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Ⅳ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고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호14:4) 1998.1.12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패역을 고친 후에 주시는 축복Ⅰ(호14:5) 1998.1.13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4
3. 패역을 고친 후에 주시는 축복Ⅱ(호14:6) 1998.1.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8
4. 돌아오는 자들의 복락(호14:7) 1998.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40
5. 패역을 고친 자의 새로운 삶(호14:8) 1998.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2
1. 고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
특별히 이 호세아 14장은 회복의 장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이제 패역하고 신앙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그 패역과 그 많은 불순종에서 돌이켜서 정말 하나님께 사랑 받는 백성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인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잠시 배경을 말씀드리자면 이 호세아서가 쓰여진 것은 주전 8세기 중간시기쯤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시대로부터 300년 정도후의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때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나라가 점점 강성해지고 많은 부를 누렸습니다. 영명한 군주들도 태어났고 그래서 나라는 오랜만에 아주 황금기를 구가했습니다.
특별히 여로보암 2세의 치세 하에서는 이 북왕국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서자 왕국으로서의 불명예를 씻고 오히려 남왕국 유다 보다도 훨씬 더 세력 있는 나라로 강력한 판도를 유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치, 군사, 경제 모든 분야에 있어서 강력한 힘을 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주위의 작은 많은 나라들이 이 나라에 와서 조공을 드리기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그 왕국의 번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해서 이 호세아서도 기록하고 있고 또 아모스 같은데도 나옵니다.
그래서 여름이면 여름별장으로 놀러 다니고 겨울이면 겨울별장으로 놀러 다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는데 그 침상은 수입품 상아로 깎아만든 그런 침상에서 잠을 자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번영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파괴되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속속들이 썩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한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흐느껴 울듯이 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나서 이제 멸망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이스라엘 역사의 비탈길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풍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이제 예언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점차 나라가 기울게되고 북쪽에서 일어난 앗수르라는 나라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게됩니다. 공격이라기 보다는 이제 남쪽으로 진출을 해서 애굽 쪽으로 가는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하는 앗수르의 남진정책에 제일 먼저 걸림돌이 되었던 나라가 북왕국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남왕국 유다를 지배하게되면 그 다음에 애굽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이 이스라엘은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점점 약해지고 영광이 점점 떠나게 되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국가적인 생존을 위해서 강대국에게 아부하면서 외교를 통해서 자신의 국가적인 목숨을 연명해 보려고 했는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슬펐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의지하면서 사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잘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잘사는 힘이 누구를 의지하며 나오는 힘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중에는 머리 좋은 사람도 있고 돈 있는 분도 있을 것이고 권세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들을 자원으로 삼아서 잘사는 것을 하나님은 바라지 않고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해서 잘사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싶어하시는지를 이 14장에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그 모든 진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끓어오르던 많은 진노는 지나가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자하는 그 안타까운 아버지의 마음, 목자의 마음이 이제 14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사경회 때에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참하게 그렇게 신앙을 모두 팔아먹고 엎드러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들을 쭉 3절까지 더듬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4절에서는 말하자면 화려한 회복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오늘 4절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저희를 즐거이 사랑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제일 먼저 보여주시는 것은 패역을 고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즐거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패역을 고치시고 즐거이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떠났기 때문이라는 이러한 단순한 논리의 구조를 이 4절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죄를 용서하셨으면 그만이지 또 패역을 고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은 죄짓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큰 외도를 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가면서 사는 것이 좋은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똑바로 걸어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그리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또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그런 삶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세상으로부터 얻는 지혜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식보다도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구슬이라고 말한다면 지혜는 그 구슬들을 꿰는 실과 같은 것입니다. 지식은 세상적인 지식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고 또 문제가 안되지만 그것을 꿰는 지혜가 세상적인 지혜일 경우에는 악한 삶이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식이 세상의 지식이라도 그것을 꿰는 지혜가 하늘의 지혜면 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부름을 받았으면 이제는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도 하고 돈벌이하는 방법도 배우고 많이 배우지만 그러나 그 지식이 만약에 우리의 인생에 구슬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느 구슬을 버리고 어느 구슬을 꿸 것이며 어느 구슬과 어느 구슬을 이을 것인가 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에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이런 지혜를 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하늘의 신령한 지혜를 받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거늘 미련한자는 여호와를 멸시하느니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되고 충만한 은혜생활을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악인의 꾀, 악인의 지혜를 좇는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또 하나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이 걸어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의인은 항상 외톨이 취급을 받습니다. 죄인이 있는 길에서는 늘 죄인들이 좋아합니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이 더 환영을 받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세상사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못 느껴 보셨다면 여러분들은 참된 신자일수 없습니다. 참된 신자가 아니던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그 사회자체가 놀랍게 거룩한 사회이던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제가 여러 군데서 집회를 오라고 하는데 제일 좋아하는 데가 제주도입니다. 왜냐하면 공기가 너무 좋고 교통도 안 막히고 여러모로 제주도가 참 좋습니다. 한번은 차가 평지를 달려가는데 운전사가 '손님 저것 좀 보세요, 저것이 말이 됩니까?' 하고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예화) 제주도의 수평선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과 이 착시현상을 이용해 제주도 사람들이 서울사람 돈을 따먹으려고 골프장으로 불러들인다는 이야기
제주도 수평선에 대한 이 착시현상도 바닷가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진실한 수면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죄인의 길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인생이 성공할 것이라고 하는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을 팔아먹고 죄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길이 성공을 보장하고 의의 길이 실패를 보장하는 것 같아도 주 없이 성공하기보다는 주와 함께 실패하겠노라 하고 의로운 길로 걸어가야 됩니다. 오만한 자리에 않지도 말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의 오만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영적인 교만에서 비롯된 오만입니다. 이런 사람의 자리에 앉는 그것은 말하자면 타락의 최종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우리가 앉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보십시오,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되는지, 여러분 지난 한해도 악인의 꾀에 얼마나 솔깃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에는 왜 그렇게 귀가 어두운지 '뭐라구요?, 순종하라구요?' 그러면서 그 옛날에 시외통화 하는 것처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응답을 해도 가는귀 먹은 사람처럼 안 들렸지만, 세상이 뭔가 우리에게 성공을 미끼로 유혹을 하고 그리고 우리가 형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세상의 지혜로 우리를 미혹할 때 우리는 얼마나 놀랍게 거기에 반응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이 죄를 떠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죄의 길에 설 때도 얼마나 많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들어서 자신의 인생에 아예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하나님의 징벌 같은 것은 계산에 넣지 않고 자기만 결심하면 훌륭한 인생을 살수 있을 것이라고 마치 망가진 핸들을 붙들고 운전하는 초보 운전자처럼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과속으로 몰고 가서 여기저기 들이받고 우리의 인생이 폐차직전까지 간 실패를 경험한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면 좋은데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잘못산 사람들을 아예 폐기 처분해 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교회는 마치 폐차장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실패한 사람들을 고치시고 새롭게 만드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렇게 나와서 은혜 받겠다고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하고 찬송을 하니까 다 신품 같아 보이지만 다 중고품입니다. 여기저기 들이받고 부서지고 해서 뜯어다가 고치고 꿰매고 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제가 보이는데 여러분은 안보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생각해도 너무나 밉고 한심스러울 때에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결국은 이렇게 살다가 천당에 가는군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볼 때 너무 희망이 없고 너무 바보 같고 그리고 살아온 내가 밉고 또 살아가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훌륭한 일 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고치시는 일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주위에 훌륭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많이 고친 사람입니다. 신통치 않은 사람은 고치다가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방에 집회를 내려가던 중에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다니는데 차 본체는 까만 색, 본 네트는 빨간색, 문짝은 초록색입니다. 그러니까 차가 망가졌으니까 어디에서 뜯어다가 갖다 붙여 놓았는데 칠을 하고 다녀야하는데 굉장히 급했던 모양입니다. 가는데는 지장이 없으니까 그냥 끌고 나오는 겁니다. 차가 신호등 앞에 서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낄낄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직장 다니면서 술 안 먹는다고 얼마나 구박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모두 죄인의 길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이상하게 죄인들이 걸어가는 길은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착시 현상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어떨까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주님이 바라보실 때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말하자면 주님이 그쪽 동네에 시선을 두시기만 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주님이 바벨론으로 시선을 두실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한사람 있었는데 항상 사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던 그 다니엘이 주님의 눈에 들어왔던 것처럼 그런 사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저 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완벽하게 고쳐놓으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탕이 좋아서 그런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손을 많이 봐주셔서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이 손만 봐주시면 제법 쓸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에서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죄를 짓게되면 주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드렸으니까 그 자체가 벌받아야 될 일 아닙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우리가 신앙에서 실패를 해도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와있는데 두 가지로 잘 읽어야 됩니다. 하나는 아예 끝장내 버리시는 진노이고, 또 하나는 일시적인 진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처음에 말씀드린 끝장내버리는 진노는 하나님이 무엇인가 그들이 범죄하였을때 그들을 아예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고 앗수르에게 망하기도 하는 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신 적도 물론 있었으나, 그러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영적인 공동체 자체는 주님이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버리실 수도 없고 버린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자녀가 있다면 공부 좀 한다고 갖다버리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주워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남아날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족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사랑에 비추어 보아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부실해도 하나님은 완전히 폐기처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슨 말씀이냐 하면 때로는 성경 속에서 진노라고 표현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기 위한 그러한 진노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이 바르게 살지 않을 때 책망합니다. 책망할 때 웃으면서 '얘야 이리 오너라 종아리 맞자' 하며 채찍으로 때리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난 너를 때릴 때마다 이렇게 즐겁단다' 그러고 때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때릴 때는 다 화가 나는 겁니다. '이 자식 엎드려뻗쳐, 이따위밖에 못살겠어' 그러고 마구 팹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야만 아이들이 더 무서워하지 만약에 엄마가 얘를 패면서 '얘야 맞자' 그러면 아이들이 실성한 줄 압니다. 그게 아이들의 입장에 서보면 진노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두 가지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표현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장내 버리시려고 그렇게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를 통해서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신앙이 잘못된 사람들은 아주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찮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망가진 채로 고쳐지지 않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다라고 하는 그 자체가 비극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부모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저 자식은 내놓았어요, 포기했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럽니다. 그렇게 내놓으면 그 다음서부터는 그 아이에게 별로 간섭을 안하게 되겠죠? 그래서 그 아이가 집에 들어가도 밥도 주고 재워도 줍니다. 그것가지고 신나 한다면 IQ가 몇 자리 자식입니까? 그것 바보 아닙니까? 자기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친자식이고 다리 밑에서 주어온 자식도 아니면서 부모가 자기에 대해서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밥이나 먹여주고 잠이나 재워준다는 것 가지고 만족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커다란 비극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과연 내 안에 진실로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러주셔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자녀 삼아 주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충만하게 느끼면서 주님과 함께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느냐 이것을 반문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그 자체가 형벌입니다. 그 자체가 비극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가 죄악된 길, 실패의 길, 타락의 길을 안 들어가면 좋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런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됩니다. 제일 먼저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말하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떠한 회복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회개가 없는 복음, 뉘우침과 참회가 없는 신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결국은 멸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진실로 거듭나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의 영혼 속에 심겨져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늘 참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인생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 죄인의 특징은 강퍅함입니다. 주님이 눈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불러도 그들은 점점더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돌아와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져 있고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큰 은혜에 비해서 거기에 보답하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다든지 아니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든지 하는 이런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참회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주 없이 살고 사람의 꾀와 지식을 좇으면서 신앙을 멀리하면서 살았던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토설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항상 거기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러한 회개의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실제로 경험을 해보면 우리가 깊은 죄에 빠지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난 그러한 실패의 길에 지속적으로 거하였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됩니다. 깨닫는 것이 우선 입니다. 그래서 깨닫게되면 깨닫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서 있어야할 자리와 현재 서있는 자리를 보여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있으면 받을 축복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있기 때문에 자기가 받아야하는 고통과 영혼의 아픔을 동시에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억울해서 눈물 흘리는 면도 포함되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순종했더라면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을 탠데 내가 불순종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모든 것을 내가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비참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먹어 버린 가난한 상태가 되어서 마치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를 찾고자 하는 그 탕자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구나 하는 마음이 회개를 불러오는 겁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똑같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를 주워먹으면서도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기 전까지는 참회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습니다. 뭐가 생각났습니까? 자신의 이 비참한 생활과 먹을 것이 풍족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품꾼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고는 참회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런 거룩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죄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눈에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심령은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호소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귀가 먹고 그리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오는 사람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심령이 되어서는 우리가 웬만한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가지고는 우리자신이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면 곡식이 자라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땅이 오랫동안 묵은 땅이 되어있어서 곡괭이로 쳐도 불이 번쩍 날 정도로 그렇게 굳어진 땅이 되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물을 주고 햇빛이 비치고 그리고 씨앗을 뿌려도 열매맺지 못할 것입니다. 씨앗을 뿌려도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고 뿌리내리지 못한 그곳에 뿌린 물은 그 씨앗을 썩게 만들 것이고 그리고 식물을 정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햇빛은 그 씨앗을 매말려 버려서 결국은 결실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됩니까?
호세아서는 말하기를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대책이 없습니다. 호미를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큰 황소 두 마리를 매달아 가지고 커다란 쟁기를 땅속깊이 푹 박아 가지고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그 마른땅을 걷어내고 속에서 나오는 까맣고 기름진 흙이 위로 올라오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들은 모두 걷어내고 거기에 다시 씨앗을 뿌려야 됩니다. 분명히 여러분들 가운데는 그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전에는 신앙생활에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영혼의 묵은 땅을 기경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참회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참회를 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한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광경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하면서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면 많은 지체들이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돌아갈 줄을 모르고 회개하고 지친 상태로 옆에 있는 지체들에게 고개를 기대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는지를 서로 털어놓고 나누는 그러한 광경을 보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깊이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정답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리니' 하셨는데, 그런데 이 패역이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앗수브'라는 단어로서 이 '앗수브'는 (여호와께로)돌아간다라고 할 때의 '수브'에서 나온 어근이 같은 분사형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도 돌아가는 것이고 패역도 돌아가는 것인데,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패역은 자기 고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패역입니다. 패역이라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패역' 그러면 간음죄를 짓고 살인을 하고 사기를 치고 도둑질하고 등등 이런 것들도 물론 패역이지만, 그러나 패역은 이런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기의 고집대로 살려고 하는 강한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패역입니다. 그래서 이 패역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깊이 우리에게 뿌리 박혀있고 또 이 패역이 얼마나 고질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우리 모두 이 패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일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제껏 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 믿게 하시고 또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충만한 주의 사랑과 은혜의 물에 잠겨놓으실 그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경향이 안 생겨납니다. 그러나 일단 그 은혜의 물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은 고집들이 아주 강하게 우리 뼛속깊이 스며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었고 우리의 존재와 분리해서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그런 특징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게으름, 나태, 방탕, 음란함, 거짓, 도둑질, 미워함 이런 것들이 깊이 파고 들어와서 우리에게 패역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죄 그 자체도 무서운 것이지만 죄가 가져오는 결과가 엄청나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패역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쪽 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한번 눈물 흘리고 깊이 회개하면서 '나는 이제 이렇게 살수 없어' 하고 딱 돌아올 수 있지만, 그러나 패역을 고치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은 그렇게 금방 눈물 한번 흘렸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이런 비유를 들지 않습니까?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먼 곳으로 가서 돈도 많겠다 사람 후려치고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 성적으로도 방탕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모두 다 털어먹었습니다. 이젠 가난하게 되었고 의지할 데가 없게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나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이제 자녀의 지위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가 그렇게 타향에서 방탕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성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금방 고쳐집니까? 술에 절어서 살았기 때문에 알콜 중독이 되었습니다.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돌아온 건 사실이지만 다시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 맑은 소주 생각이 날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보같이 생각하는 것이 뭐냐하면, 자기가 한번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나면 그것으로서 끝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물론 회개하고 눈물 흘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제 새롭게 살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제 고쳐야 됩니다. 성병은 병원에 지속적으로 다니면서 고쳐야 됩니다. 5년 걸릴지도 모르고 아니면 결국은 못 고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알콜 중독도 특별한 기관에서 요양을 받으면서 전문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약물을 투여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술을 먹고싶어 하는 마음과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고쳐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가면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수 있는 건강하고 단정한 그러한 사람으로 다시 변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몸에 그런 타락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병과 고쳐야될 것이 있으면서도 눈물 한번 흘리고 손들고 옵니다 찬송 한번 부르고 은혜 흠뻑 받으면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집에 가서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게되면 이게 해결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오르게 됩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참으로 사랑해 주시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의 친밀함은 잠시였고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절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지 않으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패역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패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에 굳은살이 박히고 또 박혀서 하나님의 사랑이 웬만큼 가서 닿아도 그것을 감각으로 느낄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말하자면 죽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죄 가운데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을 다루면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나서 더 자포자기에 빠지는데 그것은 무식해서 그런 것이므로 깨달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진심으로 회개했는데 결과는 나아진 것이 별로 없어요. 하나님께서 용서를 안 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을 안 해주신 것이 아니라 패역한 심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저 아들놈은 참 패역하다' 그런말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패역한 얘들 예를 들어볼까요?
