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Ⅴ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정처 없는 신앙의 비극(호6:4) 1998.10.19 가을기도학교사경회(저녁) 1
2. 견고함이 없는 이스라엘을 고치시는 하나님(호6:5) 1998.10.20 가을기도학교사경회(저녁) 15
3. 제사보다 나은 인애(仁愛)(호6:6上) 1998.10.21 가을기도학교사경회(저녁) 27
4. 번제보다 나은 지식(知識)(호6:6下) 1998.10.22 가을기도학교사경회(저녁) 39
5. 하나님이 치료하실 때에(호6:7-7:1上) 1998.10.23 가을기도학교사경회(저녁) 56
1. 정처 없는 신앙의 비극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이 호세아서를 가지고 네 번이나 집회를 했고, 그 때마다 본문은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언제나 같은 줄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호세아 전체의 주제는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의 마음을 알고,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로 걸어가고 있는 이 현실들을 심히 개탄하고 탄핵하면서 이제 호세아 예언을 그려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호세아서에서 유명한 장 가운데 하나인 6장에 나오는 문맥입니다. 6장의 문맥은 바로 5장까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열거한 다음에 이 6장에서 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렇게 돌이키지 않지만 그러나 돌이킬 날이 올 것이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돌아올 것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에 돌아올 것이다 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예언하던 이 시기는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지만 그는 이 북녘 땅 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 왕국 유다에 대해서도 동일한 동족의 애정을 가지고, 예언을 펼쳐 나갔습니다.
이 호세아가 활동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시대는 여로보암 2세라고 하는 왕이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역사에서 백년에 한 명 정도 나타날까 말까하는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토대로 왕국을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무역을 통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외교에 능했으며,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북 왕국 이스라엘의 대 통합을 기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요단강 건너편의 여러 족속들을 복속시켜서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지도를 보면 남 왕국 유다를 아래에 남겨놓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온통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커다란 판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게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같은 시대에 예언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보면 이스라엘 왕국 백성들이 당시 얼마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름이면 별장으로 쉬러가고, 겨울이면 겨울 별장으로 쉬러 갔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면 그 침상은 상아로 깎아만든 침상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부를 누리고 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를 누리면서 아주 특별한 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 그야말로 태평성대였습니다. 그 때에 이 호세아와 아모스는 그들을 향해 통렬하게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났으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고 계신지를 통렬하게 예언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호세아는 흐느끼다가 가끔씩 분노하는 음성을 발했는가 하면 아모스는 분노하는 음성을 발하다가 목이 메어서 흐느끼는 그러한 선지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호세아 선지자를 사랑의 선지자라고 말하고, 아모스 선지자를 정의의 선지자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 선지자를 통해서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성경 전체를 읽어나가고, 아니 기독교 역사 전체를 읽어나가면서 우리들이 주목을 해야 할 바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대가 어둡고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의 역사로 걸어 갈수록 하나님은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을 가진 당신의 종들을 세상에 보내어서 어느 한 구석에서든지 주의 그 말씀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백성들이 사는 길이였습니다. 그들의 음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으로 불탔고 주님의 음성을 대변해 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한결같이 그들의 음성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계셨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의 음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자기의 뜻을 보이셨지만 그러나 귀 기울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도 함께 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릇된 길로 걸어가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고 주님이 심판을 행하실 때에도 도저히 핑계하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보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능력의 선지자로 꼽고 있는 엘리야 같은 사람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 여로보암 2세 못잖은 가장 타락한 왕이 아합의 시대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그 큰 능력의 종들이 가장 캄캄한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외쳤습니다. 이사야가 그러했고 예레미야가 그러했고 걸출한 주의 종들이 바로 그렇게 암담하고 비참한 역사의 비탈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시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커다란 축복은 어디에선가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향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이 누군가를 통해 그 시대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 의해서 환영받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하는 사람, 혼란과 어두움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서도 무엇인가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이 있으면, 정말 이 혼란과 어두움 속에서 빛 되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붙들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진실한 성도들이 아무리 타락한 시대에도 언제든지 조금씩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지탱되어 온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는 주님이 어떤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지를 말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만연되어 있는 우상숭배의 죄와 그리고 세속적인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죄를 나열했습니다. 그리고 목놓아 울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도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모습을 보면서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가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언제, 고통을 당할 그 때에 이 백성들이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1절부터 3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이 아니라 가상적인 예상이었고, 가상적인 상상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일 이렇게 살다가 크게 고통하는 때가 오면 그때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 하는 것을 하나님이 예고적으로 미리 말씀하신 다음에, 그 말씀이 다 끝나고 나자 다시 상상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 그렇게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셨고, 기대하고 계셨지만 그러나 그들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그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벌렸습니다. 그래서 4장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망하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저를 버려 제사장 나라 되지 못하게 하리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풍부함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종교의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형식이고, 모든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를 경외하는 진실한 마음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현실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가 어찌 할꼬’ 이 에브라임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에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북 왕국이 갈라질 때에 12지파 중에 북쪽으로 넘어간 지파 가운데 가장 큰 지파가 에브라임 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가 어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찌 하랴’ 말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을 하나님이 한없이 사랑하시는 데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들을 정말 축복하고 싶고, 정말 도와주고 싶고, 이들에게 선을 행하시고 싶고, 은혜를 주시고 싶고, 이들을 정말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드시고 싶고, 그리고 이들을 정말 주의 백성답게 만들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는데 하나님도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보여주는 것 이예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시면 하시는 것이지, 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그렇게 안타까워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제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을 안 하실 수 있습니까? 안 한다는 것보다도 못 하실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모든 일을 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못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못하십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실 수 없는 그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한 성품에 어긋난다 이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시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함이 없는 신앙 때문입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이나 이슬과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아침에 잠시 피었다가는 해가 퍼지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야 마는 해뜨기 직전에 잠깐 깔려있는 그 아침구름, 찬란한 빛을 내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반사하며 유리알처럼 빛나는 이슬이 들녘에 가득하지만 해가 떠올라서 잠시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사라지고 마는 이슬과 같은 그러한 존재들, 그러한 인애가 바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시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한 번도 지금 받고 있는 이 축복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말입니다. 오늘도 집회 내려오기 전에 거울 앞에 앉아서 넥타이를 매면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인생이 무엇이관데 이런 놀라운 사랑으로 세밀하게 인도하셔서 오늘 이 거룩한 집회를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내게 베풀어주신 이 은혜가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알고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불만이 제가 하나 있는데 이사와서 감사하다는 말이 너무 적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얼마나 놀랍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충분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제 마음에 기쁜 때에도 충분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 은혜를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깨뜨려지지 않는 사람도 더 많았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이 예배의 현장에 더 크게 축복하셨더라면 하나님, 그렇게 차가운 가슴으로 마음을 닫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영혼들이 물같이 녹아서 그렇게 고쳐지지 않던 사람들이 바로 이 예배 시간에 고쳐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큰 축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을 다 해서 충성하고 주를 위해서 봉사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을 몰랐더라면 어두움 속에서 쓰레기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갈 비참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보배롭게 주님의 손으로 닦고, 또 닦고 다듬으셔서 하나님의 교회에 거룩한 성전에 한 벽돌이 되게 하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어떤 때는 너무나 감사해서 ‘하나님, 이제는 충분합니다. 하나님, 제가 베풀어주신 이 크신 은혜를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이제껏 져온 하나님의 은혜의 빚만 해도 하나님 저는 이제 이 검은머리가 하얗게 파뿌리가 되도록 내 검은머리를 잘라서 신발을 만들어서 주님의 발에 신겨드리고, 내 살가죽을 벗겨서 주님의 옷을 만들어 드려도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내가 네가 뭘 해주랴?’ 이렇게 물을 때 ‘하나님, 이제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감사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격적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사실이지만 이거는 불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많이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주님을 섬기고 더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부족한 것들을 수없이 많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우리가 여태까지 하나님 앞에 살아온 이 비천한 생활이 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가 정말 감당할 수 없이 크지만 이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이 정말 하나님만 높이고,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더 부어주셔야 될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왜, 하나님이 더 큰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완악한 죄인들에게는 더 날선 검과 같이 찔러 쪼개고 회개하고 참회하는 영혼들에게는 더 뛰어난 양질의 포도주가 되어서, 그들의 상처에 부은바 되어서 새살이 돋게 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에게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게끔 짧은 한마디의 권고를 들어도 찬란한 빛처럼 다가와서, 의심할 여지가 없이 자신의 인생의 모든 혼돈의 구름이 물러가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잖아요. 주님이 매 시간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지만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은혜보다도 더 뛰어난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입에서 전하는 이 복음이 불이 되고 검이 되어서 영혼들을 압도시키고, 그 영혼들을 참회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더 큰 축복을 하나님 앞에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세아의 이 예언을 듣고 있는 현장으로 가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할 제목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부강한 나라 만들어 주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세속적이지만 영명한 군주를 주어서 나라를 평안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강력한 나라, 군사적으로 대국을 만들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하셔요.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죄는 용서해 주고 싶으시고 잘한 것은 많이 상주고 싶어하시고, 모자라는 것은 넘치도록 채워주시기를 원하고 필요한 것은 필요한 거 이상으로 더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 한 심령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안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철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신앙의 철이 들면 들수록 자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걸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실 까, 내가 이렇게 살아 갈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 까, 내가 이 길을 걸어갈 때에 나는 고달프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 까’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되고 거기에 삶의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 신앙적으로 철이 드는 거예요. 철이 들기 전에는 모두 자기 생각밖에 안합니다. ‘나는 이것도 없는데, 저것도 없는데 딴 애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좋은 옷에 좋은 음식에 그렇게 부족한 것 없이 사는데 나는 이게 뭐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앙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내려다보시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바라보실 때에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주님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시지 않았습니까? 한사람, 한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자기의 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해 죽임을 당하게 하시고 그 피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들을 살려서 주님의 귀한 자녀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에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말할 수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큰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지루하신 희생의 대가가 너무나 크고, 너무나 크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를 고쳐서 쓰고 싶어하고, 왕관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대신 어떻게든지 기회를 주셔서 우리를 고치셔서 쓰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다 못 쓸 것이 되었는데도 살 때 워낙 비싸게 주고 산 거는 그거를 쉽게 버리지를 못합니다. 안경만 쓰면 눈이 아프고 자꾸 눈물이 나고 초점이 안 맞고, 심지어는 두통이 나고 그렇게 해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싸구려 안경을 늘 썼습니다. 3만원, 5만원 이렇게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나서 한 15주년쯤에 우리 집사람이 진짜 좋은 안경을 하나 선물을 했습니다. 지금은 눈이 더 나빠져서 도수도 맞지 않고 안경테도 부러졌습니다. 그런데도 못 버리고 아직까지도 차에다 넣어 가지고 다닙니다. 다시 쓸 가능성이 없어요, 그런데도 못 버려요. 왜? 너무 귀해요 당시로서는 정말 보통 때 쓰던 안경 쓴 거에 다섯 배는 더 주고 샀어요. 그래서 몇 년 동안 눈도 안 아프고 아주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요. 쓸모가 없는데도 옛날 안경 같았으면 다 쓰레기통에 버렸을 거예요. 그것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쇠도 다 누렇게, 퍼렇게 녹이 나고 그러는데 무엇에다 쓰겠습니까, 그런데 알을 못 버리고 아직까지도 가지고 다닙니다. 다시 쓰지도 않을텐데, 왜? 워낙 좋은 거고 비싸서요. 그게 값을 주고 산 사람의 마음입니다. 얻어다가 쓴 것은 용도가 끝나면 쓰레기통에 휙 집어던집니다. 그리고 ‘아직도 쓸만한데?’ ‘내 버려’ 그러나 비싸게 주고 산 거는 자꾸 몇 번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신 거예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들을 당신의 외아들을 통채로 주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었을 까요. 아들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다시 말하면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처절하게 절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찢어서 처참하게 심판하시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살릴 가치가 있었겠습니까, 당치도 않는 그 비싼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에 심으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열매맺지 못하는 어린 묘목이지만 그러나 이 나무가 내 포도원에서 때가되면 아름다운 결실을 하야, 내가 이들을 위해서 내 아들을 값 주고 산 보람을 느끼게 해 주겠지’ 생각하시고 우리를 그 피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막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막 살다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은 오물도 담겨있고, 그리고 더러운 물도 담겨 있지만은 그러나 사실은 정말 고결한 포도주를 담는 금 그릇과 금 잔과 같이 그렇게 고귀한 존재예요.
우리가 그럴 가치도 없는데 주님이 그런 비싼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고귀하게 사용하고 싶어하고, 우리의 인생을 정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정말 값진 도구로 쓰고 싶어하시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위해서 우리를 복 주시고 싶어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영혼에 큰복을 주어서 하나님을 아는 더 풍성한 지식 속에서 환희의 벅찬 삶을 살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의 가정이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정말 복 받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의 생업이 번창하여 경제적으로 정말 부유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시련 속에서도 여러분들이 시련보다 더 커다한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의 인생이 우연히 부딪히게 된 인생의 시련이나 여러분들을 해고지 하기 위해서 갑자기 나타난 어떤 한 두 사람의 출현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인생 전체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그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기 않습니다. 하나님이 철저히 막으시는 거예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그 말씀은 바로 에브라임과 이 유다를 하나님이 정말 축복해 주시고 싶은 그 바램이요 그 마음입니다. 주님의 이 마음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더 많이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되돌아 볼 틈이 없이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주셔서 예전에 하나님을 만난 감격보다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이 놀라운 감격 때문에 주님 자랑하고, 주님 사랑하고, 주님 섬기고, 주님 위해서 사는 도구 되게 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 자녀의 잘못된 일을 선의로 해석해 보려고 애를 쓰는 부모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우리를 축복해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에브라임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에 에브라임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철저히 세속적인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제 나무그늘 아래서 우상들을 섬기고 바알의 신전에서 바알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가득 찬 우상 숭배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때에 도말 해 버리려고 애 쓰셨던 그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신앙이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번성하고 하나님이 복 주시면 복 주실 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고, 제 갈 길로 갔습니다. 바알에게 가서 포도주를 바치고 금과 은을 바쳤는데 사실은 그것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을 향해서 ‘내가 어찌 할꼬, 내가 어떻게 할꼬, 내가 어떻게 하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나는 너희에게 복 주고 싶고, 나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고 싶은데 너희는 나로 하여금 그렇게 간절하게 너희를 축복하고 싶은 이 마음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구나’ 주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무엇인가 선한 것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들을 축복해 주시고 싶어하셨고, 죄를 과소하게 평가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 성실한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사랑을 크게 평가하고 싶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선지자는 말하기를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마음에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견고함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 했지만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애는 바로 히브리말로 ‘헤세드’인데 이 ‘헤세드’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것과 동시에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이스라엘도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부자는 아주 부자로 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못 사는 나라의 거지보다는 잘 사는 나라의 거지가 더 비참한 거 아십니까? 이 사람들이 그러한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물질주의가 팽배하게 되자 이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던 때에 가지고 있었던 동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아가페의 사랑이 사라지니까 이웃을 향한 자비심도 사라져 갔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피가 피를 잇대고 강포와 패역과 사기가 가득한 물질만능주의 적인 그런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도 없었고, 이웃을 향한 자비심이 하나도 없었느냐하면 그건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동물과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순간 순간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내가 이렇게 살다가 벌받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들에게 들지요?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 안하고 살다가 하나님이 손 좀 보시지 아마’ 그런 생각이 들지요? ‘내가 이렇게 은혜 생활 안 하면 결국은 내가 마귀한테 한번 되게 걸려서 넘어지지’ 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없습니다.
또 다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그리스도인은 젊은 시절에 얼마나 성공했는지 서른 다섯인가 되는 해에 이미 사십 여 평이 넘는 아파트에 결혼하고 나서 한 5년 됐을 것 아닙니까. 사십 평이 넘는 큰 아파트에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녔어요.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고 손을 흔드는데 멀리 내려다보면서 리모콘으로 찰칵하고 그랜저 3.0 시동을 걸면서 그랬대요. 거기 탁 앉아서 안전 벨트를 매면서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러면서 그렇게 부족한 것이 없고, 아내가 자기 사랑하고 아이들이 자기 좋아하고, 행복하고 돈 많고 사업 잘 되고, 몸도 건강하고 그런데 그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잘 나가다가 언제 한번 넘어지지’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떠난 번영과 형통함의 한계예요. 잘 나가도 불안하고, 뭐가 안 되도 조짐이 보인다구요. 그러니까 잘 되도 불안하고, 잘 되지 않아도 불안 한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있다 이 얘기지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의 양심이 그런 것들을 증거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면 번영가운데 염려할 것 없이 걸어가는 데도 순간 순간 그런 것이 다가와요, ‘이러다가는 큰일 나지’ 하는 마음이 다가와요. 이게 뭐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 시점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지막지하던 사람들이 가끔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커다란 재앙을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실 때에 ‘나도 이렇게 살다가는 저렇게 되지’ 하는 그런 두려움이 확확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뭐냐하면 확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 이예요. 누구에게나 있다 이 얘기예요. 그리고 내가 무엇인가 형통하고 잘되고 그럴 때에 곤고하고 어려운 지체들을 보면서 ‘도와주고 싶다’라고 하는 마음, ‘저런 지체들은 정말 불쌍하다’ 이런 마음이 들 수 있다 이거지요. 그게 하나도 없을 수 없다 이 얘기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될 것은 바로 그런 대목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내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지 하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에 기도가 될 때도 있다 이거지요. 말씀이 귀에 잘 안 들어 올 때가 있지만 그러나 어떤 때에는 정신차리고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따듯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거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가끔 생겨난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신앙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거예요. 이따금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내 마음속에서 나오고, 말씀의 어떤 감동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고, 주님이 그래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 것 같은 그런 따듯한 감촉이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러한 상태를 가지고 ‘내 신앙은 그래도 건강하고 깨어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건 매우 오산 중에 커다란 오산이거지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게 있었다 이거예요. 그걸 가리켜서 바로 뭐라 그랬냐 하면 아침구름과 같은 인애, 아침구름과 같은 기도, 아침구름과 같은 은혜, 이슬과 같은 기쁨.
