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8
목 차
광대하신 하나님(시 48:1-2) 33
이스라엘의 피난처이신 하나님(1)(시 48:3) 37
이스라엘의 피난처이신 하나님(2)(시 48:4-7) 43
인자와 정의를 찬송함(시 48:8-10) 47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함(시 48:11-14) 52
시편56편 강해 1
시편48편 강해 1
시편48편 강해 6
시편48편 강해 1
시편48편 강해 1
시편48편 강해 1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시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시 48:1-2)
본문해설
가보지는 않았지만 시온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산으로 에워싸인 가운데 성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습니다. ‘시온’이라는 뜻이 그렇게 썩 좋은 뜻은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게 ‘메마른 땅’, 혹은 ‘요새’라는 뜻입니다. 시온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게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만날 장소로 한 곳을 지정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물론 성막이 하나님을 만날 장소였지만 그곳은 임시적인 거처였고, 후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확정됩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보좌
비유를 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왕이 보좌에 앉는 이유는 밥을 먹거나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보좌라는 것은 왕이 권위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도 왕궁이 있고 거기에도 보좌가 있어서 왕이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임재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이 보좌에 앉아서 홀을 들고 문무백관들에게 명령을 하면, 그 뜻이 왕이 다스리는 나라 전체에 전달되어서 온 나라가 왕의 명령을 준행합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이라는 보좌에 앉으셨고 이스라엘은 왕의 뜻을 이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 있는 문무백관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세계 구석구석에서 성취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시온은 바로 그러한 유서 깊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그러나 아름다움으로 말하면 시온이나 예루살렘보다 더 아름다운 도시나 나라가 이 세상에 없겠습니까? 그런데 시온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아름다움도 주님이 그 마음의 보좌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한 교회의 아름다움도 교회의 한복판에 주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름다워지고 아무것도 아닌 교회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전에 아무리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어도, 현재 그 사람의 마음의 보좌를 주님이 차지하고 다스려주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주 추한사람으로 변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란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셔서 자신을 왕으로 삼고 살아가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그 발아래 복종하는 것을 큰 행복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명령을 준행하게 하시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만하시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도 주십니다. 예를 들면, 왕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할 때 보좌에서 명령을 하면 그것을 문문백관들이 받들어서 시행합니다. 그러나 왕이 그것밖에 하는 일이 없다면 누가 왕의 통치에 굴복하겠습니까? 만약에 무리들이 왕의 명령에 반발한다면 왕은 단칼에 그들을 제압해 파멸시킬 수 있는 군대와 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이 방방곡곡에 미칠 것을 알기 때문에 백성들은 왕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왕으로 계셔서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새 힘과 은혜와 능력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셔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왕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은혜의 힘 아래 복종해야 합니다.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죽을병에서 살아나고, 세상에 없는 기적을 경험했어도 주님의 은혜가 자기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굴복할 수도 없고 복종시켜도 거기에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저한테 신학을 배운 여전도사님이 있었는데 조금 나이가 들어서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성남의 지하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한번만 와서 설교를 해달라고 한사코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가서 설교를 했는데 아주 조그만 교회였습니다. 제 설교가 끝나고 나서 그 전도사님이 하소연을 하는데 이 달동네의 작은 지하실 교회에 누가 와서 예수를 믿겠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전도를 했는데 암에 걸려서 남산 만하게 배에 복수가 차서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고 집으로 보낸 사람들 외에는 믿으려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주고 돌봐줬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 사람을 낫게 해주셨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그렇게 가난한 동네에서 치료도 못 받고 신앙의 힘으로 기적같이 나았는데 아플 때는 교회를 의탁하고 도움을 받더니 걸어 다닐만하니까 일 년도 안 돼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욕하고 술을 퍼먹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 괴로워서 저 인간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좀 보여 달라고 저렇게 욕을 하고 돌아다닐 바에는 차라리 도로 데려가시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도 목회자가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타일렀는데 얼마나 안타까우면 말은 못하고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런 인간들이 이 세상에는 즐비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는 것도 결국 그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꾸 잊어버립니다.
