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사랑
(1995년 주일오후)
설교기간|1995년 11월 19일 - 12월 17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 13:34) 1995.11.19 주일오후 1
2. 예수를 알게 하는 형제사랑 (요 13:35) 1995.11.26 주일오후 14
3. 형제사랑의 옛 계명과 새 계명(레 19:17-18, 요일 2:7) 1995.12.3 주일오후 23
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형제의 연합(시 133:1-3) 1995.12.10 주일오후 32
5. 포기할 수 없는 관계(시 133:3) 1995.12.17 주일오후 42
1.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형제사랑 (1995.11.19 주일오후 1)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 내 형제 사랑에 대해서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인도하시는데 까지 한번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점점 깊어질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본질을 붙잡는 것을 놓치기가 쉬운 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모습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신앙이 어리고 초기일 때는 잘 되던 것이 신앙이 깊어지고 영적인 삶이 오히려 향상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턱도 없이 그런 기본적인 일들을 혹은 기본적인 신앙생활들을 오히려 더 못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예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신문에 났습니다. 언젠가 한번 청와대에서 불조심 강조 기간을 맞아서 불시에 화재가 났다고 치고 소화 진화 훈련을 했습니다. 저는 가보지 않았습니다만, 아마 집 모양을 한 여러 가지 것들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그리고 이제 잘 훈련된 사람들이 계획에 의해서 이제 소화기를 가져와서 불 끄는 연습을 했습니다. 문제가 생긴 게 아주 숙달된 사람들에 의해서 숙달된 프로그램에 따라서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각기 자기 위치에서 소화기를 가져와서 켰는데 망가져서 안 켜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불이 점점 커지니까 할 수 없이 진짜 119에다 전화를 걸어 가지고 진짜 소방대가 와서 불을 끄는 촌극을 빚은 적이 있습니다. 이게 대장간에 쓸 만한 칼이 없다고 신앙생활 잘 하는 집에서 정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것들이 오히려 게을리 될 때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잊혀지는 것이 뭐냐 하면 형제사랑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사람을 향한 가장 커다란 덕목은 말하자면 형제사랑과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람들을 향해서는 사랑을 주고,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향해서는 대접을 하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가장 커다란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이 다 주님이 주신 계명이지만 예수님 자신의 말을 보더라도 주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에는 큰 계명이 있고 적은 계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계명이라도 우리가 작다고 생각하고 덜 지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이 있는데 신앙생활을 한참 오랫동안 잘못 하고 타성에 젖다보면 작은 계명은 열심을 내고 지키고 제법 뻔질난데, 정말 큰 계명은 오히려 아예 지키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무시해도 별로 가책을 받지 않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은 큰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서 작은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판단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욕하시면서 약대는 걸러내고 하루살이는 삼킨다고 하신 말씀처럼 그렇게 외식하는 자들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3장은 시작하기를 유월절이 가까워 올 때의 일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이 가까워오면 이제 유월절이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로 이미 다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다가 오셨을 때에 그때에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과 같은 말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내가 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하자면 교훈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하신 형제 사랑의 계명이야 말로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계명이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먼저 인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우리의 상태나 생각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아무것도 못 지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 계명이 중요하다고 하면 우리는 그 계명을 못 지키는 현실을 빌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 할 걸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했을 때 우리는 옛 계명이 생각나게 됩니다. 이 새 계명이라는 말은 말하자면 ‘카이네’ 쉽게 이야기해서 희귀적으로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새로운 계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옛 계명이 새 계명과 어떻게 다릅니까? 옛 계명과 새 계명은 시기에 있어서 다를 뿐 만 아니라, 새 계명과 옛 계명은 질적으로도 다른 계명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여러 가지 계명들을 우리들이 종합해서 볼 때에 구약 속에도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지만 그러나 이 새 계명의 정신이야 말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갈망하던 그런 하나님의 갈망이 나타나 있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새 계명을 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간에게 주고자하시는 그 계명을 몸소 실천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주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언과 같이 남기신 그 모든 계명의 총론이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잘못 이해해서 그렇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그 근본적인 정신은 사랑입니다.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그것은 이전에 사랑하던 것들은 버리고 전에 사랑하지 않던 한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는데 이 새 계명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다른 계명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계명은 더 커다란 계명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계명이 우리에게 이것도 하라, 저것도 하라,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명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고 하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을 총괄하고 주장하는 더 큰 계명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데 그것이 바로 형제 사랑의 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이제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고 계셨고, 그 직전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서 밖으로 살짝 빠져나간 다음에 남아 있었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 갈 때도 우리는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지만,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서부터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훨씬 더 무거운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표는 주일날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그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그가 그리스도인의 증표일 수 없고 그가 심지어는 예수를 전한다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인 이라는 증표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잠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계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너희 안에 예수가 있도다. 너희 안에 주님이 계시도다” 말할 수 있게 하는 일들이 무엇을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까? 그들 속에는 예수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신 것처럼 그들이 서로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사랑하는 그 사랑의 관계, 사랑의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이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고 제자가 된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표들을 어디에서 여러분은 찾고 발견하고 있습니까? 혹시 남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아는 것이 여러분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그런 징표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는 이유가 그런 모습이 그런 삶이 다른 사람들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인의 표적이라고, 표징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네가 참 내 제자인 것을 한번 보여 달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럽거나 후회해보지 않는 이러한 신앙적인 뻔뻔스러움이 바로 신앙생활의 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형제를 사랑하라’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그 계명, 형제를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 하나님을 믿는 자녀,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것이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느 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한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약에 회개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라면, 그렇게 딱딱하고 굳은 마음을 움직여서 회개하고 뉘우치도록 만들어준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던 포악한 성품을 갖은 사람이 변하여 형제를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무엇이 그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자기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아!’ 말할 때 ‘아가페 토이’ 말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받은 자들이여! 사랑의 시동은 우리에게서 걸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걸렸습니다. 그가 우리를 전심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확실히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자신을 위해서 낮아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모두 자신이 참된 주님의 사랑을 충족하게 만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서 감동 받을 줄 모르는 죄인의 이 딱딱한 심령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아울러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를 서로 사랑하도록 주신 이 계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앙이 자라고 예수를 많이 믿게 되면 지식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혼 속에 깃들여 있는 다른 지체와 영혼을 향한 사랑의 성장이 지적인 성장을 앞질러야만 됩니다. 그래야만 겸비하게 예수의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성장하는 것보다 지적인 성장이 앞서게 되면 그 지식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 지식으로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어리석음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이번 시리즈를 계속하는 동안에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열심히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가장 결핍되기 쉬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그리고 형제를 향한 이 사랑의 결핍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인지를 깨닫고 여러분의 삶이 대폭적으로 돌이켜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3장을 다 해설해도 아마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수많은 그런 그림들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 안에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각기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사랑이 무엇인가를 토론한다고 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주신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사랑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형제 사랑이 메말라 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우리가 먼저 예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통해서 예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이 죽음에 이르는 사랑이었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사랑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우리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골라내어서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에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다 자기의 곁을 떠났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실망하거나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강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해야만 사랑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근원은 언제나 순간적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언제나 출렁대고 있습니까? 그 예수의 사랑을 쏟아 놓거나 토해놓지 못해서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불이 되어서 사랑의 불 때문에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 있습니까? 대부분 우리는 사랑 없이 살아 가다가 말씀을 듣거나 회개를 하거나 기도를 할 때 그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돌아 봐야 되겠다는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해져서 이러한 사랑을 끊임없이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강한 힘들을 소유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사랑하다가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알량한 사랑을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대가를 상대방으로부터 바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부 다 외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돌아보고 사랑하는 그 일, 누구를 위해서 한 것입니까? 그것이 만약에 행여 라도 이러한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이것이 알려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베풀었다면 여러분은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셨던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셨지만 모두 우리가 배반하고 홀로 십자가에 달리셔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망하거나 낙심하시지 않으셨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는 것으로 만족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베푸는 것으로 만족을 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베푼, 끝까지 사랑한 사랑의 대가는 배신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배신과 죽음도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사랑을 그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형제를 사랑해 본 적이 얼마나 있느냐고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그만두고 미워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그러나 신앙이 자라고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굳어진 사람들이 훨씬 더 교회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오죽 했으면 미움과 용서를 시리즈로 제가 7번인가 8번했지요? 좀 들어보십시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붓고 혹은 기초 공사가 잘못된 곳에 계속해서 2층 3층 짓고 싶어 하는 그러한 욕망을 가진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초를 다지십시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형제를 사랑한다는 이 말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의 마음으로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미 이것을 가장 커다란 계명으로 주신 것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형제들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습니까? 돌아보고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형제를 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네 집에 쌀이 없는지 누가 등록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 누가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알려고 하고 있습니까? 사랑할 기회를 갖고 싶어 하고 그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고 그 사랑 안에서 함께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몸에 배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앞두시고 남아 있는 제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충만하게 돌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는 가도 너희를 통하여 내가 들어가야 하리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사모하고, 바라고,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얼마나 구현해 가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가장 용서를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악한 마음을 품으면 가장 무자비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 그런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교적인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일에 대해서 가장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사람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누차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완전해지면, 완전해지는 그 순간 즉시 자기 때문에 불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교회 속에서 참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리고 형제들을 사랑하면서도 우리는 보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그 교회가 완전해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있는 곳, 그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곳이 죄가 없는 의롭고 거룩한 곳이 되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의롭고 거룩해 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는 사람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용납해 줌으로써 교회는 완전한 공동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너희에게 죄를 짓는 사람 너희에게 허물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적마다 너희가 누구인지를 알라.’ 누구입니까?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빚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범죄하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은 1백 데나리온을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 탕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이 사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 귀하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가! 세상에서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도 주님은 나 없이 사실 수 없는 분이시다.’이러한 사랑을 자기가 입었을 때에 여러분 앞에 있는 가장 모자라는 사람, 가장 허물이 많은 사람, 여러분이 가장 무관심해 하는 사람, 그 사람도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인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여러분은 그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행합니까? 주일학교를 하는데 큰 녀석이 작은 녀석을 주먹으로 뻥 때렸는데 교회에서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작은 애가 무어라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거의 비슷한 친구들 4-5학년 애들이었습니다. “자식이 까불어?” 그리고서 퍽 쳤는데 쌍코피가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시뻘건 코피가 쏟아지는데, 애들은 피 보면 안 아파도 울지 않습니까? 그래서 때린 애를 선생님들이 데려다가 벌을 세우고 난리가 났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아이는 자기가 때렸다는 사실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했다. 나도 야단맞을 만큼 받았다.’ 이러지 않겠느냐? 그래서 데리고 들어 왔습니다. 코피를 닦아 주려고 그랬습니다. 그때 내가 집사 때입니다. 선생님들에게 닦아주지 말라고 내버려두라고 그러면서 둘 다 들어오라고 하여 교역자 실로 들어가 문을 딱 잠근 다음에 “너는 코피가 나니까 누워 있어라 하여 눕게 하고 그리고 너는 여기 무릎을 꿇고 앉아라.”하면서 둘을 앉혀 놓고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너는 왜 때렸니?” 그러니까 씩씩거리면서 사실은 내가 때리려고 안 했는데 얘가 무슨 나쁜 말을 했다고 그러면서 이제 막 자기 변호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맞을 짓을 했구나.” 그러니까 드러누워 있는 애는 울다가 억울한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더 우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야, 얘가 이렇게 너한테 나쁜 짓을 하니까 너는 때려서 코피를 터뜨렸지?” 하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네가 나쁜 짓 할 적마다 예수님이 코피를 터뜨리시면 너는 어떻게 되겠니?”그러니까 이제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얘야, 예수를 믿는 주일학교 어린이는 누구냐? 자기가 매일 나쁜 짓을 하면서도 주님, 이렇게 나를 코피 터트리지 아니 하시고, 용서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데가 주일 학교란다.”그러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어요. “야, 이제 네가 무슨 일을 해줄 수 있겠니?”그러면서 손수건을 짜다가 수건을 물에 떠다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일어나더니 입의 피 묻은 것을 닦았습니다. 닦아주면서 한없이 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행할 수 없는 어떤 무거운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지불하는 세금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번에도 우리가 문답을 했지만 우리 교회 세례를 통과하시는 분들은 여러분이 아주 깊이 인정을 해주어야 됩니다. 4명이 떨어졌습니다. 반은 붙었는데 2 대 1의 경쟁입니다. 그런데, 그 문답집을 아마 여러분보다 더 잘 할 것입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완벽하게 외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안 사람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죄 많은 인생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한 사람들만 세례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부가적인 의무를 예수께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내게 주신 그것이 우리가 예수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바꾸십시오. 오늘부터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화나게 하거나 잘못하게 해줄 때 그때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렇게 행하는 지체들을 기쁨으로 받아주고 마음속으로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때 여러분은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여러분 속에 예수의 사랑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론의 칼은 사람의 옷을 다 잘라서 벗길 수 있지만 사랑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이러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들이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하는 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준엄하게 경고하던 예수 그리스도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을 때 이런 경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우리가 예수께로 받은 이 사랑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알게 되는 것이 어디로부터입니까? 