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7
목 차
누가 엄위하신 하나님을 찬양할까 (시 47:1-4) 17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오르시는 하나님(시 47:5-7) 22
열방에 지존하신 하나님(시 47:8-9) 25
시편56편 강해 1
시편47편 강해 1
시편47편 강해 1
시편47편 강해 1
누가 엄위하신 하나님을 찬양할까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셀라)”(시 47:1-4)
하나님을 향한 찬양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찬송시입니다. 탄원하는 시에도 찬송의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탄원시의 주제는 대체로 고통과 시험 속에서 건져주시기를 원하는 간구들이 주를 이룬다면 찬송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손바닥을 치고’라는 것은 극도의 기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너희 만민들아 극도로 기뻐하면서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라는 것이고 그 외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온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분이 온 땅의 임금이며 주인이고 통치하는 대왕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이 땅의 모든 나라를 당신의 나라로 여기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노릇을 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나라와 백성들은 하나님께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이 시는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자기의 왕을 몰라보고 패역을 행하는 자들이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들도 다스리시며 때가 되면 돌아오게 하시고 복종케 하셔서 결국은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는 포괄적인 선교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만민들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으로서 이방 사람들의 땅과 더불어 싸우시기 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반역하였기 때문에 마치 반란이 일어난 영토를 평정하셔서 다시 당신의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 같은 구도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라는 선교적인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찬양할 이유 1: 하나님의 엄위하심
본문에는 손바닥을 치면서 즐거워해야할 이유가 나오는데, 지존하신 하나님은 엄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엄위하다’라는 뜻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엄격, 엄격한 위엄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지존하심으로 모든 만민과 백성들에게 그런 분으로 인정을 받으시고, 당신이 세우신 엄격한 도덕적인 통치를 따라서 모든 만민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엄격한 도덕과 도덕적 가치를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의미는 거기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형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실 때는 거기에 분명한 상과 벌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엄위하심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벌을 받게 하심으로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인생이 끝날 때 최종적인 심판을 받게 하셔서 당신의 엄위하심을 보이십니다.
시인은 이렇게 엄위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고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조건은 하나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께 충분히 순종해서 적어도 마음에 양심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르고 있다는 가책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많은 죄악이 자신 속에 있지만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선명한 양심으로 그분께 순종하고 있으며, 그 외에 보이지 않는 불순종이 드러날 경우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꺾고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잠재적인 마음이 그 안에 가득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완전한 선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존하신 하나님의 엄위를 찬양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엄위를 찬송합니다.
주께서 엄위를 행하실 때 자기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대상 속에 있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결코 이 엄위하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없습니다.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거역하는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다스리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게 붙들며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불의와 함께 기뻐하는 삶보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을 더 좋아해야할 이유를 하나님의 엄위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고 무도한 자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원망과 원한과 많은 슬픔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됩니다. 모순과 갈등, 정의의 굽음, 이 모든 것들은 순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엄위를 펼치시리라는 소망 때문에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찬양할 이유 2: 열방을 발아래 복종케 하심
또 하나의 찬송의 이유는 만민과 열방을 우리의 발아래에 복종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위를 찬송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았을 때는 이스라엘이 이방나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짓밟히고 욕과 수치를 당하고 그들을 섬겨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기뻐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들보다 훨씬 더 큰 나라를 그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자기들보다 훨씬 더 큰 민족들을 발아래 복종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열방의 삶을 당신의 엄위로 통치하신 덕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실 때 “너희가 의로워서 주는 것이 아니라 저 백성들의 죄악이 관연해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너희에게 그 나라를 붙이시는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부당하게 편들어주실 것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찬양할 이유 3: 우리에게 기업을 주심
마지막 찬송의 제목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업은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열방을 그들의 발아래 복종시키신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히 먹고 살 수 있는 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을 염두에 두고 그려낸 묘사입니다. 아직까지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요단강 저편에서 제비뽑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그것을 가지고 승리를 확신하며 그들과 싸우고 그 땅을 정복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결국 원수를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의 땅과 유업을 이스라엘에 주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법과 당신의 말씀을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을 붙드셔서 원수는 강하나 강한 원수를 이기게 하시고 유업을 주셔서 손바닥을 치며 즐거운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기뻐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인하여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오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시 47:5-7)
