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터널 끝에서
(2016년 새해말씀사경회 저녁설교)
설교기간|2016년 1월 11일-1월 31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6년 2월 12일
목 차
인생의 터널 끝에서 1 (2016.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2 (2016.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3 (2016.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4 (2016.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헤아리시는 하나님(시 5:1-2) 2016.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2. 들으시는 하나님(시 5:3) 2016.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3
인생의 터널 끝에서 5 (2016.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 미워하시는 하나님(시 5:4-6) 2016.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3
4. 사랑하시는 하나님(시 5:7) 2016.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3
인생의 터널 끝에서 6 (2016.1.17 주일오전설교)
5. 인도하시는 하나님(시 5:8) 2016.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45
인생의 터널 끝에서 7 (2016.1.24 주일오전설교)
6. 판단하시는 하나님(시 5:9-10) 2016.1.17 주일오전 57
7. 보호하시는 하나님(시 5:11) 2016.1.24 주일오전 64
8. 복을 주시는 하나님(시 5:12) 2016.1.31 주일오전 71
인생의 터널 끝에서 1
인생의 터널 끝에서 1 (2016.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2 (2016.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3 (2016.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4 (2016.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5 (2016.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6 (2016.1.17 주일오전설교)
인생의 터널 끝에서 7 (2016.1.24 주일오전설교)
인생의 터널 끝에서 8 (2016.1.31 주일오전설교)
인생의 터널 끝에서1 2016. 1. 11 새해말씀사경회 첫째날
< 헤아리시는 하나님 >
“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 5:1-2)
I. 본문해설
- 시 3편과 4편으로부터 이어진 시임
- 압살롬 반역을 배경으로 하는 듯함
- 3편 아침노래, 4편 저녁노래에 이음
- 5편 아침기도: 아침제사 성가대용
- 압살롬 반란 직전 다윗이 음모 안 때
- 네 토막으로 이루어진 본 장의 구성
a. 간구와 탄원(1∼3절)
b. 성품과 묵상(4∼6절)
c. 성품과 적용(7∼8절)
d. 악인과 심판(9∼12절)
II. 헤아리시는 하나님
A. 귀를 기울이심
- “나의 말들”에 귀 기울이시는 주님
- 여기서 ‘말’(emer)은 기도만이 아님
- ‘말들’(amarai): 언어, 생각, 사연
- 기도만 아닌 발화와 사정까지 아심
- 때론 기도에 묶이지 않으신 하나님
- 사랑으로 그 마음과 형편까지 아심
- 그래서 “사랑은 곧 필요를 아는 것”
- 사랑하는 자의 형편 항상 보고 계심
B. 심정을 헤아리심
- “나의 심정” hagigi, “묵상, 탄식”
- 인간의 마음은 외적 환경과 깊이 연관됨
- 여행과 호기심은 새로운 정동 추구
- 환경의 어려움은 마음에 영향을 줌
- 마음의 질서 있는 조율과 흐트러짐
-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상태를 아심
-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향할 때 튜닝이 됨
- 공감이 곧 사랑임 ex. 불평하는 아내
- 때로 고난 주셔서 주님 바라게 하심
III. 부르짖을 때에
A. “나의 왕 나의 하나님”
-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 왕으로서 더 큰 왕이신 하나님을 바람
- 하나님 앞에 완전한 신하임을 인식
- 왕의 통치는 무한한 권세와 능력임
- 우리의 인생이 그분의 손 안에 있음을 앎
B. 성도의 부르짖음
- “부르짖는 소리”는 구원을 청하는 소리임
a. 억제 불가한 정염 b. 원한에 사무침
-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뚜렷한 표현임
- 부르짖음은 간절함에 대한 표현임
- 모든 것 아시나 기도 전까진 못 느낌
- 기도할 때 비로소 전부터 아심 느낌
- 그 지식이 사랑의 힘으로 극복케 함
- 기도의 실천은 신앙의 구체적 움직임
- 하나님을 안 영혼의 최초의 동작임
- 고통과 시련 속에서 주께 부르짖음
IV. 적용과 결론
- 긴 터널 끝 가장 어둡지만 빛 가까움
- 하나님이 능력 없어 지키지 못하신 것이 아님
- 고통과 시련의 학교에서 주를 배움
- 간절한 기도로 믿음을 보이라!
인생의 터널 끝에서2 2016. 1. 12 새해말씀사경회 둘째날
< 들으시는 하나님 >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I. 본문해설
- 앞 두 구절에 이어지는 간구와 탄원임
- 부르짖음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표현
-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들음
II. 들으시는 하나님
A. 사랑의 표현인 “들음”
- “들으시리니”(tishmah)
- 마음을 기울인 들음은 공감하는 사랑임
- 진정한 들음은 그의 편에서 들어주는 것
- 들어주는 이 없는 세상에서의 외로움
- 자기 말 들어줄 이 있으면 죽지 않음
- 영혼의 죽음인 절망은 소통자 없을 때
B. “나의 소리”
- “나의 소리”(qoli)는 소리내는 외침임
- 고통의 비명 아닌 부르짖는 기도임
- “the voice of my cry”(KJV)
a. 억제 불가한 탄식 b. 뼛속 깊은 데서
-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과 마음의 교통
- 때론 억제할 수 없는 정과 부르짖음
- 뼛속 깊이 한처럼 새겨진 기도의 소원
- 믿음은 마음의 집중이며 영혼의 응시임
C. “여호와 … 주”
- 언약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 사랑은 그 선함과 잘남에 있지 않음
- 하나님의 불변성과 언약적 신실함
- 세상 만물의 주인이 우리와 언약 맺음
- 특별한 은혜로 불러 사랑으로 다스림
- 우리를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심
D. 아침에 들으심
- “아침”(boqer): 아침과 새 날
-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시30:5)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 자식에 대한 꾸짖음과 부모의 마음
- 여호와의 새 마음 느끼게 하는 성령
- 하나님의 변화라기보다 자기의 변화
- 이해할 수 없던 고통으로 현실을 새로 봄
- 은혜로써 삶의 사태를 새 마음으로 봄
- 절망적이지 않음은 주 친히 다스림
- 인생의 터널 끝에서 새 아침을 맞으라
III. 기도하고 바람
A. 기도함
- “당신께 내가 늘어 놓다”(earaq)
- 심정에 있는 말을 주께만 털어 놓음
- 격의 없는 친밀함 속에서 마음 통함
- 두 가지 잘되면 꼭 이김: 말씀+기도
- 주님 마음 흘러오고 내 마음 흘러감
- 시련 중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것은 추한 일임
- 아주 사소한 것까지 주께 쏟아 놓음
- 기도하는 자에게는 시련이 상처 되지 않음
B. 바라봄
- “내가 바라다”(echapah) 소망함
- 기대감을 가지고 여호와를 우러러 봄
- 잠시 우리 뜻대로 안됨은 앙망케 하기 위함
- 형통할 때 교만, 불통할 때 주를 무시
- 겸손히 주를 우러르게 하시기 위함
IV. 적용과 결론
-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
- 신실하신 하나님은 기도하길 바람
-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심
- 우리를 총체적으로 새롭게 하소서
인생의 터널 끝에서3 2016. 1. 13 새해말씀사경회 셋째날
< 미워하시는 하나님 >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 (시 5:4-6)
I. 본문해설
- 간구 탄원(1∼3), 성품과 묵상(4∼6)
-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배우게 됨
- 성품 묵상의 방식: 상향식+하향식
- 하나님 경험의 깊이가 곧 신앙의 깊이
- 당신의 성품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II. 인생의 터널에서 배움
- 어두운 터널 같은 절망을 통해 배움
- 하나님의 성품과 시행방식을 배움
-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나쁜 일 없음
A. 하나님의 성품
-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 죄악은 자신의 천지창조 목적을 위배하는 것임
- 죄 자체가 아닌 죄인에 대한 사랑임
- 자신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로 배움
B. 성품의 시행방식
-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 악인은 범죄한 자 연약한 자가 아님
-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오만이 인격화한 것임
a.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친밀함 없음
b. 오만한 자가 주님 앞에 서지 못함
c.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심
d. 모든 포학은 하나님 사랑 없기에
- 행악자, 피 흘리는 자, 속이는 자
- 악인에게 고통받는 과정을 통해 배움
- 착한 사람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것들임
III. 신자의 위로
- “주는 선하시고 인자∼”(시10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 여호와의 선하심의 두 가지 측면들
a. 그를 의지하고 따르는 자들 위로
b. 그를 대적하고 악을 행한 자 경고
- 대적들조차 주의 선하심 폐하지 못함
- 시련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남
- 악인은 형통한 때 교만하고 시련의 때 원망함
- 어차피 인생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임
- 그것도 우리 인생의 한 토막임
- 고난의 터널에서 회개하고 주를 만남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임
- 당신 아닌 우리를 돌이키시는 하나님
- 터널의 시련으로 그 사랑에 돌아오게 함
- 둘러싼 악인들 때문에 두려워말라
-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를 보호하심
인생의 터널 끝에서4 2016. 1. 14 새해말씀사경회 넷째날
< 사랑하시는 하나님 >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 5:7)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성품으로 악인의 미래를 봄
- “오직 나는‥” 악인과 대조된 성도
- 악인은 힘 있으나 영적 기업이 없음
- 영적 기업은 하나님을 누리는 생활
- 악인과 대조되는 성도를 향한 성품
II. 성도를 사랑하심
- 히) “당신의 hesed의 많음으로써”
- 인생의 어둔 터널과 언약적 사랑을 앎
- 좋은 것만 아닌 나쁜 것을 통해 복 주심
- 하나님은 성도를 사랑(hesed)하심
- 그 사랑은 언약에 묶인 신적 사랑임
- 언약에 충실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성품임
- 이런 사랑이기에 인간에게 희망이 됨
III. 사랑에 대한 반응
A. 경외함
- “당신 집에 들어가” 가족 관계를 암시함
- 방문자가 아니라 동거하는 가족을 뜻함
- 성도의 불행은 신적 가족의 행복을 모르는 것임
- 히) “당신께 대한 경외 안에서”
- 하나님 경험: 두려움+사랑의 실재
- 하나님의 사랑을 안 자의 삶은 경외의 삶임
- 경외의 삶: a. 말씀 복종 b. 기도 실천
- 이런 종교 경험에 의해 삶 전체를 바침
B. 예배함
- 경외함은 삶 전체에 깃드는 종교 정신임
- 예배함은 그 종교심의 핵심을 가리킴
- “eshtahaweh”: 절하다, 경배하다
a. 넓은 의미의 예배 vs 좁은 의미의 예배
b. 두 예배는 경계 없는 원뿔 관계임
- 실제적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
- 종교적 예배로 수렴되는 생활
- “성전을 향하여” 예배의 중심을 가리킴
- 하나님의 말씀을 정보로 다루는 현실
- 경외심으로 예배의 현장에서 말씀을 받음
- 지금 당신의 예배 생활을 반성하라
- 양심을 달래기 위해 때우는 예배 생활
-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아님
IV. 적용과 결론
- 둘러싼 대적을 인하여 낙심치 말라
- 맘대로 안되는 삶의 현실을 받아들임
- 거기서 신적 성품을 발견하고 감사함
-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 경외하는 삶을 위해 예배의 은혜를 받음
인생의 터널 끝에서5 2016. 1. 15 새해말씀사경회 다섯째날
< 인도하시는 하나님 >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 5:8)
I. 본문해설
- 악인들과 대조되는 성도들의 삶을 노래함
- 많은 헤세드로써 경외하고 예배함
- 이제까지 악행하는 자들을 바라보았음
- 그러나 이제 고통 중 사랑의 주님을 바라봄
- 원수들의 악과 고통을 사용하신 뜻을 생각함
a. 하나님의 의로써 인도해 주심
b. 주의 길을 목전에 곧게 하심
II. 인도하시는 하나님
A. 원수를 사용하심
- shoreai: “원수들” 때문에 인도하심
- 원수들이 많음이 타협의 구실이 될 수 있을까?
- 오히려 악한 원수들로 인해 주의 길을 배움
-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함에 사용하심
- 악인들에게는 상이 없으나 유용한 역할을 함
- 신자됨에 있어 인생의 터널도 그러함
B. 우리를 인도하심
1. “주의 의로써”
- 주님 자신의 언약적 의로움으로써
- 주님은 자신에게 모순되지 않으심
- 변하는 인간의 의와 불변하는 하나님의 의(義)
-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닌 하나님의 의
- 개혁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었던 대목임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소망됨
2. “인도하심”
- 전능한 주님께서 의(義)를 실현하는 방법
- 물리적 방식으로가 아닌 도덕적 방식으로 하심
- 신자의 영혼과 삶을 고치심에 있어서
- 은혜를 사모함도 인도 받기 위함임
- 무엇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는가?
- 지성으로 깨닫고 사랑으로 감화 받으라
III. 곧게 하시는 하나님
A. “주의 길”
- 객관적 실재로서 주의 길: 항존함
- 주관적 인식으로서 그 길: 한시적
B. “곧게 하소서”
- 항시 곧은 주의 길과 세상에 펼쳐짐
- 주님을 향한 탄원보다 세상을 향한 기도임
- 신자의 소명은 하나님 통치의 실현임
- “내 목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함
-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은 영적인 것임
- 자기 안에 실현된 만큼 하나님나라를 사모함
- 세상의 굽은 질서를 보며 침묵하는 비겁함
- 혈기와 객기가 아닌 영적인 힘 필요함
- 자기 안의 굽은 질서를 직면하는 용기가 먼저 있어야 함
IV. 적용과 결론
-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악을 사용하심
- 악인들의 악을 성도들을 위해 쓰심
- 인생의 터널에서 주님의 성품을 배움
- 악인의 파멸보다 자신의 온전해짐을 구함
- 시련과 역경의 터널에서 주님을 배움
- 사랑 많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인생의 터널 끝에서6 2016. 1. 17 주일오전예배
< 판단하시는 하나님 >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죄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시 5:9-10)
I. 본문해설
- 대적자 대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봄
- 많은 헤세드의 사랑을 입은 시인의 삶
- 그러나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II. 판단하시는 하나님
- 사리분별에 있어 현혹되는 인간들
- 악하지는 않으나 판단력이 모자람
- 인생 최고의 지혜는 판단에 관계함
- 판단력의 부족은 악에 가까이 있음
- 단지 원한 아닌 성품의 빛으로 판단
A. 악인의 정체
- 하나님의 성품이 환경을 통해 드러나듯
- 악인의 정체는 상황들을 통해 드러남
a. 말에 신실함이 없음: 말은 곧 사람
b. 심중이 악함: 겉마음+속마음
c. 목구멍은 무덤 같음
- 마음의 죽은 상태를 묘사한 표현임
- 말로써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감
d. 혀로 아첨함: 마음 없는 이익 때문
B. 하나님의 심판을 구함
- 악인을 향한 복수를 꿈꾸지 아니함
- 각 사람을 판단하시는 주님께 간구함
a.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심
b. 악한 자들을 쫓아내심
-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을 보호함
- 주님의 면전에서 축출하여 정체를 현시하심
- 증오에 찬 기도는 자기를 파괴함
III. 의에 목마른 성도들
- 시인들의 이러한 기도는 목마름을 보여 줌
- 천국 백성의 인격과 의에 대한 목마름
- 거룩한 통치의 갈망과 죄를 미워함
- 그러나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성도
- 개인의 원한 아닌 주님께 배역한 것 때문임
IV. 적용과 결론
- 시련과 고난을 통해 신적 성품을 발견함
- 원한과 미움을 넘어 섭리를 바라봄
-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 자신의 통치를 구현함
- 성도의 소원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
- 거룩한 갈망으로 그 나라와 의를 구함
인생의 터널 끝에서7 2016. 1. 24 주일오전예배
< 보호하시는 하나님 >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 (시 5:11)
I. 본문해설
- 시련을 통해 찬란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움
- 대적자의 미움에서 주님의 주권을 바라봄
- 악인들을 판단하시는 주님을 묵상함
II. 주께 피하는 자들
- 모든 인간 만사가 주님의 뜻 안에서 발생함
- 인간의 악과 신적 허용은 신비로움
- 자율적이지만 하나님은 뜻을 이루심
- 악인은 악을 쌓게 함으로 심판에 이름
A. 성도의 피난처
- 성도는 주께 피하게 하사 가르치심
- “피한다”는 의미
a. 그에게 의존함 b. 자기의 약함을 앎
-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존임
- 그러한 의존으로써 온전히 순종함
- 고난과 시련 속에서 마음을 연단함
B. 성도를 보호하심
- 악인은 승리를 꿈꾸나 주권은 주님께 있음
-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능가하시기에
- 그런 지혜와 능력으로 당신을 알리심
- 참된 성도는 모두 그것을 경험했음
- 독립해 살려는 자들을 돌이키게 하심
- 자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 주님의 보호를 경험케 하심: 피하는 자
C. 기뻐하게 하심
- “기뻐하며…영원히 기뻐 외치고”
- 시련은 고통이지만 피난처는 위로임
- 사물들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심
- 삶의 사태를 의미로써 파악하게 됨
- 외적인 축복보다는 하나님 때문에
- 신앙은 모든 삶의 상황을 뛰어넘게 함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 있는가?
III. 주를 사랑하는 자
- “주의 이름을 사랑함” : 주를 사랑함
- 주님을 향한 사랑은 주님께 대한 의존을 동반함
- 주의 이름을 위할 때 자기를 위해 투쟁하지 않음
- 대적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함
- 시련 속에서 약할 때 붙드시는 주님
- 사랑의 나무는 고난의 액체를 먹고 자람
- 시련과 고통보다 불변적 사랑을 점검함
IV. 적용과 결론
-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심
- 신앙은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함
- 신자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 시련과 대적을 인해 은혜를 경험하라
인생의 터널 끝에서8 2016. 1. 31 주일오전예배
< 복을 주시는 하나님 >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2)
I. 본문해설
-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움
- 대적자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
- 악인에 대한 주님의 판단을 묵상함
- 악한 자와 대조되는 성도는 주께 피함
- 영적 변화로써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함
II. 복을 주시는 하나님
- “여호와여” 그가 믿는 언약의 주님
-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절대자이심
A. 복을 주심
- tibarek: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임
- asher의 복과 berakah의 복을 비교함
-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심
- 복이 다른 데서 온다는 생각이 믿음을 배신함
- 그런 생각은 근원의 끝을 추적하지 못했기 때문임(호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심을 알라
- 행복을 다른 데서 찾으려 할 때 타락함
- 곤고하게 사는 신자들의 초점 없는 삶
-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우주의 질서를 아는 것임
- 회의주의를 통과한 시인의 결론(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 하나님께 가까이함으로 복을 누림
B. 보호하심
- 시련과 고난 속에서 물질만이 복은 아님
- 무수한 악과 죄에 둘러싸인 성도들
-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보호하심
- 언약 안에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1. 방패같이
- 무기: 공격용 vs 방어용, 자기를 지킴
- 칼은 물론 독화살의 공격에서 보호해줌
- 하나의 방패 아래 완벽히 몸을 숨김
- 멸망의 위기에서 주께 피한 자를 보호하심
- 하나님은 성도의 방패이며 도움이심
2.은혜로써
- rachon의 2중 의미: 은총+은혜의 힘
- 하나님은 자녀를 은총으로 대하심
- 세상이 알 수 없는 비밀한 힘으로 다루심
- 부흥은 은혜의 비밀로 넘치는 것임
- 하나님의 생명이 교회에 가득하게 됨
- 복의 근원이신 주님께 마음을 모으라
- 은혜 없는 삶이 은혜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어려움
- 회개와 간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
III. 적용과 결론
- 성도를 “의인”(chadik)이라고 부르심
- 성도는 “의롭게 하심을 덕 입은 자”임
- 하나님의 언약과 성실로써 의롭게 하심
- 성도는 그 은총 아래서 믿고 순종해야 함
- 어둔 세상을 빛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
- 신앙은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는 것임
- 주님은 시련을 통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심
인생의 터널 끝에서 1
인생의 터널 끝에서 1 (2016.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2 (2016.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3 (2016.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4 (2016.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5 (2016.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인생의 터널 끝에서 6 (2016.1.17 주일오전설교)
인생의 터널 끝에서 7 (2016.1.24 주일오전설교)
인생의 터널 끝에서 8 (2016.1.31 주일오전설교)
헤아리시는 하나님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녹취자 : 장주은
I. 본문해설
저는 이번 사경회의 주제를 ‘인생의 터널 끝에서’로 잡았고 5편 전체를 강해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을 새롭게 알고자 합니다. 우선 시편 5편은 아마 다윗이 지은 시 중에서 가장 애송되고 있는 시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3편, 4편, 5편 연속해서 이어지는 시입니다. 뭐라고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권위 있는 주석가들은 이 시의 배경을 압살롬의 반역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판단합니다.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3편은 아침의 노래라고 말하고 4편은 저녁 노래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5편은 아침 기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5편은 유대인들이 아침 제사를 드릴 때 성가대용으로 쓰였던 시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개인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기를 아마도 이 시는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바로 그 초기의 다윗이 아들의 음모를 알았을 때에 지은 시일 가능성이 많다고 추정합니다.
