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년 주일오전)
설교기간|2014년 8월 6일-10월 2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3월 28일
목 차
1. 아침을 차리신 예수님(요 21:15) 2017.8.6 주일오전 1
2. 고난과 하나님의 경륜(롬 8:28-29) 2017.8.13 주일오전 11
3. 실패한 때에 찾아오심(눅 6:1-11) 2017.8.27 주일오전 21
4. 넘어지는 자를 붙드심(시 37:23-24) 2017.9.3 주일오전 30
5.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눅 15:11-23) 2017.9.10 주일오전 39
6. 집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눅 15:25-32) 2017.9.17 주일오전 51
7.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골 4:10) 2017.9.24 주일오전 59
8. 십자가로 돌아오라(요 19:33-35) 2017.10.1 주일오전 65
9. 예수 죽으심에 돌아오다(요 19:38-42) 2017.10.8 주일오전 71
10. 영광을 돌리게 하심(요 21:18-19) 2017.10.15 주일오전 78
11. 절망 중에서 구원하심(막 5:25-29) 2017.10.22 주일오전 86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1 2017. 8. 6 (주일 1,2,3부 예배)
< 아침을 차리신 예수님 >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I. 본문해설
- 부활 후 세 번째 갈릴리 해변에 오심
- 예수를 만났으나 부활의 의미를 모름
- 어부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으심
- 어로 실패와 큰 어획 경험의 데자뷰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II. 제자들을 찾아오심
A. 식탁을 차리심
- 숯불 떡과 생선을 구워 아침을 차리심
- 가족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시는 엄마 같으심
- 실패한 자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대해 주심
- 결코 악을 행할 수 없는 선함을 믿으라
- 끊을 수 없는 가족 관계로 돌아오라
B. 이름을 부르심
- “요한의 아들 시몬” 매우 흔한 이름
- “바요나 시몬”∼“베드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는 예수님
- 고달픈 인생 길에 부른 이름 “엄마”
- 어떤 처지에 있든지 받아 주시는 분
- 베드로의 배신을 아시며, 사명을 주심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 우리가 상상하는 복음서의 스토리
- 영웅이 아닌 실패한 자를 불러 섬기게 함
- 용서의 경험이 주님을 사랑하고 자랑하게 함
- 실패했으나 여전히 그 이름 부르심
C. 질문을 던지심
- “네가‥나를 더 사랑하느냐?”
- 지나간 과오에 대해 묻지 아니하심
- 오직 현재형으로, 사랑하는지를 물으심
- 물고기나 사람들보다 주님을 사랑함
- 실패했으나 신자는 여전히 사랑함
- 사랑의 대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떠남
- 딸‥손녀‥손자‥코코!
- 인간은 사랑 받음이 아닌 사랑함으로써 복됨
- 끝 없이 솟아나는 샘물 같은 사랑이 없음
-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 그 사랑에서 미끄러졌기에 혼란함
-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으로 돌아오라
D. 사명을 맡기심
-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실패한 자를 통해 다시 섬김을 받으심
-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의 부록과 같음
- 실패한 자가 다시 사명자가 되는 회복의 장임
- 당신의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하라
- 신자 인생의 보람은 사명을 따라 사는 것
III. 적용과 결론
-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끝이 아니다
-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신다
- 다시 말씀의 은혜, 충만한 첫 사랑으로 돌아가라!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2 2017. 8. 13 (주일 낮 예배)
< 고난과 하나님의 경륜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8-29)
I. 본문해설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의 행복을 언급함
- 세상에서 신자도 고난과 시련을 당함
- 세상과 인간과 자신의 불완전 때문임
- 우리들은 고난과 시련을 피하고자 함
-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심
II. 고난을 통해 뜻을 이루심
A. 신자도 시련을 겪음
- 신자들도 시련을 겪고 때로는 실패함
- 세상의 불완전성과 죄 때문에 시련을 당함
-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님
B. 신자는 주님을 사랑함
- 당신의 뜻대로 신자를 부르셨음
- 우리를 미리 아셨으니 이는 곧 사랑하심
-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음
-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코 소멸하지 않음
- 불신자는 단일의지, 신자는 복합의지로 불순종
C. 신자에게 선을 이룸
- 나쁜 것을 좋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
- 이것은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를 보여줌
- 인간뿐 아니라 사단의 지혜도 초월함
- 욥의 경우와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라
- 병원체는 나쁘나 예방 주사는 좋다
- 선한 창조, 나쁜 것은 인간의 죄 때문
- 하나님은 나쁜 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심
- 하나님은 지혜뿐 아니라 능력도 가지고 계심
D. 신자를 맏아들이 되게 함
- 맏아들이 된다는 것은 상속자 됨을 의미함
- 그 문맥에서 맏아들은 완전한 상속자이심
- 아버지로부터 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모두 받음
- 동생들은 그 자비에 의해 복을 누림
- 종말적으로는 믿음을 지킴으로 상급을 받음
- 현재적으로는 충만한 영적 은혜를 누림
-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처럼 누림
III. 적용과 결론
- 신자 인생의 고난 지나가는 것이다
- 한 번의 실패나 어려움이 끝이 아님
- 하나님은 우리를 순전하도록 연단하신다.
- 우리를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만드심
-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게 하신다
- 지금 여기에서 충만한 은혜의 유업을 누리게 함
- 기도하자! 주님을 굳게 붙들자!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3 2017. 8. 27 (주일 낮 예배)
< 실패한 때에 찾아오심 >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 5:1-11)
I. 본문해설
- “게네사렛 호수”라는 이름(민34:11, 긴네렛)
- 갈릴리 바다라는 생업의 현장에 오심
-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함
- 말씀을 전하기 위해 시몬의 배를 사용하심
- 많은 무리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심
II. 실패한 때에 찾아오심
A. 말씀을 주심
- 말씀을 주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4)
- “많은 무리” 이미 공중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음(1)
- 말씀: 받아들일 마음에 개인적으로 주심
- 말씀을 받음에 있어서 마음이 중요함
- 실패로 낮아진 마음이 말씀에 은혜를 받음
- 주님이 개인적으로 말씀을 주시려고 하시는 마음
- 아무하고나 깊이 털어 놓지 않는 것이 관계임
- 진리와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말씀을 받으려 하는 오류
실패로 낮아지게 하셔서 말씀 앞에 나오게 하심
가난한 마음의 중요성과 신앙의 실천
B. 순종하게 하심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과 이유들
a. 아침 시간은 고기잡는 시간이 아니었음
b. 씻은 그물을 다시 사용하는 번거로움
c. “깊은 데로 가서” 상식에 반하는 일
- 말씀의 확실성 vs 현실의 논리성
- 그 확실성은 주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유래함
- 믿음으로 순종하였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남
-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6)
- 주님에 대한 신뢰와 인격의 경험, 경건생활의 관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순종하라
C. 고백하게 하심
-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
-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게 됨
- 실패 속에서 하나님이 눈 열어 주심
- 많은 물고기를 잡은 기쁨과 다른 것
-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두려움
- 막8:28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 죄인임을 고백하는 독특성을 보라
- 기적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신성
-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족함을 느낌
- 이러한 자각 속에 절망적인 자신을 보게 됨
- 실패는 성공보다 더 큰 계획을 보여줌
-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다시 성찰함
- 실패를 통해 잃은 것보다 더 귀한 것 발견
-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게 됨
우리에게는 무슨 고백을 하게 하실까?
D. 사명을 주심
-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10)
- 무엇을 위해 “사람을 취”하는가?
-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위함
- 사람을 취하여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함
- 전도(영혼 구원)와 목양(성숙함)
- 이것이 어찌 시몬만의 사명인가?
- 교회로 하여금 인류를 하나님꼐로 돌아가게 함
- 하나님 나라는 온전한 사랑의 사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사는 사회
- 물고기를 잡다가 죽을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 위한 사명을 주심
- 참 인생 역전: 실패 통해 참다운 인생을 살게 됨
-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은혜 받음으로 변화됨
III. 적용과 결론
-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함
- 실패한 현장에 말씀으로 찾아오심
- 은혜를 통해서 순종할 마음을 주심
- 상식과 경험을 꺾고 주님을 신뢰함
- 많은 수확을 얻었으나 더 큰 것 얻음
-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됨
- 인생의 참 목적을 따라 살 사명을 받으라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4 2017. 9. 3 주일 낮 예배
< 넘어지는 자를 붙드심 >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I. 본문해설
- 다윗이 쓴 지혜의 시
- 악인들이 번영하는 사회 현실
- 도덕회의론자들에게 들려준 시
- 악인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의인
II. 넘어지는 자를 붙드심
A. 갈 길을 정하심
- “걸음”과 “길”: 선택과 인생길
- “길”이라는 표현은 시편에 약 50회 나타남
- 포괄적 “길”과 구체적 “걸음”
- 주체: 죄인들, 의인들, 주의, 너의
- “생명의 길”, “법도의 길”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 ” (시16:11)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 (시119:27)
- 신앙이란 무엇인가?
-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고
- “걸음” 인도 받으며 삶(교훈, 성령)
-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며 살아가야 함
B. 의인도 넘어짐
- “그는 넘어지나” 의인도 넘어짐
- 인간의 넘어짐은 대부분 죄 때문임
- but, 때로는 악인에 의해 넘어짐
- 인간의 연약함과 세상의 악함 때문에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시10:10)
- 또 다른 시인의 고백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 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시88:15)
-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고백함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34:6)
이 모든 넘어짐과 일어남의 과정에서 믿음이 필요함
C. 손으로 붙드심
-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
- “손”은 선택, 능력, 친밀함을 뜻함
- 하나님은 자녀를 버리지 않으심
- 말세 “∼무정하며”: 자녀조차 버리는 부모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 (딤후3:3)
- 부모들조차 비정하여 자식을 버리는 세상임
- but,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
하나님의 선택과 선하심을 모르는 인간들
-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붙드심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시37:17)
- 시편에서 악인과 의인의 개념
- 믿음으로 주를 의지해 살게 함
- 당신을 붙잡는 자들을 붙드심
- “하나님께 붙들려 산다”는 의미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이 인생의 갈 길을 정하심
- 신자도 때로는 넘어진다
- but, 신실하신 주님이 붙드신다
-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를 하나님이 붙드심
- 은혜에 사로잡혀 주님과 동행하라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5 2017. 9. 10 주일 낮 예배
<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 (눅 15:11-23)
I. 본문해설
- 세 가지 비유: 잃은 양+드라크마+탕자
- 이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가리킴
- 자기 의지로 떠나 은총으로 돌아옴
- 주인공은 탕자 아닌 기다리는 아버지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A. 곤궁함
- 사전에 유산의 분배를 요구하는 아들
-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아감
- 낭비와 흉년이 겹쳐서 곤궁하게 됨
- 가증한 짐승인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됨
a. 세상의 육적 자원의 유한함
b. 하늘의 영적 자원 없이 비참함
- 하나님 떠난 자의 삶의 마지막을 보여줌
- 좋으신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 잘못임
B. 생각함
-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 “내 아버지에게…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17)
- “내게 돌아올 분깃을…” 생각이 바뀜
- 은혜의 때와 현재의 상태를 비교해 생각함
- 신앙과 교훈을 생각함(계2:5, 3:3)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계2:5)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계3:3)
•죄와 욕망은 사고작용에 관여해 판단을 흐림
•침잠과 말씀의 빛으로 생각을 정돈함
- 자기의 행위를 생각함(시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시119:59)
-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함(롬5:8)
C. 돌아감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20)
a. 결단: “내가 일어나…”
b. 겸비: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c. 실행: “…돌아가니라”
- 돌아간다는 것은 거리가 아닌 마음
- 실패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임
- 바뀐 생각의 결단이 필요함
D. 회복함
-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직도 거리가 먼데…”(20)
-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20)
- “측은히 여겨” espranknisthe
a. 좋은 옷 b. 가락지 c. 송아지
- 아들 지위+상속자 권한+기쁜 잔치
- 실패를 기억하며 더 순종하고 사랑함
- 실패한 자식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을 떠난 자는 곤궁하게 된다
- 신앙적으로 넘어진 곳에서 생각하라
-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6 2017. 9. 17 주일 낮 예배
< 집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25-32)
I. 본문해설
- 집 떠난 아들 vs 집에서 일하는 아들
큰 아들이 밭에서 돌아올 때 들린 잔치소리
돌아온 죄인들과 율법적인 종교지도자들
방탕함 없이 집에서 일했으나 사랑이 없음
사랑과 기쁨 없이 살아가는 신자들
II. 집 떠나지 않은 아들
A. 관계의 기쁨이 없음
a. 동생과의 관계
- 밭에서 돌아와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음
작은 아들의 무사귀환을 기뻐하는 잔치
동생과의 관계의 기쁨이 없는 생활
b. 아버지와의 관계
“… 아버지를 섬겨” 동기가 사랑이 아님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머슴의 정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기쁨이 없음
어떤 아버지였는지 생각해 보라!
방탕한 아들을 문 밖에서 기다리심
집에 있는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B. 섬김의 기쁨이 없음
- 긴 세월 섬긴 것을 기억함→긴노동
명령에 따른 것을 기억함→억울함
섬김에 받을 것을 기억함→섭섭함
외적 순종은 있으나 사랑의 관계가 없음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인데 보상을 바람
아버지를 인색한 상전처럼 생각함
III. 집에서 기다리심
- 아버지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었음(31)
집에 있는 아들을 이미 기뻐하셨음
방탕하지 않은 아들이 그 사랑을 모름
집에 있어 자신이 실패한 줄 모르는 큰 아들
집 떠난 탕자들을 문 밖에서 기다리심
그 사랑 알기까지는 행복하지 않음
여기서 아버지는 사람으로 그려짐
그것을 알았다면 더 기다렸을 아버지
집에 있으나 마음 떠난 아들을 얼마나 더 기다리실까?
IV. 적용과 결론
- 천국을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부르심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방탕은 없었으나 사랑의 감격도 없음
집에서 일하던 아들이 사실상 탕자였음
그 사랑으로 돌아오라!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7 2017. 9. 24 주일 낮 예배
<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 4:10)
I. 본문해설
우리가 실패할 때 사람들은 낙인찍음
but,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신다
충성스런 자들도 한 때는 넘어졌던 사람들임
모든 실패를 딛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섬기라
II.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A. 사명을 떠남(행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13:13)
-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었다(골4:10)
베드로가 투옥될 당시 기도회가 열린 집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12)
바울과 함께 제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함
안디옥, 버가, 밤빌리아 지방을 선교여행 함
밤빌리아에서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떠나감
이 일 때문에 바울은 크게 실망하였음
맡겨주신 자리에 있기 위해서 큰 은혜가 필요함
혹시 우리는 사명을 떠나 있지는 않은가?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B. 기회를 주심(행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15:40)
-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됨
바울은 1차에서 자기들을 버린 마가를 거부
바울은 바나바와 크게 다투고 실라와 동행함
but, 하나님은 마가에게 다시 기회주심
배를 타고 구브로 지방에 전도를 떠남
다툼에서 마가의 대사가 없으니 깊은 반성한 듯함
하나님은 실패한 자들에게 또 다시 기회를 주심
C. 인정을 받음(골4:10)
- 1차 전도여행(47-49) 약 20년 후에 쓴 편지임
그는 바울의 유익한 동역자가 되었음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바울은 교인들에게 마가를 영접하도록 당부함(골4:10)
바울이 마가를 다시 “동역자”로 언급함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24)
베드로는 더욱 친근하게 부름 “내 아들 마가”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5:13)
사도 바울 뿐 아니라 베드로에게 인정됨
신자는 두 번 태어남. 중생+사명
신자로서의 포괄적 사명과 자신의 특별한 사명 생각함
스스로 살고 섬겨야 할 이유를 발견하라!
III. 적용과 결론
주님은 실패한 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 맡겨주신 자리에 굳건히 서있으라
떠나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 인정받음
인간은 낙인찍지만 주님은 기회를 주심
떠나 있다면 다시 부르심의 자리로 가라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8 2017. 10. 01 주일 낮 예배
< 십자가로 돌아오라 >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 19:33-35)
I. 본문해설
- 다른 복음서에 없는 십자가 사건의 기록
- 십자가 형벌의 연대기를 생각하라
- 최후의 만찬부터 체포와 심문 처형
- 십자가에서의 최후 순간의 기록임
II. 예수 그리스도를 버림
-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마26:31)
- 예수 홀로 남으심: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
- 철저히 버림 받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심
- 예수님 홀로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셨음
-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배우자
III. 십자가로 돌아온 제자
- “창으로 찌르니 피와 물이 나오더라”
- 십자가 고난의 생생한 증인이 된 요한
-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상세한 묘사
- 이후 모든 교회가 요한의 증언에 빚을 짐
- 돌아온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19:26)
-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
- 고난 받으실 때 그분을 버리고 도망감
- 은혜로써 그리스도께 돌아갔음
- 배신을 기억하지 않고 맞아주심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유일한 증인이 되었음
IV. 적용과 결론
- 요한은 실패했으나 돌아올 때 받아주신 주님
-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라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9 2017. 10. 08 주일 낮 예배
< 예수 죽으심에 돌아오다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 19:38-42)
I. 본문해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의 사건
요셉의 기사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됨
산헤드린 공회 회원으로 존경받았음(막15:43)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자(막15:43)
아리마대 부자 요셉(마27:57)
선하고 의로운 사람(눅23:50)
니고데모처럼 밤에 예수를 찾아옴(마27:57)
II. 자신의 정체를 숨김
그는 예수를 따르던 자였음
a. 예수 처형에 찬성하지 않음(눅23:51)
b. 예수의 제자였음(마27:57)
c. 하나님 나라 기다림: 마가+누가
- but, 고난의 때 자신의 정체를 숨김
- 유대인을 두려워했음(요19:38)
-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지만 정체성을 숨겼음
- 공회원들의 비난+유대인의 존경을 잃을 염려?
- 확실한 것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숨겼음(요19:38)
- 제자로서의 헌신과 결단 있었으나 자기사랑에 머뭇거림
- 자만하지 말고 은혜에 붙들려 살라
매일 사랑으로 감화된 용기가 필요함
III. 십자가 죽음에 감화 받음
- 그런데 예수 죽음 이후 요셉의 태도가 급히 변함
무엇이 그렇게 변하게 했을까?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 깊이 감화됨
A. 용기
당돌히 빌라도를 찾아감(막15:43)
두려움이 변해, 용기 있게 시신 요구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마27:60)
처형자에 대한 유대인의 관습
a. 처형당한 자도 장사 지내줌
b. 가족들의 묘지에 안장하지는 않음
- 당시 처형당한 자를 위한 매장지 2곳
- 돌에 맞거나 화형+참수, 교수(Josephus.)
