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고치심 (2)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시 107: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계속해서 시인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시편 107편 전편에서 시종일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과 끊임없이 주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범죄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을 만나게 되고, 그 고통은 하도 깊어 식물에 대한 즐거움을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사망의 문 가까이에 이르렀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셔야 했습니다. 이런 비참한 형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시고 언제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모든 때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시지는 않습니다. 보여주셔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II. 여호와께 부르짖음
그러면 이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떠나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 사이에 연결 고리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매’라고 번역된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자꾸’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냥 단순히 부르는 것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듯이 무엇인가 고통 속에서 간절한 탄식으로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거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무신론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을 우리는 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요새는 반신론이라는 사상이 생겨났습니다. 반신론은 무신론의 관심이 신의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였다면 반신론은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없기도 하거니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 모든 사상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신론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독교를 조롱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한다. 그런데 만약에 그 기도가 정말 진실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아이큐는 기독교인보다 조금 낮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신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다 알고 있는 것을 신은 모르니 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고, 기도하는 자기는 해결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 신은 무지해서 모르니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도와주시면 됩니다. 이리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시오. 라고 가르치지 않느냐’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기도를 그런 신으로 해석한 신학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과 그 수단의 행사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른 전적인 타자이십니다.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고, 하나님과 같은 존재의 양식을 이 세상에 있는 감각적인 피조물, 정신으로 알 수 있는 영혼이나 혹은 천사와 같은 피조물에서도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과 이 세상의 실존하시는 양식은 우리들의 지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격차 밖에는 없습니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과 우리 사이에 완벽한 타자성만을 강조하신다면 하나님은 계셔도 하나님일 뿐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어도 우리일 뿐입니다. 양자 사이에 관계를 설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는 인간을 지으셔서 당신이 창조한 세계를 잘 가꾸고 돌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세상을 잘 돌보고 가꾸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이해해야 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이해해야 했고, 그 역할을 감당해 나가는 인간도 이해를 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당신이 어떠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셔야 했고, 또 가르쳐 주신 그 지식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지식의 눈높이가 하나님께 맞춘 지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맞춘 지식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신약 용어로 ‘아콤모다치오’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적합한 번역이 없지만 ‘적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아주 쉽게 설명하면 눈높이 방식의 하나님의 나타남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면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지식을 얻으실 필요도 없고, 또 보텔 새로운 지식이, 더욱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로부터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법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감동을 받거나 겪음을 당하거나 이러면서 변향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무엇이 생겼다면 그것이 완전한 것이라면 그게 없었을 때 하나님이 불완전한 것이고, 없었을 때에 하나님이 완전한 거라면 지금 생겨난 것은 필요가 없는 것이 생겨났으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 계시는 분인 것처럼 우리에게 비추셔야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지 창조가 모두 끝난 후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이미 창조에 대한 관념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에게 그 일이 어떻게 감동을 받을만한 뜻밖의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든지, 뜻밖의 일이라든지 아니면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소식이라든지 그런 것은 하나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련과 어려움이 왔습니다. 그래서 막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몸부림을 치면서 신앙으로 이겨냈습니다. 승리한 것이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런이런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말 제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하나님 정말 제가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 영원 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무것도 내게는 새로운 것이 없어. 그거 다 내가 작정한 거야.’ 그러면 돌아올 때 얼마나 싱겁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대해 주시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눈높이로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정말 훌륭하다. 정말 잘했다. 착하고 충성되구나. 정말 기쁘다. 네가 내 마음을 오늘 시원하게 하는 구나’ 이렇게 말씀하실 때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마음에 각오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 다음에도 시련이 오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우리에 대한 교육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물과 사건들을 보실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한 번에 영원히 보시는 것을 그래서 얻는 지식을 단순지라고 부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성의 단순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와 교통이 안 되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보시는 것처럼 우리와 똑같이 보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기도 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감동, 슬픔, 아픔, 기쁨, 환희 같은 것들이 느껴져서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도 하고, 힘 있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감정의 정동적 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현견지라고 부릅니다. 