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2010년 설교모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2010. 10. 11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2010. 10. 12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3 (2010. 10. 13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4 (2010. 10. 14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1.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민14:1-10) 2010.10.11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
2. 고난을 통해 복을 주시려고(신8:11-17) 2010.10.12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3
3. 절망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삼상1:9-20) 2010.10.13 가을말씀사경회(저녁) 24
4. 현실과 함께하는 경건(창39:19-40:15) 2010.10.14 가을말씀사경회(저녁) 37
5. 상처를 만지시는 예수님(눅5:12-13) 2010.10.15 가을말씀사경회(저녁) 48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2010. 10. 11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2010. 10. 12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3 (2010. 10. 13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4 (2010. 10. 14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5 (2010. 10. 15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끝에 선 그대에게 1 2010.10.11. 사경회 첫째날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창 14:1-10
I. 본문의 배경
II. 불신앙과 절망
A. 낙심함
B. 원망함
C. 돌이킴
D. 반역함
III. 신앙과 약속
IV. 결론
인생의 벼랑끝에 선 그대에게 2 2010.10.12. 사경회 둘째날
고난을 통해 복을 주시려고
신 8:11-17
I. 본문의 배경
II. 미래에 대한 경고
A. 풍족함 속의 교만함
B. 하나님을 잊음
III. 광야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
A. 마음을 낮추심
B. 시험하심
C. 복을 주심
IV. 광야에서 주신 은혜
A. 만나를 먹이심
B. 물을 먹이심
1. 성령의 은혜
2.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V. 결론
인생의 벼랑끝에 선 그대에게 3 2010.10.13. 사경회 셋째날
절망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
삼상 1:9-20
I. 본문의 배경
II.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찾음
A. 문제해결의 길 : 하나님
B. 마음을 쏟음
C. 소원을 간구함
III. 하나님이 생각하심
IV. 결론
인생의 벼랑끝에 선 그대에게 4 2010.10.14. 사경회 넷째날
현실과 함께하는 경건
창 39:19-40:15
I. 본문의 배경
II. 현실과 함께하는 경건
A. 현실을 받아들임
B. 원망치 않음
C. 사람들에게 인정받음
D. 섭리를 믿는 신앙
III. 신실하신 하나님
IV. 결론
인생의 벼랑끝에 선 그대에게 5 2010.10.15. 사경회 다섯째날
상처를 만지시는 예수님
눅 5:12-13
I. 본문해설
II. 문둥병: 절망적인 질병
III. 예수님을 찾은 사람
A. 경배로 돌아감
B. 믿음으로 간구함
1. 주권을 믿음
2. 능력을 믿음
IV. 만져주신 예수님
V. 결론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2010. 10. 11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2010. 10. 12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3 (2010. 10. 13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4 (2010. 10. 14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5 (2010. 10. 15 가을 말씀사경회 저녁)
1.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1-10).
Ⅰ. 본문의 배경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인생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제껏 인생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살아보는 인생인 것처럼 우리의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없고 대처할 능력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 가까이 두 번을 가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 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을 광야를 방황하고 난 후에야 드디어 가나안 정복에 들어가게 되는 바로 그 때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은 순탄하게 가나안까지 들어가고 거기에서 그 땅을 손에 넣을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그들에게 주실 복된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허락하셨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정탐꾼을 파송하게 합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에서 각각 정탐꾼들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상세하게 그 땅을 알아보고 여러 가지 사실들을 탐사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열 두 명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탐사하게 됩니다.
그 때에 그들은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는 그 땅이 엄청나게 기름지고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아주 비옥한 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에서 포도를 발견하였는데 그 포도 한 송이를 따서 꿸채에 꿰어 두 사람이 들고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황당한 기사라서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프랑스 델리치아 그리고 시에프 카일이라고 하는 독일학자가 쓴 주석에 보면 그 당시에도 에스골 골짜기에서는 포도 한 송이가 6-7kg짜리까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포도가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여 년 전에만 해도 거기에서 생산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어떤 상황인지 둘러보지 못했지만 이것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기록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발견한 사실은 땅을 기름지고 아주 아름다운 땅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거기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기골이 장대하고 발달한 문명을 누리면서 큰 성과 요새를 지니고 있어서 자신들이 그들을 쳐들어가 정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발견하였습니다. 한 가지는 기쁜 소식이었고 또 한 가지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발달한 문명이 있는 성에서 살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애굽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그 놀라운 발전된 문명에 접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노예계급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광야를 여행해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 전까지는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목의 문화라고 하는 것은 정착된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문명이 발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농경사회로써 정착하여 살 때에 부도 축적하게 되고 그것을 가지고 집도 짓고 건물도 짓고 사회 시설들을 확충하면서 왕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가나안 땅은 남쪽으로는 애굽의 문명을, 그리고 또 바다 쪽으로는 지중해의 문명을, 그리고 위로부터는 또 다른 문명들을 끊임없이 섭취하면서 나름대로의 아주 발달한 문명을 이루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시려고 한 것도 바로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실 때에 하나님에 관한 소문이 가장 빨리 전파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거기에 갔을 때에 아주 발달한 물질문명을 누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저는 아주 깊이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대학원 다닐 시절에 이 고대 문명에 매혹이 되어서 잠깐 열심히 공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사용되던 언어에 대해서도 잠간 학습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의 경험으로 보아서 깜짝 놀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쯤만 해도 영어권에서 나온 어느 주석에서는 모세의 연대가 주전 15세기인데 그 때에 과연 문자가 있었겠느냐는 의구심을 표명하기도 했었습니다. 비교적 복음주의적 주석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자료들을 보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주전 18세기에 놀라운 문헌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그것은 쐐기글자의 형태로 발견이 되고, 심지어 아브라함 시대라고 믿어지는 주전 22세기의 경우에는 문자의 사용이 얼마나 보편화되었든지 연애편지, 물건을 사고 판 영수증, 법원 집달리의 판결문, 통고장 이런 것들의 수많은 서류들이 발견이 됩니다. 이것은 종이에 기록된 서류가 아니라 진흙 판에 새겨진 서류였습니다. 진흙에 쿡쿡 찍어서 말려서 혹은 불에 구워서 각자 자신들이 편지로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역사책에서 보았던 설형문자, 쐐기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문명은 굉장했습니다. 그렇게 발달한 문명이 지속되어서 성곽을 건축하는 것들도 그 기술이 굉장히 뛰어나서 엄청난 건축문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쳐들어갔을 때에 그 오합지졸과도 같고 무기도 변변치 않은 사람들 눈에 도저히 그 성은 점령할 수 있는 성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II. 불신앙과 절망
그래서 그들은 이 정찰의 임무를 40일 동안 수행하고 다시 진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들은 놀랍게 이 열두 사람의 마음이 두 패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쪽은 이 많은 과실들과 열매, 기름진 땅은 탐내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거기를 정복하기 위해 쳐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이 사람들이 각기 자기가 보고 온 것을 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의 기름진 곳을 일부 보고하긴 했지만 열 명으로부터 그 땅이 얼마나 물질문명이 발달한 나라이고 더욱이 그들의 신장과 기골이 장대해서 자신들은 메뚜기 같이 여겨졌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고 그 싸움이 두려워진 나머지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온 땅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비관적인 열 사람의 보고를 다 들었을 때에 커다란 절망감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로 이스라엘의 수많은 회중에 덮쳤습니다. 14장 우리가 읽은 본문 1절에서부터 6-7절까지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불신앙으로 절망하고 있는가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이 절망은 크게 네 단계로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A. 낙심함
제일 먼저 그들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위기 앞에서 낙심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 땅에 관한 비관적인 보고가 있은 후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은 큰 소리를 높여 울부짖으며 밤새도록 백성들이 낙심하며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울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낙심하며 통곡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들은 이 열 사람의 보고를 들으면서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위기를 직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기골이 장대한 가나안 원주민들의 칼에 남김없이 도륙을 당하고 말리라는 커다란 위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아무런 대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온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낙심하는 것이었습니다. 낙심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마음이 뚝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뚝 떨어져버려서 우리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었던 이전의 모든 정신의 힘들을 상실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열 사람들이 너무 비관적인 보고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할 정도로 낙심하였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관적인 보고가 이들을 낙심시킨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것을 이 비관적인 보고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지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시고, 다 알고 계시지만 그 믿음으로 시험을 하심으로써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기 자신도 자신의 믿음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실제로 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당신 자신도 기뻐하시기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도 영원한 기쁨이 있고 또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얻으시는 기쁨도 있습니다. ‘단순지’는 영원한 기쁨과 관련되고 ‘현견지’는 순간적인 시간 안에서의 기쁨과 관련되는 것이니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떤 사람들을 기뻐하실 수도 있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쁨을 얻으시기 위해서 종종 사람들을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은 대개 두 가지의 방법으로 오는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들을 풍족하게 하심으로서 그들을 시험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들을 결핍 가운데 두심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기도 하시는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두 번째의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런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도 속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속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들로서 가나안 땅을 얻으러 간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애굽의 열대장을 뒤로하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향해 나설 때만해도 그들은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렇게 커다란 절망적인 위기 앞에 세우심으로 그들이 믿음이 없는 백성이요, 아직은 가나안 땅에 여호와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이 보여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보고를 들었을 때에 그들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 없는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코드가 안 맞아 너무 힘이 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교제할 때 아주 힘이 나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제대로 발언을 할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통곡을 하고 난 그 다음날에야 겨우 이야기할 기회를 얻어 발언을 하니까 모두들 그들을 죽이려고 돌맹이를 든 것이었습니다. 왜?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은 죽여 버리려고 하고 비관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신뢰하고 따르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잘 사귀어야 합니다. 한 숨 쉬는 것 좋아하고 주저앉아서 꼭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그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 금방 옮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낙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신앙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은 뭐냐 하면 안 믿겠다고 하는 고집입니다. 믿으려고 하는데 순간순간 의심이 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불신앙은 딱 붙들고 ‘믿지 말아야지’하면서 의지를 가지고 자기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신앙은 가장 수치스럽고 더러운 죄악입니다.
B. 원망함
이렇게 낙심하게 되자 두 번째 단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을 향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일치하게 마음이 합해져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가재는 게편이라고 저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모세가 뭘 잘못했습니까? 자기도 가만있었으면 애굽의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어쩌면 왕이 되었을지도 몰랐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버려두고 자기 동족들을 돌아볼 마음이 있어서 그들을 학대하는 애굽의 병사를 때려죽인 그것이 모두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40년 동안을 그렇게 지독하게 연단을 받고, 언제 모세가 이스라엘 출애굽 지도자 뽑는 공채에 응모했습니까? 안가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야단쳐서 가라고 그러셔서 할 수 없이 끌려 왔고 아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론은 모세가 핑계대기를 나는 말을 못해서 못갑니다 하니까 그러면 말 잘하는 아론을 보내 줄테니까 가라고 하니까 딸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하나님이 언약하신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여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철주야 헌신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갔는데 모세가 뭘 잘못했습니까?
잘 될 때에는 자기들이 잘해서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못됐을 때에는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종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론과 모세에 대해서 원망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이 뭐냐면 사람이 일단 어떤 현실에서 낙심하게 되면 우리는 그 낙심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낙심하는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왜냐하면 낙심을 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 아니라 낙심을 하게 만드는 것 그 자체가 믿지 않겠다는 강한 고집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 어떻게 그 신을 신뢰할 수 있겠어, 나는 믿지 않을 테야’라는 강한 고집이 있기 때문에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낙심하는 그것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신앙이 없고 하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바깥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마음 안에 품고 있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바깥으로 노출이 되어서 드러날 그 때에는 그것은 단순히 마음에 품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 미움의 본질은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악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벌써 형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 아침이면 바뀔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나면 그것은 또 다른 사건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하나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말로만 이러는 감정은 내일이면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 사랑하는 마음을 자신의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드려서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서 직접 표현할 때 그것은 커다란 기쁨으로 우리 자신에게 다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사람을 향한 원망이 확 쏟아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의 경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와 아론이 데리고 와서 여기에서 죽이려고 끌고 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잘못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주변에 실제의 삶을 보면 어떤 크게 낙심되는 사건이 있고나서 우리들이 고통을 받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찾아가고 찾아가고 하다보면 거기에는 우리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부지런히 원망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뭔가 절망에 처하게 될 때 말도 되지 않는 연계를 지어서 미워하고 원망할 사람을 찾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엔가 낙심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사실 미워하는 그것이 무한한 삶에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기를 품은 사람들이 안 죽습니다.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목숨이 잘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저 인간들이 우리를 이끌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라고 합니다. 사실 누가 그들을 채찍질해서 끌고 데려왔습니까? 모두 자신들이 신앙을 고백을 하면서 따라 왔습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브레이크 풀린 언덕을 내려오는 자동차처럼 또 다른 단계로 돌진을 합니다.
C. 돌이킴
그 다음 단계가 돌이킴입니다. 하나님을 쫓아 걸어가던 그 길에서 돌이켜서 우리 뜻대로 가보자 라고 하는 돌이킴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고 하시는구나 우리 처자가 반드시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애굽에서는 그러면 아주 좋은 생활을 했나요? 성경을 다시 펼 필요도 없이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부르짖는 그 소리가 하늘에 상달될 정도로,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간절하고 신령한 기도가 아니라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고통하는 그 탄원의 소리를 자비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삶입니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백성들은 종종 애굽에서 고기국, 참외, 마늘 그런 등등을 주저리주저리 섬기는데 그 맛있는 마늘과 외를 먹던 것은 불과 한 순간이었고 그것을 먹기 위해 그들은 채찍에 등이 터지면서 수없이 벽돌을 굽고 노예로써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총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괴로웠던 순간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감미롭던 순간만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 인간들이 안전하게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칩시다. 그러면 바로의 경우에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첫 아들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열 개의 어마어마한 재앙을 통해서 이 애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쌍수를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순을 환영을 하고 그들을 위해서 축하의 만찬을 베풀어 주었을까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낙심하고 사람을 향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들게 되자 더 이상 자신이 걸어가는 신앙의 길을 안 가겠다고 하는 강력한 고집이 생기기 시작하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위기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 저 모세와 아론을 해고하고 장관을 하나 세우고 이 장관의 목적은 모세하고는 틀리다. 모세는 우리를 애굽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지도자였지만 우리가 세운 이 장관은 우리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의견을 내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모든 백성들을 충동하고 그들의 마음이 애굽으로 돌아가기에 적합하도록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불신앙의 고집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낙심과 절망의 마지막 끝은 욥의 아내가 말한 데서 축약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이것이 자기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자폭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절망의 끝입니다.
D. 반역함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담대한 반역입니다. 드디어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튿날 발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물론 그들은 강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땅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읽기만 해도 구구절절이 마음이 벅찹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짱돌로 그들을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이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보고 온 것을 저 사람들은 비관적으로 거짓 보고를 했고 이 사람들은 정직하게 보고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제껏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총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연설을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이고자 돌멩이를 쳐든 것입니다. 이 돌멩이는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심히 어겨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처단을 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믿음이 훌륭하고 정직한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돌멩이를 들고 그들을 저주로 죽이려고 했으니 이것은 결국 그들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강력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죄의 특성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담대함’입니다. 그래서 일단 죄가 그를 사로잡게 되면 아주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용감한 것이 좋은 의미에서의 용감함이 아니라 아주 대담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맹렬함’입니다. 이 죄 속에는 아주 맹렬한 기운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확 솟구치듯이 폭발하는 것 같은 위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미친 기운’이 거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광기라는 것은 비이성적인 기운입니다. 차분차분 하나하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즉각적으로 생각해서 자기 감정에 충실하면서 미친 기운 즉 광기로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죄의 세 가지 특성입니다. 담대함, 맹렬함, 미친 기운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특히 하나님 앞에 신앙을 가지고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성적이 되지 신앙을 포기하고 자기의 욕망에 이끌려 살려고 마음을 먹게 되면 미친기운, 광기가 발동합니다. 그래서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가만히 생각해도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는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와 갈렙이 거짓말로 그런 낙관적인 보도를 해서 그들이 얻을 이익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럼, 왜? 비관적인 보도를 한 그 사람들은 그 보도를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들도 슬퍼서 밤새도록 온 마음을 다해서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왜? 절망감 때문에 통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비관적인 사람들의 보고는 자신들의 불신앙의 생각과 코드가 맞았습니다. 그래서 펑펑 울며 목이 붓도록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것이 미친 짓입니다. 그렇게 울부짖음으로 기도를 했다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감 때문에 울부짖는 이 죄의 미친 광기와 하나님을 향한 눈물의 기도는 겉모양으로는 비슷해도 그 정신 자체는 완전히 정반대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서럽고 억울하게 펑펑 울다가 ‘하나님’ 하고 부르면 눈물이 딱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눈물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눈물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돌멩이를 들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죽이고자 돌멩이를 들었을 때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의 끝입니다.