- 시신 요구로 모든 것 잃을 수도 있었음
- 선하고 존경 받았으나 유대인을 두려워했음
- but, 예수 십자가 죽음에 감동을 받음
- 깊은 사랑의 감화가 용기를 가져옴
- 두려움은 잃어버릴 것에 대한 집착
- 용기 있게 사는 길: 은혜를 받으라
B. 헌신
- 니고데모, 몰약과 짐향 섞은 것으로 헌신
Aug; increase+victory-people
애굽인처럼 미이라 만들 목적 아님
100litra는 약 30kg: 가말리엘 36kg “위대함”(Jos)
막달라 마리아 일행은 따로 온 듯함
이들이 위험을 무릎 쓴 것은 십자가의 감화임
사랑으로 감화된 자가 헌신함
예수 때문에 복 받으려는 사람 많다
잠시 실패했으나 십자가 고난에 감화되어 헌신함
Ⅳ. 적용과 결론
예수의 제자였으나 두려워하여 실패했음
but 십자가 죽으심에 깊은 감화를 받음
용기와 헌신으로 그 사랑에 응답함
그 분의 고난에 깊이 감화 받아 살자!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10 2017. 10. 15 주일 낮 예배
< 영광을 돌리게 하심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18-19)
I. 본문해설
- 세 번째 질문에 괴로웠던 베드로
- “근심하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 다시 한 번 사랑의 고백을 받아내심
- 믿음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입구임
- 믿음과 함께 사랑의 성향이 부여됨
II. 실패한 자를 부르심
A. 사명의 길을 주심
- 자유를 포기함: “띠를 띠우고…”
- 원치 않는 미래: “원하지 않는 곳”
- 사명: 옛 본성 아닌 새 본성에 맞음
- 보편적 & 개별적 사명: 기초+건축
- 예수를 사랑함은 보편적 사명임
- 은혜 안에 있을 때 기쁨, 침체 땐 고통임
- Luther와 설교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지나치고 싶었다”
- 설교는 이국의 언어, 사명은 아픔
- but 신앙: 의미를 찾음, 은혜: 기쁨을 줌
- 덧없는 세상과 육체를 위해 살지 말라
- 실패한 자를 불러 경륜을 따라 살게 하심
B. 영광 돌리게 하심
- 사랑의 고백 후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심
- 위대한 고백 뒤 큰 상급 아니라 죽음이 예고됨
- 인생에서 성공의 역설적 의미를 되묻게 함
- “어떤 죽음으로…영광을 돌릴 것을 …”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 인생의 최고 가치는 하나님을 드러냄
- 이것을 신자는 알고 불신자는 모름
- 신자는 예수와 함께 인생의 목표가 바뀜
- 세상의 기준으로 신자의 성공을 재지 말라
- 언젠가 한 줌의 흙처럼 부스러질 육체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7)
- 실패한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
C. 주님 따르게 하심
- 당장은 베드로가 예수 따르게 하심
- 요한의 미래를 묻자 자신을 주목케 함
- 사명과 인생 두루마리처럼 펼쳐짐
- 그것은 주께 맡기고 오늘 예수를 따름
–사명 & 따름: 개울 건너편+징검다리
III. 적용과 결론
세 번의 질문에 답함 “주를 사랑하나이다”
- 실패했으나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심
- 허무한 일에 굴복하지 말고 영원을 향해 살자
- 오늘 하루를 예수 따라 가며 살자!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11 2017. 10. 22 주일 낮 예배
< 절망 중에서 구원하심 >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막 5:25-29)
I. 본문해설
혈루증 여인 이야기 세 복음서에 나옴
마가복음이 가장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음
예수의 사역 초기에 많은 기적이 있었음
기적의 반복 기대 보다 예수 믿음을 촉진함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 알게 함
12년 동안의 혈루증은 절망적인 상태
II. 불행에 항거함
인간은 행복을 찾는 본성의 존재자
생명과 행복은 하나의 추구점이다
12년 질병에 가족들도 지쳤을 것임
but, 그녀는 자신의 행복 포기 않음
A. 많은 의사를 찾음
낫고자 하는 희망은 의사를 찾게 함
많은 의사 명의로부터 민간 의술 이르기까지
“괴로움을 받았고” 치료 과정은 많은 고통 수반
오직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리함
B. 가진 재산을 허비
“가진 것 다 허비” 전 재산과 소유를 잃음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듯함
이제 개인의 문제 넘어 가족의 문제가 됨
이처럼 불행은 우리의 모든 것 빼앗아감
불행이 빼앗을 수 없는 것을 소유할 필요
C. 병세가 중해짐
의원을 찾고 가산을 기울여 치료에 전념함
but, “효험이 없고 … 더 중하여 …”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됨
불행에 대한 자기 항거가 쓸모없음을 깨달음
구원은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시작됨
자기 밖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됨: 신앙
이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음
III. 예수를 믿음
“예수의 소문 듣고” 설교+치료+교육
예수의 거룩한 인격에 관한 소문임
(Greek) sothe “내가 구원을 받으리라”
단순한 질병 아닌 불완전으로부터의 해방임
“옷에만 손을 대어도” 예수의 능력을 믿음
옷은 예수 옷이나 구원은 하나님 것임
절망의 벼랑 끝에서 구원을 갈망함
중병 상태에 거동도 쉽지 않았을 것임
나와서 많은 무리에게 끼어들었음
“뒤로 와서 옷에 손을 대니…”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를 붙들다
“혈루의 근원 마르매… 깨달으니”
노예처럼 매인 삶을 떨쳐버린 결단
Ⅳ. 적용과 결론
지금도 예수님의 능력은 여전하다
우리는 불행에 항거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절망 속에서 간절히 주를 바라보라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8.06. 주일오전1)
1. 아침을 차리신 예수님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부활 후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신 것은 세 번째 출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그 부활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는 일 없이 옛날 하던 일,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에게 그들을 향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고, 그래서 이 갈릴리 바닷가의 만남은 제자들의 일생에 있어서 잊히지 않는 회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II. 제자들을 찾아오심
오늘 우리가 읽은 15절은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첫째, 식탁을 차리셨고, 둘째, 이름을 부르셨으며, 셋째, 질문을 던지시고, 넷째,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A. 식탁을 차리심
첫째는 식탁을 차리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에 해변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고기잡이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러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말씀하셨고 과연 그 말에 순종했더니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에게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는 사건의 데자뷰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발견하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막상 뵈옵자 그들은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기억이 스쳐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신하며 도망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을 위해 조용히 식탁을 차리고 계셨고, 그 모습은 아마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서 장만을 하셨는지 싱싱한 생선과 맛있는 떡이 숯불 위에 구워지고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뻘쭘하게 서 있는 제자들의 무안함을 덜어주시기 위함인지 너희에게 잡은 생선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생선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기 위한 친근한 화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침을 베푸셨습니다. 아마 따끈따끈한 떡을 석쇠에서 들어 올려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셨을 것이고, 생선도 잘 익은 것부터 하나씩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건네주시며 ‘배고팠지? 많이 먹어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의 문맥에서 보면 이 그림은 무언가 예수님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최소한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혹은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침상을 차리시는 모습은 선지자나 그리스도가 하실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차라리 행주치마를 두르고 자녀들을 위해 아침을 짓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성경의 문화에서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하고나 식탁을 나누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습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족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안에서 신자들이 영적인 생명을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그러한 교제의 생활을 가리켜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식탁을 차리고 계신 이 모습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 분을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예수님의 마음엔 여전히 이 실패한 제자들이 당신의 가족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런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때로 인생을 살면서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고 고통을 당합니다. 신앙의 봄날이 있는가 하면 추운 겨울날이 있고 미끄러지는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 곤고한 일을 만나든지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든 나에게 악을 행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 이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화한 모습으로 이른 새벽 아침상을 차리고 계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들이었기 때문에 마치 자식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처럼 그렇게 식탁을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을 함께 떼고 물고기를 나누시면서 그들이 여전히 당신과 한 피 받은 가족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싱싱한 생선과 맛있는 떡을 구워 그들의 식탁을 차림으로 그들과 한 가족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예배 속에서 말씀의 식탁을 여러분들에게 차려주십니다. 은혜의 성찬, 하나님의 사랑의 만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차려주심으로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좋으신 분이심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위해 말씀의 식탁을 차리며 가족 관계 속으로 부르시는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이름을 부르심
둘째는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이 이름은 예수님이 버리라고 하신 이름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불후의 신앙 고백을 남긴 후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버리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석’이라는 뜻이었고 그 반석과 같은 믿음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 보면 ‘바요나 시몬아’라고 나오는데 ‘바요나’(Bar-Jonah)라는 말은 ‘요한의 아들’(son of Jonah)의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라고 하는 단어는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히브리어 발음으로 ‘요나’이지만 그리스식으로 발음할 때에 ‘요하니스’(Ιωάννης)이 되고, 이것을 스코틀랜드 식으로 발음하면 ‘이안’(Ian)이 되며 영어권으로 들어오면 ‘존’(John)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스갯소리이지만) 강아지 이름으로 적용될 때에는 ‘쫑’이 됩니다. 아무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요나 혹은 요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예호하난()이며, 이 말은 ‘야훼’라는 명사와 ‘하난’이라는 동사가 합쳐진 말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곳에서는 베드로라고, 또 어떤 곳에서는 바요나로, 또 어떤 곳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다양하게 나오는데 이 용례를 모두 분류해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름을 고쳐주신 이후에는 이 용례를 조사해 보면 베드로라는 이름에 합당하지 못한 일을 했거나 혹은 합당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 이 사람을 부를 때에는 베드로라고 안 부르시고 시몬 혹은 요한의 아들이라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인데 그가 아무리 큰소리를 치며 죽는 데까지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해도 결국은 미끄러져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부르셨고, 두 번이나 연거푸 부르셨으니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러주신 뜻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큰 뜻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주님이 불러주신 것은 요한을 매우 멸시하는 말이고, 베드로의 자리에서 미끄러져서 매우 잘못한 것을 경멸하는 어투로 부르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후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남겼을 때에도 그를 바요나라고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그를 이렇게 불러주신 것에는 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나라의 ‘김’, ‘이’, ‘박’과 같아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흔해 빠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너의 원래의 정체성은 ‘요나의 아들 시몬’일 뿐이다. 이게 바로 너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네가 이 위대한 불후의 신앙 고백을 하였구나. 이제 너에게 새로운 천국의 이름을 주노라. 그 이름은 ‘베드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러주신 것은 이 말을 들은 베드로로 하여금 가이사랴 빌립보의 그 사건을 생각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불후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남겼을 때 주님이 친근하게 자기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러주셨던 그 광경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제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러주신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줍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가지시는 기대보다는 사람이 내게 갖는 기대에 더 많은 마음을 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의 기대에 미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쭐하여 교만하여지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본성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너무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떠한 돌파구도 보이지 않을 때, 너무나 외롭고 힘들기 때문에 누구하나 기댈 사람이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우리가 부르는 마지막 이름이 있습니다. ‘엄마’입니다. ‘엄마 나 어떻게 해?’ 라고 부릅니다. 아빠나 누나나 삼촌을 부르지 않습니다. 반드시 ‘엄마, 나 어떻게 해’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을 미리 아셨고, 그리고 그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줄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가 회개하지 않고 있었던 때조차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돌이킬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고,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사명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고픈 복음서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아서 배가 터져 죽었고 나머지 열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했으나 한 제자만은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희생하여 간신히 살아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한 제자 앞에 11명의 제자들이 모두 무릎을 꿇게 하시고 그 순결한 한 사람으로 교회의 지도자를 삼으시는 광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방법을 택하셔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우리는 그를 붙들고 계시는 예수님보다는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순전한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그 한 사람을 숭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영웅이 아닌 평범하게 자, 아니 실패한 자를 불러 다시 자신을 섬기게 해 주심으로써 이 스토리 자체가 복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렇게 주님에 의해서 다시 세우심을 입고 일평생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배반의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회복시켜 주신 이 은혜의 경험 때문에 시련의 먹구름, 핍박의 폭풍이 불어올 때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향해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썼습니다. ‘담대하라 불같은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라’고 피를 토하며 외쳤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그를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담대하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한때 제가 너무 좋아하던 복음송가가 있습니다. 베드로에 관한 것입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주님이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패했으나 실패한 그 모습 그대로 자기를 불러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여러분들의 이름 석 자는 예수의 마음에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는 그 분 앞에 나아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질문을 던지심
세 번째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지나간 과오에 대해서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현재형으로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물고기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네가 지금 살아있고 앞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나 예수에 대한 사랑인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신자에게 절대로 사라질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극도의 한계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를 향한 사랑입니다. 중생과 함께 우리 안에 심겨진 이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신자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얼마 전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를 하면서까지 예수는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이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질문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베드로의 마음이 꽉 차 있었다기보다는 당신 없이 살 수 없다는 베드로의 거듭난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것, 곧 하나님이 넣어주신 예수를 향한 그 사랑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베드로가 잠시 잊고 있던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질문은 ‘네가 정말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느냐’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서 베드로는 비록 실패했으나 그리고 얼마 전에는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고 버렸으나 지금은 그 일을 후회하고 있고, 그 질문을 받는 지금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패했으나 신자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동원된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사랑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해주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로부터의 사랑만을 가지고는 죽어도 만족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약간 권태가 느껴질 때쯤이면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아빠, 엄마를 너무 좋아하고 전 세계에서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따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너무 젊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으며, 또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사역하고 헌신해야 될 것이 너무 많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린 자식들의 사랑의 몸짓을 일일이 받아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서 이제 아이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이제 아이들의 관심사가 나로부터 멀어집니다.
딸을 예뻐해서 마음속에 늘 그리면서 살았지만 훌쩍 커버린 후에는 딸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백화점을 기웃거리면서 저 옷이 예쁠까, 저 가방이 예쁠까, 저런 거 갖고 싶어 하지 않을까 가슴 설레며 선물을 고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매일 연애하는 기분입니다. 아침에 집에서 출근하면 저녁 때 될 때까지 집에 들어가는 법이 없는데 하루에 한 번씩 안 들어가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그 손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연애하는 것 같습니다. 출장을 가서도 다른 곳이 아닌 유아용품 코너에서 꼭 걸음이 멈춥니다. 그러다 이 손녀가 자라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아빠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이제 마음에서 떠납니다. 그러다 손자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는 뭣도 모르고 할아버지를 좋아합니다.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다가도 내가 들어가면 카르르 소리를 내고 웃습니다. 그래서 또 많은 선물을 사다줍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사진을 마음에 품습니다. 그러다가 두 달 동안 외할아버지 집에 다녀오고는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요즘 우리 집에 가족이 하나 생겼습니다. 말티즈라는 종의 강아지 한 마리를 들여왔는데 2017년 6월 1일생입니다. 저는 강아지 기르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유는 강아지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내가 너무 좋아하던 개 네 마리가 내 앞에서 죽는 광경을 목격을 한 후로는 그것이 상처가 되어서 다시는 개와 인연을 맺음으로 그렇게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내 허락도 안 받고 딸이 무조건 사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가 너무 귀여운 것입니다. 이름을 코코라고 지었습니다. 모든 가족이 잠든 시간에도 제가 아파트 입구에서 삐삐삐삐하고 잠금장치를 누르면 방울 소리를 내면서 미친 듯이 달려와 막 꼬리를 치며 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쩍 안아주면 얼굴을 핥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너무 반가울 때는 다른데도 아니고 얼굴을 그렇게 핥습니다. 매일 그러는 것입니다. 한 이틀 전에도 가족들이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이 강아지가 유독 내 방 앞에만 와서 문을 긁으면서 저를 부릅니다. 너무 안쓰러워서 방에서 나와서 꼭 안아주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사랑받고 싶지만 나를 사랑하는 대상은 수시로 변하며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그리고 또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 자신도 변하는 것입니다. 동생하고 차를 타고 오면서 그랬습니다. “형, 애들은 왜 그럴까?” “왜?” “우리 애들도 자기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만 내게 문자를 해. 그 이외에는 연락도 안 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 아이들만 했을 때 우리 아빠한테 그렇게 마음 써준 적 있니?” 그러니까 “없지”라고 답합니다. “그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란다. 지금은 우리가 자녀들에게 그렇게 소외된 마음이 들면서 서운해 하지만 걔네들은 그것도 모르고 인생을 살다가 불과 한 20년, 30년 후에 우리가 겪는 똑같은 쓸쓸함을 자기 자식과 손자들에게 겪을 거야.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단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가 버린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채움으로써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실현될 수 없는 꿈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이 사람으로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온 인류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그는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은 것이니 이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문제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 사랑이 솟아나서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생명처럼 아끼고, 나의 행복과 유익을 모두 버리고 그만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며, 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하신 이 질문 속에 모두 녹아있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실 텐데 얼마나 많은 자격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든 자격에 대한 질문을 모두 밀쳐놓으시고 오직 하나만을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어스름한 저녁 시간에 그곳 장로님이 저를 안내해서 어느 자리에 세우시며 하셨던 말을 들었을 때에 잊을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습니다. “목사님 전승에 의하면 바로 이 자리가 로마의 핍박을 피하여 베드로가 도망을 갈 때 예수님이 맞은편에 오시다가 만난 자리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물은 그 유명한 질문이 바로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nine?) 곧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였다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버리고 간 로마를 위해 나는 다시 못 박히러 들어가노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돌이켜 로마에서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질문이 가장 큰 질문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이미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충만한 사랑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 그 사랑이 배고프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 실패한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식탁을 차리셨던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사실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때에도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했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을 이기며 살았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으며 한숨이 변하여 우리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너 같이 실패한 것이 날 사랑할 자격이 있느냐’는 조롱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다. 너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라’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눈물어린 음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그 사랑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오늘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사람들로 붐비는 예루살렘 도시 한복판이 아니었을까요? 조용한 곳, 예수님 한 분만 대면할 수 있는 그 고요한 환경에서 아직 아무도 해변을 밟은 적이 없는 한적한 아침 첫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끝내신 후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아침상을 차려 주심으로써 실패한 제자들이었으나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시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을 향해서도 똑같이 그런 이유로 물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무슨 도움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들을 일깨워 그 사랑으로 돌아가 다시 예수를 찾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질문 앞에서 가슴에 새기십시오. 여러분들은 ‘지명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니 그 분을 향한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D. 사명을 맡기심
마지막으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르시되 네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시고” 실패한 자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마지막에 사랑한다는 대답을 받아내신 후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니 이제는 성공하여라, 번영하여라, 잘 살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백을 받아내신 후에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사명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베드로에게 주신 오래전의 그 사명, 거기로 베드로를 다시 돌아가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실패한 자를 불러 다시 섬기게 하십니다. 이것은 자기를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용서하고 회복시키신 예수를 자랑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사복음서 전체를 읽고 마지막으로 요한복은 20장을 읽고 나면 이보다도 훌륭한 복음서 전체의 마무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1장을 뜯어버려도 훌륭한 성경이 될 것 같습니다. 21장은 마치 부록으로 들어간 듯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부록이 없으면 우리는 대단히 큰 혼란에 접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까지의 기록을 통틀어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장 넘기면 사도행전 1장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제자들이 모두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그런데 그 사이에 21장을 부록으로 두심으로 어떻게 두 스토리가 아름답게 연결되는지를 눈물 없이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실패한 자를 엄마 같은 사랑으로 가족처럼 받아주시고 그리움이 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분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그는 다시 사명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름 없는 꽃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신 후에는 그가 잠시 잊어버렸던 사명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게 하셔서 거기서 하나님과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해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실패와 허물을 기억하는 사람은 손가락질 하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을 깨끗이 씻겨 다시 새 옷을 입히시고 다시 거기서 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그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심이 아니니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 사랑으로 목표의 합치를 이루어 주님의 마음에 이루고자 하는 일을 품게 만드십니다. 그게 사명의 자리입니다. 처음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은 자기 같은 죄인을 구하신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며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예수를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였습니다. 말씀에 굶주리고 방황하다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에 붙잡혔을 때에는 여러분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한 영혼을 섬기고, 한 순을 섬기고, 한 구역을 섬기고,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 사랑을 부어주신 은혜의 계획이라고 믿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지자 맡은 사명의 자리도 희미해지게 되었고, 자신의 행복이 그리고 자신의 불행이 하나님의 마음보다 더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실패한 자들을 다시 부르셔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맡겨주신 자리가 어디인지 거기로 다시 돌아가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돌아갈 수 없지만 그 사랑은 우리를 돌아가게 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기며 주님의 사랑에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신자의 인생의 보람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교회와 자기에게 위탁하신 사명과 본분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은혜의 회복을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이 본래의 여러분들의 자리로 돌아가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을 살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겪은 것보다 더 많은 고난의 파도를 넘고 지금보다 더 쓰라리고 가슴 아픈 일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실패 속에서도 예수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실패한 제자들을 위해 정성껏 식탁을 차리신 그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말씀의 식탁을 차려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미끄러지고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시고, 실패한 자들을 다시 붙들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우리를 붙드셨다고 기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다시 시작하십시오. 다시 주님의 충만한 은혜의 때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시작은 언제나 요란한 행사나 복잡한 결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한 시간, 갈릴리 바다를 찾으십시오. 아무도 없는 골방에 혼자 무릎을 꿇고 앉은 시간이 그 시간일 수도 있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 시간에 작은 등불아래 성경을 펴고 말씀을 깨닫도록 주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시간이 그 새벽 갈릴리 바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가난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 이외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예수께로 돌아와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 새벽, 그 바닷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정답게 걸어가는 그 해변은 무거운 어구를 메고 고기를 잡으러 오던 그 전날의 해변보다 얼마나 아름다운 바닷가였을까요? 예수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8.13. 주일오전2)
2. 고난과 하나님의 경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8-2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로마서 8장은 성경의 가장 위대한 장들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8장에서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오히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졌으며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고난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고난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II. 고난을 통해 뜻을 이루심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두 절의 성경 구절은 크게 네 가지의 교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도 시련을 겪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선을 이루시며, 넷째는 신자를 맏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A. 신자도 시련을 겪음
첫째, 신자도 시련을 겪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과 선이 대조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 속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신자들이 생각할 때에 나빠 보이는 것, 즉 시련과 고난, 역경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함께 합력해서 결과적으로 좋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합력한다’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시네르게오’(συνεργέω)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에너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시계를 뜯어보면 많은 부속품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좌측으로 움직이고 어떤 것들은 우측으로 움직입니다. 그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복잡해 보이지만 하나의 일을 만들어 냅니다. 세 개의 바늘로 시간과 분과 초를 가리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용해서 결국은 하나의 선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 속에는 반드시 신자들이 당하기를 원하지 않는 시련과 고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들이 당하는 많은 시련은 자기 자신이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까닭에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곤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스스로 어두운 그늘 아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신자는 자신이 짓지 않은 죄 때문에도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나는 죄가 없지만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은 불순종과 죄의 결과를 나도 함께 당하게 됩니다. 또 내가 지은 죄와 불순종의 결과도 내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필연적으로 미치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렇게 인류는 떼어 놓을 수 없이 한 가족처럼 연결을 이루고 있고 한쪽에서 일어난 나쁘고 사악한 일들이 또 다른 반대쪽에 영향을 끼쳐 인류가 함께 고통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 온 인류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온 인류가 하나의 몸처럼 고통을 함께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룩하지 못한 평화롭고 완전한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여전히 불완전성과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유익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지혜를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결국은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이 일을 말하기 전에 먼저 신자가 누구인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교리입니다.
B. 신자는 주님을 사랑함
둘째,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29절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자들을 지시하는 표현입니다. 우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이 기쁘신 뜻을 따라서 우리를 구원받도록 불러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신자인데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지만 이제는 그 사랑이 모두 식어버렸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신자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부해질 때도 있고 빈약해 질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우리 스스로 그 사랑을 자가발전해 낼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와 맺으신 구원의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랑이 완전히 소멸하는 경우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으며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져서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신앙에서 미끄러지고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진리의 빛이 멀어지면 인간은 영원한 영혼의 어둠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둠속에서 진리와 멀어지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진리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은 시들어 갑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식어가고 마음속에서는 온갖 육욕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육욕 때문에 부끄러운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신자는 여전히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최악의 경우에도 신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 8장, 이 위대한 장을 마무리하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입니다. 그 사랑을 이미 받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신자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그 마음에서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비록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실패하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겨울날 냇물은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였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는 이미 봄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나듯이 저 깊은 곳에서는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영혼의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주님을 향한 신자의 사랑은 결코 소멸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뜬 사람입니다. 이미 그 사랑을 받았고 맛보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본성, 중생과 함께 심겨진 사랑의 이 본성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신자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도 옛날처럼 그 세상 때문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건져낸바 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겼을 때부터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사랑의 참 맛을 보게 하셨고, 우리 또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제 마음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도 옛날처럼 그 세상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번 붙든 구원의 도리를 굳게 붙들고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행복입니다.
