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Ⅱ
(2011년 설교모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1 (2011.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설교기간|2011년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2 (2011.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3 (2011.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4 (2011.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1. 절망의 땅 끝에서(욥1:20-22) 2011.1.10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홀로 남겨진 환란 날에(욥2:7-10) 2011.1.11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4
3. 환란보다 두려운 것(욥7:16-21) 2011.1.12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6
4. 구속자가 살아계시니(욥19:25-27) 2011.1.13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9
5. 정금 같이 나아오리라(욥23:8-10) 2011.1.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2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Ⅱ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1 (2011.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2 (2011.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3 (2011.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4 (2011.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5 (2011.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1.절망의 땅 끝에서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I. 본문해설
II. 절망의 땅끝에서
III. 믿음으로 사는 길
A. 마음이 낮아짐
B. 은혜를 생각함
C. 경배로 돌아감
IV. 결론
2.홀로 남겨진 환란 날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7-10)
I. 본문해설
II. 고난이 겹치는 날에
A. 홀로 남겨진 환란 날에
B. 절망이 데려가려는 끝
C.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
III. 순전함을 잃지 말라
IV. 결론
3.환란 보다 두려운 것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 하리이다"(욥 7:16-21)
I. 본문해설
II. 믿음의 양면성
III. 시험 중에 찾아오는 침체
A. 침체 속에 불평함
B. 선하심을 의심함
C. 하나님을 오해함
IV. 결론: 환란의 학교에서
4.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25-27)
I. 본문해설
II. 구속자를 바라봄
A. 사람 바라보지 않음
B. 구속자를 바라봄
C. 부활신앙으로 이김
III. 주께로 더 가까이
IV. 결론
5.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8-10)
I. 본문해설
II. 환란 날에 숨으신 하나님
-환란 때문이 아니라 침체 때문에
-환경의 변화에 놀라는 영혼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무지
III. 벼랑 끝에 세우신 계획
A. 의지하게 하심
B. 연단 받게 하심
1. 정결
2. 굳셈
IV. 결론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Ⅱ 1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1 (2011.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2 (2011.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3 (2011.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4 (2011.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II - 5 (2011.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말씀)
1.절망의 땅 끝에서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0-22)
녹취자 : 허혜숙
I. 본문해설
학자들은 이 욥이 아마도 아브라함 시대 때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욥기 안에 아브라함 시대와 같은 때를 암시해 주는 몇몇 증거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성경은 이 욥을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이 애매히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장 절망의 땅 끝에 서 본 사람이 바로 이 욥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망은 비참으로 끝나지를 않고 이 사람의 경우에는 그 절망의 벼랑 끝에서 주님께 놀라운 은혜를 입고 새 삶을 찾았던 인물이기에 오늘 우리가 살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II. 절망의 땅끝에서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은 어느 정도로 절망의 땅 끝에 섰을까요? 이 사람은 하나님이 ‘동방의 의인이요 정직하여 흠이 없는 자’라고 칭찬하실 정도로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경건한 삶을 살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 사람의 정결한 신앙을 칭찬하였을 때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이라고 그의 이름 그대로 참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사탄’이라고 하는 이 말이 히브리어로 ‘고소하다’ ‘소송하다’ 혹은 ‘비난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탄’ 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축복이나 번영 때문에 당신을 공경하고 정결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단에게 ‘그럼 내가 욥에게 준 것을 네가 흔들어 보거라’ 하나님이 허락을 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조차도 주님의 뜻을 반해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것만을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멈추고 끝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적은 자녀의 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늘 정결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함께 잔치를 하고 먹고 마신 후에도 혹시 부지불식간에라도 아이들이 하나님께 범죄 하였을까봐 하나님 앞에 죄를 속하는 번제의 제사를 올릴 정도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에게 이 일이 허락된 후에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말과 소와 그리고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례차례 그것들을 모두 도적들에게 빼앗기고 그의 재산은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습니다. 한 종이 와서 스바 사람에게 가축을 빼앗겼다고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와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짐승들이 모두 죽고 종들도 모두 죽었다고 보고를 했고,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또, 또, 또, 계속 불행이 닥친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에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자녀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광풍이 불어와서 집이 무너지면서 일곱 아들과 세 딸이 함께 그 건물더미에 깔려서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때 보여준 이 욥의 반응을 통해서 오늘 인생의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찌 욥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비록 욥처럼 정결한 신앙을 갖고 순수한 믿음으로 살지는 않아도 고난과 시련을 당하기는 욥과 마찬가지입니다. 욥처럼 이렇게 극단적인 고난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어떤 고난이든지 간에 자신이 막상 당하고 나면 그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어느 교수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소위 ‘anti aging’이라고 해서 노화방지 의학이 각광을 받고 있는데 이 분은 한 마디로 ‘아직 학자들이 인간이 왜 늙는지를 발견을 못했고 어떻게 인간이 나이를 먹어서 늙어 가는지 메커니즘 자체가 규명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멈추거나 항거할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을 하면서 그것은 모두 눈가림으로 나이 먹은 것을 잠시 속이는 것 뿐이지 ‘anti aging’ 즉 ‘노화방지의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고 단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늙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늙는 것이고 anti aging이 아니라 well aging 그러니까 안 늙을 수는 없고 잘 늙는 비결이 뭔가를 잘 터득을 해서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뭐 그렇게 인간이 오래 살아서 뭐하나 하는 것은 모두 남보고 하는 이야기이지 자기한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들한테 ‘그렇게까지 오래 살아서 뭐해?’ 하는 것은 다 남의 죽음을 앞둔 것이고 또 자신에 대해서 ‘난 그렇게 오래까지는 살고 싶지는 않아’ 할 때는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 죽음 가까이 가면 어떻게 하든지 더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 ‘그것 참 살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더 한 사람도 많은데’이렇게 말하는데 자신이 직접 당하고 나면 그것은 보통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제가 몇 년 전에 편도선 두 개를 수술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20년을 의사를 했는데 목사님같이 이렇게 큰 편도선을 달고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컸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목사님 아무개 교구의 몇 구역의 아무개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왜? 무슨 병이래?’ ‘편도선 수술을 했답니다’ 그것 뭐 심방도 안 갔습니다. 뭐 하러 심방을 합니까? 그것도 수술이라고 어디 명함을 내놓습니까? 그랬는데 제가 수술을 했는데 상상을 초월합니다. 8kg가 빠졌습니다.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설교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고 설교를 했다가 꿰맨 실밥이 터져가지고 길거리에서 피가 한 컵이 쏟아져 병원에 달려가서 치료하고 최초로 2주 동안 설교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산 속으로 들어가서 혼자 있었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너무 아프고 물 한 모금 쌀 한 톨도 못 넘겼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께 ‘편도선 수술하고 8.5kg가 빠졌습니다’ 했더니 ‘원래 그런 것입니다’ 하면서 아주 남의 일인 것처럼 신경도 안 썼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정말 사랑이 없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 중의 한 사람이 나하고 똑같이, 그 분은 순수한 편도가 아니라 궤양이 돋고 해서 잘라낸 사람이 있었는데 그 한 사람만 ‘그거 무지 무지 아픈 것’이라고 자기는 애 낳는 것보다 더 아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애는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아프다고 했습니다. 당해 본 사람만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사실은 큰 환란, 큰 시험, 작은 환란, 작은 고난 그러는데 절대적으로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을 때에는 작은 시련도 나에게는 인생의 벼랑 끝입니다. 이길 힘이 넉넉히 있을 때에는 벼랑 끝이 벼랑 끝이 아닙니다. 뭐가 벼랑 끝입니까? 내가 그것을 이길 힘이 있고 내가 그것을 극복 할 수 있는 의지가 있고 정신의 힘이 남아있는데.
여러분도 비록 욥과 같이 이렇게 극단적인 시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절대적인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 앞에서 우리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느냐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절망의 땅 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렸을 때 읽은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소설을 기억할 것입니다. 병에 걸린 여자아이가 누워있는데 담쟁이 넝쿨만 보면서 계속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잎이 남아있는데 저 이파리가 떨어지면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잠들면서 ‘오늘 밤에는 저것이 떨어질 것이고 나는 죽을 것이다’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도 계속 살아있는 것입니다. 화가가 밤새도록 잎을 그려서 그 사람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큰 시련과 환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욥처럼 큰 것이 아니어도 나에게는 커다란 절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 정신적인 힘이 남아있을 때에는 부모가 뭐라고 야단을 좀 쳤다고 절대 죽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힘이 없을 때 아이들이 부모가 야단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일평생 참았는데, 여태까지 시시때때로 다투면서 살아왔는데, 그 날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가서 스스로 동맥을 끊고 죽어버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부싸움 하는 일도 늘 있는 일상적인 일인데, 여태까지 시시때때로 다투면서 살았는데, 그 날은 왠지 ‘돈도 못 벌어오는 주제에’ 하고 욕을 해버리니까 남편이 한강에서 투신자살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사람들의 절망의 땅 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시험의 크기가 얼마나 큰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신이 그것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절망의 땅 끝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욥과 같은 시험까지는 아니어도 욥보다 정신과 신앙의 힘이 약할 때 경험하는 절망감은 욥보다 훨씬 커다란 절망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반응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럼 무엇이냐?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자면 인생의 벼랑 끝이라는 그 자체는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자기가 인식하기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절망이 될 수가 있고, 진짜 절망인데도 그것이 사실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보십시오. 어느 한 순간 자살을 하는 사람들 중에 거의 대부분은 평소와 같은 정신 상태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상당 기간 동안 자기 정신이 외부와 격리 되어서 아주 폐쇄적이 되고, 단절이 되고, 우울증 증상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충동적이라고 해도 그 충동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내면의 세계가 무너진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또 오늘 이처럼 여러분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한 번 숙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작정 가운데서 나를 불러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여기에 이렇게 말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시련과 환란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이 내 눈에 들어오는 광경대로, 내 마음에 가져다주는 상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이 절망하는 그것은 성령이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키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선언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절망의 그 끝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 자신이 파멸해 버리는 것이 절망의 종착역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가 절망의 결과이기 때문에 파괴적이고 악의 본성을 가진 마귀와 사단의 세력이 아니고는 이런 절망감으로 인간을 끌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여러분이 놓여 있는 삶의 상황에서 절망이 밀려오고 나 자신이 불행하고 이제 이 모든 희망이 끊어진 낙망의 땅 끝에 내가 서있다 라고 느낄 때 마음에 들어온 느낌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아니다 라고 부정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운전을 하다가 깜박 실수를 해서 사고를 낸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자리를 다시 통과하게 하면 절대 그 자리에서는 사고를 내지 않습니다. 운전수 가운데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상황에서 두 번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절망의 끝이라고 느낀 이 절망적인 환경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이 지점이 오늘 처음 생긴 지점이었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무수히 지나왔던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기고, 피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서 피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로운 길을 보자니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길을 찾을 수가 없고, 극복할 길을 발견 했는데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지금 닥친 이 시련과 환란이 처음 찾아오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이 그런 뱃길을 지났고 풍랑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III. 믿음으로 사는 길
A. 마음이 낮아짐
그러면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도대체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20절에서 22절 사이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오늘 욥이 이 모든 슬픈 소식, 마지막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기의 자식 중 한 두 명이 아니라 일곱 아들과 세 딸 모두가 몰사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드디어 욥이 일어났고 그는 세 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겉옷을 발기발기 찢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무슨 의미이냐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통렬한 감정을 옷을 찢음으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옷을 찢는 것은 회개와 뉘우침의 상징입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라고 하는 고통의 표현으로 이 옷을 찢는 것이며, 또한 ‘이 모든 일이 나의 죄 때문입니다’라는 자백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옷을 찢음으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머리를 모두 밀었는데 구약에서 이 머리가 사실은 존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 머리를 미는 것, 어떤 털이 난 부위를 밀어버리는 이것은 아주 불결한 것으로 취급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실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들로서 일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은 이러한 영적인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참 존귀한 자다라고 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밀어버린 다고 하는 것은 이제 자신의 존재에 자기 스스로 마음을 부요하게 하는 어떤 존재감도 부여하지 않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며 머리를 밀어버리고 ‘나는 이제 존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하며 머리를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동작이 땅에 엎드리는 것인데 얼굴을 대고 땅에 엎드리는 것은 흙과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흙은 구약에 나오는 ‘아파르’ 즉 ‘먼지, 진토’입니다. 그 티끌이라고 불리우는 ‘아파르’는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가운데 있는 것들 중 가장 값어치 없는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티끌을 날리면서 재에서 회개했던 이유가 그 재가 가장 정확한 티끌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이 이렇게 얼굴을 대고 땅에 엎드린 이것을 결국은 자신의 어떠한 존귀함도 모두 상실하고 자신은 이제 무가치하기 이를 데 없기를 이 ‘아파르’ ‘티끌 같은 존재’ ‘땅에 있는 티끌 같은 존재 입니다’라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마음속으로 동의가 됩니다. 즉 우리는 이 욥을 의로우면서도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느 부분에서는 맞고 어느 부분에서는 틀리다. 외적인 행실에 있어서는 그가 거의 인간으로서의 모본에 가까운 의로운 사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를 다 보지는 못했고, 하나님께서는 이 커다란 시련을 통해서 욥도 하나님만 섬기며 살았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무지와 악을 보게 하기 위해 이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다. 뒤편에 넘어가면 여기서는 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서 견디었던 사람이 ‘내가 무슨 죄가 있냐?’고 항변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아무튼 이 욥은 하나님 앞에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했을 때에 ‘내가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 됩니까?’라고 고개를 쳐들고 하나님께 대들 듯이 묻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런 것을 하나님께 물어볼 때 즉시 그에 대해서 대답이 오는 것은 희귀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즉시 대답이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간 후에야 그 때 왜 그런 고난이 나에게 필요했는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섭리입니다. 계시는 드러난 뜻이지만 섭리는 감추어진 뜻이라서 살아봐야지만 마치 두루마리가 풀리듯이 그 일의 결말과 원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세를 배우셔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고난을 당하고 시험 가운데 있을 때에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당해야 되느냐?’고 하나님 앞에 물을 때에 정말 알고 싶어서 주님께 겸손하게 묻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그 속에는 분노와 억울함,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 도전, 이런 흔적들이 감정 속에 묻어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제일 먼저 큰 시련이 오고 온 마음을 다해서 휘 젖고 몸부림 쳐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 같은 곳에 들어가게 될 때에 제발 하나님께 ‘내가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 됩니까?’ 이렇게 묻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앞에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게 닥친 이 시련과 모든 환란이 나의 잘못 때문일 것이다’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을 찢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 이야기 입니다. 이것이 바로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자존감, 그리고 경건하지 않는 자존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자존감과 비정상적인 자존감들을 버려야 됩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쓰는 새로운 용어 가운데 ‘미친 존재감’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말 뜻은 ‘자기가 미칠 듯이 훌륭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미친 존재감을 가지고는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절대 못 만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이 미친 존재감부터 시작을 해서 미치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경건하지 않은 존재감까지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만 보이면서 온전히 매달리던 기도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이든지 낭떠러지 이든지간에 어쨌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서 느끼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백하는 그 언어의 표현이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은 좀 낫죠. 그것을 지나서는 ‘나는 정말 더러운 인간입니다.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 어디에서 미친 존재감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티끌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때에 자신이 티끌 중, 진토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거기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은 정말 티끌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아주 뛰어나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은 티끌 같이 아무것도 아닌, 주님이 훅! 하고 불어버리면 날아가 버릴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새 신종플루가 다시 유행한다고 해서 손을 자주 씻습니다. 원래도 손은 자주 씻는데 그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이 미생물을 보고 얘네들을 어디로 갈까 생각합니다. 가글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해 주시니까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만, 우리 인간에게 손에 수없이 붙어있어서 비누로 손을 씻는 한 번으로 죽어버리고, 하수도 구멍으로 들어가 버리는 수백만 마리의 세균과,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그 하나님 앞에서 이 티끌과 같은 나 사이의 존재의 격차가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정말 더러운 죄인 이구나’ 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티끌 같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티끌은 그렇게 큰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티끌 같은 것이 세계를 뒤집는 죄와 악을 생산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인간은 결코 티끌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망치고 망가뜨립니다. 정말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은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극히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에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마음이 낮아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시면 망가진 마음으로 어긋난 길을 가다가 인생의 대형 사고를 일으킬까봐 삶의 제동장치를 장애물을 두어서 잠시 걸려 못 가게 하시고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의 궤적을 그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지를 살펴보게 하시기 위하여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배워야 할 것은 주님이 그런 시련을 주시는 것은 혼자서 한 번 잘 해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그런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주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 확신과 투지에 넘치고 용감한 사람들, 절대 주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낮은 사람들, 겸손하고 그리고 주님을 기꺼이 따르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설교가 진행되기 전에 중간에 여러분이 물음에 답을 하면서 갈 길을 선택을 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기에서 적당한 답을 여러분이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사경회에 참석하나 마나입니다. 계속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멈춘 이 길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아지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해 봤잖습니까? 자기 힘으로 해 보려고 몸부림치고 어기적거려 봤는데 마치수렁 속에 빠진 사람이 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이 수렁 속에 빠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시련 위에 고난이, 고난 위에 환란이 겹쳤잖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벼랑 끝에 서게 되었잖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어디까지 견디는지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짓누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얘야 네가 그 마음으로는 2011년을 살 수가 없다 고치거라’ 그래서 하나님이 잘 나가던 여러분의 인생의 장애물을 두시고 미친 존재감으로 살던 여러분이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도록 벼랑 끝에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을 낮추시렵니까? 아니면 가던 길로 계속 가시렵니까?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주님을 만나던 모든 경건한 시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공통된 특징은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한없이 낮아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신약 시대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들려주실 때에 최고로 복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제일 먼저 마음을 낮추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만난 시련과 환란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 교만 때문입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죄의 원천이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불순종하는 이유는 ‘주님의 판단보다는 내 생각이 옳습니다’ 라고 교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깊이 낮추십시오. 낮아진 마음에서 기도도 나오고 말씀의 은혜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낮추십시오.
