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맛본 사람의 특징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녹취자: 김미영
참 본능이라는 것이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를 갓 낳으면 아이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백지상태에서 태어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 학습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엄마 품에 아이를 안으면 아이가 막 고개를 흔들면서 젖을 찾습니다. 그리고 젖꼭지를 물고 빨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기이했습니다. 뱃속에서라도 혹시 습득이 되었다면 모를 텐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뱃속에서는 입을 통해서 먹을 것을 섭취하는 게 아니라 탯줄을 통해서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태어나자마자 학습되지 않은 그 아이가 엄마 젖꼭지를 알고 그것을 문 다음에는 빨까? 정말 기이하다 인간만이 그러한 게 아니라 포유류 동물이 다 그렇단 말입니다. 그게 정말 놀랍다. 그리고 얼마나 몰두하는지 모릅니다. 아마 아이가 태어나면서 자기도 어떻든 엄마는 낳느라고 고생했지만 자기는 나오느라고 고생했겠죠? 그러니까 운동도 많이 하고 힘도 쓰고 했으니 배가 고팠겠죠? 그러고는 이제 젖을 먹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연 많은 인생길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갓난아이, 젖 먹는 아이를 얘기하는 것이죠? 젖먹이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너희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결국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갓난아이가 태어나서 그 생명이 엄마의 젖을 먹는 것에 달려있는 것처럼 신자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있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이 ‘우리에게는 생명의 의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정말 생명이 필요하다.’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생명이 뭔지를 사람들이 알까? 생명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오는 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들이 이런 영적인 생명에 대해서 많이 공부할 필요가 있고, 사실은 많이 올바르게 알아야지만 용기도 생기게 됩니다.
제가 생선을 참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민물생선을 잘 안 먹습니다. 이상하게 거기서 흙냄새 비슷한 게 나서 잘 안 먹습니다. 그런데 같이 학교에 있을 때 그 교수님들은 쏘가리 매운탕을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대개 비쌉니다. 그런데 전 별로, 싫습니다. 어느 날 운전을 하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방송이 나옵니다. 향토음식을 소개하는 프로인데 붕어찜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데, 정말 음식에 대한 설명을 탁월하게 잘 하는 탁월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사람 이야기를 주 욱 듣는데 생전 처음으로 붕어찜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시도는 못했습니다. 그 사람의 전도가 열매를 못 맺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순간에 붕어찜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잡았다고 해서 그게 진짜 맛있는 붕어찜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붕어가 다 베트남 붕어랍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백성들이 가난할 때 베트남 붕어를 풀었는데 이게 천적이 없이 돌아다니면서 토종 물고기들을 다 잡아먹는 겁니다. 커요. 이게 생태계를 교란시켰습니다. 토종 붕어, 귀하긴 한데 그 붕어로 만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래기를 깔고 물을 넣고 삶아야 된다고 하는데 정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겁니다.
말하자면 지식이 있어야지 욕구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은혜를 막 사모하는 사람들은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막 깨닫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상당히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막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공부를 꽤 한 사람입니다. ‘나 이렇게 기도 못해서 어떻게 해.’ 그러고 막 자책하는 사람은 상당히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내 인격은 비참해 이런 인격으로 어떻게 살아.’ 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얼굴이 이렇게 못생겨서 어떻게 해.’ 막 이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얼굴이 예쁘게 생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간절한, 말하자면 어린 아이들이 살고자 하는 생명의 욕구가 엄마의 젖을 먹는 것으로 나타나듯이 신자가 정말 살아있는 영적인 생명을 가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됩니다. 그 원리는 평신도들에게만 통하고 교역자들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그런 원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꽃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원리는 언제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함, 그런데 오늘 뭐라 그랬냐면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구원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구약 이야기는 그만두고 신약에서만 이야기를 하면 신약에서는 구원을 이야기 할 때 과거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이미 옛날에 우리가 받은 구원, 그 다음에 현재적인 구원을 이야기하기를, 그것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켜 가는 것, 그래서 “구원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나니” 재밌습니다. 구원받았는데 어떻게 또 구원을 향해서 가느냐? 과거에 받은 단회적인 구원으로 이제 성화의 구원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두 번 째 구원은 사실 그 구원은 온전히 누려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래의 구원을 가르쳐 주시기도 합니다. 결국은 많이 성화되려고 애써도 우리가 완전히 이룰 수가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완성하신 영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보다 더 세부적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육체와의 만남이 없이 하늘나라에 가 있는 상태도 우리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래도 완전히 죄로부터 벗어난 게 아닙니다. 낙원에 가서도 우리의 몸의 구속이 영혼의 구속과 함께 만나서 완성될 때 완전한 구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너희는 구원 받은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오늘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아이들이 엄마의 품에 눈을 못 떠요 막 고개를 흔들면서 젖꼭지를 찾습니다. 그러고 나서 막 빨아먹기 시작하잖아요. 거의 잠결에서도 그 행동을 하고 무의식적입니다. 그렇게 얼마나, 이 베드로도 결혼한 사람이니까 생생하게 그런 광경들을 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생생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구원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조잡한 인격을 가진 사람, 저열한 인격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열심히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말씀의 위에서 자신이 깊은 감화를 받고 영혼이 헐떡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래서 존재자체가 변화 되어서 살아있는 그 자체가 영혼의, 말하자면 존재의 울림을 가진 그런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럼 이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너희가 만약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단순한 가정법이 아니라 확신을 주는 확정적 가정법입니다. 