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불꽃처럼
(1995년 새해말씀사경회)
설교기간|1995년 1월 16일 - 1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 10:12) 1995.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허비케 하는 사랑 (마 26:6-10) 1995.1.17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9
3. 사랑은 불꽃처럼(마 26:11-13) 1995.1.18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7
4. 열린 문 (계 3:7-8) 1995.1.19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7
1.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사랑은 불꽃처럼 (1995.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여러분, 오늘 이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선지자입니다. 뭐 ‘눈물의 선지자’ 아니면 무슨 ‘사랑의 선지자’ 그렇게 불리웁니다. 하여튼 호세아라고 하는 사람, 이 자체는 엄청나게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사람이 선지자로 소명을 받자마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명과 동시에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은 뭐냐 하면, 음란한 여자를 찾아가서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이 음란한 여자는 그냥 음란한 여자가 아니라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고 하는 여자를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까지 거명한 것으로 봐서 이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라 그저 음란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여자 이름을 대면 “아, 그 걸레?” 그럴 정도로 하여튼 유명한 그 여자를 찾아가서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도 이상하지만 또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이 사람도 참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호세아 선지자가 그렇게 음란한 여인을 찾아서 장가들었을 리가 없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이고 이 사실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즉,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이유는 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미리 뭔가를 보고, 본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선적인 사명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임무는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은 선지자가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다가 하나님이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예언으로 주시면 그는 또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언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한 그 말씀 중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들은 자기의 설교였습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우리들이 선지자를 보면서 고정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가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지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경우에 따라서는 모세에게 하신 것처럼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이렇게 이르라”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 불러주실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적은 경우였고 대부분은 하나님이 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전체적인 말씀을 가지고 그 정신에 불타는 마음과 신앙으로 그 시대 백성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무슨 말씀을 들어야 되는지를 그들에게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선지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도록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선지자들은 제사장들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왜? 제사장들은 전통 속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이 사람은 전통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말을 전하면서 이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신다고까지 예언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 선지자들은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면 왜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까지 들었느냐? 그 이야기는 선지자는 말로써 예언하는 것만이 예언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도 메시지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선지자는 그 음란하기로 유명한 그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를 들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경건한 남성들은 경건한 여성을 만나서 그리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그 소박한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님이 기뻐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선지자에게는 그런 소박한 인간의 소망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 바쳐야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들러 가면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그 온 심령 속에서 이후에 호세아의 메시지가 불붙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음란한 여인, 보기도 싫고 상종하기도 싫고 더군다나 그런 여자하고 같이 살을 맞대고 살아야 되고 그 여자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 여자와 함께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는 이 끔찍한 생각을 하면서 걸어갈 때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가슴 속에 비수와 같이 파고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선지자야! 네가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들러 갈 때에 그 여인의 집에 당도하지도 않았는데 더러운 냄새가 네 코를 찌르고 나 여호와가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갖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여인에게 장가들러 가는 것 같이 나 여호와는 너희와 맺은 관계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네가 그 여인을 사랑해야 하는 것 같이 나는 너희 백성들을 사랑해야 되는 운명에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변화되고 돌이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선지자가 가서 다시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가서, 고멜과 같은 백성들에게로 다가가서 다시 한 번 그 백성들을 변화시켜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제는 더러운 창녀요 음란한 여인이 아니라 순결한 처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선지자가 계속해서 앞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뼛속 깊은 곳까지 그 음란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통과 함께 그 여인이 그렇게 자기를 떠나서 아이를 낳아가지고 오고 그러면 가서 그 아이를 찾아가지고 오고, 찾아오면 또 며칠 있다가 나가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다가 또 아이를 낳고 그 놈을 또 찾아가지고 오는 이러한 삶이 반복되는 가운데에서 이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뼛속 깊은 곳까지 타 들어가는 이 여인을 향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더럽고 가치 없는 여인을 향한 타오르는 사랑이 뼛속에서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참 괴로운 것입니다. 차라리 미워하면 좋을 텐데, 사랑이 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타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이 선지자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에서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시는지” 너희가 비록 이런 죄악의 길로 들어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하지 아니하였다고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너희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진노하신다.”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하던 곳은 북왕국이었습니다. 남북으로 가라져 있지요? 북왕국이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임금을 두 사람 내었는데 그 중에서 1세는 바로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으로 나라가 갈라질 때에 그 창시자였습니다. 그게 1세입니다. 오늘 이 호세아서가 씌여진 곳은 2세 때의 상황입니다. 2세 때에는 말하자면 여로보암 2세가 등극했는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40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린, 세상적으로 볼 때는 영영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때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주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무역을 해서 많은 돈들이 들어오고 그리고 전쟁에서 자꾸 이겨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조공을 드리러 이 나라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러운 것이 없는 생애가 이 사람 시대에 통치가 펼쳐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왕국에서 큰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모스가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인데 그 아모스 선지자가 말하기를 부자가 얼마나 잘 사느냐 하면, 아침에 ‘아! 잘잤다.’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데 그 침대가 상아로 깎아 만든 침대였습니다. 여름에는 여름 별장으로, 겨울에는 겨울 콘도로 각각 돌아다니면서 흥청망청 잘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영적인 삶은 점점 부패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패해 가는 가운데 처음 가졌던 그런 신앙들, 그런 것조차도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는 딱딱하게 메마른 쓸모없는 땅으로 변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인 삶을 보면서 호세아 선지자는 오늘 이 10절을 하나님 앞에 또 이스라엘 백성 앞에 호소하듯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열매를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인데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고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매를 많이 맺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많으니까 그 열매를 맺게 해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단을 많이 쌓아서 바알을 숭상하고 바알을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땅이 황량한 땅이 아니라 곡식을 내고 열매와 소출을 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바알에게 제사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오늘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말합니다. “지금은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나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전쟁이 일어나고 전선이 밀리고 수많은 아들딸들이 전쟁 속에서 죽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 지금은 여호와를 찾아야 할 때다.’라고 누구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이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지극한 평화가 온 땅에 가득히 깃들어 있고 무역항에는 끊임없이 수출하러 가는 배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각종 희귀하고 아름다운 외국의 소산들이 수입되고 있었습니다. 거리마다 흥청망청 그 수입품들로 먹고 마시고 치장하며 사람들은 기름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정치는 안정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강하였습니다. 그리고 문화는 활발하였습니다. 왕권은 안정되었습니다. 당쟁도 없고 외국의 침입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여호와를 찾아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무지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그 때가 바로 여호와를 찾아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은 육체의 궁핍과 굶주림과 죽음의 위협 앞에 직면해서야 그 때가 겨우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복이 없고 심판에 이를 사람들은 죽음의 상황에 이르러서도 여호와를 찾지 아니합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무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부요하면 그의 마음도 기름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일들이 모두 잘 되어가고 배고픔이 없고 가난함이 없고 절박함이 없고 그리고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하나도 없을 때 그들은 모두 마음이 기름지고 그리하여 가난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간구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를 않는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만 일어난 일들이겠습니까? 지금도 동일한 것입니다.
(예화) 오래 전 어떤 자매를 전도한 이야기/ 근심이 없는 부인의 이야기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선지자는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우리와 모든 삶이 고난에 처하고 그래서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물리적인 한계 상황 하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것도 축복일 것입니다. 그 곳에서 모르고 죽는 것보다는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너무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우리 인생을 그런 식으로 몰고 가서 그때서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물리적으로 한계 상황에 가서 이제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은 수차례, 아니 수십 차례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십니다. 때로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확신 같은 것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이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같이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물질적으로 조금도 궁핍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아직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진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여러분들이 자긍해 하는 그 물질을 하나님께서 거둬서라도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물리적인 환경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찾기 전에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인 다음에 자신의 신앙의 가야 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지키고 깨어 기도하면서 돌다리를 두드리듯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기도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위기를 만나지 않습니다. 위기가 아니라 그것은 시련입니다. 불같이 연단한 후에 정금과 같이 나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련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고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그 환난과 시련의 불을 통과한 후에는 정금과 같이 순결한 신앙으로 다시 나올 수 있게 될 믿음이 그에게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깊은 위기를 만나기 전에 우리들은 위기를 만나고 그 위기에 처한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위기에 처하기까지는 끊임없는 불순종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놓여있는 이 위기와 그리고 영적인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상황의 원인을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고통하며 우느냐? 사랑하는 내 딸아, 네가 큰 어려움 중에 곤궁하구나. 아참 내가 너를 잠깐 잊어버렸다”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여러분들은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실 때 잠시는 즐거워하고 좋아하리라는 것을 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 여러분들에게 근본적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그런 깊은 위기의 수렁에 빠지기 전에 내가 너에게 끊임없이 경고하였던 것을 기억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은혜 받을 만한 때라!” 말씀하셨습니다. 왜? “지금은 내가 너희에게 나타날 만한 때다”라고 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똑같은 말인데 그렇게 해 주시면 얼마나 소망이겠습니까? “얘들아, 지금은 내가 너희들에게 나타날 말한 때다” 아니!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아닙니까? 뒤집으나 메치나, “너희가 찾을 만한 때요” 그 이야기나 “내가 너희에게 나타날 만한 때다” 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는 수동태지요? 뒤집어 버리면 능동태 아닙니까? “지금은 내가 너희들에게 은혜를 줄 만한 때요”라고 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은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께로 시작하지 않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인간으로부터 시점이 출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신비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은 오늘 스스로 결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이번 주간에 이 집회를 통해 들려오는 어떤 음성도 듣지 않겠다.’ 여러분,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물으십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선지자의 표현대로라면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이 죄악에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죄악에 빠졌습니다. 벗어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을 보고 “지금은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타날 만한 때라고 말해주지 않습니까?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 은총주심에 응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호와를 찾고 내가 정상적인 신앙의 생활로 돌아가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에 추구함이 없다면 사도 바울이 와서 설교해도 여러분들은 유두고처럼 졸다가 떨어져 죽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바로 성경이 간단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상고하지 않고 사람을 향한 극도의 원망과 미움과 여러 가지 많은 이유들을 대면서 핑계하는 여러분들이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 그러한 신앙의 태도를 성경은 ‘불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패역한 족속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외칠 때 그들이 이스라엘 회중 바깥에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오늘 선지자는 하나님이 도무지 필요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형통한 시기에 지금은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형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내면의 세계, 그 속에서 흐느끼는 영혼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주 어렸을 때 가난한 동네에 살면서 달동네 같은 데에 모여있는 사람들, 어린 아이들이 배고파서 처마 밑에 앉아서 울고 있는 장면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이 중에 아무도 오늘 돌아가서 편하게 쉴 만한 거처가 없어서 고뇌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도 안전하고 염려가 없는가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했습니다. 얼마나 잘 사는지 얼굴에 교만함이 가득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서 선지자는 말하기를 ‘머리가 희끗희끗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말했습니다. 늙었지만 아직도 철들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는 먹었지만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유아와 같고 유치했습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가 그들의 삶의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드러낸 속사람의 실체는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예화) 여름날 비 올 때 헛간에 깔린 가마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랬습니다. 잘 깔린 가마니 같이, 그러나 선지자가 말씀으로 가마니를 들춰내고 나니까 그 속에서 온갖 더러운 벌레, 뭐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 속에서 우리가 과연 평안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을 등지고 살면서도 태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빨리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든지 교회 밖으로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도 선지자는 가장 절박하게 “이 사람들은 여호와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오늘날 나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주님! 걱정 마십시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난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어지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선지자의 눈에서 볼 때는 진짜 부자가 된 사람들은 돈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돈이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지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추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불을 하나 끄고 나면 또 불이 붙고 또 불을 끄고 나면 또 불이 붙고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소진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는 인생이 참다운 평안을 어디에 가서 누릴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을 먼저 보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답이 정답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와서 “너네, 그렇게 외제품 많이 쓰면서 풍풍거리고 나면 얼마 있다가 쫄딱 망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오늘 저녁에 아비가 가서 자고 온 그 집에 내일은 그 여인과 함께 아들이 동침하는 상황에서도 “너희가 어찌하여 그렇게 사느냐? 당장 사창가를 없애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보기에 악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안 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많지만 모든 문제는 하나의 근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 끔찍한 타락과 하나님을 떠난 그 비참한 죄악들, 그리고 조만간에 심판을 불러오고야 말 그 모든 타락상들은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근원을 막지 않으면 문제가 하나는 해결되는 것 같아도 계속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고통하는 모든 영혼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는 대답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을 그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이런 문제들이 결국에는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 민족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찾는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먼저 이 메시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필요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만한 때라고 말하는데 히브리말로 ‘다라쉬’입니다. 이 말은 ‘전심을 다해서 좌우를 보지 말고 추구한다.’라는 뜻입니다. 눈을 돌려서 어디에 있나 보이는 대로 찾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찾고 수색하는 것, 그것이 ‘다라쉬’입니다.
(예화) 직장 여직원의 반지 이야기
이게 다라쉬입니다. 그것 하나를 찾기 위해서 너무나 집중된 나머지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찾는 모습, 이것이 바로 찾는다는 것의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은혜를 주시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 예배에 덜렁덜렁 와서 가만히 앉아서 마음은 이미 딴 생각으로 떠나있고 고개는 푹 숙이고 해서는 개선되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의를 심고 그 열매로 긍휼을 거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그의 얼굴을 구하라 그의 길을 구하라 그의 길을 추구하라, 끊임없이 그를 따라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인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고 세상을 다 보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위기를 넘겨보려고 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문제를 풀고 이 매듭의 원천적인 근원이 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모든 문제의 매듭을 풀고 그리하여 나를 얽어매고 있는 이 모든 문제의 매듭을 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진실한 신앙의 길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을 구하는 자가 찾아보지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짐승처럼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누가 이기나 줄다리기를 해 보십시오. 아들, 딸이 고사리 같은 손에 피까지 내면서 당겨보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불쌍해서 한 번 놔주십니다. 그때 조금 형통합니다. 그러나 계속 놔주면 어떻게 합니까? 줄 뒤편은 낭떠러지입니다. 계속 이기게 놔둬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누구도 하나님과 줄다리기해서 이겨본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야곱을 보셨지요? 하나님과 줄다리기해서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과 줄다리기하니까 마지막 남은 결과는 한 대 얻어맞아서 엉치뼈가 부러지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비로소 깨진 것입니다. 깨지고 주저앉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회개했다고 호세아서가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네가 이겼다”그러시는 것입니다.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삶의 비참함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도 동일한 촉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은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은혜에 더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으려고 왔을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충만한 삶을 살지 못했다면 뭔가 문제가 있어서 왔을 것입니다. TV에서는 지금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한창입니다. 여러분이, 이 지하실에 앉아서 ‘뭔가 선한 것이 있을까?’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그 관계를 든든하게 붙드십시오. 여러분들이 고통 하는 문제가 환경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무너질 것 같은 환경 앞에 직면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보지 말고 무너질 것 같은 그 환경 속에 깃들여 있는 무너져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십시오. 그리고 철저하게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이 모든 문제들의 이유가 무엇이고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해야 되겠는지 하나님께로 직접 가십시오. 직통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데 들르지 마십시오. 누구 이야기 들어보아야 선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그러나 아무 도움이 안 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직통하십시다. 어디에도 들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십시오. 왜 이렇습니까?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내가 왜 이런 식입니까? 왜 내가 이렇게 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시작도 끝도 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내가 왜 이런 위기 속에서 이렇게 마음 아파하며 내가 왜 이런 역경 속에서 이렇게 허덕이면서 살아야 합니까? 사람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직접 가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 142장)
영화로신 주 예수의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서 찾는 것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그 하나에 고정되고 그 하나의 목표 이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화) 활쏘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것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할 때 이 찾으라는 의미는 한 번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구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요? 열심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한 번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간청하는 것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자기 친구가 왔는데 대접할 떡이 없습니다. 이웃에게 빌리러 갔습니다. 그래서 떡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워 있으니까 이제는 줄 수가 없으니까 다음에 오라고 말했습니다. 돌아가지 않고 더 두드렸습니다. ‘내가 귀찮아서 일어나 주리라’ 그리고 주인이 일어나서 떡을 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어떻게 적용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하나님을 찾으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지 목청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튼튼한 발을 가지고 얼마나 높은 기도원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그것을 보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산에 있는 기도원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거기가 하나님하고 가장 가까운 데가 아니냐고 그럽니다. 아무리 높은데 올라가도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하나님이 그걸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으셔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알고 계시지요? 문제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해답을 갖고 계실까요, 안 갖고 계실까요?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냥 주시면 되지 뭐 이렇게 복잡하게 자꾸 조건을 거시느냐?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대답입니다.
(예화) 과자를 가지고 간 집
문제가 있을 때 문제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께서 나를 진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작심하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큰 하나님을 만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과녁을 바라보는 것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계속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응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사랑도 끊어지고 사람에 대한 기대도 끊어집니다. 그리고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도 끊어지고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가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 없이 하나님께서 탁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그 사람이 변화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변화되지 않습니다. 한 번은 말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돈 10만원 감사헌금 할지는 모릅니다. 그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할 때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압니까?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낳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죽했으면 성경이 그것을 연단이라고 표현합니까? 연단, 불로써 연단한다. 불로써 연단하는 거 보셨습니까?
(예화) 쇠 덩어리를 갔다가 불 속에다 집어넣습니다. 얼마나 불이 붙었으면 이 딱딱한 쇠덩어리가 물처럼 녹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으라는 이 말이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한 번 부르짖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높은 기도원 꼭대기로 올라가고 금식 한번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시선을 거기에 고정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씨름하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가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까? 선지자에게 바람을 피우는 정도가 아니라, 가서 아이를 낳아 가지고 와서 그 아이를 그 품에 집어 던지고 또 아이를 낳으러 갔습니다. 오죽했으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바알에게 드린 그 포도주도, 그 남자들에게 갖다 바친 그 기름도 사실은 내가 준 것인데…. 남편이 월급 타오면 그 월급 빼가지고 가서 바람피우고 남편이 준 돈으로 산부인과 가서 남의 애 낳고 그리고 그 돈 가지고 우유 사 먹이고 그리고 남편에게 맡겨 놓고 그 다음엔 또 압구정동으로 또 가는 것입니다.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까? 그리고 선지자가 눈물을 흘리며 가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빚진 것이 있으면 다 갚아줍니다. 그리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시되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다 주실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원하는 바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 하나만 하나님 자녀답게 만들면 하나님은 바라는 게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개구장이라도 좋다. 사람답게만 자라다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그 음성, 안 들리십니까? 안 들리지요? 하나님이 감도를 좀 더 높이십니다. 그래서,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안 들리십니까? 불의 온도가 더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필코 우리에게 인격적인 승복을 받아 내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그 불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길어지면 안 좋습니다. 빨리빨리 끝날수록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것은 사람답게 되라고 씨름을 하다가 죽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목표가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 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은 못 삽니다. 그런데 결국은 죽습니다. 천당에 들어가기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우리들이 이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이 우리를 깎고 다듬도록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 주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변하고 우리의 심령에 진정한 변화가 찾아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과 같이 타오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그래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비같이 내리고 찬란한 정오의 빛과 같이 그렇게 이 어두운 세상을 지날 때에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믿음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 그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찬란한 불꽃과 같이 살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오늘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이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건 간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삶의 태도로 하나님 앞에 일관된 삶을 살기로 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여러분들이 다 변화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끊임없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붙들고 매달리다가 세상에서 낭패를 만나고 인간적으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더 큰 죄에 빠지는 어리석음에 우리들이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고 하나님만이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 인간의 치료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잠시적이지만, 하나님의 해결은 완전하고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나님의 고치시는 손길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그 손길이 나타날 때까지 이젠 내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해 보고 말겠노라고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냐’ 이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냐? 성경이 하나님을 찾는 것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이 아니라 항상 구체적입니다. 구체적이라는 말은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는 그 말 앞뒤에 보면 반드시 구체적인 삶의 결단을 수반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따라서 성경에서 끊임없이 여호와께로 돌이키라고 말할 때에 그 돌이키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키라고 나와 있는 명령 앞뒤에 보면 반드시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포로로 끌려가고야 말 이스라엘 백성, 유대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말했을 때 그 돌이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이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의 원조에 희망을 걸지 말라.’ 그래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원조에 희망을 걸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애굽의 원조에 희망을 걸지 말라.’ 그리고 주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나를 의지해야 하느니라.’ 그것이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변에 나타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할 때 무엇이 회개하는 것이었습니까? 다가온 천국 앞에서 너희의 삶을 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열매 맺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나이까? 어찌해야 하오리까?” 하는 사람에게 구체적이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세금을 많이 받던 악한 세리들은 정한대로만 받아라. 군인들은 강포한 짓을 행하지 말라. 그리고 회개를 했느냐?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간단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빌립보 감옥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간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선생이여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물었을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추상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이 말씀과 이 촉구 앞에서 피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동일합니다. 성경이 오늘 말합니다. “여호와를 찾을 때니”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묵은 땅을 기경하라”
(예화) 홍천의 황폐화
이것은 한 번도 곡식을 심어본 적이 없는 그런 땅이 아니라, 한 때는 기름져서 곡식을 많이 소출해 내고 그리고 많은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었던 그러한 열매 맺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묵은 땅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딱딱해지고 그래서 잡초가 우거진 그러한 땅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체를 여러 번 ‘땅’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체가 땅으로 되는데, 이렇게 쉽게 묵은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우리들의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매일같이 신경 쓰지 않으면 그러면, 풀이 길같이 자랍니다.
