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3:17-4:1)
녹취자 : 허혜숙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홀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예수님을 시험받게 했다든지 혹은 마귀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다든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 예수님을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시험을 받게 하셨는지 우리는 다 그 섭리를 알 수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죄 있는 사람이었다면 비교적 설명이 간단 할 것입니다. 그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거룩하고 하나님 앞에 참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30이 되셨을 때 광야로 들어가셨고 40일 동안이나 극심한 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광야에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의 기록이 끝나는 시점에 성경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셔서 설교하시는 것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가르치는 말씀의 내용 때문에도 놀랐지만 가르침 속에 깃들여있는 저항할 수 없는 영적인 권세를 경험하면서 놀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청중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과 같지 않다고 고백하게 만들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제한 된 정보를 가지고 예수님의 광야 40일 기도생활을 설명하자면 다른 것은 몰라도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예수님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시게 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적합하도록 예수님 자신이 강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복음사역을 전파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광야에 보내셔서 영적인 연단을 받게 하심으로서 다시 한 번 강한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고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전파할 때 당신이 어떻게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신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라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러한 유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심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공적 취임하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 기사를 보면서 ‘아 그렇게 취임하신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였구나, 정말 하나님이 메시야로 임명해 주시는 분이셨구나’ 하는 증거를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기사를 보면서 인정하게 되는 것도 이 기사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에게 설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을 배경으로 해서 오늘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그 시점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들이 주의 깊게 읽을 것은 접속사나 부사구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나, 그래서,’ 혹은 오늘 여기에서 본 것처럼 ‘그 때에, 그 일 후에,’ 등등의 시간, 장소, 이유, 목적 등을 나타내는 부사구를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라고 했으니 다른 때가 아니라 앞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그 때에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이끌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의 시험은 정말 아주 교묘하고 강력하고 그리고 아주 짜임새 있는 공격이었습니다. 3단계로 차례대로 공격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아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종류의 시험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큰 시험이 있게 되었을까요? ‘그 때’ 라고 하는 그 시간은 바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그 때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이것을 double slim‘이중의 인침’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를 인쳐 주신 사건이었고 또 하나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가 하고자 하는 일을 좋아 하신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아주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거나 마음속에 그렇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수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할 때에 그 기쁨은 다윗이 하고자 하는 일, 또는 해 온 일, 마음에 품고 하고자 하는 그 일이 또 마음이 밖으로 표출되어서 실제로 이루어진 이 일들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일 때 ‘기뻐하는 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이 이중의 인침이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헌제자의 마음이 없이 그에 의해 올려 진 제사가 하나님을 즐겁게 하지 못하는 것은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사랑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을 때에 시험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커다란 계시의 빛을 받은 후에 시험을 당한 사람들이 있고, 큰 승리 후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고, 이처럼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인정받은 후에 시험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토마스 맨턴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큰 계시의 빛, 큰 사랑,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시게 하신 후에 곧바로 시험에 직면하시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그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어마어마한 기적을 이룬 후 아이 성의 참패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공동체도, 우리 개인도 그렇게 다루십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고난 후에는 언제나 그에 따르는 책임이 따르고 기쁨이 있고 나면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받아야 할 연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을 거꾸로 생각을 해 보십시오. 거꾸로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시험을 받고 있다 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는 잊어버렸지만 이미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에, 우리는 잊어버렸지만 하나님께로 받던 계시의 빛이, 사랑의 불이 정말 컸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섬김 속에 십자가가 있게 하시고 고통과 괴로움이 있게끔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커다란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고생시키시는 것은 받은바 은혜가 많은 사람이 그 은혜를 잊어버릴 때 그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받은바 사랑이 큰 사람이 그 사랑을 잊어버릴 때 그는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생활이 아닌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역겨운 상황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날마다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어제도 그저께 인턴쉽이다 뭐다 너무 고단해서 눈을 뜰 수 없었는데 새벽부터 그래도 6~7km정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한 사람 한사람을 들여다보면 어쩌면 그렇게 장편 소설을 쓸 정도로 사연이 많은지 모릅니다. 나를 쳐다보면 나는 안 그런가? 안팎에 근심과 걱정이 그칠 때가 없고 때로는 고난과 역경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가족들이나 주위에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간접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아주 회피하고 싶은 상황일 때가 많은 것입니다. 차라리 칼로 찌르거나 창으로 찌르는 고통이면 ‘주여’ 하고 감당을 하겠는데 상황 자체를 비유하자면 냉면에다가 생선 꽁치를 집어넣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것이 고통이라기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것, 이해가 갑니까? 여러분 냉면에다가 날 꽁치 집어넣고 흔들어서 먹어보십시오. 그 때마다 생각을 합니다. 참 감사하다, 좋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런 독특한 방법으로 세상의 미련을 끊게 해 주시는구나, 그러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분은 그것이 자기가 원하던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간에 당하게 되는 시련과 고난을 맞이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첫째, 아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구나,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구나, 하나님은 나에게 최소한도 이 시련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거나 도와주겠다고 생각하시거나 아니면 피할 길을 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기도의 소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는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피할 수 없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좋아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을 배우는 것입니다. 시험 속에서 하나님의 의존을 배우는 것입니다. 시험을 들었는데도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주셔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섭리를 움직이셔서 우리에게 복을 많이 주셔도 항상 이 죄가 들어와서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우리가 진력하여 애쓰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종류의 나라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인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정해주시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추호도 이런 상황에 내가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은 마지막에 하나님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래서 담담히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신자의 도리이고 믿음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혹시 일어난 그 일 자체는 나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우리들이 믿음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