호세아서를 보면은 아침구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도대체 아침구름이 뭔가, 봐야지 설교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던 중에 진짜 아침 구름을 봤어요. 언젠가 집회 장소에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것이 안개가 아닙니다. 안개는 깔릴 때 벌써 달라요. 안개는 두터우면 모두 두텁고, 얇으면 모두 얇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구름입니다. 아주 낮게 깔려요. 그런데 아주 있는 그곳에는 아주 두터워요. 그 주위에는 없어요. 그런 구름이 기다랗게 서립니다. 그리고 그 구름과 아궁이에서 때는 굴뚝으로 나오는 나무 때는 연기 같은 것들이 만납니다. 그렇게 구름이 생겨요. 참 신기해요. 하늘의 떠 있는 구름은 말이죠. 구름 위에서 해가 그렇게 쨍쨍 내리 쬡니다. 그런데 좀처럼 사라지지를 않아요. 그래서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구름이 가득 있는 상황은 언제든지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침 구름은 달라요. 해가 떠오르기 전, 떠오르자마자 그 때에는 주위의 공기가 차가울 때는 아주 생생하게 띠를 그리면서 떠돌아다녀요. 그러나 해가 점점점점 떠올라서 아침을 먹을 때쯤에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속히 사라집니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풀 섶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걸어가면 백 미터도 못 가서 신발이 모두 흠뻑 젖습니다. 왜, 이슬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세 시간만 참았다가 걸으면은 보송보송한 풀밭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선지자가 말하는 아침구름과 같은 인애요, 이슬과 같은 인애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깨닫게 되었잖아요. 가끔 하나님 앞에 기도가 되는데 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실까, 가끔 내가 진실한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왜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믿음의 변화를 안 주실까, 순간 어떤 때는 내 마음속에 ‘맞어 내가 주님의 이 큰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버리고 살까’ 이런 생각을 내가 하는데 왜 하나님이 내 사랑을 몰라 주실까, 어떤 때 순간 순간 ‘맞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뿐이지 정말 주님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비극적인 일일 수밖에 없을 거야, 주님, 사랑하고 싶어요’ 하는 진실한 고백이 이따금씩 있는데 왜, 하나님이 내 진심을 몰라주시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해요. 그게 이따금 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침구름과 같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믿음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가끔 느끼는 것으로서 자기가 깨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가 은혜의 세계를 가끔 맛본다는 것 때문에 내가 그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있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맛이 어떤지를 가끔 맛보고, 가끔 그 은혜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우리들이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나마 완전히 하나님을 등지고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간간이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찔금 찔금 눈물을 흘리고, 내일은 다시 건조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그 다음 주일에는 지난주에 왜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고 교회에 나오는 그런 생활을 해 나갈 때에, 가끔 와 닿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가끔 목이 메이도록 가슴속에서 미어져 나오는 가끔의 그 기도가 여러분들의 인생을 가꾸어 놓았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과 같이 메마른 시대에는 그러한 것조차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보아도 사랑의 고백이 없고, 너무나 오랫동안 주님을 만나 뵙지 못하고 살아가도 그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불쌍한 영혼을 보아도 가슴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사람들과 왜 우리가 비교되어야 합니까? 주님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 철저한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하나님을 떠나 헤매고 있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도 아침구름과 같은 은혜, 그리고 풀 섶을 지나는 발을 적실 수 있는 아침 이슬과 같은 인애를 발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정말 무엇인가 복 주고 축복하고 싶은데, ‘애들아 불행히도 너희의 믿음이,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아서는 내가 너희를 이렇게 축복해 주고 싶지만 줄 수가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마음의 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을 줄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해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마치 그 황홀한 은혜의 동산에서 감격하며 뛰노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렇게 천사와 같이 주님을 찬송하던 사람들이 일년이 지난 뒤에 보이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아픈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한순간, 한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고, 그 크신 사랑에 가슴 저며하면서 나 같은 죄인 위해서 피 흘리고, 죽으시고 가치 없는 이 죄인을 위해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지만은 그러나 정말 불꽃과 같이 그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주님의 영광을 들러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나 소수인가’
그래서 얼마 전에 동역자 한 분을 만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여보, 아무개 목사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대충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한번 잘 살기 위해서는 인생이 너무 길어’ 왜,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쉽게 요동치니까’ 내가 해놓고도 말이 참 멋있더라구요. 자기를 즐겁게 하면서 막살기에는 너무 짧아, 그런데 하나님만 사랑하고 정말 진실하게 주님께 바쳐진 인생은 그렇게 정말 가슴 저미는 슬픔과 아픔으로 주님만을 위해서 순결하게 살다가 가기에는 너무 인생이 길어요. 그 상태가 안 생기는 아닌데, 가끔 생기는데 그거를 앞으로 40년, 30년 이렇게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이 안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해 놓고도 몇 번 내가 스스로 되뇌었어요. ‘막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주님만을 위해서 순결하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길구나!’ 이거는 70년이나 80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제 인생의 남은 날을 두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게 어렵다면 여기 젊은 형제, 자매들에게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있으되 아침구름과 같은 믿음에는 축복하실 수가 없었어요. 오늘 주님을 향한 눈물이 있고, 내일은 왜 울었는지를 잊어버리는 그러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축복해 주실 수가 없었어요. 오늘 주님을 향한 감격이 있고, 주님을 향해서 살고 싶은 목이 메이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진실이었지만 한 날도 지나지 못해서 그 마음을 모두 잃어버린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실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어요. ‘내가 너희를 어찌하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찌하랴, 애들아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구속해 내고, 광야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이 가나안에 모든 족속들을 좇아내고 이 땅을 누리며 살도록 너희를 인도하고, 너희와 친히 함께 싸운 나 여호와다 내가 너희를 축복하고 싶다. 애들아 내가 너희를 복 주고 싶다. 그런데 너희들이 가끔은 나를 사랑하고 가끔은 나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해가 떠오르면 모두 사라지는 아침 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으니 애들아, 나의 이 마음을 어찌하랴’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 피로 우리를 사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돌이켜 당신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당신의 사랑 안에서 언제나 거하며, 품안에 있는 자식처럼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른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에게 축복해 주고 싶어하는 그 간절한 하나님의 마음을 비웃듯이 가끔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지만 곧 잃어버리고, 곧 그 은혜에서 멀어져 가는 아침구름과 같이 정함이 없고, 이슬과 같이 견고함이 없이 덧없이 사라지는 우리들의 믿음 생활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우리는 이런 신앙생활을 신앙생활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견고함이 없고, 마음에 정함이 없이 흔들리는 아침구름과 같은 신앙생활은 단지 연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연약해지면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납니다. 이건 연약함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믿음 생활이 만약에 이렇다면 이번 기간에 여러분들은 확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따금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런 감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느낌,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이따금 느끼는 성령께서 너무나 슬퍼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가끔 기도하게 하시는 그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얘기예요. ‘이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끔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도를 느끼는 것 가지고는 하나님과 내 관계가 새로워질 수가 없고, 내가 안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숙제들도 하나님 앞에 해결 받을 길이 없다.’ 이렇게 단언해야 됩니다. 아침 구름과 같은 인애도 인애입니까? 이슬과 같은 믿음도 믿음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기도의 은혜도 그게 정말 기도의 영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런 아침구름과 같은 인애 밖에는 가질 수 없었을까요. 왜,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슬과 같았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침이슬, 아침구름 해만 떠 올라주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슬이 맺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는 떠오릅니다. 그 해가 찬란한 빛을 발할 때에 모두 그 열기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견고한 사랑과, 뿌리깊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신뢰, 거기서 흔들이지 않고 살지를 못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합니다. 우상 때문이었습니다.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자기의 나라를 지켜주시리라고 믿는 믿음보다는 우상이 자신들을 더 안전하게 지켜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들을 혼내고, 야단만 치시는 분이고, 우상은 자기들에게 풍년을 가져다주고,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은 인생을 사는 낡은 사고방식이고, 우상을 의지하며 사는 것은 최신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생각이 정말 이치에 맞습니까? 말도 되지 않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을 우리가 똑같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의 감동이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하고, 아침구름과 같이 잠시 있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은혜가 적어서 입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많은 지체들의 경우에는 은혜가 적어서 였다기 보다는 마음이 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고 인생의 비참한 위기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여러분들을 건져 놓으셨는지를 경험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는 앞으로도 내 인생을 건지고, 지키실 분이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믿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더 입증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인생의 절망의 구덩이 속에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몸부림쳐 봤지만은 그러나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살려고 몸부림 쳤지만 살수 없었고, 어둠의 그늘, 죄악의 그늘 아래서 고통을 받으며, 쇠사슬을 묶인 것 같은 그런 구속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우는 울부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이 아니었습니다. 비참한 자기 탄식이었고, 절망의 몸부림에서 나오는 통곡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무엇에서 울던지 간에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하는 것을 참아 보실 수가 없어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고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을 향한 그 사랑을 더 보여주실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구나, 주님이 나 같은 인간도 어둠 속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돌아보시는 구나!’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하나님께 감격했습니다. 은혜가 모자라서 입니까? 아닙니다. 여기 나와서 견고하게 주님을 붙들며 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견고하게 살지 못한 모든 사람보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은혜 받았어도 은혜보다 더 큰 반역과 불순종이 그를 사로잡았던 사람들은 믿음의 길에서 미끄러졌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미끄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건져 주시고 구해주셨는데 그 이후의 삶이 어땠습니까? 정말 그 감격을 유지하며 살았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은 많은 핑계를 댈 것입니다. 그러나 간단합니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제 노래가 여러분들의 정곡을 찌르지 않았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은 많은 말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가슴아픈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여러분과 같이 부둥켜안고, 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아닙니다.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비할 데 없는 은혜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은 이제껏 까지 변함없이 신실하셔서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는 나를 보면서 ‘내가 너를 어찌하랴, 나는 네게 복 주고 싶은데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렇게 안타깝게 부르짖으시는 그 하나님은 신실하셨는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성실한 기도생활을 잃어버렸다고 시인해야 합니다. 그때에 어린아이처럼 간절한 목마름으로 사모하던 말씀, 눈도 뜨지 못한 어린아이가 커다란 엄마의 젖가슴을 더듬으며 젖꼭지를 무는 것 같은 그러한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말씀에 대한 그리움들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입니다.
한때에 주님을 향한 그 큰 구원과 은혜를 경험하고 여러분들에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주님과 결혼했습니다. 하나님,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내 편이시고,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십니다’ 그렇게 고백한 것, 거짓말 아니었습니다. 정말 이었습니다.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악에 여러분들을 삼키고, 그 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도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이었습니다. 결과론 적으로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아침구름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슬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향해 축복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그 목메는 마음, ‘내 백성이 잘 되는 것을 보리라, 내 백성이 내게 축복 받는 것을 보리라’고 꿈꾸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안겨드린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주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신앙생활을 떠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전에는 바람이 몰아치는 그러한 시련의 인생이었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인생이었다고 하더라도, 태풍가운데를 지나는 인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바람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이 폭풍가운데서는 건질 수 없으십니까? 시련을 당할 때는 우리를 붙드실 수 있었지만 격렬한 시련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결국 우리를 버려 두실 수밖에 없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가슴 아픈 사연도 있고, 일대기를 쓰고도 남을 애절한 사연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미끄러지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질 때 그게 어떻게 이유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한번 하나님 없이 살아보는 것이 어떤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 좋은 하나님의 은혜를 팽개치고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마다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정도의 강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겁니다. 그 어려운 여러분들이 가슴 안팎의 털어놓는 그 외롭고, 고통스럽고, 가슴 저미는 사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처음 붙들었던 그 하나님 변함없이 붙들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었다면 왜, 우리의 믿음이 아침구름과 같았겠으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왜, 이슬과 같았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점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가끔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심적으로 오거나, 환경적으로 올 때마다 저는 눈물을 삼키면서 그런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 이거보다도 더 큰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거기서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거기서도 당신의 자비를 보이셨는데, 하나님, 힘들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 견딜 수 있습니다. 이거보다도 더 캄캄한 속에서 더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그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주님, 살아남았는데 견딜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굳게 서서 모진 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의 역사를 간직한 바닷가에 서 있는 늙은 노송을 기억해 보십시오. 해변의 역사를 모두 알고있고, 세월의 흐름을 모두 알고 있는 그 묵묵한 소나무를 기억해 보십시오. 바람소리 요란해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그런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저희 선배되는 ‘이선 김광섭’ 시인은 그의 시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혹은 울기도 하려니와 혹은 웃기도 하려니와 그러나 젊은 새의 꿈은 항상 나르는데 있나니’ 하늘을 나르다 보면은 땅에서 쏘는 포수의 산탄의 위협을 받을 때도 있고, 더 높은 하늘에서 머리를 쪼기 위해서 날라오는 솔개나 매의 위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새들의 꿈은 나르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말 어려움을 만나고,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시련 속에서 넘어지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붙들며 사는 이 신앙생활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을 믿기보다는 세상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세상을 의지하는 방법이 훨씬 손쉬운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된 생각들이 우리를 이런 실패로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로운 각오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정말 저희들에게 견고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따금 우리를 스쳐 가는 그런 사랑, 그런 은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서 결국은 주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싶어하시는 그 간절한 축복, 그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이 부어 주셔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름진 백성들 되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2. 견고함이 없는 이스라엘을 고치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호6:5)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 그 인애가 아침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았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아픔과 고통을 드렸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하랴 유다야 내가 어떻게 하랴’ 주님께서는 무엇인가 그들 속에서 선한 것을 발견하시고, 그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났고, 주님께로부터 더 멀어져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점점 더 하나님의 참다운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뒤로 물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그리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 은혜 하나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박약했기 때문에 너무나 박약하고, 너무나 가벼웠기 때문에 조그만 어려움에도 혹은 세상 사랑에 쉽게 사라져 버리는 그러한 형편과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 아침구름과 같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사람, 그런 인애 밖에 가지지 않는 그런 이스라엘의 영혼들의 상태를 깊이 아파하시고,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시려고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독차지하시기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충성과 온전한 헌신을 하나님 앞에 다 바치기까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 위한 당신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아침구름과 같이 사라지는 인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그런 인애 밖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러한 사람들을 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고치고 그것들을 만지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시고, 아침 구름과 같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그 박약한 인애를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을 가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놔두실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게 건져낸 내 백성들인데!, 어떻게 건져낸 내 자녀들인데! 그들은 나를 사랑함으로서만 행복해 질 수 있는 자녀들인데!’ 그 본분을 버리고 당신께로부터 멀어지는 자녀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니 찢어지시는 아픔이겠습니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셔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정말 죽은 자와 같이 살고, 주님을 향한 모든 경외와 사랑이 모두 바닥이 나고, 인생을 더 살 힘이 없을 때 여러분들에게는 누군가 말씀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목사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친구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고, 교회의 지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그때에 여러분들의 모습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심으로 여러분들이 가던 길을 돌이키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두 견고함이 없고, 뜨내기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관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선지자를 보내어’라고 말씀하시지를 않고, ‘선지자들을 보내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커다란 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말씀의 종들을 통해 내게 견고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촉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호세아 선지자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과 유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침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이 쉬 사라지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당신의 종들을 세워서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목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목회자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의견일치를 보여주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견해나, 신앙에 대한 생각에 뒷북쳐주는 목회자를 구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그에게 담보 잡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여러분들은 원하십니까? 그리고 그의 가장 본질적인 직무는 무엇입니까? 그의 직무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설교를 들으면서 저 사람이 내 생각과 똑같다는 걸 확인 시켜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견고하지 않는 여러분들을 어찌하든지 아침구름과 같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이 그렇게 덧없고, 견고함이 없는 여러분들을 견고하게 붙들고 세워주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교회를 여러분들의 심적인 위안을 위해서 다니는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세웠고,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러분들을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여러분도 저를 만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므로 설교자의 소명은 잠시 있다 사라질 구름이나 이슬과 같이 덧없는 신앙을 가지고서도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고 그렇게 견고함이 없이 하나님을 뜨내기로 사랑하며 살아가면서도 마치 자기가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허황된 생각을 부숴 버리고, 하나님 앞에 그들이 얼마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인지를 보여주어서, 견고하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돌아서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보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깨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영광은 늘어나는 사례금이나 호사스런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데도 그의 참다운 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꿈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침구름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슬처럼 곧 말라 없어지는 그런 박약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견고하지 않는 그 백성들이 자기를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믿음과 삶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종들이요, 또 이 선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호세아는 개인적으로 살을 에이는 것 같은 불행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음란하기로 소문난 고멜과 결혼하도록 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음탕한 여인을 데리고 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무엇인고 하니 호세아의 가정 생활까지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한 도구에 불과 했습니다.
그도 저와 같이 평범한 한 남성에 불과 했을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경건하고 거룩한 여인을 만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 행복한 삶을 가꾸고 경건한 자녀들을 기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가정을 원했을 것이고, 누구나에게 칭찬 받는 자녀들을 갖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되 그 소박한 꿈까지 모두 주님께 빼앗겼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 평범한 소원마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가정까지도 결국은 그 음란한 여인을 찾아오고, 밖에서 외간 남자와 간통하고 나온 자식들을 찾아오는 그 눈물겨운 과정을 통해서, 범죄하고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특수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의 신에 사로 잡혀서 자기의 행복을 모두 마다하고, 인생 전체를 불행과 고통과 손가락질 속에 살면서, 그가 염원했던 바는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사용해서라도 견고함이 없이 정처없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생애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설교 한편을 염통을 터뜨려서 피로 쓰고 죽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가 이렇게 불행한 삶을 살면서 주님의 음성을 대변해야 했습니까? 주님이 그 음성을 그에게 위탁하셔서 그 시대를 향해 들려 주셔도 도무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 비운의 선지자를 통해서 당신의 음성을 전해주시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왜, 그 일을 하셨을 까요?
호세아는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니까 하나님이 그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1장 2절과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과 여호와의 신이 그의 내면의 세계를 파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히브리 본문에 나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그런 특별한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 시대를 두루 살피시다가 한 사람, 호세아를 만나서 ‘애야, 내가 내 백성들에게 음성을 들려주고자 하되 아무도 듣는 자가 없구나, 네가 내 나팔이 되어 내 눈물과 내 아픔과 내 백성을 향한 나의 이 불붙는 사랑을 전해줄 수 없겠니?’ 하고 호세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여 저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구약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 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종들에게는 감추고 행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특별한 사랑을 호세아가 받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처절하게 짓밟히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호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갔을 때에 이 백성들이 가슴을 찢으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쏟아지는 눈물로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들이 거절했습니다. 피로 쓰는 것 같이 그렇게 찢어지는 마음을 안고, 외간 남자를 찾아 떠난 고멜을 찾아가서 제물을 주고 바꿔오는 그 과정, 거기서 나온 자기의 자녀가 아닌 자녀들을 끌어안고 돌아오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고멜이 바로 이스라엘 자기 자신들이었건만 그들은 오히려 호세아 선지자의 그러한 삶의 모습을 조롱하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름과 같이 정처없는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찌하든지 돌이켜서 뿌리내린 견고한 나무와 같이 세워주는 것이 이 선지자의 최고의 임무였습니다. 그 마음과 그 타는 가슴을 가지고 호세아는 이 예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마음에 정함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도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 같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마음이 이처럼 안타까우셔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셨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여러분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더 많은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정처없는 신앙을 가진 견고함을 잃어버린 여러분들에게 당신의 슬픈 마음을 보이시겠습니까. 지금 들립니까? 많은 은혜를 받고도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서 다시 유리 방황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찢어지는 아픔이 여러분들에게 느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 안 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아끼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열어 신령하고 거룩한 것들로 여러분들에게 주시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셨습니까?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마음에 정함이 없이 이따금 가슴이 따듯해 오는 정도의 믿음, 그걸 가지고 대단한 것처럼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아침에 있다 저녁때 사라지고, 지난주 있다 이번 주에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인애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이것으로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을 얼마나 슬퍼하시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완전한 사람은 어디 있어? 뭐, 열심히 하다가 안되면 할 수 없는 거지!’ 그런 사람들이 미끄러져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진 사람들이 동창회 할 때 하는 이야기가 그 얘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뒤로 물러서고 정처없는 신앙을 가진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슬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말씀하는 종들을 통해서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싫든지 좋던지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도 원하지 않지만 쉽게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 견고한 신앙을 갖고 싶은 데도 늘 아침 구름과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거목과 같은 신앙을 꿈꾸지만 자고 일어나서 보면 언제나 갈대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으면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뒤로 물러가기 전까지 수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뭔가 은혜가 있을 때에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저런 이야기는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이미 뒤로 물러가 버린 후에는 자신이 뒤로 물러간 사람으로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핑계 대며 합리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사람 때문에 뭐가 어때서, 일이 잘 안 풀려서, 사업의 어려움이 생겨서, 가정에 불화가 있어서’ 핑계를 댔습니다. 하나님이 웃고 계십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네 마음이 내게서 떠나는 일이 먼저 있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주신 은혜는 불꽃같았지만 그러나 그 불로 더 큰 용광로의 불을 지펴 여러분 자신을 그 은혜의 불로 변화시키고, 여러분들의 삶의 상황을 바꾸고, 여러분과 관계된 사람들을 바꾸는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의 불로 여러분들은 불장난하다 그 모든 불들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바로 아침구름과 같은 신앙이었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신앙이었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큰 은혜와 그 은혜에 바르게 반응하는 진실한 신앙이 없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이미 주신 그 은혜를 잃어버린 것만 해도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거기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호세아와 같이 정말 복 주시고 싶어하는 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시면서라도 정처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바로잡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호세아와 같은 사람을 얼마나 복 주시고 싶어하셨겠습니까? 가정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주님이 이런 명령을 내리실 리가 없지만은 만약에 내린다면 나는 순종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아마 순종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이 사람을 복 주고 싶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으로 짓밟힌 인생을 살게 만드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기의 목소리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려주셔서 그래도 어떻게 고칠 수 있는 길이 없을까를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러분들의 목회자가 여러분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온데 간데 없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회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든지 아니면 우월한 생각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꿈꾸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매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인생과 이 교회의 미래를, 적어도 여러분들의 인생과 여러분들의 교회를 향한 미래와 현재는 여기를 통해서 조명하십니다. 여기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인생 개개인의 삶을 경고하시고, 물러간 자들에게는 돌아올 길을 보이시고, 돌아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경고를 보내십니다. 돌아온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비전들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실치 않음과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대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안하무인격으로 짓밟고 하찮게 생각하고, 발로 차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운 성품, 신실하신 성품을 따라서 그들을 특별히 선택하신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돌이키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겁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쉽게 뒤로 물러가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어느 날 깊이 참회하고,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회개할 때 그리고 다시 한번 여러분 그 동안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지난날의 이 강단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놓친 말씀들을 추적해 간다고 할 것 같으면, 정말 하나님이 정확하게 시기시기 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지적하셔서, 어떻게 흔들리는 신앙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을지, 뒤로 물러가는 자들이 어떻게 물러가지 않으려고 싸우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기가 막히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후일에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아침구름과 같은 신앙을 갖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신앙을 갖게된 이때에 어떻게 여러분들이 살아왔는지 한번 스스로 반성을 해 보십시오. 어떻게 살아 왔는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주고 계신 메시지를 향해서 어떤 식으로 반응하며 살아왔는지 한번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슴에 손을 놓고 한번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둠 속에서 여러분들을 돌이키실 때, 주님이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실 때, 어린아이처럼 두려워 떨며 그 말씀 속에서 마치 만나를 처음 발견하고 환호성 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왔습니까? 귀만 자라지 않았습니까? 어느덧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설교를 들으면서도 도저히 여러분들 자신은 그 적용에서 제외시키고,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은 목사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답안을 맞추는 태도로 설교를 들어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무수한 말씀, 이전에 여러분들이 그랬듯이 지금은 또 다른 영혼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그 말씀이 여러분들로부터 멀리 멀리 사라졌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은 여러분들의 교만한 마음과 부유한 심령, 갈라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서 출발하였지만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르지 못하고, 허공 중에 흩어졌습니다.