아무튼 이 시는 크게 네 토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절과 3절은 간구와 탄원을, 4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성품과 묵상을, 7절에서 8절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적용을 다루고 있고 마지막에 9절부터 12절까지 악인과 심판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II. 헤아리시는 하나님
1절과 2절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헤아리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예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성경에는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객관적으로만 인간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실뿐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자녀가 겪고 당하는 모든 일들을 헤아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 헤아리시는 하나님을 오늘 본 절에서는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첫째는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A. 귀를 기울이심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을 올립니다. 여기에서 ‘말’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에메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아말라’라는 복수로 되어 있는데 ‘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들을 수 있게끔 언어로만 말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이나 혹은 사연, 심지어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마음의 복잡한 작용까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동사가 맨 처음 사용된 것이 창세기 1장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할 때 하나님이 들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에게 무슨 언어로 말씀하셨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유 속에서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어떤 희망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이 말씀이 되어서 실제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기도만이 아닌 우리의 입을 열어서 나오는 말, 그리고 우리가 처해있는 형편과 처지, 심지어는 우리도 알 수 없는 우리 마음의 복잡한 사정까지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간절한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매 끼니를 점심을 먹은 후에는 저녁을 먹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해서 저녁 식탁을 받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전철을 꼭 탈 수 있도록, 탈선하거나 충돌하지 않도록, 사고 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한 응답으로서 지하철을 타고 교회까지 온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 없이 타고 그냥 왔습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헤아리시지 않고 모든 것들을 엄밀한 기도의 응답으로만 주신다면 아마 우리는 결핍 투성이의 삶을 살거나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기도만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인간의 만사를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헤아리면서 그들의 기도 뿐 아니라 그들이 우연히 토해놓은 말과 그리고 그들의 생각, 자기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의 복잡한 사연까지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고 하는 것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지만 때로는 우리가 그렇게 많이 기도하지 못했어도 내게 너무나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비해서 넘치도록 주시는 경우를 우리는 발견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거의 포기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오래전에 기도한 것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들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지만 결코 우리의 기도에만 묶이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그래서 기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 헤아리시기 때문에 해줄 것이라는 운명론적인 생각을 가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 귀를 기울이게 만드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귀를 기울이게 만드냐, 사랑입니다.
종종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깊은 관계 속으로는 들어가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생긴 것 자체가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공감을 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할 수는 있지만 사랑이 없는데도 상대방의 사정을 공감하면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함께 눈물을 흘려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한 번, 아니면 두 번만 만나면 이 사람을 내가 계속 만나서 관계를 깊게 하여야 할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 대개 마음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요한 웨슬레 선생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분은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가 목회하던 영국의 교회에 가보면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 전설처럼 내려옵니다. 그는 시간을 아주 아끼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자신의 책 속에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자기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한 시간 안에 이 사람과 계속 교제할 것인가, 일평생 다시 보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동의가 안됐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좀 만나야지 한시간만에 단칼에 치나 했는데 그 다음 이야기가 공감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짧은 인생을 아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도록 만드는 공감의 능력이 결국 어디서 오는 것이냐 하면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부부도 서로 사랑을 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렇게 즐겁습니다. 아내가 아내이기 전에, 아내이고 난 후에도 그럴 수 있지만, 아내이기 전에 애인이었을 때 만나서 남자들이 이야기만 하면 턱을 괴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그렇게 감동적으로 듣지 않습니까? 자기는 말하고 싶은 게 별로 없습니다. 들리는 소리가 모두 아름다운 악기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사이가 나빠지게 되면 남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막 소프라노로 퍼붓습니다. 결혼한 여자들은 목소리가 엄청나게 큽니다. 식당에 가도 30cm 거리에 앉았는데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않습니까? “아, 그래 내가 말이지.” 하며 한 30m떨어져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게 별로 좋은 내용도 아닌 이야기를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는 결혼하고 나서 소리를 질러야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듣는 남편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애들이 말을 조곤조곤 하면 말을 안 듣고 소리를 질러야 듣습니다. 여러분도 조곤조곤 설교하면 자지 않습니까? “으아아아” 해야지만 뭔 일인가 하고 자다가도 한번 깨지 않습니까? 사랑은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나한테 상담을 청했던 한 우리교회 교인은 아니고 한 사람이 면담을 하기 전에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귀를 기울여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의 처절한 외로움. 그런 것 말입니다.
저는 40대 까지만 해도 지금도 물론 별로 못됐지만 더 못됐었습니다. 성격이 칼 같아서 어디 가서 막 여자들이 넋두리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지금은 이해합니다. 항상 구역장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르쳐주는 구역장이 되는 것과 들어주는 구역장이 되는 것을 4:6 혹은 3:7로 하라고 합니다. 조금 가르치고 많이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라. 답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젊은 아이들 속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화로 막 친구가 퍼부으면 네 마디만 반복하면 환심을 산다고. 정말? 그럴 수가! 대박! 헐! 이 네 가지만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면 친구가 너무 감격해 한답니다.
실제로 어느 학자가 저하고 딱 한번 만나고 갔는데 온 동네 다니면서 김남준 목사는 너무 좋은 분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젊은 분이었습니다. 와서 자기 전공한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 쭉 이야기해서 아 그러셨어요, 박사논문을 참 잘 쓰셨더군요. 읽었습니다. 그러고 몇 마디만 하고 자기 혼자 이야기를 다 하고 갔습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점심 대접하고 듣기만 했습니다. 정말 좋은 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외로운 것입니다.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의 유익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거스틴이 고백한 것처럼 나는 당신의 귀에다 대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슨 사연이 있거나 그럴 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 마음을 다 알아줬으면, 물론 감추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억울하거나 힘들거나 할 때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조용히 저처럼 한 시간 반 만 홀로 산책해 보면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 우리의 삶을 다 이해하겠으며 모두 가르쳐 준들 누가 다 동의를 하겠습니까? 나도 내가 하는 일에 동의가 안 될 적이 많은데 누가 그렇게 완벽하게 우리에게 동의를 해주겠냐는 것입니다. 그냥 너무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남들이 자기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것이 원한처럼 가슴에 박혀 사는 것도 질병입니다. 그것이 삶에 주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인생에 내가 진정한 주체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해 빠지고 다른 사람의 평판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과민한 마음 때문에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한 양심을 따라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주체된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형상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은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에서 나옵니다.
사랑은 필요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나를 잘 아는 사람이 하는 선물과 의례적으로 가져오는 선물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가까이 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것을 선물합니다. 의례적으로 선물하는 사람은 가져왔는데 별로 쓸데가 없어서 저 구석에 모아놨다가 바자회나 넘겨줄 물건들이 선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향해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모든 사람들의 형편, 때로는 이교도들이라고 할지라도 혹은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혹은 기도를 전혀 모르는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나님이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귀를 기울이시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정말 오래전이었습니다. 경희대병원으로 심방으로 갔는데 교인이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주고 나오는데 나하고 상관이 없는 사람이, “저 목사님.” 해서 “누구세요?” “저는 그냥 환자 보호자인데요. 우리 이 이좀 기도해주시면 안 될까요?” “교회 다니세요?” “아니오. 그런데 그렇게 환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그래요. 우리 이이좀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여기에 뭘 꼽고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의식불명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누워계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말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 귀를 기울여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불신자도 그렇게 부러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오늘 시인은 간절히 부르짖었더니 귀를 기울이셨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때로는 기도하지 못할 때조차도 여러분은 느끼지 못하지만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B. 심정을 헤아리심
두 번째는 심정을 헤아림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난 이 옛날 번역이 너무 좋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심사를 알고 계신다. 그래서 신하나 백성이 너무 억울해서 원한에 맺힌 것 같은 일이 있을 때 왕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깊이 엎드려 오직 한 가지를 호소합니다. 왕이여 저를, 저의 마음을 통촉하옵소서. ‘통’이라고 하는 것은 통찰하는 것입니다. 꿰뚤어 본다는 뜻입니다. ‘촉’은 촛불입니다. 어두워도 아무리 꿰뚫어 봐도 어두우면 진상을 파악할 수 있는데 촛불을 환하게 밝히면 등잔불을 환하게 밝히면 정확하게 그 사물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성의 밝음을 가지고 나를 살피소서.”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기끼’라고 하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정확한 뜻은 ‘묵상’입니다. “나의 묵상, 혹은 나의 명상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NIV같은 성경에서는 이 명상이나 묵상이 그냥 객관적인 명상이나 묵상이 아니라 악인이 자기를 괴롭히고 자신은 고통 받는 이 현실에 대한 탄식어린 묵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한숨’, 혹은 ‘탄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의미를 말하자면 “나의 탄식하는 이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외적인 환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삶에 의욕이 꺾이거나 절망이 엄습할 때 용기를 내어서 훌훌 털고 하루나 이틀 여행을 좀 다녀와도 새로운 정동이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늘상 접하는 환경은 새로운 것을 주기도 하지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잘 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휙 떠납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굉장히 새로운 정동이 마음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영국에 갔을 때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예쁜 숲이나 공원들을 쉬는 시간에 산책하는 것이 저의 취미 중 하나입니다. 혼자나 혹은 둘이서 산책을 하면 참 좋습니다. 굉장히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한번 아주 무서우리만치 황량한 벌판을 보고 싶었습니다. 북쪽에 가면 많은데 마침 갔던 곳이 북쪽이어서 올라갔는데 하늘에는 구름이 스산한 겨울이었습니다. 나무는 다 말랐고 눈이 군데군데 있고 그 황량한 곳에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세게 불었습니다. 이렇게 서 있을 때, 전혀 다른 아름다운 새소리가 있고 물이 흐르는 풍경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동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거기에서 오히려 정말 찬송하고 싶습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아주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혼자 작은 배에 떠있는 느낌은 어떨까요.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에 홀로 동떨어진 느낌은 어떨까요.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동을 가져다줍니다. 이만큼 우리의 삶의 환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치료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벽지만 바꿔도 집에 들어올 때 인간의 마음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환경에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삶의 환경을 만나면 마음이 우울하고 고통스러워지게 됩니다. 환경을 매일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지금 자신의 삶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의 마음의 질서와 조율이 흐트러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느끼고 양심을 따라 판단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규범을 따라 이해하고 하는 것들이 잘 되는데, 마음이 헝클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런 것들에 대한 판단이 현저히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압박 이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든지 괴로움이 있어서 죽음과 삶의 고비를 넘나든다든지 하면 사람이 아주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감각이 없어져서 커다란 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거나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아무 관심사가 없어서 가족들의 목숨도 돌아보지 않거나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외적으로 모든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살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혼과 육체는 각각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함께 만나 기능하는 이 마음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예술과 문학과 이러한 정신적인 양식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어느 한 순간에 인간이 아무리 많은 재산이나 이런 것들을 손에 넣어서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물질의 많음, 지위의 높음에 의해서 삶의 주체성이 흔들릴 정도가 되는 사람은 부자가 되지 않는 것이 복이고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그릇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부자가 됐기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도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이 없는 것, 지위가 너무 낮아서 자존감을 짓밟히고 사는 것이 자신의 주체성을 훼손할 정도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을 가지면서 살아야 하고 또 반대로 본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너무 교만해질 정도로 부유하지도 않고 너무 비굴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게 하면서 적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마음이 어떤 질서 속에 놓여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상황은 얼마든지 우리가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기도가 아닙니다. 이미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도 시편 23편 하면서 말씀드렸지만 다윗이 불새출의 지도자이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탁월한 철학가였고 그 이전에 뛰어난 신앙인이었습니다. 문학가였고 전쟁에 능한 장군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외형적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아버지의 편애에 시달리고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의 사랑도 별로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버림받고 아내는 자기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형제들로부터 끊임없이 따돌림과 미움을 받았고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 사람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륜녀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강간한 강간범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아들놈 중의 하나가 자기를 죽이고 왕 위를 차지하겠다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런 정말 상처와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면서 그는 마음 둘 곳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사연을 쏟아놓을 수 있고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시는 탄식과 모든 묵상을 통촉하여주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계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폭풍과 흑암과 같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고 인생의 긴 터널을 그 분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종합해서 보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인생사가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보면 정신 차리고 가만히 우리 인생을 보면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안된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내 맘대로 잘된 것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안된 수많은 시간을 통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올바르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을 돌아볼수록 하나님의 지혜를 높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결국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만이 행복은 아닙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럴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저 한두 시간이나 백 시간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새 집을 얻어서 감격을 해도 그 감격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한 일 년 갈까요? 나는 집에 들어가서 그렇게 감격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아파트로 갔다고 칩시다. 한 일년 갈까요? 한 일 년은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들은 다 그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을 진짜 잘 사는 비결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게 튜닝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저 피아노 새로 사놨지 않습니까? 저 같은 막귀가 들어도 튜닝이 잘 안됐습니다. 별로 동의를 안 하십니까? 우리 같은 귀가 들어도 우리는 피아노를 잘 못치지만 귀는 있지 않습니까? 튜닝이 잘 안됐습니다. 튜닝이 잘 된 피아노와 튜닝이 잘 안된 피아노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 피아노 이거 싸구려라서 형편없어, 그래도 정말 탁월한 조율사가 와서 하루 종일 조율한 다음에 탁 두드리면 깜짝 놀랍니다. 이게 그 피아노 맞아? 깜짝 놀랍니다.
어차피 우리의 껍데기는 계속 늙어갑니다. 사람들이 젊어 보이십니다, 다 마음에 없는 소리입니다. 특히 연세 드신 분일수록 신경을 많이 쓰시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면 지우개로 지워버리십시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겉 사람은 계속 늙어가고 후패해져 갑니다. 그것이 이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튜닝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 예쁘구나, 웃으면서 눈물이 맺힐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추한 것을 보고 아 더럽구나, 하고 구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것을 보고 불끈 하는 용기가 솟아나고 바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이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용기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든 지식과 모든 양심,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본성적인 사고, 이것을 모두 총동원해서 마지막에 판단을 내리고 간절한 기도로 그 판단이 옳은지를 하나님께 구하고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정말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인가, 본질에 속하지 않은 것인가를 구별해서 본질에 속하는 것이면 머리가 터져도 싸워야겠지만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면 너와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의견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각자 그 길을 간다, 그럼 우리는 형제다, 하고 사이좋게 가는 것입니다. 또렷하게 그의 양심을, 그의 주체성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도 한국 사람들은 모두 통일, 통일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나도 옛날엔 그랬습니다. 아줌마가 와서 부추깁니다. 똑같이 시키면 빨리 나옵니다. 늦게 나오면 어떻습니까? 세월이 모래알이니 싹이 틉니까? 열 명이 와서 열 가지를 시킨들 좀 더 기다리면 되지 그 사람이 그거 먹고 싶다는데 존중해줄 정도의 애정이 없으면 왜 거기 같이 앉아서 밥을 먹습니까? 각자 집에 가서 콩나물국이나 먹지. 그렇게 존중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이 하나님을 향해 잘 튜닝이 되어있을 때 우리 인간은 의외로 견딜 수 없는 수많은 시련이나 어려움들을 극복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아 어떻게 그것을 견뎠지?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못 견딜 것 같습니다. 폭발을 하든지 무슨 사건을 내든지 못할 것 같은데 놀랍게 견뎌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고 견뎌낼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을 그때는 주셨습니다. 왜. 영혼의 튜닝이 잘 되어있으니까 자신의 갈 길이 아주 명료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정말 얼마나 놀랍습니까? “에이씨” 그러고 마음에 폭발하다가도 마음을 모아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편 한 장을 천천히 읽으면서 찬송 한 곡 듣고 나면, 아 그래 맞아,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지, 그리고 자기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고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깊은 밤중에 추운 1월에 나와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정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심정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II. 부르짖을 때에
그런데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내 심정을 헤아려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또 하나님 앞에 이미 경험한 것을 또다시 그렇게 경험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면서 그 탄원이 부르짖을 때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A.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먼저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대상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사람 자신이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왕이 어떤 사람인지를 왕권 하에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책에서나 들어서 알지, 잘 모릅니다. 왕은 백성들과 비교될 수 없는 지존한 존재였습니다. 자신이 왕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하고 만민과 자신이 정복한 나라와 열방이 어떻게 굴복하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른 사람이 왕이라고 불렀을 때와 이 다윗이 왕으로서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 때의 느낌은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왕으로서 더 큰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완전한 신하일 뿐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왕의 통치는 무한한 권세와 능력입니다. 이런 시련과 고난을 겪어보니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심정을 헤아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제 그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전개가 그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완전히 부복하면서, 내가 이 용상에서 외치는 한마디의 말로 이 온 나라를 다스리듯이 저도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아래 있는 사람이고 나를 대적하기 위해서 일어난 이 모든 대적들도 당신의 지배와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들을 명하여 물리치시면 그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바라본 호칭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왕은 왕입니다. 그런데 왕정시대의 왕이 아닙니다. 입헌군주국의 왕입니다. 좋은 집에 살다가 외국에 손님이나 오면 양복입고 나와서 흰 머리를 휘날리며 악수나 하고 들어가는 그런 입헌군주국의 왕 같은 존재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본적인 대접은 해드릴 테니 국사에는 참견하지 말고 뒷방 늙은이로 만족을 하십시오, 하는 것이 입헌군주국에서의 왕의 대우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표리부동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광과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다스려주실 때에 그 다스림을 한없이 기뻐하며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이 이 위대한 신학자, 철학자로서, 신앙으로서 다윗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왜 이렇게 나와서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쓰고 미력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티끌만큼이라도 뭔가를 이바지하기 위해서 교회를 섬기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뭘 하든지 신경도 안 썼을 그런 사람들의 일, 심지어는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먼 나라의 선교사들과 이 땅의 신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확장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지엄한 의무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입맛대로 다스려주실 때에만 하나님을 헤헤거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것이, 그 통치 아래에 자기가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본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입헌군주국의 뒷방 노인네입니까, 아니면 정말 나의 삶과 인생의 보좌에 앉으셔서 당신의 홀 하나로 우리 모두를 통치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며 사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인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이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성도의 부르짖음
마지막으로 성도의 부르짖음입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소리는 구원을 청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짖음은 곧 기도이옵나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는 소리는 구원을 청하는 소리이고 이것은 그 시인의 마음속에 억제하기 어려운 정념이 불붙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이 사람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원한에 사무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부르짖음의 원인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가 우리에게는 스스로 기도하고도 응답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일상적으로 지나가는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기도의 제목이 이렇게 원한에 사무친 기도제목이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시인처럼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을 때 그때는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억제 불가능한 신앙의 정을 가지고 원한에 사무치도록 하나님을 집중하여 간절히 매달리도록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가장 뚜렷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외심에 넘치지 않는 사람도 신학을 공부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쏟는 간절한 기도,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울부짖는 그 기도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경외와 그분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부르짖음은 기도의 간절함의 표현이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신자는 기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부터도 하나님은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여러분이 깨닫고 여러분의 죄를 진실로 회개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켜보셨음에도 여러분은 외로웠고 주님이 동행해주심에도 여러분은 버림받은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기 전부터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모두 아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심정을 헤아리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어떤 인생의 터널 끝에서 당신에게 마음을 모으고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전부터 너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며 심정을 헤아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처지에 계십니까? 인생의 터널 끝에 계십니까? 너무나 긴 세월을 그 터널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내 인생에 뭔가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조차 사라져가고 영혼은 꺼져가는 심지처럼 신앙은 상한 갈대처럼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자신의 죄 때문에 이 끔찍한 불행을 만났는데도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여호와 한 분 밖에 없었고 이 시인의 눈물겨운 그 사정에 귀를 기울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죄와 가족들의 잘못, 이 모든 과거의 상처와 현실의 고통이 버무려진 이 복잡한 자신의 묵상과 탄식을 헤아려주실 수 있는 분도 우리 하나님 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라는 것, 그리고 시련과 역경이 내 앞에 펼쳐져도 여전히 주님은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간절히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인생의 터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부자였는데도 높은 권세의 사람이었는데도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는데도 웅장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는데도 이런 인생의 터널을 긴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이어서 육신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의 눈으로는 그 터널의 끝에서 비춰오는 눈부신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자기를 못 지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의 학교에서 주님을 배웠습니다. 악을 배운 것이 아니라 악인을 통해 하나님의 선을 배우고 인간의 추함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통해서 수치를 배운 것이 아니라 당신을 의지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이 겪고 있는 시련이나 어려움, 언제부터 계속되었는지도 모르는 인생의 이 길고 긴 터널은 어쩌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시인처럼 그렇게 하나님께만 마음을 쓰도록, 그 하나님께만 간절히 부르짖도록,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배우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터널 끝에서 눈부신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3절은 앞의 두 구절에 이어지는 간구와 탄원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가장 깊고 어두운 터널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과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그분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3절에서 압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의 한 성품,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앞 절에서 하나님께 자기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호소한 바 있지만, 3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한 성품을 회고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II. 들으시는 하나님
A. 사랑의 표현인 “들음”