B. 은혜를 생각함
두 번째는 은혜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환란과 시련이 겹치게 되면 낙심할 즈음이 되면 비교의식이 생기면서 왜 나만 이렇게 인생살이가 되는 일이 없는가? 하나님이 나만 불공평하게 대우하시는 것 같고, 나만 운이 없는 것 같고, 나만 불공평하게 시련을 만나는 것 같은 자괴감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욥을 보십시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으며 또 그리고 적신으로 그리로 돌아갈 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라’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전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동방의 큰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순식간에 그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그는 생각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 아닌 것을 여태까지 누리고 있었다고 생각을 해보니 아직까지도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적신으로 왔으나 지금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는 찢을 옷이라도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있었고 그것은 가슴 아픈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야 알 수 없지만, 그 자식도 주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주님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악을 행하거나 부당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누구 한 사람이 마음이 무거워져서 ‘목사님, 우리 교회는 이러 이러한 것을 잘 못 하고 있고, 우리 교인들이 이런 것을 협조하지 안 해주고, 이런 것은 좀 그렇습니다.’하면 한 사람이 한숨을 쉬고 또 옆 사람이 한 숨을 쉬고 하다가 또 어떤 사람이 ‘그래도 우리 교회는 좀 낫죠. 우리 교회 교인들은 설교 하면 그래도 은혜를 받고 뭐 하라고 하면 말은 듣잖아’ 하면 ‘맞아요, 제가 아는 어떤 교회는요...’하면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시작 하면 다들 마음이 확 바뀌어서 ‘그래도 이만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의 전환에 따라서 사물을 보는 생각과 눈이 너무너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를 건축할 때 건축한 지 얼마 안 되는데 교인들이 많으니까 또 증축을 한다고 하면서 헌금을 하자고 하니까 교인들이 속으로 입이 한 발씩 나왔습니다. ‘돈도 없는데 다른 교회는 평생에 한 번 건축을 하는데 우리 교회는 또 건축을 한다고 하면서 맨 날 돈 내라고 하고’하면서 불평을 했습니다. 다른 교회도 건축할 때 마찬 가지 상황이 있었는데 그 때 어떤 장로님이 나와서 ‘여러분, 제가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죽었습니다. 이 녀석이 살아있어서 맨 날 아침에 학교 갈 때마다 아빠, 돈 줘, 옷 좀 새 것 사줘, 참고서 사야해, 구두 다 떨어 졌어 하면서 돈을 달라고 할 때에 그 아이가 원수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이 아이가 죽어서 아무도 운동화 사달라는 사람이 없고 가방 사달라고 하는 아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고 아이에게 들볶이던 그 시절이 그립더라, 교인이 모이니까 교회도 짓지 교인이 모두 떠나면 어떻게 교회를 짓겠습니까?’ 하니까 모든 교인들이 목사님 설교보다 장로님 광고에 은혜를 받고 헌금을 많이 했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이 욥이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껏 내가 누리며 살아온 모든 것들도 주님이 내게 맡기신 것이었고 모든 것을 가져가신다고 해도 섭섭한 것이 아니라 이제껏 까지 누리고 살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날 때 빨간 몸End이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라며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부정적으로만 자신의 인생을 보지 말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많잖습니까? 한 해를 지나면서 한 해 동안 감사한 일을 생각하니까 너무나 많아서 마지막에 눈물이 납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뭘 하나님 앞에 잘 한 것도 없는데 먹이시고, 입히시고,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하시면서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에 지니고 있는 것, 우리가 누리는 것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을 때에 주님 섬기고 은혜 떨어졌을 때 주님을 무시했지만,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잘 섬기고 성령이 충만할 때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미끄러져서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무거운 근심으로 마음이 짓눌릴 때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님께 불순종하는데도 오늘 재워주시고, 내일은 먹이시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입혀 주시고 우리의 명예를 보존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공급받은 것을 가지고 주님께 욕 돌리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순종하며 사는데도 ‘먹고 싶냐’라며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따뜻한 잠자리를 주시고 밤이면 평안히 잠들도록 기력을 회복하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두려움에 떨고 고통 받고 괴로워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폐기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이 경험하는 그 절망과 낙심은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릇된 길로 걸어가는 자녀들을 보면서 무관심한 부모들은 자율적으로 하라고 내버려둘지 모르지만 관심이 있는 부모는 그 자녀를 보면서 책망하고 견책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만약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섰다면 주님이 밀어 넣으셔서 벼랑 끝에 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악한 의지와 그릇된 판단으로 유혹에 빠져서 벼랑 끝에 오게 된 것이지 하나님은 잘못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시험을 받을 때에 제일 먼저 고백해야 될 것은 ‘주님은 옳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정말 선하시고 신실 하십니다’ 그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한 번 낙심하고 좌절해 있는 여러분에게 인생을 한 번 새롭게 보도록 나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오늘 기도하고 집에 가면서 하나님이 그래도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한 번 그것을 손꼽아서 헤아려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나는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신실하지 못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면서 매일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이제껏 인도해 주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 절망의 땅 끝에서 시련을 극복할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난 속에서 이미 못 받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이미 받은바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C. 경배로 돌아감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그는 그 끔찍한 불행의 소식이 들렸을 때 그가 맨 먼저 한 것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땅에 엎드려 경배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렸습니다. 여러분, 시험에 들게 되면 대부분이 무너지지만 빨리 무너지는 세 가지 생활이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되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것이 '기도의 생활'이 무너지게 됩니다. 마음에 근심과 번민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우러러 기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심과 염려, 걱정은 그 자체가 마음을 찢어놓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그것이 탐욕입니다. 그러니까 걱정에 짓눌린 마음은 탐욕에 불타는 마음과 똑같이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것은 찢어진 정신을 모두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신을 하나의 지점에 고정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기도입니다. 한편으로는 정욕과 탐욕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유혹에 빼앗겨서 수시로 찢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우러러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근심과 염려에 압도당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산산이 찢어져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장시간 엎드려 있지만 허공을 치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기도가 나오질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환란과 시련을 만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서 두 번째 세계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것이 '말씀의 세계'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을 들으면 놀라운 깨달음이 오고, 성경을 읽으면 그것이 잘 이해가 되고, 책을 통해서 교리를 깨닫는 것이 마음에 그렇게 기쁨을 주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나무토막처럼 맛대가리가 없는 영혼에 몹쓸 음식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며 그것으로 힘을 얻어서 이길 수 없는 것을 이기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을 극복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의무들을 감당하며 살았는데, 기도의 세계가 끊어지면서 이 공급이 멎는 것입니다. 또 혼란스럽고 어둡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한 줄기 쫙 비추면 매주일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세워놓고 설교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뭡니까? 뭡니까?’ 하고 일주일 묻다가 오면 주일날 정확하게 답을 주십니다. 그러던 세계가 딱 끊어지고 설교와 모든 말씀이 자기의 정신 앞에서 모두 분산되어서 흩어지는 것입니다. 수없이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책장을 넘겨도 마음을 휘어잡는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도 경험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 말씀의 빛으로 무지와 어두움을 이기고 판단력을 가졌었는데 이제는 이길 힘도 사라졌는데 판단내릴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시련과 시험의 환란을 당할 때에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면 무너지는 마지막의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예배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받다가도 예배당에만 들어오면 눈물이 막 쏟아지면서
(찬양)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그런 고백이 나오는데 이제는 간신히 예배당에 나오고 그 의무가 지탱하기 힘든 피로감으로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 때에는 예배를 드리고 나면 새 힘이 확 솟았는데 시험에 들고 나니까 예배가 끝나고 나면 견딜 수 없는 피로감이 확 밀려오면서 빨리 파자마 바람으로 벌렁 눕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의무를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들이 사라지면서 고갈된 증거들이 언어생활, 그 다음에 가족들과의 관계, 직장생활, 교회에서의 섬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다 바깥으로 시간문제이지 차츰 차츰 바깥으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던 사람이 어느 날 다 집어 치우고 자기 하나 신앙을 지키면서 예배당에 나오는 것도 허덕거리면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의무조차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환란을 만날 때에 그 환란과 맞붙어서 싸워 보겠냐라고 하면 금방 승부가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용기보다 더 필요한 것은 뭐냐면
(찬양)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요
나의 도움이 오직 그에게서 나는 도다. 그래서 시련이 일어나고 환란이 막 일어나는데 이 나쁜 머리로는 그 원인과 결과를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불끈불끈 솟아나는 어느 인간에 대한 원망과 불평, 그리고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내 인생에 대한 분노 이런 것 밖에는 잘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막 대드는 것, 그런 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무리 그리고 있어봐야 불면증이나 생기고 나중에 머리가 터지는 것 같지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냥 답을 낼 수 없으면 그 나쁜 머리를 가지고 답을 낸들 그 답이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왜? 시련과 환란이 꼭 원인이 무엇인지 캐물어야지만 해결의 길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 다 알게 됩니다. 내버려두고 그 대신 무엇을 보냐면 한 가지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게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일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불신자가 아닌 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경건한 족장들이 인생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예배의 단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아주 개인적인 일 뭐 자식을 못 낳는다든지 첩과 싸웠다든지 속상한 일부터 시작해서 나라에 무슨 일이 있다든지 하면 항상 어디로 갔습니까? 문제가 일어난 그 곳이 아니라 항상 성전에 올라가서 거기에 답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한 것입니다.
(찬양)
주 앞에 나와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내일부터 실험을 해 보십시오. 그래 내게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다. 확실한 것 하나는 나쁜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왔을 리가 없고, 나의 잘못으로부터 왔고, 나는 머리도 나쁘고 이해 할 수도 없어서 이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원인도 알 수가 없고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수없이 고민을 해도 나는 해결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잠시 이것을 제쳐 두기로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한 번 주님을 경배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께 직접 대답을 들어보자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문제의 해결을 보여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그 문제가 일어난 원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 문제의 원인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닫게 만들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어땠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되고 있는지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 고통스러운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바꾸고 싶어 하시는지 주님이 당신을 경배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대답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투덜거리고, 입술로 범죄하고, 또 죄를 짓고, 또 문제를 일으키고 이런 사람들에게 대답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십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일 먼저 여러분이 시련과 환란을 만났다면 예배생활부터 회복을 하십시오. 그렇게 예배드려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마지막 숨 거두고 죽을 때 한 번 시간이 주어지면 내가 마지막 할 일도 이 일입니다. 하나님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환란과 시련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마음을 써보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IV. 결론
여러분, 예전에도 사경회나 예배당에 나와서 도저히 어느 길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님 만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어땠습니까? 결국은 여러분이 왜 돈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명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고난을 만나게 되었는지 답을 들려주어서 여러분이 그렇게 감격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 했던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궤적을 그리며 살다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지 여러분의 어긋난 마음을 보여주었을 때, 경배자로서 여러분의 잘못된 마음을 말씀이 드러내 보여주었을 때, 그 때 여러분은 자기의 실패한 예배자로서의 삶을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실패가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면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그렇게 크게 회개하고 난 다음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세가 어떠했습니까? 오랜 기도 속에 응답을 받고 여러분을 위기와 고난 속에서 건져주셨을 때 감사의 예배는 얼마나 감격적이었습니까? 울려 퍼지는 찬송 소리는 하늘 성가대의 가락과 같았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을 울리는 가락이 되지 않았습니까? 예배 시간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는 여러분의 마른 목을 축이고 주린 배를 충분히 채워주어서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주먹을 꼭 쥐고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차례대로 당신과의 관계를 고쳐주시고, 그 다음에 깨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쳐주시고, 화해시켜주시고, 나도 나를 용서하게 만들어 주시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막혔던 모든 삶의 환경과도 화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 사랑은 그 때만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됩니다. 절망의 땅 끝에서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돌이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홀로 남겨진 환란 날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7-10)
녹취자 : 구미영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어제 있었던 이후의 일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고 경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리고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죽음으로 데려 갔는데도 욥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만약 하나님이 욥의 몸을 치셔서 큰 질병을 주셔 고통을 받게 하시면 그때는 틀림없이 이 욥이라는 인간이 자신의 숨겨진 마음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 하며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이 욥에게 재앙을 내렸습니다.
II. 고난이 겹치는 날에
A. 홀로 남겨진 환란 날에
이제 아무것도 없고 남은 것이라고는 자기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데 여기에 큰 재앙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발끝부터 머리 정수리까지 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표현인데 몸 전체라는 의미의 표현법입니다. 그러니 성한 데가 없이 온몸에 악창이 났습니다. 아마도 온몸에 종기가 생겨서 그것이 곪고 터지고 그것이 또 굳어 욥의 세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달려왔을 때 그가 욥인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가려워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부서진 집에서 기왓장 한 장을 집어 들어 자기 온몸을 벅벅 긁고 있었습니다. 이제 단정하던 사람이 온몸에 악창이 나서 얼굴을 마주보아도 그 사람이 욥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 몰골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가난하게 살던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만나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부유한 환경에 살던 사람은 조금만 궁핍해지면 그 궁핍한 것이 거의 절망의 수준이 되어 가슴에 밀려옵니다. 원래 병약하고 앓던 사람은 조금 병이 나도 그러려니 합니다. 하지만 건강하던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그 고통과 스스로 느끼는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욥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뒤 자기 자녀들까지 잃어버리고 마지막 남은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어버리는 고난이 겹치는 날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렇게 고난이 오면 줄지어 오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련이 오면 소낙비처럼 내린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련과 고난이 꼬리를 물며 밀려올 때 욥과 같은 처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주위에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든든히 붙들어 주고 그 고난에 함께 즐겁게 동참하며 교제를 나눈다면 아직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고난이 닥치면 이상하게 한사람씩 한사람씩 떠나서 홀로 남겨지는 환란의 날을 맞이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예화) 우리 옛 속담에 정승이 죽으면 안가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정승은 이미 죽었습니다. 죽어서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의 덕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승집 개가 죽은 것은 기회이므로 가서 눈도장을 찍으면 덕을 볼 여지가 있습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많아도 아직 외롭지 않으면 고난이 아닙니다. 그냥 고생을 좀 하는 겁니다. 인생의 벼랑 끝도 아니고 벼랑 끝 근처도 안간 겁니다. 그런데 진짜 벼랑 끝에 가면 따라와서 우리의 팔짱을 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에 우리는 꼭 홀로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환란을 만나고 인생에서 시련을 만날 때 반드시 외로움도 함께 찾아옵니다. 이 외로움이 징검다리와 같아서 이쪽으로 건너가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계기가 되고 저쪽으로 건너가면 고독과 비참에 빠져 절망의 길로 가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에 괴로운 일이 일어났을 때나 시련이 밀려올 때 주위를 돌아봐도 돕는 사람 하나 없고, 좋은 일이 일어날 때는 연락하고 자랑할 사람이 많이 있는데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할 때는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시련의 때에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을 찾으면 그 외로움 때문에 돛이 바람을 품은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미끄러지듯이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이며 상한 심령입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아무 사람도 안 보이고 오직 우리 주님 한분만 바라보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외로운 마음이 들 때 언제나 이렇게 은혜로운 결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이 겹치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외로운 마음이 일어나게 될 때 이상하게 문을 꽉 닫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과 절연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우울증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까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폐쇄 되면서 깊이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이럴 경우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고 원망하며 반역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나고, 또 어떤 때는 그렇게 낙심하고 절망한 나머지 내 인생에서 더 나빠질 것이 무엇이 있겠냐며, 그런 시험에 들지 않았을 때는 전혀 저지를 수 없는 끔찍한 죄들을 지으며 방탕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시험을 당한 죄인들의 심리입니다.
욥은 이때까지만 해도 신앙을 올곧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었습니다. 자녀들도 모두 가고 이제 자기 곁에 남은 사람은 아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열이나 낳도록 살았으니 이 부인은 오래도록 욥을 알고 같은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았을 인물입니다. 그런데 얼굴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악창이 나서 피고름이 흐르며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이 악취를 풍기며 기왓장으로 자신의 헌데를 긁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한순간에 확 솟구치는 분노와 반역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욥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지키느뇨?’ 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그토록 섬기던 하나님이 이제 당신의 모든 재산을 앗아가고, 사랑하는 우리 일곱 아들과 세 딸까지 데려가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몸뚱이까지 온몸에 악창이 나서 아내인 나도 당신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는데, 그래도 당신이 자기신앙의 순전을 지키겠냐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하고는 히브리 성경 말로 저주하다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이제 욥은 마지막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기와 함께 했던 마지막 우군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마저 이 치열한 환란 속에서 신앙이라는 가치는 붙들고 지키려는 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절망이 데려가려는 끝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환란과 시련 속에서 모든 희망이 끊어지는 곳입니다. 그 희망이 끊어진 곳이 절망입니다.
그 희망이 끝난 절망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희망 즉 신앙 안에서 품은 소망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인 것처럼 시련과 환란 속에서 경험하는 그 끔찍한 절망도 결국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 하더라도 그들이 품은 모든 소망이 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야 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소명으로 삼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소명과 상관없이, 내일은 내가 이 도시에 가서 돈을 벌어 일을 많이 남기고 모레는 저 도시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부유한 삶을 누리며 나 자신을 즐거워하겠노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풍년이 들어서 곡식을 많이 소출하였을 때 어리석은 부자가 고민하면서 이 많은 곡식을 둘 창고가 없으니 내가 어떻게 할까? 창고를 크게 짓고 거기에 곡식을 보관한 후에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며 자기의 영혼을 북돋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소명을 따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사람이 그 소망의 끝을 이 세상에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외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예수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분의 신부로서 날마다 자기를 정결하게 가꾸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소망을 품고 그 신랑이 아직 여기 계셨더라면 사셨을 그 삶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겁니다. 그 신부들이 모두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큰 신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신자의 소명이고 교회의 소명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죄를 근원적으로 고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지 않는 마음의 망가짐도 고침 받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힘입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자기를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사는데 인간존재의 의가 있고 신자의 신앙생활에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신앙의 구도를 무시해 버리고 복을 받아야겠다고 주먹을 들이밀게 되면 이제 이 기독교 신앙이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절대로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 주신 이 욥은 왜 이렇게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시련과 고난을 당하며 온몸에 악창이 난 가운데 아내마저 자신과 함께 하기를 거절하는 그런 배신을 경험해야 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탈선이라는 것은 무슨 탈세, 도둑질, 간음, 살인을 하는 이런 타락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타락의 극단적인 결과일 뿐 우리 영혼의 타락은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기쁨을 찾기 시작하는 그때 우리 영혼에 빨간불이 들어오면서 질병의 신호를 보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 이외 아무데서도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이것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목사님! 가정에서도 기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기쁩니다. 기쁜데 그냥 아내가 예쁘게 살아 있어서 기쁘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 다녀서 기쁘고 아들이 돈 많이 벌어 와서 기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한 가족으로 묶어 주신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내 아내와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 때문에 아내가 즐겁고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묶여진 그리스도 안의 지체가 행복해서 기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우리가 사랑하자! 사랑하되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자!’ 우리끼리 사랑한다면 우리는 결국 서로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면 하나님은 잃어버릴 수 없고, 심지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져도 우리는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했으니,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 사람이 없어질 때는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셔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B. 절망이 데려가려는 끝
절망이 우리를 데려가려는 그 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을 저주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을 욕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절망이 우리를 데려가려는 두 개의 목적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욥의 경건한 가정생활에 동참하였을 그의 아내도 환란과 시련이 꼬리를 물고 거의 버려진바 되자 그의 마음속이 솟구쳐 오르는 분노 속에서 하나님을 욕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원래 이 여자가 사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끔찍한 환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면서 경건한 모습으로 욥과 함께 가족을 위한 제사에 참여했을 것이고 하나님께 봉사했을 여자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살아온 이 여자로 하여금 솟구치는 분노 속에서 하나님을 저주해 버리라고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겠습니까? 절망입니다. 이제 아무 희망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자기를 이렇게 만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퍼 붇는 저주를 하나님을 향해 쏟아 놓는 것입니다. 만약 인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치게 되면 그녀는 틀림없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시련과 괴로움을 만날 때 이런 절망의 끝까지 가본 적은 없습니까? 절대로 이 절망에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욕구가 죽었으면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일단 절망을 느끼게 되면 모든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자기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절망 속에서 자살을 하게 되는데 사실은 너무 살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진짜 별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자살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커다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뛰어 내려 죽어버리자고 충동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살고 싶은 겁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충동은 너무 살고 싶은데 이렇게 살고 싶지 않고 다르게 살고 싶은 겁니다. 너무 그 욕망이 강하니 원치 않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예화) 벌써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16억 정도 지고 자살했습니다. 죽은 다음 재산을 정리해 보니 빚을 갚고 5억이 남았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미친 사람이라 했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은 빚이 16억 이고 재산이 21억 이면 정리해서 빚 다 갚고 5억 남아 이것으로 집사고 새 출발하면 되는데 부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옆에 빌딩이 계속 올라가고 있을 때 이 빌딩 주인인 회장이 자살했습니다. 돈과 경제적인 고통을 받아 자살했다고 신문보도에 나왔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탈탈 털어도 전 재산이 오천만원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빚을 많이 졌다 하더라도 다 털면 우리 보다 부자 아니겠어요? 그렇게 살면 되지 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인 겁니다. 부자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꿈이 있고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도저히 할 수 없을 때 택하는 것이 내가 존재하지 않기를 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살입니다. 자살은 정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이 택하는 절망의 끝입니다. 어느 순간 절망이 밀려오면 사람은 매우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예화) 언젠가 탤런트 한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자녀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엄마가 그렇게 죽을 때 혹은 아빠가 그렇게 죽을 때 그 자녀들 마음속에 일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습니다. 절망의 끝에 가면 자기 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지극히 이기적이게 되는 겁니다.