찬송 중에 오르시는 하나님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전형적인 찬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여기에서 ‘올라가신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개념도 포함하겠지만 이것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용상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왕의 의자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왕이 만주백관을 거느리고 용상에 오르는 것은 나라를 정식으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후원을 거닐거나 밥을 먹다가 어명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국상을 논의할 때 용상에 올라 만주백관 가운데서 어명을 내리는 것입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위엄을 하나님께 대입해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을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 보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묘사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즐거이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 주님이 오르시고 나팔소리가 나는 가운데 오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언약백성의 전심의 경배가 있는 곳에서 온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많이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에는 주님에 대한 경험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품의 한 부분에 대한 빗나간 느낌은 결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대한 경고를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온전한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시작될지는 모르지만 완성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공경의 마음, 하나님은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한히 높으신 분이시라는 경배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시는 중에 올라가시고 나팔소리 중에 올라가십니다.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드리는 찬양가운데 하나님이 올라가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찬양은 단지 가락이나 입술로 나오는 찬양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 앞에 고백적으로 드리는 진실한 헌신 속에서 나오는 찬양이며 경배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인간의 마음에는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순종하겠노라는 결단도 함께 서려있는 것입니다.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언약백성에게는 이스라엘만이 자신의 나라이지, 다른 나라는 자신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나라나 지역의 신이 아니라 온 땅과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언약백성들 속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신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사랑을 보이시며, 자기 안에 이미 주신 약속을 따라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은총과 사랑은 자신들에게 부어져서 흘러넘치고 결국 하나님이 모든 세계의 창조자이신 것을 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도 드러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언약백성들만이 아닌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사야서나 예레미야, 에스겔서에서 풍부하게 드러납니다. 실제로 선지자들이 그 곳에 가서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온 땅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질서 있게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지혜의 시로 찬양함
그러면서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지혜의 시’라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노래를 부르고 찬양하는 당사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뛰어나고 탁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찬양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알고, 하나님의 위엄과 자비, 영광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를 찬양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지혜의 시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시는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성경에 보면 시편의 표제어 가운데 ‘마스킬’(lyKim')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가 있습니다. ‘사칼’(lk'c)이라는 히브리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직역을 하면 ‘지혜롭게 하는 시’라는 뜻입니다. 어떤 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인데 그 찬양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으시고,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혜의 빛을 주십니다. 분수를 모르던 인간에게 분수를 알게 하시고,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던 인간에게 그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온 땅과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자기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될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마스킬’의 효과입니다. 이런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지혜의 시로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알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고, 나 자신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신을 지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신령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에 있어서 찬양은 매우 중요합니다. 찬양과 예배,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와 정신으로 살아야 될지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열방에 지존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시 46:8-9)
본문해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에 집중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구약 안에는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교회의 확장에 대한 전망들이 보입니다. 다만 구약 안에서는 신약의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교회의 영적 전망이 지상의 나라라는 하나의 껍질을 통해서 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요성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임금 삼으셔서 그 나라의 태평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굴복시켜 조공을 받으며 열방 가운데 존귀하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러 나라에서 조공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전체의 크기가 손바닥만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과 교통하는 권역의 나라는 앗시리아라든지 바빌론, 애굽 정도였습니다. 그곳에서 바다 쪽으로 나아가 아래에 있는 페니키아나 그리스 같은 나라들을 복속하고 그들에게 조공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으로 요단강의 건너편 좌우에 있었던 아주 작은 나라들, 우리로 말하자면 나라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동네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다윗의 판도라고 해봐야 손바닥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국의 크기나 땅 덩어리의 크기를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중요성은 역사적인 크기에 있습니다. 크기로 따지자면 중국이나 로마가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고 고대로 돌아가면 페르시아나 이집트, 바빌로니아 같은 나라들이 훨씬 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중요성은 크기가 아니라 그 의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의 장엄한 구속 계획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매개로 해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역사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역사를 사용하셔서 이 세상의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장중한 계획들을 펼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 시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상이 나타나있습니다. 이것은 비정치적이기도하고 정치적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지역신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의 세계가 자기의 관할지를 분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영역에서는 자신들의 신이 최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싸울 때 신들도 싸우고 그 승부를 통해 신들의 우열이 가려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책을 보니까 중국에도 그런 사상이 분명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민족마다 지역마다 고유한 신이 있어서 그 신들이 자기의 영토와 영역을 지켜준다고 굳게 믿었으므로 자신들이 다른 민족이 다스리는 땅에 들어갈 때는 극도로 주의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신의 힘을 상당히 신뢰하면서 그 신의 보호가 있어야만 이민족과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도’라는 글자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길 도’(道)자 이전에 ‘이끌 도’(導)자가 있습니다. 그 글자는 원래 무당들이 사람의 머리를 들고 들어가는 형상인데 이민족을 칠 때나 이민족의 땅에 들어갈 때,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신들에게 바치고 들어감으로써 자기 신의 호의를 사고 저 신들 앞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런 생각에서 생겨난 글자였던 것입니다.