성경에서 이 “들음”은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도 그러하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최고의 칭찬 중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했다는 칭찬입니다. 사울은 싸움에서 노획한 재물들을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진멸하도록 명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어기고 재물들을 챙겼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무엘 선지자는 마음이 깊이 상하였고 그래서 이 선지자는 준엄하게 사울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때 한 유명한 말이 바로 순종은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번제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것을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께 순종하고 사랑할 때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게 바로 듣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과 듣는 것은 다릅니다. 들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듣는 것이지만, 듣는 것은 마음으로 들리는 그 말의 의미를 포착하고 자신의 삶을 거기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순응하는 마음이 있는 것만이 들음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들음이 사랑의 표현인 것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다른 시편에서 수많은 인생의 고비를 넘기며 그 깊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언제나 위로를 받았던 대목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대부분이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찬양도 넓은 의미에서는 기도에 속합니다. 그 소망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사연을 들어주시는 우리의 처지에 공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들음은 그냥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이는 들어줄 수 없습니다. 끝없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오는 그 긴 이야기를 애정이 없이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깊이 공감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며 그렇게 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자꾸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별로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벽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에 에워싸여서 살고 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구원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다 몰라줄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불만스러워하지 말고 그냥 그런 것이려니 그렇게 생각하고 누군가 자기의 마음을 그렇게 알아주어서 위로가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 공감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진짜 동정심과 사랑으로서 그게 교류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된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신문기사 읽고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한 15년 전 된 일인데 아이 하나가 외국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불에 타서 입, 코, 눈, 귀가 다 붙어버렸습니다. 붙은 것을 뚫은 것입니다. 그러니 몰골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니까 엄마가 내 놓았습니다. 도저히 이웃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서 아이들의 입양사연이 전해졌는데, 독일에 있는 어느 부부가 그 사진을 보고 밤새도록 대화를 한 것입니다. 진짜 예쁜 동양계 아이들이 많은데 그 아이들은 다 누군가 원해서 입양이 될 것이고, 그런데 이 아이를 누가 데리고 가겠는가? 그래서 그 부부가 기도하면서 그날 밤새도록 울고 이튿날 아침에 이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입양해 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훌륭하게 길렀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초등학교인가 중학교쯤 되었을 때 고향을 방문시켜준다고 데리고 온 것입니다. 역시 그 얼굴은 말할 수도 없었고 언어도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고향을 데리고 갔는데 한국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하니까 아이가 엄청나게 많은 상처를 받고 그리고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흐느낀 게 아니라 진짜 엎드려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정말 나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생각 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입양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고 그러는 것을 보면서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런 공감 능력을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의 공감능력을 증진시켜 주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마지막 결과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헤세드, 인자함입니다.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우리를 들으시는 분이 없다고 하는 생각 그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들어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신앙적인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 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에게 전수되고 우리의 심정이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 전수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들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압살롬은 아주 오랜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히 반역을 계획적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가지고 안 되겠으니까 성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에게 편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을 하면서 그렇게 환심을 산 것입니다. 꽤 긴 세월동안 그렇게 해서 위로부터는 아버지의 슬하에 있던 막료들부터 시작을 해서 아래로는 하층백성에 이르기까지 환심을 사면서 아주 야비한 방법으로 반역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수많은 반역하는 무리들은 한때 자신의 사랑을 받았던 자신과 생명을 함께 하며 전쟁터를 누볐던 동지들이었고 그 우두머리는 자기 뱃속으로 낳은 새끼였습니다. 그때에 다윗이 인생을 생각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공감 한번 해 보십시오. 아마 “하나님 제가 충분히 살았습니다. 저를 거두어주시옵소서.”라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들같이 물어뜯을 듯이 덤벼들고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까지도 자기를 멸시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다윗이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이 나의 소리를 들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시인이 그 모든 시련을 통과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관용이 나오고 시련으로 가득 찬 인생길을 걸으면서도 기쁨이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야비한 방법으로 복수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한 너그러움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거나 병원에 가서 그 하찮은 의사들한테 구박이나 받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그렇게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데도 털어놓을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져서 그분 앞에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홀로 듣고 계시다는 것을 지각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관용이 있을 수가 없고 그리고 원한은 복수를 부르고 미움은 원망을 부르고 작은 상처는 끔찍한 보복을 꿈꾸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없는 삶이라고 이야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 말고 언제나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나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기도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신음소리까지도 들으셔서 그래서 나를 기억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도록 여러분이 은혜생활에 힘쓰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B. “나의 소리”
두 번째는 오늘 시인이 ‘나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성경에 ‘콜리’라고 나옵니다. ‘콜’은 소리 내는 외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부르짖는 기도로서의 외침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the voice of my cry’라고 말하는데, ‘cry’가 비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로서 탄원하는 부르짖음, 그 목소리입니다. 결국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억제할 수 없는 탄식이 있다는 것이고, 뼛속 깊은 데로부터 우러나와서 그것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원한에 사무친 것 같은 그런 기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과 마음을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높은 단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수없이 청구서를 쓰는 그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인간의 욕망과 자만심 그리고 헛된 자랑으로 인해서 마음이 어그러져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사람이 어떤 인생의 터널 끝에서 자신이 도저히 이 터널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믿으면서 하나님만을 절실하게 의지하는 가운데, 그때에 자기 자신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자만심과 교만, 나태함 이런 것들을 내어버리고 주님을 간절히 붙드는 것이 기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잘 될 때와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큰 은혜를 기칠 때가 대체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리고 둘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잘 되고 있는 어느 하나에도 결함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에 전혀 은혜가 없는 기도가 잘 되는 상태, 말씀을 잘 깨달아지지만 전혀 기도가 안 되는 상태 모두 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뼛속깊이 한처럼 새겨진 기도의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오랫동안 안이했던 자신의 영적 상태를 떨치고, 이제는 그 아름다운 옷을 휘날리고 왕관을 쓴 왕으로서가 아니라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는 한 사람의 참회자로서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쏟아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집중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응시입니다. 그래서 믿는 마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마음이고, 그를 통해 온전하고자 하는 마음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입니다. 그것 없이는 믿음을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지난 길을 회상해 보십시오. 어제는 아니고 이번 달은 아니었고 또 올해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살다보면 어느 한 순간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삶의 상황에서, 이렇게 큰소리를 내려고 해서 큰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그저 억제할 수 없는 어떤 기도의 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서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누구에게도 마음 쓰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간절한 울부짖음, 피맺히고 한이 맺힌 것 같은 그런 간절한 울부짖음이 바로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나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들으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때는 특별히 그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이 마음을 우리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주님은 오늘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이지만 나는 그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고 부르짖을 그 때에 그때 우리는 하나님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난 한 해는 저에게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한 해이기도 했지만 다시 달력을 돌아보고도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건강이 안 좋아서 나 자신을 추리기도 버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아프면서 점점 심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영양제나 몇 대 맞으면 낫겠지 그랬습니다. 점점 심해지는 데 병원에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의학서적을 뒤지면서 도대체 이게 어디서 온 증상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백약이 무효입니다. 매일 저녁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들었는데 한 한달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내 마음에 결심이 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아내와 헤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래서 40% 정도는 올 안에 아내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잊혀지지 않습니다. 몸이 아파서 새벽기도도 못 나오고 침상에서 기대어서 새벽마다 새벽기도 시간쯤이거나 아니면 조금 더 늦은 시간에 6시 반쯤 기도를 시작했는데,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사람이라는 건 만나면 죽음 저편으로 건너가게 돼 있는 것이니.” 이미 인간의 애달픔 그런 것만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가 그렇게 깊어졌습니다. 그날 아침이었는데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렵니까?” 하나님이 음성으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 신뢰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를 그렇게 간절히 하는 순간 두 가지가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아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기도가 향연이라면 하나님이 ‘흠’ 하고 빨아들이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나와서 불러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안 죽는데. 그러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견디시오. 밥 먹고 약 먹고 치료도 받고 어차피 인생에 한번쯤은 그런 계곡을 통과하는 건데.” 그 다음서부터 불쌍히 여기고 매일 기도해 주는 것은 했지만 그러나 나도 같이 주저앉는 것은 그날 아침으로 끝났고 그 다음 한 번도 밑으로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아,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내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들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그리고 내 인생에 무슨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언제나 주님은 거기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C. “여호와 … 주”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여호와, 주님”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이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생각이 그 안에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언약의 상대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동급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도 우리 인간에 대해서, 우리 인간도 하나님에 대해서 의무가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권리를 갖습니다. 그것이 언약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관계에 충실하십니다. 배신하시거나 혹은 그것을 이용해서 야비하게 우리를 등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수시로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를 이용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데도 하나님을 기만하고 거짓을 행하고 언약을 깨뜨리고 이렇게 하면서 탕자처럼 살아갑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언약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빌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여” 이것은 언약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베푸는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어떤 선을 행했기 때문에 베푸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선함과 잘남 때문에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그 사랑의 은덕을 입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언약의 신실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쓰레기 같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수준도 맞지 않는 그 인간과 언약 관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셔서 우리와 당신을 언약으로 묶으셔서 당신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기쁨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한 은혜로 불러서 사랑으로 다스리시고 그리고는 우리를 한 가족처럼 살아가도록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한 지체로서 맺는 관계, 그리고 이웃으로서 맺는 이 관계의 신실함은 하나님과 언약의 신실한 관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절대로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남을 짓밟고 상처를 주면서라도 세상에서 힘과 권력이 없어서 못 펼친 뜻을 교회에서라도 한번 펼쳐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실함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실함은 그가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의 인격과 삶 속에 어떻게 육화되었는가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터널에서 자신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분이신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행했던 지간에 하나님은 자신의 소리를 들어주시며 자기의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들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새로운 신앙의 차원을 보게 된 것입니다.
D. 아침에 들으심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아침에 들으실 것이라고 시인이 자신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아마도 이 시가 아침 제사 때 성가대 찬양용으로 사용되었던 이유도 아마 이 구절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히브리말로 ‘보께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아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해가 떠서 빛이 나오는 때부터 시작을 해서 햇살이 확 퍼지기 전까지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날과 달에 대한 독특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달’을 히브리말로 ‘호데쉬’라고 합니다. ‘호데쉬’는 의외로 ‘새롭다’는 뜻입니다. ‘달’을 ‘호데쉬’라고 하는데 ‘하다쉬’에서 옵니다. ‘하다쉬’는 ‘새롭다’, 그래서 ‘베리트 하 하다쉬’ 그러면 ‘신약’입니다. 그래서 그 ‘하다쉬’라고 하는 것이 ‘새롭다’라는 것이 하늘에 떠 있는 달과 연관이 됩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달이 동그랗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달이 빵 잘라 먹는 것처럼 잘라집니다. 그래서 초승달이 점점 커가서 큰 달이 되고 큰 달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믐달이 됩니다. 그게 계속 순환합니다. 그러한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이 모든 과정이 새로운 달이 태어나는 것 같다는 개념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같은 천문학적인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 달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유사한 개념을 아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아침저녁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다시 떠서 오는 그 날은 어제 있었던 그 날의 반복이 아닌 새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모두 멸망당했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래서 하나님이 성실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렇게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심판을 당했는데도 또다시 태양은 떠올라 어제와는 다른 새 날을 주시고, 또 그 해는 져도 또 다른 해가 떠올라 하루가 끝나지 않고 그 다음 날을 또 주셔서 하나님 앞에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임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편 30편 5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는 종종 자녀들을 꾸짖을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통렬하게 꾸짖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니까 자녀들이 뭔가 잘못했을 때 마음에 격정도 솟지 감정은 하나도 없고 오직 이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꾸짖은 적이 우리 생애에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다 감정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화를 내고 때리고 야단친 다음에 뻘줌 하니까 하는 말이 “다 너 잘되라고 그러지 왜 그러겠느냐”고 그럽니다. 아이가 맞으면서 그럽니다. “때려요 때려요 당신 새끼 죽지 내 새끼 죽냐고.”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새 마음을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회개하면 우리의 인생이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고통을 새로운 시각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은혜로서 삶의 사태를 새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데, 어떠한 비관적인 처지에서도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도 절망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 속에서 주님이 친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정말 미칠 것같이 괴롭고, 그것이 있는 사람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터널 끝에서 새 아침을 맞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기도하고 바람
A. 기도함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여기 ‘기도하다’라고 하는 단어가 특이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도하다’라고 번역하지 않은 성경들도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에아라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무엇을 죽 늘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내가 주께 이 모든 사연들을 늘어놓고 그리고 주님께 소망을 두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만났을 때, 인생의 터널에 있을 때 왜 저 사람이 나를 돕지 않을까 왜 나의 이런 사정을 모를까 이러면서 사람을 붙들고 온갖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하면 인간이 아주 지저분한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정말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 같은 그런 인생의 마지막 막다른 길목에 서 있을 때는 하나님이 당신께 그 사연을 털어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털어놓으려고 하면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각하고 어디서 자기가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가 안 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로 나아가는 아주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 안합니까? 못하겠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왜 못하게 됩니까? 안 하니까 나중에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만나거나 부딪치면 자신의 마음을 하늘 높이 띄워서 자신의 생애와 자신의 삶과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관조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는 신앙의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고 뭐고 당장 미운 놈은 미운 놈이고, 어떻게 하든지 거짓말이라도 쳐서 위기를 넘겨야 할 상황에서는 서슴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이 위기를 모면해 보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빼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극복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니까 어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런 식으로 대응을 하니까 만나면 만날수록 사람이 점점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신앙도 다 털고 다 부서져 버리고 인격적으로도 아주 망가진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기가 아주 십상인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여유를 줍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욕을 하고 사울의 집안에 악을 행한 사람으로 묘사를 합니다. 언제 다윗이 그랬습니까? 그리고 그는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그런 속에서 살면서 그렇게 백성들에게 오해를 받고 시므이라는 작자가 흙을 뿌리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도 조용히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아신다. 혹시 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욕하시는 줄 알겠느냐?” 그렇게 자기를 내려다보면서 걸어가는 그 여유가 결국 신앙입니다.
신앙과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련 중에 사람에게 매달리고 하소연 하는 것은 정말 추하고 더러운 일이고 자신의 영혼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쏟아놓으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통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이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결국 기도하는 자에게는 시련이 상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들을 통해서만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나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실 때가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형통하고 잘 먹고 사람들 앞에 이름을 날리고 박수갈채를 받던 때에는 무엇인가 자신에게 남는 것이 없지만 시련과 고난 속에서 주님 앞에 기도하며 매달렸던 때에는 언제나 거기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가 시련의 고통보다 컸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인생의 깊은 터널을 지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자신이 처한 모든 삶의 상황에서 사연과 모든 사정들을 그 하나님께 쏟아놓고, 모든 것들을 주님께 고하며, 그분께만 치료받고, 그분께만 응답받고, 그분께만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해결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굳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련 중 범죄 하는 대신, 고난을 당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은혜의 깊은 세계 속에 들어가서 은밀히 자기를 만나주시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시련 속에서 사람을 붙들고 추하게 호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으며 여러분의 사연을 주님께 늘어놓는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바라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에하파’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내가 바라다. 소망하다.’ 그런 뜻입니다. 이 말은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뜻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 뜻대로 안 될 때가 많은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우리의 눈높이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1미터 50에서부터 1미터 90사이를 오가는 인간들이 그냥 비슷비슷한 눈길을 주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안 됩니다. 뜻대로 안 되고 시련이 오고 절망스러운 일이 닥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의 눈높이에서입니다. 눈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거기 계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때는 교만하고 뭔가 잘 안 되고 막힐 때는 주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이 잠시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맘대로 안 되게 만드시는 것은 우리의 눈높이로만 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 보시게 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땅의 것만을 향하지 말고 눈을 들어서 우리의 인생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시고 어떠한 처지에서도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눈높이에서 바라보지만 말고 한번 믿음의 눈을 높이 들어 주를 우러러 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주님을 붙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은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는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렇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날에 바라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물리적으로 자연적으로는 소망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때에 오히려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소망의 닻을 던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당신께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당신 앞에 홀로 서서 그 인생의 터널 끝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절히 부르짖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고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도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고난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는 바뀌기를 원하지 않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삶의 상황만을 끊임없이 누더기 고치듯이 뜯어고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더러운 우리를 총체적으로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붙들고 새롭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터널 끝에서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일체의 성실하심으로 아침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이 하나님 붙들고 올 한 해를 이기는 여러분 되십시오.
미워하시는 하나님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 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니이다”(시 5:4-6)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 번째 토막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토막인 1절부터 3절은 하나님께 대한 간구와 탄원을 다루고 있다면 4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의 성품과 묵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정말 이런 불행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 몰랐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일어났고 불행하게도 이 시인은 인생의 가장 깊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고통 속에 신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여서 이 시인이 바로 인생의 터널 끝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배우고 평탄할 때에는 도저히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방식에는 하향식이 있고 상향식이 있습니다. 하향식이라는 것은 연역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지를 믿은 다음에 그 알고 있는 지식이 아래로 내려와서 자신이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만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현재 겪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 중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라고는 별로 없습니다. 인생의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고 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았다는 이야기 중에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어린아이들도 아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들의 인생이 바뀌는 이유는 객관적인 지식과 정말 주님을 만난 체험이 가져다주는 지식의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상향식으로 아는 방식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이해가 더디거나 혹은 무지하고 교리적인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랐는데 어떤 일을 겪고 보니까 비로소 귀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위로 올라가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상향식 하나님의 성품 알기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인은 아마 이 두 가지 방식 모두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탁월한 영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터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기가 어떤 일을 겪기 전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끔직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위에서 이미 하나님을 만나 알고 있는 지식들은 아래로 내려오며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분이신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뿐만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이 시인이 모든 것을 알았을 리는 없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었을 리도 없습니다. 또 이전에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그 경험이 계속되고 있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인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이 상정하는 바가 맞는다면 이 시인은 압살롬의 반역에 직면해서 그래서 그 말할 수 없는 치가 떨리는 배신감과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깊은 실망이 이 아버지인 다윗의 마음에 스쳐갔을 것이고 사실 이 사람이 왕위를 탐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까짓 왕위쯤 내어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 시인에게 가르쳐주었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이 시인이 평탄한 길을 걸었더라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Ⅱ. 인생의 터널에서 배움
그러면서 이 시인은 인생의 터널에서 하나님의 한 성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향해서는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선한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미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아주 엄연한 사실을 이 시인이 고통스러운 인생의 터널에서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그 인생의 터널 끝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악인을 미워하시는가를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이 시인은 죄에 대한 미움도 배웠고 또 자신과 같이 연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이 고난 속에서 인생의 터널 끝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이 시인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정의와 사랑을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터널과 같은 절망스러운 인생의 한 구간을 통해서 주님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규율하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어떤 식으로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시행하시게 되었는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깨닫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매우 나쁘게 느껴지는 어느 순간이 있다면 사실은 우리가 믿음이 적기 때문에 또 우리가 이해가 모자라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을쯤이 되면 독감주사를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한 십년쯤 전부터 직원들과 교역자들 사모님까지 다 예방주사를 접종해줍니다. 무슨 복지혜택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고 한 십여 년 전 겨울이었는데 독감이 돌았습니다. 독감이 엄청 돌아다니다가 교역자들에게만 달라붙었습니다. 한사람이 독감에 걸리니까 일주일은 심방을 못했습니다. 겨우 털고 일어났더니 사모님이 독감에 걸렸습니다. 이게 사역이 힘들어질 정도로 독감이 돌면서 교역자들이 헤매는 것입니다. 직원들도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 손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하다가 예방주사를 맞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모두 예방주사를 맞고 저도 독감이 걸려서 일주일 정도를 심하게 앓고 나서는 반드시 독감 예방주사를 맞습니다. 그러면 독감이 안 걸리고 혹시 걸려도 일주일까지는 가지 않고 이삼 일이면 털고 일어납니다. 그러니 본인들이 듣기에는 별로 안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예방주사를 한 대 맞히고 계속 일을 하게하는 것이 낫지 한번 아프다고 아픈 김에 드러눕는 것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몸이 피곤하고 상태가 안 좋을 때 예방주사를 맞으면 잘못하면 진짜 독감이 올 수 있습니다. 독감주사를 맞으면 몸의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기분이 아주 안 좋고 밤에 잘 때 감기기운 같은 것이 오면서 몸의 상태가 아주 안 좋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백신이라는 것은 독감 균을 집어넣어서 우리 몸속에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것인데 그것이 놀랍게 들어가서 우리 몸속에서 공격을 하면 우리 속에 있는 우리 몸의 요소들이 들고일어나서 적군을 향해 공격을 하면서 저항력을 길러서 유사한 것이 침투하면 온 몸 전체가 방어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총 동원방어훈련을 한번 하고 힘을 키운 다음에 겨울 내내 이기는 것입니다.