결국 절망의 마지막 끝은 비존재를 택하는 것인데 이것이 자살이요 죽음입니다. 그래서 절망과 죽음은 항상 가까운 이웃집입니다. 절망한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절망에 들렀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절망을 택할 때 이것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죽어도 죽음의 흔적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큰 고통으로 남습니다. 죽은 자가 버리고 간 삶은 살아남은 자들의 죽음이 되어 그 슬픔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절망은 누가 뭐라 해도 사단의 작품입니다. 정말 사단에게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니 하나님을 욕하게 하고 결국 최후에 하나님 앞에서 죽어버리게 하는 겁니다.
욥이 이런 끔찍한 유혹을 받으며 결국은 그 유혹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하기를 ‘잠시 후면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도 나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시험에 들고 절망의 끝까지 떨어지니까 경건하고 하나님 앞에서 흠 없다 칭찬받던 사람의 속에서 쓴 뿌리들이 막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부정과 절망, 어두움 이런 것이 되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절망이 데려가려는 끝이 바로 거기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고 마지막에는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을 파멸에 던져버리는 곳 바로 절망이 데려가는 곳입니다. 누가 행복하겠습니까? 그렇게 파멸로 가는 자신이 행복하겠습니까?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행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그 모습을 보며 행복하겠습니까? 아무에게도 유익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멸로 가는 겁니다.
일단 마음이 절망을 느끼게 되면 기도할 수도 없고 찬송도 부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없고 심지어 은혜를 받은 사람의 얼굴도 보기가 싫어집니다. 스스로 그 절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희망의 빛 그 자체에 대해 아주 반감을 느끼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악마의 계략이 있습니까? 살면서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그리고 사단의 송사를 통해서 화살들이 수 없이 날라 옵니다. 이럴 때 아니다 라고 거부해야 합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기도 열렬히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이상하게 희망이 생기고 소망이 생깁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이 이 어려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또 한 번 보여주시고 이 시험을 통해 나를 잘 연단하신 후 정금과 같이 나오도록 만들어 주실 거라는 소망과 희망이 막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 옆에 있게 되면 낙심하고 절망하던 사람들이 다 희망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희망의 전파력입니다.
같이 모여 앉아서 한 사람이 한숨을 쉬기 시작하면 다 같이 한숨을 계속 쉽니다. 한 사람이 희망찬 이야기를 하고 자랑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에 질세라 다 자랑을 합니다. 따라서 절망에 빠지는 것은 절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속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감화 받고 기도생활 하면서 날마다 주님을 만나 절망할 수 없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겁니다.
(예화) 제가 예수를 믿고 격한 성격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학교 다니며 리포트를 쓸 때 그냥 써서 내면 졸업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만족이 안 되는 겁니다. 22시간 동안 일어나지 않고 끝낼 때까지 앉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놀이기구가 새로 들어왔는데 하교시간에 몇 번 타고 집에 가면 되는 그것을 토하면서도 계속 탔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누가 하모니카를 하나 선물해 줬습니다. 하모니카 부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입에서 피가 나도록 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격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그런 모습이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지고 되돌아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붙잡혀 통재가 잘 될 때는 정말 좋은 겁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 스스로가 목회현장을 보면서도 마음속에 분노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건 아니다 라는 느낌이 들면 왜 안 될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17년 동안 있으면서 교역자들이 참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얘기가 안 된다 못한다는 겁니다. 왜 똑같이 보고를 해도 안 된다 못 한다 그렇게 합니까? 차라리 보고할 때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돈을 더 주십시오!’ 아니면 ‘사람을 더 붙여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십시오. 저는 이런 사람이 더 좋더란 말입니다. 왜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고 은혜에 사로잡힐 때 사람에게 이러한 격함이 없이 어떻게 발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화) 처음 청교들을 만나고 나서 미친 듯이 책을 읽었습니다. 국내에 있는 책은 거의 읽었습니다. 계속 울면서 읽었는데 이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을 위해 피 뿌리며 죽고 밤을 새워 기도하고 심지어 생일이라고 꼭두새벽에 기도하러 들판에 나갔다 별을 보면서 돌아왔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될까 하며 나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을 때도 온 몸에 비늘이 돋는 것처럼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분의 책 두 권을 읽으면서 천재라 느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는데 나는 왜 이렇지 못할까 하는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해답을 찾고 겸손해졌습니다만 한동안 하나님 앞에 불만을 토로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이 저와 다른 정말 위대한 삶을 산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픈 소망이 많은데 신앙으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 이런 사람들이 절망을 잘 하게 됩니다. 절망을 안 하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목표도 없고 꼭 하겠다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안하겠다는 것도 없이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사는 사람들은 별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강력한 소망도 야망도 없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화) 신학교에 강의하러 가면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일본에서 바둑 두는 사람들 끼리 전해 내려오는 기보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바둑을 두다 지고 너무 억울해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어느 녀석은 그깟 바둑에 졌다고 억울하여 선지피를 쏟고 죽었는데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 아닙니까?
누군가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죽었더라 하는 장렬한 순교이야기를 들을 때 안일하게 살아가는 내가 밉지 않으면 그것이 어찌 소명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청교도 데이비드 브레이드너는 21살에 회심하고 24살에 선교사가 되어 29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너무 과로해서 죽습니다. 눈 덮인 언덕에서 엎드려 땀 흘리며 기도하고 일어나는데 각혈로 온 땅이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겁니다. 그러니 참 좋은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으로 다스려지지 못할 때 이런 사람들에게 좌절이 굉장히 크게 오고 거기에서 절망이 밀려오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목표로 하고 살던지 나 자신의 인격과 마음이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다스림과 함께 강렬하게 솟아나는 열렬함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선봉에 서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절망하는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지금 나는 인생의 벼랑 끝이다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시험을 지나 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아직은 작게 들리지만 더 깊이 귀 기울여 보면 욥의 아내의 이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차라리 파멸해 버려라!’ 이런 소리가 귀에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C.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
그래서 우리들이 가져야 될 신앙의 자세 마지막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도 주시고 재앙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잡을 수 없이 모순된 존재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롭게 여기시는 것은 틀림없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 인생 어느 한때는 그 복을 누리며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이 우리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행동만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보다 높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화) 가끔 아이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문병가면 가장 불쌍한 점이 갓난아이들이 링거 맞고 있는 것입니다. 팔뚝도 아닌 머리에 링거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안쓰럽고 형언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아빠도 별로고 엄마 밖에 모릅니다. 엄마만 보면 방긋방긋 웃고 젖을 물고 장난을 치며 엄마와 눈을 맞춥니다. 이 아이에게는 엄마는 언제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자기만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항상 좋은 것만 해주는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턱을 강한 손으로 붙들고 입을 벌리더니 도저히 먹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토해버리고 싶은 무슨 국물을 집어넣고 삼키라며 물을 들이 붓습니다. 그 아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누워있는 아이가 욥이라면 그것을 재앙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욥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라는 말은 복을 받았으면 나중에 반드시 재앙도 받아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그 방법은 우리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은 죽을 때가 되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얻어낼 수 있지만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모두 찾아낼 수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날도 일찌감치 오셔서 기도하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심방하러 다니셨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 버스 앞좌석에는 뜨듯한 엔진좌석이 있었는데 노인네들이 그 좌석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 권사님이 그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 후 갑자기 끼어든 차 때문에 운전기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그만 이 권사님이 유리를 뚫고 바깥으로 튕겨 나가 차에 치어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장례식을 지내는데 가족들 대부분이 신앙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라 목사님 얼굴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가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란과 시험을 당하는 것 대부분은 죄와 불순종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너무 순결한데 욥처럼 하나님이 사단과 내기를 하셔서 시련을 당하는 사람은 욥 같은 사람 한둘이지 여러분은 그런 케이스가 아닙니다. 시련과 환란을 당했을 때 가장 높은 확률은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해 다가오는 시험이라 생각하고 문제를 자신의 마음에서 찾으면 거의 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백퍼센트 맞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아무리 계산을 해보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봐도 정말 이런 일을 당할 만한 그 무엇도 없는 같은데 시련과 환란을 만나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서야 되는 때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답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포기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인생의 시점에서는 답이 안 나오는 일입니다. 두고 보면 세월이 흘러가고 세월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으면 하늘나라 가서 보면 우리가 왜 그런 끔찍한 시련을 당했는지 답이 나오는 겁니다. 답을 찾을 수 없는 그때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과 내 모든 인생은 그분의 주권 아래 있으며 주님이 내 인생의 주관자시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합니다. 주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세상의 주관자이시고 나는 아무 별 볼일 없는 비참한 인간이며 티끌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마음속에 놀라운 평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화) 아주 오래 전 회심하고 얼마 안 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계셨는데 여자 아이 하나를 고아원에서 입양했습니다. 이 아이는 목사님 가정에서 삶의 기쁨이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아 여자라면 모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제일 좋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머리 좋고 공부도 잘 하고 똑똑하면 신앙이 별로일 수도 있는데 신앙도 좋았습니다. 졸업할 때쯤 되어 무슨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물어봤더니 ‘아버지!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나 동남아로 갈 줄 알았는데 캐나다를 선교지로 택했습니다. 캐나다가 왜 선교대상이냐 물어봤더니 캐나다에 갔었는데 이민 간 사람들이 밥을 벌어먹기 위해 너무나 고달픈 삶을 사는데 거기에서 태어났거나 데려간 1.5세들이 거의 버려진 채 신앙교육이 안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 주시고 이 아이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바른길로 인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했고 목사님은 섭섭했지만 그래도 소명이라니까 기도하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권을 만들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는데 폐결핵이라 나와서 비자가 거부되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진짜 심각한 폐결핵 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뭔가 잘못 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가라고 소명을 주셨는데 내가 폐결핵 말기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건강한데요?’ 라고 말하며 믿음이 워낙 충만한 자매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기도하면 틀림없이 나을 겁니다.’ 말하며 병원치료도 거절하고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열렬이 기도했습니다. 자매는 기도가 너무 잘 되고 병이 낫겠다는 믿음도 생겼습니다. 병이 곧 나아질 줄 알았는데 6개월 정도 지나니까 각혈이 쏟아지면서 누가 보더라도 곧 죽을 사람처럼 병세가 깊어갔습니다.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상황에 많이 매달립니다. 그러자 이 자매의 믿음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제 뭐라고 기도해야할지 기도의 방향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혼자 요양원에 실려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생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데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 처지가 되어 오늘 내일 오늘 내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퍼뜩 스쳐가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 병상에서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 드려보지 못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제까지 배운 믿음의 상식으로는 소명을 주시고 질병에 걸리면 소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이 나를 고치시고 고치시는 가운데 나를 연단한 후 선교사로 훈련시켜 보내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보니 저는 죽음 직전에 있고 매일 매일 죽음과 만납니다. 나의 신앙의 수준에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만약 내가 모르는 아주 다른 뜻이 있어 내가 캐나다에 가서 열심히 선교사역하는 것 보다 이 쓸쓸한 병실에서 홀로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내가 당신의 그 주권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삶도 죽음도 모두 당신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자매는 이렇게 고백하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진짜 모든 의사들이 포기한 그 지점에서 회복이 되기 시작하여 한참 후 결국 회복하고 선교사로 갔답니다. 하나님은 병들고 환란을 만났을 때 열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시 건져 주신다는 것만 알고 있던 그 자매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는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일깨워 주신 겁니다. 그러면 ‘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결국 기적은 일어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화) 여러해 전 한 10년이 넘었는데 너무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대학원 다닐 때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어느 교회 부목사인 형제 하나가 40세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한 두어 달을 앞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제금을 좀 가지고 일산에 있는 병원에 찾아 갔습니다. 그래서 마주 앉았는데 참 눈물이 났습니다. 40세 정도 된 젊은 나이다 보니 아이들도 아주 어렸습니다. 생활을 어떻게 하나 물었더니 부목사로 섬기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 못했는데도 일 년 동안 월급을 줬고 퇴직금을 주면서 이제 우리 교회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하여 작별했다고 말했습니다. 간암 말기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습니다. 같이 간 친구들이 걷어 간 돈을 드리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빙긋이 웃으시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저도 하나님이 소명을 주셔서 신학교에 보내셨고 졸업한 후 목사가 되게 하셨는데 저도 할 수만 있으면 목회를 한번 해보고 싶고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고 싶습니다. 그런데 왠지 내 인생이 여기까지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주권이 그렇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러고 나니 마음이 참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두 달 후에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데려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비밀들을 해명하라고 하나님께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불행과 시련이 일어났을 때 ‘나의 죄 때문입니다. 잘못 때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든지 아니면 도저히 잘못을 발견할 수 없을 때는 ‘나의 모든 인생이 주님의 손안에 있으니 나에게 일어난 일 중 주님의 허락이 없이 일어난 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왜 이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당신은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는 주님의 손에 있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라고 고백을 하며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그래 주님이 주인이니까 주님 맘대로 하세요!’ 이런 의미가 아니라 주님이 내 인생의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니 이제 그분을 의지하겠노라는 표현입니다. 이 하나님 주권사상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욥은 바로 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욥은 왜 이런 재앙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몰라도 내게 이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의 주권을 통한 것이고 나는 이해할 수 없어도 이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이해할 때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을 때도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잘 해 주셔서 주님을 믿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들과 우리에게 좋은 일들이 일어날 때만 주님을 공경한다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런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할만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III. 순전함을 잃지 말라
마지막으로 욥은 우리에게 환란 가운데 있더라도 순전함을 잃지 말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순전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과 환란이 몰려와 혼란스럽고 고난이 겹치는 시련이 와도 악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 알 수 없지만 주님을 붙듭니다. 주님이 좋은 것을 주실 때만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인간의 논리를 초월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 불행에서 나를 당장 건져내지 않으시고 신앙을 따라 살아도 이 신앙에 대한 보상을 당장 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시련 속에서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들이 다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환란의 벼랑 끝에 서서 홀로 버림받아 모두 떠나가고 홀로 있는 것 같은 분들에게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여러분이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동행해 주어도 그들이 여러분을 벼랑 끝에서 업어 나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있어도 주님이 버리셨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고 만약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도 그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나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화) 제가 몇 해 전에 그런 예화를 하나 들어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꿈에 벼랑 끝에 서서 뛰어내려 죽어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자기 몸을 던지려는데 천사가 내려오더니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몸을 확 던졌는데 날개가 펼쳐지면서 절망의 계곡 위를 날아 건너편 언덕에 내립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찬양)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으시네.
주님!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인 것을 압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므로 주님 없이 내 인생이 팽개쳐 지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제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니 주님! 저를 버리지 마시고 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내 위에 날개를 달아 주세요! 홀로 남겨진 환란 날에 주님 앞에 묻고 따지는 것을 잠시 접고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3.환란 보다 두려운 것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찌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욥 7:16-21)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제 욥의 세 친구가 아주 멀리서 찾아왔습니다. 와 보니 이제 모든 가사는 전부다 잃어버렸고 불행과 고통이 겹친 가운데 자녀들마다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 욥은 온 몸이 악창이 나서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그러한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와서 이 욥을 보고 여러날 동안 말을 잇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제까지의 신앙관을 기초로 욥이 왜 이러한 불행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이제 변론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욥이 큰 환란을 만나고 그야말로 절망의 벼랑에 서게 된 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죄는 은닉되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죄를 짓지 않고는 하나님이 이렇게 끔찍한 형벌을 내리실수가 없다는 것이 이들이 생각하는 신앙관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정확히 맞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욥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욥은 완전히 깨끗하고 순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당하게 되는 고난이 그의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삶을 미루어 보고 하나님이 이 욥에 대해서 칭찬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욥이 당한 이 고난은 이 욥의 세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같은 인과응보의 고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하나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욥은 당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해 볼 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요. 순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 끔찍한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실은 욥 자신도 자기에게 있는 줄을 알지 못했던 그러한 깊은 이 불신앙과 죄의 뿌리들이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약에 이 욥에게 내리신 큰 재난과 고난이 이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그 죄의 뿌리에 대한 인과응보의 고난이라고 한다면 욥보다 더 많은 뿌리가 있고 거기에서 욥 보다도 더 많이 그 죄들이 드러나서 악을 행한 그 사람들은 아마 이 땅에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한적인 의미에서 욥의 세 친구들의 이 인과응보적인 죄벌관을 가지고 욥을 바라보았던 것은 잘못되었던 것이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흔히 알기로 정말 의롭고 순결하고 애매히 고난을 당한 사람의 대표자인 이 욥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얼만큼 자신 안에 있는 불신앙과 죄들을 드러내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들이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믿음의 양면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이 욥의 경우에 우리들이 지난 이틀 동안 살펴본 바와 같이 참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주 탁월한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도 욥과 같은 상황을 만난 사람도 없겠지만 또 만났다고 하더라도 자신 있게 나도 이틀 동안 욥이 보여준 것 같은 반응을 하나님과 나의 삶의 환란에 대해서 그대로 보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 사람 욥이 얼마나 신앙으로 산 사람이고 그의 신앙이 표피적인 신앙이 아니라 마음 깊이 뿌리박은 훌륭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자녀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재산을 모두 다 날려 버렸지만 한 순간에 불행이 닥쳤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했고, 그의 육신마저도 질병에 걸려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헌데를 긁으며 고통을 받아야 했지만 그 때에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II. 믿음의 양면성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오류중 하나는 우리들이 믿음이 충만할 때에는 우리 안에 믿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믿음이 가장 충만할 때에도 거듭난 자 안에는 믿음이 충만할 때에도 항상 의심이 존재하고 의심할 때에도 그 마음 어느 한구석에도 믿음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 중의 하나가 예수님이 바다 위로 베드로를 향하여 명령하시며 걸어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풍랑이는 바다를 걸었습니다. 아마 걸으면서 자기 자신도 굉장히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출렁거리는 바다 물결을 보았을 때, 그는 즉시 미끄러져 물속에 빠지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그 순간에도 그 속에서는 항상 의심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이 믿음이 굉장히 커서 거의 의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항상 이것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까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바다 위를 걸을 때는 그의 마음 전체가 믿음인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풍랑이 일면서 내가 빠지면 주님은 오라고 하시지만 주님이 나를 붙잡고 계신 것도 아닌데 내가 미끄러져 빠지면 어떻게 하나. 물결이 무섭도다 한번 쳐다보았을 때 그는 아무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의심하면서 물속으로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자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도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한 사람이 만약에 믿음이 충만하다면 그것은 그렇게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신 하나님 덕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이 믿음에 대해서 인간이, 인간이 이 믿음에 있어서 믿음의 기원과 원천은 주님이시고, 성령님이시지만 그러나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심에 있어서 우리의 믿고자 하는 의지를 초월하거나 혹은 믿고자 하는 의지에 반해서 이러한 믿음을 주신다고는 안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 안 믿으려는 사람, 믿고자 하는 뜻이 없는 사람에게 이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신 성령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되지만,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항상 성경이 우리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놓고 보면 이 욥이 오늘 얼마 전까지 그렇게 충만한 믿음을 보여 주었고 심지어 일생동안 자기와 함께했던 아내까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그렇게 그릇된 불평을 하였을 때에 욥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날이 길어졌습니다. 위로하기 위해서 온 친구들이 위로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염장을 지르며 ‘네 죄를 토설해 보거라. 어디에 하나님께 죄 짓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벌 받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토설하라.’고 하니 이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린 격이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냉수를 뿌린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고통을 받으면서 이 욥은 이제 자기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세 친구들과 함께 논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욥기는 굉장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욥의 친구들이 와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한 것, 그 광경이 너무 비참해서 입을 열지 못한 것만 7일이 되었다고 하니까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즐겁게 놀고 오락에 빠졌을 때는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흐르지만, 고난이 닥치고 시련이 밀려 올 때에는 정말 세월이 느리게 갑니다. 느리게 갑니다. 이제 결국은 시험 중에 영적인 침체가 찾아 오게 된 것입니다. 시험 중에. 그래서 사실 오늘 설교 제목이 환란 보다 두려운 것, 그랬습니다. 환란 보다 두려운 것은 뭐냐 하면 침체입니다. 침체. 영혼의 침체에 빠지는 것.