그러면 이성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관적인 보고를 들었을 때 아, 하고 다리에 힘이 풀어지면서 주저앉았을 때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부러 큰 힘을 발휘해서 낙심하고 주저앉는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연약함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은 신앙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으로 원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믿음이 아닌 탐욕으로 얻으려는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단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낙심했을 때 그것은 인간적인 것 같았지만 신속하게 원망으로, 돌이킴으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치닫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아무도 말리지 않고 그들의 말이 맞다고 해서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 누군가가 이야기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그들이 지도자들을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이 그들에게 최고의 대안이 되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죄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 다시 절망할 수도 없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절망을 한다고 칩시다. 그래서 백번 양보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가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지만 또 내버려 두신다고 칩시다. 그러면 세상은 여러분을 좋아할 것 같습니까? 이미 이 세상에서 살다가 거기에서 젖 빨아먹고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서 살다가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하고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들고 돌이키는 순간 여러분은 세상의 가슴에 칼을 꽂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지명수배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한 일을 잊고 세상으로 돌아가는데 세상은 여러분이 한 짓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고 돌아오라고 유혹을 하고 꼬여서 결국은 예수님의 가슴에 칼을 꽂고 다시 두 번째 변절을 한 순간 그들이 더 이상 이 인간이 예수께 붙어있지 않다고 세상이 확인을 할 때 그 때에 살려달라고 돌아오면 짓밟아버리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믿다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성공수기가 신문에 자주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세상의 품에서 도망쳐서 예수의 품에 안겨서 행복했다 하는 것처럼 똑같이 세상도 내가 예수 배반하고 세상에 돌아왔더니 여기가 내 고향이었다라고 하는 간증이 있어야 하는데 없지 않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으로 돌아가서 성공하고 괴롭지 않고 잘 사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끝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거기를 그리워해도 거기로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싫으나 좋으나 주님을 굳게 믿고 사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제가 이만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절망을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매일 아침마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날마다 절망을 했습니다. 그런 찢어진 가슴을 안고 산 격동의 시기가 약 10여년 되었는데 아무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결국 수없는 절망을 경험해보고, 좌절도 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목회를 하면서도 어떤 때는 낙심을 한 적도 많습니다. 극단적으로 누구를 돌로 치자 이런 정도까지는 안 가지만 참 그렇게 속상하고 낙심될 적이 인간이니까 있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낙심이 되도록 자기를 놔두면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어느 한 순간에는 자폭하듯이 공중에 자기 자신이 확 폭발해 보이는 것 밖에는 결국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호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절망이 아닌 그런 종류의 절망은 추호도 성령으로부터 오는 절망이 아닙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굉장히 커다란 불륜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를 부부관계로 본다면 불륜입니다. 차라리 부부가 살다가 맘에 안 들면 ‘에이 씨’하고 바가지라도 한 번 집어던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도 우리가 살다 보면 하나님한테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정면적인 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자신이 아무 희망이 없다고 확 주저앉는 것 같은 낙심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사람을 원망하고 관계가 깨지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해 가던 길을 돌이키려는 각오를 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전면적인 반역하고자 하는 길로 내버려두면 계속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대표적인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결국은 그 속에서 비관하면서 마지막에 창자가 터져서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낙심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하고 큰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낙심했는데 사람을 결국은 찾아내서 그 사람을 원망하고 마지막에 자기 의무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향해 돌멩이를 듭니다. 그런데 소망을 가지면 반대의 희망이 생깁니다. ‘아니야 참 소망이 있어’, 하나님이 이제껏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고 말씀을 듣고 또 내 인생을 다시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시면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지겹게 밉고 그 인간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는다 생각을 하던 사람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사람이니까, 인간이 다 그렇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심은 아주 연약하기 이를데없는 상처 입은 천사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그 뒤에는 자기를 짓밟을 대군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 앞에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낙심하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낙심이 들고 이럴 때에는 음악을 듣더라도 주저앉는 음악을 듣지 말고 자기를 잘 추스릴 수 있는 소망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소망은 사람과 친구이고 낙심은 원망과 친구입니다. 낙심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되리라 낙심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낙심은 무서운 전주곡입니다. 낙심하는 생각이 들 때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혹은 인간관계에서, 혹은 가족관계에서, 혹은 영혼을 섬기면서 낙심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아 진짜 나는 왜 혼자만 십자가를 지는거야, 나는 너무 가엾어,’하면서 자기를 쓰다듬는 것인데 그것이 더 큰 원망과 불신앙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될 때마다 그것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삶에 있어서 하나님 때문에 긍정적인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죽을 것 같이 괴로운데 사실은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그 괴로운 기간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해 주셔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괴로움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결코 맛볼 수 없었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낙심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즉시 ‘내가 믿음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신앙을 꽉 붙들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에서 발견하는 경건한 시인들이 말하는 내적대화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너희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라’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자기의 신구약 주석을 완간을 하고 감사예배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 앞에 고백하기를 ‘여러분 제가 신구약 주석을 완간을 했습니다. 혹시 읽으시다가 뭐 좋은 점이 발견되고 성령을 이해하는데 깨우침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주님 때문에 잘된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읽으시다가 뭔가 좀 정확하지 않고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내가 미련하고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니 나를 탓하십시오’. 라고 했답니다. 우리도 돌아볼 때 과거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도 있고 기쁜 기억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좋고 아름다운 것, 달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때문이고 무엇인가 좀 아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은 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잘못했고 내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해서 자신의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지고 가면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은 한 순간에 주저앉고 꺼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원망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III. 신앙과 약속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배우고자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것이 불신앙과 절망이었다면 이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신앙과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을 떠났다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을 읽는데 가슴이 벅찬데 이 사람들은 왜 짱돌을 집어 들었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해방을 위해 싸울 때 유명한 어록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적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고 얼마나 많은 무기를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입니다. 신앙은 결국 상식선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기대하니까 신앙이지 만약에 상식선에서 일어나는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은 신앙이 아닙니다. 불가능 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뤄질 수 없는 그것이 이뤄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기를 가야 하는데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심히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키가 엄청나게 크고 그 다음에는 어마어마한 요새와 성들을 짓고 살더라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셔야 할 시간이구나,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이제 정말 우리의 믿음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할 때이구나 바로 이때에 하나님이 이 위기를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고 아직은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은 우리의 믿음의 위대함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위기를 허락하신 것이구나 생각을 하면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그러면 그날 밤 무릎을 꿇고 철야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한 마음이 되어서 부르짖을 때 정말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면 사실은 그 밤에 통곡하고 울고 에너지를 쏟는 그것이 기도하는 에너지로 바뀌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찬양)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다 쏟고 아침에 그 통곡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그들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어려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의외로 하나님이 기도의 복을 주셔서 막 기도하고 일어나는 그 마음이 눈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것을 느끼게 됩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눈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데 마음속에서 기쁨이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관용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면서 ‘그럴 수있다’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관계가 깨뜨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낙심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이들이 믿는 신앙은 무슨 신앙이었습니까? 약속입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다’. 왜?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 땅은 아름다운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고 있다고 하셨는데 가보니까 정확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맞았습니다. 그러면 그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 그 말씀도 하나님이 이루시지 않겠느냐?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을 아주 칭찬하시고 축복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살든지 간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믿음은 언제나 사랑의 열매를 가져오지만 사랑이 저절로 믿음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믿을 때 하나님이 무엇보다 기뻐하십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사랑하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전보다 더 큰 위기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 혼자인 것 같은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에는 잘 극복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을 때에는 그 풍랑과 고생을 인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그리고 주님은 그 큰 인생의 위기와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주님을 붙들고 살려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주 아름다운 당신의 속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밤하늘에 폭죽을 슉 하고 쏘면 초록색 빨간색 아주 아름다운 색깔로 터집니다. 그것은 금속이 어떤 금속이 들어갔느냐에 따라서 형형색색의 각가지 아름다운 불꽃이 확 터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이라는 화약을 터뜨리실 때에 거기에 고난, 위기, 역경, 절망적인 상황 이런 것들이 쇳가루처럼 들어가서 사랑이 들어가 확 터질 때 아주 아름다운 빛깔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눈앞에 닥친 감당할 수 없는 이 위기, 그것이 내적이고 아주 깊은 영적인 고민이든지 혹은 환경적인 커다란 어려움과 위기이든지 간에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쇠 가루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고 그것이 확 터질 때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오늘 자기 전에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 연설을 들을 때 우리 마음속에 확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열 명의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밤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을 하고 자기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은 정말 아름다운 땅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리고 저들을 지키는 신들은 떠났고 대신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다’. 그러한 불신앙의 환경이 아니었더라면 나타나지 않았을 그들 내면에 있는 믿음이 확 하고 솟아오르면서 오히려 핍박받는 그 상황이 찬란한 불꽃처럼 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러지 않았습니까?
(찬양)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주님의 자녀가 된 후로 우리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말씀을 꽉 붙들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2.고난을 통해 복을 주시려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네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 8:11-17).
I. 본문의 배경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결국은 그 가나안 땅을 얻기 직전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그들은 끝도 없이 계속 될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 40년 가까이 광야에서 온갖 고생을 한끝에 드디어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제 애굽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거의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는 요단 건너편에서 가나안 복된 땅을 바라보고 결국은 죽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율법의 중보자였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도될 것인데 그 여호수아는 바로 이름이 ‘예수’라는 뜻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도력이 교체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직전 아직 요단 이편에 있을 때에 모세는 유언과 같은 설교를 신명기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과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지도자였기 때문에 이미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또 풍족하게 될 때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리게 될지도 이 지혜로운 지도자는 거의 알고 있었습니다.
II. 미래에 대한 경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들을 데리고 함께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뒤로 묻은 체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언약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광야에서 이루어진 설교를 반복한 것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의 ‘신’은 ‘신신당부’한다고 할 때의 바로 거듭 ‘신’자 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래에 대한 경고를 하게 됩니다.
A. 풍족함 속의 교만함
그 첫 번째가 풍족함 속에서의 교만함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는 동안에는 먹고, 마시고, 입고, 신고, 하는 모든 것을 주님을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오늘 모세의 설교에 보니까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신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굶주린 적이 없고 목마른 적이 없도록 주님이 그 수백만, 적어도 250만 이상이 되었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는 그들이 그런 기적적인 공급을 의지하며 살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땅을 기업으로 농사를 지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부요한 생활을 하게 될 참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습성과 그 민족성을 너무나 잘 아는 모세는 그들이 풍족하게 될 때에 그들이 교만하게 될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이 세상에서 방황 할 때에 우리가 그렇게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인간은 한 번쯤은 하나님 앞에서 나 혼자서는 도저히 인생을 살 수 없노라고 하는, 자기가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 존재인가를 아는 자각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영적으로 예표론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고 예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입니다. 그들은 땅이라는 공간 속에서 한 민족을 이루면서 살았지만 우리는 영적인 공동체로서 교회를 이루며 살고 있고, 그들은 땅에서 보이는 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으나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예수의 영적인 통치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감격을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주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의 인생의 문제가 단지 인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전에는 죽어도 믿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믿어졌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와 복음의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찬란한 영광스러운 복음의 지식 앞에서 우리는 한 번도 인정 해 본적이 없었던 것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자기가 너무나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나의 죄를 위한 것들이었다는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뒤적거려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 있는 이 인간,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이 인생의 모든 난관과 고통이 앞으로도 계속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찬송했습니다.