광대하신 하나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하나님은 광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극히 광대하시다”라고 할 때 이 고백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크고 넓은 것과는 다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온 세계와 만물을 당신의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통치하며 다스리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신앙심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시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이고 믿음이 식은 사람들의 눈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지극히 크고 광대하셔서 온 땅과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경배하고 존귀하게 여길 분이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 외에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 모든 세계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의 빛 앞에서 자신의 설 자리가 어디이고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해야 할 바입니다.
이스라엘의 피난처이신 하나님(1)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시 48:3)
피난처이신 하나님
이 부분은 히브리어 본문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여러 번역본들에서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삼절부터는 하나님 자신이 공동체의 피난처이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한 사람의 피난처가 되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위태롭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그 나라의 피난처시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과 같은 어려움에 처할 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피했더니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하고 도망치면 하나님이 나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생각을 공동체적으로는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다루실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도 다루고 있습니다.
가족을 세우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다니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라. 땅 위에는 온갖 짐승들이 있으라.” 하고 한번 명령하시니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단 한 사람만을 먼저 만드십니다. “땅 위에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게 살아라.” 하고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창조하시면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 텐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외롭게 한 사람을 만드시고, 조금 뒤에 또 한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왜 두 사람에게서 사람들이 태어나도록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수천만의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그들은 가족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아무런 관계없이 창조하셨다면 둘은 가족이 될 수 없을 텐데,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했기에 가족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하와는 아담과 동시에 만들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어 만드셔서 아담의 아내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가족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에 있어서 그 두 사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희귀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나 에녹과 같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데려가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에 오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은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만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데려가실 때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다면, 태어날 때도 그런 특이한 경우가 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가족을 만드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로 인해 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피를 이어받아 생육하는 측면에서의 가족을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서로가 하나로 일치를 이루는 가족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가족이 죄로 말미암아 깨졌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가정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사이가 갈라지고 형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 전체의 역사는 온 인류를 가정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와, 죄의 물을 먹은 인간들이 공동체로 살아가기를 거절하면서 그것을 부수는 역사의 갈등입니다.
교회,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신 공동체
구속의 대 역사가 이루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인간들을 연합시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들이 한 가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죄가 들어오고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게 됩니다. 마치 자기는 아무 가족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 인간인 것처럼 자기를 주장하고 공동체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으면 다시 공동체로 들어오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깨뜨리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 이루려고 하셨던 인간들의 연합을 이루십니다.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모형을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나라라는 맥락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와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피난처라는 구도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도 받아들여야할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이웃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가족과 자신의 씨로 퍼져나갈 인류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가족을 향한 사랑과 자신의 씨로 인해 생겨날 모든 인류가 하나로 묶여져야하는 종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사랑과 완벽한 동질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은 전혀 새로운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을 이룰 수 없는 인간에게 오셨고, 당신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명령은 전혀 새로운 명령이 아니라 맨 처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주셨던 그 명령입니다.
