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009년 설교모음)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죄 중에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시6:1) 2009.10.19 가을말씀 사경회(저녁) 1
2. 목숨을 걸고 기도함(시6:2) 2009.10.20 가을말씀 사경회(저녁) 15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 범죄한 영혼의 고통(시6:4) 2009.10.21 가을말씀 사경회(저녁) 28
4. 범죄한 영혼의 잃어버린 것들(시6:5) 2009.10.22 가을말씀 사경회(저녁) 45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5.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들 (2)(시6:5) 2009.10.23 가을말씀 사경회(저녁) 59
6. 범죄한 영혼의 탄식과 눈물(시6:6-7) 2009.11.1 주일오전 74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7. 용서받은 영혼의 자유(시6:8) 2009.11.8 주일오전 87
8. 회복된 영혼의 자유(시6:9) 2009.11.29 주일오전 95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9. 대적들을 이기게 한 용서(시6:10) 2009.12.6 주일오전 103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1 2009.10.19
죄 중에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I. 본문해설
II. 죄와 하나님의 성품
A. 진노하시는 하나님
B. 죄의 효과
1. 소극적: 낯섦과 거리감
2. 적극적: 震怒와 定罪感
C.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거룩함
2. 하나님의 中心性
3. 하나님이 찾으심
III. 죄와 인간의 참회
A. 탄원의 근거: 言約에 근거함
B. 참회의 과정: 依存을 회복함
IV. 결론: 하나님을 떠날 수 없음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2 2009.10.20
목숨을 걸고 기도함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2)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을 향한 집중
A. 참회와 갈망
1. 過去의 罪惡에 대하여
2. 現在의 苦難에 대하여
B. 긍휼을 구함
1. 慈悲에 호소함
2. 治療를 간구함
III. 영혼의 햇빛, 예수
IV. 결론: 목숨을 걸고 기도함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3 2009. 10. 21
범죄한 영혼의 고통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I. 본문해설
II. 범죄한 영혼의 고통
A. 마음의 격리
1. 교통의 본질: 성령
2. 격리: 은혜의 결핍
3. 은혜가 결핍된 마음
a. 양심의 송사
b. 율법의 정죄
c. 오성에 대한 감각의 방해
B. 인간의 무능
1. 行動은 영혼에 직접적 영향 불가
2. 恩惠는 영혼에 직접적 영향 가능
3. 罪의 영향은 은혜 거두심으로써
4. 마음의 選擇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
5. 距離感 제거에 무효한 것들: 자기암시, 위선,
동의 없는 고백, 마음으로부터 아닌 기도
6. 믿음과 依存;
a. 복음에 대한 믿음
1) 자신의 身分과 約束
2) 영원한 容恕와 懲戒의 의도
3) 그리스도의 義로 받아주심
b. 하나님에 대한 의존
1) 자신의 微賤함과 不潔을 자각함
2) 자신의 補償 행동이 아닌 전적인 慈悲
C. 영혼의 고통
III. 참회자의 소원
A. 하나님께 돌아감
B. 인자하신 하나님
IV. 결론: 사랑의 하나님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4 2009. 10. 22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I. 본문해설
II. 범죄와 영적 생명
A. 사망: תום
1. 생명(life)
a. vita creata 와 vita increata
b. 人間과 生命
1) 肉的 생명: 육체 + 영혼
2) 靈的 생명: 영혼 + 하나님 형상
a) 영혼과 성령의 결합
① ‘결합’의 의미
② 결합의 두 의미
-일반적 의미: 모든 인간
-특별적 의미: 오직 신자
b)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
① Imago Dei의 의미
② ‘결합’이라는 의미
-創造時: 결합된 채로 창조됨
-墮落時: 상실된 채로 살아감
-重生時: 중생을 통한 재창조
③ 결합의 결과: 생명
- 하나님 성품의 현실태적 발현
ⓐ 영혼과 마음 안에서
ⓑ 생활과 실천 안에서
- 영적 생명의 특성: 하나님을 보여줌
2. 사망(death)
- 생명의 결핍(privatio vitae)
a. 肉的 사망: 육체와 영혼의 결합 해체
b. 靈的 사망: 영혼이 하나님형상으로부터 멀어짐
1) 영혼과 하나님 형상의 결합: 성령의 은혜로써
2) 意志的 범죄
a) 성령의 은혜를 거두심
b) 영혼이 하나님 형상으로부터 멀어짐
① 은혜와 죄의 자리: 마음
② 마음의 죄가 영혼에 영향을 미침
③ 결합에서 멀어져 죄가 마음을 지배함
3) 결합 이탈의 결과: 죽음
a) 옛 성품의 현실태적 발현
① 영혼과 마음 안에서
② 생활과 실천 안에서
b) 영적 죽음의 특성: 옛 자아를 보여줌
c) 죽은 행실을 낳음: 노골적으로 대적함
B. 음부: לואשׁ
1. 음부의 개념
2. ‘영적 생명’의 결핍에 대한 은유
3. 성도들이 두려워한 상태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5 2009. 10. 23 금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들2:
기억과 감사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하)
I. 본문해설
-음부: לואשׁ
1) 음부의 개념
2) ‘영적 생명’의 결핍에 대한 은유
3) 성도들이 두려워한 상태
II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들:
A. 주를 기억함 : ךרכז- 기념
1. 신자의 가장 큰 의무: 하나님을 기억함
a. ‘기억한다’는 의미
1) 잊지 않도록 생각함
2) 잊지 않도록 紀念함
b. ‘紀念한다’는 의미
1) 잊지 않도록 自身을 자극함
2) 잊지 않도록 他人을 일깨움
c. 하나님이 의도하신 ‘기억’의 방식
1) 단지 잊었다가 다시 생각하는 방식이 아님
2) 하나님의 존재와 뜻이 영향을 끼침
a) 생각과 마음의 작용 안에서
b) 의지와 실천의 결정 안에서
3) 날마다 자신 안에 하나님 살아계시는 방식
2. 기억․기념: 내적 성향에 의함
a. ‘기념․기념’과 내적 성향
b. 내적 성향과 성령의 은혜
3. 범죄와 내적 성향의 상실
B. 주께 감사함 : הדוי -기림
1. 감사(感謝):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의 움직임
a. 이 움직임의 두 방식
1) 일반 섭리적 축복을 통한 움직임
2) 특별 영혼적 축복을 통한 움직임
b. 내적 성향과 이 움직임의 방법
1) 성령의 은혜로운 성향 충만시: 둘이 밀접히 교통
2) 성령의 은혜로운 성향 결핍시: 그렇지 않음
2. 감사는 기림임
a. 靈魂과 마음 안에서
b. 生活과 實踐 안에서
1) 감사 자체가 영적 성향임
2) 성향은 마음 안에서 그것을 발현하고자 함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
3. 범죄한 영혼엔 기림이 없음
a. 犯罪한 영혼은 자아중심적 임
b. 自我의 秩序를 추구함
c. 하나님의 統治를 대적함
d. 자아 질서의 成就를 보지 못하고 죽음
IV. 結論: 구원을 간구함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 10. 25 주일
범죄한 영혼의 탄식과 눈물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 6:6-7)
I. 본문해설
II. 범죄한 영혼의 탄식과 눈물
- 탄식: 영혼의 눌림을 인함
- 눈물: 죄악에 대해 후회함
III. 회개란 무엇인가?
A. 회개의 본질
1. 知性 : 죄를 깨달음
a. 개별적인 犯罪
b. 총체적인 罪性
2. 情緖 : 죄를 슬퍼함
a. 後悔의 정서와 懺悔의 정서
b. 罪에 대한 바른 인식의 증거
c. 槪念的 인식과 衷心的 인식
3. 意志 : 죄에서 돌이킴
a. 개별적인 犯罪로부터
b. 총체적인 罪性으로부터
B.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
1. 律法的 회개: 인간자기 중심
2. 福音的 회개: 그리스도 중심
C. 회개의 효과
1. 회개의 全人的 효과
2. 선한 意志의 새로움
a. 죄의 성향이 뿌리가 깊을 때
b. 죄의 성향이 그렇지 않을 때
3. 거룩한 恩惠의 효과
IV. 결론: 은혜로 부르시는 방법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7 2009. 11. 8 주일
용서 받은 영혼의 자유
“행악하는 너희여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시 6:8)
I. 본문해설
II. 赦罪의 두 측면
A. 본질적 측면
B. 경험적 측면
III. 사죄의 효과: 담대함
A. 담대함의 대상
1. 밖의 대적들
2. 안의 대적들
B. 담대함의 본질
1. 교통의 확신
2. 수납의 확신
IV. 다시 받으시는 하나님
V. 結論: 하나님 앞에 다시 서라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 11. 29 주일
회복된 영혼의 자유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I. 본문해설
II. 회복된 영혼의 자유
A. 용서와 자유
B. 자유로운 영혼의 기도
III. 간구하는 자를 용서하심
A. 자비를 구함
B. 죄를 뉘우침
IV. 결론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 12. 6 주일
대적들을 이기게 한 용서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10)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적들
A. 거룩한 목표를 향할 때
B. 죄로부터 각성할 때
III. 대적들을 이기게 한 용서
IV. 결론 : 하나님께 돌아오라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1.죄 중에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I. 본문해설
자 오늘 집회 첫 날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시편 제 6편 1절 보겠습니다. “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다시 한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성경의 표제가 가리키는 대로 다윗의 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가 탄원의 시일뿐, 참회의 시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시편 6편 전편에 다윗은 찢어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참회와 탄원을 함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가 언제 쓰여졌는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많은 구약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의 생애에서 일어났던 가장 가슴 아픈 사건, 압살롬이 아버지인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그 때에 그 환란을 겪은 직후에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데는 대개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편 6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육신의 큰 병이 생긴 상태에서 쓴 시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견해는 이 시편 6편은 영적인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과거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빌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죠. 이 시편 6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절인 1절은 총론적인 참회의 내용을 담고 있고 2절부터 7절까지는 그 구체적인 탄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 10절까지는 불현듯 시인의 마음속에 밀려온 사죄에 대한 확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오늘 이렇게 참회의 시에 말문을 엽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이 죄를 죄 중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들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죄와 하나님의 성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누렸던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다윗입니다. 사무엘하 11장까지 그는 순전한 성도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편 6편 1절에 나타난 상황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냘픈 시인의 모습입니다.
A. 진노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친밀하고 따뜻하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눈빛 앞에서 몸둘바를 모르고 두려워 떨며 영혼과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모두 궁핍하게 된 상태에서 목숨이 끊어질 것 같은 그 절절한 고통 속에서 오늘 이 시를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시인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시인이 범죄 한 후 즉시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지은 죄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치르게 하시는 그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6편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면 여기서 다윗이 뼈저리게 참회하는 것은 지난 날 하나님 앞에 지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의 죄일 것이다 라고 추측합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과 그리고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자신이 황급히 요단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 사이에는 상당한 세월의 길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을 때에 그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예고해 주셨고 그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결국은 다윗의 자손들 사이에 왕자의 난으로 나타났고 급기야는 결국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황망히 망명의 기리로 올라야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이제 예전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그 일은 끝났고 당시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던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죄를 깊이 참회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또 용서를 받았고 그래서 상당한 세월을 나라를 다스리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망명의 길에 오르고 그 큰 고통을 받는 동안에 이 시인은 다시한번 지난 날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지난날의 죄 뿐 아니라 비교적 반듯하게 살아 온 그 이후의 모든 삶의 죄까지 포함해서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는 그 모습을 오늘 이 6편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너무 신묘한 지혜와 경륜이 담겨졌기 때문에 이제 앞으로 이 시편 6편을 풀면서 이 문제를 더 많이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지식들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우리 인간의 모든 행복과 삶에서의 성공의 여부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을 올바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이고 이에서부터 멀어지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는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우리들이 몸의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정신으로 아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맨눈으로 하나님을 보아서는 알 수 없기가 태양을 쳐다보고 해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고, 또 그 성품이 어떻게 이 세상의 피조물들 속에 실행되고 작용하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시인은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많이 배웠습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그리고 땅의 산천초목과 우주의 삼라만상을 통해서도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신 우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배웠고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한 나라의 제왕으로 삼기까지 승리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이김을 주신 그 모든 인생역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우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많이 배우게 되었고 그리고 그 율법은 곧 자신의 인생과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고 세계와 이 우주를 보는 눈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보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비록 아주 뛰어난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갔다고 하더라도 시인이 아는 바는 하나님 자신의 어떠하심과 존재의 무엇이심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이 죄 가운데 깊이 은혜가운데 살았을 때는 차마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깨닫게 하심으로 결국은 죄와 불순종도 사용하셔서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전달할 하나님 자신에 관한 위대한 계시를 다윗의 인격과 신앙 안에 담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친교를 나누었지만 죄를 지을 때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죄의 효과
죄는 이러한 시인에게 두 가지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우선 소극적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낯섦과 거리감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우리는 매우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안에서 날마다 경험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영적인 순발력이라고도 부릅니다. 세상에 복잡다단한 일에 몰입되어 있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꽉 차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그러한 친밀함이 은혜 안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주님과의 친밀함이 있기 때문에 항상 그분과 나누는 풍부한 교제가 있어요.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남모르는 사람하고 함께 앉아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야기도 통하지 않는 남모르는 사람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친한 사람들이 만나면 이 사람 말 끝나기 전에 저 사람이 말하고 저 사람이 아직 이야기하고 있는데 듣는 것보다 자기 말하고 싶어서 말꼬리를 자르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친밀한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과 친밀할 때에는 기도도 아주 잘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을 때에는 굳이 그렇게 금식기도 할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아주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언어가 나오는 것이죠. 감정은 언어의 연못이야. 그래서 그 연못에 물이 많으면 물을 아무리 퍼내도 물이 계속 고이는 거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있게 되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예요. 은혜가 떨어지면 할 얘기가 없어요. 왜 하나님의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할 얘기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친밀한 속에서 풍부하게 기도의 언어가 나오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될 때에 친밀한 사람 사이에는 눈빛을 보고도 통하는 마음의 흐름이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에 마음의 표현이에요. 하나님은 마음 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빈 말 많이 하거든요. 전혀 하나님 앞에 헌신할 각오가 없으면서도 이 생명 바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가 하면 또 전혀 그럴 의사가 없으면서도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빈말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빈 말로 하시는 법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죠.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 있을 때에는 성경을 읽으면 그 성경에 빨려들듯이 막 기름처럼 우리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와서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속에 있는 아버지의 그 풍부한 그 마음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서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고 나면 내 마음은 사라지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런 친밀함이 서서히 혹은 신속하게 사라지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아주 낯선 관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런 서먹함이죠. 이런 서먹함은 또한 거리감을 동반해요.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져요. 그래서 때로는 고난이 오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나에게 아주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통해서 나에게 보여 주시는 거예요. 때로는 내 바깥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두운 골방에 혹은 감옥 속에 홀로 갇혀 있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이 내 마음속에 나타나는데 이게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증거에요. 그런데 범죄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무한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감이 느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은 그러한 반기감, 방치되어서 내동댕이쳐 버린 것 같은 그런 반기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상태를 가리키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회개할게 별로 없습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기를 생각해 봐도 특별한 죄가 생각이 나질 않는 거죠. 사실 이런 사람들이 훨씬 더 영적으로 곤고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거예요. 제가 시편 23편을 설교하면서도 이미 들었던 예화입니다.
(예화)개울가에서 군인 셋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상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돌멩이 50KG씩 주워오너라 그러고 자루를 하나씩 주었더니 한 사람은 50KG짜리 돌멩이 하나를 가져오고 두 번째 사람은 30KG, 20KG를 담아오고, 세 번째 사람은 공깃돌 천개를 담아서 50KG를 가져왔어요. 그 다음 명령이 황당해요. “모두 제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하나를 가져온 사람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있죠. 두개 가져온 사람도 조금 헷갈리다가 돌을 떠낸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딱 맞아요. 그런데 천개를 가져온 사람은 한 개의 돌멩이도 제자리에 둘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의 죄는 신문지상에 날 정도의 커다란 형법상의 죄만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죄고 그 죄의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질은 동일한 질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한 번에 커다란 창을 들고 와서 반항을 하고 어떤 사람은 이쑤시개를 가지고 와서 수백 번에 걸쳐서 하나님 앞에 반항을 하는 차이지 그렇게 된다 말이죠. 무지무악해진 가운데 커다란 틀에 있어서는 예배당에 다니고 십일조도 하고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복종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향한 온전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습관적인 모든 신앙생활이 나오는 거죠. 그리고 자신은 정말로 뚜렷하게 신문에 오르내릴 만한 그런 끔찍한 죄가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런데 자기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깨뜨려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이 객관적인 어두움과 주관적인 어두움에 갇혀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에요.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것을 매우 신뢰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도달하게 되는 거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아주 순결한 삶을 살면서도 매일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내 안에 있은 이 많은 죄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이 교만함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가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이런 교제가 거의 오랜 세월 끊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도소 들어 갈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뉘우쳐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귀납적인 방식으로 이것을 해석해 가야 한다는 것이죠. 즉 무슨 뜻이냐면 내 죄를 발견하고 내 마음에 그게 느껴지니까 아 내가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구나 이렇게 판단하지 말고 이렇게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이 영혼은 상태가 아주 좋거나 말씀에 강렬한 빛과 조명을 받아서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도록 어두움이 물러갔을 때에 가능한 것이에요. 그러면 뭘 어떻게 거꾸로 귀납해서 추측하느냐 그것은 이거에요. 죄 자체가 보이지 않으면 내게 하나님과의 그런 친밀함과 밀접한 친교가 있는가 하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 나의 영혼의 상태를 판단하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감기가 눈에 보입니까? 아마 감기가 진짜 걸렸는지를 보려면 기침이나 가래침을 가지고 바이러스 검사를 해야 될 거예요. 그런데 우리 병원체는 우리 눈에 안보여요. 그래도 증상이 나타나면 우리는 약국에 가서 감기약 사먹습니다. 콧물이 나고 뼈마디가 쑤시고 눈이 진물진물하고 목이 붓고 추워서 으슬으슬 떨리고 뼈마디가 콕콕콕콕 쑤시고 그러면 그거 뭐예요? 몸살이에요. 균 한번 본 적이 없어도 우리는 약국에 가서 교만을 떨죠.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면 아스피린 두알, 사리돈 한알, 그 다음에 판콜 한병 주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아픕니다 그러면 아, 약사가 그거 감기네요. 감기약을 제가 좀 지어드리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아예 약 이름까지 쫙 대서 이틀 치만 주시면 됩니다. 교만을 떨어요. 그리고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잖아요. 그러면 벌써 증상이 나타난 거쟈.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버림받은 것 같은 아주 먼 느낌을 받게 되었을 때에 그것만으로 이미 자신이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충분히 입증된 거예요.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도 경험을 했을 거예요.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자꾸 자신의 죄가 보여요. 그리고 성경말씀을 읽으면 꼭 하나님이 내가 그렇게 아파하는 부분만 바늘과 정확하게 찔러서 터트리세요. 그게 터트리면 물이 확 나오는데 그게 눈물이란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요. 그런데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래요.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성경을 수 없이 읽고 아니면 목사가 나타나서 당신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고 이야기해도 내가 뭘 하는 반발심이 생겨나는 거예요. 자신이 자신의 죄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의 마음을 거울로만 삼는다는 것은 굉장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한번 오늘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한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그리고 주님이 항상 여러분과 동행하시는 아름다운 교제를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친교를 깨고 낯섦을 도입하고 하나님과의 간격이 없는 동행하는 삶 속에서 밑도 끝도 없이 주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소리쳐 불러도 기도는 허공을 맴도는 것 같고 성경을 수 없이 읽어도 성경 속에 있는 사람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은 그런 객관적인 공허함이 여러분들에게 도입된 것은 죄의 효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이게 죄의 소극적인 효과에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죄의 적극적인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다는 느낌과 나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하는 정죄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오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사실은 우리가 이것도 신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 특별히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이 양심의 느낌, 판단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어떤 불순종과 잘못을 한 것에 대한 의식이 내 기억 속에 살아있을 때,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참 잘못된 일을 했다는 것,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면 이런 벌을 받아야 된다는 것, 이런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기억 자체가 사라지면 양심에 가책도 없고 정죄감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감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수십 년 전에 건축헌금 한 것은 액수까지 기억을 해도 우리의 죄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잘 잊어버리죠. 청문회하면 항상 하는 이야기죠.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 앞에 나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도의 영적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양심의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정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항상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며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의미는 아닌 것이에요. 오히려 이것을 잘 못 느끼는 극단적인 형태가 성경은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의 표요, 양심의 화인 맞은 사람들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오늘 이 시인은 다행히 자기의 죄도 자각하고 있고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도 깊이 자각하고 있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죄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자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진노하시고 정죄하신다고 하는 것은 오래전에 있었던 바로 그 한 가지 사건에 지은 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때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받았기 때문이죠. 그는 아마도 이 압살롬의 반역이라고 하는 자기 생애에 상상하지도 못한 끔찍한 일을 당하면서 그는 자기의 그 지난 날의 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그 본성 속에 담겨져 있는 그 죄의 깊은 뿌리들을 자기의 실존 속에서 발견하는 기회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진노가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끔찍하게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저리치듯이 자기의 죄를 혐오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 다윗이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를 깊이 자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진노당하고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정죄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깊은 의식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성품과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C. 거룩하신 하나님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에 수없이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 모두가 다 하나로 묶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집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원래 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존재론적인 격차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이외의 모든 것들의 원인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그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창조된 것이고 또 창조되어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그것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그 사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는 높낮이가 각기 다른 수많은 사물들이 있어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바 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와 그리고 식물의 차이, 땅에 붙박혀 있어서 햇빛과 양분을 먹으며 성장하는 수동적인 이 나무나 풀 같은 식물과 마음껏 돌아다니며 감각하는 동물들 그리고 먹고 마시고 인간 비슷하게 행동을 하지만 인간처럼 사랑하고 인간처럼 고뇌하고 가치를 찾아갈 수 있는 이성이 없는 짐승과 인간 사이의 차이는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는 거죠. 그래서 몸짓으로 치면 커다란 노새만도 못한 이 인간이 이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면서 이 세계를 가꾸어 가는 것 아니에요. 이렇게 무생물과 식물, 동물과 인간 사이에 아주 커다란 존재의 격차가 있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는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무한한 것이에요. 이것은 항상 가슴에 새기는데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격차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 인간이에요. 인간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우리들이 하나님도 모르고 나도 모르며 인생을 살때는 교만하게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이 모든 세계를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온 땅과 만물 위에 아주 뛰어나시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를 감히 내세울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님 앞에 엎드려지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이에요.
(예화)지난 주에 기도원에 있는데 금요일 날 밤이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천둥이 쳤던 것 같아요. 밤에 자다가 몃 번을 깼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잠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지직하면서 합선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쾅하고 치는 거예요. 그것을 보면서 그 먼 산에 하얀 빛줄기가 지나가면서 잠시 후에는 온 산을 뒤흔들 것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땅과 지축이 모두 뒤흔들리는 천둥소리가 나게 돼요. 그때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비행기만 타고 밑을 내려다 봐도 참 인간 개딱지 같은 집에 다닥다닥 붙어서 사는 것, 제일 웃기는 게 아파트에요. 내가 저런데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성냥갑같이 바끌바끌한데 또 그것도 한 채 없어가지고 또 마음 고생하고 그러는 것 보면 참 인간사는 것이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의 초월성,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위대함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돼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해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 중에 인간만 물론 천사 포함해서 인간만 위로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아래로는 세계를 알 수 있고 사람들을 알고 자기를 알 수 있는 사중의 지식을 주신 거예요. 인간만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만 반성을 해요. 하나님과 세계와 다른 인간들과 나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중의 지식을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당신 닮은 성품을 주셔야지만 당신 비슷하게 다스릴 것 아니에요? 우리나라에는 자기 부모가 가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예가 많지 않더라고요. 그죠? 일본 같은데 보면 어느 집 주인이 음식점을 하는데 미꾸라지를 구어서 파는 집이야. 그런데 3대, 4대째 미꾸라지를 구어서 팔아요. 근데 아들이 굉장히 훌륭한 대학을 나왔어. 그런데 그 가업을 물려받아서 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그게 아버지와 비슷한 기질, 그 사업에 대한 애착이나 포부 이런 게 있어야지만 그 가업이 물려지지 기질이나 사고방식이 아버지하고 완전히 다르면 아버지 죽을 때까진 해요. 죽은 다음에 빨리 팔아가지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결국은 거덜을 내잖아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맞게끔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당신 닮은 성품을 주셔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처럼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처럼 진실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처럼 공평할 수 있도록 하나님처럼 정직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많은 빛깔의 성품을 인간에게 주신 거죠. 그래서 인간이 그 성품을 가지고 잘 활용하면서 살면 가족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주위의 이웃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듣고 그리고 후세 사람들에게도 영광을 누려요.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가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데 우리의 죄를 속하는 그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너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거기에서 무얼 깨닫냐 하면 예전에는 내가 사랑하고 지식을 갖고 공평하고 한 것이 다 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경험하게 돼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나도 사랑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게 될 때에 내 사랑은 아주 가치 없는 그런 불결한 나 중심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쎴지만 주님의 올바름에 비하면 내 올바름은 휘청거리는 올바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미천한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미천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뭐 그런 것 아니에요. 금하고 티끌하고 비교하면 미천한 게 되겠죠. 그죠? 커다란 금덩어리와 먼지 티끌을 비교한다면 두 개의 가치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 이건 뭐냐 하면 더러운 거예요. 불결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커다란 불결을 경험했을 때에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진노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죠. 그때에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며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을 의지할 마음을 갖게 되죠. 그래서 한 사람, 성도의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깊이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고 자기는 티끌 같은 미천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얼마나 완전하고 순결하신 존재이며 자기는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결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아는 그 깊이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깊이에요. 이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커다랗게 자기를 향해 크게 진노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깊이 깨닫고 자각하게 되는 것은 그날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비췬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워낙 밝고 그리고 그가 그 죄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발견한 그것이 워낙 커다란 발견이었기 때문에 그가 오늘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의 뼈 속까지 묻혀있던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중심으로 삼으세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드시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굽히시거나 꺾으셔서 우리에게 맞추어주시는 법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인해서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단 하나의 길은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것도 우리 자신이 돌아간다기 보다는 우리는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어도 마음먹은 바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그래서 죄인이 회개하고 나면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회개하게 만드셨다는 고백을 하게 되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나 중심에 계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에 자기가 힘들고 곤고하면 찾아와서 힘들고 곤고한 것을 싸매주시고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지 자기가 왜 중심되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이렇게 곤고하고 슬픈 사람이 되었고 나는 이에 대해서 무슨 책임이 있는 가하는 것을 규명하려 들지를 않는 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사랑이라고 하는 쇠창살에 갇혀서 아주 무기력하게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가고 악을 행하고 노골적으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도 그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눈물만 흘리시면서 ‘얘야, 그리로 가지 마라. 제발 부탁하는데 가지마라. 나를 봐서라도 좀 그러지 말거라. 내가 진짜 너에게 애원을 한다. 나 불쌍하지도 않니?’ 이렇게 몸부림치다가 우리가 인심쓰듯이 ‘그러면 하나님께로 한번 돌아가 볼까요?’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친교를 누리던 삶에서 낯선 삶이 되고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없는 친밀한 삶에서 거리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어떠한 불순종과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오게 되었는지 스스로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진정한 참회의 정신이에요. 끊임없이 변명하고 합리화 하고 그리고 하와처럼 자신의 죄를 상활에 전가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끊임없이 그렇게 변명하는 그런 신앙의 태도로는 다시 그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 속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상실한 상태에서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그들의 마음에 들려도 그 마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경험을 스스로 노래하기를 주께서 나를 판단하실 때에 내가 의롭다하겠나이다. 이게 바로 참회하는 사람의 정신이에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금 여러분들의 곤고한 상황,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으며 사는 삶을 살다가 우리가 곤고하게 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산 사람은 결국은 곤고하게 될 수 밖에 없거든요. 태양을 등지고 걷는 사람이 어떻게 그림자를 잘라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필연적이에요. 누구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그 순간 결코 행복할 수 없어요. 불안은 그의 친구이고 그리고 고통과 번민은 그의 다정한 이웃이 됩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통도 느끼게 될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세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말할 수없는 친교를 누리며 살아도 지극히 짧은 인생인데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도 길지 않을 인생의 시간인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못 박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어요.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 안에서 하늘의 자원을 아주 풍성하게 누리면서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분에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에요. 문제는 그 하나님이 중심이 그리고 언제나 나의 영혼의 곤고함과 하나님과의 친교가 깨뜨려진 것은 물론 상황이 이용되어 질 수도 있어요. 남의 돈을 부당하게 취하기 위해서 만약에 사취했다면 물질에 대한 궁핍이라고 하는 환경이 있었던 것 아니에요. 그렇죠? 내가 만약에 어떤 죄에 빠졌다고 한다면 유혹이라고 하는 상황이 있지 않았겠어요?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했다면 그가 나를 분노하게 만든 정황이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기를 원하면 그렇게 있었던 정황에 자기의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생각으로는 하나님 앞에 돌아 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잘못과 책임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죄에 빠지고 불순종하게 된 모든 것이 상황과 도구들이 아무리 많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은 책임이 없고 모든 책임은 이것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나에게 있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야지만 참회의 길이 열린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남편 미워하고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랬더니 말이지 맨날 교회와 가지고 이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러면서 자기의 죄는 회개 안 하고 남편이 얼마나 나쁜 짓 했는지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해봐야 이웃 사는 사람들은 체면상 고개를 끄덕거려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신단 말이죠. 그런 태도로는 하나님 앞에서 면피하려는 태도로는 하나님 앞에 영혼의 참된 사랑을 회복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중심성이에요. 그게 언제나 우리의 영혼이 곤고해지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그냥 모든 상황은 접어요. 그걸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다 접고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셨으나 내가 하나님을 떠났나이다. 주님은 언제나 옳으셨지만 내가 하나님을 버렸나이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확정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해야 돼요. 그래서 이 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검사들의 그 일화를 들어 보면 범죄자들이 끝까지 죄를 자백 안 한 대요. 그러면 검사가 막 협박하고 공갈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타이르는 거죠. 밥도 사주고 그 다음에 담배도 주고 그 다음에 쉬는 시간에는 자기 인생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고 나면 어느 순간에 ‘사실은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예외 없이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고백이 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입으로 그렇게 시인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그것이 굉장히 커다란 말하자면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일평생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이 그것이잖아요. ‘하나님 나의 죄, 나의 큰 죄 때문이옵나이다. 모든 것은 나의 죄, 나의 큰 죄 때문이옵나이다.’ 그것을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무조건 오늘 밤에 남편, 가족, 무슨 주위에 있는 지체들, 또 뭐 나라의 상황 이렇게 핑계대지 말고 이것들은 모두 도구들일 뿐이옵고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것은 나였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책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을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이 중심이 되셔서 움직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이 고통을 느끼게 되면 결국은 당신이 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은 옳으신 분이고 내가 그 질서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라고 참회하며 당신께 옴으로 그럼으로써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다시 받으셔서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이 돌아갈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중심을 세우고 계셔서 우리가 스스로 회개하고 당신을 찾아갈 때까지는 아무것도 안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죠. 기준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중심으로 서 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다양한 모든 환경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우리의 삶 거기 딱 찾아오셔서 우리 스스로는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고 우리를 회개케 하시고 우리를 붙들어서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에요.
