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3월 19일_온라인구역공과
6.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때
녹취자: 장미연, 송미옥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제 대공원에 잠깐 산책을 나가보니까 벌써 꽃들이 많이 폈습니다. 산수유꽃은 아주 만발했고 홍매화도 피어있고 여기저기 진달래도 벌써 피어있었습니다. 어김없이 봄은 오는 것 같습니다. 겨울에 시작한 우리 아사밤 공과가 이제 봄을 맞으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 오늘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제 6과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때 같이 공부해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같이 읽어볼까요? 조지 바이런의 생애를 읽으며 느낀 바를 나누어 봅시다.
짧은 책 속에서 바이런 이야기만 할 수 없으니까 간략하게 썼습니다만은 쓴 것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걸 느끼셨습니까? 지체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할까요?
인터뷰 1) 그가 누군지 얼마나 유명한 시인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문학적으로는 뛰어난 사람인지 몰라도 그의 삶은 욕망에 사로잡힌 채 방탕한 삶을 산 듯합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다 문득 저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나 잘난 맛에 살던 젊은 시절, 저 또한 세상 친구들과 어울리며 순간의 즐거움과 채워지지 않는 만족을 따라 되는대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2) 바이런의 삶은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나 방탕한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수많은 대상을 사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들이키면 목마름이 찾아오는 것과 같은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이런의 삶은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해 방황했던 삶은 아닐까요?
인터뷰 3) 사람들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다는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지금까지 지내왔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나의 에너지를 써가며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든 간에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었기에 삶에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랑은 끊이지 않고 솟는 샘물과 같은 사랑인데 그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하기에 조지 바이런은 그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을 수밖에 없었지만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셔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사랑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바이런의 생애를 보면 참 기가 막힌 시들을 많이 남겼고 젊어서 저도 그의 시집을 거의 끼고 다녔는데 그 삶을 보면 참 행복했다라는 생각은 잘 안 듭니다. 결국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바이런은 끊임없이 사랑을 찾았지만 실제 그가 경험한 것은 사랑 대신 순간순간 솟구쳐 오르는 욕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랑 때문에 생겨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이 불행해지는게 행복해지려다가 불행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행복해지고는 싶은데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있는데 바르게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지 모를 때 그 때 인간은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대상을 알맞게 사랑할 수 없을 때 인간이 거기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가치있는 것을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의 대상을 알맞게 사랑할때에 그때 이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바이런은 불행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훌륭한 시를 쓰고 얻을만한 인생에 대한 통찰과 교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여기도 나오네요. 충동과 반항의 낭만주의자였고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는데 결국 아버지도 바이런 비슷하게 살았습니다. 1790년에 아버지 잭이 자살했으니까 어렸을 때 죽은 거지요. 아버지는 가난했습니다. 큰아버지의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게 되면서 엄청난 지위와 재산을 갖게 되고 1812년에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라고 하는 시집이 대박이 나게 되고 결혼과 별거 등등 하다가 그리스의 메솔롱기온 (이라는) 타지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자, 이 정도 하고 2번 문제 풀어볼까요? 같이 읽어봅시다.
당신에게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은 언제였습니까? 그때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지체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요?
인터뷰 1) 내 힘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 하면 할수록 주어진 상황도 환경도 주변의 모든 것들조차 미움과 분노의 대상이 되어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나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비로써 현실의 문제를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들게 하고 상황과 환경이 열리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 2) 교회를 다녔지만 재물과 남에게 잘 보이고 나를 드러나게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느 순간 갑자기 목숨처럼 여기던 재물과 인기가 한순간에 없어졌습니다. 그 밤에서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도 않았고 그때 그 심정은 이대로 눈감은 채로 내가 마주쳐야 할 일들을 다 내려놓고 또 다른 세상에서 눈뜨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3) 헤어졌다 다시 만난 아내가 암에 걸리고 2번의 수술을 받았을 때 제 탓인것만 같아 맘이 아프고 주님께 매달리며 계속 기도했습니다. 1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봐주면서 계속 기도했지만 암이 재발하여 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원망과 울분으로 마음은 메마르고 그 어떤 사랑도 싫고 사랑하고 싶지도 않은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절망적인 순간에도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아내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밤을 지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 밤을 헤치고 나오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한 아직 밤이 아닙니다. 진정한 밤은 사실 환경의 밤이 아니라 영혼의 밤입니다. 그래서 환경의 밤과 영혼의 밤이 함께 겹칠 때 인간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인생의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밤에 도달하게 되면 사실은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결국은 이제껏 내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 삶의 맥락이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계. 부모와의 관계 심지어 자식과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 아내와 남편의 관계. 