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얼굴을 찾을 때
2020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0년 7월 26일 – 10월 11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12월 31일
목 차
1. 내 얼굴을 찾으라(시 27:708) 2020.07.26._주일오전 16
2. 고난 받는 자의 기도(시 27:9-10) 2020.08.02._주일오전 22
3.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시 30:7-9) 2020.08.09._주일오전 29
4. 주의 얼굴을 찾는 자의 기도(시 27:11) 2020.08.16._주일오전 37
5.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대하 7:14) 2020.08.23._주일오전 46
6. 성전에서 기도할 때(대하 7:15) 2020.08.30._주일오전 53
7. 성전에서 기도할 때(2)(대하 7:16) 2020.09.06._주일오전 59
8..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단 9:17) 2020.09.13._주일오전 66
9.. 주의 긍휼을 의지하라(단 9:18) 2020.09.20._주일오전 72
10.. 주 자신을 위하소서(단 9:19) 2020.09.27._주일오전 77
11.. 기다리시는 하나님(호 5:15) 2020.10.04._주일오전 84
12.. 한 사람이 불씨다(스 10:1) 2020.10.11._주일오전 91
<설교 프레임>
주의 얼굴을 찾을 때1 2020. 7. 26 주일 낮 예배
< 내 얼굴을 찾으라 >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7-8)
I. 본문해설
다윗이 큰 고난(苦難)을 당하던 시기에 지은 탄원시다. 아마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고통을 겪던 때에 지은 시(詩)로 추측된다.
이 시(詩)는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시 27:1)
이 고백은 고난(苦難) 속에서도 오직 진리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지(依支)의 표현이며, 그런 처지에서 자신을 도우실 분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신앙(信仰)의 표현이다.
우리는 시인을 통해 특별한 고난(苦難)을 당하는 시기가 바로 하나님을 특별히 찾아야 할 때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II. 내 얼굴을 찾으라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단어 중 하나가 “얼굴”(panim)이다.
성경에서 “얼굴”(face)은 개별적인 인격체의 가장 고유한 표지(標識)다. 얼굴은 그의 영혼(靈魂)과 정신(情神)을 반영한다.
악인은 천(千)의 얼굴을 가졌고 의인(義人)은 단 하나의 얼굴을 갖는다. 왜냐하면 의인은 진실하여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이라는 용어가 특별히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그분의 심오한 임재(臨在)를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탁월한 친교(親交)의 경험이다(시 31:1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두 가지 목적(目的)으로 인간에게 향하신다. 죄인에게는 벌(罰)을 내리시고 의인에게는 복(福)을 주시기 위하심이다(시 34:16, 민 6:26).
A. 주의 얼굴을 찾음
첫째로, 시인은 고난(苦難)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로 결심했다.
시인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시27:8). 이 말씀은 이미 오래전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이다.
모세는 탁월한 통찰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방탕하여 결국 징계(懲戒)를 받게 될 것을 예고했다. 그러나 거기서 마음을 돌이킬 것도 예고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말씀이 고난 중에 주어졌음을 기억하라.
인간이 고난을 받을 때는 정신과 마음이 염려와 근심, 고통과 괴로움으로 분산(分散)된다. 그런 혼란 속에서 지혜(知慧)를 잃게 된다.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시간(時間)에 속한 것으로 지탱하고, 영혼의 생명은 영원(永遠)에 속한 것으로 유지된다.
세상의 염려가 마음에 가득 차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 마음은 정처 없는 혼란(混亂)에 빠진다. 시련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詩人)이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말씀에 응답한 방식을 주목하라.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하)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決心)했다. 정확히 말해서, 시인은 고난 가운데서도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마음(heart)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기로 작정(作定)한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기능(技能)으로서 감각한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한다. 또는 창조적인 상상력(想像力)을 발휘한다.
삶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서 온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듣는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응답(應答)하지 않는다면 아무 변화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신체(身體)나 영혼(靈魂)을 돌이키라고 가르치지 않고, 마음을 돌이키라고 말한다.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겔 14:6)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복음(福音)을 듣고 삶으로 열매 맺는 것은 마음이 말씀을 받는 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찾는다”함은 집중된 정신으로 마음을 목표에 고정하고 있는 상태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세상의 것들로는 할 수 없다. 그것들로부터 마음을 떼어 하나님을 향(向)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종종 고난(苦難)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로 돌이키게 하신다. 이는 고난 자체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마음에 있다.
시련(試鍊)을 만날 때, 어떤 사람은 믿음을 버리고 어떤 사람은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참 모습을 마주 보게 된다.
신앙은 해석(解釋)하는 힘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믿음은 상황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상황이 편안해지면 유혹 속에서 마음이 나뉘고, 고통을 받으면 염려(念慮) 속에서 정신(情神)이 흩어지게 된다.
세상과 육신의 일로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라. 그리고 우리 인생의 주관자(主管者)이신 하나님께 매달리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 그러면 만나주실 것이다.
B. 소리로 부르짖음
둘째로, 시인은 고난(苦難) 중에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고난 받는 시인은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부르짖는 기도로 표현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시 27:7)
마음에 간절함이 없으면서, 소리 내어 부르짖는 것은 형식적(形式的)인 기도일 뿐이다. 결코 하나님께 주목(注目)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그의 마음이 회개(悔改)로 깨어질 때와 하나님을 사랑(love)할 때다.
진정한 의미의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정(情)을 마음으로 이기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자신의 과오(過誤)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그는 눈물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외에 자신을 가엾이 여겨주실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이는 시인의 마음이 쏟아지는 물이 넘쳐서 흘러내리게 된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依存)의 감정이 극도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고난 속에서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그 사람을 추(醜)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름답게(美) 만든다.
시인이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대(期待)한 바는 오직 하나님께 긍휼(矜恤)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었다(시 27:7).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는 거룩한 정서(holy affection)에서 나오며 거룩한 정서는 간절히 찾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恩惠)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명제에 도달하게 된다.
“풍부한 기도는 거룩한 정서에서 나오며, 그러한 정서는 신령한 은혜를 받음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KNJ)
자신의 의로써는 응답 받을 자격이 없으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써 응답해 달라고 부르짖는 간청이었다. 무엇 때문에 낙심하는가?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라. 그분께 부르짖으라.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으나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였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탁월한 섭리(攝理) 속에서 비밀스럽게 은혜(恩惠)를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의 마음은 거룩한 정서(情緖)로 넘쳤으며, 영혼의 시선(視線)은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신자는 고난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찾는다. 찾고자 하는 자에게 찾을 힘을 주시고 친히 만나주신다.
신자에게는 특권(特權)이 있다. 시련 속에서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주님께 부르짖으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2 2020. 8. 2 주일 낮 예배
< 고난 받는 자의 기도 >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9-10)
I. 본문해설
시인은 고난(苦難)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로 뜻을 결심했다. 이는 일시적인 감상이 아니었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갈망(渴望)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그는 뜨거운 감정(憾情)을 억제할 수 없어 “소리내어 부르짖”었다(시 27:8).
우리는 여기서 고난(苦難)을 당할 때에 신자(信者)가 어떻게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II. 고난 받는 자의 기도
하나님은 고난(苦難)이라는 저울을 통해 믿음의 진실성을 달아 보신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노아처럼 완전(完全)하다 할지라도(창 6:9), 그런 상태를 지속하는 자가 없기에 고난을 통해 우리 모습을 보게 하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만을 믿고 의지(依支)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려 하심이다.
A. 숨기지 마소서
첫째로, 하나님의 얼굴을 자신에게서 숨기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시 27:9 상)
“숨기지 마소서”에서 “숨기다”(satal)는 하나님 자신이 숨으시는 동작이다(시 89:46). 때로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겨서 감추는 것을 가리키기도 했다(시 31:20).
신자가 겪는 최고의 형벌(刑罰)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의 단절(斷絶)이며 진노의 표현이다.
지복(至福)은 마음이 청결한 자로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마 5:8).
신자의 가장 큰 행복(幸福)은 하나님을 지성(知性)으로 알고 마음(heart)으로 친교(親交)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 인간에게 자기를 숨기시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알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시인에게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겠는가?
인간의 큰 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인데 이는 곧 불의(不義)다(욥 18:21). 무지(無知)는 곧 죄(罪)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을 거의 하나로 본다(고전 1:21).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높이에서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자신은 변함이 없으시면서, 경외하는 자에게 친밀(親密)함을, 범죄한 자에게 진노(震怒)를, 깨닫는 자에게 얼굴을 보이신다.
시인(詩人)은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실 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밧세바와의 사건을 통해 경험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제사를 드렸으나 열납되지 않았으며, 죄의식(罪意識)은 사라지지 않았고, 입술은 찬송할 수 없었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셨기 때문이다. 참된 제물은 상한 심령이었다(시 51:17).
고난 가운데서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영적 생활(spiritual life)이다.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을 찾으라.
B. 버리지 마소서
둘째로,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歎願)한다.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시 27:9 하)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비록 범죄(犯罪)했을지라도 그가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David)이라는 이름은 “사랑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유다 지파에 속한 아버지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윗은 자신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여기고 있었다(시 27:10).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父母)는 세계다.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무섭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는 뼛속 깊이 잘 알고 있었기에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詩人)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경험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분의 신실(信實)하심은 어디에 있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1)
하나님은 결코 성도(聖徒)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시 37:28)
신앙(信仰)은 언약 관계다. 비록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地位)의 격차가 있으나, 언약(言約)은 두 당사자가 있는 관계이며 당사자는 의무와 특권을 동시에 갖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는 순간에 이뤄지지만, 새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평생 은혜(恩惠)와 말씀을 받음으로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품을 떠나는 자들을 곤고(困苦)하게 하심으로써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시인(詩人)은 버림받은 것 같은 경험을 통해서, 비록 범죄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전부임을 깨달았다.
시련(試鍊) 속에서 믿음을 가지라. 주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신다(요 14:18).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C. 영접하소서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접(迎接)해주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여기서 “버렸으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아자브”(azab)인데 여기에는 “떠나다”라는 의미가 있다(창 2:24).
이 고백은 그가 평소에 부모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다윗은 많은 복(福)을 받았지만, 부모와 아내에 관한 한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러한 처지는 하나님을 더욱 붙들며 살게 하는 은혜(恩惠)의 도구가 되었다.
이는 다윗이 마음으로부터 느낀 애틋함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받은 상처(傷處)를 보여준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로 사울의 딸 미갈을 아내로 맞았다(삼상 18:27).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법궤가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기뻐 춤추는 다윗을 업신여겼다. 그의 신앙(信仰)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삼하 6:16). 두 사람은 정신적 연합(聯合)을 이루지 못했다.
시인은 믿었다. 부모(父母)는 자신을 버렸으나 하나님(God)은 자신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난을 견뎠다.
그는 비록 왕(王)이었으나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외톨이였다. 끝까지 그의 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시인(詩人)은 그들을 사랑했을지언정 의지(依支)할 수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구원자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종 세상 사랑으로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고난(苦難)을 주신다. 당신께로 돌아와 살게 하려 하심이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 3:7)
시련 중에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라. 그분을 알기를 힘쓰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접해 주실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적이 있었는가? 우리의 빛이요 구원이시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맡아주신다.
고난(苦難) 받을 때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이다. 당신을 찾는 자에게 얼굴을 보이신다.
우리를 자녀 삼으심에 후회(後悔)가 없으시니 버리지 않고 영접하신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3 2020. 8. 9 주일 낮 예배
<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 >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 30:7-9)
I. 본문해설
이 시(詩)의 표제에는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고 되어 있다.
다윗의 시는 사실상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해두었던 그가 성전(聖殿)의 낙성식, 곧 준공일을 위해 미리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즉위 후 4년에 시작되었고 7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왕상 6:1, 38).
그러나 이 시에는 성전(聖殿)에 대한 내용보다는 자신의 지난 생애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감격하는 찬송들이 많이 나온다.
이 시를 주목하는 이유는 시인이 고난(苦難) 중에 간절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경험(經驗)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II.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
시인(詩人)이 영광스러운 솔로몬 성전의 완공(完工)을 바라보며 미리 감격하고 있었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느끼게 했다.
시인은 은혜의 감격 속에서 과거에 있었던 영적 침체의 경험을 반추(反芻)하며 자기의 영혼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A. 영적 침체의 경험
시인은 수많은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으나 가장 큰 절망(絶望)을 느낀 것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실 때였다. 영적 침체였다.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란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영혼의 활기(活氣)가 사라지고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뜻한다. 현상적으로 다양한 원인이 있으나 근원적으로는 죄(罪)와 무지(無知) 때문이다.
영혼(靈魂)의 침체는 영적 생명이 약화되는 것이며, 이로써 죄(罪)를 이기고 은혜의 기쁨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
다윗은 커다란 시련(試鍊) 속에서도 산(山)과 같이 굳세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그러한 상태가 영구히 지속(持續)되리라고 믿었다. 신앙의 상태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시 30:6)
그러나 주께서 얼굴(face)을 가리시자 산 같이 굳건해 보이던 마음의 평안(平安)은 사라지고 영혼은 근심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때 시인(詩人)은 비로소 그 굳건함이 영원(永遠)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 때문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그는 이제껏 자신의 신앙(信仰)이 견고할 수 있던 것이 자기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恩惠)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영적 침체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게 하여 겸비(謙卑)하게 한다.
영혼의 침체에 빠질 때 신앙의 기쁨(joy)이 사라지고 마음은 굳어진다.
그런 상태에서 신자는 정욕(情慾)에 굴복하나 행복하지 않다. 수많은 모순률(contradiction)에 시달리게 된다. 마귀가 원하는 바다. 여기서 벗어나라!
B. 영적 침체에서 벗어남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굴을 가리시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했다. 그때 그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1. 홀로 낙심함
영혼의 침체를 겪을 때 시인의 첫 번째 반응은 낙심(落心)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믿음 없음과 죄, 그리고 무지 때문이었다.
일생 동안 시인에게 가장 큰 자산(資産)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으로 그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자 시인은 마치 무덤에 내려가는 것 같은 절망과 두려움을 겪었다. 구약에서 “무덤”은 모든 희망(希望)과 생기(生氣)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피(血)는 생명이다. 육체의 생명(生命)은 피에 있다(레 17:11). 그가 스스로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love)에서 멀어진 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절망적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詩人)은 깊은 영혼의 침체(沈滯) 가운데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곱씹어 본다. 이는 자기를 구원(救援)해 주신 하나님께 받은 사명(使命)이기도 했다.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하)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때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고백하였다.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0:10)
신자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이유는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자신도 행복하기 위함이다.
신자(信者)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는 행복(幸福)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거기서 떠날 때 사명(使命)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주(主)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신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자기 인생의 의미도 다시 찾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2. 주께 부르짖음
시인(詩人)은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처지를 아뢰며 주(主)께 부르짖었다. 언약의 여호와께 자신을 깊은 영적 침체에서 건져 주시도록 간절히 부르짖고 간구하였다(시 30:8).
기도(祈禱)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spiritual union)을 온전히 이루려는 인간 영혼(靈魂)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하나님께서 시인(詩人)을 향해 얼굴을 가리신 것은 하나님의 변심(變心)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인의 무지(無知)와 미끄러짐, 불순종(不順從)과 죄(罪)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대면(對面)하는 친밀함을 주신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모든 것이 평안할 때에는 마치 우리 자신의 믿음으로 스스로 든든히 서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恩惠) 덕분이다.
하나님은 종종 시련을 통해 영적 침체를 겪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幸福)인지를 알게 하신다.
영적 침체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교만(驕慢)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하신다. 따라서 은혜는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시작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읽는 곳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성령이 주어질 때, 그 사람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신다. 이는 성령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작점을 갖지 못한다.” KNJ譯, A. Augustinus,『삼위일체』(De Trinitate), 15.17.31
시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對面)하는 기쁨을 잃어버리자 그는 모든 것을 상실(喪失)한 자가 되었다.
비록 무지와 죄 때문에 침체에 빠졌으나 영적 침체의 고통(苦痛)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았다.
우리의 기쁨(joy)이 어디서 오나? 우리의 소망(所望)이 어디서 오나? 아무리 누려도 해(害)가 되지 않는 즐거움이 어디서 오나? 오직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온다.
III. 적용과 결론
인간은 많은 것을 누리며 욕망을 채움으로써 행복해지지 않는다. 영혼의 생명(生命)을 누림으로써 행복해진다. 우리의 삶의 의미도 거기서 발견(發見)된다.
영혼이 침체에 빠졌을 때, 시인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였다(시 30:8).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신앙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다.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하여 하나님께로 집중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 간절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4 2020. 8. 16 주일 낮 예배
< 주의 얼굴을 찾는 자의 기도 >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시 27:11)
I. 본문해설
시인(詩人)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지 마시고 또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구(懇求)했다.
다윗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육신의 부모(父母)는 자기를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영접(迎接)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는 주님이 자기를 떠맡아 주실 것이라는 확신(確信)이었다.
II. 주의 얼굴을 찾는 자의 기도
시인은 요동치던 마음의 분요함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평안(平安)한 어조로 자기의 인생(人生)에서 꼭 필요한 바에 대해 기도한다.
이는 다윗이 자기의 인생(人生)에서 궁극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시 27:11)
여기서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face)을 찾는 자가 인생을 잘 살기 위해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A. 가르치소서
첫째로, 주의 도(道)를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확신을 얻은 시인은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구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시 27:11 상)
“주의 도(道)”라고 번역된 구절은 히브리어로 “당신의 길”(darkeka)이다. 시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도(道)를 따라 살기를 원했다.
여기서 도(道) 곧, “길”(derek)이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면에서 숙고(熟考)되어야 한다.
하나님(God)과 관련될 때에는, “이 세계와 인류 사회와 인간 개인에 관한 하나님의 흠없는 뜻(will)”이다. 이 뜻은 성경을 통하여 분명히 계시(啓示)되었다.
인간(人間)에게 관련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도리(道理)”다. 인간은 도(道)를 따라 살기 위하여 도를 깨닫고, 또 은혜(恩惠)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Christ)와 관련 될 때, 도(道)는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啓示)되었을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곧 진리(眞理)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聖經)을 통해 주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주의 도”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도(道)를 보여”달라고 기도했으며(시 25:4),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간구하였다(시 86:11).
또한 말씀을 지키고 여호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복(福)되어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라고 하였다(시 119:3).
이처럼 도(道)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그것을 따라서 살아야 할 길(the way)이다. 그 도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도 참된 행복(幸福)을 누릴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소견(所見)에 옳은대로 산다(삿 17:6, 21:25). 그것이 자신을 행복(幸福)하게 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보편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이성(理性)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그 자체가 진리(眞理)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이 인간의 도(道)가 될 수 없다.
이성의 판단(判斷)을 따라 삶으로써는 행복에 이르지는 못한다. 더욱이 인간은 이성이 옳다고 판단하는 대로도 살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도(道)를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깨닫는 자에게 도(道)를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 힘도 주신다. 그것이 바로 은혜(恩惠)다.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感化)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얼굴(face)을 가리시는 고통스러운 영적 어두움을 경험함으로, 더욱 자신이 주의 도(道)에 대해 무지함을 깨달았다.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마음이 총명(聰明)의 빛을 잃어버리자 혼란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인이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라고 간구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고난과 시련(試鍊)은 종종 우리의 잘못이 없어도 찾아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世上)은 악하고 인간들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영혼의 어둠은 언제나 죄(罪)와 무지(無知) 때문이다. 벗어날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주의 도(道)를 배우는 것이다. 살아갈 은혜를 받는 것이다.
B. 인도하소서
둘째로, 평탄한 길로 인도(引導)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왜냐하면 시인은 악인들로 인해 많은 고통(苦痛)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시 27:11 하)
시인의 원수들은 군대처럼 많은 수효로 진(陣)을 치며 대적하고 공격하였다(시 27:3). 그때는 시인에게 환란의 날이었으며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고통 받던 시기였다(시 27:5).
악인들의 궤계(詭計)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녀들을 대적하여 좌절시키고 넘어뜨리는 것이다(벧전 5:8).
여기서 “원수를 생각하셔서…”는 이중적 의미다. 한편으로는 시인의 원수(怨讎)들의 많고 강함을 생각해 달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 의하여 둘러싸인 시인의 연약(軟弱)함을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시인에게 없는 죄를 거짓 증거(證據)하며 악(惡)을 토하며 일어나 치려고 하”는 자들이다(시 27:12). 시인에게는 시련(試鍊)과 고난은 모함과 비난(非難)으로 얼룩진 채 다가왔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 69:4)
하나님은 악인의 길로 걷는 자는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의인(義人)의 길로 행하는 자는 형통(亨通)한 길로 인도하신다.
