분이었어요. 그래서 그 유명한 디엘 무디가 전도운동을 하고 막 교인들이 파죽지세로 늘어날 때에 그 때에 자기를 도울 목사님 두 분을 모셔요. 기도는 토레이 목사님을 모시고 성경은 모간목사님을 모셔요. 그래서 모간목사님이 그곳을 휴직을 하고 그리고 합류하셔요. 그래서 이 두 분이 디엘 무디와 함께 몰려든 교인들을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요. 참 아름다운 목회 아니에요? 그렇게 하셨어요. 그런데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해요. 부인과 함께 어느 교회를 갔는데 설교가 아주 깔끔해요. 그래서 부인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여보, 설교는 아주 잘하고 깔끔한데 그런데 왠지 가슴에 와 닿지 않지!’ 그리고 왔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거기를 다시 찾았어요. 설교가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지? 여보, 저 설교 너무 놀랍지 않아?’ ‘그래요. 예전과 설교가 놀랍게 달라졌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기간 동안에 죽을 고생을 이 목회자가 한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방법,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방법,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녹이시고 새로운 사람을 만드시는 경건의 놀라운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확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놀다가 적은 사람을 하나도 없어요. 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일어나고, 시련을 당하고, 고난 속에서 목표를 찾아가던 그런 믿음의 사람, 고난의 사람들이 적은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과 같은 길로 걸어가는 삶을 살 때에 성령이 쓰신 이 성경은 아주 놀랍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신적인 요소에 대한 경험이 은혜의 체험 속에서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요소들이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터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람 다윗을 쓰시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그 큰 고난을 당하게 하셔서 가난해서 제사장 이외에는 못 먹는 진설병을 집어먹을 정도로 극한 가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그렇게 사울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고통을 받고, 자기 자식에게까지 배신을 당하고 하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호의호식하고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을 왕이지만 모래를 씹는 것과 같은 일생을 살고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피투성이가 되어서 걸어가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 마음은 수시로 물같이 녹았어요. 그래서 본래 모친의 태에 있을 때부터 부패성을 지니고 태어난 바탕은 나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고난과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그의 마음을 끝없이 새롭게 빚으셨으니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늘 녹아내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양)내 마음 녹이셨네!
깊이 녹아내려요. 그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Ⅳ. 말씀으로 세워짐
그때에 그렇게 물같이 녹아내린 마음을 하나님 뜻대로 살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다시 빚으시는 일을 하나님이 하셨는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렇게 세우실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말씀대로 그랬는데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키데바레카’로 되어있는데 직역을 하면 ‘당신의 한 말씀을 따라서’ 혹은 ‘당신의 한 말씀같이’ 혹은 ‘당신의 한 말씀처럼’ 이렇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즉 ‘내 마음이 물같이 내 앞에 녹으면 내가 너를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이런 종류의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처럼 그렇게 나를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이 해석이 가능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데, 녹은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는데 그때 그 도구가,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데 이것을 어떻게 세워야 되겠느냐는 목표가 있을 것 아니에요? 벽을 쌓으면 쌓는 목표가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목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해석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해석이 훨씬 더 이 시의 원문에 부합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 한 말씀(according to),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옵소서.’ 성경에서 이 단어가 ‘카에마니’라는 단어인데 원래 ‘쿰’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쿰’은 ‘일어나다’라는 뜻인데 ‘달리다쿰’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쿰’입니다. 아주 쉽지요. 그래서 일어난다는 말이 성경에서 여러 번 나오는데 일상적으로 누웠다가 일어나는 것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영적 각성을 동반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서 일어서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이런 것……. 그 다음에 그 요나서에 나오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그 때 그것이 바로 같은 단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영적인 각성을 동반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거예요. 그냥 누웠다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쓰러졌던 나를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게 놀랍게 복수가 아니고 단수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영원히 정신없이 퍼져있을 때 말씀을 하나만 정확하게 듣고 깨뜨려져도 그 사람은 그 안에서 영혼이 소생되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66권을 다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면 더 좋지만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굳이 쓰러져서 받아야 하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죽을 것 같을 때만 와서 은혜를 받아야 되나요? 살 것 같고, 돈도 벌고, 시간도 있고, 건강도 있고, 그럴 때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지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라도 그것이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정확하게 받아들여지게 하실 때에 그 때에 그는 엎드러졌던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각성된 가운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V. 결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해요. 어떤 영적인 깊은 침체나 어려움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내가 이렇게 침체에 빠지는데 십년이 걸렸으니까 일어나는 것도 십년은 걸릴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5년은 혹은 2년은 걸릴 것이다.’ 그러는데. 그것은 상관없어요. 어떤 사람은 늘 회개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못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게 오랜 세월 죄가 운데 있었어도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실 때에 오직 당신의 말씀으로 치료하십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의 두 통로를 막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기도의 통로와 말씀의 통로를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진정한 영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놓여있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있든지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강력한 능력으로 하나님은 살리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처지에 있어 영혼이 눌리고 고통을 받더라도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에 의해 마음이 녹기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러진 여러분들을 다시 세우시는 주님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1 (2009/04/15,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2 (2009/04/29,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3 (2009/05/06,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4 (2009/05/20,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5 (2009/05/2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6 (2009/06/17,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7 (2009/07/01,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8 (2009/07/08, 수요예배)
내 영혼의 봄날의 위하여 9 (2009/11/11, 수요예배)
9.내 남자의 아름다움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희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게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 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볼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아 5:9-16).
