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아마도 사도 요한은 로마의 대 박해 시에 피신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쓸 때쯤에 이 사도는 기독교의 원로로서 자기의 공동체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진리의 빛, 신자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이것은 두 개의 주제인 사랑과 교제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이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인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룬 이 교제를 어떻게 교회 속에서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끊어진 교제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 서신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죄 사함이 핵심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닙니다.
Ⅱ.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
우선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이전에도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증거들이 없었더라면 시인들이 노래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찬송들은 어떻게 생겨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일깨울 때에도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수많은 사랑과 자비의 흔적들을 노래함으로써 그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나타내 보여준 것처럼 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질문 안에 오늘 우리가 왜 이천년 전에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신 그 날을 경배해야하고 그 날을 기뻐해야하는 이유에 대한 답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는바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이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이 성탄절을 지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성탄절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어떤 일을 판단할 때에는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아울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날을 산정하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자들이 왜 이 성탄절을 굳이 지키지 않았는지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우리는 좀 더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날과 절기에 대한 복잡한 규정이 없이 그저 기본적인 교회의 절기들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시대에는 일 년 중 수많은 날들이 온갖 이름이 붙은 날이었습니다. 교회의 절기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중세교회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날들 그리고 성인들을 축복하는 날까지 해서 일 년의 대부분의 날들이 이름을 가진 날들이었고 특별히 절기들은 미신적인 종교행위를 많이 가지고 들어왔고 또 거기에는 온갖 인간의 탐욕과 방탕까지 도입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중세교회의 매우 잘못된 실상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미신적인 절기들을 모두 걷어내지 않으면 정말 복음이 참뜻이 드러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종교개혁자들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내렸기 때문에 이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탄절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 복음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신 것, 그리고 그 후에 참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으로 일생을 이 세상에서 사신 것, 이것이 주는 기독교의 의미는 실로 막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성탄절의 핵심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징이 바로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이십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은 비유하자면 들리는 사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사셨고 특히 3년 동안의 공생애는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며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그릇된 자를 꾸짖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실 때 그 백성들과 마치 한 형제인 것처럼 그들 가운데 계시며 사셨습니다. 그 결과 듣기만 하던 하나님의 사랑은 생생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다가왔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찢어지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곧 하나님이 그 시대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시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사도로 세워 파송하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저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이 육체의 감각을 통해 볼 수 있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더라면 그 생생한 그분의 생애의 기록들이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복음서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만져본 적도 없고 그분이 떼어주시는 보리떡을 먹어본 적도 없지만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의 감화를 입어 이천년 전 그분의 생애의 기록들을 대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셔서 그래서 이천년 전의 예수가 아니라 지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Ⅲ.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심
A. 하나님의 사랑을 보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어 아기 예수로 오신 것은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이 사랑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극치였던 것입니다. 왜? 아기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 사랑의 나타남의 극치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한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성탄 사건이 바로 이 세상에 당신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모든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 계획의 열쇠였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보이시기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구약의 그 어마어마한 기적을 동반한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들이 나타났지만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역사는 그 둘을 비교할 때 하나는 태양이고 하나는 촛불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과 교제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심으로써 이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양떼들을 향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보이도록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더라면 결코 드러나 보여줄 수 없었던 무지개빛깔 같은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고 그 모든 계시된 속성 가운데 최고로 탁월한 속성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게 느껴지던 하나님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에서 병든 자를 어루만지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손길을 통해서 그 마음을 사람들이 전달받게끔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당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그들의 어그러졌던 마음을 돌이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그 영원한 생명을 힘입어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날을 기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B. 우리를 위해 죽으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죄를 지어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으니 그 사람의 죄를 속해 죽기 위해서는 사람이어야 했고 죽어야할 그 사람이 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기 위해서는 그분이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셔야했고 또 우리 인간에게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의 성품을 지니셔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으실 수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를 그 모든 죄에서 속함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는 제사장일 뿐 아니라 또한 헌제물로써 당신 자신이 죽으셔야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 신적 사랑의 최종적인 결말은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극치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마 누리지 못했던 큰 축복으로 다가왔으니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들을 당신의 양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부활하신 후에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그 머리에 붙은 한 지체로 삼아 그들 모두를 한 몸으로 만들어 영원한 생명과 사랑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해주시려고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빌레몬서 1장 3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그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유익으로 보자면 그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고 축하할만한 일이었지만 우리에게 그 생명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수치요 치욕이었습니다. 그 모든 율법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이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아래 복종하시고 그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게 됩니다. 그래서 구유에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영광과 행복으로 본다면 기뻐할 일이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이런 유익과 행복을 주기 위해서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복종하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는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두고 그 구유위에서 교차하는 우리의 두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만약에 거기서 끝났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한 위대한 구원의 계획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해주시는 것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후에 예전에는 없었던 하늘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그 어떤 놀라운 능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정사와 마귀들의 궤계와 그리고 모든 이 쇠사슬을 끊어 하나님 앞에 무장해제 시키고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살게 해주시는 그 어떤 위대한 힘이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사랑과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사 하나님을 대신해 이 온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시고 삼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생명과 사랑을 당신이 원하는 백성들에게 부어주실 수 있는 원천이 되셨던 것입니다.
Ⅳ.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수치스럽게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예전에 받지 못했던 하늘 생명과 사랑을 받아서 예전과 다른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선언하기를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 사실을 믿는 우리에게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상태에서 살아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에 살아갈 우리의 새로운 인생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단지 육신적인 연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던 때도 우리는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우리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깃들여있는 그런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쁘지 않았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갔지만 그러나 정말 이것이 나의 인생이요 나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라고 생각했어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만족했더라면 여러분 중 누구도 예수님을 믿었을 리가 없습니다.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삶이라는 것은 이기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또 자기와 관계 맺은 사람들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움과 선을 드러낼 이 자연의 세계를 알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그 자각 속에서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유와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삶만이 진정한 자기의 삶인 것입니다.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자기의 삶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들이 육신으로 살아있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자원들을 많이 소유하면서 사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살았다는 증거일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3장 1절에서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신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의미 있는 인생은 결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하늘생명, 하나님의 사랑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자신을 스스로 지탱하고 자기의 외부세계에 대해서 반응하며 생존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식물들도 가지고 있는 생명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이상입니다. 자신을 존귀한 사랑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끔 생존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의도에 합당하게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 힘이 있어야지만 그가 살아가는 삶을 자신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생명이 심각하게 고갈된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그리고 기쁨입니다. 당신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다시 당신과 관계를 맺어 누리게 하기 위해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살리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이 일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혀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깊이 슬퍼해야합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비천한 세상에 오셔서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하나님의 선도적인 사랑의 개입이 아니었더라면 아무 희망 없이 죄 가운데 태어나 사망 가운데 죽어갈 이 비천한 인생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날을 아무리 기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아기 예수가 구유에 태어나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스스로 악한 의지를 행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들을 버리지 않고 아직도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입니다.
Ⅴ.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유에 누이신 아기는 맑은 눈으로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생명과 사랑을 주기 위해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에서 여러분을 향해 물으십니다. 나는 그대들의 구속을 위한 모든 일을 다 이루었고 내가 여러분에게 그 은혜의 언약 안에서 모든 것을 주었고 또 줄 것이며 그대들은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살아가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 성탄절에 먹고 마시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그 하늘의 생명과 하늘 사랑을 힘입어 살게 하시려고 낮고 천한 구유에 오신 것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그 구원을 받아들이고 또 그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구원의 계획대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