이런 것들 까지도 사실은 아무 의미 없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진짜 어두운 밤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평생 그렇게까지는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러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정신력이 워낙 강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은 어떤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멘탈이 워낙 튼튼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너무 둔감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어느 경우에 해당되는지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그런 어두운 밤들을 다 이렇게 지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아사밤 공과를 제가 시험적으로 고등부에서도 한번 해보면 어떠냐 그랬습니다. 고등부에서 검토를 하고 공과를 채택해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불호가 딱 반으로 갈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너무 좋다고 빠져들고 어느 학생들은 너무 지루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다고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디서 그런 차이가 나타날까요? 어떤 책이 자기에게 다가올 때 자기 마음의 결. 마음의 결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떤 사물의 내적인 구조입니다. 이런 마음의 내적인 구조가 책과 결이 같을 때. 혹은 자기도 모르던 결을 그 책이 건드려 줄 때 그때 이제 진정한 책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책을 보면서 “아 좋다” 그러고 감동을 받는 학생들은 이미 벌써 마음에 그런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있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모든 사람이 다 표현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흔히 쓰는 말이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아이들이 특히 청소년기 아이들이 인생에 대해서 자아가 생기고 고민을 하기 시작할 때 애가 말을 안 한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말을 섞기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고민을 하고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지나기는 하는데 그걸 말로 설명을 자신도 잘 못하겠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명해서 우리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처럼 들리니까 핀잔만 주고 또 이해도 받지 못하니까 더더욱 말을 털어놓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밤을 지날 때에 우리는 아주 특별한 심리상태에 접어들게 됩니다. 한 번 볼까요? 우리들이 그런 심리에 접어들게 될 때에 언제든지 그런 때가 옵니다. 그때는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받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끝이 무엇일까요? 사랑에대한 사랑하고자하는 기대와 사랑받고 싶어하는 기대조차도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끝은 절망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미 이야기했지만 진정한 인간의 사망에 이르는. “우리 영혼의 정신이 사망에 이르게 되면 그 질병이 바로 절망이다.” 그렇게 피력을 하면서 인간의 절망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그 절망에서 무엇인가 사랑하던 모든 기대를 꺾어 버리고 약간 평안해진 것 같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사실 평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죽음에 다다르는 입구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랑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사실은 거기에는 희망도 사라지고 믿음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3번째 같이 읽어봅시다.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통해 신자로서 좋게 되었던 경험과 나쁘게 되었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1) 외로움 때문에 고독 때문에 신자가 되었습니다. 천지에 나 혼자 있다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외로움과 내 존재의 이유에 대한 질문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내 존재의 이유가 되시기 때문에 신자가 되어서 좋게 되었고, 세상 속에서 신자인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 불신의 가족과 친척과 지인들이 예수님 향한 나의 믿음을 비웃을 때, 물론 믿음을 가진 신자로 외로움이 더 할 때가 있었습니다.
인터뷰 2) 살아오면서 외로움이 참 많았습니다. 많은 시간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바쁘게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신자로서 외로움도 있었지만 은혜 안에 있을 때의 외로움은 저의 상황과 환경을 아시는 하나님께 더 많이 의지하는 시간을 갖게 하였고,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의 외로움은 나 자신이 한없이 약해지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3) 고등학교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청년시절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통해 불신자들과의 부조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외로움과 고독에 빠졌습니다. 불편한 현실에 맞추려는 나와 스스로를 곤고하게 여기는 나 사이를 방황하며, 일중독에 빠지기도 했지만 허무하게도? 고독에 휩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해 몇 달을 병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고통 속에서 미끌어진 나의 영적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회개를 통해 새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가 시작되자 영혼과 교회를 사랑하며 섬길 수 있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더 이상 고독의 시간이 아닌 주님과의 은밀한 연예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독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고독은 사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을 못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외롭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찾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이고, 마지막 자신까지 낯설어 보일 때에 결국 인간은 거기서 절대적인 고독을 느끼게 되고, 그 고독이 상대적인 사랑에 의해서 채워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고독은 인간을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흔히 고독사라고 하는데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립사입니다. 고독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고립사’ 하는 사람의 경우에 자기 의지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고립되고 인간을 기피하는 본성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때로는 그럴 의지를 가진 것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장소적으로 고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이 자기를 상대해주지 않고, 왕따 같은 것이 대표적인 고립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될 때에 인간은 깊은 고독을 경험하게 되고 그 고독 속에서 세상을 향해 원망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비관하게 되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외로움의 뜰인데 외로움을 절실하게 인간이 느끼게 될 때에, 그 때에 결국 인간이 이런 외로움을 느끼게 될 때 이것이 외로움의 뜰입니다. 인간이 외로움을 여기서 느낍니다. 외로움을 느낄 때 이렇게 가면 진리로 나가는 대문입니다.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은 진리로 가는 마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은 하나입니다.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문은 문을 특별히 찾아야 가는 길이지만 절망은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못 찾으면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싫은 것입니다. 진리를 찾을 수도 없고, 절망에 빠지지도 않았을 때 인간이 하는 것은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설교했었습니다.