(찬양) 눈물 흘리며 참회 하였었네
나의 마음이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그 때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빛줄기처럼 쏟아 부어졌을 때에 우리는 사는 것이 환희였습니다. 왜 날 사랑하나, 이 쓸모없는 인간을 주님이 왜 이렇게 사랑하시나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불평도 없었고 불만도 없었고 하나님이 이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셔서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해 주셔서 미력이나마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행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물질의 복도 주시고, 영혼의 복도 주시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교회도 주시고, 피 하나 살 한 점 섞이지 않았는데도 나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때문에 아주 풍족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도 함께 식게 된 사람들이 우리 중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해졌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십자가의 사랑이 맨 처음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우리는 날마다 우리에 대한 자기인식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십자가 아래서 자기 인식을 상실하고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예수를 부리고 하나님을 심부름 시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감사는 사라지고 입에는 불평을 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우리의 전부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행복도 중요하게 생각이 되었고 더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요하게 되고 그리고 잘 사는 것이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풍족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다르게 될지도 모르는 불신앙의 위험을 통해서 오늘 우리를 경고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풍족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B. 하나님을 잊음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너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냐 시험하실 때가 있고, 때로는 우리에게 많은 복을 누리심으로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시험보다는 후자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가난하고, 끼니가 간데 없고, 몸이 아프고, 이 세상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대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주님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을 주셨을 때에도 그 축복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는 듯한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향한 경외심을 하나님을 향한 간구 속에서 쏟아내는 사람들은 얼마나 드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도 간증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몸부림치며 기도했다, 산에 올라가서 금식을 했다, 울부짖었다,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매달렸다’, 그러는데 ‘그 때 우리는 잘 살고 아무 근심이 없었다’ 이렇게 간증문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부분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그래서 도저히 내 힘으로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커다란 시련 속에 있을 때 그 때에 대부분 사람들이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나 여러분은 피할 수 없이 아담의 후손이고 골수 속에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살려고 하는 반신앙적 유전자가 골수 속에까지 사무쳐 잇습니다. 그것이 언제 활짝 암세포처럼 온 마음에 번져서 세력을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이지 결국 그것은 반드시 드러나고 맙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부패한 본성은 노력을 안 해도 솟아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본성,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사랑하면서 동행하려고 하는 이 착한 성품과 거듭난 인간의 본성은 치열한 몸부림 속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냐면 잡초는 내버려두어도 잘 자랍니다. 그러나 곡식을 뿌려놓고 내버려두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밭이 되어버리고 마는 묵은 땅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까? 왜 여러분이 위기와 고난을 만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신 무서운 죄악중의 하나가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수없이 그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있는데 ‘잊지 말라’ 또는 ‘기억하라’였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물건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려서 새까맣게 생각이 안 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을 ‘기억한다’는 단어를 생각해야지만 ‘잊어버린다’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억한다’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기 이름보다도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이름을 말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대한 정보로서의 기억만이 아니라 그 이름을 사랑하고 기념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그 이름에 대한 기억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이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잊어버린다는 것은 바로 그 중심축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것은 될 수 있으면 그길로 가자는 것이지 우리가 ‘just’ 똑같이 그 길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심축이 문제입니다. 중심축이 하나님으로 되어 있으면 잠시 흔들리는 것 같지만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중심이었던 자리에 자아가 서게 될 때에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이것이 배교에 가까운 삶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그래서 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고했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고 그대로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이 그 가나안 땅에서 그 복된 땅에서 그렇게 지독하게 이방신을 섬기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 대신 이방신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으로서 이방신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랑, 이방신 사랑, 권력사랑, 명예사랑, 물질 사랑, 수많은 것이 있어도 그것은 모두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수단이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통해서 진짜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방신은 이스라엘백성에게 회개하라고 외친 적이 없습니다. ‘니가 똑바로 살지 않으면 징계를 내리리라, 나 이방신은 니가 신실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깨어짐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이방신 사상에 물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3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겠습니까?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끼니가 간 데 없다가 예수 믿고 밥술이나 뜨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갈등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잊었을 리가 있나? 교회도 계속 다녔고, 봉사도 했고, 십일조도 했고, 교회에서 집사도 되고 했는데’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중심축이 하나님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III. 광야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나면 그래서 그 중심이 내가 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버려두실 수가 없어서 우리에게 깨달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 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러한 습성이 뼈 속 깊이 배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서도 조금만 풍족하고 조금만 자기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곤 하는 악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단련하시기 위해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본성을 고쳐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말하자면 민족성을 개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길을 걷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A. 마음을 낮추심
이곳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셨는데 첫째는 그들의 마음을 낮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결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끊임없는 위기 속에 부딪혔습니다. 때로는 물이 없어서, 때로는 커다란 질병 때문에, 때로는 전쟁 때문에,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위기를 겪으며 40년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그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혹은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마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도 자신의 이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채 뭐 여기에 답이 없을까 하고 나오신 분들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사랑한다며 왜 나를 이렇게 취급하시는 거야?, 또 하나님이 선하시다면서 잘 되는 것이 뭐가 있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 우리를 고난의 벼랑 끝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그것이 헛된 것인 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결코 교만한 마음을 낮추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인생을 그려갈 궤적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고치고 낮추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광야의 길을 지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마음이 떡 만드는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쌀을 빻아가지고 큰 통에 넣고 찝니다. 그래서 큰 시루떡 같이 되면 이것을 큰 기계에 쏟아 넣고 위에서 누르면서 떡을 빼면 저 밑에서 틀의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떡이 나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이 돈을 달라고 애원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떡의 틀처럼 돈을 찍어서 준다고 부으신다면 마음이 교만하고 악한 마음이면 그 돈이 들어가서 떡처럼 만들어져서 자기가 원하는 마음의 틀대로 나옵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차라리 돈이 없었을 때는 하나님 살려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하겠지만 마음이 고쳐지지 않았는데 그 돈을 집어넣는다고, 걱정거리가 사라진다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마치 성형수술해서 예쁘게 얼굴을 고치면 천사 같은 마음이 된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자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칼질해서 아무리 얼굴을 고쳐도 옛날 사람 그대로입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힘듭니다. 시간이 바쁩니다.’ 그런데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을 잔뜩 주시면 정욕에 흘러서 타락하고 자기가 즐기는 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바빴을 때는 엉뚱하게 악을 행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합니다. 명예를 줘서 높여 줬다고 칩시다. 사람들에게 밟히고 낮게 살 때에는 돌아오면서 너무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서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밟히면서만 삽니까? 하나님 나 좀 도와주세요.’ 기도 했는데 이 사람이 떴다고 치면 그 명예를 쪄서 집어넣어 떡이 되어 나온다고 칩시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고 교만한 마음이고 높아진 마음인데 그 명예를 어디에 쓰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도 옛날에 얼굴을 마주보고 친구처럼 살 때는 다정했던 사람이 워낙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쳐다도 안 보는 그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마음이 고쳐지지 않은 사람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복은 복이 아니라 사실은 재앙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을 뛰어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왜 신앙생활 열심히 안합니까?’ 하면 ‘제 마음이 부패해서 그렇습니다 목사님.’ 하는 사람을 17년 동안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바빠서 그렇습니다’ 아니면 ‘돈이 몰려서 그렇습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그렇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어주어 봐야 결국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재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설득되게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개념이 없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맨날 술이나 처먹고 가방 열어보면 이상한 그림책이나 가지고 다니고 그렇게 까분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애한테 돈을 듬뿍 준다고 칩니다. 여러분은 그 애가 옳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미친 짓이라고 부모인 여러분도 생각할 것입니다. 그 애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꾸 팔자를 고치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갈림길입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팔자를 고치고 싶은데 주님은 진짜 너의 팔자가 펴는 길은 네가 바뀌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팔자도 안 고쳐주시면서 왜 우리를 이렇게 괴롭혀 고치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도 안 고치는 주제에 무슨 팔자를 고치려고 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쌍곡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길을 40년 동안을 걷게 하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을 하나님의 ‘부정’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의 새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지극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지극하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불리실 때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 흘리면서 광야에서 죽어가고 질병에 걸려서 결국은 그 광야에서 죽어 가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소위 이야기하는 삼위일체에서 단순지로서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셨는데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면서 보셨는데 그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실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해 보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그 종자들이 그 마음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그나마도 하나님의 영광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 가나안 땅에서 드러낼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40년 동안을 하나님께서 그 광야에서 민족성 개조를 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월이 흘렀는데 여호수아가 이렇게 보니까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로하신 이 분이 역사의 비탈길에서 외치면서 ‘너희는 오늘날 선택을 해라, 하나님을 섬기든지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 저편에서 섬기던 이방신을 섬기든지 선택을 해라, 나와 내 가정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이렇게 담대하게 외칠 때 가나안을 정복하고 몇 년이 흐르지 않을 때였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긋나는 박자로 하나님 앞에 와서 팔자를 고치겠다고 계속 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식에게 ‘새 사람이 되어라’ 하면 자식은 ‘엄마가 새 엄마가 되세요’ 하는 것입니다. 돈 잘 주는 엄마, 게임기 사주는 엄마가 되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들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시는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을 걸으면서 그 마음이 한없이 낮아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이 훈련은 계속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광야의 길에서 낮아지던 마음을 이번에는 전쟁을 통해서 이웃나라가 쳐들어와서 사람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고 가난해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원래는 그렇게 될 수 없는 민족인데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 신앙을 버릴 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낮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던 모세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하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것을 마음에 생각 하거라 하나님이 너희를 많이 사랑하시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너희 마음을 개조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채찍을 드신단다’라고 말합니다. 팔자 고칠 생각마시고 자신이 고쳐질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팔자도 고쳐집니다. 오래 목회를 해서 보면 생긴 그대로 인생이 펼쳐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인생의 궤적은 그의 마음이 지나간 발자취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이 뭐 일 한 것 한 번만 봐도 그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아는데 살아가는 사람의 발자취에 그 궤적은 그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지나간 자리입니다. 여러 번 볼 것도 없고 몇 가지 일을 시켜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판단이 서고 더 오래 실험을 했을 때 첫 번째 판단이 틀리는 경우는 드믑니다. 대부분 그 처음 판단이 맞습니다. 왜? 그 사람의 마음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집요하게 이 마음을 고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칠 마음은 낮추시고 고쳐져서 보존할 마음은 네 마음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복된 사람은 마음이 낮아진 사람입니다. 마음이 낮아진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향한 앙망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살 수 있다고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래서 자신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며,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고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주님이 원하시는 시각에 맞추어 살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고 그렇게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지 않는 인생은 이 세상에서 박수갈채를 받아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결코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강력하게 이들의 마음에 연단을 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대장간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을 보십시오. 쇠조각 같아 보이는 것을 그 역청탄 속에 집어넣고 풀무질을 해서 시뻘겋게 달아서 거의 물렁물렁 해질 때까지 쇠를 달굽니다. 그렇게 달구지 않으면 대장장이가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시옵소서’ 라는 찬송을 마음이 깨뜨려 지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부르면 최고의 찬송이지만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부르면 ‘배 째라’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주님 앞에 죄송하다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것입니까? 가난해서? 못생겨서? 너무 늙어서? 너무 어려서? 눈이 찢어져서? 배가 나와서?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나인 것 자체가 죄송합니다. 왜? 주님이 원하시는 나는 더 아름다운 나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나는 더 순결한 나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나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나인데 내가 이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한없이 죄송한 것입니다. 어느 부분이라고 말할 수 없고 전존재가 죄송한 것입니다. 내가 나여서 나일 수밖에 없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반대의 감사함이 듭니다. 하나님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나님이어서 감사한 것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던 얼음이 퉁 하고 망치질을 하면 녹기는커녕 퉁 하고 우르르 부서져버리는 단단한 얼음이 이제 따뜻한 봄기운에 천천히 녹아 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고, 가보지 않은 가시밭길을 지나 살이 찔리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벼랑 끝에 세우셔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자지러지게 만드실 때도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거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잊어버린바 되었거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포기하셨거나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낮추시고 바꾸시기 위해서 그래서 여러분이 능히 감당하고 예견했던 시련이 아니라 도저히 생각한 적도 없고 그렇게 감당 할 것이라고 믿지도 못했던 그런 처절한 시련의 시간에 여러분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시는 사건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불꽃놀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는 화약이라면 그 속에 있는 많은 금속가루는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삶의 태도와 다양한 우리의 상황들입니다. 이것들이 쾅 하고 화약이 폭발할 때 그 사랑이 폭발할 때 정말 신실하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던 사람들의 삶의 상황은 금속가루가 되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한없는 자비를 보이시고 그들을 복 주시는 것으로 찬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 아프게 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고 저것은 미움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사랑이 확 하고 폭발을 했기 때문에 야단도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만약에 우리에게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 아들이 아니다, 사생자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친히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사람을 그런 불행으로 몰고 가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운 그것이 이 세상의 환경 그를 속인 어떤 사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은 아 바꾸고 하나님이 한없이 달라는 것을 모든 것을 주시면 벼랑 끝으로 뛰어내립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그렇게 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때리시는 그 자체가 그를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B. 시험하심
그래서 그 사랑이 그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다양한 삶의 상황과 연결 지어서 아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냥 피가 나도록 두들겨 맞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한없이 받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없이 여러분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주기도문 할 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닙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혹하게 만들어서 잘못된 길에 빠지게 하시는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험입니다. 나는 가끔 어떤 사람이 커다란 질병에 걸려 죽을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한 가족들은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하는 환자에게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도 모르는 사리에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잘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안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적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직면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치고 돌이킬 수 있는 그 중요한 기회가 있을텐데 그것을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식구들은 그 사람이 죽을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데 정작 본인은 준비를 못 끝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잔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시험하시는데 이 시험은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집어넣어서 미혹에 빠뜨리는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시험의 기회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가 정말 믿음이 없고 하나님 앞에 초라한 존재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가 이 정도 믿으면 얼마나 훌륭하겠어?’ 이렇게 생각을 했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불결하고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신의 참 모습을 직면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렇게 인생에 있어서 시련을 당하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고치고 바꾸어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하시려는 아주 중대한 도전이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절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새로운 소망을 갖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인생의 길을 새롭게 인도하시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이러면서 우리들이 의심하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는데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우리들을 불같이 연단하시거나 시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갈아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금속을 갈 듯이 갈아보십니다. 그 때는 갈아보시니까 아픈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고 사니까 그 속을 찾아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갈아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때 아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C. 복을 주심
그런데 그 갈려서 나온 그 가루가 진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불로 연단하시고 우리를 갈아서 우리의 진짜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보게 만들어 주시는 그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한 번 상식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옳고 곧지 않고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불로 연단해서 교만한 사람의 마음을 낮추시고 그 마음을 갈아버리셔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잘못된 마음인줄 주님이 증거를 들어 보여주셔서 하나님이 그를 고치실 때에 그래서 모두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되게 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뭐 하시려고 그렇게 부지런히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겠습니까? 결국은 길을 돌이켜서 새 마음 새 길을 걸어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새 마음이 되고 새 길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면 자원이 있어야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움직이면 자원이잖아요? 자원이 있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 갈텐데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영적인 자원이든 육적인 자원이든 자원은 부어주시지 않고 그 길을 가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변화된 그 사람의 마음에 그것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올바로 간수하는 것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작은 액수에 대해서 정직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맡기면 반드시 사고를 칩니다. 작은 명예를 주었는데 그것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큰 명예를 주면 일을 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을 고치시고 그를 시험하시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바르게 고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백성들이 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을 연단하시고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지 모릅니다. 정말 저녁 때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시련의 광야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주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면 거기서 여러분은 죽지 못해서 사는 삶을 되풀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살 그런 내적인 의지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가 싫다고 세상을 등질 수 없습니다. 겁쟁이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드셔서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은혜가 사라지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살자니 기운이 없고 죽자니 하나님이 나를 붙드셔서 나를 그렇게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괴롭히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돌이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 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IV. 결론
여러분이 주님을 떠난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에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은 여러분을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니 여러분은 예수 믿은 것을 후회 하는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을 한 순간도 후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보내셔서 시련과 고난에 응어리져서 돌 같이 굳어져 버린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분이 광야의 길을 걷는 동안에 마음을 낮추시고 치열하게 시험하셔서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의 모습 앞에 세우고 싶어 하시고 그래서 여러분을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서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설 수 밖에 없도록 망가진 인생을 살게 만들었던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어서 주님 앞에 다시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평화 속에서 지체들을 사랑하며 사랑을 받으며 그 복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는 단순지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여러분을 구원하시면 여러분이 이맘 때 쯤 주님을 멀리 떠나 벼랑 끝에 설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그 분이 하나님이실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셨는데도 주님은 후회 없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건지셔서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못 박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결국은 당신의 사랑 속에 이끌어 들이는 또 다른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의 속성을 우리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드러내셔서 당신의 영광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오늘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늦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마음을 두드리며 여러분을 당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망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 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 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삼상 1:9-20).