(예화) 농사를 지어 본 사람, 잔디밭의 잡초
마찬가지입니다. 삽시간에 잡초가 우거진 밭으로 변합니다. 여러분, 이 묵은 땅으로 변하는 것은 어느 날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까 묵은 땅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변하는데, 눈치 채지 못하게 서서히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러면서 빠르게 번져갑니다. 그래서 그 아름답고 좋은 소출을 많이 내던 밭이 기름지면 기름질수록 잡초를 더 많이 내놓습니다. 그리고 잡초가 더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자랍니다. 사람이 발을 디뎌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묵은 땅이 되어 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온갖 열매를 많이 맺는데 그 열매가 이전처럼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열매가 아닙니다. 이삭이 한없이 많이 달린 탐스러운 벼이삭이 아니고 아름다운 열매가 많이 달린 그러한 채소가 아니라, 오히려 가시와 엉겅퀴, 거기서 씨가 떨어져서 또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그러한 종류의 열매를 맺는 그러한 묵은 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가득하게 되어 질 때에 이 땅을 가르쳐서 우리는 ‘묵은 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면서, 살아갈 때에 그들의 인생을 부지런하게 살면 살수록 더 많은 죄악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지요? 죄를 행하다가 죄를 행하고 악을 행하고 그 열매를 맺다가, 오히려 병이 들고 병상에 누워 버리면 열매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죄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가 죄의 열매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의 열매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가 출발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심령 속에서. 그러니까 삶이 초토화 돼서 묵은 땅으로 가득 차서 육체의 열매와 더러운 것들을 가득 맺는 황무지가 되기 전에 먼저 심령이 황폐화 되게 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심령이 그렇게 황폐하게 되어져 버리면, 말씀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예화) 봄의 모종
삶이 묵은 땅과 같이 초토화되기 전에 먼저 심령이 묵은 땅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왜 묵은 땅이 되느냐?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근심과 심적인 고통에 많이 시달리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런 관계가 깨어 있으면 그러면 여전히 버텨 나가는데 아예 자포자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환경이 너무나 오래 계속되고 거기에서 우리의 마음이 무뎌져 버리는 것입니다. 혹은 세상을 향한 사랑과 지나친 애착들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일들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에 분주함들을 가득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냥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밟고 그리고 거기에 가시와 엉겅퀴가 떨어지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씨가 되어서 떨어지고 이듬해에 다시 돋아납니다. 그러면서 계속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우리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래도 은혜를 못 받을지언정 사모하는 마음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아예 사모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사모한 마음이 없다가 나중에는 마음에서 반발이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반발이 생기고 설교를 들어도 반발이 생기고 은혜 받은 사람을 봐도 반발이 생기고 예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봐도 괜히 심사가 뒤틀리고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또 상처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악순환들이 되풀이 되어 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제시한 그 모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돌아오기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의 고통스러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오늘 성경은 이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경의 의미를 여러분들은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예화) 소의 쟁기
뒤집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습니까? 근원적으로 땅을 뒤집음으로 말미암아 악한 열매를 맺는 식물들이 자라는 본거지를 초토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먼저 있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찾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본거지를 초토화시키는 것입니다. 걷어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새 뒤집어내고 보니까 겉에서 맺는 그 열매들을 악하고 더러운 열매들이었는데 땅을 뒤집고 보니까 새까만 흙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주 기름진 흙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모두 이런 가능성을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하나님은 여러 각도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 증거를 제시하고 예를 드시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겨자씨를 너희들이 보라!
(예화) 겨자씨가 얼마나 조그마한지 한 숟가락만 퍼서 흐트려 놓으면 …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가능성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무명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인생 막장에 서서 이제는 폐인의 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자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요긴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라고 하는 주인의 속만 썩이고 주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나쁜 짓만 하던 사람이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고 나니까 ‘그는 나의 유익한 일꾼이다’라고 바울이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 안에 두신 가능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들은 이제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다가 죽어도 이게 모자라는 인생인데, 그 쓴 뿌리를 맺고 쓴 열매를 맺으면서 독한 열매를 맺으면서, 나로 말미암아 이웃에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서 나만 혼자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혼미한 가운데서 영적으로 고통하며 방황하게 만드는 이 큰 범죄로부터 우리는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고 나의 이 묵은 땅들을 기경하고자 하는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먼저 하나님 앞에 기경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화) 식물, 고기 -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생명력이 강함 - 아카시아
이상하지요? 좋지 않은 것들은 그렇게 생명력이 강합니다. 그러나 좋은 과실을 맺는 열매는 이상하게 생명력이 약해, 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런 묵은 땅에다가 아무리 씨를 뿌려도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말하자면 초토화시키는 일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심령은 갈아엎는 것입니다. 뒤집어 버리고 모든 찌꺼기들을 걸러내고 그 다음에는 그 써레라고 그럽니까? 빗같이 생긴 것으로 소에다가 달고 말입니다. 죽 끌고 가면서 그 흙덩이를 깨뜨리면서 다 골라줍니다. 그리고 그 보드랍게 된 그 흙 위에다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흙으로 덮고 그럴 때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많은 열매들을 맺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없는 한 우리의 삶의 변화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있을 때,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에 완전한 변화가 찾아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 묵은 땅을 너희 스스로 기경하라’ 여기에서 ‘너희 스스로’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명령형으로 나와 있어서 우리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리하여 다시금 황량하고 열매를 맺지 못 하고 심지어는 악한 열매를 맺는 우리의 신앙의 정원이 변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풍성한 수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저주저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빛나는 생애를 살았던 모든 신앙의 사람들은 인내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이었지만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는 불같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늘 살아가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시기에 용기 있게 결단할 수 있는 이러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적미적하고 결단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지 압니까? ‘아직도 꽤 견딜만 하옵나이다.’ 그 뜻과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하나님은 ‘높아진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번쯤은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도 좋겠습니다만 지금 이 상황 속에서는 한번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줄 테니,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나타날 테니 내가 나타나면 너희가 나를 봐라.’라고 말하지 아니하시고, ‘너희는 다라쉬’,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궁사가 과녁을 노리듯이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광부가 보물을 찾는 것같이 그러한 사모함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추구하면서 묵은 땅을 기경하는 그러한 농부의 심정으로 우리의 황폐해진 삶에 쟁기를 대고 그리고 우리의 무디어진 심령에 쟁기를 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무디어진 심령을 고백하면서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시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의 방식들을 고치도록 그 전에는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제 말을 못 믿으십니까?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렇게 삶의 촛점을 하나님께 맞추면서 그를 중심으로 그의 관점에서 우리의 인생을 보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행복과 불행과 위기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이러한 겸비한 심령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친 많은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자리에 들지 않기를 우리는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로 시작했다가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들은 너무나 훌륭하겠지만, 그러나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삶의 결과를 보십시오. 그 많은 날들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원했고 심지어는 그 많은 날들을 핍박을 감수하며 예수 믿는 신앙을 안 버렸습니다. 그 많은 시련 속에서도 헤치고 주님을 믿어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제까지 살아 온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에게는 분명히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사연이 예수를 믿는 과정 속에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성도들의 그 예수를 믿고 살아 온 사연을 듣다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 체험들과 우리 모두 이런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그 신앙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그리고 그 신앙의 깊이가 깊고 낮음에 불문하고 우리는 모두 여기가지 걸어왔습니다. 때로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신앙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 왔고 때로는 오류 속에서 갈 길을 몰라 캄캄한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청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거절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양심도 그것이 불가능하고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선지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너희여,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려고 하느냐. 너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것을 나는 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스무 살에 회심을 하고 그리고 20여 년 동안 주님을 믿고 섬겨왔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지만 ‘보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너희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고.’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지만, 저는 제가 예수를 영접하고 살아 온 그 20여 년의 세월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감격해 하고 눈물 흘릴 때가 많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 온 그 시간들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동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함께 노래하고 뛰놀던 그 신앙의 아름다운 정원들을 하나님과 나 말고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시련의 폭풍우도 지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고통의 폭풍 가운데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이 혼자 지내야 되는 무서운 때도 있었습니다.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 길을 걷게 하시고 끊임없이 하나님은 ‘나도 너 없이 살 수 없고 너도 나 없이 살 수 없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주 없이 살 수 없네.’ 노래할 때에 주님은 ‘나도 너 없이 살 수 없단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추억과 이 모든 신앙의 관계를 폐기 처분하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그 관계가 우리에게 진실하고 참된 관계라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가운데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찬양)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입으면서도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문제와 우리 자신의 이름과 그리고 육체적인 문제를 인해서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을 우리 문제의 해결사로 생각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철없던 나날도 하나님이 재롱으로 받아 주시면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 주셨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수아가 기울어가는 불신앙의 역사 속에 굳게 서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면서 살도록 촉구했던 것처럼 ‘오늘날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여호와를 섬길 것이냐, 아니면 가나안 이쪽에서 만났던 그 이방의 신상들을 섬길 것이냐? 너희들은 오늘날 택하라 너희들이 무엇을 택하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말하는 것입니다. 주 없이 사실 수 있거든 사십시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가치는 없고 공로는 없지만 목마른 자들과 같이 물가로 나와서 ‘주 없이 살 수 없사오니 이 시간에도 미천한 인생들을 붙드시옵소서.’ 부르짖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목말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그리고 주 없이 살 수 없으므로 ‘내 죄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주님 나를 버리지 마시고 고쳐서 사용하옵소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 주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삶을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분주한 삶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주일을 지키는 삶으로 돌이켜 서기 전에는 여호와를 찾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다니엘이 하나님께 뜻을 정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위기 속에 매달렸던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으로 돌이키는 삶의 기경이 일어나야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찾는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에 위로를 받으며 잠시 누워있는 죄악의 잠을 청하기보다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버겁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정을 하나님께서 두실 수도 있고 그리고 우리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적으로 동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여러분들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인생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보시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결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결단할 때, 하나님은 누구에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피곤치 아니하는 힘과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전심으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며 울고 웃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않고 이제는 결단하고 하나님만을 앙망하면서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기를 주시고 새 힘을 주셔서 낙망치 않게 하시겠다고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셨던 분, 새벽기도
이것이 바로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엘리를 기억하십니까? 그의 집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그림자가 깃들여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회막에서 범죄 했고 다른 여인들과 통간했고 그리고 심지어는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늑탈했습니다. 여러분, 엘리가 그때 결단을 내렸더라면 자식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단을 미루었습니다. 결국은 그 집안이 자식도 죽고 자기도 의자에서 떨어져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선지자는 오늘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찾을 때요 여호와를 찾는다는 말은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신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비’라고 하면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비가 없으면 그 천혜적으로, 자연적으로 그렇게 비가 드문 곳입니다. 심지어는 빗물까지 받아먹었습니다. 지붕을 비스듬하게 지어놓고 비가 떨어지면 한 곳에 모이게 해서 그 빗물까지 받아먹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물이 귀한 동네인데 이곳에서 두 번의 비가 내려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파종을 하고 늦은 비가 내리면 추수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의 비가 내려야 되는데 ‘하나님이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열매를 보장해 주시겠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진 가운데 잘못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맺힙니까? 안 맺히는 것입니다. 열매는 맺히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맺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가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많은 과실을 맺나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게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계속 맺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나 때문에 사람들이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고통이 가득한 곳에 은혜가 깃드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삶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외로움 속에서 고통하 던 가족들과 이웃들이 ‘인생은 그래도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한.’ 이런 고백을 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찾기로 결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묵어있는 모든 땅들을 기경하고 우리의 삶의 태도를 하나님 앞에 분명히 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 갈망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의를 비처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 허비케 하는 사랑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6-10)
사랑은 불꽃처럼 (1995.1.1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
어제는 호세아서를 보면서 묵은 땅의 문제를 꽤 길게 거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시간에는 요나서를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에 꽤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시간 십 분정도 설교를 한 것으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 내일 테이프를 여기다 가져다 놓을 테니까 들으시면서 요나서하고 연결을 해서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낮에도 한 55명이상 나오셔서 거의 가득 메웠습니다. 아침 시간과 저녁시간의 메시지를 모두 한꺼번에 들으셔서 그 메시지가 겨냥하고 있는 하나의 초점을 여러분들이 직시하시고 집회 말씀을 통해서 도전하는 하나의 초점이 무엇인지 직면하셔서 여러분들이 소정의 의미를 받아들여야 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6장의 그 베다니에서 향유로 기름부음을 받으시는 이 사건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흔히 잘 알고 있는 늘 마주 대하는 그런 사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늘 알고 있는 사건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늘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성경본문이 사실은 우리가 가장 취약한 이해를, 이해가 취약한 본문일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하면서 가난한 마음으로 본문을 우리들이 한번 더듬으면서 말씀의 숲 속으로 우리가 한번 들어가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쪽으로 예루살렘이 여기 있다면 베다니는 요단강 쪽으로 아주 가까운 동네입니다. 그래서 그 베다니를 거쳐서 흔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러한 길에 있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다니에는 바로 누가 있었느냐 하면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누이와 함께 살고 있는 나사로가 거기에 있었고 오늘 여기 기록되고 있는 그 한 여자라는 이 여자도 이 베다니에 나오는 이 여자도 바로 그 나사로의 집안에 있는 그 누이일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베다니에서 예수께서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이 사람을 가리켜서 문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문둥이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고 하는 말씀인데 사실은 이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문둥병자들은 율법으로 볼 때에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와서 생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 진중에서 완전히 격리되어서 그래서 다른 곳에서 살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벤허’라고 하는 영화를 보았으면 기억할 것입니다.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에 굴이 있고 그 굴속에 모여서 사람들이 우거하고 있는 그 모습을 아마 여러분들이 보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격리된 문둥병자들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베다니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동네에서 거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에 초청하였습니다. 같은 사건의 기사인 것으로 생각되는 누가복음에 보면은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 있었다.’, ‘바리새인의 집에 있었다.’ 그러면 결국은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바리새인이고 문둥이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더 이야기가 안 됩니다. 바리새인이면 더 율법에 철저했으니까 문둥이가 이 회중에서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하고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진 바깥으로 별거 생활을 하다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혹은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럴 경우에는 제사장한테 가서 완전히 낳았는가를 분명하게 검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상당한 의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더 자세하게 문둥병의 증상에 대해서 말하고 진짜 나은 것과 가짜로 나은 것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면서 그 기준에 적합하면은 일단 나은 것으로 확인을 하고 결례를 받은 다음에 이스라엘 회중으로 들어오게 되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지요. 또 하나 말이 안 되는 건 바리새인이면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무리들 가운데 하나인데 그 바리새인이 어떻게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초청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바리새인으로서 자기의 위치에 상당한 위협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다가 다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식사는 형제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으로서 그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공격의 대상이었고 지탄의 대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다가 함께 형제됨을 상징하는 식사를 나누면서 그러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 그들이 싫어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에 모셔놓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 형제됨을 과시했다 이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정리를 해야지만 이 스토리가 풀릴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에 명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결론을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으로서 그는 진리도 잊어버리고 불결한 자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들어온 것으로 볼 때 아마 거의 틀림없이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은혜를 입어서 병이 나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병을 낳게 해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고마워서 바리새인으로서, 전직 바리새인으로서 동료들에게 받을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하면 아까 말씀드린 본문을 보면서 제기되는 많은 의문들이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가르쳐서 누가복음에서는 죄인인 한 여자라고 말합니다. 이 죄인인 한 여자라는 것은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죄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죄인이었다는 말은 특별한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죄를 업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낙인찍힌 사람, 우리로 말하자면은 오늘날 주차를 하다가 잘못해서 딱지를 끊기는 그런 정도의 죄인이 아니라, 모르고 차를 몰고 가다가 접촉 사고를 일으켜서 새 차를 슬쩍 긁고 경찰에 가서 조서를 쓰게 된 그런 죄인이 아니라 세도, 세금 계속해서 먹고사는 사람들, 아니면 강도 이런 사람들의 여자로서 대표적인 부류가 누구였었느냐 하면은 창녀요 기생 그리고 남자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그때나 이제나 문제가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문제를 회심하는 비결은 마태와 같이 회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다 세무서 다니는 분들인가 봅니다. 세무서에서 한번 설교하러 오라고 그러면 확실히 한번.... 그래서 이제 갔습니다. 그렇게 갔습니다. 그런데 그 창녀라는 말이 기생이라는 말인데 그 기생이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조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그 ‘조나’라고 하는 말은 ‘자나’라고 하는 동사에서 왔는데 ‘자나’라고 하는 말은 ‘자다’입니다. ‘자나’라고 하는 의미는 돈을 받고 이방 남자와 동침하는 것, 그게 ‘자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나’라는 기생 이름이 유래한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바로 그렇게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낙인찍힌 그런 여자들이었단 말입니다. 여기서 바로 이 여인이 그런 여인이었는데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어떻게 이 여자가 그것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에 이렇게 서서 먹거나 아니면 입식으로, 앉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소파 같은 데에 비스듬히 누워서 이렇게 기대고 그리고 티 탁자 같은데 음식을 차려놓고 비스듬하게 누워서 식사를 이렇게 했습니다. 정말 편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먹으면 옛날 어른들이 소된다고 그랬거든요. 소가 되려는지 뭐가 되려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 누워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딱 향유를 들고 오니까 딱 스니까 여인의 가슴이나 배 아래쯤 내려왔을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딱 붓기가 좋습니다. 머리에다가 부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러니까 세 사람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에는 두 사람은 똑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여튼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굉장히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여인이 다가와서 향유를 붓고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 이 바리새인이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선지자가 아닌가. 선지자라면 자기에게 다가오는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텐데.’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저건 동네에서 소문난 걸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저 여자가 이 향유를 들고 와서 붓는 것을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 향유를 받아서 붓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다니 이건 말이 안 된다. 이상하다.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에게 발 닦을 물을 준 적이 있느냐?”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이 제일 먼저 사람이 들어오면 우선 입을 맞추고 두 번째는 발 씻을 물을 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신고 다니던 신발이 그 당시에는 발을 안 닦고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해서 발 닦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을 닦게 해야지 집안이 깨끗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신고 다니는 신발이 샌들이었습니다. 샌들. 그러니까 그 습기가 적고 먼지가 많은 나라에서 걸어 다니다 보면 발이 온통 먼지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어서자마자 인사 차 입을 한 번 맞춘 다음에 그 다음에 대야에다 물을 떠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발을 씻고 그 다음에 이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 식사할 시간이 되면 그 다음에는 향료,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향료를 몸에 바르도록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 것도 안 해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할 수 없이 본인이 밖에서 씻고 들어오셨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해결을 하고 들어오셨습니다. 들고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이 여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었는데 이 향유 한 옥합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말하기를 삼백 데나리온이나 넘겠다 대충 짐작이 견적을 내었는데 삼백 데나리온 이었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장정이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하루를 온종일 노동하는 품삯이었습니다. 지금 뭐 비싸게 받는 사람은 많이 받지만 그전에 기술 없는 사람이 가서 몸으로 떼우는데 오 만 원은 줘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은 천오백만 원짜리 향유였으니까 중형차 한 대 값이었습니다. 그거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 위에 부어 버렸습니다. 뜯어 가지고 쬐끔 붓고 도로 가지고 왔습니까? 다 아낌없이 다 부어버렸습니다.
세상이 말입니다. 이게 너무 펑펑 잘 씁니다. 이 예술의 전당 앞을 이렇게 지나가면 바다 가제 요리집이 생겼는데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데 풍문에 듣자니까 그 음식점에서 하는 말이 한 사람이 오만 원 어치 먹으면 충분합니다. 이야기하는데 실상은 8~10만원을 먹어야지만 풍족하게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저녁때는 가서 앉을 자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미쳤다고 말합니다. 한끼 식사에 어디 쓸데가 없어서 십 만원을 쓰고 있느냐? 한 가족이 다섯 명이 가서 먹고 나오면 오십 만 원인데 우리 한 달 월급입니다. 그런데 아낌없이 먹습니다. 대단합니다. 십 만원을 가지고 우리가 미쳤다고 그러는데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식사를 졸지에 천오백만 원짜리 식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확 부어버렸습니다.
이 향유의 정체가 뭐냐 이게 궁금합니다. 그 당시의 이 향유는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씩 조금씩 사서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사서 모아서 그것을 가지고 다 모아놓았다가 그 모아놓은 것을 가지고 시장에 가지고 나가면 언제든지 현금과 바꿀 수 있는 그런 유동성이 있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 식사하시는데 부어 버린 다음에 땅에 있는 거 다시 모아서 가져갔습니까? 한 번 붓고 끝나버렸습니다. 여러분, 누가 천오백만 원짜리 식사를 그렇게 차려드렸다 할 때 그건 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칭찬을 했습니다.
