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2011년 설교모음)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1 (2011.6.26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1년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2 (2011.7.3 주일오전설교)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3 (2011.7.10 주일오전설교)
목 차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4 (2011.7.17 주일오전설교)
1. 목마른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사48:21) 2011.6.26 주일오전 1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5 (2011.7.24 주일오전설교)
2. 영혼이 피곤할 때(욘2:7) 2011.7.3 주일오전 9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6 (2011.7.31 주일오전설교)
3. 깊음에서 내리는 결단(욘2:8-9) 2011.7.10 주일오전 16
4. 지친 영혼을 다시 세우심(시119:28) 2011.7.17 주일오전 25
5. 부르짖게 하시는 하나님(시107:17-19) 2011.7.24 주일오전 33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7 (2011.8.7 주일오전설교)
6.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시107:20) 2011.7.31 주일오전 40
7. 강할 때와 약할 때(삿15:14-19) 2011.8.7 주일오전 47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8 (2011.8.14 주일오전설교)
8. 내 얼굴을 찾으라(시27:8-9) 2011.8.14 주일오전 55
9. 생명과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사44:1-4) 2011.8.21 주일오전 63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5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1 (2011.6.26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2 (2011.7.3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3 (2011.7.10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4 (2011.7.17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5 (2011.7.24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6 (2011.7.31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7 (2011.8.7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8 (2011.8.14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9 (2011.8.21 주일오전설교)
1.목마른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사 48:21)
I. 본문해설
II. 목마름으로 시험에 듦
A. 사막을 통과할 때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1)
B.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시험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출17:7)
C. 오래 기억된 하나님의 격노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 하지 말고”(신6:16, 9:22, 신33:8)
III. 반석에서 물을 내심
A. 반석 위에 서신 하나님
B. 고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
IV. 십자가, 마르지 않는 은혜의 샘에서
V. 결론
2.영혼이 피곤할 때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요나 2:7)
I. 본문의 배경
II. 영혼이 피곤할 때
A.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남
B. 깊음에 에워싸임
1. 환경의 깊음
2. 영혼의 깊음
III. 여호와를 생각할 때
A. 피곤한 영혼을 버려두심
B.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IV. 결론
3.깊음에서 내리는 결단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요나 2:8-9)
I. 본문해설
II. 선지자의 자기반성
A. 소명을 외면한 삶
B. 은혜에 대한 배신
III. 깊음에서 내리는 결단
A. 감사를 결심함
B. 헌신을 결심함
C. 서원으로 돌아감
IV. 결론: 구원을 믿으라
4.지친 영혼을 다시 세우심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편 119:28)
I. 본문해설
II. 영혼의 힘이 모자랄 때
A. 영혼의 지침
- 영혼의 힘
- 영혼의 아름다움
- 마음, 감각, 지성, 의지
B. 지친 영혼의 슬픔
III.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
A. 살아야할 이유가 있기에
B.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
IV. 결론
5.부르짖게 하시는 하나님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시편 107:17-19)
I. 본문해설
II. 곤고함의 원인: 미련함
A. 곤고한자의 고통
B. 범죄와 죄악의 결과
C. 지혜없음
III. 부르짖게 하시는 하나님
IV. 결론
6.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20)
I. 본문해설
II.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A. 곤고한자를 자녀로 여기심
B. 말씀으로 고치심
- 문제의 근원: 영혼과 마음
- 문제의 결과: 곤고와 위기
C. 돌아오게 하시는 방법
- 추론과 도덕적 설복으로
- 말씀의 빛으로 깨우치심
III. 언제나 부르시는 하나님
IV. 결론
7.강할 때와 약할 때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더미, 두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 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 15:14-19)
I. 본문해설
II. 삼손의 강함
A. 하나님의 권능
B. 위기의 순간
III. 기도와 영적소생
A. 탈진과 목마름
B. 엔학고레의 샘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
-샘을 터치심: 은혜의 주권
C. 소생하게 하시는 하나님
IV. 결론
8.내 얼굴을 찾으라
“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시 27:8-9)
I.본문해설
II.특별히 부르시는 때
A. 언제나 있는 말씀
B. 말씀으로 부르실 때
-나를 찾으라
-마음으로 응답함
III.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도
A.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함
B. 용서와 자비를 구함
C.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봄
IV. 결 론
9.생명과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다” (이사야 44:1-4)
I. 본문해설
II. 선택에 기초한 사랑
- 창조하심
- 선택하심
- 사랑하심
III. 하나님의 도우심
A.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심
B.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름
C.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심
IV. 생명과 번영을 주심
V. 결 론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5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1 (2011.6.26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2 (2011.7.3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3 (2011.7.10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4 (2011.7.17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5 (2011.7.24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6 (2011.7.31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7 (2011.8.7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8 (2011.8.14 주일오전설교)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9 (2011.8.21 주일오전설교)
1.목마른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21.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사 48: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변증하는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실하고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셨으나 이스라엘은 수시로 우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반역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때리셔서 그들을 돌이키시고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그들을 정결하게 하셔서 자기의 백성 삼으신 것을 끝까지 성취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하게 자비롭게 인도하셨는지를 변호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중요한 한 사건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II. 목마름으로 시험에 듦
A. 사막을 통과할 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마름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들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막을 통과할 때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해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이르렀고 신 광야라는 곳을 출발하여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물이 없어 목마르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목마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모세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를 향하여 악한 감정으로 대들면서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습니까? 모세도 처음에는 젊은 시절에는 그 일을 해보려고 했지만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짐승이나 치면서 살면서 그 꿈을 모두 접었고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불러주셨을 때 그는 완강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큰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 탈출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직접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고, 지도자 모세를 향한 원망 속에는 이런 환경 속에 자기를 두신 하나님께 대한 미움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B.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시험
그들은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어떻게 시험했을까요? 출애굽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출 17:7)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말랐을 때에 모세보고 원망을 하며 모세를 돌로 칠 듯이 위협하였지만 200만이 넘어 300만 명 가까이 되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갈할 수 있는 그 물을 모세가 어디에서 금방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모세를 족쳐서 하나님께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주님께서 결국은 물을 내셨습니다 만은 오늘 이 사건을 가리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한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C. 오래 기억된 하나님의 격노
자,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모세를 족쳤지만 물은 모세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라고 믿었겠죠. 그러면 인간의 상식으로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로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까? 아니면 믿는 겁니까? 사람의 상식으로 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 기대를 거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히려 믿음의 장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참 신앙은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이들이 여호와를 시험했다고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 것 때문에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니 계신가’ 다시 말해서 물을 내어 주시면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물을 안 내어 주시면 못하시니까 안 계신 것이고,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 물 한 번 내봐. 물 내보면 용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음이 아닌 시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래서 결핍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실 수 있다고 신뢰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데 이들은 하나님이 하시나 못하시나 한 번 보자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불신앙의 태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오래도록 기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6장, 9장, 33장 세 군데에서나 똑같이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아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채찍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여러분은 모두 평안하게 사는 것 같지만 성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아무도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만 이 많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은 이렇게 예배당에 나오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겠지, 이렇게 이렇게 해주셨으면 참 좋을 텐데’ 등등의 생각을 가지고 또 어떤 때는 기대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이 모든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은 이런 난관을 만났을 때 전심으로 자기의 무능함,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그 일들을 친히 이루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굳센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열렬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자 한번 상황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신 광야를 지났습니다. 아주 목이 천천히 목이 말라 오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기가 어려운 때가 되었는데 르비딤에 데리고 갔더니 르비딤에 놀랍게 맑은 시냇물이 끝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짐승들과 함께 그 물을 먹고 시원하게 목욕까지 했습니다. 그때에도 모세를 죽이겠다고 덤벼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커다란 난관도 기적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죠. 근데 왜 하필이면 이 지점에서는 목말라 죽겠다고 목을 손으로 쥐어뜯고 심지어는 모세를 돌로 칠 정도까지 강퍅해지도록 하나님이 물을 안 주셨을까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형통해서는 결코 직시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면의 어떠함을 결핍 속에서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제때에 물을 만나게 하셨더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이 이렇게 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제나 은혜를 주시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이 모든 성화의 신앙생활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참여하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시는 것도 필요하고, 종종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지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신앙 생활해야 될지를 결단도 하게 되고, 또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의지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중대한 결단을 하고 나는 이제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중대하게 결심했을 때에는 항상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아, 난 몰랐는데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었구나. 아, 이젠 나는 나를 믿으면 안 되겠구나’ 혹은 ‘야, 나는 그래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제 와 보니까 이런 유혹 속에서 내가 도저히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아주 부패한 존재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더 경건에 힘써야겠구나’ 이러한 자기 자신을 보는 자각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결국은 아무것도 없고 물 한번 못 먹었다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건져내신 것도 무효로 치고 우리가 따라온 건 저 모세라는 능력 없는 인간이고, 그래서 저 자식은 죽여 버려야 된다 라고 맘을 먹을 정도로 위협을 했기 때문에 모세가 ‘조금만 있으면 저 사람들이 나에게 돌질을 하겠습니다’ 그러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속에서 호소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묻고 싶은 것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나 이렇게 바닥으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 물이 갈라진 홍해를 마른 땅을 밟으며 건넜고, 뒤늦게 후회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기 위해서 600승의 병거를 보내어 군인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게끔 파견했습니다. 그들이 홍해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물을 건너기 위해 마른 땅을 밟았을 때 중간에 오자 하나님께서는 그 물을 합쳐 그들을 모두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2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되는 지상 최대의 성가대가 ‘주와 같은 힘이 어디 있으리요’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이 애굽의 병사들이 수장되고 있는 홍해 바다 위에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사에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을 때에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하던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깨닫게 되는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원래의 좋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존재들입니다.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 속에 가득 있었을 때에는 이러한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굳게 붙드는 신앙심이 불붙어져서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나니까 목마름, 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하나님도 없고, 모세도 막보는 그런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실수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의 현상과 본질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의 문제를 현상으로 자꾸 해결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보고 묻습니다. “왜 그렇게 곤고하게 삽니까?” “목사님도 5년 동안 취업을 한번 못해보십시오. 제가 지금 잘 나가는 직장에 말끔하게 양복입고 출근하고 있다면 전 정말 신앙생활도 잘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곤고합니까?” “회심하지 않은 내 남편이 하도 괴롭혀서 제가 마음을 하나님께 모을 수가 없군요.” “목사님 개념 없는 아내하고 살아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되는 건강의 상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해 나가게 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아무 염려 없이 신앙에만 전심전력할 환경이 언제쯤 주어지나요. 예전에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기쁨조가 되어 본 적이 있습니까?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안 그렇고, 죽을 때까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돈 없으면 고달파요. 은혜 많이 받아도 회심하지 못한 남편, 개념 없는 아내하고 사는 것은 힘들습니다. 은혜를 아무리 많이 받아도 육신의 질병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냐하면 은혜가 없이 이런 시련을 겪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렇게 포악해지고 표독해지고 막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은혜가 있으면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교회에 대한 제 기억의 끝자락은 한 두 세 살 때입니다. 한 세살 때 정도 될 때 이렇게 희미한 필름처럼 끊어졌지만 뒤뚱뒤뚱하던 때의 기억이 스틸 사진처럼 몇 장 생각이 나요. 좀 더 또렷한 기억은 유치원 다닐 고 나이쯤, 그리고 초등학교 때까지 와서는 아주 선명합니다. 그때 어린 아이의 눈에 비쳤던 그때 교회의 모습은 두 가지였습니다. 무지무지하게 가난하다는 것,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래서 예배당이 이런 예배당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고 무슨 그 은박지 그런 거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그 가마니, 가마니도 없잖아요, 요새는. 이렇게 짚으로 짠 가마니. 그런 가마니를 쭉 찢어서 그래서 쭉 붙여 놓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을 좀 뿌려요. 그러면 먼지도 안 나고 차분하게 가라앉아요. 그래서 예배 시간이 되면 꾸득뚜득 마르잖아요. 거기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 무릎 꿇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있었냐 하면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게 제 기억에는 1970년대 말까지입니다. 80년대 오면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한, 어느 교회에 가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간절한 부르짖음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은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닥칠 때, 시련이 올 때에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더라면 안 그랬을 텐데 모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꽉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 고난 속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한 결핍과 고생, 인내, 시련을 견디는 사랑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돈 때문이다, 술술 풀리지 않는 비비꼬인 내 인생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신앙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고민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면 그때서야 그가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예수 위해 사는 사람이 될까요? 아닙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살아 있는 아버지 앞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서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을 때에 도대체 무슨 괴로움이 있었습니까? 어떤 일들이 아버지의 집에 살 때에 그를 심히 괴롭게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괴로움이 많아서 타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마음껏 향락할 수 없기 때문에 타국으로 간 겁니다. 그러면 신앙 없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해 주실 때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타락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 혼나는 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혼내는 사람, 그게 징계입니다. 징계. 사생자에게는 징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친 자식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그거 물 한 몇 백 드럼 주실 능력이 없겠어요? 원하시면 즉석에서도 만드실 수 있었을 것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안 주실 것처럼 목이 마르다고 소리소리 질러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이 문제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III. 반석에서 물을 내심
A. 반석 위에 서신 하나님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이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기적을 행하던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 반석 위에 서거라. 나도 그 위에 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대면하여 마주 서리라. 그러면 너는 바위를 쳐서 물을 내거라’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물을 얻으려면 계곡으로 내려가서 축축한 땅을 삽으로 파야지 흙탕물이라도 한 모금 마실 수 있지 올라와서 반석 위로 올라가라고 하는데 그 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반석으로 안 올라가고 돈 나올만한 곳으로 곡괭이 들고 내려가요. 세상에서 발생된 모든 문제들을 반석위에 올라가는 신앙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결될 것 같은 세속적인 방법을 찾아서 내려가는 동안에 신앙도 잊어버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잘 되던 사업을 위기를 만나게 만드셔서 파산할 것이냐, 말 것이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벼랑 끝에 세우실까요? 왜 남들에게는 모두 형통하게 이루어진 일들이 나에게는 자꾸 막히고, 그래서 그것이 고난위에 시련이 되어서 겹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이 잘못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가 나서 복수하신다고 생각하면 그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목말라 시험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신 것처럼 여러분을 건지신 것입니다. 그 반석위에.