제가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지로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시기 위해서 현견지로 아시는 것처럼 당신 자신을 눈높이로 낮추심으로 우리를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자기를 바꾸려고 하는 기도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해도 무엄하다고 말씀 안하시고 그냥 귀엽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당장 응답을 안 해주시고 어떤 때는 가혹할 정도로 긴 아픔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응답을 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두 가지 이유인데 첫째는 그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좋은 것들이 오직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사소한 문제에까지 사랑으로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오직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 반신론자의 기도에 대한 피상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진술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 그 빛나는 지성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런 수준으로 기도를 이해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아콤모다치오의 방식으로 어리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앙으로 훈련시켜 오셨습니다. 그 훈련 중에 하나가 바로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과 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지는 구원 사이에 연결 고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가 그들을 구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구원해 주었지만 온 백성이 마음을 모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이 특별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그 커다란 고통 속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배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주님을 믿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 자기 생각이 안 나고 남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적으로 깊이 깨어나게 되면 오히려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너무 많이 마음을 쓰지 마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웃과 결핍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떠오르며 그들의 고통 하는 영혼의 상태가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땅에 떨어져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서 자신이 짓밟히는 것처럼 아파하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올릴 때 예수님의 마음이 항상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남을 위한 아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슬픔은 영혼이 아주 은혜의 상태에서 고양되어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지만 자기가 고통 받을 때 아파하는 것은 신앙의 유무, 영적인 상태의 높낮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아도 돈 떨어지면 불편하고 은혜 사라져도 직장에서 쫓겨나면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없어도 밥 안 먹으면 배고픕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사랑으로 뭉쳐진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도할 수 있도록 시동을 거실 때에 아무리 남의 아픔을 보여주어도 이 사람이 아파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의 시동이 걸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자신을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좋은 시절입니다. 뭐 그냥 요새는 키도 안 돌리고 그냥 단추를 누르면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리고 자동차만 그렇지 않고 오토바이도 단추만 누르면 시동이 걸립니다. 옛날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시내버스를 타면 안 믿어지겠지만 앞에 차장 한 사람, 뒤에 차장 한 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앞 차장은 여성이고 뒤 차장은 건장한 남자가 있습니다. 뒤에 있는 차장은 조수라고 불렀는데 가다가 시동이 자주 꺼집니다. 그러면 조수가 막 뛰어 내려가서 크랭크라고 이렇게 ㄱ자 붙여놓은 것처럼 되어 있는 걸로 앞에다가 꼽고 막 발동기 돌리듯이 돌리는 것입니다. 그게 추운 날은 잘 안 돌아갑니다. 막 고생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리다가 푸식푸식 푸식푸식 그러다가 어쩌다 하나 걸려서 부르릉 하고 걸리면 망가진 줄로 알고 다 내렸던 손님들이 다시 버스에 타고 출발하는 게 서울 시내에서도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거의 마음속에 기도에 엔진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도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을 때에 모든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최초의 믿음의 발동은 자기 사랑을 하나님께 연장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내가 어느 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했을 때 하나님 영광 위해서 그렇게 하려고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서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깨달은 것이고 예수 안 믿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고달프니까 어떻게 예수님이라도 믿어서 조금 나아져 볼까하고 믿은 게 이게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과의 의존 속에서 찾으려고 한 것,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죄의 웅덩이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만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면 고통이 올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독한 마음을 품고 반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러지는 못합니다. 결국 어느 한 순간에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깊이 앞에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낮추게 되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에 어떤 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극심한 인생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잠시는 완악해질 수 있고, 잠시는 교만해질 수 있지만 고통 속에서 영원히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고통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당신의 자녀들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이것이 인에 박여버리면 술 먹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벌을 주시지 않으셔도 간이 망가지고 그리고 위도 망가지고, 몸의 손상이 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하나님이 원 저자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우리들이 뿌린 삶의 씨앗들이 언제 뿌렸는지도 모르는 삶의 씨앗들이 우리가 예기치 못하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열매 맺힌 것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우리가 전혀 뿌려놓지 않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악한 사람들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하게 되는 핍박과 같은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고통은 크게 두 가지인데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고통입니다. 이것들은 이 세상에 있는 또 다른 물질이나 정신의 자원을 가지고 완화시키거나 혹은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 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해서 의도하시고 허락하시는 고통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치료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잡는 사람도 같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나하고 함께 배 탔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배를 탔을까? 요나만 거기 안탔더라면 그렇게 모든 화물을 잃어버리고 죽을 고생 안했을 텐데 요나가 거기에 탔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고통의 원 저자가 아니시라면 그러면 그 고통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당하게 된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고통의 원저자로서 우리가 잘못한 어떤 것에 대해서 보복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좋은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시고자 여러분의 잘못을 사용하셔서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자녀들이 수시로 당신을 떠나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향한 의존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종종 그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허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성도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무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불타는 마음 없이는 누구도 드릴 수 없는 헌물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의 영향력들과 찌꺼기들을 쏟아내고 한편으로는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엔진이 마음속에서 차갑게 식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웃의 고통, 하나님 나라의 전투상황을 보여주어도 그것으로 기도의 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은 이미 그런 것들이 자기 사랑으로 뭉쳐진 그 사람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도 그가 죽자고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그 자신의 행복한 상태를 건드리면 그것은 즉각 반응이 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기도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 속에서 그들이 자기를 의지하며 살았던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A. 