우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 먼저 우리들이 더듬어 봐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그리고 십자가를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에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누구를 사랑하고?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강령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레마타’인데 그거는 여기에 박힌 못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율법서건 선지서건 무슨 시가서건 무슨 구약의 성경이든지 그 못에 걸리지를 않으면은 땅에 다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못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 주님을 향한 사랑 그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된 이웃을 향한 사랑 이것이 신앙의 정 가운데 들어있는 핵심이라 이 이야기입니다. 신앙 한가운데 신앙이 무엇이냐 말할 때 그것은 이전에는 사랑하지 않던 것을 사랑하게 되고 이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이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만약에 세상의 사람들과 왠지 틀리다면 그 원인은 간단한 것입니다. 서로 합치될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예수를 믿고 있고 저 사람도 예수를 믿고 있는데 예수를 믿고 있는 이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질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서로 상당히 같은 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삶이 질적으로 차이나지 않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이 문둥이 시몬과 그리고 이 죄인인 한 여자 향유 한 옥합을 들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식사자리에 나타난 이 불청객 이 두 사람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도 질적인 차이와 수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식사에 초대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어떤 오해와 그리고 비난을 각오한 행동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둥병을 고쳐주셨을 때에 열 문둥이 중 아홉 문둥이는 달아나고 한 문둥이만 남았는데 은혜를 모르고 도망갔던 아홉 문둥이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고쳐주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보답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러나 대단히 훌륭하시고 고상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한껏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는 아마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보내주셨던 그 많은 선지자들 가운데 한사람일 거라고 그 자리에다 높이높이 올려놓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셨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나 탁월한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던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 그리고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을 눈물로 외쳤던 호세아나 불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며 백성들에게 각성을 부르짖었던 아모스 같은 선지자중의 한사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한껏 높여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를 고쳐주시고 그리고 자기를 새롭게 해주신 그 은혜의 이 사랑이 한없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사의 수준은 그 고마워하는 고마움의 표시는 뜨거운 사랑을 안고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식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이 여인의 사랑에 비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대단한 분으로 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불리움을 받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암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발 씻을 물도, 입 맞추지도, 그리고 몸에 바를 향유도, 그는 예비하고 준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여기에서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참된 신앙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신앙생활의 겉모습은 같을지 몰라요. 그러나 여러분 겉모습이 아무리 같아도 그 속도 다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초대를 받고 있는 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사업상 자기를 도와준 어떤 은인을, 그리고 질병에서 자기를 고쳐준 어떤 고마운 의사를 대하는 것 그 이상의 태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리에 앉아서 바로 그렇게 불안정한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 그것입니다.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문둥병으로부터 낫는 이적은 경험했으나 그러나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개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만약에가 아니라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과 같은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의례적인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맞아, 베다니 문둥이 시몬을 그 문둥병에서 고쳐주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악에서 건지셨지.” 하며 인정합니다. 고마워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기도의 능력으로 나음을 받은 그런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사해 합니다. 고마워합니다. 그리고 뭔가 사의를 예수 그리스도께 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그렇게 우리가 받은 어떤 고마운 사건에 대한 보답이나 우리에게 주신 어떤 기적이나 그리고 우리를 어떤 보답이나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어떤 기적이나 우리를 어떤 위기에서 건져주신 어떤 그러한 참다운 고마움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사의나 고마움이나 의사나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 것이 바로 신앙이지 그런 것들에 매여있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입헌군주국의 왕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입헌군주국의 왕처럼 실권이 없이 가서 인사나 하고 그리고 잘 모시는 회의가 있을 때 윗자리에 앉혀드리고 하는 그런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과 그리고 죄인을 절망 가운데서 고통 하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를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존경을 표하고 경의를 표하고 감사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인사치레는 하고 싶지만은 그 이상의 깊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하나 되는 사랑의 경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순결한 처녀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시키려고 하노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신부가 되어서 교회와 함께 그분께로 들리어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때 공중에서는 혼인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인이 오늘도 밥을 해주었습니다. “오늘도 아침을 어김없이 해 놓으셨군요.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올시다.” 그리고 출근을 하고 돌아와서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하루 동안 가사노동의 무보수로 공사하느라고 얼마나 노고가 많았소?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올시다.” 월급날 월급 가져다 주면은 “이 많은 돈을 거져 우리 집에 가져다주시니 참 은혜가 황송하옵나이다.”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관계가 부부관계입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흐르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보고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그러니까 우리는 말하기를 주님 그것이 이유가 다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나와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이런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사는 사랑의 인치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지 ‘주님이 내 병을 고쳐주시니까 어떻게 뭔가 좀 사의를 표해야 될 텐데.’ 이런 것들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는 감사해하고 그리고 그가 자기를 몹쓸 병에 대해서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는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된 신앙의 경지, 참된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일치 속으로 들어가고 있지 못하는 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을 깨닫게 하시는 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어떤 여인이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이 여자하고 미리 사전에 합의를 봐 가지고 언제 짠하고 나타나라 그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자리에 그 여인이 올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재미있는 사건은 예수님하고 이 바리새인 문둥이 시몬은 대사가 많이 나오는데 이 여자는 끝까지 한 번도 대사가 안 나오는 배우입니다. 나타나서 끝까지 대사가 한마디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한마디 말도 안했는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남김없이 가르쳐주고 떠났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것입니다. 말이 많아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깊은 경지로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 여인은 한마디 대사도 안 했는데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여자가 보여준 신앙이 무엇인지 한번 더듬어 가보도록 합시다. 이 여자가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왔는데 이 향유가 제산 축척의 수단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TV에서 언젠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 비참한 창녀촌에서 AIDS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비참하게 몸을 팔고 있는 어느 여인을 인터뷰하는 것을 한번 보았습니다. 그 여인과 인터뷰하는 것을 봤을 때 하는 이야기가 빠져나가고 싶어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빚이 너무 많아서... 왜 그렇게 빚을 졌느냐? 맨 처음에 이 길로 들어설 때에 뭐도 사주고 뭐도 사주고 그래서 거져 사주는 건줄 알았더니 나중에 나가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주민등록을 뺏으면서 하는 말이 “네 빚이 이 만큼이다.” 그러고 취업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다 기본적으로 제공해 주는 줄 알았던 모든 물품과 모든 비용을 명세를 달아놓았는데 그게 벌써 수백만 원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거를 내야지만 너는 갈 수 있다. 내가 너를 사올 때 얼마를 주고 사왔기 때문에 다 계산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못 빠져 나간다고 합니다. 기자가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빨리 열심히 돈을 벌고 성실하게 모아서 이 빚을 다 갚고 그리고 택시라도 하나 사서 몰고 다니는 것, 택시 운전이라도 하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이 여인도 아마 이방 남자들을 포함해서 유대인들의 품에서 웃음을 팔고 술을 팔고 니나노를 부르면서 그리고 받을 수 없는 그 비참한 모욕까지 받아가면서 그리고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이미 가족과 친족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철저히 소외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이 여인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고 그 수렁은 더 깊어지고 그 수렁이 더 깊어지자 인간관계도 모두 다 파괴당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동족들에게도 낙인을 찍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술을 팔고 웃음을 팔면서 몸은 피폐해갔고 몸이 피폐해가는 것과 함께 마음에 상처도 쌓여갔습니다. 그 여인이 그렇게 상처를 받고 몸이 피폐해 가는 가운데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저녁 때 들어와서 벽장을 열어보고 향유를 들여다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한 눈금 쌓였다. 아마 틀림없이 이 여인은 한 눈금 쌓이는 향유를 그렇게 거액의 향유를 모으는 동안 아마 집요하게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 여인이 그렇게 집요하게 향유를 모으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면에는 틀림없이 여인이 나름대로 세워놓은 그 목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요즘말로 개인택시라도 하나 얻어서 끌고 다녔을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고 한적한 시골에 땅이라도 몇 마지기 사서 채마 밭이나 일구면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은 그러한 소망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생명자체였습니다. 여기에 쌓인 이 향유가 바로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오고 모욕과 치욕 속에 살아온 모든 생애에 농축된 것과 다름이 없는 그런 액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로는 그런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슨 위로가 있겠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위로를 얻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일주일을 무슨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금요일, 금요일 날은 ‘주의 날’이라고 하더래요. 술 마시는 날, 금요일 날 술 마시는 재미로 월, 화, 수, 목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금요일까지 살아갑니다. 토요일 날 일 없는 사람들이 일주일을 무슨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토요일, 일요일 연휴 쉬는 그 맛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토요일까지 일하는 사람들은 일요일 날 쉬는 것을 목표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음에는 훌륭한 여행의 계획이 있고 신나는 여행의 계획이 있으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러면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날이 빨리오나. 빨리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빨리빨리 지나가면 인생이 빨리빨리 막차를 타는 것입니다. 인생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촛불처럼 타들어 가는 것입니다. 빨리 타 들어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어떤 즐거움의 목표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좀 더 고상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를 볼까요? ‘나는 이제 뭐 이제 소망이 없고 자식들이나 잘 키워야지.’ ‘우’자 하고 ‘수’자 하고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저는 아직 잘 모릅니다만 ‘수’ 몇 개 받아온 것 가지고 대견해서 눈물을 흘리고 좋아하고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고 자식들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 사주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웃들 만나서 ‘수 ’몇 개냐 가지고 따지면서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위 삶의 목표요 삶의 즐거움입니다. 그렇지요? 그나마도 복이 없어서 자식이 맨날 ‘양가양가양가’ 맨날 ‘양가’만 들고 오면 그나마도 대화의 축에서 빠집니다. 그러면 이 다음에는 뭔가를 목표로 살아가야 되는데 가만히 보니까 돈밖에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 시골을 지방에를 내려가는데 그 참 아는 사람도 많습니다.
청주까지 내려갔는데 말입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뭐냐 그랬더니 “제가 있는 건 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거 사가지고 왔으니까 가지고 가십시오.” 꿀인지 뭔지 하여튼 하나를 사줬습니다. 그다음에 인제 자식도 못 둔 사람은 뭘 자랑하는 걸까요? 통장 만지작거리는 것입니다. ‘나처럼 돈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러고는 만지작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는 것입니다. “아, 이번에 우리가 식탁을 들여놨는데 천팔백만 원 이야.” 이러면서 이제 사람들에게 뽐내면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하루 종일 몸을 팔고 술을 따르고 뭇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고 그러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에 들어와서 벽장을 열고 이거를 보고 히죽거리고 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고상하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그러한 삶을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의 출세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승승장구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가보면 갑자기 초상집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이 출세길에선 미끄러져서 대청으로 뚝 떨어진 것입니다. 졸지에 말하자면은 복덕방이나 드나들고 노인정이나 드나드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웃음이 그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또 더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모으고 그 물질을 가지고 쌓는 일들을 즐거워하면서 거기에 모든 생명을 걸고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십 억을 빚진 사람이 고민하다 고민하다 한강에 투신자살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산 조사해 보니까 제산이 60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신나갔지요. 그렇게 정신이 나간 게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라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냥 60억 턱턱 털어가지고 60억 뭐 부동산이라고 처분을 못한다고 그러면 반만 뚝 꺾어가지고 그냥 헐값에 팔아서 30억하고 20억 갖고 10억 남으면 열린교회 헌금해서 좀 큰 교회로 가고 잘 살지 뭐가 걱정입니까? 한 3억짜리 빌라나 하나 사가지고 엑셀 승용차 하나 사가지고 다니면서 그렇게 하면서 통장에다가 3억 넣어놓고 삼백만원씩 이자타서 먹고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가난하게 사는 거라고 합니다. 아는 사람들 이야기가 당신이 그렇게 밖에 생각 못하니까 맨날 그렇게 밖에 못 산다 그러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돈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60억 있다가 40억으로 줄어드는 비참과 절망을 가난한 사람은 이해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경지에 들어가니까 더 모르겠더라고요.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재산이 늘어가는 것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하고 자랑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의 여인이 하루 종일 뭇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고 술을 따르다가 저녁 때 들어와서 벌겋게 술 취한 얼굴로 벽장을 열고 이것을 보고 히죽거리며 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다른게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루 종일 웃음을 팔고 천한 일에 자기 몸을 망치다가 밤에 들어와서 이 늘어나는 향유를 보면서 히죽거리고 있는 여인을 여러분들이 만약에 현장에서 봤다면 틀림없이 “미쳤군” 그럴 것입니다. ‘아이고, 불쌍한 인생아,’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일에 종사를 하면서 그러면서 하루에 오만원이나 십 만원을 벌어가지고 한 천오백만 원된 향유를 쳐다보면서 히죽거리는 거는 웃기는 거고 그리고 하루에 한 백만 원씩 벌면서 한 오십억 쌓인 통장을 보면서 히죽거리는 것 그거는 고상한 것입니까? 인생을 그렇게 봐도 되는 것입니까? 이게 하나님의 시야라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우리인생은 모두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어느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에서 아주 천한 일에, 교회당도 청소하고 아주 완전히 시골 파파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아이고 할머니, 여기에 일하던 분은 어디가시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여기 와서 “기도원에서 일하십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어느 교회 집산데 이 기도원에 와서 봉사를 하게 됬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야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아들 서울대 다녀요.” “집사님이 어떻게 이 기도원에 와서 어떻게 이 수고스러운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어봤는데 “우리아들 서울대 다녀요.” 그것 하나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인생을 산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축소판입니다. 하루 종일 몸을 팔고 그러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그리고는 가서 모아지는 그 향유를 보면서 그 눈금을 보면서 히죽거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이 사람은 이 여인은 그렇게 행동을 하고 그런 식의 인생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건이 생겼습니다. 숙명적인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이 모습으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이 여인은 병 고침을 얻거나 혹은 이 여인이 자기가 없는 어떤 것들을 선물로 받거나 하는 이적이 아니라 이 여인은 이 사건을 만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깊은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용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와서 향유를 보면서 히죽거리면서 좋아했었는데 어느 날 가보니까 그 향유의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이까짓 것을 보고 히죽거려서 뭐하나?’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여인의 온 마음을 다 빼앗아가고 사랑을 앗아갔던 향유가 이제는 그 사랑이 이 향유를 향하여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변혁이 인생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인생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변혁이 인생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래요? 향유를 쳐다보면 기분이 좋고 내일 소망이 있는 것 같은데 눈뜨고 내일 나가보면 바뀐 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몸은 피폐해가고 마음은 소외되고 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참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진정한 죄사함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의 인생을 얽매었던 모든 속박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이 여인이 깊이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체험하게 됐는지 좀 더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토리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렇게 향유가 있었는데 이 여인의 대치할 수 없는 삶의 소망이었습니다. 인간은 소망이 되는 것에만 사랑을 주습니다. 그가 자식이 이제 어렸을 때는 괜찮았는데 나이 점점 먹어가면서 청소년기를 접어들고 점점 대학에 갈 나이가 되면서 이게 완전히 삐딱선을 타가지고 이제는 이 자식에게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면 부모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뜨거운 사랑을 자녀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생의 말년도 아니고 중년을 잘 보내야 됩니다. 중년에 나타나는 위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시기가 되기가 쉽기 때문에 중년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방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어렸을 때 고물거리면서 그 새끼들이 뭔가 소망이었는데 이게 점점 크니까 언제 날 길렀느냐고 다 날개치고 저 갈대로 다 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교수님 한분은 외로워서 미치겠다고 합니다. 아래층에 가면 애들이 윗층으로 주르르 올라간다고 합니다. 윗층으로 오면 아래층으로 주르르 내려 간다고 합니다. 하루는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너희들 왜 나를 피하느냐?” “피하는 게 아니라 왠지 아빠하고 있으면 불편합니다.” 기껏 사랑했더니 마지막에 대화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흔넷, 오십 되기 시작해가지고 인생 이제 막차타기 시작하는데 어디 가서 끝발 날릴 일 있습니까? 그러니까 허망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모으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향락에 빠지면서 몸부림치고 그게 바로 중년에 찾아오는 병입니다. 사십대 오십대 조심하십시오. 소망이 되는 것에만 사랑을 줍니다. 틀림없습니다. 소망이 되는 것에만 사랑을 주습니다. 믿습니까? 소망이 되는 것에는 한없는 애정을 쏟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단순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알아야 됩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소망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향유가 꽉 차면 나를 해방시켜 주리라.’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 비참하고 저주받은 이 창기의 생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뭐밖에 없다? 돈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이 맨 처음에 자기 미모만 믿으면서 살았습니다. 길거리만 나가면 남자들이 떼거지처럼 들러붙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그러고 한 번 밖에 안 봤는데 결혼하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쭐하면서 살았는데 그게 점점 맛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 언제입니까? 삼십대 후반에 들어가면서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봐도 옛날의 그 얼굴이 아니야.’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놓지 않으려고 돈을 펴서 돈을 가져다주어서 주름을 다림질하고 코를 깎고 턱을 낮추고 하면서 이빨을 다 빼서 틀니를 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라도 옛날의 그 모습을 간직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젊은 사람들이 입는 옷을 한번 입어보려고 그러고 안경도 써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슬픈 몸부림, 그 소망을 안 놓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여기는 뭐 이 이야기 듣고 찔릴 사람 아무도 없지만은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소망을 갖는 것에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여인의 인생의 모든 사랑을 송두리째 차지했던 것은 이 향유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 없는 사랑 없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습니까? ‘이게 나를 구원해 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 저주받은 이 비참한 생활에서 나를 이제 해방시켜주고 그리고 나도 이제 정숙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라는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거 하나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천오백만 원 된다고 그러면은 하루에 십만 원씩만 번다고 하더라도 먹고 쓰고 오 만원씩은 모았으면 최소한 삼백일 이상 일 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일하면서 모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들어와서 보니까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더 이상 이것을 보아도 가슴이 뛰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향유를 볼 때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왜? 누구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제는 이 향유가 자기를 구속해주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이 이 여인을 만났을 때 모두 죄수 보듯이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여인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에게는 친구도 없었고 사랑하는 가족도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리고 어쩌면 한두 번 결혼하거나 아니면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남자도 어디에 갔는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됐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운명을 개척하고 바꾸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포기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과거를 묻지 않은 채 다가오시는 한분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찬양)
주 예수 오셔서 내 슬픔 아셨네 나에 눈물도 내 주 아셨네
나 주를 버리고 떠나갔었네 주님 약속대로 날 붙드셨네
주 말씀 하네 너 물가로 곧 나오라 내게 오라 너의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두움 속에 해맬 때 흘리던 네 눈물 그 눈물을 위해 내가 죽었노라
어둠을 헤매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골 깊은 사연을 끌어안고 운명을 곱씹으며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완전히 소외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그들은 네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 출신이냐 물었습니다. 어제 밤에 네가 무엇을 하고 왔느냐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을 묻지 않으시는 한분이 그 인생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어둠 속에 흘리는 네 눈물과 슬픔을 내가 아노라. 딸아 내가 너를 구원하노라.”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믿게 되면서 이 여인은 자기의 참된 사랑이 이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게 앞으로 나를 구원해주고 나를 구속해 줄 거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말대로 가서 택시운전을 한다고 칩시다. 지금은 향유를 쳐다보고 술 취한 얼굴로 와가지고 향유를 쳐다보고 히죽거리고 있겠지만 다음에 택시 운전을 하고 난 다음에는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하얀 장갑 옆에 놓고 통장을 가지고 히죽거리고 있을 것 아니냐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말대로 농토를 하나 얻어서 소박하게 농토를 일구는 농부가 됐다고 칩시다. 이전에는 술이 취해서 얼굴이 벌건 얼굴로 벽장을 뒤지면서 매일 이 향유를 보면서 히죽거리던 이 여인이 이제는 채소 몇 단을 보면서 히죽거리고 살아가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구원입니까? 그게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까? 그게 우리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까? 여러분, 인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인생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이 얽매인 데서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와서 보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향유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아도 좋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내 마음속에 은혜를 주셔서 내가 주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고 그리고 이제는 죄와의 인연을 끊고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 마음에 주셨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 받은 데서 축복의 자리로 옮기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찬양)
세상을 보며 사람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때 나는 만족 하였네
바뀌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제는 그런 것 없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그분이 오셔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상대해주지 않을 때에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대한 선지자 그 이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그분이 비참한 자기의 인생의 지경까지 내려오셔서 그래서 “딸아 내가 은혜로 너를 구원하노라.” 그리고 그를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 참된 구원의 은총을 주셨을 때 이제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뀌는 것입니다. 한숨을 쉬면서 살아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 그래요? 이제는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자기를 이 세상에서 필요 없고 쓸 모 없다고 느끼는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생각이 아니면 그것은 모두 성령으로부터 온 생각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허무와 삶의 무가치 속에 시달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사함을 받게 되자 자기가 여태까지 인생이라고 보아왔던 그 지평너머에 새로운 인생과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도대체 뭐냐? 웃긴다. 참 웃긴다.’ 이것입니다.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사함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회개한 사람들은 이 여인과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새롭도다.’ 우리에게 주님을 믿는 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런 사람이 가서 헌금은 천원밖에 안하면서 몇 백만 원 들여서 중형차를 대림질 한다면 그 사람은 참다운 회개가 아닙니다. 그건 사꾸라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고 그 죄사함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제물을 움켜쥐지 않으면 마음이 평안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 없이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맘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된 사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의 고백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 여자가 갑자기 요술지팡이로 예수님께서 ‘뿅’하고 한번 치니까 백설 공주로 변했습니까? 순결한 처녀로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과거의 이력서 또 보면 여전히 옛날의 전과기록도 나오고 어느 사창가에서 일한 흔적까지 다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 앞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이것을 깨뜨려서 가져다 붙는 것입니다. 가져다 붙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의 궁극적인 소망이 되는 것을 위해서 궁극적이 되지 못하는 작은 소망들은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돈을 귀하게 여깁니다. 돈을 귀하게 여깁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아, 나는 돈에 사심이 없다.’ 그러고 막 돈 뿌리고 다닌다면 정신병자입니다. 성경적이 아닙니다. ‘돈은 이건 불의의 씨앗이다. 막 써서 없애버려야 한다.’ 정신병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축하지 않고 사는 걸 자랑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비성경적 입니다. 사랑하지 말라고 그랬지 저축하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미래를 위해서 대비하는 게 뭐가 나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동기가 사랑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주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깨뜨리고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이 세상의 그 무엇이라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방해하고 하나님과 내가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 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깨뜨려 부술 수 있는 그러한 힘, 결단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대표적인 케이스 아니었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기가 언제 자식을 달란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와서 주시겠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겠다고 그래놓고 언제는 와서 내가 가져가야 되겠다 그러셨습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리아산으로 끌고 가서 그 아들의 몸에 칼을 대게 만들었던 것은 무슨 힘이었습니까? ‘아들아, 내가 너를 뜨겁게 사랑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 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 한번 죽이려고 그랬는데 참 잘됐다.” 그게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제야 원한을 풀게 되었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아주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종속적인 소망이었기 때문에 궁극적인 소망 앞에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뭐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드리는 것.