B. 고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
그럼 왜? 계곡으로 내려가는 대신 반석 위로 올라가라고 그러셨을까? 도대체 이 반석은 무얼까? 생뚱맞은 이야기 같지만 이 반석이 예수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세상에 그런 신기한 번역이 어디 있을까?’ 그러죠. 그런데 이거는 우리가 아무렇게나 생각해서 기분대로 풀어서 이게 예수님이라고 치자라고 한 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이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고린도 전서에서 그는 ‘우리 조상들이 모두 한 바위에서 나온 샘물을 마셨는데 이 반석이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마른 이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러한 목마름을 반석을 터뜨려 샘물을 나게 하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미래의 영적인 기갈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는 인간들이 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물을 얻을 수 없고, 물이 나올 것처럼 계곡 아래 내려가서 축축한 땅을 뒤지지만 거기 어디서에도 자신의 갈한 영혼을 해갈 시킬 물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이 생명의 샘물을 마시게 될 것을 예표 적으로 우리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한없는 인간관계의 단절을 느끼면서 인간들은 온갖 우울증과 신경쇠약, 그리고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려요. 요즘은 모임에 나가도 재미가 없습니다. 음식 시켜놓고 모두 상 밑에서 아이폰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을 만나도 그래요. 무슨 아이폰이 무슨 그게 그렇게 좋은 거라고 ‘아이폰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거 왜 그렇게 살아? 그게 전부다 노예 되는 삶입니다. 편리한 것 같은데 자기가 아이폰을 조정하는 것 같지만 아이폰이 자기를 조정합니다. 내가 언젠가 아이폰 시리즈로 내가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티브잡스가 무슨 자기의 구세주나 되는 것처럼 말이지 입에 마르도록,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인생을 그렇게 주께 맡겨 봐요. 주께 맡겨봐. “주님을 그렇게 찬양해봐. 핸드폰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한번 만지작 거려봐.” 그렇게 얘기했더니 “말씀도 이 속에 다 들어 있는데요.” “말씀도 들었는데 왜 그런 야한 동영상도 그렇게 들어있어? 그래. 그건 신약이야, 구약이야 아니면 중약이야.”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신이 다 찢어져서 그래서 신앙생활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그런 기계에 집착하면서 신령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내가 거의 못 봤어. 다 피상적이야. 깊이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런 거에만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최대한 꼭 필요한 부분만 쓰고 그 다음에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신앙 서적 이러면서 아이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야 합니다. 아이폰 가지고 늘 만지작거리고 사는 사람들 1년에 책 한 권 페이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읽는 사람 없습니다. 조사해 보세요. 수없이 많이 아는데 전부다 거기 떠 있는 그 인터넷을 툭 치고 들어가면 다 나오면 그런 이야기들을, 남의들 이야기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도 절제해야 해요, 절제. 제발 그러지 말고 그 마음으로 어떻게 기도를 하겠습니다. 나는 안 될 거 같애. 조금 전까지 비비비비빅 거리고 게임하다가 어떻게 기도가 나오겠습니다. 기도하는 중에도 막 뭐 찾고 싶어서 이 속에서 막 움직일 거 아닙니다. 정신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위에 서거라. 모든 이 목마른 인간의 필요는 그리스도께서 채우실 것이다.’ 그 의미입니다. ‘해결의 열쇠는 그리스도께 있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돌아보면 지금 이런 저런 어려운 일 때문에 기도도 잘 못하고 신앙생활에 마음을 못 쏟는다고 그러는데 우리가 이것보다 훨씬 어려운 때에도 신앙생활 잘하던 때 있었거든요. 제가 말씀드리지만 너무너무 이 세상에서 사는 게 행복한데도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혼자서 못 살거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만약에 계곡 사이에 그 계곡이 흠도 티도 없는 유리관으로 되어 있다면 아무리 물이 흘러도 적막하겠죠. 돌멩이들이 있고 계곡이 커브가 있으니까 물이 막 부딪치면서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속에서는 막 생명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높은 데서 뚝 떨어지면 물도 멍이 드는지 거기에는 시퍼런 물이 고이잖아요. 웃지도 않네. 그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정말 많지만 문제에 대한 해결도 그렇게 많은 게 아니라 한분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환경이 변하는 것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더니 집에 가 보니까 갑자기 돈 다발이 문 앞에 하나 놓여 있다든지 절대 회심 안하고 박해하던 남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든지 개념 없었던 아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현숙한 아내가 됐다든지 회심 안했던 아들, 딸들이 눈물을 흘리며 ‘엄마, 아빠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뜻대로 살게요’ 반성문 쓰고 기다린다던지 그런 일은 안 일어나요. 일어날 수도 있지만 거의 안 일어나더라고요. 오늘 은혜 받고 가도 집에 가면 가난했던 사람은 오늘 저녁에도 가난해, 남편이 회심 안한 사람은 오늘 저녁도 남편이 갈궈. 그런데 예수님 사랑으로 그 십자가 그 반석에서 깨뜨려진 바위 사이로 솟구치는 물처럼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으신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생명수를 마신 사람들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IV. 십자가, 마르지 않는 은혜의 샘에서
하면서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받으셨던 박해와 시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때에는 멀리 보이던 하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정말 지금 내 곁에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반석을 깨뜨려 샘물을 솟아나게 하신 것은 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의 옥체를 산산이 깨뜨리심으로 거기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의 담을 허물고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의 심령 속에 깊이 쏟아 부어주실 그 무한하신 은혜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곡에서 물을 찾은 것이 아니라 반석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수의 강물을 마시며 해갈하였던 것처럼 돈 없는 사람들도 예수님 만나서, 상처가 많은 사람도 십자가 사랑 때문에, 인생길에서 핍박과 고난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삶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해결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의 자원하고 다릅니다. 이 세상의 자원은 하나밖에 해결을 못합니다. 돈을 손에 쥐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얻으면 병만 해결할 수 있어. 명예를 얻으면 비참한 것만 극복할 수 있어.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의 자원은 우리의 삶 속에 모두 흘러들어서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하늘 은혜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인간을 향한 원망,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태도밖에 없었을 텐데 주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는 주님이 멀리 계셨는데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이 내 안에,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경험하고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고난에 함께 계시며 동행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마르지 않는 은혜의 샘입니다. 우리의 모든 반역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우리의 갈한 영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고, 저장할 수 없는 웅덩이를 파고 거기에 물을 저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생명 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메마른 영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 가득차서 그래서 주님의 은혜의 말씀, 하나님의 생명의 샘물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흘러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쫓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V. 결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시련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인생의 위기를 만나고 결핍 속에서 고통해 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안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네가 누구인지를 알라’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너의 영혼이 얼마나 메말랐는지 혹은 너의 영혼이 얼마나 나의 은혜로 가득차 있는지 너희는 한 번 너희 자신을 대면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리고 목말라 죽을 것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팍’ 하고 반석이 쪼개지며 생수가 솟구쳐 시내처럼 흘렀을 때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세상에 있는 것들은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썩은 미소를 짓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회함 없이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진실한 기쁨, 맑은 행복, 그리고 천진한 희열을 가져다주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처음 신앙으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다고 믿을 때 그리고 그 막다른 골목에서 울고 있을 때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이 음성을 듣고 감격하며 주님 한 분께 우리의 인생 모두를 의탁하고 주님의 손 붙들고 걸어갔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 붙들고 고난의 때를 이기며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영혼이 피곤할 때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라는 음성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그 후에 당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큰 나라 앗수르의 수도였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가서 요나 선지자가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외쳐 그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선지자는 물고기 속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함으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풍랑이 누구를 인함인지 제비를 뽑았을 때 배 밑창에 잠들어 있던 요나가 당하였고 그는 사람들에 의해 떠매여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켰고, 그는 물고기 속에서 삼일삼야를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물고기가 어떻게 사람을 삼켜 뱃속에 둘 수 있을까 라고 말하지만 학자들은 물고기 뱃속이 아니라 후두부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역사의 기록들을 보면 상어과에 속하는 몸집이 매우 큰 물고기에게 물렸다가 그 물고기가 포격을 받고 사람을 토해낸 예도 있고 또 큰 물고기를 잡아서 배를 갈라보니 몇 백 kg 되는 그 큰 고기가 뱃속에서 발견된 예도 있습니다. 어쨌든 학자들에 의하면 후두부 속에 이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이 요나 선지자가 삼일삼야를 공기와 물을 동시에 마시면서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II. 영혼이 피곤할 때
어쨌든 이 요나는 선지자들 중에서도 매우 영적인 수준이 낮은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삼야 죽는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고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물고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고난의 그 긴 기도의 기록을 오늘 성경이 담고 있습니다. 이때 이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음이라” 라고 말입니다. 피곤하다 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이죠? 피곤하다고 하는 것은 평소에 피곤하지 않았으면 기력을 발휘해서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이 활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어떤 힘없음이 그리고 어떤 기력이 쇠한 것들이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몸이 피곤하면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은데 몸이 잘 움직이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열의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피곤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육신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병들거나 음식을 제때 공급해주지 않아서 기력이 쇠하게 되면 피로감이 몰려오고 마음은 있어도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질 않습니다. 몸은 육신의 생명으로 움직이고 영혼은 영적 생명으로 움직이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때 영혼은 피곤함을 딛고 이기고 영혼의 올바른 기능과 작용들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올바른 기능과 작용이라는 것이 무얼까요? 영혼에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영혼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기능이 활발하게 움직여요. 그 영혼의 기능이 제일 먼저는 우리의 시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여러분이 초롱초롱하게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깨닫기 위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지성이 활발히 활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잘 따져서 자기 욕망대로 살지 않고 욕망이 몰고 올 결과들을 미리 생각하면서 이치적으로 살 마음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영혼의 생명이 있을 때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혼의 생명이 넘치게 되면 우리의 의지가 새로워져요.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고, 더 좋은 신자가 되고 싶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면서 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이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영적인 힘, 이러한 신령한 은혜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면 영혼이 매우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사가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기력이 없기 때문에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밭일 하는 것보다 공부할 때에 에너지가 더 많이 소모가 됩니다. 그래서 밥 먹고 책상에 생각없이 앉아있으면 자꾸 소화가 안 된다고 그러지만 열심히 공부하잖아요? 한 4시간만 하고 나면 허기가 확 밀려와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이 안에서 정신이 작용을 태우는 것입니다. 허기가 확 밀려와요. 어제도 너무 바빠서 저녁을 못 먹고 10시 반까지 논문을 쓰는데 끝나고 났는데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아무거나 막 주워 먹었습니다. 살로 갔겠지. 그렇게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런 에너지가 없게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집중력도 안 생기고, 기도 제목이 산처럼 쌓여도 마치 일하기 싫은 사람 밭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 밭 매러 안 나가는 것처럼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속에서 죄가 계속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피곤함이 밀려오면 절대로 기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할 힘이 없습니다. 또 안 하니까 기도할 힘이 더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혼의 피곤함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오늘 예배드리면서 영혼의 피곤함이 몰려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 얼른 끝나고 파자마 바람으로 집에 가서 벌렁 누워서 텔레비전 리모콘이나 움직였으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모두 영혼의 피곤함입니다.
A.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남
그런 영혼의 피곤함을 이 선지자 요나도 깊이 느꼈던 것입니다. 언제 그런 영혼의 피곤함이 밀려왔냐하면 성경 3절은 말합니다. 4절은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난 것이 영혼의 피곤을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대면하여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엊그제도 어느 집 심방 가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 사랑하시면 이 세상에 형통함을 주시지만 더 많이 사랑하시면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대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아주 기뻐하실 때에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이 일반 섭리의 복 속에서도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시거든요. 그런데 많은 때에는 하나님이 일반 섭리에서는 많은 복을 누리게 해 주셔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게끔 허락을 해주시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이스라엘 백성들이거든요.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 만나를 처음에는 감격하면서 먹었겠죠. 굶주려 죽을 지경인데 하나님이 정말 놀라운 방법으로 만나를 주셨습니다. 한참 먹고 나니까 그 다음에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 우리는 옛날에 애굽에서 고기도 먹었는데 그게 종살이를 하면서 고기를 먹으면 얼마나 먹었겠어요? 그러고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놓으면서 슬픈 얼굴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하셔서 메추라기를 날려 보내셨는데 땅에 쏟아졌는데 발목이 잠길 정도로 엄청난 메추리가 쏟아졌습니다. 그래 그 놈을 잡아가지고 그냥 맛있게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메추라기는 주셨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해서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하기를 주께서 “저희에게 원하는 것을 주셨습니다만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쌍한 성도가 누구인지 아세요? 사업에 위기를 만난 사람들, 조금 불쌍한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 불쌍한 사람 아닙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아파하는 사람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사람들, 우리의 인생의 길에 가장 큰 재산이 무엇이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우리의 인생길은 형통할 때도 있고 불통할 때도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큰 재산이 있다면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분의 면전에서 사는 것 아니에요?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시련의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내가 무릎을 꿇어 기도하면 주님이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때 그리고 나에게 갈 길을 보여주실 때 두렵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면전에 있기 때문에. 환란의 폭풍이 그리고 시련의 먹구름이 우리의 앞을 가득 가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주님의 면전에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왜? 매주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어두운 세상에서 어느 길로 걸어가며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 서서 사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런 하나님의 면전에서 원래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왜? 주님께로부터 ‘너는 저 큰 성 니느웨에 가서 심판이 임박했다고 외치거라’ 이 말씀을 들을 때만해도 그는 하나님 면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불순종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영혼이 피곤해질까요? 많은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왜 그렇게 곤고합니까? 돈이 없어서요, 가정의 일이 꼬여서요, 사업의 위기를 만나서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예 들 필요 없이 우리의 과거만 생각해도 지금보다 훨씬 더 환란을 만나고 우리의 인생이 벼랑 끝에 서있을 때에도 주님 찬송하며 산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면전에 서기 때문에. 불순종과 죄는 우리에게 그런 행복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잘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돈도 주시고 많은 것을 한꺼번에 즉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안 그럴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등진 가운데서도 형통하게 사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 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통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나에게는 이 많은 재물과 명예, 그리고 지위, 그리고 이 세상의 형통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면전에 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등지고 형통한 길을 가시렵니까? 주님의 면전에서 고난을 당하시렵니까? 주님의 면전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 큰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실 위대한 일들에 우리들이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주님의 면전에 계십니까? 언제나 여러분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들리고, 주님의 목소리는 여러분의 귀에 들립니까? 주님의 면전으로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깊음에 에워싸임
두 번째는 깊음에 에워싸였을 때에 그의 영혼은 피곤해졌던 것입니다. 시편 130편을 주해하면서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은 그 깊음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환경의 깊음이고, 두 번째는 영혼의 깊음입니다. 깊음이라는 것이 뭐죠? 심연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발을 담그고 건너갈 수 있는 물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목전에서 떠나게 되면 깊음에 에워 쌓이는데 하나님이 제일 먼저 우리를 환경의 깊음에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시련과 어려움에는, 난관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난관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의 깊음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난관은 우리의 재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 얼마든지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시기 위해서 두신 이 환경의 깊음은 우리의 잔재주로서 극복할 수 있는 환란이 아닙니다. 진흙 같은데 빠지잖아요. 수렁에. 그럼 어떻게 하죠? 살려달라고 막 몸부림을 치잖아요. 그럼 몸부림을 치면 몸하고 진흙 사이가 벌어져요. 그러니까 몸이 더 빨리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라리 몸을 직선으로 하지 말고 어긋맞게 팔과 다리의 모양을 벌리고 있으면 천천히 내려가요. 살려달라고 막 몸부림을 치면 나오려고 온몸을 똑바로 뻗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몸과 진흙사이가 활동을 하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더 빨리 쭉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목전을 떠나 불순종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환경의 깊음입니다.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그런 환경의 깊음을 만들어 거기에 들어가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길인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잔재주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수렁 속에서 몸부림을 치는 인간이 더 깊이 빠져 들어가 마지막에 머리까지 꼴깍하고 진흙 속에 들어가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환경의 깊음을 허락하였을 때에는 당신이 허락한 환경의 깊음을 어떻게 신앙 없이 극복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을 의지한들 하나님의 권능을 이기겠으며 자기의 잔재주를 부린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겨루어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환경의 깊음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가 자신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난 것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인지를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환경의 깊음 속에 들어갔을 때 신앙은 사라졌고 육적인 혈기는 이 속에서 계속 방자하게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잘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금 섭리 속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다루시는데 이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되죠? 신자 같지를 않고 미친 인간처럼 되는 것입니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입니다. 더 맞아야 됩니다. 더 맞아야 됩니다. 할 수 있으면 아이들은 때리면서 기르지 마십시오. 그러나 매를 댈 때에는 초장에 완전히 기를 제압을 해야 됩니다. 기를 확 꺽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징계가 무섭다는 것을 알고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때리지 마세요. 차라리 사정을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환경의 깊음 속에서 그런. 어떻게 하려고 하냐면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 그거를 극복해 보려고 막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수렁 속에서 계속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배우게 하시냐면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영혼의 깊음 속에 들지 않을 때에는 내 힘으로 가정을 꾸려 가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내 힘으로 사업하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매일 매일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환경의 깊음 속에 계신 분들이 오늘 여기 있으시겠죠. 언제까지 거기서 하나님 없이 한번 그 깊음에서 헤어 나와 보시렵니까? 이제껏 낭비한 시간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환경의 깊음보다도 더 깊은 깊음이 그에게 떨어지는데 영혼의 깊음입니다.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찬송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시간에 한 번 말씀드렸는데 한 오년 됐나요? 한 오년 됐는데 미국 집회를 갔습니다. 그 집회를 아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목사님 디즈니랜드를 한번 보여주겠습니다.” 그랬습니다. “디즈니랜드 필요 없으니까 여기에 옛날에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사시는데 좀 찾아봐 달라” 그랬더니 몇 시간 만에 찾았습니다. 그때 연세가 94세였습니다. 제가 그 분 조교를 했고 그 분이 우리에게 조직신앙을 가르쳐 주셨고, 총신 학장도 지내고 그러셨습니다. 찾아가 뵀습니다. 과일 한 바구니하고 꽃바구니를 들고 바구니 두 개를 들고 이제 갔습니다. 절을 하니까 못 알아 보셔요. 하도 오래전 일이니까 다 설명을 드렸더니 그제서야 이제 이해를 하셔요. 반가워하시면서 책을 한권 드렸더니 ‘조직신학 책을 썼구만’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 막 나왔을 때였습니다. 근데 정말 건강하신 분이었거든요. 92세까지 운전을 하고 다니셨대요. 2년 전부터 다리가 아파서 운전을 못하고 이렇게 사모님은 7년 전에 돌아가시고 휠체어 말고, 이렇게 붙들고 움직이는 거 있잖아요. 그걸 움직이시면서 혼자서 뭘 끓여 드시는 것입니다. 눈물이 확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외로우시죠?”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러셔요.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뭐 혼자 있나? 우리 주님과 함께 있는데” 어린 아이처럼 천진하게 “내가 뭐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계신데”
그립지 않습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산 적이 있지요. 마치 하나님은 내 기도에만 귀를 기울이시는 것 같았고, 주일 예배가 날마다 나를 위한 예배인 것 같았고, 성경을 피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한테 보낸 연애편지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덧 죄악이 우리를 삼키고 영혼의 깊음 속에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매우 피곤해져 있었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침체 속에서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아요. 너무나 짧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주님의 면전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여호와를 생각할 때
A. 피곤한 영혼을 버려두심
잘 나갈 때에는 선지자 요나도 하나님 생각 안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배를 타라고 명령하셨지만 다시스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을 갔으니 우스운 얘기지만 요즘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애시당초부터 막으셔서 배에 시동이 걸리지 말게 해 주셔야 하죠. 선장이 심장마비로 죽어버리든지 근데 순풍에 돛단 것처럼 쫙 미끄러지듯이 항해를 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아마 요나 선지자가 밀짚모자에 선글라스 하나 끼고, 그리고 왼손에 맥주 한 통 들고 그리고 쭉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야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참 여기에 길이 있구나’ 그랬을지 모르죠. 불순종해도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근데 형통하게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나중에 더 심하게 굴러 떨어집니다. 그리고 항해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듣도 보도 못한 물고기 속에서 수시각각으로 밀려오는 바닷물과 싸우고, 그 콧구멍에 바다풀까지 들어와서 머리와 목을 에워 쌓습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수도 없는 환경 속에 있을 때에 그는 여호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삼일삼야 동안이나 이 선지자가 그렇게 고통을 받게끔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도록 만들어 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피곤한 영혼을 내버려 두셨다는 증거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피곤한 영혼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를 한동안 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시련과 환란을 만나고 이런 환경과 영혼의 깊음 속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때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너라.’
그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손목을 비틀어서 데려오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피곤한 영혼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철들라고, 철들라고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난 지 맘대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그 다음에는 모든 관심사가 돈, 사업, 행복, 쾌락 이런 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씩 하나씩 차단하고 막으세요. 위기를 만나요. 시련이 와요. 사업에 커다란 어려움이 닥쳐요.