요즘은 좀 뜸합니다만 IMF 한파 때문에 부모님에게 줄 돈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옛날에는 후딱 하면 용돈을 안 주어서 부모를 때려죽였습니다. 술값을 안 주어서 또는 야단을 치니까 불질러 버렸다 그랬는데 그게 패역아닙니까? 그렇게 패역한 자식들 마음속에 부모의 사랑이 느껴지겠습니까? 느껴질 수 있으면 이미 그는 패역한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돌아온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나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리니 그러면서 그 패역을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싶어도 이상하게 회복이 안되는 분들은 오늘 이 점에 대해서 눈을 떠야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여러분들이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면서 회개한 적은 있었는데 지속적으로 나를 고쳐주소서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어놓는 신앙생활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안 고쳐집니다, 고쳐지나 보세요, 절대 안 고쳐집니다. 결국은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고쳐지지 않는 망가지고 패역한 마음 패역한 삶을 그냥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당하는 그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풍성한 삶이 있습니까? 목자의 참사랑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행복이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이 큰 환난과 풍파가 불어와도 안전하다고 하는 신념이 있습니까?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까? 늘 무엇인가에 쫓기고 미친 듯이 허덕이면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이라고는 망가지고 치료되지 못한 채 폐기처분 직전에 놓인 영혼, 자신의 망가진 인생, 그리고 하나님과의 고장난 관계가 재고처럼 쌓이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병이 있으면 가장 지름길은 마냥 무식하게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아야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그리고 자기를 다 보이고 자기가 이렇게 패역한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정말 고침 받기를 원한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필요하면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에게 뭔가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부끄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멀쩡하게 있는 젊은 여인들한테 옷 좀 벗어보세요, 이야기하면 뺨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면 꼼짝 못합니다. '다 벗어요, 엎드려요, 바지 내려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다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수치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불명) 치료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치료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노출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하고 내 인생의 진정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고 그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찌르고 계시다 라고 하는 그런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겁한 사람들은 따라서 영적인 회복도 가능하지 않고 속임수를 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려고 하는 약삭빠른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 곤고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정직하게 '하나님 곤고합니다, 주님은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만 내 마음에는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 영혼은 망가졌습니다, 제 신앙생활은 파산선고 되었습니다, 주님 나를 고쳐주십시요' 이러한 정직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게 금방 고쳐지는 것은 아닌데 또 생각보다 엄청나게 빨리 고치십니다. 문제는 무엇에 달렸느냐하면 얼마나 정확하게 투약을 하느냐이고 또 하나는 얼마나 환자가 의욕을 가지고 자신이 고침 받고 싶다 고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 가서 약 꼭 드세요' 하고 주면 집에 가서 어디 치워버리고, '약이 어디 있나' 하고 또 와서 '주사나 한대 놓아주세요' 합니다. '내일 병원에 오세요' 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병원에 올 시간에 가서 술 먹고 앉아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결국은 의사도 고치지 못합니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내어놓고 우리의 망가진 부분들을 고쳐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속하게 고치시는지 모릅니다. 사랑이 없고 마음속에 피묻은 칼과 같은 미움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을 결국은 하나님이 고치셔서 그 칼 다 꺼내십니다. 뺏길 때는 막 미치겠죠, 그 칼 그걸 가지고 사람들 찌르는 재미로 살았는데 말이죠, 그걸 내놓으라고 그러니까 펄펄 뛰는 겁니다. 회개할 때 우는 이유가 또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까는 억울해서 운다고 했지만 그것 아까워서 우는 겁니다. 자기 옛날의 옛 고집 옛 자아 버리는 것이 그렇게 섭섭하고 아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하고 꼭 같느냐 하면, 암환자가 암덩어리 떼어내면서 '아이구 저 살, 저 고기, 저 피' 그렇게 하는 것과 꼭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고치는데 몇 년씩 걸리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 변하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야, 세상에 새사람이 되었네, 몰라보게 변했네'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경우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신속하게 고치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고치시고자하는 손길에 반응을 제대로 안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걸 가르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죄 가운데 있으면서 지금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불순종하는 재미를 또 안 잊어 버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 도토리 만한 인간 속에 뭐가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신비합니다. 나쁜 쪽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또 고치시는 하나님의 그 눈빛을 피하는 재미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살 피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하나님 손들고 옵니다 나 고쳐주세요' 할 때에는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몇 번하고 나니까 조금 숨통이 튀었거든요. 그러니까 '꼭 뭐 그렇게 수술을 해야하나? 뭐 그렇게 내 마음을 해부해서 모든 죄를 다 끄집어내야 돼? 뭐 꼭 그렇게 해야되는가? 딴 사람도 끌어안고 잘사는데?' 이럽니다.
그러니까 눈물 흘리고 회개를 했는데도 정말 고쳐지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망가진 채로 살아갑니다. 망가진 채로 살아가니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도구가 되고 복의 근원이 되어야될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그런데 고쳐지지 않은 채 살아가니까 이게 보통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정비공장에서 폐차 직전이 된 차를 겨우 이제 시동을 걸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을 못 기다리고 그걸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도 안 듣고 핸들도 안 듣고 그 다음에 배기가스는 시꺼먼 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고 앞차 옆 차 들이받고 그리고 제멋대로 차선도 지키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망가진 채로 그냥 사는 것은 하나님과 이 세상과 자기 앞에 너무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예수를 믿어서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주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해지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망가진 사람이 그것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야, 너희들 좀 고칠 수 있게 해달라, 나한테는 약도 있고 기계도 있고 좋은 의술도 있으니 내가 너희들 고쳐줄 테니까 그래서 좋은 사람 만들어주고 이제 그 모든 패역을 도려내어서 깨끗한 사람 만들어 주어서 나의 큰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로 너희를 쓸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날 좀 허락해 달라' 하시지만 그걸 허락을 안하는 겁니다. 그것 불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에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래 신앙생활해도 그게 뭡니까?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 모양 일주일에 한번씩 끌려와 가지고 그러고도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어디 가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필요하면 내놓고 아니면 감추고 이러고 살아가는 삶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치료의 기회들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고치십니까? 우선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말씀으로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진토에 떨어진 것같이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서 우리를 고치시고 주의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어서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굽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로 잡으십니다.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서 수없이 외치는 말이 있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고자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패역을 짊어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고통을 덜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인간의 비참함이 얼마만한지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더 많이 고통을 당하고 더 많이 아픔을 겪고 더 많은 시름 속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망가진 나 같은 인생을 고치시는 방법이 주님이 진리를 통해서 짐승과 같은 나를 깨닫게 하시고 바보와 같은 나를 고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되는 그 시점까지 그는 더 곤고해져야 됩니다. 더 고난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넘치도록 고난을 받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깨달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라도 마지막에라도 깨달아야지만 그 영혼이 버림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희망이 없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고칠 것이라고 하는 진정한 기대가 없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 매일 주어지는 몇 조각의 떡이나 몇 점의 고기를 먹으면서 많이 먹는 날은 웃고 돌아다니고 배고픈 날은 인상쓰고 주위의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인상 그리면서 돌아다니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짐승이지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우리에게 원하셨던 삶이 겨우 그런 삶이었습니까? 그런 삶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기대를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살리시기도 하고 깨닫게 하시기도 하고 변화시키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놓치면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패역을 고치실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감격과 같이 여러분들에게 밀려온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의 추억이 있고 그런 감격이 있는데 오늘은 왜 그런걸 잃어버리고 살아갈까요? 그런 사랑을 내가 많이 경험했는데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이 불순종하여 패역을 하나님 앞에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와서 말씀으로 나를 고치신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마음을 열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몰아넣었던 그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치고 그리고 그것들을 치료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여러분들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손길을 기대게 되는 것입니다. 용한 의사에게 진단을 한번 받기 위해서 3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신문에 한번 나왔더군요. 그 병이 3년을 기다려도 괜찮을 병이라면 꼭 그렇게 진찰을 받아야 됩니까?
주님이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기뻐하시고, 우리는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며 사는 삶, 이것이 바로 주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의 패역을 고치지 않고 그래서 여전히 반쯤 망가진 채로 살아가는 이 불순종의 삶을 계속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은혜 이러한 사랑의 손으로 우리 깊이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지고 고치시고 그리고 새롭게 해주셔서, 이전의 숙명처럼 여겨왔던 모든 실패와 무기력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이 모든 동물적인 삶들을 모두 분쇄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안에서 그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안고 아직까지도 이 사랑 모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고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 전하는 사람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패역을 고친 후에 주시는 축복Ⅰ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白合花)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리니, 이는 저희에게서 나의 진노가 떠났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다 복습을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회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회개의 궁극적인 목표요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이라고 하는 것은 눈물이 귀하고 참회가 귀하긴 하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 하나로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충분히 고쳐서 새사람 만드실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선택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여러분들은 마치 정비불량의 자동차처럼 되어서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택하셨을 때에 원하셨던 목적과는 정반대 되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바라보실 때에 고통스러울 것이고 여러분도 고통스러울 것이며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관계를 맺고있는 가족과 모든 이웃도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우리에게 누리게 하고 싶으셨던 그러한 삶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피로 쓰고싶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참 은혜를 깨닫고서도 견고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하나님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자신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 때문에 자신의 삶의 방향과 목표가 변화되어서 우리 앞에 살다갔던 영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과 같이 그러한 아름답고 믿음의 길을 우리가 걷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감동과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바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 오랫동안 살아왔던 우리의 패역하고 굽은 우리의 잘못된 질병과 같은 하나님을 거슬려 살고 싶어하는 이 죄악된 본성을 고치겠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자신을 바치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망가진 인생들을 고치셔서 죄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세계 속에 영광스러운 계획을 따라 살도록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반쯤 고쳐진 상태로 자신도 괴로워하고 하나님께도 고통을 드리면서 망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비참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면서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세상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 불러다가 고친답시고 교회 안에 불러다 놓으면 자기 같은 사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가지고있는 신앙적인 수준, 교회가 가지고있는 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패역을 고치는 이것은 그것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행복이 없다고 저는 단언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근본적으로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쳐지고 나면 하나님이 즐거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자유롭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우리의 패역입니다. 우리의 굽어진 삶,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고 굽어져 있으면서도 도무지 고치시려고 하지 않는 그러한 악하고 무지하고 그러면서도 힘있는 죄악된 본성, 그것이 우리의 삶을 곤고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고통과 시련으로 몰아넣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축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패역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듯이 부어집니다.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집니다.
여러분 생각 좀 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다가 우리가 하는 짓이야 하나님 앞에 참 꼴 같지 않게 보이시겠지만 그래도 하나님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가끔 하나님이 완전히 인생이 바닥에 떨어져서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살수가 없을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여 줍니다. 그것마저도 경험을 못하면 그것 집어치우고 떠나죠. 그래서 하나님이 맛을 보여주십니다. 어떤 때는 눈물도 찔끔찔끔 흘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은혜도 받고, 뭔가 좀 기도해 보려고 또 새벽에 한번 나와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만 맛을 봐도 그 감격이 정말 우리의 가슴속에 밀려오는데 그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이나 억압이 없이 자유롭게 우리에게 부어진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를 우리에게 그야말로 물 붓듯이 부어주신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감격과 환희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크다란 은혜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가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슬과 같다고 나오고 그 다음에는 백합화같이 피겠고 그리고 또 하나는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슬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러분 이슬에 대해서 저만큼 연구를 많이 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딸을 낳아놓고 이름을 지어야 되겠는데 여러 가지로 궁리하였으나 다 쓸데없고 성경에서 무엇 좀 좋은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이슬’이라고 지은 사람이 저입니다. 성경에 이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쭉 살펴보았습니다.
몇 개만 골라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맛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선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이렇게 축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에게 이슬을 내리시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슬이 가지고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축복입니다. 여러분, 이슬은 누가 작용을 해서 맺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자연적인 섭리 속에서 맺혀지는 것입니다. 비가 올 때는 구름이 떠야지 만 비가 옵니다. 마른하늘에 비가 내리는 법은 없습니다. 눈이 올 때에도 먼저 하늘이 컴컴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슬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슬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아침에도 이슬이 없는 아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슬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이슬이 이러한 축복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상은 이사야 26장에도 나옵니다. 이사야 26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슬을 내리시면 땅은 죽은 자를 내놓는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이슬은 땅의 죽은 자도 다시 살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이긴 하지만, 이것은 곧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이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는 이 세상을 살린다고 하는 의미를 보여줍니다. 이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다가 광야 길로 들어섰는데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서 양식이 다 떨어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그 백성들을 먹이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만나 입니다. 만나가 무엇으로 내렸습니까? 이슬로 내렸습니다. 이슬로 그 만나가 내려서 거기에서 응고되면서 만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하는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단지 맑고 깨끗하고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이슬은 성경에서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독점적인 축복입니다. 이러한 독점적이고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묘사는 하나님이 그런 이슬을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이슬과 같이 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의 최상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 그 자체가 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리신다는 표현보다 ‘I shall be’ 내가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하나님의 표현방법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언제 이러한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시게 되는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축복은 축복성회를 한다고 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축복기도를 받는다고 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패역을 고쳐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있는 축복의 생각도 많이 정리가 되어야합니다. 요즘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축복이라는 개념은 소매치기 축복의 개념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여러분들은 뻥하시겠지만 쉽게 얘기하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 하나님 자신이 변화된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러한 개념의 축복이 아니라 무엇인가 기도를 세게 하고 밀어붙여서 하나님의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내는 그런 개념의 반강제적인 축복입니다. 비인격적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패역을 고치신다는 것인데 우리는 거기에 협력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고쳐주십시오. 이렇게 망가진 상태로 살아간다면 내가 돈이 아무리 많이 있고 내가 아무리 인물이 출중하고 내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합니다. 고쳐지지 않고서는 망가진 인생, 망가진 삶, 망가진 생활만이 기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제품처럼 생산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떡을 만드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도 많이 봤습니다. 쌀가루를 쪄서 집어넣으면 거기에서 떡이 쏟아져 나옵니다. 굵은 떡을 뽑기 위해서는 굵은 기계를 그 틀에 끼우면 굵은 떡이 쭉 나오고, 가느다란 떡을 뽑으려면 가느다란 구멍이 있는 기계를 그 틀에 딱 꽂으면 가느다란 떡이 쭉 나오고, 넓적한 떡도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하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망가진 사람에게는 망가진 삶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고장난 사람에게서 정상적인 삶을 기대하는 것은 바보 같은 것입니다. 망가진 사람에게서는 망가진 삶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래서 가끔 어떤 목회자들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하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사람들은 교회에 안 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 여기입니다. 그래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상식 밖의 일을 만날 때 여러분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상식을 초월해서 생각을 해야됩니다. 왜냐하면 망가진 사람들이 아직 교회에 많이 있기 때문에 망가진 삶이 산출되는 것입니다. 다 완전히 고쳐졌으면 여기 교회에 어떻게 들어오겠습니까? 자격미달입니다. 망가진 사람끼리 모여사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망가진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는데 망가진걸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문제입니다. 계속 배기가스 뿜어내고 앞차, 뒷차 들이받고 돌아다니면서도 뒤에다가 써 붙여 놓기로 ‘나는 망가졌다, 나는 내어놓은 놈이다.’ 그러는데, 그게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제일 먼저 우리를 고치는 것입니다. 잘 고치십니다. 그런 속에서 사실은 복을 받겠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는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시는 것과 꼭 같은 시각으로 먼저 들어가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기독교는 인생의 본질을 고치는 종교입니다. 가난한 사람 돈 많이 주어서 잘 살게 하고 병자 불러서 병 고쳐 주는 그런 것만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엇으로도 해결 받을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을 기독교가 고쳐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네 인생의 불행은 이것이다’ 라고 지적해 주실 때, 즉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고자하는 패역한 경향성, 그리고 죄 가운데서도 자신을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완악함, 이런 것들을 지적하실 때 거기에 대해서 ‘아멘’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내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로구나 하고 깨달을 때에는 정상적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셔야 된다든지 사놓은 땅값이 올라가야 된다든지 장롱에 묻어둔 딸라가 올라가야 된다든지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곤고하고 고통스럽고 어둠 속을 헤매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망가진 관계 속에서 고통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이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인생의 패역을 고치고자 하실 때 그때에 먼저 아멘 해야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고쳐지고 나면 하나님이 그에게 이슬과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주님 오늘도 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면서 말씀 앞에 늘 무너지고 그래서 깨뜨려진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주님 없이 살수 없다고 고백을 하며 매일 매일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안 주시고 그저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싫은 겁니다. 왜냐하면, 자꾸 자신의 패역을 건드리는 것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를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더라도 무지무각한 소리처럼 들려지고 그것이 자신에게 뭔가 부담을 주고 자기에게 더 많은 의무를 부과하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한때는 감격스러웠지만 이제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와서 축복기도 해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직까지도 목사가 기도하면 하늘에서 복이 산더미처럼 쏟아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제발 미신에서 깨어나십시오. 그래서 가끔 저는 그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올바로 예수를 믿으면 내가 축복을 주지 않으셔도 복을 받고 당신이 똑바로 못 믿으면 내 축복은 의미가 없다. 그렇지 않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패역을 고치도록 허락을 할 때, 그리고 그 패역을 하나님이 고치실 때 그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축복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슬과 같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축복으로 복 주시고 그리고 그에게 끊임없는 말씀을 내리셔서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말씀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정식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에게는 그 옛날 받은 은혜까지 다 털어먹고, 그리고 다 긁어모아서 은혜 많이 받고 패역을 고치는 사람에게 더 많이 부어주시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세계에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거기에 거스르고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항상 쪽박 찹니다. 쪽박차고 살다오니까 말씀을 들어도 다시 아무 것도 받아가지 못하고 그 쪽박 또 들고 갑니다. 그러다가 가끔 그 쪽박이 또 깨어집니다. 신앙생활 수 십 년하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집의 창고에 쌓여있는 깨진 쪽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패역이 고쳐진 사람, 이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강하게 거스르고 내 마음대로 살고싶어했던 자신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수리한 사람, 그에게 하나님이 이슬과 같이 내려오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 자신이 이슬이 되어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겠다는데 누가 하나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하나님을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두 가지 못 막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곤고케 하시려고 한 사람, 그것을 못 막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려고 하는 사람, 그 사람 못 막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버릇 좀 고쳐야 되겠다 하고 ‘손 좀 봐야지’ 하나님이 결심하시면 막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어려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은 더 못 말립니다. 하나님이 딱 찍어서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리라 내가 너에게 이슬이 되리라’ 그러고 주님이 내려오실 때에 아무도 못 말립니다.