시인이 악인들로부터 “원수의 억압”을 당해 슬픔에 잠겼을 때 그는 진리의 빛(a light of truth)을 간구하였으니, 구원(救援)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옴을 깨달았던 것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간절하게 찾는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가 죄(罪)를 지었다면 용서(容恕)해 주실 것이며, 억울한 누명(陋名)을 쓰고 있다면 벗겨 주실 것이다.
그가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의 어둔 밤을 지나고 있다면, 거기서 주님을 만나 눈부신 새 아침을 맞게 해 주실 것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신자(信者)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피할 길이 없어서 좌절(挫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引導)를 받지 못해서 칠흑 같은 인생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인생의 밤은 시련과 고난(苦難)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문이 닫힘으로 오는 것이다. 진리(眞理)를 깨닫지 못해 생명의 은혜(恩惠)가 사라짐으로써 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選擇)하실 뿐 아니라 보호(保護)하시고 인도(引導)하신다. 어려운 인생길에서 그분 앞에 겸손(謙遜)을 배우고 평탄한 인생길에서 그분께로부터 인자(仁慈)를 배운다.
어두운 인생길에서 갈 길을 찾으라.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라.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인도(引導)하심을 간절히 구하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살아온 길을 생각해보라. 한걸음 한걸음 우리의 인생(人生)이 하나님의 인도로 이제까지 왔다.
고요히 자신 속으로 돌아가 침잠(沈潛)하라. 요동치는 마음을 추슬러 영혼의 시선(視線)을 하나님께로 향하라.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으라. 하나님의 도(道)로 가르침을 받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라. 절망의 계곡에서 희망의 들판으로 나아오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5 2020. 8. 23 주일 낮 예배
<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I. 본문해설
본문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聖殿)의 준공식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광야에서 계시해 주신 성막(聖幕)을 거의 그대로 건축물로 옮긴 것이었다.
성전이 세워진 장소는 아브라함(Abraham)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산이었다(대하 3:1).
솔로몬이 기도를 마쳤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祭物)을 태웠고 여호와의 영광(榮光)이 성전에 가득하게 되었다(대하 7:1).
그때 여호와께서 다시 밤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이다.
II. 땅이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택해 성전(聖殿)을 삼으신 것과 함께, 미래에 이스라엘 땅이 고통(苦痛)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대하 7:13)
그 목록들은 이스라엘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들이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에게도 그런 재앙(災殃)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일찍이 없던 감염병(感染病)의 재난을 겪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의 저자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비난(非難)을 받으셔야 하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벗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죄 때문에 질병(疾病)에 걸리거나 고통(苦痛)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재앙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부인(否認)하거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무능(無能)해서 생겨난 일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도(意圖)다. 그것은 신자가 뜻밖의 재앙 앞에서 자신들의 책임(責任)을 생각하는 것이다.
a. 자연에 대한 책임
b. 이웃에 대한 책임
c. 하나님에 대한 책임
이런 재앙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롭게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대하 7:14 상)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재난을 무너진 도덕적(道德的) 현실을 생각하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서 잊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재앙의 때에 하나님의 얼굴(the face of God)을 찾으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 겸비(謙卑)해져서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III.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
땅을 죄악으로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땅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재앙을 통해 땅을 고치시는가?
A. 들으심
첫째로, 하나님은 들으신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마음을 기울여 행하고자 경청(敬聽)하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땅의 고통소리도 들으시고 사람들의 신음소리도 들으신다(출 2:24).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는 더 잘 들으신다.
이 세상의 재앙은 인간에게 고통(苦痛)을 주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恢復)하게 하심으로써 죄(罪)로 망가진 이 땅을 고치실 기회이기도 하다.
큰 재난과 고통 속에서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가?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祈禱)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재앙 속에서 하나님을 고요히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미움과 원망으로 서로 분열(分裂)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B. 죄사함
둘째로, 하나님은 죄(罪)를 사(赦)하신다.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돌이켜 당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복수심에 불타서 재앙(災殃)을 내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돌이키는 자들을 용서하신다. 그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돌이키신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신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모든 사물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디에도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신자들도 마음이 죄로 무뎌지면 하나님에 대해 영적으로 무감각(無感覺)해진다. 그래서 더욱 죄에 빠진다.
이런 무감각한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려고 종종 지금처럼 환경의 큰 변화를 겪게 하신다. 거기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신다.
죄를 사(赦)하시기 전 우리의 마음을 때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다. 물질적 감각에만 치중하던 마음에 영적 각성을 주신다.
이러한 때에 경건한 신자는 황폐한 세상(世上)을 바라보며 자신과 교회,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책임을 자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회개하며 죄사함을 구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죄(罪)를 사하신다.
C. 고치심
셋째로, 하나님은 땅을 고치신다. 재앙을 만나 회개하고 간구하는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의 영혼을 고치신다. 그리고 땅을 고치신다.
여기서 “고칠지라”(epra)는 의사가 병자를 고칠 때 쓰는 동사다.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하)
망가진 땅과 타락한 인간은 같은 운명(運命)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혼의 생명(生命)을 잃어버림으로 곤고하고 땅은 물질의 생명을 상실함으로 황폐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죄(罪)를 해결하고 삶을 고치신다. 도덕적으로 무너진 사회를 바꾸심으로 다시 복(福)을 받게 하신다.
사람이 망가진 것은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땅이 망가진 것은 온전히 결실(結實)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땅이 황폐하게 된 위기(危機)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무너진 신앙적 삶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세속적 욕망(慾望)을 좇은 무질서한 삶에서 돌이켜 회개(悔改)하여야 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해야 한다.
마침내 황폐했던 땅은 고쳐질 것이며, 산과 들은 다시 아름다운 소산을 낼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목(和睦)을 누리게 될 것이다.
IV. 적용과 결론
큰 재앙을 통해서 자신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바르게 질서 지워졌던 삶이 무너진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신자는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이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7 2020. 9. 6 주일 낮 예배
< 성전에서 기도할 때 2 >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대하 7:16)
I. 본문해설
큰 재앙을 만났을 때, 시민(市民)의 한 사람으로 책임 소재를 묻고, 비판하고, 또 대책에 참여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信者)로서 할 일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올바르지 않은 관계(關係)를 고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여기서 죄에 대한 회개(悔改)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바로 죄(罪)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II. 성전에서 드린 기도
이런 큰 재앙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자신의 책임(責任)을 생각하는 것은 신앙(信仰)을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의 책임을 자각하며 겸비(謙卑)해져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용서(容恕)해 주시고 땅을 고쳐주시겠다는 것이다.
A. 성전을 택하심
하나님께서 장소로서의 성전(聖殿)을 선택하여 거룩하게 하신 것은 연약한 인간을 교육(敎育)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였음이라"(대하 7:16)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니 장소(場所)에 국한해서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을 위해 상징(象徵)을 베푸신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알게 하시고 그분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곳을 거룩한 장소(場所)로 지정하심은 그분이 구별된 존재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성전을 선택하신 이유였다.
성전(聖殿)으로 예표되던 신학적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러나 공동체적 모임으로서의 유형적(類型的) 교회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하나님은 보이는 교회 속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敎會)를 생각하게 하셨고, 거기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공동체(共同體)의 본분을 확인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그러나 교회에서 용서(容恕) 받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깨닫는다.
B. 하나님의 이름을 두심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다. 들리는 진리(眞理)와 보이는 진리를 사용하신다.
1. 이름을 두심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영원히 그 성전에 두셨다.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6 하)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실 때 성경(聖經)뿐만 아니라 피조물(被造物)들을 사용하신다. 성경 말씀과 하늘의 별들, 역사는 물론 인간의 양심과 좋고 나쁜 감정들을 통해서도 당신을 알리신다.
사람을 통해서 당신을 알리시는데 신자들의 인격(人格)과 삶(life)을 통하여 감화를 주시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경외(敬畏)하게 하심이다.
예수께서 세상 계실 때는 그분을 통해 앞으로 교회(敎會)가 어떤 공동체가 될지를 미리 보여주셨다면, 이제 승천(昇天)하신 후로는 생겨난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의 이름은 세상에 두셨다. 그분의 존재는 태양(太陽) 같아서 높아지고 낮아지실 수 없지만 그분의 이름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그런데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 것을 첫 번째 기도 제목으로 삼게 하셨다. 무엇 때문일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그분께 무슨 이득(利得)이라도 가져다준다는 말인가? 또 그분에게 우리를 향해 바라실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렇게 당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世上)에서 우리가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름을 사랑함
교회(敎會)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오늘날처럼 노골적으로 모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소수의 탓이라지만 공공의 적이 된 교회"
이런 상황 가운데서 신자(信者)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움과 분노를 정의(正義)로 위장하고 이웃을 원수처럼 여기는 마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名譽)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니 우리에게는 그분이 영광(榮光)을 받으시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고, 또한 그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처럼 가슴 아픈 때가 없다.
이런 재앙(災殃)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돌아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것만큼 그분의 이름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변증(辨證)하고 분투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나, 마음은 일체의 고요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께 쏟아 놓아야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드러날 부흥(復興)을 갈망하며 간구해야 한다. 모든 나라가 주의 영광(榮光)을 알도록.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사 64:1-2)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임재(臨齋)의 영광 앞에서 떨며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빌어야 한다.
C. 마음을 두신 곳
“하나님의 마음”이는 표현은 인간을 이해(理解)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heart)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은총적 구원 행동이 그분에게서 비롯된다.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6 하). 이 말씀에서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성전(聖殿)에 있을 것이라고 하심은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성도(聖徒)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love)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당신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사랑하신다는 확신(確信) 속에서 살아야 할 때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을 때 경건한 시인(詩人)은 눈물로 그 안타까움을 주님께 호소했다. 그 상황을 마음으로 더욱더 그분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기회로 삼았다.
하나님의 마음은 당신의 교회(敎會)에 있다. 사람들의 죄(罪)는 미워하시지만 교회와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소망을 주신다.
세간(世間)의 비난에 귀를 막지 말라. 그러나 세상의 비판과 칭찬에 쉽게 울고 가볍게 웃지도 말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라.
이 상황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버리신 까닭이 아니다. 그분의 눈과 마음은 사랑하는 교회(敎會)에 있다.
멸시 당하는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고통(苦痛)을 당하는 것이 그분의 이름과 상관없이 사는 편안한 삶 보다는 낫다.
믿음을 가지라. 불신(不信)의 시대에 더욱 하나님을 찾으라.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더욱 소망(所望)을 굳건히 하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하고 경건한 삶이 멸시 당하는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만물(萬物) 위에 계셔서 세상을 다스리심을 잊지 말라.
먼저 나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홀로 하늘 높이 계셔서 세상을 통치(統治)하시는 분을 바라보며 자신과 교회와 역사를 위해 기도(祈禱)해야 한다.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하)
큰 파도(波濤)에는 더 깊고 견고한 신앙(信仰)의 닻을 내려야 한다. 배가 클수록 더 큰 닻이 필요하다. 결코 흔들리지 말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8 2020. 9. 13 주일 낮 예배
<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단 9:17)
I. 본문해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시대에 황폐한 예루살렘(Jerusalem)이 회복될 것을 예레미야의 서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신자는 재앙(災殃)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과 공동체의 도덕적 책임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
II.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A. 주의 얼굴빛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고서 비로소 포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날이 가까운 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 25:11)
다니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어버리는 재앙을 만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였다. 그것은 죄(罪)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9:13)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나라가 멸망(滅亡)하였다는 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다.
신앙인은 종교적(宗敎的) 의미를 굳게 붙들고 현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단 9:16 하)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얼굴 앞에서 사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죄(罪)를 떠나고 적극적으로, 진리(眞理)를 깨달아야 한다.
그동안 죄와 쉽게 타협하고 신앙의 순수성(純粹性)을 잃어버린 것을 생각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를 위해 살지 않았던 것을 뉘우쳐야 한다.
다니엘에게 말씀 속에서 눈을 열어 주셨을 때 이스라엘 멸망의 이유를 깨달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약속을 보았다.
그렇게 깨닫기까지 다니엘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적국의 총리가 되었으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단 6:20)이었다.
그는 가장 비극적으로 나라가 멸망당하는 역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
사람을 원망하거나 남의 탓을 하지 말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지체들과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
이러한 상황에서 미움과 원한으로 이웃을 분열(分裂)하게 하지 말라. 그것은 신자가 할 일은 아니다. 일체의 관용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빌 4:5).
이 큰 재앙 아래서 사람들의 불안(不安)은 우울로, 우울은 분노로 바뀌어 가고 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은혜(恩惠)를 주시도록 간구하라.
B. 황폐한 성소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왔다. 그러나 경건한 백성들은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서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 137:2-4)
그때 성전(聖殿)은 황폐하였다. 화려하던 성전 건물은 훼파되었으며, 희생 제사는 그쳤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었다.
다니엘은 국무총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아무 흠과 허물이 없이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봉사했다(단 6:4). 그러나 그의 관심(關心)은 황폐한 예루살렘에 있었다.
세상의 현실 상태는 교회의 영적 상태의 반영이다. 예수님 시대 멸망한 예루살렘 한가운데는 영적으로 황폐한 성전(聖殿)이 있었고, 무너진 성전 한가운데는 영적으로 잠든 제사장과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교리와 도덕생활의 우위성을 강조했으나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임하자 역사의 물길에 휩쓸려 내려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 번영을 위해 힘써야 한다.
신자는 교회와 함께 역사라는 모닥불의 마지막 불씨다. 중요한 것은 나 한 사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재앙의 시기는 영적 변화의 기회가 된다.
참된 영적 변화는 요란한 행사(行事)나 인위적으로 일으키려는 계획(計劃)에 의해서 오지 않는다. 먼저 자신이 고요히 하나님 앞에 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서책을 통해 예루살렘의 회복의 약속(約束)을 알았을 때는 그가 소년 포로로 끌려온 지 약 60여년이 지난 때였다. 포로 귀환이 이루어질 날이 매우 가까운 때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끌어안고 황폐해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소수(小數)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
황폐한 성전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통해 희망의 역사를 일구어 가셨다.
C. 기도와 간구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리라는 놀라운 계시를 깨달은 다니엘이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단 9:17 상)
여기서 “기도(teppila)와 간구”(tahanun)라는 말이 나온다. 전자는 일반적 기도(祈禱) 행위를 가리키고, 후자는 특정적 애원(哀願) 행위를 뜻한다. 왜 이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을까?
다니엘은 항상 기도했다. 다리오 왕 시절, 사자 굴에 던져질 형벌을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는 평소처럼 기도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모든 신자가 어려움이 닥친다고 열렬히 간구하지는 않는다. 안일하게 살던 사람이 재앙을 만난다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평소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열렬히 간구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환경이 많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다니엘이 항상 기도했으나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은 예루살렘으로 모아졌다. 애원하는 간구가 불타올랐다.
이런 재앙의 때에 염려와 근심, 분노(忿怒)와 미움에 사로잡히지 말라.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혈기(血氣)와 절망에 마음을 내어주지 말라. 그래서 이런 때에 말씀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다니엘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뜨겁도록 타올랐을까? 그것은 성전의 재건이었다.
국제 정세를 잘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던 그가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獨立)까지 꿈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불타올랐다.
그들이 돌아가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황폐한 성전이 다시 복구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경건한 신앙(信仰)으로 타오르고 이방인(異邦人)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잠든 다수(多數)의 사람들이 아니라 깨어있는 소수(小數)를 사용하셔서 역사를 펼쳐 가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사람이 다수다.
하나님은 이런 재앙(災殃) 속에서 기도와 간구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9 2020. 9. 20 주일 낮 예배
< 주의 긍휼을 의지하라 >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단 9:18)
I. 본문해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상태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希望)을 발견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황폐한 예루살렘 성전(聖殿)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했다.
우리가 절망적 상황에서 무엇을 의지(依支)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II. 주의 긍휼을 의지하라
다니엘은 당시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는 재난에 처한 우리가 어떻게 의지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A. 들으소서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것을 재앙(災殃)으로 보았고 자신들의 죄(罪)와 불순종(不順從) 때문이라고 고백했다(단 9:14).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단 9:2).
그는 하나님께 빌었다. 이스라엘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상황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간구였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단 9:18 상)
“기도와 간구를 들어”달라는 기도(단 9:17)는 반복된다. 칠흑 같은 역사 속에서 말씀을 주셨으니, 그는 부르짖어야할 때임을 알았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실까?
그것은 당신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시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기도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시간(時間)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당신을 더욱 의지(依支)하게 하려 하심이다.
재난의 상황 속에서 기도하라.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기도하라. 말씀을 깨달으라.
기도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시련(試鍊)을 이기게 된다.
재난의 때에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찾으신다. 고난(苦難) 중에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나 이길 힘을 얻게 하신다. 하나님을 찾으라.
B. 보옵소서
다니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 이 상황을 보아 주시길 간구한다. 그분께 눈을 뜨시라고까지 아뢴다.
바벨론에 있었던 다니엘은 마치 자신이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같은 화법(話法)으로 하나님께 아뢴다.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었겠으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안타깝게 말한다.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단 9:18 상)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급히 구하는 기도다. 재앙(災殃)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희망을 잃고 신앙(信仰)이 무너진 것을 돌아보아 달라는 뜻이다.
“황폐한 상황”은 곧 예루살렘의 성읍과 파괴된 성전(聖殿)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암시한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靈魂)까지도 황폐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눈으로는 희망이 없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따라서 “보옵소서”는 단지 육신의 눈으로 보듯 겉모습만 보아 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 그들이 흘러갈 역사(歷史) 속까지 보아 달라는 간구(懇求)다. 모든 것을 아시는 눈으로 보아 주십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느 한 시점(時點)의 상태만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변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超越)해서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께 보아 달라고 애원(哀願)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간구할 수 있다. “우는 자가 아는 자다”
많은 시련이 계속되고 있다. 이때 깨어있어 자신과 교회의 영적인 필요(spiritual need)를 발견하라.
이웃을 돕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라.
C. 긍휼히 여기소서
최종적인 간구의 제목을 하나님께 아뢴다. 앞의 기도들은 이 간구를 위한 서론(序論)이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긍휼(矜恤)을 베풀어 달라는 부르짖음이었다.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단 9:18 하)
다니엘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것은 죄(罪)와 불순종(不順從)으로 나라가 망했으면서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고유하게 그분의 긍휼은 언약 백성과의 관계에서 빛난다.
언약은 계약(契約)이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關係)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자와 긍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언약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言約)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 거룩하게 살 책임(責任)이 있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모든 계명을 따르는 삶이다.
번영하던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亡)하고 포로로 끌려오는 재앙을 당하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 아닌가?
이제 책임은 떨어졌고 이스라엘은 재앙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희망은 공의(公義)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공의대로 한다면 그들은 모두 완전히 멸망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신의 간구가 공의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을 따른 것이라고 고백한다.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함이니이다”(단 9:18 하).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依存)이며 자기를 포기하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를 내려놓는 고백(告白)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회개하는 비참(悲慘)한 자를 당신의 자비로 가엾이 여기신다.
자신의 공로도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正義)도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만이 희망이었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의 자녀들을 차마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신앙(信仰)이다. 호세아 선지자에게도 말씀하셨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나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이 재앙적 상황에서 용서하시는 긍휼을 구하자.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이웃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자.
주의 얼굴을 찾을 때10 2020. 9. 27 주일 낮 예배
< 주 자신을 위하소서 >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단 9:19)
I. 본문해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포로 상태에서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달았다.
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점령되어 황폐한 예루살렘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옛날의 영광(榮光)과 지금의 수치를 대조했다. 이스라엘이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자기 죄처럼 회개(悔改)하게 되었다.
놀라운 응답이 주어질 기도를 끝내면서 그는 특별한 간구를 드린다.
II. 주 자신을 위하소서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였다.
A. 용서하소서
먼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容恕)해 주시도록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단 9:19)
“들으소서”라는 기도는 앞서 드린 기도(17절)의 반복이다. 그만큼 절박했던 그의 심정을 보여준다.
그 기도는 용서를 비는 기도였다. 용서(容恕)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해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주는 것”을 뜻한다.
이 행위가 하나님과 관련될 때는 단순한 용납과 덮어줌이 아니다.
죄 지은 자를 다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만 아니라,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것은 은혜(恩惠)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죄를 사(赦)해 주실 뿐 아니라 망가진 마음을 고치신다. 은혜를 주셔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신다.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용서를 빌게 된 것은 죄(罪) 때문이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대적(對敵)이다. 죄인은 용서하나 죄는 없애주신다. 어떻게 가능한가?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 사랑으로 바꾸신다. 마음에 감화 주신다. 대적하는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지난 죄에 대해 벌 받지 않게 해달라는 게 아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해 달라는 기도(祈禱)다.
하나님의 자녀는 고통(苦痛)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信仰)이다.
하나님을 생각하라. 기도하라. 우리와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길 빌라.