B.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시련과 환란을 만나는 가운데 그는 비로소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 이 모든 깊음 속에 떨어지게 된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한 마디의 간절한 심령의 기도는 건성으로 일 만 마디의 기도보다 더 큰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나 선지자는 삼일삼야 동안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어쩌면 ‘아, 이럴 바에는 죽어버렸으면’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죽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합니다. 누구 좋으라고 죽게 내버려두시겠어요? 어림도 없죠. 그러니까 그 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연단 속에서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의 불순종과 그리고 자기의 죄를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환경과 영혼의 깊음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외에 자신을 이 모든 시험에서 건질 자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될 때 그의 기도는 애끓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피가 솟구치는 핏빛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그는 이전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주실 때,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을 울릴 때, 비록 가난했지만 주님이 주님의 그 면전에서 살던 때의 행복을 회상하면서 그래서 주님께 용서를 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원망,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불평, 이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 사라지고 ‘오직 이모든 것이 나의 죄 때문이옵나이다. 내가 당신을 떠났습니다. 내가 주님의 목전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인격적인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난 날 겪었던 그 환경의 깊음 속에서 맞았던 수많은 회초리, 영혼의 깊음 속에서 내리치던 수많은 양심의 채찍질들, 하나님의 말씀의 찔림 들이 바로 주님이 나를 돌아오라고 부르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고난이여 길이 참 어둡고
험악한 시련이 그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위협합니다. 사나운 환경의 깊음이 우리를 삼키듯이 올때 그때 주님은 그 속에서 우리를 간절히 부르시는 것입니다.
(찬양)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우리는 주님의 목전에서 떠나게 되고 영혼에는 피곤이 몰려옵니다. 주님이 당신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그 인간들이 하나님 사랑하고, 사명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교회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살게 되는데 주님이 은혜를 아끼시겠습니까? 생수를 뜰 물에 탈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외아들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문제죠. 버리세요. 하나님이 정신 차리라고 여러분을 깊음 속에 두셨을 때에 여러분의 힘으로 하나님의 능력 대적하고 여러분의 잔꾀로 하나님의 지혜와 맞서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커다란 시련이 찾아올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파멸이 여러분을 방문할 것입니다. 신앙의 요체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때리시기까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의 면전으로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깊음에서 내리는 결단
“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욘 2:8-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큰 물고기 속에서 삼일삼야를 지내던 요나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가운데 나오는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안한 때에는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깊음 속에서는 들릴 때가 있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인간들도 위기 속에서는 자신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자기의 뜻대로 되는 듯하였으나 결국 난관을 만나 거대한 풍랑을 겪으며 그는 깊이 좌절하였고, 물고기 속에서 삼일삼야를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내며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선지자의 자기반성이었습니다.
II. 선지자의 자기반성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한다는 것은 모든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입니다. 동물에게는 자기반성 작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를 반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항상 우리 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나인 경우에는 쉽게 반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성을 하려면 나를 나에게서 떼어놓고 나를 남인 것처럼 내가 바라볼 수 있어야지만 반성의 작용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만약에 나를 나에게서 떼어놓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나 아닌 나를 살피게 만들어 주는 그 빛이 나에게서 나오는 빛이면 나는 다시 합쳐질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나의 상식과 나의 판단의 빛이 아니라 진리의 빛으로 나 자신을 비추게 될 때에 비로소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그리고 나를 반성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신자, 날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신자의 특징은 끊임없는 자기반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아래 사는 사람들만이 이 반석의 기조를 자신의 삶 속에서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소명을 외면한 삶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엄중한 소명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그는 그것을 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모든 일들이 평화롭게 이루어질 때에는 이 사람도 죄인 중 한 사람인지라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시련을 만나면서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가 소명을 외면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있었던 많은 선지자들 중 몇 사람에게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를 향하여 예언을 하도록 지시를 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직접 가서 그것도 그 나라의 수도 한 복판에서 왕과 모든 대신들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이런 식으로 선교적 소명을 주어서 보내신 선지자는 요나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사역의 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여호와의 구약 신앙의 선교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그런 소명을 외면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용서하시고 복 주시는 것,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선지자에게 아주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아집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명이라고 하면 목사나 혹은 신학교를 가는 전도사나 선교사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불붙는 소명을 지금도 주셔서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기의 씨를 받아서 엄마의 몸에 아홉 달 반을 있다가 생명이 태어납니다. 첫 번째 출생입니다.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면서 살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거듭나게 됩니다. 두 번째 영적 출생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깊이 받으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아있어야 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발견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일들을 내가 할 수 없지만 내가 사는 동안에 내게 있는 한 가지 할 일, 그리고 목숨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이 일을 온전히 이루기 전까지는 내 마음이 언제나 불붙을 수밖에 없는 그 일 그걸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다수도 아직 이런 소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나와는 거리가 먼 특별한 종교적인 사람들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도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병원에 가서 말기암 환자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이름 없는 평신도들이 여럿 있습니다. 남들이 주일날 푹 자고 12시쯤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주일에 평소 출근보다 더 일찍 교회에 나와서 첫 번째 예배를 드리며 하루 종일 영혼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을 태어나게 하셨다고 믿는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수 천 만원의 연봉을 마다하고 구역식구 열한 명을 돌보는 것이 십자가 사랑으로 구속하신 자기에게 주신 생명 같은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헌신하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의 권력자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목사이고 모든 사람이 선교사이겠습니까? 소명 없이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지도자처럼 보여도 하찮은 사람이요, 불붙는 소명으로 어린 영혼 하나를 섬겨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드는 사람은 빛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열정 상실증입니다. 일본에 바둑의 역사에 보면 ‘토혈국’이라는 게 있습니다. 둘이 바둑을 두다 한 사람이 졌습니다. 너무 분해서 피를 토하고 바둑판 위에 엎드려져서 절명을 해버렸습니다. 실화입니다. 그 기보가 지금도 전해 내려옵니다.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옵니다. 아니 오락을 하다가 맘대로 안 되도 원통해서 피를 뿜고 엎드려져 죽는데 무슨 구원이 그 시시한 구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늘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으면 믿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확신을 못하겠으면 주님이 살아 계신지 목숨을 바쳐서 한번 여쭤보라는 것입니다. 있다는 것이 마음에 믿어지면 그 다음에 살아야 할 이유를 그 믿음 안에서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소명이 없이 살아가는 삶은 영적 식물인간 상태입니다. 그리고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오늘 여러분 중에 지금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한 가지 소원만 5초 안에 말해라, 내가 들어주마.’ 라고 말할 때 즉시 대답할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여러분 중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쯤 될까요? “예수님 그걸 왜 물어보십니까?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새벽마다 밤마다 눈물로 기도했던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을 주님은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하고 지금하고 비교해 보면 우린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했는지 지금 현재 지구상에는 그런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EU와 FTA가 정식으로 발효되었기 때문에 빠르면 3년 늦으면 5년 내에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다음 5위의 무역국이 될 거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금도 잘 살지만 앞으로는 더 잘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가난하게 살 때에는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슴 가슴마다 타는 불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위한 불길, 가난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온 조국의 교회가 돌 가슴, 철 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아요. 성경을 읽으며,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하며 여러분 마음의 응어리들을 모두 쏟아놓고 하나님 한 분 앞에서 그 분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든지, 너무 기뻐서 감격을 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무슨 그런 허접한 사랑이 있느냐 말입니다. 가슴에 열정이 없는 것은 목표가 상실되었기 때문이고 그 목표가 없는 것은 소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도 한 천 여명 모이는 청년들 집회에 갔습니다. 그러면서 다들 그래요. 취직할 데가 너무 없다고 그래서 내가 설교 속에서 그랬습니다. “내가 취직할 데 가르쳐 줄게. 학교 선생이 되거라. 선생이 되거라.” 그래서 방황하는 저 많은 청년들 정말 선생다운 선생 한 사람만 나오면 아이들은 뭐든지 선생님에게 다 바쳐요. 마치 조폭이 똘마니에게, 똘마니가 조폭에게 충성하듯이 아이들에게는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의 사랑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이 목사님, 그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러니까 너는 바보다. 쉬운 길에 소명이 있겠냐? 먹고 자는 것이 소명인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백수로 놀 소명 받은 사람 중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게 무슨 소명입니다. 그건 소명이 아니라 소명의 결핍입니다. 치열하게 노력해야죠.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느냐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양상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양상의 삶이든지 무엇을 지향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사가 될 수 없으면 학교 청소부로 들어가라. 그래서 청소년 선교 하거라. 수위로 들어가든지. 에이든 윌슨 토저라는 미국의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천사 셋을 불렀습니다. 첫 번째 천사에게 명령을 주셨습니다. 황금으로 만든 임금의 지위봉을 들려주셨습니다. 이거 가지고 내려가서 저 큰 나라에서 왕을 하거라. 두 번째 천사에게 큰 주판을 주면서 너는 이거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기업을 하거라. 세 번째 천사에게는 다 쓰다 버린 군인 철모에다 막대기를 끼워서 주시면서 너는 이것을 가지고 똥 퍼라. 셋이 각각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올 때 천사들의 마음이 달랐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소명은 어명입니다. 어명입니다. 자, 낙향하여 살고 있는 선비에게 정부에서 관리를 급히 말달려 보내서 어명을 전달합니다. 그러면 어떻하죠? 조용한 어느 집 마당에 서서 “걔 누구 있느냐?” 하고 불러요. 그러면 누가 나오죠. “어명이요.” 하면 도로 집으로 쏙 들어와요. 그리고 완전히 의관을 정장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마당에서 왕이 계신 곳을 향해서 절을 하고 그리고 무릎을 꿇고 어명을 받듭니다. 어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소명은 뭐예요? 아직까지도 살아가야 할 인생의 길이 긴데 영적 식물인간으로 남은 세월을 다 보낸다는 것은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아요? 한 번도 피 토할 일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은 불행한 일 아니에요? 그게 어떻게 산 것일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소명을 받을 수 있을까요?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반드시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어디다 쓰려고 만드셨는지,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을 향해서 어떤 뜻이 계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인생을 살면서 거의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물질이 없기 때문에, 돈이 없기 때문에, 좋은 직장이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여성이나 남성이 없기 때문에,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등등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불행한 것은 삶의 목적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명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면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왜 구원해 놓으셨는지, 그리고 내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주님이 분명히 이런 소명을 주셨지만 이 소명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기쁨도 없고, 슬퍼도 울부짖을 수 없는 물고기 속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는 소명을 따라 살 때에는 위대한 선지자였으나 소명을 버렸을 때 그는 배 밑창으로 도망친 사람이 되었고 제비가 뽑혔을 때는 마치 죄수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소명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를 버리십니다. 깊이 회개하고 이 소명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이 소명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은혜에 대한 배신
두 번째는 은혜에 대한 배신을 반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으나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가고 나니까 하나님을 거스르는 수많은 악인들이 생각났고 그들의 허무한 삶은 헛되고 거짓된 것을 숭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얼마 전까지 자기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대신하였던 것.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 대가를 받고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거저 주는 것을 은혜라 합니다. 그러나 거저 준다고 해서 아무 계획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보십시오. 그러면 그 아이에게 어떤 분유를 먹어야 건강에 좋을까? 혹시 이것이 영양분이 결핍된 분유는 아닐까? 나쁜 성분이 들어가서 아이에게 건강을 해치는 분유는 아닐까? 고민하고 좋은 학교, 좋은 학원, 그리고 좋은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그리고 의료 혜택을 받게 만들어 줍니다. 설마 그거를 다 적어놨다가 아이가 취직하면 할부로 갚으라고 그러려고 적어 놓는 것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렇게 아이를 위해 은혜를 베풀고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부모의 마음속에는 아이를 향한 기대도 함께 자라게 됩니다.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그리고 어떤 일을 했으면, 어떤 식으로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 이 세상에 유익을 끼쳤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이를 낳았는데 목표가 15년 내로 1m 80cm에 90kg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엄마가 양돈업자지, 엄마입니까? 은혜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고, 그 계획은 우리에게 소명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는 소명이 있는 거야. 아직까지도 자기 아집에 사로잡히고 자기 사랑에 붙잡혀서 그 소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반드시 구원과 함께 그에게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진실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따라갈 소명이 있고 또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없는 나에게만 주시는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 소명을 느낍니다.
우리는 이 요나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냥 아미떼의 아들이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이 만나 주시는 깊은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선지자적 소명을 그의 가슴에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엄청난 선교적 사명을 주셨을 때에 은혜를 안 주시고 그냥 보내셨겠습니까? 하나님이 능히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지만 그는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자기의 아집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꺾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전면적인 배신 행위였죠.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주님의 은혜요. 죽지 않고 이제껏 살아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요. 방황하며 살던 값없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건져 그 빛 아래 살게 해 주신 구속의 은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열렬히 기도한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그래도 주님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신앙이 없을 때조차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게 하셔서 꾸겨지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파도가 엄습할 때에는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이었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경을 여실뿐만 아니라 그 험한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인내할 수 있었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은혜로 우리에게 덧입혀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이 왔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아름답고 선한 것은 다 주님이 주신 것이고, 나쁘고 그리고 추악한 것들은 모두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로 신앙을 배신하며 불러들였던 것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빚 덩어리입니다.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하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찼을 때에는 주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 주소서.’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이용하고 싶어졌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안 움직여 주시자 앙탈을 하고 마음에 앙심을 품고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직면한 영혼의 메마름, 그리고 삶의 위기, 시련 속에서 받는 고통, 그것 때문이 아닙니까? 고난을 당할 때 감히 욥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수천 명의 한두 명 뿐입니다. 대부분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고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깊음에서 내리는 결단
이러한 깊음 속에서 선지자는 세 가지 결단을 내렸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로서 말미암나이다. 아멘”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하나님이 바라는 바람직한 인간의 상태는 주께서 그의 지성에 성경 계시로 말을 건네실 때 그것에 의해서 마음이 정동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지성적으로 깨어 있으면 주님이 말로 ‘너 잘못했다’라고 마음을 찌르시는 한 번의 가슴 아픈 말은 창으로 등을 찔러 허파를 꿰뚫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우리의 마음에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태도와 신앙을 바꾸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마음 아파하시니까. 정말 사랑하면 저 사람이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 때문에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연합입니다. 지가 아프던 말든 완전히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인간들이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 잘 돌보지를 않아서 주님이 아무리 말씀을 주셔도 마음속에 일어난 시끄러운 소음과 욕망의 파열음 때문에 주님의 음성이 묻혀서 들리지 않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흔드시기 위해서 그의 환경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하나님이 떠나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 그렇게 하면 나도 너 떠난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이 돈, 물질, 사람, 따뜻함, 편안함, 환경, 이런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흔들어 놓으면 오히려 하나님이 백번 말씀하시는 것보다 그 사람 마음에 변화가 더 빨리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준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막 흔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련을 만나요. 그러면 비로소 자기가 환경적인 깊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환경적으로 그는 깊음 속에 있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자기를 믿고 신뢰하고 환경을 의지했던 마음들이 끊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은 시련을 만날 때 잔재주로 시련을 해결하려고 하고 오히려 죄악 속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해 반역의 마음을 품게 되는데 이럴 때에는 더 많이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속에는 항상 madness 미친 기운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비이성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바로 그런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배 밑창에서 엎드려 자다가 발견이 되어서 넘실거리는 파도에 던져졌을 때 어금니를 굳게 깨물고 눈을 감고 죽어버리고 싶었겠죠. 그러나 누구 맘대로 죽습니까? 소명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바닷물과 그 짠물 그리고 물풀들이 자기의 머리와 목을 에우는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비참함 속에서 삼일삼야를 몸부림 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A. 감사를 결심함
자기를 반성함으로 객관적으로 보고 하나님은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제일 먼저 감사를 결심했습니다. “내가 감사의 목소리를 드리겠나이다.” 장삿집에 가서 살아있는 게 참 감사하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나는 뭐 그렇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데 병원에 가면 감사한 마음이 확실히 듭니다. 이러고 돌아다닐 때에는 내 힘으로 숨 쉬는 줄 아는데 호흡기를 끼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게 하나님의 은혜구나, 내 입으로 내 돈 주고 밥 사먹는지 아는데 밥을 못 먹어서 입에다 호수를 꽂고 죽을 내려 보내고, 혹은 링거로 음식을 삼으며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면 야, 먹는 것도 주님의 은혜구나 내 입으로 소변 보고 대변보는 줄 알았는데 긴 호스를 늘어뜨리고 가슴에, 배에다가 그 변기 줄들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야, 변을 보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면 돈 많이 주셨을 때 여러분 감사한 거 아니구요. 건강할 때 감사한 거 아니구요. 지위가 높아졌을 때 기분 좋아 했을지는 모르지만 감사한 것 아닙니다. 그런 것 아무것도 없어도 마음속에 주님의 은혜가 가득했을 때 주님의 은혜가 없었을 때에는 감사의 조건도 되지 않았을 것들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깊이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메마른 영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밤에 잠들기 전에 더 많이는 몰라도 열 가지만 하나님 앞에 잊고 살았던 감사의 제목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마음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투덜거리면서 하나님을 거역했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자기가 받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의 제사를 올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멘.
