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녹취자: 최원정
00교회에서 직원들에게 설교를 해달라고 해서 이 구절을 가지고 40분 정도 말씀을 전했던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오늘 우리들이 이 15절의 말씀은 4가지 동사로 구획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preparing the table.” 식탁을 차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온 물고기로 아침을 차리신 것이 아니라 이미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온 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밀하게 대하시기 위해서 ‘너희에게 뭐 작은 것이 있느냐’ 하고 물으시면서 말문을 열어주시자 제자들이 물고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가 식탁에 첨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당신이 직접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성경에서 이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가족애 혹은 한 부모에게 태어난 자식들이란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다시 고기 잡으러 나갔지만 예수님은 이미 이들과 화해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식탁은) 당신과 이 제자들과의 관계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런 하늘의 혈육관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역을 잘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많은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그렇게 자랑할 때도 있고 때로는 감추고 싶을 만큼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피붙이로 여기고 우리를 위해 식탁을 차리신 주님이란 사실입니다. 그 식탁의 교제에서 제자들은 변했지만 예수님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행적인 은총을, 주도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calling the name.”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식탁을 차린 후) 부르시는 것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 사람의 이름이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는데 예수님이 그 이름을 버리라 해서 버리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사람을 부를 때 당신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베드로라고 부르셨어야 맞습니다. 그리고 (전부터) 예수님은 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이 사람을 불렀습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여기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요한아 아들의 시몬아.’ 한국어로 말하자면, ‘김, 이, 박’에 해당될 정도로 그렇게 흔한 이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요한이란 이름도 매우 흔한 이름이었고 시몬이란 이름도 더욱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당신이 버리게 하신 그 이름을 바로 이 자리에서 불러주신 것일까요?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나면 맞을 성경입니다. 21장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 21장에 붙어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요한복음의 끝일 뿐 아니라 21장이 없다면 요한복음의 끝일 뿐 아니라 4복음서의 끝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4복음서가 제자들이 실패한 것으로 끝나고 바로 뒷장이 되었을 사도행전 1장에서는 베드로가 다시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해주는 장이 바로 21장입니다. 요한복음 20장까지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해서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가장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 실패한 야고보와 요한을 어떻게 또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었는지. 이것을 보여주는 연결고리가 21장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베드로의 리더십을 회복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실패한 그의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베드로라는 이름은 감당하기 힘겨운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면서 그는 비록 실패했지만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그를 불러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일 뿐이지 우리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우리 이하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우리 이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그러한 주위의 평가에 현혹되어서 자신도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자기 이상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한 없이 낮아져서 자존감을 잊어버리고 자기보다 훨씬 낮은 자신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 주님이 항상 우리를 위대한 사도, 위대한 일꾼이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베드로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모든 덕목 중 최고의 덕목은 진실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보이고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평가를 받고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책망을 때로는 위로를 받으며 내일의 우리가 오늘의 우리를 더 좋은 자신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실패한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것도 중한 책망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은총으로 불러주신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을 이루신 생각을 드러내셨습니다.
세 번째는 “asking the question.”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 질문은 세 번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희랍어 원어를 번역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 희랍어에서 변화되는 것을 주목하면서 여기에서 사랑하느냐의 의미가 각각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부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희랍어에서는 만약에 그 희랍어를 희랍철학에 비춰놓고 보면 세 개의 질문이 각각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심오한 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을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는 희랍어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릴 수 있는 가능한 결론은 비록 표현은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희랍세계에 있는 독자들을 배려한 것일 것이고 원래의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세 가지 질문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을 말하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의 부각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예루살렘교회의 첫 번째 담임목사로 부르기에 앞서 주님이 세 번 반복하신 질문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역을 해나가면서 어떨 때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행복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확실한 하나의 대답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교회가 알아주지 않아서, 성도가 알아주지 않아서. (그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이란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섬김과 행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느냐는 하나의 질문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신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교회를 맡겨줄 텐데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시련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네가 참겠냐?’ 이렇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을 사랑할 것이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핍박을 받을 텐데 괜찮겠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한 가지 질문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이 시간도 전 세계에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과 고난을 받는 사람이 많이 있고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불완전한 상황에서도 수시로 생명과 가족들의 생활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일들을 극복해 나갈 때 한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 “giving the mission.”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 번의 질문이 있고 난 다음에 미션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내 어린양을 먹이라’ 는 것이었습니다. ‘양을 치라.’, ‘양을 먹이라.’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지만 큰 차이가 없는 동일한 말의 반복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주님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씩이라도 주님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주님을 조금 만난 사람들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목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목양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의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또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경험한 성도들이 그 사랑을 앎으로 목양은 목양다워집니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 경험한 사람은 다른 일을 해도 되지만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돌보는 헌신이 없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고 그 소명을 따라서 베드로는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얼마만큼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로마에 있는 한 교회에 갔을 때 바로 인근에서 보았던 그 골목은 그런 의미에서 깊이 상정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바로 그 골목에서 베드로는 핍박 받고 있는 로마를 버리고 떠나는 자신 맞은편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다시 말해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야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해 못 박히러 가노라.”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돌이켰고 돌이킨 그 자리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 모두 전승에서 아는바와 같이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이것은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게 될 때 베드로의 사랑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나타나야 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양을 잘 하는 사람의 영혼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목양을 부족함을 깨달아 가면서 몸부림치는 과정이 교회를 세우는 과정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져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 다시 실패한 베드로에게서 예수님의 위대한 일꾼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preparing the table”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생각하십니다. “calling the name”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asking the question”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giving the mission” 그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목양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복음을 이해하며 날마다 주님 곁에 가까이 다가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