교회나 공동체는 안중에 없고, 자신이 행복하고 자신의 필요를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앞서 말한 반쪽자리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세상의 많은 사교단체들처럼 목적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에게 좋고 이용가치가 있으면 계속 관계해 나가되, 필요 없으면 끊어버리는 식으로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 교회 하나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안중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절대로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목회를 15년 가까이 하다 보니 교회에서 교회로 이동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동체의 개념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교회가 무엇이고, 구속받은 자녀들을 하나로 묶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심지어 장로가 되어 왔는데 그런 개념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격적으로 올바르고 이전 교회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낫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이러한 개념이 없습니다. “왜 이 교회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은혜가 되니까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보따리를 싸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교회생활의 중요성
오히려 불신자였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전에 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예배시간이 3시간이라고 하면 ‘원래 이렇게 믿나보다.’ 하고, 십일조를 하라고 가르쳐주면 ‘원래 이렇게 예수를 믿나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수없이 돌아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했지만 교회생활을 안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더라도 교회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고치기가 정말 힘듭니다. 하나님을 믿고 처음 신앙생활을 했을 때부터 그렇게 배우지 못하고 일그러진 교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도 자신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안에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은 빼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상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지금은 교회를 떠났지만 언젠가 은혜를 받았다고 감격하던 부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의 정직한 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이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의 가슴 속으로 흘러 들어간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위에 은혜가 소낙비처럼 부어지기는 했지만 당신을 뚫고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로서 당신을 7년 동안 보아온 추호의 거짓이 없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쪽에 구멍이 뚫려서 죄를 계속 짓습니다. 그 한 구멍을 통해 들어온 죄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들이 더럽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욕망이 적기 때문에 문제를 덜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막혀있어도 구멍 하나가 뚫리면 그곳으로 죄의 물이 들어와 그 사람을 다 더럽히는 것처럼, 자신이 기뻐하는 진리는 받아들이되 자신의 사고와 맞지 않은 어떤 진리는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와서 그 사람의 본성을 진정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이고, 은혜라는 것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하나님과 한 성령을 통해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 속에 들어오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듣고 열심히 찬양을 하고 봉사를 해도 곤고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지금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자기 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 채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그런 사람들이 구원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보면 ‘이렇게 구원받은 무리가 소수이구나.’ 하고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애처로운 것은 교회 안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그 사람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를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의 가족으로 다루십니다. 본문을 보면 ‘여러 궁중에서’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궁중은 왕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나라의 실질적인 권세를 잡은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궁중에서 하나님 자신을 피난처,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요새로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온 백성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간다고 할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성이 있겠습니까? 어려움과 환란, 국가적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백성들을 품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위해 우리 하나하나를 지으셨지만, 또한 하나의 나라를 부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해 늘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나라를 부르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피난처이신 하나님(2)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시 48:4-7)
깨어진 사랑
시련의 공동체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온 세상을 한 가족으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것들은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가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던 마음속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니 가족 간의 사랑도 깨지고 공동체로서 국가 안에서의 사랑 또한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서구사상에서 나라는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계약관계로 봅니다. 성경에서 나라는 왕국의 설립을 의미하는데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호세아에 보면 “하나님이 진노함으로 왕을 주셨고 분노함으로 왕을 버리셨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가정에서의 사랑이 깨졌는데 국가에서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나라의 크기를 커지는 것을 왕이나 혹은 자기 시민들의 욕망을 증진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에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인간들을 구원하여 인간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묶으셔서 미래의 가족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듭날 때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가장 분명한 표징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중생한 신자가 끊임없이 죄와 싸우면서 살아가는 그 표징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신적인 두려움
3절에 이스라엘이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셨다.”라고 나옵니다. 4-5절에는 “열왕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으며 빨리 갔도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도망가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한 나라가 쳐들어온 것도 큰일인데 여러 나라의 왕들이 연합을 이루어서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으니 이것은 큰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함께 모인 그들이 결국은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두려움 속에 물러간 것입니다. 이어서 6절에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과 같도다”라는 것은 큰 공포가 엄습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있을 때 하나님은 신적인 두려움을 대적자들에게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4-35장에 보면 이스라엘 야곱의 집안이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을 때 세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디나’라는 야곱의 딸이 세겜 사람에게 강간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싸우려고 생각해보니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 상대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자식들이 돌아와 누이가 그렇게 된 것을 보고는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동생을 주겠다는 흥정을 합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고 신열이 나서 누워있을 때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까지 전부 다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때 야곱은 큰 공포를 느낍니다. 세겜 사람들과 가나안 원주민이 한 통속이어서 이 사실이 알려질 때 가나안 족속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겜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내리셨고 야곱의 집안이 당당히 그들 앞을 지날 때 아무도 추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하셨던 큰일은 풍문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널 때 요단이 말랐고,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 그 성이 힘도 못쓰고 무너졌다는 풍문을 들으면서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내리시자 이들은 한 번도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젊은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생각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라고 하며 찬송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왜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이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가진 큰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시는데 그것은 7절에 “배를 깨뜨리시도다”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왕들은 아마 해상을 이용하여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스는 그 당시 지중해 연안에 있는 커다란 도시였는데 그곳으로 많은 배들이 여행을 하며 물건을 팔고 군왕들을 띄웠습니다. 그 다시스에 하나님이 동풍을 보내어 큰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요나가 풍랑을 만난 곳도 바로 다시스였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을 섭리 가운데 보호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가능성과 사실들은 하나님의 선(善)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시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좌정하셔서 왕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쉬거나 밥을 먹으려고 앉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앉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아 이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놀라운 능력과 큰 위엄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복입니다.