B. 헌신을 결심함
두 번째는 헌신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께 제사를 드리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제사는 틀림없이 번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제는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있어서 불로 태워서 드리는 것이었고, 특별히 하나님 앞에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를 드릴 때에는 이렇게 번제로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 죽겠으며, 그 사지들이 절단된 것처럼 내가 고난을 당하겠으며, 그것들이 불 위에서 모두 타 연기가 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나 자신을 태워서 주님의 향기가 되겠습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고 소명을 주신 목적을 따라서 내가 그렇게 나 자신을 모두 시련의 불 가운데서라도 태워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라는 상징으로 번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렸던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물고기 속에서 삼일삼야를 회개하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단지 목회를 하고 선교를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소명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주님이 맡겨주신 그 일에 헌신하면서 살 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인생의 위기를 만난 모든 사람들의 한복판에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한복판에는 이렇게 주님이 주신 소명의 자리를 떠나 헌신하지 않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방만한 삶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누구에게 힘을 쏟아야 할지, 어느 일에 자기 자신을 다 바치며 신명을 드려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세워주신 그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는 이미 죽임 당한 재물이다. 불같은 시련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미 쪼개어진 재물이다. 그 고통이 클 때마다 이 고통으로 나를 다 살라 향기가 되는 것이 그래서 주님께 흠향되는 것이 나의 존재의 이유인 것은 마치 초가 자신을 태워 온 방을 밝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C. 서원으로 돌아감
세 번째는 서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서원을 주님께 갚겠사옵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구약에서 이 서원은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이루어져요. 인생의 커다란 난관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를 이렇게, 이렇게 구원해 주시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주님께 나 자신을 헌신 하겠습니다’라는 서원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이 너무 커서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요구하시지도 않는데 자신이 그것이 기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는 이렇게, 이렇게 당신께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에 이렇게, 이렇게 나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이게 바로 서원입니다. 선지자가 무슨 서원을 했는지는 우리는 요나서 1, 2장의 내용만을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 요나도 그 시대에 태어난 그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먹고, 입고, 장사하고, 그리고 목축하고, 거래하고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이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이 사람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큰 만남을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의 말씀이 아미떼의 아들 요나에게 임함이라하는 그 내면의 의미입니다. 그때에 그가 이 세상에 가치관, 인생관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리고 신앙적인 인생관, 세계관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커다란 은혜의 감격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틀림없이 그렇게 하나님이 내가 너를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선지자로 세우겠노라고 은혜를 부어주셨을 때 그는 틀림없이 서원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 내가 당신의 선지자로 살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많은 백성들에게 전하여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겠습니다.’ 이게 서원입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이 자기의 아집과는 어긋나는 소명을 주셨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서원을 어겼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기의 편견을 더 신뢰해서 다시 부르시고, 용서를 선언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일들이 좋은 일이었지만 앗수르 사람들에게만은 절대로 하나님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확신을 하며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입니다. 물고기 속에서 삼일삼야를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의 그 망동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더럽고 죄스러운 것인지를 어느 정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서원으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한 자신의 삶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의 서원을 이제 주님께 갚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주님 앞에 서원하셨겠죠. 작은 물질의 서원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인생의 위기의 때에 급한 나머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우해 주시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겠습니다. 저러저러하게 믿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봉사하겠습니다.’ 라고 서원한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셨으니 이제 이 생명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을 위해 드리며 일생을 살겠습니다’ 라고 다짐을 했던 적이 있겠죠. 모두 서원입니다. 서원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서원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두려워하며 갚으려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찬양)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IV. 결론: 구원을 믿으라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선지자는 고백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로서 말미암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어렵게 도달한 결론이었습니까? 그 죽을래도 죽을 수 없고, 살래도 살 수가 없는 상황에서 삼일삼야를 지내면서 그는 자신이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달린 것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가고 계시죠?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영혼의 메마른 목을 축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그린 그림이 여러분의 육신의 목마름을 해갈해 줄 수 없는 것과 꼭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총체적인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소명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은혜에 배신했던 삶을 깊이 회개하고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러분을 사랑해 주시고, 은혜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4.지친 영혼을 다시 세우심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편 119:2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편 119편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시였을 거라고 여겨지는 119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광스러운 유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에 어떻게 이 말씀이 시인의 영혼을 살리고 그것을 이기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영혼이 항상 이런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였던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곳곳에서 시인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며 자신의 영혼의 곤고한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났고 그 속에서 영혼이 거의 죽어있는 것 같은 괴로움을 겪으면서 영혼의 소생을 위해 아버지께 간절히 빌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좀 다르게 나오는데 “나의 영혼이 고통을 인하여 심히 피곤하게 되었사오니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나를 일으켜 세우소서”라고 나옵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영혼의 힘이 모자라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영혼의 지침의 때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II. 영혼의 힘이 모자랄 때
오늘 시인은 여기에서 “내 영혼이 고통을 인하여 심히 피곤하였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피곤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육체의 피곤을 생각해 봅시다. 육체 중 어느 한 부분도 잘라져 나가거나 상처를 입어서 피가 흐르는 것이 피로가 아닙니다. 육체의 사지백체는 멀쩡하고 그대로 있으나 육체의 생명력 있는 기운이 모자라게 될 때에 평소에는 잘 하던 행동도 어줍게 되고, 그리고 능히 해 나갈 수 있는 일들도 손과 발이나 혹은 사지백체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피곤이라고 할 때의 이것은 생명력이 결핍된 상태를 가리켜서 피곤한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푹 쉬고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고, 적절히 운동할 때에 육체의 피로는 물러가고 다시 온 몸의 힘이 솟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먹은 대로 이것저것도 할 수 있고 손과 발도 잘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살이 더 쪘다거나 팔과 다리의 길이가 길어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생명력을 가득 담게 되자 피로 하던 일들을 못하게 되던 일들을 능히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메마른 대지였을 때에는 풀도 전부 다 다 숨이 죽어 곧 쓰러질 것처럼 메말라 갑니다. 나무도 서 있지만 껍질이 바짝 마르고 입파리도 습기가 모두 사라져 축축 늘어지고 줄기도 힘이 없어집니다. 먹구름이 피어나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이튿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들어 가던 풀들은 생명의 기운으로 시퍼렇게 살아나고 나뭇잎과 가지들도 훨씬 더 튼실하게 생명을 머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무 안에 생명력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A. 영혼의 지침
육체와 자연 사물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의 피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힘이 필요한데 영혼이 이런 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영혼의 기능에 심각한 장애가 오게 됩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작용은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면서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고 육체를 그 영혼의 작용으로 통솔하게 됩니다.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능 두 가지가 있는데 지성의 기능이고 의지의 기능입니다. 영혼 속에 생명력이 넘쳐나게 되면 그 생명력 때문에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잘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지성의 활발한 작용입니다. 그리고 어려워 보이던 교리들도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그 속에 오히려 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는 올바른 힘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선한 것들을 자주자주 마음을 먹게 됩니다.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마음속에 넘치는 사람들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들을 마음에 먹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실행해 가면서 삶과 그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물이나 그리고 햇빛이나 기름진 비료, 그 자체가 나무나 풀의 생명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이용해서 공급할 때에 이 나무와 풀의 생명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배, 간절한 기도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가 영적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하나님 혹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놀라운 은혜는 이렇게 예배와 설교와 말씀, 기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생명력 있는 기운을 불어 넣어 우리의 영혼으로 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힘이 가득할 때에 영혼 속에서는 질서가 잡히게 되는데 이 질서가 바로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을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잘 믿은 다음에 그 믿음 아래서 우리의 이성이 복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를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삶과 자연의 세계,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역사의 구조 속에서 확인을 하게 됩니다. 더 많이 믿게 될수록 더 많이 배우게 되고, 더 많이 배우게 될수록 하나님을 믿어야 할 마음이 충만해져서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가게 되고 올바른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정동되면서 감정들이 일어나게 되고, 올바르게 일어난 감정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한 일을 행하며 살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 안에 가득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영혼의 아름다운 질서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혼의 생명이 빠져나갔을 때에는 그때 우리의 육체는 비록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로 잘 먹고 휴식을 취해서 아주 강한 육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피곤해졌기 때문에 영혼의 올바른 지도를 받으며 육체를 계도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각종 더러운 욕망과 부끄러운 죄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죽은 영혼으로 죽은 수많은 행실들을 만들어 내게 되니 이것이 탐욕, 거짓, 욕망, 미움, 시기, 분노, 분쟁, 쟁투 그 다음에 약탈, 탐욕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죄악들이 끊임없이 행해지고 우리의 마음은 더렵혀지게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게 되고 성령의 역사하시는 그 작용에도 둔감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지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지쳐있을 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각양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 결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의 어떤 이상이 있을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몸의 바깥으로 징후를 나타내듯이 영혼이 지치고 피곤해 있을 때에 그 피로하고 지친 기색이 우리의 마음과 언어, 그리고 우리의 삶, 우리의 행동 속에서 두루두루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인이 고백한 “나의 영혼이 고통을 인하여 심히 피곤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 말의 의미 있는 의미입니다.
B. 지친 영혼의 슬픔
이러한 지친 영혼은 슬픕니다. 이것이 지친영혼의 슬픔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있을 때와 영혼이 이렇게 지쳐있을 때에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슬픔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그 속에서 아주 놀랍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 생명이 넘치게 될 때에 영혼에는 언제나 거룩한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슬픔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살지 못하는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사랑은 너무나 큰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바친 것은 너무 적다는 후회와 그리고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영혼의 슬픔이고, 이런 영혼은 슬프면 슬플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러한 영혼의 생명력이 모두 사라지고 핍절한 영혼이 되었을 때도 영혼은 슬픕니다. 그 슬픔은 단절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하나님과 낯설고 거리감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자니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쳐져서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가득찰 때에는 그렇게 따뜻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그 속에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 자기 사랑에 뭉쳐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는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은 물론이고, 교회에 와서도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 낯설게 느껴지고, 목양의 관계와 교회 안에서 주님이 주신 모든 아름다운 모든 질서와 제도들이 자신이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낯섦이 밀려올 때 이것이 바로 영혼이 지쳐있는 상태에서 슬픔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슬픔은 불행하게도 육욕적인 슬픔이기 때문에 이런 단절감에서 오는 슬픔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그는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고 이런 슬픔이 가득찰 수록 주님을 간절히 찾을 희망은 점점 적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속에서 이제 이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인이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하고 그 말씀에 붙들려만 살던 것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은 눌림을 인하여 녹을 정도가 되었고 고통 속에서 그의 영혼은 매우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지친 영혼으로 살아가는 슬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놀랍게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은 지쳐서 피곤하지만 그렇게 영혼이 지쳐 피곤해 있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육욕적인 욕망의 작용들은 아주 활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마음이 고르고 평정했지만 은혜가 멀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육체의 욕망과 더러운 탐욕들이 마음속에서 용솟음치기 시작하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음성에는 잘 반응하지 못하던 우리의 육체가 이런 육욕적인 음성에는 놀랍게 반응하면서 마음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열렬하게 자기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을 성경은 죽은 행실, 육체의 죽은 행실이라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자신이 곤고하고 괴로운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이 빠져나가고 이렇게 지친 영혼으로 슬픔에 가득 차게 되면 그의 입술과 마음에는 온갖 욕설들이 자기도 모르게 솟구치게 됩니다. 미워할 사람도 정말 많고 죽이고 싶은 사람도 많고 심지어는 자신이 오늘날 고생하는 것이 나라 때문이고 정부 때문이고 대통령 때문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짐승과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는 고통을 받을 때에 의미를 생각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진 사람들은 동물적인 마음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실은 타락할 수 있지만 그 의미를 규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지친 영혼으로 슬픔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마음은 맹수처럼 변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마음으로 정신으로 물어뜯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가장 커다란 피해자는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고통을 인하여 녹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한번 질문을 해봅시다. 세상에서 고생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모든 영혼이 이렇게 피곤하고 지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일어난 열렬하고 뜨거운 불을 옆에 있는 사람이 수돗물로 그 마음의 열정의 불을 끌 수가 있습니까? 물은 물리적인 물이지만 마음에 일어나는 열정은 정신이기 때문에 물질의 물로 정신의 불을 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그가 그렇게 곤고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갈 때에 그것으로 인하여 영혼이 피곤해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작용으로 스스로 영혼이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증거를 한번 대볼까요?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했습니다. 허망한 풍설을 전한다고 끌려가서 실컷 두들겨 맞았습니다. 고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이 피곤하게 되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헛되게 살지 말고 본질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많이 해봤죠. 인생이 고난이 겹치고, 사업에 위기가 오고,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고, 육신의 질병이 오고,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하고 사방 전체가 원수들에 의해서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어떤 인간을 향해 이를 가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디까? 누군가를 마음의 원한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디까? 결국 그런 모든 악한 행동의 마지막 끝은, 그 칼끝은 마지막 우리의 영혼을 겨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면 대부분 악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악은 우리의 육체로 마음에 빠지는 것이고 시험은 우리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두는 것입니다. 영혼이 올바르고 하나님의 생명에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이 깨어있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자기 앞에 놓인 위험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미리 피하고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II.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
오늘 여러분이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몇 주 동안 계속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여러분 정신 차려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다시 똑바로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시련은 인간의 방법으로 삽질하면 삽질할수록 낭패를 만나고 인간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체면까지 완전히 찢어져 똥걸레가 됩니다. 그러니까 빨리 항복하고 주님께 돌아와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게 주셨던 그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한 기운을 나의 죄와 그리고 불순종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열렬히 구하지 않는 나의 나태함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갈 때까지 간 혼자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완전히 탈진한 영혼이 되었을 때 이 시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의 말씀에 따라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옵소서’ 그가 이런 영혼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저앉아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주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잃어버렸을 때에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넘어졌든지 넘어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A. 살아야할 이유가 있기에
그러면 우리가 왜 이렇게 생명을 잃어버린 지친 영혼으로 살아가다가 엎드려져 죽게 되었을 때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할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들에 핀 풀 한포기 들꽃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아름다워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공중을 가르고 땅 위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빗줄기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아서 하나님이 이 땅에 떨어지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공중의 나는 새와 비교할 수 없고, 들에 핀 백합화와는 상대도 할 수 없는 지고한 영혼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닌 내가 오늘 여기 이렇게 주님을 힘입어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이 붙드심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아직도 남았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지 아니하고 목숨을 부지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아름답기에 돌이킬 기회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지 않고 아직도 여기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한 10년쯤 지났을까요? 영혼이 아주 곤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도도 잘 할 수가 없고, 밤이면 잠을 이룰 수 없고, 그리고 이제는 나의 목회 사역에 주님의 은혜가 다한 것 같고, 아무리 내가 몸부림치며 발버둥 쳐도 주님께 만족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괴로움 속에 보내던 날들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에 외국에 낮에는 목회자, 저녁때에는 평신도들을 위한 집회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지친 몸으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리고 태평양에 건넜습니다. 마음이 모아지지도 않고 슬픔만 밀려왔습니다. ‘아,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이 비행기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아니라 하늘나라로 가는 비행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녁때 도착해서 바로 숙소로 갔습니다. 허름한 호텔이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누워도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괴로워하다가 만약에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버리지 않고 나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계시다면 주님이 그렇게 나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에게 한 번 들려달라고 기도를 하며 울며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되어서 차를 타고 집회 장소로 가면서도 마치 그 많은 설교가 내 마음에서 한 편도 안 남고 사라진 것처럼 입술은 천장에 붙은 것처럼 무엇을 설교해야 될지 가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배당에 가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며 새벽기도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 요한복음 21장을 설교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리고 올라가서 20여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은 성도들에게 30분 남짓 요한복음 21장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자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그렇게 짧은 시간 설교하면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마치 설교하는 시간 내내 유체 이탈한 사람처럼 나는 설교하고 있는데 정말 나는 내 몸에서 이탈하여 멀리 회중석에 앉아서 나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명료함으로 내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으로 다가왔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그날 그 새벽에 설교가 끝난 후에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백할 적이 있느냐고 당신이 물으시면 나는 내 손가락으로 내 입을 막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들어주신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일생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은 당신 밖에 없었고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거짓 없이 사랑한 분도 당신이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아침에 한참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오래된 침체 속에서 건져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어찌 이런 경험이 나에게만 있겠습니까? 태어나지 않는 사람보다 생을 마감하고 당신께 부르시는 사람보다 주님이 더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침체된 영혼으로 메마른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의 생명을 상실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원하지만 거듭난 본성으로는 원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모순 속에 붙잡혀 있는 가련한 사람들을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기에 오늘도 그들에게 저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게 아니시겠습니까? 이런 극도의 침체 속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영혼의 견딜 수 없는 메마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살아 숨 쉬는 것도, 마음에 눌려 숨을 고르게 내쉴 수 없는 눌림을 경험한 사람은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시련 속에 영원히 입을 떼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혼의 생명을 위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우리가 아낌없이 은과 금을 다가지고 심지어는 우리의 생명까지 녹여 바치면서 그것들을 샀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아무 유익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영혼의 생명은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그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오늘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우리가 어떠한 침체, 심지어는 어떠한 죄 가운데 빠져서 절망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뜻이 있으셔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류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나 들꽃처럼 살다가 쓰러질 불과 몇 십 년의 인생밖에는 없는 그런 사람으로서 나를 창조하신 것은 그래도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기에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 떠나고 주님이 한때 우리에게 주셨던 충만한 영혼의 생명은 다 잃어버린 다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후회하게 됩니다. 지나간 일들은 우리의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만 미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길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B.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키데바레 카”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라는 이것은 두 가지 의미인데 첫째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을 정도로 하나님의 생명을 모두 잃어버리고 지쳐있을 때 하나님이 그 영혼을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보혈로 사셨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은혜에 대한 무한한 공급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는 부모가 준 유산을 한번만 탕진하면 아마 다시는 더 이상의 유산을 주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은혜를 공급해 주시면 그 은혜를 올바로 사용하지 않고 다 허비하고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부패한 인간이 되었는데도 다시 와서 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날마다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서 돌변하여 이를 악물고 하나님을 원수처럼 대하려고 하고, 사랑해야 될 사람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가는 신세가 여러분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여러분을 주님의 은혜로 비할 데 없는 순결한 사랑으로 그대들의 심령을 가득 채워주시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충만한 은혜의 생명이 여러분에게 있었을 때 여러분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했고 의지했습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아니라 티끌 같은 목숨이라도 주님을 위해 드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조그맣게 라도 쓰임을 받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희망이었고 꿈이었습니다. 그 많던 하나님의 생명, 시련 속에서 아버지의 손을 붙들던 어린 아이 같은 신뢰, 그리고 고난의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에 밀려오는 구원의 감격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에 여러분은 자리에 없었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는 그를 버렸지만 그는 언제나 거기 계셔서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자존심도 없이 언제나 기쁘게 맞아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없이 곤고한 영혼으로 계속 살며, 죄 짓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원수처럼 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엎드려진 것을 분명히 인정하고 시인처럼 눌림을 인하여 녹게 된 영혼, 고난을 인하여 피곤하게 된 영혼임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믿음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하나님이 부르셔서 당신의 생명을 다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따라서”라는 말은 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고갈한 영혼이 되었을 때에 무엇이 하나님 자신을 대신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가 굶주려 죽게 된 사람들에게 너의 정신을 맑게 해 줄 것이니 이 아름다운 그림을 보라. 이것으로서 너희의 지친 육신을 새롭게 하라고 타이른들 지쳐 죽게 된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운 그림이 무슨 육체의 힘을 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져 영혼이 지쳐있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인데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로 입에 쳐 넣고, 몸 위에 쳐 바르고 그리고 어깨위에 수없이 걸치고 그리고 권위로 띠를 두르고 수많은 사람들을 호령한들 그 영혼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겠습니까? 잠시는 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끝나고 난 뒤에 밀려오는 공허와 그 슬픔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세월이 많이 흘렀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생명을 이루고 침체에 빠진 이유가 여러 가지라고 할지라도 그런 영혼을 다시 살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살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주님 앞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눈물 나도록 원하시는 것은 구원받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만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세월이 흘러갔어도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대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간절한 기도 그 위에 역사하시는 충만한 성령의 은혜로 우리에게 이 새 생명을 주셔서 우리들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시련의 개울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뛰어 건널 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우리의 어깨위에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방황하지 말고 고요히 마음을 정돈하십시오. 이 세상에 끈끈히 붙어있는 많은 욕심들과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듯이 요동치고 분탕질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고요히 하나님을 앙망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망가진 인생에 대해서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 말씀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예전에 부끄러웠던 여러분의 삶들을 자랑스러운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5.부르짖게 하시는 하나님
“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18.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9.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시 107:17-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편 107편 중 두 구절입니다. 누구의 시인지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지만 이 시인은 언약 백성으로서 삶의 많은 굴곡을 겪었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책망하고 용서하고 인도하시는지를 경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본인인지 아니면 본인이 살아오면서 만난 어떤 인물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떤 가상적인 인물이 어쨌든 깊이 고통당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마 자신이 만난 많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 예전에 신앙에 실패하면서 하나님 앞에 연단을 받았던 때를 회고한 투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곤고한 사람이 등장하고 그 사람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는 그림이 등장합니다.