I. 본문의 배경
이 사무엘상서는 매우 중요한 성경책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 사무엘서에서 다루고 있는 사무엘이라는 선지자의 시대에 와서 그 복잡한 사사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우신 왕이 세워지는 시대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모세와 함께 가장 중요한 선지자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국이 없던 사사 시대와 왕이 세워져서 왕국의 시대로 접어드는 그 격동기에 두 역사의 줄을 함께 붙들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와서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사연 끝에 왕을 세우기로 결심을 하시고, 그 왕을 세워 이스라엘 나라를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무엘은 바로 처음 두 왕,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세운 장본인이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선지자로서 사무엘이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 못지않게 왕정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그렇게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던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인 사무엘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큽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무엘의 출생이 믿음의 어머니, 한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상당히 많은 장을 하례해서, 부분을 하례해서 사무엘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다루면서 그러면서 우리에게 믿음의 중요성,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한나의 삶의 모본을 통해서 사무엘이 받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상에 대한 영향까지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한나는 그저 믿음은 훌륭한 여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비범한 여인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옛날로 말하면 칠거지악중 하나인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어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나 우리나라에게 있어서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면 의학적으로는 그것은 남성의 책임일 수도 있는데, 모두 여자가 뒤집어쓰던 그러한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남편인 엘가나는 이 한나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첩으로 들어온 브닌나가 이제 그를 잉태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를 구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첩이 자녀를 낳고, 본처인 자기는 자녀가 없었을 때에 이 여자의 마음은 깊은 고통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II.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찾음
히브리말로 아들이라는 말을 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옛날에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죠? 허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훌의 아들이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래서 이 벤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면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진 바나 동사에서 왔어요. 그러니까 여자가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아야지만, 자기의 집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아직까지도 집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한없이 고통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착한 엘가나는 이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래서 이 아내 마음에 위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여자의 마음은 아들이 없어서 당한 깊은 상처와 고통은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도 채워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본처의 자리를 빼앗기고 물러나서 쓸모없는 여자가 되어 퇴출되는 경우를 아마 이 한나도 자신들의 조상과 주변의 역사에서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이 일이 대단한 것 같지 않았지만, 당시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로 절망 끝에 서 있는 그러한 여자의 심정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한나를 보면서 이제 그가 그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가 될 때까지 그가 이 바로 큰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무엘은 믿음으로 태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에 버스를 많이 타고 다니잖아요. 요즘은 그러한 것을 안 하는데. 그 버스 운전수들이 어떠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장면, 사진을 하나 촌스러운 것을 그려놓고 그 옆에다가 오늘도 무사히. 교통사고가 참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난 그래서 어느 소녀인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그게 바로 사무엘이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유명한 성화에요. 그 그림에 나오는 걔가 바로 오늘 이야기 하려는 걔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여자가 그 남편이 그렇게 위로를 하고 사랑을 해주었는데도, 결국은 그것으로서 이 여자는 위로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결국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그는 결국 한나가 일어나서 결국은 성소에 올라가게 되었고 옛날로 말하면 성막이죠. 거기에 올라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A. 문제해결의 길 : 하나님
결국 이것은 이 여자가 문제 해결의 길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정말 복받은 마음이 어떠한 마음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상하고 깨어진 마음입니다. 정말 상하고 깨어진 마음은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에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한나는 남편의 정말 친절한 위로가 있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이 남편, 엘가나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대 마음이 슬픕니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습니까. 이게 사실 보통 남자가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지극한 아내를 향한 사랑이 없으면, 이러한 식의 기가 막힌 그 묘사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열 아들보다. 열 아들보다 내가 훨씬 더 낫지 않습니까. 아마 구약 성경에서 이렇게 남편에게 사랑을 받은 여자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한나는 남편의 이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끝까지 사내아이를 출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남편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놀랍게 이 여자의 마음은 그 엘가나의 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간곡한 위로의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참 복된 거라 이것입니다. 이게 참 복된 거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을 만날 때가 되면 아무 것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요. 물론 남편의 이러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으로 위로가 되지 않아요. 이 한나는 왜 남편을 그렇게 따뜻한 말로도 위로 받을 수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 고마운 배려였지만 자신의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일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해결은 결국은 하나님을 독대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의 말씀을 받고 간구해서 주님께 응답을 받는 그것에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작용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러한 남편의 말이 위로가 되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이 그에게는 충분히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한분께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당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 그것들 중에는 쓰리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문제들도 있지만, 그 모든 쓰리고 아프고 괴로운 모든 문제들 까지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 아픈 문제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문제의 해결의 길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등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쳐 당신께로 부르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많이 주신 시간들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프게 가시밭길에서 헤매고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시고 그리고 우리를 아프게 하시던 그때가 오히려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시는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모든 것을 넘치게 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운지 추어도 모르던 사람들이 오히려 인생의 가시밭길에서 가시에 찔리고 피를 흘리면서 주님이 때리시는 그 매질에 종아리가 피가 흐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자기 같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믿음없이 살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당하게 된 문제들입니다. 일은 우리가 저질렀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저지른 나쁜 일 때문에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드셔서 우리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말 크고 놀라운 사랑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 한나가 결국은 그 큰 고통이 매일 매일 깊어져 가면서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격동을 경험하면서 급기야는 사랑하는 남편의 친절함이 위로로서도 돌봄을 받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분께 곧바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참 신앙생활의 유형이 다양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늘 말이 많은 것 같고, 수다스러운 것 같아도 일단 하나님 앞에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하는 것이 발생하면 사람 앞에 입을 꾹 다물고 하나님께 가서 엎드려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떠한 사람은 그저 과묵하고 평소에는 말이 없는 것 같다가도 인생의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 앞에 해결해야 될 차례인데,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속에 있는 사연을 쏟아 놓기를 기도하는 것보다 열배나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때에 그 마지막 돌아오는 결과는 매우 씁쓸한 배신, 그리고 결국은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홀로 내동댕이쳐진 그러한 마음 밖에는 되돌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추한 행동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특별히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아서 열심히 교회에서 섬기다 보면, 이러한 저러한 일들이 왜 안 일어나겠습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주일날 예배 시작한 다음에 들어왔다가 축도 끝나기 전에 가는 사람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킬 기력도 없어요. 그것도 무슨 마음의 기운이 있어야지 문제를 일으키지, 그러한 사람들은 그 사람 존재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킬 것도 없어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주님을 위해 교회에서 봉사를 해 보십시오. 그러면 또 시샘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렇다고 너가 한번 해봐라 하면 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는 사람, 그리고 또 심사가 꼬이고 은혜가 떨어지면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지체들의 흉을 보고 그리고 또 언감생심 목회자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고 이러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정말 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때에 조금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래서 늘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가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그만두면 너는 사람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주님 섬기고자 길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박수 쳐서 이 자리에 선 적이 있느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날 위해 자기의 아들까지도 주신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섬기기를 기뻐하셔서 그 사랑이 나를 감화해서 여기에 세웠으니 이게 바로 사명이고 소명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넌 그만 둬라 하실 때까지는 거기를 떠나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죠. 순종하는 자리에 서서 투덜거리는 게, 불순종하는 자리에서 찬송부르는 것보다 하나님께는 더 영광입니다. 감동이 안돼? 감동이 안돼? 생각을 해봐요. 여러분도 한번 예수님도 그러한 비유 하셨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둘이 있는데, 얘야 너 가서 이것도 사고, 저것도 해오고 심부름도 해오너라 하니까 네 엄마 걱정 마세요. 내가 금방 갔다 올게요. 그리고 가서 다른 데로 도망 간 녀석이 이뻐요? 아니면 얘야 너 엄마 심부름좀 해와라 하면, 아이씨 맨날 나만 시켜. 나만 밥이야. 동생도 있고 형도 있는데 왜 맨날 나만 시켜. 엄마 미워 그러면서 갔는데, 결국은 심부름을 한 그 자식이 이뻐요? 왜 대답을 못해. 첫째에요? 둘째에요? 물론 또 한 녀석이 있어서 아,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게 되어서 영광이옵나이다. 하고 가서 그렇게 방긋방긋 웃으며 가서 방긋방긋 웃으며 해 가지고 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이지. 그런 애들 없잖아. 그럴 바에야 둘째가 낫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참 많이 시험해 봤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이 있을 때, 거기에서 항상 방긋방긋 웃으며 충성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이지만, 안될 때 많잖아요. 그렇죠. 안될 때 많잖아요. 그럴 때에도 보면 하나님이 있으라 그러는 자리에 있으면서 가끔 하나님, 난 정말 못하겠어요. 아니면 세상에 왜 나한테만 이러한 무거운 짐을 지게 해주세요? 그리고 투덜거리면서도 거기에 있으면 하나님이 기쁨도 주시고 소망도 주시고 필요한 자원도 주시고 해서 결국 오늘은 은혜가 떨어져서 투덜거리지만 내일은 은혜 받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버리고 나면 거기에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노래를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모든 문제가 생겨날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로 우리를 이끌어서 모든 문제는 이 세상에서 생겨났지만, 그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매달려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비춰 보십시오. 정말 재밌는 게 뭐냐 하면, 한나 왜 그렇게 슬퍼하고 먹지도 않아?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아? 그런데 이상하게 한나의 대답이 없어요. 대답이 안 나와. 빈말이라도 아이고 애쓴다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대답이 없어요. 그 이야기는 남편을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은 나를 많이 사랑해 주지만, 내 인생의 이 문제는 당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과 독대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많고 여러분이 인생의 문제에서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는 문제가 많아서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심령을 썩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중차대한 문제인 것처럼 그 비례한 만큼 하나님 앞에 하나님 한분만이 문제 해결의 근원이시다 그러한 무게를 가지고 매달린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러면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많이 고민하고 괴로워 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이죠.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그것은 5년 후에도 숙제로 자신 앞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세요. 주님, 문제는 내가 일으켰지만 해결은 주님이 하십니다 하면서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게 해결의 길이죠.
(예화) 여러분 학교 가가지고, 요즘은 안 그러지만 옛날에 학교에서 까불다가 유리창 깨뜨리면 꼭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부모님한테 직접 변상을 받았어요. 참 고약했어요. 그러한 사고 쳤을 때, 무지하게 고민하잖아요. 결국은 울면서 가서 엄마 내가 잘못해서 유리창 세장 깨뜨렸어요. 선생님이 엄마 모시고 오래요. 죽싸게 혼나죠. 그래서 가서 엄마가 선생님을 만나서 미안하다고 그러고 유리창 다시 껴주고 그리고 방긋방긋 웃고 오시면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는 우리들이 쳤는데, 문제는 우리 엄마가 해결을 해줘요. 참 그때 엄마, 아빠가 참 위대해보이죠.
여러분이 사고를 쳤지만, 여러분 자신이 문제 해결은 못합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문제의 해결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인생의 벼랑 끝이다. 벼랑 끝이다, 그랬는데 사실 그 벼랑 끝이 어떠한 끝인지 생각해 보세요. 한번 눈을 조용히 감고 묵상을 해보세요. 천해만해한 벼랑 끝에 딱 서있어요. 30센치만 나가면 아래로 떨어져서 으악 하면 그 다음에 뭐 저 세상에서 눈을 뜨겠죠. 그런데 혼자 이렇게 벼랑에 서 있으면 인생의 벼랑 끝 아니야. 그 자연을 감상하는 거지, 그게 벼랑 끝이야? 그런데 저기에서 쳐들어오는 거야. 그런데 벼랑 끝에 서 보는 것은 얼마나 멋있어요? 나도 서 보니까 멋있더라고요. 설악산가서 벼랑 끝에 딱 서서 자연 경관이 한 눈에 딱 들어와요. 언제든지 마음먹어서 돌아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적군이 쳐들어오는 거야. 이리로 갈 수가 없어요. 이리로 뛰어 내릴 수도 없고. 대적을 해서 싸워보자니 이길 기운이 없고 그게 인생의 벼랑 끝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뭘 생각해요? 선택할 여지가 없잖아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투신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맨날 아침이면 나와서, 난 아침에 TV본 적이 없지만 신문에 보니까 아침에 나와서 그렇게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라 했다잖아요. 살자잖아. 그렇게 익살을 떨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던 사람이 자기 자신은 그냥 자살을 해 버렸어요. 루프스라는 병이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자살 한 것입니다. 남편은 또 혼자 보내기 싫다고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가족 둘 부부 둘이서 자살을 합니다. 그게 희망이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누가 있어요? 그렇죠.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너는 어느 곳에 있던지 주를 바라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게 신앙이죠. 그러면 결국 하나님 한분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당신 찾으라고 그러한 벼랑 끝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밑에 내려다보면서 죽을 결심 하지 말고 뒤돌아보면서 겊먹지 말고 하늘을 향하여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B. 마음을 쏟음
두 번째, 이 절망 끝에 하나님을 찾은 이 여자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중요한 일에 몰두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남편에게 앙탈을 버렸더라. 한나가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언니를 찾아가서 하소연을 하였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운 나머지 마실을 떠났더라.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부분이 그러한 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는 통곡을 동반한 기도였어요. 통곡을 동반한 기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자신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았어요. 이게 정말 놀라운 경험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마음을 확 쏟아 놓고 내 마음을 주님 앞에 모두 쏟아 놓고 나면, 그러면 어떠한 놀라운 경험이 일어나는가 하면 자기 마음을 다 쏟아 놓고 나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나게 되어요.
그래서 보면 누가 자기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이 찾아오잖아요. 그러면 한 마디로 꺾어서 그 사람을 바꾸어 놓으려고 하면 거기에서는 항상 커다란 부딪힘이 생기고 오해가 생겨나요. 가만히 들어주면서 아 정말 그러시겠네요. 맞장구를 잘 쳐주셔야 합니다. 어머나, 어쩜, 그럴 수가. 정말이요? 계속해서 계속 쏟아내요. 아,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 같으면 그렇게 못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 쏟아 놓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이야기 하면 그 사람이 아주 놀랍게 받아 들여요. 그리고 그렇게 억울하고 고통스러울 때 눈물을 막 쏟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온갖 나쁜 게 눈물 속에 쏟아져 나온다고 하더만. 그게 그렇게 몸에 좋대요. 건강에도 좋대요, 그게. 온갖 중금속과 온갖 나쁜 체액이 그 속에 쏟아져 나온대요. 그래서 눈물을 절대 먹으면 안됩니다. 흐르면서 먹잖아요. 그렇게 쏟아 놓는 것.
그때에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는다라고 하는 것, 성경에서 보면 너의 마음을 토할지니라. 또한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는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진짜 다른 사람에게 수다떨 듯이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의존한다는 뜻. 그때 자신의 마음을 확 쏟아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오만과 고집, 교만, 자기 판단, 상식 이러한 것으로서 막 버티고 있던 그러한 구조물 같은 것이 마음을 쏟아 내면서 함께 와르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떠한 고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찬양)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그냥 아등바등하고 목숨을 걸 것처럼 몸부림치던 일들이 생각을 좀 바꾸고 나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일인 경우가 많아요. 나의 집착과 욕망이 그것을 강하게 사로잡기 때문에 결국엔 깊이 고통을 받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찌 그럴 수가 이렇게 되면 혈압이 오르고, 그리고 건강에도 해로워요. 그럴 수도 있지 하면 자꾸 그렇게 말하다보면, 진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면서 그분께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 놓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모두 쏟아 놓을 때에 틀림없이 이 여자의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보니까 근심이 사라졌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첩이 자식을 낳았다고 눈꼴시게 뭐 자기를 구박하고 그러한 것을 보았을 때 그때에 어쨌든 죽을 것처럼 괴로웠다고 하는 이야기는 브닌나 첩을 향한 어떠한 분노나 억눌림 감정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 게 없었다면 이렇게 격동 받을 일이 없지. 한나가 믿음의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사람도 그저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부패한 인간일 따름이지 뭐 그렇게 유별난 사람이었겠어요? 그러니까 그 나름대로 아니 뭐 솔직히 이야기해서, 한나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그까짓 하나님이 애를 안주시면 그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 나는 주님만 있으면 남편이고 애고 상관없습니다. 나는 주님이 계시고, 나를 주님이 이렇게 살게 하셨으면 남편이 있고, 새끼가 있고 이러한 것들은 삶의 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렇게 하고 살았으면 더 훌륭한 사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더 훌륭한 사람이잖아요. 자식에 그렇게 집착을 하고 그래요. 독신으로도 훌륭하게 살수도 있는데, 시집 간 것만 해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지. 처녀로 안 죽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우리가 한나를 보면서. 얼마든지 이 한나보다 훨씬 믿음이 좋은 여자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또 하나님, 브닌나가 나를 욕해도 나는 브닌나 때문에 이 집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엘가나에게 짝지어 주셔서 그래서 그의 갈비뼈로 나를 삼으셨으니 하나님, 나는 이 여자가 나를 박해하고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주님, 저를 싱글로 늙지 않고, 시집이라도 오게 하셔서 너무 감사하고 백골난망이옵나이다 하며 방긋방긋 웃고 중간에서 브닌나 때문에 남편이 괴로워 할 때에도 여보, 난 괜찮으니까 상관하지마. 당신이 우리 두 여자 사이에서 얼마나 괴롭겠어? 이렇게 위로 해 주었다면, 더 훌륭한 사람이잖아요. 그 정도까지는 안된 것입니다. 누가 또 그 정도 까지 될 수 있겠어요? 이 여자는 그렇게 하면서 말하자면 격동을 당했다는 것은 브닌나처럼 못되지는 않았어도 이름 자체가 틀리잖아요. 브닌나, 한나 틀리잖아요. 그래서 우리 여러분이 아이를 낳을 때에 한나라고 이름지은 것은 굉장히 많이 보았어요. 믿음의 가정에서. 그런데 브닌나라고 이름 짓는 것은 하나도 못 보았어요. 그렇잖아요. 한나. 한나 많잖아요. 그렇게 그러한 여자였지만 어쨌든 격동 될 때에는 이 상황 속에서는 분노와 이러한 것들이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구조물처럼 그를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계속 버티면서 버티고 있는 가운데 자꾸 상처를 받게 되면 자기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아주 악해지는 것입니다.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떠한 생각을 하는가 하면, 밖에서 부는 수많은 바람과 시련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모든 책임을 환경에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어떠한 시련과 고난, 상처, 이러한 것들이 내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게 없는 것으로 나를 나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세요?