결론과 적용
필요하면 주님께서 주시고, 간구하면 보호하시고, 요청하면 도움을 내려주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위기에 처하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시련을 만나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큰 고통을 만나면 눈물은 흘리고 괴롭지만 그 풍랑을 인하여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인자와 정의를 찬송함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나이다”(시 48:8-10)
본문해설
본문에서 시인은 큰 위험 가운데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를 돌아보니 지금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이 오늘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끊임없이 있었던 일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라는 8절의 말씀을 통해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이 큰 능력을 보이신 어떤 사건이 과거에 일어난 일련의 많은 일들과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일정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일정한 어떤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보호와 인도, 시편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는 큰일들, 이 모든 것들에는 그분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서 창조하신 것과 동일하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와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견고케 하시는 능력
돌아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견고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견고하다’라는 것은 나무 같은 것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자라서 바람이나 어떤 자연적인 재해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있다는 의미입니다. 견디는 것 자체가 큰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그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비교해보면 신앙이 어릴 때는 열심이 있는 것 같아도 뿌리가 얕아서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께 붙들리면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이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9-10절 사이에서 시인은 대조가 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찬송 제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함
첫 번째 성품은 주의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을 생각하는 측면을 두 가지로 바라보면, 먼저 ‘왜’ 주의 전에서 인자하심을 생각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수많은 나라의 군대를 흩으시고 그 배를 깨뜨리시고 왕들을 속히 도망치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되는 것임과 동시에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연약하고 힘이 없어 보입니다. 마치 곧 멸망할 자들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여러 가지 일들로 곤고하고 괴로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많은 나라들을 무찌르시는 가운데 당신의 자비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신앙은 선택된 백성인 자신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크신 인자와 사랑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가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부모가 자식을 낳았을지라도 자식의 마음에 부모를 향한 진정한 효심이 없으면 아무리 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그 관계가 진정한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처럼 큰 자비를 베풀어도 자녀 된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감격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에도 그분의 크신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한 삶의 실제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승리와 기쁨을 주시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시는 인자하심을 찬송합니다. 또 환란과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자비하게 대해주시는 성품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과 어려움의 때를 주님의 품으로 피하면서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게 자녀 된 신앙이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본문을 다시 되짚어 어디서 그러한 자비를 생각하게 됐는지를 보면, ‘주의 전 가운데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큰 기능은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신을 깨닫게 하는 아주 훌륭한 교육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알 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죄인의 속성입니다. 속죄의 제사를 제사장 개인을 위해서도 드리고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드리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인자와 선택된 백성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탁월하신 인도와 비범하신 사랑과 자비를, 하나님 앞에 수시로 범죄하며 살아가는 자신들의 현실과 대비시켰던 것입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경험이 됩니다.
