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6
목 차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시 46:1-3) 1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시 46:4-5) 5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 46:6-9) 8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시 46:10-11) 11
시편56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융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시 46:1-3)
본문해설
이 시를 다윗의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표제에 보면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고라자손이 썼다기보다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시의 문체나 표현, 여러 가지가 다윗의 흔적을 많이 닮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마지막에 보면 ‘셀라’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음악적인 부호입니다. 악보로 말하자면 조바꿈과 가깝습니다. 장조에서 단조로 내려간다기보다는 조올림 하는 표시라고 여겨집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셀라’라는 단어가 명확하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잘 모릅니다. 제 생각에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사다리를 봅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술람’(!L;su)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자음 알파벳 세 글자로 중 앞의 두 자가 일치합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딱 한번 나오는데 다른 동족어들과 비교해볼 때 ‘사다리’라기보다는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있는 도로를 가리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와 한 글자가 다른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셀라’라는 단어는 ‘높여서 부르라.’ 정도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것을 안 읽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래서 빼놓고 읽습니다. 표제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 그리고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라고 나옵니다. ‘영장’이라는 것은 당시로 말하면 성가대 지휘자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알라못’이라는 것이 지금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이것은 당시 사람들 속에서 널리 불리던 하나의 곡조입니다. 옛날 찬송가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가사가 쭉 쓰여 있고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에 맞추어서 부를 것” 그러면은 그 가사를 가지고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에”의 곡에 맞추어서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알라못’이라는 당시 사람들이 다 아는 곡조가 있었는데 그 곡조에 맞추어서 이 노래를 부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커지는 믿음
시인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전쟁의 문맥에서 쓰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도움’이라는 말 자체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지평선에 모래 바람을 날리며 달려오는 응원군을 의미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고난을 당하는 때가 아닐지라도 인생은 끊임없는 시련과 싸움입니다. 그 싸움이 우리의 힘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지만 대부분은 인생의 전쟁터에서 자신만의 힘으로 능히 이기며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분을 의지해야 하지만 의지해야 할 대상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운명에 굴복하거나 운명의 힘을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행복은 피난처이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시련과 많은 환난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입니다. 시련과 환난이 크고 고난이 많지만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내가 당하고 있는 환난과 시련보다 훨씬 더 큰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살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시인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도움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특별한 친교의 관계,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가족관계 같은 언약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이 환난과 시련에 처한 자신을 도우셔야 하고 자기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신앙이 생겼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면서 그분을 의지하고 조금씩 그 신앙이 자라갔던 것입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은혜와 도움을 입은 사람은 더 큰 일에 있어서 그분을 의지할 수 있고, 더 큰 일에서 그분을 의지하여 환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애틋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협곡을 연결한 곳이 있지 않습니까? 이쪽과 저쪽에 다리를 연결해야 하는데 지금은 비행기도 있고 워낙에 기술이 발달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주 옛날에는 길을 건널 수도 없고 돌아갈 수 있는 도로나 다리도 없는 상황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리를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훌륭하게 천만 길 되는 낭떠러지를 극복하고 다리를 놓았습니다.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옮길 수 없으니까 사람만 간신히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험난한 길 때문에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를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그리로 건너가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화살을 쏘았다고 합니다. 화살을 쏠 때 뒤에 가느다란 줄을 매달아서 쏘았다고 합니다. 건너편 땅에 떨어진 화살을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가느다란 줄이 따라오고 뒤에 조금 더 굵은 줄, 그 뒤에 조금 더 굵은 줄을 연결해서 양쪽 사이에 밧줄을 놓고, 그 밧줄에 작은 도구들을 달아서 보냈습니다. 그것을 양쪽에 도르래처럼 묶어서 이쪽에 있는 자재들을 실어 나르고 결국은 밧줄을 이용을 해서 물건들을 날라 공사를 해서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큰 믿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자기를 시련 가운데서 도우시는 것을 조금씩 경험하면서 그분을 향한 신뢰가 생기게 되고,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어져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의존의 삶 안에서 당신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고 의존하며 살 수 있도록, 때로는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환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 시련과 환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도움을 경험하게 될 때 더 큰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날마다 믿음으로 붙드시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안일하고 평탄하게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마음이 올곧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과 환난으로 그들을 흔들어 놓으실 필요가 현저히 적습니다. 그들은 바깥에 환난과 시련이 없어도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환난으로 흔들어 놓이시는 대부분의 이유는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당신께로 향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음이 올곧고 온전하여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드십니다.