고대에는 자신의 신들이 전부 자기네 영역에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선지자들 중에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입니다. 요나서의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는 대목은 자신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탈출하면 하나님의 권한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많은 환난을 통해서 하늘과 땅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요나서는 지역신의 개념이 타파되는 신관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이것은 선교적인 전망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부강한 나라가 되어서 이방의 나라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모압 족속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이 굴복시켜서 북왕국 오므리 왕조에 복속되어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이시라고 한껏 고무되었던 것입니다.
비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의 여호와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인과 악인에게 비를 내리시고 이 모든 세계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확고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본문에서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열방의 방백들이 모이며”라고 했는데 이것은 여러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속되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고 각 나라의 우두머리들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국정을 지시받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권세자들이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이 나라를 다스려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당신을 우리의 백성과 함께 섬겨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고 변화되는, 하나님 앞에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자신의 전 삶을 복속시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자신은 없고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승패를 좌우하는 군사력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성루나 성벽에 방패를 걸어서 그것으로써 군대의 수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방패가 많이 걸려있다는 것은 그 나라가 엄청난 수의 군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군사력, 모든 군대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최근 그루지야와 러시아가 전쟁하는 것을 보면서 ‘나라는 힘이 있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루지야가 서방 세계와 친밀하게 지내고 나토에 가입하려고 애를 썼을 때 러시아의 눈에는 얼마나 가시 같았겠습니까? 그루지야의 대통령은 그렇게 하면 자기가 전쟁을 일으켜도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군사적인 지원도 해줄 것이라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까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그렇게 쉽게 군사개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강력한 러시아의 전투기, 탱크들이 단숨에 그루지야의 수도를 정복해서 전부 유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섬뜩합니다. ‘아, 이런 것이구나.’ 어떻게 대통령이 올림픽에 와있는 그날 전쟁을 일으켰는지 아주 오랫동안 별러온 전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력으로 밀어붙여버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아무도 의지할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힘이 군사력에 있다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님의 나라에 든든히 있어서 방패를 많이 걸고 그 나라에 헌신한다면 정말 훌륭할 것입니다. 한 교회의 힘은 결코 외적인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애국심도 없고 총도 못 쏴본 군인 천 명과 고도의 특정 훈련을 받은 특공대들 몇 사람이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아들이 이번 8월에 제대를 하는데 어느 날 와서 그랬습니다. “아버지”, “왜?”, “만약에 전쟁이 나면 우리 특전사들이 비행기를 타고 북한에 투입이 된대요. 그것도 인민군 군복을 입고 말이에요. 그들도 우리나라 군복을 입고 투입이 된대요. 서로 개전하자마자 수만 명이 말이에요.” 아주 혼란스런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특전사 대원 한 명이 북에 떨어질 때 몇 명의 군대를 혼란시킨다고 생각 하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우리 특전사 한 명이 낙하산을 타고 떨어져서 부대를 혼란시키는데 팔백 명의 군대를 혼란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한 명이 신출귀몰해서 돌아다니며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백 명의 군대가 모두 그 놈을 잡으려고 쫓아다니게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대대라는 것이 원래 팔백 명 정도 되는데 특전사는 일개 대대가 육십 명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결국 수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되었는가, 그러면서도 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가가 문제입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군대와 맞붙었습니다. 4만 대 23만이 벌판에서 격돌을 했습니다. 그러데 놀랍게도 23만 명이 4만 명한테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이 아직도 역사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당해내지를 못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을 하면 23만 명의 육분의 일 밖에 안 되는 4만 명을 한 줄로 쭉 서서 그냥 밟고 지나가도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군대가 훌륭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군대가 종이군대였겠습니까? 23만 대 4만이니 무기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우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벌판에서 23만 명이 4만 명한테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페르시아를 주저앉힌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때 전쟁을 지휘했던 이는 알렉산더 대제로 전투지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아테네 지역까지 쳐들어갔지만 거기서도 결국 집니다. 이렇게 병사의 수로 이기지 못한 전쟁이 아주 많습니다. 2차 대전 때도 히틀러가 러시아를 접수하려고 500만 명의 군대를 보냈지만 전쟁 중에 군인들이 거의 다 죽고 돌아올 때는 수십만만 살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비전이 선교적으로 성취되기 위해서도 교회의 외적인 크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되고 철저하게 훈련된 전문적인 전투 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되지 않은 일만 명보다는 자신의 생명과 마음, 온 뜻을 하나님 앞에 바친 한 사람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소수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역사를 써나갈 수 있었습니다.
