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교훈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녹취자: 표명희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장면은 사도 바울이 어쩌면 자기생애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전도여행을 떠나는 그때에 전송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밀리도에 도착해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냈고 그때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떤 의미에서 유언적인 설교를 장로들에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에 올 때부터 삼년이 넘는 동안 어떤 자세로 교회를 섬겼는지를 쭉 설명함으로써 자기가 떠나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교회를 든든히 붙들어주시기를 성도들에게 자신의 기대를 피력하며 장로들에게 성도들을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모든 말을 끝내는 마지막에 자신의 삶에 대해 수뢰하면서 그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는 그 말씀을 여기에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위 타로기아라고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다 더 많은 어록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중에서 복음서에 편입되지 못한 로기아들도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을 것이다. 라고 보는 근거로 이것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영감된 성경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했으니 복음서에 없어도 우리는 언젠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더 복이 있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삶에 이것을 적용을 해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크게 두 토막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진리의 말씀으로 조직화된 교훈, 교리, 신학, 학문, 성경에 대한 연구, 언어 더 확장하면 모든 학문의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흔적들 이런 것들을 집적해서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우리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말한다면 즉 진리로 조직된 교훈의 체계라고 말한다면 기독교신앙의 두 번째 토막은 그 진리로 조직된 교훈의 체계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랑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됐기 때문에 여러분도 늘 볼 수 있는 책인데 신학의 정수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William Ames의 책입니다. Medulla Theologiae 라는 책인데 그 책을 보면 굉장히 우습습니다. 그게 그 당시에 조직신학 책이었는데 1부 2부로 나누어집니다. 1부는 조직신학의 내용이 좀 엉성하게 나오고 2부에서는 그 신학을 따라 살아가는 교회생활과 도덕적인 실천 사랑의 삶 예배 등등이 나옵니다. 그것이 사실은 그 당시 17세기 초창기의 선배들의 기독교 신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진리로 조직된 교훈 그 다음에는 사랑의 삶입니다. 이두가지는 항상 서로 교통하면서 하나처럼 엮어져서 기독교 신앙을 구성해 갑니다. 한쪽에서는 기독교신앙을 오직 진리로 조직된 교훈 그것으로 만족하는 이지적인 생활 태도를 갖습니다. 그런가하면 한쪽에서는 진리로 조직된 교훈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윤리적이고 행동하는 삶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전체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진리로 조직된 교훈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사랑의 생활 이것을 통해서 이제 구체적으로 삶속에서 열매를 맺어서 그래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진리로 조직된 체계들에 접근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이렇게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고 그것으로 감화를 받고 하나님께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는 진리로 조직된 교훈의 체계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역을 할 때에도 이 앞에 말씀드린 것이 오디오라면 두 번째 말씀드린 것은 비디오입니다. 여러분이 화면에서 그림이 기가 막히게 나오는데 소리가 안 나오면 끝까지 볼 사람 별로 없고 그림은 안 나오고 소리만 나오는데 그걸 끝까지 들을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두개가 함께 아주 잘 어울려서 그래서 빵빵한 음향이 나오고 아주 아름다운 영상이 나올 때 사람들이 그 내용에 주목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은 이두 가지가 함께 가게 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그러면 어째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을까요? 받는 것이 더 복이 있지 않나요? 선물 뽑기 지난번에 했었습니다. 받을 때 의외로 비싸고 좋은 것 받을 때 입이 귀에 걸립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물건을 받으면 너무 시무룩합니다. 남을 위해서 좋은걸 살 때에는 별로 기쁘지 않은데 싼 걸사고 비싼 걸 받으면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나쁜 일을 행했을 때 예를 들어서 구타나 폭행을 합니다. 꽝 때리면 멍이 들고 이빨이 부러지고 깨지고 할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근데 그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악을 행했을 때 악을 피해 본 사람보다 악을 행한 사람에게는 더 먼저 나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맞은 상처는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고치면 어젠가는 상처가 낫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식 죽여 버려야지 하고 마음에 불끈 솟아난 영혼의 더러운 구타의 욕구는 그 사람을 때린 후에도 그 사람 마음속에 계속 남아서 이번에는 저 사람을 때렸지만 다음번에는 또 다른 사람을 때릴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거나 사라지거나 약을 발라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 무엇이 마음속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었을 때 선을 받은 사람보다도 더 좋은 일이 선을 행한 사람 안에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먹을 것 입을 것 다 싸서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걸 받고 도움을 받으면서 너무 고마워합니다. 사실은 이기심으로 얼룩진 인간이 저 지체가 너무 가엽구나. 도와줘야지 라는 마음을 가진 것은 그 사람을 돕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계속 남아서 또 다른 상황이 생겼을 때 오늘은 이 사람이지만 내일은 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고 이것을 반복하는 가운데 이것은 그의 마음속에 경향성이 되고 길이 되어서 그렇게 내가 늘 이야기 하는 노예의 정신이 마음속에 베어서 그래서 누군가를 돕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믿음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 . 