악인은 악합니다. 그리고 악을 행합니다. 그런 악인을 사용해서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인생을 살면서 즐겁고 형통하고 신나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던 시절은 우리에게 뭔가 좋은 것을 준적이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인간이라는 것은 형통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교만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없고 불통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결국은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도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형통할 때 자기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금 아까도 한국교회의 유명한 분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새해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목사님 한번 만나 뵙고 목사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정말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사경을 앞둘 때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친구가 안타까워하자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뭐냐 하면 ‘나는 죽어갑니다. 그러나 나는 원래 배 밑창에서 노나 젓던 한명의 노예에 불과한데 나 하나가 죽은들 뭐 무슨 그리 큰 영향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항상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주시고 높이셔도 그 좋은 일들이 좋은 일이 됩니다. 왜? 은혜가 끊임없이 그를 경고하고 형통해도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또 나쁜 일이 일어나도 믿음이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지만 그 나쁜 일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에 단단히 달라붙은 욕망밖에 모르고 눈높이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니편, 내편 하면서 나쁜 놈, 좋은 놈 하면서 미워하고 사랑하고 치고받고 살다가 고난을 만나면서 인생의 시련을 만나면서 한번 자신이 드론이나 헬리콥터를 타고 높이 뜬것처럼 높은 꼭대기에서 자신의 인생을 내려다보면 이제껏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갈등을 하고 살아왔던 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사소한 것들을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 걸었습니까? 그리고 조그만 것들을 위해서 죄를 지었을까 하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의 끝까지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쁨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성경속의 위대한 인물들, 역사속의 위대한 신앙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이 그들 중에 있었습니까?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그들 중에 있었습니까? 눈물골짜기를 지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이처럼 나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나빠 보일 뿐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사람을 미워하고 분쟁하고 그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허탄한 일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 시련 속에서도 깊이 하나님과 교제했던 인물들은 인생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고통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A. 하나님의 성품
그러면서 이 시인도 역시 인생의 정말 춥고 긴 그리고 고통스러운 터널이었습니다. 그 터널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은 죄악을 기뻐하시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여기에서 ‘악’ 그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인일 것입니다. 시편에서 악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연약해서 한두 번 실수해서 죄를 짓는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시편에서 가리키는 악인과 의인은 바탕이 다릅니다. 악인도 가끔 의로운 일을 행할 때가 있고 의인도 가끔 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 다윗이 겪고 있는 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어느 주석가들이 상정하는 것처럼 압살롬의 반역의 사건이라면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다윗에게 이미 예고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다윗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은 그가 뿌린 죄의 열매로써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사람을 과거에 지은 한두 가지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그때에 당신이 마음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것을 이 시인에게 보복하고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복수합니까? 그것은 부모도 아닙니다. 새끼는 부모에게 보복하는 새끼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짐승과 같은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보복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이렇게 나쁜 짓을 하고 결국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고 했었는데도 그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문루로 올라가며 슬피 울부짖으며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면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것이 아비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인 아비도 자기 자식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수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 아주 어린 신앙일 때에는 아이들이 부모가 무서워서 어떤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어려서 불경건한 고집을 꺾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을 온전히 양육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 아이들을 따끔하게 해서 부모를 두려워하게 만들어야합니다. 물론 두려워하는 것만큼 더 많이 사랑해주면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자기가 어떤 일을 하면 엄마가 혹은 아빠가 나를 미워해서 복수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아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서 청년이 되고 시집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았는데도 부모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미숙아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잘못된 일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것은 어차피 일어난 일입니다. 되돌리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내가 걸어온 인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어떤 나쁜 일들을 만나거나 고통을 겪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일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나를 당신께로 다시 부르고 계시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깨달을 수 없었던 어떤 성품을 나에게 가르쳐주신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주님에 관해 배울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혹은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할지라도 징계를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풀이를 한다거나 보복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공포심을 갖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B. 성품의 시행방식
악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인 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에게 악을 행하신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우리는 우리 건강을 사랑합니다. 건강해지고 싶지 골골하면서 병들어서 사람구실을 하지 못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자기건강에 위배되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계속 배가 나옵니다. 머리는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고기를 먹지마라.’ 그런데 너무 맛있습니다.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하기로 하고 오늘은 맛있게 먹습니다. 그것도 비계만 골라서 꼭꼭 씹어 먹습니다. 잔뜩 먹고 나서는 배를 만지면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소화가 되기 전에 다시 고기를 먹고 싶은 소원이 생겨납니다. 그렇습니다. 몸에 좋지 않은 기호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정말 나쁜 것입니다. 그것의 중독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특히 비오는 날 습도가 알맞을 때, 약간 배고플 때 피는 담배는 일품입니다. 질이 좋아야합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 자체가 무슨 죄악이겠습니까? 그렇지만 현저히 건강에 나쁩니다. 자기 자신도 그것을 압니다. 그런데 계속 흡연을 하면 폐가 자장에 범벅된 것처럼 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합니다. 계속 피웁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에 좋은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것에 위배되는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도덕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머리가 옳다는 것과 가슴에서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게 이성을 따르지 않고 감성을 따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악을 행하면 당신 자신이 이 세계를 향해 정해놓으신 그 목적에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결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선하실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그런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 그렇게 선하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악하게 느껴지고 이것은 나에게 정말 불필요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결국 그것은 무엇에 달려 있느냐 하면 우리의 신앙의 소화능력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비록 여기에 나오는 이 악한 사람들, 오만 한 자들, 행악 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 즐기는 자들, 속이는 자들 때문에 이 시인이 인생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터널 끝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수없이 많이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이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상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 시인을 좋은 사람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악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의도는 자기 욕망을 위해서 이 시인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 성품을 이 시인이 4절과 6절 사이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품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저리쳐지도록 하나님이 악인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뼛속깊이 그 악이 배어서 본성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본성상 그 사람의 인격과 운명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오만하여 모든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행악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피를 흘리고, 속이고 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이 시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악인에게도 일시적인 승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몸도 어느 한순간에 병이 우리의 몸을 모두 삼켜버리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납니다.
시인은 그 고통스러운 인생의 터널에서 한 가지 명료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악인들에 대해서 미워하시는 그 불같은 뜨거움은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해 베푸시는 뜨거운 사랑만큼이나 치열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터널 끝에서 이 시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인생의 터널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성품의 시행방식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악이 무엇이고 그렇게 악한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성품의 시행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악인은 그냥 하나님을 늘 사랑하며 살다가 어쩌다가 침체에 빠져서 죄를 범하거나 약했기 때문에 잠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 그것도 자기 스스로 선택한 무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무지는 스스로 알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무시해서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 모든 것들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오만이 인격화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 끔찍한 악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에 대한 반역을 꾀하였고 그리고 아주 용의주도할 정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훨씬 뛰어날 정도로 지혜 있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악인은 자기 스스로 솟아나는 악으로 악을 행할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습니다. 더욱이 여기서 오만한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으로 오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여기서 ‘선다.’ 라는 히브리단어는 ‘아마드’ 인데 견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런 오만한 사람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서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큰 불이 뜨거운 바람과 함께 산하를 집어삼키며 타들어갈 때 검불이 거기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겨울철 바짝 마른 관목이 불길 앞에서 오래도록 서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런 오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잠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굽는 것 같아도 결국은 사필귀정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는 결국은 버림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편에서 악인들의 인생이 벤 풀이 마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잔뜩 나있는 풀들을 베며 이렇게 논이나 밭 가장자리에 있는 풀들을 벱니다. 농부들은 이것을 정성껏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습니다. 그냥 확확 낫으로 자르고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막상 아침에 베어놓으면 싱싱한 풀이지만 하루만 햇빛이 비치면 그 다음날 와보면 검불이 되어서 어디로 갔는지 바람결에 다 흩어져버립니다. 그것이 악인의 실체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되시렵니까? 주님 앞에 연약하지만 주님을 의지하며 그 성품을 따라 사는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리라고 했던 요한 사도의 말처럼 그렇게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되시렵니까? 잠시 벤 풀처럼 흥왕하나 지푸라기와 검불처럼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되시렵니까?
거짓말하는 자들이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그를 추종하는 악한 무리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의 화신이었습니다. 현란한 말 바꾸기,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뒤집고 거짓말에 거짓말이 꼬리를 이어서 나중에는 자기가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또다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그런 끊임없는 거미의 뒤에서 끊임없이 거미줄이 나오는 것처럼 입을 열면 숨소리 빼놓고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들에게는 무슨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도의를 구하는 자는 공명을 추구하지 않고 공명을 추구하는 자는 부귀를 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귀를 탐하는 자는 무슨 짓이라도 할 놈들이다.’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거짓말하는 자들은 끊임없는 거짓말과 그리고 끊임없는 말 바꾸기 이것들을 통해서 결국은 자신이 멸망 받아야 마땅할 하나님의 대적자임을 드러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피 흘리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속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포학은 그리고 이 모든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혹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치열한 이기심이 끊임없는 교만으로 성장하여 결국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이스라엘 왕국을 허물어뜨려버렸습니다. 그렇게 악인은 잠시 승리하여 반역하는 자들이 이기는 것과 같았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망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 시련을 통해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행악 자, 피 흘리는 자, 속이는 자, 거짓말하는 자 이런 사람들을 통해 어떠한 위대한 스승도 자기에게 가르쳐줄 수 없는 소중한 교훈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착한 사람들로서는 가르쳐줄 수 없는 그 가슴 절절한 교훈들을 이 막돼먹은 행악 자들과 피 흘리는 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오만한 자들, 속이는 자들을 통해서 쓰라리지만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다윗이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우리의 인생의 터널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인생이 어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이런 각도에서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보신적 있으십니까? 아마 드물었거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보라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비결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착한사람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르쳐줄 수 없는 그런 깊은 교훈들을 이 쓰레기 같은 거짓말쟁이들이, 신앙이 없는 오만한 자들이, 행악하는 것이 뼛속깊이 본성에 배어버린 그 비렁뱅이 같은 인간들을 통해서 이 시인은 배웠습니다. 그 인간들은 쓰레기 같았지만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바로 도구가 되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만 그들을 통해 이 끔찍한 배반의 고통을 겪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에게 쓰라린 고난은 하나님께 피하는 그늘이 되었고 이 쓰라린 고통은 하늘위에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그분의 하늘까지 사무치는 그분의 이름을 볼 수 있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하늘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인생의 터널에서 주님을 뵈옵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Ⅲ. 신자의 위로
그러면 이런 속에서 신자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시편100편 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여호와는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 긍휼히 여기시는 인자하심은 영원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배반하나 그분은 우리와의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이 대대에 계속되리라는 찬송이 시인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결코 우리를 버리실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겪는 모든 고통에 동참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인생의 가장 어두운 터널 끝에서 이제는 내가 철저히 버림을 받았고 나 혼자 고립되었다고 믿는 그 순간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분의 능력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그 순간 하나님은 고통 받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 그의 현실 속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울 때 함께 우시고, 그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시고, 그가 두려울 때 함께 두려워하시고, 그의 곁에 계셔서 그의 수준에 맞게끔 시시때때로 그를 붙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가 선하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분을 의지하고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왜? 우리는 악을 인해서 수시로 고통을 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루도 그렇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가깝게는 우리 안에서 원하는바 선은 행하고자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나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봅니다. 바깥에서는 나는 그래도 끊임없이 넘어지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고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요할 정도로 미워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자기의 길을 가면되고 나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니까 내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는데 보태준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합니까? 천적입니다. 천적. 하나님을 향해 천성적으로 원수된 것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싫은 것입니다. 그런 악일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런 악에 물든 사람들, 절대로 교정될 것 같지 않은 요즘 나온 신조어가 있는데 십년 묵은 육포처럼 질긴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보다도 더 강인한 인내심을 가지고 줄기차게 우리에게 악을 행할 때 우리는 그 현실 앞에서 때로는 엠보싱화장지 같은 소름이 확 돋아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보다 그들의 악이 훨씬 더 강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다윗의 원수들이 악에 집착하는 힘이 훨씬 위대해보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왜?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일들을 선하게 당신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게 할 것이라고 칼빈이 고백했던 것처럼 ‘결국은 모든 일은 주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선이 잠시 지는 상황 속에서도 악이 이기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킹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여전히 위대하다.’ 라고 말입니다. 언제나 주님 편에 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 측면은 그를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결코 그 선하심을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달려가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입니다. 바위가 깨지겠습니까? 머리가 터지겠습니까? 수많은 대적들이 이 시인을 에워싸고 백성들에게조차 버림을 받아 고립된 것 같았지만 주의 선하심을 폐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련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악인은 형통한 때에 교만하고 시련의 때에 원망하지만 의인은 형통한 때에 겸손하고 시련의 때에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시시때때로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납니다. 고속도로를 달려가 보십시오. 좋은 풍경으로 지나가다가 갑자기 캄캄한 어둠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터널은 정말 지루하리만치 긴 터널을 지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우리의 인생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그런 인생의 터널을 통과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통과하지 않으려면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야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 직선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항상 행복하고 달콤하고 즐겁고 낭만적인 인생만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쁘고 즐거운 것만 우리의 인생입니까? 쓰라린 눈물을 흘리고 외로운 마음으로 탄식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구의 인생을 내가 대신 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분명히 어차피 우리의 인생의 한 토막입니다. 그런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비추며 돌아보며 자기를 기준으로 삼고 살았던 날들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 사람인지 자기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그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난의 터널에서 회개하고 그리고 새롭게 주님을 만나며 그 터널 끝에서 불현듯 눈부신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Ⅳ.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져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아플 때 바로 그 현장에서 주님도 아파하시고 그들이 홀로 버려진 것처럼 외로울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셔서 당신으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뼛속깊이 주님을 대적하며 사는 행악 자들과 거짓말에 거짓말을 끊임없이 뒤 잇는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 속이는 사람들 그것이 그 자신의 DNA처럼 박혀버린 사람들은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위대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아닌 우리를 결국은 돌이키셔서 터널의 시련 속에서 당신의 잃어버린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러싼 악인들 때문에 두려워하면 쩨쩨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우십니까?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할 정도로 잘못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돌이켜야할 것입니다. 어떤 나쁜 일들을 만날까봐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무슨 나쁜 일을 만나겠습니까? 가장 불행하고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해야 ‘김 목사가 오늘 죽었다더라.’ 라는 이야기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일입니까?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죽음을 향해 타들어 가는 한 자루의 촛대 같은 인생입니다. 어떻게 보면 70년, 80년 혹은 60년의 긴 인생은 마지막 죽음의 불꽃을 찬란하게 불태우기 위한 준비기간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무섭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정말 두려운 것은 삶의 현실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지 않은 것 그것 말고 두려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 그분의 손안에 달려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한 순간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덤을 많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다 받지 않았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무섭고 두렵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심지어 나에게 악을 행하고 다윗처럼 그렇게 끔찍하게 고통을 준 반역자들조차도 그 대가로 하나님 앞에 피비린내 나는 심판을 받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의 성전에서 함께 찬송하며 살고 싶다는 소원 이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더 큰 소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의 터널 속에서 이 시인의 마음을 단련하여 찌꺼기들을 쏟아내게 하셨습니다. 그런 고통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직면할 수 없었을 자신의 죄의 밑바닥 그리고 인간의 깊은 밑바닥을 보게 하셔서 상천하지에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인간의 죄와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면 직시할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게 되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 시인이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터널 끝에서 그는 배웠습니다.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에서는 결코 터득할 수 없었던 보석과 같은 교훈을 배우면서 이 시련을 인하여 그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여전히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사랑하시는 하나님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 하리이다”(시 5:7)
녹취자: 조원정
I. 본문해설
시인에게 일어난 이 끔찍하리만치 불행한 일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방에 수많은 배신자들로 에워싸였고 자신은 지금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환경의 깊은 절망적인 상황은 그의 마음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지만 그 힘겹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의 어떤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성품의 빛으로 악인들의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고 자기를 이기는 것 같지만 그 모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선악간의 악인들을 심판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당신의 거룩한 방식으로 실행하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임은 틀림없었습니다.
이 시인은 그 성품의 빛 아래에서 깊은 위로를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첫 번째 말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 하리이다.” 하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오직’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접속사인데 굳이 번역을 한다고 하면 ‘오직’이라기보다는 ‘그러나’라고 번역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혹은 그렇지만, 악인은 그렇게 하나님께 미움을 받지만 그렇지만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잠시 악인은 힘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영원한 기업이 없습니다. 영적인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 영적인 기업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시련 속에서 자신의 뜻대로 안 되는 인생의 터널을 만났을 때 시인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주님께 자비를 호소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기업이 악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악을 의지해서 사는 무도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잠시 그들의 포악이 인자를 이기는 것 같고 그들의 강포함이 하나님의 인내를 꺾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정돈하실 때까지 빈들에 쏟아난 풀 같은 존재들입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모든 것들은 쓰러질 것들이었습니다. 악인과 대조되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 시인은 묵상했습니다. 그 성품이 바로 사랑의 성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II. 성도를 사랑하심
오늘 성경에 “그러나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의 헤세드의 많음으로써”라고 되어 있습니다. ‘헤세드’라는 단어, 바로 이게 오늘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사랑의 이유가 당신 자신이 받는 유익이나 어떤 사랑받을 사람의 자격에 기반을 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시는 그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인에게 있다는 그 자체도 어마어마한 사실인데 오늘 시인은 말하기를 그 사랑이 많음으로써 헤세드의 사랑의 충만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그렇게 많음으로써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기꺼이 헤쳐 갈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평온하고 모든 것이 있을 때에 평탄할 때에 도무지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치열하고 뜨거운 사랑을 바로 인생의 터널 끝에서 그는 경험했던 것입니다.