고통 때문에 기도함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부르짖은 것이 아니고 고통 받을 때에 그 고통이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영혼을 갱신시키시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새롭게 하시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침에 눈을 뜨면 마주하는 고통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많은 이 세상의 물질과 정신의 자원을 쏟아 부었는데도 끝나지 않는 상처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점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런 고통정도를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인생에서 누구나 겪는 그 흔한 상처 하나를 극복할 수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는 신앙일 수가 있겠습니까? 매일 여러분 앞에 나타나는 고통의 민낯은 여러분에게 기도하지 않는 태만한 여러분의 영혼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깊이와 기도하는 깊이는 다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고민해도 거의 기도하지 못할 수 있고, 고민 거의 안하는데도 깊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신앙화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에 대면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능력이 모자라서 나를 이 세상에 악속에서 고통당하게끔 버려두시는 무능한 분이 아니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면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고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나의 말의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 자비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내가 미워서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복수하시기 위해서 돕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실패가 망가진 내 영혼 때문이었으니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땀을 많이 빼는 것은 건강에 아주 좋답니다. 사우나에서 계란 먹으면서 빼는 땀에는 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동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흐르는 땀에는 온갖 중금속들과 노폐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의 원리도 똑같습니다. 인도의 성자 가운데 ‘썬다 씽’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히말라야 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는 그 고개를 넘지 않는 것이 통례인데 너무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넘었는데 저 앞에 보니까 어느 노인이 길을 가다가 쓰러져서 힘이 없어서 더 이상 못 걷는 것입니다. 눈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썬다 씽은 그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서 업고 부축하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어마어마한 추위와 폭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고개를 넘었더니 여기 저기 몇 사람이 쓰러져 얼어 죽었습니다. 그 사람도 모두 도움을 청하는 이 할아버지를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썬다 씽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할아버지를 업고 부축하면서 씨름하는 동안에 계속 땀을 흘리고 몸에서 열이 나서 결국은 그 추위를 극복하고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목표는 이 기회에 우리의 망가진 영혼,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는 실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는 것이 고통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성숙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정결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뜨거운 사랑이라고, 영적인 각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은 모두 말의 잔치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망가진 우리 자신을 고치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고통 속에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근심과 염려 속에서는 마음이 찢어지고 정신이 분산되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쏟으며 기도할 때에는 퍼즐처럼 흩어졌던 우리의 정신들이 하나로 모아져서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왜 몇 명쯤이야 없겠습니까마는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려고 하는 고통 속에서는 아무도 없이 끝없이 황량한 벌판에 자신 혼자 서 있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그 홀로 서 있는 황량한 벌판에서 사면을 둘러보아도 자기의 고통에 도움을 줄 모든 사람이 단 하나도 없는 절대적인 고독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직 눈을 들어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그래서 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망가진 영혼을 고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렇게 기도의 엔진이 강한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앞에 실패한 삶을 살게 했던 찌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그 부르짖음이 정말 순수한 부르짖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이 질문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열렬히 마음을 쏟아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렵니까? 아니면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면서 망가진 채로 사시렵니까? 누구도 여러분을 대신해서 대답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삶으로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B. 고통에서 구원하심
두 번째는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부르짖음에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셨고”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고통들로부터’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두 가지의 고통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겪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서 복수하시거나 혹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 때문에 가슴아파했으니 너희도 당해봐라 하면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그런 고통이 우리에게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허락하신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 고통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그 고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 속에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들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고통 속에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그 고통 속에서 건져주시는 응답을 주시기까지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고통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보다 당신이 이해되는 인간의 지성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통이 없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때에 짐승과 같은 삶이 변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아파했던 아마도 다윗이었을 시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제게는 유익입니다.’ 고난을 당함으로써 예전에는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율례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실패한 삶의 궁극적인 문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이 세상과 망가진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실패를 고치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세상도 고쳐가야 됩니다. 