C. 신자에게 선을 이룸
셋째,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입니다. 선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어떤 것도 나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 폭행하는 사람도 그것이 좋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뉴스를 보니까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남편을 살해한 그날 15억짜리 보험을 남편 앞으로 들었답니다. 그리고 남편을 살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여자의 눈에는 남편을 살해하고도 그 15억의 보험금을 타서 물질적으로 여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악이란 넓은 선으로부터 좁은 선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15억의 보험금을 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여자 한 사람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여자와 공범인 그 사람도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많은 인류는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싸움에서 중요한 문제는 바로 내가 생각할 때에 좋다고 여기던 것들을 계속해서 버리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좋은 것으로 이동하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입니다.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좁은 의미에서의 선을 좋아하다가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에 눈을 뜨게 되니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볼 때에 선한 것을 자기도 선하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좁았던 선을 사랑하던 자기를 깨뜨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보다 넓은 선을 더 좋은 것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병균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돈을 주고 그 병균을 주사를 통해 우리의 몸속에 일부러 집어넣습니다. 왜냐하면 병균은 나쁜 것이지만 그 나쁜 것이 우리의 몸에 들어가서 우리의 몸이 놀랍게 그 나쁜 것에 반응하면서 면역이라고 하는 좋은 예방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균은 나쁘지만 예방 주사는 선한 것을 만들어 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죄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해서 여러분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겪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분들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쁜 것을 버리고 보다 좋은 것을 향해 가게끔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우리나라가 자녀들을 가장 위생적인 환경에서 기르는 나라들 중에 하나랍니다. 실제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의 자모들처럼 아이들의 위생 상태에 대해서 아주 유별을 떠는 부모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왔습니까? 오히려 예전에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병에 대한 많은 면역력들이 심각하게 약화된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는 땅이 놀이터였고 흙에서 뒹굴며 자연과 친숙해졌습니다. 그 땅의 흙에는 온갖 병균들도 있지만 그런 속에 살면서 적절하게 면역력을 키워온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멸균 상태의 집안에서 아이들을 길러내다 보니 어느 한 순간 균이 있는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현저하게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병균들에 노출되는 것이 더 큰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듯 삶 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당하십시오. 더 많은 죄를 지십시오. 막 사십시오. 그러나 결국 다 좋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편안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죄든, 남의 죄든, 불완전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시련과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자갈길을 걸어가다가 붉은 카펫이 깔린 궁전 복도를 걸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시련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관계 없었을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삼으면서 인생길을 걸어가고 그렇게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그 고통을 나눕니다. 그래서 나와는 상관없었던 사람들의 시련과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나쁘게 된 것은 모두 인간들 때문에 나쁘게 된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시련과 고통, 나쁜 일들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 나쁜 것들을 하나님을 믿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나쁜 일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결국은 나빠 보이는 그것들로 좋게끔 만들어 주시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들이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해석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어떤 상황을 보는 각도를 다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 있을 때에는 자기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나쁘고 고통스러운 많은 일들을 통해서 오히려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좋게 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사진을 찍을 때 똑같은 풍경을 앉아서 찍는 것과 서서 찍는 것과 한 30m 상공에 드론을 띄워서 사진을 찍는 것은 똑같은 물체를 찍었는데도 각도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파도치듯이 요동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때로는 나쁜 일을 만나거나 좋은 일을 만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도 나쁜 일이고, 나쁜 일도 나쁜 일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십니다. 그래서 형통하고 번영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사랑하며 주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분명히 좋은 것을 주셨는데 나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나쁜 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 절망합니다. 인간의 절망에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좋은 것이 주어졌는데 나빠졌고 나쁜 것이 주어졌는데 나빠졌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앞선 자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면 좋은 그것보다도 이것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더 좋으신 분이신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왜 남에게 없는 지식을 주셨을까? 남이 없는 지위를 주셨을까? 남에게 없는 건강을 내게 주셨을까? 남에게 없는 물질을 주셨을까?’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 좋게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다 시련을 만납니다. 고난을 당합니다. 거기서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비겁하고 배신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구나. 결국 하나님 한분만이 신실하신 분이구나. 내가 그 분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쁜 것이 주어졌지만 그 나쁜 것 때문에 더 좋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신앙의 답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쁘게 보이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결국은 좋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죄 때문에 비참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는 모든 고통의 씨앗들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긴 세월동안 고통의 쓴 열매를 거두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타락한 즉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가정을 선택하셨습니다. 한 국가를 부르시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구약의 이스라엘의 껍질이 깨지고 신약의 영적인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세계를 하나님이 어떻게 움직이실까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어떻게 펼치실까요? 하늘의 천사도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서 복음의 경륜에 대해서 말하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들조차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 결국은 천사들도 이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성취될지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천사도 흠모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신 이 세계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주님의 도구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인생살이에서 어떠한 처지에 놓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나쁜 일을 행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신자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에게 나쁜 일을 행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악인이 고통을 받고 불순종하는 사람이 곤고한 것은 악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향한 하나님의 집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악인의 고통, 죄인의 시련은 선하신 하나님을 웅변적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워낙 당신의 선으로 인간을 돌이키게 하기를 너무나 기뻐하셨기 때문에 거기에서 뛰쳐나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두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하나님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고 이전에 내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지금 내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면 과거에 일어난 모든 나쁜 일들도 결국은 좋은 것이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끔 만들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D. 신자를 맏아들이 되게 함
마지막으로 신자를 맏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입니다. 자, 성경에서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도 나오지만 구약에서 특히 많이 나옵니다.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처음난 아들입니다.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맏아들은 부모의 유산을 모두 상속합니다. 그 맏아들이 자비로우면 동생들이 그 유산의 덕을 보며 편안한 삶을 살고, 맏아들이 매우 가혹하면 동생들은 유업이 없습니다. 맏아들은 책임도 중하지만 영광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어르신들은 맏아들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가 우리 집안의 장손입니다’라고 말할 때에 함께 있는 동생들은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사회를 한번 생각하면서 성경의 문맥을 더듬어 보십시오. 그러면 결국 여기에서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유업으로 누리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맏아들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신 예수에게 하나님의 모든 기업을 물려주셨습니다. 생명과 사랑, 온 우주와 교회, 인류와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그분에게 주셨고, 모든 하늘과 땅의 자원을 그분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심으로 예수를 맏아들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바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예수를 맏아들 삼으셨지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구원을 받음으로써 그 맏아들 됨에 참여합니다. 사실은 맏아들이 아니지만 참된 맏아들 안에서 우리를 맏아들 삼으셔서 당신의 맏아들이 누리는 그 놀라운 기업을 우리가 함께 누리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예수께 위탁한 하늘과 땅의 모든 자원들을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아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나누어주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맏아들의 유익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장자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을 삼으시면서 그가 모든 고난과 시련을 겪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하사 그 모든 권세를 가지신 것처럼 우리 신자들도 또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삶의 방식을 따르게 해 주신다. 그래서 결국 맏아들에게 주신 모든 유업을 우리가 함께 누리게 만들어 주신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은혜로운 해석이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우리의 힘으로 이 모든 세계를 완전하게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렇게 믿고 노력할 뿐이고 마지막에 이 세계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신자로서 우리들이 못다 이룬 성화를 완성하셔서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성취시키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마지막 날에 썩지 않는 생명과 끊어지지 않는 사랑, 그리고 모자랄 것이 없는 하늘과 이 땅의 자원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거기에는 어떠한 고통이나 시련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어 흘리는 눈물이나 이별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완전한 행복과 기쁨을 그 나라에만 누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누리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행복을 미리 누리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만해도 간식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잘 사는 집은 많이 있었겠지만 저희는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미루꾸라는 것을 봤습니다. 밀크캐러멜을 부르는 이름이지요. 신앙촌에서 만든 한 줄에 다섯 개씩 들어있는 것으로 실로 묶여 있었습니다. 옆집 아저씨가 하나 사줘서 그 집 아들과 함께 먹으면서 처음으로 황홀한 경험을 했습니다. ‘야,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을까?’ 옛날에는 단맛의 대명사인 설탕이 돈 많은 사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설탕 맛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유일하게 단맛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엿이었는데 엿장수 아저씨가 출출한 오후에 동네어귀에 나타납니다. 아이들이 새까맣게 땅바닥에 달라붙어서 구슬치기를 하며 놀고 있는데 가위를 두드리며 다가온 엿장수 아저씨가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종잇장처럼 자른 엿을 입에 넣어 줍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맛 봤지? 이 엿이 다 너희 것이야. 이제 내가 너희를 파송하노니 고물을 가져 오너라.’ 배고픈 시절, 설탕이라고는 먹기 힘든 때에 그 달콤한 호박엿 한쪽의 맛을 경험한 아이들은 눈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다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댓돌 위에 벗어 놓은 할머니의 고무신도 가져오고, 형이 보려고 놔두었던 책도 가져오고, 구멍 난 개밥그릇도 가져오고, 땜장이 아저씨가 오면 때우려고 올려놓은 솥도 가져와서 엿을 바꿔 먹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는 동네 여기저기서 애들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사랑, 은혜, 영광, 용서, 평화, 진리 등의 맛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엿입니다. 그 한 조각이 우리 영혼에 딱 들어간 것입니다. 눈이 확 떠지는 것입니다. 그 엿 한 조각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흙바닥에 엎드려서 구슬 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한 나절을 지냈는데 이 엿이 들어가는 순간, 구슬이고 딱지이고 다 팽개치고 ‘보라, 우리가 고물을 찾으러 가자’고 가는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심 박한 엿장수 아저씨처럼 한 점의 맛보기를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한 이 세상에 살아도 풍성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시고,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서 외로울 때조차도 우리는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제 애들도 다 떠나고 집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살고 있는데 딸은 맨날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니까 얼굴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요새 강아지 코코하고 사귀는 재미에 삽니다. 이 강아지가 아직 예방 접종이 끝나지 않아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땅에 내려놓으면 무엇을 주워 먹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품에 안고 청계산에 산책을 갔습니다. 차만 타면 아주 조용합니다. 그저 신기한 모양입니다. 강아지를 안고 숲속을 거니는데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다 새로 보는 세상이니 신기했나 봅니다. 사람은 늘 새로운 풍경을 봐야지만 기쁜 정동이 일어나듯이 개는 새로운 냄새를 맡아야 됩니다. 아무데서나 냄새를 맡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풀숲에 가서 이곳저곳 냄새를 맡게 해주었더니 저의 온 얼굴을 핥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개를 다시 키우기 전까지는 제일 끔찍했던 것이 개가 사람에게 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키우고 보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강아지가 너무 좋으면 최상의 애정의 표현이 핥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너무 고맙거나 기쁘면 다른 부위가 아니라 얼굴을 핥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애가 이러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 정말 고마워요.’ 여러 풍경들을 보다가 나에게 기어오르면서 온 얼굴을 핥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아마도 감사의 마음이 솟구칠 때마다 얼굴을 핥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고, 이 강아지가 자식보다 낫네. 고마워도 고맙다는 표현을 안 하고 감사해도 감사하다는 표현을 안 하는 사람보다 낫구나.’
보십시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우리에게 그런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그것 때문에 낙심합니다. 인간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고 심지어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떻게 바꾸어 놓습니까?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 많이 겪으면서 상처를 받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그 나라는 얼마나 평화로운 나라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모든 세상이 궐기하여 일어나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자 해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한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모든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맏아들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순종의 삶입니다. 그리고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벌판에 홀로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진리의 빛이 있는 그곳에서 자기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버리고 주님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을 붙들 수 있어야 하고, 그 진리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세상의 아름다움보다 더 놀랍다는 것을 우리들이 매일매일 경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말씀과 목양,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교제가 있는 곳에서 우리의 영혼은 부흥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맏아들 된 그 놀라운 유업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하고,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이기고, 오히려 자기 안에 남아있는 사랑과 생명의 힘으로 자기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생의 문제로 돌아가면 마지막에는 생명입니다. 내게 그 생명과 사랑이 있으면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노래할 수 있고,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과 사랑이 없으면 좋은 환경이 주어지면 좋은 환경 때문에 부패하고 나쁜 환경이 주어지면 나쁜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충만한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뜻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그 분의 자녀이고 맏아들인 것을 주님 앞에 보여드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번의 실패와 인생의 어려움이 우리의 모든 삶의 끝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순전하도록 연단하시고 이 세상에서 만나는 시련과 그 많은 역경들을 통해서 오히려 예수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게 하십니다.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든지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오늘 여기서 그 모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충만한 은혜의 유업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붙들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버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할 이유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만족과 자만심을 버리고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예수의 손이 우리를 붙들지 않는 한 우리도 주님의 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에 붙들려 있을 때에만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실패하고 낙심했어도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원해서 그 길을 걸어갔지만 거기서 이전에 사랑했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다시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실패도 맛보게 하시고 그리고 좌절도 겪게 만드십니다. 좌절하게 하심은 예수 이외에 우리를 다시 일으킬 자가 없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고 역경에 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이외에 우리를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서 건져낼 분이 없음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충만한 은혜를 받고 고난 속에서 주님의 경륜을 깨달으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8.27. 주일오전3)
3. 실패한 때에 찾아오심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 5:1-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이 기둥과 같이 쓰실 세 제자를 부르시는 광경입니다. 무대는 게네사렛 호수였습니다. 구약 민수기 34장 11절에는 이곳 지명이 긴네렛이라고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긴네렛이라는 단어는 비파를 뜻하고, 이것은 갈릴리 호수의 모양이 비파와 같이 생겼다는데서 유래했습니다. 후에 이 지명은 게네사렛이라고 불리게 되고, 이것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게네사렛이라는 동네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호수라고 불렸고, 또 어떤 곳에서는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지역을 과대해서 묘사하는 유대인들의 습성에 따른 것입니다. 같은 이 호수를 디베라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총독이 디베리우스라고 하는 황제를 칭송하기 위해 호수의 이름을 바꾼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무튼 성경에는 이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나오지만 한 호수를 두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게네사렛 호수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II. 실패한 때에 찾아오심
시몬은 당시 어부였고 밤새도록 일행과 함께 고기를 잡았으나 아무것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배를 태워달라고 명령하시고 그 배를 육지에서 잠깐 떨어지게 하신 후 그 배에 앉으셔서 그 바닷가에 모인 많은 청중을 향해 설교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당시 시몬 베드로는 일행과 함께 고기잡이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실패한 현장에 직접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일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첫째는 말씀을 주셨고, 둘째는 순종하게 하셨으며, 셋째는 고백하게 하셨고, 넷째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A. 말씀을 주심
첫째로 주님은 제일 먼저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다 마친 후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개인적인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기잡이에 실패해서 낙심한 때에 어쩌면 생계에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그렇게 실망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개인적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성공하고 많은 것을 이루었을 때 찾아오지 않으시고 실패했을 때, 낙심했을 때에 찾아오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마음의 중요성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산상 수훈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위대한 인류 평화의 헌장이라고 불리는 천국 백성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주시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의 또 다른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바로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땅은 사람들의 마음이고 그 땅 위에 뿌려지는 씨앗은 복음입니다. 어떤 땅 위에 뿌려지든지 똑같은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는데 어떤 땅에서는 줄기와 가지가 자라나 성장하지 못하고 말라 죽어버리고, 어떤 땅에서는 새들이 먹어버려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땅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잎과 가지가 뻗으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마음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굳이 실패한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고 그들은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그때에 그 실패한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하늘 꼭대기로 부르지 않으시고 그리고 성전으로 오라고 초청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친히 발걸음을 옮겨 낙심하고 실패한 사람들 속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중요성입니다. 그날 만약에 많은 고기를 잡아 풍어를 누렸다면 베드로는 굳이 오랫동안 그 해변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빨리 돌아가서 생선을 팔아 이익을 나눌 일에 마음이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그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종종 세상의 많은 일들이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푸념도 해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됩니다. 신앙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의미를 찾게 만들어 줍니다. 한번 믿음의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왜 실패하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으라고, 이제는 너의 상식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실패를 경험하는 일도 과히 나쁘지 않습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시인들이 목마른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그들은 평안한 환경 속에서 카페트 위를 걸으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그 현실 속에서 그들은 믿음을 따라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렀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진리를 보내어 그들을 위기 속에서 건져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순종하게 하심
두 번째는 순종함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달가운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을까요? 더욱이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칭도 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랍비 중 한 사람 정도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상황은 이 순종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고 아버지를 도우며 그 일에 종사하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 살아온 뱃사람이었습니다. 평생을 고기 잡는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침 시간에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침 시간은 고기잡이가 끝나는 시간입니다.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이것이 뱃사람으로서 수십 년의 경험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조상들이 해오던 고기잡이였습니다. 더욱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침에는 고기가 깊은 곳으로 모이지 않는답니다. 더욱이 고기잡이를 한 다음에 그물을 걷어 올리면 고기를 잡든 못 잡든 그 그물에는 온갖 다른 것들이 매달려서 올라오게 됩니다. 그러면 어부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내고 찢어진 그물은 기우면서 그물을 씻어서 다음에 그물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이제 그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고기 잡힐 가능성도 없는데 다시 한 번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이렇게 놀랍게 순종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조금 순종하고, 열심히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교인들을 가끔 봅니다. 그리고 입에 침을 튀기며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자기가 순종했던 간증을 하면서 스스로를 높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순종했을 때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했을 때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것이니 순종했을 때에는 자신을 자랑할 수가 없고, 불순종했을 때에는 자신이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닮은 사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성령 안에서 창조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자주 나오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라는 명령도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성령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굳이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순된 문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바로 성령님이시기 때문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거나 인간을 사랑할 때 그 사랑 자체가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굳이 성령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하십니까? 인간의 영혼은 모든 피조물중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입니다. 원래 영혼의 고향은 하나님 품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실 때 한 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인간의 영혼은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가장 편안한 자리가 됩니다. 그 한 가지 조건은 바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계실 때 마치 당신 자신이 가장 편한 집에 계신 것 같은 상태가 됩니다. 칼빈이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유를 제시하자면 평생 동안 달려온 말과 익숙한 기수처럼 그렇게 인간의 마음과 성령은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 마음 안에서 성령은 충만하게 계시고 그 충만한 성령이 곧 사랑의 충만함입니다. 이때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속에서 인간은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 오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구주임을 아직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온화하게 그 많은 무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비상한 인격을 느꼈고 그분은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의 이성의 확실성과 논리성을 꺾고 말씀의 확실성을 붙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건에 관해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 목숨을 걸고 순종했던 사람이 왜 다른 어떤 때에는 주님께 불순종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그렇게 큰일에 순종했던 사람이 그보다 훨씬 작은 일에 불순종할까요? 그것은 마음의 상태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의 인격을 충분히 느끼고 사랑할 때에는 순종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은혜에서 멀어져 경건에서 물러섰을 때에는 그분의 인격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순종하는 일이 살을 에이고 뼈를 깎는 것처럼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의 순종은 그 순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순종의 열매를 거두지만 그것은 이미 오랜 전부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이 세상의 상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온 긴 시간의 열매를 매일매일 순종하면서 따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저축한 사람은 언젠가 요긴한 목돈을 손에 넣게 되고, 조금씩, 조금씩 매일 허비하며 산 사람은 나중에 커다란 부채를 지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주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분의 인격을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언제든지 순종할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고백하게 하심
세 번째는 고백함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매우 특별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고, 그리고 많은 무리들이 해변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두 보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임을 일시에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에게 당신을 믿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끌어올리기 시작했을 때 일생동안 그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어획이었습니다. 그물은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동료들이 타고 있는 배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와서 같이 끌어 올렸습니다. 한배에 다 실을 수가 없어서 두 배에 나누어 실었는데도 배가 물속으로 훅 잠기며 가라앉을 것 같이 많이 잡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 8년 전에 강원도에 갔더니 어느 집사님이 전국을 다니면서 간증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분의 직업이 그 강릉과 속초 쪽의 어부였답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는데 건축 헌금을 할 돈이 없어서 하나님 좀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주위에 있는 배가 모두 허탕을 치는 마당에 자신의 배는 그물을 내렸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았다고 합니다. 한번 그물을 던져서 4,980마리를 잡았답니다. 그게 어떻게 간증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전국 교회에서 그 집사님을 초청해서 고등어 잡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도시 교회 사람들이 볼 때에는 고등어 한 마리에 천원이래도 500만원도 안 되는 금액이라 (시시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분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기적이라고 간증을 하고 다녔습니다. 두 번째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도 그물을 끌어올려 고기를 잡았습니다. 처음에 그물이 묵직하면서 은빛을 번쩍이며 떠오르는 고기들을 보았을 때는 베드로의 얼굴은 만면의 웃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기를 모두 끌어올린 후에는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두려움이 베드로와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무릎 아래 시몬 베드로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주여’는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주님을 가리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지체 높은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이 부르던 일상적인 호칭이었습니다. 비록 이 말이 여호와 하나님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신적 명칭은 아니지만 확실히 다른 것은 ‘선생님이여’ 하고 불렀다가 ‘나를 떠나소서’ 할 때는 ‘주여’라고 부른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시몬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까지는 생각 못했지만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선지자나 큰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예수에게 주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예수가 이렇게 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면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인지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이 느껴졌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냥 나쁜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그날 만선을 하였다면 아마도 의기양양해서 ‘역시 이 동네에서 고기잡이 하면 나지’하면서 동업자들에게 ‘너 다른데 안 붙고 우리 배에 붙기를 잘했지? 가자 가면서 우리 한번 거하게 놀아보자. 즐기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실패한 그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순종하게 되었고 사람의 특별한 재능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 그분 뒤에 계신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애에 최초일지도 모르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무릎을 꿇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빛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공정하게 평가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일종의 자기 항복의 고백을 베드로에게 받아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이런 고백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남녀가 만납니다. 함께 밥도 먹고 영화도 봅니다. 그리고 작은 선물도 주고받습니다. 그냥 탐색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데로 썸을 타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에 여자가 고백을 합니다. ‘저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때 그 모든 썸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사랑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과 유사한 효과가 훅하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 전체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책임 있는 고백일 때에만 그런 효과가 있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서 매달 고백하는 여자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어제도 하고 지난주에도 하고 지난달에도 하면서 정신 나간 여자가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것처럼 흘리고 다녔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그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가까이 하기에 나는 자격이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나 같은 인간에게 당신 같은 하나님 사랑이 가까이 있는 것은 당신에게 욕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지 자기만을 부정한 게 아니라 자기를 살게 했던 인생의 모든 꿈, 바램, 희망, 모든 인생의 비전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 고백을 하나님이 받아내신 것입니다.