그렇게 못 말렸던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던 사람 중에 한사람이 바로 요셉이라는 사람 아닙니까? 재미있는 것은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이 요셉을 들어 가지고 시궁창에 집어넣으면 그 시궁창이 계기가 되어서 존귀한 사람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아버리니까 애굽으로 가고 애굽에서 감옥에 처넣으니까 거기에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왕 앞에 서게 되니까 국무총리가 되고 하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패역을 고치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축복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거나 또 하나는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것인데, 깨달았고 고쳐졌고 그래서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었던 패역을 하나님이 고쳐주셨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더 오랫동안 고통가운데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슬과 같은 축복으로 그 사람들에게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우리집안을 가만히 돌아볼 때, 언제부터 비교적 우리가 먹고살게 되었느냐하면 제가 예수 잘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런 간증들은 제 경우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또한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향하여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이름을 부를 적마다 즐겁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들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이슬과 같이 다가오셔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상태가 되면 굳이 ‘하나님 돈이 필요합니다, 뭐가 필요합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려고 하는데 그런 것도 안 해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큰 축복은 우리가 패역을 고칠 때 일어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실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회개하면 우리가 얼마나 죄악된 사람이며 패역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오랫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오면서 우리 안에서 굳어진 죄악된 본성, 즉 이 패역을 하나님께서 고치시도록 해드려야 하며, 그리고 이것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 라는 공식을 말씀드리면, 이것을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쯤 고치고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도 없는데,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기보다는 내 손과 내 발로 버둥거리면서 어떻게 한번 살아보아야겠다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서 더 큰 비극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걸 얼마나 싫어하십니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뭐라고 하였죠? 저 혼자 씩씩하게 잘사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만들 때부터 당신 없이 살수 없는 사람들로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많은 짐승가운데 양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축복 없이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 다 팔아먹고 그러면서 자기 힘으로 걸리적거려 몇 푼 벌어먹고 이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인지 자기가 몸부림치면서 얻은 것인지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십니다. 문제는 패역을 고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인데 자신의 패역은 고칠 생각을 않고 복을 받으려고 하면 그 댓가는 불순종을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일이 더 꼬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직 더 고쳐야 되는데 고쳐지기는 싫고 복은 받고 싶으니까 신앙적으로 살지 않고 불신앙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고침 받을 가능성은 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칼 들고 들어가서 가슴팍을 파헤치고 우리의 오장육부를 뜯어내는 식으로 우리를 고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은 늘 말씀드리듯이 인격적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을 비롯해서 가끔 집회 가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데 공포에 절어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종을 무서워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그 쓸데없는 미신적인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괜찮습니다. 좀 얻어맞아서 그렇지 괜찮습니다. 신앙은 인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충분히 여러분들에게 패역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다루십니까? 인격적으로 다루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내가 너를 고치겠노라, 내가 너를 완전히 새로 수리해 주겠다’ 그럴 때, ‘하나님 내버려둬요, 이대로 살다 죽을게요’ 그러면 하나님이 놓아두십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신앙은 인격적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계속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감화를 받고 눈물이 있고 그리고 결심이 있고 싸움이 있고 주님을 의지하는 은혜가 있고 날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감화가 있을 때에도 서서히 우리의 패역이 고쳐지는데, 이미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그리고 반쯤 한쪽 다리 걸쳐놓고 한쪽 다리는 세상으로 가서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로 한번 형통한 길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와서 말씀의 감화를 받고 예배 시간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게 살 필요가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되면 더 고쳐지지 않을 것이고 더 고쳐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그래서 더 절망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더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비뚤어진 독립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되면 오히려 패역이 고쳐지기는커녕 패역 위에 패역이 더 번성하면서 거기에 강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절망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러나 그 패역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슬로서 내려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팔레스타인은 비가 매우 적은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새벽 산에 한번 올라가 보아야 됩니다. 이슬이 쭉 맺혀있는 산이나 혹은 풀밭을 거닐어 보십시오, 그때가 만물이 가장 싱싱합니다. 여름 같은 때에 보면 이슬을 머금어서 참으로 싱싱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잎사귀 위의 이슬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말하자면 이슬을 머금고있는 이 식물이 의미하는 것은 싱싱하고 강한 생명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몇 푼의 물질을 움켜지기 위해서 영혼은 파리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영혼은 죽은 자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면 우리가 물질로 축복을 받고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의 영혼이 그 물질을 공급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서 더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지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패역을 고친 사람들에게 이러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이러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인생자체가 휴지처럼 꾸겨진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가르쳐주어도 잘 이해를 못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조금 예수 믿어 놓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감동을 받고 눈물 흘렸다는 사실자체가 하나님 앞에 굉장히 커다란 의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왕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던 사람인데’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데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 하면서 왕년 얘기하는 사람 치고 금년에 신통한 사람 없습니다. 대개 왕년 얘기 좋아하는 사람은 금년은 관심 없고 내년은 관심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왕년에 그렇게 훌륭했는데 금년에는 신통치 않고 내년에는 허황된 생각에 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신앙의 모든 세계를 누벼온 백전노장이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야고보서에 보면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그랬지 않습니까?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커다란 평야에 지극히 작은 오솔길 하나를 걸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가르칠 일이 많겠습니까? 그렇게 해놓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동을 받았는데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이 왜 계속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뉘우치면 복을 주고 내 말씀에 감동을 받으면 복을 준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의 패역을 고치리라, 패역이 고쳐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왕년에 은혜 받은 것만을 생각을 하지 자기가 얼마나 패역을 고치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는지는 추호도 반성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치고 패역을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시는 그러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곧 바로 자신의 패역을 고치기 위해서 조직적인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해부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신앙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마약과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정도만 감동을 받아도 ‘으악’ 하고 주님 살려달라고 뒤집어 졌는데, 그 다음에는 그 정도의 농도 가지고는 안되고 더 세고 더 충격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올라가는 것이 한도가 있지 어떻게 자꾸 올라갑니까? 그러면서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원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막판으로 가는 길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어디 가서 머리를 디밀면 복을 받을까 하고 무당같이 멍청한 사람한테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우리의 삶이 어느 자리에 와있고 내가 어떤 패역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이슬과 같이 내게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딱 파악하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그 다음에는 조직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고 눈물을 흘렸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삶을 통째로 들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놓고 그 다음에 칼로 두드려가면서 어느 부분이 썩고 골았는지를 보면서 이제는 시간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서 자신의 부패하고 패역하고 망가진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고쳐야 되겠다 라고 하는 조직적인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뭐가 뻥하면 ‘으악’ 하고 사라지고 나면 멍하고 그게 뭡니까?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회개해 보아야 소용도 없고 도움이 안됩니다. 회개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셨으면 자신의 삶을 통째로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어디서부터 고쳐 주시렵니까? 고통은 생각하지 마시고 살려만 주신다면 다 들어내 주십시오, Soft Ware 못쓰겠으면 아예 다 끌어내시고 새로 깔아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치도록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아무 것도 없고 은혜 받으니까 좋아서 막 감격했다가 그러다가 사라지면 우울합니다. 왜냐하면 사라졌으니까요. 그래서 은혜 또 기다립니다. 은혜 받으면 ‘으악’ 하고 사라지면 멍하고 이것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축복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고쳐져야지 하나님이 축복을 부어주실 것인데 경력이라고는 눈썹을 휘날리면서 부흥회 쫓아다닌 경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축복해 주실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고쳐져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 주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입니다. 이미 이러한 믿음의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작될 때마다 많은 역사상의 교회들이 이 찬송가 1장을 부르는 것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성도들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좋은 것은 그 분께로부터 오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여러분들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고치고 나시면 주님이 축복을 부어 주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림과 같은 묘사를 하나 더 주십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백합화같이 피어날 것이요’ 하셨는데, 이것은 앞에 있는 이슬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백합화같이 피어나는 것은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패역을 고칠 때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아십니까? 우선 먼저 아름다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뭐냐하면 그 마음부터 아름다워집니다. 그런데 이놈의 마음은 가시나무입니다. 손만 집어넣으면 깨물고 상처가 나고 어떻게 무인도에 가서 혼자서 살았으면 좋을 것입니다. 싸우려고 덤벼드는 사람도 아니고 온 몸에 가시투성이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무슨 좋은 얘기 좀 해주어도 팍 찌릅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손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막대기 같은걸 들고 접근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속에 있는 아름답지 못한 도사리고 있는 고슴도치와 같은 이런 것들이 결국은 비인격적인 관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알고 그 이상 선을 넘지 않잖아요? 그렇게 살아가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먼저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패역을 고치고 나면 마음이 아름다워지기 시작합니다. 증오와 저주로 가득 찼던 마음이 물같이 녹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고침을 받아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미워하고 있을 가능성은 1%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고 나면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먼저 변화되고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연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하고 말씀하십니다. 참회하고 패역을 고치고 나면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진흙에 비교할 때 아주 고운 찰흙같이 됩니다. 주님이 빚으시고 싶은 것을 말씀으로 들어가서 빚으시면 원하시는 대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할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것은 잘못되었다’ 하고 톡톡 치면 변화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만지시면 그대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빚으려고 하면 강하게 항거합니다. 세상이 뭔가 우리를 불신앙으로 빚으려고 하고 세상에게 합당한 사랑으로 빚으려고 할 때에는 강하게 반항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마음과 세상을 향한 부드러운 마음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어져 가는 이 아름다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서는 마음이 단단합니다. 세상이 바꾸려고 할 때 어림도 없습니다. 찔러도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돌같이 굳어진 사람들을 세상이 빚으려고 하면 얼마나 잘 빚어지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주무르면 금방 거기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런 시대에 어떻게 좀 살아볼까 하고 치마폭에 푹 빠져들어 갑니다. 이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패역을 고치고 나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정말 곱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뻐집니다. 물론 하나님이 패역을 고치신다고 해서 주저앉은 코가 다시 올라가거나 새우 눈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뀔 리야 없지만, 그러나 바탕이야 본래 주님이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까? 주님의 손이 만드신 제품인데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외모를 가지고 콤플렉스를 걸려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사람과 똑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만드셨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찬송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무너진 코로 인하여 감사하고 찢어진 눈을 인하여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패역이 마음에서 고쳐지고 뿌리 뽑히기 시작하면 얼굴에서 힘줄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은혜를 못 받을 때에는 꼭 얼굴 근육 속에 뼈가 들어있는 것 같았는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게되면 근육의 힘살이 모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얼굴이 확 풀어지는 게 참 신기합니다.
저는 황당무계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셔서 이렇게 사람이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잘생겨 보이고 하는 이런 것들이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정말 못생긴 사람인데 그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나면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가지고있는 매력이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예화) 미모로 따진다면 열린 교회에서 평균치보다 떨어진 사람이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게 된 후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내용.
처음 교회에 와서 마치 누구라도 말만 걸면 한판 붙을 사람처럼 목사가 물어보아도 이름도 대답 안하고 이렇게 도사리고, 전도사가 성함이 뭔지 물어보면 ‘그냥 잠깐 왔어요, 말 시키지 마세요, 다음주에 안 올 거예요!’ 완전히 시비조입니다. 식사 좀 하고 가세요 하면 ‘가야 되요!’ 하면서 튕깁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어집니다. 처음에는 갈등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뻔합니다. 얼굴에 쓰여있습니다. 이걸 받아들일까 말까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깨닫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슬픔과 곤고한 인생의 그 궁극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왜 그 오랜 세월을 사막과 같고 광야와 같은 곳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고 유리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찾아다니면서 가르침도 받고 뭔가 인생에 대한 확고한 견해도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왜 자기의 인생의 여정은 거할 성 하나 찾지 못해서 광야를 유리하고 방황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세상에서 뭔가 확신에 찬 발걸음을 인생으로 옮겨놓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자기의 영혼이 굶주리고 목마름으로 궁핍해지고 이제는 자신의 영혼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감당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탈진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모두 포기한 상황에서 손 내미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마음 고치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어느 날 드디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와르르 무너지면서 무너질 때에 하나님을 더 강하게 붙들게 됩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로 가리이까’ 그러면서 자기가 무너집니다. 이제 드디어 정말 자기밖에 잘난 사람 없는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이 주 없이 살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됩니다. 그러면서 이제껏 까지 죄의식 속에서 몸부림쳤는데 하나님이 내가 이제 너의 죄를 용서한다는 사죄의 확신을 얻게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이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말씀하실 때 아멘으로 받아들이면서 매일 매일 말씀으로 자기를 고쳐나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없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이렇게 망가진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은혜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정상이라고 감히 생각을 합니다. 정상이 아니라 완전히 폐차직전에 있는데도 이 차는 아직 한참 달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여러 사람 죽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망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가 ‘자매님은 요즘 예수를 믿고 얼굴이 참 예쁘게 변했어요’ 그럴 때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폐차직전에 있던 차 겨우 페인트 칠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보니까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 때에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아직 먼 인생입니다, 어찌하면 내 안에 있는 이 패역과 더러운 것 고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나를 고쳐 주시옵소서 하면서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이 질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자기를 고치시고 자기가 계속 고쳐지는데 질릴 리가 있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동과 감화가 있고 그렇게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주실 때 얼굴이 얼마나 예뻐지는지 모릅니다.
정말 죄 가운데 살고 자유가 없으면 얼굴이 거무죽죽하고 눈도 게슴츠레 해 가지고 알콜 중독자처럼 멍한 상태가 되면서 그리고 예배당에 오기만 하면 피로가 일시에 몰리는 듯한 얼굴이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기에 말씀의 숲 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조금 뒤에 보니까 성경책을 떨어뜨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고쳐질 때 하늘의 천사처럼 예뻐집니다. 정말 예뻐집니다. 시꺼멓던 얼굴에 생기가 환하게 도는데 그것을 천국의 화장품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은혜는 천국의 화장품입니다. 정말 그렇게 고와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그것이 병이 됩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그것이 양약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변하게되고 얼굴이 아름다워집니다.
