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 질병에서 고치심
2023년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 | 2023년 08월 13일 – 08월 27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10월 13일
목 차
1. 나병환자를 고치심(마 8:1-3) 2023.08.13. 주일오전예배 7
2. 중풍병자를 고치심(마 8:5-13) 2023.08.20. 주일오전예배 16
3. 질병을 짊어지신 예수님(마 8:14-17) 2023.08.27. 주일오전예배 24
<설교 프레임>
절망적 질병에서 고치심1 2023. 8. 13 주일 낮 예배
< 나병환자를 고치심 >
“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1-3)
I. 본문 해설
산상수훈의 설교를 끝내신 후,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 다음 광경이 마태복음 8장에서 보도된다. 산 아래 동네에는 온갖 질병 들린 환자(患者)들로 가득했다.
중풍병과 열병을 앓는 자로부터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귀신(鬼神) 들린 자에 이르기까지 절망적인 병자들을 기적적으로 고치시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첫째로는 팔복산(八福山)의 광경이다. 청아한 예수의 말씀이 울려 퍼져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산 아래의 서민들의 현실(現實)은 비참하고 절망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다. 운명 같은 절망의 현실을 능력(能力)으로 놀랍게 변화(變化)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교회에서 거룩한 은혜 받은 사람들이 속된 세상으로 내려가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고통 받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신령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병자들을 즉시 고치시는 능력(能力)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 고침의 역사는 단지 기적(奇跡)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징표로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려 하심이었다.
II. 나병환자를 고치심
팔복산(八福山)에서 말씀을 마치고 내려오셨을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 그런데 인파를 헤치고 한 나병환자가 예수 앞에 나아왔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마 8:2)
A. 절망적인 상황
나병은 문둥병으로써, 천형병(天刑病)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무서운 질병이었다.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전염병으로 피부, 말초신경계, 상기도의 점막 등에 침범하여 온몸으로 퍼져 간다.
이 병에 걸리면 제일 먼저 피부의 감각(感覺)이 사라지고 가장 쉽게 감염되는 팔꿈치를 통해서 4번과 5번 손가락이 갈퀴처럼 변형된다.
나병으로 짓무른 코가 주저앉거나, 감염된 신체 부위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당시로는 마땅한 치료 방법도 없었다.
구약에서도 나병(癩病)은 하나님의 큰 저주의 결과로 묘사되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함께 있을 수 없었다(레 13:46).
이 나병환자는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온갖 절망적 질병에 걸린 자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병 고침을 받고자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 사람의 나병이 언제 발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 그가 개인적으로 겪었을 고통과 절망(絶望)을 상상해 보라.
율법적으로 불결한 자로 분류되어 제사나 성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가족들로부터도 격리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웃들에게 자기의 나병이 하나님께 저주(咀呪)를 받은 증거라고 여기는 시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큰 나병(癩病)환자의 절망은 어디서도 병 고침을 받을 어떠한 가능성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 인생을 향해 특별한 계획(計劃)을 가지고 연단하시기 위해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신다.
이는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우리가 생애적인 변화를 받게 하려 하심이다.
지금 당신에게 이 사람의 나병(癩病) 같은 문제는 무엇인가? 일생 동안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온 불행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제껏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보았지만 추호도 나아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숙명적인 불행은 무엇인가?
자신과 가족의 심한 질병, 사랑하던 이의 죽음과 이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이 계속되는 경제적 고통(苦痛)인가?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 힘으로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나병(癩病)에 걸린 것 같은 상황을 우리 앞에 두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소망(所望) 다 버리고 주님만 간절히 찾게 하려 하게 하려 하심이다.
B. 예수 찾은 믿음
천국 복음의 소문을 들은 이 나병환자는 예수를 찾아왔다. 그분이시라면 나병(癩病)을 고쳐주시리라 믿고 거기까지 왔다.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나병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율법(律法)을 어기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들다시피 하여 예수께로 와야 했기 때문이다.
팔복산에서 내려갔을 때, 예수께서는 수많은 무리들에 에워싸여 계셨다. 그들은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율법(律法)의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감염의 위협을 느끼게 하며 예수께 나오는 나병환자를 환대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달랐다. 그에게 더 이상 의지(依支)할 데가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에게 나아온 것을 믿음으로 여기셨다.
그동안 이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인들 안 해본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끝에는 어떤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에 관한 소문(所聞)이 들렸다. 그분께서 천국 복음을 두루 선포하실 뿐이 아니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마 4:23). 그것이 그에게는 복음이었다.
그들에게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선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이 비천한 성도들 삶의 현장에 친히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 환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은 볼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절망적인 질병들을 고칠 성령(聖靈)의 능력이 없었다.
그때 들려온 예수의 복음 소식은 나병환자에게는 완전히 캄캄한 동굴 속에서 비치는 한줄기 빛이었다.
그동안 그는 자기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 다녔을 것이다. 결국 절망 속에서 어떤 희망(希望)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복음의 소문에 마지막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예수에 대해 알았으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성경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는가? 그러나 그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faith)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믿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자기의 나병(癩病)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마 8:2下)
믿음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날아가는 화살은 이리저리 둘러보고 좌우로 곡선(曲線)을 그리지 않는다. 과녁을 향해 곧장 날아간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집중(集中)과 절대적 의존(依存)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 외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처럼 생각되는 일체 다른 길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오직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쓸모없는 집착(執着)을 버리고 오직 예수만 바라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이러한 복음의 희망은 꼭 천둥번개를 동반한 우레 소리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믿고자 하는 사람들 마음에 뿌려지는 작은 씨앗이다.
그것은 결코 믿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드릴로 뚫듯이 들어가서 심겨지는 복음이 아니다. 준비된 마음에 떨어지는 씨앗일 뿐이다.
그 씨앗이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으며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다.
우주의 시작을 생각해보라. 아주 작은 빛으로 시작 되었다(창 1:3).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에 3년 가뭄이 끝날 조짐은 손바닥만한 구름으로 시작했다(왕상 18:45).
엘리야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 소리가 아니라 “세미한 소리”로 들려졌다(왕상 19:12).
일단 믿고자 하는 마음이 확정되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은 그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커진다. 그리하여 정신 전체를 사로잡아 마음 전체를 뒤덮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faith)이 역사하는 방식이다.
이 불쌍한 나병환자의 마음은, 큰 홍수에 둑이 터지자 들판에 쏟아져 들어오는 물처럼 온갖 뜻과 정신이 오직 예수를 향했다.
나병환자의 마음에 꽂혔다. 자신을 질병으로부터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은 나사렛 예수 뿐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기적을 바라며 그분 앞에 나아왔다.
당신이 눈뜨는 매일 아침마다 근심과 낙심(落心)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자신 때문에 세상에서 생겨나지만, 그것을 고치는 것은 오직 하늘의 예수뿐이심을 기억하라!
이 나병환자보다 뛰어난 믿음을 가지라. 당신에게는 이제껏 하나님을 알아온 과거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聖靈)이 그대에게 있지 아니한가?(빌 3:8) 믿음을 가지라!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바라며 세상 번뇌를 떨쳐버리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라. “절망(絶望)의 속삭임으로 나를 하나님에게서 끊어놓으려는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우리의 절망적 육체의 질병과 끝없는 영혼의 침체에서 건지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고정하고 그 능력(能力)을 의지하라!
C. 고쳐주신 예수
예수께서는 이 불쌍한 나병환자를 받아주셨다. 왜 율법(律法)을 어기고 이스라엘의 회중 속에 들어왔냐고 나무라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그의 몸은 나병환자의 몸이었다.
단지 말씀으로 명하기만 해도 고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친히 손을 내밀어 몸에 대시며 나병환자에 대한 긍휼(矜恤)을 표현하셨다.
인격적 관계가 없는 기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인격적(人格的) 교통 속에서 기적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나병으로 온통 감염되어 온통 짓무른 그의 몸에 친히 손을 대심으로써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love)을 표현하셨다.
이것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종교지도자에게도 경험해 보지 못한 친절한 사랑이었다.