(찬양)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신자는 바로 이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번의 고백으로 충분할까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수시로 변하는데 그까짓 유한한 인간을 향한 사랑이야 얼마나 쉽게 변하겠습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잊혀 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다시 이 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말아야 됩니다. 매일매일 그 사랑의 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시몬 베드로와 같이 언젠가 그 분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했던 사람들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준엄한 형벌의 심판을 보면서 두려워 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나는 쓰레기와 같은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자기 존재의 부인이 아니라 주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삶의 행복을 찾았던 인생의 목표, 자기 사랑, 자기 비전 대한 부정입니다. 그리고 단 한분이신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는 고백입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그리고 왜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하셨을까요? 미끄러지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끄러뜨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욕심에 의해 미끄러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실패케 하심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기 위하심입니다. 다시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그 분 앞에 그 옛날의 고백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찬양) 눈물 흘리며 참회하였었네. 나의 마음이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마음 갈 길을 잃었네.
모든 혼란과 무질서가 우리의 삶을 에워쌉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무엇을 찾으며 살아야 할지 길을 잃습니다. 그때 십자가 앞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그 분 앞에서 이제껏 살았던 모든 인생의 무게를 내려놓고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고백의 때로 돌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D. 사명을 주심
마지막 네 번째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고백하는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희랍어 성경에 “사람들을 사로잡으리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두려움으로 떨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위엄 앞에 떠는 것입니다. 신앙의 첫 출발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거기로부터 올바른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깔보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 시몬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이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네가 사람들을 사로잡으리라” 이 말씀이 주어진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찢어질 듯이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 잡았을 때에 두 배에 나누어 실었는데도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이 당시 예수님의 사명 주심이 무엇인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잠시 후 예루살렘 교회가 지도자가 되고난 후 교회라는 그물을 확 펼쳤을 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설교에 수천 명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세례를 받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며칠 전에 역사상 최고의 슈퍼볼 당첨자가 나왔답니다. 당첨 금액이 8400억쯤 된다고 합니다. 다른 때는 보통 여러 사람이 함께 당첨되었기 때문에 나누어 갖는데 이번에는 놀랍게 은행에 다니는 50대 아줌마 혼자서 당첨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금 40%를 제하고 오천 몇 백억 원을 목돈으로 찾아갔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생 역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젊은이들이 열심히 로또 복권을 삽니다. 그 아줌마가 슈퍼볼에 맞으셨는데 확률이 2억 9천만분의 1이랍니다. 앉은 자리에서 8번 벼락을 맞을 확률이랍니다. (사람들은) 그런 인생 역전의 꿈을 꿉니다. 강원랜드로 가서 도박을 하며 (빠징코를) 땡겨 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진짜 그게 인생 역전일까요? 잘못된 목적지를 향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비행기로 가느냐, 기차로 가느냐, 그게 일등석이냐 삼등석이냐가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요? 가던 길에 돈을 좀 보태 주었는데 그게 인생의 역전일까요? 지위가 좀 올라갔는데 그게 인생 역전일까요? 성형 수술해서 조금 예뻐졌는데 그게 인생 역전일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인생 역전은 가던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매일매일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면 ‘오늘 고기 좀 많이 잡게 해 주세요’ 빌면서 나왔을 것입니다. 많이 잡으면 기분이 좋고 못 잡으면 침울해져서 화가 나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이 살아오면서 결코 깨달아 알 수 없었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에 참여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인생 역전입니다. 실패하면 낙심하여 사람을 미워하고 하나님이나 원망했을 사람들, 성공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서 사람들을 무시했을 그런 인간이 예수를 만나고 그 사랑 앞에서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허무한 세상에서 진정한 삶의 보람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인생의 가는 길을 바꾸게 됩니다. 이제는 이슬처럼 이 세상에 맺혔다가 안개처럼 사라졌을 인간이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던 삶은 그냥 없어질 것을 찾아 사는 허무한 인생이었는데 매일 매일의 일상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보탬이 되고 내가 이 세상에 숨 쉬며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인생 역전 아닙니까?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베드로는 그렇게 고기나 잡다가 죽을 허무한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았습니다. 그 고백을 한 후 그는 인생 역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썩어질 것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처럼 사는 대신 죽었으나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가끔 우리를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그리고 왜 우리를 그렇게 낮추시기까지 때로는 우리를 고통 속에 두실까요?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의지하고 믿던 것들이 모두 내 곁을 떠나고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말씀하시는 주님을 향해 마음의 머리를 듭니다. 그리고 그 분을 우러릅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비로소 그 엄위로우심과 거룩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다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목적이 무엇이신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생 역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피 묻은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때로는 실패를 통해 우리를 낮추시고 그래서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하시고 그 눈물과 함께 우리의 마음의 때를 씻어내십니다. 눈물에 씻긴 마음의 거울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실패한 삶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역전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예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9.03. 주일오전4)
4. 넘어지는 자를 붙드심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37편의 표제에는 ‘다윗에게 속한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쓴 때가 언제인지는 우리가 명확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이 이 저작의 연대를 다윗의 인생의 후기 혹은 말기로 봅니다. 이 시는 많은 인생의 경륜에서 나오는 지혜를 담고 있는 잠언과 같은 시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듯이 이 시를 쓰던 다윗의 때에도 형통하는 악인도 있었고, 고통 받는 의인도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하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윗이 이 시를 쓸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다윗 자신도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생의 노장으로써 자신이 살아온 삶과 경건의 경험을 토대로 지혜의 시를 써내려갑니다. 즉, 악인이 형통한 때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벤 풀과 같아서 뜨거운 햇볕이 지나고 나면 모두 말라 검불이 되어 버리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II. 넘어지는 자를 붙드심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개의 본문의 한 내용은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서는 크게 세 개의 교리를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갈 길을 정하시는 분이라는 것, 둘째, 의인도 넘어진다는 사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붙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A. 갈 길을 정하심
첫째는 갈 길을 정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말입니다. ‘걸음’과 ‘길’이라는 두 개의 은유가 등장합니다. ‘길’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통로입니다. 굳이 그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때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수고와 인내, 위험과 불확실성을 내포합니다. 길은 효율적으로 어떤 사람을 그 목적지까지 가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길이 있다고 해서 곧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위를 걸어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길이 객관적으로 제시된 교통의 수단이라면 그러면 그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은 주관적으로 매일 매순간 이루어지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을 옮김에 있어 어떤 발걸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발걸음인지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생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시편에만 ‘길’이라는 단어가 50회 이상 등장합니다. 그 길은 각각 그 길의 주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주체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길이라고도 나오고, 혹은 우리 길이라고도 나오고, 너희 길이라고도 나오고, 너의 길이라고도 나옵니다. 그 길은 은유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의 도리, 실제적으로 그 도리를 따라서 살아간 발자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앞으로 세우고 있는 계획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길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깨우쳐서 인생의 올바른 길을 터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성경은 우리에게 그 길을 걸어가는 그 안에 생명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시편 16편 11절에서 성경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19편 27절에서는 “주께서 나에게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은 법도인 동시에 또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고 걸어갈 때에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생명도 주시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남자들에게는 영원히 비밀로 남아있지만 어떻게 인간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큰 아이들은 태어날 때에 4.2kg. 4.5kg까지 된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태어난 기록은 6.5kg짜리 아이였는데, 태어나자마자 6개월 된 아이만큼 우유를 먹었다고 하니까 대단한 것입니다. 어떻게 45kg에서 65kg정도 되는 여자의 몸에서 그렇게 큰 아이가 나올 수 있을까 신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신비가 있습니다. 산기가 느껴져서 아이가 밑으로 내려오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 몸의 내장과 오장 육부가 움직여서 근육이 긴축됩니다. 온 몸이 긴축되어 그 아이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줄어들게 만들어서 그 아이를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이런 것들이 진통과 함께 반복이 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길이 있고 그리고 매순간 걸어가야 할 발걸음이 있습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그 길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또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순종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해야지 자신이 순종한 것을 자신의 영웅담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 인생은 이렇게 살아라’고 제시해 주는 그 길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전에는 그 인생의 길을 내가 정한다고 생각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천 년 동안 인류가 학습해 온 도덕 같은 것들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자신이 자기의 삶의 임금이 되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창조하고 사람을 만드시고 나라는 개별적인 인간을 지으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의 사랑을 보이셨을 때 우리도 그 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인격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존이고 바램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는 인생길을 주셨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모두 이해하지 못할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의 이성을 모두 의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그분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인생의 길이 결코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제시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 때문에 선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 말씀의 빛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으며 그 길을 걸어가는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받아들여야 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가야할 인생의 길을 제시하셨고,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함으로 그것이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너무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우리가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모든 지혜에 대한 답이 그 질문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인생의 길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을 통해서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정하신 인생길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모든 불행은 그 길 바깥에서 행복을 구하는데 있으니 주님이 정하신 이 인생의 길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의인도 넘어짐
두 번째는 의인도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한다”라고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음걸음 옮겨놓고 있는 사람이 왜 넘어질까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걷는 사람, 걸음걸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추호도 넘어지지 않고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성경은 의인들의 넘어짐을 말하고 있고 또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시편에서 그리고 있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의인과 악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특히 시편에서 말하는 의인과 악인이 어떤 사람들일까 라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의인은 이러이러하고 악인은 이러이러하다고 진술하고 있고 잠언에서는 그것을 지혜라고 하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이러이러하고 미련한 자는 이러이러하나니라는 대조로 나오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두 대조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의인과 악인은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리고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시편에서 말하는 의인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 율법대로 행하기만 하는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시편에서 그리고 있는 의인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죄를 짓는 자로 진술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의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접근합니다. 시편에서 그리고 있는 의인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거나 아니면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따르고 있는 그 사람의 외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관점 자체가 사람을 외면에서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을 해서 밖으로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여자가 아리땁다’라고 할 때 그것은 김태희 같은 자를 닮은 외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남자가 준수하고 아담하다고 했을 때 정우성이나 장동건 같은 외모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분히 그리스 사람들의 마인드입니다. 어느 조선공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방주에 대한 묘사는 바깥에서 방주를 본 것이 아니라 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이게 히브리 사람들의 마인드입니다.
그러면 의인이라고 하는 그 개념도 결국 그 사람 속에 악인에게는 없는 의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의’라는 말은 ‘짜디()’와 ‘짜다크()’로 나뉘는데 짜다크와 짜디 둘 다 ‘의’인데 짜다크는 짜디가 밖으로 드러난 ‘행동들’이나 ‘열매들’입니다. 그래서 여성형입니다. 그런데 짜디는 이 속에 있는 마음의 품질입니다. 그래서 짜디와 짜디크는 구별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그리고 있는 의인은 똑같이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여 때로는 죄도 짓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가끔은 빗나가도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밖에 없고 그 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특징 지워진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의인입니다. 이에 비해서 악인은 외형적으로 율법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도, 역설적으로 말하면 때때로 악인이 의인보다도 더 도덕적일 수 있어도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악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이 구별된 카테고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시편의 많은 시인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그 시들을 썼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인들이 이 시를 쓸 때 이 시가 누구 귀에 들리기를 원했을까요? 이스라엘에서 몇 나라를 건너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게다가 가보지도 못한 이방 사람들에게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의 짐작 가능한 청중은 모두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언약 백성들 안에 어떤 그룹의 사람들은 가끔 넘어지고 때로는 범죄하기까지 하나 본질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반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시를 쓰고 있는 이 다윗도 순결한 사람으로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인생을 살았지만 결국은 간음죄도 짓고 살인죄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죄를 몰랐더라면 알 수 없었을 놀라운 은총의 세계를 이 시인에게 보여주셔서 오늘 지혜자의 위치에서 이 시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악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외형적인 도덕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내면의 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의로운 사람들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인간이 넘어지는 이유, 곤고하게 사는 많은 이유는 결국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어두움의 그늘 아래서 곤고의 쇠사슬에 매인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시련을 당하거나 괴로운 일을 만날 때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욥의 분신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자신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그리고 시련과 고통의 원인이 혹시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묻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 자체의 연약함과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악인은 종종 의인을 넘어지게도 합니다. 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시 10:10). 또 다른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시 88:15)라고 말입니다. 또 다른 시편에서는 이 시인이 자기를 곤고한 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만큼 환경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 우리는 두 번째 질문에 답해야 될 시간입니다. 그러면 혹시 악인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넘어진다면 하나님은 왜 그것을 허락하는 것일까 입니다. 그게 고통의 의미를 묻는 우리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어서 이 한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이 세상에서는 모두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막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길을 기뻐하고 또 하나님이 좋아하심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악인의 발에 걸려서 의인이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넘어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가슴에 불타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 눈물이 있는 기도,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타오르는 기도의 불길 같은 것들은 대부분 고통 받는 속에서 있었던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들을 복 주시고 평안하게 하실 때 그들은 종종 스스로 부패합니다. 밖에 내놓은 음식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성질로 부패해 버리는 것처럼 의인의 심령들도 그러합니다. 이 세상에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있어도 치열한 고통을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안정되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안식이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거기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시면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은 심령이 둔탁해지고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그에게 죄가 없을 때에도 종종 넘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사실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바가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걸려 넘어집니다. 그것이 크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함께 다정하게 교제를 나누었던 친구들이 나를 미운 물건처럼 여기며 돌아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욕합니다. 심지어 저가 악을 행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수하는 것이라고 하여 욕을 보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고통 위에 수치가 뒤덮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의인은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뭅니다. 그리고 귀를 막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싸우고 변론하기 보다는 오히려 위에 계신 한분을 바라봅니다. 이제껏 신뢰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떼어놓아 약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이 자신의 사랑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세상 사랑의 허망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합니다. 그 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외로움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달콤함의 기회가 되고 인간의 배신은 하나님의 신실함의 불꽃을 돋보이게 만드는 밤하늘의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신자로 하여금 좋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새로 발견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이 됩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넘어져도 또 그 넘어진 데서 일어나도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넘어지면서 우리는 누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악인인지를 발견하고 또 넘어지면서 우리의 허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심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분이 주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용기도 결단도 선택도 자랑할 수가 없고,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드신 주님, 우리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 넘어짐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C. 손으로 붙드심
마지막 세 번째는 손으로 붙드심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야드’() 곧, ‘손’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될 때에는 ‘선택, 능력, 친밀함, 보호’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은 정말 비정한 시대입니다. 어떻게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을 때려서 죽이기까지 합니까?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3절에서 말세의 뚜렷한 도덕적인 징조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무정하여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라고 말합니다. 작은 상처에 원한이 맺혀서 마음에 사리를 품고 평생을 삽니다. 상처라는 이름 하나로 말입니다. 그리고 무정합니다. 결국은 사랑의 정이 없기 때문에 비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비정하게 사랑 없이 용서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문명화된 야수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들조차 비정하게 자기 자식을 버리고,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서 아내를 살해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돈을 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죽여 버리는 자식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떤 이점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떠한 인생의 역경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도 두 가지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 헤어날 길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모든 시련에서 건져주신다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50년 만에 다시 강아지를 기르면서 깨닫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그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개를 좋아하고 개와 함께 있었어도, 또 사랑했어도 못 깨닫던 것들을 요새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 중의 하나가 ‘선택’이라는 문제입니다. 강아지가 우리 집에 온 첫날이었습니다. 두려움, 초조, 염려, 그리고 어찌할 줄 모르는 황공스러움, 황송함, 이런 것들이 섞여있는 긴장한 얼굴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겸손했습니다. 주인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 지나간 지금은 자기 집에 우리가 세 들어 사는 줄 압니다. 온통 돌아다니고 ‘하지 마라’ 그러면 막 짖으면서 대듭니다. 개새끼가. 오늘 아침에도 어디서 꺼내 왔는지 새 크리넥스 티슈통을 끌어다가 한 장 한 장 뽑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단을 치는데 참 신기한 것은 뭐냐 하면 사고를 치는데도 너무 귀엽습니다. 그 사고 친 것이 내 마음에 있는 그 아이를 향한 선의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와서 내 품에 안긴 첫날부터 이제까지 그 아이를 볼 때마다 한 번도 생각나지 않는 적이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기견입니다. 올 여름휴가철 한 철에만 9000마리의 개가 버림을 받았답니다. 그 개들 중에는 귀며 털이 알록달록하게 염색들인 아주 정성을 많이 들인 예쁜 개가 많습니다. 그런데 휴가 갈 때 불편하다고 버린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20만 마리가 여름 휴가철에 버림을 받는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아이들은 그냥 한 곳에서 보호하고 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코코를 데려온 그 가게에서도 개가 여러 마리가 있었는데 3개월 동안 누군가가 분양해 가지 않으면 딱 3개월 되는 날에 안락사 시킨답니다. 그 강아지들이 이미 많은 동료들이 그렇게 주사로 죽어가는 걸 봤기 때문에 직감적으로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안답니다. 그래서 석 달이 된 강아지에게 주사 놓기 위해서 끌어당기면 막 미친 듯이 사람의 가슴에 파고든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코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유기견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너는 참 복되다. 너는 선택됐구나. 언젠가 우리 헤어지겠지만 오늘의 이 인연을 즐기자. 그리고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내 곁에서 편안히 살다가 가거라. 내가 지켜줄게.’ 문제는 이 개가 이 선택이 얼마나 감사한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그 개는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가장 가까운 시간 안에 ‘나 같은 사람이 주님 없이 살았더라면 얼마나 곤고하고 외로웠을까? 이렇게 고통 받는 날에 내가 부를 수 있는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알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를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붙들고 계셔서 우리를 지키셨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택이 얼마나 고귀하고 시련당할 때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주님의 이름이 있고 그렇게 매달릴 때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인은 같은 37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지만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 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붙드신다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다하지 않는 행복이 있다면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사는 것일 것입니다. 두려운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고, 그리고 비겁할 이유도 없고, 아첨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 붙들려 산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우리의 어떤 몸이 주님께 붙들려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결국 이것은 정신과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붙드실까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붙들려고 하는 사람을 붙들어 주시고, 또 그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강한 사랑의 힘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과 정신이 붙잡힌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때로는 그 힘과 위력이 매우 강해서 환란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칼, 눈에 보이는 어떤 생명의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줍니다.
의인도 넘어집니다. 때로는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넘어져도 그것은 죄인의 넘어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의인도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넘어질 때에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마지막 순간이 되게끔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게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이외의 자신이 의지했던 것들을 내려놓게 만들고 자기가 서 있어서 살아온 모든 날들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되었던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넘어진 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주님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만들어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향해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매일매일 기도를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살기 가장 좋은 환경이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넘어졌어도 그것이 인생의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넘어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엎드려지도록 당신의 자녀들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갈 길을 당신이 정하십니다. 신자도 때때로 넘어집니다. 때로는 자신의 약함 때문에 혹은 악인의 악함 때문에 종종 넘어집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주님은 붙드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를 하나님은 일으켜 세우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은혜에 사로잡혀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9.10. 주일오전5)
5.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11-2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잃어버린 자의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은 성경 중 잘 알려진 장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세 개의 잃어버린 자의 비유가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이 잃어버린바 된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이 드라크마는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이 아니라 운명처럼 타의에 의해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자신의 결심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타락한 후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비유를 보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돌아온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관점은 돌아오는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가 읽은 이 긴 본문은 하나의 스토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바로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는 네 개의 단계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곤궁함을, 둘째는 생각함을, 셋째는 돌아감을, 넷째는 회복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A. 곤궁함
첫째는 곤궁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들은 곤궁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한 동리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듯합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자유분방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유산을 요구했으니 이는 살아있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줍니다.