가끔 보면 인조미인 있지 않습니까? 한없이 바르거나 꾸며 가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미인들이 가끔 수련회 같은데 가서 아침에 세수 후에 보면 금방 표가 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세수를 하고 나면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화장품으로 가렸던 것들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바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패역을 고쳐주시면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저는 드물기는 하지만 기도 많이 하고 은혜생활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가끔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얼굴이 환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평화가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용모만 아름다워질 뿐만 아니라 삶은 또 얼마나 아름다워집니까? 이전에는 돼지처럼 자기 입, 자기 몸 쳐 바르고 자기 옷 껴입는 것밖에 모르다가 은혜를 받고 나면 고통받는 지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평생 예수 믿어서도 섬기는 것이라고는 자기 입에 집어넣는 것하고 자기 바지 껴입는 것밖에는 섬기는 것이 없었는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는 ‘공부해서 남 주니, 돈벌어서 남 주니’ 그랬는데, 예수를 잘 믿어 변화되고 하나님이 패역을 고치시고 나니까 ‘우리 열심히 공부해서 남 주자, 우리 열심히 돈벌어서 퍼줍시다’ 이런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니까 마음만 예뻐지는 것이 아니라 모양도 예뻐지고 모양만 예뻐지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도 너무나 아름다워집니다. 그가 섬길 때 이 은혜와 패역을 고치는 것은 질병과 같이 전염의 효과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정말 궁극적인 인생의 문제 앞에 직면해서 자기의 불행의 원인이 뿌리째 변화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전도를 해도 그 사람이 덜렁덜렁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합니다. ‘저러고 다녀서 뭣하나,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할탠데’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저 혼자 덜렁덜렁 교회 다니면서 이만하면 되었지 그러는 사람이 전도해 보았자 꼭 같은 사람 만들어 낼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전도하여 올 때에는 조심해야 됩니다. 몰려다니면서 똑같은 사람되면 큰일입니다.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변화되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 보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다른 사람의 그 형식적이고 나태한 신앙생활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지 않거나 저 사람 예수 다시 믿어야되는데 하는 영적인 부담이 들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유유상종입니다. 여러분들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섬길 때 마음을 다하여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으로 가득 차는 것 때문에 그렇게 가슴 벅차거나 들떠하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얼마나 하나님이 사람들을 고치시느냐하는 것입니다.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고 놀랍게 역사 하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기대와 사모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 부흥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구나, 영혼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가 소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교회와 목회자와 그리고 교회 안에서 교우들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그러한 세속주의에서 떠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본질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될 죄인들을 위한 섬김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하고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패역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이 백성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경 본문을 설교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성도님이 저렇게 백합화를 꽂아놓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저 백합화는 구근 식물입니다. 뿌리로 번식해 가는 식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겨울에 이 뿌리가 다 땅에 묻혀서 모두다 죽은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봄에 해토하고 햇빛이 나면 거기에서 다시 싹이 나고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뿌리 식물들의 뿌리를 보셨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저런 아름다운 꽃이 연상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백합화 뿌리는 산삼처럼 영험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감자처럼 동그랗게 생긴 것도 아니고 고구마처럼 맛있게 보이지도 않고 아무 쓸데없는 뿌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저런 아름다운 꽃이 나옵니다. 그리고 향기가 진동합니다. 여러분들은 들어오시자 마자 그 향기로운 백합화 향기를 맛보셨을 것입니다. 산 중턱에 한 송이만 피어 있어도 온 산이 은은하게 백합화 향기가 풍겨납니다. 하나님이 패역을 고치고 나시면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없는 못되어먹고 그리고 전력을 생각하면 정말 형벌 받아 마땅한 그러한 뿌리와 같은 죄인을 변화시켜서 거기에서 저러한 향기로운 꽃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게끔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그 찬송가를 작사하신 분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냥하여 팔아먹은 아주 무지막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찬송가를 작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성자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리고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미 죽었으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아직도 발하고 있는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은 훌륭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러들여서 패역을 고치시고 뿌리와 같이 볼품없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주셔서 저렇게 향기로운 꽃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로 변화되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충만히 받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 박힐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견고함입니다. 오늘 세 가지가 나오는데, 즉 패역을 고치면 하나님의 이슬과 같은 축복이, 그 다음에는 백합화와 같은 아름다움이 주어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견고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 레바논의 백향목은 뿌리가 든든하고 강한 식물로 유명합니다. 그 한 암시가 시편 29편을 보면, 시인이 노래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큰 권능을 발하시면 엄청난 물, 그리고 커다란 자연계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큰 권능이 얼마나 놀라운지 레바논의 백향목도 부수신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큰 권능을 자연현상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었다가 가만히 보니까 큰 폭풍이 일어나거나 큰바람이 불면 좀처럼 부러지거나 뽑히지 않는 그러한 나무인데 레바논의 백향목이 부러지고 파괴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레바논의 백향목이 얼마나 견고한 나무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레바논의 백향목이 뿌리를 내리고 견고해서 바람이 흔들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는 것처럼 패역을 고치고 나면 견고한 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해답이 하나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체험도 하고 그래도 해볼 것은 구색을 다 맞춰서 다 해보았는데 도대체 아직까지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패역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도 없고 견고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철저한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칠이나 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겉모습을 대충 얼렁뚱땅 고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하나 붙이고 돌아다니는 것 가지고는 하나님께서는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서 새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견고함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흔들림이 없고 견고합니다. 날마다 뿌리를 깊이 뻗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땅속에 더 깊이 박히면 박힐수록 이제는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아니하고 비바람이 불어도 쉽게 뽑히지 아니하는 거목과 같은 신앙을 가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나무가 될 때 얼마나 커다란 그늘을 만들겠습니까? 많은 새들이 깃들고 들짐승이 깃드는 안식처를 제공해주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뿌리가 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좀 받아도 마귀가 겁을 안내는 모양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펑펑 울고 난리를 쳐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 한참 지난 뒤에 훅 한번 불면 모두 날라가 버리는 거품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는 받아도 패역을 고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고함이 없는 것입니다. 견고함이 없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 입니다. 아무 것도 좋은 것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견고한 신앙생활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패역을 진정으로 고치실 때 이러한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나서 여러분들이 견고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경회를 끝으로 해서 이제는 내가 삶의 사경회를 살면서 이제껏 까지 넘어갔던 모든 신앙의 문제를 다시 점검하면서 내 삶을 주님의 말씀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비극의 모든 원인을 궁극적으로 고쳐주시어 그래서 이슬과 같은 축복을, 백합화와 같은 아름다움을, 그리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견고함을 우리에게 주셔서 세상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이 어두운 세상을 정말 불꽃처럼 사는 저희들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패역을 고친 후에 주시는 축복Ⅱ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호14:6)
‘이슬과 같고’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리실 것이며, 또한 ‘그 아름다움은 백합화와 같고’ 즉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백향목과 같이 뿌리가 굳게 박힐 것이다’는 견고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서 분명하게 옛 삶을 청산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깊이 회개하고 난 다음에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였던 자신의 그 패역을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패역이 고쳐질 때 하나님이 이슬과 같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축복이 주어지고, 추하고 더럽던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늘 흔들리고 거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도무지 깊이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마음에 정함이 없던 사람들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견고하게 된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어서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과 같으리라’ 그리고 ‘그 그늘에 거하는 자들이 돌아오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축복, 그 아름다움, 견고함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패역을 고치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여기에서 멈추질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하나님의 축복에는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네 번째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가지가 퍼치고’입니다.
그 가지가 도대체 무슨 가지일까요? 앞에 나오는 것은 레바논 백향목입니다. 그런데 레바논 백향목은 가지가 퍼지는 식물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시면 ‘레바논 백향목’은 작은 글씨로 쓰여있습니다. 이것은 이 말이 들어가야지만 말이 되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앞부분을 ‘레바논 백향목과 같이 뿌리가 굳어질 것이요’라고 보충해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고,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레바논과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며’라는 뜻으로 보기도 합니다. 레바논은 원래 산지이기 때문에 나무의 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산을 박아 놓으신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산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 즐거이 사랑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고 나면- 하나님이 산을 땅위에 뿌리박아 놓으신 것처럼 그렇게 견고해서 이스라엘을 흔들 자가 없고, 영적으로는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패역을 고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그 교회를 이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흔들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느 쪽도 단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나오는 ‘그 가지가 퍼치며’ 하고 소유격으로 나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레바논의 가지라고 보는 것입니다. ‘레바논의 가지는 퍼치며’입니다. 레바논에 무슨 가지가 있습니까? 레바논은 산지이기 때문에 백향목도 유명했지만 향료가 유명했고 가지가 퍼치는 식물로서는 레바논의 포도가 최상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뒤편으로 넘어가면 레바논의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바논은 산지였기 때문에 포도나무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나무가 포도나무가 아니겠느냐고 권위 있는 성경은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상당히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포도와 같이 작은 뿌리에서 약한 줄기가 나와 한없이 그 가지가 뻗어나가는 식물은 흔치 않습니다. 등나무 비슷합니다. 포도나무 몇 그루만 심어놓고 위에다 철창을 치면 여러 명이 앉아서 함께 쉴 수 있는 커다란 그늘 공간이 생겨납니다. 그 작은 뿌리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까지 뻗어나가면서 가지를 계속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패역을 고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번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번영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온전히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번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교회적으로 적용시켜 봅시다.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세상의 상품을 선전하듯이 교회를 선전한다고 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교회에 나오고 있는 신자들이 이전의 죄를 회개하고 적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미워하고 이전에 하나님 앞에 패역하게 걸어갔던 모든 잘못된 삶들을 온전히 말씀으로 고치고 치유 받아서 건강한 영적인 삶을 살고 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의 지경을 넓혀주실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포도나무에서 생명이 있는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계속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면서 교회를 뻗어나가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파될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사는 인간의 참다운 본분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말씀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축복해 주시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도 복음을 전할 것이지만 삶으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것이며 그들이 입술로도 그리스도의 참 복음이 무엇인지를 담대히 말할 것이지만, 그들의 축복 받는 삶, 그들의 아름다운 인격, 그들의 향기로운 신앙생활, 그들의 아름다운 인간관계,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을 통해서 참사람의 본분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길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삶과 그러한 은혜, 그러한 복음 그러한 신앙의 감동을 받으면서 그 사람의 손을 붙잡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가지는 뻗어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번성해 갈 때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병든 둥치에 접 붙은 모든 가지의 운명은 죽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살아있고 든든한 가지가 되어질 때 그 교회에 붙는 모든 작은 가지들이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를 뻗치며 뻗어나가고 또 뻗어나가서 커다란 생명과 은혜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성장을 바라는 것입니다. 죽은 교회가 퉁퉁 붓는 의미의 성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교회가 생명을 이기지 못해서 그 가지를 뻗어서 수많은 죽어 가는 자들을 거기에 접붙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이루어 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열린 교회에서 모종을 내서 남태령에 한 구역을 심었다고 칩시다. 매주 자라서 그 구역의 식구들의 믿음이 자라고 그 구역에서 전도한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자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고 은혜가 자라고 헌신이 자라고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 파리하게 죽어가던 영혼들이 그 구역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인도 받아서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 죽어가던 마른 뼈와 같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실패를 운명처럼 알고 살아가던 사람, 마귀에게 지는 재미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변화를 받고 나니까 마귀와 더불어 싸우면서 매일 승리하는 군사로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사람 두 사람 곤고하던 사람들이 그 구역에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나니까 곤고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손을 붙들기 시작합니다.
(예화) 한 아이가 전봇대를 붙들고 있으면 계속 와서 달라붙는 아이들 놀이
그렇게 주욱 달라붙어서 가지가 뻗어 나갑니다. 그러더니 남태령의 구역이 남현동을 거쳐서 사당동을 거쳐서 방배동까지 와서 도로 붙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더 멀리 가서 과천에 심습니다. 이번에는 안양으로 뻗어나가는 겁니다. 이런 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지가 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뻗어나가서 그 가지에 접붙이는 자마다 비참하게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뻗어나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후손들을 주셔서 땅을 정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른 사람이 자녀 하나 낳을 때 믿음의 사람들이 셋 넷을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사고였습니다. 불 경건한 백성들을 소수파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건한 백성들이 많이, 그리고 실한 믿음의 자녀가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백성의 수가 많은 것은 임금의 영광이요 백성의 수가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고 한 것처럼 이 당시에는 백성의 수가 곧 국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부흥을 하나님 앞에 사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늘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뿌리를 박으며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며 뻗어나가는 이 가지에 접붙인 자들만이 인생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습니까?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고 돈 좀 있다고 살아가는 사람, 또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무슨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겠습니까?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예화) 전에 살던 동네 슈퍼마켙하는 한 총각이 이른 새벽이면 문을 열고 늘 TV를 보 고 앉아있다.
이렇게 사는 인생이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뻗어나가는 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예수의 생명에 접붙인 바 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부흥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도 5천명 모인 교회 달라고 기도해본 적이 없습니다. 숫자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힘과 노력을 다 해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불충성과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 생명의 포도나무 가지가 뻗어나가다가 중간에 멈추는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합니다. 계속 뻗어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생명이 없어서 어두움 속에서 기갈하고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생명의 포도나무 가지를 뻗쳐주면서 예수 생명을 누리며 살도록 전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열린 교회 포도나무 가지를 어디까지 뻗쳐나가게 만드실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결코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 사역의 목표가, 구원을 모르고 예수의 생명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뻗어나가서 그들이 접 부치게 만들어주어서, 어두움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불붙는 마음으로 자기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 모르고 그 사랑 등지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며 살다가 심판의 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을 건져내어서 어두움에서 빛으로-세상의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마귀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의 천국의 축복 아래로- 인도하는 이러한 놀라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뻗어나가게 하신다고 생각할 때 가슴이 벅찹니다.
저는 모르지만 아마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교회를 통해서 충분히 일어나게 될 것이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작은 성도들이 모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포도나무 묘목을 벌레도 잡아내며 잘 길러서 집어던지시면 거기서 가지가 뻗어나가면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가지가 뻗어나가는 곳마다 열매가 맺히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기서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씨앗이 심겨지고 뻗어나가고 뻗어나가면서 정말 한 알의 겨자씨가 수많은 새들이 깃들일만한 커다란 나무가 되고 그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는 것 같은 번영을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나와서 패역을 고칠 때 그렇게 해주십니다. 형식적으로 교회에 오고 기분이 내키면 말씀을 듣고 자기 마음대로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나 합리화시키는 식으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적용시켜 보아도 우리의 가슴이 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온전히 고치시고 치료하시고 변화시켜 주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훌륭한 사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의인의 영향력이 멀리 퍼지기를 원하시고 악인의 영향력이 퍼지지 못하도록 심판하시고 책망하시고 징계하심으로서 악한 영향력이 누룩과 같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주십니다. 그러나 의인의 영향력,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흠뻑 받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영향력은 퍼져나가고 또 퍼져나가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패역을 고치고 은혜를 잘 받으면 그야말로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그 사람과 마주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 됩니다. 왜냐면 그 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고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은 사람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너 하나님의 사랑 없이 어떻게 사니? 나도 옛날에는 너처럼 살았는데 불붙는 여호와의 사랑을 알게되어 뻗어 나온 포도나무 가지에 접붙인 바 되어서 생명이 없던 내가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던 내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지 않니?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너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 나는 예수님 때문에 소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하게 되고 그 사람은 거기에 감화를 받고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의 선교적인 성취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가는 곳마다 인생의 근본적인 불행의 원인을 치료해줍니다. 이세상의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었던 인생의 궁극적인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복음의 힘-으로 고치고 치료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놀라운 역사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해 놓으신 것입니다. 겨우 천국 가는 티켓, 그것도 가짜인지도 모르는 것 하나 얻어서 뒤 주머니에 꾸겨 넣고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니 천국 갈 때까지 장난이나 치면서 놀다가 가자는 심보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마지막날에 가서 손 펴보면 분명히 가짜 표일 것입니다. 진짜표 가진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패역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젠가 한 번 받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패역을 고치기는커녕 자유롭게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무제한의 사랑도 모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뒤집어썼지만 속은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며 자신의 아집을 섬기기를 하나님 보다 더 소중하게 섬기면서 걸어가는 인생에 소망이 있겠습니까? 소망 없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자기도 불행해지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뻗어나가는 번영의 역사가 하나님께서 패역을 온전히 고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영향력입니다. 한 가족 중에 한 사람만 예수를 똑바로 믿어도 그 가족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부음 받고 패역을 고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이 사랑하는 자녀가 그 가정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참 사랑 아래 사는 즐거움을 모르니까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나 밖에 사는 것이나 그게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니까, 애타는 마음으로 중보 기도하지 않고 애타는 마음으로 그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안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비참함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모두 패역을 고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영의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희랍 신화에 마이더스라는 인물-만지는 것마다 금이 되는 내용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는 사람과 놀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 놀면 꼭 망합니다. 동업을 하면 털어먹고 결혼을 하면 깨지고 이웃집에 살면 무엇 때문이라도 싸웁니다. 은혜 많이 받아 충만한 사랑을 안 사람,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과 동업하면 축복 받고 주식 투자하면 잘되고...... 왜냐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와서 보디발이 그를 샀을 때 복덩어리가 굴러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통해 번영이 뻗어나가게 만드셔서,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놀라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뻗어나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변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잘못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되면 계속 함께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었지만 불순종했던 요나가 그 배에 탈 때 그들은 애물단지가 탄 것을 모른 것입니다. 한사람 뱃삯 받으려다가 다 털리게 된 경우 아닙니까? 그런 사람과 놀지 마십시오. 그러나 영영 안 놀아 주면 그 사람들은 소망이 없으므로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건져주기 위해서 가야합니다. “내가 너와 손잡는다. 그러나 예수 똑바로 믿기 전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 이제부터 내가 참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테니 정신차리고 똑바로 들어라” 하며 참 신앙의 길이 무엇이고 참 은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어서 그를 새사람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의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번영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오랫동안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잘못 형성된 나의 고집, 그리고 잘못된 나 중심대로의 철학, 이런 것을 또한 신앙에 접목시키려고 하는 무지막지한 시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의 패역이 온전히 빠져 버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의 진노가 떠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고치실 때까지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고치시도록 내어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수리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통해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축복이 뻗어나가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는 놀라운 도구로 우리를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역사이며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우리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하신 이러한 삶이 있습니다. 이런 삶으로 우리를 불러주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러한 놀라운 계획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침 받기 싫어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애쓰는 피곤한 우리 인생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아서 이렇게 포도나무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 같은 번영을 영 육간에 누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 같으니” 이것은 존귀입니다. 이 감람나무는 성경 전편에 수없이 나옵니다. 이 감람나무는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많은 것을 상징하지만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매우 귀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이 감람나무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시편 52편에 보면 시인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소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집에 늘 푸른 감람나무가 될 것이며”라고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그처럼 귀한 것입니다. 성경 전편에 이 감람나무는 존귀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고 패역하고 하나님 앞에 음란하고 그릇된 길을 걸으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눈앞에 지옥의 땔감이나 하면 마땅할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고질적인 자신 속에 있는 많은 신앙적인 병폐들을 고치고 그들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패역을 온전히 고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감람나무와 같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약속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리했던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 없이 살던 자기 중심적이고 아집에 가득 찬 고집과 불순종과 용감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이 잘못된 삶의 방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치유 받고 온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고 나면 하나님께서 쓰레기에 뒹구는 것과 같은 인간 쓰레기를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상죄인, 돌팔매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하고 더러운 죄인, 오물 통에 빠진 것과 같은 더러운 인생들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 동네 뒤 넓은 밭에서 전쟁놀이 하다가 어떤 아이가 거름 구덩이에 빠 진 내용, 그렇다고 부모가 그 아이를 버리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깨끗이 씻어내고 새롭게 고치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관계를 맺다가도 똥 묻은 사람이 발견되면 인간관계를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도 버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오물이 붙어서 버리기는 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다 피해도 부모는 그 아이를 데려다가 씻기고 약 발라주고 거름독을 다 빼고 새 옷 입혀서 친구들과 손잡고 학교 갈 수 있도록 고쳐줍니다. 이것이 망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고쳐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 감람나무는 나무를 통째로 볼 때 못 쓸 것이 하나도 없는 나무입니다. 우선 열매는 올리브 열매입니다. 식용으로 먹기도 하고 기름을 짜면 최상품의 올리브유가 됩니다. 그렇게 존귀하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꿔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장이 났다고 칩시다. 성격도 삐뚤어지고 직장에서도 발로 채이고 가족들에게도 발로 채입니다. 친구들이라 할지라도 몇 번 그 이상한 성격을 받아주지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돈이나 많으면 그나마 울구어 내려고 아부하고 그 성격에 장단맞춰줄 지 모르지만 돈도 없으면 완전히 찬밥입니다. 그래서 어디 가도 친구도 없고 서럽습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 못돼먹은 성격을 받아주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사랑을 정말 알아서 돌아오기 전에 외롭지 않았던 사람 있으면 나와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고 그렇게 패역한 채로 살아가니까 이 세상에서도 친구가 없고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이나 찬송에도 ‘나는 나그네였다’ ‘외로웠다’ ‘아무도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 죄 중에 헤 매이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많은 사람 찾아와 나의 친구가 되어주려고 해도