그래서 의학자들이 그러한 이야기들을 합니다. 세 개의 삼각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그 다음에 환경,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 환경, 생활의 태도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게 근본적으로 이 밑에 깔려 있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떠한 사람이 암에 걸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환경도 아주 좋고, 스트레스도 안 받고 경치 좋은 곳에서 조용히 살고 자신도 건강을 위해 노력을 해. 그러면 암에 안 걸리다가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속에 있는 유전자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두 가지가 나쁘면 확하고 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엔 모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상처, 시련, 고통스러운 상황 맞이하고 경험할 때 악한 구조물들이 자라잖아요. 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이 사람은 그러면 다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 하는데, 내게 그러한 인자가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 사람이 그렇게 상처뿐인 상황 속에서 안 태어나고 진짜 좋은 상황에서 태어나고 아니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부모하고는 결별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훌륭한 집안으로 갓난 아기 때에 입양을 해가지고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러한 것들이 안 생겼겠지. 그런데 결국 속에 있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성과 연결을 지으며 폭발적으로 자라나는 거야. 결국은 우리가 항상 무슨 문제이든지 간에 우리의 인생을 바라볼 때,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마지막에는 신앙적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항상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바라볼 때 인정하기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이게 판단을 하게 될 때 그때에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입장이 관점이 어느 것이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죠? 시련과 고난과 막 이러한 것들, 상처뿐인 가정 이러한 속에서 생겨나면서 자기가 막 이렇게 악한 구조물 같은 것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엔 사람을 원망하고 낙심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데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항상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야지 하나님 앞에서 기도가 되지, 그리고 항상 하나님이 정말 나같은 죄인을 살려 주신 것이 정말 놀라운 은혜다 그래야지, 너 같은 죄인 살리신 것이 놀랍다고 하면 그게 기도가 되겠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할 때 그때에 하나님은 거기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문제를 풀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셔요. 우리가 말 안해도, 어느 부분까지는 너가 잘못해서 그렇고 어느 부분까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셔요. 말 안해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셔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나가 그러한 것들이 막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자면 이 한나도 나쁜 여자는 아니었는데, 마지막에는 자신도 자기를 감당할 수 없게끔 고통스럽고 괴로워하게 될 때에 브닌나를 향한 미움이나 질투의 감정이 없었다면 그 사람도 여자가 아니죠. 완전히 초탈한 성인이든지. 그러나 마음을 쏟아 버리면서 그러한 것들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확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쏟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그 당시엔 가톨릭에서 사람들이 막 기도를 모든 사람이 달달달 암송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 아주 유행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아주 통렬하게 공박을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중요성을 말했던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중요성을, 왜냐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만이 자신의 마음을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에요.
자,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지금 만큼 교리를 알지 못하고 성경 지식이 부족했을 때에도 빨리빨리 내가 변화된 적이 있었어요. 언제였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잘 쏟아지던 때. 조금만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나면 막 마음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이만큼 밖에 못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더 잘 살고 싶은데, 왜 나는 이만큼 밖에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나 인 것이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너무나 큰데, 나는 이 만큼 밖에 안 됩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막 쏟을 때, 놀라운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요. 그러한 것을 6개월만 하고 옛날에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면 새 사람을 만났다고 하죠.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잖아요. 눈을 비비는 것입니다. 저 인간이 그 인간이 맞아? 아니, 저 인간이 그 인간이 맞아. 그러면서 괄목상대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막 비비는 것입니다. 아, 정말 놀랍구나.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는 않아요. 세월이 흘러가야지 새 사람이 되지. 옛날에 내가 아는 목사님이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왜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 오신지 2년인가 되는 어느 분이 있는데 신앙생활을 너무 잘하고 훌륭하셔서 장로를 시켜 드리려 하는데, 어떨까요 그러는 것입니다. 얼마 됐다고? 2년 됐는데요. 기다려. 5년 정도는 두고 봐. 이분은 틀려요. 그러니까 틀리니까 더 두고 봐. 그러니까 3년 있다가 전화 왔어요. 형님, 형님, 그때 형님 말씀 듣기를 너무 잘했어요. 이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야. 큰 일 날 뻔 했어요. 신앙의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나올 만큼 다 나온 다음에 신앙으로 다듬어지고, 다듬어지고, 다듬어지면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오래 신앙생활 했어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아서 자신이 무너지는 경험이 없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길게 하는 사람들은 고집과 아집이 보통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교회 다녔다고 하는 고집, 우리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는데, 이게 내 교회라는 자부심. 이러한 거지같은 것들이 뒤엉켜 가지고 얼마나 웃기는 신앙생활을 만드는지요. 그것은 신앙생활도 아니에요.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렇게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놓고 보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기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떠한 때에는 여러분 거울로 이렇게 보면서, 직장 다닐 때인데, 주민등록증을 만든다고 사진을 촬영했어요. 그런데 주민등록증이 나왔는데, 어느 여직원이 훌쩍 거리면서 계속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냐 그러니까, 이게 내 얼굴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 얼굴이 봤는데, 사진이 인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너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이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약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으면, 말씀을 조금 깨달아도 그 말씀이 마음을 녹여서 마음을 확확 쏟아 놓게 만들면, 이 말씀을 깨달은 양은 작아도 그 말씀 전체가 그 사람 속에 스며들어가니까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놀라운 인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너절하던 사람이 아주 단정한 사람이, 야비하던 사람이 아주 잰틀한 사람으로. 치사하기 짝이 없던 그 쪼잔하던 사람이 아주 너그러운 사람으로. 그것도 뭐 구두쇠 이러하던 사람이 변해서 아주 너그러운 사람으로. 그렇게 그렇게 사람이 막 인격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조용히 생각해 보세요. 이 기도했지요? 누가 안하겠습니까. 마음을 쏟아 놓은 적은 얼마나 되어요, 최근에? 아, 정말 내 마음을 주님께 다 쏟아 놓으면서.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그렇게 마음을 확 쏟아 놓고 기도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떠한 마음이 들어요? 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마음이 들어요. 왜, 우리 이야기 할 때에도 어떠한 사람이 울면서 자기 이야기 막 쏟아 놓을 때, 시계나 계속 보고 핸드폰이나 계속 울리고 아이고 미안해, 혼자 울고 있어 나 가야해. 이러면 이게 그 사람이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다 필요 없고, 전화가 오면 안돼 지금은 시간이 없어 탁탁 끊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다 들어주면 아무 말 안하고 가만히 있어주기만 해도 이 사람이 뭐라 그러는가 하면, 아, 세상에 너 밖에 없다고 그런다고. 아무것도 해준 것 없이 가만히 앉았는데, 그렇게 주님 앞에 마음을 다 쏟아 놓고 나면 어떠한 마음이 드는가 하면, 시원한 마음이 들어요. 단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기가 움켜 놓은 것들을 내려놓으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 놓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뭐가 없으시겠어요. 천하를 만드신 분이신데. 또 뭐가 여러분에게 아까우시겠어요. 여러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하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셨는데. 뭐가 아까우시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지셨는데도 없으신 것처럼 인색하실 때, 또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안주시고 시간을 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놓아야죠. 그것은 뭐냐 하면 난 너의 마음을 고치고 싶다. 이게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시는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주시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두드리시려고 여러분을 벼랑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해서 벼랑에 왔지만, 아마 다리만 있었어도 아마 여기에 안 나왔을지 몰라요. 다리 따라 건너가지.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서 여러분을 세우시면서 너 마음을 나에게 다오. 난 너의 마음을 고치고 싶어 한단다. 하나님은 마음을 쏟아 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쏟아 놓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벼랑 끝에서 주님께 마음을 쏟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소원을 간구함
마지막 세 번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소원을 간구 했습니다. 이 여자는 직선적이었어요. 뭐, 하나님 브닌나의 다리 모가지를 부러뜨려 주십시오. 아니면, 남편이 그 여자를 절대 싫어하게 해주십시오. 아니면 브닌나를 쫓아내실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요. 문제의 정곡으로 들어갔어요. 그게 뭐였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 문제의 정곡으로 들어갔을 때, 그 기도의 제목은 너무나도 유치한 거였어요. 뭐였어요?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시옵소서. 그게 기도 제목이었어요. 뭐라고 그래요? 주의 여종을 잊지 않고 아들을 주시면. 아들들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에요. 하나.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한 아들을 주시면, 내가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습니다. 삭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머리 깎는 칼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옛날에 율법에 의한 나실인들,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고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들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어요. 그리고 포도주와 포도가 그 당시에 그들에게 음료였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안 먹습니다. 심지어 포도 씨도 안 먹고 부모가 죽어도 그 시체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로만 바쳐진 사람입니다. 이 여자는 하나님 앞에 아들 하나를 달라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만약 그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내가 갖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신학교 보내겠다라고 하는 뜻이라고 그러는데, 신학교 보내는 것과는 좀 다르죠. 왜냐하면 신학교 보내도 데리고 살잖아요. 맨날 보고. 그런데 얘는 젖 떨어지자마자 얘는 바로 와서 그게 사실 보통 믿음이 아니요. 여러분 보고 젖살 올라가지고 방긋방긋 웃고 젖꼭지 물고 장난할 때 얼마나 이쁘겠어요. 그것을 이제 성소에 바치고 빈 포대기를 들고 돌아서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를 구하였을 때, 자기를 위해서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간절히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으면 그 소원을 하나님 앞에 직접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이 좀 안되어 보여도 그냥 기도를 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을 쏟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 기도가 말이 안 되면 하나님이 마음에서 지워 버리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기도였는데, 말이 되면 하나님이 기도할수록 그 기도 제목을 마음 가운데 새기셔요. 그래서 기도가 열렬이 나오게 만들어 주신다고요. 어떠한 때는 뭘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기도하다가 마지막 결론은 그러한 기도를 한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끝날 때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끝날 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마음을 쏟는 기도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뭐라 그래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마지막에 정말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까 마지막에 하나님, 그러한 기도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워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 보여도, 말이 좀 안되어 보여도 직접적으로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적으로 딱 핵심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그랬어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식으로 간절히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이렇게 해. 차례대로 차례대로 순서를 따라 갔어요. 제일 먼저 자신의 문제의 해결의 길이 하나님께로만 있다고 믿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한분 앞에서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모두 토하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 놓았더니 이 여자의 어떻게 보면 정말 유치해 보이는 기도제목이었는데, 이 기도는 간구하는 소원하는, 이 소원이 간구의 능력을 가진 소원이 되었어요. 그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붕 뛰어 넘어요.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하네요. 입으로만 덜렁덜렁 하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 저렇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이상하게 응답이 없어요. 그러니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쏟지 않아요. 하나님은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의 기도는 바람에 나는 검불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굳고 심지가 견고한 사람들을 평강에서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위기를 만났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뜻을 세우는 일이었어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리라.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나는 간절히, 오늘 뭐라 그랬는가 하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 즉,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인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을 이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간구의 소원을 아버지께 간절히 올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간절히 기도한 이것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 여자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III. 하나님이 생각하심
이 여자의 애처로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위로를 주셨습니다. 한 가지는 이 여자의 처지가 주의 종 엘리에게 이해되고 용납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었어요. 이 당시 엘리는 이미 영적인 총명이 다 사라진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거의 버림받은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됨됨이와 이 모든 사연을 들은 후에 엘리의 마음속에는 이 여자를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거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고 구한 것을 허락하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이 엘리의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한나의 마음에 위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 참, 놀랍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만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더 중요한 위로는 하나님이 이 여자 한나를 생각해 주신 것이었어요. 성경에서 생각하다. 생각하다. 생각하다라고 말이 많이 나오거든요. 특별히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사람들을 생각한다라고 할 때에, 그것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이 노래하죠.
(찬양)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IV. 결론
그러잖아요. 여기서도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사. 고백을 하고 또 신약시대에 와서는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혀 죽어가던 강도가 낙원에 이를 때에 나를 생각하옵소서. 그러잖아요.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깊이 사랑할 때, 제일 먼저 그 사랑에 의해서 지배 받는 곳은 어디에요? 여기보다도 여기에요. 머리가, 머리에서 항상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렸다. 누가 누구를 버렸다고 하는 표현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뭐냐 하면, 잊었노라. 잊었다. 생각에서 잘려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하셨다라고 하는 것, 그래서 뭐라 그랬는가 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그랬잖아요. 그전에도 수없이 동침했을 것입니다. 아이가 안 생겼어요. 하나님이 생각하셨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꿈에도 그리던 자녀를 이 한나가 잉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벼랑 끝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한나는 그렇게 마음에 깊은 고통을 가졌을 때,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고 문제의 해결이 오직 하나님 앞에만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찍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여기에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괴로워하고 격동을 받으면서 고통을 겪었겠어요. 아마 브닌나의 버릇을 고쳐보고자 몇 가지 시도도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아무것도 그의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마음을 쏟으며 간구의 소원을 올리며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이 한나를 생각하셨습니다. 예전부터 하나님은 이 영원한 작정 속에서 한나의 몸에서 불세출의 선지자 사무엘을 나게 하시려는 영원한 작정이 하나님 안에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아무 때나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나가 자신의 문제의 해결이 하님께만 있다라고 하는 믿음으로 그분께 마음을 쏟으며 온 심령으로 간구할 때 하나님이 이 여자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그를 생각하셔서 그래서 믿음의 아들을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생각하시기만 하니까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여자의 가슴의 한이 되고 심정이 찢어 질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인생의 수많은 사연들이 그날 하나님 앞에서 해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인생의 벼랑 끝에 오게 하신 것이 하나님입니까. 거기에서 여러분을 건져내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무능때문입니까. 여러분이 거기에 서서 벼랑 끝을 내다보고 있는 그 절망적인 상황이 결국 여러분이 여러분을 주님이 잊어버려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그렇게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당신을 찾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 위대한 축복과 구원을 유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간구하고 자신의 간구와 소원을 올릴 때까지 마음을 쏟을 때까지 문제의 해결의 길이 여기 저기 있다고 믿으며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무릎을 꿇을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매달려 벼랑 끝에서 주님의 생각하심을 입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벼랑 끝에서 고통의 눈물이 변하여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현실과 함께하는 경건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굽는 자가 그 주 애굽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아니하였나이다”(창 39:19-40:15).
I. 본문의 배경
저는 한때 신앙생활의 초기에 성경에서 아주 좋아했던 한 사람이 바로 이 요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요셉을 좋아할 때 요셉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느냐고 사람들이 종종 물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현실과 함께하는 경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알다시피 이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없이 받은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셔서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을 하는 그런 꿈을 주셨죠. 그의 꿈은 아름다웠지만 그의 삶은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가시밭길 같은 삶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소중하게 쓰시고자 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가혹할 만큼의 아픈 길을 걷게 하시고 때로는 혹독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지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이제 우여곡절 끝에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그래서 자기 집으로부터 한없이 멀리 떨어진 이억만 리 타국의 노예로 끌려온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보디발은 이 애굽의 시위대장이었으니 옛날로 말하자면 근위대장이요, 오늘로 말하자면 경호실장 쯤 되는 사람의 집에 노예로 팔려온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 사람들은 함족 사람이요, 히브리 사람은 셈족 사람이니 생김새부터도 틀리고 언어도 다르고 모든 것이 표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여기에 노예로 팔려서 여기에 끌려온 것입니다.
II. 현실과 함께하는 경건
그러니 그런 속에서 이 요셉이 그 수많은, 한번이 아니라 수없이 여러 번 만나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과 함께 하며 그 시련을 이겨냈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요셉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의 경건이 예배당 속에 갇혀있거나 혼자 거룩한 수도 속에서 맛보는 그런 종류의 폐쇄적인 경건이 아니라 현실과 함께하는 경건이었다는데서 나는 이 요셉이 오늘날 우리와 놀라운 신앙의 적실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는 오늘 이 현실과 함께하는 이 요셉의 경건을 네 가지로 말씀을 드림으로써 정말 현실과 함께하는 경건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A. 현실을 받아들임
우선 첫째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경건이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들이 정말 감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여러 번 성경을 찾아보았는데 아무데도 이 요셉이 사람이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말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그의 생애는 순탄했습니까? 아니에요. 장가가서 처음으로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이름을 뭐라고 지었는지 아세요? 므낫세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의 뜻이 뭐냐면 ‘잊어버리고 싶다’ 그런 뜻입니다.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고생을 했으면 이 아이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잊어버리고 싶다 할 정도가 되었겠습니까?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사랑하는 형제들과 만났을 때에 그가 그렇게 통곡하여 형들이 있는 곳을 피하여 들어가서 통곡을 하고 나왔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젠 자기를 노예로 팔고 못되게 굴던 형들이 와서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었는데도 돌아가면서 통곡을 하며 울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통쾌해서였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살아온 날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가시밭길이었고 고통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 형들을 볼 때에 잠시 잊었던 그 과거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그렇게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결코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은혜 때문에 그 상처가 영광이 되었던 사람이라고 그렇게 요셉을 평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요셉의 신앙의 놀라운 특징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이라는 것이 왜 오는지 압니까? 현실을 인정하면 그러면 덜 불행합니다. 왜냐면 이 불행이라는 것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인 것도 굉장히 많잖아요. 이번에 닉 부히치치라는 사람이 책을 한 권 냈는데 이 사람은 두 팔도 없고 두 다리도 없어요. 그 다리가 저 밑에 내려가서 잘린 게 아니라 위에서부터 뚝 잘려 버렸어요. 그러니까 요만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제가 예전에 좋아하던 테너 가수 중에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태리 가수인데 장님입니다. 그 양반이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주최하는 콩클에서 일등을 하고 두각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그 사람 팬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 팬들은 그 사람이 눈이 멀었다는 이유 때문에 동정심으로 그 사람의 노래를 들어준다기 보다는 정말 어떤 가수도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창법으로 그 음색으로 테너를 노래합니다. 근데 그 사람이 사고로 눈의 시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어요. 그 사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좋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카톨릭 신자일 가능성이 많겠죠.
