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공간은 주고 시간은 빼앗아간다
녹취자: 조경훈
성도 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고 벌써 봄이 오는 느낌입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아름다운 벚꽃이 만발하는 계절이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백신접종도 시작됐다니까 하루 속히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함께 공부할 것은 제 4과 공간은 주고 시간은 빼앗아간다 입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문제1) 다음 문장에 대해 느낀 바를 자유롭고 간략하게 말해 봅시다. “공간은 우리가 사랑할 것을 제시하나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가 버린다”(A. 아우구스티누스) 이 질문에 대해서 지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연서 자매] 이 문장은 제게 영원하고 신실하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나타내주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기에 어떠한 사랑이든 그 주체의 변심으로, 혹은 그 대상의 소멸로 시간이 앗아가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만은 예외라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박현민 형제] 사실 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할 때면 굉장히 아득해지는 느낌입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도 자기가 쓴 책의 서문에서 “나는 시간을 정의하지 않겠다. 공간도 정의하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뉴턴도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한주원 자매] 공간은 제시만 하였을 뿐,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순간의 이끌림에 빠져 진심을 바치게 되고, 이내 그 사랑하는 마음을 잃은 채 다른 사랑할 대상을 찾곤 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 많은 사람은 마음의 풍요와 상실을 자주 겪게 되고 그 간극 사이에서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외로운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곤 합니다.
[목사님] 오늘 대답해 주신 분들은 학교 학생으로 말하면 딴 생각들 절대 안하시는 모범생들 같습니다. 문제는 답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답을 얼마나 심정 깊이 느끼느냐? 그래서 그 답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거기에 우리의 문제가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옆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습니다. 타기 전에는 하얗게 잘라놓은 큰 장작들이 쭉 쌓였을 것입니다. 한 아름드리나무를 올려놓고 불을 지펴서 붙으면 바람이 불면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할 것입니다. 계속 타고 활활 탑니다. 한 참을 타고 보면 불이 타고 있기는 하지만 나무가 많이 타고 밑에는 재가 있고 꺼져 갑니다. 그 다음에는 하얀 재가 남을 것입니다. 질문은 거기 있었던 엄청난 부피의 장작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매일 현상이 반복되면 이상한 것을 못 느낍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상한 것을 느낄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작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보여준 관찰 같은 것도 그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과나무에서 과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도대체 왜 떨어질까? 라고 궁금히 여겼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같은 질문을 해 봅니다. 도대체 저 장작은 어디로 간 걸까?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어디로 갔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신비한 것이다. 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장작에 불이 붙으면서 에너지로 바뀌어서 에너지로 돌아가고 재만 남았습니다. 재도 엄청난 열을 가하면 부피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재는 또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우리들이 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게 있는 그것이 정말 있는 것인가? 오히려 있는 그것이 아주 잠깐 있는 것이고 원래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침에 풀숲을 헤치면서 걸어갈 때 발끝을 흠뻑 적시는 이슬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저녁에도 없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까 풀잎 끝에 이슬이 맺혀 있습니다. 해가 뜨면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슬은 원래 있는 것이었나? 없는 것이었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봤습니다. 시간이 무엇인가? 공간이 무엇인가? 논란이 참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은 공간을 사물의 연장이라고 보았습니다. 빈 공간이라는 것은 없고 그 자체가 사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진짜 있느냐? 없느냐? 는 아직도 논란이 많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은 측정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변화와 소멸, 생성을 통해서 측정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림에 사물이 있습니다. 그 사물을 사랑합니다. 문제는 사물이 없는 것으로 이행을 합니다. 여러분 며칠만 집안 청소를 안 하면 먼지가 가득합니다. 먼지의 정체가 뭔지 아십니까? 사물의 부서진 조각들입니다. 책, 옷, 심지어 여러분들의 피부, 나무, 벽지, 쇠에서도 그 부서진 조각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서 먼지를 이루는 것입니다. 더 이상 조각들을 만들어낼 수 없을 때 사물은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있는 모든 사물은 원소로 변합니다. 원소는 어떤 조건을 만나면 또 다른 원소를 만듭니다. 결합하고 흩어지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면서 수많은 물질들을 만들어 냅니다.
사물만 변해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고정되어 있는 줄 알지만 자기도 변해가는 중입니다. 젊고 늙고, 힘 있고 힘이 없고,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니까 이것은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허무입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사랑할 때 거기서 오는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사랑할 올바른 대상을 찾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2번 문제를 읽고 오늘 이야기를 더 상기해 봅시다. 문제2) 공간과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느낀 점을 말해 봅시다.