그러자 이 아들은 며칠이 안 되어 그 모든 유산을 처분하고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동리에서 사는 대신 먼 나라로 떠났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아버지와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과 친척들의 눈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많은 눈빛들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런 사회 질서 속에 매이는 것이 곧 속박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먼 나라로 떠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껏 자유롭게 살면서 그 자유는 재산에 낭비를 요구했습니다. 얼마 못가서 가지고 있는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해 버렸고, 그리고 그 나라에 흉년이 겹쳤습니다. 흉년이 들면 인심이 각박해지고 이렇게 먼 곳에서 온 나그네에게는 불리한 생활환경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굶주린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쥐엄열매는 일종의 감 비슷한 것인데 크기가 작고 별 맛이 없는 아주 천한 열매였습니다. 흉년이 드니까 그것을 돼지 사료로 썼는데 그것이라고 먹고 배를 채워보려고 했지만 그 천한 음식도 다 임자가 있어서 자신에게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의 곤궁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구 사상은 근대를 지나며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 모든 사상의 질서가 지워지는 것을 거부했으며, 신앙을 끌어내리고 그 위에 이성을 등극시켰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행복한 세계를 건설할 줄 알았습니다. 자유주의가 번성하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에 각종 좋은 유산들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껏 고양되어 있던 이성에 대한 신뢰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성에 대해서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고, 이들은 선대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재평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등장한 허무주의는 이제 이성은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리는 보좌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이성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성 네가 거기에 앉아서 결코 우리를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도 이성이었으니, 다시 말해 이성으로써 자기가 추켜올려 세웠던 이성을 거부했으니 그것은 또 이성적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미 이러한 조짐은 서구 역사에서 오래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긴 역사를 추적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성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는 풍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에 있었던 낭만주의는 인간의 모든 사유의 중심점을 이성에서 감정으로 옮겨간 것을 보여주고, 이후에 나타난 사조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나 이후에 이어지는 실존주의자들은 그 관점이 의지로 옮아간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산 결과는 풍족함을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살고 그 분을 의지하며 존재하도록 그렇게 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80년대에 한 시대를 풍비하던 작가가 지난주에 죽었습니다. 마광수라는 사람입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유교적인 관성이 지배하던 겉으로 젊잖아 보이는 사회였고 그는 특이하게 에로티시즘의 담론을 앞세우며 문단에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즐거운 사라』로부터 시작해서 『장미여관으로 가자』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등등의 책으로 유명세를 탔고, 결국 『즐거운 사라』를 썼다는 이유 때문에 판결을 받고 구속까지 되고 실형을 언도받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책은 나오자마자 판매 금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없었고, 또 그 시절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 그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있었던들 제가 읽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에 나온 그 작품이 음란물이었기 때문에 법의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서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음란물이 추방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창작한 사람들에게 법적인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책에 대한 판결은 한국의 여성들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었고, 폭력이었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즐거운 사라』는 대학생이 성에 눈 뜨고 그리고 자신이 그 대학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성적인 즐거움에 탐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그 소설 이름이 즐거운 사라가 아니라 ‘신나는 철수’였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제목으로 이미 남성들이 성에 탐닉하는 많은 음란물이 있었지만 사회는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철퇴를 맞았고, 그는 구속과 함께 교수직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을 한국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무엇이 못마땅했기에 법원은 그렇게 철퇴를 가했을까요? 이것입니다. 여성이 감히 성적 즐거움의 주체자가 되어서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성의 즐거움에 탐닉한다는 그 스토리가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남자였으면 충분히 용납되었을 책이 여자였기 때문에 철퇴를 맞은 것입니다. 나는 오늘 그 분의 문학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속에 담겨있는 사회적인 반응의 코드를 알고 그 문제를 해석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이나 뉴스를 읽을 때 언제나 비평적으로 주체적인 눈으로 그것을 다시 해석해서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매스컴의 좀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사람이 지난주에 죽었습니다. 죽기 세 시간 전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고백했다고 합니다. “내가 너무 마음이 힘든데 잠깐 좀 와 주겠니?” 친구는 세 시간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만나기 한 시간 반전에 그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그것도 굉장히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주체적으로 글을 썼으면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그것을 보는 광경이 즐겁지는 않겠지만- 백발이 하얘질 때까지 그렇게 신나게 살다가 내 사상대로 살다가 죽었다고 하면 그것도 또 나름대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가 그런 행동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고 칭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를 보면서 심지어 내 옆에서 어떤 사람들도 ‘잘 죽었다, 내가 저럴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평소에 쓴 시 하나를 보았습니다. ‘나는 천국에 가기 싫어. 천국은 날마다 대낮이래. 그럼 밤이 없겠네. 달도 없겠지. 달밤에 키스도 못할 거고 섹스도 없겠네. 나는 그런 천국에 가기 싫어.’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의 죽음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그렇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도 그 담론에 탐닉했을까?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갈망을 성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는 그것이 영혼의 곤궁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물질의 곤궁함을 다루고 있지만 탕자가 어찌 물질의 곤궁함만을 경험했겠습니까? 자유를 찾아서 속박을 벗어버렸는데 그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마음과 육체의 말할 수 없는 곤궁함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은 아무도 없는 들판이었고, 그의 친구는 돼지 새끼들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좋으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지막 결국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모든 풍요한 것이 아버지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생각함
두 번째는 생각함입니다. 그는 극도의 궁핍을 경험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돈이 있을 때 재산을 허비할 때에는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이제는 홀로 들판에 돼지들과 함께 버려진 자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탕자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예전에 없던 바뀐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예전에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나에게 주소서라고 파렴치하게 요구했던 탕자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바뀌었습니다. 만약에 이 탕자가 마지막 순간에 돼지가 먹을 쥐엄 열매라도 한 아름 구했더라면 아마 이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완전한 곤궁함속에서 그는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능력 중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짐승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를 외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외치기에 앞서 언제나 생각을 강조합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이 같은 사실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계 3:3)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죄와 더불어 인간의 생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더욱이 사고 작용에 간여해서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때에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정돈하는 것입니다. 눈을 뜰 때부터 마지막 잠자는 순간까지 우리의 눈과 귀, 코와 살갗, 그리고 혀를 통해서 수많은 사물들에 대한 정보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그 정보들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큰 정동을 일으키고 그 감각에 접하기 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고 싶게 만들고, 갖고 싶게끔 만들고, 도저히 가질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에 비참을 느끼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매일매일 요동칩니다. 출렁거리는 물결 위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비췰 수 없듯이 그렇게 요동치는 마음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가치들을 가슴에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침묵의 시간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닫고, 그리고 감각적인 모든 사물에 무제한으로 자기를 내어주던 생활을 정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깊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의 빛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빛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가앉고 한 절, 한 절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그 한 말씀에 붙잡히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기도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감각적인 사물에 마음이 요동칠 때에는 마음이 한 곳으로 기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릴 수 없었지만 이렇게 깊은 침잠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질 때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시인은 119편에서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을 향하여 길을 돌이키게 되었을 때에 생각이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였다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시 119:59)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행복하고 불행한 것이 단지 우리의 느낌에 달렸더라면 사실 매우 불행한 사람도 상당히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고, 행복한 사람도 불행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판단을 우리 자신에게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풍족했던 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돼지 먹을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풍성한 은혜를 누렸던 때를 회상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궁핍한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놓여있는 이 삶의 상황이 매우 불편하고 영적인 상태가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자극을 받게끔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되게끔 내버려 둔다면 그 생각은 대부분 육신의 생각을 따라가고, 육신의 생각은 미혹을 부르고, 미혹은 우리를 죄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생각하도록 가르치시는 바를 생각하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는 아마 생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풍족했던 때를 생각하면서 돌아갈 결심을 했던 이 탕자처럼 여러분은 하나님과 나누었던 처음 사랑의 때, 풍성한 은혜의 때를 생각하며 지금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나 다시 하나님과의 충만한 은혜의 교제 속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돌아감
세 번째는 돌아감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곤궁해지자 그는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자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난다’라고 하는 이 표현은 그저 문자적으로 누웠거나 앉은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신앙적으로 연결이 되면 그 단어는 모종의 결단,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가는 용기 있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더욱이 이 사람은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고, 그 아버지를 버리고 먼 나라로 떠나가 허랑방탕 하는 것까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에게 죄의 개념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것이 아버지께 못된 죄를 지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은 곧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두 번째 탕자는 집에 가만히 있어서 아버지 말을 듣고 있는 큰 아들과 비교됩니다. 그러나 큰 아들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무 기쁨이나 감격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던 그 아버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하였던 이방인들이 다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아버지의 집에 풍성함을 알게 된다는 것, 그래서 아버지를 다시 사랑하게 되기를 큰 아들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다분히 구원 역사에서 예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싫어버린 바 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져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이러한 심정의 변화를 겪으며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방탕하게 살고자 하는 생각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고 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모두 이 탕자의 한 마음 안에 있었으니 그 거리는 채 한 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마음으로 갈아타는 것은 마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행을 남극이나 북극으로 떠나는 사람처럼 결단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힘이고 습관의 위대한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으로 느끼게 된 아버지의 집의 그 풍족함,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그리움, 그 마음이 이 모든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하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인생의 모든 성공과 실패를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결국 인간이 이 세상에서 실패했을 때 그 실패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게끔 만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바뀐 생각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바뀐 생각대로 살 뜨거운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날 와서 예배를 드리며 마음에 찔림을 받고 또 은혜라는 것을 조금 받습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다시 지난주에 살았던 생활에 익숙해져 거기에 물들어 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다가 한 움큼의 쥐엄 열매를 먹으며 그래도 이 돼지우리에 있기를 바라는 돌아가지 않는 탕자와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결단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갔습니다.
이른 아침에 교회에 와서 오늘 설교할 본문을 마당에 앉아서 다시 읽으면서 스물한 살 저의 처음 회심 때의 생각이 떠올라 마음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14살 2개월 되었을 때 교회로 가는 주일날 논둑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나는 누구고 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세상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에 목 놓아 울고, 그리고 어느 순간 뺨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어린 아이가 결심했습니다. 일평생 무신론자로 살기로 각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다. 그리고 있다고 해도 난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자 참 신기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자 이 탕자의 마음에 불끈하는 힘이 솟아 굽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힘이 생겼던 것처럼 저에게는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을 하자 그 순간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용감하게 무신론을 따라 살고 싶었습니다. 문학 속에서 나의 고민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으며 위로를 받고 함께 즐거워했지만 거기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사상 속에서 답을 찾았지만 그것도 온전한 답은 아니었고, 6년의 이런 삶과 죽음을 오가는 방황을 한 끝에 나의 처지는 마치 이렇게 들판의 돼지들과 함께 버려진 탕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곤고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침묵의 긴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나는 몇 사람의 영향을 끼친 책들을 읽으며 생각을 정돈하기 시작했고 종교를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중의 기독교를 택하기로 생각을 굳혔고,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천주교일까 개신교일까를 고민하다가 개신교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전도해 주는 사람 없이 어느 날 동네에서 한 이 삼십 분 떨어져 있는 벌판에 있는 한 이층 교회에 찾아갔습니다. 저녁때였고 수요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여명의 교인들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누덕누덕 기운 두툼한 방석위에 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삐걱거리면서 나오는 풍금소리가 들렸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마음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자여 돌아와 돌아와
그 논둑에 엎드려 흘리던 눈물의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슬픔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눈물이 흘렀고 그리고 거기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무엇인가 아직 확실한 것은 없지만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비참을 자각하여도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돌아가게 하는 힘 자체를 자신에게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언제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온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때로는 목회의 길이 괴로울 때마다 나는 그 날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들판에 버려진 것처럼 주님을 멀리 떠나 무신론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살았던 6년 마지막 끝에 남은 것은 찢어진 문학 작품 몇 페이지뿐이고, 알량한 사상서들 몇 권이었습니다. 내 영혼은 끝도 모르는 곤궁함 속으로 떨어졌고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몰랐기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앞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명백히 나타난바 되었으니 이 말씀을 의지해 주님께로 돌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D. 회복함
마지막 네 번째는 회복함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나 자유를 찾아갔지만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받을 때에야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집의 풍족함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에 곤궁했던 것은 탕자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극도의 궁핍 속에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돌아가기를 결단한 것도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없이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본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가 언제부터 동구 밖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집을 떠난 그날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풍문에 들려온 소식, 당신 아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어 쥐엄 열매조차도 못 먹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을까요? 아무튼 아들이 돌아오기 오래 전부터 아버지는 매일 동구 밖에 나아가 아물아물 거리는 동네의 길 끝을 바라보며 아들이 돌아오는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꿈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 사랑하는 아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멀리서 아들은 아직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할 그때에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성경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말입니다. 여기 ‘측은히 여겼다’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한 개의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에스프랑크니스테(ἐσπλαγχνίσθη)’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스프랑크나’(σπλαγχνα)에서 온 것이고, ‘스프랑크나’는 ‘창자’라는 뜻입니다. 창자가 움직이기까지 감동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몇 곳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가슴이 아프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혹은 불쌍히 여기시니 라고 하는 부분이 바로 ‘스프랑크니스데’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긍휼(compassion)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한 측면입니다.
사랑은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비, 또 하나는 오래 참음, 마지막 하나가 긍휼이라는 측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세 가지 면이 관측된다는 뜻입니다. 이 중에서 긍휼은 이런 것입니다. 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살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나고 피가 철철 흐르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해를 했든지 혹은 자기 혼자 실수해서 다쳤든지, 다른 사람이 그를 해쳤기 때문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든지 아니면 이 두 가지 혹은 세 가지가 결합이 되었든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긍휼은 그 원인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긍휼의 마음은 그것을 추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긍휼의 마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와 관련이 있는 어떤 사람이 저렇게 매우 고통 받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 것 그 한 장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동영상이 아니라 스틸 사진입니다. ‘팍’ 하고 한 순간 찍히면서 그 상태가 현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희생을 치러서든지 저를 저 고통 받는 비참한 상태에서 건져내야 되겠다는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에게 이 긍휼의 마음이 있었으니 이게 바로 ‘에스프랑크니스테’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된 것은 아버지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요구대로 유산을 나눠 주었고, 그의 방탕한 기질과 아버지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잘못된 방종한 마음이 먼 나라로 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당해야 마땅한 일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비참한 게 된 원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며 그 아들을 보자 창자가 흔들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표현보다 더 강도가 높은 표현을 성경에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니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달려갔습니다. 왜 달려갔을까요? 그렇게 불쌍한 상태에 더 오래 두지 않으려고 그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이 아버지를 달음질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걸어가는 것보다는 좀 빠른 시간에 아들을 당신의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을 끌어안고 그 더러운 얼굴에 입을 맞췄으니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자기를 때렸다, 자기를 치셨다고 함부로 말하지만 언제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때리시는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해석입니다. 대부분의 징계는 자기 스스로 뿌린 것을 거두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징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 자신의 죄로 당연한 결과를 맞이하면서 비참하게 되었을 때조차도 ‘네가 행한 것을 네 스스로 받는구나.’ 하고 기뻐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러한 마음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 비시던 그리스도의 행동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는 대신 이 끔찍한 죄 때문에 그들이 받게 될 형벌을 생각하며 아버지께서 저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용서를 빌며 아버지 앞에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비록 이 아들이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그렇게 비참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비참하게 되었는지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그 아들이 지금 만신창이가 되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그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픈 통증이 일어났고 그가 당하고 있는 모든 비참한 고통을 차라리 자신이 당하기를 원하는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이것이 바로 당신의 품을 떠나 궁핍하게 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 그 긍휼함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밀려들어왔을 때 아들을 발견하고 그는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잃어버렸던 그 아들을 찾은 기쁨이 가득하였습니다. ‘내가 이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한 이것이 바로 그 아버지의 기쁨이다’라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품에서 틀림없이 아들은 울먹이며 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를 당신의 집에 있는 품꾼중의 하나로 보옵소서. 먼발치에서나마 아버지를 뵈오며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체의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의 마음에서는 아빠가 여러 번 지워졌으나 아빠의 마음에서는 이 아들이 지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런 양심적인 고백에 대해서 아버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혔으니 이는 그 집안에서 존귀한 아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이고, 가락지를 끼워주었으니 이것은 다시 법적인 상속자의 권한을 회복시켜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반지는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에 신을 신겨주었으니 이는 그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 것이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하였으니 이는 큰 기쁨의 잔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후의 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한동안 이 아들은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탕했던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며 아버지가 있는 집에 그 아들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더 많이 순종하고 아버지를 더 많이 사랑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버린 모퉁이 돌과 같은 버려진 돌과 같은 그 예수가 이방인의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고, 우리 모든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아들의 마음속에서는 여러 번 아버지가 지워졌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곤궁해지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생각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떠난 날부터 동구 밖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이 아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팔레스타인의 맥락에서 보나 한국의 맥락에서 보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닙니다. 나간 자식을 흐느끼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애태우는 기다리는 자의 심정은 엄마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우리 인간 아버지의 상에서 추출해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 아버지는 때로는 무정하고, 때로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이렇게 동구 밖에서 언제 올 줄 모르는 아들을 하염없이 눈물로 기다리는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들이 자신을 새까맣게 잊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그 집을 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그 관계를 생각하며 그가 당신의 집을 떠나 보호자 없이 비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안고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이렇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회개하고 원래 당신 품에서 태어나게 하셨던 그 인간들이 아버지 앞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신자들도 이렇게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가지 않았지만 그러나 마음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 그렇게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여러분들도 하나님에게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닐까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들은 장성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자신의 힘으로 컸다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아버지를 떠나 독립된 인간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그 아들은 언제나 그냥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품에서 키웠던 아들을 다 자라게 하고 장가보낸 이후에 늙은 아버지들의 푸념처럼 서로 나누는 농담이 있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진 아들은 내 아들. 빚지고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면 나라도 아들을 버리고, 사돈도 버립니다. 그 아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친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붓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친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라고 하기엔 너무 죄송한, 때로는 엄마 같은 아버지이십니다. 어머니 같은 아버지이시기에 우리가 당신을 버린 그곳에서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엄마 같은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마음을 등지고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 좋으신 아버지의 마음에 못을 박고 그 대가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요? 결국 그 분의 품 안에서 창조된 인간은 그 분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결코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은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버려진 들판과 같은 곳에서 궁핍으로 홀로 살지 말고 풍족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왜 내일입니까? 왜 오늘은 안 되고 또 다음 주여야 할까요? 왜 지금은 아니고 또 훗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이 결코 느끼지 않기 때문에 나같이 진흙과 같은 설교자를 부르셔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리시는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이 초청이 마지막 초청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초청을 거절하고 더 긴 세월을 지낸들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행복을 이 먼 나라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평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은 아니고 배우처럼 화려한 삶은 아니어도 거기에는 주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들이 당신의 손을 놓은 바로 그 지점에서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일 말고 오늘 그 분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9.17. 주일오전 6)
6. 집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25-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작은 아들이 탕자의 길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온 큰 아들에게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종 한 사람을 불러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건강하게 돌아오게 된 것을 기뻐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아들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분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설득해서 잔치자리에 들어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고,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건만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잡아서 벗과 함께 즐기게 한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모두 삼켜버린 이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푸셨나이다.”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한 번의 화산처럼 폭발하는듯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것이 모두 네 것이란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이렇게 잔치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겠느냐”고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지난주에는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오늘은 집안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설교의 초점입니다.
II. 집 떠나지 않은 아들
A. 관계의 기쁨이 없음
작은 아들은 방탕하여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여기 집을 떠나지 않은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관계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먼저 동생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밭에서 돌아와 보니 풍악을 울리고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방탕하였던 동생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동생을 뜨겁게 사랑했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탕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 동생과 함께 사는 기쁨이 없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십시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은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아버지를 향한 가슴 따뜻한 사랑도 읽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머슴의 정신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 때문에 기뻐하는 그 행복이 큰 아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가서 먼 나라에서 창녀들과 함께 탕진해 버린 아들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그 아들을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문 밖에 나가 눈이 짓무르도록 그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집에서 착실하게 봉사하며 아버지의 말에 늘 복종하는 이 아들을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러나 기본적으로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향한 관계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는 그렇게 동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지독한 편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와 누려야 할 정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언제나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모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순간 하늘에서는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은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구절을 이중의 인침을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는 관계에 대한 인침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것은 섬김에 대한 인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한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였고,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마음에 기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큰 아들에게는 아버지와의 그런 관계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방탕하지 않은 것, 사실이었습니다. 율법에 비교적 순종한 것,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모든 율법을 행하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기쁨, 아버지를 향한 인격적인 사랑, 이런 것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아, 설교자가 드디어 화살을 큰 아들에게 겨누고 있구나.’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맞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작성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큰 아들 같은 교인들만 가득 있는 교회라면 한국에서는 놀라운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은 적어도 외적으로라도 순종했고, 동기는 아버지 사랑하지 않았지만 항상 일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위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없이 그냥 힘겨운 인생을 일주일 살다가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어 볼까 하고 왔다가 올 때 비슷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관계에 대한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 그 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 되어 주신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면 그 아버지가 사랑하는 동생도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B. 섬김의 기쁨이 없음
두 번째는 섬김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긴 세월 섬긴 것을 기억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긴 노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명령을 따른 것을 기억했지만 오늘은 그것이 억울한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를 섬겼지만 받을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동생의 잔치를 보면서 섭섭한 마음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외적인 순종은 있었으나 사랑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으로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큰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보같이 아버지에게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한 사람이 일을 할 때 그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의 모든 일은 섬김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모든 것이 노동일뿐입니다.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상처가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동기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쥐꼬리만 한 섬김에 개꼬리만한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 혼자 모든 피해를 한 몸에 입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이점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어디서 양식을 구할까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염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또 다른 양식이 있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따로 음식을 준비하신 걸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며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습니다. 오셨다는 기록은 세 번 나오지만 활짝 웃으신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웃으실 일이 별로 없었던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고통 받는 날에 주님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고, 그리고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걷는 날에 그 분의 인생에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찬양)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루어지이다
아버지의 뜻이 당신의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명백히 단언하셨습니다. 그분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당신의 삶의 의미를 자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섬기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분에게 아무리 많은 실망을 주어도 그 분은 낙심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셨지만 사람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위도식합니다. 여러분 중의 절반은 주님의 교회에서 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조차 기쁨이 없이 그렇게 억울한 마음, 섭섭한 마음, 손해 본 마음을 안고 힘겹게 섬깁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머슴의 정신입니다. 왠지 이거라도 안하면 주님 앞에 설 수 없을 것 같은 마음, 혹은 주님과는 상관이 없고 그냥 일하는 것 자체가 재미가 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했던 그 섬김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목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추구하며 사셨다는 사실은 당신의 공생애 시작부터 입증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나오셨습니다. 원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죄 씻음의 표이기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세례를 자청하셨습니다. 우선 그 세례를 통해 세례를 받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고, 두 번째는 그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적인 메시야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두려워하며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 세례를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부터 예수님은 한 걸음 한 걸음 인생길을 내딛으시면서 항상 아버지가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 그리고 거기에 있게 하셔서 그 섬김을 하게 하신 목적을 상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성심 성의껏 열망하시며 사셨으니 그 분의 생애는 가족을 사랑하는 여인이 정성껏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것 같은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 수는 마지막에 구속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그렇게 하면 어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여야 할지니라 예수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그 분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의 기록자들도 그것을 예수님에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의미 있는 행동을 하실 때 그 구속행동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생각했고, 또 그것이 어떻게 주님을 통해 이루어지는지를 묘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보여주셨던 모본이었습니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아버지의 뜻이 당신의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시며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가지고 있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집에 있는 이 아들들도 꼭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뻐하고 섬김을 즐거워하며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큰 아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큰 죄 짓지 않고 방탕하지 않고 창기와 함께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고, 관계를 즐거워하지도 않고, 아버지가 인생의 기쁨이 된 적도 없고, 가족들 때문에 행복해 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어느 아들이 나은 아들일까요? 아버지의 재산을 아버지에게서 나누어 가지고 가서 먼 나라로 가 창기와 함께 어울리며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렸지만 아버지가 너무 그리워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아들, 그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 인줄 알고 이제는 그렇게 섬기며 살아가야 되겠다고 돌아오는 아들과 아무것도 아버지 앞에 큰 죄를 지은 적이 없지만 자기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존재인지도 모르고 아버지를 자신이 사랑한 적도 없이 살아가는 아들 중 누가 더 훌륭한 아들일까요? 둘 다 좋은 아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둘 중에 어디에 해당합니까? 돌아온 탕자입니까? 집에 있으나 방탕한 아들입니까?
