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각이 가벼울 때 인생은 무겁다.
녹취자 : 김경애
성도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한 주간 눈도 오고 오늘은 날씨가 매우 추워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늘 공과공부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따뜻하게 덥힐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벌써 아사밤 제 3과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이 가벼울 때 인생은 무겁다.’ 복잡하고 힘든 세상이니까 너무 깊이 생각하면 골머리가 아프고 괴로우니 그냥 웃고 넘기고 가볍게 인생을 살자고 말합니다. 인생 자체의 무게가 그렇게 결코 가벼울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이 가벼우면 언젠가 현실에 직면할 때 인생이 더 무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런히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겠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문제1) 당신이 조나단 리빙스턴이라고 가정합시다. 다음 질문에 답해 봅시다. 당신은 생선 내장을 구하려는 갈매기 무리에서 왜 떨어져 나와 홀로 있습니까?
문제를 풀기 전에 이미 보신분도 있겠지만 감동적인 영상을 한번 보고 이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수평선이 붉게 물든다. 아직 도망가지 못한 빛의 어둠
죽은 독수리의 늘어진 날개와 같다
새들이 모인다. 선창가 부둣가에 새카맣게 날아든다.
간밤에 내다 버린 생선 내장 먹으러 오나보다. 서로 먹겠다고 싸운다.
갈매기 한 마리. 고독한 새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홀로 떨어져 있다.
그에게 그리운 건 자유였다. 하늘을 훨훨 나는 것 말이다.
나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다.
고등학교 때 감명 있게 읽었던 책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바닷가 긴 제방 저 끝에서 총을 쏜다.
놀란 새들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간다.
이 문장은 총소리였다
선창가를 서성이던 내 정신에 울려 퍼진 총소리였다
만일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날아라. 날아라. 너의 자유는 비상(飛翔)이다
내 마음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쇠줄이 채워져 있었다.
그것이 마음의 날개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던 거다
날고자 하는 것 나, 날지 못하게 하는 것도 나였으니
내가 누구를 떠나 날아간단 말인가
만일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이 답해주었다. 철학을 하는 것은 사랑을 하는 거라고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 있다고
의미를 찾을 수 없으니 그 우주는 무한해서 두렵고
침묵해서 무서운 거다
참된 지혜는 그분이시다
그래서 참된 철학은 사랑을 하는 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명문이 심금을 울린다.
오, 영원한 진리요,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는 당신을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나이다.
깊은 밤이다. 바람 속에 벌써 겨울이 들어와 있다
따뜻한 찻물이 끊는다. 무엇을 마실까
볼수록 감동 깊은 영상 아닙니까? 오늘 이 질문에 대해서 의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답니다.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지체1] ‘나는 이제 더 이상 생존을 위해서만 날고 싶지 않아. 이제는 맹목적인 삶의 밧줄을 끊고 나의 참다운 모습을 찾기 위해 고독하지만 비상을 꿈꾸어 볼 거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그리고 ’나’ 다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참된 진리와 진정한 자유를 향해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갈 거야.’ 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체2] 그는 넓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힘찬 날개 짓을 통해 초월적인 낢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리빙스턴 갈매기처럼 그들과 분리 되어 있다면 그들과 동일한 가치관과 기준을 벗어버리고 싶음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과 깊은 관계 안에서 자연과 이웃과 가족을 섬기고 사랑하려는 애씀이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생선의 맛에 아쉬운 미련을 갖고 있을 것 같습니다.