[김현재 자매] 공간은 사랑할 것을 보여주고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저는 감정, 사람, 물질과 같은 사라질 것들만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것들을 사랑하기도 하고 이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시간과 감정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비범한 것들로만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인간으로 존엄하게 태어난 제게 사라질 것들을 사랑하라고 시키는 얄미운 것들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 글을 읽었기에 저도 이 마음과 저 마음을 일치시며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나예선 자매]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제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 사랑으로 사랑을 하면 사랑할지라도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이 마음에 참 많이 와 닿았습니다.
[이상엽 형제] 공간과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질문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즐거운 일 곧 여행, 놀이, 휴식 같은 순간에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데 슬픔과 같은 고통, 아픔 속에 놓였을 때 하루 24시간이 100시간, 1,000시간처럼 아주 천천히 흐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순간은 다 지나가는 것인데 그 때에는 그게 다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목사님] 시간의 상대성 문제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빛과 관계있는 것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물의 변화를 확인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은 빛을 통해서 그 사물이 우리의 눈에 들어옵니다. 빛의 속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는 일반적인 공간에서 빛은 평균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빛도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수없이 실험을 해 봤습니다. 이 산에서 시계를 가지고 빛을 비추면 저 산에서 그 빛을 본 시간이 얼마인지 재봤는데 측정이 되겠습니까? 1초에 빛이 30만 킬로미터를 가는데 측정에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과학이 발달되면서 시간의 측정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상대성이론이 나오는데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에 멋있는 밤하늘에 멋있는 은하수가 보입니다. 저런 장면은 아무데서나 볼 수는 없고 공기가 맑고 좋은 스팟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충 그렸는데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시간과 공간을 따로 생각했는데 아인슈타인 한 사람을 통해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 그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것을 다 정리해서 냈는데 그것이 상대성원리입니다.
그림에 네모난 보자기가 우주의 막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옆에서 보면 이렇게 막이 있는데 이 재질이 0.01mm 정도의 아주 얇고 절대로 틑어지지 않고 단단한 라텍스같은 아주 얇은 막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막 위에 각각 크기가 다른 쇠구슬을 올려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막이 아래로 쳐 질것입니다. 큰 것은 많이 쳐질 것이고 작은 것은 조금 쳐 질 것입니다. 여기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간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시간에 3미터를 가는데 개미가 10시간을 갔다면 당연히 30미터를 갔을 것입니다. 여기서 똑바로 가면 문제가 없는데 노선이 여기서 시작을 해서 여기를 지나서 이리로 가야 된다면 홀들 아래로 들어가서 다시 기어 올라와서 갈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길이에 홀 길이인 A, B, C를 더해야 합니다. 이것이 빛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무거운 질량을 가진 것들이 있을 때 빛은 똑바로 가지 않고 그 질량이 이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분할되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소위 얘기하는 시간 공간 가설이 참된 것으로 입증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공간도 절대적인 시간도 없고 다 상대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학의 발견이 지축을 뒤흔드는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여태까지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 과학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진리에 대한 회의를 가져오는 사상적 입장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철학 뿐 아니라 신학, 철학, 역사, 문학, 과학, 예술 심지어 복식사, 건축, 음악, 수학에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제 3장에서 상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어마어마한 변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일부 발견하여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설정한 원칙이 깨지는 법칙을 발견하게 되자 진리는 없다. 라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무한하신 분인지를 입증하는 것이고 우리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진리들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발견한 학문적인 진리보다도 더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시간 안에서 육체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공간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사유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내 정신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지 못하도록 우리는 방비책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유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3번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문제3)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단계 세 가지와 이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말해 봅시다.
[강가혜 자매] 저는 저의 상황과 환경에서 저의 존재감을 찾았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가면 기뻤고 어려워지면 어떻게 해서든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나의 나됨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력해지고 허망해졌을 때 그 괴로움은 엄청났습니다. 사랑하던 것을 잃고 나니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두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내 죄가 너무도 커 보이는데 그 죄를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끝없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두웠던 제 마음에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둡던 제 마음에 말씀이 빛으로 다가오니 저는 비로소 나는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김성희 자매] “인간과 잘 사는 것” 이라는 2014년도 산상 세미나를 갔던 때, 밤하늘을 보는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생각이 납니다. 당시 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도, 세상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제 스스로에게도 저의 존재의 의미를 정의내릴 수 없는 상태였음을 깊이 자각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땅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굉장히 어렵고 땅과 하늘의 공간 사이에서 나는 도대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물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 재발견하게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이상아 자매] 밤하늘은 그 특유의 빛깔로 제게 기억과 관련된 공간적 감수성과 낭만을 제공하긴 했지만 교감은 어려웠습니다. 마음은 불안과 절망을 찍어내는 공장 같았고 만약 불량품이 나온다면 그것이 진리를 향한 호기심이었습니다. 행복에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제 마음에 주님은 소원을 두셨고 하나님의 역사와 거룩한 실재를 통해 영원을 알고 제 쓸모와 가치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감각은 그대로인데 감각을 느끼는 통로와 방법이 변화되었습니다.