우리는 형제를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사랑해주고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세상에서는 성격이 모나고 유별나서 용납을 받을 수 없는 사람도 교회는 용납해 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지요? 어디가도 분별이 없거나 혹은 이기주의적이라서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을 사람도 교회는 그 깨지지 않은 사람을 품에 안고 그 심령과 인격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깨뜨려져 부활할 날을 기다리며 그들을 품어 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넘치게 될 때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주된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시는 것이 성경의 주된 주제입니다. 예수를 그렇게 사랑하고 그리고 그 지체들과 형제들을 그렇게 사랑해본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열린다고 확신합니다. 성경이 열린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있습니까? 이름 세자만 불러도 가슴이 저며 오는 것 같은 그런 사랑! 고요히 생각만 해도 그와 함께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영혼에 한없는 특권으로 여겨지는 그런 마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혹시 우리를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과 같은 그런 변덕스러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예수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 사랑이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면서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지옥의 형벌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시며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사람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할 까봐 두려워하는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왜 사랑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을 얻고 싶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을 대가로 얻고 싶으셨습니까? 예수의 사랑에는 대가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우리에게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자신을 쏟아 부어 주시는 것이 그 분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역사를 보면 언제나 신앙이 가장 훌륭하고 열심 있던 시대마다 잔인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청교도 때도 그랬고, 종교 개혁 때도 그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고, 부흥을 갈망하고,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갈망하고, 교회에 대한 높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비로소 (끊김) 사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아직 누구인지 모를 때도 주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런 형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가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고,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사랑할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고난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고난이 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다가 사랑이 없으면 그 일을 그만 두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만 두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체를 사랑하다가 지체가 실망시키면 '야, 너를 붙들고 있느니 내가 당나귀를 기르는 것이 낫겠다.' 발로 차버리면 그만입니다. 무엇입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자기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샬롬을 누리게 될 수많은 인간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셨기 때문에 그는 고난의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낮아지고 죽어지고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 흘려 죽으시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믿으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그렇게 공생애 동안에 이 세상에 계시면서 시련과 핍박과 도전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그 계명을 가르치는 일들에 자신을 매진하셨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가라고 명령하실 때‘아멘’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그리고 자신이 비참하게 형벌을 받으므로 용서받을 수많은 우리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는 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모두 사랑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랑 할 때 비로소 십자가를 지게 되고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누군가를 사랑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단순히 ‘연애하느라고 신나본 적이 있느냐?’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누군가를 사랑해 보신 적 있나요?’ 할 때 그 물음은 사랑하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고통스러운 아픔, 시련, 폭풍을 통과해야 하는 인내 그리고 모진 박해 속에서도 그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겪었던 숭고하고 장엄한 희생, 이런 경험이 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아본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는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합니다. 어디를 통해서든지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해지고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가장 빛나는 상급 중에 하나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지불한 대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이 자그마한 교회, 이 허름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 몰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주어도 조금도 아깝거나 후회가 되지 않는 그러한 관계를 교회와 맺어본 사람들 속에는 항상 보석과 같이 빛나는 신앙의 간증들이 있습니다. 상처와 고통이, 말하자면 보석과 같은 신앙의 간증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진주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진주가 바닷물을 마시다가 사금파리나 모래 같은 날카로운 것이 들어와서 살을 비집고 박히는 것입니다. 핵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오랜 세월을 아파하면서 이 조개는 말라가고, 그리고 대신 그 살 속에 박힌 그 핵은 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결국은 이 조개가 발견되거나 죽을 때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면 그 고통스러운 자국이 진주가 되어져 있는 것이 바로 천연 진주입니다.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리는 희귀한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완성해 본 일이 있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예수를 닮아 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신앙생활이 가볍고, 경박하고, 천박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놀라운 사랑, 그것을 받은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앞에 있는 형제와 그리고 자매들을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랑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알기를 힘쓰십시오. 누가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어려움에 있고, 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기를 힘쓰십시오.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십시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촉진될 것입니다.
저는 태생이 별로 사랑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심방을 할 때나 그럴 때, 어떤 때는 성도들이 필요해서 심방을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제가 필요해서 심방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후자의 경우를 저는 몇 번 경험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어떤 때는, 분명히 내가 돌보고 있는 지체들인데 기도를 해도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실감이 나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마음속에 설교자의 마음속에서 이미 지체들을 향해서 마음이 떠나가고 나면 설교하기 위해서 소리는 외쳐도 허공을 휘돌아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기도 힘들 때는 그때 저는 심방을 합니다. 그러면서 한집한집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마주 앉아서 그가 당하는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기도할 때 역시 이 영혼들을 돌보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주일학교 선생님들, 중고등부 선생님들, 청년부 리더들에게 심방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러분, 심방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참된 목자일 수 없습니다. 참된 목자일 수 없습니다. 잘 나오는데도 심방합니까?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의 삶의 현장에서 그를 만나고 그의 고통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는 개인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그와 함께 나누고 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 우리를 목자로 불러 주셨던 그 마음의 사랑이 촉발되는 것입니다. 잘 유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 영혼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분들을 찾아오실 때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지요? 그리고 고통스러워서 앞이 보이지 않으리만치 힘들 때 예수께서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말씀 가운데, 집회 가운데, 찾아 오셔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분이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때, 그때에 놀라운 용기와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지체가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의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 모두 사랑의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호는 말하기를 자기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셋이 있을 때는 나의 3분의 1 밖에 못보고, 둘이 있을 때는 둘 밖에 못 보지만, 혼자 있을 때는 나 혼자를 다 본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충만하게 느낄 때, 그렇게 느낄 때 우리는 놀랍게 변화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 오셨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놀랍게 변화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이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진정으로 외롭지 않다고 생각한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수많은 사람에 의해서 둘러싸여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둘러싸여 살던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나는 고독하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외롭지 않았던 사람들은 누군가를 끝없이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왜? 그 사랑의 샘을 퍼내면 퍼낼수록 신비하게 고이는 예수의 사랑을 자신 속에 경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예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퍼줄 때 예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다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유능한 것은 은이요 그리고 뛰어난 지식은 금이요 사랑은 금강석이라고. 그러면서 그 사랑 속에서도 사랑으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지지 아니하고 빛나는 예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귀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올 가을과 겨울에 접어들면서 부흥회를 기다리면서 겨울 집회를 기다리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 설교를 하며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우리의 메마른 영적인 삶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처음 예수님이 내게 사랑을 주셨을 때 그 때에 한없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비하고 아름다워 보이던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늘 말합니다. 나는 목회가 무엇인지 아직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 사람을 향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회중'이라는 추상명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게 다가오고 있는 한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류라고 하는 추상명사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옆에 무거운 부담을 안고 다가오고 있는 한 지체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교회'라는 추상명사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한없이 기뻐하고 한 영혼이 실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없이 슬퍼하며 한평생을 살다 죽는 것이 바로 목회인 것입니다. 교사란 무엇일까요? 청년부 리더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한없이 즐거워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한없이 마음 아파하는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남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세계를 아울러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바로 사랑을 가진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의 사랑의 의미를 알 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알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왜 그렇게 말년이 될수록 더 깊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확신합니다. 고요히 앉아서 신선과 같이 아무도 방해하는 것이 없는 평안한 곳에 앉아서 바울 서신을 읽는다고 해서 바울 서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입술을 깨물고 나를 미워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나를 미워하고 가슴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그 용서의 혜택을 순간에 누리지만 그러나 나는 그 용서가 가능하기까지 수많은 인내의 쓴잔을 마셔야 하는 이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죽음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고 있는 갈릴리로부터 온 여인들도 있었습니다만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고 너 자신을 구원하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해내는가 두고 보자 말할 때에 그 사람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 던지고 채찍질하고 침 뱉고 모욕하던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위해서 생명을 주시는 그 고난의 순간에 그렇게 사람들이 대했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고요히 하신 기도가 있었습니다.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악행을 하고 있다면 그는 여러분에게 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히려 여러분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 주지 못하는 그 가시 달린 마음을 오히려 여러분이 용서하며 그를 위해서 깊이 기도하고 나를 미워하는 저 사람의 마음에 평강이 넘치기를 오히려 기도하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저 사람의 마음에 오히려 하나님의 샬롬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하십시오. 그 사람을 항한 미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설자리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했습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그리고 원수가 너희를 핍박하거든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나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축복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오히려 그 영혼을 향한 사랑이 우리 속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여러분 어떻게 배워 나가는 것입니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두꺼운 책을 한없이 읽어감으로 예수의 사랑을 배운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예수의 사랑은 그렇게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은 사랑하기 위해 지불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을 우리들이 체험하면서 겨우겨우 배워 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한없이 넓은 예수의 사랑이 나같이 포악한 죄인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돌 던지고 못 박아 피 묻은 내 손을 붙잡고 화해하자고 다가오시는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한없이 넓고 커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예수의 그 넓은 사랑을 모두 이해하고 알게 되리라 기대하지 않고 또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설 때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놀라움과 감격으로 그 사랑 앞에 서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곳곳을 돌아보십시오. 사람들은 고통 받고 상처받고 아파하고 찢기고 그리고 남이 알 수 없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사함을 받지 못해 곤고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교회 속에서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상처를 쓸어안고 신음하는 수많은 어린양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모든 양 떼들은 전부 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나를 용납하고 그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걸고 나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여러분이 깊이 감화를 받고 예수의 사랑을 여러분의 사랑을 통해 알게 하는 주의 도구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에 이런 사랑을 가슴 깊이 쓸어안고 그리고 주님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하고 안락하게 지낼 것인가 그런 것 주님 신경 쓰지 마옵시고 고통과 사랑이 없어서 시련가운데 궁핍한 사람들 이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고 이 속에 예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예수를 의지하며 살게 만드는 그런 사랑의 도구들이 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열린 교회 사랑하는 여러분이 어디서든지 칭찬 받고 자랑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살기를 갈망한 만큼 여러분은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을 지내오면서 여러분 자신의 아픔 말고 지체의 고통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와서 눈물 흘린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 눈물이 열매를 맺었습니까? 지체의 아픔이 여러분에게 가장 커다란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 남이 알지 못하는 아픈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멸망을 앞둔 세상의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마지막 고난의 아픈 순간을 기도로 바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형제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가족의 영혼을 위해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가족의 영혼이 하나님 없는 무지 속에서 당하는 고통 때문에 여러분이 끝없이 괴로워하고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영혼들이 예수를 알 수 있다면 자신을 내어 주고 싶어 하는 이런 마음에 불타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사랑은 역사 속에서 위대하게 피 흘리고 죽어갔던 순교자들 가슴속에서만 있고 우리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아하! 아하! 하며 감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평범한 모든 예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 없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가족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지체되고 있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지연되고 있으며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신앙생활의 지식의 진보도 지연되고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깨달으십시오. 예수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향한 그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이었으며 이 사랑을 받은 나이오니 하나님 제가 이 사랑을 실현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사랑하기 위해서 주께서 받으셨던 부당한 대접을 나에게 주시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받으셨던 오해와 멸시와 천대를 나에게 주시고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예수의 사랑의 의미를 알고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나에게 얼마나 넘쳤는가 하는 것을 증거하며 사는 생애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 이러한 잃어버린 의무에로 우리를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를 알게 하는 형제사랑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지난 시간부터 형제사랑에 대해서 주일 오후마다 말씀을 드리겠다고 광고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 바로 “사랑하라”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긴 이 말씀은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왜 그래야 할지를 35절에서 다시 한 번 상세하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 평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사랑 (1995.11.26 주일오후 2)