[지체3] 나는 단지 먹이를 구하려고 다른 새와 다투는 일에 모든 힘을 들이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갈매기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있었습니다. 나의 날개가 그저 쓰레기 물고기 내장을 차지하는 먹이활동에만 사용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의 속박을 느꼈으며 배가 고파도 하늘을 나는 것에 큰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었고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저 책을 다시 한 번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벌써 40년도 넘은 기억이지만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놀라운 것은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나는 것에서 자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주 높은 꼭대기로 올라가서 직전 강하하는 비행연습도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싱싱한 잡아먹는 방법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생각하니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참으로 자유롭게 살아라. 그리하면 네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자유가 자기 멋대로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유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남에게 구속되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철학적인 뜻은 역사적으로 철학의 시기마다 자유라는 개념이 다르게 해석됩니다. 그래서 옛날 그리스 고전철학에서의 해석과 근대 이후의 사회주의의 출현에서 나오는 뜻이 다릅니다. 그래서 유물론적인 세계관에서는 부의 분배라든지 사회구조라든지 그런 것에서의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전체를 통합해서 철학적인 뜻으로 본다면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외부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외부로부터 강요받는 것이 없는 상태이고 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좇아서 자기가 생각하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는 자유가 무엇입니까? 철학적인 의미와 유사합니다. 첫째는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사슬 같은 것들이 엮여있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신분제, 노예제 이런 것은 외적인 속박입니다. 또 북유럽 같은 곳에서는 근무시간이 끝나고 회사에서 연락을 하면 소송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동시간의 개념이 너무 분명합니다. 근무시간이 끝나고 나면 자기는 더 이상 회사에 속박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속박이 많았는데 사회적인 속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의에 어긋날 때 이것들을 끝까지 싸워서 그런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 가지고 있는 위력이고 능력입니다. 예를 들자면 조선시대 말기에는 신분제도가 살아있는데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상전이 먼저 종에게 ‘형제여’ 부릅니다. 이런 외적인 속박의 사슬이 끊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환경으로부터의 외적인 속박을 푸는 것이라면 내적 속박을 성경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 자신의 욕망, 부패성이 나를 꽁꽁 동여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이 도덕과 관련될 경우에는 이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부도덕한 일에 우리의 마음이 매일 때 은혜에 의해서 이런 내적 속박을 끌러버릴 때 그때에 우리에게 전정한 자유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입니까?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 안다는 말 속에는 이미 사랑한다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까?
(문제2)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철학자다” (A..아우구스티누스) 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자신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지체1]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난 것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선한 것은 주로부터 났고, 모든 지혜와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혜를 사랑하고 탐구하는 철학자는 결국 그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전정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체2] 저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책임감 있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의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이다. 라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 안에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경험할수록 저 또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인생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체3] 철학이란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질문으로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존재의 근원과 참된 삶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데 한계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근데 이때 신자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과 삶의 목적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내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진정한 철학자란 모든 존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진리를 찾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설교 속에서 한때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철학자다.’ 그 말이 이상한 말이 아니라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데 관점이 있는데 세상을 보는 관점, 인간을 보는 관점, 만물을 보는 관점, 심지어는 신을 보는 관점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 보는 관점을 좌우하는 것이 진리가 됩니다. 그럼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 진리는 무슨……. 개뿔 진리 없어.’ 그 말이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가 없다고 단언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진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확고하게 자신이 믿는바가 없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자기 관점을 고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고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를 찾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필라소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필리아(사랑하다)와 소피아(지혜) 즉 지혜를 사랑하는 것, 거기에서 철학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철학이라고 말할 때 밝을 철(哲)입니다. 밝은 학문인데 일본에서 먼저 만든 글자인데 그것을 우리가 차용해서 그냥 쓰면서 철학이라는 말이 된 것입니다. 썩 적합한 용어는 아니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용어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두 개의 삼각형이 있는데 하나는 거꾸로 된 삼각형이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것은 존재의 질서입니다. 존재의 질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아무렇게나 뒤섞어서 카오스 혼돈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을 조직하셔서 하나하나 형성하셔서 만드셨습니다. 이 존재에는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창조하셨을 때 모든 존재의 질료를 창조하셔서 그 재료를 먼저 지으시고 그 지은 재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씩 하나씩 빚어나가기 시작한 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빛이 창조되고 그 다음 광명 체들이 창조되고 하나씩 하나씩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맨 밑에는 무생물이 있고 그 다음에 식물이 있습니다. 무생물은 있기만 한 것입니다. 식물을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습니다. 동물은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고 감각합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있을 뿐 아니라 살아 있고 감각할 뿐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 위에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질서입니다. 이상적인 삶은 존재의 질서가 가치의 질서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은 인간의 사랑에 의해서 가치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쪽의 그림을 보면 원래 이렇게 질서가 세워진 것인데 사랑이 만약에 여기에 있었더라면 존재의 가치=가치의 질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 사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덜 중요하고 그래서 위에 것이 아랫것으로 지배하면서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이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거꾸로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가 가치가 낮은 것을 높은 것처럼 사랑하게 되고 높은 것을 낮은 것처럼 사랑하게 되어서 이것을 뒤집는데 이것이 사랑의 질서를 뒤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은 악이라고 봅니다. 사랑의 질서를 뒤바꾸는 것 이것을 악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모든 악은 어긋난 질서를 사랑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해 가십니까? 그 다음 문제를 보겠습니다.