그런데 나처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저 사람과 같은 상황이 될 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왜냐면 눈을 다시는 볼 수 없고 장님이 된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한 시간 반 밖에 안 걸렸대요. 한 시간 반만에 나는 이렇게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현실이라고 이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데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신의 눈 먼 것이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사실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예술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는 거겠죠. 그렇게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을 가져도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솔직히 이야기해서 한 시간 반만에 접을 수 있는 그런 자신이 없더라구요.
나 옛날에 눈 잘 안보일 때 접긴 접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수필도 썼어요. 그 인터넷에도 썼어요. 그 뭐냐면 ‘아, 나는 이렇게 평생 안보일거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아름다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기쁨 때문에 사는 사람이 돼야지.’ 그러나 참 긴 세월이 걸렸어요. 그래서 신앙에서 불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인간을 향한 미움을 내포한다고 첫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제일 먼저 어디에서 오냐면 현실이 자기에게 있는데 그것을 인정을 안 하고 안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인정을 안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회개 자체도 불가능 한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내가 이렇게 뉘우칠만한 사람이 된 것이 나의 잘못 때문이다. 모든 인식들이 현실을 통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현실을 인식하지 않아요. 현실을 인식하지 않으니까 회개도 안 되고 희망을 갖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벼랑 끝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던져서 고통을 끝낼 수 있느냐 그게 잘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비겁하고 생에 대한 애착이 있고 그래서가 아니라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더불어서 살고자하는 강력한 소원이 있어요. 그러면 자살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 못 받은 사람이냐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은 일단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죽고자 하는 자는 비존재를 선택하는 것인데 비존재를 선택하는 것은 진짜 존재하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다른 식으로 존재하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자살하는 것은 비존재를 선택하는 것이니까 사실 자살은 살고 싶다는 절규란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희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희망이 끊어지면 절망을 알아요. 그 희망이 끝까지 살아있는데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그 희망이 절망으로 변해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언제한번 자살에 대해서 세미나를 하면 좋겠다. 그쵸?
이 요셉은 몇 장면을 설명해 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깊이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옛날의 노예, 그 노예도 같은 함족 노예가 아니라 셈족 노예에요. 셈족은 이 애굽사람들이 아주 가증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어요. 왜냐하면 이 나라는 농경을 중시하고 목축을 굉장히 경원시 여기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목축을 하는 백성은 좀 과장하자면 천민처럼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 조상이 그거 하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다가 얼굴 모양새도 틀리고, 생김새도 틀리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그런 셈족 출신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고관대작인 보디발의 집에 끌려들어 갔을 때에 그는 노예 중에서도 가장 하급의 신참 노예였어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혔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렇게 짓밟히고 죽도록 고생할 때 누가 생각이 났겠어요? 엄마, 아빠? 그건 뭐 아주 낭만적인 대답이고. 누가 생각이 났겠어요? 그 자식들! 바로 그 형들!! 자기를 구덩이에 던지고, 돈 몇 푼받고 팔아버린 그 형 놈들 생각이 나지 않았겠어요? 그러면 한 번쯤은 이 집에 끌려와서 ‘난 사실 여기 끌려오게 된 것이 진짜 악랄한 형들 때문에 여기 이렇게 오게 된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한번이라도 이야기했을 거 아니에요? 일체 이야기 안했어요. 그게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고는 어떻게 하냐하면 자기가 끌려와서 이 보디발의 집에서 신데렐라처럼 굴러다니면서 노예살이를 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러겠죠? 그 요셉이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아닌지 목사님이 가보셨어요? 그러는데, 여기 나오잖아요. 인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결국에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고 눈에 들어서 그 수많은 함족 집사들을 다 제끼고 그 집안의 총 우두머리가 되는 말하자면 중인 계급까지 올라가서는 그 집안의 총무집사가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애굽의 경호대장 쯤 되는 그 집에 얼마나 많은 노예가 있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시대에서 근대화로 넘어오던 시대만 해도 옛날 노인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 부리는 사람이 찬모, 식모, 침모. 찬모는 반찬만 만드는 식모에요. 식모는 밥만 하고, 설거지 하는 식모에요. 그러니까 급수가 조금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침모는 뭐냐 하면 잠자리만 챙겨주는, 그 옛날에는 그 홑청같은 거 다 뜯어서 빠는 일을 해야 했잖아요. 그러니 여러분 집안에서 살림하는 사람을 공경하세요. 보통 고생이 아닙니다. 찬모, 식모, 침모 다 하잖아요. 그 어마어마한 대가 집에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있었겠어요.
그 노예에서 주인과 직접 대면하고 주인이 있는 내실까지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서 뭐라 그랬어요? 주인이 자기에게 금한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자기가 직접 먹는 것과 자기아내 두 사람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자기의 감독 하에서 돌보도록 그렇게 만들었어요. 거기에 올라가기까지 인생을 못 박고 거기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엊그제 학교 강의 나갔다가 식당에 들어갔는데 갈비탕을 먹는데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떤 아줌마 둘이서 처음 그 집에 취직을 하는 것입니다. 홀에서 갈비탕 나르고 설겆이 그릇을 나르고 하는 일이었는데 주인이 “아줌마, 주문은 절대로 받지 마세요. 그리고 저 사람을 불러서 주문을 받으세요. 두 달이 지나기 전에는 아줌마들은 절대 주문을 받지 못합니다.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로 아줌마들은 주문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두 번이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니, ‘뭐 드실래요?’
그러면 ‘갈비탕하고 곰탕’ 그러면 ‘여기 갈비탕 두개에 곰탕 하나’ 이러면 되는데 그걸 두 달 훈련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오래 식당을 경험해 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언어도 통하지 않았을 요셉이 거기에 끌려가서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일을 해서 거기까지 인정을 받았을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럴 수 있습니까? 절대 못하거든요. 그 대학 중에서 좀 후진데 가보면 애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대요. 얘네들은 실력이 없어서 이 후진 대학에 들어왔고, 난 재수가 없어서 여기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난 급수가 틀리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절대로 현실 속에서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앙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그렇게 처세술 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도사처럼 노래하는 이유가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그런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낙심하고 인생의 벼랑끝에서 사람을 향해 미움을 품고 원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되냐면 내가 지금 있는 이 현실은 사실 지금 내가 두 다리를 딛고 있고 이 현실이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없거든요. 내가 없어져야지 이 현실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실은 어떻게 할 수 없이 나란 존재와 밀착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여야 되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를 않으니까 어떻게 되죠? 사실은 현실인데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이 현실에 나를 있게 만든 사람, 환경, 상황 아니면 운명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하나님이 이렇게 되도록 나를 내버려 두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현실에 충실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현실에 충실할 수 없어요. 전쟁을 나간 군인이 자기가 이 전쟁터에 있다는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몸부림치면서 자기가 싸워야만 이겨서 나가는 것 아니에요. 이번에 칠레 광부들이 구출되어 나오는 광경을 보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48시간에 참치 캔 한 숟가락씩을 먹었대요. 심리적으로는 그런 상태에 있다 보면 패닉상태가 되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대장을 맡은 사람이 있어서 군기를 딱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취침하는 공간, 회의하는 공간, 음식 먹는 공간 이렇게 나누어 놓고 절도 있는 생활을 하고, 절대 음식가지고 싸우지 못하도록 기강을 잡고, 48시간에 한 번씩 입을 벌리면 참치 한 숟가락씩만 넣어줬다는 것입니다. 그걸 먹고 버틴 것입니다. 근데 이 사람이 그럴 수 있었던 건 뭐냐면 배 밑창에 숨어 밀항을 할 때 갑판에서 떨어지는 물을 고무신으로 받아먹으면서 생존을 하는 말하자면 현실 적응력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현실은 부인할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서있는데.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떠오르는 게 뭐에요? 그냥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 그것밖에는 마지막에 남는 선택이 없는 것입니다.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현실은 항상 기분 좋은 것이냐? 기분 좋은 현실이면 왜 벼랑 끝에 서 있겠어요? 거품 욕조에 누워있겠지. 벼랑 끝에 있잖아요? 기분 좋은 현실이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에요. 누구든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누가 인정하기 좋겠어요? 그런데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깨달음은 제일 먼저 그 현실을 네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라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영적침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다시 복구할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와 집착은 우리를 끝없는 영적인 침체로 데려갑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리고 이후에 전개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요, 신앙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도 적용됩니다. 한국에서 신학자로 꽤 이름을 날리셨던 분이 계세요. 그분이 옛날에 신학교를 들어가신 것입니다. 근데 초등학교밖에 못 나오셨어요. 지금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옛날에는 하도 교육을 못 받던 시대니까 뜨거운 사명감이 있으면 그래도 특별반으로 받아줬습니다. 별과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별과로 들어가서 학부 4년 과정을 마치고 그 다음에 신학대학원 과정에 예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대로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끼리만 돌반을 이렇게 만들어서 들어간 것입니다. 들어가서 가만히 일년 생활을 하고 보니까 이제는 책이 없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할 책이. 그 때 깨달은 것이 외국 선교사들이 프린트로 가져다 준 것이 전부니까 영어를 모르고는 신학을 깊이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1학년 때 중학교 1학년 영어책을 가지고 와서 틈틈히 공부를 하니까 친구들이 다 비웃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3학년 때 자기 동급생들을 모아놓고 영어 원강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고 졸업을 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거기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그 학교에서 학장을 지내셨어요.
여러분, 그렇게 자기 친구들이 다 있는데 그 나이든 학생이 중학교 1학년 책을 들고 들락날락 할 때에 그것은 자기가 무식하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런 용기는 생겨나지 않아요. 그러나 그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현실을 극복하고 이겨낼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똑같은 원리에요. 인생의 벼랑 끝에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현실이고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지만 하나님과 관계의 현주소도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여러분 앞에 펼쳐진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반영이 아니에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러니깐 자기가 그것을 인정하기 싫고 외면해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벼랑 끝에서 돌이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자기가 지금 벼랑 끝에 서있다고 하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뭐 난 직접 해보진 않았습니다만은 옛날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꿩 사냥을 나가서는 꿩이 계속 도망을 다니다 도망을 다니다 포수들이 총을 쏘고는 찾아가서 날개에 힘이 없으면 지푸라기 있는 데로 가서 머리를 땅에 푹 쳐 박고 꽁무니를 하늘로 쳐든다고 합니다. 눈이 안보이니까 내가 안보이니까 다른 사람도 안보이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래요.
그런데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요셉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그것이 참 신앙이 아니면 어려운게 뭐냐면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여서 그래서 그 집에서 열심히 종노릇을 해서 인정을 받아서 그 가정의 총무까지 올랐잖아요. 그러면 그 결말이 좋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보디발의 아내가 이 외국 청년을 유혹을 한것입니다. 아담하고 준수했다고 그러니까 좀 예뻤겠죠? 그쵸? 그런데 그 남편은 맨날 바쁘다고 돌아다니고 그랬겠지. 어쨌든지 간에 그 청년을 유혹을 하고. 그래도 신앙의 절개를 지켰어요. 그러면 상급이 돌아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되요? 감옥에 쳐 넣은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게 현실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참 생각도 없는지 그걸 현실로 덥석 받아들여요. 그래서 또 열심히 해서 거기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가서 열심히 종으로 일했더니 전옥이 자기 할일을 죄인인 요셉에게 다 맡겨서 쉽게 이야기하면 감옥의 총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공이 총무에요. 계속 총, 총, 총 나가다 결국에는 총리가 되었잖아요. 감옥에서도 총무가 되고.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명색이 애굽의 시위대장 집의 총무니까 대단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별 하나짜리 차를 몰면 운전병이 자기가 별 하나짜리인걸로 착각을 한다구요. 그렇게 권력이 있는 사람의 측근에 있으면서 자신이 그렇게 떵떵 거리다가 만약에 그 가정 총무로 있을 때에는 옥에서 간수나 하는 나부랭이들이 눈에 찼겠어요? 어딜 감히? 그랬는데 거기에 가서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성실하게 그 일을 거들었으면 옥에 갇혔지만 자유로운 사람으로 풀어주어서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일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겠느냐 말입니다. 감옥 속에서도 죄수의 총무 역할을 하고, 그러니 그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 들인 것입니다. 그뿐이에요? 감옥 속에 갔는데, 아까 나왔듯이 꿈을 꾼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잘 해석 해주었더니 그 사람이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죠. 당신이 삼일 후에 복직 될 텐데 나가면 나를 좀 생각해 다오. 그러면서 뭐라 그래요? 나는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인데 그 못된 여자가 나를 유혹을 하다가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나를 모함해서 여기에 집어넣었는데 진짜 죽인 여자는 보디발의 아내 그 여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아니죠. 그러니까 정말 따라갈 수 없는 탁월한 인격을 가진 자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냐면 아마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갚을 때 원한과 복수는 꼬리를 무는 것이니 그 모든 상처와 서러움은 나에게서 끝나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을 놓아주고 나는 사랑을 흘려보낸다. 진짜 정당한 거 아니에요? 그 여자가 얼마나 나쁜 여자에요.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온갖 감언이설로 이 요셉에게 눈짓을 했겠죠? 여러 번 눈짓을 했다고 나와요. 그런데 요셉은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는데 요셉은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키죠.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그렇게 악하게 자기를 감옥 속에 쳐 넣어서 결국은 여기 보니까 정치범 수용소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이 이것을 놓고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옛날에 날 가르쳐준 김희보 교수님은 이런 해석을 내놓으셨어요. 보디발이 자기 아내의 말을 잘 안 믿은 것 같다. 이게 잡범이지 어떻게 정치범이냐. 정치범 수용소에 집어넣은 것은 단칼에 죽이지 않고 오히려 요셉을 자기 아내보다 더 신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조심스런 해석을 내놓으셨어요. 어쨌든지 간에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그렇게 고생을 할 때에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또 그 집에서 충실합니다.
B. 원망치 않음
결국은 자연스럽게 현실을 받아들이니까 두 번째로 원망치 않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섞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결국은 절대 원망하지 않아요. 그래도 아버지를 만났을 때에는 그 원한에 사무친 이야기인데 한번은 할 만하잖아요. “아빠, 사실은 다 지난 이야기지만, 내가 무슨 감정이 있어서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이지만, 형들이 나를 그렇게 팔았습니다. 죽도록 고생했어. 아빠한테 가서는 거짓말로 그렇게 한 거야. 이제 알겠어?” 한번쯤은 할 만하잖아요? 일체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조용히 누구도 원망치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끌려왔을 때에는 그 생활이 원래 했던 생활과는 얼마나 대조 되었겠어요? 아버지의 집에서는 채색옷을 입었어요. 그 당시에 이 채색옷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감들인 옷이거든요.