“산이 흔들려 바다가운데 빠지든지”, “산이 요동할 지라도” 본문에서 산이 흔들린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산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동하지 않는 산이 흔들리고 무너진다는 표현은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격변하는 시련이 인생에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전적으로 흔들어 놓아서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며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4-5)
은총을 내리시는 하나님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물이 없이는 도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을 보면 도시는 항상 강을 끼고 발달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많은 문명들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여기에도 시내가 있는데, 그 시내가 나뉘어 흘러서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한다고 합니다. 물들이 성을 향하여 흐르고 성에 가장 중요한 자리인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한 도시의 문명이 강을 타고 발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모여 사는 도성에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흐름으로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그 은혜의 물이 교회에 잇대어 흐를 때 거기에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먹고 변화되고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어떤 것도 그분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있는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그 은혜를 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들이 번잡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의무에 매여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 의무를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본문은 그런 은총이 흐르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이 있는 성중에 함께 계실 때 그 성은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며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리든지 혹은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실제적인 증거를 4절에서부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중에 계시기 때문에 성이 고통을 당하거나 넘실거리는 바다물결 같은 국가적인 재난과 어려움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종류의 환난과 시련을 만나도 잠시 흔들리고 잠시 고통을 받아도 결코 성을 요동치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모든 문제가 우리가 아는 상식과 방법대로 해결되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를 초월하고 그분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능력과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십니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지혜와 큰 능력에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본분을 다해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을 붙들고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
본문은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며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새벽에만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겠습니까?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기의 백성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굳이 이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새벽에 일어난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보게 된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도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산헤립의 군대 18만여 명이 와서 졸지에 시체로 변한 것도 새벽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큰 능력을 행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타납니다. 밤에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떨고 두려움 속에서 염려하여도 새벽이 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보면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만나도 새벽 시간에 일어나서 주웠습니다. 저녁 내내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온 지면에 가득히 내린 만나를 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분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전과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와서 여화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 46:6-9)
낮추시는 하나님
여기서 ‘훤화한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요즘 자주 쓰지 않는 말입니다. 이것은 ‘떠든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시끄러운 말들이 들리고 많은 나라가 충동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 백성들을 겸손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전쟁이었습니다. 주위에 많은 나라들에 에워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하게 하시고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을 의지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라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십니다. 우리가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삶을 살려고 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들어 강하게 역사하시면서 그분 앞에 바르게 살도록 우리를 촉구하시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많은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자기의 교만을 낮추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산성이신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은 백성들을 도우시는 피난처시라고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인 야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하나의 애칭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같이 훌륭한 인물들이 많은데 왜 굳이 야곱이 이스라엘의 애칭이 되었을까요? 야곱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잔재주가 많고 꾀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야곱을 끊임없는 연단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와 같은 뜻인데, 특별히 이스라엘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목적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 많은 어려움을 만나도 언약의 하나님을 깊이 의지할 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라에 전쟁이 나면 대개 다른 나라나 산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산에는 산성이 있었습니다. 산성은 나라가 전쟁에서 질 것 같을 때 도피해서 적군과 전투를 하는 요새입니다. 낮은 지역이었다면 능히 그 성이 함락 될 수 있었겠지만 산성과 같은 곳은 절대로 함락될 수 없습니다. 그런 위치에 성을 짓습니다. 아무리 원수들이 많이 몰려와 자기들을 공격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을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 신념을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들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환란과 시련을 많이 만나고 고생을 만나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곳은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자녀 삼으신 언약의 하나님, 그분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는 피할 바위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정죄를 받고 소망이 없는 죄인도 하나님께서는 그 품에 품어 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그분 앞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 여호와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전쟁 가운데서 지켜주시는 증거를 8절부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와서 여화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나라들을 전쟁에서 패하게 하심으로 모든 땅을 황무하게 하시고, 오래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할 때 그 전쟁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전쟁이 그쳤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적군을 패하게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계속되지 못한 것입니다.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친히 행하시면서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원수들에 에워싸여 시련과 고난이 가득할 때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도와주실 수 있고 지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분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 거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이 있고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우리를 붙드시고 도우시면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생사 간에 주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분께로 나아가 그분의 은혜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46:10-11)