악인이 그를 에워싸고 행악 자들이 그에게 포악을 행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 그를 속이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강포를 행할 비극적인 그때에 가슴에 수많은 칼날을 맞고 그 상처위에 소금이 뿌려지는 것 같은 쓰라린 시절을 지날 바로 그때였습니다. 어느 주석가들의 추측이 맞는다면 이 시는 압살롬의 반역 때에 쓰여진 시이고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고 자기를 죽이려고 목을 노리는 사람들이 한때는 자기와 생명을 같이하며 나라를 세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그 비참한 배반의 시기에 인생의 가장 칠흑같이 어두운 암흑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그는 가장 단순한 사랑을 단순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사랑하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린 아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을 맘껏 펼치고 하늘만큼 땅만큼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생의 이 어두운 터널에서 배운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이 시인을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모하게 만들었습니다. 배반하는 사람들의 비열함은 이 시인을 어떻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시인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잔인하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그 야비하고 더러운 사람들의 짐승 같은 포악이 이 시인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 시인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그 포악을 통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조차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엄마 같은 세심한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지 간에 이 세상에 의해서 출렁거리면서 정말 미숙한 인생을 살면서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한 아주 중요한 비결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성숙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돈이 많아도 오히려 그 돈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빨리 죽는다거나 혹은 운명이 아주 박악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도 위로가 되실 것입니다. 거울을 가서 한번 보시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얼굴이 예쁘게 생겨도 인생이 순탄하지 않습니다. 예쁜 사람을 세상이 가만 둡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누가 찝쩍이는 사람이 없지만 제 동생이 종업원이 한 이십 명 넘는 레스토랑을 크게 했는데 그럽니다. 형, 그 애들 뽑을 때 그래도 서비스업이니까 얼굴을 좀 보고 뽑잖아. 두 달 있는 애가 없답니다. 참 예쁘다고 뽑으면 두 달을 못 있답니다. 어떤 손님이 매일 밥 먹으러 온 답니다. 결국 그 손님 따라 어디 가버립니다. 그래서 수수하게 생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쓸 만합니다. 별로 동의를 안 하십니까? 행복하지 못합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고통에 대해서 적절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고통에 대한 관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람은 안정된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성숙한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고 편안하고 괴롭지 않은 상태를 원하지 괴롭고 쓰라리고 가슴 아프고 배신당하고 고통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그런 현실을 좋아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고 개도 발로 차면 물어 버립니다. 인간은 그 고통을 자기 바깥에서 자기를 바라보면서 고통의 문제를 해석을 하고 쉬운 표현으로 이렇게 서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공중에 높이 떠서 자기의 인생을 위에서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너무너무 중요하고 생사가 달린 엄청난 일인데도 아주 쿨하게 판단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그가 성숙하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시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그가 범죄 했다고 치지만 그 정도의 범죄 하지 않은 왕들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일평생 결코 우상숭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겼던 수많은 왕들도 다윗보다 평안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느라고 섬겼고 의지하느라고 의지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지만 시인에게도 이렇게 쓰라린 현실은 너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은 그 인생의 터널 끝에서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셨고 왕이 아닌 한 사람의 하나님의 어린 자녀로서 그 왕위에서 내려와 모두에게 버림받은 인생의 고통과 절망 끝에서 우리 주님의 품에 안겨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자기 같은 사람을 이렇게 넘치는 헤세드의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보기에 좋은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많은 경우에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으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 사랑 받는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우리의 피를 흘리기를 좋아하고 우리를 개처럼 물어뜯고 싶어 하고 맹수처럼 팔다리를 뜯어 먹고 싶어 해도 오히려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결국 좋은 것이 되도록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곧 우리의 신앙의 깊이이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우리의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성도들이 예쁘고 성도들이 착한 일을 하고 성도들이 당신의 나라에 이익이 될 만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당신이 낳은 자식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향해 베푸시는 그 사랑은 언약에 묶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불변하시는 성품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너희를 끝까지 사랑하여 너희가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그 신실하심 때문에 언약에 충실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 사랑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지극히 평범한 사실, 나 여호와는 다윗 너를 사랑하노라고 하는 이 평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가혹하리만치 깊고 어두운 인생의 터널로 다윗을 들어가게 하셨고 돕는 자도 없이 위로하는 사람도 없이 그 터널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그 터널에 두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늘 알고 있는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고 하는 당연하고 평범한 이 사실을 이 시인은 뼈저리도록 체험했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끝없고 드넓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뼈 속 깊이 새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들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자기 배속으로 낳은 그 새끼가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칼을 들었을 때 이미 다윗의 마음은 그 칼이 육신을 난도질 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마음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일생을 같이했던 자기의 가족과 같고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사람이 자기를 배신할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십니까? 눈을 감고 가만히 자리에 누워 있으면 면도칼로 심장을 1m간격으로 칼날로 베고 지나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1m두께로 베어진 심장을 빗자루 쓸 듯이 접으면서 그 사이사이에다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배신의 쓰라린 고통을 모릅니다. 별로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아저씨가 날 배신한 것은 별로 상처가 안 됩니다.
다윗은 그 가난하고 고통 받던 시절에 자기에게 모인 수많은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빚지고 한 맺히고 병들고 사울의 치하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한 가슴 저미는 목자의 마음을 다윗이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에 동참하여 그 양떼들을 목양하기 위해서 동지들로써 군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싸웠습니다. 생사를 함께 했습니다. 자기의 친 형제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칼을 치켜든 자기 새끼의 졸개들이 되어서 자기 목숨을 노리며 창을 들고 말을 타고 공격을 하겠다고 했을 때에 다윗은 이미 고통에 있어서는 수십 번 죽은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오죽했으면 제가 묘사하기를 면도칼로 심장을 1m두께로 난도질해서 그걸 빗자루처럼 뒤집어서 그 사이에다 소금을 뿌리는 것입니다. 차라리 어느 한순간에 전쟁터에서 쾅 하고 독화살을 맞고 그냥 이삼십초 울컥 울컥 하다가 피를 토하고 눈을 부릅뜨고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그것이 산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나쁜 놈들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백주대낮에 다윗과 잠자리를 함께하며 일생 부부처럼 함께하며 살던 후궁들을 동침하면서 아버지의 침상에 피 칠을 했습니다. 느껴지십니까? 그냥 악인들이 와서 망치를 두드리고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쥐어뜯어 놓은 것입니다. 피를 나누고 언제든지 자신의 생명을 버릴 정도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동지들이 아주 야비한 방법으로 아주 비겁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다윗을 배신했을 때 그가 겪은 정신과 영혼의 악마적인 고통은 그가 실제에 피난길에 오르고 도망을 다니고 하는 육신이 주는 고통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그 탁월한 인식을 바로 그 사랑의 깊이만큼이나 깊은 고통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그 고통을 주었던 그 야비하고 더럽게 배신했던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윗이 그런 위대한 사랑을 경험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반하고 야비하게 협잡하고 짐승처럼 정조도 없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정권을 농락했던 이 인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준엄한 심판이 행해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피붙이같이 믿었던 그 새끼, 목숨을 함께 나누며 긴 세월 전쟁터를 함께 누볐던 신왕과 왕국 설립의 동지들이 형언할 수 없는 구차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똥같이 자기를 배신하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차라리 조용히 눈을 감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고통의 잔인하리만치 어둡고 긴 터널 끝에서 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은혜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나는 주의 헤세드의 많음을 힘입어서 주님의 집에 들어가 주님을 경외함으로써 성전을 향하여 예배 하리이다.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게 보인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종종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죄가 없는데도 이 세상에 이름난 악인도 겪지 않는 고통스러운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었던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로부터 추잡하고 더러운 배신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인생은 모두 풀이요,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사람은 의지하고 기댈 대상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추잡하기 짝이 없는 신실과는 거리가 먼 협잡과 사기 거짓말과 위선, 위증이 난무하는 쓰레기 같은 똥 같은 인간 세상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변함없이 순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가혹한 시간들을 보내게 하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헤세드는 무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어떠한 인생의 어두운 터널에서도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붙들고 살면 반드시 그 터널 끝에서 눈부신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III. 사랑에 대한 반응
A. 경외함
오늘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성도를 사랑하시는 무한한 헤세드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시인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 하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반응에 대해서 첫 번째는 경외함입니다. 여기에서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높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으로 떨리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공포의 대상일 뿐인데 왜 그런지 그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고 무엇인가 무섭고 떨리면서도 그분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이끌리고 싶은 그런 이끌리는 사랑을 체험하는, 그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이것을 융합한 것이 경외의 사상입니다. 구약에서는 특히 이것이 아주 중요하게 강조되고 신약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께 무한한 사랑을 입은 성도의 마땅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못하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기 때문에 포기한 일이 있습니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경외입니다. 이 경외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신민이 감히 올려다 볼 수도 없는 천상의 위대한 존재 같은 황제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경외함이 아닙니다.
오늘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주의 집에 들어가, 물론 주의 집은 성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전이 아니라 마치 당신의 집에 들어가, 주의 집이라고 하는 표현이 히브리어 성경에 당신의 집에 들어가, 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가족 관계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가정입니다. 어쩌다 한번 주님을 찾아온 방문자가 아니라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살아가는 한 집안의 가족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무얼 해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닙니다. 가족으로서의 어떤 자격이 아닙니다. 그냥 태어나서 함께 살면 그게 가족입니다.
가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핏줄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운명공동체로 함께 살고 있어야 합니다. 엄마 아빠 피를 받고 태어났어도 뚝 떨어져 나가서 찾지도 않고 서로 만나지도 않고 남남처럼 살아가면 오히려 같이 하숙 생활 한 친구가 더 가족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유산 나눌 때나 와서 자신의 몫을 챙겨달라고 하면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같이 자기의 이익 밖에 모르고 모든 인간의 행복을 자기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시대에는 가족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은 가족 속에서만 그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를 진공 상태에서 떼어 놓고는 그 인간이 누군가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회 속에 놓고 인간은 생각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라고 형성된 이 인간도 그렇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집회 나오기 전에 연락이 왔는데 여러분이 공과공부한 가족이라는 책이 2015년도 기독교 출판 문화상을 받았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책을 잘 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뭔가 사람들이 이렇게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난치병과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가족관계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가족들 얼굴도 안보는 그리스도인들 많습니다. 못돼먹은 며느리도 많고 진짜 마귀할멈 같은 시어머니도 많고 이해할 수 없는 시누이, 올케,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치유되지 않은 불치병처럼 인간의 한부분에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말씀의 빛으로 비춰 보고 뭔가 치료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나의 가족들의 행복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고 시집장가가면 그런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또 대물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떡하든지 그 문제들을 고통 속에서도 해결되는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독자들이 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거 가지고 우쭐해지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뜻하고 우리에게 격려가 되고 힘만 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잡아 뜯고 자신의 비극적인 가정사에 직면하기 싫어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 아픈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고쳐지는 것이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의 위대한 헤세드의 사랑을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밥 주고, 차주고, 집주고, 떡 주고, 온갖 것들을 로또 복권처럼 쌓아놔 가지고 그것을 들이밀고 홍수 속에서 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헤세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반응은 주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을 향한 경외 안에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할 것입니다. 하고 나옵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의 차이는 사람은 사랑하고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사람들이 깔봅니다. 더군다나 인간성이 못된 인간은 사랑하고 너그러워질수록 그것을 이상하게 이용하고 약점으로 이용을 해서 깔보고 짓뭉개고 발아래 놓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더러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 본성이 저나 여러분 모두 속에 다 있습니다. 항상 제가 말씀드립니다. 한 사람의 한 인간으로서 혹은 신앙인으로서의 특성은 인간을 껍데기에 현혹되지 않고 인간 자체를 바라보며 예의를 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예화) 자기가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자기한테 와서 도움을 구하는 인간을 혹은 병원에 와서 치료받으려는 환자를 자기가 지위가 높다고 깔보고 그러면 안 됩니다. 대기업의 회장이라고, 운전기사 폭행 한 것 신문에 난 것 비일비재합니다. 저도 그런 간증을 운전기사 했던 교인들로부터 수없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거 읽었을 때 아 그 병이구나! 회장들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니까 가다가 운전하는 기사를 막 때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그리스도인도 어느 한 회장을 이십 몇 년을 모셨는데 수시로 술만 취하고 속상한 일만 생기면 뒤에서 욕하고 때리고 스트레스를 푼답니다. 이 양반이 집사님이었는데 하도 성질이 나니까 가다가 아주 한적한 길에 차를 세웠습니다. 뒷문을 확 열고 평소에 절대 회장님한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야, 이 새끼야 이리 나와 봐라.” 들판에 나가서 턱주가리에 피가 나오도록 두들겨 팼습니다. “나 이 짓 더러워서 안할 테니까 날 고발하려면 감옥에 들어갈 테니까 난 너하고 다시는 안한다.” 쓰러져 있는 놈을 발길로 차버리고 차 몰고 와버렸답니다.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더랍니다. 나는 신문에서 딱 보는 순간 이것은 진짜다. 진짜 나쁜 갑질 하는 인간이 여기에 있었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정말 높고 위대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신께 순종한다고 멸시하거나 하찮게 여긴 적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언제나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절대로 식당가서, 특히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반말하고 그러는 것 아닙니다. 아주 공손하게 너무 과할 필요는 없지만 한 사람으로써 이 세상의 지위와는 상관없이 깊이 공경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사랑이 넘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넘쳐도 그 사랑이 올바른 사랑일 때에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이 동반이 됩니다. 함부로 하나님을 할 수가 없습니다. 버르장머리 없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사랑을 빌미로 해서 개기고 그러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 시인의 경외함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개 육욕적인 사랑은 언제나 무례함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나는 여러분에게 바라고 싶습니다. 2008년부터 2010년인가 고린도전서 13장을 33번에 걸쳐서 설교했습니다. 이 시간을 비로소 선전합니다. 1번부터 33번까지 다 듣고 인생이 바뀌지 않았으면 나한테 오십시오. 내가 만나주겠습니다. 좀 들으십시오. 변화되십시오. 만날 되지도 않는 어줍지 않은 신앙으로 허우적거리고 여기저기 들이받으면서 동서남북도 분간하지 못하고 그러지 말고 조용히 앉아서 나는 이 인생을 살아가기에 너무 무지하다고 생각하고 무릎을 꿇고 서른 세편, 그래봐야 한 40시간 내지 50시간 들으면 되는 것이고 10시간씩 들으면 5일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좀 바뀔 텐데 아니 왜 그렇습니까? 꼭 들어보십시오. 예전에는 다 돈 주고 샀는데 지금은 핸드폰 들어가서 툭 치면 다 쏟아져 나옵니다. 정리 본까지 잘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인생이 변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얘기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서 인격화 되어 흘러갈 때 자신을 그 사람이 사랑한다고 무례하게 행하거나 자기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뭔가를 해줬기 때문에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다고 그렇게 야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시인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의 삶은 최종적으로 경외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그 말씀에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존경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하는 것은 말을 듣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말을 들을 때에 자꾸 딴 짓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내가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착한 마음이 그 말씀을 듣는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 경외의 삶이 결국 기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기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버리고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것이 세 번째로는 실제의 삶의 일치를 이루어 받은바 말씀, 간구하는 기도, 실제 살아가는 삶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외의 삶입니다. 이런 깊은 종교적인 경외에 의해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시인이 그런 경외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B. 예배함
두 번째는 예배함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경외함이 삶 전체에 깃드는 종교정신이라면 예배는 그 종교심의 핵심적인 표현을 가리킵니다. ‘에쉬타하베’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매우 어려운 단어입니다. 원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원형보다 변형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변형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많은 어려운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은 확실합니다. 기본적으로 절하다. 입니다. 그 대상이 우상이든지 하나님이든지 혹은 사람이든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든지 그건 상관없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굽혀서 절하는 것을 이 단어를 사용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발전해서 ‘경배하다. 숭상하다. 숭배하다’라는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예배를 이야기하는데 예배는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로 나누어집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우리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은 열한 시에 모여서 드리는 혹은 열시나 열두시에 모여서 한 시간 남짓하게 예배드리는 그것을 국한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선한 일들을 위해 창조된 인간인데 예전에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지 마음대로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자기의 육욕에 만족하기 위해서 야비하고 더러운 삶을 살았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규율하는 법도나 이런 개념도 별로 없이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왜 창조하고 인간인 자기를 지으셨는지 깨닫습니다.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이기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 더러운 죄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그 끔찍한 죄로부터 하나님이 구원해주셔서 하나님의 구원 받는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에 대한 차고 넘치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 감격과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 경배의 정이 그가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업하고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하는 모든 것의 광범위하게 배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윗처럼 지금 야비한 배반자들에게 둘러싸여서 핍박을 받거나 모욕을 받거나 혹은 자기도 짓지 않은 죄를 짓지 않은 자기에게 모욕을 가하는 이런 모든 현실 속에서도 예전 같으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런 식으로 접근을 했을 텐데 이제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자기가 이런 악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나 무조건적인 무릎 꿇음, 비굴함,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복수의 칼날을 갈고 정의의 이름으로 작은 상처를 준 한 사람에게 사람의 목에 칼을 꽂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포악합니다. 이런 것들이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사도바울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곧 예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이었는데 지금도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 베일리라고 하는 인물이 청교도인데 17세기 사람이라고 기억을 합니다. 『경건의 실천』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미국에서 집회를 마치고 오는데 제가 비행기를 타면 나이가 들어서 너무 피곤한데 그때는 한숨 안자고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만 열 시간 동안 읽은 것은 아니지만 다섯 여섯 시간 그 책을 읽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그 비행기 안에서 한없이 혼자 부흥회를 하면서 왔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기도하다가 찬송하다가 그 중에 한 토막을 소개해주자면 이런 것입니다. 다 읽고 나서 밑에다 썼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나? 내가 산 삶은 부끄럽다고 썼습니다.
(예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납니다. 루이스 베일리는 자기가 실천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 겁니다. 책 제목이 경건의 실천입니다. 아침기도를 드립니다. 그때 이런 마음을 가지랍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아침에 눈을 뜬 것이 마치 천국에서 새로운 눈을 뜬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하루의 삶을 더 연장시켜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우리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입을 때 이렇게 기도하고 입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다 벗은 몸입니다. 속옷부터 하나씩 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옷이 벗은 내 몸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처럼 오늘 하루도 착한 행실로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다음에 세수를 합니다. 이렇게 내 얼굴의 때를 벗겨 내는 것처럼, 실제로 그 구절이 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때를 벗겨내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불결을 벗겨내어 주소서. 그냥 잠만 잤는데 때가 꼈나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입니다. 아침을 먹습니다. 청교도도 그때 가난했으니 소박한 아침을 먹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정말 눈물이 나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 한 그릇의 식물 없이 나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나의 본질입니다. 내가 그때 주님을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어김없이 오늘 아침도 식탁을 마주대하며 육신을 공양하는데 나의 영혼도 나의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내 영혼의 생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말씀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면서 말씀을 보는데 이 사람의 이야기는 매순간 일하면서 잠깐잠깐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 최소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바람직하게는 더 자주,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드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내가 너무 바쁘다는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사니?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런 경우는 그 청교도가 가지고 있는 예배라는 자체가 삶 전체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밥 먹고 똥 누는 것 까지도 예배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넓은 의미로서의 예배입니다. 그런 인상을 준 사람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다리오 왕 때 사자 굴에 갇혔던 다니엘에게 왕이 엉겁결에 도장을 찍어서 사자 굴에 쳐 넣고 아침에 결국 후회를 하면서 막 달려와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내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기에 능하셨느냐? 이방인 왕에 눈에도 사회적인 지위로서 자신의 신하였지만 이 다니엘이란 인간은 왕인 자기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각인이 된 것입니다. 그게 넓은 의미의 예배로서의 삶입니다.