그래서 원래 이 야곱이 목축도 했지만 무역도 했습니다. 그 때는 물감들인 옷이 굉장히 귀했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존귀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입는 옷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채색옷을 입혀준 것입니다. 그렇게 집에서는 아버지의 귀한 사랑을 받고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이 집에 내동댕이쳐져서 말도 통하지 않는 집에서 이사람 저 사람에게 짓밟혀지면서 노예생활을 하고 거기에서 가정의 총무가 되기까지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으니 그가 얼마나 미친 듯이 일을 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대조되는 두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혈혈단신이었어요. 아무도 식구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고, 일가친척도 없고, 혈혈단신으로 버려진 존재였어요. 그런데 거기 와서 자기가 그런 상황에 떨어지게 된 것이 형들 때문이었는데 아무에게도 형들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감옥 속에 들어갔을 때에도 보디발의 아내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이사람이야말로 보디발의 아내를 진정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뿐만 아니죠. 감옥 속에 가서 그렇게 꿈을 해몽해 주어서 결국 삼 일만에 복직을 합니다. 그러나 새까맣게 잊어버리죠. 그리고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 결국은 그가 바로 앞에 가서 그 부끄러운 죄수복을 벗고 총리로 등극을 하게 될 때에는 그 사람을 만나서 “당신, 어떻게 사람이 변소 들어갈 때 틀리고 나올 때 틀리냐” 한 마디쯤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리 생각해도 귀한 요셉의 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몸에 상처가 크게 나도 그 상처가 감염만 되지 않으면 큰 상처도 아뭅니다. 그런데 그 상처가 감염이 되게 되면 맨 처음에는 작은 상처로 시작을 했는데 다리를 짤라야 하고, 팔을 짤라야 합니다.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무엇이 잘못 되어서 상처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을 원망하고, 원인을 찾고 그렇게 하면서 수많은 칼날을 휘두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찌르는 가운데 결국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행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도 어쩌면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을 해. 어떻게 어떻게 해서든 인정을 하는데, 나를 이 끝으로 데려온 놈들. 하고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이 생겨나게 되고, 이 마음속에서 격동하면서 마음속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인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기도할 은혜가 주어져도 그 마음 때문에 기도할 은혜가 사그라들고, 그래서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살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솟아나는 미움과 끊임없는 괴로움들을 진정시키는데 은혜가 다 소모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고, 몸부림치고, 싸워서 이기고, 벼랑 끝에서 돌이키고 할 수 있는 이 일을 위해서 쓸 힘이 거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상처만 제일 크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 다음엔 여러분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것이 모두 옳은 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벼랑 끝에서 벗어나려면 여러분은 은혜를 많이 받고 제일 먼저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미워하고 붙들고 있던 사람들을 끌러 주어야 합니다.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미움을 내포하는 것이니 내가 잘못 했습니다, 내가 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이렇게 사람을 원망하고 나의 불행의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으면서 그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동안에는 내가 이 벼랑 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면서 마음에서 풀어주고,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앞에서만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아멘.
C. 사람들에게 인정 받음
세 번째는 이 사람은 그렇게 치열한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 끌려와서는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고 또 감옥에 들어가서는 간수들에게 인정을 받고 총리가 된 다음에는 바로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돌아온 다음에는 사실 그 형들이 요셉의 권세에만 눌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은 그 끔직한 죄를 요셉이 용서해 주고 마음을 풀어 주었을 때에 그 영적인 카리스마에 눌린 것입니다. 조금도 저 사람이 나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데도 무릎이 저절로 꿇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사람이 명백하게 나에게 강제력을 행사해서 나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절대로 승복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은 그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감화력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이 감화는 높은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큰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이 감화력은 그가 비록 노예로 살았어도 그의 인격을 통해 흘러나오는 감화력이었어요. 그래서 그 가정의 총무까지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인격의 감화력이 감옥 속에 있을 때엔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조정에 있을 때에는 조정에 있는 사람에게 두루 미쳐서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첫눈에 이 사람을 알아보고 우리가 이 사람처럼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보좌 그것뿐이라 바로 당신의 왕국에 이인자로 삼아 주었어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정말 섬기면서 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이 바닥에 있을 때에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기회가 더 많은 것이 아닐까요? 바닥에서 정말 바닥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이고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모두 아는 사람들에겐 하나님과 이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 인격적인 감화를 끼치면서 인정을 받을 그 때에 그는 정말 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잘 들으세요. 결국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가 있지 않겠어요? 때로는 애매히 시험을 당할 때도 있고, 혹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미끄러져서 시험을 당할 때도 있잖아요. 그때가 늦게나마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 있는 기도의 제목이 있어요. 내가 시험에는 들었지만 악한 사람은 되지 말게 해 주십시오. 라고요.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기도한 다음에는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시험과 악이 그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러지 말라고. 그래서 보면요 시험에 들게 되었을 때 이 시험이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다 라고 생각을 하고 모든 걸 끊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으면 해결이 빨라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원인까지 들이대면서 실처럼 꼬이기 시작하면 그 실이 자기의 목을 조르면서 계속 어둠속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이 해결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셉은 어떤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때로는 신앙을 지킨 그 마지막 결과가 더 깊은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거기에서 깨어나서 거기에서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그 사람들에게 사랑의 감화를 끼친 사람이죠. 그랬기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이제 여러분은 그 인생의 끝에서 사람들에게 잘 인정받고 오히려 그렇게 시련에 처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 된다면 여러분이 그 인생의 벼랑에서 벗어난 날들은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아멘.
D. 섭리를 믿는 신앙
마지막 네 번째는 이 사람 요셉은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뜻이 두 가지인데 감추어진 뜻이 있고 그 다음에 드러난 뜻이 있어요. 드러난 뜻이 계시라면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바로 섭리에요. 섭리는 하나님의 작정의 말하자면 접힘이죠. 접힌 그것이 천천히 펼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것을 섭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어요. 참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주시는데 안 주시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의 인생의 미래에 대해 아는 지식을 미리 주시지 않으셨어요. 왜 안주시는지 아세요?
그걸 알려주시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절대로 안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미래를 본다, 예언을 한다 하는데 다 뻥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믿지 말고 아무리 기적이 나타나고 별 생쇼를 해도 속편하게 그건 다 마귀가 하는 일이라고 줄을 쫙 그어버리면 간단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알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자,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결정되었으니까 하나님을 더 의지할거고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고 결정되었으면 어떻게 해도 그 나쁜 일이 일어날 테니까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을거 아니에요. 그러면 신앙 자체가 성립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알 필요가 없어요. 뭐만 알면 되냐면 잠시 후에 어떤일이 닥칠지, 그리고 내가 언제 죽을지, 언제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연한을 정하셨는지.
III. 신실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몰라도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인도를 굳게 믿으며 주님께 순종하고 살면 하나님이 나를 가장 신실하게 선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그 믿음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앞일이 일어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생기가 도는 것입니다. 화투치는 사람들이 화투를 두 장을 주잖아요. 두 장을 주면 이렇게 펴보면 되잖아요. 안 펴보고. 그 왜 그래요? 한 번에 안보는 게 그렇게 재밌는 거라. 생각해 보세요. 몰라요. 그런데 하나하나 전개될 때 정말 가슴이 시리잖아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응답을 해 주시는구나. 정말 놀랍다. 알았더라면 가슴 벅차지 않았을 그런 기쁨이 우리의 신념 속에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단순지는 없고 현견지만 있는 것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게 되는 통로에요. 그게 뭔가 꿈벅꿈벅 하시는 분들은 삼위일체를 안 들어서 그래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워요. 그래서 그런 것 갖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 우리의 마음에 안들 수 있어요. 때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혹은 도대체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이유 때문에 그 마음이 안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만은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나쁘게 되는 일도 좋게 바꾸실 수 있고, 좋게 발생한 일도 나쁘게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 나쁘게 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우리의 인생을 그분의 처분에 맡기며 살면서 우리는 오로지 한 가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찬양)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인생의 길을 걸어 왔는데 이것 때문에 주님이 나를 때리시겠다면 주님께 맞아가면서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 그 회초리를 피하며 세상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궁극적으로 선한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런 믿음까지 갖고 우리를 다 맡기면 오히려 벼랑 끝에 서게 된 우리의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사랑의 속성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불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걸어온 인생의 길을 이렇게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정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가슴에 벅차올 때 혹은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IV. 결론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예수 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 확신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때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욕해도 우리가 언제 예수 믿을 때 주님께도 사랑받고 세상에서도 사랑 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 믿었어요?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믿음의 길에 들어섰잖아요. 이제까지 걸어온 길은 우리가 취소할 수도 없고, 치워버릴 수도 없고, 빼버릴 수도 없어요. 왜냐면 그게 우리 인생이 걸어온 길입니다. 그것이 아프고, 서럽고, 실패한 그 한 토막 한 토막이 이어져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를 보면 오히려 우리가 결핍에 빠졌기 때문에 주님의 풍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위험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위로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합니다. 아파보았기 때문에 주님의 고치시는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합니다. 또 외로워 보았기 때문에 주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고 혹은 죄 때문에 고통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경험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 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이미 일어난 불행과 아픈 일들이 미래에도 계속해서 불행의 요인이 될 것이냐 아니면 미래에는 이제까지 당한 불행하고 고통스런 그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겪은 옛날 일에 달린 게 아니라 현재 여러분이 어떤 신앙을 갖고 사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신앙, 섭리를 믿는 신앙, 섭리를 굳게 믿는 것
(찬양)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이 소망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시리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굳게 믿고 꼭 인생의 벼랑 끝에서 섭리를 믿는 신앙으로 현실을 이기고 여러분의 고통이 영광이 되고 위기가 기회가 되는 변화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5.상처를 만지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눅 5:12-13).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사건 바로 뒤에, 문둥병자가 예수님께로 나와 고침을 받는 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때에 수많은 인생의 위기가 있고, 그렇게 해서 벼랑 끝에 서있을 때마다, 우리가 자신이 당한 그 시련이 가장 큰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가장 비참한 시련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거나 육신이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이 문둥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하나님께서 어떻게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시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II. 문둥병: 절망적인 질병
문둥병은 성경에서도 아주 절망적인 질병으로 묘사되고, 종종 하나님은 당신의 징계를 받아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 질병을 내리셔서 천주의 병이라고 하는 이름을 이해하게끔 만드셨습니다. 이 질병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아마 이 질병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절망적인 질병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질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지지 않도록, 다른 질병이 걸리면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으면서 고쳤는데, 이 질병이 걸리면 일단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적으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분리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문둥병 걸린 한 사람은 평범한 문둥병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증세가 절망적인 정도로 이미 중증이 되어버린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문둥병을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나라에서 돌봐주지 못하니깐, 문둥병 걸린 사람들이 꽤 돌아다녔습니다. 혀가 뒤집어지고, 온 몸이 고름이 퍼져있습니다. 이 고름에 의해서 문둥병이 전염이 됩니다. 그러니깐 그런 사람이 동네어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문을 다 걸고,. 아이들은 다 도망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쓰레기통도 뒤지고, 먹을 것을 문 앞에 두면 가져가기도하였습니다. 드물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어린 시절 기억에 또렷이 있습니다.
문둥병은 조금씩 발병을 해서 몸의 여러 부위로 계속 감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온몸에 문둥병이 퍼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깐 말하자면, 이 사람은 말기환자로서, 어디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이, 온몸이 눈꽃처럼 하얗게 전부가 고름천지가 되어서 온몸전체가 문둥병의 고름이 흐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걸어가다가 그냥 발가락이 하나 빠지고, 손가락이 하나 빠지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렇게 온몸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름 투성이가 된 사람이 어떻게 쫓겨나지 않고, 여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 사람이 이스라엘 밖으로 쫓겨났지만,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깐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있는 동리로 들어와서 무엇인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여러분과 관계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번 여러분 자신이 이런 문둥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마 지금 하고 있는 많은 고민과 근심걱정거리들은 그 상황에 여러분이 있게 된다면 모두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온몸에 고름덩어리가 흐르고, 윗눈꺼풀이 아래 눈꺼풀에 달라붙고, 코가 뭉개져서 호흡이 불편하고 입이 삐뚤어지고 짓물러 내려서 말도 잘 나오지 않고, 헛바람이 나오고 발은 이발가락 저 발가락 떨어져 나갔고. 손은 형체를 알아볼 수 도 없고, 옷을 입었지만, 속에서 나오는 문둥이 고름 때문에 옷이 그 고름에 척척 달라붙고, 옷을 벗으려고 하면 살점이 후두둑 떨어지는 그러한 중증의 문둥병상태가 되어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인생의 정말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벼랑 끝에 서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이미 벼랑에 떨어져서 계곡아래 떨어져 계곡아래 엎드려져 있는 사람과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계곡에 몸을 던져서 몸이 가루가 되도록 그 계곡사이에서 몸이 부셔졌으면 하고, 그것이 오히려 더욱 행복하고 편한 것 이라고 모릅니다.
얼마전 아침방송에 나와서 늘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며, 희망을 불어 넣어주던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700가지 통증에 시달리게 된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남편과 함께 세상을 등지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 사람은 적어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자신은 고통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거나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죠? 그러나 이 사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동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친구들과 가족들로 부터도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질병위에 인격적인 교제까지 단절된 가운데 완전히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그런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가엽고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무슨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기에 천주의 질병 이라고하는 저 문둥병에 걸려서 저렇게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얼굴이 뭉개져 형제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이고 끔찍하다.’ 상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상세히 알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III. 예수님을 찾은 사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절망의 벼랑 끝에서 온몸이 문둥이의 고름으로 진물러 썩어가는 그때에 입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온몸이 피고름의 냄새로 진동하는 그 끔찍한 상태, 틀림없이 자신의 얼굴이 너무도 끔찍해서 모자가 아니면 두건이나 혹은 천을 머리깊이 눌러쓰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어떤 경로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에게서 이 절망적인 인생의 상황이 변화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예수께서 한동리 안에 계실 때 이 사람이 엎드렸다는 것을 보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도적으로 수소문하며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항상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받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한 동리에 계실 때에 온몸이 문둥병에 걸려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던 그 사람이 예수님을 우여곡절 끝에 찾아오게 되었고 눈이 보였는지 안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주님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오늘 성경에 보니 예수님을 보고 얻드렸다 라고 하였습니다.