(예화)영국의 교회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 동네에 큰 죄에 대한 각성과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누가 와가지고 열렬하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한 농부가 신앙생활을 잘 안하고 까불며 살던 농부였는데 어느 날 밭을 매러 나왔어요. 그래서 쟁기로 밭을 매는데 잘라진 나무 둥치 하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땅에 뿌리를 뻗으면 땅의 지력을 많이 앗아가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금년에는 반드시 도끼로 찍어서라도 내가 이것을 땅 속에서 빼내고 만다. 그리고 흙을 판 다음에 도끼를 가져와서 들고 내려치려는 그 순간에 이 사람 마음속에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가슴을 때렸어요. ‘누구든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버리리라.’ 이걸 들고 내려치다가 자기가 주님 앞에 이렇게 열매도 맺지 못하고 밭만 망치고 있는 나무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도끼를 내려놓고 회개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 동네 사람들이 밭 갈다 말고 엉엉 우니까 저쪽 밭 갈던 사람이 와가지고 왜 그러냐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거를 찍으려고 그랬는데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열매 맺지 못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찍어버리실 것 같다고 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나도 동감이야 그리고 또 회개를 한 거예요. 그 회개가 온 동네에 다 퍼졌어요. 이거 실화에요. 성령의 역사죠. 그렇게 확 퍼진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속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두드리시고 닫혀진 우리의 마음을 향해 두드리시고 그리고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녹이시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되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거예요. 환경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서 사업이 망한다든지 뭐 이런 일들도 있을 수 있고 그러나 그런 외적인 일들이 일어나든 아니면 심정의 깊은 변화가 일어나든 어쨌든 어떤 변화가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멀리 떠나 불순종 가운데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두드리고 계시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찾으셔요. 우리의 인생의 있어서 주님 앞에 살아간 아름다운 날들은 우리의 자연적인 수명의 길이와 상관이 없어요. 불꽃처럼 잠시 살다가 갔어도 하나님만 사랑하며 산 사람들은 짧은 생애를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 길게 산 사람이에요. 엿가락처럼 길게 살아도 90세, 100세를 살았어도 그중에 20세에 회심하고 살아온 80년 중에 79년이 영적 침체 기간이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산 날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침체 속에서 사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죠. 영적인 면에서 보면은. 하나님 앞에 산 날이 살아 있는 것이 모두 산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이다 이 얘기에요. 그래서 찾으시는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들을 두드리시는 거죠.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렇게 주님이 부르시는 거죠. 부르시는 주님께 나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우리는 죄와 인간의 참회를 보게 되는 거죠.
III. 죄와 인간의 참회
이 시인은 1절에서 총론적으로 자기의 죄를 깊이 절감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자기를 이 죄에서 건져달라고 그리고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이 과거에든, 현재든 잘못한 것은 사실이고 하나님의 공평한 성품에 의하면 잘못했으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고 악을 행했으나 자기가 한 일은 나쁜 일이었으나 무조건 용서해주시고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탄원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A. 탄원의 근거 : 언약에 근거함
탄원의 근거가 바로 언약이에요. 우선 6편 1절의 초두에서 그는 먼저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여 라고 하는 하나님을 부르는 그 호칭이었어요. 근데 이 성경에 대표적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야훼라고 하는 이름과 그 다음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두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이 성함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다, 위대하고 힘이 있다 대개 그런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보여주는 그러한 단어에요. 그런데 이 여호와라고 하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당신이 창조주로서 모든 세상의 인류에게 당신 자신이 모든 만물 위에 가장 뛰어난 창조자요,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용도가 하나님이라면 이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하는 이 성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특별한 백성들에게 계시해주신 그들만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그리고 사실은 이 이름이 하나님의 본명이에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해 주셨고 이 시인은 바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언약에 근거해서 그 언약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에 근거해서 자신이 비록 죄를 지었고 악을 행한 것이 자기의 전적인 책임이며 오늘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이 그 죄에 대한 응분의 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언약을 기억하셔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이 큰 죄에서 이 큰 불행과 고통에서 구원해달라는 탄원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이죠. 이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이스라엘의 언약은 은혜언약이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이 은혜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혜택을 받음으로 맺어지는 관계라고 하는 것이고 이 은혜언약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묶어 놓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의무를 지니게 만드시는 이런 형태를 갖게 된 거죠. 하나님은 이 언약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 아무리 크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참회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여 하나님이 그를 무한히 용서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에요. 또 하나는 만약에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데 순종할 힘이 부족하다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무한히 공급해주시기로 약속하시는 거죠.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에요. 은혜의 힘이에요. 반면에 이 언약을 맺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두 가지를 실천해야 하는데 그 한 가지가 뭐냐 하면 잘 믿는 것이에요. 자기의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기 보다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 진리를 아멘하는 마음으로 굳게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생활이에요. 그래서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죄의 용서와 한량없는 은혜의 공급,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과 순종의 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함께 이렇게 엮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이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가 지은 죄는 분명히 있지만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고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것은 그냥 단순하게 내가 지금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우니까 당장 나를 야단치는 것을 그만두라고 하나님 앞에 항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렇게 주님의 분노로 자기를 견책하고 주님의 진노로 자기를 징계를 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섬기면서 온전한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맺어진 이 언약을 기억하면서 주님 내가 당신을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두렵고 뛰어나신 분, 능력이 큰 분이 아니라 나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리고 나를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의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용서와 그리고 영혼의 어두움과 이 무기력에서 벗어나 순종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다윗보다 훨씬 더 복된 위치에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때는 아직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고 희미하게 예고되는 그 중보자를 바라볼 뿐이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오셨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과 친교를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실한 참회가 없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따라서 이 믿음의 은혜를 순종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의 힘을 공급해주실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는 비록 악하고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깨달은 것 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뼈 속까지 배인 악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이 바로 이런 죄를 짓고 불순종했을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진실하게 참회하고 그 언약을 근거로 우리를 용서받아 다시 믿음으로 살게 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을 때에도 항상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B. 참회의 과정 : 의존을 회복함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의존을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 한번 여러분 살아온 인생의 길을 돌아보면서 이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환난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 도와 달라고 할 때에 간절히 매달린 적 있죠. 그때에 매달리는 것이 아무리 간절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말고 용서해달라고 비는 그 기도만큼 간절할 수는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의 인생의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오는 것은 그것은 삶의 문제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버림받고 하나님 앞에 멸망에 이르러야 하는 죄인이 용서받아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이 인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 전체가 달린 문제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잘못은 끊임없이 독립심을 갖는 것이 문제에요. 하나님이 회개할 때는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고 복을 주시면 주님이 주신 그 복 때문에 교만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납니다. 돈 많이 번 사람들, 가난하고 끼니가 없을 때에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신앙생활 하던 사람 많고요, 좋은 직장 갖지 못해서 직장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그때도 순수하던 사람들 많고요, 지금은 건강하게 자기 다닐 때에 돌아다니지만 질병에 병상에 누워서 살려만 주시면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몸부림칠 때에 절실했던 사람들이 더 많단 말이에요. 문제는 독립의 정신이 생기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그 독립심을 가끔 꺾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무너뜨리지 않으면 우리는 무서운 집념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요. 여러분 이렇게 걸어갈 때는 자기가 무슨 고집이 있나 생각이 돼요? 그러다가 벽 모서리에 쾅하고 부딪쳐서 여기가 찢어져서 한 열 바늘 꿰매고 피가 줄줄줄 흐르게 될 때에 자기의 이 걸음걸이가 얼마나 힘찬가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똑같아요. 하나님이 막으시기 전까지는 자기가 완고하다는 생각 거의 못합니다. 부딪히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완고하고 내 멋대로 사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끔 하나님이 길을 막으시고 때로는 가시를 두시고 때로는 웅덩이에 빠져서 도저히 자신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도움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절박한 지경에 이르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죠.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돈을 뺏으셔서, 명예에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불명예를 당하게 하심으로 사람에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이별하게 하심으로 건강을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프게 하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나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는 것이죠.
IV. 결론 : 하나님을 떠날 수 없음
그 과정을 통해서 이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서 통회하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다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던 교만은 꺾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마음이 생기게 되고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 이것을 얻기 위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묻어버리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서라도 주님과의 이 친밀한 교제와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하겠다는 마음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주시는 거죠.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죄와 불순종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거죠.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차가운 냉대와 그리고 불붙는 진노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여러분들에게 진노하시며 얼마나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면 불순종할 때에 여러분들이 차갑게 대해주시는 것을 느끼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십시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잠시는 떠날 수 있어도 주님을 영원히 이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을 거슬려 살지 말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2.목숨을 걸고 기도함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6:2).
Ⅰ. 본문해설
시인은 이제 2절부터 7절까지 구체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내용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먼저 자기의 육체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쭉 7절까지 이어지는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시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밖에부터 시작해서 육체를 거쳐 그리고 그의 영혼과 내면으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바깥으로 나오며 그가 하나님 앞에 제 3자적인 관점에서 자기가 어떻게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이 인생의 커다란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라고 말합니다. 수척하였다는 것은 바짝 말랐다는 뜻입니다. 아마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여러 날 동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아마 곡기를 끊으며 금식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 경견한 사람들은 국가적인 위기가 오거나 혹은 자신의 일신상이라도 커다란 고난이 올 때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재를 무릅쓰고 기도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잠자리에 들어 자신의 몸을 만져볼 때 바짝 마르고 수척해진 자신의 신체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뼈가 떨렸다고 나오는데 우리말에서는 단수로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뼈가 복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나의 뼈들이 떨리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뼈가 떨린다는 말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이것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자신의 전 존재가 불안해하며 두려움 속에 떠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사람들의 뼈들이 떨리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 뼈들이 떨리거나 혹은 거룩하신 임재가 아니더라도 커다란 환란이나 국가적인 재앙, 혹은 그런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에 접했을 때에 그 재앙이나 혹은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신데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진로를 샀기 때문이라는 신전의식 때문에 자신의 전 존재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기도 속에서 자신의 몸이 바짝 말라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뼈가 오늘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큰 고난과 그리고 자신의 악함 때문에 떨리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을 향한 집중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놀라운 집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집중하며 매달려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시가 왕이 된 후에 기록된 것이라고 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A. 참회와 갈망
그렇다면 이 시인은 그렇게 하 나라의 제왕이 되어서 바쁜 정사를 돌보고 한 나라 전체를 책임진 존귀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오늘 그는 한 나라의 제왕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혁혁한 승리를 경험한 역전의 노장과 같은 장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 앞에서 두려움 속에 떨며 하나님께 자비를 호소하고 있는 한 사람의 신자로 하나님을 향한 고도의 집중 속에서 하나님 앞에 참회와 갈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참회와 또 한편으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간절했는지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작용들이 신체에까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혼과 그리고 육체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물질 자체에 섞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영혼과 물질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마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이 육체와 영혼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큰 고난 속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돌아보고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행했던 죄에 대한 징계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해석할 때 그는 영혼이 하나님 앞에 고도의 떨림을 경험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한 집중을 보였습니다. 거기에서 그야말로 진액을 짜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매달리게 되었을 때에 그의 육체에도 이런 영혼의 집중적인 작용이 실제의 효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고도로 집중될 때에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대해서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고도의 집중력을 갖게 될 때에도 우리 역시 이렇게 고행하는 것처럼 금식을 하거나 혹은 수면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깨어있기 때문에 나의 육신도 그러한 정신의 작용에 길들여져서 그것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시인은 먼저 과거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들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이 때 이 사람이 직면했던 그 죄가 바로 이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커다란 징계가 뒤따를 것이라고 예고되었던 그러한 자신의 끔찍한 범죄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과거에 지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남아있는 그러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현재적인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성찰하며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회개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고도의 집중된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내적인 작용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사랑은 영혼의 특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이 잠시 머무는 세상이 전부 다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나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영혼을 탐구해서 영혼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아는 자는 영혼을 알고, 영혼을 깨달은 사람은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고 그 영혼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영접하고 그 사랑에 감격할 때 사실은 나를 향한 이런 사랑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나를 향하여 계속되어온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게 됩니다. 회개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향한 고도의 집중 속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될 때에 이 죄가 오늘 짓고 있는 죄인가, 아니면 내일 짓기 위해서 내 마음에 준비된 죄인가, 혹은 이전에 아주 어렸을 때에 정말 옛날에 지은 죄인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고도의 집중된 관심과 사랑이 이 모든 시간의 간격을 부숴버리고 한 번에 우리 앞에 다가오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꽤 오래전 일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가정을 심방 갔습니다. 부인이 계셨는데 연세가 많으시죠. 회갑은 훨씬 넘은 분으로 기억되는데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심을 하니까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도 항상 예수님 생각이 나고 그리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은혜가 참 감사한데 그 전에 상당한 날 동안 하나님이 자신이 아주 소싯적에 처녀 때에 지은 잘못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주 어렸을 때 지었던 죄까지 다 생각나게 하셔서 그래서 자기가 그 때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그리고 가슴 아프게 만들어 주시더라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회개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 우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고 깊이 회개하게 될 때에 그때 사실은 우리의 과거의 죄악을 회개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게하는 하나의 모티브는 되지요. 왜? 내 의식 속에 명료하게 살아있는 것은 미래에 지을 죄가 아니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죄가 아니라 과거에 지었고 과거에 지은 죄 중에서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부터 내 의식 속에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엄마 뱃속에서 지은 죄 같은 그런 것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식 속에서 행한 그 죄들이 먼저 생각나는 것이죠. 그것은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러나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참회할 때는 과거의 죄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죄를 지어왔고 또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존재 자체가 죄와 결별될 수 없는 그 상태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에요. 그 상태를 회개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의 간구를 들으시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때에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에 일어날 모든 죄까지 주님이 용서해주시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니까 우리에게는 지은 죄, 짓고 있는 죄, 앞으로 지을 죄 이렇게 구별이 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니까 그 모든 죄들이 한 번에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한 번에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죠. 이 시인이 과거의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통회할 때 거기에는 아직까지도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악에 대한 회개도 포함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편 6편이 어떻게 참회의 시가 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고통 받는다는 이야기만 나오고 있지 이 안에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해석이지요. 왜냐 하면 이 시인은 지금 비록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시편 6편 전편에서 참회하는 마음이 가득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시인은 6편에서의 이 회개가 너무나 철저하고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어떤 죄, 어떤 죄를 가릴 필요가 없이 자신 안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죄성을 심오하게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고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으며 그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오히려 구체적으로 ‘내가 물건을 훔쳤습니다. 무슨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했습니다.’ 라는 구체적인 자신의 죄에 대한 열거가 나오지 않은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통절한 회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회개의 정이 깊어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내 안에 죄도 있고 아주 잘한 것도 있고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훌륭한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자체가 하나님 앞에 전체가 악의 덩어리요 그리고 죄악의 덩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주님 앞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이에요. 그게 과장입니까? 정말 죄인 중에 사도바울이 괴수입니까? 괴수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프로토스인데 The first라는 뜻이에요. 정말 죄질의 순서대로 줄을 세우면 정말 사도바울이 1등이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일생동안 복음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았던 그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자신 안에 있는 아직까지도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려고 하는 죄성, 그리고 이전에 그렇게 하나님을 표독스럽게 대적하던 그것이 역시 아직까지도 자신 안에 죄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던 것이에요.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후에 자신은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이 시는 시인 다윗이 쓴 시 가운데 가장 심오한 참회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오늘날 우리는 참회의 삶을 거의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 우리 조상보다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더 많이 유혹을 받고 더 많이 죄를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적게 참회하고 진실하게 뉘우치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의 영적 생명은 고사되어 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낯섦과 거리감은 그 도를 더해가게 되는 것이죠. 과거의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 시인의 이 모습은 과거에 지은 죄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몸이 수척하도록 뼈가 떨리도록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그 순간조차도 자신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이 자신의 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궁금증이 들것입니다. ‘아니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잘 보이는 죄가, 그렇게 처절하게 느껴지는 죄가 나에게는 왜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라고 말입니다. 간단합니다. 거무스름한 옷에 더러운 것이 묻는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빨래를 해보면 뭐 빨래를 해주지도 않는 주제에 ‘빨래를 해보면…….’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웃겠지만 그러나 옛날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는 다 했습니다. 옛날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얀 옷을 빨 때에 검은 물이 많이 나옵니까? 까만 옷을 빨 때에 검은 물이 많이 나옵니까? 당연하죠. 그러면 여러분들 중의 어떤 분은 아니 검은 옷을 빠니까 검은 물이 빠져서 그렇지요. 요새가 어느 때인데 검은 옷에서 검은 물이 빠집니까? 그것도 다 옛날 60년대 70년대에 물감 집에서 물감을 사다가 솥을 걸어놓고 물감을 들일 때의 얘기지 왜 지금 까만 옷에서 검은 물이 빠집니까? 만약에 그런 일이 있으면 당장 바꿔주지요. 절대 안 빠집니다. 때입니다. 때에요. 물감이 아니라 때에요. 왜? 흰옷은 조금만 더러워도 금방 깨닫고 그 옷은 못 입는다고 바로 빱니다. 그런데 까만 옷은 반질반질해져야 아 때가 탔구나! 이렇게 깨닫는 것이에요. 광이 나기 시작 해야지만 때가 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빨면 시커먼 물이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시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 때 침체에 빠졌을 때는 검정 빨래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때 위에 때, 그때 위에 또 때, 그렇게 묻어도 자기가 때 묻은 사람인 줄을 선지자가 와서 준엄하게 꾸짖을 때까지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빛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놀라운 것이 그것이에요. 회개할게 별로 없는 사람들이 늘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달라고 빌지요. 정말 용서받아야할 죄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마릅니다. 눈물이 말라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보면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이렇게 찢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주님을 더 잘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미어지던 때는 언제였느냐 하면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고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사랑할 때에 그런 기도를 드렸지 노라리로 교회를 다닐 때에는 그런 기도가 안 나와요. 그것을 기억해야 되요. 그래서 주님은 있는 자에게 더 많이 주시고 없는 자의 것을 뺏어서 있는 자를 더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내일 죽어도 여러분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를 말하지 않는 기독교는 믿지 마라.’ 그것이 내 유언이에요. ‘회개를 전하지 않는 기독교는 믿지 마라.’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예수를 전하는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회개를 전하지 않는 전하는 예수는 가짜 예수에요. 가짜 예수에요. 왜? 예수가 왜 그렇게 필요합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그 커다란 이 죄와 그리고 정죄의 강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가 필요하잖아요? 그러니까 회개가 사라지는 그곳에서 예수의 복음도 함께 사라져가요. 그래도 예수를 말하는 곳은 예수를 바꿔서 말하는 것이에요. ‘예수는 경영학의 천재다. 예수는 마케팅의 수재다. 예수를 잘 탐구하면 부동산 투자의 길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변형시키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오늘날 보는 것이에요. 내 설교를 한 20편쯤 읽은 어느 신학대학 교수가 아마 지금도 이것을 듣고 있을 지도 몰라요. 논문을 썼어요. 그리고 책으로 냈어요. ‘열린 교회 김남준 목사는 결벽증환자다.’ 나는 그것을 읽는 순간에 진심으로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안 되어서 지금 눈물이 나는 것이잖아요.
시인은 과거의 죄가 계기가 되어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뼈저리게 배어있는 죄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빛을 받았을 때에 그분이 얼마나 초월적으로 높으시고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 자기가 얼마나 가치 없는 인간이고 자신이 얼마나 더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솔직하게 얘기해서 몇 가지 다윗이 죄를 범한 것을 제외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다윗 같은 임금이 있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나라를 다스렸던 그 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렇게 아들이 왕이 된 다음에 궁궐을 짓는 것을 본다면 그 부왕인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소박하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성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판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의 불결을 보고 자신도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참회를 촉진한 것은 현재 그가 당하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3년이나 넘도록 면밀 주도하게 반란을 계획했고 그리고 아버지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을 꾀어 자기편으로 회유시켰고 무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다윗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황망하게 벗은 발로 망명길로 도망을 쳐야했던 이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이 고통은 아마 왕위를 버리고 도망가는 그 피난의 고통보다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버림을 받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백성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그 정신적인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현재의 깊은 고난 속에서 그 모든 고난을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아직도 시인에게는 무기도 있고 군사도 있고 권력도 있었습니다. 피난길에서 자기를 욕하는 악한 백성들을 죽여 버릴 수도 있었고 보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오늘 일어난 이 모든 고통스러운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리고 누구 한사람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오히려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시므이라는 인간이 다윗이 그렇게 선정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흙을 뿌리면서 다윗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모욕하였습니다. 단칼에 베어버리려고 하는 부하를 말리면서 오히려 다윗은 말했습니다. ‘놔둬라,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하여 나를 욕하시는 줄을 누가 알겠느냐?’ 당시 법궤는 왕권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어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법궤를 가지고 피난을 갔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법궤를 그냥 두고 떠나면서 ‘만약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가 다시 돌아와서 이 법궤를 볼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반란을 일으키는 아들도 미워하지 않고 자기의 휘하의 장수들이 변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복수를 꿈꾸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현재에 일어난 모든 고난을 통하여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요. 그리고 내 영광이요.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와 자신의 왕국과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한분을 주목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우리를 밀어 넣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나에게 이 고통을 준 사람, 나에게 이 고통을 준 많은 다른 인간들을 생각하며 복수의 칼을 갈고 그리고 어금니를 깨물며 보복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고통과 악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려고 마음먹는 그 순간 악을 당한 이웃보다도 더 커다란 해를 우리의 영혼이 입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를 깊이 원망하면 그것은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솟구치게 만들었던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서 나를 어둠속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현재의 당하는 모든 고난을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홀로 한 일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동안에 늘 해오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역사를 기억해보십시오. 자신을 그렇게 핍박하며 죽여 버리기까지 모함을 꾸몄던 그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에 그는 형들을 향한 그 어떠한 미움의 감정도 없이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당신들의 악을 사용하셔서 나를 이곳으로 먼저 보내어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심으로 온 세상으로 굶주림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B. 긍휼을 구함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현재의 고난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라는 말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비를 호소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자신이 현재의 큰 고난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주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변명하거나 핑계하기에 급급해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모든 잘못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 주님 앞에 가지고가서 언약백성에게 무한한 죄의 용서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그 한없는 은혜의 언약에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에 호소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사람과는 말로 다툴 때는 논리에 이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논리에 이긴 사람이 이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꺾은 사람이 이긴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한 20여 년 전에 창세기를 읽으면서 아주 커다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사건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창세기 28장에서 얍복 강가에서 그는 형을 만나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큰 두려움 속에서 이제 앞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강을 건너보낸 후에 마지막으로 그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지 않아요? 그 때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천사에게 매달려서 나를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내가 놓지 않겠다고 매달립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그를 축복하고 이름을 바꿔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옛날에 성경을 읽을 때는 그것이 열렬하게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항복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호세아서에 호세아 선지자가 그 부분을 해설하는 구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천사가 그를 이기지 못한 것은 천사를 붙들고 씨름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만약에 천사가 사람하고 씨름을 해서 항복을 할 정도면 그 천사를 어디다가 쓰겠어요?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가르쳐주니까 그렇게 구수하게 배워왔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통회한 것이에요. 그래서 호세아서에 나오는 해석하고 전부 연결하면 창세기의 스토리가 이렇게 재편되는 것이에요. 맨 처음에는 씨름을 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야곱의 기질이 나온 것이에요. ‘에이 씨 한번 밀어붙여보면 뭐가 안 될까? 이 천사 이외에는 내게 카드가 이것밖에 없다. 여기에서 기회를 놓치면 나는 멸망이다.’ 하면서 막 매달린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을 때의 그 집요함하고 똑같은 것이에요. 그리고 라반의 집에 가서 결국은 라반하고 싸워서 이기는 그것하고 술수에 술수를 더해서 결국은 재산을 빼앗아오는 그 기질하고 아주 유사한 것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안되겠으니까 천사가 한때 내려치니까 그러니까 환도가 어긋났어요. 환도가 복숭아 뼈가 아니라 여기 허리에 있는 뼈에요. 그래서 아이를 가지면 환도가 시리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남자의 모든 힘이 허리에서 나오는데 허리를 쳐서 위골이 되게 만들었으니까 다리를 질질 끌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 그때에 씨름을 하는데 가장 커다란 힘이 가는 부분이 어디죠? 두 다리에요. 두 다리를 쫙 버티고 발달한 근육이 있는 상체로 상대방을 휘어잡아서 흔들어도 이 흔들어주는 힘을 지탱해주는 것은 이 다리 두 개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한쪽을 어긋나게 만들어서 질질 끌 수밖에 없는 장애의 상태를 만들어버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이제는 도저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엉엉 울어버린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통회한 것이에요. 내 방식대로 살아와서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꺾어보려고 했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밖에는 나에게 남은 것이 없다고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네가 나를 이겼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이거든요. 무엇으로 이긴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꺾어지는 통회자복으로 하나님을 이긴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께 졌다는 뜻이에요. 이긴 것이 졌다는 뜻이에요. 그런 스토리에요. 그러면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꾀로 살아오던 이 야곱, 그리고 그 때마다 인간의 지혜와 모략으로 극복해보려고 했던 그 간사한 사기꾼 같은 야곱을 마지막에 완전히 꺾으셔서 주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칼빈주의적인 교리를 그 속에 심어준 후에야 하나님이 ‘얘야, 너는 이제 야곱이 아니다.’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만날 때가 더 많이 있었잖아요? 그것 말고도 하나님을 만날 때가 많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야곱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그 사람 속에 심어주셔서 그래서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심어주셨어요. 그것이 무엇이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뿐입니다.’ 이것을 고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목사님들이 가끔 ‘기도할 때는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하셔야합니다.’ 그러니까 또 기도시간에 하나님께 성경을 가르쳐드리기에 바쁜 사람들이 많이 생겨요. ‘하나님 창세기 몇 장 몇 절에는 이렇게 되어있고…….’ 그분이 쓰셨는데 뭐 그리 주어 섬겨요? 그러다가 장수가 틀리면 어떻게 해요. 창피해서. ‘몇 장 몇 절에는 이렇게 되어있고 이렇게 되어있고……. 몇 장 몇 절에는 저렇게 되어있는데…….이런 거 아닙니까?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저렇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계속 코너로 몰고 가다가 마지막에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해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오만방자한 기도가 어디 있어요?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지……. 주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성경구절을 대지 않아도 다 기억하셔요. 잊지 말아야 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 기억하세요. 본인이나 잘 기억하면 되요. 하나님께 그것을 깨닫게 해드릴 필요 없고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나는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이렇게 시련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내가 이렇게 당하는 것은 나의 죄 때문이고 하나님은 정당합니다. 비록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할 만큼 악을 행하고 주님 앞에 나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는 있잖아요.
하나님의 사랑 속에는 긍휼이라는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어떤 죄를 짓거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커다란 불행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렇게 커다랗게 불행한 상태가 되었을 때에 그 원인이 무엇인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된 그 사람 자체를 보고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성품이 바로 긍휼이에요. 긍휼이에요. 시인은 바로 그런 긍휼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악함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탄원하며 자기를 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더 많이 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더 많이 원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당신 사이에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죄악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죄를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죄악 됨을 인정하지 않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아요. 위로해주고 싶으셔도 위로해줄 만큼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사면을 돌아보아도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누구이든지 언제나 당신의 자비로운 성품을 기억하며 용서해달라고 당신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자비하신 마음으로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깨뜨려진 가운데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십시오. 주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불순종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가득하게 된 영혼의 어두움과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반항하는 감정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사라져버린 현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낯섦과 두려움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탄원하십시오.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호소하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여러분들을 용서해주시고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영혼에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시인은 오늘 이런 긍휼을 구하는 기도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라파라는 동사가 여기에 쓰였습니다. 라파의 분사가 로페인데 이 로페가 바로 히브리어로 의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라파’로 계시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이 시인이 치료해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육체보다도 더 큰 질병의 상태에 있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치료였고 그 영혼에 치료와 함께 자연스럽게 자신의 육체의 치료도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이죠.
매튜 헨리라는 영국의 경건한 목사님은 그래서 저도 그 목사님에게 배워서 병상에 가서 항상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사람이 원하지 않는 질병의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 후딱 낫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병이 낫는 과정이 저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고치는 영혼의 치료의 과정과 일치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앞부분은 내가 따라 하기가 좀 그렇지만 뒷부분은 따라하지요. 그래서 병실에 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 이 사람 오늘밤 기적을 베푸셔서 내일 아침에 퇴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 이 사람이 육신의 질병이 치료되어가는 모든 과정이 저의 영혼이 고쳐지는 과정과 일치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면 회개를 천천히 하면 병원에 좀 더 오래 있어야 해요. 기도가 참으로 뼈있는 기도란 말이죠.