III. 집에서 기다리심
그러면 이 말씀을 한번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아버지는 집에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교회에서 교인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마음속에서 이미 자신의 모든 재산을 큰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말합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란다.” 이것은 집에 있는 아들보다 집 떠난 아들을 편애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봉사하며 자기 곁에 있는 이 아들 때문에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방탕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의 기쁨도 없고, 머슴의 정신으로 봉사하고 있어 억울하고 섭섭한 마음이 가득 찼지만 집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은 탕자요, 자신은 의로운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게 무슨 그림일까요? 예수님이 이 날카로운 두 대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얼 말씀하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이 이 유명한 잃어버린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5장 1절과 2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 나오는 돌아온 탕자는 한때 방탕하게 살았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혹은 되려고 하는 세리와 죄인들이었고, 여기에 나오는 외적으로 순종하고 외적으로 아버지를 섬기지만 관계의 기쁨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율법에 어울리는 어떠한 행동도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공격하신 것은 율법을 지키는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는 있지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없는 것을 공격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도 없고 그 분을 공경하기 때문에 섬기는 행복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섬김이 율법에 어울리고 많이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그것은 그들의 더러운 마음을 감추는 회칠한 무덤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창녀와 함께 놀아난 그 더러운 자식을 그렇게 눈물로 그리워하며 기다렸다면 집에 있는 아들은 이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있는 아버지는 전지전능한 아버지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평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아버지가 큰 아들이 자기에게 늘 순종하고 늘 성실하게 집안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를 향한 관계의 기쁨도 없이 그냥 그 일을 할 뿐이라고 아버지는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아버지였다면 그렇게 재산을 탕진한 아들을 눈물겹게 사랑했는데 자기에게 늘 순종하며 성실하게 집안의 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변함없이 큰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이 아들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14년 2개월이 되었을 때 교회 가는 길에 논둑에서 한참을 통곡하고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서 무신론자가 되기로 제가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6년, 약 7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온갖 시련과 고통을 다 겪고 그리고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날이 없었습니다. 회심하고 주님께 돌아왔을 때 가슴을 찌르듯이 내 마음에 칼이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처음 주님의 교회를 찾았을 때에는 내가 종교를 택했고 예수가 나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진짜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에 나는 칼끝이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이 고통을 느꼈습니다. 내가 이렇게 돌아와서 회개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나는 몰랐지만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렇게 방황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도 서슴지 않을 때조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찌르는 칼날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의하면 그렇게 요동치는 나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하늘에서 빙긋이 웃고 계셨습니다.
(찬양)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밖에 세워두니 한없는 내 죄라
작은 아들이 부를 찬송일까요? 큰 아들이 불러야 할 찬송일까요? 그는 집안에 있었으나 아버지가 눈물로 기다려 주었어야 할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고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랑을 알기까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홀로 우리를 짝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아는 것이 그 분의 가장 절실한 소원입니다. 아버지에게 누가 더 사랑스러웠을까요?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엄청난 재산을 탕진하고 창녀와 놀아났지만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를 떠나 살아보니 아버지의 품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어떻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겠어요? 그냥 나를 아버지의 집에 있는 많은 품꾼중 하나로 여기셔서 먼발치에서나마 아버지를 뵈오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자기의 품에서 오열하고 있는 아들이 사랑스러울까요? 아니면 그렇게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인데도 억울함과 섭섭함, 그리고 상처를 가득 안고 한 맺힌 머슴처럼 살아가고 있는 집 떠나지 않은 아들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한 사람이 냉담하게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표입니다. 우리는 냉담하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냉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사라집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와 욕망이 먹구름처럼 피어올라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육욕적인 것에 대해서는 가슴이 달뜨지만 그러나 거룩하고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냉담합니다. 왜 그럴까요? 관계에 대한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이제 가슴속으로 카드를 만지작거립니다. ‘가을이 오네. 11월이 다가오는구나. 구역장을 내려놓을 때가 됐구먼. 교사를 그만할 때가 됐어. 이제 순장을 더 유능한 사람에게 물려주어야지.’ 겨우 1년하고 6개월하고 그것도 힘겹게, 힘겹게 쥐꼬리만큼 섬기고 주먹만 한 상처를 가슴에 홀로 받은 것처럼 그렇게 하는 계절입니다. 왜 그럴까요? 집 떠나지지 않은 채 방탕한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며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에 한 페이지를 열어간다고 하는 보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섬김을 보면서 ‘아, 이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MRI구나.’ 라고 해석을 하고 정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구나. 그리고 그 관계의 기쁨이 나에게 없구나. 나의 신앙의 기초는 탄탄하지 않구나.’ 라고 고민하면서 정직하게 자신의 신앙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문에 나올만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내가 사실은 탕자보다도 더 못된 아버지에게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버린 자식이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게 그런 신앙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큰 아들입니까? 작은 아들입니까? 놀라운 것은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원래 큰 아들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때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임금 삼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세계와 아성을 구축하며 내 인생의 보람을 스스로 찾으며 그것이 가치의 최고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파산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추구했지만 그것까지 모두 잃어버리고 나니까 우리 인생 자체를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버려두고 우리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눈물 흘리며 참회했고 그리고 다시는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교회에 계속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큰 아들로 변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눈물 흘리며 참회 하였었네.
나의 마음이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마음 갈 길을 잃었네.
여러분 모두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그리고 눈물 흘리며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아버지 없는 삶은 인생이 아니야, 살았다고 할 수가 없어. 즐거운 곳에서는 나를 오라 불러도 이 아버지의 집처럼 포근한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세상의 명예와 돈, 죄의 유혹, 쾌락을 거절했습니다. 향기로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이 말씀에 눈을 뜨고 보니 우리는 큰 아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관계의 기쁨도 없고, 일하고 있지만 섬기는 기쁨도 없고, 교회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 느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섬긴 것은 억울한 원인이 되었고, 주님께 잘 순종한 것은 상처가 되었고 차별대우 받는 것 같은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냥 각자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왠지 요즘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 흘리시는 것만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를 멀리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뿐만이 아니라 그러나 더 가슴 아픈 마음으로 이미 교회에 있는 여러분들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니 이 어찌 역설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IV. 적용과 결론
신앙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말로만 듣기만 하던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갈피갈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큰 아들은 방탕한 적이 없었으나 그냥 그게 다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방탕하고 아버지의 품에서 울고 있는 이 탕자의 행복의 근처도 못간 사람이었습니다. 방탕하지 않았으나 관계의 기쁨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방탕하고 창녀와 함께 어울리던 그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께 돌아올 가능성을 가진 탕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롭다고 믿고 그리고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고 믿은 유대인들처럼 이 큰 아들은 사실상 희망이 없는 탕자였습니다. 이게 가장 슬픈 것은 부인할 수 없이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살기 싫은 부부가 자식 때문에 할 수 없이 살면서 상대방이 먼저 죽기를 기다리는 결혼 생활처럼 죽어도 출근하기 싫지만 가족들을 부양해야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힘겹게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때 이미 방탕한 길에서 돌아온 관계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생애 어느 순간에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회심하던 그 처음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정말 자신을 미워했고 그리고 허랑방탕한 삶을 뼈저리게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품에서 자기를 모두 내려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평화와 사랑이 생명이 찾아왔습니다. 큰 아들은 그런 방탕에서 돌아온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머무르면서도 자신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때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예전에 세상에서 방탕할 때는 예수님이 문 밖에 나와서 우리를 위해 울면서 기다리셨고, 이젠 집에 돌아왔는데 밤마다 주님이 집에 와 있는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리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그 처음 관계의 기쁨을 다시 찾으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는 큰 아들처럼 살다가 죽을 수 없는 사람들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동생이 집 바깥에서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만났다면 여러분들은 집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9.24. 주일오전7)
7.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 4: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누구도 실패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쉽게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함과 질투, 그리고 야비한 비난 속에서 오해를 받은 사람의 불명예도 오래 가는데 그 실패가 사실일 경우에는 얼마나 오래도록 그 불명예가 지속되겠습니까? 사람들을 비난할 때 자신의 과오는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 작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II.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A. 사명을 떠남(행13:13)
오늘 읽은 본문으로 무엇을 설교할까 궁금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으로 잡고 이 본문에 나오는 마가라는 사람으로 우리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오늘 성경이 기록하는 바와 같이 바나바의 조카였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아서 베드로가 투옥되었을 때 많은 성도들이 모여 그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그 기도의 장소가 바로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초대교회 때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고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이 사명을 떠납니다.
수고스럽지만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찾는 수고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사도행전 13장, 제 13절입니다. 같이 한번 13절을 읽겠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는 사도 바울이 역사적인 1차 전도여행을 떠나던 시점이었습니다. 이때 마가 요한은 이 전도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참관자로 동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헌신된 사역자로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버가 밤빌리아 지방을 다니며 선교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사람이 밤빌리아에서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의 나중의 표현을 보면 밤빌리아에서 우리를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 하였다고 했으니 공적인 이유 때문에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도자는 바울이었는데 지도자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전도 대열에서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로 인해서 크게 마음이 상했고 많이 실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탈이 아마도 역사적인 첫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는 대원들에게 미친 심리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많은 성과를 내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 자리를 그냥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고 거기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싶어 한 사람이 하나님 기뻐하셔야 하는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에 개울에서 헤엄치던 생각을 해보십시오. 개구쟁이 아이들이 자기가 한번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고 헤엄을 칩니다. 물장구를 쳐서 몸을 띄우고 두 팔을 휘저어 앞으로 나아가 올라가 보려고 합니다. 애를 쓰지만 기껏해야 그 자리에 떠있을 뿐입니다. 헤엄치기를 멈추는 순간 그 물의 흐름에 떠밀려 하류로 짐짝처럼 내려갑니다. 그러니 비록 큰 성과가 없어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보내주신 그 자리에서 그것을 지키며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도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순장, 두 달만 참으면 되네.’ ‘교사, 아 드디어 10월 달에 입장을 발표하고 11월에 그만두면 되겠군. 아’ 그러면서 변명을 합니다. ‘나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어야 해.’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유능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힘들다는 것이 사임 카드를 매만지는 원인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가 현실을 이기지를 못한 것입니다. 맡겨주신 자리에 있기 위해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주님이 맡겨주신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떠난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이제 막 떠나려고 카드를 만지고 있는 중입니까? 밤빌리아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아니면 보따리를 싸는 밤빌리아의 마지막 밤입니까?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있는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기회를 주심(행15:40)
그런데 하나님이 두 번째로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한 번 사도행전 15장 39절을 보겠습니다. 37절과 38절을 제가 읽고 39절을 함께 읽읍시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아멘.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였습니다. 2차 전도 여행의 목표는 새롭게 전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1차 전도 여행 때에 세워졌던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그 교회를 굳건하게 해주려는 목양적인 의도에서 이루어진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바울과 바나바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이 일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상할 수도 없는 나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방 선교의 기둥과 같은 두 지도자가 대판 싸운 것입니다. 쟁점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마가 요한의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가자고 했고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에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려두고 혼자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을 이번 전도여행에서 데려갈 수 없다고 고집을 했습니다. 결국 2차 전도대는 찢어졌고 바울은 바나바와 크게 다툰 후 실라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고자 고집한 것이 정말 한 사역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조카라는 혈육 때문이었는지는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또 바울이 마가 요한은 안 된다고 고집을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앞에서 지도자로서 공의로운 리더쉽의 원칙 때문에 그랬는지 개인적으로 마음이 많이 상해서 마음에 섭섭함이 발동하여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는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몫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나바와 바울은 이렇게 다투면 안 되는 사이였습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이 이방 선교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두 지도자의 언행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더욱이 바나바는 바울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바나바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 뛰어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악랄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교의 헌신된 젊은이 사울이 회심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 아무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의 유명 인사로서 사도 바울이 정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증해 줌으로 기독교 선교 사역의 무대에 데뷔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바나바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이 시작될 때에는 바나바와 바울, 바나바와 바울 그러고 나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바나바는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 뜻을 이루려고 하신다는 사실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신을 낮추어 바울의 동역자로 자처했고 심지어 비서 같은 역할을 하며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사도의 그늘 아래 자신을 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는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 계속 나옵니다. 그런 바나바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불행한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 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툼에 있어서 누가 옳았는지는 지금 우리가 결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위치에 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렇게 실패한 마가 요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버렸지만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사용하셨고 배를 타고 구브로 지방에 다니며 전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그 두 지도자가 치열하게 아마도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있었지만 정작 이 쟁점의 당사자인 마가의 대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둘이 다투는 동안 한곳에 찌그러진 채 괴로워하며 조용히 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듯합니다. 사람은 좀처럼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예전에 자신의 잘못으로 그 자리에서 떠났어도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부르시고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심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인정을 받음(골4:10)
마지막 세 번째는 인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쓴 것은 로마의 옥 속에서였고, 1차전도 여행은 47년에서 약 49년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편지를 쓴 때에는 약 주후 62년경이었습니다. 그러니 1차 전도여행에 마가의 배신의 사건과 그리고 골로새를 쓴 시점 사이에는 15년에서 17년 정도 간의 세월이 있었던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그는 실패했고, 바울은 절대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마가 요한에게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약 15년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옥 속에서 이 늙은 사도 바울은 마가가 갈 텐데 마가가 가면 이미 내가 너희에게 명한 바와 같이 골로새 교회는 그를 따뜻하게 영접하라고 당부할 정도로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때 역시 감옥 속에 있었고 인생의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에 서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며 마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너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말입니다. 그가 자신이 낙인찍었던 이 마가 요한이 보고 싶다고 디모데에게 데리고 오라고 부탁을 하면서 그 사람이 나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를 쓴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며 주인에게 그를 용서 받게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네시모라고 하는 이 사람은 빌레몬이라고 하는 부유한 사람의 집에서 적지 않은 재물의 손해를 입히고 도망을 나왔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 속에서 오네시모를 만났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감옥 속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그 빌레몬에게 사도 바울은 만약에 오네시모가 잘못한 거 있으면 나에게 계산을 하라고 부탁하며 형제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 자기를 섬기는 일꾼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의 편지를 썼습니다. 바로 그 편지를 쓰면서 사도 바울이 다시 마가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웬일입니까? 이 편지를 쓸 때에 실패자로 낙인 찍혔던 마가 요한은 사도 바울이 고백할 때 자기의 동역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심부름꾼이나 사환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사역에 함께 종사하는 대등한 동역자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가 끝이라면 오늘의 설교는 그리 감동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가는 바울에게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낙인이 찍힌 후 베드로를 가까이 섬겼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쓸 때 이미 핍박의 먹구름이 가득하였고 여기저기서 변절자들이 나오고 배교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한번 실패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친히 조반을 차려주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일체 그 배신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고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후 예루살렘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마가가 베드로에게 올 때 아마 베드로는 바울과 함께하는 1차 전도여행에서 일행을 배신하고 대열에서 이탈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을 낙인찍었지만 베드로는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성경 구절을 읽을 때에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여기에서 바벨론은 로마를 지칭합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문안하느니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이 마가를 그 위대한 사도가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었을까요? 실패자로 낙인찍혔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그렇게 매정했던 사도 바울에 의해 나에게 훌륭한 동역자라고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을까요? 더욱이 고난의 길을 함께 걸었던 사도 베드로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기의 아들이라고까지 인정하게 되었을까요?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실패 속에서 자기를 다시 세우시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찬양)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나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위해 바친 고귀한 희생
당신과 함께 영원히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나는 지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부끄러운 실패자가 이렇게 두 사도에게 마음 깊이 인정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실패한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거울삼아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에 붙잡혀 새로운 인생을 살 때 그 실패자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납니다. 한번은 살과 뼈를 부모에게 받아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것으로는 사람답게 살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더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거듭남 혹은 중생입니다. 신자는 두 번 태어납니다. 죽었던 영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살아나는 중생 때문에 한번 태어나고, 두 번째는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사명으로 태어남입니다. 신실하게 살자, 정직하자, 예수님 사랑하자, 이웃을 아끼자, 헌신하자, 이것은 보편적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그렇게 살아야 할 가치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개별적인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내가 있기를 바라시는 섬김의 자리가 어디인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 섬김을 감당하기를 기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개별적인 섬김은 청년 때에 좀 다르고, 결혼한 후 결혼하고 나이 들어서, 혹은 직장 다닐 때, 신학교 다닐 때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사명감이 없다면 살았으나 사실은 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칫하면 무위도식하는 삶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서 이렇게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기까지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일주일 동안도 자신의 자리에서 몸부림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평안하게 오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기까지 이 설교를 위해서 누군가 써준 책이 있고, 탐구한 내가 있고, 은혜를 주신 주님의 더 큰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설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설교가 끝나면 내일쯤은 이 설교를 녹취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몇 달 후에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문서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그러한 무명의 성도들이 수많은 땀과 눈물, 그 속에서 자신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그 모든 노고들의 집적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입니까? 그리고 지금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는 곳이 어디입니까?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면 그 생명과 은혜 때문에 생각나는 영혼들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언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성취의 기쁨을 느끼십니까? 한때 실패했으나 다시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은 마가 요한처럼 다시 인정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주님은 실패한 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맡겨주신 자리가 있다면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떠나지 않고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주님이 인정해 주시고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이기지 아니하고는 그렇게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실패했다고 한다면 인간은 낙인을 찍지만 주님은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떠나서 실패했다면 다시 부르심의 자리로 돌아가서 주님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 행복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10.01. 주일오전8)
8. 십자가로 돌아오라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 19:33-3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마지막 광경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금요일 오전 9시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세시까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고, 그 시각쯤 운명하셨습니다. 그 전날 밤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셨고, 그리고 만찬을 나누신 후에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 이 땅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던 제자의 배반으로 체포되신 후에는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고 처형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시 예루살렘의 휴가 와 있었던 헤롯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다시 모욕을 보인 후 빌라도에게 돌려보냈고, 최종적으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수많은 군중들의 데모에 가까운 함성 속에 사형 언도를 판결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형이 결정된 후 예수 그리스도는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옷이 모두 벗겨지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를 조롱하기 위해 붉은 망토를 두르게 하시고 손에는 갈대를 들려주어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워주어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가는 길에 나타나셨고, 수많은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을 받으며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힘이 진하여 십자가를 지실 수 없는 것을 보고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워 골고다까지 올라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그날과 그 전날의 시간적인 연대기입니다.