나의 상한 마음 위로 받을 길이 없어 진심으로 사람들이 다가와도 굽어지고 망가진 성품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치인 비참한 외톨이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그 쓸모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갑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해 갑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가 얼마나 굽어있는 사람이고 못돼먹은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전에 누가 “너 못됐어. 너 인생도 아니야”하면 칼들고 덤벼들었을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펼 때 말씀이 그에게 “너 못됐어, 넌 인간도 아니야”라고 말할 때 엎드러지면 “주여 맞사옵니다. 저는 인간도 아닙니다. 이렇게 살았는데 제가 어떻게 인간입니까? 하나님 저는 완전히 패기처분 직전에 있는 상태입니다. 주여, 나를 고쳐 주시옵소서. 이대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사랑을 깨달으면서 자기를 고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전에는 돈 많이 벌어서 한 번 신나게 써보고 죽는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 믿고 변화되고 나니까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옛날에는 눈물 흘리는 이유가 ‘누구누구 때문’이어서 마음속에 화와 울분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더 짓게되고 그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귀가 판치면서 역사 하니까 평화가 없었습니다. 살 만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다투고 할퀴며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 만나고 사랑의 주님을 닮기를 원하니까 성격이 변합니다. 마음에 깊이 배어있던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패역들이 고쳐집니다. 암 덩어리와 같이 그의 몸 속 깊이 붙어있어서 오장육부를 주관하던 더러운 독소들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새사람으로 고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이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 앞에 나아와서 진정으로 참회하고 패역을 고친 사람을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쓸모 없었던 사람, 쓰레기와 같았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고쳐 주셔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하나님에게 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전에는 죽어도 아무도 억울해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고 새사람이 되고 나니까 교회에서도 그를 필요로 하고 가정에서도 그를 필요로 하고 직장에서도 필요로 하고 친구들도 그만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그를 찾아와서 의논하는,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헤매이는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목마른 자에게 샘이 되어주고 힘을 잃고 갈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나침판이 되어줄 수 있는 유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다고 하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릇이 다 똑같습니까? 어떤 그릇은 정말 귀합니다. 반짝반짝한 놋쇠 그릇에 밥을 담아 먹습니다. 그것도 그릇인데 바가지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물을 풉니다. 그러다 뚫어지면 꼬매고 그러다 안되면 장대를 꽂아서 무엇하지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금주발과 같이 귀하게 되어서 임금님 수랏상에 올라가는 밥그릇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여기저기 뚫어져서 긴 장대 꽂은 바가지가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람을 보면 원칙이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거나 하지 않은 사람, 얼굴이 잘 생겼거나 못생긴 사람, 남자나 여자, 젊은 사람이거나 나이 많이 든 사람, 건강한 사람이거나 병약한 사람, 모두 사용하셨습니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이전에는 공부 못했기 때문에 쓸모 없는 사람이었고, 이전에는 얼굴이 못생겨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었고, 이전에는 성격적인 결함 때문에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에서 쓸모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기에 바람직하기 않은 잘못된 요소들을 하나님이 속에서 마음껏 빼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놀라운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연약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시고 역사 하시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훌륭한 도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그런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여러분들을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뒷산에 가득 우거진 가시덤불을 무엇에 씁니까? 쓸데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잘라다가 불이나 땝니다. 그렇게 불쏘시개를 하던지 일부러 불놓아 다 태워버려야 할 가시나무와 같은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패역을 고치시고 변화시키시니까 무엇하나 버릴 데 없는 존귀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존귀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그의 말, 그의 표정, 그의 섬김, 그의 마음, 이런 모든 것까지 다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 앞에 귀한 사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패역을 고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하고 자기 중심대로 자기의 사고방식대로 무식하게 돌진하면서 살려고 하는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고침을 받는 변화, 그래서 마음 깊이 살 깊이 박혀있는 패역의 요소들이 다 빠지고 온전히 주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바뀔 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어떤 자리에 있던지 이렇게 존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 될 때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과 같을 것이요” 백향목이라는 말을 붙이든지 아니면 레바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레바논에서 나는 특산물은 향기를 많이 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패역을 고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감화를 의미합니다. 처음에 나온 포도나무와 같이 뻗쳐나가는 것이 번영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이야기한 감람나무는 패역을 고칠 때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시고 세 번째 레바논의 백향목의 향기는 바로 우리가 패역을 고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많은 향기를 사람들에게 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감화력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예수를 안 믿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나 인격을 보고 밥맛이 떨어져서 예수를 안 믿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인격적이고 영적인 감화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할 때 그들이 전하는 말의 성과는 반이나 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하는 말이 삶에 의해서 입증되고 삶에 의해서 노출된 그것이 전하는 말로서 정리되는, 삶과 인격 속에 깃들여져 있는 거룩한 감화가 함께 사람들에게 미쳐질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어도 절대 안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생명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안 박고 있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지겹게 안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똑같다면 뿌리가 잘못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 위에 서서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며 사는 은혜 생활을 하고 있으면 안 변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안 변하겠습니까?
저는 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배맛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보기는 참 좋은데 깍아보면 당도가 떨어지든지 습도가 떨어집니다. 그것이 잘 맞아야지만 시원한 배가됩니다. 그것이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배 중에 제일 좋은 배가 신고인데 신고도 맛이 다 다릅니다. 배 키우는 전문가의 이야기가 같은 나무에서 종자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땅이랍니다. 어느 땅에 심느냐가 중요합니다. 배가 맛이 좋으려면 우선 종자가 우수해야 되겠지만 똑같이 우수한 종자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좋은 땅에 심겨졌을 때 최고의 맛을 내게 됩니다. 배 하나에 그런 훌륭한 맛을 낼 수 있게끔 땅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5년 정도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때는 객토(客土)를 하던지 거름을 주던지 쉬게 하던지 해야만 땅이 지력을 회복한답니다.
맛이 적을 수밖에 없는 배도 좋은 땅에 심기면 맛이 달라지는데 인간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의 뿌리를 대고 거기서 생명의 수액을 먹고 거기서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면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감화를 받고 새로운 도전을 받으면서 자신이 날마다 고쳐져 가는데 안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뿌리가 잘못 박혀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자신을 깊이 돌아보면서 도무지 변하지 않는 것 같다면 여러분들이 서 있는 신앙의 자리의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도원 쫓아 다녀봐야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대고 거기에서 나오는 생명의 수액을 먹으면서 그 진액으로 자신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그 사람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이전에 성격이 급하고 못됐던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고 나서 놀랍게 변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 자신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를 알고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인격과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는 사람은 놀랍게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시고 새사람 만드십니다.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도저히 상종 못할 사람이 성자와 방불한 사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 놓으실 때 우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우리를 통한 거룩한 감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누구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예수를 믿을 때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충성... 이런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서 만나는 사람마다 감화와 은혜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온유하게 살아가면 사랑으로 가득 차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는 뭔가가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이렇게 허덕이면서 원망의 칼을 품고 미움의 칼을 갈면서 이런 식으로 사는 것 말고 또 다르게 사는 생산적인 인생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감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고친 사람을 통해서는 이러한 거룩한 감화와 신령한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향기롭게 풍길 수 있는 변화의 역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머리에서 머리로 전해지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 그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진리를 전해줌으로 삶과 진리를 함께 전수시켜 주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감화력입니다. 논리는 없지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 때 채플 시간의 설교 담당 교수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뒤에 앉아 판단 하던 이야기. 그러나 어떤 교수의 설교는 기대한다
‘저분은 최소한 저렇게 사시는 분이다’고 동의를 하기 때문에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정말 그런 가르침대로 살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전하려고 하는 말씀을 가지고 먼저 고침 받은 사람, 그 인격 속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감화가 사람들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파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속삭인다고 해서 가다 마는 것도 아닙니다.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감화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당신에게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고 나면 이러한 놀라운 감화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멸시 당하던 이스라엘을 멸시할 수 없도록, 그러한 거룩한 감화를 끼쳐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믿고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불순종의 길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와서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이러한 감화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축복의 근원이 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통해서 예수의 이름이 높아지는 놀라운 변화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패역을 고친 백성들에게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축복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자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도록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들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믿은 백성으로서 만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로 인해 생명을 전하고, 불행이 있는 곳에 행복을 가져다주고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에 진정한 치유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멋대로 살고 내 고집대로 살기를 원해서 하나님 앞에 계속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메마른 가지, 벤 풀과 같이 메말라 버리는 삶을 사는 패역한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지루한 싸움을 끝장내야 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불순종의 길이 가져다 줄 우리 인생의 비극과 아픔과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밖에 없는 불명예와 교회를 향한 모든 아픔들을 계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고치소서. 나를 고치시고 새롭게 만드셔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번영을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감화를 주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새해를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4. 돌아오는 자들의 복락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호14:7)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을 고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축복하실 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을 고치고 나면 포도나무 가지가 한없이 뻗어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번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를 똑바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번영을 주십니다. 물론 매우 특별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일생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 다른 방면으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의 역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번영의 축복을 주십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며 감동도 받고 회개도 하고 부흥회 때 눈물도 흘리는데 처음에는 피는 것 같더니 세월이 흐르며 점점 쪼그라들어서 뒤틀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있는데 내가 왜 이렇게 패배하고 고통을 받으며 기쁨조차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일까?’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번영을 언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패역을 고친 후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쓸모 없고 마른 막대기와 같은 인생’이라고 말하는데 마른 막대기는 쓸데가 많습니다. 불쏘시개라도 하고 회초리로라도 씁니다. 정말 쓸모 없는 막대기는 젖은 막대기입니다. 젖은 막대기와 같은 인생들이 패역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전에는 무익하고 쓸모 없고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걱정거리였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패역을 고친 후에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레바논 백향목의 향기와 같이 만들어 주셔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 수 있는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선행으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많은 축복과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이 패역을 고치기 전에는 이런 축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50킬로미터 가까이 달리는 마라톤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정말 자주 주십니다.
목사이지만 가끔 마음이 메마를 때가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골목을 들어서며 열린 교회 간판을 보면 천국을 보는 것같이 기분이 좋은데 마음이 가라앉아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지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습니다. 강단에 올라가 찬송을 부르는데도 마음이 풀리지 않습니다. 드디어 본문을 펴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셔서 여러분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십니다. 저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시면서 흡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감화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기로 다짐합니다. 올 때는 모두 어깨를 늘어뜨리고 왔던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이 세상에서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 것인가? 정말 좋으신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것밖에 우리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하는 마음을 깊이 찌르는 결심을 가지고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하여 내린 결론은 저보다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필요하면 저의 상태를 초월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여러분들과 옷깃을 스치면서 저는 거꾸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실 때는 물론 공짜로 주십니다. 헌금 많이 낸 날 은혜 많이 받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 무료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빈 마음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각지도 않았던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 오늘 은혜 주셔야만 합니다’고 와서 은혜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오기 싫어서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오늘 예배 빨리 끝나는 것’하며 늦게 와 고개 숙이고 앉았는데 그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게 하셔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상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정말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상태와는 상관없고 심지어는 은혜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에게 특이하게 은혜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를 거저 주시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때는 삼가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죽었던 우리, 잠들었던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남이 알 지 못하는 큰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실 때 그것은 공짜이지만 계획은 있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은혜를 주셔서 남이 감격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참사랑에 감격하게 하시고, 남들은 그렇게 회개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벧엘로 올라가게 하시는 영적인 각성을 주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일깨우시고 우리에게 감동과 감화와 회개와 은혜를 주시고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변화 받고 은혜 받게 만들어 주신다고 할 지라도 우리가 은혜주신 그 계획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패역이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사랑을 많이 받고 감화를 많이 받았을 뿐이지 그 감화가 그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육체의 신진대사밖에 해 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눈물과 콧물 좀 뽑아낸 것밖에 없이 다시 원위치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개도 몇 차례 맞으면 정신을 차리고 이전에 하던 행동을 버리는데, 마음 아프게 회개했으면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패역을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고쳐서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자기를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하나님이 매일 그런 은혜를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시겠습니까? 매일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씩 은혜를 주셔도 안 고쳐지는 것은 안 고쳐지는 겁니다. 매일 흐느끼며 직장 다니고 살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괜히 오신 적은 없습니다. 오시면 반드시 뭔가 말씀하고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감동과 감화와 은혜를 주셨으면, 그것은 뭔가 여러분들을 향한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것입니다.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패역을 고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물 한 두 번 가지고는 수십 년 혹은 몇 년 동안 자기 마음대로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 떠나서 살아가던 악한 경향성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한없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포도나무처럼 우리를 번영하게 하시고,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만들어 주시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삶에 거룩한 감화와 은혜가 끼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인상 좀 피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말라 비틀어진 명태 같은 얼굴로 세상 근심을 다 짊어졌는데 그것이 신령한 근심 걱정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모두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의 복음이 팔리겠습니까? 누가 사겠습니까? 예수 믿었다가는 저 사람처럼 되기 십상인데 누가 그것을 사겠느냐는 말입니다. 저는 운명을 바꾼다고 광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합니다. 그렇게 남의 운명을 잘 보고 잘 바꾸면 자기가 점쟁이 할 줄 미리 알지 않았겠습니까? 점치는 집은 대개 찌그러져 들어가는 곳인데, 왜 자기의 그런 운명은 못 바꿉니까? 그렇게 잘 알면 자기네들이나 잘 살지 남을 고치겠다고 합니까? 저는 그런 집을 지나가다가 ‘너나 잘 살아라’합니다. 또 그런 사람 앞에 무릎 꿇고 “예, 예” 하는데, 교회 나와서 반만 겸손해지면 은혜 받고 변화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엎드릴 정도의 비참한 마음 가지고 교회에 나오면 변화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순하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줄 테니 이제 너희는 오랫동안 나를 거슬려 살던 그 불순종,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패역을 제발 고쳐라. 그리하면 내가 이슬과 같이 너희에게 내려오겠고 백합화와 같이 꽃이 필 것이며 백향목과 같이 견고해지고 포도나무 가지와 같이 번영할 것이며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해 질 것이며 백향목의 향기와 같이 너희의 삶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풍성한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강력한 도전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겉만 바꿔놓으시려고 마음 먹으신 것이 아니라 속을 근본적으로 모두 바꾸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생각, 견해, 꿈, 소망, 가치, 이런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 완전히 새로워져서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의인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러한 복된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패역을 정말 고쳐야 합니다. 반복적인 말씀이지만 패역을 고치려면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깃들여 있는 죄와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자신의 삶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죄보다 더 싫어하시는 것이 오만한 고집입니다. ‘냅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 끼여’하고 돌진하는 무지막지한 삶, 미련하고 완고한 고집, 그것이 모든 타락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것들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을 크게 뜨십시오. 눈을 크게 떠서 이 구도를 가지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렇게 비참하고, 자신도 행복하지 아니하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믿는 자에게 따르는 놀라운 축복의 표징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회개의 문이 안 열렸기 때문도 아니고 교회에 와서 헌금을 안했기 때문도 아니고 직분을 안 맡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 속에 있는 그 패역을 고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실패에 만성이 되고 패배에 익숙해져서 그 패배와 고통을 숙명처럼 감수하면서 한 많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겨우 그 정도 삶을 주시려고 그렇게 우리를 애타게 부르셨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깊이 결단해야 합니다. 정말 완고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목회자도 도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렇게 당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호세아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야말로 눈물을 많이 흘린 자였을 뿐만 아니라 타는 것 같은 가슴을 안고 이스라엘을 누볐던 불붙는 사랑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불붙고 있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그렇게 불붙었던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저희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저들이 패역을 고치기만 하면 내가 저들에게 이슬과 같이 백합화와 같이 감람나무와 같이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이 견고하게 그리고 향기롭게 감화와 모든 축복을 줄텐데 어찌하여 저들은 고치지 않는다는 말인가’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시고 아파하시던 그 하나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선지자가 바로 이 호세아 선지자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양을 하면서 종종 이런 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구를 쳐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듭니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갑갑합니다. ‘왜 저렇게 살까? 저 길이 아닌데’ 우리 같은 죄인들도 그렇게 패역을 고치지 않고 완고한 길로 나아갈 때 아픔이 전해지거늘 완전한 성품을 가지신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서로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를 죄에서 씻으시고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건져내어서 빛의 나라로 불러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부요한 생명과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까지 주시는 그 불붙는 사랑과 주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 속에 각양 좋은 것들을 부어주시기 원하셔서 물밀듯이 당신의 사랑의 성품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지만, 우리의 패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굳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불순종을 사랑하고 패역을 끌어안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사는 새사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진노를 한 몸에 담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도 하나님께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중보기도를 드리며 운명하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과의 화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는 줄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같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 비참하고 바보 같은 인생들이 당신의 고난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고 그 생명을 공급받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수 있다고 스스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속히 이 패역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고쳐 새사람 만들어서 주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고 주님의 번영과 감화의 도구가 되어서, 잠시 머물다가 가더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는 그러한 성도들도 살다가 가야지만 주님을 뵈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해묵고 오래된 패역을 고칩시다. 버립시다. 포도주는 오래 묵으면 향기가 나지만 패역은 오래 묵으면 악취가 납니다. 패역은 오래 묵으면 묵을수록 웬만한 말씀으로는 고쳐지질 않습니다. 웬만한 권고와 웬만한 타이름으로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습니다. 바위처럼 단단해지고 돌덩이처럼 굳어져서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심령 깊이 뿌리 박혀서 인격의 일부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떠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새로 읽은 성경 구절에서는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 것이며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역에 있어서 히브리 성경과 약간 차이가 납니다. ‘그 그늘’은 이스라엘의 그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패역을 고친 자들의 번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 축복의 그늘 아래 거하는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며”입니다. 그리고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의 ‘같이’가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데 히브리 성경에 안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소성하며’라는 말이 ‘예하유’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부흥하다’는 뜻의 사역형입니다. 그러니까 ‘소성하고’라는 말보다는 ‘그들이 곡식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것이며’인데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그 이스라엘의 그늘에 있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은 곡식을 부흥하게 할 것이며 포도나무와 같이 꽃이 필 것이며”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그 향기는’은 향기가 아니라 ‘기억’입니다. 성경에 ‘지칼로’라고 나오는 것은 ‘기념’, ‘명성’이라는 단어에 ‘그의’가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명성은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을 것이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까지는 이스라엘이 패역을 고치며 돌아올 때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을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이 아니라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받는 축복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번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지가 포도나무처럼 뻗어나가고 그늘이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그들의 존재가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되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게 될 때 그 감화를 받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그늘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그늘입니다.