예수께서 선언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3). 이렇게 말씀하신 즉시 그의 나병(癩病)은 깨끗하게 치료되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절망적인 나병으로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온 그가 즉시 완전히 깨끗하게 된 순간, 생전 처음 느낀 그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누더기 옷을 벗어던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마음은 이전과 얼마나 달랐을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적으로 알게 된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능력이 나병(癩病)에서 나음을 받게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God)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것이다. 이제 마귀(魔鬼)가 인간을 죽음의 절망으로 지배하던 세상이 끝나고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희망으로 통치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나라는 성령의 능력(能力)으로 임한 나라다. 절망적인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놀라운 기적은 단지 기독교(基督敎)의 본질이 기적적인 치유에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온갖 마음의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우리 영혼을 고치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도 믿음의 간구는 병든 자를 일으킨다(약 5:15). 그러므로 영육 간에 병든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육신(肉身)의 질병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 위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영혼과 마음의 질병이 자신과 이웃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
그 모든 질병을 예수께서 능력(能力)으로 친히 고치실 수 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모든 나병환자가 나음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직 이 나병환자는 고침을 받았다.
그에게 복음(福音)의 소문이 들렸고, 실낱 같은 소식을 믿음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께 나아왔다.
전심으로 복음을 믿었고, 이제 천하에 자기를 구원할 이름은 오직 나사렛 예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믿음에 자신의 인생과 운명을 모두 다 걸었다. 예수는 나병환자의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불치의 병을 낫게 하였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도 얼마든지 치료의 희망(希望)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에게 나병과 같이 떨어지지 않는 영혼의 악(惡)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얽매고 있는 불행(不幸)은 무엇인가?
도저히 넘지 못할 벽처럼 버티고 있는 난제가 무엇인가? 이 나병환자와 같은 가난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그분께 간구하라.
절망적 질병에서 고치심2 2023. 8. 20 주일 낮 예배
< 중풍병자를 고치심 >
“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5-13)
I. 본문 해설
팔복산에서 내려오셔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나병(癩病)환자를 고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이라는 성읍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있는 번성한 성읍(城邑)으로서 갈릴리 지방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그때 이탈리아 군대의 한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왔다. 그는 예수께 간구하였다. 자기에게 무엇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인을 위한 간청이었다.
지금 중풍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자기의 하인을 고쳐 달라는 간구였다.
II. 중풍병자를 고치심
그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아마도 당시 갈릴리 총독(總督)이던 헤롯 안티파스의 수하에 있었던 군인이었을 것이다.
당시 백부장은 약 100명 정도의 군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 백부장은 예수께서 복음(福音)을 전하시고 온갖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는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다. 믿음이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부장은 절망적인 중풍병(中風病)으로부터 자기 하인을 고쳐 주시기를 바라며 예수께로 나아왔다.
A. 사람을 사랑함
특이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온 이유(理由)가 자신이나 가족이 아니라, 그의 하인(下人)의 질병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이 중풍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돕기 위해 예수를 간절히 찾았던 것이다.
그분을 만나면 하인이 질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왔다.
이것은 하인에 대한 백부장(百夫長)의 특별한 사랑과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의 아픔에 대한 공감(共感)을 보여준다.
가엾은 그의 하인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심한 중풍병에 걸려 일어나지도 못한 채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백부장은 절망적인 불행에 처한 자기 하인을 어찌하든지 돕고 싶었다.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 8:)
중풍병은 뇌졸중(腦卒中)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온몸의 신경이 모인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발병한다. 뇌혈관이 막히는 것을 뇌경색, 터지는 것을 뇌출혈이라고 한다.
중풍병(中風病)의 원인에 대해 한의학에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주화설(主火說): 지나친 스트레스와 신경과민으로 간장(肝腸)에서 생긴 열이 위로 상승해서 뇌혈관이 터져서 발병한다고 본다.
(2)주기설(主氣說):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지나쳐 기(氣)가 막힘으로써 뇌경색이 발생한다고 본다. 『동의보감』에서는 오지(五志), 곧 다섯 가지 감정인 기쁨, 성냄, 사색, 슬품, 두려움이 지나치면 열화(熱火)가 생겨 중풍이 발병한다고 본다(9장. 風)
(3)주습설:(主濕說) 몸속의 물 기운이 열(熱)을 받아 점도가 높은 담습으로 변하면서 뇌혈관을 막음으로써 발병한다고 본다.
중풍병에 걸려 뇌혈관(腦血管) 장애가 발생하고, 뇌의 일부 세포가 죽으면, 뇌졸중 후 인지 장애와 우울증 같은 합병증을 동반할 수도 있다.
중풍이 무서운 것은 바로 이 후유증 때문이다. 뇌졸증을 겪은 후에 비록 의식(意識)이 돌아온다고 해도 언어장애나 안면마비, 반신불수 등의 장애가 올 수 있으며, 이로써 3명 중 1명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 하인은 백부장에게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임에 틀림없다. 백부장은 하인이 겪는 절망적 질병의 고통(苦痛)을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 백부장은 사람을 사랑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共感)하며 불행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인물이었다.
B. 예수님을 믿음
이방인인 백부장은 믿음(faith)으로 예수께 나아갔다. 그가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아마도 어디선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분이 가는 곳마다 천국 복음(福音)을 선포하시고, 각종 절망적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백부장이 예수의 놀라운 치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중풍병에 걸려 고생하는 자기 하인이었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기 하인(下人)의 절망적인 중풍병을 능히 고치실 것을 의심 없이 믿었다.
당신께 나아온 백부장, 자기의 하인을 가엾이 여기며 중풍병(中風病)에서 고쳐 주심을 간구하는 그의 간청에 예수께서 즉시 응답하셨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
이제 백부장은 예수를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서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위해 기도를 받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백부장의 반응(反應)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친히 가서 하인을 고쳐주시겠다”는 말씀에 황망해 하면서 적극 만류하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백부장이 행한 뜻밖의 고백은 그의 신앙의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로, 그의 겸손(謙遜)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인간 백부장인 자신 사이의 지위(地位)의 격차가 너무나 커서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마 8:8)라고 고백했다.
이는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낮고 비천(卑賤)한 존재라고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그의 말씀 신앙(信仰)을 보여준다. 그는 고백했다.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그는 아무리 절망적 질병이라도, 예수께서 낫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만 하시면, 그 장소(場所)에 계시고 아니 계시고와는 상관없이, 자기의 하인(下人)이 나을 것을 굳게 믿었다.
이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경험적 사실에 비춰볼 때 너무나 논리적인 사실이었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부대의 군사(軍士)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면 모든 자연과 세계까지도 복종할 텐데, 그까짓 질병(疾病)이 어찌 예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인가?
그에게는 예수를 기쁘시게 하는 믿음(faith)이 있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말씀 한 마디로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하인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백부장이 예수를 알면 얼마나 알았을까? 또 성경(聖經)에 대해 알았으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크지 않았으나,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자신의 지식(知識) 전부를 굳게 붙들었다.
오래 예수를 믿었으나 은혜(恩惠) 안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는 것은 많으나 목숨을 걸고 붙드는 말씀은 없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교회에 다녀서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마음에서 사라졌거나, 남아 있어도 지성(知性)의 창고에 단지 기억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칼의 비유
우리에게 고침 받을 수 없으리만치 절망적(絶望的)인 질병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고치려고 애쓰다가, 믿음 없기에 실패해서 도달한 결론이다.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과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과 가능한 일의 구분이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 육체(肉體)의 질병뿐 아니라 영혼(靈魂)의 질병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신은 예수와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리멸렬한 인생(人生)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영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것과 같지 아니한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하인처럼 기동조차 못하며 자유(自由)를 잃어버린 채 고생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아니한가?
예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지금 중풍병자와 같은 우리를 고치실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예수에 대한 믿음(faith)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과 믿음
C. 병자를 고치심
예수께서는, 복음서 어느 곳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을 칭찬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을 유대인의 불신앙과 대조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또한 그런 믿음으로 이 세상(世上)을 살 때 우리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얻지 못한 천국(天國)을 소유할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自己)를 믿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生命)과 풍성한 삶을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10:10).