우리는 흔히 질병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죠? 내가 아는 목사님이 가슴이 자꾸 뜨끔뜨끔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진찰하자마자 지금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그러더래요. 그것은 질병이죠? 아마 그 목사님이 하루쯤 늦게 갔으면 아마 천국 가셨을 거예요. 그 선고를 받는 그 순간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남의 이야기라고 그러지 말고……. 뜨끔뜨끔해가지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빨리 핸드폰을 쳐서 보호자 오라고 그러십시오. 지금 빨리 수술해야합니다. 오늘 수술을 안 하면 당장 죽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심정이 될까요? ‘내일 아침이 곗날인데 안 됩니다. 계를 타야지 수술을 받지요. 제가 시간나면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러겠어요?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옷부터 벗을 것 아니에요. 어떻게 되지요? ‘당신은 질병상태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라고 의사가 선고하는 그 순간 여러분들은 의사에게 자기를 다 맡기잖아요? 내가 병원에 입원해보니까 스케줄이고 뭐고 다 안 해도 되는 것들이더라고요. 전화 한통씩만 하면 되요. ‘목사님 입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끝이에요. 집회고 강의고 뭐고 입원했다는데 어떻게 해요? 다 안 해도 되는 것들이라고요. 그러니까 일평생 우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고 사는 것이에요. 아니 이 집회도 입원했으면 못하는 것이잖아요. 뭐 어떻게 해요. 내가 수술실에 누워있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니까 진짜로 중요한 일을, 그런 일을 당했을 때에 의사에게 자기 자신을 다 맡기고 자신에 대해서 전혀 주장하지 않고 그 의사의 치료에 희망을 걸지 않겠어요? 그러면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영혼의 그런 질병상태를 깨달았으면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그래야 되지 않아요? 우리 교회는 없어요. 참 다행이에요. 그런데 초창기에 여러분들이 어수룩했을 때 그 때 직접은 말도 못하고 몇 사람을 통해서 슬슬 돌려서 ‘목사님 우리 좀 위로하는 설교를 해주십시오. 무슨 설교를 해주십시오.’ ‘여기가 무슨 뷔페집 인줄 아느냐? 주는 대로 먹으라고 그래라. 우리는 단품메뉴밖에는 안한다.’ 그렇게 건방을 떨어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자기가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야. 그것은 무엇과 똑같으냐하면 수술실에 배를 가르고 누워서 ‘그 칼 말고 저 칼을 써요. 그것은 디자인이 안 예쁘잖아요. 저 옆에 있는 칼로 쓰세요.’ ‘왜?’ ‘디자인이 최신인데 그것으로 해요. 그래도 내 배의 자존감이 있지 어떻게 38년도에 나온 칼로 배를 가릅니까? 내 배 색깔하고 나이프 색깔하고 조화가 됩니까? 저 은색으로 된 것 저것으로 하세요.’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아주 흉한 질병상태에 있으면서 교회는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수술대 위에 누워본 적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 자신이 참 대단하다고 다니는데 그 기가 막힌 질병의 상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악취를 느끼고 불결함을 느끼게 되잖아요. 누워요. 누워……. 수술대에 누워서 그래서 ‘주님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치료해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무슨 칼로 나를 고치시든지 거기에 전적으로 승복하고 고쳐지기를 원하는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야하지 않겠어요?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의 놀라운 묘미는 바로 이렇게 신앙 안에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이에요.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이렇게 고쳐서 새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영혼의 햇빛, 예수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햇빛이십니다. 벌써 여러해 전에 오래전이죠. 미국에서 야심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뭐냐 하면 결국 핵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모두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핵전쟁뿐만 아니라 위성의 충돌이라든지 그렇게 해서 지구가 멸망할 수 있는 많은 예상되는 요인들이 있어요. 그 속에서 인류를 보존하는 길은 무엇일까? 해서 지하에다 도시를 만드는 것이에요. 그래서 적어도 몇 십만이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에요. 지금도 스위스 같은 나라에 가면 일만 명씩 모여서 몇 달씩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을 지하에 만들어놓고 살아요. 그런데 미국은 그보다 훨씬 더 크게 그러다보면 결국 마지막에 지구가 다 멸망해도 지구가 마지막 살아남는 그 나라 것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쨌든 밑으로 파서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물도 거기에 있고, 음식도 저장할 수 있고, 다 있는데 무엇이 문제지요?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음식을 저장하고 곡식을 챙기는 방식으로써는 해결이 안 돼요. 보관이 문제잖아요. 그래서 지하에 야심찬 실험을 했는데 어떤 실험을 했느냐하면 인공으로 빛을 만들어서 그 빛의 성질이 태양과 아주 근접하게 만든 다음에 그 빛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가? 만약에 그것이 성공한다면 얼마든지 지하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죠. 커다란 공간을 만드는 것이야 요새의 토목기술로는 일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산 같은 것을 파놓고 수백 미터를 내려가서 거기서 커다란 플라자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그리고 거기에 광선을 쏘아서 그것은 전기나 그런 것이 아니라 태양열 같은 것으로 발전해서 오면 지상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도 햇빛이 계속 비치는 한 문제가 안 되고, 최근에 보니까 또 우주 밖에다가 거울을 비치해서 해가 지지도 않고 뜨지도 않는 늘 언제나 있는 태양의 빛을 전파로 바꾸어서 발전을 한다고 하는데 20년 안에 상용화 될지도 모른다는데 어쨌든 그런 방법으로 하면 문제가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해놓고 그 빛을 비추어서 그래서 식물도 가꾸고 쌀도 심고 밀도 심고해서 지상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능한 것이잖아요. 굉장히 오래 연구했어요.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태양을 모조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생활에 필요한 살균하는 것 등 많은 기능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자연태양처럼 모든 사물들에 생명을 주는 이 기능은 인간이 만든 조명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에요.
이 세상에는 빛이신 주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들이 아주 많아요. 그렇죠? 여러분 실제로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없고 궁핍하고 그래서 이 세상사는 것이 괴로울 때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돈을 만나는 것이 더 급해요.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의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것은 가짜 빛이에요. 그것을 대치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만이 우리 영혼에 유일한 햇빛이시고 그래서 이 모든 자연사물들이 아무리 밝은 전구의 빛을 받아도 스스로 생존할 수 없고 밝은 태양의 빛, 그것으로서 이 모든 식물들이 생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가짜 빛으로는 치료될 수가 없어요.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빛에 의해서만, 그 진리의 빛에 의해서만 우리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날 수 있고 병들었던 영혼이 고침을 받을 수가 있고 그리고 어두웠던 영혼에 영적인 광명이 깃들 수가 있는 것이에요.
IV. 결론 : 목숨 걸고 기도함
그러므로 오늘 이 시인이 우리는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그 현재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죄악에 대해 참회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길은 오직 그분 한분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직 그분 앞에 나아가 자신의 인생에 전 존재를 걸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그분의 긍휼과 사랑을 입고 영혼의 생명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향해 목숨을 걸고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이 사람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시며 그리고 얼마나 망가진 우리의 영혼을 잘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신지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 죄 가운데 고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커다란 죄인이라고 두려워 떠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향해 진실하고 정직하게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고 목숨을 건 기도 속에서 주님과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분께 병들고 망가진 자신의 영혼이 온전히 고침받기를 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오늘도 불러서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것이에요. 망가진 영혼으로 병든 육체를 끌고 사는 삶이 얼마나 곤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지 맙시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믿든지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믿음생활을 보고 뭐라고 말 하든지 간에 우리는 이렇게 이 시인처럼 참회와 갈망 속에서 긍휼을 구하므로 정결하게 되고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빛 안에서 사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3.범죄한 영혼의 고통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6:4).
I. 본문해설
이어서 시인은 범죄한 영혼의 고통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살피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뼈가 떨린다고 고백했던 것과 꼭 같이 자신의 영혼도 또한 심히 떨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떨림은 뼈들의 떨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절망적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외적인 환경의 고통과 내적인 영혼의 고통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어느 때가지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하나님께 물으며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건져주시도록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범죄한 영혼의 고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한 영혼의 고통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범죄한 영혼의 고통
우리들은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면 영혼의 죽음과 방불한 상태가 이르게 되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는 엄중한 경고를 수없이 받으면서도 그것을 실제로 자신이 체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지를 모릅니다. 마치 방황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묘사해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또한 범죄한 영혼의 고통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에 빠져 악을 행하고 고통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그리고 섭리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불에 한번 데어본 아이들이 오래도록 그 불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기까지는 그 일에 대한 유혹과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친교가 얼마나 복된 것이고, 그 은혜 아래서 주님의 눈빛 아래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생활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범죄한 영혼으로서 어둠 속에 신음하며 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은 모두 죄에서 용서를 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그렇게 영혼이 범죄하여 그 고통가운데 있는 뼈저린 아픈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죄의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영혼에 직접적인 복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받는 일반섭리의 복들은 우리의 영혼에 간접적인 영향밖에는 미치지 못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이 영적인 축복이야 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이고, 우리의 존재가 어떻게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잊혀지지 않도록 강력하게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현재적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그 하나님 앞에 끔찍한 죄인중의 괴수였는가 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적 사랑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현재적인 자신의 죄인 됨을 하나님 앞에 인식하며 산다는 이야기하고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대한 인식과 자기의 악함에 대한 인식은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끔직한 죄인인 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며,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죄가 아직까지도 자기 안에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신자는 나쁜 신자들입니다.
A. 마음의 격리
이렇게 범죄한 영혼의 고통을 오늘 시인은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최소한 3가지를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격리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범죄한 영혼의 고통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감이라고 하는 것이죠. 사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주의를 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거리감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종류의 거리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거리감은 하나님이 피조물인 나 인간에 대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거리감이에요. 근데 이것은 잘 들으세요. 이것은 한 사람의 신자의 마음속에 은혜가 크면 클수록 거리감이 많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에서 오는 거리감이에요. 이해가 잘 안되시죠. 그렇게 확신을 합니다. 근데 이 예화를 기억하면 평생 절대로 안 잊어버릴 거예요. 이런 뜻이에요. 이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에서 오는 거리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그 무한한 질적인 차이,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 이 모든 세계를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아주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에 의해서 지음바 된 아주 하찮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존재의 크기와 중요성으로 하나님과 견주어 보자면 나는 ‘Nothing’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그 인식이에요. 그런 종류의 거리감은 은혜를 받을수록 많아지는 거예요, 은혜를 받을수록. 그래서 은혜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주먹만 하게 보이고 그리고 자기가 온 세상을 가득채운 것처럼 느껴지는데,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하나님이 정말 위대해 보이시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전도사 사역할 때 청소년들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한번 깊이 어루만지고 지나가시니까 이 찬양할 때 레퍼토리가 달라져요. 레퍼토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의 레퍼토리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노래하는 이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그때 그렇게 울면서 잘 부르던 찬송이 그런 거예요.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 주소서 주님을 경배하오니 주님을 찬양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 하사 다스리소서)
요만한 학생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그런 고백을 해요. 나는 하나님이 계셔서 참 행복합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러면서 찬양을 부르면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찬양을 부르면 우리 전체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거 같애, 끝나고 나면 땅으로 다시 내려오는 거 같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은혜가 가득 찼을 때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복종을 하는 거예요. 복종을 하는 거예요. 참 놀라워요.
또 하나의 거리감이 있어요. 그 거리감이 뭐냐 하면 죄로 말미암는 격리감이에요, 격리감. 나는 이것을 반기감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던져 버리셔서 그래서 관계없이 버리신 거 같은 그런, 버림받은 거 같은 그런 반기감, 그런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런 종류의 거리감이죠. 이거는 은혜가 떨어져야지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똑같은 거리감인데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를 아는데서 오는 거리감은 그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친교가 느껴져요. 그런데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에 찾아오는 격리감은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친교가 느껴지지 않는 철저한 버림받은 반기감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오늘 도대체 이 반기감의 버림받은 듯한 느낌의 이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때 버림받은 것 같은 그 느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교통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과 느끼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이 친밀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말씀드렸듯이 신자가 그리스도와 갖는 이 연합은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 거야. 그래서 이 원리적인 연합은 구원 받았을 때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맺게 해 주시고, 새 생명의 하나님의 영적인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심기어지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바로 원리적인 연합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런데 이것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서 그의 불변하는 언약을 따라 맺어진 연합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는 것이에요. 마치 여러분의 자녀들이 집에서 돈 타가고, 속 썩이고, 공부 안하고, 말썽 피우고, 사고치고 그래도 호적 파서 던지지 않는 것처럼 그런 것처럼 원리적인 이 연합은 변함이 없는 거예요.
근데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비례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우리들이 경험하는 연합이에요. 우리가 경험하는 연합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주님이 아주 나 가까이 계시고 친밀하시다라고 하는 것을 내가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부하나님과도 교제할 수 있고,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도 각각 교제할 수 있어요. 다만 성부와 교제할 때 성자와 성령이 제외되시는 그런 형태의 교제는 아니죠. 근데 이렇게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성부 하나님과 교통을 하게 될 때 우선적으로 내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경험되는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이에요. 성자와 교통할 때에는 은혜가, 성령과 교통할 때는 위로가 느껴지는데 놀라운 것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성부와의 교통 속에서 느끼게 될 때,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아주 더 곤고해 지는 거죠. 즉,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달을 때 우리는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도입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또 아울러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느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을 때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고 있는 중이죠. 그리고 성령께로부터 오는 커다란 위로를 우리들이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또한 이러한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도입해 주신, 보내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찬송하게 됨으로 삼위 중 어느 위와의 교통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화시키고, 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경험이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자와 삼위 각 위와의 교통의 교리예요.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안에서 교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이 끈이 되어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리적인 연합 안에서 실제적인 연합을 공고히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고, 우리의 가장 큰 의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은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통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을 이루는 이 교통의 본질이 바로 성령이셔요. 성령. 그러니까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느껴지는 아주 커다란 거리감은 격리감인데, 그 격리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성령의 활발한 역사의 결핍으로 말미암는 격리감이에요. 그것을 우리들이 은혜의 결핍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죠.
우리는 이제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우리가 은혜 안에 있었을 때도 있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렇게 사경회를 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은혜를 받고 하면 하나님이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은혜를 부어주시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요. 그래서 아주 놀랍게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살게 되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복되고 행복한 일이겠어요? 그런 충만한 기쁨과 그리고 은혜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그 은혜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거죠.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낙심하고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고, 자살하고 싶어지고 그럴 텐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들어 주고, 그리고 그 많은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망이나 죽음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곤곤히 하면서 살게 되는 거죠.
우리 딸이 수능이 3주가 남았답니다. 근데 난 어제 참 감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침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러는 거야. “아빠”,“왜”,“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이 고3 때가 제일 행복해, 아빠” 사실 그렇게 말하는 애는 대한민국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고 3때가 죽을 맛인데 그럼 왜 그렇게 행복하냐? 그렇게 이른 새벽서부터 밤 새벽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그리고 도서관에서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할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해 줘요.
그러니까 환경이 변화해서 어떤 감각적인 사물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 거긴 절대로 우리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잠시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게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런 은혜를 충만히 누리면서 살다가 죄를 짓게 되요. 그럼 놀랍게 한 순간에 이 은혜가 막 파괴되기 시작하고, 그리고 마음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육욕이 솟으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을 막 치열하게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아니면 물질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탐욕을 품거나,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범죄하거나,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마음과 정신에 이렇게 고름, 균형되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고른 상태가 깨뜨려지게 될 때 그때에 인간의 마음이 거칠어지면서 각양 범죄와 그 다음에 욕망들이 분출하게 되는 거란 말이죠. 육체도 똑같은 거예요. 육체도 이 육체 안에서 이 아름다운 조화가 탁 깨뜨려지기 시작하면 건강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봇물처럼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을 항상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이 죄가 굉장히 커다란 능력이 있구나’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 사랑했었는데 내가 이렇게 죄를 지으니까 한 순간에 영혼의 어두움이 오고, 그 다음에 지성의 눈멂이 찾아오고, 의지가 완고해지고, 정서는 인간의 무가치한 육욕에, 불결한 육욕에 의해서 막 냄비에서 물 끓듯이 막 끓어오르면서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때 야 ‘이 죄가 굉장히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구나’ 실제로 성경에서도 죄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죄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위대하다기 보다도 커다란 능력에 대해서, 그래서 우리들이 간증을 하잖아요.
근데 이제 오늘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준 이 교리로 이것을 깔끔하게 정리를 하세요. 이건 뭐냐 하면 죄의 능력이 위대한 게 아니라, 죄의 능력이 위대한 게 아니라, 뭐냐 하면 그럼 만약에 그 은혜의 본질이 성령님이신데 그렇지 않아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감화라고 보든지, 아니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언급대로 이 은혜 그 자체가 이 은혜가 성령 그 자체라고 보든지 간에 그것이 어떻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그것이 어쨌든 간에 성령이신데 본질적으로는 성령이신데 어떤 죄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으로 딱 들어갔을 때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그야말로 죄가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런 식으로 현상학적으로 죄를 사람들에게 실감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자면 무슨 음식물이 썩는 것을 비유한다든지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누룩으로 뭐가 이렇게 음식이 썩는 것을 비유를 한다든지, 누룩으로 비유를 한다든지, 예수님은 누룩을 이렇게 번져나가는 복음의 승리로 했지만, 또 서신서에서는 사도들은 그것을 누룩같이 번져가는 악으로도 설명을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설명이에요. 이것을 신학에서 ‘accommodation’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눈높이 수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인간에게 설명을 해 주는 accommodation’ 형태의 설명이에요. 인제 이것을 좀 더 본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죄가 위대한 능력이 있어서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진 성령의 교통을 파괴한다든지, 무효화 시킨다든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의지로서 죄를 선택할 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주셨던 그 은혜를 철수시키시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세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남의 집에 가서 금을 이렇게, 이거 금 아니에요. 저녁때 가져가면 안 돼요. 이거 쇠예요, 쇠. 이렇게 금을 이렇게 가지고 가는 게 죄예요? 아니에요? 죄죠. 그죠. 그러면 어떤 이것을 가지고 간 사람이 신자라고 칩시다. 아주 쉽게 예를 드는 거예요. 은혜가 충만했었는데 순간적으로 유혹을 받아서 와서 가져가야지, 그리고 이거를 훔쳐 가야지, 그러고 이것을 넣어가지고 갔다 이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마음에 따뜻하게 밀려오던 하나님의 은혜가 식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진짜 금이 아니고 쇠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 가세요? 훔쳐갔는데 이게 금인 줄 알고 훔쳐갔는데 알고 보니까 5,000원만 주면 어디서든지 살 수 있는 쇳덩어리야, 이게 금인 줄 알고 훔쳐갔다 이거야, 그러면 사실 이게 진짜 금이었으면 훔쳐 가면 엄청나게 큰 죄겠지만 이게 금이 아니고 5,000원짜리였다면 훔쳐갔을 때 뭐 그렇게 큰 죄가 되겠어요? 이게 5000원짜리 훔쳐갔는데, 경찰서에서 그러지 말라고 훈방하지 않겠어요? 그와 상관이 없는 거예요. 똑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이해되죠?
그런데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어떤 사람이 은행에 뛰어 들어온 거야, 그러면서 돈을 빨리 가방에 싸라, 그러고 총을 겨눈 거예요. 근데 이 사람의 표정이 강도짓 하러온 사람이 아니야, 거의 울상이 되어서 빨리 돈을 싸라, 그러면서 보여주는데 뭐냐 하면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이게 뭐냐 하면 이걸 내가 조정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저쪽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거야, 나를 제발 살려 달라, 빨리 싸라, 이 얘기예요. 결국은 그 진위가 판명이 안됐어요. 왜냐하면 결국은 터졌어요. 이 사람이 산산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진짜 위장을 해서 그렇게 한거냐, 아니면 원격 조정을 해서 결국 터트려 버린거냐 판단이 안 되서 결국은 수사를 못했어요.
자, 예를 들어서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야 이거 내가 갖고 가면 그러니까 니가 가지고 가’ 이렇게 해서 스카치테이프를 못 띄게끔 붙여서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를 협박하기 때문에 이걸 끌고 나갔다, 그러면 나의 영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이게 설령 금이었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 마음의 의지로 선택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단순한 외면적인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사한 영혼의 움직임을 보고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그 분량만큼 당신의 은혜를 철수시키는 거죠.
똑같아요. 요렇게 훔칠까 아 이거 팔아야 될 텐데 만지고 간 사람하고, 이걸 갖고 가다가 아이고 그럼 안 되지 진실하게 살라고 목사님이 늘 그러셨는데 갖다놓고 온 사람과 갖고 가서 판 사람과 팔 때 나중에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다시 대출 받아서 도로 사다가 갖다 논 사람과 이틀 후에, 아주 가지고 도망간 사람은 각기 그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각기 다른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로서 선택하는 죄의 크기만큼 정확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그 사람 안에 이미 주셨던 그 성령의 은혜를 철수시키시는 거예요. 그 철수시키셨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너무나 무섭게 나타나니까 마치 죄의 위대한 힘이 나의 은혜를 말살시켜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거죠. 근데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요것은 굉장히 여러 해 동안 제가 고민하던 문제예요. 이렇게 하면서 성경적으로 풀었어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거두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은혜 안에 있을 때 아주 단정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이러던 사람들이 은혜가 떨어졌을 때 그렇게 폭력적이고 막 예수 믿는 사람 집에서 막 사람을 때리고 그러잖아요. 그럼 안 되거든요. 일단 경찰서에다가 집어넣고 그러고 담임목사실로 전화를 해, 그렇게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죄가 얼마나 위대한가, 엄청난 능력이 있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은혜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인간이 갑자기 그렇게 된 아니라 원래 그런 인간이었는데 은혜의 힘이 그거를 누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은혜가 사라졌을 때 뻗쳐 나오는 그 무서운 타락의 기운과 그 폭력적이고 말하자면 불결함을 보면서 우리는 죄의 큰 능력을 보게 되는 게 아니라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이 있는가, 그걸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느끼는 거리감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뭘 보여 주냐 하면 그런 걸 보여주는 거죠.
좀 더 설명할게 들어보세요. 결국은 이러한 논리로 미루어,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마음의 의지로서 죄를 선택하게 되면 하나님이 은혜를 철수시키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은혜가 결핍된 마음이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서운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때에 이제 두 가지 일이 우리의 의식세계 안에서 일어나요. 그게 뭐냐 하면 양심의 송사예요. 양심은 뭐냐 하면 두 가지 기능을 갖는데 우리를 의식 속에,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의식 속에 붙어있어서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사람이라고 고발하는 역할을 양심이 하는 거예요. 이것을 송사의 기능이라고 하는 거예요.
또 하나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잘못을 한 것에 대해서 이만한 벌을 받아야 된다 라는 판결을 내리는 기능을 양심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뭐냐 하면 그때에는 양심이 홀로 일하지 않고 율법을 사용해서 판단을 하는 거예요. 아는 사람들은 기억 속에 있는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양심 자체 안에 내장되어 있는 율법의 기능을 통해서 하는 거죠. 그러니까 무신론자하고 유신론자하고 둘이 싸우면서 신이 없다고 막 떠들다가 전쟁터에서, 내가 실제로 들은 이야기예요. 막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막 이렇게 미군 병사들이 떠들다가 내가 아는 사람이 거기 같이 있었어요. 근데 전쟁이 일어나고 갑자기 막 커다란 폭탄 하나가 막사 옆에 팡 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딨냐고 그러는 사람이 제일 먼저 “Oh, my God" 제일 먼저 하더래요. 왜 God 이 My 야, 자기들한테 왜 My God 돼? 니네 하나님이라고 모르지만 어떻게 자기 하나님이라고 해요? 하나님 없다는 사람이. 그렇게 인간 안에 이미 율법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 정죄를 하는 거예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볼게요. 여러분들이 어떤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막 죽고 싶죠. 그렇죠?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판결을 내려주는 거예요. 니가 한 일이 죽을죄를 지은거다. 율법이 판결을 내려 주는 거예요. 누가 죽으라는 사람도 없는데 왜 스스로 죽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판결을 내려 주는 것이니까 이것을 사단이 사용을 하는 거예요. 자기에게 유리하게. 어떻게? 그것을 아주 강하게 밀어붙임으로써 너는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은 너를 잊었으며 그리고 너는 완전히 버림받았으며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없다 그렇게 인간을 말하자면 절망으로 데려 가는 거예요. 그 절망 속에 도달했을 때 인간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죽는 사람들도 결국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자신은 그릇되다 는 것을 삶으로써 입증하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런데 인제 여기에서 잘 들어 보세요.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우신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근데 목사님 여태까지 한 이야기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그렇게 굉장히 커다란 죄를 짓고도 항상 똑같이 그런 죄에 대한 송사와 정죄를 느끼지 못하고 어떤 때는 아주 놀라운 평화 속에서 그렇게 놀라운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기가 죄에 대한 의식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묻고 싶을 거예요. 그죠? 나는 여기에 대해서 둘로 답하고 싶어요. 우선 첫째 가능성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이미 버림받기로 작정된 양심의 화인을 맞은 사람이에요. 이게 마음의 절대적인 굳어짐이에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형벌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괴로움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런 것 없어요.
그러나 이렇게 완전히 멸망에 이르도록 완전히 버림 받을 인간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이런 현상들은 나타나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우리의 정신세계와 관계가 있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들에게 우리 영혼에는 우리의 영혼에 중요한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마음을 먹는 것, 의지하는 것, 뜻하는 것 이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 중에서 첫 번째 생각하는 기능이 지성의 기능이에요. 그런데 이 지성의 기능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 하나, 하나 원인과 결과를 추론해 가면서 답을 찾아가는 기능이에요. 이걸 가리켜서 우리들이 이성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우리들이 언제 하나님, 어제까지 무신론자였는데 오늘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펑펑 눈물을 흘릴 때 왜 어제는 없던 하나님이 오늘 내 마음에 살아계신 지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의 설득을 당해서 ‘아, 그렇구나’ 하고 우리가 끄덕거리고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한 순간에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서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우리에게 믿게끔 만들어 주셨을 때 마치 사진이 찍히듯이 퍽 하고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게 되면서 믿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확 다가와서 믿어지게 되는 그 기능이 오성의 기능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식이 전달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록 논리로 설명할 수 없어도 어제까지 믿어지지 않다가 오늘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말씀을 터득하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분이 이천년 전에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나의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은 그 분이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그리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며, 그리고 곧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이런 믿음 같은 것들은 이성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거는 오성으로서 한 순간의 논리를 초월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지식이에요. 자 그런데 이 지점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오성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의 내용들만 새겨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눈을 뜨면 만나는 이 수많은 삼라만상 접하게 되면 이 사물에 대한 감각들이 눈, 코, 입, 귀, 그리고 살갗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보가 들어올 때 이것이 이성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오성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질을 보면서 느끼는 확 밀려오는 탐욕 같은 것, 그 다음에 성적인 강한 욕망, 그 다음에 어떤 자기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끌림, 논리를 무시한 끌림, 그런 거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여자가 사치스러워요, 기질이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해요. 근데 어느 날 가다보니까 진짜 옷이 딱 옷이 있어요. 굉장한 거예요. 그래서 가서 한 벌 사 입고 싶은 거죠.
지난 주간에도 제가 어느 명품관에 근무하는 성도를 심방을 가서 점심 접대도 받고 왔는데 한번 둘러 가보시겠냐고 해서 그럴 때 아니면 명품관을 내가 언제 들어가겠어요? 그것도 경험인데, 일부러 들어가 보았어요. 어이구, 동전지갑 하나에 3,595,000원이라고 써 있어요. 실제예요, 실제. 35,000원이라고 해도 살까 말까 그럴 텐데 3,595,000원 이라니, 내가 이거 교육자들한테 선물 받았다고 가방을 이거를 얘기 했더니 그런 가방이 명품이면 3,000만 원쯤 간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볼 때에 이게 욕망이 여자가 확 느껴질 거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면 한 순간에 이성적인 추론이 마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무서운 사채를 내서 그 명품관에 와서 자기를 치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예요. 연예인들이나 이런 사람들. 그거는 우리 같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이 그걸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욕망이 워낙 강하게 느껴질 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전부다 다 오성에 맺히게 되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그런 것들이 막 정신없이 맺히게 될 때에는 어때요? 그거 오성의 기능에 한계가 있는데 그런 것들이 수없이 맺혀서 사람을 막 들뜨게 하고, 막 사람의 열정이 들뜨게 만들고, 막 마음이 기쁘게 만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 뿐 만이 아니에요. 근심과 걱정도 같이 똑같은 원리예요. 하나님의 율법이 딱 우리를 정죄해서 너는 죽음에 해당된다, 너는 무슨 사형이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 이런 것들을 그 이성에다가 막 올리는데 이미 화면에 다른 그림들이 꽉 차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번 세 번 겹쳐서 쏘아봐야 그게 가슴에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죠. 그래서 뭐냐 하면 인간이 죄의식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거리감을 느끼고 정죄의식을 느낄 때에는 미친 듯이 환락에 빠지거나 정신없이 자기를 쾌락에 쑤셔 넣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죄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제가 자기 깨어짐에서 그런 얘기 썼잖아요. 뭐냐 하면 죄인이 죄의 기질로 말미암아 범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뭐냐면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범죄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오성을 그런 것들로 속된 것으로 가득 채워서 혼자 있는 이 두려움, 그때 명료해지는 이 양심의 기능 앞에, 양심의 법 앞에 자기가 서는 것을 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즉시 그런 양심의 작동을 경험하고, 그리고 정죄 의식을 느끼면서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토설하게 된다면 그 양심과 자기 안에 있는 율법의 기능 그 자체가 우리를 주님께로 다시 데려가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거죠. 근데 그걸 못하게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그 표상들을 그려내는 거예요. 이 안에서. 그렇게 될 때에는 잠시 평화가 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마지막 때가 될수록 계속 소비량이 늘어날 것이 술입니다. 이것도 안 돼 가지고 어떻게 하죠? 마약에 손을 대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거예요, 이 마약은.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런 하나님과의 거리감들을 못 느끼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없는 게 아니라 못 느끼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보면 은혜 떨어진 사람들이 웃는 미소는 다 썩소야, 썩은 미소라고 그게. 속에는 확하고 이렇게 인상을 써서 웃어도 그 웃는 입에다 대고 한번 들여 마시면 그 속에서 곯고 썩은 냄새가 확 나는 거예요. 무슨 마음의 평강이 있겠어요?
제가 맨 처음에 존 오웬 목사님의 책을 대할 때 막 치열하게 죄를 죽이는 삶에 대해서 나오는 거야, 굉장히 치열하게 나와. 마지막에 궁금한 게 뭐냐 하면 그렇게 죄를 죽이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 하나님이 뭘 주시냐 궁금했어요. 그 밑에 보면 뭐라고 그러냐면, 뭐라고 나오냐면 평안, 평안이 온다는 거야. 평안과 그 다음에 그렇게 죄를 이기는 삶을 살 때 평안과 마음이 평안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는 거예요. 맨 처음에 그것을 보면서 막 웃었어요, 속으로. 이거 뭐 어마어마한 일이잖아요, 죄를 죽이면서 사는 게. 마지막에 주어지는 것은 어려운 너무 빈약해. 평안과 하나님과의 화목, 근데 그걸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게 결코 웃을 만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이 큰 것인지 사실은 그것이 모든 것이죠. 솔직히 얘기해서 지금 여러분 가운데도 아마 은혜에서 많이 미끄러져서 이제 처절하게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게 뼈저리게 다가올 거예요. 평안, 도대체 언제 들어본 말입니까?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언제 그런 평안을 누려보겠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즐거움 그러니까 그렇게 될 때에 그렇게 치열하게 고생하는 고 3이 되도 자기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거예요. 목회를 하고 주님을 섬겨도 마찬가지에요. 건강이 나쁘고 고난이 오고 핍박을 받고 막 괴로워도 환경이 괴로워도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한 거예요. 참 생각이 났어요. 정확하게 얘기해서 평안과 담대함이에요. 평안과 담대함. 평안과 담대함. 그래서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일어나도 ‘천만인이 나를 에워 쌓을지라도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그런 고백이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삶의 공을 들여야지 나오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가 유지되어야지 나오는 거죠. 이해되죠? 그 거리감이라는 것이 본질이 무엇이고 그 거리감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 무서운 효과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게 되잖아요. 그죠?