I. 본문해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라는 시리즈인데 봄에 시작을 했는데 벌써 겨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로 마치려고 합니다. 이 제목이 오늘 내 남자의 아름다움이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제일 먼저 신부가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말을 하고 그리고 나니까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신부에게 말을 했더니 이 신부가 10절부터 16절까지 대답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신부가 부탁한 것은 신랑이 아마 잠시 어디 가서 출타중인데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는데 너희가 혹시 나 모르게 나의 사랑하는 그 남자를 만나거든 내가 자기를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다오. 그렇게 말을 했더니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이제 도대체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그 남자보다 뭐가 나은 게 있는가? 이렇게 묻고 나니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제 이 신부가 자기가 왜 그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를 쭉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II. 미녀가 사랑한 남자(8,9)
그래서 이제 9절에서는 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면 이 여자가 미녀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에 아주 강력한 표현으로 나와 있는데 여자 중, 히브리 성경에 복수로 나옵니다. 많은 여자들 중에 지극히 예쁜 자야 그리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뻤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이 사람 술람미 여자를 보면서 “여자들 중에 지극히 어여쁜 자야” 그리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어여쁜 사람이 사랑에 빠질 정도라면 야. 그 남자는 보통사람이 아니겠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부분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만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한, 그러니까 그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 여자들 눈에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추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자기가 그 남자를 너무 사랑함으로 상사병이 걸려서 누울 정도가 되었다고 말을 하니 그 여자가 사랑한 그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잠시 출타한 이 여자의 남자를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는 이천년 전에 나무에 달려 죽은 사대 성인의 한사람일 뿐입니다.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신자들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들만 그들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내세우는 성도들이 몰골이 흉악하고 행실이 험악하다면 그들은 그렇게 신랑에 대해서 궁금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인격과 삶에 있어서 행실이 아름답고 그리고 그 신랑을 사랑하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하니까 정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병이 날 정도로 사랑을 하는 진실한 애정이 있으니까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입니다. 그 신랑을 사랑한 사람이 너무 예쁜 여자라는 것, 그 신랑을 사랑한 그 여자의 사랑이 너무 애틋하다는 것, 두 가지에 끌려서 그 신랑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궁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자의 얼굴이 아주 예쁘다할지라도 그렇게 그 사람이 오면 오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이고 이렇게 했더라면 그 사람의 신랑을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궁금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남 보기에 반듯한 삶을 살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그래도 그것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수 없이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될 때 그때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랑이 모든 평안과 행복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저 사람이 저렇게 깊이 사랑에 빠져있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최고의 섬김은 존재로서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최고의 섬김입니다. 인격과 삶 속에서 흘러나오는 예수의 향취, 비록 이 세상에서 큰 지위와 많은 재산이 없어도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그 사랑의 마음 이것이 사람들에게 느껴질 때 신랑에 대해서 궁금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묻습니다. 너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또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남자보다 네 남자가 뛰어난 게 무엇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병이 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못 보면 병이 날 정도로 그렇게 아파하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네 남자는 뭐가 다른가? 예루살렘 여자들이 물었습니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게 “마”라고 나오는데 무엇도 되지만, 어떻게도 됩니다. 네 남자가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들보다 낫다면 어떻게 나은가, 어떤 방식으로 네 남자가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들보다 잘났기에 너는 네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병들어서 누울 정도가 되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다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사랑은 세상을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예수님 안에서 그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그리고 아름다움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성경을 통해서만 듣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스도 예수가 성육신해서 아주 아름답게 드러내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분을 탐구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라고 부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더 큽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더 큽니까? 과연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내 신랑은 세상이고 네 신랑은 예수인데 도대체 예수가 내가 사랑하는 세상 신랑보다 더 좋은 게 뭐가 있기에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를 그렇게 사무치도록 사랑하는가? 