B. 행하소서
이어서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속히 행(行)하시길 간구한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단 9:19)
그러면 다니엘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속히 행하시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인가?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단 9:16)
그가 속히 행하시도록 간구한 것은 이스라엘(Israel)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 상황을 그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택(選擇)된 백성이니 그들의 수치가 곧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가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진실한 사랑은 그분의 이름에 대한 열정(熱情)으로써 표현된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평판이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시 89:16-17)
이스라엘이 이방(異邦)의 땅에서 수치를 받고 있으니 이는 나라를 잃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도 함께 수치를 당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속히 예루살렘을 재건(再建)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동시에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회복(恢復)시켜 달라는 기도였다.
인내(忍耐)하므로 오래 기다려야 할 기도도 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 이 기도는 시급히 응답(應答)되어야 할 기도였다. 하나님의 이름의 수치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모든 기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熱心)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인가? 그러면 그 이름이 업수이여김을 받는 때에 그런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영적 각성(靈的覺性)이다. 떠들썩하고 소란한 행사를 통해서 영적 각성과 부흥이 오는 게 아니다. 골방을 찾으라.
침잠하라. 고요히 자신에게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자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기도하자!
C. 위하소서
마지막으로, 다니엘은 하나님 자신을 위(爲)하시라는 기도를 드린다.
“…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의 영광(榮光)을 위하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통해 하나로 묶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 살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모든 열방(列邦)과 만민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하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명(召命)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질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복을 누린다.
고통받고 수치스러운 포로생활 속에서도 무엇이 먼저인지를 깨달았다. 당신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일하소서! 그는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알려지는 곳에서 이스라엘은 존귀하게 빛난다.
다니엘은 모욕하는 이방인들과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는 자로서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런 재난 속에서 끊임없는 염려(念慮)와 걱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며 용기(勇氣)를 가져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라. 감각을 소란케 하는 일에 절제하라. 흩어진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모으라.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기를 간구하라.
교회의 영적인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친히 일하시길 간절히 기도하자.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侮辱) 받는 상황이다. 그러나 혈기(血氣)에 치우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마귀(魔鬼) 보듯 하지 말라. 오히려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는 우리 마음 안에서 기회를 노리지 않는가?
먼저 일체 고요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 얼굴빛을 구하라. 모든 관용(寬容)과 사랑으로 섬기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11 2020. 10. 4 주일 낮 예배
< 기다리시는 하나님 >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호 5:15)
I. 본문해설
이때는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분열되고 약 150년이 흐른 때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유능한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아래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사회는 타락했다. 영적으로는 죽어 있었다. 세속적으로 열정적이고 신앙적으로는 냉담하여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았다(호 7:8).
호세아 선지자는 멸망을 앞둔 줄도 모르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심장으로 예언했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은 자기 힘을 믿었고 강대국을 의지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다(호 5:14).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져낼 자가 없을 것인데, 하나님은 도움을 끊고 그들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호 5:15 중)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당신과의 관계를 고칠 때까지 떠나 계신 채 기다리실 것을 예고하신다.
A. 죄를 뉘우칠 때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떠나가심은 언제까지인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꿀 때까지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호 5:15 상)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대신 회개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회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인의 몫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아가려는 자에게 돌이킬 힘을 주신다. 회개하려는 자에게 회개할 힘을 주신다.
그들은 세상 사랑에 눈이 가려져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음란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온갖 죄악과 부도덕을 낳았다.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호 5:7)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비참한 영적 상황이었다. 세속주의를 추구하면서 신앙을 버렸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을 위해 애끓는 심정으로 예언하고 있다.
비록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만나러 오고 있었으나 이미 떠나셨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호 5:6)
그럼에도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불붙는 사랑을 전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림으로 스스로 홀로 버려진 자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은 긴 침묵 속에서 기다리신다. 모든 도움이 끊어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보다 우상을 사랑하고 말씀을 떠난 것이다. 참된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자신들도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
변함없는 진리가 있다. 교만은 죄를 짓게 하고 회개는 죄를 떠나게 한다. 하나님보다 자기 생각이 낫다는 교만 때문에 죄짓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후회 속에서 회개하게 된다. 자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죄에 대한 회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한 것에 대한 후회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
죄를 뉘우치는 회개의 결국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B. 고난을 받을 때
세속적 번영 속에서 임박한 멸망을 깨닫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고서야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될 것이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령한 것을 아무리 잃어버려도 가슴 아픈 줄 모른다.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사랑하던 세상 것들을 잃어버릴 때 그들의 마음은 고통을 받는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신다.
그때 고통 속에서 비로소 사랑하던 것들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신다.
고난은 하나님의 메시지다. 번영에도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번영할 때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소명을 버리고, 고통 받을 때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더욱 비참해진다.
삶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라고 주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번영하게 되었다면 누가 그런 복을 주셨는가? 이스라엘은 그 복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이스라엘이 그렇게 음란하듯이 우상을 섬기고 살아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나? 말할 수 없는 고통뿐이었다.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 2:7)
자기 자녀가 고통 받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다. 고난은 죄 때문에 오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복수가 아니다.
우리에게 발견되기 위해 숨으시고 사랑하시기 위해 때리신다. 모두 우리가 당신께 돌아와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고난 속에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라. 현실 너머에 계셔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C.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그분 앞에 살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호 5:15 중)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간절히 찾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앞에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신자에게 세상이 커 보일 때 하나님은 작아 보이고 하나님이 커 보일 때 세상은 작게 보인다.
우리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시련의 폭풍과 평안의 잔잔한 바다를 지난다. 범사에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현실의 상황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 간절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들리는 음성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듯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본다.
재앙 속에서 당신만이 희망인 줄 알고 당신의 얼굴을 찾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고난이 우리를 버리신 증거일 수 없다.
어떤 상황을 맞게 되든지 믿음으로 살자. 시련과 고난도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아가려는 자들은 찾아오신다. 다시 은혜를 베푸신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12(끝) 2020. 10. 11 주일 낮 예배
< 한 사람이 불씨다 >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스 10:1)
I. 본문해설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전 537년경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첫 번째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다. 에스라는 그 후 약 80년 후 두 번째 포로귀환의 지도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연구하는 학사였다. 율법에 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사명(使命)을 받은 사람이었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았다(스 7:6).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감격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슬픈 소식이 보고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인의 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는다는 소식이었다(스 9:2).
더욱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다. 그런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滅亡)하였는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또 그런 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에스라는 말할 수 없는 충격 속에 낙심했다. 그러나 가장 비통한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 하나님은 그를 영적 각성과 부흥(復興)의 불씨로 삼으셨다.
II. 한 사람이 불씨다
A. 한 사람이 기도할 때
에스라는 학자였다.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세상 죄(罪)와는 담 쌓은 사람였다. 그러나 들려온 얘기는 참담한 현실였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스 9:3)
에스라는 절망했다. 어떻게 이루어진 포로귀환인가? 또 함께 돌아온 이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많은 고난을 헤치고 함께 돌아온 사람들이 아닌가?(스 1:5)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함께 겪으며 이겨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처음 은혜를 버리고 타락(墮落)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개인적인 회개를 끝낸 후 찾은 곳은 성전(聖殿)이었다. 그 문 앞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다. 생사를 건 기도였다.
위대한 부흥은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祈禱)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한 사람과 함께 시작된다.
에스라는 무슨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간절히 기도했다.
B. 한 사람이 자복할 때
에스라가 드린 기도는 평범한 간구가 아니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 자복했다. 자복은 자기 죄를 인정하며 주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그런데 그가 무슨 죄(罪)를 지었는가?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죄들 중 에스라가 지은 죄가 있는가? 그것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였다. 특히 지도자들이 범한 죄들이었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들의 죄를 자기 죄로 여겼으니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love)이 그들을 하나 되게 한 것이다. 그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기에 그들의 죄도 자기의 죄처럼 여겼던 것이다.
미움은 편을 가르고 사랑은 하나 되게 한다. 에스라는 진심(眞心)으로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자복하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좋은 것을 자기의 것 삼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남의 죄를 자기의 죄처럼 여기는 사람은 적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지체들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게 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위대한 부흥은 떠들썩한 행사(行事)를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복하여 진심으로 회개(悔改)할 때 일어난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모든 큰 불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큰 불이라도 불씨 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에스라의 자복(自服)은 이스라엘의 큰 죄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큰 부흥의 불을 일으킬 불씨가 되었다.
부흥의 시작은 언제나 한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자신의 불결(不潔)을 먼저 보고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그 후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죄가 자신의 죄로 여겨져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성령(聖靈)으로 감화시키셔서 눈물로 기도하게 하신다.
미움과 원망, 비난과 다툼을 버리라.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 주의 얼굴을 찾으라. 주께 먼저 자복하자!
C. 백성들이 통곡할 때
에스라는 백성을 야단치지도 않았다. 정죄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다.
먼저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위해 엎드렸을 뿐이다 그들의 죄가 곧 자기의 죄악(罪惡)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인위적인 계획과 강요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한 두 사람씩 모이기 시작했다. 많은 백성이 모여서 함께 회개하게 되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이것은 한 사람의 회개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影響力)을 보여 준다. 비록 타락했으나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love)이 남아있었다.
잠시 육체의 욕망과 세상 사랑이 압도했을 뿐이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마음이다.
에스라의 기도하는 모습이 그들의 이런 마음을 일깨웠다 거룩하고 죄 없는 지도자가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성전(聖殿) 앞에 엎드렸기 때문이다. 어떤 책망보다 마음을 크게 찔렀다.
에스라가 울며 기도하며 자복하는 광경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강퍅한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에스라가 엎드린 성전 앞에 모였다. 그리고 아버지 같은 지도자와 함께 회개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잠든 부흥이 현실에 대한 염려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이외에 해결(解決)하실 분이 없다는 절실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 회개는 큰 통곡(痛哭)의 기도였다.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에스라의 마음을 본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죄를 회개한 것이다.
이 일을 이룬 것은 에스라의 정죄와 비난이 아니었다. 자복하는 회개가 이 큰 역사를 이루게 했던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시대(時代)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 그러나 깨닫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부흥의 역사를 이루신다.
불신하는 세상에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보여주길 원하신다. 죄를 미워하고 거룩함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하신다.
미움과 원망, 끊임없는 비난과 욕설을 거두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한 사람이 되라!
주의 얼굴을 찾을 때 1 (2020.07.26._주일오전)
1. 내 얼굴을 찾으라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7-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다윗이 큰 고난(苦難)을 당할 때에 쓴 탄원시입니다. 아마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고통을 겪던 때에 지은 시였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 시(時)는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고백입니다(시 27:1). 이 고백은 고난(苦難) 속에서도 오직 진리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지(依支)의 표현인 동시에 그러한 처지에서 자신이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신앙(信仰)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특별한 고난을 당하는 때가 바로 하나님을 특별히 찾아야 할 때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II. 내 얼굴을 찾으라
아마 구약성경에서 가장 신비로운 단어 20개를 뽑는다면 그중의 하나 안에 들어갈 단어가 얼굴, 히브리어로 ‘파님(panim)'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복수로 쓰여지는데 이것은 여러 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비한 것들을 복수로 쓰는 히브리 사람들의 관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얼굴은 개별적인 인격체에 가장 고유한 표지(標識)입니다. 얼굴(face)은 그의 마음과 영혼(靈魂), 정신(情神)을 반영합니다. 악인은 천(千)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의인(義人)은 단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기 때문에 그때그때에 다른 얼굴을 갖지만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겉과 속이 한결같기 때문에 단 하나의 얼굴을 갖습니다. 이 얼굴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처럼 물질에 속한 분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코가 있고, 귀가 있고, 팔이 있고, 다리가 있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임재(臨齋)를 뜻하는 것이며 그 얼굴을 뵙는 것은 탁월한 그분과의 친교(親交) 속에 들어가는 경험이라고 시편 31편 16절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목적(目的)으로 당신의 얼굴을 향하시는데 시편 34편 16절에 의하면 죄인에게 벌(罰)을 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의 얼굴을 향하시고, 민수기 6장 25절에 의하면 의인에게 복(福)을 주시기 위해서 얼굴을 그들에게로 향하시는 것입니다.
A. 주의 얼굴을 찾음
오늘 읽은 이 두절의 시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주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苦難)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인은 고난을 당할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8절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인이 받은 말씀이기는 하지만 같은 말씀이 이미 오래전에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탁월한 통찰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고하였습니다. 지금은 불타는 신앙으로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지만 오랜 세월 그들을 목양하며 터득했던 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예고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그들의 신앙이 해이해져서 결국 방종하게 될 터인데,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실 것이고 그 징계(懲戒)를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찾게 될 것도 예고했습니다. 신명기 5장 29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이 말씀이 시인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만큼 인간이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기가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시련을 겪고 염려가 많을 때에는 근심과 걱정,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던 마음이 분산(分散)되기에 십상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런 혼란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만한 명정한 지혜(知慧)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육체는 시간(時間)에 속한 것으로 생명을 지탱하고, 영혼은 영원(永遠)에 속한 것으로 그 생명을 지탱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염려가 가득 차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 마음은 정처 없는 혼란(混亂)에 빠지고, 영혼의 양식의 공급은 중단되기 쉬운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당신을 찾으라고 시인에게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인(時人)은 바로 그 고난을 당하는 때에 자기가 이 상황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대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아야 할 때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시편 27편 8절 하반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너는 나를 찾으라 말씀하셨고 시인은 마음으로 응답하기를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決心)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시인은 고난 가운데서 환경이 주는 염려와 근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대신 오직 온 마음(heart)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기로 작정(作定)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마음은 영혼의 기능(技能)입니다. 우리의 눈, 코, 귀, 그리고 입, 살갗 등을 통해서 감각한 것들을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곳이 마음입니다. 때로는 비록 감각으로는 만져지는 것이 없어도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창조적인 상상력(想像力)을 발휘하는 곳이 마음입니다. 삶의 변화는 마음에서 옵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을지라도 마음으로 응답(應答)하지 않는다면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의 신체(身體)나 영혼(靈魂)을 돌이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마음을 돌이키라고, 너희의 마음을 나에게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서 14장 6절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福音)을 듣고 삶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마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고 강조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무지한 제자들에게 어떻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지를 가르치시면서 그 나라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나라임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실하기 전에 인내가 있었고, 인내하기 전에 지키는 일이 있었고, 그 말씀을 지키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된 그 마음이 변화된 삶의 열매를 맺고 인격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것은 집중된 정신으로 마음을 목표에 고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매우 매우 중요한 집문서나 서류, 혹은 도장 심지어는 여러분들의 지갑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간절히 찾아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사물을 보든지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정신에 집중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지금은 있지도 않은 그것에 마음이 고정되어 다른 것들의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됩니다. 그것이 바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영국에 한 신사가 컴퓨터로 작업을 많이 하다가 컴퓨터가 신통치 않으니까 그냥 그 속에서 저장장치를 떼어서 새것으로 바꾸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한 두 달 전의 일이었답니다. 런던에 근무하는 청소부들이 당연히 집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수거해가서 묻었고 쓰레기장에 버리고, 그 쓰레기 위에 다시 쓰레기가 쌓이고, 쓰레기 위에 쓰레기가 쌓이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만히 보니까 비트코인 값이 하늘로 치솟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저장장치 속에 자기가 사놨던 비트코인이 1,200억으로 올랐습니다. 여러분은 기분이 어떨까요? 그 다음에 저장장치를 어떻게 할까요?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겠죠. 그래서 시청하고 의논을 해서 그것을 찾아보겠다고 했더니 너무 벌써 두 달이나 지나서 저 깊이 묻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끄집어낼 때 일어날 환경적인 공해를 생각할 때 거기서는 그것을 찾아줄 수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그것을 찾아주면 10%나 20%를 주겠다고 그랬습니다. 나 같으면 절반을 주겠다고 그랬을 텐데 결국은 못 찾았습니다. 얼마나 찾고 싶겠어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을 얼마나 후회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찾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들로부터 마음을 떼어 하나님께로 향(向)해야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고난(苦難)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돌이키게 하십니다. 고난 자체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시련(試鍊)을 만날 때에 어떤 사람은 믿음을 버리고, 어떤 사람은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참모습을 마주 보게 됩니다. 신앙은 해석(解釋)을 하는 힘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겪는 모든 행복과 불행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합니다. 많이 복을 주시면 사명을 생각하고, 고난을 만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돌아보며 이 고난을 통해 바뀌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믿음은 상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상황이 편안해지면 믿음이 없어 유혹에 마음이 나뉘게 되고, 고통을 받으면서 믿음이 없으면 염려(念慮) 속에 정신(情神)이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육신의 일로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생사 간에 행복과 불행 간에 붙들고 계신 주관자(主管者)이신 하나님께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간절히 찾으십시오. 그러면 고난(苦難)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노라고 고백을 할 수 있으리만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소리로 부르짖음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시인은 고난 중에 소리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27편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간절함이 없으면서 소리만 내어 부르짖는 것은 형식적(形式的)인 기도일 뿐입니다. 소리로는 잠잠하나 정으로 소리치는 기도를 정은 잠잠하나 입으로 소리치는 기도보다 하나님이 더 귀를 기울이십니다. 마음에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 주목(注目)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의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정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마음이 회개(悔改)로 깨어질 때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love)할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경건이 있고, 그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아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간구의 정(情)을 마음이 도저히 이기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생 말년에 지나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과오(過誤)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는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노년에 하나님 이외에 자기를 가엾이 여겨주신 분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39편 12절은 지금 읽어도 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시인의 마음이 물처럼 넘쳐서 흘러내리기까지 쏟아지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마음에는 자기를 의지하는 생각이 없으니 하나님을 향한 의존(依存)의 감정이 극도에 도달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네’라고 한 찬송 바로 그 마음이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에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추(醜)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를 아름답게(美) 만듭니다. 시인이 정으로 소리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간절히 부르짖은 것은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하는 바는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矜恤)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시 27:7).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비난하고, 책망하고, 자신에게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이제껏 자기가 의지하며 살아온 하나님은 자기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누구나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는 자의 간절함은 거룩한 정서(holy affection)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거룩한 정서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恩惠)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간절한 기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풍부한 기도는 거룩한 정서에서 나오며 그러한 정서는 신령한 은혜를 받음으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KNJ) 돌덩어리와 같이 움직이지 않던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으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냉담했던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 뜨거운 기도가 솟구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써는 응답받을 자격이 없지만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응답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사람들마다 근심이 가득하고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염려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면 사업하는 사람대로 그리고 직장 다니는 사람은 직장 다니는 사람대로, 목회하는 사람은 목회하는 사람대로 왜냐하면 앞날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인할 수 없으리만치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해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지 낙심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우리 앞에 절망스러운 상황을 보고 시련을 만나도 하나님께 마음을 쏟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그분이 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록 갈 길을 모르고 내 앞에 어떤 삶이 전개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번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렇게 전개되어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믿음의 필요성은 증가하였고, 우리는 그 믿음을 따라 삶으로 삶의 기적을 보면서 우리의 생명을 이어왔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낙심하며 근심해야 합니까? 그 시간에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읍시다. 그분께 소리 내어 부르짖으십니다. 그러면 바로 비밀스러운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고난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응답을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시인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리고 자기를 버리지 않으신 주님이 신비한 섭리(攝理) 속에서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자기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실 줄을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낙심하던 그의 마음은 거룩한 정서(情緖)로 넘쳤고, 영혼의 시선(視線)은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었으니 그는 악인을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대신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신자는 고난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을 뵈올 때까지 무엇으로도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찾고자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찾을 힘을 주시고, 그리고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는 자를 하나님은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의 놀라운 특권(特權)은 이것이니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생사 간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 하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이 시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리라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니 시련 속에서 낙담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기회로 삼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2 (2020.08.02._주일오전)
2. 고난 받는 자의 기도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9-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제27편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아멘” 시인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감상이 아니었으니 온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찾기로 뜻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그의 마음은 거룩한 정에 벅차서 억제할 수 없는 정서로 하나님을 향해 “소리 내어 부르짖”게 되었던 것입니다(시 27:8). 여기서 우리는 고난 당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하는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II. 고난 받는 자의 기도
오늘 이 두 절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고난을 받는 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저울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달아 보십니다. 우리가 체중계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우리의 몸무게가 얼마인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처럼 고난이라는 저울에 달아봄으로써 우리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完全)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그것도 그 당시에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또, 누군가가 어느 순간에 그 완전함에 도달했다 하고 친들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의 신앙의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당신만을 의지(依支)하고 믿으며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A. 숨기지 마소서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간절한 세 가지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털어놓습니다. 첫째는 숨기지 마소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고난당하고 있는 자신에게서 숨기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애원합니다. 본문 9절 상 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숨기다 히브리어로 ‘싸탈’(satal)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시편 31장 2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무엇인가를 감추는 동작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신자가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의 단절이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불쾌감의 표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 속에서 신자가 누릴 최고의 행복 중 최고의 지복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5:8). 신자의 큰 행복은 하나님을 지성으로 알고 마음으로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당신의 얼굴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 인간에게서 자기를 숨기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로서 당신을 보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가능성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겠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당신 자신이 숨으신다기 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세상물정과 욕정 혹은 불신앙에 얼룩져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즉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보지 못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셨다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신앙을 떠나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 18장 21절에서 이러한 무지는 곧 불의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무지는 곧 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런 표현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숨기신다고 하는 표현은 바로 우리를 우리의 눈높이에서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교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경외하는 자에게는 치밀함을 보이시고, 범죄한 자에게는 진노를 보이시고, 깨닫는 자에게는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시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 무지를 미워하고,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실 때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밧세바의 사건을 통해서 아주 통절하게 경험하였습니다. 시편 51편 3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죄가 살아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 나온 그러한 고립감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던 그의 마음에는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졌고, 자기에게 기름부음 받던 날 주신 그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시편 51편 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렸으나 열납되지 않았고,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를 지었던 시인의 입술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숨기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것이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이 아니라 오히려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제일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영적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기쁨,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행복이 있을 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시련들을 능히 감당했으며 고난의 아픈 순간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급기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죄의 미끄러지는 자들이 되지 마십시오.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신앙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달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얼굴을 숨기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숨으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과 하와처럼 숨은 것이니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다시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버리지 마소서