신약시대에는 예수(Jesus)를 통해서 계시된 말씀을 전심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敬畏)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렇게 예수 자신을 믿게 하시고자 놀라운 기적(奇跡)을 베푸셔서 절망적인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인 병자의 집까지 가지 않으셨고 안수(按手)하지도 않으셨다. 그 백부장과 함께 계셨던 그곳에서 단지 한마디 말씀만 하셨을 뿐이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이제껏 움직이지도 못한 채, 자기 집에서 누워서 고통만 받던 백부장의 하인(下人)은 그 즉시로 나음을 받았다.
믿음의 유익은 자기(自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절망적인 이웃이 놀라운 구원(救援)과 기적을 경험한다.
여러분에게 중풍병과 같이 우리를 속박하는 절망적인 질병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능히 고쳐주실 줄 믿으라! 충만한 믿음으로 간절히 간구하라.
또한 여러분에게 습관적으로 자신을 죄(罪)와 신앙에 있어서 반복해서 넘어지고 자주 미끄러지는 지점이 어디인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미움인가? 인간관계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현실인가? 의사도 포기한 절망적인 질병인가?
이것들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하나의 절망적인 질병(疾病)처럼 우리 마음과 삶속에 들러붙어 있다.
이런 절망적 상태를 어디서 고침을 받을 것인가? 이제껏 혼자 힘으로 힘쓰고 애썼으나 조금도 나아지질 못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이제 누구를 믿고 의지(依支)해야 겠는가?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절망적인 질병 상태(狀態)에서 온전히 고쳐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분만이 고치신다.
이방인인 백부장도 예수께 나아와 전심(全心)으로 간구함으로 자기의 하인이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것을 경험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을 이제껏 여기까지 인도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당신의 영혼과 육체가 절망적(絶望的) 질병 상태에 있을 때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겠는가?
이 백부장처럼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의 능력을 믿기만 한다면 얼마나 더 잘 고쳐주시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절망적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能力)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우리의 단순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단순한 믿음(faith)과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의지(依支)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절망적인 현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恩惠)가 아닌가? 그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 질병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말씀의 능력(能力)으로 능히 구원하실 줄 믿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겠는가?
절망적 질병에서 고치심3_끝 2023. 8. 27 주일 낮 예배
< 질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
“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 … 말씀으로 들을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4-17)
I. 본문 해설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이후에, 또 다른 병 고침의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熱病)을 고치신 사건(事件)이다.
또한 해가 저물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데려온 귀신(鬼神) 들린 자들을 고치셨다. 또 다른 병든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다 고치셨다.
복음서 기록자인 마태는 이 치유 사건을 기독론적(基督論的)으로 해석한다.
예수의 이러한 섬김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마 8:17) 위함이라는 것이다.
II.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A. 열병 든 자를 고치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熱病)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그의 집에 친히 가셨다.
그녀는 중한 열병에 걸려 누워있었다. 분명히 그녀의 질병(疾病)을 고치시기 위해 베드로의 집에 오셨는데, 왜 그런지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그녀의 손을 만지기만 하셨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예수께서 단지 그녀의 “한 손”(τῆς χειρὸς)을 만지시기만 하신 것으로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기도하셨거나, 그녀에게서 열병(熱病)이 나가도록 명령하셨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 8:15)
여기서는 흔히 다른 병 고침의 현장에서처럼, 기적의 조건들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즉 베드로 장모가 간절한 기도(祈禱)를 드렸다거나, 베드로의 충만한 믿음(faith)이 있어서, 그것들 때문에 그녀의 열병(熱病)을 고치셨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의미(意味)일까?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God)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였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능력(能力)이 충만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사람이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심을 확증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만지기만 했는데도, 예수의 신성(神性) 안에 있는 큰 능력(能力)이 역사하여 병든 자를 고친 것이다.
성경에서 절망적인 질병(疾病)에 걸린 사람들이 고침을 얻은 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들 자신의 간절한 기도나 믿음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2차적인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모든 기적적인 병 고침은 예수께서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기꺼이 행사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써 드리는 기도를 기뻐 받으시고 기적을 행해 주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셨기에 기적적인 치유가 가능했던 것이다.
열병에서 고침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 예수님의 수종을 들었다.
이는 하나님이 고쳐주셔서 절망적(絶望的) 질병에서 낫게 된 사람이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은혜로 나음을 얻었으니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B. 귀신들을 쫓아내심
그 후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의 소문을 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욱 절망적(絶望的)인 질병에 걸린 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마 8:16)
하루 종일 사역하셨으니, 이제 저녁에는 좀 쉬셔야 하셨다. 그러나 오히려 더 많은 병자(病者)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들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셨다. 그리고 기꺼이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들과 각색 병든 자들이었다. 이들은, 누군가가 예수께서 고쳐주심을 바라며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社會生活)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귀신 들리고 병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때로는 이웃들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야 했던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누군가 그들의 처지(處地)를 긍휼히 여겨주는 이웃들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이끌려 너도나도 예수께 나아왔다.
오랫동안 귀신 들린 채 살아가던 자들과 각색 병(病) 들린 사람들이 모두 이웃의 손에 이끌려 예수께 나아왔다.
당신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처럼 절망적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가?
지금 당장 가서 그를 이끌어 예수께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당신에게는 절망적인 육체의 질병(疾病)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는가?
불행 속에 방황하는 그의 영혼(靈魂)이 너무 불쌍하기에 예수께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당신에게 있는가?
그들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비참한 처지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방법(方法)으로는 도울 길이 없기에 오직 당신이 만난 예수(Jesus)께 데려와서 고침 받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아니한가?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라. 예전의 우리처럼 절망(絶望)과 좌절 속에서 사실상 죽은 자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불쌍한 이웃을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보라. 긍휼히 여기는 심정(心情)으로 바라보라.
당신도 언젠가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 그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 손에 이끌려 예수(Jesus)께 나아왔다.
그리하여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고침을 받지 않았는가? 또한 방황하는 탕자처럼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는가?
그 가엾은 이들을 예수 아니시면 누가 고치겠는가? 그들을 데리고 나아와서 고침을 받게 해야 한다.
C. 병을 짊어지심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이 모든 치유의 사역을 보도한 후에 이것을 신학적으로 해석(解釋)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선지자 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이 구절은 아마도 이사야서 53장 4절을 염두에 두고 한 인용인 듯하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사야 53장은 그 유명한 메시야의 고난(苦難)과 영광을 예언적으로 묘사한 장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그런데 왜 두 구절이 서로 다를까? 두 구절이 꼭 같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당시 두루마리로 되어 있던 구약 성경(聖經)은 휴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설교자들이 구약의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대부분 기억(記憶)에 의존하여 인용했다. 그 때문에 구약의 성경 본문과 차이가 난다.
여하튼 특이한 것은 이렇게 예수께서 온갖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시는 것을 신학적(神學的)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바로 그러한 병(病) 고침의 사역이,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건과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생전에, 그 많은 절망적(絶望的)인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신 사건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실 미래의 일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인 비참(悲慘)과 고통(苦痛)까지도 우리 대신 담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셨다.
III. 적용과 결론
지금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육신(肉身)으로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罪)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그 결과인 고통에서도 건져주신다.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希望)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 같은 죄인(罪人)을 사랑하시고, 친히 고치시기 때문이다.
1. 나병환자를 고치심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1-3)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절망적 질병에서 고치심 1(2023.08.13._주일오전)
산상수훈의 설교를 끝내신 후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다음 광경이 마태복음 8장에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산 아래 동네에는 온갖 질병 들린 환자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중풍병과 열병을 앓는 자로부터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귀신 들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절망적인 상태의 병자들을 기적적으로 예수가 고치시는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로는 팔복산의 광경입니다. 청아한 예수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있을 때 많은 사람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서민들의 현실은 비참하고 절망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운명 같은 절망의 현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놀랍게 변화시켜 주시는 때가 온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교회에서 거룩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서만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저 산 아래 속된 세상으로 내려가서 고통받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통받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소명을 내포합니다.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병자들을 즉시 고치시는 능력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비로소 이 땅에 이미 임했다는 것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 고침에 역사는 단지 기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징표로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복음을 믿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II. 나병환자를 고치심
팔복산에서 말씀을 마치고 내려오셨을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인파를 헤치고 어느 한 나병환자가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마 8:2)
A. 절망적인 상황
나병은 문둥병으로서 천형병(天刑病) 즉 하늘이 형벌을 내린 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혹은 천주병(天呪病), 하늘이 저주를 내린 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병으로 피부, 말초신경계, 상기도의 점막 등에 침투하여 온몸으로 퍼져나갑니다. 이 병에 걸리면 제일 먼저 피부에 감각이 사라지고 고통도 잊게 됩니다. 가장 쉽게 감염되는 팔꿈치를 통해 4번과 5번 손가락이 갈퀴처럼 변형되기 시작하고, 나병으로 짓무른 코가 주저앉거나 감염된 신체의 부위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마땅한 치료 방법도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도 나병은 하나님이 내리신 큰 저주의 결과로 종종 묘사됩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함께 있을 수 없었다고 레위기 13장 46절은 말합니다.