그러니까 진정한 회개가 무엇이냐? 참 하나님을 만난 표증이 무엇이냐? 그것은 참다운 사랑, 진정한 회개는 사랑의 대상의 바뀌는 것입니다.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울고불고 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어느 날 일어나 보니까 어제까지 내가 사랑하던 것을 이제 내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런데 인간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때 결국 마지막 가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파스칼이라고 하는 철학자이자 수학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무엇이냐면 “나는 어렸을 때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학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다.” 왜? 요즘으로 말하자면 종이 한 장을 놓고 수학을 풀기 시작하면은 미치는 것입니다. 죽으려고 그러다 가만히 생각하면 ‘아휴 죽고 나면 수학은 어떻게 푸나?’ 그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수학은 난 어떻게 푸나. 천국가면 수학이 없을 텐데.’ 그러니까 못 죽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 집념이 극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될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 그때 인간은 자살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결핍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의 길로 접어들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나라에서는 자살이 별로 안 일어납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리고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릴 때 그때 인간들은 허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이것을 사랑하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예수 한분밖에는 내 인생의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죄의 사슬에서 건져준 것입니다. 벗어날 수 없고 몸부림 칠 수 없고 기껏해야 돈으로 자기를 구속해 보려고 애를 써도 소망이 없는데 그렇게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홀대하고 자기를 소외하고 죄인이라고 지목하고 자기를 상종해 주지 않았을 때에 가장 이세상의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밑바닥까지 내려오셔서 그 여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그 마음의 슬픔을 제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시고 죄사함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그런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오늘 내 마음가운데 역사하셔서 내 마음을 활기차게 하시고 내 마음속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과거의 모든 슬픔의 눈물을 씻겨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는 이 여인이 수십 년 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그 뜨거운 상처, 피 흐르는 그 상처를 단번에 치유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인생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할 길이 없습니다. 죄인의 마음을 치유할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 소외된 마음의 상처를 싸매고 어디론가 위로받기를 위해서 때로는 돈에 호소하고 때로는 오락에 호소하고 때로는 쾌락에 자주 몸을 내어 맡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궁극적인 치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우리를 그 끔찍한 죄악의 사슬에서 벗겨주시고 우리의 비고 공허한 마음을 그의 은혜와 사랑으로 넘치게 하셔서 우리는 비로소 아무것도 없는 결핍 속에서도 맹수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오 하나님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자 사랑의 대상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신앙과 참된 회개는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사랑하던 것을 지금은 사랑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힘입게 되자 ‘이제는 다른 모든 것들이 내게 의미가 없고 그 사랑 하나면 살아갈 수가 있나이다.’ 할렐루야.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그래요?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이 거기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이 동행하시는 사랑 하나를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와가지고 하는 말이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왜 허비하느냐 이것입니다. 사실은 이치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끼에 십 만원 식사를 해도 미쳤다고 그러는데 주님은 그날 밤에 한 끼에 천오백만원짜리 식사를 하신 것입니다. 아주 쫙 부으면서 졸지에 말하자면 천오백만원짜리 식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을 보시는 시각과 제자들이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은 완전히 정 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잘 하였도다. 잘 하였도다.” 이 여인이 나에게 좋은 일을 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잘했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한번 으르렁거리며 덤볐다가 박살이 났습니다. 미국의 비행기가 떠가지고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고속도로고 뭐고 쑥밭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깡그리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십 오 만 명인가 몇 명이 총 한번 못 쏴보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미국 사람은 뭐 백 명도 안 죽었는데 수십만 명이 그 폭탄에 맞아서 죽고 나중에 항복하였습니다. 막 공중융단 폭격이 행해져 가지고 그 이라크가 쑥밭이 되고 그렇게 부서지고 나갈 때에 AFKN TV에 부시대통령이 나와서 제일먼저 한말이 무엇입니까? “Well done! 잘했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가가지고 “아참 잘했어.” 그렇게 하면 웃긴다고 그러겠지요. 그런데 대통령이 나와서 “잘했어.” 이러니까 모든 사람이 그 사건에 대한 가치가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잘하였도다. 좋은 일을 하였도다.” 이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만천하를 손에 넣으신 그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여인을 보고 “잘 하였도다. 참 좋은 일을 하였도다.” 끝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잘했다는데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면 지금 끝나야 되겠지만 왜 이 제자들이 그렇게 허비하느냐고 했던가를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그건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계산입니까? 삼 백 데나리온이면 천오백만원입니다. 나누기 백 하면은 농심라면입니다. 몇 개인지 모르지만 몇 개가 된단 말입니다. 만 개면 백만 원이고 십만 개면 천만 원이니까 십 오만 개면 만 오천 명을 말하자면은 열 끼나 먹일 수 있느냐 이런 계산이었습니다. 합리적입니다.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허비하느냐?” 그랬습니다. 말 참 잘했습니다.
사랑은 허비케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사랑은 그냥 이렇게 찔끔 부어가지고는 성이 안찹니다. 확 다 부어버려야지 성이 찹니다. 사랑은 찔끔 부어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쬐끔 드려가지고는 성이 안차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을 이만큼 드린 것 가지고는 성이 안차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타오릅니다. 어떡하든지 이 불을 끄기 위해서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드리지 않고는 베길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안 드리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불을 가슴에 품고 견디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아낌없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리.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은 이렇게 허비케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분의 생애는 허비하는 생애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왜 말구유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은 철저하게 자신을 허비하고 소비하고 아낌없이 불태우고 아낌없이 버린 그런 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허비하고 희생하고 아낌없이 버리고 허비하고 모두 태워버리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자신을 아낌없이 허비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참다운 사랑에 붙들렸던 모든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허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내어 주기를 즐거워했고 모두 자신을 내어 버리고 기꺼이 자신을 소모하고 불태워버리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기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불꽃과 같이 타오르고 자신의 귀한 것을 모두 불태워 그리스도 예수께 비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고 허비하고자 할 때 그 길을 가로막았을 때 그들은 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을 때 그들은 슬퍼했고 고통스러워했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자신이 아낌없이 타오르고 고난을 받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아낌없이 자기의 모든 것을 허비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고난을 받을지라도 오히려 고난 받기에 합당한자로 하나님이 여겨주심을 인해서 주님의 이름을 찬송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회개한 신자가 드문 교회일수록 교회는 헌신에 인색한 것입니다. 헌신에 인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교회가 죄인들의 마음을 깨뜨려서 그 인생들로 하여금 참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 앞에 녹아지지 못하게 만들면 교회는 그 대가를 성도들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처럼 넘치는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허비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이처럼 허비케 하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우리 자신을 허비하고 싶지 않고 왠지 내 자신을 아끼고 싶은 것은 모두가 다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돌이켜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내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소진되고 그리스도를 위해 아낌없이 타오를 때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자신의 몸을 다 태워서 주위를 밝게 하기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촛불이 불꽃이 되어서 타오르고 주위가 환하게 밝혀질 때에 그는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래서 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꽃과 같은 삶이어야 합니다. 불꽃과 같이 타오르는 삶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헌신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쫒아가려고 하는 이 사람들, 그렇게 자신을 아낌없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허비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의 연락을 즐기며 즐겁게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들은 어찌하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자신을 불태우고 자신을 살라서 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생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속죄하신 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소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속죄를 받은 사람 이외에는 죄악의 슬픔과 구원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 그 몸은 죄악으로 얼룩져 있었고 그리고 몸은 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돕는 이도 없고 그리고 돌아보는 이도 없고 친구도 없고 철저히 소외된 채 망가진 육신과 그리고 상처 난 심령을 움켜 안고 사람을 원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면서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은혜와 축복을 이 여인이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죄 많은 여인으로 당신이 식사하는 자리에 가까이 다가와서 자기의 발에 눈물을 떨구고 자기의 발에 기름을 부은 것을 조금도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죄인을 용납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지금도 여러분들을 용납하고 계십니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 위해서 미장원에 가거나 목욕탕에 갔다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는 예수께 왔습니다. 단지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향유 옥합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께서 자기를 구하신 그 구원의 은총에 사랑으로 반응했습니다. 향유를 깨뜨렸습니다. 깨뜨리자 드디어 한점의 향유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제공하지 않았던 그 문둥이 시몬의 방에 깨뜨려지자 온갖 향기가 방안에 진동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우리가 움켜쥐고 살아가던 우리자신의 삶의 관습과 그리고 우리 자신이 최고라고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삶의 대한 생각과 자기의 아집들이 깨뜨려지고 부서지는 역사가 일어날 때에 그때에 참다운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의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깨뜨려지고 또 깨뜨려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이 여인은 천오백만원상당의 향유를 들고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올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인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비하신 구속의 샘물에서 우리는 샘물을 마시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기를 얻고 오늘도 죄악 세상을 이기며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낌없이 허비하셨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끊임없는 죄를 씻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뿌리신 핏길을 걸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와 능력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와 그 능력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무엇을 아끼셨습니까? 만약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셨다면 그는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셨을 것이고 그가 십자가를 지시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허비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죽음을 벗 삼아 운명을 한탄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아낌없이 허비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서 내어주셔서 우리가 주님을 찾기도 전에 주님이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허비하셨습니다. 그분에겐 오직 하나의 비전밖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가치 없는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도 여러분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사람이 없습니까?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소외된 죄인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며 나오는 사람들을 맞으사 그의 인생을 바꾸셔서 이렇게 죄 많은 여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빛나는 여인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렇게 변화된 생애를 만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사랑은 불꽃처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1-13)
사랑은 불꽃처럼 (1995.1.18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
하나의 본문을 두 번에 나누어서 설교합니다. 그러나 어제 설교는 어제 설교로 끝났고 그리고 오늘 설교는 오늘 설교로 다시 시작을 합니다. 그 이야기는 어제 설교 내용을 모르고 있어도 오늘 설교를 듣는데 지장이 없다 이 뜻입니다. 그러나 연결을 위해서 어제 이야기를 조금 우리들이 상기를 해보고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한번 거느려볼 이 말씀, 10절부터 13절까지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고 그랬는데 이 베다니 문둥이 집에는 초대받지 않은 한 손님이 왔습니다. 이 여인은 죄인이라고 별명이 붙어진 한 여인이었습니다.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한 여인과 한 남자로부터 이제 접대를 받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도 질적인 차이와 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비록 이 두 사람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이 여인은 그 감사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게 되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이 여인의 손에 바로 삼백 데나리온이나 넘는 향유가 들려있었는데 이것은 시가 천오백만원이나 되는 거액의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부은 것은 이 여자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세상에 대한 소망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바뀌는 것입니다. 꿈이 바뀌고 사랑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요 신앙의 핵심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감정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서 이제 이 여인이 이와 같이 귀한 향유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것은 ‘주 없이 살 수 없다’라는 의미였습니다. ‘나의 사랑을 받으실만한 분은 오직 당신뿐이옵나이다’라고 하는 고백을 이렇게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켜본 많은 제자들은 “그것을 왜 이런 식으로 허비를 하느냐?” 사랑에는 이렇게 허비케 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판을 튀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없이 끌어 오릅니다. 정과 의지와 지식과 이 모든 것들을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가 된 감정 속에서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쏟아 부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정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허비케 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낌없이 자신을 허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오신 생애는 허비하신 생애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조금도 아낀 것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러한 생애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어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그렇게 오랜 동안 꿈을 가지고 모아오던 이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가지고 왔습니다. 딱 하고 깨뜨려서 한 번에 예수 그리스도께 부었습니다. 그런데 제 삼자인 제자들이 “아니 그거를 왜 그렇게 아깝게 붓느냐?” 고 한 것입니다. 남이야 붓든지 말든지. 이 여인이 향유를 갖다 붓는데 요즘 말로 뭐 보태준 것 있습니까? 남이야 붓든지 말든지 무슨 참견입니까? 꼭 그런다 이것입니다.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예수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려고 결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사랑을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아낌없이 고백하고 살고 싶은데 그렇게 결심하고 나면 꼭 누군가가 끼어든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사랑은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찬양)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렇게 진공 속에서 나는 주님만 보고 주님은 나만 보고 그리고 아무도 없고 그리고 둘이서 사랑의 밀회를 나눈다면 그러면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의 미로를 나누면서 단 둘이서 그렇게 교제를 하고 사랑을 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만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던 삶을 회개하고 한번 사랑하기로 맘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것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진공 속에서 주님과 나와만 사랑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가끔 소설이나 TV나 영화를 보면 지루할 정도로 잘 나타나 있으면서도 그걸로 이야기를 엮을 때마다 사람들이 흥미진진해 하는 테마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두 남녀가 있는 것입니다. 양쪽집안에서 결사반대하는 것입니다. 남이야 시집가서 살든 말든, 그런데 사돈에 팔촌까지도 동원 돼서 훼방을 놓고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 훼방과 방해공작을 넘어서면서 두 사람은 기필코 만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이 세상에서의 방해에 직면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사랑하는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안타까워하면서 그것을 붙드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 여인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제자들의 것을 가져다 부어버렸다면 왜 남의 것을 가져다 붓느냐고 할 권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 남이야 향료를 붓든 들기름을 붓든 참견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내 것 가져다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붓는데 보태준 거 있냐는 것입니다. 제 삼자 아닙니까? 제 삼자가 나서는 것입니다. 나서서 콩 놔라 팥 놔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이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괴롭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선 이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세상을 버리고 예수만을 사랑해야 되겠다고 결심하면 이 세상이 제일 미워합니다. 세상이 제일 미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예수께 속하면 속할수록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께 속해서 예수를 사랑하면 더 사랑할수록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세상은 괜히 나만 미워해.’ 괜히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내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것이 나를 이 세상이 미워하는 유일한 이유다 이것입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예수 사랑하는 우리를 미워합니까? 간단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은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야지만 비로소 만족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역사해서 하나님이 받아야 할 경배를 이 세상이 홀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받아야 할 경배를 대신 받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만을 위해서 살고자 할 때 세상이 미워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앞에 향유를 아낌없이 붓느냐고 따지는 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공격을 받고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련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슬픔 많은 이 세상에서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관하지 않습니다. 낮에는 골몰하고 고통을 받으면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려고 할 때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에 직면합니다.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고요히 퇴근길에 하나님의 교회에 들러서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싶으나 끊임없는 방해에 부딪히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슬픔 많은 세상에서 주님은 위로하세요. 뭐라고 위로하세요?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안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안다.”
여기서 뭐라고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사람의 눈에는 이 제자들의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이 뛰어난 논리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아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삼백 데나리온, 천오백만원이나 되는 이 향유를 나는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리고 그에게 죄사함을 받자.’ 이것이 소망이었는데 이제는 이것이 소망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내 인생에 더 큰 사랑이 없어서 그래서 이전에 내가 귀하게 여겼던 나의 가장 소중한 내 인생과 내 눈물과 내 서러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아낌없이 붓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죄와 수치와 그리고 형벌 가운데서 구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최선의 봉사라고 믿었지만 이거를 이렇게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면 이 여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왜? 무식하니까.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한 마디도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죄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서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솜사탕을 먹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달콤하고 유쾌한 일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 위해서 넘치도록 고난의 인생길을 걸어갔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그리스도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가치로 여겼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고속도로와 같은 인생을 포기하고 비포장으로 들어섰습니다. 길로 걸어가던 인생이 이제는 돌바닥을 넘어서 사막을 지나고 고통스러운 자갈밭을 건너고 풀숲을 헤치며 가시밭길을 걸어서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죄는 그를 억만 죄악에서 구하시고 소망이 없는 정죄된 가운데서 구하시고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웃과 가족으로 버림을 받아서 친구도 없고 돌보아 줄 이도 없이 버려진 이 사창가의 비참한 여인을 사랑으로 용납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했고 사랑해서 그 사랑을 표현한 죄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칭찬과 상급이 아니라 비난과 악의에 찬 조소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이 휴지 조각처럼 난무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이렇게 고백하는 이 일을 주님을 내가 인격적으로 사랑하면서 내 인생길을 걸어갈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이 돌짝밭이든 가시밭길이든 골고다 언덕길이든 내가 그 뒤를 따라가겠나이다.”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인생과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우리가 사랑하는 첫 번째 대상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슬픔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셨습니다.
오늘 이 죄 많은 여인으로부터 향유를 부음 받는 사건이 수난주간에 처음 일어난 일입니다. 26장서부터 27장까지 총 주제는 그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시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단원의 처음 시작을 이처럼 아낌없이 향유를 부은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과 고난에 관한 기사를 우리에게 남기시기 전에 뜨겁게 십자가에 잠시 후 못 박히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한 여인을 우리 앞에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대하고 그가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고난의 길을 기억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아무 음성도 들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예수를 끌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의 무리가 그 예수를 뒤를 좇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부르짖는 수많은 군중들의 아우성 소리와 그리고 허기진 몸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힘없는 발걸음 이 모든 고난의 장면이 있은 후에 통곡하며 가슴을 치며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비통하게 슬피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주님은 고난 중에서도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환경과 사람과 악한 것들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향한 온전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거나 고백할 때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억하시고 잠시는 그를 버려두시지만 영원히 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논리 정연한 도전을 받고 안절부절 하며 뭐라고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 여인, 그 여인의 손에는 깨뜨려져서 아낌없이 부어져버려 쓸모없게 된 옥합 하나만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주님 앞에 모든 것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속들이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고 그분의 이름만을 높이기를 원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예수 그리스도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 속에서 ‘아신다’는 말처럼 정말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도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냥 눈을 보고 인식하며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영적인 통찰을 동반한 앎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오해를 잘합니다.
제가 어느 교회 집회를 갔는데 둘째 날인가 셋째 날인가 몸도 아프고 너무 너무 힘들어서 그저 보따리 싸가지고 열린교회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밖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상하게 밤새도록 기도도 안 되고. 그런데 아침에 세수를 하고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떤 형제가 걸어오더니 “강사님,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합니다. “아, 예. 평안히 주무셨나요?” 하는 말이 아첨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강사님, 어제보다 오늘 아침이 성령 충만해 보이시는군요.” 속으로 ‘죽을 맛이다.’ 인간은 이렇게 오해를 잘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렇게 말한 주범이 가룟 유다였고 “맞아.” 그러고 맞장구친 게 나머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게 좀 쉽게 이야기해서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를 제자들은 뭣도 모르고 장구를 쳤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가룟 유다를 뚫어지게 봤습니다.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으로 바꿔서 구제기금으로 그것을 드리면 예수님이 그것을 가룟 유다를 주면 돈 통에 들어오면 그게 자기 돈이 될 텐데 섭섭 하게도 현물로 가져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그것을 부어버렸으니까 자기는 국물이 없다 이것입니다. 떡을 만져야지 고물이 떨어질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말하는 가룟 유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 여인은 대답을 못 찾고 안절부절 하고 있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 마음을 움직여서 그토록 인생의 소망처럼 여겨졌던 향유를 아낌없이 깨뜨려서 주 앞에 붓게 만들었던 그 참된 원동력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었음을 이 예수 그리스도는 아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주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신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두려움이 되겠습니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할렐루야.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알고 내가 너를 잊지 아니한다.” 이 말보다도 더 위로가 되는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안다고 그러시면 끝난 거 아닙니까? 주님이 안다 그거 끝난 것입니다. 높은 사람이 전화한통해서 “나 그 사람 아는 사람인데.” 끝입니다. 좋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의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내가 안다.” 주님은 논리의 편에 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편에 서십니다. 사랑하는 편에 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예수님이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구제를 위하여 염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연히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없이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입니다.