그래서 연초서부터 계속 말씀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또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우리가 매 시간마다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내리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우리들이 삶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삶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인지 고백하는 그 삶으로 “아멘”을 고백하는 이런 삶이 아니면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세상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바로 알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왜 신앙생활이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그 사람 마음에 들어가면 삶이 바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삶이 안 바뀌면 그건 지식이 참된 지식이 아닙니다. 잘못 알고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방식이 잘못됐든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왜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이 여러분이 이 시간에 세상에 있지 않고 여기에 나와서 마음을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건 결국 그렇게 말씀을 들으므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우리의 삶을 고치시기 원하십니까? 우리가 바른 삶을 살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야지만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이 교회인사들을 청와대에 불러 하는 이야기가 구석구석 다 안 썩은 데가 없는데 썩은 한가운데엔 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맨날 개탄하는데 개탄하면 뭘 합니까? 그 사람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 속에서 조국의 교회가 예수님이 누구며,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제대로 보여주던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문제는 삶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교회와 세상에 담이 점점 높아 가는데, 기억해야할 것은 교회가 세상을 행해 담쌓으면 순결이 보호될 것 같지만 세상보다 더 빨리 썩는 속성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차라리 한나라의 기독교 씨를 말리고 싶으면 그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세금의 혜택을 주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이런 식으로 풍파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면 교회는 쉽게 썩어 들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나, 나가지만 우리가 어떻게 믿든지 그런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젠 교회의 문제이며, 세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적을 행하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를 보고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적이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뚜렷하게 신앙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주는 그 위대한 힘은 너희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삶이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날 때 그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너희를 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 속에 수많은 다양한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는 내면의 질로부터 출발해서 자연스럽게 결실을 하는데 그런 많은 것들 가운데 열심, 헌신, 충성, 사랑 중에 무엇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인격의 열매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이나 한 건의 구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삶의 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는 제자들로써 너희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적을 행하거나 내가 예수의 제자라고 떠들고 다님으로서 세상 사람이 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세상 사람들의 모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너희를 보면서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또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내가 아는 너희를 통해 나타난 사랑의 주님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사귐 속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 모임의 특징이 수 없이 많이 있지만 그 중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위선적인 삶을 살게 된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위선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불결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건 불명예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많은 무리가 되어 세상에 살아갈 때 그땐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려워집니다. 여러분 정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거나 신앙생활 해 나가는 그런 교회를 부러워해 본 적 있습니까? 무엇인가 나의 삶 속에서는 없는 비밀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까?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고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모임이 세상에 있는 모임과는 다르다는 시선을 깊이 인정할 수 있는 그런 특징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교회전체가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이 없는 한 자신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도달하는 것보다 훨씬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나올 수 있지만 아주 특별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에서도 첫 번째 원리는 제자로 삼고자 하는 사람은 제자에게 기대하는 그 이상의 삶을 살아야지만 그가 비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훨씬 더 마음을 열고 감각적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부러워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삶이 부러워진다면 자신이 우리와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게 될 것이다. “저들 속에는 내게 없는 무엇인가 있어 그것이 어쩜 저들이 저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밀이 열쇠일지 몰라”하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하는 것을 보며 자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을 통해 예수를 알게 되는 것도 있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 하면 무엇인가 다른 삶의 질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 할수록 마음 한구석에는 빛같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메마를수록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갈망을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런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 속에 그리고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건 우리안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주신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사랑에 대해 눈뜨게 만들어주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은 모두 중요하지만 여러 번 언급한 계명은 보다 중요합니다. 불순종의 질은 다 같지만 크기는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부흥을 잃어버린 것처럼 사랑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사랑하지 못하며 사는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라” 했습니다. 우리는 편지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한 장의 편지지를 메꿔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옮겨 다니면서 편지를 남기며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사람들이 들여다보는데 그 예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써내려 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감화를 받고 도전을 받고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복음을 향해 우리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써 내려간 편지를 욕설과 위선과 사기와 독설과 한을 품은 것 같은 편지를 남기고 마지막 말을 그리스도로부터라고 씁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욕설로 시작해서 사기로 끝을 맺는다면 그 편지를 받고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면 안 됩니다. 성경에 맞추며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든지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이나 역경이 올지라도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쉬운 길이면 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하셨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즉 자기부인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주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을 따를 준비입니다. 예수 믿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겐 각오를 요하는 것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형제여 우리 모두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길을 걸어갑시다”라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겠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있고 축복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말씀이 들어가서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부업 아니면 아르바이트생같이 살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신앙생활은 살아가는 것에 대해 책임도 안지고 책임질 줄 모르고 반성할 줄도 모릅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무슨 뜨거운 애사심, 사랑이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목 메인 사람이 생명을 바치고 사랑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진지하게 써 내려가야 합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셔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편지지는 한정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쓰는 건데 만약 인생이라는 그 편지지를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나의 삶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진지한 사랑의 사연을 적어 내려가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벌써 사기, 위선, 독설, 욕설, 원한, 미움, 질투의 글들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편 지는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기장은 감추어둘 수 있지만 삶으로 쓰는 편지는 감춰둘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목 타게 교회를 세우시고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예수를 바로 믿으라고 말하고 아르바이트생 같이 신앙생활 하지 말고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시대를 분열하고 때를 아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얼마 남지 않은 편지지. 어제까지 잘못 쓴 편지지만 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한없이 잘못 살아가고 있는데 앞으로라도 변화를 받아서 한 번 훌륭한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자기의 아집과 교만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마음에 가득한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자신을 높아지게 하려는 거만한 마음 이런 것이 하나님 앞에서 써 내려가는 편지의 사연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귀한 분인지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말로는 고백을 하면서도 우리가 실제로 편지를 써 내려갈 때는 형편없는 글로 쓰고 마지막에 그리스도로부터라고 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편지를 가지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우리 같이 아르바이트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풀타임입니다. 저같이 목사 같은 풀타임이 아니고 저는 예수 믿어도 배, 가족, 집을 버린 적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자녀 아내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만 좇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헌신과는 별개입니다. 완전히 별개는 아니지만 사랑하고 헌신은 꼭 같이 가면 좋은데 꼭 같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가장 치열하게 싸우면서 가슴속에 묻힌 원한을 풀지 못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 저 죽으면 천국 갈까요?” “그럼 집사님이 천국 못 가면 누가 가겠습니까?” “목사님, 그곳엔 박 집사도 있을까요?” “그럼 있지요.” “그럼 목사님 그곳이 어떻게 천국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체도 자신에게 그러한 아집과 아성을 쌓는 도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하는데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사기 치고 아니면 사람을 죽이거나 때리고 이웃에게 불명예를 입히고 그런 것 때문에 회개한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음을 인해 회개해 본 적 있습니까? 불행히도 거의 한 번도 회개한 적이 없는 이 계명이 주님 앞에서 가장 커다란 계명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계명인데도 헌신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부탁하시는 것은 그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번 외식을 설명할 때 여러분에게 말했던 것같이 ( ? ) 가만 내버려두고 자극을 하지 않으면 이 속에서 사랑이 펑펑 솟습니다. 시골 샘이 펑펑 솟는데 아이들이 샘을 휘지면 물이 시뻘개 지지만 한참 후에 다시 가서 보면 맑은 물로 아주 투명하게 변합니다. 이렇듯 인간을 내버려두면 사랑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교만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외식도 인간이 가만있으면 외식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있으면 아주 외식의 문을 더 찬란하게 바를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말아야합니다. 자기를 믿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는 첫 번째 걸음은 나는 잘못된 인간이다. 생각하는 것이 삐뚤어질 수 있고 속에서 미움과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한 외식이 솟아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이런 개념이 있을 때 자기 부인이 가능해집니다. 외식이 그러한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가슴속에서 더 많은 사랑이 없는 자신을 고통스러워하고 또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깎아지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아파하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랑이 내 속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이 겨우 부패한 인간 속에서 사랑이라는 꽃이 한 번쯤 두 번쯤 세 번쯤 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들도 그렇지 못하지만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지 못했던 사람들 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이 사랑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사랑과는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사랑은 받은 것만큼만 주거나 받은 것이 동기가 되어 좀 더 주면 그것이 세상에선 사랑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욕하는 말이 배은망덕한 놈이다 이것은 원인이 없는 사랑은 세상은 기대도 안합니다.
사람들이 대개 사랑하다 상처받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상처받을 게 없습니다. 상처받는 사람은 늘 사랑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렇게 사랑을 했는데 대가가 이것인가” 하면서 상처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주지 않고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사랑할 의무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에 있어서는 저는 기가 안 죽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의 말씀 때문에 기가 죽습니다. 서로 사랑이 잘 안 될 때는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 하셨는데 요즘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서 서로의 계명을 어길 수 없어서 제가 관둡니다. 이런 새로운 해석이 탄생합니다. 분명히 주님은 문자적인 해석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셨는데 저 사람이 안 하는데 나 혼자하면 주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신앙생활 하면서 찍어다 붙여 본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받은 동기가 있고 나서야 사랑을 준다는 세상 사랑의 개념을 뿌리 채 잘라버린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길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때를 알았다했는데 무엇을 보고 아셨습니까? 하나님의 때가 가까운 것을 영적으로 파악하셨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하고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해 모의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유다의 배반은 계획되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보면 유다가 나가는 장면이 나오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 뭔가 돌아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말에는 해당이 되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에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로부터 무슨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는 다 쓸데가 없다는 사람들도 주님은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살을 찢고 피 흘리셨건만 세상은 자신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렸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로부터 떡을 받던 그 손으로 돌멩이를 던졌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병 고침을 받던 그 몸을 이끌고 소리 질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울고 통곡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세상에서 대가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도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베드로의 생애야말로 예수의 사랑이 어떠한가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생애였습니다.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노라고 할 때 예수님은 이미 보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그러면서도 그것도 부인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떨어지지 않게 하기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노라. 회복한 후에는 네가 형제들을 돌보리라.” 범죄가 이행되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님은 그 범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그 많은 말과 갈등은 대부분 사랑이 없기 때문에 덮이지 않는 것입니다. 밥상을 덮는 보자기의 크기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보자기로 덮으면 밥상이 다 가리워집니다. 이렇듯 사랑이 허물보다 크면 덮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에는 기죽지 않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그렇게 사랑하라는 말에 기죽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사랑이 중요하고 또 예수님께서 매일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게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임을 기억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 하셨는데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찾을 수 있냐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이것을 단수로 바꾸면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너는 서로 사랑하라” 그러니까 예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더 많이 사랑해야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할 것이니라” 그렇게 예수의 사랑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신앙이 없어서 예수의 사랑이 뭔지 느끼지도 못한 사람을 앉혀 놓고 갈등을 하고 따지고 하는 건 창피한 것입니다. 성숙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교회에는 신앙의 부피가 다 틀린 주님을 ( ? ) 변화를 받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오늘 일이 아니고 옛날에 일어난 일이고 내가 구원받은 것도 오늘 일이 아니고 어제 작년 십년 전의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놀라운 사랑을 주셨는데도 철없어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한테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교회가 가르칠 수 있지만 그이상의 것은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지 않는다고 교회 지하층에 영창을 만들어 놓고 가둬둘 것입니까? 소용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을 가지고 교회가 싸우면 그 자체로써 교회는 수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임에서나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예수의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막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은 가운을 입었다고 사랑이 넘쳐날 것 같으면 시커먼 걸로 두건까지 쓰고 눈만 내놓고 설교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집사님하고 싸워서 유치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교회는 재직되려면 유단자 정도 돼야지 자기 몸을 지킬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 되면 사랑이 많아집니까? 장로님 중에도 사랑을 깊이 실천한 분들도 많지만 장로라는 그 직분이 사랑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하면서 깎여지고 다듬어진 신앙의 인격이 그것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기억해보면 우리가 그 예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우리가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녀도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가르쳐 줄지언정 여기에 무슨 강제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동맹으로 파업을 맺고 다음 주부터 교회에 안 나오면 누가 여러분을 잡아넣겠습니까? 작심하고 헌금, 십일조를 안 하겠다면 누가 뭐라겠습니까? 신앙은 그렇게 이 세상의 물리적인 제재와 방법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예수의 사랑을 알고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던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신 그것이 놀라운 사랑이었고 지금도 그와 같은 사랑으로 내 인생을 움직이시고 나를 주관하고 나를 움직이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어느 날 깨닫고 변화 받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변화 받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다 11년째 어느 날 말씀을 들으며 “아, 이것이 아니었구나! 어리석은 인생이었구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 깨닫게 될 때 그때에 눈에선 살기가 사라지고 입에선 욕설이 사라지고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하십니다. 그것은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사랑을 입었는지 주님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는 그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신앙이 인격적인 기본이 된다하지만 세상엔 기본이 없습니다. 시골에 가면 새우젓 통에 뜨물을 넣어두고 시간이 지나서 보면 위에는 맑은 물, 약주 같은 물이 생깁니다. 밑에는 모든 것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뜨물 걷어가는 사람이 와서 가지고 갈 땐 긴 작대기로 휘젓고 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섞이게 됩니다. 이렇듯 은혜 충만하게 받고 집에 가서는 식구들이 마음을 쑤시면 다 쏟아 붙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예수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 예수의 사랑을 생각하니까 저 말도 안 되는 사람을 내가 아멘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직장이나 집안에서 껄끄럽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그 사람을 방망이로 뒤통수를 때리든지 그런데 이것은 주님이 안 좋아하십니다. 그러지 말고 사랑의 품으로 끌어들여 그 불로 녹여버립니다. 불가능한데 가능하니까 주님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래놓고 하나 더 올무를 씌워주시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러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데 주님이 나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랑 받은 사람들은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 가능해집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나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유대인의 관계와 동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시험을 당한 그 모든 고난을 생각할 적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내가 한때는 핍박자와 포행자였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주의 일꾼을 삼으셨으니 내가 주의 일꾼 되지 아니하였다면 이 고난이라도 당하였을 건가 생각하면서 그 예수님 때문에 견디고 참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그런 사랑할 사람들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말도 안 되는 사람, 인격적으로 모자라는 사람, 경우가 엉터리인 사람, 성숙치 못하고 말마다 가시가 달린 사람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 품어주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은 교회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예수의 사랑이 형제들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알고 마치 23~28일 동안 품었던 병아리가 깨어나듯이 오랫동안 자기를 참아준 사람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구원받고 예수처럼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올챙이가 뒷다리 가지고 태어나는 것 봤습니까? 