III. 시험 중에 찾아오는 침체
자, 이런 영혼의 침체란 것이 무엇일까요.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충만한 기운들이 쓰러져 가는 것,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의 활기와 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 증상들이 온 영혼의 기능에 나타나기를 시작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밥을 안 먹고 밥을 심하게 굶고 혹은 금식을 하고 하면 이게 육체에도 이 밥을 굶은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나이든 사람들은 눈이 자꾸 침침해져서 눈을 비비게 됩니다. 그러한가 하면 너무 배가 고프면 이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이 더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들립니다. 환청이 들립니다. 배가 고프면. 그 뿐만 아닙니다. 겨울 같은 때 배가 많이 고프면 추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춥고 배고프면 슬퍼지기 시작합니다. 사실은 이번에 기도원에 지난 주에 올라갔습니다. 이상하게, 이상하게 몇 년 전부터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게 되었습니다. 아침 전혀 안 먹었거든요. 힘이 없어요. 체중이 늘어나는 것 같아서 신문에 보니까 쫙 써 붙였어요. 데이비드 베컴의 부인이 처방 받은 건데 하루에 2인치를 빼는 다이어트 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신문 쪼가리를 오려서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하면서 슈퍼에 가서 밥 안 먹을 작정으로 우유도 하나 사고, 그 다음에 어묵도 하나 사고, 그리고 토마토도 몇 개 사고 그리고는 올라갔어요. 실시를 했거든요, 그런데 하루가 지났는데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성경이고 뭐고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와요. 그래서 빨리 기도원에서 내려와서 파리바게뜨 가서 빵 두 개 사먹고 이것은 내 분량이 아니다. 성도들이 설교 듣고 은혜 받겠지, 인치 수 보고 은혜 받겠나. 그런 현상이 오듯이 우리의 영혼도 똑같습니다. 더 예민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충만히 먹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은혜 안에서 영적인 생명이 충만하게 역사할 때는 눈도 밝아. 눈도 밝아요. 판단을 잘 합니다. 양쪽으로. 야, 저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나를 시험으로 이끌어 가는 사건이구나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냄새를 맡아도 아, 저기는 끌려가면 마지막에 죄짓게 되는 곳이구나. 금방 알아요. 그리고 그 다음에 소리를 딱 들어보면 아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내 욕망이 소리치는 것이구나. 이런 것들이 이제 분별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영적인 침체에 들게 되면 생명의 기운이 꺼지면서 이러한 원기와 환력이 사라집니다. 영혼은 어둡게 되고 지성은 눈 멀게 되고 그리고 감정은 통제가 잘 되었었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 모냥 내가 감정을 이렇게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요동치듯이 미친 듯이 말하자면 왜 로데오 경기 같은 데서 야생말 데려다가 딱 타면 그 놈의 말이 막 미친 듯이 사람을 떨궈내려고 난리를 치는 것처럼 나의 감정이 그렇게 충동을 합니다. 그리고 의지는 의지대로 완고해져서 아무리 형님인 이 지성이 너 그것 잘못됐다 그래도 말을 안 듣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하면서 이 영혼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의 찢어짐이라 했습니다. 라틴어로 디스텐데레라고 합니다.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막 지성은 지성대로 감성은 감성대로 의지는 의지대로 막 찢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산란해 지는 것입니다. 정신 없이. 그게 바로 영혼의 침체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서서히 싫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에 대한 싫증으로 번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좋으면 그 사람의 취향도 내가 좋아하게 되고 누군가가 싫으면 내가 좋아하다가도 그 사람이 좋아하면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까지도 반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침체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은 아주 무기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욥이 바로 시험이 계속되면서 이러한 침체가 찾아오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없었던 것을 사단이 이 욥에게 넣어준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지만 욥의 재산도 한 번에 불태워 버릴 수 있었고, 집도 무너뜨릴 수 있었고, 그의 건강도 빼앗아 갈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단조차도 욥의 마음속에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도록 그것을 사단이 그의 마음속에 넣어 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사단은 유혹할 뿐입니다. 유혹까지는 해. 유혹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만약에 유혹 받는 게 죄라면 예수님도 죄를 지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으니까요. 유혹을 받는 게 죄가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는 게 죄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불순종하게 될 때 마치 사단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원리 이 의자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강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지는 성격 자체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강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이제 유혹받을 때에는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아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유혹이 우리 속에 있는 것들과 함께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혹은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집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계속 잡아 당겨서 끌어내서 발현되어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마지막에는 바깥으로 이끌려져 나오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이 유혹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가지고 한번 욥의 마음의 변화를 읽어본다면 이런 것입니다. 욥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신약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아주 오랫동안 경건하게 은혜의 지배아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환란과 시련이 닥치고 자신이 이제껏 가본 적이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혹독한 벼랑 끝에 서게 되었고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동안 눈을 뜰 수 없는 그야말로 밤에 잠이 들면 아침에 깨고 싶지 않은 그래서 뒤편으로 넘어가 보면 태어난 날을 하나님 앞에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이렇게까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 속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 오래토록 은혜 안에 살면서 거의 있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깊이 묻혀 있던 그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과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해서 살려는 그 말하자면 불순종과 악의 뿌리들이, 부패한 뿌리들이 오랫동안 시험을 받고 끊임없이 사단에게 이끌리면서 그러면서 그것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A. 침체 속에 불평함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로 이 내용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침체 속에서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나를 놓으시옵소서. 내 날은 헛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욥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욥과 같이 경건하고 탁월한 사람도 한동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인내하였던 이 사람도 결국은 그 침체 속에서 불평하게 되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야 얼마나 더 이런 위험에 가까이 다가가겠습니까. 환란을 만나면 환란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영혼의 침체에 드는 것이고 그 침체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말은 밖에 나올 때만 말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이 말은 정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느끼는 게 많으면 말이 많아집니다. 마음에 느끼는 게 별로 없으면 말 하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그런데 느끼는 것 있으면 짧게 하는 게 고역입니다. 느끼는 게 많으니까 이 속에서 한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언어들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출렁 거리냐 하는 것에 따라서 언어들이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출렁거릴 때에 출렁거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그 다음에 주님의 탁월하심 이런 것들 때문에 마음이 출렁거릴 때는 이 속에서 찬송가 경배의 언어가 마음에 꽉 차는 것입니다. 참다 참다 못해서 입을 향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남이 지어놓은 찬송가 같은 것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막 찬송가를 지어. 그러면서 노래를 막 불러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막 솟구치면서 언어가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들은 말이 되고 그 말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발화가 되어서 말이 울려 퍼질 때, 이것들은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내 귀에 들리면서 고백의 놀라운 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고백의 놀라운 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하나님이신데 사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정말 뛰어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선하십니다, 하나님 정말 사랑이 많으시군요.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내가 그랬니? 난 정말 몰랐다. 네가 그렇게 칭찬해 주니까 참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나도 그래도 사랑이 있는 것 같구나. 하나님이 그러시겠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그런 고백이 얼마나 낯 간지러운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와서 목사님, 뭐 어쨌습니다, 어쨌습니다, 그럴 때 정말 싫을 때도 있습니다. 왜 저렇게 사람을 높일까. 그럴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런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말을 들으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 그런데도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런 고백을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그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더해주기 때문에 그 고백이 하나님께 좋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쏟아 놓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말이 마음에 있는 속에서 우러나와서 일치를 이루며 쏟아 나올 때 마음 안에 있을 때까지는 자기의 말이지만, 쏟아져 나오고 자기에게 들리고 입에서 발화가 되어서 퍼질 때에는 이게 하나님의 은혜요. 도구가 되어서 이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면서 은혜 받아본 적 없습니까? 많습니다. 그렇죠. 고개를 끄덕거려요, 전도 나오지도 않으면서. 그런데 보면 뭐냐 하면 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도를 하다가 이게 자기가 하는 그 말에 자기 자신이 움직이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때는 마치 자기가 말을 했는데도 그 말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제 3자가 되어서 그 말이 나를 움직이면서 변화시키고 막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고백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을 많이 하십시오. 놀랍습니다. 난 이런 것들을 남녀 관계에서 많이 봅니다. 뭐냐 하면 아무리 남녀가 친밀하게 지내도 사랑한다고 고백을 안 하면 발전을 안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만나서 내가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한 마디 이야기를 하면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죠. 이 속에서 나오는 고백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평은 그것의 반대입니다.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됩니다. 마음속에서 정동이 되는데 이 정동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은혜, 사랑, 신실하심,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정동이 되는 게 아니라 이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질서, 고통스러운 현실, 벼랑 끝에 서 있는 내 모습,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떠나버리고 혼자 내동댕이쳐져 있는 이 외로운 모습,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 속에서 정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정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마음의 언어를 꽉 채우고 나면 그러면 그것들이 결국은 샘의 물이 꽉 차면 흘러나오듯이 정동이 많아서 언어가 말 솟구치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약 올리거나 그럴 때에 갑자기 이 속에서 정동이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언어들이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 당할 때 언어가 막 솟구칩니다. 수많은 언어가. 지는 잘하는 것인가. 지도 옛날에 그랬으면서. 이렇게 물어보지도 않는데, 이렇게 물어보면 이렇게 답할 거야. 저렇게 물어보면 저렇게 답할 거야. 이 속에서 막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나고 나면 그것을 쏟아 놓고야 만다 이겁니다. 쏟아 놓았을 때 그 때는 놀라운 아주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이 사람의 영혼과 이런 것들을 일그러뜨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불평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불평하는 것 정도는 큰 죄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의 틀들을 허물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무를 이탈시키는 아주 굉장히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평, 불만, 이런 것들은 성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침체 속에서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자기가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정동들이 일어나면서 그 불평이 확 자기를 에워싸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환란은 극복하면 되는데 환란이 극도로 가봐야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 이상을 할 수가 없어요. 환란이.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이 뭐라고 그러셨어요. 그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기껏해야 그것이 우리 육신밖에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만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파괴적인 것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확 일어나는 것입니다. 환란을 만나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한 언어가 마음에 휘감고 있을 때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언어는 불평과 불만의 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찬양과 만족과 감사의 마음 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기도의 언어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진도를 더 나가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러한 불평의 끝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우리는 욥의 믿음과는 정 반대되는 욥의 아내가 욥에게 배설하듯이 쏟아 부은 그 불평의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러고도 당신이 당신의 순전함을 지키려고 합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십시오. 확 쏟아 놓았을 때, 이 언어는 바로 그 순간 조제해서 자기 남편에게 한 언어가 아닙니다. 이 언어를 쏟아내기 전에 이 어리석은 여자의 마음속에 수많은 정동이 일어났고 꾁 채웠던 그 언어 중에서 핵심을 쏟아 넣어서 이 남편에게 주고, 더 이상은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틀림없이 이 언어를 쏟아놓자마자 이 여자의 마음과 온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감정에 불탔을 것이라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경험도 그것을 말해요. 성경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일체에 더럽고 그렇게 불결한 말을 내지도 말아라.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이렇게 환란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하고 환란 속에서 우리의 재물을 잃어버리고, 환경의 평안함을 잃어버리고 고통을 받고 괴롭고 할 때, 이것이 너무나 크고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속에서 내가 영혼을 돌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가는 끝은 뻔한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환란 속에서 내가 위험한 상황에 있으니까 더더욱 영혼을 돌보아서 그 영혼이 환란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의 모든 영혼의 기능과 삶을 굳게 붙들고 인도하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우리에게 시험 당할 때 하나님께 뭘 구하라고 충고했습니까. 그렇죠. 너희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돈을 구하라, 평안을 구하라, 심지어는 능력을 구하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너희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지혜를 구하라. 그게 시험을 이기는 길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정신과 지성의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불평과 불만으로 얼룩져 있는 곳에서는 지혜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정과 온전한 평화와 절제 가운데 올바른 판단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란을 만났을 때 환란과 막 싸우고 몸부림치는데 사실은 자기 혼자 힘으로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싸우면서 그렇게 싸우는 동안에 영혼은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열심히 전쟁을 하다가 보면 적군이 삥 돌아서 자기의 뒤를 치거나 혹은 한니발의 전쟁에서 보는 것처럼 남의 나라를 치기 위해서 멀리 원정을 나갔는데, 적군이 어느 틈에 뒤로 돌아와서 떠나온 자신의 왕궁을 습격을 하고 공격을 해서 그래서 결국은 뜻을 못 이루고 회군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환란과 싸우는데 그 안에서 환란보다도 더 무서운 사단의 궤계가 일어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고 눈뜨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고 깨어 있으면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것을 극복할 수 있지만, 침체 속에서 불평을 늘어놓으며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더럽히게 될 때에는 우리가 그 시험과 환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침체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는 결단이 나고 하나님을 향해 싫증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의 감정들까지 생기게 된 속에서 어떻게 이 환란과 더불어 싸울 수 있겠으며, 벼랑 끝에선 절망 속에서 우리들이 돌이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이런 죄를 지으면서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더 깊은 침체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오늘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아, 환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나의 영혼이 침체에 빠져서 나의 영혼이 죄를 짓는 것이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왜냐하면 시험에 들면 대부분 악에 빠지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되 혹시 시험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악까지는 가지 말라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기시기 바랍니다.