여러분, 에베소교회에 대한 계시록 2장의 주님의 평가를 보십시오. 거기에 뭐라고 나옵니까? 너희들의 참고 인내한 것과 그리고 자칭 사도라 하여 아닌 자들을 드러낸 것과 하여튼 수고와 인내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인 분별력이 뛰어나고 말씀을 아는 지식이 탁월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돕는 사랑과 수고와 인내에 있어서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무얼 잃어버렸어요? “그러나 너희에게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참 사랑을 잃어버리니까 이게 이웃을 향한 사랑이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냐 그건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건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리되는 것은 벌써 우리의 신앙의 변질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웃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중심 속에 바로 구주를 향한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게 하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이 교회는 그 훌륭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속히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 촛대를 들어서 옮겨버리겠다.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주님이 문 닫겠다 이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교회를 향한 최고의 심판의 말씀은 내가 그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를 구성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는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잘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에게 한 것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에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여인이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부었기 때문에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즐거워 하셨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향유를 부으나 안 부으나 주님은 영원히 주님입니다. 그 향유를 붓는다고 해서 주님이 갑자기 영광이 올라가고 권세가 올라가고 성령의 능력이 더 깃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는 그냥 물리적으로 한번 부어졌고 그리고 잠시 지나다 다 증발해 버리고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잘 하였다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 여인이 향유를 부은 그 사건 그 자체를 응시한 것이 아니라 그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아낌없이 붓게 만들었던 이 여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힘을 칭찬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여인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와서 향유를 깨뜨려 붓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그냥 드려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그것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래서 결국은 가난한자를 돕는데 썼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동일한 칭찬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 향유를 부은 방법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이 여인이 행한 일을 통해서 이 여인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좀 더 들어가 볼까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잠시 후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나는 잠시 후 죽는다. 가난한 자들은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다.” 그러면서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무슨 뜻이냐면 이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는 그런 모든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였습니다. 세상과 나는 관계없고 내가 아는 것은 소망이 없는 내 인생을 위해서 주께서 나를 찾아 오셨고 그리고 동족들도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더러운 인생, 저주받은 이 인생에게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시고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사 그리고 진정한 화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일들을 이 여인이 경험하고 나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신학자가 글속에서 아주 명쾌한 말로 현대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오늘날의 교회는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대신 세상도 섬기는 법을 가르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 대신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려고 하는 일만을 한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에게 향유 부음을 받고 “잘 하였도다” 하고 칭찬하신 이유는 이 여인이 향유를 자기에게 부은 것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붓게 만들었던 그리스도인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 비교될 수 없는 사랑, 대치될 수 없는 사랑, 그 어떤 것으로 바꿔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들은 미워할 정도로 마음에 사랑이 들어오지 않는 그런 사랑,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실 때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여인은 이 평범한 행동을 통해서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지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죄를 용서받은 후에야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죄함을 받지 못한 사람, 그 사람 속에는 신앙이 없습니다. 용서함을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인하여 한없이 감격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만 자기의 인생 속에 보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은혜와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감격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중대한 병이 들어있는 것이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준을 영적인 삶의 기준을, 우리의 이웃들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온전한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대는 항상 어그러진 시대가 훨씬 많았습니다. 굽어진 시대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도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무엇을 배우겠냐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힘들게 믿냐 이것입니다. 쉽게, 좀 편하게 알아듣기 쉽게 믿지 뭘 그렇게 따지느냐 그것입니다. 교회 나오고 십일조 하면서 살고 교회 봉사하고 그러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냐 이것입니다. 옥석을 가리고 마음속까지 들고 와가지고 가슴을 가르고 해부를 해가지고 그 피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피로 가득 차 있는지 안 차있는지를 들쳐 낸 다음에 가짜라고 딱지를 붙이고 가야지만 설교자 당신의 마음속이 편하겠냐 이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병석에 눕고 고통을 받을 때, 배를 갈라야 할지, 꿰매야 할지, 내버려둬야 할지, 칼을 대야 할지, 약을 먹여야 할지, 주사로 고쳐야 할지, 그거는 의사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약사가 이야기를 합니다. 약국에 있으면서 제일 얄미운 사람은 와가지고 약을 두세 가지를 달라고 그러는 사람이 제일 밉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조제해 주면 비싸게 받아 먹을까봐 “아스피린 주십시오.” 이러는 사람이 밉고 그보다 더 미운 사람은 “아스피린 하나하고 콘택 600하고 쌍화탕하고 주십시오.” 자기가 아예 조제까지 해가는 사람, 분명히 그렇게 먹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이게 뭘 또 나한테 사기 치려고 그러나.’ 그러는 눈으로 쳐다볼 때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약국에 갈 때마다 그래요. “선생님, 제 증세가 이러이러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리고 이제 조제실로 들어가려고 그래요. “선생님 약값은 제가 얼마든지 낼 테니까 소신껏 지으십시오.” 그러면 그 약사가 되게 좋아합니다. “소신껏 지으십시오. 약값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소신껏 지으십시오.” “아, 예.” 그런데 좀 너무 하더라고. 내가 가면 꼭 하루치 삼천 오백 원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면 천오백 원을 받으면서. 그래서 저는 소신껏 이라는 이야기를 안 해도 의례 나만 나타나면 소신이 충만합니다.
여러분, 이런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갈 때 사람들은 지적인 교만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의 교리는 복잡한 논쟁으로 대신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생생한 사랑대신에 논리와 이론만 앞세우는 이러한 교회로 차갑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어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무개 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교인들이냐 이것입니다. 왜? 한국 최고의 설교를 듣고 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라 이것입니다. 자기가 그 교회를 잘 알고 있는데, 한국 최고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뭐하냐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이 없고 메말라가고 있다 이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배 시간마다 흐느낌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뭘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쉽게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지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조금씩이라도 깨뜨려 지면서 예수를 믿고 진도를 나아가야지 1년 365일, 7년, 8년이 되도 안 깨뜨려진다 이것입니다. 이게 점점 각질이 생겨가지고 웬만큼 두드려 가지고는 끄떡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짜 영력의 도끼를 가지고 와서 ‘퍽’하고 쪼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하고 같이 못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조금씩이라도 맨 날 깨어져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를 생각해서라도 좀 깨져주십시오. 제가 제일 절망될 때가 언제냐 하면은 설교를 다 마치고 “기도합시다.” 그러는데 아무도 흐느끼는 사람이 없을 때, 이건 뭐냐 하면은 단순히 오늘 영대 영으로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이번 주에 더 굳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더 강력하게 되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저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조금씩이라도 좋으니까 좀 깨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점점 무뎌지니까 차갑게 이론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허물을 보고 감싸지 못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논리가 판치는 것입니다. 교회 오면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칼부림입니다. “쨍그랑, 쾅,” 논리의 칼을 쫙 빼드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이 사람이 오늘은 지고 갔습니다. 일주일 내내 집에 가서 머리를 굴리고 생각하니까 ‘아이쿠, 내가 그때 그 말을 할 걸.’ 요번에는 더 큰 칼을 들고 온 것입니다. 들어서자마자 “김 집사 나와라. 내 칼을 받아라. 사당동에서 갈아가지고 왔다. 에잇, 찻, 텅.” 하고 나옵니다. 불꽃이 번쩍 튑니다. 야, 이거 설교자가 위에서 보면 무서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다가 잘못되는 날에는 어떻게 되냐면 그 칼을 전부다 들고 강단을 향하여 돌격, 그러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쪼개지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칼이 번쩍 번쩍 부딪치는 것입니다. 서슬이 시퍼래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칼을 든 그 사람들이 전혀 주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주님을 훼방하며 사는 사람들이면 너희들 끼리 이제는 바깥에 가서 싸우라고 여기는 교회당이라고 헌금도 안내면서 왜 교회 와서 난리 치냐고 내보내면 되겠는데 헌금 내고 교회 나오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니까 요금 냈으니까 자기는 여기서 싸울 권리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논리의 칼을 들고 막 “칙” 하니까 “펑”하고 말입니다. 그러더니 조금 있더니, 이번에는 박집사가 당했거든. 그러니까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디 가서 물어봅니다. “교회에 가서 내가 이렇게 싸움이 났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저기서 이렇게 말하더라. 나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 그러고, 또 어디서 배워가지고 왔는지 미아리서 배우고 왔는지 배우고 와가지고 문을 열고 딱 들어서면서 제직회 시작하자마자 “최신병기다 받아라.” 하고 나오는데 이게 뭐 철퇴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교회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나는 교회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적마다 꼭 그 목사님의 그 예화를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마음속에 커다란 못이 박히듯이 ‘이게 바로 목회자의 갈 길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냐면 목사님이 홀아비로 혼자 사는 목사님입니다. 한 오십 쯤 됐는데 그런데 어느 날 설교하러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설교를 안 듣고 다 돌아앉아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나했더니 수근수근하고 도는 소문이 뭐냐 하면 “목사님이 애기를 낳았대.” 목사님이 남자인데 무슨 애기를 낳느냐? 그랬더니 뭐냐 하면 어떤 식모아이가 나타나가지고 시집도 안 갔는데 배가 이만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이게 교회에 덕스럽지 않지 않습니까? “누구 애냐?” 그러니까 이게 참 죽일 노릇이지. “목사님 애기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낳았는데, 사람들이 보며 하는 말이 목사님 쏙 뺐다는 것입니다. 죽일 노릇이지. 그래가지고 목사님이 결국은 한마디도 변명을 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을 맞으면서 노회에서 잘리고 목사 파직당하고 그리고 그 아이를 안겨서 퇴직금도 안줘서 내쫒았습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이 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돌아서면서 다 욕을 했습니다. “저 파렴치한 늙은이 말이야. 장가를 가지. 저 짓하고 있다”고 그런데 신기합니다.
그 식모가 계속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오년이 지났습니다.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때까지 기다리시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짜 풍랑 이는 바다를 보내셔서 이 여인을 사로잡으신 것입니다. 토설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구정물을 토하듯이 자기의 죄를 토설하는 가운데 흐느끼면서 내가 알고 있는 남자가 교회에 있는 어느 집사였는데 그 사람이 자기에게 그렇게 해야 된다고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자기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당회를 주도하던 장로들이 전국을 수배해서 이 목사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강원도 탄광에 가서 아이를 홀로 기르면서 목회를 그만두고, 어떻게 목회를 합니까? 잘렸는데. 그래가지고 가서 탄광에서 석탄을 캐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 아이를 기르는 것입니다. 오년동안. 그러고 오년 만에 이 장로들이 찾아가 가지고 거기서 말하자면 그 추운 겨울에 그 얼음판에 엎드려가지고 밤새도록 백배사죄를 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교회로 돌아와서 돌아왔으면 다시 무슨 이야기를 할만하지 않습니까? 그냥 고요히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그 교회에서 그 목사님이 성자취급을 받다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세상의 도전이 오고 그리고 고난이 오고 역경이 오고 그리고 심한 시련이 자기에게 닥칠 때 오히려 그 진실한 사랑은 더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더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저는 부여에 가서 그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깊은 인상 받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660년 정도에 백제가 망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1300년 전 아닙니까? 그때 무덤을 발굴한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옮겨 놓았는데, 요기 머리카락 조금 있고, 이 옷 있고 해골 그런 건 다 썩어서 없고 그 찌끄러기가 남아 있는데 손이 있던 그 자리에 뼈도 다 사라졌는데 금가락지만 남았습니다. 13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순금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은 시련 속에서 광채를 발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품어내며 고난 속에서 더욱 더 뜨거운 광채를 품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시선을 끌고 그들의 마음속에 감동과 감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갔던 이 여인의 가슴속에 역사하고 있는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었습니다. 교회에 대치할 수 없는 사명은 그 사랑의 불타는 사랑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질 때 논리의 칼이 판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 잘난 논리의 칼이 판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칼부림 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칼부림을 보면서 강단에서 더 큰 칼을 가져와가지고 나도 칼 있다고 하는 날에는 그거는 그 칼을 가지고 교회가 쪼개지는 것 이외에는 볼 것이 없습니다.
1741년에 캠버스랭이라고 하는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대 부흥이 일어났을 때 부흥회 장소 맨 앞에 어느 늙은 할아버지가 한없이 고개를 저으면서 눈물로 통곡하며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고장에서 가장 유명한 조직신학 교수였습니다. 그러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그 어린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데, 그 할아버지 원로 교수가 하는 말이 목사님, 자기 아들 같은 사람 손을 잡으며 “목사님, 이전에는 내가 속죄의 교리를 가르쳤으나 이제는 내가 속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 신앙을 알아야 됩니다. 고3 애들 교과서 공부하듯이 밑줄 그으면서 테이프 듣고 돌아다니면서 외운다고 해서 신앙이 자란다고 생각하면 머리 좋은 사람 아니고 머리 나쁜 사람들은 소외감 느껴서 어떻게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맨날 공부한다고 뭘 들고 다닌다고 해서 신앙이 자라는 게 아니라 이것입니다.
(찬양)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이런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갈 때 그 사람이 논리의 칼로 불이 붙는 그런 교회를 잠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여인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사랑하게 됐습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고 마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랑으로 충만해진 여인이 되었고 그 사랑을 오직 그리스도 이외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 아까운 향유를 깨뜨려서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께만 붓게 된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만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자기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우리를 향한 그의 넘치는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이 신실하신 은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추억하면서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리고 고마워하고 감격해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관계가 깊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추억이랄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깊어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우리 서로 받은 이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아가서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과 같다. 잠근 동산과 같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문을 닫고 시간이 되면 자기만 싹 들어가서 그 동산에서 한번 놀다가 그러다가 동산의 문을 다시 닫고 나와서 아무도 보지 못하고 덮어놓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런 개인적인 깊은 사랑이 바로 신앙의 수준이다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가졌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몇 번째 하늘을 봤니 어쨌느니 하면서 귀신을 내어쫒는 권세가 있고 뭐가 있다고 난리를 치는데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그것을 가지고 키 재기를 하는데 “그러나 얘들아 그거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은사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겠노라.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다.” 언제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편에 서게끔 만들어 주는 그 놀라운 사랑, 이 사랑이 여러분들 가슴속에 늘 역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늘 그 사랑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믿음의 사람들은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을 볼 수가 없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언제나 그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며, 그리고 그 은혜를 생각하면 늘 눈물이 흐르며, 옛날에 신앙의 선배들이 지은 이 찬송가는 정말 훌륭합니다.
(찬양)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비로소 전도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전도는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채 살아가는 인생들의 그 비참한 영적인 상태를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덕성가운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 그것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맞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성격이 느긋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콩콩 뛰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불같은 사람이 있고, 그리고 점잖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은 반드시 뜨겁습니다. 그리고 왠지 주체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늘 주체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분명히 한차례 때려야 되는데 도저히 때릴 수 없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분명히 여기에서 무언가를 요구해야 되는데 사랑 때문에 요구할 수가 있습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어떻게 주체하기 힘들고 그리고 언제나 가슴속에 넘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랑의 본질은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일 년 오십 주, 이 년 백 주, 삼년이면 백오십 주입니다. 백 육십 주인데 그렇게 일년, 이년, 삼년, 사년이 되도록 자기가 생각 해 볼 때 신앙생활에 아무 기복이 없는 것은 안정적인 신앙이 아니라 바닥을 헤매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어서 못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이 여인이 충만해 지니까 논리를 넘어서는 사랑의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유를 깨뜨려서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가시관이 씌어질 그 머리위에 이 여인의 향유가 부어졌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못 박히실 그 발에 이 여인은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그 발을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살아있고 뜨거운 신앙은 바로 이러한 역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교회를 정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것은 절대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신학과 신앙으로 우리 교회는 영원히 북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뜨거워지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그를 사랑하게 되면 교회는 저절로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나오시는 박주승 할머니 있지요? 은신을 못하셔가지고 전도사님들이 가서 업어 오시는 할머니입니다. 대심방을 갔습니다. 그야말로 판자집입니다. 기어들어가는 집입니다. 냄새가 콜콜 나는 집에 가가지고 앉아서 찬송을 부르는데 저도 가만히 있고 우리 전도사님들도 가만히 있는데 이 할머니 혼자서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누가 시켜서 아닙니다. 한손 못 쓰십니다. 그런데 한 손 가지고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왜? 너무나 감격해서. 기도할 줄 모르니까 우리 전도사님보고 기도를 써 달라고 그러는데 기도를 써 드렸더니 그 기도 써준 것을 다 외웠습니다. 나달나달하게 달았습니다. 몇 백번을 읽었는지. 총기가 아주 또렷또렷하신 노인네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고 그 골방 같은 구석에서 단 십 미터도 앞으로 나올 수 없는 여기 나오시는 거는 가장 장거리 여행을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왜? 그 속에서, 움막 같은 곳에서 예수 모르고 살 때에는 신세한탄 밖에 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니까 가슴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표현은 어눌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 할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세련됐다고 말하는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봅니다. 아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그 채색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가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천 원짜리 주면 그거 꼬깃꼬깃 해가지고 와서 교회 헌금하셔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주일이면 성경, 찬송을 들고 오고 그리고 십일조나 내고 감사헌금 내고 절기 때 나오고 이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서 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역사해서 그 사랑 때문에 스키 타러 가는 사람,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들이 부럽지 않네 그러면서 성경, 찬송을 들고 지하실에 교회가 있어도 그 속에 진리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까 아멘하고 나와서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뭐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전혀 복잡할 필요 없습니다. 이러한 생생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그 사람이 가는 곳에 어둠이 있는 곳에서는 그의 삶이 빛이 되고 그리고 고통이 있는 곳에는 그가 위로가 되고 불화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참된 사랑이 깃들고 고난이 넘치는 곳에는 그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위로를 받게 되는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언제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삶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고 그 처음사랑이 한없이 밀려올 때, 전 그게 21살 때였습니다. 정말 그때는 가난하고 하여튼 인생에 있어서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후줄근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내 은밀한 기쁨은, 23평짜리 이 교회 반만한 교회, 거기에 내 기쁨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고요히 30분 이상 걸어가서 촛불을 하나 켜놓고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싹트고 자라갔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은밀한 사랑과 누구에게 공개할 수 없는 비밀스런 사랑을 나누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교회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오늘 보십시오. 이 여인은 죄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였다고 치더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러한 죄인이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초대받지도 못한 채 감히 바리새인의 집에 발을 들여놓고야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유대인의 규례를 깨뜨리게까지 담대한 용기를 주었습니까? 그에게는 비천한 여인이기 때문에 바리새인집에 들어갈 수 없고 그들과 더불어 식사할 수 없고 예수와 함께 식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원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아가서 “주여, 내가 담대히 주 앞에 나아가오니 나를 더러운 여인이라고 하지 마옵시고 나를 용납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기를 용납하실지 거절하실지 몰랐습니다. 거절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여인은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사랑을 용납해 주시던지 말든지 그러나 내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 불꽃과 같은 사랑을 주여, 나는 어찌할 수 없사옵나이다.’