여러분 다 올챙이 때에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가슴에 못질하면서 이만큼 큰 것입니다. 여기 와서 미끈하게 다듬어져 있으니까 쓸 만하다고 말하지만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 속이 골았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제 생각은 매일매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충심에서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십자가의 의미만 바로 알면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다음 고난주간에는 부흥회를 하려합니다. “십자가 부흥회”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한한 사랑을 입은 인생들인지 깨닫고 모든 것 하나님 앞에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데 형제들을 용납하고, 그것도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면서 부족한 사람들을 용납하고 또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게 하기 위해 위선에 대해 가르치고 외식에 대해 가르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원리가 무엇인지 가르칠 때 우리가 어떻게 “무겁도다 저 말이여” 말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이러한 예수의 사랑이 너희 속에 가득 있을 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밥이나 같이 먹고 떡이나 같이 떼고 볼링이나 하러 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의 사랑이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 개인이 내가 먼저 예수의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인가 그것을 깨닫는 감격이 없이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떡을 떼며 재산을 다 팔아 제자들의 발 앞에 갖다 두고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사람 없이 그렇게 뜨겁게 성도들이 사랑할 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베드로가 외치니까 수많은 사람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할 때 우리가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나니까 성령이 임했고 그러고 나니 이 사람들이 천국과 방불한 공동체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는 마음속에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잘나가고 신나고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찼는데 좀 더 행복해 지려고 교회 문 두드리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마음이 낮춰지고 낮춰진 가운데 교회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예수의 사랑을 알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성숙은 교회가 나를 위해서 죽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아는 깊이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면서 우리도 또한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말고 그렇게 우리 자신을 사랑을 위해 내어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서 이 속에서 일주일에 한 번 세 번 혹은 네 번씩 모일 때마다 “천국을 가면 이와 비슷하겠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3.형제사랑의 옛 계명과 새 계명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7-1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요일 2:7)
형제사랑 (1995.12.3 주일오후 3)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은 예수를 알려주는 사람이다. 사신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은 우리를 통해서 알려진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세상 사람들은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되리라.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결국은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지만 삶이 변화되어지고 또 삶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분, 그리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드러낸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오늘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번에는 그러면 형제사랑이라는 이 계명이 정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새롭게 주어진 계명이냐? 아니면 원래 있었던 계명이냐? 왜 그러면 예수님은 원래 있었던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느냐?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한번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1장 7절을 다시 한 번 우리가 조심스럽게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7절과 8절입니다. 뜻을 생각하시면서 앞 뒤 문맥을 보시면서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시작합니다. 같이 읽읍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이것을 보면 우리들이 무엇을 하나 알 수 있느냐면 ‘형제를 서로 사랑하라.’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면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율법의 강령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형제사랑의 계명이 이미 예수님이 오셔서 새롭게 주어진 계명이아니라.” 구약 때부터 원래 있었던 계명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 때부터 있었던 계명을 왜 예수님이 오셔서 새 계명이라고 말하느냐? 이런 이야기가 오늘 중요하게 다뤄야 될 부분입니다.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니라.” 지금 사도 요한은 옛 계명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이 요한일서에서 쭉 써내려가고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쭉 써내려간 그 이유들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고 계신 그 풍성한 인격, 그리고 그 풍부한 그 성품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서 드러내 보여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제자 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뵈었을 때에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랑이라는 성품에 깊이 압도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분이시지만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각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영향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없는 것의 영향을 받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의 놀라운 사랑에도 감격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뭐냐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가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자기가 고민해왔던 것이 그 의의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고 그리고 죄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무슨 방법으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그런 것들을 늘 궁금하게 여기고 마음의 가장 커다란 고민거리였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니까 ‘아! 결국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에게 내릴 그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감당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는 값없이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을 통해서 치르게 되어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신 이 구원의 사건이 가장 커다란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총체적인 가장 커다란 관심거리는 뭐냐면 예수입니다. 예수 다른 성경 저자도 물론 예수가 가장 커다란 관심거리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는 ‘구원’, ‘예수’, 이 두 가지가 가장 커다란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의 경우에는 사랑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해서 크게 압도당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폴리 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람이 말년에는 이렇게 설교하기 위해서 단에 오를 힘조차 없어서 교인들이 이렇게 부축을 하면 손을 높이 들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면 온 교회가 커다란 감화를 받았답니다. 그럴 정도로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깊이 묻힌 것입니다. 그래 결국은 그 사랑이라는 그 맥락 하나 안에서 이 요한은 그가 빛에 속하였는지 어둠에 속하였는지를 구별할 수 있다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데 사람들이 이단의 문제가 많이 번져가지고 그래서 이제는 과연 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저 사람들이 믿는 그리스도가 참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인가하는 것들이 문제가 되어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석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참된 진리에 속한 사람과 거짓된 교훈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섞여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언제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노리고 믿는 자들을 노리는 것입니다. 이단이 노리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무엇이 참된 믿음이고, 또 누가 참된 신자인가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그 때에 이 사도 요한은 아주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는 참 그리스도에게 속한자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자는 거짓에 속한자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누구냐? 그것은 징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보면 안다 이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게 뭐냐 그럴 때에 이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형제 사랑. 왜? 그러면 그렇게 감히 사도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느냐 하는 이런 논리가 바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논리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의미는 결국은 자신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안다고 하는 의미는 결국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압니다. 첫 번째 아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압니다. 왜 그 십자가에서 흉악한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 분명한 그림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렇게 죽으셨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정말 참혹하면 참혹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뭐냐면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가 하는 것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떨어본 사람들이 아니면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놀라움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만 그러나 시골에서 여름 방학 때쯤 되가지고 내려가면 감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집 하나가 논 가운데 있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그 나무, 소나무를 죽죽 켜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판자 떼기로 집을 짓고는 그 때는 페인트라는 것이 별로 신통한 것이 없으니까 그 페인트 대신에 무엇을 바르냐면 타마고. 아스팔트에 까는 그 시커먼 것을 그것을 갖다가 죽죽 바르면 그래도 좀 방수가 되고 아마 좀 덜 썩는 모양입니다. 그 칠을 해놓은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도 늘 못 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가끔 지나가면 아주 비참하게 돼지가 울부짖는 소리가 납니다. 그 곳이 바로 뭐하는 곳이냐면 돼지를 두드려 잡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그 어른이 나에게 올바르게 대답을 해주셨는지 어쨌는지는 난 모르겠는데. 어떻게 돼지를 잡느냐 그랬더니 그분 말씀은 가마니에 집어넣고 잡는다고 합니다. 가마니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묶어가지고 그다음에 가마니에 집어넣고 머리를 때려가지고 잡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하자면 어린 마음에도 그 가끔 잠을 자다가도 섬뜩하고 놀라는 게 그 돼지가 죽는 그 광경. 그것을 봅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소 도살장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왜 그런데만 살았느냐 그러지만 그런데 하여튼 살았습니다.
그런데 소는 지금도 그렇게 잡습니다. 동일하게 시대가 발달해도 특별하게 잡는 방법이 없고 이렇게 인도해서 그래서 양쪽에 나무가 세워져있는 좁은 골목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 쪽으로 끌고 갑니다. 끌고 가가지고 그 다음에 여기 고개만 딱 내밀게끔 되면 그다음에 백정이 소 잡는 사람이 뾰족한 해머 같은 것으로 때리면 머리에 그래서 소머리 보면 구멍이 항상 나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가 죽습니다. 그 때는 뭔가 그랬더니 꼭 그 소 잡기 전에 밖에 산에서 소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거기에다 물을 줍니다. 그래서 이게 뭔가 그랬더니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회 문제가 된 그 물 먹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몇 바가지를 들이 부으면 그게 고기의 어떻게 스며들어 가는지 하여튼 그게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주는 모양입니다. 소는 안 먹겠다 그럽니다. 그런데 소가 참 신가한 것이 다 돌아다니다가 태어난 소가 도살장에 와 보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면 압니다. 거기가 거기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안 가려고 우는 소리가 그렇게 서글프게 들립니다. 거기에서 수없이 많은 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단순히 우리의 종교적인 감상이나. 감성을 가지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죄를 향해서, 아니 죄를 향해서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자신을 향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그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죄 지은 자는 내가 죽여 버리고야 말리라고 하는 그 진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시지를 못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쏟아부어주신 것을 알게 되니까 그 다음에 깨닫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면 그 진노하시는 성품을 사랑으로 누르시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셨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느냐면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이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교회 출석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그 죄 앞에 더 정확하게 말해서 죄를 지은 자신 앞에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에게 말하자면 형벌을 쏟아 부으시는 그것을 깊이 깨닫고 두려워하다가 우리를 스쳐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 죽게 하신 그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래서 그 사랑에 깊이 의미를 깨닫고 그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제는 내가 주님의 것입니다. 한사람이 예수를 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진실 되게 안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그 하나님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아서 구원을 얻었으니 나도 또한 형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이 교훈을 깊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제대로 알면 그렇게 형제를 계속해서 미워하고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만난 정도는 사람마다 좀 다를 것입니다. 그렇죠. 물론 지금 이야기 하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알고 있지만 그러나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획기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그래서 죽을 때까지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이런 것도 있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살아오면서 우리들이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도 이렇게 보면 세 번째 손가락에 상처가 있는데 저는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식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 살쯤 되었을 때 개울가에서 놀다가 유리에 베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곪아서 덧나서 할 수 없이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손가락은 이렇게 펴지지가 않습니다. 위로. 그런데 이렇게 상처가 크게 나면 큰 상처를 입으면 평생 죽을 때까지도 이 흔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작은 상처는 금방 사라집니다. 이게 지금 40년 가까이 되었는데 안 지워지고 그냥 남아있습니다. 결국은 그대로 이 상처를 가지고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를 믿고 예수를 만난 것도 은혜의 깊이와 예수를 아는 정도가 다 틀리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다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를 정말 크게 만나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이고 그 아래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 무엇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그 때 우리는 말이에요.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아직까지도 형제를 미워하고 그리고 있다면 그러는데도 여러분은 각자 그래도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를 알았기 때문에 그나마 살아가는 것이지 여러분이 만약에 그나마 라도 예수를 몰랐으면 지겹도록 이웃을 미워하면서 그러면서 끊임없이 살인하면서도 여러분은 조금도 그것이 잘 못된 것인지를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주된 메시지는 뭐냐면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입니다. 이런 형제를 사랑하라는 그 계명이 새롭게 주어진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있는 계명이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레위기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 레위기서에서 하나님께서 17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7절 18절을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레위기 19장입니다. 읽어봅시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이 계명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같은 계명입니까? 다른 계명입니까? 둘 중에 아무거나 이야기하십시오. 틀리면 틀리는 대로 강사에게 도움을 주고 맞으면 맞는 대로 도움을 주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같은 계명입니까? 다른 계명입니까? 같은 계명입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다른 계명입니다. 자 그러면 왜 그런지 보십시오. 17절 18절을 제가 잘 읽고 질문을 할 테니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라고 말하십시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 계명이 그대로 이행하기 쉬워요? 어려워요? 어렵죠? 어렵다고 했으니까 그 다음 시작해봅시다.
우선 말입니다. 18절을 우리들이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구약이 우리에게 가르친 이웃사랑, 형제사랑의 그 옛 계명, 여기에서는 형제사랑 이웃사랑,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는 나눠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나라가 곧 교회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니까. 그러니까 곧 교회가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 교회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여러분 인간이 갚아야할 원수를 안 갚고 살면 그러면 병이됩니다. 오늘 아까 점심 먹으면서도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니까 옛날에 지금 이제 정치이야기해서 안됐지만 5공과 6공에 있는 사람들이 막 구속되고 하니까 그러니까 가장 슬프게 우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직접적인 피해를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죽고, 명예를 빼앗기고, 젊은 날 수십 년을 군대에서 바르게 했는데 강제로 옷 벗기고, 일등병이 이등병으로 감등되어가지고 연금도 안줍니다. 그렇게 제대하면 연금도 안줍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억울하게 비참하게 살아왔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아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미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게 너무나 원통하니까 가슴에 서리서리 한이 서리면 그 원수를 갚지 못하면 이 속에 뭐가 생기냐면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면서 말은 하고 싶은 우선순위가 나란히 있는데 일 순위부터 차례대로 끄집어내야지 일 순위 나두고 사 순위 끄집어내려고 하면 혼돈이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은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인간의 욕망의 수천 배입니다. 수천 배라고요. 그러니까 손을 뻗쳐서 사람을 살인하거나 원수 갚는 그 궁극적인 것은 손을 뻗쳐서 사람을 헤치거나 살인을 하는 것인데 그것을 할 수 없게 될 때에 그때에 이 마음속에서 독한 말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묻은 칼과 침 묻은 입술은 똑 같은 것입니다. 그게 그거란 이야기입니다. 그럴 정도로 인간이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을 참는 것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안 만나고 참는 것과 원수를 갚아야할 사람을 그 감정을 누르면서 참는 것은, 오히려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사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도 죽음을 생각하지만 원수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최대의 목표는 뭐냐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과 만나서 죽어버려야겠다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만나서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지만. 원수를 갚은 사람은 너도 죽이고 나도 죽는다. 그러므로 말미암아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감정이 사랑하고자 하는 감정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감정의 그런 마음의 해독제는 오직 사랑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를 갚지 말며” 하나님은 말씀을 간단하게 하시지만 인간들 속에서는 이게 쉬운 계명이 아닙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이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만든 사람, 그래서 자신에게 심각한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느냐면 한을 머금고 그 한의 힘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글을 썼는데 두견새가 피를 토하고 울다가 울다가 피를 토하고 다시 그 피를 삼키고 그 피를 먹고 살고 또 다시 그 피를 토하고 하면서 한을 머금고 살아가는 그 정서에 대해서 노래한 시를 보았습니다. 그게 바로 원수 갚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원수 갚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고 그리고 그것을 기회만 있으면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인데 그런데 주님은 간단하게 “원수 갚지 말며”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십시오.