전능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조금도 보탤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게 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그럴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상황을 해결하고 문제를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상황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이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 앞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바다이고, 뒤에는 바로의 병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기 위해 질주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어느 쪽으로 보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보태어서 상황을 타결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에 그런 상황을 주셨습니다. 그 때는 오직 믿음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입니다. 주님만을 온전히 바라고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한 많은 계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이시고 능력에 있어서 뛰어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자기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큰 난관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마음 안에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큰 환란,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주신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놀라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큰 시련과 환란 앞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셔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실 기회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게 된 큰 시련과 환란 앞에서 자기에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큰 환란과 어려움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는 독립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원으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에는 믿음의 필요성이 적습니다. 진짜 믿음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들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시기를 기대해야 할 때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삶은 모험적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행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하나님께 기대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을 온전히 소유하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은 온전한 믿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함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눠지지 않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려운 상황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것의 목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님이 높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당신이 택하신 언약백성들의 마음 안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높아진다. 높이 여김을 받는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삶을 이어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감격도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기대하는 과정을 통해 심령 안에서 큰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전쟁입니다. 전쟁의 문맥에서의 표현입니다. 수많은 군대를 다스리고 전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님께 피할 수 있는 피난처시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성을 보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이 있고, 전투를 하기 위해 쌓은 성이 있습니다. 전투를 위해 쌓은 성은 대부분 산성입니다.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에 성을 쌓고, 세불여의(勢不如意)하면 모두 거기로 피난하여 쳐들어오는 적군들과 결사항전을 하게 됩니다.
작년에 중국을 갔다가 어떻게 고구려가 오랫동안 망하지 않고 북방의 넓은 곳에서 수많은 세력들과 전쟁을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에 무지하게 넓은 평지가 있었습니다. 꼭 바위를 얹어 놓은 것 같은 평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올라가면 5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나게 넓은 바위산입니다. 올라가는 길은 딱 하나이고 사방은 고도의 산악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도 등반하기 어려울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입니다. 신기한 것은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물이 딱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중국대륙에서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방어할 수 있도록 깎아지른 듯한 산에 고구려 국내성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군이 밀리면 마지막으로 국민들이 보따리를 싸서 그 산성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거기 올라가서 한쪽 길만 결사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길은 좁은 길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기다리면 겨울이 옵니다. 그곳의 겨울은 영하 40-50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춥다고 합니다. 겨울이 일찍 시작해서 늦게 끝나서 여름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곳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대관령 자락 오대산 밑에 살았는데 빠를 때는 9월말이면 눈이 왔습니다. 늦게까지 겨울이 이어질 때는 5월까지 눈이 왔습니다. 제 친구가 거기에서 보초를 섰는데 ‘눈이 올 때가 아닌데.’ 하고 달력을 보니까 5월 8일 어버이 날이었다고 합니다. 어버이날 눈이 펑펑 쏟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산성은 오대산보다 더 춥습니다. 9월부터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니까 10월, 11월이 되면 더 이상 못 버티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병들어 죽어 나가고,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밑에서 물자들을 실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신기하게 산지 위에는 우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입니다. 적군들이 도망가면 다시 내려옵니다. 이 역사를 되풀이하면서 고구려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런 성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피난처가 되는 곳, 산성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물질로 벽을 쌓고 권력으로 벽을 쌓아서 자신의 인생을 안전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안식은 그런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전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쁘게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이 달린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천천의 수양과 강수와 같은 기름, 수많은 예배, 이런 것보다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인신 줄 알고 그분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에 어려움과 난관이 올 때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실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56편 강해 1
시편40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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