두 번째는 ‘버리지 마소서’입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고립감을 느끼며 제발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눈물 어린 탄원(歎願)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편 27편 구간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마음이 어두워 죄에 빠졌고, 불순종했을지라도 결국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은 이 세상에 하나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라는 이 이름은 원래 그 뜻이 사랑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유다 지파에 속한 아버지 2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기하게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성경이 일체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이 잃어버렸고, 아버지가 계셨는데 아버지는 형들을 편애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없는 아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라고 가슴 아픈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어린 나이에 부모 모두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세계입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은 버리는 부모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아이에게 안겨줍니다. 다윗은 그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뼛속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무섭고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던 시편 51편에서 바로 이 경험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고난을 겪고 있는 오늘 시편 27편 본문의 시절에서도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을 하나님께 버림받는 경험에 투사함으로써 그런 일이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이 다윗의 기도는 버림받아 본 사람으로서의 버림받음의 의미를 아는 자의 기도였습니다. 사랑받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 경험했고,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경험한 것만큼 주님께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기억과 병합하여 그는 절실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버리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분의 신실하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신명기 4장 31절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만고풍상을 겪으며 애굽의 왕궁에 살았던 왕족의 신분에서 지명 수배된 범죄자로, 그리고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무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로 40여 년의 세월을 살면서 모든 고난을 겪었던 모세가 생애 말년의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슴 저미는 슬픔을 가지고 고백을 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느리라”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난으로 얼룩진 그의 일생을 통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서 뼛속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유언처럼 남기는 이 설교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신앙을 버리지 말기를 눈물로 애원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그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은 두 당사자가 있는 관계이며 당사자는 의무와 함께 특권을 동시에 갖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는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새사람 되어가는 것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음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지난날 언젠가 주님을 깊이 만났다는 이유 때문에 오늘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품을 떠나는 사람들을 곤고하게 내버려 두심으로써 당신 품 안에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시련 속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그를 하나님 당신 품으로 다시 부르시기 위해서 그가 괴로움을 당하게끔 내버려 두시는 것이니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아픔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 아프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 받을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비록 범죄 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전부임을 깨달았으니 지금 사방을 돌아보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이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만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면 자기가 어떤 상황을 만나도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면 누가 우리를 당신의 품에서 빼앗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인은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는 극심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원수에 대한 복수와 이 세상에 호화로운 삶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멀어지려 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그분께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시련 속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은혜 생활에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영접하소서
마지막 세 번째는 ‘영접하소서’입니다. 시인은 고난의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영접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고난 속에서 자기가 의지해야 할 하나님 한 분께 의존하도록 스스로를 격려하였습니다. 본문 27장 10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내가 나의 부모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으니 이 세상에 있는 나의 원수들에게 버림을 받고 배신을 당한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실 것이니 내 부모는 버렸어도 하나님은 나를 맡아주실 것입니다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여기서 ‘버렸으나’라고 번역된 동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azab)인데 이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이 창세기 2장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할 때의 ‘떠나다’ 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이 고백은 평소 그가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어미와 아비는 그를 떠났고, 그는 버려졌고, 그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지혜로운 성군이었으며, 용맹스러운 장군이었으며 그리고 온 하늘과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실함을 볼 수 있었던 철학자였으며, 예언자였으며, 그리고 그렇게 굳건한 삶을 살면서도 아주 세미한 것에 떨리듯 움직이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리듯이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과 이 세계와 인간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도대체 그가 안 가진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부를 누렸고,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켜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박복했던 것이 두 가지가 있었으니 부모의 복과 아내의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그 박복한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붙들고 의지하며 이 세상 사랑에 푹 빠져 버리지 않게 하는 은혜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마음으로부터 부모에게서 느끼는 애틋함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모로부터는 상처만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 공로로 통치자였던 사울로부터 딸 미갈을 아내로 받는 상급을 얻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27절의 증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아내인 그녀는 오벳에돔가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춤추며 즐거워하는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함께 사는 아내였으나 그는 남편의 신앙의 생활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사무엘하 6장 16절에 드러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시련과 고난 속에서 징계를 받으면서 그는 오히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도달할 수 없었을 높은 경지의 영적 세계를 보게 되고, 거기서 크는 온 땅과 하늘 위에 자기가 의지하고 사랑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시인은 믿었습니다. 비록 무슨 이유 때문인지 부모는 천륜을 거스르고 자신을 버렸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고 책임져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혹독한 고난을 견디며 모든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의 영혼의 눈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고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왕이었으나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되었습니다. 신실한 신하들이 그의 곁에 왜 없었겠으며 배신한 이들이 있었으나 끝까지 그의 편이 되어 그의 곁에 머물러 있었던 좋은 신하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사랑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을 의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의지할 분은 오직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형통하면 세상 사랑으로 찢어지고, 고난을 받으면 근심과 염려로 나뉘어집니다. 마치 하나님을 안 믿기 위해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세상 사랑으로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믿었던 세상으로부터 배신도 당하게 하시고,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게도 하시고, 혼자가 아닌 줄 알았던 자기가 사실은 상천하지에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이 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모자라겠습니까?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어찌 완전하신 하나님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큰 벌을 주셔서 고난과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당신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은 사랑을 우리보고 바치라고 그렇게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을 떠나 다른 것을 사랑하며 사는 삶이 마지막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불행과 고통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 받는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우리의 마음을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된 사람들은 모두 알 것입니다. 아이를 웃는 낯으로 교육해야 할 때가 있고, 엄하게 꾸짖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징계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일어나는 모습의 변화일뿐 자식을 진심으로 미워한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불완전한 인간 부모가 그렇게 자식을 향해 한결같이 사랑을 베푼다면 완전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께 돌아오라고 때로는 고난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멀리 멀리 떠났던 길에서 돌이켜 당신에게로 돌아와 참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이게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세상은 여러분들을 주님의 품에서 꾀어내지만 그러나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까지만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유혹하는 것이고, 주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 세상은 여지없이 여러분들을 버리시나니 여러분들은 세상에 속한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니 시련 중에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영접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적이 있었습니까? 만약에 그런 때가 있다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당신의 품을 멀리멀리 떠났던 시간이었습니다.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버림 받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맡아 주십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얼굴을 찾으라고 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물질적인 존재로 계시지 않기에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지만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서는 우리 앞에 현전하는 어떤 사물보다도 더 분명하게 계시니 사물은 우리의 감각의 눈으로 보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오성으로 보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심에 후회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간혹 선하지 않은 부모는 가엾은 자기의 자녀들을 버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를 버리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무한하게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그리고 그 속에서 찌들어가는 마음을 내려놓고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가장 극심한 인생의 고난의 때에 오히려 시인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그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께 돌아가셔서 참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어린아이의 기도를 들으셔서 어른에게는 보여 주지 않으시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이시나니 인간의 영혼은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안에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은밀한 시간에 은밀히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그분의 얼굴을 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3 (2020.08.09._주일오전)
3.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7-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시의 표제에는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성전의 낙성식 때 부르도록 지어진 시라는 뜻입니다. 낙성식은 요즘 말로 하면 준공식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다윗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성전을 지어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성전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 아들에게로 사명은 물려졌고,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은 즉위 후 4년에 시작되어 7년간의 공사 끝에 즉위 11년에 완공되었다고 열왕기상 6장 1절과 38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성전을 짓기 위해 많은 보물과 자재들을 모으고 완벽한 준비를 갖춘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성전에 대한 내용보다는 자신이 지난 생애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내용들로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다윗은 미래에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의 그 감격스러운 날에 성도들이 모여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에 주목하지 말고, 이전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붙드셨고, 은혜를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는지를 찬송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 시인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은 경험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
그는 주의 얼굴을 가리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솔로몬의 완공을 바라보며 감격하고 있었으니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은혜의 감격 속에서 과거에 있었던 자신의 영적 침체의 경험을 회상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죽을 것처럼 영혼이 침체되어 있었던 그때 그는 자기같이 이 무력한 인간을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경험했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성전도 하나님 앞에 받쳐지게 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영적 침체의 경험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A. 영적 침체의 경험
시인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면서 삶과 죽음의 수많은 고비를 넘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얼굴을 가리고 계시는 영혼의 침체기였습니다. 영적 침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영혼의 활기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신자의 마음은 굳어지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과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딱딱한 마음이 되고, 세상 유혹과 욕망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이니 진리보다는 세상의 유혹이 심겨지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왜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는가? 현상적으로는 아주 다양한 원인들이 있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죄와 무지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지는 거의 죄입니다. 영혼의 침체는 영적 생명이 약화되는 것인데 이로써 죄를 이기고 은혜의 능력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독특한 중요한 특징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다윗은 시련 가운데서도 자신이 산과 같이 굳게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자신의 그러한 상태가 영구히 지속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그렇게 서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그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그러자 산같이 굳건해 보이던 마음의 평안은 사라졌고, 영혼은 근심에 휩싸이게 되었고, 삶 전체에 혼란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시인은 그 굳건함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자기의 믿음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깨달은 바는 이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붙들고 계시는 동안에만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그 은혜 속에서 비로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고,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근심이라는 마음의 현상은 사람의 정신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게 만들어 안정감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두려움과 근심에 휩싸이게 되면 마음은 어디다 두어야 할지 점철을 못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제껏 자신의 신앙이 견고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자신이 붙들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 모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진 외연이라면 그 외연의 내포의 한 중심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영적 생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도 한때는 추루했던 적이 있었고, 지금 추루한 삶을 사는 사람도 언젠가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에게서 위대하고 훌륭한 특성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진 사람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당신의 자녀들이 미끄러져 영혼의 침체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매일 뵈오며 사는 그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하셔서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런 영혼의 침체에 빠질 때 신앙의 기쁨은 사라지고 마음은 굳어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신자는 세상의 유혹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게 되고, 쉽게 정욕에 불복하게 되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 안에 자기가 원하는 자신과 원하지 않는 자신이 함께 있어 서로 쌈질을 하며 서로 괴롭히나니 이로써 평소에 하나님의 얼굴을 배울 때는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모순율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취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마귀는 바로 우리가 이런 상태 속에서 일생을 지리멸렬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을 떠날 수 있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 그는 살아있는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어떻게 정확하게 의식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찾을 수 있다는 사람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무저갱의 맨 밑바닥을 볼 수 있다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 있을 때 그때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보게 되고, 그때 우리는 찢어진 자아가 아니라 하나가 된 자아를 만나게 됩니다. 모든 평안이 자아가 찢어지지 않고 통일이 된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여러분들이 자신을 따라서 살 수 없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고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지 사람이 자기를 떠날 수 없는 그 사람이 자기를 떠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전에 체험한 진리였지만 지금은 그 진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예전에 알고 있었던 길이지만 그 길은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살았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다중의 자기가 되어버리고, 시간 속에서 산산이 찢겨버린 자아 속에서 온갖 모순들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영혼의 침체입니다. 이런 삶으로써는 인간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힘 있게 활기차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는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먼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그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침체기를 지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해답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B. 영적 침체에서 벗어남
두 번째 그의 경험은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일평생 하나님을 친밀히 하며 살아왔으나 자기가 회상하고 있는 이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굴을 가리시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회상하고 있는 시점이 그의 인생 중 어느 시점이었는지를 우리들이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영혼의 극도의 침체기를 지났던 때를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성전의 낙성식에서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이 극심한 침체 가운데서 건져주셨던 분이시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홀로 낙심함
이 침체 속에서 그가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홀로 낙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낙심하였으니 이는 그의 믿음 없음과 죄, 그리고 무지와 불순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다윗에게 아마도 죽었어도 여러 번 죽어야 마땅했던 위기를 지났지만 살아날 수 있었던 시인에게 가장 큰 자산은 언제든지 하나님 얼굴을 뵈올 수 있는 영적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탄할 때나 혹은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을 다닐 때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나 위기를 만났을 때나 고통을 받을 때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는 영적인 친밀한 생활을 잃어버리고 나서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러한 심경을 본문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자 그는 영혼의 침체 속에서 마치 무덤에 내려가는 것 같은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구약에서 무덤은 모든 희망과 생기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상징어입니다. 피라는 말이 나오는데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가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라고 한 것은 영혼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침체의 상태에서 내 육체가 살아있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문제는 물질이나 이 세상에 있는 물질적인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절망적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토가 어찌 주를 찬송하리이까 했으니 이 진토는 티끌 먼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혼이 무가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도 없고, 진리를 외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혹하리만치 지독한 침체를 겪으면서 그는 자신의 삶의 이유를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구절 하반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그의 사명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위에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모든 언어와 인격을 통해서 모든 삶을 걸고 그렇게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므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이나 하듯이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면서 사는 은혜의 시기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시편 40편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자신 안에서 그의 의가 이루어지고 자신이 사는 이웃들과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외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심에 있어서 이렇게 성실하시고 그리고 날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강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한 사랑을 보여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와 살기를 원하였고,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이 진리로 돌아와 빛 가운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위협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에 대한 증거를 감추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는 단지 생물적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결국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자신도 의미 있는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결국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사는 행복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나니, 이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모든 삶은 껍질뿐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래전 나온 캐리비안 베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거기서 생명이 없지만 살아있는 좀비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하나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누가 그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종종 영혼의 침체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가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비로소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하나님 얼굴빛으로 멀어졌던 자신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 홀로 있는 깊은 괴로움 속에서 좌절하고 낙심함으로 죄에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 주께 부르짖음
그는 거기서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간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며 부르짖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이 깊은 영혼의 침체에서 건져주시기를 부르짖고 간구하였다고 본문 8절이 증언합니다. 기도가 무엇일까요? 기도는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께 온전히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안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바로 그런 안정을 갈구하는 영혼의 움직임이 언어와 말로 표출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향해 얼굴을 왜 가리셨습니까? 하나님의 변덕 때문이었습니까? 그분이 변심하셨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종종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상대방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서 친절하게 대하던 우리들을 차갑게 대할 수 있습니다. 변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심하는 분이 아니시니 이는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시지만 시인이 자신의 죄와 무지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무지와 미끄러짐, 불순종과 죄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심과 같은 효과를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재물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얼굴을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그의 영혼에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25편 1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때에는 마치 우리 자신의 믿음 덕분에 그렇게 서 있는 줄을 알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신 힘이 아니라 자기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천사의 말을 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심오한 비밀을 터득하고, 온갖 학문을 습득했다 할지라도 내 영혼을 지금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우리들인데도 우리의 잘못으로 영적인 침체에 떨어지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하십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늘 숨 쉬고 사는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건강의 남아있고 마실 수 있는 공기가 있는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그러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가혹한 고통을 겪을 때 그때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해주신 은혜, 그리고 주님이 자기를 향해 보여주시는 그 친밀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영혼의 침체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의존하던 교만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으로 바뀌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시작점인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책이면서도 기독교인에게 가장 읽히지 않았던 책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술한 삼위일체입니다. 그는 이 책을 앞머리에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젊었을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늙어서야 마치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을 쏟아부은 대작이었습니다. 그 작품에서 나오는 다음의 말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이 주제에 대한 판결문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삼위일체 15권 17장 31절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읽는 곳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성령이 주어질 때, 그 사람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신다. 이는 성령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간은 하나님께고부터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작점을 갖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죄인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기쁨을 잃어버렸고, 그러자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자처럼 상실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산과 비빈과 처첩들, 왕국과 권세와 그 많은 왕의 영광도 자신의 영혼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옴으로써만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얼굴을 떠나서는 결코 그는 행복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무지와 죄 때문에 영혼의 침체에 빠졌고, 그것을 가혹하였으나 그는 그 고통을 겪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는다면 결코 자신을 외면하시지 안 하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키에르 케고어가 말했던 것처럼 신앙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내 인생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오직 그분이 나를 향해 얼굴빛을 비추심으로써만 내 영혼이 진리로 돌아갈 수 있고, 그 길로 다시 걸을 수 있고, 그렇게 걸을 수 있는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에서 멀어질수록 아주 추해지게 되고, 그 하나님을 절실하게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어디서 올까요? 우리의 소망이 어디서 올까요? 아무리 누려도 해가 되지 않는 즐거움이 어디서 올까요?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한 인생의 의미는 길이에 달려 있지 않으며 육신의 생명의 길이가 긴 것에 의해서 의미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니 오래 사는 모든 사람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짧게 살고 죽는 사람이 의미가 적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도 사랑스러운 두 성도를 하나님께 보내고, 그리고 그들을 요단강 건너편으로 놓아 주었습니다. 제 눈에는 아직까지도 젊을 때 열린 교회를 찾았던 기억이 또렷한데 세상을 뒤로하고 강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습니까? 어렸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늙은이가 되고, 젊은 사람은 늙고 늙은 사람은 죽습니다. 여러분도 곧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침체 속에서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사는 그 삶이 우리의 인생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겨우 그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의미 있는 삶, 더 행복한 삶,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서 그분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모든 거목도 묘목이었던 때가 있고, 거대한 산맥을 몇 달 동안 불태우는 큰불도 불씨였던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노라면 어느 순간에 내 바깥에서 어떤 뜻밖의 행운이 주어져서 내 인생이 바뀌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이 아직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눈보라가 치고 추위를 견딜 수 없는 한 사람이 바람 부는 벌판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마른 나뭇잎을 펼쳐놓고, 부싯돌을 두드리는 그 불빛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가족과 함께 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돌멩이를 부딪치며 부싯돌에서 불씨를 만들고자 합니다.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길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져 있으면 책을 읽으십시오. 책도 어려우면 영화를 보십시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영화, 혹은 남의 이야기라도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따뜻해지면 어디서든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세상에 있는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고, 그런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당신의 얼굴빛을 내게 비추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처한 슬프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치 그분이 모르시는 것처럼 그분의 귀에다 대고 여러분들의 사정을 아뢰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동안 하나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그 부싯돌에서 불꽃이 마른 나뭇잎에 떨어져 불이 붙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의 생활이 있습니까? 한 주간 동안 여러분들이 기도 속에 흘린 눈물이 있습니까? 정말 나는 내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을 쏟아놓았다고 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많은 것을 누리며 욕망을 채움으로써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생명을 누림으로써만 행복해지고 우리의 삶의 의미도 거기에서 발견됩니다. 영혼이 침체에 빠졌을 때 시인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였다고 8절이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더 이상 신앙에서 미끄러지지 않게끔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이 있는 것들로 산만해지고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로 집중하십시오. 오락과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며 정신을 낭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기력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뀔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중요한 내 삶의 급선무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도해 응답하실 것이고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4 (2020.08.16._주일오전)
4. 주의 얼굴을 찾는 자의 기도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시 27: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련과 고난 속에서 시인은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신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버렸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을 영접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영접해 주신다는 이 말은 원래의 뜻이 떠맡는다는 뜻이 있으니 육신의 부모는 자기가 싫어서 떠맡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떠맡아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의 얼굴을 찾는 자가 무엇을 기도해야될지를 오늘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주의 얼굴을 가리실 때
시인은 자기를 둘러싼 악인들로 인해 요동치던 마음의 분여함을 가라앉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소 평안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꼭 필요한 바에 대해서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합니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꼭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본문 11절은 그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A. 가르치소서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 앞에 “가르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위에 도(道)를 가르쳐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깨달은 것은 자신이 여전히 무지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평안할 때는 몰랐지만 시련과 고난의 때에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 쌓일 때에 그때 그는 혼란스러워졌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에 대한 가르침을 간구하였습니다.