B. 인간의 무능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렇게 범죄한 영혼이 느끼는 또 하나의 그 상태는 뭐냐 하면 인간의 무능이에요. 자기가 얼마나 무능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거죠. 자 보세요.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육체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또 여러분들 가운데 지혜로운 분들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겠죠.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사님 우리가 죄악 된 행동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즉시 우리의 영혼이 영향을 받는데요? 그거는 맞아요. 그거는 맞는데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예를 들어볼까요? 자, 어떤 사람이 범죄하고 그리고 영혼이 매우 곤고한 가운데 있어요. 그리고 거울을 보니까 진짜 자기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그래서 돈은 있겠다, 강남에 가서 ‘코를 좀 높여주십시요, 여기 주름을 없애 주십시요’ 했더니 의사 하는 얘기가 ‘워낙 손 볼 데가 많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러면 ‘풀 서비스로 해주십시오’ 그래서 원판을 갈고 다시 새겼다고 칩시다. 그래가지고 와서 거울을 보니까 50대였던 사람이 30대로 변했다고 칩시다. 뭐가 바뀌는 것이 있어요? 요새 출입국 관리실 하다가 보면 옥신각신 하는 사람들이 가끔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여권사진하고 비슷하지도 않은 거야, 이거는 뭐냐 하면 성형수술 이전에 찍은 거고. 그 후에 강남 한번 다녀온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이게 어떻게 당신이냐? 하다가, 하다가 얼굴 벌게지면서 이거는 수술하기 전 사진이다. 옥신각신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바뀌게 됐다고 치자는 거죠. 그리고 영적인 침체에 있으니까 밥 먹고 나온 거는 배밖에 없고 찐 거라고는 살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피부 관리도 받고 해가지고 빤질빤질 해져 가지고 50대 아주머니가 30대 초반으로 돌아갔다고 치자 이거예요. 그래서 진짜 얼짱 몸짱이 됐다고 치자 이 얘기예요. 뭐 강남 의사의 칼이 얼굴에 닿을 때 영혼에 무슨 영향이 미쳤어요? 배에다가 랩을 감아가지고 그렇게 땀 빼가지고 지방분 뽑아낼 때 그때 무슨 마음의 지방도 함께 빠졌어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건 양태일 뿐이에요.
인간의 어떤 행동은 자신의 영혼에 직접 주는 것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느껴질 때 이것을 제거해 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매일 자신을 암시하는 거예요.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분명히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어 이렇게 암시를 하거나 교회에 거액의 헌금을 해 보는 거예요. 가톨릭에서는 굉장히 그것을 받고 나서 사죄의 선언을 해줄지 모르지만 장로교에서는 그런 거 없거든요. 그런 거, 아니면 그 다음에 마음에도 없는 큰 봉사를 하는 거야, 꼭 물질적인 봉사가 아니더라도 그래서 그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서 뼈 빠지게 봉사를 하고, 뭐 하고, 그럼 이제 괴로우니까 그 다음에 위선을 행하고 그 다음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도 않는 그런 기도를 길게 드리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요. 그것은 그러한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을 좁히는데 조금도 이바지할 수 없어요. 조금도 이바지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이제 이러한 거리감을 어떻게 좁히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15년 동안 너무 많이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냥 눈감고 가서 도서관에 가서 손을 뻗으면 대게 붙잡히는 게 그런 것들이에요. 아무거나 붙들고 듣고 읽으시면 되요.
그럼 결국은 그럼 뭐가 필요 하느냐 이거죠. 인간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무능해요.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그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보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가련한 시도들을 많이 하고 때로는 아주 미신적인 시도 같은 것도 해 보는 거예요. 요즘은 별로, 요즘도 그런 사람 있어요. 그래가지고 뭐, 무슨 예언집회, 아니면 가서 불 받는 집회, 무슨 불이 있는지 모르지만 불 받는 집회 뭐 그런데 가가지고 정신의 스위치를 끄고 그냥 눈 감고 머리 흔들면서 막 박수치고 벌벌 떨고 별로 방언도 못 받았으면서 받은 것처럼 덜덜덜덜 그러고 제발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일을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말씀을 받을 때도 지성을 통해서 받고, 기도를 올릴 때도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께 또렷한 의식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잠꼬대 하듯 이가 아니라 명료하게 의식 속에서 올려지는 거야, 올려지면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주어서 기도하는대로 자신의 마음이 변화 되게 하는 거예요. 왜 덜덜덜덜, 왜 그러는 거예요. 정말 웃기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이제는 정말 조금만 과학의 원칙에서 벗어나도 죽어도 안 믿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성경을 우습게보잖아요. 한쪽으로는 그러면서 뒤에서는 호박씨를 까는 거야, 그렇게 해 가지고 위선적인 교인들, 자유주의 신학 좋아하는 교인들이 말이지 허기가 지니까 몰려가가지고 무슨, 무슨 서초동 어디어디 가가지고 그 무슨 이단적인 집회에 가가지고 말도 되지 않는 자기가 사도라고 그러고 그 다음에 너는 내년에 뭐를 하겠다고 그러고 말이지 예언 받고 무슨 그 다음에 방언 교습 받고, 그런 게 다시 또 재판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60년대 다 70년대 하던 일들이 다시 재판인데 성업 중이에요. 그러니까 참된 경건의 신비를 잃어버리고 나면 인간이 마지막에 가는 게 그런 썩은 곳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 모든 신비한 경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회개를 강조하지 않아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거. 그러고 나서 거기에서 그런 신비한 체험이나 하겠다고 거기에 가서 그걸 머리를 내밀고 안수 기도를 한번 받아보겠다고 가련해요. 가련해요. 정말 어떻게 보면 불쌍하지도 않아요. 자기 스스로 영적인 간음을 행하고 있는 중이에요. 자기 남편 내버려 두고 말이지 뭐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게 다 쓸데없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도저히 그런 모든 것으로 도저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복음에 대한 믿음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제일 먼저 그 내용이 세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제일 먼저 자신의 신분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거예요. 자신의 신분이 뭐예요? 그렇지.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예요.
비록 오늘은 범죄하고 내가 어둠속에 미끄러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 같은 분이 아니시잖아요. 나는 주님을 버렸다가 다시 가서 아부하고 겉으로는 아부하면서 뒤에로는 또 호박씨 까고 하나님을 어떻게 이용해 볼까하고 고통이 끝나면 다시 또 하나님을 버리고 이러는 변덕이 심한 존재잖아요. 그런데 자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이 강하지,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해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 그리고 약속은 하나님이 한번 택하신 사람들은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내 속에서 들려오는 이 수많은 양심의 송사, 율법의 정죄, 이것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신 복음의 약속을 나는 더 믿는다, 그거를 확고하게 가져야 되요. 그런 것들이 잘 안 되는 거죠, 죄에 빠졌을 때에는. 왜냐하면 설명하면 너무 긴데,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되게 하는, 그래서 무슨 얘기냐면 은혜의 수단으로부터 멀어져서, 멀어지기만 하면 마음속에 우세하게 깔려있는 것이 이런 양심의 역반응이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기 때문에 은혜의 수단과 아주 친밀하게 가까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자신이 그런 위험한 영혼의 때에 있다면 말씀을 그냥 귀에다 달고 살아야 해요. 귀에다가, 근데 이제 얼마가 됐나. 굉장히 오래됐죠. 제가 신학대학원 그때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는데 침체에 들었을 때가 있었는데 NIV라는 영어성경이 있는데 귀에다가 늘 꽂고 살았어요. 계속. 그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거의 깨어있는 시간에는 거의 공부하는 시간 말고는 기도하는 시간 말고는 들으면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비로소 뭘 깨닫냐 하면 주님 앞에서 평안을 누리며,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것이 우리의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거죠. 그 약속을 굳게, 자신의 상태보다는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려고 애를 쓰고 그러기 위해서는 은혜의 수단과 매우 가까이 해야 해요. 그래서 내가 항상 얘기하는데 기도가 안 되면 기도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마음을 따뜻하게 주님께로 향하도록, 그래서 은혜가 되는 책을 읽는다든지, 말씀을 듣는다든지, 설교를 듣는다든지, 아니면 지체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눈다든지 하면서 계속 자신의 마음을 부패하지 않도록 지키면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열리고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셔요. 그때 기도하고 그 다음에 다시 기도할 수 없으면 다시 또 성경을 읽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면서 하고 자기의 눈을 가득 채우는 이런 것들로 부터 좀 벗어나야 해요. 그걸 달래기 위해서 그저 비디오나 밤늦게까지 보고, 극장 구경이나 가고 그런 식으로 하면 점점 더 영혼의 질병이 덧나게 되는 거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용서와 징계의 의도를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가 그분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징계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지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해서 복수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거를 아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근데 우리의 양심이 송사를 받고 정죄 받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정하게 해석하지 못하도록 우리 안에서 끊임없는 방해의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징계의 의도를 분명하게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그것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로 부르시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국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우리가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그래서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범죄를 통해서 회복하게 해 주시는 거예요. 물론 이제 늘 은혜 안에 살면서 그런 절대적인 의존을 경험하면서 살면 행복한 거죠. 근데 그렇지 못하고 미끄러졌을 때에는 죄를 지었고 미끄러졌을 때에는 하나님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지극히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아주 불결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대 의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 중심에 통회하는 자, 바로 그런 것이에요. 그 순간에 우리 안에 자기가 깨뜨려지는 그 철저한 과정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거를 현미경으로 보듯이 미세 분석한 게 자기 깨어짐이에요. 그러니까 가서 내일 부터 시작을 해서 다시 한 번 읽어봐, 한번 읽었어도 여러분 몰라, 그러니까 다시 읽어서 찬찬히 읽으면서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라는 말이에요. 그때에 이제 두 가지에 대해서 깨뜨려 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관해서 깨뜨려 지는 거예요. 그것을 좋아하고 의지하던 자신을 아주 불신하고 미워하게 되면서 나를 버리고 주님을 붙들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그렇게 하게 해 주시는 것이 내가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영혼이 많이 미끄러졌을 때 불현듯이 주님을 위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장렬하게, 그건 하나의 정죄감의 또 다른 표현이에요.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교의 열정이 아니에요. 거기에 많은 속임들이 있어요. 그런 보상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에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C. 영혼의 고통
결국 영혼의 고통, 이것이 오늘 이 말의, 오늘 이 본문이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에요. 그래서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진노를 인하여 심히 떨리고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아주 멀리 가버리신 것처럼 버림받은 반기감을 느끼고, 자신의 영혼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범죄한 영혼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필연적인 고통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나니’ 라고 하는 거죠.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거죠. 날마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리고 자기의 악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III. 참회자의 소원
그런데 사실은 이 고통 속에서 이제 비로소 참회자의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 소원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원이에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원.
A. 하나님께 돌아감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고, 주님을 멀리 떠나는 자신의 이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를 이제 비로소 자기가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거죠.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할 때는 별로 몰랐는데 자기가 경험하면서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예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셨던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기가 고쳐지고, 말씀 안에서 깨뜨려져 주님의 새로운 사랑을 받고, 환난과 시련이 많이 와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구원이시라,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나는 두려움이 없도다 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이 담대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이런 소중한 것을 한 순간에 자기의 죄에 대한 욕망과 함께 바꾸어 버린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때에 신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B. 인자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자하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들을 위해 베푸신 그 무한한 사랑과 그 놀라운 은혜를 알게 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참회하며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거죠. 성경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고 예외 없이 그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된 거죠.
IV. 결론 : 사랑의 하나님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잊혀지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은 이유는 이렇게 자기가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참회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오직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한분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그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신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성품을 이 땅에 계셨을 때 이미 보여주셨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얼마나 용서해야 됩니까? 그리고 제자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굉장히 크게 쓴 거죠. 불가능할 정도로 여러분 일곱 번 용서해 준 적 없잖아요. 근데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당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지금도 받으시고, 그리고 지금도 당신의 품 안에서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우리들이 쓰러져도 결국 마지막에 돌아가는 지점은 그리스도 예수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잖아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랑이에요. 비록 당신에게 범죄한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은혜를 거두셔서 그들의 영혼을 곤고하게 하시고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흑암 가운데 두시고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때리셔서 징계하실 지라도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가 당신에게 입히는 손해를 보복의 감정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법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거죠.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 오오 어서)
그립지 않습니까?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던 그때, 비록 부자 아니고, 높은 지위 없고, 큰 집에서 좋은 차 몰고, 화려한 옷 입고, 그리고 분에 넘치는 음식을 먹으며 살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평안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넘볼 수 없는 평화, 언제나 교회당에 가 기도하면 주님이 가까이 계시고, 어려움이 올 때마다 무릎을 꿇으면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고 확신시켜 주시던 그 놀라운 믿음의 간증들, 고난도 역경도 우리의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시련이 많았지만 그분이 동행해 주셨기 때문에 함께 살아왔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언제나 가까이 계셔서 그래서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 없이 여러분들이 살 수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주님을 피하고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겠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진실한 참회 속에서 당신의 성품을 배우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4.범죄한 영혼의 잃어버린 것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I. 본문해설
3절과 4절에서는 범죄한 영혼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시인이 보여주었습니다. 5절에서는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망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어떻게 보면은 간략해 보이는 이 구절 안에 사실은 신자가 범죄할 때 그 영혼이 잃어버리게 되는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I. 범죄와 영적 생명
우선 그는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범죄와 영적생명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A. 사망 : תום
히브리말로 마웻 이라고 되어있는 이 사망은 그야말로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죠. 사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죽음을 탐구해서는 죽음을 알 수가 없고 그 죽음의 반대편에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나면 그 생명이 사라진것이 죽음의 상태라고하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1. 생명(life)
그러면 도대체 이 생명이라는것이 무엇일까요 이 생명은 창조된 생명과 창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나뉩니다. 당연히 창조된 생명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고 창조되지 않은 생명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생명은 하나님의 자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무엇에도 의지하거나 또 무엇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언제나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항상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살아계셔야 하고 스스로 살아있게하는 이것이 생명인데 하나님은 피조물과달리 이 생명을 누구에게 덕입어서 그래서 생명을 부여받거나 혹은 누군가에 기대어서 생명을 유지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 그 자신이 생명이시다 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 생명되심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양식이고 그리고 바로 그 생명안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 자신에게 과거나 미래에 속하는 것 없이 현실로서 모두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 때문에 현실태적인 존재이시다라고 언명하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에서 볼수있는 이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이러한 자존성을 본뜨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구 때문에 살아있지 않습니다. 즉 내가 스스로 생명을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 때문에 내 생명이 유지되는것은 아니라고하는 말씀이죠. 물론 더 멀리 나아가보면 우리는 음식을 공급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음식을 먹고 섭취해서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이 우리에 생명의 원인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생존의 조건이 갖춰지고나면 우리는 누구도 의지하지않고 자가발전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는거죠.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존성을 아주 탁월하게 닮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도 의존하지않고 완전히 독립적으로 스스로 살아계신 분이시지만 인간을 비롯한 이 모든 피조세계는 누구나 예외없이 그 생명의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덕입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홀로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명을 누리는 것이죠.
이 생명을 인간과 관련시켜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더많이 펼칠수있는데 그러면 여러분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질것 같아서 그냥 자연사물들은 다 접고 인간과 생명의 관계만 보자 이런 이야기예요. 다른 모든 생명체는 육적생명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존재자체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생명도 육적생명과 영적생명으로 나뉘어지는 것이죠. 이 두 생명을 진정으로 소진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 입니다. 그러면 이 육적생명은 어떻게 생겨났느냐 그것은 육체와 영혼이 결합이 됨으로써 육적 생명을 얻게 되는것이죠.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을 때 그는 육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영혼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 영혼과 육체가 만나자 그는 히브리말로 넵페쉬하야 직역을 하면 우리말에 생명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사실은 생명이 아니라 산사람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이 만났을 때에 결합되었을 때에 그때 비로소 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죽음은 이러한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리는 육체의 죽음의 정의는 간단합니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면 그러면 그것이 곧 육체의 죽임이라고 하는것이죠. 이에 비해서 그렇다면 영적인 생명은 어떤것일까요. 확실한 것 하나는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이 닮은점이 많이 있다는 것은 인정을 하지만 왜 이 생명이 있어야지만 움직이고 기동하고 역사할수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육적 생명과는 달리 영적 생명은 훨씬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육적 생명이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통해 육적 생명이 부여된다면 영적생명은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이 결합됨으로써 영적생명이 부여되는 것이예요. 그러면 도대체 이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여기에서 우리들이 먼저 이 영혼과 성령의 결합을 생각해야 해요. 결합된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다라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물체와 물체가 그 질적으로 서로 통해서 혼합을 이루어서 그래서 마치 밀가루와 쌀가루를 섞어서 반죽을 한 것처럼 그렇게 합쳐지는 그런 종류의 혼합이 아니죠. 그러면 그것은 영혼을 물질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와 영혼도 그런 의미의 결합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육체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은 물과 잉크의 결합과 같지 않고 공기와 빛의 결합과 같다 라고 말했듯이 똑같이 우리 육체와 영혼의 결합도 밀가루와 쌀가루의 한 반죽이 된 결합과 같지 않고 마치 공기속에 빛이 들어와 공기와 빛이 구별되진 않지만 나뉠수는 없지만 구별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육체와 영혼이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이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의 정체는 뭐냐 영혼과 형상의 결합의 정체는 영혼과 성령의 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결합의 의미는 뭐냐 인간의 영혼과 그리고 성령사이에 결합이 이루어 진다면 그 결합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결합은 이렇게 아까 말씀 드린것처럼 물질과 물질의 결합인것처럼 이해해도 안되고 또 육체속에 영혼이 쑥 들어와서 그래서 우리안에 있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해도 안되는 것이에요. 잘 생각해 보십쇼. 우리의 영혼은 크기와 무게 넓이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하지만은 그런 건 있을수가 없는거죠 영체이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분명히 우리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물질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 있지 지금 몸은 여기 나왔는데 영혼은 집에서 티비를 보고있는 그런건 존재할 수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영혼이 그런식으로 분리되면 인간의 육적 생명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우리의 몸 안에 우리의 영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의 영은 물질과 같은 부피와 크기는 없지만 있는지점과 없는 지점이 딱 구별이 되는거에요. 이해 되시겠어요?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 크기와 넓이는 모르지만 우리 밖에는 없다는 거에요. 무슨 얘긴지 이해되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양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그 다음에 이 옆에는 안 계신 그런 분으로 그렇게 묘사를 하면 안된다는 말이죠.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긴 하지마는 그정도에서 그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인제 영혼과 성령의 결합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결합과도 달라요. 그래서 이제 이 결합의 의미는 우리와 성령하나님 사이에 성령 하나님을 매게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속에 특별한 교통의 관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육체에 이 땅의 양식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혼에 성령과의 이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의 형태로 우리에게 부어지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우리에 영적 생명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성령과의 교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적생명을 공급해주실 때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 지성이 그것을 깨달을 때 바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성령은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공급 해 주시므로 이것이 하나님에 생명이 우리에 영혼안에 역사하여 우리의 영적인 사람이 건강과 활기를 유지하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렇게 건강하고 활기있는 영혼에 의해서 주도되는 육식의 삶이 바로 영육간의 일체를 이룬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결합이 두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다 이런 성령과의 관계가 있어요. 예를 들자면 불신자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본성에 빛으로 그것을 깨달아 알아서 괴로워하고 신음하고 아파한다고 어제 말씀을 드렸죠? 이런것도 결국은 성령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 성령의 일반적인 비취심에 의해서 그것을 조명과 구별하여 본성의 빛이라고 불러요. 그러한 본성의 성령의 조명과 구별되는 말로써 본성의 빛이 비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도덕생활을 유지하므로 시민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에요. 이런것도 바로 성령과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그 사람이 성령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일반은총 차원에서의 본성의 빛의 작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자녀를 향한 희생적인 사랑이라거나 그 다음에 인류사회의 공통적인 도덕감정에 대한 순합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이러한 관계를 의미하고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합은 오직 신자에게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것은 우리에 육체는 비록 영혼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긴 했으나 영혼과 육체가 만나 육적생명을 누리게 되고 그러나 영적으로는 사실은 죽어있었는데 그 영혼이 살리심을 받아서 성령에 의하여 성령과의 우리의 영혼에 생명적인 교통이 시작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중생이라고 하고 그것을 느끼고 의식 속에서 인식함으로써 회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시작하는 것을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르고, 그러한 삶을 계속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본성이 성령의 역사로 순결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부르고,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완성되어서 이제 우리가 영혼과 육체사이에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을 죽임이라고 가리키고, 그리고 마지막에 살아있는 그 영혼이 다시 살리신 육체와 만나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우리들이 부활시의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신자에게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죽었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접붙여져서 그래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성령과 특별한 교통을 누리며 신적 생명을 부여받는 것 이것을 바로 우리들이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영혼과 성령의 결합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 영적생명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이거죠. 이것을 알기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을 닮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의 특성이에요. 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실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고 우리 인체에 비유하자면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영혼의 심장과 같은 것이죠. 모든 육체의 기운이 남아있어도 심장의 박동이 멎으면 삽시간에 인간 모든 육체의 생명은 아끼고 그리고 인간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이 영혼의 심장과 같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이 형상의 결정적인 특징은 바로 지성이에요. 그래서 이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이 형상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볼 수가 있는 거에요.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피조물은 인간밖에 없고,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또 하나님과 이 세계 사이에 있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되는 이 모든 지식은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지식을 알게하는 그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고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은 곧 지성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같은 신학자가 대표적으로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하나님의 형상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닮은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소프트웨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인간만이 그런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더욱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핵심적인 이유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당신을 닮은 형상 때문에 하나님이 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과 일치하는 것이에요. 다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의 핵심은 인간에게 가장 당신을 닮은 형상을 심어놓으셨기 때문이고, 그 형상은 엄연히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지만 당신을 가장 흡사하게 닮았기 때문에 인간의 하나님에 형상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회기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13장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우주를 휘돌아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회기적인 사랑이라는 교리를 여러차례 들어야 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또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가 인간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나눌 수 없다고 성경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가장 본보기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랑은 사실 저는 10년동안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어요. 근데 뭐 매일 고민했으면 풀었을 텐데 하다가 또 멈췄다가 다시 고민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고민도 아니지마는 그 후에 이 문제를 풀면서 너무 놀라왔어요. 사람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되면 그러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 닮은 것을 사랑하게 만들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이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은 사람이 예수믿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 믿은 사람이 믿지않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 갑절이나 더 커다란 죄에요. 왜그런지 설명해볼게 들어보세요. 이 시간이 아니면 설명할 기회가 없을테니까. 이런 이치에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서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이 인간에 영혼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거든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않고 타락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냥 거의 다 사라졌다고 보면 되요. 그러나 일부는 남아있는거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 실제로 그 하나님의 형상이 활짝 피듯이 다시 살아난 사람인데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그것보다도 더 하나님을 닮은것이 없어요. 그러면 만약에 그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만약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거짓이든지 그 다음에 사람을 향한 미움이 거짓이든지 둘 중에 하나예요. 그러니까 더 크게 죄를 짓는 거죠. 그러니 활짝 하나님의 형상이 피어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형상이 피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런 논리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람 안에있는 형상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어주고 그렇게 사람을 형상으로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에 형상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 가진 사람으로 여기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사랑에 동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축소지향의 성격을 갖게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확대 지향형의 성격을 갖게 되는거라 이거죠. 그래서 설명하면 더 재미있는데 이 시간이 없어요. 그게 문제죠. 자 이렇게해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과 결합된다고 하는것이 무슨 뜻이냐 이거죠. 그것은 영혼이 따로 있고 잘 들으세요. 정말 잘 들으세요. 영혼이 따로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 안에 있지만 각각 다른 것처럼 영혼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형상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요소가 있는 거에요. 엄밀하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박탈된 그런 종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심장이 없는 건강한 생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존재할 수 없는거라 이거에요. 그래서 결국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은 떨어질 수 없이 함께 결합되어있는데 창조될 때에는 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영혼이 아주 완전한 결합을 이루었어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과 완전한 결합을 이룬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에는 지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창조세계를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아는 현명함이 있었고, 정서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보듬는 그런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의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든지 순종할 수 있도록 올곧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타락하게 됩니다. 타락하게 될 때에 이 인간에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영혼에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이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에요. 그런데 이 형상이 타락함으로써 이 형상이 망가지고 이 결합이 말하자며는 이 결합이 온전하고 완전한 결합으로부터 그 결합의 성격이 이탈되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영혼이 고장난 상태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있기는 한데 이제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아보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이 모든 것을 탐지할 수 있는 기능자체를 영혼이 상실 해 버리는거죠. 즉, 영혼이 망가지니까 육체가 온전히 인도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잘못되니까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니까 영혼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거죠. 그래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 고장난 영혼 그리고 그 다음에 저주받은 육체 이렇게 세 개가 결합된 것이 바로 타락후에 인간의 모습이라는 얘기에요. 그래서 결국은 불멸할 인간이 한정된 시간안에 살다가 죽게되잖아요. 그런데 중생시에는 이 중생과 함께 하나님이 고치시는데 그게 뭐냐하면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다, 구원하셨다, 우리의 온전을 온전케 하셨다, 생명을 심으셨다 뭐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핵심은 뭐냐하며는 영혼에 심장이라고 할 수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에요. 무엇으로? 성령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영혼의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이 다시 고치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시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과 온전케 된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의 결합 안에 영적 생명이 있는 거에요. 이해했으면 참 좋겠어요. 굉장히 쉽게 설명하느라고 했는데 그쵸? 제가 이 교리를 발견했을 때 그 충격과 감격은 여러분들이 100분의 1도 안되요. 누가 영적 생명의 본질이 무어냐고 어떻게 우리가 설명을 할 수가 있겠어요? 그쵸? 성령이 오셨다 그러고 맨날 불만 땐다고 그래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자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자면 결국 육체의 생명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 안에 있고, 영적 생명은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 안에 있다 이해되죠? 아멘이에요. 여러분들은 탁월해요. 뭐 비할 데 없는 회중이에요. 자 그러면 이제 하다가 안되면 중간에 끊겠어요. 그러면 이제 그렇게 해서 인간에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이 결합될 때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뇌와같은 역할을 하는 거에요. 정확하게 그렇게 보시면 되요.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영혼이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 움직이는 거에요. 그리고 그 형상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과 충만한 교통을 누릴 때 가장 행복해하는 거에요. 가장 전율할 듯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거에요. 마치 고향에 돌아간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뭐냐면 우리의 육체에 대해서 우리가 무지하기 짝이 없지마는 그러나 육체를 위하고 육체에 대해서 돌보고 덜덜 떠는 것 만큼 100분의 1만이라도 우리의 영혼을 관리하며는 아마 훨씬 더 낳아질 거에요. 그런데 그냥 신경 안써요. 얼굴이나 그저 그냥 하고 다닐려 그러지 안되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이 많이 생각을 해야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들어보세요. ‘육체의 생명은 영혼이며 영혼의 생명은 생명의 생명이신 하나님이시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 생명의 생명이십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확 밀려오는 하나님과의 그런 영적인 교제 속에서 영혼은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요. 그 나이가 들면 말이죠 밥심으로 산다고 하잖아요? 왜이렇게 배만 고프면 기운을 못 쓰겠어요. 어디가서 점심을 제 때에 안주면 막 화가나요. 어 정말 힘들어요. 그 우리의 영혼도 똑같지 않겠어요? 그래서 속에서 소리를 친다고요. 나 좀 살려달라고. 그런데 그게 안 들려요. 그게 바로 인제 영적인 어두움과 귀먼 것이죠. 그런 결합의 결과 인제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의 결과 우리들이 영적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에요. 자 그다음이 중요해요. 그러면 이렇게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될 때 하나님은 이러한 생명을 우리 모든 사람들이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원할까요 아니면 결핍된 채 살아가길 원하실까요. 그런걸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너무나 원하시겠죠? 왜 그럼 하나님이 그런 생명을 그렇게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하나님 편에선 뭘까요? 그게 애매모호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러지 말고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왜 그렇게 하시겠어요? 대답이 안 나와야 다음 사경회를 기다리지. 그래서 뭐에요? 잘 들어보세요. 이런거에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이시죠. 그러한 생명은 곧 영적인 에너지에요. 그런 하나님의 생명이 무한대하게 충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신 아름다운 당신의 성품을 이 시간 세계속에 뻗쳐서 우리 인간에게 발현 해 보여주실 수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내가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죄를 회개했을 때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것도 하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입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끊임없이 당신을 반역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뭐라그래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찬송 제목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최고의 감격이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면 이제 답이 나온거에요. 똑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형상안에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대로 하나님 자신을 닮은 것을 그 생명의 힘을 이용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생활과 실천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것을 쏟아 내 놓지 않고는 견딜 수 가 없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이고 존재의 양식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영적 생명으로 가득찼을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심겨진 코드대로 자기 자신을 언어와 행동 실천 속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사상 속에서도 그것을 현실화 시키는거에요. 생명은 현실화 시키는 능력이에요. 내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거를 들자 할 때 들 수 있는거고 던지자 할 때 던질 수가 있는 거에요. 생명이 없으면 할 수 없는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생명을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충만하게 주셨을 때 그 때 이 생명이 역사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안에 심어 놓으신 당신닮은 성품을 생각 속에서나 마음 안에서나 정신 안에서나 그 다음에 우리의 생활과 실천 안에서나 모두 바깥으로 100%현실화 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갖게 되는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에요.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자가 되고, 사업에 있어서 크게 성공하고, 공부를 했는데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아니면은 취직을 했는데 승진을 해서 높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그래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도구는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 영광을 그것도 제가 논증을 할 수 있는데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정말 놀랍다 놀랍다 그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아니에요. 아무리 놀랍다고 박수를 쳐도 거기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남을 읽어낼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아니에요. 똥을 퍼도 그 사람을 보고 어쩜 당신은 그렇게 행복하고 평안합니까. 나는 당신보다 돈도많고 권력도 많은데 매일 괴로운 날을 보냅니다. 당신에게 계신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행복하게 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라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톱스타들이 나와가지고 축구나 하고 연예인이나 해야지 영광을 돌린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보같은 생각이에요.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똥지게를 져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고 대통령이 돼서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리수가 있어요. 그것이에요. 그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이잖아요. 사자굴에 갖혔을 때 다리오왕이 와서 다니엘을 불렀어요. 다니엘아 다니엘아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느냐? 그리고 문안인사를 했어요. 그게 뭐에요? 다리오 왕은 이 다니엘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른 것 때문에 감탄한게 아니에요. 저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양태일 뿐이고 저 사람이 진정으로 섬기는 건 내가 아니라 자기 하나님이다 그거를 알았던 거에요.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죠. 그래서 결국 영적 생명에 특성은 결국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이 이런 영적 생명을 유지하며 누리며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죠.