어제 말씀드렸지요?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고백하지 않는 것은 불꽃을 간직하고 누워서 자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여인은 기꺼이 주님을 향한 넘치는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인하여서 그리스도 예수께 생명보다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향유였습니다. 여러분의 향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깨뜨려서 그리스도 예수께 부을 수 없게끔 꽁꽁 숨겨놓은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아집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교만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속에 싹트고 있는 미움에 대한 감정들 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여러분들의 인생에 손으로 간섭하셔서 그리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흔드시는 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부인하는 몸부림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이 같은 것들이 여러분들 손에 들리는 가장 고귀한 옥합으로 받으시는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물질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너무 영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향유였습니다. 값진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향유의 의미는 이 여인의 인생의 목표였고 어떠한 환란과 시련속에서도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것,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그것을 여러분의 손에서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자만과 그리고 누구 앞에서도 깨뜨릴 수 없었던 그 자존심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여지없이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결단하고 그것을 깨뜨려서 그리스도 예수께 붓기를 소원하는 이러한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그 마음속에 그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심령으로 그분의 발 앞에 나아와 엎드리고 그리고 그 발 앞에 이 세상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그 모든 자기의 인생의 무거운 꿈과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깨뜨릴 수 없었던 그 모든 향유 옥합과 같은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 앞에 깨뜨리길 원하는 이 모든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인격, 인격 그러는데 워낙 좋은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지만 예수 믿고 이 속에서 싹트는 그 근본에서 우러나오는 이 더러움은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정말 향기로운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보십시오. 고속도로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고난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깨뜨려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향유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집요한 추적 앞에서 끊임없이 덜덜덜덜 떨리는 그 손으로 향유를 깨뜨렸던 사람들, 깨뜨리고, 깨뜨리고, 깨뜨리면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새롭게 빚어져가는 역사가 이들 속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인격에 있어서 이렇게 깨어지는 옥합과 같이 끊임없이 깨어져야 됩니다. 깨어질 때 이 옥합이 얼마나 아팠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옥합이 깨어질 때라는 소설도 있지 않습니까? 깨뜨려질 때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멀쩡한 것을 망치나 쇠 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깨뜨렸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팠겠습니까? 그래요.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당장 편하죠. 편하죠.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어쩌면 사랑이 그래도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곳이니까 그런 모난 인격과 그리고 교만하고 그리고 논리의 칼을 휙휙 빼드는 그러한 삶을 교회는 꾹꾹 참으면서 용납을 하여줄지 몰라요. 그러나 세상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집에서 대충대충 얼렁뚱땅 키워 놓으면 세상에 나아가서 고난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분 앞에서 우리 자신이 깊이 깨어지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기꺼이 인격적으로 결단하고 자신을 깨뜨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고치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때에 주님이 우리가 드리는 그 어떠한 헌물보다도 더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속 썩이는 자식이 맨 날 갈비만 사들고 오면 뭐합니다. “갈비 먹고 아빠 힘내서 나 더 패줘.” 그거밖에 더 됩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무언가 something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줄 수 없고 누구 앞에서도 깨뜨릴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 앞에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 앞에서 내 인격을 깨뜨리겠습니까? 아니 내가 꿇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깨뜨리겠습니까? 사장이 와서 나보고 깨어지라고 하면 내가 깨어지겠습니까? 내 안다니고 말지? 이거 아니면 내가 밥을 못 벌어먹나? 뛰쳐나갈 것입니다. 누가 나를 깨겠습니까? 누가? 누가 나를 깨겠습니까? 심지어 남편이 깨지라고 그러면, “나 그러면 깨지겠다. 안 산다. 너랑. 내가 뭐 네 종이냐? 난 깨지기 싫다.” 그것입니다. 이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깨지기 싫어서 이혼하는 것입니다. 깨지기 싫어서 깨지는 사람들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하나 살아있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이 되는 것입니까? 그게 요나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모난 모습을? 이 세상에 그 어떤 것 앞에서도 결코 깨뜨리지 않는데 주님이 말씀하시면 괴로워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시편 51편에서 시편기자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내가 주는 의롭다 할 것이며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나는 주님은 순전하시니 내가 고백하리라.’ 이게 상한 심령을 깨뜨려서 주 앞에 드리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인식의 모습입니다. ‘주가 말하실 때에 나는 주님은 의로우시다 그렇게 말할 것이며 주께서 판단하실 때 나는 주님은 순전하니이다 고백하리라.’ 핑계대지 아니한다 이것입니다. 기꺼이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깨뜨려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 깨어지게 하옵소서. 깨뜨려지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인격이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향기가 온 가정에 진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인격적인 깨뜨려짐, 인격적인 옥합의 깨뜨려짐이 어떤 때는 헌신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귀한 게 아니라 말하자면 인격적으로 깨뜨려지지 못한 것이 수많은 헌신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저도 뭐 그렇게 뭐 깨뜨려지긴 많이 깨뜨려졌는데 워낙 생기는 게 못 되어 먹어가지고 이렇게 많이 깨졌는데도 이 정도밖에 안됩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교역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은 특히 교회에서 참는데 대가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와서 성도들이 ‘퉤’하고 침을 뱉고 가도 그 침을 훔치면서 ‘주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못되니까 문제지요. 문제.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의 칼을 가지고 “김 집사 내 칼을 받아라.” 그러고 올 때에 그렇게 덤벼들어서 올 때에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리고 그 허물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이 한 번 그렇게 해야지 하고 인상을 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 깨뜨리시옵소서. 깨뜨리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옵소서. 주님.’ 내가 얼마나 아플까하는 것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정없이 깨뜨려 주시옵소서.’ 오늘 아침은 강도사님에게 떡메를 들려주셔서 주어 패시옵소서. 깨뜨리시옵소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 얼르시옵소서. 얼르시옵소서.’ 여러분, 개꼬리 삼년 묶어서 황모가 안 되는 법입니다. 나는, 그 도자기를 만드는 그 공장을 한번 본적이 있는데 아주 확실한 간증거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점토 흙, 이런 것들이 덩어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재어 가지고 와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면 먼저 방앗간 같은데 가지고 가서 떡메 같은 걸로 산산이 부수는 것입니다. 자글자글 부셔요. 그렇게 해놓고 그거 가지고도 안 되니까 물을 집어넣고 이제는 풀어서 비비는 것입니다. 풀어가지고 하여튼 요만한 덩어리도 있으면 안 되니까 풀어가지고 이번에는 두드리다가 못해서 안 되니까 집어넣고 반죽 기계 같은 것을 가지고서 아주 커다란 것으로 풍 돌리는 것입니다. 막 휘저어 가지고 다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그것을 가져다가 약간 물을 말려가지고 이젠 진흙덩어리를 만들어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릇을 빚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끔 녹 같은 것 젓다 보면 이만한 흙덩어리 나오는 것 있지요? 그 자리에서 다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향유를 가져와서 아낌없이 깨뜨려 부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천오백만원짜리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을 능력 없습니다. 다 털어도 천오백만원 없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손에 무엇이 들려있든지 그것을 들고 나오게 한 동기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들고 나온 것이면 그것이 예수님은 할렐루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수천만 원의 돈을 가지고 와서 헌금을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거 말고.” 그러실 수 있습니다. “나는 너의 모난 인격을 받길 원한다. 그것을 나한테 깨뜨려 줄 수 없겠니?”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리기 전까지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에 있던 목사님이 시골교회 부흥회를 갔는데, 헌금을 내는 것입니다. 감자가 하나 올라와 있더래요. 이마 머리통만한 감자를 신문지로 싸서 올려놓은 것입니다. 헌금이라고. 돈이 없으니까. 그러면서 축복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 이 물질을 바친 사람에게 천배나 축복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감자 천 개라 봐야 얼마나 되겠습니다. 만원도 안 되겠습니다. 십 만원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때 가격으로 뭐 오십 원씩 쳐봐야 천개라고 해도 오 만원밖에 안되니까 “아이 내가 그때 십만 배라고 기도를 못해줬는지 후회가 된다”고 늘 그러시는데. 당신은 이렇게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그 눈물을 흘리며 축복기도를 해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에겐 그게 옥합이었습니다. 집을 아무리, 화전민 하는 그 할머니가 아무리 뒤지면서 찾아봐도 그 감자 큰 것, 그게 가장 큰 거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상대적으로 우리가 뛰어난 어떤 것들을 가지고 와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아들아, 너는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향유를 부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향유를 부은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주님이 의미를 부여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죽으면 즉시 향유를 바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향유를 바른 기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와서 향유를 부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여인이 향유 부은 사건을 예언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부지불식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미리 예언하는 이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 사건을 가르쳐서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을 기억했던 제자는 빼놓지 않고 이 사건을 이 복음서에 기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건을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것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이 여자를 떠받들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이런 주님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십자가의 복음 앞에 감격하고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앞에 진실로 자기가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이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깨뜨려지고 난후에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가슴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인격적으로 깨뜨려질 뿐만 아니라 또한 헌신된 삶에 있어서도 깨뜨려지는 역사가 예수를 만나는 곳마다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이 역사하고 그 역사하는 복음 앞에 굴복하고 그리고 은혜를 받은 심령들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가슴속에 넘쳐나는 놀라운 역사가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이 역사하는 곳 마다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에 있어서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헌신하지 않는 것, 이것은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가 아까워요? 뭐가 아까워요?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셨는데 무엇이 아까워요?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아낌없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허비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제목은 “하나님, 어찌하든지 날 좀 허비해 주십시오. 내 인생을 허드렛물이라도 좋으니 주님의 나라의 그릇을 설거지 하는 데라도 써 주십시오. 그것이 영광이옵나이다.” 이러한 다급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격의 향유를 그리스도 발 앞에 가지고 와서 깨뜨려서 그 머리에 붓는 역사가 일어날 때 온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 이기적인 마음이 깨뜨려져서 그래서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귀한 것을 드리고자 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만이 아니라 교회가 너무 너무 기쁩니다. 기도를 이렇게 하다보면, 어떤 사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너무 너무 즐거운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다 보면 심령이 너무 괴롭습니다. ‘주여, 어찌 하시려나이까. 저 물건을 어찌하면 좋겠사옵나이까? 주님, 은혜를 내리시옵소서.’ 해결은 무엇입니까? 주의 사랑이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교만한 심령을 부수고 헌신의 옥합을 그리스도 앞에 깨뜨리게 만들어 주는 이것이 바로 이러한 심령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서 이러한 헌신의 옥합을 딱 깨뜨려서 붓기만 하면은 이것은 누구도 못 말려요.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어 합니다. 아낌없이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서 헌신하면서 서로 잘났다고 칼부림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동기가 사랑이 아니니까 다른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할 수 있거든. 할 수 있잖아요? 그 동기 아니래도 다른 동기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동기가 들어오게 되니까 예수의 정신으로 헌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신하는 것만큼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큰 직분 맡으면 큰일납니다. 정말 칼부림 난다구요. 자기를 좀 죽여야 됩니다. 언제까지 자아가 살아서 역사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헌신이 메마르는 것은 깨뜨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서 조사해보고 그런 교회가 있으면 한번 저한테 와서 알려주십시오. 그건 진짜 박사학위 논문감입니다. 매일 예배드릴 때마다 매주 예배드릴 때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 앞에 심령들이 깨뜨려지고 눈물로 예배를 드리는데 헌신이 절대 없다 한번가지고 와보십시오. 그건 연구감입니다. 세상에서 그런 게 있을 수 없습니다.
보배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그 다음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찬양)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의 옥합이 깨뜨려지기만 하면 그 교회는 자기는 이 교회에 있을만한 가치가 하나도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 교회를 나와 주는데.’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뭐가 불쌍합니까? 그런 사람을 데리고 있는 교회도 불쌍하고 또 그런 교회 나오고 있는 그 사람도 불쌍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깨뜨려져서 헌신의 옥합이 깨뜨려 지기만 하면은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과 그리고 하나님의 한 모퉁이를 섬기는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며 충성하며 살고 싶은 이러한 간절한 사랑이 내안에서 역사하는 힘에 넘치도록 수고하면서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면 심령이 괴롭고 불편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라.’ 이런 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이 그 교회에 사람들을 보내지 않으시면 어디로 보내시겠습니까? 주님이 역사하는 교회가 바로 이러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깨뜨려지면 그런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다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로 돌아와서 향유 옥합을 깨뜨리자 그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깨뜨려진 헌신은 수많은 사람의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 역사를 읽으면서 그 놀라운 역사를 보았습니다. 인도로 선교를 나간 한 선교사가 그곳에서 선교를 하다가 비참하게 그 인디언들에게, 인도에 있는 그 토인들에게 비참하게 찢겨 죽었습니다. 처참하게 찢겨죽었습니다. 그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던 어느 그리스도인 중의 한사람이 교회에 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유능하지 않는 유창하지 않는 인도말로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들고 덤벼드는 그 토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나를 죽일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이외에 여러분들을 구원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오십시오. 그 말을 못 마치고 그 칼이 목으로 들어와서 피가 솟구치는 장면을 보았다 이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 간증을 하고 나니까 그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파송했던 단 한사람의 인도 선교사가 순교했습니다. 누가 이 뒤를 이을 사람 없습니까.” 벌떼 같은 젊은이들이 그 자리에서 젊음을 인도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외치면서 일어섰습니다.
한 사람의 깨뜨려지는 헌신은 수많은 사람의 헌신을 불러일으킵니다. 한 사람의 이기심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못을 박고 교회에 상처를 냅니다만 한 사람이 완전히 깨뜨려지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완전히 죽어져야 하리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의 인생을, 고귀한 것을 깨뜨리고 보배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의 모든 삶을 드리나이다.’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한사람의 헌신이 잠자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에 향한 사랑을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아골 골짜기로 빈들로 다녔던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피 뿌리며 죽어가길 원했던 위대한 선지자, 그 선구자들, 그 선교사들, 마음속에는 한결같이 어떤 존경하는 선교사가 가슴에 있습니다. 헌신되게 살다 죽어간 모범적인 선교사가 있습니다. 지금도 OMF선교사들의 전통이 뭔지 아세요? 선교지로 가면 그 나라가 어디든지 그날 저녁에 봇짐을 풀지 않고 고요히 첫 번째 임지에서 무릎을 꿇고 유서를 쓰는 일로 사역을 시작합니다. 마지막 유서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깨어진 헌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헌신의 불을 붙입니다. 한 사람의 깨뜨려진 인격은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옥합을 깨뜨리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따라서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기념한 이 여인의 행적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는 그곳마다 사람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녹아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 앞에 녹아지자 그들은 자기의 모난 인격의 향유 옥합을 가져와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 깨뜨렸습니다. 자존심도 깨뜨렸고 그리고 모난 인격도 깨뜨렸습니다. 누구를 위해서도 드릴 수 없었던 이기심들을 그 앞에 무참히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수많은 사람의 헌신을 불러 일으켰고 한 사람의 밀알과 같은 죽음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이 땅에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언제든지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던 곳마다 교회가 섰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죽이면 죽일수록 그 피는 흘러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을 옥에 가두고 투옥을 하면 할수록 그 고난은 잠들어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그 가슴속에 불기둥이 되어 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기념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으로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며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그 불꽃과 같은 인생을 살게 만들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날 동안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외칠 것입니다. 불꽃과 같이 사십시오. 이렇게 살지 않는 것은 더할 나위없는 죄악인 것입니다. 불꽃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이 놀라운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힘입은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 최대의 죄악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나는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들이여, 이 어두운 세상을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꽃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로도 끌 수 없고 불로도 끌 수 없습니다.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찬란한 빛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찬란한 불꽃은 깨뜨려진 향유 옥합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향유에 불을 붙일 때 위대하게 나오는 불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부흥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성을 사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감격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런 일들을 즐겨 말하고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흥을 만나고 불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꽃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타오를 사람들을 목 놓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뜨려진 사람들을 향유 옥합을 그리스도 예수 앞에 기꺼이 깨뜨렸던 이 모든 사람들을 어두운 세상의 불꽃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불꽃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고 불꽃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면 죄악이 아닙니다. 여러분, 순간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앞에 불꽃과 같이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타오를 향유를 부어달라고 그 작은 불꽃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너희 모난 인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이 불길에 부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기심을 깨뜨리고 헌신되지 않은 우리 자신을 깨뜨려서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에 부었던 이 여인처럼 그 깨뜨려진 옥합의 그 향유를 부어 타오르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어두운 세상이 우리에게 남은 날은 며칠 일까요? 어떤 사람은 일년을 혹은 이년을 혹은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갈 것입니다. 여러분, 슬픔과 죄가 많은 이 세상에 여러분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삼십년, 사십년을 속았으면 이제 됐습니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증거는 성경의 증거와 일치합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니 이는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세상에 있는 정욕도 지나가고 모든 육신의 것은 지나가지만은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영원하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이 답답하고 암울한 영적인 시대를 바라보면서 피맺힌 절규로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불꽃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요 불꽃과 같이 타오르는 것이 아니면 주님을 위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아낌없이 향유를 깨뜨려 부었던 이 여인이 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마다 이 여인과 같이 아낌없이 자기의 향유 옥합을 깨뜨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그를 기뻐하시고 세상이 그 앞에 어떠한 유혹과 벗과 암초를 놓고 주님을 사랑하려고 살아가려고 하던 그를 향하여 어떠한 도전과 시련과 위기를 그 앞에 남겨놓았다 할지라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아노라. 나는 네 편이다.”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어두운 교회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불꽃과 같이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인생이 이 땅에서 오래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원하는 바는 ‘타오르게 하옵소서. 불꽃과 같이 어두운 하늘에 섬광과 같이 산화하여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약속된 하나님의 복음의 위대한 진리가 우리 속에 역사할 때 얼마나 폭발적인 불꽃이 이 어두운 세상을 비취고 그 불꽃을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갈 수 있는지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러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말했습니다. 괴로움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는 주님의 보좌를 바라보았던 모든 사람들은 불꽃과 같이 어두운 시대를 지났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 사무치는 열망으로 이곳에 섰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그리고 우리 속에 마지막 감추고 내어 놓지 않은 그 향유가 그리스도 예수 앞에 깨뜨려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지나면서 우리 모든 삶을 아낌없이 불태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여러분들의 생애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열린 문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7-8)
‘열린 교회’, 이것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사당동에 있다고 알려진 그 열린 교회를 선전하는 시간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간판이 아무리 멋있어도 실제 내용이 간판 값을 못하면 간판이 아까운 법입니다. ‘사랑교회’ 라고 써 붙여놓고 매일 싸움이나 하면 차라리 다투는 교회라고 솔직하게 써 붙이는 것이 정직합니다. 여러분 ‘친절상회’라는 간판을 써놓은 집이 하나 있었는데 이 집은 갔다 하면 늘 불쾌한 일을 당하고 돌아오는 상점입니다. 이런 집은 간판에 어울리는 상점이 아닙니다. 간판이 이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열린 교회를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열린 교회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본문은 사실 열린 교회라는 이름을 짓게 된 본문입니다. 한 번도 이 본문을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제를 살펴보면서 우리 개인의 문제도 함께 짚어 가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교회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이 뗄 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힘이 없고, 또 돌아가기를 원해도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혼돈과 어두움의 안개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 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산에 간다고 하면, 부산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는 엑셀을 부지런히 밟아서 빨리빨리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빨리 달리기 위해서 먼저 천천히 달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천천히 달리면서 표지판을 똑바로 확인하고, 이 길이 부산으로 가는 길이 틀림이 없는가? 확인을 하고, 부산 가는 길로 들어서서 빨리 밟아야지 어디인지도 모르고 이리로 가면 부산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마구 밟으면 나중에 어떤 사태가 발생하느냐 하면 더 먼 길을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런 면에서 오늘도 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신앙의 유턴을 한번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문제를 잘 드러내고,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길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주면, 우리는 저절로 우리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불통하는 요인들을 확대한 것이 교회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불통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다시 말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떠할 때에 하나님과 형통 하다면 그 원리를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형통한 관계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요한 계시록에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나와 있는 수많은 상징과 의미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 알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암호처럼 모두 다 알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요한 계시록이 미래의 일을 말하고, 하늘의 기이한 비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심판의 역사를 알려주기 전에, 1장은 서론이고, 2장과 3장에서 장시간에 걸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먼저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 드립니다마는 성경에서는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열고 보여주시는 그 기이한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있을 교인들에게 즉시 그것을 소개하지 아니하고, 현재 있는 교회들을 평가하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교회를 시작으로 해서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곱 교회를 상징으로 해석을 합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교회 역사 시대를 7로 나누어서 첫 번째 초대교회 시대는 에베소 교회 시대이고, 그 다음 시대는 서머나 시대이고 그 다음 시대는 두아디라, 버가모, 이런 교회시대로 나누어서 마지막 주님이 오시는 20세기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시대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이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오늘 우리가 읽으려고 하는 바로 앞에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대개17세기말이나 18세기 19세기의 교회가 될 터인데, 그때에 교회의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교회사에 커다란 각성과 부흥의 시대였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면이 많았던 융성한 교회 시대였으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말 할 수도 있고, 또 오늘날의 시대를 보면 여러분 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많은 교회가 잠들어 있는 시대를 당했기 때문에 이 라오디게아 교회 같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시대, 말하자면은 신앙적인 냉각 시대를 당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많이 그 타당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성경 해석학 적으로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두들 부정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먼저 이 일곱 교회는 진짜 그 시대에 존재하였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일곱 교회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가까운 곳에 그렇게 모여 있었습니다. 위치가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이 있고, 이스라엘에서 지중해가 펼쳐지는데 지중해 북쪽쯤 올라가면 이탈리아에서 건너편으로 마주 보이는 그 반도가 소아시아 인데 거기에 이 일곱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일곱 개의 실제 존재하던 교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대단히 흥미 있는 관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역사에 일어날 마지막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기에 앞서서 교회의 형편을 먼저 알리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심판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심판을 받고, 그리고 거기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른 다음에 그 교회와 함께 이 세상이 평가 받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이 서론적인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 언급을 하고 넘어 가자면 이 교회들이, 어떤 교회는 실제로 존재 했던 교회인 것과 함께 또한 앞으로 세워 지게 될 주님 오시기전까지의 모든 교회들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다양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받았고, 어떤 교회는 책망만 받았고, 또 어떤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다행히도 책망도 받지 않고, 오직 칭찬만을 받았던 그야말로 아시아에 불꽃처럼 빛나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그렇게 빛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열린 교회였었다는 것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우선 헬라 시대 때에 세워진, 그 빌라델비아는 원래 도시 이름입니다. 필라테프스 2세라고 하는 버가먼의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형을 너무 사랑 했습니다. 그래서 형을 너무 사랑해서 그 도시 이름을 ‘사랑하는 형’이라고 붙였습니다. ‘필로스’, ‘아델포스’ 두개가 합쳐져서 ‘사랑’, ‘형’, 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 이름을 지어서 이것이 ‘빌라델비아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헬라 나라에서 언어와 문화 이런 것들을, 말하자면 루디아 지방과 이쪽 지방으로 부루기아 지방으로 전파 하기위해서 세워놓은 문화의 요충지 였고, 또 도시 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이 본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서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겠습니다. 7절은 우리에게 말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댜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그랬습니다. 우선 이 편지가 사도 요한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열고 계시를 주시고, 그에게 음성으로 들려주실 때에, “내가 이제 이 교회들을 평가 하는데 이 교회들에 대한 평가를 너는 받아써라. 그리고 그 소식을 각 교회에게 알려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세상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 하든지 간에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불꽃과 같이 빛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눈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평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을 향해서 내리신 성적표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성공한 교회라고 매긴 그 성적표 두 개를 비교해 놓는다면 아마 일치하는 교회도 있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교회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서 여러분들 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교회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변하여서 부끄러움으로 변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초라한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자괴심이 변하여 영광스러운 자존심으로 변할 수 도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더욱이 시대가 깨어있지 못한 시대에는 하나님의 시각이 ‘북’이면 인간의 시각은 ‘남’일 때가 많고, 인간의 시각이 ‘동’, 이면 하나님의 시각은 ‘서’ 일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한꺼번에 심판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심판은 말세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심판 하신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행에 옮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 개인이나, 하나님의 교회나, 말 할 것도 없이 모든 교회와 개인들은 불꽃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동자 앞에 모두 드러나고, 그리고 그 교회 하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평가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평가가 인간의 평가이면, 우리는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인간의 평가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이 평가가 사람의 평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회를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고 그의 판단에는 하자가 없고 그리고 그의 판단과 그의 내리시는 평가에는 조금도, 추호도 착오가 없는 완전하고, 그리고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리시는 평가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면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불꽃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동자 앞에 나의 모든 삶과, 나의 생애와, 그리고 나의 모든 교회와, 그리고 이 모든 우리의 섬김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모든 믿음의 현장들이 낱낱이 드러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기억 하면서 우리는 늘 이런 떨리는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더 하고 싶지마는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성경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사도 요한에게, ‘너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하라’고 그렇게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사도 요한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교회는 빌리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이 말은 함께 놓일 수 없는 두 단어가 모여서 하나의 교회 이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델비아’ 라고 하는 땅 이름이고, 또 하나는 ‘교회’라고 하는 명사입니다. 여러분 다행히 우리는 ‘열린교회’라고 지었지만 만약에 우리가 이 교회이름을 ‘사당동교회’라고 지었다면,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사당동에 있는 교회를 의미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무엇을 의미 할까요?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를 의미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있는 교회는 이렇게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교회가 아니라, 도시에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큰 교회가 있느냐? 그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불렀습니다. 그러면 그 흩어져 있는 교회들은 무엇이냐 하면 가정 교회였습니다. 동아리 동아리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런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 감독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빌라델비아’라고 하는 도시와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고 하는 이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말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은 그렇게 훌륭한 말이 아닙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헬라 사람들의 문화를 부루기아와 그리고 곳곳에 전파하기 위해서 세운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사명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 이 도시의 사명이 아니라, 이 빌라델비아라고 하는 도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메마른 도시였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 신을 좇고, 자기의 육신의 이욕을 좇고, 자기의 유익을 좇아서 생활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당동 과 똑 같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낮이면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이리 저리 움직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고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파는 일들이 있었고 매매 하는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지나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낮에도 속이고, 저울을 속이고, 그리고 외상값을 떼어먹고 도망가는, 이러한 인간의 삶이 적나라하게 그대로 표출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빌라델비아 라고 하는 도시의 이름입니다. 여러분! 해가 지고 나면 틀림없이 이 동네에서는 음식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리고 더 깊어지면 술집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여관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새벽 4시쯤 되어서 어두운 골목길을 헤치고 가노라면 여기저기 토해 놓은 오물들과 술 먹고 뱉어놓은, 이런 오물들이 가득 쌓여있는 곳, 이곳이 사당동 입니다. 그런 곳이 바로 빌라델비아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시에 가득한 그곳, 그곳은 언제나 시대는 틀려도 언제든지 이런 식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거기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고, 이 교회는, 이 도시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한없이 입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고민하며 모인 장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영원히 세상과 구별되고 단절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구별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세에, 세속에 빠진 도시를 떠나서 산속으로, 산속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피해서 달아났던 때에 결국은 중세의 심한 타락 밖에 가져온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지극히 타락한 도시일수록 더욱더 그 도시는 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죄악이 가득할수록 그 도시는 더욱더 교회를 필요로 하고, 세상이 어둡고 타락하면 타락 할수록 어두운 세상은 하나님의 교회를 더더욱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교회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것을 인해서 슬퍼하거나 낙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워놓으셨을 때,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어두운 세상을 도전하고, 그 어두운 세상에 불을 비춰 그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들로 나타나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제가 많은 도시에서, 그 문제 많은 도시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시로 바꿔놓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처절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와 뒤에 있는 ‘교회’라는 이 두 낱말이 우리에게 이런 그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과 떨어질 수 없는 교회, 그리고 이 세속적인 세상의 풍조와 결별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큰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하고,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세상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을 받고, 세상으로 나아갈 때, 마치 주일저녁이 되고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 출근할 때가 되면, 가서는 안 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그렇게 지겨운 마음으로 세상에 들어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곳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곳은 우리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 하느냐에 따라서 그 도시는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도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강남에 있는데, 이 강남에서 하루 저녁 30억 원 어치 술이 팔린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모든 문화는 강남이 주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서울의 문화는 강남이 주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남의 문화는 무엇입니까? 술 먹고, 타락하고, 이런 모든 문화가 강남에 의해서 주도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욕을 먹는 압구정동 오렌지족, 이런 이야기들이 전부다 강남에서 나오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들은 전부 다 강남에 모여 있습니다. 이것은 뭔가 중대하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것이 바로 ‘빌라델비아’와 ‘교회’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은 성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 가운데 오셔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처럼 주님은 여전히 우리가운데 오셔서 성령으로 다스리고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를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노래하기를 기뻐합니다. 우리 개인이 은혜를 받으면, 교회가 은혜를 받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똑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 하라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 하라”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의 모든 감각이 깨어서 오로지 우리를 구하신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죄와 슬픔이 많은 이곳에서 우리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이 시간에도 우리의 죄악을 능가하는 은혜의 제방으로 심판을 막으시고,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기를 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감각들이 깨어나서 그 이름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노래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우리는 작은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 그런데 이 작은 교회와 큰 교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큰 교회가 시들시들하면 반드시 작은 교회가 시들시들해 집니다. 작은 교회가 성령 충만해야만 그 작은 교회들이 모였을 때 큰 교회가 성령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빌라델비아’라고 하는 불신의 도시 한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결국은 문제가 많은 가정, 문제가 많은 사회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만 그렇게 서기 싫다.’ 그것은 이미 예수를 믿을 때에 그렇게 결정된 것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게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딱 서있을 때 주위를 돌아보면서 ‘내 주위에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아? 나만 홀로 살았으면 잘 믿고 살다가 죽겠는데 나는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참 다시 태어나서도 직면 하고 싶지 않은 이런 문제들로 쌓여서 내가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오거들랑 여러분! 오늘 이것을 기억 하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라델비아’ 라고 하는 문제가 많은 도시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거기 도시가 있어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나요? 교회가 거기 있어서 도시를 만드셨나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문제가 있는 도시가 있기에 하나님이 거기에 교회를 두셨습니다.