우리를 향해서 세상이 이렇게 물을 수 있도록 우리들이 예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본분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면 뭐합니까?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하면 무엇에다 쓰시겠습니까?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선교지에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일에 눌려서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선교사들이 그렇게 애쓰는 것도 모르고 그 흑인들이 잘 따라와 주지도 않으면서 속이고 그러니까 그 선교사들이 고통스러워 회의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니까 자기도 모르게 에이씨! 깜둥이 새끼들 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일은 하지만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일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눈을 떠서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세상을 신랑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렬하게 자기 신랑을 사랑하는지 한번 보십시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렬하게 살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저 인덕원 환락가에는 열렬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돈을 뿌리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랑은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는데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그 이상의 열렬함으로 주님을 사랑합니까?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도 이 신랑 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는데 도대체 네 신랑 예수는 어디가 얼마나 낫기에 내가 내 신랑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네 신랑을 더 사랑하는가?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는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았던 옛 여인처럼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책 한 줄을 읽는 것도, 교회에 와서 이일 저 일로 섬기는 것도, 내가 내 신랑 예수를 사랑하고 우리 지체들이 우리의 신랑 예수를 더 사랑하고 내 이웃들이 온 세상의 신랑이신 예수를 더 많이 사랑하도록 이바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새롭게 발견한 아름다움(10-16)
세 번째로는 이 술람미 여인이 자기가 왜 자기 신랑을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10절부터 16절까지 노래합니다. 이것을 다 해설하면 아마 한 달은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제 설교의 목적은 그게 아니라 10절부터 16절 사이에는 모든 묘사가 어디에 집중되는가 하면 신랑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한 아름다움입니다. 한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만 사람의 뛰어나다” 그래서 희다는 것은 아주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굴이 하얀 빛이 있고 티가 없다는 것은 고결하다는 것입니다. 붉다는 것은 젊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묘사할 때 그 얼굴을 붉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술 먹은 것처럼 시뻘것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볼 같은 데가 젊음이 있어서 발그레한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여야 할 때는 하얗고 붉어야 할 부분은 붉고 코만 시뻘겋다면 그게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얼굴이 하야면 고결해보입니다. 있는 집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가운데 전 세계가 절대로 못 따라오는 게 어떤 종류의 화장품인지 아십니까? 미백입니다. 얼굴을 하이타이에 빨다가도 하얗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얘기를 들으니까 구라파 여성들은 미백 화장품 한 개나, 두 개 그리고 거의 안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미백화장품만 수십 종류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여지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고결함과 그 넘치는 생명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따라가다가 지쳐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따라오시다 지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에는 항상 생명이 넘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이 고불고불하다는 히브리말이 꼬불꼬불한 게 아니라 이렇게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살 나부끼는 것,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곱술 머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곱슬머리가 아니라 이 단어가 히브리 성경에 단 한번밖에 안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논란이 많은데 아카더의 어근에 보면 새싹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을 가리키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이렇게 늘어지면서 바람이 불면 이렇게 나뭇잎 같은 게 흔들리면서 꼬불꼬불하게 보이듯이 그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그려보면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 머리는 정금 같다, 그랬는데 이것은 머리가 금빛이라는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금으로 잘 깎은 그런 형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아주 아름다움,
12절을 보면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 하고” 그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신랑의 눈을 이야기하는데 눈은 시냇가에 비둘기 같은데 연인의 눈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오늘 집에 가서 신랑의 눈을 보여 달라고 하십시오. 이렇게, 그러면 여기에 흰자위가 있고 그 다음에 까만 눈동자가 있는데 까만 눈동자는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사물이 맺히면 자기 얼굴이 있습니다. 거기서 막 움직입니다. 이것을 시냇가에서 움직이는 비둘기로 묘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보면 “젖으로 씻은 듯 하고”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젖, 우유를 가득 담은 목욕통에 사람이 앉아서 목욕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씻은 듯하고가 아니라 ‘우유 통에서 목욕을 하는 듯 하고’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얀 우유는 무엇인가 하면 흰자위입니다. 그래서 눈에 그 흰자위를 우유 통으로 묘사를 하고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눈동자를 비둘기로 묘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를 우유에 놓고 봤을 때 그게 마치 흰자위에 있는 눈동자처럼 보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최상으로 묘사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묘사를 해낸 것입니다.