11절 상반 절에서 그 첫 번째 기도는 다음과 같이 소개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가르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도”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다르케카’(darkeka) 인데 이를 직역하면 ‘너의 길’ 혹은 ‘당신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도란 무엇일까요? 원래 길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도 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면에서 숙고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이 말이 하나님과 관련될 때에는 이 도는 세계와 인류와 인간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흠 없는 의지(will)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죠. 이 하나님의 의지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이 도가 인간에게 관련될 때에는 이 도는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도리(道理)입니다. 이 도리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믿을 도리와 살아갈 도리입니다. 결국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규정해 주는 것이 도입니다. 이 도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도를 깨달아야 하고, 또 그 도를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셋째로 이 도라는 말이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는 이 도는 곧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도구이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신 모든 것 자체가 바로 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진리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이치에 대해서 예수님은 친히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주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주의 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기 때문에 시편 25편 4절에서 그 도를 보여 달라고 기도했고, 86편 11절에서는 주의 도를 자기에게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또 119편 3절에서는 말씀을 지키고 여호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복되어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도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그것을 따라서 믿고 살아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도 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도 행복을 누릴 수가 있으니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도에서 벗어나 살고자 하는 데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17장 6절과 21장 25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도가 없기 때문에 결국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길이 되어 스스로 그것을 도라고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에게 인생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가 좋고 유익한 것이지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그 도가 아닙니다.
불행한 모든 사람 중 아무도 스스로 불행해지기 원해서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해진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행복해지려다가 불행하게 된 것이니 도가 없이 행복을 찾을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행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원해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한두 가지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걸 꼭 행해야지만 행복할 줄 알았고 그렇게 선택해야지만 자기가 영원히 즐거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결국 도가 없을 때 인간은 자기 욕심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며 참 도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고야 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래도 보편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자신의 이성입니다. 그러나 이성 그 자체는 진리가 될 수 없고 진리의 원천도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에게 결코 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인간의 이성이 그 자체가 도가 된다면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들이 있을 것이며 그 도들은 서로 충돌을 일으킬 건데 도가 도에게 충돌을 일으킨다면 아무 도도 도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은 이성으로 간혹 올바르게 판단한다 할지라도 그 이성이 판단하는 대로도 살지 못하는 존재이니 결국 인간 자신 안에서 이 도를 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도는 이 모든 세계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고, 인간을 창조하고, 나를 이 세상에 만드신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어떠한 의도로 이 세계를 만들었든지 이것은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과 연관이 될 것이며 또한 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은 나라는 한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과 면밀하게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분명합니다. 결국 인간은 이렇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로부터 도를 깨닫게 되고, 이 도를 기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도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이 기독교의 핵심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며 이 긴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예수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이며 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세계와 모든 인류 자신의 인생에 근원과 목적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깨닫는 자에게 이러한 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도를 참으로 깨달을 그때에 사랑도 함께 주셔서 이 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받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쉬운 말로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살아갈 바 도를 따라 살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쉽사리 풀 수 없는 어려운 딜레마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생각은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인간의 지성의 능력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삶이 세상을 즐거워하며 사는 삶이라면 세상에 대해서 지식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도 생기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지성은 아주 부지런히 빨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꿀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의혹을 갖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의혹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나요?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거죠. 무엇인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에는 그것을 인식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식하면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자극해서 인식하는 나와 인식한 사물들을 단단히 묶어 사랑하게 만드는 거죠. 이처럼 인간의 사랑과 지성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면 세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욕구와 능력은 뛰어나게 되지만 반대의 것은 알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책에 대한 많은 정보를 나열하는 것은 짜증 나는 일입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는 최근 세계에 새로 출시된 게임에 대한 소식은 그야말로 폭풍 흡입하고 싶은 지식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욕망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과 지식의 욕구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이런 뜻이죠. 인간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요. 그러니 도를 알 길이 없죠. 도를 모르니 결국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욕망에 따라 행동하니까 버릇이 생겨나게 되고, 버릇은 성향이 되고, 성향은 인격이 되어서 결국 모르는 무지와 방종하게 사는 것 사이의 어디도 깨뜨리고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한 필연의 고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이런 속에서 휘둘리고 살면서 어디부터 이 불행한 악순환의 숙명과 같은 고리를 끊어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변명하기에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가 없고, 이 삶을 이렇게 살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나자빠지기에 얼마나 좋은 구실입니까?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고리에 연속을 끊는 길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과 함께 성경의 지배를 의존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제일 먼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으니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한 사람이 순종하고자 선택하고 마음의 결심을 하게 될 때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은혜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릇된 것을 버리고 올바른 것을 선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 없이 시작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시작되기 때문에 무엇이, 무엇이 먼저라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거죠. 일단 순종하고 나면 마음이 요동치고 찢어지는 정신의 세계에서 다소 단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정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도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는 정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요동치는 것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저격수가 되어서 약 800m 떨어진 사람을 적군을 저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장소로 가기 위해서 차를 타고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하루 한시라도 빨리 저 사람을 저격함으로써 아군의 전투에 유익을 주어야 되겠는데 흔들리는 자동차 안에서 아무리 훌륭한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800m 바깥에 그 사람의 모습조차 잘 보이지도 않는 표적을 맞힐 수 있는 저격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 차가 멈추고 조용한 곳에 내려서 삼각대를 풀고 정착을 한다면 표적을 맞히기 쉬워지는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욕망의 날뛰는 마음 그래서 방종하게 살아가는 것은 흔들리는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결코 표적을 올바르게 겨냥할 수 없습니다. 사격한다면 백발백중 오발이 나올 것입니다. 표적으로부터 빗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먼저 순종하라는 것이죠. 그러면 날뛰던 마음이 어느 정도 평정을 얻게 되고, 이 평정을 얻게 되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이때 그의 지성은 바람 불어 물결치던 호수의 면과 같았다가 바람이 멈출 때 주변에 풍광까지 거울처럼 비치는 명정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죠. 이 모든 것들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에서 자기 자신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결국 자신이 그 모든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뚜렷이 원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으로 자기를 비춰보게 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로소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이 열리고, 그 도를 발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안에서 그 도를 사랑하고, 도를 따라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올바른 삶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는 고통스러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주의 도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마음이 총명의 빛을 잃어버리자 정신에 혼란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마땅히 구하여야 할 한 가지 기도의 제목에 매달립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한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종종 우리의 잘못 없이도 찾아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하고 인간들도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시인도 바로 그런 악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에워싸이고, 악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난과 시련을 겪었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는 고통스러운 영적인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왕국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물과 권세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비빈과 여자들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포기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찾았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를 자신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것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어두운 밤은 언제나 죄와 무지 때문에 찾아옵니다. 고난은 종종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원의 침체는 언제나 우리의 죄와 무지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순결한 도를 그리워하나, 삶으로는 그 도를 어긋나게 살고, 정신으로는 그 도의 바른길을 알지 못하나니 그는 끊임없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할 길을 걸어가면서 행복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깨달으며 주의 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에 깊이 잠겨서 그 도를 따라 그 도에 붙어있어 그 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필요해서 주님께 기도하면 어떤 것은 주시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안 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조금 기도했는데도 주시고, 어떤 것은 그렇게 오래 많이 기도했는데도 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하기만 하면 절대로 안 주시는 것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철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보다 깊은 말씀에 도를 깨우치는 일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깨닫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 우리에게 얼마나 소수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모든 고뇌와 시련을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구하지 않고 다른 것을 원하니 어찌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삶을 철저하게 이 도의 지식의 기반 위에 놓고, 모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의 깨달음을 모든 삶으로 펼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 인간은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나님께 지정된 도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모든 불행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의 도에 대해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이니 내가 나의 원수는 사랑해도 나의 무지를 미워하게 하시고, 그리고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은 용서할지라도 악은 용납하지 않도록 나에게 용기를 달라고 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두운 여러분들의 정신세계를 깨우쳐 다시 하나님의 진리로 찬란하게 할 것이니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진정한 행복의 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B. 인도하소서
마지막 두 번째는 “인도하소서. 라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시인은 악인들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두 번째 기도에 대해서 11절 하 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시인에게 골짜기는 사망의 음침한 계곡이었고, 그는 곧 죽음과 고통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평탄한 길은 하나님과 함께 간 행복한 길을 상징하는 단어였습니다.
시인의 원수들은 군대처럼 많은 수요로 진을 치고, 시인을 대적하고 공격하였다고 3절에서 말합니다. 5절에서는 그때는 시인에게 환란의 날이었으며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겪던 시기였다 고 고백합니다. 악인들의 궤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시인을 대적하여 좌절시키고 넘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원수를 생각하셔서라는 이 탄원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시인의 원수들이 많고 강함을 생각해 주십사하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 의해 둘러싸인 자신의 연약함과 가련함을 생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자극하는 탄원이었던 것입니다. 12절에서 시인은 이 악인들이 자신에게 없는 죄를 거짓으로 입증하여 악을 토하며 일어나 치려고 하는 자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시인에게는 시련과 고난의 때에 항상 모함과 비난으로 얼룩진 채 다가왔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언제나 모함과 비난으로 얼룩진 채 다가왔습니다. 한때는 자신과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형제였던 사람들이 그 고난 때에 발꿈치를 들고 원수가 되었으며 자신은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도 이미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비방하는 자의 목소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반박하는 자신의 말은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가 될 뿐이었습니다. 이런 처지 속에서 자신의 심정을 69편 4절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습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이 시인에게 원수들에게 에워싸이는 시련과 고난도 견딜 수 없는 일인데 한때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함과 비난으로 얼룩진 이 모든 구설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었고, 그는 이 지구상에서 외톨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런 때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이름 없는 목동으로부터 높여주셔서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의 사실상 건국의 군주가 되게 하시고, 그리고 자신에게 비할 데 없이 높고 오묘한 계시를 알려주셔서 예언자가 되게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자기를 낳은 혈육의 부모도 자신을 떠맡는 것이 싫어서 버렸지만 자기를 선택하여 당신의 삼으신 것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는 주님의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련과 고난 속에서 모함과 비난으로 얼룩진 채 다가오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 그는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이 깊은 시련의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시기를,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 눈물을 기억해 보십시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고난과 시련 속에서 모함과 비난을 당하며 폭풍 속을 지나고 있는 이 가련한 당신의 자녀를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3000년 전 그 시인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면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인생의 길이시오. 우리의 행복이시니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혼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그리고 비록 협착하고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생명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길로 걷는 자는 자기의 꾀에 빠져 파멸에 이르게 하시고, 의인의 길로 행하는 자는 형통한 길로 인도하사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하십니다. 시인은 슬펐습니다. 수많은 악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을 친 군대와 같았고 그는 외톨박이였습니다. 그에게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저 원수들의 이빨을 단번에 꺾을 무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 이 세상에 있는 군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왕국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장 고통받는 때에 진리의 빛, The light of truth 를 간구했으니 그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가 그 진리의 빛에 달려있는 것처럼 시편 43편 3절에서 매달렸습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시련과 고난의 계곡에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까? 모함과 비방에 시달리는 그 수치스러운 길거리에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까? 아름다운 마차를 타고 그분을 만납니까? 수많은 깃발을 휘날리는 호위병들에게 에워싸여 그분을 만나러 갑니까? 아닙니다. 마차나 호위병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하니 이 시인은 그래서 가장 고난받는 때에 주의 진리 곧 주의 빛을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 빌었으니 깨닫게 하시는 은총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큰 원수의 억압으로 슬픔에 잠겼을 때 진리의 빛을 간구했습니다. 그 간절한 간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깨닫는 것만이 자신이 이 모든 시련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얼굴을 뵙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얼굴을 간절히 찾는 자녀들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해 주실 것이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면 하나님 벗겨 주실 것입니다. 그가 영적인 침체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면 그렇게 당신에게 도를 찾고자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눈부신 새 아침을 맞이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없으니 하나님은 완전하고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그런 불변하신 하나님인데 천의 얼굴을 가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지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은 천 가지로 변하였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 때는 하나님이 활짝 웃으셨고,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을 때는 하나님이 노여워하셨습니다. 만약 자식을 사랑하는데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자식이 그릇된 길로 행할 때에 그에게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아이에게 노여운 얼굴을 하는 것은 사랑하는 그 아이가 불행한 길로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노여움은 그를 행복하게 하는 노여움이니 영원히 계속될 리가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30편 5절에서 이러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가변적인 경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 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신자는 시련과 고난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을 잃어버릴 때 역시 하나님의 인도도 함께 잃어버리니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지만 어두워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멀어지면 어둠 속을 걷게 되는 것이니 그 어둠 속에서 올바르게 걷는 사람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였습니까? 무지와 어두운 밤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여러분들을 비추어서 돌이키게 한 것이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때도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에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진리의 도를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자신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슬픔으로 압도되어 옵니다. 언제나 거기서 변함이 없는 바위가 되기보다는 그래도 희로애락이 있는 강아지가 되고 싶어하고, 언제나 사료만 주면 만족한 강아지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이 되고 싶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그러한 사실을 판단하는 인간인 우리 안에 의미에 대한 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간절히 찾고 있는 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고통을 겪는 것이니 모든 고통이 죄와 무지해서 기록된 것이고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죄 짓기 때문에 무지한 것이고, 무지하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니 무지의 어둠이 있는 곳에서 죄라는 벌레는 습기를 먹으며 잘 자라기 쉽고, 그리고 죄의 어둠이 있는 그곳에서 무지는 판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삶은 우리가 빛으로 돌아온 그 날부터 우리가 미워했던 삶이며 하나님 앞에 떠나기로 다짐했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아있는 날 동안에, 힘이 있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기를 원했고, 탐구하는 만큼 사랑하기를 원했고, 또 사랑하는 것만큼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사랑을 누리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기도가 너무나 달콤하고, 혼란스러워 보이고, 어려워 보여도 하나님 앞에 맡기고 기도하면 갈 길을 알려 주실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명정한 지성의 이르는 지름길이니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 그 사람의 정신이 가장 진리를 포착하기에 적합한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에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잘 조율된 바이올린의 현과 같아서 고통이라는 활이 켜고 지나가면 그것대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고, 평탄한 환경이라는 활이 긁고 지나가면 그 나름대로 예쁜 소리를 내었습니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이 모두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조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실 뿐만 아니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선택하신 모든 자는 보호하시고 선택되고 보호받는 모든 자는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다 알지 못해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래서 나를 선택하셨고, 그래서 나를 보호하셨고, 바로 이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폭풍과 흑암 속을 지나며 하나님의 도를 찾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했고,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결코 갈 길을 훤히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기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 그 진리의 빛을 등불 삼아서 한 걸음 한 걸음 이 어두운 세상의 밤길에서 걸음을 떼어 놓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 결국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런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어려운 인생길에서는 그분 앞에 겸손해져야 할 것을 배우고 평탄한 인생길에서는 그분께로부터 끝없는 인자하심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주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엄마의 손에 꼭 잡힌 고사리보다도 작은 아이의 손, 그 아이는 아무리 많은 인파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어떠한 또한 혼란 속에서도 보호를 받는다는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땀나도록 자기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엄마의 그 손이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가장 먼저 구해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길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라고 하는 독일 순교한 신학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모두 내게로 오너라 우리 모두 같이 죽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제자의 길을 걸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그 비용을 희생을 먼저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타이르셨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제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사는 길이 견딜만했다면 왜 우리가 그 무거운 제자의 길을 선택했습니까? 그 멍에가 훨씬 가볍고 쉬운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유로운 삶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구속의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우리를 속박으로 이끄는 자유였고, 이 속박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로 데려가는 속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고민하던 여러분들의 인생은 흘러갑니다. 태어난 자는 자라고, 자란 자는 늙고, 늙은 자는 죽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이치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은 무엇을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 욕망과 불순종으로 출렁거리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모든 감각적인 사물들에게서 우리의 정신을 떼어놓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없이 고아가 된 자신의 정신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 영혼 깊은 곳에서 나를 하나님을 뵙도록 도와 달라고 소리치는 영혼의 비명 소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두운 인생길에서 갈 길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과 동행 하십시오.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길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인도가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종종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으시고 때려서라도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셨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고요히 자신 속으로 돌아가 침잠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하나님을 발견할 때 나를 가장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사악한 욕망으로 요동치는 마음을 추스르십시오. 그것을 따라 살아서는 여러분들이 절대로 짐승과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시선을 이 세계에서 떼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처음에는 이 시간이 매우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그러나 그 속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도로 가르침을 받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절망의 계곡에서 희망의 들판으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5 (2020.08.23._주일오전)
5.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준공식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광야에서 계시해 주신 성막과 거의 그대로 건축물로 옮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성전이 세워진 장소는 일찍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바치던 모리아산이었다고 역대하 3장 1절이 보도합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쳤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제물을 모두 태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역대하 7장 1절이 말합니다. 바로 그 시기에 여호와께는 솔로몬의 심중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이루게끔 복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시기 중 어느 때에 여호와께서 다시 밤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결정적인 말씀을 솔로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II. 땅이 고통을 받을 때
여기에 보면 땅이 고통 받을 때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이스라엘 백성을 매우 기뻐하셨고, 특히 왕이 된 이 솔로몬의 하나님을 향한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땅을 택해 성전으로 삼으신 것과 함께 미래의 이스라엘 땅이 고통을 받게 될 것도 아울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역대하 7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라고 우울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이 목록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들이었습니다. 메뚜기가 모든 땅의 소산을 먹어 버리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최대의 국가적인 위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인데도 그런 재앙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찍이 없던 감염병에 큰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불행한 상황의 저자이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비난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신가, 옳으신 분인가에 대해서 많은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카뮈의 페스트라는 소설을 보면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찾고자 교회에 모이게 됩니다. 그때 성직자들은 바로 이 큰 재앙이 하나님의 형벌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일치하게 설교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린 갓난아이들이 죽어 가는데 이것도 결국 이들의 죄 때문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답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한마디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정말 죄 때문에 질병에 걸리거나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규칙을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재앙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은 계시지만 그분과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계시지만 무능하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재앙을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뜻밖의 재앙이 있을 때 그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책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재앙이 일어날 때에 가져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이러한 재앙 앞에서 자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을 때 선한 질서 안에서 창조하셨고, 모든 만물들이 서로 작용하고 서로 상호 교통하는 질서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런 법칙들이 깨뜨려질 때 당연히 재앙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를 비롯해서 오늘날의 환경적인 많은 재앙들은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바이러스 같은 감염증은 예측할 수 없이 자주 일어날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지구가 온난화되면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런 요인들이 폭발하듯이 드러나는 것이죠. 그동안 인간이 자연에 대해 자신의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고 자연을 착취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러한 결과를 자연을 통해 되돌려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사람들은 교회에서 결국은 답을 얻지 못하고 그들은 서로 서로 연대하며 시민들을 서로 도우면서 결국은 그 불행한 상황을 헤쳐나갑니다. 결국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는 가운데 이 재난적인 상황을 극복해 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해야 할 우리의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이러한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어떻게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랑으로 이 모든 난관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두 가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것인데 하나님에 대한 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고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있고, 그분이 이 온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자신의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이웃과 자연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한 책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롭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소홀하게 여기며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고, 오늘 내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인 삶의 모든 고통의 의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할 지를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줍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하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재난을 무너진 도덕적 현실을 생각하는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지 못하였고, 내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내가 이 자연을 선의로 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현실들이 나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는 깊은 자책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탓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여 분쟁에서 혼란을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요히 성찰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 모든 삶과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는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일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잊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며 그 관계를 바르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 성경은 바로 그러한 재앙의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얼굴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 앞에 서서 그분과의 친교를 갈망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죄 때문에 그런 친교가 사라졌다면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를 알아야지 하나님이 그 모든 나쁜 일들의 저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지극히 낮추어 겸비해져야 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을 오롯이 의지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이러한 사태는 우리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많은 의사들의 도움과 치료의 방법과 좋은 약물과 그리고 개선된 제도들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희망을 두기를 원하시지 그것에 희망을 두기를 원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재앙 속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악하게 살았는지를 생각하고, 바로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나 자신이 책임 있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악한 길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재앙도 훨씬 길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니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이 교만하게 살았던 날들을 회개하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왔던 평안한 모든 날들이 사실은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도록 겸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기를 원하는 갈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또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III.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땅에 고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땅을 죄악으로 황폐하게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그 땅을 고쳐 다시 복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들의 땅을 내가 고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재앙을 당하고 있는 땅을 고치시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 들으심
첫째로 들으심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것으로 그 땅을 고치시기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 의지를 가지고 행하고자 경청하는 것이니 당연히 여기에는 행동의 의지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땅의 고통 소리도 들으시고, 사람들의 신음소리도 들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는 더 잘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재앙은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흔들려 버린 일상의 삶, 깨져버린 평온함, 여기저기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들과 이별도 하지 못한 채 유리 바깥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일은 아직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재앙은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원하지 않는 이별을 강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 죄로 망가진 땅을 온전히 고치실 기회로 삼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큰 재앙과 고통 속에서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잠깐 동안은 죄에 빠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당신의 얼굴을 구하며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들의 간절한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한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외에 누가 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재앙 속에서 하나님을 고요히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움과 원망으로 서로를 탓하며 끊임없이 분쟁하므로 분열하여 재앙 속에서 미움을 폭발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그분의 귀에 고요히 우리의 마음을 토하며 이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당신 앞에 부르짖을 때까지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B. 죄사함
두 번째는 죄 사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리라”고 말입니다.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죄에서 돌이켜 당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인간의 어떠한 재앙도 하나님의 불타는 복수심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복수심에 불타서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밥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멀리멀리 떠나 이 땅을 병들게 한 그들이 당신에게로 돌이키게 하고자 그들을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재앙을 통해 하나님 찾도록 만드시고, 결국은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녹아내리도록 만드셔서 그들의 땅과 사람을 모두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신령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아침의 기도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 오늘 저녁에 말씀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 확실한 것은 이 세상에 어떤 사물이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무 데도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심지어 신자들도 마음이 죄로 무디어지게 되면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매우 무감각해지게 되어서 불신자와 다름없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 없이 더욱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감각한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고자 종종 하나님은 지금처럼 환경의 큰 변화를 겪게 하십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살아가던 삶이 흔들림으로써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게 하심으로써 이 모든 안정된 삶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죄를 사하기 전 우리의 마음을 때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보이는 물질적인 사물에 취해있던 우리의 감각이 그 고리를 끊고 영적인 각성을 받아서 하나님을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경건한 신자는 이 황폐한 재앙의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과 교회,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책임을 자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바르지 못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개인이 잘못됐으며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책임을 그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자각하고, 교회의 한 지체로서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이 세상의 죄를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짊어지고 아버지 앞에 회개할 수 없는 그들을 위해 대신 회개하고, 용서를 빌 수 없는 그들을 위해서 대신 용서를 빌었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소수의 깨어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여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하시고 이 땅의 황무함을 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재앙의 때에 그것이 모두 자신의 죄인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새벽을 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셔서 당신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 앞에 짊어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중보하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며 이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고치심
마지막 세 번째는 고치심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고치십니다. 재앙을 만나 회개하고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의 영혼을 고치십니다. 고쳐진 그 영혼들과 고쳐질 땅은 하나의 운명입니다. 여기에 ‘고칠지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에프라'(epra)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의사가 병자를 고칠 때 쓰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영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 백성을 고치는 의사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6절 하반 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습니다.