왜 여러분들을 예수 믿고 은혜 받게 만드셨습니까? 문제가 있는 곳에 살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아무리 여러분의 가정을 내려다보아도 엄마를 봐도 소망이 없고, 아빠를 봐도 소망이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봐도 더 소망이 없고, 밑에 언니, 누나, 삼촌 다 둘러봐도 소망의 싹이 보이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투성이 일뿐입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죄를 물 먹듯 마시면서 삽니다. 그러면서 그 물 도 잘 못 먹어 체해 가지고 쾍쾍 거리면서 고통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가정을 어떻게 구 하십니까? 그 가정에 예수 믿는 사람을 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먼저 있었습니까? 아니면, 문제가 많은 환경이 먼저 있었습니까? 문제가 많은 환경이 먼저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요번에 풀어가면서 그 이야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많은 그 현장에 내가 살고 싶지 않다.’ 그러면 은혜를 반납 하십시오 그러면 간단합니다. 은혜 반납하고 지구를 떠나십시오. ‘뿅!’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일수불퇴 입니다. 하나님 절대 안 물러 주십니다. 한번 은혜 받으면 안 물러주십니다. 사명을 다 맡기십니다. 만약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사명을 거부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사경회를 하고 매일 듣는 말씀인데, 매일 먹는 그 밥이 그 밥 입니다. 그런데 이 사경회 때는 밥을 고봉으로 떠서 먹는 것입니다. 1시간쯤 설교하다가 2시간, 아침에는 3시간 넘게 했으니까 밥을 좀 넉넉하게 먹자는 것입니다. 맛은 그 맛이 그 맛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경회를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 좋다 아! 좋다.” 그러기 위해서 입니까? 여기는 오락실이 아닙니다. 감상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냥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살아도 되는데 문제는 많고 우리의 신앙의 힘은 너무 작습니다. 그런데 늘 문제 많은 그 곳을 피할 수는 없는데, 그 속에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심지어 그 문제에 눌려서 ‘주여 죽겠사옵나이다.’ 그렇게 고통 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이번 사경회 때에 영양 보충하고, 다시 한 번 밥 먹은 다음에 칼 좀 갈고, 총도 다시 닦고, 실탄도 보급 받고, 긴 칼 옆에 차고 투구를 다시 쓰고, 흉배를 붙이고, 그리고 다시 한 번 군화도 새로 나왔다는 그 좋은 것으로 공급을 받고, 그리고 탄띠도 다시 매고, 전신갑주를 입고, 돌격 앞으로 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들이 모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를 원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회가 딱 끝나고 나면 여러분들은 즉시 이 변화산과 같은 곳에서 내려가서 문제가 많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앞에 은혜 받고 내려가면 문제가 ‘뿅’ 하고 변해 가지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다 녹아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내려가는데, 그 대신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면 이 문제 많은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전에 없었던 기이한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과 능력을 가지고 가서 이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싸워서 이겨야 신이 나는 것 아닙니까? 막 싸우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기권 한다면 그것처럼 싱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세상에서 문제와 더불어 싸워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가 다 끝난 다음 “휴, 끝났다.” 이것이 아니라 “주님! 날 보내소서. 날 보내소서.”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앙적인 형편이 어떠하고,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평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기를 원하셨는데, 그때에 빌라델비아의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신문지에 써서 수천 장 인쇄해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뿌려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 하시지 않고, 너는 빌라델비아 지방을 목회하는 한 사자에게 편지를 써라, 여기에 영어 성경에는 ‘엔젤’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천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빌라델비아를 지키는 ‘천사’ 라고 말 합니다. 아니, 천사는 영물인데 무슨 편지를 받겠습니까? 천사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가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피조물인데, 그 피조물에게 인간인 요한이 이 영물인 천사에게 빌라델비아 교회에 관해서 보고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여기에 나오는 ‘천사’, ‘사자’, ‘angel’이라고 표현된 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는 빌라델비아 지방을 목회하고 있는 감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편지는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묶고, 인봉을 합니다. 풀을 수 없게, 그래서 누구 앞이라고 하면, 그 수취인이 그것을 인봉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를 알려 주시다 인봉 된 두루마리를 보여 주시자 요한이 자기가 그것을 풀을 수 없으니까 통곡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는지 안 들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들고 안 들고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교회에 있어서 하나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교회를 목양하도록 세우고 교회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교회의 수준은 목회자의 수준에 밑돌 수는 있지마는 목회자의 수준을 추월하는 교회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한 교회가 목회자의 신앙이나 영적인 수준을 밑도는 교회는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에 목회자의 영적인 수준을 능가하는 수준의 뛰어난 교회가 그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일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온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 해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족 하니까 그렇지요? 무슨 뜻입니까?
(예화) 마이크 하나에 8000원부터 200만원까지 다양한 성능의 마이크가 있습니다.
여러분! 같은 사람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이크가 어떤 마이크냐에 따라서 이 음성을 그대로 전해주기도 하고 그대로 전해주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그래도 이 교회에 마이크를 살 돈이 없어서 8000원 짜리 마이크를 갖다 놓았다면 할 수없이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목회자를 통해서 교회에 일하시는 장면이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그 목회자로 하여금 충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전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되도록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런 좋은 성능을 유지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은 제일 먼저 그 기도에 힘 써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탁월한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좀 더 쉽게 생각을 해 보면 이런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요한에게 예수님이 쓰라고 하셨으니까 썼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해서 아무도 못 보게 봉해서 누군가를 통해서 인편에 보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빌라델비아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다니는 주일학교 학생한테 “이거 너네 교회에 대해 주님이 평가 한 것인데 가서 소문내라.” 이 학생이 그것을 복사기로 써 붙여 가지고 온 교회에 방을 붙이며 다녔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에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감독에게 이 편지는 누구도 보지 않은 채 누구에게 갑니까? 감독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떨리는 손으로 이 편지를 뜯어보았을 것입니다. 왜?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증언이라 써 있었습니다. 딱 뜯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어떻게 평가 하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받은 평가를 가지고 이제는 교인들에게 알려야 되었을 것입니다. 제일 구슬픈 목회자는 사데 교회의 목회자였을 것입니다. 편지를 열자마자 나오는 것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너네 교회는 죽은 교회다” 이것이 편지의 시작 이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올라가서 “주님이 우리 교회에 대해서 점수를 매기셨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와-아” 그러면서 교인들의 머리속에 별의 별 생각이 다 지나갔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래도 파이프 오르간, 그러면 우리교회 따라올 교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 우리교회가 최초에 빨간 벽돌 교회야 옛날에 순교자를 내었는데 우리 교회처럼 목사님 사례금 많이 주는 교회가 어디 있어? 우린 교역자가 100명이야.” 그러고 떠들었는데 그런 생각을 잔뜩 하고 있는데, 그런데, 감독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우리 교회를 점수를 매기셨는데 “빵점,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얼마나 비참 하겠습니까?
그 다음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경우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가 너희를 토하여 내 치리라” 그런데 아!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탁 열린 것이 무엇이냐 하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 연 문을 누구도 닫을 자가 없을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구나.” 할렐루야!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렇게 편지를 받은 것처럼 지금도 역시 하나님의 교회에는 이런 강력한 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오늘 이 놓여있는 교회의 형편과,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내고, 그 음성을 듣고, 그리고 그 편지를 열어보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이러한 신령한 강단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고 그리고 주님의 그 장중에 붙잡힌 그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그 사람에 의해서 목양을 받는 이 교회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든지 돌이킬 수 있고, 언제든지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비춰 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인정해주고 우리를 얼러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들어야 할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인 주님께서 결정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한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렇게 강력한 영권을 지니고 하나님 손에 붙잡힌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고 있지 못하다는데 모든 교회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오면 주님은 분명히 성도들에게 물을 것입니다. “너희가 과연 얼마나 너희의 교회를 목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음성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 들이 주님의 전능하신 손에만 붙잡혀서 이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충실한 도구가 되기를 위하여, 진정으로 자기의 영혼에 공급해 주는 하나님의 대언자를 위하여 애정을 가지고 기도하였느냐?”하고 말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은 강단에서 나오는 메시지에 경청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교회에 대한 평가를 들려 주기 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네 본 것은 네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7교회니라”고 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붙잡고 계십니다. 성경은 일곱 금 촛대를 붙잡았다고 말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1층 교회나 2층 교회나 지상 교회나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모든 교회를 붙잡고 계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붙잡고 계시다는 이 말을 여러분들은 기뻐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교회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을 때는 그 붙잡은 손이 축복의 손이 될 수 있거니와, 하나님 자녀들이 그 교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붙잡은 그 손으로 교회의 촛대를 옮겨 놓으실 수도 있다고 오늘 성경은 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교회를 붙잡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일곱 촛대를 붙잡고 계십니다. 촛대를 붙잡으신 그 손으로 동시에 또 일곱 교회를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곱 별은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말씀의 사자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한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충실한 대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그리스도 예수의 그 강력한 손에 붙잡혀 있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들은 기도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강하게 붙잡힌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는 그들의 손에 의하여서 그들을 통하여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서 언젠가는 부흥하고, 변화되고, 새롭게 생명을 누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와 그리고 모든 사역자를 위해서 우리는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잡으신 그 손을 놓지 마시고 끝까지 붙잡아 주시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탄원하며 간구해야 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성도들은 이러한 고민들을 저버리고 마치 교회를 편의점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오해는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문제가 많든 적든 그 사람이 영적인 삶을 어떻게 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한 교회에 대한 평가를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 보내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드디어 입을 여셔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신말씀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덧붙여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 이였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평가 하고 계시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정확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감사 하기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뇌물을 먹고 적당히 덮어 주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망신을 당하는 사례를 신문에서 자주 읽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정직하신 분이십니다. 진실 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거룩함을 추구하고 진실한 사람들만이, 진실하고 거룩한 성품을 가지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 그럽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서에 보면 이 열쇠에 대해서 말 합니다. 다윗집의 열쇠다. 무슨 뜻입니까? 다윗이 다스리고 있던 나라, 그 나라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 궁, 그 다윗 궁에 그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구약시대의 사람인데 그 구약의 열쇠를 가져서 무엇 합니까? 그것의 의미는 이런 의미입니다. 신약 성경은 자주 다윗 왕궁에 대한, 다윗 왕국을 회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다윗 왕국을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왕국, 다윗의 집’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시대를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이유, 오죽 그리워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는 그 지경에서도 다윗의 왕국을 그 나라를, 그 나라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윗 왕국으로 통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이스라엘 에게 회복시켜 주실 때가 이 때니이까?” 하고 물을 때도 역시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다윗의 왕국에 대해 향수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났던 모든 왕들 가운데 다윗이 다스리던 때에 가장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권세와 이런 것들이 혁혁하게 들어 났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윗 시대 때에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진짜 실질적인 주인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던 때가 다윗 왕국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는 그 나라의 열쇠를 가지신 이, 하나님이 완전히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천국의 열쇠를 가지신 이 그분은 그 열쇠를 가지고 문을 닫기도 하시고 열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데 그분이 한번 열고 이 사람을 향해서 열어놓아야 겠다고 하시면 그 누구도 닫을 수가 없고, 닫아버리고 열지 말아야겠다 결심하시면 누구도 열 수가 없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말씀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절에 보니까 무엇이라고 하셨느냐 하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 그러셨습니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다른 교회는 없는 특별히 내리신 축복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책망을 안 받고 칭찬만 받은 것으로 보아서 이 교회는 아주 특별한 신앙적인 삶을 살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으면 뭐도 잘 하고 뭐도 잘 하고 칭찬을 해 줄 터인데 오히려 그렇게 칭찬을 받은 에베소 교회는 칭찬 끝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네 행위와 수고를 알고 네 인내를 알고 악한 자를 용납지 않고 또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냈고 참고 견디고 게으르고 이것을 내가 다 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런데 이 교회는 그렇게 칭찬은 간단했습니다. 축복이 간단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 할렐루야!