또 다른 것은 바로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완전히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원론이라고 부르고 이 두 개가 한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일원론이라고 부릅니다. 극단적인 일원론에 빠지게 되면 최근 주일 성수에서 공부한 것처럼 나 자신이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사회적인 생활과 예배 사이에 구분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극단적인 일원론, 혹은 예배드리는 일은 거룩하고 나머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속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완전히 구획 지어진 극단적인 이원론도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온전한 것은 원뿔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예배와 좁은 의미에서 예배가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고 이 세상에서 삶과 시간을 정해놓고 드리는 하나님의 예배가 동급이라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다가 저 뒤에 누가 와서 밥 먹으러 가자고 한다고 예배드리지 밥 먹으러 안 갑니다. 돈 벌 일이 생겼다. 빨리 나와 봐. 우리는 돈 못 벌어도 여기에서 예배드립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예배는 실제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하고 모든 생활은 예배로서 수렴되어져야 합니다. 삶으로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넓은 의미로서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좁은 의미의 예배를 잘 드린 사람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는 넓은 의미의 삶을 제대로 살다가 오든지 못 살았기 때문에 깊은 뉘우침이 있든 사람들이 이런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 생활과 종교적인 생활로 수렴되는 우리의 생활이 결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성전을 향하여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예배로서 제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정보로서 다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잠시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 어떤 지식이 있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삶을 다루어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전에 어떻게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에 지식이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당장 여러분 자신의 예배 생활을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교에 가까운 예배생활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깔보고 있는 사람들이 예배가 끝났을 때 하나님을 무시하는 생활이 아닌 공경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때우는 예배생활, 이런 것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예배에 목숨을 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태만하고 예배를 위해서 일주일 동안 거의 기도하지 않고 예배에서 은혜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재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 만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어두운 터널 끝에서 가슴을 에는 것 같은 배신과 비열한 대적 자들의 악을 인하여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 고통은 육체적인 죽음을 능가하는 고통이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헤세드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가장 어두운 칠흑 같은 터널의 시기에 하나님께 경외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맹세했습니다. 다윗인들 이런 삶의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었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이기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자기 마음대로 전개되지 않고 있는 이 엄연한 삶의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합하고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현실이구나.’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계속 부인하고 살려면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둘 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현실을 만드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자기가 분노에 차서 죽어 버리거나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여 버리겠습니까? 남편이 마음에 안 든다고 살인합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고 다음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실까? 왜 이런 인생의 어두운 터널 끝에서 배신과 더러운 모욕,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끔찍한 포악을 경험하게 하실까? 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과 신 성도가 할 수 있는 바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가 어떻게 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영원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2016년 한해를 시작하면 이 주님을 만나고 이 주님의 헤세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없이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빕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8)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악인들과 대조되는 성도들의 삶을 노래했습니다. 악인들은 잠시 시인보다 우세하여 시인으로 하여금 망명의 길로 떠나게 하였고 수많은 원수들이 에워싸 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의 진정한 고통은 단지 나라를 잃어버리고 망명의 길을 떠나거나 혹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었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자기 뱃속으로 낳은, 사랑하는 핏덩이 같은 그 새끼가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군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하며 전쟁터를 누비던 그 피를 나눈 것 같은 형제와 같은 동지들이 고개를 돌리고 창끝을 자기 목에 겨누고 자기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뜨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인생의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에서 그런 고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을 위대한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헤세드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겠노라고,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자기를 에워싼 수많은 악인들, 핏줄로써 자기가 낳은 새끼가, 죽음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사랑하는 동지들이 반기를 들고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가슴아파하고 낙심하였지만, 이제는 그 고통 중에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처한 이 모든 악하고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은, 신앙이 없을 때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주관적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좋은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흔히 유행하는 말이 있는데, 재판받을 때 가장 재수 없는 죄인은, 아침에 부부싸움하고 나온 판사에게 재판받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법정에 들어설 때부터 재수가 옴 붙은 상태에서 판사가 올라옵니다. 모든 것이 다 좋지 않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너무 좋은 일이 있었던 판사, 딸이 좋은 대학에 수시로 합격했거나 아들이 장가를 간다거나 해서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한 판사에게는 뭔가 기대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주관적인 존재 아니겠습니까? 똑같은 새가 노래를 하는데, 가슴이 쓰리고 간밤에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한 사람들은 “새가 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희망찬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새들이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아도, 그 물이 하얀 거품을 내며 돌아오다가 웅덩이에 고여 푸르른 빛이 되면, 물이 순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그 물이 계곡을 휘돌아 오면서 이 바위 저 바위에 부딪히는 바람에 멍이 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아보면 압니다.
지난날을 바라보면 죽고 싶도록 괴로웠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세상에, 그까짓 일을 가지고 왜 그랬을까?’합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을 남의 인생처럼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 사랑하는 누가 죽었어? 죽었구나.’ 물론 사랑이 없어서만이 아니라, 한번쯤은 자신의 인생에서 뛰쳐나와서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처럼 바라볼 수 있어야만 인생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혹은 다른 사람의 인생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이 많습니다. 아침에 방송을 보면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 인생을 살아온 이야기를 합니다. 말 안 듣는 고등학생 아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 바람피운 자기 남편을 어떻게 붙잡았는지, 수시로 신경질부리는 신경통 여사 같은 자기 부인을 어떻게 잘 비위를 맞추며 살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다들 공감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이 주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가끔 이런 것에서 뛰쳐나와서 자신의 일을 남의 일인 것처럼,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는데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너무 기쁘고 가슴 벅차서 온 세계에 마이크를 들고 자랑하고 싶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벌러덩 누워서 코를 골며 잘 수 있는 이런 객관적인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만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도 그런 가슴 쓰라린 일들을 당했을 때, 어제 제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심장을 1mm간격으로 옆으로 쳐서, 그리고 그것을 한 장씩 뒤집으면서 소금을 뿌리며 넘기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을 이 시인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원수들, 쓰라리고 가슴 아픈 자신의 처지만을 생각해서 가슴을 쥐어뜯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원수들의 죄악과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8절의 주제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로써 인도해주시고 주의 길을 목전에 곧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이 시련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제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II. 인도하시는 하나님
A. 원수를 사용하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데 원수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원수가 우리를 인도합니까? 원수는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는 사람이고 우리를 인생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괴로워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지, 어떻게 그 원수들이 우리를 도와줍니까?” 물론 원수들은 우리를 도우려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수들은 악하나 우리를 향해서는 선하신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나쁜 일일 수밖에 없는 그 일을 좋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과 함께 자신의 형들과 가족들을 모두 불러들여서 7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왔습니다. 요셉덕분에 한 지역의 땅을 얻고 거기서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아주 평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셨고 형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여태까지는 동생 요셉이 아버지 때문에 우리에게 복수를 못했지만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우리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우리는 그를 노예로 팔아버리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거짓말까지 합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당신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랬더니 요셉이 한참 눈물을 흘리다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만민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인생을 바라보는 신앙인의 생각입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할 때, 그 일을 당한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끌어안고 이해하며 지나가면 악이 거기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되받아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으니까 나도 악으로 갚아 주리라.’하면서 복수를 꿈꿉니다. 그때에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은 보복을 당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 복수의 감정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잊어버리고 포악과 강포에 불타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책망할 때도 자녀들에 대한 미움이 솟구치면서, 어떤 때에는 혀끝까지 올라와서 자녀를 때리는데, 하물며 자신을 오랜 기간 동안 괴롭히거나 회복하기 어려운 어떤 손해를 입히거나, 아니면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어떤 불명예를 자기에게 안겼을 때, 그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되 받아쳐서 폭발하려고 할 때, 그때 자기도 똑같이 더러운 죄에 빠지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원수’라고 나오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타납니다. ‘나의 원수들’, 한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워쌌습니다. 너무나 많은 원수들이 에워쌌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이렇게 너무나 많은 원수들에 비해서 자신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지금 타협을 시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타협과 용서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아무리 원수들이 많아도 그것은 타협할 수 있는 구실이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대적이 얼마인가에 따라서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똑바로 자기가 걸어갈 길을 남자답게 걸어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인간의 상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주 전에 설교시간에 인용했지만, 맹자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 가장 넓은 집에 거하며,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 가장 큰 길로 걸으며, 뜻을 얻으면 이웃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걷나니,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며, 귀천이 그의 뜻을 옮기게 하지 못하고, 폭력과 위협이 그를 무릎 꿇게 못하나니 이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대장부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원하는 삶은 이렇게 기개가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비굴하게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 밑에서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비비며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긍휼히 여기고 누구에게 인정받든지, 인정받지 못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 성경이 지지하는 교훈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얼마나 남자답지 못하게 보였으면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했겠습니까?
오히려 시인은 악한 원수들 때문에 주님의 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슴을 에는 것 같은 쓰라린 배신의 고통, 치욕의 고난을 당하는 인생의 어둡고 긴 터널 끝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 자신이 이런 터널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친구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인도함에 있어서 가슴 아프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신 인도 당하게 하시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속기도하고, 그리고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배은망덕으로 답하기도 하는, 그 처절하고 가슴 아픈 시간들을 통해서, 그런 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주님의 그 세밀하고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을 보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터널과 같이 어둡고 음습하고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결코 머무르고 싶지 않은 그런 인생의 터널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터널을 지나가보셨을 것입니다. 터널 속에 무엇이 있는지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터널에는 보이지도 않고, 설령 뭐가 보인다고 한들 거기에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터널에는 전등을 별로 달아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저 앞을 봅니다. 그러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한없이 달립니다. 요즘 저 남쪽에 보니까 한 30km가되는 터널이 생겼다고 합니다. 진짜 지루합니다. 한없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굉장히 좋지 않습니다. 노르웨이에 가면 50km가 넘는 터널이 있는데 심리적으로 정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지하 공간에 심리학적인 설계를 합니다. 그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넓고 환한 광장이 나타나게 합니다. 조각물도 있고 바위도 있게 말입니다. 그것을 가끔 통화해야만 마음이 놓이지, 그렇지 않으면 긴 어둠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터널을 지나가는데 마지막에 저 끝에 동전만한 밝은 빛이 들어옵니다. ‘아, 이제 끝나가는구나.’ 그곳을 쌩하고 지나가면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우리가 한 동안 보지 못했던 바깥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의 터널을 지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인생의 터널에서 가르치고 인도하시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목회, 혹은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목회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는 뭔가 통일성이 없는 것 같고,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 같고 무질서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신교의 위대한 힘, 특히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회의 위대한 힘은, 모든 성도들이 진리의 빛을 신자들에게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고 구교에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교회에 주시고, 그 빛을 목회자 혼자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전하는 그 빛,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그 진리의 빛이 성도들이, 이 사람을 말씀을 섬기고, 이 사람이 어려울 때는 저 사람이 섬기면서 거미줄처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피가 그 속에 흐르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잘 되어 있는 교회들은 어려움이 와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저는 늘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하는 염려가 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북한을 잘 아는 사람들이 남한을 보면서 황당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는데 근거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군사 전문가가 하는 이야기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장사정포가 위협적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고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포를 쏘면 하나에 수십 발이 나가는 케이스 속에서 계속 해서 불꽃놀이처럼 포가 발사됩니다. 그것이 140km까지 날아온다고 하니까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한없이 쏟아진다고 하는데 한 군사 전문가가 와서 하는 이야기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장사정포가 정말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들 생각하는 것처럼 서울이 불바다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옛날에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시절에 그 포가 떨어지면 나무로 된 건물이 불에 타면서 옮겨 붙는다는 것인데, 지금 서울의 도심지에는 그런 곳이 없고 전부 콘크리트 건물이라서 장사정포를 수천 발, 수만 발을 쏠 때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그 건물 안에서만 터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위협적이고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거 한 방이 떨어졌다고 해서 동네 전체를 불바다를 만들거나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960년대, 70년대의 가옥구조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이니 너무 겁내지 말라고 안정을 시켜주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러한 것입니다. 교회를 악한 세력들이 공격하고, 우리 교회도 신천지에서 수없이 공략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비효율적인 선교지라고 생각하고 철수했습니다. 노력에 비해서 얻어지는 것이 너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몇 사람이 신천지에 갔습니다. 명단도 우리교회에서 완벽하게 파악했습니다. 지금도 그 명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2년 가까이 그 사람들을 관리했습니다. 몇 명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갔다가 한 5분 듣다가, “아, 이건 정말 아니다. 가자.”하고 데리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가장 비효율적인 선교대상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신천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이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성도들이 금방 아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에 비진리적인 요소들이 없을 수 없고, 그런 공격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속에서도,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교회가 마치 판잣집들처럼 붙어있다고 한다면, 한방 터지면 다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처의 어떤 교회는 신천지가 와서 왕창 떨어져 나갔는데, 그걸 인도한 사람이 사모님이었답니다. 사모님이 보스가 되서 교인들을 신천지로 인도한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남편에게 있지 않고 저기에 있다!”하며 말입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콘크리트처럼 잘 지어져 있으면 몇 개가 와서 쾅 터져서 한두 명이 신앙적인 손해를 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전염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악인들은 언제나 교회를 위협하고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으로 그것들을 이길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 원수들을 사용해서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을, 아름다운 결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악인에게는 상이 없지만 그런 악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역할을 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시련을 만나지 않을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가 오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자 됨에 있어서 만나는 인생의 터널도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가능하지, 믿음으로 살지 않고, 조금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간 것처럼 주저앉고, 인생의 기반자체가 뒤 흔들리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무엇도, 여러분의 인생 전체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게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혹은 심지어 나의 양떼들이라고 할지라도 그와의 관계의 깨어짐이나 그의 죽음이나 상실, 이별, 이런 것들이 내 인생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뒤흔들어 놓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만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주체로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상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에서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주체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백이 있는데, 그것이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정말 진정으로 자기가 주체된 인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멘.
그렇게 하나님은 원수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에게 너무 고통을 주는 악한 사람들이 있거나 그런 고통을 만날 때, 오늘부터 여러분은 다짐하십시오. 그들을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하는 방법은,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축복하십시오. 여러분, 아부를 한두 번 하고 그치면 아부가 되지만 아부를 일평생 하면 충성으로 변합니다. 정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고서는 그것을 평생 계속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을 축복할 때, 잘 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진심의 기도가 잘 안 나오는데 그것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계속 반복하십시오. 그러면 놀랍게도 그 형식적인 기도가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이렇게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악인을 향하여 축복할 때, 그의 머리위에 숯불을 피우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주석가들이 두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하나는 원수도 감동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숯불이 하나님의 이글거리는 심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그것은 주님께 맡기고 그리고 그를 진심으로 축복할 때, 최소한 자신의 영혼은 보호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실 때 원수를 사용하시고 악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까지 깨달으면서 우리 인생의 판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조금 어려운 일이 우리 인생에 생긴다고 해서 기가 넘어가거나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해서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고통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인생은 정말 행복한 인생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성품이라는 이 거울 속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B. 우리를 인도하심
1. “주의 의로써”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의로”라는 것은 ‘방향’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를 가지고”라는 뜻이 됩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의”라고 할 때, 그 개념은 단순합니다. 율법에 부합한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믿어라.”하신 것에서 이탈한 것만큼, 죄 된 것입니다.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부합한 것만큼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합시다. 십계명을 주셨는데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했는데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으라고 했는데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룬 의는 “주의 의”가 아니라 “나의 의”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주의 의”라고 말합니다.
이 “주의 의”라는 용어가 사실은 마르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리를 발견하게 한 구절입니다. 시편 32편이나 히브리서, 혹은 갈라디아서 등에 나오는 이 “의”의 개념에 눈을 뜨면서 그가 종교개혁의 위대한 기치를 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에르트푸르트라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굉장히 사업을 잘하는 수완가였습니다. 그래서 동광업자, 광산으로 구리를 캐내어 사업을 했기 때문에 가정에 여유가 있었고, 마르틴 루터가 에르트푸르트에 입학할 때, 상당한 돈을 기부하면서 자기 아들을 잘 봐달라고도 했습니다. 꽤 큰돈을 기부했습니다. ㄷ당연히 아버지는 마르틴 루터가 그렇게 사제가 되기 위해 그런 길을 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틴 루터는 알다시피 벼락을 만나면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에르트푸르트 수도원에서 아주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원래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삐쩍 말라서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그렇게 금식하고 고행을 하면서 번민을 잊어보려고 했습니다. 그 번민은, 경건하게 기도할 때는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뭔가 좀 편해지면 자신 속에 있는 죄성이 고개를 들면서 자기 같은 인간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처절한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다가, 너무 고행의 정도가 심해지니까, 수도원에서 이 사람을 더 이상 수도원에 두지 않고, 비텐베르크로 보내어 공부를 하도록 합니다. 거기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특히 시편, 히브리서, 갈라디아서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를 하면서 복음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비텐베르크의 옥탑에서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경에 “주의 의”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주의 의로 나를 판단하소서.”, “주의 의로 나를 구하소서.” 등이 있는데, 이 루터가 알고 있는 의의 개념에 따르면 보통의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초인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고행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는데 안 지켜졌습니다. 뼛속깊이 자기가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하나님! 당신은 어찌하여 복음 속에 칼을 두셨습니까?” 이것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거기에 “의”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도저히 우리가 거기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키시는데, 결국 그 마지막 결과는 우리의 파멸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깊은 감화 속에서 “주의 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율법을 지킨 무지한 공로 때문에 스스로 축척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구원하고 하는 자녀들과 약속을 맺으시고, 이 약속을 상대방이 어겨도 당신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이 언약을 당신은 위반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한번 우리와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셔서 그 의로 우리들을 붙드신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인데,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였습니다. 거기서 어두운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이신칭의”의 교리, 다시 말해서 이 의로움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덧입혀 주시는 의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것은 자기가 새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 교부들에게 있었고, 어거스틴에게 있었고, 심지어는 사도바울에게, 그 이전에는 복음서기자들에게, 그 이전에는 시인들에게, 이미 성경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주의 의로써 나를 인도하시고”라는 것은, 시인이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저런 악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탁월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순결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들을 다 지은 사람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살인죄까지 저지른 사람입니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적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윗도 악한 죄가 있는 사람이고, 다윗을 에워싸고 있는 나쁜 놈들도 나쁜 놈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겨우 인간의 의를 저울에 달아보아서 조금 무거운 쪽의 편을 들고,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서 가벼우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이 시인 다윗이, 자기가 율법을 이렇게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공로를 쌓았으니 자기를 인도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이 나를 에워쌌고 악을 행합니다. 나도 한때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그래서 성경에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심히 악하니라”하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의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써 나를 인도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악인들과는 달리 여호와를 나의 기업으로 삼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깊이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 시인 다윗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약 1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인생의 터널 깊은 곳에서 이렇게 “주의 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소망이 얼마나 큽니까? 그는 겨우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도 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들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를 위해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고 그 다음에 인정을 받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에서 비참한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고난의 깊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이고, 그가 당하신 치욕의 부끄러운 정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적으로 회복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갑니다. 거기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죽을죄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한때는 우리가 넘어졌으나, 한때는 우리가 쓰러졌으나, 한때는 우리가 악을 행했고, 한때는 우리가 죄를 지었으나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당신 앞으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가 당했던 그 쓰라린 고통과 인생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의 가슴 아픈 일들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을, 그러한 눈부시고 찬란한 그 어떤 곳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글을 쓰면서, 심지어는 기도할 때도 잘 듣는 유행가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전의 노래입니다. 셀린 디온의 “Power of love”라는 노래입니다. 가슴이 뭉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책상에서 반복재생으로 켜 놓습니다. 거기서 가장 감명적인 가사가 나오는데, 한 편의 시입니다. “셀린디온, 사랑의 힘”으로 찾아보시면 나옵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고통스러워 하시니까 영어로 말고 우리말로 하겠습니다. “내가 더 이상은 이 사랑을 계속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느낌은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The feeling that I can’t go on the light years far away.”, “내가 당신과 이 사랑을 계속 하지 않겠노라고 하는 그 생각은 나로부터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결코 나는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뭉클한 대목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신앙이 있을 때만 보이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쉽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누군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마다, “The feeling that I can’t go on the light years far away.”, “내가 이러이러한 하나님과의 사랑을 계속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정말로 내 마음으로부터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결코 그런 것을 꿈꾼 적도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헬렌 피셔의 노래를 들어보시면 거기에 가사까지 나옵니다.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2. “인도하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에는, “나는 이 순간은 거기에 도달했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사랑을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매일매일 직면하는 자기를 포기하며 그 사랑을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랑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 의로써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따르고 주의 의로써 자기를 건져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의를 이 세상에 실현해 가시는 방법입니다. 결코 우리 인간을 당구공 때리듯이, 그렇게 큐대로 쳐 박아서 이 사람이 저 머리 박고, 저 사람이 이 머리 박아서 결국은 그 포켓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도덕적인 방식으로 감화시키셔서 그의 망가진 영혼과 삶을 고치십니다.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는 것도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주어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가수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두려울 때도 있지만 나는 사랑의 힘을 깨달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으로 이 사랑이 나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맨날 똑같은 시간에 의무적으로 나와서, 사람들은 꼭 똑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렇게 앉아서 똑같은 액수의 헌금을 하고, 그 액수가 변할 때가 별로 없습니다. 가끔 빠지는 적은 있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시간에 끝나고 똑같은 길을 걸어서 똑같은 차를 타고 똑같은 집으로 갑니다. 진짜 재미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고 나면 매일매일이 새롭게 됩니다. 연애할 때의 감정처럼, 매일매일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때로는 나 자신을 모두 버리고 보이지 않는 그분을 의지하며 걸어가는 그 길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일어나면 이런 느낌이 듭니다. ‘오, 무섭다. 무슨 재앙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어려움이 왔구나. 기대가 된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실까? 아, 정말 좋겠다!’ 이것이 믿음생활하며 하나님 사랑하며 살아가는 유익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이 할 텐데, 오늘 끝나야 하니까 이만큼만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주는 언제나 의로운 분이시지만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가고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 위대한 의를 보여주셔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홀로 걸어가는 것 같은 그 길을 주님이 손잡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지성으로 깨닫고 사랑으로 감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지성으로 깨닫고, 사랑으로 감화를 받아라. 지성으로 깨달아 갈 길을 찾고, 사랑으로 감화를 받아 그 길을 담대히 걸어 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빕니다.