이 나병 환자는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온갖 절망적 질병에 걸린 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병 고침을 받고자 여기까지 왔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나병이 언제 발병되었는지 또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 그가 개인적으로 겪었을 고통과 절망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율법적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불결한 자로 분리되었습니다. 제사나 성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들과도 함께 있을 수가 없도록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웃들에게 자신의 나병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증거라고 여기는 시선들이었을 것입니다. 더욱 더 큰 고통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성일이면 그날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와 경배를 드리던 기쁨도 이제는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나병 환자의 절망은 어디서도 자신의 병 고침을 받을 어떠한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 인생을 향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연단하시기 위해 우리의 삶을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시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고 우리를 고칠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이는 거기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우리가 생애적인 변화를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이 사람의 나병 같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백방으로 노력하고 모든 의원에게 자문을 받았어도 결코 고침을 받을 수 없었던, 그래서 지금은 거의 포기한 채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야 되는 운명 같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일생동안 도저히 고쳐질 수 없는 숙명처럼 짊어지고 앞으로도 어떠한 희망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야 할 불행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이제껏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보았지만, 추호도 나아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여러분의 숙명적인 불행, 깊은 웅덩이와 같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자신과 가족의 심한 질병 혹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별,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경제적인 고통, 혹은 불치의 병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힘으로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나병에 걸린 것과 같은 상황을 우리 앞에 두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질병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그것을 고칠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우리를 내버려 두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소망을 모두 다 버리고 그 인생의 위기를 통하여 우리 주님만을 간절히 찾게 하시기 위하여 그런 어려움 가운데 우리를 두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까? 만약에 절망이 있다면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은 사라진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유일한 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절망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절망하는 심리를 아십니까? 절망은 모든 희망을 잿빛 어두운 비관으로 물들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희망도 절망으로 바꿔 놓고야 맙니다. 이 모든 일은 바깥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절망적인 상황을 두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바깥에서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고, 몸부림쳐 보아도 되지 않는 그 일을 여태까지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여러분은 포기하는 것을 배우고 절망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여러분, 그 절망적인 상황이 바로 예수 안에서 희망을 찾으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절망을 주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이 절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찾고 그분의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인 줄로 해석한 적은 없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B. 예수 찾은 믿음
이 사람은 천국 복음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의 소문은 이 나병 환자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듣고 이 환자는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복음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겨 대가도 없이 거저 고쳐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분이시라면 자신의 이 비참한 나병을 고쳐주시리라고 믿고 거기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병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겨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숨어들다시피 예수께로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팔복산에서 내려왔을 때 예수께서는 수많은 무리에게 에워싸여 계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율법의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자신들에게 감염의 위협을 느끼게 하며 예수께 나오는 나병 환자를 환대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에게 나온 것을, 당신의 복음을 듣고 당신을 찾아온 것을, 그의 믿음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인들 안 해본 일이 있었겠습니까? 좋은 의원도 찾아가 보았을 것이고, 민간 신앙에 의존하여 자신의 질병을 마귀로부터 고쳐 보려고 애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끝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두움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의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분이 천국 복음을 두루 선포하며 다니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선포에 감화를 받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와 함께 모든 병과 약한 것들까지도 고쳐주시되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고쳐주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나병 환자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높은 곳에 있어서 이 비천한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 친히 내려오기에는 그 현장이 너무 더러웠습니다. 그런 환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이 절망적인 질병을 고칠 성령의 능력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들려온 예수의 복음의 작은 소식은 나병 환자에게 완전히 캄캄한 동굴 속에 비치는 한 줄기 선명한 빛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온갖 비방(祕方)은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절망 속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에게서 완전히 격리되어야 하는 외로움은 그의 질병의 육신의 고통에 마음의 슬픔을 더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 복음의 소문에 마지막 희망을 걸기로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에 대해서 알았으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성경에 대해 알았다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의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마 8:2 下). 믿음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습니다. 시위를 떠나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좌우로 곡선을 그리면서 날아가지 않습니다. 과녁을 향해 곧장 날아갑니다. 이 소경의 믿음은 예수를 과녁으로 삼았습니다. 그 믿음은 곧장 마음의 활시위에서 당겨져 예수께로 곧바로 향하였습니다. 쏜살같이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에 꽂혔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집중과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이 생각되는 일체의 다른 길을 모두 거짓이라고 믿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천하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이름이 절대로 없다고 믿는 굳건한 신앙인입니다. 나병과 같은 자신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이름도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이 세상에 아무 데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집착을 모두 내어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 마음에서 쏜 화살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과녁으로 향해 날아가 자신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에 꽂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랜 세월 여러분이 교회를 다녔고, 오래된 많은 문제를 놓고 기도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에서 쏜 화살이 믿음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과녁으로 꽂혀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예수이고 예수가 내가 된 것처럼 그렇게 예수와 하나 된 경험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여러분의 아픔이 예수의 아픔이 되기까지 주님 앞에 매달려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절망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설교를 듣고 고침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한번 제대로 된 믿음을 가져보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주님 앞에 매달려 보십시오. 생사는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낫기 위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마음은 여러분에게 달린 것입니다. 마음에서 믿음의 화살을 시위에 먹이십시오.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과녁으로 삼아 날려 보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달려가 예수의 마음에 화살처럼 꽂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주님은 능히 고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만 바라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희망은 꼭 천둥·번개를 동반한 무서운 우렛소리 같은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지는 아주 작은 씨앗과 같습니다. 이 씨앗은 결코 믿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지지 않습니다. 드릴로 뚫듯이 파고 들어가서 심겨지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냥 준비된 마음 밭에 떨어지는 씨앗일 뿐입니다. 그 밭이 길가이면 굴러다니다가 그냥 그대로 있거나 새들이 먹어 버리지만, 옥토와 같은 마음에 떨어지면 그 씨앗이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으며 아름드리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은 설교 시간이 아닙니다. 설교 시간에 들은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밭에 떨어져 뿌리내리고 줄기 가지가 뻗어 무성한 나무가 되기까지 길러낼 때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둥병자의 마음이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우주의 시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 1장 3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아주 작은 빛 하나로 시작되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셔서 3년 동안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 가뭄이 끝나고 비가 쏟아질 조짐은 엄청난 천둥·번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구름으로 시작되었다고 열왕기상 18장 45절이 말합니다. 엘리야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 소리가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졌다고 19장 12절이 말합니다. 일단 믿고자 하는 마음이 확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고칠 분이 없습니다.' '나는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서 이 인생의 불행에서, 이 불치의 질병에서 낫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확정되면 복음을 들을 때 그 믿음은 그의 마음 안에서 순식간에 퍼집니다. 온몸과 정신 전체를 사로잡아 마음을 뒤덮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방식인 것입니다.