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향기로운 꽃밭만 되어도 좋은데 또 풀언덕입니다. 그러니까 풀과 꽃이 어우러진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가끔 가면 이렇게 과천 시내를 보면 넓은 땅에다 꽃을 수천송이 심어서 꽃밭을 만듭니다. 그게 무지하게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게 돈이 얼마나 들지 몰랐는데 우리 꽃밭을 만드는 것을 보니까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별로 그렇게 예쁘지 않습니다. 역시 파란 풀이 있고 거기에 꽃이 함께 어우러져있을 때 그게 진짜 자연스러움이 있고 아름다운 꽃밭이 아니겠습니까? 신랑에게서 이런 종합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니까 입술이 백합화 같다는 것은 그렇게 향기롭고 입 맞추고 싶은 그런 신부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의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얼마나 아마도 신랑의 벗은 몸을 봤겠지요? 그러니까 그 깎아내린 듯한 윤곽, 이런 것들이 상아를 깎은 아주 정교한 균형을 이루면서 몸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쭉 이야기가 나오면서 하다가 안 되니까 “입은 심히 다니” 그랬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키스로 묘사를 합니다. 그래서 키스를 해보니까 신랑의 입이 매우 달더라. 사실은 틀린 해석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입이란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는 입이 아니라 이렇게 만질 수가 없지만 혀를 대보면 입천장을 넘어가자 입천장에 막이 하나 나옵니다. 코하고 뭐하고 통하는 그 말랑말랑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입천장은 매우 달콤한데’ 이렇게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무엇입니까? 입천장이 달콤한 게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혀를 넣어서 말랑 말랑하게 만져지는 그 막이 무엇인가 하면 이 코와 성대, 모든 것을 통하면서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화의 기능을 하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입은 매우 달콤하니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신랑의 입에서 나오는 그 모든 말이 너무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모든 입술의 말이 너무나 감미롭고 사랑스러우니 그것으로도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마지막에 자꾸 물어 보지마. 그것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그 어느 하나가 예쁘지 않은 것이 없는 우리 신랑이로구나.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부의 마음속에 신랑이 떠나서 출타중인데도 조용히 눈을 감고 신랑을 생각하니까 신랑에게서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그 아름다움이 계속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꼭 보고 있어야지만 그 사람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시집가서 애를 낳고 길러보니까 그때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안 계신데도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성품이 내게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눈물 흘리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출타했는데도 이 여자는 신랑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이 병들어 홀로 잠든 밤에도 그 신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자기 신랑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병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은혜 안에서 생활할 때만 깨닫습니까, 혹은 침체에 빠졌을 때도 깨닫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좋은 분이신가. 우리에게 얼마나 꼭 필요한 분인가 하는 것을 성령 충만 할 때만 깨닫습니까, 아니면 은혜가 떨어졌을 때도 깨닫습니까? 은혜가 떨어졌을 때도 깨닫습니다. 주님이 출타하셨을 때도 우리는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방식이 좀 다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달콤한 속에서도 깨닫습니다. 침체에 빠져 미끄러졌을 때는 고통을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항상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생활하는 것을 원하시면서 도 종종 우리가 미끄러지도록 놔두시는 이유는 그렇게 그리스도 없이 살겠다는 우리가 정말 예수 없이 살아갈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달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놔두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예수 없이 살면 자유로울지 알았더니 더 큰 고통이 찾아오는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IV. 끝없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끝없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예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많이 알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깨달으면 그리스도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싫증이 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셨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움을 매일매일 발견하게 될 때 그때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는 예수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생각을 자꾸 해야지만 사랑을 하는 것이지 그래서 참 신기한 게 사람이 보기 싫어도 계속 보게 되면 정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각을 지배하고 그러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하나씩하나씩 알아간다면 내가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발견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끝없는 아름다움을 하나씩하나씩 발견해간다면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예수를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아름다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 아름다움은 몸이나 빛깔의 고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아름다움은 얼굴과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그 한없고 무한하신 그 크신 그리스도의 성품 때문에 아름다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아름다움은 도처에 묻어있습니다. 그것이 많이 묻어있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의 살아온 인생길입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면서 한번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의 길을 더듬어보십시오. 그렇게 더듬어보지 않을 때는 그저 그렇게 살아온 인생의 길인데 그런 길을 쭉 더듬어보고 돌아보면 어떤 고백이 나오게 되는가 하면 내 인생길을 주님이 인도하셨구나. 나 혼자 걸어온 인생길인줄 알았는데 그분이 함께 해주셨구나. 그런 게 어느 한순간에 확 가슴에 밀려옵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이
