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온전해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구약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설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성전이었죠. 그 성전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이죠. 성전은 솔로몬 시대 때에 지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 계셨습니다. 그 때는 성막이었죠. 물 돼지의 가죽으로 만들고 그리고 하얀 장막을 치고 뭐 이렇게 그렇게 크게 밖에서 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은 성막 시대에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성전에 혹은 성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그냥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성전 사상 속에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개념적이죠. 하나님은 항상 성전에 계시죠. 그러나 이스라엘의 특별한 때를 보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친히 그 성막에 혹은 성소에 임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친히 임하시면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에서 ‘아, 이곳은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고백을 하고 엎드려지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특별하게 임재 하셔서 ‘야, 여기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특별한 곳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이사야의 소명 받는 그러한 시기 같은 그러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죠.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신자들의 마음 안에 계시죠. 그러면 오늘 성경에 보니 뭐라고 하느냐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너희 에게 계시고” 이것은 무엇을 말 하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신 그 두 개의 경험 가운데 그냥 일상적이고 선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계시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것은 경험적이고 특별한 면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 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 라고 하는 우리에게 경험되거든요. 그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 경험되는데 삼위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경험이 되는데 이 경험은 우리에게 항상 똑같지 않습니다. 막달린 대학의 총장이던 토마스 굳윈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산다. 그렇지만 어느 특별한 시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신자들이 느끼게 된다. 성령님을 통해서 이것을 존 오웬은 총알적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느껴지는 매우 특별한 사랑,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매우 특별한 사랑의 경험 같은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제나 느끼면서 사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은 때가 없지만 하나님이 매우 특별하게 함께 해주시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할 때가 있죠.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해 주실 때가 있죠. 또 일반적인 섭리뿐만 아니라. 실제 가기 안에 내제하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특별히 함께해 주시는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놀라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오늘 성경이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할 때에 그 “계시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많이 느끼고 싶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느낀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매우 특별하게 사랑하신 사실을 경험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함께 하신 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래도록 이 성경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뼈 속 깊이 다가오는 경험은 별로 못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경험들을 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뭐냐면 사랑의 온전케 하는 효과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자신의 죄와 부족들을 늘 발견하지만 발견한 그것이 그 사람이 성화되는데 끊임없이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지는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분들에게 소상하게 설명을 할 때 여러분들이 이 교리를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우선 첫 째로 먼저 생각할 것은 무엇이냐면 이 사랑 안에 있는 온전하게 하는 효과가 우리를 성화시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온전하게 하느냐면 온전해진다. 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현재의 이루어지는 상태나 작용보다 더 뛰어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온전함 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전함 이라고 하는 개념은 더 높은 어떤 목표를 경험했기 때문에 갖게 되거나 혹은 경험하지 못했어도 바라기 때문에 갖게 될 때 그 때에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고가 하는 것이 온전합니다. 뭐 예화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음식 먹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지체가 있었어요. 집사였는데 한번 나를 데리고 목사님 아주 맛있게 하는 고기집이 있는데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래 가자. 그래서 갔습니다. 저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가까워요. 과천인데 정말 괜찮아요. 맛있어요. 그 후에도 몇 번 갔는데 어떠세요. 교수님 그래요. 그 때는 교수였으니까. “정말 맛있네.” 그러더니 이제 다 먹고 났는데 “제가 여기를 와서 너무 맛있어서 아버님을 모시고 한번 왔거든요.” 그래서 “그런데요.” “아버님이 와서 몇 번 잡수시더니 자기 생각에는 좋은 집이라고 찾아서 모시고 왔는데 아버님이 몇 번 잡수고 나시더니 물을 마시면서 그러시더래요. “얘야. 이 집은 다시 오지 마라.” 그러시더래요. r그래서 그 아버지 다시 오지 말라는 집을 나는 감격하고 먹었으니 고기 맛에 대한 표준이 그 할아버지가 훨씬 높은 것이지. 예화가 됩니까? 자매들에게 가슴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하죠. 사랑을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사랑을 했는데 정말 어떤 사람을 뜨겁게 사랑했어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러면 안 되겠지만 자신의 인생 다를 주어도 좋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랑의 경험을 한번 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대한 아주 높은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직접 사랑의 경험을 못했어도 소설이나 문학 잡품을 많이 읽으면서 높은 사랑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그런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있겠죠. 그러니까 정략이라든지, 그다음에 물질적인 이익, 그다음에 자신의 외모를 보고 접근하는 육욕적인 사랑, 이런 것에 의해서 현혹될 리가 없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높은 표준이 있을 때 우리들이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하고 저 얘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상관이 있죠.