B. 선하심을 의심함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 욥은 제 정신이 지금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어디서 많이 본 것이지요? 시편에서 다윗이
(찬양)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간이 무엇이관데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감격에 가득차서 이 티끌 같은 인간이 무엇인데 하나님이 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이런 피조물을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권고하십니까. 이 권고하신다는 것은 잘해라, 잘해라 그러는 게 아니라, 히브리말로 파카드 인데 방문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찾아오시나이까. 한없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완전히 맛이 간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크게 여기사, 이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서운 거냐는 것입니다, 침체가. 말을 꼬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우리 인간이 무엇인데 주께서 그렇게 크게 대접을 해 주셔서, 비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지금 욥이 하나님이 자기를 마음에 두고 계시다고 생각을 하면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까? 후자에요. 후자. 그리고 꼬는 것입니다. 아이고, 고양이 쥐 생각하네. 그렇잖아요. 괜찮아. 그러면 아이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대더니, 그런 표현입니다. 이게 지금. 얼마나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아침마다 혼내키시는 것입니다. 아침 시간이 무슨 시간이에요? 왜, 경건한 족장들에게는 뭐 하나님을 묵상하거나 그러한 시간이었겠지요. 그러한 시간에 하나님이 혼을 내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시편 73편에 나와요. 아침마다 나는 징책을 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니까, 주님께서 너 그렇게 살면 되겠니, 네가 그렇게 살고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아침에 성경을 읽으면 항상 어 너 잘했다, 너 잘했다. 성경 딱 덮을 때, 아이구 나는 잘났어 그리고 아멘 하고 끝나는 성경 읽기는 없습니다. 항상 보면 아, 하나님이 이렇게 원하시는구나. 정말 내가 잘못되었구나.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가 됩니다. 은혜가 되는게 아니라 이 사람은 지금 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우리를 야단치시는군요. 분초마다 우리가 잘사는지 못사는지 혹독하게 시험을 하십니까. 이게 지금 완전히 불평이라는 독약을 먹고 완전히 신앙심이 거의 가셔버린 이런 마취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불평의 힘이 믿음을 잃어버린 이것이 한순간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인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수없이 반복했기 때문에 여러분 귀에 덕지가 앉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과 환란에 처해도 두 가지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그 깊은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 두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내신다는 것. 그러면 적용을 해 봅시다.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신데 왜 우리 인생에는 악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신데 왜 내 인생에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에서 뭐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선하시면 우리를 왜 벼랑 끝에 세우십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명을 할테니까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마치 태양이 그 빛을 확 내려쬐어 온 지면을 비추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변함없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선을 베푸시는 선 자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선하다는게 무엇입니까. 좋다는 것입니다. 좋다는 게 무엇입니까.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그게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이다, 악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인간의 주관적인 것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해서 선하다, 악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 뭐 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사니까 다 많이 물들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자녀들이나 주위의 어린 아이들에게 쓰다듬어 주면서 그래서 너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여러분 말해 본 적 있습니까. 우리는 참 어렸을 때 수없이 그 말을 듣고 자랐는데, 요즘은 가끔 매스컵 같은 것 나오는 것을 보면 착한 아이로 키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맨 이용만 당하기 때문에 그러면서 영악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6살 7살 아이에게 주식 프로그램이 있어가지고 돈 버는 방법, 부자되는 비결,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고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착하다 라고 이야기 할 때 잘 들어보십시오. 아주 자기 사회에서 존경받는 아주 덕망 있는 분이 아이를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이가 무슨 행동을 했어요. 그때에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 넌 참 착하구나. 넌 참 착하구나. 그랬을 때에는 진짜 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괴범이 와 가지고 너 이리좀 와봐. 싫어요, 아저씨. 우리 엄마가 모르는 사람에게 가지 말라고 했어요. 야, 천원 짜리 보여주면서 이거 줄게 저기 가서 우리 저기 가서 떡볶이 사 먹자. 정말이요? 몇 번 그러다가 그래 아저씨가 떡볶이도 사주고 장난감도 사줄게. 아저씨 따라갈꺼지? 네 그리고 따라서 쫄래쫄래 올 때 유괴범이 아 착하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은 틀린 거란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완전히 틀린 거란 말입니다. 우리를 그 유괴범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그 존경받는 아저씨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 사람이나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판단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잘 움직여줄 때에는 머리를 쓰담아 주면서 착하다, 좋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한테는 그것이 좋지만 유괴범은 이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아 착하다 그러지만 그 광경을 보며 걔네 엄마가 달려와서 똑같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너 정말 착하다 유괴범한테 넘어갔구나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상대적인 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이야기입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하나님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불변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변함없이 없는 바위 덩어리라는 것이 아니라, 바위도 맨날 변합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한 성품이 일관되게 쫙 빛이 비취듯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게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류 역사를 보면서 절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태양을 보면서 불변하는 것의 대명사로 생각을 했습니다. 태양이 변하지 않는 태양을 몇 십억년 지나면 이제 태양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태양이 햇빛을 지구상에 환하게 비춥니다. 그래서 이 식물들이 싹이 트고 그 다음에 잎과 가지가 나면서 성장하면서 그 다음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잖아요. 꽝꽝 겨울에 얼음이 얼었는데 봄이 되면 그 햇빛을 받으면서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이 흐르면서 바다에도 풀들이 자라고 생태계가 막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균은 햇빛에 노출되면 죽습니다. 균의 입장에서 보면 저 놈은 나쁜 햇빛. 이렇게 됩니다. 누가 균이 되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백성들에게는 무지무지한 위로가 되었고 하나님과 맞서서 사는 악인들에게는 끔찍한 상상하기 싫은 현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시다는 것이.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선은 모든 인간들을 당신에게 이끌어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선의 광채인데 여러분이 불순종하고 딴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란을 당하고 있는 그 현실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부모가 정말 아이를 사랑하면 야단을 칠까요. 안칠까요. 당연히 야단을 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이들 혼 안냅니다. 네 인생 네가 사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니까 가서는 안 될 길로 걸어갈 때, 그것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니까 여러분이 변해서 가서는 안 될 길로 갈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증거기에 히브리서 12장에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만약에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사생자다. 하나님이 버리신 자식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하시는 거야. 왜, 변함없이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을 향해 걸어갈 때는 그 강력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어서 당신께로 돌아와 행복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환란과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하나님이 잘못하신 게 있겠습니까. 또 욥을 놓고 생각을 해 보면, 물론 욥의 경우는 특별할 것입니다. 그죠. 외적으로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이 욥이 시련을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렇지만 자기가 이야기 했잖아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라며. 자기가 분명히 얼마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가져가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하나님 홀로 찬송을 받을지어다 그랬잖아요. 지금은 왜 그 마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침마다 나를 징책 하셨습니다. 하면 어때, 지 자식 자기가 야단 치는데 혼 좀 나면 안되나요. 하나님이 몰라서 자기를 야단 치셨을까요? 야단 칠 수도 있지. 자기가 뭐 완벽하다고. 그리고 그 다음에 분초마다 시험하십니다. 시험하건 말건 하나님 마음이지. 완전하면 시험이 되겠어요, 불완전하니까 시험을 당하는 거지. 모두가 감사의 제목 아니에요. 여러분 한 반에 30-40명씩 공부를 하는데 집 아이가 맨날 늦게 와. 그래서 너는 맨날 늦게 오냐 그랬더니 아, 엄마 나는 너무 힘들어, 선생님이 애들 다 보내고 나만 불러서 이것은 이렇게 풀지 말아라. 매일 가르쳐 줘. 여러분 어떻게 하겠어요. 드링크라도 사들고 학교로 뛰어 가지 않겠어요. 왜 우리 아이만 차별 대우 하냐고 눈을 불알이겠어요. 뭐가 잘못되었느냐. 마음의 불평과 원망의 독이 퍼지게 되면 하나님의 속성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이 악하게 보이고 심지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나의 길을 잘못 인도하신 것처럼 보여도 그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내가 그것을 모두 설명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것을 굳게 붙들어야 됩니다. 이 끈을 확 놓게 되면 그 다음에는 정처 없이 추락을 하면서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꽉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세뇌되다 싶이 마음속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어떤 의미에서든지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떤 환란에 처해도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져 내신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여러분 물에 빠져 본 경험 있어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 있어요? 그러면 물에 빠져서 막 들어갈 때 그 때 최선을 다해서 허우적거리고 우리 몸의 기관 중 어디만이라도 물 밖으로 내보내려고 몸부림을 칠까요. 머리, 당연하지. 그 중 어디를 내보내요. 코죠. 코. 코에 호흡이 있으니까. 물속에 빠졌는데, 내 사지 중 그래도 예쁜 데라고는 발뒤꿈치인데 그러면서 발뒤꿈치를 드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코, 코의 호흡만 끝까지 입으로 물을 먹어도 코만이라도 내보내려고 몸부림을 치잖아요. 사실 마지막에 코만 위에 나와 있으면 춥고 불편하지만 구조대 올 때까지 살아있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시험에 빠졌을 때, 모두 시험에 잠겨도 영혼의 기능중 하나만은 잠기지 않도록 미친 듯이 그 시험의 물위로 올려 보내야 할 영혼의 기능이 있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대답을 못해요. 지성입니다. 지성. 생각입니다. 생각.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포착되어야지만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참 신자들의 신앙의 양태가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씀을 들으면서 집중을 합니다. 살인적으로 집중을 합니다. 뭐 대단한 성도들 많이 만나 봤습니다. 집중을 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에 가가지고 밤새도록 그리고 아침에도 들으면서 다 녹취를 해가지고 사경회 끝나기 전에 그러는 사람들 봤습니다. 그래서 뭐하냐 그러니까 자기 혼자 가지고 있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합니까. 그런데 놀랍게 시험에 들면 그냥 한꺼번에 자신 물에 뜬 물 씻겨 내려가듯이 한 번에 확 쓸려 내려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 쓸려 나갑니다. 완전히 마음이 냉담해지면서 시험에 들자마자 생각까지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일주일 동안 그렇게 시험에 든 삶을 살다가도 예배 시간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후자의 사람은 물에 빠졌는데도 어떻게 하든지 코라도 빼내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입니다. 전자의 사람은 물에 빠진 길에 잠수하는 사람입니다. 푹 들어가는 겁니다. 몸부림쳐서 뭐하랴. 가라앉자. 몸무게도 있겠다 쭉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제일 먼저 시험에 들면 우리의 정신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집중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욥이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시험에 들었을 때, 오늘 마음에 확 붙들어야 합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리고 마음속으로 마음이 다 따라와 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찬양 한번 불러 볼까요. 칠수 있지요, 반주자. 빨리 쳐봐요. 오래 간만이네요.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찬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쩌고 저쩌고 했을 때 아니야 절대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야. 사람도 그렇게 신뢰하면서 아니야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 그것은 나의 착각이고 생각이야. 아니야.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야. 내게 악을 행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 나는 악을 행해도 그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야.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건져 주실 것이야. 그렇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도 내가 한 두 번 한 것 같은데 옛날에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시키는 일 가운데 제일 싫은 일이 있습니다. 실 감는 것입니다. 실을 사오는데 실이 똑바로 되어 있는 것은 비싸요. 가게에 가면 엉클어져 있는 것 싸게 팔거든요. 사가지고 그 실을 너무 힘들어요. 이렇게 있으면 할머니가 감는데 이것 가지고 막 춤을 추셔요. 확 끊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못 쓴데요. 실패를 가지고 팔 사이로 실 사이로 왔다갔다 한참동안 하고 나면 머리 삼발한 것처럼 흐틀어진게 다 해서 실패에 쫙 정돈이 됩니다. 어렵고 복잡할수록 확 가위로 끊어버리면 그러면 안됩니다. 천천히 천천히 풀어야 합니다. 쭉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하나님을 오해함
마지막에 시험 중에 찾아온 침체가 뭘 가져왔냐 하면 하나님을 오해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합니다. 이 불평 속에 뼈가 있는 게 느껴지는 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에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이 사람이 얼마 전에는 가져가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니 영광과 찬송을 돌리라고 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환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시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 정말 못됐어요. 잘들어 보세요. 사람을 감찰하시는 주여. 이것도 꼬는 것입니다. 감찰하시는 주여 내가 범죄 하였은들 주님께 무슨 해가 되었겠습니까.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범죄 하였은들 내가 주님께 무슨 해를 끼쳤겠습니까. 말이 되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주님의 덕으로 창조된 인간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음과 영혼까지도 모두 주님의 것인데 어떻게 자기가 범죄해서 경건한 시인들을 회개할 때 뭐라 그래요? 나의 죄가 하늘에까지 미쳤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재를 날리면서 회개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뭐라 그래요. 내가 범죄 했다고 칩시다. 막 나는 것입니다, 이제. 뭘 하나님이 그렇게 손해를 보셨습니까. 이 침체에 빠지면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게 불신자이지 신자입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더 나갑니다. 뭐라 그러냐 하면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궁사가 활을 가지고 과녁을 이렇게 쏘잖아요. 이렇게, 과녁을 이렇게 쏘잖아요. 그러면 부담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냥 함부로 화살을 쏜다면 부담 없이 미친놈처럼 아무 대나 쏘면 돼. 과녁을 놓고 딱 10점 짜리에 맞추려면 어떻게 합니까? 숨을 하 쉬다가 합 이러고 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겨냥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 이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섭섭한 감정이 뼈 속 깊이 베어있는 것입니다.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나를 집중 공격하시는데 나를 맞추시는데 얼마나 애쓰십니까. 이것입니다. 내 친구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고 나만 겨냥해서, 애들 말로 하면 하나님은 나만 못살게 해.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 그러냐 하면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아니하시며, 내 죄과를 재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니까. 그런데 사실 자기 고백의 모순이 됩니다. 1장에서 잔치를 하고난 뒤에도 꼭 자신의 자녀들 위해서 제사를 드렸다고 그랬습니다. 뭐라 그러냐 하면 부지불식간도 그 아이들이 죄를 지었을지 모르기 때문에 뭐라 그러냐 하면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랬더라. 뭘 확신하면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혹시 우리 애들이 잘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주실 거라는 확신 속에서 번제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침체 속에서 믿음이 다 날라가고 하나님은 나의 죄를 사해 주시지 않는구나. 그런데 나는 죄가 뭔지도 모르겠다. 더 나쁜게 뒤에 나와요. 뭐라 그러냐 하면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잊지 아니 하리이다. 하나님이 어제는 나의 모든 재산을 날려버리시고 그 다음에는 내 새끼들을 모두 데려가시고 그 다음에는 내 건강을 모두 빼앗아 가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 아내가 거의 나를 버리고 떠나갈 것같은 그런 독한 말로 나를 쏘아서 나를 버렸고 이제는 나를 사랑한다는 친구들이 와서 내 추운 날에 내 가슴에 말하자면 찬 물을 뿌려서 얼어붓게 만들고 상처 난 그 위에 식초를 들이붓고 있는데 나 이제 흙에 누울 것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누가 누구 마음대로. 인간이 살고 죽는 주권을 누가 가지고 계신데, 얼마 전에는 그 주권을 잘 노래했잖아요. 주신 이도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라 그러더니 하나님은 물질에만 주인이고 자기 생명에는 주인이 아니신가. 그런데 하나님 허락도 없이 나는 이제 죽을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과 상관없이 나는 내가 선택하면 내가 누울 수 있습니다. 흙 이불을 덮고 들어 누울 텐데 그 때 주님이 나 욥을 괴롭히기 위해서 궁사가 화살을 겨누듯이 활을 겨누듯이 이 놈을 찾아 나서서 쏴야지 해 보십시오. 죽었지요. 이게 신앙입니까. 그러니까 이 한번 영혼이 불평과 절망에 감염이 되면 그가 달려가는 길은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끔찍한 길을 달려갑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 환란을 당한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 환란 속에서 서서히 침몰되어 가고 있는 이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이런 시련 이런 환란을 지난해부터 겪으면서 여러분에게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환란과 시련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한 하에 있고, 물론 주님이 한순간에라도 명령을 하면 여러분을 거기에서 구출해 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온 관심사는 그것 하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망가진 영혼이니 시험 속에서 시련을 당할 때에 망가진 영혼이라는 것이 들어났는데 그것이 고쳐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았을 때, 그 다음에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사는 그저 얼른 뚝딱 금시발복하여 이 시험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시험에서 우리 자신의 이렇게 실패할 수 없었던 우리 영혼을 고치시는 것이 하나님을 환란을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오해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환란의 학교에서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환란의 학교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값비싼 희생을 치루면서 우리로 하여금 배우게 하십니다. 신앙은 성공을 통해서 배우는 것보다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축복받고 칭찬 받았던 것은 오래 기억이 남지만, 우리를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 받고 고통스러웠던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발견하며 환란의 학교에서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씩 문제가 복잡하고 어려울수록 하나씩 매듭을 풀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환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영혼의 파괴입니다. 그러면서 불평하며 죄를 짓고 혼돈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대들고 선하심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비아냥거리고 이렇게 하면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갖 불순종과 대적의 감정이 솟구칠 때, 그 때 성도의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은 어디로 갔겠습니까. 욥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환란을 당한 게 아닙니다. 그랬는데도 원망하고 불평하니까 이렇게 영혼에 무서운 파괴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감히 욥과 같은 이유 때문에 시험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렇게 불평하고 침체 속에서 헤매게 되면 더 무서운 결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환란보다 더 두려운 일이 내 영혼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옳지 않은 곳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주님께 돌아와서 환란보다 더 두려운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25-27)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이제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온 이 세 친구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욥에게 너의 죄와 악함으로 이러한 환란을 당했으니 이제 너의 악과 죄를 토설하고 뉘우쳐 돌이켜야 한다고 충고하였습니다. 그 충고는 욥의 변명만큼이나 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욥에게 충고하였고 욥은 그 충고를 받아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강변하면서 18장, 19장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또한 수하 사람 빌닷이라고 하는 친구가 이제 악인이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고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다고 그 논설을 펼치면서 이 욥을 회개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이 때 욥은 다시 기력이 남았는지 이 수하사람 빌닷에 대해서 반론을 길게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우리가 읽은 25절 이하에서 이제 이 욥이 친구들과 변론을 하다가 문뜩 눈을 들어 구속자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II. 구속자를 바라봄
이것은 구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도 흥미 있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 뿐만 아니라 또 하나 보인이라고 번역된 그 구절 속에서 중보자의 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으로 여겨지는 이 사람의 시대에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구속자, 중보자에 대한 계시까지 다다를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욥기에 보면 이 중보자의 개념이 명백하게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복음주의적인 해석가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욥기에 있어서 탁월한 기독론을 보여주고 있고 그래서 이 욥은 비록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계시에 있어서는 그 유한하고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과 완전히 거룩하고 초월해 계신 하나님 사이에 위대한 중보자의 개념을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욥은 이제 고난 속에서 중대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자기를 구속해 줄 구속자가 있어서 그 구속자가 결국은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우리의 인생의 세상살이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그 구속자가 온전히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후일에는 그가 땅 위에 온전히 스셔서 온 땅을 제왕처럼 다스릴 것이니 그날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이 처지와 형편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 욥의 세 친구들이 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을 때, 어쩌면 욥은 자신의 이 고통 받는 처지를 이 세 친구들이 잘 이해하고 자신을 격려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강력한 이 평면적 신앙,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인과응보적 신앙에 묶여 있던 권선징악적인 사고를 가진 이 사람들에게는 이 욥이 배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평면적인 논리로 평범한 선악의 징벌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주어지는 이 욥의 고난에 대해 이들의 충고는 답을 주기는커녕 상처위에 소금을 뿌리고 추운 날 덜덜 떠는 사람에게 냉수를 끼얹은 것 같은 그러한 고통을 점점 더 가중 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 욥에게는 구속자를 바라보는 신앙이 생겼습니다.
A. 사람 바라보지 않음
그것은 제일먼저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이제 세 친구들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도 변론이 계속되지만, 욥의 마음속에는 이제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을 의지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그를 더욱더 채찍질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대게 환란을 만나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게 되면 사람을 벼랑 끝에 서게 되었을 때에는 항상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깨뜨린 상처를 가지고 벼랑 끝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대게 환란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대게 망가져 있습니다. 신앙으로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인내하고 은혜 중에 그 시련을 이기는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이 환란 속에서 망가진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고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렇게 너그럽던 사람이 표독하고 그리고 아주 악한 성격으로 변합니다. 너그럽고 관용을 베풀던 사람이 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그리고 아주 작은 일에도 커다란 복수를 꿈꾸는 잔인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에게 환란이 오고 시련이 올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치시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거기에는 제2의 원인이 사용이 됩니다. 제1의 원인은 하나님이고, 제2의 원인은 이 세상에 있는 환경이나 혹은 사람이죠. 오늘 욥을 보십시오. 그의 가축 떼들이 도적들에게 습격을 받아서 모두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큰 바람이 불고 대풍이 일어나면서 집 네 모퉁이의 기둥이 무너지면서 사랑스러운 자식들이 깔려 죽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때에도 사람을 사용하셔서 주시고, 우리에게 나쁜 것이 주어질 때에도 항상 사람을 통해서 나쁜 것이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옛 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것이 있습니다. 물 위에다 아무리 글씨를 써도 물이 흘러가면 글씨가 남질 않겠죠. 사람들에게 입은 은혜와 은덕은 흐르는 물에 새긴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쉽게 잊혀 집니다만, 원하는 우리의 마음에 돌에 새긴 것처럼 깊이 새겨져서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고 선명하게 우리의 가슴속에 남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어서 우리에게 은덕을 끼친 사람들을 가끔은 기억한 적이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혀 집니다. 우리를 인생의 환란으로 내몰고 벼랑 끝에 세운 사람들은 우리에게 은덕을 베풀어 준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서 우리를 돕고 우리를 축복한 사람들이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세우는 법은 없죠. 대부분 우리를 벼랑 끝에 세웠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우리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던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마음속에 깊이, 깊이 돌에 글씨를 새기듯이 바로 새겨 놓습니다. 자, 환란이다 시련이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적인 연단이다. 하나님의 섭리다. 이런 것 다 접어 두고라도 우리가 벼랑 끝에 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우리가 마음속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이 있다면 기도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막힘이 오게 되는 것이죠. 하물며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을 이런 불행에 몰아넣어주는데 도구가 되었던 사람들을 향한 원망이 한둘쯤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과 관계가 깨지고 그에게 깊이 원한을 맺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벼랑 끝에서 서있지 않고 평지에 서도 그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데 하물며 벼랑 끝에 내몰려서 그가 위기 가운데 있을 때에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린 위기는 대부분 자신의 잘못과 불순종과 그리고 탐욕과 욕망 때문에 이끌려서 거기에 온 것인데, 그것만 해도 하나님 앞에 정상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데 그 위에 자신의 잘못은 회개할 줄 모르고 누군가 자신을 그 상태에 몰아넣었던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을 지독하게 미워하고, 그 사람의 이름을 한처럼 자기의 가슴에 새길 때, 그가 과연 거기에서 신앙의 어떤 힘을 소유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이죠. 불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도 자기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하는 느낌을 받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지금 그 벼랑 끝에 서 있는 이유가 누구누구 때문이라는 원망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 벼랑 끝에서 벗어나 다시 평지를 걸어가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원한다면 먼저 마음속에 그것부터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생겨날까요.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 때문에 절망하게 될까요. 소망을 사람들에게 두었기 때문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을 때, 제일 먼저 혜택 입게 만들어 놓으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주신 사람입니다. 그렇게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들이 구원을 얻고 그 은혜의 은덕으로 하나님의 언약 자손이 된 이후에 우리가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할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그리고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십자가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 그들이 그 사랑 안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화) 대게 교회의 복음성가는 세상에서 유행을 안 하는 법인데, CF까지 나오고, 아주 세상 사람들도 술 먹고도 한번씩 부르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그런데 대게 거기에서 끝나더라고요. 뭐, 태초부터 하나님이, 그것은 안 해, 잘라 버리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연예인이 탑스타였는데 자살을 했습니다. 이제 그가 죽었을 때, 친구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 친구에게 노래를 보낸다고 그러면서 틀어준 음악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제, 열린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여러 가지 강의도, 사경회 뿐만 아니라 강의도 잘 들었던 사람들은 하나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뭐냐 하면 기독교가 가르치는 참된 진리로 정직하게 돌아가면 이 기독교 사상의 체계는 현대를 사는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인간들이 전혀 코드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도 했잖아요. 여러 가지 문제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다른 종교로 가고 그리고 개신교로 오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람들이 오늘날의 사고와는 맞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직하고 올바르게 복음을 가르칠 때 그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그 우리 기독교 신앙이 원래 이렇게 정직하게 복음을 전하고 참된 신앙을 전파하면 이 사상적 코드가 현대인들과는 워낙 안 맞기 때문에, 복음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사실인데 그런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상과 진리의 측면에서 현대인들의 코드에 너무 안 맞는 그 하나님 중심적인 사상이지만, 그렇게 현대인과 코드가 전혀 안 맞는 사상을 전한다 할지라도 만약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정말 정직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참된 인생의 보람을 남을 위해 사는데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베풀면 현대인들은 사상의 체계보다도 가슴에 밀려오는 것을 더 확실하게 붙들고 믿는 것입니다. 동의가 안 되요? 동의 되야지. 그래서 말이죠.