이 죄가 작은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 합리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눈에 보이는 피묻은 죄를 남겨두고도 여러분들은 여전히 환경타령, 무슨 타령, 무슨 여러 가지 이유, 핑계, 이런 걸로 하나님 앞에 일관하는 태도를 보이실 작정입니까? 그렇게 되었을 때 그 구차한 변명을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옛날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말씀이 여러분들의 심령을 녹이고, 그 말씀을 통하여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때 형편은 지금보다 훨씬 나았습니까? 좋았던 형편이 열심히 정신팔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이에 더 나빠졌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신앙 접어두고 다시 상황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한번 고쳐보겠다고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한번 작심해 보신 것입니까? 그러고도 여러분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돌이키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광야에서 죽은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 중에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홍해도 건넜습니다. 애굽이 피바다가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장자가 죽는 것도 보았습니다. 봤으면 뭐 합니까? 이름 없이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다 죽어갔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려고 기독교에 귀의했으나 뭔가 뜻대로 되지 않자, 무신론자처럼 살다가 교회에서 죽었다’ 이게 여러분들의 묘비에 쓰여질 비명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고도 여러분들이 마음의 평강과 영혼의 위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나는 압니다. 다함이 없는 은혜를 주셨지만 거기로부터 미끄러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은 ‘사랑하는 내 백성들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들아, 나는 너희에게 복 주고 싶은데 너희는 언제까지나 아침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을 수밖에 없더냐’ 주님이 너무너무 슬퍼하십니다. 하늘을 열고 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 여러분처럼 사랑하신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처럼 복 받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리에 양아치처럼 몰려다니던 인생들을 하나님이 한사람씩, 한사람씩 주어 모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만나지 못했으면 약 먹고 이 세상 떠났을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주님이 빛으로 나타나셔서 건져주셨을 때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뛰놀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호언장담했습니다. 내 인생의 불행은 끝났고, 어두움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런 사랑을 입고도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향한 인애는 정처 없는 인애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시며, 주님의 이 마음을 안다면 여러분들은 가던 길을 돌이키지 아니하고는 베길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어젯밤에도 교회에 있는 몇몇 지체들이 어둠 속에서 찢어지도록 고통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세 명의 지체였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상태를 내 마음에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큰 은혜를 부으시고 그랬는데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지 못하고 정처 없는 주의적인 신앙으로 변했을 때 쓸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너무나 비싸게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아들을 보셔서라도 그러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고치셔서 축복해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 선지자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의 행복도 없고, 즐거움도 버리고, 가정의 평안함도 모두 버리고, 인생 전체를 송두리채 주님을 위해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마음 보여주다가 죽는 도구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인생의 막판까지 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교회를 세우셨을 때 소망이 없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어야 할 사람을 소명 주어서, 목회자로 삼으셔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하실 때 하나님이 그 교회를 향해서 거신 기대가 어떤 기대였을 까요? 하나님이 거신 기대는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그분은 우리가 그분 앞에 살아서 기쁘시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앞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기뻐하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어하셨는데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 견고하게 서서 붙들고 살지 못하고, 아침구름과 같은 신앙이 되어버리고 난 후에 하나님 향한 그런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그런 힘없는 나그네와 같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담대하게 세상으로 돌아가자니 은혜가 받은 과거가 두렵고, 주님의 은혜 아래서 살자니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햇빛과 같은 세상 사랑에 발목 잡혀 있는 그 마음,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사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하면서 쉬운 길을 택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지금 또 다시 아침 구름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의 길을 잊어버렸습니다. 최선의 길은 주님이 주신 은혜를 간직하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매일 매일 견고하게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최선의 길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차선의 길이라도 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침구름과 같은 신앙을 청산하고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이제는 다시 한번 지난날을 참회하고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들으면서 자신을 돌이키기로 굳게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두 가지를 적고 있습니다.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고 저희를 죽였나니’ 여기서 ‘치고’라는 히브리 단어는 죽도록 두들겨 패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정말 선지자들이 그랬습니까? 정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도록 두들겨 패고 그리고 그들을 죽였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칼든 호위병을 선지자들이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읽어 본적이 없습니다. 왕 앞에 설 때에도 혈혈 단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무장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큰 칼 옆에 차고 설교했습니까? 엘리사가 창 들고 설교했습니까? 예레미야가 방망이들고 예언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가장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일할 수 있는 도구는 여기 있었습니다. 여기 다 있었습니다. 입을 열면 그들이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시대를 향해 위탁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언제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쳤고, 언제 호세아가 유다를 죽였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친 사람들이 아니라 맞은 사람들이었으며, 죽인 사람들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할 수 없었습니다. 듣지 않고 돌아가면 좋을 텐데, 때로 그들은 폭도로 돌변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톱으로 켬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기도 하였습니다. 때리면 맞고, 안주면 굶고, 투옥시키면 옥에 갇히고, 찌르면 찔림을 받아야 됐고, 죽이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호세아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뭘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사용해서 내가 저들을 쳤다 그리고 저들을 죽였다’ 왜 그럴까요. 이거는 선지자들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리라고 하는 예고를 보내시면 하나님이 그 예언을 따라서 그대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거예요.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할 것까지도 예언을 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는 거예요. 그거는 선지자의 장단에 하나님이 춤추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서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경고를 보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선지자가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경고했을 때에 그 경고가 가슴에 다가왔겠습니까? 여러분, ‘누군가가 당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그러면 겁내 하지만 ‘이북이 총을 겨누고 있다’ 그러면 아무도 겁내 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안 죽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예언을 말씀할 호세아에게 주셨을 때 이거는 공동체적으로 다루는 하나님의 말씀이셨어요. 민족적인 말씀이셨어요. 물론 개인을 향한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니였습니다마는 그러나 왕족이나 국가의 지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어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사람으로 보고 그리고 예언을 하시는 거예요. 완악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것을 겁내 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많은 것들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슬픔도 아파하는 마음도 보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놀랍게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회개했고,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났기 때문에 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여러분, 지난 여러 달 동안 계속 되어온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 속에 있는 죄를 다루시는 일에 열심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하게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의 그 충만한 생명과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을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고, 돌아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를 보이십니다.
이 사람이 사랑의 선지자였습니다. 불붙는 마음으로 사랑을 예언하던 그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 입에서 오늘 이 하나님의 치고 죽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과 같은 시대에 목회자들은 우리에게 신앙을 달라고 말합니다. 정말 제가 신앙이 그렇게도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움이 됩니까? 가져가십시오. 많이 가져가십시오. 그거를 해서 뭐하겠습니까? 오늘 아침도 방송을 들으니까, 누구인지는 모르는데 설교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렇게 고통스러운 때에는 잘 될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러면 잘 됩니다’ 그게 복음입니까? 그런 설교를, 피를 토하듯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수많은 군중들이 ‘아멘’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뭘 하는 겁니까? 그렇게 이 설교자 개인이 주는 위로가 그렇게 여러분들에 영향을 많이 끼칩니까?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그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호세아를 보십시오. 형통하던 때였습니다. 번영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정상들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무역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흐느끼고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세아’ 그러면은 ‘그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선지자, 그 자식’ 그랬을 것입니다. ‘눈치도 없는 그 자식’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낯선 정신병자와 같은 타락한 아내를 찾아다니고 눈물을 흘리며, 뛰어 다니는 그 정신병자와 같은 선지자의 행동, 태평한 태평성대의 왕국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찢어지는 가슴으로 위기를 외치던,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허공에 흩어지던 그 가냘픈 음성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리고 영원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일을 그대로 성취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침 구름과 같고 잠시 있다 사라질 이슬과 같은 정함이 없는 그러한 떠돌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채로 계속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내가 이렇게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 그래, 평화가 없겠지! 내 마음에 평안이 없겠지! 옛날에 하나님 앞에 많은 사랑을 받을 때에 내게 느꼈던 충만한 사랑과 행복, 이런 것이 없겠지! 그런데 죄를 버린다고 그런 것이 돌아올까!
그런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좋기야 하지만 없으면 없는데로 살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는 방법을 보십시요. 주님이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그런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데 아침구름과 같은 신앙의 상태에 있어서 그 견고함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서 그들을 다시 북돋고 새롭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셔요. 그런데 끝까지 그들이 그런 상태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행동을 개시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고, 주님께 큰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서지 못하고 매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구름처럼 떠도는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계속 그런 식으로 살면 하나님이 징벌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사랑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지금 많습니다. 가슴에 밀려오는 뜨거운 은혜도 잃어버렸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정확한 판단도 잃어버렸고, 고통하는 영혼들을 끌어안고 갈 수 있는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추억은 있지만은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추억으로 끝나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이전에 많이 받은 것이 지금 내 인생을 사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그렇게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조금 잃어버린 겁니다. 그것으로서 정처없는 신앙생활 하는 것을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동개시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직장을 다니다가 쫓겨나서 작은 직장으로 옮기셨다면 그것마저 거덜내실 겁니다.
사업을 하다 여러분들이 사업을 줄였다면 그것마저 깨뜨려버리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몸이 아팠는데 치료를 받아서 어느 정도 회복됐다면 다시 악화되게 만드실 것입니다. 가족간에 깨뜨려진 관계가 있었는데 그래도 예수 믿고 어느 정도 뭉쳐졌다면 여러분들이 이 신앙에서 떠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결국은 박살을 내 버리시고 말 것입니다. 풀자면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주의해야 될 점이 있다 이 얘기예요. 하나님이 마치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애걸하는 분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 없이 못살지, 하나님이 여러분 없이 못 살지 않아요. 뭐냐 된 것 같이 교만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얘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회복되지 않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참된 돌아감이 아이예요. 두려워해야 되요. ‘내가 이 정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는데도 내가 이전에 누리던 좋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렸는데 내가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간다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실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이거예요.
주님은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더 철저한 삶과 더 많은 헌신, 보다 더 견고한 삶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러한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고통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은 마음의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 그 큰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 앞에 정착하지 않는 뜬구름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선지자들의 권고까지 무시해 버린 다음에 받게될 준엄한 심판이 찬란한 빛과 같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도시에 어느 한 빌딩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 불꽃은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치솟을 것이며, 도시 전역에서 어느 빌딩에 불이 붙었는지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아직 완전히 미끄러지지 않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뒤로 물러가서 살 때에 결국은 인생이 저렇게 망가지는 구나!’ 그거라도 교훈을 하고 사라져 가야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기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신앙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길을 걸어가다가 주님이 심판하심으로 발하는 빛과 같이 진노하시는 주님이 어떤 주님인지를 보여주고, 사라져 가는 신자의 삶이 있고, 또 하나는 이제껏 걸어온 길이 잘 못 되었고, ‘내가 너희에게 어찌하랴’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복 주고 싶어하시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게 주신 이전의 은혜에 그 크고 놀라움과 그렇게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견고함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깊이 참회하고 여러분들에게 들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밝은 빛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축복하심으로 그들을 빛과 같이 찬란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보면은 정말 그리스도가 아니였으면 인생 막판까지 갔을 사람들, 아니 막판까지 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축복을 받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우리도 보잖아요. 내가 가끔 그럽니다. ‘야, 너희들은 예수 믿고 복 터졌다. 예수님 몰랐으면 지금쯤 죄 짓고 어둠 속에서 울거나 세상 원망하고, 그리고 살았을 텐데 주님 만나서 그 불행이 오히려 거룩해 지는 기회로 바뀌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로 바뀌고, 주님 앞에서 깨뜨려 지는 기회로 바뀌었으니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이냐!’ 본 사람들마다 ‘이들은 정말 복 받았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밝은 빛처럼 드러나요.
어떤 인생을 사시렵니까? 어떤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까? 방황하고, 갈등하고, 시련을 당하고, 괴로워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을 견고하게 붙들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결단을 미룰 수 없습니다. 말씀하실 만큼 말씀하셨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밝은 빛으로 소문난 사람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 삶으로 답변해야 될 차례입니다.
3. 제사보다 나은 인애(仁愛)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上)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를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과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그 교만함이 정말 극에 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시면서 아침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은 그들의 신앙을 고쳐보고자 애 쓰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견고하지를 않고 언젠가는 뜨거운 거 같다가 또 속히 식어지고, 주님께로 향하는 것 같다가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뜻을 세운 것 같다가는 뜻을 버리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보시기에는 놀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 진실하게 우리를 대해 주시는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이 있으면 그 은총에 대해서 반응하는 믿음이 합치할 때 그때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우리를 창조할 때, 구속할 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그런 관계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런 견고함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그 말씀으로 돌아오게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을 혹은 공동체를 하나님이 심판하기시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집에서 비취는 불빛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고, 그리고 이 등경 위에 있는 호롱불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러움과 또 자신도 동일하게 되고 싶은 사모함으로 우리를 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기와 미움으로 우리를 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내가 너희에게 어찌하랴’ 하시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큰 축복을 받아서 밝게 빛나는 존재가 되든지,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있는 그 큰 축복을 사모하게 되든지 아니면 주님을 바로 믿지 못하다가 커다란 낭패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으로 사람들 앞에 ‘야,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하는 마음을 심어주든지 둘 중에 하나 어느 쪽으로든지 사람들에게 분명한 증거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우리가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선지자는 드디어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비유적으로 말하고, 그리고 돌려서 말을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이제 선지자는 아주 조금도 감추인 것이 없는 적나라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호세아서에서 지금 우리가 읽은 이 구절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없다고 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이예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혼돈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말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으셨을까? 정말 하나님은 번제를 원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이 만약에 사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정성껏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어떻게 제사를 지내며 그리고 어떤 제물을 드려야 될 것까지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이 제사 자체를 얼마나 거룩하게 생각하셨는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로 제단에 불을 붙이는 사람들이 징계를 받았고, 그렇게 제사를 드리는 성막 속에 있는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것을 손으로 잡은 웃사가 즉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 앞에 드린 그 번제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가운데 그 제사를 받으셨는지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사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은 제사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마치 인애, 즉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과 제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들의 문학적인 사고 방식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사람들은 한국 사람의 어법과 아주 유사한 어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하나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를 매우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인 기법들이 히브리인의 전통 속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아내나, 자식이나, 친척이나 이런 사람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합당하지 않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합하고 예수님의 뒤만 좇아가는 사람들은 늘 자기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다 미워해야 합니다.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인의 사고방식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말 사랑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미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치 그에게 있어서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너희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를 사랑하는 사랑과 상관없이 인간적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를 향한 사랑이 절대적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식 문학적인 표현으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놓고 ‘아, 제사는 버리고 인애를 택하라는 말씀이구나’ 그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은 제사가 껍질이라면 이 속에는 인애의 정신이 들어가 있었어야 되요. 그런데 이게 빠져버린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가페의 정신이 빠신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바치려면 이것보다 이것을 바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속에 마땅히 인애가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이게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 껍데기만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이 껍데기에다 인애를 다시 채워 넣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머리가 나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껍질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다시 내용을 잃어버린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느낌이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리될 수 없잖아요. 분리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분리시키시면서 ‘너희는 이건 있지만 이게 있느냐?’ 그러고 물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게 하시려고 이런 식으로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구약에서는 이 제사를 드리는 제사 속에 그 제사에 합당한 본질적인 정신이 있어야지만 그 제사가 하나님께 받으실만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칠 짐승의 목록과 제사를 드리는 순서와 규례에 대해서 다 말씀하셨지만 그 규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사와 어울리는 심령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 규례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하는데 결혼식에는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신부가 먼저 입장하면 안되요. 헌법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게 없잖아요. 그리고 여기 올라와서 섰으면 목사가 설교를 하고 그것을 들어야 되요. 끝나면 축복기도가 있고, 그리고 끝나고 나면 퇴장을 해요. 그런 순서가 결혼식에 있어서 중요해요? 안 중요해요? 중요하지요. 그런데 두 사람중 한 사람이 가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 알아. 그게 순서를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그 결혼 자체가 이미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똑같은 의미예요. 십일조를 내는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되요? 수입된 거에서 비용은 빼고 나머지 십일조를 바쳐야 되요? 그런데 그 돈이 도둑질한 돈입니다. 도둑질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 일당을 주고 사람을 샀기 때문에 비용이 들어갔어요. 그것을 공제하고 십일조를 할 것인가, 포함해서 십일조를 할 것인가를 가지고 오랫동안 고민하는데 그 고민이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왜? 처음서부터 성립될 수 없는 헌금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의 아주 정성스러운 하나님의 규례가 있지만 그거는 하나를 전제를 한 것입니다. 그 제사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의 합당한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다 라고 하는 그것을 전제로 깔고 그 다음에 규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의 본질적 정신이 무엇일까요. 제사의 본질적인 정신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제사가 없나니’ 피흘림은 ‘죽었다’ 그 의미예요. 피를 다 흘린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해요. 제사의 정신은 죽음입니다. 무슨 의미 입니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니’ 진정한 제사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거기서 짐승이 죽는 것입니다. 짐승이 죽을 때 제사를 드리는 사람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제물을 받으실 때 그렇게 마음으로 제물과 함께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제사 속에 흐르는 정신이 무엇이냐 하면 인애입니다. 아가페의 정신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죄에 대한 참회가 있어요. 제사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짐승이 나를 대해서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짐승이 자기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짓이김을 당하면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죽어 가는 그 광경을 보면서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틀림없이 그 피흘려 죽임 당하는 안 죽으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결국은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는 소와, 양, 염소 이런 것들을 보면서 처절하게 자기의 죄를 의식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바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형상을 보여주실 때 통곡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린다
제가 주일 학교 선생님을 할 때 애들을 데리고 열심히 있었으니까 그랬죠. 제 돈주고 극장표를 끈어서 그때 ‘천국의 열쇠’인가 ‘천국의 문’인가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시내까지 갔어요. 국도극장까지 우리 반 애들을 데리고, 아주 믿음이 곱게 자란 애들이었어요. 지금은 다 시집 장가 갔겠지요.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장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 위에다가 손을 놓고 로마 병정들이 못 박는 장면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세밀하게 보는 나 같은 사람은 탁 볼 때에 아무리 외국에서 찍었지만은 이 손이 가짜 손이라는 것이 보여요. 그런데 쾅하고 못을 박으니까 피가 쫙 튀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안한 얘기지만 다들 조용히 보는데 아이들이 통곡하고 우는 것입니다.. 극장에서 ‘으아악’ 그리고 ‘예수님’ 그러고 우는 것입니다.. 그때 다행히 캄캄했기 때문에 누가 데리고 온 애들인지 아무도 몰랐어요. 참 놀랍왔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영화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거기 흐르는 피를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보면서 그렇게 통곡하고 그 극장 안에서 우는 것입니다. 울음 같은 거야 눈물이 나오면 좋은데 아이들은 친구 손 붙들고 ‘어떻게 하니’ 그러고 막 우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 였다구요. 그러니까 정말 그 제사를 제정신을 가지고 드리는 사람이면은 그 양이 순결한 양이 왜 죽어야 되요. 왜 그렇게 비참하게 피를 쏟으면서 털을 붉게 물들이며 눈을 부릅뜨며 죽어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면은 거기에서 처절한 자기 회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제사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제사 속에 마땅히 들어 있어야 할 인애의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정신을 입었다고 하는 그 정신. 하나님이 죄 없는 짐승을 향해 내리쳐 지는 끔찍한 살육이 사실은 나를 향해 행해졌어야 하는데 나는 살려두시고 내 앞에서 나를 향한 끔찍한 진노를 저 죄 없는 짐승들에게 푸시는 그 하나님의 아가페 그것 때문에 자신이 깊이 몸부림치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 아까는 하나님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번에는 내가 ‘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처절한 몸부림과 울부짖음이 주님이 기대하셨던 인애를 아는 예배였다구요. 그걸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핵심적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의 본질적인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이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정신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부서짐, 자기 깨어짐 입니다. 죽는 것처럼 자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부서지는 적이 있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자기 깨어짐이 중단된 사람은 이미 굳어져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니 그것은 후한 평가입니다. 자기 부서짐, 자기 깨어짐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만약에 반듯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면 그건 허위요 가식이며, 그가 만약에 바른 생활을 해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죄가 그의 삶 전체를 다스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자의 참된 표징은 자기 깨어짐입니다.