II. 예수 그리스도를 버림
오늘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이 기록은 몇 시쯤인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오후 세 시 이후에 기록일 것입니다. 온 땅에 해가 빛을 잃어 어두움이 칠흑 같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후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어디에 가있었을까요?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양떼들이 흩어져 당신 홀로 남으실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한때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표명하였고, 죽는 데까지라도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장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이 사랑하던 모든 제자들이 사라져 버린 골고다 언덕에서 당신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예수님 곁에는 한때는 죄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 받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당신의 말씀을 가르쳐 주던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시는 이 십자가의 고난에 누구도 동참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인간이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는 제자들의 호언장담에 한 치도 마음의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사람에게 버림받으심으로 그분이 짊어진 우리의 죄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셨고, 그 분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죄, 대속하여야 할 죄의 형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당신의 진노 아래 홀로 있게 하심으로써 오직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며 이 속죄의 십자가를 감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는데, 내가 그렇게 많은 말씀을 배웠는데, 내가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그런 이점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결함이 많은 목회자에게서 신앙을 배우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그리고 완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에게 직접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불완전한 지도자 밑에서 신앙을 배우지만 제자들은 완벽한 삶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배웠습니다. 여러분들은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목회자 아래서 신앙을 배우지만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그 큰 하나님의 능력의 기적을 직접 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여러분들은 그냥 성령의 은혜를 받지만 사도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칠 능력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배와 금을, 부모와 가족을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 그 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그 시점에 그들은 여기에 없었습니다. 예수보다 목숨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멀리 버리고 도망갔고 저주하면서까지 예수와 자신이 상관이 없노라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은 마지막까지 다 달려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도 내가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나는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왕년에 신앙은 왕년에 우리를 살렸고, 내년의 신앙은 내년에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공상 속에서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매순간 순간이 지나가며 내년이 되고 매 순간 순간이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내일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이미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붙잡았다함도 아니라 매순간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 있기를 갈망하여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 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매순간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 자만하지 말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십자가로 돌아온 제자
그런데 오늘 여기 십자가로 돌아온 제자가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중의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로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뼈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처형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의 정치적인 지위와 그리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모든 백성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처형에 티끌만한 착오라도 있으면 큰 일이 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중 한 병사는 예수를 확인 사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창을 예수의 옆구리에 넣었습니다. 어느 주석가의 설명처럼 아마 이 옆구리는 오른쪽이었을 것입니다. 창을 옆구리로 살짝 찔러본 것이 아니라 창을 옆구리에 넣었고 완전히 예수를 죽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창을 깊이 찔러 옆구리를 지나 창자를 거쳐 허파를 관통했고, 그리고 심장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쏟아진 이 피와 물은 바로 그 심장이 터지면서 쏟아진 피였고 옆구리에서 나온 물이었습니다. 물과 피가 나눠지지 않는 것이니 아마도 이 표현은 피가 물처럼 콸콸 흘렀다고 하는 묘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피와 물이라기보다는 물처럼 철철 넘쳐흐르는 피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누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을 말이 아니라 마치 생생한 그림을 보듯이 이렇게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이 기록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와 같이 당시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매우 주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목격한 사건도 삼자의 눈을 빌어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기 요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많은 제자들 중 특별히 세 사람을 총애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특히 요한은 나이가 가장 어린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함께 식탁에 참여하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그 분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 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이 사람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을 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도망간 그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의 순간을 그림처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을까요? 성경은 그 모든 과정을 추적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지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요한도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목숨이 두려워 예수 잡히실 때에 그를 버리고 도망갔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한 사람, 요한만이 예수 아직 살아계실 때 십자가 아래로 돌아온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고 더욱이 그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암시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시간이 9시부터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6시간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동안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가상칠언을 남기십니다. 즉,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는 세 번째 말씀을 요한이 받드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 번째 말씀을 주실 때에 그때에는 요한이 예수님 옆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일곱 마디의 말씀을 6시간에 걸쳐서 정확하게 50분에 한 번씩 한 말씀을 남기셨는지 한꺼번에 말을 남기시고 마지막에 일곱 마디 여섯째 마디를 끝에 하셨는지 우리는 그 시간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요한이 도망갔다가 세 번째 말씀을 주실 때에는 예수님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이 성경 본문을 읽으며 여러 날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연약한 인간이 회개할 때 얼마나 큰 사랑의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그 분의 처형에 관한 소식은 예루살렘 최대의 뉴스였습니다. 더욱이 그때는 유대인의 제일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유월절에는 백성들이 많이 모여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예수를 죽이지 말자고 계획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그 유월절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으니 이는 유월절 어린 양들이 이스라엘을 위해 죽임을 당하던 구약의 그 광경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고 물위를 걸어다니고 문둥병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던 큰 능력을 예수가 다시 행하여 자기를 형벌 받을 운명에서 구해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예수 십자가의 죽음 뒤를 따랐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이제는 더 이상 볼 구경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골고다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많은 인파였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데 그 모든 행렬을 밀치며 반대로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 어린 청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전에는 예수와 함께 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숨어있는 그 곳에서 양심은 매질하였습니다. 자기를 위해 그렇게 일생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한없이 입은 자로서 예수 죽임 당하는 이 부끄러운 순간에 그 분과 함께 있어드리지 못했다고 하는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과 자신의 배신이 대조를 이루었고, 그 분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 없음이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양심은 채찍질하기 시작했고, 그는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리스도에게로 늦었지만 그 분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골고다 언덕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뛰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군중 속에 함께 섞여 골고다 언덕에 올라갔다가 중요한 물건이라도 두고 왔기 때문에 찾으러 가는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싶었습니다. 잠시 예수보다 목숨을 사랑하여 그 분을 배신한 죄를 뉘우치며 그 분이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고난에 동참할 수는 없어도 그 분 곁에 있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단 한 사람, 요한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마지막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그리스도께 돌아가게 했고, 그 은혜는 사랑을 주었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시옵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면서 그 분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 죽음 후 부활하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실 통치자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말 당신이 육신의 어머니를 돌볼 물질이 없어서 가난한 제자에게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한 것이라고 해석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경상도 말로 자신의 잘못 때문에 뻘줌해 있는 이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요한에게 일거리를 주신 것입니다. ‘내 어머니를 네가 나를 배신하였구나. 그리고 네 가슴은 양심의 매질을 당하는구나. 그러나 요한아 나는 내 육신의 어머니를 네게 부탁할 수 있으리만치 나는 여전히 너를 신뢰하고 사랑하노라’ 이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좋은 것은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죄 짓지 않고 순결한 사랑으로 그 분의 십자가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생활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못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때로는 주님을 배반하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예수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이 요한은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그를 돌이키게 하였고 돌이킨 후 그토록 사랑했던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찬양) 하지만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두렵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은혜로 돌아왔을 때에 그는 분명히 배신자였으나 주님은 그의 배신보다는 사랑하는 제자가 당신 곁에 돌아왔다는 것을 더 또렷이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신을 잊어버리고 그를 기쁨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의 손에 위탁하심으로 그의 마음에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유일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은, 다른 성경의 기록자들은 그 순간을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세한 기록을 빼놓았고 요한의 이야기를 굳이 거기에 쓸 의욕을 못 느꼈을 것입니다. 이후에 모든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는 순간에 대한 증언을 제자들 중에는 유일하게 이 요한의 증언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다섯 마디의 말씀을 남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때 그 분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한 마디를 남기실 때에 그 분의 심정이 어떠한 것 같았는지를 증언해 줄 사도는 요한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간증을 들을 때 모든 교회는 그냥 조용히 경청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 마지막 순간에 자기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곁에 있어드리지 못한 것을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일체의 허물없이 예수만 순결하게 사랑하고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이 매우 밉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희망을 자신의 모습에 둔다면 우리는 희망을 잃은지 오래 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의 십자가 아래로 요한처럼 달려오는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올 때 그가 이전에 행했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신은 잊어버리시고 마지막 순간에 회개함으로 그 분의 고난의 현장에 눈물 흘리며 서 있는 그 모습을 기억해 주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은 실패했으나 돌아올 때 주님이 받아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다시 불러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시고, 버려두었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저는 이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아마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자의 모습이 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때는 실패했으나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돌아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분의 고난에 증인이 되어 그 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받들고 있는 이 요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모든 성도들이 돌아가야 할 본보기가 아니겠습니까? 잠시 주님보다 목숨을 더 사랑하여 주님을 배반하는 가슴 아픈 실패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끝이라면 절망이겠지만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살아있는다는 희망이 있으니 살아있는 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울부짖었던 대로 왜 내일입니까? 왜 오늘은 안 됩니까? 왜 또 다음이어야 합니까? 배신하며 산 날들은 오늘까지로서 충분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 주님의 말씀을 받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10.08. 주일오전9)
9. 예수 죽으심에 돌아오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요 19:38-4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 십자가 사건이 있고난 후의 일입니다. 아리마데 요셉의 이야기는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네 복음서 모두에 등장합니다. 그러니 이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리마데 사람 요셉에 관한 보도를 종합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관한 최고 회의체였던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가복음 15장 43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자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단지 유대교 신앙을 따른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믿는 신앙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II. 자신의 정체를 숨김
그는 아리마데 지방의 꽤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27장에는 아리마데 부자 요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누가복음 23장에서 묘사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으나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예수를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리마데 요셉도 역시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를 찾아온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에는 그가 예수의 심문과 체포, 처형에 관하여 찬성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7장 57절에는 분명히 그가 예수의 제자였다고 말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제자라는 헬라어 단어 마데테스(μαθητὴς)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가장 좁게 사용될 때에는 12명의 제자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넓게 사용될 때에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데 사도행전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예수를 단지 믿을 뿐 아니라 전심으로 그를 따르던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여기에서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였다고 할 때에 이것은 아마 세 번째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마가와 누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의 때에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음에 틀림없지만 사람들 앞에 자신이 그를 따르는 제자라고 드러내기를 주저했던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자신이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로서의 높은 지위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직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 혹은 자신을 존경하는 많은 유대인들에게서 신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 의하면 확실한 것은 그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깊이 은혜를 입고, 또 실제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도 보았기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거기에는 상당한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가 예수를 따르는 참 제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 머뭇거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순간에 결정적으로 그는 이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결단이 있었으나 여전히 자기 사랑에 머뭇거리고 있는 실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배반하고 배 터져 죽은 가룟 유다는 제외하더라도 열한명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고 모든 약한 것들을 치료하는 성령의 권능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실 때에 자기들도 죽는 데까지 예수를 따라가겠노라고 다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을 때 11명의 제자 중 아무도 그 분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바와 같이 뒤늦게 요한이 돌아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고난에 증인이 되었을 뿐입니다. 멸시와 욕을 받으며 십자가를 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망치에 못이 박히고 매달리는 동안 그 모든 고난의 광경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름 없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만하지 말아야 할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예전에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고, 말씀에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아마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이 세상 모든 것을 예수 앞에 내려놓고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 바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가 있다고 해서 그 과거가 오늘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고 살았다면 오늘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에 붙잡혀 살아야지만 그 삶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전도사로 봉사할 때 일제 강점기를 지나셨던 담임 목사님이 들려주셨던 이야기입니다. 일제가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지시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교회가 미움을 받았던 이유는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데 앞장을 섰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미소기바라이(神道浸禮)라고 해서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전국 교회에 명령했습니다. 교회는 큰 위기감을 느꼈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여서 눈물로 여러 날을 기도했습니다. 그때 목사님들이 한명씩 나아가서 이런 저런 자신의 각오를 밝혔답니다. 그 중의 한 목사님이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나는 끝냈습니다. 어제 저녁에 온 가족을 모아놓고, 아내에게는 남편 없이 살 준비를, 자녀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이 살 준비를 하라고 통보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교의 각오가 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막상 수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순교하는 박해의 때가 왔을 때 그 목사님은 변절하고 목사님들 기도 모임에 끼지도 못한 채 저 뒤에 앉아서 홀로 훌쩍이며 흐느끼던 평신도 한 사람이 그 순교의 자리를 대신했다고 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으로 유대인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종교지도자로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죽음의 사건 앞에 위험을 느끼자 자신의 정체를 숨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야할 이유입니다. 매일매일 주님의 사랑에 붙들려 이런 실패 없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십자가 죽음에 감화 받음
A. 용기
그런데 그가 예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태도를 급히 바꾸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 죽음에 감화를 받은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였다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15장은 부사 한 마디를 삽입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해석합니다. 당돌히 빌라도를 찾아갔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빌라도를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는 예수는 죽고 부활한데더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시신을 놓고 무덤의 문에 봉인을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면 예수와 한편이라는 것도 드러나고 만약에 예수가 실제로 사라졌을 때, 그 시신이 사라졌을 때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는 위기가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두려움이 변해 용기 있게 시신을 요청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십자가의 죽음이 준 커다란 감화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관습이 있었습니다. 사형을 당해 죽은 자들에 대한 유대인의 관습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아무리 흉한 죄를 저질러 처형을 당했어도 장사는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족들의 묘지에 그 시신을 안장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족에게 큰 수치이며 자신의 가족들이 그 처형당해서 죽은 죄수와 같은 통속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보면 아리마데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모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자기 뿐 아니라 가족이 함께 묻힐 가족 묘지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이렇게 처형당하고 죽은 자를 위해서 장례는 지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묘지에 묻어주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두 개의 처형자를 위한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인 요새푸스라는 사람이 쓴 역사서에 등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돌에 맞아죽거나 불태워 화형을 당한 사람들이 묻히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목 매달아 죽임을 당하거나 목이 잘려죽은 사람들을 위한 매장지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차마 예수께서 그런 범죄자들과 함께 묻히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 예수의 시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릴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선하고 존경을 받았으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던 이 사람이 이렇게 태도가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죽음의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았거나 혹은 숨어서 예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일평생 선한 분으로써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며 인간이 누구이며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깊은 감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일 후에”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이 일들 뒤에”라고 말입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 앞에 있었던 그 분의 체포 심문, 고문, 처형,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제자들의 배신, 그리고 자신도 두려워서 예수를 떠나 숨었던 부끄러운 과거, 이 모든 일들이 하나의 사건처럼 일어나게 되었고, 그 속에서 깊은 갈등을 느낀 끝에 그는 빌라도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 받기로 예정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음을 그는 아직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잘 가르쳐 주셨지만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죽으시면 그 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이 아리마데 요셉에게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자기를 사랑하신 방식과 자신이 그 분을 사랑한 방식이 너무나 달랐다는 사실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깊은 사랑의 감화가 그에게 용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가 장사 지낼 터이니 나에게 넘겨달라고 요청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모든 두려움의 근원을 추적해 가면 거기에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잃어버릴 지도 모를 것에 대한 무서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잃어버릴 것들입니다. 그렇게 꽃처럼 피어나던 젊음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화장품과 의학기술이 어느 정도는 항거할 힘을 주지만 그러나 영원히 우리를 젊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물질도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영원히 있지 않는 것을 집착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이제 단순해 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모든 사건을 직면하면서 그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던 그 모든 은택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어둠 속에 유대교 신앙에 사로잡혀있던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쳐 주시고 인간이 참 살길을 알려주셨던 예수님.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렇게 사셨던 예수를 생각하며 잃어버릴 것이 많은 자신을 회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나자 그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난주에 요한이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직면하면서 그 분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로 돌아올 때에 두려운 것이 없었듯이 아리마데 요셉도 한때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실패했지만 그러나 그 분의 죽음에 감화되자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시체를 당당히 요구했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세상 사랑을 버리고 예수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경험되는데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예수 십자가 하나만을 바라보고 용기를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B. 헌신
마지막 두 번째는 헌신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은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산헤들인 공의회 의원은 그 수가 매우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저명인사들이었고, 니고데모 역시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지도자였기 때문에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향품을 니고데모 혼자 가져왔는지 아니면 서로 약속을 해서 같이 마련하여 가지고 온 건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니고데모도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보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숨기던 자리에서 박차고 나와 오늘 예수께 달려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백 리트라의 몰약과 침향이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향품을 가지고 이런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우선 배를 가르고 내장을 모두 꺼내고 골을 가르고 머리에서 골을 모두 빼낸 후 그 빈 머릿속과 배를 향품으로 가득 채워서 시신의 부패를 방지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져온 이 향품들은 몸속에 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시신의 아래 위로 꽉 채워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방부제가 아니라 거기에 동원된 향품의 양은 그 죽은 사람의 존귀함에 대한 인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유명한 종교지도자가 죽었을 때 온 나라가 애도했고, 상당한 양의 엄청난 양의 향품이 그의 장례에 사용되었는데 그때에 이 장례를 두고 하는 말이 가말리엘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뛰어나게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니냐 하는 칭송과 함께 향품이 바쳐졌다고 합니다.
백 리트라는 대게 약 30kg정도 되는 양입니다. 그러니까 10kg짜리 쌀 세푸대 정도의 분량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난 양이기 때문에 예수의 시신을 관에 넣었다면 밑에 깔고 예수님의 얼굴만 남겨둔 채 모두 덮을 수 있을 정도의 굉장한 양입니다. 가말리엘의 장례에서 쓰여진 것이 36kg정도였다고 하니까 이것은 아마 굉장한 액수의 향품이었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도 한때는 예수의 제자인 것을 두려워하며 감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깊은 감화를 받고 그들은 오늘 바로 이 예수의 시신 앞에 엄청난 헌신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죽었으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계속 되었기 때문에 그 십자가 사랑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헌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장면을 그림처럼 그려내면서 흥미 있는 주석을 합니다. 그 이야기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재미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은 증대하다, 점점 더 많아지다 라는 뜻이고, 니고데모는 희랍어인데 니코는 ‘이기다’라는 뜻이고 나이키가 여기에서 왔습니다. ‘니케’가 승리이고, 그게 고유 명사로 사용되면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의 여신을 가리킵니다. ‘니코’ 이기다와 승리하다와 ‘데모’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승리한 백성 정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설명하기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한쪽에는 점점 증대한다는 이름을 가진 요셉이, 또 한쪽에서는 승리한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니고데모가 있었으니 이것이 예수의 죽음을 통해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동의하기는 좀 어렵지만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에 오게 된 것,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큰 향품을 예수의 장례에 바치게 한 것은 십자가의 감화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으로 감화된 사람들이었기에 이 커다란 헌신으로 우리 주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예수 때문에 이렇게 복을 받았노라고 자랑질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오늘 이 짤막한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의 기사는 우리에게 복음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정말 십자가 신앙의 가장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 사랑에 헌신된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고, 예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그 분을 섬기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비록 아리마데 부자 요셉처럼 풍족한 사람은 아니었고, 니고데모처럼 명석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나게 부자이고 존경을 받고 예수의 제자였던 사람들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한 사람들을 불러 다시 예수를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게 하셨고, 더욱이 그 실패한 사람들이 바치는 최선의 섬김을 기쁘게 받으심으로써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잠시 실패했으나 십자가 고난에 감화가 되어 주님을 위해 자신의 가장 최선의 것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번 넘어졌으나 한번 실패했으나 한때는 예수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 사랑했으나 하나님은 거기서 그를 영원히 실패한 자로 두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그들을 불러 그 부끄러운 과거를 씻고 다시 예수를 위해 헌신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주간이 가까워 오면서 저는 지난주에 루터에 관한 책 한권을 하루 종일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참 많은 눈물을 흘렸는데 그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한 부분은 그의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숨어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서 알 수 없는 하나님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그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해서 해석했습니다. 즉,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은 종종 숨어계신다고 말합니다.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숨어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에 그 분을 볼 수 없지만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펼쳐져 보이는 고난과 시련,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겨우 이런 식으로 밖에 대해주시지 않는 무자비한 분인가 이렇게 묻지 않고 오히려 나는 이 고난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지만 내가 이렇게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며 내가 볼 수 없이 숨어 계실 뿐이지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인생과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시는 분이시기에 이 순간을 믿음으로 지내면 반드시 후회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혁명가처럼 살았고, 그리고 60이 조금 넘은 아직도 이른 나이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그의 온 몸은 병으로 가득 찼고, 그리고 더 이상 육신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나를 내 고향 아이슬레벤으로 보내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백대로 자신이 태어난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 운명하였던 것입니다.