라고 하신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쭉 도와 봤습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은 특히 조심해야합니다. 상당한 거금을 도와줬는데도 거의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보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오랫동안 도움을 받으며 생활해온 사람들 그 사람들은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선교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을 돕지 않는 것이 선교에 소명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가 참지만 어떤 경우에는 따끔하게 혼을 내줍니다. 그런 정신들이 사실은 매우 잘못된 방식들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적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대접을 받고 살면 그 아이가 불행해 집니다. 원래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직원 예배 설교 할 때 이런 내용을 설교 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소비에 눈뜨지 말라. 그건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는 괜찮습니다. 과하면 안 되지만 나이든 어른들이 소비생활 하는 걸 10대도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파산 한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돈이 있어도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소비생활에 대해 너무 일찍 눈뜨게 되면 다른 창조적인 정신이 모두 매몰 되고 죽어버립니다. 금욕을 하라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면 어떤 게 있냐면 육체적인 자원이 모자랍니다. 엇 그제 청년 1교구에 갔었습니다. 두시 반에 잤습니다. 지금까지 회복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가는 부서는 어딘지 모르지만 한시에는 나를 반드시 재워야합니다. 저는 주일날 거의 죽는 줄 알았습니다. 토할 것 같고 아 이거 진짜 미련한 거다. 젊어서는 까딱없었습니다. 언젠가 교리반에서 MT 갔을 때 밥 다 먹고 나누기위해 모였을 때가 열 한시였습니다. 마지막 사람이 발표가 끝났을 때가 네 시 사십분 이었습니다. 그러고 와서 설교도하고 심방도 다니고 다 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안 됩니다. 육체의 자원을 잘 아껴 써야 합니다. 이것도 나이가 들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육체적인 자원을 잘해서 예를 들자면 가치가 적은 일에 확 써버리고 진짜 설교하거나 중요한 일할 때 기운이 없어서 못하면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입니다.
물론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얘기했듯이 여기서도 굉장히 인간의 타락한 성향은 언제나 있기 때문에 그런 걸 빌미로 해서 그다음에 타락한 성향과 만나게 되면 여기서 이제 노년에 노역과 사치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주 인생을 조심스럽게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좀 들면 대중교통을 안타고 택시타도 괜찮고 좀 편한 의자에 앉아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연세 드신 전도사님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을 그렇게 대접을 해드리는 게 좋습니다. 음식을 드려도 따뜻하게 물을 줘도 따뜻하게 그리고 의자에 앉아도 방석을 주고 이렇게 해서 육체의 자원을 절약을 해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다 고려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받는 사람은 계속 받을 때 조심해야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오히려 습관이 됩니다. 옛날에 우리가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지금도 열심히 하지만 심방도 갔었는데 할머니 한분이 중풍에 걸리셨습니다. 교회에 오실 때 오강까지 갖고 오셔야했습니다. 본인이 못 오고 우리들이 가서 모시고 오면 예배드리다가 볼일도 보시고 하셨는데 처음에 너무 외롭게 사셔서 우리가 가서 위로도 해드리고 쌀도 사드리고 청소도 해드리고 반찬도 주고 너무 외롭게 사시다가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가기만 하면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거리고 그러더니 한 6개월쯤 됐을 때 그날도 우리 대원들이 가서 잘 지내냐고 묻고 도와드리고 했더니 "다음에 올 때는 김치 좀 해 갖고 와 그러시더랍니다." 그러니까 받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복이 있다 라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실현하면서 그 사도바울이 살았는데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말은 마친 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그 말 그것도 예언자들이 예견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묶이리라. 결국은 순교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근심하여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크게 울었다 그랬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찬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 되었을까요? 과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낫다. 라고 하는 생각을 사도바울 혼자하면서 살았을까요? 그 교훈을 받은 사랑하는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교인들이 그런 생각으로 살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고 그래서 이 목회자가 돌아올 수없는 길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때에 이들은 두려워서 숨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목회자의 목을 끌어안고 크게 울며 눈물 흘리며 위로하였습니다. 이것이 결국 교회 안에 있는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진리로 조직된 교훈 이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교훈을 따라 살아가는 사랑의 생활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들이 모여서 성도의 공동생활을 나누었는데 성도의 교제하는 생활은 사역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지만 집 사기위해 함께 사는 것이 아니며 사랑의 삶을 살아야지만 아들이 월급 받아서 모두 다 갖고 오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이 가족이 함께 살기위한 수단이고 사업이 가족과 함께 사는 수단이지 반대가 아닙니다. 집이 가족이 함께 살기위한 수단이고 사업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위한 수단이지 반대가 아닌 것처럼 교회는 함께 살아가는 그자체가 목적입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그 진리를 구현하고 진리대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공동생활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사랑의 공동생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정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베어서 그래서 나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하는 그런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을 통해서 우리들이 복음의 깊은 내용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