II. 곤고함의 원인: 미련함
A. 곤고한자의 고통
시인은 이 곤고함의 원인이 ‘미련함’ 때문이라고 못 박으면서 구체적으로 그 곤고한 자의 고통을 서술해 갑니다. “저희의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라고 말입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 식욕은 삶의 욕구와 비례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 거와 상관없이 그냥 먹기만 하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만은 대부분 살아야 되겠다는 욕구가 많은 사람들이 이 음식도 아주 부지런히 잘 먹습니다. 사람이 근심과 염려에 가득차서 곤고하게 되면 제일 먼저 먹기가 싫어집니다. 그 이유는 삶의 의욕이 사라졌기 때문에 음식을 통해서 넘치는 힘을 공급받아야 될 의욕이 상실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에 병이 들거나 마음의 깊은 시름이 있으면 음식을 멀리하게 되고 육체는 점점 쇠약해져 가게 됩니다. 아주 어리고 젊었을 때야 그저 세수만 해도 얼굴이 예쁘지만, 이제 연세가 좀 들게 되면 그래도 화장품도 좀 바르고 그래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삶의 의욕이 꺾이고 근심이 짓누르게 되면 먹기만 싫어질 뿐만 아니라 얼굴을 가꾸는 것도 싫어집니다. 미장원 가기도 싫고, 세수하기도 싫고 또 세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뭘 거기에 앉아서 이것저것 찍어 바르고 얼굴을 문대고 그러기도 싫은 것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의욕이 없는데 그까짓 것 누구보라고 그거 하겠어요? 그러고 나서 한 두어 주 지난 다음에 얼굴 보면 갑자기 확 늙어 보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얼굴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사는 이치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식물을 싫어한다고 하는 것은 넘치는 마음의 곤고함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고, 사망의 문이 가깝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에서 이 ‘문’이라고 하는 것은 권세와 위엄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사망의 문에 가깝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사망의 기운이 자기를 큰 힘으로 지배하고 있고, 그리고 ‘문에 가깝다’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매우 가까이 와있다 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죽음의 기운이 마음과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에까지 깊이 스며들어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가 오늘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이 사람의 상태입니다.
B. 범죄와 죄악의 결과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그 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사람이 이렇게 식물을 싫어하고 사망의 문에 매우 가까와 곤고한 자로서 고통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이든지 제 삼의 언약의 백성이든지 늘 이렇게 살지만은 않았겠죠. 언젠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넘치고 그에 생명력 있는 축복 속에서 믿음의 삶을 영위하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왜 식물을 싫어할 정도로 영혼은 지치고 곤고하며 사망의 문에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시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라”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려내고 있는 그림은 큰 죄를 짓고 머리에 죄수가 쓰는 칼을 쓰고 손발이 쇠사슬에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깊은 지하 감옥 혹은 동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마음이 괴롭고 삶이 고통에 얽혀 있는 것은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삶의 환경, 물질적인 고통, 이런 저런 외부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이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 마음의 깊은 독들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렇게 곤고한 자가 고통을 받는 것이 ‘범죄와 죄악의 결과’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의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고난을 당하매”라고 말입니다. 물론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아주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고 우리가 그런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나는 욥과 같은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의 시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도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나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과 시련의 열매를 내가 스스로 거두게 되었는지를 돌아보고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회를 가지며 겸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내가 당한 고난과 많은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올바르게 타이르고자 하시는 그러한 마음을 우리는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범죄와 죄악으로 말미암아서 영혼이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짧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궁사가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곧바로 과녁을 향해 날아갑니다. 그리고 ‘쿵’ 소리를 내며 과녁에 꽂힙니다. 우리의 인생도 여기 저기 들러 가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긴 생애를 산 사람이 가장 많은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90이 넘어 백 살까지 살아도 그 중 80년이 방황하는 시기였다면 그는 단 20년 밖에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은 살고 죽어도 주님을 믿고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면 10세에 회심을 했다면 20년이라는 긴 인생을 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헛된 것들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난 속에서 또다시 사람을 원망하고 죄 위에 악을 더하고, 불신앙의 죄를 더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불행하고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깊이 이러한 고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이 무엇인지를 듣고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도 곤고하게 살아가고 그리고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 속에서 마음 둘 곳이 없는 성도들은 오늘 이 음성을 주님의 목소리로 기억하기 바랍니다. 고통 속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오히려 여러분이 당하게 될 많은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묻고 깨닫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이 억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여호와의 뜻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항상 올바르게 삽니까? 항상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 충만한 삶을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많은 복을 받고 형통하게 살 때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을 몰랐지만 교만해진 그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련과 고난을 주실 때에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기고 자신의 범죄 때문에 이런 곤고한 상황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복의 근원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살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우리의 의지대로 내버려 두어 시험에 들게끔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살아가는 결과를 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곤고함과 시련, 그리고 고난의 많은 괴로움과 아픔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때리시고 치셔서 그래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때리고 여러분의 심령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인격적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은 기억이 없지만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분의 양심의 목소리를 듣게 하시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며 설교자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통하여 여러분을 일깨우셨고 여러분과 만나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격에 끊임없이 호소하시고 주님의 애끓는 음성을 여러분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하는 소리는 우렁차게 들렀으나 흐느끼는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은 여러분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이미 이 세상의 사람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분탕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밀한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까지 다다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쁘고 시련과 고난이 겹치면 겹칠수록 하나님과 고요히 대면하고 그 분께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들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기도의 열렬함과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깨달음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시련과 고난이 깊을수록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을 불러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이 고통을 당하면서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그 죄를 계속하는 동안에는 여러분이 곤고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많이 사랑하신다면 더 많이 회초리를 드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때리셔야 할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큰 특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랑이시니 우리가 그 신랑을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진심을 기억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한한 죄의 용서와 순종하기 위해서 필요한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큰 사랑을 버리고 무엇 때문에 그 분을 외면하고 불순종함으로써 죄와 슬픔과 어두움 가운데서 여러분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까? 힘이 없으면 주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죄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다면 눈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면 하나님은 주홍과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용서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아버지의 참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범죄하고 죄악 가운데 있음으로 곤고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이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사랑스런 자녀가 가출해서 어디엔가 노숙자로서 생활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빌어먹으며 질병에 걸려 있다면 부모인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평안하게 쉼을 얻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품안에서 모든 당신의 자녀들이 주께 사랑을 받으며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면서 그렇게 형제처럼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엮어진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곤고함과 시련과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하고자 하나님을 배반한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보다도 더 어려운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에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고, 그리고 우리가 그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렇게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뜻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죄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마치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있는 것처럼 교만을 꺾지 않고 생활한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끊임없이 불행한 길로 가는데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내버려 두신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친 자식이겠습니까? 사생자이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사람들만 하나님을 떠나서 형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심을 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에 가장 뼈저리게 후회가 되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겪은 인생의 많은 시련이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나서 과거를 돌아보니 나의 인생에 일어났던 수많은 시련들은 모두 주님이 안타깝게 나를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C. 지혜없음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범과와 죄악으로 파리한 영혼이 되어 주님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시인은 딱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미련해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미련하다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무엇일까요? 이 지혜는 자연적인 지혜와 신령한 지혜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지혜는 이 세상에서 사물들의 질서, 인생을 사는 자연적인 질서들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을 가리켜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이 세상의 변화무쌍한 사실들에 마음을 빼앗기느라고 그 뒤에서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질서들을 올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지혜 없음입니다. 그러나 종종 이런 면에 있어서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업을 하면 성공하고 정치를 하면 덕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말하는 이 지혜는 그런 자연적인 지혜,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신령한 지혜입니다. 그러면 이 신령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학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리의 빛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은혜가 떨어지고 시험에 들면 성경을 읽으면 짜증이 납니다. 뭘 이렇게 지키라는 게 많고 그리고 힘들게 살다가 교회를 갔더니 그냥 목사가 설교 시간에 달달 볶는 것입니다. 한 10년 넘었나 오늘 이 예배 시간에 그 지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아주 젊은 어린 자매였는데 이제는 뭐 권사님 될 정도까지 충분히 세월이 흘렀죠. 회심했나? 그때 그 자매가 회심을 하기 전인지 모르겠습니다. 등록 심방을 갔더니 어떻게 지내냐 했더니 교회만 갔다 오면 속이 다 뒤집혀서 신경질이 난대요. 목사가 심방을 갔는데 그렇게 얘기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속이 뒤집히냐? 누가 그렇게 예수 처음 믿으려는 그대의 속을 다 뒤집어 놓느냐?” “아무도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뒤집히냐?” “목사님이 혼자 뒤집어 놔요.” 그러더니 후에 아주 아름답게 회심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그래요.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좋은 예가 생각이 났네요. 빛이 없다고 칩시다. 빛이 없고 컴컴한데 이걸 이렇게 들여다봤습니다. 그러면 이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눈 좋아진 거 아시죠. 저 뒤에서 졸아도 알아요. 근데 예전에 눈이 정말 나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실수도 많이 했죠. 그 중의 하나가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을 끝나고 나서 음식점에 갔는데 아 그 샐러드가 있는데 양상추 하나가 그 접시에서 살짝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아까워하고 얼른 주워 먹었는데 휴지였어요, 휴지. 근데 모든 사람이 웃었는데 내 옆에 있는 한 여자만 안 웃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누구겠어요? 그게 사랑 있는 거 하고 없는 거 하고 차입니다. 눈이 나빠서 그 겪은 일화가 참 많아요. 교인들이 목사님이 자기만 모른 척 그러는데 교회 와서 멀리서 보면 모두 다 처음 보는 사람 같아. 눈 수술하고 와 가지고 충격을 받은 게 뭐냐 하면 내가 청년이라고 생각했던 자매들은 다 아줌마고 아줌마라고 생각했던 자매들은 다 할머니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왜 그렇게 밝아. 내가 눈이 나쁘니까 계속 불 달아가지고 편의점처럼 만들었어.
어둠 속에서 보면 잘 안보이겠죠. 그런데 불빛을 환하게 비추면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잖아요. 똑같은 것입니다. 그 빛이 진리의 빛이야. 그랬기 때문에 미련해지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말씀 멀리하고 눈에 보이는 데로 생활하면 저절로 미련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죄짓기 위해서는 마귀의 도움이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가 도와줘야지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은혜가 떨어지면 마치 언덕에 세워놓은 자동차에다 돌멩이 빼면 밑으로 내리 구르는 거는 뒤에서 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굴러 내려오듯이 미련해지는 것도 그런 거라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안타까운 경우를 보냐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은혜 많이 받고 말씀 사랑할 때에는 어쩜 그렇게 판단도 정확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하고 그런 줄 몰라요. 근데 어느 한 순간에 은혜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빛을 주지 못하니까 정말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으로 한순간에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숨이 딱 끊어질 때까지 누구도 감히 자신은 이제 지혜롭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밝은 빛 아래에서 그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보고 이럴 수 있는 지혜. 이것이 있어야지만 곤고한 인생 살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은혜 받았을 때에 여러분에게도 뭐 좀 도움을 구하려고 인생 상담 오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러면 여러분 보기에 정말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죠? 요즘은 여러분이 그러지만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다. 원래 그 사람들이 지능 지수가 여러분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안 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살아 있을 때에는 판단이 모든 게 분명합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미련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범죄와 죄악 속에서 고난을 당하며 절망 속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III. 부르짖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고치시는 방법이 있는데 오늘 성경은 “부르짖게 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망가진 것들을 고치신다는 뜻입니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항상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열심히 운동해야 되는데’ 그거를 매일 생각하는 게 한 15년쯤 되었습니다. 근데 그렇게 운동하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또 바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씩 시간을 내는 게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 시간 있으면 책보고 또 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건 그래도 핑계고,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운동하는 기쁨을 잘 못 느끼기 때문에 그게 노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5~6년 전에 한번 운동에 맛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매일 한 7km씩 뛰었거든요. 7km 내지 8km 그 뛰고 나서 온몸에 땀이 쫙 흐를 때 그렇게 희열이 느껴지더라고요. 몇 달 그렇게 하다가 그때 계속 했어야 했는데 또 뭐 일이 몰려 닥치고 하니까 뒤 순위로 밀리게 된 것입니다. 요즘 며칠 째 땀 흘리면서 하는데 근데 땀 흘리는 거는 몸에 참 좋잖아요. 그죠? 근데 그 땀도 어떻게 흘리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사우나에서 조용히 앉아서 노닥거리면서 흘린 땀은 성분 분석을 해보니까 거의 물이래요. 사람들은 그러고 나서 나오면 500g 내지 600g 빠지거든요. 살이 빠졌다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 몸에서 물을 빼내서 약간 말린 것입니다. 건조시킨 그래서 몇 사발 먹으면 다시 원위치 됩니다. 그런데 운동을 하잖아요. 거기에서 나오는 땀을 성분 분석을 해보면 가만 내버려 두면 우리 몸 밖으로 거의 못 나가는 노폐물들, 중금속 막 이런 것들이 그 땀을 통하여 쏟아져 나오는데 그거는 거의 오줌 수준입니다. 오줌, 오줌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소고기 중에서 비싼 부위가 어디냐 하면 많이 움직이지 못하는 부위입니다. 넙적 다리나 이런 살은 싸요. 장조림 하는 거 이런 건 싸요. 거기에는 기름이 없어 하도 운동을 해서. 그런데 운동을 안 하는 이 안심이나 등심이나 이런 데는 막 사이사이에 제일 운동 안하는 부위가 꽃등심 부위입니다. 그게 살 하나 기름 살살 배어 있잖아요. 그래서 구우면 입에서 살살 녹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와 미련함, 부패성 이런 것들이 모두 그 우리의 맘 사이사이에 기름기처럼 하얗게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거는 안 빠져나와요. 여러분 그 위에다가 소에게 목욕을 시킨들 기름이 빠져 나오겠어요? 소에게 재미있는 영화를 보여주면 그 기름이 빠져나오겠어요? 우리의 영혼에 끼어 있는 죄의 기름, 부패성의 기름들은 빠지지 않아서 그것들이 우리 맘 전체를 지배하고 하나님 버리고 나 중심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내가 기분 나쁘지 않고 내 이익에 충돌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간절한 기도의 운동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활발한 운동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피의 펌프질입니다. 그런데 졸고 자면서 그렇게 드리는 그런 형식적인 기도를 가지고는 털끝만큼도 우리의 영혼의 근육이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래 기도하는 척하고 나봐야, 나는 그래도 기도하는 시간이 있다 라는 교만이 쌓일 뿐이지 영혼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당하나 이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영혼을 하나님 앞에 고정시키며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간절히 눈물로 마치 이 세상에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에도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분을 만나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온 영혼이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여러분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IV. 결론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혼자 씩씩하게 살아가야 할 때 하나님 크게 넘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간절한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의 마음 갈피갈피에 끼었던 더러운 악과 삶의 불결한 동기들, 돈 벌고, 사업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들의 불순한 동기들을 하나님이 그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영혼을 출렁거리며 쏟아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언제 그런 기도를 해보셨어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주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내 인생을 걸고 담판을 지어본 적이 언제 있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을 때까지 곤고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을 내버려 두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살았던 많은 날들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께 부르짖는 사람들을 불러 다시 용서해 주시고 다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선택하십시오. 주님을 외면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서 곤고하게 사시렵니까? 아니면 이제는 정말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 것입니까?