특히 파스칼의 용어 ‘디베르티스망’을 쓰면서 설명했었습니다. 고전 발레에서 스토리들이 쭉 전개되다가 막간에 뜬금없이 배우들이 다 나와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앞의 스토리로 이어지면서 발레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를 찾아갈 수 있는 정신의 힘도 없고, 그러한 의지도 없고, 절망에 빠지는 것도 무섭고, 할 때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락이나 쉽게 말하자면 헛된 일 허탄한 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일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소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외로움을 고독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는 구도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미끄러져서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기도 하고 둘 다 하기 싫거나 하지 않으려고 할 때 인간은 허무한 것에 자기 자신을 바치면서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쾌락입니다. 극단적인 방종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바이런을 여기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이런은 그런 외로움을 고독을 느꼈으면서 진리를 찾아갈 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고 낙담하도록 자기를 내버려두지 않고 그것을 끝없이 자기의 시의 세계로 추구하고, 성적인 쾌락 속에서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면서 매순간 이런 외로움과 고독을 회피해보려고 몸부림쳤던 삶은 아니였을까? 조심스럽게 천재적인 문학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확실한 것 하나는 저도 주님을 믿게 되었을 때에는 아무도 내가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절대적인 고독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고독의 경험이 결국은 절대적인 의존의 경험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의존의 경험을 우리가 쉬운 말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이렇게만 말하지 말고 그 고독을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기회로 삼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실제적으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외로움을 이기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우선 첫째는 하나님 이외의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 깊은 고독 이것은 누군가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번에 시리즈 때 설교를 했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족을 특별한 타인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보면서 쇼킹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쇼킹할 것 없습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 타인입니다. 그런데 다른 타인은 관계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타인인데 가족은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동네사람들과 주차 문제로 낯을 붉혔는데 그 사람하고 의절하고 사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몰랐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부모를 의절하고 심지어 남편과 헤어지고 아내와 헤어지고 아이들과 의절하고 산다는 것은 웬만한 결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가족들은 영원히 특별한 타인인 것입니다.
나도 나에게 타인 같은데, 나 같은 타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고독을 인간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비결은 사랑받는 것으로는 결코 고독이 해소될 수 없습니다. 절대 해소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춘기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가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고 돌봐주는데, 외롭지 않습니까? 해결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재미있게 놀고, 심지어 청소년 때 술도 마시고 까불고 파티도 열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모임이 끝나서 통금시간이 가까워오는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걸어올 때 느끼는 외로움, 혹시 그런 경험 없으십니까? 결국 인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에게 사랑받는 것만으로는 고독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또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회피만으로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고독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비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기 일보직전에, 자살하기 일보직전에 우연히 길거리를 산책하다가 길냥이를 만난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니까 길냥이가 다가와서 먹는데 그것들이 처음에는 도망가지만 먹을 것을 한 번 얻어먹으면 그 다음에는 그 시간에 기다립니다. 그리고 서너 번만 하면 길냥이들이 경계심을 풀고 다가와서 가족처럼 여기고 의지합니다. 거기서 애완동물에 대해 눈을 뜨면서 길냥이들을 데려다가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기르면서 삶의 이유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물들에 대해서도 자비심을 베풀고 불쌍히 여기면서 돌보면 인생에 있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뒤로 미루게 되는데 하물며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면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나는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사랑받는 것만으로 인간이 절대 행복해 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랑하며 살련다. 영국의 속담에 ‘우유를 받아 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배달부가 오래 산다.’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부요하고 오래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슬픔을 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하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 찬 인생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네 번째 문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끌어안고 사랑으로 하나님을 포옹하라’ 문장에 대해 자신이 공감하는 바를 이야기 해 봅시다.