이 불쌍한 나병 환자의 마음은 큰 홍수에 둑이 터지자 들판에 쏟아져 밀려오는 물처럼 그의 온 뜻과 정신을 예수로 뒤덮게 만들었습니다. 이 가엾고 외로운 나병 환자, 누구에게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나병 환자의 마음은 믿음이 화살이 되어 예수의 마음에 꽂혔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질병으로부터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나사렛 예수뿐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으로 복음을 듣자 기적을 바라며 그분 앞에 나아갈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당신이 매일 눈뜨는 아침마다 근심과 낙심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자신 때문에 세상에서 생겨나지만, 그 문제를 고치는 것은 하늘의 예수뿐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나병 환자보다 뛰어난 믿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이제껏 하나님을 알아 온 과거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이 그대들 마음에 있지 않습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오. 아니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주신 그 믿음을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바라며 세상 번뇌를 떨쳐 버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나는 영원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운명처럼 불행하게 살 것이며, 나의 이 병은 결코 낫지 않을 것이며, 나는 고통 속에 일생을 보낼 것이라는 비관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렇게 명하십시오. "절망의 속삭임으로 나를 하나님에게서 끊어 놓으려고 하는 사탄아 너는 내게서 물러갈지어다." 오직 우리의 절망적인 육체의 질병과 끝없는 영혼의 침체에서 건지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찾는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곳에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고, 어떠한 대안도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마지막에 그의 육체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고쳐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이 당신을 만날 때까지 나병에 걸리게 내버려 두셨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 가운데 복음의 소식이 이 나병 환자에게 들리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불같이 타올랐고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생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되겠습니까? 평범한 때는 평범하게 주님을 찾지만, 인생의 위기가 만났을 때는 더 간절한 방식으로 주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주님을 찾고, 간절히 주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고, 마음의 소원을 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피어린 열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소수이고,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버지 앞에 고통을 느끼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입니까? 마음에 없는 일만 마디의 아름다운 기도보다는 가슴을 찢으며 토해내는 한마디의 한숨이 주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인생의 수많은 문제를 왜 예수를 찾는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 정절(挺節)의 결함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한 분께 우리 영혼의 시선을 고정하고, 나의 삶에 모든 불행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답이라고 믿고, 오늘도 우리 마음의 활시위에 믿음의 화살을 먹이며 예수의 마음에 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믿음의 화살을 맞으시고 아픔을 느끼시도록 그래서 우리의 고통이 그분의 마음에 전해지도록 그렇게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를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C. 고쳐주신 예수
예수께서는 이 불쌍한 나병 환자를 받아 주셨습니다. 왜 율법을 어기고 이스라엘의 회중 속에 위험하게 숨어들어 왔느냐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그의 몸은 나병 환자의 몸이었습니다. 단지 말씀으로 명하기만 해도 고치실 수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손을 내밀어 그 나병으로 짓무른 몸에 손을 대시며 나병 환자에 대한 자신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기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인격적인 교통 속에서 다시 말하면 사랑 속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병으로 온통 감염되어 온몸이 짓무른 그의 헌데에 친히 손을 대심으로써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친절한 사랑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문둥병자가 누구에게 사람 취급을 받았겠습니까? 아마 그에게 직접 먹을 것을 건네주는 것도 사람들은 꺼려했을 것이고, 자비로운 사람이 있다면 먼 곳에 먹을 것을 놔두고 가져가라고 하였을 정도로 감염될까 봐 그를 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그의 짓무른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어루만지셨습니다. 마치 그의 병든 육체를 자신의 몸처럼 어루만지시며 그런 몸으로 일생을 살아온 그를 불쌍히 여기듯이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선언하셨습니다.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 8:3)
중요한 것은 예수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즉시 그의 나병은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절망적인 나병으로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온 그가 완전히 깨끗하게 된 순간 자신의 모든 피부와 온몸이 어린아이 같은 피부로 다시 변화된 그 순간 자기의 몸을 어루만지며 느꼈던 그의 기분은 어땠겠습니까?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나병 환자이던 시절에 뒤집어쓰고 살던 누더기 옷을 벗어 던지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이전과 얼마나 달랐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적으로 알게 된 그는 얼마나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능력이 그로 하여금 절망적인 나병에서 나음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깊은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때에 확실히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이렇게 기적적으로 병 고침을 받고 완전히 인생이 바뀐 이 나병 환자는 아마도 우리가 바라기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놀라운 순간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죄악에 병든 우리의 영혼을 주님의 보혈의 피로 고쳐주신 그 순간을 그토록 긴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였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마귀가 인간을 죽음의 절망으로 지배하던 세상은 끝났고,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희망으로 통치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나라입니다. 절망적인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기적은 단지 기독교의 본질이 기적적인 육신의 치유에만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온갖 마음의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영혼을 능히 고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묻지 마 살인이 횡행하는 이 시대를 보십시오. 이제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찌르는 칼을 막을 수 있는 방검복이나 혹은 호신용 도구들이 많이 팔린다는 소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정신의 질병 때문입니다. 마음이 깊이 병들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아무 희망이 없다고 믿어지는 무서운 마음과 정신의 질병까지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믿음의 간구는 병든 자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영혼과 육체에 있어 병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질병도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고침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고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성경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를 고백하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질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질병에 걸린 사람은 혹시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질병을 겪는 것이 아닌지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발견되면 그 질병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깊이 뉘우친 후에 병이 낫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원래 의인이었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때는 죄인이었는데 주님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고 관계를 회복한 사람은 기도할 때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질병을 통해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튜 헨리(M. Henry)라는 주석가는 말했습니다. "병상은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다." 그 병상에 누워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돌아보며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자신의 질병이 고침을 받는 과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 위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영혼과 마음의 악한 질병들이 자신과 이웃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 모든 질병을 예수께서 능력으로 친히 고칠 수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나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반드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확실히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의 소문이 들렸고 실낱 같은 그 복음의 소식을 믿음으로 붙잡았고, 마음 전체로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께 총알처럼 달려 나갔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예수의 복음을 믿었고, 이제 천하에 자기를 이 나병에서 구원하실 이름은 오직 나사렛 예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에 자신의 인생과 운명을 모두 걸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자기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복음을 통해 본 세상은 완전히 다른 아름다운 세상이었고,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고귀한 인생이었고, 자신은 쓸모없는 나병 환자, 버림받은 병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존귀한 형상을 가진 존엄한 인간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계와 인생과 자신을 보는 눈이 모두 바뀌게 되었고,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갔고, 예수는 이 나병 환자의 그 믿음을 보시고 불치의 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일평생 앓아온 나병인데 주님은 한 순간에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고 가족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많은 사람이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생사는 주님에게 달렸거니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마지막에 생사는 주님의 손에 맡기되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매달려 기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환자의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마음속에 믿음의 화살을 겨누십시오. 그분의 마음을 향하여 과녁으로 삼고 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예수의 마음에 꽂으십시오. 그리고 예수의 마음과 하나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여러분이 고침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도 얼마든지 이러한 질병에서 치유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에게 나병과 같이 떨어지지 않는 영혼의 악은 무엇입니까?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사슬처럼 얽매이고 있는 여러분의 불행은 무엇입니까? 몇 번이나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버티고 있는 난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나병 환자에게는 나병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운명과 같은 고통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벗어날 수 없는 불행은 무엇입니까? 나는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불행의 크기, 고통의 깊이만 보았지, 하나님의 능력의 높으심, 그의 위대하심은 생각 안 하지 않았습니까? 이 나병 환자는 나병에 걸린 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작은 복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지극히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했고, 그분이 원하시면 자기를 반드시 깨끗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으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 외에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이 나병 환자와 같은 가난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다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그 큰 불치의 병에서 고쳐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의 질병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환경의 질병이든, 이제는 거기서 완전히 놓임을 받아서 그 지긋지긋한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완전한 자유의 삶을 찾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새살이 돋아나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한 피부가 되어서 자신의 온몸을 어루만지던 병 나음을 입은 나병 환자의 기쁨을 여러분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중풍병자를 고치심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5-13)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절망적 질병에서 고치심 2(2023.08.20._주일오전)
팔복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후 가버나움이라는 성읍에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있는 번성한 성읍으로서 갈릴리 지방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때 이달리야 군대의 한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께 간구하였습니다. 자기에게 뭘 해달라는 간청이 아니라 하인을 위한 간청이었습니다. 지금 중풍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하인을 고쳐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II. 중풍병자를 고치심
그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아마도 당시 갈릴리 총독이던 헤롯 안티바스의 수하에 있었던 군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백부장은 약 100명 정도의 군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 백부장은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온갖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믿음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절망적인 중풍병으로부터 자기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바라며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A. 사람을 사랑함
이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온 이유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으로부터 고쳐 달라거나, 가족에게 복을 달라는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하인의 질병 때문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하인이 중풍병이라는 절망적인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돕기 위해 예수를 간절히 찾았던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하인이 질병에서 고침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움직일 수 없는 하인을 대신하여 예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에 대한 백부장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중풍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하인의 아픔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엾은 백부장의 하인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심한 중풍병에 걸려 일어나지도 못한 채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절망적인 불행에 처한 자기 하인을 어찌하든지 돕고 싶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아주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위해 간구하고, 누구를 위해 하나님께 비십니까? 주님은 이렇게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 백부장을 어여삐 보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드디어 예수를 만난 이 백부장은 예수께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 8:6)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은 뇌졸중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온 몸에 신경이 모인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발병하는 것입니다. 뇌혈관이 막히는 것을 뇌경색이라고 부르고, 터지는 것을 뇌출혈이라고 부릅니다.