제가 목사입니다 마는 매일 부서지는 자기 깨어짐이 없으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목회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불타는 소명을 가지고 신학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옛날에 불탔다고 할지라도 끊임없는 연속되어지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만 신앙은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왕년 타령 만하고 살 것입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도 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서지는 그 모습이 신앙생활의 유아기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혹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 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괴로워서 눈물 흘린 것 말고, 사람이 미워서 슬퍼한 것 말고, 하나님 앞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 생각은 틀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옳아서 펑펑 울고, 나 같은 죄인을 무엇 때문에 살리셔서 주님이 이렇게 고생을 당하실까 하는 그 송구스러운 마음 때문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고마워서 펑펑 우는 감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나는 단언합니다. 매일 매일 십자가 앞에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살아계신 현존 앞에서 자기의 부족을 알고 부서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명목상의 신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 은혜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찬송 미리 가르쳐 줬더라면 아마 십팔번이 됐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거나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처참하게 죽어 가는 흠 없는 어린 양 앞에서 깨닫는 거나 결국 결론은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훨씬 더 생생하게 깨달을 뿐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하자면 그런 자기 깨어짐의 정신이 사라지고 나니까 제사를 드려서 양이 자기 앞에서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 가는데 질겅질겅 껌 씹고 슬리퍼 끌면서 제사드리는 거나 꼭 같다 이것입니다.. ‘에이씨 이거 왜 이렇게 빨리 안 끝나 이거, 빨리 죽여, 죽여버려’ 마찬가지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차라리 될 수도 없는 가정을 하시면서 인애냐, 제사냐를 선택하라 그러면 ‘차라리 나 여호와는 인애없는 제사보다는 제사없는 인애를 원한다’ 이걸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다는 증거를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여드리시겠습니까? 엄청난 헌금으로 하나님께 그 마음을 보여드릴 겁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성으로 그 마음을 보이실려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겉으로 나타나기 전에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은혜와 불붙는 사랑 앞에서 주님의 사랑에 비교할 때에,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가 없는 아침구름과 같은 자신의 신앙에 처지를 깊이 인식하고, 탄식하는 자기 깨어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원하시는 것입니다.
깨어짐이 있습니까? 정말 깨뜨려지는 것이 있느냐 말씀입니다. 처절하게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앞에서 이렇게 초라하게 나타나는 자신의 죄악된 삶에 대한 처절한 자기 부서짐,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일 뿐인데 주님의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드리는 이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가!’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자기 깨어짐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 새벽에 우리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깨어짐 속에서 깊이 애통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로 해 주시는 사람입니다. 이 자기 깨어짐은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문이며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며, 이 자기 깨어짐은 지나간 날 하나님 앞에 지은 자신의 죄를 더 이상 자신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훌륭한 해독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이 자기 깨어짐이 중단되고 나면 그는 짧은 시간 안에 가장 나쁜 신자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형편없이 부족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매일 매일 이렇게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신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 같았던 사도 바울이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살수 있었던 그 비결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온전하게 애를 쓰고 몸부림쳐도 결국은 죄와 허물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분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반드시 장작이 불꽃을 내면서 타고나면 반드시 까만 재가 남듯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과정에서 반드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쌓이고 처음에 가졌던 그 순수한 사랑과 열정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일들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말씀드리는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에 한 두 번 이루어지는 나쁜 길 가다가 그냥 큰 풍랑을 만나서 사업 다 들어먹고,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고 무슨 죽을 병이 걸려 가지고 병원에 눕거나 교통사고 나서 반신불수가 될 상황에서 하나님 만나고 부르짖는 그런 깨어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얘기했던 바와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자기 깨어짐입니다.
여러분 일생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몇 번 제사를 드려야 됩니까? 이스라엘에게는 늘 드리는 번제가 있었습니다. 속죄제가 있었습니다.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속건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종류의 제사가 시간을 따라서 혹은 절기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드려졌습니다. 일생에 한 두번 깨뜨려지는 그것도 깨지고 싶어서 깨집니까? 죽을 상황이니까 하나님이 붙드는 그런 식의 깨어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년에 한두 번만 제사를 드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사는 예배와 같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다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는 하루에도 수없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그러한 성도들의 삶이 만약에 자기 깨어짐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거는 일생에 한두 번, 서너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 삶 속에서 거룩한 참회와 뉘우침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 속에서 지나간 죄를 씻고,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한 후에 믿음을 가지므로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고친 후에는 믿음으로 그 관계를 돈독히 하며 살아갈 것이 요구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축복과 은혜를 주시려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제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지 않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주님께 봉사하는데도 내 인생의 즐거운 날이 없을까! 내가 이렇게 일년이면 52주 한 주도 자유롭게 주일을 거른 적이 없는데, 왜 내 영혼에는 평안이 없을까! 어느날 인생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내가 예수 믿어서 잘된 게 무엇인가! 나는 주님을 위해서 그래도 하느라고 했는데 주님은 성의 표시도 안해 주시는 것 같다’ 그런 생각할 때 있지 않습니까? 생각이 아니라 사실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렇게 틀 잡힌 반듯한 신앙생활 속에서 제사는 남아 있지만 제사 속에 마땅히 깃들여야 할 여러분 자신이 죽는 자기 깨어짐이 있는 제사였는가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예배 속에서 자기 깨어짐이 있었습니까? 기도발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기도 속에서 자기 부서짐의 문을 통과해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말씀은 수없이 듣지만 그 말씀 속에서 혹시 여러분 자신의 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 아니라, 누구 누구 누구 가족간의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만 주어 듣다가 돌아가는 사람은 되지 않고 있습니까?
인공위성처럼 끊임없이 지구를 돌면서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러한 비행을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아침 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은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배에 지각하지 않고, 가장 은혜롭다고 소문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그 사람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예배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예배이면 예배일수록 그는 듣고도 행하지 않는 죄는 쌓아갈 뿐인 것입니다.
자기 부서짐, 그것은 정말 커다란 축복입니다.
(B면)
아무리 반듯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도, 세상의 제물에 관심 없고 주님만 섬기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자기 부서짐이 없는 그 의로운 사람, 찾아가시지 않으시고, 죄 가운데 살고 방탕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주님이 나를 심판하셔도 주님은 의로우시고 저는 할말이 없는 사람이옵나이다 하는 처절한 자기 부서짐이 있는 흉악한 죄인을 먼저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으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반듯하게 신앙생활하고 마음놓고 타락한번 해본 적이 없이 돈 하나 하나님 허락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써본 적이 없이 공들여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못 만나는 하나님을 일평생 강도짓하고, 간음하고, 사기치고, 도둑질하고 손에 피묻힌 살인강도 같은 사람이 더 먼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죄가 많아서 하나님을 빨리 만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평생을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 속에는 없는 자기 부서짐이 하나님의 마음에 향기로운 제사였기 때문에 주님이 향기가 없는 제사를 버려 두시고 그 향기로운 제사를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 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그 겸손함, 공의를 행하는 삶,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살아 있는 것은 나지만 그러나 내가 사는 것보다도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 그것을 위해서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 속에 그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그리스도인일수록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하나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합니다. 하나님, 제 인격이 너무나 모났지요. 주님, 깨뜨려 주시옵소서, 새로 빚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께 멀리 있는 그리스도인일수록 ‘하나님, 나 괜찮지요, 나만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보람이 있지요, 사람들이 다 나만 같으면 주님이 살만 하시겠지요’ 이렇게 폼잡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만나지도 못하고 인생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기에는 내가 너무나 먼길로 갔다’ 생각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죄악이 여러분들을 이기고, 삼켜서 이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 주셨던 감격적인 만남과 그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그 죄의식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은혜를 달라고 목메어 부르짖을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잘 산 사람들에게만 찾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잘 깨뜨려진 사람에게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와 비할 데 없는 섬세한 사랑으로 짐승과 같은 나를 다루어서 그 사랑에 손 붙들게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자주 동일한 그릇된 일을 행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간다고 할지라도 깨어질 때마다 하나님은 새롭게 여러분들을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게 죄 지은 자들에 대해서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되겠느냐’고 묻는 제자에게 바로 예수님이신 그분이 일흔 번에 일곱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큰 은혜의 세계와 그 놀라운 영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첫째는 그 은혜를 지키며 견고히 살지 못한 아침 구름과 이슬과 같은 신앙생활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러한 생활을 해 나가면서도 도무지 자기 깨어짐이 없는 그 생활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못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깨어지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그러다가 다시 와서 다시 깨어져야 하는 일들의 반복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지루하다면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지루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흙탕에 구르다 온 강아지를 하이타이로 깨끗하게 빨아서 드라이기로 말려 놨더니 비오는 진탕에 또 나가서 뒹굴고 오는 거, 세 번만 반복하면 나 같은 사람은 강아지 팔아버려요. 그런데 흙탕물이 아니라 똥물에 굴러온 사람을 씻기시고, 다시 고치시고, 다시 만나주시고, 새옷을 입히시고, 언제나 하나님은 자기 깨어짐이 있는 그 신자의 마음속에는 과분할 정도의 사랑, 어떤 때는 하나님은 자존심도 없으신가, 그렇게 질문하고 싶을 정도의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새로운 관계를 새롭게, 새롭게 열어 가시는 것입니다..이게 바로 제사를 잃어버리지 않는 신앙, 이게 바로 인애가 들어 있는 아가페가 자리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쥐뿔 아무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교만해 집니까? 조금 교회에서 직분이 높아지고, 조금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주위에서 사람들이 칭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은혜 받으면 교만해 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그렇게 교만해 지는 것은 잘나서 교만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로부터 받는 인정보다도 더 큰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자기를 떠 받들어도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은 그 까짓 것 소용이 없어요. ‘아니, 내가 아닌데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하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정말 견디기 힘들도록 괴롭습니다. 오, 하나님, 나의 이 악함을 어떻게 합니까?’ 이런 자기 깨어짐이 있는 데 주위에서 ‘너 만한 사람 없어, 그래도 이 시대에 너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니, 모든 그리스도인이 너 만큰만 같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따 놓은 당상이다’ 아무리 얘기해봐요 공허하다고, ‘오 주님, 저 소리들이 나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주위에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그러는데 주위에서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원래 조금만 잘하면은 떠받들고 또 조금만 못하면은 구둣발로 밟아 가지고 똥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 세상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웃고, 우는 인생을 사는 그 사람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입니다. 주위에서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사람을 향해서 연약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정말 연약한 사람이잖아요. 모든 기대와 희망, 두려움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야 그것도 인생이냐, 네가 인간이냐’ 그래도 하나님이 ‘그래, 너는 인간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인간을 넘어서서 너는 거룩한 성도다, 내가 너를 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말해도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약한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강하고, 세상을 향해서 약한 사람들이 또 하나님 앞에 서면은 한없이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이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뭐 어때’ ‘어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냅 둬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도 나를 못 고쳤는데 하나님 나를 고칠려고 그래’ 이런 식으로 완전히 개배짱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자기 깨어짐이 없는 곳에서 죄악은 자라고 교만은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사랑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나는 말이지요, 우리 교회에 강도들, 걸인, 버림받은 사람, 사창가의 평생을 굴러다닌 여자, 이런 사람들이 들어와도 괜찮아요. 뭐만 있다면? 자기 깨어짐만 있다면. 그러면 그 교회는 정말 술 한잔 마셔보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보다 더 거룩해 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훌륭한 설교자가 되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한번 김목사가 설교한다 그러면은 유럽까지 소문이 나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사람들이 온다면은 얼마나 신나겠어요.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게 흠이겠지만 하여튼 얼마나 좋겠어요. 설교할 때마나 사람들이 놀랍게 은혜를 받고 인생이 바뀐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그런데 그거는 자기네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유명한 설교자가 되는 거 보다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고,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귀하게 여기시는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고 싶어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 이게 사실은 설교의 목표예요. 설교는 여러분들에게 무슨 인생을 가르쳐 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싶으면 딴 곳에 가는 것입니다.
설교는 설교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자기 부서짐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경배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설교의 목표예요.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되요. 그러한 제사 속에 핵심적으로 존재해야 할 자기 깨어짐, 이게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신앙은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좋은 사람의 순서가 얼마나 법을 잘 지키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는지가 세상에서 좋은 사람의 순서지만 복음의 시대에 가장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은 그리스도인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가 부서지는 그리스도인인가, 그게 좋은 신자의 자태라 이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나의 마음이 물같이 녹을 수만 있다면, 매일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기도의 첫 순간에 나의 자아가 산산이 부서져서 내 영혼을 파고드는 주님의 손길을 붙들 수만 있다면 나의 섬김 속에서 철저히 내가 부서져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숨겨지고, 주님이 드러나고, 내가 가는 곳마다 고통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자기 부서짐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가증한 그리스도인이요. 자기 부서짐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회고해 봅시다. 우리가 어둠 속을 헤매고 우리의 인생을 갈 길을 잃었을 때, 전혀 예상에도 없이 ‘이제 내 인생은 이 절망 속에서 막을 내리나’ 하던 그 끝에 주님 만났습니다. 주님이 오시든지 안 오시든지 우리의 인생에 별로 문제가 안될 거라고 생각하던 그 시대가 아니라. 주님이 오시면 안될 그 시점에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고통의 원인이 이런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를 잃어버리고 사는데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부서졌습니다. 한번 부서지고 만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저 속에서 아직도 안 부서지고 있는 자신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안 부서지면 안 부서질수록 자기가 ‘내가 뭘 더 부술게 있겠느냐, 나는 콩가루처럼 부서진 그리스도인인데, 내가 뭘 더 부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부서지고 부서져서 온전한 그리스도인 일수록 자기의 부족을 인해서 가슴을 쥐어뜯어요.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 일수록 하나님 앞에 이렇게 무익하게 산 종을 용서해 달라는 참회가 있어요.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열렬하게 산 사람들이 인생을 낭비하고 주님을 위해 쓸 수 있는 그 많은 시간들을 나를 위해서 썼던 것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참회합니다.
그렇게 철저한 자기 부서짐이 있었어요. 그때는 우리의 신앙이 아침구름 같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때도 지금처럼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족하게 살고는 즉시 부서졌어요. 그래서 잘못 산 시간들을 부인해 버렸어요.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었다고 즉시 깨어졌어요. 그래서 고사리 같은 손을 움켜쥐고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입술을 깨물면서 주님 뜻대로 살리라고 맹세했어요.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있을 때에 그때에 우리는 아침구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언제나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여 있었고, 주님을 위해서 흘린 눈물이 준비되어 있으며, 주를 위해 충성하기 위해 흘릴 피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어디서든지 나 같이 희망이 없는 인생 필요해서 불러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고 주님의 교회와 결혼한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고자 하는 소박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자기 부서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우리의 눈이 어두워 질 새가 없이 그 눈물로 우리를 씻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는 영안을 가지고 있어요. 영적인 눈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을 포함한 이웃들의 영적인 상황을 분별하는 또 다른 마음의 눈 입니다. 그런데 이 눈이 수시로 콩꺼풀에 씌어져서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이거를 씻기는데 최고의 약은 안약이나 칼이 아니라. 자기 부서짐의 눈물입니다. 이게 콩꺼풀을 끼지 못하게 한다구요.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재미있는 유혹을 안 느낄 수 있어요?
돈 천만에 자기 아들 손가락도 자르는 세상이고, 돈 천만에 자기 아버지도 찔러 죽이는 세상인데, 돈에 대해서 유혹을 안 느낄 수 있어요? 성공에 대해서 유혹을 안 느낄 수 있습니까? 범죄하고자 하는 욕망을 안 가질 수 있느냐 말이지요. 그런 것들을 가질 때에 영안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한번은 길을 걸어가는데 눈먼 장님이 똑똑똑똑 두들기면서 길을 걸어가요. 그런데 맨홀 공사를 하다가 뚜껑을 반쯤 열어놨어요. 그리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는 데 빈 공간을 두드렸으면 됐을텐데, 똑똑똑똑 두들기면서 지나가는데 모든 게 다 있는 것이 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겨드랑이를 탁 잡았어요. ‘선생님 거기로 가시면 허당입니다.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이 머니까 가서는 안될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눈이 얼마나 소중해요. 여기에 콩꺼풀이 계속 쓰인다구요. 이거를 결국은 이게 씌어져서 신앙이고 뭐고 다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씌우지 않게 해주는 거는 가끔 흘리는 눈물 가지고는 안 된다니까요. 제가 그저께 말씀드렸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가 완전히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있었어요. 그런데 아침 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 가지고는 안 됩니다. 부서지는 마음, 그것도 어쩌다가 부서지는 마음이 아니라 매일매일 부서지는 마음, 그것이 없으면 울부짖어도 안되고, 통곡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받았을 때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는 그렇게 매일매일 자기 부서짐 속에서 약한 것 같았지만 강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기 부서짐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지금도 깨뜨려 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깨뜨려지지 않는 여러분 자신을 보면서 깨뜨려 지는 것은 아직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이고, 내가 이렇게 안 깨뜨려지는 걸 보면 상당히 말씀 안에서 성숙해져 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여러분들의 손바닥 위해서 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마음이 얼마나 변해가고 있는지를 여러분들은 눈을 뜨고 똑똑히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서짐이 있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오늘 어떤 인생의 곤곤한 사연을 안고 여기 나왔든지 우리는 모든 기도의 제목을 덮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 무엇을 주시려거든 상한 심령을 주시옵소서, 내게 무엇을 주시려거든 이 전에 제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을 때 늘 깨어짐이 없이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부서짐이 없이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을 내게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내게서 사라져도 그렇게 깨뜨려지는 마음이 있고, 제사처럼 바쳐지는 자기 부서짐이 내게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깨뜨려지는 사람, 그분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제는 어두움을 버리고 우리모두 빛 가운데로 나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는 그 깨진 마음,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기가 아침 구름과 같은 덧없는 인생을 고치시려고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그래서 새사람 만들어서 우리를 그 처음의 하나님을 만났던 그 언덕에 세우셔서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부르시는 하나님 뵈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사실은 모든 것을 얻은 사람이고, 죽어도 산 사람이며, 세상의 버림받아도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없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시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유이신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번 미국 집회에서 로이드존스의 생애를 읽은 다음부터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밤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도 ‘하나님, 내 영혼에 밤을 주시옵소서, 그 밤 속에서 이제껏 내가 믿고 의뢰했던 것들은 모두 빛을 잃어버리게 하시고, 오직 그 어둠 속에서 불변하시는 그리스도만이 빛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게 하시고, 주님을 바라보다가 깨어진 마음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 밤이 지나고 나야 반드시 광명한 새벽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릇된 길로 걸어가고 아침 인애와 같고, 아침 구름과 같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슬같이 덧없는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어찌하랴, 내가 너를 어떻게 하랴’ 안타깝게 부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만약에 주님의 그 사랑의 음성에 깨뜨려 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지난날의 모든 실패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정처 없는 신앙생활과 견고함을 잃어버렸던 지조 없는 신앙생활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 이번에 이런 자기의 깨뜨려짐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번에 우리를 만나주셔서 그렇게 우리를 정말 주님의 불붙는 사랑 가운데로 데려가시는, 우리 한번 잠시 머물다가는 이 인생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언제나 깨어지는 사람, 백발이 성성해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깨뜨려지는 사람, 그렇게 살다가 어그러진 세상에서 빛처럼 주님을 드러냈으면 좋겠습니다.