영적전투를 위한 교회와 개인의 역할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의 강함은 잘 발달된 무기와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군사력이 아니겠습니까? 영적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훈련된 말씀의 무기, 세상의 판도와 시대를 읽는 지식, 경건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경건의 탁월한 능력과 힘,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런 것들이 어우러질 때 세상을 이기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존재합니다.
입대할 때에는 전투를 안 하는 비전투 군인이나, 슬슬 놀러 다니는 옛날의 방위 같은 군인이나, 혹은 특수전을 수행하는 군인들이 체격조건은 좀 다르겠지만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무술을 얼마나 하는지, 키는 얼마나 되는지를 보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1∼2년 정도 지옥을 넘나드는 훈련을 받고나면 그들은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쉼만을 얻으려고 하는데 쉬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위대한 전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애를 얼마나 전투적으로 훌륭하게 사느냐, 믿음의 싸움과 영적인 싸움 속에서 얼마나 승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하느냐가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신장이나 나이가 문제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지, 강한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도전을 주고 수시로 ‘그렇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군사다.’라는 고백을 하며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꽉 차도록 도와야합니다. 어설프게 막대기를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무기를 공급해서 전쟁에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다른 것은 다 못해도 두 가지는 해야 합니다. 하나는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의 어떠한 위협에서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는 늘 자신감이 없고 비참한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산업의 맨 앞자리가 군수산업입니다. 끊임없이 연구개발을 해서 최신의 무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담대한 마음과 육체를 갖게 함으로써 강한 군대가 되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무기에도 관심이 많은데 이번에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격병이 벽 뒤에 숨어 있다가 적을 쏘기 위해 나오면서 많이 죽기 때문에 총에 LCD화면을 장착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은 감춘 채 총만 내보내서 화면을 보고 적을 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새로운 총은 레이저를 쏘아 거리를 계산한다고 합니다. 거리를 계산해서 적이 숨은 벽의 옆을 쏘면 벽을 지나서 총알이 터지고 그 총알에서 수많은 작은 총알이 튀어나와 숨어있는 적이 몇 명이든 다 죽게 만든다고 합니다. 엊그제도 자료를 보니 미국에서 만든 전투군함들이 전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밑에서 사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가진 많은 수의 무기들로 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자동으로 사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달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싸우면 애국심과 상관없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럴 때는 아무리 애국심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배 위에 올라가서 옛날처럼 총을 겨누고 대포를 쏜다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서해교전에서 얻은 교훈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명도 안 죽었지만 북한은 팔십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런 새로운 무기와 같은 것이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교회는 말씀 가운데 끊임없이 이러한 것들을 길어내어 성도들의 손에 들려주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모여서 만날 먹고 마시고 놀아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보람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의 전투지는 어디인가? 어디서 싸우고 있는가? 진짜 전투하고 있는가? 군인처럼 자기를 연마하고 자기를 절제하고 있는가?” 디모데후서에는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전투지에서 복무하는 것이 나의 최고의 사명인가?’ 하는 고민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위로만 받고 싶어 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적인 신앙생활로는 안 됩니다. 전투적이고 담대하게 분명한 소속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미 구약에서는 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56편 강해 1
시편47편 강해 1
시편47편 강해 1
시편47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