2. 사망(death)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 그렇다면은 이제 우리가 사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거에요.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는 시인이 이야기하는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습니다. 할 때에 이 사망이 뭘 의미하는가 하는 걸 보여주는건데 사망은 죽음인데 죽음은 그 자체로서는 설명이 잘 안돼요. 그래서 나는 이 죽음을 이렇게 정의해요. 생명의 결핍.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 얘기에요. 생명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이에요. 자 그러면 육적인 사망은 무엇일까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해체되는 것 이게 육적 죽음이에요. 그러면 영적죽음은 무엇일까요? 인간에 영혼이 하나님에 형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박탈될 순 없다 그랬죠?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영적사망, 영적 죽음이라고 말하는거죠. 그래서 육적죽음은 잘 들으세요. 육적 죽음은 생명이 하나도 없어야지만 죽음이에요. 그래서 만약에 죽었는데 의식도 없고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데 하악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면 죽은 거에요? 안 죽은 거에요? 한 10초에 한번씩 헉 헉 해도 그것은 안 죽은 거에요. 그러나 영혼은 달라요. 영혼은 육체가 완전히 호흡이 끊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에 형상이 그렇게 완전히 영혼으로부터 이탈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들이 전도할 필요가 없는거죠. 완전히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영적인 죽음은 영적인 생명이 하나도 없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기 보다는 영적인 생명이 심하게 결핍되었을 때 그리고 영적인 생명이 심하게 결핍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신령한 것에 대해서 어떠한 감각도 거의 갖지 못했을 때 혹은 그것에 신령한 것에 대해서 반응해야하는데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거의 상실 했을 때 신령한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되는데 거의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상실되었을 때 이런 전체적인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뭐라고 말할까? 영적 죽음이라고 이야기 하는거죠. 잘 들으세요. 근데 이 영적 죽음을 성경은 다시 두 종류로 분류해요. 그것은 뭐냐하면 절대적인 죽음과 또 하나는 가사적인 죽음이에요. 절대적인 죽음은 무엇이냐하며는 영혼에 생명 자체가 심겨진 적이 없어요. 완전히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과 신령한 것에 대해서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생명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거의 절대적인 죽음의 상태에요. 불신자들의 경우가 그런거에요. 가사적인 죽음의 상태가 뭐냐하면 신자인데 죄를 지어요. 그리고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이 비록 거듭난 영혼이라도 그 영혼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말하자면은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 파괴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의 육욕에 이끌려서 먹고 마시고 욕망대로 행하고 방탕하고 이렇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생명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스스로 폭력을 가하는 거에요.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고 머리 똑똑한 사람인데 야구방망이나 망치같은 걸로 생각날 때 마다 머리를 세게 내리치면 결국 언젠가는 돌지 않겠어요? 돌든지 죽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 아니겠어요? 그런데 옛날에 제가 직장생활 했을 때 기숙사 생활을 몇 달 했거든요. 이 기숙사가 침대를 한 방에 네 갠가 여덟 갠가 이렇게 놔줬어요. 굉장히 높아요. 몇 달 있다가 불편해서 나와 버렸는데 거기도 들어갈려면 굉장히 경쟁률이 쎘어요. 거기있는 사람들은 대게 직장생활 하면서도 공부를 하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이에요. 밥도 다 해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더 잘 집중하라고 지금 예화를 드는 거에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게. 그런데 시계를 자명종을 올려 놓잖아요. 근데 이게 젊었을 때는 잠도 이렇게 심해. 분명히 자명종을 켜놓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은 자명종이 눌려져 있고 일어날 시간에 못 일어 난 거에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른거죠. 그러니까 이제 같이 기숙사에 있던 친구가 손 데기 아주 어려운 곳에다가 시계를 논 거에요. 그러면 이제 그것을 일어나서 누르려고 하다가 잠이 깨게끔 그렇게 한거죠. 새벽에 울린거에요. 그러니까 막 주위 사람 막 미칠려 그러지. 미안하니까 빨리 끌려고 그러는데 이게 이 앞에 있는게 아니라 저 끝에 있는 거에요. 가다가 2층에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머리부터 떨어진거야. 쾅! 그 다음서부터 좀 이상해 지더라구. 사람은 있는데 약속하고도 잊어버리고 오락가락하고 그래서 우리 모두 걱정했어요. 그게 진짜 정신병이 됐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머리가 망가지면 온 몸 자체에 건강한 것이 소용이 없고 망가지는 거란 말이에요. 이해되죠? 잘 이해 되죠? 상관이 없는 예화지만 이해되죠? 그러니까 똑같은 거에요. 인제 하나님이 살려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고 그 다음에 그래도 수시로 죄가 그 하나님에 형상을 망가뜨릴려고 하잖아요. 영혼으로부터 이탈시키려고 하잖아요.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토설하고 그 다음에 회개하고 다시 새 사람 되면 다시 돌아가고 돌아가고 하는 이런 음해의 작용이 부단하게 계속 되어야돼. 그래야지만 이게 하나님에 형상이 건강한 가운데 있으면서 영혼을 움직이고 영혼은 건강한 상태가 되어서 육체를 움직이게 되는데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그냥 다 귀찮아 져서 내팽개쳐 두는 거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자기 육욕대로 사는거죠. 그러면서 자기가 그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해서 허물어뜨려 깨뜨리는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그렇게 되며는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하나님을 느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에 영혼이 거의 반응하지 않고 마음이 굳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 생기고 자기가 잘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룰려고 하면 그것에 대해서 반항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생겨나는 거에요. 그게 뭐냐하며는 바로 가사적인 죽음의 상태에요. 그래서 성경이 이런 신앙을 뭐라고 하냐고하면 죽은자와 방불한 자들..죽진 않았는데 거의 죽은 것과 유사한 교회안에 그런 사람들이 득실득실해. 이런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교회 안에서 똥내를 피우는 거에요. 계속해서. 그러니까 그리스도예수의 향기가 교회에서 나야하는데 이 똥내를 계속 피우고 지 똥 굵다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에요 이게. 똥칠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에요. 은혜받은 사람들이 계속 용서하고 쓰다듬으면서 씯으면서 돌아다니는 거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랑이 있으니까 참고 씻으면서 다녀요. 그것이 즐거운 일일수가 없는거에요.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것을 기쁘게 감당할 뿐이지 그 일 자체가 뭐 어떻게 그게 행복한 일이고 좋은 일일수가 있겠어요? 이게. 일이 왜 그게 좋은 일이에요. 똥치는 일이 뭐가 좋은 일이에요.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에요. 교회에 왔는데 다행이 그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러면 자기가 똥 싸는 거를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초등학교 가가지고 애들이 오줌 싼 애들 있잖아요. 3학년 때 내 짝에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맨날 오줌싸. 담임 선생님이 맨날 그런애들 짝을 시켜줘. 맨날 오줌싸서 옆에 있는 애들이 오줌쌌다 그러면 오줌이 아니라 물엎질렀다 물이 어딨어요 공부시간에.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은 안 그래요. 그런데 애들이 그런 유아원같은 곳에 애들이 거침없이 똥칠하고 다닐 때 애들 다 와서 자기도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장판도 똥색깔 이겠다. 그러고 막 돌아다니는 거에요. 교회에 . 그런거를 교회에서 하는 거에요.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거에요.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 자체가 영혼이 죽어있는 거에요. 언젠가 깨어나고나면 자기가 스스로 사람들 속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런 부끄러움의 때가 오는 거에요. 그게 참회에요. 그러니까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은 중생을 통해서 재결합이 이루어지지만 그 결합은 성령의 교통과 은혜 안에서 유지되는 거에요. 그리고 그러한 성령에 은혜 안에서 그것이 유지되도록 만들어주는 연료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아무리 본성이 못되먹고말이지 똥 싸는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말씀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기뻐하고 하나님에 마음을 받아서 함께 이 세상에 죄에 대해서 가슴아파하고 하는 이러한 은혜의 작용이 계속 살아있으면 본성이 나빠도 계속해서 변화되어가요. 힘들긴 하지 그렇지만은 변화되어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아름답게 변화되는 거에요. 그런데 만약에 의지적으로 범죄하게 되잖아요. 마음으로 범죄하는건 아니에요? 의지적으로 범죄하게되면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거두시고나면 그 다음에 영혼은 아주 급속히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거죠. 은혜의 자리는 어디죠? 인간에 마음이에요.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에요. 죄의 자리는 어디죠? 똑같이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은 이 은혜와 죄가 서로 거하기 위해서 격전이 벌어지는 전쟁터에요. 그런데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죄를 선택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영향력을 철수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결국은 죄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죄를 지배하고 누르고 있던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철수했을 때 그 때에 확 하고 죄의 세력들이 역사하는 것이 나타나 보인다고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 이 비유는 아주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좋은 비유겠네요 그렇죠? 여러분들이 예를 들자며는 왜 이렇게 매일매일 약을 먹으시는 분들 있잖아요. 혈압약이라든지 신혈관계를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왜 미연에 먹는 약들 있잖아요? 그런거를 안 먹어요. 며칠 안 먹으면 혈압이 확 올라가면서 쓰러집니다. 그 때 여러분 혈압의 위대한 힘을 느낍니까? 아니면 약의 효과를 느낍니까? 그 약이 약의 힘이 한 알 밖에 안되는 약인데도 이게 나의 이렇게 무서운 병을 누르고있구나 라고 하는 그 약의 힘을 더 많이 느끼지 않아요? 이것이 그렇게 큰데도 이 작은 한 알 한 알의 약이 내 병을 통제하고 있구나 라고 하는 약의 효염을 느끼잖아요. 똑같이 죄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되는게 아니라 죄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되는게 아니라 그렇게 큰 죄의 힘을 통제해 나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들이 은혜가 사라졌을 때 경험하게 된다는 거에요. 이 결합에서 마음의 죄가 결국은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형상을 망가뜨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영혼을 멀어지게 함으로써 영적생명에서 죽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거죠. 이 결합에서 멀어지면서 죄가 마음을 지배하게 되고 그리고 신자라고 할찌라도 영혼은 죽은자와 방불한 상태가 되는거죠. 그래서 이 결합이 이탈된 그 마지막 결과가 영적인 죽음인 거에요. 불신자들은 이것이 완전히 이탈되어 있는거고 신자들은 가사적 상태에서 은혜에서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는거죠. 자 그러면 어짜피 오늘은 다 할려면 11시까지 해야될거 같아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계속 더 듣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그럼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보겠어요. 자 이렇게 봅시다 하나님에 생명이 영적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있을 때 그 때에는 결국은 하나님의 성품을 현실적으로 발현한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쵸? 만약에 우리의 육체에 생명이 있으면 영혼은 죽었어도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서 육적 생명이 있으면 우리는 움직이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무엇을 구현하기 위해서 그 행동을 하겠어요? 당연히 내 정신과 마음안에 있는 걸 구현 해 나갈 것 아닙니까. 그러면 똑같이 영혼도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이 되어서 영적 생명을 누리고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에 형상을 구현해 내려고 할 것 아니에요. 그건 자연스러운 이치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결합에서 이탈되어서 심각한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칩시다. 신자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불신자의 경우도 해당되지마는 그렇게 되면은 어떻게 될까요? 자기의 불신자의 경우에는 이렇게 됐을 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있는 자기의 성품을 최대한 100%발현하면서 살려고 하는거죠.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악악 거리는 거에요. 갈 수록 심해집니다. 세상은 희망이 없어요. 갈수록 심각해 집니다. 두고보십시오. 이제 갈수록 정말 이해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점점 이제는 다른 세상처럼 느끼게 되는 그런 때가 온다는거죠. 지금도 이미 오고있고.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신자일 경우에 이렇게 영적인 가사적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자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영적인 생명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에 형상 곧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을 현실로 구현하고 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치면 그런 생명이 없다고 할 경우에는 하나님 말고 뭘 발현시키겠어요. 이게 자아에요. 그 속에있는게 하나님 형상하고 자기 옛 자아밖에 없는데 뭘 구현해 내겠어요. 결국은 하나님 없으면 마지막에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현실태로 다 들어내보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돼? 배설하듯이 자신의 욕망을 자신에 행복과 조화를 이루는 한도 안에서 확 쏟아내는 거에요. 그럼 모두 한번을 쏟아내지는 않아요. 왜 그렇죠? 사회질서가 그걸 다 용납하지 않으니까. 저 자식 되게 밉거든요. 죽여버리고 싶거든요. 그렇다고 확 죽여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애. 못해요. 왜. 한번은 시원한데 그 다음에 계속해서 자기가 감옥소에서 갑갑해야돼. 그러니까 그것도 결국은 자기사랑 때문에 못하는거죠. 범죄를 억제하는 것도 어떻게보면 자기 구현의 일종이에요. 자기를 그렇게 옛 성품을 현실태적으로 확 발현해 내는거죠. 그러니까 인간에 영혼과 마음 안에서는 충동을 일으키는 육욕과 그 다음에 분노 그 다음에 사기 악독 이런 것들이 죄악들이 육욕으로 막 부글부글 용광로에서 쇳물이 끓듯이 그렇게 끓기 시작하고 생활과 실천 안에서는 자기의 능력이 미치고 쏟아 놓았을 때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지 않는 한도 안에서 그것들을 쏟아 부으면서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이 세상에 죄악을 더하는 삶이에요. 이런 일들을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에요. 너무 몰라요. 너무 몰라. 그게 무지에요. 무지해서 그렇게 사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영적 생명에 특성은 하나님을 보여주지만 영적 죽음의 특성은 자기의 옛 자아를 보여주는 거에요. 자아가 죽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죽지 않습니다. 남아있어요. 은혜가 사라지면 부활합니다. 부활합니다. 한 10년 됐나요. 제가 영국에 갔다가 충격적인 걸 들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뭐 유럽보다는 좀 덜한데 영국에 로이 클래맨스라고하는 목사인데 어느날 교회에서 사라졌어요. 가출을 하신 거에요. 교회가 발칵 뒤집혔죠. 그런데 정부랑 도망갔어요. 더 놀랬죠. 더 놀란 건 뭐냐하면 그 정부가 남자였어요. 그래서 마지막 유서같이 편지를 하나 남겨놓았는데 내 인생에 두 번에 큰 실수가 있었는데 첫 째는 결혼한 것이고 두 번째는 목사가 된 것이다. 그러고 사라진 거에요. 그래서 알고보니까 그 사람이 대학생 때 게이였어요. 그러다 주님을 만난거에요. 그래서 회개하고 그리고 그 생활을 청산하고 자매랑 결혼하고 그리고 신학교에 가고 목사가 되었고 영국 내에서 당시에 1000명 정도 모이는 우리로서는 만 명 하고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사이즈에요. 책도 여러권 쓰시고 굉장히 영향력이 있으신 분이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일이란건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런 교리를 알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에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게이로 살 때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만난 것도 진실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는 그런 게이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평생 하나님 앞에 은혜 안에 살았어야 한다 이거에요. 그러면 그게 그사람만 해당되는거냐.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거에요. 돈 밝히던 사람 결국은 큰 환란 당하고 손들고 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다가 그러다 결국은 은혜 떨어지면은 제일먼저 그 사람 속에 솓구치는게 돈에대한 욕심이에요.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 와서도 사기치고 말이죠. 돈 뺏어가고 말이지. 그런 못된 짓을 하는 인간들도 교회는 나오는 거에요. 또, 회심하기 전에 회심한 후에라도 세상에선 명예욕 있고 높아지고 싶어하던 사람들 그거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새사람 되잖아요. 교회와. 그리고 신앙 떨어지면 이제 세상에서 그렇게 명예욕 가지고 말하자면 충동질하고 그러고 사는 사람들이 이번에 이 교회와서 자기 장로 안시켜 준다고 온갖 똥싸고 돌아다니는 거에요. 결국은 장소만 그라운드만 바뀌었을 뿐이지 똑같은 일 하고있는 거에요. 이건 어떻게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어떻게보면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구원이 얼마나 불완전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경륜은 그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고 하나님이 부족하셔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회개한 죄로 다시 돌아가고 영적인 생명으로 우리를 건져주시는데도 죽음 가운데로 미끌어져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이게요. 올바르게 이것을 이해하고 살면 이 자체가 놀라운 행복이 됩니다. 이게 선악과하고 똑같은 거에요. 선악과 왜 만들었냐고 자꾸 시비를 거는데 안 먹었음 됐잖아 안 먹었음. 왜 먹어요. 만약에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각이 멀어진 그걸 보고 유혹을 받고 저걸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대 이런 생각을 하지 자기가 똑바로 하나님을 의식하고있고 올 곧으면 그걸 보면서 세상모든 만물을 자기 맘대로 다 다스리는데 하나님처럼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처럼 그러다가도 그 나무 하나 앞에 와서는 아 그렇지 저 나무는 나에게 말하는것 같애. 너 자신을 알라. 그 나무를 보면서 하나님만이 이것을 처분하실 수 있고 자기는 그것을 처분할 권한이 없는 거에요. 하나님이 여기서 금하시면 하지 말아라 줄을 딱 그어 놓으시고 이걸 보면서 너와 나 사이에 차별을 분명히 해 탁 줄을 그어 놓으신 그걸 보면서 아 그렇구나 나는 하나님일수없구나 딱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얼마나 그것이 은혜가 되겠어요. 똑같은거죠.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다시 또 망가질 수 있다는 이것을 여러분들에게서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기회에요. 그래서 어떻게? 옛날에 생애적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전 재산을 바쳤던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오늘 하나님을 덜 의지할 이유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거에요.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날마다 날마다 그렇게 갈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결합으로 이탈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영혼은 거침없이 수많은 죽음의 행실을 쏟아놓게 되는거죠. 이게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의 결정적 차이에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근데 영적으로 죽은 사람 즉, 육체와 영혼은 결합되어있는 상태에서 육적 생명을 소유하고 영혼과 하나님에 형상에 결합을 이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인데 죽은 사람들은 죽은 상태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거에요. 그래서 쏟아내는 그 어마어마한 마음과 행동으로 실천되는 수많은 행실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dead works’ 죽은 행실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성경이 우리에게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는 그 죽음의 행실들이 그 사망의 상태에서 확 쏟아져 나와요. 막 쏟아져 나와요. 시인이 그것을 과거에 경험한 거에요. 그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막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거에요. 마치 댐이 터져서 막 쏟아져 나오는 것을 걸레나 막대기로 막을 수 없는 것처럼 확 쏟아져 나오는 거에요. 결국은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망의 상태의 제한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은혜생활 게을리 하고 적당하게 살고 그렇게 하면 당장은 편하고 행복할지 모르지마는 누구든지 우리에게는 타락의 유전자가 있어서 결국은 이 은혜를 떠나게 되면 멀어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영혼의 가사상태로 다가가게되는 거에요. 그리고 거기서 수많은 더럽고 거친 행실들을 막 쏟아내게 되는 거에요. 마음과 언어 말 행동 실천 습관 모든 것 속에서 이렇게 막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면서 살아가는것. 어디에도 하나님이 당신에 생명을 충만하게 깃들이게 할 만한 것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자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이러한 철저한 사망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크신 사랑을 얼마나 배반하는 우리의 삶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다 버리셔서 바로 우리에 이러한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시며 철저히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죄에 메여서 영적인 죽음가운데 살던 우리들을 참아보실 수가 없어서 당신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시고 당신이 죽고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고 당신은 가난해지시고 우리는 부유하게 하시려고 당신은 형벌을 당하고 우리는 축복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그렇게 죽으신 것이에요. 몰랐던 사람들은 아직도 몰라서 그 상태가 인생에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지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인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던 여러분들은 왜 또 그 옛 생활로 돌아갈려고 합니까.
~눈물 흘리며 참회 하였었네 나의 마음도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그러는 동안에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은 말할 수 없이 슬퍼하고 탄식하시고 여러분들을 위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시는 그리스도는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히는 욕을 당하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와 지체들은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여러분들의 그런 명백한 영적 죽음의 상태 때문에 매일매일 십자가에 또 다른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 도대체 누구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어두운 생활이고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 수 있는 행실이며 그렇게 범죄한 영혼으로 참회가 없이 육욕에 이끌려 살아가는 그 마지막 종점은 어디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를 그 큰 죄악에서 건지신 후에 인생이란 광야에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않았었습니다. 매 순간 시시때때로 우리를 낳으신 후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어루만지시고 그리고 우리를 문을 두드리시며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셨고 아직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셨습니다. 회개합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망의 상태에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육욕에 빠져서 산다면 그는 주님을 두 번 욕보이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깊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5.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들 (2)
:기억과 감사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
I. 본문 해설- C. 음부 לואשׁ
어제는 우리들이 5절 앞부분을 우리들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번 복습을 좀 해볼까요? 인간의 생명 두 가지는 무엇이라고 했죠?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 육적 생명은 어떻게 이루어지죠?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영적 생명은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으로. 어제는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여러분들이 예전에 없이 집중해서 열심히 들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교리들을 발견했을 때 받은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우리 기독교 교리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는데 이렇게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제가 어느 날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게 아니에요. 위대한 선배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서 교리들을 세우는 거죠.
자, 이제 계속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5절에서 본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겠습니까‘ 이것은 시편에서 자주 나오는 병행법입니다. 그래서 ’사망 중에서는‘ ’음부에서‘ 그 다음에 ’주를 기억함이‘ ’주께 감사할 자‘ ’없사오니‘ ’누구리이까‘ 이렇게 A, A' B, B' C,
연결이 되면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하면서 그 사상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음부라고 하는 발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히브리 성경에 스올이라고 나옵니다. 이 스올이라고 하는 단어를 여기서 음부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 음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하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내세적 장소를 가리켜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한 번에 모두 주어진 것이 아니라 희미한 데서 점점 명료하게 명료하게 명료하게 주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에 와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계시가 완전하게 주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더 이상의 추가적인 계시가 우리에게 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렇게 완성된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의 지성으로 탐구할 때에 그 말씀의 깨달음을 성령이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온갖 경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시고 은혜를 받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 스스로 어떤 추가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 형태가 방언의 형태든 예언의 형태든 꿈을 꾼 것이든 무엇이든지간에 그러한 형태로 또 다른 별도의 계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라고 할 때에는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계시의 종결성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우리들이 매우 잘못된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제도 제가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가끔 편지가 날라옵니다. 어떤 사람이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내 앞으로 보내었어요. 나한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목회자들한테 보내온 편지 같아요. 시작이 어떻게 되냐 하면 자기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주님이 자기를 막 야단치시면서 한국교회가 이런 이런 일들을 잘못하고 있으니까 너는 모든 교회에 알려라 그러면서 자기에게 계시를 하셨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써서 편지로 보냈는데 그런 편지들이 한 달에도 몇 번 씩 많이 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들이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나오지만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나와요. 신앙이 없다든가 물질주의로 흐른다든가 뭐 아니면 주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든가 뭐 이런 것들 얼마든지 현실적인 이야기고 또 우리들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한국교회를 볼 때 이러이러한 것들이 좀 고쳐져야 할 것들입니다. 라고 하는 자기의 의견이면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서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고 이것은 오류가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그것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꿈을 통해서든지 혹은 무엇을 통해서든지 강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계시를 통해서 받았다라고 생각을 했을 때 그렇게 단선적으로 들어오는 어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라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높게 보이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별로 펼치지 않는 이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계시가 높고 중요하게 느껴지겠어요? 그 순간에. 당연히 전자에 대해서 무게를 갖지 않겠어요? 그런 것들은 잘못된 거라는 거죠. 이런 폐해가 오늘날 아주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 거죠. 우리는 충분히 인정합니다. 잠을 잘 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한 것들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고 인정을 해요. 그것은 이미 있는 성경 속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고 그것을 올바로 알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계시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거죠. 오늘날 예언 운동이니 방언운동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홀리고 그리고 그것에 부화뇌동하면서 사람들이 생명이 없는 그러한 신비한 경험을 좇아가는 것은 모두 오직 한 가지가 모자라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함으로서 얼마나 이 경건의 세계가 신비로운지를 깨닫고 날마다 거기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운 떨림의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자, 그 얘기는 좀 빗나간 얘기입니다마는 그래서 음부라고 하는 개념도 처음부터 모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모든 것들이 구원받기에 필요한 계시들이 모두 충분하게 주어지는 것이죠. 그때에는 이미 인제 지옥과 천국의 교리가 아주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리에서 배우고 있는 내용들이 바로 그런 내용들이죠. 그러나 이제 구약 시대에는 아직 그러한 계시가 분명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죽은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 사람들은 희미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죽은 후에 인간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없었다라고 그렇게 말할 수도 없어요. 욥은 시대상으로 보면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거기에는 하늘에 대한 개념도 나오고 거기에 우리의 중보자로 계시는 그 중보자의 개념도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앞에서 하나님을 뵙는 그런 모든 개념들이 나와요. 그러니까 상당히 발전된 거죠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인간이 사모할 만한 곳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음침하고 그리고 생명이 매우 결핍되어 있는 그러한 어둡고 칙칙한 곳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음부는 비유를 하자면 육체로 보자면 죽음 이후의 무덤을 가리키고 그래서 이 음부를 여러 영어 성경에서 무덤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와 영적 생명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영적 사망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음부는 이제 앞에 본 우리들이 사망과 관련짓는다면 영적 생명이 결핍된 것의 은유적인 표현이에요.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상태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영적으로 영적생명이 결핍되어있고 어둡고 칙칙한 상태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면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두려워한 것처럼 거기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들은 영적생명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다윗이 그 치열한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리고 범죄한 영혼으로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고통스러운 영적인 침체 속에서 깨닫게 된 놀라운 사실이었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제의 설교를 가슴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 영혼의 생명 곧 영적생명보다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영혼과 온전한 결합의 상태에서 충만한 영적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우리의 육체를 다스려 우리의 영육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이바지 하며 사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영적생명이 충만하게 될 만한 일들은 아주 안하거나 힘겹게 억지로 하고 그다음에 해가 될 행동들이나 신앙생활의 태도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거죠. 마치 애들이 먹지 말라는 음식을 먹어서 몸에 해롭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참회와 순전한 믿음으로 날마다 나아가기를 힘쓰는 그러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경건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II.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들
A. 주를 기억함 : ךרכז- 기념
오늘은 이제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리는 것들 두 가지를 이 5절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요’ 라고 말합니다. 범죄한 영혼이 잃어버린 것을 다윗은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이 범죄한 상태에 있을 때 첫째 잃어버리는 것은 주님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께 감사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자카르’ 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구약 성경에서 5천 번 이상 나오는 아주 빈번하게 쓰이는 단어에요. 그러면 주를 기억함이라고 그랬는데 그러면 이 기억한다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기억한다라는 말이 두 가지 표현으로 나와요. 기억하라는 말로도 나오고 또 하나는 반대로 부정명령으로서 ‘잊지 말라’라고 하는 표현으로 나와요. 그러니까 둘 다 단어는 틀리지만 결국은 잊지 말라는 이야기는 기억하라는 이야기이죠.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자카르’ ‘기억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이것은 이제 엄밀하게 말하면 ‘기념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기억은 어떤 일을 겪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 몸에 상처가 남듯이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신자에게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기억한다라고 하는 의미는 잊지 않도록 생각한다는 것이고 또 잊지 않도록 주님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잊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다른 사람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이 기억하다 혹은 기념한다라고 하는 것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를 기억하라‘ 혹은 ‘나를 기념하라‘ 고 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기억의 방식은 단지 잊었다가 다시 생각이 나는 그런 방식이 아니죠., 자,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물들을 대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보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올 때에는 그것들이 우리의 막을 건드리면서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즐거움 이런 감정들을 우리들에게 정동시키지만 그것이 끝나고 나면 표면 위에 있던 물체가 모두 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의 이 모든 생각들이 저 밑바닥 속에 가라앉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는 우리의 기억을 우리의 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속으로 모두 내려가는 것이죠. 우리들이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나요? 맛없는 음식을 좋아하나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죠.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그 한 끼 먹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이천 원으로 해결할 수도 있고 이십 만원으로도 해결을 못할 수가 있죠. 몇 해 전에 중국에서 요리가 나왔는데 일인분에 사천 구백 오십 만 원짜리 요리가 나왔었어요. 그래서 그 요리를 먹으려면 한 달 전에 먼저 주문을 하고 그리고 가서 먹는데 많은 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열 몇 개의 코스 요리가 나오는데 첫 번째 나오는 요리가 녹차 한 잔에 중국 작은 만두 두 개가 나오는데 그게 이백 오십만 원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쨌든 그것을 먹고. 그런데 너무 궁금했어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비쌀까 그러고 봤더니 마지막 그 요리의 하일라이트가 한 사람당 잉어 백 마리를 잡는답니다. 그래서 양쪽에 붙어 있는 수염 두 개를 잘라서 모두 이백 개를 모아서 그래서 그것으로 요리를 해서 접시에 내오는데 이것이 말하자면 사천 구백 오십 만 원짜리 요리의 하이라이트랍니다. 그 요리를 독일 사람 12명이 와서 회식을 하고 갔다네요. 아깝죠. 참, 그 돈을 우리를 주면 세계 선교에 요긴하게 쓸 텐데, 그죠?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말이죠. 그게 이천 원어치를 먹어도 한 네다섯 시간 활동하고 움직이는데 전혀 문제가 없고 이십 만원을 가지고도 해결이 안 되죠. 그거 사천 구백 오십 만 원짜리 먹었을 때에 그 사람들이 그것 먹고 워낙 비싼 거 먹었으니까 한 한달 동안은 밥 안 먹어도 되겠죠? 화장실 한 번 갔다 오고 나면 또 배고파서 저녁에 또 햄버거라도 하나 먹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뭐냐 하면 결국은 뱃속에 들어가면 아무 맛을 못 느껴요. 그래서 십 만원, 이십 만 원짜리 요리를 먹었다고 해서 이 속에서 위가 계속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뱃속으로 들어가면 그게 다 똥으로 되는 공장이기 때문에 무슨 재료가 되던 다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무슨 얘기가 되냐 하면 한 끼에 십만 원 짜리이든지 이십 만 원짜리이든지 간에 그 차이는 입속에서 움직이는 그 불과 그 몇 초 사이의 차이를 위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먹는다 그거죠. 그렇죠? 그것도 너무 과도하게 하면 안 되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제 먹잖아요. 먹을 때는 쓴맛 신맛 짠맛 단맛을 입안 속에 다 느끼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육류 같은 거 씹으면 입에서 기름이 탁 배어나오면서 말하자면 거기에 고소한 육즙의 냄새가 온 입에 번지면서 거기에 양념이 된 매운 맛까지 느껴지고 달콤한 맛까지 느껴지면서 그게 막 올라가면서 머리가 막 반짝 반짝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막 정신이 막 나는 거야. 그러면서 막 온갖 것을 혓바닥으로 느끼면서 그러면서 그래프가 막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정신이 즐거워지는 거죠. 그 맛에 좋은 것 먹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버는 거예요. 그거 멏 초 지만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똑같아요. 여러분들이 한 번 속이 안 좋으면 윽 하고 트림이 올라올 때 있죠? 그 때 십 만 원짜리 먹었을 때는 다시 올라왔을 때 너무 감미롭고 이천 원짜리 먹었을 때는 아주 쓰고 그럽니까? 모두 올라오면 토해버리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똑같이 우리의 정보도 여기서 일어날 때는 수많은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지만 들어가고 나면 여기서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죠. 기억 속에서 그렇게 묻혀 있는 것이에요. 그게 우리들은 기억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다가 다 잊어버리고 살다가 탁 하고 연상되는 사건을 만나면 아, 참, 그거, 그거 어떻게 됐지? 그리고 이 속에서 죽 생각이 나면서 옛날 생각이 다 나면서 다 별의별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저희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민엇국, 민어탕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그래도 그때는 민어가 좀 있었어요. 지금은 뭐 없죠. 내가 몇 주 전에 우연히 가서 민어탕을 하나 먹었는데 참 맛있어요. 먹는데 왈칵 하고 할머니 생각이 나는 거예요. 할머니는 사실 내 마음 속에 기억은 늘 있지만 그러나. 늘 할머니 보고 싶지만, 돌아가신 지가 벌써 이십 이년이 지났는데 늘 보고 싶어서 눈물 흘리는 거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보니까 이거 살아계실 때 정말 잡숩고 싶어 하시던 건데 하면서 마음에 눈물이 핑 돌면서 마음이 아주 짠해지는 거예요. 지금 살아계신다면 내가 이거 매일 사드릴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슬퍼지는 거죠. 그러면 그 잊혀졌던 감정이 민엇국 때문에, 그 민엇국, 얼큰한 거,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거, 가난하게 사신 날, 일찍 돌아가신 거, 지금 살아계시면 내가 사줄 수 있을 텐데 이런 등등의 생각이 어울리면서 밑에 있는 할머니 생각을 확 끌어 당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올라온 생각이 머물러 있나요? 다시 또 가라앉아요. 그러다가 또 민엇국 생각나면 다시 또 올라오겠죠. 이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억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기억하라고 하셨을 때에는 그런 식으로 기억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기억은 대게 그런 식의 기억이죠. 그래서 정신없이 살다가 그러다가 죄짓고 방종하고 살고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고 자기 잘난 줄 알고 살다가 언제 한 싸대기 얻어 맞아가지고 후려쳐서 그저 눈물이 찔끔 나오고 사는 게 고통스럽고 생명이 오락가락 하고 나면 그때서야 이제 말하자면 그게 민어탕이 되어서 할머니 생각이 나듯이 하나님 생각이 나는 거야. 그때 이제 펑펑 울고 막 이러다가 또 그거 끝나고 나면 다시 또 주욱 저기 우물 속에 가라앉듯이 가라앉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 또 두들겨 맞든지 그렇게 돼서 뭔가 뜻대로 안되면 또 하나님 생각이 왈칵 나고 그러다 또 가라앉고 그러는 거예요. 이거는 사실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우리의 의식의 표면 위에 살아계셔서 그래서 당신의 존재와 뜻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시라는 사실이 내 의식 속에 항상 살아있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이었어요. 그래서 뭐라 그래요? 한창 혈기 방자한 그 젊은이를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쟎아요. 두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거죠. 야, 여기 우리 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 또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득죄할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이죠. 어떤 사람이 둘이서 헬멧도 안 쓰고 막 달려가더래. 오토바이를. 교통순경이 붙잡았어요. “여보슈, 당신은 도로교통법 위반입니다.” “왜요?” 그러니까, “반드시 헬멧을 쓰고 운행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만 봐주십시오. 제가 뭐 가까워서 그랬는데.” “ 그래도 당신 넘어지면 당신 죽고 당신 뒤에 있는 사람도 죽을 텐데 그 얼마나 불행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 함께 타고 계셔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니까 교통순경이 “그러면 헬멧 안쓴건 봐주겠는데 정원초과시군요” 그러면서 딱지 끊었대요. 저 쪽은 아직 무슨 얘긴지 몰라. 그러니까 요셉은 바로 그런 식의 삶을 산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에요. 여러분, 생각해보면 그 동행한다는 말도 굉장히 우습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안하시는 적이 어디있어요? 우리가 사실은 불행한 일을 겪는다는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와 놀랍게 함께 하신다는 거예요. 왜? 줘 패시니까. 여러분, 자녀와 함께 하지 않고 자녀를 때리실 수 있겠어요? 그게 바로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삶이에요. 그게 바로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사는 삶이에요.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의식 속에서 살아있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누군가를 사랑해보셨죠. 사랑하면 그게 그렇게 쳐다봤을 때에는 표면 위로 막 떠올라서 기쁘고 행복하고 그러다가 돌아서면 마음 저 깊은 우물 속에 쑥 들어가서 그런 인간이 있었나. 그런, 생각도 안나는 그런 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언제나 그 기억의 표면에서 가라앉지를 않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하물며 말이죠. 아합이 그 왕이 채신머리없게 무슨 나봇의 포도원이 그렇게 갖고 싶어요. 포도 먹고 싶으면 시장에 가서 사먹으면 돼지. 눈을 감아도 떠도 그 아름답고 기름진 포도원이 의식 속에서 항상 살아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기억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바로 그렇게 기억하라는 거죠. 하나님을, 우리가 아무리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성경 펴면 하나님의 말씀이고 걸어오면 하나님의 집이고 집에 가면 하나님의 가정인데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가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와 뜻이 우리의 의식 세계 속에 항상 살아 있어서 그래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생각과 마음 안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의지와 실천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는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이것을 들을 때 당장 ‘야 그러면 이해는 하겠는데 그러면 나의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수시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데’,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나요. 아예 안 떠오르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주일날 와서 이렇게 말씀을 듣고 주일날 와서 말씀을 듣고 ‘아,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지키시고 계시고 나는 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이 땅의 피조물이구나.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겠구나. 그러면서 펑펑 울고 은혜를 받고 감격을 했다 그러면 떠오른 거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월요일부터 시들시들해지면서 이제 토요일이면 충분히 가라앉는단 말이에요. 그리고 주일날 와서 다시 또 뜬다. 그 사람만 해도 좀 낫지. 주일날 와서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눈물로 설교를 해도 가라앉아서 안 떠오르는 거죠. 그런 날들이 계속 지나갈 때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기념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 이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할 거 아니에요? 제가 설명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죠? 그럴 때는 아멘 해봐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죠?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항상 우리의 기억의 표면 위에 떠 있다면 그 하나님과 함께 말하자면 사랑하고 분노하고 가슴아파하고 헌신하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될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어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어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 기억이 가라앉지 않고 우리의 기억의 표면에 항상 이렇게 떠 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거나 마음먹거나 행동하거나 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영적생명을 누리는 삶 아니겠어요?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가라앉지 않고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의 표면에 떠있을 수 있을까요? 간단한거에요. 하나님만 사랑하면 되는 거에요. 하나님만 사랑하면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도 요새도 사랑하시겠지만, 젊었을 때는 다 한번 씩 사랑을 해보셨을 거 아니에요. 지금 그 사람하고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딴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지 사랑해보신적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죠? 그 사람이 생각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 생각이 워낙 과도하게 압도한 나머지 그 사람과 관계가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의미가 없고 무엇을 하든지 다 그 사람과 연결이 되고 그것이 물질이면 그 물질과 함께 모두 연결이 되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잖아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사랑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사랑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여기에서 ’아버지의‘ 라고 하는 이 속격은 소유격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목적격적 소유격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안 사랑하신다는 게 아니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그 뜻이에요. 그것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마음의 표면에 떠 있는 것은 항상 하나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주 놀라운 신비에요.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거죠.