4. 번제보다 나은 지식(知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下)
어제는 우리들이 6절의 앞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발하는 빛과 같이 명백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경고를 주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당신의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절히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 이셨습니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애와 제사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오늘 그 둘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가 없는 그 제사가 실상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분리될 수 없는 이 아가페와 제사를 분리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자택일해야 되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사의 핵심은 죽는 것입니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이 제물되는 짐승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 제사가 온전한 제사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사보다는 인애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그 속에서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제사, 예전에는 짐승으로 드렸지만 이제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영적인 제사입니다. 자기 죽음, 자신을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자기 깨어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천천의 수양과 번제를 주께 드릴까 내 몸의 열매로서 주께 바칠까
사람의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다 쓸데없는 고민입니다. 많은 재물로 불붙는 헌신으로 미친 듯한 열정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거보다도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최고의 향기로운 제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커다란 죄인이며,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랑은 비할 데 없이 큰데 자신은 그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정직한 자기 인식,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자기 깨어짐입니다.
우리는 본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태어날 때에 죄 가운데 태어났고, 살면서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바가 악하고,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에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고자 하는 강력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제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듣고 싶다고 교회당에 앉아 있어도 그 마음속에는 우선적으로 흐르고 있는 커다란 흐름이 그를 패역하게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않으려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 닮은 자녀를 만들어서 당신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교제가 점점 깊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에는 불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거지요. 그것도 일리는 있어요. 불 받으면 뜨거운 기도가 쏟아지고, 불 받으면 신령한 세계가 영적인 체험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그 불이 제대로 된 불이면 그 불이 내릴 때 항상 동반되는 체험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자기가 부서지는 격렬한 아픔이 불과 함께 임하는 것입니다.. 그거 없이 ‘불만 임했다’ 그거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불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철저히 부서지려고 하는 자기 깨어짐에 대한 기대가 없이 ‘하나님이 불만 내려주시면 나도 뭔가 한 가닥 할텐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그거는 종교적인 탐심입니다. 그런 날은 오지도 않거니와 또 온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될 가능성은 없어요. 지금도 그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 생각 하나에 매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앙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나니까 참 신기한 게 있잖아요. 옛날에 남편하고 부부싸움하고 나면은 막걸리 시켜다 놓고, 짠지에다가 안주 해 가지고 사발에다가 술 받아먹는 동네 아줌마들, 예수 믿기 전에는 둘이 앉아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먹으면서 남편 흉도 보고 이놈도 씹고, 저놈도 씹고 하면서 하루종일 수다를 떠는 소리를 해도 참 의기가 잘 통하고, 한참 수다를 떨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 졌죠?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신령한 변화를 경험하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옛날 친구하고 만나도 재미가 없어요. 그걸 경험해 보셨어요? 그런데 왜 재미가 없어요? 그 사람이 변했어요? 내가 변했거든, 둘이 만났는데 얼굴은 옛날하고 다름없이 똑같이 못 생긴 사람 둘이 앉았는데 술을 못 먹기 때문에 이야기가 안 통하는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 술 먹으면 안되지만 술 먹고 마주 앉아도 얘기 안 통할 것입니다. 왜? 성품이 달라졌어요.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품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한 사람은 여전히 세상 가운데 있어요. 그러니까 둘이 앉아서 얘기를 해봐야 성품이 서로 닮지를 않았어요. 얘기가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예수 믿기 전에 쳐다도 보기 싫던 친구가 있어요. 매일 도시락 싸들고 와 가지고 예수 믿으라고 그러던 그 친구예요. 그런데 내가 변화를 받고 보니까 그 꼴도 보기 싫던 그 친구하고 앉으면 얘기가 통하는 것입니다. 왜? 똑같이 변했으니까.
마찬가지 원리예요. 하나님하고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굴 닮아야 되겠어요? 하나님을 닮아가야 되요. 그런데 깨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닮는 비결이 있으면 그것 좀 나에게 가리켜 주세요. 나도 한번 성공해 보게, 찾아 가지고 와 보라구요. 여러분들 이렇게 볼 때 ‘저분은 어쩜 저렇게 진짜 성도다, 어쩜 기도가 저렇게 깊고, 저 사람 옆에서 기도하는 소리 들으면 나는 내 기도는 멀리 떠나고 저 사람의 기도에 빨려든다, 아 정말 저 사람은 하나님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애, 하나님과 사귀고 있는 신령한 사람인 것 같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많이 깨어진 사람입니다. 깨어지지 않고는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고는 그런 깊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나도 왕년에 한 가닥씩 했는데 오늘날 내가 왜 이렇게 건조한 신앙생활을 할까, 나처럼 십일조 잘하는 사람도 없고, 나처럼 교회 밖에는 아는 데가 없고, 이렇게 살아가는 데도 내 신앙은 왜 이렇게 건조할까! 도대체 대답이 뭘까, 이 교회가 후져서 그럴까!’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은 오늘 정답을 찾은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리가 없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영혼의 변화가 없으니까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불 끄고 은은한 음악의 도움이 있으면 15분만에 여러분들을 다 울린 자신이 저에게 있어요. 그게 뭐예요. 그게 뭐 하는 겁니까.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내 영혼이 깨뜨려져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아닌데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깨뜨려진 사람들이 눈물 흘리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도 안 부서지면서 우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해요. 열심히 주만 위해서 사는 그 사람들, 자신이 온전히 깨어진 사람이 주님만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 불가능 하지만 안 깨어지고도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얘기예요.
그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 수많은 뻔뻔스러운 죄들도 한번에 지워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참된 용서의 능력,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거룩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로운 힘, 그 모든 일들로 들어가는 문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깨어짐입니다. 자신이 깊이 깨뜨려지는 자기 깨어짐의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가 가끔 말씀드립니다마는 도대체 신앙의 연조라는 것이 뭡니까? 오늘날 우리 나라 조국교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앙의 연조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강퍅하고 딱딱하고 굳어졌는지를 재를 척도 아닙니까? 젊은이 열 사람 회개할 때 연세 드신 분들은 한 두 명 회개하면 비율이 엄청나게 높은 겁니다. 교회에 와서 다리 꼬고, 팔장 끼고, 피로에 절어서 깊이 자고 있는 사람들 중에 6할은 나이 드신 분들입니다. 그게 무슨 연조 입니까? 은혜는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고 설교를 들어도 더 많이 듣고, 기도를 해도 더 많이 하고, 봉사를 해도 더 많이 하고, 돈을 냈어도 훨씬 더 많이 냈는데 아니 왜, 하나님은 보람도 없이 그런 사람들을 재고품처럼 남겨두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를 오래 출석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오래도록 주님을 위해서 돈 바치고 봉사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 교회 사랑하는 그 사랑의 과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모든 것을 다 했는데 자기 깨어짐이 없이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 같은 신자가 자꾸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핵심은 그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큰 아가페의 사랑 앞에 늘 자신이 깨어져서 자기 깨어짐이 반복되는 사람, 그래서 깨어져서 자기의 비참함을 알고 순간순간 자기를 에워싸고 밀려오는 중대한 위험을 알고, 그리고 거기에 노출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못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터득하고 거기에서 거꾸러지는 매일 매일의 거꾸러짐이 반복될 때, 그는 세월이 없이는 거룩한 성도가 될 수가 없어요. 세월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를 오래 다니고 출석하고 봉사하고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는 괜찮은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인애가 없는 제사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는 제사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지면서 산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어요. 나는 젊은이들에게 얘기해요. 여기 와서 울고불고 데굴데굴 굴러도 나는 여러분 신뢰하지 않아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 주름이 생겨서 깊은 골이 패였을 때, 그 때에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성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참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이 없는 이 신앙 때문에 우리는 형식은 있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가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지면서 그 샘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인애가 솟아나요. 그 깨어짐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주신 이 값없는 구원이 얼마나 고귀하고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이 제사보다는 차라리 인애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지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고대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 세월이 많이 흘러도 어린아이처럼 주님 앞에 늘 부서지는 그러한 해맑은 영혼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게 되기를 우리 모두 기대해야 되겠지요.
오늘은 선지자가 얼핏 보면 앞에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비슷한 얘기를 한번 더 합니다. 그것은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는 통칭적인 표현이지만 이 번제는 그 제사 속에 들어 있는 한 종류의 제사예요. 번제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바치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는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번제는 헌신을 상징해요. 내가 하나님 앞에 다 바쳐졌고, 그리고 나는 이제 주님의 것이다라고 하는 그 바쳐짐을 의미해요.
정상적인 신자들은 번제을 드리기 위해 짐승을 잡아서 장작 위에 주님이 명하신 규례대로 그 제물을 올려놓고 남김없이 다 태워서 드릴 때 그때 아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 내가 바친 이 제물, 내 이름으로 주께 바친 이 제물이 죽어서 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몸을 불 위에 올려놓아서 모두 새까만 숯이 되도록 남김없이 주님께 향기를 내며 완전히 타 없어지는 것처럼, 하나님 제가 주님께 그렇게 바쳐지고 싶습니다’ 그런 감격 속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목사안수를 받는데 쭉 앉아서 안수를 받고, 목사님들이 안수를 하는데 우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안수 주는 목사님들이 이렇게 누르면서 안수를 주잖아요. 등을 퍽퍽 때리면서 ‘좀 울어, 울어’ 그게 두들겨 팬다고 울음이 나오겠어요. 우리 나라 목사 안수식은 우리 부교역자들도 언젠가 안수를 받을 것입니다마는 조심해야 합니다. 완전히 결혼식 잔치하는 것 같습니다. 안수식 때에는 그런 것을 못 보았습니다마는 신학대학원 졸업식인데 교인들이 우르르 왔어요. 제가 눈이 나쁘잖아요.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사람들이 하얀 손수건을 흔들면서 ‘전도사님, 전도사님’ 그래요 웬 하얀 손수건, 이별도 안 하는데, 봉투예요. 봉투. 2만원 3만원씩 넣어 가지고 와 가지고 막 흔들면서 전도사님 찾는 것입니다. 정성이야 갸륵했지만 그 광경은 너무 세속적입니다.
제가 직접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느 영화에서 보니까 카톨릭의 신부가 ( ? )을 받을 때 장면은 정말 장중합니다. 십자가 위에 들어 눕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는 것입니다. ‘그대가 진정이 고난의 얼룩진 사제의 길을 가려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이 피나는 고난의 길을 영광도 없는 이 헌신의 길을 어떻게 가려는가’ 그러면 교인들이 돈 봉투 들고 ‘여기요, 여기’ 그러는 것이 아니라 손수건 꺼내서 다 울어요. ‘아, 한 젊은이가 저렇게 하나님께 바쳐지는 구나’ 나는 그게 단지 장가 못 가는데 불쌍해서 우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좀 우리는 성직에 대해서 그렇게 좀 생각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 앞부분 제사보다 인애를 원한다는 말씀이 자기 깨어짐을 뜻한다면 여기서는 자기 바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신이 자기 바침의 자기 자신을 드리는 자기 바침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는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오늘날 스스로 ‘나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깊이 귀 기울려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슨 뜻인지 우리들이 추적해 봐야 되겠지요.
‘번제를 보다 나를 아는 것을 원한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번제는 아까 제사가 하나님의 인애와 구별될 수 없듯이 번제와 하나님을 아는 것도 구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럴 때 여러분 옆에서 좀 숭고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어떤 한 젊은이가 ‘성도 여러분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고 목자의 길을 가겠노라고 다짐하거나 아니면은 위험이 가득한 선교지에 자기를 투신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 때에 모든 성도들이 숭고함을 느껴요. 그건 뭐냐하면 그 사람이 지금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느끼는 숭고함이 아닙니다. 한 젊은이가 ‘성도여러분, 저는 이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제 희망은 오로지 주님을 위해서 이 생명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하는 그 짧은 한 마디의 고백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젊은이 사이에 얼마나 사연이 많을까’ 그것을 즉각적으로 생각하게 되잖아요.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진실되게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다 바쳐서 헌신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기의 헌신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분리가 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없고, 불태우듯이 자기를 바치는 무엇인가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마치 이방신들에게 절하고 제사하기 위해서 칼로 자기 몸을 긋던 바알 종교 숭배자들과 같은 태도 아닙니까? 사교적인 열정이지요. 거짓종교에 빠진 열정입니다.
여호와을 믿는 신앙과 우상을 믿는 차이점이 그것입니다.. 우상을 믿는 신앙에서는 우상이 누구인지를 연구하고 탐구하고 이해하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하던 억지로 하던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쨌든지 간에 우상이 요구하는 것들을 열렬하게 하면 그것으로서 우상은 만족을 한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을 향한 모든 섬김이 당신을 아는 진실한 지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 이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옥상 꼭대기에서 자기 몸에다가 신나를 끼얹고 불붙이고 뛰어내리는 광경을 많이 봤어요. 나는 그 젊은이들이 한번도 조국을 끔찍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사랑 없이도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들은 많은 바치면서 삽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 나와 앉는 것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이게 뭔 재미입니까? 좋지도 않은 딱딱한 의지에 앉아서 한 사람은 말하고 여러분들은 가만히 앉아서 몇 시간이나 계속될 지도 모르는 설교를 기약도 없이 들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들은 파자마바람으로 누워서 TV를 볼 수도 있고 재미있는 비디오를 볼 수도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외출을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동네사람들과 함께 마실을 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헌신입니다. 바침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바치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소외되면서 산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해다 이런 말씀입니다.
너무 자극적인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헌금을 많이 한 여러분들이 모두 복 받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은 성경을 여러분들은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소득이 깨끗하고 그 헌금을 한 의도가 이름을 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때 그때에 여러분들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향한 참된 사랑, 주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정확히 아는 지식 없이도 번제와 같이 자기를 태워버릴 것처럼 열심히 주를 위해서 사는 일들은 가능하다 이것입니다..
나는 말이지요 그 쓸데없이 침체에 빠지는 사람들 있죠. 고개를 내리 꼬고 다니고 얼굴을 펼 때가 한번도 없는 그런 답답한 그리스도인들, 기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 이런 사람들을 보는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늘 쾌활한 사람들 보는 것만큼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이 없어요. 왜? 아니 깨어짐이 있으면은 그럴 수 있겠어요. 늘 쾌활하기만 하고 경건한 슬픔도 없고, 거룩한 고민도 없고, 자기가 부서지는 데서 오는 아픔도 없는 사람, 왜 그래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생각해야 됩니다. ‘정말 분에 넘치도록 열심히 주를 위해서 살고 봉사하면서 산다. 나를 위해서는 고기 한 근도 마음대로 안 먹지만은 내가 주님의 일이라면 막 바친다’ 이런 삶을 살면서도 그 사람의 영혼이 한없이 곤고하고 괴로울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좇아가다가 낭패를 만나 가지고 시궁창에 쳐 박혀서 헉헉대느라고 괴로운데 나는 사실 돈에 흥미 없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빨리 지위가 높아지기 위해서 막 그런다고, 열심히 나오더니 그럽니다. ‘이놈의 교회는 장로도 안 뽑나’ 그러더니 가버립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사실 그것도 흥미 없어요. 우리교인들 얼마나 겸손한지 집사 시켜준다고 그러면은 아주 죽는 소리를 하면서 싹싹 빌면서 사정을 해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런데 한번 정도만 그러고 두 번째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교회를 할 수가 없잖아요. 너무 겸손하니까. ‘나도 그래도 그 사람도 그래. 전혀 그런 것에 흥미가 없습니다. 그저 금식하는 것을 금식을 밥 먹 듯하고 말이지요. 철야를 사흘 돌이로 하고, 그러면서 돈만 있으면 교회다 갖다 바치는 것이 취미예요’. 취미가 뭐냐 그랬더니 헌금이래요. 있으면 갖다가 다 바치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저 인간은 교회에 미쳤대요, 하나님이 그렇게 좋으냐?’ 그런데 도대체 주위 사람들은 나보고 예수에 미쳤다는데 그런데 난 내가 나를 보니까 예수님이 왜 그렇게 낯선가요. 다 바치고 사는데 헌금이 취미고, 특기가 교회 봉사인데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나만 사랑 안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에 안나오고 매일 목사님 속 썩이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한 사람이 ‘손들고 옵니다’ 그러고 왔는데 하나님은 그 사람은 만나주시고 나 같이 예쁜 사람은 왜 안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몰라요.
여기서 답을 해 주고 있어요. 하나님을 모르고도 번제와 같은 삶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 죽임의 교리를 들으면서 주의 깊은 사람들은 그렇게 처절하게 죄를 죽이기 위한 노력 없이도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죄를 죽이면서 왜 그런 삶을 살라고 말할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죄를 죽이지 않고 이러이러한 거를 해야지만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죄를 죽이지 않고도 그런 의무를 행할 수가 있다 이 얘기예요.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죄를 죽이지 않고 그 일을 행하는 것과 내 안에서 죄를 다 죽임으로서 그 일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죄를 죽이지 않고 그 일을 행하면 그 일은 행해서 대단히 잘했는데 그 일을 행하게끔 움직이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내가 뭔가를 해 내고는 대견한 것입니다.. 누가? 내가. ‘야, 인간승리다. 나 같은 수전노가 집사 되더니 헌금했구나!’ 그러면서 스스로 ‘참 너 같은 사람 없다, 진짜 참 착하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데 자기 머리를 쓰다듬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그 다음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나처럼 못하는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저게 인간이야, 저게 사람이야, 아이 저거 무엇을 하러 교회에 잡아둬 옆에 동물원에나 보내지, 아 목사님이 늘 짐승, 짐승 그러더니 바로 저런 사람들보고 하는 얘기구나!’ 사실은 자기보고 한 얘기인데 말이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결과가 왔어요. 좋은 일을 했는데 그게 나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간 게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꼭 그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깨어나세요. 깨어나요. 자기 의에 빠져있고 스스로 칭찬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반석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서 있는 기초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니고 십자가 아니고 피묻은 복음이 아닙니다. 불타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 기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흔드는 설교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그 사람들은 특징입니다. ‘나는 깨어질래야 깨어질 것이 없다. 왜, 나는 다 바치면서 산다. 내가 날 위해서 호강시켜본 적이 있냐. 주님 앞에 다 드렸다. 헌금은 특기고 취미가 교회 봉사인데 그렇게 하고 살았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내가 깨어지느냐, 내가 무얼 잘못했냐 숙제는 오직 하나다, 나를 그냥 내버려두고 그 위에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과 은혜만 부어주시면 나는 뭐가 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밖에 못사는 이유는 내 책임이 아니라 안 부어주시는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몰라도 한참 모르시지, 나 같은 사람을 지나치시다니’ 이런 생각으로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볼 때는 너무 모범적인 생활인데 그의 영혼은 곤고합니다. 손에 피 묻힌 죄인들이 와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질 때에 맛보는 그 평화를 그는 깨끗한 손으로 살면서도 맛보지 못해요. 방탕한 죄인들 간음하고 사기 치고 살인하고 추잡한 죄를 지은 죄인들이 자기가 부서지면서 맛보는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를, 그런 죄악에서 멀리 떠났는데도 전혀 경험하지 못해요.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런 날들이 오래도록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 신앙이란 이런 거구나! 그러니까 지금 내 모습은 성숙해 있는 모습이고, 늘 깨어지기 잘하는 그런 모습은 신앙이 어렸을 때 유치할 때 일어나는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거는 결국은 자기 합리화까지 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까지 시켜놓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아요. 왜? 합리화됐기 때문에 고민 안 해요.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는 하나님 나라에 가봐야 알아요.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삶을 산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예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두고 오늘 선지자가 강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번제가 그렇게 잘 났느냐 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 번제보다도 더 원하는 것이 있다’
사실 헌신이 얼마나 중요해요. 그렇잖아요. 헌신 없이 여러분 여기 이사올 수 있었겠어요. 눈물겨운 성도들의 헌신이 있었으니까 여기에 온 것입니다.. 자기 집 팔고, 1년치 월급도 더 되는 것이 비싼 이자 물어서 대출하고, 사채 얻고 누가 시킨 게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좋아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 수리할 때 보셨죠. 매일 새벽 3시 반까지 일했어요. 그러면 월급을 줬냐, 누가 여기 월급 받아간 사람이 있어요? 입술이 부릅 트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되도록 일하고 마지막 입당하는 날은 아침 8시 반까지 안자고 일했어요. ‘하나님이 다 하시지’ 나는 그런 얘기가 제일 싫어요. 진짜 헌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 안해요. ‘하나님 혼자 다 하시지’ 헌금 안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 안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지 그 얘기는 ‘나 아니면 여기 누가 할겨’ 그 이야기과 똑같은 얘기예요.