오늘날은 청소년 선교가 굉장히 어렵지만, 청소년 때에 청소년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최고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선생님이나 위인이나 부모님, 이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누구에요, 친구에요. 친구. 그래서 친구가, 친구가 자신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면 종교 하나 따라가는 것은 일도 아니에요. 물론 그 종교를 끝까지 받아들이느냐는 영적인 문제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현대인들의 특징을 이야기 하면서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훨씬 지적이 아니라 정적이라 했잖아요. 정적입니다. 그래서 뭘 믿냐 하면 자기에게 오는 감동과 feel을 믿어요. 그러한 감동과 feel을 참된 인간의 사랑으로 인격적인 사랑으로 그들에게 미쳤을 때 그들의 마음은 흔들리는 것입니다. 쉽게 믿지 않아요.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것은 하나의 충분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단순히 사상적 구조가 특별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잘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를 접고 정말 찬송이 우리에게 이르는 대로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소리쳐서 사랑받기 원하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정말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감동이 되어서 그 사랑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베풀 때, 그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이웃의 그러한 사랑의 섬김을 받으면서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신앙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면, 사랑은 우리 모두가 사랑은 하나님께로 받고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사랑은 하나님께로 많이 받고 그리고 그 다음엔 그것을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밖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지체들끼리는 실망했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해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렇게 많은 기대를 걸고 서로를 쳐다보기를 원하지 않으셔요. 그러면 소망이 없다. 저게 뭘 하겠나, 그런 뜻이 아니라 꿈은 가져도 꿈은 가져도 그것을 자기가 낙심하고 그 사람 때문에 실망 할 정도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체들은 사랑을 하라고 주신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 우리는 사랑을 어디에서 받습니까. 주님께 받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 그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고 그 사랑을 나를 통해서 그 사랑이 흘려 갈 때, 사람들이 변화되면 사실은 나를 도구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거잖아요. 그렇게 변한 그 속에서 기뻐하는 영혼들과 즐거워하는 하나님을 보면서 즐거워하면서 기뻐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살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람에 대해서 과도한 기대, 그리고 과도한 말하자면 저 사람이 나를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 같이 어울리도록 내게 사랑을 줄 것이다 라는 그런 대응적 사랑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나중에 삶의 공황을 맞이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부모들이 자식을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공황이 안 와. 그런데 자식에게 온갖 사랑을 다 쏟아 붓고 그랬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자식이 시집가고 장가가서 날라 가면 마음에 엄청난 공황이 오고, 난 우울증 걸리는 부모들도 봤어요. 자식들만 놓고 애지중지 하다가 막 그 배신감을 느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자식도 사랑하지 말고 남편도 너무 사랑하면 죽으면 그것 어떻게 해. 적당히 뭐 죽으면 그래 뭐. 봐도 살고 안 봐도 살고 그러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사랑이 사람 사이를 휘도는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육신의 정이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서 반드시 배반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우리들의 옛 어른들이 보면 지혜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가족들과의 관계도 너무 가슴이 저미도록 너무 많이 사랑한단 말입니다. 아내나 남편, 부모님이나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죽기 전에는 꼭 그렇게 마음이 상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정을 떼고 죽는다. 그 충격을 덜하게 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우리에게 베푸는 어떤 하나님의 어떤 배려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나도, 저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어요. 정말 헤어지기 어려운 사람들, 그 헤어지기 직전에 정을 떼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래서 헤어질 때는 덜 충격이 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죠. 그렇잖아요.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죠. 그러라는 뜻이 아니라 뭐냐 하면 그냥 자식을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제발 우리는 그런 말 하지 맙시다. 어떻게 기르길 뭐, 농협 쌀로 길렀지, 뭐 어떻게 길러. 뭐 어떻게 길러.
(예화)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니까 만화가 하나 나오는데 청소년 애가 막 눈물을 흘리면서 얼굴을 표독스럽게 하면서 엄마, 아빠가 나한테 평생 해준 게 뭐 있는데, 그러니까 이제 엄마가 너 말 잘했다. 너 이리로 와. 창고를 탁 하고 열면서 결혼해가지고 임신한 때부터 시작해서 가계부를 써 놓은 것을 19년치를 보관해 놓았어요. 그래서 무릎을 꿇어 앉혀놓고 야, 너 뱃속에 들었을 때 내가 너 기르려고 우유 사먹은 것, 뭐 먹은 것, 다 해서 귀저기 값, 분유 값. 얘가 마지막에는 얼굴이 빨게 지면서 해준 게 많네.
그러니까 제발 그런 이야기, 그것은 인생을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당신 밖에서 누구 어느 인간에게 매인 종류의 사랑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셔요. 그게 자식이라도 남편이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오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물론 자식을 아주 사랑해야죠. 그리고 예쁘다 그러고 그래도 좀 많이 안아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긍휼하게 여기고 그리고 그것 좀 다그치지 말고 따뜻하게 좀 하고 그리고 딸들을 떼려 기르는 사람들은 동물이야. 딸은 그렇게 기르는 게 아니야. 절대 손대지 말고 잘못할수록 그저 그렇게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길러야 되는 것입니다. 감화를 시켜서. 그렇게 많이 사랑해 줘야 되지만, 그러나 나중에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그렇게 그 말이 나오도록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란 말이야.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반드시 상실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탁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난 괜찮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충분하다. 하나님 사랑 하나로 충분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자녀들을 주셨고, 아내도 주셨고 남편도 주셨고,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도 주셨고. 그래서 전 충분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충분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목사님들이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는데 개척교회를 하고 열심히 목회를 하는 두 목사님이 밥을 먹고 있다가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개척하고 3년 동안은 너무 좋아요. 자기네 둘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좋아요. 너무 한 식구 같고 사랑으로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되는데 3년이 지나고 나면 권태기가 오면서 막 깨지기 시작하고 갈등이 시작하는데 그때가 너무 괴로워요. 나보고 목사님도 그랬죠? 아니요. 왜요. 나는 교인들하고 그런 신혼 시절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그러니까 우리는 권태기도 없어요.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내가 태어났다라고 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자꾸 커지고 소망이 생기게 되고, 나중에는 나를 해고지 해서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 기대를 채워주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향한 의존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가끔 인간이 얼마나 의지할 것이 못되는지를 한 번씩 털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탁탁 털어서 청소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어디 나가려고 하는데 옷을 펼쳐 봤는데 먼지가 묻었잖아요. 막 털잖아요. 그리고 옷을 입잖아요. 하나님이 털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못하기 때문이죠. 그것입니다. 오늘 환란 가운데서 만약에 사람을 향한 원망이 있고 그 사람을 향한 미움이 있다면 아마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기대를 많이 걸었던 사람이거나 혹은 여러분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일 텐데 오늘 사람에게 그렇게 묶인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가보면 배들이 발동을 걸고 부웅 하고 통통통통 그러면서 배가 이른 아침이면 이제 고기도 잡으러 가고 그물도 거두러 가고 떠날 때 발동을 건 다음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다. 그 선장이 가서 조정관을 잡고 방향타를 움직이는 게 먼저가 아니라 부두에 묶어둔 줄을 푸는 게 먼저입니다. 시동을 건 다음에는 가서는 제일 먼저 줄을 끌러요. 그리고 그 다음에 닻을 올리고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가장 순수할 때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때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시인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할 때, 후렴구처럼 잘 썼던 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나이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의 그에게로서 나오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속에서 잘 불렀던 찬송이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도움이 어디서올꼬.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그 찬송입니다. 환란과 시련을 당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산을 보는 것입니다. 저 큰 산을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욥에게 이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마음을 가질 때, 영혼은 이 세상에서 닻을 끌러 하나님께 항해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랬습니다. 어제 설교가 바로 그것이었죠. 환란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있는데, 그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무서운 파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정말 절망의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고 싶다면, 그 날개를 달아주시는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기 위해서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망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모두 끌러 주십시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정신 못 차리고 사니까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나를 이끌어준 도구들이라 생각을 해요. 하나님의 사자라 생각을 하고 그리고 주님 앞에 사람 보지 않는 하나님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B. 구속자를 바라봄
두 번째는 구속자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욥, 이 사람이 말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땅위에 선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원래 이 구속자는 하늘에 있는 구속자이거든요. 그 구속자가 후일에는 땅에 서실 것이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데 후일에는 땅위에 서실 것이다. 땅위에 선다는 것은 땅은 앉아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죠. 왕권을 가지고 그 모든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구속자가 이 세상의 나라를 다스릴 때가 오게 되면 자기처럼 이렇게 커다랗게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 이 끔찍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었는데도 이렇게 부당하게 환란을 당하고 눈을 감으면 뜨고 싶지 않을 정도의 비참한 형편에 처해서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으로 그 헌데를 긁으면서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 비난과 문초를 당하고 있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 왜, 전능하신 그 분이 온 세상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이매 그렇다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매.
그러면 도대체 구속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속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약에서 이 구속은 구약에서 구속이라고 이야기 할 때 이 사상과 신약에서 구속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상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에서의 구속은 환경적이고 물리적이고 그리고 그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불행과 고통받는 상태로부터 그들을 구원하는 육적 구원의 개념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우리가 신앙적으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택을 입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예시적으로 예표적으로 보여주셨어요. 신약에 와서는 그것이 뒤집히면서 이 구속의 개념은 우리가 이 구속의 개념은 오히려 영적으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그 불행에서 건져주어 우리의 인생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고 그래서 우리의 삶에 영적인 국면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국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육체까지도 안녕한 삶을 살 수있도록 모든 결핍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는 것이 구속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의 개념들이 이렇게 교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구약에서는 외적인 구속의 개념이 크게, 영적인 구속의 개념이 작게 들어왔다면 신약에서는 반대로 이것들이 펼쳐나가는데 둘다 영혼만의 구속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전체의 전인적인 구출을 의미하는 구속입니다. 이 사람은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보내시고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건져 주시고 환경과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의 흐름과 또 도덕의 모든 흐름까지도 주님이 장악하셔서 당신이 불행과 고통에서 건져주고자 하시는 자를 능히 건지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다는 사실을 이 욥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에게 많은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마음을 이 모든 세상 사람에 대한 기대, 이 세상에서 저절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철저히 때어 놓아서 그래서 우리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바꿔 놓으시려고 인간적인 기대를 가지고 의지할 모든 것들을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물질을 잃어버리게 만드시고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의 의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깊이 실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 혼자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이 이 세상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게 되면 우리를 그렇게 환란에 이르도록 만들어준 제2원인이 되는 사람이 있고, 우리의 어리석음도 있고 환경의 도움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인생의 벼랑끝까지 밀려오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게 되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장악하고 질서를 움직이고 계신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도록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세웠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기서 자기가 왜 거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신 주님의 경고처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다음에는 거기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사람이 고쳐질 수 없고, 오늘 그 벼랑 끝에서 그 사람을 끌어낸다 할지라도 바뀌지 않는 그 사람은 결국 그 벼랑 끝으로 걸어가기 때문이죠. 오늘 여기에서 그를 이끌어 낸다고 하더라도 성향이 벼랑 끝을 걸어가는 성향이기 때문에 결국은 오늘은 끌어내도 언젠가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삶의 궤적을 그리는 그 사람의 영혼이 바뀌지 아니하면 그래서 그의 삶의 태도가 변화되지 않으면 새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벼랑 끝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애절하게 정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 한분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마음을 다하여 매달렸던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러면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지 다시 한 번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아득한 옛 추억이라도 여러분이 정말 은혜 가운에 있는 사람인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실은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래서 나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무릎을 꿇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하나님 한분께만 모든 소망을 두면서 간절히 매달리는 그러한 절실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그에게 있어야죠. 그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절대 의존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서 영광을 받으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온 땅에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시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생명체 하나 없고 인간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이 광활하고 무한대한 우주안에 있는 별들의 반짝임을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 보다는 주일학교 한 학생이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주님 잘 믿는 착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라고 회개하고 고백하는 그 마음 안에서 받으시는 그 영광이 온 우주에서 받으시는 영광보다 크다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는 처소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하박국서에 보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충만한 하나님의 지식이 세계를 덮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지구를 어떻게 덮어요. 온 세상을 어떻게 덮어요. 어떻게 덮어요. 하늘에서 막 성경을 뿌려 가지고 전 국토를 덮어 버릴까? 성경책으로? 아닌 것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그러면 뭐에요. 그게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충만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을 덮는데 뒷동산을 덮고 우면산이나 관악산을 뒤덮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 같으면 우리가 전단지를 왜 북으로 날리겠어요. 우리나라부터 성경을 잔뜩 집어넣고 전단지를 날라서 온 세상을 성경으로 덮어 버리지. 그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처럼 바다를 덮음과 같이 그 마음을 충만하게 덮은 사람들이 사랑의 연대를 이루면서 사람들이 그 사람들과의 관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라 이야기에요. 그 속에서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그것이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입니다. 그 나라의 본질을 가장 먼저 실현하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가 교회에요. 가정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교회나 가정, 온 세상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에 넘치게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 분을 아는 지식으로 넘칠 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마음속에 큰 꿈, 아름다운 비전, 이런 것들을 품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때 그 인간의 마음의 조건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절대적으로 깊이 인간이 의존하게 될 때, 그 때에는 두 가지가 인간 속에 확실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을 대적하는 모든 죄에 대한 거부와 그리고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든지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순종,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 안에 있는 거란 것입니다. 그런 절대 의존의 마음속에서 영혼은 가장 활기를 얻게 되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깊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있을 때, 기도는 별로 준비운동도 필요가 없어요. 보통 때는 찬양을 30분쯤 부르고 기도를 해도 마음이 싸늘한데, 이런 하나님을 향한 의존하는 마음이 넘칠 때는 예배당 문을 탁 열고 들어와서 무릎을 꿇으면 물이 확 쏟아지듯이 마음이 교회 바닥으로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티끌 같은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요. 말씀을 들을 때에도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들게 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놀랍게 자기의 마음에 가서 꽂히면서 그래서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에 처해있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이렇게 그리스도만을 앙망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활을 쏘는 궁사가 과녁을 향해 활을 쏠 때 모든 잡념을 다 뿌리치고 잊어버리고 오직 그 눈 하나로 그 과녁을 응시하면서 무아의 경지로 들어가요. 그리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최선을 다해서 화살을 과녁을 향해 쏠 때에는 그의 의식 속에는 활을 쏘는 자신조차도 잊어버린다 그래요. 그 과녁 하나에 자신의 온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되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잘못으로 인생의 벼랑 끝에 왔다고 할지라도 악은 우리 맘대로 행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뒷감당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환란에 있어서 영원한 미성년자입니다. 애들이 사고 치면 부모가 가서 그 사고를 해결해 주고 오잖아요. 똑같이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서 사고를 쳐서 벼랑 끝에서 설수는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앙망하며 그 분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속자는 일방적으로 하나님 편만 드시는 분이 아니죠.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알고 한편으로는 인간이시기에 인간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시죠.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 알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에게 알게 하여 그래서 우리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오실 앞길을 소개하도록 부름을 받았던 요한의 출생에 대해서 그는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이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시는 분이시겠습니까. 우리가 시련과 환란을 당해서 인생의 벼랑 끝에 있으면서 아직까지도 세상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사람의 도움과 꾀로서 이 모든 환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시련 속에서 건져 주시는 큰 능력을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음이 없이 쏟아 붓는 일만 마디의 기도보다는 마음을 다해서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쏟아 붓는 한 마디의 기도가 주님을 움직이는 힘이 더 크다는 것은 여러분이 경험해 봤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로 하여금 구속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환란을 당하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을 때도 어느 날 하나님이 한 번에 벼랑 끝에 여러분을 세우시는 적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벼랑 끝에 서기까지 무수한 하나님의 경고, 그리고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하나님의 충고가 있고난 후에 수없이 그 말씀을 보내었지만 여러분에 의해서 적절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을 잃으실까봐 차라리 여러분을 환란 가운데서라도 당신을 참는 의존의 신앙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여러분을 일부러 벼랑 끝에까지 걸어가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회개하여야 할 일은 나 혼자 사는데 익숙했던 것들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이제껏 살았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고 믿는 동안에는 더 많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도저히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한걸음도 우리의 인생을 걸어갈 수 없다라고 하는 그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마음이 시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당연한 삶이었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기도시간을 잰 적도 없고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얼마나 많이 추운 새벽에 걸어나오고 밤에 잠을 안 자고 고생을 했는지도 우리는 적어 놓은 적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하는 바이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 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여종이 주모의 손을 종이 상전의 손을 바라고 거기에만 희망을 거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의존하는 존재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한 번 더 주님 앞에 낮아질 때에 세상 사람들보다 비참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고 주님 앞에 내가 이렇게 낮아질 수 있고 나는 그렇게 뛰어난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주님 앞에는 커다란 복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바라보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우리들이 매일 매일 상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재물을 주실 때에도 주신 재물에 마음이 치우치지 않았을 때, 주님이 우리의 지위를 높여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도록 덕스럽게 만들어 주셨을 때에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내 마음에 있는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의 불결함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로 나를 붙들어 달라고 하소연 했을 때, 우리는 기도 속에서 매일 매일 위기를 만나고 기도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위기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두 평온하게 사는 것 같았지만 그러한 평온한 삶 이면에는 매일 매일 나의 또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나갈 우리의 마음의 바르지 않음과 우리의 마음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음을 인해서 애통하고 그리고 나를 미워하고 그래서 기도가 끝난 후에는 매일 매일
(찬양)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싸우고 매일 매일 이기고 매일 매일 긴장하고 매일 매일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베풀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변함이 없는 사랑. 나는 매일 배반을 하고 주님의 은혜대로 살지 못하는데도 기도하면 다시 은혜를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다시 섬길 기회를 주시고 다시 주님을 향하여 몸부림 칠 수 있는 자리를 주신 것을 바라보며 감격해서 마음의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래서 주님을 위해 부단히 영적인 분투를 할 때, 우리는 인생의 벼랑 끝으로 걸어가 본적이 없습니다. 마음에 이런 몸부림이 사라지고 우리 지성소에 불이 꺼졌을 때에는 그때에 우리 마음의 총명도 사라지고 주님을 마음속에서 잊어버린 증거가 금방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내 안에 하나님이 없는 증거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애절하고도 반복적인 호소가 있고난 후에 이제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 말고는 우리를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경의 채찍을 드십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께는 우리의 마음이 성령 충만해야 움직이지만 보이는 환경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눈만 뜨고 있으면 볼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환경으로 다루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돌이키시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환란 자체가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환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때려 보지 못했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시고 알았던 것을 버리게 하시고 잊제 하시고, 잊었던 것을 생각나게 하셔서 그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참된 사람의 본분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C. 부활신앙으로 이김
욥은 오늘 하나님 앞에 이처럼 몸부림을 치면서 자신의 이 불행한 처지를 이기는 중요한 밧줄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자신의 이 육체를 모두 벗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갈 줄을 알았으며, 그렇게 이 죄 많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 버리고 난 후에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구속주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종 우리에게 환란을 주셔서 이렇게 인생의 벼랑 끝에 내어몰리게 한 그 때에 우리는 거기서 형통할 때는 깨닫지 못했던 아주 중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많이 축복하셔서 돈을 움켜쥐고 있을 때에는 이 돈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 내 인생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다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이 물질이 얼마나 내 인생에 있어서 덧 없는 것이고 그리고 나 자신의 참다운 행복이 이 물질의 다과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깨닫게 되는 것은 역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있을 때는 못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고 예배를 드릴 때 그 말씀이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얼마나 남다른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벼랑 끝에서 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 봅니다.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 앞에 한 마디도 부르짖을 수 없는 자신의 환경은 하나님 앞에 피를 토하며 기도해도 모자랄 위기인 것만은 영혼이 죽어서 한 마디도 기도를 이을 수 없을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수많은 날들이 내 힘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주님이 음성을 들려주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의 손을 붙들어 옳은 길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인도해주시는 경험이 그 때는 그렇게 대단한 경험인지 몰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영혼의 어두운 시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그렇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깨닫고 예전까지는 내가 예배드리고 내 지성으로 말씀을 깨닫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주님의 커다란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려온 것들이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우리들의 약점과 모든 결점을 대신 지시고 대속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 그 십자가 사랑의 구속 때문에 벼랑 끝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며 소망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은혜 중에 있을 때 이 땅과 하늘나라를 공평하게 사랑했더라면 우리와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공정하게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사랑했더라면 결코 이렇게 위기를 만나고 우리들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지 않았을 텐데. 우리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 우리의 욕망에 흐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 걸음 한 걸음 내 생각을 따르고 내 욕망을 따르고 내 의l지에 순종하다 보니까 어느 날 눈을 떠 보니까 인생의 벼랑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오늘 욥이 가졌던 이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바입니다. 주님이, 주님이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질기고 모진지를 아시기 때문에 당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이 세상에서 배반을 당하게 하십니다. 맨 처음 여러분이 어둠속에서 방황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복음적 사실을 듣고 주님께 돌아오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모두 행복한 삶을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 되어서 가시밭길 같은 인생에서 떨고 울고 있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먼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 가셔서 강하고 편 팔로 여러분을 그 가시덤불에서 건져내서 싸매시고 치료해 당신의 양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주님께 돌아와 누렸던 그 안식 이전에 세상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이 세상에서 더 큰 번영과 행복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 속에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래 있다가 이 세상에 살다가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면서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이 모든 여러분의 인간 존재의 여정 가운데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 대 시간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더 많은 여러분의 존재에 남은 날들이 주님과 함께 복락을 누리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이 세상의 의미는 하늘의 빛을 비춰보아야 알 수 있고 시간의 의미는 영원에 빛을 받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매일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면서 발은 여기에 붙이고 살아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그네 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유는 이 땅에서 자신이 나그네인줄 아시고 영원한 본향이 부활 너머 저편에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III. 주께로 더 가까이