인터뷰 1) 사랑이신 하나님을 끌어안고 사랑으로 하나님을 포옹하라’ 는 어거스틴의 말을 통해서 그동안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일과 세상의 사람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포옹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으로 가슴 뛰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2) 결혼 생활 올해로 18년 차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며 시작된 서울살이 그야말로 독박육아 주중에는 아이들과 주말에는 도움이 안 되는 남편까지 함께여서 더 힘들었던 순간 3, 5, 7, 9년 홀 수 연차마다 결혼 생활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퇴근한 남편은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엄청 원망하고 미워했었습니다. 결국에는 여기 저기 흔들리는 내 마음을 바뀌게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그 분의 사랑을 배울 수 없음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한 집에 살아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 없이 행복에 이르지 못하니 그 사랑 알린 은혜를 간구하는 자신의 변화를 보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3) 우리가 아는 사랑은 각자의 경험에 비춘 자서전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인생 각자의 삶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그리고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푹 담근다면 사랑에 대한 어떤 정의도 그리고 조건도 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적인 생각으로부터도 놓아 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혹은 이렇게 해주시기 때문에 등 어떤 개념 어떤 조건에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 사랑이 내 삶이 되고 호흡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한 번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방송에 나와서 피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얼굴이 예쁜 사람 덜 예쁜 사람 다양한 사람이 있고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좋아하지만 피부에서 2m만 다 벗겨내면 아무도 잘생긴 사람이 없다고 예쁜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짜 피부 2m를 벗겨내고 나면 벌건 고깃덩어리가 나오는데 그것이 윤곽이 뚜렷하든 말든 뭐가 사랑스럽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하는 것 자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파스칼이 했습니다. 파스칼이 하는 말은 진짜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까? 인간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이렇게 말할 때 결국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그가 나에게 잘해주는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결국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 사람 사랑스러워?” “‘그럼 사랑스럽지, 이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이 어디있어?” 이럴 때 과연 예뻐서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예쁜 것으로 만족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라고 할 때 우리는 이상하게 후자에게 손을 들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한다.’ 라고 수없이 말을 하지만 사실 곰곰이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기보다는 특성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흔히 듣는 이야기 첫 번째 자매님 도움이 안 되는 남편이라고 했는데 저도 그런 사람의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깊이 그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토요일에 남편이 오면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둘에다가 남편까지 오니까 아이 셋을 돌봐야 하니까 진짜 힘드시겠습니다. 남편들께 부탁을 드리는데 이제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그리고 30대까지는 까불다가 그럴 수 있는데 40 넘으면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30대에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직 생각이 없어서 그런데 곰곰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끝까지 남아줄 사람은 아이들도 아니고 아내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하십시오.
그리고 통계적으로도 교회에서 보면 여성이 남성화된 가정보다는 남성이 약간 여성화된 가정이 훨씬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니까 토요일에 쉰다고 생각하지 말고 토요일은 내가 집에 근무하는 날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를 쉬게 해주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어나서 청소도 하고 아내가 힘들어 하는 일을 열심히 도와주면서 아이도 돌보아주고,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여보 일 주일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오늘 토요일인데 오전에는 아이들 둘 내가 볼 테니까 일찍 가서 조조 영화라도 보고와. 그리고 돌아오면 내가 점심을 준비해 놓을께”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남성들 안 좋으십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그렇게 도움이 되는 역할들을 남성들이 해 주셔야 합니다. 여성들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남성들도 물론 힘듭니다. 그런데 남편이 토요일에 와서 반나절이라도 가정을 위해 헌신해 주면 사실 아내가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족을 사랑하면서 남편 마음속에 사랑의 힘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어려워 보이는 듯한 이야기 ‘사랑이신 하나님을 끌어안고 사랑을 포옹하라’ 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사랑해서 상처를 받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끌어안고 그 사람에게 끌어안은 대가로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이 자꾸 인간에게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사람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기는 안 변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어거스틴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진정한 사랑 진정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랑이 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 받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끌어안고 사랑으로 하나님을 포옹할 때 그 때에 사람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베풀고 사랑하지만 그 대가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또 그 안에서 자기 스스로 끊임없이 채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깊이와 통찰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아사밤을 보고 많은 격려의 편지도 쓰고 지금도 네이버 같은 곳에 들어가서 ‘아사밤’을 쳐보시면 수도 없는 댓글들 블로그들이 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제가 ‘아사밤’에서 이야기 한 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는 그 위대한 사랑의 신학의 티끌도 안 됩니다. 더 어마어마한 세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도 사실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의미 깊은 명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실로 사랑의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떤 대상을 사랑해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뜻입니다.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곧 사랑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랑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찾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그런 대상을 찾는 성향이 없으면 그 사랑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결국은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족 나의 이웃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 이런 속에서 이런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하강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주 여러분들이 가족들을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봉사하고 그들이 나 때문에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사랑하고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은혜가 되는 한주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