(예화) 비가 오지 않는 날 우산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지만 여인들은 햇빛을 가리기 위 해 몇 시간이라도 양산을 쓰고 다닌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쬘 때 그늘은 생명과 같이 귀한 것이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뜨거운 여름날 먼지가 뽀얗게 나는 길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비오듯 땀을 쏟으면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겠습니까? 그러다가 샘이 있는 곁에 아름다운 그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바람도 있습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샘물 한바가지를 퍼서 마른 목을 모두 축이고 돗자리 하나 깔고 거기에 누워서 코끝을 살랑살랑 스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러닝 셔츠 바람으로 누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하고 좋습니까? 가슴이 시리도록 그러한 휴식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품에만 이런 휴식이 있습니다. 교회의 그늘에는 이런 안식과 이런 휴식이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그늘 아래 거하게 된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오면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전도 받아 오려면 좀 덕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예화) 집주인이면 전기세로 세 사는 사람과 싸우지 말라
기대고 덕을 보아야 지만 그 그늘 아래서 관용을 배우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야 지만, 패역이 고쳐져야 지만 여유가 생깁니다. 창고에서 인심이 난다고 인격의 창고에 뭐가 좀 있어야지, 화 나는 일이 불을 붙일 때 온유의 물통에 물이 있어야 한 번 끼얹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패역을 고치지도 않고 그 패역을 자랑삼아서, 자신의 단단한 가슴을 자랑삼는 인격의 물통에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불을 지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탑니다. 그러니 백 번 잘하다가도 그 한 번에 정이 떨어지게 됩니다. ‘너를 보고 어떻게 예수를 믿겠느냐’할 것 아닙니까?
살다보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좀 참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 입맛에 맞으면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기뻐할 일도 있지만 참아야 할 일도 많고 견뎌야 할 일도 많습니다. 내가 옳아도 침묵해야 하는 때가 있고 내가 잘했는데도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그 인격에 인내의 물이 있어야 합니다. 참지 못하는 고난이 우리에게 불붙이려고 할 때 인내가 있으면 인내의 인격에 바가지를 집어넣어 그리스도의 인내를 한바가지 퍼서 꺼버리면 그만입니다. 큰불이 일어나도 발동기를 인격에 꽂고 호스로 물을 뿌리면 다 꺼집니다. 사람들이 핏대를 올리며 나올 때 “그것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머리 좀 식혀가며 천천히 얘기합시다. 이익나는 것이 있으면 여러분들 가지고 가시고 손해나는 것이 있으면 나에게 돌리십시오”하면 수십 명 가슴에 불타던 증오심과 대립들이 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그늘이 되어 주어야지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그 은혜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패역을 고치지 못하니까 우리 속에 이런 여유가 안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연약한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문장이 되어 버립니다. 몸 성하려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돌아오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패역을 고치는 것은 우리의 일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일이고 우리 가정의 일이고 이 민족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패역을 고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을 입게 하시고 그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그 은총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깨닫게 되니까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지경은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수많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 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품안으로 불러들이시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패역을 고쳐서 이렇게 나의 명예로운 도구가 되어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들이 그 은혜를 헛되이 버리고 우리 자신의 패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고집대로 살아가는 그 길을 율법대로 살아가는 길보다 훨씬 충성을 다짐하며 살아가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그 큰 은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쳐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그 은혜의 역사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늘과 같은 사람들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곡식같이 소생할 것이며...” 원문에는 “곡식을 소생시킬 것이며”로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을 주로 하고 매매를 하는 민족이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부터 땅에 정착을 하면서 농경 사회가 되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확입니다. 1년 농사 망하면 굶어야 했습니다. 1년 농사 잘 지으면 1년 동안 안심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옛날 시골에서 부업도 없이 오직 농사 하나에만 온 집안 식구들이 생계를 걸었던 시절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예화) 몇 해 전 홍수 후 냉해를 입어 30%도 수확을 못했던 때, 요즘에는 쌀 말고도 대 체 식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농부가 땅을 치며 엉엉 울더라는 이야기
이렇게 기후와 수확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짓고 낙성식을 할 때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니까 성전이 얼마나 복된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늘이 닫히고 비가 오지 않거나 메뚜기가 땅의 소산을 모두 먹어 버리거나 여러 가지 재앙이 일어나서 수확을 거둘 수 없는 상황이 될 때 너희는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내가 땅을 고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곡식을 소성케 할 것이며’는 하나님께서 추수에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길들이기 쉬우셨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그러지 말아라. 내게로 돌아와라”고 눈물로 목이 메이게 말씀하셔도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근처의 나라들을 일으키셔서 쳐들어오게 하십니다. 왕궁도 성전도 털리고 여자들은 잡혀가고 남자들은 노예로 잡혀가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되면 ‘우리가 잘못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경배하고 주님 앞에 패역을 고치며 말씀대로 사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았더니 적군이 와서 털어 가니까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구나. 우리가 여화와께로 돌아가자’ 를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는 좋은 도구였습니다. 또 한가지는 비가 안 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곡식을 거두지 못하게 하십니다. 혹은 깜부기의 재앙을 내리시고 메뚜기의 재앙을 내리셔서 모두 쓸어 가십니다. 그러면 그 폐허가 된 밭에서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농사가 망가지면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망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패역한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잡아당기셔서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 곡식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주시는데 ‘곡식을 소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그 신앙의 태도가 그들의 곡식에 생명을 부여해서 그 곡식으로 부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수확을 많이 맺어서 먹고사는 문제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즘 IMF로 심히 어려운 때를 당했습니다. 피부로 절실히 와 닿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너무나 많이 고통하고 아파합니다. 현실적으로 이 문제는 보통 가슴 아픈 문제가 아닙니다. 나이 4-50 한창 활동할 나이에 집에 들어앉아 있게 되면 정말 심각합니다.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 속에서 얼마나 패역하게 살았습니까? 특별히 이 서울은 그런 점에 있어서 으뜸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많은 축복의 기회들을 방종하고 자기를 사랑하는데 써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번에 돈줄을 막으시면서 한 번 맛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정치지도자들에게도 기대를 걸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더욱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돌아오는 것을 통해서 곡식을 소성케 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은혜로운 그늘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나면 계속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변화 받는 역사가 일어나면 땅이 함께 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땅과 사람은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가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땅이 워낙 기름지고 아름다운데 사는 인간들이 패역하면 하나님이 땅도 악하게 만들어 버리시거나 가나안 원주민처럼 다른 주인을 불러다가 그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패역을 고치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업에 은혜를 주시고 번영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학개 선지자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지고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것은 뚫어진 전대에 계속 돈을 집어넣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앞으로는 수없이 집어넣는데 실컷 끌고 다니다가 보니까 다 뚫어져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뚫어지는 것이 참 허무한 것입니다.
(예화)시골에서 아버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 날 졸라서 전차를 타게 되었는데 집 에 돌아와 보니 가방 바닥이 찢겨져서 물건 하려고 챙겨 온 돈이 다 없어진 이야 기
뚫어진 것은 이렇게 비참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신앙도 팽개치고 ‘하나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돈벌고 갈 테니까’하며 애써서 법니다. 세금을 포탈할 상황에 이르러서 ‘주님 다음에 더 많이 갚을께요’하며 신앙을 팔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는데 나중에 집에 와 보니까 빈털터리입니다. 왜냐면 전대가 뚫어졌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 정말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올바로 돌아오면 곡식을 소성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참 변화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업에도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올바른 믿음을 지키면서 신앙생활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를 베풀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패역을 고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화) 포목점을 하는 어느 집사님이 은혜 받은 후 시장에서 열심히 전도했는데 보험 아주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험을 4-5개 들었다. 주일에 문 닫은 동안 불 이 났는데 잃어버린 물건의 3배를 보상받았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복 주시려 하 면 세상도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엽게 보시겠습니까? 자녀가 정말 사랑스러우면 뭐가 아깝겠습니까? 존재 그 자체가 그리움이고 존재 그 자체가 사랑인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러한 진리를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때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다음에는 “포도나무와 같이 꽃이 필 것이다”라고 합니다. 앞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그런 신자가 그런 신자를 낳는 것입니다. 축복이 깃들인 교회가 새로운 교회를 이루어 갈 때 그 축복을 물려받는 교회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고 은혜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그들의 인도를 받고 다시 하나님의 은총의 그늘로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누렸던 것과 동일한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가서 붙는 것을 잘 붙어야 합니다. 직장도 돈 많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 붙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를 결정할 때는 그 교회의 건물이나 그 교회 목회자의 얼굴, 그런 것을 보고 결정하지 마십시오. 그 교회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봐야 합니다. 그것이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화) 목회자들은 만나면 교회의 어려움을 경쟁적으로 이야기 하다가 교회를 자랑하기 가 일쑤이다-건물, 교인 수 교인들의 봉사, 출석, 헌금등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를 볼 때는 그 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들, 그래서 목회자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교회가 어떤지 알 수 없어도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성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깃들여 있고 아름답게 신앙이 꽃피는 곳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할 때 그런 번영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런 축복의 약속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달려와서 그 그늘에서 감화를 받고 거기 붙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고 주님 앞에 패역을 고친 순종의 삶을 살게 되면 뒤쫓아 와서 거기에 가입하는 수많은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함께 유업으로 받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다가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잊지 못합니다. 잊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예화) 직장 다닐 때 한 상사가 6.25 때 경찰 집안이었기에 온 가족이 죽게 되었을 때 인민군 대장이 살려 준 이야기-그 아버지의 유언이 그 은인을 찾아서 보답하라 는 것이었다
생명을 한 번 건져준 사람도 이렇게 잊지 못합니다. 한 번 있다 사라질 목숨을 건져준 사람도 그렇게 잊지 못하거늘 하물며 정말 소망이 없고 이미 죽어있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하나님께 진노와 저주를 쌓아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불러내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해서 이러한 놀라운 번영의 축복, 꽃 피는 축복, 감람나무와 같이 되는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유업들을 누리며 그 은혜의 그늘에 거하게 하였을 때 어찌 하나님 앞에서 그 상이 크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여 낸 사람들에게는 빛나는 별과 같은 상급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적이고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폐기 처분 직전에 있는 이 모든 이웃을 살려내어서 저주받을 자리에서 그런 축복과 은혜가 깃들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이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 불행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실패하고 완전히 무너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고쳐서 새사람 만들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오늘 패역을 고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일을 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악을 고치고 패역을 고쳐서 하나님 앞에 다듬어진, 고쳐진 사람이 될 때 우리를 통해서 천사도 흠모하는 이 놀라운 일들을 해 줄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죽음 직전에 갔던 많은 사람들이 그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적인 돌이킴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에게 감화를 끼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고 정말 주님 앞에 살면, 쓸모 없고 하나님께 늘 근심거리가 되던 사람들이 바뀌어서 하나님 없이 고통하며 어쩔 수 없이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 내밀어 그들을 어두운데서 이끌어 내어서 밝은 빛의 나라로 들아 와서 이런 참 좋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게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들어가고 패역을 고친 삶을 살 때, 이런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도구가 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성경은 “그의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을 것이며”라고 했는데 이것은 ‘명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의 명성은 레바논으로부터 온 포도주와 같을 것이라” 이 당시 ‘레바논의 포도주’하면 요즘 ‘블란서 포도주’ 아니면 ‘영국의 위스키’처럼 아주 유명한 특산품 이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스라엘로 수입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도 포도가 많이 나는 나라였고 지금도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는 한 송이에 4.5-6키로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정탐하러 갔을 때 포도송이 하나를 장정 둘이서 꿸 채에 매어 나왔다는 것이 ‘칼 델리취’라는 주석가에 의하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가 많이 나는 것과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포도가 열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포도의 당도나 기후 등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바논에는 산지가 많아서 양질의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고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노하우를 가지고 좋은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그 문맥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레바논 포도주 하면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예를 어떻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까?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이, 말하자면 족보 있는 존재들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포도주 하면 블란서 포도’ ‘위스키 하면 영국 위스키’ 하듯이 ‘사람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 ‘교인 하면 열린 교회 교인들’ 이렇게 레땔을 부쳐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의 명성은 레바논으로부터 온 포도주와 같을 것이며’인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말입니까? 우리가 한 번 그렇게 살아야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하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명성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고 산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명예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죽었으나 아직도 살아서 말하는 민족들이 있습니다. 이미 사라져 갔으나 아직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고 아직까지도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부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 갔고 역사 속에 모두 지나쳐 버렸지만 그러나 지금도 성경을 펴면 살아 나오고 역사를 펴면 살아 나와서 우리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았던 민족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부귀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역사와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건너갔지만 믿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역사와 함께 영원히 향기로운 민족으로 살아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신앙을 따라 살던 사람들은 역사는 흘러가도 그들의 존재를 가슴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들처럼 살려고 하는 모든 민족 속에 명예로운 기억으로 남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잠시 있다 가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는 이 역사 위에서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을 모두 후손들에게 비워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도 영원무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모두 끝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고 역사가 흘러도 명성이 사라지지 않는 민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올라선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삽니다. 이름을 내면 얼마나 내겠으며 또 세상이 우리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 무명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조금 결핍한 것이 있으면 불편하지만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하면 그 결핍도 인내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면 고통이 오고 눈물이 흐릅니다만 주님의 위로가 크면 우리는 고통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사랑 받는 백성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는 삶을 살다가 세상에서는 진흙과 같고 풀뿌리와 같은 인생을 살았어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갔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섬겼던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는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차고 넘치고, 그 순간이 하나님 앞에 기다렸던 순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산 사람들의 명성을 하나님이 보존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기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그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들의 생애를 통해서 다시 한번 그들 가운데 역사 하셨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지만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볼 때마다 눈물 흘리며 회개했던 것이 보람있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이 땅에 살아도 믿음의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 믿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자존심, 그리고 주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갔고 주님 앞에 패역을 고치며 주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백성, 순종하는 백성이 될 때 영원히 우리의 이름을 빛나게 해주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살다가 주님 만나 뵙는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5. 패역을 고친 자의 새로운 삶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호14:8)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다름없는 그런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통해서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불행해진 세상이 행복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고통받을 세상 속에 평화와 참된 축복이 찾아오는 그런 세상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자녀들을 선택해 놓으셨다.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올바르게 예수 님을 믿는 것은 이제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새로워진 삶을 살면 세상도 함께 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우리의 가슴 뛰는 말입니까. 