우리가 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많은 환경 속에 서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데, 그 환경에 우리를 두셨을 때 하나님이 원 하시는 바는, 그 문제가 많은 땅을 정복하고, 그리고 평정하고, 그리고 도전하는 세력들을 훼파 하고,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그 땅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참된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게 되기를 원하는 이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요,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내가 먼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말 할 것도 없이 거기에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호적을 100번 파도 그 상황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 가정 속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그리고 상처만 안고 살아가는 불쌍하고 미천한 그 인생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어루만지고 고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을 믿되 신통치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일깨우고 하나님의 교훈으로 그들을 이끌고 기도로 그들을 도와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런 삶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서 사명을 가지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문제가 많은 그곳 한복판에 두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많은 그 한복판에 두실 때 우리에게는 분명히 약속이 깃들어져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가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라 말씀 하셨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떤 분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모두 내게 주셨으니”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고통 받을 때 함께 옆에서 눈물 흘리면서, 우리가 잘 하면 박수나 치시면서 응원이나 보내주시는 그런 후원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으니 그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가지고 믿음으로 싸워서 쟁취하고 이기면서 문제 많은 세상을 평정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깃발을 꽂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하나씩 토벌 하면서 그 이스라엘의 깃발을 꽂았던 것처럼, 그렇게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올 때 이미 그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완료형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매일 싸워야 했습니다. 전투를 하게 되면 이기게 되었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전투하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고, 이기고 나면 반드시 땅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실패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이 땅을 주셨는데도 그 땅을 누리고 갖지 못하고 오히려 원주민들에게 억압을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 이었습니까? 하나님이 환경을 향하여서 우리의 문을 여시고 있는 한 우리는 환경을 정복하고 지배할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를 믿게 된 이 사건은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천당 가는 구도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천당 가는 구도가 아니라 천당 갈 때까지 지옥과 같은 세상을 천국처럼 바꾸는 도구로 우리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예수를 안 믿고 여기도 많습니다. 인생 막차 탔던 사람, 그 막장까지 갔던 사람들 벼랑에 서서 죽을까? 말까? 이것 하던 사람들, 돈으로도 약으로도 치유 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인생 막다른 벼랑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깨어지고, 은혜를 받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때 어떻습니까? 겹겹이 둘러싸여서 아무 희망도 없고 이제는 완전히 코너에 몰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문이, 열린 문이 턱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나는 인생 막차를 탔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살아도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 살리셔서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받은 나를 통해서 이제는 나처럼 인생 막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나를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샬롬을 창출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고 눈물로 기도해 주고 “너는 하나님과 평화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임하리라.” 인생 막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이제나 죽을까 저제나 죽을까 슬쩍 죽어버릴까 팍 죽어버릴까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콱 죽지 말고 그러면 어떻게 ‘꽥?’ 아니 ‘확’ 살아나 그러면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로 되돌려 놓는… 할렐루야! 그러면 그 사람이 진짜 축복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냐는 말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을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교인이 만 명이 모여도 전도하러 다니는 사람은 몇 십 명입니다. 교인이 100명이라도 전도 하러 다니는 사람은 10명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 앞에 열린 문을 주실 때 그때에 환경이 이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고쳐나가면서 그러면서 앞길을 펼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의 이야기를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을 요단강에 들여놓자 자 요단강물이 마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으로 이 일을 했습니까? 믿음으로 이일을 했습니다. 이적을 보고 홍해를 건넜던 그 이적을 본 믿음이 아니라, 이제는 이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그 믿음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믿음이 이적을 만들어내는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현실을 바꿔놓고 고쳐야 할 사명을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 이 사명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영혼을 좀 돌보아 주십시오.” 그러니까 하는 말이 “저 하나도 버겁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앞에 열린 문이 없으니까 내가 환경을 변화 시킨다는 그것은 그만두고 나 자신이나 살았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영적인 전쟁에 무승부는 없습니다. 내가 지고 있든가, 이기고 있든가, 둘 중에 하나를 통해서만 평화가 옵니다.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우리 앞에 환경을 지배하고, 그리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영적인 열린 문을 우리 앞에 두어야만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야만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뿐만 아니라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은혜를 체험 하신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은혜를 체험하면서 때로는 ‘아!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면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예수를 믿어도 내가 은혜를 받지 않았다면, 내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죽어도 모르고 결국은 사람 원망하고 팔자 타령하다가 예수 믿으면서 결국은 환경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리고 마음속에서 한없는 쓴 물을 내다가 사람들을 미워하는 살인의 감정까지 품다가 한 많은 인생을 화병으로 마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삶을 살아 갈 위기에 놓여 있을 사람들을,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자,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오히려 강물과 같은 은혜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이 열린 문을 통해 나아가서 이처럼 고통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대답을 던져 주는 해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해결되고 고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 하십시오, 많은 물질은 우리에게 양식은 가져다주고 우리를 배부르게는 할 수 있지만, 배고프게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돈들은 우리에게 약은 사다 줄 수 있지만 건강은 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재물은 우리에게 쾌락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해결 될 수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말 합니다. “여호와께서 저들의 원하는 모든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영혼이 파리해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을 때에만 갖는 생각입니다. 일단 그것을 소유하고 나면 여러분은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파리한 영혼의 손에 들려진 이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와 명예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축복과 형통이 결국 내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갈 의무가 있다고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가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게 열린 문으로서 이 세상을 향해서 권세와 능력을 행하면서 그러면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그리고 여건들을 풀어나가고 그리고 그것들을 어거해 나가고 그리고 그 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을, 환경과 마음의 많은 압박에서 그들을 건져내어 주고 불러내어 주는 이 일들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열어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열어 주실 때 하나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인생 살아가면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한번 문을 열어 주시니까 난공불락의 성과 같이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과 같이 요단강 건너편에 버티고 앉아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가로막고 있던 이 여리고 성과 같은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런 모든 역사가 바로 열린 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바로 이렇게 열린 문을 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이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한없이 뻗어 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이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셨고 이 열린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세상을 변화 시키고, 죄악세상 자기의 욕심과,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 죄 많은 빌라델비아 도시의 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앞에 돌아와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이 놀라운 일들은 모두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그리스도께서 두셨기 때문입니다. 형통케 하시는 열린 문을 그들 앞에 두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족이 있는데 부모 좀 꼭 예수 믿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죽어라 하고 안 믿습니다. 때로는 아양도 떨고 맛있는 것도 사다 드려보고 별의 별 수작을 다 부려보았는데도 열리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그 앞에 복음을 전 할 수 있는 열린 문을 두셔야 합니다. 영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신음하는 형제들을 건져 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는 열린 문을 그 앞에 두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실 때에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실 때에 누구도 닫을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능력과 생명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이 그냥 예수를 믿고 이름값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넘쳐서 도대체 이것을 어디다가 쏟아 놓을 곳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불꽃과 같은 생애를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화) 삼성 직원들이 잠실 운동장에서 불꽃놀이 할 때 정상적으로 터지는 불꽃과 불량품이 터지는 소리
그러니까 뭡니까? 사경회 때 은혜를 받고, ‘불꽃처럼 살 거야.’ 구호는 거창합니다. 그런데 문 앞에 딱 나가 집에 돌아가 보니 환경이 그 턱이 그 턱입니다. 자기의 기도 제목이 ‘불꽃처럼 살 거야!’ 그러고 와보면 다 타버릴 줄 알았더니 여전히 핍박 하는 아버지, 속 썩이는 동생, 그대로 도사리고 앉아 가지고 아무 것도, 쥐뿔도 변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살아야지!’ 그러면서 ‘퓨-욱’ 하고 타자마자 집에 돌아가자마자 ‘피-익’ 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주에 왜 사경회 지났는데 김이 빠졌느냐 고 하면 “저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아무것도 못 합니다.’는 그럴 때 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다음에 ‘저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익한 종 이옵나이다.’그래야지요 아무것도 해 보지도 않고 피식 꺼져 버리고 나서 저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 누가 한대요? 그런데 어떤 불꽃은 탁 붙이면 쉬이익 타오르는데. 몇 길 을 솟는 것입니다. 파-악 찬란하게 솟아오릅니다. 그런 불꽃과 같은 삶을 그리스도인이 살기 전에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나서를 하면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아침에 50명밖에 안 나오셔서 다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2가지 밖에 없습니다. 제3의 선택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 소망을 버리고 가십시오. 무엇이냐? 하나님이 문제가 많은 곳에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 은혜를 받게 하셨으니까 내가 전심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돌아가서 열린 문을 하나님이 내 앞에 주셔서 그 열린 문으로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검, 은혜의 능력으로 문제를 처리 하면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갈 것이냐? 아니면 그 일이 싫어서 사명 감당을 안 하려고 할 것이냐? 사명 감당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3등차 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환영을 받느냐 하면 세상에서 매일 천대만 받습니다. 그리고 요나 같이 배 밑창에 드러누워 자다가 뱃사공들이 와서 “너는 무엇 하는 놈이냐?” 물을 때 코너에 몰려가지고 한번 봐 달라고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문제도 해결 하면서 세상에서도 끝 발 날리는 삶을 살아보자 세상 재미도 보자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2가지 밖에 길이 없습니다. 당당하게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찬양)
나 세상 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나 세상 노래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나 세상 노래 버렸네 나 세상 좋은 것 버렸네
그러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나라’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꼭 초막으로만 보내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고관대작들 중에서도 뛰어나게 예수 잘 믿는 사람 엄청나게 많습니다.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걸어가는 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그 사명 버리고 그리고 탕자처럼 잠시 끝 발 날리는 인생을 살다가 돼지우리 간에 드러누워서 쥐엄 열매를 찾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제3의 인생 없습니까? 왜 이렇게 강도사님 극단적입니까? 왜 이렇게 중간은 없습니까? 서로 합의를 보는 세상인데, 대화로 한번 해결해 보십시다. 그 중간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직방 하나님 앞에 가서 물어보십시오. 왜 없느냐고. 없습니다. 죽을 때 까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줄다리기는 그것입니다. 이 삶의 길을 갈 것인가? 저 삶을 살 것인가? 둘 중에 하나인데 이 삶도 가고 싶고, 이 삶도 가고 싶고, 한 발은 세상에, 한 발 하나님께, 안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 물러 주십시오.” 그러나 안 물러 주십니다. 이미 끝난 것입니다.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에게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혀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저와 여러분들은 성경을 다 모릅니다. 알 필요도 별로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앞에 어떤 태산과 같은 문제들이 가로막혀 있고 여러분이 놓여있는 형편과 사정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열린 문을 두시면 그 문제는 해결되고 평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문을 닫고 계시는 한 여러분이 일찍 일어나는 것도 소용없고 늦게 수고의 떡을 먹고 잠드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도 소용이 없고 수많은 사람의 동조자를 구해서 여러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을 받고 변호를 받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다 인정해 주어도 주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으면 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여러분 잘 났다고 해도, 주님이 “못난아!” 하면 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났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자-알났다.” 그러시면 못났다는 것입니다. 잘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잘났다도 ‘잘났다’, ‘자-알났다’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열린 문을 통해서, 열린 문이라는 이 문제를 통해서 인생의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 문제없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십시오. 문제가 없으면 여기 이렇게 나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 입니다. 문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문제가 있는 곳에 성령도 역사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리 해결 하려고 노력을 해보아도 열린 문을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시면, 문제는 열리고 풀리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간단한 대답입니다.
교회가 이 빌라델비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향력을 세상에 행사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열린 문을 두시니까 문제가 해결되고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닫힌 문 고리 붙잡고 아무리 두들기고 애써보십시오. 여러분! 주님이 그 닫힌 문을 붙자고 몸부림치며 애 쓴다고 해서 주님이 그 문을 열어주십니까?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달려가서 어깨로 문을 부딪쳐 보시려고요? 안됩니다. 어깨 망가집니다. 조심하십시오.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꼭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꼭 시험해 보고 싶어 하는 인생입니다.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깨 부러진 사람 많습니다. 머리로 받으면 머리 터지는 것입니다 되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 교회를 향해서만 그 앞에 문제가 많은 빌라델비아 그 도시를 향해 문을 열어 주셨는가? 이 대답은 딱 한가지 입니다. 이 교회가 먼저 횡적으로 세상의 문제를 향해서 열린 문을 갖는 교회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열린 문을 가진 교회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문을 위로부터 열어 주실 만 했으니까 그 열려진 문 속에서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와 교통하시고, 그 빌라델비아 교회를 기뻐하시니까 하나님이 그 빌라델비아 앞에 이제는 수평적인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풀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벌써 10년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5년 되었습니다. 4년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20년 된 것도 있습니다. 쾌쾌 묵은 문제, 문제라는 문제글자가 안보입니다. 하도 오래 되어서. 그렇게까지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풀려고 수단 방법이 남아있는 한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마음가짐입니다. 행동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포위망을 좁혀서 하나님이 오셔서 목에다 칼을 댈 때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한 쪽으로 몰아세우시면서 우리를 세우시는데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보았습니다. 다 해보고, 이제 할 수 없을 때 인간이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해볼만한 것이 남았다고 생각 할 때는 인간이 절망 하지 않습니다. 아직 실험을 안 해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모든 할 짓 다 해 보았다, 그럴 때 인간은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절망하는 사람들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 하십시오. 오늘 정답이 여기 나옵니다. 막판에 가서 도저히 더 이상 뒤로 물러 설 수 없을 때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해 보았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는데 도저히 되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무엇인가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생각 합니까? 왜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까? 왜?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닫혀져 있고 도무지 열려지지 않는 상황을 통해서, 그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이렇게 완벽하게 닫혀져 있는데 저 문이 열릴 리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어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는데 그 관계 속에서 횡적인 문이 열려서 여러분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이 세상에 있는 문제를 점령하면서 문제를 통해서 해결하고, 해결이 안 되는 문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서 능력을 받아서 해결하고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 안 시켜 놓은 상태에서 여러분들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때로는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가시 같은 고통, 그것을 통해서 바울은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순결 하게 주님의 사역을 이루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횡적인 문이 막혀 있고, 더 이상 내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 할 때 우리는 눈을 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이 닫혔는데 비가 올 일이 있습니까? 비가 올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문을 열면 옆에 있는 문은 저절로 열립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문제 바로 옆에다가 해결의 보따리를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문제에 매달리고 매달리다가 결국은 지쳐서 쓰러지면서도 주님 앞에 나와서 해결의 보따리를 풀어달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이 그 앞에 놀라운 특권을 주셨는데 문을, 열린 문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린 문 을 통해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힘차게 빌라델비아라는 타락한 도시를 향해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구원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무법한 자들을 불러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리고, 예수를 믿게 만들고, 성도를 만들어서 교회의 회원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너희 앞에 열린 문을 두었도다.” 그 무법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사람으로까지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자 교회가 상상 할 수도 없었던 위대한 능력을 하나님이 이 열린 문을 통해서 행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앞에 열린 문을 두시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이상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문제 하나를 인해서 고민하고, 두 개를 인해서 고민 하면서 그 중에서 하나만 풀려도 원이 없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실 때 그 문을 통해서 우리는 도저히 이전에 넘을 수 없는 문제의 벽들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닫힌 문 속에서, 불통하는 속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무엇인가 형통하면 불안한 것입니다. 잘 되면 무엇인가 삼천포로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도는 것입니다. ‘이거 뭐 이상한데?!’ 가끔 자동차 몰고 가면 그렇지요? 부-웅 가는데 차가 한참 막혀야 되는 시간인데 차가 한대도 안보입니다. 뻥 뚫렸습니다. 계속 몰고 가며, 좋으면서도 이거 이상한데 뭐 예감이 불길 한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막힌 데에서만 살았으니까.
시골에 가면 싸리나무로 모자처럼 만들어 가지고 병아리를 집어넣고 탁 엎어 놓는 것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런 것 잘 볼 수 없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병아리가 자라갑니다. 점점 더 큰 닭으로 자라갑니다. 그러니 병아리들이 그 안에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데 매일 부딪혀 봐도 이것이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 한 달쯤 되어 주인이 그 망을 싹 듭니다. 병아리 들이 노랗게 모여서 그 원 안에서만 뱅글뱅글 도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지를 않고. 왜 그렇습니까? 그냥 그 닫힌 속에만 익숙해져서 나가지를 못하고 그 속에서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닫힌 문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래서 우리 앞에 있는 이 문이 열린 문이 아니고, 철저히 이 닫힌 문이 되어가지고 너무나 오랫동안 고통을 너무 많이 받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은 아예 패배주의 가 몸에 배었습니다. 그 속에서 믿음을 찾는다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말입니다. 잘 생각 해 보십시오. “믿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대개 “믿습니다.” 소리 지르는 사람이 의심이 많은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냥 순순하게 “믿사옵나이다.” 이러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니까 “미-있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흔들면 어떻게 무엇이 날아갈까 해가지고 “미-있-습니다.” 그리고 이빨을 깨물고 “믿습니다” 그래 보아야 주님이 쌍시옷 자 크게 낸다고 해서 그것을 큰 믿음으로 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고 의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되고, 문이 열려야지만, “믿습니다.” 그럴 때 그 열린 곳을 통해서 들여다보시고 “나를 믿는구나.” 하시고 복을 주시든지 은혜를 주시든지 하실 터인데, 문은 굳게 닫아놓고 “믿습니다. 주님!”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대로 해라 믿든지 말든지.”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 할 때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지 않습니까? 처음 정탐하고 돌아와서 정탐꾼들이 보고했는데 불신앙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크다. 우리는 메뚜기 같다.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저기에는 하나님이 안계시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돼, 그것은 무모한 짓이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즉시 진노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 40년 동안 정탐하고 온 날 수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이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며 모두 죽을 것이다.”하나님이 예언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머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니옵나이다. 우리가 돌격 하겠사옵나이다.” 그러면서 갔습니다. “가지 마라” 모세가 그들을 말렸습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끝났다. 이제 질러가고 싶으면 40년을 빨리 보내는 수밖에 없다.” 그랬는데도 “아니야, 우리는 갈 거야.” 눈물을 흘릴 때, 그 회개가 참된 회개였습니까? 아니었습니까? 회개였습니다. 왜?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주님! 우리는 안 되옵나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했을까?” 눈물을 닦으면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니까. 믿었으나 졌습니다. 죽었습니다.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문이 열려 있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온전하기를 바라고 온전한 길로 들어서서 나아가는 가운데 내가 믿을 때 거기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완전한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불화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로 말미암아 강한 불순종으로 인해 먹구름이 끼고, 완전히 차단된 이 막혀있는 관계 속에서 막혀 있는 문을 보면서 “주여! 믿습니다.” 할지라도 별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골방을 휘 돌아 올 뿐입니다. 그런 사람의 소리소리 지르는 기도의 그 외침은 메아리도 없이 휘돌아 올 뿐입니다. 공허한 기도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문이 열려있고,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 진짜 그 사람의 믿음은 위대한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열린신문’을 통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부흥의 기사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회교도들이 와서 크리스챤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곡식이 막 타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주여 어찌 하옵나이까? 이 불을 어찌 하옵나이까?” 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확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끝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그 지방에 그때에는 그런 비가 안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더 선교소식에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 토인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아이가 열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얼음이 필요합니다. 미개한 이 지방에 얼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여! 우리 아이가 죽게 되었나이다.” 부르짖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얼음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호두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잠간 동안에. 그래서 그것으로 아이를 해열 시켰다는 사실이 선교 보고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런 열린 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믿습니다.” 할 때 쌍시옷 발음 크게 안 해도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주님! 믿-습니다.” 해도 하나님께서 “난 안단다.” 그런 사람은 많이 기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말을 막 타고 가면서 가나안 땅의 족속을 쳐 죽이기를 원 하는데 날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주님! 어두워지면 저 놈들을 어둠 속에서 찾을 수가 없나이다.” 막 뛰어 갑니다. 많은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내려 가지고 손들고 통성기도 하고 신앙 고백 할 시간이 없습니다. 막 달려가면서 “하나님! 저, 해, 스톱!” 그랬더니 해가 멈춰 섰습니다. 열린 문을 가진 사람들이 믿음의 위대함을 보기 전에 그 믿음이 통했던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열린 문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열린 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 성경에서 나타난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이 이렇게 열린 문을 가지고 있을 때 “주여 믿습니다.” 할 때, 이 믿음이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고 불의 세력을 이기고 악한 세력들을 꺾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세상을 정복하고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눈물을 흘리며 이길 수 있었고, 복음과 함께 아골 골짝 빈들에서도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이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동토의 땅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십자가의 깃발을 굳게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큰 권세를 가지고 문제 많은 세상을 지나갈 때에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악한 영의 권세들이 벌벌 떨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손을 들어서 “바다야 갈라져라!”고 명 했을 때 바다는 갈라졌고, 그리고 다시 “합쳐져라!”고 명령 했을 때 다시 합쳐졌습니다. 사자의 이빨을 꺾기도 하고, 그리고 굴혈의 위협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원수들을 멸하기도 했으며 나라를 멸하기도 했고 자기들을 멸하기 위해서 달려온 이방의 군대들을 칼 없이 무찌르기도 했습니다. 이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 한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믿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열려진 문을 가진 사람들 이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근차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점검을 하고, 그리고 이런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막혀 있는 사람이 그것을 족집게처럼 알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알아낼 수가 있었다면 거기까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은 곳이라도 감찰하는 영으로서 역사 할 때 우리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가 정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쭉 정돈을 하면서, 그러니까 ‘저 말씀을 귀를 기울여 듣고, 내가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지만 나의 문제 해결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는데, 이제 문제는 많아서 고통스러운데 말씀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렇게 되면 좀 더 배를 타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바람을 더 많이 맞아야만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애적인 은혜를 받았던 사람은 생애적으로 말씀을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던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기억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머리가 정돈되면 그 다음에는 금방 가슴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렇게 정돈 시켜 주시는 것을 “아멘! 아멘 그렇사옵나이다. 주님은 다 맞고 나는 다 틀렸사옵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겸비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주님은 다 맞고 나는 다 틀렸습니다.”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학생이 신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옛날에야 뭐 별별 사람이 다 왔었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시험은 어떻게 설교라도 쓰고 나가면 설마 빵점이나 주겠습니까? 그래도 볼펜 자국이라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영어 시험이 나온 것입니다 도저히 모르겠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영어 시험을 냈는데 학생은 한글로 “교수님 저는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랬는데 성적표가 나왔는데 기가막힌 성적표가 나왔습니다. “너는 빵점, 하나님은 백점!” 성적표가 그렇게 나왔더랍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나는 맞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지만 닫힌 문이 이제 비로소 열리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을 안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저 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위에서 안 열어지는 문을 삐-익 열고 “얘야! 컴컴한데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그러면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 감격하지 않을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감격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차라리 종로 바닥에 누워서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결단 하고 인격적으로 승복하기를 기다리십니다. 문제를 보기 전에 먼저 닫혀진 문을 보고, 닫혀진 문을 하나님이 분명히 “주를 믿고 내 말이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거하고 나와 함께 동행하면 그러면 나에게는 큰 권세가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졌는데 이것을 가지고 너와 함께 하고, 이것을 너에게 나누어 주겠다” 그런데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요?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닫힌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힌 것입니다. 이것을 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닫으면 열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없다고 하셨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안 열어 주시면 나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죽어봐라.”그러십니다. 죽지도 못합니다. “안 열어주시면 죽을래요.” “맘대로 해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죽겠다는 것도, “주여! 열어주시옵소서.” 그러면서 “내가 이것을 잘못했습니다. 해결해 주시옵소서. 내가 이 길로 가겠나이다. 갈 수 있는 힘이 없나이다. 이 힘을 안 주시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이럴 땐 주님이 “아이쿠 죽는다니까 큰일났네.” 이렇게 말씀하시지 하나님 앞에 회개 할 생각은 안하고 “주님!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 문을 안 여십니다. 주님은 주님 이외에는 그 문을 열 사람이 없고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를 움직여야 이 문을 열 수 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 앞에 서지 마십시오. 문제 앞에 서면 인간이 너무 추해 집니다. 너무 자존심 상해서 이 세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들을 향해서 문을 열어 놓으셨느냐? 그것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 하였도다.” 무슨 뜻 입니까? 이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가 성령의 능력이 약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세력이 약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도 말하기를 이 교회는 숫자에 있어서는 그렇게 대규모가 아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는 가장 작은 교회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능력이라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적은 규모 적은 교인들의 수 혹은 적은 영향력, 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마는 그러나 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까? ‘내 말을 지켰다.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 이것은 똑같은 말입니다. 반복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쉽게 말 하면 “너희는 비록 지하실에 있는 교회였으나 나의 말을 지키었노라.” 그러니까 주님이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은 우리들이 보는 것처럼 세속적인 시야와 일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여셔서 위대한 축복을 부어주시고 그들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기서도 이 교회가 외적으로 일어났던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런 유능함이 적다라고 하는 것을 인하여 고민 하는 대신에 전심으로 그 적은 교회가, 그 적은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문제가 많은 빌라델비아 도시에서, 세속에 물결과 싸우면서 진리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을 생명과 양식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들 앞에 열린 문을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할지라도 이 교회는 그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신바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왜 열려져 있는 문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닫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두는 이유가 무엇 때문 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말씀을 지키지 아니 하는 불순종의 길로 갈 때에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 자신이 닫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뉘우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 올 때 그때에만 그 문을 하나님이 새롭게 여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열려진 문 속에서, 문 아래에서 환경을 향하여 열려진 문을 통하여 기이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문제와 환경들을 다스리시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며 불꽃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어두운 세상에 찬란히 타 오르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사랑은 불꽃처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