중풍병의 원인에 대해 한의학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듭니다. 첫째는 주화설(主火說)입니다. 즉, 몸의 열기가 문제가 되어서 중풍병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신경과민으로 간(肝)에서 생긴 열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위로 상승하여 뇌혈관을 터뜨려 발병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시원한 물기운과 뜨거운 불기운이 있습니다. 물기운은 수승(水升), 위로 올라가 있어야 하고, 뜨거운 불기운은 화강(火降),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의 조화가 깨져서 열 기운이 위로 올라오게 될 때 이런 병이 발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기설(主氣說)입니다. 이것은 기(氣)에 문제가 생겨서 중풍병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지나쳐 기(氣)가 막힘으로써 뇌경색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오지(五志), 곧 5가지 감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쁨, 성냄, 생각이 많음, 슬픔, 두려움, 이 다섯 가지입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열화(熱火)가 생겨 중풍병이 발병한다고 제9장 풍(風)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주습설(主濕說)입니다. 이것은 습기 때문에 발병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몸속에 물 기운이 열을 받아서 점도가 높은 담습으로 변하면서 이것이 뇌혈관을 막음으로 발병한다고 봅니다. 중풍병에 걸려 뇌혈관에 장애가 발생하고 뇌의 일부 세포가 죽고 나면 뇌졸중이 일어난 후 인지장애와 우울증 같은 합병증이 동반됩니다. 중풍이 무서운 것은 바로 이 후유증 때문입니다. 뇌졸중을 겪은 후에 비록 의식이 돌아온다 해도 언어 장애나 안면 마비, 반신불수 등의 장애가 올 수 있으며, 이로써 3명 중 1명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하인은 백부장에게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이 겪는 절망적인 질병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사람을 사랑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불행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품이 예수님의 마음에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초점이 자신에게만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나의 이웃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저렇게 절망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고통을 여러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낄 수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아파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이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의 간구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를 찾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예수님을 믿음
백부장인 이 사람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인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어디선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가는 곳마다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각종 절망적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이 예수의 놀라운 치료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중풍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는 자기 집에 있는 하인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기 하인의 절망적인 중풍병을 능히 고치실 것을 믿었습니다. 당신께 나아온 백부장, 자기의 하인을 가엾이 여기며 그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는 그의 간청에 예수님은 즉시 기쁘게 응답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 이제 백부장은 예수를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서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위해 기도를 받게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백부장의 반응은 너무나도 뜻밖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친히 가서 하인을 고쳐주겠다는 말씀에 황망해하면서 적극 만류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이 진술을 보니 이 하인은 아마도 이 백부장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며 주인을 위해 봉사했던 충성스러운 하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부장의 이 뜻밖의 고백은 그의 독특한 신앙의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로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자신 사이에 너무나 높은 지위의 격차가 있어서 그분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도 당시로서는 백부장이었으니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했을 법한 사람이고 하인까지 거느리고 있었으니, 꽤 사는 집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알았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인간인 자신은 얼마나 낮고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겸비한 마음이며, 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말씀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그는 아무리 절망적인 질병이라도 예수께서 낫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만 하시면 그 장소에 계시고 아니 계시고와는 상관없이 자기의 하인이 나을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는 군인으로서 자기의 경험적 사실에 비춰 볼 때 너무나 논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자신도 천부장의 지휘 아래 있을 것이고, 그가 명령하면 자신도 그 명령대로 복종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휘하에 있는 부대의 군사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가장 높으신 분인데, 그분이 말씀으로 명하시면 모든 자연과 세계까지도 복종할 텐데, 그까짓 일개 질병 따위가 어찌 예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에게는 예수를 기쁘게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이 예수님께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말씀 한마디로 절망적인 중풍병에 걸린 자기 하인을 완전히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를 알았으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비유대인으로서 성경에 대해 알았다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도 결코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크지 않았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자신의 지식 전부를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행사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이었고, 그 단순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의 간청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었지만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는 말씀은 많지만, 목숨을 걸고 붙들 만한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이 교회 저 교회 다녀서 이것저것 많이 배웠지만, 그러나 지금은 모두 마음에서 사라졌습니다. 또 남아 있어도 지성이라는 창고에 녹슨 칼로, 먼지 묻은 칼로 거미줄에 쌓여 있는 채 있을 뿐입니다. 에베소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 전투에 비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씀의 검을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당시 전투에서 군인에게 칼이라는 것은 자기를 지키고 적을 무찌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병기였습니다. 아무리 불타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칼이 없이 전투에 나가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적에게 바치는 것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주일날 이렇게 예배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을 기울여 듣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 끝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최신 병기를 받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새 칼을 하늘로부터 내려주십니다. 이제 그 칼을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하고 마음의 손으로 그 칼을 붙들고 휘둘러 싸울 때, 그때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의 권세를 찔러 쪼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고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마음에 감동 받은 말씀이 없다면, 지금 손에 아무 병기가 없이 영적 전쟁에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의 삶이 결국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패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쯤은 마음이 가난해져서 '이제 도저히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없으니 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주소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이전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게 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현실적으로 살아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의 마음의 손에 굳게 붙들려 좌우로 휘두를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고, 죄를 쓰러뜨리고, 마귀를 무찌르고 마귀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놀라운 병기가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삶을 승리로 이어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승리하고자 하는 의욕은 여러분에게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패배의 고통을 얼마나 더 많이 맛보고, 얼마나 더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져야지만 여러분이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는 말씀의 칼이 없구나.', '주여, 나에게 말씀의 검을 주옵소서.', '내가 죽기까지 싸우는 십자가의 병사가 되겠나이다.'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고침받을 수 없으리만치 절망적인 질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고치려고 애쓰다가 믿음이 없기에 실패해서 도달한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이 주신 결론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도달한 결론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과 어려운 일, 불가능한 일과 가능한 일 따위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육체의 질병뿐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신은 세상과 예수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리멸렬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렇게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중풍병에 걸려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신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은 할 수 있으나 몸은 움직일 수가 없고, 뜻할 수는 있으나 뜻한 대로 사지를 움직여 그것을 실행할 수 없으니, 누군가의 불쌍히 여기는 시선에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 병자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인처럼 기동조차 못 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채 불치의 병에 걸려 고생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삶이 즐겁습니까? 만족스럽습니까? 미래가 있습니까? 그리고 비전이 있습니까? 그렇게 개고생을 하고 난 다음에 여러분은 어디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지금 중풍병자들을 고칠 수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이 단순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차는 어디든지 갑니다.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강을 건너기도 하고, 혹은 산을 뚫고 지나가기도 하고, 물속을 다니기도 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철로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니, 어디서든지 당신이 원하시면 당신의 일을 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와 같은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을 고칠 수 있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이런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철길 없이 기차가 달리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허황된 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십시오. 단순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제까지 불신앙이 가르쳐준 습관적인 불행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나타나실 수 있으며, 그렇게 나타나면 우리 인생이 오랫동안의 질병에서 나음을 받을 수 있고, 질병적인 영혼의 불치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병자를 고치심
