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9 신학교 섬김의 날
녹취 자: 허 혜숙
불 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5~8)
1. 본문해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지만 남 왕국 유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세속적으로는 번영한 나라였으니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멀리 떠나간 이스라엘을 위해서 온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으로 번영한 나라가 되고 또 솔로몬 이례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던 고가적인 번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죄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역사의 비탈길에서 이스라엘은 번영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심판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때에 이 호세아는 한편으로는 진노를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여전히 안타깝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보여준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멀리 하나님을 떠나고 당신께 돌아오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불타는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이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8절에서 선지자는 말합니다. ‘에브라임이여’이 호칭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한 애칭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차마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한 번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해서 전해주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의 선지자들이든지 그들에게는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살았더라면 모세와는 다른 약 800년 후에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았을까를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어 율법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말로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결혼생활 전체의 고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했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어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선지자는 입으로만 예언한 사람이 아니라 온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호세아가 사랑의 선지자라는 인상 때문에 그의 소중한 이 예언서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흐리게 하고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의 세 절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앗수르를 의지하여 국가의 운명을 연장해 보려고 했으나 실패할 것을 주님께서는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할 때 마치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그저 그 창살을 붙들고 눈물만 흘리는 분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여전히 살아계시고 온 우주와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어떤 질서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 분의 통치의 효과입니다. 혼란이 있고 악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데서 비롯되는 일시적인 혼란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선지자의 인격 안에 있는 이 두 마음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을 악의 화신이고 일평생 대적해야 할 적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서는 여러분들이 올바르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에 동화된 것처럼 오직 사랑만을 외쳐서도 여러분들은 올바르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모순들처럼 보이는 두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두 가지 큰 죄,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과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진노하시지만 그 죄를 지은 죄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당신 안에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향해서는 한없는 미움을 가지고 있으나 그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어찌 아드마와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드마나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 함께 파괴된 두 마을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악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아서 그들을 중대한 심판으로 멸하셨으나 오늘 죄 짓고 악을 행하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었습니다. 불순종하고 그들이 지은 죄는 하나님의 마음에 화해할 수 없는 미움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 국면으로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자비와 오래 참음과 긍휼입니다. 이 세 개의 면은 사랑이 사랑을 셋으로 구분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사랑이 어떤 도덕적 피조물과 관련되는 지에 따라서 그 세 국면 중 하나가 혹은 동시에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는 가치가 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것이고 ‘오래 참음’은 거역한 사람들을 오래도록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국면을 보여준다면 ‘긍휼’은 죄인의 죄의 결과인 비참과 관련이 됩니다. 죄는 죄만이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이 죄는 비참을 동반하게 됩니다. 혹은 이 비참이 뒤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항상 비참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은 죄와 비참, 두 개가 가지고 있는 인과관계 속에서 그 비참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긍휼의 마음은 그 비참의 원인이 되는 죄 때문에 이 비참을 하찮거나 혹은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인과관계를 끊고 비참 자체만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이 긍휼은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지만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나의 사랑하는 대상이 가치가 있고 아름답고 나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 있고 또 하나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사랑하는 자 자신이 워낙 탁월한 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의 가치와 아름다움과는 상관이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Benevolence 바로 박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향해 부어주신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던 마음인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긍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잊혀 지지 않은 비유를 말씀드리면 한 청소년이 부잣집 담장을 넘었습니다. 아주 높은 담장을 간신히 넘어서 부잣집에서 금은보석과 돈을 훔쳐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큰 개가 와서 심하게 짓고 따라오는 바람에 급하게 다시 담장을 넘었고 담장에 꽂아놓은 유리와 철조망에 다리를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옷이 찢어지고 살이 터져서 피가 나오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머리까지 다쳐서 머리와 다리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보석과 돈 그리고 달려오는 경찰차의 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합니다. ‘나이도 어린놈이 남의 집에 도둑질을 하더니 결국은 담장을 넘다가 다쳤구나 싸다, 싸 저놈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우리가 붙잡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달려 왔습니다. 