망가진 땅과 타락한 인간은 한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실하는 땅과 온전한 사람은 한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혼의 생명을 잃어버리므로 곤고하고, 땅은 물질의 생명을 상실하므로 황폐한 곳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죄를 해결하고 삶을 고치십니다. 도덕적으로 무너진 사회를 바꾸심으로 다시 당신과 온전한 관계 안에서 복을 받게 하십니다. 사람이 망가진 것은 온전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땅이 망가진 것은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땅은 먼저 인간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고통 받는 땅에 결실이 없기 때문에 다시 인간은 땅 때문에 고통을 받고, 거기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인간은 더욱 포악해지고, 그 포악한 인간 땜에 땅은 더 많은 고통을 받으며 그 황폐함이 더한 땅 때문에 인간은 더 심한 고통을 받는 것이니 이 고리를 끊는 것은 자연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의 황폐함이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선의로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칠 때 하나님은 이 땅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땅이 황폐하게 된 위기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이 재앙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재앙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돌이키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을 마음을 때리기 위하심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탕자가 집을 멀리 떠났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좇아 살아오던 무질서한 삶에서 돌이켜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하라고 주님이 타이르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우리 스스로 겸비하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악한 길을 떠난다면 마침내 황폐했던 땅을 하나님이 고칠 것이며 산과 들은 다시 아름다운 소산을 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는 그 땅과 함께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될 것이니 하나님의 이 치료하시는 능력을 기대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큰 재앙을 통하여 자신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바르게 질서 지웠던 삶이 나 개인 안에서, 이 사회 속에서 무너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 안에서 순종하며 살지 않았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신 기도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고, 바로 그들이 우리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이런 재앙 속에서 사람을 원망하며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대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생사 간에, 선악 간에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으로 입증하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 땅을 고치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고요히 하고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으며 악한 길에서 떠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없이 겸비해지십시오. 무엇보다도 그 모든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기도로 표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이 땅을 고치실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6 (2020.08.30._주일오전)
6. 성전에서 기도할 때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대하 7: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러한 국가적인 재앙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연 앞에서, 사람 앞에서,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삶의 질서를 재정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악한 길을 떠나 겸비하여져서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이어서 황폐한 땅을 고치시니 땅과 우리가 한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재앙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이 일에 대한 진실성은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어떻게 해주실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II. 성전에서 기도할 때
A.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
하나님은 막연히 이스라엘이 기도할 때 듣겠다고 하시지 않으시고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도는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하나님이 성전보다 크시다는 사실을 널리 찬양했습니다. 아마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은 이 성전에 묶이시는 분이라고 생각할까 봐 이 솔로몬이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신앙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역대하 6장 1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시고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시니 어디서 기도한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어느 기도가 하나님 등 뒤에서 드리는 기도일 수 있겠으며 또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인들 하나님께 감추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굳이 기도의 장소로서 이 성전을 지정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사는 인류가 타락하자마자 계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창세기 4장에 기사를 보더라도 명백합니다. 홍수가 있은 후에 노아가 제일 먼저 한 일도 또한 번제를 드릴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설계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성막의 양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동식 성막인 이것이 만들어짐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지정되었고, 성전과 제사는 떼어질 수 없는 일치를 보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은 하나님의 통치가 한 장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 보여 줍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이로써 왕권은 온 이스라엘과 세계 열방에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행사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제사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 구원받을 율법의 지식이 전파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오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 부터 나올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온 인류가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조상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을 때 그 대가는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혼과 육체 모두를 포함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실행하시면서도 두 가지 은총을 베푸셨는데 하나는 즉각적인 죽음의 유보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즉시 죽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류를 끝까지 보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목숨을 연장시키셨고, 그동안에 그들은 자손들을 번식하여 인류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게 인류의 역사가 계속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신 상태가 아니었으니 그 모든 죄에서 그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타락 즉시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후손들 중에서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아들을 낳고 ‘구속하다’라고 가인의 이름을 지은 것이나, 또 노아가 태어날 때 그 이름이 안식이었던 것을 보면 이 신앙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는 바로 이런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짐승에게 죄를 전가시키고, 그 짐승이 대신 희생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시적인 화목이라도 이루고, 교제를 누릴 수 있게 해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나타나실 메시아에 대해서 감질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가올 보다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의 예표였고, 그 구원의 실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중단되었던 그분께로부터 오는 참된 사랑과 생명을 충만히 받아 참사람답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성전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겠다고 하는 약속은 결국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하는 신학적인 예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특별한 은총으로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그분 안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주실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국가적인 재앙 앞에서 어떻게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재앙의 원인을 규명한답시고 그 화살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사변을 하다가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신앙에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모든 일들의 시작과 결말을 알 수 없지만 확고한 사실 하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손안에 있으며 그분의 의지를 벗어나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일들을 당하게 된 원인보다는 의미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공동체의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지를 이 재앙을 통해서 배우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받아들였던 수많은 일상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그늘 아래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재앙을 만나 삶의 기본적인 것이 흔들릴 이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서 흐트러진 우리의 삶의 질서를 바로잡을 기회임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신앙을 가지고 한없이 올곧게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에 종종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멀리 떠났으면서도 당신을 떠난 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때리십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다른 마음을 갖게 하시니 아무리 말씀으로 일러도 지성으로 그 말씀을 깨닫기까지 마음이 깨어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감각에라도 호소하고자 종종 하나님은 이런저런 일을 이 세상에서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애착하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유리그릇처럼 부서지기 쉬운 현실인지를 알게 하셔서 우리가 이 현실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적인 재앙의 때에는 그렇게 빗나간 우리의 마음을 추슬러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그들이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까? 모든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모든 형통함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오늘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재앙 앞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새겨 보기를 원하십니다. 안 계신 곳 없으신 하나님이 특별한 한 장소를 택하셔서 거기서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찾으며 기도하라고 우리를 타이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이므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재앙을 만났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온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회개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우리들이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게 될 것이니 거기서 하나님은 이 땅을 고치기 전에 먼저 망가진 우리 자신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B. 하나님께서 들으심
두 번째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심입니다. 이처럼 악한 길을 떠나 겸비해져서 하나님의 얼굴을 진심으로 간절히 찾는다면 하나님은 들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7장 15절 하반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내가 눈을 들고”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원래 나의 눈들이 열려질 것이며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가지신 것도 아니고, 감으실 리도 없으니 이것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 세속을 향하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눈을 감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정욕이 그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였고, 명정한 지성을 혼탁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악한 길을 떠나 겸비해져서 이 재앙 앞에서 하나님 이외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며 얼굴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의 마음의 눈이 열려져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임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에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고,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자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닫혔던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다고 하는 것은 찬란한 빛 앞에 서는 것이니 이것을 통해서 죄의 어둠 속에 있었을 때에는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기를 자신에게 떼어놓고 싶어한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죄에 대한 회개인 것입니다. 그 회개의 깊이만큼 하나님과 깊이 사귀려고 하는 열망이 솟구치는 것이니 이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그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라는 말씀은 기도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 역시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으며 돌이킬 때에 우리의 마음의 귀가 열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이 어느 것 하나 듣지 못하는 것이 있겠으며 우리들이 무심코 뱉은 원망하는 말 하나도 그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들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귀먹은 자가 됩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히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을 올바르게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말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된 생각으로 우리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우리의 귀가 하나님을 향해 닫혔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신자는 이미 그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열린 사람이니 이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기를 외치셔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더 멀리멀리 세상을 향하여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은 재앙을 만나지만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니 그 재앙 속에서도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중 가장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실은 벙어리와 같습니다.
가장 불쌍한 신자가 누구입니까? 시련을 당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을 때의 고통스럽지 않은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눈물의 기도 없이 환희의 눈물을 흘리던 때가 언제 있었으며 고통의 아픔 없이 신앙의 환희를 느낀 적이 언제가 있었습니까? 재앙을 만나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진 사람들은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니 그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주님을 뵐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폐하게 된 땅에서도 주님의 음성은 들릴 것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그 사람에게는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일찍이 이러한 사실은 예레미아 선지자가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으나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예언이 역사 속에 성취되는 끔찍한 광경을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지고 예루살렘 성전은 겁탈당한 아녀자처럼 모든 보물들이 뜯겨 나갔으며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선지자는 낙심하고 통곡하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가졌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재앙 속에서 신앙을 버리고, 그리고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의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으며 골수에 사무치는 불의 고통을 느끼며 그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애가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재앙을 당한 이스라엘의 멸망한 현실을 보면서도 한 가지 위로를 발견했으니 이 세상의 모든 역사가 당신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믿음으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니 결국 이 모든 재앙도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한 방법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 끔찍한 심판과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롭고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소이다 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의 양식을 따라 지은 성전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들이 성전 안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일시적인 제사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단번에 드리신 십자가의 속죄가 있습니다. 성전이 이처럼 소중한 은혜의 장소였다면 우리에게는 그분을 머리 삼아 지으신 교회가 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짐승의 제사를 기뻐하셨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속죄의 제사로 받쳐진 우리는 얼마나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제물로 주께 드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친히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이 되게 하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귀를 기울이시겠습니까? 땅이 황폐하게 되는 것은 사람 때문이며 사람은 그렇게 땅을 망가뜨려 놓지만 자신들 스스로는 고치지 못합니다. 그것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런 재앙 속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회개하고 악한 길을 떠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땅을 고치게 하십니다. 이런 재앙 앞에서 우리는 고요히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어떻게 이 재앙을 하나님의 자비로 바꾸시는지를 기억하며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단지 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잘 질서 잡혔던 삶이 무너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스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대신 자신의 죄를 고요히 돌아보고 허물어진 삶을 총체적으로 고쳐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선한 의지를 쇄신시켜 주시도록 간구하고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참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재앙은 영원한 것이 아니니 어찌 이 재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 시련을 만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여 더 큰 복을 얻게 위하심이니 우리는 이 재앙 앞에서 우리 자신의 책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빗발치는 비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우리에게 그렇게 당신 곁에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던 주님의 음성에 오히려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들내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조용히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 속죄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며 마음을 하나님 한 분께로 향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구 살아왔던 악한 길에서 돌이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 재앙 속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마침내 우리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을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7 (2020.09.06._주일오전)
7. 성전에서 기도할 때(2)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큰 재앙을 만났을 때 시민의 한 사람으로 책임의 소재를 묻고 비판도 하고 또 대책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있으니 이런 재앙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올바르지 않은 관계를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여기서 죄에 대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죄 말고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렇게 망가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II. 성전에서 드린 기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선택하신 뜻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재앙의 때에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기도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큰 재앙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자신의 책임을 기억하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지극히 겸비해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망가진 땅을 고쳐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A. 성전을 택하심
여기서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이 성전을 택하신 경륜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로서의 성전을 선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연약한 인간을 교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였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니 장소에 국한하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거기 있겠다고까지 말씀하시면서 장소를 지정하고 성전을 지으신 것은 연약한 인간을 위해 상징을 베푸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한 장소 성전을 지정하셔서 거기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그분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깨달아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성전의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더욱이 그곳을 거룩한 장소로 지정하셔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이 구별된 존재인 줄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하시는 교육 방법을 위해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으로 예표되던 신학적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동체적 모임으로서의 유형적 교회의 중요성이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렇게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사라졌고, 영원히 단번에 우리를 위해 제사 드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는 더더욱 한 마음으로 모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 거룩한 분이 누구신지를 눈에 보이는 교회를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4절과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우리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하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선행을 하면 될 텐데 왜 서로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이는 교회를 세우시고,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신들이 어떠한 사랑으로 구원받았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할 사명과 서로 사랑하고 착하게 살아야 할 본분을 일깨우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모이기를 폐지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정하신 마지막 그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게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으니 이는 말세가 될수록 사람은 점점 더 이 세상 정욕에 마음을 빼앗겨 신령한 은혜에서 멀어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보이는 교회 속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생각하게 하셨고, 거기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본분을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회가 계속해서 모이지 못하는 상황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고, 그리고 이것을 늘상 계속돼도 되는 일로 받아들여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히 이 사태가 종식되기를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긴장하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시며 사람이 지은 성전에 갇혀 계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에서 용서 받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용서하면서 자신들이 받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재앙을 만나고 실연을 당하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자녀임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재앙의 때에 더욱 모이기를 힘쓰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더욱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를 사모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솔로몬 성전을 지어 거기에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거기서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지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속히 이 사태가 종식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이름을 두심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는 가장 탁월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들리는 진리와 보이는 진리를 사용하십니다. 들리는 진리가 전도라면 보이는 진리는 성도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영원히 그 성전에 두셨습니다. 본문 15절 하 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을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알리실 때 성경 계시뿐 아니라 피조물들을 사용하십니다. 성경 말씀과 하늘의 별, 역사는 물론 인간의 양심과 좋고 나쁜 감정들을 통해서도 당신을 알리십니다. 물론 성경 말씀은 직접적으로 그분을 알리는 수단이고, 이런 피조물들은 간접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을 알리시는데, 그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이런 재앙을 만난 때가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별들을 위해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은 기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통해서 앞으로 세워질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교회를 통해서 승천해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시던 그 일을 우리에게 뒤잇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요 혹은 편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이 땅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태양과 같아서 더 높아질 수도 없고 낮아질 수도 없지만 그분의 이름은 땅에 두셔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도문은 즉석에서 꾸며내신 기도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평소 하시던 기도문이었으니 문장이 똑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패턴으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무슨 정신으로 사셨는지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첫 번째의 기도 제목으로 가르쳐졌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그분께 무슨 이득이라도 된 답니까? 또 그분에게 우리를 향해 바라실 무엇이 있길래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든, 영광을 받든 하나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이 하나님을 바뀌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분의 존귀와 위엄과 영광에 어떤 손해를 끼칠 수 있는 피조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그 이름에 대해 높고 낮음에 대해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궁극적으로 그것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위한 사랑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찬송)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높여 찬송하고 나면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니라 찬송을 한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붙었던 헛된 욕심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리고 상천하지에서 내가 우러러 보고 살아야 할 분이 우리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뿐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감격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죄를 지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당신의 이름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당신의 이름을 모르기에 구원에서 멀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보고 그들을 위해, 당신의 이름을 위해 살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오늘날처럼 노골적으로 모욕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어느 신문에 보니까 이러한 타이틀이 크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수의 탓이라지만 공공의 적이 된 교회'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일부이기는 하지만 너무 어리석고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이 재앙의 사태에 대응하고 있는 교회들을 보면 우리라도 무릎을 꿇고 세상에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교회가 그 많은 교회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교회를 공공의 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주 작은 몇몇 알려지지도 않은 인터넷 방송이나 혹은 사설 뉴스 매체 한둘 때문에 비난을 하면서 모든 국민이 및 소수의 탓이라지만 공공의 적이 된 언론이라고 말하면 동의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 큰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미움과 분노를 정의로 위장하고, 이웃을 원수로 여기는 마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명예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나니 우리에게는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고, 그분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보다 가슴 아픈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위대한 많은 인물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변절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갔습니까? 자신의 영광과 영화를 위해서였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성공을 바랐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현실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분노로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으로 싸운 사람들이었으니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욕되게 일컬어질 때 그들은 그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고 먼저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싶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재앙 앞에서 우리가 자신의 도덕적인 책임을 돌아보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분의 이름이 더욱 존귀히 여겨지기를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시민으로서 의견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의 입장을 변증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의견이 다른 사람과 논쟁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이런 재앙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일체의 고요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께 쏟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커다란 재앙은 교회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역병이 제국을 덮치고 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생기고, 페스트가 온 유럽을 덮을 때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원수처럼 대하는 대신 이웃과 아픔을 함께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내어놓았습니다. 역사는 그런 사건들을 모두 기록하지 않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재앙의 순간에 생사를 초월하는 그 평온함이 어디에서 왔을까? 자기를 버리는 그 탁월한 이타심이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더욱 갈망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앙도 문제지만 이런 속에서 사람들의 그릇됨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이 현실을 바꾸어 달라고 빌어야 하는 이 기도는 재앙이 물러가도록 간구해야 할 기도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하나님이 이 비극적인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때로는 우리의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을 어두운 밤처럼 지난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모든 열정을 근심으로 불태워 버리는 대신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드러날 부흥을 갈망하며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자신을 의지하며 살았던 교만을 회개하고, 안일하게 목회하고, 안일하게 신앙 생활했던 날들을 깊이 후회하며 하나님의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부흥의 은혜가 이 메마른 땅이 임하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이런 때에 64장 1절 2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피어린 기도로 간구를 대신했습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충만한 이름의 영광이 다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임재의 영광 앞에서 떨며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빌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C. 마음을 두신 곳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교회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에게 어디에 마음이 또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이 표현은 연약한 인간을 이해시키기 위한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입니다. 잠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은총적인 구원 행동이 그분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본문에서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성 전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성도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당신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세상에는 재앙과 비극이 가득하나 그분의 사랑은 그치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당신의 교회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는 미워하시지만 교회와 이 세상에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칠흑과 같은 이 어두운 밤을 통해서도 당신의 진리를 빛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세간의 비난에 귀를 막지 말아야 합니다. 들르지도 말고 다투지도 말고 고요히 그 모든 피난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비판과 칭찬에 쉽게 울고 가볍게 웃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 앞에 서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부끄러운 행동을 손가락질하기보다 자신도 그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임을 통감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가엾이 여겨주시도록 빌어야 합니다. 억제하시는 은혜로 그들의 방종을 막아 주시고 우리는 모두 헤아릴 수 없는 특별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깨닫게 하셔서 단정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돌아오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빌듯이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재앙의 상황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교회를 버리신 까닭이 아닙니다. 그분의 눈과 마음은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에 있으니 이 교회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 사랑을 아들에게 부어주셨고, 그 사람을 또한 신부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우린 그 신부인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 멸시당하는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재앙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때로는 오해로, 때로는 악의적인 비난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할 때 그분들의 이름과 함께 고통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 그를 위로해 주시고 높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영광을 얻었으니 또한 그분의 이름과 함께 모욕도 당하는 것이 그분의 이름과 상관없이 사는 편안한 삶보다는 훨씬 나은 삶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영원한 삶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믿음을 굳건히 가지십시오. 불신에 시대에 더욱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고요히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잊지 말고 소망에 굳건히 서십시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경건한 삶이 멸시를 당하는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게 높으셔서 그 모든 만물을 발아래 다스리고 계심을 기억하며 용기를 가집시다. 먼저 나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돌아보며 바르게 서야 할 것입니다. 홀로 하늘 높이 계셔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과 교회뿐만 아니라 불신하는 세상과 뒤틀린 역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씀을 듣고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찬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유언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지금 주님도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큰 파도가 일어나는 때에는 더 깊고 견고하게 닻을 내려야 하듯이 이렇게 풍랑 이는 재앙의 상황에서는 우리의 신앙의 닻을 더욱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내려야 합니다. 결코 흔들리지 말고 이 어두운 시대를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사랑을 그분의 품 안에서 경험하며 역사를 바꾸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8 (2020.09.13._주일오전설교)
8.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단 9: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시대에 황폐한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예레미야의 책을 읽다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재앙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주관하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재앙의 때에 자신과 공동체의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A. 주의 얼굴빛
오늘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비는 기도는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입니다. 제일 먼저 주의 얼굴빛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될 날이 가까운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깨달았다고 하는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11절에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이 말을 뒤집으면 70년이 지나고 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모종의 변화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니엘과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강성하던 나라를 잃어버린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죄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서 9장 1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가 망했고 다니엘 혼자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역사 속에서 탄식했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종교적인 의미를 굳게 붙들고 이런 재앙의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 앞에 뉘우쳐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신 뉘우치고 울어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럴 수 없다면 누군가 그를 위해 울어 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이 되는 셈인 것입니다.