엊그제도 우리가 옛날에 있던 방배동에 총신대 강의를 하러 나가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거기를 지나가게 됩니다. 지나갈 때마다 그 터가 그대로 있으면 좋은데 그대로 없어도 그 옆에 있는 찌개집이니 뭐니 쭉 그대로 있습니다. 거기로 지나가면서 저기에 우리 교회 정문이 있던 자리인데 언덕을 내려가면 열린 교회 간판이 보였습니다. 옛날생각이 떠오릅니다. 지하실 교회에서 그 교회에 가서 계약하던 것부터 시작해서 성도들이 밤새워 일하면서 교회를 수리하던 광경이 다 생각이 납니다. 아, 그렇구나.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아, 그래. 우리가 여기에 있을 때 주님이 그렇게 함께 해주셨는데, 그리고 어떤 때는 가슴이 막 복받칩니다. ‘아, 정말 고생도 많이 했지만 여기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생생하게 우리와 함께 해주셨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드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여기에 맨 처음에 어떤 마음과 환경의 상태에서 교회를 찾았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와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회상해보십시오. 그런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얼마나 세밀하게 사랑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보라. 그가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 이런 감동적인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때 우리를 그렇게 감동시키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인생의 때에 우리를 다루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그 장소에 가서 그 회상을 할 때 가슴에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작년에는 지하실 교회에 한번 가봤습니다. 직원들 고생을 해서 점심을 한 끼를 사주었는데 근처에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야, 우리 성지순례를 한번 가자. 그래서 거기서 내려와 뒷골목에 갔더니 아직도 거기에 어느 교회가 있었습니다. 내려갔더니 우리가 사용할 때 보다 좀 다르게 수리를 했지만 그래도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감사헌금 십만 원부터 먼저 하고 그리고 우리가 옛날에 이 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니까 들어오라고 합니다. 가서 내가 쭉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배 강단이 여기에 있었는데 이 자리에는 누가 앉았었는데 누가 회심했고, 여기는 누가 졸던 자리고, 여기서는 누가 회심하고,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었고 다 이야기를 해주고 둘러앉아서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열린 교회의 교인들이 거기에 가서 기도회를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못 들어가서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 주님이 함께 하셨던 기억들은 주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성품이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렇게,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런 감동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우리들은 이상하게 그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많은 은혜를 회상하는데 인색합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니 심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감사가 솟아나지 않으니까 사람들에 대해서 퍽퍽합니다. 그리고 관용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감사함으로 너희 구할 것을 아뢰라. 이게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하는 비결입니다. 그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크게 보이면 세상은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작아 보이면 세상이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내 영혼이 잠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고 자기의 몸을 희생하신 그리고 나의 살아온 인생길, 걸음걸음마다 그 큰 사랑으로 인도해 오신 예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매일매일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혹하게 될 때 그때 성도는 바람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주님이 자신을 인도해 오셨던 그 순간순간의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흔적이 묻어있는데 왜 그런 것을 회상하는 일을 사람들이 게을리 할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안에 살지 않기 때문에 회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안에 살지 않으면 그런 옛날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고 거기에 정신이 팔릴 때는 은혜의 세계의 아름다움 같은 것 안중에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세계의 아름다움에 잠겨보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 공간, 그 사람들과의 교제, 그 모든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기 저기 묻어있지만 그 예수의 끝없는 아름다움이 가장 덩어리져서 놓여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주 크고 무한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과거에 나의 인생길을 인도해 오신 주님만이 아니라 지금도 나를 주님이 이끌어 가시고 인도하시는 그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V. 결론 :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함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본분은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세상 신랑은 언젠가는 자신들이 버릴 것이고 헤어져야 할 것이고 또 세상을 사랑한 사람들은 결국은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와 헤어질 수 없는 우리의 신랑이시고 삶 이편에서 뿐만 아니라 죽은 후 죽음 저편에서도 우리의 본분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맨 처음 우리가 회심하고 주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은 예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존귀하시고 아름다운 예수의 그 성품과 형상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웠기에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날이 되도록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그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사랑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봄날을 위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