6.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2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께서는 비록 당신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때 멸시하여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처럼 되었지만 그런 사람들을 버려두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다시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고쳐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해 당신의 품에서 멀리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영원히 당신을 떠나 사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자신을 돌이킬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해설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이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함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을 다시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곤고한 자도 당신의 자녀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107편 전체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시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의 머리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전반부에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선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셨는지를 노래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속해있는 후반부에서는 그렇게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왜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아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II.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겪는 시련과 많은 환란이 이 세상 때문에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심지어는 그런 상황을 내버려 두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으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그 모든 이유가 우리의 불순종과 죄악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더 믿었기 때문에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A. 곤고한자를 자녀로 여기심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이 있어도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의 마음대로 자신을 주인 삼으며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이 두 마음은 늘 싸웁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손더러 우리의 발더러 이리로 가라, 저것을 집으라 명령하면 잘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하면 왜 그런지 마음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의 마음이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 마음은 거듭난 마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아버지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마음이고, 또 다른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를 하나님 삼으며 살고자 하는 방탕한 마음입니다. 두 마음이 서로 원수이니 한 마음이 저 마음보고 명령한들 그 마음이 원수처럼 여기는 또 다른 마음의 지시를 들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고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이 불순종했고 지은 죄가 크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고 그래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마음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악하고 더러운 인간이지만,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기의 새끼를 어떻게 기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식이 자기의 마음에 들을 때도 있고, 들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그 자식 때문에 기뻐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마음을 후벼 파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 자식을 차마 자기의 자식이 아닌 것처럼 대하지는 않습니다. 악인들이라도 자기 자식을 향한 사랑이 이러하거늘 완전하신 하나님이야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그 사랑을 느낄 때도 있고, 못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은혜 생활을 하고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면 하나님이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지가 매일 매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때로는 슬픔과 고난 속에서도 찬송합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B. 말씀으로 고치심
그래서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에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계셔서 그 어두움의 심연에서 벗어나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과 고난 속에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갈 때 우리를 건지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원더우먼처럼, 슈퍼맨처럼 그렇게 날아와서 우리를 그 깊은 시련에서 환경을 바꾸어 건져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의 근원부터 치료하고 고치심으로써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 앞에 복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의 근원이 환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의 근원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의 근원을 언제나 다루고 싶어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쳐져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복들을 오히려 그 복들 때문에 우리들이 더 불행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의 근원을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은 그의 영혼의 움직임이고 한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많은 행동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 행동들은 한 가지 방향으로 그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의 운명을 따라서 그는 시련과 고난, 위기를 만나기도 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은혜의 삶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바뀌지 않는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는 간절히 우리의 우리 자신은 바뀌지 않고 우리의 환경만 변화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비참한 환경,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찬 난관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이끌었던 그 근본적인 뿌리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직접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의 도구를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께서 이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사용하시므로 우리는 돌 같았던 마음이 물같이 녹고, 도저히 바꿀 수 없었던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당신의 품으로 돌이키실 때에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힘으로 옮길 수 없었던 우리의 무겁고 아주 큰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움직이고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설악산 꼭대기의 중턱에쯤 올라가면 흔들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습니다. 작은 집 채만 한 큰 바위인데 신기하게 한 사람이 열심히 흔들면 흔들거린다고 해서 흔들바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큰 바위도 인간의 완력으로 흔들 수 있는데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완력으로 흔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흔드는 방향이 기쁘고 슬퍼하는 거라면 세상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슬픈 이야기 하나 들어도 눈물이 핑 돌고, 기쁜 웃긴 드라마 한편을 보아도 깔깔대고 웃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웃고, 울고, 떠들고 나도 악한 사람은 여전히 악하고, 선한 사람은 여전히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우리의 본성을 고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그때에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살아온 우리의 날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한없이 낯설게 보이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그 모든 것들이 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껏까지 나와 하나 되었던 내 마음이 나와 동떨어져서 나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나를 꾸짖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를 처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C. 돌아오게 하시는 방법
그러나 그렇게 꾸짖고 처벌한 듯 그 마음도 이 마음도 나의 마음이고 저 마음도 나의 마음이니 우리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핑계 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주님 앞에 용서와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 앞에 나오는 자기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돌이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의해 설복될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의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곤고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아주 깊이 의지하면서 그래서 그 말씀으로 우리 자신도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삶을 바꾸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받는 많은 물질의 복과 명예의 복,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번영의 복은 꼭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없지만 이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법칙들을 두셔서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권모술수에 능해도 이 세상에서 악의 구조 속에서 이것들을 이용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게 도달한 모든 복이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악인의 번성과 무법한 자들의 번영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참된 복이 이러한 일반적인 세상의 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고,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들은 까치발을 뜨고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대박이 터지는 행운으로 자신의 인생의 길을 바꾸어 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그들을 위한 영원한 행복이 아닌 줄을 아시기 때문에 그 보다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그들의 지성의 말을 건네심으로 그들을 설득하시고 감화시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이 모두 사람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 분의 성품을 본받아 그 분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으로 행복하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으로 아버지이신 그 분의 마음이 기쁨을 얻는 그런 관계가 될 때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길은 신앙에서 이탈하지 않고, 불같은 충성심으로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기까지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뼛속 깊이 사무친 우리의 죄성 때문에 일평생 언제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살면서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을 수 있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세월이 흐르고 나면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 길 잃은 양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의 품을 떠나겠다고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반항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로 당신을 떠나게끔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메마른 영혼으로 곤고하게 살고 난 후에는 당신께 돌아올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께 돌아오고 난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의 품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하나님과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은혜의 시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적으로 처음 사랑이든지 혹은 크기와 질에 있어서 처음 사랑이든지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이 벌레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자기를 모두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은혜의 시기, 그래서 살아있는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을 하던 특별한 사랑의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때에 무엇 때문에 행복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을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거룩함과 진리’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내 마음에 기쁨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에 아침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때리시고 우리를 책망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같아도 짐승과 같이 더러운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중 일부로 삼아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뻤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남에게 있는 많은 재물과 세상 사람들이 선망에 찬 눈초리로 쳐다보는 높은 지위가 없었지만 그러나 아침마다 우리에게 다가와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날마다 어둠 속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리 때문에 감격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들을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가르쳐 주신 감격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짐승과 같이 무지한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었고 어두움 속에서 밝은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따라 가는 평화로운 삶의 기쁨은 무엇에도 비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우리도 이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행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 사랑 안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는 세월이 흘러 쇠잔해져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강건하고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늘나라를 향한 거룩한 소망이 가득 찼고, 그래서 우리는 저 나라에 그 밝은 빛으로 이 나라의 어두움을 비추며 우리는 미끄러지고 침륜에 빠지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일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기쁨이었고 그리고 그 주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얻고 고침을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한 주간동안도 이 모든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이기며 살아갈 은혜의 힘을 우리에게 주었기에 주일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장날이었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의 손을 빌어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우리의 티끌 같은 섬김으로 소중한 영혼들이 어둠 속에서 빛으로 돌아올 때 그 기쁨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비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III. 언제나 부르시는 하나님
여러분에게는 이런 때가 없었습니까? 과연 지금처럼 메마른 영혼으로 팍팍한 인생을 살며 이 세상의 죄에 빠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이 어두움의 나라에서 건지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넘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힘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들을 깨닫지 못해 불안하고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넘어졌든지 거기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만한 은혜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힘을 다해 아름답게 봉사할 때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쓸모 있을 때까지만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과연 쓸모 있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의 선함이 구원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형상을 닮은 자기의 자식들을 차마 잃어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구원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가 충만할 때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험에 들고 죄에 빠졌을 그때에 주님을 더 간절히 찾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떠나서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던 때도 있었지만 여러분에게는 언젠가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돌아오던 회개의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회개와 부르짖음을 멸시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났다고 고백하고 주께 용서를 빌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주님이 ‘너무 늦었다. 네가 내게 돌아오기에는 나를 너무 많이 떠났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나 거기 계셔서 당신이 주신 모든 좋을 것들을 허랑방탕하게 잃어버리고 돌아왔던 그 아들을 기다렸던 그 아버지처럼 주님은 언제나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그렇게 찾아온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내가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여러분 중 누구도 주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버림받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지만 이 세상의 우리 아버지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하나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큰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어머니 같은 아버지가 거기 계셔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울 수 없을 때에 목회자가 눈물로 기도하고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 탄식하며 여러분을 위해 빌어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 모든 불순종과 악을 내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원망했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십시오.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고 그리고 누구에게 원망하는 것이 있다면 오늘 마음속에서 모두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버리고 우리의 부모도 우리를 종종 저버리는 적이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 밖에 돌아갈 곳이 없다고 고백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여러분을 맞아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간증을 끌어안고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배반하고 생활이 우리를 속일 때에라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강할 때와 약할 때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 16.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더미 두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 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 15:14-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있기 전 사사들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사사라고 하는 인물은 바로 원래 그 이름의 원뜻은 “쇼패트” 재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치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런 지도자였습니다. 삼손은 매우 해학적인 인물입니다. 전대미문의 큰 육체의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고, 20년 동안 사사로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그의 육체에 주어졌던 큰 힘을 능가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블레셋과 싸우고 있는 삼손이 등장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부터 있었던 민족들이었고, 그리고 오랫동안 이스라엘 남쪽에 거주하면서 영향을 행사하였던 족속입니다. 원래는 해양 민족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팔레스타인에 자리를 잡고 일찍이 발달한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마병을 거느린 잘 훈련된 군대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업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인근의 나라를 약탈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았고 그래서 추수 때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해서 노략질을 많이 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 블레셋을 이스라엘을 위한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자기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범죄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이 블레셋을 회초리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았을 때에는 이들을 능히 지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는 증거를 정치 속에서, 외교 속에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 앞에 보면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이 삼손이 마음에 들어 했던 여자들이 여럿 있었고, 그의 아내도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장인과 자신의 아내까지 블레셋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보복을 하게 되었고, 이 보복은 추수철에 블레셋의 모든 곡식들을 불태워 버리는 일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기 나라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병사들을 이끌고 이스라엘에게 나아갔습니다. 삼손을 내놓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는 기세였습니다. 마침 이 삼손은 보복을 피해 에담의 바위 틈 사이에 잠시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명이 무리지어 에담의 바위 앞으로 갔고 삼손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삼손은 자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순순히 붙잡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자신을 넘겨주게 하였습니다. 물론 생명은 해치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 말입니다. 이제 자신을 블레셋 백성들에게 양도해 주고 이스라엘이 물러갔을 때에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눈에 가시처럼 괴롭혔던 이 삼손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시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삼손을 단단히 묶고 있었던 그 삼 줄이 힘없이 끌러져 버리고 삼손은 괴력을 발하며 이제 블레셋 사람들과 혼자서 전투를 수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삼손의 강함
A. 하나님의 권능
여기에 나오는 이 삼손의 강함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직전에 여호와의 신의 큰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게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도 삼손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장사였으나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큰 권능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때 그는 괴력을 발휘하여 적군을 물리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위기의 순간
그 뿐만 아니라 이때에는 절실한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블레셋에게 붙잡혀 가고, 이스라엘 민족이 쳐들어온 블레셋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사사 삼손에게 큰 권능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무장을 하고 자신을 잡으려고 오는 밀물처럼 몰려오는 블레셋의 군사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삼손을 붙잡기 위해서 무장을 하고 나아왔으나 삼손은 바위틈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무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할 만한 도구를 찾아보기 위해서 사면을 돌아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고 다만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은 단단해 보이는 나귀의 턱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삼손은 이 나귀의 턱뼈를 쥐고 자기를 향해 물밀듯 밀려오는 수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전투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춤추듯이 나귀의 턱뼈를 휘둘렀고, 때리는 곳마다 급소에 맞아 이 블레셋의 군사들이 강아지처럼 널브러졌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천 명의 블레셋 군사를 때려죽였다고 하였으니 이 전쟁은 정말 굉장한 혼자만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이렇게 강하고 큰 능력과 힘을 가지고 살아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곤란하고 어려운 때인데도 능히 그것을 이기고 극복할 뿐만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기도 하였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이때가 나의 참 모습이고, 지금처럼 힘을 잃어버리고 연약해진 때가 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그리고 충만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강한 큰 능력으로 이기면서 살았던 때에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 주님 때문에 이겼던 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붙잡으신 주님의 손에서 우리가 멀어질 때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지극히 연약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만은 하나님은 우리가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독립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로부터 많은 은혜를 공급받지만 우리가 그 은혜를 믿는 것은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셔도 우리는 은혜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부어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기에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III. 기도와 영적소생
이렇게 삼손이 춤추듯이 전투하여 일천 여명의 병사들을 때려 죽었고 아마도 남은 군사들은 두려움 속에서 도주하였을 것입니다. 사면을 돌아보니 더 이상 자신에게 항거하는 군인이 없을 그때에 순식간에 탈진하게 되었고,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엄습하였습니다. 싸우던 턱뼈를 피 묻은 그 나귀 턱뼈를 던져버리고 그는 어린 아이처럼 주저앉아서 울부짖었습니다. “주께서 주의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만은 내가 이제는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손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그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도망갔던 블레셋의 군사 중 가장 연약한 군사 하나가 와서 자기의 목에 칼을 겨누어도 항거할 기운이 없어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죽어 버리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어지는 교훈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기도와 영적인 소생의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A. 탈진과 목마름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탈진과 목마름이었습니다. 일천 명의 병사를 때려눕히기까지 아무리 괴력을 지닌 장사였으나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완전히 탈진하게 된데다가 타는 듯한 목마름이 엄습하여 이제 육체의 생명의 위기를 느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모든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삼손이 힘겨운 전투를 수행할 때에 그 앞에서 샘물이 줄기처럼 솟아나 그 샘물을 마시면서 전쟁을 하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이 삼손을 붙들고 있었지만 이 전쟁이 모두 끝날 때까지 자신의 온 힘을 소진하여 싸우게 하셨고 그것이 끝났을 때에 그는 죽을 것 같은 탈진과 목마름 속에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예전에 춤추듯 싸우며 일천 명을 때려눕히던 그 용맹과 그 강한 기력은 이제 사라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까? 강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 강함이 자신에게로부터 온 강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탈진하게 하시고 목마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통해서만 공급된다는 것을 믿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B. 엔학고레의 샘
삼손이 피 묻은 나귀 턱뼈를 던져버리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우묵한 곳을 터치셨으니 여기가 바로 ‘엔학고레’의 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옹달샘이 있는 약도를 손에 쥐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삽이나 곡괭이를 주면서 저 우묵한 곳을 파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은혜의 샘을 터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당신이 베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 선한 의지를 갖게 하시고 보지 못했던 진리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돌이켜 거룩한 뜻을 세우게 만들어 주십니다. 모두 당신 하고 싶은 데로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은혜를 베푸실 때에 홀로 베푸시지만 조짐이 없이 베푸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이렇게 죽게 된 삼손 앞에 터뜨려 주신 이 은혜의 샘을 ‘엔학고레’의 샘이라고 이름 짓게 해 주셨습니다. ‘엔’은 샘물이라는 뜻이고 ‘학고레’는 그 부르짖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 분사의 원래의 뿌리가 되는 동사 ‘카라’는 ‘말하다. 부르짖다. 외치다’라는 뜻인데 마음속으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목청껏 외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는 삼손이 바로 그 라맛 레히에 주저앉아서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부르짖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지만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이 은혜를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한 영혼의 목마른 갈망은 바로 간절한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하장사인 이 삼손도 하나님 앞에 ‘엔학고레’의 샘에서 물이 터져 나올 그때까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탈진한 가운데 절망하기보다 낙심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기력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그 앞에 샘을 터치셨습니다. 맑은 생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 삼손은 거기에서 이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소생하여 다시금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블레셋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너무나 많이 분산되어 있고,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많이 혼란스러워져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에워싸고 있는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작고 사소한 걱정거리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근본적이고 인생 전체를 걸기까지는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제에 우리들은 에워싸여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떠하든지 우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 복된 처지에서 살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애쓰면 애쓸수록 이 많은 문제들은 우리에게 더 커다란 사슬이 되어서 우리를 얽어매고 오늘 해결된 것 같은 문제가 내일은 다시 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우리를 다시 찾아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땅에서 일어난 문제들이니 이 땅에서 있는 자원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속에서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고, 더 많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향하여 앙탈하는 마음까지 갖게 되어 불순종 위에 악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몸부림치며 애쓰지만 언제나 그 결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마지막에 나타나는 결말은 영혼의 더 큰 고통과 부자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음이 깊이 탈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 경험을 아는데서 끝나는 것은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이 인생의 실존적인 문제들을 우리가 어디에서 해결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이 무능을 어디에서 우리들이 해결할 수 있고 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시간만큼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에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끓이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한 분을 향하여 마음을 타오르게 하고 간구와 기도의 마음을 바친다면 아마 여러분의 인생은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탄식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믿는 자는 바로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말세가 되면 우리의 마음이 감각적인 것들에 사로잡히고 정신이 산산이 찢어져 분산됩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근심부터 시작해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장신구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주택과 의복,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염려와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미래의 결핍에 대한 불안 때문에 마음은 산산이 찢겨져 하나님께 바쳐질 마음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물질 문명이 번영을 구가하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점점 여유를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사회는 무한한 경쟁으로 치닫고 그 속에서 단 하루라도 몸부림치지 않으면 뒤로 떠 밀려가고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를 경험합니다. 그러니 산산이 찢어진 마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자의 신앙의 가장 훌륭한 외적인 고백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기도가 교회 속에 언제나 가득하였습니다.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교회는 정말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간절한 성도들의 기도 소리가 있었고, 새벽이면 부르짖는 간절한 울부짖음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는 은혜를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어느 교회든지 간에 항상 교회 천장이 떠나갈 듯 울리는 와글거리는 간절한 기도로 항상 예배는 마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일날 조국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성도들 가운데 절반 이상의 사람이 하루에 10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기도 시간이 거의 없는 사람들도 여기 꽤 많이 있을 것이고, 아마 지난 한 주간 동안 단 한 번도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며 눈물 흘려 보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절반도 더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찮은 삶을 살면서 우리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승리하리라고 생각합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홍수 철에 떠내려 온 쓰레기같이 커다란 강물 위를 떠돌면서 가두어둔 댐에 갇혀서 이리저리 떠돌며 썩어가면서 그 댐에 물을 부패시키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신앙생활 속에서 과연 그것을 어떻게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세상에 살고, 그들도 세상에 살고 비록 우리가 이 모든 세상이 주님의 것인 줄 믿지만 불법하게 취한 하나님의 유업을 빼앗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경쟁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의 자원으로만 살지, 하늘 자원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의 자원으로 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시는 천상의 자원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급됨으로써 그들과 함께 싸우면서도 그들처럼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똑같이 경쟁하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주인된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덕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세상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 주님의 나라를 방해할 물질들이 온전한 질서로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로 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통해 공급되는 것입니다.