여러분, 절망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가지가 퍼지는 것처럼 감람나무처럼 존귀하게 되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이 감화력이 있는 삶을 살 때 그 그늘 아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오게 된 그들을 하나님께서 백합화 꽃과 같이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시고 그리고 그 명성을 레바논으로부터 수입해 들여오는 포도주와 같이 길이 빛나게 하신다는 것이 오늘 성경에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놀라운 일,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행하고 고통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건지는 그러한 거룩한 일들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무엇을 고칠 때, 그렇죠 우리의 패역을 온전히 고칠 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예수님 믿고,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그리고 남들 척박한 음식을 먹을 때 기름진 음식을 먹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진정한 축복은 절망적인 세상을 고칠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소망이 전혀 없고 그리고 완전히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희망을 걸어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있고 그렇게 비참하게 절망 가운데 있고 그렇게 고통 하면서 살다가 마지막 분깃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 밖에는 아무 남은 것이 없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도 않고 또 알되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그 고통을 잊어보기 위해서 우상과 짐승에게 주며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그 불행한 인생들에게 다가가서 그 인생에 불행에 원인을 궁극적으로 고치고 변화시켜서 새사람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에게 번영을 주고, 축복을 주고, 존귀함을 주고, 아름다움을 주고, 명성을 더하여 주고 하는 이런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는 권세를 천사들에게도 주시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에 임금들에게도 주시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자! 그럼 여기서 우리는 오늘 좀더 시야를 조금만 넓혀서 오늘 우리들의 조국의 교회를 한번 보도록 합시다.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또 여러분 자신들도 예수 믿기 전에 받았던 그 수많은, 여러분들이 하였던, 받았던 그 수많은 질문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세상이 이렇게 사랑이 없고, 고통으로 가득 차고, 부패와 그리고 부조리가 가득하고, 강포와 음란과 더러운 죄들이 이 땅에 이렇게 가득한 세상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땅을 고치는 것은 인해전술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패역을 온전히 고쳐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는 그러한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는 반듯이 이 세상을 고치는 강력한 변화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데 그러냐, 교회 수가 다방 수 보다 많은데 왜 그렇게 서울이 타락하느냐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 자기는 또 어떤 사람입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이야기는 이제 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 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가서 기도라도 한 마디 더하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 매일 정답도 안 나오는 이야기 매일 타령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부다 자기는 괜찮고 다른 사람 때문에 뭐가 이 세상에 교회가 되는 일이 없다고 그리고 돌팔매질이나 하는 식에 그런 식의 비판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너’ 말하고 있는 너 자신이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쳐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즐거이 너를 사랑할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너에게서 떠날 것이고 그리고 너는 포도나무와 같이 포도나무 가지와 같이 퍼질 것이며 백합화와 같이 그렇게 피어날 것이며 백향목 향기와 같이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너를 존귀하게 만드셔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불러 일으켜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고통하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고쳐나가시는 방법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 끝날 까지 죄와 전쟁과 고통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이 세상이 진정으로 치료되고 고쳐지는지를 압니다. 그것은 공연한 구호나 부르짖음을 통해서 세상이 치료되고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고 가는 돌맹이나 그리고 이리 저리 날라 다니는 화염병가지고 이 세상이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고쳐지는 것은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을 고통 하는 세상으로 만드는 긍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 마음속에 있는 패역함 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르니까 죄 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을 안 여러분들은 그 패역을 하나님 앞에 고쳐야 됩니다. 적당히 묻어두니까 적당히 고통 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고치실 때 우리를 그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귀한 사랑 받는 그런 자녀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패역을 고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집회 마지막 날인데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말하기를’, 이 에브라임 이라는 말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명사입니다. 왜 대명사가 되었느냐 하면 북 왕국 이스라엘이 열 지파 이였었는데 그리고 남 왕국 유다가 두 지파 인데 말하자면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라 그럴까, 남 왕국과 북 왕국이 갈릴 때 가장 우두머리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 왕국을 이야기 할 때 에브라임 이라고 잘 말합니다. 특히 호세야 선지자는 그런 별명을 사용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오늘 성경에는 에브라임의 말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에브라임은 말하기를 나와 우상이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논란이 많이 되는 성경 구절입니다.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여러분, 말이 그래야 되는데 거기에 작은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죠 그게 성경 히브리 원문에는 안 나온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지 뜻이 통하지 않겠느냐 하는 성경을 번역한 사람의 의견입니다. 그런데 이건 크게 이제 두 가지 생각으로 갈립니다. 하나는 이 성경이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에브라임 이라는 말이 맨 앞에 나오는데 그걸 주어로 하고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그러면서 나와 우상이 무슨 관계가 있으리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견해를 따르면 이스라엘이 패역을 고친 다음에는 이제 우상을 그렇게 섬기고 우상과 함께 살아온 그런 삶을 다 청산하고 이제는 하나님께로만 돌아간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주 좀 저도 고심을 많이 했는데 정직한 마음으로 히브리 원문을 보게 되면
이 에브라임의 말이 이렇게 번역을 하는 건 좀 말하자면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에브라임 이라는 말이 호칭입니다. 에브라임이여~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이여 이렇게 부르고 ‘말하기를’ 이라는 단어가 본문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에브라임이여’ 이렇게 말하고 그 다음에 내가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이거는 누구의 말씀이냐 하 뒤에 계속 이어 나오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에브라임이여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내가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 패역을 고친 것을 쭉 말씀하시면서 패역을 고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더 이상 패역으로 돌아가지 않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쐐기를 박듯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너희는 상기하라 에브라임이여 너희는 기억하라 나와 우상은 관계가 없단다.‘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하면서 산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돌려야할 경배와 사랑과 아름다운 충성, 이런 것들을 우상에게 돌리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다 고친 후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상기하라 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상과는 관계가 없단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면서 자기들 마음 데로 우상에게 음란하게 대하고 우상을 공경하며 살았던 그 수많은 날들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공경해 왔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너희들은 나로부터 멀어질 것이며 내 참사랑을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잃어버릴 것이다. 이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너희가 나에게로부터 패역을 고침을 받고 나의 진실한 사랑을 물 붓듯 부음을 받게되었으니 이제는 너희는 나와 관계 있는 일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 옳지 않느냐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몰랐을 때는 우리 마음 데로 살았습니다. 그렇죠? 지나다니면서 교회가 나하고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죠? 목사들이 지나가면 예수 믿은 다음에야 목사님 그렇지만 지나갈 때는 목사 목사 그랬습니다. 예수 믿고도 그런 사람 많이 있습니다만 하여튼 그렇게 지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렇죠? 성경책, 성경책이 가죽도 씌어지고 금박도 물리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래도 성경책 주고 만화책 주면 아마 만화책 받아갔고 갔을 것입니다. 왜 성경책하고 관계가 없으니까요. 그렇죠? 예수 믿기 전에 누가 성경 준다고 그러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죠? 그걸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고 술 먹으면 그게 날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참 싫었습니다. 난 그 성경책에 제일 싫은 게 겉장을 넘길 때 그 속 페이지가 새카맣게 나오는 게 그게 그렇게 싫었습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예수님을 믿게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그 다음에 모든 것들이 다 관계가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 다 떨어졌지만 여러분 가운데는 이 성경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25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사랑스런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올려놓으면 술 먹는 것을 쳐다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켕겼던 그 책이 옆에 없으면 이제 불안해지는 책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과 관계 있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나다니다 잘 지어놓은 교회를 보면 야! 저 목회자가 땀 깨나 많이 흘렸겠다. 성도들이 헌신을 많이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교회의 그런 모습을 보면 야! 저기서 얼마나 성도들이 저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부흥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까. 그런 생각을 늘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때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나면 이제 삶이나 생각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 있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날에 패역을 고치기 전에 이렇게 우상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전에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습니까? 여러분, 구약적인 의미에서의 우상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렇죠? 설마 여러분은 이렇게 예수님 믿으면서 오늘 은혜를 받았겠다 가는 길에 한번 우상에게 절 한번 해보겠다. 그러면서 여러분 불상 집을 찾고 법당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죠? 존재는 하고 있지만 정말 그리스도인 하고는 이제 올바르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우상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남아있습니다. 그렇죠? 하나님 말고 사랑하는 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여러분, 직장이 우상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직장 상사에 혹은 직장에 피해를 안 주는 범위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죠? 돈이 우상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돈버는데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저는 공직 생활을 좀 하면서 그런 비애를 참 많이 느꼈습니다. 장관이 갈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있는 동안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모르겠습니다. 이름은 교회에다 걸어놓은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신실한 장관은 별로 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장관이 예수님을 안 믿고 장관이 신앙을 안 가진 사람이니까 가끔 장관이 와서 식사를 합니다. 가운데 딱 앉고, 그 다음에 간부들이 쭉 앉습니다. 그거 뻔하지 않습니까.
장관이 하나 앉고, 간부가 한 이 삼 십 명이 저 끝에 테이블까지 앉았으니까 거기에는 분명히 사 분의 일 정도는 예수님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장관이 기도 안하고 숟가락 들면 거의 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그래서 저기 예수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장관이 바뀌었는데 이 사람이 아주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식당에 와서 딱 앉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들 듭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전부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푸려고 하는데 아 이 장관이 밥을 안 먹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마지막에 성호를 긋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쫓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그렇게 복잡하게 눈치보고 살아서 그런 지성으로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살면 하나님이 얼마나 예쁘다고 그러시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전부 다 마음속에 순수하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항상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그 범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구약 성경에서 끊임없이 오가던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너희는 나를 버렸다. 너희는 나 대신 우상을 택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특히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들은 항상 반론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 앞에 제사하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애야 너는 나보다 우상을 더 사랑하구나 너는 나를 버렸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렇게 대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런 말씀하시면 제가 섭합니다. 제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제가 십일조를 떼먹었습니까? 주일 헌금을 안 했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주일을 빠졌습니까? 주님 나만큼만 예수님을 믿으라고 그러십시오. 이게 이제 하나님을 한 수 가르쳐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너는 나를 버렸다. 하나님 내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주님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면 난 그냥 안 믿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냐 하면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있는 신앙생활,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어떤 범위 내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 그건 하나님은 안 믿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범위 내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우상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상의 본질은 탐심이 가져다 준 것입니다. 탐심,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그리고 그 탐심은 바로 무엇입니까? 극도의 자기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잘 되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하나님과 동떨어진 상태 안에서 자기의 힘으로 잘 살아보겠다 라는 몸부림이 우상을 섬기는 동기가 된다 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의 패역을 고쳤으니 내가 우상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너희도 이제 우상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감기에 지독하게 걸리고 나면 면역이 생길까요 안 생길까요? 생깁니다. 몇 년 생깁니까? 이틀, 이틀 안에는 다시 안 걸립니다. 의사들이 이야기하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은 한달 내내 감기가 안 떠난다고,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이틀 동안 면역이 생겼다가 삼일 째 다시 걸리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홍역과 같이 일생에 한번 경험하면 면역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우리의 패역을 고쳐서 우리를 정말 새 사람 만들어 놓아도 또 하나님 보다 사랑하는 것이 있고 거기에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똑 바로 하지 않으면 다시 우리의 영혼이 곪고 덧나기 시작하면서 깊은 질병에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 어렸을 때 교회 다니실 때 그 교회 다니시는 집사님의 이야기- 연탄 배 달을 하는 가난한 그 가정에 남편이 매일 화투치고 술 먹고 타락한 삶을 사는데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교회에서 기도해주고 교회 나오면서 하나님의 은혜 로 병이 나았는데, 한달 동안 열심히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면서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살다가 두 달만에 죽은 이야기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치료했어도 그래도 이렇게 정말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패역은 다시 덧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용서해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어떠한 범죄를 하고 어떠한 커다란 죄를 지었어도 이 세상에 사람이 다 여러분들을 향하여 돌 던져도 하나님은 돌 안 던지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를 의지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리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구약에서 구원받을 커트라인이 이 정도였다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조금 낮춰서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좀 디스카운트해서 신약시대 세일 기간이다 그러고 구원에 커트라인을 낮춰서 자! 능력 있는 사람들 뛰어 올라서 이 철봉대를 붙잡으라 잡기만 하면 합격이다. 그렇게 해 주시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된다는 걸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죄에 용서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무조건 야! 너 나만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한 칼에 날려버린다. 하나님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공갈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협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책임져야 됩니다. 스스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깨달아 알고 그 깨달음이 우리에게 신앙을 불러일으키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안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서 깔때기 속에다 성경을 집어넣는다고 해 가지고 그게 속으로 들어가서 새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부모들이나 혹은 동기간들이, 하도 답답하니까 그렇겠죠. 데리고 와 가지고 어떻게 좀 해 달라고 그러는데 예수 믿을 마음도 없고, 그리고 예수님 의지할 생각도 없고, 천국이 있다고 해도 갈 생각이 없고 이런 사람입니다. 와서 멍하니 앉아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다리나 덜덜덜 떨다가, 그래도 데리고 와야 됩니다. 할렐루야 당연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앞에 섰을 때 이 곡식이 익은 곡식인지 안 익은 곡식인지 그걸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제가 교회 있을 때 그 때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예화) 어느 청년 하나가 오랜 시간을 기도를 하고 있었던 이야기- 오랫동안 기도를 하 기에 한참 있다가 가서 보니 술 먹고 자고 있기에 깨워 물으니 자신도 예수 믿고 싶다고 해서 술 깨고 와서 믿으라고 했더니 나중에 와서 주님을 믿기 시작하여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그걸 보면서 참 사람이라는 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데려와야 됩니다. 데려와서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익은 곡식인지 안 익은 곡식인지 안다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으로 완전히 치료하고 고쳐 주시잖아요. 그렇게 고쳐 주신 게 얼마나 감격적이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늘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병이 몇 가지 특별한 병을 제외하고는 병에 걸린 경력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 병보다는 조심해야 되는 병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면서 패역의 깊은 병에 걸려서 그래서 정신없이 시달리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살다가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우리를 순전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다 할 것 같으면 우린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패역이라는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바로 어떻게 비롯되었느냐 하면 하나님 이 외의 것들을 과도히 사랑하고 주님보다 더 사랑할 때 그 때에 그 사랑의 통로를 타고 우리에게 패역이라는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균들이 집단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패역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정말 우상을 떠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 사랑하는 길이 여러분들의 영혼과 마음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봐라! ‘에브라임아’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아’ 내가 너희를 이렇게 고쳤으니 이제 너희는 내가 우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너희도 우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내가 말씀으로 너희의 패역을 고치고 이제 너와의 관계를 회복해서 너에게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었으니 너는 이제 마음을 지키고 나만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나 여호와 밖에는 너희에게 사랑하는 이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전심으로 우상을 떠나는 삶을 사는 것이란다. 이것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한테 잘 보여봐야 마지막 세상의 목표는 이미 뻔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의 목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을 향해서 가서 뭐 우리는 꼬리가 없지만 세상 앞에 가서 애교를 떨고 세상아 나 예쁘지? 그리고 매일 그래봐야 세상의 마지막은 무엇이냐 하면 박자를 맞춰줍니다. 그래 참 너 예쁘다. 내 품에 와서 안겨라 그리고 입을 맞추자 그리고 끌어안지만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멀어지고 신앙 다 털어먹은걸 알면 그 다음에는 발길로 차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교훈 아닙니까. 소금이 짠맛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습니까? 밖에 내어버립니다. 밖으로 튀어 나가니까 거기서 어구 야! 소금 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뭐 하고 똑같을까요? 그렇죠 돌입니다. 흙만도 못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소금이 짤 때는 부뚜막에 있어도,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그렇습니다. 부뚜막에 굴러다닌 게 얼마나 천합니까.