여러분 형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형제를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걸림돌은 여러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걸림돌중 하나는 남아있는 복수심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속에서 끊임없이 피어나는 복수감, 분명히 여러분이 가정에서건 어디에서건 형제들 간에 아니면 사람들 간에 지체들 간에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여러분 속에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방해요인들이 있습니다. 뭔가 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적이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물리적인 피해든, 정신적인 피해든 그 피해를 받았을 때에 즉시 용서하고 그것을 없던 것으로 해버리면 그러면 최소한 사랑은 그만두고라도 형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인간들이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것이 일반적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말하자면 “복수를 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수를 갚지 말며 그리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옛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옛 계명이 결국은 지켜졌냐면 못 지켜졌습니다. 못 지켜졌죠.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이 계명처럼 철저히 유린당한 계명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로 삼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럴싸한 종교적인 껍데기에 쌓여있는 부패한 삶, 삶이 하나님 앞에 신앙을 잃어버리고 부패하게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 그 부패한 삶 속에서 형제를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이 다 메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주셨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은 이 계명을 너희들이 전혀 모르던 계명이 아니라. 이미 너희가 가지고 있는 계명이다. 그 계명이 뭐냐면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그리고 또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이것이 옛 계명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쓴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데 이는 참 빛이 이미 너희에게 비취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새 계명이 어떻게 바뀝니까? ‘원수를 갚지 말며’가 어떻게 바뀝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사람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구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죠? 구약의 교훈에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약의 교훈을 훌륭하게 이행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신앙인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에 나와 있는 이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하기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도 우리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 그것을 넘어서는 계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씀을 창기와, 세리와, 이런 사람들이 군병과 이런 사람들이 듣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계명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믿음에 있어서 파산한 사람이고 무너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원수를 갚지 말며’라고 하는 계명조차도 이행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실패의 사람들에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이 바로 요한일서 2장8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희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춤이니라.” 이 새 계명이 우리에게만 참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이 계명이 구약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사람들은 그나마도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혼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 율법에는 이혼을 할 때에는 혼인 증서를 주어서 헤어지라. 그랬거든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한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신약에 와서는 오히려 보다 높은 수준의 결혼의 윤리를 이야기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보냐하면 그 때에는 인간들이 너무나 부패하고 그리고 인간들이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사람의 남자가 많은 여자를 거느려도 좋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는 그런 정도밖에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도 이혼증서라도 써주어서 문란한 이혼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희미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보다 더 높은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갚지 말며”라는 구약의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구약의 그 계명. 비교적 가벼운 계명도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보다 무거운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것이 바로 참 빛이 벌써 비췄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전에는 사람들이 율법,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고 하는 이 준엄한 율법에 요구 앞에서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가 오셔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형제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그 형제를 사랑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사역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제대로 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고, 그리고 그 예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들이 올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질그릇처럼 아주 연약한 사람들도 넘치도록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한없이 희생하며 살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결국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 안에 있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랑,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가 하는 이 신앙의 문제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더 넘어가서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될 때에 내가 그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이며 그 사랑을 내가 한없이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하는 것을 모든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됩니다. 그것이 참 아는 것입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그 앞에서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그렇게 죄인된 자기를 한없이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것이 삶을 통해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삶을 통해서 고백되어집니다. 단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사랑과 그 정신이 우리의 삶을 주관해서 우리의 삶을 움직여야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내, 그것을 십자가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참고,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아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 때문에 우리가 온유해지고, 이런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삶의 모든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문제를 다루거나, 가정의 문제를 다루거나, 아니면 남녀 간의 문제를 다루거나, 결혼의 문제를 다루거나. 모든 문제를 다룰 적마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사실을 말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참 빛이 구약에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분명하게 예수와 같이 고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다니 하는 그런 실제와 감격을 구약의 사람들은 맛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맛보았습니다. 전에는 희미하나. 지금은 또렷하게 보였고, 전에는 구리로 만든 겨우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했으나. 지금은 실물을 보는 것처럼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너희들이 알고 받은 그 축복은 구약의 어떤 성도들이 받았던 복보다 더 크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런 빛이 우리에게 비취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보다 큰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들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는 내가 훨씬 더 낫다는 이러한 생각으로 우리를 합리화하고 있다면 우리는 구약에 있는 사람들만도 못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제 어두움은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췄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어둠을 더 사랑하고 어둠가운데서 어둠의 열매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두움은 지나가고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참된 빛이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갈지를 십자가의 밝은 빛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부인할 수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분명하고 찬란하게 우리 앞에 드러나고 비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한 가지를 회상하면 오늘 이 메시지가 분명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예수를 믿고 어느 한순간에 깊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깨닫고 회개할 때에 구원 못 받을까봐 회개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회개할 때에 그 회개하는 회개의 제목은 한가지나 두 가지가 아니라 자신의 살아온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죄인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살아온 모든 삶, 그 전체가 말하자면 죄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 ? ) 강요할 때 그 때에는 말하자면 생사를 건 투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형제 사랑에 있어서도 똑같은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매일 말씀을 듣습니다. 깨닫습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뉘우칩니다. 그리고 마음에 결심하고 마음에 다짐합니다. 이런 것들이 만약에 우리의 지적인 작용과 그리고 순간순간 우리들이 말씀을 즐기면서 그 속에서 지적인 유희를 하는 것에 우리가 그치고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많이 들은 사람들로서 하나님 앞에 책임질 일이 크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우리가 깨닫고, 그리고는 그 예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으셔서 그래서 나같이 하찮고 쓸모없는 죄인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받아들이고 살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무슨 기림이 있던지 칭찬할만한 일이 있던지 무슨 권할만한 일이 있던지 무슨 일이 있든지 너희는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너희는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어떻게 죽었는지를 깊이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의 감격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형제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못하게 될 때에 그것을 놓치게 될 때 우리는 형제 사랑의 이 계명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 새 시대를 대표하고,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새 삶이 도래하였음을,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아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훌륭한 표식이 바로 형제사랑임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임을 끊임없이 형제사랑을 통해서 드러내고 확인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형제의 연합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지난 시간에는 요한 1서 4장을 가지고 형제사랑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시편 133편의 다윗의 시를 가지고 우리가 한번 형제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가운데 사랑하지 않는 시편이 별로 없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러나 특별히 시편 133편은 제가 대단히 애송하는 시중에 한편입니다.
형제사랑 (1995.12.10 주일오후 4)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예수를 잘 믿어보려는 사람들이 살던 시대에 가장 잘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었다면 예수를 가장 잘 믿어보려고 애쓰던 시대일수록 가장 약하던 부분들이 형제사랑이었던 것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끔찍한 종교재판과 같은 일들이 언제 일어났냐면 대게 예수를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던 시대에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모하는 마음과 그 다음에 그렇지 못한 형제들을 용납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이와 같은 교훈은 역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늘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형제사랑은 예수를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취약한 부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충 믿고 살려는 사람들 말고 잘 믿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희망의 논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신앙이 좋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이라는 것은 세상의 지식이나 학식이나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의 지식, 예수를 아는 참된 지식, 믿음의 지식,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별로 없으면서 신앙이 좋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말씀을 들으면서 부분적으로 말씀을 깨달아서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들이 그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서 그 은혜를 받은 가운데 자기 신앙의 논리가 서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을 지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좋아지고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런 논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논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정죄하는 그런 위험에 빠지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역사를 보면 잘 믿어보려는 시기에는 항상 교회가 사람들을 그 교회 속에서 그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또 자신들 안에 있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변화를 주는 그런 일들을 교회가 하지 못할 때, 그때 그 사람들을 가지고 고민을 하며 하나님 앞에 변화가 되기를 사모하는 대신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시편 133편에서는 형제들이 연합하며 동거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데 아까 말씀드린 그러한 인간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려면 할수록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독선과 아집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들만이 빠지는 위험이 아니라 오늘 날 우리도 빠지는 위험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우리도 그런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잘 믿는 사람들이 아주 잘 믿고,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모여 신앙생활을 하고 잘못 믿는 사람들은 그 교회에 들어가 잘 믿는 사람들의 축에 끼어서 함께 예수를 믿을 때 변화될 수가 없고 늘 그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서 정죄되고 배척을 받는 다면 그것은 소금창고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살아있는 교회 속에서는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도 와서 형제됨을 누리며 그 속에서 예수를 믿고 함께 변화되어 나아가는 그런 힘이 교회 안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흙이 있는데 흙에다가 쓰레기도 넣고 다른 것도 다 넣습니다. 그러나 그 흙이 지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 속에 들어온 각종 물건들을 모두 분해시키고 썩혀서 결국은 흙으로 만들어버리고 결국은 그 흙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런 나무와 과실들을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변화의 능력을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결코 다윗의 몸으로 난 자식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교회였고 그리고 또 그들은 함께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넓은 의미에서의 형제를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 형제들이 동거하는 것을 보면서 다윗은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관경이 가장 장엄하게 드러나는 것은 화목제 같은 것들을 드릴 때에 그때에 사람들은 성문 안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포함해서 모든 종들이나 자유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고 그렇게 함께 즐기며 하나님과의 평화를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며 그것을 누렸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이 모여 사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며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다윗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다른 곳에서는 그런 것들을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느 곳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곳은 전부 자신이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모두 이 교회의 한 일원, 회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가장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교회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교회의 회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형제가 함께 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함께 사는 것만이 복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함께 모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 그것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도 헝제됨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하나의 집단이지 이 세상의 모임과 구별되는 독특한 하나님의 자녀의 고유의 성격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면 우리는 아예 교회 속에서 형제다운 분위기를 느끼는 것을 포기합니다. 여러분, 크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못 느끼고 작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가 열이면 사이가 나쁘고 둘이면 사이가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오늘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만이 즐겁다고 말하지 않고 그 형제사이에는 진정으로 그 모여 있는 모임을 기쁘게 하는 어떤 모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연합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라고 하는 히브리말의 원래의 의미는 골육지친 사이에서 쓰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의 마음과 결탁되어있고 또 그 자식의 마음은 그 부모와 결탁되어있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임을 보실 때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뛰어나고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모인 그 사람들의 모든 모임이 아름답고 하나님 앞에 선한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이 투철하고 하나님을 찾는 열심히 뜨겁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에도 그런 열심과 사모함들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들이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모여 있을 때에도 그러한 아름다움이 전체를 통해서 아름답게 배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합된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임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도 교회요, 주님을 가장 슬프시게 할 수 있는 것도 교회입니다. 그렇죠?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원하셨던 그런 모습을 교회가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가지고 계셨던 그 모습대로 교회가 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위해서 세운 이 교회는 어차피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낮추고 깎아야 하는 것입니다.