네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거라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법을 써서 오히려 확정적인 사실을 인식시키는 화법입니다. '네가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당연히 사람이지 '네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라 무슨 뜻입니까? '그걸 안 하면 너는 인간도 아니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아이가 엄마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절히 사모 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도 아니다 한마디로 탁 쳐버리는 겁니다. 네가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화법은 아주 강력한 확정적 화법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학적인 표현에 의한 이해를 가지고 보면 3절과 9절이 만만치 않게 확 다가옵니다. 뒤집어 보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당연하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거고 성도들도 뭐 그렇게 흔들흔들한 성도들이 아니라 핍박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때에 순교의 각오도 불사하는 사람들로 살도록 촉구할 만한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주의 인자하심을, 아가페의 사랑을 너희가 맛보았다면 당연히 맛보았습니다. '너희들이 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하면서도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 근처도 못 간 사람들이다. 탁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경건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정말 기독교적인 사랑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안에 정말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모함이 있는 가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경건 속에 진리와 사랑은 분리되지 않고, 이번 수련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해가 훨씬 빠르겠지만 사람의 자비로운 모든 행동이 존재의 울림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사람의 모든 자비로운 행동이 존재의 울림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의 울림을 동반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말하자면 진리와 나눠지지 않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사랑, 이것이 존재의 울림이다. 사실 우리들은 밑에까지 캐 들어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냥 행동 자체만 보면서 참 착한 행동이다 선한일 했네. 희생했구만. 이렇게 평가를 내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모든 외적인 행동들이 존재의 울림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이 나눠지지 않은 채 그런 하나 된 가운데 진리를 찾고 사랑을 찾은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의 울림이 있고, 그리고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런 것보다 훨씬 커다란 말하자면 웅장한 울림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은 70이 넘으신 분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절에 갔는데 절에 가서 구경을 하는데 젊은 스님이 한 분이 찾아오셨답니다. '너는 누구냐?' '네 저는 서울에 사는 무슨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여기 왜 왔냐?' '놀러가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그래? 인생이 뭐냐?' 대화를 시작합니다. 두 시간쯤 대화를 하고나서 스님이 '생각보다는 영특해 보이는구나.' 이거 한 번 외워 보거라 그러고 조그만 책을 주고 갔습니다. 그런데 얘가 호기심이 나서 막 한 두 페이지를 잠깐 사이에 외웠습니다. 한시간만에. 젊은 스님이 다시 와서 대화를 해 준 겁니다. 딱 3시간인가 4시간을 대화를 하고. 얘가 집에 돌아와서 엄마 아빠한테 무릎을 딱 꿇고 '저 출가해야 되겠습니다.' 이 집안은 천주교 집안인데 난리가 났습니다. 형이 다행히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으니까 형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촌형이라고 하던 가? '이 아이가 비로소 자신에 대한 자각이 생겼는데 그 길도 굉장히 중요한 길이니까 가게 해두시죠.' 그 때 고등학교 2학년 앞에 나타난 스님은 성철 스님입니다. 이런 것은 그 존재의 울림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그러면 '병신'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이야기 하면 다르게 들립니다. 그건 존재의 울림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은 큰일을 한 사람이었지만 정말 위대한 사람은 사람들이 그가 뭘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업적으로 말 한 사람이 아니라 존재의 울림으로 말 한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제가 잘 안 읽습니다. 한 때는 제가 앤드류 머레이의 거의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정말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영국 태생인데 화란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spirituality와 개혁주의의 지성을 함께 갖춘 선교사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선교사.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에 그 정도의 해박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든지 순종의 학교 이런 책들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화론에 있어서는 영국의 케직 성화론을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하고는 잘 안 맞습니다. 그런데 다른 부분에 있어서 탁월했습니다.
예를 들면 월트 바로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납니다. 자기가 앤드류 머레이 선교사를 만난, 노년의 선교사를 만난 기억인데 이 분이 서양 사람인데 아주 왜소하셨습니다. 1미터 6십 몇 센티미터, 하여튼 그 정도 밖에,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들으면서 '서양 사람이면서 정말 작구나.'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는데, '우리는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그 분은 두 손을 무릎에 포갠 채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서자 웃으면서 우리를 맞아주었고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분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 합시다' '그분의 기도가 시작되자 우리는 모두 하늘로 올라갔고 그 분이 기도를 끝마쳤을 때 우리는 모두 땅으로 내려 왔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뭘 한 사람인지 몰라도 그건 어떤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건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진리와 사랑, 그 생명을 사랑한, 이교도들조차도, 말하자면 일반 은총 차원에서 계시된 진리를 찾아서 살면, 그런 울림을 우리에게 준다면 참다운 진리를 찾아서 우리들이 산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그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