[목사님] 다들 총명하시네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답변들을 많이 주신 것 같습니다. 이런 것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일깨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라든지 내가 이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다. 너희도 하나님 없던 때에는 이러이러하였다. 그리고 너희가 길을 잃은 양이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위대한 감격을 간직하면서 살았던 중요한 기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고 이미 구원받지 못한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도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구원받지 못했던 때를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종이었고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것을 끊임없이 불러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노력이 그런 것입니다. 모두 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 답이 아니라 남이 가르쳐 준 답입니다. 진정성이 없는 너무 뻔한 답, 자신의 삶의 무게를 결코 얹어놓지 않는 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힘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다고는 하는데 믿음이 진정으로 실제화 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함께 우리의 사유가 뒤따라 와야 합니다. 그때 그 믿음은 드디어 색깔을 띠게 되고 갇혀있는 물에서 흐르는 물로 변하게 되고 가만히 있는 악기에서 소리가 나는 악기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었기 때문에 더 많이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믿음의 내용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자신의 의식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불이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의 사상위에 우리의 삶을 얹어놓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아주 튼튼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입니다. 실제 그 공원에서 찍은 것입니다. 생각하고 있는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학교 다닐 때 애들이 저거 볼 때마다 서로 농담했거든요.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아냐? 내 내복은 어디에 갔을까? 어디다 뒀는지 생각이 안 난다. 뭔지는 모르지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옆에 그림에 많은 사물들이 있습니다. 제일 위에는 여러분들이 요즘 한창 관심을 가지는 먹방의 이야기. 오늘은 어디를 가서 무엇을 먹을까? 무슨 음식이 얼마나 맛있을까? 등등 그 다음에 이성에 대한 생각, 경치 좋은 자연에 놀러가고 즐기고 싶은 마음, 지위, 돈과 부동산에 대한 관심 등등이 있습니다. 저것을 열심을 가지고 추구를 합니다. 저 접시가 어떤 사람은 결코 못해 봤는데 끊임없이 돈도 벌고 노력을 해서 최고의 다양한 음식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하던 이성을 만나게 되었고 원하던 지위를 갖게 되었고 부동산도 갖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은 주지 않습니다. 결국은 마음 자체가 이렇게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찢어져서 파편처럼 흩어져 쪼가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찾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자기를 주시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 안에서 산산히 찢어져 흩어져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퍼즐을 맞춰야지만 인생에 대한 답이 나올 텐데 그것을 하는 게 너무 힘겹고 또 한 편으로는 너무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더욱 미친 듯이 이런 것에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소비 중심의 산업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고 한 순간에 즐거움에 매혹되는 것입니다. 저런 것들을 다 피해가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내일 모래 설교시간에 이 문제를 좀 더 이야기 할 테니까 귀담아 들어보십시오.
나를 찾는 것은 이렇게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세 단계에 걸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가 밤하늘과 우주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늘을 많이 쳐다봤었습니다. 뭘 하겠다고 부모님들이 애를 데리고 키워야 되는데 서울로 보내버렸습니다. 명목은 서울에서 좋은 데 가서 공부해야 된다는 건데 의사결정 과정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너무 좋아하셨으니까 데리고 있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가면 엄마의 입장에서는 좀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보내버린 거죠.