집회를 갖는데 연합한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최대의 숙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골육지친들이 서로 연합하는 것처럼 그렇게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연합을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형제들이 연합을 잘 하면 그 형제들의 모임이 너무너무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연합을 잘 못하면 그 집안이 너무 불행해 보이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의사 버스를 몰고 다니시는 한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하시는 이야기가 이러합니다. “목사님, 장례를 지내다가 보면 한 번도 그 집에 가본일이 없는데 장례만 치러보면 이 집이 어떤 집인지를 10분 만에 알 수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빈부의 차이야 그 장례를 치르는 그 관경을 보면 알지만 빈부의 차이가 아니라 그 집안의 내막도 알 수 있는데 대게 가난한집에 가서 장례를 지낼 때는 모든 가족들이 함께 슬퍼하고 조금이라도 더 보태서 장례를 치르려고 그러는데 돈 많고 형제 많은 집에 가면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둘씩 셋씩 모여서 쑥덕쑥덕 거리다가 꼭 장례 치르고 돌아올 때면 재판을 걸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유업 때문에, 유산 때문에, 돈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유산이 남아있으니까 그 유산 가지고 물고 뜯느냐고 서로 연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나눌 사람들 아닙니까? 맨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는 여섯 일곱 명이 하나님의 나라를 나누어 가졌는데 그 다음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서 육십 명, 칠십 명, 팔십 명, 백 명 늘어나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나누어 갖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세상에서는 유업을 나눌 사람이 많을수록 싫어하는데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합하며 동거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나누어도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샘납니까? 여기에서 ‘성도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라는 찬양을 불러줄 때 ‘또 하나 괜히 와서 축내내!’ 그런 생각이 듭니까?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함께 나누어 가지면 나눠 가질수록 신나고 감사하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형제관계를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너무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형에게 찾아가서 사업자금을 조금 빌려달라고 했더니 이만 원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서럽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유업을 나누어 갖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유업을 서로 누리고, 나누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유업을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준비하신 유업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나누어 주셔도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주님은 이전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형제들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받아주신 그 형제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사도가 딱 잘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왜? 아버지를 안다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 요한에게 묻는다면 요한은 ‘너희 안에 사랑이 있으면 아버지를 아는 자요. 너희가 사랑이 없으면 아버지를 아는 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철저한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한 동리를 지나가시려고 할 때 사람들이 예수 지나가심을 반대했었습니다. 그때에 형제 야고보와 함께 뭐라고 말했었습니까? ‘주님이시여! 우리가 기도하여 불을 내려서 저들을 멸하시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할 정도로 아주 과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원수에게 끌려 가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보고 놀랍게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사람이 되어 사랑의 사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삶에게 있어서 말하자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운운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의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운운하는 것은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면서 구원을 운운하는 것처럼 가증하고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면 형제를 사랑할 것이요. 여전히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어둠 속에 있는 자식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연합하며 그 유업을 누리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은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의 의미도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깊은 도전을 우리에게 주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형제들과의 관계도 다시 온전하게 회복되는 그런 십자가의 사랑이 성찬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살을 찢고 피 흘리신 것을 기억하면서 떡을 떼는데 옆에 있는 형제도 그 떡을 떼고 내가 마신 그 잔을 원래는 한자리에서 한잔에 함께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느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이런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단지 나에게만 임한 것만이 아니라 내게 임한 이 감격적인 사랑을 하나님께서 이 지체에게도, 이 형제에게도, 이 자매에게도 임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찬을 통해서 첫 번째는 예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비참한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나를 이렇게 특별히 대우해 주시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대우해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함께 연합되어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만 연합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비슷한 예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정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비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가는 노상에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쓰러졌을 때 첫 번째 들린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핍박한 적도 없는데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에게 속한 지극히 작은 소자하나를 핍박하는 것도 그것이 곧 나를 향한 핍박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형제들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그렇게 함부로 상처를 주거나 미워하거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고 그러면서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교회를 갈라놓는 가장 훌륭한 방법도 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열렬히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은 지식이 뛰어나서 사단이 속일수도 없고 열심히 뛰어나서 그를 나태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충성심이 대단해서 그의 기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무엇을 하냐면 충성된 사람들 그리고 열심히 있고 헌신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와서 독선과 아집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제가 함께 동거하면서 연합을 이루지 못하도록 그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와의 화목한 관계까지 끊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이 남아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새 집을 사가지고 들어가서 이 집이 잘 지은 집인지 못 지은 집인지를 알아보려면 못하나만 박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집은 들어가서 콘크리트못은 고사하고 나무에 박는 못을 박는데도 쑥쑥 들어갑니다. 콘크리트가 연합이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제대로 된 집은 콘크리트 못을 가지고 두드려도 들어가지 않고 부서집니다. 할 수 없이 드릴을 가지고 뚫어 가지고 그 속에다가 못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15년 전에 아파트가 당첨되어서 그곳에 갔더니 못하나 박는데 삼천 원을 달라고 합니다. 그때 당시에 삼천 원을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봉이 김 선달이 따로 없구나! 무슨 못하나 박는데 삼천 원씩이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주공아파트를 지었는데 얼마나 단단하게 지었는지 망치를 가지고 콘크리트 못을 집어넣어도 열 개를 박아야 그 중에 하나 박힐까말까 할 정도로 벽이 단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드릴을 가지고 와서 벽을 뚫고 못을 박아야 하는데 열 집정도 구멍을 뚫으면 드릴 날이 부러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드릴 날이 하나에 삼만 원 정도이니 삼천 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콘크리트가 연합이 잘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교회가 연합이 안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높이 지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큰일들을 이루어 갔는데 결국은 우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교회이름이 삼풍 교회인 것입니다. 연합이 안 되고 부실하니까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실한 연합을 통해서 파괴하는 힘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나니’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있는 그 모임의 결정적인 특징이 사랑이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단지 이 사랑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 무조건 용서해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진리로 그것을 바로 잡으면서 동시에 사랑의 연합을 이루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허물이 있고 잘못이 있으면 무조건 덮어주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바르게 가르쳐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으로 이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허물을 덮어주면서도 이를 바르게 고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잘 받는 학생들이 존경할 수 있는 스승이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저는 두 가지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바로 사랑과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덮어주면서도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 이렇게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 김 목사나 박 집사님이나 김 집사님이나 아무개 전도사나 아무개 권찰이나 선생이나 다 사람이 성자 같아 보이고 은혜로워 보이지만 그러나 왕년에 다 한 가닥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질 꽤나 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도 건드리면 무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니까 옛 성품이 가려지고 눌리고 눌려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확 벗겨놓고 나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는 사랑이 있는 공동체이고 허물을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미명하에 습관적으로 잘못하고 형제와 지체들에게 고통을 주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교회이기 때문에 너희가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식으로만 강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교회에 공동체가 하나 있었는데 부실한 형제가 그 공동체에 들어왔습니다. 그 부실한 형제가 그 공동체에 들어오면 나아지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두 달의 한 번씩 형제들의 돈을 다 훔쳐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우리가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습관적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사랑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깨닫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잡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영혼을 세워주고 도와주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도 교회가 연합을 깨트리지 아니하고 형제가 함께 연합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보실 때에 아름다운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선하지 못한 것은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선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이 볼 때에 아름답고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족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편안해 하십니까? 하나님이 연보를 많이 내고 교회를 많이 나오고 그런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런 것도 기뻐하시지만 먼저 그 자녀들이 함께 연합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있는 부모님들은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에 잘 아실 것입니다. 부모가 정신 나간 부모가 아니라면 좋은 집에만 모셨다고 해서 부모들이 좋다고 합니까? 좋은 집에 들여놓고 매일 와가지고 인사하고, 문안만 하면 좋다고 합니까?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좋아하는 것은 자녀들이 함께 어울리고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고 서로 존경하고 사랑할 때. 그때에 부모는 정말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물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똑같은 것입니다. 이 속에서 연합을 이루고, 연배를 이루고, 하나님의 형제의 사랑을 배우는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운교회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격적으로 묘사를 했냐면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 세우는 의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론의 후손들 가운데 제사장을 뽑을 때 제사장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서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머리에다가 기름을 쭉 부으면 머리에서부터 기름이 흘러내려 수염을 적시며 옷깃에까지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향기가 진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 부어진 그 기름이 온 몸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그 모여 있던 모든 지체들이 그 아론의 자손의 머리위에 부어지는 그 향료를 모두 냄새 맡으며 그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러한 즐거움과 기쁨이 형제를 사랑하고 함께 연합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기뻐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갑니다. 그래서 지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처음 예수를 믿거나 교회에 온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모여서 매일 불평하고 불만하고 형제를 미워하고 모해하면 그렇게 서로를 판단하고 서로를 해하려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높이려하면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낮추고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그래서 서로를 봉사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이것이 신앙이 없는 지체들은 이러한 모습이 바로 신앙이 성숙한 모습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한번 잡지에서 어느 교회의 이야기를 읽었는데 아주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교회를 세웠는데 하는 이야기가 이러합니다.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면 대개 보통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처음에 서있고 장로님들이 그 다음에 순서대로 쭉 서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인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네 교회에는 예배가 끝났다고 하면 장로님들은 그 층계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네 교회는 아직도 교인 중에 대부분이 아직도 장로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데 장로님들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장로님들이 배에 힘주고 성도들과 악수만 할 텐데 이 교회 장로님들은 심지어 어떤 주일에는 주방에 가야 발견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성도들의 점심을 차린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교회의 이런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장로가 되면 속히 교인들의 눈에서 사라져야 된다는 분위기가 장로들 가운데 깔려있다고 합니다. 참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장로님들과 교회 중직자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 나이 어린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것이 신앙생활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을 무엇인가하면 보고 배워야할 모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도 최대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교제도 나아지고 책도 좋아지고 했습니다. 예전에 신학교에서는 프린트물을 등사해서 사용을 했습니다. 지금은 수없이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신학교 교수들이 월급을 받아도 그 책들을 다 못삽니다. 그렇게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에 그 프린트한 인쇄물을 가지고 갓 쓰고 도포입고 두루마기 입고 선생에게 다다미방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던 그 시대에 오히려 더 위대한 사람들이 태어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단순히 지식만을 가지고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에는 모두 스승이 있고 모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습니다. 바울의 시대에는 스승은 많으나 아비는 없다고 그랬는데 아비는 그만두고 스승도 찾기 힘듭니다. 누가 아비처럼 따릅니까? 누가 목회자가 화가 나서 야단을 치고 욕을 해도 무릎을 꿇으며 ‘아버지’ 하고 바지가락을 잡을 사람이 몇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비는 그만두고 이제는 스승도 많지 않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공부다 교회의 설교를 듣는다하면서 나오는데 돈 내고 학원에 가서 강습을 듣는 것과 비슷한 태도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슨 형제사랑, 연합, 한 가족 이와 같은 의미가 발견이 되겠습니까? 형제들을 돌아보고 있습니까? 누가 어떤 궁핍에 있고, 누가 어떤 도움이 필요하고 그리고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내가 돕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있는가 하는 것을 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알고 예수가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내어주신 것 아는 것을 우리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보여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살피고 형제를 살피고 궁핍한 부분들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리고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가를 늘 살피고 돕기를 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이 함께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안보면 만나고 싶고 만나면 왠지 헤어지기가 싫고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있고 숨 쉬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형제를 일주일씩이나 안보고 살수가 있습니까? 일주일이나 안보고 살수가 없으니까 수요일에 보려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죠? 수요일에 만나고 주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으니까 금요일에 또 와서 한 번씩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보는 것입니다. ‘집에 다녀옵시다.’라고 말하며 집에 다녀와서 다시 교회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형제한명이 외국에 유학 가서 편지를 썼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고국에 두고 온 성도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밤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너무 외로워서 거기 있을 때는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손잡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토록 큰 축복인줄 몰랐는데 언어도 통하지 않고 생각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그 형제들이 그렇게 그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징계가 바로 출교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성도들 가운데 교제를 못하도록 끊어놓는 것이 바로 출교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왜 그렇게 무섭습니까? 지금에는 일층에서 징계 받으면 이층으로 가고 이층에서 징계 받으면 지하로 내려가도 아무 곳에나 내려가고 그곳에서도 그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한 것입니다. 자기가 정상적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형제됨을 누리고 살았더라면 그렇게 사랑하던 형제들을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다니던 교회를 한번 떠나는 것은 그것은 정말 보통결단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으시다 할지라도 유턴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힘든 것입니다. 정말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자매를 사랑하면 한없이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일주일동안 헤어져서는 못사는 것입니다. 이곳 세상에서는 거친 풍랑과 고난과 위기를 만날 때, 풍랑 속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인간은 홀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홀로 있다는 느낌을 받고 혼자서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며 성찬을 떼며 그리고 함께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기도하면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는 것이 형제들을 통해 자매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런 것들을 느끼게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자랑하는 하나님을 아는 훌륭한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기도시간마다 열심히 하늘을 찌를 듯 읊어대는 방언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소리를 내는 징과 같을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놀랍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친 세파에서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이 교회에 와서 그 심령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래서 예수의 사랑이 이처럼 놀랍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밖에서는 남편이 돈을 많이 벌고 자녀들이 공부를 잘 한다할지라도 집에 들어오면 매일 지저분하고 싸움이나 하고 자식들끼리 토닥거리고 가끔 유리창이 왕창 깨지고 가전제품이 부서지고 하면 남편이 밖에서 돈을 잘 버는 것과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가정은 쉼이 있는 곳입니다. 가정에서 모든 심신의 노고를 풀어야하는데 그것을 풀 수가 없다면, 모든 가족이 가정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풀 수가 없다면 수술을 받아야합니다. 유턴을 해야 합니다.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가족의 책입니다. 세상에서 마음과 육체의 피로를 가정에서 푼다면 교회에서는 무엇을 푸는 것입니까? 교회에 와서는 영혼의 무거운 죄 짐을 벗고 영혼의 참된 안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성도님들께서는 세상에 나아가서 많은 시간동안 일하다가 여기 왔기에 거의 파김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영혼의 쉼을 많이 얻고 돌아갈 때는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새 힘을 부여받고 그렇게 세상으로 돌아가는 곳. 그 일을 해줄 수 있는 곳. 그런 사람이 있는 곳. 형제의 교통이 있고 용납함이 있고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만남이 있는 이곳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음 주에도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못나오면 교역자들이 전화를 거는 것을 기다리고 심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교역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좋은 형제들과의 만남에 제가 오늘 빠지게 되어서 너무 섭섭합니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전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방이 필요하면 전화를 해서 ‘우리 집에 와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장로들을 청하여 심방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죠. 그러면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서가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세상을 이길 힘을 그리고 세상의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는 위로를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어지는 가를 그리고 우리같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는 지를 형제들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건물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목회자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내가 여기에 부조와 헌금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이곳에서 진정한 힘. 영적인 가정. 그 속에서의 하나됨을 경험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의 땀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누워있어도 생각은 오직 교회생각뿐입니다. 그래서 새벽에도 달려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교회를 뒤로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목사님이 하신 말씀에 깊이 공감이 되는데 교회는 장례식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교회는 성도가 죽었을 때 제목이 항상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무개 장로 천국환송예배. 천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불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더 완전한 교회로 가는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리며 모든 교인들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유족이 아무리 울려고 해도 뒤에 있는 성도들이 워낙 좋아하니까 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 교회를 사랑하며 섬기며 그 형제들과 사귀면서 살다가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이별하며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이 교회가 더욱 하나님의 교회다운 모습이 되도록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가장 중요한 반역입니다. 교회가 더 온전해지고 아름다워지리라는 굳센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배우고 사랑하고 그리고 고민하고 그곳에서 베풀고 그 속에서 참된 길을 찾아가며 교회를 섬기고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5.포기할 수 없는 관계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지난 시간에는 형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또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가 그리고 그러한 축복들이 무엇인가 그런 말씀들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난주 설교로서 133편을 거의 다 해설한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그러나 남은 이야기가 있어서 오늘 마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절부터 3절까지를 제가 다시 읽고 싶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 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여러분 시온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어느 도시든지 산을 둘러싸고 그리고 넓은 분지가 있고 그리고 사이에 강이 흐르면 도시로서의 최적입니다. 서울이 아주 대표적인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있는 도성이 아닙니까?