어제도 우리가 그 얘기를 하면서 웃었는데 우리 딸이 그때가 몇 살 쯤 이었을까, 그게 벌써 십년 전이니까. 초등학교 2, 3학년 쯤 됐을라나 그랬어요. 우리 부부가 호주로 여행을 갔다 왔어요. 집회도 하고 하루 이틀 있다가 그러다가 한 주일 교회를 못 지키고 그러다가 왔으니까 오래간만에 돌아온거쟎아요. 차를 타고, 방배동 교회죠, 내렸어요. 우리 집사람이 먼저 내렸어요. 우리 딸이, 그때 우리가 교회 4층에서 살았잖아요. 딸이 엄마 아빠가 온다니까 내려왔어요. 예가 막 뛰어오는 거예요. 엄마가 “아이고, 우리 이슬이” 그랬더니 얘가 이렇게 슥 뒤로 빠져가지고 뒤로 와서 내 품에 안긴 거예요. 그때 받은 상처가 아직까지도 안 지워졌어요. 십년이 지났는데. 그거를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전혀 의식하고 한 게 아니에요. 전혀 의식하고 한 게 아니에요. 엄마 아빠 두 사람이 있지만 엄마는 가라앉았다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떠오르고 아빠는 그 기억의 표면 위에서 항상 떠다니는 거예요. 그게 정확한 해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냥 샥 돌아서. 그러고 나서 한참 후에야 자기가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기억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길 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게 사실은 말만 기억하거라, 기념하거라 잊지말거라 뭐 여러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지만 핵심은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이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하나님은 참 상처받으시고 외로우시고 사랑에 굶주리신 분이시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있으시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어요? 외로우시다면 그분이나 나나 차이가 뭐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이 완전하시고 충족하시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을 하나님 자신이 필요하지 않으셔요. 그러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고 그런 식으로 당신을 기억하라고 강력히 촉구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만 우리가 진정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 하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해가 된다는 말입니까? 마치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당신에게 커다란 손해가 되시는 것처럼 우리를 협각까지 하시면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그것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부르실 그때에 만약에 인간을 노예로 부르셨다면 넌 내게 복종하라 이렇게만 말씀하셔야 될 텐데 넌 나를 사랑하라 이것이 근본이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대에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탁월한 관계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어서 인간 존재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휴머니즘이에요. 기독교야말로 참된, 하나님을 인정하는 참된,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그런 참된 휴머니즘 이란 말이죠. 커다란 감동이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렇게 기억하게 되는 게 결국은 사랑의 효과인데 우리와 교통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가져다주시는 내적인 성향이란 말이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여기고 그와 함께 고착되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성향이에요.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고 그런 성향이에요. 그런 사랑은 성령의 은혜의 소산이라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범죄하게 되면 이러한 내적인 사랑의 성향이 상실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참된 형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의 상태잖아요. 영적인 생명,.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 사이의 결합이 느슨해지면 느슨해질수록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불가능해지면서 이렇게 기억의 표면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 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범죄한 영혼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기억이 없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 때는 하나님이 항상 친근해. 그래서 언제든지 대화를 나누는 거죠. 그래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기도 생활이 아주 풍부해지는 거죠. 그래서 어떤 때는 그런 감정이 아주 가득 차게 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엎드려 기도만 하면 행복하겠다 라는 마음이 밀려오게 되는 거죠. 최상의 교제의 상태인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가 오늘날에는 현대 교회에서 아주 심각할 정도로 약화되고 있어요. 대부분의 교인들이 기도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를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 생활 속에서 주님과 교통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성경과 하나님에게서 찾아내서 이용하려고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거죠. 교회도 교인들을 깊이 기도시키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고 이러한 일들이 힘겨워지기 시작하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이 내적으로 이러한 은혜 안에 있고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기억의 성향이 너무 희미해졌기 때문에 교회에서 프로그램을 걸고 그래도 사람들이 녹녹하게 그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러지를 않는 거죠.
그래서 범죄했을 때 이러한 내적인 성향이 상실되므로 하나님은 기억의 표면에서 깊이 가라앉고 기억의 표면 위에서 출렁대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거짓된 사물들의 표상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나의 육체적인 즐거움 이러한 것들로 막 분요하게 움직이면서 우리의 이 의식의 표면 위에서 막 첨벙거리는 것이에요. 그런 상태에서는 우리 마음에 평안도 있을 수 없고 기도도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아서 영적인 사망 상태에 적합한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죠.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는 거죠. 평안이 없는 것이죠. 평안만 없는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들이 그런 생활을 해 나가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책망하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내면의 질서만 불안한 게 아니라 이제는 외면적인 질서들이 흔들리고 깨뜨려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분노가 치솟고 심지어는 살인도 일어나는 거죠. 엊그제도 신문에 보니까 어떤 아이가 뺑소니를 고발했다고 찾아가서 아예 죽여 버렸더라고. 열네 살 먹은 애들이. 얼마나 무서워요.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에게 어떠한 평안과 질서 같은 것도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사랑하며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것들이 유지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아무리 실험해보고도 마지막에 결론은 똑같은 거예요. 그러므로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에이 좀 더 하고 싶은데 그 다음을 넘어가겠습니다.
B. 주께 감사함 : הדוי -기림
그리고 이제 두 번째로 범죄한 영혼의 상태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께 감사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다’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감사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엄밀히 말하면 기림이에요. 여러분 기림 아세요? 누구누구를 기림 이라고 하쟎아요. 기림이라는 말이 우리 말 중에 굉장히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린다 그거 하고는 좀 틀려요. 그린다는 것은 보고 싶어 하는, 그립다, 그리워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립다 그 다음에 기리다 이 단어는 틀린 단어에요. 그리다는 완전히 다른 단어이고. 그리다는 이렇게 그림 그리는 걸 얘기하는 거고. 그립다는 가치나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것이 가치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상관이 없이 내 마음이 그런 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떨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떤 손해가 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것을 갈구하는 정신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기린다고 하는 말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단순히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숭배하고 높이면서 보고 싶은 것이에요. 그것이 기림이에요. 그래서 영어성경에서 이 ‘요다’를 ‘praise' 라고 여러 성경에서 번역을 했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음부에서는 주를 향한 찬송이 없사오며’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게 기림이에요. 이것을 우리들이 감사라고 번역을 했는데 감사든지 기림이든지 간에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의 움직임이에요. 영혼이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영혼이 즐거운 감정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바로 이 감사이며 기림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찬송을 제대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찬양을 하게 되면 항상 우리 영혼에 떨림이 있고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냉랭한 마음으로 왔다가도 찬송을 주욱 부르고 나면 우리의 영혼이 떨리면서 은혜가 확 밀려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 감사를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이렇게 정의를 할 때에 이 움직임의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우선 첫째는 일반 섭리의 축복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의 움직임이 발생을 하게 돼. 일반 섭리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질서, 사람들의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죠.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요즘 취직 시험 어려운데 시험 응모를 했는데 480:1이라고 그러는데 붙었다 라는 소식이 들어올 때 그때 짜증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붙었을 때 모두 영혼이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겠죠. 그리고 잠시 이후에 ‘내가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구나’ 이럴 수 있겠죠.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떨리게 되겠죠. 그게 그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누가 좋은 회사에 취직한 것도 아니고 딸내미가 기가 막힌 혼처를 만나서 시집을 간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히게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명랑하고 귀여운 며느리가 들어온 것도 아닌데. 환경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아주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내 환경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내 영혼을 어루만지실 때 내 마음 속에서 내 영혼이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내 영혼이 아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거죠. 눈물도 확 나고 기쁨도 확 솟고 때로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아픔 생각도 들고 하면서 막 풍부하게 움직이게 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으면 모두 제2의 사춘기를 맞이하게 되요. 진짜에요.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 왔을 때 그 사람이 집사든 권사든 애들이든 어른이든 할 것 없이 무표정하고 입이 대빨 나와 있는 사람들 있잖아요. 늘 변함이 없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리고 예배 시간에는 늘 지그시 눈을 감고 심오한 명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은혜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 바깥에. 은혜를 받으면 제 2의 사춘기가 와요. 사춘기 때 어때요? 뭐 우습지도 않은데 늘 깔깔깔깔깔깔깔 말똥만 굴러가도 뱃살을 잡고 막 웃고 그 다음에 슬프지도 않는데, 낙엽이 떨어지면서 저러러 뭐라고 그랬길래 그렇게 울어? 낙엽 떨어지는데 뭐 보태 준 거 있어? 낙엽이 떨어지는데 지가 왜 울어? 그 떨어지는 수많은 낙엽 보고 울면 눈이 다 짓물러 버리겠네. 어느 날 낙엽이 탁 떨어지는데 눈물이 핑 돌면서 읽지도 못하는 시집은 늘 가지고 다니고 말이지. 그렇게 폼을 잡잖아요. 그것도 메뚜기도 한 철이에요. 그러잖아요. 그런데 똑같이 우리들이 은혜를 받으면 영적인 사춘기가 와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막 활짝 웃다가 또 막 눈물 흘리다가 어금니를 깨물면서 결심을 하고 그렇게 말하자면 활발한 영혼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냥 그 긴 예배 시간 내내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그렇게 안하고 막 출렁거리면서 움직이는 거죠. 누가 어쨌대. 그러면 깜짝 놀라면서 우리가 기도해줘야되겠네. 누가 어쨌네 그러면 할렐루야 감사하네 이러는 거죠. 그런데 이게 이제 은혜가 쭈욱 떨어지게 되면 말하자면 그 사춘기가 아니고 심술기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누가 그렇게 은혜를 받았대 그러면 지까짓께 받으면 얼마를 받았겠어 이러고 누가 어려운 일이 일어났대 그러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누가 어렵다고 그러니까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 그 사람은 사람이 그것밖에 안 돼. 누가 뭐 좋은 일이 생겼대 그러면 에이그 지가 뭐 좋은 일 생기면 나한테 도와주는 거 있대? 괜히 시비조고 항상 입이 이렇게 나와서. 요새 야생 맷돼지들이 많이 돌아다닌다고 그러더라고. 어떻게 종자가 통하나 모르겠네. 교회도 올꺼에요 아마. 참 답답하죠. 사람들은 저 사람 원래 성품이야 그러는데 성품이 그런 게 아니라 은혜가 떨어져서 그래. 은혜가. 은혜가. 그래서 말이죠. 아주 활기찬 삶을 살아가. 사춘기 때 항상 감정이 충만하고 또 기쁘고 희망찬 일이 있을 때 아침에 일어나면 날마다 만나는 세상이 새로운 세상이잖아요 그렇죠. 은혜의 세계 속에도 그렇다고요. 고난이 와도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 내게 어떤 일들을 행하실까 이런 기쁨들이 막 솟아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잘 들으세요. 중요한 게 이거에요. 이런 일반섭리의 축복을 통해서도 결국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의 움직임이 발생하고 그런 거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내 영혼을 만나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면 상황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데도 우리에게 어떤 고백이 나오냐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 고백이 막 밀려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말이죠. 사람의 은혜로운 내적 성향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죠.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에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억이 가득 있어서 우리의 의식의 표면위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경험되고 항상 역사하신다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연합의 상태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직접 만져주신 것이 아니라 일반 섭리 속에서 우리가 뜻하는 바를 하나님이 잘 풀어주셔요. 그때마다 영혼이 아주 활발하게 힘차게 말하자면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그 영혼을 어루만지시지 않아도 사물들의 질서를 이렇게 해주셔도 그것을 통해서도 그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아주 밀접하게 두 개가 연관되어서 같이 작동을 하는 거에요.무슨 얘긴지 알죠. 이것이 영적인 기쁨이고 이것이 사물들의 질서라면 이게 딱 돼있어서 움직이면 같이 막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죠? 감사의 생활이 아주 일상화되고 그리고 활발한 거죠. 그러니까 어떤 때는 너무 과분한 거죠. 그죠.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너무 너무 감사한 거죠.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면서, 전율하면서 감격이 밀려오는 거죠. 살면서 그런 때 참 많이 있습니다. 그 두 개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뭐냐 하면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느껴지는 거죠. 참 놀라운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지시지 않아도 자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게 범사쟎아요. 범사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가 성립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러한 성령의 은혜가 결핍되어 있을 때에는 그때는 하나님이 일반섭리에서 복을 주셔도 이게 영적인 활발한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와 지지를 않는 거죠. 그래서 입으로는 ‘하나님 은혜 참 감사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누구도 됐고 누구도 됐고 누구도 됐는데 뭐, 애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들어간 거지, 하나님이 뭐 도와주셨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사업, 우리가 열심히 했으니까 된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감사하지를 못하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 슬프지 않겠어요? 우리에게 있는 모든 나쁜 것들은 우리 때문에 온 것이고 우리에게 온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우리들은 아주 잊지 말고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잖아요.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이 감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 기림이에요. 영혼과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고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그분에게 감히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날마다 내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나의 삶의 모든 질서를 이끌어 나를 잊지 않고 버리지 않으시는 그것을 보여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찬송하면서 사는 것 이게 성도의 참다운 행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할 때에 그 두려움이 변하여서 우리의 노래가 되고 그 두려움이 변하여서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서 노래가 되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감사가 우리의 생활과 실천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림이 될 때에 그때에 비로소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충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주 충분하다는 마음이 드는 거죠.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충분하다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범죄한 영혼에는 이러한 기림이 없습니다. 범죄한 영혼은 철저히 자아 중심적이에요. 범죄한 영혼은 철저하게 자아 중심적이고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어도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범죄한 영혼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랑에 가득찬 상태이기 때문에 자아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고 그 모든 자아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통치에 모질게 대적하는 반역을 불러와요. 그래서 마음과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충만한 하나님의 행복을 느끼고자 하는 데 그것은 사실 하나님이 그를 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상 그렇게 하실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이 주님께 받은 것을 한 번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있는데 어는 교인이 상담을 하겠다고 와서 자기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지를 주욱 설명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그분에게 충고를 했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를 해줄 테니까 그 대신 당신도 한 가지를 해라. 우리 이 주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이 주 후에 만나자” 그리고 백지를 한 장 줬어요. 그리고 집에 가서 여기다가 억지로라도 좋으니까 남에게는 없는 것을 하나님이 너에게 주셔서 고맙고 감사하지 않더라도 고마워해야 할 것들 그것을 여기다가 적어와라. 그리고 이 주 후에 만나자. 그랬더니 앞뒤로 새까맣게 적어왔더래요.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 버린 자처럼 느껴졌는데 이것을 이 주일 동안 다 적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결국은 받은 것이 없어서, 모자란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기억의 표면에 살아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는 영혼이 된 거에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까. 가끔 병문안을 가거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심방을 하면서 내가 말합니다. 당신이 그거 빼놓고 하나님이 안주신 게 뭐가 있냐?
IV. 결론: 구원을 간구함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목회자들을 주시고 아이들은 회심시키고 은혜 안에 살게 하시고 그거 하나만 안 주셨는데 안주신 그것이 혹시 그것을 통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당신의 영혼을 활발하게 떨리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생각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거죠. 범죄한 영혼에는 기림이 없습니다. 범죄한 영혼은 결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범죄한 영혼은 주님의 그 크신 사랑, 그분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수많은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안주신 것들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자신이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을 들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많은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사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사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만나서 그 안에서 누렸던 그 수많은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주님을 믿었어도 주님을 위해 드린 것이 별로 없지만 주님은 자기의 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선물로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더 많이 아끼실지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깨닫지 못했다면 이렇게 깨달으면서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오면 되고 만약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어둠속에 있게 되었다면 이제 이렇게 참회하고 영적인 생명을 다시 분여 받아 주님을 기념하고 주님을 기리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언제든지 당신 앞에 나오기만 하면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온 세상이 변해도 흔들릴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6.범죄한 영혼의 탄식과 눈물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6:6~7).
Ⅰ. 본문해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이 어떻게 범죄 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눈물 흘리는 시간들을 보내었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약간의 과장법이 동원되었지만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과장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회개의 격정과, 눈물로 가득 찬 자신의 마음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과장법이기 때문입니다.
Ⅱ. 범죄한 영혼의 탄식과 눈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범죄 한 영혼의 탄식과 눈물을 보게 됩니다. 이 탄식은 성경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간의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이 탄식은 영혼의 눌림을 인하여 나오는 것이고, 눈물은 자신이 지은 죄악에 대한 후회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양심의 억누르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죄의 본질과 역사하고 있는 힘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죄에 대한 징벌로서 환경의 r깊음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영혼은 깊은 눌림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눌림 속에서 시인은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여 죄를 지었지만, 그 죄의 결과로 찾아온 곤고한 자신의 영혼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에서 자기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에 대한 탄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자신이 흘린 눈물에 대해서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은혜의 사람이요, 계시의 사람이요, 찬양의 사람인 동시에 그는 또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시편 여러 곳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린 자신의 경험을 격정적으로 토로하였습니다. 때로는 악인의 공격과 원수의 모함에 눈물을 흘리고, 도움 받을 길 없는 외로움 속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또 자신과는 다르게 악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의 죄악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편 6편에서 흘리는 아 눈물은 자기가 지은 죄악에 대해서 후회하는 데에서 흐르는 눈물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범죄 한 영혼에는 안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영혼에게는 안정과 평안이 있지만, 범죄 한 영혼에게는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고 하는 영혼의 절망적인 탄식 속에서 눌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행복, 나아가서 인간의 모든 본분은 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 할 때에 그 모든 행복은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행복이고, 그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이기 때문에, 행복은 사라져도 행복의 원천인 하나님은 남아있기 때문에 신자는 이 세상의 변전하는 사물의 쇠락, 혹은 융성 때문에 갈등하지 않을 수 있게 되고, 하나님 때문에 평화를 누리며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는 바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기도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 한 영혼에는 이러한 탄식과 눈물이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에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6절과 7절에서 범죄 한 영혼 다윗은 탄식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Ⅲ. 회개란 무엇인가?