그 어머니의 관심사는 물론 아들이 돈을 훔쳤는지 그것도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은 나중 문제이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아들이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를 다쳐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다리에서 피가 흐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어머니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긍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차마 이스라엘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들에게 오늘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불붙는 당신의 긍휼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호세아 11장 8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읽는다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마음이 나를 거슬려 변하니 나의 긍휼들이 모두 함께 일어나는 도다’‘미후마이’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복수명사입니다. 나의 긍휼들, 혹은 위로들, 동정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 구약의 선지자들 중 자신이 전한 메시지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가 예수의 가장 탁월한 예표가 된 사람을 호세아 보다 더 뛰어난 선지자를 구약에서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동안 길렀던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시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사도들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주님의 마음의 동기가 마태복음 9정 35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백성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옛날 개역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다’ 라는 이 말은 희랍어로 ‘에스프랑크니스데’라는 동사인데 원래 뜻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 식으로 번역을 하자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셨으니’ 이런 정도의 번역이 될 것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세우셔서 당신이 하시던 일을 똑같이 뒤 이어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시던 동안에 그 분이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고 그러나 우리에게 아기 예수로 오셔서 바로 십자가로 직행하시지 않으시고 30여년의 생애를 사시면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를 향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으니 그러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분이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참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탁월성은 바로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감각적인 인간의 능력들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노출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눈이 없어도 감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분이 우리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만져질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 주신 것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 중의 하나라고 설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될 수 있었고 그 신약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불붙는 실체를 읽고 구약을 통해서 그 실체를 지향하는 예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죄와 이 세상의 죄에 대해서 정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죄에 대해 분노하고 다윗이 말했듯이 두려워 떪으로서 그 죄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에서 멀어지고 성결해 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을 충분히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불붙는 사랑, 죄인들의 비참함을 보시며 차마 견디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양떼들을 목양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와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혹은 조금 공부한 후에 유학가기 바쁜 것은 신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신학은 신앙을 가르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신앙이야말로 모든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심적인 신학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제 보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신학적인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우리는 그렇게 발견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는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나처럼 하나님을 몰라 방황하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이바지 하지 아니하고는 나의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느껴서 우리들이 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 죄에 대한 불타는 미움과 함께 영혼에 대한 불붙는 사랑을 함께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리챠드 백스터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줘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세상의 고통과 가정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돌보고 있는 어떤 영혼들 때문에, 아니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세상의 하나님을 모르는 수많은 영혼들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찬송)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어질어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외치는 자 많건만은 생명시내 말랐도다
조국교회를 움직였던 위대한 유산은 정치한 신학이 아니었습니다. 청교도 정신에 넓게는 경건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선교사들이 이 은둔의 나라 조선의 땅에서 자신의 온 몸과 삶으로 하나님의 이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며 선교자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이 오직 진리인 줄 알고 오직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세상, 그 때 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진리 자체를 멸시하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본격적으로 목회나 선교활동을 하게 될 약 20년 후의 세상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68년 프랑스 학생 혁명을 현대철학의 분기점으로 삼습니다. 68년에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 전부터 시대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프랑스와 영국, 독일 그리고 구라파 제국들 그리고 미국까지를 휩쓸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들이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말한 바와 같이 미국은 그 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새로운 에토스들이 주입이 되어서 기존의 권위주의와 함께 기독교의 가치들도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년 후에는 우리들이 그 때 일어났던 것보다 더 큰 변화를 68혁명이 비켜간 혁명을 우리나라에서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조짐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매우 어려운 시대에 목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의 선교적인 가치는 숫자나 업적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빌리그레함 같이 그렇게 크게 쓰임을 받는 전도자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가 비록 아주 연약한 자라도 이 지구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번영 속에서 세상을 사랑하고 창조주를 멸시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면 여러분들은 작은 종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 영혼들, 그 번영하는 사회 속에서 신음하는 고통의 울음소리를 그들의 영혼 속에서 듣는다면 그래서 이렇게 가슴에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영혼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를 반드시 쓰실 것입니다.