C. 소생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여기서 소생하시는 하나님을 삼손은 만났습니다. 샘을 터뜨리시고 생수가 강같이 쏟아져 나올 때에 삼손은 그 물을 먹고 정신이 새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소생하는 놀라운 은혜를 누렸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솟아나온 그 물이 적셔진 것은 그의 목이었고, 축여진 것은 그의 목마름이었지만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인간, 이제 쓰레기와 같은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해도 항거할 수 없게끔 지쳐버린 자신을 위해 기적의 샘을 터트리는 것을 보면서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여러분에게 당신의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흠 없는 빛들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한 떨기 별똥처럼 그렇게 줄을 그으며 이 어두운 세상에 불처럼, 불꽃처럼 살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은혜를 베푸시기를 매우 인색해 하는 구두쇠 같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은 큰 죄와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죄는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모독이요, 오해인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모두 당신의 이름을 위해 살 텐데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도 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에 인색하신 구두쇠 같은 하나님이 되시겠습니까? 문제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지 않기 때문에 샘이 터지는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간절한 울부짖음,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들로도 나의 이 목마른 영혼을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그 구원의 은혜가 나의 심령에 부어질 그때에만 내 영혼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이 간절한 확신 속에서 주님을 찾는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는 우리가 친히 아주 오랫동안 경험했고, 그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우리는 커다란 시험과 악에 빠지면서 경험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 기다려 볼만한 더 좋은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겠습니까? 신앙의 위대한 힘은 두 발은 이 땅을 딛고 살아도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경건한 성도들은 주 앞에 부르짖을 때에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간청하는 구원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가식과 위선의 껍질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해지는 사람은 그 사람 가장 가까운 곳에 기도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주님을 위해 전쟁을 수행했다면, 비둘기 같은 순결함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우리는 기도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며 우리 속에서는 우리의 마음 전체가 기도의 향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탁월한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진실해지기만 하고 정직해지기만 하면 기도의 문은 가까이에서 열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져야 합니다. 회피하지 말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나 행한 것은 죄밖에는 아무것도 없노라고 하나님 앞에 깊이 고백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를 버리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한 번의 기도로 용서의 확신이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간절함을 더욱 더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주님의 친절한 표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기도하게 됩니다. 마음이 모아지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산산이 찢어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새롭게 모아지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주님은 놀랍게도 우리의 영혼을 수습해 주셔서 산지사방으로 찢어진 우리의 정신을 십자가로 모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나 밖에 없는 자기의 외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재물이 되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이것이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하다고 간구할 때 하나님이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거절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IV. 결론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굳게 믿는 것만이 무신론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실천적인 무신론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관념적인 무신론이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기도하지 않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실험해 보십시오. 몇 주의 시간을 내어서 기도원에라도 올라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결단을 하고 새벽기도라도 나온다면 더 좋겠지만, 잠을 쫓으며 며칠 교회에 있으며 철야기도를 한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도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디서든지 마음을 모으고 그 심령으로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영혼의 닻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마치 자기를 두고 멀리 떠난 엄마를 부르는 어린 아이의 울부짖음처럼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고, 내 앞에 펼쳐진 이 난관과 모든 시련이 내가 하나님 없이 살아온 교만의 결과였다고 고백을 하며 이제는 돌이키게 해 달라고,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이제는 주님 없이 넉넉히 살아가는 교만을 거두게 해 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마음을 모으고 주님 한 분 이외에 아무 곳에도 시선을 주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충분한 은혜를 갈망하며 인생의 어느 골목 한 모퉁이에서라도 당신의 이름을 사모하며 부르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은혜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는 그 결과는 만족스러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은 약속의 보증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노라’ 라고 하는 약속이 깃들어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십시요.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권면하노니 마음을 수습하고 하나님 한 분을 앙망하며 간절히 기도하십시요. 주님이 여러분의 곤고한 인생 그 현장 바로 앞에 은혜의 샘을 터트려 주실 것입니다.
8.내 얼굴을 찾으라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시 27:8-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아마 이 27편 시편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편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라고 시작되는 유명한 시편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와서 하나님이 특별히 자신을 부르는 때를 지각하고 있습니다. 시편 27편 전체는 탄원 시이지만 앞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확신과 감격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특별히 부르시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II. 특별히 부르시는 때
A. 언제나 있는 말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언제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옆에는 성경이 있고, 언제나 펼치면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지 손을 뻗으면 우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풀어놓은 책들이 있습니다. 교회 와서 지체들과 교제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만난 경험과 간증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도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드리러 나오면 이렇게 여러분은 듣고 목회자는 설교 하지요.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 기술이 발달된 때에는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지요. 예전에는 예배 시간에 늦으면 성도들이 늦었는데 어떤 지체의 고백에 의하면 회사 끝나고 아무리 빨리 와도 8시 정확하게 수요일 날 도착하기가 힘들대요. 그러면 버스타고 오면서 아이폰을 꺼내서 혹은 안드로이드 폰을 꺼내서 우리가 개발해 놓은 어플을 누르면 그러면 실시간으로 예배의 상황이 나오는 것입니다. 끊어지지 않고 설교를 다 듣고 혹은 교회에 못 오는 날이면 퇴근하면서 그렇게 아이폰을 켜면 수요 예배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고 가까이에 있고 어디서든지 접근할 수 있습니다.
B. 말씀으로 부르실 때
1611년에 킹 제임스 버전이 처음 나왔을 때 성경을 모두 번역하고 인쇄해서 팔았는데 그때에 성경책 값을 오늘날 인프라로 계산을 하면, 인플레이션으로 계산을 하면 4억 3000만원이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돈 만원 한 장만 들고 가도 어디서든지 성경을 살 수 있고 또 어떤 교회 가면 거저 성경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씀이 우리 곁에 늘 펼쳐져 있지만 그것이 거기에 있는 동안은 어떠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정말 그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시는 특별한 음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부르시는 그 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성적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발견하려고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물체와 같이 형체를 입으신 분도 아니요, 손을 뻗어서 만질 수 있는 물질에 속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으로 우리의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를 깨닫지 않으면 누구도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에 성경의 진리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하는 이러한 지성의 헌신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어느 한 순간에 주님께로부터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그는 응답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여호와여 내가 주님의 얼굴을 당신 말씀대로 찾겠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응답한 것이요, 지성의 지시에 대해 의지가 순종한 것이며, 또 둘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겠다고 하는 의지의 결단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많은 경험들을 듣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을 만나는 경험 이외에는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방황하고 이 세상에서 헤매며 기적을 보려고 애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이미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울려 퍼지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고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주님의 마음도 느낄 수 있을 때 그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찾는 이것은 어찌하든지 주님이 자신에게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에 자신을 복종시키려고 하는 진지하고 헌신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한 20년 전인가 어떤 사람이 여권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 가는 비자를 내기가 쉽지 않을 때인데 미국 가는 비자까지 매달린 여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탁자위에 올려 놓은 게 쓰레기 통으로 떨어졌고 그것이 쓰레기인줄 알던 식모가, 파출부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고, 그 바깥에 있는 쓰레기통을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수거해 버려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것을 찾을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그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혹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 쓰레기들이 모두 모여서 난지도라는 곳으로 가는데 거기에는 아무렇게나 막 쓰레기를 버리는 게 아니라 쓰레기 들어오는 순서가 있고, 수거해 오는 지역이 있는데 거기다 쏟아 붓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 쓰레기들 중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찾기 위해서 휴지나 양은, 이런 것들을 찾기 위해서 넝마주의들이 분류 작업을 하는데 혹시 그 사람들한테 부탁해 보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더래요. 실제로 그렇게 해서 몇 달 전에 어떤 사람은 다이아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찾았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거기를 달려가서 보니까 산더미처럼 쓰레기가 쌓여있는데 거기에서 손바닥 반밖에 안 되는 그 여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십여 명의 넝마주의들을 모아놓고 이런, 이런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찾으시는 분들에게는 이만큼의 상금을 주겠습니다. 그러고 현상금을 걸었답니다. 근데 결국은 그것을 찾았답니다. 그것도 아주 물에 젖지도 않고 고대로 있는 것을 쓰레기 속에서 찾았대요. 참 대단하죠. 그러니 그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린 다음에 얼마나 간절히 그것을 찾고 싶었으면 난지도까지 가서 넝마주의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부를 하고 그리고 매일 전화통에 매달려서 그것 찾았다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겠습니까? 이게 찾는 겁니다. 그냥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말면 말고 그러면 찾는 게 아닙니다. 정말 간절히 찾으면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진짜 찾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어쩌면 10년, 20년 예수 믿으면서도 한 번도 그렇게 절실하고 간절해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대요.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갔는데 대출 안 해주려고 하는데 대출 좀 해 달라고 간절히 당부하는 그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은행에 안가도 됐을 거라고 말입니다. 뭐 반은 신뢰하고 반은 신뢰하지 않지만 우리 신앙생활에는 앞뒤가 뒤바뀐 게 되게 많아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그런 얘기합니다. 아, 열린 교회는 그렇게 세례 받기가 힘듭니까? 왜? 그 뭐 4주나 교육을 받아야 하죠. 또 요즘 세상에 누가 또 시험까지 봐야 되고, 리포트까지 내야 되고. 내 그래서 그랬습니다. “당신은 운전면허 가지고 있소?” 가지고 있대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운전면허 합격할 때에 공부를 많이 합니까? 세례 받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합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운전면허 받을 때 공부를 더 많이 한대. 그게 잘못된 것입니다. 자동차 하나 몰고 다니는 것도 그렇게 꼼꼼하게 시험을 봐서 두 번 세 번 떨어지고, 우리 교회 어떤 분은 28번을 떨어졌다고 그러시는데 그렇게까지 어려운데 이걸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은 인생 전체를 운전하는 건데 그거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어떻게 세례를 받으려고 그러겠어요? 정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을 위해 간절히 찾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간절히 찾는 것 같은 그러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본 적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III.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도
A.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함
그래서 오늘 시인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세 가지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숨길 수가 없지만 주님은 얼마든지 당신 자신을 숨기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가 당신을 볼 수 없도록 숨으실 수 있고, 또 주님이 숨지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얼룩질 때에 마치 거울이 있어도 그 거울이 더러워질 때에 물상을 분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당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을 부르짖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형통한 삶의 여건 때문에 주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던 마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데 이 세상에 속된 것들에 달라붙어서 주님을 찾을 마음이 없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 세상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을 온전히 세상에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칠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이 사실은 그를 정말 사랑해 주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주님이 시련과 환란을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때리시기 위해서 그의 여건도 때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렇게 시련을 만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의 마음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 세상에 달라붙은 그 마음을 때리시기 위하여 잠시 시련 가운데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큰 시련과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할 터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시련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목표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시련에서 벗어나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시련이 끝나게 해 주시면 예전보다 더 빨리 세상으로 도망칠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이러한 모든 실패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시련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이전에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주님이 멸망시켜 주는 것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절한 소원은 내 인생의 이 시련과 풍랑 속에서 주님께로부터 직접 당신의 뜻을 듣고 싶다는 대면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빛 앞에서 사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삶이란 사실을 부인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우리에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붙들고 진리에 붙잡혀서 사는 삶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바로 그 진리 안에 있고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진리의 주인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그 진리를 따라서 살도록 간절히 우리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해 주고자 하지만, 이 진리는 금이나 은 같이 우리의 손목에 손바닥에 쥐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들이 악한 사람들 손에 들어가서 악하게 사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정당당하게 사업을 잘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 벌었는데 정작 그런 축복을 받은 나 자신의 마음이 부패하고, 이 세상 원수들의 마음과 똑같아 진다면 이번에는 주님이 주신 축복을 사악하게 사용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얻은 물질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흘려보내어 악한 사람들 손에 그 물질이 있을 때에 나빠진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세상이 되도록 만들어 가는데 이바지할 것 아니겠습니까? 과학에 대한 좋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면 그 좋은 지식을 가지고 온갖 나쁜 물건을 만들어 이 세상의 행복을 파괴할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쓰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것입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많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책임을 맡아 주님이 원하시는 데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는 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세상에 흩어져서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호떡 가게는 다른 호떡 가게보다 친절하고 크고 맛있고 뛰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공직생활을 하면 다른 사람보다도 공정하고 헌신적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하든지 간에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마음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우리 모두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고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고, 경마 잡히면 감투 쓰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따라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모든 즐거움들은 우리가 허리띠를 풀고, 우리의 마음의 긴장을 늦추고 마음껏 탐닉해도 좋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게임 회사를 차려서 새로운 게임을 개발해서 보급을 했고 상당한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이 그 회사에서 나온 게임에 빠져서 아이들이 망가졌다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어오기 시작을 하면서 정말 우리 회사가 만든 게임이 아이들을 그렇게 망치는 것만은 아닌데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회사에서 나온 게임을 매일 한 시간씩 하기로 결심했대요. 한 달 만에 중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깊이 깨닫고 회사를 정리하고 교육 콘텐츠 사업으로 전환했다는 고백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생전 불면증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한 달 게임하는 동안에 중독이 되고 불면증에 걸립니다. 어제 이야기를 들으니까 컴퓨터에서 게임하는데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게임을 하잖아요? 그리고 거기다가 댓글도 단대요. 그런데 뭐가 서로 의견이 안 맞고 말로 다투잖아요. 예전에는 그렇게 끝났는데 나 휴대번호 몇 번이다, 너 몇 번이냐? 우리 만나자. 그리고 만나자 마자 게임에서 나오는 것처럼 똑같이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것이 어떤 것들은 죄가 아닌 것처럼 보여도 탐닉하고 거기에 온전히 빠질 때에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그런 것들 별로 없습니다. 마음 놓고 아무리 많이 누려도 우리에게 부작용이 없는 행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당신 앞에서 당신과 친교를 나누며 사는 것임을 우리 이 시인에게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많은 시인들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했던 이유이고 주님의 그 은혜에 목말라 했던 이유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런 저런 시련을 만나고 메마른 영혼으로 곤고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 분을 뵈옵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여러분의 곤고한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분을 뵈옵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련이 하나님을 찾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는 있지만 시련에 너무 마음 빼앗기지 말고 나의 인생의 모든 실패는 시련이 아니라 하나님을 뵈옵는 주님의 면전에서 사는 친교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용서와 자비를 구함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기도를 이 시인은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왜 시인이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겠죠. 첫째는 이렇게 기도하면서 양심에 거스르는 어떤 큰 죄를 느꼈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친밀한 교제를 거두어 가셨고, 그래서 그것을 되찾고 싶어서 자기의 죄를 생각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비록 양심에 거스르는 커다란 죄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친밀함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이 자기의 불순종과 죄악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있는 것이겠죠.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상관없습니다. 그는 지금 용서와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에게 그토록 친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앗아갈 수 있습니까? 시련입니까? 아닙니다. 지금보다 더 큰 시련을 만나서 우리의 인생이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았던 날 밤에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나 같은 죄인을 향해 베푸신 주의 은혜를 감격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눈을 감고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좋을 것 같았던 때에도 주님이 든든히 옆에 계셔서 삶과 죽음 사이를 초월하는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러던 때가 있었습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엄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다고 사도는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 사이를 끊어놓고 이렇게 메마른 영혼으로 곤고하게 살아가게 된 원인은 이 세상에 물질의 질서에 있지 않습니다. 시련과 환란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분께 등을 돌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버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길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자기의 자녀들에게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 분의 은혜를 힘입으며 살아가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을 버리고 제 발로 가시밭길로 걸어갈 때에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그를 막기도 하시지만 어떤 때는 내버려 두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몸부림치며 자기를 주인 삼아서 헤어 나오고 더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칠수록 온몸이 가시에 찔려 어느 한 순간 결국은 자신을 의지했던 모든 자신감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가시밭에 찔린 한 마리 상처받은 양이라는 것을 고백할 때까지 하나님이 거기에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주님을 버리고 자기를 주인 삼아 살아온 결과가 얼마나 슬픈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회개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회개하라고 주님이 나무라실 때에는 우리를 찌르는 가시와 같지만 아픈 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어루만지심이 있습니다. 잠시 우리를 찌르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후에 열린 교회를 떠나서 어느 교회를 가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회개를 설교하지 않는 교회는 다니지 마십시오. 나쁜 교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반드시 세속으로 인도하거나 파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많이 때려주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주님이 부르실 때에 완고한 고집으로 말미암아 수없이 주님의 책망을 받았고 신앙이 아닌 혈기로 민족을 구하려 할 때에 주님께 회초리를 맞았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구약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님께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오늘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궁창에까지 미친 하나님의 진리를 보았던 사람이고, 온 땅과 하늘 가득한 하나님의 자비를, 인자하심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혹하리만치 오랜 날 동안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채찍질하시는 주님의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해 준 자기의 자녀들에게 복수의 몽둥이를 휘두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타락 속에 망가진 그들의 마음을 순결하게 하여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21살 때 어느 작은 교회에서 회심하고 주님께 돌아왔을 때에 한없이 마음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난 나의 죄를 회개하였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이렇게까지 때리신 후에는 어루만지시고 오늘도 사립문을 열어놓고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죄인을 기다리시는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좋으신 주님을 버리고 더 좋은 누구를 찾기 위해서 여러분은 불순종하며 세상의 길로 가고 있나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금도 부르십니다. 주님은 떳떳하고 올바르게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불순종하고 죄의 길을 걸어갔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주님 앞에 용서를 비는 죄인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낮은 자들의 친구이고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그 분 안에는 여러분이 찾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찾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셔서 더 이상 그것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봄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시인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 모든 시련과 원수들로부터 받는 고난에서 건져내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신뢰하였습니다. 오직 구원의 샘이신 여호와 한분께만 소망을 두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조는 의지의 정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간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순결은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이 순결이 아니라 변함없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한 분에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기 위해서 때로는 이 세상 모두를 등지는 일도 서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을 지극히 의지하고 하나님 한 분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시는 것입니다.