쉬지 말고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구한 시간을 두고 할 일이지 오늘 수리해서 내일 아침에 새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급하게 그것과 함께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 망가진 채로 살아가는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고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전능하신 그 분께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삶의 상황 하나를 바꾸는 것은 우리가 핀 하나 들어서 옮기는 것보다도 훨씬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시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고통 받을 때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 시점에서 내가 이 쓰라린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고통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 고통을 내게 가져다 준 두 번째, 세 번째 원인들에게 보복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두 도구일 뿐이고, 그 모든 고통을 통해서 너는 내 앞에 홀로 서거라 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그 고통을 받으며 아파하는 우리의 통증을 능가하는 고통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III. 적용과 결론
정신의 깊이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당할 때에 정신의 깊이가 얕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게 복수하리라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나 정신의 깊이가 깊은 사람은 고통을 받으면서 내 인생의 이 고통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바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고통 가운데 있든지 벗어나든지 마지막에 궁극적인 관심사가 그 고통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여러분이 눈물겨운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인생의 처지에 있어서 어떤 살을 에는 고통을 당하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만 잊지 않으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나를 위해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그렇게 절실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내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선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가 만나는 모든 악과 고통들이 실어 나르는 그릇된 메시지들을 지워버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사랑한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한 장 받았는데 그 편지를 받고 한참동안을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영국에서 온 편지였는데 지난해에 영국 갔을 때에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자매님과 50대 초반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편 되시는 분하고 같이 찾아왔습니다. 교회에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누구세요?’ 그랬더니 ‘6년 된 인터넷 교인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 부부가 갈등이 너무 심해서 이혼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열린 교회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주고 선물도 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너무 고마워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카드가 왔는데 그게 4월인가 5월의 일이었는데 그 사이에 그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뭐라고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뭐 평소에 아픈 것도 아니고 그것도 타국에서 갑자기 심장마비 비슷하게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편지에 썼습니다. ‘사람이 지어내 놓은 말로는 위로할 말이 없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인생에서 겪는 수많은 고통들이 해석될 수 있는 링크들이 깨져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인생의 길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들이 왜 그런 고통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아픈 순간들 때문에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 선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우리가 지성의 품으로 그 분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 온기, 그 체취, 그리고 주님의 느껴지는 주님의 숨결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 속에 훅 하고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해하려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그 숨결을 토해놓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 석 자를 당신의 마음 안에 별처럼 매다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모두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에게 알려진바 되었고 주님은 여러분에 관해서 모르신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지금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마음을 쏟고 이 세상에 항해에 가졌던 나의 구원을 향한 모든 기대를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나를 끝까지 붙들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어머니 같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한분 밖에 없다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마음을 물처럼 쏟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녹여 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기가 고통으로 가득 찬 자리였다면 그런 기도 속에서 주님은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하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여러분이 고쳐져 이제껏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성형 수술하는 것을 대부분 정죄하는 분위기인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권하지는 않습니다. 가능하면 자연적으로 태어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살자. 그런데 한 여성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면서 생각을 많이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너무 심각합니다. 호르몬 계통에 이상이 생겨서 가슴에 털이 시커멓게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수염이 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웃 사람이 그 여자를 그 집안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딸이 어디 가서 안 나오니까 ‘아드님 요새 어디 가셨어요?’ 그랬답니다. 그 속에서 엄청난 정신적인 상처를 받는데 그 사람을 치료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진찰을 받아보니까 호르몬계 심각한 이상이 생겨서 그것을 고치고 그 다음에 여자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 말이 모든 게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이제 정말 새 삶을 사는 것 같아요.’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치료를 받고 얼굴을 좀 고쳤는데도 생각지 못했던 새 삶이 전개된다면 우리의 모든 육체를 지도해 가는 우리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우리 앞에 전개될 삶이 얼마나 다른 삶이겠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진정한 행복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나올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면 자기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보혈을 힘입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게 만드셨고, 무지한 사람들은 그 진리의 빛을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가슴 저미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인생에 고통을 남겨두신 데에는 하나님의 어떠한 계획이 있었을까요? 아직은 나도 모르고 그대들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통 때문에라도 간절히 부르짖게 되면 왜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나빠 보이는 고통을 통해서 어떤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는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겹도록 익숙해진 이 어두움을 떨치고 빛 가운데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며 말씀과 함께 한해를 시작해야 될 이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