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8. 고신대 섬김의 날
2016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그들은 애급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아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획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5-8)
녹취자:이경순
30대에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구약의 한 인물은 호세아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의 다른 많은 선지자들 중에서도 매우 깊은 사랑의 신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지만 그의 정신적인 고향은 유대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이 두 왕국을 하나의 조국으로 보고 예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로보함의 치세함에 북 왕국이스라엘은 최고의 판도를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산업은 번창하고 그리고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부를 누렸습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은 점점 더 신앙에서 멀어져갔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우상을 섬김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쉽게 돌이킬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역사의 비탈길에서 피를 토하듯이 예언했던 사람이 호세아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말로 예언한 것만도 모자라서 그의 가정생활 전체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아무리 보내어 눈물로 외쳐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로 하셨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수르에 의한 멸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 때문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향한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임이여 이것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차마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죄 때문에 멸망 받을 이스라엘 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부르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절절한 사랑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공정하게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는 그 절절한 설교자의 외침을 들어본 때가 언제입니까? 회개하라고 피를 외치며 설교하던 시절에도 교인들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 더 많은 죄를 짓고 회개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강대에서 그런 외침이 사라지고 있으니 교회에서는 이미 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교자들이 그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 계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죄 짓고 악을 행하고 사회가 극단적인 타락으로 가도 하나님은 그 창살을 붙들고 흐느끼시면 서도 돌아오거라, 돌아오거라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그려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이 갑이 아니라 사랑받는 인간이 갑이 되어서 그런 교리의 창살에 갇혀있는 하나님을 향해 갑 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에게는 당신의 넘치는 용서를 통해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분명한 징계를 당신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설교자들이 정직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버리겠느냐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너를 바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바드마와 스보임을 기억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9장 23절에 의하면 멸망해버린 소돔과 고모라지역의 두 마을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당하는 것을 마음아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을 향하여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어머니같이 찢어지는 마음을 보여주심으로서 그들을 한편으로는 때리시고 한편으로는 달래시면서 그들이 당신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회개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왜 강대에서 회개를 외치라는 그 선포가 사라졌을까요? 설교자들이 절실하게 회개하는 생활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혹은 스스로 자신의 죄가 생각이 나서 펑펑 울면서 회개한 그 마지막이 언제인지 한번 달력을 넘겨보세요. 신학교 때 흘린 눈물은 마음속에서 30년이 간다고 합디다. 신학교 다닐 때 1학년 때 채플시간에 늘 눈물을 흘리고 자기 죄를 뉘우치는 그 학생은 30년 뒤에 큰 교회를 이루어도 똑같이 그렇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깊이 회개할 때 이렇게 하나님을 거슬리는 자아가 죽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순결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거나 교회를 볼 때에 다른 사람들의 죄와 불순종이 꼭 내가 지은 것 같은 연합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죄와 불순종에 대한 무지함의 용납이 아닙니다. 그것을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을 퍼붓고 그렇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죄 인 것처럼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러니까 외칠 때에 이 두 가지 죄에 대한 치열한 미움 그리고 죄인에 대한 불타는 긍휼 이 두 가지가 설교자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살아있어서 분노하고 사랑하는 것이 한 인격 안에서 동일하게 타올라야 합니다. 지금 죄를 보면서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고 죄인을 보면서 너무 가엾어서 이 정을 억제할 수 없어도 세월이 흐르면 그 처음 먹었던 마음이 변합니다. 그런데 아예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그 앞길이 어떨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제는 바로 이렇게 이스라엘의 죄를 준엄하게 심판하시면서도 여전히 이들을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이들에게 누군가는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죄를 미워 하시면서도 차마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의 돌 같은 마음을 향해서 선지자를 보내어 이 말씀을 외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불붙는 긍휼하심입니다. 죄악으로 멸망하게 될 이스라엘을 마음아파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마음을 호세아 선지자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내속에서 돌이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을 해보면 나의 마음이 나를 거슬러 변하나니 나의 긍휼들이 모두 함께 일어나는 도다 하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긍휼로 번역된 니호마이라는 단어는 일인칭 복수로서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위로 동정 불쌍히 여김 이런 것들입니다.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크기에 있어서 양에 있어서 많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래 니홈 이라는 단어는 후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박애적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크게 나누면 사랑이 두 가지인데 사랑받는 대상의 장점이나 아름다움 혹은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사랑을 통한 이익이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박애적 사랑은 그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 때문에 가치에 불문하고 그 대상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칼빈은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그럼 호세아 선지자가 물론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왜 이렇게 절실하게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치열하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어느 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임합니다. 