어린 나이에 맨날 집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때만 해도 어마어마한 매연이 나오기 전이었으니까 서울이 아주 맑았습니다. 아주 맑은 동네 개울물에서 버들치들이 뛰어 놀고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밤이면 밖에 나가서 밤하늘을 보면 초롱초롱 별들이 빛나고 특히 달이 떠 있습니다. 우리 엄마도 저 달을 보고 있겠지? 하고 눈물이 막 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달을 보는데 우리는 왜 떨어져서 살아야 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의 갈등이나 슬픔을 누구한테 툭 털어놓고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저 달은 걸어서 얼마나 걸릴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까 아직 전문지식을 배우기 전이었습니다. 걸어서 간다면 얼마나 걸릴까?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달을 처다 볼 수 있는데 갈 수 없는 먼 거리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저 우주 바깥에서 보면 개미처럼 보이겠지? 그리고 내가 지구에서 사라진다고 할 지라도 그게 산에 올라가다가 발로 밟아서 개미 한 마리가 밟혀서 사라지는 거하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기보다 어떤 그리움 때문에 끊임없이 달을 처다 보고 하늘을 처다 보았습니다. 밤하늘을 처다 보고 있으면 너무너무 신비한 것입니다. 내 눈 앞에 들어온 별빛이 몇 년, 몇 십 년, 몇 천 년, 몇 천 만 년, 심지어는 수 억 년을 달려와서 내 눈에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저 빛이 출발할 때 나는 없었구나. 내가 살고 있는 이 광경도 어느 별엔가 이 광경의 빛이 도달할 때면 나는 없겠구나. 내 눈에 들어오는 반짝이는 저 별은 어쩌면 너무 오래 전에 빛이 출발했기 때문에 지금은 폭발하고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인간이 한없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인간의 마음을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끝없이 파헤쳐진 갱도와 같아서 들어가는 입구는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들여다보고 나면 캄캄해서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해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나면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 하는 확실한 감각이 생겨납니다.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지 말고 옛날에 밤하늘을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던 때, 끝도 없는 자신의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규정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그 때의 질문을 소환해서 지금의 믿음으로 거기에 답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때 우리의 신앙은 견고해지고 우주적인 관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문제4) “할머니 묘지 이야기”에서 느낀 점을 나누어 봅시다.
[김찬영 형제] 여전히 살아계시지만 저에게도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주셨던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 묘지 이야기”를 읽고 저의 공간을 시간이 빼앗아가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너무나도 싫고 고통스럽지만 언젠간 오리라는 것이, 또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결국 한계가 있고, 온전한 사랑은 영원하신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윤상준 형제] 지난해 말, 할머니와의 헤어짐을 떠올리면서 책에 있는 감성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묘지 이야기”를 읽고 시간에 빼앗길 걸 사랑함이 인간의 고통이라는 본문의 글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물이 아닌 사람 그것도 나의 가족이라면 사라짐을 경험할 때 오는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여야 하고 그것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의연해질 수 있음을 깨달았고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길 힘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태경 자매] 할머니 묘지 이야기 중에 ‘이 발로 걸어 다니고 저 팔로 나를 안아주셨는데...’ 하시는 부분에서 시간 앞에 덧없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허망함과 쓸쓸함의 감정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은 자가 감내해야 하는 그리움과 고통을 떠올리면서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사랑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땅에서 내가 사랑했던 존재들과는 결국 이별해야 하지만 영원한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 소망으로 다가왔습니다.
[목사님] 이 세상에서 그래도 불변의 가치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어느 시대건 사랑을 어떻게 할까?를 가지고 고민하던 시대는 있었지만 사랑을 하지 말자. 그런 사상이 유행하던 시대는 없습니다. 심지어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사랑하지 말자’ 주의였습니다. 바위가 무슨 일이 주위에서 일어나든지 희로애락의 감정을 안 느끼고 항상 꿋꿋하게 거기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이상이었습니다. 그리스어도 아파데이아 라고 하는데 그것을 보면 그들 또한 역설적으로 아무 사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사랑했던 것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추구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어떤 식으로 무엇을 사랑할 것이냐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을지는 모르지만 사랑이 그래도 가장 고귀한 가치다. 라고 여기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랑은 또한 많은 것을 합리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좀 더 넓게 확장해 보면 사랑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 할머니가 거기 묻히던지 말든지 뼈를 꺼내서 다시 갈든지 말든지 나하고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사랑했던 추억들이 끊임없이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뼈를 꺼낼 때 만져도 보면서 과거의 모든 사연들을 다시 소환해서 우리를 슬퍼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묘지가 있지만 누가 자주 보겠습니다. 와서 본들 뭔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어거스틴의 고백록의 구절입니다. “누군가가 죽으면 거기에 우리의 슬픔이 있나이다. 고통의 어둠이 찾아오고 즐거움이 변하여 마음은 눈물에 젖나이다. 이렇게 작별함으로써 죽은 자의 목숨은 살아있는 자의 죽음이 되나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랑의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생각함으로써 이 공과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은 사라졌는데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문학작품이나 고백을 통해서 읽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산산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부부가 사랑하며 산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한 사람이 갔는데도 그 사람을 못 잊어서 끔찍이 사랑하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의 비극입니다.
그런 사랑의 비극은 문학작품을 통해 기록이 되어서 예술을 통해 표현이 되어서 보고 읽는 사람에게는 감동을 주지만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러면 애초부터 사랑을 하지말자. 라고 결론은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사라지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고 사라져도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분은 하나님이요 그리스도시니 그 분은 영원하실 것이니 이것으로써 나의 사랑은 허무해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공과공부를 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시면서 이번 한 주도 보람이 있는 주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