헌신 없이 하나님의 일이 되느냐구요? 나는 커다란 교회를 볼 적마다 사람들이 욕하는 거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물론 부정적인 면들이 있어요. 그런데 뭔가 그렇게 우뚝 서있는 큰 교회가 서기까지 지금은 비록 복음을 떠났거나 혹은 교인들이 나태한 생활에 빠졌다고 할 지라도 옛날에 미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교회 속에 성령에 사로잡혀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다 쏟아 붓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선것입니다..
지방에 있는 교회에 제가 집회를 갔는데 한 2500명 모이는 교회예요. 교회가 한 50년 됐어요. 판자 집에서 시작된 교회가 그렇게 큰 교회가 됐어요. 건실하게 목회를 잘 하셔요 그분이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판자촌에서 시작한 교회가 이 정도 될 때에는 여기는 미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재물도 필요 없고, 명예와 권세도 필요 없고, 오로지 하나님 이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며 젊음도, 건강도, 물질도, 지 식도 모두 하나님 앞에 바친 비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에 미친 사람들.
거룩한 땅에 주 오늘 여기에 서 있네
우리 손으로 주의 일 이루시네
하나님이 우리 손으로 주의 일을 이루십니다. 헌신이 없이 교회가 서겠느냐구요? 이제는 많이 나아졌어요. 교회를 하고 나서 가슴아팠던 게 뭐냐하면 말씀을 듣고 펑펑 우는 교인들은 많은데 땀흘리는 교인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지금 뭐하는가, 이게 무슨 우리 교회가 분식집인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헌신이 없이는 안되잖아요. 하나님이 ‘그런 것 필요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필요 없어서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핍은 무엇 이예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게 뭐냐, 이거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학생들이 노트에다가 톱스타의 사진을 붙여놓고 생년월일, 나이, 출신학교, 주민등록번호,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색깔, 장래희망 잔뜩 써 가지고 외우고 다녀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 텔레비전에서 본 것 밖에는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 ‘안다’는 것은 경험의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에서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안다’고 하는 단어는 성교하다라는 의미로 쓰여졌어요. ‘아담을 하와를 앎에 가인을 낳은지라’ 이렇게 되 있어요. 그건 경험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게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거든요. 그게 놀라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난 이제 철저히 버림받았고, 나는 이제 희망이 없다’ 그래서 생을 포기하고 자살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람이, 어느 날 하나님을 믿고 아주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예요? 누가 갑자기 그 사람에게 훈장을 주거나 돈을 주었기 때문에 희망이 생긴 것 아니예요. 뭐예요? 예전에는 몰랐어요. 그래서 자기는 ‘절망적인 존재이고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고 이제는 완전히 버림받았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지식이 생긴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신다’ 그 순간 이전에 자기의 인생을 얽어 매였던 그 비참한 고독감, ‘너는 버림받았다, 너는 혼자야, 살아봤자 소용없어, 너는 끝났어’ 이렇게 다가오던 그 깊은 좌절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누가 나를 헤치겠는가! 주는 나의 구원의 빛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나님’하고 처참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서진 마음으로 ‘하나님 저는 어찌합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탄원할 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된 응답은 뭐예요? ‘그래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안다’ 그러면 그 의미가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의미예요? 아니면은 어느 교회의 교적부 외우고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아니잖아요. ‘내가 너를 안다’ 그 얘기는 ‘우리가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다’, ‘내가 너를 안다’ 그랬을 때 그거는 뭘 외우고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미 너와는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나는 너의 편이고 너의 보호자 되어 줄 것이며, 너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을 내 뜻 안에서는 내가 너를 지키리라’ 하는 보증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무슨 상입니다. 가족들끼리 나누는 밥상입니다.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큰상을 베풀어서 성대한 만찬을 차려놓고 주님과 함께 겸상으로 먹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 광경 자체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이구나, 저거 건드렸다간 그날이 죽는 날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는 의미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도 그런 의미가 되어야 된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이라는 석자를 부를 때 아무 감정 없이 부르는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아요. 그 이름 석자가 주님에게는 그리움이고, 경험이고, 이미 알고 관계이고, 사랑,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를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그런 식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만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건 아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된 지식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요. 교만의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
제대로 하나님을 깊이 알면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베길 수가 없어요. 쥐뿔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혼신을 짜낼려니까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주님을 많이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직분은 철저하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사람인가 하는 것에 의해서 검증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돈 있고, 무슨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고 해서 교회에 와 가지고 그렇게 뭔가 무게를 잡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그는 결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 의가 되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뼈빠지게 주님을 위해 섬긴다고 섬기면서 사실은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고 자기 마음속에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동기 자체가 주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직장 다닐 때 일입니다. 뒤에 있는 직원 하나가 낚시 광입니다. 월요일 날은 와서 계속 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낚시터에서 새벽에 왔거든요. 고기도 이상하지 낮에는 안 물고 밤에만 문대요. 매일 꾸벅꾸벅 매일 하는 말이 ‘낚시터 어땠냐’고 물어보면 ‘말마, 물반, 고기반이야’ ‘얼마나 낚았냐’ 그러면은 ‘팔이 아파서 셀 수가 없대’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하면 ‘다 방생해주고 왔대’요. 그런데 그때 공무원 봉급, 그 사람이 받는 봉급이 한 십 몇 만원 밖에 안 될 때예요. 그런데 자기 동네에 낚시꾼들의 동호회 모임이 있대요. 낚시점 주인이 간사고, 낚시꾼들이 모여서 회장도 뽑고 그러는데 뭔가 트러불이 있어가지고 문제가 있어서 협동이 잘 안됐었는데 그 낚시집 주인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니까, ‘그러면 우리 잘 해 봅시다’ 그러더니 그 낚시꾼 중에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백 만원을 한 다발을 내 놓으면서 ‘기금으로 씁시다’ 이러드래요. 무슨 얘기예요. 아니 공무원 육 개월 월급도 넘는 것을 취미생활을 위해서 탁 내 놓은 사람은 평소에 그렇게 돈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그렇게 돈을 쓰고 다니려면 도대체 한 달에 몇 억을 벌어야 그렇게 쓰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내 놓는 것입니다.
취미 생활을 위해서도 열정이 있으면 그렇게 반 년치 봉급정도 선뜻 선뜻 내 놓을 수 있다 이 얘기예요. 자기는 전혀 죽지 않고도 그런 식의 섬김이 가능하다 이 얘기예요.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얘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매일 매일 하나님을 알아 가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분이였구나! 세상에 이것도 모르고 살았던 나는 얼마나 바보같은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아침마다 새롭게 알아 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감격, 예배시간마다 마음을 조리며, ‘하나님이 오늘은 당신을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해 주실까 아,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가 몰랐던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 주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평화와 은혜를 주실까, 오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면 분명히 내 인생에 커다란 힘이 될꺼야, 아니면 오늘 하나님이 나를 알게 해 주시면 그 빛이 오랫동안 숙명처럼 내 발을 묶고 있었던 사슬들을 끌러 줄거야,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열린공간 그 앞에 뭐라고 쓰여있어요?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서 자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합당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지고 그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용기와 능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지 된 것입니다.
일단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부서지는 자기 깨어짐이 없으면 즉시 죄악이 쌓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이상 없이 정지되면 그는 요령을 배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피 흘리며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열정대신 기회를 엿보며 최면유지를 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칭찬을 받으면 우쭐하고 교회 다닐 맛이 나고, 누가 뭐라고 그러면은 다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육적인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무너지는 일들이 없어요. 그리고 자기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모든 것을 미워해요. 그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설교자이면 설교자가 밉고, 그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그 무너뜨리려는 것이 경건한 성도의 충고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렇게 무너뜨리려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그 하나님도 싫어한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받고 싶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정면으로 마주하기 싫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렇게 살아가니까 신앙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축복의 도구로 전락하고,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속이 오리라’ 주께서 말씀하실 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서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해가 지고 떠 받들어주고 대접해 주기 시작하면은 그 사람의 영혼은 거기서 파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철저하게 교회에서 대접받지 말아야 되요. 그래서 스스로 이게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줘야 되요. 그게 그 영혼을 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희들에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1년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흐느껴 울고, 눈이 퉁퉁 붓고 그러다가 다시 미끄러지고, 미끄러졌다가 허덕거리고 올라오고, 올라오다가 자빠지고 하면서 그렇게 침륜에 빠지는 생활을 번복했어요. 그런데 지금 또 그러고 있어요. 1년 동안에 그런 삶을 통해서 배운 지식이 아무데도 쌓여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동과 사랑은 아침구름이고 해가 퍼지고 나면은 모두 사라질 이슬과 같은 신앙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의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이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진전이 없는 것이, 사실은 자신의 신앙이 진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사상에 장단 맞추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꼭 같은 생각이라 이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죽어라고 일을 했지만 사실은 자기 자랑을 위해서 일했기 때문에 천국에서 아무 상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은밀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없고, 그저 종교심하나로 내 몰린 삶을 살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지막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한해 한해 거듭되어 나아갈수록 1년 전의 내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차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되요. 언젠가 서가를 이렇게 만지다가 옛날에 직장을 다니면서 성경공부 시켰던 그런 글들을 보았어요.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어요. ‘아 이거 세상에 어떻게 도움을 주겠다고 이거를 가르켰지, 아 참 부끄럽다’ 그런 자기 발전이 있어야 된다 이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거를 너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닮아가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을 닮아 가면 닮아갈수록 주님과의 사귐은 깊어져 가고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져 가면 인격적인 깊이를 더하는 신앙이 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커다란 관과 같습니다. 거기에서 전에는 하나님과 상관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기게 되면 주님이 거기서 사랑을 흘려보내시면 우리가 그 사랑에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악하던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요. 거룩을 흘려보내시면 세속적이던 우리들이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야 되요.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가장 커다란 비전은 소망은 이 세상에 당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사모하셨어요. 예수님께서도 ‘영생은 유일하신 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는 모르던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 가는 기쁨이 있습니까? 이전에 신앙을 유치한 신앙이라고 스스로 얼굴 붉혀야 할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배우는 것만큼, 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까? 가치도 하나도 없는 소설은 밤을 새워서 몇 일에 한 권씩 읽어내면서 왜 성경은 예수 믿은 지 몇 년이 되어도 한번도 못 읽습니까? 그 책이 너무 거룩해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해서 자라나게 해 주는 수많은 은혜의 도구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신을 온전히 드려보았습니까? 주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기쁨을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여러분들의 삶 속에 적용하는 일에 열심을 품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는 태도를 보며 두 가지를 느낍니다. 조용하긴 조용하다. 그것이고 제가 호주에 지난번에 갔을 때 연합집회에 가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요. 박순용 목사님이 강사 소개하러 올라가 가지고 강사소개는 안하고 열린교회 교인들 소개하느라고 입에 침이 말라요. 자기는 태어나서 전세계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성도들을 처음 봤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성도들이 확실하니까 강사도 비행기 안 아깝게 설교하고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릅니다. 설교자에게 거침없이 파고 들어오는 확신 하나는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떠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이 일을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왜 여러분들은 생사가 갈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오지 않습니까? 왜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고 그 속에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 때문에 또 다시 이전에 넘어졌던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결심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부요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니까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지 않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지 않으니까 여러분들은 겉으로는 번듯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곤고한 삶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당신이 부지런히 당신 자신이 누구임을 알려주시는 데도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력을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이 정말 살아 있어서 그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충만해져 있을 때에는 헐떡거리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해요. ‘아 그렇구나, 아 맞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이제서야 알겠구나!’ 그러면서 계속 하나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가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참 신기한 것이 뭐냐하면 담배도 피우면 늘 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면 자라갈수록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은 갈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늘 듣던 이야기인데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을 때에는 늘 듣던 이야기인데 늘 듣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들립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어느 날 우리 딸이 ‘아빠, 나 사랑한다’고 그래봐 ‘사랑한다’ ‘아빠 한번 더 해봐’ ‘사랑한다’ ‘아 크게’ 만약에 ‘어 왜 숙제를 이따위로 했니?’ 그랬으면 두 번 세 번 듣고 싶다고 그러겠어요. 사랑한다는 말.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는 지식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마다 그 지식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자꾸자꾸 자극하는 것입니다. 자극하니까 자꾸 자꾸 자극을 받으면서 그 자극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은혜를 자꾸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고 싶으셨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 신지를 그렇게 알려주고 싶어 하셨어요. 보여주고 싶어하시고 깨닫게 해주고 싶어하시고, 자꾸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무엇이냐 하면 부지런히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6장에서 뭐라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때가 오는데 그러면서 선지자가 하는 말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내려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의 강물을 여러분들 가운데 흘려보내시면서 거기 모두 풍덩 들어오기를 원하시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깊은 물 가장자리에서 손을 씻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조금씩은 변화되는 것 같애도 근본적인 변화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깊이 소금물에 담구어진 배추가 완전히 저려지듯이 그렇게 되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지 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내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것을 부지런히 섭취하면서 그 속에서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진실한 신앙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틀릴 때, 우리는 누구에게서 배워야 되겠어요. 여러분들이 뭘 가진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가진 것이 많으십니까?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저 보기에 여러분들은 비유를 하자면 다 찌그러진 깡통에 동냥 얻은 밥 몇 덩어리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유해 질래야 부유해 질 건덕지가 없고, 삶을 보면 알잖아요. 불꽃처럼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니까 불꽃같은 삶을 살고 싶어도 항상 그리움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애 썼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치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알려 주시옵소서, 주님 어제 깨달았던 말씀이라도 좋으니 그 말씀으로 우리의 잠든 영혼을 자극하시고 주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게 해 주시옵소서, 날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의 그 성실한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는 그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 안 되는 그 잘난 신앙의 경험, 왕년에 체험한 얼마 안되는 알량한 자기 경험, 그리고 나름대로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왔다고 하는 그 쓸데없는 자존심,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위에 서기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 가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기쁨과 변화가 있어요.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새롭게 살아가니까 오늘 만나는 하나님이 어제의 하나님이긴 하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참 뜨겁게 연애할 때, 매일 만날 때 ‘아이고, 지루해 어저께 그 얼굴 또 하고 나왔잖아, 아이고 저 얼굴은 1년이 가도 바뀌지 않네’ 그런 생각합니까? 안해요.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오늘 만나면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오늘 내가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될까’ 그런 자극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우리들 앞에 놓여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간절히 이스라엘 백성들에 원하시는 것은 분에 넘치는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헌신, 겉멋들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큰 고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여 무관심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내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러니까 책보 싸들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공부도 하고 다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인적인 추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초점,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안 향하고 주님의 관한 지식만 자꾸 배우려고 하는데 익숙해지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지식이 자기를 교만하게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참된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물론 헌신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깨닫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베푸신 그 큰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만약에 내가 내 인생을 주님만을 위해서 다 사용하지 않으면 내 인생에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하는 깊은 자극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쌓여가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에는 평화가 사라지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없이 건조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살아있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는 그 눈은 빛날 것이고, 설교를 듣는 그 귀는 열릴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 신지를 깨달은 그 후에는 그는 분투하는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살고자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공급되는 주님의 거룩한 능력과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의무는 잘 깨달아서 하나님을 더 잘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여러분들의 영혼에 자유가 있을 수 없어요. 오늘 선지자가 우리에게 이 얘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알아가기 위해서 놀라운 감동과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은 그때 그때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그때마다 귓전으로 스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의 역사까지 가지 못한 채 하나님 말씀을 흘러가게 버려 두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경 읽는 삶은 건조하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감이 없습니다. 작년에 묶여있던 그 지점에서 올해도 묶여있고, 가끔 묶인 것이 흔들리기는 하지만 문제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격파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얽매였으나 이제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저희 교회에서 저는 그런 경험들을 참 많이 합니다. 저희 교회에는 설교한 테이프 푸는 녹취 헌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 들은 설교인데 그거를 생생하게 들렸을 때에는 변화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치고 풀면서 변화를 경험해요. 그러니까 돈도 안주고 뭘 주는 것도 아닌데 테이프 하나 풀려면 두 시간, 세시간 심지어는 여덟 시간씩 걸리는 사람도 있다는데 매달려서 겨우 하나 푸는데 그거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면서 지나가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모든 감동과, 변화, 삶이 새로워짐, 자기 깨어짐 이런 모든 것들의 기초가 되는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깨달음 얻어지는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아는 지식이란 말이지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훨씬 다릅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지식들은 누워서도 섭취할 수 있고,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섭취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그렇게 섭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려고 하는 그 영적인 순례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직 없는 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아닙니다.