불굴의 헌신은 그렇게 매일매일 그리스도 예수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건이 우리 안에 현재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예전에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그때 은혜 때문이었고 오늘은 오늘 우리에게 그런 삶을 계속 살게 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다시 그 분을 향해 사는 헌신이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아리마데 요셉은 분명히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함으로써 그는 잠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에 깊은 감화를 받고 그는 다시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잃어버릴 모든 것들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최선의 것을 드려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함으로 십자가 사랑에 응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 십자가의 죽으신 것을 짊어지고 감화를 받아 용기 있고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10.15. 주일오전10)
10. 영광을 돌리게 하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18-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이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한 고백을 믿지 않으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마치 한번 대답할 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한 번의 허물을 씻어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사랑의 고백을 받아내신 후 그에게 가야할 사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II. 실패한 자를 부르심
A. 사명의 길을 주심
믿음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만들어 내지 않지만 그러나 믿음은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 그 분에 의해 제시된 구원의 길 이외에 아무 희망이 없다는 절대 의존의 믿음은 곧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믿음과 함께 이러한 사랑이 시작되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 전체를 움직이게 하시는 것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그에게 사명의 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우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너를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미래였습니다. 여기에서 띠를 띠우고 간다고 하는 것은 젊어서와 늙어서가 대조를 이룹니다. 젊어서 띠를 띠웠다고 하는 것은 자유롭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자기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다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남이 띠 띠우는 것은 곧 구속과 속박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경제적인 번영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모든 인간은 아무튼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많은 것을 소비함으로써만 한 인간이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미를 묻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남대문에 나가서 지게꾼에게 하루에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는 “한 500원에서 1000원 사이를 법니다.”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힘들지 않은 일을 당신에게 시킬 것이고, 하루에 1500원씩 줄 테니 일을 하겠습니까?”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넓은 운동장 같이 생긴 땅을 보여주면서 트랙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너비 1m., 깊이 50cm의 구덩이를 파라는 것이었습니다. 9시에 출근해서 6시까지 일하되 한 시간은 점심시간에 쓰고 50분 일하고 10분씩 쉬면서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신났습니다. 매일 일이 끝나고 나면 1500원씩 일당을 계산해 주었습니다. 보름쯤 되어서 결국은 지시된 모든 작업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이 끝났으니까 남대문으로 돌아가야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 심리학자는 다시 지시를 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파 놓은 모든 구덩이를 다시 흙을 메꾸고 꼭꼭 밟아서 원상태로 만들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상기시켰습니다. “당신은 나와 계약할 때 왜 이 일을 하냐는 질문은 안하기로 했습니다.” 운동장을 모두 메꿔놨더니 그 다음에 다시 원위치대로 파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삽을 집어 던져 버리고 지게를 지고 남대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예화를 통해 결국 인간에게 먹고, 입고, 소비하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의미를 묻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한 의미를 끊임없이 물어서 어떤 유의미함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가 행복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에게조차도 이렇게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의미를 묻는 사람은 항상 반성을 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에게조차도 이것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인간 모두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찾아가는 방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사명의 길을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원하지 않는 미래였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곳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의미가 뛰어나고 탁월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옛 본성이 아닌 새 본성에 적합한 일입니다. 우리의 옛 본성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자기를 주인 삼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던 옛 자아의 본성입니다. 이에 비해서 새 본성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심을 얻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부어진 하나님이 주신 본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사는 인생의 본성이 새 본성입니다. 사명은 옛 본성이 아니라 새 본성에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이나 물으셔서 기초를 확고하게 하신 후, 그 후에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인 사명과 개별적인 사명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진실하라, 말씀대로 살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사명입니다. 더 넓게 말하면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모두 꼭 같은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업을 할 수 있는 소명을,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 생활을 할 소명을, 어떤 사람에게는 목회를 할 소명을 각각 주십니다. 그 개별적인 사명은 보편적인 사랑에 기초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보편적인 사명입니다. 네 양을 먹이라고 한 이 사명은 특별 사명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기쁘고 의미가 너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보람이 있고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존재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지면 침체에 빠지게 되고 침체에 빠지게 되면 옛 본성이 새 본성보다 우월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를 죽이고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마르틴 루터에 관한 새로 쓴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해서 하루 종일 앉아서 루터에 관한 책 한권을 모두 읽고 한없이 마음이 슬퍼져 눈물이 났습니다. 어지럽게 책상에 널려진 휴지를 보면서 이제껏 내가 알고 있었던 마르틴 루터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였습니다. 혁명가요, 불의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마르틴 루터에게 이렇게 연약한 인간적인 모습이 있었구나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일평생 종교개혁의 대의를 위해서 충성했던 혁명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걸출한 설교가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어떤 때에는 설교단을 보면서 마치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을 못 본척하며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그 설교단을 피하고 싶었다.’라고 말입니다. 24년 동안 열린 교회에서 설교를 제가 5500번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설교는 나에게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짐을 벗겨주실 날들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설교 속에 어찌 보람이 없겠으며 목회 속에 어찌 기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설교는 나에게 이국의 언어이고, 사명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입니다. 나만의 고백인 줄 알았더니 그 위대한 종교개혁가도 이런 고뇌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하나님이 쓰신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그 분의 손에 붙잡힌 갈대처럼 연약한 한 인간을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러합니다. 사명은 제정신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 우리 안에 심겨진 예수의 정신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길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의 길이고, 자기 죽음의 길이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고, 옛 본성을 거슬러 살아야 할 길입니다. 그에게 특별한 은혜가 없는 한 그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모든 인생에 있어서 의미를 찾게 만듭니다. 불신앙은 안락함을 찾게 만들지만 신앙은 의미를 발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은혜는 그 모든 시련으로 가득 찬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기쁨을 줍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소망 때문에 때로는 고난을 받고 끊임없이 아파하며 그 길을 걸어가도 그것은 이국의 언어이면서도 모국의 언어처럼 들리고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면서도 원하는 희생처럼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을 줍니다. 도대체 누가 하나님의 사명과 부르심을 따라 살지 않는 어떤 사람이 겉사람이 날마다 후패해도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겠으며 사라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작별하는 아픔이 하늘에서 다시 만날 천국의 소망 때문에 사라져 가는 보람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감히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을실 때에 ‘아니요. 나는 당신 같은 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주님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중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무위도식하는 분들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신세를 지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명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돈 없고 가난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매일매일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잠깐 지나갑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고 죄 가운데 영원히 멸망하였던 우리들을 예수의 피로 살리셨습니다.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의 길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거룩함의 소명이 주님을 섬기며 그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부르심이 멀고 어렵기는 하지만 주님이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매일매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사람들은 보람 있는 삶을 삽니다. 겉사람이 날마다 후패해져 가지만 그러나 겉사람이 새롭던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주님을 사랑하며 지구의 한 구석에서 우리 주님의 창조목적을 따라 봉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덧없는 세상, 사라질 육체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영광 돌리게 하심
두 번째는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다 성심으로 대답했고 마지막에는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십니다”라며 주님께 고백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직접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 고백이 쉬운 것이었습니까? 어려운 것이었습니까?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고백을 했고, 더욱이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실패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고백은 더욱더 어려운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힘들게 예수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면 그 다음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축복을 주셔야지만, 복을 주셔야지만 합당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해할 듯, 말 듯 한 말씀을 주십니다. “늙어서는 남이 너를 띠 띠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리고 가리라” 사람들이 혹시 이 말을 두고 오해할까봐 이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은 아예 해석까지 해 버렸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즉, 남이 너를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심문과 체포, 처형에 관한 예고였습니다. 그러면 중간에 있는 군더더기를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 대답하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지 않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넌 날 위해 죽어라” 그것이 대화의 전부입니다. 동의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땅이나 집이나 세상의 명예나 지식을 주시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야멸차게 “니가 나를 사랑하니 나대신 죽어라”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오해를 할까봐 요한은 한 번 더 해석을 붙입니다.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요한의 핵심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죽고, 살고,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잃어버리고 하는 것은 모두 잠시 있는 이 세상에서 겪는 일들이요, 그 모든 일들을 통해 드러날 최종적인 하나님의 목표는 영광이라는 것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영광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은 영광이라는 말을 크게 세 범주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장소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은 아무데나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성경에 보면 어느 특정한 장소에 당신의 특별한 임재를 보여주셔서 영광을 발산하십니다. 마치 모세가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나 혹은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나 광야 생활할 때 성막 위에 하나님의 임재에 구름과 불기둥이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세 번째 범주의 용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그것은 곧 영광을 돌린다는 말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곧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우리에게 상과 벌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이 그 복음을 듣고 ‘아. 내가 여태까지 무지한 죄인이었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였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단순한 말의 복음 선포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도덕적인 삶, 혹은 경건한 생활을 보며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믿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때 그 안에서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고 불신자는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불신자 시절에는 하나님의 영광 이런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온 우주의 중심이고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고, 더 많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을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게 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많이 지식을 쌓는 일에 몰두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채 참된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 비천한 나 같은 인간을 위한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의 기준으로 잴 수 없는 인생의 성공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생의 성공에 관한 역설적인 발상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풀은 히브리말로 ‘하찌르’()인데 1년 살이 풀을 가리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풀 같은 인간이 그렇게 자랑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는 그 영광은 그 들풀 끝에 매달려 있는 그 한 송이 이름 없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7)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몰랐더라면 이렇게 잠시 있다 사라질 들풀과 같은 인생으로서 그 풀끝에 매달린 꽃을 자랑하고 혹은 부러워하며 인생을 살다가 가을이 오면 허무하게 지푸라기처럼 사라져 버릴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을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서 그리스도 예수를 화목 제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자기를 위해 살다가 비명에 죽을 허무한 인간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마음에 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을 모시고 들풀과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여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예수를 모른다고 하던 그런 불효막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불러서 다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위해 산 날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미력이나마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지구 한 모퉁이, 교회 한 귀퉁이에서 하나님을 위해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그 분의 나라에서 보석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름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면류관을 쓰고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과 어깨를 겨루며 함께 있을 때 주님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이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허무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화) 젊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십니다. “얘야, 젊었을 때 나 주님을 섬기거라.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거라.” 젊음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신나서 돌아다니느라고 주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혼을 합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주님을 섬기거라” 주님보다는 남편을, 예수님보다는 아내를 기쁘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이를 낳습니다. 이제 아이를 길러 놓으면 주님을 섬기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또 살아갑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모두 길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이 대학을 다니고 취업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좀 주님을 섬겨볼까 했더니 손주들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불려 다닙니다. 딸 둔 집 엄마는 싱크대에서 코 박고 죽는답니다. 큰 딸 집에 가서 애보다가 작은 딸 집에 가서 애보다가 죽고, 아들만 있는 집은 그만도 못해서 요양원에서 죽어간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손주들도 다 커서 ‘할머니 냄새 나. 이제 저리로 가’ 그럴 때가 왔습니다. 이제 드디어 모두 자유로워졌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교회 갈 기운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에서도 별로 불러주지를 않습니다.
어느 권사님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제가 많이 웃었습니다. 권사님 A왈 B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 권사 난 이번에 구역장을 내려놓아야 되겠어.’ ‘왜?’ ‘좀 너무 힘들고 어려워. 한 1년 쉬고 싶어. 그랬더니 옆에 있는 권사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습니다. ‘하지 마. 옛날에는 내려놨으면 그 다음에 불러줬지만 이제는 다시 안 불러줘.’ 맞습니다. 안 불러줄 지도 모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주님 따르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 주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 남이 너를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고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나를 따르는 것이니라. 대체 어디로 따라오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잠시 후면 천국으로 올라가실 텐데 어디로 따라오라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훈적인 문제입니다. 즉, 네가 어디에 있든지 지금은 내가 살았던 삶, 내가 가르쳤던 교훈을 따라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라 이 뜻입니다. 베드로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자기는 그러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순교를 한다면 예수님 품안에 있는 저 요한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요한에 관해서 묻자 예수님께서는 상관하지 말고 ‘너는 네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명은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명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맡기신 하나님 때문에 빛나는 것입니다.
(예화)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것저것 섬기며 이름이 드러나고 높아지는 일은 서로 하고 싶어 하고, 이름이 없고 천한 일은 서로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시고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만약에 하나님이 어느 날 천사 셋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주판을, 한 사람에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지휘봉을,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똥을 푸는 똥 푸는 바가지를 주고 세상에 내려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미션을 실행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천사는 각각 구름을 타고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때에 세 천사의 마음이 달랐다면 그들은 천사가 아닐 것입니다. 똥 푸는 천사는 육군 철모에 막대기를 끼운 거 하나 가지고 구름을 타고 내려오고, 사업가가 되어서 엄청나게 많은 기업을 일으킬 천사는 주판을 가지고 내려옵니다. 요즘이라면 계산기를 가지고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천사는 한 나라의 황제가 되어 다스릴 지휘봉을 가지고 내려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마지막 천사가 제일 대단하고 첫 번째 천사가 제일 운이 없는 미션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지 천사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천사가 진짜 천사라면 자신들에게 이 사명을 주신 하나님이 지엄하고 지존하신 여호와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으며 그 많은 천사들 중 나에게 이 미션을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명은 그렇게 남과 비교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명과 우리의 인생은 두루마리와 같습니다. 펼쳐지기 전까지는 거기에 무슨 글이 쓰였는지 알 수가 없고, 모두 펼쳐지기 전에는 그 내용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혜에 뛰어나고 모든 사랑에 탁월하신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창조하신 대로 당신이 보기에 가장 좋은 일에 그리고 내 인생이 가장 빛날만한 일에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감당해 나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노라면 우리가 이제껏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굴곡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웃고 기뻐하지만 때로는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사명이 없이 그 길을 걸어갈 때에는 그냥 가슴 아프고 눈물 나고 힘든 인생이었겠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눈에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로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시고, 내 뺨에 흐르는 한두 방울의 땀을 사용하셔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존재했을 세상보다는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고 계시고, 내가 그 일에 쓰임을 받고 있다고 우리는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주님의 손에 맡기고 오늘 하루하루를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처럼 그렇게 예수를 따르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세 번의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대답했습니다.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실패한 것도 사실이었고, 지금 이 질문 앞에서 떨리는 영혼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도 진실이었습니다. 이렇게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왜 좀 전에는 예수를 버렸뇨냐고 묻는다면 베드로도 별 변명할 말이 없어서 눈물만 흘렸을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강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 함께 있고,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도 있고, 예수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혹 우리를 힘들게 하는 세상 사랑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을 압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이 예수께 돌아가고 그 예수의 사랑을 내게 부어달라고 그리고 나로 하여금 예수를 위해 살게 해 달라고 매일매일 소리칩니다. 그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물론 이전에 실패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잘못했습니다. 고백하건데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을 찬송합니다. 완벽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를 삼지 않으시고 이렇게 실패하고 주님을 버렸던 사람을 불러 용서하셔서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잠시 있다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죽음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고 우리는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습니다. 이제 남은 날들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허무한 일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하루를 예수 따라가며 그 분을 위해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11. 절망 중에서 구원하심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막 5:25-2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 중에 마가복음에 실린 이 이야기가 가장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기에 많은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 분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에 세워지는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모든 세대들이 기적을 바라면서 살라 라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했고, 그 나라는 능력의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더욱이 병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하는 이 많은 기적의 사역들은 사람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이런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는 기적 자체를 바라보고 감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길래 하나님은 그 분과 함께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가? 그가 누구시길래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까지 살려내시는가 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 복음서가 모두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마 그 사건이 주는 이러한 신학적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혈루증이 무엇인지 지금 의학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주석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부인병의 일종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12년 동안이나 질병 상태에 있으면서도 이 여자가 죽지 않았으니 아마 이 혈루증 병은 단기간 내에 치명적으로 죽음을 부르는 그런 병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이 여자의 삶은 더 철저히 망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12년 동안 이 혈루증을 앓게 되었고 무슨 이유였든지 여자의 몸속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하혈의 증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율법으로 보면 이러한 피가 흐르는 증세는 불결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전에 갈 수도 없었고, 또 그와 접촉한 사람도 불결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육신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어려움, 그 위에 종교적인 어려움까지 동시에 이 여자를 모두 포위하였습니다. 그리고 12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II. 불행에 항거함
그러나 이 여자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 모든 불행과 소외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은 이 여자가 온 몸으로 이 긴 세월동안 자신의 질병에 항거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지 행복을 찾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행복이 하나님이 인정하시거나 온 인류가 인정할 수 있는 행복인가, 혹은 자신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행복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이 행복을 위협하는 가장 근본적인 공격은 생명의 위협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생명이 있고난 후에 그 위에 차곡차곡 쌓여져 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공급받는다고 하는 것은 나머지 모든 행복이 설 자리를 공격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온 몸으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 불행에 항거했습니다. 1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는 질병과 싸웠습니다.
A. 많은 의사를 찾음
오늘 성경은 이 여자의 이런 몸부림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는 많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라고 말입니다. 낫고자 하는 이 여자의 희망은 의사를 찾게 만들었습니다. 12년의 세월동안 한 의사에게 모든 것을 걸고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더 심해지는 때도 있었고, 훌륭한 의사를 만나면 증상이 멈추거나 완화되는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여인에게 끊임없는 삶의 희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전국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명의로부터 이름 없는 의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사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병 낫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많은 괴로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모든 의학적인 치료의 과정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이상이 있어서 한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데 그 검사를 받고나서 돌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 병을 앓고 나지 내 두 번 다시는 여기 와서 동일한 검사를 받지 않겠다.’ 검진비용도 30만원 가까이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치료의 과정, 의학적으로 우리 질병을 고치는 과정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비인간적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잘 지키면서 사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여자는 의사가 자신을 불행에서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많은 의사를 찾았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는 많은 괴로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직 살아야 되겠다는 희망 하나로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를 통해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에 어려움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그냥 일반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저 우리 인간이 가진 지혜로 잘 넘기면 넘어가고 개선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어려움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만나게 하시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인간이 무엇으로 하든지 간에 고쳐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고자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혈루병도 그렇게 하나님이 이 여자를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앞에 세우기 위해서 주신 어려움이었습니다.
B. 가진 재산을 허비
두 번째는 가진 재산을 모두 허비했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라고 말입니다. 전 재산과 소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집안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유를 다 잃어버렸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아마 자기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재산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여자의 혈루병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 전체의 행복과 불행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이 여자는 스스로 병자였기 때문에 그 모든 불행 속으로 들어갔지만 가족들은 이 여자의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삶의 평안함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불행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때에 우리들도 이러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생을 설계할 때 계획 속에 가능한 것으로 넣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예화) 저희 할머니는 생전에 정말 건강하셨습니다. 76세가 되실 때까지 손주들이 모이면 당신 치아로 호두를 우지직 깨뜨려서 손자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그렇게 튼튼한 치아를 가지셨습니다. 그 분이 함께 앉아서 고기를 씹으시면 고기 씹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 들릴 정도로 그렇게 치아가 튼튼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랑 살았지만 할머니가 소화제 드시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건강하셨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가셨고 그 병원에서 대장암 말기라는 통보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아주 여러 번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정말 분하다.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니? 내가 온 몸이 건강한데 그까짓 암에 걸리다니” 그 분의 계획 속에는 그러한 대장암의 습격을 받을 계획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그 후에 얼마 더 사시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가시는 할머니를 뵈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 우리의 인생은 정말 모르는 것이구나.’ 우리 모두 할머니가 최소한 90은 사실 것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게 가시는구나. 내 인생은 좋은 일만 일어날 거야. 그리고 기쁜 일만 있을 거야. 그리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될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라고 그러면 실제로 그렇게 될 거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살아보면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어려운 일은 일어나고 이 여자에게 인생에 있어서도 혈루병에 걸려서 젊은 시절 12년을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보낼 계획 따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도 우리의 삶이 요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모든 삶의 상황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일을 만나면 이 여자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치료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믿음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어떠한 불행이 우리에게 와도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그 무엇을 빼앗아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게 되어 있고,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소멸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아무도 바라지 않지만 그러나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 어려운 일을 봅니다. 그러나 만약 어려운 일 한두 가지를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즐거운 일을 만났을 때 천국으로 솟구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여자는 가진 모든 재산을 허비하면서까지 자신을 질병에서 구원하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투자가 아니라 허비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이 여자가 모두인줄 알았던 그 인생의 자원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자원에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그것을 능가하는 하늘 자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병세가 중해짐
세 번째는 병세가 중하여졌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말입니다. 여인은 의원을 찾고 가산을 모두 기울여 자신의 질병을 치료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그의 모든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왜냐하면 효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의 질병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습니다. 이제 죽음의 벼랑 끝으로 다가가고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탕자가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주는 사람이 없게 되었던 것처럼 이 여자는 아무것도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는 그러한 버려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인은 불행에 대한 자신의 긴 세월동안의 몸부림치는 항거가 쓸데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이처럼 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들 중 자기 혼자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 사람이 없고 어느 한 순간에 그 확신이 무너지면서 예수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 중의 하나는 여러분들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눈물의 기도나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탄식 같은 것들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이나 자신의 마음을 예수 오셔서 다스려 달라고 하는 임재의 간구 같은 거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으로서 이미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게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데도 여전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늘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III. 예수를 믿음
이제 이 여자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에 모두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의사를 의지했습니다. 그 의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재물을 의지했습니다. 스스로 이런 노력을 그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자신의 투지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치 절벽 끝에 하나의 밧줄에 매달린 사람이 매달리다 매달리다 팔의 힘이 모두 없어져서 이제는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서 그 손을 풀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 할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때 그녀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에 들었을 수도 있고, 이전에 들었던 예수에 관한 소문이 이 시간에 다시 생각났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시 들린 소문이 생각에 꼬리를 물리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떤 소문을 이 여자가 듣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시장에 가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점이 눈에 들어오고, 옷을 사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옷 가게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들은 당연히 장난감 파는 가게가 들어올 것입니다. 이 여자의 귀에 들린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갈릴리에서 오신 그 분이 모든 병든 자를 고치고 치료하셨다는 소식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실 때에 하셨던 사역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천국 복음을 설교하시고, 모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교육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병자로서 의사에게 나아갈 때 우리는 병의 고침을 받기 위해서 나갑니다. 그 의사를 만나서 감동을 받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기를 바라며 병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여자도 돈 주고 병 고치기 위해 수많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에 그 분에게서 받는 인상은 유명한 의사에게서 받는 인상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단지 병을 고치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에 넘치는 긍휼 때문에 설교하시기도 하고 병 고치시기도 하고 또 진리를 가르치시기도 하는 인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으며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이라” 희랍어로 ‘쏘조’()라고 하는 단어는 ‘구원하다’라는 뜻으로 ‘그야말로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본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왜 이 여자가 ‘내가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 말하지 않고 ‘쏘조’ 곧,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했을까요? 물론 이 여자는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이런 장엄한 구원의 개념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의사를 찾을 때에는 그가 단지 혈루병에서 고침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왠지 자신의 이 질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온 마음을 다해서 예수께 다가갔고, 아마도 거동이 자유롭지 않았을 이 여자가 수많은 인파를 뚫고 예수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의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분의 옷을 움켜쥐거나 찢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이 여자의 겸손한 마음의 표시였습니다. 비록 손끝으로 예수의 옷을 살짝 잡았지만 그러나 이 여자의 진짜 마음은 자신의 온 몸을 예수께 던져 예수를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자기같이 불결하고 더러운 이런 여자가 어떻게 거룩한 예수의 옷을 붙잡을 수 있을까? 나 때문에 그가 불결해지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이 여자로 하여금 살짝 예수의 옷을 만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옷은 예수의 옷이었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이었고, 손끝으로 예수의 옷을 살짝 만졌지만 이 여자의 마음은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1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질병에 소외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종교적으로도 외롭게 고립된 자신의 설움을 마음으로 그분께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이외에 나를 구원할 분은 없으며 나의 모든 구원은 그분께로부터 난다는 신앙, 다른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할 길이 아니라고 하는 확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련한 여자는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훌륭한 의사를 만나서 조기에 완치가 되었더라면 아마 이 여자는 예수 없이 살아가다가 사라졌을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이 절망적인 상태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이 여자를 벼랑 끝까지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혈루병이라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투신자살을 생각했을 이 여자가 거기서 주님이 달아주시는 날개를 입고 하늘로 훨훨 날랐습니다. 이제 인생의 절벽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그에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혈루의 근원이 마르매 그가 깨달으니라” 하나님의 치료의 방법은 이렇게 근원적입니다. 과거에 이 여자도 훌륭한 의사를 만나 증상이 조금 호전되는 경우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근원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쾌락에 빠지고 죄를 지어보고 내가 원하는 곳을 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보아도 가끔은 고통이 덜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치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자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일생을 노예처럼 매어 살던 혈루병에서 해방되어 이제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시련과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절망의 벼랑에서 날개를 다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Ⅳ. 적용과 결론
지금도 예수님의 능력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한 매일매일 우리의 인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불행에 항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많이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오늘 여러분들의 인생을 드리우고 있는 실패의 그림자는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이 여자가 12년 동안을 실패의 실패를 거듭했지만 마지막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생의 벼랑 끝으로 데려가서 당신을 만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시련과 실패 속에서 간절히 주를 찾아 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