16절 하반절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도 서러운데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것도 서러운데 그들은 거기서 멸시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다니엘은 국무총리 지위에 있었으니 누가 감히 그를 무시하고 그를 멸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이 이처럼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치가 곧 하나님의 수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얼굴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소극적으로는 죄를 떠나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았더라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비전을 가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다니엘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죄와 쉽게 타협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지 않았던 초점 없는 우리의 삶을 뉘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말씀에 눈을 열어 주셨을 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달았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할 기적과 같은 약속을 주시는 것을 봤던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기까지 다니엘은 어떻게 살았습니다. 그는 지극히 총명하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한 사람인 줄을 바벨론의 왕도 알아보았습니다. 그 소년들을 나라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 쓰고자 했고 덕분에 다니엘은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바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였습니다. 적국을 위해서 재상(宰相)이 되어 그 나라를 위해 일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가 어찌 행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 때문에 그는 그 일을 감당했고 그래서 다리오왕은 자기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다니엘을 6장 2절에서 칭하여 부르기를 “다니엘아,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라고 부른 것입니다. 몸으로는 자신을 섬겨도 다니엘이 섬겼던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이방의 왕도 알아봤던 것입니다.
그는 가장 비극적으로 나라가 멸망하는 역사 속에서 포로로 끌려와서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일처럼 부둥켜안고 괴로워했을지언정 이 나라가 누구 때문에 망했노라고 손가락질한 적 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원망하거나 남의 탓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를 회개할 수 없는 이웃을 위해 대신 회개 해주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모든 사람이 나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이 이 땅을 고쳐 주시기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움과 원한으로 이웃을 분열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것은 신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재앙의 때에 오히려 일체의 관용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큰 재앙 아래서 사람들의 불안은 우울로, 우울은 분노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은혜를 받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장소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의 영적인 연합이니 그 연합의 정점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머리 되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얼굴빛을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에게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넉넉히 이 현실을 일체의 관용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이길 수 있도록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황폐한 성소
두 번째는 황폐한 성소입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백성들은 수없이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아마도 하루에 고단한 노예살이를 끝내고 시름을 달래기 위해 경건한 백성들이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두고 온 예루살렘과 하나님을 경배했던 성전을 생각하며 그들은 늦게나마 깨닫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지은 시가 시편 137편입니다. 2절부터 4절에서 그때의 히브리 포로들의 노래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2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절)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성전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답던 성전에 건물은 훼파되었고 모든 성전의 기명(器皿)들과 보화들은 이방인들에게 뜯겨 나갔습니다. 희생의 제사가 그쳤기에 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재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6장 4절에 의하면 아무 흠과 허물이 없이 이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봉사했으니 적국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감추고 계신 섭리가 드러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온 관심은 황폐한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멀리 이방의 땅에 끌려가서도 그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난 창문을 열고 날마다 기도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교회의 영적 상태의 반영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멸망한 예루살렘 한가운데는 영적으로 황폐한 성전이 있었고 무너진 성전 한가운데는 영적으로 잠든 제사장과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각기 자신의 교리와 도덕 생활의 우위성을 강조했으나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모두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는 쓰레기같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러한 재앙의 상황을 통해 영적으로 각성하고 번영하게 되기를 강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와 함께 역사라는 모닥불의 마지막 불씨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한 사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재앙의 시기는 영적 변화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참되고 진실한 교회의 영적 변화는 떠들썩한 인위적인 행사나 요란한 계획에서 오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고요히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교회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서책을 통해 예루살렘의 회복의 약속을 알았을 때 바로 이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에 그는 소년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온 지 약 60여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젊고 어린 다니엘은 이제 흰머리가 가득한 노인 되었을 것입니다. 그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이 그에게는 부끄러움의 연속이었으니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한 처지에서 남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말씀을 읽다가 거의 70여 년이 가까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그 민족의 미래를 끌어안고 황폐한 성전에 눈물을 흘리는 다니엘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황폐한 성장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묵상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무도 꿈꾸지 못한 희망의 역사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관심은 재앙이 아니라 이런 재앙의 한 가운데에 있는 나 자신과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황폐하게 된 교회를 생각하면서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새롭게 역사하실 것을 꿈꾸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C. 기도와 간구
마지막 세 번째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리라는 놀라운 계시를 깨달은 다니엘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리는 일이었습니다. 17절 상반절이 말합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테필라’(teppila)이고 간구는 ‘타하눈’(tahanun)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거의 같은 뜻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을까요?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 행위를 가르치고, 간구는 특정한 사안에 대한 애원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넓은 의미에서 간구라면, 간구는 특별한 의미의 기도가 되는 것이죠.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로 사는 인물이었습니다. 다리오왕 시절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평소처럼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짜 사랑했던 분은 하나님이었고 두려워하는 분도 하나님이셨으니 왕이 다니엘의 신앙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장의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고 말입니다. 이게 다니엘의 일반적인 기도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서책의 말씀을 깨달은 후 그의 모든 생각과 마음은 한 가지에 꽂혔으니 포로들이 돌아가고 예루살렘에서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모든 신자가 어려움이 닥친다고 열렬히 간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일하게 살던 사람이 재앙을 만났다고 열렬히 기도하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평소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이렇게 특별한 일이 닥쳤을 때 특별한 말씀에 깨달음이 올 때 열렬하게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항상 기도했으나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의 마음은 예루살렘으로 모아졌고 애원하는 간구가 그의 마음속에 불처럼 타올랐습니다. 이런 재앙의 때에 염려와 근심,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적어도 그것은 그리스도인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혈기와 절망에 이르는 마음으로 떨어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화무쌍한 때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뒤웅 치는 역사 속에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뜨겁게 타올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국제정세를 누구보다도 잘 읽을 수 있었던 위치에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을 꿈꾸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셔서 포로 된 사람들 중 일부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성이 수축되고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면 제사를 드릴 수 있었고 거기에서 꿈에도 그리던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끌려온 지 60여 년이 지나도록 거기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었으니 하나님을 성전에서 뵈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황폐한 성전이 복구되고 백성들의 마음이 경건한 신앙으로 타오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복을 주셔서 더 이상 이방인들에게 모욕받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던 사람이었으나 이 말씀을 깨달으며 그의 기도는 더 간절해졌습니다. 자신을 쏟아부으며 눈물로 쏟아지는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러한 기도와 간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 모든 상황이 자신 때문이라고 책임을 느끼며 아직도 철이 없어서 무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능욕하고 있는 사람들을 벌주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죄가 많아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가변적인 것에서 불변한 것으로 움직이고, 시간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자극하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잠든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깨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원한을 품고 분노를 발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렇게 자신들의 죄와 강퍅함을 뉘우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소수의 사람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 사람 그가 곧 다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앙의 상황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얼굴을 찾는 사람을 당신도 찾으십니다. 기도와 간구로 그 마음을 쏟아 놓으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면을 두루 살피며 자기 얼굴을 참는 자가 있는지 보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모두 그런 사람들로 하나님께 발견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9 (2020.09.20._주일오전)
9. 주의 긍휼을 의지하라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단 9:18)
I. 본문해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상태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서책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황폐한 성전은 하나님을 떠난 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주의 긍휼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II. 주의 긍휼을 의지하라
다니엘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지도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도와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곤궁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빛은 이 사람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다니엘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간청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A. 들으소서
첫 번째는 '들으소서'였습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것을 재앙으로 보았고 그 재앙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라고 14절에서 이미 고백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2절에서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의 그치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지만 다니엘이 말씀을 깨달았을 때는 약 60년에서 65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70년이 되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은 희망으로 뛰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다니엘의 마음에 이 말씀은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18절 상반절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17절에서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라는 기도가 반복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역사 속에서 말씀을 주셨으니 지금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간절히 찾아야 할 때임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을 징검다리 삼아 전개됩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이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오며 하나님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신다는 사실을 기도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심어 주시기 위해 간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생사 간의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재난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나라를 분열시키고 마음을 찢어 놓는 대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잠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바라보며 비록 불순종과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나 70년 만에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그치리라고 하신 은총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련을 만나고 재앙이 있을 때 우리가 더더욱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요동치는 마음으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파도치는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별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폭풍을 만나도 이 또한 지날 것이요 잔잔한 바다도 언젠가는 폭풍으로 변할 것이니 바다에는 항상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별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시련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재난의 때에 하나님은 당신께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보여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가슴이 뛰는 역사의 희망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들어 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보옵소서
두 번째는 '보옵소서' 입니다. 다니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 이 상황을 보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려도 되나 하는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그분께 '눈을 뜨시라'고 까지 아룁니다. 언제 하나님이 눈을 감으신 적이 있었습니까? 바벨론에 있었던 다니엘은 마치 자신이 예루살렘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 같은 화법으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예루살렘의 소식은 들었으나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을 텐데 마치 훤히 보고 있는 것처럼 안타깝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움을 다급하게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과 모든 백성들의 비참한 상황을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은총으로 이 상황에 간섭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재앙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을 잃고 신앙이 무너진 것을 돌아보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황폐한 상황이라는 이 표현은 예루살렘의 성읍과 그리고 파괴된 성전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영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보아도, 성전을 생각해도, 마음에 신앙이 무너져 운명처럼 포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희망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 속을 들여다보아도,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신앙이 부족한 사람은 그런 상황 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주저앉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희망을 포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까지도 황폐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눈에는 미래의 희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보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는 단지 육신의 눈으로 보듯 그들의 겉모습을 보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 그들과 함께 흘러갈 이스라엘 역사 속까지 들여다보아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이들의 운명을 보시고 가엾게 여겨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느 한 시점의 상태만 보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변덕스러운 분이 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자주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까?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서는 얼마나 자주 주님의 가슴에 칼을 꽂고 또 도망을 갔습니까? 걸레 같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때마다 좋아하시고 그때마다 싫어하셨다면 우리에게 비춰지는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변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신실했으나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도 사랑하셨고, 버리고 떠났을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집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사랑하였던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아달라고 애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는 자가 아는 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우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는 그 사람이야말로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시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마음을 미움과 복수로 채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그리고 이웃을 얼마나 불쌍히 여길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아니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이때 깨어 있어서 자신과 교회의 영적인 필요를 발견하고 고통하는 이 사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환란에 처한 이웃을 돕고 아픈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긍휼히 여기소서
마지막 세 번째는 '긍휼히 여기소서' 입니다. 최종적인 간구의 제목을 다니엘이 하나님께 아룁니다. 앞에 기도들은 이 간구를 위한 서론들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긍휼히 여겨 달라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래서 18절 하반절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희망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을 만나 나라가 망하고 모든 민족이 부서졌어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실함 속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나라가 망했어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은 그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고유하게는 하나님의 이 긍휼은 언약 관계 안에서 찬란하게 빛납니다. 마음씨 좋고 자비로운 엄마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자기 자식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런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그가 처한 비참한 상태를 보는 슬픔이 지배하여 그를 선하게 대우하게 하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큰 불행을 만났을 때 불행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지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원인보다는 비참한 결과에 주목합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외로울까? 가엾게 여기며 그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선대해 주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 책임이 있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번영하던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오는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된 불행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슨 책임이 있으십니까? 그들은 불순종했고 그 책임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재앙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니엘 개인적으로는 왕 다음으로 모든 지위를 누리며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녔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신의 희망을 공의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공의대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완전히 멸망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신의 간구가 자신들의 공의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을 따른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고백이며 자기를 포기하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불쌍히 여기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엾게 여겨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회개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려야 했으나 그들의 영혼은 죽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신 기도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다니엘이 기꺼이 그 자리를 택했습니다. 자신은 짓지도 않은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몸부림치고 당사자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 그들을 위해 용서를 빌며 대신 하나님의 얼굴빛을 찾았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자신의 혈혈단신이 짓이겨져도 이스라엘이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의 땅에서 모욕을 받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고 황폐한 예루살렘의 소식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회개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그런 비참한 사람들을 어떻게 자비로 가엾게 여기시는지를 아는 것이니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무지 무각하여 모든 시련과 징계를 당하면서도 짐승처럼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 원망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때에 하나님을 만나 말씀 속에서 역사의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전하는 사람 되고 싶으십니까? 자신의 공로도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도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만이 희망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모두 던져 황폐한 예루살렘을 돌아 보아주시기를, 사람을 보며 돌아 보아주시지 마시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으로 돌아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훌륭한 신앙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불붙는 가슴을 가진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니엘은 하나님의 이 약점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또 매달리기를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기도하고 이웃을 향해 긍휼을 베풀며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차마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직 나라가 망하기 전 하나님은 수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붙잡으셨습니다. 마치 마음이 가정을 떠나 바람 난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들며 이 가정을 지켜 달라고 애원했던 남편 호세아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11장 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이는 '이스라엘이여...' 라는 뜻입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히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불붙는 그 사랑은 멀리멀리 떠나가며 멸망의 불길로 뛰어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당신의 긍휼을 보이십니다. 이 재앙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나의 죄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며 기도하면 그가 제일 먼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를 조용히 회개하고 긍휼을 베푸시도록 간구합시다. 불행을 당한 이웃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를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백성들에게 하신 것처럼 합시다. 모든 것은 잠시 후 지나가리니 그때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이 날이 신앙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10 (2020.09.27._주일오전)
10. 주 자신을 위하소서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포로 상태에서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그림 같은 풍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고 온 예루살렘의 풍경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끌려 왔으니 이미 이스라엘이 기울고 있었고 이윽고 예루살렘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점령되었고 그 아름답던 성전의 기명(器皿)과 모든 보물들은 약탈되어 파괴된 채 펼쳐지는 예루살렘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옛날의 영광과 지금의 수치를 대조했습니다. 그때는 나라가 온전히 국권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나라를 빼앗겨 영토 잃은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그는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직면하면서 이스라엘이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며 그들을 위해 대신 회개하고 그들을 위해 대신 아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에 놀라운 응답이 주어질 이 기도를 끝내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특별한 간구를 드립니다.
II. 주 자신을 위하소서
그것은 '주 자신을 위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 속에서 그는 세 가지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A. 용서하소서
첫 번째는 '용서하소서' 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이스라엘이 이방의 땅에 포로로 끌려 오고 나라는 멸망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훼파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속에서 그는 가장 본질적인 기도를 19절에서 이렇게 드립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들으소서' 라는 기도는 앞서 17절에서 드린 기도의 반복입니다. 반복했다는 것은 이 기도가 그만큼 다니엘의 마음속에서 다급한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께 열납 되기를 바라는 그의 애달픈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용서를 비는 기도였습니다. 용서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해서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용서입니다. 이 행위가 하나님과 관련될 때는 훨씬 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냥 지은 죄를 용납해 주거나 행한 잘못을 덮어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본성까지 고쳐 주십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까지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하여 주실 때도 은혜로 사해 주시지만 죄지을 수밖에 없도록 망가진 그 사람의 본성을 고칠 때도 은혜를 주셔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의 작용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이 위에 한 가지를 일을 더 하시는데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 죄를 지을까요? 왜 그릇 행할까요? 왜 오류에 빠질까요? 결국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진리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게 되고 올바로 사랑하여 할 바보다는 욕망하는 바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릇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그 모든 것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일 없이는 결코 진정한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다니엘은 지나간 죄를 단순히 용서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 주면 무엇합니까? 지금 또 죄를 짓고 있고 앞으로도 지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본성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용서를 빌게 된 것은 죄 때문이었으니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고쳐서 쓸 수 있지만 대적하는 감정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수리해서 쓰실 수 있지만 죄는 고쳐서 쓸 수 없습니다. 그것은 파멸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은 용서하시지만 죄는 파괴해버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그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투쟁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다시는 그 죄를 따르지 않도록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가장 확실한 표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지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벌하지 말아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다시 이스라엘이 예전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하나님과 연애하던 그때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고통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재앙의 현실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곧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회개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와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빌기를 바랍니다.
B. 행하소서
두 번째는 '행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어서 다니엘은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속히 행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지연되면 죽을 것 같으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속히 이루어 주시도록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19절에서 그는 두 번째 기도를 이렇게 드립니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들으소서'가 일반적인 간구라면 '귀를 기울이소서' 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특별한 주의를 끌고 싶어 하는 기도입니다. 그만큼 상황이 애달프기 때문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괴롭고 고통스럽던 날에 시인이 뭐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까? 도처에 사람들의 비난이 있고 자신의 영혼이 얼어붙은 것 같은 때에 경건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자기를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사연이 마음에 가득할 때 그 마음을 툭 털어놓고 모두 이야기할 수 있고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위로입니다.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누구에게 이 하소연을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바벨론의 왕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신앙을 잃어버리고 바벨론에 섞여서 이방인과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는 불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니까?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 태어나서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이방인과 똑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입니까? 그는 외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고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하나님께 무엇을 그렇게 속히 행하시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무엇을 느리게 행하셨길래 속히 급히 신속하게 실천을 하시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자기들을 이 바벨론에서 건져 주시고 고통받는 모든 동포들이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시고 더 이상 바벨론 사람들에게 구박받지 않게 해 달라는 국민들의 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전혀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의외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와서 그는 하나님 앞에 물처럼 쏟아지는 마음으로 꼭 그 일을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당신의 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속히 해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행복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 때문에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고 있으니 이 일을 속히 막아 달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빨리 행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매달린 것은 이스라엘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수치를 당하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치욕스러운 상황을 그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너희의 신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여호와라고 하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여기에 끌려 왔느냐' 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너희의 신을 찬송하던 노랫가락 하나쯤 우리에게 불러 봐라. 놀이 삼아 들어 보자꾸나.'라고 말합니다. 이런 현실을 모두 알고 있던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이 가까웠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사랑하는 아빠를 잃어버린 소년처럼 그는 모든 수치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찢어지는 마음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아지는 곳에서는 지옥도 천국이었으나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곳에서는 천국도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무총리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짓밟힌 예루살렘, 황폐한 예루살렘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예루살렘을 이렇게 버리시나이까'라고 뒹굴며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택된 백성이기에 그들의 수치가 곧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가리는 수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진실한 사랑은 그분의 이름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바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평판입니다. 그래서 시편 89편 16절과 17절에서 시인은 그러한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뿌리'라고 하는 것은 '영광, 자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영광과 자랑이 높아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높이 여김을 받으시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우리도 우쭐해지는 자랑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기쁨인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 시대에 모욕받는 것을 보면서 더 많은 열심으로 우리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속히 행하시도록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불이 섶을 사르듯이 당신의 불과 같이 강림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부흥을 주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던 연약한 자들은 강건하게 될 그 날을 꿈꿔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땅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도 함께 수치를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하나님이 모르셨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허락하신 것은 당신의 이름이 잠시 수치를 당할지라도 이스라엘을 키질하여 더러운 것들을 모두 털어내고 그루터기들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이후에 더 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속히 예루살렘을 재건해 달라는 기도인 동시에 또한 황폐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회복시켜 달라는 간절한 애원이었던 것입니다.