그런데도 짠맛을 유지하면 국그릇에 넣고 그렇게 넣어서 먹을 때 가 많습니다. 그런데 짠맛을 잃어버리면 그걸 뭐 하겠습니까. 많은데 짠맛을 다 잃어버렸다 그건 애물단지 아닙니까? 그건 어디다 갖다가 퍼내어 버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똑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패역을 고쳤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교훈을 첫째로 발견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한다. 이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 말씀으로 패역을 고쳐주십니다. 자! 이번 사경회 때는 물론 여러분 많이 고쳐주셨지만 이제 더 많이 고쳐주신 것은 여러분들이 아! 나는 이제 고침을 받아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기분 내킬 때 한번 와 가지고 으악 하고 덜덜거리고 떠는 것이 이게 신앙생활이 아니구나 삶은 없이 와 가지고 하나님 앞에 꺼이꺼이 울고 매달린다고 해서 이게 신앙생활이 되는 게 아니구나 그걸 여러분들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이제 내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이 패역, 하나님을 거슬리며 불순종하면서 완강하게 살려고 하는 나의 이 못된 자아들을 하나님, 나는 고치려고 했지만 그러나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고치면 하나는 고쳤지만 두 세 가지 또 잘못된 부작용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 부작용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고쳐주셔서 새 사람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예배에 지각을 안 할겁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아멘) 예 적당히 아멘을 하는군요. 그렇게 하면서 계속 치유 받아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고치시고 고친 그 위에 덧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교훈을 여기에서 배우게 되냐 하면 여러분, 이스라엘을 보면 정말 우상과 떨어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까? 우상과 결별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성경을 읽는 우리의 판단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우상을 끔찍이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또 우상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들이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며 사는 사람들 이였다면 벌써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극도로 타락한 길로 걸어가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아귀에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상과 결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손아귀에 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강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기 위해 쫓아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우상을 붙들기 위해서 쫓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예 호세아서 처음서부터 보여주는 것입니다. 음란하고 타락한 여인에게 장가를 드는 것입니다. 이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가서 돈주고 여인을 찾아오고 다시 타락한 길로 가면 다시 곡식을 싸 가지고 찾아가서 그 여자를 구속해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과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지고는 살아도 우상과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치고 너희들이 나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으면 그렇게 숙명적일 수밖에 없었던 우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부터 너희가 끊어지고 나만 성결하게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끊을 수 없었던 그 뜨거운 사랑, 끊을 수 없었던 그 뜨거운 이 세상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놀라운 능력으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간에게 있는 이 타락한 습성, 이 타락하고 부패한 습성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인이 배기는 건지 모릅니다. 그렇죠? 저는 아직까지 그런 재미를 못 느껴 봤습니다만 이 도박에 미친 사람들, 완전히 정신병자 같이 됩니다. 의학에서는 질병으로 칩니다. 도박에 빠져도 보통 빠지는 게 아닙니다. 미친 듯이 도박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화투를 좋아한 이야기- 누구의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고 결심을 하면서 도끼를 가지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으나 몇 년 후 다시 패역의 길에 들 어 서서 손 갈고리에 화투를 끼고 하더라는 이야기
그것이 인간입니다. 저는 세례 받고도 4년 후 까지도 담배를 핀 사람인데 저 같은 사람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 그래서 세례 받을 때 꼭 물어봅니다. 담배와 술을 정리하겠느냐고 못하겠다면 그러면 나도 못 준다고 합니다.
(예화) 목사님 예전에 담배 피셨던 이야기-7년 동안 피셨던 담배를 은혜를 받고 나셔서 끊으셨는데 어느 날 버스 뒷자리에 앉아 가시면서 앞에서 나는 담배 연기에 자신 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는 자신을 보면서 3년 반이 지난 시간에도 자신의 내면 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패역을 이야기하심
그런데 하물며 그냥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에 잠겨보기를 했나, 또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기기만 하면 고무공 물 속에 집어놓은 것 마냥 좀 들어간 아이들이 톡 튀어나오고, 들어가면 튀어나오고 이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이랍시고 해 왔는데 어이구 뭐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형성되는 게 맨 그런 하나님 떠나서 사는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 고집 데로 사는 이 아집만 강화됐는데, 철저히 자기의 의, 그리고 자기의 공로, 자기의 체험, 인생에 대한 개똥 철학 이런 것들이 그냥 주저리주저리 쌓여 가지고 그걸 붙들고 인생을 살다가, 그렇게 사는데 자! 끊어 그럴 때 아멘 하고 눈물 한번 주루룩 흘린다고 툭 끊어지면 그 사람 살인도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담배끊는 사람보고 그렇습니다. 무서운 사람이라고, 저 사람 칼만 들면 살인도 할 사람이라고, 독한 사람이라고 그렇습니다. 그게 됩니까? 그건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패역을 고치시는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은혜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이거 뭐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약과라고 그렇습니다. 이 권력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미친답니다. 여러분, 용의 눈물 보면 압니다.
(예화) 진주 가시는 비행기 내에 용의 눈물 주인공을 만난 이야기- 비행기에서 내려 그 분을 아는 척을 하셨지만 그 사람의 대면 대면함에 내가 뭐 하러 그랬나 하신 말 씀
거기서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권력에 맛을 들이고 나니까 동기간이고 뭐고 그 눈에 안 보입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 만나면 나한테 물어보지도 말고 단칼에 베어서 죽여버리라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권력에 속성입니다. 누구하고도 나눠 가질 수 없도록 맛에 깊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났던 어느 장로님 한 분이 그렇게 요직으로 있으면서 그러다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전도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신 들어오라고, 전화를 해 보니까 비서실장이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각하께서 당신을 일본 대사쯤으로 임명하시려고 그렇게 하는 것 같다고 빨리 와서 대통령이 점심 먹자고 그럴 때 말 듣고 와서 같이 한번 저녁 먹자고, 그런데 그 분이 기도해 보니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답니다. 못 간다고 그래라.
주님 뜻 데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그리고 나서 정확하게 일 주일 있다가 십 이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그 패역을 고쳐주신 사람들, 이 패역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정말 이 은혜의 능력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어마어마하게 역사 합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과거와 단절하게 끔 만들어 줍니다. 꿀처럼 달콤하고 도저히 죽기 전에는 결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과거에 습관, 옛 타락한 방식과 더불어 절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전에는 세상을 사랑하고 이전에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얼마든지 버리면서 이 세상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신앙이랄 것도 없이 다 망가진 삶, 패역으로 치닫는 삶을 살아서 생명과도 거리가 멀고 번영 축복과도 거리가 먼 감화와도 거리가 먼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나면 은혜의 능력이 우리의 패역을 끊고 나면 우리는 이제 세상을 자랑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자랑하는 그렇게 하나님의 명성을 높이는 그런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러한 능력을 우리에게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과거에 더러운 죄와 불순종에 사로 잡혀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그 능력이 여러분들을 계속해서 고치도록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허락을 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능력은 여러분들에 과거에 고래심줄 보다도 더 강한 옛 패역으로부터 끊어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새 사람 되게 만들어주셔서 하나님 앞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 속에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식물가운데 특이한 놈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삼입니다. 삼. 특별히 마닐라에서 나는 삼 같은 건 그건 참 신기했습니다. 그건 어디다 쓰냐 하면 배관 같은 거 할 때 그 사이에 실같은걸 감는 게 있습니다. 그게 마닐라 삼 같은 걸로 씁니다. 옛날에 직장에 다닐 때 그걸 쓰는 사람이 와서 나보고 이야기합니다. “김 선생 이거 한번 끊어봐” 그런데 머리카락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 이 사람 무엇으로 보고 그러냐고” 그리고 여기다 탁 집어놓고 잡아당기는데 안 끊어집니다. “야 이게 간단한 게 아니구나” 그리고 확 잡아당기는데 손이 베어집니다. 안 짤라집니다.
여러분, 죄와 옛 습관은 삼 줄과 같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여러분 그게 끊어집니까? 얼마나 안 끊어지는지 아십니까? 정말 질기디 질깁니다. 삼 년 동안 제가 담배를 끊고 나서 이리 저리 유리 방황하면서 살았으면 내가 말을 안 합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주의 종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주의 종이 되겠다고 그런지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그게 뭡니까. 담배연기를 맡고 들이마시니 그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인데 어떡합니까. 인간이 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16장에 보면 삼손을 바로 그 삼 줄로 결박을 하지 않습니까? 삼 줄로 결박했다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런데 하여튼 줄로 결박을 하지 않습니까? 줄로 단단하게 결박을 하는데 그런데 성령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시니까 주여! 그러면서 꽉 하니까 줄이 우두둑 끊어지는데 뭐와 같았다 그랬냐 하면 불 탄 삼 줄과 같았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삼 줄은 정말 요만한 가느다란 실밥 같은 걸 가지고 칭칭 감아도 장사라도 끊어낼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모이고 모여서 이런 굵은 줄이 되어서 우리를 칭칭 감았다 할지라도 불에 탔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재인데 아무 힘도 없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이 이렇게 강하고 이렇게 철저하다고 할지라도 죄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으면 이것은 불 탄 삼 줄과 같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와 옛 습관, 패역한 옛 생활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또한 동시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붙잡혀서 그 은혜에 장중에 붙잡혀서 우리가 변화 받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하나님에 말씀으로 치료를 받고 패역을 고치는 사람들에게 임할 것임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사모하면서 동시에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렇게 주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더 이상 패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그러면서 ‘나는 저희에게 잣나무와 같이 되리니 저희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가슴을 깊이 찌르는 말씀이 ‘돌아보아’ 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히브리말로 “슈유러(?)” 라는 단어인데 이 슈유러 라고 하는 단어는 돌아보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뭐 와서 휙 돌아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도 돌아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그게 아니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세세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아본다는 말이 애정을 가지고, 깊은 사랑을 가지고 세세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많이 누워있지 않습니까? 가족들이 보살피면 좋은데 다 생업에 바쁠 경우에는 이제 호스피스나 이런 사람을 불러서 한 달에 얼마를 주고 환자를 돌보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그 사람들이 하얀 가운을 입고 있기 때문에 금방 표가 나긴 하지만 확실히 정말 자기 부인이나 자식들이 환자를 돌보는 것과 한 달에 월급 받고 돌보는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 분들 중에는 선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일 하시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같지 않습니다.
(예화) 예전에 섬기시던 교회에 교인이 식물 인간이 되어 누워 있는 이야기-간병을 하 는 분의 예의 없는 태도를 보며 마음 아파하는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심방을 가 서 가슴이 찡하셨다는 이야기
그게 바로 똑 같은 환자를 돌아보는 게 돈 받고 돌보는 사람과 함께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서 봐라보는 것에 차이입니다. 바로 그런 부인이 그런 마음으로 남편을 돌보는 것이 바로 슈유러의 돌봄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내가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할 때 그 돌아본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을 고치고 당신에게로 돌아와서 그런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사랑 안에 거하며 살 때에 하나님이 어떠한 마음으로 그 백성을 돌아보시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와서 지속적으로 패역을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고치는 건 반듯이 고통이 따릅니다. 담배 피우는데 끊으니까 내가 아무리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끊었지만 괴로웠습니다. 고통스럽고 순간 순간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은혜 받았어도 옛 삶과 결별 할 때는 고통이 찾아오는 겁니다. 옛 삶과 결별하고 이전에 우상과 함께 관계를 맺었던 삶으로부터 단절될 때는 거기에는 반듯이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버릴 때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서 군대에 보낼 때도 그렇게 부모님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물론 보내놓고 잘 갔다. 그런 부모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마음 아파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여러분, 두 번 세 번 휴가 나왔을 때는 왜 왔니? 하고 물을지라도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집에서 엄마 품에서 있던 아이가 떠나서 군대라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 안 흘리는 부모는 부모도 아닙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버릴 때는 반듯이 고통이 있고 우리의 패역을 고쳐주시고 그리고 우상과 단절된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반듯이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전 여러분들에게 입 발린 소리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여러분들의 죄악을 고치고 패역을 고치는데 어떤 통증도 없고 아픔도 없다고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건 정직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픔입니다. 때로는 그 통증이 너무 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슈유러의 돌봄으로 그렇게 패역을 고치고 우상과 관계를 끊고 살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슈유러의 돌봄으로 인자와 자비를 가지고 돌아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끊고 옛 패역한 삶을 돌이킬 때 고통이 있지만 그렇게 고통을 머금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나면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믿음과 담대함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담배를 끊고 교회 가던 첫 번째 주일을 기억합니다. 이전에는 교회 갈 때는 양치질하고, 껌 씹고, 인단 먹고, 그리고 가다가 훅훅 혹시 냄새가 나나 안 나나 확인해보고 나서 그리고 또 무슨 주일 학교 설교하러 올라간다고 강단으로 돌격 앞으로 했으니 참 정말 나쁜 짓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러운데 일주일이 딱 지나고 나서 교회 갈 때 내가 이제 옛 생활을 청산했다. 늘 하나님 앞에 가책을 느끼던 생활을 청산했다 생각되니까 그렇게 위로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내 마음속에 밀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거 작은 거 하나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걸 끊어도 그런데 커다란 죄와 우리를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얽어매고 있는 이 오래된 죄악 생활로부터 우리들이 단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슈유러의 돌봄, 다시 말하면 애정이 있고 자비가 있는 말할 수 없는 돌봄으로 죄를 끊어내고 패역을 고치는데서 오는 아픔보다 더 큰 위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가 317장에 보면 이런 거 나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가 죄에 길을 걸어가면서 고통을 당한 것도 주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때리신 후에는 위로해 주시는데 우리가 만약에 패역을 고치기 위해서 아픈 것을 경험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겠는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흘리는 피는 죄를 짓기 위해서 피 흘리는 것보다는 말할 수 없이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런 사람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깊이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고 고통을 능가하는 위로와 축복을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부어주시니까 내가 이렇게 조금 고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번에는 한번 더 고치겠습니다. 주님 더 고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막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더 고치는 기쁨이 증가되어 하나님의 생명에 내가 더 많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거 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통째로 바꾸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매달릴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을 지라도 주님 내 좋은 데로 살다가 죽지 말게 하옵시고 고난이 오고 아픔이 와도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다가 죽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 좋은 것이 제게도 좋은 것이 옵나이다. 이 정도 고백까지 가게 되면 하나님은 완전히 마음이 녹으시는 것입니다. 야! 세상에 그 입에서 그 말, 그 머리에서 그런 고백이 나오다니 야! 이거는 완전히 돌 속에서 샘물이 솟아나는구나 야! 참 마음도 돌, 머리도 돌, 인격 자체가 돌 이였던 그 사람 속에서 이런 생명의 고백이 쏟아져 나오니 하나님이 그 돌 만드신 걸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참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 통해서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보면 도대체 머리도 돌, 정말 아무 것도 든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격이 나보다 고상한가 뭐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모든 사람이 시기 날 정도로 존귀하게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져보면 뭐가 있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물 붓듯 부어진 증거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는 사람을 슈유러의 돌봄으로 그렇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동행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뜻 데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을 주님이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신 다면 누가 그런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께로 피하는 자들에 피난처가 되시고 당신에게 도망하는 자들에게 도피성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그런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그들에게 푸른 잣나무가 될 것이요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잣나무는 굉장히 큽니다. 그쪽 잣나무하고 우리 잣나무하고는 어떻게 다른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여튼 여러 가지 책들을 보면 거기에서 이 나무는 굉장히 큰 나무로 묘사가 됩니다.
그리고 나무가 쭉 뻗어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데 그 그늘이 사람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준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난 팔레스타인에 가서 잣나무 밑에 앉아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라의 잣나무 밑은 참 좋습니다. 여러분, 잣나무 밑에는 뭐가 없습니까? 벌레가 없습니다. 신기합니다. 소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온갖 벌레들이 바지 속으로 다 기어올라오는데 잣나무 밑에 가서 앉아 있으면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얼마나 깨끗합니까. 쭉 뻗어서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무에서는 ‘피튼치드’ 라는 물질이 떨어집니다. 그게 우리의 코끝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폐로 들어가면 웬만한 두통이나 이런 것들이 싹 사라집니다. 그래서 두통이 많이 나면 숲 속에 들어가서 심호흡을 하고 잠깐 누웠다가 나오면 진통제 몇 알 복용한 것보다도 더 상쾌해 집니다.
그러한 놀라운 생명과 소생함을 주고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는 그러한 나무가 될 것이라는, 누가?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그런 나무의 그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패역을 고친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피난처가 되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다시 말해서 히브리 성경에 나온 데로 말하자면 ‘너희가 내 안에서 열매를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패역을 고치고 그리고 우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만 사랑하면 이 열매는 잣나무로 비유되는 하나님에게서 직접 내려지는 열매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그 나무 아래로 피하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맺혀지는 열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피하고 이렇게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그 사람이 살다 지나간 수많은 흔적이 있습니다.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에 존귀함과, 사랑을 베푼 흔적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빛을 나눠준 그러한 인생에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모두 다 죽을 것이 아닙니까? 뭐 제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확실한 예언 하나 할 수 있습니다. 80년 후에 우리는 아무도 이렇게 함께 그렇게 마주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갈 곳으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다가 잠시 지나가는 인생인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무엇을 남기고 그래도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남기고 가시렵니까?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남기고 가는 것 별로 관심이 없습니까?
여러분, 성경에 보면 가끔 이런 묘사가 나옵니다. ‘그는 아끼는 사람이 없이 죽었더라’ 그러니까 사람이 누가 죽었네 에구 그 사람 때문에 고통받던 사람들 많았었는데, 이런 사람이 되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나는 죽고 세상을 떠나가도 늘 나를 기억하고 그리고 나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 때문에 내 인생을 돌아보는 사람들마다 내 인생과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잠시 세상에 살면서도 영원을 향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매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것으로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97년도를 우리는 쉬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정말 세상과 더불어 다투고, 싸우고, 몸부림치면서 애써서 발버둥을 쳤습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까? 죄악의 열매와 근심에 열매가 우리의 삶에 주렁주렁 맺히는 대신 신령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는 열매는 지극히 작거나 병든 열매밖에 맺지 못하는 이런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기회를 제공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번 사경회에서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패역을 고치고, 패역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주실 것이며 그런 축복을 주고 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우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하시고 그렇게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보셔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인 가를 우리에게 모두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이번에 1년 동안 살면서 여러분, 하나님 앞에 큰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년을 다 살고 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시고 깜짝 놀라실 수 있도록, 야! 올해는 정말 내가 너의 인생을 통해서 보너스를 탄 기분이다. 어떻게 너 같은 인생이 이런 놀라운 삶을 살수가 있었느냐 그때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패역을 고치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사오니, 하나님 우리의 삶에 열매를 통해서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금년에는 꼭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Ⅳ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