III. 곧게 하시는 하나님
A. “주의 길”
오늘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하나님은 곧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길”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실제로서 있는 길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살인이 옳다고 투표를 해서 가결이 되어도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합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객관적인 실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주의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그 자체가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으로 태어난 의미입니다. 개, 돼지로 태어났으면 최소한의 식생활을 위한 학습만 하면 됩니다. 개가 예절 갖추는 것 보셨습니까?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면 그 이상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제가 오늘도 심방 가서 어느 교인과 식사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미래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낙관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23년 전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때와 지금이 얼마나 다르냐고 묻는다면 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만약에 23년 전에 오늘날과 같은 선교 상황을 보여주었다면 졸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23년 후에는 더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연변 쪽에 복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본 것이고, 그 사역자들이 저에게 와서 보고하는 바 입니다. 한국 교회가 중국에 들어가니까 너무 신나서 선교비를 가져다가 교회를 수없이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변 사람들이 한국 사람과 함께 손잡고 사업을 하다 보니 돈이 많아지니까 예배당들을 크게 지었습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이 돈 벌기 위해 연변에서 빠져나와 바깥으로 나가면서 1천 명씩 들어가는 예배당에 200명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200명이 성도가 헌금을 해서는 그 예배당을 유지하지 못하니까 그 건물이 쇼핑센터로 팔리고, 혹은 부숴버리고 거기에 다시 집을 짓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덩달아 사람들이 예배당에 많이 모인다고 큰 예배당을 지어 놓았다가 은행 빚을 지고 넘어가는 교회들이 수없이 속출한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예배당도 필요하면 지어야 합니다. 장소가 있어야만 무엇을 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손들입니다. 여러분의 자손은 여러분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교회가 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한 최고의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학교도 지어주고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해야 할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다 하십시오. 가난한 아이들 밥도 먹여주십시오. 저라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은 학문의 세계를 가지고 5천 명의 교인을 먹일 수 있는 목자 1천명을 길러내면 500만 명의 사람이 그 교회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십니까? 그렇게 상황파악이 안 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결국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고, 예수님이 살아계셨더라면 가셨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인데, 그 길은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우리가 인식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그 길을 찾아서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교회 안에는 이런 진리의 빛이 넘치고 하나님 사랑의 감화가 현저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며 살 수 없었던 삶의 현실을, 인생의 칠흑 같은 터널들을 통과할 수 있는 어떤 힘들이 하늘로부터, 그 은혜로부터 주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교회가 헌신하라고 사람도 보내주시고 하나님이 물질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 하나님 빼고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주의 길을 보여줄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B. “곧게 하소서”
그러면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소서” 이것은 주님의 길이 이 세상에 마구 비뚤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길은 항상 똑바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똑바른 것을 모르고 제 멋대로 걸어갑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아주 소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남편다운 길을 걸어간다면, 애비가 애비다운 길을 걸어간다면, 목사가 목사다운 길을 걸어가고, 장로가 장로다운 길을 걸어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은 주님이 다 정해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길을 가지 않습니다. 왜 가지 않는지는 본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각자 다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굽을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갈등들이 생겨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도와 실제로 그 도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 다른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이 사람은 이 길로, 저 사람은 저 길로 걸어갑니다. 뭔가 시원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님을 향한 탄원이라기보다는 세상을 향한 기도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길은 곧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길이 곧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면서 삽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시인을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이었습니다. 천륜으로나 인륜으로나, 하나님의 뜻으로나 인간의 뜻으로나 다윗의 그 새끼는 아버지를 향해서 저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주의 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갑니다. 결국은 비참한 죽음을 죽을 거면서도 그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다윗이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기름 부으셨고, 하나님이 그를 왕에서 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입니다. 그런데 일평생을 다윗과 함께 형제처럼 죽음과 삶을 오고가면서 전쟁터를 누볐던 사람들이, 한 순간 눈에 뭐가 씌워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인간망종 같은 압살롬이 왕, 새로운 임금이 될 것이라고 믿고 거기에 깃발을 들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미친 인간이 자기의 리더라고 생각을 하고 깃발을 들고 따라가고 거기서 무엇인가 뜻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친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갑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도 답답하니까, “이 주님의 길을 곧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길이 굽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도 주님의 바른 길을 따라 걸어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걸으라고 하시는 길이, 하나님의 백성이 걷는 길과 하나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악을 사용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인생의 깊고 어두운 터널에서 이 시인은 주님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악인들로 인해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고통을 겪었지만 악인의 파멸보다는 자신이 온전해지고, 악인들의 악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시련과 역경의 터널에서 시련과 역경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의 신실하시고 사랑 많으신 그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빛 아래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갈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누가 이런 소망을 얻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소망을 가지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한 해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판단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죄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시 5:9-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은 생애에 가장 치욕적인 시련과 도전의 시간을 지나면서 인생의 긴 터널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을 바라보며 무너지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원망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대적자들을 바라보는 대신 구원의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 사용하셔서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의 위대한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많은 헤세드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수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었고, 주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드디어 눈을 들어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에게 악인들에게는 없는 영원한 기업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었습니다.
II. 판단하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오늘 9절과 10절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뚜렷한 한 가지 주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놓인 이 삶의 악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이 판결해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리를 분별함에 있어서 한결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지혜를 행사함으로 사리를 바르게 분별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현혹되는데 그들 자신은 경우에 따라서 악하지 않지만 판단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시험에 들어 악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값진 선물은 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이 지혜는 바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판단력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학문을 통해서는 자연적인 사물의 인과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자연적인 판단력을 재고시킬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인생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연적인 판단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판단력이 떨어지면 고생은 우리의 육체가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판단이고 또 도덕적인 판단입니다. 이것은 단지 학문을 아는 인간의 지식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또 신학을 통해서 그 학문의 이치를 더 깊이 깨달아 알고자 하는 경건한 지식의 증진에 의해서 재고되는 것입니다. 판단력의 부족 자체는 악 자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판단력의 부족은 언제나 그 사람을 악으로 이끌기 때문에 판단력의 부족은 악 가까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 악인의 정체
시인은 오늘 단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하나님 성품의 빛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악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진공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부딪치고 함께 생활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악인의 정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두 개의 섬이 있다고 칩시다. 한 10평 정도의 크기인데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없고, 동물하나 살지 않고, 주위의 바다에도 물고기 한 마리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개의 섬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한 군데에는 악한 사람이 살고 있고 멀리는 또 착한 사람 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뼛속까지 악이 밴 사람이고 한 사람은 뼛속까지 선이 쌓인 착한 사람입니다. 홀딱 벗겨서 발가벗긴 체 혼자 던져졌습니다. 그렇게 있어도 아마 악인은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렇게 외딴 섬에 홀로 있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사람에 대해서 저주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독설을 퍼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사람이 실어증에 걸렸다고 칩시다. 두 사람 다 실어증에 걸렸고,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모레위에 가만히 누워있다고 칩시다. 우리가 그 벌거벗고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 선한 사람이고, 이 사람이 악이 뼛속 깊이 베인 인간이라는 것을 파악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관상가입니까? 또 관상은 정확합니까?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의인도 삶의 상황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부딪치고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고 불의와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상황을 통해서 자신이 의로운 사람임을 드러내고 악한 사람은 그 반대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뼛속깊이 악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악한 사람들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주석가들의 추정과 같이 만약에 이 시편 5편이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배경으로 둔 것이라면 이 악인의 정체는 이 다윗에게 새롭게 깨달은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뱃속으로 낳은 그 새끼가 그런 새끼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백성들의 마음을 오래전부터 도둑질하고 무기를 모으고, 자기와 함께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던 그런 동지들을 꼬여서 그래서 자기를 배반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려고 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고자 한 더러운 새끼였습니다. 그런데 그 새끼가 그런 새끼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통해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아비인 다윗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의 동지들은 어떠했습니까? 사울의 그 폭압적인 정치 아래에서 다 무너져 가는 도덕과 인륜, 그리고 무너져 가는 종교적인 상황 속에서 개혁의 기치를 들고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맺히고 원한 맺히고 빚지고 그리고 연약한 모든 백성들을 함께 끌어안고 목자처럼 한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전쟁터를 함께 누비며 목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패배의 눈물과 승리의 감격을 함께 누렸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기를 대적하고 자기의 목에 창을 겨누리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런 반역을 이미 여러 해전서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윗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정말 뼛속 깊이 악이 베인 인간들이고, 악한 인간들로 변모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도 물론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슬하 치하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평안한 삶을 살면서 그는 예전에 신앙적인 헝그리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야비한 인간들로 변모하여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다윗을 죽이고 다윗의 자식이 그 압살롬이 왕위를 차지하면 다윗 치하에서보다 더 큰 영화를 누리고자 꿈꿨던 것입니다.
그들의 특징이 네 가지로 오늘 시인의 고백을 통해 드러나는데 말에 신실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거짓말, 그리고 자신의 말을 끊임없이 뒤집는 요설가들이었습니다. 말은 곧 사람입니다. 말이 신중하면 사람이 신중한 것이고 말이 열정적이면 그 사람이 열정적인 것인데 이들의 말에는 신실함이 없었습니다. 언약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심중이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압살롬이 대표적인 사람 아닙니까? 성문 앞에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억울한 백성들을 꼬이면서 자신이 그 원한을 풀어주겠노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마치 아버지의 포악한 정치로부터 상처받은 백성들을 보호하는 새로운 목자인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정말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백성들에게 그렇게 마음을 빼앗은 것은 단지 자신이 변란을 일으켜 왕을 처치할 때 백성들을 입막음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야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무리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목구멍이 무덤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마음의 죽은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멍은 바로 그 죽음으로 열려있는 문입니다. 거기를 통해서 죽음의 기운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해석은 말로써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마음 밑바닥은 죽음으로 꽉 차 있고 열린 것은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토해 놓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괴롭다가도 평화가 오고 주님을 찬송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은혜롭다가도 마음이 상하고 그리고 자신이 처해 있는 이 상황이 매우 불만스럽고 울분에 가득 차게 되고, 그리고 악한 독설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죽음의 기운이 그의 연약한 은혜를 죽여 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혀로 아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첨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없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자신의 눈앞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에도 없이 그를 높이고 존중하고 그를 칭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첨입니다. 바로 이들이 악인들의 정체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인생의 가장 치열하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이 시인은 이 끔찍한 악인들의 정체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그런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영혼의 고통은 아들의 칼에 찔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목숨을 함께 나누었던 피로 맺어진 형제와 같은 동지들이 그렇게 배신을 하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은 그들의 창에 의해 찔려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죽고 싶다는 이야기 너무 자주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죽지도 못할 텐데 뭐 하러 죽는 얘기를 자꾸 합니까? 살아내야 합니다. 맨날 욕처럼 앉아서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해봐야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합니까? 태어난 게 현실인데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더럽고 악한 자들은 자신의 삶에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도 자기가 주님 안에서 주인이 되어서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고 믿음과 양심을 따라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그 주체성을 양보하면 안 됩니다. 악인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죽음이 두렵습니까? 원래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친구처럼 생각하는 사람만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용기 있게 살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내를 너무 사랑합니까? 남편을 너무 사랑합니까? 이별이 무섭습니까?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사랑해도 그 사람과의 헤어짐이 여러분의 인생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그런 식의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헤어지는 것이 무섭습니까? 뭐가 무섭습니까? 정말 무서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그러면서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이고 무슨 짓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뭐가 무섭습니까? 뭐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용기를 가지십시오. 용기 없는 그리스도인의 좋은 신앙은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피 튀기며 고백되지 않는 신앙은 가짜입니다. 자기 위안의 도구일 뿐입니다. 사치입니다. 종교적인 자기만족입니다.
B. 하나님의 심판을 구함
그러면서 이 시인은 악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인생의 이 치열하고 칠흑과 같이 어두운 터널이 없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악인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반면교사로 터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구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정죄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탄원은 개인적인 원한에 사무친 청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이렇게 거짓과 위선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기름부음 받은 자신을 향하여 배신의 칼날을 들 때에 하나님이 직접 이들의 소위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판결을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결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아도 그냥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진리에 따르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각 사람을 판단하시는 주님께 하나님의 심판을 구했습니다. 개인적인 복수심과 그리고 원한에 사무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어떠한지 주님의 통치가 이들 가운데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저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옵소서” 왜 자기 꾀일까요? 나의 꾀대로 저들이 빠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야비하고 더럽고 그리고 치사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야비하고 더럽고 치사한 방법으로 똑같이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때리면 맞았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가 말했던 한 마디 말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나를 때리면 맞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찌르면 찔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죽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악한 꾀를 내고 그것으로서 다윗을 파멸시키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의 질서를 깨뜨리고 기름 부은 자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야비한 방식으로 세속의 모략꾼들을 몰아서 대책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신원을 부탁하였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그렇게 쳐놓은 야비한 꾀에 스스로 빠지게 되기를 구한 것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을 간구하되 악을 앞으로 갚지 않겠노라고 하는 시인의 주권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쫓아내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단순한 추방이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의 축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적인 특권으로부터 그들을 소외시킴으로써 그 악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다는 것, 경건한 무리들 안에 이러한 더러운 백성들이 깃들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거룩한 왕국의 질서를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런 기도 속에서 증오에 찬 복수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증오에 찬 기도는 오히려 자기를 파괴하고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온 우주를 휘돌아 모든 인간을 감싸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이 우주적인 사랑 안에서 그런 증언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오늘 자기를 찔렀기 때문에 자기에게 반역을 했기 때문에 증오와 분노, 울분에 가득차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늘 위에 높으신 주님의 통치, 그 분의 주권의 빛 아래서 악인들을 통해 드러난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셔서 자기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시고 악인의 악을 드러내심으로 그 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그 악인들을 정리하셔서 당신의 왕국의 평화와 질서를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으십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하며 어떠한 삶을 살든지 한 가지를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우리가 살았던 이 삶에 대해서 왜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마음을 품고 그렇게 결정하고 살았는지를 하나님 앞에 모두 설명해야 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져야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거룩한 성도들의 경건한 자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자신을 자신의 편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거짓 없이 살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옳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가 항상 의로운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연약함으로 쓰러졌던 사람들을 다시 붙드시고 회개하는 자들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며 주님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판단하시는 주님의 눈빛 앞에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의에 목마른 성도들
결국 이것은 의에 목마른 성도들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인의 이런 간절한 갈망은 바로 이런 목마름을 보여줍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는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그를 뵈올꼬”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 백성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산상수훈의 포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나온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독특한 인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입니다. 자신의 행복이나 성공, 그리고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 주님의 통치가 자신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치열한 갈망이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갈망을 가진 사람은 항상 현실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간절히 그분의 의로운 통치를 이 땅에서 구현하며 살게 되기를 갈망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에 쫓겼습니다. 결국은 최종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았습니다. 온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여졌습니다. 겨우 냄비 몇 개와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어린 아이와 함께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이었습니다. 몇 시간을 한데에서 떨었고,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지나가던 동네 마음씩 좋은 할아버지가 길가에 떨고 있는 그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 자네네 소식을 들었네. 그런데 이것은 아니지. 엄청나게 추운 이 추위에, 엄동설한에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 있다가는 얼어 죽네. 어서 빨리 우리 집으로 가세. 그래서 따뜻한 밥부터 먹고 따뜻한 방에서 하루저녁 자고 내일 해가 뜨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대책을 함께 의논해 보세.”라고 할 때에 감지덕지로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에게 필요할 때 도움을 감지덕지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갈망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목마른 마음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와 이 세상 마귀의 통치가 중첩되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지만 육으로는 세상 나라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두 나라 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였고 결국 두 나라는 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다.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으로부터 이탈하거나 외톨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분복을 누리며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도록 어두운 세상을 지나는 한줄기 빛처럼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류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진리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악한 사람들과 살면서 하나님의 선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성도의 마음이고 오늘 시인이 이렇게 악인들의 심판을 청원하는 것도 개인의 원한이 아닌 주님께 배역하는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죄로 물드는 이 세상을 향한 염려 때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무엇에 목마른 사람들입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은 말씀의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했습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다 더 밝은 말씀의 빛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다 열렬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일들을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1년을 주셨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은 또 다시 예전처럼 자기의 주체성도 없는 삶을 살면서 용기도 없이 비겁하게 죄에 붙었다, 의에 붙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했다, 세상에 속했다 하며 그런 추루한 인생을 살면서 1년을 낭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결단을 내리고 주님께 속한 언약의 백성으로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시겠습니까? 이 시인은 평탄하고 자신의 영광을 누릴 때에는 전혀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신적 성품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시련과 고난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악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천추의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원한과 미움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곧 하나님의 자신의 통치를 구현해 가는 것이고, 이 시인은 바로 그런 소망을 품고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찬양)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성도의 소원은 주의 길을 곧게 하며 사는 것입니다. 올 한해 충만한 말씀으로 충만한 은혜로 거룩한 갈망을 품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은 일생에서 다시 상기하기 싫을 시련을 통해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처음에는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대적자들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기도 하고 복수를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 깊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으며 주님의 주권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찾은 후 시인은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악인들에 대한 주님의 판단을 구하고 있습니다.
II. 주께 피하는 자들
시인이 이 시련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된 교리적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성도는 시련을 만날 때 주께 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주께 피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악인들은 이 세상 모든 만사가 자신들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보면 그 모든 만물들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서 책임질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선을 행하지만 그것도 자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선을 행한 것에 대해서도 칭찬을 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렇게 선을 행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된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또한 자율적으로 악을 행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자신의 악으로 말미암아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악에 대해서 그는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율적이지만 하나님은 선악 간에 인간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당신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대게 좋은 두부로 유명한 동네는 항상 바닷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부를 응고시키는 마지막 재료가 간수인데 간수는 그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물의 농축된 원액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두부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등지고 싶을 때 먹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찾는 것이 바로 간수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인간은 죽습니다.