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하면” 이 이야기는 호의를 베풀면 그 뜻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서 제가 언젠가 정의를 내려준 적이 있죠. 한 대상을 궁극적인 목표로 정하고 그리고 그를 끊임없이 즐거워 하려고 하는 마음의 고착된 경향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겠죠.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으신데 형제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가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뿐이어야만 한다는 그 교리와는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신비입니다. 형제를 그 다른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끝까지 사랑하려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합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이야기 하면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제를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하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신자 안에 형제 이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를 온전히 사랑하려는 신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 이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래 전에 그 부분을 읽으면서 아주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별로 감동 받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려고 할 때에 형제들 이외에 누가 있겠으며 형제를 온전히 사랑할고 할 때에 하나님 이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이 사랑은 자연적 성의나 혹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베풀고자 하는 의욕이 행사 되는 때에 간헐적으로 형제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지속적이지 않은 간헐적인 감정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보면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육욕이겠죠. 그래서 사랑은 그러면서 제일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오래입니다. 우리 교육관 앞에 누가 자꾸 쓰레기를 갖다 버려서 내가 마음이 상하는데 그냥 쓰레기를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가구를 갖다 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돈을 주고 자꾸 치우게 합니다. 어딘가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쓰레기 많이 버리는 벽에다 포스터를 하나 손으로 그려서 만들어서 붙였어요. 포스터가 아니라. 직으로 썼는데 화가 많이 났는지 막 갈겨썼어요. “야, 이 새끼들아” 이걸로 썼어요. “이번에는 내가 치워준다. 그러나 한번 만이다. 한번만 더 버리다 걸리면 너 죽고 나 죽는 기다.” 그리고 “주인백” 참았어요. 안 참았어요. 참았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생각하면 굉장히 좋은 예화죠. 사랑이라고 얘기 안 해요. 왜 그렇죠. 그 대상을 잃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고착력이 없어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함께 인생을 살아가다가 누군가에 의해서 욱하는 분노가 치밀 때도 있지만 울컥하면서 불쌍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경험이 있죠.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은 애성적 감정일지 모르지만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있어야합니다. 고착력이 있어야합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형제를 사랑하면” 내가 오늘 울컥하고 형제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생각이 나서 선심을 썼다. 쓰레기를 버리는데 열이 받치지만 이번에는 참지만 하고 넘어간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도록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지속적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물론 이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니까.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항상 충만하게 그렇게 사랑할 수 없죠. 그렇지 않죠.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면 한번 아멘” 해보십시오. 그런데 우리들이 항상 똑같이 사랑합니까. 고무신 거꾸로 신을 때도 있고, 그다음에 일부러 바나나껍질 밟고 미끄러질 때도 있잖아요. 일어나라고 주님이 손 내미시는데도 뭐가 틀어졌는지 주저앉아서 안 일어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래도 주님 사랑하죠. 왜냐면 그것은 항상 일시적인 것이고, 그 쓰러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요.
(찬양)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다시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생을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오려고 애썼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향해서도 그런데 그 사랑에 있어서 온전해지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계시게 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면 온전함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내가 이렇게 울컥하고 솟아나는 감정이 있을 때만 형제에게 호의를 베풀면 이것은 물론 사랑이 아니지만 이것은 하나의 선의죠. 그리고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그만둬요. 그러면 울컥하는 미움이 솟아나요. 그다음에는 미워해 그래서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요.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뭔가 이렇게 울컥하는 감정이 생겨서 그 사람에게 뭔가 호의를 확 베풀어요. 나는 이런 것을 조폭적 사랑이라고 불러요. 언젠가 한번 외국 영화를 보는데 거기에서 보스가 나와요. 사람들에게 부하들에게 방금 전에 커다란 인심을 써요. 네가 그동안 우리 조직을 위해서 수고했으니까 큰 집을 하나 사 주겠다든지, 뭐 이렇게 돈을 많이 준다든지 큰 호의를 베풀어요. 신디게이트 들이 다 모였어요. 그랬더니 이제 일장 연설을 아주 호의적으로 한 다음에 갑자기 밑창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내는 것입니다. 알루미늄으로 된 것을 그런데 그것을 툭툭 치면서 이 신디게이트 들이 모인 곳을 쭉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어떤 사람 뒤에 오거니 그것으로 힘껏 날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머리가 터지면서 피가 쏟아지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이 사람이 배신자다. 그러니까 항상 그런 조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스에게 호의를 받으면서도 두려움이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이 인간이 받기에 접합한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이 받기에 적합한 사랑은 애견적 사랑이 아니라. 인격적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마음의 충동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경우에는 아무런 주위의 도움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할 때 호의를 베풀고 싫을 때 싫어하고, 미울 때 미워하고, 그다음에 내 마음에 원한이 맺혔을 때 복수하고, 이런 식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는 항상 모자라는 현실과 도달해야할 당위 사이에서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살라고 해요. 그리고 이렇게 살고 싶어요. 내 의지가 자꾸 이렇게 살고 싶다고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살수 없는 격차를 느끼는 것이죠. 이 격차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아니면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그야말로 그게 은혜입니다. 내가 이렇게 통장에 맡겨놓은 것을 찾으러 갈 때에는 은혜가 아닙니다. 뭐 여러분들이 은행에 맡긴 돈 찾으러 갈 때에 당당하지 겸비합니까. 내가 맡긴 것인데. 그러나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러 갈 때에는 그렇게 당당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해줘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긍휼히 여겨서 자기에게 줘야지만 받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사람이 온유하고 온화하잖아요. 그리고 기도의 영이 끊어지게 되면 사람들이 교만하고 척박해집니다. 혈기적 이고, 그것이 왜 그런지 아세요. 은혜를 구하러 나아가는 사람은 항상 도달하지 않는 현실과 도달해야할 당위 사이에서 자기의 능력의 부족을 느껴요. 그래서 하나님의 호의를 구합니다. 그런데 호의를 구하면 구할수록 그런 무조건 적인 호의를 받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참회가 있는 것입니다. 참회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능력 주십시오.” 자기가 하나님께 능력 맡겼어요. “물질도 주셔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뭐 맡긴 것 있어요.