이 시온은 시온산이 바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그래서 하나에 의해서 둘러싸인 그 시온의 산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때에 그 시온에 거하시고 예루살렘에 거하시고 그리고 성서에 거하시고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들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곳이 바로 이 시온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함께 하시고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그 시온의 사람들 가운데 계실 때에 그 시온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계시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시온에서 받는 축복을 이미 시편에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망해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고 시온을 떠나서 도망하고 패망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단지 우리가 단지 6.25때 땅덩어리를 다 빼앗기고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월남사람들은 자기 땅을 잃어버리고 보트피플로 바다위로 떠돌아다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시온이 멸망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사람들은 말하자면 신앙적으로 풀리지 않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에 그 시온과 예루살렘은 항상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특별한 복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도 일반적인 은혜가 있고 아주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우린 살았습니다. 또 지난 주일날 만났고 오늘 이 밤 주일에도 만났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 매일매일 우리가 숨쉬고 먹고 입고 쓰고 생활하고 이렇게 인간으로써 기본적인 인격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은혜 말고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누리지 못하는 아주 특별한 은혜, 다른 사람들이 언제나 소유하고 있지 않는 아주 특별하고 유별난 은혜, 그래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고 특별히 하나님이 나를 예뻐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런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온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백성들이 항상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제나 위기에 처할 때든지 고난에 처할 때든지 예루살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는 장소 이야기하면 시온을 이야기하고, 축복을 겸하는 곳, 예루살렘을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예루살렘을 그리고 시온을 축복받는 장소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곳이 바로 시편 또 성경 구약에 나오는 모든 기사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시온에 복을 내리셔서 하나님께서 그 시온에서 모든 백성들이 복 받으라고 명령을 내리셔서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시온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게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을 구한 것을 제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것 외에 세상에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한 그러한 축복과는 다른 차원의 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옛날부터 오복을 이야기하고 혹은 하여튼 맨 날 복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뭐도 복이고 뭐도 복이고 또 오복이 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그 중에 확실히 기억나는 것 하나는 튼튼한 이빨이 오복 중에 하나라고 그랬습니다. 자식은 복이 아니라는 그런 통찰을 선조들은 가졌습니다. 자식은 복일 수 없다. 그리고 자식은 튼튼한 이빨만도 못하다 저희 할머니가 늘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속상해 하는 이웃을 만나면 ‘거봐 자식은 오복에 안 들어간다’고 하면서 ‘튼튼한 이빨이야 말로 오복 중에 하나다.’ 그래서 팔순이 다 될 때까지 호두를 이빨로 깨트려서 자손들에게 나눠줄 정도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복 받으신 분이셨습니다. 하여튼 그럴 정도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복에 대한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은 같은 복인데 그러나 기준이 다릅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복을 이야기해도 우리가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복이 세상에 사람들과 같은 그런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명하신 복, 그것을 오늘 성경이 가르쳐서 영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생. 영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심중에는 영생이라고 그러니깐 실감이 별로 안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보고 당신의 생명이 5년 연장될 수 있습니다. 하면 여러분은 아마 크게 기뻐하거나 아마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암 환자 모이는 병원들을 가보면 진찰을 받고 나오는 어떤 사람 중에 암인 줄 알고 갔는데 물혹이거나 지방덩어리여서 간단한 수술로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발표를 듣고 나오면서 눈이 시뻘개져서 창틀에 매달려 한없이 흐느껴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때문입니다. 근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곧 죽을 인생이라고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면 삶이 좀 달라질 텐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5년이 연장됐습니다.’ 하면 충격 아니겠습니까? 어느 신문을 보니깐 녹차를 계속 마시면 4년 내지 5년을 더 살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오래 산다면 그 자체는 의미가 없지만 그러나 이렇게 1년을 살아봐도 속 시원하게 원 없이 1년 살았다고 하지 못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래도 일찍 죽는 것보다 좀 더 살면 그래도 한번쯤 그물코가 천이면 고기가 걸릴 때라도 있다고 1년의 여유를 더 가지면 아마 이제는 못살았던 삶을 더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시온에서 명하신 그것이 뭐냐면 영생입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오래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죽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도 오늘 아침 설교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죄가 범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우리는 사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없고 여호와와 사귐이 없을 때 우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영생이 아니라 사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시온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하신 복이 있는데 그것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물리적으로 오래 사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죽음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 놓을 수가 없고 사망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고 사망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끊어 놓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단단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에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많은 잡다한 일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미래에 종말을 개인적인 사망의 종말을 가장 훌륭하게 대비하는 길은 무엇이냐. 오늘 영생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살아가는 삶의 그 가치 자체도 이 세상에만 있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가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히 숨 쉬고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한 세계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고 유한한 공간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무한한 하나님의 나라에 비밀과 축복과 은혜를 미리 맛보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가장 훌륭하게 죽음을 예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며 우리는 향해 달려오는 죽음의 위엄 앞에서도 그 위협에 굴복하여 우리가 범죄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다 행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 영생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 그들의 삶은 피곤하고 지치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명하셨는데 이 복이 영생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지위를 한없이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나 맛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도 앗아갈 수 없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고난과 시련도 빼앗아갈 수 없는 그런 영생을 우리는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유한한 세상 속에서 살다가 죽은 그것 이상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가치를 찾아가니까 다른 삶을 살면서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곳이 ‘거기서’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도다” 어디서? ‘시온에서, 교회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성도, 형제 자내들에 교통이 있는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명하신 것입니다. 축복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 깨닫게 되는 평범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아무리 어려워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생을 누리고 오늘 그 영생을 맛보며 살아가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시온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개척하던 초기 때부터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내가 노력을 하고 마음을 기울여도 이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이 될 때는 기도하고 떠나셔합니다. 그리고 좋은 교회를 찾아가셔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시온은 이 세상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교회출석하고 있는 이유가 아버지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할아버지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혹은 친구들이 많아서 혹은 날 도와주는 사람이 그 교회에 있어서 혹은 심지어 집이 가까워서 그런 이유들이 여러분이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가 그 교회 다니는 이유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은 모두 시온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온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 하나님의 교회와 자신이 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신앙의 참된 축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와 무슨 관계를 맺으면 어떠냐?” 하는 것은 “지금 아무려면 어떠냐?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영생을 명하셨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오늘 여기 열린 교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같이 있었고, 어떤 부들은 중간에 오셨고, 어떤 분들은 지난주에 오셨고, 이번 주에 오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어떤 인생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던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 여러분인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특징 하나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앙을 고백하며 이렇게 쓰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거미줄과 같은 신앙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이러한 마음의 변화와 그런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준 인생의 모든 변화는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찾아왔습니다.
모든 교회의 성도들 보다 뛰어난 영적인 수준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기 전까지는 초라해 보여도 작아 보여도 허물이 많아보여도 거기엔 언제나 추억 속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그에게 복 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당신을 알게 하신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걸 우리들은 모두 그런 상황을 가지고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야말로 주께서 시온에서 명하신 영생의 복을 누릴 수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돈독하던 옛 성도들은 한결같이 이사 할 때마다 이사 할 집을 찾아서 가고 교회를 옮긴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교회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집을 옮겼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이상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이미 신앙의 선배들이 깊이 인식하고 경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까이 산다고 해서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교회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교회로 보내주신 것을 알고 그 교회를 영적인 가정으로 생각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와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르바이트처럼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부업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생활 그 자체를 아르바이트처럼 하지 아니하고 정말 가정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로 힘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이야기하다가 이것을 “크도다 비밀이여”라고 말했습니다. 큰 비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부부가 만나서 한 그 이야기를 한 것은 궁극적으로 뭘 말하고 싶어서 했냐면 부부의 결합이 그렇게 신비하듯이 하나님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결합자체가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결합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신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있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착된 교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 치고 하나님을 향한 정착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을 한 교회에 부르셔서 50년 60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실 수도 있고, 혹은 1년이나 2년 섬기다가 다른 교회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여기서 인간의 끈으로 묶여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조금한 상처를 가지고도 사람들이 모두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조금한 상처를 받으면서도 고통에서 지나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교회에 묶여있는 끈이 하나님이 이 이유가 되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묶여진 그 끈이 아니라 인간적인 끈들로 묶여있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린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있는 것을 기뻐하시고 나로 하여금 이 교회를 가정과 같이 여기며 신앙 생활하는 것에 하나님이 즐거워하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교회생활을 우리의 분깃이라고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일주일에 이틀 동안을 예배드리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집에 하루 못 들어가서 외박을 하는 일이 있어도 교회는 매일 와야 하는 곳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두 번 세 번밖에 못 오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신년도의 적당한 때가 되면 5일 예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금요일도 나와야합니다. 이렇게 설교자가 말하고 있는 이 말이 여러분에게 오늘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면 여러분은 시온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5일 되는 날도 우리가 모여서 예배해야합니다.” 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할렐루야’ 해야 합니다. ‘아 기쁘다. 아 예배가 또 한 번 생긴다니 너무 즐겁다.’ 이렇게 해야지 “금요일에 우리 또 한 번 나옵니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들이 터지듯이 밀리는 전철, 그 표 끊기 위해서 기다리는 거,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지정된 버스를 올라타는 것, 사람들에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면서 교통을 시달리면서 오는 것, 차를 몰고 오면서 그냥 교통이 밀려서 빵빵거리는 생각이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린다면 시온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고, 주가 거기 계시며, 누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교통이 지옥이라면 맨 날 찬송을 부르기를 불속에라도 들어가서라고 했는데 내가 그 교통지옥을 뚫고서라도 아버지 집으로 오리라.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상아선 꼭대기에 세검정에서 뒤편으로 신양 상가 있는 데로 해서 위로 올라가면 민족제단이라고 있었습니다. 불법건물인데 8번째 다시 지었는데 9번째 부셔가지고 결국은 조국을 땅에 묻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곳에 다시 기도원을 세우게 해주시리라 묻고 내려온 적이 있는데, 거기는 올라가는데 한 시간 사십분이 걸립니다. 아무리 혹한에도 올라가면 땀이 쫙 흐릅니다. 근데 그 캄캄한 산길을 젊은 여전도사들이 바람처럼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뭐냐면 여기는 올라가면 80퍼센트 은혜를 받고 올라가선 20퍼센트만 받으면 된답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올라가는 동안에 심령이 가난해져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답니다. 야밤에 캄캄한데 혼자나 둘이서 그 산 속에 들어서면 기분 나쁘게 저기서는 바위를 깎아가지고 불상을 만들어서 목탁 두드리는 사람들이 서치라이트로 환하게 비춰놓고 불경 외는 소리가 난다구요. 그 속에서 캄캄한 그 산을 올라가 봐요. 그러면 하나님을 진짜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 도착하면 온몸에 땀이 쭉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벌써 거기 올라가면 하나님이 ‘아 그래 참 너 왔구나, 나를 인한 마음이 없으면 네가 어떻게 왔겠느냐’ 그러고 하나님이 20프로은혜를 채워 줘서 100% 은혜를 받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꾸십시오. 수요일에 우리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요일에 많이들 오십니다. 수요일 날 거의 여기가 찹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 대형화된 교회에서 수요일에 사람이 안 모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거는 회개하고 통탄해야할 일입니다. 여러분 막히면 무슨 생각합니까? 막히면 ‘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 들으러 가는 길이 멀고 험하구나!’ 그래서 저는 수요일에 오면 항상 기쁩니다. 왜 모여서 말씀 듣는 사람들이 거의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자세가 다릅니다. 왜냐면 어떤 형제는 말하기를 ‘어구 목사님 두 시간 반 걸립디다. 두 시간 반 걸려서 오니깐 수요일 날 조는 사람 한사람도 없습니다.’ 왜 두 시간 반 걸려서 여기 오고, 두 시간 반 걸려서 가면 다섯 시간 동안 와가지고 삼십분 졸고 가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깐 본전생각이 나서라도 앞자리에 앉아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경청합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은혜로운 말씀을 수요일 날 많이 주십니다.