예수께서는 복음서 어느 곳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을 유대인의 불신앙과 대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아멘. 또한 그런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 때 우리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은 육신적 유대인이 받지 못한 천국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를 통해서 계시된 말씀을 전심으로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예수 자신을 믿게 하시고자 놀라운 기적을 베푸셔서 절망적인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능히 그렇게 불치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백부장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기적적인 치유를 일으키셨습니다. 또 그렇게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게 하심으로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의 집에 가지도 않으셨고, 안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백부장과 함께 하셨던 그 자리에서 단지 한마디 말씀만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이제껏 움직이지도 못한 채 자기 집에 누워서 고통만 받던 백부장의 하인은 그 즉시로 나음을 받았습니다. 사지가 마비되어 누워 있어 옴짝달싹도 못 하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던 이 하인에게 살아있는 것은 산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백부장이 가는 길에 하인에게 '내가 너를 대신하여 예수께 나아와 너를 치료해 주시도록 간구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갔는지, 아니면 아무 말 없이 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중풍병자가, 사지가 마비되어 누워 꼼짝달싹도 못 하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온몸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는 손발을 움직여 보며 스스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신기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 중풍병에서 나음을 받은 그 사람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운명처럼 여기던 이 지긋지긋한 중풍병에서 해방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과 함께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질병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그 기쁨은 그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누린 최고의 기쁨이었을 것이고, 그 기쁨을 통해 그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유익은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믿음을 여러분의 절망적인 이웃을 위해 행사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 때문에 이웃이, 믿지 않는 가족이, 믿지 않는 부모와 친척이 놀라운 구원과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여러분이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중풍병과 같이 여러분을 속박하는 절망적인 질병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능히 고쳐주실 줄을 믿으십시오. 충만한 믿음으로 간절히 주님 앞에 나아가 고침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거듭되는 죄가 있습니까? 신앙에 있어서 반복해서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지점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미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인간관계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은 지가 오래된 사람입니까? 의사도 포기한 절망적인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이것들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하나의 절망적인 질병처럼 우리의 삶과 마음속에 들러붙어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를 어디서 고침을 받을 것입니까? 이제껏 혼자 힘으로 애쓰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나아지지 못하고 더 중해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제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겠습니까? 어디에 가서 고침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이런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여러분을 온전히 고쳐주실 분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분만이 고치십니다. 그분은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불행한 여러분을 고쳐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이제껏 여기까지 인도하신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영혼과 육체가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에 있을 때 백부장보다 더 많이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믿음으로 철길을 깔고 그분이 위대한 능력을 행하실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있으면 의지해 보십시오. 매달릴 신이 있으면 매달려 보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신을 찾고 다른 방법을 세상에서 찾을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볼 것입니다. 주님의 고쳐주심을 볼 것입니다.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적인 상황으로 바꿔놓는 것을 목격하고 말 것입니다. 이 백부장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신앙생활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를 붙드십시오. 그의 십자가의 능력이 여러분의 불행을 능가한다고 굳게 믿으십시오. 그분께서 얼마나 더 잘 고쳐주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단순한 믿음으로 주께 고치심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절망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단순한 믿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단순한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아니면 내가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던 그때 그 간절한 처음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주님 앞에 울며 매달리던 그 간절한 사모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을 불러오는 믿음이며, 병을 고치는 믿음이며,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질병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는 믿음의 능력이고 동력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절망적인 현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아닙니까? 그의 권능이 아닙니까? 삽으로 굴을 파던 사람들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준다면 그 굴은 폭발음과 함께 엄청나게 놀라운 공사의 진척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말씀의 능력으로, 단순한 믿음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주님께 매달린다면 주님이 어찌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께 매달려 고침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질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4-17)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이후에 또 다른 병 고침의 기사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또 해가 저물었을 때는 많은 사람이 데리고 온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외에 또 다른 병든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까지 모두 고쳐주신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기록자인 마태는 이 치유의 사건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합니다. 예수의 이러한 섬김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II.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입니다.
A. 열병 든 자를 고치심
먼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고쳐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그의 집에 친히 가셨습니다. 가보니 그녀는 매우 중한 열병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녀의 질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베드로의 집에 오셨는데, 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병이 나으라든지, 혹은 이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든지, 이런 것이 전혀 없었고, 다만 그녀의 손을 만지기만 하셨습니다. 누워 있었으니 아마 예수님도 앉으신 채 그 침상 머리에서 그녀의 손을 만지신 것 같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예수님께서 단지 그녀의 한 손을 만지시기만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기도하셨거나, 그녀에게서 열병이 나가도록 명령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 8:15)
여기서는 흔히 다른 병 고침의 현장에서처럼 기적의 조건들이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즉, 베드로의 장모가 간절히 기도했다거나 혹은 옆에 있는 누군가가 충만한 믿음이 있어서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녀의 열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똑같은 병 고침의 기사가 8장에 세 개나 나란히 나오는데, 앞에 두 개와는 전혀 다르게 어떠한 사람의 믿음이나 혹은 간절한 기도도 없이 손을 만지시기만 함으로 그냥 이 여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보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에 고쳐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신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아무 조건도 없이 예수께서 그녀의 손을 만지기만 했는데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神聖)의 능력이 크게 역사해서 병든 자를 아무 믿음이나 혹은 아무 기도가 없었는데도 주님이 친히 고쳐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침을 받은 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들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들이 뜨겁게 믿었기 때문에 고쳐진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고칠 능력이 없으셨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열렬히 기도하든지 혹은 아무리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든지 결코 나음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열렬히 믿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이차적인 수단이나 도구일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께서 당신이 그 믿음과 그 간절한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 믿음, 그 기도를 사용하여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는 왜 그런 간절한 기도, 열렬한 믿음을 일체 보여주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손을 어루만지심으로써 고침을 받는 기적적인 치료를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믿고,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낫게 하는 것은 너희들의 기도나, 너희들의 간절한 믿음이 낫게 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고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평생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하여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 기적을 보여주시고, 또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셔서, 일평생 병이 나은 후에도 그렇게 예수를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기적적인 치유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열병에서 고침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없고, 누구도 열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친히 고쳐주시는 것을 보면서 이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 이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이분 안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그분이 손으로 어루만지시기만 해도 나를 고쳐주시는구나!' 이런 놀라운 믿음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또한 예수께서 어떤 병자들은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고, 어떤 병자는 기도를 보고 고쳐주셨지만, 아무것도 보시지 않고 고쳐주시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건은 거기 모인 더 많은 사람에게 놀라운 충격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불꽃처럼 솟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셔서 절망적으로 질병에서 낫게 된 베드로의 장모는 어떻게 했습니까? 병이 나은 다음에 즉시 일어나서 예수를 수종 들며 섬겼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저의 제자 중 한 여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공부를 그렇게 잘하지는 않았지만 기도를 많이 하고 아주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남에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들이 있는 곳의 지하실에 예배당을 열었습니다. 제가 보더라도 웬만한 사람이면 거기 와서 등록할 것 같지 않은 그렇게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가서 사명감 하나로 열렬하게 그 동네를 뛰어다니며 전도했는데, 웬만한 사람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의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말기암이 돼서 복수가 차서 배가 남산만 해진 사람들 그리고 정신병자들, 귀신 들려서 정신이 혼미한 사람들, 가족들이 도저히 돌볼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가자니 돈도 없고, 기도나 받아볼까 하고 사람들을 줄줄이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데려온 사람들을 놓고 열렬히 기도하고, 또 데리고 오면 또 기도해주고, 눈물로 기도해주고 했는데, 그중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말기암 환자도 깨끗이 낫아서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병원에서 기적이라고 하고, 귀신 들렸던 사람도 정신이 온전해져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올 때 마음과 갈 때 마음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모두 복수가 차서 배가 남산만 해서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온 가족이 와서 병 좀 고쳐달라고 애원을 하고, 병을 고치고 나니까 제일 먼저 가족들이 변심하더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사람을 데리고 안 와도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교회 나오는 것을 소홀히 하고, 그다음에 병 나은 그 사람도 한 몇 달 동안은 교회에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두세 달 지나고 나면 자기가 살았던 방식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노름하고, 평소에 자기가 살았던 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전도사인 자신을 그렇게 냉대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마음에 너무 원통해서 '하나님, 저들이 저렇게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고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저들이 다시 질병으로 돌아가서 얼마나 그때가 고통스러웠는지를 좀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더라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들의 뒤를 밟아보면 결국은 그렇게 깨끗하게 나았던 사람들이 다시 재발하여 다음에 심방 갔을 때는 또다시 배가 남산만 해져서 드러누워 옛날 모습대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제야 이들이 깨닫고 주님 앞에 용서를 빌고 매달리기도 하였지만, 그들 중에 대부분은 그냥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하는 이야기가 '은혜로 고침 받은 사람이 자기의 병이 완전히 나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절대 그게 아니라 조건부인 것 같습니다. 그 은혜로 나음을 받았으면 자기가 그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 자기를 고쳐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모두 육신의 절망적인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면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옛날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큰 질병과 혼란에서 고침을 받았다면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 사랑하시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귀신들을 쫓아내심