(문제3) 자신 안의 사랑이 질서 있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 질서가 어떻게 깨어지게 되었는지도 말해 봅시다. 지체들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지체1] 부모가 된 후 인생을 다 알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식은 유치원 때 다 배웠다 생각했으니까요! 중년이 되어서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싶어졌습니다. 신앙 없이 살 때 알았던 사랑, 인생, 철학은 참으로 가벼웠다는 것을 느낍니다. 모든 것에는 창조주이신 주님의 섭리 안에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체21]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갑작스런 병으로 엄마를 잃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 슬픔으로 많은 시간 방황하며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애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기쁨은 순간이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무의미한 삶, 외로움이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다 동생부부의 초대로 교회여름수양회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진정한 기쁨과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질서 없이 무의미하게 살던 제 삶에 하나님인 사랑이 자리 잡을 때 질서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체31] 어릴 적 천진난만하게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세 번의 수술 끝에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무시당하고, 핀잔을 받을 때마다 고독을 느끼며,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려고 애썼지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른 질서가 세워지자 사랑할 수 있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사실 그 책은 제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책입니다. 2005년도에 출간된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2004년도에 ‘게으름’이 출간되었고 제 책을 주의 깊게 읽으신 분들은 아마 그 책이 하나의 전환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때 사실 저는 어거스틴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매일 매일 아주 깊은 철학적인 사색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실제로 철학공부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의 글 쓰는 작가로서의 커다란 전환점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스토리 중심의 Narrative인데 스토리가 있는 Narrative 중심의 이야기들로 엮어서 제가 작가로서의 인기를 누렸다면 ‘자기 깨어짐’ 이후로는 제가 법학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로 사람들을 치밀하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그 후에 15년 동안 글을 써오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점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입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는 책입니다. 짧은 시간에 썼는데 제가 그 책을 쓰면서 정말 많이 울었던 책입니다. 써놓고 놨더니 어떤 사람들이 너무 어렵다고 투덜거리고 동료목사님도 원고를 보더니 밀림 속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꼼꼼하게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분은 큰 기업을 하시는 분인데 영국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데 저를 만나겠다고 부부가 중동에서 영국까지 날아오셨습니다. 60대 넘으신 부부셨는데 ‘자기 깨어짐’을 읽고 너무나 커다란 은혜를 받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다고 저를 보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히 학식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찾는 마음의 결이 책과 일치하면 그렇게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진심으로 권합니다. 교보문고나 YES24에 들어가서 찾으시면 그렇게 비싸지 않은 만 원 정도 주면 사실 수 있습니다. 꼭 사서 읽어보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기를 보겠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이 질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질서를 창조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 제일 꼭대기에 있고 나머지는 그 아래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세상’이라고 나오는데 자기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또 한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상을 사랑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이 자기이기 때문에 세상사랑은 자기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물들이 있습니다. 삶의 사건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치 있게 여기는 어떤 가치관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은 연결되어 있는데 어떤 것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뒤죽박죽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지런해지고 질서정연해지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면 세상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자기도 변덕덩어리이기 때문에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잠깐 동안에는 어떤 질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질서가 산산이 흩어져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새벽에 나와서 글을 쓰다가 지금 올라왔는데 거기에 보니까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세월은 신음 속에 흘러가고 있으며 나의 마음 나의 심령의 깊은 곳은 산산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탄식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화면에 나오는 왼편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혼란과 무질서의 연속인데 여기에서는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대부분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회피입니다. 그 회피가 오락, 놀이, 게임, 심지어는 향락과 쾌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현실도피입니다. 그것은 결국 잠시 고통을 잊는 진통제와 같지 그것이 약발이 떨어지면 자신은 또다시 혼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내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지? 내가 왜 직장에서 빛이 되어야하는지? 왜 사람이 나를 감독하지 않을 때도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하는지? 