여러분 막히고 어려울 때 생각을 바꾸십시오. ‘아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는구나.’ 막히는 차 속에서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님, 막히는 거 보니깐 오늘 되게 좋은 말씀을 주실 것 같습니다.’ 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와 보십시오. 거기가 여러분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갈릴리 해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시온과 바른 관계를 맺고 시온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특징이 뭐냐면 그 시온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말하죠?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고운 가슴속에, 그 사람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게 누구의 마음이라 그랬죠? 목사님의 마음이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그래봐야 별로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무개하고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서 뜨거운 사랑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깊은 사랑을 속에서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으면 그런 것이 사람에 대해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또 오릅니다.
여러분 낙심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무엇을 어찌해야할지 알 수 없을 때에 여러분이 예수초등학교 골목에 접어들면서 파랗게 들어온 열린 교회라고 하는 네 글자를 보면서 여러분 가슴이 뜨거운지는 것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한 없이 외로워 보이고 낙담하고 쓰러질 것 같은 질식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내가 이 교회에 한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한없는 위로를 여러분이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다른 모든 곳에서 내가 버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지라도 이곳에 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맞아주는 것 같은 기쁨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시온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가정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정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가정을 떠나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출장을 자주 가는 사람들입니다. 집회를 자주 다니는 저 같은 사람들, 가정을 떠나 있어야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이 교회를 한없이 사랑하면서도 교회를 잠시 떠나있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온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이 성전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늘 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온에서 영생을 누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바른 관계를 누리며 시온과 바른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하는 것들이 우리가슴에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우리는 기쁨과 설움을 함께하고 한상에서 먹고 마시며 요즘엔 좁아서 한 상에 못 먹지만 하여튼 우리는 늘 같이 먹고 마시며 이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여러분 히스기야 왕이 적군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적인 전쟁을 눈앞에 놓고 그들로부터 날아온 최후통첩의 외교문서를 가지고 어디로 달려갔습니까? 그것을 펼쳐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린 곳이 성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일 먼저 성전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승진을 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 제일 먼저 어디를 찾습니까? 여러분이 하던 사업이 놀랍게 성공한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어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노래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기쁠 때나 고통 받을 때나 혼돈스러울 때나 언제나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지혜를 얻었고 위기 속에서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경험했고, 연약한 사람은 성전에서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여호와의 의로운 오른손에 붙잡히는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젊음과 꿈과 사랑과 미래와 비전과 희망과 구원에 대한 경험 모든 것을 그 교회에 다 묻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 이 한 가지 문제만 보더라도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헬스클럽에 회원권 하나 끊고 그리고 수영장에 티켓하나 끊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온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던 사람들은 시온에서 시온과 바른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 시온에는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앙의 결론을 내리고 그 속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많은 형제와 자매들과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없는 것은 시온이 아닙니다. 시온은 언제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없는 것은 시온이 아닙니다. 다 끌려 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 무너졌습니다. 성문은 불이 탔습니다. 다 끌려갔습니다. 검투사로 노예로 다 팔려가고 다 끌려갔습니다. 시온산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온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온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있으면 거기에 함께 있는 형제자매들에게도 여호와의 이름을 높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걸어온 모든 길을 주께서 홀로 아시나니”라고 말할 정도로 사연이 많은 생활을 해 오셨습니까? 거기 있는 다른 형제자매들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연을 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가슴 벅찬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누리면서 이 교회로 인도 받았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왔습니다. 연약하지만 이곳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이기며 승리하며 삶을 살도록 사모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시온엔 언제나 동일한 하나님을 경험하고 같은 종류의 체험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로 하여금 거기 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거기엔 언제나 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그래서 그 시온에서 내리진 축복과 은혜를 내리고 그리고 복을 명하시고 영생을 주신 그것을 말하기 전에 형제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에 대해서 시온을 먼저 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시인은 가족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 이 시를 써내려가는 이 133편 속에서 그의 마음속에서 있는 어떠한 어둠의 그림자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셨고, 세상에 형제들은 자기를 버렸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들에게 더 좋은 형제를 주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받게 된 아주 중요한 교훈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형제들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 이것은 곧 시온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책망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위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이미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부모로 인해서 남편으로 인해 큰 상처를 고통 받는 아내, 그것도 고통 받다가 나중엔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간단한 말이 나옵니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식으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부모, 같이 먹고 살지만 그러나 그를 부모는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자기의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껴 놓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가족들이,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시온과 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함께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형제들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커다란 실패와 범죄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맘에 안 들면 만나서 다투더라도 관계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관계를 가져보려고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도 알지 못하고 무너진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새로 할 열심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확실히 이런 것들은 시온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관계,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면 시온도 여러분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시온과 여러분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온 속에서 함께 상처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이 치료받으며 하나님을 찬송해 가는 이 하나님의 교회에서의 형제사랑의 관계도 포기될 수 없는 관계를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많이 부딪히게 됩니다. 회사에서도 부딪힙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많이 부딪힙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딪힐 때마다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아픔만큼 성숙해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딪히면서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저는 자주 갈 기회를 없지만 자연을 좋아합니다. 계곡 보다는 강가에 가서 동글동글한 돌들을 보면 신비한 느낌이 듭니다. 어느 해인가 제가 자라난 옛 고향에 가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참 신비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신비한 느낌이 뭐냐면 그 동글동글한 돌멩이를 들어봅니다. 여러분 선배겠습니까? 후배겠습니까? 선배가 아니라 조상입니다. 돌멩이가 조상이라고요.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된 돌멩이가 아니라 산이 무너져 깎아진 돌멩이였을 것입니다. 그 돌멩이가 물살에 쓸리고 그러면서 구르면서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나중에는 동글동글 해집니다. 기계로 갈아도 그렇게 되기 쉽지 않은 그러한 돌멩이로 바뀝니다. 이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억해보십시오. 대게 교회를 꾸준히 정하고 다니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시온과 올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표적인 특징하나가 뭐냐면 인격적으로 너무 독특합니다.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독선과 자만 이런 것들이 그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기억합니다. 교회생활하기 전 까지만 해도 저는 제법 잘 다듬어진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내가 얼마나 사람들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며 살아가기에는 모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도사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쓸 모 있는 인간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도사가 되고 교회에서 더 험한 일로 부딪히다 보니깐 그 다음에는 내가 정말 얼마나 모난 부분이 많은 사람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더 느끼게 됩니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이것저것 다 관계를 끊고, 갈매기 슬피 우는 그런 해변에서 조금한 교회하나 오두막처럼 지어놓고, 평생 그 가난한 사람들과 설교하면서 살고 싶다. 거기엔 또 없습니까? 뱃사람들이 얼마나 험한데, 거기엔 또 없습니까? 어디가도 없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고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거기에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속에는 사람 냄새가 납니다. 늘 납니다. 그 안 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가짭니다. 인간의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바로 그 냄새가 난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들이 있으니깐 그 교회가 온전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늘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기한 것이 뭐냐면 그렇게 불완전하고 냄새나는 교회 속에서 말하자면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이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예전에 육군사관학교에 근무할 때 큰 연못이 있습니다. 가끔 밤중에 보초를 서면 강태공들이 철조망을 넘어옵니다. 처음엔 간첩인줄 알고 비상출동하고 난리가 났는데, 알고 보니 낚시꾼들이예요 그런데 고기를 묻어놓고 얼마나 안 잡았는지 정말 고기 반 물 반이입니다. 잉어도 1미터 되는 잉어들이고 물에 발을 넣고 발을 차면 발에 두두둑 걸릴 정도로 고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삼십분 정도만 낚시를 하면 큰 것 몇 마리씩 잡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넘어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깨끗해 보이질 않아요. 그런 게 그 물에 연꽃이 핍니다. 신기한 것은 그 구정물 같은 곳에서 연꽃이 피는데 가끔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하면 물이 탁 튀어서 연꽃에 물이 튀어서 흙탕물이 튀어 올라도 그게 사르르 굴러서 떨어지고 하얀 꽃 분홍 꽃이 찬란한 게 피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불완전해도 하나님께서 그 불완전한 속에서 인간의 냄새가 나는 속에서 또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고 뉘우치고 형제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여호와를 믿고 형제를 사랑하는 참 도를 배워가면서 그러면서 연꽃과 같이 그렇게 온전하고 아름다운 신앙으로 꽃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신앙으로 자라오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늘 시온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형제의 사랑의 관계를,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야한다는 이 관계가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 관계가 싫으면 하나님을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형제 속에서 갈등하고 고통 합니다. 그러다가 진심을 털어놓고 대화하거나 아니면 어느 기로에 회개하게 하고 그리고 우리를 돌이켜서 하나 되게 할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 발견에 형편없는 지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소망 없는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야 되는 필요를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동작대교를 건너다가 그 건너편에 고수부지에 가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가끔 보면 무선조정을 합니다. 근데 헬리콥터부터 시작해서 조금한 비행기 심지어는 조금한 강아지 한 마리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비행기 까지 리모컨으로 날립니다. 속에는 엔진이 들어있어서 폭발을 하면서 돌게 되어 있는데, 1킬로미터까지 조정을 합니다. 1킬로미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날아갑니다. 날아가면서 비행기가 생각합니다. ‘세상에 나를 왜 여기까지 밖에 안 내보내는 거야, 내가 저 무선조정기만 아니면 휙 넘어서 국립묘지까지 한 바퀴 돌고 올 텐데.’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1킬로 밖으로 더 멀어졌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는 힘을 잃어버리고 조정의 한계를 이탈해서 땅으로 처박혀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억압하는 것 같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 같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기 못하게끔 우리의 신앙생활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이러한 긴장과 부족함이 교회 속에서 경험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형제와의 관계를 포기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와 함께 우리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아주 연약한 지체들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울과 같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여기에 있고, 그리고 여러분이 모세와 같은 목회자에게 목양을 받으면서 교회를 구성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교회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교회는 이 속에서 함께 형제의 사랑의 관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리고 시온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사모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허물이 있을 때 허물을 용서하고, 죄가 있을 때 그 죄를 사하여 주는 이러한 용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교회가 온전해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비슷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성도들의 믿음이 있고,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는 불꽃과 같은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그 곳에 거기에는 천국과 가까운 모형이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천국과 같이 되지 않는 것을 인해서 우리는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며 살면서도 이제 완전하게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나라의 도래를 우리들이 기다리며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그 사랑을 경험하며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는 다윗을 버렸습니다. 스스로 부모님은 나를 버렸다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부모는 포기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는 시온에서 누리는 형제와의 연합, 시온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하나 됨,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미 고난으로 얼룩진 생애를 살아오게 하는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것을 그리워했습니다. 망명생활을 떠났을 때 고라의 자손도 이것을 그리워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끔 하나님께로 데려가던 그 때를 생각한다고 술의 할 정도로 생각하고 그 만남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이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이름을 떠올릴 때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뜨겁게 다가오고 연약한 지체를 떠 올릴 때 , 온전하지 못한 지체를 떠올릴 때, 믿음으로 승리하는 지체를 떠올릴 때, 그리고 고난을 받거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형제자매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또 오를 때 그 이름 석 자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언제나 여러분의 이름을 들으면서 마음이 녹으시며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에게도 느껴지게 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틀 동안 흩어졌어도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사랑의 줄로 느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교회가 되어서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연합하여 동거할 때 하나님께서 한없는 축복을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형제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