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니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녹취자: 표명희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 반 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요한 사도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한 당신의 평가를 편지로 써서 보내게끔 지시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일곱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가장 교회 역사에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던 주장가운데 하나는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일곱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래서 에베소교회 부터 시작해서 서머나 교회 차례대로 이제 사도 이후의 시대부터 일곱 등분을 해서 오늘날은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올바른 해석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실제 했던 역사적인 교회입니다. 그렇지만 이 교회는 단지 소아시아에 있었던 역사적인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들의 잘 한 일과 잘못한 일을 통해서 가고 오는 세대에 모든 지상교회들이 이룰 수 있는 좋은 것들과 그리고 빠질 수 있는 오류들을 한꺼번에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일곱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전 세계에 오고 가는 교회들에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주장입니다. 일곱 교회 중 두 교회는 칭찬만 두 교회는 책망만 나머지 세 교회는 책망과 칭찬을 아울러 받은 교회였습니다. 지리적인 순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일곱 교회를 어떤 식으로든지 배열을 해서 첫 번째 올라온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은 교회였습니다. 저는 이 에베소 교회가 맨 처음 올라온 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칭찬과 책망이 다른 모든 교회들의 그것보다도 예수님이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 하시고 싶으셨던 핵심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커다란 부흥과 함께 기적적으로 설립된 교회였기 때문에 사도바울로부터 받은 복음에 대한 불타는 확신과 성령의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그 지역은 많은 이방신들을 섬기는 사람들과 거짓된 철학 후에는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 이였기 때문에 핍박도 있었고 거기서 참다운 복음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은 대단한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시골의 작은 마을이 아니라 로마제국에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굉장히 커다란 도시였고 지금도 그 유적지에 가보면 그 도시의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이 교회를 향해 예수님과 교회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는 그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는데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가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일곱별은 의심할 필요 없이 일곱 교회의 목회자들이고 금 촛대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곱 교회의 목회자들을 손에 붙들고 계시고 다시 말해서 그들의 거취와 생사 모든 것이 주님의 매우 특별한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교회와 함께하신다는 뜻도 되고 교회에 대한 처분의 권한을 우리예수님이 갖고 계신다는 주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모든 권한을 기지고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기 위해서는 교회를 맡은 목사들이 주님의 손에 굳게 붙들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많은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거나 잘못하는 것보다 목회자 한사람의 잘못은 교회에 더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예수님의 손에 굳게 붙들려서 목회를 한다면 고난과 핍박은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든든히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종들이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손에 굳게 붙들린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만 신앙을 이야기하고 희생하거나 수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예수님께 행위를 인정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리는 수고의 고통 좋은 것을 이루기위해서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데 그것을 참고 견디는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교회 보셨습니까? 저도 교회를 한번을 건축을 해보고 교육관도 구입을 해보고 하니까 교회에는 그런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상시에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고 자기혼자 십자가 지는 것 같은 사람들이 교회가 진짜로 희생을 요구할 때 절대로 희생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죽했으면 두 번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 이제 교회를 지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그럴 때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는 사람들 중 실제로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가 뭐냐 하면 목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할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짓기 시작하니까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 지어 놓으니까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거짓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그런 행위와 수고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올바른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옳지 않는 부도덕한 사람들과 타협하고 적당히 교회가 굴러갑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는 사람들을 일체 용납하지 않은 순결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무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교회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용납해서 사도로 대접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교회가 오류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들어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첫째는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입니다. 사도라 하는 사람들이 오면 예의를 갖추고 그들을 맞이했지만 그들이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나면 에베소 교회는 아 저 가르침은 예수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그 가르침이 아니다 라고 분명히 판단 할 수 있는 해박한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교육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느슨해져 버렸습니다.
(예화) 한번은 제가 호주에 갔을 때 일입니다. 목사님 한분이 어느 교인 집에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점심을 대접받고서 그 집 주인이 그 교회의 안수집사인데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 모른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음식을 대접해 줘서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목사님이 목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 안수집사가 목사님께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 물어 보세요 했더니 저 구석진데 가서 저한테 물어보는데 목사님 우리는 이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데 만약에 죽은 다음에 이슬람이 진리고 기독교가 가짜면 어떻게 합니까?
얼마나 교회에서 안 가르쳤으면 안수집사라는 사람이 자기가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이 어느 순간에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제가 보기에는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구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 교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본인이 배우지 않은 것도 있지만 교회에서 철저하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에베소 교회에는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것들을 분별해 내기 위해서는 지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 영적인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거짓 사도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담대히 외쳐서 다른 곳에서 그 거짓된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미혹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용기가 필요했는데 에베소 교회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했습니다. 저는 이제껏 목회를 했지만 이정도 수준의 교회를 본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목회하는 교회도 이 에베소 교회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훌륭한 과거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라고 하는 그 한마디 말이 앞에 나온 모든 장점들을 한 번에 무효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이런 일들이 행해 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칭찬 받을 만한 모든 일들은 처음에 이 에베소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말뿐이 아닌 행위의 신앙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수고가 있는 신앙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인내가 있는 신앙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라 하되 아닌 사람들을 시험하고 들어낼 수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참고 게으르지 아니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사도 요한이 받을 때에는 이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주님께 낙인이 찍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도 잠시 에베소에서 목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에베소 교회의 커다란 책망을 받아 적는 사도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당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 그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아서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두신 이유입니다. 이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정의로 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그리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또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되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사실을 깊이 공감하지만 실제로 이런 사랑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성도들의 심령에 충만이 부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재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이기적인 한 사람이 돌이켜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죄와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큰 사랑에 김화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흥을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가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받은 사랑 말고 매일 매일 나를 사랑하려는 정욕을 버리고 그리스도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매일 매일의 전쟁과 같은 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갈망하게 되고 그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질 때 우리들이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시끄럽고 분쟁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사람들마다 이런 저런 은사를 받았고 그래서 자신의 은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분쟁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준엄하게 책망하면서 보여준 더 나은 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은사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 일하려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사랑은 그 모든 은사들이 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 지도록 만들어 주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은사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교회가 될 때 그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아무리 돈 많은 부자들이 등록해도 교회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전까지는 그들의 부유함이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힘써야 할 가장 커다란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매일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불만족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이루신 십자가의 그 큰사랑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야 합니다.
(찬양)
주의 인사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 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래서 매일매일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 속에서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이런 주님의 자비를 깊이 깨달아 항상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자신의 분에 넘친다는 인식을 갖고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과 은혜가 너무 커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기꺼이 섬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사모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은 사랑의 성장입니다. 예전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 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