너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 에게 가서 결혼을 하라 주석가들에 의하면 아마도 이 여자는 당시에 있었던 바알 신전에서 종사하는 신전 창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진 말하자면 스타급의 신전 창녀 였을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 제의에서는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 담에 신전에 방들이 있고 신전에 헌신된 창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성녀들입니다. 그리고 그담에 그들과 동침을 합니다. 온 방에서 성행위가 이루어지면 이것이 바알을 기쁘게 해서 그래서 제때에 비가 내리고 햇빛이 내려야할 때 빛이 내리도록 조절함으로서 풍년을 가져온다고 믿는 신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할 수만 있으면 새로 정착한 이 땅을 주관하고 있을 바알 신에게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소위 얘기하는 혼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신전창녀였을 고멜에게 결혼을 하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결혼했으나 그 본성을 버릴 수가 없어서 수시로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와 연애에 빠지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그 고멜을 찾아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 호세아 안에 있는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도덕주의를 택했다면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선지자가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여인과 가정을 이루었겠습니까? 문제는 이 호세아 속에 이 여자를 향한 사랑이 불붙듯 해서 가서 진짜 자신이 그리워서 자신이 너무 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여자의 몸값을 주고 다시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두 대상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그 선지자의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호세아 자신을 교육 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타락하고 결혼의 정조를 저버린 그 여자를 가슴이 저미는 마음으로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배반한 그 여자를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내가 보기에 모세의 율법을 멀리 떠나고 죄만 지으면 사는 이 백성들이지만 나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하기를 네가 고멜을 향해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숙명적으로 사랑하신다 하는 것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뼛속까지 예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맨 처음 요나가 입으로 예언한 선지자였다면 호세아는 뼛속으로부터 예언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신 자신의 마음에 불붙고 있는 니홈마이를 말씀하십니다. 이 신학적으로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한 측면입니다. 그래서 자비, 오래 참음, 긍휼 이 세 개가 하나님의 사랑이 세조 각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다면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인데 그 사랑을 거슬리는 자에게는 오래 참음으로 그리고 죄인들에게는 자비함으로 그리고 긍휼은 비참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측면입니다. 그래서 이 긍휼은 어떤 것이냐면 죄에는 항상 죄로 끝나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비참을 동반합니다. 그것이 즉시일수도 있고 나중일수도 있지만 그 비참은 이미 그의 영혼 안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긍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죄라는 원인 그 결과인 비참 두 개의 필연적 관계를 생각하면 불쌍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긍휼이라는 것은 이런 고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가 무슨 죄를 지었던지 간에 비참에 처해있는 그 상태를 보며 아파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비참처럼 아파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예를 들면 한 아이가 남의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다가 돈을 훔쳐가지고 나오다가 높은 담벼락에서 넘어오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담장위에 있던 유리에 긁히면서 중상을 입고 떨어져서 골절이 되었습니다. 피가 낭자하게 다리에 흐르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쟤는 왜 그러는 거야? 손에 그 집안에서 훔쳐 온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저 자식 도둑질하다 저렇게 되었네, 아이고, 싸다 싸! 그런데 걔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둑질을 하러 갔는지 도둑질에 성공을 했는지 그리고 잠시 후에 얘가 유치장에 들어 갈 건지 그런 것은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내 아들이 다리가 다 찢어져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발목은 분질러져버린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긍휼입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못 들어보신 노래죠? 제가 작곡했습니다. 가사는 18세기에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더가 썼습니다. 우리는 목회자가 되려고 합니다. 물론 신학자가 되실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일은 매우 불행한 일이고 신학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일은 조금 더 불행한 일입니다. 만약에 지금 여러분들이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언제쯤 생길까요? 목사의 가운을 걸치면 영혼을 향한 눈물이 쏟아질까요? 아닙니다. 담임목회를 하면 시작이 될까요? 네버입니다. 언제 쯤 될까요? 안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신학을 배우고 수많은 성경 구절들을 설교하지만 무엇을 해도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듯이 죄에 대해 탄핵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향해 고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해 공정한 두려움을 느끼므로 마지막에는 자기를 신뢰하던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설교하는 것입니다. 존스터도 , 로이드 존스도 똑같이 설교는 로즈건 화이어 불붙은 논리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유익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감각적인 것에만 예민해 있는 우리에게 감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만질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므로 그분의 모든 생애를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성육신의 몇 가지 중요한 의미중 하나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배워야 합니다. 10년을 거의 한해도 쉬지 않고 여러분의 학교를 방문해서 난 똑같은 이야기를 마지막에 늘 남겼습니다. 죽도록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 3년 다닐 때 한 두 어번 정도는 병원에 실려가셔야합니다. 학문에 자신을 모두 던져 학문에 열심을 내십시오. 특히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꼭 하셔서 성경을 원전으로 읽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열렬 하게 기도하셔야 됩니다. 요즘 너무 기도안합니다. 이 학교는 기도원입니다. 방석하나 들고나가면 온 캠퍼스가 기도원입니다. 기숙사에 안 쫓겨나려고 도장이나 찍기 위해서 새벽기도 나온다면 너무 슬픈 겁니다.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리고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 타락한 시대에 이 사람들을 얼마나 불붙는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는지 그것을 가지고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살게 하신 날 동안 전심으로 피를 토하듯이 외치고 목회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낳으시고 기르시고 양육하셨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불붙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부르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사람이 없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열렬히 기도하고 그리고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며 이 복음전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