A. 경배로 돌아감
그가 예수님을 찾은 사람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우리 예수님 앞에 낮추며 경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거래하듯이 해결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돈으로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해주시면 절반은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돈 먼저 받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믿음의 표현이라면 나쁠 것이 없겠지요. 그러나 그보다도 예수님이 정말도 원하시는 것은 참된 경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문둥병에 걸려 온몸에 하얗게 고름 꽃이 피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비참한 몰골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자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경배로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팔자가 좋으면 저렇게 여유 있게 살까? 나도 주님이 복만 주셔봐, 그럼 내가 왜 봉사를 안 하겠으며 건강만 주셔봐 내가 왜 전도를 안 나오겠으며 돈만 주셔봐 내가 왜 물질을 주님께 드리지 않겠어.’하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최대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왜 그 많은 좋은 길을 내버려 두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됩니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나 중심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서 우리를 돌이킬 때는 바로 그것을 깨뜨리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든지 나부턴 먼저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줘봐. 그러면 내가 가만히 있겠어?’ 그래서 마치 자신이 복을 하나님께 받으면, 우리 주님께 팁을 주는 것처럼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진실한 참회를 볼수 있겠습니까? 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진실한 고백을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단 한 순간만이라도 진실해 보십시오. 단 한순간만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벼랑 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벼랑 끝에 익숙해진 사람들입니다. 벼랑 끝도 맨 처음에 섰을 때 무섭지, 계속 있어 봐요. 조금 지나면, 거기 앉자 도시락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까불지? 이런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인지 보세요. 그 수많은 아름다운 길로 주님이 이끄셨지만, 벼랑 끝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보세요. 주님이 말씀하시지만, 내 판단이 맞습니다. 주님이 뭘 그렇게 내 인생에 대하여 잘 아십니까? 내 인생은 내가 지킵니다. 그리고 선택을 하고 불순종의 불순종을 하면서 인생의 벼랑 끝에 왔습니다. 그것이 나중심의 산 것이죠? 그러면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우리 주님이 부르고 계신 거 아닌가요?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우리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찾으시는 거 아니시겠어요? 그러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와서 간절히 엎드려 제일 먼저 주님을 경배해야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떠나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는 것도 결국은 나의 인생의 중심이 주님의 자리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지키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안정된 가운데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늘 순종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전쟁에서 주는 교훈인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다.’ 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시험에 들 사람들은 이미 질문부터가 다릅니다. 은혜 가운에 계속 복을 받고 충만한 삶을 살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이 제법 잘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내가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개념 없이 사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벼랑 끝으로 더불어 가는 사람들은 항상 ‘담배피면 죄인가요? 술을 얼마큼 마셔야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나요? 성경에도 포도주는 조금씩 먹으라고 했는데, 포도주는 죄가 안 되겠죠? 하나님이 여기서 부터는 안된다하는 금을 밟기 전까지는 가보고 싶어 합니다.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금을 밟습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나며, 어디까지 가는 것이 죄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믿음생활을 주님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전 우리 교회의 은혜 받은 여성도들의 마음에 있는 깊은 소원이 풀타임 열린교회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월요일 새벽에 새벽기도하고, 화요일 여리고전도하고, 수요일에 중보기도 나오고, 목요일에 병원전도 나오고, 금요일에 구역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교도소 전도 나가고, 토요일에 나와서 교리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으면서 좀더 주님을 기쁘게 하고 내 인생의 얼마 남지 않은 나날들의 숫자를 헤아리며, 달력을 넘기듯이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구지 그렇게 죄의 금이 어디까지인지 자꾸 생각하지 않아도 죄의 금을 안 밟습니다. 공격을 하기 때문에 벼랑 끝에서 멀어져 벌판으로 나갑니다. 말씀 드렸죠? 놀러 와서 벼랑 끝에 서있으면 거긴 벼랑이 아닙니다. 거기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산천경계를 내다보고 “야호!”를 외치는 곳은 벼랑이 아닙니다. 뒤돌아서 다시 가면됩니다. 그러나 적군이 쳐들어와도, 죽어버리겠다고 공격해와도 도저히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갈수도 없는 벼랑이 그 벼랑입니다. 제일 먼저 회복해야할 것은 경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의무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아서 그만 두었던 여러분의 사명, 인생이 힘들고 어렵다고 그만두었던 기도생활, 너무 골치가 아프고 신경 쓰이는 게 많다고 하면서 던져버린 여러분에게 주신 영혼을 돌보는 사명을 비롯한 가정에서의 사명 등의 많은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기도의 놀라운 힘은 제자리에서 기도할 때 위대한 힘이 나옵니다. 딴 자리에서 기도하면 올바른 기도의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올바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자리에서 이어가는 생활입니다. 거기로 먼저 돌아가십시오. 거기서 주님 앞에서 겸손히 ‘내가 주님을 경배해야하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주님은 나의 경배를 받으셔야하는 분이시며, 내가 능력이 없고 힘이 없어서 조금밖에 못 섬길지라도 내가 나의 의무로 돌아갑니다.’ 라고 고백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방황하는 그곳에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 답이 없습니다. 본래의 의무로 되돌아 가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두 가지 마음이 생깁니다. ‘아, 내가 내 자리로 돌아왔구나’ 하는 안정감과 함께 그런데 은혜가 있을 때에도 감당할 수 없는 자리인데, 벼랑 끝에서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니깐 주님의 은혜를 더 간절히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예수를 찾은 이 사람은, 맨 처음에 주님 앞에 엎드리며 주님께 경배를 표했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벼랑 끝에서 헤어 나오기 전 먼저 주님을 경배하는 그 자리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교구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책에서 이렇게 곤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실제적인 실천방안을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가 하나님과의 잃어버리고, 영혼이 깊은 고통가운데 있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로 불순종하는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라. 첫 번째 그러면 너의 의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 너의 지성이 맑아지리라. 그래서 매우 혼탁하게 되었던 것들이 많이 있어서 머리가 아팠는데, “맞아.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야”하고 결정하고 돌아가면, 아직 기도를 많이 하지 않아서 정신이 맑아지고 가닥이 잡혀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내가 실험해봤는데, 정말 맞습니다. 배양하던 길에서 돌이켜 서서, 의지로 순종을 향해 돌이키라 그러면 두 번째는 너의 정신이 지성이 맑아지리라. 세 번째는 네 마음에 사랑이 쏟아나리라.’입니다. 차례대로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이만큼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어떤 사람은 기도해서 응답되면 돌아간다는데, 이미 벼랑 끝에 서있는데 기도가 잘되겠습니까? 그러니깐,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따라서 제일먼저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거기서 비로소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얻고 이렇게 인생의 벼랑 끝까지 오도록 몸부림치는 동안에 여러분이 내팽겨친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빕니다.
B. 믿음으로 간구함
두 번째로는 이 사람이 그렇게 주님께 엎드린 다음에, 주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믿음의 간구였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문둥병과 함께 그는 자신의 육체를 지탱할 수 있는 건강도 잃어버렸고, 자신의 동포와 이웃을, 가족들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결혼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아내도 잃어버려 완전히 홀로 고독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더 갈 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 모든 사람들이 저주하여 고개를 외면하는 눈꽃이 하얗게 핀 온몸에 문둥병 걸린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절망스러운 질병을 통해서 찾은 것이 오직 하나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그는 하나님 앞에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 주님께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우리를 향해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벼랑 끝에 오게 했던 우리 안에 있는 그 악한 것들이 우리의 눈물의 기도 속에서 빠져나올 때 까지 하나님은 어떻게 그 절망적인 벼랑 끝에서 이끌어 내실지 우리에게 미리 힌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길을 돌아보면, 정말 인생에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이었는데, 사실은 그 벼랑 끝이 이제것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건져주시고 절망의 계곡을 날아오르도록 나를 독수리의 날개로 업어 나르시는 하나님의 기적인 구원을 경험하는 기회로 삼아주신 적이 너무나 너무나 많았습니다.
1. 주권을 믿음
그렇다면 이 문둥병자가 무엇을 그렇게 절실하게 믿은 것일까요? 그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제일 첫 번째 그가 믿은 것은 우리 예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 그분께 간절히 간구해서 내가 낫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분이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분에게는 질병과 모든 악한 것들을 굴복시키실 수 있고, 원하신다면 모두 행하실수 있는, 주권이 있다고 굳게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대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고 주님의 시각으로 오히려 우리를 판단해서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드리고 믿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주권사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자신을 주인삼은 삶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힘든 사상입니다. 그러니깐 작은 일에 있어서도 하나남의 주권을 인정하다는 것은 자신이 이 본성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받는 자기 깨뜨려짐이 있어서 가끔은 나도 나를 인생의 주인 삼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고, 궁극적으로 자신 속에 우리 주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신분이며, 그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확고한 중심이 서있을 때, 그때에 삶에서 언뜻언뜻 그 신앙고백이, 주권이 흘러나옵니다. 그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는 진실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주권하면 반드시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야간신학대를 다닐 때입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깐 정말 지지리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교회에서 사택을 주어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내와 함께 들어갔습니다. 콩팥이 안 좋은지 늘 밤중에 조갈이 났습니다. 그래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두 컵 정도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어느 추운겨울밤에 머리맡에 주전자를 두고 바닥에 잤는데, 새벽이 되어 조갈이 나서 눈을 감을 채 머리맡에 물 사발을 들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이 돌덩이처럼 굳어있었습니다. 옆에서 집사람이 자는데 입김이 하얗게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사례비를 7만원을 주는데, 학교 등록금이 6개월에 45만원이었습니다. 계산해보면 한 푼도 쓰지 않고 먹지도 않고 그것을 모아서 3만원을 보태야지 등록금이 됩니다. 그래서 죽자사자 장학금을 받기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보는데 잘 봤는데, 한 과목을 잘 못 본 것 같았어요. 지금은 할머니가 되셨을 텐데,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교무과에 어느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성적이 다음 주에 나갑니다.” “그런데요?” “아니 전도사님, 공부를 그렇게 잘하시더니 한과목이 79점이 나왔어요. 거의 모든 과목을A+를 받았으니깐, 교수님을 찾아가서 1점만 올려달라고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셔서 “아. 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라고 돌아갔습니다. 80점 이하의 점수가 하나라도 있으면 장학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예배당에 앉아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내 마음 속에 주님이 꼭 “예야. 니가 오늘 성적 정정서를 들고 그 교수님를 찾아가서 오늘 1점을 고치려고 하느냐? 니가 그렇게 가서 1점 올려주세요 하고 장학금을 받으면 내 주권은 어디 있느냐? 공중에 나는 새도 내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데” 그날 새벽에 그렇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깨달음이 놀라 와서도 울었지만,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으라고? 하는 생각에 매우 펑펑 울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그날 새벽에 울었는지 눈이 정말 퉁퉁 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거짓과 가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입학금 빼고서는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해 등록금이 제가 대학 4년 동안 다니면서 내 돈으로 등록금을 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정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겠죠? 그러나 그 경제적 고통보다 더 큰 그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다음부터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주권을 생각합니다. 나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주장할 권리가 없지만, 주님은 내 인생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권리가 있다. 나의 가장 큰 힘은 내가 우리 주님 편에 서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새벽부터 아침까지 펑펑 울고, 제 마음속에 작으나마 하나님 주권사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주권을 믿는 믿음이 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믿음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벼랑에 있을 때, 몸부림치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애들 썼겠습니까? 그러나 그 벼랑에서 벗어났다면 거기가 벼랑이었을 리 없습니다. 내려오는 계단이 있다면 벼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나 주님은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는 어려운 일도 쉬운 일이고 쉬운 일도 쉬운 일입니다. 초등학교 아이에게 10kg을 들으라면 어렵지만, 건장한 어른에게는 1kg을 들으라고 하나 10kg이나 그리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무한한 주권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이 문둥병환자에게는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믿음이 그렇게 간단한 믿음이겠습니까? 아까 말씀 드렸죠? 온 몸에 코와 눈이 달라붙고, 입이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살점이 흘러내려서 그 하얀 고름이 눈처럼 하얗게 핍니다. 옷을 입으면 그 위에 옷이 붙고, 저넉에 옷을 벗으면 살점이 후둑둑 떨어집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이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어려운 믿음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주님의 마음을 돌리시기만 하면, 주님이 당신의 시선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이 저주받은 질병 때문에 사랑하는 친구도, 이웃도 모두 잃어버리고 가족들과도 생이별을 하고 이렇게 혼자 이 저주받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할지라도, 내 인생이 벼랑 끝에 와서 주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권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주님의 수중 안에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한마리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주권을 굳게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능력을 믿음
두 번째는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내가 이사람이라면, 이 상태에서 질병이 퍼지지 않는 정도를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몸은 이렇게 되었더라도 죽지만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죽는 그날이 이 지긋지긋한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너무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아침에 눈뜨지 않기를 바라는 때가 있는데, 이 절망적인 문둥병환자는 얼마나 아침마다 눈을 뜨며 새롭게 맞이하는 자신의 저주받은 상태가 무섭고 지긋지긋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의 의미는 얼굴과 모든 것의 모양이 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벤허에서 나왔던 것처럼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굳게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랍비라고 부르고 선생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라고 경멸하며 불렀지만, 이사람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그렇게 고쳐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분으로 굳게 믿어 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굳게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 별 큰 권세 있는 자처럼 보이지 않는 가난하신 그 분, 특히 예수님 사역의 말기나 중기가 아닌 초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유명해지지도 않으신 그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저분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나를 고치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살다 왜 잔재주를 부립니까? 주님의 능력을 못 믿는 것에서 잔재주가 나오는 것이고, 요령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능력만 믿겠습니다.’하고 살아야합니다.
제가 대학원에 있을 때, 유아교육과 학생이 하나있었습니다. 얼굴은 그렇게 이쁘지 않지만, 신앙이 참 밝고 귀여웠습니다. 유아교육과는 취업은 다됩니다. 직장의 질이 문제가 되죠. 후진데 가면 밥까지 해야 합니다. 정식으로 된 유치원에 대접도 받습니다. 강남이나 이런데 가면 생기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취업을 위해 40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30일쯤 기도했는데, 아주 좋은 유치원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기도응답이라고 생각하며 ‘할렐루야! 아멘’하고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직장은 40명 졸업해도 서너 명 갈까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퇴자를 놨습니다. 친구들이 이 기가 막힌 기회를 버리냐고 난리였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40일을 기도하겠다고 약속했지, 30일기도 한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갑니다.”하고 열흘을 더 기도했는데, 더 좋은 곳으로 갔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신뢰하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더 큰 기적을 보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 있고, 쉬운 일이 있지만, 주님에게는 그런 구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벼랑 끝에 나아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서 주님이 나의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나는 모르지만 주님이 내 인생에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늘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나를 거기에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의심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의무로 돌아가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해도 여러분은 결코 인생의 벼랑 끝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님의 그 능력을 굳게 믿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자비를 믿음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의 자비를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자비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 안에 있는 속성입니다. 특별히 이 자비는 사랑 중에서도, 물론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는 불쌍한 존재이고, 하나님을 의존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사랑은 자비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자비는 하나님이 정말 상태가 비참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그 측면을 자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온몸에 고름이 짓이겨지고 사지백체가 계속해서 떨어져 나가서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고, 가족들에게 조차 돌아갈 수 없는 이 비참한 문둥병자 이 사람은, 다른 문둥병자들은 몰려다니기라도 했는데, 이 사람은 홀로 예수께로 나온 것으로 보아서 의지할 수 있는 동료 문둥병자도 없었던 외톨박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 앞에 나올 때,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정말 어쩌면 그 사람의 질병은 조상의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질병이었을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받은 징벌로 말미암아 생겨난 문둥병일 가능성이 없다고 우리는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도 또한 없습니다. 어쨌든 그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다 밝혀주고 있지는 않지만, 일평생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온 그런 종류의 사람인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막연히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 소문을 다 들으면서, 그는 우리 예수님 그분의 이름을 듣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운데서 그분의 성품에 대한 계시를 받았을 그때에 틀림없이 이 사람은 예수님이 인정 넘치는 사역을 통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아파하는 자를 치료하신다는 그 모든 소식들을 들었을 때, 이 사람 마음속에 믿음이 있었기에, 자기의 개인적인 상황과 연결을 시킬 수 있는 놀라운 해석적 적응력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만나기를 사모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벼랑 끝에서 벗어난 일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믿음이 있을 때는 그렇게 위기와 벼랑 끝에서 벗어난 그 소식을 들을 때 자신의 인생도 고쳐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게 됩니다.
IV. 만져주신 예수님
그분이 원래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부터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고,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림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는 자기를 옳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문둥병자의 마음에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주님 자신의 자비로운 성품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싫어 버림받은 온몸에 눈꽃처럼 고름 꽃이 핀 자기같이 더러운 죄인을 주님께서는 별시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둥병자는 우리 주님께 나가서 간절히 매달릴 때, 주님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셨습니다.
그냥 멀찌감치 떨어 지셔서 “네가 그렇게 더러운 질병에 걸렸느냐? 나을지라”하고 명령만 해도 감지덕였는데, 주님이 꼭 손을 대셔야지만 질병이 나았겠습니까?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실 때도, 주님이 꾸짖어서 야단을 치시니 귀신이 나갔잖아요. 문둥병이 아니라 문둥병 할아버지도 ‘나아라!’ 하면 낫는 것이지, 예수님이 찾아가서 주사를 놓듯이 환자를 만져야지 낫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이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온몸에 고름 꽃이 하얗게 핀 사람, 모든 사람들이 물러가 피하는 그 사람에게 다가오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어디였는지 모르지만 저에게 몸에 대셨습니다. 그의 몸, 온몸에 문둥병이 창일하였다고 했으니, 예수님이 손대신 그 어느 부분도 분명히 그 뭉둥병에 오염된 부분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손대신 예수님의 손에는 그 문둥병자의 허연 고름이 묻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다가 오셔서, 당신의 피붙이처럼 여기시면서 그의 고름으로 가득 찬 그 몸에 손을 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권을 믿는 이 사람의 믿음대로 “나는 네가 병낫기를 원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믿은 대로 능력으로 역사하며서 “나을지어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믿었던 대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능력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V. 결론
그래서 예수님이 그 환자를 어루만지시며 진실하게 고쳐주셨습니다.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까지도 받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거꾸로 뒤집어 보십시오. 이 사람이 이런 끔찍한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주님의 손길을 자신의 몸에 느낄 수 있었겠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 우리 예수님 안에 있는 주권, 그리고 눈꽃처럼 하얗게 고름 꽃이 핀 죄인들도 용납하시는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자비하신 사랑까지 경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찬양) 주만 바라 볼지라
여러분도 주님이 이렇게 만져주셔서, 절망의 벼랑 끝에서 오히려 주님의 주권을, 주님의 영광을, 주님의 자비를 맛보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