IV. 결 론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신앙의 외도를 하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닌 것들에 우리의 희망을 걸고 하나님 보다 권력을, 우리 예수님보다 물질을, 그리고 우리 성령님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경험을 의지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간절하게 기도할 수 없었고,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시는 주님 한 분만을 신뢰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잘못된 신앙의 외도를 모두 떨쳐버리고 순전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걸어온 길을 아실뿐만 아니라 지금 걸어가는 길도 아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어떤 시련과 위험이 있을지 알지 못하나 그 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안에서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 당신의 면전에서 사는 지극히 큰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찾아 다시 돌아오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9.생명과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
“1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사 44: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영적인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복을 누리게 될 지를 가르쳐 준 예언입니다. 이사야서는 39장까지가 1부이고, 40장부터가 2부입니다. 1부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심판을 말하고 있고 40장부터는 하나님의 은혜, 용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거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나의 종 야곱, 그리고 여수룬’과 같은 우리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칭입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신약의 교회가 하나님께 받을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II. 선택에 기초한 사랑
오늘 성경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선택에 기초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으셨고, 선택하셨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들과 특별한 언약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기초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모든 사랑이 그 분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 우리에게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때에도 우리의 좋은 어떤 장점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고 자만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에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같지 않고 변덕이 없는 일관된 신실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산에 눈이 가득 내리면 봄이 오면 그 눈이 녹습니다. 맨 위에 있는 눈이 춥기 때문에 가장 늦게 녹고, 녹으면서 흐르는 그 눈의 물이 개울을 형성하고 계곡을 따라 풍부한 물줄기를 만듭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온 산에 비가 내리면 위에 있는 물들은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 스며들며 온 땅을 두루 적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개별적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이 사랑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우리에게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지만 언제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지체들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상태가 나빠져서 그래서 그리스도 몸의 교회의 아픔이 될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향한 사랑이 변함없으시기 때문에 그 아들 위에 부어진 사랑 때문에 교회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게 하셔서 우리가 그 사랑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계실 때부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종처럼 섬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그 순간뿐 아니라 마지막에 부활하고 승천하여 다시 주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까지 단 한 번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아니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었고,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사랑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축복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그 사랑이 그의 신부인 교회에 흘러넘쳐 그 그리스도의 신부의 몸의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까지 적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당신의 교회에 흘러넘치지만 우리가 어떤 삶을 하나님 앞에 살고,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지에 따라 그 사랑은 풍성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또 그 사랑은 별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실제적인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교만해 지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매 순간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생각하며 순종과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메르그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러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의 사용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주권을 활의 시위에 비유했습니다. 활이 있는데 양쪽 끝이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이 끝이 탄탄하여 굳건할수록 화살은 팽팽하게 잡아당길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이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할수록 활은 더 멀리 힘차게 날아가 과녁을 꽤 뚫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 의지의 사용에 대한 의무를 함께 견제할 때 이 은혜는 우리에게 더욱 충만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연적이고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선택에 기초한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든지 당신에게 돌이키고자 하는 자에게 돌이킬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언제든지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고 싶어 주의 진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어 진리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메마른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선택하고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사랑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III. 하나님의 도우심
A.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심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처지에 우리들이 있을 때에 도우심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크게 3가지를 약속하고 있는데 첫째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비록 UN에 우리나라가 물이 부족한 국가로 등록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물이 부족한 국가에 비하면 풍족한 물을 쓰고 사는 나라입니다. 저는 세계 여러 나라에 다녀 봐도 이렇게 물을 물 쓰듯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수도를 틀어서 마당에다가 퍼붓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낭비입니다. 그래서 이 에너지를 귀한 줄을 몰라요. 전기도 이렇게 흥청망청 쓰는 나라는 산유국도 이렇게 안 써요. 유럽을 가보시면 필요한 장소에만 불을 켜 놓습니다. 우리는 온 도시를 휘황찬란하게 만들어서 저 오산 넘어오면서 봐도 정말 이 서울 지역이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그렇게 하고, 건물을 지어도 벽을 장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간판을 뺑 돌려 붙여버리고 전기를 키니까 벽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흥청망청 쓰기 때문에 환경이 엄청나게 피폐해 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만은 공공요금을 좀 올려서 가난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니까 인간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양을 정하고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그거는 아주 저렴하게 그래서 불 키고, 살고, 먹고, 그 다음에 물 내리고 이런 거는 진짜 거의 돈을 안들이고 살 수 있게 그 대신 조금만 더 편리하게 살려고 하면 확 에너지 비용을 물려가지고 그래서 정말 절약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이 환경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어쨌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신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감격이 안 됩니다. 작년에 우리 성도들과 함께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홍해의 기적을 보고 3일 만에 마라에서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세상에 그런 기적을 보고도 3일 밖에 안됐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저도 몇 번 설교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두 걸으면서 모두 공통적으로 한결같이 말한 것이 뭐냐 하면 3일을 견딘 것은 대단한 신앙이었다. 왜? 정말 물 한 방울도 나지 않는 그 길을 우리는 관광버스 타고 돌았지만 그 사람들은 300만 명 되는 사람들이 가축까지 거느리고 그리고 땡볕에 그 길을 걸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3일을 참은 거는 정말 대단한 신앙이었다. 불신앙이 아니라. 우리를 갖다 놓으면 아마 반나절도 되기 전에 홍해의 기적을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우리들이 현장을 보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42편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라는 시인의 고백이 기억날 것입니다. 가을철이 오면 사슴들은 교미기입니다. 그때에 짝짓기를 위해서 수컷들이 들판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슴 한 마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뿔로 들이대며 피나는 혈투를 벌여 서로를 죽이기도 합니다. 그때에 사슴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타는 것 같은 목마름입니다. 짝짓기에 나왔다가 목마름이 엄습할라치면 짝보다는 물을 찾게 되는데 광야에 아무데나 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기 옹달샘이 보여 사슴이 줄달음질치면 그것은 신기루였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뜨거운 태양 볕이 내리쬐는 광야에 엎드려져 죽고 죽어가면서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판다고 합니다. 이런 사슴에게는 한 모금의 물이 생명과 같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이렇게 물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 어찌 자연적인 물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당신의 백성들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목마를 때에 은혜의 생수를 그들의 영혼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선택한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되 똑같이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이 있는데 이게 바로 은혜의 샘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은혜의 샘물을 그렇게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한다면 마지막 때에 교회 안에는 왜 이렇게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물을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주실 이 성령을 하나님이 물 붓듯이 일방적으로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조화될까요? 신약의 시대에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물 붓듯 부어주신 일방적인 부으심이었습니다. 이런 충만한 성령의 시대가 열린 다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그 은혜를 간구하기만 하면 구약시대의 백성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하나님이 간구한 그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충만한 약속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메마른 자신의 영혼으로 놓고 하나님 앞에 은혜의 물을 부어달라고 간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에 그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면을 두루 살피십니다. 그리고 타는 것 같은 목마름으로 주님의 은혜의 물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바로 충만한 은혜의 결핍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께서 그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성령의 은혜의 생수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고 살 때보다는 오히려 그만 못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런 주님의 은혜를 자기 같은 죄인들에게 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은혜를 즐겨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하나님의 자녀라 스스로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살아온 우리의 날들은 이러한 충만한 은혜의 부족 때문에 부끄럽게도 많이 허비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으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여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산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도 함께 섬기는 가운데 우리의 섬김에는 순수성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향한 염려와 근심이 우리의 사랑을 흐릿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것들로 뒤섞인 가운데 우리의 인생은 낭비되었고, 우리의 마음의 간구도 또한 열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오늘 9번째 영혼이 메마른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영혼이 메마른 자들이 이 건조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을지를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 중의 다수는 마치 거대한 거인처럼 잠을 자고 있습니다. 잠자는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잠자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간절한 외침으로 찔러 여러분의 마음에 자극이 오면 게슴츠레 눈을 떴다가는 예전보다 더 깊은 잠 속에 빠져들면서 신앙생활이라고 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에게 만족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이웃에게 여러분의 그런 삶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마지막 때를 살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섬길 자를 택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말입니다. 주님은 목마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음을 쏟아 당신께 이 은혜의 샘물을 구하기만 하면 주시겠노라고 그것도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어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그 탁월한 거룩한 사랑이 심령 속에 부어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지난 주 설교했던 것처럼 똑같이 다시 한 번 촉구합니다. 잠자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예배를 드릴 때에는 흐릿한 정신으로 드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침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이쑤시개로 발바닥을 찔러서라도 맑은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맑은 정신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졸면서 기도하다가 성령 받았다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졸면서 예배드리다가 예수님 만났다는 사람 본적 있습니까? 비몽사몽간에 성경 읽다가 예수 발견했다는 사람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안됩니다. 실험해 보십시오. 오늘 저녁에라도 뜻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 합니까
간절히 주님 아니면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아빠가 돌아가신 어린이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메마른 나의 영혼, 주님의 충만한 은혜 없이 살아가는 죽은 자와 같은 나의 영혼을 돌아보아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주일학교 사역을 하면서 그 어른들도 그렇게 방언 받고 싶어하더라구요. 방언이 무슨 진실한 신자의 표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신비한 표는 아닙니다. 근데 어쨌든 어른들이 그렇게 방언을 받고 싶어 합니다. 또 새벽기도 오면 ‘랄랄랄랄’ 방언하면서 또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교회마다 여럿 있잖아요. 근데 어른들은 그렇게 기도하는데 방언을 못 받아요. 그런데 주일학교 애들이 받아요. 신기합니다. 그것도 1학년, 2학년 뭐 꼬맹이들이 받아. 차이점이 뭔가 그랬더니 어른들은 머릿속으로 기도하고 아이들은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게 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아주 순수하고 간절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살아계신 증거를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빡빡 머리 깎고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 5학년, 심지어 1, 2학년된 아이들이 이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가슴을 치면서 예수님이 나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그러고 울며 기도하는 광경이 생각이 나요.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거짓과 허위의 껍질을 벗고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주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B.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름
두 번째는 하나님이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강에는 발원지라는 샘이 있습니다. 강이 사실은 그 어마어마한 넓이의 강으로 그 엄청난 물이 흘러내릴 때에는 발원지 하나에서 그 물이 나온 것은 아니잖아요. 수많은 지류와 지천들이 있고, 실개천이 모여서 개울이 되고, 개울이 모여서 하천이 되고, 그 하천들이 모이고, 모이고 수없이 물이 보태어지면서 큰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원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격이 아주 엄격합니다. 반드시 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물도 또 어디서 오는 것은 발원지가 아닙니다. 자체에서 솟아나되 사계절 동안 그 물이 마르지 않아야 됩니다. 그리고 깊이가 일정한 깊이를 유지해야 됩니다. 그때 발원지로서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이 메마른 땅에 시내를 흐르게 하실 때에 발원지가 있습니다. 그 궁극적인 발원지는 하나님 자신이시지만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물의 시작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흘러가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의 충만한 사랑을 힘입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면서 하나님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그 땅을 두루 적시며 없었던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물고기들이 깃들고, 수초가 자라고,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그래서 새들이 깃들고 곤충이 깃들고 짐승들이 깃들어 아름다운 숲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그 충만한 사랑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에 반드시 그 안에는 소명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가지고, 진리를 가지고, 성령을 가지고 사람들 속에 흘러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에 붙들어 주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자기를 꺾고 남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자기 자신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주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변화될 때 미래의 그가 메마른 땅과 같은 사람들 사이를 흘러가며 어떤 놀라운 일을 만들지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몰라요. 그런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일본 사람들하고는 종자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아주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독일 사람을 만나면 절대 나치 얘기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아주 굉장히 힘들어하고 불쾌해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과로(?)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돈을 한 푼도 유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모두 한 가지 목적에 사용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온 국토의 물길을 바둑판처럼 놓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의 물을 끌어서 전 국토를 두루 적셔 오늘날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든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다양하고 많은 것 같아도 그 많은 고통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의 귀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부어 주셔서 그들로 흘러가 메말라 쓸모없게 된 땅과 같은 사람들 속에 변화를 일으키고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혹은 받았어도 그것을 자기만족적인 삶을 위해서 모두 허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흘러가지 못하고 가두어둔 웅덩이 속에서 그 은혜의 샘물은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메마른 교회를 보시며 “너희는 내게 은혜를 받아 시냇물처럼 흘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용서하면, 내가 인내하면, 내가 순종하면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순종하고 주님 의지하고 살아가면 그러면 메마른 땅과 같이 아무 쓸모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납니다. 그게 선교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감옥소에 만난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기억할 것입니다. 부잣집에서 무슨 잘못을 하고 물질적인 손해까지 끼치고 도망 나왔다가 감옥소에 잡히게 된 그 오네시모 말입니다. 그 오네시모에게 사도 바울이 샘물이 되어 흘렀더니 그는 사도 바울의 심복 되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 열심이 있는 아주 귀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 자리에 놓고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주위에 그렇게 메말라 벌판에 쓰러져 가는 사슴처럼 생기를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메마른 땅에 흘러가는 물이 되라고, 남들에게는 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남이 보지 못하는 은혜의 진리를, 남이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철따라 우리에게 입을 옷과 먹을 양식과 아직도 살아있는 생명을 주셔서 움직이고 기동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충만한 은혜를 받고 이렇게 메마른 교회, 메마른 가정, 메마른 이 사회를 비옥하게 하며 사는데 이바지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심
세 번째는 자기 백성에게 당신의 신 곧, 성령을 부어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에 자기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때에는 마음이 곤고하고 살 희망이 모두 끊어진 것 같고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말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 라고 하는 무기력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사람도 만나기 싫고 가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 둘 곳 없을 그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자신의 메마른 영혼을 하나님 앞에 보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메마를 때에 이 세상은 기껏 해 주어봐야 이 세상의 즐거움으로 잠시 우리의 메마름을 잊어버리게 이상은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지 않지만 하나님 은혜의 보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분께 피하고, 그 분께 매달리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찬양)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약하면 힘을 주시고, 외로우면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손으로 덮으시네.
사람은 그저 일방적으로 사랑해야할 대상일 뿐이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할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실 뿐만 아니라 의지해야할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사랑해도 부작용이 있고 의지해도 거기에는 단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의지해도 나쁜 것이 전혀 없으신 단 한 분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아집을 버립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해도 허공을 치는 것 같고, 응답도 없는 것 같다면 그까짓 기도제목들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마음속에 주의 성령을, 주의 은혜를 부어주십시오. 그래서 나로 새 사람 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생명과 번영을 주심
이렇게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깊이 부어주셨을 때에 우리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10여 년 전 집회를 하기 위해 아마도 경상도 지방을 내려갔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가뭄이 계속되었는지 길가의 가로수들이 잎사귀가 바짝 마르고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소방차가 물을 갖다가 가로수에 다 물을 부어줄 정도로 가물었던 때였습니다. 주유소 옆에 나무 한 그루가 가로수에 있는 나무하고는 다르게 아주 잎이 청청하게 아주 아름답게 피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신기하다 그러고 차에서 일부러 내려서 봤더니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데 가까이 가 보니까 바로 그 나무 옆으로 아주 작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물을 머금으면서 이 나무 홀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시련을 이기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셔야 그렇게 살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싶어 합니다. 지금도 사면을 두루 살피며 당신의 이 좋은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 가까이 계셔서 그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인생 역전은 복권이 맞는다고 인생이 역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인생의 역전은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모자라는 것이 많고 망가진 사람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는 부어져서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V.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로서 나는 여러분이 이렇게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져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람들이 되고, 생명과 번영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정말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랑의 사람이 되었고 그 사랑 때문에 여러분이 부자가 되었고 그리고 복된 사람이 되었고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이 땅의 많은 자원들이 메마른 땅을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사용되었다는 간증을 듣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들어 예수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메마른 여러분의 영혼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영혼이 메마른 자들을 위하여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