옛날에 우리 교회에 있던 어떤 자매가 자기가 요즘 하나님 앞에 기도했데요. 내가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그랬어요. “하나님 여태까지 내가 하나님을 섬겼으니까. 이번에는 하나님이 저를 섬겨주십시오.” 그랬답니다. 그것이 말이 되냐? 은혜는 항상 이렇게 자기가 맡겨놓은 것을 당당하게 찾는 것 같은 태도가 은혜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긍휼과 은총을 구하는 태도, 돌아온 탕자에게서 나타나죠.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나를 아버지의 집에 품꾼 중에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그것이 은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면 구할수록 자신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과 마땅히 해야 할 당위 사이에서 은혜를 구하는데 구하다가 보니까. 그다음에 뭐냐면 되어야할 자기와 현제 있는 자기 사이에 격차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복종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복종의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복종의 마음이 생기는지는 내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종의 마음이 생겨요. 이 복종의 마음은 자기를 무가치 하게 여기는 대서 오는 복종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가운데 하나님께 복종하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끝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 자신은 자신을 무가치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세우는 목표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용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까리따스 사랑 안에 있는 합치적 성격입니다. 합치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는 무엇이든지 그래서 마리아의 고백 속에서 주의 미천한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을 이루소서. 혼전의 임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인데도 주의 계집종이기 때문에 나는 별도의 인생의 목표나 계획 그런 것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옵소서. 그러면서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 안에 있는 합치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훌륭한 성도가 모두 이 고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가진 사람, 이 고백을 갖는 것만큼 그가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화의 핵심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기 부족을 철저하게 느끼게 되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온전하게 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안에서 무엇을 발견 하냐면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수많은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조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목표를 세우고 일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워낙 태만해요. 그야말로 오합지졸이고. 개판이에요. 그런데 그중의 한 두 명이 리더인 자기를 깊이 인정하고 너무나 헌신적으로 일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않고 그렇게 온전하게 하려는 몇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조직이 놀랍게 발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그럴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이겠습니까. 그렇게 따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자기의 삶이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래도 자기의 장점이 자꾸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 드려서 온전한 사랑을 추구하려고 해요. 그럴 경우에는 그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방해 요인들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죄와 결점들을 끊임없이 보고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천착했던 것은 한편으로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그의 삶이 얼마나 지독하게 온전함을 향해서 가려고 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의 역사를 보면 죄에 대한 가장 혹독한 설교가 행해졌던 시대는 가장 거룩한 성도들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청교도 시대의 설교가 55%가 죄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거룩한 성도들이 살던 시대였습니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기하게 필요한 때에는 그 메시지가 선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필요가 없는 것 같은 때에 더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온전함을 지향하는 성도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만 자기 안에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그 지독한 패역함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 하는 것을 알지 그냥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사람들을 대하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은 항상 자기 자신에 있어서 장점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이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추상적인 사랑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비록 소수라고 할지라도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고 할 때에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을 고쳐놓은 아주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가지고 있는 온전함의 효과입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온전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 온전해지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가 주님의 온전한 기쁨이 되어야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온전한 삶 가운데 온전해져 가게 되고 온전하게 못하는 숨은 요소들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뼈 속 깊이 패역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 온전해져가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온하게 하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