자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잃어버리고 벼랑 끝에 서 있기 때문에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건져 주셔서 여러분이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은 여러분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잠시 누리며 살다가 갈 세상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무대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신앙의 사연을 써내려가라고 주님이 주신 편지지가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환란 가운데서 여러분이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부활신앙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때 부끄럽지 않도록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주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다가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로 더 가까이.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결론
이 세상의 영원한 사랑은 사람들에게도 없고 이 세상에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 세상에 누가 여러분의 영원한 애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불변하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것이니 벼랑 끝에 서서도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에 매이지 않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 보다는 여러분의 사랑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미끄러지며 벼랑 끝까지 가게 된 것도 주님 사랑에 붙들려 살지 않았기 때문이고, 맹목적으로 이끄는 여러분의 사랑에 이끌려 걸어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은 여러분이 잘못한 것이었을 것이고, 여러분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또 잘못한 어떤 사람을 사용하셔서 여러분의 인생을 벼랑 끝에 세우셨을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원망과 소망, 미련 모두 버리고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내가 그를 바리리라고 고백했던 이 욥처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굳게 붙들어 주님의 그 아름다운 은혜의 진수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니사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욥 23:8~10)
녹취자 : 허혜숙
I. 본문해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아마 욥기 전체 가운에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이고 또 사랑받는 성경 구절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이 욥은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을 향한 모든 소망을 접고 이제 자신의 구속자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자신이 환란을 당한 이 상황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자신의 의로움을 변박하는 그 일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의 상황을 주목하던 시선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구속자를 앙망하며 이제 자신의 육체 바깥에서 그 분을 뵈올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을 표하는가 하면 오늘 여기에서는 주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은 그 소망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며 왼편에서 일하시나 만날 수 없고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가 없구나’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뵈옵기를 원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환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붙들고, 인내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는 이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뵙고 싶은 갈망과 열정을 갖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열정이 단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잘못 된 것 없다는 변명과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더 큰 뜻으로 자신을 이런 상황에 두셨고 결국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왜 이 상황에 두셨는지를 깨닫는 비결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자신의 지성의 한계, 자신의 지식과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모든 인식의 한계를 고백을 하면서 절대 의존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늘의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보면 하나님이 사단과 겨루시기 위해서 욥을 고난에 붙이신 것 같지만 더 넓은 섭리의 경륜 속에서 보면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쉽게 풀 수 없는 애매히 당하는 것 같은 시련과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욥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는 것과 그리고 인간은 행복과 불행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그 분을 경배하는 가운데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진리의 빛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 지를 날마다 깨닫고 또 깨닫게 되는 가운데 우리들이 어두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빛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오래 살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조금 살았는데 가정용 조명의 변천사를 죽 겪었습니다. 지금 맨 끝자락에 생각나는 것은 조그만 호롱불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어느 관광지에 갔다가 그것을 하나 사 왔는데 밑에다 기름을 집어넣고 주먹만한 종지에 불을 붙입니다. 그것을 아주 어렸을 때 시골에 가면 그것을 켜던 기억이 납니다. 희미한 불빛이 납니다. 그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두워지면 잤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호롱불이 비치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가끔 노인들이 호롱불 아주 가까이에서 바느질을 한다고 하는데 잘 보였겠습니까? 그러다가 호야가 나왔습니다. 호야는 등유, 석유를 유리병에 집어넣고 말하자면 램프입니다. 불꽃을 조절하면 환 합니다 .그것이 맨 처음 시골에 들어왔을 때 시골 사람들이 너무 밝으니까 좋아서 감탄을 했습니다. 그 호롱불을 30개를 켜 놓아도 그 호야만큼 밝지 않았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 호야가 진화를 해서 그 다음에는 위 뚜껑까지 매달린 특별한 호야가 나옵니다. 그 호야는 정말 단단하게 생겼고 불을 켜면 신기하게 이전에 있었던 호야보다는 1.5~2배 정도 밝았는데 그 호야는 정말 부자만 쓰던 호야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전봇대가 서고 나서 전깃불이 들어옵니다. 사람들이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만지다가 손을 데고는 했습니다. 전기가 문제가 아니라 전기의 품질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주 산업용으로 전기를 쓰게 되면, 이번에도 일본에서 반도체 공장에서 전기가 나가면서 일천 억 가까운 손실이 났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제품들을 만들면서 똑같은 질의 전기가 와야 하는데 전기가 강했다 약했다 한다든지 끊어진다 하게 되면 그 걸려있는 모든 제품들을 버리면서 그 라인이 중단되고 엄청난 손실이 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약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밧데리의 전원이 다 떨어져갑니다. 생각이 날 때 글을 써야 하는데 그래서 스튜어디스를 불러서 전기 좀 꽂게 해 달라 했습니다. 코드가 저기 어디 보니까 비상코드가 있었습니다. 잠간 기다리라고 하면서 조종사한테 갔다 오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 거기에 전기 꽂지 마세요, 전기가 들어오긴 하는데 전기 질이 별로 안 좋아요, 컴퓨터가 망가질 것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전기가 질이 안 좋은 것입니다. 불이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기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밤 10시만 되면 전기불이 다 나갔습니다. 열시가 되어도 전기가 안 나가는 집은 특선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형광등이 나왔습니다. 형광등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빛이 어떻게 이렇게 하얄 수 있나’ 하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전력도 조금 들어가고 대낮처럼 엄청나게 밝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전기가 발전해 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냐면 모든 인간의 비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신기한 게 육신의 질병을 걸렸을 때에는 왜 질병이 걸렸는지를 의사가 진단을 해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부터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행동을 안 하려고 애를 쓰면서 인생을 삽니다. 고기 많이 먹다가 암이 걸린 사람들은 육식을 자꾸 절제하게 됩니다. 술을 많이 먹다가 위에 구멍이 나서 죽다 살아난 사람들은 웬만하면 술을 안 먹으려고 애를 쓰고, 담배도 마찬가지이고 무리해서 그런 질병을 겪어 죽음의 선상까지 갔던 사람들은 일을 줄이고 더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고 영혼이 잘못되어서 인생의 벼랑 끝까지 갔다가 구출만 받고 나서 이제 살만 하고 숨통이 트이면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처럼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세 번, 네 번, 다섯 번, 서도 항상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발자취를 걸어서 벼랑 끝으로 갑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무지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깜깜한데 있으려고 창문을 열지 않으니까 어둠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커튼만 젖히면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데 그냥 있는 것이니까 그냥 어두움을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은 어두움과 싸울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싸울 문제인 것입니다. 진리와 싸우고 진리를 습득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때 어두움은 자연스럽게 물러가기를 마치 어두운 방에서 어두움이 물러가기를 애쓸 필요가 없고 빛이 들어오게 하면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인간이 왜 태어났습니까?’ 할 때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하는 이 말을 할 때마다 여러분은 웃는데 웃을 일이 아니라 그것은 인생의 심오한 비밀이 담겨있는 규칙입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는 그 기쁨과 영광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들이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설령 그렇게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거룩한 진리의 빛으로 여러분을 이끌어서 그 벼랑 끝에서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I. 환란 날에 숨으신 하나님
우리들이 이제껏 살아온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하나님이 꼭 환난 날에는 숨으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환난 날에 숨으시는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환난 날에 숨으실까 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고 혼란스러운 것은 환난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만났기 때문에 정신이 없고, 기도도 할 수 없고, 마음을 신앙생활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환난 날에 숨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오래도록 찬송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역사의 한 지점에서 언제나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특별한 언약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 할 때에는 언제나 역사를 생각했습니다.
‘시오노나나미’라고 하는 일본 작가는 말하기를 ‘인간이 역사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가 정말 싫어 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인간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인간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과 관계를 맺으셨던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쓰는 편지지이고 또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쓰는 편지지입니다. 그래서 역사라는 편지지에 하나님도 쓰고, 인간도 쓰면서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언젠가 모두 죽을 것입니다. 아마 열린 교회는 없어지지 않겠죠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한 우리 후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역사는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록들을 잘 남겨두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들을 마음을 써서 잘 남겨놓으려고 합니다. 남겨 놓으면 그 남겨놓은 것이 성도들이 아 땅에서 사는 동안에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서신서를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역사 상 나타났던 수 천 수 만 명의 전도자 가운데 한 사람처럼 이름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이 잊혀 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그의 역사를 보고 그와 함께 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 역사하시고 당신의 뜻들을 이뤄가셨습니다. 그들이 항상 찬송할 때에는 역사 속에 나타나서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환난을 만나면 이 환난 때문에, 시련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할 수 없고, 기도도 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섬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한 나라를 향해서 역사를 통해, 교회를 향해 역사를 통해, 우리 개인을 통해 역사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가 지나면서 역사 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해 동안의 일들을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던 1년 동안의 역사를 통해서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었고, 어느 지점에서 놓았고, 그리고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갈 길을 잃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환난을 당해도 환란 그 자체가 하나님이 숨으시는 하나님이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환난이 우리를 우리의 환란 날에 하나님을 숨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시지만 우리의 영혼의 침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을 당하고 난 후에 혼란스러워지는 우리를 보면서 이 시련과 환난이 나를 신앙생활하지 못하도록 방해 하고 있고 나의 정신을 온통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환난을 만나지 않고 더 형통한 길을 걸어갔더라면 더 멀리 주님을 잊어버리고 더 주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숨으시는 분처럼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외에 더욱이 우리들이 더 죄를 짓게 되는 것은 환난 날에 숨으시는 것이 자신의 영혼의 침체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대신 이런 환난 날에는 하나님이 나 혼자 버려두고 숨으셨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욥처럼 불평하기까지 하고 심지어는 앙심을 품고 죽을 마음까지 먹게 되니 이 어찌 하나님 앞에 커다란 반역이 아닐 수 없겠습니까? 인간에게는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을 하고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 선생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인간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철저히 반대했고 제네바에서 목회를 할 때 자살한 사람들의 가족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습니다. 그것을 잘 했느냐 못 했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것을 잘못했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애매히 고난을 당하든지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으면 그냥 그것을 모두 감수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는 기회로 삼아야지 스스로 자신이, 욥이 그저께 말한 것처럼 ‘내가 흙 속에 숨어 누워버리리니 하나님이 나를 찾아도 이제는 없을 것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까?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런 마음이 경건하고 신앙이 뛰어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요한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자살 론에서도 철저하게 펼쳐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시련과 환난이 무슨 이유로 오든지 간에 내가 당하여야 하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당하고 견디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고, 만약에 그런 시련이 혹독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눈을 들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면서 주님을 찾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끔찍한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선을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라고 격려했고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작년엔가 약 2주간 쉬었습니다. 루터는 혁명가였잖습니까? 그 때 루터 유적지에 가서는 경건해지고 엄숙해지기는 하는데 눈물이 안 났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 이어서인가 봅니다. 그런데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에 가서는 한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거기에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목회하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자체 때문이 아니라 침체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반응을 하나님 앞에 보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난 날에 하나님이 숨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침체 말고 또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영혼의 놀람’이라고 말했는데 놀란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기뻐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직면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익숙하지 않은 그 환경에 대해서 영혼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마음의 평형 상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판단력과 모든 것들이 흐려지고 마음의 평정과 안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신앙이라고 하는 이것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 ‘하나님 우리 목사님 정말 피곤합니다’ 안 피곤한데, ‘영육 간에 곤고하십니다’, 난 안 그런데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럽니까? 저는 안 그런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 정서의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목사님이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열심히 집회를 인도하여 왔고 이렇게 이렇게 해왔습니다 하나님이 더 힘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기도해야 하는데 ‘하나님, 우리 목사님께서 영육 간에 곤고한 중에 있습니다’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저를 방황하는 신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지하실 교회에 모여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우리는 일주일 동안 내내 죄만 짓다 왔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아닌데... 다들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 소망을 가지고 왔던 사람도 맥이 쭉 빠집니다. 진짜 곤고한 것 같고 말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데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인간이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이 평형상태가 잘 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새벽에 기도 잘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잖습니까? 그 때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성질을 확 돋우는 전화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이 때 하나님이 느껴집니까? 안 느껴집니다. 여러분, 어떤 물건이나 뭘 보고 안달하는 것에 대해 저것을 꼭 손에 넣어야지 하면 하나님이 느껴집니까? 굉장히 예민한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이 갑자기 커다란 환란이 와서 마음이 뒤집힐 때 더군다나 거기에서 자기가 원망할만한 어떤 사람들을 찾아냈을 때 그 때 마음의 평정이 깨지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친 듯이 콩닥거리는 마음을 가지고는 성경을 펼쳐도 글자만 머릿속에서 날라 다니지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며칠 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입각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디스텐데라’고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시간 속에서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 찢어지는 마음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바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합치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모두 마음이 모아지면서 하나님 한 분을 향해서 앙망을 하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기도도 하나님을 향해 빨아 올려가고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되어서 흘러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시간 뿐만 아니라 묵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신을 집중해서 경건서적을 읽는다든지, 말씀을 묵상한다든지, 교리 묵상을 한다든지, 설교를 듣는다든지 이러한 영혼의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훈련이 되면 은혜의 강함은 이 집중과 모아짐이 단단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강하면 외부에서 환경이 좀 바뀌고 그래도 이것이 좀처럼 찢어지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도 마음지킴의 교리에서 설명했습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쓸모없는 세상이다’ 하면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정신이 찢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굉장히 견디기 힘든 모욕을 주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확 솟구치면 그 때 찢어지는 균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찢어짐을 면하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렇게 죽으셨는데, 그래 인간이 그럴 수 있지’ 라며 접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시련과 환란이 와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있고 나서 야고보도 죽임을 당하고 끔직한 일이 일어났어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옥 속에서 쿨쿨 잠을 잤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환란에 정신이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주님 한 분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나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꾸 남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 본인도 남편 마음에 안 듭니다. 자식들이 자꾸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 자식들도 부모가 마음에 안 듭니다. 여러분 태어나서 누구 마음에 그렇게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 마음에 듭니까? 안 들죠? 여러분은 더 제 마음에 안 듭니다. 여러분 중에 한 사람도 저런 성도들로 열린 교회가 꽉 채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명도. 사람은 인지상정이라고 여러분도 저에게 그렇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차이가 나는 모자란 부분을 주님 때문에 매꾸고 살아가는데 주님이 없으면 이 메우는 것이 없어지면서 우지직 찢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낳아놓고 ‘왜 저 자식이 내 새끼일까?’ 그러면 그 아이들은 자기들 친구한테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우리 부모를 만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관계도 남편은 아내가 마음에 꼭 드는데 아내는 남편이 마음에 절대 안 드는 그런 부부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희귀입니다. 그것은 여름날 눈이 하얗게 내렸을 때 진달래꽃 찾는 것만큼 힘든 것입니다. 다 오고가는 것이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향해서 그렇게 자기의 마음에 딱 맞을 것이라는 그런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기대입니다. 인간은 그런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누군가가 내 마음에 딱 맞을 때 그 때는 ‘이변이 일어났구나 어떻게 저 인간이 내 마음에 맞을 수가 있을까? 이건 정말 안 받아도 되는 보너스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잘 안 맞을 때는 ‘저것이 원래 우리가 사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의 변화가 출렁거리고 일어나서 고통과 어려움이 올 때에 그것을 이변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이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나그네라고 규정하시고 ‘이 세상에는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없다고 말씀하셨구나’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시련과 환란을 적절히 통과하면서 살아온 성도들이 세상과 하늘나라의 균형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으면 누구든지 이 세상에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여러분, 천국에 대해서 설교한 것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요즈음은 특히 강남에서 천국에 대해서 설교를 하니까 누군가가 ‘목사님이 강북에서 우리 교회에 부임해 오셔서 그렇지 이 강남도 살만하다고, 돈은 이미 있으니까 건강하기만 하면 굳이 천국 안가도 여기도 살만 하다고’ 정말 넉넉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없겠습니까? 뭐가 없겠습니까?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수도원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고 절이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결국은 세상으로 멀어지려고 하는데 거기에서 또 다른 세상이 형성이 됩니다. 그것이 세상이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항상 마음이 찢어지지 않도록 주님을 꽉 붙들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지만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이 숨으셨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 무지가 두 종류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안 좋아서 생기는 무지가 있고, 원래 몰라서 생기는 무지가 있습니다. 분별을 해보면 원래 모르는 것은 원래 배운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오리지날 무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과 교제하다보면 정신이 산란스럽고 교리적으로 아무 정리가 안 된 사람들 있잖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오리지날로 무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가르쳐 줄 때에는 놀랍게 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상황에 들어갔을 때는 실패를 합니다. 그것은 몰라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그런 종류의 무지는 영적인 상태에 따라 달린 무지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깨어있고 하나님 앞에 정말 정신이 찢어지지 않은 가운데 온전한 삶을 살 때는 우리가 선악간의 무엇을 택할 때 이것이 뒤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둑을 두는 8, 9단 되는 사람들이 돌멩이 하나를 놓으면 20-30개까지 안다고 합니다. 이렇게 놓으면 저 사람이 이렇게 놓고 그럼 내가 저렇게 놓으면 저 사람이 저렇게 놓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4단 정도 되면 확 쓸어버리면 흑백 돌을 가지고 원래 있던 대로 다 놓습니다. 그것을 복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자신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그것이 잘못된 결과를 몰고 올 것이라고 하는 그것이 눈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제가 평생 잊지 못하게 설명해 주겠습니다. 자 보십시다.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는 A4용지에 석장 내지 네 장에 식품 명을 쓰고 칼로리를 외워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얼마 전에 빵집에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은 칼로리를 빵에 다 써놓습니다. 제가 빵을 싫어하는데 그래도 배고플 때 맛있게 먹는 빵이 꽈배기 입니다. 배고플 때 그것을 네 개 정도 먹어야 배가 차는데 그 빵 하나에 517칼로리였습니다.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저것은 먹지를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빙 둘러서 갑니다. 그렇게 죽 외워야 합니다. 그런데 상태가 좋을 때는, 목표가 뚜렷할 때에는 ‘이것 먹어?’ 이것저것 생각해서 먹고 싶어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몇 칼로리란 사실을 다 알면서도 먹고 싶은 마음이 적었을 때에 죽 생각하던 논리들이 모두 없어지고 어떤 식으로든지 합리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칼로리는 좀 높아도 몸이 좋아하는 것을 먹어주면 건강해 질 거야’ 모두 물 건너가는 것 입니다.다
알고 있어도 알고 있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그것이 생생하게 내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은 지식이고 그 지식을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때로는 지식은 이만큼 가지고 있는데 은혜가 거의 없는 사람은 알면서도 계속해서 나쁘고 바람직하지 않는 길을 가고 정말 교리를 물어봐도 무지하고, 잘 모르고 지식이라고는 요만큼 밖에 없는데 상태가 너무 좋습니다. 충만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예배 시간에 맨 날 훌쩍이는 사람이 하는 사람이 훨씬 훌륭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식이 적어도 그 지식을 꽉 붙들고 살고 이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팽개치고 살기 때문에 실제의 삶에 있어서 현저하게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지식이 무용하다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버려진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요만한 지식을 가지고 성령 충만하고 은혜 가운데 사는 그런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성령 충만 하고 그런 사람들, 지식은 거의 없는 사람들이 내몰리기 쉬운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은 충만한 지식을 가지고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산다면 얼마나 놀라운 삶을 살겠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원래 모르는 것과 알았는데 그것이 생생하게 내 안에서 역사하지 않아서 그렇게 사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죄 죽임의 교리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생생하게 예를 들었는데 그것이 뭐냐면 ‘영으로서 죄를 죽이면 살고, 그리고 만약에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 죄가 우리를 멸 한다’ 한동안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면서 우리들이 계속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8장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행실을 죽인다는 의미가 마음속에 있는 죄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생생한 표현을 했습니다. 밤에 산에 가서 비는 부슬부슬 오는데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데 자고 있는데 다리를 턱 걸쳤는데 뭔가 물컹한 것이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뱀이었습니다. 깨물면 죽을 정도로 엄청난 놈이었습니다. 그럴 때 어쩌겠느냐? 물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옆에 예리하고 강력하게 찌를 수 있는 훌륭한 칼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옆에 있는데 다행히 나를 못 본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서 머리에 꽂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가 ‘목사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요? 요즘 죄를 발견했는데 죽이기 싫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움으로 말미암은 무지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공책 끼고 교회에 나가 공부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환란 날에 하나님이 숨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첫날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오셨다 가셨다 하는 것도 모두 우리의 신앙이고 생각이지 주님이 떠나가시면 가신 빈자리에는 누가 있으며 우리에게 오셨으면 전에 계시던 그 자리는 비워놓고 공석 중에 찾아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하나님이 환란 속에서 사라지셨느냐 나타나셨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제 여러분이 벼랑 끝에서 혹은 환란 속에서 ‘왜 하나님은 이 환란의 날에 숨으셨는가’ 라고 탄식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는 것이며 또 어떤 이유 때문에 사실은 가까이 계시면서도 그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회개하고 주님이 바로 자신이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기를 떠나고 숨으셨다고 생각한 그 하나님이 사실은 자기 가장 가까이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내 죄를 회개하고 곡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그래서 오래 전부터 항상 가까이 계셨다는 사실을 그 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환란 속에서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묻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벼랑 끝에,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III. 벼랑 끝에 세우신 계획
A. 의지하게 하심
그러면 도대체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왜 벼랑 끝에 세우실까? 벼랑 끝에까지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욥의 고백을 보십시오. ‘앞으로 가도 안계시고 뒤로 가도 안 보이고 왼편에서 일하시는데 나는 만날 수 없고 오른편에서 움직이시는데 나는 그 분을 뵈올 수가 없구나’ 그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제 중요한 고백을 토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여기에서 오직이라는 말은 자신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나는 모르고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야다’라라고 하는 동사가 사용이 되는데 ‘알다’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아는 것이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다, 사랑하다, 아니면 친밀하다, ‘경험으로 사랑으로 그를 알다’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경험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이 인정한다, 특별히 선택한다, 사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말의 알다 라는 것과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인이 고백을 하는데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예전에는 불평하고 불만하면서 ‘왜 하나님은 죄 없는 나에게 이런 혹독한 시련을 안겨 주시나?’ ‘내가 그 분을 만나서 한 번 따져봐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이 겹치고 고난의 세월이 흐르고 세 친구들까지 자신의 쓰라린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는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쉽게 알 수 없는 이 고난과 환란을 내게 허락하신 그것은 당신만이 가지고 계신 그 계획안에서 내 인생을 움직이는 것인데 결국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 한 분만이 모두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여러분을 아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시는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아시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광야를 지날 때에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날으는 것 같이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업어 날랐다.