그 후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의 소문을 들은 더 많은 사람이 더욱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마 8:16) 하루 종일 사역하셨으니 이제 저녁에는 좀 쉬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더 많은 병자들이 모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환자들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들과 각색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가 예수께서 고쳐주심을 바라며 데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통제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리고 병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때로는 이웃으로부터, 때로는 가족으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야 했던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누군가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주는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이끌려 귀신 들린 자도, 각색 병에 걸린 사람들도 모두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오랫동안 귀신 들린 채 살아가던 자들과 각색 병 들린 사람들이 모두 이웃의 손에 이끌려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역시 여기서도 누구의 믿음을 보고 감동을 받으셨다든지, 혹은 누가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 그 기도가 예수님의 심금을 울렸다든지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초점이 기도하는 사람, 믿는 인간이 아니라, 고치시는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 모든 귀신 들린 자들과 각색 병 들린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고쳐주시는 장면이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 힘으로 예수께 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귀신 들려 미쳤으니 어떻게 예수를 알고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병이 들려 몸이 불편한데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예수께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누군가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이웃들이 그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데리고 '예수께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단다. 이제 예수께 고침을 받고 너도 이 비극적이고 불쌍한 삶을 이제 그만 끝내거라.'라는 마음으로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씩 데리고 왔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절망적인 질병 속에서 도저히 희망이 없어서 인생의 불꽃이 사위어가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왜 없겠습니까?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정신이 혼미하고 영혼이 병들어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한때는 그런 사람들중 하나였고, 그때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누군가가 사랑으로 여러분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여러분의 손을 이끌어 예수 앞으로 데리고 나오고, 교회에 데리고 나왔기 때문에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나음을 받아 이제 딴 세상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반듯한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될 수 있었다면,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귀신 들린 사람, 각색 병에 걸려서 도저히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그 속에서 여러분의 옛 모습을 읽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가서 그들을 이끌어 예수께 데려오고 싶은 사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족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이웃 중에는 그렇게 인생의 막다른 지경에서 고통을 받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해서 죽음을 삶보다 더 친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절망적인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는 없습니까? 불행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은 병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쌍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여러분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거칠게 살았습니다.
(찬양)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우리 모두 한때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때는 방탕한 탕자였습니다. 우리 모두 한때는 이렇게 절망적인 질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고칠 길이 없었기에, 오직 여러분이 만난 예수께 나아와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 주위에서 한번 찾아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지 말고,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찾아보십시오. 예전에 우리처럼 똑같이 절망과 좌절 속에서 실상은 죽은 자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불쌍한 이웃을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예수께서 벡성들을 바라보시니 "···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심령을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를 고난의 때에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곤고한 우리의 영혼을 마치 자기 영혼의 곤고함인 것처럼 아파하고, 쓰라려 하고, 기도하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 대신 우리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여기며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오게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언젠가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고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방탕한 탕자처럼 살았었습니다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 인생인 줄을 몰랐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어디에서 엎드려 자기 인생의 곤궁함을 쏟아놓아야 할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러분의 손을 이끌어 예수께 데려오고 교회에 데려옴으로써, 여러분은 그 손에 이끌려 여러분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됐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을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만이 여러분의 인생을 그렇게 놀랍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예수를 아직 모르고 있으면서 질병 속에 고통하고 영혼의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사람들을 여러분이 아니면 누가 데려오겠으며, 예수 아니면 누가 고치겠습니까?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고침받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이 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님께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희망을 얻고 살 수 있도록 섬겨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병을 짊어지심
마지막으로 마태복음에는 이 모든 치유 사역을 보도한 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이 구절은 아마도 이사야 53장 4절을 염두에 두고 한 인용인 듯합니다. 아는 바와 같이 이사야 53장은 그 유명한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적으로 묘사한 장입니다. 그리고 4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우린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아니,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하였다면 똑같이 말을 해야지 왜 여기서는 이사야가 말했다고 해놓고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즉, 왜 두 구절이 같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입니다. 당시 두루마리로 되어 있던 구약성경은 휴대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회당에 두루마리들이 창고에 있었고, 설교를 하기 위해 필요한 때는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펼쳐주어 낭독을 하거나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설교를 하면서도 구약성경의 구절을 인용할 때는 대부분 기억에 의존하여 인용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사야가 했다고 하는 말이 실제 구약의 본문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여하튼 특이한 것은 이렇게 예수께서 온갖 질병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는 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바로 그러한 병 고침의 사역이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생전에 그 많은 절망적인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하신 사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실 미래의 일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 우리 죄의 결과인 비참과 고통까지도 우리 대신 담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우리의 육신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이미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그 결과인 고통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닙니까?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께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는 우리가 지었으나 형벌은 당신께서 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했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나오면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오면 알지 못하는 우리의 커다란 죄들도 그 피로 씻어 하나님 앞에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발라 우리를 정결케 하여 다시 성도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질병을 들고 찾았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었습니까? 거기서 우리 질병의 고통을 먼저 깨달은 적 있습니까? 거기서 우리가 이 질병을 먼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죄를 먼저 깨달았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을까?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일평생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는데, 그렇게 섬기시던 그 손에 못 박히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때, 그것은 그분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우리의 죗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우리가 모든 사연을 안고, 심지어는 위중한 질병을 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올 때는 그저 내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와서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 죄 없으신 예수가 왜 십자가에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으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았던 것은 우리 육신의 고통이나 우리 정신의 고통이 아니라 예수의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대신 그 십자가에 못 박히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더 아프시지 않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고통 때문에 주님을 찾았다가 예수의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하여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신 그 고난의 흔적이 나에게는 아픔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나보다 예수를 더 사랑했기에 내 고통보다 예수의 고통이 더 아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신 줄을 미처 몰랐을 때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깨달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멸시와 욕을 받으신 것이 나 때문인 줄 알고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은 것을 기억하며 눈물을 숟가락 위에 떨어뜨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일상을 살면서도 예수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를 위해 그 중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시고, 수많은 사람에게 욕설과 모욕을 받으시며 죽은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한 번도 자연스럽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눈물이 남아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유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직도 우리의 뺨에 흐르고 있습니까? 그리고 엎드려 기도할 때, 나의 지은 죄가 생각이 나서 나의 죄지은 것을 아파하시는 그리스도의 아픔 때문에 서럽게 울며 가슴을 쥐어뜯는 그런 참회의 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기는 잘하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모두 찢으시고 흘려 그들을 위해 쏟으셨던 것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울어주는 중보의 눈물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큰 믿음 가진 사람 없고, 크게 통곡하며 외치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그 가엾은 자들을 고쳐주신 적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게 고쳐주시고 치료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이 바로 우리의 그 모든 고통과 죄를 위한 것이니, 누구든지 당신 앞에 나와서 용서와 은혜를 입고, 죽었던 자처럼 살지 말고 살아있는 자답게 살기를 지금도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큰 인자를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 나는 오늘 마음을 다하여 여러분께 말합니다. 세상에 절망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질병에 깊이 시달리고 있더라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꼭 붙드십시오.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인생의 골짜기를 사망 속에 헤맨다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희망을 가지십시오. 추호도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바라보실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구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받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하는 말씀을 가슴에 담으십시오. 주님께 고쳐주심을 받고 새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을 인도하여 예수 믿게 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