저는 짧지 않은 목회 생활 그리고 신학공부의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제가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원리 하나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공부를 많이 했는데 안 쓰시는 때가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안 쓰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안 쓰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를 크게 쓰실 지 작게 쓰실 지 그것은 제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안 하시는 일 중의 하나는 당신을 너무나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그를 사용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찬송)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40년 전 혹은 30년 전의 유행가는 그래도 주제가 조금 다양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유행가의 가사들이 오직 사랑에 집중되어있습니다. 그만큼 사랑에 목마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런 감각적인 사랑은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의탁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온 인간과 우주를 휘돌고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기 합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흐르며 흘러도 하나님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조차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사랑을 가르쳐서야 되겠습니까?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자살할 수 있지만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생을 등지지 않습니다.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탁월한 사랑의 덕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지만 자신은 아무 사랑을 받지 않아도 충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 안에 하나님이 이미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낳으시고 젖먹이시고 걸음을 가르쳐 양육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버렸습니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가 몰고 온 비참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그 좋으신 그리스도께서 가슴아파하는 일을 내가 했다는 것, 그리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셔서 사랑하면서 산 모든 사랑이 자신의 힘으로 사랑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시오. 그리고 불붙는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멀리 따지면 약 15년을 이 학교에 드나들었는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하나님이 알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목회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선교사가 되고 싶으십니까?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십시오. 이것이 모든 신학의 종자 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목숨을 걸고 공부하셔야 합니다. 지금처럼 놀듯이 신학을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실천적인 것만 배우지 말고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을 철저히 공부하셔야 됩니다. 특히 신학대학원 시절에는 술사가 되지 말고 말씀의 도움사가 되셔야 합니다. 신학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어느 정도로 할까요? 신대원 3년 다니는 동안에 두어 번은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공부하셔야 합니다.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후배인 여러분들에게 애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테크니컬한 학자라면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평생을 거의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리는 결론은 ‘아, 이 설교는 보통 양의 공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매일매일 60이 넘은 지금도 느낍니다. 그래서 학생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공부하십시오. 학교 공부를 겨우겨우 따라오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독자적으로 어떻게 고전부터 시작을 해서 저 위에 그리스 철학부터 교부들, 그리고 교주, 일반 학문들, 철학, 역사, 문학, 그리고 자연과학, 사회 특히 법률, 이런 것들을 공부하면서 이 신학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성격을 구현해 낼 수 있을 지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신학자도 아닌데요?’ 잘 살기 위해서 그런 신학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책을 손에서 내려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는 꼭 공부해서 원전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도 안 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바지에 물도 안 묻히고 해군 장교가 되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냥 펼쳐놓고 줄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 정도까지는 안 된다고 할지라도 번역 성경을 펴놓고 어떤 번역이 잘 못 되었는지는 가려낼 수 있을 정도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식이 없이 어떻게 사람의 영혼을 고치겠습니까?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서너 번 공부하는 동안에 쓰러지십시오. 그렇게 해서 죽으면 순교입니다. 하나도 안 우습습니다. 물어보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쓰러져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여러 번 학교에서 쓰러졌습니다. 전심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들고 다니고 게임이나 하면 끝난 것입니다. 전심으로 공부하셔야 됩니다.
세 번째는 열렬하게 기도하셔야 됩니다. 기도가 성결교회 특징이 아닙니까? 초등학교 시절 저는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열렬히 기도하시던 모습이 언제나 생각이 납니다. 캠퍼스 전체가 기도원입니다. 방석 하나만 들고 올라가면 사방이 기도원입니다. 새벽에 올라가십시오. 그리고 두꺼운 파카하나 뒤집어쓰고 간절히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렇게 신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과 놀듯이 보낸 두 사람은 20년 후에 범접할 수 없는 차이가 나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