A. 성도의 피난처
하나님은 악인이 행하는 그 악 자체가 악이지만 그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 가십니다. 의인은 선을 쌓음으로 생명에 이르지만 악인은 악을 행할수록 자신 안에 악이 쌓이게 함으로써 심판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 시인은 그런 악인들의 끔찍한 반역과 배신 속에서 시련과 고통을 당했고, 거기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성도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 나라의 제왕이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며 말 한 마디로 자신의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임금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 시련을 통해서 한 사람의 성도가 주님께 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품으로 피하는 그 피난 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가르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왕국을 다스렸을 때에는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어떤 진리들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피한다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그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미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 이 모든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 간에 절대적으로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가슴이 물처럼 녹는 절대적인 의존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이 시인의 마음은 온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력이 뛰어나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나니 그것은 우주 저 끝에 있는 물상이 아니라 자신 아주 가까이 있는 자신의 마음입니다. 로켓을 쏘아 수조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우주에서 영상을 보내오며 우주의 신비를 벗기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1c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자신의 마음에는 뭐가 있는지 자신은 모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끔찍한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주님이 자신의 피난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주님 아니면 의지할 것이 없는 절대적인 피난처에서 그의 마음은 연단되었고, 불순종과 더러움의 찌끼들을 태워버리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시인의 저작으로 믿어지는 119편에서 그는 노래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지만 이제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자신이 많이 사랑하는 자녀인데도 당신 없이 홀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행복을 당신 자신 안에서 찾지를 않고 세상에서 찾고 자기 자신 안에게 찾으려는 인간들의 모습이 불쌍해서 때로는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주셔서 당신에게 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날에 주님께 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잘 나갈 때 불순종하며 살던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웁니다. 그래서 시인이 또 다른 곳에서 노래했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 그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님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피난처에서 형통할 때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주님의 세밀한 성품을 경험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 피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은혜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찬양)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손으로 덮으시네
B. 성도를 보호하심
시인이 두 번째 터득한 것은 하나님은 시련 속에서 당신을 피하는 자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악인은 승리를 꿈꾸지만 주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잠시는 악이 이기는 것 같지만 그러나 모두 살아보기 전에는 그 결말은 아직 유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지력이 하나님의 그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종종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하지 못하는 불신앙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당신의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그들에게 보이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참된 신앙을 가졌던 수많은 성도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만한 독립심으로 하나님 없는 행복을 꿈꾸던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그분 앞에 물같이 녹여지게 하신 것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카펫이 깔린 길을 가고 싶어 하고 믿음의 힘으로 잔잔한 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잔디밭을 걷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신앙이 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네가 믿음이 있기 때문에 뒤웅 치는 저 폭풍 이는 바다 한 가운데를, 네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잔잔한 잔디밭이 아니라 모래폭풍이 불어오는 사막의 길을 지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위대한 성도는 바로 그런 그 시련과 그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해 주시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기 마음대로 전개될 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배우지 못했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폭풍과 흑암으로 가득찬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에 오늘 이 시인처럼 사랑하는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함께 목숨을 나누던 신앙의 동지들이 자신의 목에 창끝을 겨누는 그런 비열한 배반의 시기를 통해서 주님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실망해서 주님을 못 믿겠다고 말하고 세상이 자기를 속이기 때문에 주님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정말 자기가 그렇게 믿었던 신뢰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것을 보면서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배웁니다. 내가 잘 나가고 가진 것이 있을 때에는 그렇게 친근히 대하던 사람들이 권력을 잃어버리고 소유를 잃고 외톨이가 되었을 때에 원수가 되어서 발뒤꿈치를 드는 것을 봅니다. 그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모순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노래합니다.
(찬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러한 신앙의 비밀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모릅니다. 그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인간이 나를 배신한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내가 나를 신뢰하던 사람들로부터 외톨이가 된 것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이기에 나는 하나님의 불변하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걸어가는 모든 삶을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지극히 평범한 일, 사람을 대하고 대화를 나누는 한 토막, 한 토막의 모든 일들이 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넓게 보면 사실 우리는 이러한 커다란 시련의 때를 대비해서 우리의 믿음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고속철을 놓는데 8조원정도 들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매년 40조원의 국방비를 쓰고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아마 일본은 50조에서 60조 사이의 돈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리고 중국은 300조원 정도의 국방비를 씁니다. 미국은 천조에 달하는 국방비를 사용을 합니다. 국방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나라이고, 제 기억으로는 전 세계의 국방비의 50%정도가 미국이 지출하는 돈입니다. 2위부터 7위까지 합친 나라의 모든 국방비를 합해도 미국에 미치지 못합니다. F22전투기는 한 대에 4500억 가량 하는 비행기입니다. 그 중에 250대가 미국에 있는데 그 중의 어떤 전투기는 한 번도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폐기처분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헤아릴 수 없는 수십만 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연습을 하고, 그 어마어마한 국방 예산을 국민들이 세금으로 감당합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몇 백조의 돈이 별도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한 순간의 전쟁을 위해서입니다.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의 전쟁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할지 모르는 국방비를 지출하면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한 순간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라의 기본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시련의 때가 왔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때가 왔다, 바로 그 때를 위해서 우리는 그 긴 세월동안 신앙을 위해서 자신을 소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시련의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한 중량감입니다. 시인이 혀끝 하나로 온 나라를 움직이고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재물과 그리고 자기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시련을 당하기 전까지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깊이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법을 터득했고, 거기서 주님은 성공하고 잘 나가던 때에 결코 배울 수 없었던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성품을 이 시인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주께 피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당신에게 피하는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좋은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꿈꾸지만 하나님은 정말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이 시인이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 시절에 골목에서 나보다 힘이 센 친구나 형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얻어맞고 울면 자기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엄마가 달려옵니다. 그러면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 아직 물기 묻은 행주치마에 얼굴을 묻고 한 없이 웁니다. 그러면 엄마는 우리의 역성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씩 흩어집니다.
이 시인은 한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고, 그리고 살인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끔찍한 배신과 고난의 계절에 우리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품 안에서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의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성품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보호해 주시는 주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 시인이 이 고난의 날에 우리 주님께 피했을 때 주님은 이 시인을 향해 네가 이제껏 행한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날개 그늘 아래서 보호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배웠고 그래서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우리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두운 지성을 찢고 찬란한 빛이 이 시인의 지성에 비췄고 이것은 일생동안 그의 마음속에 사로잡아서 길 잃고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음성을 들려주는 간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의 날에 주께 피하여 보호하심을 입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C. 기뻐하게 하심
세 번째는 시인은 주께 피할 때 그를 기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았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보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고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이 짧은 문장 속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이야기들이 강력한 표현으로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시련은 고통이지만 피난처에서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위로가 있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시인은 금은보화가 널려 있는 왕궁에서는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이 시련과 비열한 배반의 시대에 그는 피난을 갔고, 주님의 피난처에서 그는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이 큰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사물에 대한 시인의 사고방식을 바꾸셨고 이제는 삶의 사태를 외관이 아니라 의미로서 파악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외적인 축복이나 번영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모든 삶의 상황을 뛰어넘게 만드는 위대한 힘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 기쁨으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만약에 우리가 시련을 만나기 때문에 괴롭고 고난 때문에 슬프고, 배신 때문에 우울해진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과 우리가 무슨 차이가 나겠습니까? 감옥 속에 갇혀서도 기뻐하라고 편지를 쓰던 사도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주님은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주를 사랑하는 자
시인은 이 모든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고난과 시련 속에서 주께 피하는 성도들은 결국은 주를 사랑하는 자들임을 터득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이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곧 주를 사랑한다는 말과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동반하고 그가 주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이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이 유대인들의 생각에 불변하시는 하나님은 천상에 계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세상에 두셨다고 믿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이 땅에 두신 주님의 이름은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시인은 고난의 날에 주께 피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느냐, 번영을 누리느냐 보다도 중요한 것은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야 말로 진심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 때 자기를 위해서 복수하거나 투쟁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 대적을 당할 때 비열한 보복을 꿈꾸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숙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련 속에서 우리가 약할 때에 붙드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만사를 당신 손 안에 틀어쥐시고 결국은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전개되는 기쁨을 맛볼 것이며 형통하고 모든 것을 누리는 좋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열한 쓴 물을 머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나무는 액체를 먹고 자랍니다.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눈물, 수고의 땀,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리는 죽음의 피를 통해서 이 사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난에 직면할 때마다 여러분이 깊이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이 모든 삶의 상황이 내 맘대로 전개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내가 변함없이 순전하게 주님을 사랑할 것이냐 그래서 나의 모든 삶의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일에 있어서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 배신과 위기는 그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결국은 그 무엇도 그를 나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이렇게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이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당신 한 분에게 영혼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분의 은혜의 품 안에 피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신앙은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합니다. 자기 지혜와 능력을 버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믿음을 가질 때 시련과 고난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의 품을 파고들게 만들고 그래서 원수는 멀리 있던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려가는 교통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 고통과 깊은 환란 속에서 심지어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조차도 용서하고 악은 미워하지만 그 악인은 불쌍히 여기며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 인내와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되게끔 바꾸어 놓는 것이 그래서 우리에게 아첨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믿음이 없었더라면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의미를 몰랐을 사람들이 내 인생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좋고 나쁜 모든 일들에 대한 초월적인 의미를 깨닫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함으로 우리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인생의 길을 담력 있게 걸어가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절망과 시련 속에서 환경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삶의 주체성도 없이 마치 얻어맞은 개 주인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인생을 살지 말고 어떠한 처지 속에서도 자신이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주님 이외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런 확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대적자를 다루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에 원수들에게 에워 쌓였을 때에도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생각하며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인생의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보호하고 지키시는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악한 자와 대조되는 성도는 시련과 환란을 만났을 때에 복수의 칼을 갈기보다는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품으로 피한 시인을 영적인 변화로써 하나님을 위해 살게끔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II. 복을 주시는 하나님
이 위대한 시편 5편의 탄원의 마지막 끝은 하나님의 어떤 한 성품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끝을 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는 여호와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내리시고” 라고 말입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이 말은 게시된 하나님의 많은 성함 중 가장 존귀한 이름이고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존함인 여호와를 입에 올리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다 이 말씀이 나오면 붙을 빨아서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감히 ‘여호와’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쓰기는 여호와라고 이름을 쓰고 읽을 때에는 주님이라고 읽을 정도였습니다.
이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함은 모든 열방에게 계시된 이름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두려운 형과의 대면을 앞두고 깊은 공포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장면과 관련이 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모든 가축과 종들과 식솔들을 먼저 보낸 다음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려 간구하였습니다. 그때 천사와 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천사와 씨름한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던 것은 야곱이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살아온 것을 바로 인생의 그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에도 고집하였던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육체의 힘으로써 천사를 꺾어서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사가 야곱의 환도 뼈를 칩니다. 환도 뼈는 이 허리 아래에 있는 뼈를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의 힘이 다리에서 나오는데 여기를 얻어맞자 뼈가 어긋나면서 다리의 힘이 모두 빠져버렸습니다. 그때에 그는 울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에 야곱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을 가리켜 하나님을 이겼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증은 호세아서를 보충적으로 읽음으로서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는 이름과 이스라엘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고, 여호와 하면 이스라엘이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절대자이시지만 당신이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신실함을 보여주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른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 우리와 가족 같으신 하나님, 어떠한 시련, 인생의 터널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 그 언약의 주님을 믿는 시인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복을 주심
그래서 이 마지막 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이 시인은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티바레크’라고 하는 동사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복을 이야기할 때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히브리말로 ‘아쉐르’의 복이 있는데 이것은 신령한 의미의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고유한 복입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티바라크’에서 나온 명사인 ‘베라카’의 복은 영적인 것에서부터 저기 물질적인 것까지,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괄하는 아주 포괄적인 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쉐르의 복은 성도가 받는 영적인 복이지만 베라카는 성도든, 일반 시민이든 모든 사람에게 아울러 사용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셉이 종살이를 하던 보디발의 집에 요셉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임했는데 그것을 바로 ‘베라카’의 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이고,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은 이 세상의 법칙을 따라 혹은 내가 노력한 것만큼 받는 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질서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영혼의 복을 주시고, 자연적인 질서 속에서 사람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또 이 세상에 있는 질서 속에서 사람들을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추적해서 올라가면 결국은 그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잠시 인간이 탐욕을 부려서 부하게 되는 경우는 있지만 누구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을 받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이 주신 것을 우리들이 탐욕과 교만으로 잘못 사용하느냐 올바로 사용하느냐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였습니다. 아주 물질적으로 곤고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제 우리가 입당 예배를 드릴 때에 마지막 축사하신 목사님이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 담임 목사님이셨는데 지금 90세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의 스승 한 분이 계셨는데 96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살아 계셨으면 아마 106세 정도 아마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제가 조교를 했는데 정말 가난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연락을 하셨습니다. “김 전도사 어디어디 가면 뭐가 있는데 그거 심부름 좀 해다오” 그래서 “네” 그러고 가서 학교에 가서 챙길 것 챙겨서 교수님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노 교수님이 내가 막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김 전도사 이거 얼마 안 되는데 어려운 생활에 보태 쓰거라.” 그러고 돈을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오는데 도대체 이게 얼마가 들어있는지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다가 길가에 그냥 이렇게 보도블록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꺼내서 한번 세어 봤더니 정확하게 25만원이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붙들고 그 길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것이 25만원의 돈이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쌀을 살 수 있고 먹을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눈물이 났던 게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이 내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는구나.’
(찬양)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그 봉투를 붙들고 그 길바닥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게 돈이 아니라 거기서 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 나의 형편과 모든 처지를 기억하신다는 것, 그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없으니까 그렇지 신앙이 있으면 이렇게 작은 것을 받으면서도 적은 것을 누릴 때에도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왔구나. 이게 정말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은 주님께로부터 오지만 물질적인 것들은 자신이 노력을 해서 얻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음란한 고멜을 가지고 하나님이 예를 들면서 그들에게 설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는 도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기로 되어 있는 존재인데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할 때 모든 타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곤고하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곤고한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가 낮기 때문에, 학벌이 없기 때문에, 성질이 나쁜 남편, 혹은 못된 아내를 만나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 될 때에 행복하고 기쁘고 그대로 되지 않을 때에 우리들이 좌절하고 실망하고 낙심한다면 신앙의 유익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의 유익이 어디에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시련과 고난, 심지어는 영광과 존귀, 형통함,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의미를 추적할 수 있고, 그 의미에 묶인 삶을 살 수 있는데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곤고하게 사는 것은 사실은 이 세상 복이 없기 때문에 곤고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고 25만원이 든 봉투 하나를 들고 길거리에서 통곡하면서 울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존심 구기지 않고 그리고 무엇인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괴로워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우주의 질서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분께로 와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는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올바로 누리고 올바로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행복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실험해도 끊임없이 실패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갖 신앙의 회의주의를 통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는 끊임없이 주님 앞에 책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비교하며 그는 번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회의주의를 통과하고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언젠가 불현듯 인생의 막이 내리고 악인은 이 세상에 형통했어도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의롭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 날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내리는 이 시인의 장중한 결론은 우리에게 진지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으로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모든 복은 주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정말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그 모진 시련의 시기,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캄캄한 터널을 지나며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구나. 내 인생의 모든 행복이 그 분께 있구나,’ 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B. 보호하심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물질을 주시는 것만이 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의 결핍 때문에도 불행해지지만 은혜의 결핍, 하늘 자원의 부족 때문에 고통을 받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알 때나 모를 때나 모든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보호하고 이끄셨던 많은 날 중에서 지극히 일부분만 우리의 머릿속의 기억에 남았고 남아있는 그 부분 중에 지극히 적은 것들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이유 말고.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은혜의 깊은 감격 때문에 가슴이 벅차 올라본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는 그래야 합니다.
1. 방패같이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방패를 가지고 병사가 자기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은혜로써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전투에 사용되는 무기는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나뉩니다. 칼이나 창, 활 같은 것들은 공격용 무기이지만 갑옷, 심장을 보호하는 흉배,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 그리고 옛날에 기사들은 귀에서부터 내려오는 망토 같은 것을 썼습니다. 잘 보면 철사로 만든 망토입니다. 철사를 엮어서 그래서 발처럼 만들어서 옆에를 걸쳤습니다. 칼로 내리쳐도 칼이 들어가지 않게 만들고 그리고 다리에도 쇠로 만든 각반을 찼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방어용 무기입니다. 그 중에서 방패는 아마 가장 탁월한 방어용 무기일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기동력과 공격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파격적으로 작은 방패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희랍 군인들은 커다란 방패를 사용했습니다. 사각으로 되어 있는 그 방패를 전쟁터에서 땅에 세우고 각도를 쓰러뜨린 다음 자신의 몸을 굽혀 그 방패 아래 숨기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우박과 같은 화살을 맞고도 손톱하나 다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전쟁터에서 방패는 곧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전쟁의 시대에 살지 않기 때문에 방패라는 표현을 써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전쟁터를 누빈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자신도 이 방패 때문에 여러 번 죽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군인이 바로 방패로 함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니 그가 인생에서 통과했던 터널과 같은 시련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터와 같았는지를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시인은 다른 시편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이 방패에 자주 비교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급히 피난의 길을 떠날 때에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영광, 내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자이십니다.’ 이러한 칼은 물론 창과 독화살의 공격, 어디서 날라 오는지도 모르는 불화살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는 방패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그렇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생의 시련의 때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때에 당신의 품에서 피할 자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경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하고, 평생을 전쟁터에서 목숨을 나누었던 동지들이 배반하고, 백성들이 변심하여 왕인 자신을 멸시하는 그 때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환란, 이 모든 시련에서 자기를 지켜주신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방패이며 도움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나님 의지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방패와 같이 자기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치욕스러운 고난의 때에 그리고 가장 혹독한 시련의 때에, 가장 비열한 배반의 때에 그는 그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수가 있었고 오히려 그 큰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주님의 존귀한 성품을 배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방패이십니다. 어디에 가든지 두려워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분을 나의 방패로 삼은 사람들은 안전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여러분 보다 훨씬 더 많아 보이고 여러분의 인생의 위기와 시련이 아무리 커다란 파도와 같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위대한 지혜의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지켜주십니다. 막아주십니다. 우리에게 미리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인지 다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눈에는 보이는 것 없어도 그 분을 신뢰합니다. 아멘.
2.은혜로써
그런데 오늘 주님은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들로부터 주먹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먹으로 막아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쁜 사람들이 칼로 우리를 찌릅니다. 하나님이 청룡도를 휘둘러 목을 떨어뜨리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악한 사람들이 창으로 공격할 때 주님이 한 창에 꼬치처럼 수십 명을 꿰서 쓰러뜨리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오늘 그렇게 말씀 안합니다. “은혜로써 호위하시리이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어떻게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그날에 가장 믿었던 자기의 아들이 배신의 칼을 든 그 날에, 자기를 모두 버리기까지 사랑했던 그 백성들이 변심하는 그 날에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흥은 이런 비밀스러운 은혜가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인데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단맛을 느끼게 만드시고, 시련의 아픔 속에서 나를 고치시는 주님의 치료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시련과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베풀어주신 은총을 가리키기도 하고 실제로 신자 안에 역사하는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이렇게 은혜로 대하십니다. 세상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힘으로 그를 다루어서 자신은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은혜의 힘으로 이기게 하시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만드시고, 사랑하기에는 너무 아픈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교회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모든 복의 근원이심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믿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많은 고통을 경험합니다. 더욱이 은혜를 받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구원과 함께 소명을 주십니다. 그 소명을 따라 사는 교과서가 바로 성경입니다. 이것이 쉬운 삶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15살 때의 엎드려 통곡했던 그 논둑을 기억합니다. 정확하게 만 14세 3개월의 인생을 살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 축축한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지금 사는 것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때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누구일까? 그때 몰랐습니다. 지금도 모두 알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생을 살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알았습니다. 세계가 무슨 의미인가? 이해했습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답을 찾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는 있지만 인생의 밑바닥까지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견딜만합니다.
나는요 사람들이 불행한 인생을 사는 이유는 불행을 못 느끼기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거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진짜 인생의 밑바닥까지 흔들려본 사람들은 결코 돈이나 지위, 예쁜 아내를 얻고 잘난 남편을 얻고 똑똑한 새끼들을 두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고, 이 나라에 살 수도 있고, 휙 떠나서 다음 달이라도 미국에 가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삶의 우연적인 양상일 뿐입니다. 진짜 우리를 우리 되게 지탱해 주는 것, 삶의 진지한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이 끌려가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 그것이 무엇입니까? 만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 이외에 그 답을 우리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답을 다른데서 찾을 수 있다고 그러면 여러분은 잘못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계셔서 이 지루한 설교를 들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끔찍한 시련과 고통의 날에 이 시인을 방패로 보호함 같이 은혜로써 보호하셨습니다. 압살롬이 세력을 얻었을 때 많은 유능한 장수들이 대적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변심하여 다윗을 욕했을 때 그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잘못했어도 심지어는 범죄 했어도 그는 주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자녀였습니다. 그리고 그 큰 고난 속에서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눈물로 하나님을 찾는 이 시인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오늘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의 ‘자디크’는 피동명사입니다. 자기가 의로운 행동을 해서 스스로 다른 사람과 구별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의를 덧입혀 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된 사람, 그 사람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은 시련 속에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 속에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방패의 숨는 병사처럼 자신의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날에 주님의 품에 피했습니다. 거기서 주님의 온갖 아름다운 성품을 맛보며 당신에게 피하는 자를 예비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는 의롭게 하심을 덕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성실로서 의롭게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질 때도 있지만 성도는 그 여호와의 은총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그 분의 도우심과 은혜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존하며 인생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런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제껏 그에게 보여주신 적이 없는 찬란한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믿음으로 주님의 복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인생의 터널 끝에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