출발은 어디냐 하면 지금 내가 알고 그 지식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섬김의 차이가 있다고, 삶의 질의 차이가 있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진실한 생활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내게 없는 지식을 내가 그것을 따라서 살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고, 우리 자신이 불사르게 다 내어 줄 지라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관계없는 일들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 아는 지식이 열이면 그 열이 가르쳐 주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더 가까워지고 싶고, 주님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열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순종하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있는 자에게는 계속 보태시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깊어지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날마다 알아 가는 기쁨이 있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관한 비밀을 깨닫고 감격하는 확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마음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라는 거룩한 결심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왜 선지자가 이렇게 자신을 불태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헌신의 번제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을 원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마치 가뭄 날의 바짝 메마른 물 없는 냇가, 그 위에 댐의 수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건조하고 바짝 메마른 그 물 없는 냇가에 어느 한 순간 수문이 열리고, 강한 물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 물살이 오랫동안 메말랐던 개울을 두루 적시며 흘러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잡초밖에는 돋아나지 않던 그 들판에 하천에서 잇대어 흘러나온 물이 물길을 따라 두루 돌면서 건조하고 메말라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그 땅을 옥토로 바꾸는 그 속에서 형식뿐인 신앙은 그 물과 함께 쓸려져 나가고 거기에 생명의 기운이 깃들이 시작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참된 기쁨의 나무들,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그리고 새들이 깃들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배우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이제껏 까지 내가 아는 신앙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이었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에 깊이 잠기고 보니까 이것은 정말 밤이 깊어도 떠나기 싫은 주님을 아는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거닌 것 같구나’ 하는 그런 깊은 깨달음을 알게 되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삶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를 알리겠느니 너희들은 나를 알기를 힘쓰고 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그것이 나는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너희를 불사르게 내어 바치는 무모한 헌신보다도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바로라’ 주님이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5. 하나님이 치료하실 때에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핏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호6:7-7:1上)
그렇기 때문에 정말 진실한 신자는 이세상의 금이나 은을 얻기에 열심을 내는 것 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에 열심을 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얽매였을 때에는 자유를 주고 고통받았을 때에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고, 또 어느 길로 가야할지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적에는 분명하게 우리의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지식 안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누리며 생명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참된 지식 없이 누구도 하나님과 더불어서 온전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침구름과 같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아서 견고함이 없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계속해서 새롭게, 새롭게 그의 마음속에 쌓여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은 그저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연속되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습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우둔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라도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한번 깊이 깨어지고 나면 모든게 새로워요. 기도도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대해서 내가 생각했던 것도 새로워요. 그리고 이제껏 까지 보아왔던 성경에 대해서도 새로워지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새로워지고 모두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생의 몇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매일매일 반복해서 깨어짐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어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다니다가 재미없을 때 있지요? 교회 다니다가 교회 다니는 맛을 잃어버릴 때 있지요? 힘차게 끄덕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애요. 그래서 오늘 내가 묻고 싶어요. 누가 그렇게 재미없게 만들었어요? 누가 여러분들의 교회 생활을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만들었습니까? 물론 사람이 그런 영향을 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매일 매일 자기 깨어짐이 없는 신앙생활이 그렇게 지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롭게, 새롭게 쌓여가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매일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 굉장히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힘들어 지는 것들이 계속되면서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무엇인가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영적으로 스스로 소생되는 일들이 일어나면 교회적으로 어려워도 개인적으로는 또 나름대로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가겠는데, 같이 주저앉는 것입니다. 같이 주저앉으니까 그 다음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모든 은혜들이 마음속에서 다 사려져 가는 것입니다. 조금 아까는 자기가 그런 건조한 생활하는 원인이 밖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자기 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다 아는데도 그것을 ‘아니다’ 이렇게 부정하고 항거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신앙생활이 힘들어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롭게, 새롭게 쌓이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될 때 신앙생활은 아주 건조해 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요? 죄를 이길 힘이 없으니까 그 다음에는 죄에 자꾸 빠지는 것입니다. 죄에 빠지면서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내면적인 생명이 있을 때에는 이길 수 있는 것들도 그게 모두 고갈돼 버리니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으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은 자꾸 사라지고, 혈기 왕성한 자아는 점점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 되지요. 그 시험을 거슬리면서 살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악한데 빠지니까 범죄가 되니까 그 죄의 무게가 영혼을 또 누르는 것입니다. 그런 게 하나도 없어도 자기 깨어짐이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롭게, 새롭게 내려오지 않으니까 견딜 수가 없는데 그 위에 악을 행하고 죄에 빠지니까 더 무거운 영혼의 무게 속에서 짓눌리면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치 비유를 하면 진흙구덩이 속에 빠졌는데 그 사람이 시험에 들어서 죄를 지으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빨리 진흙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겠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마귀가 계획했던 일들은 아주 훌륭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적인 생명은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깨어짐이 없고 시험에 들어서 악을 행하고 그 위에 죄가 쌓이고, 그 죄가 영혼을 점점 어둡게 하니까 이제는 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터득할 가능성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깨뜨려질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 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도로를 자꾸 확장하느라고 애를 쓰잖아요. 우리가 뭘 압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양쪽에 1차선 도로가 나 있다가 2차선씩 늘어나면 4차선이 되잖아요. 그러면 공사비가 배로 들게 아닙니까. 배로 넓어지잖아요. 그러면 ‘전에 1만대 다니던 차가 2만대쯤 다니겠구나!’ 그랬더니 그 도로 건설하는 관계자 얘기는 그게 아니래요. 그거는 곱하기로 나갑니다. 왕복 2차선을 4차선으로 두 배 들려놓으면 물동량이 여덟 배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여덟 배가 빨라집니다. 그러니까 만대가 간신히 통과하던 그 길을 같은 시간에 8만대가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8차선이 되면은 그 다음에는 16배가 넘는 것입니다. 30배 이상 엄청난 속도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열 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요만큼 열고, 죄에 대해서 요만큼 마음의 문을 어쩔 수 없이 열려져 있는 틈새가 있을 때에는 그저 열 번 정도 죄를 지었다고 할 것 같으면, 배로 넓어지게 되면은 40번, 80번, 400번, 800번 범죄하면서 하나님 앞에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을 안해요. 그러니까 자꾸 내적인 생명이 고갈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면적으로는 그렇게 모두 망가져서 자기 깨어짐도 없고, 자기 깨어짐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도 없는 그러한 불구가 된 영혼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그러한 영혼의 상태는 고치려 하지 않고, 번제로 하나님 앞에 때우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기 깨어짐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매일 와서 매일 깨지기만 하면 뭐해. 쥐뿔도 안 변하는데’ 그런데 그거는 거짓말입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늘 깨뜨려지는 신앙의 세계를 가졌는데도 그 사람이 영적인 생활도 안 변하고 그 사람의 인생 자체가 안 변한다 그러면은 그거는 둘 중에 하나예요.
하나의 가능성은 그 깨뜨려지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깨뜨려지는 것 같지만 육적인 몸부림일 경우예요. 어느 목사님이 그런 얘기해요. 그 교회의 정말 나오라고 그래도 잘 안 나오던 어느 자매가, 전도만 받고 교회에 안 나오던 자매가 어느날 새벽시간이 됐는데 교회에 등록도 하지 않고 교회에 나오더니 뒷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애절하게 울면서 기도를 하더래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그리고 감사해서 ‘자기는 전하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나와서 새벽에 시간에 성령의 감화로 뒤집어 지고 회개를 하고 구원을 받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게 아니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시어머니한테 머리끄덩이 끄들리고 대판거리 싸웠어요. 나와 가지고 세상사는 게 너무나 원통하고 분해서 대성통곡 한 것입니다. 그게 목사 눈에는 그거 회개하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적일 경우, 그렇게 간절하게 깨뜨려지는 것 같지만 그것이 육적일 경우가 있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은 뭐냐하면 안 변하는 것 같아도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렇게 깨어지면서도 정말 불만족스러울 정도로 변하는 속도가 느리다 할 것 같으면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진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깨뜨려지는 신앙의 세계가 없었으면 뭐가 됐을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동물이 와서 짐승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를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뀌어나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릇된 길에서 살고, 또 태어나기를 너무나 모질고 강퍅한 심령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렇게 쉽게 깨뜨려지지 않는 돌 같은 마음과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이 울어야 하고, 더 많이 깨뜨려져야 하고, 남보다 더 많이 부서져야지만 겨우 남하고 비슷한 수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특별히 악하고 굳어진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리고 그 자기 깨어짐의 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새롭게, 새롭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면은 큰 슬픔이, 혹은 큰 기쁨이 우리에게 함께 임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그런 분이였구나! 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지 알았지! 나는 내가 이렇게 건조하고 힘겹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나는 뭔가 교회를 잘못 만났는지 알았지! 아, 내가 여태까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구나! 아 그렇구나 내가 이런 하나님을 모르고 예전에 살았으니 내 신앙생활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가!’ 그러면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나같이 이 무지하고 소경과 같은 인생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진리의 빛을 비쳐주셔서 나의 어두운 눈을 밝혀서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만들어 주시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혈육이 나를 알게 한 것이 아니요. 육체의 정욕으로 내가 아는 것이 아니요. 혈육의 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요.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 이제 소망을 더 굳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시편 73편의 기자가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나는 주님 앞에서 깨닫지 못한 것이 짐승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날마다 긍휼히 여기셔서 내 눈을 뜨게 하시고, 내 마음을 열어서 주님이 누구이신 지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시는 이 은혜 때문에 내가 짐승처럼 살지 않고 성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말할 때에 ‘정말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지 않았으면 동물처럼 살았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주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 마음에 넣어주시는 그 자비하시는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정말 짐승과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다 성도예요. 짐승이 아니라. 진짜 짐승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 안해요.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뭘로 봐, 동물로 본 대니까’ 성도는 자기를 짐승이라고 고백하고, 짐승과 같은 사람들은 자기를 제법 뭔가 하는 사람이라고 고백을 해요. 참 얼마나 놀라워요.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불붙게 만들어요. 냉냉했던 가슴에 불을 지르고, 그리고 차디찬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죄악 된 세상에서 육신의 이익을 따라가는 죄악 된 삶을 살기보다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고난을 받고 분투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만들어요. 왜? 주님을 깊이 알고 보니까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거슬리고 불순종한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해서 ‘애들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부르짖으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들은 참 하나님의 사랑과 그 특별한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뭔가 예수 믿는 사람답게 흉내는 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에 비하면 내세울 것이 정말 없다는 걸 느끼잖아요.
여러분들이 이 다음에 자식을 다 길러놓고 그리고 이제 나이 먹어서 성인이 다 되더니 어느 날 만원 짜리 한 다발 보자기에 싸 가지고 가져다 놓으면서 ‘이 정도면 됐지요?’ 그러면 여러분 뭐라 그러겠어요. 귓방망이를 한 대 갈겨요. ‘네가 이 부모의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효자는 바로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모의 그 사랑이 부모가 나에게 얼마나 돈을 많이 주고, 큰집을 사주고, 유산을 남겨주고 그게 아니라 그 부모 속에 있었던 돈과는 바꿀 수 없는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거를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를 깨닫게 되요.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겸손해요. 겸비해져요. 많은 거를 알면서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는 자기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매일매일 쌓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맛보는 사람들이 더 그것을 사모하게 되고,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것을 체험하니까 자신의 영혼 속에 참다운 행복들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번제와 같이 자기를 태워드리는 헌신보다도 그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제 말씀드린 하나님이 번제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한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읽은 7절서부터 뒷 편으로 14장에서 호세아서가 끝나는데 거의 14장 중간에까지 계속해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것이 하나님이 통렬하게 이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읽은 6장7절은 바로 그 시작입니다. ‘저희가 아담과 같이 죄를 범하였다’ 그런 말씀을 여기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핏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아담과 같이 언약을 어겼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에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 시켜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같이 언약을 어기고 그랬어요. 여기서 우리들이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하는 내면의 동기는 여러 가지 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무엇이냐, 그건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영화를 누려보려고 하고 하나님 밖에서 뭔가 분에 넘치는 영광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왜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약속에 충성하며 사는 거 보다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미 첫 사람 아담에게로부터 인간의 이러한 생각은 진정 착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는 그 순간부터 아담은 이전에 범죄하지 않을 때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렸던 축복이 한번에 송두리째 날라 가는 그런 비참함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기쁨이었어요.
내가 살고, 하나님은 내 앞에 계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모두 감찰하시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 참된 행복, 그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면서 한번에 날라가 버리는 것,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말씀을 사실 하나님이 하실 필요가 없었어요. 범죄하지 않았다면, 왜? 하나님이 아담을 아시고, 아담이 하나님을 아는데 그런 말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성령충만한 사람이 그 은혜 속에서 늘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나를 멀리 떠나셨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 주님을 부르고 있는 태도가 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것처럼 말하지 않고, 가까이 계셔서 자기와 동행하고 있는 그분에게 말하는 것 처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도 저가 겪은 일을 주님은 보셨죠? 하나님 이 일들이 내게 일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 친구에게 말하듯이 내게 주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십시오’ 늘 주님과 대화하는 삶, 하나님이 낯설지가 않아요. 그런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도 아담을 찾으셔야 했고, 또 아담은 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두려워 숨어야 했습니다. 이게 바로 아담처럼 범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실 까봐 두려워해야 했고 번제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강림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가져야 했어요. 제가 언제 한번 말씀을 드렸죠. 11세기의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에 보면은 천주교 주교가 맨날 나와서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 매일 폼잡고 불러요. 그런데 어느 날 이적이 일어났어요. ‘하나님’ 그러는데 천국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그래 네가 나를 불렀느냐 나는 네가 찾는 여호와로라’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여러분들은 모든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예배에 나올 때에 ‘오늘은 하나님이 충만한 영광가운데 내게 나타나실텐데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까? 기도할 때에 오늘은 하나님과 만나는 날이다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까?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그랬습니다. 아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죄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그 임재 안에서 살도록 그렇게 축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어기자 그 축복들은 송두리째 날라 가 버렸습니다. 주님과 나누었던 교제의 기억은 있지만 교제는 사라졌고 그 거룩한 임재와 마주했던 영광의 추억은 있지만 그 영광은 떠났습니다. 영광은 사라지고 죄와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그 영혼의 축복, 그 안에서 사는 진정한 행복으로 만족하지를 않으니까 사단의 꾀임에 빠져서 천사와 같아지면, 하나님과 같아지면 그러면은 지금의 있는 상태보다 훨씬 더 대단할지 모른다라고 하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불을 받는 겁니까? 진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물론 영적인 사람들은 열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열렬하게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영적인 사람이다 라고 할 때 어떤 겁니까? 손만 대면 사람이 쓰러지고 거꾸러지고 병이 났는 그런 사람들이 영성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선적인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진짜 영적인 사람은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게 영적인 사람이라구요. 왜? 전에는 육의 눈만 가지고 살았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산 것입니다.. 그랬는데 주님을 만나고 그의 영적인 성품,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나니까, 또 하나의 눈이 띄어지게 됐는데 그게 영적인 눈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육적인 눈을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의지하는 것은 육적인 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에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이 호세아 선지자처럼 이스라엘이 아무 걱정할 것 없이 번영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시대에 육적인 눈에는 드나드는 외국의 엄청난 무역선, 그리고 장엄한 군대, 강력한 지도자,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세상 이게 육의 눈에 보이지만 영의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이제 무너져가고 있는 왕국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그런 영광은 다 필요 없다, 새와 같이 날아가 버린다 너희들이 아무리 세상영광을 자랑하고 있지만은 그러나 곧 망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랑거리가 나중에는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가치가 바뀐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리고 그 바뀐 눈으로 인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바뀌었다기 보다는 은혜 받았다는 자체가 뭔가 하나 추가됐다 라는 그러한 견해에 가깝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옛날에 열심히 돈벌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그냥 재수 찾고, 운 찾고, 천지신명 찾던 사람이 예수 믿고 나니까 주님 백으로 이번에는 뭐 좀 해 봐야 되겠다라고 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 그 정도로 우리들이 은혜라고 부르고 있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옛날에 사랑하던 것 지금도 사랑하고, 옛날에 싫던 것 지금도 싫고, 옛날에 살았던 혈기, 지금도 살고, 옛날에 교만한 마음, 지금도 여전히 교만하고, 옛날에는 돈 많이 벌어서 사람들 대접 좀 받아 보려고 했다가 요점에는 교회 와서 어떻게 튀어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 똑같은 거지 뭐가 틀려요. 주인만 바뀌었지 똑같은 노예상태 아니예요. 어차피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한 사람은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고, 한 사람은 교회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후자의 사람이 더 비참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쩌면 그렇게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은지 몰라요. 그게 바로 안 변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사람이 안됐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담과 같이 또다시, 또다시 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든지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능성을 지니고 것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바로 ‘아담과 같이’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게 자기의 육신의 생각에 좋을 대로 영적인 생각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육적인 생각을 따라 산 결과 그는 파멸과 죽음을 맛보게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 받았던 모든 좋은 것들은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비참함 속에서 살아갔던 아담을 생각하면서 ‘너희들이 바로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그렇게 실패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아담과 맺으셨던 그런 종류의 언약을 맺으셔서 죄가 있는 인간의 후손이었지만 그들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이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시고 그의 임재와 은혜 앞에서 사는 그 특별한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하나님이 결심하십니다.
그런데 아담이 세상 영광을 구하고 바뀌어지지 않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범죄하였던 것 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영광, 하늘나라의 법보다는 땅엣 것, 영원한 왕국보다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왕국에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호세아 선지자가 7장에서 말하는 것 같이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다. 전병이라고 하는 것은 구운 떡입니다. 그런데 뒤집지를 않았어요. 빈대떡 같은 것들을 굽는데 올려다 놓다 한참 딴일 하다가, 전화 받다가 보니까 연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위에는 설익었고 아래는 새깜해요. 위에는 안 익어서 못 먹고, 아래는 타져서 못 먹고 할 수없이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빈대떡 같은 신세가 됐다 이것입니다. 빈대떡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좋네, 구운 개떡같은 신세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쓸모가 없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패역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거슬리는 사악한 생동들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어쩌다 우발적으로 저지르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이거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경향하고 마치 하나님을 괴롭게 하려고 결심이나 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주님께 도전하고 주님께 항거하는 그런 사악한 인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겉모습은 어땠습니까? 제사에 열중을 했다니까요. 번제에 열심을 내었다니까요. 겉모습은 그럴 듯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 보실 때에 그들은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도 끊어졌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대들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면서 저는 존 오웬의 말을 인용하면서 ‘신자가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쪽으로는 부지런히 제사를 지내고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부지런히 침을 뱉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번제는 드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견디실 수가 없었어요. 인간은 표리부동한 관계를 잘 견뎌요. 왜? 사악하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진심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이용해 먹기 위해서 진실하지 않은 관계도 잘 견뎌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품상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폼잡고 사람 앞에서 으스대고, 하나님께로 부터는 먼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런 태도들은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서 심하게 나타나요. 청년들은 비교적 덜 해요. 쥐뿔이나 알아줄 게 있어야지. 돈이 있나, 그렇다고 교회를 섬길 관록이 있나,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나, 토큰 두 개 가지고 매일 학교 다니는 처지인데 폼잡아 봐야 누가 인정을 해 주겠어요. 그래도 또 잡긴 잡아요. 그런데 제법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들, 온갖 폼 다 잡아요. 거들먹거리면서 교회 옮겨다니면서 ‘이 교회에서 좀 나를 대우 안해 주나!’ 왜 저렇게 사람이 비딱할 까 그리고 캐들어 가다보면 마지막에 꼭 그것입니다. ‘나는 왕년에 뭐했었는데 이 교회 와서 취급도 못 받는다’ 그러니까 그러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주님이 슬퍼하셨던 목자 잃은 양떼와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실 때 가슴아파하고 민망히 여기셨던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목자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곁을 떠난 사람들, 자기의 사악과 그리고 자기 욕망과 이기적인 탐심 때문에 그분의 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유리하는 길을 택하고, 스스로 방황하는 길을 택했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선한 날 보기를 원하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자기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감히 이야기하려고 하지만은 그러나 결국은 오늘 성경이 이스라엘을 향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잃어버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리며 사는 사람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혐오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겨야 되요.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를 통과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이 얘기지요. 어디를 통과해서 들어왔는데 그럴 수 있겠어요.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아요. 와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엎드려지면 새로 시작하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그거를 잃어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부르짖으시는 그 하나님의 강렬한 부르짖음을 뒤로하고 어그러진 길로 걸어갔던 데서 돌아왔으면 이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시고 버리지 않고 오늘 이 시간에도 나를 새롭게 고쳐주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아담처럼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거슬려 살았던 옛날을 참회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거슬려서 자기가 지은 죄를 깊이 참회하고 회개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사랑하실 거야’ 하는 그런 막연한 기대에서 나오는 추측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죄 죽임의 교리에서 통렬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이 길르앗은 여기 고을이라 그랬는데 사실은 고을이 아닙니다.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넒은 지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를 고을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비교해 보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고을에 사람이 많은 것처럼 이 길르앗의 죄악이 가득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싶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핏 발자취가 가득하니라’ 이거는 살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이방신에게 제사하기 위해서 짐승을 죽인 피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문맥을 볼 때에 이것은 살인입니다. 살인과 폭행에서 흐르는 피를 밟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니는 것입니다..