왜 내가 절약하고 미래를 위해서 저축해야 하는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거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모든 것이 가지런합니다. 드루나루두스 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이렇게 모든 것이 가지런해질 때에는 죄가 깃들 여지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죄는 깃들 수 없습니다. 왼편에 나오는 저런 무질서 속에는 빈틈이 너무 많아서 어디든지 우리의 변덕과 욕망을 따라서 죄가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4)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을 사랑했던 저자의 경험에서 공감하는 내용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지체1] 목사님께서 국어선생님을 좋아하셔서 국어과목을 좋아하셨다고 했는데 저는 아내를 사랑하게 되면서 옷을 멋지게 입게 되었고 집을 잘 치우고 정리정돈을 잘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저와 결혼하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보려는 경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이라는 과목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지체21] 저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계셔서 목사님의 말씀이 공감이 되었는데요. 선생님과 가까이 만나기 위해서 앞자리 친구와 자리를 바꾼다던지, 문제집을 들고 교무실에 간 기억이 있습니다. 덕분에 지구과학이라는 과목을 좋아하고 잘하게 되었던 기억도 있고요. 아사밤 책 중에 ‘사랑하면 그 과목을 좋아하게 된다며? 그분을 사랑하면 우리는 무슨 과목을 좋아하게 될까?’ 라는 대목이 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무슨 과목을 좋아하게 될까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 풍성히 열매 맺는 나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체31] 이 부분을 읽고 울었어요.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고 회화적이어서요. 그분을 사랑하면 우리는 무슨 과목을 좋아하게 될까? 그냥 좋아서, 만나고 싶고, 잘 보이고 싶고, 예쁨 받고 싶고 칭찬 받고 싶고, 나를 보는 그 눈빛 잃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사는 것, 사모함.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서 그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아서 무슨 과목이든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과목을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저도 이 대목을 쓰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여러 번 울었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라고 하지 않고 국민학교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과목이 없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국어선생님은 아니고 그냥 일반 선생님이었습니다. 국어를 특히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글짓기대회에도 여러 번 나갔는데 어떻게 선생님 생각이 나던지 여러 번 울었습니다. 계산해보니까 지금 살아계시면 90세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95세가 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안살아 계실 확률이 높겠습니다. 이름을 못 외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무슨 과목을 좋아하게 될까? 그 도전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 과목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국어선생님을 좋아하면 국어를 좋아하게 될 텐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과목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다 알아야할 것 같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제일 먼저 누구를 알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누구를 알아야 하겠습니까? 인간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알아야 하겠고 사람들을 알아야 하겠고 자연 만물들을 알아야 하겠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지 알아야 하겠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었으니까 알아야 하겠고 결국은 삶 자체가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동북아철학에서는 이미 눈을 뜬 것이고 인간의 존재를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중국철학에서도 마찬가지고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참 인간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깜짝 선물을 드릴 것입니다. 궁금하실 것입니다. 보시겠습니까? 제가 1967년도 6학년이었고 1968년도 2월에 졸업을 했는데 어제 이 앨범을 찾았습니다. 서울 숭인국민학교였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 학교가 제가 알기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였습니다. 당시 학생수가 8천명이었습니다. 당시에 애들을 얼마나 많이 낳았는지 2부제가 아니고 3부제였습니다. 아침반, 점심반, 오후반이었습니다.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은 조회하는 광경인데 아마 아침반 조회일수도 있고 오후반 조회일수도 있는데 아무튼 1/3 학생의 조회입니다. 6학년 졸업앨범에 찍힌 김남준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쁘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눈에 우수가 서려 있습니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고독한 세월을 보내면서 어린 나이에 그랬습니다. 그 선생님을 만난 때는 2학년 때이고 이것은 6학년 때이니까 선생님하고 헤어졌을 때입니다. 얼굴에 티 하나 없는 우윳빛 얼굴이었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다시 문제로 돌아가서 결국은 선생님을 사랑하면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과목을 가르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조류학자들이 좋아할 내용은 조류학을 통해서 배우면 되지만 공중에 나는 새가 오늘도 떨어지지 않는 도덕적인 의미, 종교적인 의미는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고를 짓지 않고도 그렇게 하늘을 날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배우며 우리에게 적용하기를 ‘염려하지 말아야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 중심적인 사유 속에서 살아가는 사유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곧 철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철학이라는 말을 쓸 때 학교에서 어렵게 선생님이 가르치는 그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기 위한 삶의 지혜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 즐거운 생활하시기를 바라고 아사밤과 함께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져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