기도 중에는 인내하므로 오래 기다려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 이 기도는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다급한 기도였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자신의 생명까지 가져가실지라도 하나님이 속히 응답해 주셔야 할 기도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모욕을 받는 이 상황에서는 그의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이 치욕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다니엘에게 고통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많은 재물을 누리고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그가 정말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모든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그의 경건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까? 그러면 그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우리의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의 되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고 두려워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당신의 잠자는 교회를 깨워 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각성입니다.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각성을 통해서 부흥이 옵니다. 떠들썩하고 요란한 행사를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례적으로 드리는 예배나 마음이 없이 하는 경건생활에서는 이런 것들이 오지 않습니다. 골방을 찾으십시오. 침잠(沈潛)하십시오. 고요히 흩어진 자기를 버리고 고유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현실을 아파하십시오. 그 아픔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의 고통을 대입하십시오. 성령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C. 위하소서
마지막 세 번째는 '위하소서'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은 하나님은 이제 다른 것 신경 쓰시지 마시고 당신 자신을 위하시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깨달은 후 올린 기도의 정수(精髓)였습니다. 19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 이제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많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하여 당신의 능력을 쓰시옵소서.' 왜냐하면 '주님의 성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것들인데 이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있나이다.' '당신 자신이 당신의 이 불명예를 사라지게 해 주옵소서' 라고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이름에 먹칠한 적이 없건만 그와 언약으로 묶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판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제발 직접 나서서 이 사태를 해결하셔서 하나님이 하나님인 줄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에 나아가 알게 하도록 도와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과 묶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가에 따라 하나님 이름의 평판은 결정되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 수도 있고 그 영광을 드높일 수도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존귀한 이스라엘이 되는 대신 하나님을 버리고 행복해지려다가 결국 하나님도 잃고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열방과 만민에게 당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하시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질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복을 누립니다. 이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고통받고 수치스러운 포로 생활 속에서도 무엇이 먼저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해달라고 그는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모욕하는 이방인들과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비참한 상황의 책임이 자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께 뒤집어쓰고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나의 의로움을 보옵소서'가 아니라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자신의 죄로써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없었던 재난의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재난 속에서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며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하여 내가 나의 죄를 깨달았사오니 아버지여 우리를 용서 하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이 속히 당신을 위해 하시옵소서. 이렇게 빌어야 할 것입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여러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감각으로부터 잠시 떠나십시오. 흩어진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십시오. 그분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주님을 보기 원한다고 주님의 음성을 듣길 원한다고, 주님을 만져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존귀하신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이 땅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있사오니 하나님이 지체하지 마시고 당신을 위해 일해 달라고 빌어주십시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깨우고 부흥의 불을 지피십니다.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친히 일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혈기에 치우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남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마귀 보듯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여러분 마음 안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일체의 사랑과 관용으로 대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성심을 다해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도록 봉사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체의 고요함으로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그분의 얼굴빛을 뵙기를 간구하십시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그분께 아뢰십시오. 일체의 관용과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여러분 자신을 헌신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을 통해 땅에 떨어진 주님의 이름이 다시 높아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찾을 때11 (2020.10.04._주일오전)
11.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이때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라가 나누어진 뒤 약 백오십 년이 흘렀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유능한 여로보암 2세가 등장했습니다. 그의 영명(英明)한 통치 아래 번영을 누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타락했습니다. 영적으로는 극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7장 8절에서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았다고 했으니 이는 세속적으로는 열정적이었고, 신앙적으로는 냉담한 이스라엘의 정신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멸망을 앞둔 줄도 모르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심정으로 예언했습니다. 가장 든든한 것처럼 보이던 안정된 시기에 호세아는 울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대신 울어 주었고, 뉘우칠 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뉘우쳤던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이 한 절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그림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은 자기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신흥 강대국인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14절에서 예고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을 그 심판에서 건져낼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도움을 끊고 떠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5장 15절 중반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때도 이스라엘을 버리신 적이 없었지만 그들이 당신과의 관계를 고치고자 할 때까지 떠나 계신 채 기다릴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A. 죄를 뉘우칠 때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 때, 언제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까? 첫 번째는 '죄를 뉘우칠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언제까지입니까? 그분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떠나가심은 언제까지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꿀 때까지입니다. 15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기까지..." 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대신해 주시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을 사랑하는 종들을 통해 회개할 줄 모르는 그들을 위해 대신 회개하게 하지만, 당신 자신이 우리를 대신해서 회개해 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죄를 뉘우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인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당신에게 돌아가는 자에게 돌이킬 힘을 주십니다.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회개할 힘을 주시고, 돌이키려고 하는 자에게 돌이킬 힘을 주시고, 죄를 끊어 버리려고 하는 사람에게 끊을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나라는 번영했고 물질은 넘쳤고 사람들은 세상 사랑에 깊이 빠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세상을 사랑했고 사라져 갈 이 세상의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누리며 그들은 음란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거기서 온갖 죄악과 부도덕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5장 7절에서 호세아는 가정의 상처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뜨거운 눈물로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하나님의 분부로 당시 이름난 창녀였던 고멜에게 장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뼛속 깊이 사랑하는 아내가 끊임없이 외도하여 아이를 낳아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아오는 아내, 버릴 수 없이 뼛속 깊이 스며드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 선지자의 찢어지는 감정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비참한 영적 상황이었습니다. 세속주의를 추구하면서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이 지은 죄가 자신의 죄 때문이고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것이 자기의 고통인 것처럼 애끓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는 기도로 빌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하나님의 관하여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만나러 오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떠나셨습니다. 5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 떠나신 것입니까?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이런 선지자를 보내어 당신의 불붙는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스스로 홀로 버려진 자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긴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든 도움이 끊어진 이스라엘이 그들이 떠난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잘못한 아이를 방 안에 홀로 두고 엄마가 문을 닫고 돌아서는 것은 그 아이가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반성하여 좋은 아이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보다 우상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위해서 우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 우상을 사랑한 것이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도 잃어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누리고 번영을 구가한들 그것이 무엇을 남겨 두겠습니까? 불이 모든 것을 태운 후에는 재밖에 남겨 두지 않듯이 그들의 세상사랑도 말로가 뻔한 것이었습니다.
변함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악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었던 이유는 아름답고 보기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판단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판단보다 훨씬 옳다고 믿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이 교만이 마음속에 사랑으로 작용한 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 때문에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못 하게 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오히려 우상을 쫓았습니다. 교만은 죄를 짓게 하고 회개는 교만을 후회하게 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생각이 낫다는 교만을 뉘우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기를 꾸짖고 후회 속에서 회개하게 되는 것이니, 자기를 향한 신뢰는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굳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회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후회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죄를 뉘우치는 회개는 결국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란하고 떠들썩한 체험을 말하고,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회개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열매로 알리라' 말씀하셨으니 회개의 열매는 사랑이고 그 경험이 어떠하든지 사랑하던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가 회개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죄를 뉘우칠 때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뉘우칠 때입니다. 그리고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의 죄까지 자신의 죄처럼 여기며 뉘우칠 때입니다. 이것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길입니다.
B. 고난을 받을 때
두 번째로 '고난을 받을 때'까지 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속적인 번영 속에서 임박한 나라의 멸망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거짓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참 사랑은 눈을 뜨게 합니다. 거짓 사랑은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고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게 하지만, 참 사랑은 있는 것을 있다고 여기고 없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계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사라질 세상을 사랑했고, 허무한 우상을 공경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임박한 멸망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못된 짓을 해서 복수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초리로 때려서라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어미의 마음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당한 후에야 극도의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 이외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령한 것을 아무리 잃어버려도 가슴 아픈 줄 모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직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섭습니다. 가치관이 사랑 때문에 바뀌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사랑하던 세상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들의 마음은 고통을 받으니 신령한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 받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결국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고통이요 고통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이니, 이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은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기업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고통 속에서 비로소 사랑하던 것들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참되게 빛나는 그분의 얼굴을 뵈오며 진정한 행복이 그분의 얼굴 앞에 사는 것임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고난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번영과 고난에는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번영할 때에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소명을 버리게 되고, 고통받을 때에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더욱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모든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석하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석의 힘이 바로 신앙입니다. 아무것도 우연한 것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 없으니 사랑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삶의 현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좋은 일에 대해서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나빠 보이는 일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의 해석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번영하게 되었다면 누가 그런 복을 주었습니까? 이스라엘은 그 복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호세아 2장 8절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벌어 놓은 집안의 돈을 빼돌려 우상에게 갖다 바치는 자신의 아내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 만하면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를 다 싸들고 바알에게 가서 몸을 팔며 외간 남자와 동침하고 바알에게 그 모든 것을 바쳐 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살점을 저미고 그 살점에 소금을 뿌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절절이 빨아들이게 한 다음 하나님의 분신이 되어 자기의 아내를 생각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남편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아오도록 울부짖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음란하듯이 우상을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의 번영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번영하게 해 주신 것이지 어찌 우상이 그 번영을 주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은 말할 수 없는 고통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아내를 생각하며 2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고멜은 바알 신전의 창녀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바알에게 자신의 물질을 바쳤고 바알에게 경배하러 오는 이름 모를 남자들과 동침했습니다. 그 남자들이 그녀의 몸만 탐했을 뿐이지 무슨 생명을 나누고 싶어 했으며 그와 더불어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싶었겠습니까? 한순간의 쾌락을 위한 몸뚱이로 여겼던 것입니다. 모든 남자가 떠난 후에 버려진 자신을 보며 그때야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라고 말하면서 돌아왔던 것입니다.
자녀가 고통받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고난은 죄 때문에 오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복수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발견되기 위해 숨으시고 사랑받기 위해 때리시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우리로 하여금 당신에게로 돌아와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그때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미움과 원망, 불평과 간 곳이 없는 자신의 마음에 방황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것이 나의 죄입니다. '나의 죄, 이 큰 나의 죄'라고 고백했던 선조들처럼 고난을 받을 때 현실 너머에 계셔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시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얼굴을 구할 때
마지막 세 번째는 '얼굴을 구할 때'까지 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그분 앞에 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누리며 살고자 우상숭배와 타락을 택했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든 부강하든 영광은 결국 망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사랑하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약탈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자 가졌던 모든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까지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분 없이 잘 살기보다는 그분과 함께 잘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중반절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그들이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어디서부터 오셨고 또 돌아갈 곳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돌아가시면 이스라엘 가운데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장소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어디에는 안 계시고 어디에는 숨어 계신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너희들이 내 얼굴을 간절히 찾을 때까지 너희는 내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간절히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탕자를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셨던 것처럼 오늘도 당신을 멀리멀리 떠난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셔서라도 당신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기 전에 이미 많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마음의 귀가 먹고 영혼이 질병 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영혼의 건강 상태가 훌륭할 때에는 수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속에서 사람의 말소리로 들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귀에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손을 인간의 지성에 내밀어 인간 지성의 손으로 지성이신 하나님의 팔을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는 것 없이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혈액 검사를 하는 방법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뢰할만합니다. 불과 몇 cc의 피를 뽑으면 수십 종, 정밀하게는 약 200여 종이 넘는 검사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삿바늘입니다. 우리의 영혼에서 피를 뽑아냅니다. 그리고 검사를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들릴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내 마음을 찌를 때, 위로할 때, 어루만질 때 우리의 마음에는 거룩한 정이 출렁거립니다.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말씀의 바늘을 꽂고 피를 뽑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죽은 영혼입니다. 죽어서 보름이 지난 시체에 주삿바늘을 꽂고 피를 빼보십시오. 피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찾게 하시는 것은 당신이 발견되시기 위함이니 이는 당신을 발견함으로 우리를 당신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그 시련 속에서 자신의 믿음이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나오는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속에서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신자에게 세상이 커 보일 때 하나님은 작아 보이고, 하나님이 커 보일 때 세상은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커 보일 때 하늘은 작아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커 보일 때 우리의 인생사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습니다. 시련의 폭풍과 잔잔한 바다를 함께 지납니다. 거울같이 맑은 바다 위를 미끄러질 때도 있지만 배 우편을 때린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며 침 뱉듯이 배 오른편에 물을 뿌리는 상황도 경험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변화는 우리의 인생이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있는 일이고 우리는 변함없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현실의 상황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만 자신의 죄를 알고 민족의 죄를 압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듯 말씀을 통해 자신을 봅니다. 재앙 속에서 하나님만이 자신의 희망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싶어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숨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발견되고 싶다는 뜻이고, 당신이 멀리멀리 가시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 가까이 계시고 싶으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잠잠히 하십시오. 누가 뭐라고 말하든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고개를 드십시오. 그분이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주님이시며, 그분의 품 안에 있는 이 모든 세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지존하신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살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기도를 통해 여러분이 살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살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를 선택하고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버리신 증거라는 주장은 매우 천박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되던지 우리는 그분의 품 안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도 당신을 찾고 만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아가려는 여러분들을 찾아오십니다.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 한 사람이 불씨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전 537년경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첫 번째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니엘이 70년 후에 고토로 돌아가리라고 한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깨달은 그대로였습니다. 그 후 약 8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두 번째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지도자가 에스라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율법에 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에스라 7장 6절에 의하면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끌려 간지 70년 세월이 흘렀고 그 후 다시 80년 세월이 흘렀으니 백오십 년이 지난 것입니다. 30년을 한 대(代)로 잡으면 약 5대가 바벨론 땅에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 험난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앞장서겠다고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매우 슬픈 소식이 에스라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인의 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에스라 9장 2절에 따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이 일에 으뜸이 되어 가담했습니다. 이런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했는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또 그런 큰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말할 수 없는 깊은 충격에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비통한 때에 하나님을 가장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각성시키고 심령에 부흥을 가져다 주는 불씨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II. 한 사람이 불씨다
그래서 오늘 이 한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사람이 불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 '한 사람'이 영적 각성과 부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불씨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은 수없이 많이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부흥의 불씨가 된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언제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불씨로 삼으시겠습니까?
A. 한 사람이 기도할 때
첫째 '한 사람'이 기도할 때였습니다. 에스라는 학자였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스스로 지켜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가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세상 죄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들려온 이야기는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끔찍한 우상 숭배와 그리고 도덕적 불의가 그 땅에 다시 널리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소식을 들었을 때 에스라는 9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했다고 보도합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에 관한 것이었고 이말을 듣고 그는 겉옷과 속옷을 마구 잡아 당겨 찢어 버렸으니 이는 자신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머리털과 수염은 존귀하게 여기는 인간의 발부(髮膚)입니다. 그것을 뜯으며 기가 막혀서 힘이 없어 주저앉을 정도가 되었으니 에스라가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어떻게 이루어진 포로 귀환이었습니까? 15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정착해서 살아온 사람들이 그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에스라 1장 5절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고, 안정된 모든 생활을 버려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들을 환영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방 족속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떤 고난을 만나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숱한 고난을 헤치고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동지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함께 겪으며 이겨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동지같이 믿었던 사람들이 타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에스라는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죄처럼 개인적인 회개를 끝낸 후 찾은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죄송해서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생사를 건 기도였습니다.
위대한 부흥은 위대해 보이는 사람이나, 위대해 보이는 인간의 계획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겨날 때 거룩한 열망과 함께 부흥의 불씨가 지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한 사람'과 함께 부흥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학자였고 훌륭한 지도자였으나 이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을 때 참모 회의를 하거나 어떤 계획도 먼저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기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고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범죄가 자신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 찾으십니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모든 시대적 상황을 하나님 앞에 고하며 하나님을 떠난 불경건과 불의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고 민족을 위해 용서를 비는 사람을 통해서 그의 마음에 불씨를 담아 화로를 삼으시고 부흥의 시발점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에스라의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에스라 이름의 뜻은 '도움' 곧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그의 이름처럼 그는 민족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 민족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한 사람이 자복할 때
두 번째는 한 사람이 자복할 때 그 사람을 부흥의 불씨로 삼으십니다. 에스라가 드린 기도는 그저 평범한 간구가 아니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실 수 있는 좋은 것을 많이 주셔서 호강을 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 자복했습니다. 자복은 자기의 죄로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후로 하나님이 무슨 형벌과 어떠한 처분을 내리시든지 모든 것을 감당하고서라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렇게 자복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닌데도 자신의 죄로 여겼고, 자신이 죄를 지은 것보다 더 가슴 아파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게 될지도 모르는 큰 형벌을 자신의 형벌처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수치와 치욕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괴로워 하며 하나님 앞에 굴복하였던 것입니다. 9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라고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고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있는 죄들 중에 에스라가 지은 죄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였고 특히 지도자들이 범한 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들의 죄를 자기의 죄로 여겼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게 되었습니까?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가슴 아파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이스라엘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고 그렇게 사랑했기에 그들의 죄가 자신의 죄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미움은 편을 가르고 사랑은 하나 되게 합니다. 에스라는 진심으로 자기의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때 하나님 안에 자기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자기만의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이스라엘 중 한 사람이었고, 이스라엘 안에 있는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눈물로 하나님 앞에 자복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자복하는 회개가 있습니까? 나라는 더 잘 살게 되었고, 교회도 많아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날처럼 끼니와 생계를 위해 목숨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필요도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모든 부요함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살아 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제 머릿속에 또렷이 박힌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가고 혹은 친구들 교회에 가기도 하고, 초등학생이지만 고모를 따라 부흥회에 가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어디를 가든지 회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시멘트로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놓고 의자도 없이 가마니를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설교가 그다지 훌륭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어쨌든 주의 종들은 목에 핏줄이 서도록 열렬하게 무언가를 말했고 설교가 끝나면 어느 교회든지 통곡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한국 교회의 밑거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울었고 고단한 인생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천국을 바라보며 울었습니다. 물론 그 울음 속에는 자기 설움의 눈물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복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교회에 가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여러분! 눈물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재앙적 상황이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사하여 주셔서 다시 이 땅을 고쳐 달라는 진심 어린 자복이 있었는지 한 번 돌아보십시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남의 죄를 자기의 죄처럼 생각하며 그를 대신하여 회개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지체들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부흥은 떠들썩한 행사나 사람이 미리 계획한 일정표를 따라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자복하여 진심으로 회개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큰 불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큰 불이라도 불씨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스라 한 사람의 자복은 이스라엘의 집단적인 큰 범죄에 비하면 매우 매우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부흥의 불을 일으킬 불씨가 되었습니다. 부흥의 시작은 언제나 한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불결을 먼저 보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보이시고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희망을 기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죄가 자신의 죄로 여겨지게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성령으로 감화시키셔서 눈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간구하는 사람들의 연약한 기도를 통해서 동토와 같은 땅에 봄이 오게 하시고 얼어붙은 땅에 샘물이 흐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망, 비난과 다툼, 끊임없는 분열과 싸움을 이제는 그쳐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단 한 번이라도 남의 핑계를 대고 원망하는 대신, '나의 큰 죄 때문이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오니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내가 이 시대의 모든 나쁜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니 주여 나의 죄입니다' 라며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람의 말을 하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 사람의 말들을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먼저 주께 자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백성들이 통곡할 때
세 번째는 백성들이 통곡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불씨가 되었을 때 그 불씨가 어떻게 불길이 되어 퍼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의 죄악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똥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치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장 주모자들을 잡아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정죄하는 설교를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큰 심판을 예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불행한 소식을 듣는 순간 모든 죄를 짊어졌습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위해 엎드렸을 뿐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자기가 지은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 앞에 엎드려 자신의 불결을 토하며 기도하는 에스라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죄가 곧 자기의 죄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런 인위적인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성전 문 앞에 엎드려 흐느끼며 자복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에스라가, 자기의 지도자가 성전 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엎드려 흐느끼는 에스라의 모습을 보며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에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와 함께 모였습니다. 에스라 10장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남자와 여자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마음까지 찢어 놓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우상 숭배를 했겠으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죄를 지었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도 마음을 찢으며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회개가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락했으나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었습니다. 잠시 육체의 욕망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압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속 깊이 여전히 하나님을 그리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예외 없이 이 마음이 있습니다. 에스라의 기도하는 모습이 그들의 이런 마음을 일깨웠습니다. 죄 없는 지도자가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성전 앞에 엎드렸습니다. 어떤 책망보다도 마음을 크게 찔렀습니다. 에스라가 엎드린 성전의 소식을 듣고 모인 그들은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라가 엎드린 마음이 곧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인들과 시집 장가를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슬픈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둘씩 성전에 모였고 아버지 같은 지도자와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우상숭배와 범죄로 찢어진 그들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 앞에 모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잠든 부흥이 현실에 대한 염려로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는 해결하실 분이 없다는 절실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큰 통곡의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스 10:1) 에스라의 마음을 본 받은 백성들이 회개한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룬 것은 정죄와 비난이 아니었고 자복하는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을 향한 눈물의 기도가 큰 역사를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시대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의 불씨가 되어 냉담한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인 부흥의 불을 지피게 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 하신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백성의 죄를 위해 에스라처럼 통곡하고 그들을 위해 대신 울어줄 사람을 찾을 때 여러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깨닫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말씀 통해 깨달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불신하는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기적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거룩함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망, 끊임없는 비난과 더러운 욕설을 거두십시오. 그치지 않는 분열과 분쟁을 그만두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큰 난관에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를 주님이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의 얼굴을 찾고 그분을 만나 여러분도 살고 나라도 살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