A. 회개의 본질
그러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의 본질이란 어떤 것일까요?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심판하고 처벌하는 자기 깨어짐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죄를 짓는 과정과 아주 유사합니다. 죄를 지을 때 외부의 사물을 보고, 유혹을 받고, 생각이 굴복하고, 마음의 정동이 일어나고, 의지가 굴복하는 것처럼 회개도 역시 똑같이 그렇게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과정을 거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회개는 지성이 죄를 깨달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죄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앎은 그 죄를 뼈아프게 느끼고 회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앎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 죄 자체의 숨는 특성 때문입니다. 죄가 일단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놀랍게 빠른 속도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더불어 친화적인 작용 속에서 마음의 일부가 되어서 마음 안에 숨어버림으로 우리 인간은 죄가 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자기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어두운 영혼을 비춰줄 때 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지성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죄에 대한 깨달음은 개별적인 범죄에 대한 깨달음과 총체적인 죄 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개별적인 범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이 이것이라고 하는 기준이 신자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때 어떤 죄를 범하게 되면 이것은 그 기준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는 양심의 가책과 판단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죄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런 기준을 마음에 두며 살지 않도록 우리를 어지럽힙니다. 특별히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을 부인하는 이 세상의 풍조는 우리가 선악의 기준이라고 가르쳐주기 때문에 이 세상 사상에 물들면 물들수록 교회에서 많이 가르쳐주어도 이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서지 않는 것이죠. 머릿속에 법의 기준이 서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이 법의 기준이 작용하고 있지 않으면 사람의 행동은 법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념적으로 그 법에 대해서 알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마음속에 선명하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신자의 의무고, 신자가 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바로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서 개별적인 범죄를 깨닫게 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분명하게 마음속에 선으로 그어져 있다면, 그러면 무엇인가 남의 것을 훔쳤을 때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훔쳐온 물건을 보면서 ‘내가 이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적인 범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때에 변명할 수 없이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별적인 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깨어 있는가 하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개별적인 범죄에 대한 깨달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의 죄를 깨닫고 나면 비로소 자신은 깨어나 이 죄가 어디로부터 유래되었는지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더듬어 내려가게 될 때에 그는 그 개별적인 죄와는 비교되지 않는 아주 커다란 죄의 원천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총체적인 죄 성과의 만남입니다. 다윗은 이런 개별적인 범죄를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본성이 철저하게 부패한 본성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고백이 바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음이여.” 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모친이 죄를 지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자기가 지은 이 개별 죄의 뿌리는 내가 선택하기 전에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지니고 태어났다고 하는 죄의 선천적 특성에 대한 깨달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 성을 맞닥뜨리게 될 때에 신자는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과 힘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찾아온 영혼의 죽음은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이때에 인간의 지성은 철저히 죄를 슬퍼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에 눈물을 흘리고 운다는 것이 죄를 회개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죄에 대한 올바른 지성의 깨달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회개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니, 정서가 죄를 슬퍼하는 것은 지성이 죄를 올바르게 인식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후회하다, 회개하다’는 이 단어가 두 개로 쓰입니다. ‘메타멜로마이’라고 하는 단어와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입니다. 두 단어 모두 ‘메타’라는 접두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twice, again, after’의 뜻입니다. 즉 ‘후에, 나중에, 다시 한 번’ 이런 접두어이고, ‘메로마이’는 ‘슬퍼하다, 혹은 우울해하다’ 이런 뜻이고, 여기에서 영어단어 ‘melancholy’가 온 것입니다. ‘노에오’는 ‘누스’라고 하는 명사의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알다, 이해하다, 지성으로 직관하다’ 이런 정도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타멜로마이’는 단지 후회하는 정서이고, ‘메타노에오’는 이와 구별되는 참회의 정서입니다. 그래서 ‘메타멜로마이’의 회개는 가롯 유다의 회개를 표현할 때 쓰였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았습니다. 당시 은 삼십은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돈이 탐나서 예수를 팔았지만, 결국 양심에 처절한 가책을 받고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한 채 던져 버리고, 자신은 목매어 죽었고, 줄이 끊어져 떨어지면서 배가 터져 탕자가 흘러나오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평범한 질문을 하게 되죠. 그렇게 자살할 정도의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더라면 아마 다윗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후회하는 ‘메타멜로마이’의 정서는 있었지만 이것은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공정한 이해는 결핍한 것이었습니다. 결핍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자기 독립의 표현이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 지을 수 있는 죄 가운데 가장 커다란 죄가 ‘절망’이라는 죄입니다. 이 절망은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깊이 낙심할 때에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로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절망한 사람은 스스로 이 피할 길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것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겠다는 인간의 비 의존적인 성향의 적나라한 발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커다란 죄가 되는 것이죠.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자살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의 좌절된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삶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없이 자살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불굴의 강력한 죄 성의 표현이기 때문에 고래로부터 이 자살은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자의 선택이라고 정죄되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판단을 백퍼센트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전통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타멜로마이’의 이 회개의 정서를 가지고는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고, 이 인식이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충심 적으로 역사할 때 그는 반드시 죄에 대해서 슬퍼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에 대한 진정한 슬픔이 없이 회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서가 죄를 깊이 슬퍼할 때 의지는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영혼의 몸부림입니다. 여기에서 의지는 홀로 역사하지 않고 회개하는 과정에 개입하시는 성령과 함께 역사합니다. 둘 사이에 아주 신비적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야말로 신비인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성령의 의지에 의해 저항 받지 않고, 성령의 의지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가운데, 성령도 인간의 의지도 지극히 자유로운 가운데서 역사함으로써 인간은 성령에 힘입어 죄에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에서의 돌이킴은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문제가 되었고 정죄에 빠지게 된 그 개별적인 범죄로부터의 돌이킴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개별적인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 총체적인 인간의 타락한 죄 성으로부터의 돌이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범죄로부터 돌이켰다 할지라도 여전히 총체적인 죄 성은 인간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끊어버릴 수 없는 자신의 일부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신자는 회개하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이 모든 회개가 종결될 수 없다고 하는 처절한 자기 부족을 절감하게 되는 가운데, 의지는 스스로 죄에서 돌이키면서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철저하게 회개하는 가운데 이 인간의 의지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져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가 죄에서 돌이키게 되고, 지성이 명료해지게 되고, 정서가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게 될 때에 차츰 그의 영혼 안에 있는 질병적인 증상들은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을 고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의지가 죄에서 돌이켰다고 할지라도, 의지가 돌이킨 그것을 계속 돌이킬 수 있는 힘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회개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였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의존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진정으로 회개했을 때 인간은 더더욱 그 은혜의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 절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참다운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런 복음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그 마음 안에는 죄에 굴복하고자 하는 죄 성이 반드시 있는데, 그 있는 죄 성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 죄 성이 역사하여 크고 작은 죄들을 끊임없이 마음과 행위 안에서 짓게 만드는데도 지성이 이 죄에 대한 진정한 진실을 깨닫지 않고 정서가 이 죄를 슬퍼하지 않고 의지로서 이 죄에서 돌이키는 전적인 회개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신자는 영적인 생명을 잠식당한 가운데 영적으로 죽은 자와 방불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영혼의 싫증은 번창하게 되고, 육체의 게으름과 짝한 영혼의 싫증은 마음껏 죄가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인간의 마음 안에 마련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속에서 예배는 형식화되고, 기도생활의 의무는 무시되고, 마음을 쏟아놓는 하나님 앞의 고백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혼이 희열에 뛰노는 이 은혜의 감격은 지난 시대의 유산으로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른 뼈와 같이 살아가는 오늘날 신자들의 영적인 해부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여러분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 기독교는 모두 사단이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도 확실하게 맞습니다.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 모든 기독교는 그 모양새가 어떠하든지 결국 그 저자는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지상에 존재했던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 가장 탁월한 의식을 가졌던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얻는다는 교리를 로마서 가운데 개진한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매일매일 죽는 것은 다른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자기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회개 없이도 성립되는 기독교 신앙, 회개 없이도 활기차고 행복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당장에도 이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영적으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이런 복음은 처음서부터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서 영혼을 지옥에 팔아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감언이설에 속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서 살고,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주신, 한번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어둠속에 묻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다윗은 오늘 자신의 죄를 자각하며 탄식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도저히 이 죄로부터 스스로를 건져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는 명령만 내리면 순종할 수많은 군대와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있었습니다. 강성한 나라의 임금이었고, 자기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백성들이 많이 있었고, 자기 가까운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충신들이 있었습니다마는 죄지은 영혼으로 탄식하고 눈물 흘리는 그 순간에는 그 모든 것들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이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회개만큼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습니다. 회개하는 그 순간에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캄캄한 우주와 죄 지은 자신과 그 죄를 판단하시는 거룩하고 엄위하신 그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이죠. 거기서 결국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될 때에, 한 분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자기의 죄를 위해 이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구속 주 예수시라는 것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불행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생활을 통해 참된 영적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
회개는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로 나뉩니다. 율법적 회개는 율법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고, 복음적 회개는 복음 때문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두 장소에 율법을 새기셨습니다. 하나는 돌 판에 새긴 율법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마음 안에 새긴 율법입니다. 마음 안에 새긴 이 율법은 양심으로 작용하는데, 양심과 율법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작용을 하는 것이죠. 양심은 고소하는 기능을 하고 율법은 송사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니, 양심 없는 율법도 없고 율법 없는 양심도 없어 구분되지만 사실은 둘은 하나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 죄에 대해서 율법과 양심은 함께 협동하여 우리를 정죄합니다. 정죄되는 판결은 다양하게 우리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양심이 우리에게 내리는 판결은 죄의 크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만 판결을 내려요. 그게 뭐예요? 사형이에요.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너무 괴로우면 나중에 무슨 생각이 들죠? 죽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양심이 내리는 사형판결이에요. 죄의 질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어요. 그러면 죄의 양은 차이가 있잖아요?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시비가 붙어서 “이 자식이 순 나쁜 놈이네.” 이러고 욕을 했다고 칩시다. 그 말밖에 안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한테 어떻게 그렇게 욕할 수 있느냐고 소송을 냈어요. 그래서 법정에 서게 되었어요. 나는 법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한 때는 법을 참 좋아했어요. 혼자 공부를 했는데, 한참 되었어요. 법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법원에 가면 기각할 것 같아요. “ 런 일은 사람이 살면서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걸 가지고 법정에까지 오냐? 그건 법원에서 심리의 대상이 안 된다.”라고 기각할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이해가 안 가면 한 번 해 보세요. 그러나 “이 자식이 순 나쁜 놈이네.” 하고 주먹을 날려서 옥수수 열 대를 뽑았어요. 그러면 법원에서 “그런 건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니 그냥 돌아가라.” 그러겠습니까? 어림없죠. 그건 폭행죄에요. 그리고 옥수수가 열 개 쏟아질 정도면 육 개월은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합의가 안 된다면. 저쪽 피해자가 나 돈도 필요 없다, 저놈 콩밥 먹여야 되겠다고 하면 육 개월은 살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자식 이거 나쁜 놈이네.” 하면서 칼로 푹 찔러서 죽여 버렸어요. 그러면 이거 육 개월 가지고 안 되죠. 사형 되든지, 정상을 참작해서 종신형이든지, 우발적인 범죄인가 고려해서 한 7년이나 10년 정도 살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이 나쁜 자식이네.” 욕한 그 사람이 동네 박 씨 아저씨가 아니라 황제였다면 어떻게 되죠? 자, 첫째 황제보고 “이 자식이 순 나쁜 자식이네.” 하고 대놓고 욕을 했어요. 판결이 어떻게 되죠. “저놈을 죽여라.” 주먹을 휘둘러서 황제의 옥수수를 부러뜨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사형. 황제를 칼로 죽여 버렸어요. 그것도 사형입니다. 대상이 아주 존귀하면 죄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질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더 얘기해보죠. 정보기관 사이에는 독순술이라는 것이 있어요. 영어 표현 중에 이런 거 알아요? A read my lips. 제 입술을 읽어 보시죠. 독순술은 뭐냐면 저 멀리 있는 어떤 사람을 망원경으로 감시하면서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질 찾아내는 거예요. 그런 독순술 감시사가 황제 옆에 있다고 쳐요. 그런데 황제는 보지도 못했는데 저 1km 떨어진데 있는 사람이 “저 나쁜 자식이야.” 라고 얘기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의 죄는 뭘까요? 그것도 사형이에요. 그러니까 이 죄를 짓는 대상이 워낙 위대하게 되면 죄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질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물론 성경은 죄의 크기를 이야기해요. 그리고 우리들이 작은 죄는 쉽게 용서받지만, 큰 죄는 쉽게 용서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시간 세계 속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어서 우리가 큰 죄에 빠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세요. 그건 충분히 인정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보면 인간의 모든 죄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분모를 무한대로 하는 그 위에 있는 숫자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모든 죄가 사형이에요. 그래서 양심과 율법의 판결은 아주 간단한 거예요. 양심이 사용하는 율법의 판결은 항상 간단해요. 죄를 짓고 나면 인간이 그 죄에 대한 인식이 강력하게 살아있을 때 죽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면서 결국은 이 양심이 살아서 그 사람을 끊임없이 정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실제로 큰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그만 죄를 지었는데도 워낙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옛날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한분이 목매어 자살했잖아요. 딸 같은 여선생한테 “김 선생, 커피 한 잔만 타와.” 시켰어요. 학교에서 그러면 안 되죠. 그걸 가지고 고소를 하고 운동을 해 가지고, 몸종처럼 교사를 부리는 부도덕한 교장 선생님이다 하고. 결국은 괴로움에 못 이겨서 자살한 거예요. 사실 흉악범들이 보면 그건 자살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거죠. 그렇죠? 이러한 것이 바로 율법적인 회개의 방식이에요. 그래서 율법적인 회개의 특성이 뭐냐면 자기의 이익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볼 수 없고 후회라고 봐야지 맞는 거예요. 결국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두려운 상황, 고통 때문에 예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적 회개에요. 여전히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된 자신의 불행한 상태에 대해서 아파하고 있는 것이에요. 중심 자체가 자기중심에서 말뚝이 안 옮겨진 상태에요. 그러니까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면 확장된 자기사랑이에요. 자기사랑이 좌절되자 그렇게 좌절할 수밖에 없도록 선택한 자신에 대해서 뉘우치는 거죠. 뉘우치게 될 때 앞으로는 그런 일을 안 할 가능성도 있어요. 그 사람이. 예를 들면 운전을 하는데 중앙선을 막 넘나들며 까불다가 사고가 나서 죽을 뻔 하다 다시 살아났다면 다시 안 그러겠죠. 그것은 모두 자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적인 회개는 달라요. 율법적인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회개라기보다는 후회이고, 이 복음적인 회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회개라고 할 수 있는데, 복음적인 회개에는 반드시 율법적인 회개의 성격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역할을 해요. 왜냐하면 어쨌든 이 율법이 없으면 인간은 회개가 불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율법 앞에서는 죄를 깨닫고 자기가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뿐이지, 어떻게 그 사형에 해당되는 죄의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율법이 가르쳐주지도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주지 않는 것이에요. 율법의 한계를 이해하면, 율법이 그 용도라고 이해를 하면 그 율법은 참 고마운 것이죠. 낫은 처음부터 풀을 베도록 만든 거예요. 풀을 베도록 만든 것을 가지고 칼국수를 썰려고 하면서 무슨 칼이 이렇게 생겼느냐고 투덜대면 안 되죠. 그건 어차피차 용도 자체가 다르니까. 복음적 회개는 복음 때문에 회개하는 거예요. 그럼 복음이 뭐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 Jesus died for us. 그러면 거기서 'for' ‘위하여’ 라는 것이 세 가지 의미에요. ‘우리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이런 뜻이에요.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 때문에,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회개하는 거죠. 그래서 죄를 지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발견해요. 자기가 지은 그 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예수를 나무에 매달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만들었던 그 죄를 자기가 의지 안에서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서 뼈저리게 아파하고 후회하는 가운데, 이 후회는 단지 ‘메타멜로마이’의 회개가 아니라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 때문에 못 박히셨다는 회개이고,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명예가 이 땅에서 누를 입었다는 것에 대한 회개에요. 그러니까 이런 복음적인 회개는 자신이 죄의 결과로부터 피하고 싶다든지 도망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개념 때문에 하는 회개가 아니에요. 그래서 바실레아 슈링크라는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회개하면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참답게 회개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는 이 죄에 대한 형벌을 모두 받는 고통을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통을 다시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회개가 참된 회개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참된 복음적인 회개에요. 이렇게 죄지은 자기와 자기가 지은 그 죄가,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지은 죄와 자기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그 죽음이 한꺼번에 하나의 지평으로 밀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자기는 그렇게 자기를 위하여 당신을 버리신 예수를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함으로 죄를 지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뼈저린 후회의 고통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재현되는 거예요. 그때 커다란 고통이 이 신자의 내면의 세계 속에 밀려오게 되고, 이 밀려오는 과정을 통해서 신비하게 이천년 전에 나무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이 이번에는 그 신자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재현되는 거예요. 이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오늘 그 죽음의 기운이 내 속에 스며들어서 살아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함께 죽음으로 데려가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여 죄를 지으려는 인간의 옛 자아에요. 인간을 미워하고, 정욕대로 살고, 탐욕을 품고, 물질에 대한 탐심을 느껴 도둑질을 꿈꾸고, 다른 사람을 밟고 그들 위에 높여지고자 하는 이런 모든 내면과 외면의 죄를 지향하는 원천인 그 죄 성을 닮고 있는 옛 자기가 그 과정을 통해서 치명적인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그는 처절하게 영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죽임을 충분히 당하게 되었을 때 신자는 비로소 자신의 영혼이 아주 가볍게 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자기 안에 충만하게 살아계신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영적 생명이에요. 이 고백을 사도바울이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부분이 우리 성경에는 과거시제인데, 희랍어 성경에는 현재 시제에요. ‘에스타오로타이’-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게 바로 신자의 진정한 영적 삶이에요. 눈감고 방언 따라하고, 말도 안 되는 속임수 같은 예언 따라다니는 것이 영적 생활이 아니라 지금 설명하는 이것이 바로 이천년 교회사 속에서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누리고 싶어 했던 진정한 영적 삶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복음적인 회개를 하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뭐냐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은 죽고 주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도 항상 ‘내가 그것을 좋아하니까’ 이것이 이유였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이에요. 자기가 사랑하는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일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이 사랑은 나뉘지 않고 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통합을 이루는 것이에요. 이 과정을 통해서 신자는 죄를 깨닫고, 그 죄에 대해서 인식하고, 슬퍼하고 돌이키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심판하고, 자기를 처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C. 회개의 효과
그래서 이 회개의 효과는 전인적이에요. 그래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회개의 작용은 위로는 영혼에 영향을 주어서 자기를 사랑하던 경향성을 죽여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왜? 이유는 간단하죠. 왜냐하면 그렇게 정죄 받아 죽음에 해당된다고 했을 때 자기를 구원하실 유일한 길을 그리스도 예수께 발견했기 때문이죠. 위로는 영혼에 영향을 주고, 영혼의 작용인 지성은 맑고 명정하게 하고, 또 회개했을 때 성경을 읽으면 막 빨려 들어오죠. 놀랍게 빨려 들어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 그 이해력은 놀랍게 탁월하게 되요. 이 영혼이 맑았을 때 쓴 글과 혼탁했을 때 쓴 글은 현저히 차이가 나요. 본인이 쓰고 본인이 느껴도 차이가 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느끼겠어요. 그래서 우리의 지성과 정서, 의지 모두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영향을 미쳐요.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못 보면 어떻게 되죠? 병이 들잖아요. 그 사람을 만나면 그 병은 치료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보고 싶을 때 최대의 약은 보는 거예요. 육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너무 분명하지 않아요? 놀라운 영향을 줍니다.
회개의 가장 뚜렷한 효과는 지성 안에서 나타나요. 그래서 어둡고 혼란스럽던 것이 깨끗이 정리되면서 아주 또렷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눈 나쁜 사람이 안경 안 쓰고 사물을 보다가 안경점에 가서 도수 맞는 안경을 딱 쓰면 모든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회개하고 나면 지성이 그렇게 맑고 명정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정서에 변화가 오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 안에 충만해요. 그리고 그분의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해요. 그러면 행복한 거죠.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데 있는데, 그것을 자기가 충분히 느끼면서 사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어요?
더 큰 영향은 의지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이 ‘선한 의지의 새로움’이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해야 된다는 것은 아는데 정신의 힘이 모자라서 도저히 그것을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그런 것 아니에요. “네 원수를 용서하라.” 너무 잘 알죠. 그렇게 하면 좋다는 것을. 그런데 정신의 힘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거죠. “돈에 대해서 너무 탐욕을 갖지 마라.” 좋은 걸 누가 몰라요. 잘 알죠. 그런데 그걸 억지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거죠. “정욕에 흐르지 마라.” “순결한 삶을 살아라.” 그걸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는 우리에게 그걸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그렇게 절실하게 고백을 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명령을 하시는데 몇 번 해봐도 그게 안 된다는 걸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저 밑으로 나동그라지고, 나동그라지고, 나동그라지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기도를 바꾸잖아요. 뭐냐면 “명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내게 명하시옵소서.” 명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라는 뜻이 무슨 뜻이에요? 명하는 것은 계명이고, 그것을 달라고 하는 것을 그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달라는 것이에요. 그 은혜의 힘은 선한 의지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선한 의지의 힘을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게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 은혜의 힘으로 순종하겠나이다. 이게 뼈저린 자신의 고백에서 나오는 거죠. 여러분,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일곱 살 때 혼외정사로 아데오다투스라는 아이를 낳은 것은 기억하죠?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 버립니다. 버린 이유는 간단해요. 더 좋은데 장가가기 위해서. 그 여자도 그리스도인이었어요. 그리고 그 여자는 결국 아프리카로 돌아가죠. 그리고 이제는 순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죠. 정혼을 했는데 로마의 법에 이 여자가 결혼 적령기에 2년 미달이에요. 2년을 기다려야 되요. 그 사이에 다시 사건을 벌여요. 이런 자기의 자전적인 경험을 통해서 아무리 하나님이 좋은 것을 명령하셔도 나는 그것을 이행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그 유명한 말 “명하는 것을 제게 주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제게 명하시옵소서.”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거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 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명언이에요. 그러면 결국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 앞에. 그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행하지 않은 책임에 대해서는 누구의 핑계도 댈 수가 없는 것이에요.
여기서 마지막 한 가지, 회개하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지성적 혼란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회개했을 때 다시 그 죄가 자신에게서 반복될 때 느끼는 혼란이에요. 분명히 죄를 깨달았고, 분명히 죄에 대한 깊은 슬픔도 있었고, 그래서 은혜 안에서 선한 의지가 발동 되서 죄에서 돌이키기로 결단을 내리고 또 상당 기간 동안 그렇게 행했는데, 다시 그 죄로 돌아가게 될 때에 이 신자의 불쌍한 영혼은 아주 큰 혼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떤 혼란을 느끼냐면 대개 이런 혼란을 느끼는 거죠. ‘전에 내가 한 회개가 가짜가 아니었을까?’ 두 번째는 뭐냐면 ‘회개해도 이것은 별 수 없는 거구나!’ 세 번째는 ‘회개해도 이 회개는 하나님이 나에게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그러면서 여기에서 죽었던 율법과 양심의 송사들이 되살아나서 다시 사형언도를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절망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네 번째는 ‘죄의 힘은 워낙 크고 은혜의 힘은 아주 미약해서 상대가 안 되는구나! 나의 이런 상태는 개선할 수 없는 운명이구나!’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때 죄에 대해서 고분 고분하는 생활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시골에서 자라지 않아서 잘 모르죠? 병아리가 깨어나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얼개미 같은 닭장에다 집어넣어요. 그러면 비가 쏟아지지 않는 한 움직일 일이 없어요. 마당에서 먹고 자고 그러는 거죠. 병아리가 그 속에서 계속 있다 보면 한 달 정도 되면 꽤 커지거든요. 걔네들은 거기서만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만 사는 거예요. 거기가 온 세상인 줄 아는 거예요. 주인이 와서 열어줘도 안 움직이고 거기서만 뱅글 뱅글 돌아요. 거기에 익숙해진 삶이죠. 그러다가 앞에 있는 한 녀석이 금을 밟아 보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어요.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좀 걸어가 보는 거죠. 그러면 뒤에 있는 녀석들이 따라가면서 온 마당에 흩어져서 모이를 주워 먹으며 닭으로서의 인생을 새 출발 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운명으로 생각하며 거기에 굴복하며 사는 것, 이것이 죄가 우리가 보이기를 원하는 진정한 반응인거죠.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런데서 혼란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때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은 이거에요. 죄악의 성향이 아무리 뿌리 깊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단번에 그런 죄로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안 되고, 죄의 성향이 뿌리 깊지 않았을 때는 단번의 회개로 결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어떤 특정한 죄의 성향이 뿌리 깊을 때 회개해도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회개가 올바른 회개가 아닐 수도 있지만, 회개가 올바르게 죄를 깨닫고 죄를 슬퍼하고 성령의 작용으로 죄에서 돌이켰는데도 이것이 다시 그렇게 되는 수가 있어요. 이것은 죄의 성향이 뿌리 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런 성화의 과정은 죄의 원천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한번 회개했다고 해서 그 죄에 대해서 이제는 자유롭고 해방되었다고 느끼면 안 되고 은혜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소멸하시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것도 미루어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박힌 죄를 결국은 뽑아내시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은혜에 끊임없이 붙어있게 하심으로써, 이 죄를 근거로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그분의 은혜에 붙어 있도록, 절대적인 하나님을 향한 의존 속에서 생활하도록 만들어주시는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이죠. 오늘 시편을 보십시오. 중요한 부사 하나가 나와요. 그게 뭐냐면 ‘밤마다’예요. 다윗이 통절하게 회개했지만 한번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처음에 그 죄를 짓고 회개했을 때 통절하게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그날 저녁에 집에 가서 잠들었을 때 다시 그 마음이 정욕으로 따뜻해지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여러 날을 몸부림친 거예요. 그러니까 ‘날마다’라는 부사를 여기에 추가한 거예요. 그래서 밤마다 눈물로 자신의 침상을 띄우며 회개한 거예요.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 성을 발견하고, 개별적인 죄에서 깊은 죄의 뿌리로 들어가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 사망에 이를 이 몸에서 자신을 건져낼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심오한 경지를 보게 되었고, 자신의 이 죄의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온 땅과 하늘에 높으신, 궁창까지 가득 찬 여호와의 인자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성경에는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바로 죄를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어요. 분명한 사실 한 지는 이것입니다.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것 같은 방기 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절대적인 고독, 이런 속에서 수없이 싸우고 고통 받지만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사랑을 멀리 떠난 인간을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단절을 느끼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수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런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율법과 양심의 송사이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아니에요. 그렇게 있는 것도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한 방법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이렇게 범죄 한 이 시인이 병든 영혼으로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과정을 통해서 죄의 중대함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은 이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시인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부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주님을 향한 끔찍한 도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 죄를 능가하여 결국은 죄인을 그 죄에서 돌이켜 당신 가까이로 부르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이 큰 사랑으로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은혜 안에 살게 만들어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매일 매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영적인 풍성한 생명을 결핍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빛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어둠속에 걷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이 다윗의 회개의 경험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다윗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용서의 계시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으니 오늘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윗의 시대에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하나님 앞에 더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낮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 가운데 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살아도 우리의 인생의 길은 너무나 짧고 이미 너무나 많은 세월들이 무지와 어둠 속에서 흘러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듣고 범죄 한 영혼으로 탄식하며 눈물 흘리는 밤을 지내고 있다면,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여러분들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품을 떠난 자기의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밤새 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오늘이 바로 그분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 그분과 함께 거하기에 좋은 저녁이 아니겠습니까?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7.용서받은 영혼의 자유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시 6:8).
Ⅰ. 본문해설
시인은 오늘 8절에서 7절까지 있었던 영혼의 고통에서 벗어난 담대한 외침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행악하는 너희들은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7절까지 범죄 한 영혼으로 자유를 잃어버리고 어둠과 고통 속에 있던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자유를 외칠 수 있는지 우리는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7절과 8절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일이 이 시인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죄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어떤 방식으로 이 사죄의 확신이 주어졌는가 하는 것은 본문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대개 두 가지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7절과 8절 사이에 상당히 많은 시간의 간격이 개입되어 있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과 마음을 변화시켜 결국 완전히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가능성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과정도 어느 정도 포함하지만, 다윗이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자주 경험하듯이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사죄의 선언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치 나단이 그의 범죄를 고했던 것처럼 선지자 나단이나 혹은 자기 자신 속에 하나님이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는 외적인 선언을 통해서 내적인 확신으로 나아가 결국은 더 이상 죄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자유 속에서 이 고백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마지막에 도달되는 결론은 똑같습니다. 사죄는 시인이게 이런 담대함을 가져다가 주었다 하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죄의 두 측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Ⅱ. 사죄의 두 측면
A. 본질적 측면
우선 본질적인 측면과 관계해서 생각해 봅시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때에는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주시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죄가 시간이 개입되기 때문에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가 나누어지지만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 모든 죄들이 현재적인 죄들입니다. 이 죄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이든지 간에 남아있는 상태로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질 수도 없고, 또 용서되지 않고 남아있는 죄가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용서받은 것이 아니죠. 그래서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지난 죄뿐만 아니라 현재,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 앞에 불신하며 살았던 자신의 날들에 대해 회개하게 될 때 시작은 개별적인 죄에서부터 그 회개가 시작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개별적인 죄에 대한 회개는 결국 그 죄의 뿌리가 되는 총체적인 죄 성으로 그를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총체적인 죄 성은, 그것이 과거에 발현된 것은 과거의 죄를, 현재 발현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죄를, 미래에 지을 죄는 역시 미래의 그 죄 성이 발휘됨으로써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죄 성은 결국은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어느 정도는 과거 현재 미래로 지속되면서 시간에 따라서 이 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이 죄의 뿌리가 되는 죄 성은 현재적이면서도 동시에 미래적이기도 하고 과거적이기도 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첫 회심에 있어서 우리의 이 죄에 대해서 회개할 때는 개별적인 죄에서 시작됐지만, 이 죄 성 전체에 대한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결국은 그렇게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되고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칠 때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우리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시는 것이죠. 이러한 경험은 첫 번째 회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도 이것들은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개별적인 죄로부터 회개가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참회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결국은 그 모든 죄를 가능하게 했던,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 안에 있는 죄 성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통절히 뉘우치게 되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B. 경험적 측면
이것이 본질적인 측면이라면 또 사죄에는 경험적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한 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우리가 믿은 후에 죄를 지을 때에는 놀랍게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우리에게 주셨던 많은 은혜의 특별한 효과들을 거두어 가 버리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주셨는데, 그것은 개념으로만 살아있고 실제적으로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방기 감을 경험하게 하시는 거죠. 그럴 때에 신자는 그러한 범죄 한 영혼으로서 고통 가운데에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때에 진실하고 간절히 참회하는 신자는 우리를 거들떠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꿀 요량으로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지혜로운 섭리 속에서 당신께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신자로 하여금 자기 사랑과 멀어지게 만들고, 자기를 신뢰하던 자기 의로부터 단절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던 인간을 다시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게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이것이 어느 정도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주신 것이지만, 신자의 성화 과정에서는 그것이 경험적으로 지금 그것이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심으로서 사죄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이것이 사죄의 경험적인 특성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사죄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한 참회로 나아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죄라고 하는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의 깊은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죄의 경험을 통해서 영혼이 고통 아래 있도록 허락하심으로 신자는 자기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버리고 자신을 불신하고 처벌하도록 유도하시는 동시에, 좋으신 하나님을 더 많이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Ⅲ. 사죄의 효과 : 담대함
이러한 사죄의 효과는 오늘 성경에서 담대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네 가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첫 째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신분의 자유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는 죄의 종이요,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신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 것이죠. 두 번째는 영혼과 마음의 자유예요. 예전에는 우리 안에 우리를 스스로 죄에 얽매이는 유효적인 법이 있어서 실효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작용을 해서 우리를 모든 죄 아래로 데려갔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이 필연적인 속박을 하나님이 끊어주시는 것이죠.
두 번째는 담대함이에요. 예전에는 율법을 무서워하고 양심의 송사에 두려워 떨며, 그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을 쳐야 하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간에 그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은혜의 담대함으로 그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이죠.
세 번째는 명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타이틀을 주신 것이죠. 예전에는 그런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분을 주시는 것이죠.
네 번째는 징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이죠. 이것은 명백한 특권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자요, 하나님이 버리신 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오늘 시인은 바로 하나님 앞에 길고 절실한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죄가 자신에게 주어지고 이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확신으로 다가오게 되자 그는 죄 아래 있을 때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마음의 담대함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담대함은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 사람들만이 가지는 마음과 정신의 특성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 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때에는 늘 경험하던 담대함이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빛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님은 나의 피할 바위이시오, 산성이십니다.” 이러한 담대한 고백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던, 하나님과 동행할 때의 다윗이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동행은 최소한 두 개의 계명을 내포해요. 하나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예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감추어진 것이나 어떤 구김과 불화가 없는 상태죠. 완벽하게 죄가 없는 상태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양심에 거스르는 어떤 구김이 없는 그러한 온전한 평화의 수립 상태, 이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절한 갈망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본질이에요. 다윗이 바로 그러한 독특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하게 되자, 이러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특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담대함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A. 담대함의 대상
그러면 이 담대함의 대상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밖에 있는 대적들을 향한 담대함입니다. 시인이 언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빈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왕 만들어주시지 않고 짐승이나 치는 목동으로 내버려두셨어도 그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행복하게 살았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심으로 다윗을 택해 이스라엘 나라의 섬기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 때에는 많은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또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를 해치려고 하는 대적이 있을 때에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이러한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범죄 하여 담대함을 상실하게 되자 밖에 있는 수많은 대적들은 그의 끊임없는 근심과 고통거리가 되었고 그들의 말과 비난은 그에게 끊임없는 눈물과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부와 같은 시간을 지냈고, 그의 눈은 근심을 인해 쇠약해졌고, 대적을 인하여 어둡게 되어 버리는 시기를 지나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상처받는다고 그러잖아요. 상처받으면 우리들이 항상 받은 자신은 피해자요, 자기에게 그런 상처를 준 사람은 가해자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성경이 가르치는 심리학과는 전혀 다른 거예요.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는 삶을 살고 은혜 안에서 살면 상처가 전혀 되지 않을 것들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그것이 상처가 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우리의 마음이 보드라운 진흙과 같다면 뭘 집어던져도 깨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만약 그 진흙이 굳어져서 완전히 말라버린다면 무엇을 던지든지 깨지지 않겠어요? 쉽게 상처받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라 강퍅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우리의 대적들이 일어나도 그 대적들을 자기의 마음속에 품고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또 그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괴롭혀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므로 우리 안에서 없었던 은혜들이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서 솟아나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봅시다. 조개를 열어보면 진주가 나오잖아요. 물로 모든 진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작이 사금파리 같은 작은 것들이 조개가 입을 벌리는 동안에 딸려 들어가서 그 살 속에 박히는 거예요. 그러면 조개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 체액들을 짜내서 그것이 자기에게 영향을 못 미치도록 감싼답니다. 그래서 진주를 품은 조개는 열어보면 살을 먹을 게 별로 없대요. 온통 씨름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나온 게 진주예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비록 누군가가 상처를 주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하여서 하나님을 더 바라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갈망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밖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대적들의 말 하나, 행동 하나, 모든 것들이 그에게 커다란 고통으로 와서 부딪히게 되는 거예요. 이것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악으로 대응하게 되면 그다음 영혼은 더 많이 범죄 하게 되어서, 악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하다가 더 큰 악을 행하게 되어 더 깊은 침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범죄 한 영혼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 이 다윗에게 많은 대적 자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는 놈이 뱃속으로 낳은 자기 새끼였던 것 까지도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를 따르던 수많은 대적들이 한때는 자기가 너무나 사랑하던 지체들이었어요. 그때, 밖에 많은 대적들이 일어날 그때에 그는 예전처럼 “천만인이 에워쌀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바라리이다. 여호와가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이렇게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대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자 그는 이 모든 대적들을 무시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아무리 내 옆에 모여 있다 할지라도 너희는 나를 공격하여 나를 헤칠 수 없다. 또 나를 헤친다 한들 나에게는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언약 적 관계가 있다.’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까뻴’이라는 곳에서 대적 자들과 함께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아들과 사위까지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죽어가던 쯔빙글리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에게 마지막 임종의 작별을 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육체의 목숨만을 빼앗아가는 원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영혼까지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비난할 때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눈물이 주야로 자신의 음식이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밤낮으로 우는 눈물 흘림이 주여 어찌합니까?