하나님의 정의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큰 복을 주셔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
죄인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강조를 통해 주님은 그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시인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렇게 감격하면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온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충만한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두 번째 성품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커다란 국가적인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당장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였더니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해치려는 많은 나라들을 흩어버리시는 손길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정의는 앞서 말한 인자와는 다릅니다. 인자는 가치 없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이지만 정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게 행동하는 자들을 벌하시고 심판하시고, 그분의 뜻을 좇는 사람들을 복주시고 다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의는 상주시는 정의와 벌주시는 정의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악한 나라의 많은 왕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짧게 보면 나라의 전쟁이지만 멀리 보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나라를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라를 정복하여 자신의 노획물로 삼으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인 도전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악을 행하는 사람을 향하여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악을 행하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므로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원수를 향해 긍휼히 여기며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결론과 적용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의무는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정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고, 그러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 앞에 자비하심을 입은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두 가지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는 택한 백성들을 향한 인자이고, 또 하나는 모든 나라와 민족, 온 누리에 가득히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정의를 행하시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함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1-14)
본문해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따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때 그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판단을 인하여”라고 하는데 ‘판단’이라는 것이 공의입니다. 히브리어로 ‘미쉬파트’(fP;v]m)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공의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판단을 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판단이라는 것은 결국 선악에 대한 판단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하게 판단하시면 상을 주실 것이고, 악하게 판단하시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에게 벌을 주시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시간차가 있을 수도 있고, 종류는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시온’ 자체가 산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변하는 지역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이라는 산지에 에워싸인 가운데 거기에 예루살렘이 있고 예루살렘 한복판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온산은 기뻐하라.” 하나님이 온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실 때 시온이라는 곳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시온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많은 것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고 경험했던 시온의 백성들의 꿈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과 세계 위에 두루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시온은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여기에서 ‘딸’이라는 말은 사람의 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에 딸린 성읍들, 마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들을 자주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성 수(數)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성 수 개념을 산출하는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비유했던 것입니다. ‘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레브’(br,j,)라는 단어인데 여성명사입니다. 칼이 왜 여성명사일까요? 기다란 떡국 떡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입니다. 칼질을 하면 그것이 수십 개로 변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떡이 새끼를 낳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낳도록 만드는 칼은 여성명사가 되는 것입니다.
서울이 있고 서울에 딸린 많은 위성도시들이 있습니다. 과천, 용인, 군포, 수원, 안양, 이런 도시들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도시들을 서울이 낳은 자식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여자들이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손을 위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아주 기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의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를 따라오는 여자들 보고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그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저 멀리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부르시고 그것을 중의법으로 사용하셔서 동시에 “예루살렘에 딸려있는 많은 도읍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식들을 위하여 울어라.”고 하시며, 약 40년 후면 다가오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멸망당할 자식들을 위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거기에 딸린 수많은 마을들이 자녀들의 운명을 위해 눈물을 흘려 기도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함
“유다의 많은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땅에 당신의 통치를 펴실 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언약백성들은 행복할지어다. 시온과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거기에 딸린 언약백성의 마을들과 백성들이 함께 즐거워할지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역사를 바라볼 때 믿는 사람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과 교회의 영적인 번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이 두 가지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 혹은 확장과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번영은 단순히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교회가 많은 재산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번영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교회가 영적으로 번영했던 시기입니다. 중세시대는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번영했지만 영적으로는 쇠약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진리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뜨겁게 살아가는 교회의 영적인 번영,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사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입니다. 교회의 참다운 번영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확장과 교회의 번영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풍부하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이 세계를 통치하십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은혜와 율법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깊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의해 다스려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과 함께 율법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이 들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행복하다면 그런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애통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림인 것입니다.
시온의 번영을 후세에 전함
“시온을 편답하고” 여기에서 ‘편답한다’라는 것은 두루 다닌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이것은 번영과 안전을 뜻합니다. 망대들, 성벽, 궁전, 이 모든 것들은 그 나라가 얼마나 탄탄한지를 보여줍니다. 번영할 때의 하나님이 택하신 유다와 모든 성읍들이 어떻게 견고한지를 기억하였다가 후세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온 땅에 두루 펼치는 데 있고, 하나님의 통치에 이바지하고 기뻐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는 두 말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통치보다 자기의 욕망과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영영히 인도하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이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손에 꽉 붙들려서 그 나라가 번영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나라가 아무리 번영해봐야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라가 비록 번영하고 강하지 못해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훌륭하게 이바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운들이 점점 쇠퇴해가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는 작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까 교회에 큰 번영이 오고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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