제가 동물학자는 아니지만 어느 주석에 보니까 미심쩍긴 한데 그런 말을 합니다. 모든 동물들이 발톱으로 새끼를 붙잡아서 옮기는데 독수리는 날개 위에 새끼를 올려놓고 옮긴다더라 그래서 사냥꾼이 활을 쏘아도 어미를 맞추지 않고는 새끼를 떨어뜨릴 수 없다는 그런 생각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가 나오는데 선택, 인도, 보호입니다. 이것은 언약관계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렸던 특권이었습니다. 선택했을 뿐 아니라 인도하고 인도하는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난관 속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심으로서 언약백성들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써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우리에게 이 사실을 적용해 봅시다. 만약에 여러분이 환란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인생의 벼랑 끝과 같은 상황에 오게 되었다고 칩시다. 한편으로는 환경적으로 여러분이 그럴 수도 있고 또 환경에 있어서는 무슨 물질의 손해를 본 것이 아니고, 질병이 엄습하거나, 사업에 위기가 온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는 그대로가 아니다. 나는 정말 곤고하고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위기를 느낀다. 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자신을 주인삼아 왔던 교만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쐬기를 박으시고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 한 분만을 전적으로 의지 하면서 살게끔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시련인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이 주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이라고 제가 늘 말씀 드렸습니다. 신앙의 진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리며 주님 앞에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믿음생활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납니까?
자기 혼자 넉넉히 살아갈만한 인생길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주님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란이 닥치고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을 때 제일 먼저 회개해야 할 것은 거기 까지 걸어오도록 교만했던 삶을 회개하고 여러분의 불경건한 독립심들을 하나님 앞에 뉘우쳐야 합니다. 그 망가진 독립심 때문에 기도하지 않았고, 말씀 붙들고 살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 결정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 여쭤보지 않았고, 그런 삶을 살아서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일으키면서 살아오는 발자취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를 교만’이라고 봤던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지성 면에서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식을 의지하지 말씀을 붙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이 하나님의 힘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은혜를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결단력을 의지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이 깨뜨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환란을 만나는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환란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렇게 완강하고 완고한 사람인 줄을 아마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심지어는 친구들을 보내 아파서 쓰라린 가슴에 소금을 뿌린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이 사람이 괴로웠겠습니까? 상처 난 가슴에 친구들이 굵은소금을 뿌리고 벅벅 긁으니까 그 속에서 욥도 몰랐던 것들이 솟아 올라온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은 결백하고 흠이 없다라고 하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통하는 한계 까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넘어 설 때에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 자살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것들이 이 속에 있다는 것들을 자신도 깜짝깜짝 놀라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시련가운데 달구고 달궈서 결국은 이 욥으로 하여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러니까 나는 모르고 그는 아니까 그 분께 여쭤봐야죠, 그 분을 의지해야죠, 그 분을 따라서 살아가야죠. 여러분은 어떻게 벼랑 끝에 서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다 아십니다. 여러분은 온 길도 모르는데 나가는 길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다 알고 계시죠. 여기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지 아니면 벗어나서 다시 푸른 풀밭으로 인도받는 날이 오게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지 하지 않고 살았던 것을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벼랑 끝에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 때에는 그 길이 나쁜 길인 것 같았는데도 한참 걷고 보면 정말 아름다운 곳에 도달하게 되고, 주님의 손을 놓고 혼자서도 잘 하는 것처럼 씩씩하게 불경건한 독립심으로 그 길을 걸어갔을 때에는 좋은 길 같았는데 마지막에 도달한 길은 어디로 왔는지도 모르고 돌아서 나갈 능력도 없는 그런 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의 힘의 한계를 고백하고 주님 앞에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섰다면 오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원망, 그런 죄 짓는 것 다 버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님은 아시나니’ 고백을 하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연단 받게 하심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벼랑 끝에 세우신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연단 받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연단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정결’과 ‘굳셈’입니다. 그것이 연단의 목적입니다.
1. 정결
첫째는 정결입니다. 자 여기에서 정금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떻게 금을 정금을 만듭니까? 그것은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정제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더 최신 공법도 많겠지만 옛날 재래식 공법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자면 아무리 사금을 캐거나 혹은 광석에서 금이 있는 성분을 깨뜨려서 부유 법으로 물에 띄워서 금속이 있는 것들을 가려내잖아요? 그래서 금처럼 보이는 것들을 모두 모아도 사실 그것은 금 성분이 섞인 것이지 그 자체가 금덩어리인 경우가 희귀한 것입니다. 그런 금덩어리가 모인 예도 있는데 그것을 금맥 혹은 금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금덩어리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금일 것 같지만 금이 아닙니다. 아닌 성분이 많습니다. 그것을 연 가마에 넣고 불을 때서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열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타면서 시뻘건 쇳물 속에서 다 타서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정도 온도에 타지 않는 것들은 액체로 된 금 속에서 비중이 높으니까 가라앉습니다. 과정을 통해서 가느다란 줄을 통해서 국물을 흘려보내서 금을 다시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힙니다. 그리고 찌꺼기는 버리고 다시 용광로에 넣어서 또 불을 때고 녹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덜 가려진 것들이 또 가려집니다. 이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아주 순도가 높은 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순도가 낮고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금은 색깔이 변합니다. 금도 물론 색깔이 변하지만 그 성분 자체가 오래도록 정금은 변하지 않는 것은 금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금은 정결하고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값이 싸지만 그렇게 수없이 정련의 과정을 거쳐서 순도가 높게 된 금은 매우 비싼 가치가 있는 금속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정결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선택한 여러분을 향한 뜻입니다.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가장 나쁜 것이 자기 칭찬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칭찬하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청교도들이 자기 아첨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아첨하는 것 그렇게 해서는 정결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이 세상에 모든 기계나 옷이나 아니면 모든 제품들을 보더라도 좋은 제품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류와 오차를 허락하지 않고 잘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심어놓으셨을 때에 이스라엘의 가나안에 심으신 것처럼 극상품 포도나무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지 포도나무 가지에 매달린 포도라고 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최상품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몇 년 전에 일본에서 포도를 만들었는데 한 송이에 2만 5천원인가 한다고 했습니다. 매우 진귀하게 길러낸 포도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셔서 교회를 세워 놓으실 때에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이 교회가 극상품 포도가 되라고 주님이 세워놓으시고 거기에 여러분은 붙어있는 한알 한알의 포도 알갱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아주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길러서 생산하고자 하는 농부, 길러서 거기에 골드마크를 붙이고 싶어 하는 농부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최선을 다해서 가꿀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목회를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뭐 이 정도 하면 괜찮지 않아? 성도들을 모두 신학생 만들 것도 아니고 성도들을 모두 목사 수준으로 만들 것도 아니고, 뭐 목사 수준이 그렇게 높지도 않습니다. 성도들을 그런 식으로 해서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가 그 분의 신부가 될 정도로 우리가 정결해 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우리 안에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도 어느 순간에 이 말씀이 우리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우리의 진면목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길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알면서도 허락을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걸어가 불순종하도록 하나님께서 참고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 때 커다란 환란과 시련을 만나고 마침내 벼랑 끝에 서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이렇게 걸어왔던 것이 자신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음 때문이란 사실을 깨닫고 자신 안에 있는 자기도 고칠 수 없는 마음에 일그러진 부분, 부패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너무나 모자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그런 불결들을 미워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늘 말씀드리는 죄의 객관화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때의 신자의 마음은 그것은 자기를 고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얼굴이야 성형외과 의사가 고치고, 몸에 병이 나면 약국에 가서 약을 먹으면 되지만, 마음 고치는 약, 마음고치는 의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아무 곳에서도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기도는 간절해지고, 그의 간구는 눈물로 얼룩지고, 그리고 그의 심령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솟구치는 사모함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의 영혼에 붙어있었던 더러운 세상의 찌끼들이 떨어져 나가고 마음은 경건한 소망으로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춤추는 화염과 같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마치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환란을 통해서 사람의 망가진 그 마음을 회복시키십니다. 그가 잘못된 삶의 궤적을 그으면서 오게 만들었던 그 마음을 바꿔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절망이 바뀌어서 소망으로, 좌절이 바뀌어서 기회로, 이렇게 바뀌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서 마치 우리는 손해를 보고 하나님 혼자 이익을 독차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상업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 그것이 우리 인간의 행복이고 신자의 행복이고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는 데서 그 모든 불행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환란 속에서 불평과 불만을 모두 잠재우고 매일 그렇게 말하세요.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나의 불결 때문입니다. 내가 더러운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인생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왔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가 내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나는 불결합니다.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환란 속에서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주님이 여러분에게 아무리 복을 많이 주셔도 깨끗케 할 수 없는 여러분의 마음을 망가진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고장 난 마음을 주님이 고쳐주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벼랑 끝에 세우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굳셈
그 다음 마지막은 굳센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우리가 열렬하고 뜨거운 것도 중요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쇠를 강하게 만드는 비결은 여러 번 불에 달구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읽어보니까 그 칼도 쇠에서 나오는데 놀랍게도 진짜로 잘 만든 칼은 그 칼로 바위를 내리쳐서 바위가 부서져도 이빨이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만드냐고 했더니 끝없이 불에 달궈서 그것을 얇게 펴서 다시 접고 다시 펴서 다시 접고 하는 일을 반복하는데 과장인지 모르지만 일천 번을 펴서 접고 펴서 접고 해야 명검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칼 한 자루에 지금도 2천만 원에 팔린다고 합니다. 그것을 집에다 걸어놓으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필요 없습니다. 사악한 것이 있으면 말씀의 검으로 물리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끊임없이 단련하고 단련하는 가운데 쇠붙이가 강하고 굳센 쇠붙이가 되는 것처럼 신자도 순수하고 하나님 은혜 많이 받았어도 연단되지 않은 사람들은 약합니다. 예쁘게 꽃 핀 하늘하늘 쓰러질 것 같은 나뭇가지 같습니다. 그래서 힘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상처 받았다는 말은 많이 하는지, 그것도 하나님 보다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그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코드와 맞기 때문에 그런 상처라는 이야기가 수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상처가 있겠죠. 그런데 상처가 많다고 투덜대는 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총 쏘는 소리 들린다고 투덜대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나서 원래 세상이 그런데 자신이 지금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그러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에서 대포소리 들리고 총알소리 들리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듯이 그저 상처가 없고 모든 것이 좋으면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올 것이 왔구나 원래 그렇구나’ 생각해서 웬만한 일에는 상처 받지 않고 굳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뭐 일하다가 ‘누가 그러는데 너 잘못한데’ 하면 온 몸이 흔들리고 털썩 주저앉아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집어 치우자, 네가 와서 하라고 해라’ 그러면 안 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다 좋다고 하겠습니까? 나도 지가 싫은데,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굳셈을 가지고 큰 나무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아마 열린 교회 개척하고 17년 동안 교회 와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지금 남아있으면 지금 이 숫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마 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떠나더라구요.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못생긴 나무가 아니라 잠깐 꽂혀있는 나무들은 가뭄에 마르고 그다음에 큰 바람에 쓰러지고 홍수가 날 때 떠내려가도 말씀을 듣고 계속 성장하고 자란 성도들은 큰 나무가 되어서 요동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인데 사람이 속상하게 한다고 교회를 떠나고,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섬기는 것을 집어치우고 그러면 그 사람이 굳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가서 두드려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하지만 그건 아니거든요. 어렸을 때 하는 애교를 나이 든 사람이 하면 두렵습니다. 치매기가 오는 것이 아닌지 두렵고 무섭습니다.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온 집안의 동물 가운데 강아지가 가장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지키고 있는데 주인이 오자마자 앞발을 들고 주인 품에 안기니까 주인이 쓰다듬어 주고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도 한 번 해봤다가 반 죽었습니다. 미친 말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중요한 것은 꼭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굳건히, 주님이 그렇게 굳건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멸시와 욕을 다 받으시고 오해와 비난을 한 몸에 다 받으시면서도 굳건한 삶을 살게 만들었었던 것은 주위에 좋은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도들조차도 당신을 다 버리고 도망갔을 때에도 예수님은 그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 한 분 만을 우러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영광과 존귀를 누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멸시 받고 고난 받고 마지막에는 섬기다가 자기 목숨을 대속 물로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정말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아서 연약해 보이기 짝이 없는 육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굳센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청교도들이 앙망하던 ‘성도의 신앙의 가치’, 그것은 ‘성숙한 경건’과 ‘연단 받은 꿋꿋함’, 수많은 고난의 과정을 피 흘리며 통과했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붙들고 지킨 신앙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고난과 시련에 의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과 꿋꿋함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려면 우리를 스스로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난과 역경 속에 두시지 않으면 우리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IV. 결론
여러분, 유리그릇을 비싸게 주고 사왔는데 차 한 잔 마시려고 뜨거운 물을 부었는데 쨍 하고 깨진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막는 비결이 있습니다. 처음에 사왔을 땔 찬물을 그릇에 붓고 가스 불에 끓이면 깨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열이 오르면서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러면 잘 깨지지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어보십시오. 주위에 보면 은혜 받은 성도들은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있고 회심하는 성도들이 있고 하나님 사랑에 감격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센 성도들은 많지 않습니다. 고난이 와도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시련이 오고 고통이 와도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고 역경이 오고 삶이 죽음 같은 상황에 접어들어도 주님을 끝까지 붙들고 십자가를 붙드는 연단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성숙한 경건과 연단된 꿋꿋함을 가진 사람들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신앙이 흔들려 보십시오. 제 자리로 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합니다. 회의와 번민, 원망, 비난, 시험, 그다음에 말에 말을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그 괴로움, 이 모든 것 속에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다 물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꿋꿋함’입니다. 시련을 만나도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도 내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때로는 역경을 만나도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지 그래서 여기는 잠시 머물 세상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내게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폭풍우 흑암 속을 지나도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그 분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이긴다면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인생의 벼랑 끝이 여러분이 그 벼랑 끝에서 날아오르는 하나님이 날개를 달아주시는 지점이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두려워 떨던 계곡을 날아오르며 주님의 품안에서 내려다보는 이러한 위대한 성도의 모험을 즐겨보지 않으시렵니까? 올 한 해 정말 이렇게 믿음으로부터 그리고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헤어 나와 그 고난과 시련의 날개를 통해 성숙한 경건 속에 정결해 지고 연단된 꿋꿋함으로 이 시련을 만난 것에 대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