시인의 처지가 꼭 같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용서해주시자 그는 자신의 인생과 삶과 죽음과 미래를 그분의 손에 다 의탁하면서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내 인생이 당신의 수중에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가 더 많이 괴롭힘을 당했던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대적들이었습니다. 너는 죄를 지은 자라는 양심의 고소와 너의 그 죄에 대한 대가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율법의 준엄한 정죄 앞에서 그는 몸 둘 바를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이 시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자기의 품으로 불러주셨을 때에 이 시인은 담대함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를 뿌리치고 하나님 한분께로 피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31편에서 여호와의 의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호소했고, 이 이상한 기도를 연구한 것이 마르틴 루터가 이신 칭의를 깨닫게 된 중요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할 필요가 잇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안에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없고,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B. 담대함의 본질
그러면 이 담대함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다시 자신과 영적으로 교통해주신다고 하는 확신에서 오는 담대함입니다. 시인이 한때는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뵈옵고 궁창에까지 가득 찬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 이었습니다마는 죄를 경험하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했고, 무서울 정도의 깊은 단절은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계속 되었고 그 고통 속에서 그는 통절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너의 곡성을 들었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성경에 보면 “나의 울음의 한 소리를 들으셨도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단수로 표현된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시인이 참회하는 시간 동안 가지고 있었던 통회의 마음이 얼마나 지속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그는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시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막힌 기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말씀의 통로들이 단절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교통해주심으로써 이 시인은 담대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담대함의 또 하나의 본질은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받아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다시 기도의 문이 열릴 때 다시 담대함을 회복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말씀의 통로를 다시 열어주실 때 그것은 우리 전체를 다시 기쁘게 받으신다는 수납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수납하신다면 결국 우리 인생 전체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게 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주권을 겸허하게 따르게 되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칼빈은 죽기 전에 31가지가 넘는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손이 자기 육체를 짓누르고 있다고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육체를 짓누르고 계시지만, 그래서 나의 영혼이 고통 받고 있지만 그 고통을 받게 하는 손이 주님의 주권적인 손이기 때문에 저는 괜찮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환난도, 시련도, 고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도, 우리에겐 아픔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동안에는 그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평화가 있는 동안에는 그것도 사실은 아주 감미로운 주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을 다시 받아주셨습니다. 한때는 하나님 앞에 끔찍하게 죄 짓고,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던 이 간악한 시인을 하나님이 다시 받으신 것은 시인 안에 있는 어떤 의로움이나 좋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태로부터 죄 중에 잉태한 사람이었고,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자신의 죄 성이 자기를 삼키고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 사람 다윗을 이 뼈저린 경험을 통해 진짜 칼빈 주의로 남기시지 않았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철저한 죄인, 오직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 앞에 자기를 세울 수 없는,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존해야 할 존재, 그래서 그는 다른 시 속에서 “사람이 누가 감히 주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라고 부르짖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Ⅳ. 다시 받으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이 큰 죄를 용서해주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은 도무지 의지할 수 없지만 주님은 의지할만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문제는 죄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통절하고 진실한 참회가 없는 것이에요. 죄를 매일 물 먹듯 마시고 악을 행하면서 우리는 진실한 참회의 시간이 거의 없이 살아갑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한 번에 가슴이 찢어지는 탄식과 통곡이 쏟아져 나와 이 시인처럼 밤마다 여러분의 침상을 띄우고 요를 흥건히 적시는 경험을 구하지 말고 먼저 진실해지세요. 가뭄에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져 천천히 물을 길으십시오. 마음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기도가 아닌 것은 모두 기도가 아닙니다. 더듬어도,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아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해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만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천천히 천천히 우리의 막혔던 영적 교통의 문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의 틀들을 바꿔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기에 적합하도록 우리를 진리와 성령으로 어루만져 역사하시는 것이에요.
V. 결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순종하고 당신을 사랑할 때에 사랑스러운 당신을 뵈옵지만,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당신을 뵈올 뿐,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서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고백했어요.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는 성도의 눈물 흘리는 마음, 그 다음으로 아름다운 것은 자기의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기 깨어짐의 마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사죄의 경험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게 당신 앞에 나아와 참회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주님의 용서 앞으로 나아갈 때에 때로는 오랜 시간을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 앞에 나아온 영혼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여러분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은혜 안에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8.회복된 영혼의 자유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6:9).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자유를 얻은 시인이 기도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 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라고 합니다. 이 본문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나는 이 시인이 하나님께 이렇게 용서를 받아 영혼의 자유를 되찾기까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하게 매달렸는지를 보여주고, 또 한 편으로는 이러한 용서와 함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자신의 기도와 자신의 존재 전체가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Ⅱ. 회복된 영혼의 자유
우선 제일 먼저 오늘 이 시인의 고백은 회복된 영혼의 자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 아래 있는 자신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엄위하심 앞에서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전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고 나자 그의 억눌렸던 영혼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그 자유로운 영혼의 날갯짓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붓는 기도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A.용서와 자유
우리는 여기서 용서와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영혼 안에는 죽음의 원리가 없습니다. 타락한 이후로 인간의 육체 안에는 죽음의 원리가 있지만, 인간의 영혼 안에는 죽음의 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 그 자체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다만 그 생명이 자가적 생명이 아니라 보다 무한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 덧입음으로 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영혼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영혼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죽음에 방불하도록 이 영혼의 속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죠. 원래 이 영혼의 죽음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생명적인 요소를 결핍하고 있거나, 신령한 작용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어떤 생명적인 기능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무능해지게 되는 이 세 가지가 영적인 죽음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불신자의 영혼은 죽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육체가 죽은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있다고 할 때에 그것은 생명의 요소가 없거나, 또 신령한 작용에 대해 반발하거나, 혹은 어떤 영적인 일을 행함에 있어서 무능하게 된 상태, 이것이 바로 영혼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죽음의 상태를 신자도 따라가게 되는데 죄를 짓고 그 죄에 의해 속박을 받게 될 때 신자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영혼이지만 이렇게 영적 생명의 결핍, 신령한 작용에 대한 반발, 그리고 어떤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무능함 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충만한 은혜는 충만한 생명이에요. 그래서 은혜 생활을 잘하고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면 생명이 충만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영적인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이 신령한 방법으로 움직일 때에 그것을 알고 잘 순종하고 또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하시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유능함을 가지고 그것을 하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영적인 생명이에요. 죄는 이런 생명을 앗아가고 그리하여 우리를 속박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이제 죄에 사로잡힐 때에 할 수 없게 되고, 예전에 하나님의 신령한 인도를 잘 따르며 복종하던 그런 사람들이 이제 이런 신령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잘 복종하지 않는 반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거죠.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죄가 우리 영혼에 가져오는 속박이에요.
언젠가도 한 번 여러분들에게 예화로 알려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지금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야생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덫을 놉니다. 그리고 그 덫에 의해 희생되는 야생동물이 아주 많아요. 그 덫을 보면 가랑잎 같은 걸로 덮여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남이 다니지 않는 산길을 걸어갈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짐승이 그걸 밟으면 그게 “탁” 하고 튀어 올라와서 발목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쇠줄은 나무에 묶여져 있어요. 그 짐승이 거기에 갇혔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 겨울에. 그러니까 TV에서 한 번 보니까 작은 멧돼지 새끼가 거기에 붙잡혔는데 밤새도록 얼마나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그 줄을 묶어놓은 나무가 허옇게 벗겨졌어요. 그렇게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살갗을 뚫고 뼈까지 이 스프링의 힘을 받은 족쇄의 날카로운 톱니바퀴가 그걸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서 죽어 가는데, 그것을 사진 찍었는데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거기에 찢겨서 뼈가 드러나고 눈물이 주룩 흐른 자국이 얼었어요. 그걸 보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에 이렇게 잔인한 동물이 있을까?’ 그거 고기가 먹고 싶으면 푸줏간에 가서 한 근 끊어다 먹지, 그걸 굳이 먹겠다고 거기에 덫을 놓고 그렇게까지 해서 사냥을 해야 되나 비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속박이에요. 범죄 한 영혼에게는 자유가 없어요. 죽음의 원리가 그 안에 없는데도 죽음을 따라갑니다. 이 시인의 영혼이 그가 범죄 한 상태에서는 이렇게 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을 때 그의 영혼은 아주 놀라운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눈물로 자기의 요를 두루 적셨습니다. 그의 눈은 근심을 인하여 쇠하였고, 모든 대적을 인하여서 그의 눈은 어두웠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을 때 그는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우는 소리를 들으셨도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힘을 잃은 영혼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시고, 양심의 속박을 받던 마음에 양심의 자유를 주십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죽음보다도 불행한 것은 속박입니다. 저는 속박을 이야기할 때마다 저의 할머니 생각이 언제나 나요. 요새도 할머니 생각이 간절히 나는데, 한 번이 아니라 서너 차례를 저를 보시고 유언을 하셨어요. “얘야, 내가 죽으면 제발 저렇게 염을 하지 마라.” 사람을 묶어서 베 보자기로 몇 번을 씌우잖아요. “왜요?” “나는 일생을 속박 가운데 살았다. 시집오기 전까지는 자유로웠는데, 네 할아버지하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에게 속박 당하고, 애들에게 속박을 당하고.” 심지어는 시동생도 형수인 당신이 젖을 먹여서 길렀으니, 당신이 시집을 오니 시어머니가 서른두 살이더래요. 그런데 자기가 먼저 아기를 낳고 시어머니가 나중에 아기를 낳은 거예요. 그래서 걔까지 젖을 먹여서 길렀다는 거예요. 그렇게 계속 속박 속에서 시집살이, 그리고 일 년이면 열두 차례씩 돌아오는 수많은 제사 등 속박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기는 자유롭게 해 달라고 그래서 돌아가실 때 제가 씻겨서 하얀 인조견 치마저고리를 입혀드리고 아무것도 묶지 않고 관에 편안하게 눕혀 드렸어요. 흔들리지만 않게 옆에 솜으로 박고 보내드렸어요. 지금도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쁘셨을 수가 없어요. 그게 속박이에요. 속박은 그의 영혼에 죽음보다도 무서운 고통이에요. 그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에요.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그 시작은 자유를 찾는데서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그 자유를 누리고 나면 그 자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서운 속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에요. 이런 속박으로부터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에요. 장소를 옮기고, 있던 곳을 떠나고, 수없이 지위가 바뀌고, 심지어는 늙고, 젊고, 건강하고, 병들고, 삶의 여건이 수없이 바뀌어도 기본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속박된 영혼은 그것은 변화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순종하고 당신을 따를 때에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불순종하고 반역할 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 우리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변함이 없는 것이에요. 이러한 영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하나님의 용서예요.
그래서 성경과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잡혔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누구나면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에요. 그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온 하늘과 땅을 다 하나님께 선물로 받아도 결코 알 수 없을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신자가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날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는 철저한 죄인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망가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깨닫게 되는 죄의 크기와 그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대조할 때에 그때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이 언제나 가슴속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가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의 자기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다운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이 시인은 바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분을 멀리 떠남으로 이러한 영혼의 자유, 삶의 질서의 온전한 자유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스스로 자유하기 위해서 죄를 지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인은 영혼의 참된 자유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그 사랑 안에서 그분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자신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탄식하였고, 곤핍하였고, 밤마다 울었고, 그래서 그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두루 적시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죄의 은혜를 베푸셨고, 하나님이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자 무엇으로도 풀 수 없었던 이 영혼의 속박이 풀리고 영혼의 지극한 자유 속에서 다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확신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자유로운 영혼의 기도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오늘날 우리는 기도하여야 할 내용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눈을 뜨면 마주치는 우리의 삶의 현실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마주해야 하는 교회의 모든 현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에게 현실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교회를 세상에 두신 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에 소명을 주셔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세상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야 할 교회가 스스로 썩기를 원치 않고 죽고자 하지 않을 때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문제들은 결국은 교회에게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느냐?” 고 묻는 내용들입니다. 무기력해진 교회, 점점 더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 너무나 기본적인 복음을 설교하면 그것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통탄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교회 안에, 교회 밖에 가득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도처에서 죽음의 기운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당신은 죽어도 당신의 교회는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당신은 주님께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아도 우리의 영혼은 주님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죽음을 지심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병들고 나약한 이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될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기도하는 영혼들은 얼마나 소수이고, 교회에는 얼마나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간구와 눈물의 기도들이 교회에서 꺼져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의 가녀린 몸부림으로는 이 대세를 뒤집어엎을 수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세속의 물결들이 이제 세상을 넘어 교회에 밀려들어오고 있는 이때에, 이것과 맞서기에는 너무나 약해진 교회를 볼 때 우리는 누군가 무너져가는 이 성벽을 다시 수축하기 위해서 에스겔의 마음으로, 예레미야의 기도로, 다니엘의 간구로 하나님 앞에 매달릴 사람들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속의 물결이 넘실거릴수록 교회는 세상과 평화를 찾으려고 하지, 세상과 일전을 불사할 것을 각오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배당 앞에는 분명히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써 놓고 실제로는 교회 안에는 마음을 쏟아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시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인데, 그때 그 학교에는 나이 든 학생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복음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하고 작은 책들을 써 놨는데 그중에 기도에 관한 책이 하나 있었어요. 이 학생이 나한테 편지를 썼는데 그런 내용을 썼어요. 어느 순간 하나님이 자기를 깨우셔서 정말 이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말 이제까지는 나 개인의 문제만을 골몰하면서 신앙생활 했지만, 그러나 이제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하게 하시는 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보다가 울면서 밖으로 튀어나와서 강남이 집이었는데 모르는 교회를 막 밤중에 달려간 거예요. 그랬더니 교회당 문이 굳게 잠겨있어요. 몇 교회를 기도하러 뛰어갔다가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형제가 글을 썼어요. “하나님은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렀거늘, 이 큰 교회당에 기도소리는 간 곳 없고 굳게 잠긴 자물통과 경비병의 호루라기 소리만 들립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요?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환경이 어렵거나 여건이 불리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깃털처럼 가벼운 영혼, 하나님을 향해 언제나 날아오르는 심령,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자신의 모든 마음이 물같이 녹아 하나님 앞에 쏟아져 내리는 것은 청교도 Richard Sibbes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만이 가질 수 있는 초자연적 마음의 상태에요. 도대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요새 이상하게 임직 식 여기저기서 와서 그것도 설교도 아니고 권면을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지난주에는 사랑의 교회에 갔고, 지난달에도 여러 군데 다녔어요. 다니면서 늘 아쉬운 게 있어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심지어는 노회 때에 목사가 되는데도 도대체 진짜 복음의 의미에서 교회의 일꾼이 세워지는가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많아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십자가를 진다는 마음, 이렇게 더러운 인간이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무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이 짐은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짐입니다. 그러니 소원은 그 처절한 녹는 마음, 그게 왜 그렇게 없는지 모르겠어요. 특별히 가을마다 마주하는 목사 안수 식은 정말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요. 교인들은 손에 손에 꽃다발을 들고······.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심지어는 자기네 교회 강도사 안수 받는다고 봉투를 들고 와서 축하한다고 연발하는데, 나는 임직 식 가서 축하한다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게 뭔 축하입니까? 십자가 지러 가는 길인데.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임직하는, 방금 목사가 된 사람들이 무슨 과거라도 급제한 것처럼. 그런 것은 복음의 본질로부터 아주 멀어진 것이고, 목사 안수 식을 그렇게 하니까 임직하는 평신도들도 그것을 배우는 것이에요. 오죽 했으면 제가 안수 받을 때 어느 연로하신 목사님이 스물다섯 명을 놓고 강대상 뒤에서 안수를 하는데, 한 사람씩 안수를 하다가 이 목사님이 마음이 너무 아프셨는지 내 옆에 목사 안수를 받는 강도사의 등판을 몇 번을 두드리면서 “이 사람아, 울어라, 울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인데 넌 눈물도 안 나냐?” 이제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가는데 임직하는 사람의 가슴에 꽂힌 꽃은 이 세상에서 좋은 직분에 취임하는 사람의 가슴에 꽂힌 꽃하고는 의미가 달라요. 세상에 출세하는 사람들의 가슴의 꽃은 존귀와 축하의 꽃다발이지만, 임직하는 사람의 가슴에 꽂힌 그 꽃은 조화에요. “삼가 명복을 빕니다.” 라는 조화예요. 그래서 내가 다음 우리 교회의 임직 식 할 때는 다른 꽃은 전혀 쓰지 않기로 마음의 결심을 했어요. 하얀 국화꽃을 쓰자. 그 국화꽃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명복을 빕니다.’에요. 그것도 싫으면 그만 두고. 그래서 하얀 국화꽃을 쓰고, 그게 죽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자는 거예요. 자기가 주님 앞에 깊이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이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예수 쉽게 믿는 법을 가르쳐주어도 내가 유언하듯이 여러분에게 당부하노니 제가 죽은 후에라도 그런 가르침이 절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믿기 바랍니다. 그런 신앙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신앙이 있다면 예수님이 가장 비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하신 것이에요. 시인이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속박된 영혼이었는데, 주님이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시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에 자유를 주시고,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Ⅲ. 간구하는 자를 용서하심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A. 자비를 구함
시인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자비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하여 분노하지 마옵시고 자기를 진노로 징계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매달렸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자신의 의로움을 강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절실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사망 중에서는 당신을 기억할 수 없사오니 당신이 음부에서부터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건져달라고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선행은 곧 잊고 어떤 사람의 죄는 오래도록 가슴에 간직하고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당신께 호소하며 용서를 비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가 밤마다 탄식하며 눈물로 간구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많은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죄를 기억하고 시인이 행한 악을 조롱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시인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은밀하게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자 침체에 빠졌던 이 시인의 영혼은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인간이 만들어놓은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죄를 지었으나 용서를 비는 자의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모두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비를 간절히 구하며 은혜를 달라고 용서를 빌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큰 죄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 당신의 자비로 용서해주심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보다 훨씬 크고 인간 안에 있는 죄의 능력은 대단하지만 용서를 통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이 회복의 은혜는 죄의 능력을 능가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능력은 사망으로부터 오지만, 용서의 은혜는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B. 죄를 뉘우침
이 시인의 간구의 또 다른 제목은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6편 전 편에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고백의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충분히 자기의 죄를 자각하며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을 보여줍니다.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자신의 요를 적시는 이 모든 통곡의 과정은 단지 고통 때문에 괴로워 우는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으나 자기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는 시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자기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올 때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이 자기를 괴롭히고 기름 부음 받은 자기를 모욕하며 심지어 저주하고 멸시하였으나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신, 하나님의 큰 섭리와 주권 속에서 자신의 죄가 자신을 이 불행 속에 몰아넣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바라보며 원망하는 마음을 품기 보다는 악을 행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뉘우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의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이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징계가 없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은혜의 심오한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도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Ⅳ.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과 양심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 되게 말하고 여러분들을 향해 정죄하고 송사한다 할지라도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자녀로 택해주신 그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은 것을 후회하는 때가 있어도 주님은 우리를 불러 당신의 자녀 삼으심에 있어 후회가 없으신 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날 줄을 모두 알면서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 택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어디에서 살 수 있겠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어디에서 우리들이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순경과 역경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고, 잊어버렸던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회개함으로써 이렇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 (2009/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2 (2009/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3 (2009/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4 (2009/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5 (2009/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6 (2009/10/25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7 (2009/11/08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8 (2009/11/29 주일오전예배)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9 (2009/12/06 주일오전예배)
9.대적들을 이기게 한 용서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10).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시인은 이 참회의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우울하고 고통스러웠던 이 시편 6편의 기조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주시는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서 기쁨과 확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시인은 이 영광스러운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이어져가는 삶인 것 같아도 거기에는 끊임없는 도전과 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편지 마지막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으로서의 전투적인 특성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어둠의 주관자들에 대한 것이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영적 전쟁의 모습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사도바울의 진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는 항상 대적들이 많습니다.
Ⅱ.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적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적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가운데 깊은 고통 속에서 자신이 당하게 된 그 모든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만나게 된 수많은 대적들과의 고통스런 투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대적은 반드시 이러한 죄 가운데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A. 거룩한 목표를 향할 때
우리들이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치열한 대적들은 우리가 거룩한 목표를 향할 때도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목표를 향할 때 우리의 삶은 많은 대적들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한 일에 대해서 굳은 결심을 하게 되면, 그 결심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싫증과 게으름은 물론이고 그 목표를 향하여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수많은 환경과 여건,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뜻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기까지는,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힘을 내기 전까지는 이런 수많은 난관과 대적들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에 일평생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도리를 따라 살아가려 한다면, 얼마나 많은 대적들을 만나게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래 되어서 지금은 이름이 잊혀 진 어느 청교도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일평생 진리를 따라 살아 온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 할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비록 스러져가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섬기며 살고자 할 때 그는 거룩한 목표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온 마음과 힘을 다해서 살려고 할 때 그것을 가로막는 수많은 대적들이 고개를 들고 기승을 부립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극하고 위대한 영적인 투쟁이 있었습니다. 회심의 때에도 그러했지만, 회심하고 난 후에도 영적인 인물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마주하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을 지났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영적인 뛰어난 인물들은 아주 극렬한 영적인 투쟁의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을 섬겨왔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알려져 있지 않고 무명하던 시절에는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고 깎아내리기 위해서 시기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유명해지고 하나님을 위해 훌륭한 일을 감당해 나아갈 때에는 수많은 시기하는 사람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바르지 못한 삶 때문에 정당하게 비난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게 비난 받을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 때 깊이 존경하던 18C의 설교자 George Whitefield는 Lloyd Jones목사님의 평가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사도 시대 이후에 존재했던 사역자들 가운데는 그 사람만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헌신했던 사람은 없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대적 자들에게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았지만 교인들의 헌금을 걷어서 떼어먹는다는 악한 소문까지 무성하게 퍼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할 때 이 세상은 그런 거룩함을 싫어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렇게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향하여 살려고 할 때에 불경건하고 옳지 않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높은 뜻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 거룩한 목표를 추구하며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의 바라는 바이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도 동시에 영광을 받는 것이 우리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소원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을 선택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간 대표적인 인간 이었습니다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으시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생애는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적을 당하시면서 그렇게 고통 받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영적 전쟁이 현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살면서 이런 대적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거나 이상한 일처럼 여겨지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계산을 잘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 집을 지을 때 먼저 군사를 헤아리고 가진 돈이 얼마인지를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고 우리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며, 우리는 정말 죄인이고 주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전부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좆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세상에서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산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네가 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가치를 깨달았다면 이제는 그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너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한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신자가 주님이 나를 위해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주님을 위해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할 때 그의 순수한 마음이 고난의 크기를 감하여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해 순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고난의 불에 내어주셨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은 대적에 에워싸이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당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의 영광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의 목표를 함께 가지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고난과 시련의 불 가운데 그들을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저는 어려서 강원도에서 자랐습니다. 거기에는 금광도 많이 있고, 한때는 계곡에서 금을 캐는 사람들을 제가 직접 보기도 하였습니다.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서 녹여서 거기서 금붙이를 꺼내고, 그걸 다시 녹여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걸러내고 하는 것은 금이 섞인 광석이나 그렇게 하는 거지, 가치가 없는 광물이 섞인 돌들은 그렇게 재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 앞에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더 단련하시고 단련하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많은 대적에 에워싸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심으로 자기가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신 많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많은 자연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하셔서, 남들이 보기에는 좋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활용해서 섬기지만,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수많은 대적들에게 시달리게끔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 6편을 쓰고 있는 다윗이 그런 인생의 길을 바로 절실하게 걸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후에는 그 죄 때문에 연단을 받고 시련을 당했다고 하지만, 죄를 짓기 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찬송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던 그 목동 시절에는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까? 그리고 한 번도 이스라엘의 권력자가 되기를 꿈꾼 적이 없건만 주님이 그를 주권적으로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사울에게 끊임없이 쫒기며 멸시와 욕을 당하였고 매일 매일의 삶을 확신할 수 없을 그런 정처 없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 수많은 대적들에게 그 순수한 사람을 에워싸이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이 다윗을 아주 훌륭하게 사용하시기 전에 철저히 인생의 행운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심지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도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우러러 보는데 있어서 가장 간절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던 것이에요. 그래서 궁창에 이르기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그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자라고 그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고, 나라와 모든 영광을 주셨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노예일 뿐이라고 매달리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가고 오는 영광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분과 합일을 이루고 그분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이루는 그것이 그의 최고의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삶을 살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국을 이뤘지만 그는 역사 속에 스러져갈 왕국 보다는 영원토록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더 사모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며 사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괴로운 삶, 도처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대적들과 안팎을 에워싼 시험과 환난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뜻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에 우리가 부딪혀야 하는 수많은 환난과 시련을 이상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가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매 대적들에게 에워싸일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시는 그 거룩한 경륜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 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하여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바람과 꿈은 하늘나라에 두고 그 대적들과 싸우며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갈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삶과 그 자비로운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꺾여서는 안 됩니다. 선한 뜻을 세우고 살아갈 때에 이 세상에 온갖 시련과 많은 환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그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이겨야 합니다.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위해 거룩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B. 죄로부터 각성할 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와 같은 삶에서 수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또 한 번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가 죄로부터 각성하게 될 때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보여주는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인 경험이 바로 이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범죄하고 죄악을 즐기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각성하고 깨어날 때 수많은 대적들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자기 안에서는 율법을 통하여서 자기를 정죄하고 있었고 양심을 통하여 끊임없이 송사하여 자기를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찍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려고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차가운 거절감이 양심의 정죄와 송사를 지지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깊음은 시편 130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환경의 깊음도 동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가운데 있을 때에는 고개를 들지 못하던 수많은 대적들이 이번에는 삶의 깊음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환경 속에서 이 대적들은 고개를 들고 시인의 권위에 도전하고, 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비웃고, 그를 저주하고 도전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를 쓸 때에도 아마 시인은 이제 이렇게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였던 것 같습니다. 주석가들이 추정하는 바와 같이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고 수많은 대적들이 에워쌌습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법궤를 남겨둔 채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황망히 망명의 길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수많은 대적들이 죄에 대해서 각성할 때 환경과 마음 안에서 일제히 궐기하였습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협박합니다. 하나는 그 죄를 버리고 나서 전개될 미래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사용하여 압박합니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제 이 모든 세속적인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려고 했을 때 끊임없이 죄의 속삭임을 들었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정녕 나를 버리려느냐? 이제는 나 없이도 살 수 잇을 것 같으냐? 나로 말미암는 이 즐거움을 포기하고도 네가 정녕 한 번에 나를 떠나 홀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속삭임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그래서 죄인들이 쉽게 그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를 떠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여전히 사랑하는 대적들과,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면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 그리고 바깥에서 일어나는 환경의 모든 어려움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신자를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될 때 그는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인 포위당한 힘없는 군사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오늘 시인도 이와 같은 똑같은 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Ⅲ. 대적들을 이기게 한 용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이 모든 대적들을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적들을 이기게 한 하나님의 용서였던 것입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서 너는 이미 끝났고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과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왕이라고 생각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궐기한 수많은 대적들 중 상당수는 시인에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때는 친구였고, 자기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는데, 자신이 약해지고 가련한 처지가 되자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대적들로 돌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 속에서 시인은 더더욱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려울수록 자포자기하는 대신 하나님께 파고들었고, 고통스러울수록 도망치는 대신 자기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한분 앞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고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탄식하여 곤핍하게 되어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셨습니다. 이미 이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한 죄였지만, 다시 한 번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이 모든 고통스런 상황들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가 아니라 주님은 이 고통스러운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아니하셨습니다. 마치 믿음의 선배 욥이 그 큰 고난을 당하면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온 뜻을 다해 이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이미 용서해주신 용서가 믿음직스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고통스런 상황을 직면하면서 사람을 미워하고 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다루시고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자기의 인생을 섭리하심으로 온전케 하시고 대적들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경험을 현재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젠가도 한 번 말씀을 드린 것 같았는데, 그 얘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었는데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이래요. 거기도 목사가 되는 과정이 있고, 마지막에 시험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목사가 되기 전 면접을 하는데 어느 감독관이 되는 목사님이 목사가 되려는 어느 강도사에게 물었답니다. “강도사님, 당신이 이제 잠시 후에 목사가 될 텐데 만약에 당신의 삶을 잘 아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이 감히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질문을 듣고 한참 생각을 하더니 갑자기 눈을 감고 “오, 주여. 아버지” 하면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지더라는 거예요. 그때에 목사님이 “당신은 합격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모든 대적을 죽이는 하나님의 화살입니다. 시인은 자기를 에워싼 끝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대적들을 보았습니다. 자기의 죄를 변명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감추면 감출수록 그 대적들은 벌떼처럼 일어났고 수많은 비난과 공격을 경험했습니다. 무엇으로도 그것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갔을 때, 그리고 자신의 모든 죄와 그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모든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품에 피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용서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가 당한 모든 고난을 오히려 그가 당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었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세계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끝없는 영적인 침체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우리는 속히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온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축복 속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 안에서 깨달았습니다. 나도 버리고 싶은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큰 사죄의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양심이 갈 길을 가로막고 율법이 가시 울타리를 쌓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구원이 오직 그분에게서만 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이 큰 인물이 아닙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큰 용서를 경험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일평생 가정도 없이, 아내도 자녀도 없이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죽기까지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자기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죄인이었음을 인식한 자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떠한 삶을 허락하셔도 그것은 과분한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주시고, 사도라고 불러주시고, 이방을 위한 그릇이라고 불러주셨지만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은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약점을 통해서 오히려 드러나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자랑할 수 있었고, 자기의 검고 검은 죄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붉은 십자가의 보혈의 용서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짧지 않은 6편의 강해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모든 죄인을 추호도 멸시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속히 그분께로 돌아오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죄를 통해서라도 그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찬란한 사랑을 깨닫고 예전에는 교만할 수 있었던 여러분들이 이제는 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어서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기를 다 버리고 살아도 그렇게 산 자기를 자랑할 마음이 없이, 자기를 그 무한한 죄에서 건져주시고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오늘도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볼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성도들, 주님의 교회에 기둥 같은 일꾼들, 그리고 주님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모든 사람들, 한때는 죄의 어둔 밤을 지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모두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가 그분과 평화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회하는 자의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