보세요,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됐는데, 잘 살게는 됐는데 잘 살게 되었다는 것과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경제가 발전되면서 사람들이 좋은 차를 굴리고 다니고 좋은 집에서 살고, 물질문명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이 편하다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옛날이 더 좋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그건 단순한 향수가 아닙니다. 잘 사는 것과 행복을 사람들이 혼돈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사는 게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서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정말 잘 사는 사람이 되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꿈꿔야 되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세상의 번영이 아닙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인간의 잘 살아보려고 하는 욕망은 하나님도 채워 주실 수가 없어요. 왜? 끝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아담을 보세요. 아담이 뭐가 부족했어요? 그는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안준 것이 딱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자리를 안 주셨어요. 그런데 그게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하나님도 하실 수가 없는 것 아니예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이 타락한 죄인의 이 더러운 욕망을 채워주시는 일은 하나님도 하실 수가 없어요. 누구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구요.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다르면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나고 도착하면 더 큰 욕망이 생겨나고, 거기 도착하면 이전의 상상, 이런 욕망이 내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욕망이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우리를 계속해서 범죄로 끌고 들어가고 파멸로 우리를 데려가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잘 살아 보려고 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데 가치를 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신령한 나라의 보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정말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 다 와서 ‘야 네가 부러울 것이 뭐가 있냐’ 그래도 늘 깨어지고 울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 사람은 돈이나, 물질, 시간, 건강 이런걸 가지고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아직 없는 것,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예를 들자면 나를 예수님 형상 만들어 가시는 것, 그리고 이 세상 나라에서만 유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 세상에서만 요긴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더 요긴한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깨뜨려지지 않는 내 모습 때문에 주님의 거룩한 일에 걸림돌이 될 때에 세상의 돈이 우리를 새사람 만들 수 있겠어요. 세상의 건강이 우리를 새사람 만들 수 있겠어요. 세상이 자랑하는 어떤 이유가 우리를 새사람 만들 수 있겠어요. 하나님만 그것을 가지고 계시니까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내가 너무나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 모자라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매 만져주시는 것이 너무나 멀리 있다고 느껴질 때, 그 때에 우리는 어떡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앞에 깨뜨려질 수밖에 없잖아요.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왜 피를 흘리고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번영하게 되었는데도 결국은 그 번영이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의 터전 위에서 생겨한 신앙의 번영이 아니였기 때문에 그 번영이 그들을 잘 살게 하였지만은 그러나 그 번영 때문에 그들은 잘 사는 속에서 더 불행해 지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느 장의사가 교인의 시신을 싣고 장지로 가면서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가 20년 동안 이 일을 했는데 자기 마음이 제일 기쁜 것은 간악 ( ? ) 팁을 얼마 못 받아도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가 없데요. 동기간들이 다 하나되고 서로 서로를 위로하면서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에 동기간이 더 단단히 결합이 되어서 ‘이제 아버지도 떠났으니 이제 우리가 누굴 믿고 살겠니, 우리 더 의지하고 그리고 살자’ 그런데요. 돈 많은 집에 가면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가 거의 없데요. 시신은 아직까지도 체온이 안 가셨는데 누런 것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만나서 다 듣는데서 이야기를 안 하고 ‘이리 와봐, 이리 와봐’ 저 귀퉁이에 가서 쑥덕쑥덕 이야기 하다가 멱살잡이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 다음에 저쪽에 가서 세 사람, 세 사람 모여서 그 다음에는 같이 편먹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왜? 유산 때문입니다. 잘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 살게 된 나라가 됐는데 사회는 더 부패하고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그 시대에 맞게 한번 잘 살아 보려는 욕망을 갖게 되는데 제사장들까지도 여기에 동참을 하고 강도 짓을 하는 장면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선지자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죄가 부분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죄로 가득 찬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악 된 행동이 솟아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그러나 죄가 가득 찰 때에 악한 행동들이 돌출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뿌리는 마찬가지라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들이 만약에 ‘나는 이런 거, 저런 거만 고치면은 완벽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뭔가를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결국은 절망적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유 없는 제사’ 이게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제사를 제대로 드리려면 그 외에 아가페가 다시 보충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제사만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성질이겠어요? 아니잖아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버렸고, 형식적인 번제를 드리고 있는데 다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스라엘 속에 쏟아져야 할 것 아니예요.
그런데 그것만 붙들고 씨름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롭게 쏟아지느냐, ‘아 내가 하나님을 좀 아는 지식이 요새 부족해서 그렇지 다른 게 문제가 있겠어!’ 또 앞에는 깨어짐이잖아요? ‘내가 딴 것은 문제가 없어, 내가 무슨 문제가 있겠어, 내가 뭐 도둑질을 했나, 바람을 피웠나, 사기를 쳤나, 깨어지지를 않아서 그러는데 그거만 없으면 진짜, 하나님은 다 아셔, 나 같은 사람 없다고 우리 교회 목사님도 나보고 당신 같은 사람만 있으면 목회 할 맛나겠다고 그랬는데 깨어지는 것만 보충이 되면 나는 괜찮은데! 다른 것은 필요 없고, 누가 깨어지게 해주는 거 그거 좀 나에게 안주나!’ 그런데 지금 얘기한 거 껍질밖에 없는 제사에 인애가 가득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에서 헌신하는 데에 하나님의 지식이 차고, 그리고 깨어짐이 없는 신앙을 깨어지게 하는 것이 이게 근본적인 변화에서 오는 거지 한 두 가지 습관을 고친다고 해서 오는 거냐 말이지요. 그런데 자기를 그렇게 생각을 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선지자 통해 이스라엘은 총체적인 수술을 필요하고 있다는 논리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장1절에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여기서 치료한다는 말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한다고 할 때에 쓰는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치료하려할 때에’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이스라엘이 그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는데도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갖고 계셨는지를 보여주잖아요. 그게 뭐냐하면 ‘그렇게 나를 버리고 철저히 타락했어도 내가 이들을 버리지 않고 고쳐서 쓰리라’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었어요.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갖고 있는 기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고치는 방법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치시려고 할 때, 하나님이 고치고 싶으신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이번 사경회에 우리들에게 지적한 것에 따르면 선지자를 보내도 말을 듣지 않은 것, 고치고 싶으셨지요?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데 아가페가 없는 것도 고치고 싶으셨어요. 또 번제는 있는데 번제에 합당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도 고치도 싶으셨어요.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더 많은 불순종을 고치고 싶으셨어요. 그리고 그 죄가 얼마나 많은지 14장 초반부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죄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치시고 싶으신 것이 많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치실 때에 이거를 고치시기 위해서 결국은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하면 ‘이스라엘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났도다’ 이거는 반복하는 겁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였어요. 수도가 이스라엘의 전체의 죄와 악의 심장부가 된 것입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이스라엘에 있어서 사마리아의 관계와 같거든요. 그러면 유다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한 공의와 참된 신앙의 도가 유다 백성들을 통해서 전파되어야 했던 것처럼 사마리아도 역시 그래야 했거든요. 그런데 지도층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아담처럼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패역을 행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죄악의 심장부를 수술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렇게 이스라엘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실 때에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죄와 악입니다. 이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에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적 받고 그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지적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잘라 버리려고 하실 때에 인간이 죄를 버리는 것은 손마디 하나를 잘라서 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워요. 그러니까 그것은 피 흘리는 희생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운 모습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암 덩어리가 배속에 들었는데 계속 ( ? )바르면서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게 괜찮아지느냐구? 배를 갈라야 되요. 그런데 가를 때 돈 받고 환자 배 갈라주는 거하고 자기 가족 배 가르는 거는 너무 달라요. 저가 의사한테 물어봤어요. 자기가 자기를 수술은 못하겠지만은 ‘가족들 수술해 본적이 있냐?’고 짖굳게 물어 봤어요. ‘아이고 목사님 그 짓을 어떻게 합니까.’ 못한데요. 자기도 자기 아들이 무슨 병이 걸려서 수술을 해야 했는데 자기 병원에서 수술하는데 신뢰할 수 있는 친구 불러다가 시켰대요. 어떻게 그것을 하겠어요.
여러분 자녀의 배를 가른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가를 수 있겠는지? 못할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회개를 외쳐서 그 아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칼 들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의사가 칼을 들고 영혼의 병이 아닌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바늘 하나만 자식이 찔려도 부모의 마음에 가시가 되고 자식이 엎드려져 가지고 가슴이 저리저리한 그 부모의 심정에 자를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실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죠. 의사가 자기 아들이 드러누워 있는데 자기 아들 속에 있는 주먹만한 암세포를 사랑할 의사가 어디 있어요. 그러나 자기가 비록 치료하기 위해서라기는 하지만 치료하기 위해서 이 아이의 배를 가를 때 아이의 살 끝 하나 하나가 잘라서 나가면서 이 부모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우리를 고치기 위해서 뭔가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대어서 우리를 새사람 만들어 가실 때 우리들이 고통하고 몸부림치는 것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주께서 우리를 치시고 찢으신 다음에 우리를 싸매시고 고치실 것’이라는 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자체가 미워서 그렇게 찢으시고, 그들이 파멸되어 버리도록 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아직은 하나님의 인내가 남아 있어서 그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그 끓어오르는 애정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다룰 때 빠지기 쉬운 위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분별할 마음은 있는데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올바른 방법으로 죄를 다룰 수가 없어요. 죄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 죄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영혼에 대한 깊은 하나님의 연민을 함께 가져야 된다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수술대 위에 누워야 되요. 여러분 수술대 위에 누워서 벌거벗고 의사에게 마취도 아직 덜 들어간 상태에서 눈을 멀뚱거리면서 ‘아저씨 배 쨀 때에는 옆으로 똑바로 째고, 이쪽 옆으로는 반달모양으로 찢어주세요. 꿰맬 때에는 3센치에 5섯 바늘씩 들어가게 정확하게 잘 재어서 빨간 실로 꿰매주세요’ 그거는 미장원에서나 그렇게 얘기하는 거지 수술실에 들어가면 그렇게 얘기 안합니다. 미장원에 가서는 ‘그거 말고 저 기계로 말아달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것은 본질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머리 모양을 바꾸는 거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수술실에 들어가 가지고 자기가 뭘 알아요. 알아도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앉아서 ‘그 칼쓰지 말고 이 칼쓰세요’ ‘왜’ ‘예쁘잖아요’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으로 꿰매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갖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도 왕년에 수술도 받아 봤는데’ 자기가 수술을 받아 봤다는 사실이 자기가 스스로 수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옛날에 좋은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도 그 경험이 여러분들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지금 여러분들을 찾아오시는 말씀이 여러분들을 고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아주 신앙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예화는 뼈저린 고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결국은 아까 내가 이야기 한데로 반달모양으로 찢어서 빨간 실로 그렇게 안 꿰매줄려면 집어치우라고 그리고 마취 반 밖에 안된 상태에서 벌거벗고 뛰어나가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와서 자기를 고쳐달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영혼의 의사이신 하나님 아버지 나는 패역하고 범죄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렇게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나를 고쳐주지 아니하시면 내 인생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주여, 내가 손들고 수술대에 눕습니다’ 그리고 누워요. 좋다 이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어요. 말씀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자기를 겨냥하듯이 팍팍 찌르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이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악무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그렇게 와서 자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진짜 정말 옛날에는 성도라고 불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집사는 고사하고, 장로는 고사하고, 목사는 고사하고 주님 십자가에 못박은 그 피로 살리심을 받은 성도가 될 수 있었을 까, 하나님 옛날에 나는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죄악의 암덩어리들이 막 잘라져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 들어냈어요. 이제 꿰매기가 하면 되요. 꼬매기만 하면 금방 아물 거 아니예요.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다 들어냈고 이제는 꼬매기만 하고 가만히 누워서 닝겔만 맞고 있으면은 새사람이 될텐데 뭐에 삐쳤는지 그 암덩어리 떼어낼 때에는 이를 악물고 참던 사람 이 막 꼬매는데 갑자기 마취에서 벌떡 깨더니 신경질을 탁 내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니까, ‘바늘 끝이 구부러져서 아프잖아’ 그리고 너덜거리는 배를 안고 거리고 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야, 수술했다’ 수술했으면 뭐해요. 꿰매지를 않았는데, 뉴패션이예요? ‘봐, 나는 죄가 하나도 없잖아’ 다 열어 보이는데 그 동안에 균은 들어가서 암은 사라졌지만 비참하게 인생이 된 것입니다. 묘사도 생생하지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고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암 같은 거 수술하다가 저희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의사가 진단하더니 ‘어떨지 열어봐야 되겠다’ 열더니 도로 덮었어요. 나중에 수술이 끝났는데 의사가 하는 얘기가 ‘열었다가 도로 덮었데요’ 아니 그런 수술이 있냐 그랬더니,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데요. 그거를 떼어 내려면 아예 내장 자체를 다 들어내야 된데요. 그런데 그걸 떼어 내고 인간이 살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의사는 하다가 안되면 덮어버리잖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셔요. 우리를 정말 온전한 사람으로 고쳐놓고 싶으신 것입니다. ‘대충 고쳐서 그저 불편 없이 살게만 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끔찍한 병에 걸려 있는 환자들은 그런 식으로 얘기 안해요. 의사선생님이 ‘날도 덮고 피곤한데 1년만 더 살게 해줄께요. 1년 치만 뜯어낼께요’ 그리고 칼을 들면 다른 병원으로 도망가고 말아요. 목표는 온전한 사람으로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고쳐져요? 안 고쳐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한번도 개복 해 본적이 없어요. 배를 갈라 본적이 없어요. 나도 한번 새사람 만들어 달라고 아침부터 나와 가지고 줄서는 것입니다. 새치기 하느라고 밀고 땡겨요. ‘들어오시오’ 들어와요. 수술대보고 나서는 도망가는 것입니다. 수술 받고 나면은 얼마나 건강해지고 새사람이 되는지에 대해서 다 듣고 나서 ‘아 좋다’ 그리고 나서 ‘칼은 싫어’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 그러고 눈물이 글썽글썽 하는데 다 애들 장난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귓전을 스쳐가다가 눈물을 떨어뜨리는 그런 정도가 되서는 안되요. 파헤치고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봐요. 그러면 그때 우리는 아프다는 생각을 하면 안되요. ‘아 그렇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아 이렇게 아프셨겠지! 주님이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위해서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난을 한 몸에 다 당하셨으니 나도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본 받아서 이거는 참기만 하면은 되는데 실패할 확률을 전혀 없고, 잘못 고쳐질 확률도 전혀 없고, 후유증도 없는데 믿고 내가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도 고쳐주시옵소서’ 그렇게 탄원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이 얼마나 빨리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몰라요.
그런데 서서 수술할 순서 기다릴 때는 1번 차지하려고 새벽부터 나와 가지고 1번 서는 것입니다. 누가 새치기하면 피가 터져요.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와’ ‘네’ 그리고 들어와요. ‘누워’ 누우려는 순간에 끔찍한 칼들을 보면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가까이는 늘 갔어요. 한번도 갈라져 본적이 없어요. 말씀을 즐기기는 하는데 그 말씀에서 깨뜨려 본적이 없고, 훌륭한 인생을 살다간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은 좋은데 나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요. 죄에 심각성에 대해서는 느낀 적은 많은데 죄를 버리기 위해서 싸워 본적은 거의 없어요. 그런 식으로 되니까 결국은 변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변화가 안 되니까 패역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뿌리에서 죄와 악이 계속해서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내가 네게 어찌하랴’ 복 주시고 싶으신 하나님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지만 그것은 부서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때우기 위한 땜질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곤고함 속에 살아가면서 기껏 생각한다는 게 ‘저 설교는 내 입맛에 안 맞어 역시 나는 박수를 치는 교회 가야지 뭐가 되는 모양이야! 역시 나는 은사를 받아야 지만 해결이 돼!’ 그런 식으로 핵심을 비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암에 걸렸는데 수술 받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푸닥거리하러 가는 사람하고 똑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금 어떻게 고치시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수술하기 위해서 온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칼이였어요. 그런데 그들이 그 칼을 거절했어요. 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간직하고 그들을 고치고 나면 기뻐하실 하나님의 기쁨을 기대하면서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들을 말씀으로 고치시려고 하실 때에 그들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워할지 조차도 미리 느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선지자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의 신앙의 경력을 자랑하고, 왕년에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린 횟수 자랑하고, 번제를 드리면서 얼마나 많이 송아지를 태웠는지 그거 자랑하고 앉았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아가페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저는 지금 2800년 전의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진정 행복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참된 기쁨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많은 물질이나 높은 권세를 가지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거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의 한 양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재물로 힘써 주님을 섬기고 높은 지위에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공의를 펼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시겠어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 만나면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걸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담과 같이 하나님께 언약을 어기고 범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기 전에 누렸던 그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 시절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수많은 은혜를 주셔서 그 애굽땅을 떠나게 하시고 광야에서 그 어린 손을 이끌며 하나님이 그 광야 길을 헤쳐오시던 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그 정절과 처음 사랑, 그것을 우리 모두 간직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면 쏟아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령한 빛, 말씀을 펼치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해 주시지 않은 이 시대를 향한 특별을 음성을 내 영혼 속에 부어주시는 그 독자적인 기쁨, 매일 매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깨뜨려지고, 깨뜨려지는 아픔 뒤에 찾아오는 보석과 같은 영롱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거룩한 결심과 그 은혜, 이런 것들이 찬란하게 우리의 가슴속에 영롱하게 매달리게 될 때에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보석과 같이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저 샹드리아를 청년들이 닦았잖아요. 볼수록 신기해요. 먼지가 튀튀하게 끼여서 거기다 전기불을 켜놔도 볼 때에 ‘저게 저렇게 달려 있어야 되나, 환한 형광들이 달려 있어도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는데 청년들이 올라가서 슬슬슬슬 닦지를 않고 한 알갱이, 한 알갱이 유리 세정액을 묻혀 가지고 깨끗이 목이 부러져라하고 거꾸로 매달려서 세시간을 닦아놨더니 찬란한 빛을 발하는데 궁금한 게 저게 얼마갈까! 맨 처음에 칙칙할 때는 50만원쯤으로 쳤거든요. 빛이 나더라구 그래서 100만원은 가겠구나 그리고 샹드리아 가게 가서 물어봤어요. 저거 반만 한 것인데 똑 같습니다. 그런데 180만원이래요. 그런데 하도 안 팔려서 120만원에 내놨대요. 저걸 보니까 350만원은 가겠어요. 그거 봐요. 그렇게 귀한 것인데 고치지 않고 내버려두니까 애물단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정성 드려서 완전하게 고쳐놓고 속에 전기 다마도 다 빼고 다 새 것으로 다 갈아 끼였어요. 그랬더니 찬란하게 빛나요. 우리 교인 중에 이제 저걸 보고 버리자 그런 사람 없을 것입니다.. 저걸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모습은 샹드리아 저것도 닦아서 고쳐놓으니까 저렇게 우리 교인들의 사랑을 받는데 하나님, 나도 고쳐 주시옵소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기만 하면 우리의 단점은 사라지고 우리의 장점은 더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우리의 장점은 주님이 더 훌륭하게 사용하셔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고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고치시려고 하고 저도 고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파요. 하나님은 이 아픔까지도 아신다구요.
가끔 있는 일이지만 어느 순간에 뭔가 제가 큰 가책과 깨달음을 경험하면서 찢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플 때 항상 외에 없이 드는 생각이 ‘지금 내가 이렇게 내가 아파하고 나는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르고 데굴데굴 구르는데 하나님이 내 아픔을 아신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치료의 수술대에 누워서 경험하는 그 아픔과 고통은 하나님이 버려 두시지 않으셔요.
여러분,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이 파고 들어와서 나에게 가책을 불러일으키고 나를 막 찢으면서 나를 고칠 때에 아프긴 하지만 대체로 잘 참는 게 뭐냐하면 아픔보다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라고 하는 그 큰사랑을 더 많이 느끼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진통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프면서도 이 아픔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불같이 연단 되면서 정금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진지해져야 되요.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 희망이 없어요. 오직 희망은 동물처럼 살다가 죽는 것 밖에 아무 희망이 없어요.
어저께 총신 대학원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왔어요. 한 1시간 인터뷰한다고 하더니 얘기하다 빠져들어서 한 세시간을 얘기하다 갔어요. 그런데 그 중에 한 형제가 얘기해요. ‘목사님, 이 교회 교인들은 설교 시간에 어렵겠어요’ 왜 어렵냐고 그러니까 ‘계속 생각을 해야 되겠어요. 그래야지만 좇아올 수 있겠네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생각 없이 설교를 듣는 것이 그게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당연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실 때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다 고쳐나가실 때 우리 속에 그런 아픔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싸매고 고치시는 늘 함께 하시는 그 사랑, 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싸매시는 거를 느끼는 것입니다. 고통스럽다고 해서 모두 사람들이 불행한 것도 아니고, 편하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고통을 많이 받아도 지금 내 고통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있다라는 그 확신이 가슴에 밀려들어오면은 이길 수 있어요. 그리고 놀랍게 새롭게 된다구요. 인간이 보면 얼마나 신비한지 보세요. 수술한 사람 배 봤지요. 이렇게 예쁘게 아기자기 하게 줄맞춰서 꼬맨 것이 아닙니다. 그냥 꼬맵습니다. 그런데 2,3일 되는 붙어버려요. 신기해요. 그러니까 회복이 어느 정도로 빠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수없이 많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졌는데 그 사람은 회복되는 게 시간은 걸려요. 그런데 너무나 지루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혹은 중도에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옛날 죄가 너무나 커서가 아니라 회복될 때에 마땅히 잠겨야 하는 그 은혜와 치료의 과정들을 너무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은혜의 물 속에 잠겨서 우리의 영혼을 가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해 보라구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속히 회복되요. 이것이 영혼의 소생입니다.
여러분, 아직까지도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이 남았지만은 일단은 여기에서 집회를 닫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 합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이 문제를 좀 더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그렇게 망가진 채로 인생을 살면서 행악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패역하게 대들고 그러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들을 향해서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치료하실 때 그 영혼의 아픈 고통까지도 헤아리시는 섬세한 손길을 가지신 그분이 오늘 여러분들을 향해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애들아 내가 어찌하랴 망가진 채로 계속 패역하게 살려느냐 아니면은 내가 너희들을 고치랴?’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Ⅴ 1